제목

하나님의 가슴이 되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것이 사람이든, 환경이든, 날씨든, 상황이든... 우리가 아무리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해도 우리를 둘러 싼 것들에 의해 조금씩은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묘하게 슬픔과 기쁨과 희망과 좌절과 환희와 갈등과 걱정과 고뇌, 염려들로 엮어져 있어 이것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으므로 우리의 마음이 자주 파도에 배가 흔들리듯,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듯 이리 저리 흔들리는 것을 경험한다. 어떤 예기치 못한 힘든 상황이 갑자기 우리에게 닥칠 때, 과연 누가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초연하게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자신의 주위에 어떤 격렬한 일들이 일어나 휘몰아치면 한번쯤은 태풍에 휩쓸리듯이 마음이 휘청거리는 것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시험을 받는 것도 마음이고, 슬픔과 분노를 느끼는 것도 마음이다. 기쁨과 환희에 들뜨는 것도 마음이고, 좌절하여 무너지는 것도 마음이다. 그래서 어찌 생각해보면 마음만 잘 되면 이 세상에 힘들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혹자는 우리 마음에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평화를 얻으려는 노력으로 속세를 탈피해 보기도 하고, 혹자는 명상을 통하여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 이것을 극복하려고도 하며, 또 어떤 훌륭한 지혜자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찾아내고 갈등을 일으키는 실체들이 다가올 때 미리 그것들을 알아보고 대처하므로 어떻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해야 할지를 깨달음과 연습을 통해 발견한 후, 그 방법들을 책으로 써서 사람들에게 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단련한다해도, 그리고 명상과 수련을 통해 어느 정도 마음을 다스리는 법이 터득되고, 마음에 갈등과 고통을 일으키는 실체들을 알아차리고 그것에 대비를 한다해도,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능가할만한 훌륭한 깨달음을 얻는다해도, 그것만으로는 우리 마음 속에 일어나는 고통과 괴로움이 단번에 그렇게 쉽게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을 깨달을 때면,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새삼 느낀다.

예수님처럼

때때로 인간의 성정을 가지시고 이 땅에 사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마치 태양이 구름 위에서 빛나는 듯이, 늘 환경과 주위의 소용돌이를 초월하신 듯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사셨던 평온한 그분의 모습을... 그리고 하나님과 완전히 일치하여 다스려진 그분의 마음 속에 있었던 완전한 평화를... 예수께서는 칭찬을 받으므로 의기양양하시거나 비난과 실망으로 인하여 의기소침해지는 일이 결코 없으셨다. 가장 심한 박대와 가장 잔악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용기는 왕성하셨다. 이 세상의 아무 것도,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그분의 마음에 있던 평정을 깨뜨릴 수 없었다.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분주하고 바쁜 투쟁의 생애를 사시면서도 그분의 마음에 언제나 안주해 있었던,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었던 그 평화... 그 평화를 우리는 얻을 수 없는 걸까?

하나님의 품에 안기어

예수를 따른다고 말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기를 두려워하여 망설이므로 마음에 불안과 괴로움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그렇게 내어 맡김으로 겪어야 될 결과(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포기하는 것)를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불안이 일어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아직 온전히 하나님께 내어 맡기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굴복을 거절한다면 우리는 결코 평화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굴복할 때에 새로운 능력, 초자연적인 능력이 마음을 점령한다. 그리하여 스스로 성취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변화가 인간의 본성에 일어난다. 이렇게 하늘의 능력으로 채워진 영혼은 어떤 권세도 건드리거나 흔들 수 없으며, 늘 끊임없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사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음 속에 이루어진 천국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라고. 지금, 필사적으로 무엇을 얻으려는 (설사 그것이 구원일지라도) 욕심을 버리고 모든 몸부림을 멈춘 채, 잠잠히 하나님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어보라! 그리고 체험해 보라. 그러면 그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가까이 그리고 얼마나 많은 축복의 선물들을 가지고 다가오시는가를...

다시 난다는 것

우리가 거듭날 때에 예수의 마음, 곧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죽기까지 비우신 그 마음과 똑같은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늘 채우고 있던 강물처럼 끊임없이 흘러나오던 평화도...거듭난다는 것은 나의 가슴을 비우고 하나님의 가슴을 내 마음에 가진다는 것이다. 아니,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온전히 체험하여 알아 자신을 하나님의 품에 던진 채, 하나님의 품에 안기어 그 좋으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사는 것이다. 마치 어린 아이가 아무 걱정도 없이 모든 것을 맡기고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듯이 그렇게... 그 큰 사랑의, 그 무한한 은혜의 바닷물에 잠겨, 한없는 포근함을 즐기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품에 안겨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은 걱정도 자신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요, 슬픔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슬픔이요, 염려도 하나님과 같이 나누고, 기쁨도 하나님과 함께 느끼므로 이 세상의 어느 무엇도 그를 흔들 수 없다.

그리고 또한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으로 똑같이 생각하고, 하나님의 눈과 똑같이 사람들을 보는 것이다. 절대로 편협하지 않은 마음으로, 절대로 판단하지 않는 마음으로, 그리고 어떤 것에나 누구에게나 절대로 분석이나 고정된 관념을 가지지 않고, 무한히 넓은 마음으로 사물들을, 사건들을 그저 바라보고 포용하는 것이다.

거듭남의 환희

하나님의 가슴을 진정으로 체험한 사람에게는, 즉 거듭난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아무 것도 그렇게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태풍이 불 때 크고 무거운 나무는 쓰러지지만, 가벼운 들풀은 쓰러지지 않는다. 다만 잠깐 흔들릴 뿐이다. 바람이 휘몰아치면 휘둘릴 수는 있다. 그러나 바람이 그것을 쓰러뜨릴 수는 없다. 마음을 비운 사람도 그렇다. 자신을 비운 사람은, 또 자신이 비어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밀려오는 문제들 때문에 그렇게 크게 영향을 받고 흔들리거나, 앞으로 닥쳐올 어떤 불이익 때문에 자기가 상처를 받아 불행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애벌레에게는 앞에 놓인 작은 돌도 문제요, 나무토막도 문제이다. 그에게는 문제 아닌 것이 없고, 고통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나비가 되면 그것들은 문제가 아니라 구경거리로 바뀐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애벌레가 변하여 나비가 되었기 때문에 그냥 그것이 달라진 것이다. 우리 자신이 변하면 세계가 달라진다. 이것이 곧 거듭남의 환희이다.

예수께서는 마음을 완전히 비우셨으므로 아무 것도 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다만 하나님과 하나가 된 기쁨 속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기워 함께 나누는 교제의 기쁨이 너무나 큼으로 이 세상의 부패된 감화에서부터 자유로우실 수 있으셨다. 하나님의 품에 안긴 사람은 예수님처럼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요 14:30)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가슴에서 비치는 밝은 빛 가운데서 기뻐하면서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요일 5:18)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감정이 일어날 때, 감정의 소용돌이가 태풍처럼 휘몰아칠 때, 그 감정이 자기에게 있음을, 일어남을 인정은 하지만, 그것을 붙잡지 않고, 모든 것을 품고도 남음이 있는 무한히 넓은 하나님의 가슴에 던져버린 채, 사랑의 하나님의 품에 안겨 천진난만하게 지내고 있으니까...

빈 배처럼

어떤 사람의 글 중에 이런 내용의 글이 있다. “한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빈 배가 그의 배와 부딪히면 그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배는 빈 배이니까. 그러나 배 안에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피하라고 소리치며 화를 낼 것이다. 이 모든 일은 그 배 안에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나 그 배가 비어있다면 그는 소리치지도 않을 것이고 화내지도 않을 것이다. 세상의 강을 건너는 그대 자신의 배를 빈 배로 만들 수 있다면 아무도 그대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대를 상처 입히려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만일 우리 모두가 예수님이 자신을 비우셨듯이 우리 자신들을 비운다면... 넓은 하나님의 가슴에 안겨 주님과 하나가 되고, 그리고 그 넓은 하나님의 가슴이 우리의 가슴이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경이롭고 신비로운 것이 될 것인가!

권두언


강병국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쟁에서 실패한 후에 지도를 펴 놓고 영국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기 이 곳만 아니었으면 온 세상이 내 것일텐데...” 사단도 갈보리의 십자가를 가리키며 똑같은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타락시켜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구를 악의 세력의 본부로 만들려고 발악을 하였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두 팔을 벌리시고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운명하셨습니다. 마귀의 세력뿐만 아니라, 선한 천사들까지도 십자가의 참 뜻을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두 번째의 삶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이루신 놀라운 계획의 진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십자가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바울은 천사들도 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 대하여 살펴보기 원한다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대속의 죽음을 죽으셔야만 했을까요? 그 길만이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십자가를 찬양하고 설교하고 있으며, 교회 지붕 위에도 십자가를 매달아 놓았습니다. 십자가가 우리 신앙의 중심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참 뜻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매우 적은 것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의 참 뜻을 진실로 이해한다면, 우리의 마음과 생애에 놀라운 변화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교회들이 이렇게 타락한 상태에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참 뜻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번 호를 제작하였습니다.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충만하시기를 간절하게 소원합니다!

한나 이야기


세상에는 참 기가막힌 사연의 이야기들이 많지요. 마치 한편의 드라마처럼 한없이 기쁘기도 하고 한없이 슬프기도 한 나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지만, 나중에는 그렇게 기쁠 수 없는 것으로 변한 나의 이야기를 말입니다. 그리고 이 보잘것없는 여인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신(시 30:11) 친절하고 자비로우신 나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야기도 말입니다. 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하냐구요? 그건 슬프고 좌절에 빠진 당신에게 용기를 주고 싶어서지요. 아무리 절망적이고 슬픈 상황이라도 희망 넘치는 환희의 사건으로 바꾸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또 나의 기도를 응답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서이지요!

나는 참 행복한 여자였습니다. 남편은 나를 참 사랑해주었지요. 누가 보아도, 아니, 내가 생각해도 우리는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잉꼬 부부였습니다.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며, 둘이 있으면 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정에는 어딘가 쓸쓸한 그림자가 드리워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둘 사이에 아기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무척이나 서로 사랑하고 있었지만, 다른 집에서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나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올 때면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쓸쓸해지고 가뜩이나 큰 집은 휑하니 더 크게 느껴지곤 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가 살던 땅은 유대 나라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유대나라에서는 자기 자손에서 메시야가 나기를 고대하였기 때문에 유대 여인들은 자식을 낳는 것을 무엇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하나님의 축복에서 끊어진 여자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남편이나 나는 세상의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섬기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삼고 살았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남편 엘가나는 레위자손으로서 성소의 직무를 수행하던 경건한 사람이었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기쁨으로 순종하고 지키는 사람들이었는데, 왜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듯이 우리 가정에 아이가 없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었고, 나의 말못할 슬픔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갔습니다. 그리고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아 내치심을 당한 죄인처럼 쳐다보는 주위 사람들의 눈총은 나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남편에게도 더 이상 미안하여 견딜 수 없었고, 마침내 나의 남편은 그의 가계(家系)를 영속시키려는 소망으로,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이 다른 여자와 제 2의 결혼 계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혼례식이 있던 그날 저녁, 다른 여인과 함께 신방으로 들어가는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는 나의 아픈 마음을 여러분은 헤아리실 수 있으신가요? 그 날 하나님은 나에게서 멀어져 보였고, 나는 세상 모두에게서 버림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쓸쓸하고 고독한 날들이 이어져 갔습니다. 그 때의 세월들은 얼마나 나에게 어둡고 잔인해 보였던지요!

그러나 슬픔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심의 부족으로 이루어진 이 처사는 우리 가정에 행복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새 부인이 되어 들어온 여인 브닌나로 인하여 가정에 아들과 딸들이 태어났으나 하나님의 거룩한 가정제도의 기쁨과 아름다움은 훼손되었고 가정의 평화는 깨어져 버렸습니다. 브닌나는 질투심이 강하고 마음이 좁은 여자로 나를 없신여기며 한없이 오만하고 불손하게 행동하였습니다. 자녀를 낳은 브닌나는 늘 내 앞에서 당당하였으며, 늘 나를 없신여기는 말과 행동을 했습니다. 남편의 사랑이 첫째 부인인 나에 대해서 변함이 없는 것을 본 브닌나는 질투심이 나서 견딜 수 없는 듯, 자신이 하나님의 큰 총애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나(한나)보다 더 우대를 받아야 한다고 남편에게 요구하였으며, 내가 아들이 없는 것은 여호와의 불쾌히 여기심의 증거라고 저를 조소하곤 했습니다.

이런 일은 해가 거듭될 수록 계속되었고, 나는 너무나 수모를 당하고 멸시를 받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어떤 땐 브닌나가 하는 말처럼 정말 나는 여호와 하나님께 벌을 받아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슬픈 생각이 마음을 휩쓸었고, 이웃의 동정어린 시선도 더 이상 견디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브닌나가 나를 괴롭혀도 아이를 낳지 못한 나는 늘 죄인처럼 아무 대응도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나의 희망은 깨어지고 생애는 무거운 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불평하지 않고 그 시련을 묵묵히 견디었고, 온유한 마음으로 모든 가족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였습니다. 나의 말 못할 슬픔을 오직 하나님께만 토로하며...

남편은 나에게 변함없이 친절하였습니다. 내가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리면 나를 위로하며 “내가 열 아들보다 낫지 않느냐”고 반문하곤 했습니다. 우리 유대인들은 절기가 되면, 그 당시 세워진 습관에 따라 성전에서 감사의 예물을 드린 후, 가족이 함께 연합하여 엄숙하면서도 즐거운 잔치를 열곤 하였습니다. 나의 남편 엘가나도 잔치를 베풀고 이 자리에서 아이들의 어머니인 브닌나와 그 아들과 딸들에게 그들의 몫을 각각 나눠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도 몫을 주었는데, 남편은 나를 귀중히 여기는 증거로 두 몫을 주며 나에 대한 애정이 마치 내가 자녀를 가진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사실 나의 남편은 내가 비록 자식을 낳지 못하였지만 나를 늘 사랑해 주었고, 나에 대한 관심은 변함이 없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예전처럼 또 다시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감사의 예물을 드릴 때가 돌아오자, 우리 모든 가족들은 즐겁게 준비를 하여 실로로 올라갔습니다. 나의 마음은 매우 슬펐지만 슬픔을 감추고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희망에 젖어 조용히 기도하면서 함께 여행길에 동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매년 그랬듯이, 감사의 제사 후 베풀어진 잔치 자리에서 그 일은 또 터지고 말았습니다. 나에게 남편이 준 몫을 보고 질투심 많은 브닌나가 또 악의와 저주에 찬 말을 나에게 퍼부은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고 슬픔을 감출 길이 없어 울음을 터트리고 잔치 자리를 뛰쳐나왔습니다. 나는 정신 없이 뛰쳐나와 성막문 곁의 기도하는 장소에 쓰러졌습니다.

나는 고통 중에 엎드려 한참을 울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왜 입니까? 저에게 왜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제가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며 당신의 모든 법에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친절하게 대하며 남을 미워하거나 해를 끼치지 않고 남에게 베풀며, 믿음을 지키고 진실된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온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저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여자처럼 이런 수모 속에서 슬프게 살아야 합니까? 여호와여! 제가 하나님 당신 앞에 부족하게 행한 것이 무엇이오니까? 가르쳐 주옵소서, 가르쳐 주옵소서. 왜 저는 당신께 저주를 받은 듯 자식이 없는 것입니까?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나님 여호와여! 합당하시면 저에게도 자식을 주시옵소서! 그리하면 저의 자식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치겠나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치욕을 거두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양육하고 교육시킬 한 아들을 귀중한 선물로 주시기를 열렬히 탄원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일 나의 요구가 허락된다면 아이를 날 때부터 하나님께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였습니다.

한참을 울며 흐느끼는 나를 흔드는 어떤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저를 술취한 여자인줄 알고 꾸짖는 대제사장 엘리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는 엄한 목소리로 “이 가련한 여자여! 대낮부터 벌써 독한 술에 취해 이러고 있으니 그대는 언제 포도주를 끊고 정신을 차리겠는가?”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슬픔을 가눌 수 없는 가운데 대제사장에게 술취했다는 오해까지 받은 나는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침착하게 나의 사정을 대제사장에게 이야기 하였지요. 자식을 갖지 못해 당한 모든 수모와 고통, 그리고 얼마나 자식을 갖기 원하는지, 또 그리고 그것은 나의 평생 소원이며,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시면 그 자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치겠다는 나의 결심의 이야기를 들은 대제사장은 깊은 감동을 받으셨는지 나에게 축복을 해주었습니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쩐지 그 축복의 말이 저의 가슴을 강하게 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이 저에게 현실로 다가오리라는 예감이 저의 가슴 속을 흔들었습니다.

맞았습니다! 그 예감이 맞았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습니다! 나는 마침내 열렬히 간구하던 선물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되었습니다. 내가 임신한 사실이 알려지고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이 주위에 알려지자, 남편은 물론 주위의 사람들은 너무나 기뻐하고 경이롭게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네,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잘 생기고 예쁜 옥동자를 저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나는 너무 기뻐 아기의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는데, 그 뜻은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는 뜻입니다. 맑은 구슬이 굴러가는 듯 예쁜 사무엘의 웃음소리는 나와 나의 남편의 마음을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충만하게 하였습니다. 슬픔과 어두움으로 얼룩졌던, 그러나 결코 원망이나 불평없이 묵묵히 견딘 그 인고의 오랜 세월에 대한 하나님의 얼마나 풍성한 갚으심인지요!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이십니다. 나는 내가 하나님께 한 서원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남편과 함께 성전에 교육 받으러 가 있는 아들 사무엘을 만나러 실로로 가는 날입니다. 벌써 나의 마음은 사랑스럽고 의젓한 나의 아들을 만나 품에 안은 듯 뿌듯하고 들떠 있답니다. 네? 아, 어떻게 그렇게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멀리 떠나 보낼 수 있었냐구요? 물론 그 일이 쉽지는 않았지요. 내 아들 사무엘은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인 동시에 하늘의 특별한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성별된 보물로 받았기 때문에 나의 아이를 그의 소유주이신 하나님께 돌려드리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사무엘을 늘 곁에서 지켜보며 키우고 싶은 욕심이 나에게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아이가 하나님을 위해 교육을 받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라면, 나는 자칫 이기적이 될 수 있는 해로운 모성애도 버리고, 어떤 수고나 고통도 감수하리라는 결심을 굳게 했던 터라 그 일은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답니다.

아, 저기 멀리서 함박꽃 같은 웃음을 띠고 나의 아들 사무엘이 달려오는 것이 보이네요! 하늘의 특별한 선물인 어린 사무엘을 기르던 지난 몇년의 행복한 시간들이 눈 앞을 스쳐갑니다. 아기를 낳고 하나님께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드리던 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기적을 직접 체험한 남편의 기뻐하던 시간들, 아이를 안고 행복에 겨워 하루종일 하나님께 찬송과 기도로 보내던 날들, 부러워하는 이웃 여인들의 시선을 느끼며 주위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었던 가슴 뿌듯하고 감격스러웠던 시간들... 정말 한번이라도 기도없이 사무엘에게 젖을 먹인 적이 없었던 것을 나는 여러분에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아이의 지력이 싹트기 시작하는 아주 초기부터 나는 아들 사무엘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도록 가르쳤고 동시에 자신을 여호와의 것으로 여기도록 가르쳤지요. 천연계나 자연에 일어나는 현상들을 보고, 그리고 주위에 있는 모든 익숙한 사물들을 통해 그의 생각을 창조주께 향하게 하려고 노력하였구요. 드디어 아이가 자라 하나님을 위하여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나와 나의 남편은 서원을 이행하여 나의 아들 사무엘이 하나님의 집에서 봉사할 수 있는 교육을 받도록 그를 대제사장의 지도에 맡기고 돌아왔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여운 외아들을 떼어놓고 오는 나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하여 교육을 받게 한다는 엄숙한 기쁨 때문에 눈물을 보이지 않은 채 돌아왔습니다.

아이와 헤어진 후 나의 기도는 더 없이 간절해졌습니다. 매일, 아니 매 순간 나는 아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아이의 모습을 눈에 그리며 아들을 위하여 손수 예복을 만들었습니다. 그 작은 예복은 올마다 사랑하는 아들 사무엘이 순결하고 고상하고 진실되기를 기원하는 나의 기도로 짜여져 있었지요! 나는 언제나 나의 아들이 세속적으로 위대하게 되기를 구하지 않고 그가 하늘이 귀중히 여기는 위대함,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모든 이웃에게 축복이 될 수 있도록 열렬히 탄원하였습니다.

나는 어머니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어머니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값진 기회와 무한히 귀중한 사업이 위임되어 있다고... 여인들이 싫증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주위에 있는 대수롭지 않은 매일의 의무는 가장 중대하고 고상한 사업이라고... 어머니들은 자신의 기쁜 일과 궂은 일을 통하여 그들의 자녀들이 영광스러운 하늘로 가도록 길을 곧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 스스로가 생애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따르려고 노력할 때에만 자녀들의 품성을 거룩한 모본을 따라 형성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은 부패한 감화로 가득 차 있습니다. 유행과 습관은 젊은이들에게 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만일 어머니들이 교훈하고 지도하고 제어해야 할 의무를 감당하지 못할 때에는 자녀들은 자연히 악을 용납하고 선에서 돌아설 것입니다.

사실 나의 아들 사무엘을 성막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배우도록 엘리 제사장에게 보냈지만 그가 악한 감화나 죄악의 모본이 없는 환경에서 산 것은 아닙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아버지를 공경하지도 않는다는 소문이 무성한 것을 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안 나의 기도는 한층 더 열렬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늘 올바르게 살도록 지켜주신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어머니들은 자주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 아이를 어떻게 길러야 할까요? 가르쳐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마다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얼마나 큰 축복과 보상을 받은 사람인지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바친 나의 헌신을 어여삐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제가 외로울까봐 저에게 더 큰 축복을 주셨지요! 그게 무엇이냐구요? 저는 하나님께로부터 세 아들과 두 딸을 선물로 더 받았답니다. 지금 큰 아들 사무엘은 잘하고 있어요. 엘리 제사장의 뒤를 이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권고하고 영적으로 지도하는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지요.

하나님은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요! 여러분도 여러분의 슬픔과 고통을 환희의 기쁨으로 바꾸시며, 그것들을 큰 축복과 보상으로 갚아주시는 좋으신 하나님께 실망하지 마시고 계속 기도하세요! 저에게 일어난 기적은 여러분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어머니의 기도는 꼭 응답을 받는 것이니까요.

우리 모두 비만을 체크하자!


현시대의 질병은 예전에는 찾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질병들이 생겨난 것으로서, 많은 것들이 우리의 식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비만은 별 관심을 끌지 않고 슬며시 찾아와서는 어려운 문제와 합병증을 일으키는 심각한 질병이다. 또한 이 질병은 조금이라도 선진국의 대열에 끼는 국가에서는 범세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은 2005년 1월부터 범국민적 총성 없는 전쟁에 돌입했는데, 그것은 바로 미국 정부가 비만과의 전쟁을 공식으로 선포한 것이다. 이 전쟁의 주목표는 미국 국민을 비만이라는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고 자유롭게 하려는 것이었다. 현재 미국 국민의 약 3분의 1일이 체중과다 및 비만인 상황이다. 통계를 보면 비만으로 인한 관상동맥 심장질환, 고지혈증 및 고혈압, 당뇨 등 성인병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그 어떤 전쟁으로 사망하는 수보다 압도적으로 많고 경제면에 있어서도 천문학적인 재정이 손실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 한국 국민에게도 이러한 조치가 예사로 들리지 않는 것은, 작년에 조사된 바에 의하면 한국 중학생들 사이에 22%가 비만임이 이미 판정되었다는 것이다. 13세에서 15세 사이의 학생들 가운데 22%가 비만이고, 또한 비만인 학생들 가운데 약 20-23%가 이미 성인들이 가진 심장질환, 고혈당 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도 질병 면에서 이미 서구사회와 흡사해지는 양상을 띠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정부차원에서 비만에 대한 대책이 없는 듯하다. 그러므로 문제를 직면한 개개인이 문제를 파악하고 대책을 세워야할 필요를 느껴야 한다. 아니, 최소한 문제를 인식해야 할 것이다.

비만은 그 자체를 질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여러가지 합병증을 유발하고 건강상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초래하므로 그냥 예사롭게 보아 넘겨서는 안되는 상태이다. 비만의 정도와 상태와 원인을 분석, 측정하여 성인병의 주범이 되는 비만을 치료 및 미리 예방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비만에 대하여 알아보자.

* 비만 : 비만이란 과다한 체지방을 가진 상태를 의미한다. 남자는 체지방이 체중의 25%, 여자는 체중의 30% 이상일 때를 비만이라고 정의하며, 임상적으로는 BMI (Body Mass Index:체질량지수)가 30.0 이상인 경우, 현재 체중이 이상 체중을 20% 초과하는 경우로 정의된다.

1. 비만의 원인 : 유전적 요인, 환경적 요인, 에너지 대사의 이상 등

2. 비만의 종류 :

단순 비만 : 과식과 운동 부족으로 발생함.
증후성 비만 : 내분비, 시상하부성, 유전, 전두엽 및 대사성 등으로 발생함.

3. 나도 비만?

보기에 통통하고 좋아 맏며느리감이라고 불리우는 여성들, 아니면 든든한 체격을 가졌다고 어깨를 펴는 남성들을 주위에서 많이 본다.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닌 진짜 비만은 어떻게 측정할까? 함께 알아보자.

* 비만도를 평가하는 방법 : 체중을 측정하는 방법, 피부주름 두께 측정법(캘리퍼를 사용)이 있다. 비만도를 평가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으나 그 중 가장 간단한 측정법은 다음과 같다.

비만도(%) = 현재체중(kg) ÷ 표준체중(kg) × 100€

90%이하 : 저체중
91-110% : 정상(표준체중)
111-120% : 과체중
121-130% : 경도 비만
131-150% : 중등도비만
150%이상 : 고도비만

* 표준 체중
비만도를 알아보려면 표준 체중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표준체중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표준 체중의 산출방식은 여러가지가 있다. 성인의 경우, 보건복지부 통계표 - 표준 체중표를 사용하는데, 여기에서 표준 체중표는 한국인 평균체중을 키 또는 성별로 산출한 것을 표준 체중으로 표시한 것이다. 대개 자신의 키에서 100을 뺀 숫자가 자신의 표준체중에 가깝다고 하는데, 이것은 어린이의 경우에는 적용이 안 된다. 160cm 이상 신장에서는 110을 뺀 값이 표준체중에 가깝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표준체중(kg) = (신장(cm)-100)×0.9

* 또 다른 계산법
표준체중
남자 : 표준체중(kg) = 신장(m) × 신장(m) × 22
여자 : 표준체중(kg) = 신장(m) × 신장(m) × 21
예) 신장이 167cm, 체중이 58kg인 여성이라면;
표준체중(kg) = 1.67 × 1.67 × 21 = 58.57
비만도(%) = 58 ÷ 58.57 × 100 = 99 이므로 정상 체중에 속한다.

* BMI(체질량지수)란?
BMI(Body Mass Index : 체질량 지수)는 의학적으로 저체중, 정상체중, 과다체중, 비만으로 나누는 중요한 지표이다.

* 체질량 지수(BMI) = 현재체중(kg)÷ [ 신장 (m)×신장(m) ]

* 체질량 지수에 의한 비만도 판정
20 미만 : 체중부족
20~25 : 정상
25∼30 : 과체중
30 이상 : 비만
40 이상 : 고도비만

예) 신장이 167cm, 체중이 58kg이라면;
체질량지수 = 58÷( 1.67 × 1.67 ) = 20.8(정상체중이다)

* 그 외에 어린아이들을 위한 비만 측정법으로서 Kaup 지수와 Rohler 지수가 있다. Kaup지수는 2세 미만의 연령에서 사용하는 방법이며 18 이상이면 비만이다. 체중(g)/신장(cm)×100이다.
Rohler지수는 학교에서 학생의 비만 판정 지수로 많이 사용하며 체중(kg)/신장(cm)× 3× 107으로 신장이 110∼129cm에서 180 이상이고 130∼149cm에서는 170 이상, 150cm 이상에는 160 이상을 비만으로 판정한다.

* 그런데 BMI에 의한 비만의 분류에 의하면, 비만의 등급과 비만 관련질환의 발병 위험성은 비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비만으로 인한 질병에는 관상동맥질환, 당뇨병, 고중성지방혈증, 고혈압, 심장질환, 심혈관계 질환 등이 있는데, 비만도가 높을수록 관련질환의 발병율이 높다. 이렇게 비만은 여러가지 질병의 원인이 되므로 빨리 손을 쓰는 것이 좋다.

4. 복부형 비만이란?

잘못된 식생활과 무절제한 생활, 과도한 스트레스, 운동 결핍 등으로 인하여 기초대사량이 저하되어 있는 중년의 직장 남성에게서 쉽게 나타나는 비만을 말한다. 이것은 지방이 주로 복부에 분포되어 있는 형태의 비만이다. 특히 음주와 흡연 그리고 고지방 음식 섭취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남자는 여자에 비해 내장층의 지방이 2∼3배 많으며, 대개 흡연과 음주를 하는 경우가 많아 복부에 비만이 생기기 쉽다. 지방분포의 형태는 전체 체지방량보다 성인병의 위험을 평가하는 데 중요하며, 복부형 비만은 둔부형 비만보다 성인병의 위험이 더욱 높다.

* 복부형 비만 측정법 ; 복부형 비만을 알아내는 방법은 허리(W) 둘레 대 엉덩이(H) 둘레의 비율로, 허리둘레를 엉덩이둘레로 나누면 된다.
허리둘레(inch)/엉덩이둘레(inch)

* 허리둘레(inch)/엉덩이둘레(inch)의 수치가 남자의 경우 0.95∼1, 여성의 경우 0.7∼0.85사이가 정상이고, 비율이 높을수록 복부형 비만으로 인한 성인병의 위험이 있다.

* 체지방의 정도, 곧 비만 정도와는 무관하게 W/H 비의 상승만으로도 대사성 질환이 증가하므로 주의해야 한다. 선천적으로 엉덩이가 큰 경우에는 W/H비의 측정에 무리가 있으므로 복부의 피부의 두께를 캘리퍼라는 신체 계측기를 이용하여 측정하는 방법이나 초음파나 복부 컴퓨터 촬영 등으로 복부의 비만도를 측정한다.

* 복부형 비만으로 인하여 심근경색·협심증과 같은 허혈성 심질환, 뇌경색·뇌출혈과 같은 뇌혈관장애, 인슐린 비의존형 당뇨병 등 각종 대사성 질환이 생길 수 있고, 여성에게는 악성 종양 등 여러 가지 성인병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복부의 비만을 최대한으로 줄이는 것이 최선이다.

5. 비만의 치료법

비만의 치료에는 식이요법, 운동요법, 행동수정요법, 약물요법 등이 있는데, 식이요법과 운동요법을 권한다. 앞에서 말한 바, 이번에 미국정부에서 내린 조치들은 미국국민들의 생활습관을 바꾸게 하는 것들이다. 특히 식생활 부문에서 식품제조사들에게 좀 더 철저하고 명확한 영양분석과 비만을 일으키는 지방사용 금지를 요구하고 있다.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광고도 금지해야 된다는 목소리도 한 편에서는 높아지고 있다. 하루에 섭취하는 전체 칼로리를 조절하고 운동을 적극적으로 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유의할 만한 몇 조치는 다음과 같다.

1. 자연 상태 그대로의 과일과 채소를 매일 섭취하여야 한다.
2. 통밀, 현미 등 정밀 되지 않은 곡류를 사용한다.
3. 심장질환을 일으키는 포화지방과 정제된 설탕 섭취를 최소화한다.
4. 견과류 즉 잣, 호두, 아몬드, 캐슈넛, 마카다미아, 페칸, 피스타치오 등을 섭취한다.

* 영양학 전문가들은 이러한 조치가 미국국민의 생활양식을 바꾸게 하는 데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 예측하고 있다. 그래서 좀 더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비만이 여러 성인질환을 초래한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 문제에 관심 있는 의사나 영양사들은 이러한 상황에 봉착할 것을 이미 예고하고 있었고 드디어 위험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러한 조치가 취해져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각 개인들이 자신의 의지를 잘 조절하여 비만의 원인이 되는 습관들을 제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식사습관을 고치는 것은 중요한데, 과식, 간식, 폭식, 늦은 저녁식사는 특별히 비만과 사망의 지름길이다. 이런 좋지 않은 습관과 더불어 운동부족으로 에너지소모가 적어지면 비만은 가속할 것이며, 그리하여 비만은 다른 많은 질병들을 불러들일 것이다.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는‘헨리 4세’에서 “과식하도록 내버려 두어라. 무덤이 그를 향해 세배나 큰 입을 벌릴 것이다” 라고 했다. 그리고 “癌(암)”, 세 입으로 음식을 산더미처럼 먹어서 걸린 병이 한자로 “암”이다.

* 건강 생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삶의 의미를 확실하게 아는 생활이다. 내가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알아야만 삶은 의미 있게 된다. 그래야만 먹는 것도 삶에 의미 있는, 생명이 있는 음식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귀하신 창조물들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질병없는 생활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일 것이다!

1부 -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십자가의 숨겨진 의미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신앙을 한다. 2000여년을 거듭해 오면서 기독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원의 표상으로 삼고 믿으며 가르치며 전하여 왔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말할 정도였다(고전 2:2).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까?

인류가 이렇게 은혜의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과 또한 주님의 구원을 발견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 받고 살고 있는 것은 갈보리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원토록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돌리기에 합당한 구속의 상징이다.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그 죄 값을 갚으신 주님의 고통을 상징한다. 인류가 당하여야 할 처참하고도 자비가 섞이지 아니한 영원한 멸망의 죽음을, 우리를 대신하여 지불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놀라운 희생을 나타낸다. 십자가는 멸망 당하는 인간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실 수가 없어서 절규하시며 돌아오라고 탄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상징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중심이 되었으며, 교회들 지붕 지붕마다 십자가를 달게 되었고, 심지어는 십자가를 목걸이로 만들어 걸고 다니고 있으며,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십자가를 수호의 상징으로 달고 다니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마저도 그 진정한 구속의 의미를 미처 이해하지 못한 채 십자가를 입으로만 찬송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 십자가가 필요하게 되었으며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들의 죄를 어떻게 대신 지실 수 있었는지를 다시 한번 살펴 보는 것이 중요하리라 본다.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책임지실 수가 있었을까? 또한 어떻게 죄의 결과를 우리 대신 경험하실 수가 있었을까? 이 문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잘 살펴 보아 이해하여야 할 문제이다. 그런 후에야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십자가를 사랑하고 찬송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몸으로 죄를 지셨다는 의미

우리는 베드로 전서 2:24절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게 된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어떻게 몸으로 남의 죄를 질 수 있을까?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음의 경험을 이해하도록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고 나면, 예를 들어서 거짓말을 하거나 물건을 훔치고 나면 어떠한 반응이 우리의 몸에 나타나게 되는가? 맥박이 빨라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게 되며, 묘한 죄책감이 마음을 사로잡아 괴로움을 느끼게 되고, 얼굴이 빨개지며 식은 땀이 몸을 적시게 된다. 그리고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고 마음의 평화와 행복이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것이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나타나는 신체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것이 우리가 우리 죄를 우리의 몸으로 지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죄들을 당신의 몸에 대신 지셨다는 말씀의 의미를 짐작 할 수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고통이란, 우리의 죄를 마치 예수님의 자신의 잘못이나 예수님 자신의 죄처럼 인정하여 대신 전가 시키는 것 이상의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지셨다는 의미는 우리의 부채를 은행의 구좌 모양으로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넘겨 버리는 것 이상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의미는, 우리의 죄로 인한 결과와 심판을 대신 경험하심으로써, 우리가 그러한 대가를 다시 치르어야 할 필요가 없도록 하셨다는 실제적인 맞바꿈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대하여 미리 예언한 말씀들 가운데 특히 시편 40장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하는데 충분하다. 시편 40:12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부르짖음을 듣게 되는데, 그 부르짖음은 다름 아닌 십자가 상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고통에 대한 예언인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 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음으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죄가 전혀 없으시고 한번도 죄를 범해 본 적이 없으신 구세주께서 나의 죄가 나의 머리털 보다 많다고 말씀하고 계신 사실을 보라. 다시 말해서 인류의 모든 죄악들이 십자가 위에 달려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한꺼번에 전가되어 내려 누르는 형편을 표현한 말씀인 것이다. 조금 전에 생각해 보았듯이 우리가 죄를 범할 때 느끼는 죄책감과 같은 신체적인 반응들이 갑자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몸에 실제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께서 인류들의 모든 죄를 지금 자신의 몸으로 짊어 지시고 있기 때문이다. 죄인이 느끼는 절망감, 자비가 섞이지 않은 심판의 두려움과 그 죄책감의 뼈아픔을 순결하신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갑자기 마음에 그리고 당신의 몸에 느끼기 시작하신 것이다.

영원한 멸망의 죽음을 당하심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부르짖으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것은 순교자의 부르짖음이 아니었다. 어느 순교자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죽어 가면서 그러한 외침을 한 적이 있었는가? 순교자들은 모두 다 기쁨과 소망 속에서 영원한 구원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친다는 사실에 기뻐 찬미하면서 화형대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 가지 아니했는가?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순교자의 죽음이 아니었다. 예수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그들이 받아야 할 죄의 결과를 대신 받아 주시는 대속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한번도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된 경험이 없이 늘 아버지와 하나이셨던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는 십자가에서 갑자기 하늘 아버지와 절연되는 느낌을 느끼신 것이다. 죄는 하나님과 그 인간과의 사이를 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납 하실 수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를 지신 예수께서 통렬하게 부르짖으신 이유는 죄가 예수님을 깜깜한 지옥같은 절망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한 말씀으로 잘 알려진 이사야서 53장에서 우리는 더욱 명백한 말씀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4절). 이 말씀에도 우리가 받을 죄의 값을 예수께서 대신, 실재적으로 경험하여 주셨다는 사실을 말씀하여 주고 있지 않는가? 예수께서 죄를 지신 것은 그 죄의 고통을 대신 경험하여 주신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죄를 대신 책임지기 위하여 전가시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또한 이사야서 53:12절 중반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보게 된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범죄하여 죽어가는 인류들을 구원하여 내시기 위하여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러, 대신 완전히 죽어 없어져 버리더라도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죽기를 택하겠다는 이해 할 수 없는 강렬한 사랑을 나타내어 준 것이다. 이 엄청난 사랑이 인류를 살게 하였다. 이것은 영원토록 연구와 경외의 대상이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 후서 5:21). 바울은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서 죄 그 자체가 되셨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은 죄 그 자체가 되셔서 형벌을 대신 받아 주신 사실을 그렇게 강조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그러한 사실을 느끼셨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죄를 대신 몸에 지시는 경험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탄원하시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말하는 것이었다. 주께서는 하나님과 아니 하늘 그 자체와 영원히 분리되어 죽어 버릴 가능성을 내다 보셨기 때문이었다. 그 고뇌의 아픔을 과연 누가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죄의 고통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실 때를 기억해 보자. 예수께서는 신음하시다가 서서히 서서히 돌아가시지 아니하셨다. 십자가의 양편 강도들은 금요일 저녁까지 아직 죽지 아니했기 때문에 속히 죽게 하기 위하여 다리를 꺾었지마는 예수께서는 벌써 운명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큰 소리로 부르짖으시고는 갑자기 고개를 떨구시고 숨을 거두셨다고 성경은 마지막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갑자기 파열되어 돌아가신 증거이다. 로마 군인이 죽었는지를 확인해 보기 위하여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자 피와 물이 흘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는가. 심장이 작동하기를 멈추고 파열되었기 때문에 혈구와 혈청이 나뉘어져서 물과 피가 따로 흘러 내린 것처럼 보인 것이다. 인류의 죄를 지시면서 그 괴로움과 죄의 의식을 더 이상 견디실 수가 없으셔서 예수님의 심장은 그만 터져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못박힘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죄가 찌르는 아픔들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죄악들이 바로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그래서 시편 40편 12절은 예수의 고통의 장면을 그린 예언에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영어로는 “Therefore my heart failed me”(그러므로 내 심장이 멈추었나이다-필자 번역)라고 번역하고 있어 예수께서 죄의 무게 때문에 심장이 멈추어 버린 표현의 감각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어린 양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일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넓은 엄청난 의미가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자기 개인의 마음 속으로 믿고, 정말로 감사하며 눈물겹게 받아들이는 자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나의 죄를 주께서 실재로 대신 져 주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죄에서 자유를 얻고 그 정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아 심판 당하시는 것으로 느끼셨다. 그것은 쇼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영혼은 떨리고 있었다. 바로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을 위하여 죄를 대신 져 주시고 영원한 죽음을 받아야 할지, 아니면 그대를 포기하고 아름답고 고통이 없는 하늘로 다시 올라가 버려야 할지를 선택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마귀는 예수의 곁에서 그를 몹시 괴롭혔다. 감사치도 않고 깨닫지도 못하는 인류들을 보여 주면서 예수님의 희생이 헛된 일이 될 것이요, 이제 이 대속의 죽음은 그를 영원히 멸망 당하게 만들 것이라는 절망적인 말들을 해 주었을 것이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선택을 하셔야 하였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율법을 만드신 그분만이 인류를 대속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으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한 구속의 죽음을 영원한 것으로 느끼신 것이다. 다시는 무덤 속에서 나와 부활하지 못할 것처럼 느끼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도 더 이상 보이지 아니하는 깜깜한 영혼의 그늘 아래서 하나님의 아들은 고민하고 계셨다.

그는 자기 자신의 생명과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 자신의 영생과의 사이의 선택에서 촛불처럼 떨고 계셨다. 드디어 예수께서 믿음으로 승리하셨다. 그는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의탁하나이다!”라고 소리치시며 고개를 떨구셨다. 선택은 이루어졌다. 주님의 너무나도 큰 사랑이 바로 그대를 포기하실 수가 없으셨던 것이다. 차라리 당신이 죽어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대를 구하여 내시겠다고 결정하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인류가 범죄하였을 때부터 결정해 놓으신 사실이다. 그러한 주님을 하늘 아버지께서는 삼일만에 부활해 내시었다. 그러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아들을 영원한 구세주가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또한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시다.

과연 누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다 이해 할 수가 있을까? 바다를 먹물로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 모든 풀들을 붓으로 만들어 기록하려 해도 그 사랑 다 기록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알고 믿고 가슴 깊이 받아들여 감격해 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고통은 육신적인 고통 그 훨씬 이상을 의미한다. 이것을 이해할 때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끌려 가게 되는 것이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한복음 12:32). 십자가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서 이번 호의 십자가에 관한 모든 기사들을 계속 읽으시기를 권하는 바이다.

2부 - 십자가에 대한 카다란 오해


왜 십자가가 필요하게 되었을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서 또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 무한한 지혜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 시키지 않고도 인간을 구속 하실 수 있는 다른 계획을 생각해 내실 수 없으셨을까?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도로 사시기 위하여서 다른 선물을 마련하실 수가 없으셨을까? 천사가 인류를 대신하여 죽을 수는 없었을까?

예수께서 갈보리로 가신 것은 전혀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는 이 세상의 인류들을 저들의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한 목적뿐만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사단 마귀와 싸우는 우주적인 전쟁의 의미도 내포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전쟁은 십자가에서 최고도에 달하였다. 그 전쟁은 십자가에서 시작되거나 끝나지 아니했다. 십자가는 창조 이전 부터 하나님의 마음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혹시 인간이 자유 의지의 선택을 통하여 하나님을 반역하고 범죄하게 될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은혜를 통하여 다시 구속할 것에 대한 계획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마음 속에는 있었던 것이다.

십자가가 생긴 이유

십자가가 생긴 이유는 사단이 하늘에서 반역하여 전쟁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아름다운 그룹 천사 중 하나였다. 에스겔은 마귀의 타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였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청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 되었었도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 났도다” (에스겔 28:13-15).

또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사단의 타락을 설명하고 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Lucifer, 루스벨)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 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라” (이사야 14:12-15).

위의 말씀들을 미루어 보아 그의 타락은 교만에서부터 비롯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던 것 같다. 그는 하나님과 자신을 비기면서 하나님처럼 높아지겠다는 마음이 생겨서 다른 천사들을 꼬이면서 하늘에서 반역을 시작한 것이다. 그가 천사들 중 삼분의 일 정도를 미혹하는데 성공한 사실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데, 요한 계시록 12장의 말씀이 그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꼬리가 (용의 꼬리 - 필자 주)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으로 던지더라...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요한계시록 12:4,7-9). 여기에서 미가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용은 말씀 그대로 사단을 상징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사단의 도전장

이 전쟁에서 사단이 인류를 꼬인 수법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꾀이는 것이었다. 오늘날도 꼭 마찬가지이다. 그는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실과를 따 먹어도 괜챦다고 꼬였다. 즉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거역해도 별 문제가 없는 것이며 영원히 살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다른 모든 실과들은 먹을 수 있지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선악과 자체에 독이 들어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고 우주의 조화와 질서를 성립하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존중성을 위하여 주신 명령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이 세상의 평화와 생명을 영원히 아름답고 질서 있게 보존 할 수 있는 것이다. 법이 없는 사회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단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미혹하고 기만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 마귀는 하나님을 이기적인 분이라고 고소하였다. 그 사실은 창세기 3장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되는데, 사단은 아담과 하와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아는 하나님이 그것을 먹지 못하도록 금지시키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해 준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기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한 기만술에 인류의 조상은 그만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들의 불순종이 이 세상을 이러한 파멸로 몰고 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다시 회복되어 에덴 동산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 분의 율법을 존중하여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악하여지고 불순종에 익숙하여졌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로마서 8:7). 그러므로 하나님께 두가지의 사단의 고소를 침묵시키셔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된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이기적인 분이 아니고 인류의 평화와 영원한 행복을 원하시는 크신 사랑의 존재인 것을 증명해 주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계명은 우주의 질서와 평화를 위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요, 그것을 무시하고 깨뜨리는 날에는 세상의 파멸과 슬픔이 온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셔야 한다.

하나님의 응전, 십자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 오시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다. 십자가는 에수께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신 속죄의 의미 이외에도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이기적인 분이 아니라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참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명해 준 것이다. 그리하여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 버린 모든 인간들이 당신의 품으로 다시 돌아 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계명은 폐할 수 없는 것으로서 인류의 평화와 질서를 위하여 지켜야 할 것을 증명하신 것이다.

이미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결과가 어떠한지는 이 세상의 타락의 모습을 통하여서 지난 수천 년간 증명되어 온 바이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이 하늘의 천사들과 거민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품성의 차이점을 너무도 명백하게 살펴 볼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되었다. 사단의 본성이 얼마나 악한 것이며, 그의 주장들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가를 온 우주가 더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다. 십자가에서 인간들을 충동질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는 악랄한 마귀의 성품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제는 아무도 그의 주장을 인정하는 자들이 없어졌다. 십자가에서 악한 마귀의 본성과 용서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품성의 큰 대조가 드러난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영원히 서게 되었다. 십자가는 사단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그는 영원히 패배자가 되었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는 영원히 멸망 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십자가는 영원히 인류를 구원하는 표상이 되었다. 마귀가 예수를 십자가로 죽이려 했으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사랑을 통하여서 영원한 승리를 거두신 것이다. 사단은 그래서 십자가를 미워한다. 그렇다고 그는 십자가를 없이 할 수가 없다. 십자가의 상처가 예수 그리스도의 손바닥에 영원히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기독교회 속에 들어온 사단의 기만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기억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선악간의 전쟁이 십자가에서 결정지어지긴 했으나 아직 끝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마귀는 자기가 십자가를 없이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의 능력과 의미를 없애 버리기 위하여 또 다른 작전을 세운 것이다. 십자가를 그리스도인들이 믿더라도 십자가의 참 뜻을 오해시켜 버리면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사단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주 미묘한 작전을 세웠는데, 그것은 오히려 아예 믿지 않는 것보다 더 무서울지 모르는 기만술인 것이다.

그는 자기가 십자가를 없앨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의 의미를 자기의 주장에 맞게 색칠을 하여 자기가 원하는 바대로 사람들이 믿고 따르도록 만들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는 원래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은 꼭 순종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법을 폐해도 큰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꼬여 왔다. 그것이 바로 마귀가 인류의 조상들을 기만한 방법이 아니였던가!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찬양하고 설교하며, 갈보리에 대하여 많이 말하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이 감정적으로 십자가에 대하여 많이 말하고 찬송하며 설교하기를 원한다. 십자가의 그 참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예배나 찬송은 사단에게 조금도 두려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사단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졌다고 가르치며 믿게 하고 있다. 십자가의 보혈과 은혜가 마치 인간의 불순종에 대한 좋은 핑계가 되도록 믿게 하고 있다. 십자가를 믿는 한 하나님의 계명은 더 이상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믿도록 권한다. 십자가를 믿는 한 죄를 계속 지어도 충분한 용서 속에 있으니 염려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믿고 살도록 격려 한다. 사단은 갈보리의 십자가가 우리를 하나님의 율법에서 해방하였다고 믿게 만든다. 십자가가 마치 우리들을 죄로부터 구해낸 것이 아니라, 그 죄 가운데서 구원을 준 것으로 믿게 만들려 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죄에서부터 해방하여 낸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일에 자유케 해 주신 양으로 생각케 하고 있다는 말이다. 십자가의 보혈에는 능력이 있다. 죄를 용서하는 능력 뿐만 아니라, 죄인들을 그 죄에서부터 해방하여 다시는 그 죄를 반복하지 않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십자가는 죄인의 마음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자로 만들어 주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는 것이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브리서 9:14).

만일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계명을 폐하신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예수께서 그 위에서 돌아가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율법을 그렇게 쉽게 폐해 버리실 수 있으셨다면,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율법을 범한 인류들의 죄를 대신하여 그 값을 치르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말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이 있기 때문에 죄가 성립되는 것이고, 죄에 대하여서 하나님의 율법은 사망을 선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간들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율법을 폐하시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시고 높이신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그냥 쉽게 율법을 폐하여 버리실 수 있는 일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통스러운 죽음을 통하여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셔야만 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완전케 세우신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태복음 5:1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로마서 3:31). 사도 바울이 설명한 예수께서 십자가로 폐하셨다는 것은(골로새서 2:14-16 참조)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라, 의문의 율법 곧 유대인들이 지키던 모세의 율법 즉, 절기들이나 종교 의식적인 절차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었다.

십자가를 찬송하자! 그것은 우리의 구원의 상징이다. 십자가를 감사하자! 그것은 우리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표상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참 목적을 잊지 말도록 하자. 오늘날, 십자가에 대한 커다란 오해가 범람하고 있다. 그것은 마귀가 뿌린 씨들이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용서해 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착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로 바꾸어 주는 것이다. 십자가에는 죄인들을 변화시키어 하늘에 있는 거룩한 천사들과 같이 살 수 있기에 안전한 자들로 만들어 주는 힘이 있다.

예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속하시는 것은 우리를 거룩하고 깨끗한 자들로 만드시기 위하여서 구원하신 것이다. 십자가에는 능력이 있다. 십자가는 우리들에게 죄를 짓는 면허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십자가는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케 해 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로 만들어 준다. 이것을 경험하는 자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라 하겠다.

3부 - 제자들의 빗나간 기대


예수께서 그의 지상 봉사의 거의 마지막 시점까지 십자가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신 것은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다. 십자가는 하늘에 태양이 떠있는 것과 같이 너무나도 확실하게 복음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왜 구주께서 그렇게 오랫동안 이 사실에 대하여 숨기셨을까? 예수께서는 그의 죽음에 관하여 상징적인 말로 가끔 신비롭게 말씀하셨을 뿐이다. 요한복음 2장 19절에 나오는 “성전”이 무너지고 삼일만에 재건되리라고 하신 것과, 요한복음 3장 14절에 언급된 “구리 뱀”과, 마태복음 12장 39절에 그의 육체를 세상의 생명으로 주실 것이라는 것과, 마태복음 9장 15절에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를”것이라는 말씀이 이러한 예들이다.

제자들은 이 말씀들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확실하고, 그들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어떠한 사건을 기대하였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믿음의 시련이 오기 몇 달 전, 빌립보를 방문하셨을 때까지 십자가에 대한 모든 자세한 설명을 숨기셨다. 또한 이 때가 오기까지 제자들에게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도 묻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이 초기에 들었던 상징적인 말씀들이 그들의 지식과 믿음에 융화되어 서서히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기까지 적당한 시간이 필요하였다.

정말로 제자들은 예수의 신성에 관하여 깊은 시련을 겪어야만 하였다. 예수께서는 묵묵히 자신을 “인자”라고 명하시고 계속해서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기를 즐겨하셨다. 예수께서는 계속적으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의 희망에 실망을 주셨다. 유대인들이 공통적으로 품고 있었던 메시아에 대한 소망은 예수로 하여금 한동안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게 하였지만, 점차 이러한 지지가 사라져 갈 때도 예수께서는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으로 남아있기에 만족해 하셨다. 예수께서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인정을 받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셨고 도리어 그들의 분노를 사는 길을 가셨다.

생명의 떡에 관한 말씀이 있은 후, 드디어 예수를 따르던 군중들은 모두 떠나가고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자신을 왕으로 받들려는 사람들을 퉁명스럽게 해산시키기도 하셨다. 이제 예수께서는 “멸시받고 거절 받는” 사람으로 남게 되었다. 이제 제자들에게는 예수에 대한 믿음을 거절할 수 있는 많은 이유가 주어지게 되었다.

제자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되었는가?

그러나 이 때에도 제자들에게는 성령의 계속적인 확신의 말씀이 들려왔다. 그들의 마음은 이러한 많은 혼란 속에서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충분한 증거를 배우고 있었다. 이러한 증거들은 단순히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만이 아니었다. 물질적인 증거들은 친구들과 적들에 의하여 거짓되게 풀이될 수 있으며, 또한 물질적인 증거들은 진정한 믿음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제자들의 마음속에 진정으로 믿음을 심어주고 확신을 갖게 하였던 그 증거는 바로 예수의 모든 행동과 말씀에 깃들여져 있었던 기적적이고 진정한 사랑이었다. 예수께서 하신 모든 말씀에는 심오한 영적 지혜와 하늘의 지식이 실려 있었다. 이것이 바로 빌립에게 믿음을 심어 준 요소였다(요한복음 14:11:12). 진정한 사랑의 진리를 깨닫기를 거절한 것이 바로 희망 없고 고침을 받을 수 없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불신의 죄였다. 이들의 죄는 인자를 거절한 것이 아니고 성령을 거절한 것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믿었다. 그들은 십자가가 세워지기 몇 달 전, 빌립보를 방문하였을 때 그들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예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더냐?” (마 16:13) 제자들의 대답은 예수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긍심을 부추기는 말처럼 들렸을 것이다. 예수를 엘리야, 예레미야, 또는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그 때 당시 화려한 명칭이었다. 예수께서는 만족스럽게 생각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속에 모호하게 남아있는 인자에 대한 생각을 구체화 시키려 하셨다.

베드로는 그의 용감한 믿음을 표현하고자 첫 번째 대답을 함으로 다른 제자들의 마음을 매혹시켰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16:16절).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자만심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충고도 주셨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베드로는 비록 그가 다른 제자들보다 명철할지라도 자아 만족적으로 되어서는 안되었다. 아무리 명철하고 재간이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성령이 그 안에 거하시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은밀히 나타내실 때에 그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2000년 전 예수께서 이 땅의 먼지 나는 인생 길을 가신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의 육체와 피를 통한 하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제자들의 확신에 찬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이제 그의 교회의 기반을 놓으려 하셨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그의 신앙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 신속하게, 뛰어난 건축가로서, 또한 신성한 기술자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음부의 권세”를 대항하여 제자들의 믿음 위에 세우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의 신성에 대한 완전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십자가에 대하여 설명하여 주는 일이었다. 그 동안 구름에 싸여있던 십자가에 대한 모든 신비로운 베일을 벗기시고 예수께서는 이제 명확하게 그가 앞으로 사람들에게 거절당하시고 죽게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 16:21).

제자들은 두려움보다는 놀라움으로 그 말씀을 들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들이 있다는 것도 개혁적인 사건이었지만, 그 아들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은 더욱 더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믿을 수 없었다. 영광의 왕위를 받으셔야 할 메시아가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셔야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더욱 더 확실해지면 질수록 고난받는 메시아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더욱 더 이해할 수 없었다.

특별한 축복을 받았던 베드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첫 번째로 선언한 그가 십자가를 첫 번째로 부인하였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절). “십자가는 흉악범을 위한 것이다... 십자가는 의로운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아들을 위한 것은 특별히 아니다!” 십자가는 제자들에게 걸림돌이요 어리석음이요 또한 모욕이었다.

우리는 제자들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이해가 도달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오직 성령만이 이것을 깨우쳐줄 수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믿음의 고백을 먼저 하게 한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는가.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이해하지 못함으로,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한 것처럼, 예수를 떠났을 것이다. 사람이 만든 종교도 메시아를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세상을 위하여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주시며 고난 당하시는 예수를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베드로보다 나은가?

우리도 십자가의 진리에 눈이 어두웠던 예수의 제자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아마 더욱 큰 위험 속에 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이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십자가를 증명하는 많은 역사적 사실들과 이 사실을 인정하는 많은 사람들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 베드로보다 더 계몽된 사회와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더 현명하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의 가장 큰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베드로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빌립보에서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 없다. 십자가는 오직 하나님만이 생각해 내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표상하고 있다(고린도전서 1:18,24 참고). 이것은 고상한 기술로 이루어진 영적 전쟁의 성스러운 전략이다. 예수의 말씀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이 세상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베드로의 반응은 십자가에 대한 불쾌하고 어리석은 감정을 갖고 있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불경건한 행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책망하셨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 16:23). 베드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이해하는,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었다. 베드로는 우리보다 더 흉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기 자신만을 의존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하려 하였다.

우리는 베드로가 그리스도에게 반대하여 나타낸 그 사상의 출처를 생각해야 한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화를 내신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씀은 폭발하는 감정적 성격을 갖고 있지 않았다. 엄격하고 마음을 찌르는 예수님의 책망은 베드로의 세상으로 기울어진 감정을 드러내셨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 16:23).

불쌍한 베드로! 그는 무의식 중에 자신을 사단의 도구가 되도록 허용하였다. 십자가를 이루지 못하게 하려는 베드로의 말속에서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반역하여 이 땅에 쫓겨온 사단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는 베드로가 사단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대하여 갖고 있었던 생각은 단지 연약하고 무식한 인간의 본질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사단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침울해지고 잠잠해진 제자들의 마음속에 강한 힘으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견책이 서서히 스며들어가기 시작하였다.

4부 - 어린 예수와 십자가


만약 베드로가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생각할 시간이 있었다면 아마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선생을 책망하려고 시도하였으며, 그가 고기잡이 시절에 정신병자에게 했던 식으로 예수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이제 제자들은 경외심과 깊은 감동으로 예수께서 처음으로 여시는 하늘 나라의 법에 대한 신비로운 말씀을 경청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 이 말씀을 다른 말로 요약한다면 - ‘너희들은 인자인 내가 십자가를 통하여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만 놀라고 있지만, 만약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너희도 나와 같이 십자가에 자신을 죽여야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이러한 모든 것에 하나가 되었고 십자가의 법이 우리를 두르고 있기 때문이란다’ - 하신 것이다.

죄가 시작되기 이전, 멀고 먼 태고 때에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께서 만약 인간이 죄에 빠진다면 아버지가 아들을 주고, 아들은 자신을 세상을 위하여 주어서, 지구를 자아를 추구하는 이기주의의 멸망 속에서 구원하시고자 경건한 협정을 맺으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같이 든 모든 자들을 하늘 보좌에 앉게 할 수 있도록 계획하셨다. 그 깊이와 높이를 측량할 수 없는 십자가의 극적인 사랑의 표현을 죄짓지 않은 우주의 존재들에게 나타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도 이 일에 그의 십자가를 지고 계셨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든지, 만약 그리스도를 따르기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들만의 십자가를 지고 있다.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사제나, 수도승, 성직자, 선교사, 교회 직원, 종교 지도자가 될 필요는 없다. 죽기를 싫어하는 씨는 결국 잃어버림을 당할 것이고, 땅속에 들어가 죽는 씨는 많은 열매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법칙 안에 바로 하늘 나라가 세워진 창조적 원칙이 숨어있는 것이다.

죄가 하나님의 정부를 공격하기 위하여 첫 번째로 하는 일이 바로 십자가를 없애려 한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선악간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전략은 십자가를 통한 길 이외에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본능적으로 십자가를 선택한다. 그 이유는 십자가만이 완전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으시고 그의 독생자를 주시고자 작정하셨다. 예수께서도 그 길을, 인류를 위한 신성한 사랑으로, 따르기로 하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되신 것이다(계시록 13:8, 참고). 어느 누구의 마음속에 들어가시든지 신성한 사랑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죄에 대항하는 여러분과 나의 싸움은 창조주께서 하시는 똑같은 원칙에 근거하여서만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린 예수와 십자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의 인생을 통하여 보여주신 진리의 십자가는 깊은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비록 완전한 인간으로서 모든 종류의 시험을 당하셨지만 그의 마음은 죄 없으셨으며, 정결하셨다. 이 사실은 놀라운 경이요 사랑의 보고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이세상의 모든 인간들과의 다른 점이다.

아기로서 태어나셨을 때에 예수께서는 그가 하늘에 계셨을 때를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아기들처럼 태어나셔서 인간의 아기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알지 못하셨다. 그는 목자들의 숭배를 깨닫지 못하였으며 박사들의 방문을 알지 못하였다. 큰 도시에 가보았던 운 좋은 아이처럼 시골 산 동네에 사는 친구들에게 하늘에서 천사들의 사령관이었던 때를 설명할 수도 없었다. 예수께서도 다른 모든 아이들처럼 우리가 배웠던 방식으로 지식을 습득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아이가 자라며 강건하여지고...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라고 적고있는 것이다(누가복음 2:40, 52).

예수에 관한 신비는 바로 그의 태어나심에 있다. 신이 인간이 되시고 이 땅에 태어나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자라나셔야 하시고, 죄 없이 사신 것은 큰 신비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태어나실 때에 그의 지식에는 어떠한 초자연적인 과거의 기억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 모든 것들을 하늘에 두고 태어나셨다.

아이가 12살이 되어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때가 이르렀다. 그의 마음속에는 장래의 일을 형성할 수 있는 어떠한 모형이 세워지게 되었다. 예수께서 유대 나라 명절이었던 유월절에 참석하였던 때는 12살 때였다. 처음으로 그는 유명한 사원들과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제사장들이 피 흘리는 희생 재물을 제단에 올려놓는 것을 보게 되었다.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어린 예수의 마음은 희생양이 갖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하였다. 제사장도, 어느 누구도 그 의미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재갈물린 말처럼 묵묵히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의식을 행할 뿐이었다. 4000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짐승의 피를 바쳐왔다. 그러나 아이들이 “왜 이러한 일을 행합니까?”라고 물으면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아무도 신비로운 그 희생의식을 설명할 수 없었다. 예수는 아마 “소나 염소의 피가 정말로 죄를 없앨 수 있을까?”하고 의아해 하였을 것이다.

어린 예수는 다른 아이들처럼 친구들과 잡담과 놀이를 하지 아니하고, 심지어는 부모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피를 뿌리는 그 장면이 그의 마음속 깊이 어른거렸다. 바울은 예수께서 처음으로 짐승들의 피가 우리의 죄를 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 그 마음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 땅에 오시기 전 하늘에서뿐만 아니라, 이제 인간으로서도 무릎을 꿇고 깊은 심오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말이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브리서 10:5-7).

“아버지여 당신에게는 이러한 짐승의 피가 필요 없나이다! 당신은 그 안에서 아무런 기쁨을 찾을 수 없으니, 그 이유는 이것들이 어떠한 인간의 죄도 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만드셨고, 내가 바로 그이오니 나는 줄 수 있는 몸이 있고, 나눌 수 있는 피가 있나이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아버지여. 저로 하여금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게 하소서. 제가 세상 죄를 위하여 죽겠나이다. 제 피가 속죄제물이 되겠나이다. 제가 이사야가 말한 그 ‘고통받는 일꾼’이 되겠나이다. 저로 인간의 죄를 위하여 상처받게 하시고, 멍들게 하시고, 채찍질 받게 하소서. 당신의 의지를 따르리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예수께서 구약의 표상적인 봉사를 제하여 버리시고 자기 자신을 그 자리에 세우셨다고 하였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브리서 10:9,10).

영원 전에 미리 존재하였던 과거의 기억이 유월절 의식의 신비를 대신 설명할 수 없었다. 하늘에서 이 지구가 만들어지기 전에 있었던 “평화의 협정”은 “그 두 사람 사이에” 있었으며 (스가랴 6:13),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삼아 세상의 죄를 씻기로 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이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하신 그 계약을 기억해 내실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의, 죄로 더럽히지 않은 정결한 마음은 유월절 의식을 통하여 본 상징들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브리서 9:9).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히브리서 10:1).

“이것은 모두 비유이지...” 예수께서는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무죄하고, 순결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누군가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죽임을 당하여 잃어버린 인류를 대속 해야 한다... 이렇게 의미 없이 계속되고 있는 무의미한 의식은 이제 극적인 마지막을 맞게 함으로 의식의 실제적인 의미가 거룩한 희생으로 나타나야 한다... “

이것은 이스라엘의 박사들과 제사장들이 수 천년간의 의식을 통하여서도 깨닫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보아왔던 상징을 단지 한번 봄으로서 12살 짜리 어린 예수는 그 의미의 중심을 이해하였다. 그의 어린 마음은 강한 의지의 힘으로 감싸지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어 보려는 불쌍한 영혼들의 노력은 하나님의 은총의 자비 없이 그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었다.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시고 그 공평이 없는 것을 기뻐 아니하시고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며...” (이사야 59:15,16)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브리서 9:14).

이 놀라운 사랑의 사업을 보라! 그는 인간의 몸에 거하셨고, 영원전의 모든 기억을 알지 못한 채 10년 동안 어린이로서, 단지 성경말씀만 믿음으로서 사신 그리스도.. 그는 영원 전 하늘의 사령관으로서 내리신 그 결정을 인간으로서도 선택하셨다. 그는 십자가로 가시기를 선택하셨다.

구원받을 수 있는 오직 한 길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우리 마음에 비춰지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영원 전에 선택하신 그 길, 또한 어린아이로서 옛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결심하신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마음을 품고 있든지, 죄인의 마음을 갖고 있든지 간에 오직 십자가의 길만이 부활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한복음 12:25).

두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너와 나의 십자가. 그리스도를 선택한 그 강도가 졌던 그 십자가는 곧 우리들의 십자가이다. 또한 갈바리에는 세 번째 십자가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는 구원이 내릴 수 없었다. 그는 고통과 죽음 속에서도 그의 마음을 굴복하지 않았다. 반역적인 그의 정신은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예수와 동료를 저주하였다. 우리도 그 강도처럼 십자가의 사랑을 거절하고 그를 따라서 영원한 어둠으로 떨어질 것인가?

우리의 거룩한 모본께서 보여주신 그 십자가는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기에 쉽게 하신다. 그의 십자가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발견할 수 있고 또한 기쁨으로 이것을 지게 하는 힘을 찾을 수 있다.

5부 - 내가 발견한 십자가


나는 어렸을 때에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의 이야기를 공포가 느낄 정도로 자세하게 들은 적이 있다. 또한 중세 암흑기에 비참하게 죽어갔던 순교자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어린 나의 마음은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겪으셨던 그 고통과 이러한 순교자들이 견디어야 했던 그 비참함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었다. 사실, 많은 순교자들이 당했던 고통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던 것보다도 더 심했으며 길었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점차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던 그 고통과 수치와 외로움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순교자들이 죽을 때에는 그들의 친구들이나 잘 아는 누군가가 그들의 옆에서 그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응원하여 주었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친구들은 십자가를 두고 모두 도망갔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유도 그렇게 큰 차이점을 주지 못했다. 이와 비슷한 외로움과 거절과 엄청난 육체적 고통을 겪은 순교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나 다 그들이 착한 사람이었다면 그들이 맞을 밝은 죽음 저편의 세계를 생각하며 그들의 고통을 참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배운 바 대로는 만약 착한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하늘에 가서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이었다면 지옥에 가서 고통을 받는다고 알았다. 예수는 당연히 착한 분이셨다. 그래서 나는 예수께서 죽으신 다음 곧바로 하늘에 가셔서 하나님 아버지와 천사들과 즐거운 주말을 보내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누가복음 23장 43절에도 “오늘 내가 너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것을 보면 이것은 너무나 확실한 사실처럼 보였다.

예수께서는 금요일 오후 3시경에 돌아가시고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예수께서 그 사이에 하늘에 가셨다 오신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예측은 예수께서 그 고통을 더 쉽게 견딜 수 있도록 하셨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어떠한 확실한 영광과 행복이 앞날에 있을 것이 확실하다면 인간은 초인간적인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갖고 있는 특별한 영광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고민하였다.

더욱이 예수께서 겪으셨던 육체적인 고통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모든 고통의 시간은 12-15시간 이내에 끝이 났다. 그렇다고 내가 이러한 고통의 시간을 겪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정말로 길고 긴 고통의 시간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순교자들이 더 긴 시간동안 더 큰 고통으로, 또한 곧바로 하늘에 가서 즐거운 주말을 보낼 수 있다는 확신도 없이 순교를 당했던 사실이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해 보았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갖고 있는 특별한 영광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감사를 느끼고 있는 것 같은 그 십자가에서 내가 깊은 감사를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내가 들은 바 대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에 이에 영광을 돌리고 특별하고 심오하며 마음을 움직이는 감흥을 느껴야만 하는데,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를 생각하며 울기도 한다. 나는 내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나는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한 말씀을 마음 깊이 느낄 수 없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감동 받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해 보았으나 헛된 일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어떤 풀 수 없는 실마리에 묶여져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장래에 어떠한 일이 있을 것을 아셨으므로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간처럼 그렇게 쉽게 무너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계속 내 생각 속에 머물렀다.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아셨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과 다시 돌아갈 것도 아셨다. 그렇기 때문에 짧은 이 땅의 육체적 고통은 순간적인 것에 불과했어...”

나는 어렸을 때 세상에서 가장 이름난 부자 중 하나였던 헨리 포드에 대한 책을 읽은 것을 기억한다. 그 유명한 자동차 회사의 건립자인 헨리 포드는 어느 날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한 친구와 함께, 그날 따라 제일 작고 싼 차를 타고 어느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싸구려 자동차가, 가난한 사람들이 싼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경험하는 것처럼, 갑자가 길 한가운데서 망가져 서 버렸다. 포드는 시골 자동차 수리공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불편한 시간이었지만 헨리 포드는 그 시간을 즐겁게 보냈다고 적고 있다. 나는 그 때 포드가 그 망가진 작은 차를 꼭 고쳐야만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라도 회사에 전화해서 Lincoln과 같은 좋은 차를 보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이러한 사실이 포드로 하여금 그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게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만약 보통 사람이 그러한 경험을 하였다면 그 기분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리스도도 이 같은 상황에 있지 않았는가? 나는 스스로 변론하였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태복음 26:53) 하신 것은 바로 헨리 포드의 자동차가 고장났을 때의 상황과 같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총알이 더 많이 있는 군인이 하나도 없는 군인보다 더 용감할 것은 당연한 사실이 아닌가?

나를 혼란케 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나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나는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남겨 두셔서 내가 그리스도께서 내게 하신 일을 잘 이해할 수 없게 하셨는가? 나는 고민하게 되었다. 그냥 내가 그 사실을 믿는다고 해 버릴까? 아니면 내가 어떤 중요한 감흥을 느낀다고 해버릴까? 내가 느낄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이다. 나는 구원받기를 열망하였지만, 동시에 나는 진실되고 싶었다. 내가 진정으로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끼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어떤 작가들과 강사들은 인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늘에 갈 때까지 기다려야만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말은 나에게 위안이 되기보다는 더 큰 혼란을 주었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바울을 포함한 예수의 제자들의 마음이 십자가를 통하여 깊은 감동과 변화를 경험하였다. 어떤 놀랄만한 현상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면서 까지도 고통받기를 자초했으며, 울거나 슬퍼하기는 커녕 그들이 받는 고통과 박해와 모욕과 불편함을 즐겁고 만족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들에게는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그 무엇이 있었다. 아마 이것을 나는 하늘에 갈 때까지 갖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를 괴롭힌 것은 내가 만약 그것을 지금 갖지 못한다면 나는 하늘에 갈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렇게 희망 없는 쳇바퀴만을 계속 돌리고 있었다.

아마 어떤 사람은 나에게 이렇게 충고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당신과 같이 있지 못해서 도와줄 수 없어 참 안됐군. 그런데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리가 십자가에 대하여 특별한 감흥을 느껴야만 하늘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냥 단순히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세주로 받아들기만 하라고. 이것은 단순히 보험카드에 싸인하는 것과 같은 것처럼 간단한 것이야. 눈물이나 어떠한 감정도 싸인하는 일에 필요하지 않아. 그래도 싸인하는 동시에 당신은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을 받는 거야.”

내가 이러한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의 만족도는 예수의 제자들이 경험한 그 불타는 신앙과는 너무나도 먼 거리에 있다. 바울은 예수께서 경험하신 그 희생의 십자가를 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의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린도후서 11:25-30).

보험에 가입하는 것과 같은 믿음은 푹신한 교회 의자에 매주 앉는 것도 힘들어 한다.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복음 14:33,27). 만약 누구든지 예수의 제자들처럼 그리스도를 섬기지 못한다면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 내 마음에 깃든 음성이었다.

십자가의 의미를 감추어 버리는 것

사람이 죽을 때 진정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상태로 살게 된다는, 영혼은 절대로 완전히 죽지 않는다는 가르침은 큰 오류이다. 단순히 비타민이 부족하여 어떤 병이 걸리는 것처럼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영혼 불멸적인 사상은 내 마음에 복잡한 혼란을 만들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이 죄를 지을지라도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고 유혹하였다(창세기 2:17 참고). 지금도 사단은 우리에게 “너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3:4)고 유혹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 어떤 인간도 결코 완전히 멸망 받을 수 없어. 영혼은 자연적으로 불멸한다고.”

이러한 사상이 이방인들의 종교의 기본사상이 되었으며 점차적으로 기독교에 퍼져나가 이제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이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다. 겉으로 볼 때 이러한 생각이 별 나쁜 결과를 끼친다고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여 보라. 이 사상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라고 하신 로마서 5:8절의 말씀과 대치된다. 왜냐하면 영혼불멸설 안에는 실제적인 “죽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말해서, 사단이 우리에게 이 사상을 통하여 속이려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겪으셔야만 하였던 경험은, 실제로 죽음이 존재하지도 않고, 그렇기 때문에 잃어버릴 것도 없고, 포기해야 할 것도 없으며, 그래서 참기에 충분하였다고 사단이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희생은 어디에 있는가? 희생은 존재할 수 없다.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 없는 쇼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 노리는 것이다. 십자가의 의미를 없애려는 것이다. 나라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전쟁 용사들의 죽음보다도 더 중요하지 않게 십자가를 만들어 버리는 사상이 바로 죽음이 없다는, 영혼 불멸의 사상인 것이다.

십자가가 주는 진정한 의미

그리스도께서 경험한 십자가의 고통은 그 어떤 육체적 고통이나 순교자들의 경험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십자가에는 어떠한 수치나, 억지로 믿어야만 하는 짐이 없다. 이사야서는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죄악”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죄악은 우리로 하나님과 분리되게 만들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하였다(이사야 59:2). 죄는 우리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분리시키고 우리의 영혼을 빼앗기게 하였으며 담대함을 잃어버리게 하였다. 구주께서는 진정으로 우리들의 죄악을 자신에게 옮겨놓으셨다. 이 의미는 죄악이 갖는 모든 죄책감과 외로움, 완전히 버림받은, 더 이상 희망이 없이 멸망 받기만을 기다려야만 하는, 사형선고 받은 죄인의 처절함을 모두 느끼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시킨 요소들이었다. 내가 이러한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정말로 버림받은 느낌을 받았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아버지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부르짖음이 영화 속의 배우가 극적인 표현을 하기 위하여 꾸미는 연극과 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예수께서 버림받았다는 사실로 울부짖었을까?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2:24).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그의 어깨에 우리의 짐을 지시지 않으셨다. 그는 그의 마음과 영혼 깊숙이 우리의 죄를 지셨다. 그의 모든 신경조직에, 그의 마음과 영혼에 우리의 죽음의 죄를 지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린도후서 5:21).

예수께서는 죄인이 아니셨다. 그는 죄 없는 분이셨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니라”(갈라디아서 3:13). 죄와 저주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를 지셨던 것이 얼마나 실제적인 사건이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 만약 그리스도께서 죄가 되시고, 죄의 저주를 받으셨다면, 그는 죄의 결과가 주는 고통도 경험하셔야만 한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브리서 2:11).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 받으신 그 죽음이란 무엇인가? 성경은 두 가지 죽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나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죽음으로 “잔다”는 의미에서의 죽음 (요한복음 11:11,13 참고)을 말하고, 두 번째 죽음은 완전한 죽음을 말한다. 요한계시록 2:11, 20:6, 21:8절에 나오는 이 두 번째 죽음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것이며, 모든 빛과 즐거움과 생명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당하신 그 죽음은 바로 이 두 번째 죽음이었다. 영원히 이 땅과 온 우주에서 사라져 가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나거나 창조함 받을 수 없는,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할 상태로 가버리는 죽음이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브리서 2:9). 예수께서는 인류 모두가 각기 당하여야할 그 죽음을 맛보셨으므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죽음은 우리가 늙어서 죽는 그러한 죽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 한번은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만약 그들이 죄를 짓는다면 받을 것이라고 말한 그 죽음을 당하셨다. 이 지구에 그 동안 살았던 수 천억의 인류 개개인의 모든 죄의 결과를 마음에 지시고 한 사람의 죄책감이 아니라 수 천억 명의 죄책감과 그들의 불안함과, 희망 없음을 모두 느끼시며 영원한 죽음을 당하시는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생각하여 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브리서 2:17,18).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로부터 완전히 가려졌다. 희망도, 빛도 두 번째 죽음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며, 다시 창조되는 부활도 기대할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죄인의 죽음을 당하셨으므로 더 이상 부활을 기대하거나 용서를 바랄 수 없었다. 만약 예수께서 부활의 소망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었다면, 그는 모든 사람의 죽음을 맛보기에 부적합하였을 것이고, 진정으로 자신을 우리의 죄를 위하여 희생하실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애원하실 때에 그의 인성은 움츠려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8,39). 그리스도께서 마셨던 그 잔은 어떤 인간도 아직까지 맛보지 못한 것이었다. 실제로 우주 역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죽음을 당하셨다.

소름끼치도록 두렵고 절망적인 두 번째 죽음을 온전한 정신으로서 경험하신 그리스도. 그의 손을 찌른 못도, 그의 뚫어진 발도, 매서운 채찍도 그를 죽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육체적 고통을 거의 느끼실 수 없을 정도로 그 마음의 고통이 극심하셨다. 그를 죽인 것은 겟세마네부터 흘리시기 시작한, 피땀 흘리는 마음의 고통이었다.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시편 69:20).

이 땅에서 사신 모든 생애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부활에 관한 확신이 있으셨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얼굴을 보실 수 있으셨으며, 이러한 영광의 햇빛 아래서 마음이 움츠려들 수 있는 어떠한 큰 장벽도 없었다. 심지어는 십자가상에서 회개한 강도가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하였을 때에도 예수께서는 즐거운 확신 속에서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곧 이러한 감흥은 사라지고 예수께서 마셔야 할 그 잔이 그의 몸과 마음을 침투해 들어왔다. 급속한 변화가 그에게 이르렀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마 27:42, 40). 그리스도께서 마신 그 쓴잔은 이렇게 욕하고 저주하는 사람들, 예수께서 구원하시려 왔던 바로 그 사람들로 인하여 더욱 쓰게 변하였다. 십자가 위에서 이러한 말씀을 들으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한 번 내려와 봐!” “하나님이 왜 너를 구원해주지 않지?” 그리스도의 손은 넓게 벌려져 나무에 박혀 있었기에 귀를 막으실 수 조차 없으셨다. 그저 기도할 수만 있었을 뿐. 승리의 기도가 아니라, 희망의 기도가 아니라, 버림받는 울부짖음의 기도뿐. 하늘은 닫혔고 어느 누구도 그를 돕는 손길을 뻗히지 않았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치 아니하시나이다”(시편 22:2).

여러 시간동안 예수께서는 죄와 죽음의 짐과 싸우셨다. 구경꾼들의 잔인하게 모욕하는 말이 들리기 시작한 조금 후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었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하나님과 자신과의 완전한 분리가 이루어졌음의 절망을 선고하셨다. 사람들의 모욕은 독에 담겨 가시 돋친 화살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에 심한 고통을 일으켰으며,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되어 가는 예수의 영혼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이제 완전한 죽음이 그리스도의 영혼을 빼앗아 갔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힌 손으로 자신의 눈물을 감출 수 없음을 아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어두움을 보내어 놀리는 군중들로부터 그의 얼굴을 숨기셨다. 오직 짙은 암흑 속에서 들리는 것은 갈바리로부터 메아리치고 있었던 그의 사라져 가는 적은 신음소리 뿐... 얼마나 잔인한 인간들인가? 또한 얼마나 자비로운 하나님이신가? 아들의 마지막 고통을 숨기시는 그 자상한 사랑. 천사들조차도 보기를 허락지 않았던 그리스도의 고통의 마지막 장면들, 영원한 죽음을 갖게 하시기 위하여 끝까지 그리스도에게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동정, 그러나 마지막 격정의 모습을 사람들로부터 숨기우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의 법과, 구속과, 사랑의 원칙을 온 세상에 전하고 있었다. 희망은 영원히 사라졌지만, 사랑은 견디었다. 시편 22편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겪으셨던 그 고통을 설명하고 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믿음은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의지이다. 그러나 사랑은 보이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게 한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수난을 통과하실 때에 그 마음과 영혼은 오직 죽어 가는 인류를 위한 사랑으로서 채워져 있었다. 그에게는 부활과 영생의 희망이 전혀 없었지만, 사랑은 그 영원한 죽음을 끝까지 받아들일 수 있게 하였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게 한다. 순교자의 죽음이 아닌 죄인의 죽음을 택하시고, 희망 없는 영원한 죽음의 세계로 그의 얼굴을 돌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하늘의 원칙을 기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을 위하여 구속의 경륜을 세우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기로 결심하시고, 겟세마네로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통과 모욕과, 아픔과, 외로움과 희망 없음과 싸우셨으며, 끝까지 변함없이 그 영원한 죽음을 받아들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셨다. 희망은 완전히 없어졌으나, 사랑은 이를 견디었다. 믿음은 움츠러들었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었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6부 - 주님께 나가는 길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사실 십자가는 로마시대의 무서운 사망의 형벌과 저주의 상징이었지만, 지금 우리 크리스챤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그 똑같은 십자가를 알고, 가지고, 믿고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각 사람마다 자신에게 비치는 십자가의 의미는 모두 다르다. 당신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십자가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다. 십자가는 “죽음”, “멸절”, ”없어짐”을 상징한다. 그리고 모든 것의 “죽음”, ”멸절”, “없어짐” 후에 오는 “부활”, “신생”, “있음”과 “충만함“을 상징한다. 죽기 전에는 살 수 없고, 사망이 없으면 탄생이 있을 수 없다. 사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십자가가 의미하고 있는 참된 뜻인 “진정한 죽음”을 경험하지 못함으로 “진정한 거듭남”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

다가오는 십자가의 의미

만일 당신의 영적 생명이 매일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경험이 없이, 아니 당신의 존재 전체가 새롭게 피어나는 체험이 없이 늘 무기력하게 이어져가는 삶을 살고 있다면, 끊임없는 깨달음과 자각과 지혜의 성령의 인도하심의 특징이 삶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또한 점점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나는 영적 성장의 특징이 당신의 삶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대의 본성이 늘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빛으로 점점 다가가고 싶어하며, 그 무한하신 신성의 아름다움을 보는 일이 그렇게 기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당신의 영적 생명에는 문제가 있다.

십자가는 생명이다. 예수님께서는 여러가지 비유를 통해 “죽음”을 통해서라야만 새로운 생명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누누히 우리에게 말씀하신 후, 자신이 하신 그 비유를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몸소 보여 주셨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나니...” 이 말씀처럼 예수께서는 그분의 생명을 십자가에 던지셨다! 보라! 그 죽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새 삶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하나님께서는 보지 못하면 믿을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을 눈에 확실하게 보이시고 현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사용하셨다. 용서를 하셨다는 어떤 눈에 보이는 증거나 표상이 없으면 깨달을 수 없는 인간의 무지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리고 아무리 사랑한다고 말해도 의심이 너무 많아 믿지 못하는 우리들의 불신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위해 십자가를 사용하셨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가 아니면 우리에게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을 보이실 방법이 없으셨다. 그리고 눈에 확연하게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설명하지 않으시면 우리 연약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할 방법이 없는 것을 아셨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음보다 더한 죽음을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볼 때, 그리고 그분의 고통, 고난, 죄책감을 대신 견디신 심리적 고통, 둘째 사망의 형벌을 대신 당하시는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의 현시를 볼 때야만 아들을 우리 대신 죽게 내어주신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고 느낄 수 있을 것을 아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사용하신 것이다.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의 유형

자세히 살펴보면 십자가를 믿을 때 여러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생기게 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이유는 십자가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에 따라 하나님께 대한 태도와 믿음과 신앙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최초의 타락 이후, 늘 인간을 괴롭혀 온 무서운 죄책감의 문제를 보자. 사단이 하나님을 마치 우리의 잘못을 살피시는 무서운 심판자로 여기도록 하나님을 왜곡시킨 대로, 그리스도인들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마음 깊이에서는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양심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거나 자신의 행동이 도덕적인 율법에 조금이라도 어긋난다고 생각하면, 죄책감에 눌려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며 벌벌 떤다.

또 다른 유형의 사람들은 반대 현상으로 십자가에서 구원이 다 이루어졌고, 예수께서 율법의 요구를 폐하시고 다 이루셨음으로 율법을 지킬 의무에서 해방되었다고 기뻐하며 그냥 마음대로 산다. 어차피 죄에서 태어났고 그 죄를 십자가에서 다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셨으니까 그냥 그렇게 살면 언젠가 홀연히 변화되어 불멸의 옷을 입고 하나님의 천국으로 옮겨질 것이라고 거짓 안전감 속에 자신을 둔다.

십자가를 통해 주님께 나가는 길

우리는 십자가를 똑바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버리셨던 주님과 같이 자신을 버려야 한다. 또한 우리는 자신을 버리기 전에 자신에 대해 잘 알아야만 한다. 자신을 모르면서 어떻게 자신을 버리겠는가? 우리는 자신을 잘 알아야만 하며 그래야만 버리기 위해 자기 자신을 주님 앞으로 가지고 갈 수 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 앞에 자신을 가지고 가는 첫번째 단계에서 실패하므로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없는데, 그것은 철저한 자복과 인정의 결여이다. “아니, 나는 철저하게 고백을 했는데요”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라. 정말 그랬는지를...

우리 인간에게는 자신의 죄된 모습이나 부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것에 대해 자꾸 부인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신 안에 어떤 문제나 부족, 혹은 죄성을 볼 때, 그것이 내 자신 안에 있음을 순순히 그리고 겸손하게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만든 환경이나 상황이나 사람이나 사단을 탓한다. 그래서 긴 변명의 기도를 자주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을 설득시키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딜레마에 빠져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할 계단을 잊어버리고 만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님 앞에 나가는 첫번째 단계도 시작할 수 없다. 그냥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라! 그것이 첫번째 해야 할 일이고 그리고 그것이 전부이다. “하나님! 저에게 이런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인정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라. 그러면 그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우리가 그것을(죄를) 인정(고백)하는 순간 그것은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던져버린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것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알 수 있듯이 인정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순간 벌써 그것(그 죄)은 내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옮겨갔고, 나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드리는 고백을 하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져가셨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의 양심은 말한다. “미워하면 안되는데!...” 그래서 그 다음으로 우리는 누구를 미워하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숨기고 싶어한다. 아니면 하나님 앞이나 자신에게 긴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악한 면, 부족한 것, 모자람 등을 스스로 인정하고 겸손하고 순수하게 하나님께 나아가 그것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이다. 바로 그 때에 용서와 회복이 하늘로부터 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면(선한 면과 악한 면,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 등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우리 스스로는 될 수 없는 것을 아시고 용서를 마련해 놓고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십자가는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내 마음의 십자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적나라하게 내어 놓고 인정하기만 하면, 그 순간 용서의 확신이 마음에 찾아들고 기쁨이 마음에 들어 올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순간은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용서와 구속이 내 것이 되는 순간이기 때문에 그렇다. 어떤 좋지 않은 생각이 들든지, 어떤 악한 마음이 들든지 매번 그렇게 하라. 그렇게 계속 하나님께 드릴 때, 끊임없는 용서와 평안이 찾아 오며, 우리는 하나님과 끊임없는 기도로 늘 함께 살게 될 것이다.

진정으로 십자가에 이미 주어진 용서를 마음에 경험하고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함으로 그의 생애와 성품에서 놀라운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이며,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빛과 사랑으로 충만한 생애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생애는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악한 것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됨을 증명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만일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당신 스스로가 진정으로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주신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직도 죄책감에 계속 떨며 괴로운 삶을 살고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랑이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가족과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백번 돌아가신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렇게 아름다운 사랑과 용서의 현시로 주신 십자가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십자가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진정한 죽음을 죽고 다시 진정한 부활을 경험해야 한다. 아낌없이 자신을 쏟아부으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 십자가! 그 십자가가 우리들의 마음에 매일 새롭게 태어나야 그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거듭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