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처음 익은 열매가 되기 위하여

 끝없이 펼쳐진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도로 옆 숲속의 싱그러운 초록으로 단장한 아름다운 나무들이 눈길을 끈다. 봄에는 하양, 분홍의 탐스러운 꽃들을 피워내더니, 여름이 올라치면 어느새 파란 잎들을 피워낸다.

 나무들은 계절의 순환을 어찌 그리 잘 알고 따르는지, 그리고 얼마나 자신의 할 일을 묵묵히 기쁨으로 해 내는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들을 새삼 부끄럽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하지 못하며 살고 있는지를, 그리고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에 대해 얼마나 자주 불평하며 살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 14장 1~5절에는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 시점에 나타날 십사만 사천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그들은 이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 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은 이 사람들의 특징과 성격에 대해서 계시록 14장 4절, 5절에는 이렇게 써 있다. 이 사람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

하나님의 인
 
하나님의 인 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인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생애에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보면 하나님의 인을 앞이마에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앞이마인가? 그것은 의지와 이성이 자리잡고 있는 인간의 뇌의 전두엽 부분에서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지며, 성령의 역사하심 또한 이 곳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매 순간 인간은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성령의 음성과 하나님 편을 선택하므로, 사단과 어두운 생각과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으며, 전두엽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역사에 협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승리의 생활을 살 수 있다.

 우리는 마지막에 하나님의 품성을 생애에 이루어 하나님의 인 을 받고, 세상에 하나님을 증거할 증인들이 될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혹자는 물을 것이다. 죄 많은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닮고,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을 생애에 드러낼 수 있느냐고... 우리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로 그것을 이루게 하시기에 능하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생활에서 아주 작은 단계인, 아주 쉽고 단순한 일부터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십사만 사천인의 특성들
 
십사만 사천인의 특성들 중에는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것과 그 입에 흠이 없는 특성이 있다. 그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 그리스도인 생애에 있어서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란 없다. 하나님께 자신을 바친 사람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시지 않은 환경이나 처지에 빠지는 일이 결코 없다.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목적이 있다. 그것이 슬픈 일이든, 고통스러운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즐거운 일이든, 아니, 그것이 인간의 지혜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하고 너무 이상한 일일지라도... 그리고 그것이 아무리 괴로운 환경이거나 견디기 힘든 상황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준비하시고 허락하신 환경들이다. 그러므로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그리고 그 입에 흠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 어떻든지,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하신 장소가 어떻든지, 그리고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또 어떤 일이 닥치든지, 불평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삶을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어린 양 되신 예수께서 우리의 성격과 성정을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또 어떤 경험들을 통과해야 깨달음을 얻고 자신과 마음을 비우게 되며, 정결하게 되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줄을 아시기 때문에 그런 환경과 일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다는 것을 믿고 기쁨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입으로 불평하지 않고 감사한 마음으로 따라가는... 이것이 바로 십사만 사천인이 가지는 특성인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황을 받아들이며
 
한 신비주의의 종교가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었다. 어두운 밤이 되어 어떤 마을로 갔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곳은 그들과 다른 종교를 가진 마을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진 것도 없고 배고프고 사람들로부터 거절당한 그들은 비를 피할 처마밑조차도 제공받지 못했다. 밤은 춥고 배고파 지친 그들은 마을 밖의 나무 아래 앉았다. 그의 제자들은 몹시 슬프고 의기소침한 상태에서 일종의 분노까지 느끼면서 그의 스승 곁에 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그 스승은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당신은 정말로 훌륭하십니다. 당신은 언제나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그 기도를 들은 한 제자가 말했다. 스승님! 지금 스승님께서는 너무 지나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배고프고 지치고 입을 옷도 없으며 추운 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를 가려줄 처마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무엇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까?

 스승은 말했다. 그렇다. 하나님은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주신다. 오늘밤 내게는 추위와 배고픔이 필요했다. 오늘밤 나는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밤 나는 위험에 처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내게 왜 이러한 것을 주시겠는가? 내게 필요함으로 주시는 것이 틀림없다. 이 모든 상황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훌륭하게,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계시다는 증거이다. 나의 신은 실로 훌륭하시다!

 우리의 삶에 닥치는 어떤 상황이라도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면 그것은 축복이 된다. 삶을 그냥 그렇게 받아들여 보라!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어떤 환경이 주어지든지...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선물이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자기가 생각한 공식이나 바램대로 되지 않을 때 불평하며 불행해 한다. 그리고 그런 사고방식은 대단한 갈등과 좌절을 생산해 낸다. 그러나 나의 인생은 꼭 그래야 된다는 공식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자신이 기대한 대로 자기의 삶이 꼭 그런 삶이 되어야 한다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 마련하신 길과 방법이 자신의 욕망과 기호에 딱맞게 일치되어야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감사할 수 있는 걸까?

 자신의 삶의 길과 방식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하고 불만족해 하는 사람은 내내 불행한 삶을 살 것이다. 자신의 인생 여행길을 한숨과 후회로 장식하는 사람은 내내 후회스럽고 슬픈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자기의 마음에 꼭 드는 어떤 형태의 삶이 오기까지는... 그런데 가장 불행한 것은 그런 사람은 자신의 맘에 드는 삶이 오기까지는 한번도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살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월만 놓치고 한탄만 할 뿐, 그 사람은 삶을 한번도 자기의 것으로 가지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각 개인들을 너무 잘 아시므로 우리들에게 맞춤형의 삶을 주셨다. 그런 삶을 통과해야만이 우리가 오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어 잘 살 수 있게 훈련될 것을 아시고... 당신은 습관적으로 늘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좀 더 잘되는 어떤 무엇이 오기를?... 더 좋은 삶이 오면, 더 마음에 드는 삶이 오면 그 때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때에 그 삶에 충실하겠다고?... 지금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이 삶을 슬퍼하고 한탄하며?...지금 이 순간을, 지금 현재의 시간을 바로 적이 아닌 벗으로 받아들이라! 지금 나에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라! 현재의 순간에 감사하면서 지금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믿음과 사랑을 가진 사람이며, 그런 삶이 이어질 때 그 삶은 아름답고 풍요한 삶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나타나는 감사의 마음과 성품,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은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섭리의 길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미래에도 불평할 것이다. 지금 행복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서도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슬퍼하기만 하는 사람들의 삶은 미래에도 슬프고 우울할 것이다. 지금 주어진 상황과 환경에 감사하자! 비록 지금 주어진 삶이 숨가쁘도록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런 고통 중에서도 마음에 끊임없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므로 항구적인 평화를 느끼며 사는 사람들이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십사만 사천인의 경험을 하는 것이다.

 오늘을 살자! 오늘의 지금, 그리고 오늘의 이 순간에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며 감사하는 사람은 처음 익은 열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타나기를 고대하시는 처음 익은 열매인 십사만 사천이...

권두언


강병국 목사

어느 길로 가든지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이해가 일반적인 삶의 방법으로 자리매김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어떻게 하던지 간에 하늘에만 가면 되지 않느냐는 사고 방식이 교회 안에도 팽배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다가 예수님을 진지하게 믿기만 하면 구원받게 된다는 생각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견해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진지하게 믿기는 하지마는 하나님의 방식과 말씀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방식과 자기의 편리대로 믿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남편들이 자기 아내들을 진지하게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방식과 편리대로만 사랑하다가 가족을 괴롭히고 오히려 불행하게 만드는 사례들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에 천국에 들어 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 얻는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해 놓으신 길이요, 진리의 벽돌들로 이미 쌓아 올려져 있는 유일한 계단입니다. 물론 인간의 공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 가는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의롭게 되는 길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다고 인정 받는 길인지에 대하여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의 길만을 제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어느 길로 가던지 하늘만 가면 된다는 생각은 성경과 맞지 않는 견해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 가족들의 영생의 문제를 그렇게 쉽게 생각하거나 부주의하게 다루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 가족들의 영생의 문제는 이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번 호를 정독하시면서, 과연 성경 말씀이 우리가 의롭게 되는 길과 성화되어 영생에 들어가는 길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해 주고 있는지에 대하여 확실한 깨달음을 얻게 되시기를 간절하게 기도드립니다!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우리의 말이 얼마나 중요하면 예수께서 우리가 날마다 하는 말에 의해서 의롭다 함을 받든지 또는 정죄함을 받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을까? 예수께서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하셨다.

우리의 말과 그 말을 하는 정신이야말로 우리가 육으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죽고 영으로 생활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 된다. 하루의 시작되는 시간에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헌신하고 굴복하기로 결정하였다면, 불평이나 어리석은 말 또는 과장된 말을 하려고 하는 유혹이 우리를 공격하여 들어올 때, 우리의 양심을 통하여 들려주시는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즉시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내게 있어서도 그러한 유혹들은 하루에도 여러 번씩 닥쳐오고 있다.

얼마 전에 나는 나의 딸 앨리슨과 함께 천정의 둘레를 밧줄로 장식하였다. 그런데 제일 끝 부분에 와서 유혹이 왔다. 사다리 위에서 천정의 구석에 망치질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첫번째 못이 휘어졌을 때, 나는 앨리슨에게 다른 못을 박은 후에 그 휘어진 못을 뽑아버리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두번째 못도, 세번째 못도, 그리고 네번째 못마저 휘어져버리고 말았다. 자, 이제는 앨리슨에게 무슨 말을 해야만 할 때가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혼자말로 화가 나서 무엇인가를 크게 소리질러야만 할 때가 되었다. 그 사다리 위는 매우 불편하여서 허리와 어깨가 끊어지듯이 아팠고, 매우 더웠다. 나는 사다리 위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자세로 이미 오랫동안 앉아 있었고, 새로 페인트 한 벽과 천정을 망치로 때려서 이미 마음이 불편하던 때였다.

그 때의 유혹은, 당황함과 성가심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육체의 소욕이 원하는 대로 내어 맡김으로써 은혜가 나를 지탱하고 유지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입증하는 어떤 말을 하도록 나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그러한 유혹의 이끌어감과 동시에 성령께서 내게 역사하셔서 그것을 피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성령께서는 그때 내가 받았던 그 시험을 복음의 능력 즉, 내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능히 감당할 수 있으며, 육체의 소욕이 승리하지 못하도록 자아를 제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임을 시험 중에 내게 상기시켜 주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피할 길”을 받아들였으며, 믿음으로 육체의 불평의 소리를 거부하였고,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이신 그리스도께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기로 선택하였다(롬 1:16).

하나님께서는 나의 딸의 영혼을 손상시키고 스스로 내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말을 하는 대신에, 내게 매일의 작은 시험과 어려움들 중에서 역사하는 복음의 능력에 관하여 앨리슨과 대화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셨다. 앨리슨과 나는 이 지구상에 닥쳐올 환란을 통과해야 되는데, 우리가 매일 겪게 되는 유혹들은 우리로 하여금 순간마다 그리스도께 매달릴 수 있도록 만드는 실제적인 훈련의 과정이 되고 있음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하였다. 만일 내가 자신의 소욕을 좇아갔더라면, 나의 입에서 나왔을 말들과 대화들은 그 동안 내가 나의 딸, 앨리슨에게 주었던 모든 교육과 권면을 단 한 순간에 뒤집어 엎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 날, 조그만 승리를 통하여 얼마나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는지...

혀에 재갈을 물리라

인간이 태초에 죄를 범했을 때, 그들의 입에서 나왔던 말들은 자신을 정당화하고 변명하면서 자신의 죄에 대한 범법 사유를 다른 이, 즉 사단과 하나님께 돌리고자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양심의 거짓 평안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죄책감과 뉘우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대신에 변명과 핑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숨고자 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말이 발설되기 전에 의식적으로든지 또는 습관에 의한 무의식적으로든지, 우리 안에 복음의 능력이 존재하는 여부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지금까지 내가 예증한 이 간단한 이야기는 우리 각자가 매일의 삶에서 당면하고 있는 것들을 나타내고 있는 동시에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우리가 육체에 속한 자들인지 아니면 복음의 능력 중에 거하는 자들인지를 보여주는 거울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고 있는 우리들이 경건하게 보이고,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으며, 진리를 모든 면에서 곧바르게 고수하는 일에 있어서 성경 말씀을 능숙하게 인용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매일의 생활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혀를 올바르고 확실하게 재갈 물리는 법을 배우고 있는가?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여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야고보서 1:26). 형제들이시여, 야고보는 우리에게 우리의 말과 억양과 표현 태도야말로 우리가 진실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측정치가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나는 친구와 전화로 얘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유쾌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피차에 너무나 즐거운 나머지 육체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게 되었다. 여러분도 그러한 입장에 있었던 일이 있는가? 그는 자신의 음식물을 잘 개선한 결과 밤에 잠을 잘 수 있게 된 사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잠을 자는 일에 있어서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으므로 그 친구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혼자 마음 속으로 생각하기를 그 음식이 그로 하여금 그토록 깊은 수면을 취할 수 있게 해주었다면, 아마 내가 그 음식을 먹는다면 그것은 나를 혼수상태로 만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령께서는 나의 그러한 생각을 말하지 말도록 조용히 타이르고 계셨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그때 그 음성을 따르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러한 나의 결정은 그리스도와 나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부인하는 불평의 말은 아니었지만, 부주의하고 무례하며 과장된 표현을 하게 만들었다. 

주님께서는 내게 혀를 재갈 물리기를 촉구하시면서 그러한 말을 하지 말도록 감동시키셨지만, 나는 자신을 정당화함으로써 그 음성을 거절하였다. 그것은 단지 사소한 일에 불과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 유혹에 있어서 실제적인 문제는 내가 “만일 내가 그 음식을 먹었다면 그것은 나를 혼수 상태로 만들거야”라고 친구에게 말했던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생각을 뒤로 물리치고 나의 하늘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선택하지 않았던 것에 있다.

대화 속에 나타나야 하는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표현의 개성이고 표현 방법의 차이라고 정당화 하면서 고르지 않은 말을 하고 있다. 지나친 농담, 무의미한 말, 과장된 말, 성급한 말들이 입에서 많이 발해지고 있는데, 그것들은 아무도 저장하기를 원하지 않는 나쁜 곡식을 생산하는 씨를 뿌린다. 우리 자신의 말은 우리의 성품에 영향을 줄 뿐 아니라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성품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과장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어떤 사람이 실수할 때, 너무도 흔히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대로 그 상황을 나쁘게 표현할 자유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느낀다. 이웃이나 형제가 무지와 부주의와 약점 때문에 범한 실수들을 마치 고의적이고 계획적인 죄로 과장하여 말한다. 

나는 내 친구와의 대화에서 있었던 실패로 인하여 좌절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친구와의 즐거운 대화에서조차 내 방법과 내 표현을 고집하는 나를 보면서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더 필요로 하게 되었고, 나의 실제적인 상태에 대해서 더욱 더 잘 알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모든 면에 있어서 주인이 되어 주실 것을 소원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면서 우리의 죄를 변명하고 합리화 할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점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경험을 본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인가? 사도 바울의 권면을 받기 위해서 분발하자.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말하라”(빌 1:27). 이것이 우리가 말하기로 선택한 말들에 대한 우리의 이유와 정당성이 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하려고 하는 말이 복음의 영역에 합당하지 않다면, 어떻게 그러한 말과 정신을 고집할 수 있겠는가?

마음을 나타내는 말

몇달 전, 어떤 집회에서 나는 매우 중요한 주제를 전하는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 목사님은 설교를 시작하기에 앞서, 성령의 크신 능력으로 자신의 기별이 듣는 청중들의 마음을 꿰뚫을 수 있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마친 후, 그 목사님이 첫번으로 하였던 말씀은 모든 청중들을 크게 웃기는 농담이었다. 바로 그 순간, 기도로써 이루어졌던 영적인 분위기는 깨어지고 말았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그때 그곳에는 하나님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직접 나누어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목사님의 말투와 억양은 그가 전하던 복음과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형제들이시여, 우리는 얼마나 자주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웃음을 유도해내기 위해서 농담과 부주의한 예화를 거룩한 단상에서 사용하고 있는가? 요한계시록 14:4-5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던지 따라가는 자며, 그 입에서 교활함을 찾아볼 수 없고” (킹제임스 성경 한글역). 나는 정말 이런 사람들이 되고 싶다. 독자들은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던지 따라가는 자”가 되기 위해서 입에 교활함과 간사함이 없어야 된다. 이 성경절에 나오는 교활함 (guile) 이라는 단어의 뜻은 “책략, 미끼로 꼬임”이다. 그 말은 진실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진실되지 않은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유도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끼를 따라가는 물고기가 결국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낚시 바늘인 것처럼 말 속에 미끼를 끼워서 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말하기 전에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신중하게 검토할 만큼 충분한 시간 동안 우리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공언하는 복음을 증거할 때,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거나 입에 교활함을 담고 있지는 않은가?

말은 마음의 거울

우리의 말은 우리의 마음을 나타내는 거울이다. 사람이 말을 많이 하거나 적게 하거나 간에, 그의 말은 자신의 생각과 품성을 나타낸다. 한 사람의 성품은 그가 하는 대화의 성격에 따라서 매우 정확하게 평가될 수 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에 의해서만 평가된다면, 우리의 배우자와 자녀와 친구와 이웃들은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우리가 여러 사람들과 대화할 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서는 안될 말을 어리석고 바보스럽게 하였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상하고 극단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 주위의 사람들을 이끌고 웃음과 경박함으로 들어가고 있지는 않는가? 또한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우리는 앞장서서 대화를 그 사람에 대한 평론으로 이끌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결국에는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해서는 안될 말들을 정신 없이 하다가 한참 후에 제정신을 되찾는 경험을 종종 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평론이나 험담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대신에 적절한 침묵이나 주의 깊이 선택해서 “고른 말”을 함으로써 복음의 능력을 전시하고 있는가? 우리의 말들은 대화의 방향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이 사람들의 화제의 대상이 된 것처럼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게 되어서 그 대화를 더욱 밝고 천사들이 듣기에 즐거운 것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

어리석은 농담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많은 은혜가 필요 된다. 스트레스와 피곤과 피로할 때, 남편과 아내와 자녀들에게 짜증스럽고 귀찮은 듯한 태도로 말하고자 하는 유혹을 물리치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험담과 평론의 분위기로 정신을 잃고 열심히 이야기 할 때, 긍정적이고 밝고 유쾌한 이야기를 하기로 선택하는 일에도 많은 은혜가 요구된다. 만일 우리가 더욱 더 넓은 교제를 원하고 사교적인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기 위해서 바보스러운 웃음에 동참한다면,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 사람은 정말 모나지 않은 좋은 사람이야”라는 평가를 사람들로부터 얻어내기 위해서 험담과 다른 사람에 대해서 쓸데없는 말을 하는 대화 속에 우리의 입을 참가시킨다면, 우리는 죽어야 할 자아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며, 동시에 구세주와의 살아있는 관계가 끊어져 있음을 깊이 느껴야 한다.
우리는 “악한 말을 함으로써, 유치한 대화를 함으로써, 진실되지 않고 불친절한 말을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된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항상 냉정하고 경직된 얼굴을 하고 살아가라는 것인가? 또는 우리의 인생에서 즐거움을 빼어버리라는 말인가? 아니다. 경솔함이나 거친 흥분, 또는 무례한 농담등은 없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종교는 강 같은 평화를 가져다 준다. 그것은 즐거움의 빛을 소멸치 않으며, 유쾌함과 밝게 빛나는 웃음을 억제하지 않는다.

당신의 말은 신뢰를 받는가?

이 기사에서 논의될 수 있는 수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이 글을 마쳐가면서 한가지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 질문은, “우리의 말은 신뢰 받고 있는가?”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금새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물론입니다. 내가 하는 말은 신뢰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단순한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이 질문에 대해서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하루는 한 신사와 그의 아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을 방문해서 우리와 함께 어떤 문제에 대해서 논의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대화 중 줄곧 그의 아들은 손을 흔들면서 방안을 뛰어다녔다. 그래서 그 사람은 아이에게 멈추라고 말하였다. 나는 그가 아이에게 그렇게 말한 것에 대해서 마음 속으로 고맙게 생각했다. 아이는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다시 한번 더 멈출 것을 요구했고, 아이는 멈추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 아이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아버지는 말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말이 그 아이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으로 되어 있는가? 그 아이는 아버지의 말을 신뢰하고 있는가? 그 아이는 전혀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그 아이는 아버지가 하는 말이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 아버지를 시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 어떠한 제재나 교정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는 아버지의 말이 그다지 중요하거나 진지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이의 아버지가 뛰지 말라는 말을 한 후, 아이의 불순종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보다는 차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 좋았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정직하다면, 우리는 가정에서 우리의 자녀들에게 이와 유사한 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말을 자녀들에게 한 후, 그 말이 자녀에게 아무런 중요성과 신뢰를 받지 못하게 될 때, 자녀에 대해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을 사랑과 인내라고 부르고 있지는 않은가? 이미 우리 중의 많은 사람들이 자녀들의 불순종과 부모에 대한 자녀들의 불경으로 인하여 오랜 세월을 고통 가운데에서 지내고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 중의 대부분은 찡얼거리고, 불평하며, 말대답하고, 부모의 요구사항을 협상하려는 태도를 자녀들에게서 보고 있다. 자녀들의 자아가 부모의 뜻과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시험 받게 될 때, 일반적으로 그들은 비참한 상태로 빠져들어 간다. 엘리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말을 신뢰하였는가? 아니다. 그래서 엘리는 오늘날의 아버지처럼 자주 아들들을 꾸짖었다. “아들아, 손을 흔들면서 뛰어다니지 마라”라는 말을 자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신실하고 지속적으로 자녀들을 규제하고 교정하며, 불순종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일에 실패하였다. 결국, 하나님께서 엘리와 그의 아들들을 당신의 손으로 징책하셔야만 하셨다.

우리는 우리가 자녀들에게 말하는 바를 신뢰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길들여져 가는 자녀들의 진짜 모습을 보아야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안돼” 또는 “하지 마라”라고 말했을 때, 자녀들은 부모의 말을 신뢰해야 되는지를 살피면서 부모들을 시험하고 있다. 만일 자녀들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여지지 않는다면, 자녀들은 자연적으로 육체의 소원대로 꼴 지워져 갈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실 때에도 동일한 반응을 나타내게 된다. 교회 안과 세상에서 우리가 말하고 대화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말하는 복음의 능력에 대해 듣게 될 때, 그들은 우리의 말을 신뢰하는가? 만일 그들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의 말은 신뢰 받고 있는가? 우리는 말에 대해서 너무나 적은 분야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니”라고 말씀하신 데에는 더 넓고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말은 우리의 마음의 거울이다”라는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더욱 더 필요하게 느끼게 한다. “샘이 맑아야 물이 맑다”라는 말의 의미를 우리는 진정 이해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와 우리의 구원의 관계에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는 유치하고 부주의한 말을 하는 습관을 그대로 고집할만한 가치가 있는가? 복음은 우리의 성화되지 못한 혀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 모두를 위한 나의 기도는,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적극적이고 충만하게 받아들여서 우리 가운데서 “오직 너희의 대화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되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빌립보서 1:27, 킹제임스 영어성경).!

섬유질, 얼마나 섭취하십니까?


최근 우리나라 한국도 식생활의 패턴이 서구형으로 변화함에따라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 중에 섬유질의 양이 부족하게 되고, 이런 식생활 습관은 치질, 변비, 대장, 직장암등의 대장항문질환과 각종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대장암은 과거에 비해 발생률이 현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에따라 전문의사 및 일반사람들 사이에서도 대장질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섬유질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으나, 섬유질 음식에 대한 일반 상식이나 정보가 부족한 상태이고, 그 유익성에 대한 홍보가 부실한 편이다.

섬유질과 그 기능

섬유질이란 식물성 식품에 들어 있는, 세포벽과 세포 내에 함유된 를 말한다. 섬유질은 소화 및 흡수가 되지 않으므로 수분을 포함한 변을 만들어 양을 많게하고 묽게하는 작용이 있으며, 장내벽을 자극하여 변통을 일으키고, 배변횟수도 늘어나게 하여 결국 변비에 걸리지 않게 한다. 또한 유해물질 및 콜레스테롤을 흡착하여 빨리 체외로 배설시키기 때문에 혈액 중의 콜레스테롤 및 혈당치를 줄이고 비만방지에 도움이 되며, 결국 대장암도 예방할 수 있게 만든다. 섬유질이 많은 음식을 먹으면 변비, 치질, 과민성 대장 증후군과 같은 질환들을 해결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식이섬유의 생리적기능(인체내 역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소장에서 당질의 흡수를 지연시켜 식사 후 혈당치의 급격한 상승 을 억제
* 콜레스테롤을 흡착하여 배출
* 장내 독성물질을 흡착하여 배설함으로써, 이런 물질이 대장과 접 하는 시간을 줄임
* 포만감을 부여하여 과식을 방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체중조절에 도움
* 지방을 흡착하여 흡수속도를 늦추고 배설을 촉진함으로써 체내 지방의 축적 감소
* 장액의 분비를 촉진시켜 소화를 도와 줌
* 변의 양을 많게 하고, 수분을 많이 흡수하여 쾌변을 유도
* 비피더스균 등 유익한 장내세균을 증식시켜 당분을 분해시키고 유기산을 산출하여 장운동을 촉진 하므로써 원활한 배변을 유도
* 대장의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 설사, 변비가 생기는 과민성대장증후군에서 식이섬유는 복부 불쾌감을 줄이고 대장을 이완시켜 장 운동을 정상적으로 유지
* 부드러운 대변을 만들어 배변시에 직장항문에 긴장과 자극이 감소

작용기전

배변작용 : 배변의 원리는 섭취한 음식물이 소화되면 소장에서는 영양소의 흡수, 대장에서는 주로 수분이 흡수되고 그 나머지는 대변으로 직장에 도달하면 직장의 벽이 넓어지면서 변의를 느끼게 된다. 이러한 자극이 배변 중추에 전달되면 척수 반사로 직장의 연동운동이 나타나 항문의 괄약근이 엷어지면서 대변이 배출된다. 배변의 횟수는 음식물이 위에서부터 직장에 다다르는 시간을 감안하면 하루에 1회가 보통이다. 즉 위에서 나와 장의 각 부위에 도달될 때까지의 시간은 장의 운동, 식사내용, 정신상태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평균적으로 볼 때 음식물은 위에서 약 3 ~ 4시간 정도 머물기 때문에 식사를 하고 난 후 약 24시간이 지나면 체외로 배설된다. 그러나 장의 운동이 너무 저하되면 장에서 대변이 장기간 머물러 수분량이 감소됨에 따라 변비가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변비증상의 개선을 위해서는 식사를 규칙적으로, 물은 충분히, 식이섬유가 많은 음식을 먹도록 하며, 규칙적인 운동을 할 것과 아울러 배변에 대해 여유를 가질 것 등을 권장하고 있는데 변비가 있는 사람이 식사를 하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식이섬유가 풍부한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이다. 그러면 식이섬유가 배변 작용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살펴 보자. 배변작용에 있어서 식이섬유는 일반적으로 변의 양을 증가시키고 대장 운동을 원활히 하여 배변을 용이하게 한다. 또한 장 내용물이 대장을 통과하는 시간을 단축시키고 수분을 유지시키며, 대장을 깨끗이 하여 쾌변을 도와준다.

이러한 효과는 식이섬유의 수분보유능력에 기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치 걸레로 바닥을 닦는 것처럼 식이섬유는 대장의 내용물을 흡착하여 배설되는데 이것이 식이섬유의 특징이다. 식이섬유는 변과 함께 배출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의 무게보다 훨씬 많은 수분을 흡수하여 변의 양을 더욱 늘어나게 하고 또한 대변을 부드럽게 하여 장의 연동운동을 촉진하게 하므로 배설하기 쉽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대변은 주로 식이섬유와 박테리아로 이루어졌으며 변량을 증가시키는 주요 원인은 소화되지 않은 식이섬유가 수분을 보유하여 팽창되기 때문이고, 또 직장에서 식이섬유로부터 에너지를 얻은 박테리아가 증식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박테리아가 식이섬유를 발효시켜서 더 강한 변통이 일어나게 한다. 이때 각종 장내 유산균의 증식은 촉진되고 장내 부패균 등 유해균은 사멸되어 장의 환경이 좋아지며, 각종 유해 노폐물은 배설되게 된다.

따라서 변비에 있어서 식이섬유의 충분한 섭취가 제 1차 필요요건이라 할 수 있다. 자극성 하제(설사를 유발시키는 성분)가 들어있는 약품은 처음에는 한 알만 먹어도 잠깐은 변이 잘 나오는 듯 하지만 먹을수록 대장의 기능을 저하시켜 변이 잘 나오지 않고 점점 약의 양을 늘려야 하는 일이 생기고 장기적으로 사용하면 대장무력증이 생길 수 있다.

혈장 콜레스테롤의 저하 : 육류를 섭취하는 사람에 비하여 채식인의 혈중 콜레스테롤 농도가 낮고 심장 · 순환기계 질환의 발생비율이 낮게 된다. 그리고 관상심장병은 혈류의 콜레스테롤 수치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데 1%의 콜레스테롤 수치의 상승이 관상심장병 가능성의 2%증가와 맞먹는다고 알려지고 있다. 수용성 식이섬유는 혈청 및 간의 콜레스테롤 함량을 낮추어준다.

그 이유로는 첫째로, 수용성 식이섬유는 강한 점성을 가지는 특성으로 인해 흡착력이 강해 쉽게 담즙산과 콜레스테롤에 부착되어 담즙산과 콜레스테롤의 체내흡수를 방해하며 안전하고 쉽게 몸 밖으로 배출한다. 이리하여 담즙산의 저장량이 감소하게 되면 콜레스테롤로부터 담즙산염의 합성이 증가되므로 결국 수용성 식이섬유는 혈중 콜레스테롤 함량을 낮춘다고 볼 수 있다. 즉, 담즙은 간에서 콜레스테롤로부터 합성되어 담낭에서 저장되었다가 소장에서 분비되어 지방의 소화와 흡수를 돕게 된다. 그리고 담즙은 다시 소장의 하부인 공장에서 재흡수되어 다시 간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이와 같은 담즙의 순환은 매우 효율적으로 일어나 소량의 담즙만이 대변으로 배설된다. 그러나 음식물 중에 포함되어 있는 식이섬유는 담즙과 결합하여 배설시키므로 담즙의 재흡수를 방지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에 간 내에서 담즙합성이 높아지므로 혈액 중의 콜레스테롤 함량이 낮아지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식이섬유는 대장의 박테리아 작용에 의해 분해되어 초산, 프로피온산, 낙산 등과 같은 저급지방산을 생성하는데 이들은 대장에서 흡수되어 간의 콜레스테롤 생합성을 저해시키거나 또는 콜레스테롤의 흡수를 저해시켜 혈액 중의 콜레스테롤 수준을 낮추어 주게 된다.

셋째로, 수용성 식이섬유는 소장에서 겔(gel)을 형성할 수 있는 특성 때문에 포도당의 흡수를 지연시켜 혈중 인슐린 농도를 낮게 유지시키므로, 간의 콜레스테롤 생합성을 억제시킬 수 있다는 제안도 있다. 혈액 중의 콜레스테롤을 낮추어주는 식이섬유 성분은 주로 펙틴, 수지 등이며 이들 섬유는 점성이 있고 수분을 흡착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며, 리그닌은 회장에서 담즙산의 재흡수를 저해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식사 후 당분의 흡수속도 조절 : 식이섬유는 식이요법에도 중요한데, 식이섬유는 당분이 혈관에 흡수되는 속도를 늦추어줌으로써, 인슐린 분비부족을 줄여준다. 이는 식이섬유의 섭취가 혈당치의 과도한 상승이나 급격한 상승을 억제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장에서 흡수되는 탄수화물, 즉 포도당인 경우 이것을 대사하기 위해서는 췌장에서 ‘인슐린’이 흡수된 포도당과 정비례하여 분비되어져야 하는데 포도당의 흡수속도가 빨라지면 ‘인슐린’의 분비속도도 빨라져야 한다. 이러한 현상이 장기간 계속되면 췌장은 무리를 받을 수 밖에 없게 되며 지쳐 버린 췌장은 멀지 않아 ‘인슐린’을 정확히 분비할 수 없게 되어 혈중에는 과잉의 포도당이 남아 고혈당증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이 당뇨병의 시초이다. 또한 고혈당증은 다른 생리적 문제들의 근원이 되고 있다. 고혈당인 상태의 피는 점도가 높아져 혈액순환의 장해를 일으키게 될 것이며, 점도가 높아진 피를 모세혈관에 순환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혈압은 상승하게 된다. 또한 피 속에 포도당이 많아졌으니 피가 정상적인 일을 할 수 없어 면역기능이 떨어진다.

그러나 식이섬유는 점성을 갖기 때문에 음식의 소화와 흡수를 느리게 하여 포도당의 흡수를 느리게 함으로써 혈중 포도당의 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게 된다. 이것은 고식이섬유 식사를 할 때 위와 소장에서 포도당이 소화 · 흡수되는 속도를 저식이섬유 식사를 할 때와 비교해 보면 알 수가 있다. 췌장의 기능이 정상적인 경우, 섭취한 음식물로부터 혈액에 흡수된 당분의 양에 따라 인슐린이 분비되는데, 분비된 인슐린은 혈액 내 혈당치의 수치를 정상으로 돌려 놓게 된다.

고식이섬유 식사를 하게 되면 영양소의 흡수는 서서히 일어나 소장의 아랫 부위까지 소화물이 내려가면서 영양소가 흡수되므로 혈중 포도당의 농도도 서서히 올라 가지만, 식이섬유가 거의 없는 식사를 하였을 경우 소화와 흡수속도가 대단히 빨라 소장의 윗부분에서 이미 흡수가 완료되므로 혈중 포도당 농도가 급격히 상승했다가 크게 떨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혈중 포도당 농도가 급격히 높아지게 되면 짧은 시간내에 많은 인슐린 분비를 유도하므로 인슐린의 분비기관인 췌장을 혹사시키거나 손상시키게 된다. 따라서 고식이섬유 식사를 하면 인슐린의 단시간내의 과다분비 필요성을 감소시켜서 많은 양의 당의 섭취에 대한 두려움 없이 식사를 즐길 수 있도록 하여 준다. 고식이섬유 식사가 식이섬유가 부족한 식사에 비하여 혈중 포도당 농도를 낮게 유지한다는 것은 거의 확실시되고 있으므로 식이섬유가 풍부한 음식을 섭취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포만감을 부여하여 과식을 방지함으로써 체중조절을 도움 : 비만은 섭취열량이 소비열량을 초과할 때 생긴다. 과잉의 에너지는 복부 등의 부위에 지방으로서 저장된다. 보통 정상체중을 약 20% 초과했을 때 비만인으로 불린다. 비만인은 당뇨, 심장병, 고혈압, 그리고 동맥경화의 위험률이 15~20% 가량 증가한다고 한다. 식이섬유는 수분과 결합했을 때 부피가 증가하고 섭취 후 위장이 가득찬 느낌을 갖게 된다. 또한 섭취한 음식이 위장 내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고, 위로부터 소장에 이르는 시간을 연장할 뿐 아니라 천천히 소화, 흡수되도록 하여 상당히 오랫동안 포만감을 느끼게 되어 이로 인해 과식을 방지하여 결과적으로 섭취칼로리를 줄일 수 있어 비만을 줄일 수 있다.

체지방의 축적감소 : 식이섬유는 체내에 들어가 위장과 장을 통과할 때 수분을 흡수하여 젤리처럼 굳어져 강한 점성을 갖는데, 이때 강한 흡착력으로 인해 지방을 흡착하여 체내로 흡수되는 속도를 늦춰 주거나 지방의 배설을 촉진하므로써 체내에 지방이 축적되는 것을 줄여준다. 시중에 다이어트용으로 판매되고 있는 제품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식이섬유를 주종으로 하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원리 때문인 것이다.

섬유질이 많은 음식과 권장량

섬유질의 하루 권장량은 20~30그람 정도이다. 섬유질이 많은 음식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기로는 야채, 과일등이지만, 사실은 해조류(한천, 미역, 다시마, 김등), 버섯, 곡물류(콩, 깨, 팥, 현미, 보리 등)에 더 많다.

* 섬유질이 많은 음식 : 사과, 오렌지, 브로콜리, 양배추, 베리, 배, 싹양배추, 상치, 무화과, 자두, 당근, 수박, 복숭아, 사과껍질, 자두, 양배추, 곡식의 씨눈, 우엉, 죽순, 고사리, 고비 등등이다.

* 문헌에 나와 있는 음식의 섬유질 포함량을 비교해 보자.

강남콩; 18.56(%) 검정콩; 3.50 붉은팥; 3.70
현미; 2.75 보리쌀; 9.93 백미; 0.96
들깨; 5.43 율무; 3.93 조; 4.80
곶감; 17.73 밤; 5.06 귤; 1.00
딸기; 1.55 바나나; 1.68 복숭아; 1.38
배(신고); 1.64 가지; 1.95 고구마순; 12.02
당근; 3.16 고추잎; 6.56 근대; 3.15
냉이; 7.05 도라지; 4.36 셀러리; 3.96
오이; 0.70 양상치; 1.19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섬유질의 섭취를 늘리면 수분의 섭취도 따라서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최소한 하루에 8잔 이상의 물을 마시는 것이 필요하다. 각 개인의 식단을 살펴서 풍부한 섬유질을 포함시킴으로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한 생활을 하자.

서론 - 성경이 말하는 명확한 구원론


이 세상에는 교인들이 많다. 비단 기독교인들뿐이 아니고 불교나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를 가진 신자들도 많다. 사람은 왜 신을 찾고 종교를 믿으려고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전 3:11)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본성 속에 절대자를 찾으려는 욕망을 넣어주셨다.

그것은 우리 인류가 창조시에 받았다가 범죄함으로 인해 잃어버린 하나님의 빛을 다시 찾기 원하는,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던 원래의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고 싶어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며, 궁극적으로는 창조자이시며 절대자이신 신을 만나 함께 살고 싶은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욕망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쾌락에 대한 욕망 중에 최대의 욕망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하면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과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을 대면하여 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성경에는 그 방법에 대하여 아주 명료하게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참된 신앙을 가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결국에 가서 하나님과 만나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교회를 다니며 믿는 진실된 그리스도인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이유는 다양한데, 그것은 어떤 단체에 속해 있으면 얻을 수 있는 소속감을 가지기 위해, 혹은 자신의 사회적인 입지를 세우기 위해, 아니면 신을 믿고 예배하면 복을 받는다는 단순히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또는 인간보다 위대한 어떤 절대자를 신뢰할 때 얻어지는 마음의 평안을 위해, 고통을 잊기 위한 수단으로, 그것도 아니면 별 이유없이 맹목적으로 등등이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는 이유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영생을 얻기 위해 진실되게 탐구하는 양심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때때로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신앙의 길이 올바른 것인가를 생각하며 갈등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냥 이렇게 믿어도 되는 것인가 하고... 왜냐하면 요즈음 교회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가르침들은 우리의 영적인 갈급함을 채워주기에 부족할 뿐 아니라, 교회에서 성경에 기초된 명확한 구원론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이 말하는 참된 구원론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여야 종국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 함께 살 수 있는, 영생을 얻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번 호 신앙기사에는 이 문제들을 다루어 보았다. 숙독을 바란다. - 편집실 -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계 14:6).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음과 구원론에 대하여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올바로 믿어야 구원을 얻고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인 하나님을 만나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성경과는 다른 많은 혼란스러운 구원론과 가르침들이 난무하고 있으므로, 참된 복음을 알고 그에 알맞는 신앙경험을 해야 할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당황하게 하고 있다. 인간이 최초로 범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발표하셨던 복음, 곧 영원한 복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시기 전인 마지막 시대에 온 세상에 전해져야 할 복음을 가리켜 “영원한 복음”, 즉 창세로부터 마련된 영원한 복음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당신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영원한 복음에 대하여 연구하고 싶은가? 단순하고 가난한 마음이 되어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올바른 구원을 깨달아 알고 그대로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명확한 복음, 구원론에 대해 함께 연구하여 보자.

1. 영원한 복음

최초로 복음이 인간의 귀에 들려진 때는 인간이 범죄한 직후였다. 물론 성경은 구속의 경륜은 지구의 창조 이전에 이미 세워졌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창조함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 13:8 구역)이시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모두 성경에 나오는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고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들은 이미 그것에 대해 경고를 받았었고, 그것을 먹으면 죽을 것을 알았다. 겉으로 보기에 단순해 보이는 이 이야기 뒤에는 온 인류에게 영향을 준 깊은 비극이 숨어 있다. 성경은 죄의 값은 사망(롬 6:23) 이라고 확언하고 있는데, 이 사망은 영원한 사망을 말한다.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시다. 그런데 우리의 선조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생명이 되시는 그분을 떠났다.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하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평화에 관한 의논” - 타락한 인류를 위한 신비스런 의논 - (슥 6:13)이 오래 계속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인간을 죄의 값인 사망에서 구원해 내시려고 작정하셨다. 곧, 하나님께서 인간의 사망의 형벌을 짊어지기로 선택하신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고, 예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그 사망의 고통을 당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요 1:1~3, 14, 빌 2:5~8). 그는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처럼 모든 일에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셨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처지에 처하여 죄 없는 생애를 사셨고, 죄가 없으신 분이 우리의 죄의 형벌을 대신 지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모든 유혹을 이기셨다(히 2:17~18). 오직 예수님 한 분만이 이 일을 하셨다(롬 3:23).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영원한 사망에서 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그분의 생명을 주셨다. 이것이 “영원한 복음”이다. 이것은 성경 요한복음 3장 16절에 명확하게 나와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그러므로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의 구원의 선물을 받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어느 누구라도 믿음으로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정말 좋은 소식이 아닌가? 이것이 복음이며, 이 세상 끝날까지 변하지 않을 영원한 복음인 것이다.

2. 완전한 복음

그런데 복음에는 귀중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어떤 변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 그 구원을 받아들이고 “네” 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우리의 생애가 시작될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0).

이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네”라고 대답할 때,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실 때 일어나는 변화이다. 이것이 완전한 복음을 경험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변화이다. 진정한 복음을 경험하는 사람은 성령의 도우심을 입어 자신의 길대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을 따라가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의 생애에는 증오와 분노와 욕심 대신에 사랑, 희락, 화평, 양선과 친절 같은 특성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갈 5:16~26). 이것은 인간 자신이 스스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는 일이 우리 생애에 일어날 것이며,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며 주위에 하나님을 알리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본으로 주어진 분이시며,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의 생애와 가르침에 그분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야할 우리의 사명이다(벧전 2:21, 엡 3:10).

이렇듯이 완전한 복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우리의 생애에서 그의 품성을 드러내는 것을 포함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역시 그와 같이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다(요 5:30, 고전 10:13).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요, 행하는 사람들이다. 참된 믿음은 선한 행실(좋은 행동)을 통해 나타난다. 그리고 생애의 행실들은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룰 것이다(요 1:22, 2:14~26, 요일 2:29). 이 모든 일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생애에서 이루어져야 그것이 완전한 복음이 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앞으로 실리는 기사에서 더 생각해 보기로 한다.

1부 - 기독교에 침투한 변질된 복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복음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의하여 빠른 시간에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들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복음에는 인간적인 유전 및 많은 거짓된 교리가 섞이게 되었다.

A.D. 4세기경이 되자, 기독교계는 신학적 혼란 속에 들끓게 되었다. 인간의 구속자로서의 그리스도 중심성과 그분에 관한 진리는 거의 잃어버린 바 되었다. 제시될 수 있는 모든 교리의 지류들이 다 가르쳐졌다. 마침내 정설의 정립을 위해 무모하고도 불필요한 교회 협의회가 구성되었고,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놓여야 할 자리에 교회의 권위가 놓이게 되고 교회가 신앙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회의 때마다 결정되는 교회 협의회의 결의문들은 교회를 점점 더 그리스도의 단순한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다.

* 이렇듯 성경이 말하는 완전하고 단순한 복음에서 떠나 인간의 유전이 섞인, 기독교에 들어 온 새로운 사조들은 오늘날 “신신학”, 혹은 “자유주의 신학”, 또는 신학적인 용어로 “도덕적 패배주의”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변질된 복음을 들여온 장본인

이러한 신학적 분위기 속에서 한 사람이 신학적 도그마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큰 거인으로 자라나게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그림자가 전체 기독교계에 드리워져 있으며, 슬프게도 그의 오류가 기독교의 여러 모퉁이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 그는 다름이 아닌 어거스틴이다. 어거스틴은 354년 북 아프리카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모친은 기독교인이었고 그의 부친은 마니교도(Manichaean)였다. 마니교라는 것은 3세기경 마니란 사람에 의해 창설되었는데, 이 종교는 고대 페르샤 종교인 배화교(Zorastrianism) 의 지류라 할 수 있다. 이 종교 단체는 엄격한 이원론적 종교이며 특히 강조하는 것은 빛과 어두움(선과 악)의 이원론적 대립이다.

모든 고대 이교의 상징은 균형의 상징이었다. 십자가(수직과 수평의 균형)는 가장 오래되고 타락한 모든 고대 이교의 상징이었다. 유태인들이 상징으로 채택한 다윗의 별은 합쳐진 두 삼각형의 균형을 나타내는 고대 이교의 기장(記章)이었으며, 힌두교나 불교의 사원 표시는 음양의 균형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선신과 악신, 남신과 여신 또는 남사제와 여사제 등과 같은 균형의 상징이 바로 이교도를 이끄는 상징이었다. 또 이것이 바로 선과 악이 인간의 생애를 함께 다스린다는 것을 믿게 하는 개념이다. 이교를 믿는 사람들은 그들의 신을 무서움과 두려움속에서 섬겼으며 그들이 섬기는 신들을 달래기 위하여 희생제물을 바치곤 했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이단 종교의 배경에서 양육되었고, 그가 20세 되었을 때 비로소 이태리로 갔다. 밀란에 있는 엠브로스 (Ambross) 아래서 수학하게 되었고 그때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인이 된 후에도 어릴 때 받아들인 이단적 개념을 지워 버릴 수 없었고, 또한 어린 마음에 고착된 사상은 그의 신학적 사상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신학적 견해는 그 이후 700년 동안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시대까지 교회 지도자들을 교육시키는 지배적인 사상이 되었다. 천주교회의 많은 신학적 오류들은 모두 다 어거스틴에 의해서 조장되었거나 혹은 그 뒤를 따른 학자들의 일치된 신학적 사상을 조성하려는 시도의 결과로 개발된 것들이다.

예정설

천주교의 신학자들은 아주 통일성있고 논리적인 신학 이론을 개발하였지만, 그것은 왜곡된 전제 위에 세워졌으며 그 전제된 이론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조화되지 않는 것이다. 이교의 사상이 마음에 고착된 어거스틴은 자유 선택의 문제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하나님을 절대적이며 전제주의적인 독재자로 이해했다.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어거스틴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반면 그는 성경에서 어떤 사람은 구원을 얻고 어떤 사람은 구원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해 내었고, 이 진리를 자신의 신학적 개념에 맞추어 넣기 위해 “예정설”이라는 것을 주창하게 되었다.

예정설의 오류에 대해서는 그의 생존 당시에 벌써 많은 도전을 받았는데,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 어거스틴은 우리 중에 누가 구원을 얻든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기적같은 은혜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과오를 범하는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질문할 자격조차 없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구원을 지정해 놓았고 어떤 사람은 영원한 저주 가운데 있도록 지정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예정설의 오류는 논리적으로 “한번 구원을 얻으면 영원히 구원을 얻게 된다”는 개념으로 이끌어 간다. 절대적이며 항구적인 존재인 하나님이 누구를 구원할 것인가를 독단적으로 결정하신다. 그리하여 한번 구원받은 사람들은 결코 버림을 당하지 않는다. 반면 영원한 파멸로 지정된 사람들은 결코 구원 얻을 수 없다. 자연적으로 이것은 자신이 구원을 위해서 지정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가상적인 안정감을 준다.

예정설의 모순

그러나 예정설을 믿게 될 때 모순이 생기게 되는데, 특히 복음을 전파하는 입장에서 의문을 일으키게 된다. 왜 기별을 전파하여야 하는가? 왜 전도는 하는가? 만일 하나님께서 단독적으로 사람의 구원과 멸망을 예정한다면 전도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가 수긍할 수 없지만, 예정설의 주창자들의 대답은 성경이 그렇게 명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제창은 사람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우연적이라는 견해를 옹호하는 것이다.

한번 구원 얻으면 영원히 구원 얻게 된다는 신조는 죄를 가지고도 살 수 있다는 이론과 급속히 합작하였다. 더 이상 구원을 위하여 죄를 이겨야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어거스틴은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도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이 모든 비성서적 결론 하나 하나가 모두 하나님은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이단적 신앙에 근거를 둔 어거스틴의 거짓 전제로부터 나온 논리적 추론임을 우리는 주지할 수 있다.

원죄설

어거스틴은 또한 죄의 기원에 관한 개념을 일반화 했는데, 그것은 인간은 자신의 죄로 인해 죄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아담의 죄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정죄를 받은 죄인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죄라는 것은 십계명을 범하는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존재 상태 바로 그것이 죄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은 생애 가운데서 죗된 행위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초에 그는 성(性)이 원죄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생아를 낳음으로써 불법적인 아버지가 되었는데, 이것은 그가 오랫동안 성적 욕망과 싸웠음을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약점이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신학적 이론상의 핑계를 찾도록 하였다. 어떤 목사와 신학자도 자신이 경험하는 것 이상의 설교와 신학적 이론을 발전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 후 그는 이 원죄 개념의 폭을 넓혀 다른 분야에까지 적용하였다.

이러한 관념 때문에 어거스틴은 로마서 7장 14절로 24절까지에 그려진 사람을 완전히 거듭난 사람으로 보았다. 7장에 묘사된 사람을 연약한 인간으로서 투쟁하고 실패를 거듭하는 열성적인 개인의 경험으로 보는 이전의 견해와는 달리 어거스틴은 그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미 구원된 관계를 가진 사람으로 보았다. 그는 이 귀절과 관련된 단순한 사도 바울의 증언을 묵살하였다. 어거스틴은 영과 육을 우주적인 대립 상태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한번도 영이 육을 이기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인간의 율법적 실패를 이해하지도 못하였고 인간이 그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 앞에 완전히 굴복하였을 때 죄를 완전히 이길 수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원죄설과 성육신

어거스틴의 원죄에 대한 견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생각할 때 큰 모순에 빠지게 된다. 만일 우리가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죄인이 된다면, 이 세상에 태어나신 그리스도 역시 죄인이라는 추론에 도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분 역시 우리와 같이 타락한 인간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사상이다. 성경은 명백하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결코 죄인이라고 불리울 수 없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논리적으로 그리스도는 전체적인 면에서 인간과는 다른 본성을 취하셨다고 결론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타락하지 않은 인간의 본성을 가지셨다고 그는 가정하였다. 그리스도가 타락하지 않은 인간의 본성을 가졌다는 사상은 로마 천주교회가 무염시태설 (Immaculate Conception)이라는 성경과 맞지 않는 교리를 채택하도록 이끌었고, 또 이것은 19세기경 교회의 다른 신조와 합쳐지게 되었는데, 이 교리는 마리아도 성령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타락하지 않은 인간의 본성을 가진 아이를 출산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이 논리적으로 한 발짝씩 수 많은 비 성서적 교리가 어거스틴의 거짓 신학과 합하여 천주 교회에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또 다른 딜레마가 생겨났다. 이제 그리스도는 인간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우리의 본성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 놓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인류가 당하는 유혹이나 시험을 당한 일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우리의 중보자로 받아들이기가 어렵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여 죄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만일 사람이 그리스도의 본성보다 열등한 본성을 가졌다면 어거스틴이 가정한 것과 같이 인간은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애 동안 이루신 것처럼 끊임 없는 죄로부터의 승리를 경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거스틴의 추론은, 인간은 저주 받은 타락한 본성을 가진데 반해 그리스도는 타락하지 않은 본성을 가짐으로써 우리 인간들보다는 월등하게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죄 없는 생애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가설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참된 모본이 되시는 것이 중지되었다. 그리하여 히브리 2장 16절에 있는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본성을 입으신 사실에 대한 반대주장을 만들어 내었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에 의해서 그리스도는 유혹 받는 자를 위한 구조자로서의 위치에 계시지 못하게 되었다. 인간은 말할 나위 없이 유혹을 경험하고 그것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부득불 교회는 예수 외에 다른 중보자를 추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예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중보자로써 공포되었다. 교회는 수 많은 성자를 창조해 냈고, 이들 역시 중보자로 간주되었다. 신도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모든 면에서 죄인임을 드러내는 성직자들에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부여하였다. 한번에 한 발자국씩 이교적인 개념을 받아들임으로써 거짓된 가정을 실재화 하기 위한 논리적 추론에 의해 오류에 오류를 더해 가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원죄가 사람을 영생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는 주장이 교회의 신조가 되었다. 수태되는 바로 그 순간에 사람은 영원한 형벌에 떨어지도록 선고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 결론은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한다. 어떻게 그 원죄는 제거될 수 있는가? 교회의 신부들이 도달한 해결책은 “세례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곧 이어 질문되어야 할 것은, 그러면 세례 받지 않은 자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그들은 저주를 받아 지옥의 영원히 타는 불 가운데로 떨어진다고 대답했다. 생각해 보라. 아직 세례 받지 않은 어린 아기가 죽었을 때, 이러한 부모가 받는 충격이 어떠하겠는지를, 당시는 유아 사망율이 아주 높은 때였다. 그 세대에 살던 신실한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가 타오르는 불길 가운데서 영원히 형벌을 받을 것을 생각하고 당해야 했던 그 괴로움을 어떻게 우리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교회는 재빠르게 이러한 근심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다시 제시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이제 연옥이 발명되었다. 연옥은 확실히 천국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옥도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중간 지점 쯤 된다. 그러나 비록 이 견해를 가지고도 부모의 고통을 달래 줄 수는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귀여운 자녀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천주 교회의 교리 가운데 유아 세례 의식을 소개하게 되었다. 출산의 고통 속에 죽어가는 산모의 배 위에 신부가 물을 뿌리고 유아와 산모가 모두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선언하는 예를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계속되어야 할 종교 개혁

아퀴나스와 바벌라드가 어거스틴의 이론을 조금 멈칫하게는 했으나, 중세기의 이 두 신학자들 역시 그들의 사상에 있어서 종교 개혁 당시의 천주교의 교리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우리가 중요하게 한 가지 깨달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말틴 루터가 로마 교회에 대하여 크게 반발하였던 것은 로마 교회가 성 베드로 성당 완성을 위한 모금을 위해 테젤(Tezel) 을 시켜 면제부를 팔게하는 등, 로마교의 지나친 부패에 대한 것이었지 로마 교회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교리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앞으로도 계속 더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루터는 그의 연구 가운데 성경 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견을 하게 되었으니, 곧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것이었다(로마서 1:7, 하박국 2:4).

루터는 에르프르터에 있는 어거스틴 학파의 사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는 거기서 사제가 되었다. 그의 저서에서 그는 어거스틴의 사상을 계속해서 흡수하였었으나 너무 많이 취하기 전에 그의 눈을 성경에 고정시킬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루터는 친 어거스틴적인 이단을 내어 던지기는 했으나, 반면 어거스틴의 오류의 대부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그는 예정설, 즉 한번 구원 얻으면 구원을 영원히 간직한다는 설을 그대로 믿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타락되지 않은 본성을 믿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끊임 없이 복종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고, 유아 세례를 받아 드렸다. 이와 같이 개신교의 개혁 운동 속에서도 천주교회의 사상과 변질된 복음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런 이론들이 천주교 자체 내에서 보다 개신교 내에서 더욱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왜 오늘날은 루터교회에서 예정설을 받아들이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 대답은 간단하다. 루터가 죽고 나서 맬란톤(Melanchton)이 루터 교회를 예정설에서 끌어 내었다. 그러나 화란 개혁교회에 큰 영향을 끼진 스위스의 개혁자 요한 칼빈이나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에 영향을 준 요한 낙스는 예정설을 받아들였다. 오늘날 이 예정설의 교리는 비단 상기 교회들만이 아니라 침례교회를 포함한 많은 정통 복음주의 교회에서도 받아드리고 있다.

사실 신신학이라고 명명된, 이 인간적인 유전들이 섞인 신학 이론은 고대 이교적 이설과 합쳐진 것이라는 확실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 가운데 밝혀둔 참되고 명확한 진리의 원칙 위에 확고하게 서 있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거스틴적 천주 교회의 교리를 받아 드렸거나, 그것 때문에 혼동이 되었거나, 혹은 거기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하고있다. 어거스틴적 영향은 그리스도인의 성화 문제와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신신학의 이론에서 가장 현저하게 나타나 있다. 매일의 생애에서 성령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연구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간이 들여 온 변질된 거짓복음의 치명적 오류로부터 바른 길로 인도할 것이다.

2부 - 칭의를 얻는 길, 회개와 자복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영생을 잃어버리고 멸망에 이르게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 “구속의 경륜”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하고 죄를 지어 죄의 값인 사망(롬 6:23)을 받게 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의 값을 대신 치르어 주심으로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복음, 곧 복된 소식이다. 우리 모두는 사망의 유죄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시는 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음으로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짐을 받았다. 곧 죄를 용서받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것이다(요 1:12).

죄를 용서받는다는 의미는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는 칭함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라고 부른다. “칭의”(의롭다는 칭함을 받는 것)에 대하여 연구해 보면 그 속에는 놀라운 의미와 깊은 뜻이 포함되어 있으며, 칭의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발견하게 된다. “칭의”하면 신학자들이나 다루고 배우는 용어라고 생각하여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자신의 영생이 달린 구원의 문제는 어느 누구도 대신 연구해 주거나 해결해줄 수 없는 것이므로, “칭의”라는 단어가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지라도 진실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열심히 그 의미에 대하여 깨달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회개하여 칭의를 얻게 되는 과정과 그것의 참된 의미에 대하여 함께 연구해 보도록 하자.

회개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4, 15).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회개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만나 함께 살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분이시며 불의와 함께 거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말을 더 신뢰하여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하고 죄를 지어 불의하게 되므로 인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우리의 조상의 범죄의 결과 때문에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과 타락된 본성을 타고난(원죄와는 다름) 우리들은 늘 하나님의 법보다는 육신의 법을 따르기가 쉬운 존재가 되었다. 즉, 불법을 행하기가 쉬운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죄의 유일한 정의는 “불법”이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하나님의 법은 사랑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그분의 사랑의 성품의 사본이다. 비록 그것이 인간의 상식으로 쉽게 이해되도록 도덕적인 십계명으로 쓰여져 있으나, 십계명에 흐르고 있는 정신은 “사랑”이다. 그것에 나타나 있는 사랑의 마음과 정신은 바로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완전한 사랑의 표현인데,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계명에 나오는 정신대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본성을 가진 우리들은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사랑을 가지지 못했으므로 그 법을 지킬 수가 없다.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새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다.

그러면 회개란 무엇인가? 회개란 돌이키는 것이다. 하나님과 조화되지 않는 모든 것에서부터 돌이켜 하나님과 조화되어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악과 어두움의 길을 버리고 선과 빛의 길을 택하여 사는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옳은 자가 될 수 있을까? 죄인이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을까?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거룩함에 조화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것인가? 많은 사람은 오순절 날에 허다한 무리가 죄를 깨닫고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하고 질문한 것과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의 첫마디는 “회개하라”(행 2:38)는 것이었다. 그리고 덧붙혀 그는 말하기를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행 3:19)고 하였다. 회개라는 것은 죄를 슬퍼하고 죄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면 죄를 버리지 않게 될 것이며, 또한 진심으로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우리 생애에 진정한 변화가 있을 수 없다.

십자가 밑으로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인가를 알려면 우리는 십자가 밑으로 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죄인인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갈바리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에 구속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게 되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죄의 값을 치르시기 위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우신 사랑을 알게 되므로 회개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신 그리스도를 보고 죄인이 이 사랑을 주목할 때에, 그 사랑이 심정을 부드럽게 하고 마음에 감명을 주고 심령에 통회하는 생각을 일으킨다.

이렇게 사람이 십자가에 들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분별하게 된다. 그는 영광의 주님을 징벌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이 주님께로부터 말로 다할 수 없는 따뜻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배은 망덕과 반역으로 일관된 생애를 살아 왔음을 알게 된다. 그는 가장 좋은 친구를 버리고 가장 귀중한 하늘의 선물을 모독해 온 것이다. 계속해서, 그것도 직접,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상처를 받아 피가 흐르는 그분의 심장을 찔러 온 것이다. 그는 넓고 어둡고 깊은 죄의 심연(深淵)에 의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어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느낀다. 그 때 그는 그 죄를 슬퍼하며 회개하게 된다.

성령의 이끄심

때때로 죄인들은 그들의 죗된 생활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들의 나쁜 습관을 어느 정도 버리고자 생각한다. 그들은 그들이 그리스도께로 이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렇게 한다. 그러나 사람에게 옳은 일을 하고 싶은 진실한 욕망을 일으켜주고 그들의 생활을 변화되게 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다. 성령께서 죄인들을 이끄셔서 당신의 십자가를 쳐다보게 하며 그들의 죄가 그분을 돌아가시게 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실 때, 그들은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얼마만큼 이해하기를 시작하고 부르짖기를 “죄가 무엇이길래 죄를 범한 자를 구속하기 위해 그처럼 큰 희생이 요구되는가? 우리로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하여 이 모든 사랑, 이 모든 고난, 이 모든 굴욕이 요구되었는가?” 하고 외치게 될 것이다.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 죄인이 이 성령의 이끄심과 사랑을 배척할 수도 있으며 그리스도께로 끌려가기를 거절할 수도 있으나, 만일 죄인이 거절만 하지 않으면 그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성령께서는 죄인을 십자가 밑으로 끌고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고난을 받게 한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신다. 이러한 회개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승천하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만 얻는 것이다. 회개 자체에는 우리를 구원하는 공로가 없다. 다만 잃어버린 죄인의 유일한 소망이시며 유일한 구주로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그 마음을 준비시킬 따름이다.

죄인이 하나님의 계명을 바라볼 때에 그가 범한 죄들이 자기 자신에게 밝히 드러나며 양심을 깨우치게 되며 정죄함을 받는다. 그의 유일의 안위와 소망은 갈바리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데 있다. 그는 과감하게 허락들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다. 그때에 그의 영혼에게는 위로와 화평이 찾아오게 된다. 그는 “오, 하나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이름으로 당신께 나오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멸망할 수 밖에 없으며 소망이 없는 죄인입니다. 오, 하나님,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부르짖는다. 그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온전히 굴복하게 된다.

자복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회개에는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복이다. 회개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미워하게 되며 그 죄를 버리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복을 하게 된다. 우리가 죄를 완전히 포기하기로 마음 먹자마자 우리의 범죄를 인정하는 순간에 인간의 영혼과 구세주 사이에 가로막혀 있던 장벽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것이다. 하나님께 불쌍히 여기심을 받는 조건은 단순하고 공정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가 죄의 사유를 받기 위하여 무슨 괴로운 일 행하기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은총을 받기 위하여 또는 우리의 죄과를 속하기 위하여 멀고 지리한 순례나 또는 고통스러운 고행(苦行)을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사람은 불쌍히 여기심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 만일 죄인이 자신의 죄를 예수님께 자복하고 맡기면 예수께서는 모든 더러운 것으로부터 그를 깨끗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자신의 죄를 고집하고 자복하지 않으면 그는 온전히 용서함을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의는 회개하지 않은 어떤 죄도 덮어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사도는 말하기를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 5:16) 고 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사유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또 형제와의 사이에 잘못을 피차에 자복해야 한다. 만일 그대가 그대의 친구나 이웃에게 허물이 있으면 그대는 그 잘못을 사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도 그대는 하나님께로부터 사유하심을 받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대가 손해를 입힌 그 형제는 하나님의 소유이고 그대가 그에게 손해를 입히므로 그의 창조주와 구속자에게 죄를 범한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자복하는 일은 공중 앞에서이든 개인적으로든 충심으로 할 것이며 숨김이 없이 하여야 할 것이다. 마음속 깊은 데서 솟아나오는 자복은 무한히 자비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얻을 길을 찾을 것이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라고 하였다.

진정한 회개와 개선이 없는 자복은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신다. 반드시 생애에 확실한 변화가 있어야 하며 하나님께 거리끼는 것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버려야 한다. 이 일은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는 결과로 될 것이다. 성경에는 자복하는 사람이 반드시 해야 될 일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 1:16, 17).

변명은 진정한 자복이 아님

우리는 죄를 자복할 때 죄에 대한 핑계를 대면 안된다. 아담과 하와가 먹지 말라고 한 과실을 먹은 후에 그들은 수치와 공포의 느낌으로 충만하였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어떻게 저의 죄를 핑계하여서 그 무서운 사망 선고를 면할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주께서 그들의 죄에 대하여 물어 보실 때에 아담의 대답은 그 범죄의 일부분을 하나님께 돌리고 또 일부분은 그 아내에게 돌려 말하기를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하였다. 여인은 그 허물을 뱀에게 돌려 말하기를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3)하였다. 왜 당신은 뱀을 지으셨습니까? 왜 당신은 그 뱀이 에덴동산에 들어옴을 허락하셨습니까? 하는 질문이 자기 죄를 변명하는 하와의 말 가운데 암시되어 있었고, 그것은 하와가 범죄한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이었다. 자기 변명의 정신은 거짓말하는 자의 아비에게서부터 시작되어 모든 아담의 자손들이 나타내었다. 이런 종류의 자복은 성신의 감동을 받아 된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그 죄를 속임이나 외식이 없이 자복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는 불쌍한 세리와 같이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부르짖게 될 것이다. 자기 죄를 자복하는 자들은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예수께서 회개하고 자복하는 자들을 위하여 당신의 피로써 하나님께 호소하시는 까닭이다. 진정한 회개로 부드러워진 겸손하고 상한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갈바리”에서 지불된 대가를 이해할 것이며, 참으로 참회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게 할 것이다.

3부 - 칭의에 대한 5가지 성서적인 이해


“칭의”란 단어는 어쩐지 우리에게 낯설고 어려운 단어 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은 목사, 혹은 신학자들이나 사용하는 용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세히 연구해보면 칭의는 의외로 아주 쉬운 주제인 것을 알 수있다.

칭의와 성화에 관한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주제들은 우리의 구원과 영생에 관한 문제를 푸는 중요한 열쇠이기 때문이다. 한가지 언급할 것은, 우리가 영적인 경험을 함에 있어 이것은 칭의이고, 이것은 성화이며, 이것이 거듭남이라고 엄밀히 구분하여 나누기는 어려우며, 어떤 형식에 꼭 맞는 공식이 있다고 할 수는 없겠다. 왜냐하면 이런 영적인 것들은 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모든 경험이 한번에 이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나 있는 칭의와 성화와 참된 믿음에 대한 진리들을 연구함으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칭의와 성화의 경험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며, 또 우리가 이런 주제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을 때, 우리의 영적인 경험이 이 지식을 토대로 하여 올바른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질문으로 함께 연구해 보자.

1. 칭의와 율법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믿기만 하면 은혜로 다 구원을 얻고 의롭다하심을 받는다고 들었는데, 율법이 왜 필요할까요?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

사람이 먼저 회개하려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이 없이는 죄를 깨달을 수 없으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않으면 회개할 수 없습니다. 또한 사람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않으면 구세주의 필요성도, 구원을 받아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율법은 몽학선생처럼 우리를 인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과 같지 않은 점을 가르쳐 주지요. 하나님의 계명에 우리를 비추어 볼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율법은 의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죄인인 우리는 이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으로서만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범하므로 불의해진 우리는 회개하고 죄의 값인 사망의 형벌을 우리 대신 치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여 칭의(의롭다 하심)를 얻으려면 죄에 대한 각성이 있어야 하며, 그 죄에 대한 각성을 가져오는 것이 율법이므로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2. “칭의”(Justification)란 무엇인가요?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1~25). (롬 5:1~11 참고).

칭의란, 죄인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굴복할 때 그의 과거의 죄를 용서해 주심과 동시에 마치 한번도 죄 지은 적이 없는 것처럼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말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인간은 죄인이며 아담의 범죄 이후에 인간의 본성은 불의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지요. 하나님을 만나 영원히 살 사람은 의로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불의와 함께 거하실 수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를 얻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 영생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인이 어떻게 “의”를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려 십자가로 나아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통회하며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해 주십니다. 그것을 신학적 용어로 “칭의”라고 합니다. 칭의는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믿음의 의”(Righteousness by faith)라고 부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그렇게도 중한 잘못을 저질렀고 하나님을 거스렸던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공로를 가져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순종을 보시고 우리 죄인들의 허물을 간과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가 인간의 실패 대신으로 가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사랑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회개하는 죄인)를 받으시고, 용서하시고, 의롭게 여기시며,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회개한 죄인을 의롭다고 칭하실 때 그 사람의 마음을 의롭게 바꾸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의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하나님에게로 가져갈 수 있으며, 주님은 그의 아들의 순종을 죄인의 계정에 올리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이며 오묘한 구원의 이치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인간의 실패를 대신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받으셔서 용서하시고 의롭다하실(칭의를 주심) 뿐만 아니라 우리를 의로운 것처럼 대하시고 그의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순간 한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사람처럼 대접을 받으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한 죄인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칭의)을 받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 용서받은 영혼은 계속 은혜에서 은혜로, 빛에서 더 큰 빛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외치게 됩니다.

아담은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품성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 실패하였고 그의 범죄로 인하여 우리의 본성은 타락되어서 우리는 스스로 의로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가 많고 거룩하지 못한 우리는 거룩한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게 되었지요. 그 뿐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응할 만한 자신의 의는 조금도 가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할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것과 같은 고난과 시험 가운데서 사셨습니다. 그러나 죄 없는 생애를 사셨지요.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회개하는 죄인들의 죄를 벗기시고 당신의 의를 우리에게 입혀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바치고 그분을 우리의 구주로 받아들이면, 우리의 생애가 아무리 악하였을지라도 그분의 공로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품성이 우리의 품성을 대신하게 되고 우리는 죄를 도무지 범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앞에 받아들이는 바 되지요. 이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 가운데 거하십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우리의 마음을 항상 주님께 바침으로 말미암아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동안에는 주님은 우리의 원하고 행하는 것을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하게 하실 것입니다.

3. 용서와 칭의는 동일한 것입니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 1:9). 회개한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뉘우쳐 자백하고 그리스도의 속죄가 그를 위한 것임을 깨닫고 믿음으로 이 속죄를 그의 생애에 유일한 소망으로 받아들일 때, 그의 죄가 용서를 받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입니다. 용서와 칭의는 하나이며 동일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믿음을 통하여, 사단과 죄악의 자녀인 반역자의 위치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충성된 백성의 위치로 나아오게 되는데, 그것은 타고난 선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그를 입양하여 그분의 자녀로 받으시기 때문이지요. 죄인은 그의 죄를 그의 대리자이며 보증인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하기 때문에 죄의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 나의 자녀가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사망의 선고를 유예하고, 나의 생명보험증권, 곧 영생을 그에게 줍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의 자리를 대신하여 그의 죄에 대한 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딸)입니다.” 그리하여 용서받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흠 없이 서게 됩니다.

죄인이 실수를 범할지라도 무자비하게 쫓겨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우리의 범죄와 죄악을 용서해 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권한이며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셔서 우리의 형벌을 중지하시고 우리에게 당신 자신의 의를 옷 입혀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공의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킵니다. 칭의는 유죄선고와 반대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가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주어지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속죄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위하여 범죄와 죄악을 용서하십니다. 동시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흉악한 범죄자가 하나님의 은총 안으로, 그리고 영생의 강한 소망 안으로 들어오게 되며 칭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4. 진정한 용서의 뜻이란 무엇인가요?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겔 36:25~27).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벧전 1:18,19).

하나님의 용서는 단순히 우리를 정죄에서 면하게 해주는 사법적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게 하며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죄인이 십자가로 나아가서 그 앞에 부복할 때에 새로 창조함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그에게 주시며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는 것이지요. 그분께서는 마음 뿐만 아니라 감정을 거룩하게 하시고 생각을 순결하게 하셔서 모든 동기와 모든 생각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히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죄를 미워하고 회개하여 용서를 받은 사람의 생애에 일어나는 변화이고 거듭남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용서를 받는 것은 단순히 용서뿐 아니라 심령을 새롭게함을 받는 것도 뜻합니다. 주님께서 죄를 용서하실 때 “새 마음을 네게 주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 그리스도의 형상이 마음과 정신과 영혼 가운데 새겨집니다.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고전 2:16)다고 말합니다. 거룩한 능력을 통해서만 이르러 오는 변화의 과정이 없이는, 우리의 마음에는 타고난 죄로 향하는 경향이 여전히 남아 새로운 죄의 사슬을 형성하게 되어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깨뜨릴 수 없는 노예의 상태를 다시 초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용서 받은 사람은 새 마음을 받아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단순한 기술적인 방안이 아닙니다. 그것은 범죄의 치료뿐 아니라 영적 건강까지 회복시키기 위한 주님의 거룩한 처방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 마음과 품성에까지 미치도록 하늘이 지정하신 방법입니다. 사람이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의지를 굴복할 때에 새로운 능력이 새 마음을 점령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이 스스로는 성취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인간의 본성에 초자연적인 요소를 가져다 주는 것은 초자연적인 역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배역한 세상에서 예수께서 굳게 붙드시는 당신의 성채가 되며, 이렇게 하늘의 능력으로 채워진 영혼은 사단의 공격에 난공불락의 성이 됩니다.

5. 의지를 굴복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2~13).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애를 통해서 일어나는 진정한 회개를 보실 때에 즉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회개에는 그리스도께 우리의 의지를 완전히 굴복시키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의지를 그리스도께 완전하게 굴복시키지 않으므로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어떻게 내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가?’ 라고 묻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그분께 바치기를 원하지만 그들의 도덕적 능력은 약하고 그들은 곧잘 의심의 노예가 되며 죗된 생애의 습관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약속과 결심은 썩은 새끼줄 같아서 쉽게 끊어지며 자신의 생각과 충동과 애정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스스로 지키지 못한 약속과 결심에 대한 기억은, 그들 스스로 자신을 믿지 못하게 만들며 자신의 신실함에 대한 확신을 약화시키게 되어, 이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납하시지 않는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럴 때 자포자기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모두는 의지의 진정한 힘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정하거나 선택하는 힘은 인간의 본성을 지배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이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하는데 달려 있지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선택력을 주셨으므로 우리들은 임의로 그것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우리의 애정을 억지로 하나님께 드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섬기기로 선택할 수는 있으며 우리의 의지를 그분에게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한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할 능력은 우리에게 없지만 선을 행하려고 하나님의 올바른 편을 선택할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한 쪽을 선택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주셔서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으로 우리를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한 사람은 자신의 죗됨이 너무 싫고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었으므로 자신의 마음대로, 자신의 의지대로 하지 않고 그 대신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대로 굴복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그분의 선하신 뜻대로 살도록 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의 모든 성향은 그리스도의 영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의 애정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실 것이며, 우리의 생각은 그분과 조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선하고 거룩하게 되고자 욕망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그런 욕망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될 수 없지요.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바라고 희망하는 중에 잃어버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의지를 하나님께 즐겨 굴복시키는 그 지점까지 이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생각과 욕망을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하게 함으로서 영혼에 새로운 생애를 가져오고 속 사람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다시 새로워집니다. 그러므로 의지를 굴복한다는 뜻을 올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4부 - 성화란 무엇인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와 용서를 믿으며 이렇게 말한다. “이제 십자가에서 구원이 다 이루어졌으니 믿기만 하면 된다! 나는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구원의 복음을 반쪽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받은 칭의를 계속 유지해야 할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회개할 때,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며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고 율법을 범함으로 받게된 형벌을 되돌리신다. 그리하여 죄인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으로 서게 되며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과의 교제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그 후에 성취되어야 할 중요한 일이 남아 있는데, 그 일은 영혼이 진리를 통하여 성화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일 역시 믿음으로 성취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받는 그리스도의 은혜로서만이 우리가 성화될 수 있으며, 우리의 품성이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화에 대하여 알아보자.

* 성화란 무엇인가?

성경에 나타난 복음에는 “칭의”외에 또 다른 면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그 면이 함께 이루어져야 복음이 완전하게 되며 구원이 완성된다고 말한다. 그것이 성화인데, 성경의 복음은 칭의와 성화를 모두 포함한다. 거룩함(성화)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중요한 교리 중의 하나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말하였으며(살전 4:3), 또한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 기를 원하노라”고 기원하였다(살전 5:23).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다(요 17:17).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품성의 모본을 보여 주셨다.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셨다(요 15:10). 회개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과 같이 되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고 매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가운데 거룩한 율법의 원칙과 일치하는 품성과 생애를 가져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성화(거룩함)이다.

성경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 때에 성화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칭의는 변화를 요구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 완전한 회개의 경험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여 그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다는 증거가 그 생애에서 나타나야 한다. 그러므로 성화를 쉽게 풀어 말하자면 예수님과 함께 살기 때문에 삶 속에 성령의 열매가 풍성히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화는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는 성화된 사람만이 하늘에서 하나님과 조화되어 살 수 있기 때분이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죄를 싫어하고 미워하게 되며, 과거의 어두움 가운데서 살던 생활이 너무 싫기 때문에 다시는 과거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진다. 그리고 새롭게 주님과 시작한 생활이 너무 좋고, 또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므로 다시는 죗된 생애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진다. 그런 사람은 매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되며 혹시 연약하여 쓰러졌을지라도 다시 하나님과 화목한 생애를 이어가게 된다. 거룩한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서 살 사람은 거룩하게 성화된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고 죄가 너무 싫어 습관적으로 늘 주님의 편을 택하고 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하늘에 가야 루스벨이 타락했던 것같은 죄의 역사가 다시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

* 칭의와 성화를 함께 언급하고 있는 성경절

칭의는 한순간의 역사이고, 성화는 일생동안에 일어나는 역사이지만 그것은 반드시 칭의와 함께 시작된다. 성경은 회개하고 거듭난 사람이 살아야 하는 생활에 대하여 거듭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은 너무나 자주 칭의와 성화를 복음의 테두리 안에서 연결해 주고 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개념이 16세기 종교 개혁을 주도한 지도자들의 지배적인 신학이였음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의롭게 된다는 것, 즉 칭의를 받는다는 것이 성서적이기는 하지만 칭의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전체적인 복음과 조화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칭의와 성화를 함께 말하고 있는 성경절을 몇가지 예로 들어 보자.

“그 눈을 뜨게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칭의)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성화)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라” (사도행전 26:18).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칭의)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성화)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9).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칭의)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성화) 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성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8:1-4).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칭의)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성화)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되라” (요한계시록 23:11).
주의 기도문 가운데에서도 칭의와 성화는 하나로 결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칭의)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성화)” (마태복음 6:12, 13).

이렇듯이 성경에서 성화는 칭의와 늘 함께 다루어지고 있고 또 믿음과 진정한 믿음의 결과인 행함을 함께 말하고 있으며, 칭의는 성화를 수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성화란 무엇인가? 다시 한번 말하자면, 성화란 회개하고 거듭난 사람이 거듭난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성화란 자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남김없이 완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것, 즉 공의로우며, 자비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겸손하게 동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신이나 자신의 유익에는 무관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것이며, 하늘의 정신을 소유하여 순결하고 비이기적이며, 거룩하며 점이나 흠이 없는 생애를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온전한 굴복을 말한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 속에 계시는 성령에 의해서 날마다 새로운 침례를 받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번 거듭난 후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의지를 계속적으로 굴복시켜야하며, 매일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하고, 또 그런 능력을 받기 위해 늘 기도하며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 중요한 성화의 두면

지금까지 우리는 성화에 대하여 배웠다. 그런데 성화에는 두가지 면이 있다. 그것은 성화의 질과 성화의 분량이다. 우리가 앞에서 배운 것처럼, 회개하고 자복하여 죄를 버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고백한 죄를 계속 승리하는 생활을 유지하는 것, 곧 칭의를 계속 유지하는 상태를 성화의 질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화에는 또 다른 한면, 곧 성화의 분량이 있다. 이 말의 뜻은 쉽게 말해서 성품의 성장을 말한다. 이것은 성화의 분량으로서, 성화의 생애를 계속하는 사람의 생애에 맺혀지는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뜻한다. 매일의 생애에서 이 성령의 열매의 성품이 풍성하게 맺히고, 또 그 열매가 충실하게 익어가는것, 곧 우리의 성품이 예수님의 성품을 온전히 닮고, 우리의 생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온전하게 반사되는 것을 성화의 분량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두가지 면을 일컬어 총체적으로 성화라고 한다.

우리는 매일 회개하고 거듭나는 경험을 계속하며, 또한 우리의 회개와 거듭남의 경험이 계속적으로 더 깊어지는 경험을 하며 살도록 기도하자!또한 우리의 생애에 죄를 승리하는 역사와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역사가 지속되도록 기도하자! 이것이 참된 성화의 길이다.

5부 - 성화, 그것은 어떻게 얻는가?


성화는 믿음과 행함으로 얻는다

성화는 어떻게 얻는가? 성화는 오직 믿음으로 부여받는 것이지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성화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생애를 당신께 바친 사람들에게 주시는 거룩한 선물이다.

성화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물, 즉 하늘에서 오는 은혜와 능력을 붙잡음으로 생애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의 생애에는 행함이 필수불가결한 증거로 나타나게 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은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14-24)고 말한다. 다음의 성경절을 또 보자.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롬 2:13). 그러므로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믿음에 걸맞는 행함이 뒤를 따라야 할 것이다.

위험한 믿음?

하늘 아버지의 뜻(진리인 성경 말씀)과 그것에 대한 순종(행함) 없이, “믿으라, 믿으라,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외치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가르침이다. 믿음에 대한 오해가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나가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속에는 믿음과 행함이 반드시 균형지게 이루어져야 한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우리는 마귀도 가지고 있는, 머리로 알기만 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약 2:19,20 참조) 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믿음, 행함이 수반되는 참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라는 가르침 속에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굴복과 변화없이 이기적인 생활 속에서 편히 안주하게 만드는 위험이 포함되어 있다.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동의하기만 하면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다.

믿음을 설명하면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성경절 가운데 하나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선생들아 내가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0,31). 많은 사람들이 이 성경절을 말하면서 “믿으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 또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36). 이 말씀은 믿음과 행함에 대한 균형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지만, 그분의 말씀을 순종(행함)치 않을 때,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는 말씀이 오해할 수 없게 설명되어 있다. 우리는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심판은 행함으로 얻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입술로만 믿는 진리?

우리는 입술로만 진리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진리가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 전과 믿은 후가 조금도 차이가 없다면, 옛날과 똑같이 질투하고, 옛날과 똑같이 화내고, 옛날과 똑같이 세상을 사랑하고, 옛날과 똑같이 복수하고 싶어하고, 옛날과 똑같이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한다면, 우리가 믿는다고 공언하는 진리와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진리를 믿는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이 생활과 성품을 온전히 예수님과 같이 변화시킨다는 것을 증거해야 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어쩌면 여러분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그대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라” 라는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나 2000년 전에 예수께서는 동일한 질문에 대하여,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되물으셨다. 그때 예수께 질문했던 사람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라고 하셨다(눅 10: 25~28). 믿음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행함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마음과 정신의 법칙이다. 믿음과 행함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선한 행실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가져온다. 참된 믿음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성경의 진리에 대한 동의 뿐만 아니라 그 진리에 순종하게 한다. 행함을 통해서 영생을 얻을 수는 없지만, 참된 믿음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경건한 행실과 순종을 열매로 맺는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 행함의 함수 관계이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한복음 15:14).

성화는 은혜로 얻는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믿는 것도 잘 알고 그리고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요! 그런데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야지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생활이 변화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갈등하고 있다. 그리고 변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한다. 이 문제에 대하여 갈등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좋은 치료방법이 있다. 그 치료방법은 곧 “은혜”이다. 이 대답을 듣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들이 “은혜”의 참된 의미와 힘을 알게 된다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함께 공부해 보자.

“은혜”는 능력?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은혜”라는 단어는 “힘”, “파워(power)” 라는 뜻으로 쓰여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의 성경절을 살펴보자.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사망에 이르도록) 왕 노릇한(다스린)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다스린)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롬 5: 20,21).

이 성경절을 보면 죄도 다스리는 권세(능력, 힘)을 가졌고, 은혜도 다스리는 권세(능력, 힘)을 가진 것을 알게된다. 그러므로 위의 성경절은 은혜도 다스리는 힘을 가졌고, 죄도 다스리는 힘을 가졌는데,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는 때에는 옳은 것을 행하는 것이 그른 것을 행하기 보다 더욱 쉽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죄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모든 능력을 격퇴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반항의 정신을 가지고 굴복하지 않는 것; 예를 들어 다소의 사울이 가시채를 뒷발질(양심의 찌름을 항거하여 발길질)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행 26:14 참조].

그러나 죄인이 회개하여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면, 마음에서 죄의 권세가 깨어지고 은혜가 주권을 잡게 되어, 은혜가 죄를 다스리며 죄의 권세(능력)을 격퇴하게 된다. 죄가 다스리는 때에, 올바로 행하기보다 그릇 행하기가 쉬운 것과 같이, 은혜가 다스리는 때에는 그릇 행하기 보다 바로 행하기 쉽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을 우리의 영적인 생애에 적용해 보자.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와 구원을 받아 새 마음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그의 생애에 늘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는 역사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죄를 미워하고 악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싫어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준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주신 은혜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마음을 바치면 예수께서 우리 마음에 좌정하실 것이고, 그러면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어떻게 거짓말 하실 수 없고 불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죄를 그대로 사랑하고 있고 버리지 않는 사람을 그냥 의롭다고 칭해 주실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회개하는 죄인을 의롭다고 하실 뿐 아니라 진짜 의롭게 해주신다. (물론 회개하도록 이끄시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며, 처음으로 거듭난 사람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려면 많은 깨달음과 연약함으로 인해 생기는 실수들을 거치게 되지만... )

은혜의 의미 2가지

그러므로 은혜는 두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자격없는 죄인을 불쌍히 여겨 용서와 구원으로 끌어안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말하고,
2. 우리가 죄로 죽었을 때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개심시키시고 죄의 힘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는 성령의 역사(엡 2:1~5 참조)를 말한다.

복음의 능력?

성경에는 “은혜”와 같은 뜻의 의미가 담겨 있는 단어가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복음”이라는 단어이다. 다음의 성경절을 보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로마서 1:16).
“복음”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두나미스”인데, 그 뜻은 영어로 “다이나마이트”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성경 로마서에서 “복음”을 능력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것이 도데체 무슨 뜻일까? 복음은 구원을 가져다 주는 능력이다. 복음은 능력을 가졌으므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음의 능력도 받아들이게 되어, 그 능력으로 죄를 다스리고 이기는 생애를 살게 된다는 말이다.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받아들인다는 뜻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신 능력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의 능력이다.

복음의 능력 =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 창조의 능력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그가 이기신 것처럼 이기게 되는데, 그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러므로 능력의 비결은 이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고 그 능력을 행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만일 우리가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에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게 한다면, 그리고 예수께서 우리의 마음에 계시면서 그의 일을 하신다면, 우리는 모든 죄를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칭의를 가능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희생은 동시에 성화를 가능하게 한다. 성화의 원칙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 임을 충분히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복음이 전적으로 인간 속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공로임을 깨닫게 된다. 앞의 기사 “칭의”에서 언급했던 사실을 다시 반복하지만, 만일 죄인이 자신을 예수님께 바치고 그분을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면, 과거의 생애가 그때까지 아무리 죄로 가득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롭다고 간주해 주신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은 그의 성품을 대신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 죄 지은 일이 없는 사람처럼 가납된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는 마음을 변화시켜 주신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그의 마음 속에 거하시고 함께 사시는 것이다. 의롭게하고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야말로 얼마나 풍요하고, 얼마나 완전하고, 얼마나 만족스러운 것인가! 복음은 인간의 교만이나 공로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된 것이다.

물론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허다한 투쟁을 경험하게 하고 또 거기에는 사단을 대적하는 만만찮은 전쟁이 있을 것이다. 또한 강력한 투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거기서 승리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승리의 힘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발진(發進)시켜 주시는 힘인 것이다. 이런 이유때문에 바울은 이 복음을 일컬어 “능력있는 복음”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는 모든 일에 충만한 능력을 주신다. 그는 비단 우리를 죄의 저주로부터 구하시는 능력뿐만 아니라 우리를 죄와 그 죄의 가책으로부터 격리시켜 보존하시는 능력까지 공급해 주신다.

성화는 사랑으로 얻는다

그러나 성화를 이루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은 우리 신앙의 동기가 되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면 모든 것이 짐이 되고 고역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자연히 회개하게 되고 그에 따른 칭의와 성화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할 때에는 하지말라고 해도 모든것을 자원해서 행하게 될 것이다. 형제에게 가서 먼저 용서를 빌게 될 것이고, 이웃을 불쌍히 여기게 될 것이며, 인자하고 자비롭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마음에 간직한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는 것이 그들의 삶의 목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갈바리의 십자가로 가야 한다. 거기서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무한히 영광스러운 세계로부터 죄로 인하여 손상되고 사망과 저주의 음영으로 어두워진 세계로 내려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이 당신의 사랑의 품과 천사의 존경과 숭배를 떠나서 수치와 능욕과 압제와 증오와 사망을 당하시도록 허락하셨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광야의 예수,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 십자가상의 예수를 바라보라! 흠이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의 짐을 몸소 지셨다. 하나님과 일체이신 예수께서 죄 자체가 되셨고,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힌 두려운 간격을 그의 마음 가운데 절실히 느끼셨다. 이것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하는 고민의 부르짖음을 그의 입술에서 나오게 한 것이다. 죄의 무거운 짐, 죄의 무서운 흉악성과 죄로 인하여 하나님에게서 끊어지게 됨을 느끼는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심장을 터지게 하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요 3:16)다.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타락하여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자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이러한 속죄를 준비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그 무한하신 사랑을 타락한 세상에 부어주시는 일에 매개자가 되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고후 5:19)셨다. 갈바리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셨다. 겟세마네의 고민과 갈바리의 죽음으로써 무한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신 분께서 우리의 구속의 값을 갚으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요 10:17)고 하셨다. 이 말씀의 뜻은 이런 것이다; “나의 아버지께서 너희를 심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너희를 구속하기 위하여 생명을 버린 나를 더욱 사랑하신다. 내가 내 생명을 드려 너희의 죄의 값을 담당하여 너희의 대리자와 보증인이 됨으로 나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는다.”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무한한 희생이 아니고는 잃어버린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다.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갚으신 대가, 곧 그 아들을 주사 우리를 위하여 죽게 하신 하늘 아버지의 희생과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 굴복하고 회개하기에 넉넉하다. 성신의 감동을 받은 사도 요한은 멸망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보았을 때에 찬탄과 존경의 마음이 충만하여 이 사랑의 위대함과 그윽함을 표현할 적당한 언사를 찾지 못하여 세상을 향하여 “보라”고 부르짖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3:1).

이러한 사랑은 무엇에도 비할 수 없다. 이 사랑은 우리가 매일 깊이 명상할 제목이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 비추어서 연구할수록 그의 자비와 온유과 공평과 의로 섞인 사유와 용서를 깨닫게 될 것이며, 그 사랑과 자비를 깨달은 사람만이 기쁨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성화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성화의 길이 너무나 쉽고 즐거운 길이 될 것이다! 독자들이 가는 성화의 길이 즐겁고 행복한 길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