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마음의 성소

 어떤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러 어느 낯선 도시에 갔다. 그런데 부흥회를 개최할 교회를 찾아가다 길을 잃어버린 목사는 지나가던 사람에게 물었다.

 실례합니다만, 길을 찾고있는데요, 혹시 00교회가 어딘지 아십니까?
 아, 그 교회요? 바로 저 뒤에 있어요.
 오, 그렇군요. 근데 혹시 교회에 나가십니까?
 왜요?
 내일 저녁에 시간 있으시면 제 설교 들으러 오십시오. 제가 천국 가는 길을 가르쳐드리지요
 그러자 그 사람이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바로 뒤에 있는 교회도 못찾는 사람이 천국 가는 길을 어떻게 가르친담!...

 우리 주위에는 열심히 믿는 기독교인들이 많다. 그런데 그 중에는 너무 열심히 믿는 나머지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조차 알지 못한채 맹목적으로 교회만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것이 진리인지, 아니면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인지, 그것도 아니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파인지 알지도 못한채, 아니 생각해 보지도 않은채 그냥 교회를 왔다 갔다 한다. 그렇게 맹목적으로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교회가 구원을 준다는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의 목사님이 구원을 준다고 생각해서인지, 단상에서 전해지는 말씀이 성경에 맞는 진리인지 아닌지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맹종한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를 절대 빠지지 않는다. 한번이라도 교회를 빠지거나 나가지 않으면 축복을 받을 수 없고 또 만일 그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큰 벌을 받을 것처럼 두려워한다. 그들은 마치 교회에만 하나님이 계신듯이 생각하고 사실은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작은 성전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종교

 만일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한번도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이 없고, 또 자신 안에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시며 성령께서 마음 속에 조용히 말씀하시는 경험을 개인적으로 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교회에나 가야 겨우 하나님을 만나는 것 같고, 또 그렇게 해야 겨우 영적인 분위기를 이어갈 수 있다면, 그리고 또 마음 속 깊이에서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한 공허감과 두려움을 극히 감정적인 상황 - 굉장한 소음의 통성기도나 떠들썩한 방언 - 으로 대치시켜 달래보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이다.

 자신의 마음 안에 조용히 역사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 끝없이 큰 우주를 운행하시지만 그러나 또한 그분이 우리의 작은 뇌세포 안에, 우리의 작은 생각 안에, 마음 안에 임재하신다는 것을 한번도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 그리고 인간의 유전과 가르침 속에 젖어 성경이 곧바르게 말하는 진리를 받아들이기에 너무 마음이 닫힌 사람, 그런 사람은 아무리 어떤 종파에 소속되어 있을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큰 교파, 큰 무리에 함께 속해있다는 안전감에 젖어 있을 지라도,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종교를 열심히 믿는데,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데, 만일 자신의 종교 속에 하나님이 없다면, 그리고 자신이 속해 있는 종파 속에서 정작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들이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마치 옛날의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바쁜 행위들로 그리스도의 부재를 메꾸어 보려고 애를 쓰나보다!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헌금을 많이 드리고, 바쁜 교회활동에 눈코 뜰새없이 자신을 던지고, 지나친 금식기도나 겉으로 들어나는 행위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을 하며... 하나님을 자신 안에서 만난 경험을 한 사람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시고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한없는 기쁨과 편안함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진리와 일치하는 삶이 주는 화평 속에 혼자 있어도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어떤 교회나 종교적인 단체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이 마치 구원을 보장하기나 하듯이 거짓 안전감 속에서 지내지만, 교회 밖을 나서면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너무 생소하고, 자신의 생활과 성품 속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열매가 없는, 또 자신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 그러나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거짓 기만 속에 진리가 올 때 마음을 열어 연구해보려고 하지 않고, 배타적인 태도로 밀어부치는 닫힌 마음을 가진 상태... 아마도 그것은 자신이 부자라고 하나 사실은 벌거벗은 라오디게아 교회(계 3:8)의 상태처럼 아주 심각한 상태일 것이다.

 그런 기독교인들이 잘못된 신앙을 할 때, 그리고 세상에 보이는 그런 모습들이 기독교인들은 아주 이기적이고, 매우 아집스럽고 편협적인 사람이라는 말을 세간으로부터 듣게 한다.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감

 우리들은 우리의 이름이 교회 녹명책에 적혀있는 사실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산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면,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로 성화되어 매일 하늘 아버지의 아름다운 성품을 받는 참 자녀로서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면, 그리고 진리가 가르쳐주는 대로 아버지의 뜻, 곧 사랑의 법칙인 계명을 순종하는 생애를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하늘 아버지의 참자녀가 아니다.

 구약 느헤미아서를 읽으면 느헤미아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온갖 어려움과 반대를 무릅쓰며 애를 쓴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는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가고 있다. 그런데 그 성전을 짓는 곳은 이스라엘 땅도 아니고 미국도 아니고, 바로 우리 마음 속이다. 우리 각 개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사도 바울은 너희 몸이 하나님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반문했으며, 베드로는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벧전 2:4)라며 우리를 예수님과 연결된, 아니 예수님을 모신 성전으로 지어져간다는 표현을 했다.

 예수께서는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고 묻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여기서도 말고 저기서도 말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1, 23,24).

종교를 초월한 믿음

 사람들이 열심히 종교를 믿다가 하나님을 놓치는 일이 종종 생긴다. 우리는 종파를 초월한, 종교를 초월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종파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다. 목사가 구원을 주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하나님이시고, 영적으로 산자의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의 비유처럼 하나님과 산 관계를 맺은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 사람들이 참 하나님의 교회이다. 아무리 큰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 하여도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산 연결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또한 어느 곳에서 어떻게 예배드리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마음이 성전이 되어야 하며,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참 성소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참 교회의 개념이다.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우리에게 어느 교회에 다녔느냐고 묻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누구의 중재를 통해, 또는 어느 교회와의 연결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직접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직접 간구하여 받을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 아무리 혼자 광야에 가서 거한다 해도, 아무리 무인도에 홀로 떨어져 산다해도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며,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그곳이 참 성소, 교회가 되는 것이다.

 성경에는 마지막 이 세상 역사의 장에 나타날 위대한 교회에 대하여 예언되어 있다. 그 교회는 요한 계시록 14:12절에 나오는 마지막 남은 무리, 곧 성도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다. 아무도 우리에게 구원을 줄 수 없다. 아무 것도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없다. 진리로 성화되고 하나님과 산 연결을 가진 사람들만이 마지막에 설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참 성소인가? 당신의 마음의 성소에는 하나님이 계시는가?

권두언

강병국 목사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 혹은 어떤 단체에게 지배를 받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사회제도 자체가 완전 독립적인 개인을 인정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위하여서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확인하고 지나가야 할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속한 사회가 공의롭지 못한 일을 요구할 때에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우리들이 속해 있는 교회들에 적용된다면 그 심각성은 더해지게 됩니다.

 과연 우리가 누구에게 충성을 바치며 살아가야 합니까? 누가 우리들의 충성을 받기에 절대적인 존재입니까? 물론 그 분은 하나님이시지요!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는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혼돈하는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교회가 잘못 할 때에, 혹은 목사나 교회의 책임자들이 잘못 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러할 때에라도 계속적으로 그 교회나 지도자들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 문제는 쉽게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원칙이 설정되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의 진리와 원칙을 고수하고 지키며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의 목사들과 지도자들은 바로 이 일을 이루기 위하여 교회를 받드는 자들입니다.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도 그들을 성경의 진리 안으로 구원하여 들이는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나 아니면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릇된 길로 나아 갈 때에 과연 신자들은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누구에게 충성을 바치며 살아가야 합니까? 이번 호는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해답을 드릴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으실 때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들을 올바른 길과 태도로 인도하시기를 간절하게 바랍니다.

생활 습관에 의존하는 건강

 우리들은 매일 매일 생명과 건강에 관계되는 결정을 내리고 있다. 엄청나게 많은 과학적 연구는, 우리 일상의 선택들이 건강하게 오래 사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유전자가 자기 생명의 질과 얼마나 오래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라고 잘못 믿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건강은 무엇보다도 다음의 두가지 요인에 의존한다. 우리가 우리 몸에 무엇을 집어넣는가. 우리가 우리 몸으로 무엇을 하는가이다. 이 두 개념을 다 포함한 단순한 낱말이 생활습관(lifestyle)이다. 우리의 유전자는 바꿀 수 없어도 생활습관은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아주 좋은 소식이다. 생활습관을 잘 길들이면 유전적으로 걸리기 쉬운 질병들을 예방할 수 있다. 로마린다 의과대학의 레이몬 머독 박사는 결함있는 유전은 총알을 장전하고, 생활습관은 방아쇠를 당긴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자기 몸보다 차를 더 잘 돌보는 것이 내게는 참 이상하게 느껴진다. 나는 아직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내 차가 언제죽을지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나는 기름이 들어 있는지, 엔진오일을 언제 바꾸야 하는지 점검할 필요도 없고, 또 바꿀 필요도 없다. 또 평상시 정비를 할 필요도 없다. 또 어떤 종류의 휘발유를 써야 하는지 걱정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자동차가 최고의 성능을 내고 최장기간의 수명을 위해 적합한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몸의 최고 성능과 최장 기간의 수명을 위해 적합한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언제쯤 깨닫게 될까?

사망, 질병의 원인과 생활습관
 사망의 근본원인과 치명적인 질병의 원인은 무엇일까? 연구자 맥기니스(Mcginnis)와 포으지(Foege)는 미국인들의 사망원인을 분석하고, 그들이 발견한 것을 미국 의학협회잡지에 발표했다. 사망하는 9가지 주요 원인은 생활습관, 즉 우리가 우리 몸에 무엇을 집어넣는가 그리고 우리 몸으로 무엇을 하는가와 크게 연관이 있었다. 다음의 원인들을 살펴보자.

미국 내 사망의 근원적 원인
 
1. *빈약한 식사, 불충분한 운동 2. *흡연 3. *음주 4. 감염성 질환 5. 독극물 6. *총기류 7. *성행위 8. 자동차 사고 9. *마약
 *표를 붙힌 요인은 모두 생활습관과 직접 관련이 있다. 이 요인들로 인한 사망자 수는 모두 125만명인데, 이것은 미국의 매년 사망자 수의 절반을 넘는다. 이로 미루어 사망의 근본 원인이 대부분 건강에 해로운 생활습관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감염에 의한 사망은 좋지 않은 생활습관으로 인해 약해진 면역 기능 때문이다. 생활습관과 건강에 대해 더 연구하면 할 수록 좋은 생활습관이 사망을 더 많이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위의 연구는 연구자들이 생활습관의 요인으로 알려진 사망만을 조사한 것임) 만일 미국인들이 그들의 해로운 생활습관을 좋은 생활습관으로 바꾸기만 한다면, 미국에서의 조기 사망률이 현저하게 감소할 것을 위의 연구 도표에서 볼 수 있다.

미국의 10대 주요 사망 원인(1995)
1.심장 및 혈관질환 2. 암 3. 만성 폐질환 4.사고 5. 폐렴, 독감 6. 당뇨 7.에이즈 8. 자살 9. 간경화 10.신부전
 
위의 사망의 원인들을 살펴보면, 만일 좋은 생활습관을 가졌다면 그 사망과 질병의 원인을 충분히 막고도 남음이 있을 것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과학적 탐구는 사망의 주요 원인을 대부분 예방할 수 있음을 확신해 주었다. 전 미국 공중위생국 장관이었던 의학박사 에버렛 쿠프는 1988년 최초의 장관 보고서를 작성한 바 있다. 그것은 과학 문헌의 철저한 검토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는 과다하고 균형 잡히지 않은 음식 섭취가 미국에서의 여덟가지 주요 살인적 질병의 큰 원인이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의 보고서를 살펴보자.

질병과 사망의 원인; 영양 과잉과 불균형
 
식사는 건강에 중대한 영향을 준다.
10대 주요 질병 및 사망 요인 중 다섯가지가 식사와 관련이 있었다(심장병, 암, 당뇨, 동맥경화).
다른 세가지는 과다한 음주와 관련이 있었다(간경화, 사고, 자살).
1987년에 사망한 총 210만 명 중 거의 150만명이 이 여덟가지 경우에 해당한다.
영양 과잉이나 불균형은 고혈압, 비만, 치과 질환, 골다공증, 소화기계 질환들의 주요 원인이 된다.
식사가 이들 질병의 발생에 중요한 기여를 한다는 것과 식사의 변혁이 그것들을 예방하고 조절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 이제 분명하다.

생활습관과 관련한 장수 연구
 사람이 오래 사는 데 도움을 주는 생활습관들은 무엇인가? 네드라 벨록 박사와 레슬러 브레슬로우 박사는 이에 대하여 확신을 안겨주는 답을 내놓은 최초의 연구자들이다. 그들은 캘리포니아 앨라메다 카운티의 주민 약, 7000명을 재상으로 한 표준적 연구에서, 사람이 오래 사는 데 영향을 끼친 일곱가지 생활습관 요인을 발견했다. 그 요인들은 다음과 같다.

벨록과 브레슬로우의 일곱가지 건강 수칙

1. 7~8시간씩 잔다.
2. 간식하지 않는다.
3. 아침을 규칙적으로 먹는다.
4. 적절한 체중을 유지한다.
5. 규칙적으로 운동한다.
6. 술을 절제하거나 마시지 않는다.
7.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들의 연구 보고에 의하면 개인이 몇 가지 생활습관을 준수했는가는 그들의 수명에 굉장한 영향을 끼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나이와 상관없는 건강나이라는 것이 있음을 그들은 밝혀내었는데, 예컨대, 건강한 생활습관을 충분히 지키는 50세가 평균 35세의 사람과 똑같은 건강 또는 생리 나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그 사람의 건강 나이는 35세라 하겠다. 한편 건강한 생활습관을 전혀 무시한 사람은 아무리 젊어도 70세의 노인의 건강 나이를 가질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건강한 생활습관을 얼마나 많이 실천하느냐에 따라, 건강 나이는 실제 나이보다 더 적을 수도, 많을 수도 있다. 벨록과 브레슬로우가 확인한 개인적 습관들 중 몇 가지를 살펴보고, 그것들이 수명뿐 아니라 삶의 질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보자.

1. 규칙적인 아침식사
 
엘라메다 카운티에 관한 보고를 읽은 많은 사람들은 아침식사를 하는 것이 장수의 가장 중요한 일곱가지 요인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란다. 아침 식사를 하는 것 자체가 수명을 늘린다. 그들의 최초의 몇가지 검사 자료에서는 아침 식사를 하고 간식을 하지 않은 사람의 사망률이 아침식사를 안 하고 간식을 한 사람의 사망률의 절반 이하였다.

 엘라메다 카운티의 좀더 최근 연구는 특히 60~94세 노인에 초점을 맞췄다. 규칙적으로 아침 식사를 하지 않은 사람들의 사망률은, 규칙적으로 아침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사망률보다 50% 더 높았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미국 노인들에게는 장수가 담배를 피우지 않고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는 것 못지않게 아침식사를 잘 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장수와 건강에 필수인 아침 식사를 거르는 이유 중 가장 공통된 이유는 아침에는 배가 고프지 않다는 이유이다. 그것은 보통 저녁을 많이 먹는 탓이다. 저녁식사를 적게 하는 것이 이 문제를 해결하게 해 줄 것이다. 아니면 한 주일을 저녁을 먹지 말아서 아침에 배가 고프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또 배고픈 채 자려고 하면, 처음에는 좀 거북해도 차츰 잠을 더 잘 잘 것이다. 계획을 잘 세우면, 점심이나 저녁식사보다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대체로 더 쉽다. 곡물을 잘 이용하고, 신선한 과일을 자주 먹는 것이 좋다.

* 규칙적인 아침식사를 하여 얻는 유익점 
 
심장마비 발병률 감소 -­ 아침식사를 하기 전에는 혈소판, 즉 혈액을 응고시키는 세포들이 끈적끈적해진다. 이 현상은 아침 시간에 혈액을 응고시키는 경향을 증가시킨다. 심장의 혈관 속에 그런 응고가 생기면 심장마비가 일어날 수 있다. 대부분의 심장마비는 아침 7시에서 정오 사이에 일어난다. 아침 식사를 하면 혈소판이 덜 끈적끈적해지고 아침에 심장마비가 일어나는 위험을 감소시킨다.

 정신 능력을 돕는다 -­ 1995년 8월, 데이비스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소아과는 상당히 많은 심리학자, 신경과학자, 영양학자, 생리학자를 초청하여 아침식사에 관한 과학적 연구들을 검토했다. 연구자들은 아침식사를 하는 것은 아동들이나 어른들이나 모두 학습, 기억력, 건강을 위하여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Mathews R. Importance of breakfast to cognitive performance and health 1996:3:210) 아침을 잘 먹는 습관은 특히 오전의 늦은 시간에 정신과 신체의 능률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데에 필 수적이며, 다음과 같은 유익점이 있다; 더 효율적인 문제 해결력, 기억력 향상, 유창한 언어 구사력, 집중시간 연장, 태도 개선, 성적향상.

2. 수면, 운동, 흡연
 
* 수면; 수면은 대부분 6~9시간이 이상적이다. 엘라메다 카운티에 관한 연구는 이보다 더 혹은 덜 잔 사람들은 사망 위험이 적당한 수면을 취한 사람보다 사망률이 높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은 수면은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지 않은 것과 비슷한 위험이 있었다.

 * 운동; 운동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운동을 한 사람에 비하여 사망 위험이 50% 증가한다. 규칙적인 운동 프로그램으로 온갖 원인에 의한 사망 위험이 감소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 흡연의 여러가지 위험
 엘라메다 카운티의 조사 자료는, 만일 어떤 사람이 담배를 피우면 담배를 피우지 않은 사람에 비해 9년 안에 죽을 위험이 2배임을 밝혀냈다. 여성이 담배를 피우면, 사망 위험이 60% 더 많았다. 또한 다른 연구는 꾸준히 다배를 피운 사람들은 평균 수명은 65세밖에 기대할 수 없음을 밝혔다. (Cigarette smoking-attributable mortality, MMWR Mortal Wkly 1993. Aug 27;42) 이것은 평생 담배를 피우지 않은 사람에게서 기대되는 77세의 수명보다 12년이 더 짧다. 뿐만 아니라 담배를 피우는 사람의 삶의 질은 열악하다.

 위궤양은 흡연자 가운데 흔한데, 담배는 식도와 위 사이에 괄약근의 수축을 감소시킨다. 이때 위산이 식도로 역류하기 쉽고, 또 속쓰림을 일으킨다. 또한 담배를 피우면 피부에 주름이 일찍 생기고 골다공증이 생긴다. 그 외의 흡연의 해는 말할 수 없이 많지만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한다. 그 외에 알코올 섭취는 생명을 단축시킨다. 알코올의 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한다.

3. 사회성과 도덕성
 
많은 회의론자들은 놀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과 규칙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것이 수명을 늘린다는 보고가 있다. 진실한 친구가 있는 것, 어떤 단체의 회원이 되는 것, 심지어 결혼생활을 잘 유지하는 것이 장수 하는 데 유익한 효과가 있다. 듀크(Duke)대학이 내놓은 보고는 종교적 신앙심이 강한 사람들이 인생에서 남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행복과 만족을 느낀다는 것을 보여준 바 있다.

 내가 진료한 환자들을 보면 미국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유전 때문에 혹은 운명 때문에 자기가 죽는 날짜와 시간이 정해져 있다고 믿는다. 이 숙명론적인 태도가 그들로 하여금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한다. 하버드 대학의 공중보건대학 영양학과의 왈래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염병 연구가 증명한 분명한 결론은 미국의 많은 사람들이 최선이라고 할 수 없는 식사를 하고 있으며, 개선된 영양이 질병 예방에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벨록과 브레슬로우는 그들이 발견한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데이터들은 평생 건강에 관한 좋은 실천을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좋은 건강을 얻게 하며, 또 좋은 건강 상태의 기간을 30년 가량 연장한다. 사실, 벨록과 브레슬로우의 일곱가지 건강 수칙은 간단하지만 큰 효과가 있다. 건강수칙을 지킨다는 것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 애굽인들이 겪었던 질병을 피할 수 있었던 것처럼, 현재 사망의 열가지 주요 원인은 건전한 건강 수칙들을 지킴으로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알고 있었지만 실천하지 않았다면 다시 건강한 생활습관을 배양하고 건강 수칙을 지키는 사람이 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1부 - 누구에게 충성할 것인가?

 이번 호 신앙기사에는 많은 양심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다니며 마음 속으로 갈등하는 문제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았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소위기름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종, 목사님들의 권위에 의해서 야기되는 문제들이다. 힘이 없는 연약한 양들인 교인들은 목자의 어떤 모습들을 보고 과연 그 권위에 순종해야 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혼란을 경험할 때가 종종 있다. 이 문제는 아주 미묘한 것으로서 잘못하면 사람에 대한 공격으로 비춰지기 쉽다. 그러나 진리로 승리하여 마지막까지 하나님 앞에 서고 충성할 사람들은 어떤 길이 바른 것인가를 스스로 판단하여 혼자 설 수 있을 만큼 성숙한 신앙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누구에게 충성할 것인가? 교회의 권위인가? 아니면 목사의 권위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목소리인 진리인가? 그동안 실렸던 이런 내용의 기사들을 재편집한 이번 호 신앙 기사가 독자들의 올바른 길을 찾는데 도움을 주게 되기를 바란다. - 편집실 -

목사도 틀릴 수 있다.
 
- 이 기사는 성공회 신부인 요한 챨스 라일이 기록한 교회들을 향한 경고라는 책에서 발췌하여 편역한 글이다. 요한 찰스 라일은 1838년 영국 성공회의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후에 성직자로서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노년에 교회를 향한 경고라는 역작을 저술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성직자와 평신도들을 위한 중요한 교훈을 남겨 놓았다. 이 글은 100 여년 전에 기록되었지만, 오늘날의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살아서 움직이는 원칙과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

안디옥 사건이 주는 교훈
 
이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갈라디아 2장에 나타난 한 장면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러나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 그에게 책망할 것이 있기에 내(바울)가 그를 면박하였으니 이는 몇몇 사람이 야고보에게서 오기 전에 그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뒤로 물러나 혼자 떨어져 있기 때문이라. 다른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그와 함께 위선을 행하니 심지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가더라. 마침 나는(바울)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서 올바르게 행치 아니하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갈 2:11~14).

 사도 베드로는 안디옥에서 무엇을 하였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고 싶은 전부이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수많은 사람들을 복음으로 개종시켰던 베드로가 안디옥에서는 위선적인 면을 나타냈다. 다른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그(베드로)와 함께 위선을 행하니 심지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가더라. 복음과 위배되는 베드로의 위선을 목격한 바울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 사도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는 충격적인 장면이 갈라디아 2장에 전개되어 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 그에게 책망할 것이 있기에 내가 그를 면박하였으니. 바울은 안디옥에 있는 모든 교회들 앞에서 선배 사도 베드로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견책하였다. 사도 바울은 베드로의 잘못을 글로 기록함으로써, 오늘날까지 베드로의 수치스런 위선을 통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안디옥 사건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아무리 위대한 사도라도 잘못을 범할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베드로는 사도 중의 사도였다. 그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친분을 나누었으며, 그분의 설교와 기적을 직접 듣고 보았고, 개인적으로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였다. 그는 오순절에 유대인들에게 첫 설교를 함으로써, 유대인들을 향한 복음의 씨앗을 제일 먼저 뿌린 사도였다.

 그토록 위대한 사도 베드로가 수치스러운 잘못을 범했다. 지금 나는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하심 하에서 성경을 기록할 때에 실수하거나 잘못을 범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도들도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붙들어 주지 않는다면, 아무리 성화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언제든지 연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쓰러질 수 있으며, 또한 곁 길로 나갈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들이다.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이며, 영생을 유업으로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부르심을 받았으며, 빼어내심을 받았고, 택하심을 받았을지라도, 인간은 썩어질 육체 안에 거하는 한 하나님의 손을 놓는 순간에 쓰러질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높은 성직과 안수
 
높은 성직과 권위있는 직책이 사람을 실수와 잘못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성직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을 모든 교리적 잘못과 도덕적 연약함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모든 죄로부터 벗어나게 보장해 주는가? 결코 아니다. 비록 그가 교황이나 추기경이나, 감독이나, 사제나 목사의 위치에 있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잘못을 범할 수 있는 인간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이 안수 기름을 바르고, 경건한 대주교의 손을 통하여 안수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를 잘못된 교리와 배도로부터 보호해 주지 못한다.

 선택의 여지없이 모태로부터 신앙을 받은 사람, 교회에는 정기적으로 나가지만 성경을 연구하지 않는 사람, 자신이 다니고 있는 교회의 교리와 관습을 아무런 생각없이 받아들인 사람, 친구나 가족이 나가는 교회를 별다른 생각없이 따라 다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정말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가를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한다.

영국 성공회 헌장 21조
 
비록 여러분이 믿고 있는 교리나 가르침이 교회의 위원회나 총회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영적 위치가 반드시 안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위원회나 총회의 교리적 결론 역시 잘못을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단을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을 성령의 음성과 진리를 통하여 인도하신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는 영국 성공회의 헌장 제 21조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이 있다. 총회 역시 잘못을 범할 수 있고, 때때로 잘못을 범해 왔다. 심지어는 하나님께 속한 문제에 있어서도 잘못을 범했다.

 형제 자매들이시여,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어린 양의 인도하심을 안전하게 따라가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어떤 인간도 의지하지 말며, 인간이 세워 놓은 전통과 교리를 무조건 따라가지 말라. 성경을 스스로 연구하여 진리를 발견하도록 애쓰며, 이것이 정로이며 진리의 길인가를 항상 숙고하라. 이것이 하늘로 가는 가장 안전한 길이다.

성경의 예증들
 
안디옥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잘못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수많은 예증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기억하는가? 그 믿음의 용사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대신에 아내 사라의 권고를 따라서 젊은 후처를 얻었던 사실을 기억하는가? 홍해의 기적, 불기둥과 구름 기둥,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 온 만나를 직접 먹었던 대제사장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백성들로 하여금 춤을 추도록 방조했던 역사를 기억하는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직접 기름부음을 받았던 다윗이 남의 아내를 취했던 일을 기억하는가? 가장 지혜로웠던 솔로몬 왕이 이방의 여인들을 아내로 취하여 이방 신전을 짓도록 허락했던 사실을 기억하는가? 유다의 선한 왕인 아사 왕이 하나님을 찾는 대신에 그 당시의 의사에게 찾아간 일을 기억하는가? 선한 왕인 여호사밧이 악한 아합을 돕기 위하여 갔던 일을 기억하는가? 야고보와 요한이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사람들을 태워 죽이기를 구했던 사실을 기억하는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세번이나 부인했던 일을 기억하는가? 왜 성경은 위대한 사람들이 범했던 이러한 잘못들에 대해서 숨김없이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성경의 기록은 지금도 우리 모두를 향하여 크게 외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진리를...

경건한 수도승의 잘못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를 살펴 볼 때, 우리는 최고의 지성과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도 잘못된 사상과 교리에 빠질 수 있다는 교훈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늘은 지식과 지성이 충만한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라, 진리 앞에 마음을 겸손하게 낮출 줄 아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 초기 기독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위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을 각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좀더 순결하고 경건한 수도원 생활을 원했다. 비록 그들의 동기가 좋았을지는 모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수도원 안에도 세속과 배도가 흘러들어 오게 되었다. 그들은 수도원 안에서 세상을 그리워 하면서 살았다. 경건은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급기야는 외형적인 경건에 촛점을 맞추어 수도원을 교회의 허식적인 경건을 과시하는 상징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중세기 동안, 수도원 안에 있는 성직자들을 통하여 수많은 미신적 교리들이 교회 안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종교 개혁자들의 잘못
 
교회와 수도원이 정치의 권력과 부에 이끌려 부패되자,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서 종교 개혁자들이 진리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일어났지만, 그들 중 아무도 잘못이나 실수로부터 제외된 사람은 없었다. 마틴 루터는 너무나 고집스럽게 성체 공존론을 주장하였고, 그가 죽은 이후에 루터의 동료 개혁자인 멜란톤에 의하여 루터 교회가 몇몇 잘못된 교리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었지만 여전히 그들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요한 칼빈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권한에 대해서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장로교회를 어처구니 없는 예정론으로 이끌고 말았으며, 크래머는 자신의 첫 신앙을 공식적으로 취소하고 한동안 물러가는 모습을 보였다. 제월은 죽음에 대한 잘못된 교리에 빠져서 결과적으로 교황권의 주장을 답습하게 되었으며, 후퍼는 예식 때에 입는 예복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성공회에 해를 입혔다. 요한 웨슬리와 탑레디는 치열한 교리 공방전으로 인하여 수치와 상처를 받았으며, 어빙은 자신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에 빠짐으로서 미혹당하고 말았다. 이러한 지난 역사와 사건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 입을 모아서 성직자도 틀릴 수 있다는 경고를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인간을 의지하는 정신
 
우리는 사람을 신뢰하는 일을 중단해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어떤 사람도 우리의 주인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대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사람들이 여러분들에게 성경에 대해서 질문을 할 때에 우리 주교님(목사님)께 물어보고 대답해 드리겠습니다라는 대답을 하지 말라. 여러분이 어떤 교리와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얼마나 많은 성직자들이 그것을 인정하고 있는가를 살피지 말고,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를 확인하여야 한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성직자의 조언을 구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말을 반드시 성경에 비추어 비교해 보아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인간을 의존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스런 목자이시며, 위대한 대제사장이시고, 대주교 중의 주교이며, 교황보다 높으신 분인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기 보다는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교회의 성직자들을 의지하기를 좋아한다. 우리의 믿음과 신앙에 대해서 하나님의 인정보다 주교나 사제의 인정을 더 필요로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깊이 회개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존경하는 성직자에게 우리의 믿음과 신조를 맡겨 버리는 잘못을 범하기가 너무나 쉽다. 우리는 어떤 교리나 가르침이 성경의 진리와 일치하는가를 확인하기 보다는 어떤 목사, 어떤 사제, 어떤 주교, 또는 어떤 신학 박사가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 좋아한다. 진리는 어떤 교단이나 학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만이 진리를 확인해 주는 유일한 방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매우 귀찮아 하거나 위험한 일로 여긴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성직자를 무조건 믿고 따라가는 것이 최상의 안전책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다 양같아서 하나가 움직이면 나머지도 모두 따라간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이유
 
서두에서 언급한 갈라디아 2장의 안디옥 사건도 바로 이러한 잘못이 되풀이 되었던 것이다. 십자가 이후에 제자들과 사도들이 기독교회를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사도 바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제자들과 사도들이 유대 교회의 관습과 의식에서 한동안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모습이 신약 성경에 여러 곳 나와 있다. 베드로가 바울에게 책망을 받았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베드로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잘못을 범하게 만들었다. 그(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뒤로 물러나 혼자 떨어져 있기 때문이라. 다른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그(베드로)와 함께 위선을 행하니 심지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가더라. 그 당시, 그 자리에 있던 평신도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베드로와 같이 위대한 사도가 잘못을 범할리가 없어. 그를 따르는 한, 결코 잘못에 빠질 수 없을거야! 우리는 그들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의견을 무조건 신뢰해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이 사제나 주교나 목사직에 있다고 해서 그를 무조건 신뢰해서는 안된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베드로의 잘못된 이해가 초대 기독교회 전체에 퍼져나가는 것을 막아야만 하였다. 바울은 이제 갓 태어난 교회 안에 유대 교회의 전통이 들어 옴으로써 복음의 빛이 퇴락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지도층에 있는 성직자의 의견과 주장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일 경우, 그가 쓰러지면 그 밑에 있는 교회 전체가 쓰러지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바로 이러한 위험을 간파한 바울은 노장 선배 사도 베드로의 잘못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함으로써, 진리를 올바로 세울 수 있었다. 마침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서 올바르게 행치 아니하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이 점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잘못을 범하고 있다. 초대 교회가 잘못된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던 것도 이러한 문제 때문이었다. 1세기 이후, 세월이 흘러서 제자들과 사도들이 모두 죽게 되었고, 교회는 많은 신도들을 가진 거대한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주교님의 마음에 반대되는 것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주교나 사제나 목사나 장로가 도데체 무엇인가? 가장 훌륭한 목자일지라도 단지 사람일 뿐이다. 사도 바울은 이 점에 대해서 분명히 하였다. 아볼로는 누구이며, 바울은 누구이냐?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고전 3:5).

진리를 전하는 성직자, 오류를 전하는 성직자
 
아이러니칼하게도, 역사를 통하여 볼 때, 진리를 잘못 제시하고, 오류를 진리처럼 꾸며서 자기 마음에 맞는 신조로 만들었던 장본인은 성직자들이었다. 가장 위험하고 가장 큰 오류는 모두 성직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이스라엘의 종교를 무질서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던 대제사장 엘리의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도 성직자였고,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도 성직자였으며, 이교의 창시자라고 불리우는 아리우스도 성직자였다.

 진리를 잘못 제시하고 오류를 진리처럼 꾸몄던 사람도 성직자 이지만, 어두운 교회 안에 진리의 빛이 나타났을 때, 가장 앞에 나서서 반대했던 사람들 역시 성직자들이었다. 마틴 루터가 나타나서 종교 개혁의 횃불을 들었을 때, 어떤 성직자가 그의 편에서 섰었는가? 그의 곁에는 농민들과 소수의 귀족이 있었을 뿐이다. 진리를 전하는 것도 성직자이지만, 진리를 가장 극렬하게 반대하는 것도 성직자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안수를 받았다는 인준서가 진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가라사대라는 말씀으로만 진리는 확증된다. 성직자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진리를 전하는 성직자이고, 다른 하나는 오류를 전하는 성직자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누가 기적과 은사를 행하는가에 따라서 진리를 분별하려고 한다. 그러나 기적과 은사를 행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진리의 편에 서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베드로도 놀라운 방언의 은사를 받아 언어의 장벽을 초월하여 자유롭게 말씀을 전하였고, 그의 기도를 통하여 죽었던 도루가가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지만,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진리는 기적에 의해서 확증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오직 성경 말씀으로만 확증될 수 있다.

맺는 말
 
중세 시대에 살았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종들을 무조건 신뢰하는 잘못을 범했다. 그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종들의 상을 교회 안에 세워 놓고 우상시 하는 데까지 발전하였다. 그 당시 사람들은 토마스 아퀴나스, 던 스코터스, 피터 롬바드와 같은 신학자들을 거의 특별한 영감을 받은 성인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는 항상 다음과 같은 말을 서두에 붙혔다. 틀릴 수 없는, 거룩한(Rev.), 비교할 수 없는, 귀하신 등등. 나는 두권의 책으로 되어 있는 로버트 멕킨의 회고록과 설교집과 같은 책이 오리겐이나 사이프리안과 같은 유명한 신학자가 저술한 어떤 책보다도 사람의 영혼에 유익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또한 성경 외에는 어떤 책도 알지 못했으며, 희랍어나 라틴어를 전혀 몰랐던 사람이 저술한 천로역정은 지금도 온 세상 사람에게 놀라운 진리의 빛을 전하고 있다. 옥스포드 신학대학을 나온 수재들이 히브리어나 헬라어에 대해서는 요한 웨슬리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는 그들이 요한 웨슬리보다 훨씬 무지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진리는 학위나 숫자나 어떤 교단에 의해서 확정되는 것이 아니다. 감리교회를 세운 요한 웨슬러도 처음에는 교회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혀서 쫓겨나지 않았는가!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시여, 그대들이 존경하는 성직자가 하나님의 사람일수 있으며, 모든 설교와 가르침에 있어서 진리 위에 올바로 서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또 하나의 교황으로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자리에 성직자의 교리를 올려 놓지 말라. 그대가 존경하는 성직자는 결코 틀릴 수 없다고 추측하지 말라. 성직자가 오류에 빠질 경우에 그대가 따라서 치르게 될 대가를 생각해 보라. 성직자도 믿음에서 떠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교회와 성직자에 온 마음을 의지하는 사람은 그들이 틀리고 깨어질 때에 함께 쓰러지지만, 자신의 신앙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긴 그리스도인은 타고 있던 배가 흔들리거나 파손된다고 해도 반석 위에 굳게 서 있을 수 있다. 부디 그리스도의 신실한 대사인 성직자를 존경하기 바란다.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들을 도와주고 사랑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신뢰는 반드시 성경의 진리 위에 두어야 한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고상하여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사도행전 17:10).

2부 - 어떤 목사의 고백

 나는 모태에서부터 교인이 되었습니다.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계셨던 나의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내 마음 속에 아름답고 순결한 신앙을 심어주시기 위해서 언제나 애를 썼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어머니의 정성으로 인하여 나는 진실하고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를 위하여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100% 확신하며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대한 충성이 순종으로 표현되며, 하나님의 말씀이 지적하고 있는 죄와 세속을 거절하는 승리의 생애를 살아가는 좁은 길을 걷게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 마음 속에 불타고 있던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사랑은 나로 하여금 전혀 망설이거나 흔들리지 않고 신학대학에 등록하도록 인도하였습니다. 나는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폭넓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결과 수십년 동안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보다도 많은 성경 지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나는 놀라운 열심을 가지고 신학과의 모든 강의 시간에 참석하였는데, 시간이 얼마쯤 지나면서부터 나는 교수님들이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교수님들이 신학대학원과 박사코스에서 학위를 받는 오랜 과정을 거치면서 예리한 논리와 이론을 배우지만, 그들이 애초에 가지고 있던 순결한 신앙을 잃어버립니다. 서서히 신앙을 잃어버리는 과정 속에서 그들은 온 신학계를 범람하고 있는 자유주의와 합리주의 그리고 세속에 물들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서 그들의 어깨에 학사, 석사, 그리고 박사라는 학문적 명예가 둘리워졌을 때에는 그들의 마음 속에 더이상 하나님의 사업과 진리에 대한 희생적 헌신이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들은 경건의 능력은 잃어버린 채 경건의 높은 모양만을 가지고 신학대학의 강단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오랜 교수 경험을 거치면서 그들의 논리는 숫돌에 간 칼날처럼 예리해지기 때문에 그들의 강의를 듣는 어린 양들은 교묘한 설득력과 노련한 경험 앞에 쉽사리 굴복하게 되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순결한 신앙을 합리주의와 학문적 논리로 바꾸어 가기 시작합니다. 더구나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 양들은 자신들의 학점에 대하여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의 말을 아무런 여과없이 받아들이기 쉬운 것입니다. 교수 중에 어떤 분들은 성경이 100% 영감의 말씀이고 하나님이 진리라는 사실에 대해서 오히려 의심과 회의를 갖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 강의를 진행하곤 합니다. 소위 분석 이나 비판이라는 학문적 용어를 사용하면서, 분명한 답변을 제공하지 않은 채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는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 의문점을 제시하는 강의는 학생들의 마음을 깊은 회의와 의심의 미로 가운데로 이끌어가기에 충분합니다. 또한 그들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걸어야 할 순종과, 죄에 대한 승리의 생애를 강조하여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영적 경험을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설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성경에 기록된 어떤 부분들은 과학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신뢰할만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며, 그들도 자신들의 스승들처럼 성경을 부분적으로만 인정하는 합리주의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런 학생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더이상 100% 영감의 글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며, 희생, 순종, 극기라는 말은 그들에게 매우 어색한 단어가 되고 맙니다.

첫번째 딜레마
 
그러나 나는 그러한 혼돈의 와중에서도 기만당하지 않았으며, 진리를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교수님들의 왜곡된 신앙을 정확하게 이해하였습니다. 신학교에 숨어 있는 이러한 위험을 간파한 이후부터, 나는 교수님들이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거나 자유주의적인 가르침을 강의하면, 조심스럽고도 지혜로운 방법으로 그것을 지적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첫번째 시도는 교수님에 의해서 젊잖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서 교수님은 자신의 가르치고 있는 높은 학문에 계속적인 도전을 받게되자 신경질적인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함께 강의를 듣고 있던 다수의 학생들도 교수님의 그러한 태도에 동의하였는데, 그 이유는 내가 교수님처럼 높은 학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수업 시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교수님은 나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서 지혜로운 권면을 하였습니다. 학생, 나는 그대가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네. 그러나 그대는 일하러 나가기 전에 경험과 학식의 폭이 넓은 사람에게 배우기 위해서 대학에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돼! 나는 교수님께 나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 애썼지만, 교수님은 노련하지 못한 나를 여유있게 제압하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었고, 내 마음 속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충성심을 넣어주셨던 어머니는 신학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하여, 교수님은 성경에 나오는 여러가지 실례를 들면서 성경의 100% 영감성을 은근히 부인하며, 죄에 대한 승리의 불가능함을 은근히 조장하는 논리를 조심스럽게 펼쳤습니다 .

 다음 강의 시간부터 나는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때때로 교수님의 강의가 크게 의심스러울지라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습니다. 나는 학급의 친구들에게 교수님의 강의 내용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지만 그들은 교수님의 강의를 여과하거나 판단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학기말 시험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시험지에 진리에 대한 원칙들을 기술하였으나, 교수님은 나에게 형편없는 점수를 주었습니다. 나는 내가 위기와 딜레마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목회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개인적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러한 포부의 성취여부가 교수님의 손에 크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또한 나는 한가지 중요한 현실을 보게 되었는데, 교수들은 가르치고 점수를 주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졸업 후에 목사로서의 길을 열어주는 면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나는 강의 시간에 교수님께 어떤 도전이나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되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졸업을 하고 목사직을 얻게 되면, 순결하고 인간의 논리에 오염되지 않은 진리를 강력하게 설교해야지라는 결심을 했습니다.

두번째 딜레마
 
나는 무난히 졸업을 하게 되었고 어떤 교회에서 전도사로서 봉사하도록 임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서 내가 봉사하고 있던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진리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세속과 자유주의 신앙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가끔씩 주어지는 설교 시간에 신자들에게 죄를 포기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회개하여 죄와 세속에 대해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강력한 설교를 했으며, 이러한 진실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준비되어 있다는 메세지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던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러한 설교와 가르침을 들어보지 못했으며, 담임 목사님에 의해서 오랫동안 길들여져 온 어리석은 양들 이었습니다. 담임 목사님은 내 설교에 대해서 불안한 마음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하루는 담임 목사님이 나를 보자고 하더니, 당신은 매우 유망한 장래를 가지고 있소. 그러나 매우 지혜롭고 조심스럽게 설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당신의 설교는 교인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몇몇 교인들이 내게 와서 당신의 설교가 너무 강하고 사랑이 부족하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분들은 당신의 설교가 교회의 평안과 안정을 깰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하나님의 진리를 높이고 영혼들을 멸망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에 대한 관심보다는 교회를 아무런 문제없이 운영해야 된다는 데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나타내었습니다.

 나는 또 다시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또 다시 결심하였습니다. 이 다음에 내가 한 교회를 맡게 되면, 설교 시간에 하나님의 진리를 마음껏 외치리라! 라고... 다음 설교 시간부터 나는 어쩔 수 없이 설교 내용을 부드럽고 듣기 좋게 다듬어야만 했으며, 나중에 내 자신이 직접 교회를 맡게 될 때까지 곧바른 진리의 선포를 미루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세번째 딜레마
 
마침내 기다리는 시간이 왔습니다. 나는 정식 목사로서 한 교회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위대한 진리를 마음껏 선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도 하나님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악하고 거센 양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몇몇 영향력 있는 집사들과 장로들을 찾아다니면서, 목사의 설교가 너무 강해서 교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는 불만과 염려를 토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 중에 진정으로 하나님의 진리의 가치를 충분히 깨닫지 못한 자들과 진정으로 거듭난 경험이 없는 세속적인 자들이 불만 세력에 동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가 술렁거리기 시작했으며, 나이 많으신 보수적인 장로님들도 걱정을 표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 중의 몇 분이 하루는 목회실로 나를 찾아와서 우리는 목사님의 설교가 매우 성경적이고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분간 교인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목사님의 설교 주제를 정하시는 일에 있어서 조금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점잖게 권면해 주었습니다.

 그 즈음에 나는 좋은 여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내게 또 하나의 짐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였지만, 남편인 나의 장래를 더욱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를 아끼는 마음으로 안정적인 목회 생활에 방해가 되는 설교는 제발 하지 마세요. 좀더 부드럽고 사랑이 넘치는 내용으로 설교하세요. 교인들의 죄와 세속을 지적하는 설교는 그들의 마음을 오히려 완악하게 만들 수도 있어요!

 나는 내 손에 쥐어져 있는 두가지를 보면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한 손에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충성과 영혼들이 구원에 대한 깊은 염려가 쥐어져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장미빛 목회 생활과 안정된 가정 생활에 대한 미련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한 쪽에서는 나의 정직한 양심에 좁은 길을 걸으라라고 속삭이시는 성령님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고, 다른 한 쪽에서는 너도 다른 목사들처럼 하면 돼! 왜 너만 유별나고 특별한 설교를 해서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버리려고 하니? 조금만 지혜롭게 처신하면 너도 큰 교회의 인기있는 목사가 될 수 있어!라는 사단의 음성이 들려 왔다. 결국 내가 목회를 중단하게 되면 나에게 맡겨져 있는 이 사랑하는 영혼들은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결국, 목회를 중단하게 되면 이들에 대한 영적인 영향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으므로 좀더 지헤롭게 처신해야겠다고 생각함으로써 내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타협의 길
 나는 잠시 기다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영향력 있는 장로님들이 나의 기별에 동의하고, 아내가 나의 부담을 이해하고, 교인들이 나의 설교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 하나님의 진리를 곧바로 설교하는 일을 뒤로 미루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설교를 할 때마다 여러번 진리를 타협하게 되었으며, 양심 속에서 부르짖는 죄책감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타협의 과정 속에서 내 마음 속에 있던 진리에 대한 사랑과 능력있는 설교자가 되겠다는 순결한 포부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내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목사들처럼 나 역시 성공적인 목회는 교인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는데서 시작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나역시 그들처럼 정치적인 목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하나님의 진실한 종으로부터 사단의 효과적인 종으로 변모해 가고 있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는 상태에서 계속적으로 진리를 타협하는 목회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점점 인기와 평판을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돈과 명예를 은근히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나는 교인들의 시선을 하나님의 시선보다 두려워 하게 되었고, 교인들의 숫자를 늘리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일을 복음을 전파하는 일로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하여 고용된 삯꾼으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담임하고 있던 교회 속에 유행과 세속과 이기심과 탐욕이 넘실거리고 있었지만, 나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만 설교하였고, 죄와 세속을 지적하거나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해서는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교인들이 세속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그리스도의 길을 걷게 될 것이야라고 막연하게 기대함으로써 자신을 합리화하고 기만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나는 다른 목사들이 부러워하는 대형 교회의 목사로 부름을 받게 되었고, 내 아래에 젊은 전도사들을 몇명 거느리는 사장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전도사가 가끔씩 나의 목회 지침과 설교에 대해서 질문하거나 도전할 때마다, 과거에 내가 들었었던 노련하고 지혜있는 말로 충고 해주었습니다. 그들에게 내가 어떻게 이렇게 큰 교회를 맡을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고, 어떻게 하면 교회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들 중의 어떤 전도사는 석연찮은 얼굴을 하면서 나의 충고를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이라고 도전하였지만, 나는 약간 분노가 섞인 음성으로 노련하게 그들의 도전을 잠재웠습니다. 그러한 전도사를 볼 때마다, 나는 젊은 시절에 가지고 있었던 나의 단순함과 미숙함을 회상하게 되었습니다.

회한의 눈물
 
무엇보다도 슬픈 사실은, 이러한 모습을 내 자신에게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많은 내 동료 목사들에게서도 이러한 형편을 종종 보았는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죄를 합리화 하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나는 설교를 곧바르게 하지 않으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크게 느끼지 않을 정도로 영적 어두움에 갖혀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실수로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목회를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분의 요구에 위배되는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첫번째 초림하시는 길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침례 요한이 일어나서 곧바른 기별을 백성들에게 전하였던 것처럼, 마지막 시대에 예수께서 두번째 재림하실 때에도 그분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백성들에게 예리하고 곧바른 기별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교회 안에서 곧바른 설교에 대항하여 일어서는 장로들과 집사들의 압력이 두려워서 설교 내용을 듣기 좋고 반대를 받지 않을만한 내용으로 다듬었던 것입니다.

 이제 은퇴를 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얼마남지 않은 나의 인생길을 덮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양심의 가책과 고뇌로 인하여 내 영혼에는 쉼이 없습니다. 젊은 시절에 나의 목회를 통하여 죽어간 양들을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은 절망과 죄책감으로 고통당합니다. 젊은 시절에 있었던 나의 굴복과 타협에 대한 깊은 회한이 나의 영혼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당신의 목회는 성공적입니다라는 말을 듣기 위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포기했었던 나의 결정에 대한 후회가 나의 얼굴에 깊은 근심의 줄을 긋고 있습니다. 처음에 나를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셨지만, 나는 사단의 덫에 걸려서 그가 주문하는 대로 목회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치욕적 과거를 되돌아 볼 때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다시 목사의 길을 걸을 수 있다면... 이라는 생각이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지만, 시간은 이미 지나가 버렸습니다. 만일 나에게 다시 목회를 할 수 있는 젊음이 주어진다면, 하늘로부터 가브리엘 천사가 내려와서 하는 것과 같은 설교를 할텐데 라는 후회가 내 영혼을 엄습합니다. 교인들의 마음에 전율을 일으키는 진리를 전하며, 교회를 하나님의 진리 앞에 온전히 굴복시키는 기별을 전하고자 하는 소원이 내 마음을 전율시키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성결과 거룩함의 길을 걷도록 인도하는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싶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후배 목사들이시여, 마지막 시대에 부르심을 받은 목사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깊고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온 생애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굴복하는 헌신이 선제되어야만 합니다. 먼저, 자신의 생애와 가정에서 진실하고 정직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정직한 양심과 순결한 진리를 가지고 영혼들을 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목사들만이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가장 높으신 부르심에 올바로 응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목사들만이 내가 다시 목사가 될 수 있다면... 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3부 - 방황하는 목자, 방황하는 양떼, 방황하는 교회

 이 글은 비난도 아니고 비평도 아니다. 이 글은 내가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조용한 통곡이다.  이 글은 아무런 고민이나 갈등도 느끼지 않으면서 자신의 목적과 야망을 위하여 정신없이 뛰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글이 아니다. 이 글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양심의 가책과 괴로움으로 인하여 고뇌하고 있는 신실한 목자와 양떼들에게 보내는 글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예루살렘의 교회를 보면서 우셨던 것처럼, 진리와 정직과 고결한 표준을 버린 교회를 보면서 함께 탄식할 목자들과 양떼들에게 이 글을 보낸다.

목자와 양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 안에는 두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목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이고, 하나는 양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이다. 많은 목자들이 순결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복음 사업에 뛰어들고 있지만, 다음과 같은 두가지의 음성을 들으면서 깊은 고민에 잠기게 된다. 한쪽에서는 진리에 대한 충성과 영혼들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진리와 원칙의 표준을 낮추는 한이 있더라도 많은 교인들을 가진 큰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육체의 음성이 들려온다.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진실한 목자라면 어떤 음성에 자신의 생애를 굴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슬픈 사실은, 오늘날 많은 목자들이 두가지 음성 사이에서 한동안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후자를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목자가 이러한 결정을 하게 되면, 그는 자신의 목적이 성취될 때까지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 거룩한 원칙에 대해서 곧바르게 말함으로써, 교인들의 마음과 기분을 상하게 만들 수 있는 설교는 당분간 하지 말아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목자는 예수님의 사랑만을 이야기하면서, 양떼들의 부도덕과 부정직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버린다. 그리하여 문제없고 평화스런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이러한 교회 안에서 양떼들의 죄와 부패는 아무런 지적도 받지 않은 채 슬쩍 넘어가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죄에 대한 깊은 회개를 경험하는 일이 너무나 어렵게 된다. 마땅히 책망받아야 할 부도덕에 빠져 있는 양에게도 격려와 위로의 말씀이 함부로 사용되기 때문에 교회 안의 부도덕과 죄는 더욱 깊어만 간다. 이러한 양떼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덮어주고, 죄에 대한 면허증을 주는 도구로만 이해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한일서 2:15~16).

 참된 목적을 잃어버린 목자 아래에서 양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볼 기회도 잃어버린 채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거짓 확신 속에서 멸망을 향하여 달려가게 된다. 교회 안에 세속이 넘실거리고, 아슬아슬한 짧은 치마와 울긋불긋한 아주 짙은 화장, 그리고 부와 명예를 자랑하는 귀고리, 목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오는 양들의 예복이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에서 술과 담배 냄새가 진동하여도, 목자는 여전히 평온한 미소를 띄우면서 하나님의 사랑만을 이야기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로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셨고,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으니, 이제는 율법에 구속받을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이상한 복음이 부도덕과 죄에 빠져 있는 양떼들에게 강력한 신학적 핑계거리를 마련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과 사랑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의 핑계를 단번에 무너뜨리신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이루리라(마태복음 5:17).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한복음 14:15).

 대개 그러한 목사들은 양떼들에게 강력하고 영감적인 설교와 진리의 양식을 먹임으로써 교회를 사랑과 진리가 충만하게 만드는 대신에 , 자신의 행정력과 인간적인 정으로 양들을 묶어서 교회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그들은 양떼들을 오직 하나님께로만 이끄는 대신에, 하나님께로만 가야 할 영광을 자신과 하나님이 함께 나누어 가지고자 한다. 어리석은 양떼들은 교회의 권위에 충성하라는 설교를 들으면서, 목자에게 충성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라(누가복음 16:15). 오직 진리에 충성하는 자들만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자취를 감추고 만다. 성경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을 신중하게 점검하는 태도를 가진 양들의 숫자가 너무나 적다. 그 결과, 교회 활동에는 열심이 있지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무지한 양들로 자라난다. 이러한 목자가 다스리는 교회에는 많은 헌물을 바침으로써, 자신의 죄와 부정직과 부도덕함을 가리고 하나님께 가납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양떼들의 숫자가 늘어나게 된다. 목자는 스스로 판단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양들이 교회에 많이 생기면 생길 수록, 교회는 양적으로 더욱 더 빨리 성장한다는 비결을 배우게 된다.

목사의 권위
 
교회와 조직이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목자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욱 높은 권위를 가지게 된다. 무지한 양떼들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라는 말보다 우리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라는 말을 훨씬 많이 하도록 길들여져 간다. 성경의 분명한 진리를 눈앞에 대고 읽어주어도, 그들은 여전히 그래도 우리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는데요라는 말하는 고집스런 양들로 변해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마태복음 15:9). 너무나 많은 양떼들이 그리스도께로 인도되는 대신에 교파나 교회로 인도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교회의 주인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대신에, 목사나 장로나 교회의 조직을 교회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목자가 좀더 큰 교회를 가져야겠다는 야망을 품는 순간, 양떼들에게 침례와 직분을 주는 표준은 급격하게 떨어지게 된다. 더 많은 양떼를 가져야 겠다는 야망이 복음전파 사업의 순수성과 거룩함을 삼켜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대로와 골목을 점령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진리는 점점 더 듣기 어렵게 되고 있다. 교회는 날마다 늘어나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참된 양들을 만나기는 점점 더 어렵게 되고 있다. 교회가 그 거룩한 목적과 사명을 저버리자, 교회는 세속과 유행의 물결에 대하여 문을 열게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교회와 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뚜렸한 경계선은 무너져 버렸다. 그 결과,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되어 버렸다. 신문과 뉴스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는 목자와 양떼들의 부패상은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하여 등을 돌리도록 만들고 있다.

 교회가 세상과 같아지자, 하나님의 은혜가 가치없이 함부로 나누어 지게 되었다. 교회는 양에게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받아들였다는 결정적인 열매가 나타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었다는 표적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제시하는 집사와 장로의 자격을 무시한 채, 침례를 주거나 직분을 줌으로써 양들을 교회에 붙잡아 두려고 하고 있다. 사단은 양떼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 노심초사 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를 거짓 양들로 채우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위험 속에 있는 목자와 양떼들에게 보내는 호소
 
이 글은 비난이 아니라 사랑의 경고이다. 이 글은 그 길로 계속가면, 죽게 되니 제발 그 길로 가지 마세요!라는 호소이다. 교회가 세속적인 양떼들에게 인기있는 것으로 되려고 노력하면 할 수록, 교회는 세상을 닮아가게 된다. 교회가 타락하고 세속화되어 세상과 별다른 차이를 나타내지 못할 때, 세상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양들은 어디로 찾아가야 하는가? 멸망해 가는 세상이 하나님의 진리와 원칙을 보고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오직 교회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어느날, 부자 청년 법관이 예수께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계명을 지키라고 대답하셨는데, 이에 법관이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나이다라고 응답하자, 네가 원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는 말로서 계명을 지키는 참된 정신을 가르치시면서 그 부자 법관의 마음에 숨겨져 있던 이기심을 지적하시자, 그는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되돌아 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마태복음 19:16~24). 만일 예수께서 그 부자 법관의 이기심과 죄를 적당하게 눈감아 주었더라면, 예수께서는 그 사람의 적극적인 후원과 영향력 하에서 경제적으로 훨씬 더 쉬운 목회 사업을 하였을 것이다. 만일 예수께서 그를 위하여 표준과 원칙을 조금만 낮추었더라면, 그분께서는 훨씬 더많은 인정과 환영 속에서 그분의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목적은 이 땅에서 당신을 따르는 양들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분의 유일한 목적은 이 땅의 죄인들에게 구원에 대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소개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진리와 원칙을 분명하게 제시해야만 하였던 것이다.

 지금은 부드러운 설교를 할 때가 아니다. 세상의 부도덕과 부정직과 세속적 유행이 하나님의 교회 안을 넘실거리고 있는 이 때, 누가 분명한 기별을 전함으로써 하나님의 양들을 깊은 잠에서 깨울 것인가?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 (이사야 58:1). 목자가 나팔을 크고 분명하게 불어서 양들을 깨우지 못하는 이유는, 혹시 목자 자신이 세상과 하나가 되어서 깊은 잠에 빠져있기 때문은 아닌가? 혹시, 목자 자신이 죄의 종이 되어 있기 때문은 아닌가?

 이제 세상은 교회의 원수가 아니라 친구가 되었다.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야고보서 4:4). 하나님의 교회 안에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함께 섞여 있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속된 것이 거룩한 것을 압도하는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되었다. 언제나 교회 안에서 충실한 책망과 경고의 나팔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인가? 누가 외로움 속에서 진리대로 살아가는 진짜 양들을 격려하고, 죄와 세상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거짓 양들을 책망할 것인가? 과거에 예례미야 선지자가 배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기없는 기별을 전했던 것처럼, 오늘날 누가 패역한 양떼들에게 철저한 부흥과 개혁을 촉구하는 인기없는 기별을 전할 것인가? 거듭나지 않은 양떼들은 언제나 부드럽고 평화로운 설교만을 요구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보다는 철학이나 우화나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원한다. 어떤 목자가 그들에게 성령의 음성을 들려줌으로써 그들을 회개의 길로 인도할 것인가? 선한 목자는 우둔한 양떼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듣기 좋은 것으로 깎아 내리거나 다듬지 않는다.

사단의 전략
 
사단은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일어날 정도로 갑자기 일하지 않는다. 사단은 거대한 죄와 배도를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매우 여러 단계로 된 작은 타협의 계단들을 만들어 놓는다. 그는 교인들에게 다른 집사님이나 장로님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해도 괜찮을 거야라는 생각을 하도록 유도한다. 사단은 화장이나 목거리와 같은 장식물에 대해서, 어떤 목사나 교인이 용기를 가지고 일어나서 이야기 할 때에 그를 극단적이고 사랑이 부족한 율법주의적인 사람이라고 몰아부침으로써 참된 사랑을 왜곡시킨다. 사단은 교인들이 죄와 세속에 대하여 아주 조금은 괜찮아. 그 정도는 괜찮아라는 말을 하도록 자극함으로써, 결국에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성취시킨다.

 사단은 여인들이 입는 치마의 길이를 무릎 훨씬 위로 끌어올렸으며, 이제는 허벅지가 허옇게 보이는 치마를 입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가도록 양떼들을 훈련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양떼들이 입술과 손톱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교회에 와도, 전혀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할 정도로 교회는 세상에 익숙해져 있다. 유행과 세속의 사교장이 되어버린 교회의 숫자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이제, 사단은 교인들로 하여금 돈이 가지고 있는 위력이 교회 안에서도 통하는 모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데에도 성공하였다. 돈많은 집사와 돈많은 장로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세속적인 아이디어로 이끌어가도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만일 우리의 눈으로 세속과 유행과 돈을 이용하여 교회 전체를 암흑 속으로 끌어 가고 있는 사단의 계략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지금처럼 느긋하고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교회 안에 있는 세속과 죄로 인하여, 우리 가족들의 영혼이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되고 있는 모습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죄에 대해서 지금보다 훨씬 강력하고 용감하게 대처할 것이며, 죄와 세상에 대하여 동일한 책임감과 경각심을 가지고 연합하여 일어서게 될 것이다.

 사단이 세워놓은 최고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상의 요구에 민감하게 만들고, 죄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단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세상이 요구하는 바에는 쉽게 굴복하고 타협하지만, 그리스도의 뜻과 그분의 진리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양떼들을 보면서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다.

무엇이 목자들과 양떼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병의 증세들을 살펴보았다. 유행과 세속, 사치, 쾌락, 죄에 대한 무감각, 세상적인 사고방식 등등. 이러한 모든 문제들이 지금 하나님의 교회가 겉으로 나타내고 있는 증세들이다. 그런데, 마땅히 거룩하고 경건해야 할 목자들과 양떼들에게 왜 이러한 문제들이 생기게 되었을까? 우리는 종종 병의 증세만을 쫓아다니다가 질병의 진정한 원인을 놓치는 실수를 하기 쉽다. 무엇이 진짜 핵심 원인인가?

 그것은 거짓 복음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율법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다. 그들은 사랑과 율법을 분리시킨 다음에, 사랑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여 버리려고 애쓴다. 그러나 사랑은 율법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로마서 13:10). 여기서 바울은 참 사랑을 가진 자마다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 바울의 선언은 율법을 범하는 죗된 생애를 살아도, 사랑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다는 거짓 복음의 위험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율법에 기록된 도덕적 원칙들이 무시된 무분별한 사랑이 구원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짐에 따라서, 죄와 세상에 대하여 승리하는 경건한 생애에 대한 관심은 사라져 가고 있다. 물론, 구원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거저 나누어지는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구원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숫자는 너무나 적어 보인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양떼들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결국, 최후의 심판날에 가서는, 모든 양떼들은 자신들이 생애한 바에 따라서 진짜 그리스도인과 가짜 그리스도인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진리에 충성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경건한 생애를 살지 않는 사람들은 거짓 양들이라는 선언을 듣게 될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어버지의 뜻대로 행한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 예수께서는 비록 많은 헌신과 열심으로 주의 사업을 하였지만, 당신의 율법을 범하는 죗된 생애를 살았기 때문에 멸망에 들어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실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멀리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2~23). 그들의 신앙에는 원칙과 도덕이 결여된 인간적 사랑만이 있을 뿐,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는 부도덕한 생애를 살았다. 그들은 영생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교회활동과 주님의 사업에 참여하였지만, 희생과 극기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과 원수되는 삶을 살지 않았다. 그들은 주께서 지정하신 좁은 길을 걷는 대신에, 육체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대다수의 군중과 함께 넓은 길을 따라가기로 선택하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또 하나의 진리가 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경건한 생활을 살지 못해도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은 보장됩니다라는 달콤한 설교가 수많은 양떼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신앙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3:31). 여기서 바울은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율법을 굳건하게 지키는 삶을 산다는 진리를 선언하고 있다. 믿음과 율법은 서로 경쟁하거나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충하고 협조한다. 참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열매를 맺는 생애를 살게된다는 가르침이야말로, 믿음과 순종과 구원에 대한 가장 균형있는 진리이다. 그러나 잘못된 오류에 빠져 있는 양떼들은 하나님의 영께서 양심 속에 들려주시는 진리와 의에 대한 확신을 계속해서 거절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의 구원 안에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과거 중세기에서부터 시작된 잘못된 오류들이, 이제는 교회 안에서 진리를 누르고 승리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진리대로 살고,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는 경건한 생활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행위에 의존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들이라는 핀잔을 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무너짐에 따라서, 사람들의 신앙과 사상은 방종의 길을 달리게 되었으며, 신앙과 사상이 무분별한 감정적 사랑에 오염됨에 따라서, 각종 세속과 유행과 부도덕이 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급속하게 세속화되어 가고 있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기억하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을 무너뜨리는 자마다, 방종과 세속의 길을 걷다가 결국에는 사단이 속삭이는 논리와 이론에 미혹되어서 어둠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4부 - 이제야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 고뇌와 방황의 길

 이 글의 저자인 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곧바른 기별을 전하는 목사로서 희생적인 생애를 살다가 간 일본 기독교계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간추린 신앙 고백을 통하여 그 속에 비추어져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과 영적 위치를 확인해 보도록 하자. ­ 편집실 -

깨어진 나의 첫 결심
 
내가 처음으로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접했을 때, 나는 그 도덕의 고결함과 위엄에 탄복하였다. 성경은 나의 불결함과 불완전함을 깊이 깨닫게 만든 유일한 책이었다. 내 말과 내 행실, 그리고 나의 사상을 성경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더럽기 이를 데 없었다. 내 생활은 은근한 기만과 거짓과 위선으로 온통 얼룩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삶을 살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면서 좋아하였고, 다른 사람을 넘어뜨려서까지라도 성공하기를 원했다. 나의 목적은 언제나 아름답고 보기 좋은 것으로 위장되어 있었지만, 진정한 목적은 내 자신의 이기심과 명예를 채우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도덕군자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매우 공격적인 야심가였던 것이다. 내 생애의 목적은 비루하였고, 사상은 더러웠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된 이후로부터, 나는 나의 모든 사상과 행실을 완전히 개혁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이제부터 내 말과 행실을 완전히 뜯어 고치겠다.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남을 비평하거나 중상하지 않겠다. 정욕을 억제하겠다. 게으름을 피우지 않겠다. 원수를 사랑으로 갚겠다.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정신을 버리고 겸손하겠다. 술, 담배, 극장 구경도 중단하겠다. 나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겠다. 그야말로 전격적인 개혁을 선언하였다. 굳게 결심한 이 마음, 다시는 흔들리지 않으리! 라는 결심과 함께 내 자신이 새롭게 거듭났다고 굳게 믿었다.

 한동안 내 결심은 잘 실행되었다. 나의 회심이 너무나 전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어떤 친구들은 나의 그러한 변화를 싫어했다. 어제까지의 떠버리가 이제는 침묵가가 되었고, 나의 이야기 속에는 회개의 눈물과 성경절의 인용이 있었다. 나는 마치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듯한 생활을 살았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개혁이 유익한 것이긴 했지만, 인위적으로 조작된 성결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한 채 기독교인으로서의 겉모양만을 흉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언행과 생각은 다시 옛 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의 부자연스러운 생활은 내 주변 가족들과 친구들을 어색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내 자신마저 부자유스럽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얼마가지 않아서 나는 완전히 옛날의 상태로 돌아가고 말았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유일한 표시는 매 주일마다 냉랭한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아침 저녁으로 머리를 숙여서 무의미한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였다. 교회에서나 어디서든지 친구들과 만나 이야기 할 때는 목사님이나 다른 사람의 흠을 찾고 비판하기가 일쑤였다. 내 마음에는 평안이 없었다.

 나는 야고보가 기록한 말씀을 읽을 때마다 내 양심은 끌로 쪼이는 듯한 아픔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만일 내가 나의 말많은 습관과 다른 죄의 습관들을 억제하지 못한다면, 내가 믿는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이 내게 무슨 유익이 된단 말인가? 내 자신은 성경이 말하는 명백한 가르침과 교훈에 따라 살지도 않으면서,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는 죄를 회개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철면피가 극에 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나는 위선자이다. 참된 변화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한 내가 무슨 면목으로 남에게 기독교회의 신앙을 권하겠는가?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은 내 영혼에 해결할 수 없는 고통과 고뇌를 가져다 주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약속하고 있는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 내 영혼은 깊은 좌절과 고뇌의 미로를 헤메게 되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그 때부터 나는 영혼의 평안을 찾기 위해서 수십년 동안 방황하였다.

율법의 정죄로부터 시작된 고뇌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은 나의 마음과 생애를 정죄하기 시작하였다. 그 정죄의 크기와 깊이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차라리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짐승이었으면 이라는 생각이 떠오를 정도였다. 성경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모두 살인자다 너희가 아는 대로 살인자는 누구나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원한과 용서하지 못하는 정신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 말씀이 너무나 지나친 말씀이라고 생각되었지만, 그 말씀 역시 진리였다. 증오는 결과적으로 살인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증오심이 언제나 살인이라는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그 사람의 교육, 환경, 체면 등에 의해서 조절되기 때문이다. 만일 국가의 법과 사회의 제재가 없고, 살인자는 저생에서 지옥불에 떨어진다고 가르치는 종교가 없다면, 사람은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을 결국에는 죽이고 말 것이다. 마음 속에 증오심이 뿌리를 내릴 때마다 이미 살인은 시작된 것이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 역시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것은 무릇 하늘이 베풀지 않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나는 위선자고, 살인자며, 도둑질한 자였다. 성경이라는 빛으로 나를 살펴볼 때마다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절망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알지 못하였을 때에는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그다지 큰 고통이 없었는데, 죄와 죄의 결과를 안 후로는 죄를 범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고뇌가 나를 압도하였다 그런데 매우 놀랄만한 사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한 고민과 고뇌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깊은 절망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치료하기 위해서 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환자들을 불러들이는 돌팔이 목사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멸망의 골짜기로 걸어가고 있다. 그러한 목사들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죄에 대해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라고 물으면, 그들은 한결같이 연약한 인간은 원래 죄를 범한 다음, 그것을 후회하고 또한 그 결과를 두려워 한답니다. 그런 다음, 죄를 범한 자신에 대해서 절망감을 느끼게 되죠. 그러면서도 똑 같은 죄를 반복해서 범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랍니다. 비록 그러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교회 활동에 열심히 참석하고 잘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느니 안심하고 교회에만 열심히 나오십시요 라고 답변한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말인가? 정말 그러한 삶이 성경이 말하는 이기는 자의 경험이란 말인가? 나는 반드시 이 문제에 대한 진리를 찾아내기로 결심하였다.

교회 안에서의 외로움
 
오늘날,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신자의 고통과 눈물은,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기도회, 부흥회에 참석하는 것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든 의무를 완수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전혀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자신의 죄에 대하여 깊은 고통과 슬픔을 느끼는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서조차 외로움과 설움을 맛보게 된다. 가끔씩 내가 교회를 위하여 곧바른 말을 하면, 그들은 나를 사랑이 없는 율법주의자로 몰아부쳤다. 아, 교회 안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한단 말인가? 교회는 나에게 죄를 강요하고 있다. 죄를 죄로 느끼지 않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나는 매우 외로운 세월을 보내야만 하였다. 그들의 설교나 신앙 태도는 나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죄에서 구원받으려는 자는 그리스도 교회로 오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방패 삼아서 대담무쌍하게 죄를 범하고자 하는 자들도 교회로 오라! 오늘날, 교회는 신자들에게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소개하고 있지만, 율법에 대해서 올바로 알려주지 않음으로써 교인들을 대담한 무법자로 양육시켜 가고 있다. 또한 어떻게 하면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가를 안내해 주지 않음으로써 교인들을 지옥불에 대하여 두려워 떠는 신경쇠약 환자로 만들고 있다.

교회 안에서 얻지 못한 대답
 
나는 내 죄가 부끄러워서 하나님을 피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손을 놓지 않으셨다. 나는 하나님의 겨누는 표적이 된 듯하였고, 그의 화살에 맞아서 비틀거렸으며 그의 손이 나를 누르셨다. 죄로 인한 가책으로 인하여 나는 완전히 삶의 즐거움을 잃고 말았다. 식욕을 잃고 밤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일할 기력조차 없었다. 하루는 유명한 목사님을 찾아가 내 영혼의 고통을 말하면서 도움을 구했으나 나는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다는 대답을 줄 뿐이었다. 죄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성경과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설명하지 못하는 목사야말로 자신이 왜 목사가 되었는지를 모르는 성직자라고 말할 수 있다. 죄의 문제에 대한 명백한 답변을 가지고 있지 못한 어떠한 신앙이나 종교도 모두 거짓이다.

봉사와 희생의 위험성
 
나는 희생적인 봉사를 통하여 영혼의 고통을 잊기로 결심하였다.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선과 봉사를 통하여 죄로 인한 양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심지어는 교회에 바치는 헌금을 통하여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나 역시 한때 자선과 봉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참된 경험을 얻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빈민 구호 병원에 보조 간호원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발을 씻기고 배설물을 닦아주며, 환자들로부터 온갖 욕설을 들으면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인내의 수련을 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자선과 봉사는 사랑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진리를 깨닫고 나서부터 이 문제에 있어서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자선과 봉사 사업에 종사하면 결국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관념은 사실처럼 보이지만, 진리는 아니다. 자선과 봉사의 행위가 자비로운 마음을 배양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결코 우리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사랑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자신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사랑 이상의 봉사와 자선을 억지로 이끌어 낼 경우, 자선은 위선이 되고, 봉사는 교만으로 발전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회를 위하여 수많은 자선과 봉사를 베푼 사람이 결국에는 교만한 목사와 장로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선과 봉사가 나를 교만하게 만든다면, 나의 선행은 나의 원수이다. 이러한 경우에 자선과 봉사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교만과 위선의 깊이는 깊어진다.

 조심하라! 고아원을 세워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봉사하려고 하는 자여! 세상이 그대의 자선심을 인정하고 교회가 그대의 신앙적 헌신을 칭찬할 때, 그대는 바로 지옥의 벼랑길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자신의 죄를 해결하지 않은 채 자선 사업가가 되기를 원하는 자가 있는가? 조심하라!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싶어하는 정치가와 연예인들이 자선 사업에 많은 돈을 투자하는 모습을 보라! 그와 마찬가지로, 거듭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도 자선과 봉사를 인기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설교를 잘 하지 못하는 야심적인 목사도 자선가가 되면, 세상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자선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칭찬하지 말라! 너는 남을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구제를 은밀히 하라. 그리하면 은밀히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니라 (마태복음 6:4).

5부 - 이제야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 평안과 구원의 길

 마지막 시도, 목사의 길
 
자선 사업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한 나는 마침내 극단적인 수단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목회 사업에 투신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세상에 위선적이고 파렴치한 사람들이 많지만, 목사보다 더한 사람이 있을까?

 사실 과거에 나에게 여러 사람이 신학 공부를 권했었다. 그러나 나는 목사를 나의 직업으로 택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하는 목사는 내가 생각하는 목사와 달랐다. 나는 바울과 같은 목사가 되고 싶었다. 나는 루터와 같은 목사가 되기를 갈망하였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제대로 성경을 배우지 못했고, 충분한 경험이 없으며, 자신의 죄와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해방되는 경험을 알지도 못하고,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신학대학을 졸업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목사가 되어서 설교 단상에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목사직에 대해서 환멸을 느껴왔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마지막 제물을 바치고 목사로서 최대의 고난을 받는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에 평안을 주실 것이다 라고 믿었다. 내 영혼의 평안을 위해서라면, 목사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신학교에서 기도와 단식으로 인생 최대의 행복을 얻고자 하였다.

신학교에서의 실망
 
신학교에서 배운 어떤 학문들은 나의 사상에 있어서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특히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연구를 통해서 나는 모세와 바울을 직접 대면하는 듯한 감격을 맛보았다. 그러나 신학이라는 학문을 여기서 제한하였더라면 좋았을텐데, 유감스럽게도 진지한 성경 연구는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오히려 영혼을 구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웅변학, 설교학, 목회학, 변증학과 같은 것들을 공부하는 데 많은 시간을 바쳐야만 하였다. 나는 모세와 바울이 배웠던 신학을 배우고 싶었지만, 신학교는 나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신학교 역시 나의 영혼에 평화를 가져다 주지 못했다. 신학교의 아침 기도회, 쉴 새 없는 찬미소리도 내 마음 속에 있는 죄의 사슬을 벗겨주지 못했다. 성경 연구, 기도, 찬미와 같은 것들이 학문의 대상이 되고, 의무로서 나에게 부담을 주었을 때, 그러한 것들이 더 이상 거룩한 힘으로 내게 다가오지 못했다. 더우기 종교 비판학과 같은 강의 시간에는 두려운 마음 없이는 입 밖에 낼 수 없는 거룩한 이름을 마치 오래된 돌멩이나 나무조각의 이름처럼 불러댔다. 신학교에서 내가 경험했던 위험은 바로 신성모독의 죄였다.

 신성모독에 대한 형벌은 마음이 죄의 죄됨을 느낄 수 없는 상태로 전락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거룩한 성경 말씀이 죄인의 심령을 치료하고 죄의 사슬을 끊어주는 능력으로 다가오는 대신에 하나의 학문과 학설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나는 죄의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얻으려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신학교에 있는 어떤 교수들은 죄를 계속해서 범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신학을 나에게 강요하였다. 나는 신학교에서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는 문을 발견하곤 더 깊은 좌절에 빠지고 말았다.

 신학의 중심은 마음에 있어야 한다. 전도는 정신이지 기술이 아니다. 목사의 설교는 배우의 연극이 아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도, 특별한 하늘의 계시와 영감이 없이도, 그리스도에 대한 순결한 사랑을 맛보지 못한 사람도 신학생이 될 수 있다. 그러한 신학생들에게 하나님의 복음 사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이 현대 신학교가 가지고 있는 맹점이다. 설교는 제조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바울의 글은 문법적으로 분석하고 해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되어야 비로소 바울의 사상과 경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목사의 양성은 신학교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훌륭한 종교가 중에는 신학교 출신이 많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길리얏의 야인이었으며, 그의 사업과 정신을 물려주려고 선택한 후계자 역시 소를 모는 사밧의 아들 엘리사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사 세상을 구하려고 계획하셨을 때에도, 당신의 아들을 히렐이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우게 하지 않으시고 나사렛 벽촌에 두셔서 천연계를 통하여 아들을 친히 가르치셨다. 신학교가 만들어 낸 목사야말로 그리스도 교회의 가장 위험한 원수이다.

신학자와 목사가 만들어 놓은 거짓 평안
 
죄의 죗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의 은혜됨을 알 수가 없다. 자기 죄의 무서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에 대한 절실한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은 하지만 그 마음 속에 절실한 감사와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다.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에 들어온 가장 큰 위험은 죄를 어쩔 수 없는 인생의 부산물로서 가르치는 것이다.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죄에 대해서 그렇게 가르친다. 그들은 죄를 도저히 승리할 수 없는 것으로 부각시킴으로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의 율법은 너무나 거룩해서 도저히 순종할 수 없다는 식의 설교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죄를 범하고도 그것을 심각한 죄로 생각하지 않게 되며, 따라서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죄인으로서 열렬히 구해야 할 십자가의 보혈과 은혜를 마음 속 깊이 구하지 않게 된다. 죄를 범한 죄인은 죄책감에 눌리게 되고, 죄인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께 나오도록 계획하신 것이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인데, 신학자들은 죄 가운데서도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신학을 고안해 냄으로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죄인들의 마음에 거짓 평안을 넣어 주었다. 죄를 범한 사람은 마땅히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오직 죄를 회개하였거나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만이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죄를 생각하지 않거나, 인위적으로 율법을 폐지시킨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거나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시도는 죄를 죗되게 하지 않음으로써, 은혜를 은혜되지 않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내가 깨달은 오해 - 죄에서 벗어나는 길
 
죄란 무엇인가? 노하는 것, 도둑질 하는 것 등이 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왜 노하고 도둑질하는가? 어찌하여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것일까? 악이란 음행,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원수맺기... 질투, 술주정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육체의 죗된 행위는 마음에 깃든 병이 겉으로 드러난 증세이지, 병 자체는 아닌 것인가? 많은 고뇌와 투쟁 끝에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육체의 죗된 행위 하나 하나와 싸우는 일을 중단하기로 결정하였다. 왜냐하면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는 결코 죄에 대해서 승리하거나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만일 겉으로 드러난 죗된 행위 자체가 악의 본질이 아니라면, 선한 행위 자체도 선이 아닐 것이다. 이름을 날리기 위한 자선, 더 좋은 것을 얻어내기 위한 기부금은 자선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것도 반드시 선은 아니다. 야심적인 목사, 세속적인 신앙인처럼 추한 모습은 세상에 다시 없다. 선은 정신이지 행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선한 행위는 선이 겉으로 드러난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비록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 주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고 해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도 없다고 증언하였던 것이다(고전 13:3).

 한번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께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에는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담고 있다.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니 곧 하나님이시다. 무엇이 선이냐는 질문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선은 하나님이다라고 답변하셨다. 선 자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알면 의인이 될 수 있다. 선을 배우면 하나님께 가까워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 선을 행할 수 없다. 종교와 도덕적 행위와 신앙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이다. 한쪽을 버리고서는 다른 쪽을 이해할 수 없다. 선이 하나님이라면, 악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 도둑질, 살인, 간음은 하나님을 떠난 결과이지 죄의 근본 원인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율법을 의도적으로 범하는 죄를 짓는 것은 내가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결코 죄를 범할 수 없으며 죗된 생각이 나를 주장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의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죄에서 벗어나는 길, 영혼의 평안을 찾는 길, 그것은 오직 이 길 뿐이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
 
신앙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신앙이란 납득할 수 없는 일을 믿는 것이 아니다. 신앙이란 양심과 성경에 근거해서 의로운 선택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 교회에서 말하는 신앙이란,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마음과 심령의 전적인 동의를 말한다. 그런데 마음과 심령의 하는 일은 의지와 양심의 선택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면, 양심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믿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아무리 부도덕하고 부절제한 목사라도 성경에 기록된 진리대로 순종하는 사람만이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설교를 하지만, 과연 몇명의 목사들이 자신이 설교하는 진리를 믿으면서 그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가?

나의 오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왕과 신하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자애로운 어머니와 갓 태어난 아기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아기는 어머니께로부터 만가지를 받지만, 아기는 어머니께 하나도 드리지 못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는 우리의 신뢰 자체도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을 깨달았기 때문에 생긴 선물이다. 우리가 우리의 재산과 몸과 영혼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되돌려 드리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주시는 자요, 인간은 항상 받는 자이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없지만, 하나님은 그분 자체가 사랑이시며 사랑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봄으로써, 그분의 사랑이 자신의 마음 속에 새겨지도록 허용해야만 한다.

 그렇다! 나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분의 선하심을 알았다. 그리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결심도 하였고, 어느 정도 그분의 사랑도 알았다. 그러나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그분을 신뢰할 정도로 그분의 사랑을 알지 못했다.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배반하는 탕자가 되거나, 비록 부모 밑에 있을지라도 의무감에서 어쩔 수 없이 순종을 하면서 마음 속에 불만이 가득한 자식으로 자라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 역시 일상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된다. 나는 내 영혼이 구원을 받기 전에 성인의 거룩한 행위를 흉내내려고 했다. 나의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의 관심과 호의를 얻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선한 행위와 의로서 하나님의 친구가 되고, 나중에는 나의 구원에 대해서 그분과 대등한 계약을 맺으려고 계획했었다. 나는 지음을 받은 자면서도 지은 자의 흉내를 냈던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기이면서 우주의 창조 사업에 동참했던 그의 파트너나 된 것처럼 행동하였다.

 아, 나는 얼마나 미련했던가!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이 은혜와 사랑을 주려고 호소하시면서 나를 찾아오셨건만, 나는 오히려 왜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까? 왜 나를 사랑해 주지 않습니까? 라고 하나님께 대들었던 것이다. 지나간 생애 동안에 하나님께서 나의 선한 행위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실 때까지 기다렸던 적이 얼마나 많던가?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분의 손에 나를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나의 잘못은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그분의 사랑을 충분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무한한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는가? 먼저 내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난 후에 하나님께 나아가야지 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떻게 내 스스로 나를 깨끗케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 이외에 누가 나를 죄로부터 깨끗케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의 손을 놓음으로 흙탕에 빠지게 된 어린아기가 스스로 자신을 깨끗하게 씻을 때까지 어머니께 올 수 없단 말인가? 사랑의 어머니는 오히려 아이가 머뭇거리면서 더디 온 것을 책망하고 곧 새옷으로 갈아 입힐 것이다. 하물며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겠는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증거를 얻기 위해서 자꾸 눈에 보이는 특별한 기적과 은사를 요구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해 놓으신 용서에 대한 증거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십자가를 통한 변화의 길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행전 4:12).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원하시는 힘을 가지고 계시다. 모세의 율법을 몸에 두르고 엄격하고도 청렴한 바리새파인 다소 출신의 바울도 그 마음의 고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재능과 학식을 분토로 여기고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참회하며 용서함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독일에 한 청년이 있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번뇌케 하여 그는 불안한 나머지 단식과 절제를 통하여 선을 쌓기 위해서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어쩌랴, 그가 외모를 꾸미면 꾸밀 수록 악한 생각이 끊임없이 마음에서 솟아나왔다. 그 때에 스승인 슈타우비츠의 한마디가 그에게 영감을 가져왔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은 루터의 죄를 용서하셨고 온 우주는 버림받았던 자식을 건져 올렸다. 그 후로 루터는 믿음과 성결을 강조하는 강력한 종교 개혁자가 되었지만, 오늘날 그의 후예들은 루터가 말한 믿음을 죄를 겁 없이 범할 수 있는 보험카드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믿기만 하면 어떠한 생애를 살던지 간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설교를 하게 된 것이다.

 나 역시 죄가 가져온 온갖 고뇌와 고통 속에서 방황하다가 모든 기력을 탈진하고 나서야 아버지의 자비만을 바라보면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범한 죄에 대해서 변명하지 않고, 내가 행한 의와 선한 행위를 내세우지도 않았다. 다만 태초 이전부터 예비해 두신 하나님의 어린양이 이루어 놓은 속죄만을 바라보았다. 하나님이시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시고 나의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용서해 주십시요. 저는 이제 당신께 드릴 선행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는 선행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피곤에 지친 몸과 정신, 그리고 깨어진 마음 뿐입니다. 이러한 기도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가 내 영혼 깊숙히 스며 들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에 대하여 너의 제물은 받아들여졌다. 너는 낡은 옷을 벗고 내가 너를 위하여 준비해 둔 의의 옷을 입어라 라고 말씀해 주셨다. 이제 나의 기도에는 내 소원을 요구하는 주장이 없어졌다. 다만 그리스도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간청만이 있을 뿐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넘칠 뿐이다.

 이제 유일한 나의 의무는 단지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다. 나의 기대는 노력과 희생에 대한 보수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에 대한 약속된 보상으로 달라졌다. 나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막대한 청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노력과 봉사에 대해서 최선의 선물로 축복해 주셨다. 먹고 입는 것에 대한 근심은 사라져 버렸고,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졌다. 오직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라는 말씀에 대한 느긋한 신뢰가 생겼다(롬 8:32).

 더 이상 나는 의무로서 선을 행하지 않게 되었다. 전도든지 자선이든지 간에 즐거움과 만족한 마음을 가지고 행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말과 생활에는 순결한 유머와 여유가 넘치게 되었고,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의미있는 희생과 봉사를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서 바칠 수 있게 되었다. 희생, 절제, 극기와 같은 것들이 더 이상 하기 힘든 의무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고,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를 위해서 바칠 수 있는 다시 없는 특권으로 생각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베푸신 구원에 참여하게 된 이후부터 선에 대한 의무는 즐거움으로 바뀌게 되었고, 죄를 짓는 것은 더할 수 없는 고통이 되었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게 되었고, 악을 미워하기 때문에 악을 행하지 않게 되었다. 율법은 더 이상 내게 무거운 짐이 되지 않았으며, 다음과 같은 사도 요한의 말이 이해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3).

 구세주의 사업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진다. 첫째는 인류에게 완전한 생애를 가르치는 것이고, 둘째는 인류의 죄를 당신 자신이 직접 짊어지심으로써 제거하시는 일이다. 전자는 최종 목적이고, 후자는 전자로 인도하는 필요 수단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죄인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죄를 속죄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죄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진실로 용서받은 경험을 하지 못하면, 그 죄인은 결코 죄를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는 속죄의 교리를 죄에 대한 값싼 용서에 국한시킴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구세주의 모본을 쫓아서 따라가는 성화의 경험을 빼앗아 버렸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를 속하셨으니 이제 나는 애써 선행을 하지 않아도 되며, 죄를 범해도 구원에는 지장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리요 (롬 6:1). 내 경우에 있어서 처음에는 모세의 율법이 부각되었고, 그 후에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다가왔다. 어떤 의미에서 율법의 엄한 밧줄로 자신을 얽어 맨 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 교회에는 속죄의 교리를 가지고 자신의 죄와 부도덕함을 가리우려고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이루어진 은혜가 눈 먼 자들에 의해서 희롱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깊은 염려와 슬픔에 잠기게 된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의를 사모하는 자들의 휴식처이지, 악인의 은신처가 아니다. 구약의 엄격한 십계명을 가르치지 않고, 신약의 은혜만을 부드럽게 설교하는 목사야말로 하나님의 어린 양들을 소리없이 죽이는 늑대이다.

 이제 나는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을 깊이 인식한 채 목회와 자선 사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용서가 당신의 완전하신 심판과 공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모든 정성과 힘을 다하여 그분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나를 깊은 멸망의 수렁에서 건져주신 그분의 은혜를 어떻게 저버릴 수 있는가? 전에는 그분의 율법에 압도 되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엄청난 은혜에 압도되었다. 하늘은 내가 가지기 원하는 모든 것을 나에게 주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인생은 한번 살아볼 만하지 않은가! 나는 평안과 구원의 길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길을 안 것이 반드시 그 길을 걷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단지 깨달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평안과 행복한 마음을 가지고 그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