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진정한 버림

 언젠가 읽었던 어떤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인상 깊은 꿈에 대한 이야기가 가끔씩 마음에 떠올라 생각을 던지곤 한다.

 그 사람은 꿈 속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차에 짐을 가득 싣고 하늘로 향한 여정길을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한참을 가자 길은 좁아지고 점점 가파라졌는데, 그 길의 한 쪽은 까마득한 낭떠러지였으며, 다른 쪽은 매우 미끄럽고 높은 바위벽이었다. 여행을 계속 할 수록 길은 점점 더 좁아져 더 이상 마차를 끌고 갈 수 없게 되자, 그들은 마차에 실린 짐을 말등으로 옮겨 실은 다음, 마차를 버리고 말을 타고 여행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길이 계속 좁아져 말 등에 실은 짐 보따리가 벽에 닿아서 걸을 수가 없게 되어, 할 수 없이 사람들은 짐 보따리를 절벽 아래로 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조금 더 가자 길이 너무나 좁아져서 더 이상 말을 타고 갈 수 없었기 때문에, 말을 버려둔 채 일렬로 서서 앞사람의 발걸음을 따라 조심스럽게 가야만 하였다. 이 때, 작은 밧줄이 하늘로부터 그들 앞으로 드리워졌고,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좁아진 길에서 몸의 균형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밧줄을 꼭 붙잡고 전진하였다. 그들이 앞으로 전진함에 따라 밧줄도 앞으로 움직이면서 그들을 인도하였다. 여행길의 종점이 가까워질수록 길이 너무나 좁고 험해져서, 그리스도인들은 신고 있던 신발과 양말까지 벗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여 그것들을 다 버리게 되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바위 벽에 바싹 붙어 갔지만, 길이 워낙 좁았기 때문에, 그들의 발은 안전하게 디딜 수 있는 여유조차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지나가는 바위 벽의 이곳 저곳에 얼룩져 있는 피자국을 보았다. 그것은 앞서 간 그리스도인들의 것이었다. 앞서 간 이들의 아픈 발에서 흘러내린 피자국을 보면서, 그들은 낙망과 좌절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걸어간 그들은 마침내 깊은 골짜기에 다다랐으며, 거기서 길은 끝났다. 골짜기의 저편에는 푸른 풀밭의 아름다운 평원이 있었고, 이 세상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빛이 하늘 궁전에서 비치고 있었다. 두려웠지만, 그들은 믿음으로 밧줄을 잡고 골짜기 저편의 아름다운 땅으로 건너 뛰었다. 그들의 마음에는 평안한 안도감이 넘쳤으며, 그리하여 골짜기를 건너 온 모든 여행객들은 하나님의 찬양하는 승리의 함성을 크게 외쳤다. 그들의 음성에는 완전한 행복이 담겨져 있었다. 그 그리스도인의 꿈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진정한 버림
 
그리스도인의 여정길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은 버리는 것이다. 마치 그 그리스도인의 꿈 이야기 같이, 처음에는 마차를 타고 떠났지만, 나중에는 마차와 짐 보따리들과 말과, 결국에는 신발과 양말까지 다 버려야 했던 것처럼, 신앙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버리는 일을 계속하여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버린다는 의미를 너무 좁은 의미로만 국한시키는 듯 싶다. 물론 그것은 물질적인 것, 곧 세상의 부와 명예, 세속적인 쾌락들을 버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이상의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 찾은 것에, 갖은 것에, 붙잡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더 높은 곳, 더 높은 경험을 향해 전진해야 할 것을 의미한다. 하늘에 가서 사랑하는 하나님을 만나 함께 살 사람들은, 진정한 버림을 해야 하는데, 자신의 모든 것, 곧 자신의 감정, 의견, 주장, 방식, 나중에는 깨달음조차 버려야 한다. 진정한 버림이 없으면 영적인 성숙과 자라남이 없으며, 그것을 맛보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는 경험, 즉 있는 그 상태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상태가 되는 경험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느 것이든, 아무리 그것이 최상의 것이라고 생각될지라도 그것에 그대로 매여 있으면 새로운 것을 경험할 수 없다. 어느 것에든 매이면 진정한 성장이 거기서 멈춰 버리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자신이 발견한 최고의 진리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에 머무르면 안되고, 그 지점에서 멈추면 안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신앙 경험을 하는 데 있어 영적인 성장을 그리도 자주 멈추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신이 붙잡았다고 생각하며, 찾았다고 생각하여 그 자리에 안주해 버린다. 비록 최고의 진리를 발견했다 할지라도, 그 진리에 매이는 순간 자신이 찾았다는 안도감과 이루었다는 영적인 자만에 빠져, 더 이상의 깨달음이나 영적인 경험을 하기를 그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찾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많은 경우에 머리로만 찾은 것이고, 그 진리가 가슴 속까지 녹아 들어가 자신의 것이 되는 경험을 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진리를 넘어 그 이면을 보지 못하기 쉽다. 진리 너머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기 쉽다. 진리는 결국 우리를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가진 사람으로까지 변화시켜야 한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사람으로 변해야 하며, 우리 자신이 진리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리를 찾으면, 그 찾은 진리가 너무 좋고 신기하여 둥지를 틀고 그 속에 머리를 박고 잠들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많은 경우에, 진리를 찾았다고 기뻐하는 사람들은 또 하나의 교파와 종교를 만들어 놓고, 그 자유케 하는 진리를 그들만의 교리와 신조로 가두어 두려고 한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 가는 사람들을 (각 개인의 하나님을 발견하고 구원에 이르는 경험의 길은 서로 다르다) 자신의 신조와 교리에 묶어 두고, 다른 사람들의 신앙의 경험이 자신의 방식과 표현과 다르면 은근한 압박을 가한다.

 인간의 속성 중에 가장 강한 속성은 안주하고 싶은 것과 집착하는 것인 듯 싶다. 그 안주함과 집착이 비록 진리에 관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새로운 고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루터가 채 이루지 못한 완전한 종교개혁의 완수를 이루는 다음 주자가 될 수 없기에... 빛은 점진적인 것이 되어야 하며, 붙잡고 안주한 상태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진정한 깨달음과 개혁을 이룰 수 있다. 개혁은 곧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종교를 벗어나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나는...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노라(빌 3:13~14)고 말하지 않았던가!

버려야 거듭난다
 
어두운 밤의 정적을 타고 신앙의 비밀을 알기 위해 찾아 온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거듭나라고 말씀하셨다. 그 뜻은 계란적인 삶을 버리고 새로운 병아리의 삶을 살으라는 의미였다. 신앙은 버리는 것이고, 거듭남이며 부활이다. 계속 버리는 사람에게만 진정한 거듭남과 부활이 도래한다. 그것은 단단한 껍질을 깨고 알 속에 갇혀 있던 상태에서 날개 달린 자유로운 새가 되어 나오는 것을 말한다. 묵은 껍질을 벗어 버리는 것, 과거의 내가 온전히 죽어 없어지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는 것, 죄의 속박된 상태에서 벗어나 기쁨과 자유에 가득 찬 새로운 삶으로 변화하는 것, 그것이 중생이고 부활이다. 신앙은 끝없이 버리고 끝없이 새로운 것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버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삶, 부활이 없다.

 처음에 주님을 믿을 때, 우리는 죄를 버리고 회개하며 거듭남을 경험한다. 그러나 버리는 것은 거기서 한번만 끝나면 안된다. 매일의 삶 속에서, 어두움에 속한 감정들과 생각이 떠오를 때, 암흑에 속한 일들을 하려는 유혹을 받을 때, 그리고 그런 일들이 계속 밀려와 우리의 거듭남의 경험들을 비웃을 때, 우리는 그것들을 붙잡지 말고 계속 하늘로 올려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잠깐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갈 뿐, 붙잡지 않으면 우리 마음과 생각 속에 머물지 못하기에... 지성소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 예수께서는, 우리가 붙잡지 않고 기도로 예수님께 고백하여 올리는 어두움에 속한 감정과 생각과 일들을 받으시고, 그 대신 빛과 사랑과 능력으로 채워 주신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거듭났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묵은 껍질들을 부여잡고 놓지를 못하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중생은 전 존재가 변화하는 것이다. 존재의 온 사상과 생각과 감정과 느낌이 변화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머리로, 지적으로 진리를 알고, 깨닫고, 가지고 있는 것을 거듭난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것은 아직 단단한 껍질 속에 갇힌 채, 생각으로만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인 경우가 많다.

 버리는 자유를 맛보는 것은 숭고한 일이다. 집착을 해 본 사람만이 집착의 사라짐의 자유를 알고, 감정에 빠지고 느낌에 종 노릇 해본 사람만이 그것들로부터 해방되고 풀려나는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잡은 것으로 여기지 않고 앞으로 전진하는 사람,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 사람, 마음과 생각 속에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명이 기록된 사람, 이것이 거듭남의 비밀을 마음 속에 간직한 사람이다.  당신은 매일 진정한 버림을 경험하는가?

권두언

강병국 목사

 여러분들은 혹시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현재 이슬람의 과격파들이 미국과 서부 자본주의 국가들을 상대로 테러 행위를 하고 있는 그 진정한 이유가 잘못된 성경 예언 해석에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옛날 유대나라가 메시야를 거절한 이유가 성경의 예언을 잘못 해석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 때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예언들을 예수께서 초림하시는 사건에 적용시킨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미국을 이렇게 미워하며 재난을 초래하도록 아랍인들을 분노케 하고 있는 진정한 이유도 성경 예언을 잘못 해석한 데 기인하였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우리는 정말로 아쉬움을 금 할 길이 없습니다.

 문제는 지금 현대의 참 이스라엘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로마의 침공으로 쫓겨나서 오랫동안 세상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아직도 여전히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인 현대 이스라엘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드리기를 거절하고, 아직까지도 미래의 다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이스라엘 나라가 여전히 하나님의 선택된 나라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현재 중동 지방의 전쟁인 유대인들과 아랍인들 간의 종족 전쟁은 성경 해석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번 호에 실린 내용들을 확실하게 알고 지나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지구의 장래를 결정 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는 일은 우리의 개인적인 구원 문제뿐만 아니라 세상의 역사를 꼴 짓는데 있어서도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누가 성경이 말하는 현대 이스라엘인가를 설명하고 있는 이번 호는 여러분들께 신선하고도 분명한 이해를 갖도록 도와 드릴 것입니다.

사랑을 찾는 이들에게

1. 결혼을 앞둔 이들에게
이성과 감정이 조화되는 사랑
 
나에게도 사랑과 결혼을 생각하며 아름다운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배우자의 선택이라는 현실과 마주했을 때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힘들었을 때도 있었다. 누가 나의 배우자일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은 누구일까? 이 사람이 정말 내가 평생을 함께 할 반려자가 맞는가?

 이러한 질문들 앞에서 나는 내 감정과 이성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분명히 들어야만 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를 듣는 것과 같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기 때문이고 올바른 감정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마음의 상태이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지 아시기 때문이었다. 나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그 음성에 순종한 지금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래서 사랑을 찾는 이들에게 나를 도와주었던 말씀과 원칙들이 도움이 되길 바라며 글을 쓴다.

 결혼을 앞둔 이들은 이성과 감정이 조화되어 한가지로 말하는 사랑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성은 마음의 한 자락을 붙잡고 아니라고 말하는데 감정만을 앞세우다 아픔만 남기는 만남들을 나는 많이 보았다. 또한 사랑의 감정 없이 이성적으로만 결혼의 조건에 맞추어 만나 상처만 남기는 경우도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 하기를 원하신다. 그 말은 우리에게 맞는 사람이면 사랑의 감정 또한 주신 다는 말이다. 구하면 주시는 하나님께서, 찾으면 찾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때를 아시고 때에 맞게우리에게 필요한 말씀들을 해 주실 것이다.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에 말씀하여 주실 것이다. 이성의 정확한 음성과 사랑의 감정이 함께하는 사랑은 우리에게 사랑을 찾게 해 줄 것이다.

두려움이 없는 사랑
 
누구나 배우자와 함께 할 앞날을 생각하면 작은 두려움들이 마음 문을 두드린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그가 과연 지금과 같을까? 등의 두려움들 말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잔잔히 밀려오는 평안과 확신 때문에 이러한 생각들을 마음 안에 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말하려고 하는 두려움은 그런 두려움이 아니다.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데 혹은 누군가를 마음에 정해 두었는데 그와 함께 할 미래에 대한 어떤 부분들이 확신이 없어 두렵거나, 왠지 모를 마음에 불안함 때문에 두렵거나, 그를 감당하기가 두려운 것들, 도저히 떨쳐 버리려고 해고 떨쳐지지 않는 두려움들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대의 이성에 이 사람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온전한 사랑이 올 때에는 마음에 두려움은 들어 올 수 없고 확신과 믿음만 있을 것이다. 열악한 조건들도 감사가 되고 행복이 될 것이다.

모든 허물을 덮는 사랑
 
여자는 남자의 자라온 가정환경과 그의 과거의 경험들을 알아두어야 한다. 남자의 자라온 환경이나 과거의 경험들을 듣고 그의 과거의 경험들이 어떠했던지 간에 그를 돕고 싶고 그의 경험들이 오히려 여자의 마음에 사랑을 더하게 한다면 그 사랑을 위해 더 기도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남자의 경험들이 여자의 마음에 거부감이나 부담을 주고 그것을 포용하는데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남자는 여자의 가정환경과 현재 미래의 계획들을 알 필요가 있다. 여자의 부모님과 가정형편을 잘 알고 그 여자를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또한 그 여자의 계획과 재능을 돕고 싶고 계발 시켜주길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사랑을 위해 한 걸음 나아가 기도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현재 형편이나 그녀의 계획들이 마음에 불편을 주고 오히려 걱정거리라는 생각이 든다면 어떠한 형편도 덮을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잠 10:12)
진정한 사랑은 그가 어떠했던, 형편이나 조건이 어떠하건 모든 것을 덮는 힘이 있다.

사랑은 선만을 행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와 만나면서 그 만남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에게나 부모에게나 주위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는 일이 있다면, 그와 만나면서 나의 일이 책임감 있게 마쳐지지 않는다면, 그와 만나는 것 때문에 내가 부정직한 일을 하게 되고 내 양심에 괴로움을 호소하는 일들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올바른 사랑도 진정한 사랑도 아닌 것이다.  사랑은 선만을 행하게 하는 힘이 있다. 참된 사랑은 우리를 선만을 행하도록 이끌 것이다. 그래서 삶과 사랑에 힘을 줄 것이다. 신앙을 격려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기쁨을 주고 모든 일이 선하게 이루어져 나간다면 그 사랑을 위해 기쁘게 기도해도 좋을 것이다.

사랑은 부모의 마음을 이끈다
 
하나님 다음으로 우리 자신을 잘 아시는 분은 우리 자신이 아니고 우리 부모님일 것이다. 우리를 낳으시고 기르시고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였을 때를 잘 아시는 부모님은 분명 우리를 잘 알고 계시다.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이해해주시고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부모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사람이 맞는지 알고 계신다. 신실한 부모님이라면 우리의 배우자를 두고 오래 기도해 왔을 것이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신앙이 없는 부모님도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똑같기에 자녀에게 가장 적당하고 좋은 배우자를 허락하길 원하신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부모님의 사랑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과도 같다. 그와 결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 때에는 부모님께서 허락하실 때까지 기도하고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분명 부모님의 마음도 이끌릴 것이다. 이성과 감정이 한가지로 말하는 사랑, 두려움이 없는 사랑, 허다한 허물을 덮는 사랑, 선만을 행하게 하는 사랑, 부모님께서 허락한 사랑이라면 하나님께서 허락한 사랑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2. 결혼한 부부에게
서로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 만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
 
많은 부부들이 서로가 다르다는 것 때문에 낙심하고 서로에게 실망하고 나아가서는 배우자의 성격을 바꿔보려고 애를 쓴다. 그것이 결국 싸움이 되고 불행한 가정생활로 이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서로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 만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 하신 바라는 것이다. 서로 다른 뜻과 목적과 신앙을 가진 사람이 만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성격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대부분의 부부들이 서로 다르지만 비슷한 부분도 있다고 말하지만 무엇이 비슷하고 무엇이 다른지 정확한 선을 생각 못하는듯하다. 그것의 선은 여기에 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 말하듯 사람들은 비슷한 사람끼리 이끌리고 어울리게 되어있다. 부부도 그러하다. 서로 생각하는 것이 비슷하고 뜻하는 것이 비슷하여 서로 이끌리어 만났지만 일을 해나가는 방법에 있어서는 매우 다르다. 조급함을 나타내는 분야가 다르고 느긋함을 나타내는 분야도 다르다. 조심스러운 성격을 나타내는 분야가 다르고 아끼고 아끼지 않은 분야가 서로 다르다. 자라온 환경과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가지 일을 두고 남편과 아내의 태도와 처리 방법이 다를 때가 많다. 이런 것 때문에 어두워질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사를 똑같이 생각하고 처리하는 방법이나 대처하는 태도가 같은 부부는 편협하거나 편견의 생각을 품기가 쉽다. 우리는 이렇게 하는데 다른 이들은 왜 저렇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 다른 배우자를 대하며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마음도 갖게 되고 편견과 편협한 생각들도 없앨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나와 비슷한 사람만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나와 같지 않은 모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내 이웃을 나의 몸과 같이 사랑 할 수 있는 것은 가정에서부터 연습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행할까?

 부부의 다른 성격 때문에 인내심이 생기고 성품이 온유해지고 마음이 넓어진다면 이것이 축복이 아닐까? 또한 서로의 다른 성격들은 서로의 단점들을 보완해 주고 보다 안정적인 가정으로 이끌 것이다.  서로의 성격을 인정해 주고 단점들은 조용히 도와주면 사랑을 찾는 결혼 생활이 될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을 존경하듯 남편을 존경하라
 
여러 가지 형편들 때문에 남편보다 아내의 경제력이 더 나은 경우가 있다. 경제력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결정권들이 주어지기에 경제력을 쥐고 있는 아내의 목소리가 커질 수 있다. 아내가 남편보다 경제력이 있을 때, 아내는 지혜로워야 한다. 남편을 쉽게 여기거나 자신의 갈비뼈 아래로 본다면, 그것은 성경적이지도 않지만 자신에게 불행을 줄 뿐이다. 성경은 아내는 남편을 교회가 하나님을 존경하듯 존경하라고 말하고 있다.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엡 5:33).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4).

 아내가 남편의 보호 아래 있으면서 남편의 결정에 따르며 남편에 대한 존경하는 마음이 있을 때 아내는 진정 행복할 것이다. 하와가 아담의 곁을 떠나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여 선악과를 먹었을 때 죄를 짓게 되고 불행해졌던 것과 같이 아내가 남편의 보호를 떠나면 불행하게 될 경향이 있다. 우리의 주위에서도 이런 경우를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내는 남편에 대한 존경심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모든 일들을 남편과 의논하고 남편이 결정한 일들이 죄를 짓는 일만 아니라면 남편의 의견을 따르라. 남편에게 기회를 주라. 그리고 기다리라. 남편을 존경하게 될 것이고 행복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하라
 
햇빛에 겉옷을 벗고 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 동시에 여자의 마음이기도 하다. 남편의 자상한 한마디가 아내를 행복하게 만들고 차가운 말 한마디가 아내를 불행하게 만든다. 가정의 분위기는 아내의 마음에 달려있다. 아내가 기쁘고 건강하면 가정에 빛이 있고 행복이 있다. 반면 아내가 우울하고 건강하지 못하면 가정 또한 어둡고 우울한 장소가 된다. 아내의 마음과 육체를 건강하게 하는 것은 남편의 말과 행동에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 하나님께서 교회를 돌보시듯 남편이 아내를 돌보면 아내도 행복하지만 남편은 더욱 행복해질 것이다. 아내의 무거운 가사일을 쉽게 해줄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하고 도와주고 사랑을 표현하면 서로에 대한 사랑을 찾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가까이 있으라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부부 사이도 가까워지고 하나님과 멀어지면 부부 사이도 멀어진다. 사람은 스스로 선한 것을 낼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은 악한 것으로 기우는 성향이 더욱 강하다. 그러나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께로 나가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가까이 있으면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이 흘러나와 우리의 마음에 채워질 것이다. 우리는 자연히 사랑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말이 바뀌고 우리의 행동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우리의 삶의 목표가 바뀔 것이다. 그리고 찾고자 했던 그 사랑을 찾을 것이다.

 
참 사랑

서정희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
그가 어떠했었다는 것은
그리고 지금 어떠한 형편에 있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의 아픔들은 나에게 오히려 그를 도와야 한다는
사랑을 더하게 할 뿐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가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고
지금 내 앞에 보이는 것이 없을지라도
믿음이 있습니다.
아무도 가져갈 수 없는
잔잔한 확신이 있기에
두려움은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사랑은 선만을 행하게 합니다.
그를 위해
옳은 것이 아닌 것을
내 안에 들여 놓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그의 행복을 위해
믿을 만한 사람이 되길 원할 뿐입니다.

사랑은 조용하나 힘이 있습니다.
많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사랑은 믿음과 신뢰로 표현되기에
조용히 따라갈 힘만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물을 보지 않으며
두려움이 없고
선만을 행하게 하며
조용하기에 진실됩니다.

스트레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현대는 스트레스의 시대이다라고 하였다. 지진, 폭력, 데모, 전쟁에 대한 소문, 물가의 폭등, 불확실한 경제, 사고와 같은 요소들은 모든 사람들을 염려하게 만든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내일에 대한 염려는 오늘을 어둡게 만드는 요소가 되고 있다. 우리는 스트레스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스트레스, 그것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어떻게 스트레스가 생기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정복할 수 있는가?

스트레스의 위험
 
스트레스는 홀몬을 분비시키는데, 스트레스에 의해서 분비되는 홀몬은 섬세한 혈관벽에 자극을 가함으로써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으며, 암과 싸우는 T임파구의 기능을 저해할 수도 있다. 또한 스트레스는 고혈압과 뇌일혈의 주요 원인이 된다. 스트레스는 우리의 삶과 직장과 행복을 앗아갈 수 있는 무서운 적이다. 우리 모두는 스트레스를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스트레스는 신경 시스템과 홀몬을 통하여 우리 몸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 몸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것은 곧장 심장의 박동에 영향을 미치며, 위장에 해를 가하게 된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스트레스에 의해서 근육이 긴장 상태에 있게 되면, 근육이 수축되고, 근육이 수축되면 근육 속을 지나가는 혈관이 수축되어서, 혈액을 따라서 함께 운반되는 산소의 공급이 충분하게 이루어질 수 없게 되어서, 결국에는 산소 부족 현상으로 인하여 통증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다음과 같은 악순환이 형성된다: 근육의 긴장 - 근육의 경직(spasm) - 통증. 이러한 악순환의 되풀이는 등, 목, 어깨 부위에 수시간 동안의 통증을 가져 온다. 이것이 심해지면, 만성적인 통증이나 기능 장애의 형태로 자리를 잡게 된다.

스트레스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여기 고무줄이 있다. 손가락으로 고무줄을 양쪽 방향으로 잡아당기면 탄력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이 우리의 몸의 일상적인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무줄을 조금 더 잡아 당기면 고무줄이 팽팽해 지는데, 이 상태를 스트레스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조금 더 잡아 당기면 고무줄이 끊어지게 되는데, 이러한 상태의 신체를 기진맥진한 탈진 상태(burn-out)라고 설명할 수 있다.

 어떤 무엇에 의해서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긴장 상태에 들어가게 될 때,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어떤 면에 있어서 스트레스는 매우 개인적인 것이다.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상황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스트레스를 주지 않을 수도 있다. 물건을 사기 위해서 줄을 서있는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즐겁게 이야기 하거나 책을 보면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어떤 사람은 자신의 차례가 너무 늦게 온다고 짜증을 내거나 불만을 토로한다. 스트레스를 받는 정도는 각 개인에 따라서 다르다. 스트레스 반응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자극하는 상황을 어떠한 생각과 감정으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사실, 스트레스 반응 자체는 유익한 것이다. 그것은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을 순간적으로 빨리 극복하게 위한 신체의 메카니즘이다. 스트레스 반응은 싸울 것인가? 도망갈 것인가?(fight-flight) 를 결정하는 반응이다. 아드레날린과 같은 홀몬은 우리의 신체로 하여금 적과 싸우도록 하거나, 위험으로부터 빨리 도망치도록 하기 위해서 적색 경보를 내린다. 이러한 경보는 근육, 심장, 폐, 두뇌가 최우선적으로 활동하게 만들며, 소화 기능과 같은 다른 신체 기능들은 2차적인 것으로 만든다. 산소와 포도당을 근육 속으로 빨리 공급하기 위해서 심장의 박동은 빨라지며, 혈압이 상승하게 된다. 근육은 순간적으로 긴장 상태로 돌입하게 되어서, 물에 빠져 들어가는 아이나 자동차에 치이려는 아이를 순간적으로 건져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종류의 스트레스 반응은 어떤 위기나 긴장의 순간을 잘 극복할 수 있게 만든다. 시험을 치루거나 직장을 얻기 면접 시험을 볼 때에 정신적인 긴장 상태를 느끼게 된다. 약간의 스트레스는 좀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짧은 기간 동안에 우리의 모든 신체적, 정신적 기능들을 집중함으로써, 가장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다.

 그러나 물건을 사기 위해서 길게 줄 서 있거나 러시 아워에 교통 체증에 막혀서 차 안에 갖혀 있는 짜증난 사람들에게 있어서 스트레스는 어떤 작용을 하는가? 스트레스로 인하여 신체에는 적색 경보가 내려지게 되는데, 이러한 경우 우리 몸은 값비싼 댓가를 지불하게 된다. 인간의 몸은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과 사람이 스스로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구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일상 생활에서 교통 체증과 같은 것 때문에 일일히 짜증을 내고, 초조해 하며, 화를 내면, 우리 몸은 그때마다 스트레스 때문에 자극을 받게 된다. 반면에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평안을 유지하기로 선택하면, 스트레스 반응을 최소화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스트레스는 간단한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

스트레스의 위험 수준
 
위협이나 압박감을 느끼거나, 화를 낼 때마다 스트레스 반응이 시작된다. 위협, 압박감,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잘 다스려지면, 스트레스 반응은 중단되고 안락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스트레스는 효과적으로 다스져지지 않으며, 오랫 동안 지속되기 때문에 여러가지 심각한 문제를 몸 안에서 일으키게 된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들은 사람들은 계속적으로 몸과 마음이 긴장 상태에 있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이 장기간 계속되면 마침내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탈진 상태에 이르게 된다. 우리의 몸이 스트레스의 위험 수준에 접근하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스트레스가 위험 수위에 접근하면 할수록, 우리 몸은 신체적이나 심리적으로 경고 신호를 보낸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경고 신호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가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신체적인 증세
 
발열, 땀에 젖음, 입안이 마름, 호흡이 얕아짐, 가슴의 통증, 심장이 두근거림, 맥박이 고동침, 혈압의 상승, 두통, 등이 아픔, 쇠약해짐, 소화불량, 설사, 토함, 변비, 장에 개스가 참, 위경련, 피로, 식욕을 잃어버림, 불면증, 어지러움, 피부가 가려움, 근육의 경직화, 근육이 뭉침, 잦은 병치례.

정신적인 증세
 
흥분 상태, 공포감, 우울감, 기분의 변화의 폭이 극심함, 짜증, 쉽게 지침, 망각, 걱정, 부주의, 안절부절, 쉽게 흥분함, 도피경향, 고무줄을 계속해서 잡아당기면, 언젠가는 끊어지는 것처럼, 이러한 증세들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언젠가는 탈진 상태(burn-out)에 들어가게 된다. 스트레스가 점점 더 강도를 더해갈 때, 탈진 상태에 더욱 빨리 이르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심장마비나 정신병과 같은 치명적인 질병을 얻게 되며, 어떤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자살을 계획하게 된다. 계속적인 스트레스 상태에 자신을 놓아둘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력을 마구 소모하게 되어서 결국에는 돌아올 수 없는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된다. 생활 속에 있는 스트레스를 소홀히 여기지 말라. 젊었을 때에는 스트레스가 조금 있어도 그것을 극복하면서 일하고나 생활할 수 있지만, 언젠가는 스트레스에 의해서 허물어져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스트레스를 정복하는 방법
 
스트레스가 계속해서 우리를 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스트레스를 불러 일으키는 대부분의 요인은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아니라 저 사람이죠. 그는 정말 함께 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나는 매우 바쁘단 말입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스트레스의 수준은 스트레스를 그대가 느끼거나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제 1차적으로, 스트레스는 어떤 사람들이나 상황 또는 우리 자신으로 인해서 생성된다. 그리고 2차적으로는 먹고 마시며 운동하고 수면을 취하는 라이프 스타일에 의해서 형성될 수 있다.

1. 올바른 라이프 스타일을 선택하라
 
우리 몸은 자동차와 같다. 잘 관리하면, 효과적으로 일한다. 건강에 해로운 음식을 먹고, 몸을 마구 사용하며 학대하면서, 어떻게 스트레스가 엄습할 때에 그것에 대해서 적절하게 반응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운동은 아드레날린과 같은 홀몬의 분비량을 줄여준다. 규칙적으로 옥외에서 운동을 하지 않고, 밤 늦게까지 텔레비젼 앞에서 앉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스트레스를 정복할 수 있겠는가?

2. 자연이 스트레스를 치료한다
 
존 홉킨스 대학에서 개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 결과는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개들에게 먹이를 줄 경우에 항상 낮은 음의 신호를 주었다. 또한 개들에게 전기 충격을 줄 경우에는 날카로운 고음의 신호를 주었다. 모든 개들이 이러한 신호에 매우 익숙해졌을 때, 저음의 소리는 음식을 먹으라는 신호가 되었고, 고음의 소리는 전기 충격을 받는다는 신호로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갑자기 고음과 저음의 신호를 동시에 주었더니, 심각한 혼돈이 생겼다. 어떤 개들은 신경 계통에 심각한 장애를 일으켰으며, 심장이 정상적으로 박동하지 않았고, 체내의 기관이 올바로 작동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집을 물어 뜯거나 심한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다.

 연구원들이 그러한 증세를 나타내는 개들에게 특별한 정성을 쏟으면서 사랑을 베풀었지만, 증세가 호전되었을 뿐 여전히 정상으로 회복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러한 개들의 환경을 완전히 바꾸어 주기로 결정하였다. 어떠한 종류의 신호나 굉음이 없는 평화로운 환경의 큰 농장에 풀어 놓았다. 개들은 얼마 안되어서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였다. 생명은 매우 단순한 것이다. 농장에 풀어 놓은 거의 모든 개들이 회복되었다. 연구원들이 개들을 부르면, 숲속이나 개울에서 놀던 개들이 일시에 정확하게 다시 모였다. 자연을 이용한 프로그램을 통하여 모든 개들이 완전하게 치료를 받았다.

 스트레스로 인하여 몸과 정신이 여러가지 증세를 나타내고 있는가? 자연으로 가라! 그곳에 스트레스를 위한 완전한 치료 시설이 준비되어 있다.

3.가장 근본적인 해결책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생각과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면, 그대는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만일 그대가 마땅히 들어야 할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듣지 못했거나, 따돌림을 당했거나, 잘못된 대우를 받았다면, 그대는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만일 그대가 내일에 대한 걱정과 염려 속에 휩싸여 있다면, 그대는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만일 그대가 분노하고, 원한을 품으며, 속상해 하고, 어떤 무엇으로 인해서 압도되면, 그대는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그대가 비현실적인 목적을 위해서 자신을 혹사한다면, 그대는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스트레스는 부정적인 느낌이나 감정과 함께 다가온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느낌을 바꿈으로써 스트레스를 제거하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지금과는 다르게 생각해야만 한다. 생각을 바꾸는 것이 가능한가?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고, 생각과 느낌을 긍정적이고 건설적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다. 그대는 성공적으로 바뚤 수 있다. 그대가 진정으로 그것을 원하기만 한다면... 그러나 완전한 변화를 원한다면, 먼저 그대의 생각과 감정이 새롭게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거듭남이라고 부른다. 거듭남은 혼자서 투쟁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변화시켜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간절하게 필요로 하는데에서 시작된다. 먼저 그대 자신을 되돌아 보고,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간구하라. 모든 잘못된 생각과 느낌을 가져가 주실 것과, 사랑과 인내와 자아 조절과 평화와 행복한 마음을 그대의 마음 속에 창조해 주실 것을 기도하라. 하나님께서는 그대의 그러한 기도를 응답하실 것에 대해서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대는 새로운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살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은 날마다 새롭게 계속해서 받아야만 한다.

 그대 주변에, 문제와 투쟁이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어쩌면 더욱 심각하게 악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 주변에 있는 문제와 투쟁을 바라보는 그대의 눈이 거듭남의 경험을 통해서 변화되는 것이다. 스트레스가 그대에게 접근할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을 간구하라.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붙잡을 때마다 스트레스를 정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스트레스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스트레스를 정복하는 방법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대의 주변 상황이 변화되기를 기다리면서 스트레스를 몸 안에 쌓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대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써 스트레스를 정복하라!

1부 - 왜 미국이 이슬람 테러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일까?

 왜 미국이 이슬람의 과격파 테러 조직의 공격의 목표가 되고 있는 것일까?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종교적인 이유에서다. 더 나아가서 말하자면 성경 예언의 해석의 문제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이 놀라운 사실을 논하기 전에 우선 먼저, 옛날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였는가에 대한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거기에서부터 의문의 실마리가 풀려 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때부터 약 2000년 동안이나 예언되어 오고 기대되어 온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많은 성경 예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하고 그들을 구속하기 위하여 오신 메시야를 죽이게 되었을까? 그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다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왜 그랬을까?

예수님을 거절한 이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한 이유는 사실상 참으로 간단한 답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성경의 예언을 잘못 풀었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예언의 진리를 자기들의 욕구와 기대에 맞추어 잘못된 해석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 대대 손손이 잘못된 메시야 관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엉뚱한 메시야를 기다리게 만든 것이 바로 그 이유이다. 온 유대 나라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계획하시지 않은 다른 방식의 메시야를 기대하게 만든 것이 문제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에게 맞지 않는, 그들이 기대하지 않는 존재로 오셨기 때문에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이다. 또한 그러한 잘못된 기대와 가르침으로 일관한 그 당시 교회의 지도층에게 예수님은 위협적이고 도전적인 존재로 받아 들여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국가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게 된 것이었다. 이 모든 일이 다 성경의 예언을 잘못 해석하고 적용시킨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유대인들이 메시야에 관한 성경의 예언을 어떻게 곡해 하였는가?

메시야의 예언 해석의 곡해
 
구약 성경에는 예수님의 오심에 대하여 세 가지의 사건들을 다 예언되어 있다. 예수님의 초림과 그리고 말세에 다시 오시는 재림, 그리고 천년기 이후에 이 지구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만드시기 위하여 새 예루살렘 성과 함께 세 번째 다시 오시는 삼림에 대하여 다 함께 예언되어 있는 것이다. 다음의 성경 절들을 살펴 보면 그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 구약에 있는 예수님의 초림에 대한 예언의 실례들
창세기 3:15 -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실 것
미가 5:2 - 베들레헴에 탄생 하실 것
시편 22장 - 수족이 찔리시고 조롱과 모욕을 당하실 하나님의 아들
이사야 53장 - 유대인들의 배척과 인류의 죄를 위하여 고통 받고 죽게 되실 고난의 메시야
이사야 53:9 - 부자의 무덤에 장사 되실 메시야
스가랴 11:12 - 친구의 배반으로 은 삼십에 팔리실 것
시편 16:10; 68:18 - 부활과 승천

* 구약에 있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예언의 실례들
시편 2:7-12 -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
시편 96:13 - 심판하러 오시는 하나님
시편 50:1-5 - 성도들을 구원하시러 강림하시는 하나님
시편 91장 - 환란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시는 하나님
이사야 25:9 - 의인들을 구원하러 오시는 하나님
말라기 4장 - 세상을 심판하시고 불로 태우러 오시는 하나님

* 심판하러 오시는 재림 이후에 천년 동안 의인들이 하늘에 가서 지내게 됨. 그리고 나서 천년기가 지난 이후에 예수께서 의인들과 다시 이 지구로 내려 오시어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여 주실 것임. 그렇게 하여 원래 창조 당시의 에덴 동산이 다시 회복될 것임.

* 구약에 있는 예수님의 세 번째 오심에 대한 예언의 실례들
시편 115:11-18 - 의인들에게 새 땅을 주심
이사야 24:1-3 - 황무하게 될 지구
이사야 35장 - 꽃처럼 다시 피어 나게 될 지구
이사야 65:17-25 - 다시는 해와 상함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된 지구
스가랴 14:1-11 - 세 번째 오셔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 세상을 다시 재 창조하시는 하나님

 이렇게 구약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세 번에 걸친 사건들을 함께 예언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의 압제에 시달리고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려 오고 있던 터라, 자기들의 죄에서 구원하여 주실 메시야 보다는 그들을 압제와 가난에서 구원하여 주실 메시야를 더 선호하며 기다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백성들에게 메시야의 오심의 목적과 이유를 설명하면서, 속 시원한 심판장으로 오시는 재림의 예언을 초림의 예언으로 둔갑시키어 잘못 이해하고 가르치게 된 것이었다. 그러던 중 심지어는 이사야 53장의 고난의 메시야에 대한 감동적인 예언을 읽거나 가르치지 못하게 막고 정죄하는 일까지 저지르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일의 결과는 그들은 엉뚱한 메시야, 하나님께서 뜻하시지 않은 다른 메시야를 고대하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로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백성들은 생소한 그분의 가르침과 사역을 이해하거나 받아 드릴 수가 없도록 되어 버린 것이다. 바로 이러한 꼭 같은 이유로 현재 미국이 이슬람의 테러 단체들의 공격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미국의 기독교인들의 예언의 곡해
 
미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있는 예언 중 한가지 중요한 예언에 대하여 잘못 해석해 오고 있다. 이러한 곡해와 잘못된 사상이 이렇게 엄청난 결과를 초래 할 줄을 누가 알았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 한다는 사실이 이토록 중요한 것이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의 이스라엘이란 영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이후에는 구약시대의 실제적인 역사들이 영적으로 전환됨으로,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교회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더 이상 실제 유대인들이나, 새로 건국된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의 택하신 선민들이 아닌 것이다. 그들의 국가로서의 운명은 이미 끝나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로 대치 시키신 것이다. 유대인들도 다른 어느 사람들과 같이 개인적으로 구원 받는 것이지 옛날처럼 선택된 특별한 도구로서 쓰임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국가를 위한 선택과 예언은 조건적이다.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렘 18:7-10,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리라 한다고 하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케 하리라 한 선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그런데 미국의 교회들이 1948년도에 다시 건국된 이스라엘 나라의 건국을 마치 성경의 예언의 성취로 적용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그들은 예레미야서에 있는 흩어진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 오겠다는 말씀을 현대 이스라엘 나라의 건국으로 잘못 적용시킨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이스라엘이 다시 건국 될 수 있도록 그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여 도와 주었던 것이다.  예레미야에 있는 다음의 예언들이 마지막 시대에 회복되고 바벨론의 오류에서 나와 참 교회로 모여지게 될 하나님의 참된 교회들에서 그 성취를 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현대 교회들이 아직까지 실제 이스라엘 나라에 적용을 시키다 보니 엉뚱한 기대와 잘못된 국가의 정부 시책을 불러오는 과오를 범하게 된 것이다.

* 렘 30:8-11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꺾어 버리며 네 줄을 끊으리니 이방인이 다시는 너를 부리지 못할 것이며 너희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으킬 너희 왕 다윗을 섬기리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종 야곱아 두려워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원방에서 구원하고 네 자손을 포로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과 안락을 얻을 것이라 너를 두렵게 할 자 없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이라 내가 너를 흩었던 그 열방은 진멸한다 할지라도 너는 진멸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공도로 너를 징책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 렘 31:7-12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만국의 머리 된 자를 위하여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니 그들 중에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되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열방이여 너희는 나 여호와의 말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무리에게 행함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속량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셨으니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은사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에 모일 것이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회복된 이스라엘의 정체
 
오늘날의 현대 이스라엘 국가는 예수님을 믿거나 받아드리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지 못하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은 그들이 앞으로 특별한 방법으로 회개하여 신약의 예수님을 받아드리고 마지막 구원의 사업을 이루는데 그 중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예언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진리를 가진 참된 교회가 마지막 말세에 한 백성으로 모여지고 보호 될 사실과 또한 그로 인하여 이 지구가 다시 장미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 갈 것이라는 예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옛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과 예언이 이제는 말세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참된 교회를 통하여 이루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 성의 기초석에 열 두 사도들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계시록 21장 참조) 그리고 성의 열 두 문은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가! 그 이름들은 원래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이름과 조금 다르지 않는가? (계시록 7장 참조) 현재 이스라엘 나라가 깊은 지하수들을 퍼 올려서 농사를 짖고 있는 모습을 마치 광야에 꽃이 피고 회복된 것처럼 설명하지마는 그것은 전혀 말씀과는 맞지 않는 해석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영광스럽게 된 이후에 재 창조될 지구에 대한 예언을 아직도 광야 같은 이스라엘 국가에 적용을 시키는 것은 정말 잘못된 예언 해석인 것이다.

잘못된 예언 해석이 빚은 결과
 
이러한 성경 예언의 잘못된 해석이 미국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나라에 목을 메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정책이 아랍 국가들을 제쳐 놓고 이스라엘을 선호하며 특별한 보호와 원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이 아랍 민족들에게 어떻게 비추게 되고 있는가? 정말 그들이 이를 너무나 불공평한 처사며 편애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특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구의 아랍인들 간의 분쟁에 있어서 미국이 이스라엘을 선호하는 태도 때문에 이슬람의 반감을 사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인 투쟁의 중심에는 잘못된 성경 예언 해석이 자리를 하고 있다. 미국의 교회들이 이스라엘에게 연연하고 있는 이유가, 그래서 미국의 정책을 그렇게 이끌어 나가고 있는 이유가 잘못된 성경 에언 해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만큼 성경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 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면 이러한 시점에서 다음에 계속되고 있는 기사들을 통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말세에,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란 누구인지에 대하여 확실하게 연구하고 지나가 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사도 바울이 말씀한 다음의 성경절들을 마음에 두고 지나가는 것이 합당 하겠다.

* 롬 2:28,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 갈 3:26-29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2부 - 현대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성경적으로 현대 이스라엘이 과연 누구인가? 실재적으로 팔레스타인에 있는 이스라엘 나라일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중동 지방에 있는 이스라엘 국가를 성경 속에 나오는 이스라엘로 생각하고 있다.  그들의 선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어도, 사람들은 신약 성경 마지막에 나오는 이스라엘을 현재의 이스라엘 국가로 여기고 있다. 사실 이스라엘 나라는 A. D. 70년도에 예루살렘이 멸망 된 후, 온 세상에 흩어져 버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1948년도에 다시 하나의 국가로 재건되어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현 시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현대 실재 이스라엘 나라의 건국을 보고 성경 예언의 성취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이 현대 참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결국 승리하는 편이 바로 이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겟돈 전쟁을 러시아와 중국이 실재로 이스라엘 나라로 쳐들어 오는 전쟁으로 해석하고 있다.

 아마겟돈은 전 세계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감행하는 악인들의 최후의 공격을 가리킨다. 그 예언은 실재 이스라엘 국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러한 잘못된 해석 때문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 나라로 이민을 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또한 이스라엘 국가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지 못해서 오는 큰 실수라고 할 수 있다.

참 이스라엘은?
 
그렇다면 이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할 참 이스라엘은 과연 누구를 말하는가? 현재, 이 시대의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함께 성경을 한번 연구해 보자.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유일한 길잡이이다. 먼저 성경은, 하나님께서 실재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새로운 다른 영적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 들이신 사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갈라디아서 3장 29절을 읽어 보자.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또한 로마서 2장 28,29 절에는,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라고 써 있으며, 로마서 9장 8절에는,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고 쓰여 있다. 이 성경 구절들에 언급된 이스라엘은 현재 이스라엘 국가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 이스라엘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데, 곧 실재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절하자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영적인 이스라엘인 하나님의 참 백성인 교회가 생긴 것을 가리킨다.

 참 이스라엘의 정의 육신적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절하여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바울은 사도행전 13장 46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기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사도 바울의 참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정의를 보자.

* 갈 6:15,16
 할례나 무 할례나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음을 받은 자 뿐이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성경은 참 이스라엘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은 자, 거듭난 자들, 곧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드리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을 하나님의 이스라엘, 곧 참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고 있다.

 성경을 아는 사람들은 흔히들, 계시록에 나오는 14만 4천은 유대인들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요한 계시록 7장에, 14만 4천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에서 나온다고 언급되어 있으므로 그렇게 말들을 한다. 그러나 계시록의 12지파의 이름들은 원래의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들과 조금 다르다. 또한 야고보는 성경 야고보서 1장 1절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이 안부의 말은 소아시아 지방에 있는 초대 교회들에게 한 것이었으며, 그 교회의 교인들은 이방인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교회들이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 이스라엘 백성들이 흩어지고 만 다음에는 유대인들은 더 이상 선택된 민족이 아니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진리를 세상에 전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국가 대신 교회를 택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 이유는 그들이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빛, 곧 진리를 전수하시기 위하여서였다. 하나님께서 이제 세상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영적인 이스라엘로 택하셨다. 초대 교회는 오순절 날 성령을 받고 제일 먼저 예루살렘과 유대에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 진리를 거절하자, 하나님께서는 진리가 이방인들에게로 전파되도록 계획하셨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8).

현대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의 교회
 
이러한 모든 성경적인 증거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현대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짜 이스라엘은 복음을 받아드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함께 모여 살고 있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참 교회, 참 백성들은 온 세상에 흩어져 살고 있다. 아마겟돈 전쟁이 오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내실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교회 안에는 참된 알곡만 남게 될 것이고, 마지막에 남은 알곡, 곧 하나님의 참 백성들이 하나님의 증인들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충성스럽게 싸울 것이다.

 현재 유대인들은 더 이상 옛날처럼 선택된 민족이 아니다. 그들도 다른 민족들과 같이 개인적인 단위로 구원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기 위한 택하신 선민들이 더 이상 아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주님을 믿는 교회에게 천국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도록 분부하신 것이다. 구약 시대의 주인공은 유대인들이었다. 실재적인 이스라엘이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주인공은 하나님의 교회, 곧 영적인 이스라엘이다. 우리는 더 이상 실재 이스라엘 나라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앞으로 그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예언을 살펴 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구약에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모든 약속들과 예언들이 이제는 영적인 이스라엘인 현대 교회에게로 다 옮겨진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항상 조건적이다. 복음을 거절한 유대 국가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은 선민국가로서의 특권을 박탈당하고, 대신 복음을 받아드린 교회가 하나님의 약속과 부르심을 대신 받게 된 것이다.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며(왕상 9:4-7). 하나님의 약속은 항상 조건적인데, 그 조건은 순종이다. 그런데 이 성경의 가르침을 모르고 또 잊어버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는 유대인들과 심지어는 많은 무신론자들로 이루어져 있는 실재 이스라엘 나라를 마치 성경의 마지막 예언을 성취시킬 주인공인양 생각하여, 중동지방에서 되어가고 있는 일들의 귀추를 열심히 주목하고 있고, 또한 그곳으로 이민을 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열매 맺는 참 그리스도인이 교회
 
유대나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반역했을 때에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잡혀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돌이키시려고 그 고난을 허락하셨다. 그 때 여러 선지자들이 일어나 예루살렘과 유대 나라의 회복을 예언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망을 고취시켜 주었다. 이 회복의 성경구절들을 어떤 사람들은 1948년도의 이스라엘 나라의 재 건국으로 적용시킨다. 그러나 그 예루살렘의 회복 예언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간 지 70년 후에 다시 돌아와 느헤미야 때 성전을 재 건축하는 일로 이루어졌다. 약속을 받은 자들의 배도나 반역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이 무조건 성취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고, 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고대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이루어 지지 않았으면 그것은 신약시대에 와서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인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 이루이지게 된다. 아모스 9장 11절에 보면,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며 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은 신약시대의 교회에서 이루어 졌다고 다음과 같이 적용했다. 사도행전 15장 14~16절을 보자.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였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지어 일으키리니...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리라는 아모스의 예언을 사도 바울은 초대 교회에 그리스도교회가 세워진 것으로, 영적으로 적용한 것을 알 수 있자.

 사도 베드로는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가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벧전 2:9,10). 여기에서 베드로는 고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등장하는 새로운 이스라엘,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를 소개하고 있다.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드린 이방인들과 예수를 받아드린 소수의 유대인들과 합하여 새로운 언약 속으로 들어간 그들을 향하여 바울은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말한다고 다 영적인 이스라엘 아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다 이스라엘 아니다. 열매를 맺는 백성,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는 성화의 경험을 하는 사람들, 변화함을 받은 사람들이 참 이스라엘이다. 실재 유대인들도 순종치 않고 열매를 맺지 않았을 때에 버림을 받았다. 그 조건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유대인들도 버림 받았는데, 하물며 우리는 얼마나 더 신실한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야 할 것인가! 사도 바울은 신약시대에 시작한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경고했다.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꺽기우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롬 11:20,21).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1장 4절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무슨 열매를 말하는가? 이것은 바로 성령의 열매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품성을 닮은 열매, 주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순종의 열매를 말한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에 순복하며, 주님과 늘 동행하고, 마음 속에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그리스도의 의의 옷, 곧 그리스도의 품성을 가지게 될 것이며, 그 때에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 참 이스라엘, 하나님의 참 교회가 될 것이다.

3부 - 교회에 성취되는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

 성경에는 교회에 대한 놀라운 약속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약속들은 마지막 하나님의 교회에게 성취되는 예언들이다. 즉, 구약의 이스라엘은 버림을 받고, 새로운 영적인 이스라엘인 하나님의 참 교회가 약속의 성취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함께 이 문제에 대하여 연구해 보자.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
 
내가 그들을 위하여 유명한 종식할 땅을 일으키리니 그들이 다시는 그 땅에서 기근으로 멸망하지 아니할지며, 다시는 열국의 수치를 받지 아니할지라. 그들이 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는 줄을 알며 그들 곧 이스라엘 족속이 내 백성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라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34:26, 29-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3:10-12, 42:6, 7).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을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자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임이니라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 49:8-16).

하나님의 교회
 
교회는 반역한 세상에서 하나님이 보유하고 계시는 당신의 요새이며, 도피성이다. 태초부터 충성스러운 백성들이 지상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매 시대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파수꾼들을 가지고 계셨고,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세대에 충성스럽게 증언을 전하였다. 이 파수꾼들은 경고의 기별을 전하였으며, 그들이 갑옷을 벗고 물러날 때는 다른 사람들이 그 일을 대신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증인들과 언약 관계를 맺으셨고 지상의 교회를 하늘의 교회와 연합시키셨다.

 박해와 투쟁과 흑암의 세기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분의 교회를 보존하셨다. 그분이 허락하지 않으신 어떠한 구름도 교회를 덮지 못하였으며, 그분의 사업을 대항해 일어난 어떠한 반대 세력도 그분이 모르시는 것은 없었다. 그분은 당신의 교회를 버리지 않으셨으나 무슨 일이 발생할지를 예언을 통해 말씀하셨다. 성령께서 선지자들을 감동시켜 예언하게 하신 것은 성취되었다.

 영적 암흑기에 하나님의 교회는 산 위에 세운 도성이었다. 곧, 진리를 간직한 소수의 무리가 하나님의 참 교회였던 것이다. 하늘의 진리는 시대에 시대를 이어서, 계속되는 세대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공개되어 왔다. 비록 약하고 결함이 있어 보이나 교회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당신의 최고의 관심을 쏟으시는 대상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실현되는 장소로서, 하나님은 그 안에서 심령을 변화시키는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막 4:30)라고 물으셨다. 그분은 세상 나라들을 비유로 들 수 없으셨다. 그 사회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비교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그분은 아셨다. 세상 나라들은 물리적 힘의 우월로 다스리지만, 그리스도의 나라에서는 모든 세상의 무기와 탄압 도구가 제거된다. 이 나라는 인류를 향상시키고 고상하게 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다양한 은사와 성령의 능력을 충만하게 받은 여러 성도들이 모인 궁정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도와주고 축복하는 사람들의 행복에서 그들의 행복을 찾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될 수 있도록 교회를 통하여 성취하시려고 하시는 일은 놀라운 사업이다. 치유의 강에 대한 에스겔의 이상 가운데 이 사업이 잘 나타나 있다.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 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겔 47:8-12).

교회의 계보
 
태초부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통하여 세상에 축복을 주시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으로 애굽 민족에게 생명의 근원이 되게 하셨다. 요셉의 성실을 통하여 온 백성의 생명이 보존되었다. 또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통하여 바벨론의 모든 박사들의 생명을 구원하셨다. 이러한 구원은 실물 교훈으로서, 그것은 요셉과 다니엘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으로 세상에 주어진 영적인 축복들을 보여준다. 그 마음 속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사람,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는 사람은 모두 인류의 축복을 위하여 하나님과 동역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하여 예수께로부터 은혜를 받을 때에 그의 전 생애에서는 영적 생명의 조수(潮水)가 흘러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그분의 품성을 알리시려고 이스라엘을 택하셨다. 그분은 그들이 세상에서 구원의 샘들이 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늘의 명령, 하나님의 뜻의 계시를 위탁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초기 시대에 세상 열국들은 부패한 행습으로 인하여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한때 하나님을 알았으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롬 1:21)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셔서 그들을 멸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당신의 택하신 백성을 통하여 그들에게 다시 한 번 그분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주시려고 하셨다. 제사 제도의 상징으로 예언되고 알려져 왔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가 오셔서 모든 민족 앞에 십자가에 높이 들릴 것이었으며 그분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은 생명을 얻게 될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사 제도의 기초이셨다. 모든 표상과 상징들은 복음이 압축되어 있는 예언이었고 구속의 약속들이 묶여져 있는 표상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 복음을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대표자로서의 고상한 특권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렸으며 그들의 거룩한 사명을 완수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받은 축복을 세상에 나누어 주지 않았다. 그들은 그 모든 이점을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였고, 유혹을 피하기 위해 세상과 담을 쌓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이방인의 행습에 동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우상숭배자들과의 교제에 가하신 제재를 그들과 다른 모든 민족들 사이에 장벽을 쌓는데 사용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신 예배를 도둑질하였으며, 동료 인간들에게 신앙적인 지도와 거룩한 모본을 제공하지 않았다.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의식 존중주의의 틀에 매여 있었다. 그들은 율법적인 신앙에 만족하였으므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늘의 산 진리를 전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가 충분하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그들의 신앙이 새롭게 되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그들의 공로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선행의 공로와 연결시켰다. 사랑으로 역사하고 영혼을 순결하게 하는 믿음은 의식들이나 인간의 명령들로 이루어진 바리새인들의 신앙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렇게 선언하셨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렘 2:21).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호 10:1).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사 5:3-7).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여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겔 34:4).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지도 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지혜롭고 구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의로우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광이 필요 없을 정도로 큰 영광을 가졌다고 생각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남용한 특권과 그들이 경시한 사업을 그들에게서 거두어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셨다.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나야 했고 당신의 말씀은 확증되어야 하였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세상에 세워져야만 하였다. 하나님의 구원이 무수한 도시들에 전파되어야 하였으므로 유대 지도자들이 실패한 그 사업을 하도록 제자들이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후, 제자들과 그분의 가르침을 믿은 소수의 무리들이 성령을 받고 복음을 전하였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교회가 된 것이었다.

4부 -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교회

 그리스도께서 친히 놓으신 기초 위에 사도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세웠다. 이 성전 건축에 대하여 기록하면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4, 5).

 사도들은 유대와 이방 세계의 채석장에서 기초를 놓을 돌들을 채취하는 일에 수고하였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신도들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19-22).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전 3:10-13).

만세반석 위에 세워지는 교회
 
사도들은 확실한 기초, 즉 만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웠다. 그들은 이 기초에 저희가 세상으로부터 채석한 돌들을 가져왔다. 건축자들이 방해를 받지 않고 수고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사업은 그리스도의 원수들의 반대로 극도로 어려워졌다. 그들은 거짓된 기초 위에 짓고 있는 사람들의 완고와 편견과 증오에 맞서 싸워야 하였다. 교회의 건축자로서 일한 많은 사람들은 느헤미야 시대의 성벽 건축자들에게 비유될 수 있다. 그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다(느 4:17).

 세상의 왕들과 총독들, 또한 종교라는 미명 아래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투옥과 고문과 죽음을 무릅쓰고 충실한 사람들은 사업을 진전시켜 성전 건물은 아름답고 균형 있게 건축되었다. 때때로 일꾼들은 저희 주위에 둘러 있는 미신의 안개로 거의 눈멀게 되었다. 때때로 그들은 대적들의 폭행에 거의 압도당하였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신앙과 충실한 용기로 그들은 사업에 전념하였다.

 때때로 건축자들의 최선봉에 선 사람들은 차례로 원수의 손에 쓰러졌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고, 야고보는 칼에 죽임을 당하였고, 바울은 목 베임을 당하였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요한은 정배당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성장하였다. 새로운 일꾼들이 넘어진 사람들을 대신하고 건물에는 돌에 돌이 첩 놓이게 되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교회라는 성전은 서서히 올라갔다.

중단되지 않는 성전 건축
 
그리스도 교회의 설립 이후에 여러 세기 동안 격렬한 박해가 있었으나,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사업을 생명 그 자체보다 더 귀중히 여긴 사람들이 없어지거나 부족된 적은 결코 없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6-38).

 사단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사람들에게 위임된 사업을 중지시키려고 부단한 노력을 쉬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위대한 종들을 일으키셨다. 이 사람들의 인내와 영웅적 행위가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사도들처럼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저희 자리에서 쓰러졌으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은 꾸준히 전진하였다. 그 일꾼들은 죽임을 당했으나 사업은 전진하였다. 왈덴스인들, 존 위클리프, 허스와 제롬, 말틴 루터와 즈윙글리, 크랜머, 래티머 그리고 녹스와 위그노들과 요한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 그리고 다른 많은 무리들은 영원 무궁토록 견딜 재료를 성전의 기초에 가져왔다. 그리고 근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추진하기 위하여 아주 훌륭하게 노력할 사람들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큰 기별들을 전할 길을 준비한 사람들 또한 성전 건물을 세우는 일을 도왔다.

 사도 시대 이후의 여러 세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성전 건축은 결코 그치지 않았다. 우리가 우리의 영적인 눈을 떠서 그 세기들을 회고해 보면, 오류와 미신의 어두움을 뚫고 쏟아져 나오는 빛처럼 빛나는 산 돌들을 볼 수 있다. 영원을 통하여 이 귀중한 보석들은 점점 빛을 밝게 비출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의 능력을 증거할 것이다.

교회의 사명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게 한 거룩한 임무를 맡기셨다.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의 보화, 신비스러운 그리스도의 부를 세상에 전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 당신의 성령과 당신의 품성을 대표할 대리자들만큼 구주께서 바라시는 것은 없다. 인간을 통하여 구주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만큼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없다. 온 하늘은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교의 능력을 나타내실 수 있는 남녀들을 기다리고 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한 충성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는다면 교회 앞에는 빛나고 영광스러운 날이 동틀 것이다.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히 굳게 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영원한 미덕, 많은 세대의 기쁨으로 삼으실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손수 마련하신 미래의 영광의 계시들이 나타나 있는데, 이 계시들은 당신의 교회에게 귀중하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늘 성 문 앞에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하여 고통 당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 사람들에게 주어질 정중한 환영사를 들을 수 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오라고 하는 말이 들릴 때에 그들은 구속주의 발 앞에 그들의 면류관을 내려놓고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라고 찬양할 것이다.

5부 - "현대 이스라엘=교회"란 무엇인가?

Q : 교회란 무엇입니까?
A : 교회는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정하신 하나님의 기관이다.
 교회는 봉사를 위하여 조직 되었고, 그 사명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한 후부터, 당신의 자녀들을 구원하시려는 구속의 경륜, 즉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시기 위하여 교회를 택하셨다.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신 성품을 세상에 나타내고, 당신의 사랑의 성품과 은혜의 충만하심을 온 세상에 나타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교회의 설립의 목적이었다. 교회, 즉 교회를 이루는 교인들은 한 목적을 위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데, 그것은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기이하신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을 충만히 받았던 소수의 무리들(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른 사람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친히 눈으로 목격했던 사람들로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 성령을 받은 무리들 ; 초대 교회라고 불림)이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려고 했을 때, 그들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질서와 조직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의 회, 곧 교회였다.

 초대 교회 당시의 교회는 지금의 교회의 개념과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함께 모여서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를 서로 나누고 간증하고 싶은 열망이 컸으므로, 자신들의 체험을 같이 나눌 수 있는 모임과 장소가 필요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 말씀을 효과적으로 실천 및 실행하기 위하여 질서 있는 조직이나 체계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교회에는 봉사직으로 여러 가지 직분이 주어졌으며, 그 직분은 다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하여만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 당시의 참 교회의 모습은 현 시대의 비즈니스화되거나 산업화된 권위주의적인 교회의 모습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또한 현시대의 교회와 그 당시의 교회와는, 교회 설립의 목적, 교회를 구성하는 요소인 교인들의 사명, 목적의식, 또는 자질 면에 있어서 확연히 다른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커다란 건물도 아니고, 조직도 아니고, 그것은 국가적인 설립 기관도 아니며, 또한 그것은 여러 각종 교파들도 아니다. 교회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그리스도께서는 초라한 몇 사람들 중에라도 계시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이다. 왜냐하면 영원토록 거하시는 높고 거룩하신 분의 임재만이 교회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Q : 참 교회가 되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A : 참 교회가 되는 조건은, 우리들 자신이 성소가 되어 마음 속에 하나님을 모시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구원은 무더기로 얻는 것이 아니다. 구원과 신앙의 경험은 개인적인 것이며, 각 개인이 가져야 할 아주 사적(私的)인 체험이다. 내 자신 스스로가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먹는 경험을 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이 떡을 먹은들 내 배가 부를 리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거듭남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경험이 내 것이 될 때에만 그 거듭남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진리가 겉으로 돌지 않고 나의 것으로 체험되고, 내 마음 속에 녹아 들고, 내 자신이 진리 자체가 되는 경험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체험을 이렇게 상징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3~56).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그 안에서 완전하게 된다는 것을 믿고, 그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예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그의 사랑을 바라보고, 그의 사랑을 깊이 생각하고, 거기서 깊은 감명을 받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양식이 신체에 영향을 주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심령에 영향을 끼치셔야만 한다. 음식은 우리가 그것을 먹지 않는 한, 또는 그것이 우리 신체의 한 부분을 구성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끼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알지 않는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아무런 관계나 가치도 없다. 이론적 지식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먹고 그를 마음에 받아들여 그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하여야 한다. 그의 사랑과 그의 은혜가 우리의 생애에 소화되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참 백성, 참 교회가 되는 조건이다.

 포도나무의 비유를 잠깐 살펴 보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분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연결된 것은 너희가 나에게서 지지를 받는 그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린 가지가 산 포도나무에 접 붙혀져 섬유질(纖維質)과 섬유질이, 엽맥(葉脈)과 엽맥이 연결되어 이것이 포도나무 줄기로 자란다. 포도나무의 생명은 그 가지의 생명이 된다. 그와 같이 허물과 죄로 죽은 영혼이 그리스도와의 연결을 통하여 생명을 얻는다.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음으로 연합은 이루어진다. 죄인이 그의 결점을 그리스도의 장점에, 그의 텅 빈 것을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에, 그의 연약함을 그리스도의 항구적인 능력에 연합시킬 때에, 그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우리의 인성에 감응되며, 우리의 인성이 신성에 감응된다. 이와 같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은 거룩한 품성을 나누어 가지는 자가 된다. 그 때 인간은 사랑 받으신 분이신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앞에 받으시는 바 된다. 이렇게 한번 이루어진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연한 접촉이거나 또는 분리와 연결이 무상한 그런 결합이 아니다. 가지가 산 포도나무의 한 부분이 된다. 뿌리에서 가지로 생명과 힘과 과실의 풍성함을 전달하는 일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포도나무에 붙지 않은 가지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살 수 없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너희가 나에게서 받은 생명은 계속적인 교통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내가 없이는 너희는 단 하나의 죄도 이길 수 없고 조그마한 유혹이라도 물리칠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성령을 계속적으로 받아들여 그분을 섬기는 일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생애를 의미한다. 교통의 통로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계속적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 포도나무 가지가 산 포도나무에서 수액(樹液)을 계속적으로 빨아올리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께 매달려서 믿음으로 능력과 그분의 품성의 완전하심을 그분에게서 받아야 한다. 뿌리는 가지를 통하여 가장 먼 가지에 이르기까지 영양분을 공급한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신자들에게 영적 능력의 흐름을 전달하신다. 영혼이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는 한, 시들어 버리거나 부패할 위험은 없다. 포도나무의 생명은 가지들에 달린 향기로운 열매 가운데 명백히 나타날 것이다. 예수께서는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 때에 성령의 열매가 우리의 생애 가운데 나타나 보일 것이며,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참 교회가 되는 사람들이다.

Q : 교회에 나가야만 구원을 얻습니까?
A : 위에서 배운 대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을 말한다.
 그것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로만 공언하는 그냥 교인이 아닌, 마음 속에 하나님의 임재를 충만히 경험하는 성도, 포도나무의 비유처럼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하나님과 산 관계를 맺고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참 교회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 교인이 교회와 관련되어 있거나, 교회의 교인 명단에 이름이 올라있거나, 목사님과 가까운 관계에 있거나, 선교를 많이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되고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와 죄를 이기게 하시는 능력, 그리고 우리 속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입혀주시는 의의 옷, 곧 나누어 주시는 의로운 성품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지, 교회라는 조직이나 그룹, 혹은 건물에 속해 있다고 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오늘 날 교회의 건물은 크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시지 않거나, 하나님의 임재가 부재된 교회들이 많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안목으로 생각해볼 때,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 속에 있지 않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언급되어져야 할 문제이지, 교회와는 상관이 없다.

 참 교회란 마음속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 = 백성이 아무도 없는 쓸쓸한 사막에 혼자 거하여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갑갑한 감옥에 갇혀 눈물로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아무도 없이 적막하게 집에서 혼자 하나님을 부른다 할지라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통회하며, 신령과 진리로 예배 드리는 사람을 당신의 아름다운 교회로 인정하시고 그 마음에 거하시며, 그 사람은 하나님의 눈에 귀한 참 교회가 되는 것이다.

Q : 마지막 시대에 나타날 하나님의 참 교회는 누구입니까?
A : 요한 계시록에는 마지막 시대에 탄생할 하나님의 참 교회에 대하여 예언되어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시대에 짐승의 표가 강요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요한계시록 13장, 14장에는 짐승의 표가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되는 모습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계 13:16),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계 14:11). 그런데 이렇게 짐승의 표가 강요되는 두려운 상황에서도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승리하는 참 교회의 모습이 나온다. 성경은 이들을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라고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 짐승의 표 받기를 거절하는 참 교회의 모습이 나와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다.

 성경의 마지막 장인 요한계시록 22장을 보면, 하늘에 들어갈 마지막 참 교회에 대해서 나와 있는데, 그들에 대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 (한글 성경에는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킹 제임스 영어 성경과 성경의 원문에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음, 역자주).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하늘에 들어가는 자들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신실하게 지킨다는 표현을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의 참 교회를 묘사하면서, 참 교회는 계명을 지키는 자들로 구성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오늘날, 과연 누가 사도 요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예언을 부인할 수 있는가? 그러나 현실을 살펴보면, 너무나 많은 목사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계명은 십자가에서 폐해졌다고 설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마지막 시대에 사단이 분노하여 전쟁을 벌이는 상대는 오직 여자의 남은 자손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요한계시록 12:17). 하나님의 계명이 폐하여졌다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의 공격대상에서 제외될 것이며, 그들은 짐승의 표를 받고 오히려 짐승의 표를 강요하는 세력에 가담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계명을 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고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태복음 5:17-19).

 물론, 참 교회의 교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였기 때문에, 청결하고 순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며 그것을 지키는 변화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거듭났고 새 사람이 되었으며,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법인 계명이 쓰여져 있으므로, 자연히 하나님의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생애를 살게 된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것을 지키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니, 늘 죄의 소욕에 끌려 다니고 습관적으로 의례히 죄의 노예로 살므로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 사람들은 아직 온전히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했거나, 구원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마지막에 하나님께서는 교파와 종교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생애에 이룬 참 백성들을 불러 모으실 것이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로 마지막에 모두 함께 모이게 될 것이다. 그들은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거듭난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마음 속에 충만히 경험하고, 또 죄의 흉악성을 너무 뼈저리게 느끼므로, 죄악을 싫어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악과 타협하거나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당신의 증인으로 삼으셔서 우주에 그들의 성품을 높이 들어 올리시고 보이실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된(히 10:16) 새 언약에 들어간 사람들이며,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이며, 이런 사람들이 마지막에 나타날 하나님의 참 교회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한복음 14:15)

Q : 여자의 남은 자손이란 무슨 뜻인가요?
A : 요한계시록 12장 마지막 절에 나오는 성경절에는 여자의 남은 자손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사단이 여자의 남은 무리(remnant)와 전쟁을 벌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남은 무리(remnant)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 remnant의 원어의 의미를 살펴보자. 옷감을 파는 집에 가면 천을 큰 두루마리로 말아놓은 것이 있는데, 그 두루마리의 마지막 남은 조각을 remnant라고 부른다. remnant는 두루마리의 첫 번째 천과 동일한 천으로써, 맨 마지막에 남는 조그만 천 조각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남은 무리는 사도시대의 교회가 가지고 있던 가르침과 동일한 변질되지 않은 가르침을 그대로 전수하고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

 각 가정에 족보가 있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엄연히 족보가 존재한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마는 하나님의 참 백성들의 족보와 그 족보의 흐름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남은 자손들이 있다고 성경은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진짜배기 자손들이 있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사람들을 구분하여 갈라놓는 것처럼 드릴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 말씀 자체가 여자의 남은 자손의 특징에 대하여 분명하게 명시해 놓고 있다.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에, 그들이 이제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선고를 내리신 즉시부터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자손과 뱀의 자손들이 서로 원수가 될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서로 원수가 될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문자적인 직역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그들 사이에 적개심을 두시겠다는 뜻이다. 이 세상 역사는 항상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 사이에 끊임없는 전쟁이 있어 온 사실을 여실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성경 요한 계시록 12장에 나오는 예언이 바로 그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의 자녀들, 즉 여자의 후손들과 그들을 핍박하는 자들 사이의 전쟁이 예언되어 있는 것이다.

 계시록 12장의 출발에서 성경은 햇빛을 입고, 달을 밟고, 12별의 면류관을 쓰고 있는 한 여인을 소개하고 있다. 이 여인이 한 남자 아이를 낳게 되는데 그 아이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이며, 용이 여자가 낳은 그 남자 아이를 죽이려고 애를 쓰게 되고, 결국에는 이 아이가 하늘로 승천하게 되는 사실을 말하면서 과거 역사적인 측면에서 이 여인이 누구인지를 설명하여 주고 있다. 이것은 틀림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킨 교회를 말하는 것이며 마귀가 그를 죽이려 하는 모습과 결국에 하늘로 승천하여 올라가신 주님을 설명하여 주는 장면이다.

 그러므로 계시록 12장은 남은 자손, 즉 하나님의 교회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으며 그들의 정체가 과연 누구인지를 지목하여 주고 있는 예언인 것이다. 여인이 낳은 남자 아이가 하늘로 승천한 후에 마귀는 분이 나서 교회를 핍박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 패한 분풀이를 하나님의 자녀들인 교회에게 하는 것이다. 그는 1260년 동안 교회를 죽여 없애려고 애를 쓰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교회는 광야로 도망하여 살게 되는데 그것은 사단의 핍박을 피하기 위하여 광야와 산골짜기 그리고 동굴 등으로 피신하여 겨우 그 존재의 명맥을 유지해 나가는 참 교회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중세기 동안 교황권의 핍박을 피하여 도망 다니던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하고 있다.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고 복사하지 못하게 할뿐더러 성경의 진리대로 가르치는 자들을 교회의 권위에 대한 반역자와 이단자들로 몰아 잡아 죽이고 고문한 과거 암흑시대의 역사가 누가 참 하나님의 교회인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중세기에 1260년 동안 핍박을 감행한 세력은 마귀의 앞잡이 노릇을 한 파워이고 그 같은 기간 동안에 핍박을 당한 대상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인 것이다.

 그런데 계시록 12장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4-17). [ * 14절의 한때 두때 반때의 기간을 6절에서는 1260일이라고 말했다. 예언 기간에서 하루는 일년을 상징함으로 이것은 1260년 동안의 종교 암흑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이때 용이 물을 토하여 교회를 없애려고 하는데, 이 물은 성경의 예언에서 사람들을 상징하고 있다(계 17:15 참조).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핍박한 교황권의 활동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폭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때에 땅이 교회를 도와 주게 되는데 이 땅이란 바로 다음 장인 계시록 13장에 등장하는 땅에서 올라오는 나라인 미국을 상징한다. 그래서 중세기의 핍박에 시달리던 하나님의 자녀들이 미국이라는 대륙이 발견되자 그곳으로 이주하여 옴으로 그 핍박을 피하여 살게 된 것이다. 콜럼버스가 그 즈음에 미국을 발견하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마귀는 인간의 범죄 후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 하시려는 계획을 알아차리고 하나님의 참 백성들을 죽이려고 사력을 다하여 싸워 왔다. 우리는 그 사실을 성경의 역사를 살펴 보면서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먼저 가인을 통하여 아벨을 죽인 마귀의 역사를 보자. 마귀는 여인의 후손, 즉 하와의 아들인 가인을 자기의 자손으로 삼는 일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 충성하며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는 동생 아벨을 미워하여 죽이게 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가인은 여인의 자손이었으나 실상은 뱀의 후손 즉, 마귀의 후손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 사이에 전쟁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 후에 아담은 셋을 낳고 기뻐하였으며 셋은 아벨을 대신하여 여인의 후손 즉, 참 하나님의 교회가 된다. 그 후로 셋의 후손들과 가인의 후손들은 서로 떨어져서 살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인의 후손들로부터 오염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창세기 6장에 가서 슬픈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마귀가 셋의 후손과 가인의 후손들이 서로 섞이게 만드는 일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2,3,5,6). 마귀는 여자의 남은 자손들 즉, 하나님의 참 백성들을 다 죽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가 간구해낸 묘책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들어 와 그들을 타락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셋의 후손들이 가인의 딸들과 결혼함으로 타락시키는 일에 성공하였다. 그 결과 비참한 노아 홍수가 임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만히 놓아 두실 수가 없으셨다. 죄악의 파급이 너무나 신속하였기 때문에 메시야가 오시기도 전에 세상이 자멸 할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노아 홍수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참 백성들을 구별하여 놓으셨다. 세상의 타락한 와중에서도 진리를 고수하며 의로운 생활을 사는 백성들을 구별하여 놓으신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아브라함이었다. 우상 숭배가 만연했던 갈대아 우르 지방에서 그를 불러내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계명을 지키는 자로 삼으신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라(창 18:19).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는 의로운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것이 여자의 후손 곧 하나님의 참 백성들을 구별하여 두시는 이유다.

 노아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읽어 보자.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보았음이니라(창 6:22-7:1).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남겨 두시는 이유가 얼마나 꼭 같은가! 바로 이러한 같은 이유에서 계시록 12장이 여자의 남은 자손들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이 바로 여자의 남은 무리들이다. 참된 하나님의 남은 자손들이라는 말이다. 그들은 예수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 계시록 1장 2절은 요한이 본 계시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라고 부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주신 계시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는 자들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에 말씀하고 있는 사단의 자손들과 여자의 남은 자손들의 특징을 이해하는 자들이 지금도 하나님의 남은 백성들이라는 것이다. 사단은 초대 교회 때에 오류를 가지고 교회에 들어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기의 부하들로 만드는 일에 성공하였다. 침례 요한이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이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부른 것을 기억하시는가? 그것은 그들이 실상에 있어서는 마귀의 자식들이라는 말이다. 예수께서도 그들을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시지 안았는가? 그러므로 지금도 교회 안에 하나님의 백성들과 마귀의 백성들이 눈에 보이지 않게 분리되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마귀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여자의 남은 무리들을 핍박하고 있다. 앞으로 이 일은 온 세계적으로 일어 날 것이다. 두 무리가 분명하게 분리되어 서게 될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과연 어느 편에 속하게 될 것인가? 참으로 심각한 질문이 아닐 수가 없다.

 예수를 그저 머리로만 믿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이 그들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자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만 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따라 사는 자들이 여자의 남은 자손들이다. 자기의 목숨을 잃어 버리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될 지라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더 높이는 자들, 하나님의 명령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자들, 먹고 사는 일보다 주님의 명령이 더 중요한 자들, 그러한 자들이야 말로 참된 하나님의 남은 자손들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