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가 걷는 길

이 글은 From The Mount Of Blessing 에서 발췌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태복음 5:2~3.

그리스도의 순결함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마다 자신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깨닫게 된다(요한계시록 3:17). 그러한 사람들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급하게 된다(디도서 2:11). 바로 이러한 사람들만이“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씀을 들을 때에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예수께서는“부자라 부요하여”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축복을 나누어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조소로서 은혜의 선물을 외면하였다. 스스로 부족한 것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 자신이 꽤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현상태의 자신에 대하여 만족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의 의에 대하여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다. 성경은 그러한 마음의 상태를 교만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교만한 자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굳게 닫는다. 자신의 부족을 깊이 느끼면서 천국문을 향하여 떨리는 손을 믿음으로 뻗치는 영혼들에게, 예수께서는“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선언하신다.

예수께서는 죄인을 용서하시기 전에 먼저 회개하도록 만드신다.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죄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해온 모든 일이 이기심과 죄로 얼룩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련한 세리처럼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부르짖게 된다(누가복음 18:3). 바로 그러한 자들이 복있는 자들이다. 그러한 회개를 하는 자들에게는 용서하시는 은혜가 내려진다. 그러한 자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이 되실 수 있다(요한복음 1:29). 또한 그러한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약속이 준비되어 있다.“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사야 1:18.

마음이 가난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 아래로 모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는 가난한 마음, 온유한 마음, 의를 위하여 핍박을 감수하는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초청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를 앞장 세우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만이 천국문을 들어가게 된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지위가 높은 자들이나 부자들이 우쭐거리면서 당당하게 활보하기에는 너무나 좁으며, 야심을 펴기에는 너무나 협소하고, 마차가 쉽게 기어 오르기에는 너무나 비탈지고 험한 길이다. 노고, 인내, 자아희생, 비난, 고된 노동, 핍박과 박해 같은 것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생애하셨을 때에 감당하셨던 몫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피묻은 십자가를 앞장 세우고 하늘에 들어가고자 할 때에 치루어야 할 몫도 그러한 것들이 된다. 물론, 하늘에 가는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와 공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우리가 치루는 희생과 봉사와 핍박이 공로가 되어서 자격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어둠의 세력이 주관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진리를 향하여 나가는 길마다 고난과 오해와 희생이 뒤따르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오직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들만이 하나님의 진리 속에 담겨져 있는 고통과 인내와 슬픔과 외로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위로함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애통이라는 말은 진정한 마음으로 죄를 슬퍼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12:32). 그러므로 사람이 십자가에 들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그는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분별하게 된다. 그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생애를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자신의 생애를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게 되고, 모든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게 된다. 그는 자신의 더러운 생애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어둡고 깊은 죄의 심연에 의해서 하나님과 자신이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보면서 깊은 절망과 슬픔을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애통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은 죄를 드러내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가서 그분을 통하여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는 재난이나 사별의 아픔을 가진 자들을 위한 위로의 기별도 있다. 우리의 슬픔은 아무런 근거없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즐기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애가 3:33 에는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분께서 시련과 환란을 허락하시는 것은“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기 위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히브리서 12:10). 당장 감당하기 어렵고 가혹하게 보이는 시련일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성품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결국, 세월이 흐르면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서 고안된 고난과 시련이 우리를 위한 최고의 축복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세상의 쾌락과 재산을 송두리채 앗아가는 혹독한 재난이 오히려 우리의 눈을 하늘로 향하게 만든 수단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엄청난 슬픔을 당하여 예수님 안에서 위로를 구하는 일이 없었더라면, 결코 그분을 알지 못했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많은 경우에 있어서, 시련과 고난의 학교는 우리를 위한 최고의 훈련 학교이다. 인생의 고난과 역경은 우리의 성품에서 불순하고 모나며 거친 것들을 제거해 내는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물론, 이들에 의해서 채석되고, 깍끼우며, 끌로 새기어지고, 갈리며 다듬어지는 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또한 원치 않는 회전 연마기 속에 빨려 들어가서 정신없이 연마되어 나오는 것도 참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일단 그 속에 들어간 돌은 하늘 성전의 한자리를 채우는데에 부족함이 없이 준비되어 나온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작업은 매우 신중하게 계획된 작업이다. 예수께서는 쓸모없는 우리를 하늘 궁전에서 쓸모있는 보석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 계획을 준비하셨는데, 바로 그것이 시련과 고난이다. 시련과 고난의 학교에서, 교사이신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학생들만이 가치있는 교훈을 배우며, 귀중한 경험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련 속에서 교훈을 배우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를 경솔하게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책망을 들으면서 낙심하지 않는 방법을 터득한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시대에 복있는 자들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가지 환란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가지 환란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욥기 5:17~19.

예수께서는 상처를 입은 모든 사람들을 찾아서 치료해 주신다. 사별과 고통과 고난의 생애일지라도, 역경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기쁨과 환희의 생애를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못할 슬픔과 아프고 상한 심령으로 짓눌려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눈을 들어 자애로운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보기를 원하신다. 지금도 사랑의 구세주께서는 슬픔과 고난의 눈물에 압도되어서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곁에 서 계신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단순한 믿음으로 당신의 손을 잡고 그분께서 인도하시는대로 따라오기를 원하신다. 그분의 마음은 우리의 슬픔과 비애와 시련을 향하여 항상 열려 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명상하기만 하면, 그분의 영께서 우리의 영혼 속으로 들어와서 우리를 슬픔과 고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시며, 완전한 안식과 평화를 선물로 가져다 준다. 고통과 슬픔 중에 있는 형제 자매들이시여, 그대들의 고난과 시련은 하나님께서 그대들의 마음을 하늘로 들어 올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는 승리해야 한다. “세상을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 요한일서 5:4. 예수께서 이 세상과 죄를 보고 우셨던 것처럼, 이 세상의 타락상과 죄악을 보면서 우는 자들은 복있는 자들이다. 이 같은 애통에는 자신에 대한 자랑이 차지할 자리가 없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야말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에 함께 동참하고, 그분과 함께 슬픔의 잔을 비우는 사람들은 복있는 자들이다. 예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때에 그들은 그분과 함께 기쁨과 영광의 자리에 동석하게 될 것이다.

어떤 목사 부인의 간증


아버지의 절규

“마가렛 날 좀 도와 다오!” 그것은 절망에 가까운 호소였다. 아버지의 그러한 호소는 나로 하여금 나의 생애 전체를 바꾸어 놓은 성경 연구를 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 우리 가족은 필리핀과 인도에서 10여년간 선교사로서 봉사한 후 미국에 있는 새로운 임지로 가기 전에 카나다에 있는 가족들을 방문하였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부모님의 집에 모든 형제들이 모였는데, 어떤 한 형제에 의해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문제가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과정과 그 결과로서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우리들은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목사의 부인이고 오랜 세월 동안 선교사로 봉사하였기 때문에, 나에게서 어떤 분명한 대답을 듣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나의 형제들이 그들의 견해를 피력하였을 때, 아버지는 나에게 “마가렛, 저들의 말이 틀림이 없니?” 라고 물었다. 그 때 나는“아버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라는 무기력한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토론이 계속되어 갈수록 아버지는 점점 더 곤란해 하시는 모습을 역력하게 나타내셨다. 그분이 평생동안 믿었던 하늘에 대한 소망이 한낱 모래성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단순히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최선을 다하라. 그러면 점차적으로 죄를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셨다. 그는 평생 예수를 믿고 노력하였지만, 여전히 적은 일에 노여움을 잘내고, 분을 참지 못하며, 짜증내고, 인내하지 못하는 성품을 드러내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토론에서 마음을 정결케하고, 죄를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듣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엄청난 죄책감과 좌절감에 압도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언젠가는 자신도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평생을 살아 왔지만, 인생의 황혼기를 넘어서는 나이가 되도록 그리스도의 겸손과 온유를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성경은 “이기는 자”에게 영원한 삶을 약속하고 있지만, 아버지는 승리의 경험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요한계시록 3:21~22. 아버지는 진지한 그리스도인이었지만, 죄의 속박과 잘못된 습관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되는 구원의 즐거움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토론이 계속 됨에 따라, 아버지 뿐만 아니라 나도 혼돈 가운데로 들어 가게 되었다. 목사 부인인 나 역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의미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나의 신앙도 아버지가 믿었던 것과 비슷한 신앙이었다.“노력하라.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던 죄들이 조금씩 줄어들면, 그것을 죄에 대하여 승리하는 경험으로 생각하라.”이것이 아버지와 내가 오랜 세월 동안 믿어 왔던 신앙이었다. 과연, 노력하기만 하면, 언젠가는 이기는 자가 될 것인가? 과연, 언젠가는 승리와 패배를 반복하는 시소 게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다음날 아침, 아버지는 나에게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좌절감을 말씀하셨다. 깊은 죄책감으로 자신을 무겁게 억누르고 있는 젊은 시절의 죄들을 고백하였다. 여러 해 동안 자신이 부인과 가족들에게 행한 여러가지 잘못들에 대한 죄책감이 아버지 앞에 거대한 산처럼 다가와서 아버지를 삼키려고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의롭고 자비로운 생애를 살고 싶었지만, 도무지 그러한 삶을 살 수 없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로마서 7:19,24).

아버지는 언제 운명하실지 모르는 심장 질환을 가진 78세의 노인이셨다. 그는 죄를 승리하는 자만이 하늘에 들어 갈 수 있다는 진리를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내가 거실에서 함께 이야기하고 있을 때, 그는 내게 울먹이는 절망적인 음성으로“마가렛, 날 좀 도와다오!” 라고 호소하였다. “오늘날, 도처에는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지 못한 무엇인가를 갈망하며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죄를 정복하게 해 줄 능력, 악의 쇠사슬에서 벗어나게 해 줄 능력, 건강과 생명과 평안을 가져다 줄 능력을 갈망하고 있다.” God Taught Love.

열심은 있지만, 진리에 대한 지식이 없음

아버지의 절규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가 아버지의 고뇌를 전혀 도와드릴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실망하지 말고 좀더 열심히 노력해 보세요!”라는 말 뿐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내 자신이 한 말에 아무런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아버지는 이미 평생을 노력해오지 않았던가! 아마, 그분처럼 철저하게 신앙 생활을 하였던 그리스도인의 숫자도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름만 그리스도인이지 하나님의 진리와 그분의 뜻에 무관심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오랜 선교 생활에서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그러한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그분의 신앙은 진지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결정적인 능력을 상실한 삶이었다. 그 날,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를 도울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지를 아버지께 가르쳐 드릴 수 있게 될 때까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연구하기로 굳게 다짐하였다. 그러나 연구가 진행되면 될수록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아버지 뿐만 아니라 내 자신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목사 부인으로서의 오랜 봉사를 통하여 열심히 헌신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하였지만, 실제에 있어서 나의 영혼은 하나님의 영의 지배하에 있지 못하였다. 마음 속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굴복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 때때로 나를 성가시게 만드는 남편이나 자녀들 또는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지 못했었다.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실제에 있어서는 다만 인간적인 도덕가에 불과하다 ... 성령이 그들의 마음 속에 역사하시는 일이 그들에게는 어색한 일이다.” Living the Life of the Life Giver. 나는 어려서부터 온순하고 착한 아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났다. 나는 교회 활동에 꽤 열심을 내었으며, 기도회나 성경 연구반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내가 꽤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하나님을 위한 나의 봉사에 만족하였고, 그랬기 때문에 구원을 위한 중요한 어떤 것이 내게 결핍되어 있다는 생각은 결코 할 수 없었다. 나에게 열심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지식은 없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쫓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 로마서 10:2~3.

참 신앙을 발견함

순수한 신앙은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자기의 의가 되게 만들며, 비록 죄인일지라도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통하여 이기는 자가 되게 만든다. 그 까닭은 참된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품을 선물로 받게 되며, 믿음을 통하여 항상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손을 붙잡고 살기 때문이다. 율법을 지키는 자기 자신의 행위를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결코 그러한 순종의 행위가 공로가 되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순종과 열심은 하나님의 진리에 일치되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최고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

내 자신의 누추하고 헐벗은 상태를 깨닫는 순간, 그리스도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나에게 있어서 성경 말씀은 생명의 떡과 물이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읽어왔던 성경이 이제 전혀 새로운 것으로 부각되었다. 드디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죄악적이고 이기적인 본성을 새롭게 변화시킨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내가 발견한 진리를 남편과 나누기 시작하였을 때, 남편도 나의 성경 연구에 참여하였다. 20여년을 목사로서 봉사하였던 남편도 그리스도인으로써 가장 중요한 영적 경험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그 때부터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들의 관심과 대화는 전혀 새로운 것으로 변화되었고, 영적이고 순결한 것들만을 사모하게 되었다. 우리 자신의 노력과 애씀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의 마음과 동기가 변화되었기 때문에 우리 부부에게 있어서 영적인 생활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우리 부부는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진리를 가지고 자녀들에게로 접근하였다. 자녀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애 가운데에 생긴 변화를 보면서, 자신들도 그러한 영적 깨달음과 변화를 얻고자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진리를 올바로 보았을 때에 변화의 기쁨을 맛보았던 것처럼, 자녀들도 우리의 생활 속에 분명하게 나타나는 변화를 보면서 스스로 변화를 갈망하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그때까지 자녀들에게 가르쳤던 어떤 교훈보다도 강력하고 분명한 교훈을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죄를 승리케 하는 능력은 오직 하늘에서만 내려온다. 우리의 영혼과 몸과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은 오직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는 그리스도인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경험을 발견한 이후, 나는 주님께서 나를 아버지와 나의 형제들에게 보내 주기를 간구하였다. 나는 내가 발견한 구원의 도를 형제들에게 나누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희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22:15. 복음은 하나의 생명없는 이론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애를 변화시키는 살아있는 능력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주께서 요구하시는 복음의 증거인데, 지금 세상은 그 같은 증거의 부족으로 인하여 죽어가고 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가족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주셨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진리를 나의 부모님과 형제들과 나누었을 때,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복음을 깨닫고 기뻐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로부터 3일 후, 아버지는 79세의 나이로 운명하셨다. 나는 하나님의 기이하신 섭리와 자비로 인하여 그분을 찬양하였다. 아버지가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경험을 체험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79년을 인내하며 기다려 오셨던 것이다.

가장 먼저 배워야 할 진리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교회에 나왔을 때, 그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야만 하는 진리는 자신의 의지와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법을 배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올바로 이해하고 경험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각종 오류와 세상이 주는 유혹에 쉽게 휩쓸려 가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주말마다 교회에 착실히 나가는 신앙 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혹과 시험이 왔을 때에 너무나 무기력하게 쓰러지고 만다. 그들의 신앙은 피상적인 신앙이다. 사람의 표준에 따라서 본다면 별다른 흠이 없어 보이지만, 유혹과 죄에 대해서 너무나 무력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과 의지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우리는 단지 연약한 인간일 뿐이야. 우리가 어떻게 죄를 이길 수 있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한낱 죗된 인간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번째 조건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5.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이다. 우리 마음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이길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부자 법관이 예수께 물었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는 질문에 우리의 모든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어떠한 것도 이 질문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빼앗아서는 않된다. 이것은 생과 사의 문제이며, 영원한 세상을 위하여 각자가 반드시 결정해야 할 문제이다. 지금 현재,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 있으며,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끊임없이 성경을 연구해야만 한다. 진리와 하나님의 뜻에 기초하지 않은 막연한 소망은 결국 멸망을 가져다 줄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양심과 생애를 비추어 보아야 한다. 이러한 비추임을 통하여,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이 필요한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있게 서라.” 골로새서 4:12

 

치질, 어떻게 고칠까?

아가타 뜨레쉬 의사

치질은 항문 부위의 확장된 혈관을 말한다. 심장으로 되돌아가는 혈액의 흐름에 문제가 생길 때, 항문 부위를 지나는 혈관의 압력이 높아짐에 따라 혈관이 확장되고, 이에 따라 혈관벽이 얇아지고 약해지게 된다.

확장된 혈관은 항문의 피부 조직을 밖으로 밀어내게 되고, 이것은 그 조직을 통과하는 그물눈 모양의 세미한 혈관을 밀어낸다. 그러므로 치질을 치료하기 위한 방법은, 먼저 혈관에 가해지는 압력을 줄이고, 항문에 자극을 주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항문 바로 안쪽에 있는 근육의 내부에 생기는 것을 내치질이라 하고, 바깥 쪽에 생기는 것을 외치질이라 부른다. 외치질은 종종 치핵이라고도 불리운다. 치질은 대개 20~50세 사이에서 발병되는데, 치질이 악화되어서 심한 통증을 느끼기 전까지는 별다른 증세를 느낄 수 없다.

치질의 증세는 그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대개 항문에서의 출혈로 나타나는데, 출혈이 심한 경우에는 빈혈 증세까지 일어날 수 있다. 통증이 심한 경우에는 똑바로 앉거나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프다. 확장된 혈관에 피가 뭉쳐 있거나 굳어 있을 경우, 통증이 매우 심해진다. 때때로 가려움 증세도 수반되지만 심각한 어려움을 주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치질은 복부로부터의 압력이 증가하거나, 항문 내부를 지나는 혈액의 흐름에 문제가 생길 경우에 생긴다. 좀더 구체적인 원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변비, 임신, 대변을 배설하기 위해 과도한 힘을 줄 경우,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경우, 체중 초과, 과식, 복부와 하체를 조이는 옷, 오랜 기간 동안의 심한 기침, 장기간에 걸쳐서 장 이완제를 복용하거나 관장을 할 경우, 오랜 시간 동안 앉아 있거나 서 있는 직업을 가진 경우, 운동 부족, 간경화증에서와 마찬가지로 간의 혈관 압력이 올라갈 경우, 등등.

천연 치료법

1. 고섬유질 식사는 많은 양의 대변을 부드럽게 배설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2. 날마다 옥외에서 하는 운동은 대장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3. 하루에 6-8 잔의 물을 마시면, 대변이 딱딱해지고 건조해지는 현상을 막을 수 있다.

4.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좌욕을 하면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욕조에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뜨거운 물을 반정도 채운 다음, 10~20분씩 앉아 있기를 하루에 3~5번 반복한다. 따뜻한 물이 항문의 출혈부위에 잘 접촉할 수 있도록 엉덩이를 벌린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 좋다. 엉덩이가 욕조에 닿는 부분에 타월을 접어 놓고 그 위에 앉으면,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있다. 좌욕은 자극을 받아서 충혈된 조직과 항문부위의 근육을 부드럽게 해준다. 환자가 원할 경우, 욕조물에 조롱나무에서 채취한 약물(witch hazel)을 1/4컵 정도 섞어도 좋다.

통증이 매우 심한 경우에는, 뜨거운 물과 찬물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좌욕을 하는 것이 좋다: 두개의 큰 대야를 준비한 다음, 하나에는 뜨거운 물을 채우고, 다른 하나에는 찬물을 채운다. 뜨거운 물이 담긴 대야에 5분간 앉아 있은 다음, 찬물이 담긴 대야에 30초~ 60초 앉아 있는다. 이러한 과정을 3번 반복한다.

5. 맵고 짜거나 화학 조미료가 많이 들어간 음식 즉, 칠리, 피자 등과 같은 식품은 충혈된 항문을 자극하는 경향이 있다.

6. 천연적인 방법으로 대장을 이완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설사는 항상 치질을 악화시키므로 주의해야 한다. 오트밀, 통밀, 푸룬(자두) 쥬스, 센나 차(senna tea), 감초 차(licorice tea), 과일과 채소류 등은 매우 효과적인 이완제 역할을 한다.

7. 대변을 배설한 후, 항문을 청결하게 하기 위해서 과도하게 자극하면 안된다. 항문을 문지르는 대신에 고급 화장지로 항문 부위를 부드럽게 두두림으로서 항문을 청결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최선의 방법은 샤워기를 사용하여 배설물을 따뜻한 물로 닦아내는 것이다.

8. 끓인 양파는 혈액의 응고성을 향상시킨다. 매일 양파를 섭취함으로써 출혈을 조절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9. 항문 부위를 얼음 찜질함으로써 통증을 경감시킬 수 있다.

10. 국부 마취제가 함유된 약품이 치질약으로 나와 있지만, 그것이 최선의 해결책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약품은 오히려 상처 부위를 자극하고 치료를 지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국부 마취제에 대하여 알러지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약품의 이름이나 함유 성분란에“~케인(caine)”이라는 이름을 가진 약품들은 대개 국부 마취 성분을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1. 붕대나 천을 사용하여 골든씰 약초나 조롱나무에서 채취한 약물(witch hazel)을 항문 부위에 밀착시켜 놓으면, 지혈 효과를 얻을 수 있다.

12. 오랜 시간 동안, 앉아 있거나 서 있는 것을 삼가할 것.

13. 치질로 인하여 피가 흐를 경우, 아스피린을 복용하지 말것. 아스피린은 피가 지혈되는 것을 막으며, 출혈을 연장시킨다.

14. 알로에를 6cm 정도의 길이로 잘라서 껍질을 벗긴 다음에 항문에 삽입시키면, 매우 효과적인 치질 치료제 역할을 한다.

15. 크렌베리 폴티스로 통증을 가라 앉히는 법 : 먼저, 크렌베리를 믹서나 블랜더에 간다. 잘 갈아진 크렌베리를 얇은 무명 천으로 잘 싼 다음, 항문의 치질 부위에 얹어 놓는다. 한 시간에 한번씩 크렌베리 폴티스를 새 것으로 갈아 준다.

16. 소량의 레시틴(lecithin)을 환부에 바름으로써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17. 하루에 두번씩, 무릎을 꿇고 엎드린 자세에서 엉덩이를 위로 치켜올린 상태를 5분 동안 유지한다.

18. 심호흡을 한다. 숨을 가득 들여 마신 상태에서 천천히 20을 셀 때까지 호흡을 멈추고 있다가, 10을 세면서 천천히 내쉬기를 수차례 반복한다.

19. 대개 환부의 혈액이 응혈되었을 경우, 치질로 인한 통증이 매우 심해지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병원에 가서 환부 내에 응혈된 혈액(clot)을 제거할 수 있다. 이것은 치절제 수술과는 다른 것으로 매우 간단하고 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지는 치료법이다. 4항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좌욕을 함으로써 통증을 빨리 경감시킬 수 있다.

심하게 탈수된 치질이나 계속해서 재발되는 문제를 지닌 치질일 경우에는 치절제 수술을 고려해야 한다. 불필요하게 수술을 미룸으로써, 여러가지 불편과 통증을 자초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여러가지 새로운 시술 방법이 개발되어 있기 때문에, 간단한 시술로도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한가지 중요한 것은 치질에 대해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의사나 항문과 전문의(proctologist)를 찾는 것이다.

 

건강을 위한 더 나은 선택


오늘날처럼 건강이 이기적인 상업주의에 의해서 위협받았던 때는 일찌기 없었다. 그러나 아직도 몇몇 식품회사에서는“먹을 것”을 양심적으로 만들고 있다.

가정 주부들이 가족의 건강을 진정으로 보호하기 원한다면, 식품점에서 식품을 살 때마다 포장지에 표시되어 있는 함유물(food label)에 어떤 것들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가급적이면 외식을 줄이고, 음식을 천연적이고 단순하게 요리하여 먹는 식생활 습관을 길러야 한다. 다음에 소개하는 챠트는 독자들에게 식품을 선정하는데에 있어서 좋은 가이드 라인을 제공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 위에 소개한 대체 식품 챠트는 현재 미국에 있는 천연 치료기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대체 식품을 중심으로 작성한 자료입니다. 위에 언급한 건강식품에 대하여 좀더 상세한 정보를 알기 원하는 분들은 생애의 빛으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 MSG에 관하여 알고 싶은 분은 살아남는 이들 제7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 자료는 Freedom of Health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과 독수리의 대혈투


그리스도인과 독수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쟁투를 아는가? 이 전쟁은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오히려 자신이 죽임을 당하게 되는 매우 치열한 전쟁인데, 바울은 이 전쟁에서 독수리를 죽이고 승리하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로마서 6:6. “옛 사람”은 죗된 본성을 말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것을 독수리라고 표현하기로 하겠다. 옛 사람(죗된 본성) 즉, 독수리를 죽이기 위해서는 그것을 품고 있는 내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는 경험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죽는 것이 필요합니까?” 또는“꼭 죽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며 죽기를 거절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죽기보다는 자기 안에 있는 선한 어떤 것을 계발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악하고 이기적인 존재이므로,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악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좀더 나은 방향으로 향상시켜 나가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자아의 죽음과 선의 계발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창조와 진화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 같다. 사도 바울은 자아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재창조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 안에 있는 어떤 것을 선한 것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진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것이 하늘가는 길을 걷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참 경험일까?

독수리를 알아야 독수리를 잡는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마태복음 15:18~20. 겉으로 나타나는 열매의 출처는 마음이다.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계시면 자연스럽게 성령의 열매를 맺히지만, 사납고 비열하며 이기적인 독수리 같은 본성이 살아서 우리를 지배하면, 독수리와 같은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면서 살게 된다. 우리는 지금 독수리를 죽이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독수리를 죽이기 위해서는 먼저 독수리를 잡아야 하는데, 독수리의 본성을 잘 이해해야만 그것을 잡을 수 있다. 독수리를 잡기 위해서, 우리는 독수리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알아야 독수리를 잡아서 죽일 수 있다. 우리는 독수리가 죽은 시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독수리는 참새나 비둘기 같으면 전혀 관심도 갖지 않은채 지나쳐 버릴 죽은 송장에게 침을 흘리며 달려든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그는 독수리이기 때문이다. 독수리는 바로 그러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다. 그는 신선한 과일이나 야채나 곡식보다는 썩어서 냄새가 나는 죽은 시체를 좋아한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독수리를 잡아서 그것의 태도와 습관을 잘 길들여서 온순한 동물로 변화시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는 먼저 독수리가 들어갈 만한 커다란 새장을 만들어서 그 속에 독수리를 넣었다. 그리고 먼저 독수리의 식생활 습관을 변화시키려고 날마다 사과, 오렌지, 바나나 등을 주었다. 독수리는 여러 주일 동안 주인이 주는대로 잘 받아 먹다가, 어느날 새장 한 구석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그 구멍을 통해 날라가 버렸다. 독수리는 하늘 높은 곳에 떠있다가, 죽어서 쓰러져 있는 당나귀를 발견하고는 쏜살같이 내려가 작고 빨간 혀를 날름거리면서 맛있게 뜯어 먹었다. 주인은 독수리를 위하여 훨씬 더 선하고 아름다운 생활을 준비해 두었지만, 독수리는 자신의 옛 습관을 결코 바꾸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가 독수리이기 때문이다.

양이 되어야 양처럼 살 수 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시여,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독수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독수리 같은 본성의 형편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동안 비둘기와 함께 먹이통 곁에 앉아 있을 수 있다. 또한 마치 우리가 양들과 함께 어울려서 풀을 뜯고 놀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흉내낼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인이 우리는 지켜보지 않거나, 누군가가 우리 곁에서 지켜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면, 가차없이 독수리의 근성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어서 주변에 있는 양들에게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를 들이댄다. 바로 그 때, 곁에서 우리를 지키고 있던 천사는 눈물을 흘리며 우리가 다시 독수리로 돌아간 사실에 대해서 하늘 왕에게 보고서를 기록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경고하셨던 말씀이다. “네가 진정으로 회개하여 새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너는 곧 매우 두려운 일을 당하게 될거야. 그러니 너는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 너는 깨어 있어야 해!” 주님의 당부에 대해서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주님,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버리고 갈지라도 저는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오자, 베드로는 닭이 두번 울 때, 세번이나 부인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주님께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아니다. 적어도 베드로는 정직하게 말했다. 그는 정말 주님을 끝까지 따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 속에 숨어 있는 독수리의 참 모습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예레미야 17:9.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는가? 예수께서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아시고 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우리의 죗되고 이기적인 본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체면과 위선이 좀더 완벽한 가면을 만들어 내는 것일 뿐이다. 독수리는 그가 살아 있는한 언제까지나 독수리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어린 양같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어린 양으로 다시 태어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독수리를 길들여서 어린 양 흉내를 잘 낼 수 있게 훈련시키는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한, 우리는 적당한 때가 되면 다시 독수리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독수리인 우리는 어린 양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듭남의 경험이 없이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거듭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좀더 완벽하게 위장된 가면과 위선 속에서 이웃과 가족을 속일 뿐 아니라, 결국에는 자신마저 기만하는 깊은 늪에 빠지게 된다.

독수리를 죽이는 방법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을까? 유일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독수리를 죽이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죽음의 모본을 보여주고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것처럼, 우리의 자아도 십자가에 못박혀야만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여 함이니” 라고 말했던 것이다(로마서 6:6). 그분의 죽음은 우리 모두가 동참해야 할 죽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죗된 자아 즉, 독수리의 본성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은 매우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우리 속에 있는 독수리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음으로써 배고픔으로 허덕이게 해야 하며, 외쳐대는 그의 요구를 거절해야 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자아를 죽일 수는 없다.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이 일이 가능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분의 죽음을 바라볼 때, 우리 속에서 그분의 희생을 통하여 이루어진 용서와 구원에 대하여 깊이 감사하는 정신이 샘솟게 되며, 동시에 그분처럼 의롭고 경건하며 거룩한 생활을 살고자 하는 소원이 우리의 마음을 채우게 된다. 우리 속에서 생긴 이러한 전격적인 변화는 하늘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마음의 재창조인데, 이러한 변화를 날마다 경험하는 그리스도인만이 자신 속에서 올라오는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하고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다. 독수리의 요구에 대해서“안돼”라고 대답하는 거절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질 때, 드디어 독수리는 점점 세력을 잃고 죽어가게 된다. 전에는 커다란 유혹으로 느껴졌던 시험이 이제는 아무런 유혹거리가 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독수리가 우리를 지배하는 힘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가장 위험한 두 가지 오해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시여, 독수리와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쟁투는 평생을 통하여 계속되는 경험이다. 오늘의 승리가 내일의 승리를 약속해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간증하면서,“나는 매일 죽노라” 라고 말했던 것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혼돈하고 있는 한가지 경험이 있는데, 그것은 거듭남에 대한 경험이다.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본성(마음)을 주신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을 한 후일지라도, 때때로 자신 속에서 올라오는 옛 본성으로 인해서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 반복됨에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헌신과 회개를 받지 않으셨다고 오해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실망과 좌절 속에서 방황하다가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을 떠나고 만다. 옛 본성의 요구에 굴복하는 죗된 생애를 살다보면, 결국에는 성경의 진리를 자신의 죗된 경험에 맞추어서 철저하게 합리화 시키게 된다. 즉, 자신이 거듭나는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진리가 요구하는 순종과 자아 희생을 거절하는 생애를 살았었던 것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는 일단 한번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정죄하지 않으신다는 위험천만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대개 그러한 결론을 내린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주장을 하게 된다:

1.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 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향하여 율법이 요구하는 죄의 값을 완전하게 치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십자가는 죄를 범해도 좋다는 허가증이 아니라, 죄가 요구하는 댓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보여주면서, 인류들에게 죄짓기를 중단하라는 그리스도의 피가 묻은 호소이다. 십자가는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권위와 그 의미를 완전하게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마태복음 5:17.

2. “한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입니다(Once saved, Always saved)”: 옛 본성의 요구대로 살아가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경험을 성경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합리화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과거에 한번 받은 구원은 어떠한 경우에도 잃어 버릴 수 없으며, 심지어는 거절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원은 날마다 유지되고 지켜져야 한다. 어제 구원받았다고 할지라도, 오늘 내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거절하면, 구원은 더 이상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한번 구원받았으면, 나의 믿음과 생활이 어떻하든지간에 무조건 구원받게 된다”는 가르침을 믿고 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하늘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사도 요한의 경고를 무시하지 말라(요한계시록 21:17). 구원은 과거에 이루어진 한순간의 결정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한번 결정한 후에도,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계속 성장해 나가는 일이 필요하다. 한번 거듭났다고 할지라도, 옛 본성의 요구를 계속해서 거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자. 그렇다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죄를 지으려는 충동을 느낄 것인가? 그렇다. 왜 그런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 기 때문이다(갈라디아 5:17). 거듭남을 경험한 후일지라도, 육체의 소욕 즉 옛 사람(독수리의 본성)이 우리 속에서 계속 부르짖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과나 당근처럼 유익하고 선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인가 썩고 부패한 것을 원한다. 비록 독수리가 그러한 것들을 강력하게 요구한다고 할지라도, 놀라거나 실망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유혹을 느끼는 자체는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유혹에 굴복하여 그것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끌려다니기로 선택할 때, 바로 그 순간에 죄는 성립된다. 밖으로부터 다가오는 유혹과 우리 속에서 그 유혹에 굴복하라고 종용하는 독수리의 요구에 대하여, 우리가 굴복하느냐 아니면 거절하고 승리하느냐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관건이다. 그런데 성경은 오직 새롭게 거듭난 자들만이 승리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마음을 그리스도께 바치고 독수리의 요구를 듣지 않기로 선택해야만 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다시 살펴보자.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 이 쪽에는 십자가가 있고, 저 쪽에는 마음의 보좌가 있다. 우리가 마음의 보좌에 그리스도를 앉도록 모신다면, 옛 사람 즉 독수리 같은 본성은 십자가에 못박히게 된다. 시험과 유혹이 접근해 왔을 때, 우리가 예수께 대하여 “예”라고 대답한다면, 자신 속에 있는 독수리에 대해서는 “안돼”라고 대답하는 것이 되는데,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매일 경험해야 할 생애인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 대하여“예”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독수리의 부르짖음에 대해서도“예”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들은 십자가에는 어떤 것도 못박으려고 하지 않는다. 공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지는 않지만, 독수리 역시 못박아 죽이려고 하지 않는데, 그러한 사람들이야말로 뜨뜻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인들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 속에 독수리와 예수님과 세상을 함께 모시고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의 마음 속 보좌에는 오직 예수님 한분만 모시며, 십자가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독수리 같은 본성을 못박는 사람을 의미한다.

십자가에 못박힌 독수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신을 놓아달라고 소리치고, 협박하는 것일 뿐이다. 못박힌 독수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라고 요구하며, 자신이 원하는 곳을 가라고 부르짖고, 자신이 범하기 원하는 죄를 범하라고 졸라댄다. 자신의 날개와 발에 박힌 못을 빼달라고 애원하며 절규한다. “나를 풀어 주세요! 잠시 풀어 놨다가 다음 주에 다시 못박아도 되쟎아요!” 못에 박힌 독수리는 항상 논리적으로 우리 자신을 설득하려고 애쓴다. 이러한 논리에 휘말린 그리스도인은 오늘은 독수리를 못박았다가 내일은 풀어주는 생활을 되풀이 하면서, 독수리의 요구에 끌려 다니는 피곤한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내일이면 또 독수리를 풀어줄텐데” 라는 생각 때문에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중단하게 된다. “어차피 다시 풀어줄 독수리를 구태어 힘들게 못박을 필요가 어디있나?” 라는 논리에 휘말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독수리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중단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기 시작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자아가 죽는다는 말의 의미

이제,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 자로 여길지어다.” 로마서 6:11. 여기서 우리는 “여길지어다(consider)” 이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길지어다” 라는 말에는“꼭 그러한 것으로 간주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아마 여러분 중의 어떤 분은 이렇게 항의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전에는 죽어야 한다고 말해 놓고서, 이제는 죽지 않았지만 죽은 것으로 여기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다. 아직 살아 있지만, 죽은 것으로 여기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이다. 옛 본성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옛 본성의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박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원하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의미에서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지, 그것이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못하거나 부르짖을 수 없는 상태로 되었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수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절제와 극기의 생활을 하고 있지만, 사도 바울이 말한“죽은 것으로 여길지어다” 의 의미를 오해하거나 깊이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열심을 잃어버리고 실망하여 뒤로 후퇴해 가고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영감적인 기록에 깊은 주의를 모아야 할 필요가 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죄를 지으려는 충동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려 싸우기 때문이다. 마음 속에서 성령과 육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쟁투는 쉼이 없는 투쟁인데,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필요되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Messages To Young People, 114.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하라

우리가 정말 우리 자신이 독수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자신에 대해서 결코 자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 냄새를 피우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독수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나의 진짜 모습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그런 추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미워하며, 불신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서 진정으로 선한 어떤 것을 사모하게 되는데, 바로 이 때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리라” 라는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들려주시는 비둘기 같은 성령의 음성과 독수리의 요구를 동시에 받아들일 수 없다. 한 음성에 순종하면, 다른 하나는 자동적으로 거절하게 된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두마리의 새가 있다. 하나는 죗된 옛 본성을 상징하는 독수리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역사를 상징하는 비둘기이다. 우리가 비둘기를 사랑하여 비둘기를 기르기로 선택하였다면, 우리는 비둘기에게만 먹이를 주어야 한다. 반면에 독수리는 굶겨야 한다. 우리는 독수리와 비둘기에게 동일한 먹이를 줄 수 없다. 왜냐하면 비둘기는 죽은 시체나 썩은 고기는 전혀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령님과 독수리같은 본성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다. 우리는 하루를 사는 동안에 어떤 먹이를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텔레비젼 속에서 튀쳐나오는 각종 썩은 것들을 즐겨 받아 먹을 때, 그리고 각종 책이나 잡지에서 더럽고 추악한 사상들을 즐겨 받아 먹을 때, 독수리는 먹이를 찾은 환희의 소리를 크게 지르며 “바로 이것이 내가 기다리고 원하던 것이야! 좀더 자극적이고, 더러운 것들로 나를 즐겁게 해달라!”고 외치면서 달려드는데, 이런 경우 우리는 힘없이 독수리의 요구에 굴복하게 된다. 독수리와 비둘기는 우리가 주는 먹이에 비례하여 성장한다. 만일 우리가 독수리가 좋아하는 먹이로 마음과 생각을 가득 채우면, 독수리는 에너지를 얻어서 더욱 활개를 치면서 우리를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끌고 다닐 것이다.

우리는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할 때에 매우 단호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어정쩡한 모습으로 독수리에게 끌려다니고 있다. “독수리야, 안돼! 나는 그 사람을 결코 때릴 수는 없어. 그렇지만 그를 은근히 다른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게 괴롭힐 수는 있지. 독수리야, 나는 결코 네가 원하는대로 그 사람의 뺨을 치지는 않을 거야. 그러나 그의 약점을 아프게 건드림으로써 그를 괴롭힐 수는 있지.” 얼마나 많은 경우에, 이러한 모습으로 독수리와 타협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후일지라도 우리 속에 숨어 있는 독수리의 근성이 그리스도인 생애를 괴롭힐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우리 속에서 독수리가 다시 머리를 쳐들고 부르짖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회개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단지 그것은 독수리의 근성이 여전히 내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참된 회개를 통하여 독수리의 근성이 우리를 주장하거나 장악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능력을 하늘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다. 참된 회개는 독수리를 못박아서 가두어 놓는다. 비록 독수리가 못박혀지고 가두어진채로 우리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부르짖을지라도, 그 소리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없다. 독수리를 죽은 것으로 여기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힘차게 살아가면 된다. 독수리의 요구를 거절하거나 무시하기로 선택하고, 비둘기 같은 성령님의 호소에만 귀를 기울이는 삶을 살아갈 때, 드디어 독수리는 십자가에 못박힌채 피를 흘리면서 굶어 죽게 된다. 힘을 잃고 굶어 죽어가는 독수리의 절규와 애원을 추호도 동정하지 말라.

“죄가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고 ... 너희 지체를 ... 하나님께 드려라.” 로마서 6:12~13.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시여,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 속에 계신 비둘기 같은 성령의 속성을 살찌우게 하자. 독수리는 십자가 형에 처하고, 오직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광만이 나타날 수 있도록 인내하며 전진하자.

기적의 검정 가루

레이몬드 홀 박사/머조리 발드윈 의사

1813년은 의학사상 역사적인 해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프랑스의 화학자인 벌크랜드는 자신의 몸을 실험 대상으로 하여 숯가루의 효능을 입증하였다.

그는 치사량의 150배에 해당하는 비소를 먹고도 아무런 문제없이 살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는 비소에 충분한 양의 숯가루를 섞어서 먹었던 것이다.

1830년, 프랑스 의학계는 P.F. 토에리라는 약학자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치사량의 10배에 해당하는 1그램의 스트리키닌이라는 독소에 15그램의 숯가루를 섞어서 먹었다. 그러나 그 역시 아무런 고통이나 위협적인 증세없이 살 수 있었다.

숯가루의 놀라운 흡수력은 수천년 전부터 잘 알려져 왔다. 현대 의사들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고대 이집트의 히포크라테스는 여러가지 질병들을 치료하거나 독소들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숯가루를 사용하였다. 한 때, 숯가루는 미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치료제 중의 하나였다. 심한 구취, 임신기 동안의 메스꺼움과 변비, 위궤양, 종양, 심한 고름 등등의 문제를 해결하는데에 있어서, 숯가루는 매우 효과적인 역할을 한다.

군사 작전시에 독개스 위험지역에서는 반드시 숯가루 필터가 삽입된 방독면을 써야만 했던 적이 있다. 요즘에는 다른 물질로 대체되고 있지만, 공기 중의 독소들을 제거하기 위한 필터로서 숯가루가 널리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숯가루를 사용해야 하는가? 활성화된 숯가루를 사용해야 한다. 경질의 나무를 산소가 부족한 상태에서 태웠을 경우에 숯이 생기는데, 활성화 숯(activated charcoal)은 숯을 증기나 특정 개스로 처리하여 만든 숯을 말하는데, 숯의 처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숯의 성질이 결정된다. 예를 들면, 어떤 숯은 설탕을 정제하는데 효과적이며, 어떤 숯은 식물성 기름을 정제하는데에 효과적이다. 아무런 처리를 하지 않은 불완전 연소된 숯도 치료 효과가 있지만, 활성화 숯이 가장 효과적이다.

1. 흡수력 챔피언

숯은 거의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숯의 흡수력은 미세한 입자들의 표면에서부터 나오는 것인데, 숯 1그램에 들어 있는 미세한 입자들의 표면적을 계산해 보면 무려 400~1800 평방 미터나 된다! 그러므로 분말 상태의 숯가루의 표면적은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면적이 되는 것이다. 매우 곱게 갈아진 활성화시킨 입자는 너무나 작아서, 숯가루 1파운드(약 450그램) 안에는 약 5천만개의 입자들이 들어 있다! 이러한 놀라운 표면적을 통하여 숯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흡수력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숯가루가 가지고 있는 흡수력을 잠시 살펴보자: 1/4 티스푼의 숯가루는 염화 수은 1800mg, 질산 스트리키닌 950mg, 몰핀 800mg, 니코틴 700mg, 페놀 400mg, 알콜 300mg, 포타슘 시안화물 35mg 을 흡수할 수 있는 흡수력을 가지고 있다.

2. 강력한 해독 작용

숯은 오래 전부터 독극물을 효과적으로 흡수하는 해독제로 사용되어 왔다. 해독제에 있어서 중요한 기능은 독을 흡수하는 속도인데, 숯의 경우에는 치료에 사용하는 숯가루의 양이 흡수하는 속도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내장으로 들어간 독소들이나 약물을 해독할 경우, 일반적으로 10티스푼 또는 1/4컵의 숯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는 것이 효과적이다.

배에 개스가 차서 불편하거나 대변에서 심한 냄새가 날 경우, 숯은 훌륭한 해결사 역할을 한다. 숯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면 개스를 흡수하여 좋은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숯은 물과 공기를 정화시키는 필터로도 사용된다. 식품 공장에서 음식을 가공하는 과정에서도, 식품에서 나오는 좋지 않은 냄새와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하여 특별하게 처리된 숯을 사용한다. 담배 필터에 숯을 첨가할 경우, 흡연시 일반 필터보다 3배 이상의 독성 물질을 제거할 수 있다.

3. 혈액을 정화시키는 숯

콩팥의 기능이 정지된 환자들의 경우, 혈액을 투석(정화)시키는 치료를 정기적으로 받아야 하는데, 이러한 경우에도 숯가루가 사용될 수 있다. 매우 신기하게 들리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숯의 흡수력은 너무나 뛰어나서 일단 입을 통하여 들어간 숯가루는 소화기관을 통과하는 동안에 근방을 흐르는 혈액으로부터 독소들을 빨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흡수력을 가지고 있다. 독소를 빨아들인 숯가루는 소화기관을 통하여 배설된다. 이러한 이론을 증명하는 한가지 증거를 살펴보자. 신경 안정제나 천식 치료제 등을 혈관에 주사한 후, 다량의 숯가루를 먹으면 혈관에 주사한 약품들이 두배 이상이나 빠르게 제거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혈액 내의 독소를 제거하는 방법을 위장을 통한 투석이라고 부른다.

이와 유사한 방법의 다른 실험을 소개하고자 한다. 실험대상으로 자원한 사람에게 어떤 종류의 의약품을 섭취시켜서 그것이 혈관으로 침투었을 만큼의 충분한 시간의 흐른 다음, 숯가루를 섭취시킨 후에 혈액 속에 있는 약품의 함유량을 측정하였더니, 의약품의 함유량이 급격하게 저하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입으로 섭취된 숯가루는 소화기관을 통과하여 배설될 때까지 근방을 지나가는 혈관에게 강력한 흡수력을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숯가루는 독소나 화학 약품 뿐만 아니라 간이 일한 결과로 생기는 여러가지 쓰레기들(부산물)도 흡수한다.

4. 숙취를 해결하는 숯

술은 뇌세포를 죽인다는 사실이 근래에 많은 과학자들에 의해서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수천년 전부터 술을 먹지 말라는 경고를 해왔다. 대부분의 위스키에는 그 맛과 색깔과 냄새를 좋게 만드는“향료”가 함유되어 있는데, 이러한 향료로서 수백가지에 달하는 종류가 사용되고 있다. 그 중에 대표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것은 퓨우젤 기름인데, 이것은 곡물 알콜보다 4배나 강한 독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독성 때문에 음주 후에 심한 두통을 갖게 된다. 단 1온스의 퓨우젤 기름도 사람을 살상할 수 있으며, 그 보다 적은 양으로도 인체에 심각한 해를 줄 수 있다. 그런데 숯가루는 이러한 것들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단 한 숫가락의 숯가루를 8온스의 위스키에 넣으면, 퓨우젤 기름 36%를 흡수할 수 있으며, 기타 다른 향료들도 30~90% 이상 흡수할 수 있다.

술이 가지고 있는 독소 성분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두뇌와 건강의 가치를 이해하는 사람마다 결코 술을 마시지 않을 것이다.

5. 위장병 환자들에게 보내는 희소식

위장병 환자들의 경우, 날마다 공복시나 취침 전에, 활성화 숯가루를 올리브 기름에 잘 개어서 한번에 큰 수저로 하나 정도를 먹으면 매우 뛰어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위장이 매우 쓰리고 아플 때에도 숯가루를 이러한 방법으로 먹으면 효과가 있다. 심한 위궤양의 경우에는 숯가루를 복용하면서, 아울러 숯습포를 만들어서 배에 붙이는 것이 효과적이다.

위장약을 숯가루와 함께 복용하면, 숯가루가 약의 성분을 흡수하기 때문에 병행하여 사용할 수 없다. 대부분의 자연 치료법은 화학적인 치료법과 병행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치료를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들이 서로 상치되기 때문이다.

6. 화농성 염증의 해결사 숯가루

심한 화농성 염증, 종양, 안질 등에 숯가루를 반죽하여 환부에 붙이면 매우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눈과 귀의 염증, 편도선염, 인후염의 경우에도 숯습포를 환부의 바깥쪽 피부 표면에 붙힐 수 있다. 숯가루의 놀라운 흡수력은 피부 아래에 있는 염증도 빨아 들인다. 피부암에 숯가루 반죽을 만들어서 붙이면, 심한 냄새를 제거할 수 있다. 숯가루를 외용으로 사용할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재료를 사용하여 숯습포를 만들어서 환부에 붙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숯습포 사용법

준비물 : 숯가루, 갈은 아마씨나 밀가루, 무명천이나 가제 또는 종이수건(블루척이 좋음), 비닐종이, 반창고, 안전핀과 붕대
사용법 : 블랜더나 믹서기에 갈은 아마씨(또는 밀가루) 3 큰수저와 숯가루 3 큰수저, 그리고 물 3/4 컵을 잘 섞어서 너무 질지 않게 반죽을 만든다. 이것을 살짝 끓인 다음 약 10분간 식힌 후에 환부보다 약간 큰 크기의 목면(또는 가제, 무명천, 불루척) 위에 숯가루 반죽을 1/4인치(6밀리미터) 정도의 두께로 펼쳐 놓음으로서 숯습포를 만든다. 이것을 환부 위에 놓은 다음 비닐 종이로 덮고, 그 둘레를 반창고로 붙여서 숯반죽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한다. 붕대와 안전핀(또는 런닝 셔츠나 타월)을 사용하여 숯습포가 환부에서 움직이지 않도록 잘 고정시키는 것이 좋다. 숯습포는 6~8시간 마다 새로운 것으로 갈아 주어야 하는데, 숯습포를 뗄 경우에는 찬물수건으로 환부를 세차게 문지른 다음에 약 1시간 후에 다시 새로운 숯습포를 만들어서 붙인다.

7. 기타 사용처

설사, 소화불량, 복통, 과식하였을 경우, 장염,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날 경우에는 숯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고, 치통이나 잇몸이 부었을 경우에는 숯가루 정제를 입에 물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대장암이나 옻이 올랐을 경우, 그리고 간을 치료할 경우에는 숯가루를 복용하면서 동시에 숯습포를 환부에 붙이는 것이 효과적이다. 숯가루를 먹었을 경우, 사람에 따라서 변비 증세가 생길 수 있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숯가루에 올리브 기름을 섞어서 먹고, 물을 많이 마시면 변비를 방지할 수 있다. 독성 물질을 먹었을 경우에는 빨리 많은 양의 숯가루를 물에 타서 마셔야 한다. 곤충이나 벌에 쏘였을 경우에는 재빨리 숯가루 습포를 만들어서 붙이면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8. 주의 사항

숯가루를 가루로 먹을 경우에, 숯가루가 기도에 들어가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기 때문에 물에 타서 마시거나 정제로 먹는 것이 좋다. 숯가루를 수개월 동안 계속해서 복용할 경우에는 인체에 필요한 비타민, 홀몬, 엔자임 등에 어떤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너무 장기간 동안 계속해서 복용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그러나 3개월 정도 복용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4부 - 속죄제에 담겨져 있는 심오한 의미

두 가지 경우의 속죄제

속죄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지를 가르쳐 주기 위하여 보여주신 실물교훈이다. 다시 말하자면, 속죄제는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마련된 제사제도이다.

구약 시대에 어떤 사람이 죄를 범했을 경우, 먼저 그 죄인은 양을 끌고 성소로 가야만 하였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데, 죄를 지은 인간은 하늘에 계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 자기가 범한 죄를 가지고 믿음의 기도로 나아가야 한다. 어린 양되신 예수의 피의 공로를 힘입어 나아가서 자기가 지은 죄를 고백하면, 그 죄인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어린양에게 전가되어서 죄인이 그 지은 죄로부터 용서받고 자유하게 된다는 것이 속죄제가 상징하는 바이다.

성소 뜰에서 행해지는 제사제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 하시기 위하여 어떠한 무한한 댓가를 치루셔야 했는지를 인간의 우둔한 마음 속에 깊이 심어주고 가르쳐 주기 위하여 마련하신 상징적 제도이다. 특별히 속죄제의 경우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가 더욱 깊이 담겨 있다. 속죄제는 다른 제사와는 조금 다르게 디자인 되었다. 속죄제를 드릴 때는 동물의 전체를 태우는 것이 아니라, 제물의 기름만 도려내어 태우게 되어 있었는데 그 이유는 희생 제물의 기름은 죄 또는 죄인을 상징하기 때문이었다(시편 37:20참조). 그런데 속죄제에 있어서 한가지 다른 제사들과 현저하게 다른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 했을 경우와 이스라엘 백성 전체 회중이 함께 범죄했을 경우에 제사하는 방법과, 어떤 개인이 범죄 했을 경우의 제사 방법에는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두가지 경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희생 제물의 피를 처리하는 면에 있어서 뚜렸하게 나타났다. 제사장이 범죄 했을 때나 온 회중이 함께 범죄 했을 때는 속죄제의 제물의 피를 성소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휘장 앞에 일곱번 뿌렸다. 이러한 속죄제의 과정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죄인이 제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죄를 고백하면 상징적으로 그의 죄가 흠없는 희생제물에게 옮겨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희생 제물이 흘린 피를 성소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휘장 앞에 뿌리는 것은 그 희생 제물의 피에 전가된 죄가 성소 안으로 옮겨지는 것을 상징하는데, 이것은 인류의 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셨던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에 자신의 피에 전가된 인류의 죄를 가지고 하늘 성소로 올라 가셔서 하나님 앞에 중보 기도하시는 중요한 사실을 예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범죄했을 경우에는 색다른 절차를 밟도록 지시하셨는데 그 특이한 속죄제의 절차가 우리로 하여금 갈보리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뼈저리게 이해하도록 도와 주는 것이다. 자, 그러면 이제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의 속죄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에 앞서, 한가지 간단한 사실을 짚고 지나가 보도록 하자! 믿음은 선물이다. 왜 그럴까? 어린아기가 사랑과 정성이 가득 담긴 어머니의 손길을 매일 경험하고 나면 자연히 어머니를 신뢰하고 믿게 된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가 믿음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을 경험한 후에 자연히 생겨난 반응인 것이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믿음이 어머니의 사랑스러운 돌봄의 결과로 생기는 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이해 할 수 없는 크신 사랑과 희생을 보여 주셨기에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바로 우리의 믿음인 것이다.

속죄제는 바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그 크신 사랑을 이해케 하기 위하여 디자인 하신 제사이다. 속죄제는 우둔한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속죄의 희생과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디자인하신 제도였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서..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에야 비로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역사를 시작하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속죄제에 있어서 한가지 흥미있는 일은 개인이 범죄하였을 때에는 속죄제물의 피가 성소에 들어가 휘장 앞에 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특이한 면이 우리에게 한가지 큰 깨달음을 주게 된다. 그것은 너무나도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피가 성소 안으로 가져가 휘장 앞에 뿌려지지 않으면 제사장이 죄인이 고백한 그 죄를 성소 안으로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중보의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하기를, 제사장은 죄인이 고백한 죄를 위하여 성소 안에서 중보하는 기도를 할 때에만 죄의 용서가 있다고 레위기서에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레 4:20,26,31,35).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피를 흘리셨어도, 당신의 피를 가지고 죄인이 고백한 죄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대신 속죄하는 중보의 역활을 하늘에서 해 주셔야 우리에게 죄의 용서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이 사실은 히브리서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히 8장~10장 참조).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아무리 십자가 위에서 귀한 보혈을 흘려 주셨어도, 죄인은 회개와 고백으로 주 앞에 나와야 하며, 또한 예수께서 그 죄인의 회개의 기도를 용납하시고 그를 위하여 대신 흘려 주신 보혈의 은혜를 나누어 주시며,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그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중보의 기도를 대신 드려 주심으로써, 그 죄인을 인정해 주셔야만 용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죄제물을 가지고 성소 뜰에 들어와 제사를 드린 사람은, 제사장이 그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 휘장 앞에 뿌리고 대신하여 중보 기도를 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오히려 제사장은 그 속죄제의 피를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 뿔에만 바르고 그 주위에 피를 뿌린 후 나머지를 땅에 쏟아 버리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었다. 그 때에 속죄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아니, 제사장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 피를 그냥 성소 뜰에 쏟아 버리다니요! 소 안에 들어가 휘장 앞에 뿌린 후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셔야 제 죄가 사함 받는 것이 아닙니까? 이제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놀란 죄인에게 제사장은 인자한 미소를 띄우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형제여! 속죄제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특별히 교육시키고자 하시는 중요한 교훈을 담아 두셨습니다. 이 속죄제에는, 장래에 올 메시야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우리가 용서 받을 수 있게 되는지에 대하여 가르치기 위한 귀중한 실물교훈이 담겨져 있습니다. 형제가 죄를 고백하였을 때에 형제의 죄가 어디로 갔습니까?” “예! 저의 죄가 속죄 양에게 전가 되었지요!” “그렇소! 맞습니다. 그러면 이제 잘 지켜 보시지요!” 그렇게 말하고는 제사장이 그 속죄제물 짐승의 살점을 조금 칼로 도려내어 입에 넣고 씹어서 삼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이렇게 질문하였을 것이다. “형제여! 이제 당신의 죄가 어디로 갔습니까?” 그 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아차린 죄인은 떨면서 이렇게 대답하였을 것이다. “네! 제사장님! 저의 죄가 바로 당신의 몸으로 전가되었군요! 상징적인 의미에서, 내가 지은 죄가 바로 당신의 죄가 되어 버렸군요!” 그때 제사장은 이렇게 말하였을 것이다. “이제 나는 당신의 죄, 아니 내 자신의 것이 되어버린 그 죄를 가지고 성소 안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 당신의 죄, 아니 내 죄를 위하여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드릴 것입니다.” 죄인은 눈물이 함박고인 눈으로 성소 안으로 들어 가는 제사장의 뒷 모습을 지켜 보았을 것이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가르쳐 주는 얼마나 힘있는 실물교훈인가! (레위기 6:25-30참조).

속죄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의미가 과연 무슨 뜻일까? 베드로 전서 2:24은 우리에게 힌트를 제공한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어떻게 주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당신의 몸으로 지실 수가 있었는가? 몸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다는 의미가 과연 무슨 뜻일까?

11-23이렇게 생각해 보자.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우리 몸에 어떠한 반응이 나타나는가?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형제에게 커다란 거짓말을 하였는데, 길을 가다가 그 사람과 마주쳤다고 하자. 그 때에 우리의 몸에 어떠한 반응이 일어나는가? 갑자기 불안과 초조함이 엄습하고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며 식은 땀이 흐르면서 두려움이 마음속에 밀려 오지 않는가!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이 가슴을 메워 오는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러한 방법으로 죄를 지시는 경험을 겪으신 것이다. 우리들의 죄가 마치 당신께서 지으신 죄들처럼 그 분 위에 엄습하여 왔다. 한번도 죄를 지어 보지 않으신 분께서 죄책감을 우리를 대신하여 경험하시게 된 것이다.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느끼는 몸의 반응들이 갑자기 예수께 생기기 시작했을 것이다. 인류의 수없이 많은 죄악들이 한꺼번에 예수님의 영혼 속으로 밀려왔기 때문에, 그 분의 마음은 그 때까지 전혀 느껴 보지 못했던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하셨던 것이다. 십자가 상에서의 그 고뇌는 말로 다 형언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문자 그대로 우리의 죄를 대신 당신 자신의 몸으로 짊어지신 것이었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 5:21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시편 22장 전체와, 40장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계실 때에 당하신 심적 고통이 어떠하였는지를 미리 예언하여 준 장들이다. 시편 40:12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 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음으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당하실 깊은 고뇌를 예언하면서 “나의 죄가 나의 머리털 보다 많”다고 표현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신 하나님이셨다. 도대체 무슨 죄가 그렇게 많아 하늘을 우러러 볼 수도 없고 머리털보다 많다고 하셨을까? 그렇다! 그것은 분명히 대신 지셨던 우리들의 죄들을 말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라는 영어 성경의 표현은 “Therefore my heart failed me” 이다. 다시 말해서“나의 심장이 멈추었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꼐서는 십자가의 육체적인 고통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것은 우리들의 죄를 지시는 영혼의 고뇌 때문에 심장이 파열되어 돌아가신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의 장면을 찾아보면, 큰 소리를 지르시고 고개를 떨구시며 갑자기 운명하셨다는 기록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성경은 로마 군병이 예수께서 죽으셨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자 물과 피가 흘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그분의 심장이 파열되었다는 의학적인 증명이다. 죄로 인한 깊은 고뇌 때문에 심장이 터지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심장이 피를 생성하는 일을 멈추자 혈청과 혈구가 분리되어서 창에 찔린 상처로 흘러 나왔던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부르짖으신 말씀 가운데 우리가 잘 기억하는 말씀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이다. 그 뜻은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의미이다.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는 과정에서 우리 죄의 악함과 두려움을 짊어 지심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를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되신 것이었다. 우리의 죄 그 자체가 되어 버리신 것이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비없이 자신이 범한 죄의 댓가를 있는 그대로 당하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었다.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성경은 “죄를 대신 지셨” 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단 한번도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를 느끼지 않고 사신 적이 없으셨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갑자기 인류의 죄를 지시고 우리들의 죄 그 자체가 되심으로써, 죄인인 우리들이 당했어야 할 그 형벌과 심판을 대신 지신지게 되었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만을 느끼게 되셨고 완전히 버림받은 느낌만 가지게 된 것이었다. 주님의 눈 앞에는 이제 모든 소망이 사라졌고, 마치 대신 지신 우리의 죄 때문에 영원히 아버지와 분리되어 완전히 멸망당할 것처럼 느끼게 되신 것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순간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게 되신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 예수께서는 한가지 선택을 하셔야만 하였다. 마귀는 지금 이렇게 죽으면 영원히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되고 멸망 당해 버릴 것이라고 그분의 귀에 속삭임으로써, 예수님을 괴롭혔을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마음에는 이전에 들었던 하늘 아버지의 모든 약속도, 삼일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희망도 다 사라져 버린 것처럼 느껴졌고, 더 이상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처럼 느끼졌다. 또한 당신 자신이 목숨을 바쳐서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을 십자가에 메달고 조롱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러한 순간에도 당신 자신이 온 인류를 대신하여 영원히 심판을 받고 영원한 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인류를 포기 할 수 없다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나타내시었다. 당신 자신이 영원히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이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대신 죽어줌으로써,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루어 주시겠다는 놀라운 사랑을 실현하셨던 것이다. 인간의 부모의 사랑에서 우리가 희미하게나마 희생적인 사랑을 엿볼 수 있지만, 예수의 죽음의 선택은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전혀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 상태에서 이루어졌던 것이기 때문에, 그 종류가 전혀 다른 것이다. 인간이 죄를 지었어도 회개하고 믿을 때에는 그 지은 죄에 대한 댓가를 받지 않고 용서를 받는 것은 예수께서 그 댓가를 이미 십자가에서 치루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비록 인류가 타락하였지만, 그분의 사랑은 결코 인류를 그냥 죽게 내어버려 두실 수가 없으셨다. 온 우주의 천사들은 십자가 상에서 나타나고 있는 그러한 사랑의 장면을 지켜 보면서 감탄하였을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이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고 보답하여야 하겠는가?

독자들이시여! 예수께서는 우리 자신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깊이 명상하라. 십자가에서 치루어진 희생과 죽음 때문에, 우리에게 값없는 용서와 구원의 소망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또한 인류를 위한 값없는 용서와 구원이 마련되기 위해서 치루어진 댓가는 엄청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이다. 십자가는 쑈(show)가 아니다. 당신의 생명까지 포기할 정도로 보여 주신 엄청난 사랑의 현시이다. 우리가 2000년전에 갈보리 산 위에 서있지 않았다고 해서,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이지 내가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자! 우리의 죄가 예수를 죽인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어떤 순교자의 죽음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어떠한 순교자의 죽음도 우리에게 영생의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인류에게 다시 한번 영생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죽으신 대속의 죽음이었다. 속죄제는 바로 이 감동적인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 보고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될 때에야 비로서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그 믿음은 단순히 지적인 이해나 동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믿음은 우리의 온 생애를 바쳐 하나님을 순종하며 따르기를 원하도록 만드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소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기별의 중심이다.

 

 

5부 - 성소와 지성소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별


성소 제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진리가 있다.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속 사업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용서받은 죄인이 다시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게 되기 위하여 회복되는 과정이 또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감리 교회의 창시자이며 위대한 개혁자인 요한 웨슬레가 부르짖었던 성령의 열매이다. 그는 성령의 열매인 변화된 거룩한 생활이야말로 구원의 필수 요건이라고 가르치는 성화의 가르침을 설교하였다. 성화에 대한 요한 웨슬레의 그러한 가르침은 성소에도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 지는지를 실물교훈으로 보여 주시기 위하여, 또한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어떠한 사역을 하셨으며, 현재에는 어떠한 일을 하고 계신지를 가르쳐 주는 청사진을 보여 주기 위해서, 성소제도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성소제도는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희생과 대속의 죽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성소 뜰을 지나서 들어가게 되는 성소의 첫째칸에서는 구속 사업의 두번째 국면으로써 예수님의 중보의 사역과 인류에게 구원의 은혜를 나누어 주시는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거룩함

먼저,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생활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본 다음, 성소제도가 그것에 대해서 어떠한 실물교훈을 주고 있는지 살펴보자. 사도행전 26: 18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라는 말씀을 유의하여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전체 66권을 통하여서 성화 즉, 거룩한 생활과 변화된 순종의 생활을 구원받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경험해야만 하는 과정으로 소개하고 있다. “...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데살로니가 후서 2:13)라는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씀이 아닌가! 그리스도인의 거룩하고 깨끗한 생활을 강조하면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5:26,27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이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거룩함을 이상한 기분이나 황홀경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상태를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고 말씀하셨으며(요한복음 14:15), 사도 요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라고 말씀하였다(요한일서 5:4).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그 결과로 거룩하게 되며, 순종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에베소서는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인 삶을 설명하여 주고 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 에베소서 2:3,4,5,10.

성소를 통해서 알아보는 거룩함

이제, 성소로 돌아가서 성소제도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생활의 의미를 살펴보자. 성소 제도는,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십자가)에서 어린 양(그리스도)을 잡아 죽이는 일(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통하여 진정으로 회개하고 죄를 버리기로 결심한 죄인이, 이제는 믿음으로 제사장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하게 사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성막의 첫째칸인 성소 안에는 금 촛대와 떡상과 분향단이 있다. 첫째칸인 성소 안에 있는 기구들과 제사장의 활동은, 성소 뜰에서 죄를 회개하고 버림으로써 용서받고 의인이 된 사람이, 이제 어떻게 하면 받은 바 그 의로운 삶을 계속해서 지켜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하여 가르쳐 주며, 또한 그렇게 할 수 있게 해 주시기 위하여 은혜를 통하여 도와 주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여 주고 있다. 그렇다. 용서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범했던 죄의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 승리하는 생애를 살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란 용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하나님의 은혜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힘을 말한다. 은혜는 습관적인 죄의 속박으로부터 죄인을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한다. 은혜는, 죄로 인한 영적 죽음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도 믿지도 아니하는 사람을 영적으로 부활시켜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는 단어이다. 디도서에서 바울은 은혜를, 가르치시고 역사하는 하나님의 힘으로 설명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디도서 2:11~13

그래서 히브리서 4:14~16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 갈 것이니라.”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아서 의인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죄의 유혹과 마귀의 공격은 우리를 엄습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범했던 죄악의 습관들이 우리를 다시 찾아와서 시험을 주며, 날마다 우리를 괴롭히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와 꼭같은 시험을 당하셨으며, 고난 가운데서 살아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날마다 당하는 시험들의 어려움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우리를 도우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경험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날마다 당하는 시험과 유혹도 받으셨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설명하면서“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한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고 묘사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서 담대히 은혜의 보좌”가 있는 곳인 하늘 성소로 나아가자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하늘 성소 안에 우리를 시험에서 도와줄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성소 안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승리의 생활을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고안하신 하나님의 아이디어들이 나타나 있는데, 성소의 첫째칸 안에 있는 금촛대와 떡상과 분향단은 그러한 하나님의 아이디어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기구들이다. 성소 안에 있는 기구들은 모두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순결한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성소의 첫째칸에 있는 기구들이 순금으로 만들어졌던 것은,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과 물두멍이 두가지 금속의 합금인 놋으로 만들어졌던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성소 뜰에서 회개의 경험으로 번제단에서 죄를 태우고, 물두멍에서 깨끗하게 씻어서 순결하게 된 그리스도인은 그 다음 단계로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활동적이고 순결한 믿음의 경험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가르쳐 주기 위해서, 성소 안의 기구들이 순금으로 만들어 졌던 것이다.

 

 

세 가지 기구에 담겨져 있는 의미들

촛대 :

자 이제, 성소의 첫째칸 안에 있는 세가지 기구들이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자. 금으로 만들어진 촛대에는 올리브 기름이 들어 있어서 그 기름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촛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상징하며, 촛대 안의 기름은 성령을 상징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시편 119:105.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으므로 성령의 감동을 통하지 않고서는 진리를 이해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성경은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책이 아니다. 성경은 영생의 진리를 가르치는 거룩한 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앞 길을 진리의 빛으로 비추어 주는 등불과 같다. 성소 안에는 외부로부터 다른 빛이 들어오게 하는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오직 촛대만이 성소 안에 있는 빛의 근원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생애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어떤 다른 빛이 우리를 인도하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 것이다. 한 줄기의 빛이 칠흙같은 어두움을 내어 쫓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의 쓰레기들로 마음이 혼돈되고 복잡해 있을 때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는 한마디의 성경 말씀이 모든 잡된 것들을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퇴치해 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며 명상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유지 할 수 있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또한 거룩한 열매를 맺는 성화의 길을 걷고 싶은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읽는 대신에, 정직한 양심으로 읽어라. 성령께서 그대의 무지하고 둔한 마음에 깨달음을 주실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생활을 위하여 준비해 두신 유일한 방법이다.

떡상 :

떡상도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하늘을 향하여 여행하는 나그네에게는 어두운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필요할 뿐 아니라, 나그네에게 계속해서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음식도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 세상을 살아가며 사단과 죄의 유혹을 이기게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다 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라고 말씀하시면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한 것이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고 말씀하시었다(요한복음 6:63). 먹는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대신해서 먹어 줄 수가 없는 것이다. 만나가 하늘에서 내렸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을 향하여 여행하고 있는 우리의 영을 살리기 위하여 반드시 먹어야 하는 하늘의 만나이다. 하늘의 만나를 제대로 먹지 않는 그리스도인마다 지치고 피곤하여 쓰러지게 될 것이다.

분향단 :

분향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드리는 중보의 기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아무리 의롭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기도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열납될 수가 없는 것이다. 분향단의 향은 특별하게 만들어 졌고, 다른 목적으로는 절대로 사용할 수가 없었던 이유는, 분향단에서 올라가는 향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의로운 생애와 기도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올릴 때에 예수께서는 우리의 기도와 소원에 당신 자신의 흠없는 의를 섞어서 아버지 앞에 올리심으로써,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될 수 있도록 중보하고 계신 것이다. 아울러 예수께서는 우리가 도움을 요청 할 때마다, 우리로 하여금 모든 시험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드는 당신의 은혜와 능력을 공급하여 주시고 있는 것이다. 분향단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기도를 상징하고 있다. 그 분께서는 오늘도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며 시험 받는 자를 돕고 계신다.

그러므로 성소는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걷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의로운 생애를 유지해 나갈 수 있으며, 어떻게 거룩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그것은 성경 말씀의 연구와 기도이다. 마음을 하늘로 여는 기도!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리기 위하여 두손을 모으는 기도! 시험당하고 어려울 때에,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매일 읽고 명상하며 우리의 마음 속에 담아두는 만나를 먹는 생활! 무엇이 진리이며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께 가납되는 생활을 살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하여 성경만을 유일한 빛으로 삼아서 연구하는 생활! 이러한 것들이 바로 우리를 성화케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성소의 최종 목적지인 지성소

이제 결론적으로 지성소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지성소 안에는 두 돌비에 새겨진 십계명을 보관하는 법궤(언약궤, 속죄소, 증거궤)가 있었으며, 법궤 위에는 시은좌(은혜를 나누어 주는 곳)가 있어서, 거기에는 하나님의 영광인 쉐키나가 비쳐 나오고 있었다. 그 곳은 아무나 들어 갈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면 즉시로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결하게 준비된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씩 지성소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의 완전한 정결과 도말을 위하여서 기도하였다. 그 날을 성경은 대속죄일이라고 부르고 있다. 지성소는 성소제도의 결론이요, 최종 목적지이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그 지성소에서 다시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십계명)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0-22).

성소의 구조와 그 제도에 새겨져 있는 성소 뜰에서의 죄의 용서(칭의)와 성소 안에서의 성화의 경험은, 결국에는 인간을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서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국면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며 순종하는 거룩한 생활을 살도록 가르치시고 힘 주시는 이유는, 결국에는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자로 회복시키시기 위한 것이다. 구원은 회복이다. 다시 원래의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어야 한다.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십자가는 죄인의 마음에 죄를 미워하는 심령을 심어주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좋아하는 새로운 마음을 창조해 준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를 아무리 용서해 주신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계속적으로 똑같은 죄를 범하며 계속적으로 불순종하는 생애를 고집한다면,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분의 용서가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이유는, 이제 다시는 그러한 죗된 생애를 살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생애를 살도록 하시기 위하여 용서해 주시는 것이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시면서 예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실 때에 아울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그분을 위하여 살 수 있는 능력을 용서와 함께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경험하게 되는 재 창조의 경험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모든 죄로부터 정결케 될 것을 명하시었다. 그들은 일년 내내 죄들을 고백하며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면서 용서를 받아 왔다. 그러나 매년 마지막 날인 대속죄일 날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들을 그들의 회개가 정말 참된 것이었는지, 지금도 여전히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 정말로 죄를 참회하고 버렸는지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일을 하셨다(레위기 16장 참조).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유대력의 마지막에 있는 대속죄일은 심판의 날로 이해되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각각 심판하시는 날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한복음 5:28,29.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사도행전 17:31. “네가 어찌하여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로마서 14:10. “하나님 앞과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디모데후서 4:1.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베드로전서 4:17.

성소제도는 우리에게 결국은 모든 인간이 누구나가 다 한번은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것을 엄히 가르치고 있다. 물론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가리움을 받고 있으며 은혜를 통하여 구원의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우리가 예수의 손을 놓지 않는한 주께서 우리를 결코 놓치 않으실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기억하자! 이제 곧 머지 않은 장래에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태어났던 모든 인류를 각각 그 동기와 마음을 살펴서, 그들의 믿음의 동기가 참된 것이었는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말씀을 따라 살아 왔는지 살아오지 않았는지를 헤아리시기 위하여 마지막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서 그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대속죄일 날에는 아사셀 염소에게 모든 죄를 다 옮기어서 씌우고 광야로 데리고 나가 죽게하는 일이 있었다. 이미 다 용서한 죄를 왜 그렇게 하는 것이었을까?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죄에 메달려 있기를 선택한 죄인들은 최후의 날에 멸망당하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변화되지 못한 죄인을 다시 하늘에 들이심으로써 또 다시 하늘에 전쟁과 반역이 일어 날 수 있는 가능성을 용납하실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 자신이 과연 진실된 마음과 동기로 하나님을 옳바로 섬기고 있는지 엄숙하게 살펴 볼 시간이다. 그대는 과연 지금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예수님,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신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현주소를 잃어 버렸다. 하늘을 향하여 막연하게 기도드리지만, 예수께서 하늘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를 모른채 방황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현주소와 그곳에서 우리를 위하여 하시는 사업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창조 후 지금까지 성소를 통하여 인류의 구속 사업을 이루어 오셨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즉시로 시작된 것이 성소 제도인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성소의 모양과 형태가 아래와 같이 바뀌어졌지만, 성소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존재해 왔다. 그리하여 마지막 시대인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서 당신의 마지막 봉사를 끝내고 있다:

1. 원시 성소: 아담 이후부터 노아 때까지
2. 제단 성소: 노아 이후부터 모세 때까지
3. 성막 성소: 모세 이후부터 솔로몬 때까지
4. 성전 성소: 솔로몬 이후부터 예루살렘성 멸망까지
5. 하늘 성소: 그리스도의 승천(A.D.31년) 직후부터 재림 직전까지

노아가 쌓았고, 아브라함이 쌓았던 제단 성소 시대가 지나고, 모세 때에 이르러 성막 성소 시대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으라.”출애굽기 25:8. 그런데 모세에게 보여주신 지상 성소의 원형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그 대답을 분명하게 찾게 된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copy)과 그림자라.”히브리서 8:5. 바울은 지상 성소를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이라고 표현했는데(히브리서 9:23), 이 말은 모세가 지은 성막 성소의 원형이 하늘에 있다는 뜻이다. 또한 지상 성소를 가르켜 “그림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이것 역시 이 땅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만드는 원형이 하늘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언제 지상 성소의 원형인 하늘 성소에 들어 가셨나? A.D. 31년이었다. A.D.31년은 무슨 해인가? 예수께서 부활 후, 승천하신 해. 그런데 예수께서 승천하신 직후, 곧바로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이 그 사실을 증언하였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2.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의 죽음으로 속죄를 이루신 후 부활하셔서 하늘 성소로 들어가셨다.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셨던 A.D. 31년 이후, 그리스도께서 봉사해 오신 하늘 성소의 모습을 살펴보자:

신약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늘 성소

하늘 성소(첫째칸)의 모습

1. 성소에서 봉사하시는 그리스도: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요한계시록 1:12~13.
2. 성소에서 중보하시는 그리스도: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니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요한계시록 8:3~4.

하늘 지성소(둘째칸)의 모습

1. 요한이 본 언약궤: “하늘에 있는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법궤)가 보이며”요한계시록 11:19.
2. 요한이 본 하늘 지성소: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지성소)의 성전이 열리니” 요한계시록 15:5.

예수 그리스도, 지금 그분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늘 성소에서 인류의 죄를 위해서 중보하시며,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구원을 간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의 은혜를 나누어 주심으로써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고 계신다. 하늘 성소에서 우리 각 개인을 위한 변호사로서, 그리고 중보자로서 일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좀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분의 도우심을 청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하늘 성소에서 벌어지는 그리스도의 중보 사업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한 변호사로서 일하시는 그분의 모습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들 각 개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심판하는 과정은 매우 정확하고 실제적인 과정이다. 우리 각 사람의 구원 문제가 하늘 성소에 계신 하나님 앞에 상정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 각 개인을 위한 변호사로서 일하신다. 마지막 시대에 최고의 변호사를 앞장 세우고 하늘 법정에 들어가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가장 복있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하였던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하늘에 있는 기록책에 기록되어 있다. 아담의 이름도 기록책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예를 통하여 심판을 실제적으로 생각해 보자.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하나님께 범죄하였던 기록이 적혀 있다. 그러나 그 죄에 대한 회개와 용서의 기록이 함께 쓰여져 있다. 예수께서는 즉시로 죄의 기록책과 하나님 사이에 들어가셔서, 자신의 피묻은 손을 들어 올리면서 “아버지여, 나의 피를 보소서. 아담은 회개하였으며, 나의 희생은 그의 죄값을 치루었나이다” 라고 변호하신다. 그러면 주변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천사들이 증인의 자격으로 “그의 죄는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의 이름을 그대로 두십시요”라고 큰소리로 증언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하나씩 지성소에서 벌어지는 심판대 위로 올라가게 된다. 사울의 이름도 불리워질 것이다. 그는 처음에 선한 왕으로 시작했지만, 자존심과 이기심이 그의 마음을 채우면서 시기와 질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책에는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와 용서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슬픔으로 머리를 숙이시면서 그를 위하여 변호할 수 없음을 통탄해 하신다. 예수께서는 사울을 위하여 “나의 피”를 주장할 수 없다. 그리하여 사울의 이름은 생명책에서 완전히 지워지게 된다.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들의 심판이 차례로 진행되다가, 언제가는 기록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열려질 것이다. 누군가의 이름이 거기에 적혀 있을 것이다. 이제 곧 심판이 끝마쳐지면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런 왕과 심판자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첫번째 오셨을 때에는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지만, 두번째 오실 때에는 의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상을 주고 악인들에게 영원한 죽음의 형벌을 주기 위해서 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언젠가 마지막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람의 운명이 결정될 때, 예수께서는 하늘 성소에 서서 자신의 피묻은 손을 들어 올리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시면서,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하고 ...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롭게 하라”라는 선언과 함께 인류를 위한 은혜의 시간을 마치실 것이다(요한계시록 22:11).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구원받을 수 있는 날”이다. 기록책의 마지막 장이 덮힐 때가 다가오고 있다.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변호가 끝마쳐지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지금 그대를 위한 심판이 진행되고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의 시간이 끝나기 전에 그대의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지 않으려는가?

 

성소를 모르면 이런 오해를 하게 된다!


우리는 다니엘 9장에서 성소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예언을 볼 수 있다. 그 예언은 다니엘 9장 24절부터 시작되는 예언인데, 그 예언 속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지상의 성소제도가 폐지될 것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다니엘 9장 24절에 나오는 70주일에 관한 예언은 살아남는 이들 제9호, 25페이지에서 이미 상세하게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성소와 관련있는 내용만을 다루기로 하겠다.“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였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27절. 이 예언은 살아남는 이들 제9호에서 확인하였던 것처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지상 성소에서 행하여졌던 동물의 희생제도가 그 종말을 고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제사 제도의 종말을 알리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순간, 성소 안의 휘장을 초자연적인 힘에 의하여 두 조각으로 찢어지는 놀라운 사건을 일으키셨다(마가복음 15:37~38, 누가복음 23:45~46을 볼 것).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마태복음 27:50~51.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으로써, 더 이상 동물의 피가 흘려질 필요가 없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피로서 새로운 언약을 인치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모세가 제사 의식에 대해서 기록한 증서인 의문의 율법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다.

성경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한가지 이해하여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율법에는 두 종류의 율법이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반포하신 돌비에 새긴 십계명인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 속에 보관하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모세가 성소 의식에 관하여 두루마리에 기록한 의식법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폐한 율법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모세가 기록한 의문의 율법을 폐하여진 것으로 말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이 문제에 대하여 한가지 커다란 오해가 수많은 평신도들 뿐만 아니라, 성직자들에게까지도 편만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율법 즉, 십계명을 폐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십계명에는 제사제도나 의식에 관한 조항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므로 십자가 십계명을 폐하여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골로새서 2:14를 이용한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의문에 쓴 증서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분명, 십자가에 의해서 폐지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의문의 증서”이다. 의문에 증서는 모세가 두루마리에 제사 제도에 대하여 기록한“증서(책)”을 말하며, 십계명은 두개의 “돌비” 에 하나님께서 친히 새겨 주신 도덕률을 말한다. 그들은 십자가에 의해서 십계명이 폐하여졌다고 믿기 때문에, “구원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은 더 이상 순종하지 않아도 됩니다. 계명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는 것은 율법주의자들 입니다!”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율법을 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율법의 의미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않된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나 십자가의 은혜는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인 십계명이 폐하여졌다고 믿는 그리스도인마다 불순종과 방종의 생활로 빠져 들어가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도덕률을 무시하는 생활을 삶으로써 그리스도인 신앙 생애의 가이드 라인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다니엘 9장에 나오는 70주일의 예언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는 시간에 대한 예언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A.D.27년 가을에 침례를 받으셨는데, 그 때로부터 3년 반이 지나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희생 제사가 끝나게 된다는 사실을 예언이 25~27절에 기록되어 있다. A.D. 27년 가을로부터 정확하게 3년 반 후인 A.D. 31년 봄에 예수께서는 운명하셨다. 여기서 독자들에게 색다른 질문 한가지를 던지고자 한다. 유대인들의 절기 중에서 봄에 열리는 큰 절기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유월절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5:7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다. A.D. 31년 봄, 유월절 날, 너무나 정확한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 양이 되셔서 여러분과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는 대속의 희생을 치루셨던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예언인가! 하나님께서 선지자 다니엘을 통하여, 예수께서 이 땅에 태어나기 수백년 전부터 당신의 아들이 피흘리며 죽는 날짜까지 정확하게 예언해 두셨던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마다 엄숙한 마음으로 성경 말씀을 대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당신의 이마와 얼굴은 가시관에 찔려서 흘러내리는 피로 얼룩졌는데, 바로 그 때 “(동물의 희생)제사와 예물”을 드리는 제도와 예식이 폐지되었으며, 유대인들이 구약 시대 동안에 지켜왔던 성소와 관련된 행사인 절기나 월삭이나 절기 안식일이 폐지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의식이나 유대인들이 지키던 절기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대속 제물이 되실 것이라는 사실을 표상적으로 가르쳐 주는 그림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성소에서 거행된 모든 예식의 원형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어린 양으로서 죽으셨기 때문에, 구약 시대 동안에 이 놀라운 사건을 예표하는 그림자로서 사용되어 왔던 지상 성소 의식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던 것이다. “우리를 거스리고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 절기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니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로새서 2:14~16.

그러므로 메시야의 오심과 죽으심을 표상하였던 구약시대의 성소의 영적인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도덕률인 십계명을 폐하였다고 오해하게 된다. 십자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는 하나님께서 도덕률로 제정하신 십계명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계명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능력을 주는 원천이 된다. 또한 마지막 날에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기준으로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심판받게 될 것이다.“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이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야고보서 2:10`12

 

선택받을 자들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영혼마다 선택된다.

자기 자신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영혼마다 선택된다.

깨어 기도하며 성경을 연구하고 시험에서 승리하는
영혼마다 선택된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영혼마다 선택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정직한 양심으로 순복하는
영혼마다 선택된다.

가면과 위선을 버리고 떨리는 손으로 천국 문을 잡는
영혼마다 선택된다.

진리가 마음과 양심을 찌를 때에 인간적인 고집과 편견을 버리는
영혼마다 선택된다.

양심 속에 들리는 가장 작고 세미한 그리스도의 음성일지라도
가장 크고 엄숙한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영혼마다 선택된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립보서 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