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동기의 중요성

From the Mount of Blessing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마태복음 6장 1절. 바리새인들의 정신과 동기와 목적은 예수님의 그것과 정반대였다. 그들은 매우 열성적으로 율법을 존중했지만 실제적인 목적은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그들의 모습을 지적하시면서 자아를 사랑하는 것은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에도 바리새인들의 그러한 모습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 바리새인들은 이기적인 목적을 위하여 선을 행하였다. 바리새인들의 정신은 하늘에 속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속한 정신이었다. 그들은 선을 행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인기와 좋은 평판을 얻고자 하였으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얻어내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거룩하다는 명성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선과 구제를 행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그러한 봉사를 전혀 인정치 않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이 받게 될 상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그들이 추구하던 사람들의 아첨과 칭찬일 뿐이라고 단언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책망하셨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6:3

이 말씀의 의미는 친절한 자비와 구제가 항상 비밀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 하에 편지를 쓰면서, 마게도니아 교인들의 관대한 자아희생의 정신을 숨기지 아니 하였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들과 동일한 정신으로 물들게 되기를 원하였다. “너희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 고린도후서 9:2. 그리스도의 말씀은 자선과 구제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칭찬과 명예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어서는 않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준다. 참된 경건을 소유한 사람은 자신에 대한 자랑이 입이나 생각 속에서 사라진 사람을 말한다. 칭찬과 아첨의 말 듣기를 좋아하고 자신의 선행에 대한 응답으로써 감사와 칭송의 표현을 듣지 못하면 왠지 마음이 차지 않는 사람들은 경건의 모양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스도를 겸손한 마음으로 따라가는 자들은 그들의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 그들은 자신에게 그렇게 일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주신 분에게 모든 영광을 돌린다. 그리스도의 빛이 심령 속에서 빛나게 되면, 입술이 하나님께 돌리는 찬송과 감사로 채워질 것이다. 자신이 한 기도, 의무의 수행, 자선, 그리고 극기와 같은 것들이 대화의 주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찬양을 받으시게 되며, 자신은 깊이 숨겨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선행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끌어들이는 대신에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갈 것이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가난하고 고생하는 자들의 고통 속에 깊이 들어감으로써, 비로서 그들을 향한 진정한 동정과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다. 선을 행하는 그들의 순결한 목적과, 마음의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친절이야말로 하늘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동기이다.

우리는 보상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봉사를 해서는 않된다. 우리는 봉사를 통하여 자신의 슬픔과 고통과 애환을 잊어버릴 수 있는 지경에까지 나가야 한다. 우리가 진실하고 겸손하며 순결한 정신으로 봉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보상을 준비하실 것이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상 속에는 하나님 당신 자신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구제와 봉사로 물들어진 생을 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속에 거하시게 되며, 우리는 그분의 임재로 인하여 기쁨과 행복을 만끽하게 된다.

누구든지 자신의 마음과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나갈 수 있는 길을 내어주면, 그 자신도 풍성한 축복을 받게 된다. 산과 들은 시냇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제공해주지만, 오히려 주는 것으로 인하여 수백배 보상을 받게 된다. 시냇물이 흘러가면서 부르는 노래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시냇물이 흘러가면서 남기고 간 신록과 열매들을 선물로 받게 된다. 시냇물이 흘러가는 주변의 풀들은 다른 곳보다 더 푸르고, 나무와 꽃들도 더 탐스럽다. 대지가 한 여름의 폭염으로 바짝 말라서 갈색으로 변할 때에도, 시냇물의 주변은 하나의 뚜렷한 녹색 선을 나타낸다. 시냇물이 흘러가도록 길을 열어준 산과 들마다 생명력 있는 아름다움으로 빛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가 세상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통로를 제공한 사람은 은혜의 통로로서 마땅히 받게 되는 보상과 축복을 통하여 자신의 인생을 아름답게 꼴지울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불쌍한 사람에게 자비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받는 축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누어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자는 ...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이사야 58:7~11. 자선 사업은 이중으로 축복을 가져다 준다.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을 가져다 주지만, 베푸는 이는 더 큰 축복을 받게 된다. 자선을 베푸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은혜는 이기심과 반대되는 품성 즉, 생애를 깨끗하게 하고 고상하게 하는 품성을 계발시켜 준다. 은밀한 중에 행하는 친절은 우리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도록 이끌어 준다. 꽃에서 풍겨나오는 향기처럼, 생애 속에서 조용하게 흘러나오는 작은 친절, 곧 사랑과 자아 희생의 작은 행동은 자신의 인생을 축복과 행복으로 넘치게 만들어 준다. 다른 사람의 유익과 행복을 위한 작은 친절과 극기가 비록 이 땅에서는 아무런 칭찬이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할지 모르지만, 하늘은 그러한 자를 가장 부요하였다가 가장 가난한 자로 자신을 낮추셨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한다.

친절한 행동은 은밀한 중에 숨길 수 있지만, 그렇게 한 사람의 품성에 나타나는 결과는 숨겨질 수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일한다면, 마음이 하나님과 밀접하게 교통할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거하는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생애와 품성을 하나님과 더욱 더 조화를 잘 이룰수 있도록 다듬어 가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즐겁고 겸손한 마음으로 봉사를 행한 사람들은 자신의 품성이 아름답게 변화되는 기적을 맛보게 되며,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자신들이 뿌린 씨를 거두게 될 것이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마태복음 6:6. 예수께서는 형식과 자기 영광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크게 기도하는 바리새인들의 예배를 크게 책망하셨다. 이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공중기도 자체를 부인하신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셨고, 공중 앞에서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개인적으로 조용히 해야하는 기도를 대중 앞에서 하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의 개인 기도는 은밀한 중에 드려짐으로써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외에는 어떤 귀에도 들려져서는 않된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라.” 예수께서 가지셨던 것처럼, 우리도 은밀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장소를 가져야 한다. 비록 훌륭한 장소는 아닐지라도 하나님과 홀로 지낼 수 있는 장소를 가져야 한다.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께 기도하라.”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어떤 인간도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자가 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만이 모든 인류를 위한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가장 잘 알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열 수 있다. 하나님의 눈 외에는 어떤 사람의 눈에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귀 외에는 어떤 사람의 귀에도 들리지 않는 은밀한 장소에서, 우리는 가장 깊이 감추어진 우리의 욕망과 소원을 무한히 자비하신 아버지께 쏟아 놓을 수 있다. 그리하면 인간의 부르짖음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한 음성이 고요함과 침묵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 속에 들릴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칠줄 모르는 사랑으로 완악한 마음을 가진 죄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의 참회를 받아주고자 기다리신다. 그분께서는 마치 엄마를 알아보고 웃는 아기의 미소를 기다리듯이 우리에게서 당신의 은혜와 희생에 대한 진실된 감사함의 표현이 은밀한 기도를 통하여 흘러나오길 기다리신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를 향한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부드럽고 동정적인지를 깨닫게 되길 소원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슬픔을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의 상처를 당신의 치유로, 우리의 연약함을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의 공허를 당신의 충만으로 대치할 수 있도록 지금도 우리를 초청하고 계신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매일의 친구로 삼을 때, 우리는 보이지 않는 능력이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며, 그분과 자주 교제함으로써 그분을 닮아가게 될 것이다. 매일 드리는 은밀한 기도는 우리에게 고상한 포부와 진리와 의무에 대한 분명한 이해, 생애의 고상한 목적, 그리고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심령을 가지게 만들어 준다.

 

자녀 교육에 실패하는 이유

Our Firm Foundation 에서 발췌

혹시 그대는 이런 부모가 아닌가?

부모는 자녀들의 잘못된 습관과 방종을 제어하고 올바로 교정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부모의 의무가 끝나서는 안 된다. 자녀들의 성격과 기질을 잘 살펴봄으로써 자녀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의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자녀들이 아플 때에 병원에 데려가고, 그들의 경제적인 필요를 채워주고, 그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으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에 대해서 가져야 할 의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정신적인 결핍을 보살펴 주는 일이다. 자녀들의 연약하고 상처난 마음을 치료하는 일에는 부단한 노력과 지혜가 요구된다.

자녀들을 돌보는 일에 있어서, 대부분의 부모가 범하는 잘못은 자녀들을 일관성 있는 감정과 원칙을 가지고 대하지 않는 것이다.자녀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교육시키는 일에 있어서, 부모는 순간마다 변하는 자신의 느낌과 감정에 따라서 자녀들을 대해서는 않된다. 부모는 자녀들의 감정과 그들의 기질과 필요가 무엇인지를 잘 살핀 다음에 일관성 있는 원칙과 태도를 가지고 그들에게 접근해야 한다. 만일 부모의 감정과 원칙이 시시때때로 변한다면, 자녀들은 혼동을 일으키게 되며, 심한 경우에는 부모를 무시하거나 부모의 말에 반항적인 청년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자녀들의 불행은 대부분 부모에게 그 책임이 있다. 부모가 자녀를 일관성 없게 다룬다는 말의 의미는,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자녀들에게 신경질을 부리며, 자녀들이 분노와 미움을 품게 말하고, 자녀들을 가혹하고 까다롭게 다루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식으로 다루어진 가련한 자녀들은 결국 그들의 부모와 동일한 정신을 가진 성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자녀를 교육시키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부모야말로 자녀 교육에 있어서 문제의 주요 원인이다. 사업이 잘 되지 않거나 밖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경우, 어떤 부모들은 가정을 불평과 신경질로 가득 채우는데, 이로써 모든 가족들은 매우 비참하고 불쾌한 시간을 가정에서 보내게 된다. 예수께서는 “바라보는대로 변화된다”는 불변의 법칙을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처럼, 감정과 원칙이 일관성 없는 부모를 바라보면서 성장한 자녀들은 그 부모를 닮아서 신경질적이고 분노를 쉽게 폭발하는 성인으로 성장하기 쉽다.

어떤 부모들은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정의 분위기를 어둡게 만든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친절한 정신으로 어떤 일을 하라고 요청하는 대신에 신경질적이고 꾸짖는 어조로 명령하며, 별다른 이유없이 자녀들의 조그만 실수를 책망하고 비난한다. 부모들이시여, 그대들이 취하는 이러한 태도는 자녀들의 쾌활함과 사기를 꺽어버린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부모에게 이러한 식으로 명령을 하달받은 아이들은 자원하는 마음과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소원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무서운 부모의 말을 감히 거역할 수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부모의 명령을 이행하게 된다. 대체적으로 이러한 아이들은 부모의 말에 온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녀들은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대신에 고역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에 부모의 지시를 이행하는 일에 있어서 자주 실패하게 되는데, 그러한 자녀의 실수와 잘못을 보면서 부모는 신경질적으로 꾸짖음으로써 자녀를 더욱 더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간다. 이미 자녀는 자신의 실수 때문에 낙망과 낙담으로 압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자녀의 잘못과 실수를 계속 그들 앞에 열거하면서 꾸짖는다. 이러한 부모의 태도는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를 기쁘게 하거나 만족하게 해주고 싶다는 욕망을 말살시킨다. 그리하여 “될대로 되라!”는 정신이 자녀들을 사로 잡게 되며, 부모가 있는 가정 안에서 발견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과 유쾌함을 가정 밖에서 찾으려고 한다. 이렇게 성장한 자녀들은 자신이 부모의 권위에 저항할 수 있을만한 나이가 되면, 부모의 말에 정면으로 도전하게 되며, 종국에는 부모를 떠나서 거리의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고, 자신이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악한 사람으로 타락하게 된다.

가르치기 전에 먼저 거듭나야 할 부모

누가 이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 청년을 타락하게 만든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만일 가정이 자녀들에게 가장 매력적이고 행복한 곳이었다면 즉, 부모가 자녀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표현하였고 그들이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일거리를 적당하게 공급하여 주었으며, 자녀들이 부모를 가장 친한 친구로 생각했고, 자녀들이 부모의 말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법을 가르쳤다면, 부모는 자녀들이 바치는 최고의 순종과 사랑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어떤 상황 하에서도 자녀에게 친절하게 말하고, 자녀들이 옳은 일을 행하려고 애쓸 때에 격려해 줌으로써, 부모는 자녀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러한 부모들은 가정 안에서 들어오려고 하는 모든 어둠의 그림자들을 내쫓고 유쾌한 사랑의 햇빛을 가정에 들여올 수 있다. 아무리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가정의 분위기가 하늘의 분위기를 담고 있다면, 자녀들은 의를 사랑하고 친절하며 정직하게 성장할 수 있다.

어떤 부모는 때때로 자신의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말과 태도를 자녀들에게 나타낼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타고난 천성이 예민하고 신경질적이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결코 올바르게 대할 수 없다고 핑계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나쁜 기질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단을 가장 기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항상 자아를 지배해야 하는데, 그 일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부모가 초조함과 조급함을 극복하지 못할 때, 부모의 그러한 정신은 자녀들에게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리하여 부모의 고상하지 못한 성품으로 인하여 자녀들의 성격이 매우 불안전하게 꼴지워진다.

부모들이시여, 초조하고 화가 나며 안달이 날 때, 가족들에게 신경질을 부림으로써 가족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지 말라. 자녀를 가지고 있는 부모는 자신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매우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자신의 혀와 입술로 가족들을 불쾌하게 만들지 말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상냥하고 침착하며 안정된 정신을 가지고 말하기로 결심하라. “나는 신경질적인 말로 내 자녀의 행복과 즐거움을 깨뜨리지 않을 것이다” 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라. 날마다 주님 앞에 이러한 헌신과 결심을 바치는 부모들만이 자녀들을 깊은 사랑과 동정으로 양육시킬 수 있다. 만일 그대가 이러한 방법으로 자녀들을 훈계하고 교육시켜 나간다면, 자신이 올바른 원칙 하에서 자녀 교육에 대한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해 나가고 있다는 자각심이 그대에게 용기와 확신을 더해줄 것이다.

어떤 부모들은 자녀가 자신들이 원하는 바대로 따라오지 못할 때, 쉽게 조급하여져서 모든 문제의 원인이 자녀에게 있다고 결정지은 다음에 가차없이 자녀들을 비난하고 책임을 추궁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자녀들이 정말로 책망받을만한 잘못을 행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용납되고 아무런 추궁없이 지나간다. 자녀들은 부모의 이러한 일관성 없는 태도에 실망하여 나중에는 부모의 말을 거의 무시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부모로부터 일관성 없는 교육을 받은 자녀들은 장차 부모에 대항하는 성격을 형성하게 된다. 부모는 자녀들이 부모의 기분에 맞추어서 행동해 줄 것을 기대하지만, 부모 자신이 자녀들의 기분에 맞추어서 지혜롭게 그들을 다룰 것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자녀의 잘못에 대해서는 가혹한 부모가 부모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너무나 관대하다.

모든 부모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자녀를 위탁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분께서는 부모에게 자녀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그러나 어떤 부모들은 자녀를 마치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한다. 모든 자녀는 그리스도의 소유물이다. 모든 부모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선물을 위탁받아서 그들을 이 땅에서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양육시키는 책임이 맡겨져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인생의 무거운 짐으로 인하여, 마음의 근심과 육신의 피로에 지쳐있다. 그러므로 종종 지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불쾌하게 여기시는 태도로 대하기 쉽다. 이러한 부모의 태도는 자녀들의 마음에 어두운 구름을 드리우게 만들어서, 자녀들에게 침울하고 저항적인 기질을 형성시킨다. 어려움에 처한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책망과 꾸지람보다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이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간의 인내와 친절은 가정을 작은 천국으로 만들어서, 천사들이 즐겨 찾아와 머물게 만들어 준다.

가정에서 어머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다. 특히 자녀가 어릴 때에 어머니가 미치는 영향은 아버지의 그것보다 훨씬 크고 강력하다. 어머니는 자신의 감정이 비록 우울할지라도 그것을 자녀들에게 나타내 보이지 않아야 한다. 어머니는 마음을 항상 성령의 아름다운 감화 하에 둠으로써, 상냥하고 유쾌한 정신으로 자녀들을 대하여야 한다. 자녀들이 어머니의 마음에 있는 그늘을 볼 때, 자녀들의 여린 마음에도 우울한 그늘이 깃들게 된다. 자녀들이 가정을 어둡고 지겨운 장소로 생각하게 만들지 말라. 어머니들이시여, 하늘은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인 어머니들의 인내와 노력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자녀들의 마음을 붙잡아라!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의 찌푸린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라. 자녀들이 사단의 유혹에 굴복하였다가 후에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경우에는 그대 자신이 하늘 아버지께 용서받기를 바라는 것처럼 기꺼이 자녀들의 잘못을 용서하라. 친절하고 동정적인 정신은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붙들어 매는 끈이다. 사단은 자녀들의 마음을 부모로부터 떠나게 만들기 위해서 온갖 계략을 사용한다. 모든 부모는 그것과 싸워야 한다. 자녀들이 부모를 막역한 친구로 생각하도록 만들라. 언제라도 부모의 귀에 자신들의 시련과 슬픔과 어려움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여유를 주라. 부모와 자녀가 이러한 사랑의 연합을 이룰 때, 사단이 자녀들의 경험없는 발을 얽어매려고 준비했던 덫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자녀를 다루는데 있어서, 부모는 자녀가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녀들에게 원칙을 가르치되, 부모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자녀를 엄격하게만 다루지 말라. 그들이 한순간에 완전하게 되기를 기대하거나 장성한 남녀처럼 행동하도록 만들려고 애쓰지 말라. 부모의 이러한 태도는 자녀의 마음문을 닫게 만든다. 사단과 그의 악한 천사들이 자녀들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자녀를 공정하고 온유하며 사랑스런 태도로 다루어야 한다. 이러한 부모의 태도는 자녀의 마음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것이며,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를 깊이 신뢰하게 만든다. 자녀가 부모를 가장 믿을만하고 절친한 친구로 생각하게 될 때, 사단의 모든 공격은 허지로 돌아갈 것이다. 사단이 우리의 자녀들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가장 잘 사용하는 통로는 자녀의 친구들이다. 청년들은 서로 매우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들의 마음을 부모에게 붙들어 매는 일에 배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부모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녀 자신의 진정한 행복이라는 사실을 잘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루시듯이....

우리는 어린 시절에 얼마나 부모의 사랑과 관심과 칭찬과 동정을 원했었는가! 부모로부터 억울한 책망을 받았을 때, 얼마나 기분이 좌절되고 낙담했었는지를 기억하라. 부모는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자녀의 마음과 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 그러나 자녀 교육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원칙은 자녀들에게 부모의 말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부모의 말은 절대적으로 순종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녀들의 자원하는 순종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모가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영혼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서로를 대하고 자녀를 대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하신다면, 우리는 완전히 낙망하고 좌절하여 넘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녀들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그들을 이끌어야 한다. 그분께서는 자녀들을 뒤에 남겨두고 부모 혼자 앞으로 전진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신다. 부모는 자녀들을 조심스럽게 좁은길로 인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힘과 능력에 맞는 길을 부모에게 보여주실 것이다. 자녀를 교육시키는 일에 있어서 지나치게 초조해하지 말라. 부모인 우리가 자녀를 염려하고 사랑하는 것보다 그리스도께서 훨씬 더 많이 자녀의 앞날과 영생에 대해서 고뇌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마음 속에 깊은 평안함을 가져다 주기에 넉넉하다.

자녀들과 함께 놀아주고, 그들의 슬픔을 진지하게 동정하라. 거친 말이 그대의 입에서 새어나가지 않도록 기도하라. 부모의 거친 말은 자녀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만드는데, 어떤 경우에는 치료하기 힘들 정도의 상처를 만든다. 자녀의 마음 속에 난 상처는 자녀의 품성을 비틀어지고 반역적으로 만들어 간다. 자신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는 부모는 자녀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룰 수 없다. 너무나 잦은 책망은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의 훈계와 책망을 지겨운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아이들을 다룰 때에는 단호하면서도 친절하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대의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사랑은 자녀의 마음을 그대에게로 이끄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자녀를 사랑으로 다루는 그대의 태도는 자녀들을 선하고 의로운 길로 인도할 것이다.

때때로 그리스도께서도 매우 엄한 책망을 하셨으므로, 부모인 우리도 그렇게 자녀를 책망해야 할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책망하는 자의 정확한 상태와 그들이 감당할만한 정도의 책망의 크기와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셨다. 그분께서는 잘못을 범한 자의 시련과 정확한 동기를 아셨으므로, 영혼을 낙망에서 구하는 방법과 희망을 영혼 속에 불어넣는 방법을 아셨다.

담석 때문에 고민하십니까?

아가타 트레쉬 의사

담석증은 담낭에 결석이 생기는 현상이다. 담석은 간에서 생성되는 갈색 소화액인 담즙으로 형성된다.

식간에는 담즙이 담낭에 농축된 상태로 저장되어 있다가, 위장으로부터 부분적으로 소화된 음식이 십이지장으로 넘어오면, 지방의 소화를 돕기 위해서 담즙이 분비된다.

농축된 담즙은 콜레스테롤로 포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약간의 침전물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이 단단한 고체가 되면 담석이 시작된다. 이러한 고체물질들은 담낭의 벽을 자극하여 담즙 속에 있는 박테리아에게 보다 쉽게 영향을 받게 만드는데, 이렇게 생기는 세균성 감염을 담낭염이라고 부른다.

미국에서는, 전체 인구의 약 10~20%가 담석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남성보다는 여성들에게서 많이 발견된다. 임신을 하였을 경우, 만성 담석증이 악화되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복강내의 압력이 증가되기 때문일 것이다. 담석증을 가진 사람들은 당뇨병, 담낭암, 장기가 경화되는 병, 췌장암을 가질 확률이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진다.

담석증의 증세로는 부종, 개스, 그리고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은 후에 소화불량이나 속이 불편한 증세 등을 들 수 있다. 어떤 환자들은 복부의 오른쪽 윗부분에 고통을 느끼며, 황달 또는 고열과 함께 오환을 느끼기도 한다.

아무런 증세가 없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의사가 다른 병을 진찰하다가 우연히 담석을 발견할 때까지 자신도 모른채 지낸다. 이러한 담석증을 잠복성 담석이라고 부르는데, 잠복성 담석의 제거 여부에 대한 문제는 의사들 간에 상당한 견해 차이가 있다.

112명의 담석증 환자로 구성된 실험 그룹이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대다수는 10~20년 동안 아무런 증세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 중의 3명은 담낭 제거 수술에 따른 합병증의 결과로 사망하였다. 잠복성 담석을 가진 환자의 20% 이하는 담석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 10년 이내에 심각한 합병증을 일으킬 수 있는데, 이러한 조사 결과는 시간을 가지고 충분하게 담석증을 관찰해야 할 필요성을 말해 준다. 담석으로 인한 고통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경감된다.

예방 및 천연 치료

1. 정제된 탄수화물과 과잉 영양공급은 담석을 발전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곡물의 표면을 깍아버리면, 많은 양의 섬유질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그 결과 과식을 해야만 위장의 만복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또한 불필요하게 많은 칼로리를 섭취하면, 음식물의 종류와 상관없이 담석증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고지방, 고칼로리의 식물을 선호하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담석증의 발병률이 높아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15분 동안 뜨거운 물로 담낭부위를 찜질한 다음, 곧 이어서 잠깐 동안 얼음찜질 하는 치료를 세번 반복하면 부기와 염증을 가라 앉히고 통증을 덜 수 있다.

3. 제6차 세계 위장병 학회에서 운동 부족이 콜레스테롤의 결석화를 야기시키는 주요 요인이라는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운동을 하면 콜레스테롤과 답즙산이 다량 분비되어서 콜레스테롤이 침전되어 고체화되는 현상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이 동물과 인체 실험에서 밝혀졌다. 자건거 타기와 같은 운동을 하루에 30분 이상 하는 것으로서 좋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4. 어떤 약품들은 담석이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준다. 에스트로겐을 함유하고 있는 먹는 피임약은 담낭내에 콜레스테롤이 축적되는 것을 돕는다. 과다한 비타민 B의 복용도 담석증의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5. 비타민 C를 적게 섭취하면 결석이 생긴다는 것이 동물 실험에서 밝혀졌다.

6. 대체적으로 지방을 적게 섭취하는 아시아 국민들에게 담낭 질환의 빈도가 낮은 이유는 그들이 저지방 식사를 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지방을 많이 섭취하면 담낭 속의 콜레스테롤 함량이 늘어난다.

7. 고지방, 고단백질 음식이 담석증을 유발시킨다는 사실이 클렘슨 대학의 보그만 박사의 연구에서 밝혀졌다.

8. 음식물 알러지가 담낭질환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지고 있다. 담석증세를 가지고 있는 어떤 환자들에게 알러지성 식품들을 제거하였더니, 모든 증상이 없어졌다는 실험 결과가 보고되었다. 이러한 결과를 얻은 후에, 식사에 알러지성 식품인 계란을 첨가시켰더니 83%의 환자들에게서 증세가 재발되었다. 증세를 일으키는 식품을 순서적으로 나열하면, 달걀, 돼지고기, 양파, 닭고기, 우유, 커피, 귤, 옥수수, 콩, 견과류, 사과, 토마토, 완두콩, 배추, 각종 양념류, 땅콩, 생선, 호밀 등이다.

“음식물 알러지의 개요”라는 책의 저자인 브레노 박사는 알러지를 유발시키는 물질을 섭취하면 담낭관에 부종이 생겨서 담즙의 분비를 막는다고 말하였다. 담즙이 충분히 배출되지 않으면, 감염을 일으키기 쉽게 되고, 이로 인하여 결석이 생기는 초기 단계인 콜레스테롤 침전 현상이 일어난다. 담낭절제 수술 후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알러지성 음시물을 제외시킨 식이요법은 더욱 더 좋은 유익을 가져다 준다. 브레노 박사의 말에 의하면, 담석증과 음식물 알러지는 모두 가족 단위로 발생되는 경향이 있으며, 편두통도 종종 담석증과 연관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계란이 이 편두통과 담석의 주요 요인이라고 보고하였다.

9. 밀기울(bran)과 같이 섬유질이 많이 함유된 음식물을 섭취하면 결석의 생성을 어렵게 만든다.

10. 물을 많이 마시면 결석을 예방할 수 있다는 의학보고가 있다. 많은 양의 물을 낮에 규칙적으로 마시고, 또한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물을 마시면, 담즙이 희석되어 침전물의 고체화를 막을 수 있다고 한다.

500ml의 물을 마시면 담즙이 담낭 안에 머물러 있는 시간을 줄여줌으로써 유익을 얻을 수 있다.

11. 동물성 단백질의 섭취는 결석 형성과 명백한 관계가 있다. 반면에 식물성 단백질의 섭취는 생성된 결석을 어느 정도 분해하는 역할을 한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위스타 기관에서는 단백질과 결석의 관계에 대한 동물 실험을 하였는데, 콩 단백질과 우유에서 뽑은 단백질인 카제인을 쥐들에게 각각 섭취시킨 결과, 카제인을 섭취한 쥐들의 58%에서 결석이 발견되었다. 담석 환자들에게 우유제품을 멀리하라는 권고를 주고 싶다.

12. 체중이 초과된 사람들은 담석증에 걸릴 확률이 높다. 운동과 채식으로 하는 식이요법은 담석증에 대비한 좋은 예방책이다.

13. 담낭을 제거하면 대장암에 걸릴 위험이 높아진다는 두개의 연구보고가 최근에 발표되었다. 피츠버그 대학의 연구팀의 보고에 의하면, 담낭 절제 수술을 받을 경우, 대장의 우측에 암이 발생할 가능성이 거의 2배나 높아진다고 한다.

14. 얼마 전부터 Chenodiol 이라는 약품이 담석증의 치료에 사용되고 있는데, 이 약품을 사용하는 환자들의 콜레스테롤 수치가 상승한다는 좋지 않은 보고가 잇달아서 들어오고 있다.

 

간식이 가져오는 재앙들

캘빈 뜨레쉬 의사

어떤 사람들은 하루에 식사를 소량으로 여러번 하는 것이 건강에 유익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러한 식사법은 배고품이나 한꺼번에 과식하는 것을 방지해 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개 간식을 매우 즐겨 하는 사람들이다. 인체의 생리학에 대해서 기본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쉽게 알게 될 것이다.

간식에 대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간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대개 균형있는 식사를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들은 식사를 불규칙적으로 하고 있으며, 그러한 식사 습관으로 인하여 여러가지 질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가장 좋은 식사법은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고, 다음 식사 시간이 될 때까지 물 이외의 어떤 것도 먹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소화 기관은 음식을 소화시키기 위해서 스스로 준비하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입안에서 타액을 준비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서, 전 소화 기관에서 적당한 양과 적당한 강도의 소화액을 준비해야 하는데, 이러한 준비 과정에 있어서 인체는 막대한 화학적, 물리적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정확한 시간에 식사하는 습관을 배양한다면, 인체는 우리의 식사 시간에 맞추어서 정확한 시간에 소화를 위한 준비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음식물이 정해진 시간보다 빠르거나 늦게 위장에 들어가게 되면, 소화 기관은 그것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무리를 하게 되며, 소화를 위하여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어서 결국에는 신체가 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올바른 식사 습관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은 소화기관이 잘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음식물을 섭취하게 되기 때문에, 섭취한 음식물이 불완전하게 소화된 상태로 기관에서 기관으로 옮겨지게 된다.

우리는 위장에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위장을 계속적으로 가동시킴으로써, 위장을 학대해서는 않된다. 우리의 위장은 우리의 두뇌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정신적인 평화와 안정을 필요로 하며, 또한 육체적인 휴식을 필요로 한다. 위장이 음식물을 소화시킨 후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다음 식사를 위해서 준비하는 동안에 또 다른 일거리를 위장에 넣어주는 것은 위장을 혹사시키는 행위이다. 식사를 끝마치고 다음 식사를 시작하기 전까지의 시간 간격은 적어도 5시간을 넘어야 한다.

앉아서 일하는 직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늦은 시간에 갖는 저녁식사는 특별히 해롭다.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한번 건강을 잃어버리면 결국 죽음으로 끝나게 되는 질병을 갖기 쉽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저녁에 느끼는 배고품은 인체가 음식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보내는 신호가 아니라, 낮시간 동안에 위장과 소화기관을 과도하게 혹사시켰기 때문에 느끼게 되는 허전한 느낌이다. 한조각의 콩을 소화시키기 위해서도 전 소화기관이 가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여기에 간식을 절대로 피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른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소화기관도 휴식을 필요로 한다.

많은 사람들은 잠자기 바로 직전에 식사를 하는 해로운 습관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점심 식사를 늦게 했기 때문에 저녁 식사 시간을 늦추게 되며, 어떤 사람은 직장에서 하는 일 때문에 저녁 식사 시간이 늦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늦은 시간에 허기진 느낌을 채우기 위해서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잠자리에 들어간다. 하루종일 음식물의 소화작용을 위해서 일했기 때문에 피로해진 위장은 밤이 되어서 다른 기관들과 함께 휴식을 취해야 하는데, 또 다시 소화를 위해서 밤새 일해야 되는 최악의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낮시간 동안의 소화 작업으로 피로에 지친 위장에게 많은 음식물을 밀어 넣음으로써, 위장은 쉬어야 할 시간에 가장 많은 일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의 잠은 대개 불쾌한 꿈으로 방해받아서 아침에 일어나면 기분이 상쾌하지 못하고 몸이 무거운 것을 느끼게 된다. 밤시간 동안의 소화작용에 많은 에너지를 빼앗겼기 때문에 노곤한 느낌이 들며, 입맛도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소화기관들은 오래가지 않아서 기력을 잃게 되고 고장나게 된다. 그리하여 소화불량증으로 일생을 비참하게 고생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하지만, 원인이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다. 외관상으로는 건강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피는 깨끗하지 못하다.

하루에 몇 끼를 먹어야 하는가?

올바른 식사 습관을 실행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은 하루에 세끼를 먹는 것보다 두끼를 먹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루에 세끼를 먹다가 두끼로 바꿀 경우, 처음에는 다소 현기증을 느낄 수 있지만, 일단 몸이 두끼에 익숙하게 되면 곧 그러한 현상들을 없어진다. 두끼를 먹을 경우, 소화기관은 밤시간 동안 완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 다음 날을 위해서 잘 준비하게 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스트레스와 운동부족으로 병들어 가고 있다. 그들은 너무 적게 먹기 때문에 건강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먹기 때문에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경우, 하루에 두끼를 정확한 시간에 섭취하면서 간식을 금하는 것은 건강을 위해서 매우 효과적인 식사법이 될 것이다. 위장은 하루에 여덟번 음식을 먹도록 길들여질 수도 있다. 일단 그렇게 길들여진 위장은 8번의 식사가 공급되지 않을 경우, 현기증이나 공복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느낌을 느낀다고해서 식사를 하루에 8번이나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우리의 건강과 위장이 필요로 하는 식사 횟수는 우리가 느끼는 느낌과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위장은 하루에 세번 식사하는 것보다는 두번만 함으로써 놀라운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루에 세번 식사하지 않으면, 자신의 건강이 크게 훼손될 것이라고 염려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하루에 두끼 먹었을 때에 더욱 큰 축복을 정신과 육체에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세번 식사를 하지 않을 경우, 너무나 배가 고파서 참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위장에 음식물을 반드시 세번 넣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느낌에 속아서는 않된다. 우리는 건강을 위한 올바른 원칙 위에 굳게 서는 정신력을 소유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느끼는 느낌을 모두 만족시키는 생활을 살아간다면, 우리의 건강은 어떻게 되겠는가?

하루에 두끼를 먹는 식사 습관은 밤에 일찍 잠자리에 드는 좋은 습관과 병행되어야 한다. 너무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으면, 배가 고파지기 때문에 음식물에 대한 유혹을 받기 쉽다. 비록 저녁에 배고픔을 느끼면서 잠자리에 들었을지라도,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배고픈 느낌을 전혀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의 배고픈 느낌과 허전한 감정은 이토록 헛된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배고픈 느낌은 위장의 요구가 아니라, 우리의 나약한 정신 상태와 잘못된 습관에서 오는 것이다. 올바른 원칙이 우리가 느끼는 느낌과 감정을 지배해야만, 건강을 유지할 수 있으며, 또한 잃어버린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건강을 회복하고 싶은가? 저녁에 가장 많은 음식을 먹는 습관을 깨뜨려라. 심한 육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복잡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정신적으로 심한 부담을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두끼의 식사법은 세끼의 식사법보다 훨씬 많은 유익을 준다. 만일 자신에게 세번째 식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그것은 과일과 빵 한두 조각으로 끝내는 가벼운 것이 되어야 하며, 잠자리에 들기 수 시간 전에 마지막 식사가 끝마쳐져야 한다.

간식이 위장에게 주는 고통

작은 콩 한조각을 먹는 간식일지라도, 위장에 머무르면서 소화되는 전 과정을 걸쳐야만 한다. 몇년 전에 X레이를 이용하여 음식물이 위장에서 소화되어서 완전히 빠져나가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측정하였더니, 평균적으로 약 4시간내지 5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실험대상으로 자원한 몇몇사람들에게 동일한 음식물을 식사로 제공한 다음, 그들의 위장이 소화를 마치고 비워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조사하였더니, 평균 4시간 반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며칠 후, 동일한 사람들에게 동일한 음식물을 식사로 제공한 다음, 2시간 있다가 여러 종류의 다른 간식을 주고 위장이 비워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측정하였더니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매우 적은 양의 간식을 하였을지라도, 식사 시간에 먹었던 음식물의 소화가 14시간 이상 지연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지방의 섭취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음식물이 위장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위장 내에서 음식물이 오래 지체하면 할수록, 위염이나 위궤양과 같은 질병이 생기기 쉽다. 음식물이 위장에 들어갈 때마다, 위장은 많은 양의 산과 소화액을 분비해야 한다. 간식으로 인하여, 위장은 강한 산성의 소화액을 과다하게 분비하게 되기 때문에 위장은 약해질 수 밖에 없으며, 결국에는 위염이나 위궤양 같은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위장이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위장이 4시간 내에 소화 작용을 마치고, 1~2 시간 동안 휴식을 취하면서 다음 식사 시간에 들어올 음식물의 소화를 위해서 준비하는 일련의 질서 있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첫번째 식사를 마치고 두번째 식사를 시작하기까지의 간격이 적어도 5시간이 되어야 하고, 물을 제외한 어떤 것도 입으로 들어가서는 않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으며, 하루의 식사를 두끼로 마치는 것이 인체에게 가장 유익을 주는 식생활 습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의 자녀는 건강합니까?

Freemdom of Health 에서 발췌

오늘날, 너무나 많은 어린아이들이 병들어 가고 있다. 한 때, 어린아이들의 뺨에서 불그스레한 장미빛을 볼 수 있으며, 예의 있고 단순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의 어린아이들은 만화와 인스탄트 식품에 의해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병들어 가고 있다. 미국에 사는 어린아이들 중 86%가 어린아이들을 위한 신체 검사 기준에 크게 미달하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비극이다. 신체의 건강이 이렇듯 파괴된 상태 하에서는, 정신적인 건강 역시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온 세계의 병든 어린아이들 중 절반 이상이 부유한 국가들에 집중되어 있다. 또한 대부분의 선진국 어린아이들이 심장과 혈관에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모든 부모들에게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학교에 갈 나이의 어린아이들이 각종 알러지와 감기와 같은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당하고 있는 현실은 어린 자녀들의 건강이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적신호이다.

텔레비젼과 건강의 관계

어떤 부모들은 정신 건강이 신체의 건강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듯하다. 인간의 마음 즉, 두뇌는 신체의 일부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건강한 마음은 건강한 신체로부터 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텔레비젼에서 쏟아져 나오는 각종 폭력물과 우스꽝스러운 만화들은 어린아이들의 정신 건강을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있다. 또한 텔레비젼은 가정에서 아버지나 어머니의 자리를 빼앗아 버렸으며, 텔레비젼이 자녀들을 교육시킴으로써, 아이들은 텔레비젼으로부터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볼 것을 선택받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자녀들은 그들의 나이가 17세가 되기까지 약 17,000 시간 동안 텔레비젼 앞에 앉아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부모가 자녀를 교육시키는 시간보다 텔레비젼이 자녀를 교육시키는 시간이 훨씬 많아진 것이다.

어떤 아이들은 텔레비젼에 의해서 마음과 영혼이 깊이 상처를 받고 있으며, 어떤 아이들은 도덕성과 양심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파손당하고 있다. 한 어린아이가 17세가 될 때까지 매 주말마다 교회에 나간다고 할지라도 그가 교회에서 보낸 시간은 고작해야 4400시간 밖에는 않된다.

텔레비젼이 소개한 식품들

오늘날, 어린아이들은 각종 식품회사에서 겨냥하는 주요 목표이다. 그들을 목표로 하는 각종 과자류나 빵 등을 만들어서 막대한 광고비를 쏟아붓고 있다. 어린아이들은 그러한 것들의 영양가나 신선함 여부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광고에서 말하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텔레비젼에서는 “Junk Food?영양적 가치가 없는 각종 상업용 식품들)에 관한 광고가 매 시간마다 약 20회정도 반복되는데, 이것은 어린아이들의 가치관을 세뇌시키기에 충분하다. 미국 국립의학회에서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식품의 판매 광고가 다른 어떤 광고보다도 많다는 사실에 대해서 경고하였다.

쇄도하는 광고 덕분에 어린아이들은 일년에 약 700파운드(약 315Kg)이나 되는 상업용 식품을 먹게 되는데, 이것은 흰빵, 육류, 젤리 등과 같은 것들은 포함시키지 않은 숫자이다. 오늘날, 어린아이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질병 중의 90%가 아무런 양양적 가치가 없는 가공 식품의 섭취로 인해 발생되고 있다.

참고로, 1불짜리 정크 푸드(junk food)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가격 분석표는 우리에게 정크 푸드의 실체를 보여준다;
# 포장비 : 12센트
# 광고비 : 17센트
# 제조공정비 및 이윤 : 55센트
# 방부제+첨가제+각종 색소 : 6센트
# 식품의 실제 재료비 : 10센트

자녀들의 행동과 식사와의 관계

미국에 사는 청소년들이 일년에 마시는 인공 음료수(콜라, 쎄븐엎 등)는 평균적으로 약 836 병에 이른다는 사실이 최근에 발표된 조사에서 나타났다. 그 중에서 정신적으로 균형있게 성장하지 못한 청소년들, 특히 조용히 앉아서 집중하지 못하거나 질서있게 행동하지 못하고 분주한 청소년들은 일년에 약 1200~1500병의 인공 음료수(콜라, 사이다 등등)를 마시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의 심리학과에서 연구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4세에서 7세의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4종류의 식사를 공급한 결과 4번째 종류의 식사를 섭취한 아이들의 행동이 가장 악화되었다.

1) 식사+무설탕+화학조미료
2) 식사+설탕 첨가
3) 식사+화학조미료
4) 식사+화학조미료+설탕
질서있고, 균형있는 판단력을 가진 자녀를 원하는가? 자녀들의 식사에서 설탕의 양과 조미료를 제한하라.

알러지와 가공 식품

음식물에 알러지 반응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을 조사해 보면, 대개 많은 양의 정크 푸드(junk food)를 먹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감자칩, 후렌치 후라이드, 캔디, 케익, 콜라 등등.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에게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식품은 우유, 설탕, 계란, 쵸코렛, 그리고 식품의 색소들인데, 가끔 밀에 대해서 알러지 반응을 나타내는 아이들도 있다. 이러한 식품을 선호하는 아이들 중, 어떤 아이들은 어수선하고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증상을 나타내며, 어떤 아이들은 감기 증세를 나타내며, 어떤 아이들은 천식과 같은 반응을 나타내기도 한다.

비만형 아이들

현대인들의 식사에 고단백질과 고지방이 유입된 이후, 어린아이들의 비만 문제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해 오고 있다. 심장과 혈관성 질병, 특히 동맥경화가 어린 시절부터 발전되기 시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린아이들에 대한 수술이 전체 수술 회수의 1/3을 차지하고 있으며, 심장질환으로 죽어가는 15세 이하의 어린아이들이 숫자가 일년에 15,000명을 웃돌고 있다.

어린 아이들에게서도 당뇨병이 자주 발견되기 시작했으며, 백혈병과 같은 암이 어린아이들의 병으로 등장하였다. 백혈병으로 죽은 285명의 어린아이들 중에 10%는 소변에서 당이 배출되었고, 25%는 그들의 가족 중(대개 할아버지 대)에 당뇨병 환자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니엘 스토웬 박사는 캘리포니아 의학협회에서 백혈병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백혈병은 혈액에 관한 질병이라기 보다는 몸 전체에 관련된 질병인데, 질병의 원인이 혈액에 급격하게 나타난 것 뿐이다.” 백혈병이 몸 전체와 관련있는 질병이라면, 백혈병이 식생활과 관련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당뇨병이 백혈병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백혈병이 부주의하고 비합리적인 식생활의 결과로서 얻게 되는 질병이라는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

부모들의 책임

오늘날,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그들의 잘못된 식생활 습관이다. 설탕과 같은 단 것들이 그들을 공격하는 가장 큰 원수이다. 단 것을 많이 먹는 아이들은 식사를 조금하게 되고, 식사량이 적기 때문에 공복감을 느껴서 군것질 할 것들을 찾는 악순환을 되풀이 하게 되는데, 이렇게 균형을 잃은 식생활은 어린아이들에게 질병과 체질 쇠약을 야기시킨다.

어머니는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텔레비젼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지 말라. 자녀들에게 신선하고 살아있는 영양을 공급함으로써, 자녀들의 뺨에서 장미빛 홍조를 회복시켜야 하는 책임이 부엌에서 일하는 어머니에게 달려 있다. 자녀들에게 하나의 사과 속에 담겨져 있는 살아있는 영양을 설명해 주라. 소다수(콜라, 사이다 등등)을 마시게 하는 대신에 어머니가 손수 짠 과일 쥬스를 맛보게 하라. 자녀들의 식탁 위에 현미밥과 신선한 채소와 씨앗과 넛트류를 올려라. 자녀들의 건강에 각종 질병을 가져오는 고기와 우유와 설탕들을 부엌에서 제거하라.

부모는 어떤 것이 유익하고, 어떤 것이 자녀들의 몸과 정신에 해로운 것인지를 공부해야 한다. 자녀들에게 적당한 운동을 시키고, 건강한 식사를 만들어 주는 어머니야말로 가장 현명한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다.


 

빛을 따라가는 사람들

클락 플로이드

종교 개혁운동의 배경

제자들과 사도들의 죽음 이후 여러 세기를 지나는 동안에 그리스도 교회는 선구자들의 신앙으로부터 떠나기 시작했다. 어두움과 세속이 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스도 교회는 세상에서 인기있는 종교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서 교회의 가르침 또한 세상이 요구하는대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성경에 예언된 중세 시대의 1260년이라는 오랜 종교 암흑시간이 끝나갈 무렵, 개혁과 부흥을 외치면서 일어서는 종교 개혁자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물론, 종교 암흑시대 동안에도 왈덴스 인들과 같은 사람들은 천년 이상 동안이나 사도들의 가르침을 고수하면서 외롭게 살아 왔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되자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종교개혁을 외치면서 일어나는 개혁자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바로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현대 개신교회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종교 암흑기가 그 극치에 달했을 때에는 교회가 국가와 손을 잡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교회의 배도와 잘못된 가르침을 지적하는 곧바른 말씀을 전할 수 없었다. 성경이 말하는 위대한 진리를 고수하기 위해서 용감하게 서있는 사람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에 대해서 무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의 모국어로 번역된 성경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평민들과 농민들은 글을 제대로 읽지 못했으며, 오직 교회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교인들의 무지를 이용하여 수많은 잘못된 교리들을 만들어서 교회의 조직과 특권을 강화하고 교인들을 종교적으로 학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되자, 종교 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16세기에 있었던 위대한 종교 개혁운동에 참여했던 개혁자들은 처음에는 자신들의 개혁이 교회의 반대를 받으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가 너무나 성서적이고 순수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개혁자들의 주장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경우, 교회의 조직과 권위에 혼란이 생기고 약화될 것을 두려워하여, 개혁자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핍박하기로 결정하였다. 개혁자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신 중보자라는 진리를 밝히 드러냈으며, 행함과 고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진리를 평민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교회 안에 들어온 각종 우상들을 거절하였고, 성경을 일반 농민들도 읽을 수 있는 영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개혁자들의 이러한 개혁운동은 로마 교회의 견고한 아성을 깨뜨리기 시작하였다. 진리의 빛줄기는 사람들의 양심에 분명한 일깨움을 주었고, 사람들은 진리를 받고 기뻐함과 동시에 자신이 잘못된 가르침 속에서 방황하였던 사실을 깨닫고 놀라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교인들의 종교적 양심을 억압하였던 로마 교회의 권력은 진리의 힘에 의해서 점점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교회는 개혁자들을 교회로부터 파면시키고 화형대 위해서 불살랐지만, 개혁의 불꽃은 또 다른 개혁자들을 통하여 온 유럽으로 퍼지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의 마음은 오랫동안 잊혀졌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손이 위대한 종교개혁의 길을 예비해 두셨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 저곳에서 개혁의 물결이 일어남에 따라서 교황권의 부패상은 더욱 밝히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전통과 유전에 의해서 가리워져 왔던 성경의 위대한 진리가 하나씩 벗겨지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구원을 위해서 교회의 성직자가 주는 면죄부를 바라보는 대신에 오직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쳐다보도록 가르침 받았다. 살아있는 믿음이 형식주의를 대신하게 되었으며,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은 자신과 교회의 진정한 모습을 보기 시작하였다. 진리를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쫓겨나고 지옥에 갈 것이라는 공포의 정죄를 받았지만, 사람들의 양심에 박힌 진리의 말씀은 요동하지 않았다.

종교 개혁자들의 공적과 그들의 실수

전 유럽을 통하여 마틴 루터, 칼빈, 파렐, 벌퀸과 같은 개혁자들이 일어나서 백성들을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으로 인도하였다. 인간에게 구원을 가지고 오는 것은 로마 교회가 가르치는 것처럼 고행과 선한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관계와 경험이라는 성경적 진리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종교 개혁운동의 지도자들은 로마천주교회가 가르치는 행위 중심적 신학의 오류에 대한 반발로 복음을 설명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남긴 어떤 저서에서는 행위와 순종에 대한 중요성이 믿음과 올바른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아쉬운 면을 드러내었다. 종교 개혁운동이 로마 천주교회의 오류와 부패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개혁자들의 구원론은 믿음을 강조하는 면으로 치우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로마 천주교회가 고수해온 오류에 의해서 가리워졌던 단순한 믿음의 중요성을 밝히 드러낸 것이야말로 16세기의 종교 개혁자들이 이룩한 가장 큰 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믿음과 순종(행함)에 대한 조화를 완전히 밝혀내지는 못하였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하게 이해해야 할 사실은, 대부분의 개혁자들은 로마천주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개혁보다는 교회 조직 속에 있던 부패와 타락상에 대한 개혁을 주장하는 일에 몰두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놀라운 희생과 투쟁적인 개혁 운동에도 불구하고 사도들과 제자들이 전파했던 하나님의 진리가 그들에 의해서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다. 개혁자들은 어떤 교파를 세우기 위해서 개혁운동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교회의 부패와 타락상을 보여줌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개혁과 부흥의 정신을 불어넣어 주고자 하였다. 한가지 아쉬운일은, 그들 개혁자를 따르던 후예들이 선구자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계속해서 개혁을 추진했어야 했지만, 루터의 후예들은 루터 교회를 세웠고, 칼빈의 후예들은 장노교회라는 교단를 세움으로써 하나의 교파로 안주한 결과 종교 개혁운동의 정신은 중단되고 말았다.

밝아지는 빛과 개신교회의 거절

그러나 1700년대에 이르러,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교회에 또 하나의 위대한 개혁자를 보내셨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 웨슬레이다. 요한 웨슬러는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설명하면서, 순종과 선한 행실은 참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맺게 되는 열매라고 가르치는 성화의 가르침을 설교함으로써, 사람들의 시선을 다시 성경의 진리 가운데로 이끌기 시작하였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구원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요한 웨슬레는 믿음과 순종의 중요성을 거의 완전한 조화를 이루면서 묘사하였다. 그는 한 모라비아 교도의 경건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위선적인 신앙과 행위에 의존하고자 하던 모든 인간적인 면들을 버리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오직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온전히 의지해야 된다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한 후, 자신이 가는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참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생애를 바쳤다. 그는 엄격하게 극기하는 신앙 생활을 살았으며, 순종과 절제를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열매로서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은 그 당시 자유주의적인 신앙에 빠져있던 대다수의 개신교회들로부터 상당한 반대를 불러 일으켰다. 요한 웨슬레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당시의 모습을 기록하였다. “개심한 그리스도인은 죄를 승리할 수 있으며, 모든 죄와 불의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성경적인 가르침 위에 교회의 핍박이 가해졌다. 백성들의 발길을 파멸의 길로부터 거룩함의 길로 인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교회의 조직적인 박해가 가해졌다.”

교회의 가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 웨슬레가 전하는 빛을 받아들였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다니던 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수단을 통하여 구원을 얻고자 한다고 조롱하는 의미로 자신들에게 붙혀진 별명인 “Methodist?방법론자) 라는 이름의 교회를 설립함으로써 종교개혁의 정신을 교파라는 장벽 안에 가두어 두고 말았다(감리교회, Methodist). 감리교회의 선구자인 웨슬레는 위대한 개혁자였지만,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그의 뚜렷한 개혁정신과 성화에 대한 가르침은 그를 따르던 후예들에 의해서 전승되지 못하였다. 이제, 감리교회는 커다란 정통 교단 중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지만, 요한 웨슬레의 정신과 설교는 더 이상 듣기 어렵게 되었다. 감리 교회의 출현 이후, 빛은 점차적으로 밝아져서 천주교회의 유물인 세례를 거절하고 웨슬레의 가르침과 침례의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의해서 개혁운동이 또 한번 전진하였지만, 그들 역시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자신들의 교회를 세운 선구자들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가르침

긴 세월이 흘러갔고, 수많은 개혁자들이 일어섰다가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 복음은 항상 믿음과 순종(행함) 중에서 어떤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그 균형과 조화를 잃어버리는 역사를 되풀이 해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크게 오해한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적인 가르침에 쐐기를 박기 위해서 율법의 근본 정신을 밝히 드러내기 위해서 십계명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누어서 설명하심으로써 복음의 완전한 조화를 밝히셨다. “첫째는 이것이니...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12:29~31. 율법주의의 사슬에 묶여있던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과 사랑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하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의 커다란 충격이 되었다. 그리하여 유대교회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들의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그분을 따르는 지지자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요한복음 9:22. 율법주의에 붙잡혀 있던 유대인들에게 올바른 깨우침을 주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랑과 율법의 관계를 설명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15.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후,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의 능력있는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 교회로 들어왔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율법과 사랑의 관계를 오해하기 시작하였다.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이 사랑만을 존중하고 계명을 경시하는 풍조를 염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요한은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고”(요한일서 2:4) 라고 강력하게 말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사랑과 율법의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밝혔다.

교회가 세속화된 신학적 배경과 마지막 시대를 위한 복음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사도들과 제자들의 죽음 이후, 그리스도 교회는 급속하게 세속화되고 타락하기 시작하였다. 중세기에 이르러서는 각종 의식과 예식이 교회 안에서 판을 치게 되었고, 행함과 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신앙이 정착되게 되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이에 대한 반발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을 들고 나왔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종교개혁 운동을 통해서 그 순수성을 회복하였지만, 반면에 그리스도인 신앙에 있어서 순종과 행위의 중요성이 약화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러다가 교회는 다시 한번 커다란 부흥의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요한 웨슬레가 주장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이다. 한동안 교회는 다시 부흥과 개혁의 길을 걷는듯 하였지만, 그를 따르던 후예들이 종교 개혁의 정신을 이어 가는 일에 실패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는 다시 세상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교가 되었고, 세속과 타협이 판을 치게 되었다. 물론, 그리스도 교회의 한쪽 구석에는 아직도 종교 개혁자들의 정신과 사상을 이어받아서 전진시키는 하나님의 종들이 있지만, 그 숫자는 너무나 적어서 교회 안에 들어온 배도와 타협을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리스도 교회가 요한 웨슬레의 성화의 가르침을 거절내지는 그 중요성을 잃어버린 결과로 인하여, 오늘날 교회 안에는 각종 자유주의적인 가르침들이 난무하게 되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사상이 팽배하게 되었고, 율법은 십자가에서 폐하여졌다는 가르침이 온 교회를 휩쓸게 되었다. 16세기의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 천주교회의 행함 위주의 구원론을 반박하기 위해서 믿음을 강조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십계명의 권위를 여전히 인정하였었다. 그러다가 17세기에 와서 요한 웨슬레는 거룩한 열매를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법의 권위를 한층 높이고 믿음과 순종의 균형을 이루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십계명에 대한 미묘한 오류들이 기독교회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충성심을 흔들어 놓았다. 그리하여 계명에 대한 순종과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율법주의자로 몰리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예수 그리스도 당시와 완전히 반대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 당시에는 바리새인들과 유대 지도자들이 율법의 의미를 잘못 왜곡하여 율법주의로 빠진 반면에, 오늘날에는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졌다는 이론 때문에 교회가 도덕적으로 크게 타락하게 된 것이다. 교회 안에서 율법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이 희미해지자, 교회는 급속하게 자유주의로 흐르게 되었으며, 세속이 범람하게 되었고, 교인들은 율법을 범하는 죗됫 생활을 살면서도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믿는 기만 속에 빠지게 되었는데, 바로 이것이 소위 복음주의자들이 교회에 가져온 재앙들이다. 복음주의자들은 겉으로 듣기에는 십자가의 사랑을 높이는 아름다운 설교를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그들은 십자가의 사랑이 율법을 폐하였고 지금은 새언약의 시대이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에 제재받지 않고 살아도 된다는 두려운 가르침을 교회 안에 퍼트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사단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무효화시키기 위해서 최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율법에 대한 순종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는 가르침을 교회 안에 퍼트려 놓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십자가는 율법을 범한 사람들의 죄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댓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로마서 6:23. 그런데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선언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더라.” 로마서 3:23.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류가 범한 죄의 삯을 치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땅에 세워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범죄하였던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준비되었는데, 구약시대에는 십자가의 죽음이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어린 양의 죽음으로 상징되었다. 십자가는 죄가 하늘의 왕인 그리스도의 죽음을 몰고왔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두렵고 엄숙한 경고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사랑의 새언약 때문에 율법(십계명)은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다는 믿음 속에 빠져 있다. 이제, 율법에 대한 순종과 계명의 중요성은 사라지게 되었고, 사랑과 믿음이 그리스도인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인정되는 시대가 되었다. 복음을 구성하는 믿음과 순종의 균형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 또 다시 깨어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시대에는 복음이 완전한 균형을 가지고 전파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완전한 복음만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마지막 환란을 통과하게 지켜주기 때문이다. 마지막 시대를 맞이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써 율법과 믿음의 완전한 조화를 설명하고 있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14:11~12.

1부 - 옛 언약이 계속 될 수 없었던 이유


한번은 설교를 마친 후, 교인들과 인사를 나누려고 입구로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앞을 가로 막는 세명의 청년들이 있었다.

그 중 한명이 큰소리로 내게 묻기를 “목사님, 오늘 목사님께서는 십계명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시면서 마치 우리가 옛 언약 하에 살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목사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새 언약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그 젊은이는, 십계명은 옛 언약이며, 그것은 십자가에서 폐하여졌으므로 은혜 아래에 사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십계명에 구속받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사실상, 그 젊은이가 가졌던 믿음은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확신을 그대로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러한 확신은 성경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무서운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이 문제를 성경이라는 저울 위에 달아 보아야 한다. 오늘날, 율법과 언약에 대한 오해야말로 기독교회가 부도덕하고 세속화 되어가고 있는 중요한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의 법이 폐하여 졌거나 불필요하다는 사상이 국민들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을 때, 그 국가는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도 무법한 상태 하에서 온갖 범죄와 부도덕함이 난무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경시하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교회 안에는 부도덕과 세속이 난무하게 될 것이고, 정치적인 목사들과, 권력을 사랑하는 장노들과 이기적인 집사들의 활동 무대가 될 것이다.

언약과 십계명에 관한 문제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언약의 정의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언약에는 여러 형태와 유형들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것은 서로의 약속과 맹세에 기초한 쌍방의 합의를 뜻한다. 각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언약에 기초하여 당신의 백성을 인도해 오셨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때에는 개인과 언약을 맺으셨고, 어떤 경우에는 국가와 언약을 맺으셨다. 시간과 장소와 환경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형태로 언약이 맺어졌지만,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는 조건은 항상 불변하였고 다른 것으로 대치되지도 않았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언약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말씀은 우리에게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에 존재하는 몇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저 첫 언약(옛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새 언약)을 요구할 일이 없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 하였노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리라.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옛 언약)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8:6~13

이 말씀은 옛 언약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더 좋은 약속”을 가지고 있는 새 언약 이 생기게 되었고, 따라서 옛 언약은 낡은 것이 되어서 없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법을 마음과 생각에 기록한다는 새 언약이란 어떤 것이며, 낡아져서 사라져 버렸다는 옛 언약은 어떤 것인가?

십계명이 아니라 옛 언약

옛 언약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옛 언약이 무엇이 아닌가를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성경에는 폐하여져 버린 언약에 관한 기록이 나와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폐하여진 그것은 십계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폐하여진 언약에 십계명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3가지 증거가 위에 언급한 성경절에 나와 있다;

첫번째 증거 : 바울은 “더 좋은 약속이 있는 더 좋은 언약”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옛 언약에 어떤 문제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만일 십계명이 옛 언약 그 자체라면, 십계명 속에서 어떤 빈약한 약속들을 찾을 수 있어야 되지 않는가? 그러나 오히려 히브리서의 저자인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십계명에 기록된 도덕률들이 매우 좋은 것임을 말하고 있다. “자녀들은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공경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에베소서 6:1~3. 옛 언약에 어떤 문제가 있음을 암시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는 십계명에 기록된 도덕률을 빈약하거나 흠이 있는 언약으로 설명하지 않고, 오히려 “약속이 있는 첫 계명”으로 권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바울의 이러한 설명을 통하여, 히브리 8장에 기록된 흠이 있는 언약은 십계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두번째 증거 : 옛 언약에 대한 오해 중에서 가장 큰 오해는 “옛 언약에 결함이 있었다”는 말에 대한 의미이다.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히브리서 8:7. 만일 십계명이 옛 언약 그 자체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손수 돌비에 기록하신 십계명에서 어떤 결함을 발견해야 한다. 시편을 기록한 저자와 사도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들어보자.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하고.” 시편 19:7. “이로 보건대 율법도 선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로마서 7:12. 십계명을 가리키는 이러한 성경절들이 무엇인가 빈약하고 결함이 있는 모습을 묘사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완전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완전하다는 말은 어떤 결함도 찾아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세번째 증거 :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8:13. 여기서 사도 바울은 옛 언약이 폐지되어 없어졌다는 강력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만일 옛 언약이 십계명을 말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도덕률인 십계명이 낡아져서 없어져 갔다는 말이 된다. 이 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견해를 들어 보자.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3:31. 이로써, 우리는 낡아져서 사라진 옛 언약이 십계명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쪽에서는 낡아져서 사라졌다고 말해 놓고서, 다른 곳에서는 동일한 것에 대해서 결코 폐할 수 없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성경은 언제나 일관성 있는 진리가 담겨진 책이다. 바울은 다만 사라져간 것은 옛 언약이고, 결코 폐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인 십계명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없어져 버린 옛 언약이 십계명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결론지을 수 있다.

그렇다면 옛 언약은 무엇인가?

무엇이 옛 언약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이제 우리는 무엇이 옛 언약인가를 성경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자, 옛 언약을 맺는 장면을 보기 위해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시내산으로 가보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율법을 주시기 전에 먼저 모세를 산 위로 부르셔서 당신과 백성들 사이에 맺을 언약을 제안하셨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 너희가 내 말을 받들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출애굽기 19:3~6. 이 말씀 가운데 언약의 요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언약은 맺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제안에 대해서 그들은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 출애굽기 19:7~8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다 행하리이다” 라는 대답이 하나님께 올려지는 순간 옛 언약의 기초가 놓여졌다. 그러나 그 언약이 공식적인 시행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그 약속을 봉인하는 절차가 있어야 한다. 언약을 인준하는 의식은 백성들 위에 숫소의 피를 뿌림으로써 거행되었다.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이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출애굽기 24:4~8. 여기서 우리는 이 언약이 십계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세워진 상호간의 약속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십계명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도덕률이지, 상호간에 맺어진 약속이 아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이 언약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옛 언약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맹세한 약속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법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약속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답례로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언약의 체결 과정에 있어서 결정적인 잘못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약속을 하는 백성들 편에서 보인 태도와 그들의 마음 상태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구하는 대신에 “우리가 할 수 있다” 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러나 모세가 돌비에 새긴 십계명을 가지고 산을 내려가기도 전에 그들은 자신들의 약속을 어기고 말았다. 이제, 옛 언약의 결함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되는가? 문제는 언약을 맹세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에 있었지,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주신 십계명에 있지 않았다. 자, 이제 앞에서 살펴보았던 히브리서 8장으로 돌아가 보자. 하나님께서 “저희를 허물하”셨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8절). 또한 9절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셨다. 분명, 상호간의 언약을 깨뜨린 장본인은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히브리서 8장에서 옛 언약이 “무흠하지” 않다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옛 언약은 백성들에게 속박을 가져왔을 뿐이며, 그들은 그것을 지킬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서 볼 때, 우리는 두번째 언약 즉, 새 언약을 다시 맺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은 히브리서 8장에서 왜 새 언약을 “더 좋은 약속”이라고 표현했을까? 왜냐하면 언약의 창안자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언약을 맺는 상대방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히브리서 8:10~12.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율법을 우리의 마음에 기록하셔서 우리를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켜 주시겠다는 놀라운 약속이 새 언약에 포함되어 있다.

이제, 새 언약이 어떻게 인준되었는지를 살펴보자. 그것은 옛 언약과 꼭 같은 방법인 피를 흘림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숫소가 피를 흘리는 대신에 하나님의 아들이 피가 흘려졌다. “양의 큰 목자되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하사 자기 뜻을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히브리서 13:20. 시내산에서 했던 인간의 빈약한 약속과는 얼마나 큰 대조를 이루고 있는가?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라는 인간의 약속 대신에,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하사 ... 우리 속에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모든 그리스도인들 앞에 놓여졌다. 우리가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그분께서 이루시는 것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이는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5. 그런데 어떻게 새 언약이 봉인되었는가? 동물의 피가 아닌 “영원한 언약의 피”로 인쳐졌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이 새로운 언약을 보증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점을 비교하여 보자. 옛 언약은 짐승의 피로 인준된 것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자신들의 힘으로 지키겠다고 공언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약속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출 24:5~8, 히 9:19~20). 그러나 새언약은 우리의 마음에 당신의 율법을 기록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위에 기초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준되었다.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브리서 8:10.

2부 - 참된 새 언약의 의미


참된 회개를 통하여 성취되는 새 언약

순종은 표면적인 행위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이 마음에 새겨짐으로써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이 마음에 새겨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까?

그것은 참된 거듭남을 통해서 마음과 생각이 변화된다는 말이다. 거듭남의 경험이란, 예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심으로써 우리의 생각과 동기와 심령이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5.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 임하셔서 순종에 필요되는 당신의 능력을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 주신다. 그리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함으로써 연약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게 되며, 그분의 승리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나타나게 되고, 육체적 정욕과 이기심은 십자가에 못박히게 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의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3~4(킹제임스 영어성경역). 예수께서는 죄있는 육신의 모양을 취하셨지만 육신에 따라서 생애하지 않고 영을 좇아서 생애하심으로써 율법의 의를 이루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께서 우리 마음 속에 거하실 수 있도록 받아들인다면, 그분께서는 죄와 분리된 당신의 거룩한 생애를 우리에게서도 이루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을 따르는 모든 자녀들에게 주어진 새 언약이며, 누구든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절대적이고도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사실을 가리키면서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고 기록한 것이다.(골로새서 1:27). 다음과 같은 바울의 간증은 우리를 전율케 하기에 충분하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 2:20

우리는 마음에 기록된 율법이 시내산에서 돌비에 새겨진 율법과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옛 언약과 새언약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은 율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직무에 있는 것이다. 돌비에 새겨진 율법은 우리를 단지 정죄하며 죽음에 이르게 할 뿐인데,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 하기 때문이다.(로마서 8:7). 변화되지 않은 육신적 마음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다. 그러나 똑같은 율법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변화된 마음에 받아들여지면, 율법은 우리를 구속하고 얽매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이 된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은 간증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한일서 5:3.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결코 무거운 것이 될 수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기쁘고 즐거운 일이 된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시편 40:8

새 언약 하에서는 단 한명의 영혼도 타락한 본성의 강한 충동을 스스로의 힘으로 싸우도록 내버려지지 않는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로마서 5:20. 선천적 혹은 후천적인 모든 결함들을 극복하기 위한 초인간적인 능력이 하늘로부터 제공될 것이라는 약속이 새 언약 속에 포함되어 있다. 죄와 유혹에 부딪칠 때마다, 그분의 능력을 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통하여 전달되는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성령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받아들이는 자마다 마음이 변화되고 부드러워져서, 모든 편견과 강팍함과 이기심과 교만을 버릴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영광스런 새 언약을 “더 좋은 약속”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두 언약을 상징하는 두 아들

지금까지의 연구를 토대로 갈라디아서 4장을 살펴보자. 새 언약과 옛 언약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이 사용한 비유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먼저 바울의 비유를 읽어보자.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이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갈라디아 4:22~25.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 즉 이삭과 이스마엘이 각각 새 언약과 옛 언약을 대표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울은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은 옛 언약을 상징하고, 사라의 아들인 이삭은 새 언약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28~31절. 이것은 매우 흥미있는 이야기이다. 바울은 왜 두 여인의 두 아들이 각각 두 언약을 나타낸다고 말하였을까? 바울은 이스마엘과 이삭의 출생을 실례로 들어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부인 사라를 통해서 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 당시 사라의 나이는 이미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나이가 훨씬 넘었었다. 그래서 사라는 자신의 남편 아브라함에게 여종 하갈을 취하여 아이를 가질 것을 권유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방법만이 하나님의 불가능한 약속을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하여 한 아들을 얻었는데, 그의 이름이 이스마엘이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러한 태도는 자신의 노력과 아이디어에 근거를 둔 옛 언약의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그러한 시도는 시내산에서 맺어진 옛 언약이 실패했던 것처럼 철저하게 실패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얄팍한 꾀로 얻은 이스마엘을 약속의 자녀로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이를 기다려야만 하였다. 사라의 나이가 90세쯤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생리학적으로 도저히 아기를 가질 수 없는 할머니의 태에서 생명을 창조해 내셨다. 육신적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하였지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창조의 능력을 통해서 이삭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이삭의 출생은 새로 태어남 즉, 거듭남의 경험에 기초한 새 언약의 관계를 잘 나타내는데, 오늘날에도 이것을 잘 이해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태어날 수 있다. 과학적으로, 신체적으로 볼 때, 사라의 태에서 어떤 열매를 낸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인의 타락하고 이기적인 몸과 마음에서는 결코 순종의 열매를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사용하셔서 늙은 사라의 속에서 새 생명을 창조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사용하셔서 영혼 속에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시면, 마음이 새롭게 되고 거듭나서 순종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이삭은 “육체를 따라” 태어나지 않고 “성령을 따라” 났다(갈라디아 4:29). 모든 인간은 연약한 육체를 가졌으므로 율법의 의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옛 언약 하에서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결국 이스마엘과 같은 종의 자녀를 생산할 뿐이다. 율법이 성령을 통해서 마음에 기록되어야 하며, “너희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사람들을 오히려 옛 언약하에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리는 오히려 그 반대를 말하고 있다. 율법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기록되어 거듭나게 될 때, 비로서 그는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유의하라. 이러한 상태에서야 비로서, 그리스도인의 순종과 행함은 참 사랑의 증거가 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15.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요한복음 5:3

육체가 아니라 마음에 받는 참 할례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옛 언약의 표로서 할례를 주셨을까? 그렇게도 중요한 언약을 나타내는 표로서 할례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매우 귀중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볼 때, 신체적인 할례는 육체를 의존하는 신앙과 관련 있음을 보게 된다.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빌립보 3:3 바울은 참 할례를 신체적인 할례와 구별하여 말하였다. 신체의 일부인 양피를 베어내는 것 자체는 참 할례가 아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신체의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로마서 2:28~29. 여기서 바울은 사람이 행하는 육체의 할례와 성령께서 행하시는 마음의 할례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참 할례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그 할례는 인간의 노력과 공로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찬양을 돌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참 할례는 참된 회개를 통하여 육체적 본성을 잘라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참된 할례의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참 할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골로새 교회에게 보내는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 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골로새서 2:11. 바울은 마음에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영적 역사를 할례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그것은 손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어떤 인간의 노력도 그것을 이룰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몸의 살을 베어내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내재하심을 통하여 죄의 육체적 본성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성령의 역사이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룰 자니라.” 갈라디아서 3:29. 마음에 할례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이 참 유대인이며, 참된 아브라함의 후사이다.

그리스도의 피를 근거로 한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은 행함의 계획이 아니라, 믿음과 은혜를 통한 변화의 계획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행함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뜻인가? 율법이 인간을 의롭게 만들 수 없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변경하거나 폐지시킬 수 있는가? 성경은 옛 언약 하에서와 마찬가지로 새 언약 하에서도 율법은 동일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3:31. 가장 큰 두가지 차이점은 단지 율법이 기록되는 장소가 돌비에서 마음으로 바뀐 것과, 우리 자신의 힘으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율법의 요구가 성취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구원을 보면서 감격하여 그분의 말씀과 명령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같은 모양을 가진 순종과 행위일지라도, 그것이 이루어지는 능력의 근원과 동기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새롭게 변화시켜주셔야만, 하나님께 충성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성과 사랑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그분의 말씀과 뜻에 온 마음을 다하여 순종하는 생애를 살기로 결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참된 새 언약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에 대하여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헌신과 순종을 의미한다.


 

율법과 언약의 역사


In the beginning 에서 발췌

시내산에서 율법이 내려진 이유

아담과 하와는 창조함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의 법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저들은 율법의 요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그 교훈이 저희의 마음 속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인류를 위한 대속제물로서 바치는 구속의 계획을 수립하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 동물의 희생제도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이 범하여지지 않았더라면, 인류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구세주의 필요성도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희생제물을 드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아담은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쳤고, 율법은 계속되는 세대를 통해서 전달되었다. 그러나 인류를 위한 위대한 구속의 계획이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숫자는 극히 적었다. 범죄로 인하여 세상은 매우 극악하게 되었기 때문에, 세상을 홍수로서 다시 정결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홍수 후, 율법은 노아의 가족들에 의해서 보존되었다. 그러나 다시 인구가 증가하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삶을 살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에게 할례 의식을 주셨는데, 이것은 할례를 받는 자는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헌신한다는 서약의 표시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 역시 그 서약을 지키지 못한 결과, 결국에는 애굽에 종살이 하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동안,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지식을 많이 잃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애굽의 이교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셨을 때, 그분께서는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모든 백성들이 듣는 가운데 당신의 율법(십계명)을 친히 두개의 돌판에 새겨주심으로써 하나님의 법에 대한 지식을 그들에게 가르치셔야만 하셨다.

그러나 만일 아담이 받았고, 노아가 보존하였던 하나님의 율법이 계속해서 잘 지켜졌더라면, 할례 의식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만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할례로써 표를 삼은 언약을 잘 지켰더라면, 그들은 우상 숭배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며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새삼스럽게 시내산에서 율법을 선포하고 돌비에 새겨서 백성들에게 줄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모세에게 부가적인 내용이 담긴 의문의 율법을 기록하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두 개의 율법

아담 때부터 시작된 동물의 희생제도는 그의 후손들에 의해서 크게 곡해되었다. 주변의 이방인들로부터 받아들인 미신, 우상 숭배, 방탕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지시하셨던 단순하고도 의미심장한 희생제도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소에서 유지되어야 할 예배 형식에 대한 완전한 지시를 주시게 되었고,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식 율법을 책에 기록하였다. 이 희생제도에 관한 의식 율법을 신약 성경에서는 의문의 율법(ceremonial law)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십자가에서 폐지된 율법은 바로 이 의식 율법을 뜻한다.

또 하나의 율법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두 돌판에 친히 기록하신 십계명인데, 이것은 성소의 두번째 칸인 지성소 안의 법궤 안에 거룩하게 보관되었다. 이 십계명은 하나님의 도덕적 품성과 그분의 뜻이 기록되어 있는 도덕률(moral law) 이다. 이것은 총 10개의 계명으로 되어 있는데, 전반부에 있는 4계명에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사랑이 기록되어 있고, 후반부 6계명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도덕과 사랑이 기록되어 있다.

동물의 희생제도에 대해서 기록한 의문의 율법은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인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제사 제도의 목적과 그 완전한 의미가 실현될 때까지만 존재하도록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 더 이상 양을 잡아 죽이는 희생제도가 불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의문의 율법을 그리스도께서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셨다고 기록하였던 것이다(골로새서2:14). 그러나 십계명의 율법에 대해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다고 기록하였고(시편 119:89),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선언하셨다(마태복음 5:17~18).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라고 말했던 것이다(로마서 7:12).

구세주의 죽음은 의문의 율법을 종식시켰지만, 도덕적 율법인 십계명에 대한 인류의 의무는 조금도 감소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인류에게 내려진 율법의 정죄를 속하기 위해서 하늘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만 했다는 사실은 율법의 요구와 그 권위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다. 비록 의문의 율법이 십자가에서 폐지되었다고 할지라도, 희생제도 속에 담겨진 귀중한 의미는 오늘날에 사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기별을 전하고 있는데, 바로 그것이 성소 기별이다(살아남는 이들 11,12호에서 자세히 연재했음).

 

두 개의 언약

성경에 두 가지의 율법이 나와 있는 것처럼, 언약에도 두가지가 있다. 제일 첫번째 언약은 에덴 동산에서 맺어졌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세기 3:15. 하나님께서 하와를 유혹했던 사단에게 하셨던 이 말씀은 사람과 맺으신 최초의 은혜의 약속이었는데, 동시에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예언이기도 하다. 여자의 후손 즉,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손과 발이 못박히시는 고통 가운데 돌아가심으로써 사단의 권세를 완전히 제압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의 귀에 들려질 때, 그것은 그들에게 얼마나 큰 소망의 약속으로 들렸겠는가? 그 언약의 말씀을 들으면서 아담과 하와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용서를 진심으로 감사했으며, 동시에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을 것이라는 충성을 맹세하였을 것이다. 이것에 대한 보충 설명으로서,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를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라고 묘사하고 있다(계 13:8, 킹제임스 영어성경역).

이 언약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라는 말씀으로 아브라함에게 다시 반복되었다(창세기 22:18).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태어나셔서 죽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고 말씀하신 다음,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고 선언하셨다(창세기 17:1, 7). 그러므로 옛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조건으로 맺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언약은 후에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반복되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 너희가 내 말을 받들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출애굽기 19:3~6. 모세가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백성들이 일제히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라고 응답하였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주신 언약의 조건으로써 “너희가 내 말을 받들고 내 언약을 지키면” 을 제시하셨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하게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명령이었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맺어진 상호간의 약속(언약)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는 계명이 어떻게 약속이 될 수 있는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 는 계명이 어떻게 언약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반드시 지켜야 되는 하나님의 도덕률이었다. 그러므로 옛 언약이란,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라고 공언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맹세와, “너희가 그것을 지키면”이라는 조건으로 맺어진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서로 교환되었던 것을 말한다. 즉, 언약이란 상호 간에 맺어지는 약속을 말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옛 언약의 문제점

아담의 범죄 후 에덴동산에서 맺은 언약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이미 구원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는데, 왜 시내산에서 또 다시 언약을 세울 필요가 있었는가?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법에 대한 지식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의 원칙도 대부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심으로써, 백성들이 당신을 사랑하고 신뢰하도록 당신의 능력과 자비를 그들에게 나타내고자 하셨다.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무능력과 하나님의 도우심의 필요를 느끼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애굽 군사들의 추격으로부터 도망할 길이 없어 보이는 홍해로 인도하여 바다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을 통하여 그들을 구원하셨다. 그 결과, 백성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 그리고 그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로 가득 채워졌다. 그러나 백성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진리가 있었다. 그들의 마음은 애굽의 우상 숭배와 부패 가운데서 사는데 익숙하여졌기 때문에 마음 속에서 올라오는 죄악적인 욕구를 이기고,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기에 전혀 준비되어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하였다. 그들은 자신을 죄로부터 구원해줄 구세주의 필요성을 깨달아야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부족을 스스로 느끼게 되기를 고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면서, 그들의 순종을 전제로 하여 큰 축복의 약속과 함께 당신의 율법을 주셨다. 그러나 백성들은 구세주의 도움 없이는 결코 죄를 이길 수 없으며,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는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에 대하여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출 24:7)라고 선뜻 응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의 결심과 힘으로 거룩한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축복의 언약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과 자세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시내산의 장엄한 위엄 속에서 율법이 선포되는 것을 목격하였고 그 앞에서 두려워 떨었다. 그러나 그 후, 불과 몇 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그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리고 금으로 만든 우상에게 절하는 죄를 범하였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깨어졌고,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제서야 비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으며, 양을 잡아 죽이는 제사에서 예표된 구세주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들은 믿음과 사랑으로 자신들을 죄의 속박과 권세에서 구원해줄 구세주를 바라보아야만 하였다. 그들은 옛 언약의 진정한 의미를 올바로 이해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볼 때, 그들이 계속해서 언약의 조건을 이행하는 일에 실패하였던 사실을 보게 된다.

새 언약을 “더 좋은 약속” 이라고 부르는 이유

옛 언약의 요구 사항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라” 였다.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레위기 18:5. 그러나 새 언약은 “더 좋은 약속” 위에 세워졌는데, 그것은 죄의 용서와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상태로 변화시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고 마음에 기록하여...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그 죄를 다시는 기억치 아니하리라.” 예레미야 31:33~34.

새 언약 하에서는 두개의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이 성령에 의해서 마음의 판에 기록된다. “더 좋은 약속”인 새 언약 하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의로움을 세우려고 하는 대신에, 그리스도의 의를 마음에 받아들이게 되며, 그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속하게 되고, 성령으로 새로워진 마음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게 된다.

사도 바울은 새 언약하에서의 신앙과 율법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 믿음으로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3:31.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율법을 철저하게 순종하는 충성의 삶을 살므로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굳게 세우는 모본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육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영의 음성을 들으면서 사는 진실된 그리스도인만이 율법을 지킬 수 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3~4.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8:8~9.

변치 않는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

하나님의 구속 사업은 각기 다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서 각기 다르게 표현되었을지는 모르지만, 그 목적과 의미는 항상 동일하다. 에덴 동산에서 최초에 주신 언약의 목적과 의미는 모든 시대를 거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의 제사제도의 희생양으로써 표상되었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신 구세주이셨다. 시내산의 장엄함 속에서 율법을 공포하실 때 그곳에 계셨던 분이 유대의 조그만 산에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제시한 사랑의 대원칙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 6:4.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레위기 19:18. 구약시대과 신약시대를 통하여 일관성 있게 말씀하셨고, 일관성 있게 언약하셨던 분은 동일한 분이시다. 율법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요구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야고보서 1:17).

경험으로 이해하는 새 언약의 의미


우리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가 사람의 마음의 태도에 달려 있는 것이지 그 조건이나 내용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앞에 실린 기사들을 통하여서 잘 배웠다.

다시 말하자면,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례와 계명들을 지키고 순종하면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들로 삼으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약속이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세우신 것인데, 이스라엘은 그 언약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 언약을 자기의 생애에서 이루는 자들이 영적 이스라엘이 되는 것인데, 사도 바울은 그들을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 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음을 받은 자 뿐이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갈 6:14-16).

여기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점은 참으로 거듭난 자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개심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심령이 준비되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굴복할 수도 없”고,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로마서 8:7,4).

사람이 거듭날 때의 마음은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며, 동시에 하나님의 율법과도 일치되게 된다. 이 놀라운 변화가 죄인에게 생기면,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죄악에서 거룩함으로, 범죄와 반역에서 순종과 충성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이다.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새로운 동기와 새로운 취미와 새로운 성향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개심은 그 사람에게 악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유전적이거나 습관적인 성향들을 변화시키켜 주는 것이다. 옛 본성과 옛 기질들과 죄의 습관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물려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정한 개심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깊이 감동할 때에만 생길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의 마음을 뜨겁게 녹일 때에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서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질 때에(로마서 5:5)계명을 지킬래야 지킬 수 없이 타락하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며 순종하기를 즐기는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재창조의 신비인 것이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경험이다. 이러한 마음의 변화의 경험을 가지게 될 때에 우리는 드디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며 살기를 즐거워 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마음과 동기가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새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이러한 새 언약의 시대에 살고 있더라도 마음의 거듭남이 없으면, 우리는 여전히 옛 언약의 입장에서 사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힘으로 하나님을 순종하며 살아가려고 애쓰며, 계명을 지킴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려고 노력하는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필자가 국민학교 5학년때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하루는 동네 골목 친구들과 제일 즐겨하던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대나무를 쪼개어 칼을 만들고 손잡이를 종이로 그럴싸하게 만들어 달았으며 나무를 휘어서 활들을 만들었다. 모래들을 퍼와서 성을 높다랗게 쌓고는 돌들을 주워 모아다가는 총알들과 대포알들로 사용하였다. 우리들은 돌격 소리와 함께 일제히 성에서 뛰어나가 칼 싸움도 하고, 달려오는 적군들을 향하여 활들을 쏘아대었다. 그리고는 돌들을 서로 던져대면서 총알과 대포알이 날라가는 양 신나 하였다. 워낙 정신없이 전쟁놀이를 하다 보면 서로 다치기가 일쑤였기 때문에 부모님들이 전쟁놀이는 위험하니 제발 하지 말라는 당부가 매일 일과들 중 하나이었다. 필자의 부모님도 예외없이 전쟁놀이에는 참가하지 말라는 부탁의 말씀을 여러번 하신 터였다. 특히 나의 어머님은 돌던지는 전쟁놀이일랑은 다시는 하지 말라고 엄히 당부한바 있었던 터였다. 그러나 동네 친구들이 신나게 딩굴면서 뛰어다니며 함성을 지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더군다나 부모님 말씀이 무서워서 뒤로 빼는 친구들은 비겁하고 나약한 배신자로 취급당하기 때문에 그 유혹이란 여간 견디기가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 날도 여전히 어머님으로부터 전쟁놀이는 하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듣고 나서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터였다. 그러나 학교에서 돌아와 동네에서 신나게 뛰어 다니며 전쟁놀이를 하고 있는 친구들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던 나는 또 다시 약해져서 그만 그들 무리속에 휩싸여 버리고 말았다. 너무나 재미가 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우리 진지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한 적군을 향하여 차돌로된 총알을 멋지게 던져 대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내가 던진 돌이 그만 길을 지나가던 행상 아주머니의 이마를 정통으로 때린 것이었다. 소리를 지르며 땅에 주저 앉는 여인의 이마에서는 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갑자기 온 세상이 조용해 진것 같았다. 아이들의 들뜬 소리들은 간데 없어지고 공포와 걱정의 분위기가 갑자기 우리의 마음들을 휘 감았다. 모든 즐거움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죄의 댓가를 한눈에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몇초 동안 얼마나 후회를 하였는지 모른다. 나는 넘어져 있는 아주머니를 향하여 “아주머니 미안해요! 아주머니 죄송해요!”라는 말을 여러번 뇌까리면서 엉겹결에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너무 겁이 났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랐다. 나는 무조건 뛰었다. 뛰어가 숨는다는 곳이 우리집 앞 마당에 있는 작은 나무들 뒤로 달려가 몸을 숨기었다. 어린 내가 가 봐야 어디로 가겠는가!

한참이나 숨어 있으려니까, 갑자기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어머님이 급하게 나가서 문을 여시는 모습이 나뭇잎들 사이로 보였다. 대문 밖에는 동네 친구들로 둘러 싸인 다친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그 친구들이 나의 어머니에게 내가 그렇게 했다고 열심히 고자질들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어머님은 약품들을 꺼내와 일단 치료를 하고 나서 그 여인을 데리고 병원으로 가셨다. 나는 나무 뒤에 그냥 숨어있었다. 아버지 한테 혼이 날 생각을 하니 한숨만 나왔다. 얼마가 지난 후에 어머님이 돌아오셨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였지만, 그 아주머니는 나 때문에 이마를 다섯 바늘이나 꿰메어야만 하였으며, 어머니는 그 분에게 돈도 얼마 주어서 보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머님은 병원에서 돌아오신 다음에 전혀 나를 찾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태연하게 일들을 하시면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집안을 치우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그때 나는 더욱 더 불안하게 되었다.

얼마인가 시간이 지난 다음에 해가 서산에 뉘엿 뉘엿 지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내가 숨어 있는 작은 나무들 쪽으로 다가 오시더니 이렇게 조용히 말씀하시는 것이 었다. “병국아! 이제 그만 나와서 저녁 먹자!” 어머님은 지금까지 내가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다 알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무안하고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그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어머니를 따라서 방으로 들어간 나는 다시 한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상위에 가득 차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럴 수가 있을까! 이렇게 못된 망나니 아들을 때려 주어도 시원치 않을 텐데, 이렇게 진수 성찬을 차려놓으시다니!

조금 후에 초인종이 울리더니 아버님이 회사에서 돌아오셨다. 나는 속으로 “이제는 죽었구나”라고 생각하였다. 방으로 들어오시면서 물으셨다. “오늘 별일 없었소?”라는 아버님의 질문에 대해서, 어머님은 “예, 별일 없었어요!” 라고 대답하셨다. 그런 후, 부모님과 여동생들과 나는 저녁식사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나는 목이 메어서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복바쳐서 치밀어 올라오는 듯한 것이 있었다. 나는 숫가락과 젓가락을 내려놓고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훌쩍거리는 나를 바라보는 아버님이 그 연유를 물으셨다. 아무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운 것은 얼마 후에 아버지 한테 맞을 매가 무서워서 운 것도 아니었다. 창피하여서 운 것도 아니었다. 내가 운 것은 나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사랑으로 감싸안으신 어머니의 큰 은혜에 감동되어 운 것이었다.

그 순간 이후부터 전쟁놀이를 하고 싶은 욕망이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이기기 어렵던 유혹이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려서는 않된다는 생각만이 내 가슴을 채워왔다. 어머니의 용서와 사랑은 나의 마음 속에 응어리져 있던 전쟁놀이에 대한 욕망을 눈 녹듯이 녹여 버렸다. 그 이후로는 나는 더 이상 한번도 전쟁 놀이에 참가해 본 적이 없다. 어머니의 사랑이 내 마음과 생각 속에 “다시는 전쟁 놀이를 하지 말아라!” 라는 당신의 율법을 기록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는 그렇게도 지킬 수 없었던 그 법이 이제는 순종하기에 아주 쉽게 되어 버렸다. 어머님의 말씀을 기꺼이 순종하기를 원하는 소원이 유혹과 시험이 주는 매력을 압도했던 것이다. 순종할래야 할 수도 없었고 순종하고 싶지도 않았었던 그 율법의 요구사항을 드디어 이루게 된 것이다. 전쟁놀이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명령을 과거에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명령을 지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에 감동한 이후에 완전히 상황은 달라져 버렸다.

바로 이러한 것을 새 언약의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로 하여금 히브리 10:16에 기록된 새 언약의 의미를 이해하게 도와 준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은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 보면서, 거기서 나의 구원을 위하여서 어떤 사랑과 희생이 이루어졌는지를 이해하게 될 때에 우리는 드디어 새 언약 관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드디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당신의 율법을 기록하실 수 있게 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의 요구대로 순종하는 생애를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심판이 두려워서도 아니고 하늘에 들어가고 싶어서만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되어 다시는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새 마음을 받았으므로 순종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구세주에 대한 완전한 사랑의 불길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독소들을 제거하여 믿는 자들의 뜻과 동기를 순결하고 고상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여러분은 새 언약관계에 들어와 있는가? 십자가로 나아가자! 거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다. 새 언약의 관계를 통해서 죄를 이기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왕국에 있게 될 것이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

돈에 매매되지 않는 사람

마음속이 진실하고 정직한 영을 간직한 사람

죄를 죄라고 부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나침반의 바늘이 남과 불을 정확히 가리키듯이
양심이 그 의무에 충실한 사람

비록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진리를 위해서 굳게 서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이 고대하는 사람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서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