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대에게 핍박이 없는 이유

From the Mount of Blessing 에서 발췌

성경이 말하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는 진리는 과거 로마 시대나 중세기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인가? 아니면,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되는 진리의 말씀인가?

요즈음 생애의 빛으로 날라온 편지들 중 어떤 것들에는 그리스도인의 고뇌와 갈등이 담겨져 있다. 편지를 보낸 분들의 외로움과 고민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겪게 되는 고통의 일면을 나타내고 있다. 오늘날에도 진리와 성경이 말하는 원칙대로 살고자 애쓰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가정과 사회, 그리고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까지도 핍박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애 전체를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에 바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진리와 오류, 그리고 의와 불의 사이에서 생기는 투쟁을 이해해야만 한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두 무리가 존재한다. 한무리는 진리와 원칙에 정직하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기 때문에 갈등과 외로움 속에서 고민하는 소수의 진짜 그리스도인들이고, 다른 한무리는 하나님의 진리와 그분의 뜻에 대해서 무관심하기 때문에 다수가 흘러가는 방향대로 아무런 생각없이 따라가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원칙과 진리에 굳게 서고, 세속과 타협하지 않는 진짜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까다롭고 사랑과 관용이 부족하다고 조롱한다. 여러분은 진리대로 살고자 하는 경건함 때문에 핍박을 받고 있는가? 아니면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조롱하고 있는가? 이 글은 외로움과 갈등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진짜 그리스도인들에게 드리는 위로의 편지이다. -생애의 빛 편집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태복음 5:10.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영광과 부를 얻고, 시련과 고통이 없는 안락한 생애를 갖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는 대신에, 세상이 그들을 알지 못하므로 극기와 굴욕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잃어버린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땅에 오신 예수께서는 사단이 지배하는 세력과 부딪히게 되었다. 그분의 언행이 자비와 사랑과 동정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너무나 다른 그분의 모습은 사단에게 지배당한 사람들로 하여금 분노와 미움을 품게 만들었다. 그분께서 가르치신 교훈과 진리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의 요구와 상충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격렬한 반대와 적의를 폭발시켰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도 예수께서 당하셨던 동일한 대접을 받게 된다. 의와 죄, 사랑과 증오, 진리와 거짓 사이에는 억제할 수 없는 갈등과 투쟁이 존재한다.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참 사랑과 경건함과 거룩한 속성이 나타난다면, 사단의 군대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격렬하게 미워하고 증오할 것이다. 사단은 깊은 잠에 취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의 진리와 그분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진짜 그리스도인들과 싸우기 위해서 최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러므로 박해와 치욕과 비난과 조롱이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핍박의 성격은 시대에 따라서 변하지만, 그 원칙과 그 아래에 깔려 있는 정신은 역사를 통하여 지금까지 동일하다. 역사를 통해서 볼 때,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무리들은 이방인들이나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이었으며, 가족과 친구들이었고, 심지어는 같은 교회에 다니는 형제자매들이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려고 애쓸 때, 우리는 정사와 권세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사단도 그의 부하들을 가지고 있다. 하늘의 법칙에 순종하는 거룩한 생애를 이 땅에서 살고자 하는 참 그리스도인마다, 보이지 않는 악의 세력에 의해서 조종당하고 있는 악의 대리자들과 부딪히게 될 것이다. 핍박과 무시와 조롱은 슬픔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시련을 면제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지 않으셨다. 만일 그대가 예수님을 위하여 시뻘겋게 단 풀무 속을 지나가는 시험을 받는다면, 그분께서는 과거에 바벨론의 풀무불 속에서 진실한 다니엘의 세친구와 함께 서계셨던 것처럼, 지금도 그대곁에 서계실 것이다. 구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그분과 함께 굴욕과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기뻐해야 한다. 각 시대를 통하여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해 왔다. 그는 그들을 고문하여 죽였지만, 그들은 죽음으로써 승리자가 되었다. 그들의 확고부동한 믿음은 사단보다 더 강하신 그리스도를 붙잡았다. 사단은 그들을 감옥 속에 가두어 놓았지만, 그들의 정신을 속박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믿음으로 어둠 저편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면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였다(롬 8:1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당하는 자들이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신께서 택하신 자들이 받는 핍박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좁은 길을 걸어 가는 동안에 고난의 도가니에서 정결하고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는데, 세상은 이러한 모습을 경이롭게 볼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정하신 진리의 길을 걸으면서 쓰라린 투쟁을 경험하고, 모욕과 냉대를 감내하면서 처절한 실망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그들은 죄로 인한 비애와 슬픔을 더욱더 깊이 이해하게 되기 때문에, 죄를 더욱더 가증하게 여기게 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만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할 수 있다는 진리를 잊지 말라.

“너희를 거스려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태복음 5:11.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사단은 매우 기만적인 방법을 통해서 역사해왔다. 그는 하나님을 매우 무섭고 두려운 존재로 사람들에게 곡해시켰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의 진정한 의도와 동기도 왜곡시켜서 사람들에게 나타낸다. 그리하여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라고 시편기자는 말했던 것이다(시편 69:6).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도 그와 같은 비난과 오해를 받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사람들은 아무런 이유없이 그분을 미워하였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진리를 말해주고, 자비를 베푸셨으며, 병자를 치료하는 동정을 나누셨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람들의 미움과 증오는 커져만 갔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비난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받게 될 유업 가운데 하나라고 말씀하시면, 분명한 까닭없이 받게 되는 악의와 미움에 대해서 대항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으며, 결코 실망하지 말도록 격려하셨다. 비난과 비방이 명예를 손상시킬 수는 있지만, 자신의 품성을 더럽힐 수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우리가 우리를 비난하고 모략하는 자에 대해서 반격을 가하겠다는 결심을 하지 않는한, 어느 누구도 우리의 심령을 더럽힐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격렬한 시련과 절망적인 환경에 처하였을 때에도, 평화롭고 순조로운 때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평화를 지키셨는데, 우리도 그와 같은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 있다. 우리의 말과 동기와 행동이 잘못 전해지고 오해될 수 있지만,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고 평화를 빼앗아 가서는 안된다. 오해와 비방과 모략보다 훨씬 종요하고 고상한 것에 관심과 목적을 둔 그리스도인마다 사단이 쏜 화살을 피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히 11:27)참으며,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고후 4:18)을 바라보면서 인내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이 누구에게 그리고 무엇때문에 오해를 받고 누명을 쓰고 있는지 정확히 아신다. 그러므로 그분의 자녀들은 아무리 심한 모욕과 경멸을 당할지라도 인내와 신뢰를 보이면서 조용히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비밀이 없으며, 결국에는 정직하게 진리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았던 자들이 사람들과 천사들과 하나님 앞에서 높임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할 때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담의 자손 중 최초의 그리스도인이었던 아벨은 순교자가 되었다. 에녹은 하나님과 삼백년 간이나 동행하였지만,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노아는 광신자요 민심을 소란케하는 자라는 조소를 받았다. 모세는 왕의 자리를 박차고 백성들의 고난과 함께 하였지만, 그들의 불평과 불만을 들으면서 사막에서 죽었다. 바울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다 라고 간증하였다(히 11:35).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시련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진리를 전파하실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당하는 까닭없는 고난과 시련을 보면서, 그리고 그러한 고통 속에서 묵묵히 겸손과 인내를 나타내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주변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과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쁨으로 고난과 시련을 감수해야 되지 않겠는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립보서 4:4

어머니들에게 보내는 글

Home & Health 에서 발췌

영원한 결과를 가져오는 어머니의 감화

어머니의 감화를 통하여 자녀들의 영혼은 지상으로부터 하늘로 연결된다. 어머니의 희생적인 열심과 고결한 품성은 자녀들의 성품 형성에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 어머니의 미소와 격려는 성장해 가는 자녀들에게 용기를 주고, 안정감을 주는 보이지 않는 능력이다. 어머니가 하는 사랑스런 말과 자녀들을 신뢰하는 눈은 그들의 마음에 햇빛을 비치게 만들고 어둠을 쫓아낸다.

만일 어머니의 감화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올바르게 자녀들에게 전달되고,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이 하늘의 지혜로 인도함을 받는다면, 어머니의 생애는 자녀들의 성품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능력이 될 것이다!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미치는 감화의 결과는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한 시간에 걸쳐서 지속될 것이다. 어머니의 표정과 말과 행동과 선택의 결과로 인하여, 자녀들의 구원이 영원토록 결정지워진다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어머니들이 자녀들을 어떻게 훈련시키고, 감화를 끼치는가에 따라서 그 결과가 영원토록 남게 된다는 사실을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다. 자녀들을 하늘의 원칙에 따라서 교육시키는 일에는 끊임없는 열심과 신실한 노력과 지칠줄 모르는 인내가 요구된다. 그러나 어머니의 이러한 노고는 반드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그늘에서 가정의 행복과 자녀들의 성품 형성을 위해서 희생과 노고를 아끼지 않는 어머니들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

어머니를 닮는 자녀들

세상에서 가장 친근한 유대 관계는 어머니와 자녀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과 정이다. 어린아이들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생활과 모본을 통해서 쉽게 영향을 받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보다 더 튼튼하고 친근한 연합의 끈이 어머니와 자녀를 결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생각과 감정은 자녀들에게 그대로 계승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만일 어머니가 자신의 기분과 감정을 아무런 절제없이 있는 그대로 나타내고, 이기적이며, 화를 잘 내고, 가혹한 성향을 나타낸다면, 그 자녀의 성격 또한 그러한 경향을 나타내게 된다. 이러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나고 성장한 아이들은 장차 거의 극복하기 어려운 악한 성품을 소유하게 된다. 사단은 부모와 자녀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문제들을 매우 잘 알고 있다. 어머니가 자녀들을 하나님의 진리대로 잘 교육시키지 않고, 아름다운 감화력을 행사하지 않을 경우, 사단은 우리의 자녀들을 자신의 소유로 쉽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시험과 유혹을 통하여 어머니들을 압박한다.

그러므로 어머니들은 시험이 왔을 때에 그리스도의 품으로 피하는 방법을 알아야만 한다. 믿음을 통하여 그분의 손을 붙잡음으로써, 시험에서 건짐받을 수 있는 비결을 개인적으로 배워야 한다. 시험의 순간에 양심 속에서 들려오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따르기로 선택하는 믿음을 배워야 하며, 자녀교육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해야만 한다. 사단은 가정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가져오거나, 짜증과 분노를 폭발시키기 쉬운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자녀들에 대한 어머니의 관심과 주의를 분산시키거나 잃어버리게 만든다. 어머니는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자녀들의 손을 꼭 잡고 사랑과 인내로 가정을 행복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자녀들은 어머니로부터 펴져 나오는 사랑스럽고 행복한 분위기를 통해서 사랑스럽고 행복한 청년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고 거룩한 분위기 속에 간직해야 하며, 자신의 모난 성미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단속함으로써, 가정과 자녀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신실하게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어머니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라고 명하지 않은 일을 하기 위해서, 어린 자녀들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고 집밖으로 나가고 있다. 그 결과, 수많은 아이들이 가정 안에서 어머니의 사랑과 인내를 볼 수 없으며, 어머니가 던져주는 사랑스런 미소와,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칭찬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다. 사단은 거의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진 많은 어린아이들을 보면서 미소짓고 있다.

인내해야 하는 어머니

하루에도 여러번씩 아이들은 어머니를 불러댄다. 작은 아이는 울음섞인 소리로 어머니를 부르고, 큰 아이는 어머니의 시선을 자기에게 이끌기 위해서 더욱 큰 소리로 어머니를 불러댄다. 어머니는 그러한 자녀들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서 집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지 않으면 안된다. 어떤 아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서 헤어나오기 위해서 어머니를 찾고, 어떤 아이는 자기가 만든 것이 스스로 흐믓해서 어머니의 칭찬과 격려를 듣기 위해서 어머니를 찾는다. 어머니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그들을 인정해 주는 말을 해주면, 아이들은 오랫동안 명랑하고 즐거운 마음을 갖게 된다. 어머니는 자신의 귀한 어린 것들 사이를 누비면서 그들의 성격과 마음에 즐거움과 빛줄기를 던져줄 수 있다. 그리하여 자녀들의 마음 속에는 어머니가 있는 곳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한 곳이라는 생각이 깊게 자리잡게 된다. 바로 이러한 생각들이 자녀들의 마음 속에 쌓여 가면서 성장할 때, 자녀들은 성장한 후에도 어머니를 사랑하고 그 말에 순종하는 청년들이 되는 것이다.

어머니는 거의 가치없어 보이는 숱한 자잘한 시험들을 참고 인내해야 한다. 장난꾸러기의 손들과 침착하지 못하는 발들은 어머니에게 많은 일거리와 어려움을 가져다 준다. 어머니는 자제의 고삐를 단단히 붙잡지 아니하면, 성급하거나 거친 말이 그의 혀에서 새어나오게 된다. 어머니는 자신의 짜증스런 감정을 폭발시킬 수 있는 경우가 하루에도 여러번 생길 수 있으므로, 그때마다 구세주께 기도함으로써 흥분되려고 하는 신경을 안정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자녀들에 대한 어머니의 조용한 위엄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침착한 음성으로 교훈을 주기 위해서는, 가혹한 말을 억제하고 성난 감정을 억누르는 노력이 필요되는데, 만일 어머니의 입에서 화난 음성과 분노의 감정이 그대로 아이들에게 표현되면, 어머니의 감화는 힘을 잃어버리게 되며, 다시 그것을 회복하는데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요구된다.

아이들의 감각은 민감하기 때문에, 그들은 인내와 사랑스러운 음성, 그리고 조급하고 성난 명령을 예민하게 식별한다. 어머니의 잘못된 감정 표현은 아이들의 마음 속에 있는 사랑과 애정의 수분을 말라버리게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소유한 어머니라면, 신경질과 동정적인 사랑의 결핍 때문에 자녀들이 어머니에게서 떠나가도록 만들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의 의무에 대한 오해

어떤 어머니들은 자신이 가정에서 하는 일을 매우 하찮고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상, 어머니의 의무는 사소한 의무들의 순환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참을성 있는 인내와 노력과 자제와 재치와 지혜와 희생적인 사랑이 없으면 그 의무를 수행하기란 불가능하다. 어머니는 눈물겨운 희생적인 봉사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가 가정에서 성취하는 일보다 훨씬 못한 것을 가지고 위대하다는 평가와 존경을 받고 있다. 어머니의 사랑의 봉사를 통하여 한 가정은 하늘을 향하여 나아가게 된다.

온 몸과 마음이 피곤에 지쳐 있을지라도,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어야 하고, 그들이 게으름에 빠지지 않도록 적당한 일거리를 주어서 바쁘게 말들어야 하며, 사랑과 교훈을 통하여 그들의 발걸음을 하늘로 향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비록 그러한 노력과 희생이 아무런 주목과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늘의 천사들은 고생으로 여윈 어머니를 동정하고 있으며, 날마다 지는 무거운 짐들을 주목하고 있다. 비록 신실한 어머니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늘에 있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는 기록된다.

가장 위대한 선교사

어머니들이 가정 안에서 수행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거룩한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부족한 수많은 어머니들이 가정 밖에서의 선교사업을 동경하고 있다. 어린 자녀들을 가진 어머니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잘못된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다. “만일 내가 저 먼 외국에 가서 가치있는 하나님의 사업을 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가치있는 사업을 할 수 있을 텐데. 내가 가정 안에서 이토록 사소한 일들에 얽매어서 세월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시간의 낭비인가?”

먼 이국 땅에서의 선교사업을 그리워하는 어머니들은 대개 가정 안, 즉 가장 가까운 주변에 가장 중요한 선교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자신의 자녀들의 영혼들이 먼 이국땅에 있는 영혼들보다 가치가 없다는 말인가? 만일 어머니들이 나날이 성장해 가는 자녀들의 사상과 생각을 하나님께 연결하는 일의 중요성을 인식한다면, 그들은 지금보다 더욱 열렬한 정신자세로 자녀들을 위해서 일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참된 겸손을 가지고 있는 어머니만이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분별하게 될 것이다.

적극적인 종교활동에 참여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각 사람은 자신의 입지와 처지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행해야 할 사업을 가지고 있다. 가정을 명랑하게 하는 것은 중요한 하나님의 사업이며, 또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사업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무너져가고 있는 가정에 대한 책임을 어머니들에게 묻고 계시며, 동시에 그 무너진 가정이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가능성과 기대를 어머니들에게서 보고 계신다. 자신에 대해서 아무리 부족함을 느끼는 어머니일지라도, 그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기만 한다면, 가정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장소가 될 것이다. 어머니의 온 마음이 가정을 위해서 바쳐질 때, 가정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자녀들은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의 손길과 말과 표정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라는 진리를 보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고, 죄짓기를 두려워 하는 아이들로 성장하게 되어서, 목사가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 이상의 하나님의 사업을 가정 안에서 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의무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행하고, 남편에게 기쁨과 유쾌한 정신을 나누어 줌으로써 남편으로 하여금 자신의 책임을 잘 감당하도록 도와주며, 하나님과 그분의 사업을 위하여 자녀들을 준비시키는 어머니야말로 가장 고상하고 위대한 선교사이다.

그리스도인 어머니들에게 보내는 호소

만일 그대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무시한채, 주님께 다른 종류의 사업을 달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모든 어머니들에게 가정에서 해야할 의무를 지적하고 계신다. 만일 그대가 이것보다 더 크고 거룩한 사업이 자신에게 맡겨졌다는 생각에 빠져 있다면, 그대는 심각한 기만 가운데 빠져 있는 것이다. 그대가 그대의 가정에서 신실하게 일할 때에 그대는 보다 넓은 분야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정에서 자신의 의무를 등한히 하는 사람은 다른 영혼들을 위하여 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그대가 그대의 가정과 자녀들과 남편을 소홀히 여기면서까지 하나님의 사업을 하도록 요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러한 방식으로 그대를 인도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와 어린 자녀들을 분리시키는 방법으로 당신의 사업을 전진시키지 않으신다. 어머니가 가장 밖에 있는 일에 몰두하게 될 때, 어린 자녀들이 타락한 친구들과 사귀고, 반항적인 기질이 마음에서 자라나게 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어머니를 가정 밖으로 이끌어 내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특별히 어린아이들을 가진 어머니는 잠시라도 자녀들을 떠나서 어떤 가치있는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야 겠다는 망상을 버려야 한다.

오늘날, 수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있다. 부모는 하나님의 사업에 일생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자녀들은 세상에 있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말과 행동과 사상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하나님께서는 어머니가 가정에서 마땅히 해야할 의무를 대신해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오늘날 가정을 가진 여인들이 자신의 의무를 등진채 하나님의 일을 한 결과, 많은 영혼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고 있지만, 반면에 그 자신의 자녀들은 세상으로 나가고 있는 모습이 우리의 눈으로 보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그리스도인 어머니가 자신의 의무에 대해서 혼돈할 때, 세상은 그리스도인 가정과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비웃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머니들에게 자신의 의무를 등한히 여기도록 만들 수 있는 일을 요구해서는 안된다. 어머니가 자녀들을 위하여 자신의 시간을 바치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어머니가 가정을 비울 때, 자녀들의 마음은 세상으로 향하게 되며, 가정은 행복한 어머니의 미소를 잃어버린 어두운 곳이 되고 만다. 어머니들이시여, 가정 밖에서 그대들의 일을 찾지 말라. 그대들이 떠맡아야만 할 가장 위대하고 거룩한 선교사업이 가정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췌장암 치료법


췌장암은 소화기 계통의 암중에서 위장암, 직장암, 담낭암 다음으로 한인들에게 많이 발생하는 암이다. 조기 진단이 어려울 뿐 아니라, 심할 경우, 5년 이상 생존하는 사람들이 통계적으로 약 2%에 불과할 정도로 치명적인 질병이다.

미국에서는 매년 2만 1천명 가량이 췌장암에 걸리고 있다.

췌장은 위장의 뒤쪽에 자리잡고 있는 기관으로써,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을 분해하는 소화효소와 인슐린을 생산하기 때문에 췌장에 문제가 생기면, 소화와 혈당의 조절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흔히 만성 췌장염 환자들에게 췌장암의 발병률이 가장 높기 때문에, 췌장염의 치료와 예방이야말로 췌장암을 막는 최선의 방비라고 할 수 있다.

췌장염은 췌장에 생긴 염증인데, 췌장의 정상세포들이 상처난 조직과 칼슘 축적물로 대치되게 된다. 종종 가벼운 당뇨병을 동반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췌장염은 담낭이나 담관에 생기는 질병으로서 음주로 인하여 발병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외에도 내장을 수술하는 과정이나 검진하는 과정에서 입을 수 있는 상처, 전기 충격, 의약품의 잘못된 복용 등을 통해서 췌장에 염증이 발병될 수도 있는데, 특히 다음과 같은 의약품들은 췌장염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스테로이드, 에스트로젠, 입으로 먹는 피임약, thiazides, azathioprine, L-asparaginase, furosemide, ethacrynic acid, phenformin, chlorothiazide, sulfonamides, 등등. 간염이나 유행성이하선염과 같은 전염성 질병에 의해서 생길 수도 있다. 이러한 것들 외에도 많은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췌장염을 일으키는 모든 인자들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좀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최근에는 신경성 식욕불량과 췌장염 사이에도 어떤 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연구 발표가 있었다.

췌장염의 증세로는 복부의 윗부분에 약하거나 심한 통증을 느낀다. 통증이 등이나 하복부로 퍼져서 일정하게 유지되는 경우도 있다. 메시껍거나 토할 수 있으며, 복부가 민감한 느낌을 갖게 된다. 통증의 완화를 위해서, 다리를 가슴으로 끌어당긴 다음에, 옆으로 누우면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토할 경우에는 통증이 심해지며, 미열을 동반할 수 있다.

천연 치료법

1 모든 종류의 술을 금지하라. 모든 종류의 술은 췌장에 해롭다.
2 췌장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환자는 증세가 가라앉을 때까지 물만 마시면서 금식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음식물이 위장에 들어가면 췌장이 자극을 받거나 소화 효소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무리하게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3 설탕의 섭취를 삼가해야 한다. 정제된 탄수화물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식생활을 함으로써 트라이글리세리드의 숫치가 높아질 경우, 췌장염이 발병될 수 있다.
4 췌장의 회복을 위해서는 칼로리와 지방의 양을 최저로 낮춘 식사를 해야만 한다. 때때로 혈중 지방치가 높을 경우에 췌장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만성적인 췌장염일 경우, 췌장에서 분비되는 리파아제가 결핍되어서, 지방의 흡수율이 심하게 저하되기 때문에, 반드시 저지방식을 해야만 한다.
5 수분의 섭취량을 잘 조절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많은 양의 수분이 복부 내에서 습수되어 사라지는데, 수분이 몸밖으로 즉시 배출되지 않기 때문에 복부에서 사라지는 물의 양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6 과식을 삼가하라. 과식은 췌장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과로하게 만든다.
7 의약품을 복용하는 것은 별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종종 상태를 악화시킨다.
8 카페인, 지방, 그리고 술은 위산이 분비되도록 자극하기 때문에 반드시 삼가해야 한다.
9 만성이 되어서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서, 환자는 심한 통증, 메시꺼움, 구토와 같은 증세들을 경감시키기 위해서 진통제를 습관적으로 먹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에 상태는 더욱 악화될 수 있다. 췌장의 절제 수술을 고려하고 있던 심각한 환자가 있었는데, 천연치료로 회복된 경우가 있다. 뜨거운 물로 복부를 자주 찜질해 주었으며, 숯가루를 복용하면서 동시에 숯가루 폴티스를 만들어서 찜질 해주었고, 입으로 들어가는 수분의 양을 조심스럽게 조절하면서 천연 식이요법을 실시한 결과, 괄목할만한 차도를 보였다.
10 도움을 줄 수 있는 약초들 : 에키네시아, 골든씰, 민들레 뿌리. 골든씰은 임산부에게는 사용하지 않아야 하며, 장기간의 복용은 피하는 것이 좋다.

췌장을 회복시는 식이요법

A 흰설탕, 흑설탕, 가공하지 않은 설탕, 과당, 벌꿀, 당밀, 잼, 젤리, 젤로 등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당분을 피하라.
B 파이, 과자, 케익, 당분이 들어간 후식을 섭취하지 말 것.
C 치즈, 유유, 그리고 우유가 함유되어 있는 유제품을 섭취하지 않는 것이 좋다. 우유에는 저혈당증을 야기시킬 수 있는 로이신이 함유되어 있다.
D 흰빵, 크래커, 흰 마카로니, 백미, 스파게티를 비롯한 정제된 곡물(표면이 도정된 곡물로 만든 식품을 삼가하고, 현미나 통밀과 같은 정제되지 않은 곡물을 섭취할 것.
E 건포도, 대추, 무화과 등과 같은 매우 단 과일과 같이 농축된 음식은 적어도 1년 동안 삼가하는 것이 좋다. 1년 후, 실험적으로 소량을 섭취하면서 증세의 재발 여부를 확인해 가면서 사용하는 것이 좋다. 바나나, 수박, 망고, 고구마도 모두 이러한 부류에 속하므로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져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포도에 증세를 나타내기도 한다.
F 카페인, 니코틴, 술은 신체의 혈당을 조절하는 일에 해를 주므로 철저하게 금해야 한다. 커피, 차, 콜라, 쵸코렛에는 카페인이 함유되어 있으며, 각종 의약품에도 카페인이 함유되어 있다.
G 모든 종류의 소다수(인공 음료수)에는 다량의 설탕이나 감미제가 들어 있다. 과일 쥬스는 농축된 식품이므로 필요한 경우에는 그 양을 소량으로 제한해야 한다. 과일 쥬스를 마시는 것보다는 신선한 과일을 먹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 무슨 종류이던지 농축된 식품은 연약해진 췌장에 부담을 주므로 삼가하는 것이 좋다.
H 각종 양념은 신경계통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며, 증세를 악화시킬 수도 있다. 식초와 식초가 함유된 식품 대신에 레몬 쥬스나 소금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I 과일과 채소는 가능하면 조리를 하지 않은 신선한 상태로 섭취하는 것이 좋다.
J 지방과 칼로리를 최저로 낮추고, 모든 종류의 동물성 지방의 섭취를 금한다.



 

비듬을 해결해 드립니다!


1. 샴푸에는 일반적으로 비누 성분이 함유되어 있는데, 이것은 오히려 민감한 피부를 가진 사람에게는 머리에 가려증을 일으키고, 비듬을 생성시킨다. 일반 샴푸보다는 100% 세제(detergent)를 사용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쉑클리나 엠웨이(Shacklee, Amway)에서 나오는 세제인 Basic H 또는 LOC는 상당한 효과가 있다. 단, 세제를 그대로 사용하지 말고, 1/20(물 한컵에 세제 한 숫가락 정도)로 희석시켜서 샴푸대신에 사용하라. 이러한 방법은 매우 효과적으로 비듬 문제를 해결해 준다. 씰레니움 설파이드가 함유되어 있는 샴푸는 머리카락을 손상시키며 빠지게 만들므로 그러한 종류의 샴푸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2. Listerine과 같은 구강청정제(mouth wash)를 솜에 적셔서 머리 피부와 머리카락에 발라주면 비듬을 억제하는 도움을 얻을 수 있다.

3. 사과 식초는 비듬 치료에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식포를 따뜻하게 데운 후에, 그것을 머리에 골고루 부운 다음, 타월로 잘 감싸서 약 1시간 동안 유지시킨 후에 샴푸로 머리를 감는다. 일주일에 두번씩 한달 동안 이 방법을 시도해 보라.

4. 샤워 후에 머리카락을 사과 식초로 골고루 적신 후에 자연 상태에서 잘 말린다. 머리카락이 마른 후에, 손으로 머리 피부에 피마자 기름을 세게 문지른다. 단 한번만의 시도로도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5. 알로에 쥬스나 젤을 샴푸대신에 사용하는 것도 꽤 효과적이다.

6. 비듬이 많은 사람은 설탕과 지방의 섭취량을 낮추어야 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LIfe Line

버클리 대학이 말하는 암의 원인과 예방책

암을 유발시키는 가장 큰 원인 두 가지

1. 담배 : 만일 모든 사람들이 흡연을 일시에 중단한다면, 암은 지금의 30% 이하로 감소될 것이며, 폐암은 매우 희박한 질병이 될 것이다.
2. 식생활 : 무엇을 먹느냐는 문제가 암 발생율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과일과 채소와 곡식만을 먹는 것이 지금까지 발표된 암 예방책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다. 채식이 암을 예방할 수 있다는 과학적 증거들이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에 이제는 이것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과일과 채소가 왜 암을 예방할 수 있는가?

과일과 채소에는 다량의 황산화제 그리고 폴라씬, 캐로테노이드, 섬유질과 같이 암을 예방하는데 중요한 물질들이 함유되어 있다. 특히, 베타 캐로틴과 같은 물질은 암과 대항하여 싸우는 중요한 물질이다. 식물에 존재하는 인돌, 썰포라페인, 플레이본과 같은 물질들도 암과 싸우는 일에 있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성분으로 주목받고 있다. 예를 들어서, 브로콜리나 브루셀 스프라웃에는 인돌이 많이 있는데, 암에 걸린 쥐에게 섭취시킨 결과, 암세포의 성장 속도가 저하되는 것을 발견되었다. 콩에 함유되어 있는 물질들도 암의 발병률을 낮추어 주는 것으로 밝혀졌다. 식물 속에 들어 있는 이러한 물질들은 암을 일으키는 독소들을 청소해 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아직도 미처 발견되지 못한 항암제들이 과일과 채소 속에서 인간들의 발견을 고대하며 기다리고 있다.ㅣ

바베큐와 암

음식을 요리하는 법이 암의 유발과 관련 있다. 고기의 기름이 공기 중에서 연소될 때에 어떤 복합 물질이 생기는데, 이것은 암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고기를 숯불에 태우는 바베큐 스타일의 음식을 주의하라.

질산염과 암

고기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질산염은 암을 유발시키는 물질이다. 질산염은 식품의 저장과 장기 보관을 위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중국, 일본, 한국과 가은 나라에서는 질산염에 의한 위암과 식도암의 발병률이 상당히 높다.

곰팡이와 암

오래된 식품에서 자라나는 곰팡이는 암을 유발시킨다. 특히, 피넛이나 옥수수에 형성되는 곰팡이인 아플레톡신은 간암을 일으키는 강력한 물질이다. 베이콘, 버섯, 땅콩에 생기는 곰팡이류는 암의 원인이 된다.

소금과 암

정기적으로 소금에 절인 식품을 섭취하는 것은 위암과 식도암의 위험률을 높인다.

술과 암

술은 간경화와 간암의 주요 원인이다. 흡연과 음주가 동시에 이루어질 때, 입과 목구멍과 식도 부위에 암이 유발되는 위험이 배가 된다.

운동 부족과 암

운동 부족은 유방암이나 전립선암과 관련이 있는데, 최근에 들어서는 운동 부족이 장암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광욕, 방사선 그리고 암

햇빛은 암세포의 성장을 억제해 주지만, 과다한 일광욕이 누적될 경우에는 오히려 피부암을 유발시킨다. 또한 방사선(X-레이)에 자주 노출되는 것도 암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라돈에 많이 노출되는 사람은 폐암의 위험이 증가된다.

직업과 암

석면, 벤진 그리고 방부제나 소독제로 사용되는 포름알데히드와 같은 화학 물질에 많이 노출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암에 대해서 좀 더 예민한 감시를 해야 한다. 하버드 대학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암환자 중의 5% 정도가 화학 물질에 의해서 발병되었다고 한다.

공기와 암

오존, 배기가스, 질소산화물 등에는 발암 물질이 포함되어 있는데, 공기의 오염은 암의 발병률을 높이는 인자로 주목받고 있다.

비만과 암

체중이 정상보다 초과될 경우, 심장마비나 뇌일혈에 대한 위험이 증가할 뿐만 아니라, 암의 발병률도 증가한다.

 

하나님의 치료제, 햇빛

Life Abundant 에서 발췌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창세기 1:14~16.

지구 창조의 네째날,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태양을 두심으로써 지구의 낮을 이루도록 하셨는데, 이것은 지구에 밝은 빛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생명체에 생명력과 에너지를 공급해 주고 있다. 태양은 지구보다 백삼십만배나 크다. 지구까지 도달되는 태양광선은 태양으로부터 분출되어 나오는 총 에너지의 극히 적은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지구의 1평방마일당 469만 마력의 에너지를 공급함으로써 충분한 에너지를 지구에 가져다 주고 있다.

태양광선은 감마선, 코즈믹선, X레이선, 적외선, 자외선, 그리고 여러가지 색깔로 분류되는 가시광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지개 색깔인 가시광선은 지구와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물들을 아름답게 물들인다.

태양의 적외선이나 태양광선에서 얻을 수 있는 열은 신경통, 신경염, 관절염, 축농증 등의 치료에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태양에서 나오는 열은 통증의 치료에 유용하게 사용된다.

자외선은 살균작용을 하며,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곰팡이, 이스트 등을 죽일 수 있다. 대부분의 창문은 95% 가량의 자외선을 차단하기 때문에, 날마다 일정한 시간동안 창문과 커텐을 열어 놓음으로써, 햇빛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을 방안까지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외선은 피부 위의 세균까지도 죽일 수 있기 때문에, 무좀, 마른버짐(건선), 여드름, 부스럼, 농가진 등과 같은 피부병의 치료에 유익을 준다.

햇빛이 가져오는 치료와 유익들

1. 태양광선은 피부를 두텁고 강하게 만들어 줌으로써, 어떠한 상처나 세균 감염에 더 잘 저항할 수 있도록 해준다. 피부가 상하거나 노화되지 않을 정도로 적당하게 정기적으로 햇빛을 쐬이면, 자외선의 해로움을 천연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피부를 가질 수 있다.

2. 자외선은 피하에 있는 콜레스테롤을 비타민 D로 전환시킨다. 비타민 D는 체내에 있는 칼슘을 적당하게 운용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며, 골다공증과 구루병의 예방에도 매우 유효하다. 그러므로 태양욕을 하는 것은 콜레스테롤을 낮춤과 동시에 비타민 D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루에 한시간 6평방인치(15평방센티)의 피부를 햇빛에 노출시킴으로써, 하루에 필요한 양(일일 최소 요구량)의 비타민 D를 얻을 수 있다.

3. 햇빛은 신체의 모든 작용들을 조절해주고 도와준다. 정신으로부터 시작해서 육체에 이르기까지, 햇빛은 인체의 건강을 유지해 주고, 양질의 수면을 취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의 눈으로 들어오는 좌외선은 송과선(pineal gland)을 자극하여서, 우리의 생활 리듬을 조절해주고 도와준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만드신 어두움 밤과 밝은 낮시간에 각각 다른 홀몬이 분비되어 인체의 기능을 적절하게 유지시켜준다. 어떤 국민학교에서 이루어진 한 실험은 매우 흥미있는 결과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기능항진(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고 안절부절하는 증세)의 어린아이들이 있는 교실의 형광등을 자연광과 거의 동일한 전등으로 바꾼 결과, 갑성선의 기능이 향상되었으며, 불균형했던 홀몬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4. 태양욕은 심장의 빠른 박동, 고혈압, 빠른 호흡을 순조롭게 낮추어 준다. 또한 혈당의 수준을 안정시켜 준다(주의: 당뇨병 환자의 경우, 햇빛에 화상을 입을 경우, 매우 심각한 상처를 입을 수 있음).

5. 햇빛은 적혈구의 생산을 증가시키며, 혈액 중의 산소량을 증가시킴으로써, 근육의 피로도를 낮추어 준다. 또한 햇빛은 백혈구의 생산을 자극하여 증가시키며, 산소의 활용도를 높여줌으로써, 질병에 대한 인체의 저항력을 향상시켜 준다. 몇몇 종류의 피부암이 태양에 과도하게 노출되는 것과 관련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몸 안에 있는 암이 햇빛에 의해서 억제되는 것도 사실이다.

6. 햇빛은 동화작용, 배설작용, 대사작용을 활발하게 만들며, 식욕의 상승에도 도움을 준다. 독성 화학물질과 중금속은 혈액의 빠른 흐름에 의해서 제거되며, 인체에 유익을 주는 무기질이 실제적으로 증가된다. 근육의 힘이 증가되고, 심지어는 운동을 할 수 없는 근육도 힘을 얻게 된다. 햇빛은 위궤양의 치료에도 유익을 주는 것으로 밝혀졌다.

아무리 좋은 햇빛도 지나치면 해가 됨

과도한 태양욕은 피부암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피부암의 80%는 얼굴, 목, 머리, 팔, 그리고 손에 생긴다. 그러므로 햇빛에 의한 화상과 과도한 노출을 피하는 것이 가장 좋은 피부암의 예방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치료보다 좋은 것이 예방이지만, 이미 햇빛에 많이 노출되었던 사람들은 조기에 피부암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피부에 사마귀와 같은 것이 생기거나, 피부 이상 즉, 오래 낫지 않는 상처(lesion)가 자라나거나, 피부색이 부분적으로 변하거나, 물집이 생기거나, 출혈이 생기면, 즉시로 의사에게 보여주어서 확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년에 한번씩 피부를 태워도 20년이면, 20번 이상 피부가 햇빛에 의해서 태워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햇빛에 의한 손상이 피부에 축적될 경우, 피부암의 위험이 높아지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햇빛을 가장 안전하게 쐬여서 유익을 얻을 수 있는가? 가장 중요한 법칙은, 피부를 연한 갈색으로 그슬리는 것(tan)은 좋지만, 피부를 태워서 화상(burn)을 입는 것은 금물이다. 뜨거운 여름일수록, 태양이 내리쬐는 각도가 직각에 가깝게 되어서 더욱 더 강렬한 햇빛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자신이 하루에 햇빛에 노출되는 시간과 일년에 노출되는 시간을 생각해 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환자들에게 보내는 메세지

환자들이시여, 도시의 비좁고 냄새나며 어두운 방에서 나와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계로 가서 쉴 수 있는 장소를 찾아라! 맑고 살아있는 공기가 가득차 있는 숲속 오솔길에 내리쬐이는 햇빛을 받으면서 걷고, 뛰어라! 신선한 공기, 치료가 담긴 햇빛, 그리고 운동이야말로 그대가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받을 수 있는 축복의 통로이다.

“참으로 빛은 달콤하며, 눈으로 태양을 바라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 전도서 11:7, 킹제임스 영어성경역. 우리의 구세주이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햇빛 속에 그대를 위한 치료제들을 가득 담아 놓으셨다. 그분께 그대의 온 마음과 육체를 맡기고, 그분께서 인정하시는 천연의 치료제들을 찾아라. 천연계 속에서 전개되는 치료는 거의 소망이 없는 많은 환자들에게 놀라운 기적을 가져다 줄 것이다. 도시의 소음과 흥분과 혼란과 인공적인 환경들은 환자들을 지치게 만들며, 공해와 더러워진 공기는 환자의 생명을 단축시킨다. 푸른 하늘과 햇빛, 풀과 나무와 꽃들이 있는 시골로 가서 모든 고통과 슬픔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마음껏 받아 들여라. 마음과 육체가 약해질대로 약해진 환자들은 그들의 정신과 육체에 강력한 감화와 치료를 가져다 줄 수 있는 환경을 선택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건강에 유익하고 모든 악의 조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특별한 환경이 필요하다.

가능하면, 환자들은 옥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시골 환경이야말로 환자에게 가장 많은 치료제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장소이다. 산뜻한 햇빛, 코끝에서부터 차이를 느낄 수 있는 맑고 신선한 공기, 마음과 정신에 쉼과 평안을 가져다 주는 꽃과 나무들이 에워싼 자연 환경은 환자에게 잃어버린 생명력을 되찾아 줄 것이다. 꽃들의 향기를 맡고, 소나무와 전나무에서 풍겨나오는 향기를 호흡함으로써, 그대는 그대의 폐와 피에 놀라운 변화가 생길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 될 것이다. 시원한 나무 그늘아래서 휴식을 취하고, 부드러운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상쾌한 정신을 회복할 수 있다. 의기소침해진 정신은 힘을 되찾고, 약해 있던 마음은 용기를 얻게 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에 평화와 사랑이 밀려음에 따라서 불규칙하던 호흡과 맥박은 정상으로 회복된다. 자신의 마음 속 깊숙히 자리잡고 있던 미움과 원망의 대상에게 한송이 꽃을 보내고 싶은 거룩한 충동이 솟구친다. 그대의 마음 속에서 용서가 미움을 대신하고, 동정이 원망을 대신하게 될 때, 드디어 하나님의 치료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내 이름을 두려워하는 너희에게는 의의 태양이 그의 날개에 치유를 가지고 솟아오르리니, 그리하면 너희는 나가서 외양간의 송아지처럼 자라리라.” 말라기 4:2, 킹제임스 영어성경역

실험실에서 살펴본 양파

Health & Healing 에서 발췌

양파는 그 종류에 따라서 다양한 색깔과 모양을 가지고 있다. 빨간색, 노란색, 흰색, 길쭉한 모양, 사각형 모양 등등. 그 맛에 있어서도, 강하고 매운 맛에서 부드럽고 달콤한 맛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이다.

따뜻한 기후에서 자라는 것일수록 부드러운 맛을 가지는 경향이 있는데, 미국 내에만해도 약 70여종이나 되는 양파가 있다.

양파는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양파가 인류의 손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곳은 중앙 아시아라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양파가 치료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상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대 이집트의 문서에는 양파를 염증의 치료제로 사용했던 기록이 있다. 오래 전부터 양파는 기관지염의 기침에 사용되어 왔으며, 오늘날에는 가끔씩 피부과 의사들에 의해서 벌에 쏘였을 경우, 신선한 양파 쥬스를 사용한 처방이 내려지기도 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양파가 당뇨병의 치료제로도 사용된다.

양파에는 건강과 치료에 매우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여러가지 요소들이 함유되어 있다. 양파에는 인체의 저항력을 향상시키는 성분들이 함유되어 있는데, 그러한 성분들은 각종 세균이나 질병의 공격으로부터 양파 자신을 보호해 줄 뿐만 아니라, 양파를 섭취한 우리들에게도 많은 유익을 준다.

식물을 위한 천연 항생제로 사용되는 양파

러시아 과학자들이 양파를 연구한 결과, 새로운 항생물질을 발견하였다. 곰팡이균들이 양파를 공격할 경우, 양파에서 평소보다 150배나 많은 양의 어떤 항생물질이 분비되어서 스스로 곰팡이균들을 막어낸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이용하여, 러시아 과학자들은 양파에서 분비되는 항생물질을 물에 약하게 타서 양파씨나 양파에 뿌린 결과, 양파가 곰팡이의 공격을 휠씬 잘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데 성공하였다. 신선한 양파를 섭취함으로써, 강력하고 부작용이 전혀없는 천연 항생물질을 값싸게 공급받을 수 있다.

양파 속에 있는 프로스타글란딘(PGs)

프로스타글란딘은 매우 놀라운 성분이다. 프로스타글란딘은 우리 몸의 모든 세포마다 존재하는데, 홀몬의 기능처럼 인체의 전체적인 면에 있어서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면, 심장과 혈관, 신경, 소화, 호흡, 소변 배출 등등. 양파에는 여러종류의 프로스타글란딘이 함유되어 있어서, 인체의 활동과 기능에 유익을 준다.

천식을 막아주는 양파

어떤 종류의 양파에서는 천식에 도움을 주는 성분들이 발견된다. 독일에서 이루어진 연구에 의하면, 기관지 장애에 도움을 주는 성분들이 양파에 있다.

성장을 촉진하는 양파

양파 기름은 성장을 자극한다. 동물 실험 결과, 양파를 먹인 동물의 간, 신장, 근육와 같은 조직들이 크게 성장하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양파씨 기름

양파씨로부터 추출한 기름에는 인체에 유익을 주는 불포화 지방산인 올레인산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 양파씨에 함유되어 있는 천연의 기름은 양파의 가치를 매우 높여준다.

혈액이 뭉치지 않게 도와주는 양파

양파는 피가 뭉치거나 끈적거리지 않게 도와줌으로써, 혈액이 혈관벽에 달라붙는 것을 막아주며, 혈관벽의 이완을 도와준다. 양파와 마늘은 피가 끈적거리거나 뭉치는 현상을 막아주기 때문에, 심장질환과 혈관질환에 매우 좋은 치료제로 사용된다.

고혈당을 막아주는 양파

양파에는 혈당이 높게 올라가는 것을 예방해주는 복합물질이 함유되어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당뇨병의 치료에 양파를 사용해왔다. 실제적으로, 양파가 당뇨병에 유익을 준다는 사실이 실험 연구에서도 입증되었다. 양파를 30분 동안 끓이면, 농축된 양파 추출물을 얻을 수 있다.

박테리아를 막아주는 양파

양파는 몇몇 종류의 박테리아에 대해서 강한 저항력을 나타낸다. 양파의 농축된 추출물은 박테리아의 침입을 막는 물질로 사용될 수 있다.

종양을 치료하는 양파

인체의 각 세포 내에는 GSH 라고 불리워지는 강력한 효소가 있는데, 씰레니움은 이 효소를 구성하는 중요한 인자이다. 씰레니움은 양파와 마늘에서 매우 많이 얻을 수 있다. 양파와 마늘에서 추출한 기름이 GSH를 활동적으로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동물의 피부에 종양촉진제(TPA)를 바르면, GSH의 활동이 오랫동안 중지되면서 종양이 생긴다. 그러나 TPA를 바른 동물의 피부 위에 다시 양파와 마늘로 만든 기름을 바르면, 종양의 생성이 50% 이하로 감소된다는 실험 결과를 얻었다. DMBA라고 불리우는 강력한 발암물질은 양파의 농축된 추출물 하에서는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DMBA를 주입시킴으로써 암에 걸린 쥐를 양파의 추출물로 치료하였더니 암의 크기가 매우 작게 줄어드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골수의 염색체에 문제가 생긴 쥐에게 웰쉬 양파 쥬스를 섭취시켰더니, 염색체의 상처가 상당히 줄어든다는 실험결과를 얻었다. 신선한 펌킨 호박 쥬스도 염색체의 상처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양파에 있는 항산화제, 플레이보노이드

식물에는 플레이보노이드라고 불리우는 각종 화학물질이 있다. 처음에 그것이 발견되었을 때에는 그것을 비타민의 일종이라고 생각하여서 그것을 비타민 P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플레이보노이드는 비타민이 아니라, 식물의 색깔을 만들어 내는 색소이다. 플레노이드는, 항암 작용을 하는 비타민 C처럼, 산화를 방지하는 항산화제의 역할을 한다. 양파의 껍질에는 매우 많은 양의 플레이보노이드가 함유되어 있는데, 특히 빨간색 계통의 양파에 가장 많은 양이 함유되어 있다.

지나치면 해가 된다는 원칙의 적용

아무리 좋은 것도 지나치면 해가 될 수 있다는 원칙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생 양파와 생 마늘을 지나치게 많이 섭취할 경우, 심각한 해를 입을 수 있다.

양파의 농축물과 쥬스를 만드는 방법

양파의 농축된 추출물을 얻는 방법: 매우 강력한 블랜더에 양파를 넣고 간 다음, 종이 필터(No. 1 whatman)를 통하여 여과시킨다.
양파 쥬스를 만드는 방법: 양파는 조리하지 않은 생양파나 끓인 것이나 모두 좋다. 믹서에 생양파를 넣고 간 다음, 양파 국물을 따로 분리시킨 후에 물을 부어서 50%로 희석시킨다. 양파의 강한 맛을 없애고 싶으면, 이것을 15분 동안 끓여서 사용해도 된다.

방황하는 목자, 방황하는 양떼, 방황하는 교회


이 글은 비난도 아니고 비평도 아니다. 이 글은 내가 사랑하는 그리스도 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조용한 통곡이다.

이 글은 아무런 고민이나 갈등도 느끼지 않으면서 자신의 목적과 야망을 위하여 정신없이 뛰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글이 아니다. 이 글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양심의 가책과 괴로움으로 인하여 고뇌하고 있는 신실한 목자와 양떼들에게 보내는 글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예루살렘의 교회를 보면서 우셨던 것처럼, 진리와 정직과 고결한 표준을 버린 교회를 보면서 함께 탄식할 목자들과 양떼들에게 이 글을 보낸다.

목자와 양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 안에는 두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목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이고, 하나는 양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이다. 많은 목자들이 순결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복음 사업에 뛰어들고 있지만, 다음과 같은 두가지의 음성을 들으면서 깊은 고민에 잠기게 된다. 한쪽에서는 진리에 대한 충성과 영혼들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진리와 원칙의 표준을 낮추는한이 있더라도 많은 교인들을 가진 큰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육체의 음성이 들려온다.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진실한 목자라면 어떤 음성에 자신의 생애를 굴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슬픈 사실은, 오늘날 많은 목자들이 두가지 음성 사이에서 한동안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후자를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목자가 이러한 결정을 하게 되면, 그는 자신의 목적이 성취될 때까지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 거룩한 원칙에 대해서 곧바르게 말함으로써, 교인들의 마음과 기분을 상하게 만들 수 있는 설교는 당분간 하지 말아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목자는 예수님의 사랑만을 이야기하면서, 양떼들의 부도덕과 부정직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버린다. 그리하여 문제없고 평화스런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이러한 교회 안에서 양떼들의 죄와 부패는 아무런 지적도 받지 않은채 슬쩍 넘어가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죄에 대한 깊은 회개를 경험하는 일이 너무나 어렵게 된다. 마땅히 책망받아야 할 부도덕에 빠져 있는 양에게도 격려와 위로의 말씀이 함부로 사용되기 때문에 교회 안의 부도덕과 죄는 더욱 깊어만 간다. 이러한 양떼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덮어주고, 죄에 대한 면허증을 주는 도구로만 이해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한일서 2:15~16.

참된 목적을 잃어버린 목자 아래에서 양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볼 기회도 잃어버린채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거짓 확신 속에서 멸망을 향하여 달려가게 된다. 교회 안에 세속이 넘실거리고, 아슬아슬한 짧은 치마와 울긋불긋한 짙은 화장, 그리고 부와 명예를 자랑하는 귀고리, 목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오는 양들의 예복이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에서 술과 담배 냄새가 진동하여도, 목자는 여전히 평온한 미소를 띄우면서 하나님의 사랑만을 이야기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로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셨고,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으니, 이제는 율법에 구속받을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이상한 복음이 부도덕과 죄에 빠져 있는 양떼들에게 강력한 신학적 핑계거리를 마련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과 사랑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의 핑계를 단번에 무너뜨리신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이루리라.”마태복음 5:17.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한복음 14:15.

대개 그러한 목사들은 양떼들에게 강력하고 영감적인 설교와 진리의 양식을 먹임으로써 교회를 사랑과 진리가 충만하게 만드는 대신에 , 자신의 행정력과 인간적인 정으로 양들을 묶어서 교회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그들은 양떼들을 오직 하나님께로만 이끄는 대신에, 하나님께로만 가야할 영광을 자신과 하나님이 함께 나누어 가지고자 한다. 어리석은 양떼들은 교회의 권위에게 충성하라는 설교를 들으면서, 목자에게 충성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라.”누가복음 16:15. 오직 진리에 충성하는 자들만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자취를 감추고 만다. 성경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을 신중하게 점검하는 태도를 가진 양들의 숫자가 너무나 적다. 그 결과, 교회 활동에는 열심이 있지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무지한 양들로 자라난다. 이러한 목자가 다스리는 교회에는 많은 헌물을 바침으로써, 자신의 죄와 부정직과 부도덕함을 가리고 하나님께 가납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양떼들의 숫자가 늘어나게 된다. 목자는 스스로 판단할줄 모르는 어리석은 양들이 교회에 많이 생기면 생길수록,교회는 양적으로 더욱 더 빨리 성장한다는 비결을 배우게 된다.

교회와 조직이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며, 목자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욱 높은 권위를 가지게 된다. 무지한 양떼들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라는 말보다 “우리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라는 말을 훨씬 많이 하도록 길들여져 간다. 성경의 분명한 진리를 눈앞에 대고 읽어주어도, 그들은 여전히 “그래도 우리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는데요”라는 말하는 고집스런 양들로 변해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마태복음 15:9. 너무나 많은 양떼들이 그리스도께로 인도되는 대신에 교파나 교회로 인도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교회의 주인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대신에, 목사나 장로나 교회의 조직을 교회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목자가 좀더 큰 교회를 가져야겠다는 야망을 품는 순간, 양떼들에게 침례와 직분을 주는 표준은 급격하게 떨어지게 된다. 더 많은 양떼를 가져야 겠다는 야망이 복음전파 사업의 순수성과 거룩함을 삼켜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대로와 골목을 점령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진리는 점점 더 듣기 어렵게 되고 있다. 교회는 날마다 늘어나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참된 양들을 만나기는 점점 더 어렵게 되고 있다. 교회가 그 거룩한 목적과 사명을 저버리자, 교회는 세속과 유행의 물결에 대하여 문을 열게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교회와 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뚜렸한 경계선은 무너져 버렸다. 그 결과,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되어 버렸다. 신문과 뉴스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는 목자와 양떼들의 부패상은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하여 등을 돌리도록 만들고 있다.

교회가 세상과 같아지자, 하나님의 은혜가 가치없이 함부로 나누어 지게 되었다. 교회는 양에게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받아들였다는 결정적인 열매가 나타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었다는 표적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제시하는 집사와 장노의 자격을 무시한채, 침례를 주거나 직분을 줌으로써 양들을 교회에 붙잡아 두려고 하고 있다. 사단은 양떼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 노심초사 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를 거짓 양들로 채우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위험 속에 있는 목자와 양떼들에게 보내는 호소

이 글은 비난이 아니라 사랑의 경고이다. 이 글은 “그 길로 계속가면, 죽게 되니 제발 그 길로 가지 마세요!”라는 호소이다. 교회가 세속적인 양떼들에게 인기있는 것으로 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교회는 세상을 닮아가게 된다. 교회가 타락하고 세속화되어 세상과 별다른 차이를 나타내지 못할 때, 세상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양들은 어디로 찾아가야 하는가? 멸망해 가는 세상이 하나님의 진리와 원칙을 보고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오직 교회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어느날, 부자 청년 법관이 예수께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계명을 지키라”고 대답하셨는데, 이에 법관이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나이다”라고 응답하자, “네가 원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는 말로서 계명을 지키는 참된 정신을 가르치시면서 그 부자 법관의 마음에 숨겨져 있던 이기심을 지적하시자, 그는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되돌아 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마태복음 19:16~24). 만일 예수께서 그 부자 법관의 이기심과 죄를 적당하게 눈감아주었더라면, 예수께서는 그 사람의 적극적인 후원과 영향력 하에서 경제적으로 훨씬 더 쉬운 목회 사업을 하였을 것이다. 만일 예수께서 그를 위하여 표준과 원칙을 조금만 낮추었더라면, 그분께서는 훨씬 더많은 인정과 환영 속에서 그분의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목적은 이 땅에서 당신을 따르는 양들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분의 유일한 목적은 이 땅의 죄인들에게 구원에 대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소개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진리와 원칙을 분명하게 제시해야만 하였던 것이다.

지금은 부드러운 설교를 할 때가 아니다. 세상의 부도덕과 부정직과 세속적 유행이 하나님의 교회 안을 넘실거리고 있는 이 때, 누가 분명한 기별을 전함으로써 하나님의 양들을 깊은 잠에서 깨울 것인가?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 이사야 58:1. 목자가 나팔을 크고 분명하게 불어서 양들을 깨우지 못하는 이유는, 혹시 목자 자신이 세상과 하나가 되어서 깊은 잠에 빠져있기 때문은 아닌가? 혹시, 목자 자신이 죄의 종이 되어 있기 때문은 아닌가?

이제 세상은 교회의 원수가 아니라 친구가 되었다.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야고보서 4:4. 하나님의 교회 안에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함께 섞여 있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속된 것이 거룩한 것을 압도하는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되었다. 언제나 교회 안에서 충실한 책망과 경고의 나팔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인가? 누가 외로움 속에서 진리대로 살아가는 진짜 양들을 격려하고, 죄와 세상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거짓 양들을 책망할 것인가? 과거에 예례미야 선지자가 배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기없는 기별을 전했던 것처럼, 오늘날 누가 패역한 양떼들에게 철저한 부흥과 개혁을 촉구하는 인기없는 기별을 전할 것인가? 거듭나지 않은 양떼들은 언제나 부드럽고 평화로운 설교만을 요구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보다는 철학이나 우화나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원한다. 어떤 목자가 그들에게 성령의 음성을 들려줌으로써 그들을 회개의 길로 인도할 것인가? 선한 목자는 우둔한 양떼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듣기 좋은 것으로 깍아 내리거나 다듬지 않는다.

사단의 전략

사단은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일어날 정도로 갑자기 일하지 않는다. 사단은 거대한 죄와 배도를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매우 여러 단계로 된 작은 타협의 계단들을 만들어 놓는다. 그는 교인들에게 “다른 집사님이나 장로님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해도 괜찮을 거야”라는 생각을 하도록 유도한다. 사단은 화장이나 목거리와 같은 장식물에 대해서, 어떤 목사나 교인이 용기를 가지고 일어나서 이야기 할 때에 그를 극단적이고 사랑이 부족한 율법주의적인 사람이라고 몰아부침으로써 참된 사랑을 왜곡시킨다. 사단은 교인들이 죄와 세속에 대하여 “아주 조금은 괜찮아. 그 정도는 괜찮아”라는 말을 하도록 자극함으로써, 결국에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성취시킨다.

사단은 여인들이 입는 치마의 길이를 무릅으로 끌어올렸으며, 이제는 허벅지가 허옇게 보이는 치마를 입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가도록 양떼들을 훈련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양떼들이 입술과 손톱을 빨갛게 물들이고 교회에 와도, 전혀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할 정도로 교회는 세상에 익숙해져 있다. 유행과 세속의 사교장이 되어버린 교회의 숫자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이제, 사단은 교인들로 하여금 돈이 가지고 있는 위력이 교회 안에서도 통하는 모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데에도 성공하였다. 돈많은 집사와 돈많은 장로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세속적인 아이디어로 이끌어가도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만일 우리의 눈으로 세속과 유행과 돈을 이용하여 교회 전체를 암흑 속으로 끌어 가고 있는 사단의 계략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지금처럼 느긋하고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교회 안에 있는 세속과 죄로 인하여, 우리 가족들의 영혼이 영원히 잃어버린바 되고 있는 모습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죄에 대해서 지금보다 훨씬 강력하고 용감하게 대처할 것이며, 죄와 세상에 대하여 동일한 책임감과 경각심을 가지고 연합하여 일어서게 될 것이다.

사단이 세워놓은 최고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상의 요구에 민감하게 만들고, 죄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단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세상이 요구하는 바에 쉽게 굴복하고 타협하지만, 그리스도의 뜻과 그분의 진리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양떼들을 보면서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다.

 

 

무엇이 목자들과 양떼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병의 증세들을 살펴보았다. 유행과 세속, 화장과 사치, 쾌락, 죄에 대한 무감각, 세상적인 사고방식 등등. 이러한 모든 문제들이 지금 하나님의 교회가 겉으로 나타내고 있는 증세들이다. 그런데, 마땅히 거룩하고 경건해야할 목자들과 양떼들에게 왜 이러한 문제들이 생기게 되었을까? 우리는 종종 병의 증세만을 쫓아다니다가 질병의 진정한 원인을 놓치는 실수를 하기 쉽다. 무엇이 진짜 핵심 원인인가?

그것은 거짓 복음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율법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다. 그들은 사랑과 율법을 분리시킨 다음에, 사랑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여 버리려고 애쓴다. 그러나 사랑은 율법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로마서 13:10. 여기서 바울은 참 사랑을 가진 자마다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 바울의 선언은 율법을 범하는 죗된 생애를 살아도, 사랑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다는 거짓 복음의 위험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율법에 기록된 도덕적 원칙들이 무시된 무분별한 사랑이 구원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짐에 따라서, 죄와 세상에 대하여 승리하는 경건한 생애에 대한 관심은 사라져 가고 있다. 물론, 구원은 아무런 댓가도 없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거저 나누어지는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구원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숫자는 너무나 적어 보인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양떼들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결국, 최후의 심판날에 가서는, 모든 양떼들은 자신들이 생애한바에 따라서 진짜 그리스도인과 가짜 그리스도인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진리에 충성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경건한 생애를 살지 않는 사람들은 거짓 양들이라는 선언을 듣게 될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어버지의 뜻대로 행한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 예수께서는 비록 많은 헌신과 열심으로 주의 사업을 하였지만, 당신의 율법을 범하는 죗된 생애를 살았기 때문에 멸망에 들어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실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멀리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2~23. 그들의 신앙에는 원칙과 도덕이 결여된 인간적 사랑만이 있을 뿐,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는 부도덕한 생애를 살았다. 그들은 영생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교회활동과 주님의 사업에 참여하였지만, 희생과 극기의 십자가를 지고 세상과 원수되는 삶을 살지 않았다. 그들은 주께서 지정하신 좁은 길을 걷는 대신에, 육체가 요구하는바에 따라서 대다수의 군중과 함께 넓은 길을 따라가기로 선택하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또 하나의 진리가 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경건한 생활을 살지 못해도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은 보장됩니다”라는 달콤한 설교가 수많은 양떼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신앙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3:31. 여기서 바울은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율법을 굳건하게 지키는 삶을 산다는 진리를 선언하고 있다. 믿음과 율법은 서로 경쟁하거나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충하고 협조한다. 참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열매를 맺는 생애를 살게된다는 가르침이야말로, 믿음과 순종과 구원에 대한 가장 균형있는 진리이다. 그러나 잘못된 오류에 빠져 있는 양떼들은 하나님의 영께서 양심 속에 들려주시는 진리와 의에 대한 확신을 계속해서 거절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의 구원 안에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과거 중세기에서부터 시작된 잘못된 오류들이, 이제는 교회 안에서 진리를 누르고 승리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진리대로 살고,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는 경건한 생활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행위에 의존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들이라는 핀잔을 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무너짐에 따라서, 사람들의 신앙과 사상은 방종의 길을 달리게 되었으며, 신앙과 사상이 무분별한 감정적 사랑에 오염됨에 따라서, 각종 세속과 유행과 부도덕이 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급속하게 세속화되어 가고 있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기억하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을 무너뜨리는 자마다, 방종과 세속의 길을 걷다가 결국에는 사단이 속삭이는 논리와 이론에 미혹되어서 어둠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

1부 - 그대는 늑대입니까? 양입니까?


늑대와 어린양 이야기

어느날, 한 젊은이가 등산을 하고 있었는데 계곡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서 내려가 보았더니 어린 늑대 새끼가 길을 잃어버리고 울고 있었다. 불쌍한 생각에 그는 어린 늑대를 집으로 데려와 좋은 음식과 좋은 집을 지어주고 잘 길렀다.

이듬해 봄이 되었을 때, 그는 늑대 새끼를 우리에서 풀어주어서 자유롭게 풀밭을 뛰어 놀도록 하였다. 늑대 새끼는 곧장 멀리 풀밭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떼들에게 달려 갔다. 늑대는 자신과 비슷한 크기의 양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양들의 흉내를 내면서 뛰어 놀려고 노력하였다. 풀밭에 이리 저리 뒹굴기도 하였으며, 풀에 코를 들이대고 먹는 시늉을 하기도 하였다. 얼마 후에 늙은 양이 다가와서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 늑대는 “나는 여기에 있는 양들 가운데 하나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늙은 양이 말하기를 “네가 양이라고? 너는 양이 아니란다.” 이에 늑대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소원을 말하였다. “나는 양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서 양이 되려고 하고 있답니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늑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많은 헌금을 내며, 자선을 베풀고 있습니다. 나는 죄를 이기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어린 늑대가 양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결코 양으로 변할 수 없다. 인간의 방법과 노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하다. 그러나 오직 한가지 길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늑대를 양으로 재창조해주시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늑대를 양으로 만드실 수 있다. 늑대와 양의 이야기는 죄인이 참된 그리스도인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설명해 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여기서 새것은 진짜 새로운 것이 되었기 때문에 새것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마음속에는 옛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슬쩍 말로만 새것이 되었다고 불러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옛것을 새것이라고 거짓 선언하는 분이 아니다. 이 성경절에 나오는 새것이란 늑대가 양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묘사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그리스도인들을 또한 양떼로 표현하고 있다. 타고난 본성에 이끌려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늑대이고, 거듭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양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이다. “갈찌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누가복음 10:3.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와 훼방이라” 마태복음 15:19. 마음의 냇물이 맑게 되려면 먼저 마음에 있는 샘이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행위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늘에 들어가고자 힘쓰는 자는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율법주의적인 종교, 즉 경건의 모양만을 가진 자는 매우 깊은 자기 기만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옛 것을 변경하고 개량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본성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가 자신과 죄에 대해서 죽고 전혀 새로운 생명이 나오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생애에 결정적인 변화가 없으면 결국에는 잃어버린바 될 것을 아셨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변화를 위한 방편들을 마련해 놓으셨다.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거기에는 생애의 변화가 일어난다. 죄악을 즐기고자 하는 생각은 사라지고 악한 동기는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 사랑과 겸손과 화평이 분노와 시기와 분쟁의 자리를 채운다. 기쁨이 슬픔을 대신함으로써, 용모는 하늘의 빛을 반사하게 된다. 아무도 짐을 덜어주는 손을 보지 못하고, 아무도 빛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지 못하지만, 사람이 믿음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때에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임하게 되는데, 그 능력은 죄인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새겨놓는다. 그리하여 하늘은 그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지 않는한,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다. 타락한 인간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은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양의 가죽을 뒤집어 쓴 늑대들

교회 안에는 마땅히 진짜 양들만 있어야 한다. 그런데 슬프게도 오늘날 교회 안에는 거짓 목자 뿐만 아니라 거짓 양들이 너무나 많이 자리를 채우고 있다. 가짜 양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종종 진짜 양들이 따돌림을 당하고 외로움을 느껴야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가짜 양들이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에 진짜 양들은 혹시 자기에게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혼돈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가짜 양이란 실제에 있어서는 양의 탈을 쓰고 있는 늑대를 말한다.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사단의 대리자들을 가리켜서 “양의 가죽을 쓴 이리”라고 지적하고 있다(마태복음 7:15). 얼핏 보면 양인데, 자세히 보면 그 하는 말과 행동이 늑대인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상한 양들은 대개 이러한 말을 한다. “꼭 그렇게 살아야만 합니까? 이런 것을 하면 죄가 되나요? 그 정도는 괜찮치 않나요?” 그들은 자신이 양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늑대의 일을 하기 위해서 구실을 찾는다. 그들은 매 주말마다 교회에 나가고 기도회에 참석하며 각종 교회 활동에 열심이지만, 그들의 마음과 품성과 모든 행위의 동기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양이라는 사실을 전혀 반사하고 있지 않다. 늑대의 기질인 부정직과 부도덕이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기적인 집사와 돈과 명예를 사랑하는 장로와 교회를 정치와 행정으로 다스리려는 목사가 다 그러한 부류이다. 사교적 모임과 스포츠 게임과 정치에는 열을 올리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분의 사랑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리와 그분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교세의 확장과 교인들의 숫자에만 신경을 집중한다. 바울은 이러한 거짓 양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은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로마서 8:5~6

가짜 양들은 자신이 당연히 먹어야 할 풀 이외에 다른 음식을 더 좋아한다. 성경은 오래 읽지 못하면서 다른 소설책들이나 텔레비젼은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본다. 자신의 신앙을 일으켜 세우고 발전시킬 수 있는 것들을 찾기 보다는 늑대의 본성을 즐겁게 만드는 자극적인 것들만을 찾는다. 양이면 당연히 풀을 뜯음으로써 만족해야 하는데, 양이라고 말하면서 죽은 말고기를 달라고 요구한다면, 누가 그를 양이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리스도로부터 새로운 마음을 받는 거듭남을 날마다 경험하는 그리스도인만이 새로운 생애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22~24. 우리는 늑대의 본성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양의 본성인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 잔인하고 사나운 늑대의 성품과 온순하고 순결한 양의 본성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전혀 없다. 양과 늑대는 그 본성만 다른 것이 아니라, 그 겉모습에 있어서도 현격한 차이를 나타낸다. 그런데 교회에 나오는 많은 양들이 마치 늑대와 같은 옷과 화장을 하고서 나오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자신은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가는 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양의 옷을 입기 보다는 늑대, 즉 옛 사람이 좋아하는 치장을 하고 다니는 것은 왠 일인가?

양은 울타리를 좋아한다

양은 목자가 쳐놓은 가시나무 울타리 속에서 거하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곳은 자신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양은 자신을 가두어 놓은 울타리에 대해서 불평하는 대신에 오히려 고마워한다. 양은 자신의 마음과 생활을 경건하게 보존해 주는 울타리인 율법과 계명을 결코 무겁거나 귀찮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한일서 5:3. 그런데 그리스도를 따르는 양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쾌락을 포기하라는 율법과 계명의 요구를 귀찮고 얽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쩐 일인가?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면, 자신의 인생이 바짝 마른 모래 사막처럼 변할 것이라고 불평하는 소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것은 어쩐 일인가? 참 목자인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세워놓으신 울타리, 즉 율법에 대해서 불평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직 늑대의 본성에 지배되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늑대에게 양과 같은 생활을 강요할 때에 늑대는 얼마나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겠는가! 그러한 사람들은 악을 행하기는 원치 않지만, 자신의 본성을 즐겁게 하는 쾌락과 재미를 포기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포기하는 것을 굉장한 손해와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밤이 되면 숲속을 다니면서 힘없는 토끼와 사슴들을 해치는 늑대를 생각해 보라. 늑대는 그러한 일들에 쾌감을 느끼고 생의 환희를 느낀다. 늑대는 그러한 종류의 일에서만 만족을 얻을 수 있다. 다음 날 아침, 푸른 풀밭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떼들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그들과 같은 평화로운 삶을 생각해 보지만, 그러한 생각은 한순간에 지나가고 다음과 같은 생각이 그의 머리를 채운다. “나는 저 양들처럼 울타리에 갖혀서 살 수 없어. 거기에는 아무런 낙도 없고, 즐거움도 없어. 양들의 생활은 너무나 재미없고 무미건조해.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바보같은 결정을 하였어.” 사실상, 그의 말은 사실이다. 밤에 다니기를 좋아하는 늑대와 같은 짐승들은 낮에는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늑대가 양이 되고 싶다고 해서 억지로 풀을 뜯어 먹는다면, 아마도 소화불량에 걸릴 것이다. 늑대가 양이 되고 싶다고 해서 가시울타리 안에 들어가서 살면, 그는 스트레스로 인하여 얼마 안가서 신경쇠약내지 정신질환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오직 진짜 양만이 울타리 속에서 참된 안전과 평화를 느끼면서 만족하게 될 것이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율법과 계명이라고 불리우는 울타리 안에서만 참된 안전과 만족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율법과 계명이 하라고 명한 것과 하지 말하고 명한 것들을 금하고 행함으로써, 참된 행복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늑대가 울타리 밖에서 만족을 얻는 것처럼, 양도 울타리 안에서 만족을 얻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양의 눈에는 울타리가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벽으로 보이지만, 늑대의 눈에는 울타리가 자신을 가두워 놓는 감옥소의 높은 장벽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늑대들은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양들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서 세워놓으신 울타리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을 토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그러한 늑대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책망을 기록하고 있다.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 . .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이사야 30:8.

양이 늑대와 결혼할 수 있나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비그리스도인과 가지는 교제이다. 어떤 사람들은 일단 결혼한 다음에 늑대를 양으로 만들면 된다고 말한다. 정말 그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고린도후서 6:14~15. 자신은 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어린 양이 늑대와 결혼한다는 것. 정말로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이 아닌가? 사단은 어린 양이 늑대와 결혼하여 살면서 그의 신앙이 변질되거나 포기하게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린 양이 자신과 비슷한 크기와 모양을 가진 양을 찾아서 결혼하여 동일한 신앙과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살게 되기를 소원하신다. 그대는 목자의 말을 들을 것인가? 양은 목자의 음성을 구별하여 그 말에 순종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양이 걷는 길과 늑대가 걷는 길

진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거짓 그리스도인이나 세상 사람들과 함께 손을 잡고 동행한다면, 그는 얼마 안가서 세상의 흉내를 내면서 각종 쾌락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가진 이 육체는 우리가 한번 거듭나는 경험을 하였다고 해서 완전히 육체의 본능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해서 저지되고 지배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육체적 본능이 좋아하는 쾌락을 멀리해야만 한다. 육체적 본능이 요구하는 것을 멀리하고 양심 속에서 들려오는 목자의 음성을 따라서 사는 길을 성경은 좁은 길이라고 부른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이가 적음이라.” 마태복음 7:13,14. 그대는 지금 육체의 본능이 요구하는대로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 그대는 넓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어서 속히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그분께서 그대의 양심에 호소하는 바대로 순종하라. 양은 자신의 주인인 목자의 음성에 따라서 움직이며, 늑대는 자신의 본성적 욕구가 이끄는대로 움직인다. “너희가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6:16

참된 그리스도인이 걷는 길이 좁고 협착하다고 해서 그 길에는 기쁨과 보람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길이 비록 가파르다고 할지라도 중간에 쉼을 취할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이 있으며 샘터가 마련되어 있다. 그 길에는 본인만이 알 수 있는 보람과 행복이 있기 때문에 가장 강력한 확신을 가지고 전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말라. 넓은 길을 선택한다고 해서 항상 쉽고 평안함만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 길에도 어려움과 양심의 가책이 있으며, 더이상 가지 말고 되돌아가라는 경고판이 세워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하면서 살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길을 걷기로 결정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받은 늑대의 본성을 가지고 늑대처럼 살다가 결국에는 멸망당하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고, 비록 늑대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능력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하고, 그리스도께서 어디로 인도하든지 순종하며 따라가는 자들이 되기로 선택할 수도 있다.

하루는 어떤 아이가 부모와 함께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 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사님의 설교 중에 나온 이야기에 대해서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아버지에게 하였다. “아버지, 아버지는 양이야? 늑대야?” 제1부의 글을 마치면서, 나는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 그 아이의 질문을 다시 던지고자 한다. “그대는 양입니까? 아니면 늑대입니까?”

2부 - 그대도 양이 될 수 있다!


“예수”라는 이름 속에 담겨진 구원의 의미

앞에서는 인간의 어떠한 노력과 희생으로도 양은 결코 늑대로 바뀔 수 없음을 배웠다. 오직 하나님의 재창조의 능력을 통하여 마음이 새롭게 거듭날 때에만 죄에 대하여 승리하는 새로운 생애를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죄에 대하여 승리할 수 있는가?” 아마 이 질문에 대한 답이야말로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제2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자.

인생에 나타나는 많은 문제들이 대개 시간이 흐르면 해결되는 경우가 많지만, 시간이 흐른다거나 교회를 오래 다닌다고 해서 해결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죄의 문제이다. 이 문제를 성경적으로 올바로 이해하고 경험하는 자들만이 구원받게 될 것이다. 하루는 어떤 신학대학에서 강의를 듣고 있는데, 어떤 교수님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을 들었다. “여러분, 그대들은 얼마나 더 죄를 짓고자 하는가?” 교실 안은 찬물을 끼얹은듯이 조용해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이 교수님이 어떤 극단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했지만, 잠시 후에 그 교수님의 말씀 속에 중요한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from their sins)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태복음 1:12. 예수께서는 당신의 이름 안에 생애의 목적을 담고서 태어나셨다. “예수 -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함” 여러분들은 죄에서 구원받았는가? 그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고,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면 구원받은 것인가? 성경은 구원에 대해서 설명할 때, 그리스도인이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을 얻는 것으로 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 죄로부터 받는 구원을 말한다. 영생은 이 땅에서 죄로부터 구원받은 결과로 주어지는 상급이다.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로마서 6:22.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는데, 어떻게 예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겠는가? 물론,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면서, 한편으로는 여전히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면 그러한 믿음은 무엇가 잘못된 믿음이 아닌가?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전도지를 주면서 “예수를 믿으세요. 그러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때, “예, 나는 예수를 믿겠습니다”라고 대답한 다음에, 이전에 지었던 죄를 계속해서 범하는 생활을 사는데에도 불구하고, 나의 구원은 보장되는 것인가?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고 하지 않았는가? 수많은 술주정뱅이들과 마약 중독자들이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고 생애를 헌신하는 모습을 보면, 무엇이 구원받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베드로나 요한처럼 성격이 급하고 시기와 질투를 잘하던 사람들이 아름다운 성품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 무엇이 구원받는다는 말의 의미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어떻게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어. 살아 있는한, 죄는 어쩔 수 없는 것이야. 거듭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어”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 우리가 아노라”라고 선언하고 있다(요일 5:18). “우리가 아노라”라는 말은 얼마나 강력한 간증인가!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새롭게 거듭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알았던 것이다. 어떻게 날마다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있으면서,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죄란 무엇인가?

15그렇다면 죄란 도체체 어떤 것인가?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죄를 버릴 것이 아닌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죄에 대한 가장 분명한 정의는 요한일서 3:4에 기록되어 있는“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이다. 성경은 죄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죄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기를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성경절에 걸려서 넘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십계명이 십자가에서 폐하여졌으며, 그 법을 다 지키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들어왔기 때문이다(살아남는 이들 13호 참조). 성경은 율법을 범하는 것을 죄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법을 범해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법이 폐하여져서 없어졌거나 무효화 되었다면, 죄를 범하는 일도 있을 수 없게 된다. 법이 없으면, 법을 범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재판소에서 법을 근거로 해서 죄인을 심판하는 일도 없을 것이 아닌가? 이 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해석을 들어보자.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로마서 4:15.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로마서 7:7. 바울은 율법이 폐하여졌다면 법을 범하는 죄가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알 수도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결론으로서, 종교 개혁운동의 기수였던 마탄 루터의 견해를 들어보자. 루터는 “도덕률 폐기론자들에 대항하여”라는 글에서 십계명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내가 어떻게 하여 율법 또는 십계명을 배척하는 사람으로 평판이 나게 되었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다 ... 도데체 율법이 없는 곳에 죄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그 누가 할 수 있는가? 율법을 폐지하는 자는 틀림없이 죄까지 철폐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로마서 6:14에는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무슨 뜻인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율법 아래 있다는 말의 의미

우리는 가끔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더 이상 십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견해인가?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말의 의미는 우리가 더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사도 바울의 말한 내용 전체를 다시 잘 살펴보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로마서 6:14~15. 이 말이 의미하는바가 무엇인가? 어린아이라도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이지만, 율법이 폐하여졌다는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의 뜻을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을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는 말을 한 다음에 “그런즉 어찌하리요?”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다시 말해서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의 설명을 읽어보자. “우리가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법을 범하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바울은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하는 표현 방식을 사용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은혜 아래에 있다는 사실이 법을 범해도 된다는 면허증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바울은 로마서 3:19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아노니 이제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바울은 “율법 아래”있는 것을 “심판 아래”있는 것과 동일시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란, 율법을 범함으로써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율법 아래 있지 않은 이유이다. 그들은 율법을 준수하는 생활을 살고 있기 때문에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의 능력 아래에 있다. 그들은 율법을 범하는 부도덕하고 죗된 생애를 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율법에 순종하는 승리의 생애를 살기 때문에, 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로마서 6:14. 은혜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고의적으로 율법에 불순종하지 않는다(여기서 고의적인 불순종이란 하나님의 뜻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지적으로나 양심적으로 분명하게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을 말함).

은혜로 말미암는 순종의 비결

이제,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비결을 연구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렀다. 바울은 율법을 지키고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비결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로마서 13:10. 어떤 사람들은 이 성경절을 지적하면서“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돼! 율법은 더이상 필요없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은, 사랑과 죄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만약 우리 마음 속에 사랑이 있으면,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때문에 죄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만약 사랑이 우리의 생애의 모든 동기와 사상과 행동을 지배한다면, 우리는 율법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 수 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를 아내로 얻을 수 있는 조건으로 7년이라는 긴 기간을 그녀의 아버지를 위해서 일하기로 약속했던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 그분의 말씀과 진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며, 우리의 모든 애정이 그분을 중심으로 쏟아지게 될 것이다. 날마다 그분을 바라보는 생애를 살기 때문에 그분과 같은 품성으로 변화되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분께서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최고의 관심을 기울이게 되며, 그분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생겨나지 않겠는가? 더우기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신 그분의 사랑과 희생을 생각할 때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나 위험한 일일지라도 기꺼이 감당하게 될 것이며, 그분께서 다시 우리를 데리러 오시겠다는 재림의 약속을 몇년이 되든지 상관하지 않고 기다리지 않겠는가? 그러한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있다면, 자신이 바친 어떠한 희생과 봉사에 대해서도 부족함을 느낄 것이며, 그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자만할 수도 없을 것이다. 율법에 순종하는 행위는 마음 속에 있는 순결한 사랑의 뜨거움을 드러내는 증거에 불과하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만드는 강력한 능력이다. 바로 이러한 사랑이 죄인의 마음에 새겨지도록 역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구원에 대해서“너희가 은혜로 인하여 ...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라고 결론지었던 것이다(엡 2:8).

사랑과 율법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

1.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로마서 13:8. 많은 사람들은 율법을 부정적인 측면으로만 이해한다. 이런 것은 하지 말고, 저런 것은 금하는 금지의 법으로만 받아들인다. 이와 같은 자세로 하나님의 법에 접근하는 것이야말로 사단이 가장 좋아하는 태도인데, 왜냐하면 사단은 사람이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질 때에 구원에서 멀어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자녀들 주위에 세워 놓으신 사랑의 벽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그분을 사랑한다면, 그분께서 법률로 금해 놓으신 것들을 매우 두려운 마음으로 거절하게 될 것이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십계명 중에서 사람들에 대한 계명인 5째부터 10째 계명들을 순종하게 될 것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5째 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6째 계명), 간음하지 말지니라(7째 계명), 도적질 하지 말지니라(8째 계명), 네 이웃에게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9째 계명), 탐내지 말지니라(10째 계명).

2. “온 율법은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갈라디아 5:14. 하나님의 율법에 기록된 10개의 계명(십계명)을 4개의 글자로 줄인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하라”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율법인 십계명을 친히 두개의 돌비에 기록해서 주셨는데, 첫째 돌비에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사랑이 4개의 계명에 나뉘어져 기록되어 있고, 둘째 돌비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이 6개의 계명에 나뉘어져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을 것이며(첫째 계명), 우상을 만들지도 않을 것이고(둘째 계명),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도 않을 것이며(셋째 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킬 것이다(넷째 계명). 또한 앞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람하는 사람은 사람에 대한 나머지 여섯 계명을 자연히 순종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온 율법”은 “사랑하라”는“한 말씀”에 함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 속에 참 사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일에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매우 잘 설명할 수 있는 예화를 한가지 들어보자. 한번은 어떤 교수님이 신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한 학생이 일어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기 시작하였다.

학생: “교수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알고 계십니까?”
교수: “그럼 잘 알고 있지”
학생: “그렇다면, 교수님은 교수님의 아내를 죽이지 않기 위해서 하루에 몇번이나 결심하십니까?”
교수: “나는 전혀 그런 결심을 하지 않는다네.”
학생: “그러면 아내의 물건을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십니까?”
교수: “전혀 노력하지 않고 있지”
학생: “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날마다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지하게 맹세하고 결심하고 노력하지만 한결같이 결국에 가서는 죄를 범하게 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교수님의 아내에 대한 계명들을 지키기 위해서 전혀 노력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혀 어렵지도 않다고 대답하셨는데, 무엇이 그러한 차이를 만들어 냈습니까?”
교수: “나는 내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일세.”

이 간단한 예화야말로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의 의미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아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그대가 하나님보다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보다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한, 결코 다른 사람에게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죄의 기초는 자기를 숭배하는데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자아를 부인하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이기만 하면, 승리는 항상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어떤 경우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다. 사랑은 모든 친절과 관대함의 근원이며 희생의 원동력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당신의 아들까지 우리를 위해서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의 마음에 새겨지게 될 때, 죄인은 드디어 멸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지게 된다. 누가 또는 무엇이 사랑을 소유한 사람에게 죄를 짓도록 할 수 있는가?

그대는 죄의 문제에 대해서 오랫동안 투쟁하고 기도해 왔는가? 그렇다면, 모든 죄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 모든 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여기에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만일 그대가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이러한 사랑을 얻기를 원한다면, 그것을 얻을 때까지 구하게 될 것이다.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마태복음 7:8

기억하라!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새겨지는 늑대마다 양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될 것이다.

3부 - 사랑이 늑대를 양으로 만든다


지금까지 배운 것의 요약

우리는 지금까지 다음과 같은 가지 진리를 배웠다.

1. 죄의 삯은 사망인데, 모든 인간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늑대와 같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2.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인들의 형편을 아시고 한가지 계획을 수립해 두셨는데, 그것은 거듭남을 통해서 인간에게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는 계획이다.

3.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에 교회 안이 온갖 문제로 가득차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짜 양들을 계속해서 좁은 길로 인도하고 계신다. 여기서 좁은 길이란,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늑대와 같은 본성이 요구하는바를 거절하고 성령의 음성과 진리가 요구하는바에 따라서 순종하는 생애를 의미하며, 그 결과로서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4. 구원이란, 이 땅에서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5. 그렇다면 죄란 무엇인가? 성경은 죄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범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요한일서 3:4.

6.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 죄라면,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 있는가? 그렇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그분의 사랑이 마음 속에 새겨지는 것이다. 사랑과 죄는 마음 속에서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사랑이 있는 곳에 죄가 사라지기 때문에, 사랑은 우리의 마음과 생애를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하고 조화되도록 만들어 준다.

사랑을 소유할 수 있는 최고의 비결

그렇다면, 여기에 또 하나의 질문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어떻게 하면 사랑을 소유할 수 있는가?”이다. 사도 요한은 “그의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들이 생명 나무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또 문들을 통하여 도성 안으로 들어가게 함이로다”(요한계시록 22:14, 킹제임스 성경역)라고 선언함으로써, 하늘 진주문을 들어가는 자격조건으로 계명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품음으로써 그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다가 다음과 같은 귀한 말씀을 발견하게 되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17:3. 우리에게 꽤 용기를 주는 좋은 말인 것은 틀림없는데,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어떻게 우리에게“영생”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안다면,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분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사랑을 갖고자 하는가?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연구하라! 우리에게 퍼부어진 그분의 사랑을 제대로 보기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그분을 향한 뜨거운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그분의 진리에 순종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순종은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가를 시험할 수 있는 좋은 증거이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며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요한일서 2:3~4.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자 하는 자마다 먼저 사랑을 소유해야만 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일단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분의 사랑과 희생과 자비에 대해서 감사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평생토록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종이 되어 그분의 명령에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도록 인도할 것이다. 그러한 생애를 살 때, 결국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로마서 6:22.

두 계명에 대한 오해

아마,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으므로 율법이나 십계명은 더이상 의미가 없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는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새 계명이라는 이름은 이전에 없었던 것이 새롭게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기독교회에 널리 퍼져 있는 오해를 푸는 열쇠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여러분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두 계명이 무엇인가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성경은 두 계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하나는 옛 계명이고 다른 하나는 새 계명이다. 이 두 계명을 함께 언급하고 있는 말씀을 찾아서 읽어보면 매우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니라.” 요한일서 2:7~8. 여기에 매우 묘한 말씀이 전개되고 있다. 요한은 새 계명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계속해서 읽어보면, 두 계명에 대해서 좀더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찌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요한일서 3:11.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요한이서 5절. 요한은 새 계명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것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요한이 말하는 “처음”이란 언제를 말하는가? 요한의 시대로부터 몇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레위기 19:18.

예수께서 초림하시기 수천년 전부터 구약 성경 속에는“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라는 율법의 참된 정신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율법의 근본 정신을 잃어버리고 그 의미를 왜곡함으로써, 까다로운 율법주의자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때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유대인들이 당신의 법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오해를 풀어주시면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그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셨다. 그분께서는 사랑이야말로 당신의 율법에 순종할 수 있는 열쇠라는 사실을 아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의 공중 봉사 사업을 시작하는 첫 설교로서 사랑과 자비와 온유에 대해서 설명하는 산상수훈을 발표하신 것이었다. 당시에 그리스도의 설교를 들었던 많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크게 놀랐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들이 그동안 백성들에게 가르쳤던 가르침과 크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의 근본 정신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고, 계명을 진정으로 지키기 위한 비결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당신의 율법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주셨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도 요한은 새 계명을 주신 그리스도의 의도를 사람들에게 올바로 알리기 위해서, 새계명을“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 묘사하였던 것이다. 옛 계명과 새 계명은 그 내용과 목적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지만, 계명의 근본 정신을 “사랑”으로 설명하는 그리스도의 해석이 유대인들에게는 새로운 것으로 들렸을 뿐이다.

예수께서 율법을 완성하는 비결인 사랑을 강조하는 말씀을 전하자,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에 어긋나는 말씀을 하신다고 비난하였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그러한 비난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단호하게 부인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함이로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태복음 5:17~18. 예수께서 사랑을 강조하셨던 이유는 율법을 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율법이 요구하는 바와 그 근본 정신을 완전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였다는 것이 이 성경절에서 증명된다. 그러나 계명에 대해서 깊은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요한복음 13장에서 말씀하신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성경절을 지적하면서 십계명은 폐하여졌다고 여전히 고집할지 모른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또 다른 성경절을 찾아보기로 하겠다. 예수께서는 다음에 나오는 성경절에서 율법과 사랑을 잘 조화시켜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7~4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서, 십계명의 첫번째 돌비에 기록된 첫째부터 네째 계명의 요약이 아닌가? 또한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말씀은 두번째 돌비에 기록된 사람에 대한 계명들의 요약이 아닌가? 그렇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 성경절의 끝에서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사랑을 강조하는 새계명은 새로운 계명이 아니라 구약시대의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을 요약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피해야 할 세가지 위험

첫번째 위험은, 십계명의 근본 정신은 소홀히 여긴채 율법을 행위로만 지키는 것이다. 양의 가죽을 뒤집어 쓰고, 형식과 행위로서 늑대의 본성을 교묘히 숨긴채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런 거짓 양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주말마다 교회에 나가고 각종 교회활동에도 적극적이기 때문에 헌신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은 매우 무미건조하고 까다로운 율법주의로 흘러가게 된다.

두번째 위험은, 율법의 문자적 의미는 중요하지 않고 율법의 정신인 사랑만 강조하는 신앙이다. 대개 이러한 사람들은 자유분방하고 성경이 말하는 원칙을 무시하는 생활을 살게 된다. 이런 사람들도 양의 탈을 뒤집어 쓴 늑대이다. 얼핏 들으면, 사랑과 십자가를 강조하기 때문에 매우 바람직한 신앙처럼 들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에 대한 분명한 순종을 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러가지 이유를 대면서 순종하기를 회피한다. 사실상,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고 있지 않다. 그들은 사랑을 하나의 교리로만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진리대로 순종하며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진짜 양과 거짓 양을 구별하는 판단 기준으로서 다음과 같은 단순하고도 명백한 말씀을 남겨 두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15.

세번째 위험은, 신앙 생활을 감정 위주로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기적과 은사에 그들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하나님의 진리와 그분의 뜻에는 관심이 없으며, 마음 속에 뜨거운 감정을 일으키는 것만을 중요시 여긴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랑은 감정적인 면에 국한되고, 진리에 의해서 뿌리 깊이 박히는 신앙이 결핍되는 경향을 나타낸다. 특히, 자신이 어떤 기적이나 은사를 체험하고 있는 경우에는 마치 자신의 신앙이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여서, 점점 더 밝아지는 빛과 진리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서도, 자신이 경험하는 기적에 만족하여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

싸워야 할 싸움

우리는 지금까지 구원은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는 사람만이 영생에 이르게된다는 진리를 배웠다.

그러나 구원이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해서,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 같은 위대한 그리스도인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만일 신앙 생활에 있어서 싸워야 할 싸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매우 치명적인 오해이다.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들어가기를 힘쓰라 . . .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 . . 마귀를 대적하라 . . . 끝까지 견디는 자”라는 말씀과 함께 싸우면서 전진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이 어디서 어떻게 벌어지느냐에 대한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싸움이다. 누구에게 우리의 의지를 굴복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권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다. 사단은 순간마다 우리를 지배하려고 노리고 있다. 그가 노리는 것은 우리의 의지이다. 하나님께서도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의지를 당신께만 굴복시키라고 호소하신다. 우리의 의지를 누구에게 바치느냐에 따라서 우리를 지배하는 주인이 결정된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6:16

늑대와 양의 이야기를 끝마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여러분 모두에게 들던지고자 한다;

당신은 늑대입니까? 아니면, 어린 양입니까?
당신은 혹시 양의 탈을 쓰고 있는 늑대가 아닙니까?
당신은 늑대들 가운데서 두려워서 떨고 있는 어린 양입니까?
아니면, 어린 양떼들 가운데서 멋대로 날뛰고 있는 늑대입니까?
당신은 어린 양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늑대가 즐기는 쾌락과 으시댐이 좋아서 그대로 늑대로 남아 있고 싶습니까?

만일 당신이 정말로 양이 되고 싶다면,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분의 희생적인 생애를 명상해 보세요.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의 마음을 양털처럼 포근하게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도 양처럼 말하고 양처럼 뛰놀 수 있답니다. 자신을 보호하는 높은 울타리를 보면서 불평하는 대신에, 안전한 푸른 풀밭 속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면서 인생을 보람과 행복으로 채워갈 것입니다.

 

어떻게 승리하는 생활이 가능한가?


성경대로 진지하게 그리스도인 생활을 하고 싶은 분들만 읽으십시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신을 이기고 싶어 한다. 매일 자기 자신의 죄의 욕심과 타락한 본성의 욕구에 패배 당하는 허탈감에 빠져 실의에 차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너무나 많이 만나 볼 수가 있다.

자기 자신과 죄에 대하여 승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수 밖에 없는거야”라고 외치면서 스스로 구원의 안정감을 만들어 내려고 애쓰는 모습들이 눈에 많이 뜨인다. 화를 내고는 후회하고, 실수를 했거나 죄를 범한 후에 오는 죄책감과 혐오감을, “죄인이니까 할 수 없지”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위로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의 현대 교인들이다. 그러나 그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생활, 자신과 죄의 유혹을 승리하는 생활, 예수께서 마음 속에 거하시기 때문에 즐거움과 평화가 깃든 생활을 살 수 있는 비결을 알고자 갈망하고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승리의 생활의 비결일까? 어떻게 하여야 부부 싸움을 이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하여야 자녀들과의 투쟁에서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가지고 승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는 것이 내 못된 자신과 죄에서 승리하는 길일까? 어떻게 하여야 그렇게 나를 괴롭히는 죄의 습관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생활을 갈망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승리의 생애의 비결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다. 진리는 항상 우리의 가까운 곁에 있다. 그러나 그 진리는 항상 깨닫는 자가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 5:16-18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생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에는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되는 데(율법의 정죄와 심판 아래 있지 않는다는 뜻),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때문이다(갈 5:18; 롬 8:14 참조).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들은 성령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 속에 부어진바 되었기(롬 5:5)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므로 그 사랑하는 자들 안에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고 계명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진실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생기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서 성령으로 하나님의 법을 당신의 아들들의 마음 속에 기록하여 주시는 경험이다(히브리서 10:15,16 참조). 이러한 자들이 성령을 따라 사는 자들이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경험이다.

반면에, 누구든지 자기가 타고난 본성인 육신의 인도함을 받고 자기의 정욕이 원하는 대로 살면 자연히 육신의 일을 하게 되고 그러한 사람들은 죄의 법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승리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육신의 세력에서 성령의 해방된 경험이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 앞에 언제나 두개의 길이 놓여져 있다. 성령을 좇는 길과 육신을 좇는 길이 그것이다. 육신의 요구를 따르기로 선택하는 길은 성령을 거스리는 길이고, 성령께 의지를 굴복하고 영의 인도를 따르는 길은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는 길이다. 육신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선한 일을 할 수가 없다. 한다고 할지라도 잘못된 동기에서 선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가 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성경은 죄의 법을 섬기며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성령의 길과 육신의 길 중에서 어느 길을 선택하는가 하는 문제는 항상 인간의 자유 선택의 의지에 달려 있다.

성경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속에 있는 육신이 여전히 영과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 사실을 유의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개심하여 하나님의 영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게 될 때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 자체에게서 분리되어 더 이상 시험 받거나 갈등과 투쟁이 없는 상태로 들어 간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듭났다는 뜻은 마음이 거듭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더 이상 전과 같이 육신의 타락한 정욕과 욕심의 지배아래 있지 않고, 성령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라”(롬 8:13).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이 모든 죄악이 육신 안에 있으므로 만일 육신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허용하면 옛날 우리를 다시리던 그 모든 죄악적 성질들이 우리를 다시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께서 우리를 지배하시도록 굴복하면 육신의 모든 것이 맥을 못추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힘은 죄의 힘보다 훨씬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성령을 좇느냐 육신을 좇느냐 하는 문제의 관건은 각자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 나아와 그분의 손을 붙잡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결단코 그들의 손을 놓지 않으실 것이다. 물론 사람이 하나님의 손을 놓지 않는한 말이다.

로마서 7:14-24을 읽어 보면 육신 아래 있는 사람에 대하여 설명하여 주고 있는 사실을 보게 되는데, 이 사람은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으므로 선을 행하기를 원하나 육신의 권세 아래 있으므로 그의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게 되는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 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 내랴”(롬 7:21-24). 이 말씀은 육신의 지배아래 있으면서 죄의 법을 섬기고 있는 사람의 고뇌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육신의 세력으로 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사도 바울은 외치고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고 외칠 때에 즉시 그 응답이 주어진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리고는 8장 1절, 2절에 가서 바울은 이렇게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에서 한국말 성경에서는 빠져 있는 한 삽입구를 영어 킹 제임스 성경에서는 발견하게 되는데, 킹 제임스 번역을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행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승리의 비결은 성령의 지배를 선택하는데 달려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감동은 우리를 항상 성령을 택하도록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승리는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매일 드리는데 달려 있다. 매일 예수님의 마음을 받는데 달려있다.

위에서 본 로마서 7장의 교훈은 죄인이 거듭나게 될 때에 그 사람이 육신과 싸우는 투쟁에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육신과 더 이상 싸움이나 유혹이 없는 입장으로 들어 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도 싸워야 할 싸움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과 싸우는 영적인 투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따르기로 매일 선택하는 자들은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 필요가 없게 된다. 승리의 생활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마귀의 모든 궤계와 죄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는 생애를 드디어 살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육신의 세력 아래 있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전서 9:26-27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케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 그리스도인이 싸우는 전쟁터는 자기 자신의 몸이다. 정과 욕심을 지닌 자기 자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쳐서 복종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우리 육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해야 한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에서 완전히 벗어나 분리되는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육신의 모든 악한 성정과 욕심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시험이 없는 영역으로 들어가서 품성을 계발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이 있는 곳에서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받으면서 품성이 계발되어 나가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 육체에서 벗어나는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구태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이다. 우리가 구원 받아 시험이 없는 영역으로 옮기어 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중에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대속의 목적이 가장 중요하지마는 또한 못지않게,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율법을 지키신 온전한 순종의 모본을 보여 주심으로 우리들에게도 소망이 있음을 보여 주시고 구원의 능력을 믿을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승리하신 예수의 믿음을 우리도 배워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기로 선택하면 우리도 예수님 처럼 승리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록 14:12은 예수의 믿음을 가진자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아름다운 품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는 사실을 보게 된다.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우리도 승리 할 수 있다. 우리도 우리의 못된 타고난 성질들을 이길 수가 있다. 우리도 유혹을 물리치고 예수의 성품을 가지고 살 수가 있다. 우리도 모든 죄에서 승리하는 기쁜 생애,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 수가 있다. 성령의 능력이 육신의 힘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믿자!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자들이 아닌가! 승리를 갈망하는 자들,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성령의 지배를 받기를 소원하는 자들은 매일 자기를 굴복시키고 자기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치는 실재적인 경험들 해야만 한다. 우리를 그렇게 이끌어 주는 원동력이 무엇인가? 십자가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딱딱해진 인간의 마음을 녹여서 죄에서 부터 해방되기를 갈망하는 마음을 갖게 하신다. 죄와 자신과의 싸움에서 매일 쓰러짐으로 낙망 가운데 있는 자들은 구세주를 바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우리를 죄로 부터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누구든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가 있다. 우리가 성령을 좇아 살기로 선택하고 굴복하기만 하면 말이다.

주님의 눈 아래에 사는 것처럼 살게


그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 얼굴 붉어질 것 같으면 결코 생각 말게
 
그대 무슨 말 속삭이는지 모르지만,
예수님 듣기 원치 않으시는 것이면 한마디도 말하지 말게

그대가 넘기고자 책장이 아무리 그대를 꾀어도
하나님께서 엄숙하게 “그 책 나 좀 보자”고 하실 때,
당황한 표정 지을 것 확실커든
그 책 치워버리게 
 
그대 무엇을 쓰는지 모르지만,
예수님께 보여드리기 어려운 것이면, 그대의 붓을 놓게
 
그대 들떠서 무슨 노래 부르는지 모르지만,
그분의 들으시는 귀 슬프게 하는 노래걸랑 입도 벌리지 말게
 
그대 어디를 가든 크신 하나님께로부터
“그대 어찌 여기 왔느뇨”란 말 듣는 것이 두려우면,
한 발자국도 그런 곳에 들여 놓지 말게 
 
그대가 추구하는 쾌락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너 무엇하고 있니?”라고 물으실 때
깜짝 놀라 움츠러드는 것이걸랑 거기에서 돌아서게
 
그대 무엇을 입든 흠잡을 것이 없고
순결하다는 느낌과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예수님이 그대의 열려진 옷장을 보실 때,
얼굴 붉힘 없고 양심 깨끗함으로 보여드릴 수 있는가?
 
그대가 생각하고, 말하고, 읽고, 쓰고, 노래하고, 걷고,
무엇을 추구할지라도,
그것이 집 안이건 집 밖이건 순결하고 정직하게 행하고
주님의 눈 아래서 사는 것처럼 언제나 살게


 

이런 사람이 온유한 사람


고난과 시련이 왔을 때에 조용한 모습으로 인내하는 사람

어떠한 환경에서도 오래 참고 행복해지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

힘겨운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면서도
감사와 행복의 노래를 만들어서 하늘로 올려 보내는 사람

모욕과 조롱과 오해를 받을 때
인내하며 보복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사람

침울함과 낙망이 엄습할지라도
결코 짜증스럽지 않으며 맑고 유쾌한 정신을 유지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비난과 무시에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사람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사람을 끌어내리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

가장 많은 봉사와 희생을 하였지만
자신의 마음을 가장 낮은 곳에 두려고 애쓰는 사람

시험과 환난이 닥쳤을 때 조용히 머리 숙여 기도하는 사람
세상과 교회 안에서 위대해지고자 하는 야망을 버린 사람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 훈계를 듣거나 책망을 받았을 때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이는 사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