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서론 - 고통의 이유


우주선을 타고 바라보는 지구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기 짝이 없다. 마치 파란 구슬처럼 평화롭게 공중에 떠 있는 우리의 지구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케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실재로 지구의 구석 구석을 살펴보면 그 구석 구석마다 말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보게된다. 죽음과 뜻하지 않은 재난들, 그리고 슬픔과 고통들로 가득 차 있는 우리의 지구. 전쟁과 테러, 홍수와 기근, 범죄들과 굶주림들로 얼룩져 있는 우리의 지구. 이러한 우리의 지구에는 오늘도 죄없는 자들이 희생당하고 있으며 고통이 그칠 날이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왜 이 세상에 고통이 있는 것일까?

흔히들 이렇게 묻는다. 하나님이 정말 사랑이시라면 왜 이 지구에 이렇게 고난과 슬픔과 죽음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가? 더 나아가서 우리를 곤궁에 빠뜨리는 질문은 “왜 하나님께서는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고통을 당하게 하시는가?”라는 질문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자들을 어려움과 고통에서 보호해 주시지 않으시는가?” 라는 질문이다. 가끔 필자는 이러한 도전들을 받는다. “하나님을 잘 믿던 내 남편이 왜 직장을 잃어야 합니까?” “그렇게 믿음이 좋던 사람이 왜 암에 걸려야 합니까?” “왜 내 아내가 나를 두고 떠났습니까?” “하나님은 낮잠을 주무시고 계신 건가요?” 등등. 이 세상에는 대조적인 문제들이 많이 있다. 아름다운 꽃밭과 황량한 사막, 풍요로운 논밭과 굶주려 뼈만 앙상한 인간들. 세상은 선과 악이 어우러져 있다. 우리는 건강과 질병, 생명과 죽음, 기쁨과 슬픔이 함께 존재하는 대조를 보게된다. 아름다운 장미 밑에 가시가 있듯이 말이다. 과연 고통과 불행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리는 그 이유를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찾을 수가 있다.

불행과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가?

불행과 고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고통들은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출애굽기 34:6은 하나님의 성품을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러면 고통이 어디에서 왔을까? 마태복음 13:24~34을 읽어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배우게 되는데, 종들이 밭에서 가라지를 발견하고는 좋은 씨만 뿌렸는데 가라지가 왜 생겼느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 때 주인은 밤에 잘 때에 원수가 뿌리고 간 것이라고 설명을 하였고, 종들이 그 가라지들을 뽑자고 제의하자 추수 때까지 놓아두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그 비유를 예수께서 설명하시는 과정에서 “밭은 세상이요”(마 13:38)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이 세상을 죄와 고통이 없는 곳으로 창조하셨다. 푸른 풀밭에 꽃들이 만발하고 새들이 기쁘게 노래하며 슬픔과 질병이 전혀 없고 건강과 행복만 가득찬 곳으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원수인 마귀가 거기에 죄와 사망과 고통의 씨를 뿌린 것이다.

누가복음 13장을 보면 예수께서 18년 동안 온 몸이 꼬부라져 있던 한 여인을 고치신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누가복음 13:16은 예수께서 그 여인을 “십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의 책임은 사단에게 있는 것이다. 그가 바로 이 세상에 재난과 파괴를 초래한 장본인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하나님의 좋으신 성품을 곡해시켜서 마치 이러한 고통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처럼 오해케 만들어 인간들을 자기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창조하셨는가?

그런데 여기에 몇가지 질문이 생긴다. 사단이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 하나님께서 그를 창조하셨는가? 라는 질문들이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창조하셨다면 결국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책임지셔야 하는 일이 아닌가? 사람들은 흔히 사단을 불타는 지옥에서 부터 올라오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존재로 상상을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원래는 천사였었으며 하늘에서 부터 내어 쫓김을 받은 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누가복음 10:18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마귀가 원래 하늘에 있었으며 하늘에서 하나님을 반역하여 전쟁을 일으켰고 또한 이 전쟁은 이 지구상에서 지금도 진행중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계 12:7~12 참조). 그는 하나님을 억울하게 고소하던 전쟁을 일으켰다가 자기를 지지하던 타락한 천사들인 자기의 부하들과 함께 내어 쫓김을 당한 것이다(살아남는 이들 제22호, 16페이지 참조).

여기에서 한가지 짚고 지나가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귀를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천사 루스벨을 창조하셨는데, 그가 반역하여 스스로 악한 사단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천사들 중에 가장 찬란하고 재주가 있던 자였었다. 에스겔 28장은 그를 “아침 계명성”으로 불리웠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뜻은 “Light Bearer” 즉, “빛을 가진 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가 교만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품게 되었고 드디어 자기도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 하나님과 비기려고 꾀하게 된 것이다(겔 28:13~17; 사14:12-17 참조). 그는 하나님을 공격하며 하나님의 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도전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해와에게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하신 선악과를 따먹어도 괜챦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이기적인 분이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보좌를 전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곡해시키고 거짓으로 고소하여 천사들과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도록 은근히 조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사람을 끌어내리거나 파괴시켜서 자기를 세우려고 하는 정신은 마귀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사랑의 교제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루스벨이 반역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인류들에게 스스로 선택 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주시어 타락할 가능성을 주셨는가?” 라는 질문이 등장하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셨더라면 이 세상에 고통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다.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바로 선택 할 수 있는 자유 의지의 힘이었다. 자유 의지의 선택력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사랑을 할 수가 없는 존재가 된다. 마치 로보트처럼 말이다. 로보트는 인격이 없다. 그저 프로그램된대로 행동하는 기계일 뿐이다. 우리를 인간되게 하며 개인적인 인격체로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이 자유의지의 힘인 것이다. 로보트는 하나님을 사랑 할 수 도 없고 예배하며 찬송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로보트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인격체로 창조하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자녀들이 로보트라고 가정하여 보자. 상당히 편리하긴 할 것이다. 청소도 잘하고 빨래도 잘 도와주고 공부도 잘하며 전혀 말썽을 부리지 않는 아이들로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부모들과 진실된 사랑의 관계를 맺는 아이들이 될 수 있을까? 결코 될 수 없다. 그런 아이들은 그저 프로그램된 기계들에 불과한 것이다. 차라리 가끔 실수를 범하고 청소를 하지 않는다로 할지라도, 천진스럽게 부모의 뺨에다 대고 “아이 러브유”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식의 사랑이 훨씬 낫지 아니한가? 사랑은 프로그램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랑은 강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천사들과 인간들에게 선택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다. 진정한 사랑의 관계만이 참된 행복을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스벨은 교만하여져서 그 자유의지를 하나님을 반역하는데 사용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자기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였고, 자기가 우주를 더 잘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법칙과 율법에서 벗어나면 진정한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단의 말은 천사들과 인간들을 속이기 위한 거짓말이다. 오늘날 청소년들이 법이나 규율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는 것인줄로 착각하다가 방종과 파멸의 결과를 거두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왕국에 문제가 생겼고 반역자 때문에 하늘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드디어 마귀와 마귀를 선택한 악한 천사들이 쫓겨나게 되었고 그들이 바로 악령들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선악간의 전쟁은 이제 곧 끝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모든 죄와 고통의 이유를 밝히시고 죄와 죄의 장본인인 사단을 없애심으로써, 이 세상, 아니 이 우주를 다시 원래의 아름다움으로 회복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로 다시 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실 때에 그것 때문에 반역과 타락의 가능성을 생길 것도 아셨다. 그러므로 그러한 위급한 상황이 생길때에 어떻게 대처하실 것이라는 계획도 영원전부터 세워 두신 것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범죄한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로 가시어 우리들의 반역의 죄값을 대신 지불해 주시고 우리에게 다시 살 기회를 주시는 위대한 희생적 사랑의 계획이었다.
마귀와 악한 천사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을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범죄하였지만, 인류들은 마귀에게 속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쓰라린 고통의 역사를 지나고 나면 이 세상에 다시는 반역이나 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죄와 불순종의 결과가 어떠하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너무 뼈져리게 느꼈기 때문에 말이다. 우리는 잠간동안 괴로움과 슬픔이 많이 이 세상을 지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죄와 고통이 없는 원래의 에덴 동산으로 회복시켜 주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계시며 또한 그 구속의 사업을 날마다 신실하게 진행중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1부 - 시냇물이 마르는 이유를 아시나요?

엘리야와 가뭄

성경에 기록된 엘리야의 이야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길르앗 지방의 험한 산 중에 살고 있던 엘리야는 어느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당시에 배도가 가장 극심하였던 아합왕의 왕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그는 의분을 가지고 악한 이스라엘의 왕 아합에게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는 심판의 기별을 선언하였다(왕상 17:1).

하나님께서는 왕궁을 신속히 빠져 나온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의 동편 광야로 인도하셨다. 그 곳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기적의 손길인 까마귀를 통하여 먹을 것을 공급받았다.

선지자 엘리야의 말대로 맹렬한 태양열 아래에서 땅은 메말라 갔으며, 모든 식물들이 죽어갔다. 그러나 엘리야는 까마귀의 기적적인 식량 공급으로 인하여 기아를 면했으며, 그릿 시냇물에서 충분한 물을 얻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의 육체적 필요를 채워 주시는 이 장면이야말로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용기와 안위가 된다. 모든 이스라엘 지역은 가뭄으로 인하여 심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순종하는 종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통하여 날마다 일용한 양식을 공급하여 주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기적과 섭리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엘리야의 필요를 채워주셨던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당신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신다. 선지자 엘리야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걷고 있는한, 그는 약속된 축복을 온전히 주장할 수 있었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 왕상 17:6

그런데 어느날 엘리야에게도 가뭄의 피해가 찾아왔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더라.” 왕상 17:7. 어느날 아침 마실 물을 뜨기 위해서 시냇가에 나갔을 때, 그릿 시내의 바닥에 깔려 있는 갈색 돌들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방울의 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온 땅을 휩쓸고 있던 무서운 가뭄이 그에게도 닥쳐온 것이다. 완전히 말라버린 시내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얼마 동안이나 엘리야를 시험하셨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엘리야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모든 약속이 한순간에 허물어 지는 것같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뭄으로 황량해진 광야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음과 같은 기별을 주셨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왕상 17:9

한 문을 닫고, 다른 문을 여는 이유

아합 왕궁에서 이스라엘의 왕에게 하늘을 찌를듯한 용기와 믿음을 가지고 재난의 기별을 전하게 하셨던 하나님, 엘리야를 조용한 그릿 시냇가로 인도하여 한적한 곳에서 날마다 까마귀의 기적을 경험하도록 인도하셨던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이 이제는 시냇물을 말리시는 고난을 주신 것이다. 그러나 시냇물이 말랐던 순간은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한 문을 닫으심으로써, 또 다른 문으로 그를 인도하고 계시는 순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실한 종인 엘리야에게 또 다른 경험을 주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냇물을 주셨고, 또한 시냇물을 말리심으로써, 그를 보다 높고 새로운 경험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전전하는 생애이어야 한다. 만일 시냇물이 마르지 않았다면, 엘리야는 그 곳에 편안하게 계속해서 머물러 있기를 원했을 것이다. 자신이 누리는 축복에 만족하며 안일하게 살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고난 이기적 본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다. 사람은 누구나 육신이 편하면 안주하려고 한다. 그러나 엘리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엘리야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가 원하는 바대로 시냇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갈멜산의 놀라운 기적과 사르밧 과부의 기적, 그리고 엘리사와의 만남 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경험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시냇물을 말리우신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언제나 같은 장소에 머무르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한 장소에 머무르면서 안일한 생활을 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편안한 시냇가에서, 모든 것이 풍족한 평화로운 곳에서 인생을 즐기기를 원한다. 바로 이러한 우리 인간들의 자기 중심적인 속성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냇물을 마르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보다 높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의존하고 있던 시냇물이 마를 때마다, 고통으로 인하여 울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냇물을 마르게 하셨을 때, 엘리야의 믿음과 신앙은 퇴보하였는가? 아니다. 그는 시냇물이 마르는 시련 속에서도 굳건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믿음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영적으로 더욱 높은 경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또한 그릿 시냇가에서 보다도 놀라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르밧 과부의 기적을 보여주시기 위해서는, 먼저 시냇물을 마르게 해야만 하셨다. 그것이 인간 엘리야의 눈에는 고통과 시련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필요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이루어질 때, 인간의 믿음은 시험을 받게 된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것처럼 보일 때일지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를 신뢰하는 믿음을 배워야만 한다. 엘리야에게 일어났던 절망의 경험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이고 일어나야만 한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매우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당한 사람들로부터 받게 되는 질문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왜?”라는 질문이다. “왜 내 아이가 죽어야 합니까?” “왜 나는 직장을 잃어 버려야 합니까?” “왜 우리 아이들은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습니까?” “왜 나의 남편(아내)은 나를 버리고 떠나갔습니까?” 우리가 받게 되는 감정적 스트레스를,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잘못으로 돌려 버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면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잘못을 범한 것처럼 그분을 원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잠시, 성경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를 살펴 보도록 하자. 요셉은 무척 행복하고 근심 걱정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그의 “시냇물”이 말라 버렸다. 평소에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해온 요셉을 시기 질투하던 형들에 의해서 상인들에게 팔려서 애굽 사람의 종으로 전락되고 말았던 것이다. 어린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 야곱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야곱은 그의 노년에 또 다시 사랑하는 두 아들(시므온과 베냐민)과 헤어지게 되는 쓰라린 시련을 당하게 된다. 늙은 야곱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의 심정을 잘 표현해 준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창세기 42:36.

얼마나 귀에 익은 소리인가? 야곱이 생애를 흐르던 시냇물이 말라버린 것이다. 그러나 불과 며칠 후에 기쁨으로 터질듯한 마음을 가지고 애굽을 향해 가는 야곱의 모습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잃어 버린 것으로 생각했던 세 아들을 한꺼번에 되찾게 된 것이다. 그의 생애에 또 다른 시냇물이 터져 흐른 것이다. 며칠 전에 시냇물이 마르는 모습을 보면서 원망하던 야곱이 이제는 다른 곳에서 흘러 들어오는 시냇물의 소리를 듣고서 기뻐하는 모습에서, 우리 모두의 연약함을 보게 된다.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변모한 요셉이 자기를 찾아온 형들에게 한 말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보게 된다. “당신들은 나에 대하여 악을 계획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계획하시어.” 창세기 50:20, 한글 킹제임스 성경. 어쩌면 요셉이 형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이미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면서 “과거에 자신이 겪었던 그 절망과 시련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였었다”라고 고백하기란 쉬울지 모른다. 그러나 왜 우리는 지금 말라버린 시냇가에 서서 그러한 믿음의 말을 할 수 없는가? 슬픔과 절망으로 인하여 가슴이 메어져버릴 것만 같은 좌절감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굳건한 신앙을 나타내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너무나 적다. 시냇물이 소리를 내면서 흐를 때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찬양하면서 믿음을 발휘하지만, 시냇물이 말라가기 시작하면 금방 조급해져서 안절부절하며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완전히 말라버린 시냇물 가에서도 하나님의 이 약속을 붙들고 서서 하나님의 선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하나님을 진정한 자신의 “아버지”로 삼고 사는 자들이다.

알곡과 가라지가 분리되는 과정

성경에는 고통이 궁극적으로는 영적인 유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성경절들로 가득차 있다. 베드로는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라고 말했으며(벧전 4:12),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기록하였다(딤후 3:12). 또한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믿기 어려운 말을 기록하여 놓았다.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야고보서 1:2,3

이러한 말씀 외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들이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고난과 고통은 그리스도인에게 신비스러운 축복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야고보는 시련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성품을 준비시켜 주는 하나님의 도구라고 말하고 있다. 요한은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의 특징을 말하면서,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라고 말하고 있다(요한계시록 14:12). 구원받을 자들의 특성 중에서 인내야말로 매우 긴요한 것인데, 야고보는 말하기를 인내는 시험과 시련을 통하여 형성된다고 하였다.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늘을 위하여 준비시키는데 필요한 훈련 과정이다. 고난을 수없이 많이 당했던 다윗은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결론에 도달하였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67,71

이 단순한 하늘의 원칙을 체험적으로 깨닫게 될 때까지, 사람들은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마다 의심과 불신의 안개 속을 헤메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사랑에 대한 의문의 미로를 방황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절대로 자신에게 시련과 고통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불가운데로 지나가는 고통과 시험을 허락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불 시험들을 통해서 우리의 모난 성격들과 이기심이 제거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품성과 생애를 정결하게 해달라는 그리스도인의 기도에 항상 응답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에서 죄와 이기심과 무정한 마음을 제거해 달라는 기도를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그러한 것들을 제거해 내는 수술인 고난과 시련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고난과 시련은 죄와 이기심을 제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유일한 방법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사람들은 계속되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 성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고 말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과 시련으로 인하여 오히려 그들의 믿음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고난과 시련에서 오는 슬픔과 충격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로 인한 감정적 스트레스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와 믿음을 저버려서야 되겠는가? 고난과 시련을 믿음으로 통과하는 비결이 여기에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꼭 필요하거나 최선의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아니면, 어떤 일도 일어나도록 결코 허용하지 않으신다는 확신 안에서 쉬는 것이다. 이것은 흔들리지 않은 믿음을 요구하지만, 우리의 영생을 위해서 돌아가신 그분의 사랑을 생각해 보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께서 허락하신 일이 내게 일어났다고 생각한다면, 평안한 확신을 가지고 내 앞에 놓인 고난과 시련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때때로 우리가 얼핏 보기에는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되는 비극들이 우리의 생애 가운데로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비극 저편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라. 비극 저편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전진할 것을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못한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생기게 된다. 바로 이러한 차이 때문에, 한 사람은 똑 같은 시련과 환란을 통과하면서 잘익은 알곡으로 익어가는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같은 시련과 환란을 통과하면서 그것에 압도되어 불평과 원망을 토해내는 가라지로 변모해 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약속만을 붙들면서 전진해 나가는 거룩한 습관을 익혀야 한다. 바로 여기에 진짜 그리스도인과 가짜 그리스도인의 차이가 있다. 어려움은 우리를 예수께 더욱 가까이 인도한다. 고난과 시련이 아니었으면, 하나님을 잊어버렸을 사람들이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고 진리를 붙잡게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우리의 성품과 신앙의 실체는 평안한 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평안한 때에 하나님과 긴밀한 개인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가장 유익하고 선한 것이 아니면 어떠한 고난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원칙을 깨달은 사람들만이, 고난과 슬픔의 순간들을 올바른 자세로 맞이하게 된다.

 

2부 - 정확하게 계산된 고통과 시련

그대는 외과 의사를 신뢰하는가?

제1부에서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충격적인 시험과 환란을 이기게 된다는 교훈을 배웠다.

하나님의 개인적인 사랑과 관심을 체험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자신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관심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비록 자신 앞에 닥친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과거에 보여주셨던 그분의 변함없는 약속과 사랑을 위기의 순간에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믿음 하에, 우리는 욥과 같은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분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 분을 신뢰하리라.” 욥기 13:15, 한글 킹제임스 성경

부모들이 자녀를 외과 의사의 손에 맡기는 절대적인 신뢰의 태도로부터, 우리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어떻게 사랑하는 자녀의 몸에 외과 의사의 날카로운 수술칼을 대도록 허락할 수 있는가? 또한 수술 후의 심한 통증을 겪게 되는 자녀의 모습을 보는 부모의 심정은 어떠할까? 부모가 자녀의 몸에 칼을 대는 의사를 신뢰할 수 있는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 수술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는 의사의 기술과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두번째, 자녀에게 완전한 치료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치료법을 행하는 의사의 지혜를 믿기 때문이다. 또한 순간적인 고통이 지나가면, 자녀가 이전보다 훨씬 더 건강한 아이로 회복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가끔 실수를 하는 인간 의사에게 자녀를 맡기는 믿음을 행사한다면, 단 한번도 실수하지 않는 하늘 의사를 믿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 일이 되겠는가? 어린 아이는 아무리 자신이 위급한 상황에 놓여있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자원해서 수술을 받기로 선택하지 않는다. 부모가 자녀의 상태를 자녀 자신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녀를 외과 의사에게 데리고 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필요한 시험과 고난을 우리가 스스로 선택해서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상태를 완전히 이해하시며, 어떤 종류의 시험과 고통을 어떤 정도로 받아야만 우리에게 유익이 될 것인지를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비록 수술을 받는 당사자가 부모가 아니라 자녀일지라도, 부모는 자녀의 곁에서 손을 잡은채 안스러운 마음으로 긴긴 밤을 지새우는 것처럼,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고통을 통과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애타는 마음으로, 우리가 승리하는 순간을 기다리고 계신다. 고통과 절망감으로 인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나올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 내린다. 우리들이 고통으로 인하여 울면서 하나님을 원망할 때마다, 하늘 아버지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시련을 당하게 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설명해 주실 수 없기에, 하나님의 마음은 더욱 더 답답함과 안타까움으로 메어질 것이다. 자녀들이 자신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는 부모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고통과 시련의 수술실로 데리고 가는 하나님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용하시는 모든 고통과 시련의 이유들을 정확하게 보여 주신다면, 우리는 그 놀라운 목적과 결과들을 지켜보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에 대하여 경탄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재강림하셔서 우리를 하늘 우주선에 태우시면서, 우리의 인생에 슬픔과 고통과 절망과 좌절을 가져다준 사건들에 대하여 우리에게 설명해 주실 때에야 비로서 우리가 당했던 시련들에 대해서 감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인생을 산다고 할지라도, 동일한 슬픔과 절망과 시련의 경험들이 자신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지난 날에 가졌던 외로움과 절망과 낙담의 경험들이 나의 전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경험들만이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이기심을 만족시키는 안일한 생활이 계속되었다면, 아마 지금과 같은 나의 신앙과 믿음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내게 쓰디쓴 고통의 잔을 마시는 경험을 허락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내 자신의 모습과 형편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시지 않았더라면, 과연 지금쯤 나는 어떻게 되었으며,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을까? 정말 생각만해도 끔직한 일이다.

영원 전부터 세워 놓으신 계획

고통과 시련의 골짜기가 우리를 하늘로 인도하는 준비 과정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일들을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의 일부라고 보아야 한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않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이사야 48:10.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과 시련을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최선의 선택으로 볼 수 있다면, 고난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태도가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바울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리를 택하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키기 위한 구원의 계획을 세워 놓으셨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에베소서 1:4

바울이 말한 이 진리를 정말 이해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우리를 개인적을 눈여겨 보아오셨다. 그 무수한 세월을 통하여,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성화시켜서 결국에는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세밀한 계획을 세워 놓으셨다. 그대가 그분의 계획에 복종하는 마음으로 따른다면, 그분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구원의 계획을 그대의 생애 가운데서 성취시키실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종종 그대에게 아픔과 재난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대가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은 결코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다 .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제나 그대의 구원을 위하여 최선의 유익을 가져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의 필요와 능력에 따라서 우리가 통과하는 시련의 용광로의 온도를 재고 조절하고 계신다.

이러한 설명이 고통과 고난의 문제를 미화시키기 위하여 꾸며낸 이야기처럼 들리는가?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들릴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끝까지 인도하시며, 모든 어려움과 고난에서 건져 주시기 위하여 간섭하신다는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야말로, 이 세상을 불평과 원망과 혼돈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전지전능하심에 따라서 각 사람을 최선의 길로 인도하신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과 섭리에 따라서 각 사람을 인도하시는 동안, 그 이유와 목적을 일일히 개별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분을 믿는 것이 어려운 일인가?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보내 주시지 않으셨고, 그 아들되신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에 대한 불신의 말들이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분께서 항상 우리를 최선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설명만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믿음과 확신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왜 하나님께서 그러한 고통과 시련을 그들에게 일어나도록 허용하셨는지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 아닌 어떤 것을 허락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께서 보실 수 있는대로 미래를 볼 수 있다면, 그들 자신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택하신 그 길을 선택하였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세이다.

고난과 성장의 관계

어려움을 통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 되었던 사람들이 있는가?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자로 삼으시기 전에, 먼저 그가 40년 동안 어려운 광야 생활을 하도록 섭리하셨다. 또한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기 전에, 먼저 밧모섬에서 수많은 세월 동안 어려운 유배 생활을 하도록 섭리하셨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만족할 줄 아는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라는 영감의 글을 기록하기 전에, 먼저 무수한 고문과 옥중 생활을 경험해야만 하였다(디모데전서 6:6, 한글 킹제임스 성경). 바울은 여러번의 옥중 생활을 통하여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는 원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바울과 요한에게 있어서, 옥중 생활과 유배 생활이 그 당시에는 고난과 시련으로 생각되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세상 끝까지 전파할 수 있는 위대한 성경 말씀을 기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왜 사람들은 고통을 받아야만 모든 관심을 한 곳에 집중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께서만 아신다. 우리를 궁극적으로 당신께 인도하시기 위하여 시련과 고난이라는 도구들을 사용하신다고 해서 그분을 원망할 수 있는가? 고통과 시련을 통하여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인도되는 것이 신비한 것처럼, 많은 경우에 있어서 부귀와 건강, 그리고 평탄한 인생길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도 신비로운 일이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높은 탑에 갇혀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탑 아래로 지나가가는 사람들에게 알려서 도움을 받고자 하였다. 그가 소리를 크게 질렀지만, 탑 아래의 분주한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그래서 주머니에 가지고 있던 순금 동전을 떨어 뜨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금 동전을 줍기 위해서 몰려 들었지만, 금동전에 온 정신이 팔려서 아무도 탑에 갇힌 사람의 상황을 알아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무너진 벽으로부터 굳은 회반죽 한덩어리를 떼어 내어서 구멍 밖으로 던졌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가던 어떤 사람의 머리를 쳐서 부상을 당하게 하였다. 그 때, 머리를 다친 사람은 고개를 들어서 위를 쳐다보았고, 탑 안에 갇힌 사람의 처지를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이 예화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은 축복은 자신의 지혜와 노력의 결과로 생기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더 많은 것들을 거두어 들이기 위하여 몰두하지만, 불행과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전하고자 하는 기별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유를 찾아서

시련이 지나간 후,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애에 나타난 “말라버린 시냇물”에 대한 이유와 목적을 설명해 주시는가? 결국에는 설명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 설명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오지 않을 경우도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그 때에 왜 그러한 시련이 필요했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까지,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전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을 당할 때에 그 이유를 찾아보아야 한다. 한 시냇물이 말라 버리면, 대개는 다른 새로운 샘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몇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시련에 대한 만족할만한 대답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는 그분께서 속시원하게 설명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비통함과 슬픔을 이해하시며 동정하시는 그분의 위로를 기도를 통하여 받음으로써 견디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고통의 근원은 죄이다. 너무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마귀가 벌여놓은 비극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망을 받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암이라는 질병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시련과 고통을 허락하실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들을 시험하도록 허용하시는데에는 이유가 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죄에 대하여 경계하는 마음을 갖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안일함과 평안함만이 계속되는 인생이라면, 슬픔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찾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사단이 주는 고통과 시험에 대하여 항상 깨어있는 양심을 가지고 경계하면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공격과 시험을 허락하심으로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항상 깨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간구하게 되기를 원하신다.

일부를 보고 오해하지 말라

라디오와 전신기가 발명되기 전인, 나폴레옹 시대에는 수기 신호를 통하여 서로 연락을 취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깃발을 사용해서 천천히 신호를 전달하면,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불란서의 나폴레옹 장군과 영국의 웰링턴 장군이 워털루 전쟁을 벌이고 있던 때였다. 모든 영국 국민들이 워털루 전쟁의 승패 여부에 대한 소식을 듣기 위해서 손에 땀을 쥐고, 수기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년 동안 나폴레옹은 온 유럽을 정복하기 위하여 애를 써왔다. 이제 영국만 굴복시키면, 그의 천하통일 목적은 성취되는 순간이었다. 전쟁의 승패 소식을 전하는 수기 신호를 보기 위해서, 수많은 런던 시민들이 도버 해협의 해안선에 모여들었다. 갑자기 해협 저편에서 수기 신호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서서히 신호가 전달되기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웰링턴 패배”(Wellington defeated) 라는 뜻을 가진 신호가 전달되었는데, 갑자기 짙은 안개가 내려서 그 다음 소식은 읽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해협에 모여든 사람들은 영국의 웰링턴 장군이 패배한 것으로 단정짓고 말았다. 이제 사람들은 런던 시내에서 최후의 일전을 치루기 위한 준비를 갖추기 위해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런던의 시민들은 반쯤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이틀을 보냈다. 그 때에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으며, 망대에서 수기 신호를 기다리던 사람이 계속되는 수기 신호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수기신호에 의한 전체 기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웰링턴이 워털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을 패배시켰다.” (Wellington defeated Napoleon at Waterloo) 영국 국민들의 오해와는 반대로 웰링턴 장군의 승리로 전쟁이 종결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제한된 능력과 편견으로 인하여,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슬픔과 고난에 대한 정확한 이유와 내용을 알 수 없다. 기별의 일부를 보고서 절망했던 런던의 시민들처럼, 하나님께서 고난과 시련이라는 수기 신호를 통해서 보내 주시는 기별의 일부만을 보고서 쉽게 실망하고 좌절해 버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불신의 안개가 걷히고, 베일이 완전히 거두어질 때에야 비로서 우리가 받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 시종일관 우리와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 속에 있었지만, 전체의 기별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오해하고 실망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재강림하셔서 성도들에게 영광스러운 몸을 주시고, 그분께서 고난과 시련이라는 수기 신호를 통해서 주셨던 전체 기별을 말씀해 주실 때까지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기다리도록 하자.

고통과 시련 중에 있는 인간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 무엇인가? 아직까지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단순히 믿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복을 빌고 계십니까?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제외한 모든 종교는 믿음의 댓가로 복을 약속한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신들이 자신을 믿는 믿음의 댓가로 복을 약속한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구별하게 만드는 중요한 차이점이다.

오래 전부터, 사단은 사람들은 복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사단의 주장이 욥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라.” 욥 1:10.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경배를 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축복을 뇌물로 사용한다는 것이 사단의 주장이다. 만일 사단이 욥에게 승리하였다면, 사람들을 기복 신앙으로 유도하려는 사단의 논리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순결하고 비이기적인 신앙이란 무가치하고 의미없는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욥은 고난과 재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불평을 토해내지 않았다. 그의 순결한 신앙은 위기 속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 그분께로부터 무엇을 얻어 내야 하기 때문에 잘 믿으려고 노력하며 의롭게 살려고 애쓰고 있는가? 아니면, 그대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이 너무나 크고 감사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생애를 살고자 하는가? 고통과 재난 속에서도 순결한 믿음을 지킨 욥의 경험은 우리 모두에게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제시해 준다.

오늘날에도 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오늘날에도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는 소수의 충성스런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경배를 유도하기 위하여 복을 미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단의 궤변을 지지하고 있다.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잘 믿으면, 당신의 사업체와 가정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입니다”라는 설교들이 점점 더 빈번하고 대담하게 하나님의 교회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이러한 설교에 귀가 솔깃해진 세속적이고 어리석은 양들은 보다 많은 헌금과 열성적인 교회 활동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얻어내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믿음과 하나님의 복을 거래할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다.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한번도 하나님께 온 마음을 바쳐본 경험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그들은 돈과 명예와 자랑에 관심이 많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도 자신들처럼 그러한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실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제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좁은 길로 인도하여 그들의 성품과 생애가 결정적으로 변화되어 영생에 이르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만일 세속적 물질이 하나님의 관심사라면,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갈망하는대로, 거대한 교회를 짓는 일을 도와 주셔야 하며, 그 건물을 채울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인도해 들이셔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의 간구를 들어주시지 않으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들의 간청과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면, 하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가지고 사람들을 끌여 들여서 자신을 경배하도록 이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단의 고소가 옳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가난한 나라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빵과 쌀을 나누어 줌으로써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 들이듯이,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건강과 물질적 축복을 나누어 주심으로써 사람들의 경배를 유도하고 계신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러한 방법으로 일하지 않으신다. 의인들과 악인들에게 모두 비를 주시며, 햇빛을 주신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고 정당하게 역사하신다. 잘 믿는 자는 복을 많이 받고,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이와 정반대이다. 오히려 하나님을 잘 믿는 자들에게 어려운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해야만, 순결하지 않은 동기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댓가를 바라보고 당신을 따라오는 자들에게 결코 당신의 제자 직분을 맡기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오히려 당신의 구속 사업에 커다란 방해가 될 뿐인데, 왜냐하면 마귀와 세상이 그러한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조롱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기복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맹목적인 보호가 어떤 결과와 영향을 가지고 올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만일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이 약속된다면, 사람들은 고통과 고난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회에 몰려들 것이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기적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교회에 찾아오는 사람들로 당신의 왕국을 채우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잘 믿는 사람들에게만 축복을 주신다는 것은 사단의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의 이러한 거짓말은 매우 효과적으로 교회를 파고 드는데 성공하였다. 그래서 믿음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부유하게 되고, 믿음이 적은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지 못해서 어렵게 산다는 식의 논리가 현대 기독교회에 편만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을 보면,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번영한다는 증거를 거의 찾을 수 없다. 오직 적은 숫자의 그리스도인만이 부자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부와 재물을 획득하는데 있어서 공평한 기회를 부여받고 있다. 사실, 엄격한 정직과 순결함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 매우 어려운 세상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는 자신의 신앙과 양심을 어느 정도 타협해야만 자신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하나님을 잘 믿어야만 그 분의 인정하심을 받아서 물질과 건강의 축복을 얻을 수 있다는 식의 가르침이 인기를 끌고 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 내기 위해서 열심히 믿고 많은 헌금을 드리는 이상한 모습이 그리스도 교회 안에 생기게 되었다. 더우기 거듭나지 못한 성직자들이 이러한 풍조를 이용하여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이용하고 있는 모습은 정말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복을 비는 기복 신앙과 각종 거짓 은사들을 사용하여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애쓰는 성직자들의 숫자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교회가 눈에 보이는 축복을 받는 장소로 여겨짐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리게 되었고, 그러한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압도적인 수를 차지함에 따라서 세상은 교회를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보기 보다는 이기적 위선자들의 집단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믿음의 댓가로 축복을 구하는 신앙은 잘못된 신앙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축복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진리와 고결함 속에서 굳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날마다 필요한 것들이 공급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모든 다른 약속처럼, 이 약속도 조건적인 약속이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못할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에게 공히 적용되는 원칙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신다는 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하나님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일반적인 원칙들에 순종해야만 한다. 그들이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에게 흘러 들어가게 될 것이다. 씨를 뿌리는 자들만이 수확을 거둔다는 것은 믿는 자와 불신자들에게 모두 적용되는 원칙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의 노력과 의무를 대신하지 않는다.

기복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벌주시는 수단으로 고통과 시련을 사용하신다고 믿는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건강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공개적이거나 비밀스런 죄를 범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고통이나 시련이 항상 죄에 대한 처벌로 내려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리거나 시련 속에 처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렸거나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 또한 어떤 사람의 건강이나 사업이 매우 잘 되어 간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감옥 속에서 외롭게 살다가 목이 잘리운 침례 요한,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베드로, 밧모섬에서 외롭게 죽어간 요한을 생각해 보라. 그들이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가장 가깝게 계셨다.

욥은 재난을 당해야 할 어떤 죄도 범한 적이 없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기 2:3. 욥은 재난을 받을 만큼 큰 죄를 범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런 이유없이 재난을 당했다. 그러므로 고통과 재난이 항상 자신이 범한 죄의 결과로 인하여 생긴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을 비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해도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어서 헤어나오기 어려운 절망의 늪으로 빠지게 된다. 기복 신앙을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그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항상 하나님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숨겨져 있다.

형제 자매들이시여, 늦은 밤, 물 한그릇을 떠놓고 조상신에게 복을 비는 어떤 여인의 기도와 그대의 기도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성황당 산신령에게 치성을 드리면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신앙에서 빠져 나오라. 하나님께서는 그대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에 최선의 방법으로 공급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서 그대에게 허락하시는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하라. 비록 그것이 고통이나 시련의 모습으로 그대를 찾아올지라도. 만일 그대가 복을 비는 신앙을 고집한다면, 그대는 그대를 고통과 시련의 좁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결코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다.

조용한 시간에 마태복음 5장부터 시작되는 팔복을 읽고 명상해 보라.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며, 무엇이 그분의 축복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성경이 말하는 고통의 이유 6가지

1. 사단의 도전

구약 성경에 나오는 욥은 사단의 도전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된 대표적인 경우이다. 욥기 1장에는 사단이 하늘 총회에 참석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회의에서 사단은 자신이 이 지구를 두루 다녀 보았는데,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 왔나이다.” 욥 1:6,7. 이 때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욥에 대해서 아느냐고 물으시면서, 욥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셨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 1:8

그러나 사단은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많은 재물을 축복하셨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서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섬긴다는 것이 사단의 고소였다.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라.” 욥 1:10. 순수한 동기와 양심적인 확신에 의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욥을 번영케 하셨으므로, 욥이 그에 대한 답례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는 것이라고 사단은 주장하였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축복을 욥에게서 거두시면, 그 즉시로 욥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이 욥에 대한 사단의 고소 내용이었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욥 1:11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명예가 걸고서 사단의 이러한 도전을 받아들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욥의 몸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셨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욥 1:12. 그리하여 즉시로 사단은 욥을 시험하기 위해서 욥에게로 내려갔다.

재난이 연속적으로 욥에게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외적들이 쳐들어 와서 소와 나귀를 다 빼앗고 종들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양과 종들을 불살라 버렸다는 종들의 말이 마치기도 전에, “또 한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거친 들에서 대풍이 불어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욥기 1:18,19. 엄청난 재난의 소식을 연속적으로 전달하는 종들의 말을 듣고 서있는 욥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사단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그는 욥의 재산 뿐만 아니라 자녀들을 빼앗아 갔다. 사단은 욥의 입에서 하나님께 대한 저주가 나오길 기대하였다.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욥은 “일어나서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기 1:20~22. 사단은 완전히 실패했으며, 욥에 대한 하나님의 신뢰는 증명되었으며, 욥을 의인이라고 선언하셨던 하나님의 명예는 옹호되었다. 욥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받기 위해서, 또는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욥의 신앙은 순결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단은 포기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욥이 순결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사단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욥기 2:3.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사단은 욥이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욥의 몸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제한하셨기 때문이라고 대꾸하였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이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제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욥기 2:4,5.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사단의 이러한 도전을 받아 들이셨다.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욥기 2:6. 다시 한번 사단은 욥의 몸에 온갖 고통을 주기 위해서 지구로 달려 내려갔다. 인간은 이기적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었다.

사단은 욥에게 고문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 2:7. 욥이 “재 가운데에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던 욥의 아내는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저주하였다(욥 2:9). 친구들도 욥을 찾아와서 욥에게 절망적인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욥 4:7,8. 친구들이 욥에게 던졌던 조롱과 비웃음은 그를 정말 참기 어려운 고통 속으로 몰아갔다.

욥의 고결한 성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부인에게 권면하였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기 2:10. 욥의 입에서 나온 이 한마디의 말에 의해서, 사단은 완전히 패배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단은 더 이상 욥기에 등장하지 않는다. 사단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했던 욥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 ...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고 훗날 그가 땅에 서실 것임을 내가 앎이라.” 욥기 13:15; 19:25(영어 킹제임스 성경역).

욥은 하늘에서 사단이 하나님께 도전했던 사실을 몰랐다. 그는 시련과 고통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 하나님 또는 사단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또한 하늘에서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오고간 대화를 들은 모든 천사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사실도 몰랐다. 그가 알았던 것은 아무런 이유없이 재난이 자신에게 닥쳤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서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태도를 나타내었다. 그의 주변에서 일어난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의 빛에 따라서 행동하였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형제자매들이여, 욥의 모본을 따르라. 욥은 자신에게 어떤 죄가 있길래 이러한 재난이 이르러 왔는지를 깊이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당한 재난의 이유와 원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대 역시 고통의 이유가 그대 자신의 죄나 부족함에 있는지를 깊이 살피라. 만일 어떤 특별한 이유없이 고통이나 재난이 닥쳐왔다고 생각되면, 그대도 욥처럼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고 말함으로써, 그대를 향한 사단의 도전을 물리치라.

2.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이 임한다.

고통이나 심판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임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던 갈릴리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을 상기해 보자.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고.” 눅 13:1.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면, 그 당시 빌라도가 수많은 사람들을 성전에서 살해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도중에 성전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일이 그들에게 일어난 것을 보면, 그들은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악한 죄인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길, “가라사대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 눅 13:2,3. 계속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3:4,5.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과 실로암 망대에 치어 죽은 사람들은 죄를 범했기 때문에 형벌을 받았다기 보다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형벌을 받고 죽었다는 것이 그들의 죽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설명이다.

우리는 어떤 죄로 인하여 갈릴리 사람들이 형벌을 받았는지 모른다. 이 이야기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치 않는 자들은 모두 그와 같이 멸망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갈릴리 사람들이 회개치 아니하여 멸망당한 것을 지적하시면서, 만일 우리도 회개치 않으면 그들처럼 멸망당할 것을 경고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악한 죄인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형벌을 받았다. 만일 우리가 회개치 아니하면 똑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임할 수 있다. 형벌이 우리의 생애 동안에 임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보다 선하다고 착각하지 말라. 최후의 심판날에는 반드시 회개하지 않은 죄에 대하여 보응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교훈이 실로암 망대에 치어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적용된다. 성전에서 종교적인 행위인 제사를 드리고 있었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종교를 가지고 있던, 가지고 있지 않던 간에 회개치 않는 자들은 모두 이와 같이 멸망당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대에게 시련과 고통이 있는가? 혹시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라. 그대가 그리스도인이든지 아니든지를 막론하고 회개치 않는 죄에 대해서 그대는 언젠가 그 댓가를 지불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고통이 온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이야기는 고통의 이유에 대한 또 다른 면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 일화가 주는 교훈은 죄의 문제나 회개가 아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의해서 고통이 올 수 있으며, 고통을 당하고 있는 당사자는 믿음을 통하여 그 고통에서 해방되고 치유될 수 있다는 놀라운 교훈이 담겨져 있다.

제자들은 그 사람이 소경이 된 이유를 죄의 문제와 결부시켰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그 사람은 자신이나 부모의 죄로 인하여 소경이 된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이나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대답하셨다(요 9:3).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병든 자에게 어떤 치유의 기적을 베풀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시 위해서 소경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대하여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봉사사업을 시작하실 때, 그 소경이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드디어 그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 나왔으며, 치유함을 받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서 드러내기 위하여 소경이나 앉은뱅이가 되는 특권(고통)을 받은 불구자들이나 환자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올 때 즉시로 치유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소경이나 절름발이, 그리고 앉은뱅이들에게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치유함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당신이 치유함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불구자로 평생을 살다가 죽었다고 해서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이 불구자가 된 진정한 이유를 모르며, 왜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은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시간이 이르기 전에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잘못된 희망을 가지고 서두르면, 실망하게 될 것이다. 조용히, 그리고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대한 가장 강력한 믿음의 행사이다.

4. 그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고통이 온다.

바울의 경우는 때때로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고통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바울은 신실한 종이었다.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훌륭하게 쓰임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연약한 인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이룩한 놀라운 사업과 희생에 대하여 스스로 교만해질 수 있는 위험을 보셨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스스로 자신을 높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높여질 위험을 아셨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셨다. 우리는 그 가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매우 바울의 육체를 매우 괴롭혔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가시를 몸에 가지고 다녀 보았는가? 얼마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가? 바울은 세번이나 그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울의 육체에 그대로 남겨 두는 것이 최선이라고 결론지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만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 가시는 바울의 육체 속에 일평생 동안 남아서 고통을 주었다. 바울이 “사단의 사자”라고 불렀던 그 육체의 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의 구원을 위하여 남겨진 바 되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은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고후 12:7~9.

바울은 많은 계시를 받았던 사도이다. 그로 인하여 사도 바울이 자고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도 그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위험이 있었다. 이러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 슬픈 일은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일수록 교만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경우들을 다루시는 법을 아신다.

가장 많은 신약 성경을 기록하였고, 제자들과 사도들 중에서 가장 많은 전도 여행을 하였던 위대한 사도 바울의 기도도 응답되지 않았는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기도가 응답되지 못하는 것은 믿음의 부족이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병을 낫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려도 치유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부족하거나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몰아부치는 것은 매우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 병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정말 순수한 믿음이 있다면, 그리고 그대가 진정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한다면, 온 마음을 다하여 그분의 섭리와 계획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바울이 자신의 육체 속에 박혀 있는 가시에 대해서 성경에 기록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고통을 허락하시는지에 관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겸손하게 낮추기 위한 경험이 어떤 것이며, 또한 언제 그러한 경험들이 필요한지를 아신다. 그러한 경험들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우리는 바울을 생각하면서 “하물며 바울과 같은 사람도 육체의 가시가 필요했는데, 나처럼 연약하고 쉽게 교만해질 수 있는 사람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더욱 필요하지 않겠는가?” 라고 말하도록 하자. 바울과 같은 위대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필요했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 불평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고통은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찾아온다. 교만은 우리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준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교만을 치료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주 사용하시는 치료책은 우리의 육체에 가시를 허락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결과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왜냐하면 가시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모른채 불평과 불만의 세월을 보낼 수도 있고, 그분의 뜻에 감사하면서 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당신께서 우리의 몸에 가시를 허락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을 당할 때에 그 이유를 찾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몇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시련에 대한 만족할만한 대답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육체의 가시가 제거되지 않는 이유를 발견하였지만, 어쩌면 우리는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을 수도 있다. 그 때까지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비통함과 슬픔을 이해하시며 동정하시는 그분의 위로를 받음으로써 견디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은 육체를 취하시고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우리와 동일한 시험과 고통을 경험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실 수 있었다. 시험을 겪었던 사람만이 시험받는 자를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다.

그대는 지금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가? 어쩌면 그대는 지금보다 더 겸손하고 온유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기 위하여 고통의 훈련학교에 입학한지도 모른다. 마음을 낮추고 왜 그대에게 이러한 고통이 제거되지 않는지를 기도해 보라.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67,71

5. 더 나은 봉사를 위해서 고통이 온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그대가 고통과 질병을 가질 수도 있다. 그것은 고통 중에서 가장 거룩하고 가치있는 고통인데, 우리는 그러한 고통을 “대리 고통”(vicarious suffering)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모든 면에 있어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른 종이었다.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도 고통에 관하여 더 높고 많은 교훈을 배운 사도이었던 것같다. 다른 제자들은 어려움과 고통을 인내하라고 권면하였지만, 바울은 한걸음 더 나가서 고통의 시간을 즐기라고 말하였다(롬 12:12; 골 1:24). 이러한 면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매우 유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1

예수님의 고통은 대리적인 고통이었다. 그분의 고통은 자신의 유익이나 죄로 인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십자가에서 인내하시고 모욕을 당한 것도 전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그분의 전 생애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러한 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고통을 받을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고통을 받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렇다.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면서 바로 이 점을 강조하였다.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은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웠노라. 내가 교회 일꾼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 1:23~29

24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받은 괴로움”을 기뻐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라고 말한 바울의 간증을 주목해 보자. 바울은 타인을 위하여 고통을 받았으며, 또한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육체에 채웠다. 그의 이러한 소원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0,11. 바울은 “고난에 참예함과 그의 죽으심을 본받”기를 열망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생애의 최고의 목표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고난받다가 죽는 것. 물론, 바울은 고난을 통과하는 자신의 희생이나 공로를 통해서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구세주께서 주신 진리와 함께 고통당하기를 원했으며,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원했다. 그리스도처럼 자신도 대리적인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음으로써, 그리스도의 경험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원했던 것이다.

고통을 기뻐해야 할 이유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냈던 두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자신의 신앙이 고난을 통하여 어떻게 승화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바울의 경험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받은 위로를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 주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찰 정도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바울의 봉사에 있어서 새로운 장을 열어 주었다. 그는 자신이 고통을 많이 받을수록 시련과 슬픔 중에 있는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준비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께서 고난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돕고 어떻게 동정하실줄을 배우셨던 것처럼, 바울 역시 고난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 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고후 1:3~7.

여기에서 바울은 고통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받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의 위로와 구원을 위해서 고통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받는 고통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고통 중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받고 있는 고통에 마음을 쓰기보다는, 고통을 통하여 자신이 좀더 동정적이고 자비로운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사실로 인하여 감사하였다. 바울은 고통을 통하여 고통받는 자들의 심정을 좀더 정확하게 헤아릴 수 있게 되었으며, 더욱 유능한 전도자가 될 수 있었다.

고통은 봉사를 위한 준비 과정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도 고통을 받으셨던 것이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을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2:18. 예수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육체를 쓰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인류를 위한 봉사를 위함이었다.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함에 싸여 있음이니라.” 히 5:2.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과 중보자가 되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 5:8,9.

사람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 투병 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병자들의 느낌과 절망을 이해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셨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히 2:18). 예수께서는 가장 많은 고통을 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우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위로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분은 고난의 왕이시며, 또한 위로의 왕이시다.

바울이 그토록 선망했던 것이 바로 이 경험이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경험하셨던 그 방법 외에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자비롭고 은혜스럽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그는 고난의 경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경험을 알게 되기를 소원하였다.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0.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고통 중에서도 즐거워 할 수 있었으며, 남겨진 육체의 가시에 대하여 만족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고통은 특권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빌 1:29,30. 바울은 여기서 고난을 특권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 특권도 받지만, 그분과 그분의 진리를 위하여 고통을 받는 특권도 동시에 받는 것이다. 고통을 이러한 관점에서 보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적다. 만일 그대가 고통을 이러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면, 그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인하여 당하게 되는 모든 고통 속에서 오히려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인생을 모르는 사람이다.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쉽게 낙심하게 되며,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없고, 위로해 줄 수도 없다. 깍아지른듯한 벼랑의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그와 비슷한 경험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고, 또한 도와줄 수 있다. 그대는 지금 고통 중에 있는가? 그렇다면, 혹시 지금 하나님께서 그대를 더 나은 봉사 위해서 준비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음을 겸손히 낮추고, 그대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명상해 보라.

6. 법을 범한 결과 때문에 고통이 온다.

지금까지 우리는 고통과 질병이 일어나는 다섯가지 이유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러한 이유들은 특별한 경우들이며, 대개, 고통이나 질병은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이나 자연법칙들을 범하는 결과로서 온다. 고통이나 질병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는 경우는 흔치 않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인간 스스로가 그들의 고통에 대한 원인을 제공한다. 노아 홍수나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 그리고 바로의 군사들이 홍해에서 수장당한 사건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하실 때에는 분명한 목적과 공의 하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 넘칠 때, 멸망이 이르러 온 경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러한 경우는 매우 드물며 대개의 경우 고통의 원인은 인간 스스로에게 있다.

그러므로 질병이 발생하면 먼저 자신이 율법과 자연 법칙 중에서 어떤 것을 범했는지를 신중하게 살핀 다음에 잘못된 것들을 회개하거나 개혁해야 한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건전한 상식이자 올바른 신앙 자세이다. 여기서 자연 법칙이란 생명의 법칙을 말하는 것으로서, 복종하면 살고, 범하면 죽게 되는 철칙을 의미한다.

율법이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도덕률을 말하며, 자연 법칙이란, 물고기가 물에서 살면 살고, 물 밖으로 뛰어 나오면 죽는 것과 같은 법칙을 말한다. 고압선을 만지면 죽는다는 법칙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고의적으로 전깃줄을 만져서 죽었을 경우에, 우리는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려서는 않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독버섯을 먹는다면, 그는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의 댓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생명의 법칙은 우리가 그것을 무시할 경우에 반드시 그 댓가를 지불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법칙을 지키면, 그것은 우리를 지켜주는 충실한 종이 되지만, 그것을 어겼을 경우에는 무서운 주인이 된다.

자연 법칙을 어겼다고 해서 항상 즉각적인 댓가를 지불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몇 년 후에 그 결과를 받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전혀 그 결과가 없이 사라지는 경우는 단 한번도 없다. 우리가 그것을 어긴 결과를 느끼든지 느끼지 못하든지 간에 그것은 항상 결과를 남긴다. 그러므로 자연 법칙은 그것을 어겼을 경우, 그 결과가 지연될 수는 있어도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20대에 무엇을 뿌렸다면, 40대 혹은 50대에 가서는 그 결실을 거두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뿌려 놓고서, 그 결과가 생기지 않기를 희망하지만 그러한 희망은 헛된 것이다. 세상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세워 놓으신 자연 법칙 또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자연 법칙은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에 따라서 변경될 수 있는 것으로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홍해를 갈라놓는 기적을 행사하심으로써, 자연 법칙을 파괴하셨다고 주장한다. 정말 그런가?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세워놓으신 법칙은 결코 파괴하는 분이 아니다. 공기보다 가벼운 물체는 중력에 의해서 공중에 뜰 수 없다는 자연 법칙이 존재한다. 그러나 공기보다 훨씬 무거운 보잉 747 점보 제트기가 하늘을 날지 않는가? 비록 공기보다 무거운 쇠덩어리일지라도 그것에 적당한 크기의 날개를 부착하고 빠른 속력으로 활주로를 달려가면 양력을 받아서, 공중에 날 수 있다는 또 다른 자연 법칙이 존재한다. 쇠덩어리는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는 자연 법칙이 존재하지만, 엄청난 무게의 유조선을 조선공학적으로 잘 설계하면 부력을 받아서 바다 위에 뜰 수 있다는 또 다른 자연 법칙이 존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 법칙 안에서 모든 현상을 해석하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인간의 어리석은 꾀 안에 가두어 놓으려고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당신께서 이 우주에 세워 놓으신 자연 법칙 안에서 자유롭게 기적을 행사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하나님의 율법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율법인 십계명도 결코 변경되거나 폐하여질 수 없는 우주의 법칙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봉사를 가리키면서, 이제는 율법이 폐하여졌으므로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만, 예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고 지금도 선언하고 계신다(마 5:17,18). 자연 법칙을 범하였을 경우에 고통을 당하거나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율법을 범하였을 경우에는 그에 대한 댓가를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데, 성경은 그 댓가를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율법을 범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은 결국에는 지옥의 형별을 받게 되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그 결과를 받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다섯째 계명을 범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는 용서의 정신이 사라지게 된다. 미움과 원통함이 온 마음과 정신을 지배하게 된다. 그 결과, 혈압이 올라가고, 심장에 무리가 가며, 갑상선에 이상이 생기고, 몸과 마음이 오랜 기간 동안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서, 결국에는 각종 질병과 고통이 그대를 찾아오게 된다.

하나님께서 불쾌히 여기시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한동안 아무런 형벌이나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먹고, 마시고, 시집 장가간 다음, 그 결과로 인하여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할 때까지 자신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노아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불쾌히 여기시는 아무런 징조도 없이 120년을 지낸 후에 갑자기 홍수가 이르러 왔던 것처럼, 쾌락과 자기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지금 현재는 어떤 특별한 징계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죄악의 잔이 차는 순간, 그들은 스스로 헤어나오기 어려운 고통과 고뇌의 경험을 갖게 된다.

비록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율법과 자연 법칙에 불순종할 때에는 그에 해당하는 결과를 받게 된다. 예를 들면, 열심히 일하는 자만이 수확을 거두게 된다는 것은 자연 법칙이다. 그러므로 열심히 일하지 않고 기도만 하면서, 좋은 열매와 결과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도 불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유전법칙에 의거하여 병약한 유전인자를 부모로부터 물려 받을 수 있다. 그들도 사고를 당하고, 불신자들이 걸리는 똑같은 질병에 들어 죽게 된다. 그렇다면, 육체적인 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통과 불신자들이 당하는 고통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 질문은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에게 동일한 자연 법칙을 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고통과 불신자의 고통 사이에 눈에 보이는 어떤 차이가 있다면, 각자가 어떤 반응과 태도를 나타내는가에 있지, 결코 하나님께서 그들 각자에게 적용시키는 자연 법칙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세상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의 생애에 다가오는 재난과 고통으로부터 면제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사건들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는 사람에 따라서 크게 다를 수 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복종함으로 고난을 이겨내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일이라면 어떤 일에서도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을 통하여 고난 속에서도 안정된 마음으로 고난의 끝을 기다릴 수 있으며, 그러한 깊은 영적 체험을 통하여 더욱 더 고결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활용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편애를 받는다거나 자연 법칙에 따라서 받게 되는 고통을 경감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자연 법칙을 적용시키지만, 하나님을 신실하게 신뢰하는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영적인 원칙을 적용시키고 계신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당신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적인 법칙에 따라서 그들의 마음에 용기를 주고 견딜 수 있는 힘을 공급하여 주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런 조건없이 베풀어져 있지만, 그분의 치유하시는 능력은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께 나오기로 선택하는 사람에게만 조건적으로 제공된다.

그러므로 고통이나 질병을 가지고 있는가? 먼저, 그대의 양심과 생활 가운데서 어떤 법칙이 범하여지고 있는가를 살펴 보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그대의 죄와 잘못을 지적해 주실 때, 즉시로 회개하고 잘못된 것들을 개혁하라. 그리고 모든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맡겨라. 바로 이것이 그대가 어두운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는 비결이다.

 

더 유능한 의사가 되는 방법


때때로 의사들이 병으로 드러눕는 경험은 자신에게 유익을 가져다 준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의사는 더욱 동정적이고 이해심 많은 의사로 성장하게 된다.

한번은 한 목사님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어떤 외과 의사에게 “의사들이 가끔식 아파서 병원 신세를 지는 것은 본인에게 많은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목사님의 그 말을 들으면서, 그 외과 의사는 동의한다는 뜻의 미소를 지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에 목사님은 의사로부터 자신을 방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병실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목사님은 석고 붕대를 감고서 누워 있는 의사를 발견하게 되었다. 의사는 아마 몇 달 동안 침대에 계속해서 누워 있어야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하였다. 의사는 목사님의 기도가 필요해서 방문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다. 의사는 말하기를 “목사님, 아세요? 얼마전부터 저는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을 곰곰히 생각했답니다. 의사들은 때때로 아파봐야지 좀 더 동정적이 될 수 있다고 하셨죠? 그때는 웃고 말았지만, 제가 이렇게 빨리 병원 신세를 지게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이제 제 환자들의 고통과 어려움음을 점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그들을 더 잘 보살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석고 붕대를 감은 팔다리는 간지러워서 죽을 지경이지만, 굽힐 수도 없답니다. 간호사를 불러서 어려움을 호소해도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기는 커녕 웃으면서 모든 것이 괜찮으므로 염려할 것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죠. 앞으로도 두 달 가량은 이렇게 누워 있어야 하는데 정말 끔찍합니다. 이번 일로 인하여 저는 분명 더 나은 의사가 될 것입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맞습니다. 의사들은 종종 아플 필요가 있다는 말씀 말입니다.” 고통과 질병은 다른 사람들에게 더 나은 봉사자가 되기 위해서 찾아올 수 있다. 

마음의 평화를 지키는 비결


그대의 생애 중에 가장 괴롭고 힘든 때는 언제인가? 진리를 위하여 돈을 포기했을 때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명예를 버렸을 때인가?

자녀들이 부모의 신앙을 거절하였을 때인가? 아니면 장래에 대한 걱정과 염려로 인해서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렸을 때인가? 이러한 모든 것들이 고통과 시련을 주지만,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괴로운 시간은 가끔씩 홀로 기도하는 밤이다.

아침에 예배를 드리고 찬미를 부르며 하루를 힘차게 시작했지만 낮에 찾아오는 시험과 유혹에 자신의 육체와 영혼이 이리 저리 끌려다니면서 시달리다가 밤이 되어서 잠자리에 들 때,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께 하루 동안의 보호와 승리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었지만, 실패에 대한 용서의 기도와 좌절에 대한 위로의 간구를 드릴 수 밖에 없는 날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15,24.

“세상을 버린 사람이 많지 않지만 자아를 이기고 승리한 사람은 너무나 적다”는 영감적 말씀이 있다. 이기는 자만이 하늘을 얻으며, 말씀을 순종하는 자만이 영생을 얻는다는 진리를 알고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성품과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때야말로 고뇌의 순간이다. 시험과 시련이 다가와서 흔들어대는대로 감정과 육체가 흔들리면, 화가 나며, 미움이 생기며, 질투가 생기고, 짜증이 나게 된다.

우리는 아침에 기도할 때, 시험과 유혹이 자신에게 다가올 때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승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정작 기도가 응답되어 자신을 부인할 수 있는 기회인 시험과 유혹이 오면, 자신을 부인하기 보다는 화를 내고, 억울해 하며, 불평하고, 분한 마음을 자제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자신이 죽지 않은 상태에서 시험을 받을 때, 그 결과는 항상 동일하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5,6.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바로 이 길만이 고통과 불안과 불만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대신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다. 어떻게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힐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의 모습을 기억해 보라.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기 위해서 당신의 두 손과 발에 사정없이 못질 했다. 그들의 못질과 창질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으셨다. 다만 심한 통증과 아픔으로 인하여 그분의 입술사이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새어나올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불평의 소리도 아니었고, 잔인한 로마 군인들과 포악한 군중들을 향한 저주의 소리도 아니었다. 다만 고통의 신음소리와 동정의 눈길만이 있었다. 그분께서는 하늘 아버지께 그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를 드림으로서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선한 모본을 보여 주셨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 없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일을 도와 주시기 위해서 때때로 우리에게 시련과 고통을 허용하신다. 새벽에 드렸던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자아를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을 만들어 주신다. 주님께서는 때때로 로마군인들과 같은 사람들을 우리에게로 보내셔서 우리의 손과 발에 못을 박도록 허용하신다. 포악한 군중들과 같은 사람이 와서 침을 뱉으며 경멸하도록 허락하신다.

그러한 시험을 당할 때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서 털 깍이는 양처럼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십자가에 못박힐 것을 기대하면서 기다리시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온 로마 군인들에게 어떤 태도를 나타내야 하는가? 그들을 대항하여 칼을 빼고 방패를 들므로써 또 다시 그리스도를 못박기로 선택할 것인가?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에 우리가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은 영혼의 고통으로 인한 신음 소리와 나를 못박고 있는 그 사람을 위한 용서의 기도이다. 불평과 억울함과 분냄과 짜증과 같은 저항은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경험이 아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에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기로 선택하는 대신에 로마 군인들의 난폭함과 몰인정함에 대해서 원망하고 불평하는가? 뿐만 아니라 그러한 시련과 시험을 허락하신 주님을 야속하다고 생각하는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3,14

그런데 우리를 십자가에 못박는 로마 군인은 실제적으로 누구인가? 많은 경우에 그들은 우리와 가장 가깝게 지내는 이웃이다. 그들은 많은 경우에 우리의 아내요, 남편이요, 자녀들이요, 이웃이요, 교우요, 시부모요, 며누리요, 친구요, 직장 동료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우리와 멀리 떨어져서 사는 친구나 친척은 우리에게 시험과 시련을 주는 로마 군인의 역할을 할 수 없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구와 교우와 이웃들이 우리에게 가장 큰 시험거리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에 자아가 죽어가는 것은 자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누군가가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일을 도와주어야 한다. 내가 나의 육체에 못을 박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존심과 이기심을 죽이기 위해서 로마군인들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육체가 못박힐 때에 우리를 못박는 그 로마 군인들을 향하여 용서의 기도를 드리면서 저항하지 않고 고통의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로마 군인과 폭도들이 주는 시험과 유혹에 대항하여 싸운다면, 다시 말해서 육체 속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자아를 부인하고 극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는 일 자체를 거부하게 되며, 따라서 자아는 결코 죽을 수 없다.

우리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리를 경험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진리를 듣거나 읽기 보다는 진리를 보기를 원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의 말씀을 읽기보다는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생활을 보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경험해야만 한다. 우리는 각자가 어떤 경우에 쓰러지는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우리의 영혼이 항상 주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에만, 우리는 주님의 가장 작은 음성도 감지할 수 있는 예민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는 양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시험과 유혹을 만났을 때, 우리에게 피할 길을 알려 주시는 주님의 음성은 매우 적은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가장 작은 음성에라도 즉시 굴복할 수 있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예민한 양심이 필요하다. 시험과 유혹을 즉시로 감지할 수 있는 예민한 양심과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양심을 계속적으로 예민하게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매일 말씀을 대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의 양심을 예민하게 보존하는 일에 있어서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은, 같은 죄를 습관적으로 되풀이 할 때, 양심이 점점 무디어져 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왠만한 작은 죄에 대해서는 회개할 수 있는 마음 자체가 준비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 144,000은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인을 받는 무리를 말하는데, 요한은 그들이 경험의 노래를 부른다고 하였다. 그들이 부르는 경험의 노래는 어떠한 노래일까? 그들은 진리를 위하여 재산을 바치고, 병든 자를 치료하며, 가난한 자들을 구제한 노래를 부를 것이지만, 그들의 노래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노래는 자신을 정복하고 승리한 노래일 것이다. 자신과 싸우는 전쟁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전쟁 중에서 가장 큰 전쟁인데, 왜냐하면 그 전쟁은 이기심과 자존심을 포기해야 승리할 수 있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자신과의 싸움, 그것은 한번 거듭났다고 해서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육체를 쓰고 있는한 예수께서 오시는 그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 날에 예수께서 성도들에게 다시는 죽거나 썩지 않는 영화로운 몸을 주실 때까지, 그 전쟁은 계속될 전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전쟁에 대해서 길거나 지루하다고 느끼지 말아야 한다. 이 전쟁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피흘리기까지” 싸울 것을 격려하고 있다. 이 싸움에서 우리는 길고 지리한 시간에 의해서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개혁은 때때로 순간에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자신의 육체와의 전쟁은 그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의 귀에 두가지의 복음이 들리는 것이다. 한 복음은 시험과 피흘리기까지 싸울 것을 격려하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피흘리기 보다는 차라리 죄와 더불어 살아가는 쉬운 삶을 권고한다. 그대는 이 둘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려는가?

오직 적은 그리스도인들만이 세상과 돈과 명예를 버리기로 마음을 정하고 있다. 그러나 사소한 시험을 받을 때, 자신의 육체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치사한 자존심과 이기심을 버리고 승리하는 생애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는 그것보다 훨씬 더 적다. 비록 과거에 많은 것을 포기하고 버렸을지라도, 그리고 앞날에 대한 불안함과 염려를 모두 주님께 맡겼을지라도 지금 이 순간, 유혹과 시험에 대해서 승리하는 경험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마음에는 고통과 시련이 사라질 날이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시험과 시련이 올 때에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병 고치는 은사에 대한 오해


병 고치는 은사 = 하나님의 뜻 + 환자의 믿음 + 영을 분별함

먼저, 병을 고치는 치유의 은사와 병자들을 위한 기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과 남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서 치유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치유의 은사는 많은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 은사는 예언의 은사, 기적의 은사처럼 아주 드물게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 중의 하나이다(고전 12:28).

하늘이 인정하는 치유의 기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조건들이 동시에 만족되어야만 한다. 첫째, 먼저, 환자가 치유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어야만 한다. 둘째, 환자가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세째, 치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영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즉,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며, 또한 환자의 믿음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치유의 은사는 항상 영을 분별하는 은사와 함께 다닌다. 바울 역시 이 두 은사를 함께 가졌었다. 바울은 어떤 앉은뱅이 청년을 보면서 그가 치유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으며, 또한 그 청년이 치유받을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한 사실을 분별하였다. 그래서 치유의 은사를 행사하기로 결정하였다.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을 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가는지라.” 행 14:9,10.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은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뜻과 환자의 믿음 즉, “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이 조화될 경우에만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치유의 은사를 위탁받았다면, 그는 항상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함으로써, 하나님의 품성을 반사해야 하며, 각 개인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의 생애와 품성에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게 있어야 하며, 환자를 위하여 안수 기도를 드릴 경우에 그 환자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의 뜻과 상반된 기도를 드릴 수 있으며, 이러한 경우 오히려 마귀가 개입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된다. 마귀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거나 소홀히 여기면서 드리는 치유의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 대신에 역사함으로써, 사람들을 깊은 혼돈 가운데로 끌고 간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선물로 주신 건강과 몸을 함부로 취급하는 자들을 치유치 않으실 것이며, 그들이 가진 믿음과 무관하게 치료하지도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실 경우, 하나님의 치유하심은 오히려 사람들의 방종을 조장하는 것이 되며, 믿음이라는 치유의 유일한 조건을 스스로 허물어 버리시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치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그 다음에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과 조화롭게 일할 때에만 하늘의 능력이 임할 수 있는 것이다. 치유의 은사는 생명을 나누어 주는 봉사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무분별하게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치유의 은사를 받을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바울은 치유의 은사를 받았지만, 그는 육체에 가시를 가졌으며, 그것을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세번이나 간구했지만 거절되었다.

치유의 은사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나누어지지만,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 특권은 모두에게 주어져 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약 5:13~16

근래에 들어서, 병자들을 위한 기도에 대한 큰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치유를 그들의 주요 목표로 삼는 종파들이 생겨났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질병과 죽음의 실체를 부인하고 모든 것을 기도를 통해서만 회복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이들은 모든 질병을 악령들의 활동으로 규정함으로서, 사람들을 깊은 혼돈 가운데로 이끌고 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환자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헤아려 보는 일없이, 그리고 환자의 영과 믿음을 분별하는 일없이 안수 기도하는 일이 성행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의 기도에도 눈에 보이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난다. 그러나 놀랄 필요 없다. 왜냐하면 기적이 항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살아남는 이들 제22호 참조).

우리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라는 말씀에 근거되지 않는 이러한 운동들을 지지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육체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신체와 세포가 필요로 하는 음식과 건강 법칙들을 준수함으로서, 균형있고 행복한 그리스도인 생활을 영위해야 한다. 우리의 육체를 지으신 하나님은 육체의 건강에 관심이 있으시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소중히 여기듯이, 육신의 건강도 소중하게 취급되기를 원하신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오늘날, 기적과 치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때때로 고침을 받은 사람에게 침묵하도록 요구하셨다.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눅 8:56.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고 예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마 8:4. 소경에게 이르기를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마 9:30. 예수께서는 결코 사람들의 주의를 자신에게로 집중시키려고 애쓰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세상에 알리거나 주장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그저 조용히 일을 하시면서 병자를 고치셨을 뿐이지, 자신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 계획하지 않으셨다. 치유의 은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을 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응답받는 기도를 드리는 비결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이 아프거나 고통받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는 그분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병과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셨다. 그분께서는 끊임없이 구원하시고 치유하시길 원하시지만, 우리는 병자들을 데리고 그분께 나오는데 너무 느리다. 예수께서는 항상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는 분으로 알려지기를 원하신다.

우리 모두에게 죄로부터의 자유와 용서를 약속해주신 것처럼, 치유에 대한 그분의 약속도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그 유일한 조건은 믿음이다. 여기서 믿음은 우리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께 떼를 쓰거나 자신의 요구를 주장하는 태도로 나타나서는 안된다. 병자들을 위한 기도에는, 하나님께 대한 실제적인 믿음과 그분의 놀라운 지혜에 대한 신뢰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대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구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기도에 응답을 받아서 질병으로부터 회복되는데, 어떤 사람은 응답이 주어지지 않은채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가?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믿음과 기도에 따라서,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각 개인을 개별적으로 대하신다. 만일 환자의 가장 큰 관심이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때에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상황들을 통해서 당신의 뜻과 목적이 이루어지게 되기를 간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믿음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위하여, 고난과 아픔 그리고 심지어는 죽음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일찍 잠재우심으로써, 견디기 어려운 시험으로부터 그를 보호하여 주심으로써, 그의 구원에 인을 치실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응답받는 기도를 드리는 비결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항상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가 되어야 한다.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이러한 기도에는 자기 포기, 복종, 그리고 거룩한 성품의 향기가 흘러 나오게 된다.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적극적인 자세가 포함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치유의 기도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요구 사항을 하나님께서 무조건 동의해달라는 식의 기도를 중단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그들의 기도 시간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능력있는 기도의 사람으로 변화될 것이다.

 

 

기도와 의무에 대한 오해


기도는 우리의 의무와 상식을 대신하지 않는다. 믿음과 행함이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기도와 행함 역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으며, 또한 각자가 해야 할 의무도 주셨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환자가 의사에게 진찰받기를 원하시는가? 아니면 먼저, 환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다음, 그분께 도움을 요청하길 원하시는가? 이러한 질문은 한마디로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요구하시며, 그러한 우리의 태도에 축복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최선을 다했는데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했을 경우에만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한 기도는 비오는 날에만 기도하는 구두닦이 소년의 기도와 같은 것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기도와 의무는 병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를 하나님께 여쭈어 보면서 우리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도움을 구하듯이 말이다. 그분의 뜻과 섭리가 무엇인지를 살피면서, 우리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대로 밀고 나가다가 스스로 탈진되어 포기 상태에 이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양심과 지능을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 둘 다를 사용해서 그분과 교통하고 그분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

한 소년이 물에 빠졌다. 구명대가 근처에 있는 나무에 걸려 있었다. 그 때 마침 그 곳을 지나가다가 소년을 본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조치들을 선택할 수 있다. 1. 그는 소년을 구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2. 그는 소년에게 구명대를 던져줄 수 있다. 3. 그는 물 속으로 뛰어들어 직접 구해줄 수 있다. 4.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다. 이 4가지 조치 중에서 어떤 방법을 택해야 하는가? 만일 그가 수영을 잘 할 수 있다면, 직접 물에 뛰어 들어서 소년을 구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만일 수영을 잘 하지 못하거나 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구명대를 던져 주거나 구명대를 던지고 자신도 물에 들어가서 소년을 도와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지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를 드리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태도가 기도와 의무가 잘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구명대를 던지지도 않은채 무릅을 끓고 소년을 구해달라는 기도만을 드리기로 선택한다면, 그는 매우 어리석은 판단을 내렸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최선을 다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뜻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 안에서 최선을 다하기를 원하신다. 만약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 앞에 던져진 구명대를 붙잡기를 거절한채 하나님만을 신뢰한다고 말하면서 기도한다면, 그의 상식과 정신이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맡기신 의무를 혼돈하지 말라. 또한 의무를 행하는 그대의 마음과 정신이 하나님의 영의 주관 하에서 인도될 수 있도록 기도하라. 바로 이것이 기도와 의무가 조화롭게 균형을 이룬 상태이다.

 

질문과 대답


1. “8살된 아들이 뇌종양으로 오랫 동안 심한 고통을 겪다가 죽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또는 “내 아들이 자동차 사고로 죽음을 당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계셨습가?”라는 처절한 질문에 대한 답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시련과 고통을 당할 때, 그 이유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 상에서 처절한 죽음을 당할 때에도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시지 않으셨습니다”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장래에 좋은 결과가 생길 것을 아셨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이 죽는 순간에도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 간섭하지 않으셨다면, 그 어린아이가 죽어 가는 순간에도 장래에 어떤 좋은 결과가 생길 것을 보셨던 것임에 틀림없지 않습니까?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깊은 슬픔 가운데서도 다정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무슨 시험을 받고 있으며,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가를 아십니다. 그분처럼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2. 저는 견디기 고통 중에 있는데, 무슨 기도를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별로 잘못한 것이 없는데, 어째서 이런 고난이 제게 왔을까요?

고통이 항상 죄의 결과로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병 중에 있거나, 고통 중에 있다면, 사람과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한 사실이 있는가를 살피셔야 합니다. 만일 범죄한 사실이 있다면,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통회함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비록 그대가 범죄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은혜가 자신에게 여전히 머물러 있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자신에게 고통을 가져올만한 어떤 죄악도 범하지 않았다고 생각되면,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저는 지금 고통 중에 있습니다. 제가 어떤 면에 있어서 부족하였거나 부족함을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다면, 저의 부족함을 용서해 주시고, 주님께서 교훈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저는 우둔하고 지혜가 없사오니 제가 깨달을 수 있는 방법으로 저를 가르쳐 주시옵소서. 혹시 제가 당하고 있는 이런 고통으로 인하여 저를 성장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하신다면, 부족한 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결국에는 저의 고통을 통하여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제게 이루어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저로 하여금 인내케 하시고, 항상 범사에 감사하게 합소서. 아멘.”

이와 같은 기도는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자신에게 유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만일 그대에게 고통이 찾아온 진정한 이유를 안다면, 그대는 고통에 대해서 결코 불평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베푸신 특권으로 인하여 기뻐하게 될 것이며,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시며,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는 바울의 말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빌 1:29; 고후 1:7).

3.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잘 믿기만 하면 되지, 꼭 율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아야 합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믿음과 사랑과 율법을 서로 분리하여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사랑과 믿음은 매우 강조하지만, 율법에 대한 순종은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기는 신앙 생활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율법과 사랑을 분리시키지 않습니다. 오히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것이며, 율법을 순종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증거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입니다.

이제, 믿음과 사랑과 율법의 관계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살펴 봅시다.

1) 먼저, 믿음과 율법에 대한 관계를 살펴 봅시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굳게 세우느니라.” 롬 3:31. 이 말씀은 믿음이 좋은 사람은 율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2) 둘째로, 사랑과 율법에 대한 관계를 살펴 봅시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롬 13:10. 이 말씀 역시 사랑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완성시킨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반드시 율법을 존중해야 한다는 강력한 선언을 남기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함이로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고 반드시 이루리라.” 마 5:17. 이 말씀은 율법의 영원불변성을 강력하게 증거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 신앙 생활에 있어서, 믿음과 사랑과 율법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구원은 믿음과 은혜로 얻는 것이지만, 진짜 믿음과 사랑이 있는 사람(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순종하는 거룩한 생애를 살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리로 하자.” 요일 3:18 (한글 킹제임스 성경). “만일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 분을 알고 있음을 아는 것이요 ‘나는 그 분을 아노라’ 하면서 그의 계명들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쟁이니, 진리가 그 사람 안에 거하지 아니하니라.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사람 안에서 완성된 것이니 이로써 우리가 그 분 안에 있음을 아느니라.” 요일 2:3~5 (한글 킹제임스 성경).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이유


침례 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선지자이다. 광야에서 외쳤던 그의 기별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 왔다.

그리하여 온 유대 땅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헤롯왕의 죄를 공개적으로 지적한 결과로 인하여, 토굴 감방 속에 갇히게 되었다. 옥중 생활의 음침함은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런 상태로 여러 주일이 지나감에 따라서 낙담과 의심의 그림자가 그를 엄습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아무런 구원의 증거도 보여 주지 않으셨다.

그의 생애는 극기와 인내의 생애였다. 그는 자신의 전도 결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업이 영광스럽게 열매 맺는 일을 보지 못한채 옥에 가둠을 당했다. 예수님의 12제자와는 달리, 그는 예수께서 하늘의 능력을 가지고 일하시는 장면을 목격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흙먼지를 뒤집어 쓴채 걸어가고 있는 가난하고 허름한 유대 청년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증거를 찾아내는데 실패하지 않았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러 요단강가로 찾아오셨을 때는, 요한은 그의 생애에서 최고의 명성을 유지하던 때였다. 산헤드린이 파견한 사자들과 백성들의 모든 관심이 요한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혹시 요한이 약속된 메시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들로 하여금 요한에게 모든 주의를 집중시키게 만들었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눅 3:15. 만일 요한이 자신을 메시야라고 선언하고 로마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을 일으켰다면, 수많은 제사장과 백성들이 그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의 영예를 구하는 대신에 자신에게 쏠려 있던 모든 관심과 존경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우던 청년에게로 돌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지상 봉사 사업을 시작하시자, 요한은 자신의 사명이 거의 다 마쳐졌음을 알았다.

요한을 괴롭힌 하나님의 침묵

예수께서 당신의 사업을 시작하시자, 요한의 광야 집회에 참석하던 대중들은 예수께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에게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저 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침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불평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떠나갔지만, 요한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은 아직 그의 곁에 있었다. 그들은 감옥에 접근하도록 허락되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신들의 선생인 침례 요한에게 그리스도의 복음 사업에 관한 소식과 백성들이 어떻게 그분의 곁에 모여 들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만일 나사렛 예수가 진짜 메시야라면, 왜 메시야의 오심을 위하여 생애를 바쳐서 봉사한 요한을 석방시키기 위해서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가 라는 의심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자신들의 스승이 평생을 바쳐서 이룩한 사업이 뿌리채 흔들리고 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침묵을 지키고 계신 것일까?

제자들의 불신의 말이 계속됨에 따라, 침례 요한의 마음에도 동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아마 사단은 요한과 제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흔들림을 보면서 매우 기뻐하였을 것이다. 요한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기별자인 요한의 마음 속에 낙담과 실망의 씨를 뿌리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셨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사명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였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은혜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오셨다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명에 대하여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설명하였던 것이다(눅 3:16,17).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는 분으로 임하실 것을 고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요한의 마음을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는 예수께서 다윗의 보좌를 취하시고 로마 제국을 뒤집어 엎음으로써, 유대백성을 구원하길 기대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예수께서 왕으로서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는 조용한 모습을 보면서 요한은 당황하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자기 주위에 제자들을 모으시고 백성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감옥 속에 갇힌 요한은 자신을 따르던 많은 군중들과 제자들이 이제는 자기를 떠나서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에게로 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쩔 수 없는 인간적 외로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날마다 로마제국의 멍에가 이스라엘을 무겁게 누르고 있고, 헤롯왕과 그의 부패한 정부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나날이 높아가고 있으며, 가난한 자들과 고통당하는 자들의 외치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창기나 세리들과 식탁을 함께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광야의 선자자인 요한에게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때때로 여러 시간 동안 사단이 그에게 다가와서 그의 마음과 정신을 괴롭혔으며, 죽음에 대한 공포의 그림자가 그를 압도하려고 하였다. 사단은 요한의 영혼 속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침묵만을 지키고 계셨다.

그토록 오랫 동안 기다려 오던 메시야가 그분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서 전해온 기별의 결과가 무엇이란 말인가?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충성과 헌신을 아신다면, 왜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자신을 구출해 내기 위한 구명 운동을 시작하지 않으실까? 왜 하나님은 침묵을 지키고 계신 것일까? 이러한 의혹의 그늘이 그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있었지만, 요한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받고 있는 시험을 표현하지 않았다. 요한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리스도께 침례를 베풀었을 때에 들었던 하늘의 음성, 성령의 비둘기 같은 강림, 예수의 흠없는 순결함, 그분께 임하였던 성령의 능력, 그리고 구약이 그분께 대하여 증거하고 있는 확실한 예언의 지식이 나사렛 예수가 약속된 메시야라는 그의 확신을 붙들어 주었다.

은근한 책망의 기별

요한은 자신의 답답함과 염려를 제자들에게 토로하는 대신에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서 질문하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라는 요한의 질문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갔다. 침례 요한이 예수를 가리켜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고 선포한지 얼마나 되었는가? 이스라엘의 군중들 앞에 확신에 찬 선포를 하였던 그가 이제는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라고 질문한 것이다. 그것은 요한의 마음을 흔들고 있던 심한 괴로움과 실망의 표현이었다. 하나님의 계속되는 침묵 속에서 신실한 요한의 믿음도 극심한 투쟁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즉시로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예수께로부터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한채 병자들과 고통당하는 자들을 치유하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맹인들은 군중을 뚫고 길을 더듬으면서 예수께 나왔으며, 온갖 종류의 병자들이 예수 앞에 실려 나왔다. 능력있는 치료자의 음성이 귀머거리의 귀를 뚫었다. 한마디의 말씀, 한번의 접촉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하여 햇빛과 주변의 경치와 친구들의 얼굴과 구원자 예수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였다. 예수의 음성은 죽어가는 자들에게 건강과 활력의 원동력이 되었다. 요한의 제자들이 이러한 모습들을 경이의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날이 저물었다. 드디어 예수께서는 그들을 부르시고 그들이 목격한바를 그대로 요한에게 전하라고 명하시면서 이렇게 덧붙이셨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전하되 ...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누가복음 7:22,23.

제자들은 그 기별을 요한에게 전하였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신 예수의 말씀은 요한에 대한 은근한 책망의 말씀이었다. 요한은 그 말씀의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요한은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 전파하여” 라는 메사야에 관한 예언을 상기하였다(이사야 61:1,2). 그리스도의 봉사 사업은 자신이 메시야임을 선언할 뿐 아니라, 그분의 왕국이 어떤 모습으로 세워질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이제, 요한은 그리스도의 사명의 본질에 대해서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죽음 이후에 드러난 침묵의 이유

헤롯왕은 결국 요한의 목을 치라는 사형 명령을 내렸다. 요한이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방문하지 않으셨다. 요한의 생애는 죽는 순간까지 고독함과 외로움의 계속이었다. 침례 요한의 생애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왜 하나님께서는 요한을 어두운 감방 속에서 신음하다가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셨는가?” 인간의 통찰력으로는 이 어두운 섭리의 신비를 투시할 수 없다. 그러나 요한 역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자들은 그리스도께서ㅓ 쓰셨던 희생의 면류관을 쓰게 된다. 그들은 사람들의 오해 속에서 사단의 공격 목표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길은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인기를 얻는 길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분을 따르는 종들의 길도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외롭게 걸어야 하는 길이다.

요한을 추종하던 사람들이 요한의 구명 운동을 위하여 애쓰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당신의 종인 요한을 구출하는 일에 개입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요한이 그 시험을 견뎌낼 것을 아셨다. 예수께서 친히 요한의 감옥을 찾아가심으로써, 요한의 마음에 기쁨을 주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지상에 오신 유일한 목적에 모든 촛점을 맞추고자 하셨다.

장차 오랜 세월 동안 감옥에 갇혀서 살다가 외롭게 죽어갈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 교회의 사도들을 위하여 요한은 고독한 순교의 잔을 마셔야만 하였다. 또한 중세기의 종교 암흑시대 동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외로운 옥중에서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외면당하고, 하나님 마저도 아무런 기적적 증거를 주시지 않을 때, 그들은 침례 요한의 외로운 죽음을 기억하면서 위로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침묵에는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 그 침묵의 이유와 의미를 신뢰하는 자들은 환란과 고통 가운데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다.

비록 요한이 기적적인 구출을 받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버렸거나 그의 고통과 고뇌를 외면하셨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천사들이 옥중에 보내서 그와 함께 거하도록 하셨으며, 그리스도의 사업에 관한 진리가 그 앞에 분명하게 펼쳐지도록 섭리하셨다.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에녹이나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 엘리야일지라도, 결코 옥중에서 외롭게 죽은 침례 요한보다 위대하거나 높은 영예를 받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립보서 1:29.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대의 고통을 보시면서 무거운 침묵을 지키실 때, 그대 역시 침묵을 지키면서 믿음으로 전진하라. 바로 이것이 고통과 시련의 터널을 통과하는 지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