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온유의 의미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5. 팔복에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쌓아가는 길이 사방으로 나 있다.

그리스도의 필요를 깨닫고, 죄 때문에 애통해 하고, 그리스도와 고난의 학교에 함께 앉은 사람들은 거룩한 하늘 교사로부터 온유를 배우게 될 것이다.

온유는 하늘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 조건 중에 첫번째이다. 예수께서는 온유에 대한 최고의 모본을 우리들 앞에 세워 놓으셨다. 그분께서는 왕중의 왕으로서 사람들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대신에, 오히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기로 작정하셨다(빌 2:6). 인류를 구원하시는 그분의 태도와 생애에는 고집이나 냉혹함과 같은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비우심으로 자신의 생애를 아름다운 자비와 친절과 동정으로 물들이셨다. 그러한 주님께서 이제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명령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 11:29.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아를 물리침으로서 이러한 것들이 더 이상의 영혼의 중심부를 차지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바라보는 사람은 다니엘이 “인자같은 이”를 바라보았을 때 그랬었던 것처럼 자신에 대하여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 하였”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단 10:8).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마다 자신의 더러움과 부족함을 더욱 더 깊이 인식하게 되며, 자신을 높이고 사랑하는 정신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가지고 있는 자존심은 사단이 우리를 유혹하는데 자주 사용하는 발판이다. 사람의 본성은 언제나 자기 과시를 위해서 애쓰고 투쟁을 위해서 준비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은 이기심과 교만과 지배욕을 멀리하게 되며, 그리하여 영혼의 평안과 안정이 깃들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서 전전긍긍하지 않게 된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밀어낼 생각도 품지 않게 된다. 오히여 그리스도의 발아래 앉는 것을 제일 높은 자리로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인도하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분의 손이 자신을 이끌어 주기를 기다린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자아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그것이 굴욕과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방어 태세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자아가 죽고 우리의 생애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안에 감추어질 때는, 무시나 경멸을 조금도 괘념치 않게 될 것이다. 비난에 대해서는 귀머거리가 되며, 조소와 모욕에 대해서는 소경이 될 것이다.

세상이 가져다 주는 행복은 물질과 환경이 변하면, 행복도 변하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은 어떤 환경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세상 재물의 양이나 세상 친구들의 숫자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불변하시는 것처럼, 그분께로부터 받는 행복과 평안도 불변하고 영속적이다.

만일 우리의 가정에 그리스도의 온유함이 나타난다면, 집안에 행복한 분위기를 조성시켜 줄 것이며, 다툼이 사라질 것이고, 화를 내면서 대답하는 모습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온유는 흥분된 감정을 가라앉히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매우 부드럽고 매력적인 분위기를 가져다 준다. 만일 우리의 가정에 온유한 정신이 있다면, 우리의 가정을 하늘의 아름답고 행복한 분위기로 채울 것이다.

온유는 오래 참고 어떠한 환경에서도 행복해 지기 위한 노력을 중단하지 않는 것이다. 온유는 조용한 모습으로 고난과 시련을 견딘다. 온유는 언제나 감사하고 나름대로 행복의 노래를 지어내며, 하나님을 향하여 심령의 가락을 지어낸다. 온유는 실망과 낙담을 극복하고, 오해와 비난에 대해서 보복하지 않는다. 온유는 부르뚱한 태도나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온유는 침울하거나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지 않는다. 온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지 않는다. 온유는 마음에 상처를 받을지라도, 불만을 품거나 상처받은 자신을 동정하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말못한 슬픔과 고통으로 인하여 짓눌려 있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눈을 들어 당신의 자애로운 성품과 생애를 바라보도록 초청하신다. 그분께서는 눈물이 앞을 가리워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 곁에 서 계신다. 우리가 단순한 믿음으로 그분을 바라보며 당신의 손을 꽉 붙잡기를 원하신다. 그분의 마음은 우리의 비애와 슬픔과 시련을 향하여 항상 열려 있다. 만일 우리가 거칠고 반항적이며 불만스러운 정신을 버리고, 온유하고 겸손한 정신으로 그리스도를 찾으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영혼 속에 진정한 평안과 화평이 깃들도록 하실 것이다. 성령 충만의 가장 큰 증거는 온유함으로 표현된다. 죄, 가난, 슬픔, 외로움으로 인하여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친절한 말, 동정적인 표정, 감사의 표시는 온유한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된 특징이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우리의 첫 조상이 아름다운 에덴 동산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자아를 높이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아희생을 통해서 잃어버린 땅을 되찾아 주기로 계획하셨던 것이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편 기자는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기록하였던 것이다(시 37:11). 온유한 자에게 약속된 그 땅은 사망과 저주의 그림자로 어두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는 실망도 없고, 슬픔도 없으며, 죄도 없고, 병들어서 신음하는 소리도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거기 계시며, 평화와 완전한 행복이 있을 것이다.

온유란?
고난과 시련을 조용한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것
어떠한 고통스런 환경에서도 행복의 이유를 찾아 내는 것
어두운 고통의 터널 속에서도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것
모욕, 조롱, 오해 속에서도 짜증과 분노를 버리고, 맑고 유쾌한 정신을 유지하는 것
다른 사람의 비난과 무시에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것
스스로 높아지고자 애쓰는 사람을 뒤에서 슬며시 끌어내리지 않는 것
가장 많은 봉사와 희생을 한 후에 자신의 마음을 가장 낮은 곳에 두는 것
세상과 교회 안에서 위대해 지고자 하는 야망을 버리는 것
자신보다 못한 사람의 책망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이는 것
의도적인 따돌림을 당했을 때, 그것을 자신에게 필요한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것
가장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가족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미소를 나누어 주는 것

권두언


어떤 그리스도인이 사막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오아시스를 찾아서 말입니다. 기갈된 목을 추겨주는 물이 있고 뜨거운 태양빛을 가리워 주는 나무들이 있는 오아시스를 찾아서 고달픈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베낭을 메고 지도를 가지고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용기와 인내와 소망을 가지고 지평선을 향하여 내닫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꾸 뒤에서 따라온다는 느낌이 들어 돌아다 보니 그 분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나를 따라 오시지 마세요! 나 혼자 충분히 찾을 수 있다구요!” 그러자 예수님의 발걸음이 더디어 지더니 결국에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걸었습니다. 오아시스를 향하여서... 그러다가 해가 졌습니다. 사막의 밤은 정말로 추웠습니다. 온 몸에 냉기를 뿌려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습니다. 예수님이셨습니다. “나에게 담뇨가 있는데...” “아녜요! 필요없어요! 나 혼자 할 수 있다니까요!”

그 이튿날 그리스도인은 넘어져 무릎을 깼습니다. 다시 뒤에 베낭을 메신 예수께서 달려 오시더니 “내게 약품이 있는데...”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말했습니다. “나혼자 할 수 있다고 했쟎아요! 왜 자꾸 따라 오시는 거죠?” 갑자기 저 지평선에 오아시스가 보였습니다. 시원한 물과 나무들이 있는 오아시스가! 그리스도인은 정신없이 달렸습니다. 오아시스를 향하여! 그런데 아무리 달려가 보아도 오아시스는 가까이 오지 않고 항상 저만치 지평선 위에만 걸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루종일 달리다 지쳐 버린 그는 드디어 그것이 오아시스가 아니라 사막의 신기루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밤이 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길을 잃어 버렸습니다. 여전히 추웠습니다. 절망감 속에 그는 모래 위에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뒤를 돌아다 보았습니다. 거기에 예수께서 여전히 서 계셨습니다. 이번호의 기사들은 진정한 해방과 자유의 경험을 갈급하는 분들에게 오아시스 같은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대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


물 위를 걸은 베드로

그대는 물 위를 걸을 수 있는가? 물론 그대는 걸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대 스스로 걸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대가 물 위를 걸을 수 없다고 믿는 그 믿음이 그대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그대는 예수께서 그대에게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실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언제나 그리고 누구나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대에게 물 위를 걸어서 오라고 말씀하시면, 그대도 걸을 수 있지 않은가?

새벽 미명의 갈릴리 바다를 연상해 보자. 희뿌연 회색빛 안개를 뚫고 다가오는 희미한 존재가 있다. 배 위에는 무서워 떨고 있는 열두명의 남자들이 있다. 그 때, 파도를 가르며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니 두려워 말라.” 생기를 되찾은 베드로가 재빨리 말하기를, “주여, 만일 당신이시거든 나로 물 위를 걸어 당신께 가게 하소서.” 예수께서는 즉시로 “오라!” 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차갑고 시퍼런 파도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과 예수님과의 거리를 측정해 보았다. 그는 생각하기를, “아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 어떻게 물 위를 걸어.” 그는 망설였다. 순간적으로 의심이 그를 삼키워 버렸다. “지금까지 어떤 사람도 물 위를 걸었던적이 없었쟎아!”

이러한 장면이 베드로에게 일어날 뻔했다. 그는 검푸른 바다 속을 내려다보면서 움추러들 수 있었다. 그의 믿음은 시작도 하기 전에 힘을 잃고 사라질 수 있었다. 만일 베드로가 파도 위로 그의 발걸음을 내밀지 않았더라면,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장면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며, 그것을 통하여 믿음에 관한 놀라운 교훈을 배울 수도 없었을 것이다. 믿음은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실에 묶여 있는 코끼리의 믿음

한번은 동물원을 방문했었었다. 그 곳에서 높이가 1미터도 채 안되는 한 거대한 코끼리가 울타리 안에서 어슬렁 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코끼리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서성거리고 있었지만 한쪽 다리에 얇은 쇠사슬이 묶여져 있었고, 쇠사슬은 작은 말뚝에 매여져 있었다. 코끼리를 지키는 사람이 그토록 약한 구속력을 가지고 코끼리를 붙잡아 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이 내게는 우스꽝스럽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을 실로 묶어서 성냥개비와 같은 말뚝에 매어 놓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매여져 있는 코끼리를 계속해서 보고 있는 동안, 코끼리에 대한 구속력이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코끼리를 지키는 사람이 나타나자, 나는 그에게 이처럼 작은 쇠사슬과 말뚝을 사용한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는 말하기를, 그 코끼리는 힘없는 애기처럼 울타리 안에서 잘 구속당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코끼리가 모든 구속력, 즉 울타리와 쇠사슬을 극복하고 도망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소유하고 있지만, 자신이 그런 일을 결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도록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쇠사슬과 말뚝을 힘없이 뽑아버리고 달려나갈 수 있지만, 그렇게 하기엔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힘이 너무나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히 그러한 도전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다.

실제에 있어서 코끼리는 쇠사슬과 말뚝에 의해서 구속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에 의해서 구속당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적고 연약한 쇠사슬과 말뚝이 코끼리의 자유를 빼앗은 것처럼, 그들의 삶에 있어서 반신 반의 하는 믿음으로 인해서 죄와 시련에 대한 승리를 잃버린채 살아가고 있다.

나의 경험

나 역시 과거에 자유를 빼앗긴 코끼리와 같은 경험을 하였다. 나는 20살이 채 되기 전인 청소년기에 침례를 받았다. 그 당시 나는 매우 신실하여서 100%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원했다. 침례를 받기 위한 준비로 성경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공부는 믿음은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애인가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일련의 성경 공부 후에 침례를 받게 되었고, 결국 나의 이름은 교회 명부에 올라가게 되었다. 그 때부터 나의 인생에 있어서 자아와 죄에 대한 치열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단의 강력한 동맹자인 자아와 죄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나의 결심을 쉽게 허물어뜨렸다. 패배감과 실망이 나를 압도하였다. 젊은 시절 동안, 나는 계속해서 교회 안에 머물러 있었지만 나의 실망과 좌절의 곡선은 아래 위로 계속해서 오르내렸다. 어떤 때는 심하게, 어떤 때는 약하게....

그러나 여전히 나는 신실하였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나의 소원은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신학교의 학생이 되었고, 또한 목사가 되었다. 성경을 연구할 때마다 나는 죄를 정복할 수 있는 분명한 가능성을 엿보았지만, 유혹과 시험에 대한 만성적인 패배감에 시달려온 나는 내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할 수 있는 성경절들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겉으로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가운데 최선을 다하여 투쟁하겠다는 결심을 되풀이 하였지만, 실제에 있어서 죄에 대한 승리를 전혀 기대하지 않은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쇠사슬은 만들어졌으며, 말뚝은 땅에 점점 깊이 박히기 시작하였다.

죄에 대한 승리를 약속하는 수많은 성경절들을 읽었지만, 그러한 말씀과 나의 연약한 경험 사이에서 나는 깊은 혼돈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성경에 기록된 승리를 약속하는 말씀들을 내 자신의 경험에 맞추어서 해석하게 되었다. 지금도 성경책의 테두리 여백의 곳곳에는 당시에 내가 가졌던 의문과 다른 의미로 해석하려고 애썼던 노력이 여러가지 표현으로 남아 있는데, 그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죄에 대한 승리의 약속과 전혀 상반되는 것이었다. 나는 죄에 대한 승리가 실제적으로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성경은 죄로부터의 자유를 약속하고 있었지만, 나는 계속되는 패배의 경험에 의해서 묶여지고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었다.

나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코 물 위로 걸을 수 없다고 단정지었기 때문이다. 나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충분한 증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나는 그것들을 믿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약속과 증거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과거에 나의 거듭나지 않은 육적 경험을 통하여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나는 성경의 약속과 증거보다는 내 자신의 경험을 더욱 신뢰하였다.

내가 물 위를 걸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실험실에서 간단하게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구태어 실험을 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통해서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가 물 위를 걷기 전까지, 사람들은 인간은 결코 물 위를 걸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세상에서 인정받고 있는 보편적인 수압의 법칙에서 해방된 자들만이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우리는 믿음이 지식을 앞서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통하여 믿음을 제한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언제나 “먼저 나에게 증거를 보여 주십시요! 그러면 믿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어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증거를 주겠다”라고 말씀하신다. 만일 베드로가 믿음을 활용해서 예수께서 명하신대로 행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지식을 소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믿음을 실행에 옮김으로서 자신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지식을 얻게 되었다.

오라!

“만일 주님이시거든 내게 물 위를 걸어 오라고 말씀하소서.” 베드로의 호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허락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오라!” 예수께서는 그 이상의 어떤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설명을 부가하지 않으셨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짧은 명령에 의존하여서 확신을 가져야만 하였다. 그러나 주님의 단순하고도 짧은 명령은 베드로에게 영감적인 확신을 불러 일으켜 주었으며, 베드로는 신속하게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주 사용하시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그것은 자주 구체적이 아닌 부르심으로 우리에게 들려온다.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살펴보자;

아브라함의 부르심: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이제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산중에서 내가 네게 알려 줄 한 산에서 그를 번제로 드려라” (창 22:2). 이 성경절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을만한 내용이 담겨져 있을 뿐이다.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없다.

베드로와 안드레의 부르심: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마 4:18,19. 이것이 그 두 사람을 부르신 말씀의 전부이다.

마태의 부르심: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마 9:9. 여기서는 오직 두 단어만을 말씀하셨다.

앉은뱅이의 부르심: 38년 동안, 한 앉은뱅이가 베데스다 연못으로 매일 들려져왔는데, 그는 연못이 요동칠 때에 치유를 얻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 5:6~9.

사울의 부르심: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이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여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행 9:3~6. 이것 역시 매우 극적이고 놀라운 경험치고는 그다지 많은 설명이 없는 장면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믿음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경우들에서, 예수께서는 믿음을 활용해서 당신의 짧고 단순한 명령에 순종해야 할 각 사람들을 남겨둔채 그 자리를 떠나셨다.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이러한 예화들을 생각해 볼 때,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큰 믿음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이 뚜렸하게 드러난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직접 행하셨던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사람도 경험한 적이 없는 불가능한 행동을 당신의 제자인 베드로에게 요구하셨던 사실을 들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길을 쉽고 평탄하게 만들기 위해서 어떤 특별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분께서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과학적 가능성을 설명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의 생명을 취하지 않으시겠다는 보장을 사전에 약속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마태에게 먹고 살만한 적당한 수준의 월급을 지급하겠다는 보증을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확실한 믿음을 요구하셨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을 행사하기 위해서, 그들은 전적인 헌신과 굴복을 해야만 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주님께서 부르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국에는 그분을 떠나가게 되는 이유이다.

그분의 명령은 그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장황한 설명을 포함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직접 귀로 들을 수 없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그것은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영혼을 울리는데, 그 소리는 흔들리지 않는 권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것은 매우 조용하고 은은하게 우리의 귀를 울린다. 우리가 이러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될 때, 우리는 아브라함, 베드로, 안드레, 마태, 중풍병자, 그리고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주님의 말씀에 즉시 순종하여, 배에서 내린 다음 물 위를 걸어야 한다. 혹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없는가? “친구여, 네가 사랑하는 그 직장, 그 취미, 그 어떤 것을 내가 지금 너에게 알려주는 산 위에서 번제로 나에게 드릴 수 있니?”

만일 주님께서 결혼한지 15년만에 새 집을 장만한 그대를 찾아와서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놔두고 나를 따르라!”고 부르신다면, 그대는 어떤 반응을 나타내겠는가? 주님께서 조용히 나를, 또는 그대를 찾아와서 “나를 따르라!”고 지금 말씀하신다면, 그대와 나는 그분의 말씀을 믿고, 굴복하여, 순종하겠는가? 바로 이러한 것들이 주님께서 그대와 나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이다.

믿음을 성장시키는 비결

믿음과 헌신, 그리고 굴복은 결과적으로 모두 동일한 것이다. 여기서 굴복이란, 나의 뜻과 그리스도의 뜻이 서로 다를 때, 나의 뜻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뜻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믿음이란, 그리스도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할 수 있는 전적인 신뢰이며, 동시에 그것은 굴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만일 그대가 믿음이 있다면 그대는 굴복하게 될 것이고, 그대가 굴복한다면 그대는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더 큰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계속적인 굴복없이 계속적인 순종을 기대할 수 없으며, 계속적인 믿음의 성장도 기대할 수 없다.
베드로의 믿음은 그의 순종에 의해서 시험받았다. 믿음은 언제나 순종을 통해서 시험받는다. 사실, 순종만이 믿음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시금석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런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뇨?” 야고보 2:14. 야고보의 질문에 대한 답은 “결코 못한다” 이다. 야고보는 또 다시 다음과 같은 도전을 던지고 있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상동, 8절. 야고보는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행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믿음과 굴복의 결과로서 나타나게 되는 행함과 순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멕시코 인디언의 언어에는 “믿음” 과 “순종” 이라는 단어 사이에 아무런 의미의 차이가 없다. 그래서 멕시코 인디언들은 믿음과 순종의 의미를 구별해서 다르게 사용하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에 적지않은 당혹감을 갖게 된다. “당신은 그것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는 않을거죠?” 라는 질문에 대해서 멕시코 인디언들은 어떻게 대답할 바를 모른다. 멕시코 인디언처럼 우리도 그러한 질문에 당황하는가? 아니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가? 혹시 우리는 그 멕시코 인디언들을 천진난만한 바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성경적으로 볼 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실로 그분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의심이나 타협하는 일 없이 당신께 순종할 수 있는 충분한 확신을 소유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에 관한 증거들을 보여 주시고 들려 주시며, 당신을 찾고자 하는 자들이 확신을 가질 수 있을 정도의 증거들을 주신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 위를 걸으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우리의 눈 앞, 또는 우리의 손 안, 그리고 우리의 발 아래와 같이 가까운 곳에서 항상 확실한 증거들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주님의 명령에 우리가 순종했을 때에만 그러한 증거들을 받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베드로가 실제로 물 위를 걸었을 때까지 그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보증을 받았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뢰할만한 명령인 “오라!”라는 말씀의 증거 외에 어떤 다른 증거도 없었다.

가끔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신께 대한 완전한 신뢰심을 가지고 물 위를 걸을 것을 요구하시는 데에는 오직 한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물 위를 걷지 않는다면, 우리의 발 밑에서 느껴지는 물을 결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순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귀중한 체험을 소유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순종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경험은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신뢰와 믿음을 더욱 더 깊고 높은 수준으로 이끌어 간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단순한 마음의 동의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결심과 행동을 요구하신다. 그런데 그러한 행동을 하는데에는 믿음이 요구된다. 그러한 행동을 하는가 또는 하지 않는가에 따라서 그리스도께 대한 각 사람의 믿음의 상태가 드러나게 된다.

물 위를 걷지 못하는 이유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해서 승리하기를 소원하며, 믿음이나 사랑과 같은 영적인 요소들을 소유하기를 원하지만, 어쩐일인지 그러한 것들을 소유하는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그들은 “주여, 나로 하여금 물 위를 걸어 당신께 가게 하소서” 라고 입으로는 외치고 있지만, 주님께서 “오라!”고 명령하시는 호소에는 결코 응답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의 명령과 부르심을 듣고 있지만, 두려움과 의심을 품은채 배위를 서성거릴 뿐이다. 그들 자신의 인간적인 결심과 노력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쓰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에 결코 순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은 우리 자신의 능력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결코 물 위를 걸을 수 없다.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근거로 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부르심과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원천을 제공해 주시는 그분을 온전히 신뢰함으로서만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물 위를 걷게 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행하는 순종

우리의 믿음은 순종에 의해서 시험받게 된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가 무슨 말로 변명할지라도 믿음이 없는 것이다.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할 수 있고,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음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요구하신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서 나왔을 때, 모세의 믿음으로 행한 순종이 홍해를 갈라지게 만들었다. 그와 같은 믿음이 없었다면, 홍해의 물결은 그들을 삼켜버렸고, 백성들은 애굽으로 되돌아 가야만 했을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행한 순종만이 엘리야로 하여금 아합 왕에게 담대히 나아가 삼년 반 동안 이스라엘에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기별을 전할 수 있게 하였다. 오직 믿음으로 행한 순종만이 온 이스라엘 백성을 갈멜 산으로 모아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옹호할 수 있게 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순종을 통해서 실패하지 않는 믿음을 백성들 앞에 전시하셨다.
오직 믿음으로 행하는 순종만이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하였다. 그와 같은 믿음이 없이는, 결코 물 위를 걸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인간이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믿음은 너무도 바보스럽게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때 그가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내었을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직 믿음으로 행하는 순종만이 우리를 죄에 대한 승리의 생애로 인도해 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인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없게 만드는 물의 수압 법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세상에서 인정받고 있는 보편적인 수압의 법칙에서 해방된 자들만이 물 위를 걸을 수 있다. 율법이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육신으로 보내어 물 위를 걷게 하셨다. 그리하여 우리도 그분처럼 물리적인 수압의 법칙이 아닌 하늘의 믿음의 법칙에 의거하여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로마서 8장 2~4절이 말하는 “생명의 법”이다.

너희의 믿음대로 될지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너무나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제한하며, 해석한다. 그리하여 그분께서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그것을 “가서, 가능한한 적게 죄를 범하라”로 해석한다.

이와 같은 태도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너무나 약해지고 병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물 위를 걷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심한 경우에는, 물 위를 걷지 못할 뿐만 아니라 확신을 잃어버리고 아예 배를 포기하고 떠나려고까지 한다. 그러한 상태로는 도무지 죄의 물결을 감당할수 없다. 그러한 상태에 처하게 될 때,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한다. “죄를 승리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이야. 물 위를 어떻게 걸을 수 있겠어?”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계속해서 물속으로 빠져 들어갈 수 밖에 없다. “너희의 믿음대로 될지니라”라는 주님의 말씀은 그런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말한 것 중에는 두가지 사상이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사상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데, 그것은 “순종에 관한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지만, 순종을 위한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가 할 수 없는 모든 일을 해주셨다. 그러나 베드로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것이라도 그를 대신해서 해주시지 않았다. 베드로는 스스로의 결정과 힘으로 배에서 뛰어 내렸다. 그 결과 그는 한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고, 계속해서 걸을 수 있었다. 베드로는 물의 부력을 전혀 이용할 수 없었지만,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 믿음을 근거로해서 베드로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실 수 있었다.

믿음이란, 자신의 인간적인 확신이 이루어 내는 자기 달성이 아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약속에 대한 완전한 확신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확신을 통해서 당신의 목적과 구원을 이루신다. 바로 이것이 물 위를 걷는 믿음이다. 물 위를 걷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생애와 승리의 생애로 우리를 유도한다.

6부 - 암이 침투하는 경로


지난 달에 이어서 이번 달에도 "천연 치료로 암을 정복하라"는 주제로 암에 대한 특별한 기사들을 모았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현대인들이 암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암에 걸릴 수 있는 방법과 조건들을 선택하면서 하루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암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요소들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암에 대한 공포로 인하여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암은 재수나 운이 나빠서 생기는 것이 아니며, 하루 아침에 갑자기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내가 선택해서 살고 있는 라이프 스타일이 수년 후에“암”이라는 이름을 달고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암을 자각하거나 병원에서 발견했을 때는, 이미 암이 십여년동안 몸안에서 자라난 후입니다. 아무도“암”을 팔자소관으로 돌리지 마십시요! 암으로 가는 길을 포기하고 떠나기 전까지, 아무도 암에 대해서 자신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암을 정복할 수 있습니까? 암은“올바른 선택”으로 정복합니다! -생애의 빛 편집실

1. 타고난 가능성을 무시하지 말라!

대부분의 암세포는 십여년 간에 걸쳐서 서서히 자라난다. 암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가지 요소들에 의해서 복합적으로 발생된다: 암바이러스, 해로운 독소, 유전적으로 타고난 쇠약함. 암에 걸릴 수 있는 가능성은 가족 중에 암에 걸렸던 사람이 있고, 체중이 표준을 많이 넘었으며, 신체의 발달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일찍 성숙된 사람에게 비교적 높다. 이러한 사람들은 사전에 스스로 생활 습관과 패턴을 건강하게 유지함으로써, 신체의 면역체계(저항력)를 강화하여서 암과 같은 질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예방이 치료보다 효과적이며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2. 암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들?

암세포를 가지고 있는 가축의 고기나 피로 만든 식품을 섭취하는 것은 암을 유발시키는 중요한 원인이라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또한 우유와 계란에서 발견되는 바이러스성 세균들이 몇몇 특정한 암에서 발견되고 있다. 비록 요리된 동물성 식품이라고 할지라도,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고온의 열에 의해서 처리된 암바이러스를 실험용 쥐에게 주입시킨 결과, 암이 유발되었다는 실험 연구 결과가 보도되었다. 동물성 식품과 암의 관계에 대한 통계를 살펴볼 때, 우유제품을 많이 사용하는 나라에서 암의 발생률이 높으며, 닭고기를 많이 섭취하는 나라에서는 백혈병과 어린아이들의 조기 성장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원숭이, 닭, 소, 고양이, 개 등은 암바이러스를 보균할 수 있는 것으로 분류되고 있다.

3. 암을 일으키는 환경적 요인들?

현존하는 암 가운데서 85%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10%는 간접적으로 환경적 요인과 관련 있다. 암을 일으키는 환경적인 요인인 발암물질이 체내에 들어가면 에스트로젠과 담즙산 유도체(bile acid derivatives)를 생성한다.

아스트로젠은, 정제된 음식(흰밀가루, 흰쌀, 설탕 등)과 동물성 식품(고기, 우유, 계란, 치즈)를 많이 섭취할 경우에 과도하게 생성된다. 일평생 동안, 멘스 사이클을 많이 가지는 여자일수록, 유방암에 걸릴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일반적으로 멘스는 14-16살에 시작되는데, 어떤 여자 아이의 멘스가 10-11살에 시작되었다면, 그 아이는 유방암에 걸릴 수 있는 가능성이 다른 아이들보다 높다고 말할 수 있다.

담즙산 유도체는 장암(bowel cancer)에 걸릴 수 있는 위험을 증가시키는데, 우리의 식탁 위에 올라오는 유리성 지방 즉, 마아가린, 마요네즈, 기름에 튀긴 음식, 요리된 지방질, 피넛 버터 등은 담즙산을 증가시키는 요소들이다.

환경적인 요소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식품류, X레이 촬영, 약품류, 살충제, 몇몇 특정 세척제들, 그리고 수십가지의 산업용 및 군사용 화학물질들을 말한다. 날마다 하루에 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 여성은 평균 3배 이상 높은 방광암의 발병률을 가지게 되며, 하루에 두 잔의 커피를 마시는 여자는 난소암에 걸릴 수 있는 위험이 2.2배로 증대된다. 심지어 병을 진단하기 위해서 입, 머리, 목부위를 찍는 X레이일지라도, 갑상선암에 대한 위험성을 증가시킨다. 해마다 유방을 X레이 촬영하는 매머그램도 유방암의 위험성을 높여준다.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것과 관련있는 Atromid-S라는 의약품은 암과 쓸개 질환을 유발시키는 빈도가 높다. 한동안 체중조절 프로그램에서 사용되었으며, 지금은 기능항진(hyperactive)적인 어린아이들에게 사용되고 있는 앰피타민즈 의약품도 홉킨스 병이 발병될 수 있는 가능성을 6배 가량 높인다. 미국에서는 일년에 32,000명이 홉킨스 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4. 유방암과 신체 지방의 분포 관계?

신체 지방의 분포도는 암의 발병률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신체의 상체에 있는 지방은 유방암과 자궁암에 관계 깊은 것으로 이미 알려져 왔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유방암 환자에 있어서 복부 및 상체의 지방은 매우 중요한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방암의 경우에 있어서는, 지방의 분포 형태가 일반적인 발암물질보다 더 중요한 암의 원인이 될 수 있다(참고: Cancer Dectetion and Prevention 17(1), 382-383, 1993년도).

5. 당뇨병과 암의 관계?

당뇨병은 모든 종류의 암을 일으킬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당뇨병의 주요 원인은 잘못된 라이프 스타일(생활 양식)인데, 이것은 암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운동 부족, 수면과 식사를 규칙적인 시간에 하지 않는 것, 고단백질의 음식, 정제된 식품(흰설탕, 흰쌀, 흰밀가루), 과다한 식용유의 사용 등은 당뇨병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암을 일으킬 수 있는 커다란 요인들이다.

6. 과다한 단백질과 지방의 섭취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과다한 단백질과 지방의 섭취는 암의 유발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동물에게 단백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식사를 공급한 결과, 다른 동물들에 비교해서 훨씬 높은 암 발생률을 나타내었다. 영국에서는 낮은 단백질의 식사를 백혈병 환자에게 제공함으로써, 좋은 결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방을 많이 섭취하였을 경우, 암에 걸릴 수 있는 빈도가 높아진다는 의학계의 보고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훈제되거나 발효된 식품도 암에 대한 위험성을 증가시키며, 오래되어 쩔은 기름, 오래된 너트나 곡식 종류, 그리고 기름이나 계란을 사용하여 만든 과자류들은 암을 유발시킬 수 있는 식품들이다. 기름으로 처리된 과자류(특히, 계란과 우유를 사용하여 만든 과자류)는 소비자의 손에 들어오기 전까지 유통과정이나 가게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되므로 쩔거나 변질되기 쉽다.

7부 - 열 치료로 암과 싸우세요!


열은 원수인가? 친구인가?

몸에서 열이 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것을 좋지 않은 현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열은 다른 질병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은 어떤 하나의 증상일 뿐이지 우리가 싸워야 할 적 자체는 아니다.

실제로, 열이 오르는 증세는 우리 몸의 방위 시스템이 질병과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신호일 뿐 아니라, 질병을 회복하는 데 여러 가지 좋은 효과를 준다.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열은 생존력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질병에 걸린 도마뱀들이 태양이 비치는 곳으로 기어가서 체온을 섭씨 41~43도로 올림으로써, 박테리아로 인한 감염에서 더 잘 살아남았다는 실험 결과가 있다. 만일 이 도마뱀의 체온을 올리는 대신에 아스피린을 먹여서 감염을 방지하려 했다면, 도마뱀들 중 75% 이상이 감염으로 인해서 죽었을 것이다.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인하여 열이 나는 동안에, 체내에서 더 많은 숫자의 간섭인자(interferons)라고 불리는 물질리 생산되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간섭인자들은 암 바이러스들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다른 바이러스들을 억제하며, 면역 시스템의 일부로 작용하여 종양 세포와 직접적으로 싸운다. 이러한 증거들을 볼 때, 열은 우리의 몸이 병균과 싸우는 방법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열은 적이 아니라 친구이다.

열 치료와 암

인간의 몸은 뜨거운 체온이 필요할 때 자연적으로 열을 생산하게 된다. 그렇다면 체온을 인위적으로 올린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우리의 인체가 질병과 싸우는 것을 돕기 위해서 외부로부터 열을 인공적으로 공급하는 경우에도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치료를 “열 치료법”이라고 부른다. 열 치료법은 수년 동안 일반적인 감기, 관절염, 통증, 출혈, 신장병, 폐염, 각종 전염병 그리고 많은 다른 질병들을 성공적으로 치료하였다. 그렇다면 암은 어떠한가? 열 치료는 암에도 효과적으로 그 기능을 발휘할 것인가?

암을 치료하기 위한 열 치료는 20세기 이후로 지금까지 꾸준히 증가되어 왔다. 체온을 인위적인 방법으로 화씨 105도에서 107도로 올릴 경우, 일반적으로 종양 세포의 성장을 지연시키거나 완전히 억제하면서, 각종 종양으로부터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이 많은 연구와 임상 실험으로 입증되었다. 예를 들어서 워렌 스테포드(Stafford Warren) 씨는 전이 종양을 열 치료법으로 치료하였는데 22명의 환자 가운데 거의 모든 환자들에게서 완전한 회복을 볼 수 있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열 치료법이 종양뿐만 아니라 건강한 세포와 조직들을 손상시킬 수도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종양 세포들은 정상 세포들보다 고열에 더 민감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거기에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1)건강한 조직들에는 더 많은 피가 유동하고 있기 때문에 피의 순환이 열을 감소시켜 주며, 2)정상 세포들은 열에 노출되어 심한 손상을 입었을 경우에도 빠른 시일 내로 회복시킬 수 있지만, 종양 세포들은 그렇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당한 온도의 열 치료법을 암 환자에게 사용하면, 건강한 세포들이 비교적 손상을 입지 않는 상태로 유지하면서 암세포의 성장을 지연시키거나 억제 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암 치료와 열 치료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졌으며 모든 연구는 긍정적은 결과들을 가져다 주었다른 화학적 치료 방법들과는 반대로, 열 치료법은 몸의 면역 시스템에 충격을 주거나 저하시키는 대신에 오히려 향상시킨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은 이토록 효과적인 치료법이 대중화되어 널리 사용되지 않는 이유는 이 치료가 너무나 천연적이고 단순하기 때문일 것이다. 열 치료법 중에서 몇 가지는 특별한 시설을 갖추지 않은 가정에서도 즉시 시행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다.

열 치료법 안내

가정에서 할 수 있는 열 치료 방법을 살펴보도록 하자. 가정과 같은 환경에서는 열을 화씨 102도까지 올리는 것이 안전하고 편안하다. 더 높은 고열 치료법은 의사의 직접적인 감독하에서만 실시되어야 한다. 열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반드시 측근에서 환자가 지나치게 기진맥진하거나 기력을 잃어버리는 지를 지켜보아야 한다. 만일 맥박이 140에 가까워지면 위험하므로 즉시로 온도를 반으로 떨어뜨리거나 어떻게 해서든지 맥박을 140이하로 낮추어야 한다. 단순히 미지근한 물로 목욕을 하거나 시원한 스폰지로 몸을 문지르면 즉시 몇 분 안에 치료하기 이전의 맥박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심장이 약한 환자를 위해서 신선하고 시원하며 건조한 공기가 치료하는 장소에 잘 유통되어야 한다.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환자의 머리는 시원한 상태를 유지시켜야 한다.

열 치료를 위한 준비물

1. 얼음물이 담겨져 있는 세숫대야
2. 2~4개의 작은 면수건(세면용 수건)
3. 2~4개의 큰 면타월(목욕 수건)
4. 구강 체온계
5. 목욕물 온도계
6. 베개(머리를 받치기 위해)
7. 발판이나 의자
8. 물컵과 빨대(물을 마시기 위해)

열 치료법을 적용해서는 안 되는 경우

1. 저혈압(졸도의 위험이 있음)
2. 심장병
3. 독소 갑상선(Toxic Thyroid)
4. 알카리 상태의 대사 작용
5. 결핵
6. 혈액의 감소 또는 빈혈

치료 과정

1. 몸이 뜨거운 물로 욕조의 반을 채운 후에 환자를 욕조에 눕게 하고, 머리 뒤를 접은 수건으로 받쳐 준다.
2. 환자의 구강 온도를 재서 기록한다.
3. 환자의 몸이 견딜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물의 온도를 화씨 105도 내지 115도까지 서서히 올려 준다.(주의 사항: 열 치료를 할 때에는 서서히 물의 온도를 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체온을 빨리 올리기 위해서는 반신욕 상태에 있는 환자의 무릎과 어깨 부위를 뜨거운 물수건으로 덮어 준다. 큰 컵을 사용해서 욕조에 있는 뜨거운 물을 환자의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덮어둔 수건에 자주 부어 준다.)
4. 체온계로 환자의 구강 온도를 5분에 한 번씩 확인한다. 약 5~6분이 지난 후에 성인의 경우에는 구강 온도가 화씨로 약 100도 정도가 되어야 한다.
5. 얼굴에 땀이 흐르면 물수건을 얼음물에 담가 두었다가 짜서 이마에 대준다. 차가운 물수건으로 얼굴과 목을 자주 닦아준다. 머리는 계속해서 시원하게 해 주어야 하며 구강 온도가 화씨 102도가 넘을 때는 머리에 덮어 준 찬물 수건을 자주 바꿔준다. 목 부위를 찬물 수건으로 찜질을 해 주면 구강 온도가 내려가지만, 실제 몸의 온도는 체온계가 가리키는 온도보다 더 뜨거울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맥박의 수를 주기적으로 재어야 한다. 만일 맥박의 수가 104이 넘거나 환자가 극도로 불편하다고 말할 경우에는 찬 물울 욕조에 넣어서 체온과 맥박이 즉시 정상으로 돌아오도록 해야 한다.

치료 시간과 체온 조절

열 치료하는 시간은 온도나 질병의 종류에 의하여 결정된다. 감기, 독감, 목이나 허리에 생기는 경련과 같이 급성으로 생기는 통상적인 질병들은 구강의 온도가 화씨 102도에서 103도로 올라갔을 때 끝마치는 것이 좋다. 기침, 습진 또는 마른버짐과 같은 고질적인 질병은 구강의 온도를 화씨 101도에서 103도로 5분에서 45분 정도까지 계속해서 유지시켜 주는 것이 좋다.(질병이 심각할수록 더 높은 온도와 더 긴 시간을 요구한다.) 찬물과 뜨거운 물을 지혜롭게 조절함으로써, 구강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시켜 주어야 한다. 체온을 감소시키지 않는 한도 내에서 환자를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해 작은 선풍기를 환자의 얼굴에 직접적으로 불게 해 줄수도 있다.

치료를 하는 첫 번째 1시간 동안에는 마실 물을 주도록 하고, 한 시간이 지난 후에는 4컵의 물에 1 티스푼의 소금을 넣은 소금 용해수를 마시도록 한다. 한 시간에 4컵의 맹물을 마시도록 하거나 한 컵의 염수를 마시도록 한다.

열 치료 끝내기

환자에게 더 좋은 효과를 주기 위해서 치료는 올바르게 끝마쳐져야 한다. 치료를 올바르게 끝마치기 위해서 간단한 샤워를 하거나 차가운 수건으로 문질러 준다. 많은 양의 혈액이 피부 표면에 올려 있고 땀으로 인해 수분을 많이 잃었기 때문에 체내에 있는 혈액의 양이 환자가 욕조에 들어가 있을 때보다 적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몇 초 동안 서 있게 되면 얼마 동안 현기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치료가 성공적이었다는 하나의 증거이다. 그러나 환자에게는 이 현상을 불안하게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불안감을 피하기 위해서 환자를 빨리 침대에 눕히는 것이 좋다.

치료 후의 휴식

1. 환자가 치료가 끝난 후에도 30분 동안 계속해 땀을 흘릴 것이기 때문에 침대를 보호하기 위해 미리 침대 위에 마른 타월을 깔아 놓음으로 환자가 곧 누울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2. 환자를 욕조에서 일어서도록 하고 손으로 세게 피부를 문지른 후 10~30초 동안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도록 한다. 만일 환자가 원하면 환자의 얼굴을 닦아 주고 남은 얼음 물을 몸이 달아올라 벌겋게 된 상태(redness)를 연장시키기 위해 환자의 몸에 부어 주는데 앞면과 뒷면으로, 어깨에서부터 밑으로 끼얹어 주고 발에 붓기 위해서 얼음물을 어느 정도 남겨 둔다.
3. 환자에게 한 발을 들어올리게 한 후에 얼음물을 그 위에 붓고 그 발을 욕조 밖으로 빼어 맨 땅에 딛도록 한다. 그리고 다른 한 쪽의 발도 들어올려서 남아 있는 얼음물을 그 위에 붓고 거친 수건으로 세게 닦아 준다. 발을 닦아 줄 때 환자가 돕도록 한다. 환자가 자신의 발을 닦는 것을 돕게 되면 현기증을 일으킬 가능성이 적어진다.
4. 침대 시트로 환자의 몸을 감싸 준 다음 즉시 침대로 가도록 한다. 만일 계속해서 걷는 동안 환자가 현기증을 느끼면 몸을 구부려서 머리의 높이를 낮추도록 한다. 만일 환자가 체온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면 여러 개의 담요를 덮어 준다. 그리고 베게가 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수건으로 베게를 덮어 주고 두 번째 수건으로 목을 감싸 줌으로 목에 있는 땀이 수건으로 스며들도록 한다.
5. 치료에 눕힌 후에 입이 온도가 화씨 100도 이하로 내려갈 때까지 계속해서 머리를 시원하게 유지하도록 하고 물을 마시도록 한다.

건강한 사람이 짧은 시간과 102도 이하의 온도에서 치료를 할 경우에는 혼자서라도 이 치료를 할 수 있다.

어린 아이를 치료할 경우

어린 아이들에게 열 치료를 할 경우에는 아래와 같은 단순한 치료법을 사용하도록 한다. 물의 온도가 화씨 103도를 넘지 않으면 열 치료를 10~15분 동안 계속해서 한다고 할지라도 아이들에게 아무런 화상을 입히지 않는다. 그리고 화씨 105도 이상의 온도에서, 특히 화씨 110도에 가까운 온도에서 치료를 할 경우에는 3살 이하의 아기들은 1분씩을 더해서 치료하도록 한다.(예: 4살(3+1)=4분, 5살(3+2)=5분)

어린 아이들을 치료할 때는 정확하게 시간을 지킴으로써 화상을 피해야 한다. 몸에 이미 열이 있으면 체온이 더 속히 올라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며 낮은 온도의 몰로 치료를 해야 한다. 만일 구강의 온도가 화씨 103도 이상이면 3살 이상의 아이일 경우에는 3분 동안만 치료하도록 하고 갓난아기일 경우에는 단지 근육을 풀어 주고 깊은 숨을 쉬게 하기 위해 더 적은 시간 동안 치료해야 한다. 만일 항문의 온도가 화씨 103도일 경우에는 물의 온도가 화씨 106도가 되도록 조절해야 하며, 항문의 온도가 화씨 104도일 경우에는 물의 온도는 화씨 105도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만일 항문의 온도가 화씨 105도일 경우에는 물의 온도를 화씨 104도로 조절해야 한다. 찬물을 잠시 동안 끼얹고 피부의 활력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수건으로 세게 닦아서 치료를 끝마치도록 한다.

열 치료가 가져다 주는 9가지 효과

1. 백혈구의 수를 증가시키고 식작용(식세포가 세균 또는 다른 이물을 원형질 내로 섭취하는 현상)의
원기를 증가시킴으로써 세균에 대한 저항력을 증가시킨다.
2. 보유하고 있던 열을 반대로 내보내고 열의 방출을 진행함으로 몸의 열을 감소시킨다.
3. 땀을 흘림으로 몸에 있는 독을 체외로 방출시킨다.
4. 목과 등의 근육에 생기는 경련을 풀어 준다.
5. 일정하게 혈압을 감소시킨다.
6. 설사를 멈추게 한다.
7. 혼란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8. 어린 아이들이 보채지 않고 잠을 자도록 도와준다. 만일 완화한 열로 오랜 시간 동안 치료하면 성인에게는 진정제의 역할을 한다.
9. 체내 수분의 균형을 회복시킴으로써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하도록 한다.
 

8부 - 항암 특수 부대, 피토케미칼


미국인 5명 가운데 1명은 암으로 죽는다는 통계가 발표되었다. 즉, 하루에 1,400명 그리고 1년에 40만 명이 암으로 죽어 간다. 미국의 국립 암연구소의 보고에 의하면, 모든 암 중에서 약 33%에 해당하는 암은 음식물에 의해서 발생된다고 한다.

사실상, 오늘날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암이 고지방, 고콜레스테롤, 저섬유질의 음식물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통하여 듣고 보아서 잘 알고 있다. 채소과 과일과 곡식으로 구성된 건강식이 암을 예방할 뿐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암의 확산을 저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이제는 새로운 연구 보고가 아니다.

피토케미칼(Phytochemicals)이라고 알려진 화학 물질이 있는데, 이것은 암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중요한 인자로서 간주되고 있다. 이 화학 물질은 암세포의 확산을 저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채소와 과일 가운데에 다량으로 포함되어 있다(1994년 4월 25일 자, 뉴스윅(Newsweek)지).

비타민 A와 C 그리고 E는 산화방지제(Antioxidant)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비타민들은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피토케미칼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산화방지제(항산화제)는 작은 화학적 자석과 같은 작용을 하는데, 이것은 우리 몸 안에 있는 해로운 물질들에게 달라붙은 다음, 그 해로운 물질들을 제거하는 작용을 한다. 산화방지제(항산화제)는 체내에 있는 해로운 물질들이 세포에 손상을 주어서 정상 세포를 암세포로 변질시키기 전에 해로운 물질들을 처리해 주는 역할을 한다.

비타민 A는 복숭아, 살구 그리고 노란 색깔의 채소들에 풍부하게 들어 있으며, 비타민 C는 감귤류, 빨간 색깔의 고추들, 딸기류에 많이 들어 있고, 비타민 E는 밀눈(wheat germ), 너트류(nut: 호두, 밤 등)에 풍부하다. 베타 캐로틴이나 폴릭 에씨드와 같은 산화방지제는 시금치나 캐일, 브로콜리와 같은 진한 녹색의 채소 잎에 많이 포함되어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버클리 대학의 글래디스 블락 박사는 17개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170가지 항목을 조사하였는데, 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과일과 채소를 많이 섭취하는 사람들은 암에 걸릴 수 있는 확률이 거의 50% 이상 감소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스위스인 3000명을 대상으로 한 12년간의 연구 조사에서, 혈액 중에 비타민 C의 함유량이 낮은 혈액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위암이나 장암에 걸리는 경향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에서 이루어진 한 연구 보고에 의하면, 혈액 중의 베타 캐로틴의 함유량이 매우 높은 사람들은 암에 걸릴 수 있는 확률이 40% 이상 저하되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또한 매우 높은 폴릭 에씨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모든 형태의 암에 걸렸을 경우에 생존률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 국립 암연구소는 날마다 과일과 채소를 충분하게 섭취할 것을 권장하고 있으며, 암을 예방하기 위한 가장 바람직한 채소 종류와 그 섭취 방법은 진한 녹색의 신선한 채소를 요리하지 않은 채 먹는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과일과 채소에는 암을 예방하는 다른 여러 가지 성분들이 있다. 그중의 하나가 설포래캐인(sulforaphane)인데, 이것은 브로콜리, 컬리플라워, 브럿셀즈 스프라웃 그리고 케일에 많이 포함되어 있다. 죤 홉킨스 의학연구소의 폴 텔라라즈 박사는 설포래패인을 주입한 결과 신체 세포들이 생기를 ㄹ얻었으며, 항암 엔자임의 형성이 증가되었다는 실험 결과를 발표하였다. 다음에 설명하는 동물 실험 결과들은 설포래패인의 기능과 역할을 우리에게 잘 설명해 준다. 25마리의 쥐들에게 잘 알려진 발암 물질을 주사한 결과, 68%에서 종양이 유발되었다. 동일한 발암 물질을 39마리에게 주입하면서 각각 다른 양의 설포래패인을 함께 주사하였다. 설포래패인을 많이 주입한 동물일수록 종양의 발샐율이 저하된다는 실험 결과가 나왔다(Newsweek, 1994년 4월 25일 자).

독일의 한 연구소는 콩(soybean)에 함유되어 있는 게니스테인(genistein) 성분은 종양이 혈관벽에 생기는 것을 방지하며, 종양으로부터 산소와 양분을 빼앗음으로써 종양이 성장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딸기, 포도, 나무딸기(raspberry) 등에 들어 있는 일레직 에씨드(Eelagic Acid)는 발암 물질이 건강한 세포들의 유전적 성질들을 파괴시키기 전에 발암 물질들을 중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과일과 채소를 섭취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유익에 대한 지식은, 한나님께서 인류의 조상에게 정해주신 첫 번째 식단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에 다음과 같은 식단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맽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창세기 1:29). 또한 다시 말씀하시기를 “너희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창세기 3:18). 자동차의 제작자가 자동차를 가장 효과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정비지침서를 기록하는 것처럼,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께서도 사람의 몸을 가장 최선으로 유지할 수 있는 건강지침서를 성경에 기록하여 두셨다. 오늘날에는 과학자들도 성경의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이 시대에 살아남는 건강법으로써, 채식을 권하는 과학자들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9부 - 암 정복자들의 31가지 특징


의사들은 암에서 회복된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특정한 특성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특성들을 살펴보면, 암의 회복을 위하여 식생활을 개선하고 치료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상태와 태도가 암을 고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을 뼈로 마르게” 한다는 성경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입증해 주고 있다(잠언 17:22). 아래에 기록된 항목들을 읽어 보면, 소망, 기쁨, 명랑함, 부지런함 그리고 겸손함, 용서와 같은 성경의 원칙들이 여러 번 반복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마음 상태는 자신을 살피고 시험하도록 하고 인내를 갖게 하며 두려움을 사라지게 한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습관들을 바꾸고, 소망을 갖는 것이야말로 암을 정복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이다.

1. 그들은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라는 적극적인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2. 그들 중 상당수가 이전에 다른 사람의 투병을 도왔거나 자신이 직접 질병과 싸운 경험을 가지고 있다.
3. 그들은 적당한 운동을 꾸준하게 하였으며 과도한 운동을 피하였다.
4. 그들은 질병에서 회복된 후에는 자신들의 경험과 소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5. 대다수가 통상적인 화학 약품과 양약의 사용을 거부하였다.
6.그들은 절대적인 진단이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였다. 병의 진단은 환자의 상태에 따라서 바뀔 수 있다고 믿었다.
7. 그들은 어떤 인간도 삶과 죽음을 결정지을 수 없으며, 어떤 사람도 누가 언제 죽을 것을 정할 수 없다고 믿었다.
8. 그들은 자신의 회복을 위해서 투쟁했으며, 스스로 자신의 건강을 돌볼 책임감을 느꼈다.
9. 그들은 외부에서 들리는 부정적인 보고나 영향력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였다.
10. 그들은 투병의 결과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으며 긍정적인 소식에 기뻐 날뛰지도 않았고, 부정적인 결과로 인하여 포기하거나 낙심하지도 않았다.
11. 그들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치료법들을 검토하는 일에 대하여 마음 문을 열었으며, 어떤 치료법이 자신을 회복시킬 수 있는가를 연구하였다.
12. 그들은 기꺼이 자신의 태도와 습관을 바꾸고자 하였다.
13. 그들은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 대하여 연구하고 공부하였다.
14. 그들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피하였다.
15. 그들은 천연 치료를 시도하였다.
16. 그들은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생활 양식들을 중단하였다.
17. 대부분이 화학 약품, 알코올, 설탕, 육식 그리고 우유와 계란의 사용을 금하였다.
18. 대부분이 의학 치료를 받은 후 별 효능이 없을 때에는 다른 치료를 선택하였다.
19. 그들은 한 가지만으로는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였으며 자신의 생명력을 강화시킬 요소들을 추구하였다.
20. 그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압도되지 않았으며 하루하루를 기대감을 가지고 침착하게 맞이하였다. 그들은 기대를 걸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었다.
21.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과 취미를 바꾸었다.
22. 그들은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외로움을 방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개선하였다.
23.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가졌다.
24. 그들은 유머 감각을 유지했으며 곤경에 처했을 때도 웃음을 잃지 않는 것과 동물들이나 어린아이들의 재롱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여유를 갖기 위해 노력하였다.
25. 그들은 마음에 평온을 갖도록 최선을 다 했으며 자신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결정들을 관리하였다.
26. 그들에게는 그들을 후원해 주는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있었다.
27. 환자들 중 어떤 이들은 치료에 도움을 주는 효과들을 얻기 위해 천연계, 음악 또는 창의력을 여구로 하는 일에 관심을 돌렸다.
28. 어떤 이들은 천연적인 영양분을 섭취했으며 이것들이 그들에게 효과가 있을 것으로 믿었다.
29.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치료에 만족하지 않고 더 좋은 것으로 대치하기 위해 연구하였다.
30. 그들 모두는 해답을 얻기 위해 많은 질문들을 했으며,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31. 그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치유의 손길을 뻗으시길 간구하였다.

지금 그대의 마음 상태는 어떠한가? 육체의 질병은 마음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대의 마음에 참된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만족감과 긍정적인 시각이 존재한다면, 그대는 질병의 치료에 있어서 매우 유익한 겨롹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대에게 이러한 마음 상태가 없거나 부족하다면,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건강에 유의한다 할지라도 마음이 병들게 되어서 결국에는 육체적인 질병들을 블러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 상태를 항상 유지하기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그대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그대로 하여금 항상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는 환경만을 조성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희망이 있다. 만일 그대가 마음과 육체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의지하기만 한다면, 그분께서는 그대의 모든 문제와 슬픔과 두려움을 제거하시고 그대의 마음 가운데 쉼과 기쁨을 누시면서 새로운 삶을 누리게 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질병 중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그대의 눈물과 외로움을 결코 모른척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그대가 당신을 향하여 온 마음을 열고 나오기를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계신다.

우유는 건강식품인가요?


알러지와 우유 

잠에서 깨어났지만, 아침의 상쾌함이나 생동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숨을 쉬기조차 불편했다. 불편한 상태로 그냥 누워있거나, 아니면 일어나 코를 푸는 것이 지난 4년 동안 매 아침마다 겼어야 했던 일이었다.

나는 날씨나 기후 탓으로 돌렸다. 봄에는 꽃가루 때문이고, 겨울에는 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무엇인가가 내게 알러지 증상을 이르킨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친구의 권유로 우유 마시기를 중지해 보았다. 그런데 얼마 나지 않아서 알러지 증상은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단백질이 많아서 신체의 발육에 좋고 건강에 유익한 식품으로 알려진 우유가 지난 수년 동안 내게 알러지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우유에 대해서 조사해 보았다. 그 결과, 나는 우유 안에 있는 25가지 종류의 단백질들이 코 막힘, 부스럼, 피부병, 빈혈 등의 알러지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의 젖은 송아지를 위한 것이다.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송아지가 6개월 안에 400 파운드까지 자라날 수 있도록 하기 이하여 마련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 우유는 모유보다 더 많은 소듐, 지방, 인이 보유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우유에 들어 있는 단백질은 모유의 단백질보다 소화되기가 더 힘들며, 딱딱한 덩어리를 아기의 위장 안에 남기게 된다.

1993년, 미국의 FDA(the Food and Drug Administration)는 우유의 생산을 늘리게 하는 Sometriation이라는 홀몬을 소에게 주사하거나 먹일 수 있도록 허가했다. 그런데 낙농업자들은 이 홀몬 주사를 맞은 대부분의 소들의 젖에 염증이 발생됨을 알게 되었다. 이것을 고치기 위해서 소들에게 항생제를 주었고, 이 항생제가 우유에 섞여 나오기 시작하였다.

규정치 이상의 항생제가 들어 있는 우유는 버려져야 한다. 1990년 FDA의 조사에 의하면, 미국의 14개의 도시에서 임의로 채취된 70개의 우유 표본 중에서 51%가 각종 항생제로 오염되어 있었다. 최신 조사에 의하면 암을 유발시키는 항생제를 포함한 약물들이 80%의 우유 표본에서 검출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우유를 마시는 사람은 우유에  포함된 각종 약물들을 함께 섭취하게 되는 것이다.

백혈병과 우유

더욱 심각한 사실은 지금 미국 내 목장에서 BLP가 포함된 소의 우유로 사육되는 가축들(양, 염소, 원숭이 등) 중에 50~80%가 백혈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도 이러한 우유를 마심으로써 백혈병에 걸릴 수 있지 않을까? 실제적으로 어떤 백혈병 환자들에게서는 소백혈병 균이 발견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유의 멸균 작업시 가열되는 높은 온도로 인하여 이러한 균들이 살균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다. 이렇나 균들은 아주 높은 온도에서도 날아남을 수 있다. 즉, 이렇나 균들은 우유 제조 공장의 멸균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도 살아남아서 수퍼마켓까지 따라온다는 것이다. 미국의 3~13세 아이들에게서 가장 높은 백혈병 발병율이 나타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나이의 때가 우유를 가장 많이 마시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매우 높은 백혈병 발병율을 나타내고 있다. 우유는 백혈병 만을 유발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유를 마심으로 임파종, 호지킨병, 공수종, 전립선암, 유방암, 결장암 등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

광우병과 우유

소는 부드러운 눈과 조용한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런데, 1985년 4월, 영국의 플러랜던 매널(Plurendon Manor) 농장에서 사육되던 소들이 갑자기 공격적이고 신경질적이며, 괴상한 성격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예방 주사를 맞은 소들에게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심각한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몇 달 후에 이 소는 죽고 도살업자에게 팔려졌다. 그 후 또다시 7마리의 소들이 이러한 현상으로 인하여 죽음으로써, 영국 정부는 이 일을 이상히 여기기 시작했다. 담당 전문가가 파견되어 조사한 결과, 이러한 질병이 영국과 웨일 전체에 퍼져 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질병이 바로 BSE, “mad cow disease”(광우병)이다.

담당의사가 그 죽은 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을 조사한 결과, 소들이 광우병에 걸리게 된 원인이 바로 소들이 먹고 있던 음식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유의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서 목축업자들은 각종 질병으로 죽은 소와 염소들의 시체를 갈아서 만든 단백질을 공급하고 있었다. 이러한 단백질 공급은 194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식품 안전상의 문제로 죽은 시체들을 화학적으로 처리하는 일을 중단하고 공급한 결과 각종 병균들이 죽지 않은 상태로 소의 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영국 정부는 국민들에게 심각한 일이 아니라고 발표했지만, 집에서 기르고 있던 고양이나 동물원의 동물들도 이러한 현상으로 죽는 일이 늘어나자 이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도 이러한 질병에 걸릴 수 있을까? 물론 인간도 이 비슷한 병을 갖고 있다. 이것을 CJD라고 부른다. 약 100만 명 중 한 명이 이러한 질병에 걸려 죽고 있다. 이 병에 걸리면, 먼저 기억을 상실하기 시작하고 그 후 심한 두통에 시달린다. 손과 발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게 되어 걸을 수도 없게 된다. 말을 하는 능력을 서서히 잃게 되고, 말의 뜻도 잊어버리게 된다. 결국에는 장님이 되어버리고 암흑 속에서 죽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그 병이 시작된 지 6~13개월 안에 다 일어난다. 이러한 질병(CJD)은 BSE(광우병)과 매우 유사한 증세를 나타내는 질병이다. 영국의 두 농장 일꾼들이 1993년 CJD에 걸려서 죽었을 때에는 아무도 그것을 염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8명의 젊은이들이 계속해서 그 질병에 걸리게 되자, 영국 정부는 이것을 전염병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 죽은 사람들의 뇌를 검사한 결과 광우병의 균이 발견되었다. 무엇이 그들을 광우병에 걸리게 했는가? 이것도 그들의 음식과 관련이 있다.

1996년 3월 20일, 정부 관련자가 이 병은 쇠고기를 먹음으로 발병되었다고 발표하자 온 국민은 카다란 충격을 받게 되었다. 영국은 대 혼란을 겪에 되었다. 정부는 마침내 의심이 가는 소 3백만 마리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3백만 마리를 죽여서 불태우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그 소들이 전부 죽게 되기까지 그 소들로부터 나온 우유는 여전히 시중으로 팔려나가게 되었다. 우유 공장에서의 멸균 작업도 이러한 균들을 죽이기에는 부적당했다. 광우병 균들은 화씨 700도에서 한 시간 이상을 견딜 수 있기 때문에 고온의 멸균 작업도 효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고온으로 요리를 한다해도 이 균들을 죽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미국의 형편은 어떠한가? 실제적으로 미국에서 사육되는 소들도 영국에서 사육되는 소들과 똑같은 먹이를 먹고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미국에서 광우병이 널리 퍼지고 있지 않는 이유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매년 미국에서도 수천 마리의 소가 “downer cow syndrome”이라는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과학자들은 이 소들이 혹시 광우병 균을 갖고 있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매년 250명의 사람들이 CJD 질병에 의해서 죽어가고 있다. 또한 뇌 질환으로 진단받은 많은 다른 질병들이 실제로는 CJD일 확률이 아주 높으며, 이 병은 감염된 지 몇 년이 지나야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서 지금 현재 얼마나 걸렸는지,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병으로 죽었는지 알아내기 어려운 형편에 있다.

어떻게 해야 이러한 동물계의 질병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을까? 가장 안전한 방법은 철저한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즉, 완전히 채식만을 하는 것이다. 모든 우유 식품들과 고기들을 먹지 않는 것이다. 오래 전에 시골에서 천연적으로 기른 소에서 나온 우유와 요즈음 우유 공장에서 대량을 생산되는 우유 사이에는 그 질과 내용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우유는 알러지를 일으킬 뿐 아니라 백혈병, 암, 또한 에이즈까지도 일으킬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Life Line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 됨같이 내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3서 2절.

선진국과 전립선암
59개국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조사 결과, 선진국 스타일의 식사를 하는 국가일수록 전립선암의 발병률이 높다는 사실이 미국 국립 암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저널에 발표되었다. 특히, 우유와 고기를 많이 섭취하는 국가들에서 전립선 암의 발병률이 높았다. Health New, 1998년 12월호

견과류와 심장질환
견과류(너트 종류)를 싫어하는가? 최근에 이루어진 연구에서, 견과류를 즐겨 먹는 사람들은 견과류를 싫어하는 사람들보다 심장질환이나 심장마비의 발병률이 35%이상 낮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과학자들은 견과류에 함유된 지방이 심장에 유익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Health New, 1998년 12월호

멕시코 야생 고무마와 여성 호르몬
멕시코의 야생 고무마에서 추출한 프로제스트론이 갱년기에 있는 중년 여성들의 호르몬제로 매우 적합하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멕시코의 야생 고무마에서 추출한 프로제스트론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어떤 화학적 프로제스트론보다 좋은 콜레스테롤 수치를 올리는데 있어서 매우 효과적이다. Times, 1999년 1월 18일 자

소음에 시달리고 계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일생 동안 심한 소음에 노출되어 있거나, 헤드폰을 통하여 굉음의 록뮤직을 듣는 사람들은 귀에 이며(tinntius) 현상이 생기게 된다. 약 3천 6백만의 미국인들이 이명 현상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4가지 치료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시끄러운 소음을 피하라. 2. 이명 현상을 자극하는 카페인, 니코틴, 알콜 또는 화학 약품을 삼가하라. 3. 귀에서 소리가 들리는 이명 현상이 생겼을 경우, 다른 일에 신경을 집중시킬 것. 4. 스트레스를 피할 것. U.C.Berkeley Wellness Letter

주의! 새 침대 시트
새로 구입한 침대 시트는 반드시 잘 세척한 다음에 사용해야 한다. 잘 구겨지지 않고 외관상 보기 좋게 만들기 위해서 항암 물질로 분류될 수 있는 화학 물질이 새 침대 시트에 입혀져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심지어는, 라텍스 페인트나 마루 바닥용 코팅에 입혀져 있는 경우도 있다. Times, 1999년 1월 18일 자

살모넬라균과 애완 동물
살모넬라균에 의해서 감염된 어린 아기들 중에 35%는 오염된 음식이 아니라, 흙 또는 사람이나 애완 동물의 변으로부터 감염되었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살모넬라균은 햄버거의 오염된 고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나 애완 동물의 변에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Times, 1999년 1월 18일 자

도살장과 오염된 고기
도살 공장에서 오염된 고기로부터 생성된 치명적인 박테리아로 인하여 11명이 사망하였고, 3명의 임산부가 태아를 잃어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미국 내에서만 해마다 약 1800건의 육류 오염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Times, 1999년 1월 18일 자

상추와 엉덩이뼈
상추에 있는 비타민 K를 놓치지 말라. 중년 이상의 여성에게 많이 발생되는 엉덩이뼈 파손 현상이 양상추에 의해서 예방될 수 있다. 상추를 많이 먹는 여성들의 엉덩이뼈가 파손되는 위험률은 상추를 많이 먹지 않는 여성들보다 45% 이상 감소한다는 연구 보고가 발표되었다. U.C.Berkeley Wellness Letter

코넬 대학의 연구 발표
비타민 C, E 그리고 베타 카로틴과 같은 항산화제가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는 과일과 채소를 많이 섭취하는 사람들은 천식, 만성적인 호흡기 질환에 의한 사망률이 현저하게 저하된다는 연구 결과가 코넬 대학의 연구팀에 의해서 발표되었다. Health New, 1998년 10월 1일 자

1부 - 당신도 해방될 수 있다!


자유없는 자유인들이 많다. 자유를 누리며 자기 권리를 가지고 살고 있는 것 같지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권세의 노예가 되어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며 묶여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다.

거기에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권력있는 자도, 회사의 말단 사원도, 아니 남녀 노소 불문코 예외가 없다. 자기가 원치 않는 습관적인 죄를 계속 범하고 사는 사람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다. 자기의 욕심의 종이 되어 하루 종일 뛰어 다니면서도 허탈해 하는 그러한 사람들이다. 자유없는 자유인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나왔지만, 그들의 노예적인 습관과 성질들에서는 아직 해방되지 못한채 불평하고 원망하며 애굽의 음식들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불신하며 광야에서 쓰러져 갔었다. 그들은 외부적인 속박에서 해방되었지마는 또 다른 세력에 의해 구속된 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유인이 되었으나 여전히 자신의 죄의 속성에 노예가 되어 산 자들이었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있을 수가 없다.

아침에 눈을 뜰 때에, “아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아니면 “오늘도 주안에서 나는 평안한 사람이야!”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이요, 자기 자신에게서 해방된 사람이다. 이러한 경험은 죄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서 해방된 자들만이 누리는 행복감이다. 자유는 자신에게서 해방될 때에 비롯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잠언 16:32은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사도 바울은 자기가 원래 율법으로는 흠이 없었던 자였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불행하고 평안이 없었다고 말하였다. 그의 말을 인용하여 보자.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립보서 3:4-6). 그러한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다음과 같이 절규하였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4-24).

이 지점에서 성경 읽기를 끝내버린다면 누구나 절망적인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바리새인으로 있었을 때에, 앞서 언급한 빌립보서 3장에 기록된 그러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있었을 때에, 실재로 그의 마음 속에는 그와 같은 처절하고도 절망적인 패배감이 가득차 있었다. 외부적으로 그는 신실한 종교인이었고, 성공적인 사회인이었었다. 그러나 동시에 철저히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죄 아래 팔려있는 노예였었다고 고백하였다. 이 이야기가 어찌 바울만의 고백이겠는가?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실은 이러한 함정에서 함께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해방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지금부터 약 13년전 쯤 된 일이다. 내가 시카고 지역에서 교회를 돌보고 있던 때였는데, 바로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과 비슷한 영적인 갈등을 경험하고 있던 터였다. 어떻게 하여야 내 자신의 죄의 소욕에서 해방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가에 대하여 무던히 몸부림치며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나는 여러가지 내 생활 속에 있는 적은 것부터 큰 것들까지 하나님께서 원치 아니하시는 것들을 계속하고 있다는 실망감, 아니 더 나아가서 그러한 것들을 안하려고 해도 안 할 수가 없는 나의 마음의 소욕을 보고 절망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T.V.에서 미식축구 경기를 구경하기 위하여 주말이면 여러시간 동안 정신없이 텔레비죤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었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승리하면 흥분하고, 패배하면 낙심하여 불쾌해 하면서 나는 어느새인가 미식축구의 광이 되어 있었다. 내 아내의 은근한 눈초리와 책망을 들으면서도 나는 그 재미있는(?) 시간을 놓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일은 시간의 낭비이며, 목사로서 마땅히 유지해야 할 정서에도 혼란을 일으키겠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은 도박에 빠진 자들이 느끼는 매력과 유사한 것이 그 속에 있었다.

나는 그 습관에서 헤어나 보려고 애를 써 보았다. 그러나 속수무책이었다. 그 시간이 돌아 오면 나는 여전히 T.V. 앞에 앉아 있었고, 그리고는 항상 후회하면서 패배 의식에 빠지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내가 좋아하던 시카고의 Bears 팀의 준결승전이 진행되는 날이었다. 그 주말에도 나는 여전히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창 강단에서 열심히 설교를 하고 있는 도중에 이러한 생각이 계속 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오늘 경기가 어떻게 될까? 지금쯤 경기 스코아가 어떻게 되어 있을까? 과연 우리 팀이 이길 수 있을까? 내가 목사만 아니었다면, 내가 이 놈의 설교만 안해도 된다면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운동 경기장으로 달려 갈 수 있을텐데...”

예배가 마치고 친교시간이 끝난 후에 나는 한 가정을 방문해야하는 의무 때문에 그 집을 향하여 운전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도 궁금한 나머지 나는 차를 멈추고 지나가는 한 신사에게 이렇게 소리치며 물었다. “Sir! What’s the score now?”(여보세요! 지금 몇대 몇이죠?).....그리고서 나는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내가 미워하는 것을 여전히 하고 있구나! 아뿔사! 내가 노예로구나! 않하려 해도 않할 수 없는 상태로 붙잡힌 노예로구나! 지금 나는 누가 시키는 대로 살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내 자신 속에 있는 죄의 육체의 종이로구나! 아!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내가 이렇게 연약한 자란 말인가! 나의 갈등은 심각한 것이었다. 나는 차를 조용한 곳에 멈추어 세우고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짙은 쥐색의 하늘로 부터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오래간만에 하나님과 아주 친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하나님! 저는 제 자신의 노예입니다. 저를 해방해 주십시요! 주님의 능력만이 저를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주여 제게 성령을 부어 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을 위한 도구가 되게 말입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 위해 살 수 있게...!” 눈발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바뀌어 내 가슴 속을 메워 오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감사의 찬송을 하고 싶어졌다. 전에 몰랐던 평화와 즐거움이 마음을 채웠다. 그리고 그 때 나는 속으로 이렇게 소리를 쳤다. “아! 나는 드디어 해방 되었다!” 미식축구 경기에 대한 흥미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즐거운 표정과 마음으로 돌아오는 나의 모습을 보고 내 아내는 의아하게 한참이나 나를 바라다 보았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의 절규로 자기의 경험담을 끝맺지 아니한다. 그는 기쁨으로 그 해결책을 8장에서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1-4,8,9).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참 모습들을 감추며 살아가고 있다. 많은 자선의 행위들과 깊이있는 신학 공부로, 그리고 열심있는 심방과 교회에 헌금을 드리는 일들로 자신들을 감추며 살고 있다. 하나님을 위한 열심으로 평안을 얻어 내려고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실재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자기 굴복은 하지 않은 채 말이다. 죄의 노예된 상태에서 해방되지 아니한 어느 그리스도인도 행복할 수가 없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만 죄의 습관의 사슬에서 놓여 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욕망이 우러나올 때에만 우리는 드디어 평안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다. 우리를 참으로 평안케 하는 것은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이다. 이번호에 실린 우찌무라 간조 선생의 글은 독자 여러분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을 줄 것임에 틀림이 없다.

 

2부 - 나의 고백


이번 호에서는 어떤 일본 목사님의 신앙 고백을 간추려서 편집하였다. 이 글의 원래 저자인 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곧바른 기별을 전하는 목사로서 희생적인 생애를 살다가 간 일본 기독교계의 대표적 인물이다.

기독교의 불모지인 일본에서, 저자는 전쟁의 참화으로부터 일본을 일으켜 세우는데 공헌을 한 20명의 일본인 중에 한 명으로 선정될 정도로 일본 국민 전체에 정신적 감화를 끼친 정직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의 무덤에 세워진 비석에는 “일본은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글이 새겨짐으로서 지금도 그의 설교는 소리없이 계속되고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그의 간추린 신앙 고백을 통하여 그 속에 비추어져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과 영적 위치를 확인해 보도록 하자. 오늘날 왜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지 않는가? 왜 세상이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비웃게 되었는가? 왜 교회가 타협과 세속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영적 고뇌로부터 해방되어 승리와 평안의 길을 걸을 수 있는가? 여기에 답이 있다. 이번 기사는 진리를 더듬어 찾고자 하는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통찰력 있는 답변을 제시해 줄 것이다. 생애의 빛 편집실

깨어진 나의 첫 결심

내가 처음으로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접했을 때, 나는 그 도덕의 고결함과 위엄에 탄복하였다. 성경은 나의 불결함과 불완전함을 깊이 깨닫게 만든 유일한 책이었다. 내 말과 내 행실, 그리고 나의 사상을 성경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더럽기 이를 데 없었다. 내 생활은 은근한 기만과 거짓과 위선으로 온통 얼룩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삶을 살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면서 좋아하였고, 다른 사람을 넘어뜨려서까지라도 성공하기를 원했다. 나의 목적은 언제나 아름답고 보기 좋은 것으로 위장되어 있었지만, 진정한 목적은 내 자신의 이기심과 명예를 채우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도덕군자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매우 공격적인 야심가였던 것이다. 내 생애의 목적은 비루하였고, 사상은 더러웠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된 이후로부터, 나는 나의 모든 사상과 행실을 완전히 개혁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이제부터 내 말과 행실을 완전히 뜯어 고치겠다.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남을 비평하거나 중상하지 않겠다. 정욕을 억제하겠다. 게으름을 피우지 않겠다. 원수를 사랑으로 갚겠다.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정신을 버리고 겸손하겠다. 술, 담배, 극장 구경도 중단하겠다. 나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겠다.” 그야말로 전격적인 개혁을 선언하였다. “굳게 결심한 이 마음, 다시는 흔들리지 않으리!” 라는 결심과 함께 내 자신이 새롭게 거듭났다고 굳게 믿었다.

한동안 내 결심은 잘 실행되었다. 나의 개심은 정말 대단한 것이라고 다른 사람도 말했고, 내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나의 아침 기도는 뜨거웠고, 길었다. 나의 회심이 너무나 전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어떤 친구들은 나의 그러한 변화를 싫어했다. 어제까지의 떠버리가 이제는 침묵가가 되었고, 나의 이야기 속에는 회개의 눈물과 성경절의 인용이 있었다. 나는 마치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듯한 생활을 살았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개혁이 유익한 것이긴 했지만, 인위적으로 조작된 성결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한 채 기독교인으로서의 겉모양만을 흉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언행과 생각은 다시 옛 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의 부자연스러운 생활은 내 주변 가족들과 친구들을 어색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내 자신 마저 부자유스럽고 고통럽게 만들었다. “약간의 방종이 신앙에 무슨 해를 가져오겠는가? 지나친 침묵은 오히려 우울증을 가져올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얼마가지 않아서 나는 완전히 옛날의 상태로 돌아가고 말았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유일한 표시는 매 주일마다 냉랭한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아침 저녁으로 머리를 숙여서 무의미한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였다.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 할 때, 이 목사와 저 신도의 결점 그리고 다른 사람의 흉을 화제거리로 삼으면서 즐기는 나의 옛 습관이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야고보가 말한대로 “한 혀로 주되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같은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 하였다(약 3:10). 야고보가 기록한 그러한 말씀을 읽을 때마다 내 양심은 끌로 쪼이는 듯한 아픔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만일 내가 나의 말많은 습관을 억제하지 못한다면, 내가 믿는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이 내게 무슨 유익이 된단 말인가? 물론, 나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라는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렇게 믿는 것이 좋다. 그러나 마귀도 그렇게 믿고 떨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내 자신은 성경이 말하는 명백한 가르침과 교훈에 따라 살지도 않으면서,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는 죄를 회개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철면피가 극에 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나는 위선자이다. 참된 변화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한 내가 무슨 면목으로 남에게 기독교회의 신앙을 권하겠는가?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은 내 영혼에 해결할 수 없는 고통과 고뇌를 가져다 주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약속하고 있는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 내 영혼은 깊은 좌절과 고뇌의 미로를 헤메게 되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그 때부터 나는 영혼의 평안을 찾기 위해서 수십년 동안 방황하였다.


율법의 정죄로부터 시작된 고뇌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은 나의 마음과 생애를 정죄하기 시작하였다. 그 정죄의 크기와 깊이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차라리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짐승이었으면” 이라는 생각이 떠오를 정도였다. 성경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모두 살인자다 너희가 아는대로 살인자는 누구나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원한과 용서하지 못하는 정신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 말씀이 너무나 지나친 말씀이라고 생각되었지만, 그 말씀 역시 진리였다. 가인은 그의 동생 아벨을 미워하던 끝에 결국에는 아우를 죽이는 첫번째 살인자가 되었다. 증오는 결과적으로 살인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인을 형벌하실 때에는 죄의 결과로 하지 않으시고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만든 의지를 심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실 때에는 그 의지의 실행 여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의지 자체를 보신다. 증오심이 언제나 살인이라는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그 사람의 교육, 환경, 체면 등에 의해서 조절되기 때문이다. 만일 국가의 법과 사회의 제재가 없고, 살인자는 저생에서 지옥불에 떨어진다고 가르치는 종교가 없다면, 사람은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을 결국에는 죽이고 말 것이다. 그래서 존 번연은 사형장에 끌려가는 죄수를 가리키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였다면 저 죄수는 존 번연이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마음 속에 증오심이 뿌리를 내릴 때마다 이미 살인은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증오와 원한을 품고 있는 나에게 하나님께서 살인죄의 선고를 내리시기로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는가?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 역시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도둑질은 절도나 강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릇 하늘이 베풀지 않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학식과 재능의 결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첨과 뇌물로서 높은 지위를 얻는다면, 그것은 그 직위와 봉급을 도둑질한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지도 않으셨는데, 내 스스로 목사가 되어 성직의 권위와 존엄성을 사용한다면, 나는 엘리의 아들과 마찬가지로 성직에 따르는 명예를 도둑질한 것이다. 아,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에 의해서 정죄당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위선자고, 살인자며, 도둑질한 자였다. 성경이라는 빛으로 나를 살펴볼 때마다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절망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알지 못하였을 때에는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그다지 큰 고통이 없었는데, 죄와 죄의 결과를 안 후로는 죄를 범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고뇌가 나를 압도하였다. 그런데 매우 놀랄만한 사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한 고민과 고뇌가 무엇인지도 모른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깊은 절망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치료하기 위해서 “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환자들을 불러들이는 돌팔이 목사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멸망의 골짜기로 걸어가고 있다. 그러한 목사들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계명을 지키고, 죄에 대해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라고 물으면, 그들은 한결같이 “연약한 인간은 원래 죄를 범한 다음, 그것을 후회하고 또한 그 결과를 두려워 한답니다. 그런 다음, 죄를 범한 자신에 대해서 절망감을 느끼게 되죠. 그러면서도 똑 같은 죄를 반복해서 범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랍니다. 비록 그러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교회 활동에 열심히 참석하고 잘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느니 안심하고 교회에만 열심히 나오십시요” 라고 답변한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말인가? 정말 그러한 삶이 성경이 말하는 “이기는 자”의 경험이란 말인가? 율법을 범한 죄로 인하여 받게 되는 양심의 고통 속에서 어떻게 성경이 약속하는 평안과 화평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성경은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혼의 평안을 약속하고 있다.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이 문제에 대한 진리를 찾아낼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겪게 되는 고통이 미신과 오류 속에서 양심을 기만하는 것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다.

3부 - 교회 안에서의 실망과 외로움


교회 안에서의 외로움

오늘날,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신자의 고통과 눈물은,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기도회, 부흥회에 참석하는 것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든 의무를 완수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전혀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자신의 죄에 대하여 깊은 고통과 슬픔을 느끼는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서 조차 외로움과 설움을 맛보게 된다. 내가 너그러운 생각을 가지고 그들을 대하면, 그들은 사기로서 나를 맞아 준다. 그들이 내게 속옷을 구할 때에 내가 겉옷까지 벗어 주면, 그들은 오히려 신발과 모자까지 달라고 한다. 나의 정직을 이용하여 그들은 나를 그들의 편리한 도구로 만들려고 한다. 가끔씩 내가 교회를 위하여 곧바른 말을 하면, 그들은 나를 사랑이 없는 율법주의자로 몰아부쳤다. 아, 교회 안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한단 말인가? 교회는 나에게 죄를 강요하고 있다.

죄를 죄로 느끼지 않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나는 매우 외로운 세월을 보내야만 하였다. 그들의 설교나 신앙 태도는 나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죄에서 구원받으려는 자는 그리스도 교회로 오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방패 삼아서 대담무쌍하게 죄를 범하고자 하는 자들도 교회로 오라!” 오늘날, 교회는 신자들에게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소개하고 있지만, 율법에 대해서 올바로 알려주지 않음으로써 교인들을 대담한 무법자로 양육시켜 가고 있다. 또한 어떻게 하면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가를 안내해 주지 않음으로써 교인들을 지옥불에 대하여 두려워 떠는 신경쇠약 환자로 만들고 있다.

교회 안에서 얻지 못한 대답

나는 내 죄가 부끄러워서 하나님을 피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손을 놓지 않으셨다. 나는 하나님의 겨누는 표적이 된 듯하였고, 그의 화살에 맞아서 비틀거렸으며 그의 손이 나를 누르셨다. 내가 동으로 가도 그가 계셨고, 서로 가도 그분을 만나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었다. 죄로 인한 가책으로 인하여 나는 완전히 삶의 즐거움을 잃고 말았다. 식욕을 잃고 밤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일할 기력조차 없었다. 하루는 유명한 목사님을 찾아가 내 영혼의 고통을 말하면서 도움을 구했으나 “나는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다”는 대답을 줄 뿐이었다.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번연 역시 죄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하루는 감당할 길이 없어서 목사를 찾아가 마음을 털어 놓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 목사가 말하기를 “아마도 당신은 악마의 종이 되었나 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죄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성경과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설명하지 못하는 목사야말로 자신이 왜 목사가 되었는지를 모르는 성직자라고 말할 수 있다. 죄의 문제에 대한 명백한 답변을 가지고 있지 못한 어떠한 신앙이나 종교도 모두 거짓이다.
 

 

4부 - 망죄술로 사용된 봉사와 희생


봉사와 희생의 위험성

나는 희생적인 봉사를 통하여 영혼의 고통을 잊기로 결심하였다.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선과 봉사를 통하여 죄로 인한 양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심지어는 교회에 바치는 헌금을 통하여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나 역시 한때 자선과 봉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참된 경험을 얻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빈민 구호 병원에 보조 간호원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발을 씻기고 배설물을 닦아주며, 환자들로부터 온갖 욕설을 들으면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인내의 수련을 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자선과 봉사는 사랑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진리를 깨닫고 나서부터 이 문제에 있어서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자선과 봉사 사업에 종사하면 결국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관념은 사실처럼 보이지만, 진리는 아니다. 자선과 봉사의 행위가 자비로운 마음을 배양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결코 우리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사랑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자신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사랑 이상의 봉사와 자선을 억지로 이끌어 낼 경우, 자선은 위선이 되고, 봉사는 교만으로 발전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회를 위하여 수많은 자선과 봉사를 베푼 사람이 결국에는 교만한 목사와 장로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선과 봉사가 나를 교만하게 만든다면, 나의 선행은 나의 원수이다. 이러한 경우에 자선과 봉사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교만과 위선의 깊이는 깊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선과 봉사라는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면, 그는 거의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영적 상처를 받게 될 것이다.

조심하라! 고아원을 세워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봉사하려고 하는 자여! 세상이 그대의 자선심을 인정하고 교회가 그대의 신앙적 헌신을 칭찬할 때, 그대는 바로 지옥의 벼랑길 위에 서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눈에 보이는 사업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보다 더 높게 평가되는 오늘날, 그대의 이름이 높이 들리면 들릴수록 조심하라! 위대한 자선 사업가 하워드는 임종시에 단 두마디의 유언을 남겼다. 하나는 그의 미친 아들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과 자기를 위해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대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수록 안전하다. 자신의 죄를 해결하지 않은 채 자선 사업가가 되기를 원하는 자가 있는가? 조심하라!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싶어하는 정치가와 연예인들이 자선 사업에 많은 돈을 투자하는 모습을 보라! 그와 마찬가지로, 거듭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도 자선과 봉사를 인기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설교를 잘 하지 못하는 야심적인 목사도 자선가가 되면, 세상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자선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칭찬하지 말라! “너는 남을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구제를 은밀히 하라. 그리하면 은밀히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니라.” 마태복음 6:4.

5부 - 마지막 시도, 목사의 길


자선 사업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한 나는 마침내 극단적인 수단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 같은 결과가 생길까봐 오래 전부터 두려워하였으며, 이러한 결정을 내리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이제 이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듯 하였다. 그래서 드디어 나는 목회 사업에 투신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세상에 위선적이고 파렴치한 사람들이 많지만, 목사보다 더한 사람이 있을까? 내가 기독교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을 때부터, 나는 “결코 목사는 되지 않을 것이야” 라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 “내게 아무리 천한 직업을 주시더라도 제발 목사는 되지 않게 해주십시요”라고 기도하였다. 물론,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지더라도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었다. 그러나 내 스스로 목사직을 택하여 Rev.(경건한 목사) 라는 명칭을 내 이름 앞에 얹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비록 내가 마차꾼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목사는 되지 않겠다고 여러번 다짐하였지만, 결국 나는 그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밭에 곡식이 익어 추수할 때가 되었다. 추수할 것이 많은데 추수할 사람이 너무나 적다. 그러므로 당신은 목사가 되어야 한다.” 나에게 여러 사람이 이러한 말로서 신학 공부를 권했었다. 그러나 나는 목사를 나의 직업으로 택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하는 목사는 내가 생각하는 목사와 달랐다. 나는 바울과 같은 목사가 되고 싶었다. 나는 루터와 같은 목사가 되기를 갈망하였다. 나는 리빙스턴과 같은 목사가 되기를 소원하였다. 나에게 그러한 목사가 되라고 권했으면, 나는 높으신 부르심으로부터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제대로 성경을 배우지 못했고, 충분한 경험이 없으며, 자신의 죄와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해방되는 경험을 알지도 못하고,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신학대학을 졸업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목사가 되어서 설교 단상에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목사직에 대해서 환멸을 느껴왔다. 로마제국의 핍박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교회의 깃발이 피로 물들었을 때에는 매우 적은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이 목사가 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목사직이 안락한 생활이 보장되는 직장으로 전락되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최소한의 생존경쟁으로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목사가 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기나긴 씨름 끝에 결국 나는 “결코 목사가 되지 않겠다”는 사욕을 버리기로 결심하였다. 이 마지막 제물을 바치고 목사로서 최대의 고난을 받는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에 평안을 주실 것이다 라고 믿었다. 내 영혼의 평안을 위해서라면, 목사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신학교에서 기도와 단식으로 인생 최대의 행복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학교는 중세기 때의 수도원과는 전혀 달랐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내가 처음 느낀 것은 너무나 편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빈민 구호 병원에서 수련하던 때와 비교하면 너무나 편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신학교에서의 실망

신학교에서 배운 어떤 학문들은 나의 사상에 있어서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특히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연구를 통해서 나는 모세와 바울을 직접 대면하는듯한 감격을 맛보았다. 신학이라는 학문을 여기서 제한하였더라면 좋았을텐데, 유감스럽게도 진지한 성경 연구는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오히려 영혼을 구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웅변학, 설교학, 목회학, 변증학과 같은 것들을 공부하는데 많은 시간을 바쳐야만 하였다. 나는 모세와 바울이 배웠던 신학을 배우고 싶었지만, 신학교는 나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신학교 역시 나의 영혼에 평화를 가져다 주지 못했다. 신학교의 아침 기도회, 쉴새없는 찬미소리도 내 마음 속에 있는 죄의 사슬을 벗겨주지 못했다. 성경 연구, 기도, 찬미와 같은 것들이 학문의 대상이 되고, 의무로서 나에게 부담을 주었을 때, 그러한 것들이 더 이상 거룩한 힘으로 내게 다가오지 못했다. 더우기 종교 비판학과 같은 강의 시간에는 두려운 마음 없이는 입 밖에 낼 수 없는 거룩한 이름을 마치 오래된 돌멩이나 나무조각의 이름처럼 불러댔다. 신학교에서 내가 경험했던 위험은 바로 신성모독의 죄였다.

신성모독에 대한 형벌은 마음이 죄의 죄됨을 느낄 수 없는 상태로 전락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거룩한 성경 말씀이 죄인의 심령을 치료하고 죄의 사슬을 끊어주는 능력으로 다가오는 대신에 하나의 학문과 학설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나는 죄의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얻으려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신학교에 있는 어떤 교수들은 죄를 계속해서 범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신학을 나에게 강요하였다. 나는 신학교에서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는 문을 발견하곤 깊은 좌절에 빠지고 말았다.

신학의 중심은 마음에 있어야 한다. 전도는 정신이지 기술이 아니다. 목사의 설교는 배우의 연극이 아니다. 사람의 영혼을 다루는 정신적 사업을 위해서 기술적 훈련을 받는 자들은 자칫 잘못하면 목사라는 직업을 가진 연극 배우가 될 수 있다. 자기가 느끼지 않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말하고, 자기가 확신하지 않는 것을 확신하는 것처럼 말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연극 배우의 필수 연기가 아닌가?

하늘의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도, 특별한 하늘의 계시와 영감이 없이도, 그리스도에 대한 순결한 사랑을 맛보지 못한 사람도 신학생이 될 수 있다. 그러한 신학생들에게 하나님의 복음 사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이 현대 신학교가 가지고 있는 맹점이다. 설교는 제조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바울의 글은 문법적으로 분석하고 해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되어야 비로서 바울의 사상과 경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억지로 바울의 사상을 꾸며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목사의 양성은 신학교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훌륭한 종교가 중에는 신학교 출신이 많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길리얏의 야인이었으며, 그의 사업과 정신을 물려주려고 선택한 후계자 역시 소를 모는 사밧의 아들 엘리사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사 세상을 구하려고 계획하셨을 때에도, 당신의 아들을 히렐이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우게 하지 않으시고 나사렛 벽촌에 두셔서 천연계를 통하여 아들을 친히 가르치셨다. 19세기 최대의 전도자인 무디 역시 세탁소의 일꾼이었다. 훌륭한 목사는 결코 신학교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신학교가 만들어낸 목사야말로 그리스도 교회의 가장 위험한 원수이다.

그렇다! 신학교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신학교는 마귀가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기 위해서 공격하기 좋은 최대의 공격 목표이다. 신학교가 마귀의 공격 목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말하고 설교하는 것과, 그들의 품성과 사상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마귀는 그리스도의 거짓 대리자들을 통하여 잘못된 사상과 교리를 하나님의 교회 속으로 밀어넣음으로써 교회를 세속화시키고 있다.

신학자와 목사가 만들어 놓은 거짓 평안

죄의 죗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의 은혜됨을 알 수가 없다. 자기 죄의 무서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에 대한 절실한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은 하지만 그 마음 속에 절실한 감사와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다.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에 들어온 가장 큰 위험은 죄를 어쩔 수 없는 인생의 부산물로서 가르치는 것이다. 타조가 사냥꾼한테 쫓기다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지면, 그 머리를 모래 속에 박고 그것으로서 온 몸을 숨겼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죄에 대해서 그렇게 가르친다. 그들은 죄를 도저히 승리할 수 없는 것으로 부각시킴으로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의 율법은 너무나 거룩해서 도저히 순종할 수 없다는 식의 설교를 한다. 그러나 죄를 범한 교인들은 심한 양심의 가책과 심판의 두려움을 목사와 신학자에게 호소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해낸 것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죄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요. 십계명은 십자가에서 폐지되었습니다. 잘 믿기만 하십시요. 그러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한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미 받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라는 신학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죄를 범하고도 그것을 심각한 죄로 생각하지 않게 되며, 따라서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죄인으로서 열렬히 구해야 할 십자가의 보혈과 은혜를 마음 속 깊이 구하지 않게 된다. 죄를 범한 죄인은 죄책감에 눌리게 되고, 죄인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께 나오도록 계획하신 것이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인데, 신학자들은 죄 가운데서도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신학을 고안해 냄으로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죄인들의 마음에 거짓 평안을 넣어주었다. 죄를 범한 사람은 마땅히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오직 죄를 회개하였거나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만이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죄를 생각하지 않거나, 인위적으로 율법을 폐지시킨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거나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시도는 죄를 죗되게 하지 않음으로써, 은혜를 은혜되지 않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6부 - 내가 깨달은 오해


죄에서 벗어나는 길

죄란 무엇인가? 노하는 것, 도둑질 하는 것 등이 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왜 노하고 도둑질하는가? 어찌하여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것일까?

악이란 음행,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마술, 원수맺기 ... 질투, 술주정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육체의 죗된 행위는 마음에 깃든 병이 겉으로 드러난 증세이지, 병 자체는 아닌 것인가?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육체의 죗된 행위 하나 하나와 싸우는 일을 중단하기로 결정하였다. 왜냐하면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는 결코 죄에 대해서 승리하거나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만일 겉으로 드러난 죗된 행위 자체가 악의 본질이 아니라면, 선한 행위 자체도 선이 아닐 것이다. 이름을 날리기 위한 자선, 더 좋은 것을 얻어내기 위한 기부금은 자선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것도 반드시 선은 아니다. 야심적인 목사, 세속적인 신앙인처럼 더러운 것은 세상에 다시 없다. 선은 정신이지 행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선한 행위는 선이 겉으로 드러난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비록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 주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고 해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도 없다”고 증언하였던 것이다(고전 13:3).

한번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께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에는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담고 있다. “네가 어찌 선한 일에 대해서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니 곧 하나님이시다.” 무엇이 선이냐는 질문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선은 하나님이다”라고 답변하셨다. 효 도 선이고, 인 도 선이다. 그러나 효와 인은 선의 결과일 뿐이며, 선 자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알면 의인이 될 수 있다. 선을 배우면 하나님께 가까워진다. 선을 구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 선을 행할 수 없다. 종교와 도덕적 행위와 신앙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이다. 한쪽을 버리고서는 다른 쪽을 이해할 수 없다. 선이 하나님이라면, 악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 도둑질, 살인, 간음은 하나님을 떠난 결과이지 죄의 근본 원인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율법을 의도적으로 범하는 죄를 짓는 것은 내가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결코 죄를 범할 수 없으며 죗된 생각이 나를 주장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의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죄에서 벗어나는 길, 영혼의 평안을 찾는 길, 그것은 오직 이 길 뿐이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

신앙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신앙이란 납득할 수 없는 일을 믿는 것이 아니다. 신앙이란 양심과 성경에 근거해서 의로운 선택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 교회에서 말하는 신앙이란,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마음과 심령의 전적인 동의를 말한다. 그런데 마음과 심령의 하는 일은 의지와 양심의 선택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면, 양심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믿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사슴은 사슴이요 말은 말인지를 알지만, 정치가들이 정권에 아부할 때에는 사슴을 말이라고 하지 않는가? 둘에 둘을 더하면 넷이 된다는 진리를 정확히 아는 장사꾼도 2원짜리 물건 두개를 5원에 팔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부도덕하고 부절제한 목사라도 성경에 기록된 진리대로 순종하는 사람만이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설교를 하지만, 과연 몇명의 목사들이 자신이 설교하는 진리를 믿으면서 그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가? 그러므로 나는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의 계시적 말씀에 머리를 수그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볼 수 있겠는가?” 누가복음 18:8. 사도 바울은 별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믿고 있는 진리대로 살다가 일생을 마친 사람에 불과하다. 마틴 루터나 요한 웨슬리가 오늘날까지 존경을 받는 이유도 그들이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과는 달리 자신이 인정하는 진리대로 살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에 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믿는 바대로 그대로 산다면, 이미 복음 사업은 끝마쳐졌을 것이고 우리 모두는 지금 하늘에 가있을 것이다.

나의 오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왕과 신하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자애로운 어머니와 갓태어난 아기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아기는 어머니께로부터 만가지를 받지만, 아기는 어머니께 하나도 드리지 못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는 우리의 신뢰 자체도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을 깨달았기 때문에 생긴 선물이다. 우리가 우리의 재산과 몸과 영혼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되돌려 드리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주시는 자요, 인간은 항상 받는 자이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없지만, 하나님은 그분 자체가 사랑이시며 사랑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봄으로써, 그분의 사랑이 자신의 마음 속에 새겨지도록 허용해야만 한다.

그렇다! 나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분의 선하심을 알았다. 그리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결심도 하였고, 어느 정도 그분의 사랑도 알았다. 그러나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그분을 신뢰할 정도로 그분의 사랑을 알지 못했다.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배반하는 탕자가 되거나, 비록 부모 밑에 있을지라도 의무감에서 어쩔 수 없이 순종을 하면서 마음 속에 불만이 가득한 자식으로 자라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 역시 일상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된다. 나는 내 영혼이 구원을 받기 전에 성인의 거룩한 행위를 흉내내려고 했다. 나의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의 관심과 호의를 얻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선한 행위와 의로서 하나님의 친구가 되고, 나중에는 나의 구원에 대해서 그분과 대등한 계약을 맺으려고 계획했었다. 나는 지음을 받은 자면서도 지은 자의 흉내를 냈던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기이면서 우주의 창조 사업에 동참했던 그의 파트너나 된 것처럼 행동하였다.

아, 나는 얼마나 미련했던가!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이 은혜와 사랑을 주려고 호소하시면서 나를 찾아오셨건만, 나는 오히려 “왜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까? 왜 나를 사랑해 주지 않습니까?” 라고 하나님께 대들었던 것이다. 지나간 생애 동안에 하나님께서 나의 선한 행위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실 때까지 기다렸던 적이 얼마나 많던가?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분의 손에 나를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나의 잘못은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그분의 사랑을 충분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무한한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는가? 먼저 내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난 후에 하나님께 나아가야지” 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떻게 내 스스로 나를 깨끗케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 이외에 누가 나를 죄로부터 깨끗케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의 손을 놓음으로 흙탕에 빠지게 된 어린아기가 스스로 자신을 깨끗하게 씻을 때까지 어머니께 올 수 없단 말인가? 사랑의 어머니는 오히려 아이가 머뭇거리면서 더디 온 것을 책망하고 곧 새옷으로 갈아 입힐 것이다. 하물며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겠는가?

의심

세상에 태어나서 속아온 사람일수록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못한다. 이 죄악의 세상에서는 믿음이라는 신성한 특성을 키울 수 있는 여건이 잘 주어지지 않는듯하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인도하겠다” 라고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소서. 그러면 믿겠나이다” 라고 요구한다. 인류는 하늘 아버지를 찾고 있다. 하늘에 걸려 있는 별들과 들에 핀 백합화가 모두 창조주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지만, 사람들은 태풍과 지진과 독초를 보면서 의심함으로써,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돌아가는 신앙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 인류의 6천년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가 꿰뚫고 있음을 증거하지만, 사람들은 수천번의 전쟁과 노예 매매와 인종 학대와 종교 전쟁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인류의 고통을 외면하고 계시다는 의심의 미로를 헤멘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 마저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증거를 얻기 위해서 자꾸 눈에 보이는 특별한 기적과 은사를 요구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해 놓으신 용서에 대한 증거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십자가를 통한 변화의 길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행전 4:12.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원하시는 힘을 가지고 계시다. 모세의 율법을 몸에 두르고 엄격하고도 청렴한 바리새파인 다소 출신의 바울도 그 마음의 고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재능과 학식을 분토로 여기고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참회하며 용서함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독일에 한 청년이 있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번뇌케 하여 그는 불안한 나머지 단식과 절제를 통하여 선을 쌓기 위해서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어쩌랴, 그가 외모를 꾸미면 꾸밀수록 악한 생각이 끊임없이 마음에서 솟아나왔다. 그 때에 스승인 슈타우비츠의 한마디가 그에게 영감을 가져왔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은 루터의 죄를 용서하셨고 온 우주는 버림받았던 자식을 건져 올렸다. 그 후로 루터는 믿음과 성결을 강조하는 강력한 종교 개혁자가 되었지만, 오늘날 그의 후예들은 루터가 말한 믿음을 “죄를 겁없이 범할 수 있는 보험카드”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믿기만 하면 어떠한 생애를 살던지 간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설교를 하게 된 것이다.

영국의 베드포드에 한 대장장이가 있었다. 그는 순박하고 단순한 심령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마음 속에 역사하는 사단의 세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다. 회개하는 눈물이 그의 눈에서 그칠 날이 없었으며, 용서를 비는 기도 소리가 듣는 자로 하여금 그를 동정하게 할 정도였다. 그는 도덕적 양심을 가지지 않은 동물의 처지를 부러워 하곤 하였다. 악마들이 그에게 몰려와서 그의 죄가 용서받지 못했으므로 지옥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속삭이곤 하였다. 그런데 이 무거운 짐을 진 여행객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무거운 짐이 벗겨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아, 이제 내 눈에는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나는 드디어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가 되는 경험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분의 의, 공로, 승리가 모두 내 것이 되었다.” 바로 이것이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번연의 간증이다.
나 역시 죄가 가져온 온갖 고뇌와 고통 속에서 방황하다가 모든 기력을 탈진하고 나서야 아버지의 자비만을 바라보면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범한 죄에 대해서 변명하지 않고, 내가 행한 의와 선한 행위를 내세우지도 않았다. 다만 태초 이전부터 예비해 두신 하나님의 어린양이 이루어 놓은 속죄만을 바라보았다. “하나님이시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시고 나의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용서해 주십시요. 저는 이제 당신께 드릴 선행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는 선행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피곤에 지친 몸과 정신, 그리고 깨어진 마음 뿐입니다.” 이러한 기도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가 내 영혼 깊숙히 스며 들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에 대하여 “너의 제물은 받아들여졌다. 너는 낡은 옷을 벗고 내가 너를 위하여 준비해둔 의의 옷을 입어라” 라고 말씀해 주셨다. 이제 나의 기도에는 내 소원을 요구하는 주장이 없어졌다. 다만 그리스도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간청만이 있을 뿐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넘칠 뿐이다.

이제 유일한 나의 의무는 단지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다. 나의 기대는 노력과 희생에 대한 보수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에 대한 약속된 보상으로 달라졌다. 나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막대한 청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노력과 봉사에 대해서 최선의 선물로 축복해 주셨다. 먹고 입는 것에 대한 근심은 사라져 버렸고,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졌다. 오직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라는 말씀에 대한 느긋한 신뢰가 생겼다(롬 8:32).

더 이상 나는 의무로서 선을 행하지 않게 되었다. 전도든지 자선이든지 간에 즐거움과 만족한 마음을 가지고 행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말과 생활에는 순결한 유머와 여유가 넘치게 되었고,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의미있는 희생과 봉사를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서 바칠 수 있게 되었다. 희생, 절제, 극기와 같은 것들이 더 이상 하기 힘든 의무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고,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를 위해서 바칠 수 있는 다시 없는 특권으로 생각되었다. 하나님께로부터 최고의 선물인 의를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썩어 없어질 인생들로부터 명예와 부를 얻고자 애쓸 필요가 없었다. 이제 나도 영국의 크롬웰처럼 “주여, 비록 내가 처참하고 비천한 죄인일지라도 은혜로서 당신과 계약 가운데 있습니다.” 라고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베푸신 구원에 참여하게 된 이후부터 선에 대한 의무는 즐거움으로 바뀌게 되었고, 죄를 짓는 것은 더할 수 없는 고통이 되었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게 되었고, 악을 미워하기 때문에 악을 행하지 않게 되었다. 율법은 더 이상 내게 무거운 짐이 되지 않았으며, 다음과 같은 사도 요한의 말이 이해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3.

구세주의 사업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진다. 첫째는 인류에게 완전한 생애를 가르치는 것이고, 둘째는 인류의 죄를 당신 자신이 직접 짊어지심으로써 제거하시는 일이다. 전자는 최종 목적이고, 후자는 전자로 인도하는 필요 수단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죄인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죄를 속죄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죄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진실로 용서받은 경험을 하지 못하면, 그 죄인은 결코 죄를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는 속죄의 교리를 죄에 대한 값싼 용서에 국한시킴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구세주의 모본을 쫓아서 따라가는 성화의 경험을 빼앗아 버렸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를 속하셨으니 이제 나는 애써 선행을 하지 않아도 되며, 죄를 범해도 구원에는 지장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리요” 롬 6:1. 내 경우에 있어서 처음에는 모세의 율법이 부각되었고, 그 후에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다가왔다. 어떤 의미에서 율법의 엄한 밧줄로 자신을 얽어 맨 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 교회에는 속죄의 교리를 가지고 자신의 죄와 부도덕함을 가리우려고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이루어진 은혜가 눈 먼 자들에 의해서 희롱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깊은 염려와 슬픔에 잠기게 된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의를 사모하는 자들의 휴식처이지, 악인의 은신처가 아니다. 구약의 엄격한 십계명을 가르치지 않고, 신약의 은혜만을 부드럽게 설교하는 목사야말로 하나님의 어린양들을 소리없이 죽이는 늑대이다.

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언제나 이러한 불만을 토로했다. “아, 하나님이시여 내가 당신을 찾고 있었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문을 열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길 가에서 방황하고 있는 모습이 당신께는 가련하게 보이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진리를 보지 못함으로 고통에 고통을 더하고 있을 때, 당신은 팔짱을 끼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계셨습니까?” 그러나 이제 은혜로운 한 음성이 내게 이렇게 대답해주셨다. “나의 은혜와 인내가 네게 족하단다. 네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함께 괴로워 했단다. 내가 너를 구하지 않았던 이유는 너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너에게 반생 동안의 방황과 번민을 허락했던 이유는 너로 하여금 자신을 의존하는 정신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나를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너를 괴롭힌 것은 네 자신이었다. 이제부터는 나만을 의지해라. 지혜는 네가 아니라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있지 말아라. 나는 네 죄를 속하여 선에서 선으로 이끌어 너로 하여금 나를 위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힘이 되게 하고자 한단다.” 이제 나는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이렇게 응답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여 그러하옵나이다. 모든 것이 그렇게 된 것은 거룩한 뜻에 합당하옵니다.” 마11:26

이제 나는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을 깊이 인식한 채 자선 사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용서가 당신의 완전하신 심판과 공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모든 정성과 힘을 다하여 그분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나를 깊은 멸망의 수렁에서 건져주신 그분의 은혜를 어떻게 저버릴 수 있는가? 전에는 그분의 율법에 압도 되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엄청난 은혜에 압도되었다. 하늘은 내가 가지기 원하는 모든 것을 나에게 주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인생은 한번 살아볼 만하지 않은가!
나는 평안과 구원의 길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길을 안 것이 반드시 그 길을 걷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단지 깨달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평안과 행복한 마음을 가지고 그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질문과 대답
문: 무엇이 유이며, 무엇이 무입니까?
답: 하나님이다. 세상이다.
문: 누가 사람이며, 누가 짐승보다 못한 존재입니까?
답: 신자이다. 거짓 신자이다.
문: 무엇이 가장 추하며, 무엇이 가장 아름답습니까?
답: 신자의 뒷걸음질이다. 죄인의 회개이다.
 

 

7부 - 변화와 해방의 기쁨


십자가를 통한 변화의 길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행전 4:12.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원하시는 힘을 가지고 계시다.

모세의 율법을 몸에 두르고 엄격하고도 청렴한 바리새파인 다소 출신의 바울도 그 마음의 고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재능과 학식을 분토로 여기고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참회하며 용서함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독일에 한 청년이 있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번뇌케 하여 그는 불안한 나머지 단식과 절제를 통하여 선을 쌓기 위해서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어쩌랴, 그가 외모를 꾸미면 꾸밀수록 악한 생각이 끊임없이 마음에서 솟아나왔다. 그 때에 스승인 슈타우비츠의 한마디가 그에게 영감을 가져왔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은 루터의 죄를 용서하셨고 온 우주는 버림받았던 자식을 건져 올렸다. 그 후로 루터는 믿음과 성결을 강조하는 강력한 종교 개혁자가 되었지만, 오늘날 그의 후예들은 루터가 말한 믿음을 “죄를 겁없이 범할 수 있는 보험카드”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믿기만 하면 어떠한 생애를 살던지 간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설교를 하게 된 것이다.

영국의 베드포드에 한 대장장이가 있었다. 그는 순박하고 단순한 심령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마음 속에 역사하는 사단의 세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다. 회개하는 눈물이 그의 눈에서 그칠 날이 없었으며, 용서를 비는 기도 소리가 듣는 자로 하여금 그를 동정하게 할 정도였다. 그는 도덕적 양심을 가지지 않은 동물의 처지를 부러워 하곤 하였다. 악마들이 그에게 몰려와서 그의 죄가 용서받지 못했으므로 지옥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속삭이곤 하였다. 그런데 이 무거운 짐을 진 여행객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무거운 짐이 벗겨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아, 이제 내 눈에는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나는 드디어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가 되는 경험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분의 의, 공로, 승리가 모두 내 것이 되었다.” 바로 이것이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번연의 간증이다.

나 역시 죄가 가져온 온갖 고뇌와 고통 속에서 방황하다가 모든 기력을 탈진하고 나서야 아버지의 자비만을 바라보면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범한 죄에 대해서 변명하지 않고, 내가 행한 의와 선한 행위를 내세우지도 않았다. 다만 태초 이전부터 예비해 두신 하나님의 어린양이 이루어 놓은 속죄만을 바라보았다. “하나님이시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시고 나의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용서해 주십시요. 저는 이제 당신께 드릴 선행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는 선행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피곤에 지친 몸과 정신, 그리고 깨어진 마음 뿐입니다.” 이러한 기도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가 내 영혼 깊숙히 스며 들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에 대하여 “너의 제물은 받아들여졌다. 너는 낡은 옷을 벗고 내가 너를 위하여 준비해둔 의의 옷을 입어라” 라고 말씀해 주셨다. 이제 나의 기도에는 내 소원을 요구하는 주장이 없어졌다. 다만 그리스도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간청만이 있을 뿐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넘칠 뿐이다.

이제 유일한 나의 의무는 단지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다. 나의 기대는 노력과 희생에 대한 보수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에 대한 약속된 보상으로 달라졌다. 나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막대한 청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노력과 봉사에 대해서 최선의 선물로 축복해 주셨다. 먹고 입는 것에 대한 근심은 사라져 버렸고,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졌다. 오직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라는 말씀에 대한 느긋한 신뢰가 생겼다(롬 8:32).

더 이상 나는 의무로서 선을 행하지 않게 되었다. 전도든지 자선이든지 간에 즐거움과 만족한 마음을 가지고 행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말과 생활에는 순결한 유머와 여유가 넘치게 되었고,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의미있는 희생과 봉사를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서 바칠 수 있게 되었다. 희생, 절제, 극기와 같은 것들이 더 이상 하기 힘든 의무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고,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를 위해서 바칠 수 있는 다시 없는 특권으로 생각되었다. 하나님께로부터 최고의 선물인 의를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썩어 없어질 인생들로부터 명예와 부를 얻고자 애쓸 필요가 없었다. 이제 나도 영국의 크롬웰처럼 “주여, 비록 내가 처참하고 비천한 죄인일지라도 은혜로서 당신과 계약 가운데 있습니다.” 라고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베푸신 구원에 참여하게 된 이후부터 선에 대한 의무는 즐거움으로 바뀌게 되었고, 죄를 짓는 것은 더할 수 없는 고통이 되었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게 되었고, 악을 미워하기 때문에 악을 행하지 않게 되었다. 율법은 더 이상 내게 무거운 짐이 되지 않았으며, 다음과 같은 사도 요한의 말이 이해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3.

구세주의 사업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진다. 첫째는 인류에게 완전한 생애를 가르치는 것이고, 둘째는 인류의 죄를 당신 자신이 직접 짊어지심으로써 제거하시는 일이다. 전자는 최종 목적이고, 후자는 전자로 인도하는 필요 수단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죄인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죄를 속죄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죄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진실로 용서받은 경험을 하지 못하면, 그 죄인은 결코 죄를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는 속죄의 교리를 죄에 대한 값싼 용서에 국한시킴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구세주의 모본을 쫓아서 따라가는 성화의 경험을 빼앗아 버렸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를 속하셨으니 이제 나는 애써 선행을 하지 않아도 되며, 죄를 범해도 구원에는 지장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리요” 롬 6:1. 내 경우에 있어서 처음에는 모세의 율법이 부각되었고, 그 후에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다가왔다. 어떤 의미에서 율법의 엄한 밧줄로 자신을 얽어 맨 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 교회에는 속죄의 교리를 가지고 자신의 죄와 부도덕함을 가리우려고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이루어진 은혜가 눈 먼 자들에 의해서 희롱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깊은 염려와 슬픔에 잠기게 된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의를 사모하는 자들의 휴식처이지, 악인의 은신처가 아니다. 구약의 엄격한 십계명을 가르치지 않고, 신약의 은혜만을 부드럽게 설교하는 목사야말로 하나님의 어린양들을 소리없이 죽이는 늑대이다.

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언제나 이러한 불만을 토로했다. “아, 하나님이시여 내가 당신을 찾고 있었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문을 열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길 가에서 방황하고 있는 모습이 당신께는 가련하게 보이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진리를 보지 못함으로 고통에 고통을 더하고 있을 때, 당신은 팔짱을 끼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계셨습니까?” 그러나 이제 은혜로운 한 음성이 내게 이렇게 대답해주셨다. “나의 은혜와 인내가 네게 족하단다. 네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함께 괴로워 했단다. 내가 너를 구하지 않았던 이유는 너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너에게 반생 동안의 방황과 번민을 허락했던 이유는 너로 하여금 자신을 의존하는 정신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나를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너를 괴롭힌 것은 네 자신이었다. 이제부터는 나만을 의지해라. 지혜는 네가 아니라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있지 말아라. 나는 네 죄를 속하여 선에서 선으로 이끌어 너로 하여금 나를 위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힘이 되게 하고자 한단다.” 이제 나는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이렇게 응답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여 그러하옵나이다. 모든 것이 그렇게 된 것은 거룩한 뜻에 합당하옵니다.” 마11:26

이제 나는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을 깊이 인식한 채 자선 사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용서가 당신의 완전하신 심판과 공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모든 정성과 힘을 다하여 그분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나를 깊은 멸망의 수렁에서 건져주신 그분의 은혜를 어떻게 저버릴 수 있는가? 전에는 그분의 율법에 압도 되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엄청난 은혜에 압도되었다. 하늘은 내가 가지기 원하는 모든 것을 나에게 주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인생은 한번 살아볼 만하지 않은가!
나는 평안과 구원의 길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길을 안 것이 반드시 그 길을 걷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단지 깨달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평안과 행복한 마음을 가지고 그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질문과 대답
문: 무엇이 유이며, 무엇이 무입니까?
답: 하나님이다. 세상이다.
문: 누가 사람이며, 누가 짐승보다 못한 존재입니까?
답: 신자이다. 거짓 신자이다.
문: 무엇이 가장 추하며, 무엇이 가장 아름답습니까?
답: 신자의 뒷걸음질이다. 죄인의 회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