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기도란 친구에게 마음을 털어놓는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심정을 아뢰는 것이다. 믿음의 눈을 가진 자는 하나님이 곁에 계신 것을 인지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겸손한 마음으로 드리는 사람의 기도를 마치 예수님 자신의 소원처럼 받아들이신다. 진실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어떤 것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심령을 울린다. 비록 기도가 유창하게 표현되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이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왔다면 그 기도는 하늘에 올라갈 것이며 예수께서는 그것에 자신의 완전하고 선하신 향기를 담아서 하늘 아버지께 바치신다.

그리스도인은 정직과 진리로 꼴 지워진 길을 걸어야 하는데, 그 길에는 마귀가 세상에 뿌려놓은 난관과 장애물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도라는 무기를 우리에게 허락하심으로써 사단의 공격을 이길 수 있도록 계획하셨다. 그러므로 기도하라!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을 받지 않는 한 아무도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하신 정직과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 없다. 하늘에 있는 능력의 근원은 이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도 열려져 있다. 하늘 아버지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그리하면 가장 고통스럽고 외로운 처지에서도 의롭고 순결한 미소를 지으며 살아갈 수 있다. 사단은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 아버지를 신뢰하는 심정으로 미소 짓는 그리스도인의 품성 앞에서는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크고 작은 문제들을 그분께 가져갈 때, 그리고 좁은 길을 걷는 매 발자국마다 그분의 임재하심을 필요로 느낄 때, 사단은 우리를 시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바로 이러한 하늘의 친구를 우리와 분리시키고자 하는 것이 사단의 전략이다.

시련은 우리의 마음을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이끄시는 은혜이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쫓아오는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전진하라!”는 명령을 내리시는데,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과 신뢰는 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지 말라. 진리와 정직으로 인하여 그대의 양심과 신앙이 시험받을 때, 예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라. 이러한 경험을 개인적으로 하는 자들만이 환란의 때에 살아남게 될 것이다.

덧없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인 우리가 온 우주를 창조 하신 분 앞에 나아가 자신의 모든 소원과 고통을 아뢸 수 있다는 자체가 너무나 큰 특권이 아닌가? 이러한 우주의 왕께서 일을 할 때나 길을 걸어가면서 드리는 우리의 기도까지도 놓치지 않으시기 위하여 귀를 기울이신다. 이러한 사실을 깊이 명상하는 자마다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동정과 자비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굴복하게 될 것이다. 그대 영혼의 평화는 예수님의 품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분의 위대하신 사랑과 은혜를 명상하라. 그분의 생애와 십자가에 나타난 자아부정과 희생을 명상하노라면, 그대의 완악하고 고집 센 마음속에 부드러움과 아름다운 의의 향기로 가득 채워지게 된다. 그분에 대해서 깊이 알면 알수록 그대는 그분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고자 최선을 다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 영혼의 구원과 평안은 그분을 더욱 잘 아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아서 안 자들은 온 마음을 다하는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죽든지 살든지 나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하늘 아버지의 명령과 말씀은 더 이상 괴롭고 지루한 멍에가 아니다. 그 누구도 하늘 아버지의 계명대로 살고자 하는 소원과 결심을 막을 수 없다. 그리하여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늘 아버지의 자녀로 변화된다.

기도는 우리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께 강요하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과 섭리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다. 기도는 하늘의 지혜를 여는 믿음의 손 안에 쥐어진 열쇠이다. 우리는 언제나 기도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진지한 마음으로 영혼의 정결함을 위하여 기도하라. 어떤 은사라도 기도를 대신하지 못하며 영혼의 건강을 유지시키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두 가지 형태의 삶이 되어야 한다. 첫째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이고, 두 번째는 조용히 기도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생활이다. 그대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든 느낌과 감정을 기도와 성경 말씀으로 검증해 보아야 한다. 그대의 신앙은 결코 느낌과 감정에 의해서 판단되거나 주관되어서는 안 된다. 사단은 우리의 느낌과 감정을 발판으로 우리의 영혼을 점령한다. 사단은 주로 우리의 감정을 통하여 역사하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주로 우리의 이성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그대 마음과 감정이 자극되어야만 만족을 느끼는 신앙 태도는 매우 위험하다. 성령의 역사는 오히려 조용히 부는 바람과 같아서 그대의 도덕적 양심에 호소하여 그대로 하여금 올바른 선택과 결정을 하도록 이끄신다.

왜 우리는 기도하지 않는가?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도우심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대가 이웃을 미워할 경우, 그대는 하나님께 기도드리기를 꺼려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대의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대답하실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돈을 사랑할 때 그대는 진정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대의 기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돈은 일만 악의 근원이다”라고 대답하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마음에 죄를 품고 있는 한 그대는 하나님과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없다. 그러한 상태에서의 기도는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지 않은 채 형식적으로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될 수 밖에 없다.

매일 일정한 시간을 떼어서 기도에 바치는 사람은 하늘의 변화시키는 능력에 자신을 붙들어 맬 수 있다. 위대한 사상, 순결한 욕망, 정직한 영혼을 소원하는가? 기도하라. 그대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와 부족과 연약함이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는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위해서 기도하는가? 기적과 이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위해서 기도하는 가? 이러한 기도는 산신령에게 드리는 이방인들의 기도와 같은 것이다. 진정으로 회개하여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유익과 만족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마음을 비우고 정결케 하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기도를 통하여 매일 성장해야 한다. 날마다 주님의 지시와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그분께 나아가라. 기도를 드린 후에 무엇을 구했는지조차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이라면, 그러한 간구와 기도는 응답되지 않는다. 그대가 드린 기도에 마음을 집중시키라. 그리고 말하거나 길을 걸을 때에도 “주님, 제가 온 마음을 다하여 그렇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세요. 지금보다 더 인내하고 지금보다 더 친절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주님을 위한 저의 봉사가 기쁨과 즐거움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라.

이른 아침에 그대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바친 다음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라.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임재이다. 사단은 우리 마음속에 주님이 없을 때를 즉시 알아차린다. 그럴 때마다 마귀는 악한 생각을 불어넣고, 이기적 욕망을 부채질하여 죄악의 구렁텅이로 굴러 떨어지게 만든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놓지 않고 길을 걸으며 그분의 임재를 거절하지 않고 일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대장이 되셔서 우리를 위하여 마귀와 싸워주실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때때로 응답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도대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면, 우리는 교만과 자기만족의 길을 걷게 된다. 하늘에 가면, 이 땅에서 우리를 괴롭게 하고 실망시켰던 신비들이 풀리게 된다. 하늘에 가면, 응답받지 못했던 우리의 기도와 좌절당했던 희망이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할 수 있는 것들을 구하라. 그분께서는 단 한 번도 우리의 이기심과 탐욕적 정신을 만족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을 이기적인 인간의 관심과 다르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분의 유일한 관심은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구원에 이르러 영원토록 하늘에게 함께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선하신 관심과 완전하신 목적에 일치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하라. 그리하면 “무엇을 구하든지” 그분께서 직접 응답하실 것이다.


 

새우처럼 살지 마세요!


새우에게서 배운 교훈

최근에 나는 새우가 일년에 6번 내지 8번 옷을 갈아입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매우 흥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탈피라고 부르는 이 현상은 오래된 살 아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서 옛 살을 바꾸는 현상이다.

새우는 새 살이 나기 시작하면 바다 밑 바위에 살을 문질러서 오래된 살을 벗겨낸다.

그런데 매번 이 탈피를 할 때가 되면 어떤 신비로운 현상이 일어난다. 새우는 본성적으로 바닷가에 깔린 작은 모래나 자갈들을 머리의 한쪽에 붙인다. 탈피를 할 때면 이미 붙어 있던 작은 자갈들은 옛 살과 함께 떨어져 나가고, 새 살이 나오면 다시 새 모래를 머리에 붙인다. 이 조그만 자갈을 “상태석”이라고 부르는데, 새우의 머리에 붙어 있는 이 조그만 자갈들은 새우가 살아남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역할을 한다.

조수의 흐름이 바뀔 때마다 새우들은 어쩔 수 없이 물결을 따라서 바다 밑바닥을 정신없이 뒹굴면서 돌게 되는데, 이때 새우들에게 자세를 다시 찾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자갈(상태석)들의 역할이다. 머리에 붙은 이 자갈들은 무게와 중력에 의해서 무게 중심이 지면을 향하게 되고, 새우는 자신의 머리 위에서 내려 누르는 작은 자갈의 중력 방향을 이용하여 자신이 똑바로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이 작은 하등동물 안에 이러한 특별한 기능을 설치하심으로 그들이 살고 있는 거칠게 변하는 바다 밑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섭리하셨다. 몇 년 전에 어느 해양 생물학자가 특별한 실험을 실시하였다. 커다란 수족관 안에 여러 마리의 새우를 넣어놓고 그 바닥에는 모래 대신에 쇠 조각들을 깔아 두었다. 탈피할 시기가 됨에 따라서 새우들은 본능적으로 그 표피를 벗겨 내었지만 바닥에는 모래가 없었으므로 모래 대신에 조그만 쇠 조각들을 머리에 붙였다.

새우가 쇠조각을 머리에 붙이는 과정이 끝나자 이 생물학자는 강한 지남철을 가져다가 수족관 위를 덮어 버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 강한 지남철은 새우의 머리에 붙였던 쇠 조각들을 끌어들이므로 새우들에게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머리에 붙여놓은 모래가 중력에 의하여 끌리는 쪽을 지면으로 알고 있던 이 새우들은 이제 자신의 머리에 붙어있는 쇠조각들이 자력에 의해서 위쪽 방향을 향하게 이끌리게 되자, 위쪽을 바닥(지면)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수족관 안에 있는 모든 새우들은 거꾸로 수영을 하게 되었다. 자석이 새우의 방향감각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이 실험을 더 실감나게 하기 위하여 생물학자는 머리에 쇠조각이 아니라 조그만 자갈이 붙여 있는 다른 정상 새우들을 그 수족관 안에 집어 넣어보았다.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벌어졌다. 새로 넣은 새우들은 정상적으로 똑바로 수영을 하는데, 쇠 조각을 머리에 붙인 새우들은 계속해서 거꾸로 수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얼마나 우스운 장면인가? 아마 머리에 쇠를 붙이고 있던 새우들은 새로 들어온 새우들을 보면서 “너희들은 왜 거꾸로 수영을 하고 있어” 하고 놀려댔을 것이다. 쇠조각을 머리에 붙인 새우들은 서로 귀속 말로 소문을 퍼뜨리면서 새로 들어온 정상 새우들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도데체 너희들은 왜 유별나게 노니? 무엇을 보여주려고 그렇게 우스꽝스럽게 수영을 하지? 우리들은 똑바로 다니는데, 왜 너희들은 거꾸로 다니냔 말이야!”

이제 여러분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쇠를 붙이고 있던 새우들은 진정한 자신들의 모습을 깨닫지 못했다. 수족관에 있던 새우들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사실을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1) 그들은 느낌에 의존해서 판단하였다. 자신의 머리에 붙은 쇠 조각들이 끌리는 그 방향에 의존해서 판단하였다. 2) 그들은 대다수의 군중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수족관에 있는 다른 대부분의 새우들이 다 자기처럼 다니는 모습에 의존하여 자신들이 똑바로 수영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다시 말하자면, 감정과 주변에 있는 대다수 새우들의 행동에 의존하여 진실과 진리를 판단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머리에 붙어 있던 쇠 조각들이 자신들을 쇠뇌시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거꾸로 걸어다니게 되는 과정

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우리 모두가 이 수족관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강한 자석과 같은 유혹들이 우리들의 정신적 삶을 교란시켜서 우리를 거꾸로 걷게 만들고 있다. 단순히 감정과 대다수 사람들의 의견만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외부의 영향력에 의해 굴복당하고 쇠뇌 당하게 된다. 그들의 판단 기준은 자신들이 끌리고 있는 그 상태에 의해서 달라지게 되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잘못된 판단 기준을 통하여 바라보게 된다. 그들은 거꾸로 걸어다니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 맞추어 모든 사물과 사건들을 거꾸로 보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자신들의 감각이 옳고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다고 믿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옳은 것을 그르게 보고, 그른 것을 옳게 보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른 어떤 사람들이 자신과 반대되는 사상을 가지고 있고,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하는 모습을 보면, 다른 사람들을 광신자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로 취급하여 버린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옳다고 믿으며, 싫어하는 것을 나쁘다고 믿는다”라는 유명한 격언이 실제로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도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결단코 감정과 다수의 의견에 의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거나 결정해서는 안된다. 진리는 다수결의 원칙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일치하는가에 따라서만 결정될 수 있으며, 결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가르침과 설교를 판단할 때에 우리 자신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나 느낌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되며, 몇 몇의 목사들과 신학박사들이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가로 판단해서도 안된다. 우리 밖에서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줄 수 있는 무엇이 필요한데,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생각과 느낌은 항상 자신의 입장과 믿음을 합리화하거나, 절대로 틀릴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끌어 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강한 자석에 이끌려서 거꾸로 뒤집혀진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수족관의 새우들처럼 우리도 자신의 느낌이나 군중심리가 주는 강력한 자력에 의해서 완전히 기만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사단의 두가지 전략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진리라는 자력에 의해서만 이끌림을 받아야 한다. 우리에게 언제나 거짓일 수 없는 단 한가지의 자력의 힘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되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이 진리인가를 밝혀내고 판단할 수 있는 표준을 제시한다. 우리의 마음 속에서 떠오르는 모든 욕구들과 감정들은 이 말씀에 의하여 먼저 시험해보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가르침, 설교, 생활 습관, 언어, 그리고 은사와 기적들은 성경 말씀의 철저한 감독과 제한아래서 검사와 검사를 거듭하여 판단된 후에 받아들여 지거나 거절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는 여러가지 가르침과 은사들조차도 실제로는 자신의 감정을 만족시키거나, 군중심리에 이끌려서 내려진 잘못된 판단이나 오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단이 자주 이용하고 있는 두 가지 무기인 감정과 군중심리에 대하여 철저하게 연구하여 대처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너무나 중요하고 요긴한 일이다. 사단의 두 가지 무기는 인간의 정신심리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사단은 에덴 동산에서 하와의 심리를 이용하여 인류의 시조를 유혹에 굴복시킨 이후 6000년 동안 인간의 심리에 대하여 깊이 연구해 왔다. 사단은 에덴 동산에서 느낌과 감정을 이용하여 하와를 점령하였으며, 노아 홍수 때에는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이 방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직 노아의 8가족들만이 방주 안에 들어가 구원을 받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사단의 연구는 어떤 정신병 의사들의 연구보다 더 세심하다. 사단은 자신이 연구하는 것을 이미 6000년 동안 실험해 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이 인간을 유혹할 때에 사용하는 느낌과 감정, 그리고 군중심리라는 발판을 잘 방어하고 보호해야만 한다.


항상 똑바로 걸어다닐 수 있는 비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걸려들었는가! 타락과 부도덕으로 물들어진 이 세상이 사단의 전략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승리해 왔는지를 증거하고 있다. 성경이 제시하는 원칙과 진리를 무시한채 자신의 감정과 느낌, 그리고 군중심리를 따라서 걸어가는 길이야말로 넓은 길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래 전에 이러한 상태를 미리 보시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셨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태복음 7:1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자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수만 있다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마태복음 24:24.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누가복음 17:26

이 말씀은, 마지막날에 오직 적은 소수의 무리들만이 온 세상에 편만하는 압도적인 기만을 벗어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경고해 준다. 세상 역사에서 오직 적은 소수의 사람들이 안일과 부정을 떠나서 진실과 정직의 편에 굳게 섰던 것처럼, 성경 역사에서도 오직 적은 숫자의 사람들만이 진리와 원칙의 편에 굳게 섰다. 성경은 그러한 사람들을 남은 무리(남은 자손)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하고 있는 이적, 자신들이 믿는 가르침, 자신들이 듣고 있는 설교를 오직 성경에 비추어 보아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였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느낌과 욕구를 중요시 하며, 하나님의 눈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무서워하고, 성경에 기록된 진리보다는 다수의 군중들에게 인기있는 가르침만을 골라서 따라가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안전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공의롭고 정확한 심판 하에서 경건의 모양만을 뒤집어 쓰고 있는 가라지로 판결될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적은 숫자의 남은 무리들에 대하여 존경을 표해왔다. 일반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보다는 진리를 위하여 안일한 삶을 버리고 눈총과 따돌림 속에서 외로운 생애를 마친 이 적은 숫자의 의인들 때문에 역사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대다수는 진리를 찾기보다는 편안하고 쉬우며 대다수에 의하여 인정받는 삶을 선택한다. 그들은 자아의 부정과 절제 생활에 관한 기별을 성가신 것으로 여긴다.

기독교 안에서도 이러한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한다. 성령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중 적지 않은 숫자의 사람들이 새벽 기도회 때에 드렸던 열정적인 방언 기도에도 불구하고, 낮 시간동안에는 부도덕과 부정직, 그리고 돈과 명예를 사랑하는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다. 가정에서 남편, 아내, 자녀들에게 마음대로 분을 내고 부절제한 생활을 하면서, 교회에만 가면 각종 은사의 능력을 행사하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진리에 대한 오해에 있다. 성령의 열매가 생애와 성품 속에 충만하게 맺힌 자들에게,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따라서 주어질 수 있는 성령의 은사가 아무 때에 아무에게나 나타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안타까움과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거룩한 설교 단상에서 저속한 농담을 섞어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들과 욕을 하면서 치유의 은사를 베푸는 목사에게서까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깊은 혼돈 가운데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이러한 그리스도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진리와 성품에 대하여 조롱하고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 생애와 성품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현저하게 맺지 못한 자들에게도 방언과 치유의 은사가 내려진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기적과 마귀의 기적을 구별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가 감정과 느낌과 흥분이라는 수단을 사용하는 사단의 전략에 깊이 휘말려 들어가고 있다! 성경은 기적을 판단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지 않다. 성경은 두가지를 모든 것에 대한 판단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첫번째 기준은 그들이 가르치고 말하는 바가 성경 말씀과 일치하는가 이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해를 보지 못하고” 사 8:20. 두번째 기준은 그들의 성품과 생애에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혀 있는가 이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 7:20.

그러나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경험하고 있는 특별한 경험을 통하여 얻는 느낌인 흥분과 행복감으로 거짓과 진리를 구별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경험한 기적이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더 그것이 하나님께로 왔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또한 자신의 경험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많은 선을 행하기 위해 노력한다. 마음이 변화된 결과로 성령의 열매가 품성에 맺히고, 품성이 변화된 결과로 하나님의 은사가 하나님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서 부여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은사를 안수 기도를 통하여 억지로 얻어내고, 얻어낸 은사가 하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선을 행하게 되는 앞뒤가 바뀐 뒤틀린 신앙을 통하여 점점 더 깊은 자기 기만에 빠져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조심하라! 자신의 경험이 쇠 조각을 붙이고 다니는 새우의 경험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군중 속에서 살아남는 비결

사단이 덫에 쉽게 걸려들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인간의 마음의 법칙에서 비롯된다. 동물들이 그들이 사는 환경에 적응하듯이, 인간들도 환경과 접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변화된다. 무의식적으로 듣고, 보는 사람들의 말들과 생활 방식이 우리의 생활을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변화시킨다. 한 사람의 변화가 누룩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번지고 결국에는 그들 모두를 거꾸로 걷게 만든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이던 일들에 차츰 적응되면, 나중에는 이상하던 것들이 정상으로 되어 버리게 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군중 속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적응성을 발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불필요하게 별다른 생활을 하려고 애쓰는 것은 자신과 이웃들에게 큰 부담을 안겨 주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생각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 동물도 환경에 적응하고 인간도 환경에 적응한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며 선택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기도하며, 성경을 상고하여 하늘로부터 도움 받을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


인간은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아래서 살고 있지만, 독립적인 판단을 통하여 스스로의 삶을 개척할 수도 있고, 남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단순히 반응만을 하면서 살지 않을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결정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과 구원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유혹과 기만의 손길을 뻗친다.

사도 바울은 사단의 기만적인 자력을 피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너희 마음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5.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예수의 마음을 품지 않고는 숨겨져 있는 마귀의 덫을 볼 수 없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계속 말씀하고 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고후 10:5

우리들의 마음이 감정에 의하여 흔들리거나, 어리석은 군중들 속에 홀로 서 있다가 그들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려고 할 때에, 또한 우리들의 행동과 반응이 대다수의 선호도에 의하여 정복되게 되려 할 때, 우리는 기도의 손을 높이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를 유혹과 기만에서 구할 수 있는 도움은 오직 하늘에서만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욕심과 정욕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마지막 시대에 사단이 펼치는 기만적인 덫에서 빠져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노인 건강 강좌


영어에 “센테네리언(centenarian)”이라는 단어는 100세 이상 산 사람들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Luigi Cornardo라는 사람 역시 이러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1464년부터 1566년까지 살았던 사람(102세)으로서, “절제하는 생활”이라는 4권의 책들을 펴냈다. 그의 자서전은 참으로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허약한 체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음식을 먹거나 밤 늦게까지 일하는 것은 도무지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통풍, 콜레라, 우울증 등을 심한 고생을 하였다. 특히 콜레라는 아주 심하였다. 그의 고통이 너무 심했었기 때문에 차라리 죽음으로 평안을 얻어 볼 생각도 할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대단한 결심을 갖고 절제하는 생활을 살기로 다짐했다. 엄격한 절제 생활을 꾸준히 산 그는 그러한 생활을 시작한 지 1년도 채 안 되어서 그의 모든 통증과 병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의 생활은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그는 건강한 인생을 즐길 수 있었으며, 특히 그의 말년은 더욱더 건강하고 행복하였다. 그가 증언하기를 그가 100세 되었을 때에도 수면을 충분히 취할 수 있었으며 그의 모든 감각 기관이 건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누렸던 고통과 질병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유의 시간들과 생애의 기쁨들은 언제나 적당한 양의 음식만을 먹는 절제하는 식생활로 유지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내 자신을 훈련시켜서 먹고마시는 일에 있어서 언제나 식욕대로 다 채우지 않도록 하였다. 나는 조금 더 먹을 수 있다고 느낄 때에 수저를 놓았다. 이렇나 생활 습관은 ‘자아를 음식으로 만족시키지 않는 것이 건강의 과학이다.’라는 잠언의 말씀을 따른 것이다.”

현저한 차이점

미국에서 90세 이상을 사는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0.4%밖에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미국 사람들은 육칠십 세가 되면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얼굴은 주름으로 덮이게 되고, 몸은 관절염으로 쑤시게  된다. 그들의 정신은 걱정과 근심과 염려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런데 러시아의 카우카서스 지방의 주민들을 살펴보자. 이 지방에는 4,500~5,000명의 100세 넘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곳에 잇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젊음을 80세로 생각하며 산다. 에쿠아도르에 사는 Vilcabanbans 마을 사람들은 그들 인구의 10%가 100 이상을 산다고 한다. 파키스탄의 훈자 마을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장수 마을이다.

노인 건강 전문의사인 로버트 버틀러(Robert N.Butler) 박사는 몇 년 전에 러시아의 Dmitiri Chebotarev의 초청으로 러시아를 방문하여 17일 동안 그곳에 사는 장수 노인들을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그의 연구의 결과는 장수의 원인이 요구르트를 많이 먹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가 발표한 카우카서스 지방 사람들의 장수 원인은 다음과 같다.

1. 적극적인 마음 자세를 갖고 산다.
2. 그들 생활의 풍미는 가족 단위로 이루어진다.
3. 일을 열심히 하며 육체적으로 언제나 활동적이다.
4. 단순한 식사를 하고, 절대로 간식을 하지 않으며, 식사 시간의 간격이 멀다.

노인과 약

매년 2억 2천 5백만 종류의 약이 노인들을 위하여 처방되고 있다. 이중 거의 80% 이상이 우울증 치료제이다. 수면제도 가장 많이 처방되어지는 약 중의 하나이다. 여러 약을 동시에 씀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매년 늘어나고 있다. 노인들이 약을 복용하면 젊은이들에 비해서 더 큰 부작용이 몸에서 일어난다. 후에는 이러한 약의 후유증들이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이러한 후유증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약을 복용하였기 때문에 급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현대인들은 약을 너무 많이 믿고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건강해지는 길을 잃어버리고 있다.

노인건강- 충분한 활동을 하라!

노인 인구 비율이 증가 함에 따라서 많은 과학자들이 늙는 과정에 대한 연구에 흥미를 보이고 있다. 사람이 늙어감에 따라서 실제적으로 무엇이 달라지는 것일까? 먼저 그들의 머리칼이 가늘어지고, 색깔이 변하며, 그들의 뇌는 하루에 십 만개의 세포를 잃어버리게 되고 시력은 매일 저하된다. 청각 작용이 점점 힘을 잃어가며, 심장은 매일 더 적은 양의 피를 보내고, 폐는 더 적은 양의 산소를 흡수하며, 신장은 점점 더 허약해진다. 방광은 점점 그 제어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저장할 수 있는 양이 줄어든다. 호르몬 생산이 적어지고, 살은 빨리 마르며, 지름이 진다. 근육은 작아지고 약해지며 뼈마디가 어긋나거나 붓게 된다.

최근의 연구 결과, 사람들이 얼마나 활동적인 생활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늙는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즉, 충분한 육체적 활동은 사람을 건강하게 하고 오래 살게 한다는 것이다. 몇 년 전에 “누워있는 시간과 건강”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20~30대의 건강한 젊은이들을 몇 주 동안 침대에서 생활하게 하였다. 그 후에 그 젊은이들에게 나타난 증상들을 조사하였다. 그들의 근육은 약해졌으며 위측증이 나타났다. 칼슘과 피의 양이 줄어들었고, 근육 단백질 안에 칼륨과 비타민, 인과 니트로젠, 소듐 등의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부족 현상이 노화의 과정과 같다는 것이다.

 이 조사에 의해서 나타난 가장 중요한 결과는 바로 몸의 산소 흡수량의 감소이다. 운동학자들은 산소 흡수의 최대량에 많은 흥미를 갖고 있다. 산소는 기름과 다른 에너지의 근원을 타게 하여 공급하는 필수 요소이다. 공기중의 산소를 몸에 끌어들이기 위하여 심장, 폐, 핏줄 등이 사용되며, 얼마나 이러한 기관들이 산소를 잘 끌어들이느냐에 따라서 그 기관이 건강한지 아닌지를 판명하게 된다.

두 그룹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한 그룹은 75~108세, 다른 그룹은 54~74세로 이루어졌다. 이 실험의 결과로 충분한 활동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거의 80세를 채우지 못하였고, 운동 프로그램을 통하여 80세를 채운 사람들도 그 프로그램을 중단한 결과 질병과 사고로 더 오래 살지 못했다.

장소와 식사량

볼티모어에 있는 gerontology 연구 센터의 Charles L. Goodrich 박사는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는 여러 그룹의 쥐들에게 똑 같은 종류의 식사를 하게 하였으나, 한쪽 쥐들에게는 자유롭게 먹게 하였고, 다른 쪽 쥐들에게는 이틀에 한번만 먹게 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2 종류의 그룹의 쥐들에게도 위와 같이 다른 양의 음식을 제공하였는데 그 쥐들에게는 운동할 수 있는 바퀴를 넣어 주었다. 다음은 그 결과이다.

(1) 운동을 하지 않았지만 이틀에 한번만 음식을 준 쥐들은 아주 건강한 생활을 하였으며, 매일 먹으면서 운동을 했던 쥐들보다 더 건강하였다.
(2) 이틀에 한번만 먹고, 운동을 했던 쥐들이 가장 건강하였다. 또한 이 쥐들은 보통 쥐들의 수명보다 2배 더 살았으며, 늙어 죽기 전까지도 아주 활동적이었다.
(3) 아무 때나 먹은 쥐들 중에는, 운동을 한 쥐들이 더 오래 살았다.

장수의 4가지 비결

(1) 적고 간단한 식사를 하라.
(2) 야채와 과일을 많이 먹고, 고기는 먹지 말라.
(3) 아침 일찍 일어나고, 야외 활동을 하라.
(4) 많이 걸어라.

서론 - 어떤 것이 진리인가요?

아마겟돈 전쟁

아마겟돈 전쟁에 얽혀 있는 오해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세상 종말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나타내 왔는데, 그럴 때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표와 아마겟돈 전쟁은 종말론의 중심 주제가 되어 왔다.

 짐승의 표로부터 시작해서 7재앙과 아마겟돈 전쟁, 그리고 예수 재강림으로 연결되는 일련의 마지막 사건들이 어떻게 시작되어서, 어떻게 끝마쳐 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시대를 초월하여 기독교회 안에 항상 존재해 왔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마지막 사건들에 대한 갖가지 오해와 추측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은 이번 호에서 아마겟돈 전쟁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독자들에게 한 줄기의 빛을 비추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에는 이슬람 문화권의 터키 제국과 기독교 국가들 사이에 있을 최후 전쟁으로 생각하는 아마겟돈 전쟁의 시나리오가 대중적인 예언 해석으로 받아들여졌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정세가 바뀌자 아마겟돈 전쟁에 관한 예언 해석도 바뀌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막바지인 1945년, 핵 폭탄이 일본에 투하되면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본격적인 냉전시대가 시작되자, 아마겟돈 전쟁은 소련이 이스라엘을 침공함으로써 발발되는데, 결국에는 무신론 세력인 공산주의와 기독교 국가들 사이의 최후 대 결전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고, 급기야는 중동 지역에서 최후의 대 결전을 벌이게 될 것이라는 식의 새로운 예언 해석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1990년도에 소련과 동유럽이 무너지면서 냉전 시대도 과거의 역사로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이와 같이 몇 번에 걸친 실망을 되씹으면서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아마겟돈 전쟁에 대해서 깊은 회의와 혼돈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과연,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아마겟돈 전쟁은 일어날 것이며, 그것은 언제 시작되어서 어떻게 종전될 것인가? 또한 그 최후의 대 결전에서 누가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게 될 것인가?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는 아마겟돈 전쟁에 대하여 조금씩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듯하다. 또한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그들 나름대로 최후 종말에 관한 아마겟돈 전쟁 시나리오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미국의 헐리우드에서 조차 혜성 침입으로 인한 지구의 종말 사건을 “아마겟돈”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 안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예언 해석들과,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낸 지구 종말에 관한 시나리오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고 나눌 수 있다.

1)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견해
 일반 대중적인 잡지나 공상 과학 소설 그리고 영화에서는 아마겟돈 전쟁을 인류와 지구가 전멸하는 최후의 대 전쟁으로 소개하고 있다.

2) 세대주의자들의 견해
 물론, 일반 잡지나 공상 과학소설과는 그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있지만, 대다수의 기독교 서적들도 아마겟돈 전쟁을 총과 현대식 무기를 사용해서 싸우는 현대식 전쟁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견해를 믿는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갈멜산 근처나 아랍의 석유지대와 사해 근처, 즉 중동 지역을 전쟁 지역으로 한정하고 있으며, 러시아 남진 세력과 아프리카의 북진 세력, 그리고 서쪽에서 몰려오는 유럽과 미국의 군사력 그리고 동쪽에서 올라오는 2억에 달하는 중공의 군사력이 인류의 최후의 날에 대결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견해는 다음과 같이 5가지로 그 내용을 요약할 수 있다.

1. 아마겟돈 전쟁의 유일한 승리자는 현재 존재하는 이스라엘 국가이다. 비록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들에 대한 은혜의 시간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은 지금 현재 중동 지역에 존재하는 실제적인 이스라엘 국가를 의미한다.
2. 아마겟돈 전쟁은 중동 지역에서 발발하는 국부적인 전쟁을 말한다.
3. 아마겟돈 전쟁은 총과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물리적인 전쟁이다.
4.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 주는 “동방에서 오는 왕들”은 실제적인 국가나 세력을 의미한다. 마지막 순간에 실제적으로 유브라데 강이 마르는 일이 생기면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이라고 표현된 세력에 의해서 이스라엘 국가가 위기의 순간에 기적적으로 구원받고, 승리를 얻게 된다.
5. 아마겟돈 전쟁을 전후로 현재 존재하는 이스라엘 국민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들이는 극적인 회심을 하게 된다.

3) 역사적인 예언 해석 원칙에 입각한 견해
 이것은 매우 독특하면서도 중요한 견해인데, 이것은 아마겟돈 전쟁을 짐승의 표를 강요하는 때로부터 시작하여 예수 재강림 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백성과 사단의 세력 간에 펼쳐지는 치열한 마지막 영적 투쟁으로 보는 견해이다.

 과연 어떤 가르침이 성경으로 입증될 수 있는 가르침인가? 성경은 아마겟돈 전쟁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러면 이제부터 다음과 같은 9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아마겟돈 전쟁의 실체를 검증해보자.

질문1. 누가 최후의 승리를 얻을까요?
질문2. 2000년 전에 결정된 유대민족의 운명을 아시나요?
질문3. 누가 진짜 이스라엘 인가요?
질문4. 유대 민족 전체가 개신교회로 개종하게 될까요?
질문5. 아마겟돈 전쟁은 언제 어떻게 일어날까요?
질문6. 사단의 군대를 지휘하는 세 장군의 전략을 아시나요?
질문7. 아마겟돈 전쟁은 어디서 일어날까요?
질문8. 유브라데 강물이 마른다는 의미를 아시나요?
질문9.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정체를 아시나요?

1부 - 누가 최후의 승리를 얻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이야말로 아마겟돈 전쟁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중요한 열쇠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아마겟돈 전쟁은 이스라엘 국가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중동지방의 무력 전쟁이 될 수도 있고,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과 사단의 백성들 간에 펼쳐지는 마지막 대쟁투가 될 수도 있다.

먼저, 요한계시록이 아마겟돈 전쟁의 승리자에 대해서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살펴 보도록 하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요한계시록 16:12~16

이 아마겟돈 전쟁에서 누가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인가? 물론, 이스라엘이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아마겟돈 전쟁에서 최후에 승리를 거두게 될 이스라엘의 모습을 매우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6:15. 여기서 성경은 최후의 승리자인 이스라엘을 “옷”을 입고 다니는 자들로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데체 어떤 옷을 입어야 마지막 투쟁인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는 이스라엘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옷을 입는 것과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19장은 매우 놀랄만한 답변을 우리에게 준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분께 영광을 돌리세 이는 어린 양의 혼인식이 다가왔고, 그 아내도 자신을 예비하였음이라 그에게 허락하사 정결하고 흰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라” 계 19:7,8(킹제임스 성경역). 이 말씀은 마치 안개낀 바다에 우뚝 서있는 등대처럼 요한계시록 16:15에 기록된 “옷”의 의미를 비추어 준다. 아마겟돈 전쟁의 승리자들이 입고 있는 “옷”은 “정결하고 흰 세마포”이다. 그런데 이 세마포는 무엇을 의미한다고 했는가?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라” 8절. 아마겟돈 전쟁과 그리스도의 재강림을 맞기 위한 준비는 공히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 것이다. (옷=흰 세마포=성도들의 의=예수 그리스도의 의)

성경은 성도들이 의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관성 있게 강조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같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의 의가 아니라 오직 예수께서 주시는 정결한 의의 옷만이 우리를 하늘 왕국의 시민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사 64:6). 예수께서도 성도들이 마지막 심판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복”(옷)을 입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비유로 설명하셨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 22:11~13. 또한 세상 역사의 마지막 교회로 표상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내는 기별에서도 마지막 시대에 사는 성도들은 반드시 희고 깨끗한 의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반복하고 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계 3:18

아마겟돈 전쟁에서 누가 승리할 것인가? 이스라엘이다. 그러나 이 이스라엘은 유대인의 피를 가지고 있는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흰 옷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있는 영적 이스라엘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온 마음과 생애로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진리와 계명에 순종하는 의로운 생애를 사는 자들은 국가와 민족과 혈통에 관계없이 아마겟돈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를 얻는 비결이다. 요한계시록은 아마겟돈 전쟁의 승리자들에 대해서 “누구든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계 16:15

 

2부 - 2,000년 전에 결정된 유대 민족의 운명을 아시나요?


아마겟돈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얻는 자들은 혈통적 유대인들이 아니라, “흰 옷”을 입고 하나님의 계명과 진리에 순종하는 의로운 생애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현재 중동 지방에 존재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아니란 말인가?

이번 기사에서는 바로 이 문제에 촛점을 맞추어 보도록 하자.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심각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를 얻는 유일한 사람들은 구약시대 때로부터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었던 유대 민족이라고 믿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믿는 것처럼, 유대 민족이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유일한 선택된 민족이라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면인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이스라엘 역시 유대 민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놀랍게도 유대 민족은 선택된 민족으로서의 특권을 약 2000년 전에 이미 잃어버렸다고 선언하고 있다. 지금부터 이 놀라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유대 민족에게 허락된 마지막 유예 기간, 70주일

구약에 나타난 유대 민족의 역사는 반역과 불순종의 역사이다.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과 70년 동안의 바벨론 포로 생활 등과 같은 고난을 통하여 유대 민족이 하나님의 선민처럼 살기를 고대하였지만, 그들은 불순종의 길을 떠나지 않았다. 이러한 때에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마지막 유예 기간을 주시는 것이 다니엘 9장 예언이다.

다니엘서 9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다니엘 선지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예언을 주시면서, 그들이 메시야와 그분의 복음을 거절할 경우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의 국가로서 가진 특권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주셨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영접하고,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것을 조건으로 유대 민족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남아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중요한 예언을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다니엘 선지자에게 전달하셨다. “네(다니엘)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70 이레(주일)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단 9:24. 이 70주일 예언은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에게 다시 한번 주어진 마지막 은혜 기간이다. 이 예언적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오심을 위하여 잘 준비해야만 하였다.

이 예언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70주일이라는 암호를 풀어야만 하는데, 기간적인 예언을 해석할 때를 대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풀 수 있는 암호 해독법을 성경에 기록해 두셨다. “1일은 1년이니라” 에스겔 4:6과 민수기 14:34. 건축기사들이 1센티미터를 1미터로 계산하여 도면을 그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기간적 예언을 해석할 때에도 그분께서 지정하신 이 특별한 계산 원칙을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70주일은 490일(70주일x7일)이고, 이것은 기간적 예언의 계산 원칙에 의거하여 490년이 된다. 그런데 490년이 시작되는 시점은 언제인가? 계속되는 가브리엘 천사의 설명을 들어 보도록 하자.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야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7주)와 육십이 이레(62주)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요” 단 9:25. 자,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70주일 즉, 490년의 시작점은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내려질 때이며, 그때부터 시작해서 7주일과 62주일 즉, 69주일(69 x 7=483일, 즉 483년)이 지나면,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야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 가브리엘 천사의 설명이다.

그런데, 70주일 예언의 시작점인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내려진 해는 언제인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마지막 명령이 언제 포고되었는가? 에스라 7:7,13에서 우리는 예루살렘 성의 중건령을 찾을 수 있다. 아닥사스다 왕 7년에 ... 조서하노니. 중건령이 내려졌던 아닥사스다왕 7년은 역사적으로 확립된 해이다. 성경의 관주에 나오는 해석을 보아도, 중건령이 내려진 해는 B.C. 457년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70주일 예언의 시작점은 B.C. 457년이다. 예루살렘성의 중건령의 조서가 그 효력을 발휘하는 B.C. 457년 가을부터 시작해서 483년을 내려가면, 역사의 연대표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사건이 일어나는 해를 만나게 되는데, 그 해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받으셨던 해이다.

정확한 시간에 나타나신 메시야: 누가복음 3:1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침례 받은 해에 관한 매우 결정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디베료 가이사 즉위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 분봉왕으로. 역사는 가이사가 즉위한 해가 A.D. 12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디베료 가이사 즉위 15년은 A.D. 12년에 15년을 더한 해, 곧 A.D. 27년이 된다. A.D. 27년에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가? 같은 장 21절에 답이 나와 있다. 백성이 다 침례를 받을새 예수도 침례를 받으시고 ...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셨으며,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심으로써, 다니엘 9장에 나오는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야라는 예언을 성취시키셨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예언을 근거로 당신의 지상 사업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The time is fulfilled, 때가 성취되었고)마가복음 1:14~15. 무슨 때가 찼다는 것인가? 다니엘 9장에 예언되어 있는 69주일(483년)이라는 예언의 때가 찼던 서기 27년에, 예수께서는 침례를 받으셨으며,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 공중전도를 시작하셨다.

 

 

정확한 시간에 메시야를 살해한 유대 민족: 그런데, 70주일 중에 마지막 남은 1주일(70주일-69주일=1주일)동안, 즉 7년 동안에는 무슨 일이 이루어질 것인가? 마지막 남은 1주일에 대한 가브리엘 천사의 설명을 들어보자.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자, 곧 메시야가 끊어져 없어지겠고.단 9:26. 가브리엘 천사는 62주일 후, 즉 서기 27년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끊어져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언급한 후에,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하실 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1week)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week)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27절. (여기서이레(week)의 절반은 7년의 반이므로 3.5년 즉, 3년 반이 됨)

그렇다면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서기 27년 가을부터 3년 반 후인 서기 31년 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메시야의 죽음을 상징하여 드려온제사와 예물을 금지하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유대인들은 흠없는 어린 양을 성소의 번제단 위에서 태움으로써,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믿음을 나타냈으며, 양의 죽음을 통하여 죄의 용서를 받아왔다.

그러나 마지막 70번째 주일의 중간인 서기 31년 봄,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양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더 이상 양을 잡아서 태워 죽이는 제사 제도가 필요없게 되었다.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였도다 ...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히브리서 10:5~7. 또한이 (구약 시대의)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써,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0:12,18. 얼마나 분명한 예언의 성취인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더 이상 양을 잡아 죽이는 제사 제도가 필요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기적이 성소에서 일어났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고 마 27:50. 성소 안에 있던 성전 휘장이 갑자기 찢어짐으로써, 모세가 제사 제도에 대해서 기록하였던 의문의 율법이 정하고 있는 제사와 예물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음을 보여주셨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골로새서 2:14.

정확한 시간에 결정된 유대 민족의 운명: 유대 민족은 메시야를 거절하고 죽였지만, 사랑과 자비가 충만하신 하나님께서는 70주일이 끝마쳐지는 순간까지 유대 민족이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의 의미를 깨닫게 되기를 고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490년을 채우기까지 반역과 불순종의 길을 고집하였다.

마지막 7년의 절반인 서기 31년에 십자가가 세워졌고, 이제 그 나머지 절반인 3년 반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에게 허락하신 70주일의 전체 예언이 완전히 종결된다. 십자가 이후에도 한동안 제자들은 유대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일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돌아가신지 3년 반 후인 서기 34년, 새 언약의 복음을 끝까지 거절하는 유대인 지도자들을 향하여 경고와 호소의 설교를 하던 스데반에게 산헤드린 공회가 돌로 쳐서 죽이는 판결을 내림에 따라, 스데반은 그리스도 교회의 첫번째 순교자가 되었으며 (사도행전 7:51~60), 이로서 유대 민족을 위한 70주일(490년)의 유예 기간은 완전히 끝났으며, 곧 이어서 일어난 핍박과 함께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사도행전 8:1~). 바로 이것이 70주일 예언의 끝을 알리는 최후의 신호였으며, 유대 민족의 운명이 영원히 결정되는 순간이었고, 온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 교회 시대가 개막되는 시간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기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 13:46

다니엘 선지자의 예언대로, 유대인들은 한 국가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특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더 이상 한 국가로서 선택받은 백성이 되기를 끝까지 거절하였기 때문에, 서기 34년 이후부터 유대 민족은 구원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자격을 잃어버리게 되었으며, 이방인과 같이 개인 단위로 구원을 받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민족과 족속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들이 하나님의 참 백성들이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유대인들)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마태복음 21:43. 유대 민족은 구약 시대에 누구도 그 자리를 넘볼 수 없는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 그들은 그 영광스러운 주인공의 자리를 영원히 잃어버렸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누가 유대 민족의 자리를 넘겨 받았는가? 이 흥미있는 문제를 다음 기사에서 공부해 보자.

 

예언 해석의 3대 원칙

1.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알고자 하는 예언의 상징적 표현이나 비유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가를 찾아보고, 기도와 합리적 판단을 통하여 그 의미를 파악한다.

2. 예언을 나타내고 있는 표현이 상징인지 또는 실제인지를 전후 문맥을 통해서 구별해야 한다. 만일 그것이 상징일 경우에는 그 의미를 풀 수 있는 열쇠들을 성경 안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3.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기간을 나타내는 예언은 하루가 일년을 상징한다. 그러나 한가지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는데, 1일=1년 원칙을 성경에 나오는 모든 날짜에 적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날짜가 어떤 특정한 기간을 나타내는 상징어로 사용되었을 경우에만 이러한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 날짜가 기록된 성경절의 앞뒤 문맥을 잘 읽어보면, 그 날짜가 상징적인 기간인지 아니면 문자 그대로의 실제적인 기간인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예언 해석 원칙이 올바로 적용되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려면, 이미 과거에 성취된 예언이 역사 속에서 1일=1년 원칙에 따라서 정확하게 성취되었는지를 확인하면 된다.

 

1년=1일 원칙

기간을 나타내는 예언 해석에 있어서 1일을 1년으로 해석하는 원칙은 건전한 예언 해석법으로 오래 전부터 인정되어 왔다. 수많은 성경 학자들뿐 아니라 종교 개혁자들도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상징적 예언인 1260일, 1335일, 2300일 등의 예언 해석에 1년=1일이라는 원칙을 적용하였다. 1년=1일 원칙에 대한 교회사적 증거들을 살펴보면, 이 원칙이 초기 그리스도 교회때부터 시작하여 중세기의 카톨릭 교회, 종교 개혁시대, 그리고 근대 기독교회에 들어와서까지 일관성 있게 적용되어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 초기 기독교회 성경 학자 : 터툴리안, 클레멘트, 유세비우스, 테오도렛, 데오도시우스, 안드로니쿠스
2. 중세의 유대인 학자: 나하웬디, 알리, 라시, 나하메니데스, 라시바즈
3. 중세의 카톨릭 학자: 요아킴, 아놀드, 우베르티노, 데리라, 부르테, 니콜라스 크렙
4.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 멜란히톤, 풍크, 불링거, 존 낙스, 존 베일, 토마스 브라이트만, 요한 웨슬리의 조력자인 플레셔르
5. 1700년대의 성경 학자: 루터교회의 신학자인 벵겔,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톤경
6. 1800년대의 성경학자: 장로교회 일반의회 의장인 죠슈아 윌슨 박사, 감독교회의 주교인 존 핸셔, 예일대학의 총장인 티모디 드와이트, 유니온 대학의 총장인 엘리팔리트 노트, 오하이오 대학 총장인 조지 정킨

이와같이 예언 해석상 1년=1일 원칙은 어떤 개인이나 교단의 독창적인 견해나 돌발적인 해석 방법이 아니라, 오랜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여러 교파에서 소속되어 있는 다양한 성경 학자들의 심도있는 성경 연구의 열매로 거두어진 결론이다.

 

3부 - 누가 참 이스라엘인가요?


신약 성경은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은혜의 기간이 끝나면서 어떤 사람들이 새 이스라엘을 구성하면서 요한계시록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혀 주는 성경절들로 가득차 있다.

이 기사에서 밝혀지는 진짜 이스라엘이 아마겟돈 전쟁의 주역들이요, 승리자들이다. 신약 성경이 말하는 이 새로운 이스라엘의 정체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자;

1) 누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인가?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가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벧전 2:9~10. 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고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등장하는 새 이스라엘을 소개하고 있다. 메시야를 영접한 이방인들은 십자가의 보혈로 인준된 새로운 언약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열렸다. 바로 그들이 진짜 영적 이스라엘이다! 그리하여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된 것이다.

2) 누가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약속된 유업을 받을 것인가?

사도 바울 역시 베드로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들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 3:29.

3)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점을 명확하게 선언하였다.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롬 9:8. 신약 성경에는 하나님께서는 오직 영적 이스라엘을 가납하시며, 육체적 이스라엘을 거절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얻기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 13:46

4) 누가 참 유대인들인가?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갈 6:15,16. 여기서 바울은 신약시대의 참 유대인의 자격을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거듭난 자)로 규정하였는데, 로마서 2장에서는 참된 거듭남을 마음에 할례를 받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롬 2:28,29. 참 유대인은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면 마음의 할례란 무엇인가?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은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골 2:11. 옛 언약은 신체의 일부를 잘라냄으로써 이루어졌지만, 새 언약은 죗된 육적 마음을 잘라냄으로써 맺어지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임으로써 새롭게 거듭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할례를 경험한 사람들이며, 그들이 참 유대인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유대인의 운명이 결정된 이후에는 혈통적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의 자녀들로 인정받는다는 말씀이 신약 성경에 단 한군데도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잃어버렸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 길가에서 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자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 나무가 곧 마른지라” 마 21:19. (무화과 나무는 유대 국가를 상징함)

유대 국가가 마지막까지 메시야를 거절한 이후부터,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은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를 막론하고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할 것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8.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니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 10:12

오늘날 누가 진짜 이스라엘인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이 중동 지역에만 모여 있는가? 아니다. 온 세상 도처에 흩어져 있다. 머지않아 아마겟돈 전쟁이 이르러 올 것이다. 여러분들은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 날에는 진짜 이스라엘만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하는 흰 옷을 입은 자들,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들, 그리고 품성과 생애에 성령의 열매를 맺은 자들만이 아마겟돈 전쟁의 주역으로서 승리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중동 지방을 쳐다 볼 때가 아니라,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회개하여 진짜 이스라엘이 되어야 할 때이다.

 

4부 - 유대 민족 전체가 개신교회로 개종하게 될까요?


요즘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게 될 때에 자신도 그 대열에 참여하여 유대 민족의 승리와 영광을 함께 누리기 위해서 중동 지방에 있는 이스라엘 나라로 이민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놀라운 확신을 가지고 그토록 엉뚱한 계획을 세우는 이유는, 요한계시록에 여러번 언급되어 있는 “이스라엘”을 지금 현재 중동 지방에 있는 이스라엘 국가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여자의 남은 자손” 즉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 구원받는 장면이 몇번 나오는데, 그 때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대 민족의 지파 이름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이스라엘 국가가 언젠가는 그 노선을 완전히 바꾸어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남으로써, 성경의 예언을 성취시킬 것이라고, 과거에 거절하였던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진실한 개신교 국가로 변모하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어디서 이러한 오해가 시작되었는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오해가 유대 국민 전체가 그리스도 교회로 개종하게 될 것이라는 빗나간 추측을 유도하였다.

1. 조건적인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스라엘은 유대민족이 아니다. 한 국가와 민족으로서의 운명은 이미 2000년 전에 결정되었다. 그들 역시 우리 이방인들과 같이 개인 단위로 구원과 심판을 받을 뿐이다. 유대 민족이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조건을 만족시켜야 했지만, 그들은 그 조건을 만족시키는 일에 실패하였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은 조건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의 구원을 유지하고 축복에 대한 약속을 성취시키기 위한 조건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순종하면 축복을 받을 것이고, 불순종하면 끊겨져 나간다”는 것이다. “네가 만일 ... 내가 네게 명한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 내가 너희 이스라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만일 너희와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면 ...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며 내 이름을 위하여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왕상 9:4~7. 이와 같은 하나님의 조건을 이해하지 못할 때, 아마겟돈 전쟁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해하게 된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스라엘은 현재 중동 지방에 있는 이스라엘 국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명예에 대한 말씀을 인용한다. 그들은 예레미야, 에스겔, 이사야서 등에 언급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최후의 승리에 관한 예언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는 고대 이스라엘 민족이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 후에 본국으로 귀향하는 예언을 잘못 해석하였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불순종하는 반역의 길을 걸어갔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군대에 포로로 잡혀서 끌려가거나 죽임을 당하는 고난을 허락하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예언을 주심으로써, 그들의 소망을 고취시키셨다. 과연 바벨론 포로생활 70년만에, 페르샤의 고레스 왕이 유브라데스 강의 하상을 통하여 바벨론성으로 침입해 들어가는 기이한 전략을 성공시킴으로써 바벨론 제국은 몰락되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는데, 이로써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는 예언은 과거에 이미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물론, 구약에 나오는 여러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미래에 관하여 영광스럽게 묘사하고 있으며, 다른 나라들을 다스리게 될 이스라엘의 명예에 대한 수많은 약속이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은 분명한 조건 하에서만 성취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고대 이스라엘을 영광스럽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유대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그들의 배도와 반역과는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성취되어야 하며, 또한 그러한 약속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유대 민족은 언젠가는 민족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는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은 성서적도 아니며 합리적인 생각도 아니다.

2.당대에는 유대 민족에게, 미래에는 세계적으로!

기간적인 예언을 해석하는데에 있어서, 1일을 1년으로 환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에 나오는 예언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한 가지 분명한 원칙이 있다. 만일 이 원칙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아무도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으며, 이스라엘이 역사와 예언에 있어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심각한 혼돈에 빠지게 된다. 이 원칙에 대한 오해로 인하여 세계적으로 일어나게 될 아마겟돈 전쟁이 중동지역의 국부 전쟁으로 제한되어 버리고 말았으며, 아마겟돈 전쟁의 주인공을 유대민족으로 바꾸어 놓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 중요한 성경 해석 원칙이란 무엇인가? 예언은 1차적으로 당대에 문자적으로 적용되며, 2차적으로는 미래에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영광스러운 약속들이 일차적으로 고대 이스라엘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셨다. 그러나 유대 민족은 반역의 길을 선택했으며, 그 결과 “순종”이라는 일정한 조건하에서만 성취되는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은 유대 민족에게 성취될 수 없었다. 그러나, 비록 유대 민족의 불충실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1차적으로 당대의 유대 민족에게 성취되지 못했을지라도, 그 약속들은 결코 무효가 되거나 취소되지 않는다. 그 약속들은 2차적으로 신약시대에 태어나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상으로 세계적이고 영적으로 적용된다. 다시 말하자면, 유대 민족의 거절과 반역으로 성취되지 못한 하나님의 약속은 세계 도처에 있는 신약 시대의 영적 아브라함 자손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성취된다.

이러한 원칙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살펴 보기 위해서 한가지 예를 들어 보도록 하자. 고대 이스라엘이 원수들을 쳐부수는 승리의 장면에서, 에스겔 선지자는 곧 건축하게 될 장엄한 성전에 대해서 기록하였다. 에스겔 40~48장에는 그 성전의 크기와 실제 모양이 어떠한지가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그 성전은 결코 완성되지 않았다. 다른 선지자들 역시 그 성전의 건축내지 재건 계획에 대해서 언급하였는데, 그 중 아모스 선지자는 성전의 재건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하였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며” 암 9:11.

이러한 구약 성경의 예언을 근거로 해서, 어떤 사람들은 미래의 어느 때에 구약 성경에 기록된 성전이 유대 땅에 실제적으로 건축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언이 당대에 문자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것을 영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다는 예언 해석 원칙을 유의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성취되지 않은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을 세계적으로 그리고 영적인 의미로 적용시켰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였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지어 일으키리니” 행 15:14~16. 여기서 바울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재건한다는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의 그리스도 교회가 세워지는 것에 적용하여 해석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부터, 즉 신약 성경에 기록된 성전은 문자적인 성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온 세상의 이방인들로 구성된 영적인 교회를 가리킨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16.

빗나간 적용의 결과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 성경에 기록된 성취되지 않은 예언을 오늘날 중동 지방에 있는 이스라엘 국가에게 적용할 때에 심각한 오해를 낳을 수 밖에 없다. 유대 국가가 그들에게 주어진 70주일이라는 예언적 기간이 끝마쳐 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메시야를 거절함으로써, 오늘날의 유대 국가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아니다.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를 막론하고 구세주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교회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면서 그들이 오래 동안 사용해 오던 관습에 따라서,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구약시대부터 오래 동안 사용해 오던 표현들과 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해서 예언을 상징적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배경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요한계시록을 읽으면, 이스라엘, 성전, 예루살렘, 시온, 이스라엘 지파 등과 같은 어휘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게 되며, 이러한 해석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진짜 이스라엘인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영광과 승리를 중동지방에 있는 유대 민족에게 돌리는 엄청난 착오를 범하게 만든다. 이러한 착오가, 아마겟돈 전쟁이 발발하는 때를 전후로해서 유대 민족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들이면서 개신교회로 개종하게 될 것이라는 극적인 시나리오로 발전된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요한계시록은 아마겟돈 전쟁의 승리자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못박고 있다.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계 16:15. 그들은 희고 정결한 의의 옷을 입고 다니는 새 이스라엘이지, 2000년 전에 민족과 국가로서 이미 그 운명이 결정된 유대 민족이 아니다.

 

5부 - 아마겟돈 전쟁은 언제, 어떻게 일어날까요?


아마겟돈 전쟁이 언제쯤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마지막 사건들의 순서를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마지막 사건들이 어떠한 순서로 일어날 것인가를 알면, 아마겟돈 전쟁의 전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이 어떤 배경을 가지고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이 말하고 있는 마지막 사건들의 순서를 살펴보도록 하자.

1) 짐승의 표 강요

마지막 사건은 짐승의 표를 강요하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계 13:15~17. 이 말씀은 사단과 그의 지상 대리자들에 의해서 전 세계적으로 짐승의 표가 강요되고, 그 표를 받지 않는 사람은 사고 파는 매매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누구나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사형 명령이 세계적으로 발표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해 주고 있다.

오늘날에는 마치 하나님과 사단 중간에 서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짐승의 표가 세계적으로 강요되는 그 날이 오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하던지 사단을 경배해야 하는 마지막 선택을 해야만 하는데, 그 때에 세상은 완전히 두개의 진영으로 나누어 지게 된다. 하나님의 참 백성들은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고, 사단에게 속한 무리들은 짐승을 경배함으로써 그의 표를 받게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짐승의 표를 받을 뿐 아니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기를 거절하고 그 표를 받지 않는 소수의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나아가서는 그들을 죽일 것인데, 바로 이것이 지구 역사의 마지막에 있는 선과 악의 마지막 대쟁투이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할 만한 사실은, 온 세계가 둘로 나누어지는 배경에는 누구를 경배(worship, 예배)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경배”라는 단어는 종교계에서만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무리 뿐만 아니라, 짐승을 경배하는 무리들도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양쪽 다 그리스도인들이 중심 세력을 이루게 될 것인데, 한 무리는 하나님의 참 백성들로만 형성될 것이며, 다른 무리는 거짓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종교,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 사항은 “어떻게 이방 종교와 세상 사람들이 거짓 그리스도인들과연합하게 될 것인가?” 라는 점이다. 요한계시록 13장에는 이 의문에 대한 힌트가 기록되어 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계 13:13,14. 바로 여기서 우리는 사단이 이방 종교인들과 세상 사람들을 하나로 끌어 모으는 방법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놀라운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놀라운 “기적과 이적”이다. 사단은 자신의 대리자인 거짓 그리스도인들에게 능력을 줌으로써 온갖 기적을 행하게 하는데,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세상 사람들이 경이로운 마음을 가지고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도록 미혹할 것이다.

 

2) 은혜의 시간의 끝과 7재앙의 시작

28마지막 시대를 위한 가장 두려운 경고의 말씀이 요한계시록 14:9~10에 나타나 있다. 벛?다른 천사 곧 세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P>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짐승의 표를 받고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로 부터 완전히 거두어 지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 부어지게 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사단의 세력은 짐승의 우상을 세우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경배케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최종적으로 거절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참 백성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들을 자행함으로써, 인류의 반역과 죄악은 그 한계를 채우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에 대한 은혜와 자비의 손을 거두실 수 밖에 없게 되고, 이로써 마지막 7재앙은 시작된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계 15:1

온 세상이 사단의 대리자들이 일으키는 기적과 이적에 기만당하여 짐승의 우상을 경배하지만, 하나님의 참 백성들은 목숨을 걸고 짐승의 우상에 대한 경배와 짐승의 표를 거절한다. 이러한 거절이 하나로 연합된 사단의 대리자들과 세상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핍박의 정신을 불타오르게 만든다.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자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마지막 대쟁투는 선과 악의 쟁투이다. 마지막 대쟁투는 짐승의 표를 받은 악인들과 그것을 거절한 의인들 사이의 쟁투이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숫자가 훨씬 더 많고, 하늘의 놀라운 기적과 능력이 자신들과 함께 하는데, 왜 너희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이유로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는가 라고 말하면서 의인들을 핍박하며 죽이려고 달려들 것이다. 이 때, 하나님의 참 백성들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과 조롱과 오해의 대상이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장면에서, 하나님께서는 일곱 재앙을 악인들에게만 내리도록 하심으로써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신다. 악인들은 재앙의 원인을 의인에게로 돌림으로써, 박해의 불길을 더욱 드높힐 것이지만, 계속되는 재앙들을 통하여 악인들의 마음에 “왜 우리와 연합하지 않는 저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재앙이 내리지 않는데, 우리들에게는 온갖 재앙이 내릴까?”라는 의혹이 생기게 될 것이다. 물론, 7재앙이 의인들에게도 불편과 어려움을 줄 것은 사실이지만, 악인들에게는 직접적으로 가해질 것이다.

짐승의 표 강요 사건이 세계적으로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은 악인들에게 내리는 일곱 재앙 역시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일곱 재앙의 순서와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재앙: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지금은 의인과 악인이 공히 질병과 전염병의 피해를 당하지만, 이 때부터는 오직 짐승의 표를 받은 악인들에게만 재앙이 집중적으로 내린다.

둘째 재앙: “둘째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세째 재앙: “세째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네째 재앙: “네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다섯째 재앙:  ”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 다섯째 재앙은 짐승의 보좌가 있는 장소를 암흑으로 둘러치는 재앙이다. 이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짐승의 세력의 정체와 그가 존재하고 있는 장소를 밝히 드러내실 것이며, 누구 때문에 일곱 재앙을 내리게 되었는지를 나타내 보이신다. 이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누가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며, 어떤 무리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무리인지를 온 세상 앞에 드러내기 시작하실 것이다.

여섯째 재앙: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요한계시록 16:12~16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주제인 아마겟돈 전쟁이다. 요한계시록은 아마겟돈 전쟁은 일곱 재앙 중에서 여섯번째로 내리는 심판으로 소개하고 있다. 아마겟돈 전쟁은 사단의 편과 하나님의 편 사이에 벌어지는 대쟁투인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참여하게 되는 영적 전쟁이다. 사단의 편에서 전쟁을 주도하는 세력은 “세 더러운 영” 즉 “귀신의 영”들이고, 하나님의 편에서는 “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들, 즉 하나님께 목숨을 다하여 충성을 바치는 진짜 이스라엘인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다.

일곱째 재앙: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더라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니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이러한 일곱 재앙을 통과하면서 지구는 황폐하게 될 것이고, 그 때에 예수께서 재강림하셔서 의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질문에 대한 답변

자 이제, “아마겟돈 전쟁은 언제, 어떻게 일어날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표를 강요하는 무리와 그것을 거절하는 무리 사이에 마지막 대쟁투가 세계적으로 시작되고, 짐승의 표를 거절하는 성도들이 핍박과 순교를 당하는 사건들이 생기게 되며, 이러한 와중에 내리는 일곱 재앙 중에서 다섯번째 재앙이 내린 직후에 세계적으로 아마겟돈의 대쟁투가 일어난다.

 

6부 - 사단의 군대를 지휘하는 세 장군의 전략을 아시나요?


사단은 자신의 수하에서 싸우는 세 장군의 정체가 폭로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왜냐하면, 만일 이것이 폭로되면, 아마겟돈 전쟁이 중동지역에서 일어나는 핵전쟁이나 제3차 세계대전이 아니라, 세계적인 영적 대쟁투라는 진실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사단과 악령들의 능력과 사주를 받아서 최전방에 나서서 싸우게 될 세 장군의 정체를 올바로 파악한다면, 우리 모두는 아마겟돈 전쟁을 위하여 세어놓은 사단의 전략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다.

누가 또는 무엇이 사단이 사용하는 세 장군인가? 요한계시록 16장에 나오는 아마겟돈 전쟁의 장면을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요한계시록 16:12~16

세 장군의 이름: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 모여 있는 하나님의 군사들을 보면서 “옷”을 입고 있다고 묘사했던 것처럼, 사단의 깃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고 묘사하였다(13절). 바로 여기에 사단이 사용하는 세 장군의 정체가 그려져 있는데, 그들은 “세 더러운 영” 즉 “귀신의 영”들이며, 그들 각자의 이름은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이다.

세 장군의 전략: 사도 요한은 세 장군 즉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아마겟돈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하여 어떻게 사람들을 기만하여 사단의 편으로 끌어들인다고 했는가?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14절. 그들의 전략은 “이적”을 사용하는 것이다! 온 세상 사람들을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시키고, 그의 표를 강요하기 위하여 사용했었던 전략인 “이적으로 끌어 모으는 작전”은 아마겟돈 전쟁에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아마겟돈 전쟁에서 사단은 세 더러운 영들 즉, 거짓 선지자와 짐승과 용을 사용해서 온 세상 사람들 뿐만 아니라 “온 천하 임금들” 즉 각국 정부의 권력자들까지도 기적으로 미혹해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세 장군의 정체: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사단의 세 장군은 총과 미사일을 사용하는 군대가 아니라 종교적인 세력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적”은 종교의 영역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며, 세 장군의 이름 중의 하나가 “거짓 선지자”라고 표현된 것을 보아서도, “세 더러운 영”이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기독교회 뿐만 아니라 뉴 에이지나 강신술과 같은 이방 종교를 포함한 종교적 세력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종교들이 사단이 베푸는 놀라운 기적을 통하여 하나의 연합된 세력으로 뭉치게 된다.

개구리가 혀로 먹이를 잡아먹는 것처럼, 이들 세 가지 종교 세력도 그들의 입으로 거짓 가르침과 이적을 행함으로서 사람들을 사단의 먹이로 만들어 간다.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13절. 용은 이교의 세계와 세상에서 역사하는 사단의 강신술과 거짓 계시들을 말하며, 짐승은 교황권의 세력을 말하고, 거짓 선지자는 타락한 교회들을 의미한다. (지면 관계상 이 세 가지 종교 세력들의 자세한 정체를 규명하는 성경적 증거들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겠다. 용의 정체에 대해서는 살아남는 이들 22호, 짐승의 정체에 대해서는 살아남는 이들 16호와 19호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세 장군의 기만 전술을 피하는 방법

사단이 조종하는 이 세 장군의 기만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벌어지는 대쟁투의 쟁점과 공격 목표를 이해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마지막 대쟁투의 핵심 쟁점(issue)인가? 요한계시록 12장에는 사단이 마지막 시대에 총력을 기울여서 싸우는 공격 목표가 나오며, 14장에는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승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사단의 공격 목표를 살펴 보자; “용(사단)이 여자(교회)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 12:17. 사단과 그의 세 장군은 “여자의 남은 자손”을 없애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일 것인데, 그 “여자의 남은 자손”은 “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다. 그렇다! 마지막 시대에 사단의 공격 목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 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시대에 짐승의 우상을 경배하지 않고 그의 표를 받지 않는 사람들 역시 사단의 공격 목표인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사도 요한의 계시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4:11,12. 요한계시록 12장과 14장에 기록된 이 두 말씀은 모두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쟁투가 “하나님의 계명”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하나님의 계명”, 바로 이것이 마지막 시대에 일어나는 대쟁투의 중심이며, 모든 혼돈과 기만을 벗어날 수 있는 열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또 한 가지 논리적인 예측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는 자들도 “하나님의 계명”대로 순종하는 거룩한 생애를 사는 자들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사도 요한의 계시록으로 가서 과연 어떤 사람들이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는지를 확인해 보자.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계 16:15. 역시 하나님의 말씀은 아마겟돈 전쟁의 최후 승리자들의 모습에 대해서도 동일한 묘사를 하고 있다. “누구든지 깨어서 자기 옷을 지”키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하는 흰 옷을 입은 자들이다. 그들은 진짜 이스라엘이며, 참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로서, 하나님의 진리와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거룩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들이다. 사단이 “이적”을 통하여 온 세상을 기만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사단과 세 더러운 영들인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의 기만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을 부인하고, 좁은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사는 것이다. 반면에 마음 속에 숨겨져 있는 이기심과 탐욕을 버리지 않은 채, 각종 은사와 기적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구원에 대한 감정적 확신을 얻고자 노력하는 자들은 세 가지 종교 세력들에 의해서 가장 쉽게 기만당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이 폐하여 졌다고 가르치면서, 기적과 각종 은사들만을 강조하는 종교 세력을 조심하라!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 죗된 삶을 살아도 구원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설교하는 종교 세력을 조심하라!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율법주의라고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 그토록 많은 오해와 비난이 쏟아지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도 바울도 “그 때(말세)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을 행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던 것이다(살후 2:9,10). 말세에 “불법한 자” 즉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모든 능력과 기적과 속임수를 행할 것이라는 바울의 경고를 간과하지 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 재림의 징조를 설명하시면서 “사람의 미혹을 주의하라”는 경고를 6번이나 반복하시면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다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고 경고하셨던 것이다(마 24:24).

사단과 악령들은 총력을 다하여 사람들을 기만할 것이다. 그리하여 외면적으로 볼 때에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치 하늘의 놀라운 능력과 기적이 임하는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인데, 온 세상 사람들과 이방 종교인들도 그들의 놀라운 기적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놀랍고도 기만적인 분위기 하에서 온 세상의 국가와 정부 권력자들까지도 미혹당하여 세 종교 세력 즉, 사단이 지도하는 이방 종교의 강신술 세력(용)과 교황권 세력(짐승), 그리고 타락한 교회(거짓 선지자)의 연합된 요구에 따라서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표를 받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사형 명령을 내리는 일을 추진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놀라운 기만적 분위기는 아마겟돈까지 연결될 것이다. 마지막 시대의 대쟁투는 연합된 종교 세력과 국가가 연합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함으로써, 극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소수의 무리는 온 세상의 비난과 조롱과 핍박 하에서도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으로 그들의 자리를 지키게 될 것이다.

 

7부 - 아마겟돈 전쟁은 어디서 일어날까요?


아마겟돈 전쟁을 사단의 편에서 주도하는 세 더러운 영들이 어디로 사람들을 모은다고 하였는가?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계 16:16.

28사도 요한은 전쟁이 일어나는 곳을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고 불리우는 곳은 어디인가?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정통한 학자들은 사도 요한이 말한 아마겟돈(Armageddon)은 헬라어로 Har-megedo(산-므깃도) 이며, 이것은 “므깃도의 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의견을 모은다.

그러면 “므깃도”란 어디를 말하는가? 그것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와 바알신의 거짓 선지자들 사이에 대쟁투가 벌어졌었던 “갈멜산”의 아래에 펼쳐져 있는 조그만 평야와 계곡의 지명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음으로 아마겟돈, 그리고 헬라어로 Har-megedo(므깃도의 산)이라고 불리우는 곳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갈멜산”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아마겟돈 전쟁을 실제적인 중동 전쟁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갈멜산 아래에 있는 평야와 계곡에 온 세상의 군대들이 집결하여 이스라엘 군대를 공격하는 전쟁을 벌인다는 말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많은 군대들이 모여들어서 전쟁을 벌이기에는 이 갈멜산 아래에 있는 평야가 너무나 협소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 곳을 한번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곳에서 온 세계로부터 집결한 수많은 군대들이 전쟁을 치루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겟돈 전쟁을 중동 지역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견해는 비성서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과 사단의 대리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쟁투를 설명하면서, 왜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인 갈멜산을 언급하고 있는가? 사도 요한은 구약 시대에 갈멜산에서 있었던 선지자 엘리야와 바알 신의 거짓 선지자들 사이에 있었던 투쟁을 통하여 아마겟돈 전쟁을 묘사하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갈멜산에서 있었던 투쟁과 아마겟돈 전쟁에서의 대쟁투의 비교표를 만들어 살펴 보면,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실체를 좀 더 정확하게 엿볼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아마겟돈"을 실제적인 지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마겟돈 전쟁을 중동 지역에서 일어나는 국부 전쟁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실제적인 지명을 가리키기 위해서 "아마겟돈"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다. 요한은 구약 시대에 있었던 갈멜산에서의 투쟁을 통하여 세상 끝에 있을 아마겟돈 전쟁을 상징적으로 조명하였다.

그 당시의 정치 세력인 아합왕권과 종교 세력인 바알신의 거짓 선지자들이 연합하여 하나님의 참 백성인 엘리야를 향하여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던 극적인 클라이맥스가 갈멜산에서 있었던 것처럼, 사단의 거짓 종교 세력과 그들에 의해서 미혹당한 세상 정권들이 연합하여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인 소수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핍박과 박해의 불길을 치솟게 하는 클라이맥스가 아마겟돈 전쟁이다. 이 마지막 투쟁의 결과, 갈멜산 위에서 바알의 거짓 선지자들의 기만이 폭로되어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아마겟돈 전쟁에서도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의 기만적인 정체가 폭로되고, 산채로 유황불못에 들어가게 되는 심판을 받게 된다.

아마겟돈 전쟁은 어디서 일어날까? 이 전쟁은 중동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참 백성들에 대한 핍박의 불길인 동시에, 선과 악 사이에 존재하는 마지막 영적 대쟁투이다.

8부 - 유브라데 강물이 마른다는 의미를 아시나요?


이제, 우리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계 16:12.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글자 그대로 유브라데 강물이 실제적으로 마르면서 동쪽으로부터 오는 엄청난 군사력에 의해서 이스라엘 국가가 마지막 순간에 기적적으로 구원받는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이것은 어떤 다른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실제가 아니라 상징

유브라데 강이 마르는 사건을 실제로 해석하지 않고, 상징으로 해석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브라데 강은 그것이 말라야만 현대식 장비를 갖추고 있는 군대가 도하 작전을 펼칠 수 있을 만큼 넓고 깊은 강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물이 아무리 많이 불어나 있을 때라도 요즘처럼 현대화된 군대에게는 전혀 장애가 될 수 없다. 가장 도하하기에 적합한 지역으로 볼 수 있는 시리아 지역의 강폭은 불과 1마일 미만에 불과하다.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낡은 장비를 가지고 있던 연합군도 악천후 속에서 폭이 100마일이 넘는 영국 해협을 도하하는데 성공하였던 사실을 돌이켜 보면, 오늘날의 초현대식 군대가 유브라데 강이 기적적으로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도하 작전을 실시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유브라데강이 마르는 사건을 상징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재강림하시기 직전에 사단의 대리자들에 의해서 핍박당하면서 쫓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브라데 강물이 마르는 기적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포함하고 있을까? 사도 요한은 구약 성경으로부터 두가지 사건을 빌려와서 아마겟돈 전쟁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하나는 앞에서 설명하였던 갈멜산에서의 사건이고 나머지 다른 하나는 지금 설명하고자 하는 페르샤의 고레스왕이 유브라데 강을 기이한 방법으로 말림으로써 바벨론을 멸망시켰던 사건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고레스왕이 유브라데 강물을 말리게 된 사건의 배경과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아마겟돈 전쟁에서 유브라데 강물이 마르는 사건의 의미를 알아 보도록 하자.

고대 유브라데스 강물이 마르는 사건

먼저, 이 사건의 시대적 배경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계속적으로 불순종의 길을 걷자, 바벨론 제국의 포로로 잡혀가서 종살이하는 고난을 허락하셨다. 페르샤의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정복하던 해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지 거의 70년이 되던 때였다. 고레스 왕은 그 당시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바벨론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특별한 전략을 생각해 내어야만 하였다. 역사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고레스왕은 비밀리에 유브라데 강물을 옆으로 빼어돌림으로써, 강물의 수위를 크게 낮추는데 성공하였고, 이로 인하여 유브라데 강물이 관통하여 흐르던 성밑 수문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달밤에 고레스 왕의 군대는 유브라데 강의 하상을 도보로 걸어서 바벨론 성안으로 침입하여 들어가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고레스 왕이 이 땅에 태어나기 150년 전에 이미 “고레스”란 이름을 정확하게 지목하시면서 위에서 언급한 고레스 왕의 전략을 다음과 같이 미리 예언해 놓으셨다는 사실이다.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사 44:27,28. 하나님께서는 고레스 왕이 유브라데 강물을 말리는 전략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시킬 것과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이 중건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것을 아셨다. 얼마나 놀라운 예언적 안목인가!

사도 요한은 바로 이러한 고레스 왕의 전략을 인용하면서,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고 기록하였던 것이다(계 16:12). 유브라데 강은 바벨론 성을 관통하면서 흐름으로써, 고대 바벨론을 유지시키는 젖줄이었다. 유브라데 강물이 마른다는 것은 곧 바벨론의 생명줄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을 영적으로 아마겟돈 전쟁에 적용시키면, 구약 시대에 고레스 왕이 유브라데 강물을 빼돌림으로써 바벨론성을 함락시켰던 것처럼, 마지막 시대의 아마겟돈 전쟁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단의 세 장군(용, 짐승, 거짓 선지자)으로 등장하는 세가지 종교 세력인 영적 바벨론을 지지, 후원하던 젖줄을 마르게 하심으로써 사단의 세 장군을 몰락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사단의 세 장군인 영적 바벨론을 지지하던 세력이 어떻게 마르게 되는가? 요한계시록 17장에 그 힌트가 나온다.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계 17:15. 그렇다! 유브라데 강의 “물”은 백성들, 즉 많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유브라데 강이 마른다는 뜻은 온 세상 사람들이 사단의 세 장군(용, 짐승, 거짓 선지자)에게 보내던 지지와 후원을 중지함으로써, 그 세력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의미이다. 고대 유브라데 강이 바벨론을 유지시키는 주요 자원이지만, 후에는 바벨론을 멸망시키는 원인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 유브라데 강의 “물”(백성, 사람들)은 영적 바벨론의 세력을 파멸시키는 원인이 된다.

유브라데 강물이 갑자기 마르는 이유

그런데, 왜 온 세상 사람들이 사단의 대리자들에게 보내던 지지와 후원을 갑자기 중지하는가?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일곱 재앙을 악인들에게만 내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여섯째 재앙인 아마겟돈 전쟁의 전후에 나오는 다섯째 재앙과 일곱째 재앙,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요한계시록 17장에 차례로 나오는 장면들은 유브라데 강물이 갑자기 마르는 이유와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다섯째 재앙: “여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 지고” 계 16:10. 하나님께서는 “짐승의 보좌”가 있는 장소를 암흑으로 둘러치심으로써, 사단의 세 장군 중의 하나인 짐승의 정체와 그가 존재하고 있는 장소를 밝히 드러내실 것이며, 누구 때문에 일곱 재앙이 내리게 되었는지를 나타내 보이기 시작하신다. 또한 이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누가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며, 어떤 무리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무리인지를 온 세상 앞에 드러내기 시작하심으로써, 사단의 대리자들의 기만적인 정체를 드러내신다.

일곱째 재앙: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되어 그의 맹렬한 분노의 잔을 받으니” 계16:19. 여기서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사단의 세 장군 역할을 했었던 세 더러운 영인 용, 짐승, 거짓 선지자의 연합 세력이 바벨론이라는 이름을 달고서 등장한다. 일곱번째 재앙에는 하나님의 참 백성을 괴롭히던 바벨론이 무너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큰 성 바벨론이 세 갈래로 갈라”진다는 뜻은 사단의 연합 세력인 용, 짐승, 거짓 선지자의 세 종교적 연합 세력이 세 갈래로 분열된다는 의미이다. 이 때에 종교 세력 뿐만 아니라, 이들을 후원하던 각국의 정치적 세력들도 붕괴된다.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계 16:19

악인들은 재앙의 원인을 의인에게로 돌림으로써, 박해의 불길을 드높히지만, 계속되는 재앙들을 통하여 악인들의 마음에 “왜 우리와 연합하지 않는 저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재앙이 내리지 않는데, 우리들에게는 온갖 재앙이 내릴까?”라는 의혹이 생기게 된다. 또한 자신들이 핍박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생애와 품성에 나타나는 거룩한 증거들을 보면서 자신들이 사단에게 기만당했음을 마침내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일곱 재앙의 고통스런 과정 속에서, 사단의 세 장군에게 보내던 세상 사람들의 지지와 후원은 완전히 중단된다.

요한계시록 17장: 요한계시록 17장에는 유브라데 강물이 마르는 장면이 좀더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바벨론이 음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 그(여자)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라 ...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계 17:1,2,5,15,16. 요한계시록 17장 후반부에는, 세상 사람들이 사단의 세 장군(용, 짐승, 거짓 선지자)에게 보내던 지지와 후원을 완전히 중단할 뿐 아니라, 그들을 향하여 참혹한 복수를 가하는 두려운 장면이 나온다. 바로 이러한 과정이 영적 유브라데 강물이 말라가는 과정이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된다.

 

9부 -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정체를 아시나요?


이제 우리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제일 마지막 장면을 살펴볼 준비를 갖추었다.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 강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계 16:12.

하나님의 백성을 위기의 순간에 극적으로 구원해 내기 위하여 동쪽 방향에서 나타나는 동방의 왕들은 누구인가?

아마겟돈 전쟁을 설명하는 요한계시록 16장 본문에서 직접 그 정체를 확인할 수 있다.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계 16:14,15. 이 말씀에는 사단의 세 장군이 “ 세 더러운 영”들이 이적을 통하여 온 천하의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장면이 나오면서, 예수께서 “도적같이” 재강림하시는 모습이 나타나고, 이어서 재강림 때에 승리하며 살아남게 될 사람들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져 있다. 그렇다! 동방(동쪽)에서 오는 왕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나타나는 방향을 동쪽으로 표현한다.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마 24:27.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이 나니” 겔 43: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돋는 데(동쪽)으로부터 올라와” 계 7:2

예수님의 재강림을 “동방에서 오는 왕들”이라는 복수로 표현하였는가? 왜냐하면 그 때에는 천만천사들을 대동하고 오시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19장에는 “동방의 왕들”이 오는 모습이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오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계 19:14,16. 계속해서 이어지는 장면에는 예수께서 천만천사 대군과 함께 재강림하시면서 아마겟돈 전쟁의 전범들을 체포하여 심판하시는 모습이 나온다.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 말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계 19:20,21

고레스 왕은 이스라엘의 구원자

구약 시대의 고레스 왕의 이야기를 아마겟돈 전쟁에서 유브라데 강물이 마르는 사건에 영적으로 적용하였다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기의 순간에 극적으로 구원하는 사건에도 적용할 수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 구약 시대에 고대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압제에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동방에서 온 고레스는 영적 이스라엘을 영적 바벨론에서 구출하는 “동방에서 오는 왕들”을 표상하는 인물이다.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에 대하여 소개하는 표현들을 살펴보면, 마지막 시대에 아마겟돈 전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는 동방에서 오는 왕들이 누구인지를 재 확인할 수 있다.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으키며 ... 열국으로 그 앞에 굴복케 하며 ... 나의 목자라 ... 나의 기름부음을 받은 고레스” 사 41:2;44:28;45:1.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킨 고레스 왕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4가지 표현 즉 1)동쪽 방향에서 나타나시고, 2)모든 악인들의 세상을 굴복시키고, 3)목자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으며, 4)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소개를 받을 수 있는 분이 누구인가? 오직 한 분밖에 없는데,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마지막 시대에 사단의 대리자들에게 쫓기고 핍박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재림이야말로 유일한 소망이다. 애굽의 바로왕 군대에게 쫓기던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홍해를 가르셨던 예수께서, 아마겟돈 전쟁에서는 마지막 위기의 순간에 하늘을 가르시면서 나타나심으로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하늘로 데려 가실 것이다.

 

결론 -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성서적인 이해


"이스라엘"에 대한 오해로 시작된 혼돈

이번 호에서 다룬 아마겟돈에 대한 정보들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그것이 과연 성서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에 기록된 마지막에 관한 예언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한가지 중요한 개념에 대한 이해를 등한시 하기 때문에 자주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거나 아니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미래를 기대하게 되는 현실을 보게 된다. 그 중요한 한가지란 마지막 종말 시대에 이스라엘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이다. 마지막 시대에 일어날 전쟁 무대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선택된 그룹이 누구인가하는 사실이다.

이번 호에서 이미 충분히 설명했던 것처럼, 마지막 시대의 이스라엘은 영적인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지 문자적인 이스라엘 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적인 해석상에서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불렀고(갈 6:16 참조) 또한 예수님의 이복 형 야고보는 소 아시아 지방에 흩어져 있던 초대 기독교회들을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라고 불렀던 것이다(약 1:1 참조). 계시록 7장에서 14만 4천이 열 두 지파에서 나온다는 말씀을 가지고 흔히들 그들이 문자적인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실재적으로, 흩어진 북방 이스라엘의 10지파들은 혼합된 결혼과 핍박 그리고 세상에 흩어짐을 통하여서 더 이상 그 줄기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이 아닌가. 그리고 계시록 7장의 12 지파의 이름은 원래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인 12지파의 이름들과 조금 차이가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계시록 7장의 12지파의 이름은 인간의 각기 다른 개성과 성격들을 나타내는 의미를 담은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드린 유대인들과 복음을 듣고 교회로 들어 온 이방인들이 합하여 이스라엘을 이룬다고 명확하게 설명해 두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롬 11:25,26). 이 단순한 가르침을 지나쳐 버리게 되는 이유는 과거에 들었던 잘못된 성경 지식으로 인한 편견 때문이다.

현재 중동 지방에 존재하는 이스라엘은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당신의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문제는 매우 간단하게 풀리게 된다. 더 이상 우리는 러시아나 중국 군대가 동쪽으로 부터 실재 이스라엘 나라를 향하여 쳐들어 오는 전쟁으로 볼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아마겟돈 전쟁은 오히려 전 세계적으로 마귀에게 사로잡힌 악인들이 하나님의 의인들을 멸절하려고 벌이는 전쟁으로 이해하게 된다.

악인들에게 내리는 재앙으로 소개되는 아마겟돈 전쟁

또 한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아마겟돈은 마지막 7재앙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이다. 7재앙은 온 세상에 대한 은혜의 시간이 끝난 후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7재앙이 내릴 때에는 회개할 기회가 더 이상 없는 하나님의 진노의 시간이다. 의인들을 괴롭히고 핍박했으며 또한 멸절시키려고 달려드는 익인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잔인 것이다. 그 7재앙들을 다루고 있는 계시록 16장은 1절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2절에서는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며 그 표를 받은 자들에게 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지 않는가! 또한 5절은 이 재앙들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또한 6절은 재앙들을 이 세상에 내리시는 이유가 악인들이 의인들을 핍박하며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재앙을 받는 악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9절과 1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계시록 17장은 이 7재앙을 받는 대상이 큰 음녀인 바벨론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말해 주고 있다.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계17:1). 성경에서 정결한 처녀는 참된 교회를 상징하는 반면에 음녀란 타락한 교회를 말한다. 그러므로 아마겟돈 전쟁은 일곱 재앙 중의 여섯번째 재앙이요, 또한 영적인 전쟁을 말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용, 짐승, 거짓 선지자의 정체와 그들의 말로

아마겟돈 전쟁은 전 세계를 무대로 하나님의 백성과 사단의 백성 사이에 일어나는 전쟁이다. 악인들은 세계적으로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지만, 오히려 전쟁의 종말에 가서는 바벨론의 세력을 지지하던 사람들이 그 지지함을 그치고 음녀를 불태워 죽이게 되는 것으로 성경은 설명하고 있다.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계 17:16.

아마겟돈 전쟁으로 악인들을 몰아오는 세 더러운 영은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부터 나온다고 말씀하고 있다. 용은 계시록 12:9에서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자”라고 설명해 주고 있고, 짐승은 계 13:1-10까지에서 42개월 동안 하나님을 대항하며 성도들을 죽이고 핍박하는 세력이라고 말씀하고 있다(42개월은 3년 6개월이고, 이것은 1260일이므로 1일=1년 원칙에 의거하여 42개월이라는 예언적 기간은 1260년을 뜻함). 이렇게 긴 천년 이상의 기간 동안 성도들을 박해 해 온 종교적인 세력은 로마 교황권 밖에는 역사에서 다른 세력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다니엘서 7장에 나타나는 작은 뿔 세력이 바로 이 세력을 말하는 것이다(살아남는 이들 16호에서 상세히 다루었음).

그러므로 종교 개혁자들은 한결같이 이 짐승의 세력을 교황의 세력이라고 확정지어 기르쳐 온 것이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 와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갑자기 변하여 버린 것은 무슨 까닭일까? 현대 기독교인들이 과거의 종교 개혁자들이나 선조들 보다 더 신앙이 좋고 똑똑해 졌다는 말인가? 더 나아가서 거짓 선지자의 세력은, 교황권의 세력에 무릎을 꿇고 타협하는 개신교회의 타락한 교회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의 뜻은 항거한다는 뜻으로서 교황권에 항거한다는 의미로 불러지게 된 것이다. 현재 에큐메니칼(종교연합) 운동의 뒤에 숨은 목적과 동기를 살펴 보면 더 이상 항거하기를 그치고 로마 천주교회로 돌아가는 대다수의 타락한 개신교회들의 상태를 이해 하는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게 된다.

계시록 19:20은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함께 망하는 모습이다. 여기에서 성경은 거짓 선지자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짐승의 표를 받게 하고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미국

그런데 짐승의 표를 강요하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는 세력인 거짓 선지자에 대하여 계시록 13장은 그 정체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 세력은 다름이 아닌 두뿔 가진 새끼 양 같은 짐승이다. 이 새끼 양 같은 짐승은 계시록 13장의 첫번째 짐승 곧 교황권이 죽게되는 상처를 받는 시기(1798년도에 나폴레옹의 세력으로 불란서 감옥으로 끌려간 교황 피우스 6세가 그곳에서 죽게 되어 중세기의 1260년 동안 계속되었던 교황권의 세력이 몰락한 사건을 말함)에 일어나는 나라로서 새끼양 같은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 정신을 가지고 일어난 미국을 말하는 것이다(살아남는 이들 5호, 미국에 관한 예언 참조). 미국의 건국 시기가 1776년도가 아닌가! 이 새끼 양 같은 짐승이 먼저 나온 짐승 곧 교황권을 위하여 이적을 행하며 미혹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계시록 13:11~16 을 읽어 보도록 하자.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자니라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 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저가 모든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 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계시록 19장에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잡혀 죽는 모습이 나오며, 계시록 20장에는 용이 이 땅에 천년 동안 결박 당하여 있는 모습이 나온다. 악인들은 다 멸망 당하였고, 의인들은 하늘로 승천하여 올라간 후에, 황폐하고 아무도 없는 이 지구상에는 사단과 악한 영들만이 쓸쓸히 남아서 아무도 더 이상 미혹할 자가 없는 상태에서 묶여 있는 형편이 계시록 20장 초반에 나온다.

아마겟돈이란 히브리 말의 뜻은 “므깃도의 산”이라는 뜻이다. 므깃도 평야에서 바라보면 보이는 산이 바로 갈멜산이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일대의 결전을 벌인 그 유명한 산 말이다. 그 곳에서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을 대항하여 누가 참 하나님이신지를 보여 주는 큰 영적인 전쟁을 치루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 신이 그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 주신 여호와인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토록 철저하게 기만당하여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바알 신이 불을 내려 줄 것을 기도하면서 광란하면서 이상한 음악에 맞추어서 춤을 추던 바알 선지자들은 심지어 자기의 몸을 칼로 베어가면서 하루 종일 소리를 질렀지마는 불이 내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야는 겸손하고 온유하게 그러나 진지하게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의 기도는 간략하고 솔직하였다. 그 때 참 하나님께로부터 불이 내려와 제물과 제단을 다 불살라 버렸다. 놀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엘리야는 그들을 속이고 기만하던 바알 선지자들을 다 죽이라고 명하였다.

바로 이 므깃도의 산에서 일어났던 영적 전쟁을 상징으로 마지막 시대에 있을 최후 전쟁을 묘사한 예언이 아마겟돈 전쟁이다. 그래서 계시록 13장은 거짓 선지자가 심지어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까지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곧 머지않은 장래에 지구 최후의 싸움인 아마겟돈 전쟁이 치루어 지게 될 것이다. 두 무리가 갈라지고 있으며 서로 전쟁을 위하여 칼들을 갈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할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그 때에 나는 과연 어느 무리에 속해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