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믿음과 감정을 구별할 수 있나요?


6가지 진지한 질문

믿음과 감정을 혼돈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느끼는 감정을 기준으로 자신의 신앙 상태를 판단하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납하시는 증거를 자신의 감정 속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자신들을 실망시키는 외에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본성적으로 인간의 성정은 사단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느낌과 감정에 의존하여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아무런 보호벽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단은 사람의 정신을 흥분시키고 자극하는 방법으로 오류와 거짓을 퍼뜨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고 그분의 진리는 영원불변한 것이지만, 인간의 느낌과 감정은 상황에 따라서 항상 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에 의해서 신앙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진지한 질문으로 자신의 영적 상태를 판단해야 한다.

1.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2. 나는 복음과 진리를 위하여 어떤 희생을 치루고 있는가?
3. 나는 승리하고 있는가? 패배하고 있는가?
4. 나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의무를 신실하게 수행하고 있는가?
5. 나는 나 자신만을 위하여 이기적인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6. 나는 정욕을 억제하고 매사에 절제하며 그리스도의 뜻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지를 판가름하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충동적인 경건이나 감정적인 신앙으로 우리의 양심을 스스로 기만해서는 안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감정의 고조를 높이 평가하거나 의존한다면, 그는 사단이 찾고 있는 가장 적절한 먹이가 될 것이다. 진정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가? 원칙에 의거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자신의 육체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에 의해서 지배받지 않기 위하여 최고의 노력을 경주하라. 이러한 신앙생활을 통하여 그대의 믿음은 향상될 것이며, 의지력은 증진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보람과 만족은 부흥회 때의 짜릿한 감정이나 은사를 체험하는 데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참된 평안과 행복은 자신의 노력과 희생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이 행복함을 맛볼 때에 얻어진다.

감정과 자기기만

사단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감정과 믿음을 섞어 놓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러므로 감정이 고조되어야 믿음이 향상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단의 전략에 기만당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람들이다. 사단은 죗되고 이기적인 생애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각종 기적과 거짓 은사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줌으로써, 그들의 감정을 고조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적 고조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인정하신다는 거짓 확신을 갖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변화가 아니다. 그들의 행동은 이전과 마찬가지이며, 생애에는 선한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그들은 이전에 자신이 경험했던 감정적 고조를 얻기 위하여 크게 소리내어 기도하고, 오랫동안 금식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생애를 이끌어 가는 원칙은 변화되지 않으며, 새롭게 거듭난 생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결과 그들은 절망하여 깊은 낙담에 빠진다. 그들은 사단에게 속았으며, 또한 스스로의 감정에게 속았다.

이러한 사람들의 영적 경험은 감정 이상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그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는 것이다. 환란과 시련이 몰아닥치면, 자신의 믿음의 기초가 모래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만, 신앙은 무너져 내리고 만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표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변화된 마음이며, 자아와 교만이 죽은 생애이다. 감정적 신앙을 가졌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매우 분명한 하나님의 말슴과 진리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분명하게 밝히신 뜻과는 달리 그와 반대되는 길로 갈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억지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야말로 원칙보다는 감정을 중요시하는 신앙인이다.

대개 감정을 중요시 여기는 신앙인은 하나님의 명령과 율법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아는 경우에도 “성령께서 내게 개인적으로 말씀해 주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그대로 가겠다.”라고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사단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이 원하는 감정과 느낌을 줌으로써,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켜준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단의 농간을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허락한 놀라운 체험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라 요구하는 바를 저버리고, 자신의 감정과 느낌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생애 함으로써 결국에는 사단의 뒤를 따라가게 된다. 그러므로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체험은 항상 거룩한 성경 말씀과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을.

최후의 대쟁투

느낌은 믿음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둘을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행사할 수 있는 특권이자 의무인 믿음을 활용하는 대신에, 자신에게 어떤 특별한 느낌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믿음은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광경을 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전진하였을 때, 영광스러운 감격과 감사의 정신을 축복으로 받게 된다. 믿음은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활용할 수 있는 것이고, 느낌은 믿음을 활용한 결과로서 얻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활용 없이 느낌을 추구하는 것은 앞뒤가 뒤바뀐 신앙태도이다.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허락하시는 감정과 느낌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참된 믿음은 약속된 축복이 실현되고 느껴지기 전에 그것을 붙잡고 주장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 11:24 우리가 축복을 깨닫기 이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축복하심에 대한 감사의 정신을 소유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최선의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을 믿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참된 믿음이다. 약속된 축복을 느끼고 그것을 즐기게 될 때에 이미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느낌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자신에게 많이 부어질 때에는 큰 믿음을 얻게 되며, 자신이 성령의 큰 능력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에는 아무런 믿음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령의 결핍을 느낄 때야말로 믿음을 활용해야 할 때이다. 두텁고 검은 구름이 마음을 덮을 때야말로 산 믿음을 활용하여 흑암을 꿰뚫고 구름을 흩어버림으로써 유쾌한 정신을 받아야 할 때이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포함된 약속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인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하는 축복을 주장할 수 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15:7

최후의 심판과 재앙이 지구에 임하기 직전에, 이 지구상에는 두가지 종류의 부흥 운동이 일어날 것이다. 하나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부흥이고, 다른 하나는 사단이 인도하는 거짓 부흥 운동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부흥 운동은 진리를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과 생애를 변화시키는 역사로서, 이 부흥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진리를 분명하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애 속에 분명한 성령의 열매가 맺힘으로서 복음 전파에 있어서 하나님의 살아있는 증인들로서 나서게 된다. 이와 반면에 사단이 인도하는 거짓 부흥 운동은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참된 변화의 경험을 체험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단이 놀라운 이적과 거짓 성령은사의 능력을 줌으로써, 사람들을 돌이키기 어려운 정도로 깊이 미혹하는 운동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두가지 부흥 운동 사이에게 혼돈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지금 어떤 운동에 참여해 있는가? 진짜와 가짜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은 오직 성경 말씀으로부터 나온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살후 2:12

 

권두언


암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방문하노라면 마음 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 오르게 됩니다. 전쟁터에서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텔레비죤의 화면에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 속에 한가지 의문이 떠 오르게 됩니다.

끔찍한 청소년들의 타락상을 지켜 보고 있노라면 한가지 의문이 마음 속에 떠 오르게 됩니다. 그 한가지 의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죄의 역사를 끝내시는 일을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오래동안 지체하고 계시는 것일까?”

왜 이 세상에 죄와 고통의 역사가 이렇게 오래 지속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과연 무엇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일까요? 인간들이 이렇게 슬픔과 고난 속에서 신음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서 속히, 하루라도 빨리 인류들을 구원하시어 원래의 완전하고 행복한 상태로 회복시키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러한 일을 막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이 세상이 구속되기 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관건이 있어서 그러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역사가 계속 지연되면 될 수록 고통과 희생은 커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이 계획이 이루어지고 나면 이 우주는 다시 죄와 슬픔이 없는 완전하고 평화로운 곳이 될 것입니다. 죄의 구속 사업은 온 우주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죄의 문제는 이 지구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하늘에서 부터 시작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지구를 구원하시고 다시 죄없는 아름다음으로 회복하시기 전에 반드시 다루어야 할 과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지금 과연 무엇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까?

이번호는 바로 이 흥미있고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기도하시는 마음으로 성경이 설명하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잘 읽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애를 인도하시는 큰 빛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고 싶을 때


이 글은 의도적이고, 고의적인 죄 속에서 빠져 나오기를 거절하는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글이 아닙니다. 이 글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한 양심과 진실한 신앙으로 순종하기 원하지만, 사단의 끈질긴 유혹과 시험과 싸우다가 지쳐서 낙담해 있는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글입니다.

자신의 생애와 성품의 부족함으로 인하여 절망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까? 이 글은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쓰여졌습니다. “너 같은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려고 하니? 너는 안돼! 포기해! 너처럼 자주 실패하고 쓰러지는 사람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니? 네 자신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을 비교해 봐!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니? 차라리 그만 두고 세상으로 나가서 마음이나 편하게 살아라!” 이러한 사단의 속삭임 때문에 괴로워하는 영혼들을 위하여 이 글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는 이유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너무나 어려워서 쓰러질 때, “하나님께서 너를 버리셨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겠니?”라는 음성이 우리의 영을 울릴 때마다, 기도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게 되고, 하나님의 분노하고 무서운 얼굴이 우리의 마음을 압도하여 우리의 영혼은 조그맣게 움츠려 들고 만다. 이러한 느낌이 우리를 엄습해 올 경우, 때때로 우리는 “기도하면 뭐해. 아무런 소용도 없을 텐데. 무슨 면목으로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가겠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낙심하고 절망한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게 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seek) 내가 하늘에서 듣고 네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는 약속을 우리 모두에게 주고 있다. 성경에 이러한 약속들이 수없이 반복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하여 스스로 깊은 좌절감 속에 빠져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며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다”(출 34:6). 바로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러나 사단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무섭고 엄한 분으로 나타내는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해 때문에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심판과 정죄의 압박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비록 그리스도의 용서하시는 은혜와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품성과 생애 속에 나타나는 불완전함과 부족함으로 인하여 깊은 좌절의 늪 속으로 밀려 들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결국에는 자신이 과거에 했던 참된 거듭남의 경험마저 의심하면서 깊은 낙담에 빠지게 된다. 이럴 때는 정말 아담과 하와가 범죄 후에 하나님을 피하기 위해서 나무 뒤에 숨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달아나고 싶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에서도 우리는 결코 낙심하거나 뒤로 물러갈 필요가 없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부족과 실수로 인하여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서 눈물을 흘릴 때가 자주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코 낙담하지는 말아야 한다.

비록 우리가 원수 사단에게 패배 당하였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거나 싫어하는바 되거나 배척을 당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분께 더욱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자들은 결코 자신의 죄와 잘못으로 인하여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고 계신다.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하여금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대가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며, 당신의 순결함과 거룩함이 그대에게로부터 반사되는 모습을 보시기를 열망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치기만 하면 우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이다.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더욱 확실히 믿도록 하자. 죄와 허물로 인하여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허물어질 때마다, 우리 구세주의 능력을 의지하도록 하자.

마음의 영적 법칙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갈 때에 잊지 말아야 할 한가지 중요한 법칙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예수께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더욱 잘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의 영적 시력이 더욱 밝아져서 우리 자신의 불완전한 품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품성과 대조되어 보다 분명하게 나타나 보이게 된다. 예수께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사단의 미혹과 시험은 그 힘을 잃어버리는 반면에 성령의 생명력 있는 감화는 우리의 양심을 각성시키고 예민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깊이 느끼면 느낄수록,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영적 좌절감이 깊으면 깊을수록, 우리가 주님께 더 가까이 나가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요한 웨슬레’라는 제목의 책 35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영감적인 글이 기록되어 있다. “많은 경우에 죄를 자주, 그리고 많이 범하는 죄인들은 죄에 대한 슬픔을 깊이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슬픔을 일으키는 양심의 감각이 이미 무디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와 반면에 죄를 적게 범한 자들은 많이 범한 자들보다 심리적으로 더 깊은 죄책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멀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리를 잘 알고 있는 사단은 신실하게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 실패하고, 쓰러지고, 암담한 상황 속에 처할 때마다 그들의 귀에 “또 죄를 범했지? 네가 아무리 애를 쓸지라도 결국 너는 멸망 받게 될거야. 네가 아무리 신실한 척 할지라도, 너는 결국 실패자고, 위선자야!”라고 속삭임으로써 낙망시키려고 애쓴다. 그러나 잊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리고 심지어는 그대의 실패와 실수를 통해서라도 모든 일을 협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도록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마음의 거룩함과 생애의 순결을 위하여 신실하게 노력하는 그리스도인 중에 많은 사람들이 죄책감과 낙담으로 인하여 고민하고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살펴 보면서,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감히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요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살펴보는데 있다. 진정으로 거룩해진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얼마나 거룩해 졌는지를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날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들은 자신의 더러움과 부족함을 더욱 더 깊이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거룩하다고 생각하거나 느끼는 그리스도인은 잘못된 경험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제자들과 사도들 중 어떤 사람도 자기 자신에 대하여 완전함과 거룩함을 주장하지 않았다. 비록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제자들의 순결한 신앙을 존경하였지만, 제자들 자신은 자신에 대하여 결코 그러한 느낌이나 생각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부족과 죄됨을 항상 구세주께 고백하였다. 바로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통과하게 되는 아이러니컬한 영적 경험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의 괴수로 여겼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주님과 그 만큼 가까운 생애를 살았기 때문에 자신의 죄 됨과 부족함을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욱 깊이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은 죄인의 괴수라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높아지고 향상되면, 스스로 자신의 성품과 생애 속에서 거룩함과 순결함을 발견하거나 느끼게 될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신앙이 고결해지면 질수록, 주님께 가까이 나가면 갈수록, 그리고 기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자신의 부족함과 죄됨을 더욱 더 깊이 느끼게 된다.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라!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역이용해서 사단은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낙심과 좌절의 늪으로 끌어가려고 한다. 그러므로 자신을 들여다 봄으로써, 어떤 종류의 확신과 만족을 이끌어 내려고 애쓰지 말라. 사단은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낙망과 좌절의 계곡으로 끌어가서 매장시키려고 기다리고 있다.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고 살피는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분의 성품을 명상하라. 그분의 인자하고 온유하며 노하기를 더디하는 성품에 그대의 온 마음을 기대어 보라. 그분께서 주시는 마음의 화평과 평화가 조용하게 흘러 들어올 것이다. 바로 이것이 거룩한 생애를 사는 비결이다.

어떤 사람들은 참된 믿음이 가지고 있는 단순성 이상을 넘겨 보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 가운데 깊은 흑암을 불러들인다. 그러한 사람들은 시선을 자신에게서 돌려서,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을 의지하고, 그분께서 말씀하신 바를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고 자신의 영적 성장을 확인하기 위해서 자신을 바라보고 살피는 자마다 실망과 낙망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인위적으로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정하신다는 증거를 얻기 위해서, 종종 기적과 은사를 추구하는데 그러한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사단이 만들어 놓은 거짓 이적과 거짓 은사에 걸려들고 있다. 그러므로 부디,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일을 중단하라.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 당신께서 약속하신 바를 자신에게 그대로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 우리 마음가운데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처럼, 그것을 끝마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단순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단순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될 때, 우리는 자꾸 자신의 마음과 생애를 바라보면서 확신을 얻으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실망과 낙망의 길로 빠져 들어가게 된다. 사단은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할 때마다 재빨리 다가가서 “너의 믿음과 신앙은 온통 거짓 투성이야. 네 자신의 변화되지 못한 생애와 성품을 좀 보아라. 하나님께서도 너의 파렴치한 죄를 보면서 너로부터 얼굴을 돌리셨을거야.”라고 속삭인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 믿음의 기초는 우리 자신의 느낌과 감정과 자기 확신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와 약속 위에 세워져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약속하신 것들을 신뢰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과거의 죄들을 회개하며, 앞으로는 순종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용납하시고, 아울러 우리의 죄도 용서하여 주신다는 진리를 믿어야 한다.

종종 흑암과 낙담이 우리를 엄습하여 우리의 영혼을 압도하려고 위협할 때에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저버려서는 안된다. 감정과 느낌의 변화가 어떠하든지 간에 예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 우리에게 부여된 모든 의무들을 충실히 수행한 후에 하나님의 약속과 허락 안에서 조용히 쉬어야 한다. 때때로 자신이 무가치하고 부족하다는 생각이 온 마음을 가득 채워서 우리의 영혼을 공포로 전율시킬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변하였거나 또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헌신이 변질되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 자신의 잘못된 선택과 실수로 인하여 가끔 쓰러질 수는 있으나, 결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지는 않는다. 사단의 덫에 넘어져서 정복당하였을지라도,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낙망하고 싶은 좌절감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그분은 지금도 여전히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며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마음에 강렬한 감정을 일으키기 위하여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부흥회 때나 기도회 때에 받았던 강렬한 감정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태도는 매우 위험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으며, 깊은 실망과 좌절만을 가져다 줄 뿐이다. 비록 어제 우리가 느꼈던 평화스러운 감정을 오늘을 느끼지 못할지 모르지만,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손을 굳게 붙잡고 흑암 가운데서도 빛 가운데서처럼 온전히 주님을 신뢰해야 한다. 그대의 시선과 생각을 예수 그리스도께 고정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사단은 그대 곁에 와서 그대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지적하면서 낙심시키고 실망케 하는 속삭임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시선이 그리스도를 떠나서 그대 자신에게로 옮겨질 때, 사단은 그대의 귀에 “너는 너무나 큰 죄인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속삭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진정으로 자신의 죄 됨과 무가치함을 인정한다며, 사단을 향하여 이렇게 부르짖으라! “나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였다. 나는 나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지 않고, 나를 정결케 하시는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신뢰한다. 나는 이 순간에도 무력한 나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의탁한다.”

우리의 마음이 어려운 난관에 처한 듯이 보일지라도 실망하지 말라. 온갖 장애물이 닥쳐오고 내적인 원수가 나타나서 괴롭힐지라도 그것들은 오직 구세주의 필요를 더해줄 뿐이다. 문제가 생기면 생길수록 우리는 이렇게 기대해야 한다. “주님, 그러므로 나는 오늘 주님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위대한 능력과 은혜가 더욱 더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굳은 마음을 제하여 버리시고 새로운 마음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 우리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결점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주님께 특별한 은혜를 달라고 간구하라.

우리 모두는 쓰러지기 쉬운 자들이며, 모두 실수하는 자들이고, 죄의 덫에 걸려서 넘어질 수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기꺼이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서 죄와 부족함을 고백하면 그 때 죄인은 회복된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실수할 수 있고, 때때로 그분의 성령을 슬프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내어 쫓지 않으신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제거해야 할 장애물들이 있다. 잘못된 감정이 품어질 수 있고, 교만함과 자아만족과 인내치 못하는 정신과 불평들이 남몰래 품어질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킨다. 그러므로 죄는 반드시 고백되어야 한다. 그대가 아무리 악한 죄를 범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대는 하나님의 얼굴을 찾아서 바라보아야 하며, 심령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순복해야만 한다.

 

천식을 해결해 드립니다!


천식은 기침, 호흡곤란, 숨을 헐떡 거림과 같은 증세를 동반한다. 천식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한 종류는 외인성 천식이고 다른 한 종류는 내인성 천식이다.

내인성 천식은 외인성보다 더 심하며, 파악하기 어려운 알러지가 그 원인이 된다. 일반적으로, 내인성 천식은 30세 이후에 나타나며, 여러 해 동안 계속되는 경향이 있다. 대개 어렸을 때에 시작되는 외인성 천식은 계절병이며, 알러지와 뚜렷한 관련을 맺고 있다. 보통 천식 환자 중의 50% 이상은 4~17세 사이에서 천식이라는 병명을 진단받게 되며, 30% 정도는 30세 이후에 자신이 천식 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초기에는 숨을 헐떡거림, 마른 기침과 같은 증세로 시작되어서, 호홉곤란이나 가슴이 답답한 증세로 발전된다. 일반적으로 천식은 잠을 자는 동안이나 밤에 도발되었다가 몇 시간이 지나면 일시적으로 진정된다. 대개 천식은 알러지와 함께 생기며, 약 20% 정도는 알러지와 관계 없이 발병된다.


급작스런 발병에 대한 치료법

A 목 뒤에 찬물을 붓는 것은 천식을 제어하는데 도움이 된다. 환자의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물주전자로 1갤론의 찬물을 30~90초 동안 목 뒤 24인치(약 60센티미터) 높이에서 부어 준다. 날마다 2~3번 이러한 치료를 반복한다.

B 열 치료를 일주일에 4번 이상 한 결과, 환자들 중의 50% 이상에게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 환자의 체온을 화씨 104~105도로 올린 상태에서 5~7시간 동안 유지시킨다. 첫번째 또는 두번째 치료를 하는 동안 대부분의 환자들은 천식의 증세로부터 벗어난다.

C 천식 환자들이 복용하는 약 중에는 sodium metabisulfite이 함유되어 있는 약이 있는데, 이것은 삼가해야 한다. 23세의 천식 환자가 있었는데, 그 환자가 6달 동안에 5번 입원하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 환자의 담당 의사는 환자가 metabisulfite 성분에 예민한 반응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 후 6개월 동안, 그 환자는 일체의 약을 사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천식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가능하면 모든 종류의 약을 삼가하라. corticosteroids 도 천식 환자들에게 자주 사용되는데, 이 약품을 장기간 사용할 경우, 감염에 대한 저항력이 저하되며, 혈압이 오르고, 체중이 증가되며, 위궤양, 근육 무력증, 당뇨, 백내장, 체액정체, 피부질환, 포타슘의 손실, 정신질환, 어린아이들의 성장 장애와 같은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D 누운 상태에서 두 발을 뜨거운 물에 담그고, 목 뒤와 앞 가슴에 뜨거운 습포로 찜질을 하면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이 때에 머리에는 찬 물수건을 올려 놓아야 한다. 이 치료는 갑작스런 천식 증세가 가라앉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치료가 끝나면 샤워를 한 후, 땀이 나지 않을 때까지 침대에서 휴식을 취한다.

E 급성 발작일 경우, 찬 수증기를 뿜어내는 가습기를 사용해도 좋다. 맨솔이나 유칼립토스 기름을 가습기 내의 물에 떨어 뜨려서 사용해도 좋다.

F 마늘은 천식 치료에 있어서 가장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온 치료제이다. 한컵의 뜨거운 물에 마늘 한조각을 넣은 후 블랜더로 간다. 어떤 환자들은 이 마늘 물을 마신 후에 토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기관지에 있는 분비물을 제거하는데 오히려 도움을 줄 수 있다. 처음 마신 마늘물을 토하였을 경우, 두번째 잔을 주어서 마시게 한다.

G 뜨거운 물에 뮬레인(mullein) 또는 개박하(catnip)를 넣어서 차를 만든 다음에 매 시간마다 마시는 것이 좋다.

H 천식 치료의 어떤 전문가들은 에어솔 분무기와 같은 치료 방법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점점 더 치료 효과가 줄어들기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약품을 사용해야 하며, 심장박동을 불규칙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가져올 수도 있다.

I 경우에 따라서 화씨 94~97도의 물을 채운 욕조에 들어가서 2시간 이상 앉아 있는 것도 도움을 줄 수 있다.

J 물이 담긴 병에 빨대로 넣고서 힘있게 불면, 기도를 확장시켜서 갑작스런 천식 증세를 완화시킬 수 있다.


지속적으로 해야 할 치료법

천식 환자들은 규칙적으로 짧은 시간 동안 운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2분 간의 간단한 운동도 조여진 폐를 열어줄 수 있다는 보고서가 미국 알러지 협회로부터 발표되었다. 야외 수영(화씨 85~90도의 따뜻한 물)은 천식 환자를 위해서 적격이다. 에모리 대학의 Arend Bouhuys 박사는 천식 환자들에게 입으로 부는 악기를 연습하라는 처방을 내림으로써, 환자들의 폐활량을 향상시켰다. 휴식 중에 있는 사람은 폐활량의 10%만을 사용하게 되며, 힘든 일을 하면 폐활량을 50%까지 증진시킬 수 있다. 노래를 부르거나 목관악기를 연주할 경우에는 폐를 최대로 사용할 수 있다.


1 호흡 운동을 매일 해야 한다.

아래에 서술하는 운동을 5~6회씩 하루에 2번 반복한다. 특히, 천식이 갑작스럽게 오려고 할 경우 이러한 운동을 하라.

A 앞 가슴 팽창 운동: 선 자세에서 손을 어깨 위에 올린 다음, 숨쉬기 운동을 한다. 숨을 들이마실 때에는 팔꿈치와 어깨를 완전히 뒤로 젖혀서 많은 양의 산소를 들이 마시고, 숨을 내쉴 때에는 팔꿈치와 어깨를 완전히 앞 방향으로 움직여서 폐에 있던 공기를 완전히 빼내어야 한다.

B 측면 갈비뼈 팽창 운동: 선 자세에서 한쪽 팔을 옆에 자연스럽게 붙이고, 다른 팔은 머리 위를 감싼다. 옆구리를 옆방향으로 굽힘과 함께 옆에 붙힌 팔을 아래 방향으로 다리 측면을 따라서 미끌어 내려뜨리면서 숨을 내쉬고, 옆구리를 다시 원래의 똑 바로 선 위치로 펴면서 숨을 들이쉰다. 팔을 바꾸어 반대 방향으로 반복하여 호흡 운동을 한다.

C 똑 바로 선 상태에서 양쪽 어깨와 두 팔을 뒤로 제낀 상태에서 호흡을 하면 좋은 호흡법을 개발할 수 있다.

D 갈비뼈를 위 아래로 움직이는 호흡을 하기 위해서는 무릅을 꿇고 호흡하는 것이 가장 좋다. 무릅 꿇은 상태에서 양손을 위 방향으로 최대로 쭉 뻗으면서 숨을 들이키고, 양손을 내리면서 숨을 내쉰다.

E 배를 바닥에 깐 엎드린 자세에서, 숨을 들이키면서 머리와 어깨를 쳐들고, 내쉬면서 제자리로 엎드린다.

F 바로 누운 자세에서 팔을 머리 위에 놓는다. 숨을 들이키면서 두 다리를 들어 올리고, 내쉬면서 다리를 천천히 내려 놓는다. 이 운동은 복근의 조절 능력을 향상시킨다.

G 두 다리를 굽힌 누운 자세에서, 숨을 들이키면서 엉덩이를 들어 올리고, 내쉬면서 엉덩이를 내려 놓는다.

H 팔을 옆에 붙히고 누운 자세에서 두 발을 약간 벌린다. 숨을 들이 쉼과 함께 손을 들어서 머리 위로 깍지를 낀다. 숨을 내쉬면서 상체를 일으켜 굽혀서 머리와 발이 닿게 한다. 다시 숨을 들이 쉬면서 바닥에 눕고, 숨을 내쉬면서 몸에 힘을 쭉 뺀다.

I 발작적인 천식이 시작되는 징조가 보일 경우, 의자에 10분 동안 똑바로 앉아 있는다. 코로 숨을 들이키고, 숨을 내쉴 때에는 오므린 입을 통해서 내쉰다. 입술을 오므리면 기관지를 확장시켜 주는 유익을 얻을 수 있다.

J 일부러 가래를 뱉어내어서 폐에 쌓인 가래를 잘 청소해 낸다. 머리와 가슴을 침대 끝에 걸치는 모양으로 배를 깔고 엎드린다. 2~3분 동안 가벼운 기침을 하면서 가래를 뱉어낸다. 천식이 발작할 동안에는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자세를 견디지 못할 수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아랫 배 밑에 2~3개의 베개를 넣고 얼굴을 옆으로 돌린 상태로 엎드려 있을 수 있다.

K 무릅을 굽힌 자세에서 침대에 반듯이 누운다. 숨을 내쉬면서 오른쪽 무릅을 천천히 가슴까지 들어 올리면서 배근육에 힘을 주는 운동을 반복한다. 오른쪽 발을 제자리에 놓으면서 숨을 들이쉬는데, 이 때 배 근육을 이완시킨다. 반대편 다리를 이용해서 이런 운동을 반복한다.


2 화학합성 섬유를 피해야 한다. 화학합성물에는 정전기가 발생하기 때문에 먼지가 쉽게 잘 쌓인다.

3 씨어리얼, 우유, 계란, 쵸코렛, 생선 및 알러지성 식품을 제외한 식단으로 50명의 어린아이들과 45명의 성인들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백신, 항원, ACTH, 또는 콜리스테로이드와 같은 약품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천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음식물은 매우 엄격하게 제한되어야 한다.

4 첨가제, 노란핵 식용 색소, 아스피린, 이산화황, 소디움 벤조에이트를 피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민감한 사람들에게 천식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일 쥬스, 술, 식초, 말린 야채, 가공된 치즈, 시럽 등에 들어 있는 Sodium metabisulfite 가 함유한 음식물은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천식의 원인이 된다.

5 공기의 오염도가 낮은 시골에서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 오염된 공기 중에 있는 이산화황은 심지어 정상인의 호흡기에까지 문제를 일으킨다. 통계에 의하면, 하루 중 공기의 오염도가 가장 높은 시간에 천식 증세가 빈번한 것으로 나타났다.

6 코로 호흡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천식 환자들 중 90% 이상이 입으로 호흡하는 습관을 가진 것으로 집계되었다. 입으로 호흡할 경우, 호흡기 계통에 천식을 일으키기 쉬운 환경이 조성되기 쉽다.

7 위장이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 간식이나 불필요한 식사를 하지 않을 경우, 입은 계속해서 닫혀진 상태을 유지할 수 있으며, 폐에 존재하는 감염물아니 분비물이 제거되기 쉽다.

8 “수면 호흡법”을 이용해서 헐떡거리는(씩씩거림) 증세를 중단시킬 수 있다. 수면 호흡은 평상시보다 느리고 깊게 호흡하는 것으로서, 숨을 최대로 들이킨 상태와 최대로 내뱉은 상태에서 각각 3초동안 멈추는 호흡이다. 환자들은 반드시 이 호흡법을 배워야 한다.

9 카모밀 약초차는 항 알러지성 작용을 한다. 아침 저녁으로 한 컵씩 마시면 좋다.

10 멜론류나 바나나를 피하라. 많은 천식 환자들이 이런 과일들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나타낸다. 이런 과일에 민감한 사람은 쑥갓류(ragweed)에도 민감한 반응을 나타낸다.

11 가능하면 옥외에서 잠자는 것이 좋다. 옥외에서 자는 것은 문이나 창문을 열어 놓고 자는 것보다 더 좋다.

12 항히스타민제는 천식의 치료에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히스타민은 알러지 반응의 주요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13 죽거나 썩은 바퀴벌레는 약 40%의 환자들에게 있어서 천식을 일으키는 집 먼지로 지목받고 있다.

14 향수, 그리고 여러가지 종류의 화학물질(가솔린, 페인트 등)에서 나는 강한 냄새, 향기가 강한 꽃, 연기 등을 피하라.

15 한기, 찬 공기, 갑작스런 기압의 변화는 천식을 일으킬 수 있다. 옷을 따뜻하게 입고, 특히 손발을 따뜻하게 간수해야 한다.

16 체내의 수분을 충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분비물의 농도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충분한 물을 마셔야 한다. 뜨거운 마늘 차는 도움을 준다.

17 기타 다른 감염원이나 군중들이 모인 장소를 피하라.

18 많은 천식 환자들이 동물의 비듬에 민감한 반응을 나타낸다. 애완동물을 가정에서 기르지 말아야 한다.

19 집안에서 기르는 식물에는 곰팡이가 있기 쉬우므로 제거되어야 한다. 욕실에 생길 수 있는 곰팡이도 주의해야 한다. 곰팡이가 생기기 쉬운 곳은 매우 세심하게 청결을 유지해야 한다.

20 많은 천식환자들이 너트류, 게와 조개류, 토마토, 딸기, 옥내의 먼지, 깃털, 그리고 소파나 가구 내부에 넣은 재료에 대하여 알러지성 반응을 나타낸다. 백신, 페니실린, 아스피린, 마취약과 같은 약들은 갑작스런 천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나무, 풀, 잡초의 꽃가루는 천식에 매우 유해하다.

21 어떤 사람은 씹는 껌의 원료인 치클에 알러지 반응을 나타낸다.

22 유아들은 모유로 키워야 한다. 알러지성 체질을 가진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면, 비슷한 환경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는 것보다 천식의 발병률이 더 높다. 고양이 비듬과 계란은 모유나 우유를 먹은 아이들에게 있어서 공통적인 알러지원이다. 오래 전부터 우유는 갑작스런 천식의 원인으로 의심받아 오고 있다. 모유를 통하여 알러지원이 아기에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산모는 우유와 계란을 삼가해야 한다.

23 지방을 제거한 식이요법으로 천식을 성공적으로 치료한 사례들이 의학지에 발표되었다.

24 집안에 있는 먼지를 제거해야 한다. 표면에 무늬가 있는 가구가 무늬가 없는 가구보다 먼지가 잘 쌓인다. 천이나 섬유로 만든 가구를 사용하는 대신에 플라스틱이나 고무로 만든 가구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개방된 상태의 책꽃이나 책에는 먼지가 쌓인다. 모든 옷들은 옷장 안에 보관하고 방에 걸어두지 말 것. 옷장의 문은 항상 닫아 두어야 한다. 먼지가 잘 쌓이는 모직으로 된 옷은 가방 안에 보관하는 것이 좋다. 좀약, 살충제, 콜타르 종이, 장뇌(camphor) 등을 피하라. 마루바닥은 카펫이나 융단으로 하는 대신에 리노륨이나 목재로 하는 것이 좋다. 장난감도 나무, 플라스틱, 금속류로 제한하는 것이 좋다. 방에는 화장품, 활석, 향수, 꽃 등을 놓지 않는 것이 좋다.

벽에는 페인트를 칠하거나 물로 닦을 수 있는 수용성 벽지를 사용해야 한다. 장식용 그림과 같이 먼지가 쌓일 수 있는 것들을 제거한다. 세탁할 수 있는 면이나 합성 섬유로 만든 커텐을 사용해야 한다. 커텐용으로 베니스풍 블라인드를 사용하지 말 것. 세탁할 수 있는 면이나 유리섬유로 만든 커텐이 사용될 수 있지만, 드래이퍼리는 않된다. 에어콘은 도움이 되지만, 선풍기는 오히려 먼지를 일으키기 때문에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데크론과 같은 합성섬유가 베개로 사용되야 한다. 깃털이나 기포형 고무(스폰지)는 피하는 것이 좋다. 먼지가 날리지 않는 면이나 합성 섬유가 이불로 사용되어야 한다. 베개, 침대 메트리스, 침대 박스 스프링은 먼지와 같은 알러지원들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잘 싸여져 있어야 한다. 지퍼가 달린 플라스틱(비닐) 덮개는 먼지의 누설을 막기 위한 밀폐용으로 적당하지 않다. 방은 하루에 두번 젖은 수건으로 청소해야 한다. 마루 바닥에 곰팡이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살균 청소제를 사용해서 마루를 닦을 수 있다. 따뜻한 공기를 내뿜는 난방 장치는 집안에 먼지와 곰팡이가 날아다니도록 촉진할 수 있기 때문에, 공기 여과 장치를 설치하는 것이 좋다.

25 항상 복부로 호흡하는 것이 좋다. 어깨를 들먹이면서 숨을 쉬는 대신에 잠자는 아기처럼 배로 호흡을 하는 것이 횡경막을 크게 움직이게 해주어서 폐의 활성화에 도움을 준다. 자세를 올바르게 가져야만 복부로 호흡할 수 있다.

26 지중해 지방의 약초인 Anise 차는 갑작스런 기관지염성 천식 발작에 특별히 효과적이다.

27 hay fever, 천식, 또는 호흡기 감염을 가진 사람은 헤어 스프레이를 피해야 한다. 밀워키 위스콘신 의과대학의 도날드 슐레터 박사는 헤어 스프레이에 있는 향료가 알러지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꼭 헤어 스프레이를 사용해야 할 경우에는 넓은 장소에 나가서 뿌리되 뿌리는 동안에 호흡을 멈추어야 하며, 뿌린 후에는 즉시로 그 장소를 떠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설탕과 아이스크림


1. 설탕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년 자신들이 엄청난 양의 설탕을 섭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나는 음식이나 음료수에 설탕을 절대로 넣어 먹지 않는데 어떻게 내가 많은 양의 설탕을 섭취할 수 있습니까?” 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매년 현대인들은 약 128 파운드(58 Kg)의 설탕을 섭취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4분의 3은 음식을 통해서 체내로 들어온다. 대부분의 설탕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섭취되고 있기 때문에 그 섭취량을 제어하거나 조절하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서, 설탕은 단맛을 내는 목적 이외에도 포장된 음식물에 방부제로서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음식이 쉽게 마르지 않고 좋은 모양을 낼 수 있도록 첨가되고 있다.

각종 인스탄트 식품, 제과류, 음료수, 그리고 식당이나 패스트 푸드 음식점에서 요리되는 음식에도 많은 양의 설탕이 들어가게 된다. 예를 들어서 프렌치 프라이(튀긴 감자)는 식당으로 운반되기 전에 설탕물에 담구었다가 냉동 상태로 저장된다.

설탕의 영양적 가치

설탕은 정제되는 과정에서 식품으로서 필요한 모든 요소는 제거되며 탄수화물만 남게된다. 설탕은 제조 과정에서 비타민이나, 광물질, 단백질, 지방, 효소 등과 같은 모든 영양분들은 제거되고 열량만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영양학자들은 현대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섭취하는 설탕의 양은 건강에 큰 해를 끼칠 수 있는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설탕과 코케인 차이

“Everything You Always Wanted to Know About Nutrition”라는 책의 저자인 데이빗 러벤 의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엄격한 의미에서 정제된 백설탕은 식품이 아니다. 이것은 나무에서 얻어낸 순수 화학 추출액으로서 마약의 한 종류인 코케인과 매우 비슷한 화학 구조를 갖고 있다. 백설탕의 화학적 이름은 썩크로즈(Sucrose)이고 그것의 분자구조식은 C12H22O11 이다. 이것은 12개의 탄소 원자들을 갖고 있으며, 22개의 수소 원자와, 11개의 산소 원자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코케인의 화학식은 C17H21N04 인데, 이것과 백설탕의 유일한 차이점은 백설탕이 N (질소)을 갖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탕수수에서 백설탕까지

백설탕은 주로 사탕수수나 사탕 비트로 만들어진다. 사탕의 원료가 가열, 그리고 기계적이고 화학적인 여러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비타민, 광물질, 단백질, 지방, 효소 등과 같은 모든 영양소들이 제거되어야만 하얀색의 설탕 결정체가 얻어진다.

1) 사탕수수나 사탕 비트를 수확하여 잘게 자르고, 쥬스를 짜낸다.
2) 그것에 물과 라임을 섞어서 끓이면서 그 농도를 높인다.
3) 그 후 남은 것은 진공 펌프를 이용하여 물기를 완전히 없앤 후에 원심력 기계를 이용하여 그 안에 섞인 다른 모든 물질들을 추출해 낸다.
4) 마지막에 남은 결정체를 다시 가열하여 끓이면서 필터를 통과시킨다. 이때 만들어진 결정체를 표백시키는데 이 때에 사용되는 표백약은 소나 돼지의 뼈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정제 과정을 통과하는 동안 64개의 식품 요소들이 완전히 파괴된다. 모든 칼륨, 마그네슘, 칼슘, 철, 망간, 인산, 황산들과 비타민 A, D, B도 제거된다. 아미노산, 활성 효소, 용해되지 않은 지방, 그리소 모든 섬유질도 제거된다. 옥수수나 메이플 시럽 등 시중에 나오는 모든 정제당들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설탕에 중독된 채로 살아가고 있다. 1915년 미국 사람들의 개인별 설탕 소비량은 매년 15~20 파운드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평균 자신의 몸무게 만큼의 설탕을 매년 섭취하고 있다. 이것은 1915년에 비해 약 9배가 늘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몸의 활성 기관들은 이러한 설탕의 대량 섭취로 인해서 급속히 약해지고 있다.

설탕은 피를 끈적 끈적 하게 만들어 혈액의 순환을 방해한다. 그래서 우리 몸의 모세혈관을 막히게 함으로 잇몸이나 이빨로 가는 영양분을 차단시킨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잇몸 질환과 충치로 고생을 하게 된다. 미국과 영국은 세계 최고의 설탕 소비 국가들로서 가장 극심한 치아 및 잇몸 질환률을 나타내고 있다.

설탕에 의해서 발생되는 가장 심각한 질병은 정신질환이다. 우리의 뇌는 몸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변화에 아주 민감하다. 설탕이 체내로 들어가면 곧 바로 비타민 B를 파괴시키고 인슐린의 생산을 저하시킨다. 설탕이 많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인슐린 생산이 저하된다. 이러한 체내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화학적 변화는 정신적 혼동을 일으키게 되는데, 많은 청소년 범죄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한다. (Dr. Alexander G. Schauss, Diet, Drime and Delinguency)

아기용 분유 속에 숨겨져 있는 설탕

아기용 분유에도 적지 않은 양의 설탕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단 맛에 끌려다니게 되며, 성인이 될 때가지 설탕을 자제하지 못하게 된다. 어떤 아기 식품들에는 고농도의 설탕이 포함되어 있다. 백설탕은 속이 빈 열량, 즉 영양적 가치는 하나도 없이 열량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설탕을 통해서는 몸에 유익한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한다. 또한 설탕이 주는 포만감으로 인하여 인체는 영양분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되며, 몸 안에 있는 다른 영양소들을 파괴시킨다.

설탕은 중독성

한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은 설탕이 중독성이라는 것이다. 술이나 담배같이 설탕은 우리 몸에 중독성을 일으킨다. 만약 백설탕을 규칙적으로 섭취하게 되면 설탕에 대한 계속적인 섭취 욕구가 생기게 되어 설탕 없이는 안정을 얻을 수 없는 정신적 상태로 빠져들게 된다. 이러한 설탕 중독은 계속적으로 인체로 하여금 설탕을 섭취하게 만들며, 따라서 몸이 비대해지게 하고, 몸을 비상 경계상태로 만들기 때문에 췌장, 간, 신장 등과 같은 해독처리 기관들이 과로로 인해서 크게 약해지게 된다.

 

2. 아이스크림

바나나 아이스크림?

지금 여러분의 냉장고 안에 있는 바나나 아이스크림이 실제로는 바나나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가? 상품명은 바나나 아이스크림이지만, 실제로는 바나나 맛을 내는 화학제품을 첨가한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해서 이것은 바나나 아이스크림이라고 부를 수 없는 아이스크림이다.

아이스크림은 국가에서 통제하는 식품 중의 하나이므로 아이스크림 제조업체는 모든 쓰여지는 원료들을 관련 기관에 보고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일반 사람들에게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만일 어떤 아이스크림이 천연적 원료인 바닐라로 만들어졌으면 “바닐라 아이스크림”이라고 겉 포장에 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적인 원료와 인공적인 원료가 섞여 있으면, “맛을 내는”(flavored)라고 표시한다. 그리고 만약 모든 요소가 다 인공적인 화학제품을 이용했을 경우에는 “인공적인 맛”(artificially flavored)이라고 표시하도록 법적으로 규제되어 있다.

아이스크림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전통적으로 사용되는 크림이나 우유 외에도, 1964년에 개정된 낙농업법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식품들도 대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말린 크림, 플라스틱 크림(우유 농축 지방), 버터, 버터 기름, 우유, 우유 농축액, 분유, 증발유, 스킴우유, 등. 이러한 대용품들이 전통적인 아이스크림 원료보다 질이 떨어지는 것들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앞에 언급한 우유 대용품들 외에도 맛과 좋은 감촉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내는 다른 첨가물에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은 아이스크림에 첨가되는 값싼 화학적 첨가물들이다.

Piperonal : 바닐라 향 대신에 사용되는 화학제품. 이것은 이(lice)를 잡는데 쓰이는 화학제품. (우리 몸의 중앙 신경 시스템에 문제를 야기시킨다)
Diethyl Glucol : 계란 대용품. 이것은 부냉각제로나, 또는 페인트를 벗기는데 사용되는 화학제품의 일종.
Butyraldehyde : 주로 견과류 향을 내는 원료로 쓰인다. 이것은 고무 접착제의 원료로 사용된다.
Amyl Acetate : 바나나 향을 내는데 쓰이는데, 원래는 유성 페인트를 녹이는 원료이다. (두통과 어지러움을 만들고, 점액분비 기관을 자극시킨다)
Ethyl Acetate : 파인애플 맛을 내게 하는 향료. 이것은 가죽 제품을 닦는 화학제품의 원료로서 쓰인다. (간, 폐, 심장병을 일으킬 수 있다.)
Aldehyde C17 : 체리 아이스크림 맛을 내는 원료. 가연성의 용액으로 아닐린 염색과 플라스틱, 고무의 원료로 쓰인다.

아이스크림에 바람 넣기

아이스크림은 우유, 크림, 설탕 그리고 화학 첨가물을 섞어서 거품을 낸 다음에 냉동시킴으로서 제조된다. 얼마만큼의 거품을 일게 하는지에 따라서 그 모양과 감촉이 달라진다. 아이스크림을 만들기 위해서는 거품을 만드는 기계에 기본 원료들을 넣어서 40~60%정도 부풀리게 되는데, 만약 공기가 너무 많이 들어가게 되면 그 구조가 거칠게 되고 부스러지기 쉽게 되며, 공기가 너무 적게 들어가게 되면 걸쭉하게 되어 껌같이 되어버린다. 법적으로 아이스크림 안에 얼마만큼의 공기를 넣을 수 있는지에 관한 정해진 규정이 없기 때문에 어떤 아이스크림 제조업자들은 공기 아이스크림, 즉 공기로만 가득 채워진 가짜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팔기도 한다.

이것을 아십니까?

비록 냉동 상태로 있으나, 보관상의 잘못이나 빨리 팔리지 않는 관계로 인해 많은 아이스크림들이 상점의 냉장고 안에서 부패하게 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이 상한 아이스크림들은 맛이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버려지지 않은채 소비자의 입으로 들어가게 된다. 아이스크림이 다시 제조업체로 되돌려 보내지는 경우에도, 상한 정도가 너무 심하지 않고 그 맛이 많이 변하지 않았으면 이것은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강한 맛의 초콜렛 아이스크림과 섞어서 곧바로 다시 상점으로 보내진다. 만약 인공 향료를 써서 아이스크림을 만들 경우 n-butylphenyl, propylene glycol, ethylacetal 등의 화학 향료들을 이용해서 상한 맛을 없애 버린다. 또한 아이스크림 안에 함유된 설탕은 많은 양의 병균들이 숨어서 살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준다.

법적으로 아이스크림의 기본 원료들에 대하여는 포장지에 표시하게 되어 있으나, 그 안에 쓰여지는 화학적 색상, 안정제, 유화제, 중화제등과 같이 공기와 섞어서 그 구조와 감촉을 이루는 화학 첨가물들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할 필요가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어떤 이물질들이 아이스크림과 섞여지게 되는지를 전혀 알 수 없다.

“Designer” 아이스크림

요즈음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아이스크림의 종류가 바로 “designer” 아이스크림이다. 이것은 보통 아이스크림에 여러 가지 색다른 과자나 쿠키등을 섞어서 만든 아이스크림을 말한다.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종류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오레오 쿠키를 넣어서 만든 것이다. 아이스크림 제조업자들은 새로운 제품이 잘 팔려서 좋고, 또한 쿠키나 과자를 만들 때 부서진 것들을 이용할 수 있어서 일석이조의 쾌거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designer 아이스크림들은 그 안에 넣어지는 쿠키나 캔디 등을 제외하고도 다른 일반 아이스크림보다 더 많은 버터 지방을 포함하고 있어서 한 컵에 300 칼로리나 되며, 쿠키나 캔디를 넣었을 경우 375 칼로리나 된다.

아이스크림 끊기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아주 어렵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스크림의 유혹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이다.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대부분의 아이스크림은 인간의 몸에 유익하지 않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맛도 좋고 몸에도 해롭지 않은 건강 아이스크림은 없을까?


가정에서 만들 수 있는 천연 아이스크림

만약 여러분이 정말로 건강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면 얼린 바나나와 다른 과일들을 사용하여 건강 바나나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보라. 바나나의 껍질을 벗겨서 얼리고, 챔피언 쥬스기 등을 이용해서 이 얼린 바나나를 갈면서 그 안에 두유 또는 Better Than Milk 같은 자연 음료수를 섞는다. 초콜렛 맛을 내기 위해서는 캐롭(carob)를 섞고, 커피 맛을 내기 위해서는 보리로 만든 로마차 가루를 바나나와 섞어서 갈면 된다. 만약 얼음이 준비되어 있다면, 얼음을 넣어서 살짝 같이 갈면, 얼음이 씹히는 시원하고 건강한 아이스크림을 만들 어 가족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

서론 - 하나님께서 죄의 역사를 지체시키시는 이유


가장 절박한 의문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항상 내 마음에 무한한 동정심을 자아낸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40대 중반의 남자였으면서 10살짜리 보다 더 작은 몸집을 가지고 있었고, 내가 그 집 부근에서 집회를 할 때면 늘 그의 13살난 아들의 품에 안겨서 집회 장소에 온 다음, 맨 뒤에 있는 긴 의자에 누운채 설교를 듣곤 하였다. 그는 Muscular Disrophy(머스큘라 디스트로피 : 근육이 축소되어 오그라드는 질병)라는 병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등이 위로 비스듬히 굽어서 베개가 없이도 항상 머리가 공중에 떠 있는 상태에 있었으며, 또 눈은 얼마나 나빴던지 두꺼운 돋보기 안경이 항상 코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그래도 손과 발을 움직이지 못하는 터라 안경을 바로 잡아 줄 수도 없었다. 내가 말씀을 마치고 나면 그는 아들을 시켜서 나를 불렀고 그리고는 이렇게 항상 질문하는 것이었다. “목사님! 예수께서 정말 속히 오시는 것이지요?! 정말 곧 오시는 것이지요?! 예수께서 오실 때에 저는 이 두 손을 번쩍 쳐들고, 이 두 다리로 사슴처럼 뛰어 가면서 왜 이제 오시느냐고 소리치며 주님께 달려 갈 것이예요! 목사님! 제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 강림 밖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 날이 오면 이 모든 슬픔과 고통이 끝나게 되겠지요?!”

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렇게 오래 지체되어 오는 것일까? 예수의 오심이 지체되면 될 수록 이 세상에 고통과 슬픔의 크기가 점점 더 심해만 가고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더 악해져만 가게 되지 않는가! 거기에 비례하여 죗된 환경에 희생당하는 자들의 엄청난 숫자들이 매일 눈물을 흘리며 살아가야만 한다. 코소보의 난민들을 보자! 얼마나 기가 막히고 어이없는 고통들을 당하고 있는가! 조상들의 잘못된 과거의 역사 때문에, 그리고 복수 하려는 다른 한 민족의 분노 때문에 애꿋은 알바니안 민족들이 큰 수난을 겪고 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상의 죄의 역사를 빨리 끝내시지 않는가? 도데체 무엇을 하고 계신단 말인가? 언제쯤이나, 아니 어떻게 해야 이 세상의 고통의 문제가 끝나게 될 것인가?... 우리는 이 심각한 문제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왜, 어떻게, 이 세상에 죄와 고통이 들어 오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이 죄의 문제에 종지부를 찍고 이 세상을 회복하시기 위하여 어떠한 계획으로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하늘에서 시작된 죄를 해결하신 하나님의 방법

먼저, 이 세상에 왜 죄가 들어 왔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간단하게 생각해 보도록 하자. 죄는 하늘에서 시작되었다. 천사의 대장이었던 루스벨의 마음 속에서 자기를 높이려는 교만한 마음과 이기심이 발동하면서 부터 반역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는 그 반역과 죄의 역사가 이 지구상으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그 시초는 우리의 첫번째 조상인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보다 사단의 말과 제안을 더 신뢰하여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데서 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시작이 하늘에서 부터였기 때문에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죄의 문제는 이 지구보다 훨씬 더 큰 것이다. 죄의 문제는 이 온 우주를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천사들도 루스벨의 반역운동을 지켜 보았고 그의 간계와 기만을 보고 들었었으며 그의 세력에 합류한 악한 천사들과 큰 전쟁을 치룬 후에 타락한 자들을 하늘에서 쫓아 내었던 것이다. 물론 헐리웃의 영화 Star Wars(스타 워스)처럼 실재적인 무기들로 싸운 전쟁은 아니었으나 누구의 말을 믿고 누구를 경배할 것인가 하는 심각한 마음 속의 결정들이 이루어 졌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신뢰하는 의로운 천사들이 기만하고 속이는 악한 자들을 하늘에서 내어 쫓았던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한 것이지 천사들이 무기를 들고 전쟁하여 이긴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루스벨(사단)의 사악한 반역과 또한 그 죄의 결과가 어떠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이러한 죄와 반역은 없어져야 하며 그러한 반역에 가담하여 돌이키지 않는 자들도 없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에 드디어 사단과 그 추종자들을 내어 쫓으셨던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반역 운동이 은근하게 시작되자마자 그 즉시로 단숨에 악한 자들을 없애 버리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그 문제점을 올바로 직시하고 충분히 이해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과 그 심판이 공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인정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셔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셨다면 하늘에 사는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공의로움에 대해서 이해하는 대신에 오히려 무서워하게 되었을 것이요, 하나님을 섬기되 두려움으로 섬기게 되었을 것이고, 나아가서는 죽은 루스벨이 혹시 옳았지 않았을까하는 의문마저 품게 되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이 진정한 감사와 사랑을 가지고 자원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의 최종적 구원을 위해 필요한 상황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죽여 없애지 않으시고 살게 놓아 두셨다. 물론, 그 세력을 이 지구에만 한정시켜 놓았지만 말이다. 실상에 있어서는 마귀의 말을 듣고 함께 범죄한 인류가 사단에게 이 지구에 대한 권한을 주었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께서 사단을 아직까지 살게 해 두시는 것일까? 계시록 21:14,15; 마태복음 13:37-43을 보면 사단도 결국에는 멸망당할 것이 확실하며, 또한 마 25:41은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단과 악한 천사들을 결국은 심판하시고 멸망시켜 없애버리실 것이다. 그런데 왜 그 마지막 심판을 이렇게 오래 동안 지체하고 계시는 것일까? 무슨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일까? 그 사실은 다음의 문제를 생각해 볼 때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지구로 옮겨진 죄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방법

죄의 시작은 불순종이었다. 죄는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는 것이다. 요한일서 3:4은 “죄는 불법”(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사단은 처음에 하나님과 같이 자기를 높이고 싶고, 하나님처럼 경배를 받고 싶은 교만한 마음에서(사 14:12-14 참조) 은근히 천사들을 기만하고 꼬여서 죄의 역사를 시작한 것이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정부를 뒤엎기 위하여 바로 하나님의 정부의 법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의 성품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해와를 꼬일 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창 3:4,5,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다시 말하자면 마귀가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해와야! 하나님이 거짓말 하신 거야! 선악과를 따 먹어도 죽지 않아! 하나님이 너무 이기적인 분이라서 자기만 먹고 하나님이 되는 힘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거야! 하나님의 법은 지킬 필요가 없단다! 법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니? 그러한 법을 만들어 괜히 우리를 얽어 메어 구속하려고 하는 거야! 너도 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거야! 하나님은 이기적인 분이야! 그 분의 말을 따를 필요가 없어! 너는 네 스스로 원하는 대로 결정하고 살면 된단다! 너는 누구의 말을 순종하고 따라갈 필요가 없어! 더 이상 구속 받지 말고 완전히 자유롭게 살아 봐! 법없이 말야...” 그래서 드디어 이 지구는 무질서하고 타락한 장소가 되어 버린 것이다. 처음 범죄의 관건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느냐 아니면 불순종하느냐”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이 지구에 사는 인간들도 하늘에 있는 선한 천사들처럼 하나님께서 옳으시고 하나님의 법도 이 우주의 평안과 질서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또한 꼭 지켜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해하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단의 반역과 죄의 결과가 얼마나 악하고 무서운 것인가에 대하여 분명히 보고 이해하게 되어야 한다. 바로 그 때에 마귀와 그를 따르는 천사들과 악인들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이 행해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끝나면 이 우주에 사는 어떤 존재도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대하여서 의심을 품는 자가 없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며 반역하는 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단과 그 반역의 역사를 이 지구상에 얼마동안 허용하고 계시는 것이다.


십자가의 목적

그런데 이렇게 타락하여 죗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사랑으로 순종하는 자녀들이 될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인간이 되어서 오셨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대하여 알려 주셨으며 또한 실제 생활로 보여 주신 것이었다. 그래서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보고 인간이 너무 감동되어서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악한 죄에서 돌아서서, 사랑의 하나님께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주님을 경배하고 섬기게 되도록 인간을 변화시키는 계획을 세우신 것이었다. 물론 범죄한 인간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법과 동일한 위치에 계신 하나님만이 법을 범한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 속죄하실 수 있기 때문에 이 땅에 오신 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이지마는 아울러, 인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에 대한 이해를 깊이 심어주기 위하여 성육신 하신 것도 큰 이유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인간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되,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며 섬기는 자들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는 인간이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참된 성품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진정한 경배를 드릴 수 없는 것을 알므로 마귀는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계명과 그분의 성품에 대하여 오해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 에덴 동산에서 해와를 꼬일때 했던 것처럼 말이다


사단의 공격과 하나님의 방어

사단은 자기가 하나님을 대항하여 아무리 전쟁을 하여도 도무지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그는 하나님을 대항하여 끊임없이 대항하고 있을까?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어기며 하나님을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며 구원하신다면 사단과 그의 부하들도 다시 하늘로 들여 보내 주어야 한다는 명분을 찾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자들을 그저 사랑으로 덮어주고 용서하여 천국에 들어 오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하나님의 공의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하늘에서 계명을 어기고 반역한 마귀와 악한 천사들은 영원히 멸망시키시면서, 땅에서 법을 어긴 인간들은 슬쩍 봐줘서 구원해 주신다면, 하나님의 법과 정부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복음이,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인간들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그들이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들로 만든다는 사실이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온 우주가 보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계명은 지킬 수 있는 것이며, 또한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사실이 지구에 사는 인간들의 생애 속에서 분명하게 증명될 때, 드디어 마귀와 악한 천사들의 반역에는 결코 어떤 핑계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정말로 의로운 자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우주 앞에 입증되어야만 한다. 타락의 시작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데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구속의 역사의 끝마침이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하게 지키는 성도들이 등장하는 일로 끝마치게 되는 것이다.(계 12:17; 계 14:12 참조)


지구에서의 투쟁을 지켜보는 하늘의 천사들

그래서 베드로 전서 1:12은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 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천사들도 이 땅에서 이루어 지고 있는 구속 사업을 열심히 살펴보고 있다. 타락하였다가 회복되는 이 지구는 하늘에 사는 자들에게 훌륭한 교과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죄의 역사를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보면서 천사들도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어겼고 또한 계속 어기고 있는 지구의 끔찍한 역사의 참상을 보면서 우주는 하나님의 법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며, 타락하였던 사람들이 복음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며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주님을 따르고 경배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우주는 하나님께서 옳았으며 마귀가 틀렸다는 사실을 영원히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사단과 죄와 그리고 그 죄에 붙어 있는 자들을 결국 불로 멸망하여 태워 없애 실 때에는 온 하늘과 땅이 함께 어울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로우심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재강림 하시는 때

그러므로 마귀는 인류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순종의 생애를 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유혹하며 시험하고 시련들을 주면서 방해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이기는 자들이 하늘에 들어 가는 권세를 얻게 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의인들... 이러한 증인들이 준비 될 때에 예수께서 오실 것이다. 인류의 구속 사업은 온 우주를 포함하고 있다. 마귀가 하나님의 법과 성품을 향하여 던진 고소의 허위성이 밝혀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로우심이 천사들과 인간들에게 충분히 이해되고 입증될 때에,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의인들을 이 죄와 고통의 세상으로부터 건져내어 회복된 에덴 동산으로 데려 가시기 위하여 이 땅에 임하실 것이다. 마귀는 이러한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는 성도들을 무섭게 미워하고 있다. “용이 여자(교회)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 12:17. 죄와 마귀에 대하여 하늘 천사들이 느끼는 것처럼 지긋지긋하게 느끼는 참된 성도들이 나타나야 한다. 구속의 깊은 오묘를 아직 확실하게 모르지만 자기가 받은 빛대로 살다가 구원받는 의인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자들에게 이러한 구속의 과학을 체험적으로 설명하여 줄 인간들의 간증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천사들과 구원받은 인간들이 모두 같은 찬양의 노래를 영원히 함께 부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하늘에서 쫓아 내시기 전에 천사들이 모든 문제를 확실하게 이해하고 깨닫게 되어 자원하는 마음으로 마귀를 물리치게 되기를 기다리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사단과 그 악한 자들을 완전히 멸망시키시고 죄의 역사를 끝내시기 전에, 이러한 모든 구속의 문제를 확실하게 이해하고 깨달아 마귀와 죄를 물리쳐 승리하는 마지막 교회의 성도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이러한 구속이 가능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다. 얼마나 큰 사랑이며 얼마나 큰 희생인가! 그러므로 이제 곧 온 우주의 피조물들은 자기들의 면류관을 벗어 던지면서 엎드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에게 존귀와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그때에 우주는 죄에서 완전히 회복될 것이다. 그리고 온 우주의 끝까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노래가 메아리쳐 갈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죄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할레루야!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아멘!!

 

 

1부 - 죄가 들어오려면


1. 에덴동산은 어떤 곳이었을까?

만약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흰색이라면 지금의 “흰색”은 무슨 색이라고 불릴까? 만약 흰색만 있는 세상이 있다면, 그곳에서는 색을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나무도 하얗고, 풀도 하얗고, 하늘도, 꽃도, 사람도.. 모든 것이 하얀 색인 세상이 있다면 거기서는 우리가 부르는 흰색을 “흰색”이라고 부르지 않고 “자연의 색”이라고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한 색깔만 존재하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색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검은 색의 반대되는 것을 흰색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만약 검정도, 빨강도, 초록도.... 모두 없어지고 흰색만 남는다면, 더 이상 색과 색을 서로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이 흰색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될지를 모르게 된다. 그래서 “색은 무엇이다”라고 하는 이해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색깔에 대한 이해가 없는 세계 안에서도 흰색이 다른 색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흰색은 계속 흰색이지만, 단지 그것을 흰색이라고 부르지 않고 “자연 색”이라고 그 이름만 바꾸어 붙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처럼 악도 없었고, 슬픔도 없었고, 고민도 없었으며, 또한 이러한 것들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곳이 바로 에덴동산이었다. 이곳에서는 의로운 일들을 의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당연히 자연스럽게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또한 악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였다. 에덴 동산은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과는 전혀 비교도 할 수 없는 완전한 세계였다. 주님께서는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으며, (시 104:5) 인간을 사랑하셔서 죄나 슬픔을 주는 모든 악한 것들에 대하여 알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

왜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두셨나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히 모든 악을 그들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게 하신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어진 완전한 아름다움과 행복이, 그들 마음에 이루어 놓으신 사랑을 완전케 하심으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드셨다. (창세기 2: 8-9)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이 땅의 모든 실과는 너희가 마음대로 먹을 수 있지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이 나무의 과일은 먹지 말라고 하시고, 만일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창 2:17 참고) 선악과는 단순히 어떤 규칙을 만드는 법이 아니고 선택을 주는 법이었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세계는 완전하여 악의 그림자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시지 않았다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랑은 단지 그들의 머리 속에 프로그램 된 무의식적 사랑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택할 수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속에 사랑하기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심어주신 것이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하신 요한복음 14장 21절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에게 심어주신 그 자유의지가 어떻게 진정한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선악과라는 법이 없었다면, 선악과를 따먹는 불법도 없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법에 대하여 어떤 의심과 오해를 갖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법을 만드셨는데 어떻게 불법의 의미가 존재하지 않았을까? 만약 불법이 없었다면 어떻게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게 되었을까?” 라고 질문한다. 성경은 이러한 질문에 정확한 답변을 하고 있다. 성경은 에덴에 선악과라는 법은 있었으나 이 법이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불법을 알게 만들지 않았다고 창세기 2장 9절과 3장 22절에 말씀하고 있다. 선악과의 이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하였으며,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야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선과 악을 몰랐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악만 몰랐던 것이 아니라 선도 몰랐다. 왜냐하면 악한 행동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당연히 “선”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주심으로 그들이 선과 악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신 것처럼 생각한다. 또한 어떤 법이 주어졌다면 일반적으로 이 땅의 법이 갖고 있는 특징처럼 에덴에서도 법과 불법의 의미가 동시에 존재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 속에서, 하나님께서 법을 만듦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불법이 생겨났다고 상상한다. 이러한 추측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이 완전하지 않았다거나, 하나님께서 죄를 창조하신 것 같은 결론을 내리게 유도한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야 악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불법을 가르치지 않는 법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에덴에 만드셨던 법은 이 땅의 법과 달랐다. 에덴동산의 법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는 것이었고, 그 법을 어긴 결과는 “정녕 죽으리라”였다. 이 법을 나누어 보면 “먹지 말라”고 하는 규칙과, 선악과와, 그 규칙을 어긴 결과인 “죽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악과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다른 과일 나무와 다름이 없는 하나의 나무였기 때문에 다른 나무와는 달리 악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 않았으며, “먹지 말라”라는 단어는 그 언어 자체로는 악을 가르치지 못한다. “먹지 말라”와 “살인하지 말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살인하지 말라”라고 법이 주어졌다면, 살인이 무엇인지도 가르쳐주었어야 하며, 그것은 곧 악을 가르치는 것과 동일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살인하지 말라”든지, “도둑질하지 말라”하지 않으시고 “먹지 말라”라는 언어를 사용하여 법을 만드신 것이다. 이 법은 지금의 법처럼 악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아니었고, 단순히 하나님을 선택하여 사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 위한 법이었다.

또한 이 법을 어겼을 때 주어진다고 했던 “죽음”이 아담과 하와에게 겁을 주어서 어쩔 수 없이 지키도록 강요할 수도 없었다. 아담과 하와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한번도 죽음을 본 경험이 없었다. 에덴동산의 나무가 가을 낙엽을 만들지도 않았으며, “영원한 삶”이라는 단어가 우리들에게는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언어인 것처럼, “죽음”도 아담과 하와에게는 다른 세계의 언어였다. 로마서 6: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하였는데, “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지 못했던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그 삯인 사망을 알 수 있었겠는가? 그들이 만약 죽음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그들은 죽음이 두려워서 그 법에 순종하였을 것이다.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에게 완전한 자유의지를 갖게 하는데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선택의 자유를 갖고 있는 의지를 통하여 줄 수 있는 사랑을 아담과 하와가 갖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만드심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완전케 하신 것이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 사랑의 법인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흰색이라면 색의 개념이 없어진다. 더 이상 서로 반대되는 색들의 세계는 없어지고 자연 색 하나만 남게 된다. 장미는 있으나 거기에 있어야 될 것 같은 가시는 없고, 태양은 있으나 해로운 자외선은 없다. 사랑은 있으나 질투는 없고, 성공은 있으나 실패는 없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세계는 그 반대의 뜻이 완전히 없도록 완전하게 만드셨다. 사과의 반대말이 무엇일까? 토끼의 반대말이 무엇일까? 이러한 생각을 깊게 하다보면 실제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들은 그 반대의 의미를 갖고 있는 사물이 없다는 것을 이 타락한 세상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율법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 요한은 예수님에 관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하고 있다. 말씀은 곧 예수님 자신를 의미하며,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야고보서 1:17)므로 그 말씀인 율법은 그림자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태초에 지으신 그 완전한 세계로 복귀하게 될 때는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반대개념은 사라지게 되어, 악의 반대 의미로서의 선도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흰색이라면, “흰색”이라는 단어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우리가 선이라고 생각하고 행하던 모든 일들에 붙었던 “선”은 없어지게 되고 “자연적인 일” 또는 “당연한 일”이라고 부르게 된다. 더 이상 우리는 선한 행동을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당연히 인간으로서 해야되는 자연 법칙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고 흰색이 다른 색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흰색은 여전히 그 색을 갖고 있을 것이지만 그 이름만 바뀌게 되는 것이다. “선이라고 부르지 않는 선”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의 상태였으며 이 땅에서 성화를 통하여 마지막 세대가 얻어야 할 우리 마음의 최종적 목표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심으로 에덴에 다른 색을 만들지 않았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것이 하나님 사랑하기를 거절하는 것인 줄 알았지만, 그 사랑하기를 거절하는 그 행위가 갖고 있는 본질에 대한 지식이 그들의 마음에 없었으므로 그것이 에덴의 색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선악과는 단지 아담과 하와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면 가서는 안될, 어떤 다른 세계(죄의 결과의 세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만을 주었을 뿐이다.

율법의 기능은 무엇인가요?

이제 선이라는 개념은 악이 있을 때에만 존재하게 되고, 선이 있기 때문에 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과 불법을 아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7:7절을 통하여 이러한 상태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바울이 죄와 율법의 다른 점을 몰라서 “율법이 죄냐”고 묻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들까지도 율법과 죄가 다르다는 것을 안다. 여기서 묻는 물음은 그 차이점을 묻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죄를 갖고 있느냐” 또는 “율법이 죄를 만드는 것이냐”는 것이다.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고 강력히 반대한다. 율법이 죄를 포함하고 있거나, 죄를 만들지 않고, 단지 율법은 내가 죄를 지었을 때에 그것이 죄라고 가르쳐 준다고 말하고 있다. 즉 율법이 죄를 어떻게 짓는 것인지 가르쳐 준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얼굴에 검정이 묻었는지 아닌지를 알려면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그런데 거울을 통해서 자기 얼굴에 검정이 묻었는지를 알았다고 하여 그 거울이 자기 얼굴에 검정을 묻혔다거나 어떻게 묻힐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율법의 기능은 거울처럼 우리의 잘못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우리가 잘못을 하지 않았으면 거울로서의 율법이 아무 것도 반사하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에게는 악도, 선도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타락하기 전의 세상에는 “살인하지 말라”와 같은 불법의 의미가 포함된 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타락한 후에, 법의 거울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 갖고 있는 악한 본성을 비추기 위하여 “살인”이나 “간음”, “도둑질”같은 불법을 반사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면 이 법이 거울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게 되므로, 죄가 존재하지 않았던 에덴동산에서는 율법이 오직 사랑을 완성케 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율법을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서 “몽학선생”으로 표현한 것이다.

법은 우리에게 단지 당연한 일을 행하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아 나는 오늘 휴지를 버리지 않았어! 아 나는 오늘 내 아기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아 나는 오늘 살인을 하지 않았어, 도둑질도 하지 않았다고! 아 나는 참 선한 일을 했다”라고 말을 한다면 이 사람은 분명히 정신병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당연히 인간으로서 행해야 할 도리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고, 자기 자녀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들에 나는 새들도 그들의 새끼를 양육한다. 그런데 만약 이 당연한 일을 행하지 않으면 율법이 나타나 불법을 행하였다고 선언한다. 거울이 없는 물체를 반사하지 않는 것과 같이, 법은 우리가 당연히 해야할 일들을 행하지 않기 전까지는 절대로 불법을 나타내지 않는다. 법이 있지도 않는 불법을 가르치거나 반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신 법이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의 속성을 얼마나 완벽히 반사하고 있으며, 이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어떻게 완전케 하셨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2.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사랑의 율법은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이므로 모든 지성적 존재들의 행복은 그들이 이 의의 대 원칙에 완전히 일치함에 달려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강제적 굴종을 기뻐하지 않으시므로 모든 존재로 하여금 당신께 자원하여 봉사하도록 그들에게 의지의 자유를 허락하셨다. 하늘이나 땅이나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창조물들은 그림자가 전혀 없는 완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완전한 의와 행복만이 있었던 그곳에 한가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 변화는 루스벨이 살고 있었던 하늘에서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허락하셨던 자유의지를 악용하는 자가 있었다. 죄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 다음가는 최고의 영광을 받았으며, 하늘 거민들 가운데 가장 높은 권세와 영광을 가졌던 자에게서 시작되었다.

모든 피조물들은 그들에게 완전한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주시는 어떠한 제한을 갖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에 관한 지식을 숨기심으로 흰색만이 있는 완전한 나라에 다른 색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시고, 선악과를 통해서 그들에게 자의로서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그들을 제어하고 억압하기 위함이 아니라 완전케 하시기 위함이셨다. 그런데 루스벨은 이러한 사랑의 법칙을 무시하고 자기 자신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는, 자아의 함정으로 이끌어 들였다.

평화와 자유와 행복은 피조물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평화와 행복을 느낄 수 있는지 잘 아신다. 그런데 이러한 대 자연의 법칙을 어기고 자기 스스로에 정신을 집착하면 자신 안에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모든 경이로운 것들이 자기 스스로 생겨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사업에 성공하여 많은 돈을 벌게 되면 그것이 자신의 힘으로 된 듯,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그 번 돈들을 유흥비나 자기 자신만을 즐겁게 만드는 일들에 쓰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루스벨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놀라운 능력과 아름다움에 집착한 나머지 그것의 근원이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차츰 잊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자기 자신이 만든 자아의 감옥에 갇혀서 자아를 숭배하기까지 이르렀다. “아침의 아들” 루스벨은 덮는 그룹들 가운데 으뜸이었으며 거룩하고 흠이 없었다. 그는 크신 창조주의 어전에 서 있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둘러싼 영광의 끊임없는 빛이 그에게 머물고 있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저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겔28:12-15)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겔28:17)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사 14:13-14)

의만 존재하였던 하늘에서 루스벨의 첫 의도가 죄로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죄로 향하게 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루스벨 스스로 느끼게 되었던 감정들과 이론들은 바로 진화론과 심리학 안에 나타나는 이론들과 흡사하다. 모든 만물이 우연적인 사건을 통하여 스스로 생겨났다는 것과, 우리가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진화론과 심리학의 기본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사상은 영혼불멸설과 헬레니즘, 동양철학들이 섞여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스스로 그 힘의 근원을 갖고 있다는 new age 사상을 만든 것이다.

자기 자신을 높이고자 했던 루스벨의 야망은 자신보다 우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고 질투심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시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만드신 그 법이 불완전하며 불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였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곧 말씀 자체이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장 1절 참고) 루스벨은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율법으로 완전케 되어진 사랑을, 자신과 다른 천사들을 억압하는 방편이라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사단이 어떻게 하와를 유혹하였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3:1-4) 여기서 사단이 쓰고 있는 논쟁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억압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는 방법인 선악과를 먹는 것을 금지하셨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이기적인 존재이고 자신은 이러한 잘못을 개혁하는 자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루스벨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 놓은 마음의 감옥에 갇혀서, 하나님의 법에 실려있는 공의와 완전케 하시는 사랑을 잊게 되었다. 또한 자신이 타락한 똑같은 방법으로 하와의 마음에 의심을 심어주어 인류를 타락하게 만들었다. 완전한 의만 있었던 하늘과 에덴에서 루스벨은 자기 스스로, 어느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었던 죄를 만들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시작이 하나님의 법의 불완전함으로 해서 만들어낸 실수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3. 왜 하나님께서 사단의 세력을 곧바로 진압하지 않으셨는가?

하나님께서는 불만의 정신이 성숙하여 공공연한 반역의 행동이 나올 때까지 사단이 그의 반역을 추진하도록 허용하셨다. 그 까닭은 사단의 계획들이 충분히 발전되어 그것들의 참 본질과 의도를 모두가 볼 수 있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죄의 시작과 그 동기는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과, 다른 타락하지 않은 세계의 존재들에게는 하나의 신비에 속한 것이었다. 흰색만이 있는 세계에서는 색이 무엇인지는 설명할 수 있으나, 그것을 느끼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느낌은 경험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락하지 않은 존재 자들은 하나님께서 알도록 허락하지 않으신 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루스벨이 만든 그 죄가 어떠한 결과를 낳을 것인지를 보여주셔야만 하였다. 온 우주에 하나님의 공의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결과가 확실히 나타날 때까지의 시간이 필요로 하였다.

기름부음을 받은 그룹인 루스벨은 매우 높은 지위에 있었으며 그는 하늘의 존재자들에게 큰사랑을 받았으며, 그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하나님의 정부는 하늘에 거하는 자들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들도 포함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행위가 충분히 발전하기 전에는 이것이 악한 일이었다는 것을 나타낼 수 없었으며 그의 불만은 반역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하늘과 여러 세계의 거민들은 그 당시에 죄의 참 성질과 결과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사단의 멸망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볼 수 없었을 것이며, 만일 그를 즉각적으로 멸망시켰다면 사랑에서가 아닌 두려움에서 하나님을 섬겼을 것이다. 그 기만자의 영향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반역의 정신도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을 것이다. 무궁한 세대를 통한 온 우주의 복지를 위하여, 사단이 그의 원칙들을 더욱 충분히 발전시켜서 하나님의 정부에 대한 그의 비난을 모든 피조물이 바른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와 그리고 그분의 율법의 불변성에 대하여 영원히,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남지 않도록 해야만 하였다.

 

4. 구속의 경륜

마태복음 5장 17절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 말씀 안에 십자가의 의미와 이유가 들어 있다. 여기서 “완전케 하려 함”의 의미는 영어로 fulfill 이라고 쓰여, “이행하다” 또는 “실현하다”라는 의미이다. 즉 의무나 직무, 법률 또는 명령을 이행한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곧 그의 말씀인 법을 완전케, 즉 실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의 타락은 온 하늘을 슬픔으로 가득 채웠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죄의 저주로 시들었고, 비참하게 죽을 운명에 처한 존재들이 살게 되었다. 율법을 범한 자들이 피할 길은 없는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감추어 오신 하나의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1:26-27) 하나님의 사랑은 법으로서만 나타나지 않으시고 이제 법을 어겨 죄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이방인이 된 우리를 다시 죄 짓기 전의 완전한 사람으로 다시 이끌어 오시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이렇게 하시기 위해서는 한가지 문제점이 따랐다. 하나님과 말씀은 동일하기 때문에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반대하는 결과를 빚게 되므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였다. 또한 죄의 결과를 대신 질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율법과 동일한 존재뿐이었다. (히브리서 6:17-18절 참고) 우리가 큰 죄를 범하면 그 죄에 해당되는 죄 값을 치루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에 대해서도 그만한 죄 값을 치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천사나 인간들 중 하나를 속죄양으로서 대신 죽게 하였다면, 우주의 거민들이 볼 때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닌 것처럼 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죄의 용서가 단순히 그 죗된 행동만을 단순히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것에서 끝날 수는 없었다. 다시 인간을 죄로부터 원상복구 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죄로 인하여 타락해진 인간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셔야만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인간의 상태를 다시 원상복귀 하시기 위하여 구속의 경륜을 지구의 창조 이전에 이미 세우셨던 것이다. 이 신비스러운 “평화의 의논”(슥 6:13)은 “창조함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되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비참의 심연에까지 내려가실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영광의 소망이신 예수그리스도가 그 영원한 법을 실행하심으로, 완전케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요 3:16)이었다. 오! 구속의 오묘함이여! 그분을 사랑하지 않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여!

 

5. 마지막까지 주시는 선택의 자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돌아가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과 의향에 관계없이 무조건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주신 것도 완전한 사랑, 즉 자유의지가 선택한 “사랑의 순종”을 원하셨기 때문이었다. 선택의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더욱 완전하여졌을 뿐이며, 강제적인 구원은 하늘의 법칙과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의향과 관계없이 하늘에 간다면, 하늘은 무법천지가 될 것이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여 그 사랑의 믿음을 행할 수 있는 자들이 거함으로, 또 다른 반역이 없는 영원한 안전과 행복이 보장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하늘에 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재창조 하셔서 지금의 나와 완전히 다른 나로서 하늘에 가게될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적인 추측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단순히 재창조하실 계획이었으면, 이렇게 긴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택의 자유는 죄짓기 전이나, 십자가 후에도 변할 수 없는 하늘의 근본 법칙이기 때문이다.

죄를 지은 후 인간은 그가 누렸던 자유의지를 잃어버렸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의의 줄은 끊기고 인간 안에 온전히 자리잡았었던 하나님의 의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인간은 의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더 이상 가질 수 없었다. 하얀색만 있었던 인간의 마음은 모두 까만 색으로 바뀌었다. 인간의 마음은 더 이상 의를 명상하거나 선택할 힘이 없었다. 인간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롬 6:16)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경륜의 첫 번째 단계로서 인간에게 잃어버렸던 그 선택권을 다시 주시려 하셨다. 선택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시는 것이 하늘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암흑만이 존재하였던 인간의 마음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인성과 연결이 되어, 끊어졌던 전기선이 연결되면서 불이 다시 밝혀지듯, 우리 마음에 의의 불이 다시 켜지게 되었다. 사단의 본부인 “죄의 법”과 싸울 수 있는 하나님의 본부인 “마음의 법”이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세워지게 되어,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그 믿음으로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신 것이다. (롬 8:4 참고)

예수님께서, 선과 악을 알게된, 타락한 인성을 취하여 이 땅에 오셔서 사단의 모든 유혹에서 승리하심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함이셨다. (창3장, 롬 8:1 참고) 우리는 이제 믿음으로 용서함을 받고, 사랑으로 사단의 모든 유혹을 물리침으로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가야 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롬 1:15-16)


사단도 믿음은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갖는 가장 큰 의는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발견이다. 고행과 자학, 선한 행실로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구교의 잘못된 가르침에서 방황하던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다는 귀중한 진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많은 개혁자들이 나타나 죽음을 불사하고 이 귀중한 진리의 터전을 쌓아 오늘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은 모든 기독교인들의 가장 근본적인 신앙의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이 기별은 시대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점차 바뀌어지게 되었고, 사회의 구조와 문화가 변화함에 따라서 기독교인들의 성경에 대한 이해도 변화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단순히 하나의 지식적 동의로서 생각한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의 믿음과 행위에 대한 귀중한 말씀들이 하나의 위인전처럼 느껴지게 되고, 이러한 선구자들의 삶의 방식은 실제로 구원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이 갖고 있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려 하심”을 하나의 사실로서 인정하는 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칭의와 성화에 대한 이러한 인본주의적이고 철학적인 추측은 한번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에 대한 구원의 문제를 완전히 신비 속에 묻어 버리게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서 2장 14절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고, 이 양심으로 사는 것은 행함의 부류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2장 19절은 이 문제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네가 하나님을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사단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이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독생자를 주”신 것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실을 지식적으로 알거나, 인정만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양심이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그 나름대로의 믿음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구원은 우리 마음속에 십자가를 통하여 은혜로서 주신 믿음과 양심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마음에 들어와 사랑을 만들고, 그 사랑이 온전한 믿음을 만들게 되어, 이 믿음이 우리의 양심이 됨으로, 우리가 이 믿음의 양심대로 행할 때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다. 우리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은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의 결과를 예수님께서 대신 이루셨다고 자동적으로 우리가 하늘에서 살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과 공의를 이해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그분을 믿게 만들며, 그 믿음으로 우리는 속죄함을 얻고, 속죄함의 경험은 우리의 사랑을 온전케 하여 그분의 말씀을 기쁨으로 순종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행함이 없는 구원을 주장할 것이지만, 사랑이 충만한 믿음은, 그것이 구원과 관계없다 하여도, 사랑의 행위를 기쁨으로 행할 것이다. 거듭남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합하는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는 선한 행동이 하나의 벼슬이나 나타내 보이고 싶은 자랑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자연의 법칙, 즉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위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행해지는 업적이 아니고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당연한 행동인 것이다. 흰색만 있는 곳에서 흰색이 “흰색”으로 불리지 않는 것처럼 구원받은 무리들에게 선한 행위는 “행위”로서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 (요 14: 23)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얻고자하여 보여주는 사랑이 아니라, 이미 사랑하여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표현인 것이다.

 

6. 공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지체되는 그리스도의 재림

우리는 지금 선과 악의 대 전쟁 속에 살고 있다. 수십 억 사람들에게 각각 천사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하늘에는 매 순간에도 수십만의 천사들이 자기들의 맡은 임무를 수행하느라 바삐 날아다니고 있다.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사닥다리를 야곱이 보았듯이 우리가 눈을 뜨고 그 천사들을 볼 수만 있다면, 하늘의 구름보다도 더 많은 천사들이, 그 어떤 비행기보다도 떠 빨리 지구와 하늘 나라를 순식간에 왕래하며 지구의 소식을 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의 천사들은 사단의 천사들과 맞서 싸움을 하며 인간을 죄에서 구출하기 위하여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그런데 바사 국군이 이십 일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군장중 하나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다니엘10: 12-14) 이 싸움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무엇을 얻기 위하여 온 우주의 거민들이 보는 앞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가? 사단과 그의 천사들도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그들이 질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왜 그토록 싸움은 치혈해지고만 있을까? 피조물이 창조자와 싸울 수 없음을 알면서도 왜 싸우는 것일까? 이 싸움이 사단과 그의 부하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거기에는 그 이유가 있다. 만약 그들이 자기들의 죄에 대한 책임을 다른 것에 전가시킬 수만 있다면 그들이 무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싸움은 최초부터 하나님의 율법에 관한 것이었다. 사단은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며, 그분의 율법에 결함이 있고, 우주의 행복을 위하여 그것들을 변경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애써왔다. 율법을 공격함으로 그는 그 율법의 제정자의 권위를 뒤집어 엎으려고 하였다. 이 싸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례에 결함이 있어 변경해야 되는지 혹은 완전하여 변할 수 없는 것인지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 고소에 대하여 하나님은 하늘의 법이 공평하며, 누구나 다 지킬 수 있으며, 사단이 내세웠던 주장들의 결과가 어떠한 것들임을 구속의 경륜을 통하여 밝히 나타내셨다. 또한 수많은 약속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을 것과, 언제라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음을 예수님의 생애를 통하여 증명 하셨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서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베드로후서 1:3-4)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6:17-18)

하나님의 남은 백성은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온 우주의 거민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계명은 지킬 수 있는 것이며, 선한 것이요, 축복이고, 사랑이라는 사실을 선포할 하나님의 증인들인 것이다. 이 싸움의 마지막 증인들로서 하나님께서는 한 무리를 인도하실 것인데 그들이 곧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 “십 사만 사천인” 이다. 이 사람들은 죄악으로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요한계시록 14:4-5) 마지막 세대를 사는 이 무리는 십자가의 사랑의 힘을 온 우주 앞에 선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음과 죄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증거 하실 것이다. 사단은 이 무리를 핍박하여 고통과 시험을 줌으로 욥에게 주어졌던 암흑을 지나가게 할 것이지만, 이것을 통하여 온 우주는 사단이 건설하고자 했던 그 정부가 얼마나 악하고 거짓된 것인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정부의 완전성을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옹호하는 작업은 길고 어려운 시간을 지나야 한다. 예수님의 재림이 지체됨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여야만 하고 하나님 자신도 고통을 겪어야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독자이신 예수님께서 그의 눈앞에서 고통 속에 죽으시는 것을 보았다. 또한 그의 사랑하는 모든 인류가 고통을 당하는 것을 매순간 보시고 계신다. 그러나 이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우주의 영원한 안전과 행복을 위하여 죄의 본질은 드러날 것이며, 하나님의 법의 필요성과 완전성은 입증될 것이다. 온 우주는 죄의 결과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피조물에게 완전히 이해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율법의 완전성을 입증하신 그 모본을 인간이 온전히 따르게 될 때에 이 싸움의 끝은 올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1:40-12:2)

 

2부 - 죄는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사랑의 율법은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이므로 모든 지성적 존재들의 행복은 그들이 이 의의 대 원칙에 완전히 일치함에 달려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강제적 굴종을 기뻐하지 않으시므로 모든 존재로 하여금 당신께 자원하여 봉사하도록 그들에게 의지의 자유를 허락하셨다. 하늘이나 땅이나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창조물들은 그림자가 전혀 없는 완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완전한 의와 행복만이 있었던 그곳에 한가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 변화는 루스벨이 살고 있었던 하늘에서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허락하셨던 자유의지를 악용하는 자가 있었다. 죄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 다음가는 최고의 영광을 받았으며, 하늘 거민들 가운데 가장 높은 권세와 영광을 가졌던 자에게서 시작되었다.

모든 피조물들은 그들에게 완전한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주시는 어떠한 제한을 갖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에 관한 지식을 숨기심으로 흰색만이 있는 완전한 나라에 다른 색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시고, 선악과를 통해서 그들에게 자의로서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그들을 제어하고 억압하기 위함이 아니라 완전케 하시기 위함이셨다. 그런데 루스벨은 이러한 사랑의 법칙을 무시하고 자기 자신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있는, 자아의 함정으로 이끌어 들였다.

평화와 자유와 행복은 피조물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평화와 행복을 느낄 수 있는지 잘 아신다. 그런데 이러한 대 자연의 법칙을 어기고 자기 스스로에 정신을 집착하면 자신 안에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모든 경이로운 것들이 자기 스스로 생겨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사업에 성공하여 많은 돈을 벌게 되면 그것이 자신의 힘으로 된 듯,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그 번 돈들을 유흥비나 자기 자신만을 즐겁게 만드는 일들에 쓰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루스벨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놀라운 능력과 아름다움에 집착한 나머지 그것의 근원이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차츰 잊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자기 자신이 만든 자아의 감옥에 갇혀서 자아를 숭배하기까지 이르렀다. “아침의 아들” 루스벨은 덮는 그룹들 가운데 으뜸이었으며 거룩하고 흠이 없었다. 그는 크신 창조주의 어전에 서 있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둘러싼 영광의 끊임없는 빛이 그에게 머물고 있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저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겔28:12-15)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겔28:17)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사 14:13-14)

의만 존재하였던 하늘에서 루스벨의 첫 의도가 죄로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죄로 향하게 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루스벨 스스로 느끼게 되었던 감정들과 이론들은 바로 진화론과 심리학 안에 나타나는 이론들과 흡사하다. 모든 만물이 우연적인 사건을 통하여 스스로 생겨났다는 것과, 우리가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진화론과 심리학의 기본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사상은 영혼불멸설과 헬레니즘, 동양철학들이 섞여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스스로 그 힘의 근원을 갖고 있다는 new age 사상을 만든 것이다.

자기 자신을 높이고자 했던 루스벨의 야망은 자신보다 우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고 질투심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시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만드신 그 법이 불완전하며 불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였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곧 말씀 자체이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장 1절 참고) 루스벨은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율법으로 완전케 되어진 사랑을, 자신과 다른 천사들을 억압하는 방편이라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사단이 어떻게 하와를 유혹하였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3:1-4) 여기서 사단이 쓰고 있는 논쟁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억압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는 방법인 선악과를 먹는 것을 금지하셨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이기적인 존재이고 자신은 이러한 잘못을 개혁하는 자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루스벨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 놓은 마음의 감옥에 갇혀서, 하나님의 법에 실려있는 공의와 완전케 하시는 사랑을 잊게 되었다. 또한 자신이 타락한 똑같은 방법으로 하와의 마음에 의심을 심어주어 인류를 타락하게 만들었다. 완전한 의만 있었던 하늘과 에덴에서 루스벨은 자기 스스로, 어느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었던 죄를 만들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시작이 하나님의 법의 불완전함으로 해서 만들어낸 실수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단의 공격 전략은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인간 대리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법은 모든 피조물들의 자유를 구속하고 얽매는 것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율법인 십계명에 새겨져 있는 공의와 완전한 사랑을 몰라보고, 율법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기는 삶을 살기로 선택함으로써, 루스벨의 속삭임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3부 - 왜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세력을 곧바로 없애지 않으셨는가?


하나님께서는 불만의 정신이 성숙하여 공공연한 반역의 행동이 나올 때까지 사단이 그의 반역을 추진하도록 허용하셨다. 그 까닭은 사단의 계획들이 충분히 발전되어 그것들의 참 본질과 의도를 모두가 볼 수 있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죄의 시작과 그 동기는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과, 다른 타락하지 않은 세계의 존재들에게는 하나의 신비에 속한 것이었다. 흰색만이 있는 세계에서는 색이 무엇인지는 설명할 수 있으나, 그것을 느끼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느낌은 경험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락하지 않은 존재 자들은 하나님께서 알도록 허락하지 않으신 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루스벨이 만든 그 죄가 어떠한 결과를 낳을 것인지를 보여주셔야만 하였다. 온 우주에 하나님의 공의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결과가 확실히 나타날 때까지의 시간이 필요로 하였다.

기름부음을 받은 그룹인 루스벨은 매우 높은 지위에 있었으며 그는 하늘의 존재자들에게 큰사랑을 받았으며, 그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하나님의 정부는 하늘에 거하는 자들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들도 포함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행위가 충분히 발전하기 전에는 이것이 악한 일이었다는 것을 나타낼 수 없었으며 그의 불만은 반역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하늘과 여러 세계의 거민들은 그 당시에 죄의 참 성질과 결과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사단의 멸망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볼 수 없었을 것이며, 만일 그를 즉각적으로 멸망시켰다면 사랑에서가 아닌 두려움에서 하나님을 섬겼을 것이다. 그 기만자의 영향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반역의 정신도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을 것이다. 무궁한 세대를 통한 온 우주의 복지를 위하여, 사단이 그의 원칙들을 더욱 충분히 발전시켜서 하나님의 정부에 대한 그의 비난을 모든 피조물이 바른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와 그리고 그분의 율법의 불변성에 대하여 영원히,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남지 않도록 해야만 하였다.

4부 - 구속의 경륜


마태복음 5장 17절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 말씀 안에 십자가의 의미와 이유가 들어 있다. 여기서 “완전케 하려 함”의 의미는 영어로 fulfill 이라고 쓰여, “이행하다” 또는 “실현하다”라는 의미이다. 즉 의무나 직무, 법률 또는 명령을 이행한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곧 그의 말씀인 법을 완전케, 즉 실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의 타락은 온 하늘을 슬픔으로 가득 채웠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죄의 저주로 시들었고, 비참하게 죽을 운명에 처한 존재들이 살게 되었다. 율법을 범한 자들이 피할 길은 없는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감추어 오신 하나의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1:26-27) 하나님의 사랑은 법으로서만 나타나지 않으시고 이제 법을 어겨 죄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이방인이 된 우리를 다시 죄 짓기 전의 완전한 사람으로 다시 이끌어 오시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이렇게 하시기 위해서는 한가지 문제점이 따랐다. 하나님과 말씀은 동일하기 때문에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반대하는 결과를 빚게 되므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였다. 또한 죄의 결과를 대신 질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율법과 동일한 존재뿐이었다. (히브리서 6:17-18절 참고) 우리가 큰 죄를 범하면 그 죄에 해당되는 죄 값을 치루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에 대해서도 그만한 죄 값을 치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천사나 인간들 중 하나를 속죄양으로서 대신 죽게 하였다면, 우주의 거민들이 볼 때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닌 것처럼 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죄의 용서가 단순히 그 죗된 행동만을 단순히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것에서 끝날 수는 없었다. 다시 인간을 죄로부터 원상복구 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죄로 인하여 타락해진 인간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셔야만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인간의 상태를 다시 원상복귀 하시기 위하여 구속의 경륜을 지구의 창조 이전에 이미 세우셨던 것이다. 이 신비스러운 “평화의 의논”(슥 6:13)은 “창조함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되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비참의 심연에까지 내려가실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영광의 소망이신 예수그리스도가 그 영원한 법을 실행하심으로, 완전케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요 3:16)이었다. 오! 구속의 오묘함이여! 그분을 사랑하지 않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여!

 

5부 - 사랑은 믿음을 낳고, 믿음은 순종을 낳는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돌아가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과 의향에 관계없이 무조건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주신 것도 완전한 사랑, 즉 자유의지가 선택한 “사랑의 순종”을 원하셨기 때문이었다. 선택의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더욱 완전하여졌을 뿐이며, 강제적인 구원은 하늘의 법칙과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의향과 관계없이 하늘에 간다면, 하늘은 무법천지가 될 것이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여 그 사랑의 믿음을 행할 수 있는 자들이 거함으로, 또 다른 반역이 없는 영원한 안전과 행복이 보장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하늘에 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재창조 하셔서 지금의 나와 완전히 다른 나로서 하늘에 가게될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적인 추측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단순히 재창조하실 계획이었으면, 이렇게 긴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택의 자유는 죄짓기 전이나, 십자가 후에도 변할 수 없는 하늘의 근본 법칙이기 때문이다.

죄를 지은 후 인간은 그가 누렸던 자유의지를 잃어버렸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의의 줄은 끊기고 인간 안에 온전히 자리잡았었던 하나님의 의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인간은 의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더 이상 가질 수 없었다. 하얀색만 있었던 인간의 마음은 모두 까만 색으로 바뀌었다. 인간의 마음은 더 이상 의를 명상하거나 선택할 힘이 없었다. 인간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롬 6:16)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경륜의 첫 번째 단계로서 인간에게 잃어버렸던 그 선택권을 다시 주시려 하셨다. 선택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시는 것이 하늘의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암흑만이 존재하였던 인간의 마음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인성과 연결이 되어, 끊어졌던 전기선이 연결되면서 불이 다시 밝혀지듯, 우리 마음에 의의 불이 다시 켜지게 되었다. 사단의 본부인 “죄의 법”과 싸울 수 있는 하나님의 본부인 “마음의 법”이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세워지게 되어,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그 믿음으로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신 것이다. (롬 8:4 참고)

예수님께서, 선과 악을 알게된, 타락한 인성을 취하여 이 땅에 오셔서 사단의 모든 유혹에서 승리하심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함이셨다. (창3장, 롬 8:1 참고) 우리는 이제 믿음으로 용서함을 받고, 사랑으로 사단의 모든 유혹을 물리침으로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가야 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롬 1:15-16)



사단도 믿음을 가지고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갖는 가장 큰 의는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발견이다. 고행과 자학, 선한 행실로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구교의 잘못된 가르침에서 방황하던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다는 귀중한 진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많은 개혁자들이 나타나 죽음을 불사하고 이 귀중한 진리의 터전을 쌓아 오늘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은 모든 기독교인들의 가장 근본적인 신앙의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이 기별은 시대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점차 바뀌어지게 되었고, 사회의 구조와 문화가 변화함에 따라서 기독교인들의 성경에 대한 이해도 변화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단순히 하나의 지식적 동의로서 생각한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의 믿음과 행위에 대한 귀중한 말씀들이 하나의 위인전처럼 느껴지게 되고, 이러한 선구자들의 삶의 방식은 실제로 구원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이 갖고 있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려 하심”을 하나의 사실로서 인정하는 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칭의와 성화에 대한 이러한 인본주의적이고 철학적인 추측은 한번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에 대한 구원의 문제를 완전히 신비 속에 묻어 버리게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서 2장 14절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고, 이 양심으로 사는 것은 행함의 부류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2장 19절은 이 문제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네가 하나님을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사단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이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독생자를 주”신 것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실을 지식적으로 알거나, 인정만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양심이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그 나름대로의 믿음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구원은 우리 마음속에 십자가를 통하여 은혜로서 주신 믿음과 양심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마음에 들어와 사랑을 만들고, 그 사랑이 온전한 믿음을 만들게 되어, 이 믿음이 우리의 양심이 됨으로, 우리가 이 믿음의 양심대로 행할 때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다. 우리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은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의 결과를 예수님께서 대신 이루셨다고 자동적으로 우리가 하늘에서 살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과 공의를 이해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그분을 믿게 만들며, 그 믿음으로 우리는 속죄함을 얻고, 속죄함의 경험은 우리의 사랑을 온전케 하여 그분의 말씀을 기쁨으로 순종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행함이 없는 구원을 주장할 것이지만, 사랑이 충만한 믿음은, 그것이 구원과 관계없다 하여도, 사랑의 행위를 기쁨으로 행할 것이다. 거듭남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합하는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는 선한 행동이 하나의 벼슬이나 나타내 보이고 싶은 자랑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자연의 법칙, 즉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위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행해지는 업적이 아니고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당연한 행동인 것이다. 흰색만 있는 곳에서 흰색이 “흰색”으로 불리지 않는 것처럼 구원받은 무리들에게 선한 행위는 “행위”로서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 (요 14: 23)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얻고자하여 보여주는 사랑이 아니라, 이미 사랑하여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표현인 것이다.


 

6부 - 죄의 역사가 끝마쳐지려면?


우리는 지금 선과 악의 대 전쟁 속에 살고 있다. 수십 억 사람들에게 각각 천사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하늘에는 매 순간에도 수십만의 천사들이 자기들의 맡은 임무를 수행하느라 바삐 날아다니고 있다.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사닥다리를 야곱이 보았듯이 우리가 눈을 뜨고 그 천사들을 볼 수만 있다면, 하늘의 구름보다도 더 많은 천사들이, 그 어떤 비행기보다도 떠 빨리 지구와 하늘 나라를 순식간에 왕래하며 지구의 소식을 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의 천사들은 사단의 천사들과 맞서 싸움을 하며 인간을 죄에서 구출하기 위하여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그런데 바사 국군이 이십 일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군장중 하나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다니엘10: 12-14) 이 싸움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무엇을 얻기 위하여 온 우주의 거민들이 보는 앞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가? 사단과 그의 천사들도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그들이 질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왜 그토록 싸움은 치혈해지고만 있을까? 피조물이 창조자와 싸울 수 없음을 알면서도 왜 싸우는 것일까? 이 싸움이 사단과 그의 부하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거기에는 그 이유가 있다. 만약 그들이 자기들의 죄에 대한 책임을 다른 것에 전가시킬 수만 있다면 그들이 무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싸움은 최초부터 하나님의 율법에 관한 것이었다. 사단은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며, 그분의 율법에 결함이 있고, 우주의 행복을 위하여 그것들을 변경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애써왔다. 율법을 공격함으로 그는 그 율법의 제정자의 권위를 뒤집어 엎으려고 하였다. 이 싸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례에 결함이 있어 변경해야 되는지 혹은 완전하여 변할 수 없는 것인지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 고소에 대하여 하나님은 하늘의 법이 공평하며, 누구나 다 지킬 수 있으며, 사단이 내세웠던 주장들의 결과가 어떠한 것들임을 구속의 경륜을 통하여 밝히 나타내셨다. 또한 수많은 약속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을 것과, 언제라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음을 예수님의 생애를 통하여 증명 하셨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서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베드로후서 1:3-4)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6:17-18)

하나님의 남은 백성은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온 우주의 거민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계명은 지킬 수 있는 것이며, 선한 것이요, 축복이고, 사랑이라는 사실을 선포할 하나님의 증인들인 것이다. 이 싸움의 마지막 증인들로서 하나님께서는 한 무리를 인도하실 것인데 그들이 곧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 “십 사만 사천인” 이다. 이 사람들은 죄악으로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요한계시록 14:4-5) 마지막 세대를 사는 이 무리는 십자가의 사랑의 힘을 온 우주 앞에 선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음과 죄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증거 하실 것이다. 사단은 이 무리를 핍박하여 고통과 시험을 줌으로 욥에게 주어졌던 암흑을 지나가게 할 것이지만, 이것을 통하여 온 우주는 사단이 건설하고자 했던 그 정부가 얼마나 악하고 거짓된 것인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정부의 완전성을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옹호하는 작업은 길고 어려운 시간을 지나야 한다. 예수님의 재림이 지체됨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여야만 하고 하나님 자신도 고통을 겪어야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독자이신 예수님께서 그의 눈앞에서 고통 속에 죽으시는 것을 보았다. 또한 그의 사랑하는 모든 인류가 고통을 당하는 것을 매순간 보시고 계신다. 그러나 이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우주의 영원한 안전과 행복을 위하여 죄의 본질은 드러날 것이며, 하나님의 법의 필요성과 완전성은 입증될 것이다. 온 우주는 죄의 결과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피조물에게 완전히 이해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율법의 완전성을 입증하신 그 모본을 인간이 온전히 따르게 될 때에 이 싸움의 끝은 올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1:4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