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극복하는 비결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라고 말씀 하셨다(눅 6:20). 물론, 이것은 마음의 가난함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나 마음이 아무리 가난하고 꽃잎처럼 고울지라도 깊은 산속에서 누더기를 걸치고 산다면 누가 그를 거들떠 볼 것인가? 세상에 괴로운 일이 많지만 가난처럼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도 없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대로 사는 자는 하나님께서 모든 복을 허락하실 것이므로 의인은 절대로 가난해질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마태복음 6장 33절을 인용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이 모든 것”을 축복으로 허락하실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모든 것”이란 무엇인가? 대 저택과 다이아몬드와 멋진 자동차와 같은 것들인가?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설명이 바로 앞에 있는 성경절에 나와 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1,32. 예수께서 당신을 진실한 마음으로 따르는 자들에게 보장하신 것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방인들처럼 불안한 마음으로 이러한 것들을 구하지 말고, 자식을 사랑하는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의연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에게 십년치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한번에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의 식탁을 펼쳐 놓으셨던 것처럼, 지금도 “이 모든 것”을 하루 하루 공급해 주신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 6:34.

필요가 하루를 단위로 공급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생애에는 궁핍과 가난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걸려서 넘어지고 있는 가난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그리스도인들만이 마지막 시대에 순결한 양심과 하나님의 자녀다운 기백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남게 될 것이다. 이제, 가난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실제적 아픔들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첫번째 아픔

가난에서 오는 고통 중에 첫번째는 친구에게 냉대를 받는 것이다. 잘 살 때는 친구들이 많이 모여들지만, 가난해지면 친구들이 떠나간다. 내가 궁하지 않을 때는 신용이 있었지만, 호주머니가 비니까 친구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친구를 찾아가도 나를 만나주기를 꺼려하고 어쩌다가 도움이라도 청하면 나를 한심한 인간으로 바라본다. 한 때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며, 하나님과 진리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던 교우도 가난이 싫어서 나를 멀리한다. 그러므로 옛 현인은 “가난에 쫓겨 눈물이 소매를 적실 때, 사람의 마음은 알려진다”라는 말을 남겼다.

가난은 가난해진 사람의 마음도 드러내지만, 가난해진 자의 친구의 마음도 드러낸다. 그러므로 가난해질 때까지는 친구를 믿지 말라. 이 세상의 친구는 그림자와 같다. 내가 햇볕 아래를 거닐 때에는 나와 함께 하지만, 가난이라는 그늘에 들어서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나의 곁을 떠나지 않는 친구가 한 분 계신데, 그분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오히려 내가 가난해지고 갈급해지면 가까이 오셔서 나의 온 마음과 생애를 당신의 영원한 진리로 배불리 채워 주신다.

두번째 아픔

두번째 아픔은 나로 인하여 가난해진 가족을 바라보는 것이다. 나 혼자라면 가난을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내게 기대어 살아가는 늙으신 부모님과 연약한 아내, 그리고 어린 자식이 있기 때문에, 가난은 내 마음에 깊은 아픔과 상처를 남긴다. “어떻게 하면 나로 인하여 가난해진 부모와 처자의 슬픔과 딱한 사정을 해결해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나의 신앙과 철학을 움추러 들게 만든다. 가난에 지친 어머니와 식솔들이 힘없는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는 모습을 보는 것, 이것이 가난이 가져다 주는 두번째 아픔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그리스도인 생애의 목적은 가난을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진리와 정직의 길을 걷고자 할 때에 가장 먼저 그대 눈 앞에 떠오르는 문제는 가난일 수 있다.

세번째 아픔

두번째 아픔은 세번째 아픔으로 나를 인도한다. 나는 가난과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빵을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를 기웃거려 보고, 저기를 찾아가서 직업을 구해야 한다. 내가 가난하고 궁하다는 사실을 안 주인은 적은 보수로 나를 고용하려고 한다. 나는 파는 사람이고 그는 사는 사람이니 값을 정하는 권한은 전적으로 그에게 달려 있다. 내가 공정과 공평을 앞세우고 그의 요구를 물리치면 나는 부모 처자와 함께 또 한끼의 식사를 걸러야 한다. 만일 굶주리는 자가 나 하나라면, 내 뜻을 세워 무릎을 꿇지 않으련만, 지금의 나는 나 혼자만이 아니다.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마음과 몸을 바치는 아내를 위하여, 나는 내가 존경할 수 없는 사람 앞에서 복종의 예를 갖추어야 한다. 빵을 위하여 존경하지 않는 사람 앞에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안되는 것, 바로 이것이 가난이 가져오는 세번째 아픔이다.

그러므로 식생활을 위하여 비굴해 지지 않는 것, 이것이 진리를 위하여 세상을 버린 그리스도인들이 통과하게 되는 경험이다. 비굴한 방법으로 가족을 위하여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구할 수는 있지만, 존경의 마음으로 그대를 바라보는 가족의 눈을 잃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육을 위하여 영을 포기하지 말라.

네번째 아픔

가난은 비루한 열등감을 내 마음 속에서 싹트도록 한다. 부자 이웃을 보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특별한 이유없이 부자 친구를 비웃는 자는 가난 때문에 비루해진 자이다. 가난한 자가 아무런 마음의 부담없이 부자 친구와 교제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지만, 진리와 의를 위하여 살다가 가난해진 그리스도인은 비겁한 열등감에 빠질 이유가 없다.

현대는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돈이 사람을 세우고, 돈이 사람을 넘어뜨린다. 돈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사상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이 되었다. 그래서 심지어는 “돈을 일만 악의 뿌리”로 믿는 그리스도인들까지도 가난의 아픔을 피하기 위하여 양심을 더럽히고 마음의 순결을 싼 값에 팔아치우고 있다. 그대 가난한 자여, 비루한 열등감이 그대 마음을 채우려고 할 때, 머리를 흔들면서 분연히 그것을 떨쳐 버려라.

다섯번째 아픔

가난은 남을 부러워하게 하고 자신을 비굴하게 만드는 동시에, 또한 자신을 염세주의자로 만든다. 가난해지면 사람이 많이 모이는 모임을 싫어하게 되고 사람들과의 교제를 피하게 된다. 마음은 점점 냉랭하고 완고해져서, 의연한 그리스도인의 자태를 잃어버리게 된다. 가난은 자신을 사회와 교제로부터 몰아낸다. 가난은 사람에게 깊은 외로움을 가져다 준다.

가난은 가난을 낳는다. 부모가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하게 된 자는 그 마음에 한을 품는다. 가난은 사람을 한 맺힌 수전노로 만든다. 가난이 한이 되어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을 생애의 목적으로 삼은 자는 물욕에 찌든 수전노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여, 조심하라. 그대의 마음에 파수꾼을 세워 수전노의 정신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라. 그대 자신을 위해서는 엄격한 절약 정신을 실천할지라도, 이웃을 위해서는 너그럽게 주머니를 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세상은 가진 자에게는 더 주고, 없는 자에게는 이미 가진 것도 빼앗는다. 부자가 더 부해진다는 이야기는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진다는 뜻이다. 깊은 가난은 사람을 절망의 계곡으로 몰아 넣는다. 가난 때문에 그대가 수치스럽다면, 정직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부지런함에도 불구하고 가난이 그대 곁을 떠나지 않는다면, 그대는 가난 속에서 만족과 행복을 찾는 비결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다섯번째 아픔을 이기는 비결이다.


의를 위한 가난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존경을 받는 가난이 있다. 비록 흔하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정의와 진리를 위한 가난이라는 것도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말하기를 “하나의 방해물이 늘 내 몸에 붙어다니는데, 그것의 이름은 정직이다.”라고 하였다. 정직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은 부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영원한 축복이 되지도 못한다. 양심의 명령을 존중하면서 축적한 부가 아니면 그것은 하늘이 인정하는 부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자들 중에도 가끔씩 의인들을 두심으로써, 당신께서 재물을 사용하시는 방법들을 계시해 주신다.

진리를 세우기 위하여 가난해지기로 작정한 위대한 사람들을 역사 속에서 간혹 찾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이 40년 간의 봉사 후에 그의 소유로 남은 것은 웃옷 한 벌과 몇 권의 고서 뿐이었다. 소크라테스는 하루에 두 근의 빵과 아테네 성뒤에서 솟아나는 샘물만 있으면 만족한다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을 생각해 보자. 우주의 왕이신 예수께서 스스로 선택하여 가난과 굴욕의 생애를 사셨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도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 선택하여 가난과 굴욕의 생애를 살아가게 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가난에 대하여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다(눅 9:58).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갈채와 칭찬을 구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부자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지 않으셨다. 스스로 가난한 자들과 함께 거하시기로 선택하심으로써 진리가 가난한 자들의 것임을 선포하셨다. 진실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인이시라면, 그분의 종이 되기로 결심한 우리도 주인보다 안락한 인생을 기대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 속에 계신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내게 행한 것이니라” 마 25:40.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이 듣지 않는 복음은 진리가 아니다.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당신이 기다리던 메시아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증명하시기 위하여 가난한 자들이 당신께서 전하는 복음을 듣는다는 사실을 지적하셨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 11:5. 2천년 전에 유대 땅에서 육신의 가난함을 돌보아 주셨고, 마음의 가난함을 채워주셨던 예수께서는 지금도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대로 도울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막 14:7).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노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사이에 가난한 사람들을 두심으로써, 그들에게 나타내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진실성을 시험하고 계신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이사야 58장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 벗은 자를 입히며 ...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누어 주며.” 사 58:7.

가난은 반드시 경제적으로 가난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다. 마음이 가난한 이 진짜 가난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들 중에서도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있다. 비록 비단옷을 입고 기름진 음식으로 세 끼를 떼울지라도, 그 심령이 가난하고 곤고하면, 예수께서는 어김없이 그를 찾아 오신다. 예수께서 마음이 가난한 자들을 항상 직접 돌보아 주신다.

사도 바울은 의를 위하여 가난하게 된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10. 바로 이것이 의를 위하여 가난해진 자들의 모습이다. 의를 위하여 가난해진 사람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살아간다.

그리스도인은 가난에 대하여 잘 이해해야만 한다. 굶주린 엘리야를 먹였던 까마귀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오천명을 먹이셨던 예수님의 기적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셨던 기적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기적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쫓는 자들은 크게 실망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할 때, 가난이 자신의 생애를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가난을 기대하고, 진리를 선택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책임지실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수천년 전에 유대 광야에서 날마다 펼쳐졌던 하늘 만나의 식탁이 오늘도 그대 가정에 기적적으로 펼쳐질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 6:34. 그대 그리스도인이여, 가난을 피하는 대신에 진리와 정직을 위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가난을 맞이하라. 왜냐하면 가난과 궁핍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백성들의 성품과 생애를 다듬질하시는 하나님의 방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