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진짜와 가짜의 차이


말과 행함


두 아들의 비유: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가서 이르되 아들아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쳐 갔거늘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가겠니이다 하고 가지 아니하였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 뜻을 행하였느뇨 하시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 뜻을 행하였느뇨 하시니 가로되 맏아들이니이다” 마태복음 21:28~31 (킹제임스 영어 성경역)

사람의 진실성은 말이 아니라 행실에 달려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마 7:21). 예수께서는 너희가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말을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너희가 ...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하고 물으셨다(마 5:47).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요 13:17). 그에 상응하는 행실이 따르지 않는 한, 말은 아무 가치가 없는데, 바로 이것이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주신 교훈이다.

두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가서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을 때에 맏아들은 즉시 대답하기를 “싫소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순종하기를 거절하고 악한 친구들과 사귀었다. 그러나 후에 회개하고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도 같은 명령을 하였는데, 그는 “가겠나이다”라는 대답을 하였지만, 가지 아니하였다.

이 비유 가운데 나오는 아버지는 하나님을 대표하고, 포도원은 교회를 대표하며, 두 아들은 두 계층의 사람들을 대표한다. “싫소이다”라는 ㅁ라로 아버지의 명령을 거절한 맏아들은 공공연하게 죄를 지으면서 사는 사람들을 대표한다. 그러나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회개하고 돌아와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다.

행함이 없이 말로만 “가겠나이다”라고 대답한 둘째 아들은, 성경 말씀의 소중함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경험했지만,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순종하겠나이다”라는 말만 하고 불순종의 생애를 살아가는 자들을 대표한다.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할 것을 호소하지만, 이들은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면서 살아간다. 주말마다 교회에 나가고 각종 교회 행사에 참석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된다고 말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두 아들의 비유에서 행함이 없는 둘째 아들은 진리를 알고 가르치지만,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둘째 아들은 진리에 대한 진실한 믿음의 증거인 순종과 행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앙 생활에 만족하여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나타낸다.

“가겠나이다”라고 대답한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신실하게 순종하는 아들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그의 말이 진실되지 못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에게는 아버지께 대한 참된 사랑과 존경이 없었다.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공언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어떤 계명이나 진리가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을 경우에는, 그것을 무시하거나 거절하는 자들은 둘째 아들과 같은 사람이다. 자신의 취향이나 생각에 맞는 진리를 엄격하게 강하면서 지키지만, 진리가 희생과 굴복을 요구할 때에는 교묘한 궤변을 늘어 놓음으로써, 불순종에 대한 그럴듯한 핑계거리를 만드는 자들은 둘째 아들과 같은 사람이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하고 행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마 23:3). 순종은 율법주의자들의 행함이나 구원을 얻기 위한 어떤 공로가 아니다. 그것은 하늘 아버지를 참으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는 자연스런 열매이다.

말로만 의를 말하고 행함이 뒤따르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의롭다는 착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실제로는 의롭지 않으면서 스스로 의롭다는 생각에 빠지는 자들은 무서운 자기 기만에 빠지게 되어 그 결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주장하지만, 저희 마음 속에 이웃과 가족들에게 나누어 줄만한 충분한 하나님의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 주께서 세상을 구원하는 사업에 동참하도록 사람들을 부르고 계시지만, 둘째 아들과 같은 사람은 “가겠나이다”라는 말만 하고 실제적인 사랑과 봉사를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게으른 자들이다. 그들은 둘째 아들처럼, 하나님께 거짓 약속을 하였다. 말로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성품과 생애는 그들이 주장하는 바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둘째 아들과 같은 사람은 진리가 아무런 희생도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에만 “가겠나이다”라는 약속을 실천에 옮긴다. 극기와 자아 희생이 요구될 때나 십자가를 져야 할 일이 생길 때에는 온갖 핑계와 구실을 대면서 뒤로 물러간다. 그 결과, 의무에 대한 책임감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알면서도 범하는 죄가 습관화 된다. 귀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영적 식별력은 사라지고, 마음은 더욱 더 강팍해지며, 양심은 서서히 마비되어 간다.

형제자매들이시여, 그대들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전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러한 생각은 자신의 영혼을 속이는 것이다. 중간은 없다. 온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의 진리대로 살지 않는 자들은 결국 사단의 진영에 가담하게 된다. 사단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냉담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고, 진리를 무시하며 영적으로 졸고 있는 자들의 나태한 상태를 이용하여 그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실제로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편에 서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결국에는 사단의 편에 서게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모본을 보이지 않고, 해야 할 의무를 수행하지 않으며, 해야 할 말을 하지 아니함으로써, 그리스도께 인도해야 할 영혼들이 사단의 먹이가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째 아들과 같은 교인들은 안락한 게으름을 즐기고 있다.

자신이 진정으로 거듭났음을 주장하는 사람이 이웃과 세상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채 무익한 생애를 살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자들은 거듭나지 않은 자들이다. 게으름과 이기적인 안락으로 이 세상을 살다가 천국에 들어갈 자는 아무도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에 감동되어서 죄와 세상을 싫어하는 자들은, 기쁜 마음으로 좁은 길을 걸어가게 된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명령)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알면서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보다는 차라리 세리와 죄인들에게 더 큰 희망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맏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마 21:31

그러나 맏아들과 같이 자기 죄를 숨기거나 합리화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들은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에 대해서 고뇌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둘째 아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진리를 공공연하게 거절하는 말을 하지만, 그들의 직선적인 솔직함을 칭찬해 주어서는 안된다. 진리로 성화된 사람의 솔직함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위한 담대한 증인이 되게 하지만, 세속적이고 타락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진리에 대해서 솔직함을 드러낼 때에는 하나님께 대한 모독과 불경스런 말이 나오게 된다. 비록 자신은 위선자가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마음의 깊은 곳에 자존심과 비틀어진 고집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솔직한 것처럼 들리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안전한 길은 마음 속에 호소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응하는 것이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팍하게 하지 말라” 히 4:7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을 때에 그 부르심을 거절하지 말라. 순종하기를 지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어쩌면 다시는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품고 있는 죄를 점차적으로 천천히 끊어 버리겠다고 계획하지 말라. 왜냐하면 사단이 그대를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죄는 품성을 약하게 하고, 죄의 습관을 강화시킨다. 그 결과, 육체와 정신과 도덕심이 약화된다. 그대 마음에 형성된 잘못된 사상과 악에 대한 익숙함이 점점 더 그대로 하여금 옳고 그름을 분간하기 어렵게 만든다. 사단은 형성된 악습을 통하여 그대를 계속적으로 맹렬하게 공격한다.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각 사람의 진실성이 시험받고 있다. 그대의 말과 행실은 일치되는가? 물론, 어떠한 선행이나 순종으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살 수 없다. 선행과 순종은 단지 우리 속에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재강림하실 때,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람들로 나누어진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사람들과 지키지 않은 사람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요 14:15~24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기독교인 비판


저는 얼마 전에 어떤 일본인이 쓴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인 비판”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의 글에는 한국에 대한 매우 예리한 비판이 담겨 있었지만, 그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이 한국인을 비판하기 전에, 한국인이 먼저 한국에 대하여 정직한 비판을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저는 이번 기회에 한국인 기독교인으로서 한국인 기독교인을 비판하려고 합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이 기독교를 비판한다면 이해가 될지 모르지만 기독교인이 기독교인를 비판한다면, 자기 얼굴에 스스로 침을 뱉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침을 뱉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스스로에게 정직하고 싶을 뿐입니다.

세상에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섞여 있듯이, 교회 안에도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습니다. 세상이 나쁜 사람들에 의해서 주도되는 것처럼 보이듯이, 교회도 가라지들에 의해서 점령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교회 안에 소수의 알곡이 있기 때문에 교회 전체를 하나로 묶어서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 기독교인을 비판하는 제 의견에 독단과 편견이 섞여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 글을 통하여 현대 기독교회가 가지고 있는 오해가 조금이라도 벗겨지고 진실과 진리가 드러난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이것이 이 글을 보내드리는 이유입니다. 나의 영혼이 속해 있는 이 기독교회가 미신과 잘못된 신앙에서 돌이켜 올바른 길로 들어서게 되기를 소원하면서..... 생애의 빛 편집실

감정 비판

한국 기독교인은 매우 감정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 신앙이 감정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보다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진리에 의존하기 보다는 자신의 감정에 의존하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진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진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려고 하지만, 진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감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애쓰게 된다.

감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애쓴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그것은 기도나 금식과 같은 종교적 의식을 할 때에 자신의 변화되는 감정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기도와 금식이 매우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러한 것들에 몰두하게 될 때, 자칫 잘못하면 커다란 잘못을 범하게 된다. 복음과 율법이 함께 가듯이 기도나 금식도 진리에 대한 지식과 함께 가야 한다.

진리를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기도에 대한 응답이 빨리 오지 않을 때마다, 그리고 그들이 기다리는 기적이 원하는 방법으로 일어나지 않을 때마다 쉽게 실망하거나 불안해 한다. 그리고 기도나 기적에 의존해서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알려고 애쓰다보니까 자칫 잘못하면 기도하는 중에 그들 속에서 생기는 감정의 변화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 마음 속에 생각을 주시고, 인상을 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도할 때에 생기는 모든 감정과 인상과 아이디어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경우 커다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모든 생각과 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반드시 확인되어야 한다.

한국인들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기준으로 구원과 축복을 확인하려고 한다. 기분이 좋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납하신다고 생각하고, 기분이 우울하고 낙담이 될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한다. 돈이 많이 벌리면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셨다고 믿고, 사업이 망하고 직장을 잃어버리면 하나님께서 저주하셨다고 믿는다.

한국 기독교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셨다는 증거를 감정 속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자극하고 흥분시키는 방법으로 예배드린다. 박수를 치면서 신나게 찬송을 부르며, 팔을 흔들고 마루바닥을 치면서 큰 소리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엄숙해야 할 교회 안에 전자 기타와 드럼과 요란한 조명이 생기게 되었고, 이러한 시설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도록 만들어 주어야 교회가 가득차게 된다. 한국 기독교회 안에서 조용히 울먹거리면서 드리는 회개의 기도와 그 뜻을 깊이 음미하면서 부르는 찬송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기도 비판

마치 레슬링 선수가 상대편의 팔을 뒤로 꺽어서 항복을 받아내듯이, 한국 기독교인의 기도는 하나님의 팔을 꺽음으로써,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애쓰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위해서 겸비한 마음으로 기도드리는 대신에 자신의 뜻과 소원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지극 정성으로 빈다. 정성을 다하여 열심히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도 별수 없이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는 그리스도인과, 아들의 장원급제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산신령에게 비는 시골 아낙네의 염불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나님은 귀먹지 않으셨다. 가장 작은 음성으로 드리는 가장 짧은 기도일지라도,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순결하고 그 내용이 하나님의 뜻과 병합된다면, 기도는 즉시로 응답된다. 한국인의 기도가 시끄럽고, 중언부언함으로써 불필요하게 길어지는 이유는, 큰 목소리로 길게 기도함으로써, 먼저 자신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얻어낸 다음, 그분의 뜻이 어떠하든지 간에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기도드리는 사람은 기도 내용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혹시, 자신의 기도가 이기적인 것은 아닌가? 자신의 영광을 위한 기도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인가를 깊이 조아려 보아야 한다. 인간적인 꾀에서 비롯된 기도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기도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기도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 알려드리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전지 전능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를 드리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뜻과 목적과 동기를 아시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살피기 위하여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기도이다.

은사 비판

한국 기독교인은 목사의 안수 기도를 통하여 방언과 치유의 은사를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성령의 은사와 축복을 하나님께 요구하지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같은 성령이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니” 고전 12:11.

성령의 은사는 우리가 요구하여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공로를 쌓거나 많은 헌금을 드림으로써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은사란 하늘 왕이 주는 영적 선물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성도들을 통하여 기적을 행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필요할 때마다 성령의 은사와 기적적인 치유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의 여러가지 은사들은 인간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어떤 것을 언제 받을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서 정하신 때에 필요되는 은사를 당신의 종들에게 나누어 주신다. 인간이 성령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인간을 부리신다. 은사와 기적이 나타나는 때와 장소와 방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지혜에 속해 있다. 연약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기적이 행사되어야 할 최적의 시간과 환경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 성장 비판

한국 기독교인은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하여 진리를 포기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존재하는 가장 큰 문제는 목사의 불충성과 교인들의 세속적인 정신이다. 양심이 마비되지 않은 목사라면 누구나 두 가지 음성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한쪽에서는 진리에 대한 충성과 영혼들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진리와 원칙을 낮추는 한이 있더라도 교회를 크게 성장시켜야 한다는 사단의 음성이 들려 온다. 한쪽에서는 교회를 진리로 인도해 달라는 소수의 진짜 그리스도인들의 요구가 들려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좀더 많은 사람들이 편한 마음으로 교회를 찾을 수 있도록 당분간 진리를 곧바르게 말하지 말아 달라는 대다수 교인들의 요구가 있다.

안타깝게도, 많은 목사들은 두 음성 사이에서 고뇌하다가 결국에는 돈많고 힘있는 장로나 권사들의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사단의 음성을 따르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일단 목사가 큰 교회를 세우기로 결정하게 되면, 그는 자신의 목적이 성취될 때까지 성경의 진리를 곧바르게 설교하지 않게 된다. 세속적인 교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곧바른 설교 대신에, 부드럽고 재미있는 설교로 인기를 얻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목사의 설교 밑에서 교인들의 신앙과 삶은 죄와 부패로 썩어가게 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일 2:15~16

진리 대신에 성장을 택한 목사가 인도하는 교회의 신자들은 교회를 부와 유행의 경쟁 장소로 만든다. 귀거리와 목거리와 짧은 치마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올 때에 입는 예복이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에서 술과 담배의 냄새가 새어 나오게 된다. 영적으로 쓰러져 있는 목사는 교회의 어리석은 양들을 이용하여 교회를 성장시키는 일에 골몰한다. 이러한 목사는 교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대신에 목사 자신에게로 인도한다. 진리에 대한 지식이 없는 어리석은 신자들은 목사에게 충성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되고, 교회에 바치는 헌금으로 자신의 죄에 대한 정죄를 피하려고 한다.

성경 진리를 스스로 연구하지 않고, 진리와 오류를 스스로 구분할줄 모르는 어리석은 교인들이 많이 생기면 생길수록, 교회는 아무 문제없이 더 빨리 성장하게 된다. 진리와 원칙이 무시되는 교회에서 사단은 교인들을 쉽게 정복해 간다.

축복 비판

한국 기독교인은 축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교회에 나가지만, 하나님께서는 단 한번도 믿음의 댓가로 복을 약속하지 않으셨다.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잘 믿으면,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업체와 가정을 축복해주십니다”라는 말은 거짓이다. 교회 안에 떠돌아 다니는 이러한 말 때문에 어리석은 양들은 자신의 믿음과 하나님의 축복을 거래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용서가 교회에 드리는 헌금에 의해서 거래될 수 있다고 오해하게 되었다.

가난한 나라의 선교사가 빵과 밀가루를 나누어 줌으로써 사람들을 예배당 안으로 끌어들이듯이, 하나님께서도 물질과 건강의 축복을 미끼로 사람들의 경배를 유도하신다는 사단의 거짓을 믿는 사람들은 순결한 동기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다. 기복 신앙은 한국 기독교회를 가라지들로 채워가고 있는 장본인이다.

신앙이 좋은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 있는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제외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 뿐 아니라, 악인들에게도 동일한 햇빛과 비를 주신다. 기독교 신앙은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죄와 이기심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한 유일한 능력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의 재물과 건강이 아니라, 영혼을 죄로부터 해방시켜서 구원받도록 이끄시는 것이다.

치유 은사 비판

한국 기독교회의 치유 은사는 매우 독단적이고, 일방적이다. 환자의 믿음이나 하나님의 뜻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치유를 주장하는 것이 한국인의 치유 은사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병자를 위한 겸손한 기도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들어주신다. 인간은 그분의 긍휼하심을 받을 자격이 없지만, 환자가 마음 전체를 그분께 바치면서 믿음을 행사할 때, 그분께서는 당신께 나아오는 자들을 받아 주신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그분의 약속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의 약속은 당신의 말씀에 대한 환자의 순종을 통하여 성취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내 마음에 죄를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편 66:18.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죄를 그대로 품고 있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약속과 축복을 요구하고 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회개이다.

많은 사람들은 방종과 무절제로 인하여 질병을 가지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옷입고, 일하는 습관에 있어서 건강의 법칙을 무시하였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부도덕하고 죗된 생활이 영혼과 몸을 쇠약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람들의 기도를 응답하셔서 건강을 축복으로 회복시켜 주신다면, 그들은 전과 동일한 부절제와 방종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들의 회복을 위해서 기적을 행하신다면, 그분께서는 그들의 죄와 부절제를 조장하는 것이 된다.

병자들은 믿음으로 치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버려야 할 부절제와 잘못된 생활 습관을 결정적으로 포기해야 한다.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기 위해서, 병자들은 알고 있는 죄들을 버리는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하며, 동시에 위생적이고 올바른 생활 습관을 가져야 한다. 병자들은 건강법칙과 영적법칙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철저하게 일치하는 마음과 생활을 소유해야 한다.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간구하라.”야고보 5:16

우리가 병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우리는“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로마서 8:26).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축복이 최선의 것이 될 것인지, 그렇지 못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질병의 치료를 위한 기도에는 다음과 같은 사상이 담겨있어야 한다. “주님, 주님께서는 이 사람의 모든 비밀을 아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병자를 가장 잘 아십니다. 당신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이 병자를 위해서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병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당신께서 이 영혼을 사랑하는 크기와 깊이가 훨씬 위대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이 병자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그러나 만일 이 병자가 회복되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라면, 주님의 은혜로 그를 위로해 주시고 고통 중에 있는 그에게 오셔서 그를 끝까지 지켜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믿음 비판

한국인은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이지만, 가정과 직장에서는 비그리스도인이다. 교회 일은 열 일을 제쳐놓고 앞장 서지만, 가정과 직장에서는 조그만 일에도 짜증과 불만을 토해낸다. 한국인의 믿음은 교회에서는 뜨겁지만, 가정과 사회에서는 차갑고 죽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가정 생활이 세속적인 마음과 짜증과 불만으로 가득차 있다면, 믿음으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일 남편이나 아내가 서로 거칠고 온유하지 않은 태도로 말을 주고 받는다면, 그들은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생명으로 의롭게 된 의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가! 만일 우리의“믿음”이 남편이나 아내에게 부드럽고 친절한 말과 음성을 들려주는 것과 같은“행함”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3:18. 살아있는 믿음이 없이는, 어떤 사람도 하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죽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영생을 결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닥쳐오는 모든 종류의 시험과 시련에 부딪힐 때마다, 우리는 살아있는 믿음으로 그것들을 대적하는가? 아니면 하루종일 그것들에 질질 끌려다님으로서 신경질과 분노와 원망 속에서 하루를 마치는가? 만일 남편과 아내로서, 우리가 살아있는 믿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도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교회에서 인정받는 장로(권사) 입니다. 나는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빠지지 않고 냅니다.” 물론, 그런 모든 희생과 헌신이 좋은 것이긴 하지만, 하루 하루를 믿음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우리 모두는 다시 한번 바울의 영감적인 말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은혜 비판

한국 기독교인은 은혜로 율법과 도덕적 원칙을 폐해 버렸다. 한국 기독교인은 십자가의 은혜를 정신적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다는 환상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 은혜에 대한 이러한 오해 때문에 깊은 회개의 경험과 죄와 세속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올 수 없게 된다.

대부분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은혜로 자신의 구원이 이미 확정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십계명과 성경의 진리대로 사는 삶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그들은 진정 은혜로 율법을 폐해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모본과 발자취를 따라가려고 마음과 생애를 바치는 대신에, 편히 앉아서 십자가의 은혜가 주는 위로와 용서를 즐기는 것이 한국인의 신앙이다.

그러나 은혜의 참된 가치를 아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생애하게 된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마 13:44. 죄의 용서를 위하여 우주의 왕이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면서 죽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얼룩진 은혜를 헐 값으로 팔아넘기려고 하는가?

십자가에서 제공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산산히 깨어지고 그 영혼은 그리스도의 진리 앞에 납작히 엎드려지게 된다. 그리하여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늘 아버지의 계명과 뜻을 받드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삶은 구원을 받아내기 위하여 마지못해 애쓰는 척하는 위선이나 고달픈 율법주의가 아니다. 이러한 삶이야말로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은 탕자가 감사와 기쁨으로 아버지의 뜻을 받들며 살아가는 참 신앙인의 자세이다. 

신장 결석, 꼭 수술해야 합니까?


신장 결석증은 콩팥 결석이나 요석증으로도 불리운다. 조그만 돌이 소변을 배설하는 통로에 생기기도 하지만(요석), 일반적으로 신장(콩팥)에 생기는 경우(신장 결석증)가 가장 많다.

돌의 크기는 모래알 만한 크기로부터 시작해서 오랜지 만한 크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신장 결석증은 30대에서 50대 사이에 발생되는데, 여자보다는 남자에게 더 많이 생긴다. 미국에서만 매해 약 20만명의 사람들이 병원에 돌 문제 때문에 입원하고 있다. 가장 일반적인 증세로는 갑자기 날카롭고 견디기 힘든 통증이 일어나는데, 멀미, 구토, 혈뇨, 그리고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온 몸이 땀으로 젖는 현상이 동반되기도 한다.

콩팥이나 비뇨기에 생기는 돌은 calcium oxlate, uric acid, struvite 이나 cystine 등과 같은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장 결석증으로 고생하는 미국인 환자들의 경우에는 calcium oxlate 성분으로 된 돌이 가장 많다. calcium oxlate 돌은 calcium phosphate(인산염화 칼슘) 성분을 포함하고 있다. 돌의 성분을 알면, 주의해야 할 식품의 종류를 파악할 수 있다. 우유나 비타민 D를 과잉 섭취할 경우에 calcium oxlate 결정들이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칼리 성분을 과다하게 섭취하는 경우에는 인산염화 칼슘의 결정이 형성될 수 있다. 푸린계 성분이 많이 함유된 식품을 섭취하는 사람들에게는 요산으로 인하여 돌이 생길 수 있다.

식이 요법 안내

1. 저단백식의 식단은 요석증 환자들에게 매우 유효한 도움을 준다.
2. 우유는 콩팥에 돌을 형성시킬 수 있다. 시카고 대학의 연구팀은 유당(lactose)과 칼슘이 둘 다 돌을 형성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3. 절대 금주해야 한다. 알콜의 섭취는 돌이 생길 수 있는 환경을 조장한다.
4. 정제된 탄수화물의 섭취, 즉 흰 설탕, 흰 밀가루, 흰 쌀과 같은 식품은 칼슘 결정 형성의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다. 설탕, 꿀, 시럽, 몰라시쓰 등과 같은 모든 종류의 농축된 감미료의 사용을 완전히 금하거나 극소량으로 제한해야 하며, 흰 밀가루와 흰 쌀의 섭취도 주의해야 한다.
5. 동물의 고기는 비뇨기계에 돌의 결정을 증가시키므로 피해야 한다. 채식으로 꾸며진 식단은 질병의 치료에 매우 효과적이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신장 결석증이 증가된 이유는 고기의 소모량 증가와 관련있다.
6. 저지방식을 해야만 한다. 1981년 ?ritish Journal of Urology”에 발표된 연구에 의하면, 지방에 의하여 공급되는 칼로리의 정도에 따라서 돌이 형성되는 확률도 증가한다.
7. 수산염 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차, 쵸코렛, 코코아, 커피, 콜라, 드링크제, 맥주, 감귤류, 사과, 포도, 크랜베리, 콩, 대황, 담배, 챠드, 상추, 시금치, 알몬드, 케슈, 고구마, 토마토, 오쿠라, 무화과, 구즈베리, 플럼, 래즈베리 등과 같이 수산염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식품을 피해야 한다.
8. Worcestershire 소스는 신장에 유독한 다량의 성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장 결석증의 요인으로 분류된다. 각종 조미료를 삼가해야 한다.
9. 30 명의 신장 결석증 환자 그룹에게 밀기울(bran)을 주었더니, 그들 중 22명의 환자에게서 소변의 칼슘 배설량이 20~25% 감소되었다. 이러한 칼슘의 배설량의 증가는 돌 형성의 위험률을 반 이하로 감소시키기에 충분하다. 환자들은 하루에 총 24그램의 정제되지 않은 밀기울을 매끼마다 나누어서 섭취하였다.
10. 메밀 요법: 정제되지 않은 메밀가루를 멀겋게 끓여서 매 시간마다 마시면 매우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

삼가해야 할 비타민류들

11. 비타민 C의 영양제를 삼가해야 한다. 이것은 돌의 형성을 촉진시킬 수 있다.
12. 비타민 D와 비타민 D를 첨가한 식품을 피해야 한다. 이것은 상피소체 홀몬 생성을 자극하기 때문에 삼가해야 한다.

수치료

13. 가장 안전하고 중요한 요법은 물을 많이 마시는 것이다. 환자들은 매시간마다 한 컵의 물을 마셔야 하며,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두 컵의 물을 마셔야 한다. 만약 밤중에 깰 경우에는 한 컵의 물을 마셔야 한다. 증가된 소변의 양은 소변의 농축 현상을 막아주며, 소변에 혈액이 섞여 나오는 현상을 막아 준다. 땀이 많이 나는 사람의 경우에는 물을 더 많이 마셔야 한다.
14. 부쿠 차를 마시면, 이뇨 효과에도 좋을 뿐 아니라, 수분도 섭취할 수 있는 이중의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일반적인 내용

15. 누워 있으면 콩팥의 배설 작용과 칼슘의 대사작용이 늦어지므로, 매일 옥외 운동을 함으로써, 신체 기관이 활발하게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누워있는 환자들에게는 돌이 더 잘 형성된다.
16. 아스피린과 같은 진통제는 돌의 형성을 증가시킨다. 콩팥에 유해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화학 의약품들을 피하는 것이 좋다.
 
 
 

라이프 스타일과 건강


헤롤드의 상황은 심각했다. 내가 간호원과 그의 심장 질환을 검사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사 선생님, 검사가 무슨 소용이 있어요! 인간에게는 각기 정해진 운명이 있으며, 또한 죽어야 할 시간도 정해져 있는데요. 정해진 수명을 변경할 수 없는데, 검사나 치료와 같은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헤롤드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가 건강과 삶에 대하여 얼마나 깊은 오해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오늘날 현대 과학은 우리가 선택하는 라이프 스타일(생활 방식)이 장수와 건강한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롤드는 건강을 타고난 운이나 재수에 맡겨버리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헤롤드에게 라이프 스타일(생활 방식)에 대한 선택과 건강의 관계를 이해케 해주는 좋은 실례를 설명해 주기로 하였다. “헤롤드, 어쩌면 당신이 믿는대로, 하나님은 당신이 죽어야 하는 최선의 시간을 미리 계획해 놓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자살을 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계획해 놓으신 죽음의 시간보다 빨리 죽는 것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살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니까요.”

우리 모두는 날마다 건강과 삶에 대한 중요한 결정과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 비록 우리가 한 순간에 자살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계속해서 해로운 물질들을 섭취함으로써 서서히 자살의 길을 걷게 되고, 또한 이로 인하여 삶의 행복을 잃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라이프 스타일

많은 사람들이 건강은 유전 인자를 통하여 부모로부터 물려받는다고 믿지만, 건강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요소에 의해서 결정된다.

1) 우리가 인체 속으로 받아들이는 것
2) 우리가 인체를 취급하는 방법

일반적으로 두 가지 개념을 한 마디로 줄여서, life style(라이프 스타일, 생활 방식)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건강에 유익한 라이프 스타일을 받아들임으로써, 건강과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도 있고 저하시킬 수도 있다. 어떠한 라이프 스타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질병의 진전을 막거나 예방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이미 유전자 속에 담겨져 있는 질병이나 연약한 체질도 극복할 수 있다. 라이프 스타일과 건강과의 이러한 관계에 대해서, 로마린다 의과대학의 라몸 멀덕 박사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잘못된 유전인자는 총에 총알을 장전시키는 것과 같고, 잘못된 라이프 스타일은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같다.”

나는 아직까지 이런 말을 듣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자동차가 폐기 처리될 시간을 이미 계획해 놓으셨다. 그러므로 나는 엔진 오일을 검사해 볼 필요도 없으며, 어떤 종류의 가솔린을 사용하는 것이 자동차의 성능에 가장 좋을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자동차를 어떻게 관리해야만 최고의 성능으로 오래 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인체도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잘 관리하면서 사용한다면, 오래 동안 최고의 기능을 발휘하면서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지 않겠는가?

죽음을 가져오는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심장마비나 뇌일혈로 죽었을 경우, 무엇이 그 사람을 그러한 치명적인 질병과 죽음을 몰고 왔겠는가? 미국 의학협회는 현대 미국인들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9가지 요소들을 발표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은 라이프 스타일과 깊은 관련이 있다. 라이프 스타일 (인체 속에 들어가는 것과 인체를 취급하는 방법)과 현대인의 죽음의 원인에 대한 비교표는 다음과 같다.

현대 미국인의 죽음과 그 원인들 1990년 기준

1. 잘못된 식사법과 부적당한 운동 (582,000명)
2. 담배 (468,000명)
3. 술 (107,000명)
4. 감염성 질병 (90,000명)
5. 환경 독소로 인한 사망 (60,000명)
6, 화재 (35,000명)
7. 성교 관련 질병 (30,000)
8. 자동차 사고 (25,000명)
9. 마약 (20,000명)

위의 9가지 사망 요인들 중 상위 세 요인은 라이프 스타일과 직접적으로 관련있으며, 나머지 대부분도 간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다. 미국에서 매해 사망하는 125만명 중에서 50% 이상이 잘못된 라이프 스타일로 인하여 죽음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라이프 스타일의 중요성을 간과한채, 약과 보약으로 자신의 건강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다. 해마다 수많은 종류의 약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위의 표에서 4위를 차지하고 있는 감염성 질병도 실제에 있어서는 라이프 스타일과 깊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잘못된 식사와 부적당한 운동량로 인하여 인체의 저항력(면역 시스템)이 저하되면, 그 결과 인체는 각종 감염성 질병들로부터 보호해줄 방어벽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현대인들이 올바른 라이프 스타일을 선택하고 모든 해로운 것들을 삼가한다면, 조기 사망률은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며, 노년의 삶을 건강하게 살게 될 것이다. 조기 사망률이 감소될 뿐 아니라, 뇌졸증이나 중풍으로 인하여 생애가 비참함으로 채워지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예방이 열쇠!

조기 사망을 가져오는 대부분의 질병은 예방될 수 있다. 1995년, 각종 사망률을 조사한 결과 다음과 같은 사망률 통계 자료를 얻었다.

1. 심장 및 혈관성 질병 (914,000명)
2. 암 (538,000명)
3. 만성 폐질환 (105,000명)
4. 사고 (90,000명)
5. 폐렴 (84,000명)
6. 당뇨병 (59,000명)
7. 에이즈 (43,000명)
8. 자살 (31,000명)
9. 간경화 (25,000명)
10. 신부전증 (24,000명)

미국 정부의 Surgeon General로서 일했던 에버렛 쿠프 박사는 미국인들을 조기 사망으로 이끄는 10가지 원인들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6가지 항목을 발표하였다.

1. 식사는 매우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2. 상위 사망률 9가지 중에서 5개는 식사와 관련 있다.
3. 10가지 중에서 3가지는 음주와 관련 있다.
4. 식사와 음주로 인한 사망자 수는 1987년도 전체 사망 자 수 2백 십만명 중에서 1백 5십만명을 차지한다.
5. 부적당한 식사와 영양의 불균형 문제는 고혈압, 비만, 치과질환, 골다공증, 그리고 위장질환의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6. 그러므로 식사는 이들 질병들을 조절하거나 예방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당신의 건강 나이는?

올바른 라이프 스타일이 사람들의 수명을 연장시켜 줄 수 있는가? 캘리포니아의 알라미다 카운티에 사는 주민 7000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다음과 같은 7가지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 요소들이 사람의 수명에 밀접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이 7가지 요소를 “벨록과 브레슬로우의 7가지 장수 원칙”이라고 부른다.

벨록과 브레슬로우의 7가지 장수 원칙

1. 하루에 7~8시간의 수면을 취할 것
2. 간식을 금할 것
3. 아침 식사를 규칙적으로 할 것
4. 몸무게를 적당하게 유지할 것
5. 정기적으로 운동할 것
6. 금주할 것
7. 금연할 것

위의 7가지 요소들을 모두 지키면서 생활한 사람들의 95%가 3가지 이하의 요소를 지킨 사람들보다 9년 이상 더 살았다.

라이프 스타일과 장수의 관련성을 알아보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는데, 그것을 “건강 나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서, 매우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로 사는 50세의 사람이 평균 35세 정도와 동일한 수준의 건강/생리학적 나이를 가지고 있다면, 이 사람의 “건강 나이”는 35세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실제 나이가 50세일지라도 잘못된 라이프 스타일로 살기 때문에 건강의 정도가 72세와 같은 수준이라면, 이 경우에 “건강 나이”는 72세이다. 그러므로 어떤 라이프 스타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건강 나이는 실제 나이보다 많아질 수도 있고 적어질 수도 있다.

캘리포니아 알라미다 카운티에서 이루어진 실험을 토대로 다음과 같은 “건강 나이 환산표”가 작성되었다.

실제 나이 0~2가지 3가지 4가지 5가지 6가지 7가지

20세 +14.3 +7.4 +0.5 -1.1 -4.2 -9.4
30세 +16.9 +9.1 +3.0 -0.6 -4.7 -11.1
40세 +19.4 +10.7 +5.4 -0.1 -5.2 -12.9
50세 +22.0 +12.4 +7.9 +0.3 -5.7 -14.7
60세 +24.5 +14.0 +10.4 +0.8 -6.2 -16.4
70세 +27.1 +15.7 +12.8 +1.3 -6.8 -18.2

이 표를 사용하여 독자 자신이 현재 어떤 건강 나이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다. 벨록과 브레슬로우의 7가지 장수 원칙 중에서 몇가지를 실행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자신의 건강 나이가 젊어질 수도 있고, 실제보다 더 늙어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자신의 실제 나이가 40세인데, “벨록과 브레슬로우의 7가지 원칙” 중에서 오직 2가지만을 생활화하고 있다면, 이 경우에 있어서 건강 나이는 49.4세(40세+19.4세)가 된다. 비록 실제 나이가 40세일지라도, 생리학적으로나 건강적으로 자신이 느끼는 건강은 49.4세에 해당된다는 의미이다. 만일 이러한 라이프 스타일로 10년 더 살아서 실제 나이가 50세가 되었을 경우, 이 때의 건강 나이는 62세(50세+22.0세)가 된다. 건강 원칙들을 생활화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경우, 나이가 들수록 실제 나이와 건강 나이의 차이는 점점 더 커진다.

이와 반면에, 실제 나이가 40세인 사람이 벨록과 브레슬로우의 7가지 장수 원칙 모두를 생활화하여 살아간다면, 그 사람의 건강 나이는 27.1세(40세-12.9세)가 되어 실제보다 12.9년이나 젊은 건강을 가지고 살게 된다.

“건강 나이표”는 라이프 스타일이 노화를 앞당길 수도 있고, 늦출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매우 명백하게 보여준다.

꼭 아침 식사를 하세요!


어떤 사람들은 앞 기사에서 언급한 “7가지 건강원칙” 가운데 “아침 식사를 규칙적으로 할 것”이라는 내용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한다.

아침 식사를 규칙적으로 하는 사람과 아침 식사를 거르면서 간식을 하는 사람들 사이의 조기 사망률 사이에는 거의 50%에 가까운 차이가 있다. 특별히, 노년에 들어갈수록, 정기적인 운동과 금연의 중요성 만큼이나 규칙적인 아침 식사 습관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개 저녁 식사를 과식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침 식사를 충분하게 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규칙적인 아침 식사 습관을 갖기 원하는 사람은 저녁 식사를 가볍게 일찍 마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된다. 일주일 동안 저녁 식사를 거르면, 아침에 배고픔을 느끼게 되어 충분한 양의 아침 식사를 즐길 수 있게 된다. 저녁 식사를 가볍게 할 경우, 밤 시간에 깊은 수면을 취할 수 있고, 위장이 비어있는 상태로 잠자리에 들게 되어서, 몸 전체가 밤 시간에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저녁 식사를 이른 시간에 가볍게 하고, 채소와 곡류로 이루어진 아침 식사를 푸짐하게 먹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건강 습관이다.

아침 식사와 살빼기

아침 식사를 하면 살찌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아침 식사를 꼭 해야만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아침 식사를 거를 경우 몸무게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아침 식사를 거를 경우, 간식이 늘어나게 되고, 저녁 때에는 심한 허기를 느끼게 되어서, 저녁 식사를 포식하게 된다. 그리고 저녁 식사가 미처 소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잠자리에 들게 되어서 미처 발산시키지 못한 칼로리가 비만의 원인으로 남게 된다.

몇 해 전에 챨스 쿠프 박사는 “식사 시간의 변경과 체중 감소의 관계”라는 연구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비만증 환자들에게 아침 식사와 점심 식사만을 제공하는 1일 2식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 경우, 환자들의 마지막 식사는 오후 3시를 결코 넘지 않도록 조절하였으며, 마지막 식사를 마친 후에 적어도 6시간이 지난 후에야 잠자리에 들도록 하였다. 환자들의 음식 섭취량을 제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이러한 식사법을 따랐을 경우, 혈중 헤모글로빈 수치가 향상되고, 혈중 당의 양이 저하되며, 갑상선의 기능이 원활해 지는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아침 식사와 심장 마비

아침 식사를 규칙적으로 할 경우, 심장마비의 위험률이 저하된다. 과학자들은 하루 중 아침 시간에 혈액(platelets)이 보다 더 끈적거려지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혈액이 응어리지는 이러한 현상이 심장 혈관에서 발생되면, 심장마비가 일어날 확률이 높아진다. 이러한 생리학적 현상 때문에 오전 7시~12시 사이에 심장마비가 일어나는 경우가 가장 빈번하다.
아침 식사를 규칙적으로 하면, 아침 시간에 혈액이 끈적거려져서 응어리지는 생리적 현상이 감소되기 때문에 심장마비의 확률도 낮아진다. 심장질환 환자들은 아침에 기상하여 2~3시간 내에 심장마비가 발작하는 경우가 가장 많은데, 아침 식사를 규칙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아침 식사를 하는 사람들에 비해서 아침 시간에 심장마비에 걸릴 확률이 2.5배나 높아진다.

아침 식사와 정신력의 관계

1995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아침 식사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연구 발표하였는데, 그들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아침 식사는 어른과 아이 모두에게 있어서 지식 습득력, 기억력, 그리고 몸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침 식사를 충분하게 섭취하는 습관은 인체의 기능을 극대화시키며, 육체적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중요한 도움을 준다. 다음은 아침 식사로 인하여 인체가 얻을 수 있는 유익들이다.

1. 보다 효과적인 문제 해결 능력
2. 기억력 향상
3. 언어 능력의 향상
4. 주의집중력 향상
5. 학습 능력 향상
6. 태도와 매너 향상

수면과 운동


수면과 운동은 모두 조기 사망률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요소들이다. 30세에서 69세 사이의 남녀를 대상으로 9년 동안 조사한 결과 다음과 같은 통계 결과를 얻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위한 최적의 수면 시간은 하루에 6~9시간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보다 지나치게 적게 자거나 많이 자는 사람들의 사망률은 이상적인 수면을 취하는 사람들에 비해서 높았다.

남자들의 경우에는 수면을 지나치게 적거나 많이 취하는 사람들의 사망률이, 규칙적인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사망률과 비슷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사망률은 정기적으로 운동하는 사람들의 사망률보다 50% 정도 높았다.

운동을 적게 하는 여성의 경우, 사망률은 남성의 경우보다 훨씬 높았다. 여성들은 수면보다는 운동이 사망률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운동을 하지 않는 여성은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는 여성보다 2배 이상 사망률이 높았다.


운동

운동은 모든 연령의 사람들이 건강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아무리 살이 많이 쪘다고 할지라도, 정기적인 운동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연한을 채우지 못하고 죽는 조기 사망을 피할 수 있다.
체중이 초과된 비만형의 사람들과, 운동으로 몸무게를 정상으로 유지시켜온 사람들과, 그리고 한 때 비만형이었다가 몸무게를 줄이는데 성공한 사람들의 사망률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1. 운동을 통하여 적당한 몸무게를 유지해 온 사람들의 사망률은 체중이 초과된 사람들보다 70% 이상 낮다.
2. 한번 비만 상태가 되었다가 몸무게를 낮추는데 성공한 사람의 사망률은 체중이 초과된 사람들보다 50% 낮다.


결 론

건강은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거나 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물려 받은 체질이나 재수로 돌리기 때문에 라이프 스타일의 중요성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수명을 채우기 위하여 우리가 어떤 라이프 스타일로 살아가야 할지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다.

벨록과 브레슬로우의 7가지 건강 원칙들은 단순하지만, 매우 효과적인 건강 라이프 스타일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보약도 이 7가지 건강 법칙보다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없다. 이것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인류의 조상에게 주신 건강의 법칙이다. 아름다운 에덴의 자연 환경 속에서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과일과 채소와 곡류를 먹으면서, 맑은 공기와 충분한 운동을 하면서 살았던 아담과 하와의 라이프 스타일이야말로 인류가 다시 회복해야만 하는 최고의 건강 라이프 스타일이다.

서론 - 누가 감히 신앙 생활의 원칙들을 허물고 있는가?


예수님께서, 옛날 유대 땅에 사실 때처럼 이 지구상을 다시 여행하시면서, 주님을 믿노라고 모여있는 현대 교회들을 두루 다니시며 설교하실 기회를 가지신다면 과연 어떠한 말씀을 하실까?

다투어 가며 교회 성장을 이루고, 웅장하고 높이 솟은 교회 건물들을 자랑하고 있는 현대 교회들을 바라보시면서 어떠한 말씀을 하실까? 당신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너무나 다른 가르침들과 사상들을 주고 받고 있는 현대 교회들을 바라보시면서 과연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 옛날 초대교회들이 점점 타락하게 된 이유들 중 가장 큰 두가지가 있었다.

첫째로, 사도들의 가르침, 다시 말해서 올비른 성경 진리의 가르침이 퇴락되고 인간의 이론과 가르침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된 것이었고,

둘째로, 사람들을, 특히 이교도들을 교회안으로 쉽게 들여 오기 위하여 교회의 표준을 낮추어 놓은 것이 그 이유었다.

사람들을 구원하고 교회 안으로 이끄는 것은 좋은 일이었고 교인들의 사명이다. 그러나 전도는 반드시 진리를 가지고 해야하는 것이다. 영혼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주께서 가르치신 진리로 이끌어 오는 것이 전도요 영혼 구원 사업이지, 영혼들을 사랑이 많은 곳으로 이끌어 와서 사교장을 만드는 것이 전도가 아닌 것이다. 흔히들 우리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과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회 복지 사업과를 자주 혼돈하고 있는 것같다.

구원과 구제 사업과는 엄격한 차이가 있다. 10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 갔으나 한 명만 돌아와 감사를 드리고 주님을 따르고자 하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열명을 고쳐 주지 아니하였느냐? 나머지 아홉은 어디 에있느냐?”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분부하시지 않았던가! “너희는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주께서 명령하셨다. 숫자의 증가보다는 진리를 이해하고 진리로 거룩함을 받는 신자들의 자질이 하나님께는 더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현대교회는 잊어버린 것 같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현대교회는 잊어버렸는가? 참된 남은 무리에 대한 성경의 반복적인 강조를 이 시대의 교회들은 망각한 것 같이 보인다.

현대 교회들에 팽배한 기복신앙들을 보라! 마치 하나님을 복권을 파는 상인처럼 이해하고 있는 많은 교인들을 보라! 자식이 시험에 합격하게 해 달라고 불상 앞에서 밤을 새며 기도하고 있는 불교인들과, 자기의 소원을 아뢰며 응답받을 때까지 조르는 기독교인들과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심판과 지옥불이 무서워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과 귀신들이 오지 못하게 부적을 붙이며 진지하게 주문을 외우는 이교도인들과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성경은 성화의 생애를 강조하고 있다. 과거의 옛 생활에서 벗어나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가 없으면 그 사람은 진심으로 가듭난 자가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주님의 십자가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하였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거나 파괴하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성경은 말쑴하고 있다.(요 14:15,21; 요일 5:2,3 참조). 이 얼마나 현대 교인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인가?

이번 호는 바로 이 시급한 현대 교회의 문제인,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신앙생애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독자 여러분들에게 엄청난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마음 문을 크게 열고 정독하시게 되기를 바란다.

1부 - 참 신앙 부흥과 거짓 신앙 부흥의 차이


죄인이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때, 죄인은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가? 어떤 경험이 참된 신앙 부흥의 경험인가?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 올 때에 어떤 변화가 생기게 되는가? 제1부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참된 신앙 부흥의 단계

첫 번째 단계 : 진리와 죄에대한 자각심

진리에는 사람의 생애와 성품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진리가 전해진 곳에는 그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증거하는 결과들이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의 영이 진리를 전하는 당신의 종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하늘의 권능이 전달된다. 순수한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 사람들의 양심은 깊이 각성되고 예민해 진다. 진리의 빛은 죄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추어졌던 비밀을 드러낸다. 빛을 받는 영혼마다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고, 의를 사모하며, 장차 올 심판을 인식하게 된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의와 자신의 생애를 견주어 보면서, 깊은 자책감과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부르짖게 된다.

두 번째 단계 : 십자가와 회개, 그리고 용서

죄인은 죄에 대한 자각심으로 인하여 생기는 어쩔 수 없는 좌절감 속에서 십자가를 바라보게 된다.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무한한 희생을 치루신 갈보리의 십자가가 분명하게 죄인 앞에 제시되자, 죄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공로로 인하여 자신의 죄가 넉넉히 속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다. 죄인은 믿음과 겸손과 감사한 마음으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받아들인다. 그의 마음 속에는 지나간 생애 동안에 자신의 영혼을 더럽혀온 죄와 부정직에 대한 깊은 회개가 일어난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인은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을 받게 된다.

세 번째 단계 : 회개에 합당한 열매

진리의 빛을 받고 십자가를 바라본 죄인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된다. 옛 사람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로운 생애를 살게 된다. 전에 좋아하던 정욕적인 것들로 자신의 생애를 더럽히지 않고, 믿음으로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게 된다. 전에는 사단의 품성을 반사하던 사람이 이제는 주님의 품성을 반사하며, 그분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

전에 미워하던 것을 이제는 사랑하고, 전에 사랑하던 것을 이제는 미워하게 된다. 교만하고 자기 주장만 하던 사람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된다. 허영을 좋아하고, 거만하던 사람이 착실하고 조심성 있게 된다. 불경하던 자가 경건해지고, 술주정뱅이가 술을 끊고, 방탕하던 자가 순결해진다. 세상의 허영과 유행을 쫓던 습관은 사라진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는 성경의 권면을 겸손하게 받아들인다(벧전 3:3,4).

네 번째 단계 : 영혼들에 대한 애절한 사랑과 동정

참된 신앙 부흥은 마음을 깊이 살피는 일과 겸비한 정신을 가져온다. 참된 신앙 부흥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은 이웃과 동료들의 구원을 위하여 열렬하게 일하며, 그리스도의 피로 산 영혼들에 대한 애절한 동정을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다. 진리로 인하여 당하게 되는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도리어 그리스도를 위하여 비난과 시련받는 것을 합당히 여기고 즐거워 한다.
사람들은 참된 부흥을 경험한 사람의 생애에 나타난 분명한 변화를 바라보게 된다. 주변에 있는 이웃들과 지역 사회는 참 그리스도인의 영적 감화로 인하여 유익을 얻게 된다.

위에 언급한 4단계의 경험을 하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근심함으로 회개”한 자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을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고후 7:9~11

거짓 신앙 부흥의 실상

참된 신앙 부흥의 경험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께서 역사하신 결과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개혁이 동반되지 않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니다. 자신이 서약한 것을 이행하고, 도둑질한 것을 돌려주고, 잘못을 범한 친구에게 찾아가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과 동료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을 때에 나타나는 증거이다. 역사를 뒤돌아 볼 때, 종교적으로 대각성이 일어나고 신앙이 크게 부흥되었을 때에는 항상 이러한 결과들이 있었다. 그들은 인위적인 방법이 아니라 자신의 품성과 생애에 맺힌 아름다운 열매를 통하여 다른 영혼들을 구원하였다.

그러나 근래에 나타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부흥은 과거의 그것과는 매우 현격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근래에 들어서 전에 없이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관심을 보이면서 교회를 찾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 속에서 참된 영적 부흥의 증거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일시적으로 불타오른 신앙은 오래가지 못하고 꺼져 버리며, 그 후에는 의심과 허탈감 속에서 이전보다 더 깊은 암흑 속으로 떨어지게 된다.

교회를 급성장시키기 원하는 교회 지도자들은 신앙 부흥을 인기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사람의 감정과 상상력을 자극하여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방법으로 예배를 주도하고자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리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성경 말씀 자체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신앙을 감정적으로 자극하는 특성이 없는 집회에는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감정적 부흥 집회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감정에 호소하는 대신에 이성과 양심에 호소하는 기별에 대해서는 전혀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들의 구원과 영생에 직접 관련있는 분명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은 각성되지 못한다.

참된 회개를 경험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진리에 대한 연구는 인생의 가장 큰 주제가 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 모여들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헌신의 정신이 있는가? 회개하고 거듭났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교만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들은 회개하기 전과 다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면서도 그리스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진리의 원칙에 대하여 무지한 자들을 보면서, 무신론자들과 회의론자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농담과 조롱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교회에서 경건의 능력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교회 안에 들어 온 야유회, 연극, 바자회, 화려한 건축물, 사람의 업적을 찬양하는 일, 유행과 화장, 운동과 세속적 음악이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빼앗아 버렸다. 집과 토지, 직장과 사업이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서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거의 주목하여 볼 수 없게 되었다.

대체로 거짓 신앙 부흥의 경험 때문에 감정적 신앙을 갖게 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에는 눈물을 흘리지만, 그분께서 말씀하신 진리에 온 마음과 생애를 던져서 순종하는 생애를 살라는 호소에는 등을 돌린다. 그들의 관심은 기적과 감정을 자극하는 부흥 집회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성령의 조용한 회개시키는 역사에는 별다른 반응을 나타낼 수 없게 된다.

 

승자와 패자

승자는 몸을 바치고,
패자는 혀를 바친다.

승자는 행동으로 말을 증명하고,
패자는 말로 행위를 변명한다.

승자는 진리와 진실 위에 인생을 걸고,
패자는 실리와 욕심에 인생을 건다.

승자는 처벌받을 각오로 살다가 상을 받고,
패자는 상을 위하여 꾀를 부리다가 벌을 받는다.

승자는 잘못 했을 때에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지만,
패자는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승자는 입에 솔직과 정직이 가득하고,
패자의 입에는 거짓과 핑계가 가득하다.

승자의 패배 속에는 정직이 있고,
패자의 승리 뒤에는 부정직과 계략이 있다.

승자는 부지런하지만,
패자는 게으르다.

승자는 시간을 관리하지만,
패자는 시간에 끌려다닌다.

승자는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지만,
패자는 패배가 두려워 도전하지 않는다.

승자는 눈을 밟아 길을 만들고,
패자는 눈녹기를 기다린다.

승자의 주머니 속에는 꿈이 있고,
패자의 주머니 속에는 욕심이 있다.

승자는 나누어주는 손을 가지고 있고,
패자는 끌어모으는 손을 가지고 있다.

승자는 자신의 부족을 살피지만,
패자는 상대의 약점을 살핀다.

승자는 진리를 사랑하지만,
패자는 진리를 싫어한다.

2부 -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방법


현대 기독교회 안에서 경건의 능력과 참된 신앙 부흥의 경험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교회 안에는 아직도 그리스도를 진실히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과 사도들에게 놀라운 경건의 부흥이 있었던 것처럼,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 즉, 짐승의 표가 온 세상에 강요될 때에도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일찌기 목격하지 못한 놀라운 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놀라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짐승의 표를 거절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체를 가리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계 14:12). 그 때가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온 마음을 다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아온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사랑하는 무리들로부터 분리되어 나올 것이다. 지금 성령께서는 진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는 한 백성을 모으시고 계신다.

그러나 사단 역시 온 세상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기 위하여 애쓰고 있다. 사단은 거짓 기적과 거짓 신앙 부흥 운동을 통하여 온 세상을 자신의 기만 가운데로 끌어들이고 있다. 사단은 자신의 기만적 세력 아래 모이는 교회들 위에 마치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내린 것처럼 보이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사단은 자신이 인도하는 어떤 교회들 안에 커다란 신앙 부흥이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되도록 유도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실상은 전혀 다른 영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셨다고 기뻐하고 있다. 감정적 신앙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단의 교묘한 수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때가 가까울수록 감정적인 신앙 부흥 운동은 점점 더 광범위하고 열렬하게 일어날 것이다. 사단이 마지막 시대에 일으키는 거짓 신앙 부흥운동은 기적과 초자연적인 현상을 포함하고 있거나, 진리와 거짓이 매우 교묘하게 섞여 있는 형태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매우 단호한 성경 연구가 요구된다. 사단의 미혹이 아무리 교묘하다고 할지라도, 아무도 속임을 당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보면 그런 거짓 신앙 부흥 운동을 분별하기가 결코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증거를 등한히 하고, 계명과 진리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고, 세속과 정욕을 단호히 거절하지 않으며, 분명하고 마음을 살피게 하는 진리에서 돌아선다면,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하심을 받을 수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마귀의 영과 하나님의 영을 분별할 수 있는 5가지 기준을 성경에 기록해 두셨다.

영을 분별하는 5가지 방법

1.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이사야 8:20. 하나님의 영을 가진 사람은 율법(십계명)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며, 그 믿는 바가 성경 진리에 일치해야 한다.

2.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는 진실로 여호와의 보내신 선지자로 알게 되리라” 예레미야 28:9. 하나님의 영을 가진 사람은 그 주장하는 바가 그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3.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 7:20. 하나님의 영을 가진 사람의 성품에는 분명한 성령의 열매가 맺혀져 있어야 한다. 가정과 교회와 직장에서 모든 언행이 일치하고, 정직하고 순결한 생애를 사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영을 가진 사람이다.

4.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 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요한일서 4:1~3.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오셔서 시련과 고통 중에서 승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을 가진 사람들도 그분의 모본을 따라서 죄와 시험을 승리하는 삶을 산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계명을 지킬 수 있어도, 우리는 지킬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다. 성령을 받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5.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14:11,12. 하나님의 영을 가진 사람들은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데, 그들의 특성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리를 통하여 당신 자신의 뜻을 계시해 주셨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모두 사단의 속임수에서 보호를 받게 된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에 온갖 악과 기만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이 열린 것은 진리에 대한 연구를 등한히 하기 때문이다. “진리가 무엇이고, 성경이 무엇을 요구하던지 간에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라는 사상이 온 교회를 좀먹어 가고 있다. 하나님의 계명의 의미와 그 의무에 대한 잘못된 개념 때문에 회개와 성화에 대한 치명적인 오류가 기독교회 전체에 걸쳐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 결과, 교회 내에 경건의 표준이 땅에 떨어졌으며, 하나님의 영과 그 권능이 결핍되게 되었고, 따라서 신자들은 그들의 생애와 마음에 거룩한 변화의 경험을 하지 못한 채 교회의 문턱만을 넘나들게 되었다.

현대 기독교회의 위기

오늘날 각 교파에 흩어져 있는 경건한 신자들과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면서 개탄하고 있다. Edwards A. Park 교수는 종교계가 당면해 있는 위기를 보면서 다음과 같이 통찰력있는 직언을 하였다.


분명한 음성

“위험의 한 가지 원인은 설교 강단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강조하는 일을 게을리 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강단이 양심의 소리가 메아리치는 곳이었다 ... 우리의 가장 유명한 설교자들은 주님의 본을 따라서 강단에서 율법과 그 교훈과 엄숙한 하나님의 계명(명령)을 명백히 가르쳐 줌으로써, 언제나 놀랄만한 능력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항상 두가지 큰 원칙을 반복하여 강조했는데, 그것은 곧 율법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나타내는 사본이기 때문에, 율법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복음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원칙이었다.

“십계명 가운데 첫째부터 네째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이고, 다섯째부터 열째 계명은 사람들 사이의 사랑과 도덕에 대한 계명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를 거절하는 자는 복음을 거절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율법은 복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품성을 반사하는 하나의 거울이기 때문에, 율법(십계명)을 사랑하지 않으면, 죄의 흉악성, 죄의 영향이 미치는 범위, 죄의 결점들을 과소 평가하는 위험을 가져오게 된다. 율법이 무시되는 곳마다 죄와 부도덕이 올라오게 된다. 율법을 거역함으로 조성되는 악은 그 율법의 의에 비례한다.

“현대 기독교회는 사랑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과소 평가하는데, 공의가 빠져 있는 사랑은 감정적이고 인간적인 사랑에 불과하다. 현대 기독교회에 편만해 있는 치명적인 잘못은 하나님의 공의를 하나님의 자비와 분리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를 전혀 무원칙적인 하나의 감정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이것을 이른바 신신학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사랑으로 공의를 무력화시키고, 복음(십자가)으로 율법을 무시해 버림으로써, 사랑과 공의, 그리고 복음과 율법이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산산조각으로 해체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율법은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물론, 선한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집행시키는 공의 역시 선한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과 공의, 인간의 불순종과 죄를 과소 평가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은 죄를 속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마련된 은혜도 과소 평가하는 습관을 갖게 된다.”

3부 - 천국 가는 길


율법에 대한 잘못된 개념

의외로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으로 율법을 폐하셨기 때문에, 십자가 이후부터는 인류가 율법의 요구에서 해방되었다는 가르침을 설교하고 있다.

그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율법을 바리새인들이 만들어 놓은 무거운 멍에처럼 나타내고, 율법은 우리를 속박하는 것이고 복음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처럼 설명한다.

그러나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윗은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행보할 것이오며” 라고 말했으며(시 119:45), 또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라고 말했다(시 40:8). 사도 야고보는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여전히 십계명을 “최고의 법” 또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말하였다(약 2:8. 1:25). 또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지 반세기가 지난 후에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면서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라고 선언했다(계 22:14, 한글 성경에는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라고 번역되었지만, 킹제임스나 다른 영어 성경에는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는 원어의 의미가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음).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으로써 하늘 아버지의 율법을 폐하셨다는 말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주장에 불과하다. 만일 하나님의 율법이 변경되거나 폐지될 수 있었다면, 사람을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을 폐지하기는 커녕 율법의 불변성을 가장 강력하게 증명해 준다. 하나님의 아들은 “율법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사 42:21, 킹제임스 영어 성경). 그리스도께서도 이 점을 분명히 하셨다. “내가 율법을 ....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7,18.

율법은 본질적으로 변하거나 폐해질 수 없는 영원불변한 것이다. 그것은 율법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므로 율법도 사랑이다. 율법의 두가지 큰 원칙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사람에게 대한 사랑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다(롬 13:10). 어머니가 어린 아이에게 “거짓말하지 말라”나 “도둑질 하지 말라”는 계명(명령)을 주는 것이 어찌 사랑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저항과 불순종의 기질을 버리지 못한 거듭나지 못한 아이라면, 어머니의 그러한 사랑의 명령을 거절하고 싫어할 것이다. 그러한 명령을 너무나 지겹고 무거운 것으로 느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3. 사랑은 율법을 폐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으로 인도한다.

하나님의 품성이 의와 진리인 것처럼, 율법의 본질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시편 기자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 ... 주의 모든 계명은 의로우니이다”라고 말했다(시 119:42,172). 사도 바울 역시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라는 동일한 간증을 하였다(롬 7:12). 이와 같이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가득 담겨져 있는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에, 반드시 영구적이어야 하며 불변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이기적이고 반항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지킬 수 없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과의 불목의 관계를 화목시켜주는 것이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회개와 성화의 역사이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과 본성에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살았다. 의의 원칙이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옴으로써, 창조주와 사람을 분리시켰다. 인류는 더 이상 하나님의 품성을 반사할 수 없게 되었다. 마음과 본성은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과 부딪치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7.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창조주와의 조화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워지고 위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음으로써, 율법과 일치한 생애를 살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새로 태어나는 것인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변화가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3


율법과 그리스도인 신앙

죄가 들어옴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이 깨어졌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첫째 계단은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죄는 불법이라” 요일 3:4.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 죄인이 죄를 깨달으면, 먼저 자신의 품성을 하나님의 위대하신 의의 표준에 비추어 살펴보아야 한다. 율법은 의로운 품성의 완전함을 보여주는 거울로서 죄인에게 그의 결함을 분별하게 해준다. 어떤 사람들은 율법을 바리새인처럼 겉으로 드러난 행위에만 적용하지만, 율법(십계명)은 마음의 중심을 살피는 기능을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율법이 행위와 마음의 중심을 함께 살핀다는 사실을 설명하셨다(마 5:28).


율법이 사람에게 죄를 나타내 보여 주기는 하지만, 죄를 치료해 주지는 못한다. 율법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생명이 약속되고, 율법을 범하는 자에게는 죽음이 선고되지만, 율법 자체에는 아무런 생명력도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죄로 인한 사형 선고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킬 수 있으며, 죄인의 성품을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성품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죄 때문에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 바쳐진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하늘로부터 회개하는 심령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은 율법의 정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늘의 품성을 받아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율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 단계가 되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양자의 영을 받아서 창조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며, 거듭남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경험을 통하여 사람은 새로운 소원과 새로운 동기를 소유하게 되고, 하나님의 진리와 율법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거나 범하는 삶을 살아도 무방한가? 이 질문에 대해서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고 대답한다(롬 3:31, 6:2).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었던 죄인이 거듭남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변화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3.

거듭남의 경험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 위대한 변화가 죄인의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면,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죄에서 거룩함으로, 범죄와 반역에서 순종과 충성으로 옮겨지게 된다. 이제, 거듭남을 경험한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은 더 이상 무거운 멍에나 지겨운 속박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드디어 자원하는(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게 된다. 하나님과 멀어져 있던 옛 생애는 끝나고 믿음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화목의 생애가 시작된다. 그리하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된다(롬 8:4). 그 때에 비로소 심령 깊숙한 곳으로부터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라는 다윗과 같은 간증을 할 수 있게 된다(시 119:9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한다(시 19:7). 율법 자체에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구원을 가져다 주는 능력이 없지만, 그것은 사람을 의의 길로 인도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 3:24. 율법이 없으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성성과 순결함, 그리고 자기 자신의 죄와 부정직에 대해서 올바른 관념을 가질 수 없다. 그들은 죄에 대하여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고 회개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롬 7:7. 따라서, 율법을 무시하는 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죄책감을 갖지 못하게 되며, 자신의 속절없는 상태를 알지 못하고, 속죄의 은혜가 담겨져 있는 그리스도의 피를 절실한 마음으로 감사할 수도 없게 된다. 그리고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나 생애의 개혁도 없이, 구원에 대한 헛된 소망을 가지고 무력한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아가게 된다. 그리하여 피상적인 회개가 습관화되고, 단 한번도 그리스도와 진정으로 연합한 경험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교회 안에서 가야할 길을 찾지 못한 채 서성거리고 있다.


 거룩함(성화)에 이르는 길

현대 기독교회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린 결과, 거룩함(성화)에 대한 여러가지 잘못된 가르침들이 교회 안에 일반화 되고 말았다. 잘못된 교리는 잘못된 경험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실생활에 있어서 매우 위험한 결과를 가져온다. 안타깝게도, 성화에 대한 잘못된 교리가 교회 안에서 매우 인기있는 가르침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이 문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명백하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거룩함(성화)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중요한 교리 중의 하나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말하였으며(살전 4:3), 또한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 ... 기를 원하노라”고 기원하였다(살전 5:23). 성경은 거룩함(성화)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다(요 17:17). 바울도 교인들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롬 15:16). 성령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무슨 일을 하심으로써 그들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가?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셨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 요 16:13. 또한 시편 기자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 ... 주의 모든 계명은 진리니이다”라고 기록하였다(시 119:142,151). 사람은 성경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에 구현되어 있는 의의 대 원칙들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율법의 의미와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된다.


하나님의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거울과 같으므로, 그러한 율법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이 거듭나서 정결하게 되어야만 하며, 의로운 율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아갈 때에 형성되는 품성 또한 거룩하여진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면에 있어서 완전한 품성의 모본을 보여 주셨다.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다고 말씀하셨다(요 15:10, 8:29).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과 같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거룩한 율법의 원칙과 일치하는 품성과 생애를 가져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성화(거룩함)이다.


성화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을 마음 속에 받아들임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권면하였다(빌 2:12,13). 그리스도인 역시 죄의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악을 받아들이고 즐기는 대신에 항상 그것에 대항하여 “피흘리기까지 싸”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죽기까지 죄와 싸울 것을 촉구하였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 대항치 아니하고” 히 12:4.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딤전 6:12. 성령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필요되는 곳은 바로 이 싸움이다. 연약한 사람이 믿음의 손을 뻗어서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붙잡을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는 승리의 간증을 할 수 있다(고전 15:57).
성경은 성화의 과업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죄인이 회개하여 속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시작된다. 이 때부터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데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나야 한다. 사도 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말하였다(빌 3:13,14). 베드로도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성화의 과정을 계단으로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 너희가 이것을 행한 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벧후 1:5~10

 Do you know this?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골로새 2:14,16


위에서 언급한 골로새서 2장에 나오는 말씀이야말로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가장 많은 오해가 얽혀 있는 성경절일 것이다. 이 말씀과 함께 에베소서 2:15의 말씀을 근거로해서 “십자가에서 율법은 폐지되었다”라는 가르침이 온 기독교회에 편만해 있다. 정말, 십계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그 용도가 폐지되었는가?

이 문제를 다루기 앞서, 우리는 성경에 십자가에 의해서 폐지된 율법과 폐지되지 않았고, 또한 폐지될 수도 없는 율법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십자가에서 폐지된 율법은 모세가 두루마리책에 기록한 의식 율법이며, 폐지되지 않은 율법은 하나님께서 친히 손으로 돌비에 기록하셨던 영원불변의 율법 즉, 십계명이다.

1. 의식 율법 (의문의 율법) :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소에서 유지되어야 할 의식의 형식에 대한 율법을 주셨는데, 모세는 이 의식 율법을 책에 기록하였다. 이 희생제도에 관한 의식 율법을 신약 성경에서는 의문의 율법(ceremonial law)이라고 부르는데, 십자가에서 폐지된 율법은 바로 이 의식 율법을 뜻한다.

구약시대의 성소에서 이루어졌던 동물의 희생제도에 대해서 기록한 의문의 율법은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인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제사 제도의 목적과 그 완전한 의미가 실현될 때까지만 존재하도록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 더 이상 양을 잡아 죽이는 희생제도가 불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의문의 율법을 그리스도께서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셨다고 기록하였던 것이다(골 2:14). 골 2:14~17까지의 전체 내용을 읽어보면, 여기에 나오는 “의문에 쓴 증서”는 십계명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절기에 속해 있는) 안식일들(sabbaths)”에 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 성소 제도의 의식 율법임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율법에 두 종류의 율법이 있는 것처럼, 안식일에도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십계명의 4째 계명인 제칠일 안식일(영원불변)이고, 다른 하나는 의문의 율법에 속한 유월절이나 장막절 등의 절기 안식일들(십자가에서 폐하여짐)이다.

2. 십계명 :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두 돌판에 친히 기록하신 십계명인데, 이것은 성소의 두번째 칸인 지성소 안의 법궤 안에 거룩하게 보관되었다. 이 십계명은 하나님의 도덕적 품성과 그분의 뜻이 기록되어 있는 도덕률(moral law) 이다. 이것은 총 10개의 계명으로 되어 있는데, 전반부에 있는 4계명에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사랑이 기록되어 있고, 후반부 6계명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도덕과 사랑이 기록되어 있다.

십계명에 대해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다고 기록하였고(시편 119:89),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고 선언하셨다(마태복음 5:17~18). 그러므로 십자가 이후에 기록된 로마서에서도 사도 바울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라고 말했던 것이다(로마서 7:12).

구세주의 죽음은 의문의 율법을 종식시켰지만, 도덕적 율법인 십계명에 대한 인류의 의무는 조금도 감소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인류에게 내려진 율법의 정죄를 속하기 위해서 하늘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만 했다는 사실은 율법(십계명)의 요구와 그 권위가 결코 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거해 준다.

 

4부 - 성화에 대한 오해


참된 성화의 길을 걷고 있는 자의 특성

성화의 과정을 걷고 있는 사람은 겸손한 정신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모세처럼, 무한하신 하나님의 순결함과 완전하심에 비하여 자기 자신이 너무나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

선지자 다니엘은 참된 성화의 모본이다. 다니엘의 긴 생애는 하나님을 위하여 바친 고상한 봉사로 가득차 있다. 그는 천사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으며,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였다. 그는 하늘의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었다(단 10:11). 그러나 그는 자신의 순결과 성결함을 주장하는 대신에 자신을 죄많은 이스라엘의 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자기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탄원하였다.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려 함이니 ... 우리가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 단 9:18,15.

욥도 폭풍 가운데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라고 부르짖었다(욥 42:6). 바울은 “세째 하늘로 이끌려 올라가” 하늘의 영광을 본 후에 “모든 성도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말했다(고후 12:2, 엡 3:8).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스스로를 높이거나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으시대는 주장을 할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심장을 파열시킨 고뇌의 원인이 자신의 죄였다는 사실을 깊이 느끼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자 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이 생애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죄악과 약점을 가장 분명히 깨닫고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구세주의 공로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믿음과 행함의 균형이 깨어진 현대 기독교회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는 십자가를 높여야 된다는 말들을 하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정신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혼돈된 상태에 처해 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 동시에 율법은 더 이상 필요없는 구속물이라는 거짓 가르침에 젖어있는 사람들은 성화에 대한 감정적이고 환상적인 이해를 갖고 있다. 그들은 “믿기만 하면 완전한 성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십계명은 폐하여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믿는 순간부터 계명을 지켜야 할 의무로부터 해방됩니다. 십계명을 지킬 필요도 없으며, 지킬 수도 없습니다”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정말 그들의 주장은 성서적인가? 그들은 율법에 순종하기 위하여 분투하는 어떤 종류의 노력도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로 몰아 버린다. 그들이 즐겨 말하는 “믿기만 하면 축복은 네 것이다”라는 말은 진리인가? 그러한 주장은 매우 위험한 거짓이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품성, 뜻, 그리고 원칙에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상태를 어떻게 “성결”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죄와 부정을 의도적으로 붙잡고 있는 죄인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여겨주실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결코 거짓말 할 수 없는 분이시다. 사도 바울은 이 점에 대해서 분명한 경고를 남겨 놓았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요일 3:7,8.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성경이 요구하는 자아 희생, 절제, 극기와 같은 거룩한 특성을 싫어하며, 그 대신에 언제나 안일함과 세속적인 쾌락과 같이 자신의 흥미를 만족시켜주는 통속적인 교리를 추구하도록 이끈다. 현대 기독교회는 믿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 때문에 깊은 혼수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도 야고보의 믿음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도록 하자. 야고보는 진실한 믿음 안에 존재하는 믿음과 행함의 균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약 2:14~24

성경은 사람을 이상한 미혹에 빠뜨리는 “행함 없는 믿음의 교리”에 대해서 반대한다. 부모의 말을 거역하고 방종과 악의 길을 걷고 있는 아들에게 백만불의 유산을 물려주면 어떻게 되겠는가? 분명, 그 아들은 더욱 더 깊은 쾌락과 방종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백만불은 그에게 축복이 되기는 커녕 저주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십자가를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늘의 구원과 축복을 내릴 수 없으시다. 불순종과 부도덕한 삶을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은사를 축복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참람된 억측이다. 참된 믿음은 성경의 약속과 법도 위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령(계명) 중 어느 한 가지를 고의적으로 범하고 있으면서 거룩해질 수 있다는 거짓 교리로 자신을 스스로 속이지 말라. 어떤 것이 죄인 줄 알면서도 범하려고 할 때, 성령께서는 사람의 양심을 괴롭게 하는 한 음성을 들려준다. 이 때,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기만함으로써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고, 그 결과 하나님께부터 분리되게 된다. “죄는 불법이며 ...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나니” 요일 3:6.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생애를 살면서도 거룩하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참 모습을 다음과 같이 드러내고 있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요일 2:4,5. 바로 이 말씀이 모든 사람의 신앙과 믿음의 진위를 시험해 볼 수 있는 확실한 기준이다.

스스로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그 자체가 성결과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성결에 대한 참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악한 죄의 성질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성결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사랑과 공의가 어우러진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하면 할수록,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요구에 대하여 무지하게 되어 결국에 가서는 자신이 자신의 눈에 의롭게 보이게 된다.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과 생애가 온통 죄로 더럽혀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완전한 착각 속에 빠지게 된다.

거룩한 산 제물의 의미

구약시대에 성소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물은 반드시 “흠없는” 것으로 드려야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권면을 하였다.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이 말씀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하여 다리를 다친 사람은 하나님께 영적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영적 예배가 이루어지는 곳인 인간의 뇌(마음)는 육체의 건강과 매우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먹고 마시는 일에 조차 주의해야 한다. 먹거나 마시거나 모든 일에 부절제한 사람은 결국 몸의 건강을 해치게 되어서 의지와 정신력의 저하를 가져오고, 지극히 감정적인 성격을 갖게 되어, 하나님께 산 제물이 되어 영적 예배를 올바로 드리지 못하게 된다. 성서적인 성화는 영과 혼과 몸 전체를 다 포함한다.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3

베드로는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경고하였다(벧전 2:11). 방종하는 욕구를 만족시킬 때마다 신체의 기능은 약화되고, 영적-지적 감각력이 죽어가며, 성경 말씀과 성령의 감화에 대하여 예민하고 정확한 반응을 나타낼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인체의 생리적-영적 관계 때문에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권면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남겼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고후 7:1. 또한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열거하면서 절제를 부가하였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갈 5:22~24.

성경 가운데 이러한 분명한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방탕한 부절제 속에서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참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탐식과 음주와 금지된 쾌락을 통하여 그들의 인간성을 추락시키고 있다. 죄에 익숙해 있는 교회는 이러한 부절제를 책망하는 대신에 사랑이라는 값싼 감정으로 덮어주고 있다. 교회는 참된 헌신과 희생만으로는 필요한 자금을 보충할 수 없다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성경이 금하고 있는 것들을 눈감아 주고 있다. 만일 예수께서 오셔서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서 종교라는 미명 하에 행해지고 있는 연회와 부정한 거래들을 보신다면, 예수께서 일찌기 유대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을 내쫓으신 것과 같이 그들을 내쫓으실 것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 몸이 하나님의 성령의 전으로 바쳐진 그리스도인은 해로운 습관의 종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몸 전체는 창조주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산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몸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우리의 몸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물과 재능도 주님의 것이다. 우리가 가진 돈을 우리 마음대로 낭비하며 살아가고, 우리의 재능을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쓰는 생애를 살아갈 때, 어찌 죄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해마다 막대한 돈을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쏟아붓고 있는 동안, 수많은 영혼들이 생명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죽어가고 있다. 누가 그들의 영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가?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십일조와 헌금이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도둑질 당하고 있다.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는 인색한 사람이 자신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정욕의 제단 위에는 아낌없이 많은 것을 불태운다.

참된 믿음과 참된 성화에 대한 가르침이 왜곡되어 있는 현대 기독교회 위에 부절제와 부도덕의 재앙이 내리고 있다. 교회 안에서 판을 치는 온갖 죄악들 때문에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나설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는 말씀의 의미

그리스도인이 죄의식과 영적 흑암 아래 지내는 것이 하늘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머리는 숙였으되 심중에는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는 것은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난 상태가 아니다. 가족들에게 불친절하고, 사회에서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는 정죄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바쳤다고 말하지만, 마음의 중심에는 세속과 정욕이 가득차 있는 상태는 참된 성화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을 흘리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생애를 사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께로 나아가 마음의 정결함을 받음으로서, 율법 앞에 부끄러움과 가책없이 설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경험을 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는 간증을 할 수 있다(롬 8:1).


7 Guide line

1. 모든 것을 희생하고 버렸을지라도, 자기 자신을 버리지는 않은 사람은 성화의 길을 걸을 수 없다.
2. 자아를 버린 사람은 자신에 대한 평판이나 인기에 끌려다니지 않는다.
3. 스스로 공로를 쌓으려고 애쓰는 대신에, 언제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린다.
4. 성화된 그리스도인은 율법 요구에 끌려다니는 지겨운 종의 생활에서 벗어나, 율법을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간다.
5. 성화된 그리스도인은 “그대는 지금까지 죄를 범해왔다. 그러나 이제 십자가에서 모든 것이 용서되었으니, 그대는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여 머물러 있으면서, 용서가 주는 위로를 즐겨라”라고 속삭이는 사단의 음성을 거절한다.
6.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 완전한 순종의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이에는 끊이지 않는 투쟁이 존재한다.
7.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께 완전하고 순수한 순종을 드리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5부 - 약속, 특권 그리고 의무


지금 세상은 방종과 쾌락에 빠져 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온 세상 사람들의 일상 생활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로부터 다음과 같은 위대한 부르심을 받고 있다.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고후 6:17.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자신의 양심이 지적하는 세속적 만족과, 알고 있는 죄악적 습관을 완전히 내버리지 않는 사람이 매 주말마다 교회에 나가고,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며,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지라도 그 사람은 성경이 말하는 성화와 전혀 상관이 없다.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는 부르심에 응하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는 약속을 허락하셨다(고후 6:18). 그러므로 성화는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의무의 길이다.

성화는 의무일 뿐 아니라, 특권이다. 하나님께 속해 있는 사람들이 풍성한 경험을 가지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요 의무이다. 예수께서는 하늘의 높으신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주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른다는 보장이 하나님의 자녀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져 있다(잠 4:18).

믿음과 순종의 길은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그리스도와 더욱 더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이러한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되는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 하시기를 원하노라” 골 1:9~11.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이 약속하는 이러한 축복과 특권을 누리고 있는가? 참된 성화의 의미와 중요성의 왜곡으로 인하여 교회는 하나님의 축복의 문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성화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바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그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 역설하였다(엡 3:16~19). 또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기도함으로써, 성도들의 특권을 간구하는 바울의 기도는 절정에 이르렀다(엡 3:19).

믿음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러한 특권을 붙잡도록 만든다. 참된 성화의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은사를 바라볼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기꺼이 필요한 은사를 허락하신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2. 참된 믿음의 의미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존중함으로써, 참된 성화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드디어 다음과 같은 놀라운 약속은 성취된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4:14, 16:24.

교회가 타락하게 된 이유

타락한 아담의 자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성경 전체가 말하는 요점이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란 어떤 믿음을 말하는가? 성경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또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러한 특성들은 믿음을 가졌으며, 회개를 하였고, 성화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되는 열매이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회는 하나님의 율법 가운데 나타나 있는 의의 원칙들을 저버림으로써, 당연히 풍성하게 맺혀져야 할 열매들이 맺히고 있지 못한 실정에 처해 있다. 교회가 율법을 버린 것, 바로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서 성령의 심오하고 변화시키는 역사를 거의 볼 수 없게 된 이유이다.

우리는 바라봄으로써 변화된다. 올바른 복음을 바라보아야만, 성경이 약속하는 축복과 변화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회가 율법을 버림으로써, 순종은 바리새인의 낡은 유산으로 취급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은 유대인들만의 법으로 남게 되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살아서 외치고 있는 성경의 증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 1:1~3. 복음 가운데 율법이 마땅히 차지해야 할 정당한 위치를 회복할 때에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사이에 초대 교회가 가졌던 믿음과 경건의 부흥이 일어날 수 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서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렘 6:16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는 말씀의 의미

그리스도인이 죄의식과 영적 흑암 아래 지내는 것이 하늘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머리는 숙였으되 심중에는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는 것은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난 상태가 아니다. 가족들에게 불친절하고, 사회에서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는 정죄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바쳤다고 말하지만, 마음의 중심에는 세속과 정욕이 가득차 있는 상태는 참된 성화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을 흘리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생애를 사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께로 나아가 마음의 정결함을 받음으로서, 율법 앞에 부끄러움과 가책없이 설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경험을 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는 간증을 할 수 있다(롬 8:1).

 Do you know this?

“온 율법은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갈라디아 5:14.

하나님의 율법에 기록된 10개의 계명(십계명)을 4개의 글자로 줄인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하라”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율법인 십계명을 친히 두개의 돌비에 기록해서 주셨는데, 첫째 돌비에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사랑이 4개의 계명에 나뉘어져 기록되어 있고, 둘째 돌비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이 6개의 계명에 나뉘어져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 율법”은 “사랑하라”는 “한 말씀”에 함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음 속에 참 사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일에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매우 잘 설명할 수 있는 예화를 한가지 들어보자. 한번은 어떤 교수님이 신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한 학생이 일어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기 시작하였다.

학생: “교수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알고 계십니까?”
교수: “그럼 잘 알고 있지”
학생: “그렇다면, 교수님은 교수님의 아내를 죽이지 않기 위해 서 하루에 몇번이나 결심하십니까?”
교수: “나는 전혀 그런 결심을 하지 않는다네.”
학생: “그러면 아내의 물건을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십니까?”
교수: “전혀 노력하지 않고 있지”
학생: “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날마다 있는 힘 을 다하여 노력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 다. 그러나 그들은 진지하게 맹세하고 결심하고 노력하 지만 한결같이 결국에 가서는 죄를 범하게 된다고 고백 하였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교수님의 아내에 대 한 계명들을 지키기 위해서 전혀 노력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혀 어렵지도 않다고 대답하셨는데, 무엇 이 그러한 차이를 만들어 냈습니까?”
교수: “나는 내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일세.”

이 간단한 예화야말로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의 의미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사랑은 모든 친절과 관대함의 근원이며 희생의 원동력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당신의 아들까지 우리를 위해서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의 마음에 새겨지게 될 때, 죄인은 드디어 멸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지게 된다. 누가 또는 무엇이 사랑을 소유한 사람에게 죄를 짓도록 할 수 있는가?

죄의 문제에 대해서 오랫동안 투쟁하고 기도해 왔는가? 그렇다면, 모든 죄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 모든 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여기에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만일 그대가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이러한 사랑을 얻기를 원한다면, 그것을 얻을 때까지 구하게 될 것이다.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마태복음 7:8

 Do you know this?

질문: 신실하게 믿고 교회에 열심히 나가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 아닌가요?

답변: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 14:12.

성경에 나오는 부자 청년 법관도 신실하였지만, “모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초청을 거절했으며, 사도 바울도 진실로 거듭나기 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신실하게 행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진리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롬 10:2,3. 그러므로 오직 진리를 발견한 다음 그것을 신실하게 순종하며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만이 안전한 길을 걷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있고, 진리를 거역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양심에 하나도 꺼릴 것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기만할 수 있습니다. 비록 양심의 음성이 그리스도인 신앙 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의 양심을 전적으로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양심에서는 잘못된 음성이 들려오기 때문이죠. 오직 성서적 진리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는 거듭난 양심만이 신뢰할 수 있는 목소리를 들려 줍니다.

성경에 제시되어 있는 진리으 안내판을 무시한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택해서 아무리 신실하게 걸어간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삶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애가 죄와 부정으로 얼룩쳐 있으면서도 성실하게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적인 안일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