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대는 어떤 분위기를...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아는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감화력을 나누어 받게 되는데, 그 감화력은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분위기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스도께로부터 감화력을 나누어 받은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용기와 소망으로 가득차 있으며, 사랑의 향기가 담뿍 담겨져 있는 생명력 있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인은 이와 반대로 불만과 이기심으로 침울하고 우울하며 쓸쓸한 분위기로 둘러 싸여 있을 수 있으며, 때때로 품고 있는 죄로 인하여 몹시 오염되어 있는 유독한 분위기를 지니고 다닐 수도 있다. 자신이 풍기고 있는 분위기로 인하여 접촉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은연 중에 깊은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감화력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의 말과 행동과 의복과 품행과 심지어는 표정까지도 우리와 대화하고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쳐서, 그 사람에게 행복한 느낌과 포근함을 줄 수도 있고 낙담과 냉정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렇게 끼친 감화는 사람이 미처 판단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자신의 분위기와 감화력으로 인하여 나누어진 결과는 반드시 상대방의 마음에 씨앗을 뿌리고 선 또는 악의 결과를 낳게 된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감화력과 분위기는 힘이 되어서 상대방에게 전달된다. 이 힘은 인간 관계의 사슬, 즉 고리에 고리를 통하여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멀리 퍼져나간다. 낙망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에게 보여준 따뜻한 미소와 친절이 그 사람의 생애를 바꾸어 놓을 수 있으며, 그 결과 그 사람의 가족 전체와 이웃들이 감화력의 결과들을 나누어 가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어떤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진리에 굳게 서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이웃과 친지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모습을 본 사람들이 감명을 받아서 용기있는 신앙 생활을 살아가는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다. 이처럼 감화를 받은 사람은 그 같은 감화를 다른 사람에게 끼치게 되고, 또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끼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무의식 중에 주는 감화로 인하여 셀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조약돌을 호수 가운데 던지면 하나의 파문이 생기고, 이어서 다른 파문들이 생기게 된다. 그 파문이 계속됨에 따라 파문이 그리는 동그라미는 점점 넓어지고 마침내는 그 호수의 가장자리까지 이르게 된다. 우리의 감화도 역시 그러하다. 우리의 감화력은 우리가 알고 조절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멀리 퍼져서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거나 저주가 되기도 한다.

복음으로 변화된 품성과 생애는 힘이다. 참되고 이기심 없고 경건한 생애가 나타내는 무언의 증거는 소멸할 수 없는 감화력을 발산한다.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품성이 반사되어야만 우리는 그 분과 협력하여 영혼 사업에 참여할 수 있다. 그리스도로부터 감화력을 나누어 받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성경 지식의 전달자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살아 있는 복음의 생명력을 전파할 수는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복음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실망과 회의와 의심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우리의 감화의 범위가 넓으면 넓을수록 더욱 많은 열매들을 거둘 수 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서 자신의 생애 속에서 복음의 원칙들을 실천하면서 살아갈 때, 그들의 삶은 그들이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증거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교회는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감화력은 선과 진리를 전하는 힘이 될 수도 있고, 악과 오류를 전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다. 사단과 타락한 육체로부터 스며 나오는 감화력은 자기 자신의 영혼도 멸망으로 인도하지만, 다른 사람의 영혼마저도 잃어버리게 만드는 두려운 결과를 가져다 준다. 우리의 감화력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생명으로 인도하는 향기가 되는 대신에 사망에 이르게 하는 악취가 된다면, 그것은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이 아닌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한다는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그 분과 진리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대신에 흩어버리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회에 대하여 실망과 좌절을 느끼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품성과 생애에서 냉정함과 이기적인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단의 효과적인 도구가 된다. 사단은 그런 사람들을 통하여 자신의 목적을 성취시켜 가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입에서 불평이 새어 나오고, 질투와 의심이 섞인 표현들이 나타날 때, 사단은 그들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향하여 화살을 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받아들일 뻔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 불신과 의심과 무신론적인 고집의 불 화살이 깊이 박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과 함께 일했던 사람은 자신의 품성와 생애 속에서 나온 악취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사실도 모른채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는 착각 속에 빠진다. 이처럼 비참한 결과가 생기는 것은 재갈 물리지 아니한 혀와 반역적인 마음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으로부터 나오는 냄새나는 감화력 때문에 시험에 빠져서 타락의 길을 걷게 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고쳐주고자 할 때는 특별히 우리의 말을 조심해야 한다. 그 말들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열어주는 생명의 향기가 될 수도 있고, 사망에 이르게 하는 독기가 될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잘못을 책망하고 충고할 때에 날카롭고 가혹한 말을 할 뿐 아니라, 상한 심령을 치료하는데 합당치 않은 말을 한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상대방을 격분케 하고 상대방의 격분을 갖도록 만든다. 사람들에게 복음과 진리를 전하는 자들은 하늘로부터 사랑의 기름을 받을 필요가 있다.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책망과 훈계는 사랑의 심령과 감화력으로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의 말은 상대방을 감화시킬 것이며, 화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한 마디 말이라도 경솔하게 하지 말라. 험담과 경솔한 이야기와 참을성 없는 원망과 불순한 암시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입술에서 흘러나와서는 안된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무릇 더러운 말을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라고 기록하였다(엡 4:29). 여기서 더러운 말이란 더러운 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원칙과 위배되고 순결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원칙과 배치되는 모든 말을 의미한다. 또한 더러운 말에는 암시적으로 다른 사람을 깍아내리는 불순한 말과 은근한 비평을 암시하는 말들이 포함된다. 더럽거나 어리석은 농담을 함부로 하는 무리들과 함께 있을 때에 할 수 있는대로 화제를 바꾸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힙입어 좋지 않은 말은 슬쩍 흘려버리고 유익을 주는 방면으로 화제를 전환시키도록 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의 경박함, 이기적이거나 부정직한 금전 관계, 냉정하고 조소적인 표정 때문에 생명의 길을 찾지 못하고 사망의 늪에 빠져서 사는 영혼들에 대해서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마지막 심판의 날에 사람들은 자신이 끼친 잘못된 감화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멸망의 구덩이에 떨어진 사실을 깨닫고 두려워 떨게 될 것이다. 악취나는 성품과 생애 속에서 어떻게 생명과 향기가 나올 수 있을까?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이 일을 이룰 수 있다. 우리 속에는 다른 사람에게 아름다운 감화를 끼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부족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부드럽고 친절한 말과 표정을 나타낼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주신다. 아름다운 감화력은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루, 한 시간, 그리고 한 순간의 일도 예측할 수 었으므로 단 하루도 우리의 길을 하늘 아버지께 맡기지 않고는 그 날을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배치시키신 하늘의 천사들이 있다. 우리가 무의식 중에 좋지 않은 감화를 끼칠 위험이 있을 때에 천사들은 우리 옆에서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나가도록 지혜를 주고, 적절한 말을 하도록 인상을 주며, 우리의 행동을 다스려 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감화가 비록 소리도 없고 의식되지 않을지라도 우리와 접촉하는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천국으로 이끄는 커다란 힘이 될 수 있다.

권두언


대단한 흥미를 가지고 시작한 새로운 천년기의 시작인 2000도가 벌써 그 마지막 몇날 만을 남기고 있습니다. 참으로 세월이 살 같이 빨리 흘러 가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말을 합니다.

새로운 천년기의 시작은 2001년 부터라고요... 여하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날에 성큼 한발자욱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의 옷깃을 여미고, 방탕하거나 술취하거나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 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할 시간 입니다.

망망 대해에서 항해하는 선원들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자기들의 항로를 하늘의 별들의 위치에 맞추어 바로 잡는 일입니다. 아무리 곧바로 가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지더라도 자주 자기들의 위치를 별들의 위치와 비교하며, 항상 변치않는 별들의 방향에 맞추어 자기의 항로를 바로 잡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두운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는 빛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만이 우리에게 진리의 빛을 발하여 주고 있습니다. 어두운 바다의 등대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가 믿고 나아가고 있는 진리들을 항상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맞추어 조율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인간적인 안목으로 옳바른 것 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빛의 말씀인 성경 말씀과 맞추어 확인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번 호는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신선한 충격과 깨달음을 주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방언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여러분들이 다시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의 이해와 경험을 재 조명해 보아야 하는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마음을 열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 연구는 여러분들의 신앙 생활에 커다란 축복을 안겨 드릴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도 틀릴 수 있다!


이 기사는 성공회 신부인 요한 챨스 라일이 기록한 “교회들을 향한 경고”라는 책에서 발췌하여 편역한 글입니다. 요한 찰스 라일은 1838년 영국 성공회의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후에 성직자로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노년에 “교회를 향한 경고”라는 역작을 저술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성직자와 평신도들을 위한 중요한 교훈을 남겨 놓았습니다. 이 글은 100 여년 전에 기록되었지만, 오늘날의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살아서 움직이는 원칙과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생애의 빛 편집실

안디옥 사건이 주는 교훈

이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갈라디아 2장에 나타난 한 장면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러나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 그에게 책망할 것이 있기에 내(바울)가 그를 면박하였으니 이는 몇몇 사람이 야고보에게서 오기 전에 그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뒤로 물러나 혼자 떨어져 있기 때문이라. 다른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그와 함께 위선을 행하니 심지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가더라. 마침 나는(바울)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서 올바르게 행치 아니하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갈 2:11~14.

사도 베드로는 안디옥에서 무엇을 하였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고 싶은 전부이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수많은 사람들을 복음으로 개종시켰던 베드로가 안디옥에서는 위선적인 면을 나타냈다. “다른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그(베드로)와 함께 위선을 행하니 심지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가더라.” 복음과 위배되는 베드로의 위선을 목격한 바울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 사도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는 충격적인 장면이 갈라디아 2장에 전개되어 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 그에게 책망할 것이 있기에 내가 그를 면박하였으니.” 바울은 안디옥에 있는 모든 교회들 앞에서 선배 사도 베드로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견책하였다. 사도 바울은 베드로의 잘못을 글로 기록함으로써, 오늘날까지 베드로의 수치스런 위선을 통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안디옥 사건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아무리 위대한 사도라도 잘못을 범할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베드로는 사도 중의 사도였다. 그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친분을 나누었으며, 그분의 설교와 기적을 직접 듣고 보았고, 개인적으로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였다. 그는 오순절에 유대인들에게 첫 설교를 함으로써, 유대인들을 향한 복음의 씨앗을 제일 먼저 뿌린 사도였다.

그토록 위대한 사도 베드로가 수치스러운 잘못을 범했다. 지금 나는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하심 하에서 성경을 기록할 때에 실수하거나 잘못을 범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도들도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붙들어 주지 않는다면, 아무리 성화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언제든지 연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쓰러질 수 있으며, 또한 곁 길로 나갈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들이다.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이며, 영생을 유업으로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부르심을 받았으며, 빼어내심을 받았고, 택하심을 받았을지라도, 인간은 썩어질 육체 안에 거하는 한 하나님의 손을 놓는 순간에 쓰러질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높은 성직과 안수

높은 성직과 권위있는 직책이 사람을 실수와 잘못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성직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람을 모든 교리적 잘못과 도덕적 연약함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모든 죄로부터 벗어나게 보장해 주는가? 결코 아니다. 비록 그가 교황이나 추기경이나, 감독이나, 사제나 목사의 위치에 있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잘못을 범할 수 있는 인간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이 안수 기름을 바르고, 경건한 대주교의 손을 통하여 안수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를 잘못된 교리와 배도로부터 보호해 주지 못한다.

선택의 여지없이 모태로부터 신앙을 받은 사람, 교회에는 정기적으로 나가지만 성경을 연구하지 않는 사람, 자신이 다니고 있는 교회의 교리와 관습을 아무런 생각없이 받아들인 사람, 친구나 가족이 나가는 교회를 별다른 생각없이 따라 다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정말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가를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한다.

영국 성공회 헌장 제21조

비록 여러분이 믿고 있는 교리나 가르침이 교회의 위원회나 총회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영적 위치가 반드시 안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위원회나 총회의 교리적 결론 역시 잘못을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단을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을 성령의 음성과 진리를 통하여 인도하신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는 영국 성공회의 헌장 제21조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이 있다. “총회 역시 잘못을 범할 수 있고, 때때로 잘못을 범해 왔다. 심지어는 하나님께 속한 문제에 있어서도 잘못을 범했다.”

형제 자매들이시여,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어린 양의 인도하심을 안전하게 따라가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어떤 인간도 의지하지 말며, 인간이 세워 놓은 전통과 교리를 무조건 따라가지 말라. 성경을 스스로 연구하여 진리를 발견하도록 애쓰며, 이것이 정로이며 진리의 길인가를 항상 숙고하라. 이것이 하늘로 가는 가장 안전한 길이다.

성경의 예증들

안디옥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잘못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수많은 예증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기억하는가? 그 믿음의 용사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대신에 아내 사라의 권고를 따라서 젊은 후처를 얻었던 사실을 기억하는가? 홍해의 기적, 불기둥과 구름 기둥,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 온 만나를 직접 먹었던 대제사장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백성들로 하여금 춤을 추도록 방조했던 역사를 기억하는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직접 기름부음을 받았던 다윗이 남의 아내를 취했던 일을 기억하는가? 가장 지혜로웠던 솔로몬 왕이 이방의 여인들을 아내로 취하여 이방 신전을 짓도록 허락했던 사실을 기억하는가? 유다의 선한 왕인 아사 왕이 하나님을 찾는 대신에 그 당시의 의사에게 찾아간 일을 기억하는가? 선한 왕인 여호사밧이 악한 아합을 돕기 위하여 갔던 일을 기억하는가? 야고보와 요한이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사람들을 태워 죽이기를 구했던 사실을 기억하는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세번이나 부인했던 일을 기억하는가? 왜 성경은 위대한 사람들이 범했던 이러한 잘못들에 대해서 숨김없이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성경의 기록은 지금도 우리 모두를 향하여 크게 외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진리를 ....

경건한 수도승의 잘못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를 살펴 볼 때, 우리는 최고의 지성과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도 잘못된 사상과 교리에 빠질 수 있다는 교훈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늘은 지식과 지성이 충만한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라, 진리 앞에 마음을 겸손하게 낮출 줄 아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 초기 기독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위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을 각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좀더 순결하고 경건한 수도원 생활을 원했다. 비록 그들의 동기가 좋았을지는 모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수도원 안에도 세속과 배도가 흘러들어 오게 되었다. 그들은 수도원 안에서 세상을 그리워 하면서 살았다. 경건은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급기야는 외형적인 경건에 촛점을 맞추어 수도원을 교회의 허식적인 경건을 과시하는 상징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중세기 동안, 수도원 안에 있는 성직자들을 통하여 수많은 미신적 교리들이 교회 안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종교 개혁자들의 잘못

교회와 수도원이 정치의 권력과 부에 이끌려 부패되자,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서 종교 개혁자들이 진리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일어났지만, 그들 중 아무도 잘못이나 실수로부터 제외된 사람은 없었다. 마틴 루터는 너무나 고집스럽게 성체 공존론을 주장하였고, 그가 죽은 이후에 루터의 동료 개혁자인 멜란톤에 의하여 루터 교회가 몇몇 잘못된 교리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었지만 여전히 그들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요한 칼빈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권한에 대해서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장로교회를 어처구니 없는 예정론으로 이끌고 말았으며, 크래머는 자신의 첫 신앙을 공식적으로 취소하고 한동안 물러가는 모습을 보였다. 제월은 죽음에 대한 잘못된 교리에 빠져서 결과적으로 교황권의 주장을 답습하게 되었으며, 후퍼는 예식 때에 입는 예복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성공회에 해를 입혔다. 후기의 청교도들은 지옥과 무저갱의 고통을 부인하였고, 요한 웨슬리와 탑레디는 치열한 교리 공방전으로 인하여 수치와 상처를 받았으며, 어빙은 자신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에 빠짐으로서 미혹당하고 말았다. 이러한 지난 역사와 사건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 입을 모아서 “성직자도 틀릴 수 있다”는 경고를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인간을 의지하는 정신

우리는 사람을 신뢰하는 일을 중단해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어떤 사람도 우리의 주인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대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사람들이 여러분들에게 성경에 대해서 질문을 할 때에 “우리 주교님(목사님)께 물어보고 대답해 드리겠습니다”라는 대답을 하지 말라. 여러분이 어떤 교리와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얼마나 많은 성직자들이 그것을 인정하고 있는가를 살피지 말고,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를 확인하여야 한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성직자의 조언을 구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말을 반드시 성경에 비추어 비교해 보아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인간을 의존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스런 목자이시며, 위대한 대제사장이시고, 대주교 중의 주교이며, 교황보다 높으신 분인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기 보다는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교회의 성직자들을 의지하기를 좋아한다. 우리의 믿음과 신앙에 대해서 하나님의 인정보다 주교나 사제의 인정을 더 필요로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깊이 회개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존경하는 성직자에게 우리의 믿음과 신조를 맡겨 버리는 잘못을 범하기가 너무나 쉽다. 우리는 어떤 교리나 가르침이 성경의 진리와 일치하는가를 확인하기 보다는 어떤 목사, 어떤 사제, 어떤 주교, 또는 어떤 신학 박사가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 좋아한다. 진리는 어떤 교단이나 학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만이 진리를 확인해 주는 유일한 방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매우 귀찮아 하거나 위험한 일로 여긴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성직자를 무조건 믿고 따라가는 것이 최상의 안전책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다 양같아서 하나가 움직이면 나머지도 모두 따라간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이유

서두에서 언급한 갈라디아 2장의 안디옥 사건도 바로 이러한 잘못이 되풀이 되었던 것이다. 십자가 이후에 제자들과 사도들이 기독교회를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사도 바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제자들과 사도들이 유대 교회의 관습과 의식에서 한동안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모습이 신약 성경에 여러 곳 나와 있다. 베드로가 바울에게 책망을 받았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베드로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잘못을 범하게 만들었다. “그(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뒤로 물러나 혼자 떨어져 있기 때문이라. 다른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그(베드로)와 함께 위선을 행하니 심지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가더라.” 그 당시, 그 자리에 있던 평신도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베드로와 같이 위대한 사도가 잘못을 범할리가 없어. 그를 따르는 한, 결코 잘못에 빠질 수 없을거야!” 우리는 그들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의견을 무조건 신뢰해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이 사제나 주교나 목사직에 있다고 해서 그를 무조건 신뢰해서는 안된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베드로의 잘못된 이해가 초대 기독교회 전체에 퍼져나가는 것을 막아야만 하였다. 바울은 이제 갓 태어난 교회 안에 유대 교회의 전통이 들어 옴으로써 복음의 빛이 퇴락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지도층에 있는 성직자의 의견과 주장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일 경우, 그가 쓰러지면 그 밑에 있는 교회 전체가 쓰러지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바로 이러한 위험을 간파한 바울은 노장 선배 사도 베드로의 잘못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함으로써, 진리를 올바로 세울 수 있었다. “마침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서 올바르게 행치 아니하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이 점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잘못을 범하고 있다. 초대 교회가 잘못된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던 것도 이러한 문제 때문이었다. 1세기 이후, 세월이 흘러서 제자들과 사도들이 모두 죽게 되었고, 교회는 많은 신도들을 가진 거대한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언제부터 인지 몰라도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주교님의 마음에 반대되는 것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주교나 사제나 목사나 장로가 도데체 무엇인가? 가장 훌륭한 목자일지라도 단지 사람일 뿐이다. 사도 바울은 이 점에 대해서 분명히 하였다. “아볼로는 누구이며, 바울은 누구이냐?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고전 3:5.

진리를 전하는 성직자, 오류를 전하는 성직자

아이러니칼하게도, 역사를 통하여 볼 때, 진리를 잘못 제시하고, 오류를 진리처럼 꾸며서 자기 마음에 맞는 신조로 만들었던 장본인은 성직자들이었다. 가장 위험하고 가장 큰 오류는 모두 성직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이스라엘의 종교를 무질서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던 대제사장 엘리의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도 성직자였고,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도 성직자였으며, 이교의 창시자라고 불리우는 아리우스도 성직자였다.

진리를 잘못 제시하고 오류를 진리처럼 꾸몄던 사람도 성직자 이지만, 어두운 교회 안에 진리의 빛이 나타났을 때, 가장 앞에 나서서 반대했던 사람들 역시 성직자들이었다. 마틴 루터가 나타나서 종교 개혁의 횃불을 들었을 때, 어떤 성직자가 그의 편에서 섰었는가? 그의 곁에는 농민들과 소수의 귀족이 있었을 뿐이다. 진리를 전하는 것도 성직자이지만, 진리를 가장 극렬하게 반대하는 것도 성직자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안수를 받았다는 인준서가 진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가라사대”라는 말씀으로만 진리는 확증된다. 성직자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진리를 전하는 성직자이고, 다른 하나는 오류를 전하는 성직자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누가 기적과 은사를 행하는가에 따라서 진리를 분별하려고 한다. 그러나 기적과 은사를 행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진리의 편에 서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베드로도 놀라운 방언의 은사를 받아 언어의 장벽을 초월하여 자유롭게 말씀을 전하였고, 그의 기도를 통하여 죽었던 도루가가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지만,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진리는 기적에 의해서 확증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오직 성경 말씀으로만 확증될 수 있다.

맺는 말

중세 시대에 살았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종들을 무조건 신뢰하는 잘못을 범했다. 그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종들의 상을 교회 안에 세워 놓고 우상시 하는 데까지 발전하였다. 그 당시 사람들은 토마스 아퀴나스, 던 스코터스, 피터 롬바드와 같은 신학자들을 거의 특별한 영감을 받은 성인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는 항상 다음과 같은 말을 서두에 붙혔다. “틀릴 수 없는, 거룩한(Rev.), 비교할 수 없는, 귀하신” 등등. 나는 두권의 책으로 되어 있는 로버트 멕킨의 “회고록과 설교집”과 같은 책이 오리겐이나 사이프리안과 같은 유명한 신학자가 저술한 어떤 책보다도 사람의 영혼에 유익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또한 성경 외에는 어떤 책도 알지 못했으며, 희랍어나 라틴어를 전혀 몰랐던 사람이 저술한 “천로역정”은 지금도 온 세상 사람에게 놀라운 진리의 빛을 전하고 있다.
옥스포드 신학대학을 나온 수재들이 히브리어나 헬라어에 대해서는 요한 웨슬리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는 그들이 요한 웨슬리보다 훨씬 무지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진리는 학위나 숫자나 어떤 교단에 의해서 확정되는 것이 아니다. 감리교회를 세운 요한 웨슬러도 처음에는 교회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혀서 쫓겨나지 않았는가!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시여, 그대들이 존경하는 성직자가 하나님의 사람일수 있으며, 모든 설교와 가르침에 있어서 진리 위에 올바로 서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또 하나의 교황으로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자리에 성직자의 교리를 올려 놓지 말라. 그대가 존경하는 성직자는 결코 틀릴 수 없다고 추측하지 말라. 성직자가 오류에 빠질 경우에 그대가 따라서 치루게 될 댓가를 생각해 보라. 성직자도 믿음에서 떠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교회와 성직자에 온 마음을 의지하는 사람은 그들이 틀리고 깨어질 때에 함께 쓰러지지만, 자신의 신앙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긴 그리스도인은 타고 있던 배가 흔들리거나 파손된다고 해도 반석 위에 굳게 서있을 수 있다.

부디 그리스도의 신실한 대사인 성직자를 존경하기 바란다.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들을 도와주고 사랑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신뢰는 반드시 성경의 진리 위에 두어야 한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고상하여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사도행전 17:10.

1부 - 암을 알아야 암을 정복한다.


메리는 조직 검사 결과를 알기 위해서 대기실에서 앉아 의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에 메리의 이름이 불려졌고, 그녀는 의사의 검진실로 들어갔다.

의사는 그녀와 마주 앉은 다음 “정말 안타깝습니다만” 이라는 말로 검사 결과를 말하기 시작하였다. 메리의 눈에는 검사 결과를 알기 전에 이미 눈물이 고였으며, “의사 선생님, 암이죠?”라고 두려운 마음으로 물어 보았다. 의사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 거릴 뿐이었다.

의사인 나 역시 지난 수년 동안의 의료 생활 중에 여러번 이러한 고통스런 경험을 하였다. 암이라는 진단을 환자에게 말하는 순간, 환자는 그것을 사형 선고로 받아들인다. 때때로 암은 방사선, 외과 수술과 같은 방법으로 치료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이미 그러한 치료 단계를 훨씬 넘어선 상태에서 발견된다. 대부분의 선진국가들의 경우에 있어서, 암은 첫번째나 두번째 사망 요인이다. 현재 미국의 사망자 4명 중에서 1명은 암으로 사망한다는 통계가 나와 있으며, 매해 미국에서만 50만명이 암으로 사망하고 있다. 암이 이토록 무서운 질병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암에 대해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어떤 사람이 암으로 사망하기 전에, 종종 그 사람의 외적 상태와 지적인 기능에 매우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 우선 상당한 양의 체중이 감소되며, 근육이 줄어들고, 머리카락이 빠지며, 심각한 통증이 느껴지고, 기억력이 저하되며, 일시적인 정신착란 비슷한 증세가 나타나고, 심지어는 심각한 성격 변화가 동반되기도 한다. 이것은 오직 암의 발병과 그것의 치료 과정 중에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증세들 중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암의 발병률이 거의 30%에 육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암에 걸리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 결과, 지난 30년 동안에 암으로 인한 사망률이 2배나 증가되었다. 1997년 한 해 동안 미국에서 암으로 사망한 사람의 수는 56만명이 되었다. 그들 중 대부분의 경우는 암에 대해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대처했더라면 사전에 암을 예방할 수 있었다.

정상 세포가 암 세포로 변질되는 과정

이제부터 암의 실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암은 새로운 세포의 생산과 관련이 있다. 매 분마다 인체 내에서 천만개의 세포가 분열되어 새로운 세포를 생산해 낸다. 인체는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어떤 메카니즘에 의해서 세포의 분열 과정은 매우 정확한 방법으로 정확한 시간에 일어난다. 암이라고 불리워지는 세포 분열 과정은 인체 밖으로부터 방사능, 화학물질, 바이러스 등과 같은 발암 물질들이 들어와서 세포 분열 과정을 조절하는 기능(메카니즘)을 망가뜨림으로서 시작되게 된다. 암의 요인은 인체 밖의 환경 이외에도 인체 내에서 생긴 홀몬의 불균형, 면역 시스템의 부조화, 또는 유전적인 변질 등에 의해서도 발생된다. 어떠한 요인에 의해서 암이 발생되었든지 간에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일단 세포가 비정상적으로 분열을 일으키기 시작하면, 비정상적인 세포들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생긴 비정상적인 세포들이 모여서 비정상적인 암 조직을 이루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암을 유발시키는 환경 물질에 체내의 정상 세포가 접하게 되면, 세포의 DNA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런데 DNA에는 세포의 활동을 조절하는 갖가지 명령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DNA에서 인체의 각 세포들이 어떻게 기능을 발휘해야 할지에 대한 결정이 이루어지게 된다. 예를 들어서, DNA는 머리카락을 어떤 색깔로 만들라는 지시를 인체의 관련 기관에 내리며, 태어난 아기가 파란 눈 또는 갈색 눈을 가져야 할지를 지시해 준다. 또한 DNA에는 세포가 분열되는 비율에 대한 지시가 담겨져 있다. 그런데, 세포의 DNA에 문제가 생기면, 암이 발생하기 시작하여, 세포의 분열 과정이 아무런 제재나 조절없이 비정상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체내에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바로 이것이 암이 시작되었다는 신호이다. 비정상적으로 분열되어 만들어진 세포는 비정상적으로 분열하는 성질을 갖는데, 바로 이렇게 변질된 세포를 가리켜 암 세포라고 부른다.

만일 인체가 비정상적으로 생긴 암 세포를 초기 단계에 인지할 경우, 인체의 면역 시스템은 이들 암 세포들이 심각한 상태로 급증하기 전에 그들을 파괴시킨다. 실제에 있어서, 날마다 모든 사람의 인체 내에서 약간의 정상 세포들이 암 세포로 변질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인체의 면역 시스템에 의해서 새롭게 생긴 암 세포들이 초기 단계에서 파괴당하고 있기 때문에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떤 경우에는 새로 생긴 암 세포들이 면역 시스템에 의해서 발견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암 세포들이 자신의 방식대로 분열을 계속하게 된다. 아무런 증세도 없이 조용히 암 세포들이 증가되다가 결국에는 하나의 암 덩어리(종양)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종양으로부터 나온 암 세포들은 혈관과 림프선을 통하여 인체의 중요한 기관으로 퍼져 나간다. 이러한 암 세포의 발전 과정은 의사에게 암이라는 진단이 내려지기 훨씬 이전에 이루어 진다. 대개 인체에 암의 증세가 나타나거나 가장 진보된 첨단 의료 시스템으로 암을 진단할 수 있기까지, 약 10년 이라는 긴 기간 동안 암 세포들은 조용히 인체 내에서 성장한다.

이번 기사에서 우리는 암을 조기에 발견하는 방법과 암을 예방하는 비결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조기 발견의 중요성

조기 발견이란 암을 치료할 수 있는 단계에서 암의 발병을 찾아내는 것을 뜻한다. 조기 발견의 방법에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가 있다. 1) 암 증세의 조기 인지. 2) 적절한 암 검사를 받는 것.

암 증세의 조기 인지법

암으로 고통당하는 환자들 중 대부분이 조기 발견의 중요성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한 해 또는 그 이상 동안 항문에서 간헐적인 출혈이 있는 사람들도 의사를 찾아가 암의 발병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의사를 찾아가는 일을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미루고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 두려워서 미룬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나타나고 있는 증세가 너무나 심각해서 스스로 좌절하여 병원을 찾지 않으며, 어떤 사람은 그것이 치질과 같은 종류의 질병일 것이라고 스스로 진단하여 의사를 찾지 않는다. 그러다가 도무지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올 때에야 비로소 의사를 찾지만, 그 때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너무 늦었다. 조기 진단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음은 미국 암 협회에서 제시한 7가지 중요한 암의 조기 증세이다.

암을 알려 주는 일곱 가지 조기 신호

1. 대변과 소변 습관의 변화
2. 치료되지 않는 통증
3. 비정상적인 출혈이나 하혈
4. 유방이나 인체의 다른 부위에 덩어리가 생기는 현상
5. 소화 불량 또는 삼키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현상
6. 사마귀나 혹에 분명한 변화가 생기는 현상
7. 잔 기침이나 목이 쉬는 현상

이상과 같은 7가지 증세들은 모두 자기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증세들이다. 예를 들어서, “대변 습관의 변화”는 지속적인 설사나 변비 또는 대변 색깔이나 양의 변화를 뜻한다. “비정상적인 출혈”에는 항문이나 여성의 질에서 비정상적으로 나오는 출혈이 포함된다. 또한 “삼키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현상”은 음식물이 목구멍에 남아 있는 듯한 느낌을 말한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 일곱 가지 증세들 중 어느 한 증세라도 느껴질 때에는 즉시 의사를 찾아가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증세를 느꼈을 때에 즉시로 의사를 찾아갔을지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이미 치료가 불가능한 선을 넘어선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기 증세가 나타날 때까지 그냥 앉아서 기다리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그것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서 실천하는 것이 최선의 암 예방법이다.

암을 예방하는 2가지 방법

암을 예방하는 두가지 기본적인 전략이 있다. 비록 이미 암 진단을 받았을지라도, 이들 방법은 암에 대해서 저항하는 힘을 향상시키는 데에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2가지 전략이란 다음과 같이 간단하다.

1. 암을 일으킬 수 있는 모든 요소를 피한다.
2. 인체가 암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이들 2가지 전략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매우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다 준다.

1. 암을 유발하는 물질들에 대한 접촉을 피하도록 도와 준다.
2. 암 세포들과 싸우는 인체의 면역 시스템을 강화시켜 준다.

2부 - 무엇 때문에 암이 생기는가?


우리는 제1부에서 암을 예방하는 2가지 전략이 있음을 배웠다.

1. 암을 일으킬 수 있는 모든 요소를 피한다.
2. 인체가 암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이번 기사에서는 이 2가지 전략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대부분의 암 세포들은 그들이 조직이나 덩어리(종양)을 형성하는 단계 이전에 미리 예방될 수 있으며, 현존하는 암 중의 80%는 단지 올바른 라이프 스타일의 삶을 살므로 예방될 수 있는데, 어떤 연구 결과에 의하면, 90%의 암이 외부의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서 발병된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암은 예방될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환경적인 요인”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인체 자체 내에서 생기는 문제나 유전적인 요인이 아니라, 인체 외부로부터 인체 내로 들어오는 발암 물질을 뜻한다. 환경적 요인들 중에는 우리가 날마다 호흡하는 공기와 마시는 물, 먹는 음식, 술과 담배와 같은 기호 식품, 운동하는 습관, 사회적인 교제 관계 등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80~90%의 암이 외부의 환경적 요인에 의해서 발병된다는 말은 앞서 열거한 항목들을 올바로 사용함으로써, 대부분의 암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외부로부터 우리의 육체와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들을 규제하고 올바로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암과 라이프 스타일(생활 양식)의 관계를 규명하는 연구 결과가 지난 30여년 동안 동일한 결론을 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강에 유익한 라이프 스타일을 실생활에 옮기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 1996년, 마이클 스폰 교수는 미국이 공식적으로 “암과의 전쟁”을 선포한지 25년이 지난 과거를 되돌아 보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만일 우리가 발암물질의 인체 내 유입을 차단하는 방법에 대한 교육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더라면, 보다 결정적으로 암에 대해서 승리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환경적 요인에 대한 교육 및 홍보 활동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일반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구체적인 지식을 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지난 수년 동안 암의 발병률이 계속해서 상승한 것으로 입증된다.

일반적으로 식품 첨가제, 공해, 방사선, 그리고 살충제 등이 암을 일으키는 주요 발암물질로 알려져 있지만, 암 전문가들은 그러한 것들보다 우리가 날마다 섭취하는 식품을 더 심각한 것으로 분류하고 있다. 언스트 윈더 박사는 이 문제를 보다 통찰력 있게 분석하였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책임져야 할 문제를 다른 해로운 것(발암물질)들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조절하거나 제한하기 어려운 것들, 즉 공해, 오염된 환경, 식품 첨가제 등에 시선을 돌리기 보다는 스스로 선택하면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는 것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기사에서 우리 스스로가 올바로 선택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대부분의 암을 예방할 수 있는 점에 촛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1) 담배는 NO.1 원인

미국과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담배가 암을 유발시키는 최악의 발암 물질이다. 암의 발병률이 증가하는 원인 중의 많은 부분은 담배에게 있다. 미국에서만 매해 17만명이 흡연으로 인하여 암에 걸려서 사망하고 있는데, 이 숫자는 전체 암 사망률의 33%를 차지한다. 미국에서 매해 담배로 인하여 다른 질병에 걸려서 사망하는 사람들의 전체 숫자는 적어도 40만명 이상이 되며, 이로 인하여 지출되는 의료비는 5백억 달라에 이른다. 전 세계적으로 담배로 인하여 사망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약 3백만 명 이상이나 되는데, 이것은 담배 때문에 매 10초마다 한 명씩 사망한다는 말이 된다.

담배가 암과 분명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엄청난 양의 분명한 증거들이 있다. 담배에는 약 4000가지의 다른 화학물질이 담겨져 있는데, 이들 중 수많은 화학물질들이 암을 유발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폐암을 일으키는 특별한 발암물질, 콩팥과 방광에 암을 일으키는 화확물질, 식도암을 일으키는 화학물질, 췌장암을 일으키는 화학물질 등이 담배에 함유되어 있다. 이 밖에도 여러가지 다른 암과 관련된 수많은 화학물질들이 담배에 들어 있다.

담배는 다음과 같은 암과 관련이 있다!

폐, 입술, 입안, 목구멍, 식도, 위장, 간, 췌장, 방광, 콩팥, 여성의 질, 혈액, 장, 피부, 남자의 성기

담배 연기가 진정 무엇을 함유하고 있는지를 안다면, 담배가 다른 어떤 발암물질보다 암을 유발시키는 확률이 높다는 사실에 대해서 별로 놀라지 않을 것이다. 연기로 마시는 담배 뿐 아니라 씹는 담배에도 동일한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 또한 자신이 직접 담배를 흡연하지는 않지만, 옆에서 날아오는 담배 연기를 들이키는 사람(second hand smoker)에게도 암의 발병률이 상승된다. 통계 자료에 의하면, 담배를 직접 피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의 담배 연기 때문에 폐암에 걸려 사망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미국에서만 매해 약 3천명에 달한다. 하루에 10개피 이상의 담배를 피는 아버지를 가진 신생아가 악성 질병에 걸릴 확률은 31%에 달한다. 하루에 20개피 이상의 담배를 피울 경우에는, 악성 질병의 발병률이 42%로 상승된다. 이러한 통계 자료는 담배 연기에 의하여 남자의 정자 세포의 DNA가 손상되기 때문이라는 과학적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담배를 절대로 삼가해야 할 뿐 아니라, 일하는 직장이나 일터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내뱉는 담배 연기를 마시지 않도록 확실한 방안을 강구해야만 한다. 미국 정부에서는 담배의 위험성을 뒤늦게 나마 인식하여 매우 적극적인 홍보에 나서고 있다. 그 결과, 매해 4천 6백만의 미국인들이 흡연을 중지하고 있으며, 1965년도에 비해서 1990년도에는 흡연자의 숫자가 42%나 감소되었다. 그 결과, 폐암의 발병률이 감소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90년 이후에는 그 동안 꾸준하게 줄어들고 있던 흡연 인구의 감소가 멈추어서, 그 이유를 알아본 즉, 청소년층의 흡연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담배를 끊는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이제부터는 암을 유발시키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2) 술은 암의 원인

술은 암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인체의 면역 시스템을 약화시킨다. 그러므로 술을 삼가함으로써, 암을 예방하고 면역 시스템을 보호하는 2중의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과거에는 술을 거의 매일 마시는 사람들에만 암이 발생되는 것으로 알았지만, 유방암의 경우에는 일주일에 3잔만 마셔도 그 발생률이 증가한다. 술은 구강, 식도, 간, 유방, 그리고 직장과 장에 암을 유발시킬 수 있다. 다음 그래프는 술을 마심으로써 암의 발생률이 얼마나 많이 증가하는가를 보여준다.

식도암 35%
구강암 50%
후두암 50%
간암 30%

하루에 두 잔의 술을 마시는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보다 장암에 걸릴 수 있는 위험률이 2배 이상 증대된다. 음주를 하는 사람이 신선한 식물성 음식에 많이 함유되어 있는 폴릭 에씨드나 메티오닌이 부족한 식생활을 할 경우에는 장암의 발생률이 3배 이상 증가된다.

술과 유방암

술은 홀몬의 분비량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 결과 암의 발병 가능성이 상승된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술을 마실 경우에 생기는 여성 홀몬의 변화와 유방암 발병 가능성의 증대이다. 흡연 여성들에게 있어서 유방암은 폐암 다음으로 많이 발병되는 암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일주일에 3잔 정도의 술도 유방암의 발병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여러차례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친구들과 가볍게 마시는 여성들도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 여성들에 비하여 유방암의 발병률이 50~100% 상승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위험성은 맥주나 와인과 같은 약한(?) 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식사와 함께 와인을 한 두잔 정도 마시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처럼 알려져 있지만, 프랑스에서 이루어진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경우에도 유방암의 발병률은 상승된다.

34~59세 사이의 여성 90,000명을 대상으로 4년 동안 조사한 결과, 음주와 유방암 발병과의 분명한 관계가 포착되었다. 일주일에 3~9잔 정도 마시는 여성들의 60%에게서 유방암이 발병되었다. 음주량이 높은 여성일수록, 유방암의 발병률도 비례적으로 높아지는 통계 결과가 나왔다. 55세 이하의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하루에 한 잔 마시는 경우에도 유방암의 발병률이 2.5배가 증가되는 결과가 나왔다.

왜 술이 유방암의 발병률을 상승시키는가? 이 질문에 대한 완전한 대답이 아직까지 나와 있지 않지만, 술은 에스트로겐 홀몬(여성 홀몬)의 수치를 상승시킨다는 과학적 증거가 확인되었다. 그런데, 이 여성 홀몬이 유방암의 발병률을 증가시킨다는 사실이 이미 입증되어 있기 때문에, 술을 마시는 여성의 경우 유방암의 발병률이 높아진다는 결론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며, 실제적인 통계 자료 또한 그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유방암의 증세를 느끼고 병원에 찾아온 환자들의 종양 크기가 비교적 큰 유방암 환자들의 경우, 대개가 술을 마시는 여성들인데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술이 종양의 크기를 조기 성장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의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표된 약 50여개의 의학 논문들이 술이 유방암을 유발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을까요?


문: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을까요?
답: 하나님의 구원은 매우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 얻을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행 4:12.

또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계명을 모르고 죽은 사람들 중에서도 구원받을 자가 있을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롬 2:14,15.

율법과 복음이 없던 시대에도 성령의 음성과 호소는 지구에 있는 각 사람의 양심을 울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전혀 얻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양심의 음성에 따라 정직하게 생애한 자들에게도 구원은 주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심판과 구원은 자신이 받은 진리의 빛과 성령의 음성에 대하여 나타낸 반응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예수님과 다른 시대, 다른 지역에서 태어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이유 때문에 구원 받지 못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 17:30

마지막 날에 어떤 죄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정죄받는 이유는 그가 진리를 미처 깨닫지 못했거나, 거짓을 양심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정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충분한 기회와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기회들을 등한히 여기고 세속과 정욕에 빠져 살았기 때문에 정죄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그 사람에게 충분한 기회와 빛을 주시기 때문이죠.

성령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각 시대의 사람들의 마음에 진실과 정직의 음성을 들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과 같이 시대적이나 지역적인 이유 때문에 전혀 복음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성령의 음성에 대하여 나타낸 반응과 생애의 열매들을 기초로 해서 심판과 구원이 베풀어 집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2:12에 있는 다음과 같은 말씀은, 율법이 있던 시대에는 율법에 의해서 심판받고, 율법이 없던 시대에는 율법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과 생애의 도덕성에 의해서 심판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서론 -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진짜 방언인가요?


1800년도에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온 노예들이 기독교회 교인이 되도록 강요 당하면서, 그러한 교인들이 예배 도중에 이상한 소리들을 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출발한 방언 운동이 이제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은 거의 모든 기독교회의 교파들이 예배시에 방언을 허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집회에 참석하는 분들이 내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여 오는 일들은 꽤 흔한 경험이다. “목사님! 방언을 해야만 성령을 받은 증거 입니까?”, “어떻게 해야 방언을 유창하게 할 수 있나요?”, “교회에서 방언하는 것이 성경적입니까?”,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진짜 방언인가요?”.

방언이란 문자 그대로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서로의 의사를 소통하기 위하여 말하는 체계적인 언어말이다. 요한 계시록 14:6 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 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여기에서 방언이란 외국어를 말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언어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린도 전서 12:10 의 말씀 중에 이러한 말씀이 있다.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을 통역함을 주시나니.” 여기에서도 방언이란 다른 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외국어를 말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해서 요즈음에는, 방언이란 개인이 하나님께만 말하는, 이상한 알아 들을 수 없는 소리냄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일까?

성경에 원래 말씀된 방언의 은사의 내용과 그 종류가 심각하게 오해되어 버리고 만 것 같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신약 시대의 첫 방언의 경험인 오순절의 방언도 외국 각 나라들에서 몰려온 사람들에게(이민간 유대인들)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알아들을 수 있게 나타난 성령의 은사가 바로 방언의 은사였던 사실을 우리는 간단한 성경 연구로 알 수가 있다. 외국에 살다가 우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모여 온 사람들이 별로 배움이 없었던 제자들의 설교를 자기들의 방언(외국어)으로 알아 듣게 되자 다 놀라 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떨게 해서 이 성경의 방언이 현대에 와서는 알아 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들을 발하는 것으로 둔갑을 하게 되었단 말인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오랫동안 방언을 해 왔었다는 한 자매가, 하루는 자기의 방언의 경험이 성령의 가장 큰 증거인 성품의 변화에는 어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다. 감정적으로 흥분된 상태를 주거나 짜릿한 고조의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나 실재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일에는 속수 무책이었고, 오히려 느낌에 의존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교인들은 옆에서 남들이 방언을 하면 자기도 무엇인가를 하여야 하기 때문에 일부러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들을 만들어 내어 지껄여 왔다는 간증들은 그저 웃고 지나가야 할 일만은 아니다.

예수께서 곧 오실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는 교인들로서,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모든 진리들을 성경을 가지고 시험해 보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성경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른다고 할지라도 단연코 버려야 하는 것이 하나님께만 충성하는 믿음이다. 만일 오늘날 흔히 하고 있는 방언이 하나님의 말씀 성경과 맞지 않는 경험이라면 그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경험이 아니라 할 수 있다. 그것이 성령이 주시는 경험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른 영에게서 오는 일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이번 호의 신앙 기사들은 이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오늘날 혼돈되어 있는 이 방언 문제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을 발견케 되실 것이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읽어 내려 갈 때에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여러분들을 진리도 인도해 주시는 놀라운 경험들을 하게 되실 것이라고 분명히 믿는다.

 

1부 - 현대판 트로이 목마


트로이의 목마에 관한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전설이다. 그리이스 군대는 트로이라는 도시 국가를 10년이나 포위하였지만 항복을 받아내는데 실패하였다.

그래서 한 꾀를 생각해 내었다. 그리이스 군대는 배를 타고 후퇴하는 체 하면서 속이 비어있는 큰 목마를 전쟁의 기념비처럼 해변에 남겨두었다. 그런데 이 목마 안에는 군인들이 숨어있었다. 트로이 안에서 활동하던 시논이라는 그리이스의 스파이는 그 목마를 도시 안으로 가져옴으로 트로이가 침범 당할 수 없는 신비의 도시라는 것을 보여주라고 사람들을 꾀었다. 트로이 사람들은 그 꾀임에 넘어가 그 목마를 도시 안으로 끌고 들어왔고, 그날 밤에 시논은 목마의 문을 열어 군인들을 내어보냈다. 곧바로 그들은 트로이의 수비대를 죽이고 성문을 열었고 바다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성문 앞에 숨어있던 그리이스 군대는 트로이로 진입, 성을 함락 시켰다.

적으로부터 오는 선물은 아주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암흑의 세력은 열기만 하면 곧바로 터져 버리는, 화려한 리본으로 포장된 폭탄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데 성공하고 있다. 오늘날 사단은 “성령의 은사”라고 불리우는 목마를 이용하여 교회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교회를 멸망시키려고 한다.

나는, 기독교인이 된지 얼마 후, 어머니를 방문하기 위하여 로스앤젤레스의 팜 스프링스에서부터 히치하이크(지나가는 차에 편승하며 가는 도보여행)를 하려고 하였다. 차를 얻어타기 위하여 손을 흔들면서 한참 걸어가고 있을 때, 친절하게도 어떤 오순절파 교회 교인이 차를 세워서 나를 태워 주었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 나는 내가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 있게 들려주었다. 내 말이 다 끝나자 그 사람은 나에게 “그러면 당신은 성령을 받았습니까?”라고 물었다.

이러한 질문을 처음 받아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글쎄요, 제 생각에는...저는 확실히 하나님의 영을 내 생활을 통하여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마약을 끊었고, 도둑질, 거짓말, 욕하기... 등, 습관적인 나의 죄와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있었으니까요.”라고 대답하였다. “아니요, 그런 것들 말고 ...” 그 사람은 조금 답답한 듯이 “당신은 성령의 침례를 받았습니까? 당신은 방언을 하나요?”라고 물었다. 그 사람은 내가 어떻게 죄악의 사슬을 끊고 승리를 거두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어떠한 황홀한 극치의 경험을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 사람은 내가 기독교인으로서 반드시 소유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경험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이후부터 나는 그 사람의 표현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아직 경험하지 못하고 있던 방언”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기독교인으로서 처음 출석하기 시작하였던 교회들은 모두 오순절파- 보통 Glossolalia 라고 부르는 방언의 무아경을 믿는 - 교회들이었다. 그러한 교회의 교인들이 다 같은 방법으로 하는 방언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에도 방언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교인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서 나는 많은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을 만나볼 수 있었으며, 성령께서 실생활 속에서 이루어 놓으시는 거듭남의 경험을 인정하는 교인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와 개인적인 문제점들을 극복하는 성화의 경험에 대한 관심보다는, 얼마나 자주 방언을 하고, 얼마나 깊은 무아경의 환상을 경험하는지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예배 시간만 되면 교회는 서로 다른 방언의 소리로 꽉 찼으며,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자책하는 분위기가 깊이 깔려 있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성경이 말하는 방언이 무엇인지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2부 - 거의 모든 교파에서 나타나고 있는 방언 현상


현대 기독교에 나타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현상 중 하나가 바로 방언을 말하는 것이다. 방언은 거의 모든 기독교에 퍼지고 있으며, 기독교뿐만 아니라 힌두교, 아프리카 토착종교, 불교, 천주교....등 거의 모든 종교계 안에서도 행해지고 있다.

비록 그들이 하는 방언의 방법은 다를지라도 자신들이 믿는 신의 능력에 압도되어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초인간적인 말을 중얼거린다는 공통성이 있다. 모든 종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현상은, 만약 현재 기독교회에서 급속하게 퍼져나가고 있는 방언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라면, 이것은 누군가가 거짓으로 조작하고 있는 속임수일 가능성이 있음을 말하여 준다. 은사는 반드시 “진리”라는 통로를 통해서만 내려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나 오류에 상관없이, 또는 누가 어떤 종교를 믿는지에 상관없이 방언의 은사가 내려질 수 있다면, 방언의 은사를 통하여 전파되어야 할 복음도 그 진실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방언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서 가짜로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방언은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다른 교인들이 방언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도 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받지도 않은 방언을 스스로 만들어서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며 자신도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무엇인가를 받아서 초인간적인 힘에 의하여 방언을 하고 있다. 그들이 기도할 때에 어떠한 힘이 그들을 제압하게 되고 그들이 생각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이상한 말을 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하에서, 그들의 마음은 평화를 느끼게 되고,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이상한 힘이 자신에게 전달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성경은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하신다(살전 5:19~22). 거의 모든 기독교 안에 퍼지고 있는 방언, 만약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우리는 이것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열심히 구하여야 한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진실을 증거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3부 - 방언의 은사가 오늘날에도 중요한 이유


방언은 오늘날에도 꼭 필요한 은사이다. 성경은 성령의 은사 중 하나로서 방언을 소개하고 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모든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 고전 12:4~6,10~11.

방언에 대하여 첫 번째로 말씀한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막 16:15~18. 예수께서는 온 세상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할 것을 명령하시면서, 믿는 자들에게는 방언의 은사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복음 전파와 방언의 은사는 병 고치는 은사와 함께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오늘날에도 복음의 전파가 필요되므로, 방언의 은사가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내려져야 한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 세 천사들의 기별은 방언의 은사를 필요로 하고 있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복음을 가졌더라” 계 14:6. 각각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족속과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방언의 은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Do you know this?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한복음 3:8)

이 말씀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모습을 나타낸다. 우리는 바람을 보지 못하지만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있다. 비록 우리가 바람을 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될 수는 없지만, 그분의 능력은 조용한 가운데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 준다. 비록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보거나 만지지는 못할지라도, 그분께서 해놓으신 결과를 볼 수는 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변화된다면, 우리의 생애가 성령의 임재하심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임재는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에 의존하여 확인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임재하심은 오직 변화된 생애를 통해서만 분명하게 확증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온전히 자신을 비우고 마음 속의 우상과 죄를 버린다면,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충만하게 채우실 것이다. 오직 이러한 사람들만이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데,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자랑치 아니할 것이며, 오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심이라”(고전 2:10,12)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받았을 때, 우리는 어떤 황홀하고 자극적인 느낌을 얻기 보다는, 오히려 침착함과 예리한 판단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생애를 바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서와 생애를 생각해 보자. 그분처럼 성령이 충만하였던 사람이 있는가? 그분의 생애는 감정적 환희와 흥분으로 차있는 생애가 아니었다. 오히려 고난과 희생과 봉사로 점철된 생애였다. 그분께서는 죄와 불의를 거절하셨으며,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치료해 주시는 생애를 사셨다. 그분께서는 성령이 충만하신 결과로 거룩한 삶을 사셨던 것이지, 자신에게 성령이 임하셨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구제와 치료를 베푸신 것이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단 한번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성령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으며, 오직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만 성령의 능력을 구하셨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성령 충만함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조용하면서도 진지하게 행하는 순종의 삶으로 표시되었다. 그분의 삶은 사랑과 희생과 극기와 자아부인으로 꼴 지워졌다. 마찬가지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이성적인 분별력과 하나님의 진리가 감정과 느낌을 지배해야 한다. 진리는 건전한 상식 위에 세워지며, 질서 있는 가정생활을 통하여 다른 영혼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허락하시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복음의 효과적이고 신속한 전파이다. 성령의 은사가 개인의 신앙적 만족감을 얻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되며,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정해 주신다는 마음의 안정감을 얻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문: 방언 은사는 누가 누구에게 주는 것입니까?

답 : 방언의 은사를 내리시는 분은 누구인가? 방언의 은사를 받기 위해서는 어떤 특별한 장소에 가야만 하는가? 그것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원이나 어떤 비밀스런 장소에 가서 오랜 기간 동안 기도해야 하는가? 누가 누구에게 이러한 은사를 주시는가? 앞에서 읽어본 대로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성경은 은사의 출처를 밝히고 있다(고전 12:4~6). 4절에서는 성령을, 5절에서는 예수님을, 6절에서는 하나님을 은사의 출처로 소개하고 있다. 은사는 아버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곧 하늘의 세 분 지도자들에 의해서 내려지는 것이다. 즉 하늘의 세 분 지도자들이 은사를 내리시는데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은사를 성령의 은사라고 주로 말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하늘에 가실 때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은 은사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은사를 그리스도인에게 전하는 것은 성령이지만, 하늘의 세 분 지도자가 은사를 내리시는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안다면, 은사가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교인들이 다 같은 은사를 받을까?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교회를 몸의 지체로 비유하고 있다. 우리 몸이 팔, 다리, 눈, 코 ... 등 같이 기능이 다른 부분이 합쳐져서 일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처럼, 교회도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 12:8~10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하여 각각 다른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주신다고 증거하고 있다. 여기에 한 가지 오늘날 기독교회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누구든지 성령을 받으면 그 결과로 방언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신자들은 방언을 거짓으로 만들어 내고, 어떤 이들은 실망하여 교회를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성령의 은사를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2장 29-31절부터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확실히 증언하고 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병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그 대답은 “아니다!”이다. 다 사도일 수 없고, 다 선지자일 수 없고, 다 병고치는 은사를 받을 수 없고, 다 방언을 말할 수 없다고 바울은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 방언을 해야 성령의 침례를 받은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서적 주장이 아니다.

 

 

 

4부 - 교회에게 덕이 되어야 하는 방언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 12:31. 바울은 12장 전체를 통하여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 아버지, 예수그리스도, 성령 모든 하늘의 지도자들이 참여하여 주어지는 귀중한 은사임을 바울은 말하였다. 그런데 그는 말씀을 마치면서 이 은사들보다 더 중요하고 제일 좋은 길을 보여주겠다고 하였으며, 다음과 같이 그 제일 좋은 길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1~3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서 비밀을 말함이니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전 14:1~5

성령의 은사는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다고 말씀하셨다(고전 12:28).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는 개인의 능력을 높이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 손이 몸에서 떨어져서 스스로 일을 행할 수 없고, 눈이 몸에서 떨어져서 그 기능을 발할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인 우리에게 교회를 위하여 주시는 것이다(고전 12:27). 그런데 만약 이 은사가 교회를 돕는 일에 쓰일 수 없다면, 그 은사는 몸에서 떨어져 나온 팔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인(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인(외국인)이 되리”라고 말한 것이다(고전 14:11).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미국인들에게 한국어로 백만 번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복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알 수 없는 방언으로 자신에게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외국인이 되고 자신도 복음을 듣는 그 사람에게도 외국인이 되어서 결국 아무 쓸모 없는 일이 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고전 14:13~14. 바울은 만일 방언을 말해야 한다면, 그 말의 의미를 통역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통역하지 않고 단지 방언으로만 기도한다면 그것도 나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지만 그 기도의 의미가 전달되지 못하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였다. 바울이 이 성경 말씀에서 언급한 영과 마음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서에서 몸과 마음을 설명하면서 육체(몸)와 영(마음)을 서로 비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은 통역 없이 방언으로만 기도하면 나의 개인적인 소원은 올릴 수 있지만 이것이 다른 신도들에게 전달될 수 없기 때문에 교회 전체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내가 교회에 대하여 “야만인”(11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 말하였다. 영어 성경에는 “마음으로”를 “with the understanding”(이해할 수 있게)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도를 할 때나 찬미를 할 때에는 영으로도 하지만 또한 마음으로도 하여 교회의 다른 사람들도 “덕 세움을”(18절) 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깨달은 마음으로 하는 말”은 곧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다 이해할 수 있는 말을 가리킨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사람이 되라”(20절).

5부 - 방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 14:22~23

성경은 “방언”을 “언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것은 실제적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마 28:19)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명령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하나 또는 두가지 정도의 언어밖에 모르는 제자들이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겠는가? 비록 제자들이 총명한 사람들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들 대부분은 교육받지 못한 문맹이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사가 필요되었다. 이것이 바로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언어를 말하게 하는 초인간적이고 신비스러운 언어의 은사인 것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새 방언을 말하며” 막 16:17. 이 성경절들을 통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 “방언” 또는 “언어”는 하나의 “표적”으로서 외국어를 공부하지 않고도 그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됨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전에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언어로 유창한 설교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경에는 방언을 말한 예가 3번 나온다 (사도행전 2, 10, 19). 이 성경절의 예를 잘 살펴보면 방언의 은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1~4

“불”은 능력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방언의 은사를 불의 임함처럼 보여주심으로써, 애굽의 바로 왕 앞에 나아갈 때에 모세가 받았던 그 능력에 (출 4:10~12) 상당하는 능력과, 이사야의 혀에 닿았던 하늘에서 온 숯처럼(사 6:6,7), 그들의 연약한 혀에 하늘의 능력이 내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하나님께서 오순절까지 기다리신 이유 

왜 하나님께서는 방언의 은사를 내리기 위해서 오순절까지 기다리셔야만 하셨을까? 사도행전 2장 5~11절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리비아인 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오순절은 유대인들의 명절로서 유월절 이후 50일째 되는 날이다. 이 날은 로마 제국의 곳곳에 퍼져있는 모든 진실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예루살렘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 하나님께서는 이 날을 택하셔서 방언의 은사를 제자들에게 내리심으로써, 그 곳을 방문중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모국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계획하셨다. 이 성경 말씀에 따르면 적어도 15개 이상의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자들에게 내려진 방언의 은사로 인하여, 타지에서 살다가 오순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개심의 경험을 하게 되었고, 오순절을 보낸 후 그들은 제자들이 전한 새로운 복음을 가지고 고향 집으로 돌아갔다.

이 말씀은, 방언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에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언어의 장벽을 허물기 위하여 내리는 은사임을 확실하게 증거해 준다. 어떤 사람들은 오순절 날에 있었던 기적이 다른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것이었다고 오해하고 있다. 이 은사는 다른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은사가 아니었고, 다른 언어를 말할 수 있는 은사였다. 이것은 언어의 은사였지, 들음의 은사가 아니었다.

성경에 나타난 방언의 3가지 기능 

1. 첫 번째 예증 : 어떤 사람들은 방언이 “하늘의 언어”로서 오직 하나님과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과 듣는 사람들이 모두 그 설교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11절).

2. 두 번째 예증 : 베드로가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에게 전도한 말씀을 통해서 볼 수 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행 10:44~46. 사도행전 10장 1절에 보면 고넬료는 이태리 사람이었고, 베드로는 유대인으로 아람어를 사용하였다. 역사에 의하면 로마의 시종들은 여러 나라에서부터 잡혀온 사람들이었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났을 때, 그 두 사람 사이에는 언어 장벽이 있었음이 확실하며, 베드로는 아마 통역관을 세워서 통역을 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령이 고넬료와 그 집안 사람들에게 내려졌다. 그 결과, 그 곳에 있던 유대인들과 베드로는 그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성경은 유대인들이 그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말하는 “하나님을 높임”의 음성을 들었다고 적고 있다(행 10:46). 후에 베드로는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오순절날)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행 11:15) 하였다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통하여 고넬료와 그 집안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오순절날 받았던 동일한 방언의 은사를 받았었다고 밝히고 있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방언의 은사를 받은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은 그들이 전에 전혀 알지 못하던 다른 언어로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3. 세 번째 예증 : 방언에 관한 마지막 예로는 바울이 12명의 에베소 사람들에게 전도한 일이다. 사도행전 19:6절에 말하기를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많은 교육을 받은 사도였으며, 가장 많이 선교 여행을 하였던 사람이다(고전 14:18). 성령이 12명의 에베소 사람들에게 임하였을 때에 바울은 그들이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로마 제국에서 쓰이고 있는 언어를 말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야 전도하는데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이 성경말씀들을 통하여 방언의 은사는 여러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 그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내려진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 4장에는 2장에 나오는 오순절과 유사한 장면이 나타나 있지만, 방언의 은사는 내려지지 않았다. 그들이 모였던 장소가 흔들렸으며 사람들은 성령으로 감동되어졌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다른 언어를 쓰는 외국인들이 없었기 때문에, 방언의 은사는 내려지지 않았다. 사도행전 4:31절에 말씀하시기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하늘로부터 성령의 침례가 내려지는 이유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가 아니고, 전도하기 위한 능력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고 하신 것이다.

Q & A

문: 성령을 받으면, 반드시 방언을 하게 됩니까?

답: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교회를 몸의 지체로 비유하고 있다. 우리 몸이 팔, 다리, 눈, 코… 등 같이 기능이 다른 부분이 합쳐져서 일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처럼, 교회는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 12:8~10)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각기 다른 은사가 내려진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을 받으면 그 결과로 방언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신자들은 방언을 거짓으로 만들어 내고, 어떤 이들은 실망하여 교회를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성령의 은사를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2장 9-31절부터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확실히 증언하고 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그 대답은 “아니다!”이다. 바울은 다 사도일 수 없고, 다 선지자 일 수 없고, 다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을 수 없고, 다 방언을 말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6부 - 고린도 교회에게 준 바울의 충고


바울이 기록한 14권의 신약 성경책들 중에서 고린도전서만이 방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는 어떤 특별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왜냐하면 고린도후서나 바울이 기록한 다른 성경에는 방언에 대하여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대 고린도 도시에는 두 개의 유명한 국제 항구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여러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고, 예배의 방법에 있어서도 혼란이 생기게 되었다. 고린도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언어로서 기도하고, 증언하고, 설교를 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바울은 조언하기를 만약 다수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를 말한다면 통역관이 필요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조용히 있으라고 말한 것이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조용히 하고 자신과 하나님께만 말하라” 고전 14:28. 즉,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하는 것은 예의있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바울의 다음과 같은 분명한 충고를 들어 보라: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들로만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교리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슨 유익을 주겠느냐? 피리나 하프같이 생명이 없는 것일지라도 소리를 낼 때에 그 소리를 구별하지 아니하면 피리를 부를 것인지 하프를 타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으리요? 뿐만 아니라 만일 나팔이 불확실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 준비를 하겠느냐? 너희도 마찬가지라. 만일 너희가 방언으로 쉽게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이는 너희가 허공에다 말하고 있는 것이라 ..... 교회에서 일만 마디의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기 보다는 차라리 나의 지각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여 나의 말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기를 원하노라 .... 누가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려면 두 사람이나 많아도 세 사람이 차례로 하고 한 사람은 통역하라. 그러나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조용히 하고 자신과 하나님께만 말하라” 고전 14:6-9, 19,27,28(킹제임스 성경역)

소위 방언을 한다는 사람들이 이 성경절들을 이용하여, 교회에서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중언부언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바울의 충고는 그러한 사람들의 주장과는 전혀 다르다. 디모데전서 6:20절에 “허황된 말과 변론을 피하라”고 하였다. 디모데후서 2:16절에 바울은 또다시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니”라고 하였다. 방언의 은사는 우리의 생각을 언어가 다른 다른 사람과 나누기 위해서 마련된 하나님의 고안품이다. 만약 사람들이 그대가 하는 방언을 이해지 못한다면, 바울의 충고처럼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지 않을까?

7부 - 하늘 언어에 대한 오해


내가 알고 있는 오순절파 교회에 있는 대부분의 나의 친구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이 실제적인 다른 나라의 언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나라의 언어를 말하는 것 이외에 두 번째 은사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하늘의 기도 언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groanings which cannot be uttered)”이라고 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기도하는 이유는 사단이 자신들의 기도를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우리의 기도를 숨기라는 말씀이 없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사단이 그것을 듣고 떤다고 말하고 있다.

오순절파 교인들이 말하는 소위 “기도의 언어”라고 불리우는 교리는 고린도전서 14장 14절에 기초하고 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들은 바울이 기도할 때에도 하늘의 언어로 기도하였으며, 바울 자신도 무엇을 기도하는지 알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중요한 문제를 제시한다. 만약 자신이 어떤 기도를 했는지 알지 못한다면, 자신의 기도가 응답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고린도전서 14:14절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성경을 읽다가 가끔 문제에 부닥치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의 성경절들이 고어를 쓰고 있어서 그 의미가 혼란스럽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 성경절을 현대어로 표현한다면 “내가 만약 내 주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기도한다면, 내 개인적으로는 성령을 통하여 기도하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기도를 통하여 전달되는 나의 생각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다”라는 뜻이다. 바울은 만약 우리가 크게 공중 기도하기 원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하든지 아니면 잠잠하라고 말하는 바울의 충고를 기억하라.

그 다음 몇 성경절들을 살펴보자.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고전 14:15~16. 이 성경절에 의하면 누가 이해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하였는가? 이해하는데 문제가 있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이 아니고, 듣는 사람이다. 만일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외국인과 같이 기도를 해 본 경험이 있다면 바울이 왜 “아멘” 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하였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통역관이 없다면 여러분이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두 가지 오해 

1. 고린도전서 14장의 문맥을 볼 때에 방언을 말하는 이유, 또는 외국어를 말하게 되는 이유는 복음의 전파를 위한 의사소통과 그로 인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만약 통역관이 없다면 그 사람의 말은 단지 허공에 대고 하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과 그 사람 자신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주 잘못 오해되고 있는 2절의 말씀의 의미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고전 14:2

바울은 다시 한번 강조하기를 방언은 듣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과 묵상으로 이야기하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고전 14:9, 28. 분명, 방언은 언어 장벽을 극복하여 복음을 다른 민족과 나라에게 전하기 위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주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2. 어떤 사람은 이같이 묻는다. “바울은 자신이 천사의 언어를 말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다.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고린도전서 13:1)라고 하였다. 만약 여러분이 이 말씀을 문맥을 따라 이해한다면, “... 할지라도”의 의미가 “만약 그렇게 한다고 할지라도”라는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예로서 바울은 2절에서 “... 할 수 있는 믿음이 있을 지라도”라는 동일한 방식의 문맥을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참수형을 당하였지 화형을 당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이 “...할지라도”의 의미는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방언의 2가지 목적 1. 복음 전파 2. 언어 장벽을 극복하기 위한 의사 소통

생각해 보아야 할 6가지 질문

1. 한국 사람이 한국 교인들 앞에서 기도하거나 설교 할 때에 방언을 사용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2. 한국 사람이 한국 교인들 앞에서 기도하거나 설교할 때에 통역을 두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3. 무아경 속에서 자신이 어떤 내용으로 방언 기도를 했는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자신의 기도가 응답 받았는지 알 수 있는가?
4.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하여 주어진 방언 은사가 왜 믿는 자들만 모여 있는 교회 안에서 가장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는가?
5. 생애와 성품 속에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지 않은 그리스도인도 방언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가?
6. 하나님의 진리와 율법을 의도적으로 거절하고, 고의적인 죄를 범하는 사람에게도 하늘로부터 방언의 은사가 내려질 수 있는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에 대한 바울의 견해 (고린도전서 14장)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2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 덕을 세우고(4절)…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느니라(5절)… 내가 너희에게 방언들로만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나팔 부는 것인지 어쩌 알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준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7-9절)…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르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인이 되리니(10,11절)… 너희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12절)…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13절)… 내가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지각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14절, 킹제임스역)… 네가 영으로 축복(기도)하면 네가 말하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너의 감사에 아멘할 수 있으리요? 너는 감사를 잘 했으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히라라(16,17절, 킹제임스 성경)…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리라(19절)…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20절)…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여 표적(22절)…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23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라(26절)…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며,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27절)…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28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33절)…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40절)”

 

8부 - 위조품을 조심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본이시다. 그분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한 분이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한번도 방언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침례 요한도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이었으나 그가 방언을 말하였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신약의 27개 책들 중에서 오직 3권만이 방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성경은 약 39명의 저자로 쓰여졌으나 오직 누가, 바울, 마가만이 방언에 대하여 말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곳에 우리의 중요성을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감정에만 의지한다면 우리는 진품과 위조품을 구별하지 못하고 헛된 방언을 구하다가 믿음을 잃어버릴 것이다.

진정한 방언의 은사는 복음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 강력한 능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단은 언제나 위조품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Glossolalia”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오순절파 교회들에서 방언의 경험을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American Heritage 사전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복잡하고 의미 없는 말, 특별히 무아경 또는 정신질환적 증상과 관련된 현상”

이와 반대로 “언어”라는 단어는 “인간이 사용하는 목소리, 주로 성문화된 글씨로 나타내는 소리,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구성된 패턴” 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성경은 방언을 언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Glossolalia”라는 분열된 소리는 “언어”가 아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많이 보아왔다. 전에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목사와 그의 아내가 “방언의 팀”을 이루고 있었다. 매주 설교 시간만 되면 목사의 부인은 벌떡 일어서서 그의 손을 하늘로 쳐들고 황홀경에 빠진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부인은 언제나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여 내었다. “한다 칼라 샤미, 한다 칼라 샤미....”. 이러한 현상은 나에게 의심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매번 그 부인이 이러한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마다 그의 남편인 목사는 설교를 중지하고 영어로 통역을 하였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사실은, 그 부인은 계속해서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데, 남편인 목사가 통역하는 내용은 매번 달라지는 것이었다. 때로는 통역이 부인의 이상한 소리보다 3배 이상 길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싶은 기별이 있으면, 왜 처음부터 전체 교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로 주지 않으실까?’ 하고 의아해 하였다.

 

 

질문 : 오순절 당시의 방언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였지만, 그 이후에는 본인이나 다른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 알아들을 수 있는 새로운 방언이 시작되지 않았나요?

답변 : 성경은 오순절 이후에도 참된 방언의 형태가 전혀 변화되지 않았음을 시사해 줍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오순절)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행 11:15). 이 말씀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의 말씀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오순절이 이후에도 방언의 형태가 여전히 "처음" 오순절 때와 같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 이후에 방언의 형태가 변화되었다는 것은 추측에 불과합니다.

9부 -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현대 기독교회 안에서 급속하게 퍼져나가고 있는 이상한 방언 현상을 볼 때마다 나는 학창 시절에 읽었던 역사책의 내용이 생각난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상한 방언 현상은 그 뿌리를 성경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 이방인들의 제사 의식에 두고 있음을 역사는 말하여 준다. 기원 전 6세기에, “델피의 오라클”이라는 사람은 아폴로신과 뮤즈의 신의 영지라고 알려진, 그리스 중부에 있는 파르나소스산 아래 살고 있었다. 델피는 “술, 다산, 선정적 춤의 신”이라고 부르는 “디오니소스”를 믿는 사람이었다.
제사 의식 중에 분위기를 돋우는 선정적인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을 때, “피디아”라고 부르는 부족의 사제장은 이상한 연기를 들여 마시면서 황홀경에 빠져들어 가면서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여 지절거렸다. 그 사제가 이상한 소리를 낼 때에 다른 사제는 그것을 통역을 하였다. 그의 소리는 아폴로신에 관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추상적인 것이었고 그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New Mexico에서 미국 인디언들과 살고 있을 때에도 이와 비슷한 현상을 목격하였다. 그 인디언들은 “페이요우티”라는 환각제를 마시고 둥글게 앉아서 몇 시간 동안이나 드럼 소리를 들으며 종교적 노래를 불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몇몇 인디언들은 발작적으로 자극적인 몽상에 관한 말을 중얼거렸다. 이러한 제사 형식의 유사함 때문에 미국에서 오순절파 교회들은 미국 인디언들에게 인기가 가장 좋은 곳이 되었다.

여러가지 이교도적 미신을 믿는 아프리카의 부족들은 그들의 신으로부터 축복을 받아내기 위하여 닭이나 염소 등을 제물로 드리고 여러 시간 동안 불을 중심으로 돌며 춤을 추며, 최면적인 리듬과 드럼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몇 사람들은 신접한 상태에 이르게 되고 혼령의 세계의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 마을 마법사나 사제가 그 말을 통역한다. 이러한 의식은 오늘날에도 서인도의 Voodoo Catholic 들에 의하여 행하여지고 있다.

이러한 이방적인 제사의식들이 처음 미국 교회에 들어온 시기는 1800년도이다.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노예들이 미국에 온 후 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강압받아서 교회에 나갔지만, 그들은 스스로 성경을 읽어서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지성을 갖추지 못했다. 그들이 비록 아프리카의 서로 다른 부족들에 속해 있었지만, 그들 모두는 신령적 춤과 신접한 소리를 낸다다는 점에 있어서는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 노예들은 그들의 신접한 소리를 방언의 은사로 오해하게 되었고, 새로운 방법의 방언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강한 리듬의 음악과 같이 진행되는 이러한 광신적 의식은 미국 남쪽 지방의 교회들에서 처음 받아들여졌으나, 당시의 기독교 단체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Holy Rollers”라고 비난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접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의식도중에 독사를 가지고 나왔다. 이러한 생각은 마가복음 16:18절에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을 잘못 오해하였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독사를 사냥하여 들고 있는 것은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가 아니고 실제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백인들의 오순절파 운동은 1906년 로스앤젤레스의 Azusa Street에 있는 Apostolic Faith Gospel Mission에서 시작되었다. 이 단체의 지도자는 William Seymour 이라는 흑인 전도사였다. 그 때부터 이 단체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교리를 계속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일반 기독교인들에게 더욱 흥미 있게 보이도록 노력하였다. “1960년대부터 이 오순절파 운동은 전통적인 백인 기독교인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전 세계에 걸쳐서 개신교와 천주교 안에 오순절파의 가르침을 믿는 수백만의 교인들이 있다.” Compton’s Interactive Encyclopedia, under the entry “Pentecostals”

무아경의 주문을 외우는 이방 종교의식에서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것을 모방한 거짓 방언들은 이방 종교의 음악을 모방한 기독교회의 음악과 종교의식에서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 반복되는 비정규적인 리듬의 연주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성적인 능력을 잃게 만들고 최면적인 무아경으로 이끈다. 이러한 분위기를 통하여 극렬한 상태로 반복되는 중얼거림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지금 사단은 위조된 방언의 은사를 사용한다. 트로이의 목마처럼, 이방 종교의 예배 방법이 기독교 안에 들어와서 놀라울 만큼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사단은 기독교인들을 믿음에서 감정으로 이끌려고 한다. 어떤 오순절파 교회들은 성경은 이미 지나간 구식이고, 방언이 바로 그리스도인에게 새롭게 주어진 기별이며, 심지어는 방언이 성경보다도 더 믿을만한 것이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현대 기독교회 안에 사단을 위한 무대가 이러한 단계까지 완성되어 있다.

 

10부 - 내가 발견한 4가지 공통점


최근에 나는 어떤 성경 연구 그룹에게 성경을 가르친 경험이 있는데, 그때 내가 깨달은 교훈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3명의 사업가와 그 부인들이, 매주 목요일마다 성경의 원칙들을 탐구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그 3쌍의 부부는 모두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처럼 보였습니다. 함께 공부하는 도중에 가끔씩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이 체험한 사랑의 경험들을 주고받았습니다.

몇 주 간에 걸친 성경 공부를 끝내는 마지막 날, 나는 그 사람들에게  그 동안 배운 진리에 대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기 시작할 것을 권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 중 아무도 자신들이 그토록 성경을 통하여 화긴하였던 진리의 말씀들을 순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더욱 당황하게 만든 것은, 그들이 순종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을 때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의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우리가 할 일들을 개인적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배운 진리를 순종하라는 지시를 아직 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동안 배운 진리가 매우 성서적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진리를 지키기 전에 성령님의 개인적인 지시를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나는 이미 성령께서 성경의 진리로 그들을 인도하셨으므로, 더 이상 성령의 뜻과 계시를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그분께서는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다른 말씀을 하심으로써 성경과 어긋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하였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합리화시키고 미화시키는  다른 영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사하고 방언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경 말씀보다 자신들의 경험을 더욱 신뢰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높여야 된다고 수없이 말하였지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순종하기를 계속해서 거절하였습니다.

나는 그들과의 성경 공부 경험을 통하여 예수께서 마태복음 7장 21, 22절에 하신 말씀의 실체를 보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정말 자신들의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은 행하지 않으면서 “주여, 주여!”라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졌다고 주장하는 성령의 은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이 과거에 행했던 것들과 매우 유사했습니다. 귀신들을 쫓아냄, 예언, 병 고침, 방언, 기적 등.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지막 때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런 기적들을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지만, 예수의 진리인 성경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마 7:23).

오늘날 어느 곳을 가든지 수많은 사람들이 교파의 장벽을 초월하는 “성령 은사 운동”에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이 자신에게 임했기 때문에 방언이라는 영의 언어를 말하게 되고, 병을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내며, 예언을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경고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는 참된 은사와 거짓 은사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는 어떤 기적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가짜를  식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느냐 또는 불순종하느냐에 의해서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거짓 선지자들의 큰 “이적과 기사들”이 너무도 기만적이기 때문에, “택하신 자”들까지도 그 기적들에 의해서 압도적으로 미혹당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마 24:24). 사도 요한은 말세에 아마겟돈 전쟁에서 “귀신의 영들”이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 그들을 모으”는 것을 보았습니다(계 16:14). 마지막 시대에 거짓 영들은 교회 안에서 활동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이 성령의 능력을 너무도 흡사하게 가장하므로, 대부분의 세계와 교회들이 사단의 기만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놀라운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쳐준다는 약속, 기적 같은 언어 능력, 심령술 등에 미혹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또는 사단에게서 오는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조차 거짓 기적에 관해서 예언한 성경의 기록들을 주의 깊이 살펴보지 않음으로써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을 가지고 설교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진지한 태도와 열성에 감동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은 그런 기적들이 하나님게로부터 오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느낍니다. 그들은 기적들을 성경으로 시험하기 보다는 느낌과 감정으로 판단합니다. 

사단이 던져 주는 기적의 덫에 걸려드는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4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하면서도 안전함을 느낀다.
2. 영을 분별하고 진리와 오류를 판단하는 최종 시험 기준으로써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자신들의 감정과 느낌을 선택한다.
3.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인정하신다는 확증을 얻기 위해서 성경 이외에 다른 시험 기준, 즉 자신들의 감정과 기적의 은사를 신뢰한다.
4. 자신들의 직접 확인한 놀라운 교훈과 예언의 진리들을 자신이 직접 체험한 종교적 "경험"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일축해 버린다. 

11부 - 사단이 그리스도인에게 기적을 주는 이유


성경에 계시된 가장 분명한 마지막 시대의 징조 중의 하나는, 모든 영혼들의 운명을 종결지을 최후의 전쟁을 위해서, 사단의 세력이 가시적으로 출현하는 것이다.

성경은 마지막 시대에 사단은 세상 전체를 자기 진영으로 끌여 들이는 기만적인 작전을 펼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도 요한은,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 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 내려갔”다고 기록했다(계 12:12). 지구 역사 전체를 통하여 준비해온 이 마지막 전쟁을 위해서, 사단은 정치적 세력과 종교적 힘을 모두 이용할 것이다. 머리가 비상한 사단은 사람들을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전략을 세워왔다. 그의 최종적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늘에 가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이 계속해서 율법을 범하는 죄를 짓게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이 최후의 기만을 위한 그의 전략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의 권위에 도전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모든 교파에 속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범하면서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하며, 둘째로는 하나님의 뜻 안에 살고 있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행하는 기적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강력한 감정적 확신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단은 신앙 문제에 있어서 성경을 최종적인 권위로 받아들이던 전통적 견해를 무너뜨리고, 그에 걸맞는 다른 권위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사단은 모든 교파 간에 존재하는 어떠한 종류의 견해 차이도 극복할 수 있는 전략을 세웠는데, 그러한 전략을 통하여 사단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전체 그리스도인들을 유도하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주님께서 주신 이 경고의 의미를 잘 생각하여 보자. 이 성경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자처하고 있으며 심지어 예언하고 병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엄청난 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그런 영적 은사들을 행사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누가 그들에게 이러한 초자연적 능력을 주어서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있도록 하였을까? 그러한 능력이 나올 수 있는 근원은 오직 하나님과 사단 이외에는 없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들이 불법의 창시자 사단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고 예언했던 것임에 틀림없다.

이 말씀은 마지막 때에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처럼 보이는 기만적인 기적들이 있을 것임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외부적으로 그것들은 정말 참된 은사와 유사하게 보일 것이며, 신앙적 열성이 충만한 분위기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질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요한복음 16:13)라고 하셨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모든 진리 또는 모든 것”은 죄를 지적하시는 성령의 사업부터 시작된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어떤 사람도 자신이 율법을 범한 일에 대한 성령의 책망을 받고 십자가로 인하여 용서와 성화의 경험을 하지 못한다면, 진짜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할 수 없다. 거짓말, 도둑질, 간음.... 등을 행하면서도 성령 충만함을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아니라 참람된 요구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 12:31,32. 사도 누가는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원칙에 대해서 분명하게 선언하였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행 5:32.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신다.

이 성경절들을 통하여 우리는 왜 기적을 행하였던 자들을 예수께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배척해 버리셨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늘의 능력을 요구하였지만, 하늘 아버지의 뜻과 그분의 율법을 거절하는 삶을 살았으므로,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하고, 사단의 속임을 당한 것이었다.

성령의 은사를 구하기 전에, 성령의 9가지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자신의 성품과 생애 속에 충만하게 맺히고 있는가 생각하여 보자. 성령의 열매들이 충만하게 맺히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성령의 능력이 부어질 수 있다는 것은 사단의 속임수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진리를 고의적으로 부인하거나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능력과 은사가 내려질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부인하는 사람도 성령의 침례를 받을 수 있다면, 어떤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받을 수 없겠는가?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그것을 받아서 이기적으로, 무례하게 사용할만큼 변화되지 않은 자들에게도 주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방언이 신앙적인 만족감을 주기 위하여 내려진다고 생각하는가? 한국 사람이 한국 청중들에게 설교하는데, 방언을 사용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한국 사람이 한국사람들에게 설교하는데 통역을 두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방언을 하는 사람 자신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며 듣는 사람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묘한 상황이 성경적으로나 합리적으로 납득이 되는가?

그대는 하나님의 기적을 간구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진리를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는가? 그대는 예수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진리와 계명을 사랑하고 순종하는가? 그대 자신의 신앙적인 경험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 그대는 자신의 경험을 부인할 만큼 성경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가?

방언은 현대 기독교회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꼭 필요한 은사이다. 만약 그대가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느낀다면, 그 은사를 주장하기 전에 기도와 성경연구를 통하여 그 은사의 진실성을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이다.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가 있는 것처럼, 거짓 방언과 참 방언이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의 진실성은 성경으로 판단되어져야 할 것이다.

 

문 : 성령을 받는 순간에는 그 능력에 의하여 이성을 잃고 쓰러져서 뒹굴게 됩니까?

답 : 우리는 성령이 임하는 사람이 어떤 태도를 나타내게 되는지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영의 침을 당한 사람은 땅에 뒹굴며 방언을 중얼거려야 한다”는 사상은 하나님의 신을 모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목적은 그의 형상을 복원하기 위해서이지, 인간의 존엄성을 잃게 하고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이성을 잃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구약시대에 갈멜산에서 이방신의 예언자들은 제단 주위를 뛰며 신음소리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예언을 하면서 자신들의 몸을 자학하였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엘리야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단순한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고전 14:33. 우리가 성령을 받을 때, 우리 자신을 제어할 수 없게 된다는 생각은 성경 말씀과 어울리지 않는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고전 14:32. 예수께서 갈릴리 맞은 편 거라사인의 땅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셨을 때에 그 고침을 받은 사람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아래 앉”아 있었다(눅 8:35). 하나님께서는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고 초청하신다.

이 글을 읽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당신은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나는 여러해 동안 방언을 하였고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알고 있습니다”라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느낌으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사단은 우리의 감정과 느낌을 통하여 접근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되어야 한다.

방언을 자주 하였던, 열심 있는 오순절파 교인인 나의 한 친구는 방언에 관하여 공부한 후 자신의 방언이 정말로 올바른 영으로부터 왔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진정한 마음으로 “주여 만약 이것이 당신의 뜻이고, 만약 내가 참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면 이것을 내게서 제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그가 내게 말하기를 그 시간으로부터 무아경의 중얼거림은 다시 그에게 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생각과 행함들을 하나님의 제단 위에 올려 놓고 포기할 줄 알아야 하며, 이것들이 어떠한 인기를 가지고 있거나,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좋아하는지에 상관없이 진리의 말씀에 일치하지 않는 모든 것들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눅 16:15.

 

결론 - 기적과 감정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


기적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요한계시록의 기별

큰 기만이 가까운 장래에 우리 모두 앞에 공개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말세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사람들의 눈 앞에서 놀라운 이적을 행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마치 하나님과 사단 중간에 서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청난 기적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짐승의 표가 세계적으로 강요되는 그 날이 오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하던지 사단을 경배해야 하는 마지막 선택을 해야만 하는데, 그 때에 세상은 완전히 두개의 진영으로 나누어 지게 된다. 하나님의 참 백성들은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고, 사단에게 속한 무리들은 짐승을 경배함으로써 그의 표를 받게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짐승의 표를 받을 뿐 아니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기를 거절하고 그 표를 받지 않는 소수의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나아가서는 그들을 죽일 것인데, 바로 이것이 지구 역사의 마지막에 있는 선과 악의 최후의 대쟁투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 사항은 “이방 종교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짐승의 세력에게 미혹당해서 그들과 하나로 연합하여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데 가세하게 될 수 있는가?” 라는 점이다. 요한계시록 13장에는 이 의문에 대한 힌트가 기록되어 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계 13:13,14. 바로 여기서 우리는 사단이 거짓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종교인들 그리고 심지어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세상 사람들까지라도 하나로 끌어 모으는 방법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사단의 대리자들이 행하는 놀라운 “기적과 이적”이다. 사단은 자신의 대리자인 거짓 그리스도인들에게 능력을 줌으로써 온갖 기적을 행하게 하는데,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는 이적을 행함으로써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경이로운 마음을 가지고 짐승의 표를 받도록 미혹할 것이다. 그 때 세상은 짐승의 세력을 중심으로해서 일어나는 경이로운 기적을 보면서 열광적인 감정의 도가니로 변하게 될 것이다.

지구 역사의 마지막이 되어 갈수록 거짓이 진리와 너무나 유사하게 제시되기 때문에 오직 성경 이외에는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말과 기적과 행위를 시험하는 일에 있어서 유일한 기준이 되어야만 한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리니” 사 8:20. 하나님의 참 백성이라면 누구나 성경을 거짓 성직자의 영향과 마귀의 영들이 행하는 기만적인 기적에 대항하기 위한 방어책으로 사용하는데 익숙해야 한다. 사단은, 만일 사람들이 성경에 대하여 올바른 지식을 소유하게 되면, 자신의 온갖 속임수가 폭로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진지한 마음으로 연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단의 공격 목표는 감정

성경 진리에 의존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감정에 의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단은 기적과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하여 사람의 감정을 집요하게 공격한다. 느낌과 감정에 의존하여 신앙 생활을 영위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아무런 보호벽도 가지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단은 사람의 정신을 흥분시키고 자극하는 방법으로 오류와 거짓을 퍼트리기 때문이다. 진리 안에 존재하는 참된 행복과 만족을 발견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헛된 감정적 환희를 추구하다가 사단이 만들어 놓은 덫에 걸려 들게 된다.

사단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감정과 믿음을 섞어 놓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러므로 감정이 고조되어야만 믿음의 향상과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사단의 전략에 기만당하기 매우 쉬운 형편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사단은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성품과 생애에 있어서 아직 충분하게 열매 맺지 못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각종 기적과 거짓 은사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줌으로써, 그들의 고조된 감정을 통하여 접근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고조된 감정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신과 특별하게 함께 하신다는 거짓 확신을 갖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변화가 아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어떤 단조로운 말을 빠르게 반복하여 기도함으로써, 이전에 자신이 경험했던 감정적 환희와 만족을 억지로 이끌어 내려고 애쓰지만, 그들의 생애를 이끌어 가는 진리와 신앙의 원칙이 교정되지 않는한 진정한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새롭게 거듭난 생애도 시작될 수 없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이 감정적으로 만족되지 못할 때마다 깊은 낙담을 맛보게 된다. 그들은 사단에게 속은 것이며, 또한 스스로의 감정에게 속은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영적 경험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 이상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한다.

감정적 신앙의 특징

감정적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매우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분명하게 밝히신 뜻과는 달리 그와 반대되는 길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억지 기도를 드리는 것이야말로 감정적인 신앙의 대표적 증거이다. 사단은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여 의심을 받지 않을만한 곳에 그물을 치기 때문에 정직한 마음으로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지 않는 한, 누구도 사단의 덫을 피할 수 없다.

대개 감정을 중요시 여기는 신앙은 하나님의 진리와 율법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내게 개인적으로 말씀해 주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그대로 가겠다” 라고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사단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이 원하는 감정과 느낌을 줌으로써,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켜 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가 요구하는 바를 저버리고, 자신의 감정과 느낌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생애함으로써 결국에는 자기 스스로를 속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표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와 교만이 죽은 생애이며, 자신보다 진리를 높이 여기는 삶이다. 분명하고 예리한 성경 진리를 받아들이기 원치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명백한 진리 대신에 자기의 양심을 진정시키고 감정을 만족시켜 주는 설교를 좋아한다. 극기와 자아 희생을 요구하는 그리스도의 진리가 빠져 있는 교리에 큰 호감을 나타내는 것이 감정적 신앙인의 특징이다.

믿음과 느낌이 오는 순서

느낌은 믿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둘을 명확하게 구별할 뿐 아니라 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활용하는 대신에, 자신에게 어떤 특별한 느낌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믿음은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광경을 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전진하였을 때, 영광스러운 감격(감정)과 감사의 정신을 축복으로 받게 된다. 믿음은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활용할 수 있는 것이고, 느낌은 믿음을 활용한 결과로서 얻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활용없이 어떤 느낌과 감정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인간적으로 애쓰는 것은 순서가 바뀌었을 뿐 아니라, 크게 잘못된 신앙 태도이다.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허락하시는 감정과 느낌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참된 믿음은 약속된 축복이 실현되고 느껴지기 전에 그것을 붙잡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세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유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붙잡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진리의 말씀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진리가 아닌 다른 것을 붙잡고 있으면, 마귀가 그 사람의 요구와 기도에 응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축복을 깨닫기 이전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축복하심에 대한 감사의 정신(감정)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항상 최선의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을 믿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참된 믿음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이 항상 만족한 감정과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이유이다. 약속된 축복을 느끼고 그것을 즐기게 될 때에는 이미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느낌이다. 말세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기 전에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며 사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이 필요한 순간

모든 것이 예상대로 잘 진행되고, 모든 일이 잘 풀려 나갈 때에는 믿음의 참된 가치가 드러나지 않는다. 믿음은 주변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나갈 때에 진정으로 그 가치가 발휘된다. 모든 것이 원만하고 평화로울 때에는 참된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상황이 변해서 모든 것이 악화될 때에는 참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높이 드러나게 된다. 자신의 감정이 잘못된 것을 요구할 때, 자신의 느낌이 건강에 유익하지 않는 음식을 요구할 때, 그리고 자신의 육체가 정욕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달라고 외칠 때에 참된 믿음은 그 모든 것을 거절하고 승리한다.

믿음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감정적 신앙을 가지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이 자신에게 많이 부어질 때에는 큰 믿음을 얻게 되며, 자신이 성령의 큰 능력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에는 아무런 믿음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령의 결핍을 느낄 때야말로 믿음을 활용해야 할 때이다. 짜증과 속상함이 치밀어 오르고, 허전함과 외로움이 밀려올 때야말로, 우리가 믿음을 발휘하여 하나님께 구조의 손을 뻗칠 때이다. 시커먼 검은 구름이 마음을 덮쳐올 때야말로 산 믿음을 통하여 흑암을 꿰뚫고 구름을 흩어 버림으로써 암흑 저편에서 여전히 나를 바라다 보고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쳐다 보아야 할 때이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인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하는 축복을 주장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는 말씀의 의미이다(요 15:7).

무엇으로 복음을 받아야 하는가?

우리는 복음을 무엇으로 받아야 하는가? 복음을 이성으로 받아야 하는가? 감정으로 받아야 하는가? 우리는 복음을 양심과 생애로 받아야 한다. 복음을 양심과 생애로 받는 대신에 감정으로 받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복음을 버리고 떠나가게 된다. 지금도 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께 나왔다가, 다시 복음을 버리고 떠나가고 있다. 복음을 양심과 생애로 받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과 행복을 발견하지만, 복음을 감정으로 받은 사람들은 감정이 식어지면 복음에 대하여 싫증을 느끼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가고 만다.

이러한 현상은 “예수께서 곧 재림 하신다” 는 기별이 전파될 때에도 그대로 반복된다. 곧 짐승의 표가 강요되고 예수께서 오신다는 경고의 기별을 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격앙되었던 감정이 식어지면, 그들은 후회하면서 복음을 버리고 떠나간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그들을 “내 백성아 거기(바벨론)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부르셨건만(계18:4), 그들은 자신들의 고조된 감정이 식는 순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그들은 원칙과 믿음으로 움직이지 않고, 느낌을 따라서 움직인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성품과 생애를 위하여 계획하셨던 섭리와 역사가 미처 이루어지기도 전에 그들은 복음을 버리고 떠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진실함을 시험하시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말세에는 예수께서 곧 재강림하신다는 엄숙하고 두려운 기별이 그것을 들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게 된다. 사람의 마음을 읽으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격앙된 감정과 흥분을 보시면서, 그들이 정돈된 마음으로 자신들의 신앙적 입장을 결정할 수 있는 때를 기다리신다.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를 기만하지만 않는다면, 그분께서는 흥분된 감정이 정돈될 때까지 시간을 허락하실 것이며, 그 다음에 당신을 따르는 백성들의 순종과 진실함을 시험하심으로써 그들의 신앙이 어떠한가를 살피신다.

하나님의 은혜인가? 나의 노력인가?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변화를 이야기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힘과 의지로 자신의 신앙과 생애를 억지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잘못을 쉽게 범하기 쉽다. 오직 거듭난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만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수 있고, 진리와 율법에 완전히 합치된 마음에만 완전한 평화가 깃들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얼마나 자주 스스로의 노력으로 마음의 평화를 만들어 내고, 구원의 확신을 얻어내려고 노력하는가?

변화의 중심은 언제나 마음이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마음의 중심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을 고조시키는 어떤 기적이나 예식이 아니라, 그분의 생명이다. 그분의 생명이 있는 삶은 언제나 어디서나 풍요롭지만, 생명이 없는 곳에는 언제나 허무와 참담함만이 존재할 뿐이다. 생명이 없는 신앙은 우리를 율법주의나 감정적인 신앙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마음의 만족과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기 원하는가? 감정을 끌어올리려고 애쓰는 대신, 온 마음과 생애를 다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들이라!

교회 안에 “다른 복음”이 존재하는 이유

복음은 타락한 인간에게 변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만일 복음이 요구하는대로 성품과 생애에 참된 변화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결국에 가서는 자신의 잘못된 경험과 감정의 요구에 맞춰서 복음을 바꾸어 놓게 된다.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대신에 사람이 복음을 변질시켜 버리게 된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바뀐 복음 즉, 다른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갈 1:6~8. 성경은 다른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강력한 경고를 주고 있는데,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 안에 왜 이렇게 여러가지 다른 복음이 존재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된 감정과 경험에 맞추어서 참 복음을 다른 복음으로 대치하였기 때문이다.

복음을 의도적으로 거절하거나, 복음대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는 평안이 깃들 수 없다.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 믿음과 원칙 위에 서있지 못하고 감정 위에 자신의 신앙을 세운 사람들은 불편한 양심을 달래고, 마음의 평안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복음을 변질시키게 된다. 복음이 일단 변질되면, 사람은 죄 가운데서도 편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모든 사람은 선천적으로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항상 “다른 복음”을 더 선호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오직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만이 “다른 복음”이 던지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기 기만의 위험

신약 성경에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나오는데, 그것은 사도 바울이 기록한 자기 기만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전 3:18. 어떻게 우리가 스스로 우리 자신을 기만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속일 수 있을까? 때때로 다른 사람들의 거짓말에 의해서 속임을 당할 수는 있지만, 어떻게 자기가 자기를 속일 수 있을까?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 자기 기만의 과정은 매우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에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다. 진리의 빛은 하나님의 말씀과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전달되거나, 혹은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임한다. 진리의 빛은 놀라운 힘(power)을 가지고 역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은 변화함을 받지만, 진리를 의도적으로 거절한 사람은 더욱 악하게 되거나 강팍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한번 자신에게 임한 빛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거절하게 될 때, 영적 감각력도 상처를 받아서 부분적으로 마비되기 때문에 두번째 나타나는 빛은 그만큼 식별할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흑암의 세력은 증가하게 되고 결국에는 영혼이 밤처럼 캄캄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자기 기만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는 과정이다. 자신에게 진리의 빛이 이르러 왔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했을지라도, 그 빛을 받아들이고 순종하여 그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자신이 빛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스스로 믿게 되고, 결국에는 자신이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빛 가운데로 걸어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깊은 기만 속에 빠지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순종도 불순종도 아닌 중간 상태에서 머뭇거리면서 진리를 앞에 두고 흥정하고 있는 동안, 사단은 그 사람의 마음을 점령해 간다. 진리가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이 진리를 거절할 때, 그는 사단의 포로가 되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두려운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들려 주시는 음성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며 사는가? 성령께서 그대를 인도하기 위하여 보내주시는 진리의 빛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그대의 반응과 선택 위에 온 세상을 미혹하는 마지막 대 기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놓여 있다. 우리에게 빛을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변화와 개혁된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스스로 기만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성경 진리를 통하여 보다 더 밝은 빛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심으로써, 사단의 기만과 덫을 피할 수 있게 도와 주신다.

Q & A

문: 현재,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답: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 자체는 영원불변하지만, 진리를 이해하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은 잘못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된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진리를 검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기준점으로서 해서 우리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즉,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 진리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서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시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경험을 진리 위에 놓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그것이 올바른 진리의 테두리 안에 있을 때에만 가치있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경험은 우리가 어떤 교단에 속했으며, 어떤 사람에게 성경을 배웠느냐에 따라서 크게 다를 수 있지만, 진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동일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고 있다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경험을 설명합니다. “A) 나는 어떤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였다. B) 그런데, 나의 경험과 매우 흡사한 경험을 성경에서 발견하였다. C) 그러므로 나의 경험은 진리이다.” 이와 같은 3단 논법에 의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성령의 은사로 믿고 받아 들입니다. 이러한 논리는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리지만, 자신의 경험이 초대 교회의 경험과 비슷하다고 해서 자신들의 경험이 진리 안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단도 기적을 일으킬 수 있으며, 성령의 역사를 위조할 수 있고, 사람의 감정을 조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험이 최고의 증거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영”에 의해서 진리를 척량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살후 2:10,11)

아무리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한다고 공언할지라도, 진리의 말씀에서 벗어나거나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영적인 위치는 매우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진리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끝까지 따라가게 되며,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 마음 속에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성령은 사랑과 진리를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성령이 주어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성령)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니라”(요 14:15~17) 사도 요한은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계명(commandment, 명령)을 순종할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순종이야말로 자신의 경험을 시험할 수 있는 최종적인 판단 기준이며, 동시에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