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어떤 노인의 이야기


지난 해에는 매우 좋지 않은 기록들이 하늘의 기록책에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지난 해에 하늘 기록책에 기록된 기록은 그것들이 선한 것들이든지, 악한 것들이든지 간에 변경될 수 없다.

만일 그대의 지나간 생애가 실패였다고 생각된다면, 이제 해가 바뀌어서 새로운 해를 맞았으니, 우리들 앞에 열려져 있는 깨끗한 페이지들 위에 아름다운 기록들이 기록되도록 노력하자.
기록하는 천사는 우리 곁에 서서 우리가 말하고 행하는 것들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 천사로 하여금 하늘 기록책에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를 결정시킨다. 우리들의 매일의 생활은 생과 사의 영원한 분리선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인생의 황혼길에서 삶의 진실과 허상을 깨달은 한 노인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매우 귀중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한 해가 새롭게 시작되는 때였다. 나는 달 빛을 반사하고 있는 눈덮힌 야경을 창문을 통하여 보면서 나만큼 희망없고 속절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의 앞에는 얼마 후에 내가 들어가야만 할 무덤이 열려져 있고, 나의 뒤에는 죄와 방탕함으로 낭비해 버린 인생이 있다. 나름대로 행복을 찾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살아 왔건만, 내가 선택한 길 위에는 참된 행복도 없었고 보람도 없었다. 내가 인생을 다 산 후에 내가 얻은 것은 후회와 절망 뿐이다. 이제 몸은 늙어서 쇠약하게 되었고, 정신은 후회와 가책으로 가득차 버렸다.

젊은 시절에 소모해 버린 인생의 슬픔 기억들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두 길로 갈라지는 한 지점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이 생각난다. 한 길은 하늘 본향으로 가는 길이었고, 다른 길은 어둠과 낙망으로 인도하는 길이었다. 하늘의 천사들은 나의 곁에 서서 내가 하늘가는 길을 선택하도록 인도하기 위하여 애를 태웠다. 나에게 여러가지 경로를 통하여 진리의 빛을 보여 주었고, 무엇이 참된 행복인지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사건들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천사들의 노력과 갈망에도 불구하고, 나는 욕심과 순간적인 쾌락에 이끌려 어둠의 길을 선택하였다. 아, 그 때 천사들이 얼마나 슬퍼했을까! 내가 선택한 길의 끝이 사단에 의해서 인도되고 있는 모습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천사들의 심정은 어떻했을까?

내 마음을 채우고 있는 후회의 기도는 이것이다. ‘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나에게 젊음의 그 시절을 되돌려 주십시요. 나로 하여금 인생의 분리선 위에 다시 한번 설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요. 내가 다시 그 때로 돌아 간다면, 나는 결단코 진리의 길을 선택하겠나이다.’ 이러한 절규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아무런 응답을 받을 수 없었다.

젊은 시절에 나의 절친한 친구들 중에 어떤 이는 빛의 길을 선택하였다. 친구들은 그 친구가 자원하여 정직과 가난의 길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면서 바보라고 조롱하였다. 나도 그 친구를 마음 속으로 놀렸다. 그 친구는 승리하였고, 나는 패배하였다. 그 친구는 만족과 행복을 얻었고, 나는 후회와 절망 속에 묻히고 말았다. 쓰디쓴 양심의 가책과 앞을 가리는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떨어뜨린 채 또 다시 절규했다. ‘오, 젊은 시절이여, 다시 오라! 평화와 거룩함의 길로 나를 인도하는 천사의 손을 꼭 한번만이라도 만져 보고 싶구나!’

못한 욕망과 세속에 지친 몸을 이끌고 하나님께로부터 서둘러 떠나가는 나의 젊은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어쩔 수 없는 회한이 마음을 채운다. 그러나 한가지 희망이 아직 내게 남아 있다. 아직도 내가 진리와 거룩함을 선택할 수 있는 인생의 짧은 기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감사와 찬송이 나온다. 나의 오랜 반역과 죄를 지켜보시면서 지금까지 인내해 오신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을 멈출 수 없다. 더 이상 지난 날의 세월에 붙잡혀 살지 않아도 된다. 내게는 아직도 진리와 행복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일시적인 감정에 의지하지 않고, 믿음을 의지하면서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신뢰하는 삶을 살려고 한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실제에 있어서는 내 자신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 지난 날의 내게 있어서 믿음이란 순간마다 변하는 감정에 따라서 조종되는 유희에 불과하였다. 젊은 시절의 나는 하나님의 계명과 진리에 의해서 내 주변에 둘러쳐진 울타리를 벗어나고자 애썼다. 그러나 이제 나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팔 안에 거하고자 한다. 오랜 세월을 통하여 배운 값진 경험이 있는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법과 진리 안에만 평안과 쉼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세상적인 명예나 인기나 재물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마지막 날에 ‘잘 했도다 착한 종아’라는 구세주의 칭찬을 듣는 것이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나는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할 것이며, 그분께서 지정하신 좁은 길을 걸어갈 것이다. 마지막 날에 주어질 최후의 면류관을 위하여 나는 전진할 것이다!”


사막에서 만난 하나님

나는 타는 듯한 사막을 걸으면서 어디엔가 있을 오아시스를 찾고 있었다.
나는 내 스스로 그 곳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누군가 내게 와서 “내가 그 곳으로 인도해 주마”라고 했을 때,
나는 “나도 지도를 가지고 있답니다”라고 대답했다.
인기척 소리에 뒤를 돌아 볼 때마다 그 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목이 갈하여 샘을 찾아 헤맬 때,
“그대가 이 물을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텐데”라는 음성을 들었지만,
나는 “나의 갈증은 그것으로는 풀리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마침내 계곡 아래에서 시원하게 보이는 물을 찾았지만,
그 물에는 무서운 독소가 들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주변 모래 위에 흰 뼈들이 널려 있었다.

너무나 지쳐서 쓰러져 누워 있는데,
“서늘한 그늘이 필요하지?”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괜찮아요!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라고 대답했지만,
나의 말은 의미 없는 빈 말이었다.

쓰러져서 몸을 뒤척이던 나는 갑자기 일어나서
저기 지평선 끝을 향하여 달리기 시작하였다.
눈 앞에 잡힐 듯이 보이는 것이 오아시스가 아닌가!

“제발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두세요!
내가 원하던 것을 찾았단 말입니다!”
나의 단호한 거절로 인하여 그분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는 듯 하였다.

손을 뻗으며 곧 잡힐듯한 곳에 오아시스가 있었다.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성공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를 향하여 치는 부러움의 박수 소리를 듣고 싶었으며,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넘어지고 피 흘리며 올라간 모래 산의 정상,
아뿔사! 그것은 신기루가 아닌가!

이윽고 밤이 몰려왔으며,
나는 목마르고 지친 상태로 쓰러져 눕게 되었다.
밤의 사막은 몹시 추웠다.
다리를 웅크리고 두 손을 다리 사이에 넣은 채,
길고 추운 밤에 절망의 눈물을 흘리면서 잠이 들었다.

포근한 느낌이 들어서 눈을 떠 보니
옆에 모닥불이 피워 있었고 그 너머에 그분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 동안 나를 따라오셨던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셨다!

새롭게 떠오른 아침의 태양 아래서
그분과 나는 나머지 여행을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권두언


이 우주는 너무나도 큽니다. 가까운 오리온 성좌까지 가는데도 빛의 속도로 350광년이나 걸린다는 군요. 우리의 태양계가 들어있는 이 은혜계의 길이가 15만 광년이라고 합니다.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도는 빛의 속도로 15만년 동안 달려가야 우리의 은하계의 끝까지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우주에는 이러한 은하계가 수없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 마음에 밀려오는 한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참으로 먼 길을 오셨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영계에 속한 천사들은 순식간에 하늘과 세상을 넘나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속도의 개념에서가 아니라, 그 크시고 높으신 분께서 이 먼곳 까지 내려 오신 사랑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냥 하나님으로서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셔서 오셨습니다. 그것도 우리 인간과 같은 육신을 가지시고 말입니다. 그것도 어린아이로 출생하시는 일을 통해서. 성경은 예수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이 땅에 오실 때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죽기까지 복종하시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아는데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하신 사랑을 이해하면 모든 구원의 수수께끼가 풀리게 됩니다. 그분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길이를 연구하면 기독교의 중심을 보게되며 모든 정벽들이 무너져 내려 앉게 됩니다. 예수의 성육신의 연구는 참으로 중요한 주제 입니다. 여러분은 예수께서 이 땅에 인간이 되어 오신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그 목적을? 이번 호는 여러분들의 심금을 우리면서 놀라운 깨달음을 주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존경하는 동료 목사님들께


나의 소원

일선에서 수고하시는 목사님들께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교회는 점점 더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 지난 한 해동안 진리를 등지고 떠나간 영혼들을 생각할 때마다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렇게 떠난 신자들 중에 목사인 제 자신의 부족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오해를 품고 방황하는 영혼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저에게 깊은 염려와 고뇌를 가져다 줍니다. 양떼들을 인도하는 성직자의 위치에 있는 제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기대하시는 죄와 세속에 대한 승리의 모본을 보이지 못한다면, 결코 그분을 위하여 봉사할 수 없다는 생각이 저를 초조하게 만듭니다. 저는 변화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새해에는 성령께서 내 개인의 삶과 목회 안에서 참된 부흥과 개혁이 일으켜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기대하시는 경험의 깊이까지 제 개인의 영적 경험이 깊어지기를 소원합니다.

목회자로서 제가 들어가야 할 경험은 깊이, 아주 깊이 들어가는 경험입니다. 그 경험은 반드시 알고 있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버리는 철저한 성령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하여 성령께서 날마다 제 앞에 십자가의 장면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목적과 이유에 대하여 분명하게 드러내시어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게 만든 저의 죄를 철저하게 미워하도록 해주시기를 소원합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미워하도록 인도할 뿐 아니라, 그 죄를 지긋지긋하게 싫어하게 함으로써 종국에는 그 죄를 버리고 돌아서게 할 정도로 우리의 뇌리에 깊이 파고 들어야만 합니다.

존경하는 목사님들이시여, 저와 여러분은 우리 자신이 죄에 대한 승리의 경험을 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의 목회 아래에 있는 양떼들에게 죄에 대한 승리를 감히 설교할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양심이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기 때문이죠. 매 주말마다 설교 단상 아래에 앉아 있는 양떼들은 우리 목회자들에게 죄에 대한 승리의 경험을 듣기를 원하고 있으며, 그들에게는 그것을 요구할 수 있는 마땅한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인들에게 회개한 삶을 살기를 촉구하기에 앞서 우리가 먼저 회개한 모본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교인들도 우리 목회자들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읽습니다. 그들은 목회자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표준을 알고 있습니다. 만일 제가 한 교회를 지도하는 목사로서 두 개의 다른 표준을 갖고 이중 생활을 한다면, 저의 설교는 전혀 그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하는 설교가 제 개인의 생애와 가정 속에서 실천되지 않는다면, 제가 전하는 생명력 없는 기별은 그들에게 있어서 “쇠귀에 경읽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참된 회개의 역사가 제 자신에게 먼저 일어가기를 소원합니다.

금년에도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분명하게 교인들 앞에 제시하고자 합니다. 누가 감히 십자가에 매달리신 우리 구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죄를 고집하고 더러운 생각을 품을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자신을 위하여 어떤 희생과 죽음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교인마다 죄를 버리게 될 것입니다. 죄에 대한 승리는 십자가에 대한 분명한 이해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능력있는 십자가의 기별을 전하고 싶습니다. 만일 제가 제시하는 십자가의 복음을 듣는 교인들의 생애 속에서 회개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제가 목회자로서 그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봉사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참된 종들이 전하는 기별은 교인들로 하여금 다니엘처럼 “뜻을 정하”도록 만들 것이며, 에녹처럼 거룩한 생애를 살기 원하는 소원을 심어 주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전에 좋아하던 것을 싫어하게 되고, 이전에 싫어하던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교만하던 사람은 겸손하게 되고,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롭게 됩니다. 술을 마시던 사람은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게 되고, 불순하던 사람은 순결하게 됩니다. 세상의 허영과 유행을 좋아하던 사람은 그러한 것들을 버리게 되고, 자신의 의복이나 자동차나 집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자 하지 않게 됩니다. 저는 제가 시무하는 교회의 교인들이 금년에는 정말로 그러한 변화를 맛보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의 대쟁투

이 세상에 두 길이 있는 것처럼, 교회 안에도 두 길이 있는데, 그것은 좁은 길과 넓은 길입니다. 지난 해에 저는 넓은 길을 걷기 원하는 적지 않은 교인들과 다투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치열한 선과 악의 대쟁투였습니다. 두 길은 서로 구별되고 반대 방향으로 가는 길입니다. 한 길은 생명으로 나아가고, 다른 한 길은 죽음과 멸망으로 향하여 있습니다. 한 길은 좁고 험해 보이며, 다른 한 길은 평탄하고 쉬워 보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멸망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경고의 기별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스스로 넓은 길을 선택해서 살아가는 교인들을 보면서 온 힘을 다하여 그들을 구원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진리에 순종하기 위하여 희생과 고난을 마다하는 교인들에게는 위로와 희망의 설교를 했고, 죽음과 멸망을 향하여 나가고 있으면서도 만족하고 안락한 삶을 즐기는 교인들에게는 단호한 경고의 설교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께서는 제게 때때로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교인들에게 인기 없는 설교를 해야만 할 필요성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성령께서 저의 강력한 설교를 통하여 교인들의 양심 속에 개인적으로 역사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장로님들과 교인들은 제 설교에 대하여 대항하여 일어섰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분명하게 죄를 지적하라는 말을 할 필요가 어디있습니까? 좀더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설교를 해주십시요!”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충실한 수호자로서 서야만 한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한 뜻과 진리를 미처 이해하지 못한 장노님들과 교인들은 제게 여러가지 모습으로 압력을 가해 왔지만, 저는 주님께서 제게 주신 부담과 책임을 도무지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과 목사인 저 사이에 치열한 영적 전쟁이 생겼지만, 저는 그것을 피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그들에게 좁고 협착한 진리의 길을 불평없이 따라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만 합니다. 또한 진리의 길은 고난과 희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행복과 보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만 합니다. 좁은 길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쁜과 정열을 가지고 뛰어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깊은 잠을 자기 위하여 덮고 있는 라오디게아의 포근한 이불을 걷어 치워주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저는 교인들의 죄는 반드시 시정되어야 하며,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는 용기와 소망을 주는 기별과 함께 전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들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양육시키기 위하여 금년 한해를 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8가지 질문

교인들을 영적 잠에서 흔들어 깨우기 위한 투쟁에는 말할 수 없는 고뇌와 고통이 따름니다. 때때로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목사로서의 나의 직책까지라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하여 배웠습니다. 저는 울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점점 더 어두워져만 가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는 제 눈에는 눈물이 흐름니다. 저의 사랑하는 교회가 죄와 세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일에는 저와 제 가족이 치루어야만 하는 분명한 댓가가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저는 교회 안에 들어온 죄와 잘못된 교리들을 보면서 스스로 벙어리인척 하길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은 10가지 질문들을 제 자신에게 물어보면서 목사로서의 제 위치와 길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1. 나는 교회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교인들이 듣기 좋아 하는 것으로 포장하여 설교하는가?
2. 나는 내 자신의 평판과 인기에 대하여 염려하며 불안해 하는가?
3. 나는 진리를 곧바르게 설교하기 때문에 목사로서의 직책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가?
4. 나는 교회의 장로들 또는 동료 목사들로부터 배척당하고 따돌림 당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가?
5. 나는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섭리로서 모든 것을 바로 잡아주시겠지”라고 말로써, 교인들에게 곧바른 설교를 하지 않는 연약함을 합리화시키는가?
6. 나는 정확한 음과 큰 소리로 나팔을 부는 동료 목사들을 비판적이고 사랑이 없는 목사라고 비난함으로써, 내 자신의 직무유기를 합리화시키는가?
7. 나는 부유한 교인이나 가난한 교인들을 항상 공정하게 대하는가?
8. 나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양심적이고 진실한 목사들에 대해서는 냉정한 태도를 나타내면서, 진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양심이 예민하지 못한 목사들과 어울릴 때에는 죄책감을 느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가?
9. 나는 내 교회의 교인이 자신의 영적 갈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다른 목사를 찾아갈 때에 그 영혼이 편안한 마음으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놓아주는가?
10.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성경 지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 즉시로 그 사실을 정직하고 인정하고 내가 믿어 온 신학과 설교를 교정하기 원하는가?

존경하는 목사님들이시여, 예언과 시대의 징조들과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배도는 어쩌면 여러분과 제가 이 시대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마지막 목소리가 될 수 있다는 분명한 증거들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비록 어려운 일선 목회의 형편이지만, 금년에도 하나님의 거룩한 제단 위에 자신의 생애를 불사르는 하나님의 종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깊은 세속의 잠으로부터 깨워 하늘 도성까지 인도하시는 신실한 종들이 되시기를 바라면서 새해를 맞는 인사의 말씀을 마칩니다.

노아의 가족만 구원받았던 신학적 이유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눅 17:26. 이 말씀은 노아의 때에 있었던 징조와 사건들이 마지막 시대에 예수께서 재강림하시기 직전에도 그대로 되풀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또한 이 말씀은, 마지막 시대인 오늘날 우리들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살펴보면, 노아의 때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는 말씀은 “오늘날에 되는 것과 같이 노아의 때에도 그러했느니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적 성경 해석에 근거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노아 시대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방주가 필요없다는 신학이 나온 이유

홍수를 위한 대비책으로 지어진 엄청난 크기의 노아 방주에 오직 노아의 식구 8명만 들어가는 비극이 벌어지게 된 배경에는 그 당시 성직자들의 잘못된 설교와 가르침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 당시의 성직자들이 어떤 가르침을 가르쳤길래 온 동물계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쌍쌍이 방주 안에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식구 8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노아 방주에 들어가지 않기로 결심했을까?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노아의 시대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편만해 있던 시대였다. 아담은 9백여세를 사는 동안 자신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에덴 동산에서 일어났던 죄의 시작, 그리고 인류의 죄에 대한 용서와 구원을 위하여 메시야를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자손들에게 말해 주었다. 노아의 시대는 하나님과 3백년 동안 동행하다 하늘로 승천한 에녹이 있었으며, 최고의 장수를 누린 무두셀라가 살아 있던 시대였다. 이러한 위대한 신앙인이 있었기에 노아의 시대는 복음에 관한 어두움의 시대가 아니라 광명의 시대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기를 거절하고 홍수에 빠져 죽음을 당하게 되었을까? 그 당시의 상황을 오늘날의 상황과 비교 회상해 보도록 하자.

노아는 곧 전 세계적인 대 홍수가 온다는 사실을 전파했다. 그러나 마지막 시대인 오늘날의 사람들이 예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재림하시는 엄청난 초자연적인 믿지 않는 것처럼, 노아 시대의 사람들도 단 한번도 하늘에서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내려오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노아 홍수를 믿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120년 간의 고된 수고 끝에 마침내 하나님의 지시대로 방주를 완성하였다. 노아가 오랜 시간에 걸쳐서 방주를 짓는 동안 그의 주변을 떠돌며 괴롭히고, 함께 일하던 사람들의 마음에 때때로 의심과 회의를 불러 일으켰던 성직자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노아의 대화를 살펴 보면 그 당시의 상황과 오늘날의 상황이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성직자들 : “노아, 당신은 정말 하나님을 신뢰합니까? 당신은 오직 그분께서만이 다가오는 폭풍우로부터 당신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정말 믿소? 당신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믿소? 아니면, 당신이 지은 이 배를 믿소? 우리들이 보기엔 당신은 하나님보다는 배를 믿는 것같소. 당신은 보잘 것없는 나무로 만든 이 배를 믿기 보다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배가 작으면 작을수록 당신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으며, 아예 배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만을 바라본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가장 확실한 믿음이 될 것입니다.”

노아 : “여러분들의 말과 신학은 매우 논리정연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의 신학이 진리라면, 왜 하나님께서는 120년 전에 이 엄청난 크기의 방주에 대한 청사진을 주셨겠습니까?”

성직자들 : “노아,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 청사진을 주신 것은 당신이 영적으로 너무 교만하고 당신이 자신의 행위에만 의존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어렵고 불가능하게 보이는 대 공사를 주심으로써, 당신 자신의 무력함과 속절없는 형편을 깨우쳐 주시길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고집스럽게 스스로의 힘으로 배를 지어서 홍수를 피하겠다는 기만 속에 빠져 있는 것이오. 만일 다가오는 대 홍수에 당신이 만든 배가 견딘다면, 당신의 배에 탄 생존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신에 당신에게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배를 포기하고 이제부터는 우리와 함께 순수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전파합시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저 작은 구명선을 준비하거나, 아니면 그저 맨 땅 위에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는 것뿐이요. 이 방주를 불태워 없애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타내 보이십시요.”

노아 : “당신네 신학이 요즈음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인기를 얻고 있으며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는 순수한 복음처럼 들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당신들의 주장이 진리라면, 왜 하나님께서는 내게 이런 청사진을 주어서 12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노력과 희생을 하도록 섭리하셨을까요? 우리 가족은 이 엄청난 크기의 배를 짓는 동안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자금이 부족하고,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우리 가족은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눈물로 간구했어야만 하였습니다. 그러한 위기의 순간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는데, 그러한 경험들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를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굳건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어려운 일들이 닥칠 때마다 우리 가족은 서로가 격려하고 위로하였고, 그것은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가 되어 우리의 가정 안에 풍성하게 맺혔습니다. 비록 방주 짓는 일이 매우 어렵고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긴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순종하였습니다. 우리들 자신의 순종과 희생 자체 때문에 홍수의 때에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결과 때문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의 방주 안에서 우리는 피난처를 찾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행함과 순종의 댓가로 하나님의 구원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뿐 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방주 짓는 일을 조롱하고 야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 가족이 이렇게 큰 방주를 지어야만 되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아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입니다. 우리 가족은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거절하기 원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만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기 때문이죠. 믿음은 게으름과 불순종에 대한 이유가 될 수 없으며, 방종에 대한 핑계가 될 수도 없습니다. 순종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구원의 계획에 인간의 입장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협조하는 것입니다. 순종이 없는 믿음으로는 하나님께서 이미 마련해 놓으신 구원의 계획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며(약 2:17),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기 때문이죠(약 2:22). 여러분들이 빠져 있는 가장 큰 자기 기만은, 자신의 삶이 아무리 부도덕하든지 간에,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 율법에 불순종하는 생애를 살지라도, 진리에 동의하고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얻게 된다는 생각입니다.

성직자들 : “노아여, 우리의 생각은 당신의 생각과 다르오. 당신은 바리새적이고 율법주의적입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에 순종하려고 애쓰는 것은 율법주의라고 설교할 것이며, 우리의 행함과 순종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오직 믿는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가르침을 전파할 것입니다. 당신의 신앙은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쌓은 공로와 행위에 의하여 구원을 얻고자 하는 행함 위주의 율법주의입니다.

이것이 노아와 성직자들 사이에 있었던 마지막 대화이다. 얼마 후, 홍수가 왔으며, 노아의 신앙을 비웃고 조롱하던 사람들과 성직자들은 아무런 피난처도 발견하지 못한채 물 속에 잠기고 말았다. 그 사건이 있은지 수천년 후에 사도 바울은 노아 홍수가 주는 교훈을 되새기면서 노아의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의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히 11:7.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이시여, 역사 이래로 없던 엄청난 마지막 심판이 우리들 앞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는 “믿기만 하면 구원 얻을 수 있다”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주는 어떤 성직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지만, 심판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서 베풀어진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죄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생애로 우리의 삶 전체를 이끌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믿음은 가짜입니다. 구원을 위하여 방주를 짓되,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정확한 청사진대로 지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추측하여 짓는 방주는 마지막 환난이 왔을 때에 결코 피난처가 될 수 없기 때문이죠.

Q & A

문: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십계명에 구속 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되는데 정말 그런가요?

답: 개신교회가 세워진 이후 수 세기 동안 기독교회는 십계명의 준수를 매우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서, 오늘날의 기독교회가 세속에 물들어 감에 따라서 계명과 진리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가르침들이 퇴락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비록 현대 기독교회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중요성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개신교회를 세우고 키워온 종교 개혁자들과 선구자들은 계명과 순종에 관한 문제를 강조함으로써, 교회를 세속과 악의 조류로부터 보호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개신교회의 몇몇 선구자들의 견해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 칼빈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이 우리를 율법의 권위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은 그리스도인의 생애가 거룩한 삶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영원불변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포함하고 있는 율법은 마땅히 존재해야만 하며 변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법은 그 권위에 있어서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 언제나 동일한 존경과 순종을 표해야만 한다.” Commentary on a Harmony of the Evangelists, trans by William Pringle

마틴 루터 : “하나님의 법이 폐지되어야 한다는 이론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나의 논리로는 그와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없다. 법이 폐지되었다는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을 만나서 그가 어떻게 그러한 말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들어보고 싶다. 죄에 묶여서 죄를 범하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법을 없애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법이 없는 곳에 어떻게 죄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누구든지 법을 없애려고 하는 사람은 죄를 없애려는 것과 같다.” Wider die Antinomer” in Sammtliche Schriften, ed. By Johann walch vol.20, cols. 1613, 1614

드와이트 무디: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십계명은 구약시대 이후로 지금까지 인간을 구속하고 있다… 사람들은 십계명이 여전히 우리들을 묶고(구속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것을 범하는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따른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바울은 말하기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사랑이 율법을 폐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Weighed and Wanting, p 10~17

 

1부 - 음식물과 건강 (아프리카 원숭이가 병에 걸린 이유)


몇 해 전에 유럽의 동물학자들이 공동으로 아프리카 원숭이의 생태를 연구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연구 및 관찰을 통하여, 아프리카 원숭이들은 하루 평균 6시간 이상 나무를 타고, 신선한 열매를 따서 먹으면서 살기 때문에 매우 건강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나무와 줄기를 타면서 밀림 속을 누비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들이 먹을 양식을 확보하는 그들의 생활 양식은 아프리카 원숭이들의 건강을 최고로 유지시키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동물학자들이 발표하였다.

그런데, 그 지역이 국립 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아프리카 정부 당국은 유럽 및 미국 등지의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아프리카 원숭이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밀림 지역을 개발하기로 결정되었다. 그 결과, 아프리카 원숭이들의 주거지 근처에 여러 호텔들이 세워지게 되었고, 구미 선진국에서 관광을 온 사람들이 먹고 남은 음식 찌꺼기들 즉, 햄버거, 스테이크, 그리고 각종 기름진 음식들이 밀림 주변에 마구 버려지게 되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아프리카 원숭이들의 집단 거주를 보기 위하여 몰려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밀림 속에서 나무타기를 즐기는 원숭이들의 모습을 보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래서 유럽의 동물학자들이 그 이유를 살펴 보았더니, 호텔에서 버린 기름진 음식 찌꺼기를 먹은 원숭이들이 배가 불러서 나무를 타면서 밀림 속을 누비고 다니는 대신에 그늘에 누워서 잠을 자거나 쉬고 있었다. 낮잠을 즐기고 일어나서 다시 시장기가 돌면, 다시 일어나서 호텔에서 버린 음식 찌꺼기를 먹으러 갔다. 다시 말해서 원숭이의 라이프 스타일이 바뀐 것이다.

이렇게 원숭이의 라이프 스타일(생활 양식)이 바뀐 지 3년 후에 동물학자들은 아프리카 원숭이들로부터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원숭이의 주거 지역이 국립 공원이 되고 호텔이 세워진 이후, 3년 만에 아프리카 원숭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4가지 성인병이 유발되기 시작하였다. 그 지역의 아프리카 원숭이들에게는 전혀 있을 수 없던 질병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첫째가 당뇨병이었고, 두번째가 고혈압이었으며, 세번째가 관절염이었고, 네번째가 비만증이었다. 당뇨병이라는 것은 원숭이들에게는 전혀 유발되지 않던 병이었다. 또한 밀림 속에서 바나나를 따먹으면서 뛰노는 아프리카 원숭이들은 비만증에 걸릴 수도 없다. 그런데 호텔에서 버린 기름진 동물성 음식 찌꺼기를 먹고 배가 불러서 운동은 하지 않고 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는 생활을 3년 동안 하면서, 아프리카 원숭이들에게 현대의 성인병들이 찾아 온 것이다. 관절염과 고혈압에 걸린 원숭이이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제대로 걷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절뚝거리면서 걷는 아프리카 원숭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아프리카 원숭이들에 대한 연구 보고서가 학계에 발표되자, 많은 과학자들이 음식물과 라이프 스타일의 중요성을 재차 인정하게 되었다. 원숭이는 원숭이답게 살아야만 한다. 밀림 속에서 나무타기를 6시간 이상 하면서 바나나와 과일을 먹으면서 살아야만, 그들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창조된 것이 아프리카 원숭이이다. 그러나 문명이 그들의 주거 환경을 침입하면서 그들의 음식이 기름진 동물성으로 바뀌고, 운동량이 극도로 줄어들면서 원숭이들은 그들이 걸릴 필요가 없는 질병에 걸려 고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물학자들은 원숭이들이 원숭이 답게 살도록 도와주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원숭이들을 다시 밀림 속으로 되돌려 보내야 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수많은 원숭이들을 개별적으로 진찰해서 당뇨병, 고혈압, 관절염, 비만증으로 분류하여 치료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치료 비용도 너무나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창조주가 그들에게 지정해준 원래의 라이프 스타일 속으로 되돌아 가면, 그들의 질병이 회복되고 치료될 수 있을 것이라는 과학적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이 원숭이들을 치료하고 회복시켜 준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원숭이가 밀림으로 되돌아 가는 것을 도와주기 위하여 호텔측에 음식찌꺼기를 제한된 장소에 버려 줄 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원숭이들은 사람들이 먹다 남은 기름진 음식 찌꺼기를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되었고,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하여 다시 밀림으로 돌아가서 나무타기를 하면서 음식물을 확보하기 위하여 하루 6시간 이상 운동을 하게 되었다. 밀림으로 돌아 간 거의 모둔 원숭이들은 3년만에 성인병들로부터 회복되었다.

아프리카 원숭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시조 아담을 창조하신 직후, 곧바로 그들에게 건강 법칙을 말씀해 주셨다.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먹으며, 어떤 생활을 하면서 살아야 가장 활력있는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건강 법칙은 성경의 제일 첫번째 장에 나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게 하리라” 창세기 1:29.

2부 - 음식물과 성격 형성 (마사이 족과 키키유 족 이야기)


오래 전에 영국의 한 의학지에 다음과 같은 제목의 논문이 실려서 학계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는 육식과 성격 형성의 관계에 대한 연구.”

이 논문은 동물성 지방과 단백질의 섭취 그리고 그것이 사람의 성격 형성에 미치는 관계에 대한 비교 연구였다. 그 논문은 아프리카의 두 종족을 대상으로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아프리카의 어느 지역에 서로 이웃해 사는 두 종족이 있었다. 한 종족은 마시이 족이고, 다른 종족은 키키유 족이었다. 한 지역 안에 서로의 경계선을 맞대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있는 사실은 대대로 이 두 종족이 섭취하는 음식물이 전혀 대조적이라는 것이다. 마사이 족은 육식을 주로 하며, 돼지의 피를 마시고 지방으로 만든 푸딩을 일상적인 주식으로 하였는데, 이와 반면에 키키유 족은 채식을 주식으로 하였다. 육식과 돼지 피를 마시는 마사이 족은 매우 호전적이고 포악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전쟁을 좋아하고 잔인하였고, 키키유 족은 이와 반대로 성격이 온순하고 평화적이었다. 그래서 이 두 종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많은 경우에 마사이 족이 승리하였다. 성격이 사납고 전쟁을 즐겨하는 마사이 족을 온순한 키키유 족이 당해 낼 수 없었던 것이다.

한번은 이 두 종족 사이에 커다란 전쟁이 발발했는데,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그 전쟁에서도 온순한 키키유 족은 사납고 포악한 마사이 족에게 여자들과 재산을 빼앗기고 밀림 깊숙이 도망할 수 밖에 없었다. 마사이 족의 추격이 미치지 못하는 밀림 깊숙한 곳에서, 키키유 족은 부족 회의를 열고 자신들이 항상 패배하는 이유를 분석하였는데, 그들의 분석한 패배의 원인은 음식물이었다. 키키유 족은 잔인하고 야만적인 마사이 족을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들도 채식을 버리고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부터 키키유 족들은 동물을 잡아서 피가 있는 채로 날 것으로 먹기 시작하였다. 돼지 피도 마사이 족보다 더 많이 마시고, 그들보다 더 많은 양의 고기를 섭취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이후로부터 키키유 족들의 성격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하였다. 매우 호전적이 되고, 잔인하게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키키유 족은 후에 “마우마우”라고 불리우는 살인마들의 집단이 되었는데, 그들은 얼굴에 검은 복면을 뒤집어 쓰고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육함으로써, 전 아프리카에서 가장 잔혹하고 두려운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키키유 족은 마사이 족들에게 당한 모든 한을 잔인하게 복수함으로써, 악명 높은 부족으로 아프리카 전체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보고서가 영국의 의학지에 발표되었다. 육식을 하면서 동물의 피를 먹는 사람과 채식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성격 형성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를 나타낸다는 사실이 그 연구 논문에서 발표되었다. 성경은 오래 전부터 음식과 사람의 성격 형성 사이에 존재하는 분명한 관계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찐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언 15:17. 깨끗한 채소를 먹고 사랑하면서 사는 삶이 살찐(기름기가 많은) 소를 먹으면서 미워하는 것보다 낫다는 성경 말씀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우리의 자녀들과 가족이 사랑스럽고 친절하며 온순한 기질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식생활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다니엘식 식이요법의 성과

영국의 영양학자 아나카민은 청소년 교도소에 들어온 10대 소녀들 중에서 성범죄로 복역 중인 소녀 죄수들을 대상으로 실험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여서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영양학자 아나카민은 소녀 죄수들에게 식사로 공급되는 모든 동물성 식품을 중단시키고, 일정 기간 동안 통밀로 만든 빵과 신선한 채소만을 식사로 공급하였다. 그것은 마치 구약 성경에 나오는 다니엘의 그의 친구들이 바벨론 왕이 내린 산해진미를 거절하고 그 대신에 채식으로 짜여진 단순한 식사와 같은 것이었다. 성범죄로 복역 중인 소녀 죄수들에게 “다니엘식” 식사법을 적용한 결과, 소녀들의 충동적인 성격이 교정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연구 보고서는 음식물과 성격 형성에 대한 밀접한 관계를 잘 나타내 줄 뿐만 아니라, 창세기 1장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지혜에 다시 한번 경탄케 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게 하리라” 창세기 1:29.


Q & A

질문에 대한 답변은 미국 헬레나 병원의 책임 의사인 멕도걸 박사께서 해주셨습니다.

문: 병원에서 처방한 약물을 먹지 않고 천연적인 방법으로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답: 우울증에 대한 4가지 천연적인 치료법을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1. 운동을 해야 합니다. 운동은 엔도르핀을 생산함으로써, 신경계를 이완시켜 주며 정신적인 균형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2. 정서에 좋은 영향을 주는 식이 요법을 하십시오. 충분한 양의 탄수화물을 섭취하고, 동물성 지방을 최대한으로 낮춘 식이요법은 세로토닌과 같은 신경계 화학물질을 분비시켜 주기 때문에 기분을 상승시켜 줍니다. MIT 대학에서 이루어진 연구 조사에 의하면, 탄수화물은 뇌에서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시켜 주며, 마음을 평안하게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탄수화물은 정신적 갈등이나 분노를 가라 앉힐 뿐 아니라, 숙면을 취할 수 있게 도와 줍니다. 세로토닌은 정신의 집중력을 향상시켜 주는 역할도 합니다. 단백질 음식은 두뇌에서 분비되는 세로토닌의 양을 낮춥니다.

3. 수면은 우울증을 악화 시킵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수면은 우울증을 일으키는 화학물질들을 생산해 냅니다. 그러므로 지나친 수면을 피하는 것이야말로 우울증을 일으키는 체내의 화학물질을 가장 효과적으로 억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69년부터 1990년 사이에 전 세계의 13개국에서 1700명의 우울증 환자를 대상으로 연구한 61건의 논문에서, 평균 59%의 우울증 환자들이 밤에 수면을 전혀 취하지 못한 바로 다음 날에 우울증의 증세가 현격하게 감소된다는 통계치가 나왔습니다.

4. 우울증에 유효한 약초도 있습니다. 영국 의학지에 실린 기사에 의하면, “St. John’s wort”라는 약초가 우울증에 매우 좋은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독일에서는 우울증에 대한 처방약으로 “St, John’s wort”엑기스(추출물)이 사용됩니다. 부작용은 거의 발생되지 않으면, 2~4주 복용함으로써,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3부 - 성경과 질병의 치료 방법 (기도원이 붐비게 된 이유)

어떤 목사님이 이렇게 간증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기도원이 매우 붐비고 있습니다. 건강할 때에는 내 교회 신자이지만, 죽을 병에 걸리면 기도원 원장의 신자가 됩니다.

나도 목사이고 기도원 원장도 같은 목사인데, 일단 죽을 병에 걸리면 기도원 목사에게 안수를 받으려고 내 교회를 떠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기도원이 붐비는 이유입니다.” 생애의 빛은 이 기사에서 이러한 좌절감 속에 있는 성직자들과 그리스도인 환자들에게 특별한 복음을 전해 드리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환자들을 치료하시는 유일한 통로와 방법은 성직자의 안수 기도인가? 성경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은가? 생애의 빛은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하여 성경 속에서 그 답을 찾아 애독자 여러분들 앞에 제시해 드리고자 한다. 생애의 빛 편집실


성경은 인류에게 유일한 구세주와 그 구세주를 영접함으로써, 죄로부터 구원받아 영생으로 인도하는 거룩한 책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만을 이야기 하는 책이 아니다. 성경에는 내세에 있어서의 구원과 영생에 대한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현세를 살면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건강하고 활력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지혜도 담겨져 있다. 성경은 죄로부터의 구원을 말할 뿐만 아니라, 구원받아 천국에 가기 전에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건강하게 사는 것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특별히, 성경은 인간에게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음식물에 대하여 유익한 원칙들을 제시해 줌으로써, 당신의 백성들에게 건강에 관한 지혜의 빛을 비추어 주고 있다.

규례의 의미와 그 취지

성경은 먹을 수 있는 음식물과 먹으면 건강에 유익하지 않은 음식물들을 구별해 주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10계명(도덕률)에 속한 문제가 아니라, 규례에 속한 문제이다. 레위기서 11장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규례를 주신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이는 짐승과 새와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과 땅에 기는 모든 기어 다니는 것에 대한 규례니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 레위기 11:46,47. 규례란 구원에 직접적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이렇게 살면 너희에게 유익하다”라는 뜻에서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법칙을 말한다. 규례는 법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행복과 건강을 위하여 음식물에 대한 규례를 우리에게 주셨다.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못할 것에 대한 규례를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해 두셨다. 규례의 정확한 의미와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신 정확한 취지가 레위기 25장에 기록되어 있다. “너희는 내 법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땅에 안전히 거할 것이라” 레위기 25:18. 바로 이것이 규례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는 유익과 역할이다. 땅 위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백성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지혜로 주신 법칙이 규례이다. 규례란 천국에 가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의 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건강에 대한 규례가 있고, 토지에 대한 규례가 있으며, 위생 등에 대한 규례가 기록되어 있는데, 레위기에는 음식물에 대한 규례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구약 시대의 규례와 현대 과학

레위기 11장에는 먹을 수 있는 고기와 먹어서는 안되는 고기가 분류되어 있다. 이 문제에 대한 규례 중에 대표적인 말씀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 무릇 강과 바다와 다른 물에 있는 것 중에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 ...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 레11:1,2,9,10.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직접 창조하신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물고기를 가증하다고 하였을까? 물론,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이 인간의 식품으로는 부적당하고 건강에 유익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원해서이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비늘이나 지느러미가 없는 해조류는 강바닥이나 바다 밑에서 서식하면서, 강이나 바다 밑에 가라앉은 온갖 쓰레기들을 먹고 산다. 하나님께서는 장어, 미꾸라지, 오징어, 조개류 등처럼 비늘과 지느러미가 없는 물고기를 강과 바다의 “청소부”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부정하고 가증한” 것으로 분류하셨다.

유조선이 암초에 부딪쳐서 좌초되어 기름이 흘러나와 바다를 오염시켰을 때에 전복이 있는 주변은 기름으로부터의 오염에서 회복된다. 바다의 오염 물질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청소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레위기는 동양에서 보신의 대표적인 식품으로 꼽히는 “뱀”을 가증한 것으로 지목하고 있다.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것은 가증한 즉 먹지 못할지니 ...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레 11:41,44. 한 때 이러한 이러한 것들이 특별한 건강 식품으로 주목받았던 적도 있지만, 그러나 과학과 식품 영양학이 발전되면서 이러한 것들에 건강에 해로운 콜레스테롤이 다량 함유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성경의 레위기는 오징어, 게, 가재와 같이 다리가 여럿인 것을 가증하다고 말하고 있다. “곧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기는 것 중에 ... 여러 발을 가진 것이라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는 가증함이라” 레 11:42. 일반 생선 속에는 발암물질인 아민이라는 물질이 있는데, 생선 속에 아민이라는 물질만을 먹는다고 해서 암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음식물에 함유되어 있는 발암 물질들과 합쳐질 경우에 발암 물질의 상승 작용이 생기기 때문에 암이 유발될 가능성이 휠씬 높아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발이 여럿 달린 오징어에는 “아민”이라는 발암 물질이 보통 생선보다 60배 이상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암을 유발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하나님께서 발이 여럿 달린 것들을 금하신 과학적 이유가 현대 첨단 과학의 의해서 규명되고 있다.

레위기는 기름에 대한 규례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또 화목제의 희생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을 간에 덮인 꺼풀을 ... 나무 위 번제물 위에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 3:3~5.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기름이 타는 냄새를 매우 좋아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경에서 동물의 기름은 죄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일차적 의미는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여 버리라는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건강 규례의 차원에서 볼 때에는 동물의 기름이 얼마나 인체에 해로운 것인가가 나타나 있다. 기름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는 매우 철저하다. 동물을 잡았을 경우, 그 동물의 부분 부분을 지목하시면서 기름을 제거하여 제단 위에 태워 없앨 것을 명하셨다. 과학이 발달되면서, 동물의 기름이 인체 내에 들어갈 경우, 혈관과 기관 속에서 온갖 문제를 일으킨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입증되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께서 기름을 철저하게 금지하신 과학적 이유가 있는 것이다.
레위기 19장에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생활과 관련 있는 여러가지 규례 중에 또 하나의 중요한 건강 규례가 기록되어 있다. “너희는 무엇이든지 피채 먹지 말며 복술을 하지 말며 술수를 행치 말며 머리 가를 둥굴게 깍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치 말며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는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를 놓지 말며 나는 여호와니라” 레 19:26,27. 하나님께서는 “피”를 먹지 말하는 규례를 명하셨다.

창조와 함께 시작된 건강 법칙

먹는 음식물에 대한 건강 원칙은 창조 사업을 끝마친 이후부터 바로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게 하리라” 창세기 1:29. 먹는 음식물에 대한 건강 법칙은 창세기 1장부터 시작되었다. 에덴 동산에 있던 유일한 법은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에 대한 법칙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앙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 2:16,17.

그러나 인류의 조상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그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5,6. 하와는 금지된 음식물 근처에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충고를 무시했다. 호기심으로 선악과 근처에 가서 그것을 보았을 때에 그것은 매우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게 보였다. 그래서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금지된 음식물을 먹고 말았다. 하와는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음식물을 고르지 않고, 그녀의 시각과 후각을 자극하는 감각적 기호로 음식물을 선택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바로 이것이 인간이 건강에 유익한 음식물 대신에 먹지 말아야 할 음식물을 선택하도록 유인하는 덫이다. 인간을 위하여 지정해 주신 성경의 규례 속에 담겨져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를 무시하고, 입맛에 좋은 것과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음식물을 추구하는 것이 대부분의 인생들이다. 자극적이고 지나친 양념과 입맛을 자극하여 비정상적으로 식욕을 상승시키는 화학 조미료로 인하여 인류는 건강을 잃어가고 있다.

건강 규례에 대한 오해

음식물에 대한 하나님의 규례를 받아들이는 두가지 태도가 있다. 첫번째는 “규례는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것이니 나는 그 깊은 의미를 잘 모르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무한히 깊으므로 어떤 이유와 목적이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소중하게 지키는 태도이고, 두번째는 “구원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것들은 지킬 필요가 없다” 라는 태도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말하기를, “레위기의 규례는 옛날 이스라엘 시대의 율법주의의 유물이다. 지금은 은혜로 구원받는 신약 시대인데, 먹는 음식이 무슨 상관이야”라는 한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음식물에 대한 레위기의 규례는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만 하는 십계명(도덕률)과 같은 것은 아니다. 음식물에 대한 규례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가 담겨진 건강 원칙이다. 그것을 받고 따르는 사람에게는 건강의 복이 찾아오고, 그것을 무시하거나 거절하는 사람에게는 질병이라는 화가 이르게 된다. 음식물에 대한 성경의 건강 법칙들을 거절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질병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지혜를 거절함으로써 건강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과학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지정해 주신 규례의 이유와 목적들을 조금씩 밝혀내기 시작하였다. 비록 현재는 아직 과학으로 완전하게 증명이 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의 지혜를 믿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지키는 비결이다. 사람들이 진리라고 철썩같이 믿는 과학의 지식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변한다. 한 때 쇠는 결코 물 위에 뜰 수 없다는 것이 절대 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여지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철로 만든 배가 발명되면서 아무리 무거운 무쇠일지라도 물 위에서 적당한 부력을 받으면 뜰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절대 신뢰를 둘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성경뿐이다.

건강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면서 인간의 유전자 안에 건강에 대한 원칙을 새겨 놓으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 놓으신 건강의 원칙들을 잘 이해하고 그것이 요구하는대로 생활해야만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라이프 스타일 즉, 에덴 동산식 라이프 스타일이야말로 인간의 병들고 찌든 유전자를 완전한 정상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해결책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채소와 과일, 그리고 곡물을 먹고, 야외에서 노동과 운동을 함으로써 건강을 유지하도록 계획하셨다. 인간이 범죄하기 전에는 생명과와 함께 저절로 자라서 맺히는 채소와 과일을 따먹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게 하리라” 창세기 1:29.
그러나 범죄 이후에 에덴 동산을 떠나는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하나님의 건강 원칙은 아담과 하와가 노동을 통하여 밭을 만들고 거기서 나오는 채소를 먹으라는 것이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창 3:18. 그들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그러한 라이프 스타일(채식, 노동, 운동)을 사는 동안, 건강은 그들의 것이 될 수 있었다. 바로 여기에 현대인들이 건강을 잃어가고 있는 진정한 이유가 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유전자 속에 새겨 놓으신 생명의 원칙과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인류를 위한 최고의 라이프 스타일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암, 에이즈, 광우병, 당뇨, 고혈압, 심장병과 같은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에덴 동산에서의 생활 이후 인류는 줄곧 완전한 채식 생활을 해왔다. 그러다가 창세기 9장에 이르러 불가피하게 육식을 할 수 밖에 없는 사건이 나오는데, 그것은 노아 홍수이다. 홍수로 인하여 모든 채소, 과일, 곡류가 물에 휩쓸려 가고 말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가족들에게 육식을 허용하시되 그들의 건강 유지를 위하여 중요한 단서를 붙히셨다. “무른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창 9:3,4. 고기를 먹되 피는 먹지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레위기 19장에 “너희는 무엇이든지 피채 먹지 말며”라는 건강 규례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피를 먹지 말라는 규례는 유대인들만을 위한 규례라고 생각하지만, 창세기의 노아 시대에는 아직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기 이전의 때라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레위기 17장에도 이 사실을 반복하여 설명되어 있다. “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레 17:12. 독자들 중에 동물의 고기에서 피를 제거한 고기를 먹어본 적이 있는가? 아무런 맛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즐기는 고기 맛은 실제에 있어서 피의 맛인 것이다. 신명기에도 피에 대한 금지 조처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오직 피는 먹지 말며 물같이 땅에 쏟을지니” 신 15:23. 하나님의 이러한 건강 규례는 성경의 여러 곳에 여러 번 반복되어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과학적 입증이 최근에 들어서 현대 과학에 의하여 입증되고 있다. 동물이 도살장에서 살육되거나 타살될 때에는 그 동물은 직관에 의하여 극도의 긴장과 흥분과 공포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순간적으로 강력한 홀몬과 체내에 있던 독소들이 피 속에 잔존하게 된다. 이러한 독소들 중에 프토마인이라는 독소가 있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이 발견하였다. 죽음에 임해서 다량으로 발산되는 프토마인이라는 독소를 추출하여 실험용 쥐에게 주입하였더니, 매우 극소량을 주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쥐가 즉사할 정도로 매우 해로운 물질이다. 요즘 어떤 사람들이 건강을 위한 방법으로 노루를 죽인 다음 즉시로 목에 구멍을 내고 피를 빨아 먹는 것이야말로 어쩔 수 없는 무지의 소치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건전한 상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드리는 충고
하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오늘날에도 질병과 고통으로 시달리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출 15:26. 구원이 신실한 믿음을 갖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처럼, 건강도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건강의 원칙과 규례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어진다.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치료하시되, 당신께서 태초에 제정한 건강 법칙과 규례에 의거하여 병자들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과학을 아는 성직자와 하나님의 능력과 성경의 건강 원칙을 아는 의료 선교인이 협력해서 환자의 몸과 마음을 치료하는 것이야말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의료 선교 사업이다. 그런데 이 점이 오늘날 기독교회 내에 심각하게 오해되고 있다. 성경의 건강 원칙에 무지하고 목사에 대한 환상적 기대를 갖고 있는 신자들은 목사가 환자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안수 기도라고 생각한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인 성경의 건강 원칙에 무지한 목사는 안수 기도 이외에 환자의 질병을 위하여 해줄 수 있는 다른 것이 없다. 이러한 현대 기독교회의 형편이 맹목적이고 무속 신앙적인 기도원을 양산해 내고 있으며, 하나님의 지혜인 천연 치료에 의하여 치료받을 수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 환자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병을 고쳐주지 않는다는 야속함과 좌절감 속에서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다. 누가 그들의 좌절감과 죽음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가?

현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장점 한가지를 잃고 살아가고 있다. 기독교회는 영혼이 구원받아서 천국에 가는 방법(영의 복음) 이외에도,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삶의 지혜(육의 복음)를 가지고 있다. 혹시, 당뇨, 관절, 고혈압과 같은 퇴행성 성인병으로 고생하고 있는가? 아니면 원치 않는 어떤 질병으로 고통하고 있는가? 그대가 갖고 있는 조그만 지식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재지 말고, 우주의 왕인 하나님의 지혜를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규례의 말씀과 인간의 유전자가 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로 생활을 바꾸어 보라!

무엇보다도 먼저, 기름기와 동물의 피에 찌들어 있는 그대의 유전자가 그러한 것들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에덴의 라이프 스타일로 돌아갈 때, 그대의 몸 안에서 놀랍고 신선한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인데, 그것은 병들어 찌든 유전자가 제 기능과 제 역할을 회복되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맑은 공기, 신선하고 깨끗한 채식 생활, 적당한 운동과 휴식, 그리고 모든 죄의 짐을 하나님께 맡긴 상태로 한 달 동안 생활해 보라! 그대의 세포 세포마다 생명의 싹이 움트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제정해 놓으신 건강의 원칙들이 그대의 병든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치료해 줄 것이다.

 


 

서론 - 성육신의 선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경건의 비밀”이라고 불렀다(딤전 3:16 참조). 예수께서 인간이 되시어 이땅에 오신 사실은 정말 신비한 일 중에 신비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물론 인류의 죄를 지시고 대신 죽어 주시기 위하여서는 죽을 수 있는 인간이 되셔야만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인간이 되신 이유가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대속의 죽음 못지 않게 중요한 다른 이유가 또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과연 어떠한 분이신가를 온 우주 앞에 보여 주시는 일이었다. 그렇다. 이 지구 뿐만이 아니라 온 우주, 즉 천사들에게도 보여 주시는 일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품성을 천사들에게 보여 줄 필요가 있다는 말이 어폐가 있는 것 처럼 들리지마는, 이 일은 하나님의 왕국이 영원히 평안하고 안전하게 되기 위하여서는 꼭 필요한 조치였다.

죄는 이 지구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죄는 인간이 시작한 것도 아니다. 죄는 하늘에서 시작되었고 그 죄의 시작은 교만하여 타락한 천사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 루스벨은 반역을 일으키면서 하나님의 정부를 파괴하려 하였다. 그는 힘으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은근히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시키는 말을 퍼뜨리면서 그의 음모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 대하여 퍼뜨린 오해는 참으로 큰 상처였다. 이왕 생긴 오해는 그 소문을 들은 자의 마음 속에서 힘있게 작용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오해를 종식시키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참된 성품을 나타내어 보여 주는 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말이나 가르침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건이 생겨야 하는 것이다. 그 즈음에 이 지구가 마귀의 반역 운동에 휘말려 들게 되고 드디어는 인류의 시조가 죄를 지어 타락하게 된 것이었다.

하나님께는 엎친데 뒷친 격으로 비상 사태 위에 또 다른 비상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를 구속하시는 일을 시작하시면서 동시에, 이 지구를 온 우주에게 하나님의 참되신 성품과 사단의 진정한 모습을 폭로하는 장소로 삼으신 것이다.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께서 동시에 그의 지상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과연 어떠한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귀한 기회로 삼으신 것이었다. 성육신의 의미는 너무나 깊고 넓어서 우리가 구원받아 하늘에 올라간 후에도 계속 연구해 나가야 할 주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대신 그 형벌을 치루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어 오셨다. 또한 33년 반 동안 이 지구에 사시는 동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간에게 자세하게 보여 주셨다. 또한 천사들에게도 하나님께서 과연 어떠한 속성과 품성을 가지고 계신지를 보여 주셨다. 마귀의 공격과 계략들을 받으시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마음은 우주의 천사들에게 놀라운 계시가 아닐 수가 없었다. “아!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정말 저렇게 사랑과 공의가 충만하신 분이시구나!” 라고 그들은 소리쳤을 것이다.

그러한 동시에 온 하늘은 마귀가 얼마나 간악한 존재인가 하는것을 실재로 보게 된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퍼뜨린 오해와 고소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온 하늘이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하늘에서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생기게 된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 인류를 구속하였을 뿐만 아니라 온 우주를 죄로부터 영원히 안전한 곳으로 만들어 놓았다. 얼마나 감하하고 찬양할 일인가!

그런데 예수님의 성육신이 이루어 놓은 또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업적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죄에 빠진 인류들에게 마귀를 이길 수 있다는 소망을 준 사실이다. 죄의 용서와 구원은 물론이고, 죄인이 이 세상에 살고 있을 동안에도, 마귀에게 잡혀서 종노릇 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사단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주신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인간이 되어 오셔서 마귀를 이기고 승리하신 사실에서 그 근거를 찾게 되는 것이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으니 너희도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주께서 말씀해 주시었다(요 16:33; 요일 5:3,4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류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 뿐만이 아니라 죄에 노예된 사슬을 끊고 해방시켜 주신 것이다.

그런데 항상 이렇게 질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왔다.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그 육신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육체와는 다른 육신이 아닌가 라고 반문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가지고 태어 나신 그 육신은, 우리와 한결같이 같은 시험을 받게 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의 육체, 즉 인간과 같은 육신을 가지고 오셨다고 선포하고 있다(히 2:9-18 참조).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육신은 우리에게 죄와 마귀를 이기고 승리 할 수 있다는 힘있는 논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의 구원과 용서를 상징하고 예수의 부활은 우리의 새 생명으로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 처럼 예수의 생애는 우리도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땅에 인간이 되어 오셨다는 사실과 또 더 나아가서 어떠한 육신을 가지고 오셨는 지를 연구하는 일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래서 혹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우리와 하나님을 묶는 황금고리와 같은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새상을 창조하셨을 때에 천연계는 완전하였었다. 거기에는 아무런 부조화의 그림자가 없었다. 말 그대로 완전한 아름다움의 조화 바로 그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아름다운 꽃과 나무 그리고 온 갖 종류의 식물들로 가득 채우셨다. 그 사이 사이로 흐르는 물들은 온 누리를 적당히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은 소리내며 나는 각종 새들로 채우시고 무늬들로 수 놓는 구름들로 채색하시었다. 비록 이 지구가 타락하였지마는 이직도 그 아름다움이 어느정도 남아 있어서 보는 이들로 탄성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그러할 진대, 이 지구가 그 본래의 상태대로 회복할 때에 그 아름다움이 어떠하겠는가!

이러한 아름다운 자연계 가운데 유독 인간만이 이기적인 존재로 변해 버렸고, 타락한 인간 밑에서 땅이 황폐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죄가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지으신 것을 망쳐 놓은 것이다. 하나님의 법칙은 사랑의 법칙이다. 이 법칙이 죄로 인하여 깨어져 버렸다. 죄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데서 시작되었다. 덮는 그룹이었던 루스벨은 하늘에서 첫째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는 천사들로 하여금 창조주로 부터 떠나게 하려고 하나님을 모함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기의 악한 속성을 하나님께 뒤집어 씌웠다. 그는 천사들과 사람들을 속이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은 이기적인 독재자라고.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불신하게 하였다. 사단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가혹하고 용서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그는 이렇게 하여 천사들의 3분의 1과 지구의 인간들을 이끌어 자기와 연합하게 하여 하나님을 반역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비애의 밤이 이 세상을 내려 덮게 되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해의 어두움으로 가득차게 된 것이다.

이 음울한 그늘이 밝아지고 세상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하여서는 사단의 기만의 세력이 깨뜨려져야 하였다. 이것은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부의 원칙과 배치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봉사만을 원하시는데 사랑은 명령으로 강요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힘이나 권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오직 사랑으로만 일깨워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보여 주면 피조물들이 그 분을 사랑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품성이 사단의 품성과 대조되어 드러나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우주에서 단 한 분 밖에 없으니,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만이 참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 주실 수가 있었다. 밤같이 어두워진 세상에 치료하는 광선이 떠 올라야 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땅에 인간이 되어 오신 것이다.

구속의 계획은 타락한 이후에 세워진 사후 계획이 아니었다. 이 계획은 영원전 부터 감취었다가 알게 하신 비밀의 계시였다(롬 16:25 참조). 예수의 오심은 자발적인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곁에 머눌러 계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께서는 하늘의 보좌에서 내려 오셨다. 그리고 어두운 이 세상까지 내려 오시었다. 우리의 마음의 보좌에 앉기 위해서 그 머나먼 길을 오셨다. 이것이 성육신의 사랑이다. 이번호에는 이 중요한 성육신에 대한 주제를, 성경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기사들로 채웠다. 다음의 기사들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게 되시기를 바란다.

1부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라디아서 4:4,5).

죄로 인하여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구세주가 이 땅에 오시리라는 약속의 말씀이 에덴에 선포되었다. 하나님께서 뱀에게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세기 3:15)고 말씀하실 때에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가 이 땅에 오실 것이 예언되었다. 아담은 이 예언의 말씀을 그의 자손들에게 전해주었으며, 족장들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매 시대마다 반복되어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소망이 끊이지 않게 하였다.

때가 이르렀다. 베들레헴의 언덕 위에는 셀 수 없는 천사의 무리가 모였다. 온 우주는 예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시는 사건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늘 회의에서 작정된 그리스도의 강림의 때가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회당과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들조차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으며, 세상은 말씀의 암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직 들에서 양을 치던 몇 목자들만이 어떤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목자들이 양을 치고 있을 때에 천사가 하늘의 영광을 반사하며 목자들에게 나타났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누가복음 2:10,11).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태복음 1:23). 그리스도께서 죄로 어두워진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드러내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되시려고 누추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탄생하신 것이었다.

2부 -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브리서 10:5).

죄를 지은 후 인류는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인류에게는 법의 집행만이 남아 있었으며, 에덴에서의 모든 행복했던 생활은 영원한 과거로 사라져 버렸다. 모든 소망은 끊어져 버렸으며 그들을 감싸고 있었던 하늘의 의는 그 빛을 감추었다. 죄책감과 절망만이 그들 앞에 있었다.

그러나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구속할 계획을 세우셨다. 하늘 회의에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실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인류의 죄는 용서될 것이며, 다시 에덴으로 복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은혜의 빛이 하늘로부터 이 땅에 비취어졌다. “제사와 예물”은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인류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몸”을 통하여 이 땅에 태어나실,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께만 달려 있었다.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마태복음 1:18). 신이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사실이다. 인간의 지적 능력이 도달할 수 없는 초인간적인 범위에 속한 현상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셨던 예수께서 인간으로서 태어나실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예수는 인간이 되실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남자 없이 태어나신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실 수 없으며, 같은 이유로 예수께서는 다윗의 씨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인간으로서 겪으신 굴욕과 고통들은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피곤하여 지치셨으며, 배고프셨고, 박해와 멸시를 받으셨으며, 가시면류관으로 인하여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단순한 연극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한 가지 이유로 예수를 인간이라는 가면을 쓴 연극배우정도로 취급하여 버린다.

정말로 과학이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만을 갖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오늘날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생명공학은 남자 없이 태어나신 그리스도께서 충분히 다윗의 혈통이 되실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남녀가 결합하지 않고서도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은 유전 공학을 통하여 이미 증명되어진 사실이다. 무성적으로 복제인간을 만들 수 있다는 생명 공학적 발견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밝히는데 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께서 남자 없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인간이실 수 없다는 생각은 더 이상 과학적인 생각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인간이 자연적으로는 무성생식을 할 수 없으나, 인위적으로는 무성적 자손번식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바로 예수께서 태어나심이 신의 섭리였다는 증거이다. 그 때 당시에는 인간을 유전학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었다. 만약 지금 어느 여자가 남자와의 관계없이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면 그것을 신의 섭리라고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2000년 전에는 이러한 일들이 불가능하였으며, 신의 섭리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심은 신의 개입하심이 있었다는 증거이며, 오늘날 인간이 무성적으로, 남자 없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증거는, 예수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으므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 틀렸음을 증거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실제로 어떻게 태어나셨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태어나셨고, “다윗의 씨”로서 다윗의 유전을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현대 유전공학이 동정녀에게서 다윗의 씨를 충분히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에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다는 이유로 예수께서 인간이 되실 수 없다는 생각은 더 이상 과학적인 주장이 못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과학만이 성경의 참됨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수는 없다. 성경은 과학적 증명을 우리에게 공급하면서도, 동시에 우리의 믿음을 행사하기를 요구하신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신 것은 “임마누엘” 하나님으로서 우리와 언제나 함께 계시기 위함이셨다. 인간의 참된 모본으로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하늘의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기”(히브리서10:16)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히브리서 2:17). 예수께서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히브리서 4:15)으실 수 있는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셨다. 구주께서는 우리의 인성을 취하심으로 결단코 끊어지지 않을 줄로 자신을 인류에게 붙들어 매셨다. 그는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우리와 연결되신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우리의 고통을 아시는 분이시며, 우리 모두가 받아야 할 멸시와 간고를 친히 경험하신 분이시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 53:3,5).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탄생하신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흠모할 것이 없으신 모습으로 이 땅에 태어나 멸시와 고통과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신 그 사랑을 이해할 수 없으며, 도리어 이 모든 일들은 무가치한 것으로 되어 버릴 것이다.

 

3부 -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미가 5장 2절은 인간으로 태어나신 예수의 근본을 하늘이라고 선언한다.

속죄양은 이 땅에서 준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준비되어지기 때문이다. 속죄양은 피조물과 같이 언제라도 다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될 수 없다. 만약 속죄양으로 피조물이 사용되어질 수 있다면, 하나님의 법의 가치는 피조물과 같은 선상에 떨어지게 될 것이며, 하늘의 법에 대한 존경심은 사라져버릴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으므로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의 집행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이 법과 대등한 속죄제물이 사용되어져야 한다. “여호와이레”, 즉 속죄양은 친히 하나님께서 준비하셔야만 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대등하신, 독생자 그리스도만이 이를 담당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하신 것이다.

성경은 또한 예수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종의 형체를 지니고 태어나셨다고 하였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 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사도행전 13:22-23).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6-8)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문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밝히 알기 전에는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통하여 의를 얻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단은 철학과 인간적 학문들을 통하여 성경을 인간적인 범주 안에서 풀이하도록 유인한다. 사단은 우리와 같이 계시는 “임마누엘”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단지 인간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 위선자처럼 나타내려고 한다. 그리스도를, 우리처럼 느꼈고, 생활하였으며,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시험들과 고난들을 경험하신 “임마누엘”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전설에서나 나오는 마술사처럼 단지 인간처럼 나타나서 도를 전하고 사라져버린 전설의 인물처럼 가장하여 구속의 경륜의 지극한 사랑에서 우리를 멀어지도록 사단은 노력한다.

이러한 오해를 만들기 위하여 사단은 예수께서 이 땅에 인간으로서 오지 않으셨다고 믿게 하던지, 아니면 인간으로서 오셨지만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죄짓기 전의 인간으로서 오셨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우리처럼 느끼시지 못하였고, 그가 당하신 시험과 고난은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라고 믿게 한다. 예수께서 어떤 인간의 상태를 지니고 이 땅에 오셨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임마누엘” 하나님을 섬기는 가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일에 “형제들과 같이”(히브리서 2:17) 되셨을까? 정말로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히브리서 4:15) 받으셨을까? 만약 예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 성경말씀들이 진리가 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종의 형체를 갖도록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창세기 1:26절에 말씀하였다. 만약 “종의 형체”가 죄짓기 전의 인간을 의미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이 종의 형상이 되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빚으셨다. 그러므로 이 성경절에서 말하는 “종의 형체를” 가진 “사람의 모양”은 죄 지은 후 타락된 인간의 육체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아기로 태어나셔서 자라나셨으며 우리처럼 시간이 갈수록 그 나이가 많아 지셨다. 예수께서 가지고 있었던 몸은 죄로 인하여 그 생명이 갈수록 단축되어지는 우리와 똑 같은 유전학적 법칙을 따라 변화되었다. 죄 짓기 전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수께서는 다윗의 “씨”에서 “종의 형체”를 가지고 탄생하셨으며, 배고픔을 느끼셨고, 피곤하여 지치셨으며, 고통과 근심 속에 고민하셨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이가 많아지며, 육신이 연약하여 지는 우리와 똑같은 타락된 인간의 유전형질을 가지고 태어나셨다. 실제로 우리와 함께 느끼고, 경험하실 수 있는 “임마누엘”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4부 -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이사야 7:14-16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미쳐 버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바 되리라.”

아담과 하와는 죄짓기 전에 선과 악이 무엇인지 몰랐다고 성경은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창세기 3:22). 죄 짓기 전 아담과 하와에게는 선과 악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악을 알지 못하는 것이 참된 행복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환경에서 살았었던 아담과 하와는 악을 알지 못하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저절로 선에 대한 이해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죄를 짓고 악이 그들의 지식 안에 들어오자 그들에게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지식이 생겨났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세기 3:5).

죄짓기 전의 인성과 죄 지은 후의 인성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바로 여기서 나타난다. 죄짓기 전의 인성 안에는 선과 악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이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타락된 인성은 선과 악을 이해하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완전히 독립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오셨다고 주장한다. ‘예수의 마음은 죄짓기 전의 완전한 인성을 갖고 있었고, 몸은 죄 진 후의 타락된 인성을 갖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께서 어떠한 인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가장 명확하게 증명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선과 악을 아직 구별할 줄 모르는 아기로 태어나셔서, 선택할 수 있는 적당한 나이가 되어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를 거치셔야만 했던, 우리와 똑 같은 마음의 인성을 가지고 계셨다. 죄짓기 전 인성은 죄를 지음으로 선과 악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죄 지은 인성은 자라나면서 선과 악을 저절로 이해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죄짓기 전 아담의 인성처럼 선과 악을 알지 못했던 인성이 아니라,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아는 인성을 가지고 계셨다.

히브리서 2:16-18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in all things)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자손”과 천사를 비교하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를 설명한다. 예수께서는 타락한 인성을 가지고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고 오셨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고 하였다. “범사”에 즉 모든 일에 형제들과 같이 되시기 위해서는 실제로 우리와 같은 환경에서 같은 인성을 지니시고, 같은 시험을 받아 타락한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능력만을 이용하여 승리하셔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5부 - 예수께서 남기신 길


우리의 완전한 모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하늘로 가는 길을 걸을 수 있는지 보여주셨다. 인간의 마음은 죄로 인하여 어두워지고, 의를 향한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선을 향한 길은 멀게만 보이고, 그리스도의 의가 실제로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능하게만 보였다. 매번 시험을 당할 때마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고, 자책과 죄책감 속에서 끝없는 방황은 계속되었다. 죄는 우리 마음에 평화를 빼앗아 갔으며, 평강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의 위에는 먹구름 같은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갈매기의 날개가 내게 있다면 진흙처럼 빽빽하게 깔린 어둠을 뚫고 하늘 높이 날아갈 수 있으련만...

우리는 우리의 힘만으로 암흑의 제왕과 맞붙어 싸울 수 없다. 하늘에 깔린 먹구름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라, 한 때 하늘 천사들의 대장이었던 루스벨의 최고의 걸작품이기 때문이다. 가는 곳마다 유혹의 절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한번 떨어지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사망의 문이 사방에 진치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사망의 늪에 빠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남기신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뿐이다. 예수께서 남기신 그 발자국만을 그대로 밟고 여행한다면 여기저기 숨겨져 있는, 지뢰와 같은 사단의 올무를 피할 수 있을 것이며, 사망의 늪 저편에 있는 희망의 나라에 안전하게 도달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왜 예수께서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셨어야만 우리의 대속주가 되실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우리의 죄 값을 치루는 일이 왜 이 땅에서 이루어졌어야만 했을까? 왜 꼭 인간으로서 오셨어야만 하였는가? 속죄양은 피조물이 될 수 없고 하늘의 법에 상당하는 제물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속죄양은 신의 자격으로서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시지 않았어도 되지 않았을까?

우리는 신성의 본질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신으로서 죽으실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되셨다고 섣불리 주장해서는 안된다. 만약 그렇다면 꼭 인간이 되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천사들과, 다른 피조물들이 우주에 살고 있으며, 이들이 스스로 절대적인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죄 짓지 않으면 죽을 수 없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으로 오셨어야만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속죄양은 죽을 상태에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죽지 않아도 되지만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대신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늙어서 돌아가셨다면 그것도 대속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께서 죽으심은 자연사도 아니고,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살인과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치심으로 돌아가신 심판의 죽음인 것이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법의 심판을 받으시는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스가랴 13:7)

십자가는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죄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를 직접 보게 함으로 우리 속에 있는 악한 죄의 본질을 깨닫게 한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인간의 마음은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자기 피로서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갈라디아서 3:13, 히브리서 13:12)시는 구주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신 또 하나의 이유는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기”(히브리서 8:10) 위해서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로 나왔을 때에 그들의 마음은 애굽의 문화와 종교에 영향을 받아 타락되어졌고 하나님을 섬기는 지식에서 멀어져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십자가의 선물과 같이 값없이 주는 은혜로 애굽에서 탈출시키셨지만, 그와 같은 상태로 가나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 하늘의 법을 다시 심어야 하였으며, 하늘가는 길을 가르치셔야만 하였다. 그래서 시내산에 이르러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십계명을 주어 하늘의 법을 알리셨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법도에 대하여 다시 배우도록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과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길과, 십자가의 은혜를 힘입어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브리서 5:7-9).

구속사업은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죄 속에 빠진 인간의 마음을 하늘로 이끄는 길, 즉 우리 마음을 진정한 회개로 이끄는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는 길을 보여주셔야만 하였다. 우리가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면 그리스도의 은혜의 선물은 무가치하게 된다. 믿음으로 바라보며, 얻는 은혜를 계속 간직하고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길을 배워야 한다. 바로 이 길을 예수께서 친히 가심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십자가는 하늘가는 문을 열었으며, 그의 생애는 그 문을 넘어 하늘까지 가는 길을 밝히셨다.

6부 - 신으로서 또한 인간으로서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동시 신이시기도 하였다.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 공존하였다. 그래서 복음서를 읽을 때에 종종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혼란을 갖게 된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 속에는 신성과 인성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한복음 6:57). 예수께서는, 신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힘에 의하여 사실 필요가 없으셨다. 예수께서 바로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이셨으며, 신으로서,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 이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신으로서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고 하셨고, 인간으로서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산다”고 하심으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의무를 가리키셨다.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요한복음 7:14-17)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유대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한번도 학교에 다녀 본 일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학교에 가지 않고서 어떻게 성경에 대하여 잘 아는지를 의아해 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내가 만들지 않았으며)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예수께서 말씀하시던 그 말씀)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내가 아는 것처럼).”

신으로서 “내 교훈”은 예수님 자신의 것이다. 예수께서 바로 구약의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해내셨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이 성경절에서 예수께서는 인자로서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라고 하셨고, 또한 인자로서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이 모든 교훈을 배울 수 있었다고 간증하시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대인들은 학벌을 중시 여기고, 학교에서 배운 것을 우상시 한다. 성경 말씀의 권위보다는 학자들의 권위를 더 중히 여기고, 유명한 학자들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동을 무식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성경말씀은 진정으로 인간이 받아야 할 교육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다. 진정한 교육은 당대의 학자들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배우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11:1-5,10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구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예수께서는 이새의 자손으로 인성을 지니셨지만 인간적 감각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존하셨다. 예수께서는 신으로서 하나님께 의존하실 필요가 없으셨다. 이 말씀은 인간이 모든 일에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요한복음 8장 25절에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고 하셨지만, 같은 문락 안에 있는 28절에서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고 하심으로 인자로서의 사명과 인간의 할 바 의무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셨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남기신 길 위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걸어간 인간 예수님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모든 발자국들은 우리의 희망이요 능력이 된다. 이 모든 말씀들 속에는 예수께서 신으로서 우리를 보살피시는 사랑과, 인간으로서 이 땅에 사시며 고통당하신 이유들이 모두 설명되어져 있어 인간으로서 우리가 해야 될 의무들을 가르치고 있다.

7부 - 흠 없는 어린양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요한복음 5:30)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로마서 8:4)

예수께서 복음서를 통하여 자신의 인성을 설명하신 것과, 바울이 설명하는 인간의 본질은 같은 특징들을 이루고 있다.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라고 말씀하시므로 “나의 원”이 “나”의 의지와 다르다고 말씀하셨다. 이 성경절은 “나의 원”과 “나”는 같은 것이 아니며, “나의 원”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자 하는 세력이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는 “나의 원”대로 행하시지 않으시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을 따르셨다고 말씀하였다. 이 말씀은 인간 예수님 안에도 우리와 똑같은 “육신”과 “영”(롬8:4)이 있었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7:21) 바울은 이 말씀을 한 이후에 곧바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하지 않았다. 바울은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기 때문에 “곤고한 사람”이라고 한탄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본처럼 “나를 보내신 이의 원”을 따라갈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바울은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7:25절에서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것을 감사하였다. 이것은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성경절 중의 하나이다. 이 오해는 구속의 경륜의 단계를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된다. 죄를 지은 후 “죄의 법”만이 있었던 우리 마음에 “죄의 법”에 대항할 수 있는 “마음의 법”이 자리잡게 된 것은 바로 구속의 경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이루어 놓으신 결과이다.

죄를 짓고 난 후 인간에게 있었던 모든 의는 사라져버렸고, 죄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조차 없어져 버렸으며, 의에 대한 모든 감각을 잃어버렸다. 의를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죄의 법”안에 사는 것뿐이었다. 의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의를 선택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구속의 경륜의 첫 번째 단계는 그들이 잃어버렸던 선택의 자유를 다시 주입시키는 것이었다. 이 사업은 인간의 마음속에 “마음의 법”을 창조시켰으며, 인간은 의를 선택할 수 있는 또 한번의 기회를 다시 얻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로마서3:23-24).

이러한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사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것이다. 사랑은 우주의 기초이며 선택의 자유 없이 사랑은 완전하여 질 수 없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함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끊어졌던 줄은 다시 복구되어져야만 하였다. 사단의 기지인 “죄의 법”안에 온전히 사로잡혀 있던 인간의 자아로 하여금 다시 의를 볼 수 있도록 하여야만 하였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로마서 3:10-18).

이 성경절은 현재 인간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어서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으며, 많은 비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의 양심에 따라 선을 행하고, 친절과 행복을 베풀 줄 안다.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성경절은 지금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인간이 어떻게 변하였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땅에 없었다면 우리 모두는 여기 설명된 사람들과 같이 죄에 완전히 빠져 의를 찾고자 하는 마음의 소원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되었을 것이다.

죄를 지은 직후 인간은 이 성경절과 같이 그 인성이 변화되었고 사단의 속박 속에 완전히 포위되어 버렸다. 더 이상 의와는 상관없이 되었으며, 더 이상 선을 선택할 수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기 위해서는 인간 안에 두 가지 대등한 세력을 유지시켜야 한다. 한쪽 세력만 있다거나 한쪽만 강하면 그것은 진정한 선택의 자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 의의 기지를 건축하고 끊어졌던 인간과 하나님과의 연결을 복구시키기 위하여 특별한 사업이 행해져야만 하였다. 이 사업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으로 우리를 붙드시고, 신성으로 하나님을 붙드심으로 인간의 마음에 의의 세력을 주입시키셨다. 죄로 인하여 끊어졌던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를 예수께서 성육신 하심으로 그 사이를 잇는 매개체가 되신 것이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랑은 여기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로마서 5:8, 요한일서 4:10). 우리가 아직 선을 선택할 수 없고, 죄악 속에 완전히 빠져 의를 바라지도 않을 때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실현되어 우리로 하여금 의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을 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상태를 죄라고 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하나님께 이러한 상태에 인간이 있게 된 것을 감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우리 마음에 선택의 기회를 다시 한번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의 법”과 “마음의 법”이 우리 마음에 공존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사랑의 시작인 것이다. 이로 인하여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죄의 법”과 “마음의 법”은 우리가 사는 환경이다. 만약 내가 “죄의 법”을 따라 행한다면 나는 죄인이 되고, “마음의 법”을 따라 행한다면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나쁜 동네에 살고 있다고, 깡패들 소굴에 살고 있다고 저절로 우리가 그들과 똑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환경이 나의 본질을 결정짓지 못한다. 내가 어떠한 환경가운데 사느냐보다는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나를 꼴지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만약 예수께서 우리와 똑 같은 인성을 가지고 계셨다면 어떻게 흠 없는 어린양이 되실 수 있었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흠 없는 어린양을 만드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사실 동안에 우리와 똑 같은 의, 식, 주의 환경 속에서 사셨다. 우리처럼 불완전한 음식물들을 드셨고, 불완전한 환경 속에서 사시었다. 저주받은 이 땅은 우리의 몸의 환경이요, “마음의 법”과 “죄의 법”은 마음의 환경이다. 환경이 나의 가치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졌어도 흠 없는 어린양이 되실 수 있으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우리 안에 주입된 “마음의 법”은 십자가를 통하여 “죄의 법”의 정체를 밝힌다. 성령은 “마음의 법”을 통하여 우리의 의지의 문을 두드리시며 우리가 “죄의 법”안에 빠져있음을 가르치시고, 의를 선택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호소하신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3:23-24)

“죄의 법”이 내 안에 거한다고 하여 “나”가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며, “마음의 법”이 있다고 하여 “나”가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고 로마서 2:14-15절에 말씀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그 안에 양심이라는 “마음의 법”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양심적으로 산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양심이 있다는 것과 양심적으로 산다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똑 같은 이유로 “죄의 법”이 있는 자체가 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내가 의인이 되었다고 “죄의 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내가 죄인이 되었다고 “마음의 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 법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법이 아니다. “죄의 법”은 사단이 만들었고, “마음의 법”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력들이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만든 세력들이 아니기 때문에, “죄의 법”은 사단이 존재하는 한 계속 될 것이며, “마음의 법”도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계속 인간 안에 머무르면서 회개의 기별을 발할 것이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로마서 7:14)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로마서 6:16-18)

우리는 “본래 죄의 종”이었다. 죄에 속박되어 선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지만, 우리 안에 “마음의 법”을 주입하심으로,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도록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셨다. 종이 된다는 것은 주인의 명령을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억압된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 안에 죄로 인한 죗된 경험이 저장되어 있어서 인간은 죄를 향하여 끌리는 힘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인간에게 죄를 향한 성향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를 향한 성향도 우리 안에 심어주셨다. “마음의 법”, 즉 양심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에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려주고, 양심을 따라 행할 때에 깊은 평화를 주심으로, 의를 향한 소망도 우리 마음에 심어주셨다. 그러므로 인간 안에 죄를 향하여 끌리는 힘이 있다고 하여 우리가 불공평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의를 향한 소망이 죄를 향한 성향을 견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록 원래 “죄의 종”이었지만, 우리가 “죄의 법”으로부터 영의 힘으로 탈출하여, 우리에게 전하여 준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면, 우리는 “의에게 종”이 되어 의의 소망을 온전히 품을 수 있게 된다. 인간은 비록 죄에 대하여 연약한 성격을 받고 태어나지만, 이 연약성이 우리를 죄짓게 강요할 수 없으며, 우리는 누구의 종이 될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창세기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성경절은 죄에 대한 연약성이 어떻게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죄에 대한 소원은 “선을 행치 아니”할 때, 곧 죄를 지을 때에 우리 마음 문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그 죄에 대한 소원을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명령은 곧 다스릴 수 있다는 약속을 포함하고 있다. 죄에 대한 소원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다스릴 수 없다는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이 성경절은 증명하고 있다.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부 - 육체에 죄를 지실 때에


술을 마셔본 일이 없는 사람은 술의 맛 때문에 술을 먹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술을 마셨다가 끊은 사람은 그 맛과 영향을 알기 때문에 때로는 술을 그리워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죄의 유혹이다. 아는 것을 그리워하게 하는 것이다.

죄에 빠져본 일이 없는 사람은 죄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죄를 그리워하는 것은 전에 경험한 그 죄에 대한 애착심 때문이다. 애착심은 한번 사랑했던 것으로부터 온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그리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 이유는 성화 되지 못한 자아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성화의 경험, 회개하고 거듭나며, 죄를 극복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의를 추구하려는 마음은 있어도, 자꾸 죄로 휘말리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죄의 소원을”(창세기 4:7) 가진 자아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우리와 똑 같은 인성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이 우리와 똑 같은 단계를 거치는 인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와 똑 같은 경험을 하셨다는 것뿐이다. 똑 같은 경험을 한다는 것과 같은 단계를 거친다는 것은 다르다. 예수께서는 흠 없는 어린양으로서 죄를 지셨어야 하였기 때문에 우리와 똑 같은 단계를 따라 시험 당하실 수 없었다. 예수께서도 우리들처럼 인간들이 자라나면서 시기별로 경험하는 시험들도 겪으셨지만, 종류에 따라서 우리와는 다른 시기별로 당하신 시험들이 있다. 그 이유는 우리들의 싸움은 우리 자신들과만 연관된 싸움이지만, 예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과와 싸우셔야만 하였으며, 대속제물은 죄를 대신 지기전까지 흠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처럼 죄에 속박되었다가 나온 자아를 가질 수 없었다.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에 가지셨던 자아는 죄를 경험한 자아가 아니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나”는 아담이 타락함으로 “죄의 법”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나”이다. 구속의 경륜의 효력으로 우리 안에 “마음의 법”이 주입되고, “나”가 중립적인 상태를 얻기는 하였지만 “나”는 전과범이었다. “나”는 이미 “죄의 법”아래서 살아보았으며, 죄의 맛을 알고 있었다. 비록 아담의 죄가 우리의 죄로서 우리를 정죄할 수는 없지만, 아담의 죄의 결과는 유전적으로 인간의 자아의 성질을 바꿔놓았다. 죄를 경험한 “나”는 언제나 그 죄의 맛에 대한 유혹을 받게된다. 술이나 담배를 끊었던 사람들이라도 죽을 때까지 옛 기억의 유혹을 받는 것처럼 죄를 한번 경험한 “나”는 상처받은 “나”가 되는 것이다. 상처받은 “나”는 흠 없는 “나”가 될 수 없다. 죄에 대하여 이미 실패한 “나”의 흔적을 가지고는 흠 있는 우리를 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께서 우리와 똑 같은 상태의 “나”를 가지고 계셨다면, 흠 있는 양을 치는 목자가 되시지 못하였을 것이다. “흠 없는 어린양”이 되시기 위해서는 우리처럼 전과범의 “나”를 가지고 있으면 안 되었다. 죄에 대하여 완전히 깨끗한, 순결한 “나”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처럼 그 안에 “죄의 법”과 “마음의 법”을 모두 가지고 계셨지만, 성화 된 자아, 즉 흠 없는 자아를 가지고 태어나셨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은 단지 흠 없는 어린양으로서의 자격을 주는 것이었으며, 예수께서도 우리처럼 전과범의 나를 경험하는 시험을 통과하셔야만 하셨다. 즉 죄를 아는 가운데서 죄의 유혹을 견디는 시험이었다. 이 일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마지막 부분에서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로마서8:3)심으로 시작되었다. 이 시험을 당하심으로 예수께서는 인간으로서 당해야 될 모든 남은 시험들을 경험하실 것이었다. 즉 죄의 결과와 성향으로 인한 시험을 당하시는 일이었다.

예수께서 죄를 대신지셨던 방법은 인간이 인간의 죄를 대신 지는 것과 달랐다. 사람이 친구의 죄를 대신 지고 법의 집행을 받는다고 친구의 죄가 실제로 그 사람의 죄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서류상으로 죄목이 옮겨지는 것뿐이지 실제로 그 죄를 지은 것처럼 마음과 몸의 상태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마약을 하고 붙잡힌 사람을 대신 하여 형을 받는 다고 하여도 그 마약의 효과가 그 사람에게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 예수께서는 죄를 서류상으로 지신 것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실제로 예수님의 육체에 옮기셨다. 모든 사람들의 죄는 예수께서 친히 지신 것처럼 예수 안에 들어왔다. 인류의 죄는 예수님의 몸과 마음에 융화되어버렸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죄인 되었음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육신에 죄를 정하시는 것은 단순히 육신에 죄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당해야 할 모든 결과들을 실제로 느끼는 일이었다.

스스로는 완전하였던 예수의 자아는 우리 때문에 죄로 물들어지고 죄의 법 아래 사로잡혀 갔던 경험을 느끼게 된다. 흠 없었던 예수의 자아는 서서히 우리들의 죄를 지시기 시작함으로 더럽혀지고 죄의 참혹한 결과를 느끼게 되었다. 이제 흠 없는 양으로서 죄를 지시는 의무가 시작된 것이다. 눈처럼 희었던 예수의 자아는 점점 검게 변하였고 하나님의 심판이 이를 것을 느낀다. 이제 스스로 자신이 죄인임을 느낀다. 한 두 가지의 죄가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바로 자신이 지은 것으로 느낀다.

이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붙드시는 임재의 빛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분은 범죄자들과 같이 취급을 당하셨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렀고 예수의 마음은 “심히 고민하여 죽게”(마 26:38) 되었다. 이제 예수의 자아는 죄의 유혹을 받게 되었다. 세상 모든 악인들의 죗된 경험이 예수의 자신의 것으로 되었기 때문에 악인들이 죄를 지음으로 빠졌던 깊은 흑암과 연약성이 예수의 자아를 누른다. 이제 예수의 자아는 셀 수 없는 인류 전체의 죄로 인하여 타락되어지고, 연약하여지고, 망가져 버린 자아가 되어 버렸다.

사단은 그 연약성을 이용하여 십자가를 거절하도록 유혹한다. 이제는 알고 있는 죄 즉 자신의 죄처럼 되어버린 그 죄의 결과들을 이용하여 예수를 유혹한다. 인류의 죄가 만든 반역과 투쟁의 정신이 예수의 육신에서 꿈틀거린다. 사단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거절하고 자신을 살리도록 유혹한다. 인류의 죄를 대신 지기를 거절하고 다시 마음의 평화를 되찾으라고 유혹한다. 예수의 마음은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구하듯 죄의 어두움 속에서 빠져 나오기를 간구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끝까지 육체의 원을 따르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선택하신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복음 14:36).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모든 유혹과 시험을 물리치셨다. 우리가 당해야 할 영원한 죽음, 영원히 하늘 아버지와 분리되는 죽음을 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공생애의 마지막 시간을 통하여, 우리처럼 전과범의 “나”를 경험하시었고, 죄로 물든 자아를 통하여 밀려오는 사단의 유혹을 이기심으로 마지막으로 고통과 시험의 인생을 끝내셨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가 합쳐져서 밀려나오는 죄에 대한 성향을 느끼셨으며, 흠 없는 어린양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자아는 망가지고, 더럽혀졌으나 시험에 굴복하지 않으심으로 인류의 완전한 모본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마침내, 로마 병정들의 창이나 십자가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서 돌아가시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스가랴 13:7).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7:46).

“자녀들은 혈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히브리서 2:14) 하시기 위함이었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복음의 핵심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 같은 인간 되심을 부인하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 그리스도니”(요한2서:7)

베들레헴의 이야기 속에는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로마서 11:33)이 숨겨져 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시고 “마음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전파하는 소식이 2000년 전에 온 땅과 우주에 선포되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한1서 3:1, 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