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최후의 만찬에 나타난 예수와 유다의 차이


다 빈치의 명작인 “최후의 만찬”에 얽혀 있는 뒷 이야기는 매우 흥미스럽고 또 많은 교훈을 준다. 화가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에 있었던 두가지 사건은 사람이 자신의 선택과 의지의 활용 여하에 따라서 어떤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증이다.

올바른 생각과 잘못된 생각, 올바른 사상과 잘못된 사상, 그리고 올바른 선택과 잘못된 선택이 우리 자신의 생애에 어떤 영향과 감화를 주는지에 대한 가장 적절한 교훈이 “최후의 명작”을 그리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최후의 만찬湛?이태리의 저명한 화가인 레오날도 다 빈치에 의해 그려졌는데, 그 그림은 완성되기까지 7년이 걸렸다. 그림에 나오는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의 모습은 모두 그 당시 사람들을 모델로해서 그려졌다. 다 빈치는 예수의 모습을 그릴 수 있는 모델을 제일 먼저 선택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최후의 만찬”이라는 위대한 걸작을 그리기로 결정한 후에 수백명의 젊은 청년들을 만나 보면서, 그들의 얼굴 모습에서 무죄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겸비하고 있으며 상처가 없고 죄로 인해 찌들어진 모습이 전혀없는 그런 얼굴을 찾으려고 애썼다. 여러 주일을 애써서 찾은 결과 19살 된 젊은 청년이 예수의 초상을 그릴 모델로 선정되었다. 6개월 동안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에 있어서 주인공 예수를 그리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후 6년동안 다 빈치는 계속해서 그 작품의 완성을 위해 노력했다. 열두 제자들을 위한 모델들이 하나씩 하나씩 선택되었다. 모든 인물들이 완성되었고, 마지막으로 유다의 모습이 그려질 공간만이 남게 되었다. 유다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은 삼십량, 오늘날의 계산으로 $16,96의 돈으로 그의 주님을 배반한 제자였다.
여러 주일동안 다 빈치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배반한 자의 성격을 묘사할만한 사람, 사납고 굳어진 얼굴, 범죄적이고 외식하며 속이고 탐욕의 상처로 얼굴이 얼룩진 사람을 찾기 위하여 이태리 전국을 뒤졌다. 유다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는 모습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수많은 사람을 찾아가 보았지만, 결과는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어느 날, 극심한 실망에 빠져 있던 다 빈치에게 한 소식이 전해졌는데, 그것은 로마의 감옥소에 사형 집행 날짜를 기다리고 있는 한 살인수가 있는데, 그 사람이야말로 다 빈치가 찾고 있는 사람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 빈치는 즉시로 로마 형무소를 찾아 갔고 그 사형수는 감옥에서 잠시 놓여 태양의 밝은 빛 아래서 다 빈치를 만나게 되었다. 거기에서 다 빈치는 검게 탄 얼굴, 긴 덥수룩한 수염과 빗지않은 머리칼이 그의 얼굴을 덮어버린 사람, 악의가 넘치고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듯한 배반자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드디어 이 위대한 화가는 그가 그릴 유다의 성격을 대표할만한 사람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로마 황제로부터 특별한 허락을 받아 이 죄수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밀란으로 옮겨졌다. 몇 달 동안 이 죄수는 매일 정해진 시간 동안 다 빈치 앞에 앉아서 천재적인 화가가 구세주를 배신하고 팔아먹은 자의 얼굴을 열심히 화면에 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 빈치는 “최후의 만찬”의 끝마무리를 마치던 날, 사형수를 지키던 간수에게 이제 그림이 끝났으니 이 죄수를 다시 돌려보내도 좋다는 말을 했다. 간수들이 죄수를 끌고 나가려고 하는 순간, 그가 갑자기 간수들의 통제에서 벗어나서 다 빈치에게 달려와 크게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오! 다 빈치여 나를 자세히 보십시요! 내가 누구인지 모르십니까?

다 빈치는 자신의 고도로 훈련된 예리한 눈으로 육개월 동안 계속해서 쳐다보아 왔던 그 사람의 얼굴을 다시 한번 더 자세히 살펴본후에 “아니오, 나는 당신이 로마의 감옥에서 내 앞에 오기 전까지 내 일생에 한번도 본적이 없오”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죄수는 그의 눈을 하늘로 향하여 “오, 하나님, 내가 어쩌다가 이런 모습으로 전락되었나이까?” 라고 절규하였다. 그리고는 곧 그의 얼굴을 다 빈치에게 돌리면서 울부짖기를 “레오날도 다 빈치여! 나를 다시 한번 보십시요. 내가 바로 당신이 칠년전에 예수의 모습을 그릴 때 이 자리에 앉아 있었던 그 사람이요.”

“최후의 만찬”의 그림에 얽힌 이 이야기는 실제이다. 한 사람의 잘못된 선택과 그릇된 생각, 그리고 인생에 대한 빗나간 견해가 인생 전체를 파멸로 몰아 넣을 수 있다는 교훈이 이 이야기 속에 담겨져 있다. 오늘 어떤 선택과 어떤 사상과 어떤 신앙을 갖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내일의 나의 생애가 꼴지워지고 형성되는 것이다. 죄악 많은 이 세상에서 고결한 성품과 죄에 물들지 않은 생애로 인하여 에수의 형상을 그릴수 있을만큼 아름답고 무죄한 모습을 소유하고 있었던 청년이 부절제와 죗된 생각과 타락의 길을 걸어간 후에 이 세상 역사의 가장 비열한 배신자로 알려진 인물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자로 변하는데 불과 칠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되었다.

악에 대항하여 선을 선택하라. 미움에 대하여 사랑을 선택하라. 거짓에 대항하여 진실과 정직을 선택하자. 그러한 마음과 생애는 우리의 모습과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반사하는 열매를 가져다 줄 것이다.


사랑을 주고 이자를 받으세요.

사랑 받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사랑을 주어야 한다. 사랑은 주는 것만큼 돌아온다. 내가 남에게 준 사랑 이상의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은 내가 먼저 그들에게 준 사랑을 돌려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매우 좋은 거래를 가져다 준다. 사랑을 나누어 주면 언제나 그것에 해당하는 이자를 받게 된다. 내게서 나간 사랑이 일단 다른 사람을 거쳐서 다시 내게로 돌아올 때에는 처음 나간 것 이상의 사랑이 돌아온다. 어떤 때는 이자가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돌아 오고, 어떤 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은근하게 돌아 온다.

사랑이 부족하면 구두쇠가 된다. 사랑을 요구하기만 하고, 나누어 주지 않는 사람은 마침내 사랑의 구두쇠가 된다. 구두쇠는 자신이 나누어 주지 않은 것은 생각지 않고, 남이 자신에게 주지 않는 것을 불평한다. 주지 않은 것은 생각지 않고, 받지 못하는 것을 서럽게 생각하는 것이 구두쇠의 특징이다. 이것이 사랑 결핍증에 걸려 있는 사람에게 흔히 나타나는 증세이다. 슬프게도 사랑의 구두쇠는 불평과 외로움 속에서 춥게 지내다 인생을 마치게 된다.

사랑은 돈과 같은 것이다.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갈 때마다 이자가 붙는다. 사랑은 결코 손해 보는 법이 없다. 사랑은 언제나 넉넉한 이윤을 남긴다. 그래서 사랑을 나누어준 자는 언제나 그 마음이 두둑해지고, 얼굴에는 미소와 만족이 나타나게 된다. 사랑을 나누어 주는 데에는 돈이 필요치 않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무한히 나누어 줄 수 있다.

사랑을 받은 자만이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다.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그것을 풍성하게 나누어 줄 수 없다. 부모의 사랑을 만끽한 아이가 그 사랑을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되돌려 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하게 느끼고 받는 사람은 그 사랑을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되돌려 준다. 사랑은 감추어 둘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다. 그것을 거저 받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아무런 아까움도 미련도 느끼지 않고 후하게 나누어 줄 수 있다. 이렇게 나누어 준 사랑은 언제나 높은 이자를 물고서 다시 내게 돌아오니 어찌 내가 사랑을 나누어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랑에는 놀라운 힘이 있다. 사랑은 원수의 머리 위에 부끄러움의 숯불을 올려 놓고, 악마의 마음 속에 수치를 던져 넣는다. 사랑은 구두쇠의 전대를 풀어 헤쳐 놓는다. 사랑은 불평의 입을 막고 너그러운 자비의 입을 열어 놓는다. 사랑은 두려움과 외로움을 내쫓고,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불러 들인다.
 

 

권두언


진정한 행복은 적은 일에 있다고들 말을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성공은 행복을 얻는 데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행복은 소유나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행복은 하나님께로서만 올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행복은 잠시 잠간이며 임시적인 것입니다. 그러한 행복 속에는 미래까지 치닫는 확신이 없습니다.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진정한 쉼도 없습니다. 참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때에만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승인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진정한 쉼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정할 때에 우리는 공중 앞에서 선서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마치 결혼 예식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구세주와 주인으로 모시고 살겠다는 엄숙한 서약 말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침례 또는 세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과연 침례가 성서적인가요? 아니면 세례가 세례가 성서적인가요? 그리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서약의 예식은 어떻게 하는 것이며, 어떠한 마음의 상태와 태도로 임해야 되는 것일까요? 진정한 침례와 서약만이 참된 행복과 쉼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 또한 어떻게 침례에 임해야 하는지를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린 아기에게 베푸는 유아 세례는 어떻습니까? 그것은 과연 성경적인 것일까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이해하는 연령이 되기도 전에 교회의 전통에 따라 침례나 세례를 받는 것이 과연 갓태어난 신생아나 어린 아이에게 구원을 가져 올 수 있을까요? 이번 호에 실린 침례에 대한 글들은 여러분의 성경 지식은 물론, 여러분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힘 있는 도전이 될 것입니다.

아내의 묘비 앞에서


아내의 죽음

우리 모두는 죽음이 생명을 가진 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며, 생물계가 존재하기 위하여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안다. 가족 중에 죽음을 당한 사람이 있는 유족들을 위로 할 때,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위로를 받지 못하면, 나는 그들에게 신앙이 없음을 탄식하고 죽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마음 속으로 은근히 나무랐다.

옛날의 영웅들은 용감한 모습으로 또한 감사한 마음으로 세상을 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종교의 도움이 있고 부활의 소망이 있으므로 더욱 더 그러해야 하지 않겠는가! 만일 내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면, 나는 그녀의 머리맡에 서서 대장부처럼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낭독함으로써, 그녀가 잠시 내 곁을 떠나가는 이별의 아쉬움을 위로하고, 다시 만날 즐거움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전송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성경과 과학이 말하는 죽음의 이치를 이해한다. 그러나 정작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비로소 나는 그 깊이, 아픔, 슬픔, 그리고 괴로움을 절감하게 되었다. 밤마다 뜨거운 피를 쏟아부은 나의 기도도 아랑곳없이, 전심전력을 다하여 내 목숨을 버리더라도 아내를 구하고자 했던 나의 정성도 아랑곳없이, 무자비하게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을 빼앗기던 그 날의 한을 잊을 수 없다.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을 잃는 것이다. 나의 사랑이 나와 함께 하였을 때에는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내게 의미가 있었지만, 사랑이 내 곁을 떠난 지금은 모든 것이 빛을 잃었고 의미를 잃어버렸다.


내 고통의 이유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데서 오는 고통은 이 세상을 잃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 세상은 어차피 떠나야 할 곳이므로 오늘 잃거나 30년 후에 잃거나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피를 쏟아부은 나의 정성이 하늘을 움직이지 못하고, 내가 가진 전부를 쏟아부은 기도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는 데서 오는 회의는 나를 악마에게 사로 잡히게 만들었다. 나는 믿음을 잃어 버렸다. 나의 믿음은 기대고 의지할 토대를 잃어버렸다. 나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은 것을 후회하였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면, 내게 이런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그분께 대한 애정과 신뢰가 없었다면, 이런 낙담은 없었을 것이다. 피를 토해낸 내 기도를 외면한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을까?

의사는 내 몸을 걱정하여 안정제와 수면제를 권하였다. 그러나 무엇이 내 아픈 영혼을 안정시킬 수 있겠는가? 냉정한 이성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생각을 돌리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목사의 위로도 친구의 권면도 이제는 식어버린 내 마음의 신앙에 불을 지필 수 없었다. 나는 성난 곰처럼 “내 사랑하는 자를 돌려다오!”라고 외치는 것밖에 할 말이 없었다.

물론, 나는 믿는다. 나의 구세주는 죽음에서 부활하였던 사실을 믿는다. 나의 아내 또한 구세주께서 오실 때 다시 부활하여 재회할 수 있음을 믿는다. 나의 슬픔은 그런 데에 있지 않다. 나의 문제는 “왜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는가?” 이다. 하나님은 과학자와 의사들이 말하는 삶과 죽음의 법칙을 극복할 수 없단 말인가? 우주의 창조주요 왕인 하나님께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인가? 내 기도에 열심과 정성이 부족해서 인가? 그렇지 않으면 내 죄가 무거워서 나의 소원을 들어 주시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나를 벌하시기 위하여 “아내의 죽음”이라는 불행을 내게 내리셨을까? 바로 이것이 내가 알고 싶은 것이다. 이것만 안다면 나의 믿음은 곧 회복되어 생명력을 얻게 될 것이다.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

첫번째 계단: 내 양심 속에서 한 조그만 음성이 들려 왔다. “자연의 법칙은 하나님의 뜻이다. 죽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를 부르실 때에 사용하시는 한가지 방법이다.” 하나님께서 내 사랑하는 자를 살리실 뜻이 있었다면, 그분께서는 당신께서 세워 놓으신 자연의 법칙에 따라 아내를 살리셨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한다. 불신자는 치료와 회복의 여부를 의약의 효과로 돌리고 의사의 기술력으로 돌리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모든 것을 의뢰한다.


두번째 계단: 악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기도는 무엇 때문에 하는가?” 이것은 어려운 질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것에 따라서 비를 내리시고 눈을 내리시는 것이 아닌데, 왜 기도해야 하는가? 중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사자굴과 핍박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했건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참기 어려운 환난을 허락하셨고 생명을 취하셨다. 기도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차라리 처음부터 기도하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처사가 아닌가? 도데체 기도할 필요가 어디있단 말인가?

아내를 잃고 나서 나는 몇 달 동안 기도하지 않았다. 기도 없이는 수저를 들지 않았던 내가, 기도 없이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던 내가, 아내를 잃을 후에는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되어 원한으로 밥상을 대하고 눈물로 잠자리에 들어가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 그 당시 고통 중에 내가 하나님께 드렸던 하소연이었다. “아! 하나님, 나의 이런 말을 용서하십시요. 당신은 당신 자녀의 믿음을 꺽고 상하게 하셨습니다. 나는 영혼의 아픔 때문에 당신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 내가 당신께 기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를 버리시지는 않으시겠죠? 아니 즐거운 마음으로 기도했을 때보다도, 도무지 기도할 수 없는 지금 당신은 내게 더 큰 사랑과 위로를 주시겠죠? 내가 당신께 기도할 수 있는 때에는 당신의 특별한 은혜와 위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할 수 없는 때야말로 당신의 돌보심을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때입니다. 아이가 심히 병들어서 몸이 쇠약해져서 엄마에게 짜증내고 함부로 말을 할 때에, 엄마는 그 아이의 깊은 속을 알고 한층 더 깊은 사랑으로 앓는 아이를 간호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나를 그렇게 취급해 주시고 계시죠? 내가 아내를 잃고 우주의 표류자가 된 지금이야말로, 제가 극도의 실망에 빠져서 하나님을 버리려고 하는 지금이야말로, 당신은 제 뒤를 쫓아와서 제가 당신을 떠나지 못하게 막으시겠죠?”

“그렇습니다! 나의 기도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십년을 하루같이 하나님께 기도해 왔기에 아내의 죽음 이후에 나는 뜻하지 않은 기쁨과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의 행복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육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영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혹시 육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 있어 기도할 때에는 항상 “만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시면”이라는 말을 덧붙혔습니다. 나는 내 자신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면 믿고, 들어주지 않으면 원망하는 것은 우상을 섬기를 사람들의 신앙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니 어찌 내가 기도를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오늘 밤부터 전보다 더욱 열심히 당신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세번째 계단: 이 때 악마가 다시 내게 속삭였다. “너는 뜨거운 기도로서 불치의 병자를 낫게 한 예를 모르느냐? 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네 열성이 부족했기 때문이야!”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내를 죽인 것은 내 열성의 부족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아내를 죽게 한 죄는 내게 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자이다. 만일 열심이 병자를 낫게 할 수 있다면, 그런 열심을 가지지 못한 자야말로 가련한 존재이다. 죽을 각오로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바꾸시어, 죽은 자를 살리시고 또한 산 자를 죽이신단 말인가? 그럴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각 인생들의 최선을 아신다. 그분의 선한 지혜에 따라서 일의 결국이 이루어지게 된다.

나는 내 믿음의 부족을 안다. 그러나 나는 내 열심을 다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나 내 아내는 결국 죽었다. 누군가 내 열심이 부족했다고 나무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나의 모든 정성을 다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신다. 내게 있는 열심을 다하여 기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데려가셨다. 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믿습니다. 나는 압니다. 만일 당신께 대한 나의 신앙이 아내의 죽음으로 인하여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면, 당신은 반드시 제 기도를 들어주셨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압니다. 하나님께서 아내의 죽음을 허락하신 것은 나를 믿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는 압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내가 이 시련을 능히 견딜 수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자연의 법칙에 따라 아내의 죽음을 허용하셨던 것입니다. 나의 열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서 주어진 저의 열심과 믿음이 족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고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외칠 수 있었다.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믿어 주신다는 사실이 저를 너무나 기쁘게 만들었습니다.”

네번째 계단: 악마는 다시 이렇게 속삭였다. “네가 믿는 정녕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너에게 이런 고통과 슬픔을 줄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악마에게 응답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내게 주셨다. “악마여,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기 위하여 고통을 주신다는 어떤 목사들의 가르침을 믿지 않는다. 성경에는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형벌”이 없다. 형벌이란 말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있어서 필요도 없고 의미도 없는 낱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형벌은 ‘어둡게 보이는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형벌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지옥불도 악인과 의인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선과 의를 싫어하는 악인을 영원히 살게 한들 그것이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살인과 강간과 도박과 미움과 증오 속에서 악인들끼리 영원히 살도록 허락하는 것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는가? 지옥불로 악인의 생명을 거두심으로써, 우주에서 악이 근절됨으로써, 온 우주가 안전하게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지혜이다. 나는 지옥불에 조차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 하나님은 정녕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다섯번째 계단: 악마는 마지막으로 한가지 의혹을 내 마음에 심고자 하였다. “네 아내는 왜 그렇게도 단명했어야만 하니? 그녀는 순결한 마음을 가졌으며, 자기를 잊어버리고 너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쳤으며,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가난과 싸우며 성경 진리를 지키기 위하여 심한 고통을 당했다. 왜 그녀는 단 한번의 안락한 삶을 살지 못한채 그렇게 빨리 갈 수 있단 말인가? 네가 믿는 하나님은 정말 가혹한 분이 아닐까?”

참으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의혹이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사실 속에 도데체 무슨 깊은 뜻이 있는지 궁금하였다. 성경은 땅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위하여 지어졌다고 말하고 있다(욥 15:19).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던 아내가 이 세상을 즐기지 못한채 갈 수 있단 말인가? 아마존의 숲속에 숨겨져 있는 금광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아프리카의 산에 파뭍혀 있는 다이아몬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나님의 진리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방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과 팔에는 금과 다이아몬드가 걸려 있는데, 일평생 충성과 희생의 삶을 산 내 아내의 몸에는 다 떨어진 천이 걸쳐져 있을 뿐이다. 이 땅은 악마의 뒤를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지어졌단 말인가?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도움을 청하는 환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시중을 들었던 아내는 단 한번의 낙도 누리지 못한채 일찍 가버렸는데, 악마의 자식들은 여전히 살아 남아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지구의 환경을 즐기고 있다. 정녕 이 지구는 악마와 그의 자식들에게 주어졌단 말인가?

이 심원한 의문에는 두가지 대답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금 현재의 지구보다 나은 세계가 의인들을 위하여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첫번째 대답에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없다면 진리도 없을 것이고, 진리가 없다면, 우주를 지탱케 하는 법칙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법칙이 없다면, 우리 자신도, 우주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존재하는 한, 하늘과 땅이 내 눈 앞에 존재하는 한, 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두번째 대답 속에 나를 만족시키는 진리가 있다. 그렇다! 성경은 예수께서 재림하신 다음 천년 이후에는 이 지구(땅) 위에 의인들만을 위한 새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이 지구는 의인들의 손에 주어진다. 그 날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영원한 주인이 될 의인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의인들은 고통과 슬픔을 참으면서 그 날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 세상에는 두가지 아름다움이 있다. 하나는 금과 다이아몬드로 치장된 아름다움이고, 다른 하나는 정직과 진실로 이루어진 아름다움이다. 악인들은 페르시아의 진주를 구하고, 오를로의 보석을 구하지만, 의인들은 온유와 겸손으로 짜여진 의의 옷을 구한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니라” 벧전 3:3,4.

지구의 이곳 저곳에 뭍혀 있는 금과 은은 얻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버리기 위하여 지어진 것이다. 그것을 얻고자 하는 자는 지옥불을 맞게 될 것이지만, 그것을 버리는 자는 결국 그것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하늘 예루살렘의 진주 문으로 들어가기 원하는 자는, 하늘 도성의 금으로 된 거리를 걷기 원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진주와 금을 버리는 경험을 해야만 한다. 아름다운 진주와 금을 버리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시련의 장소이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 속 깊은 동기까지 금과 은에 의하여 시험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시련의 장소이다. 마음의 밑바닥에서부터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린 사람만이 이 세상을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으며, 그 결과로서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회가 가지고 있는 역설적 진리이다. 내 사랑하는 아내가 겪은 고통과 시련 역시 이 진리의 공식에 의하여 이해될 수 있다.

나를 회복시키신 하나님

아내를 생각할 때마다 늘 창자가 끊어질듯한 아픔과 후회가 있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 그녀의 미소에 불쾌한 얼굴로 대답하였고, 그녀의 희생에 충분한 감사의 표시를 하지 못했던 사실이 아직도 나를 괴롭힌다. 심지어는 그녀가 병자들을 간호하다가 몹시 지쳐서 내게 위로를 청했을 때에도 나는 그녀의 연약함을 나무라면서 거친 말로 대꾸하였다. 그녀는 언제나 내게 유순하고 충성스러웠지만, 나는 이따금 냉정하고 성실치 못했다. 이것을 생각하면, 나는 땅에 부끄럽고 하늘에 부끄럽다. 보답을 받아야 할 그녀는 이미 사라졌다. 용서를 빌어도 받을 사람이 없으며, 가슴을 치며 뉘우쳐도 소용없게 되었다. 요즘도 이러한 회한이 밀려오는 밤마다 나를 지옥불 속에서 매질한다.

어느날 나는 그녀의 무덤에 찾아가서 한송이 꽃을 꽂는데, 어디선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왜 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때문에 우느냐? 너는 지금도 아내에게 보답할 기회와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녀가 너를 위하여 충성하였던 것은 어떤 보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너에게 바치는 자신의 희생과 충성을 통하여 네가 하고 있는 하나님의 일이 진보되기를 원해서 였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진정으로 아내의 희생과 사랑에 보답하고 나의 일을 하기 원한다면, 네 이웃과 국민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봉사하라. 집이 없어 거리를 헤메는 노파는 네 아내이고 또한 나이다. 가난에 쫓겨 몸을 치욕과 돈에 파는 소년는 네 아내이고 또한 나이다. 네가 그들을 위로한다면 바로 네 아내와 나를 위로하는 것이다. 비탄과 후회에 잠겨 있는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 빨리 네 집으로 돌아가 네 아내와 내가 기뻐하는 일을 하라!”
나는 아내의 무덤을 제비꽃이나 장미꽃으로 장식함으로써, 내 자신이 위로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아내의 무덤에 선하고, 진실되며, 진리로 거룩하게 된 나의 삶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아내의 죽음 때문에 나는 이전보다 더욱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아내의 죽음으로 인하여 믿음도 잃었고, 하나님도 잃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회복시키셨다. 시인 쉴러가 말한 “진정한 용사는 홀로 있을 때에 더욱 강해진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메리 모파드 여사의 죽음 이후에 탐험가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의 암흑대륙에 더욱 깊숙히 뛰어들었던 것처럼, 나 역시 아내의 죽음 이후에 진리의 조화를 좀더 깊이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느끼게 되었다. 이 눈물의 세상을 떠나 아내와 다시 만나는 그 날이 될 때까지, 나는 아내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서 하늘 집을 향한 나의 발걸음을 재촉하련다!

 

포기하지 않는 죄에 대한 질문과 답변


질문: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어려운 죄가 오래 동안 제 생애 속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주마다 교회에 나가며 교회 활동에도 열심입니다. 이러한 생활을 하는 제 마음속에도 예수님이 거하실 수 있나요?

답변: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가서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 그분의 임재를 허용하도록 요청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어서 그분께서 들어오시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결코 나뉘어진 마음은 받지 않으십니다. 만약 마음이 재물과 돈을 섬기는 일에 바쳐져 있다면, 이기심과 교만이 마음을 채우고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들어가셔서 거하실 수 있는 곳은 사라지게 됩니다.

지금 귀하의 상태는 예수께서 문밖에 서서 귀하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며 호소하시는 상태에 계신 것같습니다. 부디 죄를 포기하시고, 예수님의 임재를 전적으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마음 문 밖에 서계셔서 기다리는 것과,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오셔서 온 마음과 생애를 주관하시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죄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성령과 예수님께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양심의 음성을 들을 수는 있습니다. 비록 날이 가면 갈수록 그 음성이 점점 약해지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서 그 음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애 속에 거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구조 요청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온 하늘은 우리의 구원에 모든 관심과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구속 사업에는 강제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억지로 인간의 마음 문을 열고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성령의 감화 아래서 자신이 섬겨야 할 주인을 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 있습니다. 사람이 성령의 감화로 인하여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의 자유와 쉼과 평안을 얻게 됩니다. 죄를 버리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해야 할 일입니다. 물론, 자신의 힘으로 사단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기를 간절하게 소원하고 그 필요를 절실하게 느껴서 자신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내려오는 구원의 힘을 간구하면, 우리의 영혼 속에 성령의 거룩한 힘이 불어 넣어져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죄의 덫에서 빠져 나갈 수 있는 강력한 의지력이 창조됩니다. 바로 이러한 역사가 구원의 역사이며,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죄를 버리고 승리의 생애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죄와 이기심이 숨어 있는 장소로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거하시는 장소로 바쳐져야만 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마음의 보좌에 앉으셔서 온 마음과 생애를 주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사단과 자리를 나누어 갖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섬길 자를 분명하게 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완전하게 바쳐지지 않은 사람은 언젠가는 사단의 진영에 가담하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중간에 서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 심판의 때에는 중간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마음 속에 죄와 의, 사단과 예수님을 함께 모시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 심판의 때에는 과연 누가 그 사람의 마음과 생애를 주관해왔는지가 밝혀질 것입니다.

위궤양? 걱정없습니다!


서구식 식생활 습관들이 들어가는 곳마다, 소화성 위궤양이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전통적인 식생활의 변화가 현대인들에게 위궤양을 가져다 주고 있다.

후추가루와 고추, 각종 화학 조미료와 자극성 양념들, 설탕 그리고 커피, 콜라, 차와 같이 카페인이 들어가 있는 것들 역시 위를 자극한다. 과일과 채소를 함께 먹으면, 위의 산도가 증가되므로, 위궤양 환자들은 주의해야 한다. 식사 중에 물을 마시는 것은 위장에 부담을 준다. 식사 중에 물을 마시면 위장 내의 산도가 떨어지는데, 이 경우 위장의 적정 산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더 많은 산이 위장에 분비되어야 한다. 이로 인해서 음식이 완전하게 소화되기까지 더 오랜 시간을 위장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결과가 초래되며, 결과적으로 위장은 더 많은 일을 해야만 하게 된다. 다음과 같은 한가지 원칙이 도움을 줄 수 있다. “식사 중에는 물을 먹지 말고, 식사와 식사 사이의 공복에 물을 마실 것.”

위궤양 환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한가지 사실이 있는데, 그들은 하루에 조금씩 여러 번 식사를 함으로써, 위산이 위벽을 갉아먹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위산은 위장 안에 음식이 존재할 때에만 분비되어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상식처럼 알려진 생각은 오히려 위장에 해를 가져오는 것이다. 일단 식사를 했으면, 다음 식사 시간까지 어떤 것도 위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때 식사와 식사의 간격은 적어도 5시간 이상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원칙은 위장으로 하여금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후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여유를 주며, 다음 음식이 들어오기 전에 보급품을 받을 수 있는 여유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든다. 식사 시간이 되기 전에 한 조각의 사과나 한 모금의 과일 주스라도 위장에 들어가면, 위장과 내장, 간, 담낭, 췌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큰 공장”이 작은 음식 덩어리를 소화시키기 위해서 가동된다. 지방이 많이 포함되지 않은 적당한 양의 식사를 하였을 경우, 위장이 완전히 비기까지 3~6시간이 소요된다는 시험 결과가 있다. 그러나 식사 시간에 먹은 음식이 미처 소화되기 전에 간식을 하거나 두 번째 식사를 하였을 경우, 첫 식사 때에 먹은 음식의 잔여분이 최고 14시간까지 위장에 남아있게 된다. 이러한 경우, 위장은 매우 극심한 혹사를 당하게 된다.

간식으로 인해서 음식물이 위장 안에서 필요 이상으로 오래 동안 머물러 있게 되면, 여러 가지 원치 않는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 첫째, 위장 안에서 완전하게 소화되지 못한 음식물의 중심부에서 박테리아들이 쉽게 생성될 수 있다. 만일 위장이 효과적으로 일하지 못하면, 소화에 필요한 펩신과 산의 양을 조절할 수 없게 되어서,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은 양의 펩신과 산이 위장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만일 너무 많은 펩신과 산이 위장 안으로 분비되면, 이것은 위벽을 상하게 한다. 또한 몸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소화를 위한 화학 성분들을 만들어 내는데에 지나치게 많이 소모됨으로써, 피곤과 무력감이 생긴다. 이런 경우, 많은 사람들은 배가 고파서 무력감을 느끼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어서, 또 다시 음식물을 먹게 된다. 이미 과로한 상태에 있는 위장은 계속해서 들어오는 음식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쉴 사이 없이 일해야만 한다. 이런 식으로 혹사당한 위장은 결국에는 염증으로 인하여 붓게 되고 위궤양이 생기게 된다.

만일 너무 적은 소화액이 분비되면, 길게 연결되어 있는 음식 미립자들은 가장 작은 크기로 완전하게 분쇄하지 못하게 된다. 불완전하게 분쇄된 중간 크기의 음식 미립자들은 혈액에 유해한 영향을 미친다. 그 결과, 두통이나 감기에 잘 걸리게 되며, 쇠약한 체질을 갖게 된다.

한번은 150세를 넘어선 할머니에게 장수의 비결을 물어보았다. 그 할머니는 대답하기를, “나는 배가 고프지 않을 때에는 어떤 것도 입에 넣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단 입에 들어간 것은 그것이 물죽이 될 때까지 씹고 또 씹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훌륭한 위장 관리법이 어디에 있겠는가! 만일 배고픈 경우에만 무엇을 먹으며, 배고픔을 면할 수 있을 정도의 음식물을 섭취한다면, 그리고 식사 후 5시간 이상이 지나야만 배고픔을 느끼도록 우리 몸을 훈련시킨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힘과 생명력을 얻게 될 것이다. 피로에 관한 90%이상의 이유가 과식에 있다는 매우 놀라운 의학 보고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음식물을 적절하게 씹지 않는다. 내가 의과 대학생이었을 때, 나는 수많은 시체를 해부했던 경험이 있는데, 음식물을 제대로 씹지 않았기 때문에 소화되지 못한 음식 덩어리들이 대부분의 시체의 위장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여러분들의 주변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안에 가득 음식을 넣었을지라도, 5~6번 이상을 씹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놀라게 될 것이다. 제대로 씹히지 않은 큰 덩어리의 음식물이 위장에 들어갔을 경우, 그것을 작은 창자로 보낼 수 있을 만큼 작은 알갱이들로 분쇄하기 위해서는 휠씬 강력한 소화액이 요구된다. 우리가 맛있게 먹은 음식물로부터 얻는 유익은 음식물의 양에 비례하기 보다는 음식물이 입안에서 씹혀지는 시간에 비례한다는 것이 소화의 원칙이다 위장이 불평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적은 양의 음식물을 입안에 넣고, 그것이 크림처럼 될 때까지 씹는 것은 체중을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가벼운 운동은 내장의 소화를 증진시키고 움직임을 활발하게 만들지만, 격렬한 운동은 오히려 내장의 움직임을 감소시키며 소화액 분비를 감소시킨다. 식사 후에, 가벼운 육체 활동을 함으로써 소화를 도울 수 있다.

위궤양에 유익한 5가지 식물

1. 요리하지 않은 신선한 양배추와 양상추(lettuce)
2.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알로에 베라 젤(gel)을 작은 컵을 1/2잔 마심.
3. 매일 2개 이상의 삶거나 구운 감자(기름에 튀긴 것은 부적당함).
4. 매 식사 때마다 4~6개의 잘 익은 올리브
5. 아몬드, 좁쌀

위장에 자극적이고 부담을 주는 것

1. 후추가루, 매운 고추, 그리고 자극성 양념
2. 식초와 식초가 첨가된 음식물 (마요네즈, 토마토 케찹, 겨자, 오이 피클 등)
3. 제조과정에 있어서 발효나 썩히는 과정을 거친 식품들 (치즈, 간장, 그리고 이와 유사한 식품류)
4. 베이킹 소다(베이킹 파우더)를 사용하여 만든 식품 (거의 모든 과자류, 쿠키, 도넛, 그리고 빵 종류들)
5. 카페인(커피, 차, 콜라), 니코틴(담배), 테오브로민(초콜렛)
6. 식사 중에 물을 마시는 것(식사 중에 마시는 물은 소화를 지연시키며 위장 속에 음식물이 더 오래 동안 잔존하도록 만든다. 식사 중에는 음료수, 스프, 주스, 그리고 우유 등을 마시지 말아야 한다. 더구나 우유는 많은 양의 락토우스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우유와 설탕으로 만든 유제품들은 소화 과정에서 발효되고 유독한 화학물질을 생성해 낸다. 우유는 다른 어떤 식품보다도 알러지를 일으킬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을 함유하고 있다.)
7. 늦은 저녁 식사(저녁 식사는 과일식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위장이 비어 있는 상태에서 수면을 취하는 것은 많은 유익을 가져다 준다.)
8. 과식. 각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운동량이 부족한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현재 자신들이 먹는 음식량을 절반이나 2/3로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9. 음식물을 충분히 씹지 않는 것. 너무 빨리 먹는 것. 한번에 너무 많은 양의 음식을 입에 넣으면 충분하게 잘 씹을 수 없으므로, 숫가락의 1/3정도의 양이 적당하다.
10. 고기, 기름, 설탕이 많이 포함된 음식. 농축된 단백질 음식은 위장에 부담을 준다.
11. 과일과 야채를 함께 먹는 것. 특히 위장이 이미 약해져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과일과 야채를 함께 먹는 것은 위에 부담을 준다. 또한 우유와 설탕, 우유와 계란, 설탕과 계란을 배합한 음식물들을 피해야 한다.
12. 잘 익지 않았거나, 지나치게 익은 과일.
13. 너무 차거나 뜨거운 음식을 먹는 것.
14. 식사 시간 후, 5시간이 경과되기 전에 두 번째 식사를 하는 것.
15. 흰 밀가루와 흰 쌀

당신의 방어망은 확실합니까?


건강은 지혜로운 선택으로 시작되며, 향상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는가가 우리 몸의 건강을 유지하는 일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가 됩니다. 그러나 선택을 하기 앞서, 우리는 먼저 건강이 어떻게 유지되고 향상되는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건강에 대한 잘못된 지식과 오해는 오히려 치명적인 해를 가지고 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침 감기가 들면, 사람들은 약국에 가서 기침 약을 사서 먹음으로써, 기침하는 증세를 없애버립니다. 환절기마다 알러지가 심해지면, 병원에 가서 알러지 약을 처방 받아서 그것을 통하여 알러지 증세를 없애버립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겉으로 드러난 증세만을 없애기 위해서 이곳 저곳을 찾아 다니는 동안에, 우리의 몸이 가지고 있는 병의 근본 원인은 점점 더 깊게 훼손되어 갈 수 있습니다. 지혜가 있는 현대인들이라면, 증세를 일시적으로 없애기 위해서 노력하기 보다는, 근본 원인을 제거하고 치료하기 위해서 노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동일한 장소에서 먹고 생활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어떤 사람은 감기에 걸리는데 어떤 사람은 아무런 증세를 나타내지 않은 채 지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왜 어떤 사람은 암으로 인해서 고통 당하는데, 어떤 사람은 암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건강한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것입니까? 이러한 질문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 바로 우리 몸이 가지고 있는 면역 시스템 즉, 저항력입니다. 우리 몸의 면역 시스템(저항력)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신체를 건강하게 보존할 수 있을까요?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 입니다. 각종 질병에 대처하는 방어 시스템을 어떻게 하면 강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경우에 저항력이 쇠약하게 되어서 각종 병균과 암에 대하여 속수무책이 되게 됩니까?

현대 의학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질병과 난치병의 숫자는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질병의 증세를 끝없이 쫓아다니든지, 아니면 저항력을 향상시킴으로써 질병을 극복할 것인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은 이러한 혼돈된 상황 속에서, 가족의 건강을 유지 향상시킬 수 있는 “살아남는 건강법”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 첫 번째로 우리 몸이 가지고 있는 저항력 즉, 면역시스템을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1. 저항력, 면역 시스템이란?

면역 시스템을 어떻게 하면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면역 시스템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근본을 이루고 있는 것들을 잠시 살펴보자.

면역 시스템(저항력)은 우리 몸의 저항력을 결정하는 시스템으로서, 두 가지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첫째는 몸 안으로 들어오는 외적의 침입을 막으며, 둘째는 몸 안에 존재하거나 자라나는 불순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평화를 유지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사는 이 더럽고 오염된 환경에서, 몸 안으로 침입하여 들어오는 것들로부터 우리 몸을 보호할 수 있도록, 우리 몸에 튼튼한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여 놓으셨다. 이 시스템은 가벼운 감기로부터 무서운 암에 이르기까지 모든 질병에 대항하여 강력하고 성공적으로 저항 할 수 있는 방어망이다.

한 국가를 방어하는 국방부 안에 육군과 해군과 공군이 있듯이, 이 방어 시스템에도 5가지의 중요한 군대들이 있다. 예를 들면, B림프구, T림프구, 식세포, 살해 세포(Killer cell), 자연살해세포(NT세포)들이 있다. B림프구는 일반적인 감염과 싸우는 여러 가지 항체를 생성해 내지만, 나머지 4가지 면역 세포들은 암세포나 AIDS 바이러스, 박테리아 등을 직접적으로 공격한다. 몸 안에 병균이 침입하였거나, 암세포가 증식할 때에, 이러한 원수들과 강력한 전쟁을 벌일 수 있는 3x1014 개에 이르는 엄청난 숫자의 백혈구 방위군들이 준비되어 있다. 이들은 세균의 위급한 침입을 대비하여 24시간 비상 대기하고 있으며, 항상 6x1013개의 백혈구들의 숫자와 에너지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 증강하기 위해서, 우리는 적절한 물의 사용, 운동, 신선한 공기, 태양, 평화스러운 마음, 그리고 올바른 식사 등이 균형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어떤 사람들의 방위 시스템은 기능이 너무도 약화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각종 병에 걸리게 된다. 감기뿐만 아니라 암이나 AIDS 역시 면역 시스템이 약화된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질병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러한 방위부대를 강력한 정예부대로 만들 수 있을까?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바로 이 문제가 건강을 유지하고 각종 질병을 치료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고 있다.

면역 시스템은 신체의 각 부분과 밀접하게 뒤섞여 있으며, 우리의 마음이나 정신 상태와도 긴밀한 관계가 있다. 먼저, 스트레스가 우리의 저항력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자.

콜로라도 대학의 스타우트 박사와 브룸 박사는 신경이 예민하고 긴장한 사람이 감기에 더 잘 걸리는 것을 알아내었다. 또한 잘 알려진 것처럼, 스트레스는 콜레스테롤의 숫자를 증가시킨다. 또한 배우자를 잃어버려서 슬픔에 잠겨 있는 아내와 남편에게 있어서, 백혈구의 숫자가 감소하는 경향을 발견하였다. 마음 속에 있는 죄책감은 슬픔과 유사한 결과를 나타낸다. 우리가 죄를 범하였을 때에, 하나님과 분리됨을 느끼게 됨으로써, 우리의 면역 시스템의 기능이 저하될 수 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을 때, 시편의 기자인 다윗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과학적인 간증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시 32:3). “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악취가 나오니… 내 등이 심히 아프고 구부러졌으니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내 심장이 뛰고 기력이 쇠하였으며,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시 38:3~10)

다윗은 범죄함으로써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었고, 이것은 그의 면역 시스템을 저하시켰던 것이다. 현대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죄책감은 면역 시스템에 가장 부정적이면서 강력한 악영향을 주는 감정인 것이다.

각종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면역 시스템의 기능이 회복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의 죄책감을 제거할 수 있는 용서의 길을 열어주시고, 또한 죄를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한다는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면역 시스템과 저항력을 강화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정보 중의 하나이다. 회개한 다윗의 회복된 기쁨과 건강한 소리를 들어보라.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꺽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 51:8,12)

그리스도인들은 현대 의학에 새로운 개혁을 일으킬 수 있는 건강 정보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들이 용서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치료법을 이해하게 될 때에, 우리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최적의 건강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치료법은 신비가 아니라 너무도 의학적이고 과학적인 치료법이다. 단순한 마음으로 그분을 신뢰하고 죄를 고백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저항력의 회복을 놓치지 말자.

2. 저항력을 향상시키는 방법

우리 몸의 면역 시스템을 향상시키는 방법들은 매우 여러 가지 요소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데, 가정에서 손쉽게 실천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생활 습관들은 저항력의 향상을 가져올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생활 습관을 소홀히 여기거나 무시하면서 저항력의 향상을 기대하는 것은 막연한 상상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저항력 강화 비결 10가지

1.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따뜻한 물을 2잔 마시는 것은 매우 좋은 유익을 가져다 준다. 또한 이것은 매일 아침에 정기적으로 화장실에 가는 좋은 습관을 유지시켜 준다. 각 개인에 따라서 다르지만 하루에 6~10잔의 물을 마시는 것은 굉장한 유익을 가져다 준다.
2. 매일 아침이나 저녁에 찬물과 뜨거운 물로 번갈아 샤워를 하는 것은 면역 시스템을 자극하여 활력을 가져다 줄 수 있다.
3. 하루에 두 번씩, 식사와 함께 신선한 마늘 두 쪽을 먹는 것은 유익을 가져 온다.
4. 가볍게 땀을 흘릴 정도로 산보하거나, 유익한 노동(정원 가꾸기, 채소밭 가꾸기, 장작 쪼개기 등)을 하는 것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매우 좋은 유익을 가져다 준다.
5. 올바른 수면법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은 저항력을 향상 시키기 위한 매우 중요한 습관인데, 특히 밤 12시 이전에 도달하는 깊은 수면은 성장 호르몬과 함께 우리 몸에 매우 귀중한 유익을 가져다 준다.
6. 하루에 20분 내지 30분의 일광욕은 건강에 유익을 가져다 주는데, 얼굴과 팔만 노출되어도 충분하며, 강력한 햇빛은 오히려 면역 시스템의 기능을 저하시킨다.
절제하라! 과학과 간식은 절대적으로 건강에 해로우며, 커피, 담배, 술, 콜라와 같이 카페인이나 니코틴이 함유되어 있는 것들은 저항력을 심각할 만큼 약화시키는 것들이다.
7. 채식으로 식사를 하는 것은 매우 좋은 유익을 가져다 준다. 또한 저녁 식사를 매우 가볍게 하는 것도 매우 좋은 식생활 습관이다. 동물성 기름이나 지방은 면역 세포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들 중의 하나이다. 지방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음식은 면역세포들의 기능을 심각하게 저하시킴으로써, 각종 암에 대한 저항력이 저하되는 이유가 된다. 또한 당분(설탕)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음식도 면역 세포의 기능을 저하시킨다.
야외나 천연계 속에서 맑고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효과를 가져다 준다. 특히 옥외에서 신선한 공기를 하루에 20번 이상 심호흡하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소나무나 전나무 숲 속에서 오전 10시 경에 들여 마시는 산소는 신체에 커다란 활력을 가져다 준다.
8. 충분한 휴식, 단순한 생활, 단순한 사고방식을 소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9. 의복은 깨끗하며, 면으로 된 것이 가장 좋으며, 팔과 다리는 따뜻하게 유지할 수 있는 의복을 착용하는 것이 건강에 유익하다. 배와 가슴을 조이거나 압박하는 의복은 혈액순환과 소화기에 좋지 않은 영향을 가져다 주므로 피해야 한다.
10. 마음의 평화와 안정과 감사의 정신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은 저항력의 향상을 위하여 가장 좋은 약이 된다.

체중 조절에 대한 질문과 답변


질문: 젊었을 때는 날씬 했는데, 중년이 된 이후 급격하게 체중이 늘어서 이제는 비만을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몸무게가 정상보다 높아지면, 대개 어떤 위험이 따르는가요?

답변: 오늘날 비만은 거의 모든 현대병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받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알맞는 체중에서 20% 이상 초과하는 것을 비만으로 정의할 경우, 비만증이 있는 사람의 경우 다음과 같은 위험 부담률을 안게 됩니다.

1. 심장 질환의 발병률이 3배로 증가된다.
2. 고혈압 발병률이 4배로 증가된다.
3. 당뇨병 발병률이 5배로 증가된다.
4. 콜레스테롤 수치의 상승 확률이 확률이 5배로 증가된다.
5. 담낭 질환 발병률이 6배 이상 증가된다.
6. 각종 암의 발병률이 급격하게 증가된다.

비만증의 해결 방법은 음식물의 섭취량을 줄이는 데에 있지 않고, 생활 개혁에 있습니다. 우선, 음식을 완전한 채식으로 전환하고 운동을 정기적으로 하며, 부절제를 삼가하는 건전한 라이프 스타일로 살아가십시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체중을 조절하실 수 있습니다.

나바호 인디언과 암


21세기의 의학적 숙제인 암을 해결할 수 있는 놀라운 정보가 미국 유타 주의 남쪽에 거주하는 나바호 인디언들에게서 흘러나오고 있다. 나바호 인디언들은 놀라울 정도로 낮은 암 발생율을 나타내고 있다.

필자가 나바호 인디언들의 생활을 연구한 결과, 그들은 거의 대다수의 현대인들이 무시하고 있는 건강법칙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비록 자신들이 건강법칙을 준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현대인들을 굴복시킨 암을 정복한 정복자들로서 살아가고 있다.


17년 동안, 나는 나바호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의사로서 봉사하였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암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 사실에 대하여 놀라게 되었다. 나바호 인디언들에게도 당뇨병, 관절염, 호흡기 질환같은 질병들이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암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의료봉사를 하였던 17년 동안에, 단 한 건의 폐암이나 유방암도 발견하지 못했다. 오직 한 건의 전립선암과 장암만을 보았을 뿐이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만연되어 있는 질병인 암이 나바호 인디언들에게는 거의 발병하지 않았다. 내가 근무하였던 머뉴먼트 밸리 병원이 설립되었던 1960년 이래로, 단 한 명의 유방암 환자가 있었을 뿐이다!

나의 동료인 군(C.D. Goon) 의사는 유타 주의 몬티셀로에서 개업하고 있었는데, 그는 말하기를,“지난 32년동안의 진료 경험을 통해서 유방암에 걸린 인디언 여자를 보지 못했다”라고 회고하였다. 그의 그러한 말은 나의 관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의 동료인 제롤드 스미스 의사에게 인디언 여자가 유방암에 걸린 케이스를 취급한적이 있었느냐고 질문하였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자신은 인디언들을 25년 동안 치료했지만, 단 한 건의 유방암도 보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동료 의사들도 유방암에 걸린 인디언 여자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나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두번 정도 종양을 가진 인디언을 보았던 적이 있을 뿐이다. “인디언들은 암에 대해서 면역인가? 그들에게 암이 발병하지 않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이러한 궁금증들은 나로 하여금 이 문제에 대하여 연구하도록 만들었다.

내가 진료하고 있던 블랜딩이라는 마을은 인디언 보호구역의 경계선 부근에 있는 지역이었다. 그 마을 인구의 반은 나바호 인디언이었는데, 그들은 조상들이 물려준 석기시대로부터 현대문명으로 전환하는데에 있어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들 중의 어떤 이들은 트럭이나 가게에 나와 있는 음식물이나 식품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들 중의 많은 이들은 현대 교육을 거절하였으며,“옛 방식”을 고집하였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교육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건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암이라는 질병은 없었다.

블랜딩 마을은 샌주앙 카운티에 속해 있는데, 그 카운티에서는 인디언과 암의 관계를 연구하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다. 샌주앙 카운티에는 약 10,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그 중의 반은 나바호 인디언이었으며, 나머지 반은 백인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난 5년 동안에 나바호 인디언에게 몇 건의 암이 있었는가와 동 기간 동안에 백인들에게 몇 건의 암이 발병하였는지를 비교해 보기로 하였다. 이러한 나의 조사는 꽤 공정한 조사라고 생각되었다. 샌주앙 카운티에 사는 백인들은, 일반적인 미국인들에 비해서 훨씬 낮은 암발병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대개 시골에 살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 중류에 속하였고, 술을 마시지 않는 몰몬교도들이었다(대다수의 몰몬교도들은 미국의 유타 주에 거주하고 있음).

연구를 위한 자료들을 수집하기 위해서, 나는 머뉴먼트 병원을 찾아갔다. 나는 자료와 기록을 담당하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암환자에 대한 기록을 보여달라고 부탁하였다. 암환자에 대한 기록은 너무도 쉽게 정리되었다. 병원이 설립되었던 1960년 이후부터 13년 동안 13,000 명의 환자를 진료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나바호 인디언들이었으며, 그들 중에 암 환자는 오직 13명 밖에 없었다. 13명 가운데에는 1명의 초기 유방암 환자가 있었다. 나는 그 1명의 나바호 여자 인디언의 생활과 배경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하였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난 5년 동안에는 5명의 암환자들이 기록에 나타났다.

나는 몬티셀로에 있는 샌주앙 병원을 찾아갔다. 지난 5년동안의 백인 환자와 인디언 환자의 비율은 60:40이었다. 지난 5년 동안, 샌주앙 병원은 총 8,522명의 환자들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 97명이 암환자였다. 그리고 97명의 암환자 가운데 오직 3명만이 나바호 인디언이었다. 3명이 인디언 암환자 가운데, 한 사람은 골수암이었고, 다른 사람은 난소암이었으며, 세번째 사람은 전립선암이었다. 백인 암환자 중의 7명은 유방암, 8명은 전립선암, 6명은 장암, 8명은 폐암, 21명은 피부암, 8명은 자궁암, 15명은 경구부위의 암, 22명은 기타 부위의 암으로 나타났다. 나는 나의 사무실에서 모든 기록을 점검하였는데, 나의 진료 기록 가운데서 9명의 백인 종양환자와 1명의 인디언 종양환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뉴멕시코 주의 쉽락시에 있는 정부가 운영하는 공중보건소에 찾아갔다. 그곳에서 나바호 인디언들이 암치료를 받았던 기록을 찾아 보았다. 5명의 나바호 인디언 암환자들이 기록에 나타났다. 이들 중의 한명은 피부와 위장암 환자이었으며, 한명의 백혈병, 한명의 경구부위 암, 한명의 갑상선암 기록이 나타나 있었다. 그 보건소는 주로 인디언들을 치료하는 병원이었는데, 거기서도 암은 매우 희귀한 질병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나바호 인디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 있는 모츠마 병원을 들렸다. 이 병원에 찾아오는 거의 모든 환자들은 인디언들이었다. 그 병원의 원장인 베네딕츠 의사는 지난 8년동안 하루에 평균 30명의 환자들이 찾아왔는데, 그 중에 암환자는 단 한명도 없었으며, 종양 환자가 한명 있었을 뿐이라고 말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샌주앙 카운티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지난 5년간의 암 발병률에 대한 조사를 마칠 수 있었다.


연구 결과 보고

조사 결과, 샌주앙에 거주하는 나바호 인디언들의 암 발병률은 매우 희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과 동일한 지역에 거주하는 백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미국인들과 암 발병률을 비교하여 볼 때에,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수많은 현대인들에게 발병되는 암이 나바호 인디언들과는 거의 무관한 것처럼 보였다. 특히, 유방암과 폐암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했으며, 거의 모든 종류의 암이 나바호 인디언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였다. 나바호 인디언과 백인에게서 발병하였던 암에 대한 통계 자료를 비교하여 보자.

무엇이 이러한 엄청난 차이을 만들어 내었는가? 백인들이 더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았는가? 아니다. 이 통계 자료는 동일한 지역, 동일한 기간, 동일한 병원, 동일한 의사, 동일한 간호원들을 근거로 해서 만든 자료이기 때문이다. 조사는 공정하게 이루어졌으며, 나바호 인디언들도 우수한 진료를 받았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디언들이 병원 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집에서 암으로 사망하였을 가능성도 있지 않는가 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나바호 인디언들은 모든 경우에 무료로 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백인들보다 자주 병원을 가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인디언들은 유전적으로 암에 강하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지만, 인디언이 백인보다 암에 대한 저항력을 선천적으로 강하게 타고난다는 사실을 의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

나바호 인디언들의 암 발병률이 예외적으로 낮은 이유는, 그들이 대다수의 현대인들에 의해서 무시되고 있는 다음과 같은 건강법칙들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1. 나바호 인디언들은 날고기나 완전히 익히지 않은 육류를 먹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고기 종류를 완전히 익혀서 먹는다. 고기를 완전히 익혀서 먹는 것이 어째서 암과 관련이 있는가? 미국에 있는 소들의 약 20%는 백혈병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는데, 이것은 AIDS를 일으키는 HTLV III와도 연관이 있는 바이러스이다. 고기를 익혀서 먹지 않으면, 소가 가지고 있는 암을 유발시키는 바이러스에 의해서 감염될 위험이 증가된다. 소에게 있는 바이러스는 양이나 원숭이에 감염되어서 암을 유발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2. 나바호 인디언들은 최근에까지 우유를 많이 마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디언들이 우유를 얻기가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 대부분의 나바호 인디언들은 우유의 락토우스 성분을 소화시키는 일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수많은 젖소들로부터 젖을 짜서 우유를 만드는 과정에서, 우유가 소가 가지고 있는 백혈병 바이러스에 의해서 오염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어떤 검사관은, 소젖의 저온 살균 과정이 소의 모든 백혈병 바이러스들을 살균하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양과 원숭이들에게 소젖을 먹인 결과, 소의 백혈병 바이러스에 의해서 감염되었으며, 그들 모두에게서 암이 유발되었다.

3. 전통적으로 나바호 인디언들은 계란과 새종류를 먹지 않는다(얼마 전에 켄터키 후라이 치킨이 인디언 마을에 들어온 이후, 그러한 전통이 무너져가고 있지만). 그들은 날개가 달린 동물들을 신성시하는 토속신앙을 가지고 있다. 계란은 암을 유발시킬 수 있는 요인으로 간주되고 있는데, 전염성이 강한 여러 종류의 바이러스를 닭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계란을 잘 익히지 않은채 먹으면, 닭이 가지고 있는 암을 유발할 수 있는 바이러스를 함께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여러가지 식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날계란이 사용되고 있다: 샐러드 드레싱, 아이스크림, 우유와 계란을 섞어서 만든 빵, 등. 계란이 단단하게 될 정도로 뜨겁지 않은 열은 백혈병 바이러스를 죽일 수 있을 만큼 뜨거운 열이 아니다.


이 글은 전문적인 의학적 통계 방법에 준해서 이루어진 보고서는 아니지만, 우리 모두에게 흥미와 관심을 불러일으켜 주는 글이다. 나바호 인디언들에게서 배울 교훈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현대 과학은 동물성 단백질과 동물성 지방을 피하고, 충분한 채소와 과일을 섭취하는 것이 암을 정복하는 길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서론 - 진리를 따라 살기로 결심하기를 주저하는 분들께


우리는 이 세상에 한번 왔다가 미래를 위한 엄청나게 중요한 한가지 결정을 내리고는 빈 손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이 결정에 의하여 영원히 다시 사는 특권을 얻게 되던지 아니면 영원히 죽어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게 되던지 간에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정이란 예수의 말씀을 따르느냐 아니면 거절하느냐의 결정이다. 이 결정의 중요성을 많은 사람들이 실감하지 못하고 그냥 살아가고 있다. 썩어질 것들을 위하여 온 일생의 시간과 정력들을 다 바쳐 가면서 말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약속들로 가득 차있다. 또한 엄청난 축복과 내세에 대한 그림들로 가득 차있다. 하늘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들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큰 매력을 가지고 다가가도록 호소하고 있다. 천사들의 찬송과 영원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우리들의 마음을 감동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 문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들은 선택하지 않기 때문에 온 마음을 다하여 결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머뭇거린다. 주저한다. 현세의 좋은 것들이나 죄의 재미들 때문에 과감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한가지 결정이 그들의 미래에 너무나도 엄청난 결과와 차이를 가져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그러한 자들에게 이 글을 띄운다.

여기에 왜 여러분들이 하루라도 빨리 예수님과 성경 말씀을 따르기로 결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들이 열거되어 있다.

1. 마음 속에 평안을 얻게 된다.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 때에 제일 먼저 얻는 축복이 바로 마음의 평안이다. 그러한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 놀라운 평화를 맛보게 된다. 이 평화는 그저 심리적인 고조 현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은혜이다. 죄책감에서 해방되는 참된 쉼이다.

2. 성령을 받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행 5:32) 성경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당신의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이해하도록 도와주고 영생으로 나아가는 참 지혜를 공급하신다. 요한복음 14:15,16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사람들은 성령의 축복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를 사단과 죄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하나님의 선물 중 가장 큰 선물이다.

3. 참된 행복을 얻게 된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Happy ye are if ye do them)(요 13:17) (이것을 행하면 행복해 진다는 뜻)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행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여 지고 우리의 삶이 풍성하여 지기를 원하신다.

4. 성경은 영생과 하늘을 약속하고 있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16,24~26) 여러분은 앞으로 만년 후에, 아니 백만 년 후에 어디에 있기를 원하시는가?

5. 죄의 용서와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7,38)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 22:16)

6. 주저하면 점진적인 빛이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리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요 12:35,36). 우리가 빛을 거절하거나 믿고 따라는 일을 주저할 때에 우리의 양심은 점점 무디어 지고 나중에는 더 이상 성령께서 역사할 수 없을 정도로 완악하여 지게 된다. 같은 햇빛이 버터는 녹이지만 진흙은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것처럼…

7. 빛을 거절하면 거짓과 흑암을 받아드리게 된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9~12). 진리를 거절하거나 받아들이는 일을 주저하며 미루면 마음이 어두워지고 결국에는 이단과 거짓을 믿는 일에 빠지게 된다.

8. 빛을 계속 거절하면 결국에 가서 성령을 거스르는 죄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느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성령의 음성을 계속적으로 거절하면 더 이상 용서 받을 수 없는 마음 상태에 이르게 된다.

9. 우리가 주위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해야 함.

우리는 이 세상을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 항상 영향을 끼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리를 믿는 일을 주저하거나 미루면, 아내나 남편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 심각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우리는 우리 가족의 구원과 행복을 증진시키거나 아니면 가로 막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선택을 통하여 말이다. 우리는 항상 접하고 사는 가족들이나 이웃들에게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며 살고 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 열매를 맺는가? 아니면 이런 저런 이유들로 주저하며 마음 속에 가시덤불이 자라나거나 거치는 돌들이 많이 생겨나게 하고 있는가 성경은 옥토를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움으로 받고 많은 결실을 맺는 마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수를 받아드리고 회개하는 일을 주저하는 자들이 있는가? 새로운 진리를 접하고도 그 진리에 굴복하는 일을 머뭇거리는 자들이 있는가? 즐거움으로 영접하여 침례를 받도록 하자! 바로 오늘이 구원 받을 만한 날이요 은혜의 기간이다. 우리에게 내일은 사실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결정하지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는 동안 마귀는 까마귀들을 보내어 말씀의 씨앗들을 쪼아 먹어 버린다. 침례 받기를 주저하고 있는 이들이여, 더 나아가 새로운 진리에 굴복하고 주님께 온전히 굴복하기를 미루고 있는 이들이여,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을 생각해 보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더 무엇을 하실 것이 있는지를…

 

1부 - 침례, 꼭 받아야 하나요?

 
침례(세례)의 참 의미


만약, “구원받기 위하여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하겠는가? 사람들은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의 다른 대답을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침례가 구원받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물 속에 3번 앞쪽으로 완전히 잠기는 것이 참 침례라고 할 것이며, 어떤 사람들은 머리에 물방울을 뿌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물을 쏟아 부어야 한다고 하고, 또한 어떤 사람들은 뒤로 물 속에 한번 잠기는 것이 참 침례라고 할 것이다.

왠지 모르게, 어떻게 침례를 주고 누구에게 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설들이 교회 안에 자라나기 시작했다. 비록 모든 교회들이 그들의 행하는 방법이 다 성경에 입각한 것이라고 말은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서로 다른 주장들이 교회들 안에 있는가? 어떻게 이런 혼란들이 같은 성경을 읽으면서 일어날 수 있을까?

미국 캘리포니아주 헐리우드에 사는 어떤 사람은 장미꽃잎이 가득 담긴 커다란 물탱크에 물을 담아 그 속에 완전히 잠기는 것이 참 침례라고 주장한다고 한다. 벌티모어에 사는 어떤 목사는 침례를 받고 싶어하는 신도에게 물 호수로 물을 뿌리고 침례 받았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어떤 목사는 슈퍼마켓에서 만난 신도에게 코카콜라를 뿌리며 침례를 주었다고 한다.

누가 어떤 주장들을 하건,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들 모두 침례에 관한 성경 말씀에 관하여 너무 무지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이 갖고 있는 구원에 대한 생각은 이교도적이고 비 성서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이설들을 조심하여야 한다. 오직 성경이 말씀하는 방법에 따라서 진정한 침례를 행해야 한다.

 

 

2부 - 하늘 가기 위한 2가지 조건


먼저, 예수께서 그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신 말씀을 보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5).

이 말씀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들 중 가장 간단하고 명료하게 침례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말씀은 어떤 사람도 오해하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게 하늘에 가기 위하여 두 가지 조건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하늘에 가기 위하여 반드시 이 두 가지 경험을 통과해야 한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그 말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 물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예수께서 이 부자 바리세인과 하신 대화의 문맥을 보면 예수께서 어떤 의미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는지 알 수 있다. 3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거듭난다는 것은 마음의 변화를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7,8절에서 이 신비롭고 조용하게 일어나는 성령의 변화시키는 능력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침례를 받아 물로 거듭나는 경험은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자. 물로 거듭나는 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은 성경에서 많은 경우에 직접 연결된 사건으로 표현하고 있다. 개심은 마음에 일어나는 것이고 침례는 마음에 일어난 변화를 외부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16:16에 예수께서 하신 또 다른 설명을 읽어보자.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구원을 믿는 것은 바로 개심을 의미하며,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같이, 구원을 믿는 것과 침례는 직접 연결되어져 있다. 십자가의 은혜로 이루어진 구원을 믿는 그 믿음이 바로 침례가 상징하는 신비로운 마음의 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 옆에 있었던 구원받은 강도를 예를 들어서 침례가 구원받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 강도가 침례를 받았다는 기록이 없으며, 실제로 그렇게 할 기회도 없었음을 우리는 안다. 그렇지만 만약 그가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만 있었다면, 그는 그의 모든 악한 생활을 청산하고 훔친 물건들을 돌려주었을 것이며, 그가 이해한 모든 진리대로 남은 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육체적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옴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순종의 생애가 그 안에 주입되었으며,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하게 될 수 있었다. 만약 가능하였다면 그 강도가 받았어야 했을 침례는 예수께서 받으신 그 침례의 경험으로 대치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침례를 받지 못할 환경에 있다면 그는 그 강도처럼 그리스도의 침례가 대신 그 자리를 채워짐으로 침례를 받은 것처럼 간주되어질 것이다. 예를 들어서, 만약 어떤 사람이 바로 지금 침례를 받고 싶다고 하여 차를 타고 근처 호숫가로 간다고 가정하여 보자. 그의 마음은 변화되었고 그 변화의 결과로서 침례를 받고자 한다. 그런데 차를 타고 가는 도중 사고가 나서 그 사람이 죽었다면 그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을까? 물론이다! 그가 비록 물의 침례는 받지 못하였지만 그는 마음의 침례를 이미 받았으며, 물의 침례를 받은 것처럼 인정받게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 한 것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기회가 주어진다면, 침례 받기가 가능하다면, 성경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침례를 받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3부 - 어떻게 침례를 받아야 할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침례의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을까? 성경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바울은 에베소서 4:5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이요."

비록 세상에는 여러 가지 믿음과 침례에 대한 모조품들이 존재하지만 진리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진품과 모조품을 구별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침례를 어떻게 받느냐 하는 것은 그 침례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를 결정한다. 아름다운 의식이 무엇이고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바울이 설명하는 것을 읽어보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로마서 6:4-6).

바울이 이 성경절을 통하여 한 말씀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죗된 생활의 종결을 바울은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설명한다. 죽은 옛 사람의 몸을 장사지내는 것을 바울은 침례(세례)라고 표현하고 있다. 물 속에 잠김으로 침례를 받는 과정은 옛 사람을 장사시키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남을 상징한다. 바울은 이 모든 과정이 바로 그리스도의 죽으심,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하심과 화합하여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새로 개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의미 깊은 경험인가? 그들은 침례를 통하여 그들의 마음속에 일어난 변화를 외부적으로 증거 함으로서 앞으로 순종과 승리의 삶을 살 것을 사람들 앞에서 다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새로운 삶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어떻게 가장 이상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자. 이러한 의미를 상징할 수 있는 오직 한 방법은 바로 물 속에 잠겼다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침례의 방법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침례의 방법이며,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그 침례였을까?

예수께서는 비록 그 모태에서부터 성령 충만하였으나, 요한에게 침례 주기를 요구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마태복음 3:15). 이제 요단강에서 어떻게 침례가 이루어졌는지 살펴보자.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마가복음 1:9,10)

예수께서는, 헐리우드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요단 강변에서 침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요단강 물 속에서 침례를 받으셨다. 마가는 "물 속에서 올라 오실새"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완전히 물 속에 잠기셨다가 나오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모본을 따랐는가? 사도행전 8장에 빌립이 사막에서 에티오피아 사람을 만나 복음을 전하고 침례를 준 일을 기록하고 있다. 한 천사가 빌립에게 말하여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하였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티오피아 사람 곧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사도행전 8:26-28). 이 사람은 자신이 읽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여 빌립에게 설명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빌립은 우리의 죄를 지시기 위하여 오신 속죄양, 메시아에 관한 예언들을 설명하여 주었다.

그리고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침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이에 명하여 벙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침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가신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사도행전 8:36-39).

누가는 "둘 다 물에 내려가"라고 그 방법을 자세히 적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회가 물 속에 완전히 잠기는 침례를 주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도 서신들과 초기 기독교사에 나타난 사도들의 행적을 통하여 이러한 침례의 방식이 없어지고 새로운 방법을 세웠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성경은 요한이 건조한 지역에서 그의 활동을 하기에 어려움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 3:22에는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침례를 받더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죄를 장사지내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과 화합을 상징하는 침례는 오직 한 방법밖에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요한은, 지금 많은 교회들이 행하는 것처럼, 물 한 통을 받아서 그 물을 뿌리던지 붇는 형식으로 침례를 주지 않았다. 그는 요단강 주변의 도시들에 머물며 그 충분한 물을 이용하여 물에 잠기는 침례를 주었다. 그가 사람들에게 간 것이 아니라 그가 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와서 침례를 받았다.

예수께서 침례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에 그는 헬라어인 "Batizo"를 사용하셨다. 학자들은 2000년 동안 그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어졌는지 그 역사를 연구하였다. 학자들은 이 말이 그 동안 한번도 "장사지내다" 또는 "완전히 묻히다"라는 어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연구 결과를 요약한 Conant 박사는 "baptizo"에 관하여 설명하기를 "이 말은 그 어원이 가리키는 의미에서 한번도 바뀌었던 적이 없었다. 헬라 문학의 시작부터 끝까지, 거의 2000년 동안 이 말이 다른 뜻으로 쓰인 예는 하나도 찾을 수 없다. 이 단어는 물에 완전히 잠김으로 깨끗하게 한다는 원래의 의미에서 벗어나, 부분적으로 물을 뿌림으로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로 쓰인 예는 하나도 없었다."

예수께서 침례라고 말씀하실 때에 "Baptizo"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참으로 중요한 사실이다. 헬라어에는 물을 뿌린다는 의미의 단어들도 있지만 예수께서 한번도 이러한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죽음, 장사, 부활을 표현하는 한 말만 사용하셨다.

4부 - 누가 침례를 받을 수 있는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9,20)

예수께서는 온 세상에 가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침례를 줄 것을 그의 제자들에게 명하셨다. 그러므로 침례를 받기 위하여 침례 공부를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알지 못하고 확실하지 못한 일에 대하여 증언하고 결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빌립이 침례를 준 그 에티오피아 내시도 침례 받기 전에 빌립과 같이 이사야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예언을 공부하고 확신을 얻음으로 침례 받기를 결심하였다. 침례 요한도 그가 침례를 주기 전에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를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다.

마가복음 16:16에도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여 믿음이 먼저 있어야 하며, 침례는 그 믿음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믿음이 없이는 어떠한 죄도 용서받을 수 없고, 어떠한 개심도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믿음 없이 단지 침례를 받는 행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기계적, 형식적인 것이 된다는 것이다. 베드로도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사도행전 2:38)라고 하여 회개가 먼저고, 침례가 나중임을 확실히 밝혔다. 침례가 있기 전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변화되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배우고, 믿고, 회개하고, 개심 하는 경험이 침례 전에 있어야 한다. 침례는 옛 생활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기들이 침례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아기들이 성경에 나타난 침례의 조건들에 부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기들이나 나이가 아주 어린아이들은 성경 진리에 대하여 아직 배울 수 없으며, 죄와 회개에 대하여 깨달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아기들에게 물을 뿌림으로 주는 유아 세례는 전혀 성경적인 의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기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식은 거행할 수 있으나 그들을 침례 줄 수는 없다. 침례는 회개와 깨달음과 거듭남의 결과를 다른 사람들에게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침례를 받았다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하늘에 가게 되는 것이 아니며,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침례를 받았다고 저절로 거듭난 것으로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아직 선택할 수도 없는 아기들이 침례 받았다고 그들이 구원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유아 세례는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천주교회도 10-11세기까지 물 속에 잠기는 침례를 주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고대 성당의 모습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 천주교 성당에 가면 여러 명을 한번에 수용할 수 있는 침례 탕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시설들은 전 가족을 모두 입교시키기 위하여 필요 되는 절차에 의하여 점점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아기들은 물 속에 완전히 잠기는 침례가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점점 물의 사용 양을 줄여 결국 눈 사이 이마를 살짝 적시는 것으로 정착되었던 것이다. 이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시작한 유아 세례가 침례의 방법을 바꾸게 되었다. 이러한 이교 문화의 영향은 처음에는 천주교와 동방 정교에만 국한된 것이었지만 점차 거의 모든 신교 기독교회에서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러 해 전에 나는 인도의 방골리아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급히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급히 나를 찾아와 같이 가 주기를 간청하였다. 그 사람은 급히 목사를 찾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는데, 그 사람의 옆집에 사는 가정의 아기가 지난밤에 죽었다고 하였다. 그 집으로 가는 도중 그가 말하기를 “그 가정이 나가는 교회의 목사는 그 가족에게 일어난 일에 관하여 아무 일도 하려하지 않고, 장례예식도 거행하지 않으려 하는데 그 이유는 그 아기가 유아세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내게 그 가정을 방문하여 위로의 말을 해 주기를 원하였다.

나는 피곤하고, 몽롱하여질 정도로 좌절에 빠져있는 그 가족을 발견하였다. 그 아기의 아버지는 여러 나무 판자들을 모아서 관을 만들고 있었고 어머니는 그 죽은 아기를 안은 채 울고 있었다. 내가 그 아버지를 도와서 관 만들기를 마쳤을 때에 그는 나에게 자기가 나가는 교회의 목사가 아기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였는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부모들이 그 아기를 위하여 유아세례를 해주지 않아서 그 아기는 이제 불붙는 지옥에 가서 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자기는 그 아기의 장례도 치루어 주지 않을 것이며, 교회 매장지에 묻는 것도 허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아기를 관속에 넣고 나는 가족들을 모아서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장례 예배를 거행하였다. 위로의 말씀을 먼저 나눈 뒤에 나는 가족들에게 성경적으로 유아세례가 아기의 구원과 전혀 관계가 없음을 설명하였다. 나는 유아세례를 하지 않았다고 슬픔에 잠겨있는 이 가족을 돌보기를 거절한 그 목사가 하늘에 가기 더 힘들 것이라고 설교하였다. 나는 그 관과 가족들을 내 차에 싣고 일반묘지로 향하였다. 이방 문화가 기독교 안에 만들어 놓은 결과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과 공평성에 대하여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지 깨달아야 할 것이다.

 

5부 - 하늘이 지정한 방법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물을 뿌리던, 붇던, 물 속에 잠기던,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던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무슨 차이가 있어! 이것은 단지 상징적인 의미밖에 없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침례를 주던지 상관하지 않으신다고!”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 하시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구체적이고 확실한 방법을 가지고 계신 지를 깨달아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명령에 대하여 얼마나 구체적인 방법들을 포함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성경은 애굽에서 나온 60만 이스라엘 백성들 중 얼마나 많은 수가 가나안으로 들어갔는지에 대하여 적고 있다. 성경은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 중 601,730명은 죽고, 오직 2명만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참조: 민수기 26:31)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긴 여행 중에서 살아남아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기” 때문이었다.

상징적인 의식이라는 이유가 침례의 방법을 무시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없다. 물 속으로 몸을 낮추어 잠기는 모든 일들이 그 단계별로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침례와 성만찬 예식은 비슷한 영적인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오늘날 어떤 현대식 교회에서는 성만찬 예식 때에 코카콜라와 햄버거 빵을 돌림으로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 목요일 밤에 행하신 그 예식을 대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께서 사용하신 그 방식을 따라서 성만찬 예식을 거행함으로 그 안에 포함된 진정한 영적인 경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침례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보여주신 그 침례를 온전히 본받아서 따라 행할 때에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침례의 영적인 의미들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골로새서 2:12절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신약 성경은 침례를 설명할 때에 반복적으로 “장사한바” 된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그 구속 사업을 표현하기 위하여 침례는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상징들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중보 사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오직 물 속에 잠김으로 행하는 침례만이 이러한 사실들을 올바로 상징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구속의 경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침례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침례가 마술적으로 침례 받는 사람의 생활과 성품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옛 사람의 죄는 반드시 죽어야 하고, 장사되어 매장되어져야 한다. 침례를 성경적인 방법으로 거행한다고 해도 그 사람의 마음이 저절로 바뀌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변화와 거듭남의 경험은 침례를 통하여 사람들 앞에서 그의 믿음을 증거하기 전에 이루어져야 한다. 아무리 침례를 많이 받는다고 하여도 그 사람의 죄가 없어지거나 마음이 변화함을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죄가 먼저 죽고 우리의 마음이 변화함을 얻은 후에 침례를 통하여 죽은 옛 사람을 장사지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물 속에 잠기는 침례를 받으면 사단의 모든 공격에서 보호함을 얻을 수 있고 언제나 행복하고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침례를 받으신 직후 광야로 이끌려 사단의 강력한 시험을 받으셨다. 이러한 예는 침례를 받고 새로 교인이 된 사람들이 사단의 시험으로 큰 고난을 치룰 것도 말하고 있다. 사단은 하나님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침례를 받은 그 사람에게 진노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단이 비록 새로 신자가 된 사람들에게 엄청난 공격과 시험을 줄 것이지만,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무서워하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특별한 성령의 역사가 침례 받은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침례를 받고 나올 때에 신자들은 사단의 모든 공격들을 저항하여 이길 수 있는 특별한 힘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는 성령을 통하여 얻게되는 능력이다.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나오실 때에 비둘기 같은 성령을 힘입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작정하고 침례를 받을 때에 성령의 힘이 우리에게 내려와 사단의 유혹과 공격에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는 힘을 힘입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침례를 통하여 사단의 유혹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 유혹에 승리할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13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얼마나 놀라운 약속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가! 어느 누구도 이 싸움을 홀로 싸우지 않을 것이다. 사단의 세력이 아무리 크고 많던지 간에 그들이 우리를 보호하는 하나님의 천사들로부터 우리를 끊어놓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단의 시험에서 “피할 길을 내사” 우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6부 - 재 침례의 이유와 목적


재 침례를 받는 일이 처음 가졌던 그 신앙을 포기하는 것일까? 어떠한 이유가 있던지 간에 재 침례가 성경적인 의식일까? 성경이 재 침례에 관하여 해답을 주고 있는가? 그렇다. 재 침례에 관한 언급이 초기 기독교 신자들에 관한 기록에 나타나 있다.

사도행전 19:1-5은 바울이 재 침례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적고 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침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침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니.”

이 말씀에 따르면 에베소의 신자들은 이미 요한에게 침례를 받았었다. 그 침례가 단순히 형식적인 침례가 아니었다. 그들은 요한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을 들음으로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로 인정하고 침례를 받았다. 그러나 바울이 그들에게 성령에 관하여 물었을 때에 그들은 자기들에게 성령에 관한 지식이 없음을 고백하였다. 바울이 그들에게 한 설교를 듣고 그들은 재 침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이 예를 통하여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재 침례를 받을 수 있는 어떤 이유들이 있는지 찾아보자. 먼저, 만약 전에 받은 침례가 예수께서 받으신 성경적인 침례가 아니었다면, “모든 의”를 실행하기 위하여 올바른 방법으로 다시 침례를 받을 필요가 있다. 물방울을 뿌림으로 행하는 침례는 죽음과 장사됨의 침례의 상징적인 의미를 포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부모의 믿음에 상관없이, 아기들에게 주는 침례는 그들이 자라서 그들 스스로 신앙을 결정할 수 있을 때까지 주어서는 안 된다. 침례는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모든 죗된 옛 사람을 죽여 장사지내고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침례를 받았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사람은 “잘 모르겠는데요... 저희 부모님께 한번 여쭈어 볼께요..”라고 대답하였다. 이 사람은, 그 부모가 어떻게 대답하던지 상관없이, 확실히 다시 침례 받을 필요가 있다. 또한 어떤 사람은 거듭남의 경험을 할 수 없는 너무 어린 나이에 침례를 받는다. 이러한 침례는 영적인 침례가 아니라 형식적인 침례이다. 단지 친구들과 가족들을 기쁘게 만드는 형식이었지 실제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침례가 아니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들이 진정한 개심의 경험을 한 후에 다시 침례를 받아야 한다.

재 침례를 받아야 하는 또 다른 경우는 일단 교인이 되었다가 다시 세상으로 나갔던 신자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서약한 후 공공연히 그리스도를 배반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다시 그리스도께 돌아온 후에는 사람들 앞에서 다시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침례를 받아야 한다. 다시 주께 돌아오는 경험을 증거 하는 일은 침례의 중요한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재 침례가 필요한 또 다른 경우는, 앞에서 읽은 것처럼, 에베소 교회의 신자들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에베소 신자들은 바울이 나눈 그 빛이 생활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빛임을 깨닫고 재 침례를 받을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이와 같이 오늘날에도 우리들의 생활을 변화시키고 믿음에 새로운 빛을 주는 새로운 성경 진리를 발견함으로 재 침례를 받고자 하는 신자들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전에 걸어온 생활이, 비록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이었지만, 성경적인 생활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재 침례를 받고자 할 것이다. 에베소 신자들의 경험과 관련된 이러한 경험들은 재 침례를 받을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다.

 

7부 - 침례는 외식이 아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사람들이 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하기를 거절하고, 특별히 침례 받기를 꺼리는지에 대한 많은 이유들을 들어왔다. 가장 많이 대답하는 이유들 중 하나는 “내가 정말로 그리스도인처럼 살 수 있는지 자신 없으며, 바리세인들처럼 외식하는 사람이 되기 싫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는 진정으로 믿음과, 회개와, 변화의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표준에 도달 할 수 없음만을 알고 무서워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침례를 통하여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도와 믿음의 생활을 한다고 하여 우리가 다시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이유가 우리를 침례 받지 못하도록 하는 이유는 될 수 없다. 진정으로 변화된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인 언약을 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의 영을 받을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자라나면 자라날수록 더 큰 사단의 공격과 시험을 받을 줄 알지만,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의 은혜를 믿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이 모든 시련을 통과하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실 것도 믿는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아직 영적으로 침례 받기에 준비되지 않은 것을 증명해 줄 뿐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이 자라나서 그들의 눈이 그리스도만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침례 받기에 준비되었는지 알 수 있을까? 이제 더 이상 실수하지 않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완전한 확신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그렇지 않다. 감정은 그들의 준비됨과 전혀 상관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역사로 다시 태어난 경험을 한 그 의에 완전히 정착되어져야 한다. 침례를 받고자 하는 모든 신자들은 이사야 53장 5절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의 찔림은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내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도다.

어떤 잘못된 행실과 실패로 그리스도를 실망시킬까바 두려워 해본 일이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 바로 이러한 비 성서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일은 우리의 힘에 의하여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물리치고, 시험을 극복함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정말로 위험한 기만에 빠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힘으로 걷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만이 시험을 정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를 그의 영원한 친구로서 초청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실패하지 않는 그의 약속의 능력을 주실 것이며 그를 완전히 의지하게 하는 은혜도 주실 것이다.

빌립보의 감옥을 지키던 간수들도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확신과 믿음을 깨달았을 때에 비록 한 밤중이었지만 그들의 모든 가족들과 함께 침례 받기를 원하였다. 바울은 비록 그가 감옥에 갇힌 사람이었지만 이 새로운 신자들을 위하여 침례를 행하였다. 아나니아도 새롭게 다시 태어난 사울에 관하여 같은 기별을 전하였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사도행전 22:16).

지금 당신의 마음속에 이와 같은 성령의 호소가 울리고 있는가?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가 당신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심을 깨달았으며, 마음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당신의 마음속에 평화와 생활의 확신을 가져왔다면 이제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한 결정을 내릴 때이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나는 언제 침례를 받아야 하나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 28:18~20.

그리스도께서 내리신 이 명령에는 어떤 사람이 침례를 받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는 교훈이 담겨져 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따르고자 할 때, 나는 어떤 시점에서 침례를 받아야 하는가?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 침례를 받고자 할 때, 어떤 영적 준비가 먼저 이루어져야만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실제적이고 의미있는 질문이다. 침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영적 경험이 자신의 마음과 생애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숙고해 보아야 한다.

1. 내가 자신과 세상에 대하여 죽기로 마음을 정했을 때 

새로 태어나는 것 즉, 참된 거듭남은 이 시대의 세상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경험이다. 자신과 세상에 대하여 죽기로 결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침례를 받고, 교회 안에서 주요 직책을 맡는 일이 너무나 많이 있는데, 이것이 오늘날 교회 안에 그렇게도 많은 문제들이 존재하게 된 중요한 이유들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하여 죽지 않았고, 세상에 대해서 죽지 않았다. 그들의 품성과 생애에는 거룩한 열매가 맺히지 못했다. 비록 그들이 침례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산 채로 물에 잠겼을 뿐 여전히 자아(self)가 살아서 꿈뜰거리기 때문에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생애를 살아가고 있다. 자신만을 쳐다보며 사는 사람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반사할 수 없다.

침례 시에 자신의 몸 전체가 물에 잠겼다가 나오는 것은 자신의 옛 몸을 물 속에서 장사지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여 새로운 생애를 시작하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침례 받는 사람은 자신과 세상에 대하여 죽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함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6:2~4

2. 내가 하나님과 진리에 대하여 충성스런 삶을 살기로 헌신했을 때 

침례는 세상을 버리기로 서약하는 중요한 의식이다. 하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물 무덤에서 장사지낸 바 되고, 물에서 일어나는 침례 의식 이후부터는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에 대하여 충성스러운 생애를 살기로 헌신하는 결심이 있는 사람에게 침례 의식이 베풀어 져야 한다. 이 의식에는 하나님과 성령님과 천사들과 사람들이 증인으로서 지켜보게 된다.

3. 나의 품성과 생애에 있는 죗된 결점들이 개혁될 때 

하나님의 사업은 순수하고 비이기적인 교인들에게 맡겨져야 한다. 교회의 침례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일은 성급하게 서두를 수 없는 중요한 일이다. 새롭게 교회에 나온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품성과 생애에 여전히 죄된 결점들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신자들을 하루 속히 교회에 자리잡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의 침례 예식을 지나치게 서두르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러한 서두름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교회는 그 순결함을 잃어버리게 되는 피해를 입게 된다. “먼저 침례를 주고, 그 다음에 천천히 형편을 봐가면서 새로운 신자들의 죗된 행습들을 개혁시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제일 먼저 이루어져야 할 일은 개혁이다. 새 신자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들에게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주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께서 그들의 양심과 마음 속에서 역사하는대로 그들이 따라오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들이 나타날 때까지, 새로운 신자에게 침례가 베풀어 져서는 안된다. 증거와 열매가 나타날 때까지 침례 예식을 미루어야 한다.

4. 나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였을 때

부흥집회를 통하여 기적과 초자연적인 치유를 경험한 다음에 교회를 다니기로 결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그들 중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회개의 경험에 이르고 있는가? 기적을 체험했다고 해서 침례에 대한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진정한 회개와 죄의 자복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에게 침례가 베풀어져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심령이 상한 바되지 않았으며, 자신의 죄에 대하여 통회하는 경험이야말로 침례를 받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행 2:38.

회개는 후회가 아니다. 회개는 자신이 범한 죄의 결과 때문에 당하게 되는 불이익으로 인하여 후회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자신이 범한 죄 자체를 슬퍼하는 것이다. 자신의 죄가 너무나 더럽고 치졸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 죄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가지고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이 회개이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구세주께서 당하신 모욕과 죽음을 생각할 때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회개이다.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니” 마 3:6. 입으로는 회개했다고 말하지만, 자신의 실제 생애에서 회개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의 회개는 가짜이다. 스스로 회개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떨어져서 자신이 산산히 깨어지는 경험을 한 사람들의 숫자는 너무나 적다.

5. 내가 그리스도와 연결되었을 때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 중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늘을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매 주말마다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고 있다.

교회에 들어와 신자가 되는 것과 그리스도와 살아 있는 관계를 맺는 것과는 다르다. 교회의 침례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것과 하늘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는 것는 다를 수 있다. 어떤 교단의 교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구원을 보장해 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표면적으로는 완전한 교인의 가격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그리스도와 연결된 생애를 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연결된다는 말에는 그리스도의 뜻에 우리의 뜻을 굴복시킨다는 의미가 깊이 내포되어 있다. 침례를 수십번 받을 수 있지만, 침례 예식 자체가 인간의 마음과 생애를 거룩하게 변화시킬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먼저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합되어야 하며, 의지는 그분의 의지 안에 굴복되어야 하고, 정신은 그분의 정신과 하나가 되어야 하며, 생각은 그분께 사로잡혀야만 한다. 침례를 받음으로써, 자신의 이름이 교회의 침례자 명단에 올라가고, 교회 제직회의에 참석하지만, 마음과 생애가 변화되지 못한 신자들이 교회를 채우고 있는 것이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의 서글픈 모습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이기적인 기질과 후천적으로 배워서 습관화된 악한 행습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례 의식을 통하여 형식적인 교인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다. 침례를 받기 위하여 준비하는 신자들은 자신의 뜻이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 굴복되어 있는지, 내 뜻보다는 그리스도의 뜻이 자신의 생애를 주관하고 있는지를 깊이 숙고해 보아야만 한다.

6.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고 있을 때

모든 신자들은 침례를 받기 전에 주님께서 자신에게 일편단심의 애정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성경은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결혼 관계 즉, 신랑 신부의 관계로 나타낸다. 신부는 신랑에게 완전하고 전적인 애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애정이 없는 사랑은 거짓이며, 그러한 혼인 관계는 가짜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와 애정이 드러나고 표출되는 것은 그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이다. 어떤 열매를 맺는가에 따라서 그 나무의 특성과 종류가 결정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진리와 계명을 순종하는 사람들과,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분의 진리와 교훈을 무시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선이 있다. 순종을 통하여 진짜 사랑과 거짓 사랑, 그리고 진짜 믿음과 거짓 믿음이 구별된다.

7. 내가 세상과 분리되어 있을 때

침례 예식은 온 우주 앞에서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을 알리는 예식이다. 임마누엘 왕의 피뭇은 깃발 아래 분명하게 서서 죄로 인하여 죽어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와 뜻을 확실하게 알리는 일에 동참하겠다는 선언을 하는 것이 침례 예식이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나머지 생애를 바치기 위하여 침례 의식에 참여하기 원하는 사람은 세상의 부정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해야 한다. 세상의 죗된 습관들과 유행의 종으로 살던 옛 생애를 버리고, 성경에 기록된 거룩한 명령과 말씀에 자신의 생애를 복종시킬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만 침례는 그 의미를 갖게 된다. 의복에 대한 허영심을 버리고, 유행에 있어서 최상을 달리고자 하는 정신은 버려져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세상과 분리되어 있어야 하며, 자신의 애정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키는 것들과 관련을 맺지 말아야 한다. 부정한 것들을 보면, 그것을 보는 사람의 마음이 악한 영향을 받는다. 텔레비젼과 각종 미디어로부터 흘러나오는 세속적이고 정욕적인 것들에 엄격한 제재를 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생활과 신앙이 세속과 정욕으로 오염된다. 부정하고 부패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러한 사람들과의 교제를 즐기는 사람은 자신을 순결하게 지킬 수 없다. 비록 세상에 살지만, 세속에 물들지 않기 위하여 그것에 저항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침례를 위하여 준비된 자들이다.

8.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 내 생애의 첫번째 목적이 될 때

침례는 매우 거룩하고 중요한 의식이다. 그러므로 그 의미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침례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애를 시작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목사나 교회는 새 신자에게 침례를 받으라는 부당한 재촉을 가해서는 안된다. 목사와 교회는 새로운 신자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성령의 음성에 굴복하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신자의 생애를 그리스도와 진리로 인도해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인도함을 받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침례를 받기로 결심하게 된다.

심지어는 부모라도 자녀의 침례를 강요해서는 안된다. 자녀들이 침례를 받기 전에,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을 그의 생애에 있어서 첫번째 목적으로 삼을 것인가를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자신의 생애를 꼴지워갈 것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침례에 대한 참 의미를 깨달아야만 그들에게 침례를 베풀 수 있다. 성인의 경우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 보다 깊고 분명한 이해를 가져야만 침례를 받을 수 있다.

9. 내가 주의 날을 거룩하게 지킬 때

하나님의 십계명 가운데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는 안식일에 대한 존중심이 침례자의 마음에 분명하게 새겨져 있어야만 한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네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사 58:13,14 온 마음과 생애를 다하여 주의 날을 거룩하게 지키기로 결심한 사람은 침례를 위하여 준비된 신자이다.

10. 네 마음 속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강력한 소원이 있을 때

침례를 받기 위하여 준비하는 사람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죄 가운데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의무 중의 하나는 이기적이고 타락한 죄인이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침례를 위하여 준비하는 사람은 진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다른 영혼들을 구세주 앞으로 인도하기 원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