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전정하는 칼이 그대에게 올 때


아름답게 가꾸어진 꽃나무나 정원수 또는 아름다운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탐스러운 과목을 볼때 우리는 탄성을 지르게 됩니다. “어쩌면, 아름답기도 해라!”

그러나 모든 사람으로부터 탄성을 자아내게 하며 사랑어린 손길과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아름다운 꽃나무나 과목이 되어 나오기 까지 나무는 오랜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힘든 과정들을 거치는지를 여러분은 혹시 생각해 보신적이 있으신지요. 성경 말씀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릇 과실은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아버지 께서 이를 깨끗게 하시느니라.(요 15:2)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만 말 뿐인 가짜 신앙을 가진 외형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의 생애에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리기를 원하십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 오래참음,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같은..... 그래서 넉넉하게 하늘 창고에 들여질수 있도록...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가 생애에 열리기 위해서는 아주 필수적인 조건들이 요구됩니다. 마치 나무가 아름답게 가꾸어지기 위해서 많은 과정을 겪어야 하듯이 그리스도인 생애에도 꼭 같은 과정이 필요합니다. 弩滑ㅣ .... 우리는 그 과정을 바로 弩滑ㅣ이라고 합니다. 잘라내고 꺾고 쳐내는 弩滑ㅣ 말입니다. 꽃나무나 과목을 가꾸는 농부의 예사롭지 않은 눈길과 손은 늘 바쁩니다. 지나치게 양분을 소모하는 쓸데없는 곁가지는 쳐져야 하고 쓸모없이 휘어지게 만드는 지나치게 무성한 잎들은 잘라내져야 합니다. 땅을 향하여 늘어진 가지들은 쳐내져야 하고 흙바닥에 들러붙은 쓸데없는 덩쿨손들은 가차없이 잘려져야합니다. 그것은 나무에게 있어서 힘들고 아픈 과정이지만 커다랗고 아름다운 꽃송이들을 피우기 위해서는, 탐스러운 과일을 많이 달리게 하기위해서는 이런 아픈 전정이 꼭 필요합니다.


“전정”하시는 하나님

그리스도인 생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단련하십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히 12:6)는 성경말씀처럼... 우리 모두는 하늘의 친절한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전정하시는 칼”의 쓰라린 시련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가지를 치는 일은 고통을 유발할 것이지만 칼을 대시는 분은 사랑의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난폭한 손으로나 무관심한 마음으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어떤 것들이 우리 생애에서 잘려 나가야만 하는지를 잘 아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생애에 있는 어떤 요소들이 영생에 들어가는 길을 막고 있는지를 잘 아십니다.
땅에 늘어지는 가지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줄기가 땅에 붙지 않도록, 땅에 속하지 않도록 잘라 버려야 합니다. 그것들은 하늘로 뻗어야 하며, 그들을 지탱해 주는 것을 하나님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과실에 전달 하여야 할 수액을 소모해 버리는 지나치게 무성한 잎들은 잘라 버려야 합니다. 너무 자란 것들은 잘림을 받아서 의의 태양이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도록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쓸데 없는 많은 가지들이 있습니다. 교만, 욕심, 정욕, 급한 성질, 시기, 질투 등등의 쓸데없는 가지들이.... 또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늘로 올라가야 할 우리의 덩쿨 손들은 쓸데없이 땅 위에 단단히 붙어 있습니다. 재물을 의지하는 덩쿨 손, 명예나 지위에 의지하는 덩쿨손, 평판과 사람의 꾀에 의지하는 덩쿨손들 말입니다. 이렇듯 쓸모없는 가지와 해로운 덩쿨손들은 다 잘려 버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아주 맛있고 탐스러운 과일이 많이 열리는 크고 좋은 나무가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전정하시는 칼

그렇다면 우리를 위해 보내주시는 하나님의 “전정하시는 칼”을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을까요? 때로 그것은 생애의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하여, 또는 사람들을 통하여 옵니다. 엄청난 시련과 고난을 통하여, 말못할 슬픔과 아픔과 비애를 통하여 옵니다. 의지하고 있던 모든 것을 일시에 빼앗기는 기막힌 손실을 통하여, 또 육신의 약함과 질병과 고통을 통하여 옵니다. 이런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즐겨쓰시는 “전정하는 칼” 즉 “전정 도구”로 쓰여지는데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이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여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보고 겸손해 지도록 만들며, 그리하여 영혼의 죄의 정욕의 발진들이 다 빠져 나가고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며 사는 법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는 시편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인생의 고난은 우리의 성품에서 불순물과 거친것을 제거해 내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이들의 의해서 채석되고 깎기우고 끌로 새기어지고 갈리고 다듬어지는 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마친 거친돌을 회전 연마기 속에 넣고 돌리듯이.... 그러나 그 속에 들어간 돌은 하늘 성전의 한자리를 채우는데 부족함 없게 준비되어 나옵니다. 쓸모없는 물건을 위해서는 주님께서 그처럼 신중하고 철저한 작업을 하지 않으십니다. 시련들은 품성의 완전을 위해서 하나님이 임명하신 그의 종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늘에 들어가려면 어디를 깨끗하게 할 필요가 있는지 아시고 우리의 불순물을 제거하시기 위하여 시련의 풀무불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시련의 풀무불속에서 완전히 다 타서 없어질 때까지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금을 정련해 내시는 연단자로서, 주님은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 보일 때까지 그분의 자녀들을 순결케 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비록 고난의 불길이 우리 주위를 태우고 때로는 그 불이 우리를 완전히 삼키지나 않을까하여 두려워 할 때라도 지극한 관심과 주의를 가지고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허락하시는 풀무불은 순결하고 세련되게는 하지만 삼키고 멸망시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련과 시험의 “전정하시는 칼”의 과정을 겪으면서 비로소 우리는 정금같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에는 하나님의 “전정하시는 칼”이 어떤 방법으로 찾아왔나요? 그 “전정하시는 칼”이 여러분의 삶의 한 부분을 잘라낼 때, 어떤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상실과 고통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크신 섭리의 길이 아무리 어둡고 이해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모든 것이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 임을 알고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장차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시련이 우리의 구원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 가서야 비로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겪은 고난의 경험들이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감당하기 어렵고 가혹하게 보이는 시련이라도 일단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축복 임이 판명되고, 세상의 쾌락을 앗아가는 혹독한 재난이 오히려 우리의 눈을 하늘로 향하게 하는 수단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고난과 시련의 풀무불이 올 때,
겸손히 그것을 받아들이며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지 않으시렵니까?
그 “전정하시는 칼”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 모두 정금같이 되어 나올수 있도록....
모든것이 잘려 나간후
아름답고 큰 한송이 꽃을 피울수 있도록...
그리고 탐스러운 열매를 주렁주렁 단 아름다운 과목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전정하시는 칼이 우리에게 올 때 말입니다.

권두언


양심의 가책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시카고의 한 신문에 자수한 은행 강도의 사진과 그에 대한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는데, 그는 35년전에 저지른 죄 때문에 하루도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산 날이 없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경찰 차의 소리만 들어도 자기를 잡으러 오는 것 같았고, 전화 벨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과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결국 자수하기에 이르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문은 그가 강도 행각을 했을 때인 젊을 때의 사진과 자수 했을 때의 사진을 나란히 실어 놓았는데, 그는 참으로 그의 나이보다 훨씬 늙게 보이는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죄는 인간의 불행의 원인입니다. 슬픔과 고통과 질병의 원인이 결국은 우리의 죄에 있습니다. 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영혼과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안겨다 줍니다. 죄는 용서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씻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부터 도말 하여 멸절 시켜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 속에서부터 다시는 우러 나오지 못하게 심령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속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서 죄 그 자체를 아예 없이하여 버리시려고 계획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일을 행하시는지에 대한 청사진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성소 제도입니다. 이번 호는 대속죄일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의 방법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분들, 죄의 문제 때문에 평안이 없는 분들,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시는 분들에게는 큰 은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대의 가정 안에는 구원이 있습니까?


로마서 1장 19절에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말씀하셨다.

성경의 한 쪽에는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이 나오지만, 다른 한 편에는 말세에 내 교회와 백성이 믿음대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경고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가 믿음에 대해서 일가견을 가지고 있지만, 참된 믿음인 구원하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개인적으로 아는 그리스도인은 매우 적다. 믿음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구원에 대한 엉뚱한 환상 속에서 생애를 끝마치게 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그리스도인이 된지 수십 년 동안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믿음에 대한 이상한 환상 속에서 방황하였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참된 믿음을 터득하였기에 이러한 간증의 고백을 하기에 이르렀다.

첫번째 의미

믿음에 대한 세가지 설명과 나의 가정에서 있었던 세가지 실례를 통하여 믿음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믿음에 대한 첫번째 정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믿음이란 영혼의 행동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호와 인도하심 가운데로 영혼 전체가 바쳐지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받는 믿음이란 하나님을 향하여 내가 하는 응답이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능력의 하나님께 자신 전체가 바쳐지는 것을 뜻한다." Havenly Places p.104. 감정과 격정이 치밀어 올라올 때에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믿음이다. 정욕과 방탕한 식욕이 올라 올 때에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믿음이다. 죗된 욕구가 강하게 올라올 때에 그것을 부인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믿음이다.

나의 가정에서 실제로 있었던 예를 통하여 믿음의 실체를 살펴보도록 하자. 16살된 아들, 마태가 한번은 엄마가 일하고 있는 부엌을 지나서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엄마가 다음과 같은 부탁을 아들에게 하였다. "마태야, 엄마가 바쁜데 저녁 식사 준비를 도와줄 수 있니?" 마태는 동생과 재미있게 놀기 위하여 밖으로 나가려고 하던 참이었다. 엄마의 부탁을 듣는 순간, 마태는 자신의 의지와 엄마의 명령이 마음 속에서 서로 부딪치는 것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마태의 어깨가 축 쳐지고, 얼굴이 찌끄러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들의 의지는 엄마를 도와서 저녁 식사 준비하는 것을 거절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드리는 가정 예배 시간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배웠다. 올바르지 못한 감정과 느낌이 올라올 때에 그것을 부인하고 자신의 의지를 굴복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라는 사실을 어렸을 적부터 배워왔다. 엄마의 부탁을 받고 망설이며 서있는 아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를 주목하였다. 마태는 부모의 말을 공경하라는 성경 말씀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성경 말씀에 대하여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살아있는 믿음을 활용하지 못하면, 성경 말씀은 실생활에 적용되지 못한다. 진리에 대한 지식은 가지고 있지만, 실 생활에서 진리대로 사는 경험을 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부엌 한가운데 서있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그가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게 되기를 기도하였다. 아버지가 가정에서 가르치고 교회에서 설교하는대로 이 아이가 이 순간에 믿음을 활용할 것인가? 마태의 마음 가운데 극심한 갈등이 대립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이런 종류의 갈등을 이해하리라 믿는다 . 과연 내 아들 마태는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마침내 마태가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한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께 즉시로 찬양을 돌렸다. 육체와 영의 싸움에서 아들은 믿음으로 성령의 음성을 붙잡음으로써 승리하였다. 아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엄마, 나는 저녁 식사 준비를 돕는 대신에 밖에 나가서 동생과 놀기 원하지만, 엄마 말씀에 따를께요." 바로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이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굴복하여 드리는 것이다. 한 순간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믿음의 생애이다.

두번째 의미

믿음에 대한 두번째 설명은 다음과 같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자신의 의지와 뜻을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마음이 굴복되는 그곳에 자신의 애정이 부어지게 된다." 믿음은 의지와 마음을 주관할 뿐만 아니라, 육체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말씀을 믿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믿음은 매일의 생활에서 내가 믿는 성경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는가를 포함한다.

한번은 14살인 둘째 아들 앤드류가 숙제를 끝낸 다음에 산악용 자전거를 타기 위하여 막 밖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앤드류에게 "얘, 엄마가 지금 매우 바쁜데 다리미질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니?" 그는 평소에 다리미질하는 것을 싫어했다. 엄마의 부탁을 듣는 순간, 그의 마음 속에는 갈등과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는 믿음을 통하여 자신의 의지를 굴복하고 어머니의 명령에 순종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엄마의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집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가 밖에서 무엇을 하는가 궁금하여 창문을 통하여 그를 엿보았다. 그는 집앞 계단에 앉아서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 마음 속의 갈등을 하나님께 아뢰고 있었다. 잠시 후에 그는 집안으로 돌아와서 엄마에게 웃는 모습으로 이렇게 말했다. "엄마, 제가 다리미질 할께요."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인정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 말씀에 따라 자신을 굴복시키는 것, 이것이 믿음이 우리 생애 속에서 실제적으로 하는 역할이다. 믿음은 복잡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굴복하는 것이다. 항상, 그리고 어디에서나 양심 속에서 말씀해 주시는 그분의 음성에 나의 의지와 감정과 욕구를 굴복시키는 것이 믿음이다.

세번째 의미

믿음에 관한 세번째 정의는 다음과 같이 내릴 수 있다. "믿음은 모든 위기의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의 손을 붙잡고 승리하는 것을 뜻한다."

한번은 두 아들과 함께 등산을 간 적이 있다. 내가 먼저 산의 정상에 올라섰고, 두 아들은 내가 내려주는 밧줄을 잡고 바위를 타고 올라와야만 산 꼭대기까지 올라 올 수 있었다. 나는 바위 산의 꼭대기 위에 서서 아들 마태에게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얘들아, 내가 내려주는 밧줄을 붙잡아라! 나는 너를 붙잡아 올릴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다. 염려하지 말고 밧줄을 의지하여 올라와라!" 나는 바위 산 꼭대기 위에서 두 아들의 눈을 내려다 보았다. 그들의 눈을 통하여 나는 그들의 갈등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나는 과연 아버지를 신뢰할 수 있을까? 아버지의 힘을 믿어도 될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의 두 아들은 마음의 의심을 떨쳐 버리고 아버지를 믿는 믿음으로 밧줄을 잡고 산의 정상까지 올라왔다.

바로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이란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신뢰하는 것이다. 나의 두 아들이 이 땅의 아버지를 신뢰하는 마음으로 밧줄을 붙잡고 정상을 오른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하늘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늘 가는 길을 걸어야 한다. 믿음이란 모든 경우에, 위기의 경우에, 비상시에,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음성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내가 도달한 결론

믿음 자체에는 구원하는 능력이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공로로 여겨짐을 받아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에 관한 한, 인간에게는 어떤 공로도 없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고, 하나님은 이러한 믿음을 통하여 우리를 시험과 유혹 가운데서 건져내시는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하나님)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나의 가족은 몬타나주의 깊은 산속에서 살고 있다. 한번은 산 아래에 있는 시내에 가기 위하여 짚차를 타고 비포장 도로를 달리고 있었는데, 조금 과속으로 커브길을 돌다가 그만 길옆 도랑에 빠지고 말았다. 다행히 지나가던 차가 멈추어지고, 내 차를 밧줄로 그 차의 범퍼에 연결시켜서 끌어내었다.

믿음이란 내 차를 도랑에서 꺼내기 위하여 묶었던 밧줄과 같은 것이다. 믿음이란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에게 나를 묶어 매는 밧줄과 같다. 밧줄은 연결시키는 역할을 할 뿐 밧줄 자체에는 구원하는 능력이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은 단지 연결시켜주는 밧줄의 역할을 할 뿐, 믿음 자체에는 구원하는 능력이 없다.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께 묶어 준다. 믿음에는 우리를 구원하는 면에 있어서 어떤 공로도 없다. 믿음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공로를 붙잡을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믿음이 없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내 자신 밖에 있는 구원자를 신뢰하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믿음이다. 지난 20여년 동안 나의 그리스도인 신앙 생활에 있어서, 나는 믿음 대신에 다른 어떤 것을 신뢰해 왔는데, 그것은 성경 말씀에 대하여 내 자신이 갖고 있었던 지식이었다. 나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대신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신학을 신뢰했고, 십자가와 하나님의 용서를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지식을 신뢰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매일의 생활에서 나를 죄와 유혹에서 건져내지 못했다. 그것은 죽은 지식에 불과했다. 내가 성경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또한 내가 다른 사람과 신학에 대해서 잘 논쟁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착각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은 믿음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지식과 동의에 불과하였다. 믿음이란 우리 자신 밖에 있는 구원자를 전적으로 신뢰함으로써, 내 자신의 뜻과 의지를 버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스도인이 된지 20년이 지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믿음은 우리 자신의 굴복이다. "나는 내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노라"는 말씀이 믿음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의이다. 내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하여 "내게 힘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간증하는 것이 믿음이다. 이 말의 의미를 다시 예화를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나는 독일계 미국인이다. 독일 사람은 매우 완고하고 고집이 센 사람이다. 그들은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가면 금방 화를 내는 기질이 있다. 독자 중의 어떤 사람은 나와 같은 기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한번은 새벽에 일어나서 2시간 반 동안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마음을 그리스도께 드리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아래 층으로부터 급히 올라와서 "아버지, 큰 일 났어요. 지금 저 밖에 있는 발전기가 꺼졌어요!" 라고 말했다. 우리 가족은 가까운 인가로부터 50마일 떨어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깊은 산 속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가정에는 자가 발전기가 있어서 가정의 모든 전기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발전기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즉시로 나는 그 문제를 고쳐야만 했다. 그러나 그 당시 집밖의 기온은 체감 온도까지 감안하여 영하 45도까지 내려갔다. 영하 45도에서 쇠로 만든 물건을 만져본 적이 있는가? 나는 이 춥고 캄캄한 새벽 시간에 밖에 나가서 발전기를 분해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육체와 마음 속에서는 격렬한 갈등과 좌절감이 일어났다. 어찌할 수 없는 성가신 느낌과 짜증이 급히 마음을 채워갔다. 이런 상태로 밖에 나가면 발전기 앞에 서서 화를 내면서 그것을 발로 걷어찰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추위에 밖에 나가면 감기 밖에는 걸릴 것이 없다는 생각이 나를 에워쌌다. 발전기에 문제가 생겼다는 아들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조금 전 새벽 헌신 시간에 가졌던 영적 경험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때 그리스도께서 나의 마음 속에 이렇게 속삭이셨다. "얘, 너는 지금 나를 신뢰해야만 한다. 이 위기의 상황이야말로 네가 나를 신뢰해야 할 순간이란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성경 말씀(마 28:20)을 잊어버렸니?"
그리스도의 이 음성을 들은 그 순간, 나는 믿음의 결정을 해야만 하였다. 지난 주일에 교회에서 설교했던 그 말씀 그대로 이 위기의 상황을 믿음으로 승리해야만 하였다. 내가 집에서 평소에 강조하던 말씀대로 그 순간 믿음을 활용해야만 하였다. 위기와 시험이 닥쳐올 때, 나는 믿음으로 내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굴복해야만 하였다. 나는 그 위기의 순간에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님이시여, 저를 제 자신의 느낌과 감정으로부터 보호해 주시옵소서. 지금 집 밖으로 나갈 때에 저와 함께 해주십시요. 주님을 신뢰하오니 저의 눈이 되어 주셔서 발전기의 문제를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저의 독일인 기질이 나를 압도하지 못하게 지켜주시옵소서. 환경이 나를 주도하지 못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면서 나는 책상 위에 있던 조그만 쪽지 위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 뜻대로 독립해 나가는 것은 내 생애의 저주이다. 주님이시여, 지금 저를 제 자신으로부터 구원해 주시옵소서." 기도가 마치자, 나는 예수께서 주시는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밖으로 나가서 발전기를 고칠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살아 있는 믿음이다.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이다. 과거 같으면 화를 내면서 발전기를 발로 걷어차고, 안으로 들어와서는 아내에게 신경질을 내고, 아이들에게 고함을 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경험이다. 살아 있는 믿음의 체험을 발견한 이후부터, 나는 위기의 상황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였고 그분의 말씀과 음성에 굴복하였다. 위기의 상황에서 어떻게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손을 잡을 수 있는가에 대한 신앙 비결을 배운 다음부터, 나는 끊임없는 기도와 노력에 의해서 그분과의 연합 관계를 유지해 왔다. "네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우리는 자아를 저지하고 부인함으로써 정복해야 한다.
나의 전쟁은 발전기와의 싸움이 아니었다. 나의 투쟁은 집밖의 영하 45온도와의 싸움도 아니었다. 나는 내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나는 발전기 앞에서 다시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님, 이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과 나의 문제입니다. 나를 홀로 내버려 두지 마옵소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해서 예민하게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나를 따라 함께 나왔던 둘째 아들이 나의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교회와 가정에서 설교하고 가르치는대로 이 위기의 상황을 극복할 것인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의 자녀들은 성경절을 암송함으로써 믿음과 신앙을 배우는가? 아니면 부모들이 모든 상황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을 보면서 신앙을 배우는가? 그 날 새벽, 나는 30분 동안 침착한 태도로 발전기와 씨름한 끝에 결국 문제를 발견하고 고쳤다. 나의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정말 훌륭한 그리스도인 인데요." 나는 그 아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니?" 아들은 대답하였다. "아버지는 주일 날에 설교단상에서 설교하는대로 집에서 사시니까요. 발전기가 고장났다고 제가 말씀드렸을 때, 처음에는 아버지의 마음 속으로부터 심한 좌절감이 올라오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 이런 일이 생겼다면 아마 아버지는 화를 내면서 신경질을 내셨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은 아버지가 기도로서 마음 속의 좌절감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인다운 태도로 발전기의 문제를 대처하시는 모습을 보았거든요." 나는 아들의 손을 붙잡으며 위기의 순간에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해 줄 수 있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하면 복음대로 살아가는 비결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그들은 가정에서 부모가 보여주는 모본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살아 있는 믿음은 승리를 가져다 준다. 짜증과 분노를 낼 수 있는 상황에서 아내와 자녀에게 부드럽고 온화한 말을 건내 주는 것, 바로 이것이 믿음이 가져다 주는 승리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믿음을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면, 결코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구원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세상을 회개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영적 분위기를 가진 가정을 세워야 한다. 믿음은 성경을 아는 지식 이상의 것이다. 살아 있는 믿음은 성경 말씀을 우리의 생활 중심으로 가져옴으로써, 성경 말씀이 실 생활 속에서 실현되게 된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처음과 나중과 최상으로 삼는 생애를 살아간다. 가정에서 부모와 아내와 남편과 자녀에게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지고 대하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구별하는 경계선이 된다.
살아 있는 믿음을 발견한 다음, 나의 결혼 생활과 가정 생활은 전격적으로 변화되었다. 남편인 내가 성령의 감동하에서 모든 상황을 믿음으로 대처하는 모습을 본 아내는 내 경험을 설명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아내는 나의 간증에 감동하였고, 아내의 생애 또한 놀라운 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아내가 변화되자, 자녀들이 엄마의 변화된 성품과 태도에 감동되어 부모의 말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이들로 자라났다. 지금 나의 두 자녀는 우리 부부와 함께 복음을 전하는 종들의 길을 걷고 있다. 복음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다!

구원의 확증에 대한 질문과 답변


질문

얼마 전에 같은 교회에 다니는 한 친구가 “나는 작년 9월에 구원 받았다”라고 간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작년에는 그 친구의 신앙이 매우 좋아 보였지만, 요즘에는 다시 옛 생애로 돌아가서 과거에 가지고 있던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 친구를 보면서 구원에 대한 혼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과거에 가졌던 믿음에 의해서 단 한번에 결정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현재 또는 미래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는 생애를 삶으로서 구원이 확증 되어야만 합니까?


대답

다음과 같은 예화를 통해서 구원에 대한 문제를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바다에서 낚시를 하다가 바람에 배가 파손이 되어서 조그만 나무 조각에 몸을 의지한 채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사람은 수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한 척의 배가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배는 단 하나의 짐이나 사람도 더 실지 못할 정도로 만선이었습니다. 그래서 밧줄을 물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던져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밧줄을 꼭 잡으시오. 우리가 당신을 해안까지 끌어다 주겠소.”
낚시꾼이 밧줄을 잡았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사람이 밧줄을 붙잡고 있는 한, 그는 구원받은 것입니다. 구원은 이제 그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해야 할 몫이 있는데, 그것은 밧줄을 꼭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밧줄을 놓아버리거나 다시 잡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잃어버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낚시꾼의 구원은 밧줄을 처음 붙잡았을 때(과거)와 밧줄을 붙잡고 해변까지 끌려오는 과정(현재)과 해변의 모래밭 위를 두 발로 걸을 때(미래)의 세 가지 시제를 거치면서 이루어집니다.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과거의 한 때에 구세주를 영접하는 경험이 필요하고(과거), 오늘 이 순간에 구세주의 손을 붙잡고 동행하는 경험이 필요하며(현재),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미래의 한 때에 하늘 천국문을 들어감으로써, 구원은 완전하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미래).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구세주의 손을 붙잡고 거기에 매달려 있는 한, 그는 구원받은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구세주의 손을 놓아버리고 사단의 손을 붙잡는다면, 그는 이미 얻었던 구원일지라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낚시꾼이 밧줄을 꼭 붙잡고 있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낚시꾼은 자신의 힘으로 해안까지 헤엄쳐 갈 수도 없으며, 밧줄을 스스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낚시꾼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배가 끌어 당기는 힘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만 합니다. 그는 단지 밧줄을 붙잡음으로써, 자신을 끌어당기는(구원하는) 힘에 협력할 뿐입니다. 낚시꾼이 해안까지 안전하게 도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한번 예수를 믿고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할지라도, 그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사단이 놓은 덫과 유혹dp 걸려서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믿음이라는 밧줄을 꼭 붙들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 자신의 결정과 행동에 의하여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거절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죄인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복음으로 그 마음과 생애가 거듭나면 죄의 댓가인 형벌로부터 면죄받게 되는데, 이것을 칭의라고 합니다(과거). 칭의(의롭다 하심)fmf 받은 사람은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받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신학적으로 성화라고 부릅니다. 성화란 오늘 내가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받는 생애를 사는 것을 뜻합니다(현재). 성화된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때, 그 몸이 영화로운 변화함을 받고 하늘 도성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것을 영화라고 부릅니다(미래).

성경은 세 가지 시제 즉, 과거-현재-미래를 사용해서 구원의 경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4절에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we are saved)라는 과거 시제로 기록되어 있고,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we are being saved)라는 현재 시제로 기록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15장 11절에는 “우리가 ...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we shall be saved)는 미래 시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해야 하며,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듯 그분께 확고하게 매달려(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와 능력에 의하여 성령의 열매가 우리의 마음과 생애에 풍성하게 맺혀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대한 순종과 의로운 행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구원받기 위하여 억지로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마음 속에 거하시는 결과로 인해서 순종과 승리의 생애가 자연스럽게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혈관이 터지는 이유


Blood Clotting은 혈관 내의 피가 끈적거려지고 조그맣게 덩어리 지는 현상으로서, 뇌졸증 및 중풍, 그리고 심장마비와 같은 질병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이다.

예방 약초: 엔젤리카, 훼너그릭, 마늘, 생강, 은행, 메도우 스위트, 머덜월트, 튜머릭

Blood Clotting의 원인들

1. 죠지아 주립대학의 실험 보고서에 따르면, 쥐에게 우유의 단백질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음식물을 공급해 주었더니, 쥐의 혈액이 끈적거려지면서 뭉치는 현상이 발견되었다.
2. 혈액의 순환과 햇빛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혈액이 덩어리지는 문제를 가지고 있는 환자들이 적당하게 햇빛을 쬐이지 않을 경우, 가벼운 일광욕으로 얻을 수 있는 유익을 놓치게 된다.
3. 다량의 당분(설탕)이 함유된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은 혈관 내의 피를 끈적거리게 만듦으로서 혈액이 덩어리지게 한다.
4. 모든 종류의 동물성 지방은 혈액이 뭉치는 현상을 가속화 시킨다.
5. 스트레스로 인한 아드레날린의 분비는 혈액의 끈적거림과 뭉치는 현상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6. 과식으로 인한 혈중 인슐린의 상승은 피가 끈적거려지고 응어리 질 수 있는 상태를 조장한다.

혈액의 뭉침(Blood Clotting)을 막을 수 있는 방법

1. 가장 먼저 우선되어야 할 방법은, 모른 종류의 육류의 섭취를 중단하고, free fat의 섭취를 최소화 하는 것이다. free fat은 마가린, 버터, 마요네즈, 튀긴 음식, 요리용 기름, 샐러드 오일, 너트로 만든 버터 등에 많이 포함되어 있다.
2.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적당한 운동 역시 혈액의 뭉치는 현상을 막을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이다. 이 문제에 대한 의학 보고서가 매우 많이 나와 있는데, 와싱턴 대학의 웨인 챈들러 박사의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60세에서 62세의 남성 13명으로 하여금 운동을 일주일에 5번씩 6개월 동안 시킨 결과, 혈관 내에 이미 뭉쳐져 있던 혈액 덩어리를 분해시키는 능력을 가진 엔자임이 39퍼센트나 더 많이 형성되었다.
3. 한 가지 흥미 있는 보고가 발표되었는데, 연구팀은 응어리진 혈액을 분해시키는 능력은 이른 아침에 가장 낮고, 저녁에 가장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루 중에서 이른 아침에 심장마비가 생기는 경우가 가장 많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른 아침에 운동을 할 경우, 혈관 내의 혈액의 응어리를 하루 종일 효과적으로 분해시킬 수 있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3. 항 산화제를 많이 섭취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항산화제는 혈액이 응어리 지는 속도를 늦추어 준다. 항산화제는 과일, 채소, 껍질을 벗겨내지 않은 곡식류, 너트, 그리고 씨앗류에 풍부하게 포함되어 있다. 항산화제에는 베타카로틴, 비타민 C와 E, 그리고 셀레니움이 포함된다.
4. 마늘이 다져질 때에 나오는 화학물질도 혈액의 응어리 방지에 매우 효과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5. 밭에서 캐낸 신선한 땅콩에는 혈액의 응어리를 방지하고 끈적거리는 현상을 막을 수 있는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오래 묵은 땅콩은 오히려 혈관에 해롭다.

약으로 고칠 수 있나요?

지난 수십년 동안 혈액이 응어리 지는 문제를 치료하거나 예방하기 위하여 다양한 약품들이 개발되어 사용되어 왔지만, 확실하게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실패하였다. 심장마비, 뇌일혈, 동맥경화증의 전문가들 중에 어떤 의사들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약들이 오히려 뇌졸증의 위험을 실제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다는 말을 종종 한다. 물론, 특정한 몇몇 경우에는 혈관 내의 찌꺼기의 감소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많은 경우에 있어서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므로 실제로 환자들 중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혈액의 끈적거림과 응어리를 치료하는 약의 사용으로 인하여 오히려 병세가 악화될 수 있다. (Ref. Medical World News, p.85, April 8, 1985)

재앙이 내리고 있습니다!


광우병에 대한 두려움이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가고 있다. 광우병의 원인을 연구한 과학자들은 풀을 먹고 살아야 하는 소가 죽은 동물의 살과 뼈를 먹음으로써, 두려운 재앙을 받게 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영국의 한 신문에는 동물계의 질병을 지목하면서 “영국에 성경이 말하는 재앙이 내렸다”라는 기사가 다루어졌다. “자연의 법칙을 버린 사람은 신의 버림을 받는다.”는 말이 있다. 식물을 먹고 살아야 하는 동물이 동물의 살과 뼈를 먹음으로써 자연의 법칙을 범하였을 때, 그 동물은 무서운 질병으로 죽어가게 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각종 과일과 채소와 곡물을 먹고 살도록 창조하신 사람에게도 두려운 질병의 재앙이 몰아닥치고 있다.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고 범한 결과로 인하여, 사람 및 동물계를 강타하고 있는 재앙의 원인 및 대책을 살펴보도록 하자.

광우병
1996년 3월 20일 수요일, “광우병”이란 표제가 세계적으로 눈길을 끌었다. 일련의 신망있는 영국 과학자들이 파괴적인 가축병이 인간에게도 전염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충격의 물결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의 발표에 의하여, 영국인들은 육류 식품의 섭취를 삼가하기 시작했으며, 영국의 육류 산업계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영국에 이어서 유럽 연합에 속해 있는 여러 나라들이 차례로 영국 쇠고기 수입을 금지하였다. 그 이후로 23개국의 나라들이 영국 육류의 수입을 금지시켰다.
1986년 이후, 광우병으로 죽은 영국 소들의 부검 결과는 신경계의 감염으로 인하여 뇌에 작은 구멍들이 생긴 것으로 나타났다. 현미경으로 검사한 결과, 광우병으로 죽은 소들의 뇌가 스폰지 처럼 된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스폰지 같은 모양은, 보빈 스폰지폼 엔세파로파티(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 BSE로 불리워지는데, 이것을 번역하자면 소(Bovine)에게 발병되는 스폰지 같은(Spongiform) 뇌 질병(Encephalopathy)이 다.

프리온 (Prion)
광우병은 프리온이라고 불리우는 단백질에 의해서 전염된다. 과학자들은 지금까지 감염성 질병은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로 인해 생긴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프리온의 발견 후 그 생각은 바뀌게 되었다. 지금까지 전문가들이 대학에서 가르쳐온 논리와는 대립되는 것이 바로 이 프리온이다. 프리온은 박테리아도, 바이러스도, 곰팡이도, 기생충도 아닌 단백질이다.
프리온은 탄력이 있는 단백질로써 어떤 멸균 방법에서도 살아남는 아주 무서운 존재이다. 프리온은 화씨 800도(섭씨 340도) 이하의 온도로는 없앨 수 없는 단백질이다. 프리온은 냉동과 건조의 방법으로도 전혀 파괴되지 않는다.
소들만이 프리온으로 유발되는 스폰지 같은 뇌 질병에 걸리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도 프리온으로 인하여 광우병과 같은 질병에 걸리는데, 인간에게는 주어지는 병명에는 세가지가 있다-- 크로이츠펠트-야콥병(Creutzfeld-Jakob Disease), 걸만-스트라우스럴 신드롬(Gerstmann-Straussler syndrome) , 쿠루병(Kuru)
사람 또는 어떤 짐승이 프리온에 의하여 감염되는가에 따라서 질병의 이름이 각기 달라진다. 프리온이 소에게 감염되면 광우병으로 불리워지며, 사람에게 감염되면 크로이츠펠트, 야콥병, 쿠루병으로 불리워지고, 양 또는 고양이 등에는 각각 다른 이름의 병명으로 불리워진다.

식인종에게서 부터 시작된 쿠루병
파푸아 뉴기니의 어떤 부족들은 죽은 친척들을 장사 지내는 대신에, 죽은 시신을 먹는 고대의 관습을 이어오고 있었다. 여자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더 많은 아이들을 낳을 수 있다고 믿었다.
1940년, 과학자들은 파푸아 뉴기니의 한 부족에게 생긴 이상한 질병으로 인하여 매우 당황하게 되었다. 파푸아 뉴기니의 원주민들은 이 수수께끼 같은 뇌 질병을 쿠루라고 불렀다. 그들이 이 질병을 쿠루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질병에 걸리면 죽기 전에 아주 이상한 행동을 하고 죽기 때문이였다. 쿠루병은 죽은 시신을 먹는 관습을 가진 부족의 여인들 중 80 퍼센트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처음에는 쿠루병은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병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병이 죽은 친척들의 시신을 먹음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감염되는 병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어떻게 유럽과 미국으로 퍼지게 되었나?
쿠루 병이 구미 선진국에 제일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영국의 양 떼에게서 였다. 영국의 목축업자들은 이 병을 이질(Scrapie)이라고 불렀다. 병에 걸린 양들은 희한하게도 몸을 어느 곳에던지 비비는 버릇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양들은 머리나 가죽을 울타리에 문질렀다.
1970년, 미국 농무부와 국립 위생 연구소에서는 이질이 걸린 양들을 모아서 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분리시킨 이 동물들을 뉴욕으로 보내서 검사를 했지만 이질을 일으킬 수 있는 아무런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를 찾지 못했다.
이러는 와중에 계속해서 이질에 걸려 똑바로 설 수도 없는 양들이 다량으로 발생되자, 목장 주인들은 가축의 질병 검사비용을 아끼기 위하여 양들을 가축 병원에 보내는 대신에, 사료를 만드는 공장으로 보내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초식 가축들이 육식을 섭취하는 육식 동물로 전환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로 무시무시한 단백질인 프리온에 감염되기에 이른 것이다.

감염된 소는 어떻게 되는가?
감염된 가축에게 조금이라도 압력을 주게 되면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유를 짜기 위해 프리온에 감염된 소를 움직이면 그 소는 옆에 있던 소들을 피하면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고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식성이 좋음에도 불구하고 무게가 감소되며 우유의 생산량이 감소된다.
근육이 줄어들면서 경련과, 떨림 그리고 흔들림이 생긴다. 이를 갈고 울음소리가 이상해 진다. 사람이나 다른 짐승과의 접촉에 민감해지며, 공포로 인해 전율하며 떠는 경우가 잦아 진다. 결국에 가서는 심하게 몸을 흔들면서 휘청거리다가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된다.
일반적으로 소가 도살되면 머리를 제외한 나머지 몸의 부분들은 시장에서 고기로 팔리게 되는데, 뼈는 대부분 젤라틴으로 만들어지고 고기는 식용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유통 과정을 거쳐서 소에게 광우병을 일으켰던 무서운 프리온이 사람에게 옮겨지는데, 일단 프리온이 사람에게 옮겨져서 질병을 일으키면 크로이츠펠트-야콥병으로 불리우게 된다. 소고기를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보다 크로이츠펠트-야콥병에 감염될 가능성이 13배나 된다.
소 이외에도 사슴, 노루, 양, 밍크, 고양이 등도 프리온에 의하여 감염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감염된 모든 동물들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상과 같은 증상을 나타낸다. 죽은 친척의 시신을 먹고 이 무서운 병이 걸린 파푸아 뉴기니인들처럼 첫 증상이 나타난 이후 매우 짧은 시간에 사망하기 때문에 회복되는 경우는 없다. 어떤 뉴기니인들은 프리온에 감염되어 죽은 친척을 먹은지 40년이 지난 후에야 쿠루병의 첫번째 증상이 나타났다. 그러므로 지금 건강하게 보이는 소나 사람의 몸 속에도 프리온이 잠복되어 있거나 나타나는 과정 중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전혀 안심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크로이츠펠트-야콥병
(Creutzfeldt-Jakob Disease)

크로이츠펠트-야콥병은 뇌를 스폰지처럼 만드는 매우 치명적인 질병이다. 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이 병에 감염되면 병의 원인인 프리온을 없앨 수 있는 아무런 치료도 할 수 없다. 프리온은 뇌와 신경계에 매우 점진적인 속도로 구멍들을 뚫지만, 한번 그 과정이 이루어지면 매우 짧은 시간에 죽음을 가져온다. 그 어떤 치료도 이 병에는 소용이 없다. 프리온에 의해서 죽은 사람을 부검해 보면, 뇌가 스폰지 같이 되어 구멍이 많이 생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프리온에 감염된 환자는 첫번째 증상으로 움직임에 문제을 갖게 되며, 기억력을 잃어 버리고, 분명치 않은 발음을 하는 등 정신적인 변화를 나타낸다. 또한 근육 경련이 일어나며 얼굴의 표정이 고정되며 비틀거리고 쓰러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다음 몇 주일은 환자가 혼란스러워 지며 친지들과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 병의 마지막 단계에 가면, 무의식 상태로 들어가며 아무에게도 반응을 하지 않는다. 경련의 빈도가 점점 잦아지다가 자제력을 잃으면서 듣고, 말하고, 볼 수 없게 되며, 끝내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지금까지 이 병에 감염되었다가 회복한 환자는 하나도 없다.
이 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은 암으로 사망한 사람들 보다는 그 숫자에 있어서 많지 않다. 그러나, 암보다 더 무서운 이유가 한가지 있다. 증상이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건강한 사람은 증상이 없기 때문에 이 병을 소홀히 생각하므로 조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몇년 후에는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이 병으로 인해 죽어 갈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예상하고 있다.
미국 서부에는 노루와 사슴에게서도 광우병과 같은 증상의 병이 급격하게 번지고 있다. 프리온에 감염된 사슴 고기를 먹은 한 사냥꾼은 1년 후에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같은 병으로 사망했다. 소와 양 또는 그 어떤 동물을 먹는 것도 절대로 안전하지 않다. 다른 동물들도 프리온과 관계된 병들을 가지고 있다. 양과 염소들을 포함한 20종류의 동물들도 프리온에 감염되어있다.

프리온에 감염되어 있는 동물계
소, 밍크, 고양이, 타조, 양, 순록, 원숭이, 돼지, 치타, 퓨마, 염소, 쥐, 등등

프리온이 없는 제품들
크로이츠펠트-야콥병으로 죽은 어떤 일본 여성의 초유(colostrum)에서 프리온이 발견되었다. 의학계에서는 우유에 대한 의혹을 가지고 있다. 광우병의 문제가 커가면서 영국에서는 동물과 사람 모두 감염된 젖소의 우유 마시는 것을 금했다. 불행하게도 프리온으로 감염된 동물들에게서 오랜 기간동안 아무런 증상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젖소가 감염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동물의 젖으로 만든 제품들에 관한 염려와 의심이 일어나고 있다. 건강 식품점에 있는 여러 종류의 영양제들도 프리온 감염의 위험이 있으므로 피하는 것이 좋다.
광우병이 고기를 통하여 전달된다면 유제품과 계란을 통해서도 전달될 수 있다. 그리고 마요네즈, 사탕, 그리고 비타민 캡슐의 재료인 젤라틴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프리온으로 죽은 동물의 뼈와 피를 갈아서 만든 사료를 통해서도 프리온은 전달된다. 백신(Vaccine), 프리마린(Premarin)과 같은 약품들, 멜라토닌과 같은 선(Glandural)이 들어 있는 치료약품들도 동물의 몸에서 추출해내고 있다. 캡슐이나 젤레틴, 미용제품 등 아주 많은 제품들이 동물성 재료를 사용하고 있다. 동물성 식품의 섭취를 통해서만 감염되는 것이 아니라 동물로부터 추출해낸 약품과 제품들을 복용 또는 사용할 때에도 병에 감염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동물성 제품들의 사용을 금하는 것이 프리온으로 감염되는 질병을 피하는 가장 좋은 예방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광우병, 크로이츠펠트-야콥병은 짧은 시간 안에 증상이 나타나서 쉽게 치료가 되는 병이 아니므로 더욱 더 심각하며, 일단 증상이 나타나면 순식 간에 사망하므로 그 어떤 질병보다도 무서운 병이 아닐 수가 없다. 지금으로서는 치료보다는 예방에 중점을 두는 것이 현명하다고 볼 수 있다. 프리온이 동물성 식품이나 약품 또는 제품을 통하여 감염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예방책이겠는가? 프리온이 전달될 수 없는 식품과 약품과 제품들은 먹거나 사용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과일과 채소, 곡식과 견과류와 식물성 천연 식품들에는 프리온이 없다.

고기를 잘 익히고 우유를 살균하면 어떤가?
“뜨거운 불에 요리를 잘 하면 프리온이 죽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아주 많으리라 생각을 한다. 우유는 섭씨 150도에서 살균 처리되는데, 이 정도의 온도는 프리온에게는 화창한 날씨 정도의 수준이며, 요리를 212도에서 한다고 할지라도 프리온에게 있어서는 알맞는 온도로 사우나 하는 것과 같은 수준에 불과하다. 온도를 320도로 높여서 기름에 튀긴다고 가정해 보자. 이 온도로도 프리온은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프리온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면 온도를 섭씨 340도(화씨 800도) 이상으로 높여야 한다.

오직 한가지의 해결책
이제는 결정을 할 시기가 되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미 크로이츠펠트-야콥병에 걸린 상태에 있다면, 식생활을 채식으로 바꾼다고 할지라도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이 무시무시한 병을 예방하는데 있어서, 채식으로 식생활을 전환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고기는 먹지 않고 채식만 할 경우, 단백질은 어떻게 섭취할 수 있는가? 완전하게 채식을 한다고 할지라도, 단백질의 부족을 걱정 할 필요가 없다. 가장 안전한 단백질은 두부, 견과류 그리고 콩 등을 통하여 충분히 섭취할 수 있으며, 거기에는 프리온도 없을 뿐 아니라, 해로운 콜레스테롤도 없어서 이중 삼중으로 우리의 몸에 유익을 준다.
육류에도 풍부한 단백질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해 생명과 건강을 위태롭게 한다면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 아닐런지?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출애굽기 15:26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인간에게 “채소와 과일” (창세기 1:29)을 음식으로 선정해 주셨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선정해 주신 음식을 먹는다면, 우리는 애굽인(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가진 질병들로부터 보호함을 받을 것이다.
주위에 있는 여러 질병들을 보고 그 원인을 살펴 보라. 그리고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결정을 하라. 결정을 미룬다면 당신의 건강을 가지고 모험을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동물에게서 감염될 수 있는 또 다른 균들

이 콜라이(E. Coli)
이 콜라이(E. Coli)는 인간에게 가장 잘 알려진 박테리아이다. 우리 몸에는 백만이 넘는 세균들이 장에 살고있다. 불행하게도 그 중에 가장 위험한 세균들은 죽음을 가져 올 수도 있다.
쇠고기만 심각한 전염병을 발생하게 하는 음식이 아니다. 이 콜라이로 부터 오는 질병은 생 우유나 살균된 우유가 원인인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우유 이외에도 소세지, 쇠고기, 사과 사이더(사과 사이더를 만들 때 가축의 거름으로 인해 더럽혀 진 땅에 떨어졌던 사과를 이용할 경우)등도 이 콜라이균으로 인한 식중독을 일으킨다.

리스테리오시스(Listeriosis)
리스테리아 모노사이토젠즈(Listeria monocytogenes)는 생명을 위협하는 병의 원인이 되는 박테리아이다. 병의 증상들은 유행성 감기와 비슷하다. 이 박테리아와 관계가 있는 음식은 부드러운 치즈와 잘 익지 않은 닭이다. 따뜻하게 데우지 않은 핫도그도 이 박테리아를 전염하는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농무부에서 19개의 핫도그를 검사한 결과 20% 리스테리아 균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켐피로박터(Campylobacter)
캠피로박터(Campylobacter)는 박테리아로 생기는 식중독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매년 2백만명이 넘는 미국인들이 이 균에 의해 감염되고 배의 통증, 고열, 구토와 메스꺼움등의 증상을 나타낸다. 캠피로박터 균으로 감염된 환자 중 20퍼센트 정도는 아주 심한 증상을 경험한다. 매년 200명이 넘는 죽음이 이 균으로 인해 생긴다. 그 중 반 이상은 닭이 원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캠피로박터를 일으키는 또 다른 원인은 쇠고기, 케이크의 크림, 생 우유 그리고 계란이다.

살모넬라(Salmonella)
살모넬라는 캠피로박터 다음으로 설사를 일으키는 질병이다. 살모넬라 균으로 인하여 매년 2백만명의 환자가 발생된다. 많은 환자들은 고열, 장의 염증으로 인한 설사 그리고 으시시함을 경험하지만, 10퍼센트 이상의 환자들은 입원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른다. 병원 입원 환자 100명중 3명 정도가 살모넬라로 죽는다. 살모넬라 균을 일으키는 음식은 집에서 만든 아이스크림, 살균된 우유, 쵸코렛, 계란 그리고 계란으로 만든 식품들이다.

크로스트리디움 펄프린젠스
(Clostridium Perfringens Infection)

미국에서 크로스트리디움 펄프린젠스 균 감염에 대하여 매년 1000명 정도의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이 균은 이상하게도 익힌 쇠고기로 인해 감염된다. 또한 닭고기를 통해서도 이 균에 감염될 수 있다. 이 균에 감염되면 복부에 경련이 일어나며 구토하는것이 보통이다.

간, 너무나 중요해요!


간은 인체의 기관 중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기관이다. 간은 우리 몸의 오른쪽, 횡경막과 갈비뼈 밑에 위치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4가지의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1. 인체의 폐기물을 태워 없애는 동시에 몸 전체를 따뜻하게 하고
2. 몸이 필요로 하는 혈액 이상의 혈액을 보관함으로써 심장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며
3. 여러 가지 필요한 효소들을 생산하고
4. 당, 지방, 단백질, 그리고 비타민을 저장할 뿐 아니라, 필요할 때에 몸에 공급하는 중요한 기능들을 가지고 있다.

간은 불완전한 소화로 인하여 발생되는 산성 독소들을 태움으로써 산성을 알카리성으로 전환시킨다. 이러한 과정은 갑상선에 의해서 통제되기 때문에, 갑상선에 문제가 생길 경우 인체는 폐기물과 쓰레기로 가득 차게 되고 그 결과 체중이 올라가고 늘며 나른해 지게 된다. 간의 또 다른 기능은 항체를 만드는 것이다. 간은 지방을 소화할 때에 필요한 비누같은 알카리성의 담즙을 생산하며, 독, 아미노산, 너무 많은 양의 단백질, 그리고 당 등을 사용할 수 있게 변형시킨다. 간은 우리 몸에 필요한 당, 지방, 단백질, 그리고 비타민들을 저장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당이 몸에 지방같이 저장된다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러므로 체중이 늘어나는 것이 싫다면 설탕과 같은 당분의 섭취를 줄이는 것이 좋다.

간에는 문정맥과 간 동맥이라고 불리우는 특별한 순환 조직이 있다. 이 순환기능은 1분에 1.5 쿼터(Quart)의 혈액을 간에 보급한다. 하루에 몸의 반이나 되는 혈액이 간과 신장을 거쳐 간다. 그러므로 혈액의 정결이 기관들의 기능에 얼마나 중요한 것을 깨달아야 한다. 혈액의 깨끗한 정도가 인체의 건강도를 측정하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간이 과다한 독소로 인하여 막히면 고혈압을 일으키게 되는데, 간의 이러한 문제는 당뇨병, 심장병, 신장 관련 질병, 혈액 순환 문제, 혈액과 관계된 질병, 피로, 부은 발과 다리, 그리고 신경과민과 같은 불균형을 가져오게 된다. 간을 가장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원칙은 간에 좋은 혈액을 공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위해서 8가지의 법칙을 우리에게 주셨다. 햇빛, 맑은 공기, 운동, 충분한 휴식, 깨끗한 물, 영양, 절제,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간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과 매우 비슷하다. 성령께서 우리의 양심에 죄와 악을 지적해 주시는 것처럼, 간은 체내에 들어온 독소들을 중화시킴으로써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요한복음 16:13은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고 있다. 간이 우리가 먹는 음식을 변형하는 것처럼, 성령께서는 우리가 듣고 배운 영적인 음식을 잘 소화하고, 진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신다. 간이 영양소들을 우리 몸에 저장하는 것처럼, 성령께서는 영적 힘과 지혜를 공급해 주신다. 간을 잘 돌봄으로써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하는 것처럼, 성령의 음성에 잘 귀를 기울임으로써 영적인 질병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을 얻을 수 있다.

우유와 설탕의 섭취는 간의 경화를 가져와서 간이 고통을 당하도록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기적인 본성이 원하는대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은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거나 거절하게 되어 영적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상을 입게 된다. 그러므로 언제나, 어디서나 “이 길로 걸으라”는 조용한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야만 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린도전서 3:16. 간을 건강한 상태로 유지함으로써 최적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처럼, 성령의 음성과 인도하심을 따름으로써 우리는 영적인 치유를 받을 수 있다.

단백질의 하루 섭취량에 대한 질문과 답변


질문에 대한 답변은 미국 유치파인 천연 치료소 책임 의사인 에가타 뜨레쉬 의사께서 해주셨습니다.

질문: 우리가 하루에 섭취해야 하는 단백질 양은 얼마이며, 채식가가 되면 어떻게 충분한 양의 단백질을 섭취 할 수 있나요?

대답: 성인의 일일 단백질 섭취량은 30그램 정도입니다. 정제되지 않은 모든 식물성 식품들은 단백질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과일에는 1~3그램, 채소에는 2~8그램의 단백질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통밀빵 한 조각에는 3.5~4 그램이 들어 있고, 몇개의 호도, 브로커리 2컵, 그린콩 1컵, 익힌 콩나물 1컵에는 각각 15그램의 단백질이 들어있습니다.
1964년, 로즈박사는 단백질 섭취량은 하루에 18그램으로 충분하다고 발표했습니다. 1971년, 헤그스테드 박사는 우리 몸에서는 자체적으로 아미노산을 재활용하기 때문에 하루에 10그램의 단백질만 섭취해도 충분하다고 발표했습니다.
일부 영양학자들이 단백질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단백질을 해가 될 정도로 과다하게 섭취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영양소 일지라도 너무 많이 섭취하게 되면 (심지어는 물과 산소일지라도) 인체는 그것을 쓰레기 처리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며, 어떤 경우에는 몸에서는 독소가 들어간 것같은 취급을 합니다.
단백질은 매우 다양한 종류의 식품들에 함유되어 있습니다. 단백질은 채소와 과일, 견과류와 콩, 두부, 그리고 곡식에 들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음식들을 골고루 섭취한다면 단백질을 적게 섭취하는 문제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서론 - 대속죄일의 현대적 의미


성경에 기록된 성소제도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청사진이다. 사람이 영생의 특권을 잃어 버리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죽게된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모든 고통과 슬픔의 이유는 죄에 있다.

죄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성경은 죄를 불법이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그 뜻은 lawlessness, 즉 법을 어기고 마치 무법적으로 산다는 뜻이다(요일 3:4).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속에 살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자연 법칙을 어기고 궤도를 벗어나는 별이 있다면, 만일 물이 위로 흐르기를 시작한다면 결국 우주는 큰 혼란을 맞게 되고 그 결과로 모두가 다 파괴되고 말것이다. 하나님의 법칙은 우주의 존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구원의 계획
더 나아가서 인간은 자연법칙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법칙으로 주관되고 있다. 인간은 식물이나 동물과 달라 본능 이상의 능력인 지성과 자유 의지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주관하는 법칙을 제정하여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십계명인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는 그 도적적인 율법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금지의 법칙으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존경과 사랑의 마음으로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행복과 영원한 삶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류를 얽어 묶어서 부자유하게 만드는 부담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법칙은 우리를 보호하고 살게 하는 울타리 같은 축복이다. 어떠한 모종의 법칙에 지배를 받지 않고 사는 피조물이 어디 있는가? 모든 만들어진 물건들에도 그 사용법칙이 있지 않는가? 모든 만물을 지켜 보라! 서로의 평화와 안전과 질서, 그리고 상대방의 행복을 위하여 그들은 반드시 어떤 법칙에 의하여 주관되어 오고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칙을 어기는 것은 결국에 가서 온 우주를 파괴 내지는 큰 혼란으로 몰아넣는 독소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죄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그들을 다시 살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는 그들의 죄의 값을 대신 치루어 주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 주셔야 했다. 왜 죄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꼭 그 댓가를 치루게 하여야 하는가? 만일 죄의 결과를 치루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결과가 전혀 없이 지나가게 됨으로 우주를 주관하는 그 중요한 법이 깨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이 법을 없애거나 바꾸실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우주 자체가 법에 의하여 운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천지가 없어질 지언정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룰 것이라고(마 5:18)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도 구원하시고 우주의 법도 지키시기 위한 구속의 계획을 고안하시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 한다.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셨다고. 그러나 실재로는 그 반대이다. 만일 예수께서 계명을 폐하실 것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계명을 어긴 인류의 죄의 댓가를 대신 지불하시기 위하여 그러한 엄청난 고난과 희생을 치루어 주셔야만 했단 말인가! 그냥 율법을 없애버리시고 그저 쉽게 용서해 주어 버리시지 않고...십자가는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이지마는 동시에 하나님의 정부의 율법을 높이시고 옹호하시는 공의의 결정이기도 한 것이다.
범죄한 인간을 살리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이 계획되었고 또한 그로 인하여 인류는 죄를 용서 받고 다시 영생할 수 있는 길을 얻게 되었다. 오! 얼마나 크고 놀라운 사랑인가! 죄를 지은 인류에게 소망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가 반드시 이해하고 지나가야 할 매우 중요한 관건이 걸려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인류의 구원이 용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죄를 씻고 용서해 주는 동시에 그 죄를 지은 인간들을 변화시키어 다시는 법을 범하지 않고 하나님께 변치 않는 사랑과 충성심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죄를 지은 자의 마음과 품성이 변화되는 일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죄인들을 구속하신 이후에도 이 우주는 안전한 곳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일은 강제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인간은 기계나 로보트가 아니라, 지성과 선택력을 가진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고안 하신 것이 바로 성소 제도인 것이다.

성소 제도의 의미
성소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죄 값을 치루시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며, 또한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그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에 감동되어 다시는 하나님의 법을 범하지 않는 자들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시는 일이다. 성소 뜰은 예수께서 이 지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역을 상징해 주는 제도이다. 그래서 성소 뜰 번제단에서 희생 제물을 죽여 태우지 않았는가? 그 후에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 첫째칸 성소는,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중보하시고 그 희생의 유익을 믿는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적용시키시는 사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성소 안에서 죄인들을 위한 용서의 일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고 인도하여서 진리대로만 사는 자가 되도록 변화시켜 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신 구주 예수를 위하여 살도록 교육시키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대로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 되도록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이다. 바울은 그러므로 믿음을,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이라고 표현하였다.

지성소와 대속죄일
그러므로 성소의 제일 마지막 부분인 지성소는 하나님의 구속의 결론을 보여주시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 지성소야말로 성소 제도의 목적이요 그 결론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곳에서 죄인과 만나시겠다고 말씀하시었다(출 25:22). 이 지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님의 최종 심판을 상징해 주고 있다. 과연 용서 받은 죄인이 영원히 다시 살기에 합당한지를 조사하시고 결정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 날을 개인의 운명이 결정지어 지는 날이라고 믿고 가르쳐 왔는데, 바로 그 날이 대속죄일이다. 유대인 백과사전에는 대속죄일을 “그 개인의 생명이 영원히 계속 될 수 있는지 없는지 그 운명을 결정 짖는 날”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날에 그들이 서로 나누는 인사가 “좋은 인(표)을 받으셨기를 기원합니다!”였다. 바로 이러한 개념으로 성경은 대속되일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 대속죄일은 백성들이 자기들의 모든 죄로 부터 정결케 되는 날이라고 말씀(레 16:29,30)하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실상 죄인들이 죄를 지었을 때에, 그때마다 양을 끌고가 이미 죄를 고백하고 회개 하였지 않는가? 그들은 죄의 용서를 이미 받았지 않는가? 그런데 뭘 또 새삼스럽게 죄를 살피고 또 정결케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이미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렀는데 말이다. 대속죄일에 다시 죄를 살피고 정결케 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예수 재강림 전에 있을 심판
우리는 경험적으로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 안에 항상 거하지 아니하면 옛날 죗된 생활의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회개하였지마는 다시 마음을 바꾸어 죄의 습관으로 돌아가서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겉으로는 회개한 것 같이 보이지마는 속으로는 여전히 죄를 품고 있거나 아니면 죄의 습관을 버리지 않고 있거나, 아니면 죄의 우상을 여전히 가지고 살아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구원의 증거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생애인 것이다. 그 믿음이 참된 것인지 아닌지를 나타내는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생기는 성령의 열매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마 7:20)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강제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원하는 심정으로, 십자가의 사랑에 감동되어 자신을 굴복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명대로 따라 순종하며 사는 자들에게 영원히 살 수 있는 자격을 주시는 것이다. 인간의 의의 성품은, 자기가 원하는 마음으로 순복할 때에만 이루어 지는 것이다. 심판이 두려워서 따른다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이 세상에 대하여 죽는 일이 없이 이기적인 목적으로 따라 모방한다고 해서 영원히 살 품성이 형성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대 속죄일날, 즉 이 땅에 다시 재림 하시기 전에 누가 영원히 구원 받을 수 있는지를 먼저 조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결정과 심판은 온 우주 앞에서 천사들과 모든 피조물들이 다 보고 알 수 있게 공개적으로 행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책들이 펴 놓여있고 심판이 진행되고 있는 장면들을 여러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실례 - 단 7: 9,10; 계 5:1-5; 계 19:2; 계 20:12,13). 예수님께서도 비유로 이 사실을 여러번 가르치신바 있다. 왕의 혼인 잔치의의 예복의 비유가 그 중에 하나이다. 이미 초청 받아 와 앉아 있는 자들에게 왕이 들어와 그들이 예복을 입고 있는지를 조사하였다(마 22장). 예복을 입고 들어오지 않은 자는 밖으로 내어 쫓김을 받아 이를 갈며 슬피 울게 되었다. 계 19:7,8 은 결혼 예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사업을 통하여서 각자 개인의 생애의 기록을 보시면서 그가 참으로 처음 회개할 때의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 보시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은 이미 다 알고 계시지마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모든 피조물들, 즉 하늘의 배심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결정을 직접 보도록 하시는 것이다. 과연 구원 받아오는 인간들이 영원히 살기에 합당하고 안전한 자들인지를 펼쳐서 보여 주시는 것이다. 죄인들이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영원히 사는 특권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속에 반역과 불순종의 정신이 없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에는 우리의 양심을 씻어 옳바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 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어기거나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일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충성심을 가진 자들의 이마에만 하나님의 인이 쳐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합리적이며 공평하시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거룩한 천사들과 배심원들이 하나님의 심판이 의로우시다고 찬양을 부르는 장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신지라...”(계 19:1,2). 성소제도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그러나 죄를 사함받고 주님을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는 자들은 이 심판에 대하여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다. 자기 양심이 진실된 자들은 자기의 무죄를 판결하여 줄 심판날이 오히려 기다려지는 것이다. 또한 이 날은 하나님의 명예가 회복되는 날이다. 사단은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가 없다고 늘 고소하여 왔다. 하나님의 법을 없애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이기적인 분으로 거짖 고소하여 왔다. 이 내용은 마귀가 하와를 꼬이는 장면에서 잘 묘사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고 의로운 당신의 백성들을 통하여서 당신의 이름의 명예를 회복 하실 것이다.

대속죄일 의식에 담겨진 의미
대속죄일 날에 드리는 제사와 의식들은 하늘 지성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 사업을 잘 묘사해 주고 있는데, 그 날의 제물로 드리는 동물들은 네마리 였다(레위기 16장에 있는 내용임). 수송아지 한마리, 수양 한마리, 수 염소 두마리가 그것이었다. 수송아지는 대제사장이 자기와 자기의 권속들을 위하여 드리는 속죄 제물이었고, 수양은 온 이스라엘을 위한 그 날의 속죄제물이었다. 그러나 정작 대속죄일의 제물은 두 마리의 염소였다.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한 염소였고,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한 염소였다. 흥미있는 사실은 여호와를 위한 염소의 머리 위에 매일 드리는 속죄제 때 처럼 안수하여 죄를 고백하지 않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 염소는 죄를 대신 지는 염소가 아니다. 이 대속죄일에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이 동물이(염소) 죄를 지지 않는다. 이 날에 여호와를 위한 염소는 죄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염소의 피는 죄인이 고백한 죄를 성소로 옮겨 더럽히기 위해 뿌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년 내내 행해져 왔었다. 그러나 이날은 오히려 그렇게 성소를 더럽혀 온 인간의 죄들을 , 다시 말해서 성소로 옮겨져서 하늘의 기록 책에 기록되어 옴으로 하늘의 성소를 더럽혀 왔던 모든 죄들을 도말하고 씻는 효험이 있는 피를 상징한 것이다.
그래서 이 여호와를 위한 염소의 피를 가지고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들어가는 지성소에 들어가 법궤위 시은좌에 일곱번 뿌리고 나오면서 성소의 분향단의 뿔에 바르고 뜰로 나와서는 번제단 주위에 뿌리고 그 네 모퉁이 뿔에 바르는 것이었다. 그곳 들은 매일 죄를 담은 피로 제단과 성소에 뿌리고 발라서 더럽게 하였던 곳들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이 모든 죄의 기록들을 다 말끔히 씻어 도말하시는 일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죄들을 기록에서 도말하시기 전에 각자들의 참된 상태를 살펴보셔야 하는 것이다. 그들의 생애가 정말 어떠했는지를 조사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합당하고 의로운 일이다. 조사함이 없이 집행 언도를 내리는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믿는자는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심판에 이르렀을 때에 정죄를 당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심판에 나아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교회가 먼저 심판을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누구나 다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벧전 4:17,18; 딤전 5:24,25; 딤후 4:1 참조).
이렇게 구원 얻을 자들의 죄가 조사되고 씻어져서 영원히 그 기록책에서 도말된 이후에 모든 죄는 그 죄의 창시자요, 죄를 짓게 만들었던 마귀에게 다 돌려지는 것이다. 바로 이 일을 아사셀 염소에게 모든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상징하여 주신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아사셀 염소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이다. 이 아사셀 염소는 최종적으로 모든 믿는자들의 죄의 책임을 지고 광야로 끌려나가는 마귀, 사단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반역함은 물론이요 다른 인간들을 범죄케 한 창시자이다. 그러므로 진실로 회개한 인간들의 죄를 그들에게로 부터 옮겨서 마귀에게 책임을 지우고 그에게 다 옮기는 것이다. 그리고는 정해진 사람의 손에 의하여 그를 데리고 무인지경인 광야로 데리고 나아가서 죽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난 후에 천년동안 황폐된 이 땅 위에 마귀만이 홀로 끌려와 갇혀 있을 것에 대한 예표인 것이다(계시록 20:1-3 참조).
성소 제도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를 처리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청사진이다. 대속죄일의 의식은 하나님께서 죄를 어떻게 심판하시며 최종적으로 어떻게 처리하시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물어야할 중대한 한가지 질문이 있다. 이 질문을 회피할 자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언제 하늘에서 우리의 이름이 불리워지고 우리의 생애의 모든 기록들을 펼쳐 놓고 나에 대한 심판이 시작될지 모른다. “우리는 과연 진심으로 회개하였는가?” “과연 우리는 모든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께 드렸는가?” “나는 진실로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즐겨하며 죄를 미워하는 생애를 살고 있는가?” 말할 나위도 없이 이 심판은 죽은자들로부터 시작하여 나중에 살아 있는자들의 생애들도 취급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예수님을 당신의 변호인으로 모시고 있는가? 당신은 예수님의 앞에 설 때에 부끄러움이 없는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참으로 심각한 질문이 아닐 수가 없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더 이상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는 구세주로 오시지 않는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십자가의 피로 씻고 변화되어 주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 의인을 데리시러 오시는 것이다. 심판주의 옷을 입고 오시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의 깨닫게 하시고 도우시는 크신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간절하게 기도드린다.

1부 - 대속죄일 안에 담겨져 있는 구원의 계획


유대인 백과사전이 설명하는 대속죄일의 의미

성소 제도에는 매일 드리는 성소 봉사와 1년에 한 번만 드리는 지성소 봉사가 있는데, 1년의 마지막에 드리는 이 지성소 봉사를 대속죄일이라고 부른다. 대속죄일은 대제사장에 의해서 매해 7월 10일(유대인 달력)에 드려진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속죄일을 일년 중 가장 특별하고 중요한 날로 지키고 있다. 이 날은 특별히 거룩한 날인데 유대인들은 이 날을 “Yoma” 즉, “그 날(The Day)” 라고 불렀다. 이 “그 날”은 성소에서 행해지는 짐승의 희생 제도에 있어서 핵심이며 결론이 되는 날이었다. 누구든지 그 날에 스스로를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짐을 당하였다.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레위기 23:29.
대속죄일은 1년 동안의 삶을 종결짓는 엄숙한 심판의 날이며, 이 날의 판결은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의 생명이 유지되느냐 잃어버리느냐가 걸려 있는 운명의 날이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 날”을 준비하도록 하기 위하여 10일 전인 그 달 1일에 나팔을 불어 알린다.

대속죄일은 Tishri라고 부르는 7월 10일이었는데, 오늘날의 달력으로 9~10월에 해당된다. 이 날을 위한 특별한 준비 기간은 Tishri의 첫 번째 날에 시작된다. 이 날에 대하여 유대인 백과사전은 “속죄”라는 제목아래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Tishri의 첫 10일은 한 해를 마감하는 참회의 기간인데, 이 특별한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재 탄생되었으며, 그들의 마음에 완전한 변화를 가져오는 날이었다. 대속죄일에는 종교의 가장 큰 선물인 하나님의 용서의 자비가 인간에게 내려옴으로 그 극치를 이룬다 ... 유대인들은 Tishri의 10번째(마지막) 날에 인간의 행위가 최종적으로 심판을 받고 그의 운명이 결정되어지며, 하늘의 선고가 봉인되는 날이라고 생각하였다.” 유대인 백과사전 제2권, p. 281.

유대인들은 대속죄일에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보좌에 앉으실 때에, 하늘의 기록책이 열리는데 모든 사람의 생애와 서명이 거기에 기록되어 있다. 큰 나팔소리가 울리고, 작고 조용한 음성이 들린다. 천사들은 이 날이 대속죄일이라고 외치며 전율한다. 하나님의 성직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지 않기 때문이다. 양떼들이 목자의 지팡이 아래서 검사를 받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모든 인간의 영원한 생명을 정하시고 그들의 마지막 운명을 결정짓기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을 그분 앞으로 지나가게 하신다. 새해 첫째 날에 선고가 기록되고, 대속죄일에 누가 살고 죽게 될지를 결정한다. 그러나 회개와 기도와 자선은 그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유대인 백과사전 제2권 p.286

레위기 16장에 기록된 대속죄일

대속죄일의 의식에 대한 설명은 레위기 16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먼저 레위기 16장 전체를 주의깊게 읽으면서 대속죄일의 의식과 절차를 살펴본 다음,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중요한 영적 의미들을 연구하도록 하자

1절: 아론의 두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
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3절: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고 수양으로 번제물을 삼고
4절: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고의를 살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
5절: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 제물을 위하여 염소 둘과 번제물을 위하여 수양 하나를 취할지니라
6절: 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권속을 위하여 속죄하고
7절: 또 그 두 염소를 취하여 회막문 여호와 앞에 두고
8절: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9절: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를 속죄제를 드리고
10절: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는 산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11절: 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권속을 위하여 속죄하고 자기를 위한 그 속죄제 수송아지를 잡고
12절: 향로를 취하여 여호와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13절: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며
14절: 그는 또 수송아지의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15절: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지니
16절: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를 인하여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같이 할 것이요
17절:그가 지성소에 속죄하러 들어가서 자기와 그 권속과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고 나오기까지는 누구든지 회막에 있지 못할것이며
18절: 그는 여호와 앞 단으로 나와서 그것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곧 그 수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를 취하여 단 귀퉁이 뿔들에 바르고
19절: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 번 뿌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 할 것이요
20절: 그 지성소와 회막과 단을 위하여 속죄하기를 마친 후에 산 염소를 드리되
21절: 아론은 두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22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23절: 아론은 회막에 들어가서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입었던 세마포 옷을 벗어 거기두고
24절: 거룩한 곳에서 물로 몸을 씻고 자기 옷을 입고 나와서 자기의 번제와 백성의 번제를 드려 자기와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25절: 속죄제 희생의 기름을 단에 불사를 것이요
26절: 염소를 아사셀에게 보낸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진에 들어올 것이며
27절: 속죄제 수송아지와 속죄제 염소의 피를 성소로 들여다가 속죄하였은즉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으로 내어다가 불사를 것이요
28절: 불사른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후에 진에 들어올지니라
29절: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칠월 곧 그 달 십 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30절: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31절: 이는 너희에게 큰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
32절: 그 기름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그 아비를 대신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는 제사장은 속죄하되 세마포 옷 곧 성의를 입고
33절: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며 회막과 단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제사장들과 백성의 회중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34절: 이는 너희의 영원히 지킬 규례라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를 위하여 일 년 일 차 속죄할 것이니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대속죄일의 2가지 목적

레위기 16장 연구를 통하여 우리는 대속죄일에 이루어지는 정결에 두 가지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로, 물건들, 즉 거룩한 곳과 단과 같은 성소와 기구를 정결케 하는 일이며, 둘째로는 제사장들과 백성들을 정결케 하는 것이다(16,19,30절). 속죄는 물건들과 사람들 모두를 위하여 이루어졌다(11,16,18,30,33,34절). 이 두 가지 목적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한쪽이 다른 쪽을 서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대로 우리는 그 두 가지를 분명히 구별하여 생각하여야 한다.

거룩한 곳, 성소가 정결케 되어야만 했던 이유는 성소 자체나 기구에 어떤 죄나 악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로 인하여 더럽혀진 것들을 정결케하는 것이다(16절). 번제단도 마찬가지이다. 제사장은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 해야만 하였다(19절).

그러므로 성소와 번제단이 부정케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들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부정은 한 해 동안 매일드리는 봉사를 통하여 쌓여왔던 것이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양이 희생되어 그 피가 번제단 주위에 뿌려졌다. 매일드리는 제사에서, 죄인이 양의 머리 위에 안수할 때에 상징적으로 죄는 죄인에게서 양으로 옮기워지며, 죄인이 양의 목을 갈라 죽이고 나서 제사장이 그 피를 성소로 가지고 들어갈 때에 상징적으로 양에게 전가되었던 죄는 다시 피를 통하여 성소로 옮겨졌다. 그리고 제사장이 그 피를 단과 휘장 앞에 뿌렸을 때에 상징적으로 죄인의 죄는 단과 휘장으로 옮기워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죄인의 죄로 인하여 성소와 번제단이 부정케 되었던 것이다. 대속죄일의 의식은 일년 동안 성소 안에 쌓여온 모든 죄들을 도말하여 버림으로써, 성소와 제사장과 백성들을 정결케 하는 과정이었다.

2부 - 이미 용서받은 사람들이 또다시 정결케 함을 받아야만 합니까?


어떤 독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드리는 제사를 통하여 죄에 대한 용서를 이미 받았는데, 왜 또 다시 연말의 대속죄일에 정결케 함을 받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고 싶을 것이다.

“그들은 지나간 한 해 동안 필요할 때마다 속죄제물을 바침으로 그들의 죄를 고백하였고 용서를 받지 않았는가? 왜 그들은 용서를 두 번 받아야만 했는가? 왜 해마다 죄를 다시 생각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히브리서 10장에 있는 성경 구절에 대해서 의아심을 표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히브리서 10:2,3
이 질문에 대답하기 앞서 먼저, 구원은 죄인의 회개와 인내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를 용서해주시지만, 이 용서가 그 죄인의 장래의 일과 상관없이 무조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번 회개했다고 구원이 최종적으로 확정되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반드시 유지되고 지속되어야만 한다. 선지자 에스겔이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에스겔 18:24. 회개와 의로운 삶은 유지되어야 하며, 다시 악으로 돌아갈 때에는 하나님의 용서와 의롭다하심도 취소될 수 있다.
이 말씀은 만약 어떤 사람이 의로운 길로부터 돌이켜 악한 일들을 행하면 그가 전에 행했던 모든 의로운 일들이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대 상태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악인이 그의 악한 일로부터 돌이키면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게되는 것이다(22절). 회개의 심령이 생애 속에서 유지될 때에만 하나님의 용서도 유효할 수 있는 것이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도 우리는 이러한 구원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였을 때에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마태복음 18:26,27) 그러나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며”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었다.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18:28~35).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는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는 우리의 자비와 용서에 비례한다.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들의 모든 기록을 가지고 계신다. 진정한 마음으로 드린 회개의 기도가 하나님께 이르면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베푸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용서를 받고 난 후에도 그들의 마음이 바뀌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들이 회개했음을 후회한다. 그들은 그들의 생활을 통하여 그들의 회개가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처음부터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용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일단 용서라고 그들의 이름 옆에 써놓으시고 마지막으로 죄를 소멸할 때까지 기다리심으로 그들에게 그 문제에 관하여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시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마지막 생애 속에서 그들의 죄를 미워하는 진실된 회개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회개를 성실한 것으로 인정하시면서 마지막 심판의 날에 그들의 모든 죄의 기록들을 완전히 소멸해 주신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그렇게 행하였던 것이다. 대속죄일이 다가오면, 전에 범죄 했던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아직도 동일한 회개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만약 그들이 그렇다면, 그들이 고백했던 죄에 대한 기록들은 대속죄일에 소멸될 것이고 그들은 완전하게 정결케 됨을 얻게되는 것이다.

3부 - 심판의 날, 대속죄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대속죄일은 심판의 날이었다. 한 해 동안 범죄한 사람들은 성전에 나와서 그들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다. 대속죄일에는 그들의 죄들이 하나님 앞에서 재검토되는데 이 사건을 히브리서 10:3절은 “해마다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날에, 진실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또 다시 바치는 경험을 하였으며, 그들의 회개를 확고히 하였다. “이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레위기 16:30. 이 날이 마쳐지고 집으로 돌아갈 때에 그들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너의 모든 죄로부터 정결케 되라.” 얼마나 놀라운 확신인가! 이와 같은 약속이 신약에도 나온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9. 단지, 용서만 받는 것이 아니라 정결함도 얻을 수 있다!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마지막 심판의 날에 관하여 요한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요한계시록 20:12. 대속죄일은 바로 이러한 날이다. 비록 구약 시대의 지상 성소 안에 책이 보관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일년 동안의 피뿌림을 통하여 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드려진 번제의 핏방울을 단 위에 뿌림으로 그들의 범죄의 기록이 남겨졌다. 번제단 뿔과 분향단에도, 죄인들이 용서를 얻기 위하여 가지고 온 희생 제물의 피가 발라짐으로 백성들의 죄의 기록이 남겨졌다.

대속죄일에는 전에 이미 용서를 받은 죄들의 기록들이 완전히 없어지게 되는 반면에,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은 영원히 “끊어짐”을 당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소는 한 해 동안 쌓여온 죄들의 기록들로부터 정결케 함을 얻었다. 죄들은 더 이상 백성들을 상대로 증거가 될 수 없었다. 대속은 완성되었으며, 그들은 더 이상 정죄 아래 있지 아니하였다. 더 이상 죄에 대한 기록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대표

대제사장은 모든 백성을 대표하며,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모든 것들은 제사장 직분 안에 모아지고 응결되어진다. 그가 죄를 지으면, 백성들이 죄를 지은 것으로 간주된다.
아담은 인간의 대표였다. 그에 의하여 “죄가 이 땅에 들어왔다.” (로마서 5:12) 그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 되었다.” (19절)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고”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 (17,15절)

그리스도께서도 또한 인간의 대표자이시다. 그는 둘째 아담이시자 마지막 아담이시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5:47) 둘째 아담은 “하늘에서 나셨으며” 첫째 아담이 범죄를 통하여 이룬 모든 것들을 회복시키셨다. 첫번째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죄인이 되었다.” 그러나 두번째 사람의 순종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의롭게 함을 입었다.”(로마서 5:19) 첫번째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심판이 모든 사람들에게 미쳐 정죄를 이루었다.” 그러나 둘째 사람의 의로 인하여 “은혜의 선물이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 의롭다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 (17,18절)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15:22)
대제사장은 그리스도의 표상이요 국가의 대표였다. 국가의 대표자로서 그는 백성의 죄들과 함께 취급당하였고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의 표상으로서, 그는 백성들의 중보자였고 구세주였다. 그는 이 일들을 하나님과 함께 백성들을 위하여 행하였다. 그는 이러한 의미에서 백성들을 대표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시는 것은 그 안에 있는 백성들을 받으시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입는 예복의 치마 아래단에는 종이 달려 있다. 백성들은 대속죄일 날 대제사장의 옷에 붙어 있는 종이 소리를 내면서 울리는지의 여부에 온 주의를 집중하며 들었다. 지성소 안에서 대속이 이루어지고 화해가 완성된 후 대제사장이 거동을 시작하면서 들리는 종소리는 하나님께서 대속을 받아주셨다는 증거였다. 그가 밖으로 나와서 종소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더 확실히 들리면 백성들은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 안에 있는 그들을 다시 한번 받아주신 것이다.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지성소로 들어갈 때, 그는 백성들의 대표로서 들어가게 된다. 그 안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고 한 해 동안의 죄를 결말짓게 된다. 그들의 죄에 대한 기록은 번제단과 성소에 뿌려진 피로서 남아있다. 대속제일은 모든 죄들이 하나님 앞에서 재검토되는 최후 심판의 날이다. 대제사장은 분향의 연기로 감싸져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그 해 처음으로 죄가 지성소 하나님 앞으로 옮겨진다. 대제사장은 “수송아지의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린다.” 그렇게 함으로 “자기와 권속을 위한 속죄”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제 그는 깨끗해 졌다. 어떠한 죄가 그의 것으로 취급받았던지, 어떠한 죄가 그의 책임 안에 있었던지, 그 모든 죄들은 이제 성소로 옮겨졌다. 그는 이제 깨끗해졌다. 그러나 성소는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일을 요약하면 바로 다음과 같다: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대표하는 상태로서 하나님과 법 앞에 나아간다. 그는 그의 죄악들을 인정하였으며 피를 뿌렸다. 법은 이렇게 질문을 한다. “죄를 지었는가?” 대제사장은 “예. 저는 죄를 지었고 나의 죄들을 모두 고백하였습니다”고 대답한다. 법은 “죄의 값은 사망이다. 나에게는 죽음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대제사장은 이렇게 응답한다: “저는 희생의 피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것을 대신 받으십시오.”
피가 속죄소위에 뿌려진다. 죄인 대신에 대속제물이 받아들여졌다. 이 대속제물에 죄가 전가되었으며, 이 제물이 죄가 되었고, 죽음을 당하였다. 그가 범죄의 값을 치루었다. 그것은 죄인을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그 제물이 죄로 인한 빚을 갚아 주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음을 당하신 것뿐만이 아니라 죄 없는 자로서 돌아가셨다. 우리의 죄를 지심으로 그는 죽을 수밖에 없으셨다. 법이 죽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당신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다. 그는 죄가 없으셨다. 그러나 죽임을 당하셨다. 죄 없는 자의 죽음은 명확한 하나님의 계획의 한 부분이다. 죄인의 죽음은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충족시킨다. 죄 없는 자의 죽음은 죄인들을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요구를 충족시킨다.
대제사장은 수송아지를 드린 후 그 피를 속죄소 위와 앞에 뿌리며, 그 다음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장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아래 뿌릴지니,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를 인하여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 같이” 하라고 말씀하였다. (레위기 16:15,16)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여기서 수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려 한다. 수송아지의 피는 아론과 그의 권속을 위한 속죄를 이루었다. 염소의 피는 백성들과 성소를 위한 것이었다. (11, 15, 16절) 수송아지의 피가 성소를 위한 속죄나 정결을 이룬다는 언급은 전혀 없다. 이것은 분명히 염소의 피가 이루는 결과이다. (15, 16절) 그러한 이유는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모든 경우에 용서를 받는, 매일의 제사를 통한 피로 인하여 속죄가 이루어지며 죄가 성소로 옮겨진다. 죄인은 그의 죄들을 희생 제물에 옮기고 희생 제물은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그 피를 번제단이나 분향단의 뿔에 바르고, 또한 성소 안에 뿌려진다. 그 피는 죗된 피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죄인의 죄가 희생제물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이다. 그 죄는 상징적으로, 또한 의식적으로 뿌려진 곳을 더럽히게 된다. 그러므로 성소가 더럽혀짐을 당하는 것이다.
대제사장이 수송아지의 피를 뿌리고 나왔을 때, 그는 깨끗함을 입었다. 어떠한 죄를 그가 짊어졌던지 그 모든 죄들은 고백되어졌고 성소로 옮겨졌다. 그가 지성소에서 나올 때 그는 깨끗하고, 자유롭고, 거룩하고, 죄 없는 그리스도의 상징으로서 나오게 된다. 그는 그의 죄들을 고백하였으며, 용서를 받았으며, 더 이상 고백할 죄가 없다.

그가 이제 막 뿌리려고 하는 그 피의 주인인 하나님의 염소는 죄 없는 자를 상징한다. 그 해 동안 바쳐진 모든 제물들은 죄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를 상징하였다. 그는 죄 없는 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죄 그 자체가 되었다. 대속죄일의 염소 안에서 그는 무해하며, 정결하고, 죄 없는 자, 곧 하나님의 택하신 자로서 상징되어졌다.
대속죄일에 바쳐진 염소는 “거룩하고 악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히브리서 7:26) 죄 없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그 염소의 피는 죄가 전가된 피가 아니기 대문이며, 이 피는 깨끗하게 하는 역할을 하며, 성소를 정결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전가하지 않은 이 깨끗한 대속죄일의 피는 드디어 모든 죄의 기록을 깨끗이 씻어 도말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침 저녁에 피를 뿌림으로 행해지는 국가를 위한 제사는 그 날에 지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들을 포괄하고 있다. 단 위의 매일의 제사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던”,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로서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셨”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매일의 번제는 세상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주시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음을 당하심으로 그에게 오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실 수 있도록 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단 주위에 뿌려진 피는 임시적이고, 조건적인 속죄만을 상징하며, 범하였으나 아직 개인적으로 속죄되지 않은 죄들의 기록들을 가리킨다.
개인적으로 드려진 속죄제물들은 실제적으로는 속죄가 필요 되는 죄에 대한 기록들로 형성되어있다. 죄악들은 매일의 아침저녁의 제사를 통하여 이미 기록되어졌다. 이제 죄를 지은 모든 개인들은 요구되는 제물을 가지고 옴으로서 그들의 회개를 표시하며, 그 제물의 피는 번제단의 뿔이나 분향단의 뿔에 발라지고, 장막 앞에 뿌려지게된다. 이렇게 함으로서 그 피는 고백된 죄들을 기록하게 된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모든 고백된 죄들은 결국 성소 안으로 옮겨지게 된다. 만약 피가 직접 성소 안으로 옮겨지지 않을 때에는 제사장이 그 살을 먹음으로 그 죄를 옮기게 되며, 제사장들이 그들을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릴 때에는 다른 죄악들과 함께 성소 안으로 옮겨지게 된다.
이러한 지상 성소 의식은 범한 죄악들과 고백된 죄악들의 온전한 기록이 있는 하늘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사업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에 대속죄일이 닥치면,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죄들을 고백하고 그들의 고백을 피를 통하여 성소 안에 기록한다. 이 속죄의 사업을 마치기 위해서는 이제 그 기록들을 지워야 한다. 즉 그 죄들을 도말 하여야 하며, 피로 더렵혀진 성소를 정결케 해야만 한다. 이 일을 행하기 전에 대제사장은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자신과 그의 권속들을 위한 속죄를 행하게 되며, 그 후에 정결 작업이 시작된다. 지성소는 염소의 피로 정결케 되고, 성소도 정결케 된다. 이렇게 함으로 죄의 기록들이 도말 된다. 그 후에 단이 정결케 함을 얻는다.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 번 뿌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 할 것이요.” (레위기 16:19) 그렇게 함으로 “그 성소와 회막과 단을 위하여 속죄하기를 마친다.” (20절) 이제 모든 것들이 정결케 되었고, 화해되었으며, 속죄를 얻었다.
이제까지 백성들이 정결케 되는 일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그들의 죄를 고백하였다. 그들은 용서함을 받았다. 단지 그들의 죄에 대한 기록들만이 남아 있으며, 이 날에 그 모든 기록들이 도말 되어 버린다. 그들은 정결한 상태로 새로운 해를 시작하게 된다.
이제 마지막으로 수송아지의 피를 단 뿔에 바르는 문제를 생각하여 보자. (18절) 염소의 피를 단 뿔에 바르는 일은 더 많은 설명이 필요 없이 그것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왜 수송이지의 피를 사용하는 것일까?
대제사장은 백성 전체를 상징한다. 그는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사람으로서 그는 상징적으로 속죄를 이루며, 그의 대속죄일의 의식이 모두 끝나면 모든 죄들은 다루어지고, 모든 고백된 죄의 기록들이 도말 되어 버린다. 그가 이러한 죄들에 대한 고백을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하고, 또한 그들을 대신하여 대속을 얻는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그들을 정결케 하기 위하여 속죄를 얻어 모든 죄에서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정결하게 하도록 하였다. (30절)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대속죄일에 개인적인 속죄제물을 바치고 그들의 죄를 고백하는 일에 너무 늦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회개하였으나 성전에 너무 늦게 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팠거나 올 수 없는 형편에 있었거나, 또는 너무 멀리 살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속죄제물을 가지고 올 수 없었다. 이들이 끊어짐을 당할 것인가?
그들의 죄들도 매일 아침 저녁 희생을 통하여 기록되어졌다. 그러나 희생제물을 가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고백이 성전에 기록되지 못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제사장은 대속죄일에 피를 단 뿔에 바름으로 고백을 기록하고, 또한 용서를 얻는다. 그는 그 일을 행할 때에 만약 그 사람들이 올 수만 있었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제물을 바쳤을 것이라고 간주하고 그들의 회개도 그 속죄사업에 포함시킨다. 십자가상의 회개한 강도와 다른 사람들의 죄악들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고백된 죄악들에 대한 대속죄일의 사업은 끝마쳐졌다. 죄들을 고백하고 회개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죄가 도말 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들은 대제사장의 옷에서 나는 종소리를 들었다. 그는 용서받은 것뿐만 아니라, 또한 정결함도 얻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9)

이 모든 의식을 다 끝마친 대제사장은 성소에서 나와 밖에 묶여져 있는 아사셀 염소 위에 모든 죄를 옮기는 의식을 안수를 통하여 행하게 된다. 이것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모든 죄들을 원래의 죄의 창시자였던 마귀에게 옮기는 것을 뜻했다. 모든 죄의 책임은 마귀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로 회개하고 죄를 도말한 경험이 있는 자들만 자신들의 죄를 아사셀 염소에게 떠넘길 수가 있었다. 누구에게 그러한 자격이 있는지를 살피기 위하여 대속죄일의 심판이 필요한 것이다. 죄를 전가시킨 아사셀 염소를 정한 사람의 손에 맡기어 광야로 끌고나가 방황하다가 죽게 만드는데, 이것은 천년기 동안 황폐한 지구에 홀로 갇혀 있다가 죽게 될 사단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아사셀 염소의 의식은 대속죄일의 의식이 끝난 후에 이루어졌다. 드디어 죄의 문제가 다 해결되는 끝마쳐지게 된 것이다.
이 모든 의식 절차들은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각자 개인들을 조사하시고 심판하실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죄인들이 진실로 회개한 것인지, 그리고 하늘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참된 품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보시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4부 - 지금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


하늘에 있는 세 가지 책들 - 생명책, 기념책, 죄의 책
 
지금까지 우리는 세상 역사가 끝나가는 마지막 시대에 하늘 성소가 정결하게 되는 대속죄일(심판)이 실제적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대속죄일의 심판 사업을 통해서 인류는 양과 염소의 두 무리로 나누어진다.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때에는 심판 사업에 의해서 의인으로 분류된 사람들을 데리러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의 대속죄일은 예수께서 재강림하시기 직전에 있는 심판의 시기인데, 그 심판은 각 사람의 생애가 기록된 책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하늘에는 사람들의 이름과 그 행위를 기록한 책이 있는데, 그것들에 의하여 심판의 판결이 결정된다. 다니엘 선지자는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놓였더라”고 말하였다(단 7:10). 사도 요한 역시 그 같은 광경을 묘사하면서 “또 책들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말하였다(계 20:12).
생명책에는 하나님을 변함없이 지속적인 신앙을 가지고 섬겨온 모든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눅 10:20). 바울은 그의 성실한 동역자들에 대하여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고 말하였다(빌 4:3). 다니엘은 “개국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란의 때를 미리 보면서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단 12:1),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얻을 것을 말하였다. 그리고 요한은 그 이름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이 하늘 도성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계 21:27).
하나님 앞에는 “기념책”이 있으며, 거기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들의 선한 행실이 기록되어 있다.(말 3:16). 믿음에서 나온 그들의 말, 사랑의 행위가 다 하늘의 책에 기록된다. 이에 대하여 느헤미야는 “내 하나님이여, 이 일을 인하여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나의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라고 말함으로써, 그 역시 하늘에 있는 기념책에 대해서 언급하였다(느 13:14). 하나님의 기념책에는 의로운 행위가 빠짐없이 영원히 기록된다. 거기에는 유혹을 물리친 것, 악을 이긴 것, 부드러운 말로 낙심해 있는 사람을 위로한 것 등등이 자세하게 기록된다. 그리고 모든 희생적인 해우이와 그리스도와 진리를 위하여 받은 고난과 슬픔이 모두 기록된다. 시편 기자는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였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하였다(시 56:8).
거기에는 또한 사람들의 죄악을 기록하는 책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전 12:14. 예수께서는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2:36). 은밀한 목적과 동기까지도 하늘의 기록에는 빠지지 않고 기록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고전 4:5). “보라 이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 내가 잠잠치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 ... 너희의 죄악과 너희 열조의 죄악을 함께 하리”라(사 65:6).

우리의 중보자
각 사람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 심사되어 성실한 것과 불성실한 것들이 기록된다. 하늘의 책들에는 각 사람의 이름 아래 온갖 악한 말, 모든 이기적 행위, 온갖 의무 태만, 모든 은밀한 죄, 모든 기만 등이 무서우리 만큼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늘의 경고와 견책을 등한히 여긴 것, 시간을 낭비한 것,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소홀히 여긴 것, 선악간의 감화와 그 결과가 멀리까지 미친 일이 모두 기록하는 천사에 의하여 기록되어진다.
하나님의 율법은 심판의 때에 사람의 품성과 생애를 측정하는 표준이 된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말하였다(전 12:13). 야고보는 그의 형제들에게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권면하였다(약 2:12).
심판에서 “합당히 여김을 입은” 사람들은 의인의 부활에 참여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저 세상 및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고 말씀하셨다(눅 20:35). 그분께서는 또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셨다(요 5:29). 곧 죽은 의인들은 심판의 때에 생명의 부활에 합당한 자라는 선고를 받고서야 비로소 부활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에 대한 기록이 하늘 심판정에 제출되어 조사를 받아 결정될 때에 개인적으로 그 자리에 출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의 생애에 대하여 기록한 책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중보자(변호사)로서 그들을 위하여 탄원하고자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일 2:1.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 9:24, 7:25.
심판의 때에 기록한 책들을 펼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의 생애가 하나님 앞에 나타난다. 우리의 대언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처음 생존한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하여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모든 사람의 사건을 제시하신다. 각 사람의 이름이 불리워지고, 모든 사건이 세밀하게 검토된다. 어떤 이름들은 가납되고, 어떤 이름들은 거절된다.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고 용서받지 못한 채 기록책에 죄를 남겨두고 있으면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서 지워지고 그들의 선행의 기록도 하나님의 기념책에서 지워질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고 선언하셨다(출 32:33). 선지자 에스겔은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면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다(겔 18:24).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 승리
그러나 진심으로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그들의 속죄제물로 주장한 사람들에게는 하늘 책에 기록된 그들의 이름 아래 용서받았다는 말이 기록된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그들의 품성이 하나님의 율법과 조화된다는 사실이 입증될 때, 그들의 죄는 도말되고 그들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주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사 43:25).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에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 3:5.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마 10:32.
세상 법정의 공판에 대하여 사람들이 나타내는 가장 큰 흥미도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들이 온 세상의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심사되는 하늘 법정에 기울이는 흥미에 비하면 다만 희미한 것에 불과하다. 중보자 되신 주께서는 당신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승리를 얻은 모든 사람이 그들의 죄를 용서받고 태초의 에덴 동산에서 다시 주님과 함께 살기를 고대하신다.
예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변호하고 중보하는 동안, 사단은 자신과 같은 범죄자로 하나님 앞에 고소한다. 사단은 그들을 의심에 빠뜨리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잃어버리게 하며,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 그분의 율법을 범하게 하고자 전력을 다해왔다. 이제 사단은 사람들의 생애에 관한 기록들을 지적하면서, 그들의 품성의 결함과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혔던 사실을 들추면서 그러한 죄들은 과거에 사단 자신이 범죄한 것과 동일한 죄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단은 그들을 자기 백성이라고 주장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죄에 대해서 변명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들이 범죄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진심으로 회개한 사실과, 그들의 생애 속에 나타난 믿음을 보여주시면서, 그들이 용서받은 것을 주장하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상한 손을 하나님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 앞에 드시고 “내가 저희 이름을 압니다. 내 손바닥에 저희 이름을 새겼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라고 호소하신다(시 51:17). 예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고소하는 사단을 향하여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고 말씀하신다(슥 3:2).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아버지께 충성된 백성들을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나타내기 위하여 당신의 의의 옷을 입히실 것이다(엡 5:27).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연고라”는 기록이 그들의 이름 아래에 기록되어 있다(계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