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천사가 그대 마음을 살필 때


두 하루의 차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채 그저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숨가쁘게 반복되는 생의 바퀴 속에서 그래도 그 '하루'는 그들에게 제법 많은 의미를 부여 할 수 있을것입니다.

얼마의 돈을 손에 쥘 수 있고 , 어떤 한가지 훌륭한 일을 성취할 수 있게 하고, 아니면 생의 의무들을 잊게 할 만큼의 들뜬 환락으로 채울수 있게도 하는.....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을 믿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산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의 하루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영원을 바라고 사는 우리 그리 스도인들의 하루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하루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매일 매일 싸워야 할 선과 악의 영적인 쟁투가 그리스도인 하루에는 있고, 또 매일 마땅히 얻어야 할 승리의 경험이 하루 속에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해 나타내야할 우리의 반응과 의무가 그리스도인의 하루 속에는 놓여 있으며, 뿐만 아니라 어제 십자가에 못박은 자아가 내일 다시 살아나지 않도록 주께 마음을 바치는 일이 매일 하루 하루 마다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매일 죽노라"고 말했던 사도 바울의 경험처럼.... 그러나 이런 무엇보다도 가장 엄숙한 사실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심판의 시간이 가까왔고,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는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열쇠가 되며, 그리고 매일의 우리의 '하루'는 하늘책에 정확하게 기록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사의 저울

만일 우리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구분해 놓은 휘장을 열어 사람들이 심판날에 다시 목격하게 될 모든 말과 행동을 기록하고 있는 천사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 날마다 하는 자기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그치게 될까요? 우리가 보이지 않는 세계의 휘장을 열 수 있다면, 그리고 만일 천사가 우리의 생각과 관심을 달아보는 큰 저울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본다면 우리의 생각은 얼마나 달라질까요? 한쪽 저울 판에는 하늘로 향하는 생각과 관심이 실려있고 다른 한쪽 저울에는 세상으로 향하는 생각과 관심이 실려있다면.... 세상으로 향하는 저울에는 쓸데없는 이야기 책을 읽는 것과, 겉치례와 허영, 자랑 등에 대한 생각들이 실려있는데 세상과 허영과 자랑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찬 저울은 무거워 속히 내려가 버리고 하늘로 향하는 생각과 관심을 실은 저울은 다른 쪽 저울이 내려갈
때 너무 가벼워서 속히 올라가 버린다면... 그리고 만일 그 천사가 "이런 사람들이 하늘에 들어갈 수 있을까? 결코 없다 . 그들의 소망는 헛된 것이며 빨리 회개 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 하는 말을 듣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엄숙한 순간이 될까요? 곧 세상에는 죽고 하나님에게는 살았노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천사들이 저울질 하고 있을 때 이렇게 나타난다면 말입니다. "하나님의 공평한 줄과 의의 추(사28:17)로 오늘 하루 우리의 모든 마음과 생각과 동기가 헤아려 진다면 말입니다.



하루는 영원을 결정한다

하나님의 기록은 조금의 오차도 없습니다.영원한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날마다 하늘의 책들에 기록의 양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얼마나 엄숙해 집니까? 한번 입에서 나온 말, 한번 나타낸 행위는 결단코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천사들은 선악간의 행위를 다 기록하여 둡니다. 세상의 가장 강한 정복자도 단 하루의 기록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우리의 행위, 우리의 말, 심지어 가장 은밀한 동기까지도 모두 행복과 불행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역할을 합니다. 실수없이 정확하게 연마된 예술가의 판화에 얼굴의 모양이 틀림없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처럼 사람의 품성도 하늘의 모든 기록에 충실하게 묘사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거룩한 분들에게 보여지지 않을수 없는 그 기록에 대하여 염려하는 일이 얼마나 드문지요. 어떤 사람이든지 그가 행한 악한 행동은 환한 낮에 행한 것이나 밤의 어둠 속에서 행한 것이나를 물론하고 우리를 취급하시는 하나님 앞에 공공연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그 모든 죄를 목격하고 절대로 잘못이 없는 기록으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죄는 그 부모 앞이나 처자와 친구들 앞에는 혹 숨길 수 있을지는 모르나 하늘에 있는 이들 앞에는 그것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어두운 밤이나 가장 교묘한 속임수나 단 하나의 생각까지도 숨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경건한 모양에 결코 속지 않으십니다. 주께서는 사람의 품성을 평가하시는데 결코 실수가 없으십니다.
만일 우리가 마음의 눈을 열어 하늘에서 우리의 죄의 고백과 회개를 받으시며 사랑의 눈물로 중보 기도 해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무심히 살아 넘겨버린 하루의 기록이 그분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고 있는가를 헤아릴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 당장 무릎꿇고 주의 보혈의 아름다운 피로 나의 하루의 추한 기록들을 지워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탄원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다시는 우리의 기록이 추하지 않게 되도록 하루 하루를 깨끗히 살게 해달라고 주님께 매달리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의 생을 기록한 페이지가 숨김없이 공평하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들어날 때가 점점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매일 자신들의 하루의 선택으로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고 있습니다.우리는 평생동안 해야할 사업의 엄청난 양에 압도 되지 말아야 할것인데 그이유는 그 모두를 단번에 살라는 요구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게는 하루만이 주어졌을 뿐이고 다만 하루씩 만을 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직 매일 하루씩만을 나와 동행하자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루의 특권과 기회를 얼마나 잘 이용했느냐 하는것으로 우리의 성패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매일 매일이 마지막 날인것 처럼 주님을 섬기도록 하라는 부르 심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우리들 각자가 숙고해야할 질문들이 있습니다. 나의 죄들은 용서를 받았는가? 죄짐을 지시는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가져 가셨는가? 나는 그리스도의 의로 정결케된 깨끗한 마음을 소유했는가?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된것같이 나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지금은 아직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때입니다. 그리고 아직 우리의 생의 기록의 오점들을 용서하시는 주의 피로 깨끗이 지울수 있는 때 입니다. 여러분은 원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의 생의 페이지가 하늘의 심판대 앞에 펼쳐질때 아름다운 기록으로 나타나게 되기를 .... 천사들의 저울에 여러분의 마음이 달릴때 하늘로 향한 관심과 영원에 대한 소망과 사랑이 가득하고 무겁게 나타나게 되기를.... "달아보니 부족함이 없다는"예수님의 칭찬을 받게 되기를.....

 

천사의 충고

두려워하지 마세요.
아무리 부끄럽고 치졸한 죄일지라도,
정직한 고백과 진실한 회개는
그대에게 하늘을 열어 줍니다.

괴로워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은 그대의 회개를 비웃고 조롱할지라도 ,
하나님은 그대를 가장 가치있는 존재로
껴안아 주실 겁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그대가 아무리 괴로운 낙망 속에서
방황할 때일지라도,
하나님의 강한 손은 여전히 그대 어깨 위에
놓여 있답니다.

실망하지 마세요.
돈많은 장노님과 세속적인 집사님이
가정과 세상에서 철저한 위선자로 살아갈지라도,
실망과 불신과 비난의 늪을 찾아가지 마세요.

겁내지 마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에게
아무리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그대가 그분의 사랑과 섭리를 기억한다면,
그분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심을 가지고
끝까지 좁을 길을 걸을 수 있답니다.

버려야 할 것은 버리세요.
세상이 던져주는 재물과 명예와 인기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이 그대의 양심과 생애에
티나 흠을 남기는 것이라면,
그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버림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세요.

간절하게 기다리세요.
노아나 롯의 때처럼 사람들이
심판의 기별을 무시하고 조롱할지라도,
그대만큼은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살아가세요.

권두언


성경에는 여러 가지 참으로 흥미 있는 예언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세하게 예언된 사건들이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성취되어 나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되고 과연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의 말씀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성경 예언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토록 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지요. 또한 다른 한가지 목적이 있다면, 앞으로 다가오는 위험에 대하여 경고해 주는 일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진리를 위해 싸우는 원수의 세력이 과연 누구이며 어떠한 교묘한 방법으로 역사할 것인가에 대하여 미리 알려 주어 그 위험을 피하게 하거나 진리를 수호하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예언들 중에서 기간에 관한 예언들이 있습니다. 특정한 기간들을 말씀해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는 동시에 그 때가 되면 무슨 일을 행하실 것인가, 또한 당신의 백성들이 어떻게 무엇을 미리 준비해야 할 지에 대하여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간적인 예언들이 성취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과 또한 그 미래를 아시는 지혜에 대하여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미래에 대하여 말씀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주께만 속한 일입니다. 그러나 흔히들 점쟁이들이나 점성술자들이 과거와 현재에 대하여 잘 알아 맞추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미래에 대한 예언들을 믿어 버리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도 과거와 현재에 대하여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들의 입장이나 과거에 한 일들을 간혹 그들이 잘 알아 맞추지마는, 그들이 말하는 미래들은 너무나도 엉뚱하면서 또한 틀리는 것들이 많이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번 호는 성경에 나타나 있는 가장 긴 예언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놀라운 성취는 물론 그 의미에 대하여 이해하시게 될 때에 여러분들에게 큰 영적인 축복이 임하게 되실 것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연구하실 때에 창조주의 은혜가 여러분 속에 충만하시기를 간절하게 기도드립니다.

소돔을 겨우 빠져나온 롯의 간증


살아남는 이들 애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는 아브라함의 조카입니다. 성경은 나의 이름을 롯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나의 친척인 아브라함과는 달리 나의 이름은 겨우 구원 받은 사람 또는 우유부단한 그리스도인을 설명할 때에나 거론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나, 롯을 책망하면서 “나같으면 절대 롯처럼 하지 않았을 거야”라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나의 사정과 형편을 아신다면, 나를 지금보다는 더 많이 이해하고 동정하시게 될 것입니다.


나의 불행은 아브라함을 따라서 조용한 시골에서 살기로 선택하지 않았던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에게 먼저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을 때, 나는 소돔을 선택했습니다. “네(롯)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아브라함)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보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여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창세기 13:9~13. 그 당시 내가 소돔을 가족들의 거처로 정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소돔은 요단 계곡의 모든 도시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도 도시가 주는 안락과 편리, 그리고 밤거리를 빛내주는 화려한 네온싸인 같은 것들을 좋아하는 것처럼, 나 역시 그러한 것들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자녀들을 위한 좋은 학교가 있고, 큰 병원이 있으며, 도서실과 공원, 그리고 목욕탕과 수세식 변소가 있는 소돔이라는 도시는 우리 가족이 살기에 거의 완전한 장소처럼 보였습니다.


내가 소돔이라 불리우는 도시를 선택했을 때, 아브라함은 시골을 선택했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선택은 너무나 비합리적인 결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소돔을 채우고 있던 이기심과 물욕으로부터 나오는 강력한 힘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소돔을 선택했던 것은 소돔을 우아하고 세련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롯은 세속에 대한 욕심 때문에 소돔에서 살기로 선택했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오해입니다. 내가 좋아했던 것은 소돔의 죄악이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던 편리한 문명과 세련되어 보이는 매너였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은 그러한 것들 뒤에 숨어 있는 하나님과 진리를 조롱하는 정신을 올바로 직시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나의 아내와 자녀들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소돔의 도시인들의 삶을 채우고 있던 이기심과 경쟁하는 정신은 우리 가족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선지자 에스겔이 소돔 속에서 보았던 것을 보지 못한 것이 나의 결정적인 잘못이었습니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고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에스겔 16:49,50.


처음에는 소돔의 죄에 저항하는 삶을 얼마간 성공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가족은 소돔의 죄악과 타협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내 자신이 직접 그들의 죄에 참여하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돔인들이 즐기는 악에 익숙해져 갔습니다. 소돔에 있던 환락과 주연과 연회와 술취함이 점점 더 낮설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나의 딸들은 점차적으로 소돔에서 유행하는 화장과 옷 차림새로 바뀌어 갔습니다. 소돔 주민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우리 가족은 우리가 그동안 지켜온 신앙의 원칙들을 하나씩 둘씩 잃어 버렸습니다. 소돔으로 이사올 당시에 가졌던 믿음은 점차적으로 퇴색되어 그 분명한 색깔을 나타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나와 나의 가족들이 소돔에서 하루 하루를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동안, 하늘에서는 놀라운 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소돔성을 불로 심판하신다는 결정 말입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기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우리 가족들의 영적 감수성이 이미 너무나 둔해져 있었습니다. 어제처럼 오늘도 해가 뜨고 졌으며, 소돔의 모든 일상 생활들이 아무런 변화없이 평화롭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곧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이 성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말은 소돔 성 안에 사는 주민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믿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아침의 밝은 태양빛에 빛나는 도시는 영원한 번영과 평화를 보장하는듯 보였습니다. 거리마다 넘치는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은 소돔이야말로 생명력이 넘치는 도시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산으로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는 경고의 기별을 전했지만, 소돔의 성직자들은 “안심하라. 심판이 내릴만한 이유가 없다. 광신과 극단을 조심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매우 혼돈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롯은 너무나 우유부단한 사람이야”라고 말하지만, 그 당시의 소돔의 모습과 상황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쉽게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쨋든 나는 천사가 전한 멸망의 기별을 가지고 결혼한 자녀들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을 떠나라”는 천사의 말을 전했지만, 그들은 나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며 나의 “미신적 공포심”을 재미있는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미 나의 아들과 딸들도 소돔의 남편과 아내와 함께 사는 동안 소돔의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소돔에 깊이 밀착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이 세상이 불로 멸망당하게 될 것이라는 마지막 심판의 기별을 조롱하며 웃는 것처럼, 나의 자녀들과 사위들과 며누리들도 곧 소돔이 멸망당할 것이라는 기별을 듣고 조롱하며 웃었습니다. 심판의 기별을 전하는 순간, 나는 자녀들에게 망령이 든 노인 취급을 받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아브라함을 따라 시골에서 신앙과 순결함을 지키지 않고, 도시가 주는 매혹과 편리함에 이끌려 소돔으로 이사하기로 한 나의 결정 때문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발걸음은 정말로 무거웠습니다. 천사들은 나의 아내와 아직 출가하지 않은 두 딸을 데리고 도시를 떠나라고 하였지만, 나는 지체하였습니다. 자녀들을 곧 멸망당할 곳에 버려두고 떠나야만 하는 슬픔, 그리고 평생을 모아온 재산과 집문서와 저금 통장과 새로 산 마차를 버리고 떠나야 한다는 안타까움은 나를 지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아름다운 집과 가구, 그리고 전 재산을 버리고 빈털털이의 방랑자로 소돔성을 그렇게 갑자기 떠난다는 것은 나의 가족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비록 내가 소돔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악한 죄들을 보면서 근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그 죄악의 무서움을 진정으로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을 심판하심으로써 죄악의 물결을 저지해야만 하는 이유와 필요성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나처럼 지체하고 우유부단하게 되는 것같습니다. 그날 밤에 하늘의 사자들이 나와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아 소돔 밖으로 끌고 나가지 않았더라면, 나의 가족은 그 곳을 떠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마지막 심판의 밤, 천사는 우리 가족 중 누구든지 저주받은 소돔성을 바라보든지, 그처럼 아름다운 집을 떠나기 싫어서 한 순간이라도 머뭇거리면서 뒤돌아 보면, 그 사람은 생명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우리는 그 동안 우리를 묶어온 소돔에 대한 모든 애착심의 끈을 끊어 버려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의 아내는 그 끈을 확실하게 끈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그만 아쉬운 마음으로 뒤를 돌아다보고 말았습니다. 몸은 소돔을 빠져나와 들에 있었지만, 마음은 소돔에 달라붙어 있었으므로 그것과 함께 멸망당했던 것입니다. 그날 밤, 그녀는 소금으로 만든 심판의 기념비가 되고 말았습니다. “만일 내가 주저하지 않고, 지체하지 않고, 우유부단하지 않고, 천사가 전한 심판의 기별을 듣고 이유를 달거나 항의하는 말을 하지 않고, 곧 바로 순종하여 부지런히 산으로 도망하였더라면, 아내는 그녀를 소금 기둥으로 만든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을텐데”라는 후회와 양심의 가책이 아직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가족의 제사장인 나의 머뭇거림과 지체함이 아내로 하여금 하나님의 경고를 경시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소돔의 멸망은 죄가 그 한계선이 이르고, 악이 그 잔을 채우고 넘칠 때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끝남과 함께 심판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교훈으로 남겨주었습니다. 호소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면서 자기의 길을 끝까지 고집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는 선언을 내리실 것입니다(호 4:17). 소돔의 멸망을 직접 지켜 보았던 내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줄 수 있는 경험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도 세상의 죄악과 향락을 택하여 돌아선 사람들에게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소돔성의 주민들보다도 훨씬 견디기 어려운 형벌이 내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지난 날의 나와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집을 선택함에 있어서 자신과 가족들을 둘러싸고 있는 도덕적, 신앙적 감화보다는 그들이 얻을 이익과 헤택에 촛점을 맞추는 모습을 봅니다. 시골의 아름답고 조용하며 단순한 생활보다는 도시의 번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번영과 부를 바라보고 도시로 찾아온 사람들에게 악마는 돈을 던져주고 그대신 그들의 시간과 건강을 빼앗아 갑니다. 마귀가 뿌려놓은 돈을 주우면서 바쁘게 사는 동안, 그들은 그들에게 오직 한번 주어진 인생이라는 구원의 기회를 낭비해 버립니다.


아브라함과 나는 한 때 같은 장막에 거하면서 한 제단에서 예배드리며 살았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한 동네에 살면서 같은 교회에 다닌 것과 마찬가지죠. 그러나 아브라함이 조용한 시골에 살면서 하나님을 경배하기로 선택했을 때, 나는 도시가 주는 이익과 혜택을 위하여 소돔을 선택하였습니다. 나의 이러한 선택의 결과로 인하여, 나의 자녀들은 우상 숭배자들과 날마다 교제를 나누게 되었고, 그들의 풍습과 정신을 따라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비록 내가 심중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날마다 귀에 들리는 소돔의 죗된 대화와 도무지 저지할 수 없는 죄악의 물결로 인하여 번민하여 살았지만, 나는 불에서 꺼낸 나무처럼 겨우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말년에 재산은 모두 없어지고, 아내와 자녀들을 잃어버리고, 야수처럼 산속의 동굴에 살면서 노년의 생애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나의 후손들은 소돔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우상 숭배자들이 되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성경에 모압과 암몬 족속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즉,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가장 많이 괴롭히는 두 족속으로 성경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한 때, 아브라함은 나의 가장 절친한 친척이었지만, 이제 우리 두 가족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현명하지 못한 발걸음 하나를 잘못 내딛은 결과로 인하여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맞이할 수 있는지를 여러분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나는 지체함과 우유부단함으로 인하여 겨우 구원받은 대표적 인물로 남게 되었습니다.


나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와 교훈을 주기 위해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부디 여러분들 각자가 자신에게 알맞는 교훈들을 개인적으로 얻게 되시길 기원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 자신과 가족을 진리와 의의 길로 끝까지 인도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이만 줄입니다.

소돔에서 겨우 구원받은 롯 드림

 

 

사랑인 것과 사랑이 아닌 것


사랑이 아닌 것 : 계명과 분리된 사랑

기독교회에 사랑과 계명을 분리시키려는 위험한 움직임이 널리 전파되고 있다. 마치 십계명을 폐지시키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 것처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아마도 그러한 사람들은 예수께서 율법을 지킨다고 공언하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을 여러 차례에 걸쳐서 공개적으로 책망하는 장면들을 성경 속에서 읽으면서 이러한 오해를 갖게 된 것같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하게 구별해서 생각해야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의 율법주의적인 외식과 위선을 책망하신 것이지 율법과 십계명 자체를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께서는 계명을 열심히 지켜야 된다고 강조하던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의 외식과 위선을 책망하면서 그들에게 “새 계명”을 지킬 것을 명령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그 당시 이미 십계명이 있었는데, 왜 예수께서는 “ 새 계명”을 주셨을까? 이 말씀은 예수께서 구약 시대의 십계명을 폐지시키고, 신약시대를 위한 새로운 계명을 주신다는 의미인가? 아니다. 그렇게 해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 이미 계명은 영원토록 불변할 것이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7,18.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요일 2:7.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계명을 언급하신 진정한 의도는 유대인들이 그토록 열심으로 따르던 십계명은 행위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지키는 것이라는 진리를 밝히는 것이었다. 십계명 중에서 첫째부터 네째까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에 관한 계명이고, 다섯째부터 열째까지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에 관한 계명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과 우상을 섬기지 않을 것이며,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부모를 공경하게 되고, 간음하지 않을 것이며, 도둑질이나 거짓말을 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그 전체가 사랑에 대한 이야기 임에 틀림없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계명과 사랑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계명의 근본 정신인 사랑을 보지 못했지만, 예수께서는 계명과 사랑은 서로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14.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 없이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마음 속에 사랑을 품지 않은 채 계명을 지키는 것처럼 불가능한 것은 없다. 마음 속에 참된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십계명을 지킨다고 공공연히 말하면서도 그들의 삶 속에서는 거짓말과 탐욕과 돈과 재물과 정욕의 우상을 섬기며 살았다. 바로 이러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의 모습을 지적하시면서, 예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던 것이다. 사도 요한은 처음부터 존재하였던 십계명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새 계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요이 1:5. 요한은 계속해서 사랑이라는 새 계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요이 1:6. 유대인들의 마음과 정신이 이기심과 물욕으로 깊이 물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근원을 치료해주기 위하여 그들의 눈을 “사랑”으로 돌리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요한은 사랑이라는 “새 계명”을 언급하였던 것이다.

 

사랑이 아닌 것 : 원칙과 분리된 사랑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우리가 한가지 기억해야 될 사실이 있는데, 사랑에는 원칙이 있다는 것이다. 원칙이 무너져 있는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자신이 알고 있는 도덕적 원칙과 진리 안에서 실행되어야 한다. 계명과 원칙과 진리 밖에서 사랑이 행하여 질 때, 그것은 인간적인 감정이지 사랑이 아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랑은 진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도 요한은 원칙(계명)과 사랑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하나님)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요일 2:2~5


사랑은 진리와 원칙과 헌신과 희생으로 물들어져 있어야 한다. 계명과 원칙이 빠져 있는 값싼 사랑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회가 이렇게 어지럽게 되었다. 사랑이 원칙으로부터 분리될 때, 사랑은 값싼 감정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서 사랑과 원칙이 분리되면서부터, 성경이 요구하는 계명과 진리는 어떠하든지 간에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착각이 시작되게 되었다. 자신의 가정과 사회 생활 속에 부도덕과 죄가 가득한 사람도 교회에서 열심히 사랑(?)의 봉사를 하는 생애를 살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신앙 속에 은연 중에 깊이 잠식되어 있다. 봉사와 구제와 같은 사랑의 행위를 아무리 많이 베푼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생활이 정직하지 못하면, 그의 사랑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자신은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살면서도 입으로는 “사랑 타령”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오늘날 교회가 이토록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지 못하게 된 커다란 이유 중의 하나이다. 원칙이 무너진 사랑,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다!


사랑 안에는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예의의 향기가 담겨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랑 안에는 가난한 심령과 의를 갈급하는 마음이 새겨져 있어야 한다. 사랑이 이러한 진리들로 구성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연예인들이 말하는 사랑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부터 도무지 흉내낼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사랑을 쵸코렛처럼 달콤한 것으로 표현하지만, 성경은 “사랑은 오래 참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13장 참조).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 원칙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강력한 힘과 충격으로 상대방에게 전달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높은 산 위에 앉아 있는 어떤 도인의 마음 속에서만 맴도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매우 활동적인 것이며 또한 원칙과 진리에 의거하여 표현되기 때문에, 그것은 가정과 이웃과 교회에서 분명한 빛과 생명력을 전달하게 된다.


사랑이 아닌 것 : 마음과 분리된 사랑

사랑은 행위로 표현된다. 하나님의 사랑도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허락하는 행위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사랑이 행위로 표현되는 것은 사실일지라도, 마음과 분리된 사랑의 행위 자체는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이웃과 형제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또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도와 주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사랑은 무엇인가? 도데체 어떤 것이 사랑인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매우 독특한 방법으로 사랑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는 거기서 사랑이 아닌 것들을 통하여 참 사랑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다 함께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어보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런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1~3. 바울은 방언과 천사의 말도 그 자체는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예언을 하고 모든 비밀을 알지라도 그 자체는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그 자체는 사랑이 아니라도 말하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구제를 할지라도 그 자체는 사랑이 아니라도 말하고 있다. 심지어는 내 몸을 불사르는데에 내어 줄지라도 그 자체는 사랑이 아니라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랑이라는 말인가?


계속되는 바울의 설명은 어떤 사람이 진정한 사랑을 소유한 사람인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치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self-seeking, 자기 뜻대로 하는),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7.


바울은 사랑은 솜사탕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오래 참지 아니하면 그 사람에게 사랑이 없다는 말이다. 온유하지 않으면 사랑이 없는 것이다. 투기하면 그 사람에게 순결한 사랑이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고 예의없이 대하면 그 사람에게 사랑이 없는 것이다. 구제와 자선과 같은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자는 사랑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사랑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바를 해주는 것이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데에도 예의가 있어야 하며, 자기가 원하는 방법대로(self-seeking, 자기 뜻대로)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다른 사람의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는 참된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랑을 가진 사람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그의 양심은 곧바르며 언제나 진리와 진실의 편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바울이 설명하는 이러한 사랑은 감정적인 싸구려 사랑이 발붙힐 틈이 전혀 없는 참 사랑이다.


바울은 자선과 구제의 행위를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랑은 행위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는데, 이것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정신과도 일치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12. 사랑의 표준은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어떤 것도 이것보다 부족한 것은 성경이 요구하는 사랑이 아니다.


마태복음 5장에는 예수님의 취임 설교(팔복)가 나온다. 일반적으로 취임 설교에는 목사님이 그 교회에서 시무하는 동안 전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 담겨지게 된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취임 설교 즉, 산상수훈(팔복)에도 행위와 형식에 붙잡혀 있는 유대인들에게 주는 중요한 메세지가 담겨져 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께서는 마음과 심령에 속한 문제들을 다루셨다.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음이 청결한 자 .... 예수께서는 수많은 예식과 희생 제도의 의미와 가치를 외면한 채 그것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형식에만 매달려 구원을 이루려고 애쓰는 유대인들을 보면서“너희들은 먼저 마음이 변화되어야 해” 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사랑은 철저하게 마음의 상태에 속한 문제이다. 마음에 사랑이 있어야만, 참된 사랑의 행위가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사랑은 억지로 만들어 낼 수 없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지금까지 사랑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이제부터는“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사랑의 대상이 되는 “네 이웃”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다. 왜 하나님께서 사랑의 대상을 설명하시면서 “먼 곳에 있는 가난한 사람을”, “아프리카와 같은 오지에 있는 병든 사람을”이라고 하지 않고, “네 이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여기서 이웃이란“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자”로서, 우리와 가까운 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분명하게 포함되어 있다.


사랑을 하되 나의 이웃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 나의 이웃에서부터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은 누구인가? 우리의 남편과 아내와 자녀와 부모이다. 그리고는 우리의 옆집에 사는 이웃이고 같은 믿음을 가진 교우들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사랑은 먼저 가정과 교회 안에서 먼저 실현되어야 하며, 그런 다음에 사랑으로 연합된 가정과 교회를 통하여 사회로 퍼져나가야 한다. 사랑이 이러한 법칙과 질서에 의해서 실행되지 않을 때, 우리는 여러가지 모순에 부딪치게 될 수 밖에 없다.

 

행복한 사람은 희생과 봉사로 평안한 휴식에 이르고,
불행한 사람은 과욕과 과로로 불안과 죽음에 이른다.

행복한 사람은 나누어 주다가 행복을 발견하고,
불행한 사람은 끌어 모으다가 불행에 빠진다.

행복한 사람은 하늘의 방법으로 세상 기쁨을 얻고,
불행한 사람은 세상 방법으로 하늘의 기쁨을 얻으려 애쓴다.

행복한 사람은 이미 행복하기 때문에 세상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처한 불행을 잊기 위해서 더 깊은 쾌락을 찾는다.

행복한 사람에게는 가난도 평안의 기회가 되지만,
불행한 사람에게는 재물도 고통의 원인이 된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과 싸워서 평화를 얻고,
불행한 사람은 남과 싸워서 불화를 얻는다.

행복한 사람은 남을 위해서 살고,
불행한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산다.

행복한 사람은 욕심을 버림으로서 행복에 이른다고 믿고,
불행한 사람은 욕심을 버리면 불행해 진다고 믿는다.

행복한 사람의 눈에는 다른 사람의 소원이 보이고,
불행한 사람의 눈에는 다른 사람의 허물이 보인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자복함으로 평안을 얻고,
불행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가리움으로 평안을 잃는다.

행복한 사람은 문밖에 나가 손님을 기다리고,
불행한 사람은 오는 손님도 내쫓는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조금 가진 것도 나누어 주고,
불행한 사람은 남이 가진 적은 것도 취하려 한다.

행복한 사람은 고난 속에서 교훈을 찾고,
불행한 사람은 고난 속에서 한을 품는다.

행복한 사람은 희생의 기회를 축복으로 여기고,
불행한 사람은 이익을 얻고도 불평을 쏟아낸다.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분노에 온유로 답하고,
불행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실수에 크게 화를 낸다.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잘못에서 자신의 책임을 찾아내고,
불행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도 남의 탓으로 돌린다.

행복한 사람은 남의 만족을 보면서 행복을 맛보고,
불행한 사람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남을 불쾌하게 한다.

행복한 사람은 높임을 받을까봐 두려워하고,
불행한 사람은 높임을 받지 못할까봐 두려워한다.

행복한 사람은 남의 고통을 동정하다가 자신의 고통을 잊어버리고,
불행한 사람은 자신의 고통에 몰두하다가 더 깊은 고통에 빠져든다.

행복한 사람은 악인이라도 긍휼히 여기고,
불행한 사람은 의인이라도 무시하고 미워한다.

아직도 당뇨 주사를 맞고 계십니까?


미국 당뇨병 협회의 발표에 의하면, 현재 미국에 1천4백만 명의 당뇨병 환자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그 중에 절반 이상은 자신이 당뇨병 환자인지도 모른 채 지내고 있다.

적어도 60초에 한명씩 당뇨병이라는 진단을 받고서 병원을 나서는 것으로 통계 자료는 말하고 있다. 당뇨병은 현대인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질병 중에서 랭킹 3-4위에 속하는 무서운 질병이다.
당뇨병은 나이에 제한 받지 않는 질병이다. 그것은 어린 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 까지 모든 나이의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질병이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생활 환경이 바뀜에 따라서 당뇨병이 발병될 수 있는 위험 요소들이 증가된다.
당뇨병의 발병률이 가장 높은 그룹은 45세 이상의 남녀들이며, 여성이 남성보다 발병률이 약간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출산 경험이 있는 여성들이 더욱 높은 경향을 나타낸다.
당뇨병이라는 이름은 혈당이 180 이상일 경우, 소변으로 당이 빠져 나오기 때문에 부쳐진 이름이다.
당뇨병의 증세는 심한 갈증, 과도한 소변량, 체중 감소와 함께 힘이 빠지는 현상 등이 생기며, 혈액 중의 당의 양이 높기 때문에 피부나 음부와 같은 점막 부위가 곰팡이에 의해서 감염되기 쉽다.
당뇨병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유아 당뇨(Type I)와 성인 당뇨(Type II)로 나누어 진다.

 

유아 당뇨 (Type I, 인슐린 의존형)
일반적으로 유아 당뇨는 15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에게 생기지만, 모든 나이의 사람들에게 발병될 수 있다. 유아 당뇨는 유전적인 요인과, 바이러스의 침입에 의해서 기인될 수 있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유아 당뇨가 바이러스의 감염에 의해서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몸 안에 들어온 바이러스가 베타 세포(췌장에서 인슐린을 생산하는 세포)를 파괴함으로서 유아 당뇨가 발병될 수 있다. 어린아이들의 당뇨병 증세도 어른들과 거의 유사하지만, 어린 아이의 경우에는 체중이 정상보다 부족한 상태에서 발병되는 경향이 있다. 유아 당뇨에 걸린 아이들은 식욕이 매우 왕성함에도 불구하고 키가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유아 당뇨에 걸린 아이들의 키는 당뇨병을 잘 조절하는 정도에 따라서 결정된다.
체내에서 인슐린을 전혀 만들어 내지 못하기 때문에 혈당치를 조절하기 위해서, 하루에 몇 차례씩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한다. 유아 당뇨는 매우 불안정하며, 혈당치의 변화폭이 매우 크기 때문에 조절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유아 당뇨의 경우, 인슐린 주사량은 몸의 크기에 따라서 결정되기 때문에, 어린 아이의 경우에는 몸이 성장함에 따라서 주사량이 증가되게 된다. 이러한 경우 어린 아이와 부모는 당뇨병이 악화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유아 당뇨는 반드시 세심한 조절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적어도 초기에는 반드시 전문가의 지도하에 치료 받아야 한다.


성인 당뇨 (Type II, 인슐린 비의존형)
성인 당뇨는 타입 II 라고도 불리 우는데, 주로 40세 이상의 성인들에게 발병된다. 성인 당뇨는 대체적으로 체중이 정상보다 많으며, 비활동적인 사람들과 정제되거나 가공된 식품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찾아 온다. 성인 당뇨의 경우, 유아 당뇨병과는 달리 체내에서 인슐린을 부분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 비만형의 성인들 가운데 80%에게 당뇨병이 발병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만형의 당뇨 환자들의 경우, 적당한 영양을 공급하는 상태에서 체중을 줄이는 것에 치료의 목표가 맞추어 진다. 체중이 정상으로 조절될 경우, 이러한 환자들은 인슐린 주사량을 크게 줄이거나 전혀 맞지 않을 수 있다. 신체에서의 인슐린 요구량은 몸의 크기에 근거하여 정해지기 때문에, 몸무게를 정상보다 5-10% 정도 낮게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당뇨병 환자들은 심장질환이나 혈관에 생기는 질환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매우 많이 있다. 미국의 경우, 당뇨병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의 75%가 혈관에 관련된 질병들과의 합병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뇨병은 간의 경화 현상, 췌장염, 췌장에 생기는 종양, 뇌하수체나 갑상선의 장애 등으로도 발전될 수 있다.
당뇨병에 먹는 약물의 안전도에 대한 의문이 제시되고 있다. 심한 빈혈, 황달, 저혈당으로 인한 혼수 상태, 호흡이 짧아짐, 헤모글로빈 수치가 떨어짐 등과 같은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다음에 나오는 치료법은 주로 성인 당뇨를 위한 치료법이지만, 유아 당뇨에도 이와 유사한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


천연 치료법

1. 당뇨병을 정복하기 원하는가? 먼저 식탁에서 지방을 제거하라: 60명의 당뇨 환자들에게 지방이 전혀 포함되지 않는 식사(fat-free diet)를 공급하였더니 혈당치와 소변으로 빠져 나오는 당의 양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식단에서 지방을 완전히 제거한 후 3-4일만에 급격한 저하가 이루어졌다. 식물성 기름일지라도 철저하게 제한해야 한다. 지방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천연적인 상태의 너트류(호두, 알몬드, 잣 등)도 너무 많이 섭취하지 말아야 한다.
2. 규칙적으로 운동을 할 것: 운동은 당뇨병 환자에게 매우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 줄 뿐 아니라, 합병증으로 올 수 있는 심장 질환의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
3. 고섬유질의 식사를 할 것: 고섬유질의 식사는 식사 후의 혈당치를 낮추어 주고, 인슐린의 요구량을 저하시켜 주며, 세포 조직이 인슐린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게 만들어 준다. 정제되지 않은 천연 섬유질은 당뇨병의 정복에 있어서 필수적인 무기이다.
4. 과식을 조심할 것: 특히, 비만형의 환자나 비활동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과식은 매우 해로운 결과를 가지고 온다.
5. 복합 탄수화물(전분과 섬유질이 합성된 상태의 탄수화물)과 콩과식물의 섬유질을 많이 섭취할 것: 복합 탄수화물은 인슐린의 요구량을 낮추어 준다. 또한 섬유질은 탄수화물의 흡수를 지연시켜 주므로 식사 후에 당이 올라가는 것을 막아 준다. 한 실험 집단에게 8종류의 마른 콩으로 마련된 식사를 제공한 결과, 일반적인 식사를 하였던 사람들보다 혈당의 최고치가 45% 가량 저하되었다.
6. 설탕과 설탕이 함유되어 있는 식품을 경계할 것.
7. 우유와 설탕의 혼합 식품을 경계할 것.
8. 커피를 금할 것: 커피는 혈당을 비정상적으로 높인다. 카페인이 함유되어 있는 모든 종류를 금해야 한다. 당뇨병에 걸린 쥐에게 카페인을 주입하고 6시간 후에 혈당을 검사하였더니 평상시보다 2배나 높은 혈당치가 나왔다. 그러나 건강한 쥐에게 카페인을 주입하였더니 혈당치가 저하되는 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9. 질산염이나 아질산염으로 처리된 가공식품을 경계할 것: 고기를 장기 보존하기 위해서 처리하는 화학물질인 질산염(아질산염)은 암이나 당뇨병을 유발시키는 것으로 밝혀졌다.
10. 당뇨병 환자에게 있어서 식사 시간은 매우 중요한 문제임: 규칙적인 시간에 식사를 하게 되면, 인슐린 제조 공장인 췌장은 규칙적인 스케쥴에 따라서 기능을 수행하게 되고, 휴식시간에는 스스로 고장난 부위를 치료하게 된다. 또한 식사를 급히 하면, 혈당의 고저폭이 불안정하게 증대된다.
11. 마늘은 소변으로 빠져 나오는 당의 양을 줄여준다.
12. 먹는 피임약은 혈당의 조절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13. 당뇨병은 염증에 약하며, 염증의 치료를 지연시키기 때문에, 신체를 항상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면에 있어서, 충분한 휴식과 수면은 매우 필요하다.
14. 흡연을 금할 것: 흡연가는 비흡연가보다 인슐린의 요구량이 증대된다. 담배를 많이 피우는 사람의 경우에는 최고 30%까지 인슐린의 요구량이 증가한다.
15. 비만형의 당뇨환자의 경우, 1-5일의 금식은 매우 유익한 결과를 가지고 올 수 있음: 단, 금식은 전문가의 지도하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일반적으로 유아 당뇨 환자의 경우에는 금식을 해서는 안됨.
16. 요리하지 않은 신선한 채소의 섭취률을 증가시킬 것: 요리하지 않은 신선한 채소 섭취량을 증가시켰더니, 인슐린 요구량이 저하되었다.

 

아직도 인공 감미료를 사용하시나요?


장마다 가게마다 인스턴트 식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현대인들은 인공 감미료 및 화학 조미료(MSG)를 피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사실상, 인공 감미료의 원료인 아스파르테임이라는 물질은 우리 몸에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화학적으로 가공하여 만들어 낸 섭취할 인공 감미제를 섭취할 경우, 이것은 우리 몸에 해를 주는 매우 위험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인공 감미료는 음식의 맛을 돋구는 역할을 하지만, 그것을 장기간 동안 섭취할 경우에는 우리의 몸과 뇌에 매우 해로운 결과를 가져다 준다. 화학적으로 제조한 인공 감미료 대신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음식들, 채소, 과일, 견과류, 곡류 등과 같은 천연적인 식품으로 식단을 꾸미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건강에 유익한 방법이다. 인공 감미료는 식탁에서 제거하고 천연적인 식품을 섭취하면, 인공 감미료가 가져다 준 여러가지 증상들이 사라질 뿐 아니라, 머리가 맑아지고 더욱 건강함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공 감미제의 상표들
인공 감미료의 원료로 사용되는 아스파르테임(Aspartame)이라는 성분은 뉴트라 스웨트(Nutrasweet), 이퀄(Equal), 스푼풀(Spoonful), 그리고 이퀄 메절(Equal-Measure)이라는 상표로 마켓에 나와 있다. 인공 감미료는 1965년에 화학자 제임스 스레이터(James Schlatter)가 항궤양 약을 연구하던 중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1981년, 아스파르테임은 건조 식품들에 첨가될 수 있는 인가를 받았으며, 1983년에는 음료수에도 사용될 수 있는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1985년에는 몬산토가 이것을 사용해서 뉴트라 스웨트(Nutrasweet)라는 인공 감미제를 만들어 내었다.

인공 감미제의 부작용
아스파르테임은 식품에 첨가될 수 있는 성분으로 허락된 물질 중에서 가장 위험한 물질 중 하나이다. 아스파르테임은 미국의 식품 및 약품 기관(FDA)에 부작용이 따르는 성분으로 보고된 것들 중에서 7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물질이다. 아스파르테임이 일으키는 부작용 중에서 심각한 것은 발작과 죽음이다(1994년 2월에 미국 보건 복지부 보고서). 90여종에 이르는 다른 보고서들에서 찾을 수 있는 아스파르테임의 부작용은 다음과 같다.
두통 및 편두통, 어지러움, 발작, 메스꺼움, 마비, 근육 경련, 피로, 우울증, 체중 증가, 발진(rash), 불면증, 과민, 빈맥(tachycardia), 시력 및 청각 상실, 심계 항진(heart palpitations), 호흡 곤란, 기억력 상실, 현기증(vertigo), 관절의 통증, 불안, 귀에서 소리가 들림, 분명치 않은 발음(slurred speech), 그리고 입맛 상실.

관련 질병들
과학자들과 의사들의 연구에 의해 발견된 아스파르테임의 부작용들 중에서 다음에 열거된 만성 질병들이 더욱 악화되거나 시작될 수 있다.
뇌 종양, 만성 피로, 노년성 치매, 다발성 경화증(Multiple Sclerosis), 간질, 파킨슨병, 정신 장애, 임파선 암, 선천적 기형, 섬유 근육 류마티즘 및 당뇨병.

뇌 세포와 인공 감미료
아스파르테이트(aspartate)와 글루타메이트(glutamate)는 뇌 세포들 사이의 정보 전달을 촉진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너무 많은 양의 아스파르테이트와 글루타메이트는 오히려 과다한 양의 프리 래디칼(free radicals)들을 생기게 하고, 이로 인하여 세포들은 죽어가게 된다. 뇌 세포를 이러한 방법으로 죽이므로 아스파르테이트와 글루타메이트를 엑사이토탁신(Excitotoxins) 즉, 흥분시키는 독소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이러한 물질들은 세포들을 극도로 흥분시키고 결국에는 파괴되도록 이끈다.
아스파르틱산(Aspartic acid)이 아미노산(단백질)의 형태로 인체 내에 들어가게 되면 혈중 아스파르테이트와 글루타메이트의 양은 증가된다. 증가된 이 두 물질은 뇌의 어떤 부분에 글루타믹산과 아스파르테임으로 저장 내지 축적된다. 어린 아이들의 뇌 보호막은 완전히 개발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특별히 위험하다. 또한 뇌 보호막이 만성과 급성 질환들로 인하여 망가져 있는 경우에는 더욱 위험하다. 비록 뇌 보호막이 건강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글루타메이트와 아스파르테이트가 침투하여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과도한 양의 글루타메이트와 아스파르테이트는 뇌 세포들을 점진적으로 파괴시킨다.
어린아이들, 임산부, 노인, 그리고 만성 질환들을 가진 사람들은 인공 감미제의 섭취로 인하여 커다란 해를 받을 수 있다. 적지 않은 과학자들과 의사들이 아스파르테임을 염려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아스파르테임과 질병
아스파르테임은 여러 종류의 문제들을 가져온다. 어떤 문제들은 오랜 시간을 걸쳐서 나타나며 다른 문제들은 매우 짧은 시간 내에 증상을 나타낸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아스파르테임이 가져오는 증상으로 인하여 고생하고 있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증세를 없애기 위해서 여러가지 약을 먹지만, 그 증세를 가져오는 원인을 제거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1. 뇌암
1981년 사티아 두비(Satya Dubey)라는 미국 FDA의 통계학자는 아스파르테임과 뇌 종양의 관련성 때문에 뉴트라 스위트라는 상표로 사용되는 감미제의 사용을 허락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아스파르테임 생산회사에서 실시한 2년 간의 연구는 320마리의 쥐 중 아스파르테임을 먹인 12마리의 쥐에게서 뇌암의 발병을 발견하였다. 뇌암이 생긴 12마리 중 5 마리는 적은 양의 아스파르테임을 먹은 쥐였다.

2. 당뇨병
미국 당뇨협회 소속의 당뇨병 전문가이며 인공 감미료의 권위자인 H.J. Roberts 박사의 연구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드러났다.
1) 임상 당뇨병의 침전을 일으킨다.
2) 인슐린이나 당뇨병 약의 효력을 저하시킨다.
3) 당뇨병의 합병증인 망막염(retinopathy), 백내장, 신경장해, 그리고 위부전마비(gastroparesis) 등을 유발시킨다.
4) 발작을 일으킬 수 있다.

3. 정서질환
뇌 세로토닌(serotonin)의 분비량 저하, 우울증, 그리고 다른 정서 질환이 아스파르테임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수많은 연구 발표들이 나와 있다. 그리고 아스파르테임의 섭취를 완전히 중단함으로써 정서 질환이나 불안정이 완치된 사례들이 발표되었다. 과학자들은 아스파르테임에 의하여 뇌 속에서 분비되는 페닌알라닌의 양의 증가되면, 세로토닌의 분비량이 저하되게 되고, 그 결과 여러가지 정서질환이 오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켈리포니아 LA 주립대학(UCLA)의 윌리암 팔드리지(Dr. William M. Pardridge)박사는 미국 상원의 청문회에에 제시한 보고서에서 하루에 16 온스의 다이어트 청량 음료 4캔을 마시는 청년들에게서 페닌알라닌 양이 급속도로 증가하는 것을 증명하였다.

4. 간질 및 발작
미국의 MIT 대학에서 아스파르테임을 섭취하고 발작을 일으킨 80명을 조사한 결과 지역공동체 영양학 협회(Community Nutrition Institute)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80명에 대한 조사 결과, 아스파르테임은 시민들의 건강에 절박한 위험을 주는 화학 물질이므로 미국 FDA은 이와 관련된 식품을 신속히 시장에서 제거해야 한다.”
근래에는 아스파르테임으로 인해 생기는 급성 발작으로 고통당하는 비행기 조종사들을 위힌 핫라인(hotline)이 개설되었다. 600명이 넘는 비행기 조종사들이 아스파르테임으로 인한 급작스런 발작의 증상을 경험하였던 사실이 보고되었다.


왜 아스파르테임에 관해 들어보지 못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아스파르테임에 대한 심각한 반응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1) 아스파르테임에 관한 인식이 전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스파르테임이 원인인 질병은 신문에 크게 보도되지 않는다.
2) 아스파르테임을 한두번 섭취했다고 해서 증세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 동안 서서히 그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아스파르테임을 이용해서 인공감미제를 제조하는 회사들의 대대적인 선전 공세와 FDA의 잘못된 식품 인준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공 감미료를 아무런 경각심도 없이 섭취하고 있다.

아스파르테임이 함유되어 있는 식품
- 인스턴트 아침 식사(instant breakfasts)
- 구강 청소제(breath mints)
- 시리얼(cereals)
- 설탕이 들지 않은 껌
- 코코아 믹스 (cocoa mixes)
- 커피 음료수
- 냉동된 후식
- 젤라틴 후식
- 쥬스
- 완화제(laxative)
- 종합 비타민(multivitamins)
- 유제품(우유가 첨가된 제품)
- 제약(pharmaceuticals)과 보완제(supplements)
- 세이크 믹스(shake mixes)
- 청량 음료(soft drinks)
- 감미료(tabletop sweeteners)
- 차 음료(tea beverages)
- 인스턴트 차와 커피(instant teas and coffees)
- 표면 장식 믹스(topping mixes)
- 와인 청량음료(wine coolers)
- 요구르트(yogurt)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설탕이 첨가 되지 않은 식품들에는 인공 감미료가 첨가되어 있다.

서론 - 성경에서 가장 긴 예언


성소 진리를 파괴한 작은 뿔

성경에는 긴 기간의 예언들이 여러 번 등장한다. 1260년간의 중세기의 핍박에 대한 예언, 490년간 유대인들에게 다시 은혜의 기간을 허락하신 예언, 여섯째 나팔에 나오는 391년 동안 오토만 제국이 세력을 떨칠 것에 대한 예언 등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것들 보다도 훨씬 더 긴 기간에 대한 예언이 성경에 나타나는데 그 것이 바로 2300주야에 대한 예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분명히 이해해야 할 성경적 사실이 있다. 그것은 다니엘과 요한 계시록의 예언들의 초점이 작은 뿔 곧 짐승의 표의 막후 인물인 교황권이 하나님의 교회에게 어떠한 지장과 어려움을 초래하는지에 대한 활동을 미리 말해주는 예언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가 두 예언서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주제이다. 이것을 언급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 2300년에 대한 예언이 교황권이 진리를 땅에 던져 짓밟고 성소에 대한 이해를 훼파하여 버리는 일과 관련되어 등장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다니엘서의 내용이 선제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2300년에 대한 긴 기간에 대한 언급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한 뿔에서 또 작은 뿔 하나가 나서 남편과 동편과 또 영화로운 땅을 향하여 심히 커지더니 그것이 하늘 군대에 미칠 만큼 커져서 그 군대와 별 중에 몇을 땅에 떨어뜨리고 그것을 짓밟고 또 스스로 높아져서 군대의 주재를 대적하며 그에게 매일 드리는 제사를 제하여 버렸고 그의 성소를 헐었으며 범죄함을 인하여 백성과 매일 드리는 제사가 그것에게 붙인 바 되었고 그것이 또 진리를 땅에 던지며 자의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단 8:9~12)

여기에 나타나는 작은 뿔은 교황권을 의미한다(살아남는 이들 제 16호를 참조하기 바람). 이 세력이 남편과(아프리카 지방) 동편과(헬라, 바벨론, 페르샤, 앗시리아 지방) 또 영화로운 땅(유대 나라 지역)을 향하여 세력을 뻗어가는 것을 보아 이 세력은 서쪽으로 부터 오는 세력임에 틀림이 없다. 교황권은 성경 지리상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인 로마에서 오는 세력이다. 이 세력이 진리를 땅에 던지며 짓밟는다고 말씀하였다. 다시 부연할 필요없이 교황권은 중세기 동안에 많은 오류들을 이교로 부터 끌어 들여와 교회를 어둡게 하였고, 진리를 수호하는 많은 성도들을 박해하였다. 그런데 그(교황권)가 한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배도의 일은 매일 드리는 제사를 제하고 하나님의 성소를 헐어 버린 사실이다. 이 언급은 이 예언이 과연 누구에 대한 예언인지를 알아 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힌트이다. 로마 교황권이야말로 성경의 중심 사상인 성소 제도에 대한 진리를 훼손시켜 버린 장본인이다. 하늘로 승천하셔서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 성소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제사장의 역활을 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파괴하는 역활을 한 세력이 바로 교황권이다.

그 세력은 인간 신부 제도를 만들어 놓음으로써, 죄를 범한 사람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부들에게 가서 죄를 고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또한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와 권한을 교회에게 주셨다고 가르침으로써, 교인들은 교회에서 만든 인간의 전통들과 오류의 가르침들에 얽매어 살게 되었고, 하늘에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되었다. 마리아 상을 포함하여 수 많은 성자들의 상을 만들어 그것들에게 기도하도록 하여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의 사역을 가리워 놓았고, 성지들을 순례하는 등 여러가지 자선 사업들과 헌금들을 통하여 공로를 얻게 만드는 제도들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유일한 구원의 도리를 짓밟아 버렸다. 다시 말해서 하늘 성소에 대한 이해를 없이해 버림으로, 하나님의 구속의 오묘를 설명해 주고 있는 성소를 허물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의 이 예언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교황권의 활동에서 성취된 사실을 볼 수가 있다.

심판의 시간과 2300년 예언

이러한 예언의 말씀 후에 하늘에서 하나님과 한 거룩한 천사 사이에 나누어지는 대화를 소개하면서 2300주야 예언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들은즉 거룩한 자가 말하더니 다른 거룩한 자가 그 말하는 자에게 묻되 이상에 나타난 바 매일 드리는 제사와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일과 성소와 백성이 내어준바되며 짓밟힐 일이 어느 때까지 이를꼬 하매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 삼백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하였느니라.”(단 8:13,14)

이 문맥으로 보아 2300주야(일)에 대한 예언은 교황권 세력의 활동 중에서 구속의 의미를 담고 있는 성소 제도의 진리를 짓밟는 일과 명백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한 천사가 물었다. “다른 거룩한 자가 그 말하는 자에게 묻되 이상에 나타난 바 매일 드리는 제사와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일과 성소와 백성이 내어준바되며 짓밟힐 일이 어느 때까지 이를꼬 하매” 13절. 이 성경절은 “ 언제 이 성소가 정결케 되겠습니까?라고 묻는 질문이다. 이 질문의 의미는 “과연 언제나 하나님께서 이 교황권의 횡포를 심판하여 성도를 신원하여 주시겠습니까? 라고 묻는 것이다. 다니엘은 이미 이 교황권의 활동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어 성도들의 한을 풀어 주실 것에 대하여 먼저 기록해 둔 사실을 볼 수 있다. “내가 본즉 이 뿔이 성도들과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신원하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가 나라를 얻었더라.”(단 7:21,22)

신원하신다는 뜻은 심판하여 변호하여 주신다는 뜻이다. 다니엘 7장에 기록된 성도들을 위하여 변호하고 심판하여 주시겠다는 말씀이 8장에 와서는 더 자세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심판해 주실 시간에 대하여서 알려 주신 것이다. 그 시간이 바로 2300일에 대한 예언, 곧 성경 예언 기간에 대한 해석의 원칙에 의하여서 2300년에 대한 예언인 것이다.

성소 정결의 의미

이 예언의 초점은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는 언급에 있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 삼백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단 8:14. 성소가 정결해진다는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 이 표현은 유대인들이 성소 제도에서 사용하고 있는 의미를 살펴보아야만 그 뜻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성소가 정결케 된다는 의미는 대속되일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모든 죄를 심판하시고 도말해 없애심으로 성소에 있는 모든 죄들을 씻어 정결케 하신다는 뜻이다.

일년 내내 고백한 죄악들이 상징적으로 양의 피에 포함되어 성소 안에 뿌려져 왔다. 그래서 성소는 백성들의 죄들로 더럽혀져 온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년 끝에 대속죄일을 제정하셔서 모든 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다시 살피고, 정말로 자기가 죄들을 회개하고 버렸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의 생애를 하나씩 검토하시어 심판하시고 그들의 죄를 영원히 도말하여 버리심으로 인을 쳐주시는 날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대속죄일은 심판의 날로 여겨져 왔다. 구약시대의 대속죄일은 그리스도들의 죄의 고백이 하늘 성소에 기록되어 있다가 말세에 하나님께서 대속죄일에 그 죄들을 말끔히 씻어 도말해 버리실 것을 상징해 주는 의식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죄들을 없애시기 전에 믿는 자들의 생애를 살펴보시는 심판이 먼저 선제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속죄일은 심판의 날이 되는 것이다. 그때에 성소가 모든 죄들로부터 드디어 정결케 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곧 성소 정결에 대한 성경의 표현이다.

다니엘서 8장 14절은 선포하고 있다. 2300주야(일), 즉 2300년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해 진다고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 때에 가서 교황권의 배도의 역사를 심판해 줄 것이고, 그 세력에 억울하게 당한 성도들은 물론 그 외의 모든 믿는 자들을 변호하시어 모든 죄들을 도말하여 주시겠다는 선포이다. 레위기서 16장은 대속죄일의 성소 정결 사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있다.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를 인하여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같이 할 것이요” 레 16:16. 흥미있는 일은 대속죄일 날에 백성들 자체보다는 백성들의 죄 때문에 더럽혀진 성소를 정결케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성소 자체가 고백된 죄의 기록들 때문에 더럽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죄들을 심판하여 영원히 도말하여 버림으로 성소를 죄의 모든 기록들로 부터 말끔히 씻어 버리는 정결사업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레위기 16:29,30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칠월 곧 그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그러므로 2300년 후에 하나님께서 하늘 성소에서 드디어 심판을 시작하시어 성소와 성도들을 정결케 하시는 일을 시작하실 것이라는 것이 바로 이 예언이다.

2300년 예언과 490년 예언의 관계

그런데 언제 부터 이 2300년의 예언이 시작된다는 것인가? 다니엘 9장은 그 힌트로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날 때부터 시작하여 2300년이 지난 후부터라고 말씀하고 있다. 다음에 이어지는 기사에서 설명하겠지만, 어떻게 다니엘 9장에 나오는 유대인을 위한 은혜의 기간인 490년의 예언 기간이 2300주야 예언과 연결되는 것인지를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8장에서 다니엘은 2300년에 대한 이상을 본 후에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만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중요한 계시를 다니엘에게 이해시키시려고 가브리엘 천사를 파송해 주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또 하나의 힌트를 발견하게 된다. “곧 내가 말하여 기도할 때에 이전 이상 중에 본 이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내게 가르치며 내게 말하여 가로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나왔나니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음으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 지니라” 단 9:21~23. 여기에서 “이상”(계시)이라는 단어가 두번 나오는데, 원래 히브리어로 각각 다른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첫번째 “그전 이상 중에 본”이라고 말할 때의 이상은 Hazon 이고, 두번째 가브리엘이 말한 “그 이상을 깨달으라”의 이상은 Mare 이다. 그런데 단 8:17 에 2300년에 대한 이상을 언급할 때에 그 이상을 Mare 라는 단어로 표현되어 있다. “그가 나의 선 곳으로 나아 왔는데 그가 나아 올 때에 내가 두려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매 그가 내게 이르되 인자야 깨달아 알라 이 이상(Mare)은 정한 때 끝에 관한 것이니라.”(단 8:17)

그러므로 9장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깨달으라고 설명하여 주는 이상은 바로 2300년에 대한 이상, 즉 다니엘이 들었지만 이해하지 못하고 기절하였던(단 8:27절 참조) 그 이상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단 9:24 자체가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여기에서 기한을 정하였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영어 성경에서도 말하였듯이 Cut off, 즉 어디로 부터 잘라 내었다는 뜻이다. 어떤 더 큰 것으로 부터 잘라 내었다는 뜻이다. 자, 그렇다면 이 70 이레(주일), 즉 유대인들을 위하여 주어진 은혜의 기간인 490년에 대한 예언을 어디에서 부터 잘라 내었다는 말인가? 물론 그것은 2300년의 긴 예언 기간에서 부터 잘라 내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대속죄일, 곧 심판하셔서 성도들을 신원하여 주시는 일을, 예루살렘 성을 다시 지으라는 중건령이 내릴 때부터 계산하여 2300년에 이르는 때에 시작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예루살렘성 중건령이 내려진 때로부터 2300년 지난 후에 하늘 성소가 정결하여 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시작 지점인 예루살렘 성의 중건령이 내려진 해로부터 490년 동안은 유대인들을 위하여 다시 은혜의 기간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니엘이 이 예언을 받은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죄악들 때문에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나라와 성소를 잃고 외국 땅에 거하고 있는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성소가 정결하여 진다는 말은 유대인의 성소 언어이다. 그것은 대속죄일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날은 심판의 날이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가장 긴 이 2300년에 대한 예언은 우리 모든 믿는 자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엄숙한 예언이 아닐 수가 없다.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기 전에 심판이 먼저 시작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먼저 살피고 심판하신 후에야 이 땅에 재림하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이상은 끝날 마지막 때에 관한 일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지 않는가!(단 8:17참조) 지난 호에 실린 대속죄일에 대한 기사들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다음에 나오는 본론의 기사들을 읽게 되시기를 바란다. 마음을 열고 읽는 분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게 살아서 움직이는 영감을 느끼게 되실 것이다.

생애의 빛이 이번 호에서 소개하는 2300일 예언은 아래와 같은 성경 학자들의 예언 해석에 기초하였습니다. 이들 성경 학자들은 한결같이 2300일 예언을 예루살렘성의 중건령(B.C. 457년)으로부터 시작되는 2300간의 긴 예언으로 해석하였습니다.

1. 1190년도, Floris의 Joachim은 “1일=1년” 원칙을 적용하여 제일 처음으로 1840년 초기에 2300주야 예언이 끝날 것이라고 해석하였음.
2. 1440년도, Cusa의 Nicholas도 이와 유사한 해석을 하였음.
3. 1768년도, 독일의 Johann Petri 목사는 70주일 예언이 2300주야의 첫 부분이며 이 예언은 1840년대 즈음에 마쳐질 것이라고 해석함.
4. 1800년도 초기에 영국의 John Aquila Brown 목사와 미국 South Carolina의 Cummins David 목사도 이와 유사한 해석을 하였음.
5. 1826년도, 미국 인디아나 주의 대학 교수였던 Th. R. Robertson 목사는 2300주야에 대한 책자를 펴내어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킴.
6.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회중교, 성결교회등 많은 교회의 목사들이 1830년대에 들어 와서 2300주야에 대한 예언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됨. 예를들어, 버지니아 주의 Campbell목사, 오하이오 주의 Wilson 목사, 테네시 주의 M’corkle 목사, 뉴욕 주의 Scott 목사, 카나다의 Burwell 목사, 필라델피아의 A.J. Krupp 목사, 메인 주의 David McGregor 목사, 웨스트 버지니아의 Charles Wheeler 목사.
7. 남미에서, 천주교 신부였던 Lacunza 신부와 Jose Maria De Rosa 신부의 2300주야 연구와 해석은 멕시코와 남미의 기독교 교인들에게 많은 부흥을 일으켜 줌.
8. 동 시대 동안의 영국 성경학자들 : Lewis Way, william cunnihame, William Anderson, Mathew Habershon, Joshua W. Brooks, Hugh M’ceile, Geral T. Noel, Edward Bickersteth, John Cox, William Thorp, Joseph D. Sirr, Joseph Wolf
9. 미국에서 1830년대 초기부터 1844년도까지 William Miller가 일으킨 재림 운동은 2300일 예언 해석에 기초한 초교파적인 운동이었다.
10. 같은 당시에 뉴 햄프셔 주의 침례교회 전 교회들은 2300주야 예언이 1843년도에 끝났다는 해석을 받아 드렸다.
11. 초기 미국 대학들의 학장들은 2300년 예언 해석에 대부분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예일 대학의 총장 Dweight 박사, 동부의 장로교회 신학 대학장이었던 George Junkin 박사, 켄터키 주의 Bacon College의 James Shannon 총장 등등.

한가지 문제점 : 2300주야에 대한 해석 및 수학적 계산 자체는 너무나도 성서적이었기 때문에 성경을 아는 사람들은 그들의 해석에 반대하지 못했다. 위에 열거한 성경 학자들과 목사들의 예언 해석과 가르침은 1840년대에 기독교회에 커다란 부흥을 가져왔지만, 한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문제는 2300주야의 예언이 끝나는 때를 대속죄일의 시작 즉, 심판의 시작으로 해석하는 대신에, 예수께서 이 세상에 재림하셔서 불로 세상을 정결하게 하실 것으로 해석한데 있었다. “2300주야까지니 그 때에야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는 다니엘 8:14의 말씀에서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는 말씀은 하늘 성소의 기록책에 기록된 죄들이 정결하게 되는 심판 사업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을 재림 전에 있어야 할 심판의 시작으로 해석하는 대신에 예수 재림으로 해석하였던 것이 그 당시의 해석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였다. 이번 호에서는 2300일 예언의 계산법 및 성소 정결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예수께서 이 땅으로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 지성소에서 재림 전에 있을 심판을 시작하신다는 사실을 그들이 잘못 인식했던 것이다. 성소 정결은 이 땅을 불로 정결케 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늘 성소의 죄의 기록을 정결케 하신다는 대속죄일의 의미를 가진 예언이기 때문이다.

1부 -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표


요한 계시록은 성경 가운데서 가장 놀라운 책이다. 계시록이 성경 제일 마지막 부분에 위치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요한 계시록은 인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해 준비시키기 위하여 특별하게 디자인 된 책이다.

계시록은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 주고 있으며, 사단의 기만들을 폭로해 주고 있다. 계시록은 그저 짐승들이나 예언적인 상징들만 있는 책이 아니다. 계시록은 그저 어둡고 두려운 장래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는 책이 아니라, 희망이 가득차 있는 책이다. 계시록은 하나님의 사랑이 물씬 물씬 풍기는 책이다. 계시록은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 장면을 보여주는 책이다. 계시록은 이 세상 역사가 인간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나라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독재 정권들이 일어나 지배한다고 할지라도, 악한 정치가들이 세상을 혼란으로 몰아넣는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종교 자유가 곧 없어진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왕국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다.

심판이 있기 전에 항상 기별이 주어져 왔다!

요한 계시록은 이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는 인류들에게 마지막 최후의 메세지를 전달해 주고 있다. 마치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하여 마지막 메세지를 그 세상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홍수로 멸망하시기 전에 노아를 일으키셨다. 노아는 이 세상이 홍수로 멸망당할 것이라고 외치면서 120년 동안이나 전도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정신나간 미친 할아버지로 생각하면서 비웃었다. 그러나 실재적으로 노아의 메세지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기별이었다. 그 때에 노아의 말을 믿고 방주에 들어간 자들은 구원을 받았고 노아의 말을 믿지 않고 거절한 자들은 홍수에 의하여 모두 멸망당하고 말았다.

예수께서 이 땅에 초림 하시기 직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침례 요한을 일으키셨다. 그 당시 사람들도 역시 그를 광신이며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또한 핍박하여 죽였다. 그러나 침례 요한이 전했던 메세지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초림을 위하여 준비시키려고 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땅에 두번째 다시 오시기 전에도, 이 세상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기별을 세상에 보내지 않으시겠는가? 이 세상이 물로 멸망되기 전에 노아를 일으키셔서 기별을 세상에 보내신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불로 멸망 당하기 전에도 특별한 메세지를 보내주시지 않는다면 얼마나 이상한 일이겠는가? 예수님의 초림 당시에 침례 요한을 통해서 기별을 주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사건을 위해서도 메세지를 보내시지 않으시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말세를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을 경고하기 위하여 마지막 기별을 보내 주셨다! 요한 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로부터 온 메세지를 긴급하게 전달하는 일들이 있을 것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다.

마지막 시대를 위한 심판의 기별

요한 계시록 14:6은 말씀하기를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라고 했다. 여기에서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면서 기별을 전한다는 뜻은 이 기별이 하늘에서 왔다는 말이며, 또한 온 세상에 빠르게 전파될 것을 뜻하는 것이고, 그가 전하는 메세지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민족들과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야 할 전 세계적인 메세지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느 세력도 이 메세지의 전파를 막지 못할 것이다. 어떤 종교적인 지도자나 정치적인 지도자도 말세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막지 못할 것이다. 이 기별은 물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 산을 넘고 평야들을 지나 온 땅에 전파될 기별이다. 요한계시록 1:1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요한 계시록 속에는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는 인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하여 준비시키기 위한 긴급한 기별이 들어 있다.

자,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께서 말세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주시는 긴급한 기별이 무엇인가? 천사가 날아가며 외친다고 해서 하늘을 쳐다 보아서는 안된다. 독자 여러분들은 큰 날개를 달고서 하늘을 날아가는 천사를 아마 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천사가 외친다는 것은 상징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사는 여러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의 종(사람)들을 상징하고 있다. 이제 천사 즉, 하나님의 종들이 특별한 기별을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전파한다는 말씀 바로 뒤에 이어지는 계시록 14:7을 읽어 보도록 하자.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자 여기에 있는 말씀 가운데서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라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시간 얼마 전에 인류는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며 살고 있는 동안에 우리의 운명이 결정지어지는 심판의 시간이 먼저 이르러 올 것이므로 진리의 말씀대로 경건하게 살라는 기별이다.

사람들이 여전히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며, 장사하고 사고 팔면서 여전히 이 세상이 몇십년 아니 몇 백년 동안 이러한 식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여유있게 살아가고 있는 바로 그 시간에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먼저 이르러 올 것이라는 말씀이다. 노아 시대에 홍수가 내리기 전에 이미 방주의 문이 닫혀 버리고 사람들의 운명이 결정된 것처럼 말이다. 창세기 7:10은 노아의 식구들이 방주에 들어가고 문이 닫힌 후 7일 후에 홍수가 왔다고 말씀했다. 홍수가 올 때에는 회개할 시간이 더 이상 주어지지 아니했다. 사람들이 그 때 믿고서 방주에 들어가려고 애를 썼지만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받았고, 그것을 통하여 그들의 운명이 영원히 결정지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심판에 대한 경고 이후에 이어지는 추수

요한계시록 14:7에 나오는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에 대한 말씀 이후에 14:14,15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경고의 기별이 주어진 후에 곧 이어서 추수의 장면이 나오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 같은 이(예수님-필자주)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하니.” 이 장면은 한 천사가 예수께 보고하는 장면이다. 천사가, “하나님, 이 땅에 추수가 준비되었습니다. 곡식들이 익었으니 낫을 대어 추수하실 때입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가 인간의 마음 속에 뿌려져서 그 의의 열매들을 맺은 것이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절제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거인 성품의 열매들 말이다. 뿌려진 모든 씨들은 추수 때에 다 드러나게 된다. 모든 씨는 종류대로 그 열매를 반드시 내도록 되어 있다. 의로운 자들은 의롭게 추수될 것이고, 악인들은 악인들대로 거두어져서 유황불 속에 던지우게 될 것이다.

마지막 시대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섬기는 의인들의 품성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악한 영에 사로잡힌 마음들과 불신과 죄를 사랑하는 자들 역시 그들의 열매로 그 본성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마지막 시대에는 중간이란 있을 수가 없다.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채워져 있던지 아니면 마귀의 영으로 채워져 있던지 둘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와 성령에게 등을 돌리고 핑게하게 되면, 마귀에게 마음 문을 활짝 열어 주게 되는 것이다. 계시록 22:12은 말씀하고 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때는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 성경은 두번째 기회에 대해서 단 한번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예수께서 오실 때에 우리의 일한 대로 갚아 주기 위하여 오신다면, 이 땅에 재림하시기 전에 누구에게 어떤 상급을 주실지에 대하여 결정하시고 심판하시는 일이 먼저 선재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요한계시록은 말세에 하늘에서 인간들을 위한 심판 사업이 진행될 것이라는 경고를 우리 모두에게 주고 있다. 혹시, 지금 하늘에서 진행 중에 있는 하나님과 천사들의 심판의 사업을 모르고 무관심하게 지내고 있지는 않는가?

다니엘서에 기록되어 있는 심판의 시기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지금이 마지막 시대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 재림의 징조인 전쟁과 기근과 지진같은 것들은 역사적으로 항상 있어 왔지 않습니까? 지금이 말세라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물론, 전쟁과 지진과 기근은 항상 있어 왔다. 그러나 요즘처럼 이렇게 크게 그리고 빈번하게 세계적으로 가속화 되어 가는 때는 과거에 없었다. 또한 원자 폭탄의 발명으로 인류 스스로가 지구를 자멸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때는 과거에는 없었다. 요한계시록은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때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려고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주의 분노가 임하여 죽은 자들을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계 11:18. 또한 중요한 것은 다니엘서와 요한 계시록에 “마지막 때” 혹은 “말세” 또는 “심판의 때”에 대한 정확한 시간적인 예언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예언을 연구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말세라는 사실을 도무지 부인할 수 없게 된다.

특히 마지막 때에 관한 예언들이 다니엘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다니엘서의 예언은 수천년 전부터 예수께서 언제 이 땅에 태어 나실 것과, 언제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과, 또한 언제부터 말세가 시작될지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는데, 그 예언은 역사적으로 정확한 때에 분명하게 성취되었다. 물론, 예수 재림에 대한 정확한 날자와 시간은 아무도 알수 없다. 마태복음 24:36에서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재림하시는 날과 시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이 예언 연구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오시는 정확한 날자를 알아 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확한 날짜와 시간은 알 수 없지만, 예수께서 언제쯤 재림하실 것이며 언제 쯤부터 말세가 시작되는 지에 대한 시기는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실상 사도행전 17:31에 기록되어 있는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시간을 이미 작정해 두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재강림과 심판을 동일한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성경은 심판과 예수께서 오시는 재림의 날을 분리하여 말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심판하시는 시간이 먼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고, 구약의 예언서인 다니엘서는 말세에 시작될 심판의 때에 대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다니엘서가 다루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의 장면과 그 때에 대한 예언을 연구해 보도록 하자.

하늘에서 벌어지는 심판에 대한 이해

먼저 다니엘 7:13을 읽어보도록 하자.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이것은 예수께서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시는 장면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께서 함께 모여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만나시는 것이다. 무슨 목적으로 만나시는 것일까? 몇 절 앞으로 가서 다니엘 7:9,10을 읽어보면 그 궁금증이 풀리게 된다.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기록책을 펴고 살피는 심판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시는 장면이다.

사단은 태초부터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다고 고소하였다. 그래서 하늘에 우주적인 고소 사건이 생긴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문제에 있어서 이의를 제시해 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고소와 이의가 부당하다는 사실을 우주 앞과 천사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분명하게 나타내 보이셔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믿고 주님 앞으로 나아오는 모든 자들을 용서하시고 그 마음을 변화시킴으로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업이 얼마나 공정하고 의로운 일인가 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시고 변호하셔야만 한다. 그런데 하늘 법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재판을 통하여, 의인들의 구원에 대한 공정성도 입증되지만, 진리와 복음을 거절하고 믿지 않거나,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진실되게 살지 않는 가짜 그리스도인들을 가려냄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정확하고 의로운 판단인가가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다니엘 7장에 하나님 아버지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피흘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모여서 책들을 펴 놓고 심판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 7장에는 심판의 장면이 기록되어 있지만, 마지막 시대에 벌어지는 하늘 심판의 시기에 대한 시간 예언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심판의 때에 관한 예언은 8장에 가서야 발견하게 된다.

다니엘은 8장에서, 메데 페르샤 시대부터 중세기의 핍박의 역사와, 말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진리가 짓밟히게 되는 사건들을 예언해 준 다음에, 이러한 일들이 다 일어 날지라도 하나님께서 모두 심판하고 깨끗하게 처리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심판의 때에 대한 예언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 삼백 주야 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단 8:14. 다시 말해서 “그때에 내가 심판하겠다”라는 뜻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17절에서 우리는 “2300주야(일)”에 대한 천사의 설명을 읽을 수 있다. “그가 나의 선 곳으로 나아 왔는데 그가 나아 올 때에 내가 두려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매 그가 내게 이르되 인자야 깨달아 알라 이 이상은 정한 때 끝에 관한 것이니라.” 이 계시는 어떠한 때에 관한 것이라고 하였는가? 천사는 “정한 때 끝”에 관한 계시라고 말하였다. 다시 말해서 말세에 관한 계시라는 뜻이다.

성소가 정결하게 된다는 말의 의미

여기서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성소가 정결하게 된다는 말과 심판과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구약시대에 있었던 유대인들의 성소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의식들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에 관한 모든 계획들을 알려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계시 가운데 보여주심으로써, 하늘 성소를 모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지상 성소를 짓도록 명하셨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쫓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 8:5. 또한 히브리서 9:11에 나오는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는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늘에 성소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늘에는 성전이 있는데,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한 다음에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그곳 하늘 성소에서 봉사하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 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히 9:24

자, 이제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구약 시대의 지상 성소는 두 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첫째 칸에서는 성소 뜰에서 죽은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와 휘장 앞에 뿌리고 그 죄를 고백한 죄인을 위하여 제사장이 중보 기도하는 일이 이루어 졌다. 다시 말하자면 죄를 지은 죄인이 양을 끌고 와서 자기의 죄를 지고 대신 돌아가실 메시야를 상징하는 양 머리에다 죄를 고백한 후에 그 양을 죽여서 그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다. 그 때에 제사장은 그 양의 피를 받아 가지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피를 휘장 앞에 일곱번 뿌리고 난 다음, 성소의 둘째칸 곧 지성소를 향하여 서서 이 죄인의 죄를 메시야의 피공로에 의지하여 용서해 주실 것에 대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상징적으로 그 피 속에 죄인들의 죄가 담겨져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렇게 뿌려진 피가 일년 내내 성소 안에 쌓이는 것이다. 일년 동안 뿌려진 피(죄)에 의해서 더럽혀진 성소를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매년 연말에 한번 대속죄일 의식이 거행되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지상 성소 제도는 폐지되었다. 예수께서 부활 후 승천하셔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후부터는, 지상에서 올려 보낸 인간들의 죄의 고백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와서 쌓이게 되었다. 하늘에는 죄는 없지만, 인간들의 죄에 대한 기록이 하늘 성소의 기록책에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들이 매년 연말에 대속죄일을 통하여 성소를 정결하게 했듯이, 지구 역사가 끝나는 종점에도 하늘에 있는 죄에 대한 기록을 씻음으로써 하늘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역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 일은 유대인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매년 연말인 대속죄일에 이루어졌다. 그 날에는 누가 진정으로 죄를 용서함 받고 깨끗하게 되었는지가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시간이었다. 누가 진실로 모든 죄를 고백했으며 깨끗한 마음을 가졌는지를 심판하는 시간이었다. 대속죄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되고 정결하게 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죄를 다 고백하고 버리지 아니한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끊어지는 날이 바로 대속죄일이었다. 그러므로 성경적으로 성소를 정결케 하는 날인 대속죄일은 그들에게 있어서 심판의 날이었다. 레위기 16:30은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33절에는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며 회막과 단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제사장들과 백성의 회중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고 말씀하여 대 속죄일에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성소 그 자체도 정결케 될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니엘 8: 14절에 나오는 “2300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함을 입으리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의 죄를 심판하시어 모든 죄들을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온 모든 죄의 고백들을 정리하신다는 의미이다. 모든 사람들의 생애를 통하여 나타나게 되는 그들의 회개와 고백의 진실성을 심판하여 의인으로 판단되는 사람들은 그들의 죄의 기록을 하늘 기록책에서 영원히 지워버림으로써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으실 것이라는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소를 정결케 한다는 말의 성서적 의미는 세상 끝에 가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법과 자비롭고 공의로우신 판단에 의하여 사람들의 생애와 성품을 심판하셔서 그들의 죄를 하늘 기록책으로부터 완전히 도말해 버리신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2300주야 까지니 그때야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는 말은 “그때에 가서야 심판 하리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확실하게 이해해야 할 한가지 사실이 있다. 대속죄일에 죄를 도말(정결케)하기 위해서는 대제사장이 성소의 둘째 칸인 지성소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곳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광채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며 심지어는 일반 제사장들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었다. 오직 대제사장만 일년에 단 한번 대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날에 대제사장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신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그들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속죄하는 기도를 드렸다. 이것이 성소 제도에 있어서 최종적인 의식이요, 이 의식이 끝나야 비로소 백성들은 자신들이 범한 모든 죄로부터 정결함을 받았다. 이러한 대속죄일의 과정을 거쳐야만 드디어 누가 진정으로 용서받을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지게 된다. 유대인들은 지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속죄 사업을 Rosh Hashanah 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곧 “심판의 날”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앞에서 읽은 다니엘 7장에 있는 심판의 장면인, 예수께서 하늘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시는데 하나님 앞에서 심판이 베풀어지고 책들이 펴 놓여져 있다고 한 말씀은 바로 예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하늘 지성소에 계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셔서 우리의 죄를 변호하시는 마지막 심판의 사업을 하시는 광경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 이제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성경에서 가장 긴 기간의 예언 문제를 풀어나가 보도록 하자.

1일=1년의 원칙이 적용됨

2300주야 곧 2300일은 약 7년이 채 못되는 기간으로서 이 기간을 실제적인 기간으로 해석하면, 다니엘 시대로부터 이 말세의 시대까지 오기에는 어림도 없는 짧은 기간이 되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이 2300일을 상징적인 해석으로 풀어야만 한다. 성경 에스겔 4:6은 이렇게 상징적으로 표현된 기간 예언을 풀 때에 힌트로 사용되는 열쇠가 기록되어 있다. “그 수가 차거든 너는 우편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라 내가 네게 사십일을 정하였나니 일일이 일년이니라.” 1일이 얼마라고 하였는가? 1일을 1년으로 환산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2300일은 2300년이라는 긴 기간인데,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긴 예언이다. 이 예언의 시작점으로부터 2300년이 지나면 그 때에 하나님께서 하늘 성소에서 모든 인간의 운명들을 결정하여 그들이 일한대로 갚아 주기 위한 심판을 시작하실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2300년 동안의 긴 기간이 언제부터 시작되는가? 이제부터 2300일 예언의 시작점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어떤 분들은 너무 어려워서 잘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이 계시를 받은 다니엘 자신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기절하였었다고 하였다. 다니엘 8:26,27에 말씀하기를 “이미 말한바 주야에 대한 이상이 (2300주야에 대한 계시 즉, 2300년 기간 동안의 계시) 확실하니 너는 그 이상을 간수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니라 이에 나 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을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내가 그 이상을 인하여 놀랐고 그 뜻을 깨닫는 사람도 없었느니라.” 다니엘도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고 기절하였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독자 여러분이 이 계시를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의 예언의 확실성과 그 정확한 성취를 보면서 깜짝 놀라게 되실 것이다.

2300년 예언의 구성과 내용

2300년의 예언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다니엘 8장에서 이 계시에 대한 이해가 끝나지 않고 지나갔으므로 그 다음 장인 9장에서 우리는 그 해석과 설명이 나올 것을 기대할 수 있다. 다니엘 9:21~23은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다. “곧 내가 말하여 기도할 때에 이전 이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내게 가르치며 내게 말하여 가로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나왔나니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 다니엘은 앞서 이상 중에 만났던 천사 가브리엘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가브리엘 천사는 다니엘에게 그 이상을 깨닫게 도와주고 지혜를 주기 위해서 왔다고 하였다. 왜 그런가? 다니엘이 8장에서 본 2300년에 대한 이상을 깨닫지 못하고 기절하였기 때문에 가브리엘 천사가 다시 와서 그 계시를 다니엘에게 설명하여 깨닫게 해 주기 위하여 파송된 것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2300년에 대한 기간 예언의 해석을 드디어 천사의 입을 통하여 직접 듣게 되었다. 다니엘 9장 24절에 기록된 천사의 설명을 들어보자. “네 백성과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자 여기에서 “네 백성” 곧 다니엘의 백성은 누구인가? 물론, 유대인들을 뜻한다. 그러면 그들을 위하여 칠십 이레 곧 70주일의 기한을 정했다는 뜻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정했다”는 말은 히브리 말로 “어디로부터 떼어 내었다”는 뜻이다. 어디로 부터 떼어 내었다는 말인가? 바로 2300년의 기간 예언에서 떼어 내었다는 뜻이다. 여기에 나오는 70주일 역시 상징적으로 표현된 기간 예언의 해석 원칙에 의거하여 1일=1년의 환산법을 적용하면 된다. 70주일은 일주일이 7일이므로 490일이되는데(70주일x7일=490일), 이것에 기간 예언의 해석 원칙을 적용하면, 490일은 490년으로 환산할 수 있다.

그 당시, 다니엘의 백성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반역한 결과로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490년 간이라는 은혜의 기간을 다시 주실 것이라는 뜻이 70주일 예언에 포함되어 있다. “네 백성과 거룩한 성을 위하여 70 이레(weeks, 주일)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단 9:24. 그러므로 2300년 예언은 다니엘 시대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처음 490년 동안은 유대인들을 위한 은혜의 기간이 될 것이고 그 이후 나머지 기간의 끝 즉, 2300년에서 490년을 뺀 나머지 기간인 1810년이 지나면 성경의 말세가 시작되면서 마지막 시대의 심판이 하늘 성소에서 시작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총 2300년의 기간 중에서 490년의 기간이 지나고 또 다시 1810년의 기간이 지나면 마지막 시대가 시작된다는 뜻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70주일(490년)의 예언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예수께서 정확하게 어느 해 몇 월에 이 세상에 오셔서 메시야의 일을 시작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공개해 주셨으며, 또한 유대인들이 어느 해 몇 월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것이며, 결국에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고 진리를 거절함으로써, 드디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할 것이라는 자세한 시간표가 이 2300년의 예언 기간 속에 모두 들어 있다.

1년=1일 원칙

상징적인 기간을 나타내는 예언 해석에 있어서 1일을 1년으로 해석하는 원칙은 오래 전부터 인정되어 온 예언 해석법이다. 수많은 성경 학자들뿐 아니라 종교 개혁자들도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상징적 예언인 1260일, 1335일, 2300일 등의 예언 해석에 1일=1년이라는 원칙을 적용하였다. 1년=1일 원칙에 대한 교회사적 증거들을 살펴보면, 이 원칙이 초기 그리스도 교회때부터 시작하여 중세기의 카톨릭 교회, 종교 개혁시대, 그리고 근대 기독교회에 들어와서까지 일관성 있게 적용되어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 초기 기독교회 성경 학자 : 터툴리안, 클레멘트, 유세비우스, 테오도렛, 데오도시우스, 안드로니쿠스
2. 중세의 유대인 학자: 나하웬디, 알리, 라시, 나하메니데스, 라시바즈
3. 중세의 카톨릭 학자: 요아킴, 아놀드, 우베르티노, 데리라, 부르테, 니콜라스 크렙
4.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 멜란히톤, 풍크, 불링거, 존 낙스, 존 베일, 토마스 브라이트만, 요한 웨슬리 의 조력자인 플레셔르
5. 1700년대의 성경 학자: 루터교회의 신학자인 벵겔,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톤경
6. 1800년대의 성경학자: 장로교회 일반의회 의장인 죠 슈아 윌슨 박사, 감독교회의 주교인 존 핸셔, 예일 대학의 총장인 티모디 드와이트, 유니온 대학의 총 장인 엘리팔리트 노트, 오하이오 대학 총장인 조지 정킨

이와같이 예언 해석상 1년=1일 원칙은 어떤 개인이나 교단의 독창적인 견해나 돌발적인 해석 방법이 아니라, 오랜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여러 교파에서 소속되어 있는 다양한 성경 학자들의 심도있는 성경 연구의 열매로 거두어진 결론이다.

2부 - 수학으로 계산하는 초림, 침례, 십자가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 날짜


2300년 예언의 시작점과 70 주일 예언

2300년의 에언은 언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그것은 이 예언의 첫 부분인 490년의 예언 기간의 시작점에서 함께 시작된다. 왜냐하면 490년 예언은 2300년 예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첫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예언은 과연 언제 시작되는 것일까? 다니엘 9:25은 그 시작점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7 이레(7 주일)와 62 이레(62 주일)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가브리엘 천사는 70주일 예언을 7주와 62주와 마지막 1주로 나누면서 이 모든 예언의 시작점에 대해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라고 다니엘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렇다! 2300년 예언의 시작점은 바벨론의 침공에 의해서 무너져서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된 후에 유대인들에 의해서 다시 중건되는 때로부터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유대 민족의 마지막 유예 기간을 가리키는 70주일 예언

구약에 나타난 유대 민족의 역사는 반역과 불순종의 역사이다.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과 70년 동안의 바벨론 포로 생활 등과 같은 고난을 통하여 유대 민족이 하나님의 선민처럼 살기를 고대하였지만, 그들은 불순종의 길을 떠나지 않았다. 이러한 때에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마지막 유예 기간을 주시는 것이 다니엘 9장 예언이다.

다니엘서 9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다니엘 선지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예언을 주시면서, 그들이 메시야와 그분의 복음을 거절할 경우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의 국가로서 가진 특권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주셨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영접하고,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것을 조건으로 유대 민족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남아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중요한 예언을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다니엘 선지자에게 전달하셨다. “네(다니엘)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70 이레(주일)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단 9:24. 이 70주일 예언은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에게 다시 한번 주어진 마지막 은혜 기간이다. 이 예언적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오심을 위하여 잘 준비해야만 하였다.

이 예언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70주일이라는 암호를 풀어야만 하는데, 기간적인 예언을 해석할 때를 대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풀 수 있는 암호 해독법을 성경에 기록해 두셨다. “1일은 1년이니라” 에스겔 4:6과 민수기 14:34. 건축기사들이 1 미터를 1 센티미터로 환산하여 축소 도면을 그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기간적 예언을 해석할 때에도 그분께서 지정하신 이 특별한 계산 원칙을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70주일은 490일(70주일x7일)이고, 이것은 기간적 예언의 계산 원칙에 의거하여 490년이 된다. 그런데 490년이 시작되는 시점은 언제인가? 계속되는 가브리엘 천사의 설명을 들어 보도록 하자.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 곧 메시야가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7주)와 육십이 이레(62주)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요” 단 9:25. 자,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70주일 즉, 490년의 시작점은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내려질 때이며, 그때부터 시작해서 7주일과 62주일 즉, 69주일(69 x 7=483일, 즉 483년)이 지나면,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야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 가브리엘 천사의 설명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누구인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이고, “메시야” 역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이다. 그러므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뜻한다. 성경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생애하시는 정확한 기간을 말하여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통 인간이 아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경에 정확하게 예언하여 둔 우리의 구세주이시다. 이 성경절에서 가브리엘 천사는 우리에게 “깨달아 알라’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해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반드시 이해해야만 하는 중요한 에언이다.

예언의 시작점

앞에서 잠시 언급하였던 것처럼, 490년(70주일)과 2300년(2300일) 예언은 모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령 즉,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되고 파괴되어 있는 예루살렘 도성을 다시 지으라는 명령이 날 때부터 시작된다고 가브리엘 천사는 설명하였다.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이것은 2300년 예언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제부터는 언제 포로로 잡혀가 있던 유대인들에게 고향 땅으로 돌아가서 예루살렘을 다시 건설하라는 명령이 났는지만 찾으면 되기 때문이다. 에스라서 7:7,13에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을 다시 건축하라고 명령이 내려진 그 년도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페르샤 제국이 들어섰는데, 그 당시 폐르샤 제국의 왕이었던 아닥사스다 왕은 은과 금과 재료들을 주면서 유대인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가 자기들의 무너진 성전을 다시 건축하도록 허락하는 명령을 내렸던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에스라서 7:7,13이다. “아닥사스다 왕 7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 올 때에 ... 조서하노니” 여기에 분명히 이 예언의 시작점인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난 해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해는 역사적으로, 페르샤 나라의 아닥사스 왕 7년 즉, B.C. 457년이다.

정확한 시간에 성취된 그리스도의 침례와 공중 봉사 사업의 시작 : 가브리엘 천사는 기름부음을 받은 왕 곧 그리스도가 나타나기까지 62 이레와 7 이레를 지날 것이라고 말하였다. 62 이레(주일)와 7 이레(주일)는 62에 7을 더하여 69주일이 된다. 69주일은 몇일 인가? 483일이다(69주일x7=483일). 예언 기간의 원칙은 1일이 1년이므로 483일은 483년으로 환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내린 B.C. 457년부터 시작하여 483년 후에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나타난다는 예언인 것이다. 예루살렘성의 중건령의 조서가 그 효력을 발휘하는 B.C. 457년 가을부터 시작해서 483년을 내려가면, 역사의 연대표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사건이 일어나는 해를 만나게 되는데, 그 해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받으셨던 해이다.

한 가지 우리가 계산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B.C.에서 A.D.로 넘어 갈 때에, 다시 말해서 기원 전에서 기원 후로 넘어갈 때에는 “0”년이 없기 때문에 B.C.1년에서 그 다음 해가 A.D. 1년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실제적인 계산에서는 1년을 더해야 하는 것이다. 자, 그러면 함께 계산해 보도록 하자. B.C. 457에서부터 69주일인 483년을 앞으로 더해 가면 얼마가 나오는가? A.D. 26년이 나오는데, B.C에서 A.D.로 넘어 가는데 1년을 더해 주어야 하므로 실제적으로는 A.D 27년이 된다. A.D. 27년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가? 놀라웁게도 그 해는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시고 메시야로서 공중 전도사업을 시작하신 바로 그 해이다. 얼마나 놀라운 예언인가? 사도행전 10:38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라고 말씀하였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고 올라 오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한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누가복음 3:1은 침례요한이 회개의 침례를 전파한 해가 디베료 가이사 제 15년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디베료 가이사 15년은 바로 역사적으로 A.D 27년이었다. 그 해에 예수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드디어 메시야로서 복음 사업을 시작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예언을 근거로 당신의 지상 사업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The time is fulfilled, 때가 성취되었고)”마가복음 1:14~15. 무슨 때가 찼다는 것인가? 다니엘 9장에 예언되어 있는 69주일(483년)이라는 예언의 때가 찼던 서기 27년에, 예수께서는 침례를 받으셨으며,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 공중전도를 시작하셨다. 이 예언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누구나가 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리게 되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영접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와 미래를 예언하시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면 이렇게 정확하게 미래를 예언하여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정확한 시간에 이루어진그리스도의 죽음과 십자가 :

2300년 예언의 첫부분인 70주일 예언 속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정확한 해가 나타나 있다.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 질 것이며 ...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단 9:26,27. 가브리엘 천사는 62주일 후, 즉 서기 27년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끊어져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언급한 후에,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하실 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1week)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week)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27절. (여기서“이레(week)의 절반”은 7년의 반이므로 3.5년 즉, 3년 반이 됨)

이 예언의 의미를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날 때부터 시작하여 7주일과 62주일 즉, 69주일(483년)이 지나면 그리스도가 일어 날 것이요, 69주일(483년)이 지난 다음에 이어지는 마지막 주인 70번째 주(7년) 동안에는 유대인들을 위한 은혜의 70주일 기간, 즉 490년 기간이 끝마쳐 지면서 메시야가 “끊어져 없어진다” 즉, 죽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2300일 예언의 첫 부분인 70주일(490년) 예언은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중건령이 선포된 때로부터 시작하는데, 그 때로부터 7주일과 62주일 즉, 483년이 지나가고 마지막 70번째 주일 즉 마지막 7년의 절반이 되는 시점에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것이 70주일 예언의 핵심적 내용이다.

다니엘 9장 27절은 그리스도가 70주일 예언 곧 490년 예언 기간 동안의 마지막 한 이레 곧 7년동안 사람들과 더불어 언약을 굳게 정하겠다고 하였다. 마26:27,28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피로 인류와 언약을 굳게 정하셨다. 또한 그가 그 마지막 한 주일 즉 7년의 절반에 다시 말해서 7년의 중간인 3년 반만에, 다시 말해서 A.D 27년에 침례받으시고 복음 사업을 시작하신지 3년 반 후에 제사와 예물을 금하시겠다고 했다.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서기 27년 가을부터 3년 반 후인 서기 31년 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메시야의 죽음을 상징하여 드려온“제사와 예물을 금지하”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A.D. 31년 봄 유월절 날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던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예언인가?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고린도전서 5:7 하단. A.D. 31년 봄 유월절에 예수께서는 여러분과 저의 죄를 위하여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다시 한번 예언을 정확하게 성취시키셨던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예언이며, 얼마나 큰 사랑인가?

오랜 세월 동안, 유대인들은 흠없는 어린 양을 성소의 번제단 위에서 태움으로써,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믿음을 나타냈으며, 양의 죽음을 통하여 죄의 용서를 받아왔다. 그러나 마지막 70번째 주일의 중간인 서기 31년 봄,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양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더 이상 양을 잡아서 태워 죽이는 제사 제도가 필요없게 되었다. 성소 제도의 모든 제사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상징한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그 상징의 실체가 오신 다음에는 더 이상 양을 잡아서 제사드리는 일이 필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였도다 ...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히브리서 10:5~7. 또한“이 (구약 시대의)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써,“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0:12,18. 얼마나 분명한 예언의 성취인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더 이상 양을 잡아 죽이는 제사 제도가 필요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기적이 성소에서 일어났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자, 이에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고” 마 27:50. 성소 안에 있던 성전 휘장이 갑자기 찢어짐으로써, 모세가 제사 제도에 대해서 기록하였던 의문의 율법이 정하고 있는 제사와 예물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음을 보여주셨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골로새서 2:14.

정확한 시간에 끝난 유대인의 은혜의 기간과이방인들을 위한 복음 전파의 시작 : 70주일 예언 중에서 마지막 1주일의 절반 즉, 7년의 절반인 서기 31년에 십자가가 세워졌고, 이제 그 나머지 절반인 3년 반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에게 허락하신 70주일의 전체 예언이 완전히 종결된다. 70주일 예언 중에서 마지막 70번째 주일의 절반 이후에 성취된 사건들은,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은 백성들에게 여전히 3년 반이라는 은혜의 기간이 남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십자가 이후에도 한동안 제자들은 유대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일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돌아가신지 3년 반 후인 서기 34년, 새 언약의 복음을 끝까지 거절하는 유대인 지도자들을 향하여 경고와 호소의 설교를 하던 스데반에게 산헤드린 공회가 돌로 쳐서 죽이는 판결을 내림에 따라, 스데반은 그리스도 교회의 첫번째 순교자가 되었으며 (사도행전 7:51~60), 이로서 유대 민족을 위한 70주일(490년)의 유예 기간은 완전히 끝났으며, 곧 이어서 일어난 핍박과 함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사도들은 온 세계로 퍼져나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사도행전 8:1~). 바로 이것이 70주일 예언의 끝을 알리는 최후의 신호였으며, 유대 민족의 운명이 영원히 결정되는 순간이었고, 온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 교회 시대가 개막되는 시간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기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 13:46. 이것은 예수께서 이미 마태복음 21:43에 “그러므로 너희(유대인)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셨던 예언의 성취이기도 하다.

정확하게 성취된 2300일 예언

다니엘의 예언은 빈틈없이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예수께서 A.D. 27년에 메시야의 일을 시작하실 것이라는 예언이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또한 주님께서 A.D. 31년 봄에 돌아가심으로 제사와 예물을 금하실 것이라는 예언도 정확하게 성취되었다. 또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못박고 진리를 거절하였으며 드디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면서 그리스도교를 내어 쫓음으로 그들의 은혜의 기간이 A.D. 34년에 끝나게 될 것이라는 기간적인 예언도 놀라웁게도 그대로 성취되었다. 이렇게 해서 2300년 예언의 전반부는 예수님의 초림에 그 초점을 맞추어서 예언되었고 또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렇다면 “2300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함을 입으리라” (단 8:14)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에 대한 예언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2300년에서 유대인들에게 허락된 은혜의 기간이었던 490년을 빼고 나면 1810년이 남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 예언의 시작점인 B.C 457년부터 시작해서 유대인들을 위한 은혜의 기간인 490년을 거스려 올라가고, 또 그 후에 1810년을 더 올라가면 1844년이라는 해에 도달하게 된다. “2300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함을 입으리라”는 다니엘서 8장 14절의 예언 때문에 1830년도 말기부터 미국과 유럽 그리고 남미에서도 예수께서 1844년도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설교하는 일들이 열렬하게 일어났었다. 그들은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성결교회, 회중교회 등을 총 망라한 여러 교파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의 오심을 사모했으며 진실되게 준비하려고 했을지라도 그 예언의 적용을 잘못함으로 크게 실망하는 경험들을 하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다시 오시는 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당시 다니엘서 8장을 연구하였던 사람들은 “2300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함을 입으리라” 는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예언으로 오해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의 성경학자들도 1844년에 예수께서 재림하신다고 설교하던 사람들이 설명하는 다니엘서 8장의 2300년에 대한 해석 만큼은 성서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너무나 정확하게 성취되어 왔기 때문에 그 예언 자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예언의 기간에 대한 해석과 계산 방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2300년이 끝마쳐지는 시점에 이루어지는 사건에 대해서 오해하였던 것이 그들의 문제였다. 그 당시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며 기다리던 그리스도인들은 2300년 예언이 마쳐지는 종점인 1844년에 하늘 성소가 정결함을 입는 하나님의 심판 사업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성서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성소가 정결함을 입는다는 것은 세상이 불로 정결케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늘 성소에 있는 죄의 기록들이 도말되어 정결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마지막 심판의 시작을 가리키는 “2300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함을 입으리라”는 말씀을 이 세상에서 실재적으로 일어날 사건 즉, 예수께서 재강림하심으로 지구가 구속함을 받는 사건으로 오해하였다. 성소가 정결함을 입는다는 말씀에 대한 오해로 인하여, 그들은 1844년에 대 실망의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844년에 겪은 대 실망의 경험으로 인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시대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또한 그 문제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말세를 위하여 준비된 심판의 기별

이 세상은 2300년의 예언 기간이 끝나면서 이제 완전히 이 세상 종말의 때에 접어들게 되었다.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 제16호와 19호에는 다니엘 예언 중에 또 하나의 기간 예언인 1260년(중세기의 종교 암흑시대) 동안에 작은 뿔의 세력이 성도들을 핍박하는 시기에 대한 예언을 공부할 수 있다. 아직 이 예언을 공부하지 못한 분들은 이번 기회에 꼭 월간지를 주문하시기를 바란다. 1260년의 예언은 1798년도에 끝마쳐지는데, 그 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이 말세가 되었다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1798년도를 전후로 해서 교황권이 잠시 동안 몰락하게 되었고 불란서 혁명이 일어나 무신론 세력이 기치를 들기 시작하여 세계의 국가들과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이 달라지기 시작하였고, 미국이 건국되어 일어났으며 이 세상 역사가 드디어 말세를 가리키고 있는 예언들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2300년의 예언은 더 나아가서 온 인류가 드디어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통과하게 되는 마지막 시대에 돌입한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1844년도가 지나자 이 세상은 벨하우젠의 성경의 권위를 비판하는 고등비판의 소리가 크게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니이체가 일어나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회의주의의 씨를 심기 시작하였으며, 1859년에는 드디어 다윈의 진화론이 소개되면서 하나님의 창조를 무시하고 부인하는 반역적인 운동들이 세상을 온통 뒤덮기 시작하였다. 1865년도에 멘델의 유전 법칙의 발표 결과 다윈의 진화론이 완전히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느끼는 인간들이 성경의 하나님을 부인하고 무신론적인 사상으로 이 지구를 가득 채우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요한계시록 14:7을 통하여서 말세를 위한 기별을 준비해 두셨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여기서 독자 여러분 중의 어떤 분들은 마음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의문이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2300년의 예언 기간이 끝난지 벌써 150여년이 흘렀는데도 아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이 의문에 대한 답변으로 우리는 노아의 때를 되돌아 보아야만 한다. 예수께서는 인자의 때도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노아는 120년 동안 홍수로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외쳤다. 120년 간의 긴 세월 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처럼 보였다. 심판의 기별을 전하던 노아는 미친 사람처럼 취급을 받고 배척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면서 하늘에서 인류들을 내려다 보고 계셨다. 사람들이 노아의 말을 어떠한 태도로 받아들이든지 간에 노아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분명한 심판의 기별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인간들이 대담하여져서 그들의 생각하고 계획하는 모든 것이 악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는 그들을 물로 멸망시키셨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악해 질대로 악해져 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때처럼 하늘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 보고 계신다. 이제 곧 하나님께서 더 이상 참지 아니하실 때가 다가오고 있다. 지금은 마지막 심판이 지나가고 있는 때이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우리들 각자의 죄가 기록되어 있는 기록책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심판하고 계신다. 그 심판이 마쳐지면, 곧 예수께서 이 세상에 임하실 것이다. 그 때에는 우리들 각자가 행한 행위대로 보상 또는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만일 예수께서 심판을 끝내시고 오늘 오신다면 아니 다음 주일에 오신다면 여러분은 준비되어 있는가? 독자 여러분들은 그 때에 어디에 계실 것인가? 여러분들은 지금 예수께 나아와 마음을 온전히 드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위하여 준비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