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참된 평안을 얻는 길


예기치 못한 사고나 갑작스레 닥친 재난으로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될 때, 또는 전쟁이나 테러의 공포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당하게 될 때, 아니면 인생의 고비에서 힘겨운 고난과 역경을 만날 때, 마치 바람 앞에 선 가냘픈 촛불처럼 우리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속절없이 흔들리는지…

평소에 그리 강하게 보이던 소위 예수를 열심히 믿는다고 말하는 신자들 조차도 그런 상황 속에서는 예외가 아님을 종종 볼 수 있다. 마치 예정된 파멸을 향해 달리듯 흉흉한 난리의 소문을 안고 빠르게 질주하는 지구를 지켜 보며 이즈음 많은 사람들은 혼란과 불안에 싸여 마음에 안위를 줄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갈망한다.

참된 마음의 평안은 어디서 오는 걸까?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걸까? 바람 한 가닥 없는 청명한 가을날의 드려다 보일 듯이 투명하고 잔잔한 호수 같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정을…. 구름 한 점 드리우지 않는 깊고 푸른 가을 하늘처럼 고요한… 어떤 환경, 어떤 사건,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동요되지 않는, 아니, 파문조차 일지 않는 마음의 평안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 걸까? 세상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갈구하고 있는 그 평안을….

예수님이 가지셨던 평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평안, 사나운 폭풍 속에서도 작은 뱃머리에 누워 주무실 수 있었던 예수님의 평안, 얼마나 자주 우리는 예수님이 가지셨던 그런 마음의 평안을 갈망하는지…. 바리새인들의 증오 속에서, 때로 너무나 진리를 가르치시기 때문에 미움의 돌팔매질을 당하셔야 만 했던 외로운 지상생활에서도 예수님의 마음에는 항상 얼마나 완전한 평화가 깃들어 있었던가! 누구의 칭찬에도 의기양양 하시거나 어떤 비난과 실망으로 인하여도 의기 소침해 지지 않으시고 마치 구름 위에 태양이 빛나듯 예수께서는 얼마나 모든 것을 초월한 평화와 기쁨 속에서 사셨던가!       성난 폭도들의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외치는 아우성이 마치 사나운 대양의 물결처럼 높이 치솟아 거세고 성난 파도가 되어 그분 주위에 파열 하였건만 하늘의 빛 줄기에 둘러싸인 듯 평온하고 온유하게 안정을 유지하시던 예수님의 평안… 어떻게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그렇듯 지속적인 평화가 깃들어 있을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평안의 비결

예수님 속에는 자아가 없었다. 하나님 아버지의 본체이시며 영광의 광채 이셨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기로 작정 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자아가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비우셨기 때문에 그 분께서 하시는 일에는 어디에고 자아가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노라”고 말씀 하셨던 그는 또한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고 하셨으며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다고 말씀 하셨다. 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최고의 영광과 기쁨으로 여기셨던, 자신을 완전히 비우셨던 예수님의 마음에는 항상 하늘 아버지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해 있었으며 하나님과 완전히 일치된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므로 오는 영구적인 평안이 늘 자리잡고 있었다.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아버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사신 것,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늘 평안으로 채울 수 있었던 비결이었으리라.

마음에 평안이 없는 이유

불안이 일어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소유를 잃을까,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심지어 생명을 잃을까 걱정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곧 예수님 처럼 자신을 비우는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을 보면 언제나 자기 과시를 위해 애쓰고 투쟁을 위해 준비한다. 자아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그것이 굴욕과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방어태세를 취하게 된다. 또한 손에 한 웅큼 쥔 하잘 데 없는 생의 욕심에 연연하며 매달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자아가 죽고 우리 생애가 그리스도로 더불어 하나님 안에 감추어 질 때에는 욕심과 이기심과 교만과 지배욕이 멀어진다. 심령 속에는 안정이 깃 든다. 자아가 성령의 지배아래 굴복하게 될 것이며 이렇게 되면 우리는 제일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전전긍긍하지 않게 될 것이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밀어낼 생각도 품지 않게 될 것이다. 또 어떤 무시나 경멸도 조금도 괘념치 않게 될 것이며 비난에 대하여 귀머거리가 되고 조소와 모욕에 대하여는 소경이 될 것이다. 잃어버림에 대한 두려움도 없을 것이요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없을 것이요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사는 기쁨만이 가슴속에 파도 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거하는 손님으로 영접할 때 오는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안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과 뜻을 지켜주므로 어떤 인간적인 소동이나 사단의 분노도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통으로 얻어지는 안정을 결코 깨뜨릴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생애의 작은 일에서부터 큰 일까지 항구적인 평화의 원칙이 마음속에 자리잡음으로 늘 초연한 자세로 임할 수 있게 되리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말씀처럼… 자신이 죽고 예수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경험을 한다면….

참된 평안을 얻는 길

많은 사람들은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하여 많은 것들을 찾으며 방황한다. 혹은 찾은 듯 하나 곧 깨어져 버리고 말 헛된 것으로 마음을 채워 보기도 한다. 그러나 참된 평안은 하늘로 부터만 올 수 있다. 그리고 그 하늘에서 주시는 평안은 비인 마음이 준비되어야 만 받을 수 있다. 즉 자아가 완전히 비워진, 비인 마음이 있어야만…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찬 곳에는 참된 하늘의 평화가 자리 잡을 수 없기에…. 자아를 완전히 포기한 사람의 마음에만 하나님께 생의 모든 것을 의탁한 잔잔한 쉼과 평화가 있기에… 그래서 성경은 반석 되신 예수님께 떨어져 자아가 산산이 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 돌 위에 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고. 반석에 떨어져 깨어지는 것은 우리의 독선을 버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게 그리스도께 나아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그 분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믿는 것이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생의 시계를 쳐다보며 속절없는 삶의 바퀴 속으로 굴러간다. 가진 것을 다 잃을 것 같은 불안감을 가지고… 가졌어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갈증을 가지고… 당신의 마음은 어떠한가?
오늘 당신의 귀에 영원한 평안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인,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 하도록 보존 하리라”는 평범한 듯하나 심오한 진리가 메아리 쳐 오고 있지 않는가?

 

권두언


강병국 목사

    검은 구름이 끼고 비가 오는 날에도 우리는 저 구름 뒤에 여전히 해가 있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습니다.

    채찍을 든 어머니의 손이 매서와도 우리는 어머니의 사랑을 여전히 의심치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는 종종 하나님의 사랑과 그 섭리에 대하여 의심을 합니다. 테러리스트들의 공격과 같은 참화가 생길 때에 우리는 묻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느냐고요.

    변호사 없이 법정에 서는 일처럼 답답한 일이 벌로 없습니다. 우리의 입장과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변호해 줄 사람이 필요한 때에 그러한 자를 발견치 못할 때처럼 안타까운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로 그러한 입장에 서 계십니다. 재난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요즈음과 같은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원망하는 자들이 너무나도 많이 속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시하는 현실들이 그 반대로 생각하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시기입니다.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으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죽어 갔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독 가스와 바이러스로 많은 이들이 고생하며 죽어 가고 있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이러한 질문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잘못하면 해결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의심이 남모르게 우리의 신앙을 좀먹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호의 내용은 바로 이러한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큰 축복이 될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가장 잔인한 여왕


그녀의 이름은 유행이고, 그녀는 수백만의 신실한 추종자들을 지배한다.  

오늘날처럼 빠른 세상에서 유행은 마치 교만한 여왕처럼 그의 변함없는 방향으로 수 많은 사람들을 노예처럼 묶어서 끌고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변덕스러운 유행들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품위 있는 옷을 입음으로써 온 세상 사람들에게 그들의 주님을 바르게 나타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한 사람의 성품은 그가 입는 옷차림에 의해서 평가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어떤 이미지를 세상에 주고 있는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왜, 그리고 어떻게 해서, 유행을 사랑하는 것이 사람들의 생애를 지배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미국에 한 유명한 저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언제나 유행이 바뀌도록 고안하여 충동한 것은 모든 선의 원수인 마귀였다. 그가 가장 바라는 것은 인간에게 불행과 멸망을 초래케 하므로 하나님께 슬픔과 불명예를 돌리는 것이다. 그가 이 일을 가장 효과적으로 성취하는 방법 중 하나는 정신을 약화시키고 심령을 위축시킬 뿐 아니라 육체를 약하게 만드는 유행을 고안해 내는 일이다.”


성 차별이 없는 옷이 주는 악영향

1. 동성 연애를 부추김

인기 있는 어떤 유행들은 품위 있고 우아한 반면에 어떤 유행들은 도덕의 흐름을 역류시키는데 공헌하는 것들도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성 차별 없이 입는 옷들이다. 성 차별이 없는 옷을 파는 옷 가게에서는 이미 남자나 여자가 함께 입을 수 있는 옷들을, 심지어 미장원에서도 남녀에게 같은 머리 스타일들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옷들이나 헤어스타일들은 너무나 흡사해서 길거리를 걷고 있는 두 사람의 성을 전혀 구별 할 수 없게 한다. 오늘날의 유행사회에서는 더 이상 ‘다름에 대하여 만세’를 외치지 않고 ‘같음에 대해서 만세’를 외치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도덕적인 위험이 있을까? 성경은 동성연애에 대해 명확하게 죄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가증한 죄악으로 불리 우고 있다. 그 예를 보자. 가나안 즉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땅은 이미 동성연애에 물들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가나안 땅에 들어 가기 전에 어떻게 옷을 입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방법들을 알려주셨고 그것과 함께 동성연애에 대하여 주의를 주심으로 그와 같은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셨다.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 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 신명기 22장 5절. 이 말씀은 또한 그들의 가정을 지키는 안전막이 되었다.
동성연애는 지난 10년 동안 놀랄 만큼 자리 매김을 했다. 미국 언론 매체들은 동성 연애자들이 그들의 권리를 추구하는 움직임에 대하여, 또한 그들이 어떻게 그 동안 쉬쉬하면서 숨어 지내던 옷장에서 나오게 됐으며, 또 어떻게 그들의 권리를 추구하게 됐는지에 대해 찬사와 갈채를 보내고 있다. 또한 성 도착증 -남자가 여자의 옷을 입거나 여자가 남자의 옷을 입는 증상 - 은 점진적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평범한 옷차림가운데 이미 다른 성으로부터 빌려온 것들이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2. 서로 다른 남녀 의무를 혼란 시킴

성차별 없이 입는 옷이 유행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남녀 평등의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레스터 여사가 저술한 ‘역사적인 옷차림’이란 책은 “이러한 움직임 즉 성의 차별이 없는 흐름은 바로 남자와 여자를 성과 경제면에서 동등한 입장으로 몰고 갔고 또 사회적으로 구분되어 있던 남자와 여자의 의무도 불투명하게 만들어 버렸다” 라고 언급했다.
오늘날 남자들이나 여자들이 하나님께서 전혀 의도하신 바가 없는 추상적인 임무들을 꾀함으로 만족을 추구하고 있다. 반역의 결과는 성의 혼란이다. 성차별이 없는 옷의 유행은 바로 이러한 혼란을 야기시켰다. 유명한 저자 화잇여사는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가 입어야 할 옷차림에 분명한 구별을 두도록 계획하셨다. 왜냐하면 남자나 여자가 동시에 입을 수 있는 옷차림은 혼란을 야기시키고 범죄의 증가도 부추기게 만든다.” 라고 언급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스러운 남녀의 의무들을 망가트리고 악에 물들게 하는 사단의 계책이다.


도덕성을 타락시키는 유행

우아함은 어디로 갔는가?

성적 문란은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우아함이 결여된 유행에 있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여자들에게 주신 본래의 우아함을 거의 말살시켜 버렸다. 오늘날 유행의 흐름 속에서 여자들은 도덕의 굴레들을 벗어 던졌는데 우아한 옷차림도 그 중에 하나이다. 나체와 자극하는 옷차림들이 정상적으로 받아 들여지게 되었다. 미니스커트의 창시자, 메리 퀘인트는 “미니스커트는 남자들을 유혹하기 원하는 여자들의 상징이 되었다”.라고 담대하게 증언했다. 여자의 치마가 무릎에서 몇 인치 더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남자의 성적 자극도 또한 증가된다. 그리스도인 여성들은 이러한 유혹을 유발시키는 일에 동참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잘못된 유행의 흐름들

어떤 유행들은 수치스러운 생활 스타일을 묘사한다. “부랑아 같은 모습”의 유행은 마치 식욕 감퇴증이나 걸식 들린 사람의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영국의 모델 캐이트 모스는 키가 5피트 7인치이고(약 170Cm) 몸무게는 105파운드 (약47Kg)에 건강치 못하고 부적당한 가는 몸매임에도 불구하고 유명한 패션잡지에 매력적인 모델로 소개 되었다. 영국 코스모폴리탄 잡지의 편집인 말셀 디알기 스미스 씨는 그녀의 사진들이야말로 소름 끼치고 비극적인 것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그녀처럼 보이는 딸이 있었다면 나는 그 딸을 의사에게 데려 갔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오늘날의 패션 사회에서 묘사되고 있는 또 하나의 수치스러운 모습의 유행은 “헤로인 중독자의 얼굴” 즉 헤로인 중독자들의 육체에 나타나는 증상, 가는 몸매에 푹 들어간 눈, 창백한 피부 등이다. 헤로인 중독자였으면서 패션계에서 10년간이나 일해온 신티아 벡위트에게 헤로인 얼굴에 대해 물었을 때 그녀는 “그것은 너무 구역질이 나요. 헤로인은 좋은 것이 전혀 없어요. 헤로인은 바로 죽음 그 자체예요....” 라고 대답했다. 오래 전에 한 유명한 패션디자이너가 세계 최고의 아름다운 모델들에게 비싸면서도 너덜거리고 찢어진 옷들을 입혀 선을 보였다. 그 모델들은 오랫동안 잠을 못잔 것처럼 보였고 그들의 머리칼들은 마치 일주일도 넘게 감지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런 패션을 쉽게 받아들이는 젊은 세대들에 대하여 한 패션 디자이너는 설명하기를 “반항기 있는 신세대들은 그들의 미래에 대해 극히 비관적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으며 패션의 대가인 앨리슨 럴은 그 이유는 우울증 때문이라 설명한다. 그는 계속해서 “그 이유말고 그들이 못나게 보이고 싶어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그들은 이 세상이 못난 세상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못난 세상만큼이나 자신들이 못나게 보이고 싶은 거죠.” 라고 덧붙였다.


그리스도인들의 의무

우리는 어떻게 옷을 입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어떤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대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입는 옷이나 외관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자신을 학대하지 않고 너절하지 않고 건강하고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보여져야 할 것이다. 그들은 또한 성의 구별이 확실한 옷들 즉 남자는 남성적인 옷차림으로 또한 여자는 여성적인 옷차림을 해야 할 것이다. 패션계가 남자와 여자들에게 동시에 영향을 끼치고 있지만 대체로 여성에게 더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스도인 여성은 품위 있는 옷을 입음으로써 남자들이 선정적인 옷차림에 의하여 쉽게 자극받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 여성들은 그들의 옷차림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들어내는 동시에 그의 동료들을 도울 의무가 있다.

현숙한 여인의 참 옷차림

최신 유행의 옷이나 자기 몸을 학대하는 모델들을 우상처럼 여기는 대신에 여성들은 잠언 31장에 묘사된 여성처럼 되기를 힘써야 한다. 여기에 나오는 여성이야말로 모든 여성들이 따라야 할 모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그 집사람들은 다 홍색옷(2중으로 된 옷)을 입었으므로 눈이 와도 그는 집사람을 위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능력과 존귀로 옷을 입고....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며 그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며.” 잠언 31:10-27.
현숙한 여인은 그녀의 옷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녀는 외모로 드러나는 여인이 아니라 성품으로 드러나는 여인이다. 그녀는 믿을만하고, 충실하고, 부지런하고, 친절하다. 그런 여인은 외모만 가지고는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현숙한 여인은 패션의 빠른 유행을 쫓기 위해 자신의 돈이나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그 반면에 그는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해 튼튼하고 적절한 옷을 준비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 여성들도 금보다 더 귀중한 겸손과 온유의 내적인 장신구들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 그들의 옷차림은 자연스럽게 얌전하고 품위 있게 될 것이다.
영원한 성공을 위한 옷차림.
잠시후면 없어지고 마는 최신 유행의 옷들을 추구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영혼의 가장 부한 옷을 옷 입도록 하자. 영원히 간직하게 될 신의 성품으로... “그런즉 너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고린도전서 10장31절.

 

나는 감사합니다


서정희

 가까운 이들이 나에게 쉽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낼 때
나는 감사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표현하기에 나는 편한 사람이고,
나에게는 그들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야 하는 특권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나의 부끄러운 비밀들을 소식처럼 나누고 때론 나를 험담할 때
나는 감사합니다.
나는 나의 마음을 다시 한번 살피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고
게다가 사람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이해하고 견디기 힘든 고난과 시련이 나를 쓰러뜨리려 할 때
나는 감사합니다.
시간이 흘러 어느날 내가 겪은 일을 겪고 있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마음을 다해 해줄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
나는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잔잔히 채워주시는 기적을 볼 수 있고
하늘 가는 여정 길에  세상에 미련을 둘 것이 없어 가볍게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또는 내 사랑하는 이들이 몸이 아플 때
나는 감사합니다.
우리의 모든 소망을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께만 맡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당하기 힘든 일처럼 느껴지는 부탁이 들어 올 때
나는 감사합니다.
부탁한 이들은 나를 믿어 주는 것이고
그 일로 인하여 나는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또 다른 달란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 매 순간, 어떤 일이 나에게 닥쳐와도, 모두가 나에게 등을 보인다 해도
내가 감사함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내 곁에서 나를 붙잡으시고 도우시는,

내 입에 찬미를 넣어주시고, 기도를 넣어주시고, 말씀으로 소망을 넣어주시는
나를 사랑하시는 한 분이 계시기 때문이고.
그 분께서 오늘도 나와 같이 부족한 자에게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갈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십계명과 그리스도인의 옷차림


서정희

        오래 전 한 친구가 그리스도인이 올바른 옷차림을 하지 않을 때 십계명에 있는 10개의 계명 중 몇 개나 지키지 못하는지 아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오늘 나는 똑같은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다시 한 번하고 싶다.

이 질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적합한 옷차림이 어떤 것인지 그 답을 줄 것이라 믿는다. 이 질문의 대답을 생각하며 우리의 마음과 의복을 살피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서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첫째계명과 이기심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애굽기20장 3절)
출근하기 전, 학교에 가기 전, 친구를 만나기 전, 어떤 모임에 가기 전, 이 모든 일들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무엇을 먼저 생각 하는가?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오늘은 어떤 옷을 것인가’를 먼저 생각 할 것이다. 이 대답에 동기를 깊이 살펴보면 ‘나를 어떻게 드러 낼 것인가?’ 라는 또 다른 대답이 나 오게 된다. 나를 인도해 주신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드러낼 수 있을까? 가 아닌 나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이기심이 아닐까? 우리 모두를 당신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시는 그분을 어떻게 하면 알릴 수 있을까 하는 대신 나를 높이고자 하는 것은 나를 그 분의 자리에 놓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이 계셔야 할 자리에 우리의 이기심, 엄밀히 말하면 나를 두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 무엇을 입을까? 라는 질문 대신에 우리의 하나님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 를 더 많이 자문하고 그것에 대해 기도해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의복을 통하여 나를 드러내려는 대신에 그 분의 성품을 옷 입고 그 분만을 높이고 드러내기 위해 한번 더 무릎을 꿇을 것이다.

둘째 계명과 유행이라는 우상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출애굽기20장4절)
우상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실제로 그 앞에서 절하고 경배를 드릴 수 있도록 눈에 보이게 만들어 놓은 것을 말하는 것일까? 물론 그런 것들도 우상이다. 하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우리 삶에서 우리가 많이 생각하고 시간을 쓰는 것, 우리 삶을 지배하고 이끄는 것이 진정한 우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유행하는 옷들을 입고자 그들의 시간과 재정을 낭비한다. 현재 유행하는 옷을 입고자 입던 옷들에 싫증을 느껴 입을 만한 옷들을 버리고 새 옷을 사므로 재정을 낭비하게 된다. 또한 유명한 상표의 옷을 입고자 백화점이나 상점을 찾아 가거나 책자들을 여러 번 들추어 보며 시간을 낭비하기도 한다. 우리의 시간과 재정은 유행하는 옷을 입고자 쓰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이웃을 돕기 위해 쓰여져야 할 것이다. 현재 유행하는 옷들을 어떻게 멋있게 입을 것인가? 라는 질문이 우리의 삶에서 지배적일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상을 우리 마음에 아로 새기고 있는 것이다. 이 둘째 계명은 첫째 계명과도 연결이 된다. 우리가 옷을 선택해서 입는 일에 있어서 우리의 의지를 굴복 시키지 않는다면 우리의 이기심을 우상처럼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계명과 말씀에 따른 옷차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애굽기20장7절)
성경에서 여호와의 이름은 그분의 성품을 나타낸다.(출애굽기33장 18~ 19절, 34장 5~7절) 그분의 성품은 그분의 말씀에서 나타난다.(마태복음12장 34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 또한 여호와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은 우리의 매 삶에서 그분의 말씀과 성품을 잘못 나타내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옷차림에 대해 여러 번 말씀해 주셨다. 우리는 그 말씀들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을 잘못 나타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분께 욕을 돌릴 수 있다. 그러면 말씀들을 보며 우리가 어떤 의복을 입음으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지 살펴보자.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신명기 22장 5절)
여자를 상징하는 옷인 치마나 다른 옷들을 남자가 입어서는 안되고, 남자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옷인 바지와 다른 옷들을 여자가 입어서는 안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른 도덕성을 타락시키는 사회적 문제들 때문이다. 몇 년 전 그리스도인 남성과 위의 성경절을 두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적당한 길이의 치마를 입고 있는 여자와 바지를 입고 있는 여자 중 누가 더 남자에게 성적 자극을 주는지 아는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여성미가 넘치는 치마를 입은 여자가 아니냐고 대답했다. 그 때 그가 한 말은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여자들은 남자들을 너무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다리와 엉덩이의 선이 드러나는 바지를 입은 여자가 남자에게 더 성적 자극을 준다는 것이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보는 것으로 인해 유혹에 빠지기 쉬운 남자들의 연약한 본성을 여자들은 알아야 할 의무가 있고 지켜주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깨달았다. 성차별 없이 입는 옷은 또한 동성연애를 부추기고, 남녀 평등을 주장하게 하여 남녀 각기 다른 의무에 혼란을 가져오는 등 여러 문제를 일으킨다. 이러한 일들에 그리스도인이 동참하면서 주님을 믿는다고 공언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그분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아니겠는가?
위의 성경절은 여자가 바지를 입으면 죄이기 때문에 무조건 입지 말라는 의도에서 쓰여진 극단적인 말이 아니다. 이 성경절의 배경은 그 당시 도덕성이 타락하고 동성연애가 일반화되어 있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할 이스라엘 백성을 도덕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쓰여진 말이다. 이 말씀은 도덕성과 연결되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유효한 말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 여성이 몸의 선을 드러내지 않는 적당한 길이의 치마를 입는 것은 최선의 옷차림일 것이다. 그러나 많이 움직여야 하는 야외 활동을 할 때 다리와 엉덩이의 선이 드러나지 않는 치마바지 같은 넓은 바지를 입는 것은 그리스도인 여인들의 지혜가 아닐까 한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디모데전서 2장 9절)
영어 성경에서 “아담한” 이란 단어는 Modest로 쓰여있다. 사전을 찾아 보면 “겸손한 ,조심성 있는, 정숙한, 얌전한, 점잖은, 알맞은, 온당한, 수수한 , 간소한,”등으로 번역 되어 있다. 그리스인 여성들은 위의 말씀처럼 정숙하고 얌전하고 검소한 옷을 입어야 하겠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안내해 주는 옷차림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또한 첫째와 둘째 계명들과 연결이 되어 있다. 유행하는 값비싼 옷으로 나를 드러낼 때, 나를 먼저 생각하는 이기심으로 옷을 골라 입을 때, 우리는 세상에 그분의 품성을 잘못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그분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

 넷째 계명과 참된 예배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출애굽기20장8절)
대학에 다닐 때 사감 선생님께서 해 주신 이야기가 생각 난다. 사감 선생님께서 젊으셨을 때 주의 날을 지켜 교회에 열심히 다니셨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에 새로 산 노란색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갔다고 한다. 새 옷인데다 눈에 띄는 색깔이라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치마가 너무 예쁘다며 치마에 관한 이야기만 하다가 돌아 왔다고 한다. 사감선생님은 이렇게 말씀을 끝내 셨다. 창조주를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야 할 날에, 우리의 생각이 그 분께 고정되어야 할 주님의 날에 선생님은 자신의 생각뿐 아니라 교인들의 생각까지도 땅에 묶어놓는 잘못을 저질렀고 그렇게 하므로 그 날은 실패한 날이 였다고....
짧은 이야기지만 우리에게 우리의 옷차림으로 주님께서 특별히 정하신 날을 범할 수 있음을 알려주었고 또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날에 어떤 옷차림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이야기였다. 예배를 드리는 날 우리의 유행과 옷차림이 설교보다 앞서 연구 재료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섯째 계명과 불효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애굽기20장 12절)
많은 젊은이들이 세상에서 유행하는 옷차림을 따라가기 위하여 부모의 재정을 낭비하고 부모님의 일에 부담을 준다. 뿐만 아니라 많은 청년들이 유행에 따라 멋진 옷을 입고자 고상한 생애에 대한 포부를 없애기도 한다. 그 예로, 의복에 대한 욕망을 만족시키는 돈을 벌기 위해 어린 여 청년들은 잘못된 일들을 하기로  선택하는 것을 요즘 쉽게 보고 듣는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부모의 마음에 못을 박는 것이다. 나이가 든 성인들은 그들의 외모를 가꾸기 위해 부모를 돌보아야 할 재정을 헛되이 쓰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일들이다. 또한 건강에 해를 주는 옷을 입음으로 질병에 걸려 부모에게 불효하는 경우도 있다.(이 예는 아래에 있는 여섯째 계명에서 살피기로 하자.) 이러한   모든 것들이 부모를 공경하고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는 계명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여섯째 계명과 건강
        “살인하지 말지니라”(출애굽기20장13절)
이 계명은 꼭 흉기를 들고 사람을 살인 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으로도 사람을 미워하고 살인 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건강에 해를 주는 옷을 입음으로 혹은 건강에 해를 주는 옷을 입힘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의 수명을 줄이며 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떤 옷들이 건강을 어떻게 해치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그러한 옷들을 피해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서야 하겠다. 건강한 몸을 가질 때 건강한 마음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으며 부모에게도 기쁨을 안겨드리게 될 것이다.
        1. 사지를 따뜻하게 보호하지 못하는 옷
발과 팔 다리는 신체의 중요한 기관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충분히 입힘으로써 특별히 보호해 주어야 한다. 사지를 습관적으로 차게 하여 피가 너무 적게 되면 몸의 다른 부분에 너무 많은 피가 몰려있게 되어 건강을 해친다. 심장에 가까운 신체 부분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생리 기관보다 덜 덮어주어도 상관이 없다. 폐와 심장 부위를 두텁게 가려주는 것처럼 손발을 따뜻하게 해주면 말초 부분까지 혈액순환이 활발하게 되어 건강을 유지하는 비법이 될 것이다. 완전한 건강은 완전한 혈액 순환을 요구한다. 수족을 따뜻하게 보존하지 않으면 두통, 코피, 가슴이 답답함, 가슴 두근거림, 냉증, 여러 가지 부인병 그리고 소화불량 등의 증세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지를 따뜻하게 하지 못하는 옷은 피해야 한다. 특히 갓난 아이들이 두 팔을 노출시키면 항상 감기에 걸리기 쉽고 폐와 뇌 부분이 충혈된다.
        2. 허리를 조이거나 허리에 부담을 주는 옷
허리를 조이는 옷은 허리 부분에 있는 장을 조이며 위장을 약화시켜 피로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몸을 구부러지게 하는 경향이 있어 폐에 압박을 주어 올바르게 호흡하는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폐가 조여져 적당한 활동을 못하게 되면 피가 불결해지고 피부의 땀 구멍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안색이 좋지 않으며 평생토록 갖고 다닐 질병에 걸리게 된다.
        3. 몸에 딱 달라 붙는 옷
몸에 달라 붙는 옷은 피부의 땀구멍을 막을 뿐 아니라 피부를 약하게 만든다. 몸은 피부의 땀구멍을 통해 숨을 쉬는데 달라 붙는 옷이나 옷을 너무 많이 끼어 입게 되면 피부가 숨을 쉴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땀구멍이 막혀 몸 안에 노폐물들이 가득차게 되므로 또 다른 질병의 원인이 된다. 뿐만 아니라 몸에 꼭 끼는 옷은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지 못하므로 몸 안에 있는 각 기관들의 활동에 장애를 주어 많은 질병의 원인을 제공한다.
       4.바지나 치마의 길이가 너무 긴 옷

요즘 젊은 청년들 사이에서 땅에 끌리는 긴 바지가 유행이다. 심지어 땅에 끌리어 밑이 헤어진 바지가 더 멋있어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치마나 바지의 길이가 길면 길거리에 있는 진흙이나 먼지를 쓸어 발목에 묻히고 발목을 차게 해 건강을 해친다.

 일곱째 계명과 도덕성
        “간음하지 말지니라.”(출애굽기20장 14절)

예수님께서는 간음에 대하여 산상에서 다시 한 번 설명하여 주셨다.”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태복음 5장 27~28절) 간음은 실제적인 행동으로만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내가 직접 그 일을 하지 않았을 지라도 다른 이들에게 그 일을 하도록 실마리를 준다면 나 또한 그 일에 동참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보는 것으로 인해 훨씬 쉽게 유혹에 빠진다. 그리스도인 여성들은 목선이 많이 파인 옷이나, 가슴이나 몸의 선이 드러나는 달라 붙는 옷이나, 허벅지까지 보이는 짧은 치마나 바지를 입음으로 그들 주위에 있는 남성들에게 그들이 받지 않아도 될 시험을 주고 있지 않은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를 돋 보이게 하기 위해 입는 옷차림들로 인하여 신실한 그리스도인 남성들이 그들 마음에 죄를 범하게 된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리스도인 여성들은 정숙한 옷차림으로 그들 주위에 있는 남성들을 도와야 할 것이다.

여덟째 계명과 하나님과 이웃의 돈
        “도덕질 하지 말지니라.”(출애굽기20장 15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단순하고 정숙하고 검소한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쫓기 보다는 우리의 이기심을 쫓아 얼마나 많은 재정을 낭비하고 있는가? 그 돈들은 가난한 이웃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는데 쓰여져야 했을 돈일 것이다. 우리의 주머니에 있지만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거둬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 돈을 내 옷을 사는데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것과 이웃의 것을 도적질 하는 것이다.

아홉째 계명과 살아 있는 설교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출애굽기20장 16절)
우리는 말과 행동과 의복으로 우리의 이웃에게 하나님을 소개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과 행동과 의복을 하나님의 말씀과 잘 조화시켜 이웃에게 살아있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말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최신 유행하는 비싼 옷만 입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면 그들에게 겸손하신 예수님을 제대로 소개할 수 있겠는가? 또한 매주 교회에 가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지만 입고 있는 옷이 몸의 선을 심하게 드러내는 야한 옷들이라면 하나님의 성품을 올바로 나타낼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의복을 잘못 입을 때 우리가 입으로 시인 한 것에 대해 이웃에게 거짓증거를 하게 되는 것이다.

열째 계명과 탐심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출애굽기20장 17절)
우리는 우리 친구들이 입은 옷들을 부러워하고 탐낸 적이 여러 번 있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가 비싸고 눈에 띠는 옷으로 자주 갈아 입고 출근을 하거나, 학교나 모임, 또는 교회에 간다면 우리를 보는 이들은 우리의 의복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그들도 그렇게 입고 싶은 욕망이 생기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검소한 옷차림을 귀하게 여기므로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도 말아야 할 것이고 또 이웃에게 우리의 허식을 탐내는 기회를 주어서도 안 될 것이다.

 

결론을 내리며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소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제일 먼저 최상의 미, 즉 영원한 미를 사랑하고 찾아 구하기를 희망하신다. 사람이 만든 아무리 훌륭한 작품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극히 값진 것”으로 보시는 아름다운 품성과 비교될 만한 것은 없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입는 의복이 말쑥하고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몸에 잘 맞고 어울리는 것이 되기를 원하신다. 옷차림에 의해 그 사람의 인격이 판단된다. 청초하고 수수한 의복이 겸손한 태도와 연합되면, 젊은 여성을 품위 있는 분위기로 두를 것이고, 그 분위기는 사회적 문제와 건강에 관한 허다한 위험에서 그를 지키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요약

1.하나님의 성품을 먼저 옷 입는다.
2.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옷을 입는다.
3.유행을 따르지 않는 단순한 의복을 입는다.
4.몸에 편안하게 잘 맞고 어울리는 옷을 입는다.
5.직장활동과 작업에 적합한 옷을 입는다.
6.남녀의 구분이 분명한 옷을 입는다.
7.건강에 적합한 옷을 입는다.

 

변비, 너무 힘들어요!


얼마나 자주 오십니까? 얼마나 오래 동안 앉아 계십니까? 여기에 날마다 정해진 시간에 와서 편안한 마음으로 앉았다가 나갈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흔한 문제는 무엇일까? 몇가지의 질병을 생각할 수 있지만, 변비야말로 빠뜨릴 수 없는 골치거리이다. 변비는 장의 내부를 정기적으로 비우는데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생기는 현상이다. 대변의 상태가 단단하고 건조할 경우, 변비 현상이 생기게 된다. 변비가 심하거나 장에 문제가 있을 경우, 만성적인 두통이 생기며, 복부가 불편하고, 기운이 없으며, 식욕이 저하되고, 허리에 통증이 온다.
식사를 균형있게 하였을 경우, 매일 3-7 온스(약 90-200g)의 배설물을 배출하게 된다. 식물성 섬유질을 많이 섭취하면 할수록, 배설물의 양이 많아짐과 동시에 부드럽게 된다. 고기, 설탕, 치즈와 같은 농축된 식품은 배설물의 양을 감소시키며, 대변을 단단하게 만든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순수한 채식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변비 증세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매 식사가 위에서 소화되어 장으로 내려갈 때마다, 장에 있는 배설물이 앞으로 밀려나가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건강한 상태의 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장에 있는 배설물이 일주일에 한번이나 두번 정도 앞으로 움직여 나간다. 배설물이 장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면, 장 내부에 각종 질병과 암이 발생되기 쉽다. 변비는 변비 그 자체도 문제이지만, 만성적인 변비의 결과로 인하여 생기는 여러가지 다른 질병들이 더욱 큰 문제이다.
대부분의 의학자들은 날마다 정해진 시간에 화장실에 가는 것은 건강에 매우 유익하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이른 아침, 식사 전이나 후가 화장실에 가야 하는 최적의 시간이다. 일반적으로 변비의 원인에는 저섬유질 식사, 고단백질 섭취, 불충분한 수분의 공급, 운동 부족, 수면 부족, 피로, 긴장과 스트레스 등이 있다.

예방과 천연치료

1. 섬유질이 많이 포함된 식사를 하지 않는한, 변비 증세가 없어질 수 없다. 현미, 채소, 과일 등에는 풍부한 섬유질이 들어 있다. 곡물의 씨눈을 물에 타서 마시면, 대변 배설의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장(bowel)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도 유익을 얻을 수 있다. 변비의 치료에 있어서, 옥수수의 눈은 통밀의 눈보다 훨씬 많은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
2. 대변을 잘 나오게 만드는 이완제(laxative)를 사용하여 변비를 치료할 경우 오히려 유해한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된다. 이완제를 먹을 경우, 그것이 몸밖으로 배출되기 전까지 약 20피트(약 6.5미터)나 되는 소화기관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예민한 조직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이완제의 부작용으로는, 포타슘의 손실, 내장 운동력의 저하, 그리고 콩팥의 심각한 손상 등을 들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변비의 치료를 위해서 광물성 기름을 사용하는데, 광물성 기름은 모든 이완제 중에서 가장 유해하다. 광물성 기름은 칼슘과 인의 흡수율을 저하시키며, 비타민 A,D,E,K와 캐로틴이 손실된다. 광물성 기름을 장기간 동안 계속해서 사용할 경우, 장에 암이 발생될 수 있다.
3. 비만과 변비 사이에 상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체중이 초과된 사람들은 체중을 적어도 정상으로 낮추어야 한다.
4. 화장실에 가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찬물을 담은 소형 관장기를 항문에 넣은 다음, 물을 주입시키고 1분 후에 물을 배출시키면, 잠시 후에 장에 있던 대변이 따라나오게 된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이러한 방식의 관장을 몇번 함으로써, 날마다 정해진 시간에 화장실에 가는 습관을 형성시킬 수도 있다.
5. 장의 위치와 방향에 맞추어서 복부를 적당하게 마사지 함으로써, 장의 운동을 촉진시켜서 대변의 배출을 도울 수 있다.
6. 모든 종류의 동물성 식품에는 섬유질이 거의 없기 때문에 변비를 유발시키며, 소화를 위하여 내장에서 머무는 시간이 매우 길기 때문에 여러가지 문제의 원인이 될 수 있다.
7. 식사를 서둘러서 빨리 하거나 불규칙하게 하는 것은 장의 기능을 저하시킨다.
8. 모든 종류의 안티히스타민은 그 자체에 건조시키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대변을 건조하게 만들 수 있다. 살빼는 약, 통증 완화제, 암피타민, 그리고 코데인을 함유하고 있는 기침약 등은 장의 기능을 저하시킨다.
9. 규칙적인 운동은 혈액의 순환을 촉진시키며, 심장을 강하게 할 뿐 아니라 복부 근육을 강건하게 만들기 때문에 장의 기능을 왕성하게 한다.
10. 변기에 앉았을 경우, 상체를 앞으로 숙여서 복부를 최대한으로 가깝게 접근시킨 자세가 배설물을 원활하게 배출하기에 가장 적합한 자세이다.
11. 과식은 변비를 조장한다.
12. 우유는 변비를 일으키는 식품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다. 우유를 먹던 사람들에게 우유를 제거하고 과일과 야채를 섭취하도록 한 결과, 장의 운동이 정상적으로 회복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다음과 같은 식품들은 변비를 유발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치즈, 요구르트, 계란, 생선, 닭고기, 자극성 양념, 소다수, 아이스크림, 과자, 케익, 파이 등.
13. 어떤 식품들은 천연적으로 이완제의 역활을 한다.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푸룬 (자두) 쥬스가 있으며, 사과, 무화과, 감초, 시금치 생것, 딸기 등도 대변이 잘 나오게 도와주는 이완제의 역할을 한다. 자두(푸룬)에는 장의 운동을 자극하는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 바나나, 사과와 같은 과일에는 많은 양의 수분을 흡수하는 펙틴이라는 성분이 있는데, 펙틴은 소화관을 따라서 내려가는 동안, 박테리아와 장의 내벽에 붙어 있는 쓰레기들을 끌어 갈 뿐만 아니라, 상처난 내장의 벽을 고치고 부드럽게 하는 치료의 기능을 한다. 콩나물에도 이완제 성분이 함유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4. 임산부들에게는 일반적으로 변비 현상이 나타난다. 태아가 성장함에 따라서, 장이 압력을 받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생기게 된다.
15. 복부에 압력을 가하는 꼭 끼는 의복을 삼가해야 한다.
16. 날마다 6-8 잔의 물을 마시는 것은 변비의 예방에 필수적이다. 아침 식사 전에 따뜻한 물을 마시는 것은 장의 운동을 촉진하게 만든다.
17. 홍차와 같은 차 종류는 변비를 유발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변비에 유익한 식물
a. 매 식사마다 4-6개의 올리브를 먹을 것
b. 현미식을 할 것
c. 자두, 섬유질(pulp)가 포함된 푸룬 쥬스, 사과, 옥수수 등등

찌꺼기의 통과 시간을 줄여라!
위장에서 소화된 음식이 장을 빠져나가는데 걸리는 시간(transit time)이 긴 경우, 즉 위에서 소화된 음식 찌꺼기가 비정상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장에서 머무르게 될 경우, 장에 여러가지 질병이 생길 수 있으며, 암의 유발 가능성도 매우 높아진다. 고섬유질의 식사와 운동은 장의 통과 시간을 줄이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다.
장의 통과 시간을 측정하는 방법: 2 티스푼의 참깨를 물과 함께 씹지 않고 삼킨 다음, 참깨가 완전히 대변으로 빠져나가기 까지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는가를 눈으로 확인하여 측정한다.

1부 - 건강의 열쇠, 유전자


어떤 문제든지 그 원인을 알아야만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하다. 질병도 마찬가지이다. 병의 원인을 정확히 알고 치료해야만 그 병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수많은 환자들이 원인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증세를 치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병을 치료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의 병이 낫지 않는다고 절망한다. 또는 질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려고는 하지 않고 건강해지기 만을 바라면서 병원을 쫓아다닌다.

질병의 원인은 무엇이고, 건강한 삶의 비결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 얼마나 분명하고 정확한 대답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질병의 원인을 치료할 수 있고 병을 고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은 수많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세포가 건강해야 사람도 건강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포는 사람처럼 어떤 것은 좋아하고 어떤 것은 싫어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만일 세포가 싫어하는 것을 내가 좋아 한다면, 우리 몸의 건강이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을 생각할 수 있다. 세포가 싫어하는 것을 내가 좋아해서 그것을 먹거나 자주 한다면 세포는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그 결과 그것은 어떤 종류의 병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건강의 비결은 첫째로, 세포의 성질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포는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을까? 그것을 잘 이해하면, “우리 인간은 이런 것을 먹고, 이렇게 살도록 만들어 졌는데, 나는 그 동안 그 원칙을 벗어나서 생활해 왔기 때문에 이런 병이 들게 되었구나!” 라는 깨달음을 가질 수 있다.

사람의 세포 안에는 46개의 염색체가 있고, 10만 종류의 유전자가 있다고 한다. 이 유전자가 세포의 활동을 결정한다. 따라서 유전자가 죽으면 세포도 죽는다. 유전자가 죽는다는 말은 어떤 독소로 인하여 유전자가 부러지기도 하고 잘려나가기도 하고, 순서가 서로 엉키기도 하여 엉망이 되었음을 말한다. 결국 몸에 병이 들었다는 말은 세포에 병이 났다는 말이며, 이것은 또한 유전자에 문제가 생긴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만성 B형 간염은 간세포의 유전인자에 문제가 생긴 것이고, 치매증은 뇌신경 세포의 유전자가 변질되어 생기는 병이다. 모든 것이 유전자의 병이다. 따라서 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유전자가 정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을 할 수 있게 된다. “한번 비정상적으로 변질된 유전자는 다시 정상으로 회복될 수 있는가?” 즉, “병은 치료될 수 있는가?” 다행스럽게도 병들어서 변질된 유전자에게 유전자가 스트레스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올바른 환경을 제공해 줄 경우, 유전자는 다시 정상적으로 회복된다. 그것을 세포의 재생이라고 부른다. 이런 재생의 과정을 통하여 모든 병은 치료될 수 있다. 이것은 불치의 병으로 죽어가는 환자들에게 있어서 놀라운 복음이다. 유전자는 원래부터 재생할 수 있게 창조되었다. 처응부터 그렇게 만들어졌다.

2부 - 산돼지와 집돼지

      
       유전자의 재생은 산돼지와 집돼지의 이야기에서 매우 잘 살펴볼 수 있다. 산돼지와 집돼지는 생김새가 너무나 다르다. 같은 돼지라고 부르기 힘들 만큼 판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산돼지는 부리가 쑥 튀어나오고 송곳니가 밖으로 길게 솟구쳐 나와 있고, 집돼지는 부리가 짧고 송곳니도 얌전히 들어가 있다. 분명 겉으로 보기엔 다른 동물 같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설명하면 분명 집돼지와 산돼지는 같은 동물이다. 돼지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에 의해 집돼지와 산돼지의 유전자가 같다는 게 밝혀졌다. 그런데 서로 다른 모습을 하게 된 이유는 산에서 살던 돼지를 우리 조상들이 잡아서 집에서 기르다 보니 송곳니도 없어지고 지금의 집돼지처럼 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산돼지와 집돼지가 같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실험한 내용이다. 과학자들은 산돼지를 집에서 길러 보았지만 산돼지의 송곳니가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돼지는 6개월에 한번씩 새끼를 낳는데 도대체 수십 세대가 지나도록 이론처럼 송곳니가 들어간 집돼지의 모습으로 변하지 않았다. 아마 그렇게 되기 위해선 아주 오랜 세월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결국 과학자들은 이 실험을 포기하고 이번엔 반대로 해 보았다. 집돼지를 산에다 갖다 놓고 길러 본 것이다. 철조망을 치고 다른 동물들이 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다음, 몇 쌍의 집돼지를 산에 풀어놓았다. 처음 산으로 들어간 1세대 사이에서 2세대들이 태어났는데 그 때에는 송곳니가 없었다. 그 2세대가 결혼을 해서 6개월내지 1년 후에 3세대가 태어났는데 송곳니가 나기 시작하였고 4세대부터 더욱 확실한 모양의 송곳니가 나타났다. 산돼지를 집돼지로 바꾸는 실험에서는 수십 세대를 기다려도 그 결과를 볼 수 없었는데, 집돼지를 산으로 보내고 3세대가 되니 송곳니가 나기 시작 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본래의 돼지에게는 있었지만 필요가 없어진 송곳니 유전자가 잠들게 되었고 그렇게 잠자고 있던 송곳니 유전자가 필요에 따라 다시 활성화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재생하였다는 점이다. 어떤 생물이 부리라든지 송곳니라든지 머리칼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더 자라게 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 처하게 되면 그것을 만들어 내던 세포 속의 유전자가 점점 퇴화한다. 그러다가 필요하면 퇴화된 유전자가 다시 활발하게 움직임으로써 그 부분이 재생된다. 필요한 상황에서는 생명이라고 부르는 어떤 힘이 그 필요한 유전자를 깨우는 것이다.     

       ‘세포는 재생한다.’ 이 명제는 병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우리에게 실로 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보너스처럼 우리를 기쁘게 한다. 그것은 바로 과학자들의 실험에서 분명히 증명되었듯이, 정상이던 세포가 비정상으로 되기는 어렵고 오랜 세월이 필요하지만 비정상이던 세포가 정상으로 돌아가는 데는 그리 긴 세월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본래 있었던 돼지의 송곳니가 없어졌다는 것은 뼈 세포의 유전자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퇴화 시킨 결과로서 곧 정상에서 비정상으로 된 경우이다. 그런데 산돼지를 집으로 데려다 놓고 아무리 기다려봐도 집돼지로 바뀌지는 않았다. 즉 정상이 비정상으로 되는 것은 수십 세대를 기다려도 보기 어려울 만큼 힘든 일이다.

       그러나 반대로, 없어진 송곳니가 다시 생겨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비정상이 다시 정상으로 회복되는 것은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빨랐다. 이 결론을 그대로 우리 몸에 적용하면 참으로 소중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병이란 유전자가 비정상적으로 변질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유전자는 재생하게 되어 있으며 그 시간 또한 정상에서 비정상으로 될 때보다 훨씬 빠르다는 결론은 우리에게 희망을 갖게 하는 과학적인 근거가 된다.

서론 - 지구에 존재하는 고통의 의미


우주선을 타고 바라보는 지구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기 짝이 없다. 마치 파란 구슬처럼 평화롭게 공중에 떠 있는 우리의 지구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케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실재로 지구의 구석 구석을 살펴보면 그 구석 구석마다 말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보게된다. 죽음과 뜻하지 않은 재난들, 그리고 슬픔과 고통들로 가득 차 있는 우리의 지구. 전쟁과 테러, 홍수와 기근, 범죄들과 굶주림들로 얼룩져 있는 우리의 지구. 이러한 우리의 지구에는 오늘도 죄없는 자들이 희생당하고 있으며 고통이 그칠 날이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왜 이 세상에 고통이 있는 것일까?

흔히들 이렇게 묻는다. 하나님이 정말 사랑이시라면 왜 이 지구에 이렇게 고난과 슬픔과 죽음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가? 더 나아가서 우리를 곤궁에 빠뜨리는 질문은 "왜 하나님께서는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고통을 당하게 하시는가?"라는 질문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자들을 어려움과 고통에서 보호해 주시지 않으시는가?" 라는 질문이다. 가끔 필자는 이러한 도전들을 받는다. "하나님을 잘 믿던 내 남편이 왜 직장을 잃어야 합니까?" "그렇게 믿음이 좋던 사람이 왜 암에 걸려야 합니까?" "왜 내 아내가 나를 두고 떠났습니까?" "하나님은 낮잠을 주무시고 계신 건가요?" 등등. 이 세상에는 대조적인 문제들이 많이 있다. 아름다운 꽃밭과 황량한 사막, 풍요로운 논밭과 굶주려 뼈만 앙상한 인간들. 세상은 선과 악이 어우러져 있다. 우리는 건강과 질병, 생명과 죽음, 기쁨과 슬픔이 함께 존재하는 대조를 보게된다. 아름다운 장미 밑에 가시가 있듯이 말이다. 과연 고통과 불행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리는 그 이유를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찾을 수가 있다.


불행과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가?

불행과 고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고통들은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출애굽기 34:6은 하나님의 성품을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러면 고통이 어디에서 왔을까? 마태복음 13:24~34을 읽어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배우게 되는데, 종들이 밭에서 가라지를 발견하고는 좋은 씨만 뿌렸는데 가라지가 왜 생겼느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 때 주인은 밤에 잘 때에 원수가 뿌리고 간 것이라고 설명을 하였고, 종들이 그 가라지들을 뽑자고 제의하자 추수 때까지 놓아두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그 비유를 예수께서 설명하시는 과정에서 "밭은 세상이요"(마 13:38)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이 세상을 죄와 고통이 없는 곳으로 창조하셨다. 푸른 풀밭에 꽃들이 만발하고 새들이 기쁘게 노래하며 슬픔과 질병이 전혀 없고 건강과 행복만 가득찬 곳으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원수인 마귀가 거기에 죄와 사망과 고통의 씨를 뿌린 것이다.

누가복음 13장을 보면 예수께서 18년 동안 온 몸이 꼬부라져 있던 한 여인을 고치신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누가복음 13:16은 예수께서 그 여인을 "십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의 책임은 사단에게 있는 것이다. 그가 바로 이 세상에 재난과 파괴를 초래한 장본인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하나님의 좋으신 성품을 곡해시켜서 마치 이러한 고통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처럼 오해케 만들어 인간들을 자기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창조하셨는가?

그런데 여기에 몇가지 질문이 생긴다. 사단이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 하나님께서 그를 창조하셨는가? 라는 질문들이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창조하셨다면 결국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책임지셔야 하는 일이 아닌가? 사람들은 흔히 사단을 불타는 지옥에서 부터 올라오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존재로 상상을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원래는 천사였었으며 하늘에서 부터 내어 쫓김을 받은 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누가복음 10:18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마귀가 원래 하늘에 있었으며 하늘에서 하나님을 반역하여 전쟁을 일으켰고 또한 이 전쟁은 이 지구상에서 지금도 진행중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계 12:7~12 참조). 그는 하나님을 억울하게 고소하던 전쟁을 일으켰다가 자기를 지지하던 타락한 천사들인 자기의 부하들과 함께 내어 쫓김을 당한 것이다(살아남는 이들 제22호, 16페이지 참조).

여기에서 한가지 짚고 지나가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귀를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천사 루스벨을 창조하셨는데, 그가 반역하여 스스로 악한 사단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천사들 중에 가장 찬란하고 재주가 있던 자였었다. 에스겔 28장은 그를 "아침 계명성"으로 불리웠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뜻은 "Light Bearer" 즉, "빛을 가진 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가 교만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품게 되었고 드디어 자기도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 하나님과 비기려고 꾀하게 된 것이다(겔 28:13~17; 사14:12-17 참조). 그는 하나님을 공격하며 하나님의 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도전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해와에게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하신 선악과를 따먹어도 괜챦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이기적인 분이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보좌를 전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곡해시키고 거짓으로 고소하여 천사들과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도록 은근히 조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사람을 끌어내리거나 파괴시켜서 자기를 세우려고 하는 정신은 마귀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사랑의 교제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루스벨이 반역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인류들에게 스스로 선택 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주시어 타락할 가능성을 주셨는가?" 라는 질문이 등장하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셨더라면 이 세상에 고통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다.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바로 선택 할 수 있는 자유 의지의 힘이었다. 자유 의지의 선택력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사랑을 할 수가 없는 존재가 된다. 마치 로보트처럼 말이다. 로보트는 인격이 없다. 그저 프로그램된대로 행동하는 기계일 뿐이다. 우리를 인간되게 하며 개인적인 인격체로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이 자유의지의 힘인 것이다. 로보트는 하나님을 사랑 할 수 도 없고 예배하며 찬송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로보트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인격체로 창조하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자녀들이 로보트라고 가정하여 보자. 상당히 편리하긴 할 것이다. 청소도 잘하고 빨래도 잘 도와주고 공부도 잘하며 전혀 말썽을 부리지 않는 아이들로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부모들과 진실된 사랑의 관계를 맺는 아이들이 될 수 있을까? 결코 될 수 없다. 그런 아이들은 그저 프로그램된 기계들에 불과한 것이다. 차라리 가끔 실수를 범하고 청소를 하지 않는다로 할지라도, 천진스럽게 부모의 뺨에다 대고 "아이 러브유"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식의 사랑이 훨씬 낫지 아니한가? 사랑은 프로그램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랑은 강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천사들과 인간들에게 선택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다. 진정한 사랑의 관계만이 참된 행복을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스벨은 교만하여져서 그 자유의지를 하나님을 반역하는데 사용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자기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였고, 자기가 우주를 더 잘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법칙과 율법에서 벗어나면 진정한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단의 말은 천사들과 인간들을 속이기 위한 거짓말이다. 오늘날 청소년들이 법이나 규율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는 것인줄로 착각하다가 방종과 파멸의 결과를 거두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왕국에 문제가 생겼고 반역자 때문에 하늘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드디어 마귀와 마귀를 선택한 악한 천사들이 쫓겨나게 되었고 그들이 바로 악령들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선악간의 전쟁은 이제 곧 끝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모든 죄와 고통의 이유를 밝히시고 죄와 죄의 장본인인 사단을 없애심으로써, 이 세상, 아니 이 우주를 다시 원래의 아름다움으로 회복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로 다시 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실 때에 그것 때문에 반역과 타락의 가능성을 생길 것도 아셨다. 그러므로 그러한 위급한 상황이 생길때에 어떻게 대처하실 것이라는 계획도 영원전부터 세워 두신 것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범죄한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로 가시어 우리들의 반역의 죄값을 대신 지불해 주시고 우리에게 다시 살 기회를 주시는 위대한 희생적 사랑의 계획이었다.
마귀와 악한 천사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을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범죄하였지만, 인류들은 마귀에게 속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쓰라린 고통의 역사를 지나고 나면 이 세상에 다시는 반역이나 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죄와 불순종의 결과가 어떠하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너무 뼈져리게 느꼈기 때문에 말이다. 우리는 잠간동안 괴로움과 슬픔이 많이 이 세상을 지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죄와 고통이 없는 원래의 에덴 동산으로 회복시켜 주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계시며 또한 그 구속의 사업을 날마다 신실하게 진행중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1부 -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단 말인가?


뉴욕과 와싱턴의 테러 참사 이후에 제기되는 심각한 질문이 하나가 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가는 순간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으며 또 어디에 계셨단 말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인류 역사의 모든 재난들과 전쟁, 더 나아가서 모든 슬픔과 고난들을 다 포함하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전제하에 신앙을 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재난들과 하나님의 섭리를 연결시키어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우리가 고통 당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계셨다는 말인가? 영어로 말해서, Does God care?(하나님께서 과연 관심이 있으신 건가?) 이라는 질문은 인간의 역사 만큼이나 오래된 질문이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렇게 악했던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되도록 허용하셨을 때에도 아브라함은 이렇게 항의하였었다.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 하시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 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나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3-25).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 불공평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이다.

그러나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되는 장면들에서 하나님의 참 모습을 바라 볼수가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 성을 멸하시기 전에 인간에게 알리시고 하나님의 선택이 이렇게 밖에는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셨다. 아브라함에게 알리시지 않고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권한이 하나님께 있지 않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성경을 읽는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설명하여 두시고자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죽하시면 그렇게 하셨을가”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 재난이 난무하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과제인 것 같다. 처음에 오십인만 거기있으면 그 성을 멸망시키시려는 마음을 돌려 주시겠습니까? 라고 물은 아브라함이 45인,40인,30인,20인, 아니 나아가서는 열명만 있다면 살려 주시겠습니까? 라고 하소연하였다. 그때 하나님의 대답은 ?es?였다. 그 대화 때문에 아브라함은 소돔성이 불타는 장면을 보았을 때에도, 하나님께 대한 의문이나 불만이 전혀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그분의 친구가 된 것이었다. 한가지 부연해서,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그 소돔의 불 속에서 몇명 안되는 롯과 그 식구들을 천사의 손으로 이끌어 내어 주셨다. 그렇게 자비하시고 공의로우신 분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노아 홍수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120년 동안이나 경고하시고 기다리셨다. 그러나 그 심판과 재난을 초래한 것은 인간들이었지 하나님이 아니었다. 심판과 죽음은 회개치 않은 인간에게 언젠가는 반드시 와야하는 문제이다. 죽음 앞에서 슬프지만 우리는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 그러므로 죽음 자체보다는 죽음을 위하여 준비되었는가가 더 중요하다. 죽음과 재난을 불러오게 만드는 인류의 상태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 악인들을 영원히 살도록 내버려 두실 수가 없으지 않는가? 그것은 영원히 살 의인들에게 너무나 불공평한 일인것이다. 언젠가는 누구나 다 자기의 생애에 대하여 심판을 받아야 한다. 어떤때는 그 심판이 조금 앞당겨 졌다고 해서 우리는 울고 불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이다.

고기 뱃 속에 들어갔던 유명한 요나 때에도 하나님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예가 있었다. 그당시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가장 미워하는 적국이었던 니느웨 성에 가서 회개하라고 전도하는 일은 매국노 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도 반대 방향인 욥바로 도망쳐 간 것이었다. 파란 곡절 끝에 요나는 니느웨의 해변에 토해 내쳐졌다. 그는 할 수 없이 그곳에서 닥아오는 심판에 대하여 전도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왕으로 부터 모든 백성들이 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쓰며 다 회개하는 것이 아닌가! 고고학을 통하여 보면, 그당시 니느웨 성에는, 신의 기별자가 물고기의 뱃속에서 나올 것이라는 전설이 있었다는 것이다. 큰 물고기 뱃속에서 걸어나오는 요나를 본 어부들이 놀래어 소문을 퍼뜨렸을 때에 온 니느웨 성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는 그들의 전설까지 이용하시어 그 악한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키시고 회개하라는 기별을 전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심판의 기별을 전달한 요나는 산에 올라가 그 성이 불에 타서 멸망당하는 모습을 보려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접한 소식은 그것이 아니었다. 니느웨는 회개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셔서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는 것이었다. 그때 요나는 무척이나 원망과 불평을 털어 놓았다. 그러면 내 입장과 평판이 무엇이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수만명의 어른들과 아린 아이들을 살려주려하시는 엄청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행동 앞에서 선지자는 자기의 입장과 평판을 더 앞세웠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요나 옆에 한가지 작은 기적을 베푸시었다. 박 넝쿨이 요나의 머리를 가리어 뜨거운 태양으로 부터 시원케 해 주신 후 벌레를 보내어 그 박 넝쿨을 씹어 시들게 하시었다. 그때 요나는 또 불평하였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요나서를 끝마치는 마지막 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나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요나서 4:10,11).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의심하는 자들이 내세우는 성경의 한가지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 족속들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죽이라고 명령하신 대목이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우선 창세기 15:16을 먼저 읽어 보기로 하자.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해 주셨지마는 사대만에, 즉 400년 이후에나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그들의 죄악의 잔이 아직 다 차지 아니했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모본을 통하여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고,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를 도는 동안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기적의 이야기들을 통하여 가나안 사람들의 마음을 여시려고 애쓰셨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마음이 완악해지어 아무리 하나님께서 감동하시려해도 성령의 음성이 더이상 소용없을 정도로 악하게 되었다. 다시말해서 그들의 은혜의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다. 그 후에 할 수 없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시고 멸절하여 버리신 것이다. 소돕과 고모라의 멸망과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당시에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에서의 자손들과 롯의 자손들은 아직 은혜의 문이 닫혀지지 않았으므로 죽이지 말라고 하신 사실을 신명기 2장에서 찾아 볼수가 있다. 그당시 가나안 족속들은 자기 자식들을 몰렉의 신전에 바쳐서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여 태워서 재사를 드렸다. 그뿐인가! 그들은 동성연애는 몰론이요 짐승들과 교합하는 악한 일들을 행하였고 그들의 죄악이 온 땅을 패괴하게 하였다(레위기 18장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때까지 참으셨다가 이스라엘의 손을 통하여 그들을 심판하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나라가 로마인들에게 무참하게 멸망되도록 허용하셨을 때에도 감람산 위에 서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닭이 자기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려 함같이 내가 너희를 품으려 한적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거절하였노라”고 말씀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호세아 11:4, 8은 하나님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너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내가 어찌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불붙는듯 하도다.”
우리는 재난을 당할 때에 먼저 하나님께 향한 의문이 생긴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시다는 말인가? 우리를 향한 관심이 없어지셨는가? 아니면 우리를 창조하신 뒤에 잊어버리시고 우주 저 먼 곳으로 가버리셨는가?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볼지어다 내가 항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하나님을 잘 믿는 자들에게 재난이 닥쳐 올 때에 우리는 더 크게 당황하게 되는데, 그러나 그러한 문제를 위하여 기록된 책이 바로 욥기서이다. 우리는 욥의 경우에서 놀라운 비밀을 한가지 깨닫게 된다. 그것은, 우리에게 재난을 일으키는 장본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마귀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항상 방어해 주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욥기는 설명하여 주고 있다. 또한 동시에 하나님께 도전하는 마귀의 고소 때문에 인간들에게 시련들이 생기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잠간동안 마귀의 시험을 허용하심으로 우리의 진실된 동기를 하늘과 땅 앞에서 드러내시어, 마귀의 고소가 잘못되었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동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하여 애쓰시고 게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항상 이 세상에 슬픔과 고난을 가져오는 자는 원수 마귀이지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상을 다시 한번 확인할 시간이 온 것 같다.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가 축복을 받고 건강하기 때문이라고 고소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애쓰신다. 그런데 그 유일한 증명은 우리가 고난과 질병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충성스럽게 경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주, 믿는자들에게도 재난들이 이르러 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다. 그러한 분께서 오죽하시면 그러한 큰 재난들을 허용하시겠는가!

한가지 더 우리가 이해하고 지나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도 더 이상 보호하실 수가 없는 형편들이 자주 생긴다는 사실이다. 그 형편과 장소에서 인간들이 하나님 보다 마귀의 편을 택하는 삶을 살때에 그 지역이나 형편은 하나님 보다는 마귀가 지배하는 곳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범위 안에서 마귀는 어떠한 장소나 기회를 지배하게 된다. 그러한 경우에 발생하는 재난들은 순전히 마귀의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쓰라린 고통과 시련들 속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재난들을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발돋움대로 사용할 수가 있다. 고통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하늘을 더 사모하게 만들어 준다. 괴로움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기도하게 만들어 준다. 이 세상에 허락된 죄의 고통의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이 세상 역사에서 슬픔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앞으로 우리는 점점 더 극심한 재난들과 참화들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앞날은 엄청난 환란들과 재앙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성경의 에언이다. 어떤이들이 믿는 것 처럼 의인들은 하늘에 들려 올라가 환란을 통과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성경 해석이다. 의인과 악인이 함께 마지막 환란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사들이 의인들을 그들의 날개 아래 보호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의롭게 된 자들은 천인이 곁에서 넘어질지라도 보호함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는 자들일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는 자들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 어디에 계실까?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기도하는 의인들의 간구를 듣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 집을 지금 준비하고 계신다. 사자와 양이 함께 풀을 뜻고 어린 아이가 뱀의 굴에 손을 넣어도 안전한, 그러한 새 하늘과 새 땅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변함없이 우리를 영원히 살 수 있는 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온갖 힘을 기울여 우리 주위에서 역사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 분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서 최선이 무엇인지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다. 이렇게 외치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3부 - 테러리스트로 키우지 않는 방법


2001년 9월 11일은 우리 세대로써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그날의 끔찍한 사건은 도대체 테러리스트들이 어떠한 사람들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미국 정부는 테러와 또한 테러리스트들과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테러리스트들과의 전쟁보다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 더 쉬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테러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테러의 행위와 그 결과만을 살펴보면 되지만, 테러 행위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체포하여 재판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빈 라덴을 잡기위해 여러 나라가 전쟁에 임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직 실행에 옮기지 않은 훈련된 테러리스트들은 찾아내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또한 지난 9월 11일에 잔인한 테러 행위를 한 테러리스트들이 도대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떻게 그렇게 잔인한 테러리스트들이 되었는지를 알아내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 일들을 생각할 때, 우리가 지나치기 쉬운 사실은, 엄청난 테러를 저지른 테러리스트들이 본래 처음부터 그러한 자들은 아니였다는 것이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것처럼 그들도 처음에는 어떤 작은 행위로부터 시작해서 그렇게 큰 테러를 일으키게 되었을 것이다. 테러는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협박이나 폭력을 사용하는 것으로 정의 된다. 사실상 테러는 심각한 테러 행위처럼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여러 가지 방법들을 통해 우리 주위에서 매일 일어나는 것이다. 벽돌을 유리창에 던지는 것은 하나의 테러 행위이다. 벽에 음란한 그림 그리거나 혹은 어떠한 낙서를 하는 것 역시 작은 테러 행위이다. 협박 전화 또한, 테러 행위인 것이다. 고의적으로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것, 혹은 일부러 남의 소유물에 손해를 끼치는 것 등, 이러한 모든 것들이 바로 테러 행위의 일종이다. 물론 지난 9월 11일의 사건은 아주 분명하고도, 대표적인 테러 행위였다. 그렇다, 우리는 이 테러들을 막아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의 조급함으로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1.진정한 테러는 어떤 것인가?

테러리스트들의 계획을 알아낸 후, 그들을 잡아서 감금하거나, 또한 테러리스트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까지 제거함으로써 테러를 없애려는 시도는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주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아이들의 성장과정과 그들의 잠재적인 생각과 습관들을 살펴서 테러리스트의 습성을 가진 아이들을 올바로 교육시키든지, 아니면 그런 아이들을 제거하는 일이 있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아이들이 결국은 끔찍한 참사를 일으키는 테러리스트들로 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테러리스트들은 어떤 특정한 유형의 사람들이나, 인종, 관념, 혹은 종교에 그 근거를 두고 양성되어 지고 있다. 그러므로 테러리스트의 특성을 가진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다른 수 많은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 매우 조심스러운 감시와 경계를 받으며, 심지어는 죽임을 당해야 만 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일들은 이웃끼리 또는 형제끼리도 서로 감시하고 의심이 나는 사람을 신고하여 누가 비밀스럽게 잡혀갈지 아무도 몰랐던 중세기의 종교재판 때와 같은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속 깊이에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숨겨진 테러의식들이 있다는 것이다. 시기, 질투, 격노, 복수심, 악의 등, 이 모든 것들이 바로 테러리스트들의 생각과 동기들이다. 인간의 지력과 감정의 발전은 아주 어린 시절, 심지어는 모태에서부터 발달되며, 교육, 종교, 그리고 식생활과, 뉴스, 오락 등 여러 다른 요인들로 부터도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것들은 테러리스트를 육성하게 하는 크고 작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어떤 테러리스트들은 그들의 행동들이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기 때문에 테러리스트로 인정되어지지 않는 반면, 어떤 테러리스트들은 그들의 행동들이 괴이하고 특별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잘 띄게 된다. 어떤 괴한이 비행기를 공중 납치하면, 그것은 테러 행위가 되며, 그것을 테러 행위라고 보는데 문제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정의 교육이 공공 기관의 교육과 비교해 봐서 더 보수적이고 종교적이며, 그들의 생활 방식이 소다나 콜라, 햄버거를 먹으며 텔레비전을 즐기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너무 다르다는 이유로 공공 경찰관이 그 가정의 아이들을 납치(?)하여 아동 보호소로 데리고 가는 행위는 테러행위로 간주되지 않는다.(실제로 미국내에서 이러한 일들은 자주 일어나고 있다.) 이와 같은 테러리스트들의 행위는 오히려 “아동을 학대”하는 부모로부터 희생되는 아이들을 “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우리는 또한 역사를 통해서 테러 행위를 일삼았던, 소위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할 수 있다. 사실 어떤 이들은 거의 모든 나라들을 테러 행위로 몰아 넣었다. 히틀러, 알랙산더 대왕 등 수많은 이들의 테러 행위들을 일일이 열거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이다. 심지어 과거에 미국에서도 그런 테러 행위들이 일어난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특별한 건강 원칙을 따른다는 이유로 그들을 “이단자”들로 취급하여 비밀 경찰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기억하는가? 그 당시 그런 비참한 테러 행위들은 일어날 필요가 없었다.  

9월 11일 테러 사건으로 우리 모두가 경악하게 된 것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일 낙태로 인해서 죄 없이 희생되는 수많은 생명들을 생각한다면, 어떠한 테러 행위가 더 나쁜 것인가라고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전자는 예상치 않게 일어난 테러 행위지만, 후자는 공개적으로 묵인되고 어쩌면 후원 되는 테러 행위이다. 미국 역사의 전쟁들과 테러로 인해 죽은 모든 사람들의 숫자보다 낙태로 인해서 계획적으로 죽임을 당한 생명들의 숫자가 더 많다는 것은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놀라운 사실이다. 또한 매해 25,000명이 음주 운전으로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그다지 큰 충격을 주지 않는다. 그 25,000명 중 대부분이 죄 없는 아이들과 남녀들임에도 말이다. 9월 11일에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으로 거의 7,000명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어떤 테러 행위가 더 두려운가? 우리의 가정 안에서 발생되는 테러 행위들인가 아니면 밖에서부터 오는 테러 행위들인가?

2.테러 행위의 근본은 어디서 오는가?

테러리스트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교육의 역할과 오락의 영향에 대해서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만 한다.

먼저 오락에 대해서 알아보자. 실제로 모든 오락들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교육시킨다. 어떤 유형의 음악과 오락들이 폭력과 테러의 행위들을 조장하고 가르친다는 것은 아주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 롹 콘서트에서 어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폭력을 당한 후, 칼에 찔린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죽기까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하는 비인간적이 일이 일어났었다. 나는 이것을 분명한 테러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 롹 음악과 그곳의 야만적인 환경이 이런 테러 행위를 낳게 한 것이다.

텔레비전과 비디오 영화, 그리고 오락 게임을 통하여 폭력적인 장면들을 봄으로써 받는 나쁜 영향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 졌고 책으로도 출판되었다. 거의 모든 비디오 게임들은 죽이고 파괴시키는 원칙에 의해서 작동된다. 거의 모든 텔레비전 프로그램들,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들에도 수없이 많은 폭력적인 장면들을 담고있다. 한 예로, 6살 된 어린 소년이 만화 영화에서 주인공이 머리를 얻어 맞은 후, 머리 주위에 “별들”이 빙글 빙글 돌아가는 장면을 텔레비전에서 본 후에 야구 방망이를 가지고 4살 된 자기 여동생의 머리를 내리쳐 죽였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자기 동생의 머리 주위에 날아다니는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며 의아해 하였다. 1993년에 출판된 “시한폭탄 TV”라는 책은 그 당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현실의 삶보다 55배나 더 폭력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책이 기록된 때로부터 지금까지 TV에서의 폭력적인 장면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영화의 악한 영향에 대한 예를 들어보자. 어린 소녀가 빗자루 손잡이의 끝으로 성 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화가 방영되었다. 한 어머니가 자기의 어린 딸과 함께 그 영화를 보다가 그 장면이 나오자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그러나 며칠 후, 똑같은 영화를 본 소년들이 그 어머니의 어린 딸을 맥주병으로 성 폭행한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보아야만 한다. 누가 이러한 테러에 진정한 범인인가? 할리우드 영화의 제작자들과 배우들에게서 배웠던 그 소년들인가? 아니면 그 소년들의 마음속에 그렇게 하도록 범죄의 씨를 뿌린 자들인가? 일리노이 대학의 연구원들이 오랜 기간동안의 연구 후에 다음과 같은 발표를 하였다. 나이 8살 때에 정규적으로 텔레비전의 폭력적인 장면을 본 아이들은 나이 30살 때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폭력적인 행동(테러 행위)을 할 경향이 더 높다는 것이다.

승객들을 인질로 잡고 비행기를 폭파하겠다고 협박하는 것을 소재로 한 영화가 있었다. 비행기 조종사 협회의 강력한 이의 제기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전국으로 방영되었다. 그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비행기를 폭파하겠다는 협박 전화가 여러 항공사로 걸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후, 일 주일 안에 비슷한 내용의 협박 전화가 8개의 항공사로 걸려왔다. 5년 후, 같은 영화가 오스트리아에서 방영되었고, 그 결과는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 어떤 항공사는 자사 비행기에 탄 116명의 승객들의 생명을 위해서 결국 오십만 달러(약 6억)를 협박자들에게 지불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물론 이런 협박을 하는 테러리스트들은 비난 받아 마땅하고 또 처벌 되어야 한다. 하지만 텔레비전을 통해서 그들을 교육시키고 그런 테러리스트가 되도록 영향을 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테러 행위를 정말로 없애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폭력적인 것들을 담고있는 오락 문화의 단절을 시작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뉴스에 나오는 폭력적인 장면들을 보고서 그와 같은 심지어는그 것 보다 더 악한 행동을 하게끔 충동을 받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해외에 있는 테러리스트들을 찾고 없애기 위해서 많은 돈을 사용하고 있는 반면 한쪽에서는 테러리스트들을 길러내는 오락물들에 수 십억의 돈이 또 쓰여진다면 우리의 노력은 결국 쓸데없는 것에 불과 하게 될 것이다.

3.테러 행위를 과연 무엇으로 막을 수 있는가?

역사를 살펴 보면, 대부분의 테러 행위는 종교적인 극단주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 예로 중세기의 십자군이나, 왈덴스인들에게 가해진 핍박들을 들 수 있다. 어떤 것이든, 좋고 올바른 목적으로 사용될 때는, 도덕적인 법의 원칙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남용되고 악용되면, 악하고 파괴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행동과 태도를 제어하는 힘은 인간의 바른 양심 안에서 존재하며 올바르고 진실된 종교 역시 인간으로 하여금 바른 도덕적인 표준을 갖게 한다. 올바른 지식을 더 많이 습득하면 할수록 올바른 행동의 틀 안에서 그 지식을 사용 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더 유용하고 가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올바른 행동 원칙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웃과 사회에 항상 예의 바르고 공손한 태도를 취하도록 인도한다.

도덕적 원칙에 근거한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인도하는 바른 양심으로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자신을 그렇게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모든 사람들은 테러리스트의 성향을 갖고 있다. 또한 비록 지금은 도덕적인 원칙을 따르는 양심을 가졌다 할지라도 후에 그 마음속에서 바른 양심의 원칙을 상실하는 사람들 역시 테러리스트의 성향을 갖고 있다고 간주 할 수 있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누구라도 도덕적인 양심의 원칙을 한 순간에 잃어 버리기가 너무나 쉽기 때문에 어쩜 우리 모두가 테러리스트의 성향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도 무방하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술 마시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가 너무도 힘들다. 그래서 술에 취하여 극악한 “테러 행위”를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테러를 야기시키는 것에서 자신을 지키려는 시도 조차도 하지 않는다.

사회의 전반적인 활동이 잘 유지되도록 해야 할 책임은 그 나라의 정부에 있다. 그래서 정부는 문명적이지 못한 행동들을 처벌하기 위해서 반드시 “칼”을 들어야만 하며, 도덕적인 원칙을 따르지 않는 바르지 못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제재를 가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이웃에게 올바른 예절로 대한다면 그 누구도 벌을 주거나 제재를 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며,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이며, 어떤 행동을 할 지를 대충은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테러”를 예방하기 위해서 정부가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테러 행위를 한 사람들에 대하여 큰 형벌을 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테러를 일으킬 잠재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주므로 테러 행위를 막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방법보다도 더 나은 방법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누가 집을 짓는다고 하면, 비가 내릴 때 생길 피해를 막기 위해서 지붕에 방수시설을 설치한다. 그러나 아무도 날씨가 흐릴 때마다 비가 내릴 가능성이 있는 구름들을 검사해서 비로부터 집을 보호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매일 구름이 낄 때마다 그 구름을 쫓아야만 할 것이고 또 그렇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테러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비행장 같은 운송시설의 검색을 강화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테러를 일으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을 골라내어 테러를 막으려는 방법에는  

구름을 쫒으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계가 있다. 민주국가에서 테러를 일으킬 위험이 있다고 보여지는 종교나 단체들을 가려내어 규제하려는 것은 모든 국민들의 사생활을 간섭해야 하므로 안전하고도 현명한 방법이 될 수 없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개인의 자유와 종교에 대한 핍박의 결과만을 낳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들은 도덕적으로 올바른 원칙들을 통해 사람들을 교육시켜야 할 큰 책임을 가지고 있다. 오래 전에 미국의 한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교육이 종교를 설립한 것이 아니라, 종교가 교육을 설립하였다. 학교는 교회 옆에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 교육의 발전에 있어서 무시하지 못할 아주 중요한 사실이다. 종교사상이 없으면, 문명사회는 자신의 무게에 의해서 망하게 될 것이고,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그 깊고 끊임없는 지혜의 기초는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혹 지적으로는 예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지 모르지만, 반면에 또 탐욕스럽고 잔인하게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과학의 그 멸망시키는 힘에 의하여서도 우리 스스로 자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도덕적 원칙이 없이는 지성이 계발될 수 없고, 혹 계발된다 하더라도 곧 자멸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교육은 전인 교육으로 이루어 져야 한다. 사람에게 큰 포부를 갖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품성의 계발 또한 도외시하도록 하면서 감각의 인식만을 빠르게 하기 위해 손과 눈을 훈련시키고, 또 지력을 계발하는 것은 참된 교육의 방법으로써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육체적인 발달보다는 영적인 성장이 더 필요 되어진다. 우리에겐 지식이 아닌 품성의 계발이, 물질적인 영토가 아닌 정신 문화가, 법이 아닌 종교가 더 필요하다. 우리에겐 또한 보이는 것들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필요 한 것이다. 우리가 현 시대에 있어서 우리에게는강조해야만 할 인생의 중요한 측면이 있다. 만일 그 측면이 강화된다면, 다른 측면들은 스스로 세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중요한 측면이란 바로 다른 모든 것의 기초를 말하는 것이다. 만일 기초가 튼튼하면 그 건물은 세워질 것이다.” 

- 칼빈 쿨리지 (1925), 교육에 대한 미국의 큰 필요 74-75 페이지 -

교회는 국가가 할 수 없는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 책임은 바로 도덕적인 원칙들을 사람들에게 올바로 교육시켜 그들로 하여금 올바르고 고상한 원칙에 의하여 생각하며 행동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4.테러를 막기위해 잘못 취해진 생각과 태도.

미국에서는 테러가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크게 염려하고 있다. 또한 큰 충격으로 감정이 격앙된 사람들이 과도한 반응과 지나친 행동을 취할 위험이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테러리스트들이 박멸될 때까지 그들과 전쟁을 벌인다고 선언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죄없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죽음으로 몰고 갈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 때문에 그렇게“먼저 쏘고 나중에 물어 본다.”라는 식으로 일을 진행하기가 너무도 쉽다.

테러리스트들을 없애는데에 개인의 생각과 개성과 생활들을 조사하는 일이 요구된다면 그 일에는 끝이 없고, 결국은 무자비한 일이 될 것이다. 인종과 종교를 차별하게 될 것이며, 특정 종교나  테러리스트들을 교육시키는 인종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핍박하고 제거할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테러리스트들은 모든 교단, 모든 민족, 그리고 인간 사회의 모든 분야에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소수 단체에 속한 몇몇 사람들이 테러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대다수 사람들이 속해있는 힘있는 단체들이 그와 달리 소수의 힘없는 단체들을 사회에 손해를 끼치는 집단으로 취급할 위험이 있다. 짧게 예를 들면 몇 몇의 테러리스트들이 요르단에서 왔기 때문에 요르단 사람들 모두가 다 테러리스트들이 될 것이라든가, 또한 어떤 이슬람 군인들이 테러를 저질렀기 때문에 모든 이슬람 사람들에겐 테러리스트가 될 가능성이 있다라는 그 같은 잘못된 결론들을 내리기가 너무 쉽다는 말이다. 사실 대표적인 테러리스트들 중 어떤 이들은 천주교회 출신들이다. (예를 들면, “St. Bartholomew massacre의 역사”를 읽어보면, 그 당시의 대주교가 수 천명의 개혁자들을 잔인하게 죽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특별한 메달을 만든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고 모든 천주교인들은 테러리스트들이 될 수 있으므로 엄격히 처벌되어 감금되거나 제거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인가? 또한 침례교, 몰몬, 여호와 증인 등, 다른 종교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 역시 과거에 적어도 한번씩은 테러를 일으켰다는 것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그러한 종교 단체들이 반 사회적인 테러를 조장한다고 판단되어 질 수 있는가? 만일 우리가 너무 과잉 반응을 보이면서 “안전”이라는 잡히지 않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우리의 자유를 너무 많이 희생시켜 버린다면, 우리는 결국 역사상 가장 포악하고 압제적인 국가를 설립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종교나, 인종, 또는 출신 배경으로 인해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다고 지목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안전”이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한 것임에도, 헌법에 규정된 자유의 모든 원칙이 결국엔 “안전”이라는 것과 교환 되어질 것이다.

5.테러 사건 이후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

아마도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난 참사는 미국인들과 또 전 세계 사람들에게 도시 생활이 가장 좋은 계획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경고일 수도 있다. 실제로 도시들이 테러의 주된 목표가 된다. 19세기 말 즈음에는 80%의 인구가 시골에 살았고 20%의 인구만이 도시에 살았다. 그러나 20세기 말에는 80%의 인구가 도시에서 생활하며, 20%의 인구만이 시골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고는 양식을 구하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양식 공급의 체계는 매우 약하여 지고 공격 받기 쉽게 되어 버렸다.  

대략 1세기 전에 한 작가는 다음과 같이 영감적인 말을 기록했다.

“도시를 떠나라… 도시를 떠나 작은 토지를 매입하여 저희 자신과 저희 자녀들을 위한 가정을 마련하도록 사람들을 교육하라…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도시마다 투쟁과 혼란이 일어날 것인데 그 때는 도시들을 떠나기 원할지라도 떠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슬람 배경을 가진 사람이 테러를 벌였다고 해서 모든 이슬람 사람들을 의심하거나, 어떤 테러리스트들이 아랍 출신이기 때문에 모든 아랍 사람들을 테러리스로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 해야겠다. 미국 정부는 테러 행위에 대한 적절한 처벌을 해야만 할 것이나 테러리스트를 없애겠다는 노력이 우리 모두에게 어떤 악 영향을 주는지는 주의 깊게 고려되어야만 한다. 이웃을 의심하고, 죄 없는 자들을 미워하며, 사생활을 완전히 잃고서, 자유를 안전이라는 허울 좋은 말 아래 못 박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남을 향해 쏘았던 의심의 화살이 우리를 향해 다시 날아 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테러를 저지른 테러리스트들과 단지 같은 배경을 가졌다는 이유로 죄없는 사람들을 벌해서 원수를 갚겠다는 야비하고 무책임한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가  “안전”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변할 수 없는 생명과 자유에 대한 누군가의 권리를 부당하게 빼앗는 가장 극악한 테러를 범하게 될 것이다. 민족이나 신앙관, 또는 인종의 배경에 상관없이 양심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개인의 자유권이야 말고 미국의 숭고함과 힘의 대표적인 상징이며 이러한 미국 헌법은 “유죄로 입증되기 전까지는 무죄”라는 위대한 자유의 원칙 하에서 유지되어 왔다. 그런데 만일 인종이나 종교의 배경 때문에 무죄한 사람들이“테러리스트”로 지목 되고 쫓김으로 그 중요한 자유의 원칙들이 버려진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이 되겠는가! 하지만 거울로 보이는 우리자신이 가장 두려워 해야 할 테러리스트 일 수도 있다는 것이 더 비참한 일이다.


 

2부 - 역경에서 승리로

        2001년 9월 11일, 화요일, 그 날 아침, 미국에는 극적인 변화가 있었다. 테러는 새롭고 무서운 방법으로 그 비열하고 악한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의 가정과 마음에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모두에게 그 날은 여느 화요일처럼 평범하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확하게 아침 8시 48분에 승객들을 가득 싣고 공중 납치된 아메리칸 항공 비행기가 뉴욕 하늘을 가르며 질주하여 세계 무역 센터 쌍둥이 빌딩의 한 건물에 사정없이 부딪쳤다. 그 비행기가 부딪힌 곳, 1,368 피트 지점에서 화염과 연기가 마치 성난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약 18분 후인 아침 9시 6분에 공중 납치된 또 다른 비행기가 쌍둥이 빌딩의 두 번째 건물에 충돌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아직 그 충격가운데서 당황하고 있을 때, 또 다른 비행기가 미국 국방성 건물로 급강하하여 부딪쳤고, 네 번째 비행기는 펜실베니아 센크스빌과 가까운 지역에 추락하였다.

       세계 무역 센터 빌딩들은 화염으로 둘려 싸였으며 곧 무너져 우리를 경악하게 했다. 또한 뜨거운 불길은 미 국방성 건물의 한쪽을 삼켜 버렸다. 우리는 누구도 영원히 잊지 못할 망연하고 놀라운 광경들을 목격하였다. 그 장면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히 지울 수 없게 새겨지게 되었다.

      

우리들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질문들

       이 참사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 아이들에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가?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날 때, 과연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단 말인가? 이 참사로 생긴 모든 분노와 충격과 아픔을 진정시킬 방법은 없는가?

       나는 그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 성경은 놀라운 방법으로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소개한다. 이렇게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아무리 위압적이고 어지러운 위기의 순간 속에서도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절망의 순간에 소망을, 고난의 때에 평화를, 슬픔의 때에 위로를 주신다.

       이러한 재난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이러한 때에 우리가 어디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가? 먼저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테러리스트들의 행동들 속에서는 하나님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여기에 그 대답이 있다. 요한 일서 2장 9,10절 말씀을 들어보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또한 사도 요한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요한 일서 4장8절에 기록하였다. 이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우리가 만일 사랑을 모른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은 격렬한 미움과 놀라운 사랑 사이의 전쟁터이다. 이 세상은 선과 악이 가두어져 운명적인 전쟁을 치루는 곳이다. 그러나 모든 것에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죄악의 결과를 막기 위해서 항상 간섭하시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고통 받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나님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신다. 하나님은 비록 사람들의 선택이 몹시 잘못되고 악하다 할지라도 그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하신다.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께는 오직 다른 한 가지  방법 밖에는 없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선택의 자유를 제거하시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단지 로보트나 다름없는 인간 기계 밖에 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이 그 진로대로 흐르게 허락하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고통 중에 있는 인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하시며,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고통 받으시며, 우는 자들과 함께 우신다. 그분은 그 곳에서 그들을 지키시고 힘주시며 격려하신다. 그분은 그곳에서 마음이 상한 자에게 용기를 주시며 상처 받은 자들을 안아 주신다.

       유명한 시편인 시편 23편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라고 말한다. 시편 46편은 다음의 희망적인 말씀을 더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우리가 개인적으로 고통과 슬픔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우리와 함께 하신다. 만일 우리가 잠시 멈추어서 귀를 기울인다면, 이 모든 슬픔과 걱정과 눈물 너머로 “내가 너를 극진히 사랑하니, 너의 낙담한 마음을 위로하며 너의 상처들을 감싸주리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테러가 폭우처럼 하늘에서부터 떨어졌던 그 위기의 9월 아침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그때에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었는가?

       우리는 비록 세계 무역 센터가 불타며 무너지는 순간일지라도 상처 입은 동료들을 80층에서부터 인내 있게 데리고 내려온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위험한 곳을 헤치며 주저하지 않고 그 건물 속으로 달려 들어가 결국 건물이 무너질 때 매장되어버린 경찰관들과 소방수들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시간을 아끼지 않고 자원하여 봉사한 사람들, 자진하여 헌혈을 한 사람들, 또 기꺼이 자신의 재물을 기부한 사람들 등, 이 모든 이들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이타적인 사랑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계신다. 이 세상에서 존재했던 가장 위대한 이타적인 사랑, “갈바리”라고 불리 우는 거친 언덕의 피 묻은 십자가가 여전히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는 그 놀라운 사랑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의 원천이다.

       이 지구의 납치범인 사단은 그의 복수의 증오를 하나님의 독생자에게 집중시켰다. 그날 무죄한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그분에게는 죽음을 당하실 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이 세상의 증오에 대한 단 하나의 해답이 드러났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빼앗긴 그 뼈아픈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 잘 아신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잃으셨다. 

       그러나 죄와 죽음으로 이 세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침에 예수님께서 살아서 무덤에서 나오셨다. 그 날, 예수님께서 죄와 죽음, 그리고 무덤을 정복하셨다.

       그 피 묻은 십자가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놀라운 보증(약속)이다. 끔찍한 재난들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할 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해서 유지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할 때에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항할 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 비록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할지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거기에 우리와 함께 있다. 역경의 때에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는 모든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황하고 상처 받고, 또한 화를 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거기에 우리와 함께 있다. 인생을 살면서 겪는 끔찍한 참사들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생명들인지 가르쳐 준다. 그 화요일 아침에 세계 무역 센터로 일하러 갔던 사람들은 그 두려운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미 국방성 사무실로 출근하던 사람들도 그날 아침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있었다.

       한 순간에 인간의 생명이 없어져 버릴 수 있다는 충격적인 현실은 우리 모두에게 더 깊은 헌신의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인생의 역경들은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재정비하라는 외침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태복음 6장33절

      

언제 테러가 영원히 없어질 것인가?

       하나님과 더 새롭고 깊은 교제를 가지라는 부르심을 우리는 느끼고 있는가? 우리는 아마도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의 부르심에 한 번도 자신을 굴복한 적이 없을 지도 모른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부르심에 응하라고 우리를 초청하신다. 우리가 그분의 부르심에 응하기만 한다면, 그분께서는 주저하지 않으시며 기꺼이 우리 그대로를 받아주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며 우리에게 새로운 기쁨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위하여 형용할 수 없는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우리가 그 계획에 동참하게 되기를 원하신다. 성경은 이 세상이 완전했던 상태에서 시작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이 세상은 다시 완전한 상태로 될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결론이다. 재난이 이 세상의 끝이 아니다. 파멸도, 죽음도 이 세상을 끝낼 수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운명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다.

       이 말씀을 들어보라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요한 계시록 21:1,4-6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다 이루었도다”라는 승리의 선언을 공포하실 것이다. 아픔과 고통과 슬픔은 끝날 것이다. 다 이루었도다! 걱정과 궁핍과 전쟁은 끝날 것이다. 다 이루었도다! 눈물과 역경과 테러는 끝날 것이다. 다 이루었도다! 공포와 애통과 절망은 끝날 것이다. 다 이루었도다! 질병과 재난과 죽음은 끝날 것이다. 다 이루었도다!

       언젠가는 우리가 고개를 들어 예수님을 바라볼 것이다. 언젠가는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의 모든 재난들은 그분의 마지막 승리의 영광스러운 광채로 인하여 사라져 버릴 것이다.

       오늘 이 시간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저 영원한 하늘 본향 집으로 인도하실 예수 그리스도께 여러분의 모든 것을 굴복하는 삶을 사시길 기원한다.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그 하늘 집에는 눈물도 재난도 테러도 영원히 없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