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랑은 여기에 있다!


사랑은 참 신기한 것이다. 원수 사이에 있던 차가운 미움의 장벽을 눈 녹이듯이 녹여 허물어 지게 하고, 복수의 타오르는 불꽃을 시원한 생수처럼 진정시키는….

다 빼앗긴 후에도 다 줄 수 있었음을 감사 하게 하고, 자신의 상처가 아픔에도 남을 먼저 다독이며 싸매어 줄 수 있게 하고…. 던져지는 야멸찬 눈길에도 따뜻한 웃음과 눈빛으로 답하게 하며, 아무리 퍼 주어도 부자 일수 있게 하고, 먹지 않고 먹이기만 해도 배부르게 하는….
사랑은 어디서 오는 걸까? 들여다 보면 볼수록 냉담한 것 같은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도 따스하고 부드러운, 기적 같은 사랑이 흘러 나올 수 있는 걸까?

하나님의 사랑
사랑은 하나님의 가슴의 한 복판에서 온다. 하나님의 근본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에 대대로 이어져 내려 오는 혈육의 정이나 위대하다는 어머니의 사랑 일 지라도 그것은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가슴 속의 대양 같은 사랑의 바다에서 흘러져 내려온 한 방울의 작은 수맥에 불과한 것 일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근원을 둔다.
함께 사랑을 나누도록 지음을 받은 첫 인류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깨고 범죄 하였을 때 하늘에는 심각한 회의가 있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범죄한 인류의 대속죄물로 드리기로 아버지 하나님께 제안 하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에는 타는 듯한 고통이 시작 되었다. 사랑하는 자녀인 인간을 자신들의 죄 가운데 죽도록 내버려 두는 일이나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 예수를 인간의 죄 값을 대신하여 죽도록 대속물로 내어 주는 일이나 이 일은 모두 하나님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물로 주시기로 결정을 내리셨고 아버지의 사랑의 화신인 아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기꺼이 우리 불쌍한 인류를 위하여 바치기로 자원하셨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증명된 하나님의 사랑
사단이 이 땅에 던진 하나님에 대한 오해의 검은 그림자는 하나님의 성품의 사본이신 독생자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보이심으로써만 제거 될 수 있었다. 우주의 왕이시며 창조주셨던 아들 예수께서 어버지 하나님의 뜻을 쫓아 그 사랑을 보이시려고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쓰시고 나신 것은 사랑의 신비 그 자체였다.
예수께서 지상에서 보이신 성품과 생애와 행동 하나 하나 마다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병자를 고치시고,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셨고, 애통하는 자를 위로 하시고, 실망한 자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시며, 자기에게 나오는 사람들의 말을 항상 진지하게 들으시며 그들의 고민을 덜어 주셨고, 인간의 슬픔을 보시고 동정과 연민의 정으로 가득차셨으며, 상한 자와 고통 당하는 자들에게는 자애롭고 온유한 음성으로 격려해 주셨던 예수님!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게 되었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마다 모두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이시다 라고 외칠 수 있었다.
이렇게 온 생애를 통하여 사랑을 증거 하시던 예수님께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약속대로 자신을 속죄물로 드려 인간의 죄 값을 치루실 고통의 때가 왔을 때 그 때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께도 긴 고통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께서 이 세상의 타락한 모든 인류의 죄 짐을 지기로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엎드려 기도 하실 때 그분의 영의 고뇌는 땀구멍을 통해 땀이 핏방울 처럼 빠져 나가도록 밀어 내었다. 당신의 온 지상생애 동안 아버지 하나님의 임재의 빛 가운데 계시던 예수께서는 이제 세상 죄를 몸소 지신 죄인으로서, 아버지의 율법의 범죄자로서 서게 되었고 그 까닭에 그렇게도 서로 사랑하며 하나이셨던 아버지와 아들은 분리 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는 함께 거하실 수 없으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을 그토록 날카로운 고뇌로 찢고 이마에서 핏방울 같은 땀이 창백한 뺨을 흘러 땅에 떨어져서 대지에 스미게 한 것은 그 자신이 죄 자체가 되심으로 오는 죄의식 때문이었다. 초인간적인 고통으로 기진 하시고 영혼의 고뇌 속에서 찬 땅에 엎드리신 예수님, 그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으셨을 때 그와 함께 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아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고 계셨다. 하늘에는 침묵이 흘렀다. 하늘의 음악은 모두 멈추었다. 마치 하나님의 눈물처럼 동산의 삼나무와 종려나무 가지의 잎들에서 진한 이슬이 떨어지고 있었다. 인간의 죄를 위해서 고뇌하신 거룩한 사랑이여!

재판정에서
입맞춤으로 원수의 손에 팔려가 세상의 법정에서 죄 많은 인간에 의하여 사형 선고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창조하시고 또 그들을 위하여 무한한 희생을 치르려 하는 자들의 손에서 온갖 모욕을 당하셨다. 미친 군중들에 에워싸여 조롱을 받으셨고 야비하고 참람된 저주와 모독적인 욕설을 받으셨으며 날카로운 채찍에 맞으셨다. 조롱거리의 옷을 입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신 하나님의 아들이 거기 서 계셨다. 허리까지 옷이 벗겨지고 등에는 길고 흉측스러운 매 자국이 보였으며 그곳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가시관을 쓰신 머리와 그분의 얼굴은 피로 물들여져 있었고 피로와 고통의 흔적이 역력 했으나 지금보다 더욱 아름답게 보인 적은 결코 없었다. 구주의 모습은 원수들 앞에서 조금도 일그러지지 않았으며 온 얼굴은 평온과 인내심과 그리고 잔인한 원수들에 대한 가장 부드러운 동정을 나타내었다. 하늘도 땅도 경탄하고 놀랄 그 위대한 사랑이여! 얼마나 온유하고 오래 참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내의 사랑이 예수님의 성품을 통해 나타났던가.

십자가 곁에 서 계셨던 하나님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 극치를 이룬 곳은 십자가였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한 고통이 극치를 이룬 곳도 십자가였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로마 군인들이 박는 큰 못이 부드러운 살을 뚫고 들어갈 때 그분의 이마에는 큰 땀방울이 맺혔다. 그 때 그 고통 중에서도 창백하고 떨리는 입술로 주님은 살인자들을 위하여, 아니 온 세계의 죄인들을 위하여 사랑과 용서의 기도를 하셨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시어 그의 살은 매 맞아서 찢어졌고 그 처럼 자주 축복하시려고 펼치시던 손과 사랑의 봉사로 피곤할 줄 모르던 발은 나무에 못 박혔고 고귀하신 머리는 가시관으로 찔리셨으며 상하신 관자놀이와 손과 발에서 흐르는 피는 십자가를 세우기 위하여 뚫은 바위 위에 방울 방울 떨어졌다. 못 박힌 상처들은 몸무게 때문에 크게 찢어졌으며 그의 영혼이 세상의 죄의 짐에 눌려 헐떡일 때 그 분의 괴로운 호흡은 빠르고 깊어졌다. 십자가 아래서 그분을 계속 조롱하는 고함소리가 들렸으나 그 무서운 고통 가운데서도 계속 죄인들을 위해 기도 하시는 예수님! 죄인들을 위해 끝까지 간청 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애절하게 어우러진 모습인지!
영광의 주께서 인류를 위한 대속물로서 운명 하실 때 그를 괴롭힌 것은 육체의 고통도, 십자가의 치욕도, 죽음의 공포도 아니었다. 그의 고통은 인간이 너무 죄에 익숙하므로 흉악한 죄에 눈멀게 된 것을 아시고 죄의 악함을 느끼는 데서 오는 고통이었다.
고뇌에 찬 숨 속에서 그리스도의 믿음과 희망은 떨렸다. 그는 무덤 너머 저편을 볼 수 없었다. 다만 그 놀라운 흑 암 속에서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께서 죄를 불쾌히 여기시며 그 벌은 죽음이라는 사실이 전부였다. 그분께 당신의 아버지와 다시 화목하게 될 수 없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하고 있었다. 사단은 그분의 마음을 비틀어 짜는 듯이 괴롭혔고, 아버지께서 그를 영원히 떠나셨다는 심한 시험이 십자가 상에서 이런 소리를 부르짖게 하였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표면상으로 버림을 받은 것 같은 그 무서운 고민의 시간에 짙은 어둠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곁에 서 계셨다. 그는 어두움으로 그의 영광과 임재를 감추시고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운명하는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계셨다. 그렇다! 그는 아들과 함께 고난을 당하셨으며 함께 못 박히셨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귀한 생명을 버리실 때 그분은 아버지의 품성, 곧 그의 공의와 자비와 크신 사랑을 잘 알고 계셨으므로 믿음으로 아버지를 신뢰하였다. 그의 희생이 가납되고 죄지은 인류를 위해 맺은 사랑의 언약이 충족 되었노라고 가납 받은 것을 믿는 믿음 가운데 그분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다 이루었다. 외치며 심장이 파열하여 운명하셨다. 사랑과 공의는 충족되었다. 인간의 죄 값은 치루어졌다. 아 얼마나 위대한 사랑인가!

아직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고…. 붉은 빛과 주황 빛 그리고 황금색과 보랏빛으로 온 하늘을 물들이며 타오르는 노을은 오늘도 너를 향해 타오르는 나의 사랑의 마음이라고…. 검고 차가운 겨울 대지를 한 자락도 빠짐없이 덮어 가리 우며 보듬어 안는 흰 눈의 포근한 손길은 너를 내려 덮는 나의 사랑의 손길이라고…. 그리고 회색 빛 하늘은 가로질러 무수히 뿌려지는 빗방울은 오랜 세월을 너를 그리워하며 흘리는 나의 사랑의 눈물이며, 보석처럼 흩어져 밤 하늘을 수 놓는 별빛은 한 순간도 잊지 않고 너를 돌보는 나의 사랑의 눈빛이라고…. 그리고 너를 향한 나의 이 사랑을 오늘도 꼭 기억해 달라고….

권두언


강병국

“어떻게 하여야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하여야 우리가 하나님의 호의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라는 질문은 인류의 시작만큼이나 오래된 것 같습니다. 인류의 불안은 죄의 타락에서부터 기인된 것입니다.

원래의 상태대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자기 자신도 모르게 솟구치는 그러한 염원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증거요 또한 돌아갈 본향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계시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시작할 수도 없는 일이요, 우리 자신들 나름대로 길을 모색하여 추구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시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이름을 믿는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원래의 상태대로 회복시키시는 길을 제시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마련하여 놓으신 길을 따라 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마련해 놓으신 구속의 길, 곧 구원의 방법에 대하여 정확하면서도 간단하게, 그러면서도 자세하게 그려 놓으신 청사진이 있습니다. 이 그림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죄에서부터 구원하시어 다시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실 것인가에 대한 자세한 방법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유일한 구속의 청사진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에 나오는 성소제도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 뿐만이 아니라, 다시는 그 죄가 올라오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장차 오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반역의 역사가 다기는 생겨나지 않도록 하시고자 계획하시는 것입니다. 이 지구의 구속은 온 우주의 안전을 포함하고 있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번 호를 통하여 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청사진에 대한 계시를 연구하시게 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시는 계획과 그 방법이 어떠한 것인지 주의 깊게 살펴 보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1부 - 성소, 구속의 청사진


성소가 주어진 이유와 그 중요성


마음을 정하고 성경통독을 시작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창세기는 잘 읽어 나가는데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읽으면서 어렵고 지루함을 느껴 대충 읽어 나가거나 그 부분을 읽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출애굽기 중반을 지나면서부터 레위기 전체가 이해하기가 어려워 보이는 성소의 기물들과 각종 제사에 대한 설명들이 계속해서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절) 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성경 말씀은 분명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이고 한 말씀 한 말씀이 우리를 교육하여 온전케 만들도록 쓰여진 것임을 부인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성경의 첫 부분의 책인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자세히 반복하여 설명되어 있는 성소에 대한 기록을 무시하거나 구약에 쓰여진 것이니 이미 지나간 것이라고 덮어 둘 수 있겠는가? 그럴 수는 없다. 성소제도에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이상의 놀라운 구속의 섭리가 있다. 성소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과정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는 청사진이다.

사실 성소제도의 시작은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난 뒤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가죽옷을 통해 희생이 필요한 제사제도를 보여 주셨다. 그러므로 성소제도는 하나님께서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는지, 어떻게 범죄한 죄인이 다시 죄의 문제에서 회복하여 하나님 앞에 설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에 희생된 동물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그리고 모세시대 당시 죄로 인해 희생당한 동물들도 또한 예수님을 상징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성소의 의식 하나 하나는 예수님의 봉사의 생애와 사역을 의미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구원의 경험과 단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이번 호는 성소제도가 시작된 이유와 성소의 중요성, 성소의 모형이 주는 의미, 성소 기구들이 갖고 있는 의미, 성소에서 이루어진 제사 제도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그리고 성소를 통해 예수님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사역, 그리고 우리가 현재 서 있는 곳과 서 있어야 할 곳, 등을 자세하고 쉽게 설명해 놓았다. 앞으로 읽어 나갈 글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성소를 통해 보여주신 놀라운 구원의 길을 찾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찾고 그 길에 들어서서 마음에 참된 평안을 찾기를 바란다.

1. 성소 제도가 주어진 이유

인류의 타락

인류의 구원은 인류의 타락에서 연유되었다. 사람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영원히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았을 것이다. 사망, 질병, 슬픔, 고통, 늙음과 같은 죄의 결과들도 물론 이 지구상에 전혀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사랑과 화평과 행복과, 영원토록 전진 되는 기쁨과 발전만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므로 그 모든 조화는 깨어지고 엄청난 어두움과 재난의 그림자가 이 세상에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로마서 6:23). 그런데 성경은 인류의 조상 아담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 죄를 범하였다고 선고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였다 (로마서 3:23). 물론 죄를 시작하고 그 결과로 죄에 대하여 약하여진 본성을 유전하여 준 총체적인 책임은 아담과 하와에게 있다고 하겠지마는 그러나 그들의 모든 후손들도 한결같이 자기들의 선택을 통하여서 죄들을 짓게 되었고 그리하여 사망이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인류가 타락하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죄는 어떻게 성립되는 것인가? 성경은 죄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려 주고 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한일서 3:4. 다시 말해서 죄란 하나님의 율법인 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이 우주에는 법칙이 있다. 하나님의 창조물들이 존재하는 데는 원칙이 있다. 별들이 회전하는 괘도가 있고 생물들이 호흡하는 생성 원리가 있는 것이다. 이 법칙을 깨어 버리면 질서와 평화와 행복이, 아니 더 나아가서 그 생명의 존재 자체가 파괴되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도덕적 그리고 영적인 세계에도 법칙이 존재한다. 그 법칙은 어떠한 면에서 천연계의 법칙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도덕적이고 영적인 법칙이 또한 자연계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간이 잘못된 도덕적인 법칙을 세우고 원자 폭탄을 만들면 자연계에 엄청난 파멸을 초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도덕적인 법칙을 어기게 되면 이웃들에게 내지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아니 더 나아가서는 온 우주에 큰 슬픔과 고통을 불러 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들인 사기, 절도, 강간, 살인, 불효, 시기, 질투 등의 두려운 결과들을 주목하고 살지 아니하는가! 사람들은 하나님의 정부, 곧 우주의 헌법인 계명을 무시하는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타락하게 된 것이고, 그 결과로 무서운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과 계획

하나님께서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고 하신 분부는 에덴 동산의 눈에 보이는 계명이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 분의 지배를 받는 데에만 안정과 평화와 행복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시조는 그 계명을 어기고 사단의 꾀임을 더 신뢰하였다. 마귀는 하나님을 이기적인 분으로 고소하였다. 불공평한 분으로 고소하였다. 이 과실을 먹으면 하나님 자신처럼 눈이 밝아질 것이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어겨도 괜찮은 것이며 결코 죽지 않을 테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기만하였다. 인류의 시조는 마귀의 말을 하나님의 말보다 더 신뢰하고서 우주의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인 계명을 어기고 반역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가슴에 너무나 커다란 슬픔과 고통을 안겨 주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제 선택을 하셔야만 하게 된 것이다. 범죄한 인간을 그저 대수롭지 않은 듯 용서해 주어 버리면, 온 우주에 거하는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될 것이고, 그 결과로 엄청난 반역과 파괴가 우주를 휩싸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가 없으셨다. 그렇다고 인류를 그저 영원히 소망 없이 죽어 가도록 내버려 두실 수는 도저히 없으셨다. 그러한 갈림길에서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루어 주시고 두 번째의 은혜의 기간을 가지고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여 주시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자유 의지와 자유 선택권을 주시었다. 자유 의지와 선택이 없는 인간은 로보트요 사람이라 할 수 없는 것이요, 또한 자유 의지와 선택이 없이는 성품의 발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울러서 인간에게 자유 의지와 선택권을 주셨을 때에는 인간이 반역과 불순종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신 일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계획 속에는 인류의 타락의 가능성과 그 사후 대책에 대한 계획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범죄한 인간들을 위하여 인간이 되어 오셔서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시고 또한 그들에게 의로운 삶의 모본을 보여 주시는 일이었다. 그 일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요, 하나님의 생명의 댓가를 치루는 어마어마한 값을 지불해야 하는 일이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의 선택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바치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그것은 쇼(Show)가 아니었다. 성소 제도의 속죄제를 공부해 보면 알게 될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참으로 우리의 두뇌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인류는 두 번째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통하여 태어나게 될 수많은 자손들을 보시고 차마 인류를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실 수가 없으셨다.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는 내어다 보신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영원히 살게 된다면 현재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이 생명의 가치야 말로 이루 형용 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이 된다. 우리의 지식과 성품이 계속적으로 영원토록 발전하여 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태어날 아담의 후손들에게, 구원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그 적당한 숫자가 차기까지, 또한 죄악의 역사를 용납하실 수 있는 기간까지 이 땅에 태어 나도록 허용하신 것이다. 그러나 인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허용하셔야 할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 지구상에 죄의 결과가 그대로 임하도록 허용하시는 일이었다. 그것은 공평한 처사였고 또한 사단과의 전쟁에서도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온 천하에 드러날 때까지 그 공정성을 지키셔야만 하시기 때문이었다. 또한 죄와 반역은 악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 결과를 보여 주심으로 공개하실 필요가 있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는 하지만 잠깐 살다가 죽게 되어있고 또한 죄의 결과인 슬픔과 질병과 늙음의 영향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유일한 이유와 목적은, 사는 동안 더듬어서 진리와 하나님을 찾아 발견하여 구원의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기회를 주시는데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17:25-28 참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생명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발견하고 구원의 선물을 받으면 우리는 영원히 사는 삶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재 우리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아무리 어려운 시련들을 당하게 되든지 간에 불문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이 놀라운 기회에 대하여 영원토록 감사와 찬송을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 은혜의 기회는 놀라운 것이기 때문이다.

2.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된 성소 제도

인간을 다시 살게 해 주신 후에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계시가 바로 성소에 대한 계시였다. 그것은 창세기 3장에 나타나는데, 에덴 동산에서 내어 쫓기는 인류에게 하나님께서는 가죽 옷을 해 입히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죽 옷을 해 입히시기 위해서는 동물을 죽이셔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소의 의식 속에는 반드시 소나 양이나 염소 등 제사에 바치는 동물의 희생이 수반되어야만 하는데, 그 동물의 죽음은 바로 장래에 십자가에서 돌아 가실 속죄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소 제도야 말로 하나님께서 인류를 어떻게 구원하실 가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여 주신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유일한 계시였다. 그러므로 죽음의 선고를 들은 아담이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설명을 듣고 성소 제도의 제사 제도에 대하여 알고 난 후에 감격하여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 라고 지었는데, 그 뜻은 “산자의 어미”라는 의미였다. 지금 방금 사망의 선고를 받은 아담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청사진인 성소 제도에 대한 계시는 그에게 커다란 소망을 안겨다 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아내를 산자의 어미라고 불렀다. 시편 77:13은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다. “오 하나님이여, 주의 길이(道-필자 주) 성소에 있으니 누가 우리 하나님처럼 그렇게 위대한 하나님이리이까?” (킹 제임스 성경 번역).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직후의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 보자. 그리고 인류의 시조와 하나님 사이에 있었을 법한 다음과 같은 대화를 상상하여 보도록 하자. 이 이야기는 필자가 만든 것이지마는 분명히 그러한 내용의 말들이 오갔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범죄한 후 떨고 서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아담아! 네 뒤에 있는 동물들을 보느냐?” “예! 하나님! 두 마리의 어린 양들이 뛰 놀고 있군요! 우리가 가장 사랑했던 동물들 중 하나입니다.” “그 양들을 불러보렴!” 아담과 하와가 휘파람을 불자 그 두 마리의 어린 양들은 껑충 껑충 뛰어와 한 마리는 아담의 품으로 또 다른 한 마리는 하와의 품속으로 안긴다. 그 때 하나님의 아들께서 다시 명령 하신다.

“아담아! 저기에 있는 돌 두개를 집어 오너라!” 영문도 모르고 돌들을 집어오는 아담에게 다시 말씀하신다. “아담아! 그 돌들을 서로 부딪쳐서 깨뜨려라!” 아담이 돌들을 깨뜨리자 하나는 칼처럼 날카롭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다시 명령하신다. “아담아! 이제 그 돌로 그 어린 양의 머리를 힘있게 내리 치거라!” “하나님! 저보고 이 양을 죽이라는 겁니까?” 놀라서 쳐다보는 아담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더 엄숙하게 말씀하신다. “그렇다!” 어떻게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 할 수 있는가! 아담은 명령에 따라 돌을 들어 양의 머리를 내리 쳤다. “더 세게!” 더 세게 내려친 돌을 맞은 죄없는 양이 바르르 떨면서 눈을 크게 뜨며 피를 흘리며 죽어 간다. 죽음의 장면을 처음으로 목격한 아담은 두려움에 질려서 양의 시체를 땅 바닥에 떨어 뜨리며 이렇게 묻는다. “하나님!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하는 겁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담아! 아니다. 너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앞으로 너희를 위하여 내가 저렇게 비참하게 죽게 될 것이야!” 구속의 계획을 한 눈으로 알아차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외친다. “하나님! 오, 하나님! 그렇게 하시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러한 사랑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오, 주님! 우리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무참한 죽음을 당하셔야 속죄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제부터 죄를 정말로 미워합니다. 어떻게 주님의 마음에 고통을 다시 가져다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오, 하나님!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를 정말로 미워합니다! 다시는 그러한 일을 반복 할 마음이 없습니다!”

성소의 의식 속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들어있다. 성소 제도는 인간들이 직접 그 의식에 참가하여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속하시는 방법에 대하여 생생하게 보고 느끼도록 계획하셨다. 그러므로 성소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은 우리들의 구원의 문제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3. 모세가 지은 지상 성소는 하늘 성소의 모형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소를 지으라고 명령 하실 때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식양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양식을 따라 지을지니라.” 출애굽기 25:8,9. 이 성소는 하나님께서 인류와 다시 같이 사실 수 있는 계획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고안 되었다. 이 성소 제도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지상 생애와 그 분의 사역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여 올라 가셔서 하실 봉사 사업까지를 상징하는 기구들과 예식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속의 기구들 하나 하나, 의식 하나 하나, 그리고 색깔 하나 하나 마다에 인간을 구속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가르침과, 또한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해야 할 구원의 단계들을 상징하는 표상들이 알알이 맺혀져 있다. 이 성소의 모형은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성소의 모양을 계시 가운데 보여 주시고 그 모형대로 짓도록 모세에게 지시 하셨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8:5.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에도 모세가 지었던 성소 모양 비슷한 참 성소가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성소 제도야 말로 하늘이 내어 주신 우리 인류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청사진이 아닐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성소를 통하여 당신의 구원을 인간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계획 하심으로써, 인류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방법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이제, 몇 기사에 걸쳐서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함께 연구해 보도록 하자!

4. 성소의 세부분과 구속 사업의 세 국면

성소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을 세 단계의 사역을 통하여서 이루신다는 뜻이다. 바울은 예수께서 우리의 대 제사장이시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 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6:19,20; 7:24,25; 8:1,2.

49예수께서는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성소 뜰에서, 첫째 칸인 성소에서 그리고 둘째 칸인 지성소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속죄 사업을 이루시는 것으로 표상 되어 있다.

성소 뜰

성소 뜰에서 죄인이 끌고 온 희생 제물을 죽이고 번제단 위에 태우는 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인류를 위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시어 십자가에 대속제물로 돌아 가실 것을 상징한 것이요,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고전 5:7,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히 10:12

성소 첫째칸 (성소)

첫째 칸 성소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성소로 가시어 당신께서 흘리신 피를 힘입어 회개하며 나아오는 자들을 위하여 중보 기도하시며, 죄를 사하시고, 나아가서는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나누어 주시는 일을 행하신 사실을 나타내 주는 것인데, 그 일은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해인 A.D. 31년 부터 진행해 오셨다고 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11-12.

성소 둘째칸 (지성소)

둘째 칸 지성소는 예수께서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앞에서 인간을 심판하시는 마지막 구속의 국면을 상징해 준 것이다. 그러므로 성소의 세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들을 위한 구속 사업의 세가지 국면들을 상징하고 있다.

 

2부 - 성소로 나아가는 길

 
1. 성소 밖에서의 경험

죄책감

제일 먼저 성소로 나아가는 첫 단계는 죄인의 마음 가운데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범하였을 때에 즉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을 때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

죄를 지은 사람은 심판과 멸망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 때에 죄인은 마음 속의 평화를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죄의 용서와 기쁨을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죄인은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 성소로 가져갈 흠 없는 동물을 고르게 되는데, 그것은 죄 없으신 흠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동시에 흠 없이 순전한 우리의 전적인 헌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려고 나아 갈 때에는 온 마음을 다하여서 진실된 회개의 심정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나누어진 반쪽 마음을 받으실 수가 없으시다.

성소 밖에서 보이는 세 가지

이제, 죄를 진 자는 제사 드릴 제물을 가지고 성소로 향하여 걸어가게 되는 데, 그 때에 그는 성소를 바라보며 희망을 돋구워 주는 세가지 물체를 보게 된다. 1) 하나는 흰 세마포로 만들어진 성소 바깥 벽인데, 그 흰 색깔은 죄인이 성소 안에 머물러 있는 한 하나님의 의로 가리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큰 위로를 안겨다 주게 된다. 2) 또 한가지는 번제단에서 타오르고 있는 연기인데, 그것은 죄인이 죄를 자복하기만 하면 자기의 죄가 연기처럼 올라가 버리고 말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 3) 또 다른 한가지 눈에 들어 오는 것은 성소 지붕 위에 머물러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었다. 그것은 성소 안에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다는 엄숙한 마음을 갖게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두렵기만한 분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하여 인간들 가운데 머물기를 즐거워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인 사실을 일깨워 준다.

성소 문의 색깔이 주는 의미

성소에 다다르자 성소의 문을 통과하게 되는데, 그것은 문이라기 보다 휘장이었다. 그 휘장은 붉은 색, 청색, 자주색으로 짜여져 있었다. 1) 붉은 색은 앞으로 오실 메시야 곧 구세주의 흘리실 피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2) 청색은 그분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온전하게 지키시는 충성스러운 순종의 삶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청색은 언제나 율법에 대한 순종을 상징하였다. 3) 또한 자주색은 왕족들만 입는 색깔로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상징한다. 아울러 이 색깔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고 그의 말씀과 계명을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서 하늘 왕국의 자녀들이 된다는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었다. 양을 끌고 온 죄인은 벌써 이러한 자세한 교훈들과 배려를 통하여서 깊은 감동을 받으며 성소 뜰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를 맞아 들이는 제사장은 그를 친절하게 안내하여 들이며 가져온 제물이 흠이 없는 것인지를 먼저 확인한 후에 성소 의식 절차를 설명하여 주게 된다.

2. 여러 제사를 통한 성소 뜰의 경험

성소 뜰에 들어간 죄인은 제사장의 안내에 따라서 가져간 희생 동물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그 머리에 얹고 자기가 지은 죄를 고백하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죄를 고백할 때에 우리의 죄가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옮겨지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죄인은 칼을 꺼내어 양의 목을 따서 죽이는 것이다. 바로 우리의 죄가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게 만든 것처럼....

제사 제도에 있어서 크게 네 가지 종류로 나뉘어지게 되는데 성경 레위기서에 기록된 순서대로 첫번째는 번제, 두 번째는 화목제, 세 번째는 속죄제, 그 다음으로는 속건제로 나뉘어 진다. 1) 번제는 헌신과 희생을 목적으로 드리는 제사요, 2) 화목제는 회개한 죄인이 감사와 서약의 의미로 드리는 제사이고, 3) 속죄제는 말 그대로 죄를 속하기 위하여 드리는 희생의 제사요, 4) 속건제는 속죄제와 같은 종류의 제사로서 손해 배상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제사이다. 죄를 속죄하는 네 가지 제사중 가장 중요한 번제와 속죄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번제를 통한 성소 뜰의 경험

그 첫번째인 번제는 개인적으로도 드리는 것이었지만 특히 아침 저녁으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드리게 되어 있었는데, 이 번제는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경험해야 하는 거듭남의 경험이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가르쳐 주는 제사이다.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그는 그 번제 희생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단 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단 윗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위기 1:3-9

성소에 있어서의 의식 하나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의미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구원의 경험과 단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번제는 회개와 거듭남의 경험을 실물교훈으로 보여주신 제사제도이다. 죄를 고백한 죄인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위에 있는 번제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대로 희생 동물의 가죽을 벗기는 일이 있게 된다. 왜 그렇게 지시하셨을까? 그것은 회개하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선이나 의에 대하여 무가치함을 깨닫고 자기의 의의 옷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어야 겠다는 소원을 상징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추함과 속절없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겸비의 표현이다. 그리고는 배를 가르고 그 속에 있는 모든 내장을 꺼내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물로 깨끗하게 씻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죄를 고백하였지만, 혹시 또 마음 속에 아직도 숨어 있는 죄가 있을까봐서 자기의 마음을 활짝 열어 젖히고 “하나님! 혹시 내 속에 무슨 다른 죄가 있는지 살펴 주세요. 저는 하나님께 전적인 마음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의 생각과 묵상이 주님께 열납되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속의 내장들과 창자들까지도 다 물로 깨끗하게 씻는 것이다. 성경에서 물은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그래서 회개한 죄인은 죄만 고백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낱낱이 고백한 뒤 포기하여 내어버리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진리의 말씀을 따라 잘못된 부분들을 시정하고 개혁하는 일이 반드시 뒤 따라야 하는 것이다. 형식적인 회개와 쉽게 넘어가는 표면적인 회개가 아니라, 정말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죄를 포기하여 버리며 잘못된 생활들을 진리를 따라 바꾸고 개혁하는 철저한 회개를 가르치시기 위한 제사가 곧 번제였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청사진을 비추어 볼 때에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회개가 얼마나 피상적인가!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얼마나 엉터리인가! 오늘날 기독교회의 진정한 문제점은 대부분의 교인들에게 진정한 거듭남의 경험이 없는 데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열납받는 회개를 드려야 한다.

속죄제를 통한 성소 뜰의 경험

속죄제는 죄인이 자기의 죄를 용서함 받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로서 가장 중요한 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죄없으신 하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하는 사실을 실물교훈을 통하여 분명하게 죄인에게 실감시키는 제사이다. 구속이란 영어로 “Redemption” 인데, 그 낱말은 “값을 치루고 도로 사옴” 혹은, “값을 치루고 도로 물러 줌”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피는 그 생애에 따라서 가치가 생기는 법이다. 죄를 지은 우리들의 피는 죄를 속하는 힘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죄를 한번도 지은적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보혈이 되어 우리의 모든 죄를 씻는 샘물이 되는 것이다. 율법을 제정하신 창조주의 죄 없으신 피가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흘려짐으로 우리가 다시 새로운 생명 가운데 살게 된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성소 뜰에서 동물을 죽여서 피를 흘리는 제사를 드려야만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도록 계획 하셨을까? 피 흘리는 장면을 보기 좋아하시기 때문이었을까? 그럴리가 없다. 하나님께서 피흘리는 제사의 법칙을 주셨던 이유는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용서가 무슨 댓가를 치룸으로 가능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깊은 인상 갖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렇다! 회개하는 죄인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너그럽게 용서 하신다. 그러나 그 용서를 위하여서 갈바리의 십자가의 댓가를 지불하셔야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동물이 피를 흘리는 장면을 직접 목도하도록 성소제도를 고안하셔서 죄인이 구세주의 사랑과 희생에 대하여 뼈저린 감사의 마음을 느끼게 됨으로, 그 결과로, 인간들이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도록 만드시기 위하여 제사제도를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대인들은 성소를, 동물을 잡는 도살장처럼 만들어 버렸다. 제사제도를 마치 죄를 용서 받는 면허증처럼 사용하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죄를 그치게 되기를 바라셔서 제사제도를 주신 것이었는데도.... 그들은 다시 죄를 지으면 양을 한 마리 또 끌고 오면 된다는 식으로 죄를 짓기에 과감하여 졌던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용서를 마치 죄를 짓는 면허증인양 생각하고 죄 짓는 일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처럼....

속죄제에서는 희생 동물 전체를 번제단에서 태우는 것이 아니라 그 기름만 잘라내어서 태우게 되어 있었는데, 그 이유는 기름은 죄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지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시편 37:20). 그 나머지 시체는 이스라엘 진영 밖에 지정된 장소에 내다가 불로 소각해 버렸는데, 그것은 죄와 분리되지 아니한 죄인들은 결국 새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유황 불로 타서 멸망 받게 될 것을 상징한 것이었다 (요한 계시록 20장 참조).

속죄제에 있어서,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이 죄를 범했을 경우와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죄를 범했을 경우에는 그 둘을 동일한 크기의 죄로 다루었는데, 그러한 경우에는 제물의 피를 성소 안으로 가져가서 지성소 앞에 있는 휘장 앞 바닥에다가 일곱번 뿌리게 하였다. 그 피를 통하여 죄인이 고백한 죄는 상징적으로 성소로 옮겨지게 되는데, 제사장이 그 죄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중보의 기도를 올려야 죄를 용서 받게 되는 것을 표상하는 것이었다. 레위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그 제사장의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장 앞에 일곱번 뿌릴 것이며 또 그 피로 회막 안 여호와 앞에 있는 단 뿔에 바르고 그 피 전부는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그 기름은 다 취하여 단 위에 불사르되 그 송아지를 속죄제의 수송아지에게 한것 같이 할지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얻으리라.” 레위기 4:16-20. 성경은 제사장이 성소에서 속죄한즉, 다시 말해서 중보기도를 드려야 죄가 사함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상징적으로 성소 안에 뿌려진 피는 죄인의 죄가 성소 안으로 옮기워진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궁극적으로 죄인이 고백한 죄가 하늘 성소에 있는 죄의 기록책으로 옮기어 져서 하늘 성소에 계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죄인을 위하여 중보기도하셔서 죄를 사하여 주시는 일련의 과정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는 일이 십자가의 죽음에서 다 끝나버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인류의 죄를 위한 용서를 마련하신 것이요 또한 구속을 시작하신 것이다. 성소의 번제단으로 표상된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의 죽음으로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마련하신 이후, 당신 자신의 피를 가지고 승천하셔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 우리들을 위하여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중보하시며 당신의 보혈의 은혜와 능력을 제공하고 계신 것이다.

성소제도에 있어서 희생 제물의 피가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자세히 살펴 보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 피 속에 상징적으로 전가된 죄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죄를 범했을 경우나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죄를 범했을 경우는 피가 휘장안으로 옮겨져 뿌려지는데, 평민인 개인이 죄를 범했을 경우에는 피가 성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뜰에 있는 번제단 주위에 뿌려 졌으며 죄는 다른 방법으로 옮겨져 중보의 기도를 드리게 되어 있었다. 왜 그랬을까? 거기에는 참으로 감동적인 속죄의 이야기가 내포되어 있다.

속죄제물을 가지고 성소 뜰에 들어와 제사를 드린 사람은, 제사장이 그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 휘장 앞에 뿌리고 대신하여 중보 기도를 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오히려 제사장은 그 속죄제의 피를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 뿔에만 바르고 그 주위에 피를 뿌린 후 나머지를 땅에 쏟아 버리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었다. 그 때에 속죄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아니, 제사장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 피를 그냥 성소 뜰에 쏟아 버리다니요! 성소 안에 들어가 휘장 앞에 뿌린 후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셔야 제 죄가 사함 받는 것이 아닙니까? 이제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놀란 죄인에게 제사장은 인자한 미소를 띄우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형제여! 속죄제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특별히 교육시키고자 하시는 중요한 교훈을 담아 두셨습니다. 이 속죄제에는, 장래에 올 메시야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 지심으로써 우리가 용서 받을 수 있게 되는지에 대하여 가르치기 위한 귀중한 실물교훈이 담겨져 있습니다. 형제가 죄를 고백하였을 때에 형제의 죄가 어디로 갔습니까?” “예! 저의 죄가 속죄 양에게 전가 되었지요!” “그렇소! 맞습니다. 그러면 이제 잘 지켜 보시지요!” 그렇게 말하고는 제사장이 그 속죄제물 짐승의 살점을 조금 칼로 도려내어 입에 넣고 씹어서 삼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이렇게 질문 하였을 것이다. “형제여! 이제 당신의 죄가 어디로 갔습니까?” 그 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아차린 죄인은 떨면서 이렇게 대답하였을 것이다. “네! 제사장님! 저의 죄가 바로 당신의 몸으로 전가되었군요! 상징적인 의미에서, 내가 지은 죄가 바로 당신의 죄가 되어 버렸군요!” 그때 제사장은 이렇게 말하였을 것이다. “이제 나는 당신의 죄, 아니 내 자신의 것이 되어버린 그 죄를 가지고 성소 안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 당신의 죄, 아니 내 죄를 위하여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드릴 것입니다.” 죄인은 눈물이 함박고인 눈으로 성소 안으로 들어 가는 제사장의 뒷모습을 지켜 보았을 것이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가르쳐 주는 얼마나 힘있는 실물교훈인가! (레위기 6:25-30참조).

속죄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의미가 과연 무슨 뜻일까? 베드로 전서 2:24은 우리에게 힌트를 제공한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어떻게 주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당신의 몸으로 지실 수가 있었는가? 몸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다는 의미가 과연 무슨 뜻일까?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우리 몸에 어떠한 반응이 나타나는가?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형제에게 커다란 거짓말을 하였는데, 길을 가다가 그 사람과 마주쳤다고 하자. 그 때에 우리의 몸에 어떠한 반응이 일어나는가? 갑자기 불안과 초조함이 엄습하고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며 식은 땀이 흐르면서 두려움이 마음속에 밀려 오지 않는가!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이 가슴을 메워 오는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러한 방법으로 죄를 지시는 경험을 겪으신 것이다. 우리들의 죄가 마치 당신께서 지으신 죄들처럼 그 분 위에 엄습하여 왔다. 한번도 죄를 지어 보지 않으신 분께서 죄책감을 우리를 대신하여 경험하시게 된 것이다.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느끼는 몸의 반응들이 갑자기 예수께 생기기 시작했을 것이다. 인류의 수없이 많은 죄악들이 한꺼번에 예수님의 영혼 속으로 밀려왔기 때문에, 그분의 마음은 그 때까지 전혀 느껴 보지 못했던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하셨던 것이다. 십자가 상에서의 그 고뇌는 말로 다 형언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문자 그대로 우리의 죄를 대신 당신 자신의 몸으로 짊어지신 것이었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 5:21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시편 22장 전체와, 40장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계실 때에 당하신 심적 고통이 어떠하였는지를 미리 예언하여 준 장들이다. 시편 40:12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 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음으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당하실 깊은 고뇌를 예언하면서 “나의 죄가 나의 머리털 보다 많”다고 표현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신 하나님이셨다. 도대체 무슨 죄가 그렇게 많아 하늘을 우러러 볼 수도 없고 머리털보다 많다고 하셨을까? 그렇다! 그것은 분명히 대신 지셨던 우리들의 죄들을 말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라는 영어 성경의 표현은 “Therefore my heart failed me” 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심장이 멈추었다” 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육체적인 고통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것은 우리들의 죄를 지시는 영혼의 고뇌 때문에 심장이 파열되어 돌아가신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의 장면을 찾아보면, 큰 소리를 지르시고 고개를 떨구시며 갑자기 운명하셨다는 기록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성경은 로마 군병이 예수께서 죽으셨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자 물과 피가 흘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그분의 심장이 파열되었다는 의학적인 증명이다. 죄로 인한 깊은 고뇌 때문에 심장이 터지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심장이 피를 생성하는 일을 멈추자 혈청과 혈구가 분리되어서 창에 찔린 상처로 흘러 나왔던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부르짖으신 말씀 가운데 우리가 잘 기억하는 말씀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이다. 그 뜻은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의미이다.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는 과정에서 우리 죄의 악함과 두려움을 짊어 지심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를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되신 것이었다. 우리의 죄 그 자체가 되어 버리신 것이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비없이 자신이 범한 죄의 댓가를 있는 그대로 당하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었다.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성경은 “죄를 대신 지셨” 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단 한번도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를 느끼지 않고 사신 적이 없으셨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갑자기 인류의 죄를 지시고 우리들의 죄 그 자체가 되심으로써, 죄인인 우리들이 당했어야 할 그 형벌과 심판을 대신지게 되었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만을 느끼게 되셨고 완전히 버림받은 느낌만 가지게 된 것이었다. 주님의 눈 앞에는 이제 모든 소망이 사라졌고, 마치 대신 지신 우리의 죄 때문에 영원히 아버지와 분리되어 완전히 멸망당할 것처럼 느끼게 되신 것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순간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게 되신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 예수께서는 한가지 선택을 하셔야만 하였다. 마귀는 지금 이렇게 죽으면 영원히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되고 멸망 당해 버릴 것이라고 그분의 귀에 속삭임으로써, 예수님을 괴롭혔을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마음에는 이전에 들었던 하늘 아버지의 모든 약속도,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희망도 다 사라져 버린 것처럼 느껴졌고, 더 이상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처럼 느끼셨다. 또한 당신 자신이 목숨을 바쳐서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을 십자가에 메달고 조롱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러한 순간에도 당신 자신이 온 인류를 대신하여 영원히 심판을 받고 영원한 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인류를 포기 할 수 없다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나타내시었다. 당신 자신이 영원히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이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대신 죽어줌으로써,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루어 주시겠다는 놀라운 사랑을 실현하셨던 것이다. 인간의 부모의 사랑에서 우리가 희미하게나마 희생적인 사랑을 엿볼 수 있지만, 예수님의 죽음의 선택은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전혀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 상태에서 이루어졌던 것이기 때문에, 그 종류가 전혀 다른 것이다. 인간이 죄를 지었어도 회개하고 믿을 때에는 그 지은 죄에 대한 댓가를 받지 않고 용서를 받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댓가를 이미 십자가에서 치루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비록 인류가 타락하였지만, 그분의 사랑은 결코 인류를 그냥 죽게 내어버려 두실 수가 없으셨다. 온 우주의 천사들은 십자가 상에서 나타나고 있는 그러한 사랑의 장면을 지켜 보면서 감탄하였을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이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고 보답하여야 하겠는가?

독자들이시여!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깊이 명상하라. 십자가에서 치루어진 희생과 죽음 때문에, 우리에게 값없는 용서와 구원의 소망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또한 인류를 위한 값없는 용서와 구원이 마련되기 위해서 치루어진 댓가는 엄청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이다. 십자가는 쇼(show)가 아니다. 당신의 생명까지 포기할 정도로 보여 주신 엄청난 사랑의 현시이다. 우리가 2000년전에 갈보리 산 위에 서있지 않았다고 해서,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지 내가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자! 우리의 죄가 예수를 죽인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어떤 순교자의 죽음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어떠한 순교자의 죽음도 우리에게 영생의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인류에게 다시 한번 영생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죽으신 대속의 죽음이었다. 속죄제는 바로 이 감동적인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 보고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될 때에야 비로서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그 믿음은 단순히 지적인 이해나 동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믿음은 우리의 온 생애를 바쳐 하나님을 순종하며 따르기를 원하도록 만드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소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기별의 중심이다.

 

3부 - 성소 첫째 칸의 경험

 


1. 성소 첫째 칸과 거룩함

성소제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진리가 있다.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속 사업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용서 받은 죄인이 다시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게 되기 위하여 회복되는 과정이 또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감리 교회의 창시자이며 위대한 개혁자인 요한 웨슬레가 부르짖었던 성령의 열매이다. 그는 성령의 열매인 변화된 거룩한 생활이야말로 구원의 필수 요건이라고 가르치는 성화의 가르침을 설교하였다. 성화에 대한 요한 웨슬레의 그러한 가르침은 성소에도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 지는지를 실물교훈으로 보여 주시기 위하여, 또한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어떠한 사역을 하셨으며, 현재에는 어떠한 일을 하고 계신지를 가르쳐 주는 청사진을 보여 주기 위해서, 성소제도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성소제도는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희생과 대속의 죽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성소 뜰을 지나서 들어가게 되는 성소의 첫째 칸에서는 구속 사업의 두 번째 국면으로써 예수님의 중보의 사역과 인류에게 구원의 은혜를 나누어 주시는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거룩함
먼저,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생활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본 다음, 성소제도가 그것에 대해서 어떠한 실물교훈을 주고 있는지 살펴보자. 사도행전 26: 18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라는 말씀을 유의하여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전체 66권을 통하여서 성화 즉, 거룩한 생활과 변화된 순종의 생활을 구원 받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경험해야만 하는 과정으로 소개하고 있다. “...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데살로니가 후서 2:13)라는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씀이 아닌가! 그리스도인의 거룩하고 깨끗한 생활을 강조하면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5:26,27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이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거룩함을 이상한 기분이나 황홀경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상태를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고 말씀하셨으며(요한복음 14:15), 사도 요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라고 말씀하였다(요한일서 5:4).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그 결과로 거룩하게 되며, 순종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에베소서는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인 삶을 설명하여 주고 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 에베소서 2:3,4,5,10.

성소를 통해서 알아보는 거룩함
이제, 성소로 돌아가서 성소제도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생활의 의미를 살펴보자. 성소 제도는,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십자가)에서 어린 양(그리스도)을 잡아 죽이는 일(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통하여 진정으로 회개하고 죄를 버리기로 결심한 죄인이, 이제는 믿음으로 제사장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하게 사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성막의 첫째 칸인 성소 안에는 금 촛대와 떡상과 분향단이 있다. 첫째 칸인 성소 안에 있는 기구들과 제사장의 활동은, 성소 뜰에서 죄를 회개하고 버림으로써 용서 받고 의인이 된 사람이, 이제 어떻게 하면 받은 바 그 의로운 삶을 계속해서 지켜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하여 가르쳐 주며, 또한 그렇게 할 수 있게 해 주시기 위하여 은혜를 통하여 도와 주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여 주고 있다. 그렇다. 용서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범했던 죄의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 승리하는 생애를 살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란 용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하나님의 은혜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힘을 말한다. 은혜는 습관적인 죄의 속박으로부터 죄인을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한다. 은혜는, 죄로 인한 영적 죽음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도 믿지도 아니하는 사람을 영적으로 부활시켜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는 단어이다. 디도서에서 바울은 은혜를, 가르치시고 역사하는 하나님의 힘으로 설명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디도서 2:11~13

그래서 히브리서 4:14~16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 갈 것이니라.”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아서 의인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죄의 유혹과 마귀의 공격은 우리를 엄습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범했던 죄악의 습관들이 우리를 다시 찾아와서 시험을 주며, 날마다 우리를 괴롭히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와 꼭 같은 시험을 당하셨으며, 고난 가운데서 살아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날마다 당하는 시험들의 어려움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우리를 도우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경험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날마다 당하는 시험과 유혹도 받으셨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설명하면서”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한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고 묘사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서 담대히 은혜의 보좌”가 있는 곳인 하늘 성소로 나아가자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하늘 성소 안에 우리를 시험에서 도와줄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성소 안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승리의 생활을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고안하신 하나님의 아이디어들이 나타나 있는데, 성소의 첫째 칸 안에 있는 금촛대와 떡상과 분향단은 그러한 하나님의 아이디어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기구들이다. 성소 안에 있는 기구들은 모두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순결한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성소의 첫째칸에 있는 기구들이 순금으로 만들어졌던 것은,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과 물두멍이 두 가지 금속의 합금인 놋으로 만들어졌던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성소 뜰에서 회개의 경험으로 번제단에서 죄를 태우고, 물두멍에서 깨끗하게 씻어서 순결하게 된 그리스도인은 그 다음 단계로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활동적이고 순결한 믿음의 경험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가르쳐 주기 위해서, 성소 안의 기구들이 순금으로 만들어 졌던 것이다.


2. 세 가지 기구에 담겨져 있는 의미들

촛대
자 이제, 성소의 첫째 칸 안에 있는 세가지 기구들이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자. 금으로 만들어진 촛대에는 올리브 기름이 들어 있어서 그 기름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촛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상징하며, 촛대 안의 기름은 성령을 상징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시편 119:105.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으므로 성령의 감동을 통하지 않고서는 진리를 이해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성경은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책이 아니다. 성경은 영생의 진리를 가르치는 거룩한 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앞 길을 진리의 빛으로 비추어 주는 등불과 같다. 성소 안에는 외부로부터 다른 빛이 들어오게 하는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오직 촛대만이 성소 안에 있는 빛의 근원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생애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어떤 다른 빛이 우리를 인도하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 것이다. 한 줄기의 빛이 칠흙 같은 어두움을 내어 쫓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의 쓰레기들로 마음이 혼돈 되고 복잡해 있을 때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는 한마디의 성경 말씀이 모든 잡된 것들을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퇴치해 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며 명상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유지 할 수 있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거룩한 열매를 맺는 성화의 길을 걷고 싶은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읽는 대신에, 정직한 양심으로 읽어라. 성령께서 그대의 무지하고 둔한 마음에 깨달음을 주실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생활을 위하여 준비해 두신 유일한 방법이다.

떡상
떡상도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하늘을 향하여 여행하는 나그네에게는 어두운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필요할 뿐 아니라, 나그네에게 계속해서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음식도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 세상을 살아가며 사단과 죄의 유혹을 이기게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다 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라고 말씀하시면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한 것이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고 말씀하시었다(요한복음 6:63). 먹는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대신해서 먹어 줄 수가 없는 것이다. 만나가 하늘에서 내렸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을 향하여 여행하고 있는 우리의 영을 살리기 위하여 반드시 먹어야 하는 하늘의 만나이다. 하늘의 만나를 제대로 먹지 않는 그리스도인마다 지치고 피곤하여 쓰러지게 될 것이다.

분향단
분향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드리는 중보의 기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아무리 의롭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기도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열납될 수가 없는 것이다. 분향단의 향은 특별하게 만들어 졌고, 다른 목적으로는 절대로 사용할 수가 없었던 이유는, 분향단에서 올라가는 향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의로운 생애와 기도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올릴 때에 예수께서는 우리의 기도와 소원에 당신 자신의 흠없는 의를 섞어서 아버지 앞에 올리심으로써,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될 수 있도록 중보하고 계신 것이다. 아울러 예수께서는 우리가 도움을 요청 할 때마다, 우리로 하여금 모든 시험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드는 당신의 은혜와 능력을 공급하여 주시고 있는 것이다. 분향단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기도를 상징하고 있다. 그 분께서는 오늘도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며 시험 받는 자를 돕고 계신다.

그러므로 성소는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걷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의로운 생애를 유지해 나갈 수 있으며, 어떻게 거룩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그것은 성경 말씀의 연구와 기도이다. 하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드리는 기도!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리기 위하여 두손을 모으는 기도! 시험당하고 어려울 때에,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매일 읽고 명상하며 우리의 마음 속에 담아두는 만나를 먹는 생활! 무엇이 진리이며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께 가납되는 생활을 살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하여 성경만을 유일한 빛으로 삼아서 연구하는 생활! 이러한 것들이 바로 우리를 성화케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4부-성소 둘째 칸 지성소 경험

 

1. 성소의 최종 목적지인 지성소

하나님과 인간이 다시 만나는 곳거룩함
이제 결론적으로 지성소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지성소 안에는 두 돌비에 새겨진 십계명을 보관하는 법궤(언약궤, 속죄소, 증거궤)가 있었으며, 법궤 위에는 시은좌(은혜를 나누어 주는 곳)가 있어서, 거기에는 하나님의 영광인 쉐키나가 비쳐 나오고 있었다. 그 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면 즉시로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결하게 준비된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씩 지성소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의 완전한 정결과 도말을 위하여서 기도하였다. 그 날을 성경은 대속죄일이라고 부르고 있다. 지성소는 성소제도의 결론이요, 최종 목적지이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그 지성소에서 다시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십계명)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0-22).
성소의 구조와 그 제도에 새겨져 있는 성소 뜰에서의 죄의 용서(칭의)와 성소 안에서의 성화의 경험은, 결국에는 인간을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서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국면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시며 순종하는 거룩한 생활을 살도록 가르치시고 힘 주시는 이유는, 결국에는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자로 회복시키시기 위한 것이다. 구원은 회복이다. 다시 원래의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어야 한다.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십자가는 죄인의 마음에 죄를 미워하는 심령을 심어주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좋아하는 새로운 마음을 창조해준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를 아무리 용서해주신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계속적으로 똑같은 죄를 범하며 계속적으로 불순종하는 생애를 고집한다면,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분의 용서가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이유는, 이제 다시는 그러한 죗된 생애를 살지 말고 하나님이 안에서 새로운 생애를 살도록 하시기 위하여 용서해주시는 것이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시면서 예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주실 때에 아울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그분을 위하여 살 수 있는 능력을 용서와 함께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경험하게 되는 재 창조의 경험인 것이다.

대속죄일의 경험과 심판
하나님께서는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모든 죄로부터 정결케 될 것을 명하시었다. 그들은 일년 내내 죄들을 고백하며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면서 용서를 받아 왔다. 그러나 매년 마지막 날인 대속죄일 날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들을 그들의 회개가 정말 참된 것이었는지, 지금도 여전히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 정말로 죄를 참회하고 버렸는지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일을 하셨다(레위기 16장 참조).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유대력의 마지막에 있는 대속죄일은 심판의 날로 이해되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각각 심판하시는 날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5: 28,29).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행 17:31). “네가 어찌하여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롬 14:10). “하나님 앞과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딤후 4:1).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벧전 4:17).
성소제도는 우리에게 결국은 모든 인간이 누구나가 다 한 번은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것을 엄히 가르치고 있다. 무론 지금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가리움을 받고 있으며 은혜를 통하여 구원의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우리가 예수의 손을 놓지 않는 한 주께서 우리를 결코 놓지 않으실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기억하자! 이제 곧 머지 않은 장래에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태어났던 모든 인류를 각각 그 동기와 마음을 살펴서, 그들의 믿음의 동기가 참된 것이었는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말씀을 따라 살아왔는지 살아오지 않았는지를 헤아리시기 위하여 마지막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서 그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대속죄일 날에는 아사셀 염소에게 모든 죄를 다 옮기어서 씌우고 광야로 데리고 나가 죽게 하는 일이 있었다. 이미 다 용서한 죄를 왜 그렇게 하는 것이었을까?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죄에 매달려 있기를 선택한 죄인들은 최후의 날에 멸망 당하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가르쳐주기 위해서 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변화되지 못한 죄인을 다시 하늘에 들이심으로써 또 다시 하늘에 전쟁과 반역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용납하실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 자신이 과연 진실된 마음과 동기로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고 있는지 엄숙하게 살펴 볼 시간이다. 그대는 과연 지금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2. 예수님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

예수님이 계시는 곳 – 하늘 지성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신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현주소를 잃어 버렸다. 하늘을 향하여 막연하게 기도 드리지만, 예수께서 하늘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를 모른 채 방황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현주소와 그곳에서 우리를 위하여 하시는 사업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창조 후 지금까지 성소를 통하여 인류의 구속 사업을 이루어 오셨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 즉시로 시작된 것이 성소 제도인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성소의 모양과 형태가 다음 페이지 상단에 나오는 도표와 같이 바뀌어졌지만, 성소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존재해 왔다. 그리하여 마지막 시대인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서 당신의 마지막 봉사를 끝내고 있다:
노아가 쌓았고, 아브라함이 쌓았던 제단 성소 시대가 지나고, 모세 때에 이르러 성막 성소 시대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으라.” (출 25:8). 그런데 모세에게 보여주신 지상 성소의 원형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그 대답을 분명하게 찾게 된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copy)과 그림자라.” (히 8:5). 바울은 지상 성소를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이라고 표현했는데(히 9:23), 이 말은 모세가 지은 성막 성소의 원형이 하늘에 있다는 뜻이다. 또한 지상 성소를 가리켜 “그림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이것 역시 이 땅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만드는 원형이 하늘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언제 지상 성소의 원형인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나? A.D. 31년이었다. A.D. 31년은 무슨 해인가? 예수께서 부활 후, 승천하신 해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승천하신 직후, 곧바로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이 그 사실을 증언하였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12).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의 죽음으로 속죄를 이루신 후 부활하셔서 하늘 성소로 들어가셨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그분의 봉사와 십자가에서의 희생은 성소 뜰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던 A.D. 31년에는 하늘 성소의 첫째 칸인 성소로 들어가셨다. 다니엘서 8장과 9장에 예언된 것처럼 예수님은 그 곳에서 우리를 위해 1844년까지 중보의 기도를 드리셨다. 그리고 1844년에 하늘 성소의 둘째 칸인 지성소로 들어가셔서 지금까지 봉사하고 계신다. 다니엘서 8장과 9장 그리고 2300주야가 끝나는 1844년에 관한 예언은 살아남는 이들 44호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니 참조하길 바라며 24페이지에 나오는 상세한 도표를 참조하여 지금 이 순 간에도 하늘 지성소에서 우리를 위한 중보와 심판을 하고 계신 예수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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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속죄일에 우리가 해야 할 의무

지상 성소의 모형적 봉사에 있어서,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면 온 이스라엘 족속은 성소 주위에 모여서 죄사함을 받고 회중에게서 끊어지지 않기 위하여 지극히 엄숙한 태도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겸비하게 하도록 요구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늘 성소에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실제적인 대속죄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늘 대제사장(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해하고 자신들이 해야 할 의무를 깨닫는 일이 얼마나 긴요한 일인가!
인류는 하나님께서 자비로써 보내주시는 경고를 거절하고서도 무사할 수는 없다. 노아 시대에는 하늘로부터 한 기별이 이 세상에 주어졌는데, 그 기별을 취급한 태도 여하로 사람의 구원이 좌우되었다. 경고를 거절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죄 많은 인류에게서 떠나고, 그들은 마침내 홍수로 멸망을 당하였다. 아브라함 당시에도 은혜는 소돔의 흉악한 주민들을 위하여 더 이상 간원하지 못하였으므로 롯과 그 아내와 두 딸 외에는 모든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온 불로 멸망되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시대에도 그러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당시의 믿지 않는 유대인에게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마 23:38)고 선언하였다.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께서는 마지막 시대를 내다보시고,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할 자들에 대하여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살후 2:10-12)고 선언하신다. 그들이 하나님이 말씀의 교훈을 거절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령을 거두어 버리시고, 그들을 그들이 좋아하는 기만 가운데 버려두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사람들을 위하여 중보하고 계시므로 빛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빛이 주어질 것이다.” 선지자는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r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게 하되 금은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말 3:2,3)고 말한다.
예수께서 재강림하시기 직전, 인류에 대한 은혜의 시간이 끝나고, 하늘 성소에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업이 그치게 될 때,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중보자 없이 서게 될 것이다. 그들의 옷은 흠이 없어야 하고, 그들의 품성은 피뿌림을 통하여 죄에서 깨끗해져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들 자신의 꾸준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악과의 투쟁에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하늘에서 심판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는 정결케 하고 죄를 버리는 특별한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일이 완성될 때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의 재림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말 3:4)될 것이다. 주님께서 오실 때에 당신의 것으로 받으실 교회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 (엡 5:27)는 교회가 될 것이다. 그 때에 교회는 “아침 빛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 (아 6:10)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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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 성소를 알아야 풀리는 의문의 율법과 십계명


1. 지상 성소의 폐지와 의문의 율법의 폐지

우리는 다니엘 9장에서 성소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예언을 볼 수 있다. 그 예언은 다니엘 9장 24절부터 시작되는 예언인데, 그 예언 속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지상의 성소제도가 폐지될 것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였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27절. 이 예언은 앞의 도표에서 확인하였던 것처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지상 성소에서 행하여졌던 동물의 희생제도가 그 종말을 고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제사 제도의 종말을 알리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순간, 성소 안의 휘장을 초자연적인 힘에 의하여 두 조각으로 찢어지는 놀라운 사건을 일으키셨다(마가복음 15:37~38, 누가복음 23:45~46을 볼 것).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마태복음 27:50~51.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으로써, 더 이상 동물의 피가 흘려질 필요가 없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피로서 새로운 언약을 인치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모세가 제사 의식에 대해서 기록한 증서인 의문의 율법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다.


성경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한가지 이해하여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율법에는 두 종류의 율법이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반포하신 돌비에 새긴 십계명인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 속에 보관하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모세가 절기들과 성소 의식에 관하여 두루마리에 기록한 의식법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폐한 율법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모세가 기록한 의문의 율법을 폐하여진 것으로 말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이 문제에 대하여 한가지 커다란 오해가 수많은 평신도들 뿐만 아니라, 성직자들에게까지도 편만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율법 즉, 십계명을 폐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십계명에는 제사제도나 의식에 관한 조항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므로 십자가가 십계명을 폐하여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골로새서 2:14를 이용한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의문에 쓴 증서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분명, 십자가에 의해서 폐지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의문의 증서”이다. 의문에 증서는 모세가 두루마리에 제사 제도에 대하여 기록한”증서(책)”을 말하며, 십계명은 두개의 “돌비” 에 하나님께서 친히 새겨 주신 도덕률을 말한다. 그들은 십자가에 의해서 십계명이 폐하여졌다고 믿기 때문에, “구원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은 더 이상 순종하지 않아도 됩니다. 계명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는 것은 율법주의자들 입니다!”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율법을 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율법의 의미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나 십자가의 은혜는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인 십계명이 폐하여졌다고 믿는 그리스도인마다 불순종과 방종의 생활로 빠져 들어가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도덕률을 무시하는 생활을 삶으로써 그리스도인 신앙 생애의 가이드 라인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다니엘 9장에 나오는 70주일의 예언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는 시간에 대한 예언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A.D.27년 가을에 침례를 받으셨는데, 그 때로부터 3년 반이 지나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희생 제사가 끝나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예언이 25~27절에 기록되어 있다. A.D. 27년 가을로부터 정확하게 3년 반 후인 A.D. 31년 봄에 예수께서는 운명하셨다. 여기서 독자들에게 색다른 질문 한가지를 던지고자 한다. 유대인들의 절기 중에서 봄에 열리는 큰 절기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유월절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5:7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다. A.D. 31년 봄, 유월절 날, 너무나 정확한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 양이 되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는 대속의 희생을 치루셨던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예언인가! 하나님께서 선지자 다니엘을 통하여, 예수께서 이 땅에 태어나기 수백년 전부터 당신의 아들이 피흘리며 죽는 날짜까지 정확하게 예언해 두셨던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마다 엄숙한 마음으로 성경 말씀을 대하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당신의 이마와 얼굴은 가시관에 찔려서 흘러내리는 피로 얼룩졌는데, 바로 그 때 “(동물의 희생)제사와 예물” 을 드리는 제도와 예식이 폐지되었으며, 유대인들이 구약 시대 동안에 지켜왔던 성소와 관련된 행사인 절기나 월삭이나 절기 안식일이 폐지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의식이나 유대인들이 지키던 절기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대속 제물이 되실 것이라는 사실을 표상적으로 가르쳐 주는 그림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성소에서 거행된 모든 예식의 원형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어린 양으로서 죽으셨기 때문에, 구약 시대 동안에 이 놀라운 사건을 예표하는 그림자로서 사용되어 왔던 지상 성소 의식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던 것이다. “우리를 거스리고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 절기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니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로새서 2:14~16.


그러므로 메시야의 오심과 죽으심을 표상하였던 구약시대의 성소의 영적인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도덕률인 십계명을 폐하였다고 오해하게 된다. 십자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는 하나님께서 도덕률로 제정하신 십계명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계명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능력을 주는 원천이 된다. 또한 마지막 날에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기준으로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심판 받게 될 것이다.”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야고보서 2:10`12

2. 율법의 역사

아담과 하와는 창조함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의 법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저들은 율법의 요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그 교훈이 저희의 마음 속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인류를 위한 대속제물로서 바치는 구속의 계획을 수립하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 동물의 희생제도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이 범하여지지 않았더라면, 인류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구세주의 필요성도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희생제물을 드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아담은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쳤고, 율법은 계속되는 세대를 통해서 전달되었다. 그러나 인류를 위한 위대한 구속의 계획이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숫자는 극히 적었다. 범죄로 인하여 세상은 매우 극악하게 되었기 때문에, 세상을 홍수로서 다시 정결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홍수 후, 율법은 노아의 가족들에 의해서 보존되었다. 그러나 다시 인구가 증가하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삶을 살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에게 할례 의식을 주셨는데, 이것은 할례를 받는 자는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헌신한다는 서약의 표시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 역시 그 서약을 지키지 못한 결과, 결국에는 애굽에 종살이 하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동안,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지식을 많이 잃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애굽의 이교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셨을 때, 그분께서는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모든 백성들이 듣는 가운데 당신의 율법(십계명)을 친히 두개의 돌판에 새겨주심으로써 하나님의 법에 대한 지식을 그들에게 가르치셔야만 하셨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계명과 율법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하여 제정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이 아닌 우리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정말 그런가? 성경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기 훨씬 이전 즉, 야곱을 통해서 유대민족이 형성되기 훨씬 전에 이미 계명과 율법이 존재하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창세기 26:5. 이러한 사실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이 공포되기 이전의 장면에서도 재확인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출애굽기 16:4.


만일 아담이 받았고, 노아가 보존하였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율법이 계속해서 잘 지켜졌더라면, 할례 의식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만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할례로써 표를 삼은 언약을 잘 지켰더라면, 그들은 우상 숭배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며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새삼스럽게 시내산에서 율법을 선포하고 돌비에 새겨서 백성들에게 줄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모세에게 부가적인 내용이 담긴 의문의 율법을 기록하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의문의 율법을 주신 이유와 영원한 계명


49아담 때부터 시작된 동물의 희생제도는 그의 후손들에 의해서 크게 곡해되었다. 주변의 이방인들로부터 받아들인 미신, 우상 숭배, 방탕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지시하셨던 단순하고도 의미심장한 희생제도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소에서 유지되어야 할 예배 형식에 대한 완전한 지시를 주시게 되었고,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식 율법을 책에 기록하였다. 이 희생제도에 관한 의식 율법을 신약 성경에서는 의문의 율법(ceremonial law)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십자가에서 폐지된 율법은 바로 이 의식 율법을 뜻한다.


또 하나의 율법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두 돌판에 친히 기록하신 십계명인데, 이것은 성소의 두번째 칸인 지성소 안의 법궤 안에 거룩하게 보관되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도덕적 품성과 그분의 뜻이 기록되어 있는 도덕률(moral law) 이다. 이것은 총 10개의 계명으로 되어 있는데, 전반부에 있는 4계명에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사랑이 기록되어 있고, 후반부 6계명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도덕과 사랑이 기록되어 있다.


동물의 희생제도에 대해서 기록한 의문의 율법은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인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제사 제도의 목적과 그 완전한 의미가 실현될 때까지만 존재하도록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 더 이상 양을 잡아 죽이는 희생제도가 불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의문의 율법을 그리스도께서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셨다고 기록하였던 것이다(골로새서 2:14). 그러나 십계명의 율법에 대해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다고 기록하였고(시편 119:89),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고 선언하셨다(마태복음 5:17~18).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라고 말했던 것이다(로마서 7:12).


구세주의 죽음은 의문의 율법을 종식시켰지만, 도덕적 율법인 십계명에 대한 인류의 의무는 조금도 감소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인류에게 내려진 율법의 정죄를 속하기 위해서 하늘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만 했다는 사실은 율법의 요구와 그 권위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다. 비록 의문의 율법이 십자가에서 폐지되었다고 할지라도, 희생제도 속에 담겨진 귀중한 의미는 오늘날에 사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기별을 전하고 있는데, 바로 그것이 성소 기별이다.


3. 성경절로 확인하는 하늘 성소

하늘 성소는 지상 성소의 원형
1) 원형인 하늘 성소: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쫓아 지으라 하셨는니라” 히브리서 8:5b

2) 참 것인 하늘 성소: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찌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히 9:23,24

하늘 성소(첫째 칸)의 모습
1) 성소에서 봉사하시는 그리스도: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요한계시록 1:12~13.

2) 성소에서 중보하시는 그리스도: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니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요한계시록 8:3~4.


하늘 지성소(둘째 칸)의 모습
1) 요한이 본 언약궤:
“하늘에 있는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법궤)가 보이며” 요한계시록 11:19.

2) 요한이 본 하늘 지성소: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지성소)의 성전이 열리니” 요한계시록 15:5.
 

 

항상 침착하라


“네가 너희에게... 본을 보였노라” 요한복음 13:15

우리는 하늘에 가기 위하여 품성을 형성하고 있다. 어떤 품성도 시련과 고난을 통하지 않고서는 순결해질 수 없다. 우리는 시험을 받고 연단을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의 유일한 모본이시다.
그리스도는 인내와 관용과 온유와 겸손에 있어서 우리의 모본이시다.
그분께서는 경건치 않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시고 대항해서 싸우셨다.
그분께서는 비록 선행에 대한 보답으로 수치스러운 모욕을 받으셨을지라도, 정욕적이고 난폭한 말과 행동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고통과 냉대와 모욕을 당하셨지만 보복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자제와 품위와 위엄을 갖추셨다.
그분께서는 고통을 받으셨으나 잠잠하셨고 모욕에 대해서는 동정과 연민과 사랑을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그 모든 일에 있어서 그대의 구주를 본 받으라.
상황이 잘못 될 때에라도 흥분하지 말며 자아를 드러내지 않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사태가 바라는 대로 전개되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에는 자제력을 잃게 된다. 다른 사람이 잘못을 저지른다고 해서 그대가 잘못을 범해도 된다는 핑계는 있을 수 없다. 두사람의 잘못이 하나라도 올바른 것을 만들어 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이기셨던 것처럼 이기기 위하여 그대가 쟁취해야할 승리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불평하거나 불만을 토로하시지 않으셨으며 불쾌한 말이나 분노를 나타내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결코 낙담하거나 실망하지 않으셨으며 당황해 하거나 초조해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가장 극적인 상황이나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라도 인내하면서 평온을 유지하셨으며 침착하게 행동하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주위에서 어떤 소동이 일어 날지라도 품위와 여유를 잃지 않으시고 당신의 일을 수행하셨으며 다른 사람이 칭찬에 고무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폭력과 죄악과 흥분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태양이 구름 위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행동하셨다. 인간적인 정욕과 소요와 시련에 대처하여 그분께서는 의연하게 행동하셨다. 마라나타 255P

구원의 길 여신 주님


서정희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기 원했을 때
주님은 조용히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죄의 가시들로 덮여 뻗뻗이 마른 나를
“나는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고 새 생명, 새 빛 주기를 기뻐한단다.” 하시며
따뜻하게 안고 계셨습니다.

이기심의 가시,
무지의 가시,
교만의 가시,
거짓의 가시,
배반의 가시로
시기와 질투의 가시,
더러움의 가시가
나를 안고 계신 주님의 가슴과 손,
나를 아시고 이해하시는 그분의 이마,
그리고 나를 위해 먼저 걸어 가셨던 그분의 발을
깊이 깊이 찌르고 있건만 그분은 나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정녕
십자가의 못은 내가 박은 것이었습니다.

사랑의 침묵으로 눈 감으시면서
나를 위해 흘린
동정의 눈물과 뜨거운 피는
내 가시들을 덮어 주었고
나는 나의 가시들이 부끄러웠고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길 바랬습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내게 죄에서 돌아서야 함과
예수님만을 따라가고 싶은 소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죽어서도 나를 잊지 못해
삼일 만에 다시 일어나신 주님
하늘로 가셨던 이유는
내게 승리와 온전함 주시고자
그분의 피로 기도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나를 위한 끊이지 않는기도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그분을 따라가게 한 능력이였습니다.

이제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서신 예수님
펼쳐진 생명책 위에 내 이름 보시고
불려지는 내 이름 들으시고
“이는 나의 피로 죄사함 받고
기도와 말씀으로
나를 따라 온 충성된 종이오니
이를 당신의 자녀로 받아 주시옵소서.” 라고 탄원하시는 예수님 앞에
난 고개를 숙일 뿐입니다.

나 같은 자에게
희망과 생명주시고
하늘의 문을 열어주신 주님
보답할 길은
그분께서 인도하시는 길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며
그분을 닮는 길 밖에 없음을
성소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으로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