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죄인의 마음을 치료하는 방법


이 이야기는 우리의 가족과 이웃, 그리고 우리 모두의 마음을 치료하는 하나님의 처방서입니다.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분께서는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할 죄값에 따라서 우리를 취급하지 않으신다. 비록 우리의 죄는 정죄받기에 합당하지만, 그분의 마음에서는 우리를 향한 동정이 타오르고 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 우리의 냉담함과 고집을 여러 해 동안 참으셨다. 비록 우리의 심령이 완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있을지라도 그분의 팔은 여전히 우리를 향하여 뻗쳐 있다.

은혜는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인간에게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태도이다. 우리가 은혜를 찾는 것이 아니고, 은혜가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가 은혜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은혜를 주신는 것이 아니라, 전혀 가치가 없을지라도 우리에게 그분의 은혜가 필요되기 때문에 당신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해야만 하는 유일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그분의 자비가 크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깊은 인간의 불행의 심연까지라도 자비의 황금 줄을 내려보내서 죄로 병든 영혼을 끌어올리고자 하신다. 죄 많고 속절없는 영혼들, 사단의 간계와 사슬에 묶여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영혼들일지라도, 마치 목자가 양떼를 돌보는 것과 같은 주의 깊은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에서 행하셨던 모본은 시험당하는 자와 실수한 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신 것과 같은 친절과 인내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야 한다. 그분께서는“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13:34).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우리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이기심없는 사랑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우리의 동정과 도움이 필요되는 사람을 볼 경우, 우리는“그들은 도움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인가?”라고 묻는 대신에,“내가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유익이 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게 될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서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귀한 가치를 보고 계신다.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각 영혼들을 바라볼 때,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보시는 것처럼 동료 인간들을 볼 수 있게 된다.

타락함과 죄의 결과로 인하여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몰인정함이 어쩌면 우리에게 있는 가장 큰 죄일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던지는 우리의 거칠고 냉랭한 말투는 그들을 깊은 낙망의 늪으로 밀어 넣는다. 사람의 마음은 매우 미묘한 것이다. 오직 마음을 아시는 분만이 사람들을 어떻게 회개하도록 인도할 것인지 아신다. 오직 하나님의 지혜에 의지해야만 잃어버린 바된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키는 일에 있어서 성공할 수 있다. 그대는 엄격하고 완고한 마음으로“나는 너보다 거룩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의 이론이 아무리 정확하고, 그대의 말이 아무리 진실할지라도, 그와 같은 자세는 사람들의 마음을 결코 돌이킬 수 없다. 교훈과 논쟁이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할 때, 말과 행동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이 영혼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동정심을 나타내야만 한다. 이러한 동정심은, 우리에게 아무런 잘못을 범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이 아니라, 우리에게 죄를 짓고 괴로워하거나, 시험을 받아 낙심 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드러운 친절과 동정으로 당신께 나오라고 초청하신 사람들은 버림받은 사람들, 즉 세리들과 죄인들이었다. 그분께서 결코 호의를 보이실 수 없었던 사람들은 스스로의 자존심에 사로잡혀서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자들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사단이 멸망시키고자 애쓰는 영혼들을 위하여 확고한 목적과 끊임없는 관심과 불굴의 인내로 일해야 한다.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로마서 8:24). 가장 깊은 타락에 빠진 사람에게 일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존경심으로 대하셨다. 우리는 실수한 자들을 바라볼 때, 그들이 넘어졌다가 일어서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아야 하며, 낙담과 실망을 극복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모습을 보아야 하고, 동정과 도움을 갈망하는 눈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과거에 범했던 유사한 실수와 잘못들을 생각할 때, 비로서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동정할 수 있다.

잘못을 지적당하는 것은 언제나 굴욕적인 일이다. 부질없는 비난을 함으로써 상대방의 쓰라린 경험을 더욱 아프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비난은 사람을 회개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비난은 죄인의 마음에 오히려 반감을 갖게 만들며,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각성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부드러운 동정과 친절한 태도는 실수한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해 내고 많은 죄를 가리워 준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을 때, 그 사람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도록 주의 해야 된다. 무관심과 불신으로 그 사람을 낙심케 하지 말아야 한다. “그 사람이 끝까지 잘 해 나가는지를 지켜본 다음에 그를 신뢰하겠다”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흔히 그와 같은 불신이 시험받는 자를 더욱 큰 시험으로 몰고 간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없신여기느뇨.”,“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로마서 14:10,13).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책망해야 될 필요성을 깨달았을 경우, 먼저 우리가 잘못을 범한 사람을 진정으로 염려하는 친구라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교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기 앞서, 자신이 그러한 경고를 해야만 되는 이유를 열렬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는 실수해서 넘어진 사람이 다시 일어서려고 애쓸 때에 그들에게 격려와 동정을 나타내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는“내가 큰 환란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였다(고린도후서 2:4).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약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어두움의 권세자인 사단의 세력에 억눌려 있는 상태로부터 벗어날만한 도덕적 힘이 부족한 사람들이 통과하게 되는 경험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가장 비참한 것은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통과하는 터널과 같은 경험이다. 그는 아무 것도 분명하게 보거나 생각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 마음이 흐려져 있기 때문에 어디를 향하여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냉랭한 시선을 받으며, 이상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압도하는 고통과 번민 때문에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게 된다. 그의 마음 속에는 용서와 평안을 갈급하는 강력한 소원과 욕망이 꿈뜰거리지만, 아무도 그의 간절한 소원을 표현할 수 있는 여유를 베풀지 않기 때문에 잃어버린 어린 양이 되어서 방황하는 모습을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이 볼 수 있는가! 무엇이 그에게 가장 필요한 처방인가? 죗된 생애에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최선의 처방인가? 용기와 희망의 말을 해줌으로써, 그의 손이 구세주의 손을 붙잡을 수 있도록 해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시험받는 자의 처지에 놓은 다음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 사람이 유전적으로 타고난 기질, 성장 과정에서의 나쁜 교제와 악한 환경, 나쁜 습관의 영향력 등을 깊이 생각해 보라. 그와 같은 상황에서 그가 타락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는가? 연약하고 실수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노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사랑과 동정의 손길이 없이는 스스로 회복해서 일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이 자신의 부족함과 죄악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할 때, 그들 마음 속에 있는 한 줄기의 희망이 사라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들의 마음 속에 숭고하고 고상한 사상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대의 말과 행동과 생활을 통하여 부도덕과 순결함, 흑암과 빛의 차이점을 설명해 주라. 그대의 모본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보여 주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듣는 일에 지쳐 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성품과 생애를 보여 주라. 하나님의 은혜가 그대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말해 주어라. 냉랭함과 완고함과 조급함 대신에 동정과 친절과 넉넉함을 가지고 죄에 빠진 자들에게 접근해라. 그들의 어리석음은 성령의 역사 아래에서 사라질 것이며, 죄악의 사슬은 끊어질 것이다. 자신의 부도덕함을 수치스럽게 느낄 것이며, 이기적인 게으름은 극복될 것이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통하여 마음은 순결해지고, 정신은 보다 높고 고상하게 계발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죄악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치료하는 하나님의 처방이다.

 

 

승리의 비결


우리 모두는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승리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승리를 위한 참 비결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승리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림 설명(CD에서 100m 달리기 하는 모습): 우리 모두는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경주에 참여하고 있다. 이 경주에는 2등상이나 감투상이 없다. 오직 승리한 자와 완전한 패배자만이 있을 뿐이다.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까?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에서 성공을 위한 참 비결을 발견할 수 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마가복음 8:34.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의 본성의 요구에 대해서 끊임없이 거부하고 저항해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베드로전서 2:11. 본성의 요구에 대한 저항과 거부의 과정은 치열한 투쟁의 과정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은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과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자아(self)와의 싸움이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싸워야 할 대상을 분명하게 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시험과 유혹이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 우리의 육체는 즉시 그것에 대해서 발동한다. 육체의 본성은 항상 이기적이고 세속적이며 정욕적인 것을 요구한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이미 회개한 사람일지라도 타락한 본성을 자극하는 유혹에 의해서 고통을 받게 된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됨이니.”야고보서 1:14. 이 말씀은 우리의 죗된 본성이 유혹과 시험이 던져주는 매력에 이끌려 유혹당하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단은 남편, 아내 그리고 자녀들에게까지 각종 유혹의 덫을 던져 놓음으로써, 가정 전체를 자기의 소유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투쟁의 전쟁터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의 가정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리 모두는 먼저“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해야만 한다. “부인하다”라는 말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만두다, 허락하지 않다, 거절하다”로 설명되어 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성경절의 의미는 자기 속에 있는 본성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을 뜻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따르기로 선택한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권면을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그것은“자기를 부인하라”라는 말씀이 될 것이다. 우리의 뇌에는 어떤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의지”라고 부른다. 우리의 의지는 시험과 유혹을 받을 때마다, 본능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인지, 또는 거절할 것인지를 선택하게 된다. 거기에는 오직“예(Yes)”또는“아니오(No)”라는 대답만이 있을 뿐이다. 육체의 본능을 거절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통해서 그것이 가능하다는 진리를 믿는 사람들이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 4:13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선한 사람이 될 수 없지만, 우리 자신을 지배하는 주인을 스스로 선택할 수는 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로마서 6:16. 사단은 우리의 타락하고 죗된 본능을 자극함으로써 역사한다. 우리의 본능이 자극(유혹)을 받으면, 그것은 항상 어떤 것을 요구하게 된다. 바로 이때, 우리는 본능의 요구에 굴복할 것인지, 아니면 거절할 것인지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본능의 이기적이고 정욕적인 요구에 굴복하면 사단의 종이 되는 것이고, 거절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베드로후서 2:19.

만일 우리가 가정에서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고 싶으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돈을 생애의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돈을 위해서 우리의 생애를 바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의 원칙과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순히 그것을 거절할 수 있다. 아무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어떤 강요나 구속을 받지 않는다. 단지,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 속에 호소하심으로써, 우리를 시험과 유혹에서 건져내고자 하신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르면, 우리는 의의 종이 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단순한 가르침이다.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로마서6:16.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선택에 따라서 어떤 형태의 삶이든지 살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주셨다. 우리가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넓은 길을 걸으면서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만족을 취하면서 살아갈지라도, 어느 누구도 우리의 앞길을 막지 못한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의 양심 속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을 무시한채, 우리 자신의 죗된 본능이 요구하는대로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그러한 삶의 끝에는 하늘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길을 걸으면서도, 하늘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고, 하늘에 대한 설교를 들을 수 있으며, 기도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위선적인 행위들은 우리의 구원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조건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정말 그런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굴복되기만 하면, 우리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요구를 충족시키고도 남게 될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바라봄으로써, 우리가 진정으로 그분을 믿고 신뢰하는가에 달려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오직 두가지 길만이 놓여 있는데, 하나는 넓은 길이고 다른 하나는 좁은 길이다. 하나는 우리의 죗된 본성이 요구하는 대로 걸어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음성대로 걸어가는 길이다. 이 두가지 음성을 들으면서, 우리는 매일의 삶을 살게 된다. 어떤 음성에 굴복할 것인가? 마음 속1 에서 들리는 두가지 음성, 즉 그리스도의 음성과 육체의 음성은 서로 다른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양자택일의 음성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을 선택하도록 만든다. 결코 중간은 없다. 둘 중에 어느 하나를 받아들이면, 다른 하나는 자동적으로 거절하는 것이 된다. 지구 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와 사단 중 어느 한 존재의 지배를 받게 된다.

누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도록 허용할 것인가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은 우리에게 맡겨져 있다. 우리가 섬기기로 선택한 주인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스스로 선택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다음 세상 즉, 하늘 도성에 들어가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아!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가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경주에 참여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경주에는 2등상이나 감투상이 없다. 오직 승리한 자와 완전한 패배자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은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이 막연하고 불분명하게 보이지만, 결국에는 모든 것을 얻고 하늘에 올라가든지, 아니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영원한 사망에 처하게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각자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 중대한 경기가 얼마나 엄숙한 것인지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적다.

수많은 사람들이 승리하든지 패배하든지를 상관하지 않은채 맹목적으로 달려가고 있다. 경주의 승부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너무도 낮기 때문에, 경주 도중에 나타나는 사건과 사물에 너무나 많은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의 관심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애에 있어서 영원을 위한 경주는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최선을 신뢰하는 가운데 전진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날마다 전투의 최전방에 서게 된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대쟁투에서 어중간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사단의 음성에 따라서 춤을 추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음성에 따르기로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충동에 의해서 살아가든지, 원칙을 따라서 살아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누가 우리의 첫번째 애정과 사랑을 차지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우리 자신이나 세상인가?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오직 한 주인 즉,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만 굴복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 중에 으뜸이 되시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을 그분께 드릴 수 있을 만큼 그분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모든 유혹의 순간마다 자아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우리가 항상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회개하고 영적인 마음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만이 자신을 부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아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참된 거듭남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위로부터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음에 품는 자들만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질 수 있다. 또 한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의 거듭남은 날마다 새롭게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하였다. 사도 바울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날마다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간증을 하였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거듭난 마음을 소유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순종을 할 수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다는 결론을 스스로 내린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 말씀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하고 추상적인 것이 되고 만다. 그들은 사람이 위로부터 새롭게 거듭난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너희 가운데 이 마음을 품으라. 이는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말씀이 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된다(빌립보 2:5).

날마다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접촉없이는 어떤 누구도 사단의 유혹에서 승리할 수 없으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없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음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경고의 심각성을 이해하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리라.”마태복음 5:29. 죄와 유혹에 대항하여 싸워야 하는 우리의 자세를 이보다 더 엄숙한 말로 경고할 수 있을까? 오늘날 자신의 입장과 환경에 따라서 유혹과 죄에 타협하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신과 비교하면 얼마나 대조적인 말씀인가!

어떻게 하면 가정과 교회와 직장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먼저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품을 바라봄으로써, 그대 자신을 부인하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능력을 간구하라. 그 능력에 의지해서, 자신의 육체적 본능이 외치는 소리를 거절하고, 양심 속에서 울려나오는 조용한 그리스도의 음성에 자신을 굴복하라.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오직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한일서 3:7-9 

 

그대도 건강한 관절을 가질 수 있다!

켈빈 트레쉬 의사

관절염 환자에게 있어서, 가지과 식물(nightshades)과 관절염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관절염은 관절에 생기는 염증이나 퇴행성 질병(degenerative disease)이다.

관절염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골관절염, 류마티스성 관절염, 그리고 통풍(gout)인데, 그 종류에 따라서 치료법이 조금씩 다르므로 통풍과 류마티스성 관절염의 치료법은 다음 기회에 소개하고자 한다. (통풍이나 류마치스성 관절염에 대한 천연 치료법을 알기 원하는 분들은 생애의 빛으로 연락하시면, 치료법의 안내책자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관절염 치료법

1. 많은 관절염 환자들이 가지과 식물(가지, 토마토, 흰감자, 담배, 고추)을 섭취했을 경우,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는 의학계의 보고가 있다. 한 연구 보고서는 관절염 환자 중의 87%는 이와 같은 식물들을 섭취하지 않음으로써,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이 연구를 주도한 놀만 칠더스 박사는 말하기를, 관절염 환자는 식사를 매우 엄격하게 해야 하며, 단 한조각의 가지과 식물(가지, 토마토, 흰감자, 담배, 고추)이라도 치료 효과를 무산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하였다. 가게에서 파는 식품의 뒷면에“천연 향료”라고 쓰여 있는데, 이 중에는 가지과 식물이 그 원료로 사용된 것도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어떤 것들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알 수 없는 음식점의 음식이나 가공된 식품을 먹지 말고, 가정에서 단순하고 천연적으로 준비된 음식을 간단하게 섭취하는 것이다. 그 연구 보고서에서 칠더스 박사는 쵸코렛, 비타민 C 정제, 콜티손 이나 금주사(gold shots), 각종 차와 커피도 여러가지 문제들을 일으킨다고 말하였다.

2. 우유, 통밀, 계란, 옥수수, 돼지 고기 등은 관절염의 증세를 야기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브레닌멘 박사는 관절염 환자가 자신에게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식품을 섭취하였을 경우, 48-72시간 후에 관절의 통증을 가져온다고 발표하였다. 돼지 고기를 먹었을 경우, 섭취후 5일이 지나면 관절에 통증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관절의 통증이 늦게 나타나기 때문에 음식으로 인하여 통증이 생겼다는 사실을 깨닫기가 쉽지 않다.

특정 식품에 대한 관절의 알러지 반응으로 인하여, 관절 부위가 부종 수분(edema fluid)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부어 오르는데, 만일 문제를 일으키는 식품을 식별하지 못한 상태에서 계속해서 섭취하면, 관절 부위가 영구적으로 변형된다. 소금의 섭취량을 줄이면, 부풀어 오른 관절 부위를 가라앉힐 수 있으며, 관절부위의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다. 또한 술을 절대 삼가해야 하며, 어떤 종류나 형태의 알콜 성분도 관절염을 악화시킨다.

3. 하루에 12개의 신선한 피칸을 6주 동안 계속해서 먹으면, 어깨, 팔, 손의 관절염에 어느 정도의 유익을 얻을 수 있다.

4. 슬립핑 백에서 잠을 잘 경우, 아침에 손이 굳는 현상이나 통증이 경감될 수 있다.

5. 체중이 무거운면, 관절에 주는 압박이 증가된다. 체중을 평균치보다 아래로 조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6. 굳어진 관절부위에 뜨거운 물찜질을 하면, 아침에 관절의 부드러움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7. 면역 주사를 피해야 한다. 소녀나 젊은 여자가 풍진(rubella)의 백씬 주사를 맞을 경우, 종종 합병증이 생긴다. 또한 다른 종류의 면역 주사 역시 관절염에 영향을 미친다.

8. 동물 실험에서 동물성 고단백질의 식사는 관절염을 일으킬 수 있을 것으로 나타났다. 동물에게 고단백질의 음식을 일정 기간 동안 먹였더니, 관절이 부어오르고 움직임이 불편해지는 것을 발견하였다. 모든 종류의 동물성 식품을 엄격하게 삼가하라.

9. 치즈에 함유되어 있는 인돌과 스카돌 성분은 만성 관절염이나 관절 변형을 야기시킨다.

10. 냉온수욕은 관절염에 유익을 가져다 준다. 뜨거운 물과 찬 물을 각각 준비된 대야에 부은 다음, 통증이 있는 관절 부위를 뜨거운 물(화씨 110-115도)에 4분 동안 담그고, 찬 물(화씨 55-60도)에 45초 동안 담그는 일을 20-45분 동안 되풀이 한다. 이때 끓는 물과 찬물을 대야에 적당하게 부어서 찬물과 뜨거운 물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 관절염의 물찜질은 반드시 뜨거운 물로부터 시작해서 뜨거운 물로 끝나야 한다.

11. 심한 통증으로 인하여 관절 운동을 할 수 없는 환자들은 따뜻한 물(화씨 93-98도) 속에서 움직이는 운동을 할 수 있다.

12. 숯가루로 만든 반죽을 얇은 면으로 싸서 관절 부위에 붙이는 일을 주기적으로 되풀이 하면, 여러가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13. 파라핀(양초)를 불에 가한 다음, 녹여진 파라핀에 관절염 부위를 담그면 가장 효과적으로 통증 부위를 따뜻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14. 관절염에 유익한 약초: 데블스 클러(devils claw)

15. 관절을 적당하게 운동시키는 것은 관절염 치료에 매우 중요한 열쇠 역할을 한다. 하루에 두번씩 다음에 소개하는 운동을 부드럽고 천천히 시행하라. 관절의 운동량이 부족할 경우, 관절 부위를 점점 더 움직이기 힘들게 될 뿐 아니라, 관절 부위의 변형이 심해지며, 반대로 관절의 운동량이 너무 많을 경우에는, 관절염이 악화될 수 있다.

A. 손과 손목 운동

1) 주먹을 쥐었다가, 손가락을 완전히 펼치는 운동. 손가락을 완전히 펴기 어려우면,손바닥을 책상 위에 올려 놓고, 다른 손으로 손등을 수직 방향으로 누른다.
2) 각 손가락의 끝을 엄지 손가락의 끝에 차례로 갖다댄 다음, 둥근 원을 만들어 보라.
3) 손목을 앞으로 숙인 다음, 원을 그리면서 돌린다.

B. 팔꿈치 운동

1) 팔의 상박을 책상 위에 놓은 다음, 손바닥을 위로 향한 상태에서 팔꿈치를 굽혔다가 펴는 운동을 한다. 이때, 손가락으로 어깨를 닿을 때까지 구부렸다가 펴야 한다.

C. 어깨 운동

1) 의자에 똑바로 앉은 다음, 손바닥을 몸쪽으로 향하게 하여서 팔을 내려뜨린 상태에서, 팔을 앞으로, 뒤로, 옆으로 가능한 높이까지 들어 올린다.
2) 선자세에서, 상체를 마루 바닥과 평행하게 구부린 다음, 팔에 힘을 뺀 상태에서 팔을 원형으로 돌린다. 이때 적은 원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장 큰 원으로 팔을 돌린다.

D. 발목 운동

1) 발끝을 들어올렸다가, 내리고, 안쪽과 바깥쪽으로 움직인다.
2) 발끝을 원형으로 돌린다.

E. 무릅 운동

1) 딱딱한 마루 바닥에 누운 다음, 발을 들어 올려서 마치 자전거를 타는 것은 운동을 한다. 이때, 두 다리의 안쪽 근육이 부딪치면서 움직여야 한다.
2) 책상 위에 걸터 앉은 다음, 무릅을 구부렸다가 펴는 운동을 한다.

F. 엉덩이 운동

1) 마루 바닥에 누운 다음, 오른쪽 다리를 오른쪽으로 벌릴 수 있는 만큼 벌렸다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왼쪽 다리를 왼쪽으로 최대한으로 벌렸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운동을 반복한다.
2) 누운 자세에서 발을 들오 올렸다가 무릅을 많이 구부린다.
3) 엎드린 자세에서, 무릅을 편채 다리를 들어 올린다.

G. 목 운동

1) 어깨를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목을 굽혀서 머리를 원형으로 돌린다.
2) 누운 자세에서, 머리를 베개를 향하여 아래로 힘있게 누른다. 그 다음에 머리를 위로 들어 올린다.

H. 등 운동

1) 엎드린 자세에서, 엉덩이 근육에 힘을 준 상태로 몇 초동안 유지하였다가 힘을 풀어준다. 무릅을 핀 상태에서 다리를 위로 들어 올린다. 손을 엉덩이에 올려 놓은 다음, 머리와 어깨를 들어 올린 상태로 2-3초 동안 유지한다. 또 다리와 머리를 순간적으로 들어올린다. 손을 머리 뒤에 놓은 자세에서, 다리를 무릅을 핀 상태로 들어 올린다.
2) 바닥에 누운 자세에서, 엉덩이와 배에 힘을 주고 허리 부분을 바닥에 댄 상태를 유지한다. 무릅을 핀 상태로 다리를 각각 하나씩 들어 올렸다가 서서히 내린다. 두다리를 동시에 순간적으로 들어 올린다. 머리와 어깨를 들어 올렸다가 서서히내린다. 한쪽 다리를 들은 다음, 무릅 뒤로 두손을 깍지 낀 상태에서 허벅지를 힘껏 복부 부위로 끌어 당겼다가 놓는다. 동일한 과정으로 다른 한쪽 다리를 운동시킨 후, 두 다리를 동시에 복부로 끌어당기는 과정을 반복한다.

 

단백질,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낸시 리드셀

단백질을 숭배하는 현대인들이 너무나 많다. 좀더 많은 양의 단백질을 섭취함으로써 보다 강력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전설을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근육, 피부, 머리카락, 손톱, 엔자임, 눈, 홀몬, 이 모든 것들의 주요 성분이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다. 단백질은 몸안에 들어온 외적과 싸우는 항체를 형성하는데에도 필수적인 물질이며, 몸의 조직을 만들고 고치며, 어떤 기능을 유지하는데에도 꼭 있어야 한다. 단백질의 구성 인자인 아미노산의 적당한 균형은 체액(body fluid)과 소금의 균형, 산(acid-base)의 균형을 조절해주며, 필요로 하는 엔자임과 홀몬 그리고 헤모글로빈을 생성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단백질은 거의 모든 세포의 주성분이다. 단백질에 대해서 이러한 소개를 들으면, 단백질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단백질은 중요한가? 물론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도 너무 많으면 해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단백질, 생명체를 위한 건축 자재

단백질은 모든 사람들의 식사에서 빠져서는 않되는 아미노산이라고 불리우는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단백질은 수분 다음으로 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아미노산에는 23종류가 있는데, 그중에서 반 이상은 체내에서 스스로 만들어 지며, 나머지 8가지는 반드시 음식이 소화 흡수됨으로써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필수 아미노산이라고 불리워진다. 모든 음식 속에는 다양한 종류의 아미노산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8가지의 아미노산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식품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식품에는 몇가지를 포함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단순하게 준비된 음식을 일주일 동안 다양하게 섭취해야만 필요한 단백질을 모두 공급받을 수 있다.

단백질의 필요량

단백질의 필요량은 사람의 성장률에 따라서 달라진다. 신체의 성장은 항상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몸이 필요로 하는 단백질의 양도 계속적으로 증가되지 않는다. 사람은 태어나서 첫 일년동안 빨리 성장하다가 점차로 느려지며, 청소년기가 되면 다시 빠르게 성장한다. 이렇게 빨리 성장하는 시기에는 신체가 필요로 하는 단백질의 양도 증가된다. 성인이 되면, 단백질의 필요량도 감소되며, 기본적으로 신체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양만큼만 단백질을 공급하면 된다.

모든 동물은 각기 다른 성장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물의 젖에는 각기 다른 양의 단백질이 아래와 같이 함유되어 있다:

#. 사람은 생후 180일 동안에 체중이 두배로 증가된다.
#. 사람과 다른 포유동물과 비교하여 볼 때, 사람의 모유에는 가장 적은 양의 단백질이 포함되어 있다. 신생아가 먹는 모유의 단백질 함유율은 약 1.4%에 불과하다.
#. 말은 생후 첫 60일 동안에 무게가 두배로 증가된다.
#. 암말의 젖의 단백질 함유율은 약 2% 이다.
#. 고양이는 생후 7일 동안에 무게가 2배로 증가된다.
#. 고양이의 젖의 단백질 함유율은 약 9.5% 이다.

단백질의 필요량은 나이, 각 개인의 영양 상태, 스트레스와 건강 상태 등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얼마나 많은 단백질이 필요합니까?

단백질의 필요량(100g 이상)에 대한 기존의 상식은 너무나 오래된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재고되어야만 한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최근의 보고서에는 단백질의 섭취량이 섭취된 총칼로리의 10%정도 이어야 한다는 글이 발표되었다. 이것은 대략 40-60g 정도의 단백질을 의미한다. 다음에 나오는 챠트는 전형적인 서구식 식사 스타일에서 섭취되는 단백질의 양을 나타내고 있다.

아침식사 수량 단백질량((g)

계란 2개 12
우유 1컵 8
빵1조각 3
베이컨 3개 6

점심식사

소고기 패디 3 x 5/8인치 21
흰빵 1 4
치즈 1조각 6
커리즈 치즈 1컵 28
밀크세이크-바닐라 11
-------------------------------------------------------------------
단백질의 총섭취량 99그램

아침과 점심식사에서 이미 하루에 필요한 단백질의 양을 훨씬 초과하였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각종 간식과 가장 기름지고 많이 먹게 되는 저녁식사, 그리고 밤늦게까지 텔레비젼을 보면서 먹게 되는 밤참을 합치면, 단백질의 양은 엄청나게 필요량을 초과하게 된다. 음식을 엄격하게 조절하지 않을 경우, 단백질의 섭취량이 얼마나 쉽게 증가되어 나가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가?

초과된 단백질이 주는 피해
단백질을 계속해서 필요한 정도 이상으로 섭취할 경우, 우리 몸은 다음과 같이 엄청난 생리학적 피해를 보게 된다:

1. 초과로 섭취된 단백질은 간에서 BUN으로 전환되는데, 이것은 콩팥으로 하여금 수분을 몸밖으로 배출시키는 이뇨작용의 부담을 추가로 준다. 여분의 단백질의 대사과정에서 생성된 부산물을 배출시키는데에는 탄수화물이나 지방의 부산물보다 7배나 많은 수분이 요구된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고단백질 음식을 선호하는 사람의 콩팥이 더 빨리 파괴되는 경향이 있다.
2. 탈수 현상으로 인한 수분의 불균형 상태를 초래한다.
3. 비타민 B6의 필요량이 증대된다.
4. 신체 기관들이 과로하게 되어서, 생명이 단축된다.
5. 신체의 비만을 가져온다.
6. 심장 질환과 암의 가능성이 크게 증대된다.
7. 신체가 더 많은 양의 칼슘을 필요로 하게 된다.
8. 당뇨병의 발병률이 높아지고, 이미 발병한 당뇨병은 더욱 악화된다.

과도한 지방의 섭취는 대부분의 경우에 과도한 단백질의 섭취를 동반하게 되는데, 이것은 위암이나 장의 질병을 야기시킨다. 식생활은 반드시 절제와 균형의 원칙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고단백질 식사를 피해야하는 이유

인간의 몸은 생리학적으로나 해부학적으로 고단백질 식생활을 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일반적인 상식과는 위배되는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육식은 인간의 몸에 부적당한 것이다.

육식동물의 짧은 소화기관과 비교하여 볼 때, 인간의 소화기관은 대부분의 초식동물과 같이 매우 긴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육식동물의 소화기관은 고기를 짧은 시간 내에 처리하여 여러가지 부산물이 발생되지 않도록 만들어진 반면에, 인간의 소화기관은 음식물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소화기관을 통과함으로써, 영양분의 흡수를 극대화 할 수 있도록 디자인 되었다.

그러나 고기나 여분의 단백질이 소화기관 안에 오랜 시간 동안 머물러 있으면, 내장(colon)에 나쁜 박테리아가 번성하게 됨에 따라서 각종 질병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음식이 적당하게 소화되고 처리되지 않으면, 장에서 음식의 부패가 진행되게 된다. 과일이나 채소가 정상적으로 소화되고 장을 통과하는 시간은 약 10-15시간이다. 그러나 고기와 지방이 완전하게 장을 통과되는 시간은 36시간까지 걸린다. 육식가들에게 각종 소화기 질병이나 위암이 보다 쉽게 발병되는 이유가 이해되는가?


 

어떤 중풍병자 이야기


가버나움에 한 중풍병자가 있었다. 중병에 걸려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 중풍병자 역시 회복에 대한 모든 소망을 잃어버렸다.

그의 질병은 죄악적이고 부절제한 생애의 결과였다. 그러므로 그의 고통은 양심의 가책으로 인하여 더욱 심해졌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바리새인들과 의사들에게 호소하였으나, 모든 일이 허사였다. 의사들은 그의 병을 불치의 병이라고 선언하였으며, 바리새인들은 그를 죄인이라고 정죄하면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그가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 중풍병자는 깊은 절망의 늪에 빠졌다. 바로 그러한 때에 예수님의 치료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자기처럼 죄가 많고 속절없던 사람들도 고침을 받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누군가에 의해서 구세주께로 운반되어 갈 수만 있다면, 자기도 고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을 믿고 용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믿고 있듯이, 자신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칠 때마다, 모든 희망은 순식간에 사라지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치료에 대한 소망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 중풍병자의 가장 큰 소원은 죄의 짐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뵈옵고 용서의 보증과 하늘이 주는 화평을 얻고자 갈망하였다. 자신의 죄가 용서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병이 회복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든지 죽든지 그 결과를 받아들일 것이겠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소원은 육체적 질병의 치료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인 치료와 회복에 있어서 더욱 절실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더 이상 잃어버릴 시간이 없었다. 이미 쇠약해진 육체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친구들에게 자기를 침대에 누운채로 예수님께 운반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친구들은 그의 요청을 기꺼운 마음으로 들어주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구주께서 집회를 열고 있는 집의 안과 밖에 너무나 많은 군중들이 빽빽히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 환자와 친구들은 도무지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으며,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까지도 갈 수 없었다.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진정으로 그분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는 일에 방해를 받고 있다.

그 때,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집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주위의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고, 또한“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도 앉아 있었다(누가복음 5:17).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참소하기 위한 정탐꾼으로 온 자들이었다. 그들 외에도 혼잡한 군중, 열성 있는 자들, 오기심을 가진 자들, 믿지 않는 자들이 모여 있었다. “병을 고치는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누가복음 5:17. 생명의 하나님께서 군중들 가운데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은 그분의 임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아무런 부족함도 느끼지 못하였으므로 고침을 받는 일이 그들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누가복음 1:53. 스스로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접근할 여지가 없다.

중풍병자를 실은 침대를 들고서 군중들 사이를 뚫고 들어가려고 여러번 시도하였지만,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 병자는 말할 수 없는 고민의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처럼 갈망하던 희망이 바로 저기에 있는데, 어떻게 그 희망을 버리고 돌아설 수 있겠는가? 그의 마음 속에 모든 사람들의 상식과 생각을 초월한 부탁의 말을 친구들에게 하게 되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을 지붕 위로 운반하여 지붕을 뚫고 예수님께로 내려달라고 하였다.

중풍병자는 지붕 위로 올려지고, 지붕을 뚫은 구멍을 통과하여 예수님 발 아래에 놓여지게 되었다.

예수님의 설교는 중단되었다. 구주께서는 슬픔과 두려움에 잠긴 그 얼굴을 바라보시고 당신을 주목하고 있는 애원하는 눈을 바라보셨다. 그분께서는 무거운 짐에 눌려 있는 그 영혼의 갈망을 잘 아셨다. 그 중풍병자가 집에 누워 있었을 때, 그의 양심을 각성시켜서 죄를 깨닫게 하셨던 분은 그리스도셨다. 그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자신을 완전하게 고쳐주실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을 때, 구세주께서는 그의 심령에 복을 주셨다. 처음에는 희미한 믿음만이 그의 마음 속에 있었지만, 그 믿음은 성장하여서 예수께서 죄인을 도와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변화를 주시하셨다. 믿음은 그리스도 앞에 나아오고자 하는 그의 노력과 함께 더욱 강하게 자라났다. 예수께서는 그 병자의 귀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들리는 음악과 같은 음성으로“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9:2).

그는 죄의 짐이 자신의 영혼에서 벗겨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새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죄사함을 추상적이고 막연한 신비라고만 생각하는데, 용서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실제적인 변화를 창조해 낸다.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그분의 능력을 부인할 수 있는가? 희망이 절망을 대신하고, 즐거움이 우울한 마음을 대신하였다. 육체적 고통을 사라지고 온 몸은 변화되었다. 그는 더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은채 평화로운 침묵 속에 침상에 누워 있었다. 실로 오랜 세월만에 느껴본 평화와 기쁨의 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 이상한 사건을 하나 하나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역시 죄로 인하여 심령에 고통과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도 죄의 짐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였다. 죽음과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잃어버릴 것을 염려한 나머지,“참람되도다.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말하였다(마가복음 2:7). 예수님의 시선이 그들과 마추치자 그들은 그 시선을 피하여 움추렸다. 예수께서는“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하셨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중풍병자를 향하여“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9:4-6). 그러나 들것에 실려서 예수님께 왔던 그 사람은 젊음의 탄력과 힘을 가지고 자기 발로 일어섰다. 그는 즉시“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모두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마가복음 2:12.

그 썩어가는 육체에 건강을 회복시키는데는 바로 창조의 능력이 요구되었다. 땅의 흙으로 창조된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던 바로 그 음성이 죽어가는 중풍병자에게 생명이 회복되도록 말씀하셨다. 그리고 육체에 생명을 주신 바로 그 능력이 마음을 새롭게 하였다. 육체의 치료는 그리스도께서 마음도 새롭게 해주실 수 있다는 강력한 증거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명령하시고,“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중풍병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심령과 육체가 모두 치료된 것을 깨달았다. 그는 육체의 건강을 누리기 전에 심령이 먼저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체의 질병을 고치기 전에, 마음을 죄로부터 해방시키고 심령을 죄로부터 정결하게 하셨다. 오늘날, 질병의 치료를 받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들은 육체의 질병의 치료를 간구하기 전에 먼저 그들 마음 속에 있는 죄와 세속을 정결하게 해주실 것을 간구해야 한다. 자신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천년 전에 중풍병자가 들었던“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기별을 듣고자 갈망하는 병자들이 지금도 너무나 많이 있다. 불안하고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원인인 죄의 짐이 그들의 질병의 기초가 되고 있다. 그들은 심령을 치료해주시는 분 앞에 나오기 전까지 결코 안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오직 그분께서 주실 수 있는 화평과 평안만이 심령에 활력을 주고 육체에 건강을 줄 것이다.

고침을 받은 중풍병자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흘러나왔으며, 가볍고 활기찬 발걸음으로 군중 사이를 뚫고 지나갈 때, 사람들은 두려움과 경이로움이 가듣찬 얼굴로 그를 바라보면서“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고 조용히 속삭였다(누가복음 5:26). 하나님께서 그의 육체와 마음 속에서 행하신 기적으로 인하여, 그의 생애에는 더 이상 의심과 불신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분의 말씀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충성과 순종이 계속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고침을 받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자연스런 열매이다.

치료하는 금식

아가타 트레쉬 의사

금식은 질병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2-3일 동안의 단기 금식은 건강에 해롭지 않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다른 어떤 의학적인 치료보다도 유익한 결과를 가져온다.

금식을 할 경우, 일반적인 치료 방법들을 통해서는 도무지 얻을 수 없는 유익을 얻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금식에는 완전 금식(total fasting)과 부분 금식(partial fasting)이 있는데, 완전 금식은 물을 제외한 모든 종류의 음식을 금하는 것을 말하여, 부분 금식은 물 이외에 과일 이나 통밀 빵(현미밥)을 소량으로 섭취하는 금식을 의미한다. 금식을 하면서 마시는 물은 반드시 깨끗한 물이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물은 체내의 각 기관을 씻어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 충분한 휴식을 가져오는 금식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1. 금식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

위장: 금식은 우리 몸에 여러가지 유익을 가져오는데, 첫째로 과로한 위장에 휴식을 줄 수 있다. 소화성 위궤양 환자들에게 있어서, 금식은 최고의 치료법이 될 수 있다. 위산은 단백질 음식이 위장에 들어올 경우에 그 분비량이 증가되기 때문에, 금식을 하게 되면 염산의 분비량이 감소하게 된다. 소화성 위궤양 환자들이 금식을 할 경우, 금식 기간 동안에는 통증이나 배가 더부룩한 느낌과 같은 여러가지 현상들이 크게 줄어든다. 만일 위궤양 환자가 금식 중에 통증을 느끼면, 매 6분마다 뜨거운 물과 찬 물로 복부를 찜질하면 통증을 제어할 수 있다.

간: 간은 소화관으로부터 혈액 속으로 들어가는 모든 화학 물질들을 처리하고 독소들을 제거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간은 금식을 통하여 상태가 크게 호전될 수 있다. 소화기로부터 나온 모든 음식의 화학물질을 가득 함유하고 있는 혈액은 간세포를 통과하면서 모든 독소들이 제거되며, 혈액의 ph 수치가 조절되게 된다. 금식 기간 동안에 간은 혈액 중에 있는 독소를 제거할 수 있으며, 아울러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된다.

점막: 금식은 점막(mucus membranes)에 유익한 결과를 가져온다. 점막은 공기 중에 있는 어떤 물질이나 내막으로부터 분비되는 독소들에 의해서 자극받는다. 코의 내부에 있는 점막을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코의 내부에 있는 점막은 알러지성 물질의 침입에 의해서 자극을 받게 되는데, 하루나 이틀 동안의 금식을 통하여, 간은 혈액 중에 있는 점막을 자극하는 화학물질을 제거하며, 코에서 분비된 분비물에 잡힌 알러지성 물질을 중화시킬 수 있는 항체를 만들어 보냄으로써 점막을 보호한다.

관절: 하루나 이틀 동안의 금식을 통하여, 관절의 통증이나 불편함, 그리고 관절이 굳은 상태가 훨씬 좋아질 수 있다.

내장: 금식을 통하여 위장 뿐만 아니라 소, 대장을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내장 속에 오래된 배설물들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유익을 얻게 된다.

발열: 심각한 고열(severe fever)의 경우, 단기간의 금식은 열을 내려준다. 고열이 있는 경우에는 신체의 시스템이 연약해질 수 있을 정도로 장기간의 금식을 해서는 안된다. 만일 지나치게 오랜 기간동안 금식을 하게 되면, 음식을 요구하는 위장의 갈망은 오히려 체온을 올리기 때문에 적당한 양의 음식을 공급해 주어야 한다. 신선하게 준비된 적당 양의 음식은 고열을 다스리는데에 매우 효과적인 역할을 한다.

여러가지 질병: 부절제한 식생활에 의해서 생긴 여러가지 질병들이 금식을 통해서 치료될 수 있다. 정신 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물과 과일을 섭취하는 부분 금식은 육체와 정신에 매우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 짧은 기간동안 금식한 후에 매우 단순하게 준비된 음식을 소량 섭취하는 과정을 여러번 반복하는 것은 신체로 하여금 스스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준다. 1-2달 동안, 매우 절제하는 식생활을 시도해 본 후, 건강이 어떻게 증진되는가를 스스로 살펴보라. 일주일에 하루를 금식하는 것은 신체에 말할 수 없는 유익을 가져다 준다.

식욕: 금식은 식욕을 조절하기 위한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효과적이다. 금식 기간 동안에는 신체가 일종의 동면(hibernation) 상태에 들어가게 되며, 기초 대사율이 낮아지게 되기 때문에 체중이 크게 저하되지 않는다. 금식을 통하여, 비정상적인 식욕을 조절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식생활을 바꾸기 위한 준비 과정: 식생활을 완전 채식으로 바꾸거나 매우 단순하게 요리한 저염식으로 식생활을 바꾸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서 금식은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질병의 치료를 위하여, 매우 엄격하게 절제된 식생활로 전환하기 전에 1-2일 동안 금식하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방법이다. 자아 부인(self-denial)의 길이 건강의 길이라는 교훈을 이해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미각은 과다한 조미료, 과다한 기름, 과다한 설탕의 사용으로 비정상적으로 길들어져 있다. 짧은 기간 동안의 금식을 통하여, 단순하게 조리된 음식일지라도 만족하게 즐길 수 있는 입맛을 회복시킬 수 있다. 금식을 하면, 배가 매우 고프기 때문에 단순하고 천연적으로 요리된 음식일지라도 입맛을 충족시킬 수 있게 된다. 단순히 입맛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음식을 요리하면, 식욕을 비정상적으로 만들게 된다.

까다로운 식성을 가진 어린아이: 음식을 편식하거나 까다로운 식성을 가진 어린아이들은 필요하다면 3일까지 금식시킴으로써, 잘못된 식성을 올바로 교정할 수 있다. 배고픔은 단순하게 준비된 건강 음식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어린아이들의 식성을 변태적으로 까다로운 상태로 방치함으로써, 자녀의 신체를 쇠약하게 만들기 보다는 금식을 통하여 식욕과 입맛을 교정시켜주고, 균형있고 절제된 식생활을 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주의 사항: 금식을 할 경우에는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이 좋다. 특히, 금식을 마치고 정상적인 식사로 돌아오는 과정에 세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위장이 완전히 비어 있는 상태이므로, 매우 적은 양의 음식을 섭취해야 할 뿐 아니라, 매우 잘 씹혀진 음식물이 많은 양의 침과 함께 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또한 체중이 정상치보다 많이 미달되는 사람의 경우에는 금식이 바람직하지 않다.

2. 금식이 마음에 미치는 영향

영성: 신앙적인 열심이 사라지고 영적인 침체에 빠졌을 때, 금식을 통하여 도움을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금식은 도움을 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금식을 함으로써 마음과 정신이 맑아지고, 보다 예리한 판단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절제한 식생활을 함으로써, 영적인 안목을 잃어가고 있다. 비정상적인 식욕에 맞추어서 먹고 마심으로써, 신체는 그에 해당하는 댓가를 지불하게 되고, 정신은 점점 더 둔감하게 되며, 도덕적인 의지가 서서히 마비되게 된다. 기도와 금식과 올바른 생활 태도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운 성품과 생애를 유지해야 한다.

생애의 끝을 위한 준비: 그리스도인은 생애의 끝을 마치기 위한 준비로서 기도와 금식의 시간을 따로 떼어서 구분해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반드시 완전 금식을 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가장 단순하게 마련된 음식을 절제하여 먹는 부분 금식을 하는 것이 좋다. 물론, 금식 자체에는 아무런 공로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기도와 금식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생애의 마지막을 위한 가장 가치있는 준비가 되지 않겠는가!
현대인의 금식: 오늘날 현대인들을 위한 금식은 모든 자극적이고 건강에 해로운 식품을 삼가하고, 건강에 유익하고 단순한 음식을 적당하게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웹스터 영어사전에는 금식에 대한 정의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전혀 음식을 먹지 않거나, 또는 건강에 유익한 특정한 음식을 소량으로 섭취하는 것.”

성경이 말하는 금식의 정신: 성경은 금식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어떤 금식이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을 수 있는 금식인가? 이사야 58장에는 금식의 태도와 마음 자세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으며, 또한 외식적이고 형식적으로 금식을 하였던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 나온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는 참된 금식의 정신에는 쉼, 용서, 자비, 사랑이 포함되어 있다:“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굻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꺽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야 58:4-7

참된 금식의 뒤에는 육체적, 영적 치료가 따른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은 치료에 대한 약속을 우리 모두에게 보장하고 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을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과 같을 것이라.”이사야 58:10-11


 

Life Line


귀하의 자녀는 어떻습니까?

미국 고등학교 학생들의 흡연율이 1991년 당시 27.5%이었는데, 1995년에는 34.8%로 크게 증가되었다. 거의 모든 흡연가들이 18세가 되기 이전에 흡연을 시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2-15살의 어린 학생들이 담배를 구입하는 것이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담배 구입량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에 있다. 매일 약 3000명의 청소년들이 흡연을 시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뱀에게 물렸을 경우?

다음에 소개하는 내용은 미국 아리조나 주립대학의 럿셋 교수가 발표한 내용이다: 미국에서 매년 45,000명이 뱀에게 물리고 있는데, 그 중에서 약 8000명은 독사에게 물린 것으로 나타났다. 매년 약 20명이 뱀에게 물림으로써 사망하고 있다. 뱀에게 물림으로써 사망하는 사람들 중의 2/3는 방울뱀에 의한 희생자들이다.

뱀에게 물렸을 경우, 자신을 물은 뱀을 잡느라고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독사에게 물렸을 경우, 우선 물린 부위를 움직이지 말고, 심장보다 낮은 위치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발이나 다리에 물렸을 경우, 들것에 실려서 병원에 가는 것이 바랍직하다. 공포에 사로잡히지 말고, 침착하게 행동해야 한다. 만일 손이나 팔에 물렸을 경우, 반지와 같이 몸을 강하게 조이는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 가능하면 물린 부위를 빨리 비누와 물로 깨끗하게 씻은 다음, 숯가루를 붙여주고, 몸을 따뜻하게 유지해 주며, 안정을 취해야 한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병원에 가는 것이다.

상처부위에 얼음을 대지 말라. 오히려 독소가 더욱 깊어질 수 있으며, 오랜 시간 동안 얼음을 물린 부위에 놓아두면 조직이 상하게 될 수도 있다. 또한 피의 흐름을 막기 위해서 지혈기를 사용해서도 안된다. 이것으로 인하여 손이나 발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30분이내에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뱀에게 물린지 5분이 경과되지 않은 경우에만, 팔이나 다리 부위를 조여주는 조치가 필요하다. 물린 자국으로부터 5-7.5cm 위치에 조이는 밴드를 묶는데, 이때 손가락 두개가 밴드 밑으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탄력으로 묶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묶은 후에 상처 부위에서 혈압의 박동을 느낄 수 있어야 하며, 혈액이 여전히 순환되는지의 여부를 규칙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상처 부위를 칼로 찢고 독을 입으로 빨아내는 것은 수시간 안에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만 고려해야 한다. 이것 역시 뱀에게 물린지 5분이내에 취해져야 하며, 입안에 상처가 없어야 한다.

예방: 긴바지와 발목까지 올라오는 신발을 신을 것, 장작더미에서 장작을 집거나 모을 때에는 두꺼운 장갑을 낄 것, 바위나 쓰러진 나무를 뒤집어 엎을 때에 조심할 것, 어두운 곳이나 덤불 속으로 들어가지 말 것, 바위나 산을 오르기 위해서 손을 보이지 않는 곳에짚을 때에 조심할 것, 캠핑은 널찍하게 트인 장소에서 할 것, 절대로 어두운 밤에 장작을 모으지 말 것.

칼슘의 가장 안전한 공급처

브로컬리 6 온스에 200mg, 비트나 케일 1컵에 170mg의 칼슘이 포함되어 있다. 이외에도 짙한 녹색잎의 채소에는 풍부한 양의 칼슘이 들어 있다. 칼슘을 죽은 동물이나 생선의 뼈나 우유에서 찾지 말고, 가장 천연적이고 안전한 식품 속에서 찾으세요!

물고기도 위험하답니다.

환경 오염이 심각해짐에 따라서, 일반적으로 원해보다 근해에서 잡히는 물고기들에게서 더 많이 위험 독소들이 발견되고 있다. 또한 강이나 호수에서 잡히는 물고기에서도 많은 양의 위험 독소들이 발견되고 있다. 생선이 안전한 건강식품이라는 이야기도 이제는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도우넛을 조심하세요

일반적으로 도우넛은 동일한 무게의 잉글리쉬 머핀이나 비스켓에 비해서 12배나 많은 지방과 50% 이상의 칼로리를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의 용서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사야 59:1,2

1968년 12월 17일, 발바라 맥클과 그녀의 어머니는 플로리다를 향하여 여행하는 도중에 죠지아 주 아틀란트시에 있는 한 호텔에서 하루밤 묵기로 하고 여장을 풀었다. 새벽 4시 쯤 갑자기 문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깊은 잠에서 깬 발바라의 어머니가 문을 열려고 하자 딸이 말했다.“어머니 지금 새벽이예요! 아무에게나 문열어 주지 마셔요!” 그때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이 말하기를 자기는 경찰이고, 조금 전에 발바라의 남자 친구가 큰 자동차 사고가 났기 때문에 발바라를 데리고 빨리 병원에 가야 한다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어머니 거짓말이예요! 저 사람은 경찰이 아닌것 같아요! 문열어 주지 마세요!” 그러나 황급하게 말하는 사람의 말에 설득된 어머니는 문을 열어 주게 되었고, 그러자 밖에 서 있던 여자 복장을 한 두 남자는 그 어머니를 마취제로 기절 시킨후 발바라를 끌고서 새벽 어두움 속으로 사라졌다.

납치범들은 발바라의 입을 틀어막고서는 꽁꽁 묶어서 자동차 뒤 트렁크에 밀어쳐 넣고 죠지아에 있는 한 산등성이 언덕까지 차를 몰았다. 발바라는 플로리다에 살고있는 백만장자인 프랭크 맥클씨의 딸이었다. 범인들은 어떤 특정한 나무로부터 20발자국을 계산한 후에 그곳에 구덩이를 파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나무로 만든 관 속에다 그녀를 넣고는 물과 음식을 조금 주었고, 공기가 통하도록 하기 위해서 축전기로 움직이는 작은 선풍기를 달고, 그리고 약간의 온기와 빛을 제공하기 위한 등불을 달아주고는 땅속에 묻어버리고 말았다.

발바라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는 열린 무덤 속으로 내리워졌고, 나의 관 위로 흙을 퍼붓는 삽질 소리들을 들었습니다. 처음에 삽질하는 소리는 크게 들렸는데, 점점 소리가 희미해 지더군요. 나는 비명을 지르다가 가만히 귀를 기우려 무엇인가 소리를 들으려고 애썼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납치범들이 다 가버린 것 같았습니다.

나는 관 뚜껑을 밀쳐 내 보려고 있는 힘을 다하여 밀어 보았으나 헛수고 였습니다. 나는 광적으로 소리를 쳐 보았지만 아무런 응답도 없었고 죽음의 침묵을 느낄 뿐이었습니다. 나는 산채로 매장된 것이었어요!”

납치범들은 그녀의 아버지인 프랭크 맥클씨에게 한 신부를 통하여 접촉을 하였고 몸 값으로 백만불을 요구하였다. “당신의 딸은 무사합니다. 좀 불편하기는 해도 ... 충전된 선풍기와 등불은 48시간 정도 갈 것이오. 그 후에는 산소가 끊기어 질식하여 죽을 것이오. 만약 당신이 당신의 딸을 다시 보기를 원한다면 백만불을 몸값으로 내시오. 현금이 준비되는 대로 마이아미 비행장에 있는 라커 박스에 갖다놓고 신문에 이렇게 광고를 내시오. ‘사랑하는 이여, 오소서, 와서 X 박스에 있는 것을 가지고 나의 소중한 것을 돌려주시요’라고 ... 만일 경찰에 알리거나 돈을 놓아둔 장소를 감시하면 당신은 당신의 딸을 영원히 못보게 될 줄 아시오!”

아버지는 즉시로 돈을 은행에서 꺼내어 지정된 장소에 갖다 놓았고 범인들에게서 받은 은닉 장소를 그 당시 FBI 책임자였던 에드거 후버씨에게 알려주자 경찰들은 쏜살같이 달려가 납치범들이 말해준 그 나무밑의 땅을 파 헤쳤다. 나흘이 지난 후였기 때문에 그 딸이 살아있을지가 문제였다. 관 뚜껑을 열어젖힌 경찰관을 향하여 발바라는 이렇게 소리를 쳤다. “오! 당신은 내가 본 인간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 기쁜 소식이 아버지에게 알려졌고 그 딸은 플로리다 주까지 호송되었다. 아버지와 딸의 감격적인 재회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문밖을 달려 나와 얼싸안는 아버지와 눈물을 흘리며 사랑하는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딸의 모습을! 그 이후로부터 그 딸은 자기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백만불이라는 몸값이 그 아버지로 하여금 자기 딸을 더욱 사랑하도록 만들었는가? 아니면 그 백만불의 몸값은 딸에 대한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의 일부를 표현해 주는 것에 불과 했는가? 대답은 물론 후자이다. 그 치룬 몸값은 이미 아버지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던 딸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 주는 계기가 되어 준 것 뿐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귀하를 그렇게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만약 귀하가 그렇게 납치돼 있다면 당신을 위하여 그러한 몸값을 치루고라도 귀하를 도로 찾아줄 사람이 있는가? 무슨 희생을 치루고서라도 그대를 구해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무릅 쓸 그러한 친구를 그대는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 그대에게도 바로 그러한 귀한 친구 한 분이 계시다.

성경은 죄에 팔려 납치되어간 인간들을 다시 사기 위하여 엄청난 몸값을 치루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이야기로 그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베드로 전서 1:18,19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성경에서 “구속”(Redeem)이란 단어의 뜻은 “값을 치루고서 사거나 물러 주었다”는 뜻이다. 귀하는 자신이 값을 주고 구속된 사람이란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살고 있는가? 백만불이 아니라, 고귀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의 보혈로 그 값을 치룬 사실을 귀하는 얼마나 감사하며 살고 있는가? 귀하를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처럼 사랑하고 있는 한 분이 계시다. 귀하를 너무나 사랑하고 아끼시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바치시면서 까지 귀하를 구원하기 위한 값을 치루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은 죄가 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도저히 희망없이 죽어가고 있었다. 죄는 무서운 질병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면 그 율법은 인간에게 사망을 선고 한다. 불속에 들어 가면 죽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자연계의 법칙을 어겨도 사망이 이르러 온다. 하물며 이 우주를 평화와 질서 하에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명들을 어기고 반역하여 사는 죄인은, 자기 자신을 악하게 만들어 죽게 할 뿐더러 다른 생명체들에게도 지대한 해를 끼치게 되며 더 나아가서는 온 세상의 질서와 평화를 파괴시키는 악의 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귀하에게 말씀하고 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사야 59:1,2.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간단하게 하나님께서 당신과 인간 사이를 막고 있는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다시는 그러한 죄를 반복하지 아니할, 다시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지 아니할 사람들로 변화시켜 주시는 일 또한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에는 과거에 지은 죄들을 깨끗이 씻어 주시는 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러한 죄의 노예로 부터 해방되어 살 수 있게 하는 능력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인류가 범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해와의 눈을 쳐다 보시면서, 그들이 순종하기만 했더라면 누렸을 완전한 행복과 고귀한 생명의 완성을 보셨다. 또한 영원토록 계속되어졌을 성장과 즐거움을 보셨다. 그래서 범죄한 죄인이 그대로 희망없이 죽도록 내버려 두실 수가 없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아버지시기 때문이다. 어떠한 값을 치루어서라도 다시 두번째의 은혜의 기회를 주어서 진리를 발견하고 하나님께 나아와 용서 받고 영생을 얻을 기회를 주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해와에게 두번째의 기회를 주실 때에는 죄의 결과가 이 세상에 들어와 인류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게 되는 일을 동시에 허용하셔야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수많은 후손들 즉 귀하와 같은 인간들이 태어나 복음을 듣고 영생에 들어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해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죄의 결과인 고통과 슬픔이 지구를 휩쓸지라도 인류를 용서하시고 또 한번의 기회를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이번에 인류가 받은 두번째 기회는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에덴 동산 안에서가 아니라 죄로 물들여지고 타락한 이 세상 속에서 받게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인내하여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이해하고 받아드리면 다시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잠간 태어나 살게되는 유일한 이유는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발견케 하려 하심이”다 (사도행전 17:27).

귀하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귀하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치루신 엄청난 몸값에 대하여 깨닫게 되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발견하여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죄를 자복해야 한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살게 되어 있다. 십자가에는 용서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치료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향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라고 소리쳤던 것이다. 그 음성은 지금도 귀하의 고막을 울리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용서는 이미 마련되어 있다. 구원의 잔치가 이미 배설되어 있다. 당신은 어떠한 죄의 짐에 눌리어 낙담하여 있는가? 어떠한 죄책감에 휩싸여 자포자기한채 살아가고 있는가? 귀하는 어떠한 크고 작은 죄들의 노예가 되어 즐거움과 평화없이 매일매일 질질 끌려가면서 살고 있는가? 아직도 그대에게 희망이 있다. 십자가에서 베풀어진 큰 용서는 당신을 위한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리 강한 죄의 사슬도 끊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십자가로 나아 오시오! 하나님의 따뜻한 품으로! 귀하를 위하여 그렇게 큰 몸값을 치루어 주신 하늘 아버지께로!

 

나의 용서


한번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 하였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마태복음 18:21.

그때 예수님께서는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한 말씀은 그 당시 제자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사고 방식은 네번째는 용서해 주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유명한 랍비 호세벤하니나는 말하기를 “이웃에게 용서를 구하는 자는 세번이상 용서해 달라고 하지 말것이다. 네번째에는 용서해 주지 말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원칙을 구약 성경 아모스서에 그 근거를 두었는데,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그 이방 도시들에게 세번 경고 하신후 네번째 무시했을 경우에는 그들의 죄 때문에 심판하셨다는 기록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 랍비의 가르침보다 훨씬 더 너그럽게 일곱번까지 용서하겠다고 말하고는 칭찬을 기대하고 있다가, 오히려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들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말씀은 490번까지만 용서하라는 뜻이었을까? 물론 아니다. 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참으신 하나님의 무한한 인내와 용서를 상징하는 말씀이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은 신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신앙 사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으며, 더 나아가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까지 말씀하시었다 (마태복음 5:7; 6:14,15). 야고보는 말하기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라고 말씀하였다 (야고보서 2:13). 이러한 모든 말씀들을 미루어 보아 우리가 남을 용서해 주는지 또는 용서해 주지 않는지의 태도가 우리의 구원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실을 보게 된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의 용서의 태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구원의 관계에 있는지 없는지를 판가름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이며, 또한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인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 즉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를 나타내 주는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고 나면 용서의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예화를 읽어 보면 우리는 큰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게 된다. 함께 읽어 보도록 하자.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 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태복음 18:23-35

우리가 이 예화 가운데 나오는 돈의 수치를 계산하여 보면 그 의미가 훨씬 심각하게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다. 그 당시에 한 달란트는 한 젊은 사람이 받는 한달 봉급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현재 싯가로 약 1,500불 혹은 한화로 약 100만원 가량 된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용서 할 줄 모르는 그 종은 10,000 달란트 즉, 1,500만 달라의 빚을 임금에게 지고 있었다. 그 말은 다시 바꾸어 말해서 1,000년 동안 일을 해도 벌 수 없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그 당시 달란트란 금의 무게를 환산한 것이었는데, 10,000 달란트를 들고 가려면 8,600명의 장정이 한사람 당 30킬로 그램씩 들고 가야 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무게였다. 그 당시에 갈릴리 지방의 일년 예산이 약 600달란트가 고작이었다고 한다. 그 종은 이토록 엄청난 액수를 자기 임금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그는 자기와 자기 처자들을 모두 합하여 일평생 동안 종노릇해도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임금에게로 부터 용서를 받는 길 밖에 없었다. 그래서 왕은 그를 불쌍하게 여겨 그의 빚을 탕감해 주고 그를 용서해 주었다. 그 종은 자기의 빚의 크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참아 주시면 갚겠다고 말한 사실을 볼 수가 있다.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이 예화는 우리가 지은 죄는 하나님의 용서의 방법 밖에는 갚을 길이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에서 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아무리 우리가 많은 선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를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갚없이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행함과 태도 곧 우리의 성품이 우리의 구원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 빚졌던 종이 왕에게서 용서 받은 후에 자기가 남에게 행한 자기의 태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 사실을 우리는 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왕에게 큰 빚을 용서 받았다 하더라도 자기가 다른 형제에게 행한 자기의 행함이 잘못되었을 때에는 그 빚을 전혀 용서 받지 못한 것처럼 취급을 받고 형벌에 처하게 된 사실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용서의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의 삶의 태도가 우리의 구원의 운명을 결정지어 주는 것이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의 태도를 보라. 엄청난 용서를 받고 나오던 그 종이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을 빚진 형제를 만났다. 그 돈은 현 싯가로 약 20불쯤되는 액수였다. 누구든지 갚을 수 있는 적은 돈이었다. 그래서 그 빚진 형제가 조금만 참아 주면 갚겠다고 엎드리어 사정하였다. 그러자 용서 받은 종이, 지금 당장 갚으라고 어름장을 놓으며 그를 감옥 속에 쳐 넣고 말았다. 이 사실을 보고 있던 다른 종들이 임금에게 그 일을 고하게 되고, 급기야 노한 왕은 그를 다시 불러들여 빚에 대한 용서를 취소하고, 그를 감옥에 던져 넣어 심판하는 장면으로 그 이야기는 끝을 맺고 있다.

이 예화에서 우리가 짚고 지나가야 할 중요한 교훈이 있다. 내용을 잘 살펴 보면 왕이 그 신하를 정죄한 것이 아니다. 그 신하 자신의 태도와 성품이 자기 자신을 정죄한 것이다. 우리의 구원의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믿었을 때 이미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들을 용서 받았다. 우리는 도저히 죄 사함 받을 길이 없는 엄청난 죄들을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과 그 크신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용서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우리의 생애와 품성에 따라 우리는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무효화 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죄하신다기 보다는, 우리의 생애 자체가 “우리는 구원 받을 자격이 없다”고 우리 스스로를 정죄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용서는 용서 받는 죄인의 심령에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그 죄를 깊이 뉘우치고 후회하며 다시는 그러한 일을 행하지 않고 돌이켜서 반대 방향으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은 너무나 뜨거워서 인간 속에 있는 모든 죄들을 태워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의 마음을 녹여서 부드럽게 하고 새로운 심령을 갖도록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18장의 그 예화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 끝을 맺고 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렇게 하시리라.”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은 조건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드린 후에 나타나는 우리의 태도는 우리의 구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씀하였다(마태복음 16:27; 고린도 후서 5:10). 우리의 성품은 하나님의 용서를 올바로 받아 들였는지 아니했는지를 보여 주는 척도인 것이다.
그대는 가족들과 이웃들의 잘못과 죄를 중심으로 용서해 주고 있습니까?

 

회개로 가는 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는가? 죄인이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께 나갈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을 때에 해결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의는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깨달았을 경우, 그들은“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엄숙한 질문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베드로는“너희가 회개하여 ... 죄사함을 얻으라”고 대답한다(사도행전 2:38). 또한 동일한 질문에 대하여“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사도의 답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사도행전 3:19).

회개한다는 것은“죄를 슬프게 여기고 그 죄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죄가 얼마나 가증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는한, 우리는 결코 죄를 버릴 수 없다. 또한 죄로부터 결정적으로 돌아서기로 결심하기 전까지, 우리의 생애에 진정한 변화란 있을 수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참된 회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죄를 지은 것을 후회할 뿐이다. 그들이 범한 죄의 결과로 인하여 자신들이 받게 될 고난과 어려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비행을 고치고 잘못을 고백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가롯 유다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는 주님을 죽이고자 작정한 자들에게 그분을 팔아넘겼다. 그리고 그는“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부르짖었다(마태복음 27:4). 유다의 고백은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압도하였기 때문에 부르짖은 후회였다. 무죄한 하나님의 아들을 팔아서 죽게 한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진정으로 슬퍼하는 대신에, 엄청난 두려움에 압도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유다의 고백은 죄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와 후회였지, 자신이 범한 죄 자체를 진정으로 슬퍼하는 것이 아니었다.

참된 회개는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많은 사람들은 회개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선물로 준비되어 있는 것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스스로 먼저 회개하지 않으면 결코 예수님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회개가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길을 준비해 준다고 믿는다. 사람이 용서받기 전에 먼저 회개해야 한다는 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오직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뉘우치는 자만이 구세주의 필요를 느끼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회개는 억지로 쥐어 짜듯이 할 수 없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죄인의 마음에 역사해서 굳은 마음을 통회하는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일이 선제해야 한다. 그렇다면 죄인이 회개한 후에야 비로서 예수님께 나올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회개가 죄인과 구주를 막는 장애물이 되어야 하는가?

성경은 죄인이 예수님께 나오기 전에 먼저 회개해야 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의인과 악인 모두를 초청하고 계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로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깊이 명상하는 자마다 참된 회개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서 진정한 회개에 이를 수 있게 도와준다.

선을 향한 모든 옳은 욕망은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선천적으로 죄를 좋아하는 본성을 타고난 우리들로 하여금 죄를 증오하고 혐오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죗된 형편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고 계심을 알게 된다. 이러한 변화가 우리 마음 속에 생길 때에만, 우리는 진리와 순결함을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12:32). 우리가 갈보리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심을 이해하게 되며, 우리의 마음은 그분의 사랑에 의해서 감동받고 우리가 범한 죄를 슬퍼하게 된다.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이끄시기 위해서 역사하시고 계신다. 때때로 구세주를 모르는 죄인들도 자신의 죗된 생활을 부끄럽게 여기고 나쁜 습관을 어느 정도 버리려고 시도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실상 그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주역은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행복을 찾고자 세속적인 쾌락과 즐거움 속으로 들어가지만, 모든 것이 헛되다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 결국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가치와 평안을 갈망하게 되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마음 속에 불러 일으키시는 선한 욕망이다.

성령의 이끄심을 거절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수는 교만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부족과 죗됨을 깨닫지 못하는 것만큼 영적으로 위험한 것은 없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자신의 이기적인 생애와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부족을 구체적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순결함은 우리의 생애가 부정하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다. 우리의 모든 오점과 약점을 밝히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생애는 우리의 모든 이기적이고 악한 욕망과 불성실함과 더러운 말을 정확하게 지적해 준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기심과 자아를 사랑하는 마음을 혐오할 수 있게 되며, 그리스도의 순결한 품성을 사모하게 된다.

사람들은 술주정뱅이를 싫어하고 그런 사람은 하늘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교만과 이기심과 탐심에 대해서는 그러한 말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큰 죄를 범한 사람은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그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가 자신에게 크게 필요됨을 느낀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아무런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교만은 죄인의 마음 문을 굳게 닫음으로써 그리스도를 거절하게 만드는 무서운 질병이다. 자신의 생애를 그리스도의 생애와 비교하지 않는 사람마다 교만이라는 질병으로 죽어가게 된다.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신앙이 깊지 않은 사람들은 연약하며,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르키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자기 자신을 변명한다. “나도 그들만큼은 선하답니다. 그들은 나보다 착하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쾌락을 사랑하고 세상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들과 나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과 약점을 찾은 다음에, 그것을 핑계로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을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을 우리 모두의 모본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흠없는 하나님의 아들만이 우리 모두의 모본이 될 수 있다.

죄를 죄로 깨달았을 경우, 즉시로 죄를 버려야 한다. 죄로부터 돌아서는 일을 뒤로 미루지 말라.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실수를 범해왔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실수 때문에 그들 자신의 영생을 잃어 버렸다. 지상에서의 생명은 확실한 보장이 없는 것이다. 성령의 음성에 복종하기를 지체하고 죄악 속에 살기를 선택하는 일에는 무서운 위험이 따른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을 지체하는 것은 영생이 걸린 도박을 자처하는 것이다. 죄가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마음 속에 머물러 있게 해서는 않된다. 우리가 죄를 정복하지 않으면, 결국에 가서는 죄가 우리를 정복하고 멸망시킬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서 먹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그러한 행동이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죄의 결과가 자신들에게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불순종은 그들을 하나님과 분리시켰으며, 슬픔과 죽음이 세상에 들어오게 만들었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온 세상은 죄로 인하여 고통당해 왔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것 때문에 갈보리에서 돌아가셨던 것이다. 죄를 결코 작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죄를 지을 때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돌아설 때마다, 마음은 점점 더 굳어진다. 우리의 마음이 죄로 인하여 굳어지면, 우리는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께 즐겨 순종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의 영께 우리의 마음 전체를 펼치지 못하게 만든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악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원할 때에는 언제든지 마음을 돌이켜서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날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은 그분의 음성을 듣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사단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하나님께로 신속하게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일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 일단 범한 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그 결과를 남긴다. 죄는 죄를 범한 자의 욕망과 습관을 바꾸어 놓으며, 그들이 품성을 꼴짓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경고를 들어보라.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잠언 5:22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놓으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길을 강요하지는 않으신다.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짓기로 선택할 수도 있으며,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은혜를 받지 않기로 선택하고 결정한다면,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분은 우리의 소원을 아시며,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신다. 우리는 죄로 더러워진 그대로 그분께 나아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 앞에 우리 자신을 펼쳐 놓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정직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이 일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엄숙하게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과 경고는 그분의 영원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단은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가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우리를 낙망시키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구세주의 선하심과 자비를 바라보면서 소망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큰 죄인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심으로서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자신의 죄를 가장 크게 생각하고 가장 깊이 느끼는 자들 일수록, 하나님의 용서의 필요성을 깊이 깨닫게 된다. 가장 많이 용서받은 자들이 가장 많이 그분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위대한 희생에 대하여 진정으로 찬양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깨닫게 되면, 우리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사실을 깊이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마다 죄로부터 결정적으로 돌아서게 될 것이다. 멸망의 계곡으로 한없이 떨어지려는 우리들의 손을 붙잡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얼마나 멀리까지 손을 뻗으셨는가를 깨닫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의 실체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진정으로 죄를 슬퍼하게 될 것이며, 죄를 혐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버리게 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향한 감사와 사랑의 정신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부터 피어오르게 될 것이다.

이 글은 Peace Above The Storm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사막의 하나님

나는 타는 듯한 모래밭을 걸으면서 오아시스를 찾고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오셔서 그곳으로 안내해 주시마 했을 때,
나는 “나도 지도를 가지고 있답니다.”라고 대답했다.
인기척 소리에 뒤를 돌아볼 때마다 그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목이 갈하여 샘을 찾아 헤맬 때
“그대가 이 물을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텐데.”라는
음성을 들을 수 있었지만, 나는 나의 길을 고집하였다.

마침내, 계곡 아래에서 물을 찾았지만,
그 물에는 무서운 독소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주변에 앙상한 흰 뼈들이 널려 있었다.

너무나 지쳐서 쓰러져 누워 있었는데,
“그늘이 필요하지?”라는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 편히 잘 쉬고 있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나는 그 말이 공허한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몸을 뒤척이던 나는 갑자기 뛰어 일어나서
저기 지평선 끝을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눈앞에 잡힐 듯이 오아시스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피곤하고 지쳐있던 나의 얼굴에 승리의 표정이 나타났다.
“그곳이 아니다!”라는 강한 음성에 놀라서 뒤를 보았더니
아직도 하나님이 내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제발, 나를 내버려 두세요. 내가 원하던 것을 찾았단 말예요!”
나의 이러한 거절과 함께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듯하였다.

손을 뻗으면 곧 잡힐 듯한 곳에 오아시스가 있었다.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성공을 보여 주고 싶었다.

넘어지고 피 흘리며 올라간 언덕 위에는,
아뿔사! 그것은 신기루가 아닌가!
 
이윽고 짙은 밤이 몰려왔고 목마르고 피 흘리며 지친 상태로 쓰러져 눕게 되었다.
밤의 사막은 몹시 추웠다.

다리를 웅크리고 두 손을 다리 사이에 넣은 채,
길고 추운 밤에 절망의 눈물을 흘리면서 잠이 들었다.

포근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떠서 앞을 보니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그 너머에 하나님께서 앉아 계신 것이 아닌가!

새롭게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 아래서 우리는 함께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