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4종류의 사람들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온 세상 사람들을 4부류로 나누어서 설명하셨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1)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2)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3)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4)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마태복음 13:3-7.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이 4부류 중 어느 하나에 속하게 된다. 다음에 소개하는 4부류의 사람들에 관한 그리스도의 설명을 읽으면서, 우리 자신들이 각각 어떤 부류에 속해 있는가를 확인해 보도록 하자.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씨가 뿌려진 땅의 상태가 씨의 발아와 성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설명하는 이야기이다.

1. 길가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비유를 설명하셨다. “그런즉 씨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18-19절. 길 가에 뿌려진 씨는 부주의한 자의 마음에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낸다. 사람들의 발걸음이나 마차의 바퀴에 의해서 단단해진 길처럼, 그들의 마음은 세상의 장사, 쾌락,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으로 굳어져 있다. 영적인 기능이 마비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의 참 의미와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다. 자신들의 부족과 위험을 깨닫지 못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기별이 자신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마치 새가 길 가에 뿌려진 씨를 재빠르게 먹어 없애는 것처럼, 사단도 마음이 강팍한 사람들의 마음에 떨어진 진리의 씨를 뽑아가기 위해서 항상 노리고 있다.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까지 무관심 했던 자에게 깨달음을 일으키고, 완고했던 마음에 영향을 줄 것을 두려워 한다. 그는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서 최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2. 돌밭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란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20-21절. 돌밭에 뿌린 씨는 흙이 깊지 못한 곳에 떨어졌다. 싹이 나기는 하지만 그 뿌리가 돌을 뚫고 들어가 필요한 양분을 섭취할 수 없으므로 얼마 안가서 말라 죽는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타고난 이기심이 땅 속에 돌처럼 깔려 있기 때문에 저희의 선한 소망과 포부가 깊이 자리를 잡지 못한다. 즉,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런 사람들은 죄가 얼마나 무섭고 흉악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며,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이 겸손하지 못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쉽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앞으로 유망한 신자가 될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믿음은 피상적이고 막연한 것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린다.

돌밭에 뿌려진 씨의 비유에 의해서 상징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즉시로 받아 들이지만, 그 말씀이 요구하는 댓가와 희생에 대해서는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어떠한 변화를 요구하는가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생애의 전반에 걸친 습관과 견해를 하나님의 말씀과 대조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생애를 온전히 지배하도록 맡기지 않는다. 돌밭의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에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한 행실과 순간적인 선한 생각에 의존하여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에 힘입어서 굳세고 강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는 비법을 발견하지 못한 자들이다. 돌밭의 사람들은“그 속에 뿌리가 없”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뿌리가 깊지 못한 곡식은 뜨거운 여름의 태양열을 견디지 못한고 시들어서 죽는다. 이와 마찬가지로,“뿌리가 없”는 자는“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 곧 넘어진다.” 생활이 순조롭고 모든 일이 잘 되어 나갈 때에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희가 풀무불과 같은 고난과 시련을 만날 때에는 넘어져 버리고 만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이 생애 속에 있는 어떤 죄를 지적하든지, 또는 극기와 희생을 요구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피해서 도망갈 길을 찾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저희 생애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할 때, 그들은 당장 앞에 있는 불편과 시련에 압도되어서 영원한 보상을 그들의 시야에서 잃어버린다. 그들은 예수를 떠나갔던 제자들처럼“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선한 행위는 성령의 깊은 감동하심에 의한 것이 아니며, 인간적인 기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구세주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성품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이기심과 결점으로 얼룩져 있다. 때때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개선하려고 하지만, 저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지경에까지 나가지 않는다. 자신들의 죄를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인정하지만, 죄를 구체적으로 구별하여 버리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의 참 뜻을 이해하는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3.

3.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와 같은 사람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22절. 복음의 씨는 가시떨기와 잡초 속에 떨어질 수도 있다. 사람들의 마음에 도덕적인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옛 습관과 죗된 행위를 버리지 않으면, 씨의 발아는 저지되며 결국 가시밭 속에서 말라죽게 된다. 귀한 진리를 받기 위해서 항상 준비된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만이 믿음과 신앙이 성장하며 성품이 변화될 수 있다. 죄의 가시떨기는 어떤 땅에서도 자란다. 가시떨기 나무는 특별히 가꾸어 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유익한 열매를 맺는 곡식은 잘 가꾸지 않으면 안된다. 찔레와 가시나무는 언제나 빨리 자라나므로 제초하는 일이 항상 계속되어야 한다. 만일 마음을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주관 하에 맡기지 않는다면, 옛 습관이 생애 가운데 자연히 나타나게 될 것이다. 복음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복음에 의해서 변화된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들이 믿는다고 공언하는 것은 허탄한 것이 된다. 생활의 염려와 재물에 대한 욕심은 영적 씨의 성장을 막는 요소들이다.

“재리의 유혹”이라는 말의 의미는 재물에 대한 사랑 때문에 기만당할 수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흔히, 재물은 그리스도인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대신에 세상의 쾌락으로 인도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4. 좋은 땅에 뿌린 씨와 같은 사람들:

씨뿌리는 자가 언제나 실망만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옥토에 떨어진 씨는“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즉,“좋은 땅에 뿌렸다는 것은 착하고 어진 마음으로써 말씀을 듣고 지키며 인내로 결실하는 자들이라.” 여기서 착한 마음이라는 것은 성령께서 마음을 찌를 때, 이에 순복하는 자를 말하는데, 이러한 자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절실하게 필요로 느끼게 된다. 또한 옥토로 묘사된 좋은 마음은 믿는 마음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었을 때, 깊은 깨달음을 얻는 자들을 가리킨다. 진리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척 하거나 무시하면서 귀를 막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리가 들어갈 수 없다.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는 자들이다.

진리에 대한 지식은 두뇌의 우수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순결한 양심과 진실된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천사들이 찾아오게 될 것이며, 성령의 지도하심을 통하여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순종을 통하여 결실을 맺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때로 사람의 전통과 습관, 그리고 지식에 상반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자들은 자기 앞에 제시된 모든 말씀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잘못된 습관과 지식과 견해를 하나님의 진리 아래로 굴복시킬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인내로서 열매를 맺게 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시험과 역경이 왔을 때에 오히려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그들은 인내와 투쟁을 통해서 더욱 고결한 영적 경험을 얻게 된다. 믿음과 온유와 사랑의 열매는 흔히 풍파와 역경 가운데서 잘 결실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면, 그분의 성품이 우리의 성품 가운데서 재현될 것이며, 그 결과로서 우리는“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나 되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시골 생활과 그리스도인 가정


오늘날, 현대 사회는 급속한 속도로 부패되어 가고 있다. 도시에 있는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교사들이 1940년대와 1980년에 직면했던 문제들의 순위를 비교해 보면, 도덕의 타락이 얼마나 심각하게 급진전 되었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1940년대: 1) 잡담, 2) 공부시간에 껌 씹는 것, 3) 떠드는 것, 4) 복도에서 뛰는 것, 5) 새치기, 6) 쓰레기통에 휴지를 버리지 않는 것.
1980년대: 1) 마약 복용, 2) 음주, 3) 임신, 4) 자살, 5) 강간, 6) 강도, 7) 폭행.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우리가 사는 장소는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인 면에 있어서 매우 깊은 영향을 미치는가?” 일반적인 상식과 우리의 피부로 느끼는 현실과 성경의 교훈을 근거로 해서 볼 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그렇다(Yes)”이다.

만일 도시 환경이 우리 모두의 건강을 위해서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면, 왜 수 많은 사람들이 주말과 휴가 때마다 도시를 벗어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는가? 나는 글레이셜 국립 공원이 보이는 몬타나 주의 북서부에 살고 있는데, 작년 한해 동안에 약 250만명의 관광객들이 야생 동물과 수정같이 맑은 호수, 그리고 눈덮힌 산봉우리를 보면서 도시 생활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국립 공원을 찾아왔다. 오늘날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도시 생활 속에서 고요함과 평화스러움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계속되는 스트레스, 긴장, 피곤, 종종 걸음, 경쟁 등과 같은 죽음의 그림자들을 잠시나마 피하기 위한 장소를 찾아 방황하고 있다.

만일 도시인들이 도시의 혼잡함과 경쟁으로부터 몸을 빼내어서 한적한 시골에 그들의 피난처와 휴식처를 마련한다면,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얼마나 놀라운 유익을 얻을 수 있을까? 아마 약간의 나무가 있는 땅과 조그만 농토, 그리고 자유롭게 호흡할 수 있는 공간은 그들의 마음과 영혼을 자유롭게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한 곳에서 부모들은 도시의 악한 영향과 죄악들로부터 자녀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다. 자연의 신비와 웅장한 천연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창조와 능력을 보고 만질 수 있는 곳이야말로 부모와 자녀들에게 있어서 가장 바람직한 교육 장소가 아니겠는가? 시골에서 자녀들은 부도덕한 유혹으로부터 보호받게 되며, 가치있는 인생을 위해서 스스로를 준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너무도 적은 그리스도인들만이 자신과 자녀들에게 미치는 도시의 악한 영향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도시의 구석 구석마다 악한 광경과 악한 소리가 점령하고 있으며, 관능과 유흥으로 손짓하는 유혹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날마다 수많은 살인과 강도와 강간 사건들이 신문을 뒤덮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도시의 죄악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면, 양심과 도덕관에 이미 심각한 마비 증세가 왔기 때문일 것이다.

도시의 골목마다 돈에 대한 격렬한 욕망의 샘이 흐르고 있으며, 흥분과 쾌락의 회오리 바람이 몰아치고 있고, 사치와 낭비에 대한 과시가 솟구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모든 것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인생의 참된 목적으로부터 순간적이고 아무런 소망이 없는 곳으로 돌리도록 만들고 있다. 이러한 환경 하에서는, 부모와 자녀가 모두 저항할 수 없는 세력에 굴복할 수 밖에 없다.

요즈음, 국민학교 미술 시간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부모의 얼굴을 그려보라고 하면, 남자만 둘 그리거나 여자만 둘 그리는 학생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상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날마다 유행처럼 번지는 동성연애자들이 이제는 아이들까지 입양하여서 정상적인 부모 행세를 할 뿐 아니라, 입양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학교에 보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국에 있는 수많은 학교 선생님들이 자신의 자녀들은 학교에 보내지 않고 가정에서 공부시키고 있다는 보고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도시를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는 말이 점점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 때가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도시 가운데서 그물에 잡힌 꽁치처럼 뭉쳐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아름다운 자연과 천연적인 소리가 들리는 장소를 가정의 터전으로 제공해 주셨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그러한 장소에서 가정을 복음으로 아름답게 꼴지워 가기를 바라고 계신다.

몇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나와 아내에게 시골로 이주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셨다. 우리 앞에 시골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즉시 열리지 않았지만, 실망하지 않고 기다리면서 준비하였다. 하나님께서 적당한 기회를 주시자, 우리 부부는 매우 유망한 직장과 사업체를 정리하고, 몬타나 주의 시골로 이주하였다. 나는 곧 멸망이 임하는 소돔성을 급히 빠져나가는 롯을 생각하게 되었다. 롯이 머뭇거리면서 죄악의 도시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지연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었다. 롯의 아내는 소돔의 향락과 편리함을 그리워 하면서, 뒤를 돌아보는 순간에 소금 기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다음과 같은 의미 깊은 경고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누가복음 17:32, 영문 성경

나는 가족의 건강과 행복과 구원을 위해서 시골로 이주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시골에서 우리 가족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다시 소생되는 기적을 경험하였다. 아이들은 우리 부부의 말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신속하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으며, 참된 인생의 행복과 가치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다. 물론 우리 가정의 수입이 줄어들었지만, 우리는 가족들이 함께 채소밭을 가꾸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 부부는 더 나은 것을 위해서 좋은 직장과 높은 수입을 포기하기로 결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결심과 계획에 축복해 주셨다. 우리 부부는 거의 잃어버릴뻔 했던 자녀들을 다시 찾게 되었으며, 허물어져 가던 건강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 부부를 그들이 가진 최고의 친구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부모인 우리가 내린 결단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다.

다시 소돔에 살았던 롯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소돔이라는 도시의 극에 달한 도덕적 부패는 롯의 가정을 몰락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소돔성이 죄악의 잔을 채우자, 하나님께서는 그 도시를 멸망시킬 수 밖에 없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도시에 있는 롯과 그의 가정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천사들을 소돔에 보내셨다. 롯은 그의 딸들에게 다음과 같이 탄원하였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창세기 19:14. 소돔성을 떠나야 한다는 롯의 호소에 대해서 자녀들은 조소와 빈정거리는 태도를 나타내었다. 그들은 소돔의 악함 속에서 사는 동안, 악에 대해서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다.

오늘날 현대 도시에서 그대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돈과 재물과 명예와 세속적인 만족과 건강의 파괴 이외에 무엇이 있는가? 가족의 구원과 진정한 행복, 그리고 가치있고 보람된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도시를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나의 이러한 정직한 제의를 지나치게 극단적이고, 현실을 무시한 이상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을 양심적으로 직시하여 보라. 과연 누가 오늘날의 도시가 진실한 그리스도인 가정을 위한 최적의 장소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단순한 마음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마다 나의 제의를 엄숙한 마음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롯은 죄악의 도시 소돔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하였지만, 롯의 전도 활동은 철저하게 실패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소돔이 롯의 가족들에게 압도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소돔은 롯의 아내와 자녀들의 도덕적 감각을 마비시켰다. 너무 늦기 전에, 자녀 교육과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조용한 시골을 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 롯은 가족들을 소돔의 죄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손들은 후에 우상숭배자들인 모압족과 암몬족을 이루게 되었다.

그대가 도시에 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혹시, 돈, 세속적인 안락함, 자녀들에 대한 이기적인 기대와 같은 것들이 그대가 도시의 복잡함 속에 살고 있는 이유가 아닌가? 시골의 고요한 아침이 그대를 부르고 있다. 숲속에서 퍼져나오는 푸룻한 풀냄새에 그대의 머리를 씻어 볼 생각은 없는가? 그대를 향한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은 그대의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완전하게 치료하는 것이다.

지금, 가족들의 손을 잡고“한적한 시골”을 찾아서 떠나지 않으려는가?

간염을 잡아라!

아가타 트레쉬 의사

간암의 70%가 B형 간염으로부터 진행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40대 이상의 한국 남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질병 중의 하나는 간염과 간암이라고 말해도 과언을 아닐 것입니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간염 바이러스는 간암을 발전시키는 가장 유력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간암은 한국인에게 발생되는 암 종류 중에서 11%를 차지하는데, 이것은 위암, 폐암에 이어 세번째이지만, 사망률로서는 폐암을 제치고 2위를 차지하는 매우 치명적인 질병입니다. 한국의 경우 대개 40대 초반부터 간암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40대 중년 남자의 간암 발병률이 세계 1위라는 수치스러운 기록을 가지고 있다. 생애의 빛에서는 이번에 간염의 치료와 간의 관리법에 대한 특별한 건강 정보를 준비하였다. 편집실

간염이란 간에 생긴 염증을 말하는데, 바이러스, 박테리아, 또는 어떤 독소에 의해서 발병될 수 있다. 여기서는 주로 바이러스에 의해서 발병되는 바이러스성 간염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바이러스성 간염은 주로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지는데, 하나는 A형 간염이고, 다른 하나는 B형 간염이다. A형 간염은 오염된 물, 우유, 그리고 음식 등을 통하여 전염되며, 대개 15-45일의 잠복 기간을 가지고 있다. 간염은 증세가 나타나기 바로 직전에 가장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요식업계 종사자나 음식물을 다루는 사람을 통하여 전염되기 쉽다. 일반적으로 황달 증세(피부과 눈이 노랗게 됨)가 나타난 7-9일 후에는 바이러스가 사라져 버리게 된다. 동물들을 통하여 바이러스를 받을 수 있으며, 조개도 바이러스를 운반하는 매체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A형 간염은 4주 이내에 회복이 된다.

B형 간염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는데, 특히 인구 밀도가 높고 위생 관념이 낮은 지역에서 매우 많이 발병되는 질병이다. B형 간염은 28-160일(2-6달)의 잠복 기간을 가지고 있으며, 회복하는데에 6달 정도의 기간이 소요된다. B형 간염은 주로 혈액을 통하여 전달되지만,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모유, 정액, 가래 등을 통해서도 바이러스가 전염될 수 있다. 감염된 주사 바늘이나 주사기와 같은 의료 기구를 통하여 바이러스가 전염되며, 키스와 성적인 접촉에 의해서도 전염될 수 있다. 또한 한약방의 침을 통해서 바이러스가 전염된 사례도 있다. 특히, 동성끼리 성교를 하는 동성연애자들에게 있어서, 간염은 높은 전염률을 나타내고 있다. 신장의 기능이 파손되어서 혈액으로 투석하는 환자들이나 수혈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간염이 높은 발병률을 나타내고 있다. 만성적인 감염은 간경화로 발전되어서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될 수 있는데, 특히 B형 간염의 경우 위험도가 매우 높다.

간염의 증세로는 황달, 피로, 식욕부진 및 헛배가 부름, 두통, 신경과민, 관절 경직, 구토, 위장의 통증, 설사 또는 변비, 근육통, 고열 등이 있으며, 피부가 가렵거나 발진될 수도 있다. 가려움은 피부 밑에 담즙산염(bile salts)이 축적되어서 생기는 증세이다. 황달이나 피부가 노랗게 되는 현상은 눈과 점막부에 먼저 나타난다. 소변으로 배출되는 빌리루빈으로 인하여 소변 색깔이 진하게 될 수 있으며, 대변이 담즙색소의 결핍으로 인하여 진흙 색깔로 변할 수 있다. 간이 크기가 커지며 민감해진다.

매해 미국에서 간염으로 보고되는 환자들의 숫자가 4만내지 7만인데, 자신이 간염환자인지 모른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들을 합하면 이 숫자의 약 10배 이상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어린아이들과 청년들에게 있어서도 간염이 무섭게 파고들고 있다.

최근에 들어서, A형 간염은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지만, B형 간염은 주사바늘로 마약을 주입하는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크게 늘어나고 있다.

간염 치료법

1.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대부분의 간염은 그 자체에 제한성이 있어서, 충분한 휴식과 보조적인 치료를 통하여 완쾌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환자가 침대에 편히 누워서 쉬는 것이 간염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생각되었지만, 연구 결과에 의하면 급성이 아닐 경우에는 활발한 운동도 해롭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많은 현대 의학자들은, 간염 환자들이 느끼는 피로감이 환자의 운동량을 자연스럽게 제한하기 때문에 피로를 피하는 선에서 운동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장기간 동안, 침대에서 휴식만을 취하는 것은 그 자체가 오히려 신체를 쇠약하게 만든다.

2. 많은 경우에 있어서, 간염 환자들은 식욕을 잃어버리게 되며, 심지어는 음식의 냄새에도 메스꺼움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환자들은 적절한 영양을 섭취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간염 환자들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식욕을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으므로, 매우 신선한 영양이 담긴 아침 식사를 섭취해야 한다. 과다한 지방이 함유된 식품을 피하고, 술과 담배를 절대 삼가해야 한다. 지방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식이 요법(oil-free diet)이 간염 환자에게 권장할만 하다.

3. 대장 내의 대변이 원할하게 빠져나가지 못하여 축적되면, 혈액 속으로 암모니아와 같은 폐기물들이 더 많이 들어 가게 되기 때문에, 간이 처리해야 할 독소들이 늘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변비는 방지되어야만 한다.

4. 환자는 콩팥 내의 독소들을 씻어내기 위해서 많은 양의 물을 마셔야만 한다.

5. 환자는 자주 목욕을 해야 하며, 화장실에서 대변을 본 후에는 반드시 비누와 따뜻한 물로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환자는 가족들이나 다른 사람들과 다른 분리된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사용 후에 좌변기의 앉는 자리를 깨끗이 씻어주어야 한다.

6. 환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식사를 준비하거나 요리를 해서는 않되며, 부엌에 들어가서도 않된다. 가능하면, 환자는 일회용 식기를 사용해야만 하는데, 만일 사정이 허락되지 않을 경우에는, 환자의 식기는 다른 가족들의 식기들과 분리하여 씻어야 한다. 사용한 일회용 식기는 플라스틱 봉지에 밀봉하여 놓았다가, 폐기시켜야 한다.

7. 환자가 사용하는 의복과 천은 별도로 분리시켜 세탁해야 한다.

8. 간염 환자는 세척용 약품이나 용액에서 나오는 독한 증기를 피해야 한다.

9. 간에 부담을 주는 화학 의약품들을 최소한으로 삼가해야 한다. 간염과 싸울 수 있는 어떤 항생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에스트로겐을 함유하고 있는 피임약은 혈청의 빌리루빈 수치를 상승시키기 때문에 삼가해야 한다. 급성의 경우에 코르티코스테로이드를 먹을지라도 후에 다시 재발될 수 있으며, 특별한 효과를 기대할 수도 없다. 심지어는 아스피린도 간에 독소를 가져다 줌으로 삼가해야 한다.

10. 환자를 편히 눕힌 자세에서, 간이 있는 부위를 뜨거운 물에 적신 타월로 15분 동안 대주었다가, 곧 이어서 찬물에 적신 스펀지나 타월로 닦아주고, 다시 뜨거운 물로 간이 있는 위치를 찜질하는 것을 날마다 4회 반복할 것. 수치료를 끝마친 후에는 샤워로 몸을 씻어주고 신선한 옥외 공기가 통하는 조용한 곳에서 잠시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해야 치료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11.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에 들어가면0, 땀을 내면서 체온을 올릴 수 있는데,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신체가 가지고 있는 저항력이 간염 바이러스와 싸우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 환자는 견딜 수 있을 만큼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에서 체온이 화씨 102-104도 올라갈 때까지 앉아 있어야 한다. 일단 체온이 이 온도에 도달되면, 체온을 약 20분간 유지하기 위해서 물의 온도를 낮추어도 된다. 이러는 동안에 얼굴과 머리에 얼음 수건을 대주어야 하며, 땀을 통하여 잃어버린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서 환자가 많은 양의 물을 마시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20분 후에 찬 물로 샤워를 하고, 환자에게 면으로 만든 따뜻한 옷을 입힌 다음, 땀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침대에서 편히 쉬게 만든다. 이러한 수치료는 10-15일 동안 날마다 환자에게 줄 수 있지만, 어떤 환자들은 연일 계속되는 치료를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으므로 환자의 상태를 주의 깊이 살펴야 한다.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사람은 치료의 기적을 통하여 믿음을 얻고자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통하여 육체와 심령의 치료를 주고자 하신다.

동양에서 가장 무성운 질병으로 알려진 것 중의 하나는 문둥병이었다.

그 병의 불치성과 전염성, 그리고 감염자들에게 미치는 끔찍한 결과 등은 사람들에게 두려운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문둥병을 죄로 말미암아 받는 심판으로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문둥병을“재앙”이라고 불렀다. 그 병의 뿌리는 워낙 깊고 근절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치명적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문둥병을 죄의 상징으로 생각하였다.

모세가 기록한 의문의 율법에 따라서, 문둥병자는 친구와 친척들을 떠나서 그가 가진 질병의 저주를 감당하여야 하였다. 그는 자신이 문둥병이라는 재앙을 받은 사실을 공포해야 했으며, 옷을 찢고, 경고의 음성을 높임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조심하라고 알려주어야 하였다. 외롭게 추방된 자가“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치는 슬픈 목소리는 공포와 두려움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그리스도께서 봉사하시던 시대에는 문둥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분의 의료 사업에 대한 소식이 그들에게 전해지자, 마음 속에 믿음이 솟아나기 시작한 한 사람이 있었다. 유대 지방에 많은 문둥병자들이 있었지만, 믿음을 가지고 예수 앞으로 나온 사람은 극히 적었다. 그는 자신이 예수께로 갈수만 있다면,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예수님 앞으로 나갈 수 있을까? 영원히 격리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의 선고를 받은 그가 어떻게 치료자이신 예수께 자신의 몸을 보일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도 앞에 나갈 수 있다고 할지라도, 혹시 그분께서도 자신에게 저주를 선언하지는 않을까? 주님께서도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처럼 사람들이 사는 곳을 피해서 돌아가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실까? 오늘날에도 죄의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이 의심 때문에 예수 앞으로 담대하게 나가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부족과 죗됨을 깊이 느끼는 자마다, 구세주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는 자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하신 구원자로 바라보면서 그분께 나가야 된다.

마음 속에 의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여러가지 사실들이 생각났지만, 그는 지금까지 예수님에 대하여 들었던 모든 것들을 회상해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그분께 도움을 청했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도 그냥 돌아간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 가련한 사람은 구주를 찾고자 결심하게 되었다. 비록 마을과 격리되어 있을지라도, 산길을 따라서 오솔길을 여행하시는 예수님과 마주칠 수도 있으며, 마을 밖 조용한 곳에서 성경을 가르치시는 그분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희망이 그의 마음을 채우기 시작하였다.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이 있지만, 예수님을 만나는 것만이 그에게 유일한 소망이었다.

드디어, 그 문둥병자는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었다. 멀리 떨어져 서서 구주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말씀을 듣게 되었다. 그는 예수께서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시는 것을 보았다. 절름발이, 소경, 중풍병자, 그외 여러가지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일어나서 구원받은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믿음은 더욱 강해 졌다. 그는 군중들이 있는 곳으로 점점 가까이 접근해 갔다. 그는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규칙, 사람들의 시선, 모든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서 느끼는 혐오감과 거부감 등을 완전히 잊어 버린채, 자신도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아갔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께로 온전히 나가기 위해서, 자신을 얽매고 있는 사회적인 관습과 다른 사람들의 시선 등을 완전히 무시해야만 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너무나 적다.

그의 몰골은 몸서리칠만큼 보기 흉했다. 그 질병이 육신을 무섭게 잠식해 들어가는 모습은 보기만해도 끔찍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보자 뒤로 소스라치게 물러섰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그와 접촉하는 것을 피했기 때문에, 예수께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를 예수님께 접근하지 못하게 가로 막았지만,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자기를 경계하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을 보면서 그분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예수께 나아가 자기 몸을 그분의 발 앞에 던졌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고 부르짖었다. 예수께서는“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손을 그 사람 위에 얹으셨다(마태복음 8:2,3). 즉시로 그 문둥병자에게 변화가 생겼다. 그의 피는 정결해졌으며, 신경은 감각을 회복하였으며, 근육은 강건해졌다. 문둥병자의 특징인 부자연스럽게 희고 비늘 모양의 피부는 사라졌다. 그의 살은 젊음을 되찾았다.

만일 제사장들이 그 문둥병자가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사실을 알게 되면, 그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증오심 때문에 부정직한 판결을 내릴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공정한 판결을 받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고침을 받는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그 이적에 관한 소문이 퍼지기 전에 지체하지 말고 예물을 가지고 성전에 가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제사장은 예물을 받기 전에, 예물을 바친 자를 살펴보고 그가 완전하게 회복된 사실을 확인해야 하였다.

그는 전에 자기에게 추방을 선언하였던 제사장을 찾아가서 자신의 회복된 몸을 보였다. 그 제사장은 문둥병이 완전히 치유된 사실을 인정하였으며, 가정과 사회로 돌아갈 수 있음을 허락하였다. 그는 건강과 가정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았다. 그는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게 된 것을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께서 주의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완전한 치유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기를 완전하게 고쳐주신 분의 능력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 마음과 육체를 치료받은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증거이다.

성경에서 문둥병은 죄로 인하여 병들은 사람의 상태를 상징하는데 사용되였다. 죄의 문둥병, 곧 뿌리를 깊이 박고 있으며, 치명적인 죄의 문둥병에 대해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온 몸은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뿐이”로다(이사야 1:5-6). 그러나 예수의 임재는 죄인에게 치료의 능력이 될 수 있다. 누구든지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서,“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믿음으로 말할 때,“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는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의 문둥병에 대한 유일한 치료제이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마다 죗된 마음을 치료받고, 온유와 겸손과 정직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십자가를 믿는다고 공언하지만, 그 마음이 거룩하고 깨끗하게 치료받지 못했다면, 그는 아직 십자가를 바라보는 진짜 경험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죄인의 마음을 치료함으로써, 구원을 베푸신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께 간구한 축복을 즉시로 허락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문둥병자의 경우에는 즉시로 응답을 받았다. 우리가 세상에 속한 것들의 축복만을 위하여 기도할 때, 기도에 대한 응답은 지체될 수 있으며, 우리가 구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기도할 때는 그렇지 않다. 죄의 용서와 승리를 구하는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지체치 않고 응답하신다.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사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생애를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갈라디아 1:4). 우리가 하나님께 건강, 치료, 그외 어떤 것을 얻기 위하여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간구해야만 한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것을 얻은 줄로 또한 아느리라.”요한일서 5:14-15

예수께서는 근심이 있으며 마음이 괴로운 자들, 희망을 잃어버린 자들, 세속적인 쾌락으로 심령의 갈급함을 진정시키고자 애쓰는 자들을 지금도 초청하시고 계신다. 그분 안에 있는 치료와 쉼을 나누어 주시기 위하여 지금도 병들고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초청하신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시면 믿음을 갖겠다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치료 이전에 믿음을 요구하신다. 믿음으로 그분 앞에 부복하는 자마다 완전한 치료를 받게 될 것이다.


이 글은 the pathway to the health & happyness에서 발췌하였음.

롯의 처의 회상

데보라 밴스

“성경은 나를 롯의 처라고 소개하고 있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누가복음 17:32에 나오는“롯이 처를 기억하라(Remember Lot? wife)”는 말씀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여러분은“롯의 처”라고 표현된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지금부터 설명하는 나의 한맺힌 이야기를 듣고 나면, 어쩌면 여러분들 중에서 많은 분들이 여러분 자신과 나 사이에 많은 유사점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실, 소돔이 살기에 완전한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우리가 살던 정든 집이 있었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답니다. 사람들은‘롯의 처는 죄악의 도시 소돔을 사랑했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소돔의 죄악과 부패를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소돔에 있던 나의 가정을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소돔 전체를 사랑했던 것은 아니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싫어했던 것들이 소돔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실 겁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나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하기를 원한다면,‘롯의 처는 그녀의 가정을 사랑했을 뿐이야’라고 말해야 합니다.

“나는 이미 자리를 잘 잡은 안정된 가정을 사랑했을 뿐입니다. 집안을 깨끗하고 우아하게 꾸미기 위해서 쏟은 정성이 모든 세간살이와 부엌 살림의 구석 구석 새겨져 있었습니다. 매월마다 정기적으로 돈을 벌어올 수 있는 직장이 정해져 있었으며, 어디서 장을 보고, 어떤 친구들을 사귀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들이 매우 안정적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던 가정을 떠난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 가정의 질서와 안녕을 파괴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날, 소돔의 멸망에 대한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그것은 마치 모든 것들에 대한 종말을 선언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소돔이 재가 되어 버릴 것이야”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 말이 내게는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들렸습니다. 나는 소돔을 떠나서 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소돔은 나의 가정이며, 나의 생명이고, 나의 모든 것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남편과 우리를 데리러 온 남자들에게 밀려서 억지로 소돔을 빠져 나왔을 때, 내 마음 속에 있던 소돔의 세력들은 엄청난 힘으로 나를 압도했습니다. 소돔에 있는 나의 집으로부터 점점 멀리 떨어져 나왔을 때, 나의 마음은 공허와 아쉬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정들었고 행복했던 추억들이 한순간에 머리를 채웠습니다. 우리 가족들의 추억과 행복한 기억들이 뭍혀져 있던 가정을 떠난다는 것은 정말 죽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평범한 가정 주부였답니다. 나를 매우 악하고 세속적이며 물욕이 가득찬 여자로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내가 소돔을 빠져 나오면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소돔을 보았던 것이 아니라 소돔에 있는 정든 집을 보았던 것입니다.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키웠으며, 함께 식사하고 정다운 대화를 나누었던 집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내가 원했던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했던 것을 나 역시 원했을 뿐입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여러분처럼 나 역시 하늘을 원했습니다. “하늘을 원하는 소원이 롯의 처에게는 없었어”라는 말을 하지 말기 바랍니다. 나는 하늘을 원했고, 동시에 소돔에 있던 안정된 가정을 원했을 뿐 입니다.

여러분은 의아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롯의 처의 죄가 무엇입니까? 그녀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 소금 기둥으로 변하는 형벌을 받았단 말입니까?”라는 질문을 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나의 잘못은 내가 원하는 것들이 영원토록 계속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나는 안락한 가정에 새롭고 큰 변화가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새로 구운 빵이나 새로 산 옷, 새로 구입한 장농, 새로 나온 모델의 마차와 같은 것들은 좋아했지만,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는 새로운 사상, 새로운 생활, 새로운 견해, 새로운 삶의 터전 같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이 지금도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정체된 기념물인 소금 기둥으로 서있게 된 것입니다.

나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내가 배웠던 교훈은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때때로 변화를 위한 위대한 결심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시간과 기회가 주어졌을 때, 변화를 위한 결심을 뒤로 미루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매일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들은“롯의 처를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실패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을 너무 늦게 배우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앞에 놓여진 더 좋은 것을 위해서, 지금 손안에 쥐어져 있는 좋은 것을 버릴 줄 아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입니다.

또 한가지 덧붙여서 말하고 싶은 것은, 영원한 가정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현재 살고 있는 가정과 집을 언제라도 기꺼이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인생은 떠나는 사건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진리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오류를 떠나야 하고,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얻기 위해서는 바쁘고 이기적인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한답니다. 언젠가 여러분도 여러분이 가진 것으로부터 떠나라는 하늘의 요구를 받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면, 많은 것을 잃어버릴 것이지만,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매우 귀중한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양심 속에서 들려오는 하늘의 음성을 거절한다면, 여러분도 나처럼 생명이 없는 한 형체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나의 인생 전체를 잃어버린 후에 깨달은 교훈이 있는데, 그 교훈은 지금까지 성경을 통하여 전해져 내려오고 있답니다. 부디, 나를 기억하면서 이 교훈을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누가복음 17:32-33

말레이지아의 원숭이를 기억하세요!

말레이지아에서 원숭이를 포획하는 방법에는 매우 의미 깊은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사냥꾼은 손이 겨우 들어갈 만큼 목이 잘록한 병 속에 잘 익은 바나나를 넣은 다음, 그 병을 커다란 나무 기둥에 잘 묶어 둡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한마리의 원숭이가 찾아왔습니다. 원숭이는 조심스럽게 병을 들어 냄새를 맡고, 병 속을 들여다 보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듯이, 병 속으로 손을 넣어서 바나나를 꽉 붙잡습니다. 원숭이는 바나나를 잡은채 손을 빼려고 하지만 잘록한 병목에 걸려서 뺄 수가 없습니다. 팔을 흔들면서 힘을 다하여 손을 빼내려고 애를 쓰지만, 바나나를 붙잡고 있는한, 손은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숲 속에 숨어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사냥꾼은 얼굴에 여유있는 미소를 지면서, 병목에 걸려 있는 원숭이에게 걸어 갑니다. 원숭이는 놀라서 더욱 힘있게 손과 팔을 흔들면서 빠져 나오려고 하지만, 손목만 아플 뿐 별다른 효과가 없습니다. 그 맛있는 바나나를 놓으면, 쉽게 빠져나올 수 있으련만, 원숭이는 결코 바나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원숭이는 사냥꾼의 차에 실려서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손에 맛있는 바나나를 꼭 쥐고서 인생을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부디, 바나나를 놓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결국 여러분의 인생을 잘록한 병 안에 가두어 놓을 것이며, 그것에 의해서 인생 전체가 파멸되고 영원한 생명 또한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사냥꾼이 풀어 놓은 먹이에 정신이 팔려서 인생을 파멸로 이끌지 말기 바랍니다.

지금 즉시, 붙잡고 있는 것을 놓고 손을 빼세요! 말레이지아의 원숭이를 기억하세요!

 

Life Line


마이크로웨이브 테스트법

가정에 있는 유리잔이나 세라믹 접시를 마이크로웨이브에 넣어서 사용할 수 있는지를 검사해 보세요. 유리잔에는 반잔의 물을 넣고, 접시와 함께 마이크로웨이브에 넣은 다음 높은 온도에 맞춘 상태에서 1분간 가열하세요.

만일 접시가 뜨거워지면, 그것은 마이크로웨이브 용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접시나 유리잔이 미지근하면, 사용 가능하며, 온도 변화가 없이 그대로 차가우면 요리용으로 최적인 접시라고 판정해도 좋다. 접시의 온도가 접시에 담긴 음식물의 온도보다 높을 경우에는, 내부에 금속이 포함된 접시이므로 깨질 위험이 있다. Consummer? Report

컵라면,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컵라면은 일단 증기로 익혔다가 기름에 튀켜서 말린 국수이기 때문에, 라면 무게의 약 18%는 기름이 차지하게 된다. 라면의 튀김용으로 사용되는 기름은 주로 매우 높은 포화지방인 돼지 기름이나 야자 기름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라면을 바람직한 식품으로 볼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스프에 너무 많은 양의 소디움과 자극성 양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Berkeley Wellness Letter

크림 치즈에 들어 있는 지방의 양?

크림 치즈 무게의 33.3%는 지방이 차지하고 있다. 크림 치즈 100칼로리 중에서 90%는 지방에서 나오는 열량이다. 저지방식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이여, 크림 치즈를 피하라. Health & Healing

AIDS는 젊은이의 병?

미국에서 매해 새롭게 나타나는 에이즈 환자들 중의 약 10%는 50세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이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에이즈의 증세는 훨씬 오진되기 쉬운데, 그 이유는 의사들이 그러한 나이 또래의 사람들에게는 에이즈병이 많지 않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내리는 에이즈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도덕적이고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로 생애의 길을 바꾸는 것이다. Light for Life

에어백의 안전성과 위험성

에어백 덕분에 1995년 한 해에만 460명이라는 인명이 목숨을 건진 것으로 발표되었다. 또한 운전자의 치사율도 좌석벨트만 착용하였을 때보다 10%가량 저하되었다. 그래서 97년부터는 앞좌석 둘 모두에 에어백(dual air bag)을 설치하는 것이 법제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시 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 앞좌석에 키가 작은 어린아이들이나 노약자들이 앉는 것이 매우 위험하게 된다. 최근에 나온 미국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두얼 에어백이 장착된 자동차의 앞자리에 앉았던 26명의 어린아이들이 경미한 충돌시에 에어백이 발포됨으로써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19명의 어른들도 에어백으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NTSB

록 뮤직이 만든 새로운 질병?

록뮤직 음악회에 자주 가는 청소년들이 순간적으로 청력을 잃어버리고, 귀에서 이음이 들리는 록컨롤 병으로 고생하고 있다. 각종 전자 장치로 음악 소리를 극대화시키기 때문에 청각에 무리가 생긴 것으로 의사들은 판단하고 있다. 록뮤직 컨설트는 헤드폰으로 음악을 듣는 것보다 청각에 미치는 해가 훨씬 지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녀들이 아직도 부모의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 때, 록뮤직을 듣지 못하도록 제재하는 것이 어떨까? Audiology,1996

소금의 섭취량을 어떻게 조절할 수 있을까?

현대인들이 섭취하는 소디움(소금)의 75%는 소금을 직접적으로 섭취하기 보다는 정제된 가공식품과 패스트 푸드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얻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금의 섭취량을 줄이고 싶은가? 통조림과 가공식품류, 그리고 패스트 푸드를 피하라. Berkeley Wellness Letter


 

올리브, 최고의 천연 캡슐

버넬 발드윈 박사

올리브가 좋다는 이야기는 이곳 저곳에서 많이 들려오는데,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그리고 왜 좋은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이번 기회에 올리브에 대한 모든 것을 살펴보기로 하자.

올리브는 수천년 전부터 지중해 부근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성경이 기록된 시대에도 올리브와 올리브 기름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매우 필수적인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 한동안 올리브가 과학자들에게 관심을 모으지 못하고 있다가, 요즈음에 다시 올리브의 진가와 비밀에 대해서 연구하는 일이 활발해지고 있다.

올리브의 원산지라고 할 수 있는 남유럽의 지중해 연안 국가의 과학자들은 수십년 전부터 올리브가 혈관과 심장에 유익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왔다. 일반적으로 지방을 많이 섭취하는 사람일수록, 심장질환에 걸리는 확률이 높다. 유럽, 남미, 북미 등과 같이 육식을 많이 하는 세계의 사람들은 육식을 비교적 적게하는 아시아인들에 비해서 심장마비율이 매우 높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태리,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과 같이 지중해 연안 국가의 국민들은 그들이 다른 서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동물성 지방을 많이 섭취함에도 불구하고, 심장마비율과 혈관성 질환이 매우 낮다는 사실이 과학자들에게 포착되었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 내었다고 생각하는가?

혈압을 낮추어 주는 올리브

터프트 대학에서 발간하는 Diet & Nutrition Letter에 발표된 바와 같이, 올리브 기름은 혈압을 낮추어 준다. 심지어는 나이, 운동, 흡연, 스틀레스, 그리고 포화 지방과 단백질 등과 같은 요소들을 모두 고려한다고 할지라도, 올리브 기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혈압이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의 혈압보다 낮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혈압에 여러가지 종류의 지방이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기 위해서, 76명으로 구성된 30-35세의 남자 사무원들을 대상으로한 실험이 이루어졌다. 매우 세밀하게 실험을 분석한 결과, 올리브 기름에서 추출되는 올레인산(oleic acid)이 혈압을 낮추는 일과 관련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어떻게 이러한 결과가 나왔는가? 블랭캔 박사와 그의 동료 연구원들은 다양하게 식단을 바꾸어 가면서 혈관벽을 느슨하게 이완시키는 홀몬의 분비량을 조사하였다. PGI2 라고 불리우는 혈관 이완 홀몬이 어떤 경우에 가장 많이 분비되는지를 비교하기 위해서, 해바라기 기름, 콩기름, 돼지 기름 그리고 올리브 기름으로 각각 조리한 식사가 혈관 이완 홀몬의 분비량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였더니 올리브 기름을 사용하여 조리한 식단이 단연 우세한 결과를 가져왔다. 올리브 기름으로 조리한 식사를 하였을 경우, 다른 것에 비해서 2배 이상의 PGI2를 생산하였다.

결론적으로 올리브 기름은 혈관을 이완시켜줌으로써 혈압을 낮추어 주는 경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콜레스테롤을 낮추어 주는 올리브

네덜란드의 민신크 박사와 그의 동료들은 고탄수화물과 고섬유질과 올리브 기름으로 준비된 식사를 48명의 건강한 사람들에게 공급하여, 이것들이 콜레스테롤에 미치는 결과를 비교하는 실험을 하였다. 올리브 기름으로 준비된 식사를 하였던 그룹이 가장 낮은 콜레스테롤 숫치를 기록하였다.

American Journal of Clinical Nutrition 지에 소개된 실험을 살펴보자. 신진대사에 문제가 있는 사람 11명에게 올리브 기름으로 준비된 식사를 공급하였더니, 콜레스테롤 숫치가 약 10%가량 낮아졌다. 유해한 콜레스테롤인 LDL이 낮아졌으며, 유익을 주는 콜레스테롤인 HDL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실험에 참여했던 의학자들은 올리브 기름이 콜레스테롤의 균형을 유익한 방향으로 조절해준다는 사실에 동의하였다.

올리브가 가져오는 다른 유익들

가공 처리하지 않은 상태의 올리브에서 가장 많은 미네랄과 비타민을 얻을 수 있다. 올리브 나무는 곰팡이 균류와 염증을 치료하는“천연적인 항생제”를 생산해 낸다. 많은 화학자들은 올리브 기름에는 면역시스템의 역할을 도와줄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성분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러시아 해군의 훈련병들의 저항력에 문제가 생겼던 적이 있었는데, 올리브 기름을 섭취시켰더니 B-임파구와 효소 리스짐의 상태가 호전되었다. 또한 해바라기 기름은 T-임파구를 도와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리브에 대한 이러한 선구자적인 연구와 실험들이 계속해서 이루어짐으로써 올리브의 참 가치가 더욱 밝게 드러나야 한다.

올리브에는 항산화제가 함유되어 있다. 항산화제는 세포막의 수명과의 관련성으로 인하여 현대 의학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항산화제는 과산화수소로부터 세포가 손상되는 것을 방지해 주며, 양질의 지방을 불포화 상태로 유지시켜 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러한 항산화제의 기능 때문에 세포막이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위장을 치료하는 올리브

성인들에게 있어서, 올리브는 최고의 지방을 얻을 수 있는 원천이 되며, 소화 또한 너무나 쉽게 된다. 올리브에 함유되어 있는 지방은 산화되어도 해롭지 않으며, 체내에서 쉽게 유화될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한다. 위장에 염증이 있거나 심지어는 건강한 위장을 소유한 사람일지라도 식사 후에 올리브를 매우 잘 씹어서 먹음으로써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올리브는 위장의 염증이나 통증을 치료한다.

올리브가 위궤양의 치료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의학적 증거들이 있다. 또한 신선한 양배추 쥬스가 위궤양에 매우 유익한 결과를 가져온다. 스탠포드 대학의 챈니 박사는 소화성 위궤양 환자들에게 양배추 쥬스를 섭취시킨 결과 매우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발표하였다. 커다란 제약회사들이 이러한 연구 결과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려고 했지만, 올리브나 양배추를 캡슐로 만들었을 때에는 이미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천연적인 약효가 사라지게 된다. 건강은 돈이나 어려운 화학식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양배추 쥬스는 너무 빨리 위장을 빠져 나가지만, 올리브를 씹어서 먹으면 적당한 시간 동안 위장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더 많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대변을 부드럽게 해주는 올리브

올리브는 대변을 규칙적으로 나오게 해준다. 올리브는 대장을 부드럽게 자극함으로써 지나치게 단단하지 않는 대변을 장내에서 형성시켜준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올리브는 대변을 규칙적으로 나오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암과 올리브

유방암은 서구식 식사법이 들어가는 곳마다 재앙처럼 내려지고 있는 질병이다. 유방암이 초기에 발견되어서 치료받은 후 5년 동안 아무런 증세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유방암 수술을 받은 후 15년 후에 재발되었다는 보고가 있기 때문이다. 유방암과 식생활은 서로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다. 동물에게 여러가지 지방을 섭취시킨 결과, 올리브 기름을 섭취한 동물의 건강 상태가 가장 양호하였으며, 매우 많은 양의 옥수수 식용유와 해바라기 식용유를 섭취한 동물들에게서 암이 발생되었다는 실험 결과가 발표되었다. 소량의 옥수수 기름을 섭취한 동물에게서는 암세포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많은 양의 옥수수 기름을 섭취한 동물에게서는 암이 발병되었다. 이러한 결과를 분석해 볼 때, 어떤 일정한 양 이상의 지방을 섭취할 경우에 암이 발병될 수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올리브 기름을 섭취한 동물에게서는 유방암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다량의 옥수수 기름과 해바라기 기름을 섭취한 동물들은 결국 암으로 죽었다.

이외에도 각종 암과 올리브의 상관 관계를 증명하는 실험에서 올리브에서 추출되는 지방은 암을 유발시키는 성질이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오늘날 각종 식물성 기름과 동물성 기름, 그리고 생선에서 추출한 지방 등이 마켓에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올리브에 담겨 있는 지방이 가장 믿을만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올리브가 주는 유익들

1. 심장 질환이나 각종 혈관성 질병, 그리고 암의 발병률을 낮추어 준다.
2. 혈압을 낮추어 준다.
3. 콜레스테롤을 낮추어 준다.
4. 좋은 콜레스테롤인 HDL의 수치를 향상시키거나 유지시켜 준다.
5. 동물성 지방 대신에 올리브 기름을 사용할 경우, 대장암의 발병률이 저하된다.
6. 여러가지 실험 결과, 유방암의 발병률을 매우 저하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올리브 기름에 튀겨 먹으면 어떤가요?

올리브 기름을 식용으로 사용하는 것과 올리브 기름을 튀김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다른 문제이다. 쿠에스타 박사와 그의 연구팀은 정제되지 않은 올리브 기름과 일단 한번 튀김용으로 사용했던 올리브 기름을 동물에게 섭취시킨 후 신체에서 나타나는 결과를 비교하였다. 튀기는데 사용하였던 기름을 섭취한 동물에게 있어서 콜레스테롤이 즉각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기타 유해한 증세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왜 그럴까? 기름을 튀기면 지방이 유해한 분자들로 분해되기 때문이다. 기름을 튀기면, 사람의 DNA에 해로운 화학물질들이 형성된다. 식품을 기름으로 튀길 경우, 식품의 표면이 소화하기 어려운 지방으로 감싸지게 되기 때문에, 위장이나 간에 많은 부담을 준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등식이 항상 성립되는 것이다.

지방 + 탄수화물이나 단백질 + 튀김 = 신체에 부담을 안겨 줌

최선의 올리브 사용법

익은 올리브는 맛이 너무나 쓰기 때문에 적당한 방법으로 처리한 올리브를 먹을 수 밖에 없다. 올리브에서 쓴 맛을 제거하는 세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로, 일명, 그리이스 처리법이 있는데 그것은 지중해 연안에서 사용하는 방법으로 잘 익은 올리브를 소금물에 담구어서 쓴 맛을 빼내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처리한 올리브는 너무 짠데, 이것을 물에 담구어서 냉장고에 보관하면 소금기가 빠진 올리브를 섭취하는 것이 최선의 올리브 사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로, 올리브 가공 공장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처리법으로는 올리브를 알칼리 용액(잿물)에 담굼으로써 쓴 맛을 제거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러한 방법은 올리브를 대량으로 처리할 수 있으며, 껍질을 부드럽게 만들고, 비용이 절감된다는 잇점이 있지만, 처리 과정에서 알칼리 용액이 지방을 용해시키는 비타민들 즉, 비타민 A, 비타민 E 등을 파괴시키게 된다. 그러므로 질병의 치료에 사용하는 올리브로서는 적합하지 못하지만, 일반 식품으로써의 가치는 여전히 매우 높다고 말할 수 있다. 세째로, 박테리아를 생성시키는 랙틱 에씨드로 올리브를 처리하는 방법이 있다.

 

 

누가 예수를 진짜로 믿는 사람들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다.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아니면 어느 인간의 학설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좋은대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모본을 따라 살기로 작정한 자들이다. 세상을 살기에 편리한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또한 제시하여 주신 길대로 사는 자들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의 길과 세상의 길 사이에는 항상 투쟁이 있기 마련이다. 믿는 자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드릴 때에는 동시에 예수를 자기의 주인이요 왕으로 받아드리는 것을 수반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 안에는 예수를 자기 편리한대로, 자기 마음 먹히는대로 믿고 사는 가짜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차있는 이상한 시대가 되어 버렸다. 어떤 교회들은 기업이 되어 가는가 하면 어떤 교회들은 사회 친목 단체나 클럽처럼 변신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좌표를 다시 살펴 보는 일이 필요하겠다. 과연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어떠한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일까?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이가 적음이니라.” 마태복음 7:13,14.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일이란 참으로 많은 희생이 필요되는 생애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기쁨과 즐거움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는 말씀이다. 마음이 거듭나서 취미와 좋아하는 것들이 바뀌어 지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생애를 살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쉽게, 그리고 편하게 사는 길은 멸망의 길이라고 말씀하신 셈이다.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로새서 3:1-3.

세상에서도 재미를 보고 하늘도 가겠다는 태도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구원을 얻는 길에는 중간이 있을 수가 없다. 적당히 믿는다는 사고 방식은 신앙이 아니다. 우리가 물려 받은 성경과 진리는 피 묻은 것들이다. 얼마나 많은 선조들이 자기들의 생명을 바쳐가며 신앙과 진리와 그리고 표준을 고수하여 왔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빚진 자들이다.

한번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는데 어떤 사람이 질문을 하였다.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누가복음 13:23.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궁금증은 한결같은 것을 보게 된다. 이에 예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 즉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란 어떠한 각오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길인지를 아주 명료하게 설명해 주셨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 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누가복음 13:24) 라고 말씀 하시고는 길을 가시다가 뒤 따르는 수 많은 군중들을 향하여 다시 더 자세하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 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여 다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 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 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14:25-33.

예수님의 제자의 부르심은 아주 명백하다. 따르기 전에 먼저 어떠한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분명하게 제시하여 주셨다. 하나님과 부모 형제 사이에 선택하여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먼저 선택하지 않는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자기 자신의 정욕을 부인하고 예수를 따를 때에 자연히 짊어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따르게 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길이다. 그 길은 어떤 의미에서 수치스러운 일이다. 옛날에 십자가를 지는 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또한 주님의 축복 때문에 그것들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이해 하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재산이나 시간이나 달란트(재능)들은 모두 주님께서 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따르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다. 이러한 제자됨의 댓가에 대한 가르침이 타협되거나, 가르쳐 지지 않고 망각되어 버렸을 때에 교회는 곤두박질 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세상 사람들과 교인들 사이를 구분하지 못할 만큼 타락하게 된 것이다.

어떤 한 청년이 사랑하는 애인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고 한다. “사랑하는 그대여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오! 내가 당신을 찾아 만나기 위하여서는 에베레스트 산보다 더 높은 산이라도 넘어 가겠고 태평양 보다 더 넓은 대양이라도 헤엄쳐 가겠오! 오, 나는 당신을 그리워 하오!” 그리고는 그 편지 밑에다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P.S.- 오는 수요일날 당신을 만나러 가겠소! 비가 오지 않는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는가?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하며 믿는다고 말은 하지마는 실상에 있어서는 적은 일들로 하나님을 부인하며 살고 있지 않는가? 자신의 편안함과 세상의 재미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매일 예수를 배반하며 팔고 있다. 그러면서도 교회들은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인양 여전히 십자가를 자기 교회 지붕 위에 높다랗게 달아놓고 선전하며 살고 있지 아니한가! 과연 우리는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인지 다시 한번 살펴 보아야 겠다. 말세에 살아남는 이들이 되기 위하여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로 눈 앞에 두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예비하는 생활을 살아야 하는 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선지자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을 만나기를 예비하라.” 아모스 4:12. 우리는 하늘에서 거룩한 천사들과 이웃이 되어 살아야 할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초림하셨을 때에도 그 분의 길을 예비 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던 선지자 침례 요한도 회개의 기별을 전파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이 오시는 메시야를 마음속에 받아 드릴 수 있게 하기 위하여서 그들의 생애의 개혁과 부흥을 촉구하는 회개의 기별을 전하였던 것이다. 그의 사명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이렇게 예언해 두었었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누가복음 3:4-6; 이사야 40:3-5.

그렇다. 산처럼 높아져 있는 우리의 교만한 마음들이 낮아져야 하겠다. 골짜기처럼 깊숙하게 들어가 있는 음흉한 마음들과 이기심들이 돋아져 평평하게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 타협하며 적당하게 살아가는 굽은 마음들이 곧바로 펴져야 하겠다. 그리고 돌들과 파인 곳들이 많은 길처럼, 거칠고 모나며 세상의 잔재들로 가득찬 성품들이 치워져야 하겠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시는 길이 평탄하여 지도록 말이다. 침례 요한은 광야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요한이 침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누가복음 3:7-9.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텔레비죤 프로그램을 똑같이 좋아하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듣고 웃는 농담들과 코메디 쇼들을 보면서 같이 깔깔거리며 웃고 있다면 우리들과 그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과 꼭같이, 뒤 늦을새라 유행 옷을 걸치고 다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을 단장하는 대신에 더욱 더 예쁘게 보이기 위하여 짙은 화장을 하느라 많은 시간들과 돈들을 낭비하면서도 우리는 과연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자칭할 수가 있을까? 속 사람을 단장하기 보다는 값진 패물과 장신구들, 반지, 귀고리, 팔찌, 목거리, 비싼 시계들로 몸을 치장하고 다니면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세상을 향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가 있겠는가? 파티의 좌석에서 같이 술 마시며 담배를 피우며, 성경이 하지 말라고 분부한 일들을 같이 행하면서 어찌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몸을 흔들게 하는 그러한 유행가를 따라 부르면서 어떻게 우리가 하늘을 가고 있는 성도들이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몸을 과다하게 노출 시키는 짧은 치마나 상의를 입고서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교회 문을 들어 설 수가 있을까? 그러한 옷 차림들은 예배드리는 자들을 위하여 디자인 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옷차림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세상 사람들이 남자들의 눈을 현혹하기 위하여 만든 옷들이다. 오늘날 교회는 성경의 표준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나와 있다. 우리는 다시 종교 개혁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곧 다시 오시기 때문이다. 제2의 침례 요한의 사역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참된 회개를 촉구하는....

마태복음 13장에는 또 다른 예수님의 호소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태복음 13:44-46. 보화가 감추인 밭의 값은 얼마였는가? 백만불? 천만불? 아니다. 그 밭의 값은 그 농부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이었다. 진주의 값도 마찬가지였다. 진리와 영생의 댓가는,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됨의 댓가는 자기의 옛 생애를 완전히 다 포기하고 예수님의 길에 서는 것이다. 그래서 그 문을 좁은 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길은 가장 즐거운 길이다. 그 길은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길이다. 그 길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쉼을 주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워야 하는 길이다. 진리를 발견하려고 헤메던 인간이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만나고 나면 과거에 살던 죗된 길이 얼마나 어리석게 보이는지 모른다. 그리고 신기루와 같은 세상이 제시하는 행복에 속임당했던 자신을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죄를 미워하게 된다. 그것이 거듭난 자들의 특징이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영생의 길이 그렇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 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로새서 1:21,22) 라고 바울은 말씀하고 있다. 사도 베드로도 합세하여 우리들에게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사모하라...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 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 베드로 후서 3:10-12, 14.

진짜 그리스도인과 가짜 그리스도인을 구별하는 15가지 질문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린도후서 13:5

다음에 소개하는 16가지 질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 속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여 봅시다.


1. 나는 직장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만큼, 성경이 말하는 진리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는가? 예________ 아니오________

2. 나는 내가 텔레비젼, 라디오, 그리고 신문에 소비하는 시간만큼 성경을 읽는데 시간을 바치고 있는가? 나는 거울 앞에 앉아 있거나, 전화로 다른 사람들과 잡담하는 시간보다 정해진 시간에 무릅을 꿇고 기도하기를 더 좋아하는가? 아니면, 너무나 바빠서 무릅을 꿇을 시간도 없는가? 예______ 아니오______

3. 나는 성경을 하나님께서 직접 내게 쓰신 편지서로 읽는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고 그 사건을 고대하며 준비하면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너무나 바빠서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가? 예______ 아니오_______

4. 나는 주의 날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대로, 나는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하고, 일곱째 날은 거룩한 날로서 구별하여 지키고 있는가? 나는 주의 날을 이사야 58장 13절에 기록된 바대로 준수하고 있는가?

5. 나는 가정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가? 가정을 불화와 불행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가족 예배가 규칙적으로 나의 가정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 나의 가정은 자녀들에게 있어서 가장 사랑받는 장소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내가 믿고 있는 신앙을 자녀들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가? 가정 안에서 텔레비젼과 라디오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수단으로 자녀들에게 사용되고 있는가? 예_______ 아니오_______

6. 내가 입고 다니는 옷들을 통하여,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적인 아름다움을 단장하는 것보다 외적인 미모를 단장하는데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지는 않는가? 나의 의복은 세상의 유행을 쫓고 있는가? 아니면 단정하고 그리스도인다운 옷을 선정하여 입고 있는가? 예_______ 아니오_______

7. 나는 대화할 때에 하나님의 천사가 곁에서 나의 말을 듣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가? 만일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나의 말을 듣는다면, 그들은 나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아니면 세상 사람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예_______ 아니오_______

8. 나는 언제나 정직한가? 나는 모든 금전 문제에 있어서 언제나 엄격한 정직성을 유지하고 있는가? 예_______ 아니오_______

10. 나는 십일금을 하나님께 신실하게 바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사업에 헌금을 드릴 때에 정기적으로 드릴 뿐만 아니라, 희생적으로 드리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사업을 확장하는 일보다 개인적인 쾌락을 누리는 일에 더 많은 돈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는가? 예______ 아니오_______

11.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빛과 진리에 대해서 가장 정직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생애를 살고 있는가? 예_______ 아니오_______

12. 나는 골로새서 3장 17절에 의거하여 모든 책과 음악과 교제와 오락을 선택하고 있는가?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동에나 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극장의 영화와 텔레비젼의 프로그램 중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인가? 예________ 아니오________

13. 나는 마음 속에서 감정의 쓴뿌리가 내리지 못하도록 힘껏 저지하는가? 나는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있는가? 나는 악을 선으로 갚고 있는가? 나는 내 자신에 대해서 승리하고 있는가? 예______ 아니오________

14. 나는 죄를 미워하며 증오하고 있는가? 얼마나 많이? 가장 작은 죄에 대해서도 강력한 증오심을 가지고 대처하는가? 나는 죄인은 사랑하지만, 죄를 미워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르고 있는가? 예_____ 아니오_________

15. 나는 영혼 구원 사업에 투신하고 있는가? 영혼을 구원하는 사업이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관심을 끌고 있는가? 지금까지 그리스도 예수 앞으로 몇명의 영혼을 인도하였는가? 예_______ 아니오_________

16. 마지막으로, 나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댓가로 치면서 값으로 산 바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가? 나의 몸과 마음 전체가 그리스도께 속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 예__________ 아니오___________

 

1부 -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


오늘날 기독교계에 가장 크게 오해받고 있는 그리스도의 선물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닌“은혜”이다. 소위 값싼 은혜(cheap grace)라고 불리워지는 가르침이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무방비 상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으로 인하여 마련된 값비싼 은혜가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물건처럼 헐값에 거래되고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저자 설명: 1906년 2월 4일 독일의 브레스라우 시에서 의과대학 교수의 아들로 출생. 1930년도에 23세의 나이로 베를린 대학 조직 신학과의 교수로 취임. 1943년, 나치스의 게스타포에 체포되어 감옥생활 시작. 히틀러 치하에서 너무나 조용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기독교회를 책망하기 시작함. 1945년 2월, 뷰켄발드 강제 수용소로 끌려감. 기독교회에 스며드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 규탄했던 대표적인 신학자. 1945년 4월 9일, 옥중에서 자신의 신앙를 포기하지 않고 고수하다가 순교함. 이 기사는 그의 대표적 저서인“제자가 되는 댓가”에서 발췌한 글 임.)

값싼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가 시장에서 팔리는 값싼 물건처럼 팔려 나간다는 의미이다. 침례와 죄의 용서가 너무나 가치없는 것으로 전락되었으며, 고의적이고 의도적인 죄를 범한 죄인에게 회개하라는 호소 대신에, 위로와 격려의 말들이 무책임하게 난발되고 있다. 물론 은혜에는 어떠한 댓가나 가격이 붙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은혜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은혜에 대한 댓가가 이미 지불되었다는 사실이다. 은혜를 위하여 무한한 댓가가 치루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무한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인류에게 은혜를 무한하게 나누어 줄 수 있기 위해서 치루어진 값은 결코 헐값이 아니었다. 은혜를 위해서 무한한 댓가가 지불되었으며,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희생이 지불되었다. 은혜를 무한하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 치루어진 값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자마다 은혜를 매우 소중하고 값비싼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은혜를 매우 값싸게 취급하는 사람들은 은혜를 단순히 어떤 교리나 이론으로서 받아들인다. 그들이 받아들이는 은혜 속에는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재창조의 능력과 생명력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은혜를 죄의 용서에만 국한시켜서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께서 베푸신 용서하시는 은혜를 정신적으로 인정하고 동의하기만 하면, 은혜는 자신의 죄를 용서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은혜에 대한 매우 위험한 오해이이다. 은혜에 대해서 이러한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은 죄를 값싼 은혜로 거침없이 덮어씌우기 때문에, 깊은 회개의 경험을 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이러한 상태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와 세속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도 솟아 나올 수 없으며, 가난한 마음으로 의를 사모하지도 않게 된다.

만일 은혜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이 올바른 진리라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은혜가 값싼 은혜라면, 인생 살이에서 세상이 요구하는 바에 맞추어서 살아도 된다고 설교해야 한다. 정말 은혜가 값싼 것이라면, 우리는 깊은 자기 기만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다: “값싼 은혜가 그대를 덮어주고 있으므로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구태어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대는 값싼 은혜 아래에서 경건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척 할 필요도 없다. 진리대로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나, 한번 그리스도를 버리고 세상으로 나간 교인에게 재침례를 요구하는 것과 같은 것들은 불필요한 이설이다. 그대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대는 여전히 죗되고 이기적인 생애를 살 수 밖에 없으므로, 거룩한 생애에 대한 소망을 버려라. 은혜가 항상 그대에게 베풀어져 있기 때문에 그대가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한, 그대의 생애가 어떻하든지 간에 구원은 보장되어 있다. 은혜가 그대를 덮어주고 있으므로, 더 이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온 세상을 덮어주고 있으므로, 그대는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도 된다. 어차피, 그대는 은혜로 구원받았는데, 부흥과 개혁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구태어, 세상 사람들과 조금 다른 것을 하거나, 조금 다른 길을 가는척 하지 말라. 십자가에서 베풀어진 은혜가 그대를 구원하기에 넉넉하지 않은가? 세상에서 오는 유혹과 시험을 극복하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극기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애를 세상과 구별짓기 위해서 세상을 전적으로 버려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을 부인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써 베풀어진 은혜가 진정으로 자신에게 은혜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은 은혜를 통하여 세상을 정복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대가 값싼 은혜를 믿는다면, 그리고 만일 그대가 생명력이 없는 거짓 은혜를 믿는다면, 그대 주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이 주는 쾌락을 즐기면서 살되, 세상보다는 조금 높은 표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도록 가르치라. 하나님의 피묻은 은혜를 위해서 살기 보다는, 세상을 위해서 생애를 바치라고 말하라.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모든 일을 다하였으므로, 그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구원에 대한 감정적 확신 속에서 안주할 수 있도록 만들라.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려고 애쓰는 대신에, 그분의 은혜가 주는 위로와 위안을 즐기라고 말해라. 바로 그것이 값싼 은혜가 의미하는 바가 아닌가? 죄를 버리고 통회하는 죄인을 의롭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 자체를 의롭다고 여기는 은혜를 가리켜서 값싼 은혜라고 부르고 있지 않는가? 진정으로 회개한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그대로 품고 있는 죄인에게도 은혜가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가르치는 것이 값싼 은혜라는 가르침의 핵심 논리가 아닌가? 물론, 값싼 은혜도 죄의 용서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죄의 올가미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지 못하는 기만이다. 값싼 은혜는 우리의 마음을 경건하고 은혜롭게 변화시킬 수 없으며, 마음 속에 죄와 이기심을 붙잡고 있는 죄인들 위에 흰색 보자기를 뒤집어 씌움으로써, 회개하지 않은 죄인을 의인으로 위조하는 허무한 포장지에 불과하다. 값싼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의를 부여하게 하는 자기 기만이다.

오늘날, 값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은 기독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각종 참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장본인이다. 값싼 은혜는, 참된 회개없이도 용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으며, 진리에 대한 확신과 행습의 개혁없이도 침례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고, 아무런 고백도 없이 성만찬 예식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값싼 은혜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요구하지 않는 은혜, 십자가가 없는 은혜, 그리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의 의미과 가치를 값싼 것으로 만드는 은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값비싼 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은 것을 말한다. 그것을 진정으로 사기 원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게 된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태복음 13:44. 은혜의 참된 가치를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모든 소유와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 마저 버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이게 된다. 값비싼 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값진 진주와 같은 것이다. 값진 진주의 가치를 올바로 알아보는 그리스도인 역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것을 사게 될 것이다. “또 천국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태복음 13:45-46. 값비싼 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만일 눈이 그대를 넘어지게 만들면, 그 눈을 뽑아버리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말한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마태복음 18:9. 값비싼 은혜는 선물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만,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받기 위해서 희생과 극기의 댓가를 지불하게 된다. 값비싼 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베드로에게 그물을 놓고서 자신을 따르라고 명하신 그리스도의 부르심이었다.

누가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얼룩진 은혜를 헐값으로 팔아넘기려고 하는가? 누가 값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값비싼 하나님의 은혜를 적당하게 슬쩍 사용하려고 하는가? 값비싼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라고 호소하는 부르심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지만, 두드리고 도전해야 하는 열리는 문이다. 이와같이 진짜 은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르라는 부르심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다. 물론, 우리의 극기와 노력과 희생 자체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지만, 은혜에는 그것을 구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인생을 댓가로 지불하라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 험한 세상에서 오해와 희생의 길을 걷게 되기 때문에, 은혜는 매우 값비싼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은혜만이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위선이나 가식이 없는 진실한 것으로 꼴지울 수 있다. 은혜는 죄를 죄라고 정죄하기 때문에 값진 것이며, 또한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버리고 의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주기 때문에 진짜 은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그 댓가로 지불하였기 때문에 값비싼 것이다. “너희는 값으로 산 바 되었으니”라는 성경 말씀에 나오는“값”이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생명을 바치면서 치루신 값을 어떻게 우리 인간이 값싼 것으로 취급할 수 있겠는가! 온 우주의 왕인 하나님께서 육체를 취하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그 은혜를 어찌 값싸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뜻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치루신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댓가를 깊이 명상해보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값비싼 은혜를 통하여 세우신 그리스도 교회는 마땅히 세속으로부터 보호되어야만 한다. 은혜를 개나 돼지에게 던져주는 자가 누군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와 그 목적을 명상하는 자마다, 은혜를 매우 귀하고, 소중한 것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놀라운 희생을 통하여 이룩된 값비싼 은혜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은혜의 초청장을 보내고 있다.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는 산산히 깨어진 마음으로 죄를 깊이 뉘우치는 영혼에게 용서의 약속을 제공한다. 은혜는 사람의 마음을 겸손하고 가난하게 만듦으로써, 그리스도의 초청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며,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보면서 회개에 이르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가 하는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은혜는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은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을 따르라고 호소한다. 이러한 호소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인데, 왜냐하면 예수께서“나의 멍에는 쉬우며, 나의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은혜의 초청은 자신이 스스로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호소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 호소의 주인은 그리스도 이시다. 은혜가 베드로로 하여금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르도록 만들었으며, 은혜가 베드로로 하여금“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노니”라는 고백을 하도록 만들었는데, 그러한 신앙 고백이야말로 그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참람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은혜의 역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은혜는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이 세번이나 부인하였던 주님을 위하여 순교자의 길을 마지막 순간까지 걷도록 초청하였다. 그러한 부르심에 그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충성의 마음으로 응하였다. 베드로의 생애에 있어서, 은혜와 제자의 직분(discipleship)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제자가 되는 댓가를 기꺼이 지불함으로써 은혜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누가 감히 그리스도의 은혜를 값싼 것으로 전락시키려고 하는가? 지금,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뒤를 따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멍에와 짐이 그대에게 가벼운 것이 될 때까지, 그대를 위하여 치루어진 그분의 희생과 봉사의 생애를 명상하도록 하라.


 

2부 - 은혜에 대한 사단의 공격


사도시대 이후, 그리스도 교회의 성장과 함께, 교회는 점점 더 세속화 되었으며 은혜가 요구하는 댓가에 대한 가르침도 점차 빛을 잃어버린채 희미해져 갔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12제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진리는 중세기의 종교 암흑 시대에도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여전히 전수되고 있었다.

은혜란 그리스도의 초청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분의 부르심에 응하는데에는 희생적인 댓가가 지불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날마다 그분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애를 살았다. 비록 수도승 제도가 나중에는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의 대표적인 예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초창기의 경건한 수도승들의 동기와 목적은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 교회에 들어오는 세속적인 정신과 값싼 은혜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는 파수꾼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행정과 정치를 맡아보던 성직자들과 신부들은 수도승 제도를 교회 조직의 타락한 모습을 가리우는 가면으로 이용하였다.

종교개혁시대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순수한 복음인 값비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수도승이었던 마틴 루터를 개혁자로서 선택하셨다. 그는 수도원 생활을 거쳐서 수도승이 되었는데, 이러한 모든 과정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루터는 완전한 순종의 길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던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생애를 위하여 세상이 주는 장미빛 유혹들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마틴 루터 역시 수도원 생활을 통하여 개인적인 성취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이 소수의 제한된 수도승들의 개인적인 성취나 공로로 이용되어서는 않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하여 보여주셨다.

영적 눈이 열린 마틴 루터는 수도승 제도가 제자들의 소박하고 겸손한 봉사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공로를 쌓으며 극단적인 영적 교만으로 빗나가는 현실을 보게 되었다. 세속이 수도승들의 심장부에 찾아들자, 말할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되었다. 세상을 버리려고 하던 수도승들이, 이제는 수도원 안에서 세상을 그리워하는 미묘한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종교계가 이처럼 바닥까지 타락할 즈음,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게 되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주장하기 시작하자, 거의 모든 수도승들이 그에 대항하여 일어섰다. 루터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순을 뻗고 계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루터는 믿음의 손을 뻗어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붙잡았다. 그리하여 그는“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지라도, 우리는 믿음으로 선한 생애를 살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하여 마련하여 주신 은혜는 값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은혜라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산산히 깨뜨렸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한번 더 그물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었다. 그가 처음에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 그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버렸지만 자기 자신을 버리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남아있던 자아 마저 버릴 수 있게 되었다. 자아를 버리게 되자, 그때까지 그를 붙잡고 있던 자신에 대한 신앙적인 평판도 하잘 것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스스로 공로를 쌓으려고 애쓰는 대신에,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에 응하라는 부르심에 순종하였다. 루터는“그대는 지금까지 죄를 범해왔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용서되었으니, 그대는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여 머물러 있으면서, 용서가 주는 위로를 즐겨라”라고 속삭이는 사단의 음성을 거절하였다.

드디어, 그는 수도원을 떠나서 세상으로 돌아갔다. 그가 세상으로 돌아간 것은 세상이 선하고 거룩하기 때문에 돌아간 것이 아니라, 수도원도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돌아갔던 것이다. 루터가 세상으로 돌아간 사건은 세상에게 가장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가 수도원에 들어갈 당시에 했던 세상의 포기는, 그가 세상으로 돌아왔을 때에 했던 자아의 포기에 비하면 어린아이의 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의 개심은 그 당시 종교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세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수도원이 안전한 피신처가 될 수 없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날마다의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 완전한 순종의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는 진리를 발견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세상 사람들의 삶 사이에는 끊이지 않는 투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마틴 루터가 깨달은 복음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제거해 준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치명적인 오해이다. 그들의 오해와는 반대로, 루터는 세상에 살지만 세속에 대하여 결정적인 저항을 하는 그리스도인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거룩함에 이른다고 가르쳤다. 그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음을 설교하였으며, 세상에서의 삶을 통해서도 거룩한 경험을 지속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루터가 믿었던 신앙은, 하나님께서는 죄를 의로운 것으로 인정해 주신다고 믿는 신앙이 아니라, 죄를 버린 죄인을 의인으로 인정해 주심을 믿는 신앙이었다. 그가 받아들인 은혜는 값비싼 은혜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죄에 대해서 용서를 가져오는 것은 자신이 힘들게 쌓아나가는 공로나 희생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로 베푸시는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고달픈 수도승 생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이전보다 더욱 엄숙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들였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베푸신 값비싼 은혜를 깨달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위대한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 루터는, 하나님의 아들이 치루신 댓가가 너무나 크기에 그것은 타락한 인류에게 은혜가 될 수 있으며, 그러한 엄청난 은혜를 바라보고 묵상하는 그리스도인마다 희생적인 댓가를 치루면서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라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루터가 수도원에서 매우 참담한 경험을 하고 있을 때, 그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죄로부터의 자유와 용서를 붙잡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결코 없앨 수 없었던 죄를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의존하여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자, 그는 그러한 은혜를 베푸시는 그리스도께 이전보다 더욱 큰 헌신과 충성을 바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의 생애 전체를 댓가로 지불하는 삶을 살도록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루터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는 순간, 일생 처음으로 그리스도께 완전하고 순수한 순종을 드릴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다. 루터에게 있어서 사랑과 감사의 정신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완전한 헌신과 충성을 드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은혜는 그에게 그리스도 제자로서의 직분을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열성적인 제자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이것이 마틴 루터가 은혜에 대해서 깨달았던 바이다.

루터는 오직 은혜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루터를 따르던 그의 후예들은 루터의 교리를 받아들였지만, 루터의 경험을 이해하는 일에는 실패하였으며, 루터가 했던 말만을 되풀이 하였다. 루터의 경험을 체험하지 못한 그의 후예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그리스도인들이 걷게 되는 제자의 길을 가르치는 일에 실패하였다. 물론, 마틴 루터는 오직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말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러한 설교나 가르침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과 배경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는 그 당시에 가장 열성적이고, 가장 엄격한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결심한 수도승들을 대상으로 설교하였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한 사람들의 믿음을 하나님의 은혜를 향하여 돌리고자 했던 루터의 의도를 이해해야 한다. 혹독한 규율과 엄격한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의무나 직분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까? 대답은 분명하다. 그 당시 루터는 수도승들에게 가장 적합한 설교를 하였을 뿐이다.

루터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한 생애를 살 수 있다고 말하였다. 또한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도록 만들 수 없으며, 오직“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만이 우리에게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그가 수도원을 나올 때, 즉 두번째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부르심에 응하면서 했던 말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루터는 엄청난 죄로부터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지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깨달았다. 이와 같이 죄에 대한 보다 분명한 깨달음은 루터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더욱 열심히 따르게 만들었다. 그는 언제나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은혜를 바라보았지, 방종과 게으름에 대한 핑계로서 은혜를 간구하지 않았다. 그가 얻은 해결책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서 마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루터를 따르던 후예들은 루터가 발견한 해결책을 자신들의 경험으로 깨닫지 못하였으며, 은혜를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교리나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바로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계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있는 값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의 기초가 되었다.

만일 은혜가 그리스도인 신앙 생활에 있어서 한낱 지식에 불과한 것이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곳을 가게 되며, 우리가 원하는 모든 죄를 범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가 우리의 죄를 덮어준다고 믿게 된다. 본성적으로, 사람은 가장 싼 값을 주고 은혜를 얻을 수 있는 장소를 찾으려고 한다. 본성적으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마음을 만족시켜주는 설교를 하는 목사나 교회를 좋아하게 된다. 마틴 루터가 말했던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말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신앙을 붙들게 되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이전의 상태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을 덮어주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게 된다. 은혜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교회는 깊은 세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교회와 세상 사이에 차이가 없어졌으며,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 사이에도 극적인 대조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처럼 이기적이고 위선적이며, 세상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일주일에 한번씩 교회에 가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를 충분히 수행했으며, 그것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대량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은혜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이 그리스도 교회에 가져온 참상이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값싼 은혜가 그들을 제자로서의 의무와 직분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 나타나는 필연적인 댓가를 면제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지식으로만 이해하는 값싼 은혜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싼 값을 치루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도록 만들고 있다. 우리는 값싼 은혜의 가르침이 만들어 놓은 결과들을 보면서 엄숙한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 누가 값싼 은혜의 가르침 때문에 멸망으로 들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인가?

매우 미묘하고 혼돈시키는 기만이 여기 있는데, 값싼 은혜를 믿는 사람들과 값비싼 은혜를 믿는 사람들이 공히“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잘못 이해하거나, 그것을 개인적으로 체험하지 못할 때,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크게 빗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해야만 한다. 오늘날, 루터의 의도와는 달리 그의 말이 정반대의 의미로 해석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절망마저 느끼게 된다. 물론, 아직도 루터와 개혁자들이 가르쳤던 값비싼 은혜에 대하여 존경심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값싼 은혜의 가르침에 대항하기 위해서 일어서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사람은 자신이 믿는대로 된다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만일 우리가 값싼 은혜의 가르침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것이 말하는 바대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값비싼 은혜를 믿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감사의 정신으로 댓가를 치루면서 응답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은혜를 가장 값싸고 쉬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루터의 후예로서 마땅이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하는듯 하다. 그들은 은혜를 어떻게 하면 쉽고 간편하며 값싸게 만들 수 있을까를 위해서 골몰하는듯 하다. 그래서 오늘날, 루터의 가르침을 지지한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된다고 믿는 사람들을 율법주의자로 보게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서 희생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극단 또는 이단으로 정죄받는 세대가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기독교는 가장 인기있는 종교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회로 개종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기독교계에서 루터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목사들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성직자로 신뢰받고 있지만, 참된 제자의 직분에 대한 가르침은 희생되고 말았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지불해야 할 댓가가 너무나 싼 값으로 책정되었으며, 값싼 은혜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승리자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값싼 은혜가 가져온 결과가 부매랑처럼 우리 자신들에게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세속과 부정직으로 붕괴되어 가고 있는 커다란 교단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그리스도인의 위선과 부도덕에 치를 떨면서 교회를 무시하는 세상 사람들의 코웃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수많은 사람들을 도매값으로 침례주며, 회개하고 진리를 확신하는 일없이 구원받았다고 자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채워가고 있다. 마땅히 책망받아야 할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죄를 가리워 줄 것이라고 위로하는 무책임한 성직자들의 숫자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 그치지 않는 은혜의 샘을 퍼붓듯이 나누어 주고 있지만,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좁은 길로 들어가라는 설교는 점점 더 듣기 힘들게 되었다. 초기 사도 시대의 교회에서 가르쳐졌던 그러한 진리를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값비싼 은혜에 감격하여 자신의 목숨을 단두대와 화형대 위에 던졌던 선구자들의 모습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기독교계 전반에 걸쳐서 내리고 있는 값싼 은혜의 재앙이 보이지 않는가? 바로 이것이 소위 복음주의자들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값싼 은혜를 가르친 결과로 내려진 재앙들이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불순종의 생애를 살 수 있도록 교인들을 준비시키는 것이 값싼 은혜의 가르침이다. 값싼 은혜는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에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어중간한 사람들로 만들어 버렸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제자로서의 직분을 잃어버렸으며, 그리스도의 헌신적인 도구가 되지 못하게 되었다. 급기야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말을 듣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가르침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지금 당신을 부르고 계신다는 말을 들을 때에 어리둥절하며 당황하게 된다. 왜냐하면 값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은 값비싼 은혜에 대한 진리에 대하여 눈이 가리워지게 되기 때문이다. 깊은 기만 속에서, 그들은 값싼 은혜가 자신들을 구원하여 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살게 된다. 그들의 생애 속에서 제자로서의 의무와 순종의 삶을 이끌어 갈만한 실제적인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구원이 이미 모두 이루어졌다고 믿는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지 못하게 되며, 성령의 능력이 자신의 실제적인 생활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에 있어서 은혜에 대한 오해는 계명의 행함에 대한 오해보다 훨씬 무서운 재앙을 가져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값비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을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정직한 마음으로 대다수의 교인들이 참된 제자의 길을 걷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정통이라고 불리우는 큰 교단에 다니는 교인들로 인정해 줄지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정직하게 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참 교회에 속한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제자되는 직분(discipleship)과 은혜 사이에 존재하는 상관 관계를 반드시 이해해야만 한다. 우리는“무엇이 그리스도 교회를 이토록 참담하게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분명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참 은혜를 발견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만족과 평화를 마음에 담고서 살아갈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사단의 권세를 이기는 사람은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의 한량없는 은혜를 찬송하게 될 것이다.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감으로서 세상이 흉내낼 수 없는 자유를 만끽하게 될 것이고, 하늘 시민으로서의 확신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값비싼 은혜를 통하여 가장 가치있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소식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복음이 아니겠는가?

 

천사의 충고

두려워하지 마세요.
아무리 부끄럽고 비참한 죄일지라도
정직한 고백과 진실한 회개는 그대에게 하늘을 열어 줍니다.

괴로워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은 그대의 회개를 비웃고 조롱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대를 가장 가치 있는 존재로 껴안으실 겁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그대가 가장 어둡고, 낙망되며, 슬프고, 괴로울 때일지라도
하나님의 강한 손은 여전히 그대의 어깨 위에 놓여 있답니다.

실망하지 마세요.
돈 많은 장로님과 세속적인 집사님이 가정과 세상에서 철저한 위선자로 살아갈지라도
실망과 불신과 비난의 늪을 찾아가지 마세요.

겁내지 마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에게 아무리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그대가 그분의 사랑과 섭리를 기억한다면,
그분을 향한 깊은 신뢰심을 가지고 좁은 길을 걸을 수 있을 겁니다.

버려야 할 것은 버리세요.
세상이 던져 주는 재물과 명예와 인기가 아무리 그럴 듯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이 그대의 신앙적 양심에 티나 점을 남기는 것이라면,
그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버림으로써, 세상에서 구경거리가 되세요.

간절하게 기다리세요.
노아의 때나 롯의 때처럼 사람들이 심판의 기별을 무시하고 조롱할지라도
그대만큼은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살아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