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깨어 있음의 의미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깨어 있음에 대하여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혹은 경고로, 또 후세에 성경을 읽을 우리들에게 호소의 말씀으로 깨어 있으라고 부탁하셨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성경 아주 여러 곳에 나온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알지 못함이라(막 13:35).

깨어 있다는 것

 당신은 깨어 있는가? 물론 우리는 매일 아침 깨어나 눈을 뜬다. 깨어 있다. 그러나 그런 깨어남과 예수께서 말씀하신 깨어 있음의 의미는 다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깨어 있다는 의미를, 단순히 말세의 징조들을 살펴보며 예수님의 재림의 날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물론 깨어 있으라는 예수님의 부탁 속에는 그 의미가 들어있다. 그러나 그 이면의 의미를 가만히 묵상해 보면, 그 속에는 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깨어 있다는 것은 본다는 것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안다는 말인가? 그것은 매 순간 깨어 있는 의식으로 자기 자신을 본다는 것이다. 매 순간 깨어 있으면서,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이다. 깨어 있는 사람은, 마음속에 성령의 안약(계 3:18)이 눈에 발라져 있으므로 자기 자신을 명료하게 본다. 깨어 있는 사람은, 깨어나지 않은 사람이 육신의 자아로부터 올라오는 감정이나 생각에 휘둘리며 무의식적으로 막 살아가듯이 살지 않는다.

 깨어 있는 사람은, 매 순간 깨어서 자기 자신을 지켜 보고, 안다. 얼마나 자주, 아니 얼마나 지속적으로 육신의 자아가 살아나는지를... 그 육신의 자아가 살아나 어떤 생각을 일으키고, 어떤 변명을 하게 하고,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지, 그 육신의 자아가 어떤 욕망을 일으키고, 어떤 방어를 하게 하고, 어떤 것에 집착을 하게 하는지를... 그리고 그 육신의 자아가 일으킨 생각과 감정이 생(生)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아픔과 뒤얽힘들을 만들어내는지를... 또 우리의 육신에 붙은 에고가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 때론 훌륭한 영적인 모습으로, 때론 야비한 세속적인 모습으로 - 모양을 바꾸어 나타나 혼돈시키는지를 안다.

갈라진 두 마음
 왜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날 때 하나님의 마음을 받았다는 것을 그렇게 자주 잊어버릴까? 왜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영적인 무의식의 잠에 빠져 옛날에 육신의 자아가 죽어버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까? 왜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의 자아는 죽고 마음 속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잊어버릴까? 하나님의 마음을 받았으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지, 왜 다시 육신의 마음으로 돌아가 갈라진 두 마음으로 살까? 육신의 에고가 부추기는 대로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며...

 우리들이 영적인 깨어남을 잃어버리고 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까 봐 사도 바울이 그렇게도 권면해 주었건만, 우리는 곧잘 어리석은 사람이 되곤 한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시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는, 그리고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여기라(롬 6:11)는 바울의 간곡한 부탁을 잊어버린 채...

 우리는 언제까지 갈라진 두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려 죽으셨듯이, 우리도 단번에 죽을 수 없는 것일까? 자신을 다 드려 죽고 나면 우리 존재 자체가 없어질까 봐, 우리가 진짜로 다 죽어 없어져버릴까 봐, 그래서 우리 자신은 없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만 사시게 될까 봐 겁이 나서 우리는 자신을 끝까지, 죽기까지 복종하는 데까지 내어줄 수 없는 것일까?

나는 매일 죽노라
 사도 바울은 말했다. 나는 매일 죽노라고... 예수님을 만나 온전히 거듭나는 경험을 한 훌륭한 사도 바울도 육신의 에고가 다시 살아나 꿈틀거리는 것을 보면서 놀라서 이렇게 외친 것이다. 나는 매일 죽노라! 사도 바울보다 너무 연약한 우리들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나는 매 순간 죽노라고...

 죽는다는 것은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육신의 자아인 에고(ego)에게 노(No)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과 같지 않은 모든 것에 노(No)하는 것이다. 매 순간, 인정받고 싶어서, 칭찬 받고 싶어서,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주도하고 싶어서 올라오는 에고에게 노(No)라고 외치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때로 모습을 바꾸어 자기 연민, 자기 동정, 쓸데없는 자책감, 그리고 자기 비하의 감정의 얼굴로 다가오는 에고에게 노(No)하는 것이다.

 자아가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과 반대되는 모든 감정 - 미움, 오해, 교만, 질투, 모함, 비판, 판단 등에 노(No)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부정적인 생각에 노(No)라고 말하는 것이다.

판단하는 것
 당신은 거듭났는가? 당신의 자아는 죽었는가? 그리고 마음 속에 예수님만이 사시는가? 육신의 자아가 아직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를 알 수 있는 명백한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지금 자기가 다른 사람을, 세상을, 모든 것을 판단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판단한다는 것은 아직 에고가 살아있다는 큰 증거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비판하지 말라고, 심판은 아버지께 맡기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들은 너무나 자주 하나님이 앉으셔야 할 자리에 앉아 모든 것을 비판하고 판단한다.

 남을 판단한다는 것은, 자아가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자기가 표준의 잣대가 되고, 그 잣대로 모든 것을 재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사람의 삶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판단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의 삶의 과정을 위하여 마련하신 고유하고 유일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함부로 재는 것은 하나님께 매우 불경한 일이 될 것이다.

 자아가 살아 있는 사람은, 그래서 남을 늘 판단하는 사람은, 이것은 좋고 이것은 나쁘다고 끊임없이 분석하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지 못하다. 그런 사람들은 비판과 판단을 하는 것에 너무 바빠서, 그리고 마음속으로 분석하는 일에 너무 바빠서, 삶의 아름다운 관계들과 그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총과 행복을 놓쳐 버리기 때문이다.

깨어나서
 우리는 깨어나서 눈을 떠야 한다. 육신의 에고의 눈은 감고 하나님의 마음의 눈을 떠야 한다. 육신의 에고의 귀는 막고 하나님의 마음의 귀를 열어야 한다. 육신의 에고의 입은 틀어막고 하나님의 마음의 입을 가져야 한다. 육신이 죽고 온전히 하나님의 마음만 남은 사람은, 눈으로 보는 것마다 아름다움이요, 귀로 듣는 것마다 감미로움이요, 입으로 나오는 것마다 감사이리라!

깨어나라
 예수님의 말씀대로 깨어 있으라. 깨어나서 매 순간 육신의 자아가, 죽었던 자아가 어떻게 살아나려고 꿈틀거리는지를 지켜 보라. 영적인 무의식의 잠에 취하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 자칫 육신의 자아의 생각이 휘두르는 대로 딸려가 소용돌이치는 감정의 늪에 빠질까 조심하라.  깨어나서 삶을 살아가라. 그러면 육신의 자아가 살아나 소리칠 때,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벌써 오래 전에 죽었다. 이제는 하나님만 내 안에 살아 계신 걸!...
 

권두언

강병국 목사
 사람들은 믿음이 없이는 못 삽니다. 신호들을 믿지 못한다면 파란 불에 직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다리가 무너져내려 앉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없이는 건너 갈 수도 없을 것이며, 과학 기술을 믿지 못한다면 비행기를 탈 수도 없겠지요.

 이렇게 모름지기 믿음은 우리의 삶의 기반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성경의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를 꺼려하며 살고 있지요.  아울러, 정작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할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믿음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사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믿음이 마치 어떤 가르침이나 교리를 이해하고 동의하는 수준의 것이라고 생각들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그것보다 훨씬 더 크고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경험입니다. 믿음은 창조의 역사의 일부분입니다. 믿을 때에 우리에게 어떠한 역사가 일어납니까? 아브라함이 믿었을 때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경은 믿음을 가졌던 자들에 대한 생애로 가득 차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들은 물을 건너기도 하고, 불 가운데서 타지도 아니하고, 죽음에서 부활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이 믿음입니다. 믿음 그 자체에 힘이 있는 것은 아니나, 그것을 통로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무엇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또 어떻게 믿는 것이 참되게 믿는 것입니까? 믿을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는 어떠한 것입니까? 이번 호에는 이러한 중요한 이슈들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주님 안에서 얻는 쾌락

질문 1 : 사단은 무엇을 미끼로 온 세상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 모을까요? 답변 : 사단은 쾌락을 통하여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지만, 돈이 쾌락을 줄 수 없다면 누가 돈을 벌려고 애쓰겠습니까? 사단은 쾌락을 미끼로 사용하여 온 세상 사람들을 미혹하여 지옥행 열차를 태우고 있습니다.

질문 2 :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통하여 온 세상 사람들을 당신께로 인도하고 계실까요?
답변 : 하나님께서도 쾌락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하늘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쾌락이 아니라 주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기쁨, 행복, 만족을 통하여 당신께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사단이 최고의 세속적 쾌락을 미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기쁨과 행복을 우리에게 맛보이심으로써 당신을 끝까지 따라오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질문 3 :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최종 목적은 무엇입니까?
답변 :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 안에서 항상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지점에까지 이르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가 주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회개하였다고 말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산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마음에 참된 기쁨과 만족이 없다면 그러한 삶은 정말 불행하고 참담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신앙 생애를 살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을 보시면서 깊은 안타까움과 슬픔을 느끼십니다.

질문 4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 안에서 참된 행복과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답변 : 물론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우리는 참된 즐거움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말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연구하고 명상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공부하고 명상하면 그분의 생애에 나타나 있는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품성을 알게 되는데,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주님께 대하여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신뢰가 생기면 드디어 우리 마음에는 조용한 쉼이 생기게 되는데, 이 쉼은 우리 스스로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난 결과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열매입니다.

질문 5 : 한 번 얻은 주 안에서의 즐거움을 다시 잃어버릴 수 있나요?
답변 :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다시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과거에 가졌던 한 순간의 영적 경험이 무조건 계속 된다는 말씀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주 안에서의 행복과 만족은 영원한 생명의 공급자이신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입니다. 한 번 주 안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얻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접촉과 관계가 지속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데, 왜냐하면 이것은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을 쉬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 어려운 일일까요? 사랑과 감사의 관계로 맺어진 부모와 자녀가 서로 계속해서 사랑하고 존경하고 희생하는 일이 어려운 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며 또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은 모든 인간이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연합을 떠나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사람은 본성적으로 누구나 자신을 만족하게 만들고 기쁘게 하는 것을 쫓아서 살게 됩니다. 쾌락을 위하여 돈을 벌고, 그것을 위하여 집을 사고, 그것을 위하여 차를 사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을 잘 아는 사단은 온 세상에 쾌락을 뿌려 놓았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보든지 자극적이고 쾌락적인 것들이 사람들의 입과 귀와 눈을 유혹합니다. 하나님과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새끼줄에 꿰인 굴비처럼 다발로 묶여서 사단이 운전하는 쾌락의 열차를 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자신이 믿고 따라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쾌락, 즉 참된 행복과 기쁨과 만족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끝까지 따라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 얼굴에는 항상 불만족이 있고, 그 눈으로는 늘 세상 쾌락을 곁눈질하며 사모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진리를 함께 붙잡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인도하는 대로 끝까지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언젠가 자신에게 더 큰 만족과 기쁨을 주는 세속적 쾌락을 붙잡기 위하여 진리를 떠나게 됩니다.

 주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참된 행복과 평화를 맛보지 못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허전한 마음을 채우기 위하여 그것을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애씁니다. 그들은 인위적으로 기쁨과 행복감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예배와 신앙을 감정적인 분위기로 이끌어가려고 하지만, 억지로 조작해 내는 흥분과 감정의 뒤에는 언제나 허무함만이 남을 뿐입니다. 아무리 손을 흔들며 찬양하고, 큰 소리로 기도를 하며, 온 몸을 격정적으로 움직이면서 방언을 한다고 할지라도 참된 평화와 쉼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인위적인 것들은 오히려 텅 빈 공허함만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신과 믿음으로 인하여 얻게 되는 마음의 평안, 마음과 영혼 속에서 세미하지만 분명하게 들리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삶 속에서 얻게 되는 만족과 행복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만들어 낼 수 없는데,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것을 얻는 즐거움과 쾌락 때문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희생을 치르게 됩니다.

 만일 우리의 자녀들이 부모인 우리가 시키는 대로 잘 따르고 심부름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며 집안 청소도 잘하는데 그들의 얼굴과 마음에 참된 기쁨과 만족이 없다면 부모인 우리의 심정이 어떠할까요? 미국 테네시 주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어린 남매를 입양했던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입양된 남매는 새 부모의 말을 너무나 잘 순종했습니다. 집안 청소에서부터 공부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습니다. 그 아이들은 단 한 번도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으며, 점심 도시락에 맛있는 반찬을 싸달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운동 경기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습니다. 너무나 말 잘 듣는 완벽한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양부모의 마음에는 전혀 기쁨과 행복이 없었는데 왜냐하면 입양된 아이들은 항상 양부모의 눈치를 살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잘못하면 자기들을 다시 고아원으로 보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 아이들로 하여금 완벽한 순종을 하도록 억압했던 것입니다. 양부모에게 있어서 그러한 모습을 보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자녀가 가정 안에서 참된 만족과 행복을 맛보지 못할 때, 부모의 마음에는 항상 그늘이 드리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산다고 말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참된 행복과 쉼을 맛보지 못한 채 성경이 말하는 순종과 절제의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하여 애쓰는 사람은 언젠가는 자신에게 더 큰 만족과 기쁨을 주는 오류와 세속을 찾아 떠나게 됩니다. 부모의 사랑을 모르는 자녀들이 부모 밑에서 고아처럼 외롭게 살 때에 그 성격이 삐뚤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와 성품에 대한 오해를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사랑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게 되어 결국에는 메마르고 삐뚤어진 신앙인이 되고 맙니다. 진리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 고아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심판과 지옥불이 두려워서 교회에 다니게 되며 하늘 아버지의 도우심 없이 모든 일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애쓰는 힘겨운 생애를 살게 됩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얼굴과 생애 속에는 언제나 어두운 그림자가 있으며, 결국에는 이런 저런 이유를 만들어서 진리를 떠나가게 됩니다. 사단과 세상이 주는 쾌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만족과 즐거움을 진리 안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위선적이고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러한 쉼은 우리를 완전한 만족과 행복으로 이끌어 가는데 바로 이것이 주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들만이 누리게 되는 특별한 쾌락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즐거움인데, 이것을 맛본 사람은 마귀와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쾌락에는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게 됩니다. 그들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을 이긴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부모의 사랑과 보호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자녀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게 될 것이며, 따라서 예수께서 이방인들의 기도라고 책망하신 그러한 기도를 하늘 아버지께 드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1~33.

 우리는 가끔 주변에서 신앙이 참 좋아 보이지만, 그 사람 곁에서 이웃으로 함께 살고 싶지는 않은 그리스도인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의 기도와 설교와 성경 이야기를 들으면 그 사람은 정말 신앙이 좋은 사람이야라는 말을 하게 되지만, 하늘에 가서 그 사람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을 생각하면 어쩐지 함께 살 자신이 없어지는 그런 그리스도인을 만날 때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고 기록했던 것입니다(고후 3:2).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그분의 편지와 같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가 되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편지로서 가족과 이웃들에게 보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사는 마을과 거리로 우리를 보내십니다. 우리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말씀하시고자 열망하십니다. 그들은 때때로 성경을 읽을지라도 성경 속에서 그들에게 말해주는 음성을 듣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천연계 속에 그려져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행복과 즐거움이 담겨 있는 마음씨, 얼굴 표정, 태도, 말씨를 통하여 예수님을 나타낸다면, 사람들은 우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결국에는 그분께서 보내시는 진리의 빛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참된 행복을 맛본 그리스도인만이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를 끝까지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의 참 행복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세
1. 작은 일에도 불평하고 불안해 함.
2. 긍정적이고 밝은 것보다는 언제나 어둡고 부정적인 것에 매달림.
3. 항상 의심의 구름 속에서 살아감.
4.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해를 품고 있음.
5. 어리석고 치졸한 농담을 멈추기 원하지 않음.
6. 다른 사람의 결점에 계속해서 매달림.
7. 앞날에 대한 염려와 걱정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함.
8. 자신의 의무를 등한히 하면서 기도와 기적에 매달림.
9. 하나님을 믿기 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신뢰함.
10. 전도하고자 하는 열정이 식음.

투병과 건강의 길

믿음을 가져야 산다.
 나는 나을 수 있다 나는 반드시 낫는다는 희망이 투병 생활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 환자는 희망을 가져야 하는데 그 희망의 뿌리는 믿음이다. 성경에 나오는 30년이 된 중풍병자도 반드시 낫는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치유함을 받았다. 만일 그가 나는 절대로 이 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어라고 믿었다면, 그는 낫지 않을 것이 뻔하니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의 믿음대로 그는 낫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너희 믿음대로 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낫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믿음의 결과대로 치유함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환자는 반드시 나을 수 있다는 믿음과 결코 나을 수 없다는 믿음 중에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한다. 만일 여러분이 환자라면 어떤 믿음을 선택하겠는가?

생명의 이치를 이해해야 산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반드시 나을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가만히 앉아서 기도만 한다면 그가 가진 불치의 병이 사라지겠는가? 그는 한동안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것이며 어쩌면 신의 존재까지도 부정하게 될지 모르겠다. 무엇이 이 사람의 문제인가?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기도하기 전에 창조주께서 인간의 몸에 새겨놓으신 생명의 이치를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생명의 이치에 따라서 자신이 잘못 걸어온 길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이치를 쫓아서 당신 앞에 나오는 환자를 축복하시고 그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일단 환자가 생명의 이치를 올바로 이해하고 깨닫게 되면, 그의 믿음은 아! 이렇게 하면 반드시 낫겠구나라는 확신에 찬 믿음으로 발전하게 된다. 생명의 이치를 깨닫고 그것에 따라서 실천하는 것, 바로 이것이 투병 생활의 핵심이다.

 그런데, 무엇이 생명의 이치인가? 몇 가지 예를 통하여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쥐에게 철분이 없는 먹이를 한동안 주어서 철분결핍증이 생기게 한 후 쥐 앞에 철분이 포함된 식초와 순수한 물을 갖다 두면 흥미 있는 장면이 나타난다. 쥐를 식초의 독한 냄새를 싫어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물을 먼저 마신다. 그러나 얼마 후에 주춤거리는 발걸음으로 식초 앞으로 다가가 식초를 마신다. 며칠 동안 철분이 포함된 식초를 마신 쥐가 일주일이 지나자 식초는 쳐다보지도 않고 물만 마시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상하게 여긴 연구자들은 쥐의 혈액을 채취하여 검사해 보았더니 철분이 정상치로 회복되어 있었다. 더 이상 철분이 필요 없으니 식초를 마셔야 하는 고통을 감수할 필요성이 없어진 것이다. 이러한 쥐의 행동은 무엇을 의미할까? 쥐는 입맛에 따라서 음식을 선택하지만 동시에 그는 필요에 따라서 음식물을 선택한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에든버러 대학에서는 돼지가 단백질이 풍부한 먹이를 먹어서 체내에 단백질이 풍부해지면 아무리 배가 고파도 단백질 성분이 들어 있는 먹이는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식초를 먹은 쥐나 단백질을 거절한 돼지 모두 자신의 체내에 어떤 성분이 부족하거나 풍부한지는 몰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이치에 따라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어떤가? 인간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우리 몸에 설계해 놓으신 생명의 이치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온갖 양념에 의해서 삐뚤어진 입맛에 따라서 살아간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세워놓으신 분명한 두 가지 생명의 이치가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는 쉼의 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에 대한 법칙이다. 쉼의 법칙이란 일주일에 하루 정해진 날에 갖는 쉼과 휴식을 통하여 몸은 그 생명력을 보충하게 된다는 법칙이다.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의 법칙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식단을 과일과 채소와 견과류로 지정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계속되는 일과 과도한 스트레스와 비정상적으로 변질된 입맛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으며, 그 결과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을 가진 질병들이 인생의 불청객으로 찾아온다.

 건강하다는 말은 우리의 세포가 건강하다는 뜻이고, 병에 걸렸다는 말은 우리의 세포가 병에 걸려서 생명력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세포가 원하고 바라는 생명의 환경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생명의 이치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어떻게 하면 세포에게 생명적 환경을 제공 할 수 있는가?
 인간의 세포는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좋아한다. 세포는 우리가 운동할 때에 활력을 얻는다. 그것은 맑은 물을 좋아하며, 따사로운 햇빛을 원한다. 맑고 깨끗한 공기가 세포에 공급되어야 하며, 적당한 휴식과 마음의 평화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신뢰가 늘 환자의 마음과 육체에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런 것들이 죽어가는 세포를 살릴 수 있는 생명의 요소들이다.

세포가 원하는 음식물 환경
 세포는 기본적으로 싱겁고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을 원한다. 그러나 잘못된 습관에 길들여진 우리의 입맛은 얼큰한 찌개를 먹고 싶다는 신호를 뇌에 계속적으로 보낸다. 짜고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계속적으로 먹는 사람들은 그 성격이 급하고 참을성이 없으며 화를 잘 내는 사람들로 변해가기 때문에 잘못된 음식물 환경은 잘못된 정신 환경을 형성시킨다. 세포가 원하는 음식물 환경을 일반적으로 건강식이라고 부르는데, 건강식의 시작은 잘못된 입맛을 버리는 것이다. 잘못된 입맛에 맞추어서 건강식을 개발해 나가는 사람은 결국에는 세포가 싫어하는 음식을 먹게 된다. 세포가 싫어하는 음식은 반드시 세포를 상하게 한다.

 아무리 좋은 것을 먹어도 그것이 지나쳐서 과식이 되면 체내에서 활성산소가 발생하게 된다. 체내에서 발생된 활성산소는 세포에 들러붙어서 세포를 산화시키는데 이것은 정상 세포를 변질시켜서 암세포를 만들어 내는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 있다. 무엇이든지 지나친 것은 세포에게 해를 가져다 준다. 지나친 운동이나 자외선 과다 노출도 활성산소를 발생시켜서 세포를 산화시키고 노화시킨다. 화를 내거나 스트레스를 받거나 걱정과 염려가 많아도 활성산소가 만들어져서 세포를 괴롭힌다. 우리 몸을 병들게 하는 대표적인 원인 물질 중의 하나가 활성산소이다. 그러므로 활성산소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활성산소를 중화시킬 수 있는 생활을 살아야 한다. 과식, 기름에 튀긴 음식물, 라면, 피자, 포테이토칩은 모두 활성산소 덩어리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활성산소를 줄일 수 있는가? 그것은 산화방지제가 많이 포함된 식품을 섭취하는 것이다. 가장 효과적인 산화방지제는 비타민 C와 베타카로틴과 비타민 E 등이 있는데, 이것은 과일과 채소, 현미와 통밀 등에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채식 생활이 세포에 건강한 환경을 제공해 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채식이 가져다 주는 또 하나의 커다란 유익은 풍부한 섬유질을 섭취할 수 있는 것이다. 섬유질은 동물성 식품에는 전혀 없는 성분으로서 이것은 마치 수세미처럼 장벽을 닦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섬유질이 없는 동물성 식품을 많이 섭취하면 장벽을 닦아줄 물질이 없으므로 장벽에 대장균이 많이 자란다. 위장에서 소화된 동물성 식품의 찌꺼기는 장의 사이사이에 끼어서 숙변으로 남게 되는데, 대장균은 바로 이것을 먹고 기생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풍부하게 섭취하게 되면, 섬유질이 대장에 들어가 장벽을 닦아주게 되고 그 결과 대장균은 자신이 먹고 살아가는 생활 터전을 잃어버리게 된다. 대장균은 갑자기 들이닥친 섬유질을 제거하려고 애쓰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부산물로 생기는 것이 탄산가스이고 바로 이것이 방귀가 되어서 배출되는 것이다. 원래 탄산가스는 무색 무취이지만 장벽에 찌꺼기가 많이 있으면 심한 냄새를 풍기게 된다. 따라서 섬유질이 풍부한 채식을 하여 장벽을 잘 닦아주면 방귀 냄새도 없어지고 변비도 말끔하게 해결될 뿐 아니라 대장암, 전립선암, 유방암, 난소암 등 고지방식사와 관련 있는 암도 예방할 수 있다. 이상적인 건강식을 정의하라고 하면 결국 산화방지제와 섬유질이 풍부한 식사로 규정할 수 있다.

세포가 원하는 운동 환경
 운동은 세포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인데,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운동부족으로 인하여 질병에 걸리고 있다. 운동을 하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현상이 에너지 발생이다. 숨이 가빠질 정도의 운동을 하면 몸 속에 남아 있는 과잉 영양분 그 중에서도 지방이 연소되기 때문에 지방으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이외에도 운동은 혈관벽에 쌓인 콜레스테롤을 긁어내거나 혈관을 유연하게 만들고 뼈를 튼튼하게 하는 등 성인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꼭 필요한 방법이다.

 운동은 규칙적으로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규칙적인 운동은 생체 리듬을 살아나게 만들기 때문이다. 며칠 운동한 다음에 며칠 쉬고 다시 얼마 있다가 다시 운동하게 되면 세포가 혼란을 느껴 리듬이 깨지게 된다. 또한 운동을 하면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과로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과로는 활성 산소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많은 양의 운동이나 격렬한 운동은 운동이 아니라 스트레스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나친 운동만큼 좋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억지로 하는 운동이다. 귀찮아서 하는 운동, 짜증을 내면서 하는 운동, 어쩔 수 없어서 하는 운동 등은 체내에서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시켜서 혈관을 좁히고 경직시켜서 혈압을 오르게 만들고 심장에 부담을 주는 등과 같은 부작용을 일으킨다. 억지로 하는 운동이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미국의 몇 개 대학이 공동으로 운동을 하면 성인병이나 암 발병률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는가를 연구하기 위한 실험을 했다. 운동을 시킨 쥐와 운동을 시키지 않은 쥐, 두 그룹으로 나누어 암 발생 여부를 밝히기 위한 실험을 했는데, 이상하게도 똑 같은 실험을 했는데 대학마다 연구 결과가 다르게 나왔다. 어떤 대학에서는 운동을 시킨 쥐가 오히려 암에 더 잘 걸렸는가 하면 또 어떤 대학에서는 운동을 안 시킨 쥐가 더 암에 잘 걸렸던 것이다. 서로 연구 결과가 상반되게 나오자 여러 차례 재실험을 하던 연구팀들은 쥐를 세 그룹으로 나누었는데, 첫 번째 그룹은 운동을 전혀 하지 않게 하였고, 두 번째 그룹은 쳇바퀴를 넣어주어서 운동을 하고 싶을 때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으며, 세 번째 그룹의 쥐들에게는 쥐를 헬스기구 위에 앉혀둔 다음 스위치를 누르면 헬스기구가 돌아가 쥐를 뛰게 만드는 그룹이었다. 그리고 이 세 그룹에게 동일한 먹이를 공급하였다. 그리고 얼마의 기간이 지난 후에 이 세 그룹의 쥐들에게 모두 발암물질을 주사하였는데, 결과는 두 번째 그룹 즉 자유롭게 운동을 한 쥐들의 암 발병률이 가장 낮았고, 운동을 전혀 하지 않은 첫 번째 그룹의 쥐들의 암 발병률이 가장 높았다. 이 실험으로 밝혀진 결론은 운동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성인병과 암 발병률이 낮출 수 있다는 것이고, 운동을 하되 억지로 하는 것보다는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이다.

 가장 생명적인 운동은 자연을 즐기면서 자유롭게 하는 운동이다. 살을 빼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하는 운동은 그저 근육운동일 뿐 세포에게 생명적 기쁨을 주지는 못한다. 숲길을 산책하고 길에 핀 꽃을 즐기며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노래하며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을 세포에게 제공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최고의 운동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이 불가능하면 집 안에서 또는 헬스 클럽에서 규칙적으로 운동해야만 한다. 먹고 사는 일이 너무 바빠서 운동할 수 없다는 말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삶이 바빠도 내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하루에 20분 내지 30분을 투자할 여력이 없다면 그런 삶은 매우 위험한 삶이다. 운동은 생명을 생명답게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고 평생의 건강을 지키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생활이다.

1부 - 믿음이란 무엇인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고 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을 가지고 믿는 사람이 매우 적은 것 같다. 그 이유는 진정한 믿음의 실체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은 막연해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실제적인 질문이다. 왜냐하면, 올바른 믿음을 가져야 구원의 역사가 우리 생애에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진정한 믿음은 우리를 구원해줄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생애에 역사하는 산 능력이 되어 죄를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한다.  믿음에 관하여 연구하는 것은 다른 어떤 지식을 얻는 것 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진정한 믿음에 대하여 알아야 그것을 체험할 수 있고, 그런 체험을 하는 사람만이 결국에는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번 호 신앙 기사는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하여 엮어 보았다. 독자 여러분들의 믿음을 북돋우는 유익한 기사가 되기를 바란다. - 편집실 -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며 예수님을 믿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모른 채, 또 실생활에서 직접적인 믿음을 경험하지 못한 채, 막연하게 교회만 다니고 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에서 주님이 믿음에 대해서 너무나 분명하게 말씀하셨지만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무작정 교회만 타성적으로 다니는 교인들이 많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성경에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들을 찾아 보면서 진정한 믿음이란 어떤 것인지 연구해 보자.

1). 다만 말씀만 하옵소서
 어느 날 어떤 백부장이 예수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6-10).

 여기에 예수님께서 믿음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이 진정한 믿음인 것은 조금도 의심 할 여지가 없는데, 왜냐하면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백부장이 나타낸 것을 믿음, 곧 큰 믿음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볼 때, 믿음은 어디에 있었는가? 백부장은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는 주님께서 그 일을 해주시기를 원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하셨을 때에 백부장은 그것을 막으면서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주님의 말씀대로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백부장은 무엇이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는가? 다만 말씀으로만 하셔도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그의 하인을 치료하기 위하여 오직 무엇에만 의존했는가? 다만 말씀에만 의존하였다. 그러자, 주 예수님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씀하셨다.

2).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그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속에 믿음을 넣어 주기 위하여, 말씀 그 자체 안에 그 말씀이 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성경이 시작되는 맨 처음 장, 창세기 1장은 우리에게 믿음을 가르치는 말씀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믿음을 분명하게 깨우쳐 넣어주는 일곱 구절의 분명한 말씀이 있다. 사람들에게 믿음을 넣어 주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하는 바를 스스로 이룬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면 성경절을 읽으며 공부해 보자.

1. 하나님이 가라사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어떻게 창조하셨는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시 33:6-9).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는 없었지만, 말씀하시니 이루었다. 단지 말씀만 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이루어지게 했는가? 오직 말씀이 그것을 이룬 것이다.

 처음에 이 세상에는 흑암이 모든 깊음 위에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빛이 있기를 원하셨다. 모든 것이 완전히 흑암이었을 때 어떻게 빛이 있을 수 있게 하셨는가?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빛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이 빛을 창조하셨다. 주의 말씀을 열므로...(빛이) 비취(시 119:130)었다.

 둘째로 궁창을 만드실 때, 그때는 공중이 없었는데 하나님은 궁창이 있기를 원하셨다. 어떻게 궁창이 있게 되었는가? 하나님이 가라사대 궁창이 있어...그대로 되니라. 그대로 되니라는 말의 다른 번역은 이렇게 되었느니라이다. 무엇이 궁창을 있게 하였는가? 무엇이 궁창을 이렇게 있도록 만들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에 말씀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자체가 이것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뭍이 있기를 원하셨다. 이 뭍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게 되었는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을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그 다음, 세상에는 채소와 과목이 없었다. 이것들은 어떻게 생기게 되었을까?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그대로 되니라)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뭍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그대로 되니라) 이와 같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만물이 창조되었다. 그는 말씀만 하였으며 그대로 되었다.

2.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하나님의 하신 말씀자체가 만물을 창조하였다. 이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구속 사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오로지 말씀으로 병자를 치료하셨고, 마귀를 쫓아 내셨고, 태풍을 잔잔케 하셨고,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였으며,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죄를 용서하셨다. 이 모든 일에서도 역시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라는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 언제나 창조주이시며 언제나 말씀으로만 모든 일을 하신다. 그리고 언제나 거의 말씀으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특성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하신 일을 스스로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창조의 능력이 들어있으므로, 그 말씀이 말씀하시는 일의 실상을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자체 안에 창조의 능력이 있으므로, 만일 창조의 능력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고, 볼 수도 없는 것들을 창조하여, 존재하도록 하고 볼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 일을 하도록 기대하는 것이며, 그 일을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다만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이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알 수 있다.

3. 모든 것을 이루는 말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사람은 말을 할 수는 있으나 그의 말에는 말한 일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말한 일을 이루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말만 하면 안 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다른 어떤 일을 부가적으로 해야 하며, 그의 말을 실행하기 위해서 어떤 행동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 말씀하신 일이 실재로 존재한다. 단순히 그가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말씀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성취시킨다.

 주님은 사람이 하는 것처럼 말씀한 것을 이루기 위해 다른 어떤 일을 행해야 할 필요가 없다. 즉, 그의 말씀에 어떤 능력을 더하여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다. 그는 말씀만을 하실 분이며 그러면 그 일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것은 단순히 거짓말하기를 원하시지 않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또 거짓말을 하실 수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시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 하신 말씀 속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어서 다만 말씀만 하면 말씀하신 그대로 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시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하신 미래에 다가올 일들에 대한 성경의 예언을 보면, 어떤 때에 해당하는 말씀을 하셨을 때에 그때가 실제로 이르러 오면 그 말씀이 성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그때에 성취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 말씀 외에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어떤 일을 행하시기 때문이 아니고, 그때를 위하여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며, 그 말씀 속에 창조의 능력이 있어서 그때에 말씀하신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때문이다.

2부 - 말씀을 믿은 믿음의 사람

 성경은 믿음을 가지고 실천한 사람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조상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 대하여 기록한 것은, 믿음이 무엇이며, 믿음은 그 믿음을 가진 자에게 무엇을 행하게 하는가를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성경은 그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아브라함은 팔십 세가 넘었고 그의 아내 사라도 늙었으나 아이가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 15:5)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창 15:6)셨다.

1. 처음에는 믿음이 없었던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에 의지하여 그 말씀하신 일을 기대하였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그러나 사라는 그의 기대를 하나님의 말씀에만 두지 않았다. 아이를 낳기 위하여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창 16:2).

 그 순간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신뢰하는 믿음에서 벗어져 나갔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끝까지 바라고 의존하는 대신 사라의 말을 들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아이가 태어나기는 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사라에게 만족스럽지 못했고, 그로 인하여 너무 많은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자신이 만들어서 생긴 일을 거절하였다. 하나님께서도 이 일을 거절하시고 사람의 계획대로 태어난 아이를 약속의 후손으로 삼지 않으셨다.

 그런 후에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시고 약속하신 후손을 통하여 그를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는 일과 약속하신 후손과 언약을 세우는 일에 관하여 계속 말씀하셨다. 또 사래의 이름을 사라로 바꾸셨다. 왜냐하면 사래도 약속하신 후손을 통하여 열국의 어미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창 17:15-21)라고 말씀하셨다.

2. 믿음을 배우게 됨
 이 모든 어려운 일과 고난들을 통하여 아브라함과 사라는 약속을 이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데에 있어서 오직 그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배웠다. 사라는 그의 계략은 단지 불화와 고통만을 가져오고, 약속의 성취를 지연시킬 뿐이라는 것을 배웠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사라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확고하게 붙잡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러므로 이제 그 모든 계략을 버리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지금 아브라함은 아흔 아홉 살이 되었다. 그러므로 말씀의 성취가 어느 때보다도 더 요원한 것같이 보였으나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을 의존하고 보다 큰 믿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였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그대로 믿는 것 외에는 다른 무엇을 의존할 것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그 말씀하신 바를 이루시도록 완전히 그 말씀에 매달렸다. 그들 자신들의 모든 행위와 책략과 계획과 노력을 버리고 그 말씀하신 일을 이루시도록 하기 위하여 오직 믿음에 의지하고, 오직 말씀에 매달리고, 완전히 그 말씀에만 의존하였다.

 그때, 오직 말씀만이 역사할 길이 밝히 열렸고, 그 말씀이 능력으로 역사하여 약속하신 자손이 태어났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씀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히 11:11). 그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히 11:12). 이와 같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그에게 하신 말씀이 성취가 되었다.

 이것은 믿음을 가르친 성경의 교훈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믿음을 기르는 필요성을 강조하는 교훈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것을 아브라함에게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로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 4:23-25).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갈 3:9).

 자신들의 모든 행위와 책략과 계획과 노력을 거부하고 인간적으로 완전히 무력한 가운데서 그 말씀하신 일을 이루도록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는 사람들은 모두 믿음에 속한 사람들이며, 믿음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하나님의 의로 복을 받을 사람들이다. 믿음을 행사하는 법을 아는 것 이것이 복음의 과학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의 과학은 과학중의 과학인 것이다.

3. 믿음의 시험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스마엘을 낳게 하였던 모든 불신의 계획을 완전히 청산하고 오직 믿음 위에 서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했을 때에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태어났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을 들었을 때에는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노선과 참된 믿음에서 벗어났었지만, 이제 그들은 오직 말씀과 참된 믿음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는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진실한 말씀을 신뢰하여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이 이삭을 얻었다. 그러나 이제 이삭을 얻었으나 이삭까지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는가 하는 시험이 주어졌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 22:2).

 아브라함은 오직 말씀만을 신뢰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이삭을 받았다. 이삭만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약속하신 자손이었다. 이삭이 태어난 후에 하나님은 그 말씀을 확증하시면서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창 21:12)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이르러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얼마 전에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할 것이며,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고 하셨으며,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창 26:4)고 하셨는데, 지금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니!...
 만일 이삭을 번제로 드려 불사른다면 그를 통해서 모든 민족을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은 어떻게 될 것인가?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무수하게 많을 것이라는 약속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전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고 이스마엘을 버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정도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고 이삭을 버려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해야만 하는 것이다.

4. 말씀을 신뢰한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면서 이삭을 드렸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씨라고 칭하리라고 약속하신 이 말씀들을 조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이 말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그가 아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이것을 알았을 때, 그는 그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을 따랐으며, 이런 말씀의 조화나 설명이 꼭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을 믿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으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겠다! 전에 내가 하나님의 약속에 관여하여 방해가 되었지만 나의 모든 주장을 버리고 오직 말씀으로만 돌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약속의 자손 이삭을 주셨다. 그런데 이제 약속의 자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신다. 이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겠다! 또 그는 이렇게 덧붙였을 것이다.
기적으로 이삭을 주신 하나님이 기적으로 그를 다시 살려주실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를 번제로 바칠 때에 그는 죽을 것이다. 그때에 그를 다시 돌려주실 수 있는 기적은 오직 그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시는 기적인데,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그렇게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할 것이며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자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삭을 다시 살리는 일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행하신 일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겠지... 나의 몸과 사라의 몸이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삭을 낳을 수 있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이삭을 다시 살리실 수 있고, 또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이다! 여호와를 찬양하자!

5. 승리한 아브라함
 이제 그의 마음은 정하였다. 아브라함은 일어나서 종들과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을 향하여 사흘 길을 갔다. 사흘째 되던 날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창 22:4,5). 누가 갈 것이라고 했는가? 내가 아이와 함께...가서. 그러면 누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했는가? 내가 아이와 함께...가서...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아브라함은 이삭과 함께 간 것처럼 꼭 그와 함께 돌아올 것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고 그 다음에 이삭이 잿더미에서 살아나 함께 돌아갈 것을 기대하였다. 왜냐하면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자손이라 칭하리라 또는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했다. (히 11:17-19).

 이것이 믿음이다. 그러므로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다 (약 2:23).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뢰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가져다 주는 믿음이다. 이것이 믿음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을 행사하는 법을 깨닫는 것, 이것이 복음의 과학이다. 당신은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3부 -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믿음을 의로 여기시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사실 요즈음 기독교에서 말하고, 또 가르치고 있는 믿음과 믿는다 것의 정의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개념과 다르며, 많은 차이가 있다.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함께 연구하여 보자.

1). 의를 창조하여 주심

 성경에는 믿음의 의,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하여 자주 나온다. 우리는 어떻게 믿음의 의를 얻는가? 어떻게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으며, 그 말의 뜻은 무엇일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또는 믿음의 의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고, 오직 그 말씀이 그 말씀하고 있는 일을 이루기를 기대함으로 의롭게 되는 의를 말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믿는 믿음에 의하여 얻는 의를 말한다.

 태초에 창조하실 때에 말씀하시매 이루었다. 그러므로 다만 말씀으로만 하신 이 같으신 분이 또한 말씀으로 하나님의 의를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다.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세워 만물이 생기고 존재하도록 하는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오직 말씀만 하시면 만물이 존재하였다. 인간이 재창조를 받는 구속에서도 똑같다.

 인간에게는 의가 없다. 인간은 그의 생애에 나타날 수 있는 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의를 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세우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말씀으로 캄캄한 흑암 같은 인간의 생애에 의가 있게 하셨다. 믿음으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세계를 존재하게 하신 것처럼, 그 말씀이 약속하신 바를 믿는 사람들의 생애에 의를 창조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고 의존함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의롭게 되었음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롬 5: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의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만 하는 사람, 즉 입으로 믿는다고 시인하면서, 하나님께 100퍼센트 자신을 바치지 않은 사람을 의롭다고 하실까? 즉, 믿는다고 말만 하면서,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면서, 마음이나 행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믿음을 나타내지 않는 사람들을 무조건 의롭다고 해주시는 것일까? 어떻게 거짓말 하실 수 없는 분이 의롭지 않은 사람을 의롭다고 칭하실 수 있으실까?

2). 칭의: 의롭다는 칭함을 받음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을 아니 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세우셨으니...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 4:5, 3:22,25).

 이 말씀을 믿는 데는 믿음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경건치 않다는 것을 믿고 시인하는 것까지는 매우 쉬운 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의롭게 해주신 것은 믿지를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엄청난 믿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의롭다 하신 것을 믿을 수 없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너무나 경건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이 너무 경건치 못하여 의롭다 함을 발견할 어떤 가능성과 희망을 발견할 수 없을 때에 바로 거기에서 믿음이 생긴다. 정말로 믿음이 들어올 수 있는 지점은 오직 그곳뿐이다. 자신을 의지할 만한 모든 근거가 없어지고, 또 없어진 것을 인정할 때에, 그리고 눈에 보이는 모든 일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을 때, 바로 그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면서 오직 하나님의 약속, 곧 말씀에 자신을 맡길 때에 믿음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우리는 우리의 속절없는 상태를 깨닫고, 성경에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으면서 의 (義)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때에, 우리의 죄를 가져가시고, 죄 대신에 하나님의 의(義)를 주신다. 이 하나님의 의는 선물이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지었으므로 깨끗하게 되려면 완전히 값없이 용서를 받아야 한다. 죄의 용서 - 죄 대신에 주시는 하나님의 의 - 는 거저 주시는 것, 곧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 (롬 5:18)게 하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는 모든 사람은 오로지 용서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믿음은 말씀에서 말하는 바를 이루도록 완전히 말씀만을 신뢰하는 것이며, 이와 같이 의는 전혀 믿음에 속한 것이다.

 이 믿음은 바로 우리 자신, 곧 너무나 죄되고 연약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고 회개하게 하며 굴복하게 한다. 그리고 이렇게 온전한 회개와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굴복하는 일을 하게 될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칭함 (칭의) 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의롭다고 해 주시는 방법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온전히 값없이 그리고 확실하게 의롭게 만들어 주시고 의와 구원을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3). 성화: 진정한 믿음은 의롭게 사는 것

1. 의롭게 하는 믿음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존하고, 의롭게 해주시겠다는 말씀을 믿고, 회개하고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므로 의로운 사람이라는 칭함을 받는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고, 끝이 아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될 뿐만 아니라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곧 우리가 의롭게 된 후에도 의롭게 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롬 1:17). 하나님의 말씀(복음)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완전히 믿을 수 있을 만큼 그 속에 의가 있는가? 그렇다. 복음에는 의롭게 살게 하시는 능력이 들어 있다. 다음의 성경절을 보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로마서 1:16).

 복음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두나미스인데, 그 뜻은 영어로 다이나마이트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성경 로마서에서 복음을 능력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복음은 구원을 가져다 주는 능력이다.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게 되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받아들이게 되면, 그 말씀, 복음은 능력을 가졌으므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도 받아들이게 되어, 그 능력으로 죄를 다스리고 이기는 생애를 살게 된다는 말이다. 즉 의로운 생애를 살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말씀과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받아들인다는 뜻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신 능력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의 능력이다. 복음의 능력 =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 창조의 능력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그가 이기신 것처럼 이기게 되는데, 그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만일 우리가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게 한다면, 그리고 예수께서 우리의 마음에 계시면서 그의 일을 하신다면, 우리는 모든 죄를 승리할 수 있고 의롭게 살게 되는 것이다. 칭의를 가능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은 동시에 성화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역사, 칭의와 성화가 모두 하나님의 선물임을 충분히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복음이 전적으로 인간 속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공로임을 깨닫게 된다.

2. 의롭게 만드심
 앞에서 살펴 보았던 칭의에 대한 사실을 짚어보며 구원의 역사에 대하여 다시 살펴보자. 죄인이 자신을 예수님께 바치고 그분을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온전히 회개할 때, 과거의 생애가 그때까지 아무리 죄로 가득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롭다고 간주해 주신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은 그의 성품을 대신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 죄 지은 일이 없는 사람처럼 가납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 있는 사람을 깨끗하다고 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만일 그분이 그렇게 하신다면 공의로운 하나님이 되실 수 없으시다. 그러나 그분은 그보다 훨씬 더 좋은 어떤 일을 하신다. 그분은 죄 있는 사람이 깨끗하게 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죄를 제거하신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그러므로 그는 죄를 결코 짓지 않은 사람처럼 간주된다.

 스가랴 3:1~5절에 나오는 더러운 옷을 벗기는 것의 의미는 그 사람에게서 죄를 제거한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의의 옷을 입혀 주실 때, 죄 있는 옷을 그냥 두신 채, 그 위에 의의 겉옷을 입혀주시지 않고, 먼저 입고 있던 죄의 옷을 벗기신다는 것, 치워버리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죄의 용서가 형식 이상의 어떤 것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죄의 용서와 더불어 죄책감에서 깨끗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것은 죄책감에서 깨끗하게 될 뿐 아니라, 의롭다 하심을 받고, 정당하게(의롭게) 되며, 근본적인 변화 - 죄의 용서에 더하여, 새로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 혹은 새로운 거듭남이라는 놀랍고도 기적적인 변화 - 를 수반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곧 믿음으로 받는 의롭다 하심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롭다 하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 성취한다. 믿음으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은 전에는 아무것도 없던 그 사람 안에, 그 생애 안에 의를 산출 해낸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새 마음을 창조 받게 되는 것이다. 새롭게 거듭난 사람은 마음속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죄를 미워하고 악한 것을 싫어하는 새 생활을 살게 되며, 비록 연약하여 쓰러질 때도 있지만, 죄를 다시 지을 마음이 없어지며, 죄를 품을 마음 또한 없어지는 것이다.

4). 계명은 순종할 수 있다
 구속의 능력은 창조의 능력과 같다는 것을 우리는 앞에서 배웠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는 포로의 길로부터 구출하여 자신을 순종의 길에 세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참된 의롭다 하심 안에 작용하는 믿음은 역사하는 믿음(행하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성품의 사본인 거룩한 계명을 순종하는 일에 조화되고 일치되는 효과가 따르지 않는다면 그 속죄는 진정한 속죄가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참된 화목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계명을 계속 불순종해도, 소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라는 식의 잘못된 믿음은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롭다 하심과, 믿음과, 창조와 구속의 능력을 모두 곡해하였기 때문이다.

 의롭다 하심은 계명과 관계가 있다. 그 말은 의로움을 만든다는 뜻이다. 로마서 2장 13절을 보면 누가 의로운 사람들인지 알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그러므로 의로운 사람은 율법을 행하는 자이다. 의롭게 (just) 된다는 것은 옳게(의롭게, righteous)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의로운(옳은) 사람은 율법을 행하는 자인 이상, 한 사람을 의롭다고 하는 것, 즉 그를 의롭게 만든다는 것은 결국 그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고 행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단순히 믿음으로 율법을 행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그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의 실수를 보기 좋게 겉치레 하여, 그가 사실은 악할지라도 의롭다고 간주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오히려 그분이 그 사람으로 율법을 행하는 자로 만든다는 뜻이다. 즉, 그리스도는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그의 마음속에 거하시고 함께 사셔서 매일 의롭게 살 수 있도록 해주신다.

5). 계명을 지키는 것은 무거운 일인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계명을 지킨다는 표현을 매우 율법주의적인 표현으로 생각하며, 또 아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본다. 우뢰의 아들이라고 불리웠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사랑의 사도로 변한 사도 요한은 계명을 지키는 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개심의 경험을 한 후, 신실한 사도가 된 저 유명한 바울은 로마서 13장 10절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했다.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 예전에 하던 일들을 그대로 좋아 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사람이, 아직도 원수를 갚고, 복수하는 일을 좋아하고, 교만과 자랑하기를 좋아하고, 질투와 모함하는 일을 좋아하고, 세속과 쾌락을 사랑하는 일이 가능한 것일까? 말씀으로 의롭게 된 사람, 즉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새 마음을 받아 새롭게 태어난 사람은,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하신 사랑이 거하고, 또 그 사랑이 매일 풍성하게 흘러나와 저절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 있는 계명을 지키게 된다. 물론 믿음의 장성함에 이르는 분량에 있어서는 매일 더 자라나야 하겠지만...  의롭다하심을 얻은 사람은, 그 마음속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의 능력으로 매일 악한 것을 이기고, 자신을 쳐서 복종하고, 그 대신 그 마음속에 예수님의 충만하신 사랑이 거하므로, 그 사랑은 그 사람의 생애에서 율법의 완성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4부 -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복음에 관하여 말씀하려고 하는 모든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다.

 복음은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나 다만 모든 믿는 자 들에게만 구원을 주는 능력이 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완전한 성품이며, 계명이다. 모든 불의는 다 죄이며 불법이지만, 복음은 그 죄를 치료하는 하나님의 치료제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과 조화를 이루도록 역사하며, 그들의 생애에서 의로운 율법이 나타나도록 해준다. 그리고 앞에서 배운 대로 이 역사는 모두 다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믿음으로 믿음에이르면서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마치면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 어느 시대에나 항상 같은 진리이며, 하나님의 성도들이 그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하나님을 직접 만날 때까지 변함이 없을 진리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오직 믿음으로만 사는 것일까?

1) 거듭남을 가능케 한 믿음으로 거듭난 후에도 계속 살라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지난 날의 생애의 죄에 대하여 용서를 받고, 그 용서를 받은 믿음의 확신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으며 그리고 이 용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일단 그리스도인의 생애의 경주가 시작되면 그 때부터는 그들 자신의 힘으로 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뜨겁고 확신에 찬 개심의 경험을 하지만, 신앙 생활이 계속되면서 신앙은 그들에게 무거운 것이 되고 만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처음 믿었을 때에 있었던 과거의 체험이나 기쁨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러나 현재 나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기쁨이나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그들은 너무나 빨리 신앙의 경험을 잃어버리고는 그 빈 자리를 그들의 행위로 채우려고 노력하므로, 신앙 생활은 그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무거운 짐이 된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에 많은 헌금을 드리는 일, 선교 활동과 봉사를 하는 일, 그 외의 많은 교회의 행사와 활동들로 그들의 공허한 신앙의 빈자리를 메꾸려고 노력한다.

 사도 바울은 이 믿음의 문제를 분명하게 영광의 나라와 연결시키면서 아주 힘있는 실례를 들어 말하고 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5,6). 에녹은 믿음으로 옮기워졌는데, 그 이유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는 증거를 받았기 때문에 옮기어졌던 것이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에녹은 거듭난 후에도 계속 똑같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행위를 하나도 할 수 없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선한 행위라도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완전한 의에 전혀 이를 수가 없다. 참된 믿음을 가졌다면 그것은 매우 귀한 일이다. 그러나 과거에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무리 좋았을지라도, 그 믿음이 은혜의 시간이 마치기까지, 곧 그 생애가 끝날 때까지 계속 증가하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다.

2) 하나님을 계속 신뢰하라
 많은 사람들이 의롭게 사는 것이 어렵다고들 말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애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실패로 얼룩져 있기 때문에 자포자기하고 싶은 생각을 한다. 그들이 실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구나 계속 실패하면 실망할 수 밖에 없다. 세상에서 아무리 용감한 군인이라 할지라도 만일 그가 싸움터에 나가서 계속 싸움에 지기만 한다면, 낙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무능함을 보고 한탄하면서 나는 나 자신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불쌍한 영혼들이 전혀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저희 자신을 능히 구원할 수 있는 분,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한다면, 전혀 다른 말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롬 5:11)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비록 시험과 고난을 당하고 있는 중에라도,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신뢰와 패배의 가련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이다.

3) 승리하게 하는 믿음을 가지라
 최후에 받을 행복에 대한 모든 약속은 이기는 자들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시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계 3:21).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계 21:7)고 말씀하셨다. 이기는 자는 승리를 얻은 자이다. 그러므로 이 승리는 지금 있어야 한다. 우리가 얻어야 할 승리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대한 승리이며, 우리 자신과 자기 방종에 대한 승리이다.

 이러한 원수와 싸워서 이길 때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 아무도 그가 기뻐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원수가 굴복하는 것을 볼 때에 기쁨이 마음에서 저절로 솟아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계속 자아와 세상 정복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두려움으로 바라본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까지 승리의 기쁨을 전혀 알지 못하고, 실패만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 승리할 때에 계속 싸운다는 것은 결코 슬픈 일이 아니다. 모든 싸움에서 승리한 백전 노장은 싸움터에 나가기를 원한다. 알렉산더의 군사들은 그의 지휘 아래서는 패배를 몰랐었기 때문에, 항상 앞장 서서 싸움터로 나아갔었다고 한다. 승리할 때마다 의기충천하여 힘이 더욱 생겼고, 이와는 반대로 패배한 적은 의기소침하여 힘이 더욱 없어졌었다.

 그러면 영적인 싸움에서는 어떻게 하면 계속 승리할 수 있을까? 사랑의 제자 요한의 말을 들어보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다시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 보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믿음은 승리하게 한다.

4) 능력의 비결
 그렇다면 무엇이 승리하게 하는 능력의 비결인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고, 그 능력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만일 그가 우리의 마음에 계시면서 그의 일을 하신다면, 계속 승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믿어야 한다. 이것은 자랑할만한 일이 아닌가? 시편 기자는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시 32:2)라고 말했고, 바울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라고 말했다.

 알렉산더의 군대는 백전백승의 군대로 생각되었다. 왜 그러했는가? 그것은 그들이 원래부터 그들의 모든 적들보다 더 강하고 용맹스러웠기 때문이었는가? 아니다. 그들이 알렉산더의 지휘를 받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힘은 알렉산더의 지도력에 있었다. 그들이 다른 사람의 지도하에 있었다면 자주 패배했었을 것이다. 유니온 군대가 윈체스터에 있는 적 앞에서 벌벌 떨면서 패주하고 있을 때에 쉐라론 장군이 나타나서 그들의 패주를 승리로 이끌었다. 만일 그가 없었더라면 그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는 폭도들에 불과했을 것이지만 쉐라론 장군이 진두 지휘하면서부터는 무적의 군대가 되었다. 전쟁 후에 그러한 장군의 지휘하에서 싸웠던 병사들은 기쁨이 충만하여 입이 마르도록 그들의 장군을 찬양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그 장군이 있었기 때문에 강했고, 그 장군과 같은 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의 대장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모든 원수의 두목을 만나서 한 손으로 정복해버리신 분이다. 그러므로 그를 따르는 자들은 싸움터에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겨야 할 것이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믿고 신뢰할 것이며, 그 후부터는 계속 승리를 하면서 그들을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하신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신 분의 아름다운 덕을 찬양할 것이다.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믿음을 통하여 세상을 이긴다고 말한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팔을 붙들면, 그의 크신 능력이 그 일을 한다.

 아무도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 안에 어떻게 역사하고,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이룬다는 것을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 안에 어떻게 역사하고,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이룬다는 것을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어떻게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 오히려 쉬울 것이다. 예수님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 3:8)고 말씀하셨다. 성령이 어떻게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욕심을 극복하고 자만심과 시기심과 이기심에 대하여 승리하게 되는가 하는 것은 성령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우리로서는 이미 이 일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 무엇보다도 이 일이 이루어지기를 믿음으로 바라고 원하는 모든 사람 안에서 이루어질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히 11:30).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12). 하나님의 은혜는 영적인 싸움에서 우리에게 강력한 능력이 된다. 옛날, 믿음의 조상들이 믿음으로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육적인 원수들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그러나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가장 놀랍고 용기를 주는 것은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히 11:33,34)라는 말씀이다.

 그들의 약함은 바로 믿음을 통해서 그들에게 능력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송사할 것인가?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5,37).

 

5부 - 그대는 물 위를 걸을 수 없는가?

1). 물 위를 걷는 믿음
 그대는 물 위를 걸을 수 없는가? 물론 그대는 걸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대 스스로 걸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대가 물 위를 걸을 수 없다고 믿는 그 믿음이 그대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그대는 예수께서 그대에게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실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새벽 미명의 갈릴리 바다를 살펴보자. 희뿌연 회색 빛을 뚫고 다가오는 희미한 존재가 있다. 배 위에는 무서워 떨고 있는 열두 명의 남자들이 있다. 그때, 파도를 가르며 상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니 두려워 말라! 갑자기 생기를 얻은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만일 당신이시거든 나로 물 위를 걸어 당신께 가게 하소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라. 베드로는 차갑고 시퍼런 파도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과 예수님과의 거리를 측정해 보았다. 그는 생각하기를,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 어떻게 물 위를 걸어. 그는 망설였다. 순간적으로 의심이 그를 삼키어 버렸다. 지금까지 어떤 사람도 물 위를 걸었던 적이 없었어.

이 장면은 베드로에게 일어난 사건이었다. 만일 베드로가 파도 위로 그의 발걸음을 내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가 물 위를 걷는 장면을 통해서 믿음에 관한 놀라운 교훈을 배울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2). 길들여진 가짜 믿음
 서커스단에서 길들여진 코끼리는 어릴 때부터 쇠사슬에 묶어 놓는다고 한다. 한쪽 다리를 얇은 쇠사슬에 묶여 자유스럽게 다니지 못하며 자란 코끼리는 커서 거대한 코끼리가 되어도 한쪽 다리에 얇은 쇠사슬만 묶어 놓으면 아무데도 가지 못하고 그 한 곳에만 매여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코끼리는 모든 구속력, 즉 울타리와 쇠사슬을 극복하고 도망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소유하고 있지만, 자신이 그런 일을 결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도록 어릴 때부터 길들여져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커서도 쇠사슬과 말뚝을 힘없이 뽑아버리고 달려나갈 수 있지만, 그렇게 하기엔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힘이 너무나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에 있어서 코끼리는 쇠사슬과 말뚝에 의해서 구속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에 의해서 구속 당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작고 연약한 쇠사슬과 말뚝이 코끼리의 자유를 빼앗은 것처럼, 그들의 삶에 있어서 반신반의 하는 믿음으로 인해서 죄에 대한 승리를 빼앗기고 있다. 다음에 서술하는 한 사람의 경험은 자유를 빼앗긴 코끼리의 모습을 우리에게 연상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나는 20살이 채 되기 전인 소년기에 침례를 받았는데, 그 당시 나는 매우 신실하여서 100%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원했었다. 나는 다니엘서까지 연구를 했으며, 그 공부는 예수님에 관한 믿음과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 수 있는가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나의 이름은 교회의 녹명책에 기록되었으며, 자아와 죄에 대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사단의 강력한 동맹자인 자아와 죄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나의 결심을 쉽게 허물어뜨렸다.

 환멸과 실망이 그 뒤를 이어서 찾아왔다. 나의 젊은 시절 동안, 나는 계속 교회 안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 동안 나의 실망과 좌절의 곡선은 위 아래로 오르내렸다. 어떤 때는 심하였고, 어떤 때는 약하게.... 그러나 여전히 나는 신실하였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나의 소원은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신학교의 학생이 되었고, 후에 목회자가 되었다. 내가 성경을 연구할 때에 때때로 나는 모든 죄를 정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았지만, 유혹에 대한 만성적인 패배감으로 인한 고통과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의 신앙 상담에서 들은 말 - 죄, 즉 이기심, 질투, 불인내 등등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까지 우리 생애에서 계속될 것이라는 위로의 말 - 은 죄를 승리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스스로 합리화하도록 확신시켰다.

 나는 마음속으로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가운데 최선을 다하여 투쟁하겠다고 결심했지만, 실제적인 생애에 있어서 죄에 대한 충실한 승리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쇠사슬은 만들어졌으며, 말뚝은 땅에 꽂혀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죄에 대한 승리를 약속하는 성경절들을 읽었지만, 그 약속의 글은 오히려 나를 혼돈케 만들었으며, 결국에는 그 글이 말하고 있는 바는 다른 의미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승리의 가능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성경의 글들은 자유를 약속하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있는 믿음일지라도 죄를 승리하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나의 신조에 의해서 나는 묶여지고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었다.

3). 지식보다 먼저 가는 믿음
 다시 처음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물 위로는 걸을 수 없다고 단정지었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나도 걸을 수 있다는 충분한 증거를 보았을지라도, 나는 그것들을 믿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약속과 증거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과거의 나의 육적인 경험을 통하여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었기 때문에.... 나는 성경의 약속과 증거보다는 내 자신의 경험과 신조를 더욱 신뢰하였다. 오랜 후에 많은 연구와 갈등을 거쳐 진리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을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믿음이 지식을 앞서간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만일 베드로가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행함으로써 믿음을 활용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지식을 소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믿음을 실행에 옮김으로써 지식을 얻게 되었다. 인간의 마음은 이와는 다른 길을 요구한다. 인간은 항상 먼저 나에게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어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증거를 주겠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성경을 통해서 되풀이되고 있는 장면이다.

 성경을 보면, 두 명의 눈먼 자들이 예수님을 소리질러 부르며 따라왔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마태복음 9:27). 예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그들에게 치유를 베풀기 전에 그분께서는 그들의 믿음에 대한 확신을 이끌어 내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상동 28절).

 한번은 귀신들린 소년의 아버지가 예수께 나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마가복음 9:22) 라고 말하는 가운데 자신의 가진 의심을 드러내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믿음이 부족함을 보여주시면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 (상동 23절) 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의심이 자기 아들을 치유 받지 못하게 하고 있음을 깨달은 소년의 아버지는 열정적인 갈망으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상동 24절) 라고 예수께 외쳤다. 그 장면에서 믿음이 포기되거나 취소되었다면, 예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행사하실 수 없으셨을 것이다.

6부 - 오라!

 오라! 만일 주님이시거든 내게 물 위를 걸어 오라고 말씀하소서. 베드로의 호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허락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오라!

 예수께서는 그 이상의 어떤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있을 만한 확신을 주시지 않으셨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의존하여서 확신을 이끌어내야만 하였다. 거룩한 확신이 가득 찬 주님의 명령은 베드로에게 영감적인 확신을 불러일으켜 주었으며, 그리하여 베드로는 신속하게 순종하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주 사용하시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그것은 자주 구체적이 아닌 부르심으로 우리에게 들려온다.

1). 명령으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이제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산중에서 내가 네게 알려 줄 한 산에서 그를 번제로 드려라 (창 22:2). 이 성경절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을 만한 내용이 담겨져 있을 뿐이다.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없다.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마 4:18,19). 이것이 그 사람을 부르신 말씀의 전부이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마 9:9). 여기서는 오직 두 단어만을 말씀하셨다.

 38년 동안, 한 앉은뱅이가 베데스다 연못으로 매일 들려져 왔는데, 그는 연못이 요동칠 때에 치유를 얻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요 5:6-9). 잠시 후에 그가 자신을 고쳐준 사람을 찾아보니, 예수께서는 이미 자리를 피하신 후였다. 이 모든 경우들을 보면, 예수께서는 그분에 대한 믿음을 활용해서 그분의 명령을 수행하도록 각 사람들을 남겨둔 채 그 자리를 떠나신 것을 알 수 있다.

2). 믿음을 요구하심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이러한 예화를 생각해 볼 때,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큰 믿음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떤 사람도 경험한 적이 없는 불가능한 행동을 당신의 제자인 베드로에게 요구하셨던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길을 쉽고 평탄하게 만들기 위해서 어떤 특별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앞서 보았던 것처럼, 그분께서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어떠한 확신을 주는 언급도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의 생명을 취하지 않으시겠다고 미리 보장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마태에게 먹고살 만한 적당한 수준의 월급을 지급하겠다는 보증을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의도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믿음을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요구하셨는데,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을 충족하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전적인 헌신과 굴복을 해야만 했다.

 그분의 명령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길고 구체적인 설명을 포함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직접 귀로 들을 수 없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그것은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영혼을 울리는데, 그 소리는 흔들리지 않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매우 조용하고 은은하게 우리의 귀를 울린다. 우리가 이러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될 때, 우리는 아브라함, 베드로, 안드레, 마태, 중풍병자, 그리고 바울처럼 주님의 말씀에 즉시 순종하여, 배에서 내린 다음 물 위를 걸어야 한다.

 주님께서 조용히 나를, 또는 그대를 찾아와서 나를 따르라!고 지금 말씀하신다면, 그대와 나는 그분의 말씀을 믿고, 굴복하여, 순종하겠는가? 바로 이러한 것들이 주님께서 그대와 나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이다. 믿음과 헌신, 또는 굴복은 결과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믿음은 그대가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의탁할 수 있는 그분께 대한 전적인 신뢰인데, 그것은 굴복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대가 믿음이 있다면, 그대는 굴복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그대가 굴복한다면, 그대는 더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계속적인 굴복없이 계속적인 순종을 주장할 수 없다. 굴복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3). 믿음은 순종을 통해 나타남
 베드로의 믿음은 그의 순종에 의해서 시험 받았다. 믿음은 언제나 순종을 통해서 시험 받는다. 사실, 참된 순종만이 참된 믿음을 시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다음과 같은 올바른 지침을 말할 수 있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런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뇨? (야고보 2:14). 야고보의 질문에 대한 답은 결코 못한다 이다. 야고보는 또 다시 다음과 같은 도전을 던지고 있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상동, 8절). 야고보는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행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믿음과 굴복의 결과로서 나타나게 되는 행함과 순종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의혹이나 타협하는 일 없이 당신께 순종할 수 있는 충분한 확신을 소유하기를 요구하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에 대한 증거들을 보여주시고, 들려 주신다. 당신을 찾고자 하는 자들이 그분께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풍성한 증거들을 주신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위를 걸으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우리의 눈 앞, 또는 우리의 손 안, 또는 우리의 발 아래와 같이 가까운 곳에서 항상 확실한 증거들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우리가 순종할 때만 그러한 증거들을 받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베드로가 실제로 물 위를 걸었을 때까지 그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보증을 받았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뢰할 만한 명령인 오라!라는 말씀의 증거 외에 어떤 다른 증거도 없었다. 가끔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에 대한 완전한 신뢰심을 가지고 물 위를 걸을 것을 요구하시는 데에는 오직 한 가지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물 위를 걷지 않는다면, 우리의 발 밑에서 느껴지는 물을 결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순종을 통한 경험에서 우리로 하여금 귀중한 체험을 소유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순종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경험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뢰와 믿음을 더욱 더 깊고 높은 수준으로 이끌어 간다.

4). 순종을 통해 시험을 받음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단순한 마음의 동의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행동인 순종을 요구하신다. 또한 그러한 행동을 하는 데에는 믿음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한 행동을 하는가 또는 하지 않는가에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한 개인의 믿음의 상태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가끔 어떤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죄에 대해서 승리하기를 소원하며, 믿음과 평화와 사랑 같은 거룩하고 영적인 요소들을 소유하기를 원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러한 것들을 소유하게 되는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주여, 나로 하여금 물위를 걸어 당신께 가게 하소서 라고 입으로 외치고 있지만, 주님께서 오라!고 명령하시는 호소에는 결코 응답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지만, 배 위를 서성거리면서 불분명하고, 두려워하면서, 의심을 품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 안에서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을 찾으려고 하지만, 자신 안에 그러한 원천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은 우리 자신의 능력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결코 물 위를 걸을 수 없다.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근거로 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부르심과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원천을 제공해 주시는 그분을 온전히 신뢰함으로써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순종에 의해서 시험 받게 된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가 무슨 말로 변명할지라도 믿음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디트리취라는 사람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할 수 있고,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음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요구하신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오직 믿음이 있는 자만이 행할 수 있는 순종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으로 행하는 순종만이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하였다. 그와 같은 믿음이 없이는, 그는 파도 위에 서있는 그분을 신뢰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은 너무도 바보스럽게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때 그가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내었을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직 믿음으로 행하는 순종만이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서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게 해준다.

 로마서 8:2~4 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는 순종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다. 더 높은 법에 의거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인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없도록 하였던 물의 수압에 대한 물리적인 법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다. 세상에서 인정받고 있는 보편적인 수압의 법칙에서 해방된 자들만이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율법이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육신으로 보내어 물 위를 걷게 하셨다. 그리하여 우리도 그분처럼 물리적인 수압의 법칙이 아닌 하늘의 믿음의 법칙에 의거하여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불가능한 것을 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

 영적인 경험에 있어서 우리는 물 위를 걷지 못할 뿐만 아니라 확신을 잃어버리고 아예 배를 포기하고 떠나려고까지 한다. 우리는 즉시로 죄의 물결과 싸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미 그러한 죄의 물결을 감당할 만한 믿음이 없다. 우리가 이러한 상황과 상태에 처하게 될 때,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한다. 죄를 완전히 정복한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이야. 물 위를 어떻게 걸을 수 있겠어? 그리하여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고자 할 때, 우리는 계속해서 물속으로 빠져들어갈 수 밖에 없다. 너희의 믿음대로 될지니라라는 주님의 말씀은 그런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사상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데, 그것은 순종에 관한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지만, 순종을 위한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가 할 수 없는 모든 일을 해주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베드로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것이라도 그를 대신해서 해주시지 않았다. 베드로는 스스로 배에서 뛰어 내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고, 계속해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물의 부력을 전혀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 믿음을 근거로 해서 베드로를 위해서 일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5). 믿음은 언제나 물 위를 걷는 것
 베드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현실화하였다. 그는 그 이전이나 후에 어떤 사람도 하지 못했던 것을 성취했다. 그는 세상에서 인정하는 과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절대 불변의 물리적 법칙에 대항하여 걸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도 물 위를 걸을 수는 없다. 수력학 법칙은 인간이 물 위를 걷는 것을 절대적으로 금하고 있다.

 무엇이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하였을까? 조그만 개구리의 무게조차도 가라앉아 버리는 물의 표면 위에서, 성장한 인간의 무게를 버티게 하였던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에 대한 대답은 믿음이다. 믿음이란 자신의 확신이 이루어내는 자기달성이 아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소유하는 완전한 확신인데, 이것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적을 창조해 내시는 것이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에게 불가능한 것을 행하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물 위로 걸어서 당신에게 가도록 명하여 주십시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면, 그는 아직 그리스도인의 참된 생애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 속에서 불가능한 것들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사람은 아직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리스도인 생활이 단순히 종교적인 형식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일종의 자아훈련을 통해서 그것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활은 전혀 실질적인 그리스도인 생애가 아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마음속에 내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모든 죄와 악한 것을 이기고 정복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진실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께 다음과 같이 호소하는 것이다. 주님, 나를 명하사 물 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님, 저는 저의 생애에서 죄를 극복하기를 원합니다. 저는 질투심, 원망, 분노, 조절되지 않는 식욕, 그리고 원한을 버리기를 원합니다. 저는 이 지긋지긋한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는 제 자신의 힘으로 물 위를 걷기를 원하지만, 제 스스로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를 주님께 가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오라! 이런 소원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항상 오라! 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지만, 이러한 호소를 주님께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 없이 물 위를 걸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그대는 그리스도 없이 물 위를 걸을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