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의 황금의 수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지혜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세상과 우주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법칙을 따라서 순종하며 살고 있다.

 하늘에 날아다니는 예쁜 새들, 그리고 땅위에 기어다니는 곤충들, 심지어 수풀 속의 나뭇잎이나 풀잎사귀까지도 하나님이 창조의 법칙을 따라 서로 베풀며 산다. 꽃들은 향기를 내며 그 아름다움을 펴서 세상을 행복하게 하고, 태양은 무수한 세계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그 아름다운 빛을 보낸다.

 모든 샘물의 근원이 되는 바다는 강물들에서 흘러오는 물을 받고 있지만, 그것은 다시 주기 위하여 받는 것이다. 바다의 표면에서 증발되어 올라가는 수증기가 다시 비가 되어 땅에 떨어지는 것도 땅을 적시어 곡식을 싹트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고... 이렇듯 자연계는 하나님의 정확한 사랑의 법칙을 따라 순종하며 순환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신비한 세계를 더 자세히 연구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아름다우신 하나님에 대하여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식물에 나타난 황금의 수
 우주와 천지만물이 마치 지적 설계자에 의해 창조된 거대한 컴퓨터 프로그램 같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황금의 수(golden number)를 연구해 보면 확실해 진다. 파이(phi)라고 알려져 있는 이 황금의 수는 기하학의 아버지인 유클리드(Euclid)에 의해 약 B.C. 300 년 경에 처음 계산되었다. 이것은 한 선분이 동일하지 않은 두 개의 선분으로 나뉘어질 때, 전체 선분에 대한 긴 선분의 비율과 긴 선분에 대한 짧은 선분의 비율이 똑 같은 비율로 나뉘어질 때 나타난다. 유클리드는 두 선분의 길이의 비(ratio)를 1.6180339887...으로 계산했다. 그런데 이 비율은 신기하게도 모든 자연계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한 가지 예로 해바라기 꽃을 살펴보면, 해바라기 꽃의 씨는 시계 방향과 반시계 방향의 나선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서로 얽히면서 교차하고 있다. 해바라기 씨가 꽃의 중심을 향하면서 서로 감겨질 때, 한쪽 방향으로 감겨지는 씨앗의 수와 다른 방향으로 감겨지는 씨앗의 수 사이에는 특정한 비율을 가지고 있다. 미국 볼티모어에 있는 우주 망원경 과학 연구소의 과학 부장이자 천체 물리학자이며 황금의 수에 대한 주도적인 전문가인 리비오(Mario Livio) 박사는 말하기를, 놀랍게도 식물들에 나타난 비율을 계산해 보면, 그것들은 황금의 수인 파이 수와 같다라고 했다.

 1837년, 식물학자 루이스는 새로운 잎이 줄기에서 돋아날 때, 그 잎은 파이 수에 의해 결정된 특정한 각도에서 자란다는 것을 발견했다. 리비오 박사는 이것에 대해 파이 수에 의해 결정된 각도에 따라 잎들이 배열됨으로써, 그 잎들은 거의 겹쳐지지 않으면서 가장 유효한 방식으로 공간을 채울 수 있게 된다 고 했다. 이런 것을 보면 작은 이파리에까지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공식과 법칙이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동물계와 은하에 나타난 황금의 수
 동물계는 어떨까? 동물계에도 황금의 수가 적용될까? 황금 직사각형(golden rectangle)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황금의 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데, 황금 직사각형의 세로에 대한 가로의 비율도 파이 수와 같다. 만일 계속해서 황금 직사각형 안으로 점점 더 작은 황금 직사각형을 만들어서 어떤 점들을 연결시키면, 대수 나선(logarithmic spiral: 17세기 수학자 버놀리가 발견함) 이라고 불리는, 안으로 향하는 곡선을 얻게 된다. 주변의 한 점에서 대수 나선 위의 어떤 점까지 직선을 긋는다면, 그 선은 항상 정확히 같은 각도로 곡선을 가로 지르는데, 이런 것들은 모든 자연계에서 나타나고 있다.

 듀크 대학교의 생물학자인 터커(Vance Tucker)는 수년 동안 매(falcon)를 연구해서 매가 비스듬히 날며 비행할 때, 사냥감을 향해 똑바로 급강하하기 보다는 약간의 곡선궤도를 따른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곡선 모양의 하강은 버놀리의 대수 나선과 일치한다. 이에 대해 리비오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자연은 대수 나선을 너무나 좋아한다. 앵무조개(nautilus)의 껍질에서부터 허리케인, 나선은하(spiral galaxies)에 이르기까지, 자연 현상 속에서 대수 나선은 쉽게 발견된다. 앵무조개의 경우, 그것은 성장해가면서 생겨나는 자연적 무늬 (pattern)인데, 그 무늬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황금 비율은, 13세기 이탈리아 수학자인 피보나치(Fibonacci)에 의해 발견된 유명한 일련의 수인 피보나치 수열 (Fibonacci sequence)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피보나치 수열은 정확히 해바라기 씨의 비율과 일치하는데, 이 수는 황금 비율로서, 자연계나 동물계에는 어디에나 나타나는 수이다. 동물계에서는 이 수가 동물 세포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단백질 폴리머로 이루어져 있는 속이 빈 원통형 튜브인 미소관(microtubules)에 나타난다. 그것들은 함께 모여 세포골격(cytoskeleton)을 유지하는데, 이 구조는 세포의 모양을 결정하고, 일종의 신경세포처럼 작용한다. 포유류 동물의 세포에 있는 미소관은 전형적으로 13개의 기둥(columns)으로 되어있는데, 우선형의 5개와 좌선형의 8개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5, 8, 13 등은 모두 피보나치 수이다).

 또 우주의 많은 은하들에도 이 수가 적용되는데, 은하의 나선 팔(spiral arms)들도 대수 나선에 가깝다. 이렇게 동물계, 심지어 인체에까지 이 비율들은 나타나 있다. 그래서 과학자들과 수학자들은 모든 자연계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는 이 놀라운 황금 비율을 보며, 이 세상은 우연히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질서와 조화의 우주(Cosmos) 라는 거대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창조하신 지적인 설계자가 계시다는 강력한 증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꽃보다 아름다운 하나님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에 나타나 있는 그분의 수와 법칙은 신기하다. 이런 황금의 수를 연구해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일정한 법칙 없이 그냥 되는 대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법은 사랑의 법이다. 햇빛을 향하여 꽃잎을 펼치는 아름다운 꽃들, 하늘을 수놓는 빛나는 별들은 모두 하나님의 법칙에 순종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꽃이나 별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은 다만 자신을 위해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밝고 즐겁게 해주는 아름다운 삶을 살라는 것에 있음을 가르쳐 준다.

 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품성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하신다. 꽃을 그처럼 아름답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그리스도의 품성의 아름다움으로 옷 입기를 더없이 바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생애가 꽃처럼 매력을 풍기는 아름다운 것이 되기를 원하시며, 또 우리들의 본성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으로 변화되어 그분의 아름다운 품성과 조화될 수 있기를 원하신다.

 아름다운 꽃을 따 모을때, 우리는 꽃을 만드신 분은 꽃보다 더욱 아름다운 분이심을 생각해야 하리라! 그리고 모든 자연계를 만드신 데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법칙이 있음을 생각해야 하리라!

 황금의 수의 비율은 신기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생각하게 해주고, 또 아직 하나님의 성품과 조화되지 않는 우리들의 어그러진 성품의 부조화를 깨닫게 해준다. 하나님의 정확한 수의 배열을 따라 돋아나는 새싹이나 나뭇잎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의 법칙을 따라 순종하며 살 수는 없는 것일까?

권두언

강병국 목사
 계시록은 닫힌 책이 아니라 열린 책입니다. 그 제목부터가 그렇게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마치 요한계시록은 이해하기 어려운 닫힌 책처럼 생각하며 지내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해서 주시려고 계획하신 하나님의 크신 축복들을 잃어 버리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계시록에는 일곱이라는 숫자들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숫자는 영적 의미를 가지고 존재하지요. 예를 들자면 3은 완전한 연합을 뜻하는 것이고(삼위 하나님), 12는 완성되었다는 의미의 숫자이며(12지파, 12사도, 12문), 7은 완전하다는 뜻을 가진 숫자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에는 일곱이라는 숫자를 가진 예언들이 등장하는데,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우뢰, 일곱 재앙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것은 완전하게 계획하여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들을 나타내는 것들이지요.

 그 중에서 일곱 교회의 예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부터 역사적으로 존재해 온 일곱 시대의 교회들에 대한 예언들입니다. 각각 그 시대마다에 존재해 온 교회들의 영적인 형편과 그 위험, 그리고 충성됨과 배도함들을 미리 예언하여 주어서 하나님의 참 백성들이 혼돈에서 피하여 진리에 충성하며 살도록 도와주며 또한 낙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진 예언입니다. 우리는 이 일곱 교회의 예언을 살펴 보면서 현재 우리들의 교회의 자화상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속성과 죄의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죄된 인간의 역사는 항상 같은 모습으로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 지난 역사가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번 호는 계시록의 일곱 교회들에 대한 예언을 다루고 있습니다. 각 시대마다의 교회들의 형편이나 역사들도 알아야 하겠으나 그러했던 교회들의 형편들에서 우리가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할지가 더 중요한 것이지요. 그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현재 우리 시대의 교회들의 모습 속에는 지난 역사의 교회들의 모든 배도와 타협들, 아울러 그 신실함과 충성심, 더 나아가서는 핍박하는 모습들까지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다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대 교회는 지난 일곱 교회 예언의 완결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번 호의 기사들이 여러분들께 큰 깨우침을 드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왜 그들은 구원받지 못하였는가?

 잃어버린 양에 대한 비유는 예수께서 두 무리를 앞에 두고 말씀하신 비유이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눅 15:1~4. 예수님 앞에 앉아 있는 한 무리는 세리와 죄인들이었고, 다른 한 무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다. 당시 유대인의 사회에서 멸시 받았던 세리와 창기들에게는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 영혼의 절규가 있었다. 목자이신 예수께서는 바로 그들을 잃어버린 양으로 표상하여 이 비유를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고통 가운데서 울부짖는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세리와 창기들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수 있는 형편 가운데 있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수 없는 형편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알려 주고자 하셨다. 그들은 진리의 빛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한 생애를 보고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자존심과 세속적 이기심을 버리고 싶지 않아서 그리스도께 마음을 열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세리와 창기를 멸시하였지만, 세리와 창기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은 그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아들이셨으며 비록 그들이 유대 교회로부터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자들로 취급을 받고 있었지만, 하늘 아버지의 마음에는 단 한 번도 잊혀진 바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불행과 죄가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동정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나 교단으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느냐는 것은 하나님께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그분을 향한 간절한 마음과 자신이 범한 죄로 인하여 두려워하는 영혼의 상태와 간절한 마음으로 구원을 향하여 뻗은 떨리는 손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죄에 대해서는 너희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진노하였던 예수께서 세리들과 창기들의 죄에 대해서는 오히려 깊은 동정을 나타내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비유의 말씀을 듣고 있던 두 무리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을 모두 구원하시기 원하셨지만, 한 무리는 구원하실 수 있으셨고 다른 한 무리는 구원하실 수 없으셨다. 한 종류의 사람들의 죄는 진노의 대상이 되었는데, 다른 종류의 사람의 죄는 오히려 동정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두 종류의 죄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죄를 세리와 창기의 죄와 분명히 다르게 취급하셨다. 죄는 다 똑 같은 죄인데 왜 이 두 무리를 다르게 취급하셨을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요한복음 9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요 9:41. 예수께서는 모든 인류의 죄를 소경된 자의 죄와 본다고 하는 자의 죄로 구별하여 취급하신다.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범하는 잘못은 죄가 아니지만, 본다고 하는 상태에서 범하는 잘못은 분명한 죄가 된다. 분명한 빛을 받고 양심에 호소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하는 알고 범하는 죄와 부족한 빛과 성령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한 상태에서 범하게 되는 모르고 범하는 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인간의 눈과 판단으로는 이 두 종류의 죄를 정확하게 구별하기란 매우 어렵지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살펴보도록 하자. 누가복음 23장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기도가 나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눅 23:34~37.

 누가 보더라도 이것은 정말 두려운 죄다! 메시야를 십자가에 달아 놓고 조롱하는 자의 죄에 참여한 자들에게 얼마나 큰 형벌이 떨어지겠는가!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중보하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군중들은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 엄청난 죄가 사함을 받을 수 있었을까?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그들의 죄를 소경된 자의 죄로 인정해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군중과 폭도들의 죄는 알지 못하고 범한 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인지 몰랐으며 무지하게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된 인도를 따랐을 뿐이고 마귀와 그의 악한 천사들이 그들 속에서 섞여서 선동하였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폭도들과 군중들을 위하여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중보 기도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공정하고 은혜스러운 분이시다!

 그렇다면 알고 범하는 죄는 무엇인가? 어떤 경우의 죄가 알고 범하는 죄가 될까? 이 문제 역시 성경에 나타난 예를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2,23.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소위 본다고 하는 자들이다. 진리에 대한 분명한 빛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권능을 행하던 자들이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직분과 권능을 행하였지만, 그들은 삶 속에서 빛을 거절하고 양심 속에서 호소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던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죄는 알고 범하는 죄가 되었고 예수께로부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두려운 선언을 듣게 되었다.

알고 범하는 죄의 심각성
 하나님께서는 보지 못하는 자의 죄와 본다고 하는 자의 죄를 분명하게 구별하신다. 아담과 하와는 본다고 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사전에 하나님과 천사들에게서 선악과에 대한 충분한 교훈과 경고를 받았다. 그들이 선악과 앞에서 마귀의 유혹을 받았을 때 그들의 머리 속에는 하나님과 천사들로부터 받았던 경고의 말씀들이 정확하게 기억났으며 성령께서 그들의 양심 속에 따 먹지 말라는 분명한 음성을 들려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하기로 결정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죄의 책임을 물으셔야만 했고 그 결과 단 하나의 알고 범한 죄로 인하여 그들은 의의 옷을 잃어버린 채 에덴동산을 떠나야만 했다. 알고 범하는 죄란 진리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본다고 하는 자가 지적으로 영적으로 분명하게 유혹을 인식한 상태에서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면서 죄를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위 본다고 하는 자가 알고서 죄를 범하거나 품고 있을 때 그것은 매우 심각하고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알고서 범하는 단 하나의 죄로 인하여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 알고 있는 한 가지 죄를 그대로 품고 있을 때 그것은 성령의 증거하는 음성을 잠잠케 하고 영혼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잃어버린 양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울부짖는 자와 같이 겸비한 영혼들을 항상 죄에서 분리시키시고 구원하신다.

 사실 죄를 범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데, 왜냐하면 우리의 죄된 본성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끌고 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로 물든 더러운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죄를 짓는 일에는 분명한 핑계가 있다. 그러나 성경은 각 시대마다 이기는 자들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선언하고 있으며(계 2장과 3장),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3절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다. 죄를 범하는 일에 핑계가 있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 모두의 앞에는 십자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창에 찔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범하고 성령의 뜻을 거절하고 있으면서 구원과 은총을 계속해서 누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죄짓기를 중단해야만 한다는 감동을 강력하게 받게 된다. 십자가를 제외한 채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복음을 말하고 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죄에 대한 핑계는 매우 큰 설득력을 얻게 된다. 십자가를 빼놓은 상태에서 죄와 의에 대한 논쟁을 하면 오히려 죄에 대한 신학적 핑계만이 잔뜩 생길 뿐이다. 그러나 나 때문에 창에 찔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의를 말하고 복음을 말하게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죄에 대한 승리를 말하게 되고, 죄를 모두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게 된다. 십자가 없는 죄의 문제와 십자가 없는 의의 문제는 우리를 아무리 애써도 실패와 좌절로 끝나는 율법주의로 이끌거나 아니면 죄를 붙들고 살면서도 자신은 여전히 구원받았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바벨론의 복음으로 유도한다.

기대와 상식을 뒤엎은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과 기대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만다. 랍비들과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처럼 경건하고 신앙이 좋아 보이던 사람들에게는 화 있을진저라는 정죄가 내려지고, 부적절한 이성관계를 가지고 있던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이나 세금을 착취하던 세리 삭개오, 부정한 여인 막달라 마리아, 로마 군인이었던 백부장, 그리고 어떤 귀신들린 자에게는 구원이 놀랍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비웃고 조롱하던 군중들의 죄는 간과하심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권능을 행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는 두려운 선언이 내려졌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도 도무지 구원하실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많은 진리와 빛을 받은 본다고 하는 자가 지적으로나 영적으로 분명하게 유혹을 인지하고 성령의 경고를 들으면서도 죄를 범하기로 선택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죄들로 자신의 생애를 채워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구원하실 수 없으시다. 그들의 신앙은 종교적 허식과 의미 없는 의무로 채워져 있을 뿐 하나님을 향한 울부짖음도 없고 양심의 가책으로 깊은 밤 고뇌하지도 않는 자들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영적으로 교만하여지고 무감각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당연히 구원받을 것으로 기대되던 다수의 바리새인과 랍비들이 구원을 잃어버렸고, 도무지 구원을 쳐다보지도 못할 창기와 세리 같은 소수의 사람들이 오히려 구원받았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마지막 시대에도 비슷한 역사가 반복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소수가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경고해 주셨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 18:8.

 주께서는 마음이 겸비한 자들을 통하여 일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학위나 학력보다는 오히려 성령의 은혜를 받음으로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신앙과 기도의 사람들은 거룩한 열심으로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옛날 어부들을 당신의 제자들로 부르셨던 것처럼 당신의 사업을 위하여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 남녀 종들을 일으키실 것이다. 우리가 볼 때에는 풍성한 알곡만 보이던 마당에서부터 쭉정이들이 구름처럼 바람에 불려 나갈 것이다. 우리가 그 휘황찬란한 빛 때문에 존경해 온 많은 별들이 그 때에는 어둠 가운데로 사라질 것이다. 그분께서는 멸망해가는 영혼들에게 마지막 경고의 음성을 주기 위하여 다른 직업을 가진 자들 가운데서 사람들을 부르실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될까? 진리의 말씀에 따라서 성화된 신앙이 아니라 감정적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다. 감정적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매우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요구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포기하지 않는 신앙을 말한다. 양심에 호소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구원받은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는 신앙이 감정적 신앙이다. 대개 감정을 중요시 여기는 신앙은 하나님의 진리와 계명의 요구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내게 개인적으로 말씀해 주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그대로 가겠다 라고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사단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이 원하는 감정과 기적을 줌으로써, 그들에게 감정적 만족감과 구원에 대한 거짓 확신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장 가난하고 부족하지만 가장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느끼게 된다. 그들은 부도덕과 불법 속에서도 구원에 대한 안전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들은 결국 자기 스스로를 완벽하게 속이게 되어 하나님께서 도무지 구원하실 수 없는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유대 교회의 경건하게 보이던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잃어버렸는데, 왜 세리와 창기와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세리나 창기와 같은 가난하고 애통하는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께서 찾아오셔서 구원해 주시는 잃어버린 양들이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복을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그리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이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수 있는 자들이다.

암과 생명의 법칙

 암에 걸렸다고 하면 흔히들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도대체 암이란 어떤 종류의 질병이길래 죽음을 가져오는 불치의 병이라고 말할까? 정말 암에 걸리면 죽을 수밖에 없는가? 암과 생명의 법칙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나면 그것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길이 보인다.

 우리 몸 속에 있는 정상적인 세포들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번식해 나가고 있을 뿐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존재한다. 콩팥 세포는 독소를 걸러내는 일을 하고 간 세포나 갑상선 세포도 몸 전체의 건강을 위하여 자신의 소임을 다한다. 그러나 암 세포는 이와 다르다. 암 세포는 몸 전체를 위하여 일하는 대신에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고 일한다.

 과학자들은 정상 세포들 사이에서 서로 대화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정상 세포를 배양 접시에서 배양시키면 세포가 성장하고 분열하여 접시의 가장 자리에 닿으면 성장을 멈춰버린다. 이때 접시의 가장자리에 닿은 세포들만 성장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배양접시에 있는 세포 전체의 성장이 멈춘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까? 왜냐하면 정상 세포들 사이에는 서로 서로 대화가 항상 진행되기 때문에 그렇다. 서로 의식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고 있기 때문에 성장 분열을 해도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방향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층이 생긴다. 그러나 암 세포는 전혀 대화를 나누지 않으며 독불장군처럼 산다. 그래서 성장하고 분열을 해도 가지런한 층을 이루지 못하고 서로 엉키는 덩어리가 된다.

 정상세포는 영양소의 밸런스가 정확하게 맞아야 살지만, 암 세포는 영양소의 밸런스가 정확하게 맞지 않아도 살 수 있다. 정상 세포를 배양할 때 영양소의 밸런스를 깨뜨려서 불균형한 상태로 영양을 계속 공급하면 결국에는 정상 세포가 변질되서 암 세포가 생겨난다. 주변에 발암 물질을 놓아 둔 것도 아니고 발암 주사를 주입하지도 않는데 단순히 밸런스가 맞지 않는 영양소를 공급하면 그 결과로 암 세포가 발생된다.

항암 인자와 암
 암 세포가 증식하여 덩어리를 이루더라도 아직까지는 양성 종양 상태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요소에 의하여 사망적 자극을 받아 상태가 계속 악화되면 결국에는 세포가 완전히 미쳐버리고 항암 인자가 없어지게 된다.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항암 인자가 살아 있는 동안은 아무리 유전자가 두세 개쯤 변한다 해도 세포는 여전히 양성 종양 상태로 머물러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단 항암 인자가 없어지고 나면 드디어 악성 종양으로 바뀌고 만다. 항암 인자는 불균형한 영양 섭취나 과식, 스트레스, 홀몬의 과다한 상태에서도 세포들이 일정한 법칙들을 지킬 수 있도록 유지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암이란 결코 운이 나빠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항암 인자가 두손 들고 포기할 만큼 세포를 학대하고 힘들게 만드는 환경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주위 환경, 음식물, 스트레스 그리고 삶 전체가 항암 인자가 지쳐서 자신의 역할을 포기하고 사라질 정도로 고문을 가해야만 악성 암이 생기게 된다. 항암 인자가 없어지기 전인 양성 종양 상태로는 암 세포는 절대로 다른 조직으로 옮겨지지 않는다.

암을 다스리는 방법
 처음에는 한 개의 세포가 암으로 변하지만 나중에는 두개 세개로 늘어나면서 자라기 시작한다. 암세포의 성장은 어떻게 생활하는가에 따라서 그 속도가 달라진다. 암세포에게 유리한 환경이 되면 급속하게 증가하지만 자신이 도무지 성장할 수 없는 환경이 되면 한 곳에 쳐박혀 꼼짝도 하지 않음으로써 성장이 중단된다. 처음에 암 세포로 변한 세포들은 다른 기관으로 퍼지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암을 진단해 낼 수 없다. 암이 의사에게 진단될 수 있기 까지는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린다. 유방 속의 세포 한 개가 성장 분열하여 악성 유방암으로 발전한 후 암 전문의에게 진단을 받기까지 8년 내지 1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가게 된다. 간암의 경우 진단을 받을 만큼 자라려면 10년에서 2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한번 악성 암으로 변질된 세포는 결코 회복될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아무리 나쁘게 변한 세포일지라도 좋은 환경이 제공되면 다시 정상 세포로 되돌아 간다! 그것이 창조주께서 인체 속에 새겨 놓으신 생명의 법칙이다. 그러나 무조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 유전자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생명적 환경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태쥐에 관한 다음과 같은 시험은 유전자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회복의 법칙을 잘 나타내 준다.

 태쥐에 대한 실험 : 태쥐란 어미 쥐의 자궁 속에 있는 아직 태어나기 전의 쥐를 말한다. 태쥐를 어미 쥐의 자궁 밖으로 내놓으면 아무리 환경을 잘 조성해 주어도 태쥐의 세포들은 암 세포로 변질된다. 그런데 변질된 이 암 세포들을 다시 자궁 속으로 이식하면 암이 없어진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유전자는 이렇게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영향을 받고 또한 적응하기 위하여 변한다. 암으로 변질된 세포도 어머니의 뱃속이라는 생명적 환경 속에서 정상 세포로 되돌아 오는 것이 생명의 법칙이다.

암이 커지는 것을 막는 방법
 암이라고 할지라도 퍼지지 않는 암일 때는 별로 위험하지 않다. 암을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한다면 생명을 위협하지 앉는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세포를 계속해서 괴롭힌다면 암은 심각한 상태로 발전되어 퍼지는 종류의 암으로 변한다. 8년 동안 간 세포에 암이 자라고 있다고 해보자. 비록 간에 암이 8년 동안 자라고 있다고 할지라도 아직 의사가 진단할 수 있는 크기는 아니다. 어떤 현대 의학의 설비라고 할지라도 8년 동안 자란 간 세포의 변질을 찾아낼 수는 없다. 그러나 환자 본인은 어느 정도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마음 속에서몸이 좀 이상하다. 피곤하다. 힘들다라는 작은 목소리가 들려옴에도 불구하고 생활과 습관을 바꾸지 않으며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임 세포는 사망적 환경 속에서 계속 커지고 변질되어 퍼지는 암으로 그 성질이 바뀌게 된다.

 만약 암 환자가 생명의 법칙에 맞게 생활한다면 인체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 놀라운 일이 생긴다. 지금까지는 암 세포를 발견하고도 피곤하고 힘이 없어서 공격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면서 피해다니던 백혈구와 T 임파구와 엔케이 셀 등의 세포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그들은 암 세포를 찾아다니면서 그것들을 죽이는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인체의 면역 시스템이 다시 강력한 일을 하기 시작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퍼지는 종류로 변질된 악성 암 세포도 안 퍼지는 암 세포로 환원될 수 있고 안 퍼지는 암 세포는 정상 세포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바로 이것이 유전자 속에 하나님께서 넣어두신 생명의 법칙이다.

 물론 면역 기능이 다시 정상적으로 가동되기 위해서는 천연적인 음식물과 깨끗한 물, 공기 그리고 적당한 운동과 같은 생명적인 환경이 제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과 함께 꼭 주어져야 할 생명적 환경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적 에너지이다. 마음의 화평과 감사와 사랑과 용서의 정신이다. 우리의 몸이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생명적인 환경 속에 놓이게 될 때 세포에는 급속한 치료가 일어나게 된다. 건강한 삶을 살라! 건강한 음식을 섭취하라!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마음의 모든 걱정과 화와 스트레스를 해결하라! 그리하면 하늘이 정하신 치료의 법칙이 그대 속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1부 - 일곱 교회 예언 공부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신다. 그것이 때로는 경고의 말씀으로, 또는 사랑과 위로의 말씀으로, 예언으로 역사를 통해 배우게 하시는 교훈의 말씀으로 성경에 나와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에게 예언을 통하여 사랑의 메세지를 보내신다. 예언을 연구할 때에, 우리는 미리 예언된 일들이 이루어지는 예언의 성취를 보므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더 확고하게 되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이 구원 얻기를 매우 갈망하시기 때문에, 예언을 통하여 그분의 사랑의 메세지를 보내시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시며 경고해 주셔서 영생과 구원을 위하여 준비하게 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의 예언은 당시의 교회에 적용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더 적용이 되며, 더 많은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일곱 교회의 예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가 무엇인지, 또 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예언은 어떤 영적인 교훈을 주고 있는지 조명해 보았다. 필독을 바란다. - 편집실 -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는 일곱 교회에 대한 예언이 나온다. 이 예언은 사도 교회부터 예수 재림 직전의 마지막 교회까지의 일곱 시대의 교회의 형편을 예언한 것이다. 이 예언은 각 시대마다의 교회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는데, 이 일곱 교회의 이름은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이다.

 요한계시록은 약 A.D 100년경에 기록되었는데, 이 일곱 교회는 그 당시에 소 아시아(지금의 터어키)에 있었던 교회들이었다. 그 당시 통신 수단이었던 로마의 우편 마차를 위하여 원형을 그리고 있었던 도로(하이웨이)에 일곱 교회의 이름의 순서대로 일곱 도시가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그 도시들의 형편과 교회의 형편은 그 후에 존재한 역사적인 일곱 시대의 교회들의 형편들과 너무나 흡사했다.

 정말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계시를 받아 그 교회들에게 차례로 편지를 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이것은 또한 미래 시대의 교회들을 위한 예언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계시록은 특별히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는 교회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마지막 시대의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를 위하여, 즉 우리들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계시록의 예언들은 마지막 시대에 와서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성취되고 있기 때문이다.

1). 일곱 교회의 예언
 소아시아 지방에 있던 일곱 교회에게 보내어졌던 서신은 각 시대에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기록되었던 그리스도의 기별이다. 일곱 교회에 대한 예언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마지막 시대의 재림 때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를 말한다. 요한이 그의 서신을 보내기 위해서 이용하였던 로마제국의 우편물 운송 하이웨이는 그리스도 교회가 지나게 될 시간의 하이웨이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적합한 상징적 표현인지 모른다.

 로마제국의 우편물 운송로를 통하여 요한의 서신을 받아 보았던 당시의 소아시아 지방에 있던 일곱 교회의 배경과 형편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일곱 교회에 대한 예언의 의미를 좀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일곱 교회는 일곱 시대에 걸쳐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말한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는 각 시대마다 교회의 영적 상태와 도덕적 수준이 어떻게 변천하여 나갈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2). 현시대에 적용되는 일곱 교회 예언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의 형편은 사도 요한이 계시를 통하여 보았던 교회의 변천 역사를 묘사하기에 가장 적당하다. 일곱 교회는 각 나라와 민족 사이에 펼쳐져 있는 그리스도 교회를 대표하는 것으로써, 세상 마지막까지 교회의 역사와 상태가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일곱 교회는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모든 교회들을 대표할 뿐 아니라, 그 사이의 시간을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서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적 변천을 설명해 주고 있으며,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서신의 내용은 각 시대마다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교회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이 예언은 현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 - 하나님의 교회이며 백성들인 - 에게 의미심장한 메세지를 던져 주고 있다. 즉, 이 예언이 주는 권고의 말씀들은 현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당시보다 더 적용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일곱 교회의 예언을 연구할 때에는, 각 교회에 주어진 권고와 경고의 말씀들이 현재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지적해주는 것이므로 그 권고의 말씀들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고 우리의 영적인 상태에 잘 적용하므로 큰 유익을 얻도록 해야 할 것이다.

3). 예언이 쓰여진 형식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시는 이 예언들은 편지 형식으로 쓰여 있는데, 이 서신들은 같은 내용의 흐름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잠깐 그 형식을 살펴보자.
1. 그 도시의 이름의 뜻과 교회의 영적인 형편과의 관계
2. 그 도시의 성격
3. 칭찬
4. 책망(서머나,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책망이 없음)
5. 훈계
6. 이기는 자들에 대한 약속.

4). 예언의 적용

 위의 내용의 흐름을 따라 요한계시록 2~3장에 기록된 일곱 교회에 대한 기별을 다음과 같은 7항목으로 나누어서 연구해 보기로 하자.
1. 기간
2. 교회 이름의 의미
3. 칭찬의 말씀
4. 책망의 말씀
5. 권면의 말씀
6.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의 말씀
7. 현시대의 적용

 일곱 교회의 예언을 공부하면, 각 시대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연연히 이어지는 순결한 진리와 믿음의 대장정을 통해 교회 안에 역사하는 사단의 도전과 그리스도의 응전을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될 것이며, 또한 각 교회에 대한 예언들이 현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들의 영적인 잠을 깨우고 다시 한 번 뜨거운 헌신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만들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제부터 한 교회씩 차례대로 연구하기로 하자.

2부 - 에베소 교회

1). 기간: A.D. 34~100년
 사도교회 시대; 십자가 이후부터 마지막 사도가 죽을 때까지

2). 이름의 의미
 에베소라는 이름은 바람직한, 흠모할 만한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이름처럼 이 교회는 사모할 만한, 흠모할 만한 교회였다. 에베소 교회는 지역적으로도 정말 사모할 만한 좋은 위치에 있었다. 이 에베소 교회는 초대교회였고 사도교회였다. 이 교회는 순결하고 뜨거웠던 교회였으며,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을 직접 본 사도들과 제자들이 생존해 있어서 그들로부터 가르침과 설교를 들었기 때문에 온갖 오류와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1. 최초의 교회를 구성했던 제자들
 예수님과 삼 년 반 동안 함께 있었던 제자들은 이제까지 세상에 존재했던 교사 중 가장 위대한 교사의 교육을 받았었다. 개인적인 교제와 감화로써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사업과 교회를 위한 일꾼들로 훈련하셨고, 날마다 그들은 그분과 함께 걷고 대화하면서 미래의 교회를 돌보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양들을 돌보는 세계의 교사가 되어야 하였으나 서로 매우 다른 품성을 드러내었다. 다양한 천성과 생활 습관을 가진 그들이 부름받은 그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는 감정과 사상과 행동을 예수님 안에서 일치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연합을 이루시려고 목적하셨다. 하늘 아버지께 드린 그분의 기도 속에 그가 애쓰신 수고가 나타나 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1, 23). 그분은 그들이 진리를 통하여 성화되기를 끊임없이 기도하셨다.

2. 성령을 받은 제자들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후,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워하였다. 그들이 예수님의 순결하고 거룩한 생애를 명상할 때에, 만일 그들의 생애로 그리스도의 품성의 아름다움을 증거할 수만 있다면 너무 힘들어서 하지 못할 수고나 너무 커서 못할 희생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과거의 삼 년을 다시 살 수만 있다면, 그들은 얼마나 다르게 행동할 것인가를 생각하였다.

 만일 그들이 주님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깊이 주를 사랑하는지를 보여 드리고자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였을 것인가! 그리고 불신의 말과 행동으로 항상 주님을 슬프시게 한 일에 대하여 얼마나 진실되게 뉘우쳤을 것인가! 제자들은 사람들을 만나기에 적합하게 되도록 그리고 매일의 교제에서 죄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도록 매우 열렬히 기도하였다. 불화와 최상권을 잡으려는 모든 욕망을 버리고, 그들은 그리스도인 교제를 통하여 모두 친밀해졌다. 그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더 가까이 나아갔으며, 예수님의 분부대로 성령을 받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리면서 참된 회개로 마음을 겸비하게 하고, 불신을 자복한 예수님의 제자들과 소수의 무리들은 마침내 오순절에 성령을 받게 되었다. 성령 강림 후, 제자들은 그분과 그분이 위하여 죽으신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였으므로 그들의 말과 기도를 듣는 사람들의 심령이 녹았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하였으며 그 능력의 감화로 수많은 사람들이 개심하고 회개하였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을 체험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였으며, 이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에베소 교회의 구성원들이었다. 이 교회는 복음전파를 위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이 에베소 교회 시대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3). 칭찬의 말씀
 초대교회였던 에베소 교회는 복음 전파로 인해 핍박을 받게 되었다. 이 에베소 교회는 가장 심했던 로마제국의 네로 황제의 핍박 속에서도 지칠 줄 모르는 열심과 수고로 일하는 교회였고, 또 성경 말씀에 기록된 진리에 충성스러운 교회였다.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은 그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진리로서 시험하였다. 에베소 교회에 대한 칭찬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계 2:2~3 절: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당의 가르침(영지주의, Gnosticism)을 반대하였다. 니골라당에 속한 사람들은 도덕률에 순종하기 위해서 구태여 육체의 욕구를 자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또한 물질과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기 때문에 육체의 방종이나 죄된 행위는 영의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어떤 의미에서 니골라당은 현대 그리스도 교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자유주의적인 가르침 즉, 그리스도를 지적으로 인정하고 믿기만 하면 구원받으므로 하나님의 계명에는 순종할 필요가 없다라는 가르침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니골라당의 가르침에 대항하여 일어선 에베소 교인들을 칭찬하셨다.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6절

4). 책망의 말씀
 그러나 이렇게 순수하고 훌륭한 교회에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책망의 말씀이 있었다. 그 책망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주어진 책망과 같이 에베소 교회는 처음에는 열심이 있었으나 나중에는 그들의 첫사랑을 잃어버렸다. 처음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받아들였을 때에 가졌던 순결한 사랑의 정신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식어갔던 것이다. 에베소 교회는 진리를 고수하는 열성을 잃어 버리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데살로니가 후서 2장에 바울이 말한 대로 그 당시 이미 불법의 비밀이 역사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5). 권면의 말씀
 이 교회는 다음과 같은 훈계를 받고 있는데, 그것은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옛날을 기억하고 돌이키라. 회개하고 돌아서라. 이것이 에베소 교회에게 주어진 권면이다. 마음속에 사랑이 가득찼던 시간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행함은 사랑을 낳지 못한다. 사랑이 행함을 낳는다.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와 같다. 사랑이 식으면 열심이 사라지는 것이다. 회개하여 돌이켜 첫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6). 약속의 말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7절. 인간이 범죄한 이후, 사람은 생명의 나무에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회개하고 죄를 승리하는 자들에게는 다시 생명 나무의 과실을 먹을 수 있는 영원한 특권이 약속되어 있다. 오직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그리스도인들만이 이기심과 죄로부터 승리할 수 있으며, 진리를 분별할 수 있다. 교회 안에 그리스도인들이 가득차 있지만,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양심이 순결한 참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7절.

7). 예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 에베소 교회에 주어진 예언은 그 당시의 교회뿐만 아니라, 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살펴 볼 때, 우리도 하나님께로부터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는 책망을 받을 만한 상태에 있지는 않는가? 우리의 마음속에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 처음 주님을 받아들여 믿을 때와 똑같은 회개와 굴복과 그리고 사랑이 동기가 되어 행하는 순종이 나타나고 있는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종교 생활과 활동, 이것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멸망의 원인이었으며 또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멸망의 원인이 될 것이다. 교회 안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점점 식어지고 그 대신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종교 활동의 동기가 되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상실함과 동시에 이웃에 대한 사랑도 아울러 상실해 가고 있다.

 율법주의적인 종교는 사랑도, 그리스도도 없는 종교이므로 사람을 결코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없다. 예수님의 사랑이 없이 행해지는 모든 종교 생활과 행위들 -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정신에 의해 행해지는 금식이나 기도, 또 행위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는 것, 엄숙하고 화려한 예배, 열렬한 집회, 종교적 의식의 반복, 외형적인 겸손, 남의 이목을 끄는 희생적인 활동 등 - 은 완전히 무의미한 것들이며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들이다. 우리 자신의 행위로는 결코 구원을 살 수 없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없는 신앙 생활은 아무 것도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아 아는 경험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성품과 생애의 완전한 변화가 그렇게도 드문 이유는, 그들이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사 그리스도인이 과거에 한 번쯤 그런 경험을 했다할지라도, 그 하나님과의 첫사랑의 경험을 지속시키지 못하고 잃어버리므로,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재하실 때 저절로 이루어지는 생애의 변화나 성품의 열매가 맺히는 장성한 믿음의 분량까지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자아가 완전히 포기될 때에만, 주님께서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실 수 있다. 새 가죽 부대에만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신자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를 바라보는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품성이 나타날 것이다. 당신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가?

3부 - 서머나 교회

1). 기간: A.D. 100~313년
 핍박과 순교의 시대; 사도 시대 이후~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 교회로 개종하기 전까지

2). 이름의 의미
 서머나 라는 이름은 향수의 일종인 몰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몰약은 그 나무를 쳐서 으깰 때에 큰 향기를 발하게 된다. 서머나 교회는 로마제국이 가하는 극렬한 핍박을 통과하였지만, 그 핍박은 교회를 파괴시키는 대신에 하늘의 복음의 향기가 온 세상에 퍼져나가도록 만들었다. 서머나 교회 시대는 핍박의 시대였지만, 오히려 그 고통을 통하여 신앙이 승화되고 복음이 온 천하로 전파되는 시대였다.

3). 칭찬의 말씀
 두 번째 교회인 서머나 교회에 대한 핍박은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가 A.D. 313년에 그리스도 교회로 개종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서머나 교회에게는 어떠한 책망의 말씀 대신에, 위안과 위로의 말씀만을 남겨 두셨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서머나 교회가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인내하면서 충성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서머나 시대 동안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는 고난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는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었다. 교회에 가해졌던 고난과 핍박은 교회를 순결하게 정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서머나 교회 중에는 자칭 유대인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사단의 회였다. 그리스도인들을 시기하고 미워하던 유대인들은 로마 정부와 결탁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주고 죽이는 일에 앞장섰다. 사도 바울은 진정한 의미의 유대인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로마서 2:28. 오직 성령을 통하여 거듭난 그리스도인만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라디아 3:29.

4). 책망의 말씀; 없음

5). 권면의 말씀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그리스도께서는 서머나 교회가 당면할 가난과 궁핍을 아셨다. 그러나 그러한 핍박과 어려움은 그들의 신앙을 부요하게 만들었으며, 그들을 사랑과 봉사의 그리스도인들로 변화시켰다. 그들은 가난하였지만 영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네가 장차 당할 고난을 두려워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9~10절.

 십 일이라는 기간은 예언 해석 원칙에 의해서 10년으로 환산된다(1일은 1년으로 환산된다. 민수기 14:34, 에스겔 4:6 참조). 그러므로 십 일 동안의 환란은 십 년 동안의 환난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서머나 교회 시대 동안, 사단은 로마제국의 핍박을 통해서 그리스도 교회를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다. 로마제국은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이 사람들 사이에 인기있는 사상이 될 것을 두려워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 교회를 하나의 위험한 경쟁자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수많은 핍박이 가해졌지만, 디오클레시안 황제 치하에서 이루어진 마지막 10년간의 핍박이 가장 심했던 것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차기 황제인 콘스탄틴 대제가 그리스도 교회로 개종을 하면서 그리스도 교회에게 자유를 주기 전까지인 A.D. 303~313년 사이의 10년간의 핍박이 가장 극심하였던 사실을 역사는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10절. 핍박과 순교의 시대를 통과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얼마나 커다란 격려와 위로가 되겠는가! 이 말씀을 입술로 되새기면서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순교자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들은 앞에 있는 생명의 면류관을 기쁨으로 바라보며, 주님의 권고의 말씀을 따라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하나님께 충성하였던 것이다.

6). 약속의 말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 2:11).

 하나님을 위해 순교한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었던 서머나 교회에 꼭 어울리는 약속의 말씀이 주어졌다. 그것은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 하리라는 것이었다. 인간은 한 번 태어나면 누구나 죽는다. 이것을 첫째 사망이라고 부르는데, 첫째 사망은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둘째 사망은 다르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구원과 영생을 얻는 사람들은 둘째 사망을 당하지 않는다. 둘째 사망은 천년기 이후에 있는 것이다. 구원 얻은 성도들이 하늘에서 천 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살며 심판하는 일이 마친 후 이 땅에 새 예루살렘이 내려올 때, 악인들이 부활하여 영원한 사망을 선고 받고 이 땅을 정결하게 할 지옥불이 내려올 때 둘째 사망을 당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말 4:1) 사를 것이다.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 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시 11:6).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온 땅이 풀무불처럼 불타는 날, 그때 둘째 사망이 악인들에게 이를 것이다. 그때에는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것들이 모두 타 버릴 것이다. (말 4:1; 벧후 3:10 참조). 이때는 경건치 않은 자들의 형벌과 멸망의 때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보수할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실 해(사 34:8) 이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한 의인들은 둘째 사망의 해를 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거할 것이다.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고 구원을 얻는 기쁨을 우리 모두 누리도록 하자!

7). 예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머지않아 하나님의 충실한 백성들에게 환난이 올 것이다. 은혜의 시간이 끝나고 선악의 대쟁투 가운데서 우주에 하나님의 성품을 증거할 하나님의 증인들이 준비되면 이 세상에 큰 환난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명과 진리에 순종하는 일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들이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 하나님의 충실된 자녀들은 서머나 교회에 주어졌던 약속의 말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용기를 얻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금 생애에 닥치는 작은 시련에 용기를 잃고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과 믿음과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앞으로 닥치는 큰 환난에는 어떻게 견딜 것인가? 성품은 위기의 때에 나타날 것이다. 지금 편안한 때에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나누고, 하나님을 맛보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개인적으로 잘 알아야 환난의 때에 굳게 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개인의 구세주가 되는 경험을 반드시 해야 할 것이다. 지금 그 준비와 경험을 해야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부 - 버가모 교회

1). 기간: A.D. 313~538년
 타협의 시대; 로마 황제인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 교회로 개종한 이후, 그리스도 교회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됨에 따라서 사람들의 인정과 인기를 추구하기 시작하였고, 갑자기 수많은 이교도들이 콘스탄틴 황제를 따라서 개종하게 되었다. 교회는 새로 개종한 이교도들과 국가의 요구에 따라서 진리를 타협하게 되었다.

2). 이름의 의미
 버가모라는 이름의 뜻은 성채, 요새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핍박의 시대 동안에도 굳건하게 지켜지던 믿음의 순결함은, 정치와 종교가 서로 손을 마주 잡음으로 핍박이 중단되고 세속과 권력이 교회 안에 들어오자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에 따라 믿음의 성채는 무너지게 되었다. A.D.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 교회를 국교로 선포한 이래 교회는 세속과 타협의 길을 걸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버가모 교회를 위기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당신의 모습을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로 나타내셨다. 12절.

 버가모 도시는 사단이 지배하는 종교의 본거지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버가모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seat: 보좌)가 있는 데라13절.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정복한 후, 페르시아는 바벨론에 속해 있던 버가모 도시의 시민들에게 자유를 허용하였다. 그리하여 바벨론이 멸망한 후에도 바벨론의 종교는 계속되었으며, 바벨론 신전의 제사장들도 그들의 신앙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바벨론의 종교는 버가모를 통하여 나중에는 로마에까지 전달되었다. 버가모는 고대 바벨론과 로마제국을 연결하는 중간 고리 역할을 하였다.

3). 칭찬의 말씀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3). 비록 버가모 도시가 사단이 주도하는 바벨론 종교의 중심지이긴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실한 백성들을 가지고 계셨다. 안디바(Antipas)는 버가모에서 순교 당한 그리스도인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다.

 안디바(Antipas)라는 이름에는Anti-대항하는, Papas-교부(교황)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당시교부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일컬어 안디바(Antipas)라고 불렀다. 로마제국이 그리스도 교회를 국교로 인정하면서 교회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인정을 얻고 권력자들의 요구에 순응하기 위해서 타협의 길을 걸었다. 이러한 때에 안디바라고 불리우던 소수의 그리스도인 그룹은 교회의 지도층 즉, 교황권에 대해서 저항하였던 것이다. 타협과 세속의 길을 걷던 버가모 교회에 있어서, 안디바는 하나님의 남은 백성(참 백성)을 대표하였다.

4). 책망의 말씀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4~15).

 버가모 교회에 대한 책망의 말씀은 발람의 교훈을 따르고 우상을 숭배하고 행음한 것에 대한 책망이 주어졌다. 요한계시록 16장, 17장에서는 음녀와 행음하는 상징적인 묘사가 나오는데, 이것은 순결하던 교회가 교황권, 즉 바벨론과 타협하고 그리스도교의 순수하던 진리가 바벨론의 포도주로 더럽혀진 것을 가리킨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영적인 우상 숭배와 음행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런 영적인 음행은 버가모 교회 시대에 이루어졌다. 교회에는 오류와 이교의 미신과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뒤섞인 이상한 교리들이 판을 치게 되었고, 교회는 영적인 암흑시대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때에 책망의 말씀이 주어진 것이다. 배도는 참으로 신속하게 발전해 나갔다. 제1세기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 나타났던 니골라당의 행위가 버가모 교회에 와서는니골라당의 교훈(doctrine, 교리)으로 발전되었다.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15절. 니골라당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이스와 로마의 관습과 철학 위에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니골라당의 인간적인 가르침은 교회 안의 부유층과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니골라당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고결한 표준을 사람들의 미묘한 철학적 논리와 이교 사상과 혼합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진리가 요구하는 바를 논리적으로 부인하도록 유도하였다. 인간의 의와 논리 위에 세워진 니골라당의 가르침이 버가모 교회 시대에 만연되었다. 사단은 에베소 교회시대 이후 계속해서 니골라당의 핵심 교리인 복음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의무로부터 그리스도인을 해방시킨다라는 도덕률 폐기론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공격해 왔던 것이다.

5). 권면의 말씀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 2:16). 하나님께서 버가모 교회에게 주신 권면의 말씀은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회개하지 않으면 성령의 검이 마음속의 모든 것을 잘라 드러내실 것이며, 그 드러난 상태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버가모 교회가 하나님의 눈앞에서 안전하게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하는 것이었다.

6). 약속의 말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할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 2:17).

 만나는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상징한다(요 6:26~63). 우리가 날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면, 그분께서는생명의 떡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셔서 우리의 품성과 생애를 그분과 같이 변화시켜 주신다. 우리가 생명의 떡인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하늘의 만나를 먹는 경험을 하게 된다.

 흰 돌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그 당시 법정에서 재판을 할 경우, 흰 돌과 검정 돌을 사용해서 재판 결과를 나타내었다. 흰 돌은 무죄 석방을 의미하였고, 검정 돌은 유죄를 의미하였다. 또한 노예가 자유인이 되었을 때에는 그에게 흰 돌을 주었는데, 때때로 새로운 이름이 그 돌 위에 새겨졌다. 그리고 흰 돌은 싸움에서 15번 이상 승리한 투사에게도 주어졌다. 흰 돌은 자유와 명예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흰 돌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세상을 승리한 그리스도인이 죄의 사슬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명예를 얻게 되는 것을 상징한다. 오늘날에도 오직 흰 돌을 받는 경험을 하는 사람만이 구원의 약속을 받게 될 것이다.

7). 예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버가모 교회가 당면했던 문제들은 현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와 있다. 니골라당의 가르침은 요즈음 기독교에서 인기리에 가르쳐지고 있는 자유주의 신신학이다. 이것은 반쪽 복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 강조하지, 제일 중요한 부분인 진정한 마음의 변화와 온전한 회개, 그리고 의지의 완전한 굴복,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일들에 대하여 강조하거나 가르치지 않는다. 그냥 믿기만 하고, 믿는다고 말만 하며, 믿는다고 머리로 동의만 하면 다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거짓 복음이다.  또한 버가모 교회가 지적 받았던 우상 숭배와 음행이 현대 기독교인들 사이에 만연하고 있다.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애정과 경배를 다른 것에 두고 그 대상을 섬기는 것을 영적인 우상 숭배라고 부른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첫째가 되어야 할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사랑이 그 자리를 빼앗기고, 그 대신 자신을 사랑함과 세상을 사랑함과 재물과 쾌락에 대한 사랑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상 숭배의 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주 짓는 죄였다. 사단은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로 인도하기 전에 먼저 늘 방탕으로 유인하였다. 육체의 정욕의 방종은 지력을 약화시키고 영혼의 가치를 저하시킨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풍속과 습관과 원칙에 있어서 세상과 구별되기를 원하신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나니(요일 2:15).

 오늘날에도 세상 사람에게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자들에게까지 인기를 끄는 많은 오락들이 있다. 그 오락들 중에는 사단이 영혼들을 멸망시키는 데 이용하지 않는 것이 거의 없다. 영화를 통해서 사단은 각 시대를 통하여 인간의 정욕을 흥분시키고 악한 습관을 조장하는 일을 해왔다. 교만한 마음을 기르거나 식욕의 방종을 조장하는 것과 하나님을 잊게 하고 영원한 구원에 대한 관심사들을 보지 못하게 하는 오락장에서 사단은 쇠사슬로 영혼들을 속박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워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애의 순결을 찾으려는 노력이 헛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 없이 고상하고 덕있는 품격을 건설하려는 자는 흐르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우리는 우상 숭배의 위험에 빠질까 자신을 늘 살피며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사단의 계책과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영혼의 통로를 잘 지켜야 한다. 불순한 생각을 일으키는 것들을 읽거나, 보거나, 듣는 일을 피해야 한다. 사단이 암시하는 모든 문제에 무분별하게 빠져들지 않도록 마음을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 이 일에는 열렬한 기도와 끊임없는 경계가 요구된다. 우리는 마음을 향상시키고 마음속에 순결하고 거룩한 사물을 항상 생각나게 하는 거룩한 성령의 끊임없는 감화를 받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늘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경계하자! 믿기만 하면 된다는 자유주의 신신학을 조심하고, 반쪽 복음대신 온전한 복음을 받아들이자! 하나님의 복음은 인간을 완전하게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복음의 능력은 인간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온전히 지키고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든다. 하나님의 은혜, 우리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죄로부터 회복시키시는 놀라운 은혜의 능력 가운데서 살아가자!

5부 - 두아디라 교회

1). 기간 : A.D. 538~16세기 초
 종교 암흑시대의 교회, 광야로 피신한 교회; A.D. 538년, 유럽의 국왕들을 지배할 만큼 강력하게 교황권의 세력이 확립됨에 따라, 교황권은 교회가 제시하고 가르치던 교리와 지시를 거절하고 바꾸었으며,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고수하기로 선택한 그리스도인들을 직접적으로 핍박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사 중에서 이 시기에 성경 진리가 가장 많이 왜곡되고 변질되었다. 두아디라 교회는 16세기 초에 종교 개혁운동이 시작하기 전까지의 교회를 말하는데, 중세기의 종교 암흑시대 동안에 하나님의 참 백성들은 산과 계곡으로 피신하여 진리를 고수하였다.

2). 이름의 의미
 두아디라의 이름이 가진 의미는 통탄스러운 희생인데, 이것은 이 시기를 대표하기에 너무나 적합한 의미이다. 교황권의 통치로 인해 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온 배도 때문에 믿음의 단순성은 희생되고, 그것은 외적인 행함과 고행으로 대치되어 버렸다. 교회 역사의 4번째 시기인 두아디라 교회 시대에 와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단순한 복음을 떠나서 복잡한 종교 의식과 인간 중보자와 인간 제사장 제도를 만들었다. 이 시기는 그리스도 교회에 있어서 참으로 깊은 상처를 가져온 시기였다. 교회는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회개의 신앙을 저버리고 죽은 행위과 의식을 신앙의 기초로 만들어 나갔다.

3). 칭찬의 말씀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계 2:19).

 두아디라 교회에게 보내는 기별을 말씀하신 분은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되었다(18절).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곳은 바로 여기뿐이다. 중세기의 종교 암흑시대 동안에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류를 위한 중보자의 위치를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서 빼앗기셨다. 마리아라는 인간 중보자가 등장함으로써,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직접 나가는 대신에 마리아라는 여인을 바라보도록 가르침 받기 시작했다. 두아디라 교회는 약 천 년에 이르는 가장 긴 기간의 교회의 역사를 차지하고 있는데, 역사가들은 그 기간을 종교 암흑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종교 개혁운동에 의해서 두아디라 교회 시대는 그 종말을 고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황권의 핍박을 피하고 진리를 고수하기 위하여 광야로 도망간 그리스도인들을 칭찬하시면서, 특히 그들의 나중 행위를 칭찬하셨다. 내가 ...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19절. 두아디라 교회 시대가 끝나갈 무렵, 위대한 개혁자들 즉, 루터, 낙스, 칼빈, 쯔윙글리 등과 같은 성직자들이 유럽의 이곳저곳에서 일어나서 개혁운동을 이끌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4). 책망의 말씀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계 2:20~21).

 일곱 교회에 보내는 7개의 서신 가운데 가장 길고 강력한 책망의 말씀이 두아디라 교회에게 보내졌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20절. 세속화되고 변질된 교회를 표상하기 위해서 이세벨 만큼 적절한 표상은 없을 것이다. 이세벨은 페니키아의 여제사장이었는데, 이스라엘의 왕인 아합은 이세벨과 결혼함으로써, 바알신이 이스라엘로 들어오는 문을 열어 놓았다. 이세벨은 결국 국권을 사용해서 이스라엘의 전체가 우상 숭배를 하도록 유도하였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왕 앞에 나타나서 이스라엘의 배도를 책망하면서 3년 반 동안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지 않는 대기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아합왕과 이세벨의 추종자들은 엘리야의 개혁의 호소를 듣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왕인 아합과 이세벨의 결혼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전체가 배도에 빠지게 되었던 것처럼, 우상 숭배와 이교 사상을 받아들인 두아디라 교회의 지도자들은 중세기 동안 교회에게 주어졌던 엄청난 권력을 이용하여 각종 우상숭배와 잘못된 교리를 백성들에게 강요하였다. A.D. 538년, 저스티니안 로마 황제는 로마 교회의 주교를 이단자들을 교정하는 자로 세웠는데, 교회는 이단을 박멸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교황권의 교회의 지시와 가르침을 거절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투옥하고 사형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교회가 정치의 권력과 손잡고 사람들의 양심의 자유를 탄압하는 종교 암흑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약 천 년 동안 교회는 영적인 대기근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높은 산과 계곡의 토굴 속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셔서 보호하셨으며, 그들을 통하여 진리를 보존하고 개혁의 기별을 전파하시면서 두아디라 교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지만, 끝내 회개하지 아니하였다.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치 아니하는도다 21절. 오히려 교회는 개혁운동에 참여한 개신교도들에 대항하여 반 개신교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보내신 기별을 보지 못하도록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가리우고 말았다.

5). 권면의 말씀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25절. 이 말씀은 계시록에 나오는 첫 번째 재림에 대한 약속이다. 진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고 핍박과 고문을 당하던 하나님의 참 백성들에게 주님께서는 너희의 믿음과 진리를 내가 올 때까지 굳게 붙잡으라고 말씀하신다. 정말 진리를 끝까지 고수하기 위하여 그들에게는 인내가 필요하였다. 이 시기 동안, 어거스틴과 같은 사람은 성경의 위대한 진리인 부활에 관한 가르침을 크게 왜곡시켰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죽었던 몸이 실제적으로 부활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은 죽은 영혼이 몸을 빠져나와 부활하는 것으로 왜곡하여 가르쳤다. 주님께서는 내가 다시 올 때까지라고 하시며 그들에게 재림을 강조하셨다.

6). 약속의 말씀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계 2:26~28).

 이기는 자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약속하셨다(26절).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생명을 버린 많은 순교자들과 핍박과 고문을 견디면서 성경의 진리를 고수한 충성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부활하여 하늘에 올라가 주님과 함께 왕노릇하며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을 것이다.

 또 내가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28절. 교회가 엄청난 배도로 인하여 가장 길고 어두운 밤을 통과할 때에, 그리스도의 영께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개혁자들을 일으키셨다. 위클립, 허스 등과 같은 개혁자들은 종교 개혁의 아침을 불러온 새벽별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처럼 새벽별들이 나타나 종교 개혁운동을 일으켰고 그 결과로 기독교가 진리로 회복하는 과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종교 개혁운동은 앞으로도 점진적으로 성경의 진리가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7). 예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졌던 이세벨을 용납하고 행음했다는 책망의 말씀은 현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해당되고 있다. 영적인 우상 숭배에는 진리의 타협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옛날 중세기 영적 암흑시대에 하나님의 진리 대신 교회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오류의 가르침들은 현시대의 기독교에 아직도 스며들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와 올바른 가르침과 인간의 유전을 따라 만들어진 오류를 구별하여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그 이유는 우리가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우리의 영적인 경험이 잘못되어 기만 속에 빠지게 되며 영생을 위해 준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바벨론의 오류들은 지금 기독교에 깊이 들어와 많은 사람들을 거짓 구원의 기만 속에 빠뜨리고 있다. 구원을 위해 준비하는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진다는 거짓된 가르침의 일환으로 연옥설이 존재하고,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론의 일환으로 미사와 성찬식을 만들어내었고, 인간이 태어나는 자체가 죄라는 것을 강조하고 죄에 대한 정의를 변조하여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죄를 승리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가르치는 신신학과 또 반쪽만의 복음인, 은혜로 구원받았으므로 순종과 의지의 굴복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변질된 복음들이 기독교를 장악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 50, 90, 93호 등을 참조하십시오)

 이런 때에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진리를 연구하고 그 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할 것이다. 이기는 자와 내 일을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즉 하늘에서 영생을 얻어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 것이라는 귀한 약속을 주셨다. 복음에 굳게 서서 끝까지 충성하는 우리가 되자!

6부 - 사데 교회

1). 기간: 16세기 초~18세기 말엽
 종교 개혁과 분열의 교회; 종교 개혁운동과 함께 진리와 단순한 믿음이 되살아 나는 듯했지만, 개혁의 정신이 사라지면서 개혁자들의 후예들은 각기 다른 교파를 만들어서 안주함으로써 개신교 운동이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2). 이름의 의미
 사데라는 이름은 남아 있는 것들, 또는 새로운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천 년이라는 길고 긴 배도와 박해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그리스도 교회는 참된 신앙을 거의 모두 잃어버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되자, 광야에 피신하였던 소수의 남은 무리(참 백성)와 개혁자들은 개신교회의 아침을 열었다. 이 시대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로 표현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당신의 개혁자들을 통하여 무너졌던 진리를 회복할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1절).

3). 칭찬의 말씀
 사데 교회에 대한 칭찬의 말씀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사데 교회는 과거에 개혁자들이 이루어 놓은 영광에만 의존하여 존속하였다. 몇몇 살아있는 것들도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외적으로는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죽어가고 있었다. 종교 개혁 이후, 여러 개신교회들이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회복하는 듯이 보였지만, 내적으로는 생명력을 잃고 죽어가고 있었다.

4). 책망의 말씀
..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사데 교회는 종교 개혁의 선구자들 덕분에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지만, 다시 거의 죽게 된 상태에 이르렀다. 한때 그들이 개혁자들에게 들었고 받았던 신앙이 잊혀져 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은 종교 개혁자들이 미쳐 다하지 못한 개혁운동을 더 밀고 나아가 성경이 말하는 완전한 진리로 회복되고 그들의 신앙과 진리가 더 완전한 빛으로 나아갔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그들의 선조 개혁자들이 해 놓은 개혁 운동에 안주하고 마는 우를 범했던 것이다.

5) 권면의 말씀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2~3).

 주님께서는 사데 교회에게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고 권면하신다. 진리를 고수하고 성경과 맞지 않는 복음을 타파하고 개혁하려고 혼신을 다했던 개혁자들의 헌신과 희생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고 권면하시는 것이다. 그들은 개혁자들이 일구어 놓은 진리의 보화들을 더 캐내고 연구하는 대신에 자신들의 마음에 맞는 것들을 택하여 교리와 종파를 만들고 그 종파에 스스로 안주하여 버렸으며, 그리하여 폭넓게 온전한 복음을 수용하는 대신에 자신만의 교리를 주장하고 종파의 장벽을 쌓아 올렸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것에 대해 회개하라고 촉구하신다.

6) 약속의 말씀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 3:4). 그러나 그러한 사데 교회 안에도 몇몇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부패되지 않은 신앙을 유지하였으며, 의의 흰 옷을 입고 있었다. 대부분의 개신교회들이 내리막 길을 달릴 때에도, 모라비안 교도(개혁자 허쓰의 후예)와 퀘이커 교도(영국의 죠지 폭스의 후예)와 청교도들은 개혁의 정신을 유지해 나갔다.

 사데 교회는 한때 진리의 빛과 약속을 가지고 시작하였지만, 곧 신학과 교리 분쟁에 골몰함으로써, 형식주의에 빠지게 되었고 개혁 사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믿음을 통하여 마음과 성품을 변화시킨다는 성경의 대진리가 신학적 분쟁과 논쟁에 의해서 깊이 파묻히고 말았다. 우리가 아무리 루터와 칼빈과 웨슬러의 후예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세상이 우리를 정통이라고 인정해 줄지라도,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임재해 있지 않으면 그러한 인정과 역사들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종교 개혁자의 후예들은 자신들이 천주교회와의 투쟁에서 승리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조직과 교단을 만들어서 안주하기 시작하였다. 루터와 낙스와 같은 개혁자들에 의해서 시작된 위대한 개혁 사업이 이제는 사람들의 돈에 의해서 운영되는 공공단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만심이 영혼을 병들어 가게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데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저버리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영국에서 청교도들을 일으키셔서 신대륙인 미국에서 완전한 종교 자유를 가지고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주셨다.

7). 예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우리의 영적인 생애에 있어서도 사데 교회에 주어진 책망과 권면의 말씀은 아주 유익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점에도 안주해서는 안 된다. 즉, 다 이루었다는 지점, 다 깨달아 알았다는 지점이 있으면 안 된다. 사도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했으며, 또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고 간증하였다.

 우리의 영적인 경험인 거듭남도 이와 같다. 어제의 거듭남이 오늘의 거듭남이 될 수 없고, 어제의 깨달음으로 오늘을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더 깊은 거듭남과 진리에의 깨달음과 경험으로 전진해야 한다. 영적인 전진에 있어서 정지란 없다. 그것은 곧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관계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나무의 비유처럼, 늘 가지된 우리가 나무인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경험, 즉, 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있는 매일의 산 경험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데 교회에 시작되었던 종교 개혁운동은 마지막 때까지 계속 되어야 한다. 우리는 완전한 광명에 이를 때까지 더 밝은 진리의 빛으로 점진적으로 나아가야 하며, 우리의 선조 개혁자들이 미쳐 회복해 놓지 못한 성경의 총체적인 진리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교파와 종파를 만들어 놓고 서로 높은 장벽을 쌓은 채 자신들의 교리만 옳다고 주장하며 거기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받아들여 고칠 것은 고치고 버려야 할 것은 버리는 과감한 개혁과 변화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런 종교 개혁운동에 참여하는 일은 하나님의 마지막 백성의 특징이 될 것이다.

 사데 교회에 주어진 약속의 말씀처럼, 믿음의 의의 경험을 올바르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 사람은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흰 옷을 입고 영원히 살 것이다. 우리의 영적인 경험과 생애가 늘 전진하며 발전하고 자라나는 것이 되도록, 또 계속되는 영적인 종교 개혁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며 자신을 살피고, 성령의 능력을 구하면서 살아가자!

7부 - 빌라델비아 교회

1). 기간: 18세기 말엽~19세기 중엽(세계를 향하여 나간 선교의 시대)

2). 이름의 의미
 빌라델비아는 형제의 사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3). 칭찬의 말씀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계 3:8). 빌라델비아 교회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처럼, 이 교회는 정열과 아름다움으로 채워진 교회이다. 사데 교회에게는 전혀 없던 칭찬의 말씀이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기록되어 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혼을 채우고 나가서 선교에 전념한 교회였다.

 빌라델비아는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상 가장 전도 설교가 왕성한 시대였다. 요한 웨슬리, 조지 휫트필드, 요나단 에드워드 등과 같은 수많은 전도자들이 나와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특히, 웨슬리는세계가 나의 전도 지역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열렬한 선교 정신을 표현하였는데, 그는 칼빈이 주장한 구원받을 자는 이미 예정되었다는 예정론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반대함으로써,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올바른 길로 회복시켰다. 그들의 이러한 전도 활동은 18세기의 끝을 밝혀 주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기간의 교회를 위하여, 세계를 향한 선교의 문이 열릴 것이라는 허락의 말씀을 남겨두셨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닫을 사람이 없으리니8절.

 유럽의 산업혁명 이후로 교통 수단이 발달하기 시작하였으며, 공산주의가 미처 뿌리를 내리기 전인 이 시기야말로 온 세상의 문이 복음을 위해서 열려져 있던 때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통하여 이 기간 동안에 거의 모든 지역에 선교사가 파송될 수 있었다. 윌리엄 캐리가 1793년에 인도에 갔으며, 로버트 모리슨이 1807년에 중국에 갔고, 리빙스턴를 뒤를 이어서 로버트 모펫은 1817년에 아프리카로 떠났다. 각 대륙에서 성서 공회가 조직되기 시작했으며, 주일 학교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때도 이 무렵이다. 세계 선교를 위해서 교파와 국경을 초월해서 형제의 사랑을 나타낸 때가 바로 이때이다.

 1780년 5월 19일이 암흑일(dark day)로서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고, 1833년에는 수많은 별들이 떨어짐으로써 다시 한번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후, 세계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말세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으며, 성경이 말하는 예언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 교회의 복음이 전파되는 일을 크게 도와 주었다.

4). 책망의 말씀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전혀 책망의 말씀이 없다.

5). 권면의 말씀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1). 복음이 널리 전파되고 전도가 왕성해지자 예수님의 재림이 당도할 수 있는 길이 처음으로 준비되기 시작하였으므로, 주님께서는 내가 속히 임하리니라는 표현을 비로소 하셨다. 그들은 진리와 복음을 굳게 잡아 승리하여 면류관을 머리에 쓸 때까지 전진하여야 하였다.

6). 약속의 말씀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계 3:12).

 복음을 깨닫고 진리에 굳게 선 사람, 진리로 성화되어 말과 행동과 성품이 일치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과 같은 사람이다. 그렇게 성화된 사람의 이마에는 하나님의 인이 쳐지는데, 그것이 곧 여기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기록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인 것이다.

7). 예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한 예언은 특별히 마지막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그 이유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예언을 주시며 열린 문을 언급하셨고, 또 약속의 말씀에 새 이름을 기록해 주신다는 언급을 보아서도 그렇다. 열린 문과 새 이름을 받는 일은 마지막에 있는 사건들이다.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계 2:8). 이 열린 문에 대한 언급은 그 다음 장인 요한계시록 4장에도 나온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계 4:1~3).

 빌라델비아 교회의 예언과 계시록 4장에 언급된 열린 문은 같은 표현으로서, 하늘의 성소, 특히 지성소로 가는 문이 열린 것을 가리킨다. 열린 문 안에 하나님의 보좌를 베푼 모습이 보이는데, 보좌를 베푼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지구를 마지막으로 심판하시는 일과 구원의 역사를 끝내시려고 보좌를 베푸신 것이다. 그러므로 열린 문이 언급된 것은, 마지막 심판의 때가 시작되고 이 지구의 세상의 은혜의 시간이 마치려고 하는, 곧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시점이라는 것을 시사하기 위하여 언급된 것이다.
지금 예수께서는 지성소에서 우리의 죄를 중보하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지성소로 향하고 그분이 그곳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특별한 속죄를 하고 계시는 일에 관심을 가지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 지성소에서 하시는 마지막 최후의 중보 사업과 속죄 사업에 대하여 우리는 열심히 연구하여야 하며, 마지막 심판을 위하여 준비하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큰 날에 서도록 준비하기 위하여 죄를 정결케 하시는 그리스도와 조화를 이루어 영혼의 정결사업에 동참하여야 한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시험하며 입증하고 계시는데, 많은 사람들이 품성의 시험, 즉 하나님의 헤아림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죄악적인 품성의 특성을 극복하고 온전히 주님께 굴복하며,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이 하나님 앞에 서도록 온전한 회개와 성화의 길을 가야 한다. 우리는 게으르게 기다림으로써가 아니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열렬히 하나님과 교통하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우리의 마음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얽매이지 않도록 하며 깨어 주님을 맞기 위해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신앙 생애란, 영적인 싸움을 계속하는 생애이며, 깨어 기도하고 수고하는 생애이며, 단 한순간이라도 영적 경계를 게을리 할 때 영혼에 위기가 따르는 생애라는 사실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여야 하며, 주님을 알기 위하여 날마다 순종하는 생애를 살고, 예수님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가시는 의미를 배우며, 우리 앞에 놓인 소망을 굳게 붙잡고 나가야 한다.

 우리는 중보자 되신 예수님께 우리의 영혼을 붙들어 매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그리고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생애가 승리하는 생애가 되도록 늘 기도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의 이마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인을 쳐주실 것이며,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들만이 마지막에 구원을 얻을 것이다.

8부 - 라오디게아 교회

1). 기간: 19세기 중엽 이후~ 예수 재림까지(마지막 교회, 현대 기독교회)
2). 이름의 의미
 라오디게아의 뜻은 백성을 심판하심이다. 이 교회는 지구 역사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교회를 말한다. 그 이름이 의미하듯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심판하는 시대의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이다.

3). 칭찬의 말씀
 두려운 사실은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칭찬의 말씀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세속적인 자기 만족의 정신에 빠져 있으며, 영적 혼돈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당신의 책망을 표현하셨다.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15절.

4). 책망의 말씀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7절. 이 마지막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 너무나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는데, 라오디게아 교인들 자신은 너무나 부요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교회는 뜨뜻미지근한데, 그 상태는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은(믿는 것도 아니고 불신하는 것도 아닌) 상태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랑하는 교회의 시대, 곧 마지막 시대인 현재 교회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실 때,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이다. 가장 비참한 형편인 것이다. 제일 무서운 영적인 형편은 자기 자신들은 부족한 것이 없다고 느끼는 상태, 곧 가장 잘못되어 있으면서, 가장 올바르다고 느끼고 있는 상태이다. 이 교회는 자기의 영적인 참 모습과 상태를 모르는 교회로서, 자기의 상태를 모르기 때문에 고침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이 시대의 교회는 자신들이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 있는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이미 구원받았다는 생각에 도취되어 있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리에 대해서는 눈이 멀어 있으며, 신앙은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인 현대 기독교회의 신앙을 보시면서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경고하고 계신다(16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두고 가장 뜨거워야 할 이 마지막 교회가 가장 미지근한 상태 가운데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시는데, 라오디게아 교인들인 우리는 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과 필요를 느껴야 구조의 도움을 요청할텐데, 거의 완전한 자기 만족과 자기 기만 속에서 종교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 위험한 비극이 있을까?

5). 권면의 말씀
 마지막 교회에 속한 교인들의 이러한 치명적 상태를 치료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처방을 내려 주셨다.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8절.

1. 불로 연단한 금: 용광로에서 연단되어 나온 금은 시련을 통하여 연단된 순결한 믿음을 의미한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베드로전서 1:7.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기 23:10.
2. 흰 옷: 성도들의 의를 나타냄.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 요한계시록 19:8.
3. 안약: 양심을 민감하게 하고, 진리를 식별하고 깨닫게 하는 성령을 의미한다.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1:18~19.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 요한복음 16:13.

 안약을 발라 보게 하라는 뜻은 양심을 민감하게 하고 진리를 식별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은혜로 우리의 비참한 상태를 먼저 볼 수 있게 되어야 고침을 받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한 영적인 상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족한 상태에서 깨어나서 우리의 참된 영적 형편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의의 옷이 없이 벌거벗은 형편을 보아야 한다.

 결국, 이 세 가지 처방을 종합하여 보면, 순결한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깨끗한 의를 옷입어서 성품이 변화되고, 의로운 생활을 살며, 성령의 감화를 통하여 진리를 분별하는 영적 눈을 뜨며, 양심이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치료의 말씀인데, 바로 이것이 마지막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다.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에는 예수께서 문밖에서 두드리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수님이 문에 서 계시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의 임박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주님을 마음 문밖에 세워두고 있는 교회,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관계를 말한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강요하지 않으신다. 구원은 개인적인 경험이다. 주님의 말씀인 생명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 남이 나를 대신해서 먹어 줄 수가 없다. 독자의 마음에는 예수께서 살아 계시는가?

6). 약속의 말씀

내가 문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구원은 언제나 개인적인 문제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각 개인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스도의 책망과 권면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그리스도께 대하여 마음의 문을 열게 될 것이다.예수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한다. 마지막 시대인 라오디게아 시대에도 오직 이기는 자들에게만 구원의 특권이 주어진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21~22절.

7). 예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내시는 기별을 유의해서 연구하여야 한다. 이 기별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육신적으로 평안한 형편에 처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들은 곤고하고 헐벗은 상태에 있지만, 영적으로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고 스스로 믿으며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자신이 전혀 잘못되어 있는 데도 스스로 옳다고 확신하는 것보다 더 큰 기만이 있을 수 있을까! 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지는 기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비참한 기만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그 기만을 알고 있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것을 보여 준다. 그들은 그들의 형편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한탄할 만한 상태인 것을 알지 못한다.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이 스스로 높은 영적 수준에 처해 있다고 자부하고, 아무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을때, 참된 증인의 기별은 그들이 영적으로 눈멀고 가난하고 곤고한 상태에 있다는 무서운 책망으로 그들의 안전과 거짓 구원의 확신을 깨뜨린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분명히 보는 것, 곧 자기의 질병의 성격을 아는 것이다. 그들은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 그들은 중립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미지근한 것을 싫어하신다. 여기서 뜨뜻미지근한 자들에게 사라고 권고하신 순수한 금, 곧 믿음과 사랑은 참된 부(富)이다. 우리가 지상의 보화에 있어서 아무리 부요할지라도 우리의 모든 재물을 가지고 소위 미지근한 영적 질병을 치유할 귀중한 치료제를 살 수 없다. 지력과 지상의 부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결점을 제거하거나 그들의 비참한 형편을 치유하기에 무력하다.

 그들은 눈이 멀어 있지만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의 마음을 일깨우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스스로의 죄악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도움의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회개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자아 기만의 힘이 인간의 마음에 역사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크시므로 은혜로 모든 것을 덮어서 구원해 주시리라는 기만 속에 너무 깊이 빠져서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눈이 멀어 있는가를 보라고 불로 연단한 금과 흰 옷과 안약을 사라고 주님께서는 권고하시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이 좌정해 계시지 않는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그들은 문을 열고 주님을 맞아들여서 함께 먹고 마시는 경험을 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내재해 계실 때에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고, 그분과 산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 그래서 순수하고 산 믿음인 금을 소유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은 사람들, 성령의 내재로 깨어서 늘 자신의 모습을 올바로 볼 줄 아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모든 죄를 승리하고 마침내 주님과 함께 보좌에 앉게 될 것이다. 당신은 라오디게아 교회 형편 가운데 있지는 않은가? 문밖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고 그분과 항상 함께 사는 사람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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