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청결한 마음

새 해가 밝았습니다. 또 다시 새로운 한 해를 맞으면서, 이 해에는 우리의 마음이 정말 맑고 깨끗하고 청결하게 되었으면 하고 바래봅니다. 그리고 아울러 청결해진 마음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경험을 하는 독자들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8절).

하늘의 청결한 마음을 가지고 이 땅에 사셨던 예수님은, 사람들이 청결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의식상의 청결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하였기 때문에 청결에 대한 번거로운 법칙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집이나 손 발을 씻을 수 있는 물 항아리들을 놓아 식사 전에는 반드시 청결하게 씻도록 하였고, 특히 식사 전에 형식상으로라도 손을 씻는 시늉을 해야지 손에 물을 묻히지 않고 식사를 하면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규칙과 관습과 외관상의 불결에 대하여만 신경을 쓰던 나머지, 그들은 이기심과 악의에 의해 얼룩지는 마음의 더러움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의식상의 청결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 아니라고,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청결이라고... 그리고 그래야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라고...

마음이 청결하신 하나님과 살 사람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부터 마음이 청결 해져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이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의 생애는 투명하고 깨끗합니다. 그러나 청결하지 못한 마음에서는 늘 무례한 말과 부주의한 행동이 나옵니다.  주위에 어떤 사건이 생길 때,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일이 아름답고 화평하게 잘 마무리 되도록 노력하는 대신에, 자신의 악의를 섞어서 그것을 크게 부풀리고 과장하며, 술수를 써서 그 일이 매끄럽게 해결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사람의 성품과 생애에는, 부정직하고, 분쟁을 일으키고, 모함을 하며, 질투하고, 화내는 것 같은 육체의 일(갈 5:19) 들이 현저하게 나타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만 세상에서 이해하는 의미의 순결, 감각적인 것과 육체적인 정욕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앞에 마음의 목적과 동기가 진실하고, 교만과 자아 중심에서 벗어나 겸손하고 사심이 없고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손과 발을 깨끗하게 씻는 의식의 청결에는 철저했지만, 마음의 청결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채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처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열심히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마음의 청결, 마음을 씻는 경험을 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이 훌륭한 교인인 줄 압니다. 아무리 손을 씻어도 마음이 검고 더러웠던 유대인들과, 아무리 교회에 다녀도 변하지 않고 거듭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같지 않을까요? 신앙 따로, 생활 따로 인듯, 요즈음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 예배 드릴 때만 훌륭한 교인인 것 같습니다.

품성은 위기의 때에 나타납니다. 큰 위기가 아니라, 실생활에서의 작은 위기들 - 곧 자신의 이익이 달린 경우, 자신이 손해나 피해를 보게 될 경우, 그리고 자신의 자존심이 건드려지는 경우나 자신의 마음 대로 되지 않는 경우 등 - 의 작은 위기들을 만날 때, 마음이 청결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때, 마음속에 품은 품성의 악이 드러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날의 그리스도인들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시겠지요. 손만 씻는다고 마음이 깨끗해지지 않듯이, 교회만 다닌다고 마음이 청결해지는 것이 아니란다!라고요. 아직도 손만 많이 씻으시나요? 외관상의 종교 생활이 우리를 청결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그 쓸데없는 씻음인 형식적인 종교를 버리고, 마음속 깊은 데까지 철저하게 씻는 진정한 영적 목욕을 하십시오! 마음이 청결해지기 위해서는 마음을 씻는 목욕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육체가 예수님과 함께 물속에 장사되고, 새로운 마음을 입고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옛 것을 살짝 모양만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죄됨, 문둥병처럼 처절하게 썩어가는 불결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악하고 통탄할만 하게 느껴져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슬퍼 부르짖는 사람만이 물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고,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깨끗한 몸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을 씻는 목욕 거듭남은 한 번만 하는 것이 아니고, 매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 순간 멈추지 않고... 이렇게 육체를 장사지내는 것을 예수님은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마 16:24).  마음이 청결하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육체의 소욕이 올라올 때, 그 소욕을 얼른 예수님 앞에 가져가 그 성령의 물속에 던져 버려야 합니다. 육체의 소욕이 올라올 때마다 매번, 한번도 빠지지 않고 끊질기게... 이것이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것이며, 그것이 의지의 굴복이고, 자신을 부인하는 길입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가서 살 하늘의 성은 수정과 같은 보석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수정은 그 안이 들여다보이는 맑은 보석입니다.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성에 들어가서 살 사람들은 아무 것도 감추지 않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은 수정처럼 투명하고 맑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수정처럼 안을 들여다봐도 숨길 것이 없는 깨끗하고 청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공산국가였던 구소련의 우주인들이 우주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우주에 가 보았는데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더라고 했다는 말을 듣자, 부모로부터 성경을 배운 한 어린이가 그 말을 전해준 선생님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그 우주인들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이었나요?라고...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이 수정처럼 맑은 성에 들어가서 살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의 눈은 맑고 아름다와서 어그러진 성품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그 맑은 눈의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은, 문득 어두움에 속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동기가 얼마나 추한가를,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정직하지 못한가를 깨닫게 하고 갑자기 부끄러워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도 깨끗한 마음을 가졌으면하는 열망을 갖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마음이 청결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깨끗한 분위기는 주위를 행복하고 평화롭게 만듭니다. 예수님에게서 매일 깨끗하게 목욕하는 사람은, 어둡고, 탁하고, 음울한 세상을 청결한 향기로 가득 채우고, 문득, 그 향기를 맡는 사람들이 곁에 다가오고 싶도록 만듭니다.

권두언


강병국 목사

약속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서로를 묶어주는 줄입니다. 우리의 생명 자체가 약속들에 의하여서유지되고 있으니까요. 천연계의 법칙들도 일종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도덕의 율법도사실은 약속입니다. 우리가 천연계의 법칙을 어기면 죽음을 가져오게 만드는 무서운 결과를낳게 되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도덕적인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들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 피조물들은 결국 죽게 되는 것이요, 죽어 가는 동안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동물들이나 식물들에게는 도덕적인 개념이 없습니다. 특별한 두뇌의 기능, 즉 양심과 마음을 받아서 창조된 인간들에게만 도덕의 개념, 옳고 그릇됨의 개념, 의로움과 죄됨의 개념이 있습니다. 이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인간들이 점차 진화되어 가면서 견해 나간 어떠한 선에 대한 추구가 아닙니다. 인간들은 점점 더 나아지고 있는 것 보다는 오히려 점점 더 악해져만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영이 그 마음 속에 거하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법칙을 순종하며 살아 갈 수가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인간들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법칙을 지켜나가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안되니까, 반대 방향으로 달려 가면서 하나님의 법은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것이니 다른 방법으로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약속관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약속들을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구분하고 있지요. 이번 호를 채우고 있는 기사들은 이러한 이슈에 대한 여러분의 이해를 크게 도와드릴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 신앙의 기준점

기준점이 없으면 결국에는 흔들려서 혼돈 가운데 빠지고 만다. 집을 짓거나 토목 공사를 할 때에 기준점이 필요한 것처럼 그리스도인 신앙에도 기준점이 있어야 하는데 교회 안에서 사단이 온갖 미혹과 기만을 일으키는 마지막 시대에는 더욱 더 분명한 기준점이 필요하다.  말세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신앙과 믿음을 비교해 보고 확인할 수 있는 성서적 기준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 신앙의 기준점이 되는 말씀을 요한계시록에 기록해 두셨다. 그러므로 말세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기준점과 비교해 봄으로써 자신이 서있는 영적 좌표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럼 이제부터 요한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마지막 시대의 신앙의 기준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요한계시록에는 마지막 시대 신앙의 기준점이 되는 사람들의 정체가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요한계시록 12장과 14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 12장 17절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요한계시록 12장은 기독교회의 생성과 그 역사에 관한 에언을 말하고 있다. 초대 기독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열두 제자를 중심으로 세워지며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에 하늘로 승천한 후에 하나님의 참 교회(여자)가 사단의 핍박을 피하기 위하여 1260년 (중세기) 동안 광야로 도망하는 예언이 계시록 12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1260년 예언의 끝 무렵에 신대륙 미국이 발견되어 미국이라는 땅을 통하여 여자의 남은 무리(하나님의 참 백성)가 피난처를 얻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12장 17절에서 말세에 사단의 집요한 공격 목표가 되는 여자의 남은 무리의 특성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여자의 남은 무리의 특성은 짐승의 우상을 극복하고 그 표를 거절하는 사람들의 특성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요한계시록 14장 12절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13장에는 두 짐승이 나오는데 첫 번째 짐승은 중세기 1260년 동안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핍박을 가하는 세력이고 두 번째 짐승은 미국인데 미국은 처음에는 양처럼 올라오다가 나중에는 용처럼 말하는 핍박의 세력으로 돌변한다. 말세에 이 두 짐승이 서로 연합하여 짐승의 우상을 세우고 짐승의 표를 전세계적으로 강요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요한계시록 13장의 에언이다. 요한계시록 14장에는 짐승의 우상과 그의 표를 극복하고 이기는 하나님의 참 백성들의 정체가 나타나는데 그들이 바로 십사만 사천이다. 계시록 14장 12절은 마지막 시대 신앙의 기준점이 되는 사람들의 신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그렇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이야말로 마지막 시대에 모든 신앙의 기준점이다. 요한계시록 12장 17절과 14장 12절의 말씀은 말세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교리와 신앙과 믿음을 분명하게 판단하고 분석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기준점과 같은 말씀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의 믿음과 신앙도 이 말씀 위에서 그 옳고 그름이 밝혀질 수 있다. 요한계시록은 독자 여러분의 신앙과 믿음 속에는 하나님의 계명과 에수 믿음이 포함되어 있는가 라고 묻고 있는데, 이 질문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답변은 무엇인가?

계명과 믿음 그리고 감정과 느낌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12장 마지막 절에서 볼 수 있듯이 말세에는 사단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노하여 공격하는 것이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계명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모으시고 인도하신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구약의 모세 시대에는 계명을 돌비에 기록하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새 언약 시대에 살고 있다. 새 언약 시대에는 계명이 돌비가 아니라 육비 즉 우리의 마음과 양심에 기록된다.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 8:1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양심에 기록된 당신의 계명(법)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하나님께서 계명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계명을 새기시고 양심과 이성에 당신의 뜻을 호소하심으로써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뜻이다. 마지막 시대에는 오직 하나님의 계명과 양심 속에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을 의지하며 전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참 백성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시대에 사단은 사람들을 기만하기 위해 어떤 방법 을 사용할까? 사단은 말세에 이 적과 기적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미혹한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짐승의 표가 내려지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사단이 온 세상 사람들을 기만하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계 13:13,14. 이러한 사단의 기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는 아마겟돈 전쟁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더러운 세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계 16:13,14. 사단은 세상 끝에 있을 최후의 영적 전쟁에서 이적과 기적을 사용할 것이다. 왜 사단은 이적과 기적을 사용하는가? 우리의 감정과 느낌을 자극하기 위해서이다. 말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방법인 계명과 믿음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느낌과 감정에 의존하는 신앙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적 신앙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계명과 원칙에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사단은 우리가 보고 느끼는 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기 원하기 때문에 기적과 이적을 사용한다.

감정과 느낌에 의존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
어떤 사람들이 사단이 주는 이적과 기적에 미혹되어 빠지게 될까? 감정과 느낌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마지막 시대에 사단의 미혹에 쉽게 빠지게 된다.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이적과 기적을 행하기 전에 사단은 먼저 사람들의 신앙을 느낌과 감정에 의지하는 감정적 신앙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처럼 참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지만, 사단은 보고 느끼는 것에 기초하여 판단하고 믿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어간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성경 말씀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믿고 따른다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실제로 있었던 한 이야기를 통하여 느낌과 감정을 의지한다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자.

한번은 나이든 노부부가 기차를 타고 보스톤에 왔다. 그들을 기차역에서 나오는대로 곧장 하버드 대학 총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들은 총장과 시간 약속도 하지 않았지만 총장실의 비서에게 총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 비서는 한눈에 그 노부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보았다. 얼굴은 검게 타 있었고, 허름하고 구식 양복을 입은 나이든 남자와 전혀 세련되지 않고 시골티가 듬뿍나는 나이든 여인을 보는 순간 총장 비서는 이 사람들은 하버드 대학의 총장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 노부부가 총장님을 만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였지만, 비서는 총장님은 오늘 하루종일 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노부부는 할 수 없이 그러면 저희는 총장님을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문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비서는 그들이 기다리다가 지쳐서 돌아가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업무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노부부는 전혀 지치거나 지루해하지 않았고 오랜 시간을 의자에 앉아서 총장을 기다렸다. 참지 못한 것은 노부부가 아니라 비서였다. 비서는 짜증이 났고 결국에는 이 사람들이 총장을 만나게 하여 빨리 돌아가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비서는 총장실에 들어가서 총장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총장님 잠시 이들을 만나주셔서 노부부가 빨리 돌아가도록 하셔야 할 것같습니다 라고 말했다. 총장은 잠시 한숨을 쉬었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들을 들어오게 하라고 말했다. 총장은 근엄한 얼굴로 노부부에게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부인은 대답하였다. 우리 부부에게 하버드 대학에 다니는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작년에 갑작스런 사고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내 남편과 나는 아들을 기릴 수 있는 기념물을 하버드 대학 캠퍼스에 세우기를 원합니다. 총장은 답답한 얼굴로 그리고 조금은 거만한 음성으로 부인, 하버드 대학에 다니다가 죽은 모든 사람들의 동상을 이 대학의 교정에 세우면 이 학교는 학교가 아니라 공동묘지가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부인은 금새 아닙니다. 우리가 세우려고 하는 것은 아들의 동상이 아니라 건물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총장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 부인이 입고 있는 낡고 촌티나는 옷들을 아래 위로 흘어보면서 부인, 건물을 짓는데 얼마나 돈이 드는지 아십니까? 하버드 대학의 건물들을 짓는데 750만 달러가 들었습니다라고 설명하였다. 시골에서 금새 올라온 듯하게 보이는 그 부인은 잠시 말을 하지 못하고 침묵하였다. 총장은 이제 이 부부가 여기를 나가겠구나 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부인은 몸을 돌려 남편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조용히 말했다. 여보, 대학을 세우는데 그 정도의 돈이 든다고 하는데 차라리 우리가 직접 대학을 세우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자 남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노부부의 대화를 듣고 있던 총장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어쩔 줄을 몰라하였다. 곧이어 리렌드 스탠포드 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총장실을 빠져 나갔다. 그리고는 곧장 캘리포니아의 팔로 알토에 가서 자신들의 이름을 딴 대학을 세웠는데 그것이 스텐포드 대학의 시작이 되었다. 노부부는 스탠포드 대학을 세움으로써 자신들의 죽은 아들을 추모하였다.

이 이야기는 스탠포드 대학이 세워지게 된 배경의 실화이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지만 사람은 외모를 보고 판단한다는 성경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이 실화는 자신의 느낌과 감정에 기초하여 판단하는 잘못을 지적하는 교훈이 담긴 이야기이다. 계명과 원칙에 따라서 움직이지 않고 자신이 보고 느끼는 대로 행동하고 결정할 때 이와 같은 일들이 영적으로도 생기게 된다. 사단은 기적과 이적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사람들이 느낌과 감정에 따라 신앙을 하도록 유도한다. 교회 내에서 이 일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하여 사단은 성령의 은사를 우리의 감정과 느낌과 연결시켜 놓는데 성공하였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에게 뜨거운 느낌이 있을 때에만 성령의 역사가 있다고 믿도록 훈련받고 있다. 이러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기분이 좋을 때는 성령의 임재를 느껴서 믿음이 충만해지고, 감정이 그늘지고 힘겨울 때는 하나님의 임재를 못느끼고 믿음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에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이적이 일어날 때 깊은 혼돈 가운데 빠지게 된다.

감정과 느낌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좋은 감정과 느낌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정과 느낌이 있는데 그것은 믿음을 행사한 이후에 자연스럽게 얻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믿음으로 건넌 후에 감격과 감사의 정신을 가지게 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감정과 느낌은 믿음을 행사한 이후에 따라오게 된다. 그러나 사단은 이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믿음을 행사하기 이전에 먼저 행복하고 황홀한 느낌을 갖도록 유도한다. 성결한 믿음의 생애를 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가서 박수치고 단순한 노래를 반복하고 큰 소리로 기도하면서 성령을 구하면, 사단은 사람들의 마음에 뜨겁고 황홀한 감정을 넣어줌으로써 무아지경 속에서 방언을 하거나 이적을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감정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과 믿음대로 사는 거룩한 생애는 전혀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다.

믿음과 계명이 조화를 이룬 신앙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의 진짜 그리스도인의 특성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 믿음을 지키는 신앙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신앙을 말하는가? 이것은 계명과 원칙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성품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은 성령의 지배를 충만하게 받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삶이다. 그리스도의 정신과 마음을 소홀히 하고 계명과 원칙만을 높이면 까다로운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이 되고, 그렇다고 해서 계명과 원칙을 무시하고 사랑과 관용만을 강조하면 경박하거나 부도덕한 사람이 되고 만다.

기독교 신앙은 교리나 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죽은 율법이나 값싼 감정이 아니라 생명이다. 생명이기 때문에 언제나 살아 있어서 명쾌하고 분명하게 움직인다. 그것은 계명으로 육체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며 믿음이라는 이름 아래 계명과 법을 폐하는 것도 아니다. 성령을 통하여 적절하게 육체를 부림으로써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것이 참 신앙이다. 참 신앙은 계명과 율법에 밀려서 어쩔 수 없이 금욕하고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평안과 만족을 맛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절제하게 되는 것이다. 계명과 믿음이 조화를 이룬 신앙은 어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무리가 없으며 보기 흉하지 않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그렇고 내 스스로 느끼기도 그렇다. 참 신앙은 금욕도 아니고 은둔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육적 쾌락도 아니고 무원칙도 아니며 나약함이나 무사안일도 아니다.

사랑과 원칙이 조화를 이룬 신앙
믿음과 계명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신앙은 전혀 달라 보이는 두 가지 특성이 성령 안에서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게 된다. 여기서 두 가지 특성이란 사랑과 원칙을 말하는데, 참 신앙 속에서는 믿음과 계명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사랑과 원칙도 조화를 이루게 된다. 믿음인데 메마른 믿음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표현되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계명인데 나약한 계명이 아니라 분명하고 일관성이 있는 원칙을 포함한 계명이어야 한다. 이러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마지막 시대의 참 신앙인이다. 사랑과 원칙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슬픈 종말을 맞은 사람이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의 이름은 예후와 엘리이다.

먼저 예후의 경우를 살펴보자.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왕상 19:15~1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개혁할 인물로 예후를 지목하셨다. 예후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들을 행했다. 그는 계명과 원칙에 굳게 서서 우상숭배를 혁파하는 개혁을 시도했지만 그의 개혁 속에는 사랑과 온유와 겸손이 결핍되었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에 옮겼지만 교만과 비판의 정신으로 계명과 원칙을 세우는 잘못을 범했다.

예후와 정반대의 성품을 소유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엘리이다. 엘리 제사장은 부드럽고 사랑이 많으며 친절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양육을 그에게 맡겨지도록 섭리하셨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봉사와 그분의 사업의 번영에 진실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기도에는 능력이 있었으며,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여 반역을 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죄를 견책하고 죄인에게 공의를 행사하는 확고부동한 성격이 결핍되어 있으므로 그의 두 아들이 방탕하고 배도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배도를 막고 개혁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실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믿음에 용기를 더하지 않으므로 적당한 때와 적당한 장소에서 안 된다고 말할 능력이 없었다.

죄는 죄이고, 의는 의라고 경고하는 뚜렷한 나팔소리는 들려야만 한다. 우리는 두려울 정도로 사악한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정신차리고 깨어있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대한 경배는 타락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세의 그리스도인 신앙의 기준점으로 계명과 믿음을 정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다. 마지막 시대에 교회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거짓 가르침과 거짓 이적에 맞서서 우뚝 서 있어야 할 당신의 백성이 필요하셨기에 계명과 믿음을 참 신앙의 기준점으로 정하셨던 것이다. 온 세상이 감정적 신앙과 기적으로 뒤덮혀 있을 때, 분명한 원칙과 계명 위에 서 있는 한 백성이 말세에 나타나게 되는데 그들이 여자의 남은 무리이다.

우리 모두는 올바른 것을 말하고 의를 위하여 분명하게 서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할 때가 많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향하여 반대하고 일어서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곧바른 신앙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의 눈을 두려워하는 대신에 사람의 눈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할 수 없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에게 들려오는 기별과 말이 어떤 내용인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말의 내용보다는 오히려 누가 그 말을 했는가에 관심이 있다. 똑같은 말이라도 그것이 당회장과 조직의 위에서 내려오면 반대를 받지 않는다.

메시야가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 태어나지 않고 헤롯 왕궁에서 태어났으면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아기 예수를 영접하기 위하여 모여들었을 것이다. 의의 기별이 광야에서 미치광이처럼 사는 침례 요한으로부터 터져나왔기 때문에 그리고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나사렛 예수가 의의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진리를 거절하였다.  하나님의 음성이 사람을 통하여 전해질 때,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누가 말하고 어디에서 출판되었는가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은 결국에는 진리를 몰라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거절하게 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 일어났던 일이고 마지막 시대에 반복되고 있는 상황이다.

믿음과 계명 그리고 사랑과 원칙이 조화를 이룬 신앙은 참 어려운 신앙이다. 이런 신앙을 갖는 것이 왜 어려운가? 왜냐하면 이 신앙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신앙이기 때문에 어렵다.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하고 내 자신에게는 엄격해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 자신의 인기를 포기하고 형제와 이웃을 위하여 올바른 진리를 말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 이 신앙은 때때로 친구를 잃어버리게 하고 오해를 받게 만들기 때문에 어렵다. 이 신앙은 사랑과 원칙을 적절하게 섞을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 이 신앙은 사랑해야 할 때는 사랑하고 원칙과 계명을 세워야 할 때는 분명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혀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

이 신앙은 우리의 육체 속에서 올라오는 타락하고 이기적인 감정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해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 그러나 이 신앙을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날마다 성령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하는 것이다. 계명과 원칙 위에 분명하게 서 있지만 까다롭거나 교만하지 않으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위에 분명하게 서 있지만 원칙과 계명을 소홀히 여기지 않는 신앙, 바로 이러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마지막 시대의 남은 무리이며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고 마지막 시대에 신앙의 기준이 되는 사람들이다.

당뇨병, 확실하게 알아야 확실하게 치료할 수 있다!

에너지 부족이 일으키는 병

당뇨병이란 글자 그대로 당이 소변에 섞여 나오는 병이다. 당뇨병에 걸리면 제일 먼저 오는 증세가 피로감이다. 피로하다는 것은 에너지가 없어서 기운을 차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당뇨병을 가진 사람은 너무나 피곤하여서 손끝 하나 움직이는 것도 귀찮아 한다. 사람이 그토록 피곤에 지치게 되는 것은 체내에서 에너지가 제대로 생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뇨병이라고 하면 에너지가 생산되지 않는 병으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여러 가지 병이 에너지 생산에 문제가 있어서 생기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 당뇨병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으로 에너지 생산에 문제가 있는 병이라고 할 수 있다. 피곤증 외에도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증세가 있는데, 목이 말라서 자주 물이 마시고 싶고 또한 배가 자주 고파진다. 특히 몸이 너무나 피곤하기 때문에 만사가 온통 짜증스럽기만 하다. 피곤과 짜증은 당뇨병의 대표적인 증세이다.

아주 작은 일에도 신경질적이 되며 참을성도 없어진다. 사람이 사랑스럽고 친절하며 너그러운 데에도 적당한 에너지가 공급되어야 한다. 사랑, 친절, 용서, 자비와 같은 정신적인 요소들도 인체의 에너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몸이 건강해야 마음도 건강해진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나치게 바쁘고 피곤한 삶을 살게 되면 이웃을 사랑하고 돕는 일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게 되어 상대방에게 미안한 마음과 심할 경우에는 양심의 가책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경우는 죄책감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다. 우선, 생활에 여유를 가짐으로 피로와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이 먼저이다. 에너지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기가 싫다. 반대로 에너지가 충분하게 공급되고 있으면 자신이 지금하고 있는 일을 즐기게 된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체내에서 적당한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하고 있는데,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 활동과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양심의 가책 내지 죄책감을 계속해서 느끼게 된다면 결국 그러한 상황은 병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왜 피곤해질까?
왜 당뇨병에 걸리면 에너지가 생산되지 않는 것일까? 병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려면 병의 원인을 하나하나 추적해 보아야 한다. 당뇨병에 걸리면 소변에 당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혈당이 높기 때문이다. 혈중 당분이 너무 많아서 소변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핏속에 당분이 많다는 것과 에너지 생산이 안 되는 것은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은 인체 내에서 에너지를 공급하는 주요 성분인데 당이 소변을 통하여 빠져나가기 때문에 에너지 부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장작을 태워야 난로가 열, 즉 에너지를 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세포 난로도 장작인 당분을 적당하게 받아들여야만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다. 즉 혈액 속에는 당분이 충분하게 있는데 그것이 세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함으로써 시작되는 병이 바로 당뇨병이다.

그렇다면 왜 장작인 당분이 난로인 세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일까? 난로에 장작을 넣을 수 있는 문이 있는 것처럼, 세포에도 당분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다. 그러면 당뇨병 환자의 세포에는 문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당뇨병 환자의 세포에도 문이 있다. 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분이 세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이 존재하고 고장난 것도 아닌데 왜 당분이 세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혈액 속을 떠돌다가 소변을 통하여 몸밖으로 빠져나가고 마는 것일까? 과학자들은 고민을 하다가 환자에게 인슐린 주사를 놓아 보았다. 그랬더니 문이 열리고 혈당이 적당하게 떨어졌다. 혈당이 떨어졌다는 것은 당분이 세포 속으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이로써 인슐린이 세포의 문을 여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당뇨병은 인슐린이 부족해서 생긴 병이라는 결론을 내놓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던 때만 해도 체내에서 분비되는 인슐린의 양을 측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인체에서 생산하는 인슐린의 양을 측정할 수 있게 되어서 당뇨병 환자들의 인슐린 생산량을 측정해 보았더니 건강한 사람의 인슐린 생산량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물론, 지금 언급하고 있는 당뇨병은 성인 당뇨병을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이다. 소아 당뇨병의 경우는 인슐린의 생산량이 확실히 적다. 그래서 현대 의학에서는 성인 당뇨병을 인슐린 생산과는 상관없는 당뇨병이라고도 부른다.

세포의 문에도 이상이 없고 인슐린도 정상적으로 분비되는데 세포의 문이 열리지 않아서 당이 그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니 참 답답한 일이다. 고민을 하던 과학자들은 세포를 자세하게 연구하던 중 세포에 스위치와 같은 구조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세포에 리셉터(receptor)라고 불리우는 스위치가 있어서 그 스위치에 의하여 세포의 문이 열리거나 닫힌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스위치를 눌러주어야만 비로소 세포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성인 당뇨병 환자의 경우, 인슐린 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리셉터, 즉 스위치가 고장난 문제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발견된 문제점들
세포에 달려 있는 스위치의 숫자가 부족하였다. 예를 들어 건강한 사람들의 세포에는 100여 개의 스위치가 있다면 당뇨병 환자들의 세포에는 20여 개 정도 밖에 없었다. 스위치 숫자가 적기 때문에 당분이 세포 속으로 충분하게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인슐린을 인위적으로 체내에 넣어주게 된다. 스위치가 있긴 하지만 예민하지 못하기 때문에 강하게 눌러주어야만 세포문이 열렸다. 쉽게 말하자면 세포문을 열어서 당분이 세포 속으로 들어가는데 인슐린이 정산인보다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하는 상황이 생기게 된다.

왜 스위치의 숫자가 줄어들었을까?
세포의 문을 열고 닫는 스위치에 문제가 생긴 것이 당뇨병이다. 세포의 스위치는 세포의 유전자 속에서 생산해 내는데, 유전자 중에서도 특별히 스위치를 만들어 내는 유전자에 문제가 생겨 건강하고 충분한 숫자의 스위치를 생산해 내지 못해서 생긴 병이 당뇨병이다.  그렇다면 왜 스위치를 생산하는 유전자에 문제가 생겨서 건강하고 충분한 스위치를 만들어내지 않게 되었을까? 그것은 스위치 생산 유전자가 스위치를 생산해 낼 의욕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사람이 일을 하지 않고 운동을 하지 않으면 근육은 현격하게 감소하게 된다. 왜냐하면 근육을 사용할 일이 없기 때문에 유전자는 근육 세포를 생산해 낼 의욕을 상실하게 되고 따라서 근육은 힘을 잃어버리고 현저하게 줄어들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양소를 태워서 에너지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는 생활, 간단히 말해서 운동을 하지 않는 생활을 오랜 기간 동안 하다보면 당분이 세포 속으로 들어가서 에너지로 변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 결과 세포는 애써 문을 열고 닫을 필요가 없게 되고 유전자는 불필요한 스위치를 생산해 낼 이유가 없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세포의 문을 열고 닫는 스위치의 숫자는 점점 더 줄어들게 된다.

당뇨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당뇨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우리의 유전자로 하여금 스위치를 계속해서 생산해 내어야만 되는 이유와 동기를 부여해 주면 된다. 당뇨병 환자의 유전자를 조사해 보면 그 구조가 비정상적으로 망가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혈중 당분의 농도가 높아서 세포가 당분을 받아들여 에너지를 만들어 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유전자는 스위치를 생산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한 가지 정말 감사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유전자를 창조하실 때에 비록 유전자가 망가지고 그 구조에 문제가 생길지라도 다시 회복되고 재생될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유전자는 재생되어야만 할 필요가 생길 때에는 스스로 치료하고 회복되어 완벽하게 재생된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다시 정리해 보자. 당뇨병은 운동하지 않는 생활을 사는 사람,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의 유전자가 비활성화되어 스위치를 생산해 내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질병이다. 그런데 매우 희박한 경우이지만, 운동을 많이 했던 사람에게도 당뇨병이 생기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지나친 스트레스가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당뇨병에 유익을 가져다 주는 운동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서 즐길 수 있는 운동이다. 운동이 좋다고 해서 지나치게 많은 양을 하게 되면 그것이 오히려 스트레스로 작용해 해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산책을 즐기는 것은 가장 바람직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에게 알맞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다. 운동을 해도 스위치를 생산하는 세포의 유전자가 편안함과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최고의 치료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당뇨병 치료의 비결은 1.운동이고, 2.스트레스의 감소이며, 3.음식물의 조절이다.

음식물과 당뇨병 치료
기름기가 있는 음식은 당뇨병에 치명적이다. 왜 그럴까? 지방이 체내에 들어가면 유전자가 세포의 스위치를 생산해 내지 않기 때문이다. 지방이 몸 안에 들어가면 유전자는 세포의 스위치를 생산해낼 의욕을 다시 잃어버리게 된다. 지방의 혈중 농도가 높아지면 피가 끈적끈적해져서 산소가 원활하게 공급되지 못하게 되고 유전자의 생산성이 떨어지게 된다. 이것은 마치 불을 때려고 난로에 장작은 넣었는데 충분한 산소를 공급하지 않아 충분한 화력이 나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불이 제대로 타지 않으니까 더 장작이 들어올 필요가 없어지게 되고 그 결과 유전자는 세포의 스위치를 만들어 낼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되어 생산 활동을 중지하게 된다. 지방이 있는 음식물이 당뇨병에 치명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당뇨병 환자에게 당분이 치명적인 줄로 생각하지만, 이런 생각은 고쳐져야 한다. 물론 당분을 먹으면 혈당이 올라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당뇨병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를 갖고 운동과 스트레스와 음식물에 대한 올바른 치료를 하게 되면 과일 등 단 음식을 먹는데도 불구하고 혈당이 잘 올라가지 않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켄터키 의과대학에서 흥미있는 실험을 했다. 의과대학 학생들을 둘로 나누어 한쪽에는 단것만 먹게 하였고 다른 한쪽에는 설탕은 전혀 주지 않고 감자 튀김, 새우 튀김, 스테이크, 버터를 많이 섭취하게 하였더니 단것을 먹은 학생들은 혈당이 나오지 않았는데 지방을 많이 섭취한 학생들은 48시간만에 당뇨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당뇨병 환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당뇨가 나온 것이다. 지방이 많은 음식물을 섭취하면서 운동을 하지 않고 당분을 먹으며 과식을 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삶을 살면 그것은 자살행위이다.

당뇨병과 과식 및 과로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과식과 과로는 당뇨병을 치료하는 데 있어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대상이다. 당뇨병을 치료하기 원하면 과식하지 않는 식습관을 가져야 한다. 과식하는 음식물 중에도 칼로리가 많은 식품이 특히 문제가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지방이 많은 식품이다.  과로와 스트레스와 과식. 이런 것들이 한국의 30대와 40대의 일상 생활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생활 수준이 높아지고 지방과 인스턴트 식품의 섭취가 늘어남에 따라서 당뇨병이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옛날에는 당뇨병은 부자만 걸리는 병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모두 부자처럼 먹고 살기 때문에 당뇨병이 생긴다.  당뇨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성인병들이 치료될 수 있다. 왜냐하면 당뇨병의 치료법은 인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법칙을 그대로 따라가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세포와 유전자에게 최고의 환경을 제공해 주는 치료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마음과 육체를 치료하는 길이다. 조그만 채소밭을 만들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면서 보람을 느끼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에게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 주며 사는 것, 바로 이것이 하늘의 치유의 은사를 받는 비결이다.

서론 - 하나님과의 사랑의 언약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한번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약속은 꼭 지키시는 너무 정확하고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우리가 구원 얻기를 바라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과 약속을 하셨습니다. 성경은 그 악속을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새 언약의 시대이므로 옛 언약과 계명이 폐하여졌으므로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옛 언약이 폐하여졌다는 의미와 새 언약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하여 조명해 보았습니다. 이 주제에 대하여 확실히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사가 여러분의 신앙에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실 -

 

1부 - 질문으로 공부하는 성경의 언약

1. 언약이란 무엇입니까?
언약이란 말은 성경에 많이 등장합니다. 언약이라는 단어는 사전에 이렇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 언약: 말로 약속함. 또는 그런 약속. 또 백과사전에는 언약이란 말이 계약이라는 단어로 나오는데, 그 의미가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 계약: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약속. 히브리어인 베리스에서 온 말로 속박이라는 뜻이다. 원래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 사이에 약속이 이루어지면 짐승을 둘로 쪼개어 나누어 가지는 유대 민족의 풍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2. 성경은 언약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성경에서 언약이란, 일차적으로 죄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은 세 가지 요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약속들 (갈 3:16, 17).
2). 하나님의 조건들, 곧 그의 뜻에 대한 순종(신 4:13).
3). 조건들을 충족시킬 방도들; 그리스도(복음) (사 42:1, 6).


3. 구약은 얼마나 많은 언약들을 언급하고 있나요?
근본적으로 오직 하나의 언약만이 있습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아브라함과 맺으신 것이었는데,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삭과 야곱, 그리고 그 후에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더불어 체결된 것입니다.

4.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출 2:24).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출 6:5).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곧 그분의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5. 언약은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요구하였습니까?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 19:5).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던 이스라엘을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해내시고 그들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셨는데, 이 언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은 순종하기를 요구 받았읍니다. 계약이란 쌍방의 동의가 있어야 하며, 쌍방이 이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언약에 동의함에 따라 하나님의 언약이 요구하는 법칙, 곧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려면 지켜야 할 법들을 지키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돌비에 새겨서 십계명으로 주셨습니다.

6.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점은 무엇이며, 바울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였나요?
옛 언약은 행위에 근거되어 있는 반면에 새 언약은 믿음 위에 근거되어 있습니다. (갈 3:2 참조).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22~26절에 아브라함이 하갈을 잘못 사용한 것처럼(자신의 힘으로 아이를 얻으려고 그녀를 아내로 삼은 것 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덕적 지시들과 의식적 지시들을 왜곡시켰음을 보여줍니다. 이 의식들은 율법과 복음의 역할 - 곧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과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하여 깨닫게 해주는 역할 - 을 했어야만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단순한 행함의 제도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그 의식들의 영적인 의미는 상실되었고, 그들은 단순히 그것들을 순종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행함의 의미로만 그 의식들을 행했던 것입니다. 곧,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행함의 제도로 왜곡시켜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것을 옛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의 힘으로는 아무리 육신의 힘을 다해 노력하여도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는 것을 아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과 은혜로 변화를 받아 새로운 마음이 되는 것인데, 그 새로운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저절로 지킬 수 있는 사랑의 마음으로 변한 마음입니다. 그것을 새 언약, 곧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 바울은 히브리 서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히 10:16).

영원한 언약의 영원한 원칙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으며, 또한 성령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을 기록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일에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새 언약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영적인 이스라엘인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새 언약을 이루는 경험을 해야 할 때이며,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 일에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2부 - 경험으로 이해하는 새 언약의 의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에 대해서 질문을 해온다. 사실,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사람의 마음의 태도에 달려 있는 것이지 그 조건이나 내용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다.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례와 계명들을 지키고 순종하면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들로 삼으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약속이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세우신 것인데, 이스라엘은 그 언약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 언약을 자기의 생애에서 이루는 자들이 영적 이스라엘이 되는 것인데, 사도 바울은 그들을 영적인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음을 받은 자 뿐이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갈 6:14-16).

여기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점은 참으로 거듭난 자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개심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심령이 준비되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굴복할 수도 없고,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로마서 8:7,4).

새 언약을 이루게 하는 거듭남
사람이 거듭날 때의 마음은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며, 동시에 하나님의 율법과도 일치되게 된다. 이 놀라운 변화가 죄인에게 생기면,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죄악에서 거룩함으로, 범죄와 반역에서 순종과 충성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이다.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새로운 동기와 새로운 취미와 새로운 성향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개심은 그 사람에게 악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유전적이거나 습관적인 성향들을 변화시키켜 주는 것이다. 옛 본성과 옛 기질들과 죄의 습관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물려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정한 개심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깊이 감동할 때에만 생길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의 마음을 뜨겁게 녹일 때에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서 우리 마음속에 부어 질 때에(로마서 5:5), 계명을 지킬래야 지킬 수 없이 타락하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며 순종하기를 즐기는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재창조의 신비인 것이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경험이다. 이러한 마음의 변화의 경험을 가지게 될 때에 우리는 드디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며 살기를 즐거워 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마음과 동기가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새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이러한 새 언약의 시대에 살고 있더라도 마음의 거듭남이 없으면, 우리는 여전히 옛 언약의 입장에서 사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힘으로 하나님을 순종하며 살아가려고 애쓰며, 계명을 지킴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려고 노력하는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사랑이 가지고 온 변화
필자가 초등학교 5학년때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하루는 동네 골목 친구들과 제일 즐겨하던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대나무를 쪼개어 칼을 만들고 손잡이를 종이로 그럴싸하게 만들어 달았으며 나무를 휘어서 활들을 만들었다. 모래들을 퍼와서 성을 높다랗게 쌓고는 돌들을 주워 모아다가 총알들과 대포알들로 사용하였다. 우리들은 돌격! 소리와 함께 일제히 성에서 뛰어나가 칼싸움도 하고, 달려오는 적군들을 향하여 활들을 쏘아대었다. 그리고는 돌들을 서로 던지면서 총알과 대포알이 날아가는 양 신이 났었다.

워낙 정신없이 전쟁놀이를 하다 보면 서로 다치기가 일쑤였기 때문에, 전쟁놀이는 위험하니 제발 하지 말아라!하시는 부모님들의 당부를 듣는 것이 우리 동네 아이들의 매일의 일과 중 하나일 정도였다. 필자의 부모님도 예외없이 전쟁놀이에는 참가하지 말라는 부탁의 말씀을 여러번 하신 터였다. 특히 나의 어머님은 돌던지는 전쟁놀이는 절대로 하지 말라고 엄히 당부하셨었다. 그러나 동네 친구들이 신나게 딩굴면서 뛰어다니며 함성을 지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더군다나 부모님 말씀이 무서워서 뒤로 빼는 친구들은 비겁하고 나약한 배신자로 취급당하기 때문에 그 유혹을 견디기란 여간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날도 여전히 어머님으로부터 전쟁놀이는 하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듣고 나서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터였다. 그러나 학교에서 돌아와 동네에서 신나게 뛰어 다니며 전쟁놀이를 하고 있는 친구들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던 나는 또 다시 약해져서 그만 그 무리들 속에 휩싸여 버리고 말았다. 너무나 재미가 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우리 진지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한 적군을 향하여 차돌로 된 총알을 멋지게 던졌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내가 던진 돌이 그만 길을 지나가던 행상 아주머니의 이마를 정통으로 때린 것이었다. 소리를 지르며 땅에 주저앉은 여인의 이마에서는 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갑자기 온 세상이 조용해 진것 같았다. 아이들의 들뜬 소리들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공포와 걱정의 분위기가 갑자기 우리들의 마음을 휘감았다. 모든 즐거움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죄의 대가를 한눈에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몇초 동안 얼마나 후회를 하였는지 모른다. 나는 넘어져 있는 아주머니를 향하여 아주머니 미안해요! 아주머니 죄송해요!라는 말을 여러번 반복하면서 엉겹결에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너무 겁이 났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랐다. 나는 무조건 뛰었다. 뛰어가 숨는다는 곳이 우리 집 앞 마당에 있는 작은 나무들 뒤로 달려가 몸을 숨기었다. 어린 내가 가 봐야 어디로 가겠는가!  몰래 숨어 있으려니까, 갑자기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고, 어머님이 급하게 나가서 문을 여시는 모습이 나뭇잎들 사이로 보였다. 대문 밖에는 동네 친구들로 둘러싸인 다친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그 친구들이 나의 어머니에게 내가 그렇게 했다고 열심히 고자질들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어머님은 약품들을 꺼내와 일단 치료를 하고 나서 그 여인을 데리고 병원으로 가셨다. 나는 나무 뒤에 그냥 숨어있었다. 아버지 한테 혼이 날 생각을 하니 한숨만 나왔다.

얼마가 지난 후에 어머님이 돌아오셨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였지만, 그 아주머니는 나 때문에 이마를 다섯 바늘이나 꿰메어야만 하였으며, 어머니는 그 분에게 돈도 얼마 주어서 보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머님은 병원에서 돌아오신 다음에 전혀 나를 찾지 않으시는 것이었다. 너무나 태연하게 일들을 하시면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집안을 치우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나는 더욱더 불안하게 되었다.

얼마인가 시간이 지난 다음에 해가 서산에 뉘엿 뉘엿 지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내가 숨어 있는 작은 나무들 쪽으로 다가 오시더니 이렇게 조용히 말씀하시는 것이 었다. 병국아! 이제 그만 나와서 저녁 먹자! 어머님은 지금까지 내가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다 알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무안하고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그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어머니를 따라서 방으로 들어간 나는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상위에 가득 차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럴 수가 있을까! 이렇게 못된 망나니 아들을 때려 주어도 시원치 않을 텐데, 이렇게 진수성찬을 차려놓으시다니!

조금 후에 초인종이 울리더니 아버님이 회사에서 돌아오셨다. 나는 속으로 이제는 죽었구나라고 생각하였다. 방으로 들어오시면서 물으셨다. 오늘 별일 없었소?라는 아버님의 질문에 대해서, 어머님은 예, 별일 없었어요! 라고 대답하셨다. 그런 후, 부모님과 여동생들과 나는 저녁식사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나는 목이 메어서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복받쳐 치밀어 올라오는 듯한 것이 있었다. 나는 숫가락과 젓가락을 내려놓고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훌쩍거리는 나를 바라보는 아버님이 그 연유를 물으셨다. 아무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운 것은 얼마 후에 아버지 한테 맞을 매가 무서워서 운 것도 아니었다. 창피하여서 운 것도 아니었다. 내가 운 것은 나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사랑으로 감싸안으신 어머니의 큰 은혜에 감동되어 운 것이었다.

그 순간 이후부터 전쟁놀이를 하고 싶은 욕망이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이기기 어렵던 유혹이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려서는 않된다는 생각만이 내 가슴을 채워왔다. 어머니의 용서와 사랑은 나의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전쟁놀이에 대한 욕망을 눈 녹듯이 녹여 버렸다. 그 이후로는 나는 더 이상 한 번도 전쟁 놀이에 참가해 본 적이 없다. 어머니의 사랑이 내 마음과 생각 속에 다시는 전쟁 놀이를 하지 말아라! 라는 당신의 율법을 기록해 주었기 때문이다.

새 언약의 경험
그때 나는 변했다. 그전까지는 그렇게도 지킬 수 없었던 그 법이 이제는 순종하기에 아주 쉽게 되어 버렸다. 어머님의 말씀을 기꺼이 순종하기를 원하는 소원이 유혹과 시험이 주는 매력을 압도했던 것이다. 순종할래야 할 수도 없었고 순종하고 싶지도 않았었던 그 율법의 요구사항을 드디어 이루게 된 것이다. 전쟁놀이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명령을 과거에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명령을 지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에 감동한 이후에 완전히 상황은 달라져 버렸다.

바로 이러한 것을 새 언약의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로 하여금 히브리 10:16에 기록된 새 언약의 의미를 이해하게 도와 준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은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 보면서, 거기서 나의 구원을 위하여서 어떤 사랑과 희생이 이루어졌는지를 이해하게 될 때에 우리는 드디어 새 언약 관계에 들어가게 된다. 그때 드디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당신의 율법을 기록하실 수 있게 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의 요구대로 순종하는 생애를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심판이 두려워서도 아니고 하늘에 들어가고 싶어서만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되어 다시는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새 마음을 받았으므로 순종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거할 때, 우리는 변화된다.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지게 된다. 구세주에 대한 완전한 사랑의 불길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독소들을 제거하여 믿는 자들의 뜻과 동기를 순결하고 고상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여러분은 새 언약관계에 들어와 있는가? 십자가로 나아가자! 거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다. 새 언약의 관계를 통해서 죄를 이기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왕국에 있게 될 것이다.

3부 - 옛 언약이 계속될 수 없었던 이유

한번은 설교를 마친 후, 교인들과 인사를 나누려고 입구로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앞을 가로 막는 세 명의 청년들이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큰소리로 내게 묻기를 목사님, 오늘 목사님께서는 십계명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시면서 마치 우리가 옛 언약 아래 살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목사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새 언약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그 젊은이는, 십계명은 옛 언약이며, 그것은 십자가에서 폐하여졌으므로 은혜 아래 사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더이상 십계명에 구속받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사실상, 그 젊은이가 가졌던 믿음은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확신을 그대로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러한 확신은 성경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무서운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이 문제를 성경이라는 저울 위에 달아 보아야 한다. 오늘날, 율법과 언약에 대한 오해야말로 기독교회가 부도덕하고 세속화 되어가고 있는 중요한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국가의 법이 폐하여 졌거나 불필요하다는 사상이 국민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을 때, 그 국가가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도 무법한 상태 아래서 온갖 범죄와 부도덕함이 난무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경시하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교회 안에는 부도덕과 세속이 난무하게 될 것이고, 정치적인 목사들과, 권력을 사랑하는 장노들과 이기적인 집사들의 활동 무대가 될 것이다.

언약의 정의
언약과 십계명에 관한 문제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언약의 정의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언약에는 여러 형태와 유형들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것은 서로의 약속과 맹세에 기초한 쌍방의 합의를 뜻한다. 각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언약에 기초하여 당신의 백성을 인도해 오셨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때에는 개인과 언약을 맺으셨고, 어떤 경우에는 국가와 언약을 맺으셨다. 시간과 장소와 환경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형태로 언약이 맺어졌지만,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는 조건은 항상 불변하였고 다른 것으로 대치되지도 않았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언약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말씀은 우리에게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에 존재하는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저 첫 언약(옛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 째것(새 언약)을 요구할 일이 없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 하였노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리라.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옛 언약)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8:6~13.   이 말씀은 옛 언약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더 좋은 약속을 가지고 있는 새 언약 이 생기게 되었고, 따라서 옛 언약은 낡은 것이 되어서 없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법을 마음과 생각에 기록한다는 새 언약이란 어떤 것이며, 낡아져서 사라져 버렸다는 옛 언약은 어떤 것인가?

폐하여진 언약은 십계명이 아니다
옛 언약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옛 언약이 무엇이 아닌가를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성경에는 폐하여져 버린 언약에 관한 기록이 나와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폐하여진 그것은 십계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폐하여진 언약에 십계명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3가지 증거가 위에 언급한 성경절에 나와 있다. 

   첫 번째 증거 : 바울은 더 좋은 약속이 있는 더 좋은 언약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옛 언약에 어떤 문제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만일 십계명이 옛 언약 그 자체라면, 십계명 속에서 어떤 빈약한 약속들을 찾을 수 있어야 되지 않는가? 그러나 오히려 히브리서의 저자인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십계명에 기록된 도덕률들이 매우 좋은 것임을 말하고 있다. 자녀들은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공경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엡 6:1~3). 옛 언약에 어떤 문제가 있음을 암시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는 십계명에 기록된 도덕률을 빈약하거나 흠이 있는 언약으로 설명하지 않고, 오히려 약속이 있는 첫 계명으로 권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바울의 이러한 설명을 통하여, 히브리서 8장에 기록된 흠이 있는 언약은 십계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증거 : 옛 언약에 대한 오해 중에 가장 큰 오해는 옛 언약에 결함이 있었다는 말에 대한 의미이다.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히브리서 8장 7절. 만일 십계명이 옛 언약 그 자체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손수 돌비에 기록하신 십계명에서 어떤 결함을 발견해야 한다. 시편을 기록한 저자와 사도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들어보자.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하고 시편 19장7절. 이로 보건대 율법도 선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로마서 7장12절. 십계명을 가리키는 이러한 성경절들이 무엇인가 빈약하고 결함이 있는 모습을 묘사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완전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완전하다는 말은 어떤 결함도 찾아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세 번째 증거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8:13). 여기서 사도 바울은 옛 언약이 폐지되어 없어졌다는 강력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만일 옛 언약이 십계명을 말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도덕률인 십계명이 낡아져서 없어져 갔다는 말이 된다. 이 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견해를 들어 보자.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3장31절. 이로써 우리는 낡아져서 사라진 옛 언약이 십계명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쪽에서는 낡아져서 사라졌다고 말해 놓고서, 다른 곳에서는 동일한 것에 대해서 결코 폐할 수 없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성경은 언제나 일관성 있는 진리가 담겨진 책이다. 바울은 다만 사라져간 것은 옛 언약이고, 결코 폐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인 십계명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없어져 버린 옛 언약이 십계명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결론지을 수 있다.

그렇다면 옛 언약은 무엇인가?
무엇이 옛 언약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이제 우리는 무엇이 옛 언약인가를 성경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자, 옛 언약을 맺는 장면을 보기 위해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시내산으로 가보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율법을 주시기 전에 먼저 모세를 산 위로 부르셔서 당신과 백성들 사이에 맺을 언약을 제안하셨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 너희가 내 말을 받들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19:3~6).

이 말씀 가운데 언약의 요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언약은 맺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제안에 대해서 그들은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출 19:7~8).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다 행하리이다 라는 대답이 하나님께 올려지는 순간 옛 언약의 기초가 놓여졌다. 그러나 그 언약이 공식적인 시행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그 약속을 봉인하는 절차가 있어야 한다. 언약을 인준하는 의식은 백성들 위에 수소의 피를 뿌림으로써 거행되었다.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이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4~8).

여기서 우리는 이 언약이 십계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세워진 상호간의 약속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십계명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도덕률이지, 상호간에 맺어진 약속이 아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이 언약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옛 언약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맹세한 약속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법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약속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답례로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언약의 체결 과정에 있어서 결정적인 잘못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약속을 하는 백성들 편에서 보인 태도와 그들의 마음 상태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구하는 대신에 우리가 할 수 있다 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던 것이었다.

언약을 깬 이스라엘 백성들
그러나 모세가 돌비에 새긴 십계명을 가지고 산을 내려가기도 전에 그들은 자신들의 약속을 어기고 말았다. 이제, 옛 언약의 결함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되는가? 문제는 언약을 맹세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에 있었지,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주신 십계명에 있지 않았다. 자, 이제 앞에서 살펴본 히브리서 8장으로 돌아가 보자. 하나님께서 저희를 허물하셨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8절). 또한 9절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셨다. 분명, 상호간의 언약을 깨뜨린 장본인은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히브리서 8장에서 옛 언약이 무흠하지 않다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옛 언약은 백성들에게 속박을 가져왔을 뿐이며, 그들은 그것을 지킬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서 볼 때, 우리는 두 번째 언약 즉, 새 언약을 다시 맺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은 히브리서 8장에서 왜 새 언약을 더 좋은 약속이라고 표현했을까? 왜냐하면 언약의 창안자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언약을 맺는 상대방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히브리서 8장10~12절.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율법을 우리의 마음에 기록하셔서 우리를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켜 주시겠다는 놀 라운 약속이 새 언약에 포함되어 있다.

새 언약의 인준
이제, 새 언약이 어떻게 인준되었는지를 살펴보자. 그것은 옛 언약과 똑같은 방법인 피를 흘림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숫소가 피를 흘리는 대신에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흘려졌다. 양의 큰 목자되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하사 자기 뜻을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히브리서 13장20절. 시내산에서 했던 인간의 빈약한 약속과는 얼마나 큰 대조를 이루고 있는가?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는 인간의 약속 대신에,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하사 ... 우리 속에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모든 그리스도인들 앞에 놓여졌다. 우리가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그분께서 이루시는 것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이는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장5절. 그런데 어떻게 새 언약이 봉인되었는가? 동물의 피가 아닌 영원한 언약의 피로 인쳐졌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이 새로운 언약을 보증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점을 비교하여 보자. 옛 언약은 짐승의 피로 인준된 것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자신들의 힘으로 지키겠다고 공언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약속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출 24:5~8, 히 9:19~20). 그러나 새 언약은 우리의 마음에 당신의 율법을 기록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위에 기초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준되었다.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브리서 8장 10절. 

4부 - 마음에 기록되는 새 언약

새 언약은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순종은 표면적인 행위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이 마음에 새겨짐으로써 가능하게 되는 것인데, 그렇다면, 율법이 마음에 새겨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까? 그것은 참된 거듭남을 통해서 마음과 생각이 변화된다는 말이다. 거듭남의 경험이란, 예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심으로써 우리의 생각과 동기와 심령이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5.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 임하셔서 순종에 필요한 당신의 능력을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 주신다. 그리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함으로써 연약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게 되며, 그분의 승리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나타나게 되고, 육체적 정욕과 이기심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의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4, KJV). 예수께서는 죄있는 육신의 모양을 취하셨지만 육신에 따라서 생애하지 않고 영을 좇아서 생애하심으로써 율법의 의를 이루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께서 우리 마음속에 거하실 수 있도록 받아들인다면, 그분께서는 죄와 분리된 당신의 거룩한 생애를 우리에게서도 이루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을 따르는 모든 자녀들에게 주어진 새 언약이며, 누구든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절대적이고도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사실을 가리키면서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라고 기록한 것이다(골 1:27). 다음과 같은 바울의 간증은 우리를 전율케 하기에 충분하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 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명
우리는 마음에 기록된 율법이 시내산에서 돌비에 새겨진 율법과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옛 언약과 새언약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은 율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직무에 있는 것이다. 돌비에 새겨진 율법은 우리를 단지 정죄하며 죽음에 이르게 할 뿐인데,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 하기 때문이다(롬 8:7). 변화되지 않은 육신적 마음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다. 그러나 똑같은 율법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변화된 마음에 받아들여지면, 율법은 우리를 구속하고 얽매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이 된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은 간증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한일서 5장 3절.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결코 무거운 것이 될 수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기쁘고 즐거운 일이 된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시 40: 83.

새 언약 아래서는 단 한명의 영혼도 타락한 본성의 강한 충동을 스스로의 힘으로 싸우도록 내버려지지 않는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선천적 혹은 후천적인 모든 결함들을 극복하기 위한 초인간적인 능력이 하늘로부터 제공될 것이라는 약속이 새 언약 속에 포함되어 있다. 죄와 유혹에 부딪힐 때마다, 그분의 능력을 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통하여 전달되는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성령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받아들이는 자마다 마음이 변화되고 부드러워져서, 모든 편견과 강팍함과 이기심과 교만을 버릴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영광스런 새 언약을 더 좋은 약속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두 언약을 상징하는 두 아들
지금까지의 연구를 토대로 갈라디아서 4장을 살펴보자. 새 언약과 옛 언약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이 사용한 비유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먼저 바울의 비유를 읽어보자.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이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갈 4:22~25.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 즉 이삭과 이스마엘이 각각 새 언약과 옛 언약을 대표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울은,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은 옛 언약을 상징하고, 사라의 아들인 이삭은 새 언약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28~31절. 이것은 매우 흥미있는 이야기이다.

바울은 왜 두 여인의 두 아들이 각각 두 언약을 나타낸다고 말하였을까? 바울은 이스마엘과 이삭의 출생을 실례로 들어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부인 사라를 통해서 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 당시 사라의 나이는 이미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나이가 훨씬 넘었었다. 그래서 사라는 자신의 남편 아브라함에게 여종 하갈을 취하여 아이를 가질 것을 권유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방법만이 하나님의 불가능한 약속을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하여 한 아들을 얻었는데, 그의 이름이 이스마엘이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러한 태도는 자신의 노력과 아이디어에 근거를 둔 옛 언약의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그러한 시도는 시내산에서 맺어진 옛 언약이 실패했던 것처럼 철저하게 실패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얄팍한 꾀로 얻은 이스마엘을 약속의 자녀로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이를 기다려야만 하였다. 사라의 나이가 90세쯤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생리학적으로 도저히 아기를 가질 수 없는 할머니의 태에서 생명을 창조해 내셨다. 육신적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하였지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창조의 능력을 통해서 이삭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이삭의 출생은 새로 태어남 즉, 거듭남의 경험에 기초한 새 언약의 관계를 잘 나타내는데, 오늘날에도 이것을 잘 이해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태어날 수 있다.

과학적으로, 신체적으로 볼 때, 사라의 태에서 어떤 열매를 낸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인의 타락하고 이기적인 몸과 마음에서는 결코 순종의 열매를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사용하셔서 늙은 사라의 속에서 새 생명을 창조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사용하셔서 영혼 속에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시면, 마음이 새롭게 되고 거듭나서 순종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이삭은 육체를 따라 태어나지 않고 성령을 따라 났다(갈 4:29). 모든 인간은 연약한 육체를 가졌으므로 율법의 의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옛 언약 아래서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결국 이스마엘과 같은 종의 자녀를 생산할 뿐이다. 율법이 성령을 통해서 마음에 기록되어야 하며, 너희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사람들을 오히려 옛 언약 아래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리는 오히려 그 반대를 말하고 있다. 율법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기록되어 거듭나게 될 때, 비로서 그는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이러한 상태에서야 비로서, 그리스도인의 순종과 행함은 참 사랑의 증거가 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장15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요한복음 5장3절.

육체가 아니라 마음에 받는 참 할례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옛 언약의 표로서 할례를 주셨을까? 그렇게도 중요한 언약을 나타내는 표로서 할례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매우 귀중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볼 때, 신체적인 할례는 육체를 의존하는 신앙과 관련 있음을 보게 된다.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 3:3).

바울은 참 할례를 신체적인 할례와 구별하여 말하였다. 신체의 일부인 양피를 베어내는 것 자체는 참 할례가 아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신체의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로마서 2장28~29절.

여기서 바울은 사람이 행하는 육체의 할례와 성령께서 행하시는 마음의 할례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참 할례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그 할례는 인간의 노력과 공로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찬양을 돌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참 할례는 참된 회개를 통하여 육체적 본성을 잘라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참된 할례의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참 할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골로새 교회에게 보내는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 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골 2:11). 바울은 마음에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영적 역사를 할례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그것은 손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어떤 인간의 노력도 그것을 이룰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몸의 살을 베어내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내재하심을 통하여 죄의 육체적 본성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성령의 역사이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룰 자니라 갈라디아서 3장29절. 마음에 할례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이 참 유대인이며, 참된 아브라함의 후사이다.

참된 순종을 이루는 새 언약
그리스도의 피를 근거로 한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은 행함의 계획이 아니라, 믿음과 은혜를 통한 변화의 계획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행함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뜻인가? 율법이 인간을 의롭게 만들 수 없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변경하거나 폐지시킬 수 있는가? 성경은 옛 언약 아래서와 마찬가지로 새 언약 아래서도 율법은 동일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3장31절.

가장 큰 두가지 차이점은 단지 율법이 기록되는 장소가 돌비에서 마음으로 바뀐 것과, 우리 자신의 힘으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율법의 요구가 성취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구원을 보면서 감격하여 그분의 말씀과 명령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같은 모양을 가진 순종과 행위일지라도, 그것이 이루어지는 능력의 근원과 동기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셔야만, 하나님께 충성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성과 사랑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그분의 말씀과 뜻에 온 마음을 다하여 순종하는 생애를 살기로 결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참된 새 언약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에 대하여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헌신과 순종을 의미한다.

5부 - 십자가에서 무엇이 폐지되었는가?

105호 5부
십자가에서 폐지된 율법은 무엇인가?

성경은 두개의 율법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하자 그들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구원의 계획을 발표하시고(창 3:15),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제사 제도를 주셔서 그것을 통하여 그들이 믿음을 표현하게 되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아담 때부터 시작된 동물의 희생제도는 그의 후손들에 의해서 크게 곡해되었다. 주변의 이방인들로부터 받아들인 미신, 우상 숭배, 방탕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지시하셨던 단순하고도 의미심장한 희생제도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소에서 유지되어야 할 예배 형식에 대한 완전한 지시를 주시게 되었고,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식 율법을 책에 기록하였다. 이 희생제도에 관한 의식 율법을 신약 성경에서는 의문의 율법(ceremonial law)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십자가에서 폐지된 율법은 바로 이 의식 율법을 뜻한다.
또 하나의 율법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두 돌판에 친히 기록하신 십계명인데, 이것은 성소의 두번째 칸인 지성소 안의 법궤 안에 거룩하게 보관되었다. 이 십계명은 하나님의 도덕적 품성과 그분의 뜻이 기록되어 있는 도덕률(moral law) 이다. 이것은 총 10개의 계명으로 되어 있는데, 전반부에 있는 4계명에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사랑이 기록되어 있고, 후반부 6계명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도덕과 사랑이 기록되어 있다.

동물의 희생제도에 대해서 기록한 의문의 율법은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인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제사 제도의 목적과 그 완전한 의미가 실현될 때까지만 존재하도록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 더 이상 양을 잡아 죽이는 희생제도가 불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의문의 율법을 그리스도께서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셨다고 기록하였던 것이다(골로새서2:14) 그러나 십계명의 율법에 대해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다고 기록하였고(시편 119:89),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선언하셨다(마태복음 5:17~18).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라고 말했던 것이다(로마서 7:12).

구세주의 죽음은 의문의 율법을 종식시켰지만, 도덕적 율법인 십계명에 대한 인류의 의무는 조금도 감소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인류에게 내려진 율법의 정죄를 속하기 위해서 하늘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만 했다는 사실은 율법의 요구와 그 권위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다. 비록 의문의 율법이 십자가에서 폐지되었다고 할지라도, 희생제도 속에 담겨진 귀중한 의미는 오늘날에 사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기별을 전해주고 있다.

십계명과 의문의 율법의 차이점 비교표

 

 

 

비교 내용

십계명

의문의 율법

1. 법의 내용

사랑의 도덕률

제사제도의 의식법

2. 별칭

"최고의 법" (약2:8)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엡 2:15)

3. 기록자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하심(출 31:18)

모세가 기록함(대하 35:12)

4. 선포자

하나님께서 직접 선포하심(신 4:12~13)

모세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달(레 1:1~3)

5. 기록 장소

옛 언약 : 두개의 돌비 (출 31:8)새 언약 : 마음 판 (히 8:10)

책 (대하 35:12)

6. 보관 장소

법궤 안에 넣어 둠(출 40:20, 히 9:4)

법궤 곁에 놓아 둠(신 31:24~26)

7. 유효 기간

"영원히 설 것임"(시 111:7~8)

십자가에서 폐지됨(골 2:14)

8. 폐지 여부

그리스도께서 폐하지 않았음(마 5:17~18)

그리스도께서 폐하셨음(엡 2:15)

 

6부 - 사랑으로 계명을 지킨다!

성경은 두개의 율법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하자 그들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구원의 계획을 발표하시고(창 3:15),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제사 제도를 주셔서 그것을 통하여 그들이 믿음을 표현하게 되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아담 때부터 시작된 동물의 희생제도는 그의 후손들에 의해서 크게 곡해되었다. 주변의 이방인들로부터 받아들인 미신, 우상 숭배, 방탕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지시하셨던 단순하고도 의미심장한 희생제도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소에서 유지되어야 할 예배 형식에 대한 완전한 지시를 주시게 되었고,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식 율법을 책에 기록하였다. 이 희생제도에 관한 의식 율법을 신약 성경에서는 의문의 율법(ceremonial law)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십자가에서 폐지된 율법은 바로 이 의식 율법을 뜻한다. 또 하나의 율법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두 돌판에 친히 기록하신 십계명인데, 이것은 성소의 두번째 칸인 지성소 안의 법궤 안에 거룩하게 보관되었다. 이 십계명은 하나님의 도덕적 품성 과 그분의 뜻이 기록되어 있는 도덕률(moral law) 이다. 이것은 총 10개의 계명으로 되어 있는데, 전반부에 있는 4계명에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사랑이 기록되어 있고, 후반부 6계명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도덕과 사랑이 기록되어 있다.

동물의 희생제도에 대해 기록한 의문의 율법은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인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제사 제도의 목적과 그 완전한 의미가 실현될 때까지만 존재하도록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 더 이상 양을 잡아 죽이는 희생제도가 필요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의문의 율법을 그리스도께서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고 기록하였던 것이다(골 2:14).

그러나 십계명의 율법에 대해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다고 기록했고(시 119:89),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선언하셨다(마 5:17~18).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라고 말했던 것이다(롬 7:12).

구세주의 죽음은 의문의 율법을 종식시켰지만, 도덕적 율법인 십계명에 대한 인류의 의무는 조금도 감소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인류에게 내려진 율법의 정죄를 속하기 위해서 하늘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만 했다는 사실은 율법의 요구와 그 권위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다. 비록 의문의 율법이 십자가에서 폐지되었다고 할지라도, 희생제도 속에 담겨진 귀중한 의미는 오늘날에 사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기별을 전해주고 있다. * 본 호 30쪽의 도표를 참고하십시오.

7부 -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된 사람은...

밤중에 수줍은듯이 몰래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요 3: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의아해하는 그에게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고 하셨습니다.

잎사귀와 꽃을 살랑거리게 만드는 바람의 소리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들립니다. 그러나 바람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것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성령이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바람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회심한 과정이나, 개심의 과정의 확실한 시간이나 장소를 대어 말할 수 없다 해도 이것이 그 사람이 회심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성령께서는 바람과 같이 보이지 않는 능력으로 각 사람의 마음에 끊임없이 역사하고 계십니다. 받는 사람이 혹시 의식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조금씩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이끌리게 하는 감명이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감명들은 예수님을 명상하거나,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거나, 목사님의 설교를 들음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더욱 직접적인 호소를 하실 때에 그 영혼은 기쁘게 자신을 예수께 바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갑작스런 회심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꾸준하고도 오래 계속된 과정을 거쳐서 호소하신 결과인 것입니다.

거듭남은 새 마음을 갖게 합니다. 거듭남은 새로운 사람이 되어 살아가게 합니다. 오랫 동안 갇혀있던 캄캄한 죄의 동굴과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무거운 육체의 사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마음이 새롭게 된 사람은 진리 속에서 무한한 자유와 기쁨을 느낍니다. 육체의 소욕은 죽고 예수님과 함께 성령의 소욕을 따라가는 생애의 환희와 즐거움은 푸르고 넓은 창공에 안기워 날아가는 새의 즐거움과 같습니다.

이전에 두렵게 느껴지던 하나님이 이제는 마치 친형님처럼 가깝고 의지할 만한 분으로 느껴지고, 사랑으로 덧쒸워지고 입혀진 새로운 마음속에 임재하시는 예수님과의 끊임없는 동행은 삶을 과거의 것과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으로 만듭니다. 사도 바울이 간증했듯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배설물처럼 하찮게 여겨지고, 하늘의 영적인 사물 외에는 세상의 것들에 별로 관심이 없어지지만, 그렇다고 주어진 삶을 함부로 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최선을 위해 마련하신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으므로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바람 그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고 느낄 수 있는 결과를 드러내듯이, 영혼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도 그 구원하는 능력을 체험한 사람의 마음과 모든 행위 가운데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그 사람의 생애는 변화됩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능력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죄악적인 생각은 사라지고, 악한 것이 싫어지고, 악한 행위와는 인연을 끊게 됩니다. 또 예수님이 위해서 돌아가신 한 영혼, 한 영혼이 너무 소중하고 그들의 삶이 귀중하게 생각되어, 다른 영혼을 아프게 하거나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일을 하지 않게 됩니다. 사랑과 겸손과 화평이 분노와 시기와 분쟁을 대신하고, 기쁨이 슬픔을 대신하며, 얼굴은 하늘의 평화의 빛으로 잔잔한 미소를 띄우게 됩니다.

때때로 육체의 소욕이 일어나 아우성을 칠 때가 있지만, 하나님께 온전히 굴복한 삶,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하나님의 능력에 모든 것을 의탁한 삶의 기쁨과 평화는 이 세상의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것이 그렇게 크게 마음을 동요시키는 유혹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육체의 소욕을 또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때임을 깨닫게 하는 신호가 되어 다시 주님께 매달리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영과 합하여 사는 생애, 육체의 소리를 듣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걸어가는 생애, 진리의 좁은 길을 따라 기쁨으로 사는 생애, 육체의 충동과 사단이 주는 유혹에 종이 되어 살던 어둡고 캄캄하던 감옥을 벗어나 진리의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의 세계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사는 거듭난 생애를 한번 맛 본 사람은 다시는 잃어버리고 싶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거듭난 사람의 마음과 생애 속에는 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소원, 늘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열망, 사람의 인정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자세,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여 묵상하는 일들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범죄하라고 억만금을 갖다주어도 고의적으로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기록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법이 생각에 기록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철저하게 거듭난 사람인 것입니다.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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