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만찬으로의 초대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두 눈동자와 두 뺨이 무지개빛으로 입혀진듯 황홀한 빛으로 빛나고, 입가엔 다물 수 없는 함박꽃 같은 미소를 띤 연인들을 바라보는 것은... 비바람이 부는 캄캄한 밤, 문득 발견한 어떤 집 창가에 켜진 환한 등불처럼, 아무리 어두움이 주위에 드려있어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사랑으로 그 암울한 어두움을 다 녹여내며 그들의 행복으로 주위를 환하게 만든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
가끔 에녹을 생각해 본다. 삼백 년이란 긴 세월을 하나님과 동행한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 에녹을... 아무리 좋은 사이라도 함께 지낸다면 지루할 만도 했을 삼백 년이란 긴 시간을, 마치 아무리 얘기를 해도 또 얘기할 것이 남아있는 연인들처럼, 하나님과 한없이 함께 이야기하며, 함께 생각하며, 함께 나누며,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에녹... 그렇게 좋아하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에녹의 삶은, 마치 매일 만찬으로 초대 받은 것 같은 가슴벅찬 기쁨의 삶이었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영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 이 세상의 어떤 사이보다 더 가깝고,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더 밀접한, 아니, 연인보다 더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 그래서 성경에는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전혀 범죄한 기록이나 실수의 기록이 없는, 삼백 년 동안이나 끊임없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 에녹에 대하여 써있으며, 우리에게 모본이 되는 그 짧은 몇 줄의 이야기는 삼백 년을 뛰어넘어 영원한 세월로 이어졌다. 에녹은...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1~24).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예수님과 영적인 산 관계를 맺으려는 욕망보다는, 이적과 기사를 보고 세속적인 육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예수님을 따르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자, 예수님은 그들을 돌려 보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우려는 것은 이 땅의 왕국이 아니고, 마음속에 세우는 영적인 왕국이라고... 그리고 나와 영적인 산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은 나와 나의 왕국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덧붙여 예수께서는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시면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당신과 맺는 밀접한 관계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상징으로 표현하셨던 것이다.

교회는 열심히 다니지만 예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어떤 관계도 맺지 않은, 피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많이 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이 무엇인지, 그분과 동행하는 기쁨과 환희가 무엇인지, 자아가 죽고 내 안에 예수께서 살아계시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체험하지 못하면서 믿는 사람들,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맺는 깊은 영적인 관계와 내적인 경험을 전혀 모르는 채, 세속적인 축복만을 바라면서 교회를 다니는 그런 사람들은 그저 교회의 문턱만 드나드는 마당만 밟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교회를 수백 번 드나들었다해도 전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노라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마신다는 의미
우리 육체의 생명이 음식에 의하여 유지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적 생명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지된다. 또 우리가 음식을 먹지 않는 한, 또 음식이 우리 몸 속에 들어가 신체의 한 부분을 구성하지 않는 한, 그 음식이 우리에게 아무 유익을 끼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분과 영적인 관계를 매일 맺지 않는다면 그분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신다는 의미는, 그분을 마음에 받아들여 그분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하는 것이며, 그분의 진리가 우리의 것이 되고 그분의 사상이 우리의 사상이 되고, 그리고 그분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의 생애에 소화되는 것을 말한다. 그분의 말씀과 생명을 먹으며 그분과 하나가 되어 사는 삶,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삶은 아름답다.  또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사랑의 성품이 내 것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마시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그분 안에서 완전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예수님의 사랑의 생명을 받아들여 변화함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그분의 사랑을 깊이 생각하고 그 사랑에 의하여 깊은 감명을 받을 때, 우리는 그분의 성품을 닮게 되고 그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 음식이 신체에 영향을 주듯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끼쳐야 하는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예수께서는 당신과의 영적인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말씀하셨다. 어린 가지가 산 포도나무에 접붙혀져 섬유질과 섬유질이, 엽맥과 엽맥이 연결되어 포도나무 줄기로 자라듯이, 그리하여 포도나무의 생명이 그 가지의 생명이 되듯이, 죄로 죽은 영혼이 그리스도와의 연결을 통하여 생명을 얻게 된다. 이 연합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결점을 그리스도의 장점에, 우리의 텅 빈 것을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에, 우리의 연약함을 그리스도의 능력에 연합시킬 때에,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성이 신성에 감응되고 예수님 안에서 그분과 하나가 되어 죄인인 우리가 드디어 그분의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과 품성을 나누어 가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 이루어진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지속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연한 접촉이거나 또는 분리와 연결이 반복되는 그런 결합이 되면 안 된다. 가지가 산 포도나무의 한 부분이 되기 위해서는 뿌리에서 가지로 생명과 힘이 전달되는 일이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지속적인 경험이 되어야 한다. 포도나무에 붙지 않은 가지는 살 수 없듯이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영적인 생명은 예수님과의 계속적인 교통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 없이는 우리는 단 하나의 죄도 이길 수 없고 아무리 조그마한 유혹이라도 물리칠 수 없다.

만찬으로의 초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마시는 경험, 가지가 포도나무에 지속적으로 붙어있는 경험, 그것이 에녹이 한 경험이었다. 에녹은 이 세상에 살았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의 생각과 사상과 마음은 늘 하늘에 있었고,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는 세상의 어느 무엇이 줄 수 없는 기쁨을 그에게 주었다.  그는 늘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만찬에 초대되었으며, 그 아름다운 초청은 매일 매 순간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안에 녹아들어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었던 에녹... 마치 사랑하는 연인처럼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에녹... 그 연합은 점점 가까워져서 하나님과 에녹은 더 이상 헤어져 살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녹을 하늘로 데려가셨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과 행복은 경험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은밀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신방의 불이 켜지듯이 비밀스럽고 아름다운 것이며, 그 환한 빛 속에서 사랑하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영광스러운 경험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으로 마음속에 믿음의 등불이 켜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경험이다. 에녹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권두언


강병국 목사

우리가 나또는 내 자신이라고 말 할 때에 우리 신체의 어느 부분을 가르키는 것입니까? 우리의 심장을 가르키는 것인가요, 아니면 우리의 팔을 가르키는 것인가요? 물론 나라고 말할 때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가르키는 것이겠지요. 마음의 다스림이 없는 신체는 한갓 로보트에 불과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여러 가지의 기능들이 있는데, 과연 그들 중에 어떠한 것이 우리의 자신들을 지배하고 명령하는 기능일까요?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의지의 기능입니다. 이 의지를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결정하고 명령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만약 이 의지가 없다면 우리는 자기의 독특한 개성을 가진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지의 힘이야말로 우리 자신들을 나 자신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바로 이 의지의 힘, 곧 자유 선택의 힘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로보트가 아닌 한 인격체들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지의 힘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도 하고 또는 반역하여 죄 가운데 빠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 우리가 우리의 의지의 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크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죄악을 저지하거나 아니면 의로운 성품을 만들어 나가는 일에 있어서도 우리의 의지의 힘을 어느 편에 두느냐에 따라 하늘과 땅의 차이가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의지의 힘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하며, 더 나아가서. 어떻게 하여야 이 의지의 힘을 하나님 편에 두고서 올바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지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과학인 것입니다.

이번 호는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간절하게 기도드립니다.

기독교 역사 꿰뚫어보기 - 제1부

교회의 속성과 역사
16세기 마틴 루터 시대에도 교회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구원을 막는 걸림돌이었다. 성령께서 직접 각 개인들에게 역사하셔서 그들을 진리로 인도하시기 원하셨지만 교회는 교단의 권력과 인간의 전통을 내세워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였다. 그래서 교회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루터의 시대에 있어서도 모든 양심인들의 고민이 되었다. 세상에 부패하기 쉬운 것이 많지만 교회처럼 부패가 잘되는 곳도 찾기 힘들다. 바다에서 금방 잡아 올린 생선이 신선하게 보이지만 잠깐 사이에 그 생명과 함께 신선도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교회의 거룩함과 신선한 정신도 빠른 속도로 부패가 진행된다. 기독교회가 태동하기 이전에 존재하였던 유대교회는 오랜 세월 동안 부패의 극을 달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시어 교회를 견책하셨다.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주고 네 혀로 궤사를 지으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시 50:17~20).

기독교회가 생기자마자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위선자들이 생겼고(행 5장),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사도들이 하나씩 사라지면서 교회의 부패와 세속화는 급속하게 진전되었다. 기독교회 역사에 의하면 사도들의 시대가 끝나면서 시작된 암브로스, 클레멘트, 그리고 크리소스탐과 같은 교부시대에 이미 교회의 부패는 극심해졌다. 교직은 공공연히 매매되었고 뇌물을 주고 받는 일들이 왕성하였다. 교회는 이때부터 이미 의인들을 죽이고 진리를 고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다. 이러한 기독교회의 부패와 진리의 변절은 중세기의 종교 암흑시대 ,즉 1200여년 동안 계속되었고 루터 시대에 이르러는 극에 달했다. 그러한 교회의 부패의 속성은 지금까지 현존하는 모든 교단이나 교파에 지속되고 있다. 일찌기 영국 국교회의 감독 웨스트 코트는 교회의 부패 역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교회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서기 312년)에 한 번 세상과 결합한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그것을 끊지 못하고 계속하고 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세상을 교화시키고 구원하기 위함이지만, 교회는 세상에 의하여 변질되고 부패되었다. 세상이 교회를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이 일어나서 교회를 원래의 목적으로 돌리려고 하면 그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주체가 교회가 되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사람은 교단에 의하여 핍박을 받고 순교를 당함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게 되는 상황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미움과 분노를 통해서도 당신이 뜻과 목적을 이루시는 섭리를 보게 된다. 교회의 거룩함과 진리로 인하여 영혼이 구원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의 사람들을 반대하고 핍박함으로써 영혼들이 연단되고 정결케 되어 구원받는 이상한 모습이 기독교회 역사를 채우고 있다. 지나간 역사 동안 나타난 교회는 구원의 기관이 아니라 박해의 기관이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성경에 남겨 두신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알찌니 (마 7:13,14).
그날에 많은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2,23).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 18:8).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
교회의 역사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떠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교회가 타락하고 부패하면서 진리가 변질되고 이방 종교의 가르침과 철학이 그 자리를 차지하자 교회는 진리를 고수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성경의 진리에 충성하고자 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떠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결심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데 왜냐하면 그 당시 교회는 교회를 떠나거나 출교를 당하면 구원과 영생이 없다고 가르쳤으며 교회를 떠남으로써 모든 사회적 관계가 끊어졌고 신분이 박탈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성경의 진리에만 의지하고 일어서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그 유명한 왈덴스인들이다. 그들은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성경 속에서 확인한 진리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교황이나 신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성경으로 가서 성경 속에 계신 진리의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였다. 프랑스 리옹시의 상인이었던 페테로 왈도라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이 진리 고수 운동은 곧 이태리와 프랑스 양국으로 퍼져나가서 온 유럽에서 개혁 운동의 토대를 만들었다. 후일에 일어난 거의 모든 개혁자들은 왈덴스 인들의 정신과 신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는 이유는 교회의 타락과 부패 때문이다. 일부 식자(識者)들이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공감했지만, 아무도 교회를 개혁하는 일에 앞장 서지는 않았다. 양심인의 절규도, 지식인의 글도, 성도의 기도도, 학자의 제안도 깊이 병든 교회를 치료할 수 없었다. 개혁을 위해서는 인간의 힘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였다.

개혁자가 준비되는 과정
하나님께서는 중세기의 로마 천주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개혁자가 필요하셨다. 그래서 한 사람을 선택하셨는데 그가 바로 마틴 루터이다. 하나님께서는 개혁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루터에게 구원의 진리를 보여주셨으며 또한 그것을 루터 자신이 깊이 경험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다. 율법과 행함에 묶여 있던 사울에게 구원하는 진리를 보여주셔서 믿음과 순종의 신앙을 가진 바울로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는 루터에게 바울과 유사한 경험을 하도록 섭리하셨다.

2천 년 기독교 역사상 바울처럼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맛본 사람이 누구인가? 그리고 바울처럼 철저하게 유대교회의 전통을 밟아 온 사람이 또 누구인가? 그는 스스로 유대 사람 중의 유대 사람으로 자처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유대교회의 전통과 가르침은 그를 어쩔 수 없는 좌절과 고뇌의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결국 그는 율법의 무거운 짐을 견디다 못해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절규하였다(롬 7:24). 깊은 절망의 고통 중에 방황할 때 바울은 율법 이외의 세계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 율법에 눌리어 죽었던 바울이 십자가에서 살아났다. 그는 낡은 멍에를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으로서 참된 순종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이방인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도가 되었다.

만일 기독교회 역사를 통하여 제2의 바울을 찾는다면, 역사는 주저없이 마틴 루터를 지목할 것이다. 바울이 유대교회의 충실한 아들이었던 것처럼, 루터도 로마 천주교회의 충성스런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바울과 마찬가지로 로마 천주교회가 가지고 있던 전통과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에 얽매여 극심한 영혼의 고통을 받았다. 루터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교회가 가르치는 전통과 교리에 의지하여 구원과 영혼의 평안을 찾고 찾았지만 그러한 것들은 그의 영혼의 갈증을 풀어주지 못했다. 결국 그를 구원한 것은 일찌기 바울을 구원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였다. 바울처럼 루터 역시 교회의 아들에서 십자가의 아들로 변화되었다. 그는 교회가 가르치던 전통과 거짓 교리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으로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되었다. 바울이 성경을 유대인들의 손에서 빼앗아 이방인들의 손으로 가져갔던 것처럼 마틴 루터도 성경을 로마 천주교회의 성직자들 손에서 빼앗아 평신도의 손으로 가져갔다. 성경은 더 이상 교회의 경전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경전이 되었다.

개혁자가 나타나는 이유
처음에 루터는 개혁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다만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서 구원에 이르겠다는 생각에 몰두하였다. 스스로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거대한 개혁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도함을 받았다. 그는 개혁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안에서 거듭났으며 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였다. 교회와 세상을 개혁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개혁하였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개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능력에 의하여 자신이 개혁되었던 것이다. 마틴 루터가 다른 개혁자들보다 현격한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점에 있다. 하나님은 먼저 루터의 마음에 내려오셔서 유럽을 개혁하고 교회를 개혁하셨다. 교회가 개혁되기 위해서는 먼저 개혁자가 준비되어야 하며 개혁자의 마음과 신앙 속에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 있는 준비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 준비는 성령의 은혜와 진리의 가르침으로만 가능하다.

역사는 하나님의 행위의 기록이다. 교회의 역사는 부패의 역사이다. 교회의 역사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이 언제, 어떻게, 왜 교회를 떠나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기록이다. 교회의 역사는 선지자가 왜 필요하게 되었는가의 역사이며 개혁자가 왜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밝혀 주는 기록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토마스 칼라일은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하였다. 역사는 깊이 연구하면 성경이다. 이 말이 가장 잘 적용되는 것이 16세기에 있었던 유럽의 종교 개혁사이다.

개혁이 교회 밖에서 시작되는 이유
역사를 통하여 볼 때 개혁은 항상 교회 밖에서 시작되었다. 매우 드물지만 개혁이 교회 안에서 시작된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교회의 지도자가 경건하고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었던 때였다. 예를 들어 모세의 때는 지도자인 모세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경건하고 진리를 올바로 이해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개혁을 교회 안에서 시작하실 수 있으셨다.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은 교회라는 조직이 부패해서 스스로 개혁할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개혁은 항상 교회 밖에서 시작되게 된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유대교회의 대제사장인 엘리를 버리시고 한나의 아들인 사무엘을 택하셔서 새 신앙을 이스라엘 안에 일으키셨다. 하나님께서는 개혁자 중에 가장 큰 개혁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내리실 때에도 유대교회의 대제사장의 아들이나 왕족을 택하지 않으셨다. 유대교회에서 전혀 주목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무슨 선한 자가 나오랴고 한 그 나사렛의 목수 집안을 예수 그리스도의 집안으로 선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개혁의 시작을 교회의 밖에서 시작하기로 결정하셨던 것이다. 침례 요한 역시 교회가 그에게 개혁의 자리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그의 개혁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교회나 교단이 부패하여 영적으로 몰락되어 갈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조직 밖에 있는 사람들을 일으키셔서 당신의 개혁 사업을 시작하신다는 것은 참된 개혁의 진위를 판가름하는 역사의 중요한 법칙이다. 16세기 종교 개혁 사업에도 역사의 이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옥스포드 대학의 개혁자 위클립도 아니고 이태리 명문가 자제인 개혁자 사보나 롤라도 아니며 물론 교황의 집안 사람도 아니고 독일 퉤링겐의 깊은 산 중에서 가난하고 정직한 생애를 보낸 광부 한스 루터의 장남으로 태어난 마틴 루터를 통하여 유럽의 종교 개혁은 이루어졌던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반복되는 교회의 역사
루터의 개혁은 독일의 평민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개혁이란 어떤 종류의 개혁이든지 간에 항상 평민들로부터 시작된다는 또 하나의 역사의 법칙이 있다. 귀족으로부터 시작되거나 교회의 지도층에서 시작된 개혁은 언제나 그 힘이 미약했으며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는 것이 역사가 말해주는 교훈이다. 그들은 개혁을 시작했지만 결국에는 현실에 안주하고 말았다. 그러나 루터는 평민을 지도했고 그 평민을 대표해서 당시 유럽 전체를 주도하던 교회에 맞섰던 것이다. 이러한 루터에 의해서 로마교회의 신학과 미신적 가르침은 산산조각이 났으며 그의 부패의 진상이 드러나게 되었다.

역사는 목적 없는 혼란한 사건의 흐름이 아니다. 루터가 태어나기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실행되어 왔다. 루터가 태어나기 30년 전,즉 1453년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어 터키의 손으로 넘어가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로 인하여 로마교회는 외형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또한 이 사건은 르네상스로 인한 문예부흥을 한층 활발하게 만들었다. 루터가 태어난 해에 콜럼버스는 세계 일주의 계획을 세워 스페인으로 갔다. 1453년에는 구텐베르크에 의하여 인쇄술이 발명되어 라틴어 성경 전체가 처음으로 인쇄되는 역사적 사건이 생겼다.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의 실현이다. 루터의 개혁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드러나게 하심으로써 루터의 글과 책자들과 번역된 성경이 온 세상으로 쉽게 퍼져나갈 수 있는 기초를 놓으셨다. 또한 콜럼버스로 하여금 신대륙이라는 거대한 땅 덩어리를 발견케 하심으로써 개혁의 결과로 일어나는 교회의 핍박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마련하셨다. 위대한 장군이 세운 전략과 같이 하나님의 섭리가 정확한 때에 맞추어 역사적 사건들이 하나씩 이루어졌다. 루터와 콜럼버스와 구텐베르크는 비록 태어난 곳이 다르고 사업의 종류가 다르고 종교를 달리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 안에서 그들 모두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세상에 보내신 바된 사람들이었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미국이라는 거대한 신대륙은 유럽으로부터 피신하는 청교도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제공하는 피난처가 되었고 루터의 개혁과 정신을 분명하게 실현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셨다.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 12:16,17).

모든 사건은 루터의 개혁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일어나고 존재하였지만 어두움에 속해 있던 교회는 교회 밖에서부터 비추어 온 빛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교회는 루터와 함께 서있던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하여 핍박과 반대의 정신을 드러내었다. 지난 역사 속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거대한 교회는 언제나 개혁을 반대한다는 역사의 법칙을 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의 법칙들을 통찰력 있게 꿰뚫어 보는 사람만이 마지막 시대에 존재하는 혼돈과 기만에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다음 호에 제2부가 연재됩니다.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암이 퍼지는 것을 막는 방법

정상적인 세포가 암세포로 변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그렇게 진행되는 동안 인체는 우리에게 끊임없는 경고를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집과 건강에 대한 편견을 꺾지 않은 채 계속해서 세포를 괴롭히는 생활을 살아간다면 그것은 세포에게 결정적인 문제를 가져다 준다. 이런 상태 속에서 정상 세포는 암 세포로 변질되고 한동안 퍼지지 않는 암세포로 남아 있다가 나중에는 퍼지는 암세포로 변하게 된다. 퍼지기 전의 간세포의 암은 간을 죽일 수 없다.

암 환자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15년 동안 퍼지지 않는 암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건강에 대한 몇몇 원칙들을 이해하고 그것을 생활에 적용하면 암의 크기가 더 이상 커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다. 이처럼 암이 자라지 않고 그 성장이 중지만 되어도 생명에 대한 위협은 사라진다. 그런데 만일 암 환자가 하나님께서 인체에 새겨 놓으신 생명의 법칙에 일치하게 생활한다면 놀라운 일들이 인체 속에서 일어나게 된다. 암 환자가 생명의 법칙에 따라서 생활하기 시작하면 지금까지는 암세포에 대해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하던 백혈구와 T 임파구 같은 인체의 면역 세포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드디어는 암세포를 찾아다니면서 죽이기 시작한다. 인체의 면역 체계가 정상적으로 환원되면 퍼지는 암세포도 퍼지지 않는 암 세포로 환원될 수 있고 안 퍼지는 암세포는 정상 세포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인체의 면역 시스템이 정상화 되려면 신선하게 마련된 채식과 깨끗한 물과 공기 그리고 운동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 과정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부로부터 생명의 에너지가 들어와서 마음이 변화되어야 한다. 죄와 울분과 원한과 같이 깊고 어두운 사망적 스트레스에 의해서 사로잡혀 있던 환자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풀려나서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온 몸과 마음이 생명의 법칙 안에 거하게 될 때 인체는 드디어 참된 쉼을 얻게 되고 면역 체계가 활발해지면서 스스로 암을 치료하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된다. 암세포를 안 퍼지는 상태로 유지시키거나 안 퍼지는 암 세포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몸과 마음이 생명의 법칙 속에 머무는 생활뿐이다.

항암 인자에 대한 이해
암세포가 증식하여 덩어리를 이루더라도 아직까지는 양성 종양 상태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부정적 요소에 의하여 세포가 사망적 자극을 받는 상태가 계속되면 결국에는 세포가 완전히 미쳐버리고 항암 인자는 사라지게 된다.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항암 인자가 살아 있는 동안은 유전자가 두세 개쯤 변한다 해도 세포는 여전히 양성 종양 상태로 머물러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단 항암 인자가 없어지고 나면 드디어 악성 종양으로 바뀌게 된다.

항암 인자는 양성 종양에서 악성 종양으로 변하려는 순간에 마지막으로 변하는 인자를 말하는데 이 항암 인자를 P53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P라는 염색체에 있는 유전자 중에서 53번째에 있는 인자라는 뜻이다.

항암 인자는 정상 세포가 암세포로 변질되지 않도록 유지 위하여 최선을 다하다가 사람이 오랜 세월 동안 생명의 법칙을 무시하고 사망적 환경 가운데 살아가게 되면 결국에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일단 항암 인자가 없어지고 나면 세포는 완전히 다른 세포로 변질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서 항암 인자가 사라져 버림으로 인하여 인슐린 세포가 변질되면 몸의 밸런스를 생각하지 않고 아무 때나 마음대로 인슐린을 생산하게 되어 인체의 조화는 깨어지게 된다. 이처럼 항암 인자는 세포가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암세포는 건강한 세포로 돌아올 수 있는데, 이것은 사라졌던 항암 인자가 다시 되돌아 올 수 있음을 말한다. 없어졌던 항암 인자가 부활하게 되면 암세포는 정상으로 회복되기 시작한다. 이 사실은 실험실에서 분명하게 입증된다. 그러나 한가지 이상한 사실은 실험실에서는 쉽게 입증되는 이 사실이 인체 내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실험실에서는 정상 세포가 활동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줌으로써 사라졌던 항암 인자가 다시 돌아오지만 우리 인체에서는 잘 돌아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이 너무나 사망적이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나 동물성 지방처럼 들어오지 말아야 할 것들은 몸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즐겁고 깨끗한 생각과 신선한 야채와 과일 같은 것들은 잘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세포조차도 활동하기 힘든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항암 인자가 다시 부활하여 나타날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만일 암 한자가 생명적 환경 속에서 건강의 올바른 원칙들을 받아들이는 생활을 살아나간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정상 세포들이 활기를 찾게 된다. 그리고 활기를 찾은 정상 세포들은 항암 인자가 생산하는 물질을 암세포에 보내주게 된다. 이 물질이 암세포로 흘러들어가게 되면 암세포는 그 영향으로 인하여 그 구조가 변하게 되어 새로운 항암 인자를 탄생시키게 된다. 동물 실험을 통하여 이러한 이론이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암 환자에게서 이러한 실험 결과들이 잘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암 환자가 사망의 법칙 속에서 사망의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몸 속에서는 사망의 현상들이 세포 속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간을 구해드립니다!

간을 가장 빨리 회복시키는 방법은 한마디로 간을 쉬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면 간을 쉬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간의 산화를 방지해 주고 영양 과잉을 피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생활을 치료해야 비로소 간이 치료될 수 있다.

최적의 건강 생활이란 산화 과정을 가능한 한 줄여주고 산화방지제를 많이 섭취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구마에는 비타민 C뿐 아니라 강력한 산화방지제인 베타카로틴이라는 물질이 매우 많이 함유되어 있다. 노란 색깔을 가지고 있는 식물에는 베타카로틴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당근에 많은 양의 베타카로틴이 함유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고구마에 더 많이 함유되어 있고 그 다음으로는 호박과 멜론이다.
거의 모든 종류의 과일이나 채소에는 베타카로틴이 들어 있다. 가장 강력한 산화방지제는 비타민 C이고 두 번째는 베타카로틴이다. 그러므로 과일과 채소를 충분하게 섭취할 수 있는 채식을 한다면 언제나 매우 강력한 산화방지제로 몸을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단백, 고지방의 식품은 영양 과잉으로 유도하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좋다. 그 대신에 소식을 하거나 짧은 기간 동안 과일식만을 하면서 금식하는 것이 피로에 지친 간에 휴식을 줄 수 있는 매우 좋은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내장 세포는 매우 빨리 자라지만 간세포는 특별히 빨리 성장한다. 20~25% 정도만 잘라서 이식을 해도 2~3개월 안에 완전한 크기의 간으로 자란다. 그러나 계속해서 해독해야 할 물질들을 섭취하고 스트레스와 과로 그리고 술과 담배로 간을 피곤하게 만든다면 간세포는 재생되지 않는다. 간을 위한 진정한 건강 생활은 간에게 재생되어야 할 필요와 동기를 부여하는 라이프 스타일이다.

과식은 금물이다. 몸에 좋은 음식만 먹고 술과 담배를 하지 않더라도 간의 주요 기능이 해독 작용이기 때문에 과식이 간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심각하다. 필요 이상의 영양이 지속적으로 공급될 때 간은 지치게 된다. 현대 의학은 영양 과잉에 대해서 매우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영양 과잉이 영양 부족보다 훨씬 더 해롭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있다. 특히 암에 대한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영양 과잉의 문제가 더욱 크게 부각되고 있다. 암도 결국에는 영양 과잉에서 오기 때문이다. 과식으로 인하여 영양 과잉이 초래되거나 보약이나 보양식처럼 과량의 영양이 장복될 때 암이 발생되기 쉽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부 - 하나님의 모험

신앙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또 승리하는 믿음 생활을 살기 위하여 의지의 힘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요즈음 현대 기독교회들에서는 믿음은 강조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 안에서 우리에게 부여된 의지의 힘을 사용하여 어떻게 죄와 유혹을 승리하며 살 수 있는지에 대하여 가르치거나 강조하고 있는 교회는 거의 없다.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의지에 대하여 조명해 보았다. 이 신앙 기사가 승리하는 믿음의 생활을 사는 데에 일조를 하는 기사가 되기를 기도드린다. - 편집실 -

만일 인간이 하나님이 명령하는 대로만 행동하는 로보트처럼 창조되었다면 어떨까? 만일 인간이 자유의지나 선택할 자유를 가지지 못하고 다만 하나님이 조절하는 대로만 살도록 창조되었다면 행복했을까? 만일,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반역하여 죄를 짓거나 불순종할 수 없게 창조되었다면, 죄 때문에 야기되는 고통이나 불행이나 파멸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을까? 그리하여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도록 허용하셨을까? 하나님께는 인간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창조하실 수는 없었을까? 이런 질문들은 많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질문들이다.

1) 하나님은 사랑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16). 그분의 본성과 그분의 율법은 사랑이다. 이것은 과거에도 그러하였고 미래에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창조력의 현현 하나하나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는 문구는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봉오리마다, 뾰족뾰족 돋아나는 풀잎마다 기록되어 있다. 공중을 즐거운 노래로 가득 채우는 예쁜 새들, 향기를 풍기는 고운 꽃들, 무성한 수풀과 초목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인간을 행복하게 하시려는 그분의 사랑의 갈망을 증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친히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을 반포하셨다. 모세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하고 기도하였을 때에 주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출 33:19)리라고 하셨다. 이 선한 형상은 주의 영광, 곧 주의 성품이다. 주님께서는 주의 영광을 보여달라는 모세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가하는 성품을 나타내셨다. 주님께서는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출 34:6, 7)는 분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욘 4:2)며, 인애를 기뻐하신다(미 7:18).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늘과 땅에 있는 창조의 신비를 목격하게 하시며 무수한 사랑의 증거들로써 우리들의 마음을 그분에게 붙들어 매신다. 천연계의 사물을 통하여, 또는 사람이 마음으로 체험해 알 수 있는 그윽하고 부드러운 인간적 결연(結緣)을 통하여, 그분은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려고 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에는 충분하지 못할 것이다.

2)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이유
원래의 속성이 사랑이신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영적, 정신적, 그리고 지적으로 함께 교류를 나눌 수 있는 사랑의 대상이 필요하셨다. 서로의 사귐으로 인해 서로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또 서로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사랑의 상대를 필요로 하시고, 그리하여 그 깊은 교류와 앎을 통하여 생기는 위대한 사랑의 출현을 보기 원하셨기 때문에, 함께 하나님과 교류하며 교제할 수 있는 인간을 창조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분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로보트처럼 만들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피조물로부터 사랑의 섬김과 교류를 원하셨는데, 그 사랑의 섬김은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을 인식하고 알기 때문에 저절로 자원하여 생겨나는 사랑의 섬김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다. 그분은 강제적인 굴종을 기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모든 존재들이 당신께 자원하여 봉사하도록 그들에게 의지의 자유를 허락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이 사랑의 봉사, 곧 주님의 성품을 지적(智的)으로 이해하므로 생기는 경배를 드리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강제적인 충성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의지의 자유를 허락하셔서 그들이 주님께 자발적인 경배와 봉사를 할 수 있게 하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즉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전혀 반항할 가능성이 없는 로보트 같은 인간을 만드셨다면, 아니면, 무조건적으로 하나님만을 섬기고 경배하도록만 만드셨다면, 인간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생기는 사랑의 경배와 교제를 받으실 수 없었을 것이며, 그 교제와 사귐에서 생겨나 점점 성숙되어가는 사랑의 완숙한 경지를 이해하거나 맛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후에 하나님의 속성과 사랑을 완전히 알게 되므로 하나님께만 충성을 하도록 계획하시고 고안하신 것에는 모험이 뒤따랐다. 만일, 피조물이 이 주어진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거역하고 떠난다면 하나님의 정부에는 질서가 깨지고 부조화와 불순종(죄)이 들어올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의 안녕을 존중하셨던 창조주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던 것이다.

3) 자유의지의 남용과 죄의 시작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우주에 평화와 기쁨이 있었다. 모든 것은 창조주의 뜻에 완전히 조화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최상의 것이었고 피조물들 사이의 사랑도 공정하였다. 말씀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는 그 본질과 품성과 목적에 있어서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일체였고, 온 우주에서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과 함께 의논하고 계획하시는 유일의 분이셨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자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골 1:16)다. 그러므로 온 하늘은 하늘 아버지께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하였다.

모든 피조물이 사랑의 충성을 인정하는 동안 하나님의 온 우주에는 완전한 조화가 있었다.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있는 동안에는 상호간의 사랑도 믿을 만하였고 무아적이었다. 하늘의 조화들을 파괴할 불협화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 행복한 상태에 한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허락하셨던 자유의지를 악용한 자가 있었다.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 다음가는 최고의 영광을 받았으며, 하늘 거민들 가운데 가장 높은 권세와 영광을 가졌던 자에게서 죄는 시작되었다.

천사장 루스벨은 하늘에 있는 모든 천사들 가운데 가장 총애를 받는 자였다. 그는 매우 존귀를 받았었으나 이것이 그의 창조주께 대한 감사와 찬양을 우러나오게 하지는 못했다. 그는 하나님처럼 높아지기를 열망하였다. 그에게는 실행해야 할 특별한 사명이 있었다. 그는 위대한 창조주 가까이에 있었고, 가장 가까이서 하나님을 모셨으며,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므로 하나님을 가장 잘 증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가장 잘 봉사할 수 있는 기회와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루스벨은 하나님을 높이는 대신, 차츰차츰 자기를 높이려는 욕망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겔 28:17).

루스벨은 그리스도를 질투하고 시기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창조 사업을 위한 특별한 의논에 참여하셨으나 루스벨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일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또 그것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도 않았다. 그리스도는 하늘의 주권자로 인정받으셔서 그분의 권능과 권위는 하나님 자신과 동등하였지만 루스벨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루스벨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싶은 욕망에 빠지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는 불만과 그리스도에 대한 질투가 가득한 마음으로 하늘 아버지의 면전을 떠나갔다. 그는 하나님께 불충성하려는 그의 욕망과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떠나려는 그의 선택을 철회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의지의 자유를 남용하고 하나님께 반역하기로 선택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천사장 루스벨은 교만과 질투로 인해 하나님의 정부와 법에 불만을 표하며 천사들을 선동하여 하늘에서 반역을 일으켰으며, 주어진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하나님의 세계에 최초로 죄를 들여온 장본인이 되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印)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겔 28:12~15),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13, 14). 이렇게 주어졌던 자유의지를 남용하고 하나님께 반역하므로 루스벨은 대적 마귀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이 세상에 죄라는 것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이제 하나님과 인류의 적이 되었고, 하늘에서 이 지구로 쫓겨나 인간에게 의지의 남용과 악용을 부추기며 유혹하는 사단이 되었다.

4)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와 타락
하늘에서 더 이상 마음대로 반역을 선동할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 대한 사단의 증오심은 인류의 파멸을 음모하는 가운데서 한 새로운 분야를 찾아내었다. 그는 에덴에 사는 아담과 하와의 행복하고 평화스러운 생활 가운데서 자기가 영원히 잃어버린 행복의 환상을 보았다. 시기심을 가지고 사단은 인간이 불순종하도록 그들을 선동하고 죄책과 죄의 형벌을 가져다 주려고 하였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사랑을 시험하는 시금석으로 인간에게 주어졌다. 여호와께서 동산에 있는 모든 것을 주셨지만 한 가지만을 금지하셨다. 주어진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든지 불순종하고 거역하든지 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의 몫이었다.

사단은 인류의 시조를 유혹하기 위하여 뱀을 매개체로 사용하였고, 그 금단의 과실을 먹도록 하와를 유인하였다. 사단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접근한 하와에게 말하기를, 이 나무의 과실을 따 먹는다면 그들은 더욱더 높은 존재의 영역을 획득할 것이며 더욱 넓은 지식의 분야로 들어갈 것이라고 하였다. 사단은 자기 자신도 금단의 과실을 먹어 보았으며, 그 결과 말하는 능력을 얻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여호와께서 그들이 그분과 동등하게 높아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그것을 금하신 것이라고 교묘하게 암시하였다. 그는 이 나무의 실과는 지혜와 능력을 주는 놀라운 특성이 있기 때문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그것을 먹는것뿐 아니라 만지는 것까지도 금하신 것이라고 말하였다.

유혹자는 하나님의 경고는 사실 그대로 성취되지 않을 것이며, 단순히 그들을 위협하려고 의도된 것이라고 암시하였다. 그들이 죽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이미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지 않았던가? 하나님께서 그들이 한층 더 고상하게 발달하고, 더 큰 행복을 발견하는 것을 막으시려고 노력해 오셨다고 사단은 암시하였다. 유혹을 받은 하와는 흔들렸다. 그녀는 주어진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올바른 편,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충성의 편을 선택하여야 하였었다. 사단의 말을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어야 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의 조상은 그들의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여 이 세상에 죄의 저주와 고통과 슬픔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이 세상에 시작된 선과 악의 대쟁투에서, 또 우리가 죄를 승리하는가 하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와 결과를 빚어낸다. 우리는 주어진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선택권을 통하여, 하나님께 충성하며 이 지구를 하나님의 왕국으로 회복시키는 데 일조를 가할 하나님의 증인이 되든지, 아니면, 악의 편을 택하여 하나님께 끝까지 불순종하는 반역적인 악인이 되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지의 힘은 이 지구의 역사와 운명을 크게 좌우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하고 위대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 믿음과 의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연구해 보자.

2부 - 의지와 선택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며 예수를 믿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예수를 믿고 입으로 주를 시인했기 때문에 벌써 구원을 받았으니 그 구원을 그냥 즐기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Once Saved, Always Saved - 예수를 믿음으로 일단 한번 구원받으면, 품성이나 믿음의 영적 성장에 상관없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 상관없이 무조건 구원받게 된다 - 는 가르침을 믿으며 거짓 평안과 기만 속에서 구원 받은 줄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런 가르침은 그리스도인 생활에 마땅히 나타나야 할 성품의 변화나 열매 맺는 생활, 또는 성화를 간과하게 하고 소홀히 하게 만드는 위험한 반쪽만의 복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막연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고는 있지만,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무엇이며, 믿음을 행사하여 죄를 승리하는 생활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안에서 죄를 승리한다고 말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 죄를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꼭 알아야 할 매우 중요한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의지의 힘이다. 이 의지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것은 이 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는 여부에 따라 우리가 죄를 승리하는가 하지 못하는가, 또 영생을 얻는가 얻지 못하는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의 의지의 역할과 힘을 알고, 또 그 의지를 어떻게 바르게 사용하는가를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제부터 의지에 대하여 함께 연구해보자.

1) 인간의 의지와 두뇌의 전두엽
인간의 의지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인체의 어느 부분에서 의지를 관장하는가? 그곳은 뇌, 즉 앞 이마의 뒷부분에 있는 전두엽이다. 우리 인간의 뇌는 특유의 기능을 가진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중에서 전두엽은 뇌의 가장 큰 돌기로서, 판단과 논리, 지능과 의지를 통제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우리의 존재, 즉 자아를 제어하는 기능이 이루어지며, 우리의 의지가 작용하는 것이다. 이 전두엽에서 이루어지는 세 가지 중요한 기능들은 영성, 도덕성, 의지로서 사람의 독특한 개성을 이룬다.

우리의 뇌 속에 어떤 정보가 들어가면 대뇌에서 지성, 감성, 그리고 의지, 이 세 가지 기능들이 활발하게 활동한다. 대뇌의 전두엽에 자리한 이 세 가지 중요한 기능들은 입력된 정보에 재빨리 반응한다. 그리하여 분석하고 판단하여 무엇을 선택할지 결정한다. 지성이란 이해하고, 인식하고, 판단하며, 분별하는 기능이다. 또한 감성이란 소원하고, 느끼며, 충동하는 감수성의 기능을 말한다. 그러나 지성과 감성이 느끼고 말하는 것을 판단하고 나서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바로 의지이다.

우리 뇌에 있는 이 세 가지 기능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의지의 선택에 따라 각 개인의 인생 방향이 결정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뇌 속에서 지성과 감성이 전쟁을 하고 있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이 싸움을 해결할 수 있겠는가? 해결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의지가 판단하여 결정을 내리도록 하는 것이다. 의지의 결정은 너무나 중요하다. 조그만 의지의 선택들이 모여져 큰 결정을 만들고 결국에는 우리의 영생도 결정짓게 된다.

2) 연약해진 의지
그런데,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죄로 인하여 몹시 약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태초에 하나님께로부터 창조함을 받을 당시 인간이 부여받았던 자유의지는 인간의 타락 때문에 매우 연약하여졌다. 그래서 사람의 품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를 이루는 의지력은 사단의 지배하에 들어가 버렸다. 이제 인간 혼자의 힘으로는 악을 대적하기가 어려워졌고, 사단은 언제나 자신이 기뻐하는 뜻을 따라 인간에게 역사함으로 사람의 멸망과 불행을 도모해 왔다. 즉,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의지는 자연히 사단의 뜻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우리의 의지는 힘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기 위하여 제일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자신의 의지의 연약함과 죄를 이기기 위한 능력의 부족함이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인간은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에 내어 맡겨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 너무 약하므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를 도와주셔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질문한다. 어떻게 하여야 의심과 사단의 올무인 죄의 습관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라고. 과거의 실수들과 작심삼일이었던 결심들을 기억하면서 인간들은 절망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여기에 희망이 있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10:27).

3) 의지의 사용과 선택
진정한 믿음을 행사하고 죄를 승리하기 위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의지를 사용할지를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빌립보 2장 12절 하단에는 우리를 향한 사도 바울의 권고가 나오는데, 그것은 자칫 우리에게 율법주의자의 행함을 강조하는 듯 이상하게 들린다. 그 성경구절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하고 있다.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어떻게 우리가 우리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이상한 말이 아닌가? 그런데 만일 우리가 우리의 의지의 선택과 의지의 힘에 대하여 알고 있다면, 이 말씀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이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바로 우리의 의지를 잘 사용하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의지에 대하여 연구하기 위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던 순간을 생각해 보자.

하와가 뱀으로 변장한 사단의 말을 들었을 때, 하와는 사단의 말을 듣든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든지 둘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하여야 했다. 그때가 바로 주어진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아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하와가 자신의 사랑하는 배필이었지만, 하와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이상, 자신만이라도 하나님께 대한 충절을 지키겠다고 결심하고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거절하든지, 아니면, 그 여자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버릴 수 없어 그 선악과를 받아 먹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야 했다. 불행하게도 잘못 사용한 의지의 선택, 곧 의지의 오용과 남용으로 인해, 우리의 시조 아담과 하와는 이 지구에 죄의 저주와 사망을 가져오게 되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이와 같다. 우리의 매일의 신앙 생활은 선택의 연속이다.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생활이란 어떤 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의 생활에 있어서 우리의 의지로 사단의 편을 택하지 않고 하나님의 편을 택하는 것, 사단에게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죄를 승리하는 것이며, 이 일은 우리의 의지의 작용과 선택에 의하여 매일 매 순간 이루어지는 일들이다.

요즈음 기독교인들의 구원관은, 인간의 의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또 하나님의 편을 택하는 일,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죄를 승리하는 일, 또 그에 따르는 영적인 성장을 이루는 일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현대의 기독교의 가르침은, 구원은 전적으로 과거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던 단 한 번의 선택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의지의 힘과 죄에 대한 승리에 대하여 전혀 가르치지 않는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현대 기독교의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치명적인 해를 주는 가르침인 것이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이 바로 이 이슈에 달려 있다. 우리는 죄와 및 자아와의 싸움에서 우리의 의지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또 우리의 의지를 사용하여 매일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아야 할 것이다.

 

3부 - 인간의 의지+하나님의 능력

의지의 힘과 선택에 대하여 말하면,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지 모르겠다. 누가 그것을 모르느냐고, 다 알고 있지만 의지의 힘이 약해서 승리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필요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의 의지는 연약하고 타락되어 올바른 편을 선택할 힘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 그것이 구원의 은혜인 것이다. 자, 이제부터 우리의 의지의 힘에 대하여, 그리고 의지에 작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역사에 대하여 연구해 보기로 하자.

선택을 할 때
우리가 죄를 승리하는 생활을 살기 위해 의지의 힘을 연구할 때, 한 가지 꼭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선악 간의 대쟁투의 규칙은 사람의 의지를 강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나 사단, 둘 중 하나를 선택하여 그에게 순종하기로 결정하면, 그때 그리스도든 사단이든 그 사람을 지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규칙을 바울은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고 하였고, 베드로는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벧후 2:19)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비록 그 규칙을 잘 안다하여도, 우리는 타락한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가 스스로 한 약속과 결심은 썩은 새끼줄 같이 연약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생각과 동기와 애정을 통제하거나 억제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낙심할 필요가 없다. 그때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의지의 힘과 우리의 의지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을 고칠 수 없고, 또 우리의 애정을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 또한 옳은 일을 행할 능력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할 수는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택력을 주셨으므로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다. 우리가 비록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고, 우리의 생각과 욕망과 애정을 지배할 수 없고, 또 자신을 순결하게 하여 하나님 앞에 적합한 상태로 만들 수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할 수는 있고, 우리의 의지를 그분께 드릴 수는 있다.

여기에 승리하는 비결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에게 힘은 없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주님을 부를 수 있으며,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당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것이다. 그리하면 우리의 온 성격이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다만 나를 부르기만 하라. 그리고 너의 마음의 의지로 나를 선택하기만 하라. 그러면 너에 대한 주권은 내게로 넘어온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힘과 능력을 주고, 너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편을 선택하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주셔서 우리가 선택한 것을 행할 힘을 주신다. 곧,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들이 원하고 행하는 것을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의지의 힘
모든 일은 올바른 의지의 활용에 좌우된다. 선과 순결에 대한 욕망을 갖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거기에서 그치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악한 기질들을 정복하고자 바라고 소원하는 동안 멸망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를 택하지 않는다.

의지력의 올바른 활용을 통하여 완전한 변화가 생애에 이루어지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그리스도께 굴복시킴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연합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를 굳게 붙들어 줄 능력을 위로부터 받는다. 순결하고 고결한 그리스도인의 생애, 식욕과 정욕에 승리하는 생애는 연약하고 요동하는 인간의 의지를 전능하고 확고한 하나님의 의지에 결합시키는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것이다.

의지는 사람의 인간 본성 가운데서 지배하는 힘이다. 만일 의지가 확립되면 생애의 모든 나머지 것들은 그 지배하에 들어오게 된다. 의지란 기호나 경향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이요, 결정하는 능력이요, 사람 속에 작용하여 하나님께 순종하게도, 불순종하게도 만드는 최고의 능력이다. 의지의 힘을 진정으로 깨달을 때까지 우리는 항상 위기에 놓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믿고 약속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의지를 옳은 편에 고착시키지 않는 한, 우리 스스로 자신에게 한 약속이나 신념은 무력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의지력을 가지고 믿음의 싸움을 싸우면 분명히 승리할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의지를 그리스도 편에 고정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에 복종시킬 때, 그분은 즉시 우리를 취하여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의지를 가지고 그렇게 행하도록 우리 속에서 역사하신다. 그러면 우리의 본성은 성령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며, 우리의 생각까지도 그분께 복종하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감정과 정서를 원하는 대로 지배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의 의지를 지배할 수는 있다. 이렇게 하면 우리의 생애에 전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듭난 의지
앞에서 공부한 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선택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의지를 바치기만 하면,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비한 능력으로 우리의 의지에 놀라운 힘을 주셔서 죄를 이기게 하신다. 누구든지 죄의 습관들과 세력에서 헤어나오기를 간절하게 원하기만 하면, 성령께서 능력을 주셔서 새로운 생애를 살 수 있게 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거듭난 의지를 갖게 되는 비결이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죄의 힘으로 연약하여지고 비뚤어진 나의 의지를 주님께 드립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힘이 없습니다. 나의 뜻과 나 의지를 굴복하오니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시옵소서!

교육과 인간 스스로 하는 수양과 의지력의 연단과 노력은 각각 상당한 효력이 있지만, 이것들이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에는 무력하다. 이런 것들이 혹시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와 외모의 단정함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할지라도 마음을 고칠 수는 없으며 생애의 동기를 깨끗하게 할 수도 없다.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서 성결하여지려면 먼저 마음속에서 작동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위로부터 새 생명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이 능력은 곧 그리스도이시다. 오직 그분의 은혜만 인간의 죽은 심령의 기능에 생기를 주어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구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요 3:3), 즉 사람이 새 마음과 욕망과 새 목적과 새 동기를 받아 그것들로 새 생애에 들어가지 아니할 것 같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요 3:3)다고 하셨다. 우리가 매일 매 순간의 선택에 있어서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치고,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를 승리하게 될 때, 우리의 의지의 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점점 더 강해지게 되는데, 이렇게 하여 우리는 거듭난 의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계속되어야 하는 선택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우리는 선을 행할 수는 없지만 선택할 수는 있다. 선택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담배를 많이 피우는 골초가 한 사람 있었다. 그 사람은 담배를 끊기 위해 금연 프로그램에 여러 번 참석했지만 아직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담배 끊기가 어렵다는 사람을 만나면 씩 웃으면서 말하곤 한다. 그게 뭐가 어렵습니까? 저는 지금까지 100번도 더 끊었는데요라고... 선택에는 아무런 공로가 없다. 그러나 선택만 하면 주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를 위하여 역사하셔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그런데 한 가지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편을 택하는 우리의 선택은 날마다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일은 한 번만이 아니라 여러 번, 그리고 매일 매 순간 지속되어야 하는 일인 것이다. 우리는 매일 아침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그리고 이 일을 우리의 할 일 중 첫째로 삼아야 할 것이다. 또 우리는 기도하기를, 오 주여! 나를 받으사 온전히 당신의 것으로 삼으소서. 나는 나의 모든 계획을 당신의 발 앞에 놓나이다. 오늘 나를 당신의 일에 써 주시옵소서. 나와 함께 하여 주시고 나의 모든 일이 당신 안에서 성취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날마다 행할 일과이다. 우리는 아침마다 그날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며, 모든 계획을 하나님께 맡겨 그분의 섭리를 따라 행하기도 하고 그만두기도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우리는 우리의 생애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생애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모방하게 될 것이다.

노력이 필요함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드리고 굴복할 때, 물론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고 죄를 승리하게 해주시지만, 우리는 늘 우리가 담당해야 할 부분, 즉 우리의 온 힘을 다하여 바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우리 속에 큰 변화를 이루기 위해 마음을 쏟으며, 열렬하고 꾸준한 기도와 노력으로 분기해야 한다. 그릇된 습관과 행습은 떨쳐버려야 한다. 이 같은 잘못들을 시정하고 바른 원칙을 따라 살고자 하는 결정적인 노력만이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이렇게 노력하는 것은 율법주의가 아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 99%을 해주신다 할지라도 우리의 1%의 노력과 협력이 없으면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도록 능력을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 주시기를 기다리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가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품성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품성 계발은 아무런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이 결합하여야 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능력과 합해질 때, 그것은 전능한 것이 된다.

우리의 의지를 그리스도께 복종 시킬 때 우리의 생애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진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의 능력에 굳게 매어 둘 힘을 그분께로부터 받게 되고 새로운 생애, 곧 믿음의 생애가 가능하게 된다. 우리의 의지를 그리스도 편에 두어 하나님의 성령과 협력하지 않는 한 우리를 향상시키는 일에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있으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분을 생각하며 혼신의 노력을 쏟자!

 

4부 - 자아 부인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위의 성경절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의 눈과 오른손이 실족케 하거든, 다시 말해서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버리고 그 지체를 잘라버리라니, 너무하신 말씀이 아닌가라고... 언뜻 들으면 매우 잔인하게 들리는 이 말씀의 뜻은 과연 무엇인가? 범죄하지 않기 위하여 차라리 우리의 신체의 일부를 자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철저한 자아 포기와 굴복을 가리키신 것이다. 자신을 포기하는 일은 마치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는 것과 같이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자아의 포기와 굴복은 의지의 선택과 죄의 승리와 매우 깊은 연관이 있다. 함께 연구해 보자.

1) 자아를 굴복하는 일
하나님의 편을 선택하려면 항상 수반되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나의 뜻을 포기하는 일이다. 즉, 육신에 속한 나의 뜻과 나의 고집과 욕망을 포기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기 위해 자신을 굴복하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편을 선택할 때, 항상 함께 수반되어야 하는 일로서, 바울은 이것을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표현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 2:20).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이것은 예수께서 범죄하지 않기 위하여 지체 중 하나를 잘라내라고 하신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마태복음 5장 29,30절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정말 우리의 신체를 해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어떤 일이 있어도 죄를 범하지 않도록 마음을 제어하라고 단호하게 경고하신 것이다. 만일 우리 몸이 병이 들고, 그 병이 몸에 퍼져 생명을 빼앗기게 되었다면, 그래서 우리 몸을 살릴 수 있는 치료 방법이 우리의 신체 중 일부를 절단해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자신의 오른팔이라도 잘라내는 것을 감수할 것이다.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즐거운 마음으로 잘라내어야 하며, 그렇게 해야 우리가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자아를 굴복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죄로 기울어지는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이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일은 쉽지 않다. 유혹을 받을 때, 육신의 소욕대로 행하고 싶은 육체의 욕구가 우리 마음속에서 강하게 움틀거리며 올라온다. 성령의 소욕을 따라 행하기보다는 육신에 느껴지는 감정대로 행하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올라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하기 위하여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자신의 뜻을 굴복하고 하나님의 편을 선택한다. 그것은 마치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는 것처럼 아프고 힘든 일이지만, 그래야만이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으며 영적인 생명이 소생될 수 있는 것이다.

2) 의지를 바치는 일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은 단순히 죄의 필연적 결과인 고통에서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 자체에서 구원하는 것이다. 타락하여 훼손된 영혼은 순결해지고 변화되어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시 90:17) 옷 입고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롬 8:29)아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고전 2:9)한 것이다. 오직 영원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이 맞이할 영광스러운 운명을 드러낼 수 있다.  이 높은 이상에 도달하기 위하여, 우리는 영혼을 넘어지게 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

죄가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의지를 통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지를 굴복시키는 것을 눈을 빼 버리거나 손을 베어 버리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표현하셨던 것이다.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이 평생을 불구나 절뚝발이로 보내기로 동의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자주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불구가 되고, 상처를 입고, 절뚝발이가 되더라도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더욱 좋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재난으로 생각하는 그것이 최고의 유익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려면 늘 하나님과 교통함으로써만 그 영적 생명을 소유할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나면, 목숨은 잠시 부지할지 모르나 영적인 생명은 소유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침으로써만 그분의 생명을 받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자아의 굴복을 통하여 당신의 생명을 받아들일 때에만 우리를 멸망으로 이끄는 숨은 죄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자아에 매달려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거절한다면, 사망을 택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나님은 죄를 사르는 불이 되신다. 그러므로 죄를 택하고 죄에서 분리되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마지막에 죄를 사르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의해 함께 불살라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것은 희생이 요구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 고상한 것을 위하여 저속한 것을, 신령한 것을 위하여 세속적인 것을, 영원한 것을 위하여 사라져 없어질 것을 버리는 희생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파괴하려고 하지 않으신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의지의 활용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순결하고 깨끗하게 된 상태로 다시 돌려 받기 위하여, 매일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뜻대로 행하고 싶은 욕망이 고개를 쳐들때, 즉시 우리의 의지를 굴복하여 하나님의 편에 놓아야 한다. 우리의 의지는 매일, 아니 매 순간 하나님께 바쳐져야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또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아낌없이 쏟아 부으실 수 있는 통로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그분과 늘 연결시켜 놓아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특히 마음과 성격이 강하고 고집이 센 사람들에게는 이런 굴복이 힘들고 고통스러울지 모르나 그것은 유익한 것이다.

3) 우리가 해야 할 일
마태복음 5장 29~30절에 언급된, 범죄하지 않기 위하여 지체 중 하나를 잘라 버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마음을 제어함으로써 우리의 몸도 제어하라고 하신 것이기도 하다. 이 성경 구절은 우리가 기도하면 그분께서 즉시 우리 삶에서 죄악적인 성향을 제거하실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온유하게 우리를 이끄시지만, 종종 우리가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일을 포기하게 하시거나 혹은 어떤 일을 시작하도록 단호한 요구를 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으로서, 만일 우리가 그 죄를 계속 품고 버리지 않을 때는 우리의 영적인 생명이 위태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지를 바치는 일이나 죄를 버리는 일은 그 아무도 우리를 대신해서 해줄 수 없다. 그 일은 우리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인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성령께서 감동하시고 또 기도하면 그렇게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시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어느 한 편을 선택하는 일, 의지를 바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행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의지의 선택이나 그 힘에 대해서는 가르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믿기만 하면 그 모든 일을 예수님께서 다 해주신다고 막연하게 믿고만 있는 것이다. 즉 우리의 행할 일은 하지도 않고 말로만의 믿음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감화하심에 따라 우리는 우리 스스로 어느 한 쪽을 늘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동의 없이 억지로 그를 사단의 세력에서 구원하실 수 없으시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능력의 도움을 받으며 자신의 힘으로써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악을 저항하여 싸워 이겨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이기신 것처럼 인간도 이겨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전능하신 이름으로 쟁취한 승리를 통하여 그는 하나님의 후사, 곧 그리스도와 공동 후사가 되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신하여 싸워주셔서 이기셨다면 이런 특권이 주어질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몫을 해야 한다. 인간은 예수께서 주시는 힘과 은혜를 통하여 자기가 싸워 승리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극복하는 일에 그리스도와 동역하는 자가 돼야 한다. 그래야 그는 그분의 영광에 동참하는 자가 될 것이다.

5부 - 감정과 의지에 관한 5가지 질문

제5부에서는 감정과 의지의 관계에 대하여 문답식으로 함께 연구해 보겠습니다.

1. 인간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감정은 다 나쁜 것인가요?
감정을 다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력의 가장 큰 적(敵)은 바로 감정이 되기도 하지요.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점점 더 감각에 직접 호소하는 사진들과 음악들의 자극을 받으며, 분노와 두려움 그리고 정욕과 같은 감정을 일으키는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감정이란 반드시 나쁜 것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으나 타락한 본성의 육신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늘 올바른 것이라고 할 수도 없지요.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렘 17:9). 감정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감정에도 선하고 아름답고 좋은 감정이 있는가 하면, 악하고 추하고 좋지 않은 감정들도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한 마음은 자신이 느껴지는 대로 온갖 감정을 다 만들어내기 때문에 감정을 믿거나 감정에 휘말리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닙니다.

2. 감정을 따라 사는 것은 위험할까요?
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느낌에 따라 결정하고 선택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에 호소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곧, 육체의 욕심과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하고 성령의 소욕대로 따라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감정에 따라 사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것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성경절을 한번 음미하며 읽어보세요.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16~23). 실제로 우리의 감정은 자신을 속일 수 있고, 사실에 대한 그릇된 심상을 일으킬 수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이끌며,  그리하여 우리를 어려운 시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정을 따라 살며, 감정을 기초로 하여 선택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신앙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3. 감정은 통제되어야 하는 것인가요?
사람은 감정으로 사는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감정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기도 하지요. 그러나 감정적으로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해서 안 되는 것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감정적으로 아무리 하기 싫어도 해야 할 것은 하도록 지성과 의지가 주장해야 합니다. 감정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죄의 정욕에 물든 감정이 나쁜 것이지요. 모든 감정들은 성경의 원칙 아래 통제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통제하는 것이 이성과 의지의 역할이지요. 이 감정은 이성과 의지의 주장 아래서 행사되게 해야 하고, 우리의 이성과 의지는 하나님 편에 바쳐져야 성령께서 우리의 감정을 통제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감정의 지배를 받는 대신 연단된 의지력을 활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바른 선택을 함으로 정로를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에 대하여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1:13). 베드로는 사람의 마음이 배의 키와 같이 우리의 몸을 제어한다고 이해했습니다. 마음의 통제력을 제해 버리면 우리는 감정에 이끌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의 편에 우리의 의지를 놓으므로 하나님의 뜻으로 통제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인생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방향이 서로 다른 여러 길들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길은 우리를 범죄하는 길로 이끄는 길이고, 또 어떤 길은 우리의 느낌과 감정과 욕망에 호소하여 유혹에 넘어지게 하는 길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그러한 길들 중에 하나를 택한다면 우리는 정로(正路)에서 벗어나게 되고 다시 돌이키기 매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정이 항상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 되도록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치고 감정을 통제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만 더 덧붙여 생각해 볼까요? 우리의 품성의 힘은 두 가지, 곧 의지력과 자제력으로 구성된답니다. 많은 청년들이 강하고 제어되지 않은 격정을 품성의 위력으로 오해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격정에 지배를 받는 자는 연약한 사람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위대함과 고귀함은 그가 지배받는 감정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지배하는 감정의 힘에 의해서 측량됩니다. 가장 강한 사람은, 모욕이나 멸시를 받을 때 일어나는 분노와 감정과 격정을 억제하고 그의 원수를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감정을 통제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영웅입니다.

4. 감정이 우리를 유혹하는 사단의 도구가 될 수 있나요?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우리의 신체 중에 뇌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앞의 기사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의 뇌 중 대뇌의 전두엽 부분, 즉 이성과 판단과 의지를 관할하는 이 부분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부분이므로 이 전두엽에서 관할하는 우리의 이성과 지성이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사단도 우리의 뇌를 통하여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유혹하거나 시험할 때, 주로 우리의 감정을 통하여 합니다. 즉 오관(5 가지 감각 기관)을 통하여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므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정이 사단이 우리를 유혹하는 도구로 쓰일 수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오관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은 이것들을 통하여 승리를 얻으려고 할 것인데, 그 이유는 이 오관이 심령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단의 시험과 유혹을 이기고 그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면, 우리의 눈과 귀와 그리고 모든 오관들의 충실한 파수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단과 그의 천사들은 인간의 오관들을 마비시켜서 하나님의 영의 주의나 경고나 질책들이 들리지 않도록, 혹 들린다 하여도 그것들이 마음에 영향을 미치거나 생애를 개혁하지 못하도록 만들기에 분주하지요. 많은 사람들의 오관들은 욕망의 탐식과 죄에 익숙해짐으로 인하여 무감각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오관을 혼란시키려는 사단의 계책을 알아차리고, 사단이 접근할 길을 막기 위하여 우리의 심령의 모든 통로를 끊임없이 지키고 계속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해야 하며 동시에 죄로 향하는 모든 경향을 단호히 저항해야 합니다.

사단의 계책에 희생이 되지 않으려는 사람들, 심령의 통로를 잘 지켜려는 사람들은 불순한 생각들이 떠오르게 할 것들을 읽거나 보거나 혹은 듣는 것을 피해야 하며, 사단이 제시할지도 모르는 모든 문제들에 닥치는 대로 생각하도록 마음을 아무렇게나 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은 충실히 파수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밖에 있는 악들이 속에 있는 악들을 일깨울 것이며 그 심령은 암흑 가운데서 방황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시험을 이기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제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생각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켜야 하며, 우리의 감정을 신앙과 이성의 지배하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상상력은 아무런 억제와 훈련의 노력 없이 마음대로 쓸데없는 공상을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상이 바르지 않으면 감정도 바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상과 감정이 결합하여 도덕적 품성이 되지요. 만일 우리가 사단이 역사하는 대로 받은 인상에 굴복하여 우리의 사상이 회의와 의심과 불평의 통로로 흘러가도록 버려둔다면 우리는 사단의 유혹에 굴복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5. 감정과 신앙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신앙은 감정이 아닙니다. 거룩한 마음과 순결한 생애를 신실히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때때로 당황하고 실망합니다. 그들은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고 시선을 고정시키는 대신 언제나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의 신앙이 부족함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음과 신앙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주장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감정(느낌)을 신앙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희의 감정이나 황홀함, 또는 행복감 같은 감정을 느껴야 믿음이 좋고 열렬하며 신앙 상태가 잘 유지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신앙은 감정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때때로 신앙 생활에서 낙담과 실망의 감정이 영혼을 엄습하고 압도하려고 위협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이 좋게 느껴지든지 느껴지지 않든지 예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알고 있는 모든 의무를 신실히 이행한 다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평온한 가운데서 쉬어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들 자신의 무가치함에 대한 깊은 느낌에서 영혼이 두려움에 떠는 일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를 낙심시키는 감정과 죄책감들은 사단이 주는 암시이기 때문에, 그때 우리는 그 감정에 눈을 돌리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담대하게 주장하며 그 감정을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고 낙심시키는 감정이나 부정적인 감정이 밀려올 때,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가 변하셨다거나, 또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변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한갖 우리의 부정적인 감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의 감정이 아닙니다. 신앙은 어려움이 닥치거나 시련과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과 약속을 믿으며, 우리의 생애가 평탄할 때와 똑같이 변함없이 하나님 안에 평안히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에 흑암의 시간이 닥쳐 올 때, 우리들은 마음을 자신에게서 돌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그분의 약속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주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실 것을 단순하게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과거의 범죄를 회개하고 장래의 순종을 결심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받아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감정에 흔들리기 쉬운 인간인 우리들의 생각과, 인상(印象)과, 느낌은 믿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은 믿을 만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들은 우리들의 타락한 사고와 관념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6부 - 승리의 길

1) 성화와 의지와의 관계
자세히 연구해 보면, 현대 기독교에서 보편적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복음은 대부분 완전한 복음의 극히 적은 부분인 칭의만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일 때,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치는 것, 그리고 십자가에서 구원이 끝났다고 가르치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칭의의 가르침은 신앙 생활에 있어서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주지하는 사람들이 매우 드물다. 또 구원 문제에 있어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성화나 영적인 자라남이나 성장에 대하여 가르치는 교회가 매우 드물다. 이것이 죄를 승리하는 가르침이 교회 안에 그렇게 적은 이유이다.

만일 교인들이 성화와 영적인 성장, 그리고 죄를 승리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지 못한다면,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많은 갈등과 어려움을 겪을 것이며, 많은 양심적인 사람은 혼돈 속에서 좌절을 하든지, 아니면 거짓 구원의 기만 속에서 애써 양심의 소리를 침묵시키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도 신앙 생활의 출발점으로서 중요하지만, 출발 이후에 지속되어야 하는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아니, 결국에는 영생에 이르는 길에 도달하기 위하여, 의지를 어떻게 활용하여 죄를 승리하고 극복해야 하는가, 또한 승리가 지속되는 진정한 믿음의 생애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죄를 승리하는 생애와 비결은 성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애에서 어떻게 의지의 힘을 사용하고, 또 의지를 어떻게 하나님께 바쳐서 생애의 매 계단에서 죄를 이기며 승리하는가 하는 것은, 어떻게 거룩한 생활, 성화의 길을 걸어 갈 수 있는가와 직결된다.

2) 예수께서 승리하신 것처럼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연구해 보면,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시고도 죄를 승리하신 것에 대하여,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도 예수께서 승리하신 것처럼 죄를 승리할 수 있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본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성을 취하시고도 죄 없는 생애를 사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인간성의 약점 때문에 승리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지 않도록 해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 가 되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리고 그분의 생애는 인성이 신성과 연합할 때 죄를 승리하는 생활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람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 것인지 보여 주기 위하여 승리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시험과 유혹을 받을 때 그 사단의 모든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항하셨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과 의지를 복종시키셨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능력을 받으셨다. 그래서 사단은 어떤 유혹과 시험으로도 예수님을 넘어뜨릴 수 없었으며,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분께서는 항상 모든 시험을 기록하였으되라는 말씀으로 대처하셨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도 죄를 승리하고 악을 저항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지극히 크고 귀한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 약속으로 말미암아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될 수 있다(벧후 1:4).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인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유혹은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다. 사단은, 모든 면에 우리들과 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가 없으셨던 주님의 순결하신 성품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위로부터 능력을 받음으로써 완전한 생애를 살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그분의 온 생애를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과 연합할 때,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완전히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셨다.

예수께서는 사단의 시험과 유혹에 응하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으셨다. 그분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셨고, 생각으로라도 시험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과 연합되었다. 그분은 성령의 내재하심으로 충만한 생애를 사셨고, 하늘의 능력으로 채워져 있었으므로 늘 사단과 죄악과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그분의 생애로 모본을 보여주시려고, 그리고 우리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여 예수님과 똑같이 승리하는 생애를 살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와 더불어 연합하고 있는 동안에는 죄는 더 우리를 주관하지 못할 것이다.

3) 죄를 승리하기 위한 실제적인 의지의 활용
지금까지 배운 의지에 대하여 상기해보면서 죄를 승리하는 실제적인 문제에 대하여 함께 살펴 보기로 하자. 죄가 성립되는 데에는 단계가 있다. 먼저 유혹이 선재하고, 그 다음 그 유혹을 받아들일 때 죄가 성립된다. 그런데 유혹에는 조건이 필요하다. 밖에서 무엇인가 우리를 자극하는 요소가 필요한 것이다. 보는 것, 혹은 듣는 것 등등. 그래서 우리의 내적인 것이 그것에 유혹을 받아서 끌려야 되는 것이다. 야고보서 1:14절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죄가 성립이 되려면, 먼저 우리가 유혹을 받고 끌려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끌리는 자체가 죄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지 않겠다고 우리의 의지로 결정을 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런 자극에 끌리는 자체가 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물론 우리는 죄에 끌리는, 죄로 기울어지기 쉬운 본성을 가졌다. 그러나 성경은 그 본성 자체가 죄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끌리는 것은 유혹이라 말한다. 

죄는 유혹 뒤에 온다. 죄가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단계가 있는 것이다. 유혹을 계속 품어야 죄가 된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이 성경절은 죄가 성립되는 단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위의 말씀처럼, 사람은 처음에 유혹을 받고, 그 욕심을 계속 품어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유혹을 받는 그때가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의지의 힘을 발휘하여야 하는 때이다.  자,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나를 모욕하고 억울하게 취급했다고 하자. 그때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마음속에서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한 그 사람에게 화를 내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뜻이 충돌하며 갈등을 일으키는 순간이다. 이때가 바로 우리의 의지를 사용해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인 것이다.  그때, 우리는 화를 내지 않고 그 사람을 사랑할 힘이 없지만, 이렇게 기도할 수는 있다.

주님! 지금 저의 마음속에 분노가 올라오고 저 사람에게 화를 내며 보복하고 싶은 욕망이 끌어 오릅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의 뜻대로 행동하기 원합니다. 저는 주님의 편을 선택하겠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하나님의 편을 선택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당신의 능력을 주셔서 우리로 그 사람에게 온유하고 친절하게 대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그 순간, 우리에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창조해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아무도 죄를 범하도록 강요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단도 우리를 억지로 죄짓게 만들 수 없다. 먼저 사람 스스로 그 자신의 승낙이 있어야 한다. 격정이 이성을 지배하기 전, 죄가 양심을 정복하기 전에, 영혼이 죄가 되는 행동을 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죄가 성립된다. 그러므로 시험이 아무리 강하다할지라도 죄에 대한 변명은 절대로 되지 않는다.

루터는 아주 유명한 말을 했는데, 그는 유혹을 거절하고 죄를 짓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지혜롭게 표현했다. 새가 우리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지만 우리 머리에 집을 짓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자신이 하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하도록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시험에 대하여 항상 No! 아니오!라고 말하기를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항상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한다(요5: 30)고 하셨다. 아무리 유혹과 시험이 크고 죄를 짓게 만드는 압력이 아무리 끈덕지더라도 아니!라고 말하고 우리의 의지로 하나님의 편을 선택하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4) 죄를 승리하는 계단
1. 첫 번째 계단; 믿으라!
우리가 죄를 승리하는 생애를 살기 위한 비결의 첫 번째 계단은 믿는 것이다. 무엇을 믿는가?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그분의 창조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성경에는 죄를 승리할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의 신학과 유전으로 그 가르침을 바꾸고 무시해서 그렇지 영적으로 눈을 뜨고 보면, 성경에 나타나 있는 복음은 우리가 죄를 승리할 수 있다는 가르침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승리하는 첫 번째 계단은 죄를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우리가 모든 악한 성질과 기질, 모든 죄, 모든 유혹을 이기고 최후에 그분과 함께 설 수 있도록 우리에게 피할 길을 마련해 주시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돌아가셨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그분께서 해주실 것으로 믿자!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주로 받아들인다고 공언하지만, 주님께서 죄를 이길 능력을 그들에게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으므로 승리하지 못한다.  만일, 살아계신 구세주와 진정으로 개인적인 접촉을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속에 살아계시다면, 예수께서 범죄하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도 죄짓기를 거절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오시면 죄가 나가고, 죄가 들어오면 그리스도께서 나가는 것은 단순한 원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죄를 동시에 우리의 마음 보좌에 모실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누인 마음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장성한 완전의 상태는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애를 주장하심으로, 우리가 반역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다.

거룩한 성품, 그리스도와 같은 생애가 모든 회개하고 믿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스도인 품성의 이상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인자되신 그리스도의 생애가 완전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들의 생애가 완전하여야 한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에는 그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 수 있는 능력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도록 사람 안에 조물주의 형상을 회복하고 사람이 그 창조함을 받던 당시의 완전한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구속 사업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믿고 신뢰하자!

2. 두 번째 계단; 의지를 바치라!
예수께서는 타락한 본성이 우리를 끌어당길 때,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막 8:34).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육적인 악한 습관에 물들어 있는 본성의 요구에 대해서 끊임없이 거부하고 저항할 것을 호소하고 계신다. 이렇게 자신을 부인하는 일은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하나님께 의지를 바치며 그분의 편을 선택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전에서 (자신을) 부인하다라는 말의 의미를 찾아보면, 그만두다, 허락하지 않다, 거절하다로 정의되어 있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가 타고난 본성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의지는 항상 본성의 요구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거절한다. 거기에는 오직 예 또는 아니오 라는 대답만이 있다. 자아를 부인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육적인 본성의 요구를 결정적으로 거절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과, 우리를 지배하게 될 법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구원의 조건을 억지로 따르도록 강요받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성경의 원칙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순히 그것들을 거절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늘의 원칙들을 순종하라고 강요하지 않으신다. 다만 성령을 통하여 간절히 호소하실 뿐이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오직 두 가지의 선택이 제시되어 있다. 오직 두 길이 우리 모두 앞에 제시되어 있는데, 즉 그것은 넓은 길과 좁은 길이다. 두 본성이 우리를 지배하기 위해서 격렬하게 투쟁하고 있다. 영적인 음성과 육적인 음성이 매일의 생애에서 매 순간마다 우리의 영혼 속에서 호소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세상의 음성이 우리들의 이성과 감정과 양심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는 선택을 하도록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양자택일의 초청들은 결코 서로 조화롭게 섞일 수 없는 성질의 것들이다. 이 길이 아니면 저 길을 선택해야 한다. 결코 중간은 없다. 둘 중에 하나를 받아들이면, 자동적으로 다른 하나는 거절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사단 중 어느 한 존재를 우리의 주인으로 선택해야 한다. 매일 수많은 투쟁들이 우리의 의지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날마다 의롭게 살 것인가와 불의하게 행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매 순간마다 우리는 우리의 속에서 외치는 감정의 절규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양심의 호소에 동의해야 한다. 우리는 충동에 의해서 살아가든지 원칙을 따라서 살아가게 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애에서 실제적인 왕이 되시든지, 아니면 사단이 우리가 섬기는 실제적인 왕이 되는 것이다.

독자들의 생애는 오늘 누가 지배하고 다스리는가?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결국에 가서는 행하게 된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결국에 가서는 선택하게 된다. 모든 죄는 하나님보다 세상이나 자신의 육에 속한 쾌락을 더 사랑함으로써 발생된다. 모든 비도덕적이고 불순결한 것들이 여기에 근원을 두고 일어나게 된다. 누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우리의 애정과 사랑을 차지하는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이신가? 아니면 그대 자신이나 세상인가?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오직 한 주인 즉,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굴복함으로써 시작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 중에 으뜸이 되시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을 드릴 수 있을 만큼 그분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생애는 죄와 상관없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를 승리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 편에 매일 바쳐야 할 것이다.

3. 세 번째 계단; 하나님께서 일하시게 하라!
죄를 이기기 위한 세 번째 계단은 의지를 하나님께 바친 후, 그분의 능력에 굴복하는 일이다. 사람이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고 구주의 공로에 완전히 의지하는 것보다 더욱 속절없이 보이는 것이 없지만 실상은 그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다. 사람이 그리스도께 굴복할 때에 새로운 능력이 새 마음을 점령한다. 사람이 스스로는 성취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난다. 인간의 본성에 초자연적인 요소를 가져다 주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악한 세상에서 예수께서 굳게 붙드시는 당신의 성채가 되며, 하늘의 능력으로 채워진 그런 영혼들은 사단의 공격에 함락되지 않으며, 죄를 승리하게 될 것이다.

죄에 대한 승리와 악에 대한 유일의 방어는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내재시키는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역사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산 연결을 맺지 아니하면 우리는 자기를 사랑함과 자아 방종과 죄에 대한 유혹의 부정한 영향을 대항할 수 없다. 우리는 많은 악습을 버릴 수 있을 것이며 얼마 동안은 사단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순간마다 자신을 굴복시킴으로 하나님과 산 연락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복당할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 안에 거하며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서 그분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역사하시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죄를 승리하며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칠 때에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합되고, 우리의 뜻은 그분의 뜻에 합병되고, 우리의 정신은 그분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 생각은  그분에게 사로잡히게 되어 마침내 우리는 그분의 생애를 살게 되는데, 이것이 죄를 승리하는 비결인 것이다.  모든 죄는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길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굴복하기만 하면,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며, 우리는 죄를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자들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완전케 하시는 일을 시작하신 것처럼 그 일을 마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