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편지: 요즈음 어떤 노래를 부르고 계십니까?

기분이 좋을 때나 행복할 때 사람들은 노래를 부릅니다. 기분이 우울하거나 슬플 때도 노래를 부르면 곧 그 감정이 해소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래는 우리의 삶에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노래는 가사와 멜로디를 통해 영혼의 느낌과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에, 항상 시대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의 감정을 대표하는 노래들이 생겨나곤 하지요. 당신은 요즈음 어떤 노래를 부르고 계십니까? 당신의 영혼에서는 오늘 어떤 노래가 흘러나오나요?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노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이 꼭 부르기를 원하는 노래를 가지고 계십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자녀들에게 꼭 가르치시고 싶어하는 노래를 가지고 계십니다. 구속함을 받아 새 하늘에 가서 살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노래를 반드시 배워야 한답니다. 그것이 무슨 노래이냐고요? 그것은 성경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노래인데, 특별히 이 노래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계 14:3).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계 15:3).

구원을 받아 하늘에 가서 살 성도들은 이 땅에서 이 노래를 배워야만 합니다. 이 노래는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 길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찬양한 모세의 노래이며,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법을 배운 십사만사천이 부르는 경험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이 땅에서 구원을 받아 하늘에 올라가서 살 사람들은 자신만의 경험의 노래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땅에 살 동안 하나님께서 자기를 인도하셨던 그 기이한 섭리에 대하여 가슴 속으로부터 울려나오는 감동과 감사의 노래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노래는 하늘에 가서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 무리 찬양대인 십사만 사천이 우주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부를 간증의 노래이기 때문에, 그때 그 찬양대에서 노래를 부르려면 지금 이 땅에서 자기만의 간증과 경험의 노래를 꼭 배워야 한답니다.

시련 속에서 배우는 노래
아름다운 목소리의 새를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새의 주인은 자기 새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노래가 있었답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래를 가르치려고 해도, 밝은 대낮에, 그리고 주인의 목소리 외에 여러 다른 소리들이 들려오는 동안에는, 그 새는 주인이 가르쳐주려고 애쓰는 노래를 배우려고 하지 않았답니다. 어쩌다 주인이 가르쳐 준 노래의 한 절씩을 여기저기에서 떼어내어 짤막하게 부르는 흉내를 낼 수는 있었지만, 결코 혼자서는 그 노래의 완전한 곡조를 다 부를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주인은 매우 검고 두꺼운 천으로 새장을 덮고, 그 새가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곳에 두고 그 노래를 가르친답니다. 외롭고 단절된 곳, 고독하고 고립된 어두움 속에서, 그리고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오로지 주인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는 고요한 곳에서, 그 새는 주인이 가르쳐주는 노래를 되풀이해서 부르려고 노력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새는 주인의 노래를 배워 완전한 곡으로 부르게 됩니다. 그런 다음 그 새를 밝은 곳으로 내어 놓으면, 그 새는 비로소 자기가 배운 노래를 부른답니다. 아무리 다른 소음들이 들려와도, 그 새는 오직 주인이 가르쳐준 그 노래만을 부르게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세상의 소리들이 시끄럽게 들려오는 동안에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노래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캄캄한 시련의 어두움 속에서, 뼈아픈 고통의 그늘에서, 모든 것이 떠나버린 뒤의 소외감과 외로움의 빈 둥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배워주시려고 하는 노래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때에야만이 오로지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고 하니까요! 그리고 고통 속에서 아픔을 이기며 배운 노래여야만이 다시는 잊어버리지 않고 부를 수 있으니까요!

감사함으로 부르는 노래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의 노래의 주제들을 만들어 줍니다. 어려운 시련을 하나하나 견디고 겪을 때마다 우리에게는 노래의 제목들이 하나 둘 더 늘어납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시련 속에서 하나님께서 배워주시려고 하는 공과들을 잘 배웠을지라도, 감사함으로 그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 노래를 완전히 배운 것이 아닙니다. 그 노래가 감사함으로 충만한 멜로디가 되기 전에는 완전한 곡조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과 하는 일이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택해 주신 것으로 늘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좋아하는 일이든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든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아무 불평 없이&&. 마치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무엇을 만들든지 진흙이 묵묵히 있듯이&&.

토기장이는 도자기나 그릇을 만들 때에 진흙을 가지고 자기의 뜻대로 형체를 만들지요. 그는 진흙을 떼어서 빚다가, 또 그것을 누르고 뭉쳐서 물로 축이고 말립니다. 또 얼마 동안은 손을 대지 않고 그 진흙 덩어리를 그대로 놓아두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진흙 반죽이 완전히 말랑말랑해지면, 그것으로 그릇 만드는 일을 계속합니다. 그리고 모양을 만든 다음, 다시 깎고 다듬은 후에 그것을 햇빛에 말리고 솥에서 굽습니다. 그런 모든 성가신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사용하기에 알맞은 그릇이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빚어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마치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분의 손에 가만히 놓여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토기장이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바침으로 토기장이 되시는 예수님에 의하여 꼴 지어지는 일입니다. 우리의 계획이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되는 것은 아니지요. 어떤 때는 우리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계획과 의도를 버리는 것이 우리 자신과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최선의 길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정말 좋은 것을 희생하도록 요구받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바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들은, 하늘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쓸 데 없는 것을 버리는 것에 불과한 것이랍니다.

우리가 아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버리라는 요구를 받을 때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훌륭하고 좋은 일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니 감사하십시오! 당신의 인생에 대하여 감사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길을 한숨과 비탄에 찬 것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의 삶 속에 예수님의 임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마음속에 거하는 사람들은 밝고 맑고 행복하고 감사한 표정으로, 마음으로 자신의 인생길을 걸어 갈 것입니다.

장차 오는 생애에서는 이 땅에서 우리를 괴롭게 하고 실망하게 했던 신비들이 밝혀질 것입니다. 우리는 응답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였던 우리의 기도와 좌절당했던 희망이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인생길을 노래로 넘치게 하십시오! 더 많은 가사와 주제들을 만드십시오! 머지않아 하늘에 가서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찬양하는 경험의 노래를 부르게 될 때, 더 많은 곡들이 있게 하십시오.  지금 당신은 그 노래를 배우고 계십니까? 요즈음 당신은 어떤 노래를 부르고 계십니까?

생애의 빛에서

강병국 목사
예배는 신앙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요 자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창조하시고 만드셨기 때문에 그분께 경배를 드리는 일은 마땅한 것이지요. 우리의 삶의 전부가 그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예배하는 형식이나 태도가 어떠하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는 이유는 예배자의 믿음과 신앙 사상이 어떠하냐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이해나 오해는 이상스러운 예배 형식을 갖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배란 우리 자신 스스로의 유익들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목적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태도와 방법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신들을 중점으로 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면 그 예배의 형식이 자신들의 느낌을 만족시키기 위하여서, 그리고 본인들의 유익을 위하여서 드리도록 각본을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중심에 삼고 그분의 명령을 따라 그분께 드리기 위한 예배를 만들려고 한다면, 우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한 기도와 말씀들, 그리고 하나님께만 찬양을 돌리는 순서들로 만들어지게 될 것입니다. 인간들의 공로나 행위 또는 아름다운 음성들을 칭찬하고 기리는 그러한 순서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역사하심에 초점을맞추며 그분의 분부하심을 듣고 알기 위하여 드리는 순서로 바뀌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예배가 없는 그리스도인 삶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천사들도 하늘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을 드리고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단체적으로 행해야 할 의무입니다. 마치 자녀들이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리며 감사하는 것처럼, 그리고 부모님들이 기쁘고 보람 있어 하시도록 자주 찾아 뵙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삽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일까요? 이번 호는 여러분들에게 새롭고 중요한 이슈를 가지고 찾아갑니다.

가정과 영성: 신내림과 참된 부흥의 차이

어떤 절간에서 한 여승이 간절한 마음으로 100일 기도를 드리다가 신내림을 받았는데 그 여승은 그날부터 고양이 같은 소리를 내고 고양이처럼 행동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목도한 신자들은 그 여승이 부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여승을 따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여승을 보기 위하여 모여들었는데 그들은 자신에게도 그런 은혜가 내려지기를 구하기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였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일들이 지금 기독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생애의 빛은 이번 기사에서 그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하나님의 영께서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 -편집실-

부흥회
어떤 교회의 목사가 성령의 은사가 충만하다는 말을 듣고 나는 10리 길을 마다 않고 그 교회를 찾아갔다. 그 교회의 교인들은 죄 사함을 받고 기쁨에 넘쳐서 은혜가 충만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초대 교회의 오순절을 생각하였다. 그 교회의 청년 하나는 방언으로 교회의 어른들에게 설교했는데 완고한 노인들도 그 능력에 압도되어 죄를 회개하고 어린아이와 같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 교회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 중에 평범한 것은 하나도 없었고 모두가 비상한 것들이었다.

나는 진리를 사랑하는 학자의 마음을 가지고 그 교회의 부흥회를 찾아갔다. 내가 그 교회에 들어서자 두세 형제들이 나에게 와서 속히 성령을 받을 것을 권하였다. 그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었다. 그들의 말은 너무나 진지하고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따라서 울게 되었다. 부흥회를 참석하는 동안에 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였다. 부흥사의 말에 의하면 하늘에서 불길처럼 뜨거운 것이 내려와서 신도들의 마음을 뜨겁게 할 것인데 그러한 하늘의 은혜를 받은 신도들은 이상한 변화를 느끼면서 갑자기 죽을듯한 고통을 느끼기도 하고 등줄기에 뜨거운 것을 느끼기도 하다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느낌 속에서 죄 사함과 구원받은 기쁨이 일시에 몰려와서 두 손을 하늘을 향하여 올리고 황홀한 표정으로 기도하며 찬송하고 심지어는 껑충껑충 뛰는 신도들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었다.

나는 항상 진리는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믿는 그리스도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균형진 판단력과 양심의 음성을 통하여 접근하신다고 믿었다. 그러나 내 눈앞에 나타난 광경은 전혀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내 마음속에 혹시 내가 그 동안 잘못 생각했던 것일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다! 지금 내게는 부흥이 필요하다. 여기 있는 교인들처럼 마음의 고통과 영적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나도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받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받은 은혜를 내가 받지 못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부흥사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구하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다. 나도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께 매달리고 기도하면 이 놀라운 은혜와 기적이 내게 임하여 마음속의 죄는 사라지고 근심의 구름이 걷히어 행복과 기쁨으로 충만한 생애를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나는 놀라운 은혜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하루를 기다려도 은혜는 내리지 않았다. 이틀이 지나도 마음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 교회의 목사를 찾아가서 물어 보았더니 당신의 열심과 기도가 부족한 탓이라고 말하였다. 나는 애써 울면서 기도하고 부르짖으면서 은혜를 간구하였다. 주여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옵소서. 다른 사람을 구하심같이 저도 구하여 주옵소서! 나의 간절한 절규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효험이 없는 애씀과 노력 끝에 나는 마침내 실망하고 말았다. 내 죄가 다른 사람의 죄보다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다른 형제자매들은 하늘에서 받은 특별한 은혜로 서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는데 오직 나만 고아처럼 버림받은 자식처럼 감사할 은혜도 느끼지 못하고 나타낼 기쁨도 없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느낌으로 우울에 우울을 더하는 생애를 살게 되었다. 의심과 회의가 전보다 열 배는 증가되었다. 다른 신도들의 눈에 나는 믿음이 없는 자로 보이게 되었고 회개하지 않고 고백하지 않은 죄를 숨기는 자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 여기 저기서 나를 손가락질하여 소근거리는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인들과의 교제를 피하게 되었고 교회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이런 위기의 상황 속에서 나를 구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께서는 심령의 변화를 식물의 성장에 비유하여 설명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막 4:28-29). 성경은 결코 사람이 갑자기 변화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먼저 씨를 땅에 묻어야 하는데 씨앗은 그곳에서 썩어서 죽는 경험을 먼저 해야만 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서 싹이 나오는데 그런 다음에도 시간과 절차에 따라서 이삭이 나오고 서서히 자라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열매가 맺기까지 필요한 양분과 경험을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리스도인의 변화의 경험이다. 세속적이고 이기적으로 살던 사람이 부흥회에 참석하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갑자기 변화되어 은사를 받고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없다. 성경은 급진적인 변화와 열매를 부인한다.

마태복음 13장에서도 예수께서는 이러한 진리를 반복하여 설명하셨다.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마 13:31-33). 겨자씨같이 작은 존재가 먼저 나물로 성장하는 단계가 필요하고 그 다음에 새들이 날라와 머물 수 있는 나무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다.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모두 사람이 급진적으로 하루 아침에 변화될 수 없음을 증거한다. 성경은 단 한 번도 그리스도인의 급진적인 변화와 열매 맺음을 말한 적이 없다.

예언서인 요한계시록과 다니엘서는 교회의 탄생과 투쟁과 승리의 과정을 모두 2천 년 이상으로 예언하고 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람의 심령 변화와 교회의 성장 기간을 하룻밤 사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지진대와 산맥이 오랜 기간에 걸쳐서 서서히 형성된 것처럼 사람이 변화하는 과정에도 필요한 경험과 시간이 반드시 요구된다.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처럼 그리고 날마다 마시는 물처럼 진리의 효과는 확실하고 분명하지만 그 작용은 눈에 띄는 현격한 것이 아니다. 진리는 서서히 효과를 나타내는 약초와 같은 것이지 당장 효과를 나타내는 화학 약품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변화는 겨자씨가 성장하듯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가서도 영원토록 계속되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이러한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진리와 조화를 이루는 그리스도인의 진짜 경험을 할 수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경험
신약 성경의 대부분을 기록한 바울 역시 일정한 기간 동안 성령의 은밀한 역사와 영적 투쟁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나서 죄 사함을 받는 경험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개신교회를 일으킨 마틴 루터의 경험도 그렇고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의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루터로 하여금 루터가 되게 만든 것은 단순히 그의 스승 스타우비츠가 전해 준 한 마디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3,4년 동안 수도원 안에서 홀로 사색과 기도하는 세월을 보내야만 했으며 진리를 찾아서 방황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감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존 번연의 경우도 그가 죄 사함의 위대한 진리를 깨달은 후에 오히려 1,2년 동안 베드퍼드 감옥에서 외롭게 지내는 단련의 과정이 필요하였다. 진리를 깨달았을 때는 내가 그것을 느끼든지 않든지를 불문하고 나의 신앙적 경험과 성장이 진일보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진리와 상관없이 아무리 울고 절규하고 기도하고 매달리며 눈물을 흘려보아도 그것은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값싼 감정에 불과하다. 냉정한 이성과 합리적인 판단 그리고 양심의 결정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어떤 부흥회나 집회도 무가치하다.

그리스도인의 생애 속에서 변화와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의 진리 위에서 부흥하는 일이 필요하다. 감정적 부흥을 조장하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요한 웨슬리와 휘트필드의 부흥회 방법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는데, 감리교회의 선구자들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부흥사가 아니었다. 요한 웨슬리는 매우 논리적으로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는 목사였다. 그는 진리와는 상관없이 소리만 지르는 감정적 설교가가 아니었다. 그가 진리를 가르쳤기 때문에 감리교회가 오늘날까지 내려올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오늘날 그의 후예들이 그의 가르침을 땅에 내려 놓았기는 하였지만 말이다. 참된 부흥은 이성과 양심이 진리를 심사숙고한 이후에만 올 수 있다. 진리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감정은 하나님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없는 것이다.

감정적 부흥회를 지지하는 목사들은 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구원의 확신을 느낄 수 있는 수단으로 부흥회를 오용하고 있다. 참된 거듭남의 경험이 무엇인지 모르고 성경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부흥회를 찾아가 절규에 가까운 통성 기도와 시끄러운 음악을 통하여 황홀한 무아지경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자신의 텅 빈 마음을 채우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감정적 확신을 얻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현대의 생리학자들은 오늘날 부흥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감정적 변화들을 극단적인 신경 작용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사회심리학자들은 부흥회를 찾는 그리스도인들은 죄로 인한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고 감정적 기쁨과 행복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부흥회를 이용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넓은 길을 선택하는 이유
사람은 죄를 지어서는 안 될 자이면서도 죄를 짓는다. 깨끗하게 살아야 할 의무와 그렇게 살 수 있는 선택의 기회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깨끗함을 잃어버린다. 천사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존재이면서도 짐승의 수준까지 떨어져서 헤맨다. 올라가면 하늘의 사람이 될 수 있고, 내려가면 지옥의 자식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이다. 무한한 영광과 무한한 타락 이 둘 중 어느 것도 인간이 이를 수 있는 형편이다.

내려가기는 쉽게 생각되고 올라가기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다. 그러나 지옥으로 내려가는 길에도 양심의 가책이 있고 후회와 불행이 있기 때문에 내려가는 길도 결코 쉽다고만 말할 수는 없는 길이다. 하늘로 올라가는 길에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고 성경 말씀의 뒷받침이 있으며 죄로부터의 구원이 있고 간간히 쉬어갈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이 있지만 육체의 끊임없는 방해가 있고 세상이 유혹을 던지기 때문에 올라가는 길도 쉽다고 말할 수는 없는 길이다. 두 길 모두 어려운 길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바는 행하지 않고 자꾸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게 되는 경험을 통과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모두 두 개의 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나는 또 하나의 나와 늘 싸우고 있다. 참으로 인생은 전쟁과 투쟁의 연속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다음과 같은 세네카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내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전쟁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 7:13-14). 내 속에서 일어나는 인생의 투쟁이 너무나 길고 힘들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투쟁하기를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다. 투쟁이 힘들고 전쟁에서의 패배가 싫기 때문에 아예 그것을 잊어버리기 원한다. 성령께서 양심을 괴롭혀 주는 것이 싫고 다가오는 유혹과 육체의 욕심에 맞서서 싸우기가 싫기 때문에 쉬운 구원을 찾아서 이 교회 저 교회를 찾아 다닌다. 이런 사람들이 찾아가는 곳이 소위 말하는 부흥회이다. 그곳에는 죄도 없고 양심의 가책도 없으며 계명도 없고 순종도 없으며 극기와 인내도 없다. 오직 감정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행복과 만족을 느끼지만 그곳은 내려가는 길로 연결되어 있는 넓은 길이다. 육체와 유혹이 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넓은 길이다. 존 번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가끔 개와 고양이의 신세를 부러워했다. 왜냐하면 개나 고양이에게는 사람이 겪어야 할 선과 악의 싸움과 투쟁이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존 번연 역시 두 개의 내가 싸우는 전쟁이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구원과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선과 악의 전쟁을 포기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그러면 거기서 구원의 평안과 승리가 얻어진다.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 13:23-24).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인데, 그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 길을 걷기 원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런 이유 저런 이유 때문에 그 길로 들어서지 못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넓고 평탄한 길을 선택할 것이며 오직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좁은 길은 감정적인 길이 아니다. 그 길은 깊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한 다음 인내와 극기로서 걸어가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 위에 진리가 있고 죄를 버림으로써 얻는 평안이 있으며 은은한 성령의 인정하심이 있기 때문에 누구도 흔들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그 길을 걸을 수 있다. 심령의 참된 부흥을 경험한 사람은 주저 없이 좁은 길을 걷기로 선택한다.

건강: 생선에 관한 진실

수산물은 감염성 질환의 저장고이다. 해마다 미국 내에서 나오는 수산물에 의한 식중독이 약 113,000건이나 보고되고 있는데, 이 수치는 소고기, 닭고기, 돼지고기에 의한 식중독 숫자보다 15배 이상이나 높은 수치이다.

수산물의 감염도 위험하지만 무엇보다도 위험한 것은 강이나 바다의 오염으로 인하여 야기되는 문제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수질은 놀라울 정도로 급속하게 오염되어서 이제 생선은 더 이상 안전한 식품이 될 수 없을 정도까지 이르렀다. 오염된 물에서 자란 생선은 물에서 받아들인 독소를 지방 조직에 농축하여 저장하게 된다. 이들 독소에는 살충제, 염화탄화수소, 다이옥신, 클로데인, 수은 등이 있다. 현재 미국의 47개 주에 있는 생선소비 자문위원회에서는 특정한 종류의 생선을 먹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다. 생선에 대한 경고 중에서 가장 공통된 문제는 생선의 지방 조직에 함유되어 있는 수은이 태아와 어린이의 뇌와 신경에 손상을 입힐 수 있다는 점이다. 참치, 황새치, 상어 같은 큰 생선의 수은 함량은 매우 높다. 과일과 야채가 살충제에 의한 오염 때문에 염려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미국 FDA의 연구 결과는 수산물의 살충제 함량이 과일이나 곡류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오염된 생선은 오염된 물에서 나온다.
식품의 오염도를 논할 때 살충제는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이다.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살충제의 종류는 900가지가 넘는데 미국에서는 약 600여 종의 살충제가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물에 있는 생선이 살충제에 노출될 수 있을까? 가장 큰 원인은 농업용 폐수이며 하수 처리물, 배에서 나오는 폐기물, 그리고 도시에서 흘러나오는 폐수와 쓰레기가 수질 오염의 주범이다. 오늘날의 생선은 오염도에 있어서 50년 전의 생선과는 전혀 다르다. 미국 오대호에 사는 거의 모든 종류의 물고기에서 종양이 발견되고 있는데 예를 들어서 메기류는 약 30%가 간암을 보유하고 있다.

국립 암 연구소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생선의 종양이 높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암 사망률이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수질 오염도가 높은 수자원의 침전물을 생쥐의 피부에 발랐더니 피부암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해마다 수많은 물고기 떼가 수질 오염으로 인하여 떼죽음을 당하고 있다. 살충제와 중금속 등에 의하여 오염되어 병든 생선들이 어부들에 의해 그물에 잡혀서 시장에 나오면 그것을 신선한 건강 식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약간 오염된 물은 심하게 오염된 생선을 만든다.
살충제와 다른 독극물에 의하여 오염된 물의 위험성을 올바로 이해해야만 한다. 아주 낮은 오염도의 수질이라고 할지라도 물고기나 생선이 오랜 세월 동안 그러한 환경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는 동안 살충제와 독극물은 체내에 축적되어서 결국에는 엄청난 위험을 가져다 주게 된다. 사람에게 장기간 동안에 걸쳐서 엄청난 위협을 가져다 주는 독극물에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특색이 있다; 1) 생물학적 축적 2) 생물학적 확대. 생물학적 축적은 인간의 장기나 다른 유기체(동물이나 생선)에 서서히 독극물이 축적되는 과정이고, 생물학적 확대는 먹이 사슬의 단계를 올라갈수록 독극물의 농축도가 점점 더 올라가는 과정을 말한다.

오래 전에 샌프란시스코의 북쪽에 있는 클리어 호수에서 있었던 조사 결과를 살펴보도록 하자. 호수의 인근에 있는 농경지에서 해충들을 없애기 위하여 DDT보다 약한 DDD(살충제)를 여러 번 살포하였었다. 살충제는 부분적으로 호수 위에도 직접 떨어졌지만 주로 빗물에 씻겨서 유입되었다. 살충제를 뿌린 결과 호수에 사는 생물이나 물고기에 다음과 같은 오염이 발생하였다.

alt

호수의 살충제 농도는 겨우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인 0.2ppm이었는데, 이것은 호숫물 1억 방울에 DDD 2방울이 섞여 있는 농도를 말한다. 생리학적 확대로 인하여 호수에 사는 식물성 플랑크톤에는 DDD(살충제) 농도가 5ppm으로 증가되었는데 이것은 호숫물보다 500배나 높은 농도이다. 더욱이 먹이 사슬이 올라감에 따라 DDD 농도가 2500ppm까지 올라가는데 이것은 호숫물의 오염도보다 125,000배가 되는 것이다. 미국의 환경보호국(EPA)에서는 다음과 같은 발표를 하였다. 물 속에 사는 생물체는 환경 오염 물질을 물에서 감지되는 농도의 100만 배 이상으로 축적할 수 있다.

환경의학 부문에서 탁월한 연구 결과를 갖고 있는 미시간 주립대학의 케네트 로즈만 박사는 공장이나 화학물질에 접촉하지 않는 일반 대중이 중금속에 노출되는 경로는 생선의 섭취에 있다고 발표하였다. 생선의 섭취에 의하여 유입되는 중금속이나 다이옥신은 혈청 콜레스테롤과 중성 지방의 수치를 올릴 뿐 아니라 남성의 정자 수와 불임에도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오염 물질들은 태아의 성장을 해치며 지능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는 대기 환경이 오염되어서 산성비가 점점 심해지고 있는데 이로 인하여 생선이 독성 무기질에 오염되는 정도가 올라가고 있다. 미국의 메인 주에서는 이러한 심각성을 주민들에게 주지시키기 위하여 임신할 나이의 여성들과 8살 이하의 어린이들은 연못이나 호수에 서식하는 물고기를 먹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물고기의 수은 함량 때문에 큰 물고기는 일년에 6마리, 작은 물고기는 22마리 이하로 섭취를 제한하고 있다. 또한 미시간 주에서는 이보다 확대된 제한을 주민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생선의 인공 양식은 안전한가요?
사람들은 수질을 관리하는 인공 양식장에서 자란 생선은 안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먹을 것을 상업적으로 대량 생산하다 보니 비양심적인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 나온 인공 양식에 관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부각시키고 있다.  어떤 인공 양식장에서는 생선을 보다 신선하고 돋보이게 보이게 하기 위하여 인공 색소를 불법으로 사료에 첨가하고 있다.  항생제를 정기적으로 사료에 혼합하여 사용하고 있다.  때때로 살충제를 사용하고 있다.  사용하는 사료에 따라서 생선에 함유되어 있는 오메가 3 지방산의 함량이 자연산에 비해서 낮아질 수 있다.

오염된 식품은 그것이 생선이든지 고기이든지 간에 장기간에 걸쳐서 만성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한 질병의 원인을 추적하기 쉽지 않다. 오염에 의한 문제가 드러나기까지 적어도 수년이 걸리며 증세가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그 원인이 되는 독소나 화학물질을 정확하게 확인하기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야채나 과일도 살충제를 뿌려서 재배하기 때문에 생선이나 고기보다 더 위험한 식품이 아닌가 라고 질문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거의 모든 의사나 식품 학자들이 야채와 과일을 최적의 식품으로 추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실제로 암을 예방하고 치료하는데 있어서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 탁월한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은 수많은 임상 실험에서 분명하게 밝혀진 바이다. 과일과 야채가 비록 살충제로 키워졌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우리를 암의 위험에 노출시키기보다는 암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역할을 한다.

건강: 생선은 건강 식품인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꽤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왜냐하면 생선이 건강에 유익하다는 많은 기사들이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건강에 좋은 생선을 먹은 사람의 콜레스테롤이 왜 올라갈까? 이 상반된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각종 신문과 방송 매체들은 생선이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어 주고, 심장 질환의 확률을 낮추어 준다는 식의 정보를 대중들에게 전달함으로써, 생선의 소비량이 날로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1985년에 생선에 대하여 연구한 세 가지 보고서가 권위 있는 뉴 잉글랜드 의학 학회지에 기고되었는데, 그 중에 한 보고서는 네덜란드에서 심장 질환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에 대한 보고서로서, 날마다 1온스의 생선을 섭취하는 사람들에게는 심장 질환 발병률이 50% 이상 감소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두 번째 보고서에는 생선의 기름은 콜레스테롤과 트라이글리세라이드 수치를 낮추어 준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으며, 세 번째 보고서에는 생선의 기름과 백혈구의 기능에 대한 관계를 다루고 있었다.

이러한 종류의 연구 보고서 때문에 소고기나 돼지고기(red meat)를 먹던 많은 사람들이 생선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다량으로 섭취하던 선진국 사람들이 생선으로 방향을 전환한 다음, 콜레스테롤 수치가 어느 정도 낮아지고, 심장 질환에 유익을 얻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소고기나 돼지고기에서 생선으로 전환한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유익을 얻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학지에는 생선과 생선 기름의 사용에 대한 경고의 글이 실리고 있다는 점이다.

생선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면
생선이 가지고 있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예를 들었던 케이스처럼 생선을 섭취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콜레스테롤의 상승은 어떻게 된 것인가? 제인의 경우를 살펴 보도록 하자. 제인은 지난 몇 년 동안 채식을 해왔는데, 친구로부터 생선이 심장 질환에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몇 달 전부터 식단에 생선을 추가하여 먹기 시작했던 것이다. 채식을 하던 사람 즉, 콜레스테롤이 매우 잘 조절되던 사람이 생선을 섭취할 경우, 그 사람의 콜레스테롤은 평상시보다 상승하게 된다.  최근에 나온 보고서들은 생선의 기름을 섭취했을 경우,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도 LDL 콜레스테롤은 상승된다는 사실을 발표하고 있는데, 이러한 보고서들은 생선이 식품으로서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 번째 문제점
생선은 동물성 식품이기 때문에 콜레스테롤을 포함하고 있다. 콜레스테롤 자체를 놓고서 살펴볼 때, 생선에 포함되어 있는 콜레스테롤과 다른 동물들 즉,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등에 함유되어 있는 콜레스테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콜레스테롤 함량을 비교해 볼 때, 생선 기름과 소의 T bone 스테이크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생선 기름을 섭취한 사람들의 콜레스테롤이 상승되는 것이다.

소의 T bone 스테이크 (3.5 온스) : 79 mg
청어 기름 (15g) : 115 mg
연어 기름 (15g) : 73 mg
정어리 기름 (15g) : 106 mg
대구 간 기름 (간유, 15g) : 86 mg

두 번째 문제점
두 번째 문제점은 불포화 지방과 관련된 문제이다. 일반 고기와 비교해 볼 때, 생선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불포화 지방에 대한 복합 포화 지방의 비율(P/S ratoio)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식물성 식품에 비교하면 너무나 큰 차이가 난다. 소고기나 닭고기를 주로 먹는 사람들은 생선으로 대치함으로써, 콜레스테롤 수치를 어느 정도 낮출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식물성 식품의 우수성에 비교할 수는 없다.

몇 해 전 네덜란드에서 생선이 심장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을 현저히 낮춰 줄 수 있다는 실험 결과가 발표된 적이 있다. 그러나 생선이 심장 질환에 유익하다는 언론사들의 발표를 듣는 사람들이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생선을 먹는 사람과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 사이에 있어서 콜레스테롤 수치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결정적인 변화를 일으킬 만큼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그렇다면, 생선의 섭취가 어떻게 심장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을 낮추어 줄 수 있다는 발표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메가-3 지방에서 찾아 보아야 한다.

오메가-3 지방산과 심장 질환
연어, 정어리, 고등어와 같은 몇몇 특정한 생선에는 오메가-3 지방산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다. 이들 생선에 들어 있는 오메가-3 지방산은 심장에 특이한 유익을 주는 EPA라는 산을 함유하고 있는 복합 포화 지방산이다. EPA라는 물질은 혈액의 끈적거리는 현상과 덩어리지는 현상을 감소시켜 준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혈액이 끈적거리거나 뭉치는 현상이 감소된다는 말은 혈관이 막히거나 심장 마비의 확률이 줄어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오메가-3 지방산은 혈압을 조금 낮추어 주는 역할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종류의 지방을 섭취함으로써, 트라이글리세라이드가 실제적으로 낮아지는 경험을 한다.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오메가-3 지방산은 동맥 경화에도 유익을 준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심장 마비가 일어났을 경우에도, 심장 마비로부터 초래되는 근육 파괴(muscular damage)를 감소시켜 준다.

이러한 증거들을 근거로 해서 본다면, 우리는 심장 질환 발병률을 낮추기 위해서 생선을 먹어야 하지 않을까? 이 문제와 관련된 두 연구 보고서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네덜란드에서 이루어진 실험 결과에서,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끊고 생선을 먹는 사람들은 소고기나 돼지고기(red meat)를 먹는 사람들에 비해서 심장 질환 발병률이 50% 정도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매우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완전한 채식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심장 질환을 조사해 본 결과, 발병률이 육식을 하는 사람들에 비해서 86% 이상 낮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 두 가지 실험 결과에서는 당연한 결과이다. 몸에 해로운 육식을 하던 사람들이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끊고 생선을 먹었을 경우에는 심장 질환의 발병률이 낮아질 수 있으며, 콜레스테롤도 어느 정도 낮아질 수 있다. 그러나 육류를 끊고 생선을 섭취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채식을 하는 사람들에 비교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자면, 육식을 하던 사람이 일반 육류를 끊고 생선만을 유일한 육류로 섭취할 경우에는 어느 정도의 유익을 얻을 수 있지만, 채식을 하던 사람이 생선을 식단에 추가했을 경우에는 건강에 많은 손해를 보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건강을 위한 최적의 식사법은 채식임에 틀림없다.

결론
자,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매우 단순하고, 평범한 식물성 식품들에서 우리는 충분한 오메가-3 지방산을 얻을 수 있다. 오메가-3 지방산을 어디서 얻을 것인가를 선택하는 문제에는 단순한 지혜가 요구된다. 돼지고기와 비슷한 정도의 콜레스테롤을 포함하고 있으며, 오염된 독성 물질을 함유하고 있으며, 발암 물질에 대한 위험을 감수한 채 생선을 통하여 오메가-3 지방산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신선하고, 아무런 부작용도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질병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채소와 과일에서 오메가-3 지방산을 얻을 것인가? 선택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지성에 맡긴다. 최고의 오메가 3 공급원은 아마씨이다!  

신앙: 1부 - 축제식 예배가 범람하고 있다

요즈음 축제식 예배가 기독교 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 축제식 예배는 더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서, 그리고 더 흥미 있고 이 세대에 맞는 새로운 형식의 예배라는 각광을 받으며 많은 교회에 도입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교인을 더 많이 끌어 모으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일에 이 축제 예배가 공헌을 할지는 몰라도, 진정한 개혁과 부흥을 이끌어내는 데 큰 몫을 담당하는 현대 기독교의 예배의 질을 향상시키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기뻐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과연 어떤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예배일까요? 이번 호에는 축제식 예와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 예배에 대하여 조명해 보았습니다. 이 기사가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일에 대한 깨우침을 가져오는 기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편집실 -

오늘날 기독교 안에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교인들이 많지 않은 것 같다. 기독교 안에 진정한 경건의 부흥과 진정한 성령의 역사가 결핍되며,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엄숙하고 감동적인 예배가 사라지고 그 대신 영적인 쇠퇴와 형식적인 종교가 자리를 잡게 되자, 교회의 영적인 빈곤과 공황을 메우기 위해 도입한 것이 축제식 예배 형태이다. 물론 축제식 예배를 경영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요즈음의 교회들은 좀더 쉽게 대중을 교회로 인도하고 또 대중을 더 쉽게 종교에 적응하게 하기 위하여, 또 좀더 효과적인 전도의 수단과 방법이 필요하다는 명목 하에 저마다 앞을 다투어 축제식 예배 형식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어린이들을 교회로 인도하기 위하여 어린이들을 위한 축제 예배 윙윙이라는 형식도 각광을 받고 있다.

최근 몇 년간, 미국 내의 기독교인들의 다수가 무대 공연식의 예배를 드리는 새로운 형태의 대형 교회(Mega church)로 몰리면서 기존의 주류 교단 교회 성도의 수가 오히려 줄고 있다는 소식이 신문에 실렸었다. 교회 연구 단체들은 그 중에서도 2만 5000명의 성도가 몰리는 텍사스 휴스턴의 레이크우드 교회를 미국 최고의 대형 교회로 뽑는데, 이곳의 예배는 마치 록 콘서트나 공연행사장을 연상케 한다. 예배 음악은 10종류의 악기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와 무대 위의 찬양단이 주도하며, 성도들은 대형 TV화면에 뜬 가사를 보면서 찬양을 따라 부른다. 예배가 진행되면 담임목사인 조엘 오스틴 목사의 얼굴이 크레인 위의 촬영 카메라로 스크린에 비춰진다. 국제 텔레비전 방송망을 통해 전 세계 1억 5000만 명의 시청자가 시청한다는 그 교회의 오스틴 목사는 인기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세계 모든 지역에 이 같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자주 해외여행에 나서기도 한다. 레이크우드 교회는 갈수록 늘어나는 신도들로 인해 올 7월 1만 6000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새 교회 건물로 이사할 예정이다.

종교 전문가 월리엄 마틴 교수는 높은 에너지를 내뿜는 축제식의 대형 교회 예배가 인기 속에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으며, 마치 종교 축제를 연상케 하는 레이크 우드 교회의 예배 방식은 미국뿐만 아니라 지구촌 주민들을 이 교회로 인도하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1) 축제 예배, 과연 효과적인가?
전 세계 기독교뿐만 아니라 한국의 많은 기독교회들이 요즈음 축제 예배 형태를 도입하여 예배드리고 있다. 그런데, 그 축제식 예배는 예배라기보다 종교적인 쇼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그 예배에서 불리고 들려지는 빠른 템포와 엇박자가 섞인 요란한 복음 성가들은 가사만 복음적으로 살짝 대치시켰을 뿐, 보통 TV에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연예오락의 유행가들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요즈음은 춤으로 드리는 예배 형식들도 등장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장르의 춤, 힙합댄스, 재즈댄스, 발레와 퓨전댄스 등으로 성경의 이야기들을 그려내며, 춤을 통하여 예배드리며 청중들을 복음화한다고 하고 있는 실정이다.

많은 목회자들이나 사역 담당자들은 말한다. 시대가 시대니 만큼 교회에서 사용하는 음악도 시대의 흐름을 따라야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교회에 적응하고 편안한 느낌으로 앉아있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시대에 맞는 음악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예배 형태는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 모으는 효과적인 수단이며, 또 매우 파급적인 전도 효과를 불러 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축제식 예배의 근원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주신 모든 것들을 감사하고 축하하자는 의미에서 생기게 되었는데, 그 근원은 천주교회가 원조이다. 이런 예배 형식을 좋아하는 목회자들과 신도들은 마땅히 우리가 드려야 하는 예배는 축제식의 즐거운 예배가 되어야 하고 축하하는 분위기 속에서 드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축제식 예배는 현대인들을 매료하고 있는 긍정적인 생활과 사고방식에 맞아 떨어지므로 더 기독교를 강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잠깐 생각해 보자. 과연 세속적인 리듬과 박자가 뒤섞인 신나는 음악이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들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 성도로 만드는가? 과연 그 축제식 예배 때문에 사람들이 더 영적으로 성장하는가? 그 흥겨운 노래가 사람들을 교회 안에 머물도록 하고, 그들을 진정한 알곡의 신자로 만드는가? 그 예배가 진정으로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게 하며 성화시키는가?

2) 축제식 예배 음악의 실상
감정을 자극하는 낭만주의적인 분위기의 노래들을 교회 안으로 불러들여 연주하여 사람들의 감각을 혼란시키는 축제 예배는, 성령의 조용하고 엄숙한 임재 대신에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음악으로 사람들의 감정을 취하게 하여 신자들의 정서를 기만하기 쉽다. 이러한 종교적 연예오락이 기독교를 온통 타락시켰기 때문에, 수백만의 사람들은 그것이 영적인 퇴락의 징조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저 흥겨운 예배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요즈음의 교회에서 불리는 복음 성가 중에 많은 노래들은 성령의 감화보다는 낭만적인 분위기가 더욱 더 지배적인 것들이다. 과거에는 나이트클럽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댄스 리듬이 소위 복음 성가라고 불리는 곡들에 들어 있으며, 그런 노래의 곡이나 가사는 말초적인 신경과 욕망을 자극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노래 속에서 그리스도를 마치 사랑하는 연인처럼 모신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그분에게 나타내는 친밀감은 그분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듯한 부적절한 경우가 많으며, 또 그것은 그분을 숭모하는 성도의 경건한 친밀감이 아니라, 너무 인간적인 연인의 무례한 친밀감을 표시한 듯 한 인상을 준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또 하나의 오락이 되어 버렸다. 이제 더 이상 기독교의 능력은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죄의 깨달음과 회개와 경건한 슬픔은 거의 없어져 버렸다. 요즈음 기독교의 교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보다 자신과 육신의 행복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참된 신앙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행복감을 얻지 못할 경우, 다른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행복해지려고 매우 애를 쓴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종교적 크리스천 로큰롤(rock-and-roll)을 즐기는 것이다. 그리고 감정에 호소하고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리듬과 화음과 곡조로 된 복음 성가들을 부르는 것이다.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이 무용음악에 쓰이는 그 많은 타악기들과 드럼과 전자 기타들과 쇼와 영화에서나 사용됨 직한 도구들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부추겨 축하해 주고, 분위기를 북돋으려고 애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주님이 주시는 참된 신앙의 기쁨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주님께서 임재하시는 평안과 기쁨으로 넘치는 사람은 다른 자극적인 것은 찾지 않는 법이다. 쾌활하고 자신감에 차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와는 그다지 닮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은 축제의 종을 울리는 일을 좋아하고 마치 게임 쇼의 진행자처럼 활력이 넘친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산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육신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 같다.

지금까지 기독교의 예배의 질은 점점 쇠퇴의 길을 걸어온 반면, 즐거움을 얻기 위한 종교적 연예오락은 계속 번성해 왔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속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애쓴다. 기쁨이 없고 메말라 있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보다 세상의 오락거리에서 기쁨의 단물을 짜내려고 애를 쓴다. 그들이 아는 유일한 종교적인 기쁨이란 복음 성가를 대중가요처럼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종교적 쇼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종교적 쇼의 진행자들이 성소로 들어갈 때 그들은 여호와께 이상한 불을 드리는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그것은 기도와 성령님의 감동을 대신하려는 가련한 시도에 불과하다. 그들의 그런 예배 방식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육신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애쓰는 것으로 비쳐진다.

3) 윙윙(Wingwing) 어린이 축제 예배
요즈음은 어린이들을 위한 효과적인 전도의 일환으로 윙윙 어린이 축제 예배 형식이 교회 어린이부마다 도입되고 있다. 이 예배를 선호하여 도입하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윙윙 어린이 축제 예배는 즐거움과 영성이 함께 조화되어 있는 예배이며, 어린이의문화에 맞게 꾸며진 예배 형식이라고 환영하고 있다. 이 예배는 예배 전 프로그램과 예배 프로그램과 예배 후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는데, 예배 전 프로그램에는 율동과 윙윙 파워댄스와 게임, 캐릭터 등이 총동원되어 있다. 예배는 즐거운 찬양 율동과 게임을 통해서 어린이들의 움직이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예배이며, 종합 예술이 동원되어 어린이들이 조금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으며, 매주 새로운 아이들이 전도되어 올 수 있는 놀라운 예배라는 주장 아래 매우 각광을 받고 있다. 
물론 이런 예배를 현대의 매스 미디어에 익숙해 있는 어린이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일환으로 사용한다는 취지는 좋다. 그러나 엄숙하고 경건하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드리며,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그리고 자신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므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조용하고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법을 배워야 하는 어린 시기에, 교회인지 오락장인지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흥분시키는 분위기 속에서 드려지는 소란한 춤과 예배는 아이들의 영성 교육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것이다.

아이들은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엄숙하고 경건해야 하며, 동시에 얼마나 특권이고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고 꼴 지워짐을 받는 것, 어린 나이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여 자신의 욕심대로 행하지 않고 더 예수님의 뜻대로 살며, 남을 사랑하고 돌보는 정신과 태도를 배우는 것은, 하나님께 경배한다기보다 자신을 즐겁게 하고 충족감을 주는 소란한 축제식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진정한 영성 교육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이다.

4) 교회 안에 들어 온 연예오락
오늘날에는 연예성 오락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교회 안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세기 동안 교회는 온갖 형태의 세상적 연예오락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견지해 왔다. 왜냐하면 교회는 연예오락의 본질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지금  "연예오락" 이라는 큰 신(神)을 이길 수 없게 된 듯이 보인다. 그 결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세상적 연예오락을 제공하는 데 많은 돈을 쏟아 붓는 희한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기독교적 연예오락이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일들을 몰아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여러 교회에서 급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다.
연예오락이라는 큰 신이 그의 추종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방법은, 주로 그들에게 노래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본래 어린아이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놀이와 이야기를 좋아하는 성향" 이 오늘날 "성장이 더딘 교인" 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성숙한 신앙에 이르지 못한 기독교인들이 자꾸 기독교가 재미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상한 방법들을 도입하여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오락성 있는 예배 형식의 도입을 받아들이는 현대 복음주의 교회의 병폐는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의 성도들이 소중히 여겼던 하나님과의 관계, 진정한 예배와 경건의 훈련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런 것은 너무 진부하고 느리다. 그들은 화려한 매력과 빠른 극적인 활동, 시대에 맞는 흥미 있는 예배 형식과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음악과 활동을 원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로 자기 내면의 깊은 영적인 공허를 메우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피상적인 신앙의 비극적인 결과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깊이 없는 사랑, 속 빈 신앙관, 재미에 치우치는 신앙 집회, 예배에 들여온 세속적인 음악, 축제식 예배 형태,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 종교적인 형식에 의지하려는 태도, 동호회 모임과 같은 친교 활동, 인간의 열정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착각하는 오해, 이런 것들이 바로 그런 비극적 결과들이다.

신앙: 2부 - 교회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습니다

왜 현대의 기독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축제식 예배를 선호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축제식 예배를 선호하는 이유
1. 거듭남 없이 거짓 평안과 환희를 느끼게 한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거듭남에 대한 가르침이나 설교를 듣는 것은 매우 드물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거듭남이란 아주 생소한 주제가 되어 가고 있다. 하나님의 성령께 굴복하고, 회개하여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친하며,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부른다. 과거에 자신의 마음대로 살던 모든 생활을 청산하고, 이제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개혁하고 새로운 생활을 사는 일이 거듭난 사람의 생애에는 나타나게 된다.

거듭난 사람은 점점 영적으로 자라나 장성한 분량의 믿음을 갖게 되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고 성화되어 하늘에 넉넉히 들어갈 성품을 은혜로 얻게 되는 것이다. 거듭남을 경험하고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가 늘 충만한 사람은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넘치게 된다. 비록 주위에 어려운 시련과 고통이 둘러싸여 있고, 때때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신의 부족 때문에 눈물로 더 깊은 회개를 하는 일이 있지만, 거듭난 사람의 마음속에 역사하는 항구적인 평안은 세상의 어떤 것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화평으로 덧입혀 있다.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고 진정으로 거듭나는 경험을 하지 못한 신자들은 마음에 허전함을 느낀다. 신앙 생활을 해도 기쁨이 없고 늘 공허한 느낌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그들의 공허한 마음을 무엇인가로 채우기를 원하며, 그들에게 결핍되어 있는 평안과 기쁨과 환희를 경험하기 원한다.

축제식 예배의 음악들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허전한 마음을 채우기에 안성맞춤이다. 복음 성가의 어떤 것들은 매우 낭만적이고 부드러운 멜로디에 비록 예수님에 대하여 쓰여졌다고 하지만 보통 연인들을 그리며 부를 만한 가사들이 섞여 있다. 또한 그런 멜로디에 곁들여지는 댄스 리듬같은 박자나 쿵작거리는 빠른 템포의 노래들은 말초적인 감정에 호소를 하게 되어 지적이거나 이성적인 면을 흐리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또 세상을 버린 경험이 없는 대부분의 신자들은 한바탕 신나게 축제식 찬양 예배를 드리고나면 속이 후련해지는 것을 느끼고, 가슴이 뿌듯해지고 마치 성령 충만함을 받은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더구나 용서와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한 복음 성가의 내용들은 양심의 소리를 잠재워 주고, 은혜로 다 구원을 얻는다는 자유주의적인 신신학의 가르침과 맞아 떨어지므로 세상의 걱정이나 스트레스를 잊어버리고 흥겹게 찬양 예배를 드리고 나면 거짓 평안과 환희를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변화나 개혁의 요구 없이 값싸게 믿을 수 있는 감정적인 신앙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신을 부인하고 세상을 버리고 좁은 길을 걷는 대신, 세상과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가지고 넓은 길을 가기를 원하며,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거듭남의 길을 원하지 않는다. 이런 성향이 축제식 예배를 선호하게 만드는 것이다.

2. 세상과의 구별을 없애주고 신앙의 독특성을 무마시켜준다
세상과 호흡을 함께 하기를 원하는 피상적인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종교 생활이 세상과 독특하게 구별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대표할 만한 거룩하고 독특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옷 입는 것, 말하는 것, 듣는 것, 음악과 노래하는 것, 그리고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경건하고 단정하고 존절하기를 원하신다.  축제식 예배에 사용되어지는 음악과 노래는 전도에 효과적이라는 명제하에 매우 세속적인 것으로 채워져 있다. 요즈음 교회에서 사용되는 음악은 세상의 음악과 별 차이가 없을 만큼 대중화 되어 있다.

특별히 축제식 예배에서 사용되는 음악은 세속적인 유행가의 리듬이나 가사나 멜로디와 너무 흡사하여 예배 음악인지 세상적인 쇼의 음악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축제식 예배 음악은, 세상과의 구별이나 독특함을 원하지 않는 뜨뜻미지근한 신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는 일이 세상과 별 구분이 없기 때문에 부담이 없어진 이들에게 이런 예배는 선호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3. 거짓 성령 운동과 함께 간다
요즈음 기독교에서 가장 인기를 끄는 것이 있다면 성령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 심지어 한국까지도 기적과 이적을 일으키는 소위 성령의 역사 운동이 활개를 치고 있다. 현대 기독교는 전에 없었던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들은 깊은 신앙이 가져다 주는 마음의 변화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시, 곧 기적과 치유의 은사나 이적을 행하는 것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성령의 역사라고 여겨지는 방언, 병 고치는 이적과 기적들, 예언하는 것 등등, 눈에 보이는 초자연적인 현상들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위험하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위에 확고하게 세워져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가져오는 능력으로 회개하고 변화되고 성화되는 것이 신앙의 참 목적인 것이다. 보통 말씀에 대한 깊은 연구나 지식이나 확신이 없이 무조건적이고 광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거짓 성령 운동에 잘 빠져든다. 그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과 초자연적인 현상에만 집착하여 그것을 참된 성령의 역사라고 믿는다.  그런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말씀을깊이 연구하고 깊은 영적 경험을 하는 대신,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것과 같은 흥분적이고 광적인 것에 몰두하며, 이를 성령의 역사라고 열광하며 따른다. 그러나 진짜 성령의 역사는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이적이 아니다.

진정한 성령의 역사는 사람의 마음을 개심시키고 거듭나게 하며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다. 그런데, 이렇게 눈에 보이는 현시에만 중요한 포커스를 맞추는 거짓 성령 운동에는 반드시 이성을 흐리게 하고 감정에 호소하는 음악이 따른다. 음향 시설을 통해 흘러나오는 쿵작거리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 복음 성가를 리드하는 찬양팀의 현란한 노래와 몸짓과 춤에 맞추어 손을 흔들며 박수를 치며 복음 성가를 부르는 축제식 예배는 항상 거짓 성령 운동에는 함께 수반되는 것이다.

현란한 음악과 조명, 외쳐대는 군중들의 통성 기도 소리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주변의 환경에 동화되어 흥분과 열정의 도가니로 빠져든다. 그리고 마치 성령을 받은 듯, 신앙이 열렬해졌다는 도취감 속에서 만족을 느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전의 생활과 다를 바 없이 똑같이 화를 잘 내고, 욕심이 그대로 살아 있고, 남을 미워하고 질투하는, 변화없는 생활을 연속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축제식 음악과 춤과 율동은 감정적인 흥분을 가져올 뿐, 진정한 개심으로 사람을 이끄는 진짜 성령의 역사를 가져오지 못한다.

4. 순종함 없이도 훌륭한 예배를 드렸다는 거짓 만족감을 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여 모든 죄를 회개하고, 알고 있는 모든 죄를 버리며,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매일 죄를 이기고 자아를 복종시키며,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열매 맺는 생애를 산다.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그냥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를 다 덮어주시고 구원해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매일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며, 세상을 이기며,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하고 예수님의 임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순종의 열매가 따르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육신을 따라 마음대로 살 때, 또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굴복된 심령으로 살지 않을 때, 그 마음에는 항구적인 평안이 없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느낌으로 마음이 공허하고 불안하며, 평안한 행복감과 충족감을 느끼기가 어렵다.  이런 신자들에게 축제 예배는 거짓 평안을 주기에 꼭 알맞다.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음악들과 한바탕 마음을 풀어낼 수 있는 분위기로 둘러 싸인, 또 하나님의 값싸고 무조건적인 은혜와 사랑만을 강조하는, 그리고 우리를 무조건 은혜로 모두 구원하시는 주님을 축하하고 찬양하자는 축제 예배는, 자신의 온전한 굴복 없이도, 순종의 열매를 맺지 않아도, 감정적이고 감동적인 열렬한 예배를 훌륭하게 하나님께 드렸다는 거짓 평안과 기만에 빠지게 한다. 그 훌륭하고(?) 감동적인 축제식 예배를 드리면,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굴복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시는 양심의 소리를 순종하지 않아도 열렬한 신자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쇠퇴해 가는 예배의 질과 기독교 신앙
오늘날은 경건한 예배를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많은 영적인 지도자들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며 또 신도들에게 가르쳐주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참 신앙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요란스러운 예배를 드리고 먹고 마시는 행사를 치러야만 행복을 느끼는 체질로 변하고 말았다.  영적인 사람들은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종교 프로젝트에 빠지지 않는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영화관 다음으로 연예오락성이 강한 장소를 찾으라면 교회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오늘날 아주 많은 교회 건물과 종교 기관의 건물들이 크게 건축되고 있다. 그리고 교회 신자의 증가율이 인구 증가율을 앞지른다. 갖가지 종교가 사회의 각계각층과 각 연령층의 사람들 중에서 개종자를 얻으려고 애쓴다. 특히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을 개종시키려고 열성이다.  그래서 예배 방법이 하나님께 가납될 만한 영적인 것인지 아닌지 생각하지 않은 채, 더 많은 교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세상적인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복음주의적 교회에서는 교인들에게(특히 젊은이들에게) 진지한 교육 프로그램은 최대한 적게 제공하고 연예오락을 최대한 많이 공급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오직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며 그분을 사모하는 모임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은 이제 거의 불가능해졌다.

우리의 신조는 정통에서 이탈한 이상한 것이 되어버렸고, 우리의 신앙 관습은 세속적인 것에 빠졌다. 축제식 예배나 세속적인 연예 방식의 종교집회들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 사람들은 말한다. 그래도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이끌면 되지 않느냐?라고. 그런데 정말 그런 방식들이 하나님의 참 제자의 길로 사람들을 이끌기에 충분한 것인가? 십자가를 지는 자기부정의 삶,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고,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생활과 성품으로 그들을 이끄는가?  흥분적이고 재미있는 오락성 예배로 길들여진 사람들은 경건하고 엄숙하고 진실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된 예배 방식을 좋아하지 않게 되어있다. 그것이 축제식 예배의 문제인 것이다.

신앙: 3부 -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1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13-24). 예수님께서 예배에 대하여 언급하신 이 말씀은,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장면에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신령과 진정으로드려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영어 성경에서 이 단어들을 보면, in spirit and in truth으로 되어 있는데, 이 구절의 직접적인 뜻은 성령 안에서 진리로예배 드리라는 것이다.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어떤 예배인가? 하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영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신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예배는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 즉 올바른 가르침과 말씀, 그리고 복음 위에 기초되어 드리는 예배를 받으신다. 참 예배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함께 공부해 보기로 하자.

회개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일찌기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알았다. 그는 시편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신다. 다윗은 그의 시에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자각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부족과 허물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진정으로 통회하고 자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심령을 어여삐 여기시며,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신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이야기 중에 두 예배자의 비유를 연구하여 보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에 우리 인간들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하여 알게 된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눅 18:10). 한번은 성전에 두 사람이 예배드리러 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너무 다른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갔다. 그리고 그 중 한 사람의 예배는 하나님께 가납을 받았고, 다른 한 사람의 예배는 하나님께 가납하심을 받지 못했다.

1. 바리새인의 예배
바리새인이 예배하러 성전에 올라간 것은, 자기가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칭찬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기의 예배가 자신을 하나님께 칭찬받을 사람으로 추천하는 행위로 생각하는 동시에 사람들로 자기의 신앙을 우러러보게 하려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의 은총을 받고 싶어했다. 그의 예배 행위는 이기심에서 발단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자기를 칭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다. 그의 태도, 그의 행동, 그의 기도가 그러하였다. 그는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사 65:5) 하는 태도로 다른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따로 서서 기도하였다. 그는 자기만족에 도취되어 하나님도 사람도 다 같이 자기를 보고 틀림없이 만족해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기의 품성을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에 비추어 판단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품성에 견주어 판단하였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 사람에게로 향했다. 이것이 그가 자기만족에 빠진 원인이다.

그는 자기의 착한 행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 바리새인의 신앙은 그의 심령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는 경건한 품성, 즉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마음을 구하려고 하지 않고 외적 생애로 나타내는 신앙만으로 만족하였다. 그의 의는 자기 자신의 것, 즉 자신의 행실의 열매요, 사람의 표준으로 정한 의에 지나지 않았다.  바리새인이 다른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 자기 자신을 평가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평가했다. 그의 의도 다른 사람의 의를 기준으로 해서 평가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가 낮을수록 그만큼 자기 자신은 더욱 의롭게 보였던 것이다. 그의 스스로 의롭다는 생각이 남을 비난하게 만들었다. 그는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자라고 비난하였다. 이로써 그는 형제를 참소하는 사단의 정신을 나타냈다.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서는 결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배를 가납하지 않으셨고, 그는 하나님의 아무런 축복도 받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2. 세리의 예배
세리도 다른 예배자들과 같이 성전에 올라갔으나 즉시 자기 자신이 그들과 함께 예배드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들로부터 좀 떨어져서 예배를 드렸다. 세리는 멀리 서서 극심한 고민과 자책을 느끼면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하였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고, 자기 자신이 죄 많고 누추한 인간임을 깊이 느꼈다.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멸시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어떠한 동정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만한 아무런 공로도 없음을 알고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하고 외쳤다.  그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기의 죄에 대한 자각에 압도되어 홀로 하나님 앞에 섰다. 그의 유일한 소원은 죄 사함을 받고 마음에 화평을 얻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그의 유일한 간구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영적인 필요를 느끼고 우리의 궁핍과 죄를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실 수 있는 첫째 조건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세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은 것은 그 기도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붙잡으려는 의뢰심을 보여 준 까닭이었다. 세리의 생각에는 자기 자신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수치스러운 존재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완전히 낮추었다. 그리하여 그는 축복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찾고 또 하나님께 예배드리려는 모든 사람들도 이러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손히 낮추며,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간구하는 사람, 자신의 죄됨을 절실하게 느끼고 예수님의 의만을 간절하게 붙잡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참 예배를 드릴 수 있다.

3. 회개와 구원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기업인 당신의 백성을 다시 사셔서 그들에게 한 번 더 선발의 기회를 갖도록 하기 위하여 당신의 찔린 몸을 바치셨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흠 없는 생애와 순종과 갈바리의 십자가 상에서의 죽으심을 통해서 잃어버린 인류를 위하여 간구하셨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구원의 주께서는 단지 탄원자로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승리를 주장하시는 승리자로서 간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중보자로서 사업을 수행하고 계신다. 즉 당신의 백성들의 기도와, 고백과, 감사의 향연에 당신의 흠 없는 공로를 섞어서 하나님 앞에 올리신다. 이것들은 그분의 의로 말미암아 좋은 향기가 되어 하나님 앞에 올라가게 된다. 이 제물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받으실 만한 것이 되어 그분의 용서가 모든 범죄를 덮어주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대속자와 보증인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그는 어느 누구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신다. 인류가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된 것을 보시고 그냥 계실 수가 없어서 그들을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버리셨다. 그분은 떨면서 간구하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신다. 그분은 자신의 속죄를 통하여 선을 행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사람을 위해 예비하셨으므로 그 능력을 우리를 위해 사용하지 않으실 리가 없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와 슬픔을 그분의 발 앞에 놓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는 예수님의 중보를 통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으며, 경배와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중보가 우리에게 효력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하고,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통회하지 않으면 용서와 화평을 얻을 수 없다. 바리새인은 죄에 대한 자책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그에게 역사하실 수 없었고, 그의 예배와 경배는 참된 것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만을 구원하실 수 있다. 그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눅 4:18) 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러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눅 5:31)다.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상태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자기의 허물을 스스로 깨달을 수 없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

마음에 없는 겸손을 입술로 나타낼 수 있다. 하나님께 심령이 가난하다고 말하는 중에도 마음속에는 자기의 의를 자랑하고 겸손의 덕이 풍부하다는 자만심으로 가득 찰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진정한 상태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의 의를 그처럼 높이는 까닭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분의 순결하심과 탁월하심을 깊이 생각할 때에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가난함과 결점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다른 모든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의롭다는 두루마기를 입고 있으며 아무 소망도 없이 잃어버린 바 된 자들임을 보게 될 것이다.

자아를 포기하는 일은 그리스도인 생애를 처음 시작할 때에만 할 것이 아니라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마다 거듭되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찾는 일과 끊임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죄를 통회하고 자복하는 일과 하나님 앞에서 심령을 낮추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경험 가운데서 전진하는 발걸음마다 우리의 회개는 더욱 깊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진정으로 회개하는 심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신다.

신앙: 4부 -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2

거듭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이 말씀은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에는 위대한 진리가 선언되어 있다.  거룩한 산이나 성전을 찾음으로써만이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배는 외형적인 형식과 의식에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예배는, 바로 거듭난 사람들이 어디에 있든지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이다.  그들의 이름이 교회 녹명책에 등록되어 있고, 교인 명부에 기록되어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주님께 마음을 다 바친 적이 없고, 주님과 산 관계를 맺지 않고 있으며, 영적으로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교인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실상은 다른 주인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나누인 마음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참 예배를 드릴 수 없다. 표면상으로 교회에 나와 몸이 예배 시간에 참석하여 앉아있다 하더라도, 마음을 모두 온전하게 하나님께 바치지 않았으므로 그 사람은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은 실재로 존재하는 분이시며, 성경은 신뢰할 만한 책이라고 믿는 것만으로는 넉넉하지 않다. 우리가 천하 인간에 오직 예수의 이름만이 사람들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이름으로 믿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분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진리의 이론만을 믿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것,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우리 이름이 교회 녹명책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넉넉지 않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이것이 참된 거듭남의 증거이다. 우리가 어떠한 공언을 하든 간에 우리의 옳은 행실로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않을 것 같으면 그 공언은 아무 소용이 없다.  의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행위로써 심판을 받는다. 우리의 품성은 우리의 행위로 나타난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믿음이 진실된 여부를 보여 준다. 진리가 마음속에 심어져야 한다. 진리가 마음을 지배하고 애정을 통제해야 한다. 우리의 온 품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쳐져야 한다. 육신은 죽고 의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임재하셔서 모든 것을 통제하셔야 한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의 생애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사람들, 곧 온 마음과 몸을 하나님께 바친 사람, 자아가 죽고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로 충만한 사람들의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신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종교가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종교이다.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의 마음이 정결하게 되고, 정신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에 대하여 더 깊이 알게 되며, 그때에 참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요구에 즐거이 순종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곧 참된 경배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역사하신 열매이다. 어디서나 영혼이 하나님을 구하는 곳에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며, 하나님께서 그 영혼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경배자들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받아들여 당신의 아들과 딸로 삼으시기 위하여 기다리고 계신다.

죄에 대한 승리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사람이 매일 반복하여 똑같은 죄를 지으면서, 그리고 진정으로 죄를 미워하고 포기하는 마음이 없이, 또 완전히 자신이 죽는 경험이 없이, 변화되지 않은 똑같은 생활을 살면서, 그리고 그냥 은혜로 죄를 다 덮어주시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기만 아래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슬퍼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죄를 승리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승리의 생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때에, 우리의 마음과 삶이 함께 어우러져 드리는 참된 예배가 되므로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 예배가 된다.  복음은 우리에게 능력이 되어 죄를 승리하게 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16-18).

칭의와 성화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을 때, 우리는 다시는 죄를 짓고 싶지 않은, 죄를 미워하는 새 마음까지 함께 받는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에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 수 있는 능력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창에 찔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범하면서도 그분의 은총을 계속해서 누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죽게 한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과 공로를 굳게 붙들고 죄 짓기를 중단해야만 한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을 매일 똑같이 십자가에 못 박을 수는 없다.  우리가 죄를 진정으로 회개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용서를 통하여 의롭다는 칭함, 즉 칭의를 받는다. 그런데,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 때에 성화의 역사가 함께 시작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하여야 한다. 칭의는 한순간의 역사이고, 성화는 일생 동안에 일어나는 역사이지만, 그것은 반드시 칭의와 함께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성화란 무엇인가? 성화란 칭의를 계속 지속시키는 것, 즉 매일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따라 살아가며, 영적으로 성장해가는 것을 말한다. 성화는 매 순간 자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남김없이 완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그것은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온전한 굴복을 말한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 속에 계시는 성령에 의해서 날마다 새로운 침례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한 번 거듭난 후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의지를 계속적으로 굴복시켜야 하며 말씀대로 매일 살아야 한다.  우리가 성화되는 것은, 즉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되는 것은, 복음과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는, 진리를 무조건적이고 온 마음을 다하여 받아들이는 일과, 하늘의 변화시키는 능력에 영혼을 남김없이 굴복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주님의 법도를 지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람의 행실이 그가 고백하는 신앙과 일치하지 않을 때,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 증거이다. 야고보는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약 2:22)고 말하였다.

기쁨과 찬송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선하심과 권능에 대하여 말하고 감사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찬송과 감사의 표현으로 영광을 받으신다. 그분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시 50:23)라고 말씀하셨다.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찬송과 감사는 향기처럼 하나님께 올라갈 것이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경배할 때, 매일의 생활에서 주님의 능력과 은혜의 도우심으로 죄를 승리하고 극복한 것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의 온 생애가 찬송의 생애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함으로 그의 도를 땅 위에 알(시 67:2)려지게 하고 그의 구원을 만방 중에서 알리려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이 마련하신 구원의 큰 경륜의 가치와 구속하시는 은혜와 능력을 인식하고, 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고상한 특권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순종하는 생애를 살게 되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하루하루 기쁨에 넘친 새로운 생애로 당신을 섬기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고 우리를 돌보시는 그분에게 우리의 모든 염려를 맡겼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속에서 복받쳐 오르는 감사의 표정을 보고자 하신다.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 감사가 우러나오는 찬양과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한다. 우리는 이 세상과 하늘에 있는 모든 천사들에게 우리가 타락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기이한 사랑을 감사히 여기며, 동시에 그분의 다함이 없는 충만하심에서 더욱 큰 축복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겪은 경험 중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던 귀중한 사건들에 대해,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주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위하여 베푸신 인자하심과 기이하신 역사에 대하여 간증하고 감사하고 찬양을 드림으로써, 우리의 예배는 더욱 성령의 감동하심이 충만한 예배가 될 것이다.

신앙: 5부 - 어떻게 예배드리고 계십니까?

1.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1). 

하나님을 사모하고 받아들이는 영적 수용성도 없고, 그분을 갈망하지도 않고, 성결을 사모하지도 않고,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내면의 굶주림도 없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이 아무리 기술적으로 탁월하다 해도, 그 마음과 태도와 방법이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예배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진정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진정으로 당신을 사모하고, 마음 깊이에서부터 그분을 사랑하며, 모든 것을 다 바쳐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열렬히 사모하는 진정한 예배자입니까? 아니면, 마음이 아닌 겉으로만의 찬양을 부르는 거짓 예배자입니까? 당신이 드리는 예배는 참 예배입니까?

2. 경건한 마음으로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 2:20).

우리는 하나님의 집 성전에서 취해야 할 태도와 행동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신성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성소에 나갈 때에 가졌던 숭경심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성전에서는 경건하고 존절한 태도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조용하게 걷고, 너무 큰 소리로 인사를 한다든가, 예배 시간에 속삭이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성도들이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려야 할 바로 그 집회에서 아이들이 성전 주위를 뛰어다니고, 장난하고, 시끄럽게 하도록 용납합니다. 그리하여 거룩하여야 하고, 거룩한 고요가 지배하여야 하며, 완전한 질서와 우아함, 겸손이 있어야 할 장소가 혼란스러운 곳이 되고 맙니다. 경건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성전에서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하여 잘 교육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만나시는 장소입니다. 영원하시고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며, 우리 생애의 가장 은밀한 생각과 행동을 꿰뚫어 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경건한 태도와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것입니다.

3. 기도할 때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서는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모세에게 명하시기를, 이리로 가까이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하나님을 만나는 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위대한 사랑의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가능하면 무릎을 꿇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최대한의 존경심으로 드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에 무릎을 꿇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최대의 존경심을 나타내는 것이며, 부족하고 허물 많은 우리 자신들을 하나님 앞에 낮추는 태도입니다.

4. 찬송을 부를 때는 마음과 힘을 다하여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욥 38:7).

찬송은 노래로 하는 기도입니다. 예배 행사의 일부로서 찬송을 부르는 것은 기도를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배의 행위인 것입니다. 찬송을 부를 때는 가사의 의미를 더욱 깊이 생각하고, 그 내용에 담긴 힘으로 감동을 받으며, 마음과 힘을 다하여 큰 소리로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과 보호하심과 위로를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와 찬송을 나타내야 합니다. 찬양의 선율은 하늘의 분위기를 맛보게 합니다. 하늘이 땅과 접촉할 때, 음악과 노래,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사 51:3) 생깁니다. 하늘과 공감하는 사람의 마음은 찬미의 곡조로 하나님의 선하심에 응답합니다. 노래는 영적 진리로 마음을 감동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찬양은 사단이 던지는 어두운 그늘을 몰아내는 데 효과적이며, 절망과 어두운 감정을 가져가고, 죄의 유혹이 힘을 잃게 하며, 우리의 삶에 활력을 주고, 하나님의 은혜의 감동의 물결로 우리 마음을 충만하게 합니다. 진정으로 부르는 찬양의 소리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노래의 역사는, 노래나 음악이 얼마나 유용하고 유익한 것인지에 대하여 알려줍니다. 음악은 때때로 악용되어 악한 목적에 사용되고 그리하여 사람을 유혹하는 데 가장 유력한 것이 되기도 하지만, 음악이 바르게 사용되는 때에는 사람의 마음을 고상한 차원으로 높이고, 심령에 영감을 일으키고, 향상시키는 하나님의 귀하신 선물이 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여행하는 중에 거룩한 노래로 격려함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도 인생의 나그넷길을 찬양하며 즐겁게 가라고 하십니다. 예배 시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매일의 삶이 찬양의 삶이 되도록 합시다!

5.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
모든 가정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의 아름다운 상징인 지상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교회와 세상에서도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가정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각 가정마다 기도의 제단을 쌓고 매일 조석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한 일과가 되어야 합니다. 옛날의 믿음의 조상들처럼,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은 어느 곳으로 가서 천막을 치든지 주님께 드리는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부모들은 자신과 자녀들을 위하여, 겸손한 탄원으로 마음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아버지는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조석으로 하나님의 제단에 제사를 드리고, 아내와 자녀들은 기도와 찬미로 연합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름다운 예배를 드리는 가정에 머무르기를 좋아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상에 있는 그분의 백성들의 가족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천사들은 기도하는 성도들을 위하여 향을 드립니다. 모든 가정마다 신선한 아침과 일몰 시간에 하늘에 기도를 올려 보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자신들의 사무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하나님의 제단 주위에 가족들을 모으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불러 모우고 죄의 유혹과 위험에서 하루를 보호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가족 예배와 기도의 시간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등한히 하지 말고, 너무 늦게까지 놀거나 사무를 봄으로 기도의 시간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래야 우리는 온전한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기도를 드리고 또 소리내어 기쁨과 감사의 찬송을 부를 때, 그 가정은 지상의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성화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부모들은 가정 교회에서 교육자가 될 수 있고 영적인 선교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가정의 선교사가 되어, 가정의 분위기를 불친절하고 거친 악의 감화에서 떠나게 하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즐겨 머물 수 있는 행복하고 화목한 장소가 되도록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생활 가운데서 그들의 신앙과 일치하는 언행일치의 삶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언행이 일치하며, 자제를 실천하는 신실한 삶을 부모가 먼저 살면서 부모들은 자녀들의 품성을 형성시킬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는 자녀들을 영적으로 잘 성장시킬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을 받은 자녀들은 훗날에 보다 높은 하늘 학교에 입학하여 하나님의 왕족의 일원, 곧 하늘 왕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을 것입니다. 모두 가정 예배에 충실합시다!

신앙: 6부 - 돌이키지 않는 이스라엘

아합의 시대에 요단강 동편 길르앗 산중에 신앙과 기도의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엘리야였다. 큰 도시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조용한 시골에서 단순하고 강직한 삶을 살고 있던 디셉 사람 엘리야는 경건하고 결단성 있는 믿음의 소유자였다.  그 당시 찾아보기 드문 경건한 신앙의 소유자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한 선지자로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다.

엘리야는 그 당시 우상 숭배에 깊이 빠져 들어가는 이스라엘을 바라볼 때에 마음이 고통스러웠고 의분이 일어났다. 옛적에 큰 일을 행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스러운 계획을 백성들은 거의 잊어버린 듯이 보였고, 한때 하나님의 선민이었던 그들은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 거짓 신 바알을 섬기고 있었다. 산중 은신처에서 이 배도를 바라본 엘리야는 슬픔을 억제할 수 없었다. 괴로운 마음으로 그는, 한때 은총을 받은 백성들의 악한 행위를 제지시키시고, 필요하다면 형벌을 내려서라도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떠난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하였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완전히 멸하실 정도로 악을 행하게 되기 전에 회개하는 것을 보기를 갈망하였다.

엘리야의 기도는 응답을 받았다. 여러 번 반복된 호소와 충고와 경고가 이스라엘을 회개시키는 데 실패했으므로,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형벌을 통해서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때가 이르렀다. 바알의 예배자들은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비가 여호와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자연을 지배하는 세력들에게서 오는 것이며, 땅을 비옥하게 하고 풍성한 수확을 가져오게 하는 것을 태양의 창조적인 힘을 통하여 온다고 주장했다. 배도한 이스라엘 지파들은 현세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바알의 능력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나타냈다.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모든 축복의 근원으로 인정하기까지는 땅에 이슬이나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었다.

엘리야의 기별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열왕기상 17:1). 놀란 아합이 정신을 가다듬고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기도 전에 엘리야는 기다리지도 않고 올 때처럼 돌연히 사라졌다. 왕은 부지런히 찾았으나 선지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늘에서 우로가 내리지 않으리라는 기별을 듣고 분노한 왕후 이세벨은 재난을 선포한 선지자를 찾으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죄악을 탄핵하고 신속히 다가올 형벌을 예언하였다는 소식은 빠르게 온 나라에 퍼졌다. 어떤 이들은 두려워하였으나 일반적으로 하늘의 기별은 조소와 조롱을 받았다.

선지자의 말은 즉시 효과를 나타냈다. 몇 달 후에 땅은 이슬이나 비를 받지 못하여 건조해지고 식물은 시들었다.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주신 기별은, 이세벨과 그의 사제들과 바알과 아스다롯의 모든 추종자들로 하여금 저희 신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 할 수 있으면 엘리야의 말이 진실인가 밝혀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백성들을 자기들의 속임수에 붙잡아 두기로 마음먹은 바알의 사제들은, 저희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면서 밤낮없이 땅을 다시 신선하게 해 주도록 계속 간청했다. 값진 제물을 드려 사제들은 저희 신들의 분노를 진정시키려 했다. 열심과 인내로 이교의 제단 주위에 둘러서서 비를 달라고 열렬히 기도하며 거짓 신을 예배하였다.  일 년이 지났으나 비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땅과 시내는 불에 탄 것처럼 바짝 말랐고, 양떼와 소떼들은 고통 중에 이리저리 방황하였다. 우상 예배를 위하여 구별된 숲은 잎이 다 떨어지고 삼림의 나무들은 말라빠진 자연의 해골처럼 그늘을 주지 못하였다. 공기는 건조하여 질식할 것 같았다.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그러나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교훈을 배우지 않았다. 마음이 거만하고 거짓 예배에 매혹된 이스라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수하에서 스스로 겸손하기를 원하지 않고 고통의 원인을 다른 데서 찾기 시작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대항하기로 굳게 결심한 이세벨은 거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과 연합하여 모든 참상의 원인이 엘리야에게 있다고 탄핵하였다. 엘리야가 저희 예배의 형태를 대적하는 증언을 하지 않았던가? 만일 엘리야가 그의 주장을 버린다면 저희 신들의 노여움은 진정되고 그들의 어려움은 끝날 것이라고 이세벨은 주장하였다. 왕후의 독촉을 받은 아합은 선지자의 숨은 곳을 찾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찾는 일은 허사였다.

기근이 든 지가 이 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무정한 하늘에는 비올 징조가 보이지 않았다. 가뭄과 기근으로 온 나라는 계속 황폐하였다. 그러나 배도한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저희 마음을 낮추기를 거절하고 이 무서운 형벌이 그들에게 이르러 온다고 말한 엘리야를 대적하여 불평하기를 계속하였다. 이스라엘의 배도는 겹친 모든 기근의 공포보다 더욱 무서운 악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잃어버린 신앙을 다시 회복하도록 도와주고자 하셨으며 이를 위해 그들에게 큰 고통을 주실 수밖에 없으셨다.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위한 구제책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을 끌어들인 죄악을 떠나 전심으로 주님께 돌아가는 것이었다.

신앙: 7부 - 두 예배

삼 년이 지나, 다시 아합 앞에 나타난 엘리야는 온 이스라엘을 갈멜산 위에 모이도록 해서, 자신과 바알과 아스다롯의 선지자들과 만나 대결하도록 요구하였다.

아합은 신속히 사자들을 온 나라에 보내어 바알과 아스다롯의 선지자들에게 엘리야를 만나러 오라고 소환하였다. 모든 성읍과 촌락에서는 백성들이 정한 시간에 모일 준비를 하였다. 정해진 장소를 향해 여행할 때에 많은 사람의 마음은 이상한 예감으로 가득 찼다. 어떤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모양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왜 갈멜산으로 모이라고 하겠는가? 또 어떤 새로운 재난을 이 백성과 이 나라에 내리려는 것일까?

갈멜산에서의 대결
예정된 날 아침 일찍부터, 배도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리를 지어 고조된 기대를 가지고 산꼭대기 가까이에 모여들었다. 이세벨의 선지자들은 당당한 행렬을 지어 행진해 올라왔다. 왕은 당당하고 화려한 행렬로 나타나 사제들 앞에 자리를 잡았고, 우상 숭배자들은 그를 큰 소리로 환영하였다. 그러나 사제들은 선지자의 말대로 이스라엘 땅에 삼 년 반 동안 우로가 내리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염려하였다. 저희가 신뢰하는 신들은 엘리야가 거짓 선지자라는 것을 입증할 수 없었다. 그들의 광란의 부르짖음, 그들의 기도, 그들의 눈물, 그들의 겸비, 그들의 매우 역겨운 의식과 끊임없이 드리는 값진 제물에 대하여 그들이 섬기는 신들은 이상하게도 무관심하였던 것이다.

아합 왕과 거짓 선지자들을 대해 마주 선, 모여든 이스라엘 군중에게 둘러싸인 엘리야는 여호와의 영광을 옹호하기 위하여 나타난 사람으로서 오직 혼자였다. 그러나 사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머리 위와 주위에는 보호하는 무리 곧 힘센 천사들이 있었던 것이었다. 선지자는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집행해야 할 자신의 사명을 충분히 인식하고 군중들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무서울 만큼 엄숙하게 빛나고 있었다. 엘리야는 먼저 허물어진 여호와의 제단을 바라본 다음에 군중들을 향하여 나팔 소리 같은 분명한 목소리로,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 18:21)고 외쳤다. 백성들 중 아무도 그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바알 선지자들의 예배
이스라엘 백성이 갈멜산 위에서 의혹을 품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엘리야의 음성이 침묵을 깨뜨렸다.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인이로다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을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을 놓지 말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왕상 18:22-24).

거짓 선지자들은 겉으로는 용감하고 담대해 보였으나, 그들의 간악한 마음속에는 공포심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겁나는 태도를 애써 감추려고 노력하며, 제단을 준비하고 그 위에 나무와 제물을 놓은 후, 그들의 예배에 사용하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고 저희 신의 이름을 부를 때에, 그들의 날카로운 부르짖음은 산림과 인근 산에 메아리치고 또 메아리쳤다. 사제들은 저희 제단 주위에 모여 서서 뛰고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르고 머리털을 뜯고 살을 베면서 저희 신에게 도움을 간청하였다.

아침이 지나고 정오가 되었으나 바알이 그의 추종자들의 부르짖음을 듣는다는 증거가 없었다. 아무런 음성도 없고 그들의 광란의 기도에 대한 응답도 없고 제물도 살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들이 격앙된 기도를 계속하고 있는 동안, 교활한 사제들은 제단에 불을 질러 백성들로 하여금 그 불이 바알에게서 온 것처럼 믿게 할 어떤 방법을 고안하려고 계속 노력하였다. 그러나 엘리야는 모든 동작을 철저히 감시하였고 사제들은 속일 수 있는 요행의 기회를 바라면서 그들의 무의미한 의식을 계속했다. 울부짖음으로 인해 목이 쉬고, 자해한 상처에서 흐르는 피로 옷이 더러워진 사제들은 마침내 자포자기하였다.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알의 선지자들은 피곤하고 지쳐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한 사람은 이렇게 하자고 제안하고 다른 사람은 저렇게 하자고 제안하다가 마침내 그들의 노력은 끝나고 말았다. 그들의 비명과 저주는 그 이상 갈멜산에 반향되지 않았다. 절망 중에 그들은 시합에서 물러났다.

백성들은 하루 종일 헛수고를 하고 있는 사제들의 하는 짓들을 목격하였다. 백성들은 마치 사제들이 저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불타는 광선을 움켜 집을 듯이 제단 주위에서 난폭하게 날뛰는 것을 바라보았다. 백성들은 사제들의 무시무시한 자학 행위를 공포심을 가지고 바라보았으며, 그로 인해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모인 무리 중에 많은 사람들은 거짓 이교의 신을 섬기며 하는 짓들에 지쳐서 이제 깊은 흥미를 가지고 엘리야의 거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야의 예배
저녁 제사를 드릴 시간이 되어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내게로 가까이 오라고 명하였다. 백성들이 떨면서 가까이 나아 왔을 때에, 엘리야는 한때 사람들이 하늘의 하나님을 예배하던 허물어진 제단으로 가서 그것을 보수하였다. 그에게는 이 폐허의 무더기가 모든 이교도의 장엄한 제단보다 더 소중하였다. 선지자의 침착한 행동은 바알의 추종자들의 열광적이고 무의미한 흥분과 현저한 대조를 이루었다. 제단을 다 쌓은 후 선지자는 그 주위에 도랑을 파고 나무를 차곡차곡 얹어 놓았다. 그 다음에 송아지를 준비하고 그것을 잡아 제단 위에 올려놓은 다음, 백성들에게 제물과 제단 위에 물을 부으라고 명하였다.

엘리야는 여호와의 분노를 격발시킨, 오래 계속된 배도를 상기시켜 백성들로 하여금 저희 마음을 겸손하게 하고, 저희 조상의 하나님께로 돌아옴으로 이스라엘 나라에 내린 저주가 물러가게 하도록 호소하였다. 그리고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 경건히 무릎을 꿇고 양손을 하늘을 향하여 든 다음 간단하게 기도를 드렸다. 바알의 사제들은 이른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비명을 지르고 거품을 내뿜으며 뛰놀았으나, 엘리야가 기도할 때에는 뜻도 없는 비명이 갈멜산을 울리지 않았다.  엘리야는 마치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고 그 광경을 목격하시고 그의 호소를 들으시는 것을 아는 것처럼 기도하였다. 바알의 선지자들은 거칠고 조리 없이 기도하였다. 엘리야는 간단하고 열렬하게 하나님께서 바알보다 위대하심을 보여주셔서 이스라엘로 당신께 돌아오도록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여 불로 내게 응답 하옵소서! 엘리야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번갯불의 빛나는 섬광과 같은 불꽃이 하늘로부터 쌓아 올린 제단 위에 내려와 제물을 사르고, 도랑의 물을 핥고 제단의 돌까지 태웠다. 타오르는 불길의 화광이 산을 비추고 군중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위에서 행해지는 일을 마음 졸이며 바라보고 있는 아래 골짜기에서도 불이 내려오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놀랐다. 그것은 홍해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군대로부터 분리시켰던 불기둥과 흡사하였다.

산 위의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 부복했다. 그들은 감히 하늘이 내린 불을 계속 바라볼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도 불에 삼키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엘리야의 하나님을 저희 조상의 하나님 곧 저들이 충성을 바쳐야 할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모두 이구동성으로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부르짖었다. 그 부르짖음은 아주 분명하게 온 산에 울려 퍼져서 산 밑의 평지에까지 메아리쳤다.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어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였다. 마침내 백성들은 저희가 얼마나 크게 하나님께 욕을 돌렸는지를 알았다. 그들은 바알 예배를 참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합리적인 예배와 비교해 봄으로 그 예배의 성격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백성들은 저희가 하나님의 이름을 인정하기까지 우로를 거두신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깨닫고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다.

참 예배와 거짓 예배
엄숙하고 경건하고 조용하고 감동적인 엘리야의 예배와 소란하고 흥분적이고 이성을 마비시키는 듯한 감정적인 바알의 예배는 현저한 대비가 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예배는 현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이 참 예배이고 무엇이 거짓 예배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알려주는 예가 된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마음과 태도와 방식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참 예배가 되든지, 아니면, 마치 바알 선지자들이 드렸던 이방신을 섬기던 것 같은 거짓 예배가 되든지 하는 것이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 예배는 경건하고 엄숙하고 조용한 가운데, 진정으로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는 심령으로, 또 하나님 앞에 온전히 자신을 낮추고, 바치며, 경배하는 가운데 드려야 한다. 예배는 성령 안에서, 올바른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방식으로 드려야 할 것이며, 진리 안에서 이성적으로, 복음이 가르치는 바에 맞게, 참되고 경건한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실 것이다.

참된 회개와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게 하는 성령의 역사하심 없이, 감정적인 흥분을 일으키는 음악과 함께 드리는, 스스로의 감정에 빠지게 만드는 현란한 축제식 예배 같은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지 못한다. 자신의 죄를 용서하심을 감사할 뿐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하며 드리는 경건하고 아름다운 찬양과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지만,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만을 주장하며, 자신의 뜻을 굴복하는 참된 회개 없이, 똑같이 반복하는 죄에 대한 불편함을 감정적인 음악과 분위기로 덮어버리는, 그리하여 거짓 안위와 평안을 조장하는 축제식 예배는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그런 예배 방식이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 모을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회개하고 거듭나게 하고 새 삶을 살게 만들지는 못한다.

어쩌면 지금 기독교는, 옛날 타락한 이스라엘의 바알을 섬기던 선지자들이 드렸던 것 같은 이방 예배 방식들을 답습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거짓 제단에 사단에게서 가져온 이상한 불을 붙이려고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축제식 예배는 이상하게도 바알 선지자들의 예배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 앞에 산 제사가 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