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편지: 신뢰에서 오는 행복

 
 
어느 한 화가가 여행을 갔다가 폭풍이 몰아치는 바닷가에 서서 파도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 한 마리가 옆의 높은 바위틈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화가가 자세히 살펴보았을 때 그는 높은 바위 틈 사이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를 발견했습니다. 무엇 보다 그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은 비바람이 부는 그 무섭고 험한 날씨에도 어미 새의 날개 아래서 평화롭게 잠자고 있는 어린 새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화가는 집으로 돌아온 후에 자기가 본 그 광경을 붓으로 묘사했습니다. 얼마 후에 그 그림은 그 나라 임금이 뽑은 최고의 그림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대인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상호간의 신뢰를 꼽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어진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뢰는 비단 인간관계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주위 상황이 어떠하든지에 관계없이 하나님 안에서 쉼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치 폭풍우 치는 날 높은 바위 틈, 어미 새의 날개 아래서 포근히 잠을 자는 어린 새들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시는 교훈
 성경에 나온 기도들 중에 참 아름다운 기도가 있습니다. 큰 전쟁에 나가기 전에 드려진 유다 왕 여호사밧의 기도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대하 20:12).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느끼고 어린아이처럼  오직 주만 바라보 는 여호사밧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큰 무리를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 20:15).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일을 우리가 하려고 얼마나 애쓰는지 모릅니다. 내 자신을 앞세우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실 기회를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 안에서 조용히 쉼으로써 얻어집니다.

 여호사밧 왕은 전쟁에 나가는 백성들에게 이 전쟁에서 꼭 이겨야 한다거나, 전쟁의 방법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대하 20:20).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맡길 뿐 아니라 그분의 뜻에 온전히 굴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자신이 무엇인가를 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나를 의지하고 나를 바라보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뢰할 때에, 그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시는 가장 큰 교훈입니다.

사랑의 결과
 여러분은 처음으로 만난 낯선 사람에게 여러분의 귀중품이 들어 있는 짐을 맡길 수 있습니까? 아니지요?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을 잘 몰라서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가진 모든 것 뿐 아니라 나의 생명까지도 내맡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절대로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뿐입니다. 그러므로 신뢰는 한 순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뢰는 오랜 사귐을 통해 이르러오는 자연스런 사랑의 결과입니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들은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 9:10).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그분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아갈 수록, 그분의 깊은 사랑을 경험할수록 우리의 신뢰는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그분과 긴밀히 교제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함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깊이 느끼게 되고 하나님을 더욱더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은 우리 삶에 가장 놀랍고 기쁜 경험이 될 것입니다.

신뢰할 때 할 수 있는 일
  하나님을 신뢰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우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믿고 나아가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12정탐꾼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모두 같은 날, 같은 곳에 가서 같은 것을 보고 왔습니다. 그러나 10명의 정탐꾼들의 보고와 갈렙과 여호수아의 보고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10명의 정탐꾼은 그들 자신을 신뢰하고 그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신뢰하는 것을 어서 빨리 그치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신뢰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생각지 않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이들 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분의 모든 명령에 기쁘게 순종하는 이들입니다.

신뢰에서 오는 행복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며, 나를 가장 잘 이해하시고, 나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조급하거나 안달하지 않습니다. 빌립보의 감옥 속에 갇혀 있던 바울과 실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아무 염려도 불평도 조급함도 없이 채찍에 맞아 아프고 차고에 채여 꼼짝 못하는 어두운 감옥에서 감사의 찬송을 불렀습니다. 적막을 깨고 들리는 그들의 평화로운 찬송소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세상이 앗아 갈수 없는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혹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조롱을 당하고, 억울하게 그들의 동기가 곡해를 당해도  하나님은 다 아시겠지 라고 생각하고 묵묵히 자기의 일에 충실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금은 당장 이해가 안 된다 해도 높으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인내로써 고난을 견디며,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버리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겸손하게 간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명예보다는 하나님의 명예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음과 생각과 삶속에 그들 자신은 없고 대신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는 자들, 그래서 하나님만 그들의 모습 속에 보이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이름이 없는 자들일지 모르고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해 감사하며, 하나님이 그들을 아신다는 사실을 인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신뢰함에서 오는 행복을 맛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신뢰함을 버리고 전적으로 그분만을 신뢰하는 이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신뢰하는 이들을 통해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생애의 빛에서

 

강병국 목사

 

흔히들, 예수를 믿으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고들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괴로움이 있거나 슬픈 사람들에게 주위에서 교회 나가보라고 권하는 일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참 평안과 쉼은 하나님 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라오는 길은 아주 괴롭고 힘든 길이니,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예 처음부터 포기하고 되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군인들이 전쟁을 하기 전에 적군의 세력을 먼저 살펴 본 후에, 만일 지겠으면 아예 미리 항복을 하는 것처럼, 집을 짓는 사람이 그 비용을 계산해 본 연후에 돈이 모자라거든 아예 시작부터 그만두는 것처럼, 너희도 나를 따르기 전에 너희가 어떠한 희생을 치러야 하는 지를 먼저 계산해 보고 난 후에, 안 되겠으면 아예 처음부터 고만두고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한 말씀을 남기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나는 평화를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불을 던지러 왔다고 말씀하시었습니다. 믿기로 결심하는 것은, 실상은 전쟁터로 나가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전투의 진영을 바꾸는 일이 되기 때문이지요. 내가 지금까지 살아 온 이전 생애의 습관들과 크게 충돌하게 되며, 더 나아가서 세상과 충돌하며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인을 따라가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승리의 면류관을 얻기 전에 먼저 십자가를 지는 일이 선재해야 합니다. 영생을 얻기 전에 죄와 자기의 욕심을 버려야 하는 일이 선재해야 합니다. 그러한 일은 우리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싶어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 속에서 드디어 참된 평안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번 호를 읽으시면서 여러분들은 진정으로 구원 얻은 사람의 삶이 무엇인지를 새삼스럽게 발견케 되실 것입니다.

가정과 영성: 내려놓아야 하는 이유

 
얼마 전에 한국에 있는 친구가 내려놓기란 책을 보내주었습니다. 오래간만에 발견한 참 좋은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읽은 감동을 글로 옮겨 보았습니다. 이 기사를 통하여 나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독자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편집실

내려놓을 수 있는 확실한 이유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마음에 주님 말씀만 하세요. 제가 듣고 순종하겠습니다라는 결단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 일단 말씀해 보세요. 먼저 들어보고 좋을 것 같으면 그대로 하구요. 제 생각이 더 나으면 그때 봐서 적당하게 절충하지요라는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달라고 구한다.
 우리가 인생의 백지 수표에 서명해서 그것을 주님께 드리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뜻을 듣고 분별하기 어렵다. 자신의 전 인생을 주님께 맡기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할 때,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 보다는 자기의 뜻을 더 높은 곳에 두게 되기 때문에 자기 기만에 빠져서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잘못 판단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당신의 뜻을 묻지 않는 이유는 그분으로부터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기꺼운 마음으로 순종하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 계획표를 백지인 채로 하나님께 넘겨드리기를 주저한다.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작성한 계획표를 보시고 결재해 주시기를 바란다. 마치 사장실 문 앞에서 결재 서류를 들고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는 직원처럼 말이다. 우리가 이렇게 인생의 계획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여쭈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실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러한 불신의 모습을 보면서 사단은 즉시로 접근하여 이렇게 속삭인다. 하나님께 인생전체를 걸면 너는 그때부터 망하는 거야. 인생의 재미도 끝이고 네가 하고 싶었던 모든 일로부터 너는 손 털어야 해. 지금까지 네가 하던 일을 다 내려놓고 어떻게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할 수 있어! 하나님께서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으라고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내려놓을 때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사단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붙잡고 있으라. 끌어 모으라고 유혹한다. 하나님께 내려놓은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겁을 주면서 후히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의심케 만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내려놓을 때 주어지는 가장 좋은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강이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이유
 예수께서는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은 단지 두 주인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금지의 법이 아니라 둘을 동시에 섬기는 것이 불가능함을 뜻한다. 우리가 세상과 하나님을 둘 다 누리고 싶어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잡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세상을 잡고 있는 것이다. 양쪽에 발을 걸쳐 놓으려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십자가가 아닌 세상을 택하게 된다.
 우리가 자신의 일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손에 움켜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는 과정에서 우리는 반드시 십자가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자아가 죽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과정 중에 꼭 거쳐야 할 단계이다. 붙들고 있던 세상을 내려놓을 때 드디어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 한 분만이 인생의 주인이 되심을 인정할 때 우리는 참 평안을 누리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행복
 현대인들은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다 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새벽에 일어나 몇 시간씩 기도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슨 대가를 치르고라도 하나님을 찾는다. 행복은 그들의 신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도구로 취급된다. 그러나 우리가 행복해지려는 열망과 행복해 질 수 있는 권리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지 않고서는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 우리가 자신의 권리로 여기던 무엇인가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진짜 행복을 얻었다는 증거이자 우리가 성장했다는 증거이다.

어린아이 이야기 1 : 밖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 들어 온 아빠가 가여워서 아빠, 나 아빠하고 놀고 싶지만 아빠가 너무 피곤하시면 나하고 놀아주지 않아도 돼요. 이제 저는 참을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우리의 어린 자녀의 배려에 감동되고 기쁘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영적 성장을 보고 깊은 감동과 기쁨을 얻으실 것이다. 우리의 고집과 움켜 쥐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의 표정은 어떠할까? 하늘 아버지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행복이 되어야 한다.

어린아이 이야기 2 : 장난감 가게에서 우리의 어린 자녀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할 때 우리 마음에는 어떤 감동과 기쁨이 생기는가? 그런데 아빠 이거 안 사주셔도 돼요. 그냥 보기만 할게요. 우리가 하나님께 그런 말과 결정을 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도 동일한 감동과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부모인 우리가 자녀들에게 무엇이든지 다 주고 싶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어 하신다. 부모인 우리가 자녀에게 어떤 것을 주고 싶어도 주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도 때로는 주지 않고 기다리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더 훈련되고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갖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의 성장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고 싶지만 때로는 주지 못하는 마음,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가지신 마음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게 되면 우리가 가진 것을 하나님께 빼앗길 까봐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어린아이 이야기 3 : 아빠와 장난감 가게에 들어 간 아이가 원하는 장난감을 선택했다. 계산대에 장난감을 올려놓고 바코드 판독기에 통과시켜야만 하는데 아이는 두 팔로 장난감을 꼭 껴안은 채 요지부동이었다. 억지로 장난감을 빼앗아서 점원에게 넘겨주려 하자 아이는 울면서 발버둥치기 시작하였다. 장난감이 진정으로 자신의 소유가 되기 위해서는 잠시 계산대에서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원하는 것을 움켜쥐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주셔야 진정으로 우리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영원하고 완전한 소유권을 갖기 위해서는 잠시 그것을 이 세상에서 내려놓아야만 한다. 그러나 영적으로 어린아이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잠시 내려놓는 것을 빼앗기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더 세게 움켜 쥐면서 추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하는 한 그것은 진정한 우리의 소유가 되지 못한다. 우리가 움켜쥔 것이 오히려 우리를 더욱 조이고 찌들게 만들 뿐이다. 우리가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것들 중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아직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들인지 모른다.

어린아이 이야기 4 : 아이가 밖에서 놀다가 흙이 잔뜩 묻은 손으로 들어왔다. 할아버지에게서 생일 선물로 새 옷이 온 것을 보고서 아이가 더러운 손으로 그것을 붙잡으려고 하였다. 아빠는 그 아이의 손을 멈추게 해야만 하였다. 아이는 울어댔지만 아빠는 세면대에 데려가 먼저 손을 깨끗하게 씻어주었다. 그렇게 한 후에야 아빠는 아이가 원하는 새 옷을 입혀 줄 수 있었다. 하나님께 내 인생을 내려놓는 일에는 이렇게 씻는 과정이 포함된다. 씻지 않은 더러운 손으로 하나님의 계획 속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위선과 정욕과 세속이라는 무게에 짓눌리게 될 것이다. 자신을 씻어야 된다는 것을 이해하기까지 우리에게 길고 긴 광야 생활이 필요하다. 세속을 털어버리기 위한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 아이가 아버지의 마음과 계획을 이해하기 위하여 오랜 세월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을 이해하기까지 오랜 광야 생활이 필요 된다.

광야,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되는 곳
 하나님께서는 길을 열어 놓으셨지만 우리의 눈에는 닫혀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순종을 기대하실 때에는 미래의 모든 것을 보여주신 다음에 선택하도록 하지 않으신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시 119:105) 라는 말씀처럼 주의 말씀은 내 발 앞을 비추어 주어서 넘어지지 않고 걸어갈 수 있을 만큼만 보여주신다. 멀리 있는 것에 대해서는 방향만을 제시할 뿐 그곳에서 실제로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가리우시고 보여주지 않으신다. 그것은 오직 순종으로 그 길을 선택하여 걸어가는 과정 속에서만 볼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만 믿음이 성장하고 강해지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환경 속에서 모든 것이 잘 되어 갈 때는 하나님을 만나기 어렵다. 그러나 붙잡을 것이 없고 기댈 곳이 없는 환경 속에서 살다가 보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 깊이 만나 주시려고 멀고 깊숙한 광야로 우리를 이끄신다. 광야 속에서 우리는 내 안에 숨어 있는 성취욕, 세상을 향한 야심을 만지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것과 내 것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것들이 고난을 통해 정제되어 갔다.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이 엉켜져 있는 삶이 광야 속에서 정결해 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내 능력의 한계에 부딪혀 절망할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열망이 자라나게 된다. 성경의 역사를 살펴 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사용하시고자 하는 다수의 인물들을 광야로 몰아가셨다. 그곳에서 그들을 만나 주셨고 그곳에서 그들을 훈련시키셨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고향 땅을 떠난 이후 줄곧 광야에서 방랑하면서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았다. 야곱도 외삼촌 집에서 고단한 타향살이를 하며 광야를 경험한 다음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하나님께로부터 얻게 되었다. 그와 반면 광야를 경험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은 야곱의 형 에서는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모험보다는 세상의 안락을 취했으며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 한 결과 자손 대대로 하나님의 백성들과 대적하는 원수가 되었다. 요셉도 타향인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는 광야의 삶을 살았으며 모세도 애굽의 궁전을 마다하고 광야로 나가 거기서 40년간 훈련을 받은 후에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내는 지도자가 되었다. 다윗 역시 광야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경험을 하였다.
 사울 왕의 시기를 받아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길고 긴 도피 생활을 살면서 혹독한 광야의 훈련 학교를 다녀야만 하였다. 엘리야 역시 긴 광야 길을 걸어야만 하였다. 바알을 숭배하는 아합 왕과 거짓 선지자들과 싸워서 승리하였지만 두려움에 휩싸여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도주하는 광야 길을 걸었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나게 되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 역시 바벨론이라는 타국에 살면서 풀무불에 들어가기도 하고 사자굴에 넣음을 받기도 하면서 험난한 광야 생활을 살았다. 그리고 우리의 구세주 예수께서도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광야에 머물면서 사단의 시험을 받았다. 그분의 공 생애 기간 동안 머리 둘 곳조차 없는 나그네의 삶을 사셨다(마 8:20).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내몰아가는데 그 주변에서 재물과 풍요의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부와 명예를 누리는 모습을 보면서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광야를 통과하는 나그네들이 만나게 되는 시험이다. 구약시대에도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를 40년간 방황할 때 주변에서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누리던 편리함과 부요함은 거절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유혹이 되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라고 불리웠지만 정작 그가 살았던 곳은 복이 없는 광야 땅이었다. 그리스도인은 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어 주변 사람들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복의 근원이 되려고 하기 보다는 복을 찾으려고만 한다. 돈이 있고 복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장소가 어디인가에는 관심이 없고 보기 좋고 살기 좋은 곳을 찾기 위하여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다. 물질적 환경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하늘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얻게 되고 행복해진다. 하나님을 소유하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느 곳에 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가 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에 발 하나를 걸쳐 놓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결코 자신의 것을 포기할 수 없게 된다. 마지못해 빼앗길지는 모르지만 자기 스스로 내려놓지는 못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 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셨다(눅 10:3).
 이 세상에는 이리와 늑대가 득실거린다. 세상에 발 하나를 걸쳐 놓는 그리스도인은 이리와 늑대에게 잡혀 먹히게 된다. 왜냐하면 양은 이리나 늑대를 결코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양이 이리나 늑대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목자 곁에 꼭 붙어 있는 것이다. 양이 시선을 세상으로 돌리고 목자로부터 떨어지는 순간 양은 이리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있기를 원하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서 있는 것,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 삶의 전부이다. 광야에서 광야로 가는 것이 나그네의 삶인데 그것은 두려움과 불안의 길이 아니라 형통과 평안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광야 생활은 붙잡고 있던 것을 내려 놓는 것을 배우는 훈련 학교이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저를 의지하면 저가 먼저 이루시고" (시 37:5)
 
 

건강: 멜라토닌, 휴식과 회춘의 물질

 
 
피로는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로로 인하여 심각한 질병과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피로의 이유를 분석해 볼 때 가장 큰 요인은 불면증이다.
 

 젊은 사람들에서부터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불면증으로 인한 피로에 빠져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멜라토닌이라는 영양보충제가 등장했다. 1993년 MIT 대학에서 나온 연구 결과가 미국의 모든 신문에 실렸다. 소량의 멜라토닌이 자연적인 수면제 역할을 한다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또한 멜리토닌이 시차로 인한 문제를 줄여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보도됨으로써 멜라토닌에 대한 대중적 인기가 급격하게 상승되었다. 이때 이후로 수많은 회사들이 멜라토닌 시장에 합류하기 시작하였다. 멜라토닌은 체내에서 스스로 생산하는데 특정한 식품을 통해서도 섭취할 수 있다. 다음에 나열하는 내용들은 멜라토닌이 인체에 어떠한 유익을 가져다 주는 가를 밝혀 준다.

수면 향상의 도우미: 이스라엘의 한 연구진은 멜라토닌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서 76세 이상의 노인들에게서 살펴보았다. 3주 동안 참가자들의 절반에게는 매일 2mg의 멜라토닌을 주었는데 그 결과 멜라토닌을 주었을 때 숙면(sleep efficiency)이 향상되었다. 불면증에 도움을 주는데 특히 노인의 경우 잠들기까지의 시간을 14분 단축시켜주고 수면 효율성을 향상시키지만 총 수면 시간을 늘리지는 않는다.


시차 문제의 해결사: 멜라토닌은 비행기 여행의 부작용으로 생기는 시차(jet leg) 적응을 돕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그 효과를 조사해 보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비행기 타는 날 멜라토닌을 먹고 그 뒤 닷새 동안 계속 복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노화와 치유: 회춘에 대한 인간의 욕구가 강해지면서 과학자들은 멜라토닌이 회춘을 위한 가능성 있는 물질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들은 수리하고 다시 젊어지게 하는 밤중 시간의 호르몬으로 멜라토닌을 제시하였다. 몸을 회복시키고 노화를 늦추어주는 멜라토닌의 역할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1세에서 5세까지의 어린아이들에게 있어서 멜라토닌의 체내 분비가 가장 높다가 사춘기의 끝에서 75%로 감소하게 된다. 성인이 되고 노인이 됨에 따라 멜라토닌의 체내 분비량은 계속해서 떨어지게 된다. 동물 실험을 통하여 동물의 경우도 늙을수록 멜라토닌의 분비량이 저하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동물에게 멜라토닌을 투여한 결과 동물의 수명이 연장되고 체내에 있는 유해 산소(free radical)가 제거된다는 실험 결과가 나왔다.

항산화제로서의 멜라토닌: 인체에 가장 유독한 유해산소인 수산화기라고 불려지는 화합물이 있는데, 멜라토닌은 이것을 매우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연적으로 제공되는 글루타치온이라는 항산화제가 있는데 멜라토닌은 이것보다 5배 이상 강력하고 비타민 E보다도 강력한 항산화제로 밝혀졌다. 또한 발암 물질, 제초제와 방사선 등에 의하여 생기는 세포의 손상을 보호하는 일에도 멜라토닌은 효과적이다. 항산화제로서 강력한 암 예방 기능을 한다.

악성 종양과 싸우고 예방하는 멜라토닌: 멜라토닌은 호르몬으로서 항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멜라토닌이 유방암 세포의 성장을 늦추어 주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면역기능을 향상시키는 멜라토닌: 스위스의 한 연구진은 멜라토닌에 대한 매우 흥미 있는 다음과 같은 연구를 하였다. 위험한 바이러스에 감염시킨 생쥐를 두 집단으로 나누어서 스트레스가 많은 환경 속에 둔 다음에 한 집단에게만 멜라토닌을 주사하여 주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30일 후에 멜라토닌 주사를 맞지 않은 생쥐의 92%가 죽었다. 멜라토닌 주사를 맞은 생쥐들은 16%만 죽었다. 멜라토닌에 의해서 면역기능을 향상시킴으로써 사망률에 있어서 무려 5배나 차이가 났다.

스트레스에 도움을 주는 멜라토닌: 멜라토닌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스트레스에 대하여 다른 방식으로 대처하게 만드는데 대단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멜라토닌은 마음을 긍정적인 기분과 밝은 인생관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증거가 있다. 가장 인기 있는 우울증 향상제들은 대개 세라토닌의 체내 분비를 높여줌으로써 기분을 향상시키는데 이것은 뇌의 송과선에서 멜라토닌의 생산에 관여하는 물질이다. 자살하는 사람들을 부검해 보면 그들의 뇌 속에 멜라토닌의 수치가 상당히 낮은 것으로 나타난다.

콜레스테롤과 혈압을 낮추어 주는 멜라토닌: 홍콩의 연구진들은 콜레스테롤이 많이 함유된 식사로 쥐의 혈청 콜레스테롤 수치를 높이도록 자극한 후에 멜라토닌을 투여했다. 그 결과, 쥐들은 나쁜 콜레스테롤 수치가 낮아졌다. 또 다른 동물 실험에서 멜라토닌이 교감신경계 활동을 낮추어 줌으로써 혈압과 심장박동수를 낮추는 것이 밝혀졌다.

골다공증에 도움을 주는 멜라토닌: 뉴욕의 의과대학에서는 최근에 골다공증 예방에 멜라토닌이 획기적인 역할을 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멜라토닌은 최적의 칼슘대사에 필요하고 인체 내의 칼슘을 도둑질하는 코티솔 호르몬의 수치를 낮추어 주는데 도움을 준다. 또한 뼈의 건강을 파괴하는 화합물질의 수치를 낮추어 주기도 한다.

인공적으로 제조된 멜라토닌은 안전한가?
 미국에서 멜라토닌은 하나의 식품보조제로 시판되고 있지만 영국과 캐나다에서는 의사의 처방을 받아야만 구입할 수 있다. 왜 그런가? 가장 큰 우려 중의 하나는 시판되고 있는 멜라토닌 화합물의 순수성에 대한 의구심이다. 멜라토닌 순도에 대한 정확한 규제가 없기 때문에 그 안전성을 보장할 수 없다. 실제로 최근에 6가지 멜라토닌 제품을 분석한 결과 4가지 제품에서 성분 미상의 불순물이 검출되었다. 어떤 멜라토닌은 소의 두뇌에서 추출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광우병과 같은 신경계 질환이 인간에게 전염될 수 있다는 현실을 자각하면 이 문제는 새로운 의미로 부각될 수 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멜라토닌 화합물이 100% 순수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장기간 동안 복용하였을 경우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 실제로 멜라토닌을 장기 복용했을 경우 오히려 시차 적응이 더 어렵게 된다는 실험 결과가 나왔다. 다른 약품과 함께 복용할 때에도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가장 안전한 멜라토닌
 멜라토닌은 몸 안에서 생성되는 천연 호르몬이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우리 몸이 만들어 내는 멜라토닌의 양을 증가시키는 전략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100%의 순도와 안전성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이다. 멜라토닌은 두뇌의 가장 중심에 있는 옥수수 한 알만한 크기의 송과선에서 주로 생산된다. 이 송과선에서는 멜라토닌 뿐 아니라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물질을 생산해 낸다.

1) 에피탈라인: 학습능력을 높이고 노화를 지연시키는 것으로 보이는 단백질
2) 세라토닌: 기분을 상승시키고 수면과 통증에 영향을 준다.
3) 알지닌 바소토신: 급속히 숙면으로 유도할 수 있는 단백질
4) 멜라토닌: 보수하고 회춘케 하는 밤중에 분비되는 호르몬

 멜라토닌의 생산 과정은 빛과 어두움의 사이클에 의해서 조절된다. 최적의 멜라토닌은 밤에 생산되고 어두운 환경에 의존한다. 새벽 2~3시 사이에 가장 높은 농도의 멜라토닌이 생산된다. 한밤중의 멜라토닌 수치는 낮보다 5~10배 이상 높다. 햇빛이 시신경을 통하여 두뇌에 전달되면 멜라토닌의 생산이 중단되고 어둠의 신호가 눈을 통하여 전달되면 멜라토닌 생산을 자극하게 된다. 이것은 저장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날마다 필요 되는 양이 만들어져야 한다.

멜라토닌의 생산 증가법
1. 하루 중 밝은 빛을 일찍 받아야 한다 : 핀란드의 한 연구진은 자연적인 태양빛에 노출된 쥐들이 인공적인 환경에서 같은 양의 빛을 쪼인 쥐들보다 저녁 시간에 훨씬 높은 멜라토닌을 생산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태양의 광선을 많이 받으면 낮 시간 동안에도 세라토닌과 같은 유익한 호르몬 생산을 증가시켜 주어서 피로와 우울증 치료에 도움을 받게 된다. 저녁 시간에 밝은 빛을 받는 것은 멜라토닌의 생산을 감소시킬 수 있다.

2. 운동은 멜라토닌 생산을 증가시킨다: 한 시간 정도의 자전거 타기가 멜라토닌 생산을 두 배 내지 세배로 증가시켜 준다.

3. 멜라토닌이 많이 함유된 식품 먹기: 멜라토닌이 많이 함유된 식품을 먹는 것도 혈중 멜라토닌 수치를 올려주는 한 방법이 된다. 멜라토닌이 많이 함유된 식품은 귀리에 제일 많고, 옥수수, 쌀, 생강, 토마토, 바나나, 보리 순으로 함유되어 있다.

4. 트립토판이 많이 함유된 음식 섭취: 트립토판은 두뇌의 송과선에서 세라토닌과 멜라토닌을 생산하는데 필수적인 물질이다. 그러므로 멜라토닌을 많이 얻기 위해서는 트립토판이 다량으로 함유된 식품을 섭취하는 것이 좋다. 트립토판은 두부에 제일 많고, 볶은 호박씨, 글루텐 가루, 참깨, 아몬드, 검정 호두, 광저기 콩 순으로 함유되어 있다.

5. 비타민 B6는 멜라토닌의 생산을 증가 한다 : 동물실험에서 B6가 간접적으로 멜라토닌 생산량에 기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타민 B6는 다음과 같은 식품 순으로 다량 들어 있다. 피망, 아티초크, 해바라기 씨, 참깨, 바나나, 영국 호두, 렌틸, 라마콩.

6. 절식과 단식은 멜라토닌 생산을 증가시켜 준다 : 제한된 양의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멜라토닌의 생산을 늘려주고 수명을 연장시켜주는 것으로 동물실험에서 밝혀졌다. 먹고 싶은 만큼 다 먹은 쥐들은 절식한 쥐들에 비해서 멜라토닌의 분비량이 절반에 불과했다. 단식 상태에서 멜라토닌의 생산이 더 증가된다는 사실 또한 밝혀졌다.

멜라토닌 생산을 증가시키는 생활습관 
 자연광을 쬐는 것을 증가시키고 인공광 쬐는 것은 감소시킨다.
 완전히 캄캄한 곳에서 잔다.
 멜라토닌, 트립토판 그리고 비타민 B6가 많이 함유된 음식을 섭취한다.
 칼슘 결핍을 피한다.
 일반적으로 음식의 섭취량을 줄인다.
 특히 저녁에는 금식하는 것이 좋다.

멜라토닌을 감소시키는 생활습관 
 
트레스
 카페인은 6시간 동안 멜라토닌의 생산량을 반으로 감소시킴
 술은 멜라토닌 생산을 41%까지 감소시킴
 담배

멜라토닌 생산을 감소시키는 것들

 비스테로이드성 염증치료제
 정신과 약인 할로페리돌과 클르포로마진
 베타 차단제 및 칼슘 통로 차단제
 진정제와 수면제
 비타민 B12(하루 3mg)
 항우울제
 심장병과 고혈압의 처방약들
 전기제품에서 발산되는 다량의 전자파


결론
 멜라토닌은 매우 놀라운 물질이다. 그러나 다량의 멜라토닌 보조제를 섭취하는 것은 매우 해로울 수 있다. 그러므로 멜라토닌 수치를 끌어 올리기 위한 가장 현명한 방법은 천연적인 생활 습관을 실천하는 것이다. 건강한 식사, 규칙적인 운동, 규칙적인 잠, 늦은 밤 활동을 피하는 것, 충분한 태양광선 쬐이기 등이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건강: 설탕이 건강을 해치는 59가지 이유 - 제1부

 

Lick the sugar habit의 저자인 Nancy Appleton 박사가 제시한 설탕의 문제점


1. 설탕은 면역 시스템의 저항력을 저하시킬 수 있다.
2. 설탕은 체내의 미네랄을 훼손한다.
3. 설탕은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과다한 활동과 불안을 야기시키며 주의를 집중하는데 어려움을 주고 짜증스럽게 만든다. 
4. 설탕은 혈중 지방치를 현격하게 상승시킨다. 
5. 설탕은 박테리아 감염에 대한 방어력을 저하시킨다. 

6. 설탕은 콩팥에 해를 가할 수 있다.
7. 설탕은 유익한 콜레스테롤(HDL) 수치를 저하시킨다.
8. 설탕은 크롬 결핍증을 유발시킨다.
9. 설탕은 유방암, 자궁암, 내장암, 전립선암, 그리고 직장암을 유발시킨다.
10. 설탕은 포도당과 인슐린의 단식 혈중 레벨을 상승시킨다.


11. 설탕은 구리 결핍증을 야기시킨다.
12. 설탕은 칼슘과 마그네슘의 흡수를 방해한다.
13. 설탕은 세로토닌으로 불리워지는 신경전달물질의 수치를 상승시킨다.
14. 설탕은 시력을 저하시킨다.
15. 설탕은 저혈당증을 유발시킬 수 있다.


16. 설탕은 위산과다증을 일으킬 수 있다.
17. 설탕은 아이들에게 아드레날린 수치를 상승시킬 수 있다.
18. 당분(설탕) 흡수불량증은 기능성 내장 질병을 지닌 환자들 에게 자주 나타난다.
19. 설탕은 노화를 촉진한다.
20. 설탕은 알코올 중독증을 유발시킬 수 있다.


21. 설탕은 치아를 썩게 만든다.
22. 설탕은 비만을 초래한다.
23. 설탕을 과다하게 섭취하면 크론병과 궤양성 대장염의 발병 위험을 증가시킨다.
24. 설탕은 위염이나 십이지장염 환자에게 문제를 야기시킨다.
25. 설탕은 관절염을 일으킬 수 있다.


26. 설탕은 천식을 일으킬 수 있다.
27. 설탕은 진균감염(yeast infection)을 일으킬 수 있다.
28. 설탕은 담석을 유발시킬 수 있다.
29. 설탕은 심장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
30. 설탕은 맹장염을 유발시킬 수 있다.

다음 호 건강 기사에서 설탕이 해로운 이유-제2부가 이어집니다.

 

신앙: 1부 - 참된 그리스도인이 가는 길

 
 점점 세속적이 되어가는 현대 기독교는 이제 세상과 별 차이가 없어진 것 같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적인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요즈음의 현실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번 신앙 기사는 이 시대의 선지자라는 평판을 들었던 A.W 토저(Aiden Wilson Tozer, 1897~1963) 목사님의 글을 편집해서 구성해보았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신앙의 자세를 이 기사를 통해 배우는 독자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 편집실

 우리는 타락한 시대에 살고 있다. 현대 기독교는 세상의 편한 방법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세상과 마찰 없이 지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깊은 잠에 빠진 기독교에게 이제 깨어나라고 말씀하신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함께 생각해 보자.


 
세상의 비웃음과 따돌림을 두려워하지 말라
1. 세상과 타협하며 미지근하게 살지 않는다
 과거에 세상이 교회를 따랐던 적이 있었다. 교회가 주도권을 쥐고 앞장서 나갔으며, 세상은 교회를 뒤따랐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반대이다. 지금은 교회가 무릎을 꿇고 세상을 흉내 내고 있다. 과거의 교회는 어린양의 아름답고 혈색 좋은 신부였으나, 지금의 교회는 쪼글쪼글한 늙은 걸인 같다. 지금의 교회는 세상의 거리로 나가 세상 사람들에게 동전 한 닢을 구걸하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 한때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어떤가?
 오늘날 교회는, 제발 우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면에서 당신들과 똑같습니다라고 말한다. 오늘날 기독교가 그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아 부으면서 세상에 전하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적 기독교와 세상을 섞어놓은 기독교, 즉, 혼혈(混血) 기독교를 전하지 않는가?

 명심하라. 십자가의 기독교는 세상의 비위를 맞추려고 아첨하지 않는다. 과거의 교회는 세상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뿐이오니 우리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했다. 교회는 자신의 성경적 원리 위에 우뚝 서서 세상에게 성령님의 음성을 들려주어야 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올 것이다. 당신은 세상에 적당히 적응하면서 현재의 미지근한 상태에 계속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현재의 미지근한 상태에 계속 머물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진리를 깨닫고 신앙의 열매를 맺고 또한 편안히 죽어서 그리스도를 떳떳하게 만날 수 있다고 믿는가?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미지근한 신앙 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까?

2. 미지근한 신앙 상태를 벗어나려면?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 : 미지근한 신앙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충만의 경험을 한 사람은 그런 경험이 있기 전에 누구나 자기를 비우는 단계를 거쳤다. 이 단계에서 그들은 공허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위대한 설교가 중 하나였던 무디는 성령님의 강력한 능력에 의지하여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사역 초기에 자신에게 있는 텅 빈 공허감에 시달렸기 때문에 더 성령 충만을 사모했고, 그 결과 그는 큰 영적 능력의 소유자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시험과 불안과 공허감이 찾아올 때, 감정의 기복에 따른 신앙을 하기 때문에 그 기회를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분의 성령으로 마음을 채우는 경험을 하지 못하고 불안해 한다.  불안이나 공허감이 찾아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찾아 오셔서 쟁기질을 하셔서 돌밭 같은 우리의 마음을 옥토로 만드시는 작업을 하신다는 증거이다. 때로는 여러 가지 사건이나 싫은 사람을 통하여 우리 마음을 쟁기질 하시며 우리 마음 밭을 엎으신다. 다윗은 이런 체험 후에 밭 가는 자가 내 등에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시 129:3)라고 고백했다. 우리를 비우시고 마음을 뒤엎으시는 하나님의 작업을 깨닫고 그 시련의 기회를 성령 충만함을 받는 기회로 삼는 사람은 하나님께 사랑 받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날마다 죽어야 한다 : 사도 바울의 간증처럼 기독교는 날마다 죽어야 하는 종교이다. 신앙 생활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얼굴에서 항상 슬픔이 베어 나와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육체적으로는 고난이 있을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기쁨이 충만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삶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이런 영적 즐거움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에서 싸구려 기쁨을 사다가 거기에다  예수 라는 이름을 붙인 다음 예수 안에서 기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기쁨으로서, 육신을 죽이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고 난 후에 주님의 임재와 동행함으로 얻는 하늘의 평안한 기쁨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육신을 죽이는 것은 자아를 비우는 것이다. 우리 속을 비우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속을 그분의 성령으로 채우실 수 없다. 우리의 뜻과 육신의 욕망을 버리고 대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채우심을 받고 그분의 뜻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만이 뜨거운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만큼 두려워한다면,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칭찬을 받든 비판을 받든 우리는 주위 사람들에 의하여 좌우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뜻대로만 살도록 결심해야 한다.

1. 능력을 얻는 비밀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사 8:13). 어떤 시대이든 간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그분의 음성만을 들었던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의 길로 행치 말 것(사 8:11)을 강력하게 경고하시며 이사야에게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자가 되라고 명령하셨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자가 되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주신 말씀은 너는 대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는 방향으로 가지 말라. 그들의 행동 방식을 따르지 말라. 대신 여호와를 거룩하다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거룩한 피할 곳이 될 것이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사야는 능력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우리가 능력을 얻을 수 있는 비밀은 바로 여호와를 거룩하다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다. 그 시대의 흐름이 어떻든지 하나님의 뜻과 음성에만 순종하고 따르는 사람만이 능력의 사람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흐름에 맞지 않을지라도 과감히 버리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2. 하나님을 체험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해야 한다. 성경적인 지식이나 진리 위에 서지 않고 이상한 감정적인 체험만을 고집하는 위험스러운 사람들 때문에  신앙적 체험 이라는 말이 거부감을 준다. 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성경의 진리를 가르친다. 그러나 개인적인 체험 없이 성경만을 아는 것은 하나의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고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체험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 오셔서 행동하고 느끼고 일하셨다. 만일 하나님 자신이 직접 이 땅에 오셨다 할지라도 그분은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와 똑같이 행동하고 느끼고 일하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성찬식에서 떡을 먹는 것처럼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우리는 날마다 먹어야 한다. 즉,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소유하고 나의 영혼 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입이 음식물을 섭취하여 위로 넘기듯이, 우리의 영혼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신다.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을 소유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게 될 것이다.

3. 사람들의 손에서 벗어나라
 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고 싶다. 특히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려는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라.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들을 추종하는 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다만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화목하게 지내기를 원하신다. 이 세상에서 가엽고 보기에 안쓰러운 일은 신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목회자가 가장 좋은 일자리를 구하려고 지역의 유명한 목회자를 찾아다니면서 식사를 대접하는 것을 보는 일이다. 필요한 교육을 받고 하나님을 위해서 준비되었다면 다만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 드리라. 오 하나님! 제가 준비되었습니다라고. 그런 다음 하나님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그곳에 가서 일하라. 윗사람을 찾아다니며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지 말고...

 사람들의 아첨에 넘어가지 말고 그들의 비판에 흔들리지 말라. 정당한 비판도 있지만,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그렇게 한다. 칭찬을 듣든, 비판을 받든 우리는 사람들의 손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 우리의 미래와 우리 자신을 사람들의 손에 맡기지 말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며 주님의 지도와 인도하심을 구하는 일이다. 사람들의 의견이나 판단이나 평판에 자신을 맡기지 말고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맞으면 무슨 일이든지 두려움 없이 착수하며 그분 안에서 확신 있는 삶을 살아가라.

4.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라
 오늘날 종교 세미나나 여러 가지 종교 행사에 참석해 보면 많은 지식들을 얻는 듯이 생각된다. 예언, 유대의 역사, 기독교 교리들을 다루며, 심지어 헬라어나 히브리어까지 곁들인 세미나들은 우리들 스스로가 유식해졌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그러나 세미나, 교리, 성경지식, 종교적 형식들이 중요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면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숭모하기 위한 종교이다. 기독교는 단지 죄의 형벌에서 건짐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실현시키는 종교인데,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란 하나님을 닮은 자녀들이 창조주를 깊이 사랑하여 진정으로 그분을 섬기고 예배드리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그분은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시며, 지혜가 되신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라. 그분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그분 밖에서 찾겠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그분 안에서 찾아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7) 라고 고백했다. 우리에게 가장 큰 깨달음이 주어지는 곳은 바로 성소이다. 그곳, 중세의 저술가들이  페너트레일리어 (penetralia)라고 불렀던 곳에서, 당신의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자신에 대하여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것을 모두 당신에게 드러내실 것이다. 그리스도께 가장 좋은 자리를 내어드리라. 당신 자신을 그분께 드리라. 온 정신과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고, 당신을 얽매어 그분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모든 줄들을 끊어버려라. 그분만이 당신의 모든 것이 되게 하라. 예수님은 모든 것이다. 당신은 예수님을 찾았는가? 예수님은 교회가 아니다. 예수님은 종교가 아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님께 당신을 온전히 바치지 않겠는가?

깨끗한 인격으로 성령과 동행한다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려고 한다면, 우리의 인격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 성령님은 거룩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것이 언제나 거룩하고 순수해야 한다. 그분은 깨끗한 마음의 성소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런데 성령님과 동행하려면 조건이 있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암 3:3).

    동행의 조건
 첫째, 가는 방향에 대해 합의해야 한다. 만일 가려고 하는 방향이 다르면 동행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둘째, 목적지에 대해 합의해야 한다.
 셋째, 그들은 어떤 길을 택할 것인지에 대해 합의해야 한다.
 넷째, 서로 동행할 의사가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1. 천국 가기 위한 보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성령님과 동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보험을 드는 심정으로 기독교를 믿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이 기독교에서 원하는 것은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으로 무사히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이 지불하는 보험료는, 주일에 불편하지만 참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다. 그들은 헌금을 드리고 저질스러운 쾌락을 삼간다. 그들은 보험이 무효 되지 않도록 나름대로 작은 불편들을 감수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이 죽으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목적이 아니라 사교적인 목적을 위해 교회에 출석한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진리를 자기들 편한 대로 해석한다. 성경에 나온 엄하고 두려운 말씀들은 그들의 손에 의해 제거된다. 이런 사람들은 참된 신앙을 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다.

2. 성령님은 깨끗한 사람 안에 거하신다
 성령님은 살아계신 인격체이시다. 하나님은 인격체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체적인 인격으로 다가오신다. 가장 구체적인 설명을 우리는 성경에서 얻을 수 있는데, 성경은 추상적으로나 공상적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성령님을 붙들면 된다. 성부와 성자와 하나이신 성령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알리신다. 우리의 생각들은 그분의 성소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곳은 우리의 사고요, 의지요, 감정이요, 지성이다.

 만일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려고 한다면, 우리의 인격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 그분은 악의, 이기주의, 속임, 어리석음, 교활함, 음란한 말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만일 당신이 이런 것들에 빠진다면 그분은 침묵하실 것이며, 당신은 그분의 은혜롭고 아름다운 임재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분은 당신을 도와주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이 당신 안에 계속 머물고 계시지만, 그분은 상처받은 채 거기에 계실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성령님과 동행하려고 한다면 성령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성령님은 거룩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당신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것이 언제나 거룩하고 순수해야 한다. 그분은 깨끗한 성소를 원하신다. 그분은 그분의 처소를 영광스러운 곳으로 만들기를 원하신다. 성령님은 불경스럽고 더러운 전에 거하시지 않는다.

3. 문제가 되는 것은 끊어라
 당신의 영적인 진보를 방해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버려야 한다. 이것이 영적 생활을 위한 실제적이고 유용한 원리요 성경의 교훈이다. 영적으로 건강 하려면 영적으로 해가 되는 것을 끊으면 된다. 당신은 성령님과 즐거운 교제를 나누면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시는 것들을 버려라. 사람들은 이제까지 즐기던 것들을 끊으면 불편할 뿐 아니라 남들에게서 비웃음과 따돌림을 당할 까봐 망설이는 것 같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겁쟁이가 되어버렸는가?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고, 야고보는 칼로 죽임을 당했고, 바울은 목이 잘렸고, 또 많은 제자들이 순교를 당했다. 교회의 역사는 냉대와 핍박과 순교의 역사가 아닌가? 그런데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가 이런 교회의 역사를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의 따돌림을 두려워하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십자가를 지고 남들과 다르게 살아라라는 말에 놀라서 비웃음을 당하기 싫으니 내게 편한 길을 좀 보여주세요라고 말하려는가?

4. 말씀을 묵상함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우리는 성경말씀 안에서 그분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우리가 범하기 쉬운 잘못 중의 하나는 묵상보다 연구를 중요시 하는 것이다. 연구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묵상이 더 중요하다.  머리로써  성경에 접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으로써  접근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진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변화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려면 하나님께서 주신 책을 깊이 묵상해야 하며 진리로 변화되어야 한다.

5.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라
 우리는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니콜라스 헤르만(Nicolas Herman, 1605~1691,하나님의 임재 (연습의 저자)은 그의 저서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해야 한다. 짧은 시간이 주어질 때 그것을 놓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라고 했으며, 심슨 박사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에 대해 이렇게 비유했다.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가? 그것은 나침반의 바늘이 항상 북극을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바쁜 생활과 와중에서 복잡한 삶을 살아갈 때에도 우리의 주의를 빼앗기지 말고 늘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우리는 결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신다. 원하기만 하면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분의 임재를 연습하며 항상 동행하라.
 

신앙: 2부 - 성령의 힘으로 세상을 제압하라!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을 받는다

 
1. 기독교의 능력은 성령의 능력
 너희는 권능을 받을 것이다(행 1:8)라는 이 짧은 말씀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이다.  그런데 주님이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초자연적인 영적 능력은 그들의 내부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외부에서 임한 것이었다. 다양한 종류의 응용 심리학이나 자기 암시, 또는 다른 새로운 가르침들이 말하는 네 자신 안에 숨겨진 가능성을 극대화하라, 네 안에 있는 거인을 깨워라 등등의 말이나 창조적 사고방식을 가르치는 철학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런 것은 성경의 진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성경은 너희가 권능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영적 및 도덕적 능력을 받을 것이라는 말인데, 이 능력은 다른 세계로부터 우리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능력이요, 신앙을 통해 받을 수 있는 힘이다. 이 힘을 받을 때 우리는 세상의 소위  적극적 사고방식의 철학 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 이 될 수 있다.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하게 해주는 도덕적 및 영적 능력이야말로 기독교 윤리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주님이 약속하신 도덕적 및 영적 능력을 배제하고 인간의 윤리의식에만 호소하는 소위  윤리적 기독교 는 어떤 형태의 것이든 간에 한계를 안고 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권능은 다른 세계로부터 우리에게 찾아오는 능력이요, 우리의 동의에 따라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는 능력이요, 우리의 삶의 뿌리까지 찾아와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1:8)라는 말씀처럼 이 능력은 바로 성령님이시다.

2. 내면의 부흥
 그렇다면 성령님의 능력은 어떻게 역사하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정확한 답은 할 수 없지만, 나는 그분의 능력이 어떤 중간적인 매체를 통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인간의 영에 작용한다고 믿는다. 당신과 나는 영이다. 곧,  몸을 가진 영 이다. 영은 단순한 정신의 영역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성령님은 바로 이 영에게 찾아와서 교제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이 성령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얻는 것이  내면의 부흥 이다. 이 내면의 부흥은 참 기독교의 영적인 차원을 깊이 깨닫고 그것을 추구하는 부흥이다.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영의 깊은 곳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셔서  내면의 부흥 이 일어나게 하신다.

 중세기의 일부 저술가들이 사용했던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페너트레일리어 라는 단어로써 가장 깊은 곳, 신전의 내전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저술가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페너트레일리어 로 찾아오신다고 말했다. 이 단어는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곳, 심지어는 우리의 정신보다 더 깊은 곳 을 의미하며, 바로 이 곳에서 하나님의 영이 일하신다. 즉, 성령님은 우리의 몸과 정신의 차원을 넘어서 더 깊은 내면의 성소에서 일하시는 것이다.

 성령님이 인간의 영의 깊은 곳에서 역사하시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령님이 다른 수단들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성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지성을 사용하신다. 거룩하게 된 지성, 즉 넓고 고상하고 예리하면서도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부드럽고 우아하고 순결하게 변화된 지성과 성품, 이것이 성령의 역사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은, 성령님께서는 사랑으로 역사하시는 영이시라는 점이다. 성령님의 역사, 곧 사랑과 이해심, 온유와 겸손을 함께 갖춘 성품은 성령께서 주재하신 내면의 부흥의 결과이다.

3.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보게 하신다
 성령님의 최고의 사역은 우리의 영혼을 덮고 있는 베일을 제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보게 하는 것이다. 성령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보게 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역사적 예수, 신학적 예수, 또는 철학적 예수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님의 능력이 임하시면 우리는 예수님께 무릎을 꿇게 될 것이며, 역사 속에 실존하셨을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의 그리스도요, 현재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라고 증거한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실 때에 우리는 성삼위의 제 2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고 부를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품을 깨닫고 우리에게 보여진 그분을 닮기를 소원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길을 예비하여 영적 부흥을 체험한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눅 3:4).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의 출현 이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에 대비하여 침례 요한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준비시키셨다. 즉, 그들이 메시아가 누군지를 깨닫고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도록 하셨던 것이다.  주의 길을 예배하라 는 이 말씀은 지금 이 시대에도 적용되는 말씀이다.


1. 영적인 복을 받기 위한 준비
 한 가지 영적 원리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복을 주려고 하실 때 그 사람이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는 원리이다. 무엇인가 준비해야 한다는 말에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태어나기만 하면, 믿기만 하면 된다라는 잘못된 사상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안에서 태어나 믿기만 하면 마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대신해서 다 해주실 것이라고 믿는 황당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개인이나 교회를 위해서 크신 일을 이루려고 하실 때에는 그 개인과 교회를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준비시키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이 영적인 복을 받는 준비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첫째,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죄로부터 깨끗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고 죄로부터 완전히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의 보혈을 통한 죄 사함은 심오한 것이다. 그것은 영혼의 깊은 곳까지 침투해 들어가 변화를 준다. 신학적으로 용서받은 사람과 실제로 용서받은 사람이 어떻게 다른가? 이 두 사람은, 하나님과 이웃과 삶을 대하는 태도, 얼굴표정, 간증의 목소리, 그리고 기도생활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둘째,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할 때 우리는 마음의 평안을 얻고 깨끗한 삶을 살며 생활에 열매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에게는 영적인 부흥이 필요하다. 우리는 아직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된 모든 영적인 복들을 실제적으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2. 복 받기 위한 준비를 가로막는 것
 당신은 죄 사함을 통하여 무죄 상태에 도달하여 깨끗하게 되었다는 확신을 갖기를 원하는가? 당신은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의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힘과 말과 행위로는 가능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가능하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시지만, 이 복된 일을 방해하는 것들이 우리의 마음과 행위 안에 도사리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장애물들을 제거해야 한다. 혈전이 심장으로 들어와 피의 흐름을 방해하여 심장 혈전증을 일으키듯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동맥과 정맥에도 장애물들이 들어와 영적 성장을 가로 막는다. 영적 성장을 막는 것들은 무엇인가?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는 것

 주님께서는 진리의 말씀들을 통하여,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우리를 옳은 데로 이끌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나 성령님의 호소하시는 음성 대신 우리 자신을 합리화해주는 말을 듣기 위해 다른 인간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모른 체하고 넘겨버리므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고 음성을 거절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성령님을 근심하게 한다.
 에베소 4장 31절에서 성령님은 어떤 것들이 그분을 슬프게 만들 수 있는 지를 가르쳐준다. 악독, 노함, 더러운 것, 부정직, 속임, 계산서의 금액을 지불하지 않는 것, 불평, 거짓말, 근거 없는 과장, 경거망동, 경박함, 이런 것들 때문에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일하지 못하신다. 당신이 친구나 가족을 위해 오랜 세월 기도해왔는데도 그가 아직도 주님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면, 그 원인이 당신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없이 만드는 모든 것을 버리고 회개해야 한다. 우리의 삶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과감하게 잘라버리고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님께 집중하자.

   사사로운 친구 관계를 정리하라
 우리가 육신을 이기고 열매 맺는 승리의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개 잘못된 사람들과 어울리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결심을 한다 할지라도 과거의 어울렸던 신앙이 없는 친구들과 계속 어울리면, 주님과 동행하는 대신 과거의 친구들과 동행하는 일이 계속되게 되고, 그 사람의 신앙의 성장은 매우 미미하게 될 것이다. 영적이지 않은 친구들과 사귀면 영적 성장이 중단하거나 매우 느려진다. 친구 관계가 영적 성장에 걸림돌이 된다면, 그 관계를 과감히 끊어야 할 것이다.

   개인적 습관을 바꾸라
우리의 습관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습관인가? 우리의 습관은 신앙의 진보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방해가 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습관을 살펴야 한다. 성령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영적 성장을 위해 너희의 습관을 잘 살펴보라고 호소하신다. 만일 우리의 습관 중에 어떤 것이 하나님 나라의 진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라면, 나의 이 습관을 반대하는 말씀이 성경의 어디에 나오느냐?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우리의 습관을 제거함으로써 주님의 길을 예비해야 할 것이다. 어떤 습관이든지 신앙의 진보를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뿌리를 뽑아야 한다.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으라
 우리는 과거에 범한 죄를 용서받지 못한 채 단지 그것을 잊어버리고 살 수 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의 잘못은 잘 기억하면서도, 혹시 잊혀진 죄는 용서받은 죄이다라는 착각 속에 살지 않는가? 하나님은 죄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용납할 경우 그분의 영광이 우주와 피조물들 앞에서 심히 손상되기 때문이다. 만일  용서받지 못한 죄 가 남아 있다면 빨리 해결하도록 하라.  원상회복 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가 정직하고 깨끗하고 의롭기를 원하신다. 원상회복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벗겨주고 인간 관계를 바로잡아 준다. 과거의 죄를 용서받았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다면 그것을 갚고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바로잡으라
 다른 사람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사는 듯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부정적이며 무정하며 냉소적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이 자기의 잘못을 빨리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이해하는 부드러운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 가운데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축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사과해야 할 사람에게 사과하지 않고 관계를 바로잡지 못하는 것에 있다. 누군가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가서 미안합니다. 당신을 싫어한 것과 당신에 대해 나쁜 말을 한 것을 용서하십시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잡으라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 나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삼각관계를 이루며 살고 있는데, 우리는 이 삼자 관계를 늘 올바르게 유지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그 다음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우리의 영적 진보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제거될 때에 이사야 선지자가 표현했듯이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사 40:5)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곧 부흥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 속에는 일종의  감시장치 ,  즉 모니터가 내장되어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이 모니터를 관리하시는 성령님은 옳고 그른 것을 분명하게 구별해 주신다. 성령님의 음성에 민감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현재 옳은 상태에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현재 올바른 상태에 있는지 아닌지를 안다. 
  창문에 블라인드를 치면 햇빛이 방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우리의 마음에도 너무 오랫동안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우리 영혼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새로운 능력을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원하는가? 우리는 어슴프래한 여명에서 밝은 정오의 햇살 가운데로 나아가야 한다. 미지근한 영성에서 벗어나 불꽃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빛 안으로 들어가서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생활과 행위를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솔직하게 비추어 보아야 한다.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것들이 우리 안에서 발견되면 과감히 그것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오셔서 우리를 놀랍게 변화시키실 것이다.

 

 

신앙: 3부 - 세상과 구별된 그리스도인

 
내 안에 도사리는 반역을 뿌리 뽑는다
 우리의 마음과 육체의 모든 죄들의 뿌리에는 반역이 도사리고 있다. 하나님께 대한 반역, 이것이 죄의 본질이다. 우리는 날마다 자신의  반역의 자아 를 죽여야 한다.  죄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도덕적 판단력과 양심을 부여받은 피조물이 내가 높아지겠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다. 최초의 죄는  타락한 천사 , 곧 사단의 죄이다. 그것은  창조된  자아가  창조되지 않은  자아보다 높아지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본질은 피조물이 창조주께 반역하는 것이다.

 
1. 죄의 증상과 모양
 죄는 여러가지 증상과 모양으로 나타난다. 마음의 죄, 의지의 죄, 감정의 죄, 육체의 죄 등 여러가지 죄들이 있지만, 이것은 모두  자아 라는 뿌리에서 흘러나온다. 완고함, 이기심, 자기를 믿는 교만 등이 모두  자아 에서 나온다. 본래 자아는 나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본래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아를 주셨지만, 우리는 그 자아를 잘못 사용하여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우리는 각기 제 길로 갔다(사 53:6).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를 위해 죽으셨지만, 우리는 각기 제 길로 가는 존재들이다.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씀하지만, 적그리스도는 내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보다 나의 뜻을 앞세우는 것이다.

2.  구세주 와  주 를 분리하지 말라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Savior)로 영접하지만, 그분을 우리의 주(Lord)로 영접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그분의  구세주 되심 과  주 되심 을 분리하는 경향이 있다. 종종 집회에서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듣는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제트기를 타고 천국으로 고속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영접하기만 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이 복음을 믿으십시오! 이런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당황하고 혼란에 빠지며, 결국 복음이 진정 무엇인지룰 모른 채 전도 집회의 장소를 떠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두 분이 아니시고 한 분이시다. 그분의 영광스러운 직무들은 분리될 수 없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분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된다. 만일 그분이 나의 주인(주님)이 되어 나를 통제하실 수 없다면, 그분은 구세주로서 나를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이 나를 자아로부터 건져내실 수 없다면, 그분은 나를 멸망에서도 건져내실 수 없을 것이다.

3. 이기적 즐거움 VS 무욕의 즐거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 현재 당신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당신의 야망이나 큰 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든지 자기의 큰 꿈을 이루어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할지라도 하나님이 없으면 그것은 마음의 만족을 주지 못하고 결국 실망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고 우리 존재의 이유이다. 몇 세대 전 살았던 독일의 신앙의 용사 하인리히 수사(Heinrich Sousa)는 하나님은 당신에게서 기쁨을 앗아가려고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무한한 기쁨을 주려고 하신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무한한 기쁨이시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기적 즐거움 에서 구하기를 원하시며, 우리에게  무욕(無慾)의 즐거움 을 주시기 원하신다. 우리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라는 주님의 말씀을 잊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먹이고 사랑함으로써 생존을 유지하려고 발버둥친다. 그러나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의 노력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 주여! 저를 자신에게서 건져내어 주님의 품에 안으소서!(휘딩턴의 찬송시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시라 의 후렴구)라고 외치며 주님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린 무욕의 마음 속에 주시는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4. 자아의 죽음
 당신의 문제는 바로  자기의 의지를 굽히려고 하지 않는 것 이다. 당신은 내게 토저 목사님, 문제는 내 성격입니다. 나는 나쁜 성격 때문에 자꾸 넘어집니다라고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밝혀두건대, 문제는 성격이 아니다. 당신이 자신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손에 움켜쥐고 있는 것이 바로 문제의 본질이다! 우리가 새 생명으로 부활하여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분과 함께 죽어야 한다. 자아를 지키는 자는 그것을 잃어버릴 것이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것을 잃어버리는 자는 오히려 영생에 이를 것이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는 바울의 교훈은 영원불변의 지혜이다. 

  많은 사람들이 몸으로 때우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봉사를 열심히 하면 무언가 신앙으로 산 것 같다는 느낌을 맛볼 수 있다. 집안 식구들이 모여 찬송을 부르는 중에 독창을 맡아 목청을 높이고,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찬양대에서 봉사하고, 피아노 반주를 하면 무언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여러가지 신앙적 활동을 하고도 정작 본질적인 것을 놓칠 수도 있다. 당신은 십자가가 마치 칼처럼 당신의 마음 속으로 파고 들어가 당신의  반역적 자아 를 죽이는 체험을 했는가? 당신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는 것(히 12:1)이 무엇인지 아는가?

 만일, 이런 깨달음이 없다면 당신의 외형적 활동들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오직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라(눅 9:23)는 주님의 말씀뿐이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국을 떠나 아프리카로 선교사로 간다거나, 좋은 직업을 버리고 목회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현상적인 것보다 더 깊은 차원에  자아 라는 것이 있다. 이 자아가 죽지 않으면 자아가 당신을 죽일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영 안에 도사리고 있는 반역자요,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는 고집쟁이요, 당신을 짓밟고 죽이려는 못된 존재이다.
 
 당신은 이런 자아로부터 건짐을 받고 싶은가? 훈련은 그것을 당신 밖으로 끄집어낼 수 없다. 교육도 그렇게 할 수 없다. 교육은 당신을 세련되게 만들지는 몰라도 자아를 죽이는 데는 무력하다. 자아를 죽이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방법,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당신 속에 있는 원수를 죽일 수 있다.
 
 

신앙: 4부 - 세 가지 상처

 
하나님이 주신 상처로 세상을 이긴다

 줄리안이라는 여성은 600년 전에 살았던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녀가 살던 시대는 종교 개혁 이전이었기 때문에 개신교가 없었지만, 만일 그녀가 루터의 시대에 태어나서 살았더라면 그녀는 완전히 루터 편이었을 것이며, 완전한 개신교인이 되었을 것이다. 줄리안은 하나님을 매우 사랑하여 주님과 동행하는 신실한 여인이었다. 그녀에게는 하나님이 전부였다. 그녀는 딱 한 권의 영감적인 책,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들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감동적이고 영감적인 책에는 그녀가 하나님께 구했던 세가지 선물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그녀는 내 삶 속에 세가지 상처를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강렬한 소원이 불같이 나를 사로 잡았습니다. 그 세가지 상처는  회개의 상처, 긍휼의 상처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상처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1. 회개의 상처
 줄리안이 원했던 첫 번째 상처는 회개의 상처였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뼛속 깊이 슬퍼하였다. 그녀는,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지도 않고 자기를 변화시키는 노력도 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값싸게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녀는 하나님, 제가 교만해지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저 같은 죄인을 위해 성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잊어버리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사람들은 종종 죄를 범한 자신에 대한 분노를 회개로 착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는 회개가 아니다. 철저한 회개! 이것은 누가 참신자인지를 말해준다. 진심으로 철저히 회개하는 신자! 이런 사람은 어느 교파에 속하든지간에 참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그 은혜에 감격하고 즐거워하는 일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성삼위 하나님께 반역하여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기억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줄리안은 오, 하나님! 제가 회개의 아픔으로 상처를 받게 하옵소서. 제가 범죄한 것을 슬퍼하게 하시고, 그 슬픔 속에서 살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사도 바울은  기쁨의 서신 이라고 불리는 빌립보서를 감옥에서 쓸 정도로 기쁨이 가득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지를 결코 잊지 않았다는 암시가 그의 서신들에 종종 나타난다. 죄가 극악무도한 이유는 그것이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께 반역하여 저질러진 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첫 번째 상처는  회개 의 상처이다.

2. 긍휼의 상처
 우리가 받아야 할 두 번째 상처는 긍휼의 상처이다. 줄리안은 예수님처럼 세상을 불쌍히 여기기를 원했다. 오늘날 기독교의 최대의 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그리스도인들 이다. 그들은 정통 교리를 믿지만, 긍휼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내가 말하는 긍휼은 툭하면 눈물을 훌쩍거리는 감상이 아니다. 진정한 긍휼은 이웃과 형제를 향하여 예수님과 똑같은 마음을 품는 것이다. 이 험난한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긍휼이다. 나는 자주 이렇게 기도한다. 오, 주 예수님! 주님이 사람들에게 느끼시는 대로 저도 똑같이 그들에 대해 느끼게 하소서. 주님이 그들을 사랑하시는 방법대로 똑같이 저도 그들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의 응답으로 나의 마음 속에는 주위 사람들이나 세상에 존재하는 슬픔과 고통에 대해 슬퍼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이런 사람들을 불쌍이 여길 때 나의 마음은 상처를 받는다. 이것은  긍휼 의 상처요, 하나님이 은혜 중에 내게 허락하신 상처이다. 나는 이 상처를 결코 치료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나는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느끼고 그들의 상처에 동참하고 싶다. 무디는 말하기를,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서 심판이나 지옥에 대해 설교하는 사람은 지옥에 대해 설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발견되는 사랑과 긍휼! 이것은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그들 중에 임재하신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긍휼의 상처는 아름다운 상처이다. 그대에게 감히 청하노니, 나와 함께 긍휼의 상처에 대해 깊이 묵상하자. 나와 함께 세상의 고통에 동참하는 사람이 되자!

3.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상처
 우리가 받아야 할 세 번째 상처는, 줄리안의 말을 빌려서 말하자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상처이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상처라고 말할 때 우리는 어디까지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 의 개념 안에서 말해야 한다. 이 말은 눈물을 짜내는 어떤 로맨틱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복음 전도자들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성간의 사랑에 비유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때로는 그것이 지나쳐서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물론 이성에 대한 사랑과 갈망이 이 세상에는 존재하며,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거나 속임을 당했을 때 마음에 큰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말하는 것이다.

 이성에 대한 갈망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갈망도 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이 세상의 어떤 것을 향한 갈망보다도 큰 것이다. 이것은 다윗과 바울이 증거한 갈망이다. 바울은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3,14)고 말한다. 여기에 나타난 바울의 모습은 선수가 결승선을 눈앞에 두고 전력을 다하여 달려가는 모습에 비유될 수 있다. 바울은 상을 얻기 위해 달려가는 것이며, 그에게 상이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는 어디까지 달려갔는가? 그는 로마 병사가 칼로 그의 목을 자를 때까지 달려갔다. 줄리안은 하나님! 하나님을 저에게 주소서. 하나님 한 분으로 저는 족하나이다. 하나님보다 못한 것을 추구한다면 저는 언제나 목마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는 하나님이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도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오직 우리가 갈망해야 할 것이 아닌가?

4. 하나님을 향한 향수병
 1차 세계대전 때에 나는 군복무 중이었다. 직접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전쟁이 끝나서 우리는 고향에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 집으로 가게 될지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같은 부대에서 일했던 한 동료는  고향아, 그리운 고향아! 라는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곤 했는데, 그는 심한 향수병에 걸려있었다. 만일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하고 고향의 땅을 밟지 못하고 살고 있다면 향수병에 걸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갈망은 병으로 발전할 수 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을 향수병이라고 부를 수 있듯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도 향수병이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히 돌아가야 할 고향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줄리안은 오, 하나님! 불치의 향수병으로 저에게 상처를 주소서. 이 세상이 저의 고향이 아니오니, 어찌 이곳에서 정착하리이까? 어찌 하늘의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라고 묻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고향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향하여 갖는 향수병은 그리스도인이 걸려도 좋은 병인 것 같다.
 
 

신앙: 5부 - 서원을 통해 위기를 극복함

 
 무기력하고 미지근한 신앙생활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서원을 해야 할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께 장차 어떤 일을 하겠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서원이다.
하나님은 서원을 귀하게 여기시며, 그것을 통하여 당신과 함께 일하실 것이다.
 
 

1. 우울하면 성인(聖人)이 될 수 없다
 흥미로운 사실은, 옛날 성자들의 관한 책들을 읽어보면 그들에게는 하나같이 유머감각이 있었다고 한다. 어떤 교회사의 권위자는 카톨릭교회에서 어떤 사람을 성자로 인정하려면 그 사람에게 유머 감각이 있다는 것이 먼저 증명되어야 했다라고 말했다.  진지함 과  우울함 은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진지하시지만 우울하시지는 않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우울한 곳이 아니다. 그곳은 진지한 곳이다. 만일 교회가 경박한 곳으로 변질되었다면, 우리는 교회의 진지함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 거듭났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들의 표정은 그들이 억지로 웃으며 참고 살아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들은 신앙으로 살아야 한다고 믿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신앙은  괴롭고 힘든 일 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억지로 믿는 신앙보다 더 나은 신앙이 가능한가? 나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발견한 사람은 어떤 환경 하에서도 평안과 기쁨이 넘치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2. 서원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라
 내 인생에 위기가 닥치기 전까지 나는 아무 문제없이 나의 일을 잘 감당했었다. 그러나 인생의 중대한 고비가 찾아왔고, 그리하여 나는 나의 일생을 더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에 의탁하며 하나님께 서원을 하였다. 나는 나의 이 다섯 가지 서원을 여러분과 나누려고 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가? 무기력하고 미지근한 신앙생활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가? 야곱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과거의 성자들의 영적 수준에 도달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서원을 해야 할 것이다. 다윗도 서원을 하고, 그것을 지켰다. 성경에는 서원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온다. 방이든지 나무 그늘 아래의 벤치든지 하나님과 조용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지 서원을 할 수 있다. 당신이 하나님께 장차 어떤 일을 하겠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서원이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도와주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첫째 서원
 " 죄의 문제를 철저히 해결하겠다고 서원하라. 당신은 죄의 문제를 철저히 해결하겠다고 하나님께 서원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은혜 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역사가들은 영국의 한 설교자가 은혜에 대하여 잘못 설교하였기 때문에 영국의 도덕적 수준이 낮아졌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의 말이 어느 정도 과장이라고 할지라도,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는 것은 개탄할 일이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은혜가 우리 멋대로 살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상대로 일하실 때, 그분은 우선 우리를 회개로 이끄신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어린이든 어른이든간에 모든 인간들 안에는 뻔뻔스럽고 음험한 죄가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사방에서 우리를 노리고 있는 죄는 우리가 조금만 틈을 보이면 물같이 우리 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죄가 도처에 깔려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를 항상 깨끗하게 유지하려는 것은 탄광의 굴 속을 통과하면서 옷에 검은 석탄을 묻히지 않으려는 것과 똑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구세주라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듯이 그분이 정녕 구세주시라면, 그분은 여기 이 세상에서 지극히 사악한 오염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실 수 있어야 한다. 육신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하나님과 계속 동행하는 삶을 살려면 우리는 바로 죄의 문제부터 확실히 해결해야 한다.

둘째 서원
 "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겠다고 서원하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를 위해 큰 일을 행하시기 전에 반드시 그들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욕심을 버리게 하신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말라. 하나님은 당신이 물질을 소유하기를 금하신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은 물질이 당신을 소유하기를 금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당신이 영적인 위기를 맞게 되고, 그 위기를 통하여 물질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원하신다. 그러므로 영적인 의미에서 위기는 축복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영적인 위기의 때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서원을 올릴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모두 하나님께 쏟아놓으며, 오, 주여! 이제부터 저의 것은 없습니다. 저의 명예도 저의 것이 아닙니다. 저의 것은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얽어매는 모든 것들을 끊어서 제거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가족이나 그 외의 모든 것이 나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할 때에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 것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당신에게 소중한 것이 있는가? 그러면 그것에 칼을 꽂아서 죽여라. 그것과 함께 죽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것과 당신을 모두 다시 살리실 것이며, 그것을 당신에게 되돌려 주실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당신 안에 있지 않고 당신 밖에 있을 것이다. 그것이 당신 안에 있을 때에는 당신의 마음을 짓눌렀을 것이다. 과거에 당신은 그것 때문에 자신을 들여다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당신 밖에 있게 되면, 당신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야망을 하나님의 손에 놓으라. 거룩한 야망조차도 하나님의 뜻에 맡기라.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우리 손으로 붙들지 않겠다고 서원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에 많은 것을 맡기실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나의 야망을 추구할 때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맡기신 것을 사용할 때에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것이다.

셋째 서원
 " 험담을 하지 않겠다고 서원하라.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소문을 퍼뜨리지 않겠다고 서원해야 한다. 존 웨슬리는 험담은 남에 대한 비우호적인 말이며 전혀 불필요한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남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은 나쁘다. 당신이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지만 입에 자물쇠를 채우고 끝까지 침묵을 지킨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큰 복을 내리실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해가 될 수 있는 험담을 삼간다. 그것은 상식이고 성경적인 가르침이며 사랑이다.


넷째 서원
 " 자신을 방어하지 않겠다고 서원하라.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방어하지 말고 산상수훈(마 5-7장)에 따라 살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산상수훈이 특별한 성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간주하지만,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교훈이다. 이 교훈 중의 하나가  저항하지 말라 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 극심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 잘못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완전히 부수어졌다. 나는 하나님을 의지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이 너무 생생했기 때문에 그 말씀이 오직 나를 위해 기록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출애굽기에 기록된 약속들이 가슴에 절절히 와 닿았고 그 말씀은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너희 중에 병을 제하리니...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출 23:25,26). 그런데 그 다음 28절에는 흥미로운 약속의 말씀이 나온다.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출 23:28). 여기서 나는 하나님이 유머가 있는 분이라고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상상해 보라! 광대무변한 우주를 만드시고 묘성을 펼쳐놓으신 하나님께서 겸손하게 허리를 굽히셔서 왕벌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이제 나는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싸우시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교만해져서 앞으로 나서서 싸운다면 코피가 터지고, 눈두덩이가 퍼렇게 되고, 심신이 피곤해 질 것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의 혀는 칼처럼 날카로웠으며, 다른 사람의 공격으로부터 나 자신을 방어하는 데 빈번히 사용되었다. 이 날카로운 혀를 무디게 만드는 데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렸는지는 하나님이 잘 아신다. 무뎌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나는 많이 부족하다. 남의 말에 화가나서 날카로운 혀를 사용하여 반격을 해놓고 보면 후회스러울 때가 많다.

 이런 나의 부족함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는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함이었고 나는 이 점에 대하여 많이 회개하였다. 당신은 스스로 나서서 적을 상대하려고 하는가? 경고하건대, 당신의 적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당신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이 들리는가? 이것을 해결하려고 동분서주하지 말라. 당신이 하려고 하던 모든 노력을 하나님께 맡기라. 하나님의 강한 바람이 당신의 흰 셔츠를 검은 숯으로부터 더럽혀지지 않도록 날려버리실 것이다. 그러므로 저항하지 않겠다고 서원하라.

다섯째 서원
 "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겠다고 서원하라.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결점이 없는 상태 가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단 1퍼센트도 더 도둑질하지 않을 정도로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시115:1)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무기력하고 미지근한 신앙생활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서원을 해야 할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께 장차 어떤 일을 하겠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서원이다. 하나님은 서원을 귀하게 여기시며, 그것을 통하여 당신과 함께 일하실 것이다. 
 
 

신앙: 6부 - 세상을 버리고 참 평안을 얻으라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지 않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세상 안에서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세이다. 이런 자세로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의 체험이 주는 즐거움은 온갖 문명의 이기와 문화적 산물이 주는 즐거움보다 더 크다.
 

1. 구원의 기회를 결코 미루지 않는다

 사단에게 속지 말라. 그리스도인이 될 뻔하다가 마는 사람이 되지 말라. 참그리스도인이 되라. 가다가 중지하지 말고 끝까지 가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그리고 그분이 당신 안에 거하시게 하라.

구원 받을 뻔한 사람들
 나는  무엇이 될 뻔하다 마는 것 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며 훌륭한 변증을 한 기록이 나온다. 아그립바 왕은 바울의 복음전도에 감동을 느꼈다. 물론 그뿐만 아니라 바울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움직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변증이 끝났을 때 아그립바는네가 나를 설득하여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뻔했다(행 26:28;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고 말했다.

 이 말을 현대 말로 하면 이런 말이다. 사도 바울! 당신의 말이 나를 기독교로 개종시킬 뻔했소. 당신의 변증이 나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 뻔했소. 이런 아그립바의 반응을 보고 바울은 어떻게 대답했는가? 그는 기품있고 진지하게 말하기를, 오, 왕이여! 오늘 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소원하는 것은 당신과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뻔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오라고 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이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될 뻔하다가 마는 것이 아니라,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이다. 무엇이 될 뻔하다가 마는 것은 참으로 저주스러운 것이다. 아그립바는 내가 그리스도인이 될 뻔했다라고 별 생각 없이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일생 최대의 비극적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성(聖) 유다가 될 뻔한 사람
 가룟 유다에 대해 묘사할 때 모든 사람들은 씁쓰레한 느낌을 입으로 내뱉는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극악무도한 죄를 범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그는 악마가 아니었다. 가룟 유다도 인간이었다. 우리와 똑같은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나뭇가지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고 고양이를 쓰다듬고 강아지를 안아주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무에게도 의심을 받지 않을 정도로 신실히 예수님을 따랐으며 평소에 그렇게 악하고 저질스럽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실수는 그가 완전히, 끝까지, 하나도 남김 없이 자신을 예수님께 굴복하지 않은 것이었고, 그것으로 인해 사단의 유혹에 완전히 넘어가 그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성(聖) 유다가 될 뻔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람에게 혐오감을 주는 가룟 유다가 되었다는 것이다.

구원의 기회를 미루는 사람들
 당신은 참신자인가? 나는  구원받기 위한 믿음 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부디 부탁하건대, 사탄에게 속지 말라. 그리스도인이 될 뻔 하다가 마는 사람이 되지 말라. 참그리스도인이 되라. 가다가 중지하지 말고 끝까지 가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그리고 그분이 당신 안에 거하시게 하라. 혹시 당신은 내게 내가 참신자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확인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을지 모르겠다. 성경이 믿으라는 대로 믿고, 성경이 행하라는 대로 행하고, 그리스도를 신뢰하라. 그러면 확신이 생길 것이다.
 성령님이 당신 안에서 일하신다면, 그분은 그분의 일을 당신에게 확신시키실 것이다. 이 확신을 가질 때, 당신은 자신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음을 알게 될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당신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당신은 오늘밤 스스로의 믿음을 판단할 수 있다. 당신의 마음을 깊이 살펴라.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라. 나는 그리스도인이 될 뻔한 사람인가? 아니면 진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인가? 그리고 오늘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렇게 외쳐보라! 나는 남들이 뭐라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 나의 모든 두려움과 의심을 헤치고 나아가 그리스도에게 도달하겠다.
 다이빙 보드에서 점프를 해서 몸을 풀장에 맡기듯이, 나는 나를 던져 그분에게 맡기겠다. 나는 그분이 나를 완전히 구원하시도록 오늘밤 나를 던져 그분에게 맡기겠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 오, 주여! 최후의 심판 날에 주님이 제게  너는 나의 제자가 될 뻔한 사람이다 라고 선언하시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이 세상에 매우 두려운 비극, 소아마비, 팔다리를 잃는 것, 실명(失明) 같은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두려운 비극이 있다. 그것은 거듭날 뻔했으나 거듭나지 못한 것이다.

2. 고독하더라도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다

하나님께 싫증난 이스라엘
 예레미야서 6장 16절 상반절은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2,500년 전에 남긴 기록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런데 이 말씀은 16절 하단의 내용으로 이어진다.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도다. 이 말씀에서 하단 부분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시 이스라엘은 영적 타락 때문에 국가적 위기에 처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을 버리고 스스로를 의지하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점점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위기에 빠진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싫증을 내어 그분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주 여러번 하나님께 반역하였는데, 그 이유는 결국 하나님의 방법과 길에 싫증을 내고 자신의 방법과 길을 따르기를 원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늘의 기적이었던 만나의 맛까지 싫증을 내었다.

신앙 침체의 원인
 오늘날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여러가지 면에서 신앙적 침체 상태에 빠져있다. 내가 보기에, 그 침체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께 싫증을 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요즈음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처럼 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십자가에 완전히 만족하지 못한다. 하나님 한 분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우리는 그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고 짜릿한 세상적인 것들을 찾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 보좌 앞에 있는 천사들이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성자(聖者)들처럼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소수이다.  이런 사람들은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별종, 극단주의자, 광신자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왕따가 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파묻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서는 안된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지 않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세상 안에서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세이다. 하나님의 임재의 체험이 주는 즐거움은 온갖 문명의 이기와 문화적 산물이 주는 즐거움 보다 더 크다. 그런데 이것을 체험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깊은 진리를 알지 못하고,  옛 길 (렘 6:16)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조심을 해야 하는데, 무미건조함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자칫 세상의 것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 들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선한  옛적 길 이 정도
 그리스도인들이 또 조심해야 할 점은, 양쪽 극단이나 편견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극단은,  옛것은 무조건 좋고 새것은 무조건 나쁘다 는 편견인데, 이런 태도는 독창성을 말살하고 진보를 가로막는다. 복음적 진리로 무장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른다면, 진부한 관점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진리를 독창적인 방법으로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의 방법을 교회 안에 끌어 들여서는 안된다. 두 번째 극단은,  새것은 무조건 좋고 옛것은 무조건 나쁘다 는 편견이다. 어설프게 배운 사람들, 잘못 배운 사람들, 조금 배웠다고 우쭐대는 사람들, 약삭빠른 사람들, 성령님이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새것이라면 무조건 열광하는 경향이 있다. 새것은 무조건 좋고 옛것은 무조건 나쁘다는 편견이 신학에 침투하면, 사람들을 자유주의자로 만들어 버린다.

 극단적인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정도(正道)는 무엇인가? 성령님의 음성을 들어보자.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렘 6:16). 이 선한  옛적 길 에서는 진리가 발견된다. 이 진리가 우리가 굳건히 서야 할 반석이다. 이 진리는 시간을 초월하는 진리이다. 성경의 진리는 아담이 에덴 동산에 있을 때에도 진리였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진리이며, 앞으로도 영원한 진리이다. 우리는  선한 옛적 길 로 돌아가 진리와 하나님을 찾을 때 비로소 영적으로 제자리에 있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싫증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 때 우리는 단지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구주를 믿는 단계에서 벗어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성숙한 단계로 나아갈 것이다.

 성령님이 주시는 영적인 기쁨이 우리 마음에 충만할수록, 우리는 세상적인 기쁨을 덜 찾게 된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필요하다고 말하지 말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 하나님 한 분으로 완전히 만족한다고 거짓 없이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 시대에 올바로 적응하고, 문명의 이기와 문화적 산물을 지혜롭게 이용하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싫증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여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비극적이고 위험하고 중차대한 시대에 하나님의 길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도한다.


마치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 길은 고독과 외로움과 멸시와 따돌림을 받는 길이며, 세상과 충돌하며 살아가야 하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진리대로 살기를 원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기 원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세상과 충돌하며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과 충돌하며 사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자! 성경의 역사에 길이 남을 선지자들이나 성자들, 아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세상과 충돌하며 사셨다. 넓은 길을 가며 세상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평안한 삶을 살기보다는, 좁은 길에서 외롭고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지라도 하나님의 인정만을 바라며,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안 속에서 사는 것이 훗날 주님 앞에 떳떳한 것이 아닐까? 세상과 충돌하며 사는 신실한 독자들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