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생각을 꺼버리는 단추

생각을 멈춰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갑자기 무한하신 존재 앞에 압도되어 모든 생각이 사라져 버리고 고요한 침묵 속에 한없이 잠기는 순간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마음속에서 자신과 남을 끝없이 판단하며 떠들어대던 육신의 목소리가 조용해지고, 분석하며 헤아리기에 분주하던 생각이 자취를 감추고, 한없는 충족감에 잠겨 고요히 안식하는 순간, 그런 순간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진리를 묵상하던 어느 날, 진리 속에 녹아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사상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채 깊은 명상에 잠겨 드는 순간, 문득 우리는 감지하게 됩니다. 정당하다고 주장하던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워하며 꼬리를 감추는지를&. 매우 지혜롭다고 신뢰하던 우리의 생각들이 얼마나 순화되지 않은 육신의 감정에 바탕을 두고 있었는지를&. 무한하신 존재의 빛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자신이 드러나는 그 순간에&.

우리의 생각은
 우리 마음은 항상 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쉴 새 없이 일어나는 생각들로 매우 분주합니다. 생각을 멈춘 상태에 머무르는 순간은 아주 드물거나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것과 합쳐져 있지 않다면, 우리 생각들의 대부분은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하나님과 하나 되어 있지 않은 자아에서 나오는 생각들은, 완전히 죽지 않은 육신의 에고(ego)인 나가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려고, 그리고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하고자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그 생각이 아무리 훌륭한 신앙의 가면을 쓰고 합리화시키며 나오더라도 그것은 결국 육신의 자아가 죽기 싫어서 안간힘을 쓰는 것이라는 것을&.

 성경은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라고. 그리고 육체에서 일어나는 일과 생각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갈 5:19~21).

 우리의 생각은 감정에 의해서 자주 바뀌기 쉽습니다. 미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변화하지 못한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각이, 자아의 그루터기가 완전히 잘라지지 않은 채 올라오는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유동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 생각들이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육신의 감정의 산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냥 휘둘려버릴 때가 잦습니다. 내 생각이 멈추어지고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과 사상이 내 것이 될 때에만, 우리는 육신에서 올라오는 감정과 충동적인 생각에 끌려다니면서 짓는 죄를 멈출 수 있습니다.

생각을 꺼버리는 단추
 우리 마음속에는 생각을 꺼버리는 단추(버튼)가 있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육신에서 올라오는 소욕과 생각을 꺼버릴 수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버튼이&. 그리고 그 단추를 사용하여 육신의 생각을 꺼버리는 법을 체득한 사람은 육신의 생각들과 감정에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에 역사 하실 때 우리는 얼른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로 성령을 택하고 육신의 소욕과 생각을 버리는 것,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각을 꺼버리는 장치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다스리고 육신의 생각을 꺼버리는 성령의 단추입니다.

 우리는 영혼을 약하게 하고 악하게 물들이는 것들로 마음이 번거로워지거나 그늘을 던지는 어두운 생각들로 우리의 마음이 캄캄해지지 않도록 우리의 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아니, 그런 부정적인 생각들을 빨리 꺼버리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왜곡된 성격과 인격에서부터, 고집 센 교만에서부터 나오는 생각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우리는 재빨리 우리의 생각을 포기하고 성령님께 드리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다. 생각이 끝날 때만 평화가 오고, 우리 자신의 생각을 멈출 때에만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이 멈출 때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에 일어나는 악한 상상과 생각을 대항하기 위한 열렬하고도 지속적인 영혼의 투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생각으로 교묘한 술수를 내거나 죄를 지으려는 유혹을 굳게 저항하며, 영혼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지켜 주실 수 있는 분을 믿는 믿음 속에서 깨끗하고 아름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영원한 근원에 속한 것을 진지하게 명상하도록 또 늘 그리스도에게 머물도록 연습시켜야 합니다.

바라봄으로 변화를 받습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분의 완전하심을 늘 명상할 때, 그분의 임재 속에 늘 잠겨서 살 때, 우리의 생각은 멈추고 오로지 그분의 생각으로만 전체가 채워질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우리가 사모하는 그분과 같이 되고 싶은 주리고 목마른 열망이 우리 영혼 속에 생길 것이며, 우리의 생각이 그리스도께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우리는 그분에 대하여 더 많이 말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마침내 우리는 그분을 닮은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남아 있는 안식
 성경은 육신의 생각을, 육신의 일을 멈춘 사람들을 안식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히 4:9~10). 생각이 없어지는 경험, 육신의 소욕을 하나님께 드리는 경험, 육신의 일(죄)을 쉬는 경험을 하는 사람, 이것이 진정한 안식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경험해야 할 남아 있는 안식입니다.

 늘 속에서 자신과 남을 정죄하며 떠들어 대는 비판의 목소리와 남을 끊임없이 원망하고 미워하며 변명하는 생각을 성령의 단추로 조용히 꺼버리고, 무한한 사랑과 용서의 속성에 함께 녹아들어가 조용히 그분의 임재 속에 쉬는 경험, 우리를 재창조하실 수 있는 그분의 능력 있는 팔에 온전히 안기는 경험, 손을 펴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경험, 이런 진정한 안식의 경험을 하는 사람만이 앞으로 도래할 영원한 안식에 넉넉히 들어감을 입을 것입니다.

 안식에 들어간 사람의 마음에는 고요한 평화가 있습니다.  안식을 체험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비쳐 나오는 아름다운 빛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삶의 분노와 어둠의 구름이 주위를 에워싼다 해도&. 그 찬란하고 평화로운 안식의 빛줄기는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생애의 빛에서

강병국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의로운 자가 하늘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자가 의로운 자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분명히 그러합니다. 자, 그렇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이 서로 상충하는 진리를 어떻게 서로 조화되게 이해해야 한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적당하게 눈을 가려서 통과시켜주시는 그러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시지만 동시에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실 때에 적당히 하실 수가 없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때에 슬쩍 눈을 감아 주는 형식으로 처리하실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만일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때에, 단지 용서해 주시는 방법으로만 처리하시면서 그 죄인의 마음속에 있는 죄의 문제 자체는 해결하는 일이 없이 구원하신다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시는 그 죄인을 실제로 변화시켜 주시면서 의롭게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구원은 회복입니다. 죄 없는 곳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으로 회복시켜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의로운 마음을 가지게 된 자들에게 썩지 않는 불멸의 몸을 허락하시는 것이지요.

 양은 온종일 풀을 뜯어 먹고 있어도 불평이 없습니다. 항상 그렇게 하며 삽니다. 왜냐하면, 양이기 때문입니다. 이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리는 피가 흐르는 고기를 먹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이리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문제, 의롭게 되는 문제는 하나님의 창조 역사입니다. 있는 것을 적당히 뜯어 맞추는 역사가 아니라, 마음을 다시 새롭게 만들어 주시는 역사입니다. 그래야 구원의 역사가 모든 면에서 합당하게 됩니다.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이번 호가 마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가정과 영성: 믿음의 어머니, 요게벳

요게벳의 교육
 성경에 여자들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사회 구조나 사고방식에는 여성의 입지가 현대 사회만큼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경 전면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사명을 감당했던 여인들이 있다. 비록 그 여성들의 업적이 무대 뒤에 숨겨져 별로 조명을 받지 못해도 그 여인들의 신앙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전해 주며, 그들의 신앙이 성경 역사에 얼마나 지대한 공헌을 했는가를 알려 준다. 성경에 나오는 한 어머니의 신앙 이야기를 살펴보며 우리의 신앙에 용기를 얻어 보자.

 요게벳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모세의 어머니이다. 그러나 이 위대한 인물 뒤에 존재하는 더 위대한 어머니에 대해서는 성경에 두서너 개의 구절만이 쓰여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짧은 구절에 숨어 있는 그 긴박하고 절실했던 삶의 순간들이나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던 섭리의 손길에 대하여 깊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뭇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출 2:1~3).

이집트에 살던 야곱 자손들
 가나안에 든 흉년과 총리대신이 되었던 요셉으로 말미암아 야곱의 자손들은 이집트(애굽) 땅에 살게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출 1:8)리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수효는 엄청나게 불어나 있었다. 그러자 그(왕)가 그 신민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출 1:10).

 애굽의 왕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담당하는 감독을 세우고 그들을 완전히 노예로 만들었다. 그리고 힘든 노동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괴롭히고 그들의 수를 줄이며 독립 정신을 분쇄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도 목적을 달성하기에 실패하자 그들은 더 잔인한 방법을 고안해 냈는데, 그것은 히브리인의 남자 아이는 출생할 때에 죽이라는 명령이었다. 사단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구원자가 나리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애굽 왕에게 역사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멸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려고 하였다.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하였(출 1:22)다.

학살 명령과 비밀 계획
 히브리 남자 아이에 대한 왕의 학살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슬픔과 두려움을 가져왔다. 이 법령이 강행되고 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 중 레위 지파에 속한 한 경건한 부부 아므람과 요게벳에게 한 아들이 출생하였다.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해방 시기가 가까이 이르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일으키시리라는 것을 믿는 신실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아기를 희생시키지 않기로 하고 이 아이를 비밀리에 숨겨서 키우기로 하였다. 아므람과 요게벳은 자신들의 아이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인물로 사용되기를 소원하며 엄숙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아이를 봉헌하였다.

 미래에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기 위한 지도자의 사명을 성취할 아이의 어머니로서 요게벳은 아주 신실한 믿음과 용기를 소유하고 있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보존하려고 세운 계획이 아무리 그녀의 생애에 어려운 고통과 고난을 가져온다 해도 그 일이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성취하는 데 필요하다면 생명을 불사하고라도 자신의 몫을 감당하리라는 결심과 결단력을 가진 용감한 여성이었다. 태어난 갓난아이는 정말 아름답고 준수하(출 2:2)였다. 그들은 아무도 모르게 이 아기를 숨겼다. 두려웠지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그들의 마음을 강하게 해 주었으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들은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히 11:23)고 아이를 3개월 동안 감추어 두고 길렀다. 아이는 숨기어진 채 건강하고 무럭무럭 자라났다.

또 다른 계획
 그러나 시간이 흘러 더는 아이를 숨겨서 키울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우렁차졌고, 매일매일 커가는 아이를 더는 숨겨 놓고 안전히 키울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또 한 번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런데 이 결정은 처음에 내렸던 결정보다 더 어렵고 위험하게 느껴졌다. 요게벳은 커다란 갈대로 바구니 같은 상자를 만들고 안에 물이 스며들지 않게 역청과 나뭇진을 칠했다. 아이를 그 바구니에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띄우기로 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결정을 행동으로 실천해야 하는 비장한 순간이 다가온 것이었다. 그 결정은 가족의 안전과 아기 모세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만큼 심각한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마음속에 끼쳐 주신 감명과 이 일을 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주저하지 않고 이 일을 하도록 그녀를 몰아갔다. 그러나 아무리 역청을 입혀서 물이 들어오지 않게 하였다 해도 그 갈대 상자 안에 아기를 넣고, 또 앞으로의 일과 아기의 생명의 안전도 예측하지 못한 채 바구니를 물 위에 띄운다는 것은 엄마 요게벳에게는 위험천만한 일로 느껴졌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새근새근 잠든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의 사랑하는 아가야!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의 손길이 너에게 함께하기를&. 이 엄마가 너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 하마. 아기를 태운 바구니는 물 위에 흔들렸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천사들이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의 섭리의 사건들을 지켜보며 바구니 위를 날고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와 어머니의 기도
 아이를 바구니에 넣고 강가에 띄운 요게벳은 아이의 장래를 하나님의 위대하고 자비하신 섭리의 손길에 맡겼다. 그녀는 감히 그곳에 머물러 아이를 지켜보고 있을 수 없었다. 만일 그렇게 하면 아이의 생명과 자신의 생명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요게벳은 아기의 누이 미리암을 불러 그 바구니를 지키고 있게 하였다. 엄마에게 미리 지시를 받은 순종심 많은 미리암은 그 부근에 머물러 있으면서, 표면상으로는 무관심한 체하면서 자기의 동생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마음 졸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감시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어머니 요게벳이 열렬한 기도로 그의 아들을 하나님의 보호에 의탁하자, 이 위대한 사명을 띤 이 아이를 지키려고 하늘로부터 파견된 천사들이었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천사들은 보잘것없는 작은 바구니 속의 비천한 휴식처 위를 날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하나님의 섭리로 강가에 나왔던 바로의 공주가 아기가 들어 있는 상자를 보게 되었다. 공주는 그 상자에 대하여 저항할 수 없는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공주의 명령으로 건져진 갈대 상자 속에 있는 아름다운 아기를 보았을 때에 공주는 한눈에 그 아기가 버려진 사연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어린 아이의 눈물은 공주의 동정심을 불러일으켰고, 이런 방법으로라도 귀중한 아이의 생명을 보존해 보려고 했던 알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동정심이 갔다. 순간 공주는 그 아이를 구하기로 하고 그를 자기의 양자로 삼기로 하였다. 그것은 놀라운 성령의 역사 하심의 결과였다.

 몰래 동태를 살피고 있던 미리암은 공주가 아이를 부드럽게 다루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어 가까이 나아가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서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먹이게 하리이까라고 말했다. 그의 제안은 허락되었다. 미리암은 이 기쁜 소식을 가지고 급히 어머니에게로 달려가 알리고 엄마 요게벳을 바로의 딸 앞에 데리고 왔다. 공주는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라고 말하였다. 요게벳은 눈앞에 일어난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지경이 었다. 터질 듯한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 차 아기를 안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의 뺨에 하염없는 감사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선택된 어머니
 하나님께서 어머니 요게벳의 열렬한 기도를 들으셨다. 그녀의 믿음은 보상을 받았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많은 여인이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의 어머니가 될 만큼의 믿음과 용기를 소유한 여인은 요게벳 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여인을 찾으시는 중에 마리아가 선택되었듯이, 장차 구주의 조상이 될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낼 지도자의 어머니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여인으로 요게벳이 선택되었다. 이 믿음의 여인 요게벳은 하나님에 의해 위대한 사명을 이루도록 선택되었던 것이다.

 요게벳은 자신의 간절한 기도를 응답하시고 자기 소망의 꿈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충만하였다. 그녀는 하나님의 섭리의 축복 속에서 이제 마음 놓고 자신의 아들 모세를 양육하는 복된 과업에 착수했다. 요게벳은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아들 모세를 교육하는 일에 전심전력하였다. 그는 자기 아들이 어떤 위대한 사업을 위하여 생명이 보존되었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눈물겨운 교육
 그러나 아들을 교육하도록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요게벳은 오래지 않아 아이 모세를 왕실의 양모에게 보내야 했고, 거기서 그의 아들 모세가 하나님을 떠나게 할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악한 감화에 둘러싸이게 될 것을 알았다. 이 모든 이유는 요게벳의 기도를 더 열렬하게 만들었으며, 그녀는 시간을 아끼어 다른 아이들보다 이 아이를 더욱 부지런히 또 더 주의 깊게 교훈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그녀는 아이의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리와 공의를 사랑하는 정신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하였으며, 부패하게 하는 악의 감화로부터 보존함을 받을 수 있도록 그를 위해 매 순간 열렬히 기도하였다. 모세를 향한 그녀의 교육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요게벳은 모세에게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과 죄를 보여 주고 어려서부터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도와주실 수 있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머리를 숙여 기도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녀는 할 수 있는 데까지 오래도록 모세를 데리고 있고 싶었지만, 그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에 그를 부득불 보내야 하였다. 그 아이는 보잘것없는 오두막집에서 왕궁, 곧 바로의 딸에게로 옮겨 가서 그의 아들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세는 유년 시절에 받은 인상을 잃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 곁에서 배운 교훈들은 잊을 수 없었다. 그 어머니의 교육은 모세를 교만과 궁전의 호화로움 가운데 흘러넘치는 죄악과 방탕함과 악습으로부터 막아 주는 방패가 되었다.

자녀의 운명을 결정하는 어머니의 교육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그가 성취한 위대한 사명은 자녀에게 주는 그리스도인 어머니의 영적 교육 사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증명해 준다. 이 일과 견줄 수 있는 다른 일은 세상에 없다. 자녀의 운명은 상당한 부분이 어머니의 손에 달렸다. 어머니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자녀의 마음과 성품을 계발시키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어머니들은 자녀의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영원을 위한 운명을 꼴 짓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선악 간에 싹이 돋고 열매를 맺을 종자를 심고 있다. 어머니는 화폭에 아름다운 모양을 그리거나 대리석에 그것을 조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기는 의무를 띠고 있다.

 어린 시절에 형성되는 자녀의 품성에 대한 책임이 어머니에게 있다. 부모들은 자녀가 아주 어렸을 때에 그들을 교훈하고 훈련해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자녀는 이 세상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세월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왕으로서 다스릴 수 있는 자격과 성품을 교육하도록 어머니들에게 위탁되었다. 모든 어머니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순간들이 매우 귀중하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어머니의 일은 하나님의 마지막 날에 그 영원한 결과가 밝혀질 것이다. 마지막 심판 때에는 남녀들의 수많은 실패와 범죄가 그들의 어린 시절에 철없는 그들의 발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의무를 가졌던 부모들의 무지와 나태의 결과라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또 천부적 재능과 진리와 성화의 빛으로 세상에 축복을 가져왔던 많은 사람의 성공 원칙들은 그들의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들이었음이 밝혀질 것이다.

 모세는 바로의 궁정에서 최고의 지식을 배웠으며, 시민적, 군사적 훈련을 받았다. 국왕은 모세를 자기의 보좌의 후계자로 삼기로 했고 그리하여 그는 높은 지위를 위하여 교육을 받았다. 애굽의 법에 의하면 바로의 보좌를 차지할 사람은 모두 사제 계급의 일원이 되어야 하였다. 그래서 모세는 세자로서 국교의 비법을 전수하여야 했다. 모세는 열심 있는 학생이었지만 거짓 신들을 예배하라는 권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왕위를 상실할 것이라는 위협도 당했고 그가 히브리 신앙을 고집할 것 같으면 모자 간의 의를 끊겠다는 경고를 공주로부터 받기도 했다. 그러나 천지의 창조주이신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외에는 아무 신에게도 경배하지 않겠다는 그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고,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그 결심은 변한 적이 없었다.

 모세는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 평생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서 보여주었던 그의 투철했던 신앙심은 바로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며 간절한 기도로 교육한 어머니의 신앙 교육의 결과였던 것이다. 유랑민이며 노예였던 한 히브리 여인이 끼친 교육의 감화는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으며, 그 교육의 결과는 얼마나 멀리까지 퍼졌는가!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요게벳과 같은 믿음의 어머니를 찾고 계신다.

건강: 유전자 변형 식품(GMO)이 몰려오고 있다 - 제1부

 최근에 들어 유전자 변형 식품에 대한 논란이 많이 야기되고 있다. 유전자 변형 식품이 무엇이며, 우리의 식생활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그리고 이 식품의 영향과 위험에 대하여 1, 2부에 걸쳐서 연구해 보기로 하자.

GMO의 정확한 명칭은?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유전자 변형 농산물, 혹은 유전자 조작 생물체.

GMO가 무엇인가?
 GMO란 유전 공학 기술 또는 유전자 조작(genetic engineering)기술을 이용하여 한 종의 특정 유전자를 다른 종에 인위적으로 삽입하여 만들어 낸 모든 생물체를 말한다. (예: 물고기 넙치의 얼지 않는 유전자를 넣어 추운 지방에서도 잘 자라게 만든 토마토, 또 염분에 잘 견디는 형질을 벼에 이식하여 해안 습지에서도 경작할 수 있게 만들어진 벼, 농약과 병충해에 끄떡없는 콩, 오래 저장해도 무르지 않는 토마토 등) 현재 많은 GMO 농산물들이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데, 유전자 조작이 벼나 감자, 옥수수, 콩 등의 농작물에 행해진 것을 유전자 변형 농산물이라 부르고, 이 농산물을 가공하여 만든 식품을 유전자 변형 식품이라고 부른다.

 GMO는 일반적으로 생산량의 증대, 또는 유통, 가공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유전 공학 기술을 이용하여 기존의 육종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형질이나 유전자를 지니도록 개발된 농산물이다. 전통적인 품종 개량법은 수정이 가능한 같은 종끼리 교배하여 원하는 형질을 얻고, 자연 속에서 장기간 검증되어 온 것인 반면, 유전자 조작 기술은 다른 종의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삽입하여 단시간에 새로운 종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자연적으로는 결코 생성될 수 없는 방식인 이 방법은 예측할 수 없는 갖가지 부작용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GMO 개발, 어느 정도로 진행되고 있는가?
 미국의 경우 10년간 500여종의 GMO를 개발하고 있는 상태이고, 이 중 시판되고 있는 GMO들은 콩, 옥수수, 감자, 토마토, 호박, 유채 등 여러 작물들인데 대부분 제초제나 해충에 잘 견디고, 장기 유통에 유리하게 유전자 조작된 것들이다. 미국의 작물들 중 70%가 GMO 작물들인데, 대부분을 수출용, 사료용으로 판매하고 있으며,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콩과 옥수수를 90% 이상 수입하고 있다. 한국 내에서는 벼, 고추, 감자, 배추, 양배추, 토마토, 오이, 들깨 등 17개 작물 40품종의 GMO가 실험실, 온실, 야외 격리 재배로 시험 중에 있고, 제초제에 강한 GM 벼와 바이러스에 잘 견디는 GM 감자의 경우 2000년부터 논에서 격리된 채 시험 재배되고 있는 상태이다.

왜 GMO 개발에 몰두할까?
 저장과 유통을 향상시키고, 농약과 해충에 잘 견디는 제품을 만들며, 생산자들과 유통 시장에 막대한 수익을 가져오므로 GM 기술은 각광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더 나아가 품질과 영양 개선 개발 단계로, 또 단백질, 항체 및 효소 등의 유용한 물질을 생산하는 산업으로 이 기술의 방향이 전환되고 있으며, 투자 가치가 높은 미래 산업으로 부상되면서 정보 통신 분야를 능가하리라 예측되고 있다.
 GMO가 최초로 시판된 것은 미국의 사가 개발한 무르지 않은 토마토인데, 과숙과 부패를 억제하여 저장 기간을 늘리고 외양을 향상시켜서 상품 가치를 높여서 식품 가공업자들의 상업적 필요에 부응하게끔 하였다. 또한 미국의 거대 종자 회사인 는 자사의 제초제에만 내성을 갖도록 유전자 조작된 콩을 개발하여 제초제와 콩을 한 세트로 판매한다든지, 터미네이터 기술을 개발해 종자의 생식 능력을 끊어 버려 이들 회사로부터 매년 종자를 구입하도록 하는 판매 전략을 갖고 있다. 그러나 는 불임 씨앗인 터미네이터 기술이 광범위한 반대 여론에 부딪히자 제품을 상용화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유전자 변형 농산물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변형된 생산물을 먹을 때, 이것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어떤 해로움을 가져오는지에 대한 연구나 조사가 턱없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부작용이 아직 한 번도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으므로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 주고 있다. 현재 미미한 수준이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GMO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보고를 살펴보자.

현재까지 제기되고 있는 GMO의 인체 유해 가능성

1.
한 유전자가 다른 종에 도입되는 경우 전혀 새로운 물질이 생산되므로 독성을 나타내거나,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짐.
2. 항생제 내성 유전자가 장내 박테리아와 병원균에 확산되면서 인체 내 항생제 내성을 증대시켜, 인체가 질병에 노출되는 경우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한 항생제나 약품의 효과가 없어지거나 질병을 초래할 수 있음.
3. 수평적 유전자의 이전과 재조합에 의해 다양한 병원균 사이에 병독성이 확산됨과 동시에 새로운 병원성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창출 가능.
4. 세포 감염으로 인하여 질병 바이러스를 재활성시키거나, 운반체(벡터) 자체가 세포 내로 들어가서 치명적인 효과(암 포함) 야기 가능.
5. 유전자가 조작된 작물을 먹으면 인체의 뇌에 교란이 일어날 수 있음.

 
GMO의 부정적인 면
 유전자 변형 농산물이 생육되는 주위 환경의 자연 생태계나 동식물에 미치는 영향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아 위험하다는 주장이 있는데, 그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1. 해충 및 제초제 저항성 GMO가 갖고 있는 저항성 유전자는 쉽게 생태계 속으로 전이될 가능성이 많다. (유전자 조작된 작물이 자라는 밭의 벌이나 나비를 통해 다른 밭의 작물에 교배되므로 GMO가 퍼지게 됨)
2. 해충과 잡초들이 저항성 유전자를 가지게 됨으로써 슈퍼 잡초와 슈퍼 해충이 탄생하게 되어 방제가 더욱 어려워지는 악순환의 가능성이 생긴다.
3. 변종(돌연변이)이 출현하여 생태계를 교란하고, 생물의 다양성이 파괴되고 획일화됨으로써 자연 생태계의 순환 구조를 파괴할 가능성이 생긴다.
4. 유전자가 조작된 씨앗들은 한해밖에 사용할 수 없도록 생산력이 조작되어 있어 특정 회사가 모든 씨앗의 점유권을 가지게 된다.
5. GMO를 먹인 결과 체내 면역력 약화와 뇌 위축 현상 등이 동물 실험에서 입증되었다.

식탁 위의 GMO
 미국에서 시판되고 있는 GMO들은 현재 15개 작물 70여개 품종으로 콩, 옥수수, 감자, 토마토, 호박, 유채 등이며, 제초제 저항, 해충 저항, 과숙 억제, 과피 손상 방지의 특성을 갖도록 만들어져 있다. 이들 중 가장 많이 유통되는 품목은 콩과 옥수수로, 한국은 수입량의 대분분을 미국으로부터 들여오고 있다. 콩은 우리의 주식일 뿐 아니라 각종 가공 식품의 주원료들로서, 장류, 두부, 콩나물, 식용유, 마가린, 두유, 마요네즈 등에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옥수수 또한 콘 샐러드를 비롯하여, 콘스낵, 팝콘, 옥수수유, 물엿, 마가린, 빵, 당면, 콜라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식품에 사용된다.

 또한 콩과 옥수수는 가축 사료의 대부분으로 사용되므로 동물 체내에 그 독성이 쌓이고, 이는 육류나, 우유, 달걀을 섭취하는 인간의 몸에도 고스란히 축적된다. 한국에서 감자는 미국으로부터 날 것 그대로는 수입되지 않으므로 생감자는 안전하다고 볼 수 있으나, 문제는 프라이드 포테이토 등 가공, 냉동 상태로 수입된 것과, 녹말가루, 건조 감자, 당면, 감자 스낵의 경우 수입된 감자 원료를 사용하므로 유전자 조작 식물일 가능성이 높다.

 유전자 조작 식물은 우리의 인체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므로 식품을 구입할 때 GMO 식품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유기농 식품을 구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GMO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과 이에 대한 대비책과 방법은 다음 호 제2부에 다루기로 한다.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을 가능한 한 건강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우리 모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도록 하자.  

반달


서정희

그 모습 그대로가
다가 아님을 압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모나지 않은
빛나는 마음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보이는 그 모습이
다가 아님을 압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당신을 만들고
당신에게 빛을 준
그분을 닮은 모습이 있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가
다가 아님을 압니다.

당신의 모습을 찾는 날
더 밝은 모습으로
어둔 밤
길을 밝혀 줄
당신이 될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보이는 그 모습이
다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감춰진 아름다움을&!

창조 교실: 최고의 항해사, 거북이

 사람들은 여행할 때 배를 타거나 비행기, 혹은 자동차로 합니다. 그런데 여행자들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것은 지도입니다. 자동차 운전자들은 지도나 도로 표지판을 이용하여, 항해사는 지도와 나침반, 항공기 조종사들은 정밀 기계와 레이더를 이용하여 여행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장치들을 전혀 이용하지 않고, 신기하게 그들의 길을 정확히 찾아가는 수많은 동물과 생물들이 있습니다. 이 생물 중의 어떤 것들은 큰 바다와 엄청난 사막을 가로질러 수천 Km나 여행을 한답니다.

 흔히 거북이는 별로 영리하지 않은 존재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바다거북들은 알을 낳고자 엄청난 거리를 항해하는 영리한 존재라는 것이 과학자들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녹색 거북이(Green turtle)인데요, 이들의 항해 경로를 조사하려고 과학자들이 녹색 거북이의 등에 인공위성 송신 무전기를 장착시키고 띄어 보낸 후 인공위성으로 추적하여 보았답니다. 그 결과, 녹색 거북이는 브라질 동해안을 출발하여 대서양의 아선시온 섬까지 장장 4,500Km나 되는 긴 거리를 정확하게 항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섬에서 암컷은 약 100개 정도의 알을 낳아 모래 속에 묻어 두고 떠나서 다시 브라질 동해안으로 돌아옵니다. 모래 속에 묻혀 있던 알에서 1주일 정도 지나면 새끼 거북이가 나오게 됩니다. 새끼 거북은 태어나자마자 바다로 향해 가서, 그 순간부터 홀로 기나긴 항해를 시작하여 부모가 살던 브라질 땅으로 돌아갑니다.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새끼 거북이가 나침반 하나 없이 말입니다. 몇 년 후 이들은 어른 거북이가 되어 또다시 머나먼 대서양 한가운데의 아선시온 섬으로의 긴 여행을 합니다. 누가 거북이에게 이 놀라운 항해 기술을 가르쳐 주었을까요?

 동물들은 이 놀라운 여행술을 이미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며, 그들에게는 최첨단 컴퓨터를 능가하는 고도의 정보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물들이 놀라운 여행을 할 수 있는 이유이지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거북이의 놀라운 여행술을 통하여 우리 인간들이 돌아가야 할 곳은 하늘 본향이라는 것을 말해 주십니다. 완벽한 설계를 통해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에 찬양을 드리면서 우리는 하늘 본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루하루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신앙: 1부 - 사람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진리의 복음이 가져오는 마음의 진정한 변화나 거듭남에 대한 가르침은 현대 기독교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대신 타락된 본성을 타고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로 모든 것이 덮어지므로 무조건 믿고 감사하라는 식의 안일한 복음주의의 가르침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요즈음 기독교의 슬픈 현실은, 복음이 시사하는 바인 진정한 마음의 변화나 새로운 삶과 생애, 그리고 온전한 사람으로 다시 거듭나는 진리에 대한 가르침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진정한 변화를 수반합니다. 만일 당신이 오랜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복음의 능력으로 새롭게 거듭나 새사람이 되는 경험에 대하여 생소하다면, 이 기사는 당신에게 한 줄기 생명수가 될 것입니다.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진정한 변화와 거듭남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 편집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요 3:4).
 발명왕 에디슨이 어렸을 때에 거위가 알을 품는 것을 보고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저 거위가 무엇을 하는 거죠? 알을 부화시키려고 품는 것이라는 설명을 들은 에디슨이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해가 질 때까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엄마가 걱정되어 찾아 헤매던 중, 이웃집의 헛간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에디슨을 발견하였다. 놀라서 물어보는 엄마에게 에디슨이 대답하였다. 지금 알을 까려고 거위 알을 품는 중이에요!
 
 사람이 알을 품어 부화시킨다는 사실이 인간의 눈에 불가능하게 보이듯이, 요즈음 그리스도인들에게 온전한 새사람으로 거듭난다는 진리는 거의 불가능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성경에 거듭남에 대한 진리의 말씀이 확실하게 언급되어 있지만, 그것은 실생활에서 실현하기 불가능한 설화 같은 이야기로 들려질 뿐, 거듭남에 대한 진정한 필요성이나 정확한 개념에 대하여 강조되거나 가르쳐지는 일은 드문 것 같다.
 
 현재 기독교 안에서 전해지는 복음과 가르침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만을 강조하는 반쪽만의 복음들이기 때문에, 진정한 거듭남과 전적인 변화와 개혁, 그리고 성화의 생애를 살기를 소원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목마름과 갈등을 해결해 주지 못하고 있다. 올바른 영적인 지식은 올바른 영적 경험을 가져오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성경의 진리에 확고한 기반을 둔 온전한 거듭남에 대하여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거듭남, 그리스도인이 이루어야 할 비밀
 밤중에 하늘의 비밀을 알고 싶어서 은밀한 회견을 자청하고 찾아온 연륜 많은 니고데모에게, 하늘의 위대한 교사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도직입적으로 위대한 하늘의 경륜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거듭남에 관한 진리였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역대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과제는 예수께서 분부하셨던 위대한 하늘의 경륜, 곧 거듭남이라는 하늘의 비밀을 이루는 것이 되어 왔다.

 거듭남,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루고 추구해야 할 최종 목표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이기도 하다. 성경은 우리가 거듭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아니, 예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전의 본성, 곧 혈육으로 나고 육신에 속해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 영적인 죽음과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영적인 탄생을 거치지 않고서는 하늘에 들어갈 수 없다.
 거듭나는 것은 새로운 동기와 새로운 성향과 새로운 취미를 갖는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애가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된다. 진정한 개심은 악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유전적이거나 습관화된 성향들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 사람이 거듭나는 것이 가능한가? 타락한 본성을 타고난 인간이 신의 성품과 마음을 이루는 일이 과연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사람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과거의 매여 있던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람이 되어 오직 성령과 생명의 법을 따라 의로운 생애를 살 수 있다는 것이 실현 가능한 진리인가?

그리스도인의 갈등
 진실한 신앙생활을 하기 원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중에 많은 사람이 신앙의 갈등을 겪고 있다. 그 갈등은, 오랜 신앙생활을 통하여서도 진정한 변화가 찾아오지 않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며, 자신의 죄의 욕심과 타락한 본성의 욕구에 패배당하는 삶을 매일 살아가는 자신에 대하여 느끼는 허탈감과 좌절감에서 기인한 것들이다. 그래서 타성에 젖은 자신의 신앙생활과 지속하는 패배에 좌절과 회의를 느끼며, 또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과 죄에 대하여 승리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사람들은 외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받을 수밖에 없다!라고.

 자주 화를 내고, 실수하고, 또한 죄를 범한 후에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시달리는 중에 많은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나는 죄인이니까 할 수 없다.라고 하며 스스로 구원의 안정감을 만들어 내어 자신을 위로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자신과 죄의 유혹에 승리하는 생활, 마음속에 자리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로 모든 죄와 악한 것을 이기고 승리하며 살 수 있는 진정한 신앙생활의 비결을 알고 싶은 갈망이 있다. 당신도 이런 갈등과 갈망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다음에 계속되는 기사들을 읽을 필요가 있는 사람이다.

서로 다른 거듭남의 과정
 사실 유한한 지력을 가진 인간이 구속 사업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 오묘는 인간의 지식의 한계를 초월한다. 그러므로 구원의 근본 도가 되는 거듭남이라는 무한한 하나님의 경륜을 유한한 인간의 개념이나 어떤 공식이나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를 토대로 인간이 유추해 낼 수 있는 최대의 한도 내에서 거듭남에 대한 가르침과 단계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가진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나는 과연 거듭났는가?라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은, 과거의 죄된 생애를 청산하고 급작스런 회개와 개심의 경험을 한 어떤 사람의 간증집회를 참석하고 나면 더 마음속에서 집요하게 떠오른다. 정말 나도 거듭났을까&? 흔히 다른 사람의 생애에 나타난 강한 성령의 회개케 하시는 역사가 자신의 생애에는 일어나지 않은 관계로 스스로 당황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거듭나는 과정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서로 다른 것이다. 이에 대한 특정한 공식이 문자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개개인들에게 역사 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그 사람의 개성과 환경과 처한 상황에 따라 사뭇 다르므로 그 과정이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경험,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아간 거듭남의 경험을 한 사람은 그것이 거룩한 실재임을 깨달으며 자신만의 그 경험을 알고 있다.
 성령의 역사는 흔히 바람으로 표상된다. 잎사귀와 꽃을 살랑거리게 하면서 바람 소리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들리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것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성령이 사람의 마음에 역사 하는 것도 이와 같다. 바람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거듭나는 과정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회심의 과정을 확실한 시간이나 장소를 대어 말할 수 없고 그 모든 환경들을 자세히 추적할 수 없다. 해서, 이것이 그 사람이 회심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바람과 같이 보이지 않는 힘으로 사람의 마음에 끊임없이 역사하고 계신다. 받는 사람이 혹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조금씩 영혼을 그리스도께 이끌리게 하는 감명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감명들은 그분을 명상함으로, 혹은 성경을 읽거나 실제로 목사의 말을 들으므로 받을 수도 있다. 갑자기 성령께서 더욱 직접적인 호소를 하실 때에 그 영혼은 기쁘게 자신을 예수께 바친다. 많은 사람은 이것을 가리켜 갑작스런 회심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오랜 구애, 곧 꾸준하고도 지속적인 과정을 거쳐서 호소하신 결과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고의로 거절하지만 않으면 그 역사에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듭남의 앞 단계
 바람이 불면 가지가 흔들리듯이,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려고 항상 우리 마음속에 역사 하시는 성령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기적을 일으키신다. 그 기적은 다름 아닌,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들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인간관계 속에서, 또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투쟁과 갈등과 좌절 속에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그리하여 영안을 떠서 그 사건 너머에 존재하는 깊은 의미들을 깨달을 수 있도록 역사 하신다.

신앙: 2부 - 거듭남으로 가는 계단

첫 번째 계단,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거듭남의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악한 죄인인지를 깨닫지 못하면 회개할 수 없으며, 진정한 회개 없이 거듭남은 불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십자가는 우리 자신의 헐벗고 부족한 모습을 보게 하며,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해준다. 사람이 십자가에 들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얼마나 악한 것인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신다. 그분의 사랑만이 단단하고 딱딱한 육신의 자아의 껍질을 녹일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과도 누구의 사랑과도 견줄 수 없이 큰 사랑이지만 인간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관계인 어머니의 사랑으로 성경에 표현되어 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그리고 그분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하여 가장 잘 현시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십자가를 통하여 그분께서 말로 할 수 없는 사랑과 긍휼, 그리고 무한하고 무궁한 자애(慈愛)를 가지고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기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얼마나 구주가 필요한 존재이며, 십자가의 구원이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깨닫게 하시려고 많은 사건과 섭리들을 허락하신다. 아무런 시련이나 재난이 없이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부분 우리 연약한 인간들은 어려운 시험이나 고난을 겪고 난 후에야 깊은 깨달음을 얻고, 자신의 죄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 는 눈을 뜨게 된다. 고난과 고통을 통하여 비로소 영적인 눈이 떠진 인간이 예수님의 사랑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것이 바로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십자가에서 비치는 빛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그 사랑은 우리를 그분께 이끈다. 만일 우리가 이 이끄심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를 슬퍼하는 가운데 십자가 밑으로 인도함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말로 다할 수 없는 따뜻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계속해서 주님을 슬프시게 하고 배은망덕과 반역으로 일관된 생애를 살아왔음을 인식하게 된다. 십자가 아래서 인간은 자기의 죄를 용서하려고 생명을 주신 구세주 예수님,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를 버리고 가장 귀중한 하늘의 선물을 모독해 온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죄가 계속해서, 그것도 직접,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상처를 받아 피가 흐르는 그분의 심장을 찔러 온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넓고 어둡고 깊은 죄의 심연(深淵)에 의해 하나님과 분리된 자신을 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느낀다.

 자신이 죄인임을 통렬하게 느끼지 않는 사람은 거듭나야 하는 필요성을 깨달을 수 없다.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대하여 고뇌하고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 영적인 자만과 자족감 속에 빠져서 자신의 죄됨을 절실히 느끼거나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거듭남으로 가는 첫 번째 단계에 들어갈 준비조차 되지 않은 사람이다. 자신의 부족한 상태에 관하여 깨닫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는 절규를 처절하게 외치는 사람만이 거듭남으로 가는 첫 번째 계단에 올라선 사람이다.

두 번째 계단, 회개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아라(행 3:19).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겔 36:25~26).


 자신의 진정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죄를 깨달은 사람은 주님 앞에 크게 뉘우치고 자복하는 회개의 계단에 들어서게 된다. 회개란 죄를 슬퍼하고 그 죄에서 완전히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가 너무 싫어서 다시는 그 죄를 짓고 싶지 않은 상태에 이르는 것을 회개라고 부른다.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볼 때에 구속의 오묘한 이치가 우리의 마음을 깨우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로 이끄신다. 예수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생명을 버리기로 작정하시고, 또 하나님 되심을 포기할지라도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모든 것을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측량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을 죄인이 주목할 때에, 그 사랑이 심정을 부드럽게 하고, 마음에 감명을 주고, 심령에 통회하는 생각을 일으킨다.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쳐다보고 주목하도록 성령께서 역사 하실 때에, 인간은 자신의 악함과 심령에 깊이 뿌리 박힌 죄를 보고, 죄가 무엇인데 죄를 범한 사람을 구속하려고 그처럼 큰 희생이 요구되었는가? 내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고 이 모든 사랑, 고난, 굴욕이 요구되었는가?라고 부르짖을 것이다. 그리하여 죄의 악한 것을 가장 절실히 깨닫게 되는 그때에, 주님께서 베푸신 그 무한한 희생을 얼마만큼 깨닫는 그때에, 그 마음은 회개와 통회로 녹는 것이다. 그 악한 죄를 다시는 반복하기 싫을 만큼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죄의 악함이 몸서리치게 싫어지게 되는 이 아름다운 회개는 하늘에서 주시는 선물이다. 이 회개의 선물이 과거의 죄된 생애를 청산하게 하고 새로운 태어남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세 번째 계단,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
 많은 그리스도인이 거듭나기를 원한다. 그러나 거듭남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거듭남을 마치 감정적인 황홀감이나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와 역사를 뜨겁게 경험하는 감정적인 어떤 느낌쯤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거듭남이란 무엇인가? 거듭남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성경은 거듭남을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말한다(고후 5:17). 즉, 이전의 모든 것, 죄된 옛 생애, 옛 습관, 옛 성질, 죄된 과거의 생애를 청산하고, 예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 주님과 합하여 새로운 생애, 의로운 생활을 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온전히 순종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

심히 죄된 자신의 모습을 마음 아파하고 통회하고 회개할 때, 이제 다시는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고 싶은 마음이나 과거에 답습하던 죄를 반복하고 싶은 마음이 완전히 없어질 때, 자신을 두르고 있던 죄의 껍질과 굴레가 깨어지고 자아가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굴복게 될 때, 그리고 다시는 예수님을 슬프게 하는 그 죄를 반복하여 짓고 싶지 않은 열망이 가득 찰 때, 그때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믿음을 통하여 사람의 심령에 새 생명을 낳는다. 회개와 그리스도의 보혈의 용서를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 성령께서 새 생명을 나게 하시는 것이다.

죄의 결과의 뼈아픈 고통을 겪으며,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고 겸손하고 낮아진, 통회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 앞에 굴복한 인간의 마음속에 이제는 새로운 능력이 점령한다. 그리하여 사람의 능력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신비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초자연적인 요소를 가져다주는 불가사의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이며,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과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는 신비한 역사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변하고, 마음 본바탕에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쓰여, 외형적으로 계명을 지키는 생애가 아니라, 마음이 저절로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지키게 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역사이다.

냇물이 맑아지려면 먼저 냇물의 근원인 샘이 맑아야 하듯이, 마음의 냇물이 맑아지려면 먼저 마음의 샘이 정결해져야 한다. 이처럼 거듭난다는 것은 옛것을 변경하고 개량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 변화되는 것이다. 자신과 죄에 대하여는 죽고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 나오는 것이다. 바람 그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고 느낄 수 있는 결과를 드러내듯이, 영혼에 역사 하시는 성령의 활동도 그 구원하는 능력을 체험한 사람의 모든 행위 가운데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그는 거듭나게 되고 그의 생애는 변하게 되는 것이다.

죄된 생각은 사라지고 악한 행위와는 인연을 끊게 된다. 사랑과 겸손과 화평이 분노와 시기와 분쟁을 대신한다. 기쁨이 슬픔을 대신하고 용모는 하늘의 빛을 반사한다. 아무도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이런 역사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리고 아무도 환하고 강렬한 빛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사람이 믿음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때에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능력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령께로 새 생명을 받은 사람의 사상과 욕망은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게 되고, 마음과 정신은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으로 새로 지음을 받는다. 거듭남, 그 새로운 태어남의 감격과 환희를 경험한 사람의 마음과 정신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기록되어 그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시 40:8)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이 거듭날 때 마음은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며 동시에 하나님의 계명과도 일치된다. 이러한 강력한 변화가 죄인에게 생기면,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죄악에서 거룩함으로, 범죄와 반역에서 순종과 충성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남, 다시 태어남의 신비이다.

신앙: 3부 - 더 중요한 거듭남 이후의 삶

 이제 막 회개하고 거듭나는 경험을 한 그리스도인들이 기뻐서 이렇게 외치는 것을 듣는다. 저는 거듭났는걸요,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어요!

 죄를 용서받고 회개의 경험을 통해 다시 태어난 기쁨과 감격스러움 속에서 그렇게 행복하게 외치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그러나 거듭남의 경험을 한 후에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빠지게 되는 갈등과 좌절의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리고 이것이 다만 진정한 그리스도인 경험을 시작하는 첫걸음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신앙의 완성을 다 이루었다고 기뻐 외치는 소리라면, 거기에는 조금 생각할 여지가 있다. 그런데 거듭남의 뿌듯하고 행복한 경험을 했음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죄의 소욕과 욕심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을 보고 양심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깜짝 놀라서 부르짖는다. 아니, 다 회개하고 거듭났는데, 왜 이런 욕심과 생각이 다시 머리를 드는 걸까? 거듭남은 중요하다. 그러나 거듭난 이후의 삶, 거듭난 후에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거듭난 후에 어떻게 그 거듭남을 유지하는 신앙생활을 살 수 있는지, 어떻게 죄에 승리하며 성화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가에 대해 올바른 가르침을 배우지 못한 이유로 혼란스러워한다.

 먼저, 한 가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거듭났다.라는 것은 마음이 거듭난 것이지 육신이 거듭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이 점을 알아야 거듭난 이후에 올바른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거듭났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과거와 같이 육신의 타락한 정욕과 욕심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성령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다는 뜻이지, 우리의 육체가 더는 육신의 소욕과 욕심이 일어나지 않는 새로운 육신으로 바뀌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번 거듭난 것으로 믿음의 도를 다 이룬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진정한 신앙생활을 위하여 첫발자국을 내디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태어났다는 것은 영적으로 아기라는 말이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는 먼저 기는 법을, 그리고 일어서는 법을, 그리고 걸음마를 떼는 법을, 후에는 넘어지지 않고 잘 걸어가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러므로 거듭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 거듭남을 유지하며 살아가는가, 어떻게 그 순결하고 깨끗한 회개의 상태를 보존하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거듭남을 유지하는 삶이란 죄에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말한다. 옛 자아는 죽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사는, 자신과 세상과 죄에 승리하는 생활을 사는 것을 말한다.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함께 공부하여 보기로 하자.

거듭남을 유지하는 비결, 승리하는 삶의 비결
1. 올바른 선택을 해라
올바른 선택을 해라! - 거듭남을 유지하며 승리의 생애를 살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은 이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8).
 거듭난 사람은 매일의 삶에서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즉, 매 순간 성령을 좇고 따르는 선택을 해야 한다. 성경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거듭나고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육신이 여전히 영과 대항하여 싸우는 것을 주지하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개심하여 성령의 지배 아래로 들어갈 때에, 우리가 가진 육체에서 분리되어 더는 시험받거나 갈등과 투쟁이 없는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라는 뜻이다.
 
 비록 거듭났다 할지라도, 마음속에 주님께서 계시고 성령의 지배 아래서 산다 할지라도, 육체는 여전히 변하지 않고 남아 있고 또 타고난 유전자나 후천적으로 배양된 습관들이 계속 남아있으므로 육신에 속한 죄의 욕심이나 소욕이 올라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은 이럴 때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라 (롬 8:13).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 3:5).
 거듭났어도 이 모든 죄악이 육신 안에 있으므로 만일 육신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허용한다면 과거에 우리를 다스리던 그 모든 죄된 성질들이 우리를 다시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께서 우리를 지배하시도록 굴복하면 육신의 모든 것이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을 유지하는 비결과 죄에 승리하는 비결은 올바른 선택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 곧 성령을 좇아 행하는가 육신의 소욕을 좇아 행하는가 하는 관건에 달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말씀하신다. 거듭난 사람은 거듭나던 순간에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던 헌신을 늘 기억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도록 매일 자신을 주님께 바치며, 매 순간 성령을 따라 사는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힘은 죄의 힘보다 훨씬 능력이 있다. 주님께 나아와 그분의 손을 붙잡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결단코 그들의 손을 놓지 않으실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손을 놓지 않는 한 말이다.

2. 죄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간주하라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라! - 거듭남을 유지하는 비결, 죄에 승리하는 두 번째 비결은 이것이다. 이것은 많은 그리스도인이 별로 생각하지 않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주제 중의 하나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오 &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이처럼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2,3,4,11).
 
 성경은 우리에게, 거듭난 사람 즉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침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새롭게 태어난 경험을 한 사람은,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라는 뜻이 무엇인가? 사람들은 흔히 육신의 생각이나 감정이 올라올 때, 그 감정이나 생각 자체가 자신인 줄로 여긴다. 그래서 그 끓어오르는 감정에 휘말리고 육신의 생각에 휩싸여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나머지, 감정이 느껴지는 대로, 또는 감정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 버리거나 떠오른 그 생각이나 감정 때문에 고민하거나 좌절을 하며 고뇌한다. 그러나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잘 알아야 한다. 왜 바울이 그런 권면을 했는지를.

 비록 우리가 거듭났다 할지라도, 죄된 육신을 가진 한, 육신의 감정이나 생각, 또는 유혹들을 떠오르지 못하게 하거나 생기지 않도록 막을 수는 없다. 이런 육신의 것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올라오는 모든 육신의 감정이나 생각들을 부인하고, 곧 죄에 대하여는 죽은 것으로 여기고 그것에 동조하지 않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에 더 나아가 이제는 죄의 사슬에서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또한 예수님과 합하여 새롭게 태어난 나, 주님에 대하여 그리고 의에 대하여 살기로 작정한 새로운 나를 진정한 자신으로 여기며 주님과 합하여 함께 살아가는 것뿐이다.그러므로 육신의 끓어오르는 감정이나 생각 자체는 진정한 나가 아니다.
 이제는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하나가 된 새로운 나가 진정한 나인 것이다. 물론 우리가 그대로 지닌 육신에서 옛날과 같은 감정과 생각과 습관들이 올라와서 우리를 지배하려 하고 넘어뜨리며 휘두르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 육신의 감정 그 너머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때 우리는 육신의 변덕스러운 감정들과 생각들은 진정한 나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고, 죄에 속한 육신의 자아는 죽은 것으로 간주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사는, 그리고 주님의 임재 속에서 주님과 하나가 되어 사는 새로운 나를 진정한 나로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이것이 거듭남을 유지하는 비결에 대하여 설명해 주는 사도 바울의 말이다.

3.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게 하라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역사 하게 하라- 거듭남을 유지하는 비결, 죄에 승리하는 세 번째 비결은 이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롬 5:5, 빌 2:13). 우리가 죄의 유혹을 이기고 죄의 소욕을 이길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가 죄를 이기게 하는 복음의 능력을 알고, 성경의 이론적인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 할지라도, 또한 올바른 편을 선택하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방법들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또한 과거의 크게 거듭나는 경험을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매 순간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역사 하시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능력이나 활력이 모자랄 것이며, 거듭남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일이 힘들어지거나 선을 행하는 일에 피곤하고 낙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매일 묵상해야 한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속에서 한 번이라도 사라지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늘 하늘을 향하여 열어 놓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영혼 깊은 곳에 늘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사랑으로 좌정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아무리 육신의 소욕이 강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그 사랑의 관계에서 오는 평안과 기쁨을 맛본 사람에게 그 세력은 힘을 잃는데,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교제에서 얻는 무한히 충만한 기쁨과 행복은 죄악이 주는 잠깐의 낙과 비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아무 가치 없는 인간들을 위하여 쏟아부으신 그 깊은 사랑과 하늘 구원의 선물들을 우리가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의 자아를 매 순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은 쉬워지며 죄를 이기는 일이 쉬워진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 속에 소원을 일으키셔서 행하게 하시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므로, 거듭난 사람들 즉 성령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속에 부어진 바 된 사람들의 생애에서는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고 계명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생기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서, 성령으로 하나님의 법을 마음속에 기록하여 주시는 경험이다(히 10:15,16 참조).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마음에 기록된 사람은 매 순간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하여 바치고 성령의 인도를 따르게 되며, 그리하여 매일 죄에 승리하는 거듭남의 경험이 지속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거듭난 사람의 생애에 찾아오는 참된 변화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그 감격스럽고 기쁨에 찬 순간이 항상 지속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은 원한다. 거듭남의 순간에 느끼던 환희와 희열이 늘 신앙생활을 지배했으면 하는 생각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자신의 신앙생활이나 감정에 별다른 느낌이 없으면 불안감을 느끼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그러나 진정한 복음을 이해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착각 속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거듭남이란 어떤 황홀한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강력한 성령의 역사 속에서 과거의 모든 죄를 뜨거운 눈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의 기쁨을 체험할 때, 또 하나님 앞에 다시는 옛 생애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새로운 결심으로 헌신할 때, 마음이 뜨겁고 감격스러운 희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듭났다고 해서 그런 환희에 찬 감정이 지속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그것이 거듭났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거듭남과 즐거운 투쟁의 생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마음을 바치고 거듭난 사람의 생애에는 들뜬 환희의 감정보다는 하나님과의 화평으로 말미암아 오는 지속적인 평안과 변덕스럽지 않은 거룩한 사랑과 계속적인 헌신과 순종이 나타난다. 사실 거듭남의 생애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친 상태에서 육신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생애이기 때문에, 환희와 감격이 계속되는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지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매 순간 자신의 뜻과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거룩한 헌신을 계속 주님께 드리려고 자신과 싸우는 영적인 투쟁의 생애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 투쟁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사랑하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생애에 당연히 수반되는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에 행복한 일이 될 것이며, 거듭난 사람이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겪는 그 과정은 기쁨이 될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거듭난다는 것은 육신에서 완전히 벗어나 분리되는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만 육신의 모든 악한 성정과 욕심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받는 것이라는 것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거듭났다고 해서 더는 시험이 없는 영역으로 들어가 영적인 싸움이 그친 편안한 상태에서 품성을 계발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험이 있는 곳에서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받으면서 품성을 계발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기 위한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지만,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목적은,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율법을 지키시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온전한 순종과 승리의 생애를 살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 주시기 위한 목적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순종의 생애를 본보기로 보여 주시고 구원의 능력을 믿을 수 있도록 하시려고 오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하신 예수의 믿음을 배워서 늘 성령의 인도를 따르며 거듭난 생애를 계속 유지하며 살 때, 우리의 생애는 예수님의 생애처럼 승리의 생애가 될 수 있다.

마음에 이르러온 참된 변화
 성경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사랑의 능력은 우리를 죄에서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죄를 미워하며 계속 주님을 향한 헌신의 생애를 살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바치는 헌신의 생애를 살아갈 때, 우리의 마음과 삶에는 참된 변화가 이르러 올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음속에 임재하셔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에 항상 복종하고 순종하는 사람의 생애에는 변화가 따르게 되어 있다.
 언제나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 늘 최상권을 잡으려는 야심이나 사단의 대표적인 품성이라고 할 수 있는 자아에 대한 사랑, 질투, 이기심, 그리고 자존심 등이 사라지고, 그 대신 겸손과 사랑과 온유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사려 깊음, 그리고 화평과 조용한 기쁨이 마음속을 채울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또 주님과 혼연일체가 되어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최대의 낙이 될 것이다.

승리하는 생애
 계시록 14장 12절은 마지막에 나타날 하나님의 남은 백성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특징은 거듭난 사람의 성품을 가리킨다. 거듭난 사람의 생애와 성품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아름다운 변화가 이루어지며, 예수님과 같은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예수님처럼 승리하는 생애를 살게 된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주님의 귀중한 피의 힘으로 우리는 승리 할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타고난 못된 성벽들을 이길 수가 있으며, 사단의 유혹을 이길 수 있으며, 자신과 세상을 이길 수 있다.
 거듭난 사람은 매일의 생애에서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예수의 성품을 가지고 살 수가 있다. 성령의 능력이 육신의 힘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처음 거듭날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속에 매일 새 마음을 창조하실 수 있으며, 우리를 매일 다시 살리시는 일을 이루실 수 있다. 거듭남의 생애를 지속하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 죄에 승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매일 자기를 굴복시키고 자기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치는 실제적인 경험을 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누구든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가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언제나 티끌 같은 존재로 여기며 겸손하게 성령을 좇아 살기로 선택하고 굴복하는 한, 거듭남은 지속할 것이며 우리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신앙: 4부 - 늑대를 양으로 만드는 방법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 인간에게는 죄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생겼다. 그리하여 인간은 태어날 때 죄의 성향이 있는, 죄악으로 기울어지는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다. 하나님의 성품과는 거리가 먼, 죄된 품성을 가진 인간이 정말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거룩한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

늑대와 양 이야기
 성경은 늑대 같은 본성을 가진 인간이 양같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또 변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늑대와 양의 이야기를 통해 참된 변화, 즉 어떻게 의롭게 변화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È 양 우리 속의 늑대 : 시골에 한 농부가 살았는데, 어느 날 산속을 걷다가 무슨 소리가 나서 길 옆 숲 속을 살펴보니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늑대 새끼가 울고 있었다. 불쌍한 생각에 그는 늑대 새끼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잘 길렀다. 이듬해 봄이 되었을 때, 농부는 늑대 새끼를 양 우리 안에 풀어 주어서 자유롭게 풀밭을 뛰어놀도록 하였다. 늑대 새끼는 우리 안으로 들어가자 곧장 멀리 풀밭에서 풀을 뜯는 양떼들에게 달려갔다. 자신의 모습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늑대 새끼는 자신을 양으로 착각하였다. 양들을 보면서 아, 나도 저렇게 생겼겠구나!라고 생각하며, 풀밭에 이리저리 뒹굴고 풀을 함께 먹는 시늉을 하기도 하였다. 얼마 후에 늙은 양이 다가와서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 늑대는 나는 양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늙은 양이 말하기를 네가 양이라고? 너는 양이 아니라 늑대란다. 자신이 늑대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늑대는 너무나 놀랐다. 그래서 늙은 양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소원을 말하였다. 나는 정말 양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늑대가 되기 싫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모든 노력을 다하여 양이 되고 싶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새끼 늑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양을 열심히 흉내 내면서 살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도 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정말 늑대가 양으로 변할 수 있는가? 결코, 양으로 변할 수 없다. 인간의 방법과 노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하다. 거듭나기 전에는 그것은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È 늑대의 본성 : 참 이상하게도 늑대가 양이 되고 싶어서 양이 먹는 음식을 먹고, 양들처럼 울고 양들처럼 뛰려고 애썼지만, 발톱은 여전히 날카로워지고, 이빨은 점점 뾰족하게 자라났다. 양들을 늑대로부터 지켜주는 울타리를 보면 마음이 놓이고 안전감을 느껴야 하는데 울타리를 볼 때마다 왠지 마음이 무겁고 답답했다. 마음은 양이 되고 싶었지만, 육신의 본능은 늑대였다. 마치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고 싶지만, 육신의 본능에 끌려다니기 때문에 도무지 선을 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상태와 같이&. 그러던 어느 날, 양들과 사소한 일로 다투다가 늑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친구 양의 목을 물어 죽였다. 피를 본 늑대는 너무나 놀라서 울타리를 넘어서 산으로 도망하였다. 늑대는 그제야 자신은 양이 아니고 양이 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모태로부터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도 거듭나지 않으면 늑대와 같은 본성을 가지고 살게 된다. 유모차에 실려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어머니 등에 업혀서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지만 양이 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면 늑대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교인의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어렸을 때부터 양처럼 식사하고 양처럼 옷을 입고 자랐지만, 참 신앙을 배우는 대신, 양의 흉내를 내는 일에 능숙해진다. 양의 모습으로 찬송을 부르고 양의 목소리로 기도하고 양처럼 말하는 기술을 일찍부터 터득하지만, 마음은 언제나 양 우리 밖의 세상을 향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라난 아이가 나이가 들게 되면 어렸을 때부터 늘 마음 한구석에 숨어 있었지만, 주변의 눈치 때문에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마음껏 해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의 계명과 원칙은 그에게 있어서 억압과 귀찮은 굴레로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늑대와 같은 죄의 본성을 만족하게 해 주는 생활과 취미를 즐기면서 살고 싶어 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세상을 즐기려고 교회를 떠나게 된다.

È 늑대의 시각 : 양은 목자가 쳐놓은 가시나무 울타리 속에서 거하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곳은 자신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양은 자신의 마음과 생활을 안전하게 보존해 주는 울타리인 율법과 계명을 결코 무겁거나 귀찮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3.

 늑대의 눈에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애가 너무나 재미없는 삶처럼 보인다. 성경이 요구하는 원칙에 대해서 불평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직 늑대의 본성에 지배되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늑대는 자신의 본성을 즐겁게 하는 쾌락과 재미를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을 포기하는 것을 굉장한 손해와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친구 양을 죽이고 울타리를 뛰어넘어 숲으로 달려간 늑대, 밤이 되면 숲 속을 다니면서 힘없는 토끼와 사슴들을 해치는 늑대를 생각해 보라. 늑대는 그러한 일들에 쾌감을 느끼고 생의 환희를 느낀다. 늑대는 그러한 종류의 일에서만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어느 날 아침, 푸른 풀밭에서 풀을 뜯는 양떼들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그들과 같은 평화로운 삶을 생각해 보지만, 그러한 생각은 한순간에 지나가고 다음과 같은 생각이 그의 머리를 채운다. 나는 저 양들처럼 울타리에 갇혀서 살 수 없어. 거기에는 아무런 낙도 없고, 즐거움도 없어. 왜냐하면, 나는 양이 아니고 늑대이기 때문이지. 그리스도인은 계명이 하라고 명한 것을 행하고, 하지 말라고 금한 것들을 하지 않음으로써 참된 행복을 소유하게 된다. 양의 눈에는 울타리가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벽으로 보이지만, 늑대의 눈에는 울타리가 자신을 가두어 놓는 교도소의 높은 장벽처럼 보인다.

변화를 가져오는 완전한 복음과 실패를 가져오는 불완전한 복음
 성경은 어떻게 늑대로 태어난 인간이 양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으로 얻게 되는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란 늑대가 양으로 변화되는 과정과 방법에 대하여 설명한 것이다. 현대 기독교에는 성경의 복음과 다른 여러 가지 가르침들이 난무하고 있다. 변화를 가져오는 복음과 그 반대의 가르침들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여 보자.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존재하는, 늑대가 양으로 변화되는 과정과 방법을 설명하는 가르침 중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네 가지가 있다.

1. 율법주의 또는 완전주의
 이것은 늑대도 양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가르침이다. 늑대를 양으로 변화시키려고 늑대의 모습을 완벽하게 바꾸어 나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먼저 양의 탈을 씌우고 목소리를 비슷하게 만들며 발톱도 부드럽게 깎아 주고 털을 하얗게 물들인 다음에 파마를 해주면 진짜 양은 아니지만, 양과 마찬가지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겉모습과 행위를 완전하게 다듬어가면 언젠가는 늑대가 양이 되어서 구원에 이른다는 가르침이다. 이것을 믿는 사람 중에는 늑대의 본성이 올라오지 않도록 굶기면 힘이 없어져서 맥을 쓰지 못하게 되어 말을 잘 듣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늑대는 굶겨도 늑대일 뿐이다. 늑대를 양으로 만들려고 늑대에게 피와 고기를 끊고, 양이 좋아하는 풀과 채소를 먹임으로써 성격을 온순하게 만들 수 있다고 노력하게 하는 가르침이 이것이다. 이런 가르침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율법주의나 완전주의를 가르친다. 만약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하늘에 가면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말할까? 
 하나님, 드디어 저는 해냈습니다. 그동안 이곳에 오려고 먹을 것도 먹지 못하고 입을 것도 입지 못하면서 정말 고생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하늘에 와보니 괜찮네요. 제가 저 아래 세상에서 듣기에는 저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셨다고 하던데 제 집은 어디입니까? 이것이 율법주의자들의 태도이다. 자신의 희생과 공로를 내세우면서 이웃과 하나님께 감사하다.라는 말을 듣기 원하는 사람들이다.

2. 자유주의 복음
 이 가르침은 늑대로 태어났기 때문에 늑대처럼 살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늑대를 양이라고 칭의해 주심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늑대는 어차피 늑대일 수밖에 없는데 채식을 하면 뭐하고, 시골로 가서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뭐합니까? 어떻게 늑대가 양처럼 순종할 수 있나요?라고 말한다. 이 가르침은 늑대는 결코 양이 될 수 없다고 가르친다. 이런 가르침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이것을 신신학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하늘에 가면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말할까? 하나님, 늑대로 살던 나를 이렇게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나 같은 늑대도 구원해 주시면서 왜 마귀와 악한 천사들은 구원해 주시지 않나요? 그들이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들의 변화되지 않은 성품 때문에 하늘은 또다시 선과 악의 대쟁투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3.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가르침
 이것은 신신학의 일종인데, 늑대도 믿기만 하면 양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나는 더는 늑대가 아니고 양이라고 우기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가르침이다. 비록 성품과 생애는 늑대이지만 내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구원해 주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르침이다. 한 번 믿기만 하면 내 생애와 성품이 어떠하든지 간에 구원은 보장되어 있다고 믿는 가르침인데, 이런 가르침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Once saved, always saved,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다.

 이런 사람들도 하늘에 가면 신신학을 믿는 사람들과 비슷한 말을 한다. 하나님,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게는 하늘 생활이 좀 지루할 것 같습니다. 좀더 재미있는 곳은 없습니까? 하나님, 질문이 하나 있는데,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돌아가셨나요? 어차피 양들과 늑대들을 모두 도매금으로 구원해 주실 것인데 쓸데없이 십자가에서 고생하실 필요가 없잖아요. 이런 사람들은 의와 선이 가득한 하늘에서 지루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늘에서 거룩하지 않은 것들을 퍼뜨리게 될 것이다.

4. 성경의 복음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아무리 잔인한 늑대라고 할지라도 양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예수께서 니고데모라고 불리는 늑대에게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다. 네가 진정 양이 되고 싶으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라는 가르침이다. 이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세리처럼 기도하게 되고, 옥합을 깬 마리아처럼 회개하며, 삭개오처럼 죄로부터 돌아선다. 성경의 복음은 늑대를 양으로 변화시키는 온전한 복음이다.

신앙: 5부 - 오직 한 가지 방법

거듭나는 공식, 물과 성령으로
 어떻게 하면 늑대가 양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 오직 한 가지 길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늑대를 다시 양으로 재창조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속에서 늑대가 양으로 변화되는 유일한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다시 태어나야, 곧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 예수께서 제시하신 해결책이다. 그러자 니고데모가 물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는 다시 태어나는 방법에 대하여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대답으로 설명하셨다. 왜 물과 성령인가? 물과 성령이 거듭남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 문제를 좀더 자세하게 생각해 보도록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의 구절을 읽어 보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성령)은 수면(물)에 운행하시니라 (창 1:1~2). 창조의 과정에는 항상 성령의 역사가 존재한다. 성경에 나타난 창조의 역사를 우리 구원의경험, 곧 거듭남과 마음에 이르러 오는 변화에 영적으로 적용시켜 보자.

창조와 물과 성령과 바람의 영적 적용
 하나님께서 창조의 역사를 이루실 때 물과 성령이 함께 하였다. 창조의 역사가 시작될 때, 하나님의 신(성령)이 물 위에 운행하였던 것처럼, 이것을 영적인 창조, 즉 새로운 탄생인 거듭남으로 적용시켜 보면, 거듭날 때도 성령과 물의 역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역사, 재창조의 역사는 항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는 성경에서 바람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성령의 역사를 설명해 주면서 성령을 바람으로 표상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6-8).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는 성령과 물이 함께 하는데, 성령은 또 바람으로 표상되기도 했으므로, 창조의 역사와 물과 성령, 또는 물과 바람은 서로 연관될 수 있다. 영적인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려면 물과 성령 또는 물과 바람이 필요한 것이다.

창조와 성령의 역사
 우리는 창조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와 같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이 역사를 영적으로 거듭남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성령의 역사로 생명이 창조함을 받는 사건들이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의 역사로 생명이 탄생한 경우들을 살펴보면서 영적으로 교훈을 얻어 보자.

성령의 역사와 생명의 창조
1.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
예수님의 성육신은 어떤가?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영이 너를 덮으리니라는 말로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을 전해 주었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것은 창조의 역사이다. 성령께서 마리아를 덮으심으로 마리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했다. 성령께서는 마치 창조 당시에 수면 위에 운행하시듯이,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게 하시고 마리아의 양수를 덮고 계셨다.

2. 침례 요한 : 수태할 수 없을 정도로 늙은 엘리사벳이 침례 요한을 낳은 것도 같은 창조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침례 요한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능력으로 출생한 것이 아니다. 천사가 와서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을 때, 사가랴는 자신과 늙은 부인을 보면서 불신의 마음을 품었다가 벙어리가 되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신이 역사 하시므로, 늙은 여인이 침례 요한을 잉태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이삭 : 수태할 수 없을 정도로 늙은 어머니 사라에게 태어난 이삭 역시 성령에 의한 창조로 태어났다. 이삭은 사라와 아브라함의 행위와 노력으로 태어난 자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위의 경우들처럼 생명이 탄생할 수 없는 상태에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생명이 창조되어 탄생하였듯이, 영적으로 거듭나는 일, 그리하여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도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인간의 본성
 여기서 잠깐 인간의 본성과 예수님의 타고나신 인성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자. 많은 사람은 예수께서 성령의 기적을 통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셨기 때문에 우리와 다른 인성을 지닌 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기적과 창조로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생각들이 천주교회의 가르침이다(무염시태설).
 침례 요한과 이삭이 부모의 수태 능력에 의해서 태어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 능력에 의해서 탄생했을지라도 보통 인간으로 태어난 것처럼, 예수님도 마리아의 수태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고 성령의 기적으로 태어난 분이셨지만, 침례 요한이나 이삭과 같이,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지고 태어나셨다. 물론 하나님이신 신성을 함께 겸하셨지만.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보통 인간으로 태어나야만 하는 이유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 2:11).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4~18).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으신 이유는, 우리의 연약한 본성을 함께 취하셔서 우리를 어떻게 도와주실지를 아시며, 또 우리를 동정하시고 시험과 유혹에서 건지시기 위하여서이며, 그리고 나아가 더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의 능력과 합해질 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생애를 살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주시기 위하여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
 우리는 예수께서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다.라는 사단의 거짓을 반박하시고 실제적인 그분의 생애를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입증해 주신 데 대하여 항상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일은 사단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그의 지배를 되찾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오직 그분이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으로서 시험을 받으시고, 인간의 순종을 드림으로써만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는 주님의 인성에 대한 잘못된 견해 때문에 많은 잘못을 범한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인성에, 사람이 사단과의 투쟁에서 갖출 수 없는 그러한 능력을 부여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인성의 완전성을 파괴하는 것이며, 성경이 말하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입으셨다.라는 진리를 반박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순종하려고 오셨으며 이러한 면에서 그분은 우리의 모본이시다.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타락한 인성을 취하셨다고 말하면, 신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러면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반박한다. 왜 그러한 주장을 하는가? 왜냐하면, 신신학에서는 타락한 인성 자체를 죄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신학하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죄된 인성을 취하셨다고 하면 예수님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죄인이 되고 만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분명하게 선언한다. 우리와 같으나 죄는 없다(히 4:15)고.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것은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시고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다는 말이다. 성경은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한결같이 우리와 같지만 죄는 없으시다고 말하지만, 신신학은 예수님이 우리와 같으면 죄가 없는 구세주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망가진 원본
 그러면 이제부터 좀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다시 태어나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가? 잘못 태어났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라고 하신 것이다. 어떤 상태로 태어났기에 잘못 태어났다고 하는가? 늑대로 태어났다는 말이다. 성경은 우리가 모두 늑대로 태어나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러므로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2). 바울의 말에서 우리는 두 가지 의문점을 갖게 된다.

첫째, 한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왜 모든 사람이 죽어야 하는가?
둘째, 왜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우리가 형벌을 치러야 하는가?


1의 답: 원본이 잘못되어 있으면 그것으로 아무리 많이 복사해도 계속해서 잘못된 내용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아무리 좋은 복사기에서 복사한다고 할지라도 원본이 잘못되어 있으면 불량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원본이 망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형상을 담고 나온 인류는 모두 망가진 상태로 태어나게 되었다. 아담이 죄를 범하자 죄로 말미암아 몸의 유전자가 퇴화하였고 그 본성도 늑대의 본성으로 변했다. 그때부터 아담의 복사본인 인류는 죄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는 존재가 되었고, 태어나서 한 번은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2의 답: 우리의 죽음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서 받게 되는 형벌이 아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며, 또한 유전 법칙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는 본성을 전수받았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태어난 이후에 단 한 번도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도 아담에게 물려받은 연약한 유전인자 때문에 죽게 된다.

 우리의 죽음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서 받게 되는 형벌이 아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며, 또한 유전 법칙에 따라 죽을 수밖에 없는 본성을 전수받았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태어난 이후에 단 한 번도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도 아담에게 물려받은 연약한 유전인자 때문에 죽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만일 하나님께서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으셨다면,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는 첫 번째 죽음은 영원한 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의롭게 살든지, 또는 악하게 살든지를 불문하고, 제한된 일정한 삶의 기간을 가진 후에 죽을 수 있도록 계획하심으로써, 그리하여 그의 사는 동안 하나님을 더듬어 발견하게 하심으로써, 또 한 번의 영생의 기회를 인류에게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영생은 사람이 자신의 수(나이)를 채우고 죽는 일생 동안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조건을 충족시키느냐 충족시키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다.

담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물려받는 것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전 인류를 대표했던 것처럼,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서도 모든 사람을 대표하신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그런즉 한 범죄(아담)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예수)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아담)의 순종치 아니하므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예수)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

 죄를 범한 첫 번째 아담에게 일어났던 것은 무엇이나 그가 대표했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던 것 같이, 그리스도의 경험도 모든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가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그저 개념적인 것이 아니요, 실재적인 것이었다면,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께 받는 것도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이어야 한다.

 첫째 아담은 무엇을 물려주었는가? 육체적인 태어남을 통하여,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고 타락한 육체와 죽음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은 무엇을 물려주는가? 영적인 태어남을 통하여 신의 성품, 승리,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당신의 영적 자녀들에게 물려주셨다. 첫째 아담이 실패함으로써 발생한 모든 결과와 영향들이, 둘째 아담에 의해서 완전히 회복되었다.

거듭남을 통하여 얻는 새 족보
 모든 사람은 새로 태어남을 통해서만 아담의 후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후손으로 옮겨갈 수 있다. 물과 성령을 통하여 인간의 마음과 영혼 속에 재창조가 일어나야 희망 없고 속절없는 상태에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즉, 거듭남을 통하여 아담의 족보에서 예수님의 족보로 바뀌는 것이다.
 
 새로 태어나는 거듭남의 경험은 어떤 어려운 이론이 아니며 신비적인 경험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경험이다. 가족들이 서로 닮은 성격을 가지는 것처럼, 새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도 하늘 아버지의 품성을 닮게 된다. 우리가 하늘 가족에 입적될 때, 우리는 새 아버지와 맏형님을 닮기 시작한다. 이 아버지를 닮듯이, 아담은 하나님을 닮았었다. 그러나 죄 때문에 그 닮음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으니(창 5:1~3). 그래서 아담의 아들은 하나님을 닮을 수 없었으며, 죄를 범한 아담을 닮게 되었다. 그러나 참된 거듭남을 통하여 인간은 죄를 범한 아담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며, 자기를 새로 지으신 예수를 닮기 시작한다.
 하늘 아버지의 자녀가 됨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아버지 하나님과 맏형님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되는데, 바로 이 새로운 영적 출생으로 말미암아 참된 그리스도인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늑대적 본성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우리의 족보가 늑대 가족에서 양의 가족으로 옮겨지는데, 족보만 바뀌는 것이 아니다. 족보가 옮겨지면서 성품과 생애 또한 실제로 양의 특성이 있게 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할 때,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지만 단순한 물이 아니다. 말씀 위에 성령이 운행하실 때 그것은 생명수가 되어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적셔 준다. 창조의 역사가 실제로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성경은 전혀 새로운 책이 된다. 값비싼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씻겼던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고, 애굽 왕의 자리를 포기하고 광야 생활을 하기로 했던 모세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며,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말과 심령이 마음에 와 닿게 된다.

 물과 성령을 통하여 성경 말씀이 생명수가 되어서 마음에 창조의 역사가 시작되면, 하나님은 내게 시작과 끝이 된다. 마음은 행복과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차게 되며, 어두운 밤에도 외로움과 허무함을 느끼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포근한 수면을 즐길 수 있게 된다. 가난한 사람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고, 병든 사람의 귀에 위로의 말을 들려 줄 수 있으며, 외로운 사람의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놀라운 것은, 다른 영혼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는 생명수를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구원할 수 있게 하는 거듭남, 성령과 물과 바람의 역사, 창조의 역사가 당신에게도 일어났는가? 우리 모두 이 새로운 창조의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자!

질문과 답변 : 착하게 살면 구원받나요?

 많은 사람들이 죄와 구원에 대한 감정적인 가르침들을 많이 듣고 있지만, 왜 죄에 대한 피의 희생 제물이 반드시 요구되는가에 관한 성경적인 논리와 이유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라고 선고할 때에 여러분은 죄책감과 두려움을 느끼실 것입니다. 왜 두려움과 죄책감이 있습니까?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롬 3:23)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모든 사람들은 율법 즉 십계명을 범하였으므로 율법이 범죄자에게 죽음을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죄인은 필사적으로 자신이 범한 율법 앞에서 옳다(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을 찾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이 사형 선고가 번복될 수 있을까요?
인간이 자기의 남은 생애 동안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므로 자기 죄를 속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성경은 아무도 오해할 수 없는 언어로 답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 3:20).

 행위가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없다는 진리에 대한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만일 한 사람이 물건을 훔치다가 붙잡혀서 감옥에서 십 년 징역을 살아야 한다는 언도를 받았다면, 그는 자기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선고받은 연한만 채우면 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그는 언도된 형을 감옥 속에서 마침으로써 자신을 행위로 구제해 내었기 때문에, 죄 없이 의롭다는 인정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똑같은 방법으로 어떤 살인 죄수가 50년의 선고를 받았다면 행위로 의롭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언도가 50년이 아니라 사형이라고 간주한다면, 그 죄인이 행위로 자신을 의롭게 만들 수 있습니까? 결코 안 됩니다! 그가 비록 100년 동안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도 법은 아직 죽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말하기를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느니라 &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히 9:22-28).

 이것이 바로 죄인이 결코 행위로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죄의 값은 10년 징역이나 50년의 강제 노동이 아닙니다. 선고는 죽음이요, 피를 흘리는 일 없이 법의 요구가 충족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뒤엎어질 수 없는 것처럼, 율법이 선언한 사형 선고 역시 취소될 수 없는 것입니다.
 죄를 허용하는 것은 우주를 영원히 파멸시키는 길입니다. 과거의 죄를 미래의 선한 행동으로 지워버릴 수 없습니다. 법이 죽음을 요구하는 한, 죄인은 자기의 생명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고서는 그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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