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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

나비의 눈보다 더 아름다운 나비의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사진은 하얀 꽃 위에 살포시 앉아있는 노란 나비의 모습을 크게 확대한 것이었는데, 사진 속의 나비는 큰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큰 눈으로 본다면 나비는 꽃뿐만 아니라 세상에 있는 많은 것을 한꺼번에 잘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가만히 그 사진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나비나 벌 같은 곤충은 두 개의 겹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개의 겹눈은 육각형 렌즈 같은 수많은 낱개의 눈들이 모여서 된 것인데, 나비의 겹눈은 평균 2만 개 정도의 낱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수천 또는 수만 개의 낱눈에서 나온 시신경들이 하나로 합쳐져 뇌에 연결되어 있어, 나비나 벌은 이 겹눈으로 대상의 형태뿐만 아니라 움직임까지 재빨리 포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또 눈이 여러 개가 있어서 곤충이 보는 영상은 마치 멀티비전 같답니다. 그리고 그 멀티비전 각각의 화면을 하나로 통합해서 뇌에 받아들이기 때문에 머리를 돌리지 않아도 여러모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겹눈으로 공중을 날아다니면서도 물체를 재빨리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나비나 벌은 또 자외선 감지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은 볼 수 없는 자외선을 볼 수 있습니다. 자외선 감지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꿀이 있는 중앙으로 갈수록 꽃의 색이 진해 보입니다. 이렇듯 나비는 꽃 속의 꿀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신기한 눈을 가지고 있지요.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눈을 가지고 우리를 보고 계실까요? 얼마나 여러 각도에서 우리를 이해하고 계실까요? 그리고 어떤 신기한 눈으로 우리 마음속까지 꿰뚫어보고 계실까요? 생각해 보셨습니까? 나비의 눈보다 더 자세하게, 그리고 더 정확하게,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는 분, 나비의 눈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계시다는 것을&. 나비의 눈에는 꽃만 보이듯이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만 보인다는 것을&. 그분의 귀에만 들리는 소리 때로 듣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가슴에 와 닿을 수가 있습니다. 귀에 닿는 소리는 진동하고 마음을 울리기 때문입니다. 모든 소리는 물체의 진동에 의해 발생하는데, 사람은 1초당 진동수 20~20,000Hz까지의 음을 청취할 수 있으며, 진동 횟수가 1초에 20번에서 2만 번 정도 되는 것을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 가청음이라고 합니다. 진동수가 20,000Hz 넘는 소리는 우리가 들을 수 없으며 이것을 초음파라고 부릅니다. 음파는 공기가 매개 물질일 때 일어나는 파동을 가리키고, 초음파는 공기뿐만 아니라 액체나 고체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박쥐나 돌고래는 진동수가 2만이 넘는 초음파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놀라운 청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입으로 초음파를 내보내고 레이더처럼 반사되어 오는 소리를 귀로 느껴 물체를 확인하고 주변의 상황을 알아낸다고 합니다. 소리의 울림을 귀로 받아 이것을 분석하여 주변을 보는 것이지요. 깜깜한 밤하늘을 날아다니는 박쥐는 빛을 겨우 느낄 정도의 시력을 지니고 있지만, 청력을 사용하여 활동하고 있답니다. 이렇게 소리나 초음파 등의 반향으로 물체의 위치를 아는 것을 에코로케이션(echolocation)이라고 하는데, 박쥐의 초음파는 20,000Hz~130,000Hz이며, 돌고래가 내는 초음파의 진동수는 1초에 15만 회에 이른다고 합니다. 박쥐와 돌고래가 가진 초고성능 음파 탐지기는 과학자들이 증명한 놀라운 것입니다. 인간의 귀가 들을 수 없는 주파수의 소리를 박쥐나 돌고래의 귀로 들을 수 있다면, 한갖 동물이지만 초음파를 보내 반향되어 오는 소리로 물체를 탐지해 내는 놀라운 청력을 가졌다면, 그들의 신기한 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귀는 우리들의 소리를 얼마나 잘 들으실까요? 우리가 부르짖는 기도 소리를, 아니, 미처 입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가슴 속에만 쌓인 애절한 간구를 얼마나 잘 들으실까요? 그리고 우리가 있는 위치를 얼마나 잘 추적하여 알고 계실까요? 하나님의 귀는 하늘 천사들의 거룩한 찬양대의 우렁찬 찬미 소리 속에서도 연약한 인간의 작은 기도 소리를 들으려고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골방에서 마음의 소원을 쏟아놓을 때나 길을 가면서 조용히 묵상으로 기도할 때에도, 비록 그것이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마음의 소리 없는 소원이라 해도, 그 기도 소리는 우주의 침묵 속에 사라지지 않고 하늘 보좌에 상달 됩니다. 거리의 소음과 군중의 소요를 넘어 우리의 간구와 소원은 하늘로 올라가 그분의 귀를 울리는 소리가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기도라면, 우리를 향해 열려 있는 그분의 사랑의 큰 귀에&. 따스한 가슴 동물 중에 유대류에 속하는 동물들이 있습니다. 유대류란 주머니를 가진 동물을 가리키는데, 캥거루나 코알라, 주머니쥐 외에도 많은 유대류 동물들이 있습니다. 유대류 동물들이 주머니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그들은 다른 포유류 동물에 비해 태반이 발달하지 않아서 배아기의 초기인 임신 30~36일 만에 새끼를 낳으므로 그 새끼를 넣어 키울 주머니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몸집이 큰 캥거루라도 그 갓 태어난 새끼는 매우 작아서 크기가 2.5cm, 몸무게는 1~2g 정도에 불과하답니다. 처음 난 캥거루 새끼를 보면 그것은 동물이라기보다는 마치 빨간색의 꿈틀대는 벌레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작게 태어난 캥거루 새끼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어서 어미 몸에서 나오자마자 어미의 배를 기어올라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주머니 안은 안전할 뿐 아니라 젖꼭지가 있어 새끼는 충분히 먹고 따뜻하게 자며 잘 자랄 수 있습니다. 어미의 주머니에 들어간 새끼 캥거루는 대략 9개월 가량을 주머니 안에서 지낸 후 밖으로 나오며, 생후 18개월까지 주머니를 들락거리다가 독립하게 됩니다. 주머니를 가진 유대류 동물들은 새끼가 커서 혼자 독립적으로 살 수 있게 되기까지 많은 위험으로부터 새끼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하여 주머니를 가진 것입니다. 외부의 적과 위험으로부터 새끼를 보호하고 잘 기르라고 유대류 동물들에게 따뜻한 주머니를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를 품으시며 잘 돌보실 수 있는 넓고 따스한 가슴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사 40:11)십니다. 마치 잃어버렸던 아들이 멀리서 보이자 맨발로 뛰어나와 덥석 안은 아버지처럼,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한 걸음만 내딛는다 해도 그분은 서둘러 무한하신 사랑의 가슴으로 우리를 안아 영접하십니다. 옛날 성소에서 제사장이 입던 덧옷인 에봇에는 흉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이 정사각형의 흉패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 새겨진 열두 보석들이 네 줄로 배열되어 있었습니다.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에 붙여 여호와 앞에 영원한 기념을 삼을 것(출 28:29)을 주님께서는 명령하셨습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 앞에 그 피로 탄원할 때, 회개하고 믿는 각 영혼의 이름을 그분의 가슴에 지니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가슴에 품어진 이름은 결코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마치 어미 캥거루가 자신의 새끼가 독립할 때까지 주머니에 품는 것처럼, 우리가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그분의 자랑스러운 자녀로 크게 성장할 때까지 주님께서는 우리를 가슴에 품어주십니다. 마치 그 영혼 하나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 각 개인의 이름과 사정을 아시며&. 모든 창조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품의 특징들을 보여 주시고 계십니다. 혹시 한 사람이라도 그 창조물들을 바라보다가 그분의 사랑을 발견할까 기대하셔서, 그리고 그 창조물에 나타난 사랑을 바라보고 혹시 구원의 소망을 발견할까 기대하셔서&.

생애의 빛에서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가 있을까요? 주님께 나아가 받으신 바 되고 헌신한 사람이 되는 계단을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까?

 흔히 이러한 질문을 받습니다. 목사님, 오랫동안 믿어 왔지만 여전히 예수님이 가까이 계신 것 같기도 하고 멀리 계신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께 용납되었고 진실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가 있습니까? 아주 간단한 질문 같지만 대답이 정확하게 손에 잡히지 않는 질문입니다. 또한 이 질문은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 나가는 길,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계단, 얼마나 간절한 말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거든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와서 나를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십자가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져야 할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으러 간다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못 박아서 다시는 살아 올라오지 않도록 하기로 결심하고, 내 자신을 쳐서 죽여 못 박아 매달 형틀을 짊어지고 주님을 따라간다는 뜻이지요. 전적인 자기 굴복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반석 되신 예수님께 떨어져서 박살이 나면 살고, 그와 반대로 그 반석이 내 위에 떨어져 내가 가루가 되면 멸망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심판받기 전에 예수님의 말씀과 그 사상에 굴복하여 내 옛 모습이 깨어지고 새로운 사람이 되면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 그대로는 하나님과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세상과 그 죄에 너무나도 익숙한 우리들에게 이번 호의 내용들은 예수님께 나아가는 확실한 계단들을 보여 줄 것입니다.

가정과 영성: 최고의 기만

 진리가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저주가 될 수도 있는가? 그렇다! 진리를 소유한 사람들이 세상을 향하여 악한 영향을 퍼트리면 진리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저주가 될 수 있다.

 
진리를 믿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사람 중에 많은 사람이 가정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자녀는 불순종적이고 제어하기 어려우며 아내는 남편과 대화할 때에 부정적인 말을 하고 다른 사람의 흉을 보며 심지어는 정욕적인 농담을 한다. 우리는 혹시 사도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불의함 속에서 진리를 붙잡고 있지는 않은가? 만일 우리가 믿는 진리가 나와 가족을 변화시켜서 친절하고 인내하며 하늘에 속한 마음을 갖고 동정적이며 온유 겸손하지 못하게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애를 통해서 세상에 악한 영향을 퍼트리게 되므로 진리는 그것을 소유한 우리에게 저주가 된다.

저주가 되는 가정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교훈은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살아 있는 경험을 갖지 않은 채 성경 말씀을 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리새인이다. 그들은 진리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었지만 그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살았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라고 말씀하셨다(요 5:39).

 어떤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진리를 전한다고 할지라도 가정 안에서 아내와 자녀들이 복음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부인하고 있다면 그것은 진리의 이론에 불과할 뿐이다. 날마다 성경을 읽고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을 흔히들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만, 진리가 삶 속으로 녹아들어 오지 않으면 진리는 그에게 저주가 되고 만다. 진리는 그것을 붙잡는 사람의 마음과 생애를 일치시켜 준다.

 사도 바울이 남긴 다음과 같은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한 이해를 준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롬 2:21-22).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야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될 수 있다(골 3:3).

 진리를 단지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결코 복음을 세상에 전파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이시여,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전에 먼저 나와 내 가족이 진리를 이해하고 그대로 사는 일이 있어야 한다. 질서 있고 잘 훈련된 한 가족의 삶이 훌륭한 설교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설교와 가르침은 충분하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이다!라고 말한다. 지금 세상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들이 믿는 복음대로 살아가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들을 보기 원한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도 가장 큰 기만은 진리에 동의만 하면 의가 성립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은 영혼을 구원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것은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 바리새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책임 맡은 것을 자랑하였으나 이런 유리한 지위가 저희를 이기심과 악의와 이득에 대한 탐심과 비열한 위선을 막아 주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신앙인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의 말하는바 소위 정통적인 신앙은 저희로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던 것이다.

 같은 위험이 지금도 존재한다. 정통이라고 인정받는 어떤 신학적 교리에 동의하기 때문에 자신들은 당연히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를 실생활에 실천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진리에 따라 살지 않기 때문에 성결케 하는 능력과 은혜를 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진리를 믿노라고 공언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저희를 가정과 세상에서 진실하고 친절하며 인내하고 관용하며 거룩한 마음을 갖도록 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신앙을 소유한 자들에게 저주가 되고 그들의 감화로 말미암아 그것은 세상에 저주가 된다.

 복음은 먼저 가정 안에서 그 능력이 드러나야 한다. 가정 안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지 못하고 하나님 안에서 숨어 지내는 비결을 배우지 못한다면,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일에서 실패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것만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복음 전파에서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사도 바울 역시 복음을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니라 나타남으로 전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demonstration)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우리의 가정이 질서를 잃어버렸고 자녀들은 불순종하며 혼돈 속에 있으며 부모는 세속에 빠져서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우리의 가정 속에서 복음의 능력을 볼 수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와서 직접 따서 맛볼 수 있는 열매가 있어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의아해한다. 왜 나의 신앙은 이렇게 능력이 없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의 삶이 복음을 전하는 말과 설교보다 훨씬 능력 있는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경솔하게 말하고 불필요한 대화에 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우리의 영성이 힘을 잃으며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적은지&. 우리 모두 다음과 같은 야고보의 권면을 잊지 말아야 한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 1:26).

 형제자매들이시여, 하나님께서는 매 순간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아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에게 더욱더 가깝게 오셔서 인도해주기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주여, 어느 길이 주께서 인도하시는 길입니까?라고 묻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겠는가? 우리 모두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라는 말씀을 깊이 이해하도록 하자(골 1:27). 복음의 비밀은 나와 우리 가정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이 최고의 기만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저주가 되는 교회
 진리가 그것을 붙잡는 사람들에게 저주가 될 수 있는 것처럼, 교회도 교인들과 세상에 악한 영향을 줄 때에 저주가 된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는 자신에게 정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창조하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였던 그리스도의 결정은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왜 하나님께로부터 선택받은 이스라엘 국가를 상징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였는가? 왜냐하면, 그들 속에 열매는 없는데 나뭇잎들만 무성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유대인들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딤후 3:5). 잎사귀가 무성한 나무는 배고프고 지친 사람들로 하여금 그곳에서 먹을 것을 기대하게 한다. 그러나 정작 나무에 가까이 가면 나뭇잎들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다.

 어떤 교회이든지 간에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대신에 교회나 목사 자신에게로 인도하는 교회는 저주를 받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교회에는 열매가 없고 죽은 교리와 무의미한 예식만이 무성하기 때문이다. 교회 지도자가 은혜의 도구가 되는 대신에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좌정해야 할 자리에 자신이 앉아 있으면 그런 교회는 사람들에게 저주가 된다.

 교회가 사람들을 예수께 인도하는 대신에 교회 자신에게로 끌어들일 때, 교회는 사람들에게 저주가 된다. 구원은 교회나 목사가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에 충성하도록 인도하는 대신에 교회와 목사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유도하면 교회는 저주가 된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대신에 교세를 확장시키는데 초점을 맞추면 교회는 저주가 된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진리를 가르치는 대신에 인간적인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면 교회는 저주가 된다.

 교회가 사람들의 시선을 교회 자신에게로 끌어들일 때, 교회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유대교회의 역사이다. 그와 같은 위험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교회에 충성하고 교회에 신실하며 교회를 위해서 희생하라는 말들이 교회마다 울려 퍼지고 있다. 심지어는 교회를 위해서는 진리마저 포기해야 하는 상황으로 양들을 몰아가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진리를 가르치고 예언을 설명해 주며 원칙을 고수하라고 말하는 대신에 교회를 돕고 교회를 열심히 다녀야 하며 결코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말들만 난무하고 있다. 교회가 주는 세뇌 교육에 물든 사람은 하나님께 인정받기보다 교회에 인정받으려고 애쓰게 된다. 이런 교회는 사람들에게 은혜가 되기보다는 저주가 된다.

 유대교회가 그러했던 것처럼 교회가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면 교회는 교인들과 세상에 구원을 소개하는 대신에 악한 영향을 주게 된다. 교회가 포도나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포도나무이다! 오직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자들만이 구원을 받게 된다. 
 
 이 글의 요점은 교회나 교회 지도자들을 비방하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교회는 영혼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로 인도하는 역할만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영혼들 사이에서 장사를 해서도 안 되고 그 중간에서 사람들이 드리는 영광을 가로채서도 안 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면서 우셨던 것처럼,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죄를 바라보면서 울며 탄식하게 된다. 
 
 여러분은 교회에 붙어 있는가? 아니면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가? 여러분은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진리에 대한 살아 있는 경험을 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그리스도께 충성 맹세를 하는가? 아니면 교회와 목사에게 충성 맹세를 하는가? 잊지 말라! 지금은 기만의 시대라는 사실을....
 

건강: 하나님이 함께 하는 환자 치료법

그리스도인 의사와 의료 선교사를 위한 글
 그리스도인 의사와 의료 선교자들은 그리스도의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그분께서는 환자의 심령과 육체를 다 같이 돌보셨다. 그분께서 가르치신 복음은 영적 생명과 육체적 회복에 대한 기별이었다.

 똑같은 봉사가 그리스도인 의료 선교사에게 위탁되어 있다. 환자의 육체적 영적 필요를 다 같이 해결해 주는 일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한다. 환자들에게 긍휼의 사자가 되어 그들에게 병든 육체와 죄로 병든 심령을 위한 치료를 함께 가져다주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고통을 해결해 주려고 활동하는 모든 그리스도인 의사 곁에 계신다. 의사는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는 한편 그의 환자들에게 심령과 육체의 질병을 다 같이 치료해 주실 수 있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어야 한다. 의사와 의료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시는 일을 다만 도와주고 있는데 불과하다. 의사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애를 쓰고,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을 나누어 주신다.

치료의 근원
 사단은 파괴자이며 하나님은 회복자이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던 말씀은 오늘날 육신의 건강과 심령의 건강을 회복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26).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소원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2)는 말씀 가운데 나타나 있다. 그분께서는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는 분이시다(시 103:3,4).

 그리스도께서는 병을 고치실 때, 많은 병자에게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경고하셨다(요 5:14). 의료 선교사는 환자들에게 그들이 건강을 회복하는 일에서 하나님과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질병은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법을 범한 결과라는 사실을 환자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사람들이 그들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하여 마땅히 할 일을 했다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나쁜 습관 때문에 많은 고통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 힘을 파괴하는 모든 행동이 불행과 질병을 가져온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세워 주신 법칙에 순종함으로 건강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배울 필요가 있다.

 만일 의료 선교사들이 부당하게 먹고 마시는 일과 그 밖의 다른 나쁜 습관 때문에 생긴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환자를 보고서도 그에게 그 사실을 올바로 이야기해 주는 일을 등한히 하면 그는 자기의 동료 인간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의사는 술주정꾼과 정신적 질병을 앓는 사람들과 방탕한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고통은 하나님의 법칙에 대한 불순종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 주어야 한다. 생명의 법칙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질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일에 열렬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길은 생명의 길임을 분명히 밝혀 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천연의 법칙을 세우셨다. 그러나 그분의 법칙은 강제적으로 요구하는 법칙이 아니다. 육체적 법칙과 도덕적 법칙을 막론하고 하지 말라.는 모든 명령에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그 법칙에 순종하면, 우리의 길에 축복이 따를 것이다.

환자와 함께 기도하는 의료 선교사
 질병을 치료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기회들은 참으로 놀랍다. 환자들의 회복을 위한 일에서, 의료 종사자는 질병과 싸우는 일에 그들이 하나님과 협력하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법과 조화를 이루어 걸어가는 걸음마다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생각하도록 지도하라. 환자들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경외하는 의사를 더욱 크게 신뢰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의사의 말을 믿고 신뢰한다.

 위험한 수술을 하기 전에 의사는 위대한 의사이신 예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려운 시련을 통하여 환자를 안전하게 지켜 주실 수 있다는 것과 그분께서 고통의 시간 동안 당신을 의뢰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을 환자에게 확신시켜 주도록 하라. 이 일을 할 수 없는 의사는 살릴 가능성이 있는 많은 환자를 잃어버리게 된다. 만일 그가 모든 괴로움을 다 아시는 구세주를 믿는 믿음을 깨우쳐 주는 말을 할 수 있고, 그 영혼의 필요를 기도로써 그분께 아뢸 수 있었다면, 그 위기는 훨씬 더 빨리 그리고 안전하게 지나가게 되었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만이 의사의 손에 수술을 받고자 하는 많은 환자의 공포와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 아신다. 환자들은 자신들의 위험을 안다. 비록 그들이 의사의 기술을 확신하고 있을지라도 그들은 그것이 절대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의사가 머리를 숙여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을 보게 되며, 그들은 확신하게 된다. 감사하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치유력을 받아들임으로써 온몸이 소생되고 생명력이 강하게 된다.

 위기가 무사히 지나고 환자가 안정을 찾았다는 확신이 들면 환자와 함께 잠깐 기도를 드리도록 하라. 생명을 건져 준 데 대하여 감사의 뜻을 나타내라. 감사의 말이 환자에게서 의사에게로 전달되면 그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도록 하라. 환자가 하늘에 계신 위대한 의사의 보호로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고 그에게 말해 주라. 그와 같은 길을 따르는 의사는 생명을 좌우하고 계시는 분께 나오는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 의사들은 육신의 병을 치료하는 일에 집중한 나머지 영혼의 위험을 잊어버린다. 그들이 맡아 치료하는 환자가 마지막 구원의 기회를 상실해 가고 있을 수도 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당신께 나오는 모든 사람을 즐겨 구원해 주고자 하시는 분을 가리켜 주라. 삶과 죽음 사이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도와주고자 열렬하고 친절하게 노력하라.

 진리를 알고 있으며 성령의 지도를 받는 의사는 가련하고 죄로 병든 영혼들을 어떻게 취급할지 알게 된다.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 선교사는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구세주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는 회개와 믿음의 능력에 관한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고, 단순하고 열렬한 말로써 영혼의 필요를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고 환자에게도 긍휼이 많으신 구주의 자비를 구하고 받아들이도록 격려할 수 있어야 한다. 의료 선교사가 병자의 침상 곁에서 봉사하고 도움과 위로를 줄 수 있는 말을 하고자 애를 쓰게 되면,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 또한 그를 통하여 역사 하신다. 병자의 마음이 구주께 인도될 때, 평안함이 그의 마음을 채우게 된다. 이렇게 생긴 영적 건강은 육신의 건강을 회복시키는 일에서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으로 사용된다. 의사는 죽음 앞에서 두려움으로 떨고 서 있는 사람과 죄와 고통의 짐에 눌려 있는 영혼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구세주의 말씀을 반복해 주어야 한다.

교육자로서의 의료 선교사
 참된 의사는 교육자이다. 그는 자기의 직접적인 보호 아래 있는 환자들에게뿐만 아니라 그가 사는 지역사회에 대하여서도 책임을 느껴야 한다. 그는 육체적 도덕적 건강의 보호자로 서야 한다. 치료에 대한 올바른 방법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올바른 생활 습관을 권장하고 바른 원칙에 대한 지식을 보급시키는 것이 의료 선교사의 책임이다. 여러 질병을 일으키는 잘못된 습관 하나는 강한 화학적 약품을 함부로 사용하는 일이다. 질병의 공격을 받으면 많은 사람은 그들의 병의 원인을 찾아내는 번거로운 일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희망은 단지 고통과 불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특효약을 구하거나 잘못된 습관을 고칠 생각은 없으면서 그들의 쉽게 증세와 결과를 제거해 줄 어떤 치료를 받고자 의사에게 의뢰한다. 만일 즉각적인 효력이 나타나지 않으면 다른 약을 시험해 보고, 그다음에는 또 다른 약을 시험해 본다. 그리하여 악순환은 계속된다.

 사람들은 약이 병을 고치지 못한다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때때로 약이 통증을 제거해 주고 약을 사용한 결과로 환자가 나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체가 스스로 독을 제거해 주고 병의 원인이 되어 있는 상태를 고쳐 주기에 충분한 활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건강은 약이 없어도 회복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약은 다만 병의 형태와 위치를 바꾸어 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약의 부작용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는 육체의 조직 속에 남아 있게 되며 언젠가 큰 해를 끼치게 된다.

 의사들은 회복시키는 능력이 약에 있지 않고 자연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질병은 건강 법칙을 범한 결과로 생긴 상황에서 육체의 조직이 벗어나고자 하는 자연적 현상이다. 병이 났을 때는 원인을 확인해 보아야 한다. 비건강적 조건은 바뀌어야 하고, 그릇된 습관은 교정되어야 한다. 깨끗한 공기, 햇빛, 절제, 휴식, 운동, 적당한 식사, 물의 사용,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 이것들은 참된 치료제이다. 병이 감염되고 나서 치료하는 것보다 병을 예방하는 것이 훨씬 더 좋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건강이 우연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건강은 건강 법칙에 순종한 결과로 얻게 된다.

창조 교실: 보행 계측기를 달고 있는 개미

 학자들이 개미를 연구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그 사실은 개미들이 걸어갈 때 자기들의 보행 숫자를 계수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개미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멀리 갔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개미들은 머릿속으로 보행계측기(pedometers)를 사용하여 얼마나 멀리 왔는지를 계산한 다음, 그것을 사용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똑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답니다. 그들은 단지 발걸음을 세는 것을 넘어서 수학적인 계산을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개미들이 고도로 복잡한 천체 네비게이션 장비(celestial navigation equipment)를 장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하라 사막의 개미인 Cataglyphis Fortis는 자주 먹이를 찾아 꼬불꼬불한 경로로 수백 미터를 여행합니다. 그러나 근처에 경계 표시가 없어도 다른 경로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독일과 스위스의 연구학자들이 개미들에게 시각적 단서, 시간 또는 에너지 사용 등을 배제한 신중한 실험을 실시했습니다.

 개미들을 균일하게 회색이고, 매끄러운 환경 위에서 실험하였는데, 개미는 자신의 길을 정확하게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 실험을 통해 개미들이 궤도 적분(path integration)으로 알려져 있는 추측항법을 사용하여 거리를 계산하는 보행계측기(pedometer)를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어서 자기들의 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습니다.

 2000년 11월 Science News잡지의 커버스토리는, 한 로봇 제조회사가 예측할 수 없는 환경과 복합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창의적인 방법을 얻기 위해 영리한 개미를 연구하고 있다는 것을 다루었습니다. 연구에서 개미들은 여러 개의 목적지가 주어질 때 가장 효율적인 경로가 무엇인지를 규칙적으로 해결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엔진공학자들은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들기 위한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 이러한 작은 개미들의 행동을 관측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은 개미의 머리 속에 놀라운 위성위치확인 시스템(GPS) 소프트웨어를 넣어주신 분은 누구일까요? 개미의 길을 인도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지 않으실까요?

신앙: 첫째 계단 -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그분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계단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쉽지만 올바른 계단을 밟지 못할 때, 그것은 어려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계단, 그 올바른 길과 방법에 대하여 조명해 보았습니다. 길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확고한 길잡이가 되는 기사가 되기를 기도하면서 필독을 바랍니다. - 편집실

사랑의 이야기
 아버지와 두 아들이 아름다운 남태평양 섬 근처를 항해하던 중, 한 섬에 정박하여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아버지는 십 대인 두 아들에게 주의를 주며 말했다. 얘들아! 여기서는 절대 수영을 하지 마라. 이 바다에는 상어가 많이 있어서 위험하니까 그냥 배 안에서 놀아라! 시간이 흘러 지루해진 동생이 바닷속으로 풍덩 들어가 수영을 하기 시작했다. 놀라서 말리는 형에게 동생은 소리쳤다. 형! 상어가 한 마리도 안 보여. 형도 빨리 물속에 들어와! 같이 수영하자! 망설이던 형도 자꾸 조르는 동생을 못 이겨 물속에 뛰어들었다. 얼마 후, 배 밑에서 일을 하다가 올라온 아버지는 바닷속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 두 아들을 발견했다. 그런데 보니 수많은 상어 떼들이 두 아들을 향해서 몰려오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는 소리를 질렀다. 상어 떼다! 빨리 물에서 나와! 빨리! 놀란 두 아들이 헤엄을 쳐서 나오려고 했지만, 빠른 속도로 몰려드는 상어 떼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상어 떼들이 막 두 아들 가까이 접근하려는 순간, 아버지는 칼로 자기 손목을 베어 피를 내고는 아들들의 반대편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들은 피를 흘리는 아버지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무사히 헤엄을 쳐서 물가로 나온 아들들이 숨을 돌렸을 때, 아버지는 상어 떼 속으로 사라지고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 두 아들을 위한 이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말해 준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 주는 것들
 하나님께로 나가는 첫 계단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된다. 이 세상의 모든 창조물은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문구는 방긋이 웃으며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봉오리마다, 뾰족뾰족 돋아나는 파란 새싹마다 기록되어 있다. 하늘을 즐거운 노래로 가득 채우는 예쁜 새들, 향기를 풍기는 고운 꽃들, 잎이 청청하게 무성한 수풀과 나무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곧 우리를 아버지처럼 돌보시며,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셔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리시기 위해 하늘과 땅에 있는 수많은 사랑의 증거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광대한 우주와 천연계를 통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으로 체험해 알 수 있는 부드러운 인간적 결연을 통하여, 기록된 말씀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려고 하셨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였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거룩하고 행복스럽게 창조하셨을 때, 아름다운 땅이 조물주의 손으로 창조되었던 당시에는 쇠퇴의 증상이나 저주의 음영이나 죄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그때의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법칙과 사랑의 힘이 온 세상 만물을 유지하고 지배하는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그러나 비애와 고통과 사망이 이 세상에 오게 된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인 사랑의 법을 범했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사단을 섬기기로 선택한 이후, 사단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인간들이 하나님을 공포심으로 대하게 하였다. 사단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가혹하고 용서하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하게 하였고, 마치 엄격한 법관이나 검사처럼, 또 각박하고 인색한 고리 대금업자처럼 여기게 하였다. 또 사단은, 조물주는 사람들의 허물과 잘못을 찾아내 저들에게 벌을 주려고 질투하는 눈으로 항상 주목하는 분인 것처럼 조장하여 왔다.

하나님은 사랑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을 반포하시며 자신의 성품을 인간들에게 보이려고 하셨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출 34:6,7) 한다고 하셨다. 그분의 성품의 특징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욘 4:2)고, 인애를 기뻐하(미 7:18)시는 성품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특성은 점점 왜곡되어 세상에 나타났고,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이해하고 알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한 분이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분은 독생 하신 하나님(요 1:18)이신 예수 그리스도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증명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7-10, 19)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려고 오신 예수님
 예수께서 성육신 하셔서 인간 가운데 사시려고 오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의 속성을 세상에 나타내셔서 이 어두운 세상에 짙게 깔린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요 14:8) 하고 요청하자 예수께서는 놀라시면서 대답하시기를,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고 하셨다.

 예수께서 하신 모든 사업은 하나님의 성격과 사업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다니시며 선을 행하시고 사단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쳐 주셨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 마을마다 병자의 신음 소리가 그쳤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그 가운데로 지나시며 모든 병을 고쳐 주셨기 때문이었다. 사랑과 자비와 부드러운 동정과 긍휼이 그분의 삶과 모든 행동에 나타났다. 아무리 가련하고 비천한 사람이라도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아이들마저도 예수님을 잘 따랐고, 심지어 예수님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서 인자하신 그분의 얼굴을 쳐다보기를 좋아했다.

 예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하나도 숨김없이 항상 사랑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말씀하실 때 무례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으며 항상 친절하셨다. 가혹한 말을 함부로 하거나 감정이 예민한 사람들을 쓸데없이 상심시키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외식과 불신과 불의를 단호하게 견책하셨지만, 그렇게 심한 견책을 하실 때마다 그분의 음성과 말씀에는 눈물이 섞여 있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나타난 품성은 곧 하나님의 품성이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신령한 사랑과 자비와 긍휼의 흐름은 하늘 아버지의 마음에서부터 흘러내려 인류에게 미친 것이었다. 자애로우시고 긍휼하시고 사랑이 많으셨던 예수님은 육신으로 나타난(딤전 3:16)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각 사람을 끝없이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사랑은 모든 타락한 인간을 향하여 가지신 하나님의 사랑을 대표하였다.

구속 사업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독생자 아들 예수를 죽게 하신 일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절정을 이루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절정의 표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이 무한히 영광스러운 세계로부터, 죄로 인하여 손상되고 쇠퇴하고 사망과 저주의 음영(陰影)으로 어두워진 세계로 내려오심을 용납하셨다. 그는 당신의 아들이 사랑의 품과 천사들의 존경과 경배를 떠나서 수치와 능욕과 압제와 증오와 사망을 당하는 일을 허락하셨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주셔서 인간 가운데 살게 하시고 인간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희생 제물로 죽게 하셨다. 예수께서 세상에서 사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 것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우리로 영원한 기쁨에 참여하게 하시기 위하여 간고를 많이 겪은 자가 되셨다.

 생각해 보라! 광야의 예수,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 십자가 상의 예수를! 흠이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의 짐을 몸소 지셨다. 그 죄책감과 하나님과의 분리의 고통이 하나님 아들의 심장을 터지게 하였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셨다. 겟세마네의 고민과 갈바리의 죽음을 통하여 인류를 향한 무한한 사랑의 마음이 남김없이 표현되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요 10:17)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곧 이런 뜻이다. 나의 아버지께서 너희를 심히 사랑하신다. 너희를 구속하기 위하여 생명을 버린 나를 더욱 사랑하신다. 내가 내 생명을 드려 너희의 빚과 죄를 담당하여 너희의 대리자와 보증인이 됨으로 나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는다.

 하나님은 죽음보다도 강한 사랑으로 그분의 자녀들을 극진히 사랑하신다. 그분은 당신의 아들을 주심으로 온 하늘을 선물로 주셨다. 우리를 위하여 드리신 그 놀라운 희생을 묵상하여 보자! 온 하늘이 잃어버린 자를 도로 찾아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려고 소비하고 있는 노력과 정력의 진가를 생각하여 보자.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우리가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생각할 때 저절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첫 계단이다. 부모의 사랑보다 더 극진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느끼고, 깨달은 사람만이 자원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첫 계단에 올라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주심으로 온 하늘을 인류에게 선물로 주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부복하게 된다.

신앙: 둘째 계단 - 구세주가 필요하다고 깨닫는 것

나는 죄인입니다
 나폴리 총독이 바로셀로나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는 항구에 죄수들이 노를 젓는 배에 갔다. 그리고 죄수들을 한 사람씩 만나 어떤 죄를 지어서 여기에 오게 되었는가 물어보았다. 죄수들은 한결같이 누명을 썼다느니, 함께 죄를 지은 자가 자기에게 죄를 다 뒤집어씌웠다느니, 판사가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했다고 하는 등,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호소했다. 그런데 맨 마지막 죄수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총독님, 저는 돈이 탐나서 남의 지갑을 훔친 죄인입니다. 그 대가를 지금 달게 받고 있습니다. 그 죄수의 말에 감동한 총독이 말했다. 오, 이 사람은 정말 죄인이군! 그러니 그를 여기서 끌어내 배 밖으로 데려가게. 여기에는 그 말고는 죄인이 한 사람도 없는데 그 죄인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겠나?

죄인이 된 인간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자신에게 그리스도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두 번째 계단이다. 인간이 창조 받은 당시에 인간의 본성은 완전했고 하나님과 조화되었었다. 사상과 행동은 순결했고 거룩했으며, 생각과 마음은 하나님의 성품과 조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불순종 때문에 인간의 능력이 악용되어 사랑의 자리는 이기심으로 점령되었다. 인간의 천성은 죄로 인해 너무 약해지게 되어 자신의 힘으로는 악의 세력을 저항하기가 불가능해졌다. 인간이 죄 없는 상태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즐거워했지만, 이제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싶어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뻐할 수도 없는, 거룩한 자들과 함께 사귀기를 꺼리는 타락한 본성을 지닌 죄인이 되었다. 인간은 이제 혼자서는 악한 마음을 고칠 수 없게 된 것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인간은 타락한 후, 조상으로부터 유전되는 죄의 영향으로 인해 의지가 연약해지고, 본성은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죄를 짓기 쉬운 경향을 가지게 된, 옳은 것을 알더라도 그것을 행할 힘이 약해져 버린 인간들을 도와줄 수 있는 누군가가 이제 필요해졌다. 죄로 인해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잃어버린 바 된 인간을 위하여, 암흑으로 뒤덮인 세상에서 불행과 질병과 사망이 난무하는 가운데 살아가야 할 아담의 가족들을 위하여, 죄가 하나님과의 사이를 내어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 다가갈 수 없게 된 인간들을 위하여 구세주가 필요하게 되었다. 다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 하늘과 땅을 연결할 수 있는 구세주가 죄인에게 필요해진 것이다.

죄인은 그리스도가 필요함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생긴 깊은 죄의 심연을 넘어 누가 과연 인간과 하나님을 다시 화목 시킬 수 있었는가?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함을 받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하려면 오직 위로부터 새 생명을 받아야 하며, 마음속에서부터 작동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 능력은 곧 그리스도이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죽은 심령에 생기를 주어서 거룩한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잃어버린 바 된 상태를 깨닫고 고뇌와 절망 중에서 스스로 얻을 수 없는 순결과 의를 갈망하여 부르짖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하였다. 이러한 부르짖음은 어느 곳에서나, 어느 시대에나, 죄의 짐에 눌린 사람들의 입에서 발해지는 부르짖음이다. 이 모든 부르짖음에 대한 대답은 다만 하나, 곧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요 1:29)는 것이다.

 야곱이 에서를 속이는 죄를 범한 후, 자기 아버지 집을 떠나 도망할 때에 그는 자신이 지은 죄를 생각하고 고민에 마음이 눌렸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도 마음을 무겁게 누르는 한 가지 생각은 자기 죄가 하나님과 자신을 끊어지게 하고 하나님에게서 버림받게 했다는 공포심이었다. 슬픈 중에 자려고 맨땅 위에 누운 그는 꿈을 꾸게 되었다. 바로 그가 누운 땅에서부터 하늘 문까지 닿은 듯한 매우 큰 사다리가 있고 그 사다리 위로는 빛나는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었다. 그는 죄인이었던 자기가 하나님과 다시 교통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을 보고 기쁨과 감사함에 넘쳐서 하나님께 찬송하였다. 그의 꿈에 나타난 신비한 사다리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교통의 중재자이신 예수를 표상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을 통해,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생긴 깊은 죄의 심연을 건너서 인간이 다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공로로 죄가 만들어 놓은 구렁텅이에 다리를 놓으심으로 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만드셨다.그리스도께서는 연약하고 속절없는 타락한 인류를 무한한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연결하셨다.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은 곧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다. 죄인은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힘이 없는 것을 깨닫고 구주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낄 때, 우리는 구주 예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자신이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일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두 번째 계단이 된다.

신앙: 셋째 계단 - 회개와 자복

 뉴턴은 선장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나이 열한 살부터 선원이 되었다. 그가 어렸을 때에는 경건한 신앙인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신앙적인 훈련을 받았지만, 일곱 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폐병으로 돌아가시고 난 후, 선원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성격도 거칠어지고 삐뚤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라면서 더욱 난폭한 성격으로 변하여 모든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오는 노예선에서 일하게 되면서 그는 배 안에서 온갖 나쁜 짓만 골라서 하는 잔인하고 악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던 중 1748년 3월 1일, 그는 배 안에서 우연히 「그리스도를 본받아」란 책을 발견하고 읽게 되었다. 책을 읽는 동안 그는 오랫동안 그의 영혼 속에서 깊이 잠자고 있던 어머니의 기도 소리와 찬송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회개하게 되었다. 너무나 악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또 자신의 죄악적인 삶에 대해 슬퍼하며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울며 하나님 앞에 결심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과거의 모든 삶을 정리하고, 그가 대적했던 바로 그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목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그가 회개한 지 29년 되는 해, 1779년에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이라는 찬송가를 작사하게 되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방황하던 자신을 건져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감사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은혜로 새 삶을 살게 된 회개의 경험을 잘 표현한 이 찬송가는 지금까지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참된 회개란 무엇인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세 번째 계단은 회개와 자복이다. 죄인이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을까? 오순절에 허다한 무리가 죄를 깨닫고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라고 질문한 것과 같은 질문을 많은 사람이 하고 있다.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 첫마디는 회개하라(행 2:38)는 것이었다.
 회개란 죄를 슬퍼하고 죄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면 죄를 버리지 않게 될 것이며, 또한 진심으로 죄에서 떠나지 않으면 우리 생애에 진정한 변화가 있을 수 없다. 회개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많은 사람은 저희의 죄와 잘못이 자신에게 고통을 초래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자기가 범죄한 것을 후회하거나 외모적 변화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상 의미로 참된 회개가 아니다. 그렇게 회개하는 사람들은 죄 자체보다도 죄로 인해 미칠 고통을 슬퍼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의 마음이 성령의 감화에 순복할 때에 양심이 각성되어, 하나님의 법인 거룩한 계명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된다. 하늘의 빛이 심령의 구석구석을 비추어 흑암 가운데 감춰진 것들이 드러나게 될 때, 죄인은 죄에 대한 자각 속에서 여호와의 의를 깨닫고, 마음을 살피시는 분 앞에 드러난 자기의 죄악의 불결함을 보게 된다. 그때 죄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함과 순결하심을 깨닫고 자기도 정결해지기를 사모하게 된다. 이것이 회개하게 되는 과정이다.
 다윗이 죄를 범한 후에 드린 기도는 죄에 대하여 참으로 슬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그의 회개는 참되고 마음 깊은 데서 나온 것이었다. 죄를 변명하려는 노력도 없었고, 정하신 형벌을 피하려는 욕망도 그 기도의 동기에 없었다. 다윗은 자기의 범죄가 얼마나 흉악한지, 자기의 심령이 얼마나 더러워졌는지를 깨달아 자기 죄를 미워하였다. 그가 기도한 것은 죄 사함을 받기 위함만이 아니라 마음의 순결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는 성결의 기쁨, 곧 하나님과의 융화와 교통을 회복하기를 갈망하였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회개는 선물
 참된 회개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로부터만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 많은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들이 먼저 회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며, 회개는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게 하는 준비라고 생각한다. 물론 회개가 죄의 사유보다 먼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죄인이 예수께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다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회개가 죄인과 구주 사이의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회개를 하게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은혜이며 선물이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죄의 사유함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성신이 우리의 양심을 깨우쳐 주시지 않으면 회개할 수 없다. 예수님만이 우리 마음 가운데 죄에 대한 증오심을 넣어 주실 수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고 하셨다. 우리가 갈바리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볼 때에, 구원의 오묘한 이치가 우리의 마음을 깨우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로 이끄신다.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주목할 때에, 그 사랑이 우리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고, 마음에 감명을 주고, 심령에 통회하는 생각을 일으킨다.

 우리의 죄 때문에 못 박히신 십자가의 주님을 주목하여 볼 때에 우리는 자신의 생애의 악함과 심령에 깊이 뿌리박힌 죄를 밝히 보게 된다. 그때 우리는 죄가 무엇인데 죄를 범한 사람을 구속하기에 그처럼 큰 희생이 요구되는가? 우리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고 이 모든 사랑, 이 모든 고난, 이 모든 굴욕이 요구되었는가?라고 소리칠 것이다. 사람이 이 사랑을 배척할 수도 있으며 예수님께로 끌려가기를 거절할 수도 있지만, 만일 죄인이 거절만 하지 않으면 그분께로 이끌려가게 될 것이다. 구원하시는 사랑과 섭리에 대한 깨달음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을 고난당하게 한 자기의 죄를 회개하게 하고 동시에 십자가 밑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우리는 혹시 자신의 생애는 정직하고 도덕적 품성은 바르다고 자만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빛이 우리의 심령을 비출 때에, 그리고 주님의 순결하신 성품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불결한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다 동등하게 여기지 않으신다. 사람들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는 다르다. 사람들은 술에 중독된 사람을 멸시하고 그런 사람은 천국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책망한다. 그러나 교만과 이기심과 탐욕은 오히려 아무 책망도 받지 않고 지나쳐 버려지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러나 이런 죄들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 큰 죄들인데, 왜냐하면 이런 죄들은 하나님의 품성과 반대될 뿐 아니라, 타락하지 않은 하늘의 사욕 없는 사랑과도 반대되기 때문이다. 교만은 마음 문을 닫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게 하며 그분의 무한한 축복을 받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마음속에 있는 교만이나 이기심 같은 것은 더 큰 죄이다.

자복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하나님께 불쌍히 여기심을 받는 조건은 단순하고 공정하고 합리적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의 사유를 받고자 무슨 괴로운 일 행하기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은총을 받으려고, 또는 우리의 죄과를 속하고자 멀고 지루한 순례나 고통스러운 고행을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죄를 자복하고 버리면 불쌍히 여기심을 받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시 회개할 것 없는 회개를 경험하지 않고, 죄를 미워하는 가운데 심령의 참된 겸비와 통회하는 정신으로 우리의 죄를 자복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 진정으로 죄의 사유를 구한 것이 아니며, 또한 우리가 진정으로 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평강을 얻지 못한 사람이다.
  죄를 자복하는 일은 공중 앞에서 하거나, 개인적으로 하거나, 충심으로 할 것이며, 또 숨김이 없이 하여야 할 것이다. 마음속 깊은 데서 솟아나오는 자복은 무한히 자비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얻을 길을 찾을 것이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라고 하였다.

 진정한 자복은 언제든지 명백하게, 또 지은 죄를 꼭 지적하여 자백해야 한다. 죄 가운데는 오직 하나님께만 자복하여야 할 성질의 죄도 있고 또 해를 입은 당사자에게 자복해야 할 허물도 있다. 또 어떤 죄는 공중에 대한 죄이므로 공중 앞에 자복하여야 할 것이 있다. 진정한 회개와 개선이 없는 자복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짐을 받지 못한다. 반드시 생애에 확실한 변화가 있어야 하며, 하나님께 거리끼는 것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버려야 한다.이 일은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는 결과로 오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그저 그대로 나아가야 한다. 사단이 너는 큰 죄인이다.라고 할 때, 우리는 구주를 쳐다보고 그분의 공로를 주장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 회개하고 자복해야 한다.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계단에 올라서 있는 사람이다.

신앙: 넷째 계단 - 거듭남과 헌신

헌신의 이야기
 예배 시간에 교회에 앉아 있던 어린 영수는 걱정이 되었다. 오늘은 후한 헌금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장로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영수는 많은 것을 주님께 바치고 싶었다. 앞자리에서부터 집사님이 헌금 바구니를 돌리고 계셨다. 점점 가까워 오는 헌금 바구니를 바라보며 영수는 무엇인가 결심한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드디어 헌금 바구니가 앞에 오자 영수가 집사님에게 속삭였다. 집사님! 헌금 바구니를 조금 내려주세요. 조금만 더요! 조금만 더&. 영수의 부탁에 따라 집사님이 마침내 헌금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자, 영수는 그 바구니에 들어가 앉았다. 집사님! 저를 다 예수님께 바치고 싶어요!

헌신과 거듭남
 회개와 자복 뒤에 오는 헌신과 거듭남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 있어서 매우 획기적인 변화가 오는 단계이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복한 사람의 생애에는 전격적인 변화가 찾아온다. 곧, 죄를 버리고 온 마음과 영혼과 몸을 하나님께 바친 결과로 그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바람이 임의로 불매 &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영향은 분명히 볼 수 있고 감촉할 수 있는 바람처럼, 하나님의 성령께서도 사람의 마음 안에 그렇게 역사 하신다.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자복할 때, 새로운 하늘의 능력이 임하여 그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든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이 거듭나게 하는 능력은 사람의 마음 안에 새 생명을 나게 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 사람을 만들어 낸다.

 마음이 변하여 과거의 죄와 죄악적인 습관이 싫어진 새 사람의 생애에는 온전한 헌신이 뒤따른다. 회개하고 자복한 사람들은 반드시 온 마음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며, 그런 헌신이 생애의 매 순간에 지속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고 주 안에서 자라나게 하는 변화가 계속 일어날 수 없다. 자신과 싸우는 싸움은 모든 싸움 중 가장 큰 싸움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며 자신을 바치는 일에는 투쟁이 요구된다. 그러나 회개하고 마음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친 사람은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고 순복할 것이다.

거듭남의 증거
 자신이 거듭났다는 증거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전격적인 변화가 없이, 또한 자신이 거듭난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이 거듭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새로워진 사람은 그 생활이 거듭난 사실을 증명할 것이다. 변화는 우리 품성과 습관과 우리의 일 등 모든 것에 걸쳐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거듭나고 하나님의 편에 속하였다는 것을 어떤 방법으로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누가 마음을 지배하는가? 생각이 누구에게 가 있는가? 누구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하며, 가장 열정적인 애정과 최대의 정력을 누가 지배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스스로 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께 속한 거듭난 사람이라면 우리의 생각은 그에게 있을 것이며,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소유와 우리의 몸을 기쁨으로 다 그에게 바치게 될 것이며, 그의 형상을 입고, 모든 일에 그의 정신을 나타내며, 그의 뜻을 행하여 범사에 그를 기쁘시게 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생애에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를 맺을 것이다. 다시는 예전의 욕망이나 정욕을 따라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그의 품성을 반사하고, 그의 깨끗하심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전에 미워하던 것을 사랑하게 되고, 전에 사랑하던 것을 미워하는 변화가 생길 것이다. 교만하고 자기주장만 세우던 사람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해질 것이며, 허영심이 많고 거만하던 사람이 침착해지고 겸손해질 것이다. 음주하던 사람은 절제하게 되고, 방탕하던 사람은 깨끗한 생활을 살 것이다. 세상의 유행을 따르는 허영적인 습관은 버려지게 될 것이다. 행위가 개선되는 결과가 반드시 따라야 진정한 거듭남의 증거가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믿음과 순종
 새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특별히 조심해야 할 점이 두 가지 있다. 그 첫 번째는 하나님께 마음을 바친 이후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융화하기 위하여 자신의 행실과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행함으로 계명을 지키고 거룩해지려고 하는 사람은 전혀 불가능한 일을 하려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행하는 모든 일은 사사로운 욕심에 빠지게 한다. 믿음으로 받는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오직 우리를 성결케 할 수 있다. 두 번째 조심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의무에서 벗어난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믿음으로만, 예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으며 우리의 행하는 것은 구원의 문제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순종은 다만 외양적으로만 행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하는 봉사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그분 품성의 표현이며, 사랑의 대원칙의 근본이기 때문에 이것은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하나님 나라의 기초가 된다.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심령에 심어지면 저절로 하나님의 법이 우리의 생애에 실천될 것이며,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히 10:16)고 하신 새 언약이 성취될 것이다. 순종, 곧 사랑으로 하는 봉사와 충성은 거듭나고 헌신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참된 증거이다. 그러므로 성경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3),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요일 2:4)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믿음은 순종의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순종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게 한다. 우리는 순종하므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나 순종은 그 믿음의 열매이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 3:6).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계속되는 헌신과 순종의 생애
 회개하고 자복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사람의 매일의 생활에서는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헌신의 생애가 계속 지속되어야 한다.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버려야 한다. 돈을 사랑하고 재물을 탐하는 것, 명예와 세속적 권세는 우리를 사단에게 붙들어 매는 사슬들이다. 이기적인 안락의 생애와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우상이 되고 있다. 이런 노예적 속박은 끊어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반은 주의 것이 되고 반은 세상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실 때에 그분의 사랑과 또 그와 함께 교통하는 기쁨으로 충만해져 예수님을 그리워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헌신하며 따를 것이다.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명상하는 가운데 자신을 잊어버릴 것이다.
 억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고자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바치고 헌신할 수 있는지 물을 것이다. 하나님께 마음과 몸과 영혼을 바치는 헌신은 거듭난 사람의 생애의 매일 매 순간 속에서 지속되어질 것이며,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이 이어질 것이다.

신앙: 다섯째 계단 - 그리스도에까지 자라남

자라남의 이야기
 교회를 다녀온 늙은 어머니에게 아들이 물었다. 어머니, 오늘은 교회에서 무슨 말씀을 들으셨어요? 글쎄다. 내가 늙어서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맨날 다 잊어버리시면서 말씀은 들어서 뭐하세요? 그러자 어머니는 아들을 콩나물시루로 데리고 가서 말했다. 콩나물에 물을 주면 물이 다 빠져나가지만 콩나물은 쑥쑥 잘 자라듯이, 말씀을 들으면 다 잊어버리는 것같지만 내 믿음은 매일 자라난단다!

영적 자라남
 영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 반드시 필요한 계단이다. 참된 신앙은 자라남을 수반한다.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주님 안에서 영적으로 자라나는 과정을 농부가 뿌린 좋은 종자가 싹이 나는 것으로 성경은 비유하였다.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난 자들은 마치 밭에 심은 좋은 종자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점점 자라(엡 4:15)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장성한 남녀가 된다. 인간의 온갖 지혜나 재주를 가지고라도 천연계 가운데 있는 어떤 작은 물체에도 생명을 넣어 줄 수는 없고 자라게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생명으로만 식물이나 동물이 살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에 영적 생명이 생기는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생명으로 되는 것이다. 사람이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시려는 생명을 누릴 수 없다.

 생명이 그런 것처럼 자라남 또한 그렇다. 씨가 발육되어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막 4:28)이 되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눅 12:27)라고 하셨다. 모든 초목과 꽃들은 자기의 염려나 걱정이나 노력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며 다만, 하나님께서 저희의 생명을 위하여 공급하시는 것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염려나 노력으로 영적인 성장을 이루거나 영적으로 자라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진리를 이렇게 가르치셨다.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 거룩한 생애를 살려면, 가지가 자라나고 열매를 맺도록 원체에 붙어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 의존해야 한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생명도 없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음으로 시들지 않고 열매 맺는 나무가 될 것이며, 그의 안에 거함으로 우리의 품성이 자라날 것이다.

혼자서는 자라날 수 없음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 스스로 어떤 일을 좀 해야 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죄 사함을 받고자, 또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에 그리스도를 의지하였지만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 옳은 생애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하셨다.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는 것도 날마다 시간마다 주님과 교통함으로, 그와 연합하고 그의 안에 거함으로써 될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하지만, 연약해서 곧잘 유혹에 지게 되고 죄악적 습관에 지배를 받는다. 인간의 약속과 결심은 썩은 새끼줄과 같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동기와 애정을 억제할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 수없이 어긴 약속과 결심 때문에 의기소침해지곤 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낙심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곧 의지의 참 힘이다. 의지는 사람에게 있는 지혜력이고 결정력이며 선택력이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고칠 수 없고, 자신의 힘으로는 애정을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할 수는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데, 그리하면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가 행하기 원하는 것을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행하게 하실 것이다.

 의지를 올바르게 사용함으로 우리의 생애는 전적으로 변할 수 있다. 우리의 의지를 그리스도께 바칠 때에 우리는 정사와 권세를 초월한 능력과 연결되는 것이다. 우리를 굳게 서게 할 힘을 위로부터 얻을 것이고, 그리하여 하나님 안에서 점점 믿음으로 자라날 것이다. 주님과 연합하여 사는 생애는 안정된 생애이다. 인간의 연약함을 그의 힘과 연합하고, 인간의 어리석음을 그의 지혜와 연합하고, 인간의 의지의 연약함을 그의 강하심에 연합할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변화된 삶을 살기 위하여
1.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영적으로 자라나며 변화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주의를 빼앗아가는 것들을 멀리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을 구주에게서 떠나게 함으로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교통하는 일을 방해하려는 것은 사단이 항상 꾀하는 일이다. 세상의 오락, 생활의 염려와 고민, 다른 사람의 결점 또는 자신의 결점과 불완전함 등에만 초점을 맞추는 생애는 사단이 틈타도록 허용하는 생애이다. 사단은 양심대로 살려고 하고, 또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많은 사람이 자신의 결점과 약점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게 하려고 노력한다.

 우리의 눈이 항상 그리스도만 주목하면 우리는 악으로부터 보호함을 받을 것이다. 예수를 바라볼 때에는 우리는 안전하다. 그리고 아무것도 우리를 주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주님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고후 3:18)게 된다. 예수의 처음 제자들이 그들의 구주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게 된 것도 이렇게 해서 된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보호에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만을 바라보라.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생각하라. 주님을 생각하는 가운데 자신을 잊어버리며, 모든 의혹과 의심을 버리고 살라. 사도 바울과 같이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하라.

2. 주님과 동행하라
 우리는 깨어서 기도하며 주님과 늘 동행할 필요가 있는데, 그렇게 해야 어떤 유혹이라도 견딜 수 있으며, 예수님 외에 다른 주인을 선택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분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 그들은 그가 필요함을 느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고 만나서 그를 따랐다. 그들은 집에서나 식탁에서나 골방에서나 밭에서나 언제나 예수님과 같이 하였다. 마치 학생들이 교사와 함께 있는 것처럼, 그들은 그분과 같이 다니면서 날마다 그분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거룩한 진리를 배웠다. 그들은 종이 상전을 주목하는 것처럼 그를 주목하면서 그들이 할 의무를 배웠다. 그들도 거룩한 생애를 살고자 우리와 같이 은혜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구주의 형상을 가장 완전히 반사한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도 본래 그러한 아름다운 품성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기를 잘하고 명예욕이 많았으며 조급하여 억울함을 당할 때에 분개하기를 잘하였다. 그러나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에게 나타났을 때에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겸손해졌다. 요한이 예수의 일상 생애 가운데 나타난 능력과 인내, 권능과 애정, 위엄과 겸손을 보았을 때에 그의 마음은 찬탄과 사랑으로 충만해졌다.
 날마다 그의 마음은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려 가게 되어 마침내 그는 자기 주님에 대한 사랑에 자신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의 조급하고 야심 많은 성미는 그리스도의 조성하시는 능력에 맡겨졌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이 그의 품성을 변화시켰다. 이것은 예수와 동행하고 연합함으로 생긴 확실한 결과였다. 그리스도께서 마음 안에 거하시면 인간의 성질은 온전히 변화된다. 그리스도의 신과 그의 사랑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심령을 안정시키고 사상과 소원을 하나님과 하늘로 향하게 한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올린 기도 가운데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기를 그가 아버지와 하나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그와 하나가 되기를 구하셨다. 이런 연합이야말로 참으로 귀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거하시면 그는 우리 속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빌 2:13)실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가 행하신 것같이 행하게 될 것이요 또한 같은 정신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를 사랑하며 그의 안에 거함으로써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라는 말을 우리 삶에서 성취하게 될 것이다.

신앙: 여섯째 계단 - 나누어 주기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 있어서 나누어 주기는 매우 중요한 단계이다. 거듭남을 경험하고 빛 가운데서 영적으로 자라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는 반드시 수반되는 경험이다.

 주님의 임재 안에서 새로운 생애를 사는 사람은 자신이 발견한 예수님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으며, 자신이 경험한 놀라운 삶의 비밀을 말하지 않고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나누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생명과 빛과 기쁨의 근원이시다. 태양에서 발사되는 광선처럼, 샘에서부터 흘러내리는 강물처럼, 모든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그의 온 피조물에게 이른다. 이처럼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의 마음 안에 있게 되면 그것이 넘쳐흘러서 다른 사람에게 사랑과 축복을 나누어 주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은 타락한 인류를 향상시켜서 구원하시는 데 있었다. 그는 이 기쁨 때문에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셨으며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 천사들도 항상 남의 행복을 위한 일에 종사하는 것을 그들의 기쁨으로 삼는다. 그리스도의 자아 희생적 사랑의 정신은 온 하늘에 충만한 정신이며, 이것이 곧 하늘의 행복의 요소이다. 희생적인 나눔의 정신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가져야 할 정신이며, 또 이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향기
 마음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마치 좋은 향기 같아서 그것을 숨길 수 없다. 이 사랑의 거룩한 감화는 우리가 접촉하는 모든 사람이 받게 될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정신은 마치 사막 가운데 있는 샘과 같이 흘러서 모든 사람을 시원하게 할 뿐 아니라 죽어가는 자들에게 생명수를 마시고자 하는 열망이 간절하게 한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인류에게 축복을 끼치고 향상시키기 위하여 예수께서 일하신 것처럼 일하고 싶은 욕망으로 표현될 것이다. 이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돌보시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사랑과 온정과 동정을 가지게 할 것이다.

 예수께서 사셨던 지상 생애는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이고 안일한 생애가 아니었다. 그분의 삶은 잃어버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꾸준하고 열렬한 노력으로 수고하는 삶이었다. 그는 말구유에서부터 갈바리에 이르기까지 극기의 길을 걸어가셨으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힘든 일과 괴로운 여행과 심신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고, 그 고난의 길을 조금도 벗어나려고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하셨다. 이것이 그의 생애의 큰 목적이었다. 이외의 것은 다 그에게 있어서 부수적인 일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 사업을 마치는 것이 그의 양식이었다. 자신과 사욕은 그의 일 가운데 조금도 섞이지 않았다.

나누는 축복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다른 영혼들을 위해 어떤 희생이라도 치르기를 기뻐할 것이다. 그들은 세상을 살기에 더욱 좋고 아름답게 만들고자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런 정신은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생긴다. 그리스도께로 나아간 사람은 다른 영혼을 구원하고 성결하게 하는 진리를 그 마음 가운데 감추어 둘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고 그분의 임재로부터 오는 기쁨이 마음속에 충만하다면, 우리는 우리가 받은 축복을 나누어 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안 사람은 마음속에 항상 말할 무엇이 있을 것이다. 마치 빌립이 구주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다른 사람을 구주께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점과 내세의 보이지 않는 실재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 주려고 애쓰게 될 것이다.

 남을 복되게 하려는 노력은 우리 자신에게 복이 돌아오게 한다. 구원의 계획 가운데 우리로 한 역할을 담당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사람에게 신의 성품을 가질 수 있는 특권을 주시고, 다음으로 동료에게 축복을 전하여 줄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 이렇게 축복을 나누어 주는 사랑의 봉사 사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창조주께로 가장 가까이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 기별과 모든 사랑의 봉사 사업을 천사들에게 맡길 수도 있었지만, 인간으로 사욕 없이 나누어 주는 이 봉사 사업에서 생기는 축복과 기쁨과 영적 향상을 얻게 하려고 우리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천사들과 동역자가 되게 하셨다.

 은혜를 받기만 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마치 일하지 않고 먹고 살려는 사람과 같다. 이것은 육체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도 언제나 퇴화와 쇠퇴를 일으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쓰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 자라나지 못할 뿐 아니라 그가 이미 가졌던 능력까지 잃어버릴 것이다.

 각 사람은 자기의 재능과 기회가 있는 대로 활용하여 가정에서나 일터에서 주님의 축복을 나누어 주는 증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누어 주려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의 통로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에 나누어 주는 도구가 되어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런 삶은 은총이 차고 넘치는 복된 삶이 될 것이다.

신앙: 일곱째 계단 -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교제, 기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계단에 있어서 주님과의 교제는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천연계와 성경과 성령의 감화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것들만으로 우리의 영적 생애가 넉넉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심정을 하나님 앞에 아뢰며 그분과 교통할 필요가 있다. 영적 생명과 힘을 얻고자 하늘 아버지와 실제적인 교제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때로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모하기도 하고 그분의 업적과 자비와 축복에 대하여 묵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려면 우리의 실생활 속에서 모든 것을 자세하게 주님께 말하고 함께 이야기하며, 또 주님의 뜻을 알고 서로 교감하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기도이다.

 기도는 마치 친구에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펴 놓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어떠하다는 것을 하나님께 알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우리에게로 내려오시게 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가 그분께로 올라가게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는 저희의 매일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고 저희의 모든 염려를 그에게 맡겨 버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제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하신 그의 보증은 또한 우리에게 대한 보증도 된다.

기도의 모본을 보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사이에 거하실 때에 자주 기도하셨다. 구주께서는 매일의 의무와 시련을 굳세게 견디고 나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능력을 구하는 탄원자와 간구자가 되셨다. 그는 범사에 우리의 모본이시다. 그는 우리와 같이 연약한 인성을 쓰셨고,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히 4:15)신 분으로서 죄악 세상에서 심령의 투쟁과 고민을 당하셨다.

 그의 인성(人性)은 그에게 기도가 필요하게 하였고 기도가 특권이 되게 하였다. 그는 당신의 아버지와 교통하는 가운데서 위안과 기쁨을 얻었다. 인류의 구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기도의 필요를 그렇게 느끼셨다면, 연약하고 죄가 많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은 얼마나 더 기도의 필요를 느껴야 할 것인가!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풍성한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기다리신다. 무한한 사랑의 샘에서 마음껏 마시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 중에 아무리 비천한 자라도 진정으로 하는 기도를 들으시려고 고대하시고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사랑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그리워하시며 구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주려고 하시지만, 사람들이 그렇듯 기도를 적게 하고 믿지 않으므로 슬퍼하신다.

 천사들은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것과 그분께 가까이 있는 것을 좋아하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을 저희의 최고의 기쁨으로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이 세상의 자녀들은 하나님과 교제함 없이 사는 것을 만족히 여기고 있다. 마귀는 기도를 게을리하는 자들을 어둠으로 가두어 놓는다. 기도는 전능하신 분의 무한한 자원을 쌓아 둔 하늘 창고를 여는 믿는 자의 수중에 있는 열쇠이다. 끊임없는 기도와 늘 깨어 있음이 없이는 우리는 부주의하게 되고 영적으로 쇠퇴할 위험성이 있게 된다.

응답받는 기도의 조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기를 기대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다.
1. 첫째 조건: 도움의 필요를 느끼는 것 -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사 44:3)게 하리라는 약속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같이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들은 확실히 배부르게 될 것이다. 매일의 생활에서 필요한 도움을 얻기 위하여, 성령의 지혜와 감화받기 위하여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라고 하신다.

2. 둘째 조건: 죄를 버릴 것 - 만일 우리가 우리의 마음에 죄를 품든지, 알고 지은 죄를 버리지 않으면 주님께서 듣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고 통회하는 자의 기도는 언제든지 들으실 것이다. 모든 아는 죄를 바로잡은 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실 것을 우리는 믿을 수 있다. 죄를 숨기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고백하며 도움을 구하는 기도는 응답을 받는다.

3. 셋째 조건: 믿음으로 하는 기도 - 응답받는 기도의 요소는 믿음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그대로 믿는가? 하나님의 허락은 무한하며 허락하신 분은 미쁘시고 믿을 만한 분이시다. 우리가 구하는 것을 우리가 구하는 바로 그때 받지 못할지라도 주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앞을 잘 보지 못함으로 어떤 때에는 우리에게 축복이 되지 않는 것을 구한다. 그래서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우리가 영적으로 밝아진 눈을 가지고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면 우리 자신도 원하게 될 것 -을 주심으로 우리 기도를 응답하여 주신다. 우리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때라도 우리는 그 허락을 굳게 붙잡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꼭 알맞은 때에 응답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가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꼭 그 방식으로 응답되고, 또한 우리가 원하는 그것을 꼭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우시기 때문에 잘못하실 리가 없으시며, 지극히 선하시기 때문에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기도가 즉시 응답되지 않을지라도 의심하지 말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확실한 허락을 믿으라.

4. 넷째 조건: 사랑과 용서의 정신으로 기도할 것 - 우리가 하나님께 긍휼과 축복을 구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마음 가운데 사랑과 용서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라고 기도를 하면서 어떻게 용서가 없는 정신을 품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우리가 용서함을 받고 싶은 모양대로, 그와 같은 방법으로 남을 용서해야 할 것이다.

5. 다섯째 조건: 꾸준히 기도할 것 - 기도를 꾸준히 하는 일은 응답을 받는 한 조건이 된다. 응답이 없더라도 믿음으로 꾸준히 하는 기도는 결국 응답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믿음과 경험이 자라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꾸준히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를 항상 하며,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롬 12:12; 골 4:2) 있어야 한다.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고 권하였다. 끊임없는 기도는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과 끊임없이 연결됨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으로 들어오게 하고, 주님의 순결함과 거룩함이 우리의 생명에 흘러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6. 여섯째 조건: 개인적이고 은밀한 기도 - 기도하는 일에는 부지런함이 필요하다. 아무 일로든지 기도에 방해를 받지 말라. 우리는 예수님과의 사이에 교통이 막히지 않도록 온갖 노력을 다해야 한다. 기도를 습관적으로 늘 하는 곳으로 가서 하도록 하라. 우리는 가정 안에서 기도해야 하며, 또 무엇보다도 은밀한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 기도를 등한히 하면서 영혼이 번영할 수는 없다. 가족 기도와 공중 기도만으로는 넉넉하지 않다.  홀로 조용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눈앞에 우리의 심령을 내어 놓아야 한다. 은밀한 기도는 주위의 영향과 소란으로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 은밀한 것을 보시고 중심에서 나오는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감화는 놀라운 것이다. 골방에서의 열렬한 기도는 사단과의 투쟁에서 심령을 강하게 하고 우리 힘의 성채가 되시는 하나님을 붙들게 하여 승리하게 한다.

매일의 업무를 행할 때에도 마음을 자주 하나님께로 향하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도 이렇게 함으로 된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기에 부적당한 시간이나 장소는 없다. 우리가 열렬한 기도의 정신으로 하나님께 향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비록 주위가 부패한 분위기로 둘려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 더러운 공기를 호흡하지 않고 하늘의 깨끗한 공기 가운데서 살 수 있다. 우리는 진정한 기도로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께로 올림으로 불순한 생각이나 불신성한 생각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모든 문을 막을 수 있다. 하나님의 붙들어 주심과 그의 축복을 받도록 마음 문을 열어 놓는 사람은 이 땅의 분위기보다 더 거룩한 분위기 가운데서 살 수 있을 것이며 하늘과 끊임없는 교통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사소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목하지 않으시는 것은 없다. 우리의 경험 중에 어떠한 사건이 너무 악하다고 하여 그것을 보지 않으시는 것이 없고, 아무리 복잡한 문제라도 주님이 풀기에 너무 어려운 것도 없다. 하나님의 자녀 중에 지극히 작은 자가 당하는 어떤 재난이라도, 그들의 심령을 괴롭게 하는 어떤 근심이라도, 또 기분을 좋게 하는 어떤 기쁨이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어떠한 진정한 기도라도,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못 본 체하시거나 직접으로 관심을 두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과 각 사람과의 관계는, 마치 그 사람 하나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각별하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다만 기도의 시작과 끝에 그 이름을 부르는 것 이상의 큰 의미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그의 허락하신 바를 믿고, 그의 은혜를 의지하고, 그의 사업을 행하면서 예수의 마음과 정신으로 기도하며 그렇게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께 늘 기도하며 주님과의 교제를 돈독히 하자.

신앙: 여덟째 계단 - 주 안에서 기뻐함

 사람이 하나님 안에 살고 그 안에 거한다는 사실은 기뻐하는 삶으로 증명된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의 생애는 감사와 기쁨으로 넘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주의 선하심과 자비를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대표자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참된 품성을 우리에게 드러내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부드럽고 인자하신 사랑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 드러내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는 & 그리스도의 편지니,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고후 3:3,2)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모든 자녀를 통하여 한 편지를 세상에 보내신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당신이 사는 가정과 동네와 거리로 보내진 하나님의 편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생애와 봉사가 기쁘고 즐거운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야 할 것이다. 우울함과 슬픈 것만을 생각하고 원망과 불평만을 하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생애를 잘못 표현하는 것이 된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가 행복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인상을 주게 되며, 우리의 하늘 아버지에 대하여 그릇된 증거가 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묵상의 주제
 주께서 긍휼과 동정이 없으신 것처럼 나타내는 것은 사단의 하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음으로, 또는 그분을 원망함으로써 하나님께 불경한 때가 너무 많다. 사단은 언제나 신앙 생애가 우울한 생애가 되게 하려고 힘쓰며, 신앙 생애가 고생스럽고 어려운 것처럼 보이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신앙생활이 괴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낼 때에는 사단의 기만을 찬동하는 것이 된다.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많은 사람은 자신의 잘못과 실패와 실망에 대하여 자꾸 생각함으로 마음이 근심과 낙망으로 가득 차게 된다. 사람들은 자주 자신이 걸어가는 인생길의 장미꽃을 보는 대신 그 가시를 본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과거 생애 가운데 모든 불유쾌한 추억들, 과거 실망의 기억들만을 모아서 거기 대하여 이야기하고, 그것에 대하여 비탄하는 중에 마침내 낙담에 빠진다. 낙담 된 심령은 흑암으로 가득 차게 되고 또 하나님의 빛이 그 심령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버리고 다른 사람의 길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하여 주신 모든 축복을 헤아려 보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복된 보증들을 모아서 그것들을 늘 바라보자. 우리에게는 감사할 주제들이 너무 많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사단의 권세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신성을 인성으로 옷 입으시고 그 아버지의 보좌를 떠나신 것, 또 그가 우리를 위하여 승리하심으로 인류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열어 주신 것, 타락한 인류가 죄 때문에 빠진 그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어 다시 무한하신 하나님과 연합하게 하시는 것, 또 인간이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고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앉아 높임을 받는 것,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깊이 묵상하기를 원하시는 주제들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생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그분의 허락을 믿지 않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것이다. 가령, 한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유익을 주려고 온 생애의 노력을 기울이는데, 그 자녀가 자기 어머니가 자신에게 잘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항상 불평만 한다면 그 어머니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그 자녀들이 어머니의 사랑을 의심한다고 하면 어머니의 마음은 상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다면, 우리의 천부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실 것인가? 누구나 다 시험이 있고 또 견디기 어려운 근심과 대항하기 어려운 유혹들이 있다. 그러나 의심하고 낙담하는 말은 한마디라도 입 밖에 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슬프시게 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라.
 우리는 사업이나 우리의 업무에서 번민이 있을 수 있고, 앞길이 점점 암담하여지고 실패를 할 염려 속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낙담하지 말라.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침착하고 기쁜 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건들을 신중하게 처리할 지혜를 얻도록 기도하라. 그리고 좋은 결과를 얻도록 최선을 다하라. 예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겠다고 허락하셨지만, 이것은 우리의 노력 없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할 수 있는 것을 다하고 나서는 그 결과가 좋든지 나쁘든지 달게 받아들이라.

 그분의 자녀들이 근심에 눌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는 너의 앞길에는 위험이 없으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주님은 앞길에 시련과 위험이 있음을 아시고 솔직하게 말씀하신다.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라고. 그는 또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하셨다.

기쁨의 생애
 예수님은 울기는 하셨지만 웃으신 적은 전혀 없으시다는 말을 흔히 한다. 우리 구주께서는 참으로 슬픔에 처한 자이셨고, 인류의 모든 슬픔에 마음을 여신, 인간의 비애를 잘 아시는 분이셨다. 그러나 비록 그의 생애가 극기의 생애였고, 생애의 고통과 근심으로 그늘졌을지라도, 그의 마음과 정신의 활기는 꺾이지 않으셨다. 그의 얼굴에는 근심이나 원망의 표정이 없고 도리어 항상 안정하고 침착한 표정을 띠셨다. 그의 마음에서는 늘 기쁨의 생명 샘이 흘러나왔고 어디를 가시든지 안정과 화평과 기쁨과 즐거움을 주셨다. 구주께서는 진중하시고 매우 열정적이었으나 음울하거나 무겁지 않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는 강과 같은 평강을 준다. 이 종교는 기쁨의 빛을 꺼버리지도 않고, 유쾌함을 억제하거나 명랑하고 웃는 얼굴을 흐리게 하지도 않는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주관할 때에 우리는 주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매일 기쁨으로 살게 될 것이다. 또 시련과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평화와 행복함을 느끼며 살아갈 것이다.  우리의 최선을 아시는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의 앞길에 최선의 축복과 선물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의 불친절하고 합당하지 않은 행위만을 자꾸 생각한다면, 불만에 싸이게 되고, 불행해지며, 또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과 긍휼을 깊이 생각할 것 같으면 그와 같은 사랑의 정신이 흘러나와 다른 사람에게로 미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과 불완전함을 보지 않을 수 없지만, 서로 사랑하며, 겸손하고,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하여 참으며 동정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는 기쁘고 행복한 사람, 관대하고 너그러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주께서는 그분의 모든 자녀들이 행복하고 평안하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고 하셨다. 세상이 주는 행복은 변하기 쉬운 것이며 일시적이어서 만족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기쁨과 만족이 있다. 혹시 우리가 현세의 낙(樂)을 가지지 못하였을지라도 우리는 내세를 바라봄으로 오히려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이 세상에서라도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며, 그의 사랑의 빛과 함께 하시는 임재를 통해 영구적인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우리는 매일 생애의 발걸음을 돌보시는 주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체험하고 기뻐하는 가운데 복된 본향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사망의 골짜기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어떻게 행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는 기념비를 바라보며 항상 기뻐하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인애와 자비를 언제나 새롭게 기억하자! 미래에 어려운 시련이 없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 곧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신 33:25)는 말씀을 기억하고 기쁨으로 살아가자!
 머지않아서 천국 문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열리게 될 것이고, 영광의 왕의 입술에서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는 큰 음악 소리가 귀에 들릴 것이다. 하나님을 발견하여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사람의 생애는 기쁨이 넘치는 생애가 될 것이며, 미래뿐 아니라, 지금 천국이 마음에 이루어진 사람의 생애에는 행복과 즐거움이 넘치는 삶이 계속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사는 사람이 사는 삶의 특징은 주 안에서 즐거워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질문과 답변: 기적이 모두 성령의 역사인가요?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큰 기만자인 사단은 자신의 속임수를 통하여서 그의 목적들을 성공적으로 달성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불순종할 것에 대해서 경고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주의해 보십시다.

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내 아버지의 법을 범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주님께서 하신 이 경고의 말씀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성경 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자처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예언하고 병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엄청난 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기적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행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그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그런 영적 은사들을 행사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들에게 초자연적 능력을 주어서 그런 기적을 행하게 하였습니까? 그러한 능력이 나올 수 있는 근원은 하나님과 사단 이외에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들이 불법의 창시자 사단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고 예언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 때에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처럼 보이는 기만적인 기적들이 있을 것임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그것들은 정말 참된 은사와 똑같이 보일 것이며, 신앙의 열성이 지극한 분위기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진짜 은사와 거짓 은사의 차이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는 이 점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주여 주여라고 부르짖는다고 할지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불렀지만,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사랑한다고 말하였지만, 예수의 입에서 나온 말씀과 진리에는 순종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분을 아는 것은 곧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는 요한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요일 2:3,4). 사실상, 그들은 진심으로 예수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곧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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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눈


하나, 둘, 셋, 넷
어디선가 눈송이가 날아옵니다.
엄마, 이게 뭐야?
눈을 처음 본 아이는
손바닥에 내려앉아
사르르 녹는 눈을 세어 봅니다.


조금 지나자 커다란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하늘에도 눈,
공중에도 눈,
땅에도 눈...
온통 하얀 눈뿐입니다.

세상이 환하게 변했습니다.
세상이 깨끗하게 바뀌었습니다.


아이는 눈을 밟고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맛보며 신기해합니다.
행복해 하는 아이를 보며
엄마가 대답합니다.

내리고, 내리고,
또 내려서
온 세상에 가득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