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편지: 선물을 가져다 준 사람

 그 사람이 없었다면 당신의 생애는 무의미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없었다면 당신의 생애는 매우 지루했을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 그렇게 가치 있는 선물을 가져다준 그 사람이 없었다면&.
 
 압니다. 그 사람 때문에 끊임없이 올라오는 감정과 싸우느라 지쳐 거의 쓰러질 뻔하고, 그 사람 때문에 베갯머리를 적시며 울다가 하나님을 원망하여 거의 낙심할 뻔했던 사실을&.  그러나 또 그 사람 때문에 주님과 씨름했던 하많은날들이 생겨났고, 그 사람 때문에 진정한 용서와 자아 포기와 죽음의 의미에 대해 배울 수 있었던 것을&.   이제 시간이 흐르고 생의 또 다른 계단에 올라서서 뒤돌아보는 당신은, 그때 왜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당신의 삶 속에 보내셨는지, 왜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당신에게 일어나게 하셨는지 깨닫습니다.  그 사람은 고마운 로마 병정이었습니다. 혼자서는 못 박힐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이 십자가에 잘 못 박히도록 도우려고 보내진&.  수없이 갈등 하면서, 그리고 많은 날들을 고뇌하면서, 낮을 밤처럼 지내고 밤을 낮처럼 지내고 나서야, 이제 당신은 그 사람이 얼마나 고마운 사람이었는지, 얼마나 소중한 선물을 당신의 삶에 가져다준 사람이었는지를 깨닫고 조용히 미소 짓습니다.

깊숙이 박힌 가시
 
가시를 빼고 싶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옆구리를 찌르는 그 가시는 매사에 그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는 몹쓸 것이었습니다.  더 높이 날고 싶지만, 더 높이 뛰고 싶지만, 그 가시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구했습니다.  그 가시를 정말 빼어 달라고, 이젠 더 견딜 수 없다고&.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답을 보내오셨고, 그는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누구에게나 빼고 싶은 가시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삶이 형편없이 망가졌고, 바로 그것 때문에 꿈을 펼치지 못했고, 바로 그것 때문에 격이 높은 삶을 살 수 없었다고 원망하는 가시가 누구에게나 깊숙이 박혀 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그 가시의 가치를 깨닫게 되기 전까지는, 그 가시가 오히려 더 높은 곳으로 자신을 오르도록 이끌어 준 디딤돌이었다는 것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가시를 견디지 않고서는 그렇게 값진 인생의 교훈을 결코 배우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이젠 곧잘 가시를 보듬어 안을 줄을 알게 되고, 끝내는 그 살에 박힌 가시가 더 이상 가시가 아닌, 그저 자신의 부드러운 살의 일부분이 되는 경험을 합니다. 그리하여 입에 한숨 섞여 올리던, 밭 가는 자가 내 등에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시 129:3)라는 슬픈 한탄이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라는 감사의 고백으로 바뀝니다.  

 날아오르게 하는 가시, 익게 하는 가시
 
가시의 고난을 견딘 사람들은 한결같이 아름다운 글들을 꿰어 냅니다.  절벽 끝에 더 가까이 오라고 하셔서 더 나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절벽에 겨우 발을 붙이고 서 있는 나를 절벽 아래로 밀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는 그 절벽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때까지 내가 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린 몇 밤, 저 안에 땡볕 한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나무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절굿공이 아래서 짓이겨지는 것이 쌀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 그러나 수없이 두들김을 당한 다음에는 목화처럼 하얗게 쏟아진다. 이 세상 인간사도 때로는 이와 같아서 역경이 사람을 빛나는 옥으로 바꾸어 놓는다."

 고난이 없이는 더 높은 영적 경험을 향해 날아오를 수 없습니다. 한 알의 대추도 저절로 영글지 않습니다. 천둥 몇 개, 땡볕 한 달의 역경 끝에 익어 갑니다. 많은 두들김에 짓이겨진 끝에야 비로소 다른 영혼을 살릴 수 있는 양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인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 결국 주님과 대면하여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힘을 다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가시가 필요할까요?

고마운 그 사람

 때로 그 사람이 내 인생에 발걸음을 들여놓지 않았더라면!이라고 말하고 싶은 시간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이 거기에 없었더라면, 그때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하고 회한에 잠기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잠잠이 고통의 순간들을 받아들이면서 지나다 보면, 겸허해진 마음속에 문득 지혜의 불빛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난 마음으로 섭리의 빛을 바라보며 감사한 마음이 들 것입니다. 나를 그렇게 갈고 닦을 수 있게 만들어 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로운 연단의 과정에 나를 위해 특별히 투입된 그 사람의 역할이 고마워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로마 병정이 필요합니다. 큰 못을 가져와 우리를 땅땅 못 박는 로마 병정이&. 우리 모두에게는 가시가 필요합니다. 못도 필요합니다.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갈 2:21)을 십자가에 꽝꽝 못 박기 위해&.

 큰 가시를 가져와 당신의 머리를 쿡쿡 찌르는 그 사람, 큰 못을 가져와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망치를 두드리는 그 사람, 당신의 성품이 갈고 닦이어 보석처럼 빛나도록 돕는 그 사람, 그 값진 선물을 가져다준 그 사람은 고마운 사람입니다. 그 사람 없이 당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단련 학교에 입학했겠습니까? 그 사람 없이 당신이 어떻게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고 회개하였겠으며, 그 사람 없이 어떻게 당신이 버려야 할 것을 손에서 놓았겠습니까? 당신의 삶에 값진 선물을 안겨 준, 당신의 인생을 의미 있게 해 준, 멋진 이벤트를 벌여준 그 사람을 고마워하십시오!  그 사람은 거기 그 자리에, 그 시간에, 당신을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관심을 드러내고자 쓰인 하나님의 유용한 도구였을 뿐입니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잠 48:10).

생애의 빛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이 다 우연히 생기는 일들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들일까요?

 우리는 이 두 가지 상황에서 혼돈하며 의아해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아니, 이렇게 크고 광대한 우주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 같은, 아니, 우리 같은 보이지도 않는 존재에게 늘 관심을 가지시고 모든 일을 일일이 간섭하시며 인도하신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라고.
 
 그렇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크기의 우주 속에서 먼지 같은 나를 하나님께서 간섭하신다니,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의 말씀들이 그렇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인도하시고 간섭하신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입니다.
 노아도, 욥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그리고 침례 요한과 바울과 요한과 삭개오도 하나님의 섭리의 경험으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라고요?  아닙니다. 그들은 그 당시에 다 우리처럼 평범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생애는 우연스러운 일들, 돌발적인 사건들의 연속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사랑하고 계시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우리는 사건들을 보는 영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치원생들의 콧물을 닦아 주며 신발을 신겨 주시는 일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하나님께 영광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섭리하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끝에 있습니다. 아직 장래에 보이지 않는 일들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하고 놓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호는 이 문제에 대한 감동적인 이해를 드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눈을 갖도록 합시다!

 

가정과 영성: 고통의 목적

 인생에서 가장 큰 불행은 재물이 없는 것이 아니다. 친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집이 없어서 길거리를 헤매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것들도 불행이지만 아직 불행의 극은 아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불행은 목적이 없는 것이다.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지기까지 자신이 왜 이 땅에 태어났는지 모르고 무슨 목적으로 이 세상을 여행하는지도 모르고, 방향도 없고 도달해야 할 항구도 없이 해초가 바닷물에 떠돌듯이 밀물과 함께 들어오고 썰물과 함께 나가면서 인생을 끝내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불행하다. 하나님의 진리에 붙잡히면 확고한 목적을 갖게 된다.
 사람의 마음속에 의의 목적이 세워지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많은 원수를 만나게 된다. 진리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가정 안에서 원수를 만나게 되고 그다음에는 교회 안에서 만나게 된다. 원수를 만나지 않고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는 일 없이 진리와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사람은 아직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진리가 인도하는 의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을 때, 나는 수많은 원수들을 교회 안에서 만나게 되었다. 내가 세속적으로 살아갈 때는 교인들이 나를 친구로 대해 주었는데 진리가 이끄는 대로 살고자 하니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모두가 나를 버리고 홀로 남게 되자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진리를 가진 자에게 있어서 영광은 고통 뒤에 온다.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고 짓밟힘을 당하고 면전에서 모욕받고 악인의 취급을 받은 후에야 영광이 온다.
 고통은 영광의 길을 열어 준다. 봄이 오기 전에 겨울이 오듯이 영광이 오기 전에 고통이 온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기꺼이 고통의 잔을 마셔야 한다.그러나 감사하자. 고통이 있기에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이 있기에 친구가 한층 고맙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느껴진다. 세상이 나를 괴롭히기 때문에 하늘이 한층 그리워진다. 잔인한 비난의 검이 내 가슴을 찔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이 나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이 세상이 나에게 낙원이 되어 나는 무덤 저편을 바라보지 못했을 것이다.
 
 인생의 고통을 가슴에 안고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면 그곳에는 다른 세계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을 때, 가난에 쫓길 때,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달려가라! 그 속에서 모든 것을 치료하고도 남는 영약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고통 속에 있을 때는 전혀 기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인내의 열매를 낳고 보다 높은 신앙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기 때문에 고통이 올 때 감사하게 된다. 고통은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과 직접 만나게 해 준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마 21:42). 
 민족에게 버림받은 사람이 국가의 양심을 지키는 애국자가 되듯이 교회에게 버림받은 사람은 교회를 구하는 개혁자가 된다. 마틴 루터가 그러했고 요한 웨슬리가 그러했다.  교회에서 지지받고 사랑받는 사람은 오히려 교회를 타락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 역사가 말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교회로부터 미움과 무시를 받는 고통을 최고의 영예로 생각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것은 그가 세상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교회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은 그가 누구보다도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그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에 가장 큰 유익을 주고 있으면서도 교회로부터 가장 큰 배척을 받는 이유는 그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세속과 배도를 지적하기 때문이다.
 교회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기도하라. 교회의 죄와 배도를 인정해 주는 대가로 교회가 주는 직책과 평안을 얻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원수와 친구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진리에 충성하는 사람은 교회의 원수가 되고 진리를 타협하는 사람은 교회의 친구가 되는 것이 현대 기독교회의 모습이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에게 이러한 고통과 환난을 주셨음을 감사드린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니었으면 내가 좁은 길을 떠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난한 사람을 돌보려고 호주머니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가난에 빠뜨려서 나로 하여금 굶주림에 울게 하셨다. 내가 교회를 어둠으로부터 구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회들로 하여금 나를 배척하게 하여 외로움 속에서 교회를 구하는 복음을 이해하도록 인도하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드셨던 가난함과 핍박과 외로움의 채찍이 이제는 감사와 행복의 복이 되었다.


살리는 고통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통은 우리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고치고 살리기 위한 것이다. 고통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이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5-11).

 고통을 위한 은혜가 아니다. 은혜를 위한 고통이다. 고통은 수단이요, 은혜는 목적이다. 고통으로 시작하여 은혜로 끝난다. 하나의 고통은 백 가지의 은혜를 가져오고 짧은 이 고통의 세상은 영원한 은혜의 세상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 말하고 은혜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야 한다.하나님을 모르면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을 모르니 인생의 의미를 알 수 없고 참된 위로와 평화를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을 모르니 사람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게 된다. 사람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니 투쟁이 생기고 슬픔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고통의 의미와 목적을 이해한 사람만이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가장 쓰라린 고통은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악인으로 취급받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통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한다는 말의 의미 속에는 이런 고통이 포함된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나에 대한 인기와 평판을 포기했는데,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십자가의 죽음이라면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자들이 받게 되는 고통이다. 진리를 세우고 교회를 구하는 일에는 이러한 고통이 따른다.

독특한 생애
 고통이 나의 생애를 독특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고 나의 슬픔과 감사와 기쁨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생애가 너무나 독특하기 때문에 세상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독특한 삶을 살게 되는 상황은 대개 이렇다. 신앙이 말라 버렸고 진리가 그 빛을 잃어버렸을 때, 전해야 할 기별이 없었고 부를 수 있는 찬양의 노래가 없었을 때, 하나님이 보내 주신 고통이 내게 임해서 나의 가슴을 찔렀다. 나는 깊은 고뇌와 아픔 속에서 방황하였다. 그런데 고통이 남긴 상처에서 회개가 흘러나왔고 생명을 담은 설교가 흘러나왔다. 내 신앙의 눈은 열렸고 찬미의 노래가 다시 내 입에 돌아왔다. 그때 나는 내 아픈 상처를 만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내게 고통을 주셔서 영혼을 소성케 하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고통을 피하려고 하지 말라. 그것을 이기려고 하라.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 싸우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승리하도록 하라. 하나님이 고통을 허락하심은 당신의 능력과 은혜를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인의 입에서는 걱정과 염려가 이 몸을 덮칠지라도 나는 한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리라는 찬미와 간증이 나와야 한다.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6-37).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자신에 대한 세상의 오해를 풀려고 애쓰지 말라. 그들은 진리와 원칙을 세우는 자를 오해하기 원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위한 만 가지 설명도 무효하다. 스스로 나아가서 원수와 맞서려고 하지 말라.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말로 변호해 주시지 않는다. 내가 원수 앞에서 침묵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통하여 나의 의를 증명해 주신다. 고요히 오랜 시간이 흘러간 후에 나의 의가 드러나도록 섭리하신다. 세상과 교회 안에서 짓밟힌 후에 오랜 세월 침묵하다가 의가 드러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러나 세상과 교회 안에서 높은 지지와 존경을 받다가 오랜 세월 후에 수치 가운데로 떨어지는 사람은 죄의 사람이다. 의인은 불평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는 자이다.


고통의 목적
 세상에는 낫지 않는 병이 많다. 물론 그것은 의학적인 입장에서의 견해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낫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치유되지 못할 병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뿐 병이 낫지 않는 것 따위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얻는 기쁨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확정적 희망이다. 그것은 덧없는 희망이 아니다. 반드시 사실로 나타나게 될 희망이다.  이 희망 때문에 환자는 위로를 받게 된다. 이 희망 때문에 병실도 천국이 된다. 이 희망을 붙잡은 환자는 더 이상 환자가 아니다. 이러한 환자는 메마른 입을 통해서 나지막한 찬송 소리가 나오게 된다.

 죄의 용서와 부활의 희망 그리고 영원한 기쁨과 생명에 대한 확신이 영혼 속에 새겨질 때 병은 나아도 좋고 낫지 않아도 좋은 것이 된다. 자신의 생명이 길지 않은 것 때문에 슬퍼하지 않는다.  이러한 희망 속에 있으면 육체는 활력을 얻게 되고 세포는 생명을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치유의 경험이다. 건강을 요구하지 않는 신앙이야말로 건강을 회복하는 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이다.

 인생에는 많은 고통이 있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동안 누구도 그 고통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희망과 기쁨이 있다면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 밖에서 우리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늘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땅의 고통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평생을 땅을 치며 통곡할지라도 고통과 슬픔은 가시지 않는다.  그러나 한번 하늘을 바라보고 우주를 운영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기만 하면 쓰라림과 고통은 봄날의 이슬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고통을 녹여서 희망과 기쁨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아는 자들이다. 모든 고통에는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이 인도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건강: 비타민과 미네랄에 대한 건강 상식

 일반적으로 건강에 미치는 영양의 유익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어떤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하는 건강 원칙보다는 뭔가 더 쉽고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다. 통곡류와 과일과 채소를 충분하게 섭취하는 건강의 원칙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노력과 계획이 이루어져야 하고 새로운 생활 습관을 형성시켜야만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쉬운 방법으로 높은 영양의 유익을 얻으려고 식품 보조제(비타민 정 등)를 선택한다.

 건강을 위해서 신선한 채식과 함께 운동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이 먹던 동일한 식사에 비타민과 보조제를 부수적으로 추가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비타민을 과다 복용하면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비타민 B군과 나이아신(niacin)을 살펴보자. 나이아신은 실제로 산이지만 자연적으로 얻어지는 적당한 양일 경우에는 비타민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것을 과량 섭취할 때는 약물과 같다.  그 이유는 신체가 사용할 수 있는 비타민의 양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초과한 양은 비타민으로 사용될 수 없고 약물의 효과를 나타낸다.나이아신의 약물 효과 중 하나는 콜레스테롤과 중성 지방을 낮추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혈액 중 지방 함량을 낮추기 위해서 나이아신을 약물로 복용한다. 모든 약물과 마찬가지로 약물로 복용하는 나이아신은 부작용을 일으킨다. 나이아신의 경우 소화 궤양, 설사, 심박동 불규칙, 간질환, 통풍, 당뇨병 악화와 같은 부작용이 따른다. 나이아신을 다량으로 복용할 경우 그것은 비타민이 아니라 약물을 복용하고 있는 것이다.

수용성 비타민 과다 복용의 문제
 
나이아신을 포함하는 비타민 B군은 수용성이기 때문에 쉽게 배출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생화학의 깊은 이해가 없는 많은 사람은 나이아신을 많이 섭취해도 그것이 수용성이기 때문에 신체가 자동적으로 배출시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유감스럽게도 오해이다. 다른 비타민 B군도 과량 복용하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엽산의 다량 섭취는 불면증과 기타 정신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다량의 비타민 B6의 기능이 있는 피리독신은 파킨슨씨 병을 악화시키고 다른 신경 장애를 일으킨다. 또 다른 수용성 비타민인 비타민 C는 과량 복용했을 경우 신장 결석이 생길 위험이 있다. 이것 역시 설사와 복부 근육 경련을 일으킨다. 비타민 C를 500mg 이상 복용하던 것을 갑자기 중단하면 비타민 C 결핍증에 걸릴 수 있다. 이는 상대적으로 신체가 높은 양의 비타민 복용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양치할 때 쉽게 잇몸 출혈이 일어난다. 다음의 표는 수용성 비타민을 과다 복용할 때 일어나는 문제들을 나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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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성 비타민 과다 복용의 문제
 
비타민 A, D, E, K와 같은 지용성 비타민은 몸에서 배출되기가 더 어렵다. 많은 사람이 보조제로 비타민 A를 적당량 섭취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질병을 앓고 있다.  하루에 2만 5천 IU(비타민 양 효과 측정용 국제단위)의 비타민 A를 섭취(영양 결핍을 예방하는 데 필요한 양보다 5배 정도가 많음)할 경우 간  장애, 두통, 머리카락 빠짐, 피부 건조, 뼈의 통증 그리고 관절 통증과 같은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비타민을 1만  IU 이상 복용한 임산부는 태아에게 선천성 장애를 일으킬 위험성이 커진다.
 
 비타민 D의 과다 복용은 신체의 칼슘 균형을 방해함으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며 혈액 내에 칼슘 축적이 일어나는 고칼슘증을 초래한다. 이 질병은 가벼운 증상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증상까지 어느 것이라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즉, 메스꺼움, 구토, 피로, 혼미, 고혈압, 신부전증, 혼수 등을 포함한다.
 
 비타민 E는 다량 복용 시 메스꺼움과 설사와 함께 허약함과 피로를 일으키는 독성이 있다. 비타민 E 과다 복용은 또한 어떤 사람들, 특히 항응고제를 복용하는 사람들에게 출혈 문제의 요인이 된다.  셀던 헨들러 박사는 비타민과 미네랄에 관한 권위자로 방대한 근거들을 인용했다. 그는 콜롬비아 대학에서 생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다른 식품 보조제보다도 비타민 E 보조제에 대하여 훨씬 많은 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헨들러 박사는 성인은 매일 400IU 이상 섭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밝히고 하루 600IU를 복용하였을 경우에 부작용이 시작될 우려가 있다고 하였다. 비타민과 미네랄 보조제를 계속 복용하는데 대한 또 다른 우려가 있다. 놀랍게도 보조제를 다량 복용하기 때문에 비타민과 미네랄이 결핍될 수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어떻게 다량의 비타민과 미네랄 보조제를 섭취하는 사람이 결핍증이라는 더 큰 위험에 처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대답은 비타민과 미네랄의 상호 작용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있다.

 인체에서 비타민과 미네랄을 운반하고 활용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한 가지 비타민이나 미네랄을 과다하게 복용하면 다른 비타민과 미네랄를 섭취하고 활용하는 데 불균형을 일으킨다.  이 상호 작용들 때문에 인체는 다른 성분들을 불필요하게 흡수해야 하고 필요로 하게 된다. 또한, 어떤 물질의 흡수를 감소시킬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비타민 C는 철분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다량의 비타민 C를 매일 섭취한다면 인체는 상호 작용에 의해서 철분의 흡수를 증가시킬 것이고 이는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킨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잠정적인 해로운 상호 작용에 대해서 무지하다. 중요한 것은 누구도 주의 깊은 생각 없이 많은 양의 식품 보조제를 복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보조제인가? 천연의 식품인가?

 식품 보조제를 사용하지 않고도 비타민의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있다. 항산화제 비타민을 복용하는 대신에 식물성 식품 속에 있는 항산화제를 먹으면 된다. 최근에 이루어진 연구는 녹색 엽채류인 케일 한 컵을 섭취함으로 비타민 E를 1,100IU와 동일한 항산화 노화 방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케일에는 항산화 비타민 E가 13IU 정도만 들어 있기 때문에 다량의 비타민 E에 따르는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고도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케일에는 많은 다른 항산화제가 들어 있어서 1,100IU의 비타민 E 보조제에 해당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과일과 채소를 섭취할 경우, 비타민 함량을 기초로 한 기대치 이상의 강력한 항산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천연 식품 속에 함유된 성분들은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킴으로써 현대 과학이 미처 밝히지 못한 효과와 결과를 만들어 낸다.
 
 풍부한 과일과 곡식 그리고 채소를 먹으면 실제로 수명이 몇 년 더 늘어날 수 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채식은 풍부한 육류와 빈약한 채소로 이루어진 식단에서 기대하는 것보다 평균 10년 이상의 수명을 늘릴 수 있다고 한다. 채식이 수명을 증진시키는 방법은 실질적으로 다른 퇴행성 질환의 위험률을 낮출 뿐 아니라 가장 강력한 사망 원인인 심장병과 암의 발병률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좋은 영양을 찾으려고 보조제를 찾기보다는 건강에 유익을 주는 식품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비타민 보조제와 수명
 
보조제 사용은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비타민과 미네랄 보조제가 정말로 사람의 수명을 증가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식품 보조제가 어느 정도의 차이를 만드는가?  이 질문은 얼마 전 미국의 국민 만성 질병 예방과 건강 증진 센터의 연구진들이 가졌던 질문이다.
 
 1971년부터 1975년에 걸쳐서 시행된 광범위한 연구 자료를 검토한 결과, 연구진들은 식품 보조제를 섭취했던 사람들이 섭취하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서 조금도 오래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미국에서 비타민과 미네랄 보조제를 섭취한 사람들의 수명이 더 길다는 어떤 증거도 찾지 못했다. 보조제들은 제약 회사의 약속대로 수명을 연장시키지 못했다는 것이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다.

 건강의 근본이 비타민과 미네랄 보조제에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풍성한 과일과 곡식 그리고 채소에 기초한 식사에 있다. 이런 음식을 선택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비타민과 미네랄의 유익을 제공해 줄 뿐 아니라 아직 발견되지 않은 많은 요소까지도 제공한다. 과학자들이 천연의 식품 속에서 어떤 특별한 성분을 발견하고, 그것을 추출해 내는 기술이 되어 상업화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천연의 과일과 채소와 곡물을 충분하게 섭취함으로써 최고의 유익을 누리는 것이 지혜이다.

가정과 영성: 행크 아론과 마태복음 20장

 행크 아론이라는 아주 유명한 야구 선수가 있었다. 그의 홈런 기록은 미국 야구 역사에 있어서 한 획을 긋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뉴욕 양키스 스타디움에서 홈런을 칠 때마다 한 소년이 행크 아론, 나도 당신처럼 되고 싶어요! 나도 당신처럼 되고 싶어요!라고 크게 소리쳤다.

 한동안 그 소리를 무시하다가 한번은 홈런을 쳤는데 또 그 소년이 행크 아론, 나도 당신처럼 되고 싶어요! 나도 당신처럼 되고 싶어요!라고 크게 소리쳤다. 행크 아론은 그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서 소년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얘, 아이야, 사실 너는 진짜 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 너는 단지 내가 갖고 있는 능력과 돈과 인기를 갖기 원할 뿐이야. 정말 네가 나처럼 되고 싶으면 너도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온 몸이 땀에 젖도록 뛰어야 하고, 손바닥에 피가 고이도록 공을 쳐야 하는데 너는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지?사람들은 나는 예수처럼 되고 싶다.라고 말한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누가 마귀가 되기 원하겠는가? 그러나 입으로는 나도 예수처럼 되고 싶다.라고 말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 말이 정말 무엇을 뜻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예수처럼 되고 싶어서 교회에 나왔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예수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변해 가는 상황, 바로 이것이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의 모습이다. 마태복음 20장 17-28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그러한 문제가 있었다. 그러한 그들을 보면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예수께서 마시려는 잔은 무엇인가? 십자가의 피의 잔이다. 고난의 잔이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따라다니면 고생과 피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의 두 제자는 권력과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대답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바로 이것이 지구 역사 6천 년 동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해 온 엇갈린 기대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피의 잔을 마시라고 요구하시는데, 인간은 항상 하나님께 권세와 파워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분명히 하셨다. 예수님의 목적은 인간에게 권세와 파워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피의 잔을 마시도록 안내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마신 것처럼 말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6-28)

창조 교실: 2,000년 전 씨앗

 식물의 씨앗 속에 들어 있는 생명력은 정말 신비합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씨앗 속에 있는 생명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언제든지 발아하기에 적당한 조건만 형성되면 새로운 싹을 틔웁니다.

 많은 식물의 씨앗은 잠자는 기간인 휴면기를 가지고 있는데, 적당한 조건, 즉 산소, 물, 온도의 조건이 맞으면 싹이 틉니다. 씨앗은 살아 있는 개체이기 때문에 휴면기에도 숨을 쉬고 물질대사를 한다고 하는데, 개중에는 수백 년 동안 생존한 씨도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씨앗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한 과학 잡지에 실렸습니다.
 이스라엘 루이스 보릭 국립의학연구소 사라 살론 박사팀은 이스라엘 마사다의 헤롯 왕의 요새를 발굴하다가 찾은 대추야자 씨앗 3개를 2005년에 심어, 이 가운데 하나를 발아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사이언스 2008년 6월 13일 자에 발표했습니다.

 연구자들이 발굴에서 찾은 씨앗 가운데 2개를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으로 분석하여 본 결과, 이것은 대략 2,000년 전의 씨앗이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합니다. 연구자들은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씨앗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여름이 덥고 건조한 마사다의 기후가 생체 분자를 파괴하는 활성 산소의 발생을 억제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고 설명했습니다. 현재 발아해 키가 121cm인 이 대추야자는 므두셀라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활동하던 무렵, 이스라엘에는 대추야자 나무가 대량으로 재배되었으며, 그것은 그 당시 최대 수출 품목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쟁과 가뭄으로 재배지가 축소되다가 800년 전 십자군의 침략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현재 연구자들은 이 대추야자 나무인 므두셀라의 조직을 떼어내 유전자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를 토대로 하여 현재 재배되고 있는 대추야자와의 차이를 규명하고 새로운 품종의 대추야자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씨앗 속에 들어 있는 생명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2,000년이나 되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발아한 이 대추야자 나무의 씨앗 속에 그런 놀라운 생명력을 넣어 주신 분은 과연 누구일까요?
 
 씨앗 속에 그런 생명력을 넣어 주신 분이 우리 마음속에 능력으로 역사 하신다면 우리의 마음도 새롭게 발아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지 않을까요? 
 

신앙: 1부 - 하나님의 섭리와 예수의 믿음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께 바친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의 삶 속에 생기는 일들은 반드시 그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잘 알 수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생애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고안된 일입니다.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조명해 보았습니다.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기사가 되었으면 합니다.  - 편집실 -

 하나님의 섭리는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일까? 우리가 금방 알아보고 따라갈 수 있도록 분명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아니면 애매모호한 방법으로 일어나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 섭리의 역사를 식별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의 믿음, 즉 우리가 소유해야 할 예수의 믿음과 하나님의 섭리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필자가 얼마 전에 겪었던 경험을 나누면서 이 중요한 과제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자. 
 
 브라질 집회로 가는 길에서의 경험
 
지난해 말에 필자는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루 시에 위치한 한 선교원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브라질 사람들을 위해 집회를 인도해 주고 돌아온 경험이 있다. 그런데 브라질로 여행하는 도중에 아주 흥미 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그 경험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 믿음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좀더 확실한 이해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거의 일 년 전부터 미리 초청을 받고 있었던 나는 내 일정표에 이 집회를 적어 두고 석 달 전에 비행기표까지 미리 사 두었다. 떠나야 할 날짜가 되어 내가 살고 있는 조지아 주 애틀랜타 공항으로 향했다.  밤 비행기였다.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비행기를 타려고 데스크에 여권을 내밀었더니 직원이 브라질 가는 비자가 있느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아니, 비자라니? 미국 여권을 가지고 지금까지 20번이나 넘게 남미 여행을 해 보았지만, 비자가 필요한 나라가 없었는데 브라질에 입국하는 비자가 필요하다니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직원은 내게 지난 2,3년 전부터 브라질에 가려면 미국 시민도 비자가 필요해졌다고 설명해 주었다. 미국이 외국 사람들에게 비자를 요구하며 입국하는 외국인들에게 손도장까지 찍게 하는 것을 야속하게 여긴 브라질이, 미국인들에게서 비자를 받아 입국시키라는 조처를 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나를 초청한 측에서는 내가 그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리오데자네이루에서 약 200여 명의 브라질 신자들이 눈이 빠지도록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아찔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비자를 받으려면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 디씨로 가야 하고, 또 하루 만에 비자를 받는다는 것도 보장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이튿날 아침 일찍이 워싱턴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 안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드렸다. 주님! 제가 브라질에 가는 일이 주님께 꼭 필요하시다면 길을 열어 주십시오! 사실 저는 다른 곳에 갈 데가 많습니다. 꼭 브라질에 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주님의 섭리대로 인도해 주십시오!

 워싱턴에 도착하자마자 차를 한 대 대여해서 브라질 영사관으로 향하였다. 같은 날 저녁에, 브라질행 밤 비행기를 타려고 애틀랜타로 가는 오후 5시 비행기를 예약해 두고 말이다. 아침 9시쯤 영사관에 도착하여 직원에게 내 사정을 설명하며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자 그는 비자 사무는 오후 2시부터 시작한다고 말하면서 지금은 비자에 대하여 상의할 직원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비자를 받는 기간이 정상적으로는 나흘이나 걸린다는 사실도 아울러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드렸다. 주님! 이번에 브라질 집회에 제가 꼭 필요하시다면 섭리의 역사로 인도해 주십시오!

 오후 2시에 다시 영사관을 찾았다. 이미 약 30여 명이 줄을 서고 있었다. 번호표를 받고 기다리다가 제일 마음 좋게 생긴 여직원에게 가서 내 사정을 설명하고 호소하였다. 당신 나라 사람들이 나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다고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때 그 직원은 내게 언제까지 비자를 만들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한 시간 안에 받아야 한다고 대답하며, 오늘 밤 비행기를 타지 못하면 차라리 가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직원은 너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한 시간 내에 비자를 내어 주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할 수 없어 말없이 서 있자, 그 직원이 그러면 부 영사에게 가서 한번 사정이나 이야기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약 15분 정도 기다렸다. 그 직원이 돌아오더니 생전 처음 특별한 케이스로 한 시간 안에 비자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크게 웃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브라질에 내가 필요하신 모양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영사관에서부터 워싱턴 레건 공항까지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지름길을 사람들에게 물어 적어 놓았다. 비자를 받자마자 나는 정말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는 뛰어나와 차를 달렸다. 출퇴근 시간의 교통체증을 피하면서 고속도로를 달려나갔다. 20분은 달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중요한 시점에서 그만 나가는 길을 놓쳐 버린 것이다. 잠시 길을 혼동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15분 정도를 더 돌면서 허비하고 나서 공항에 도착하여 뛰어갔는데, 약 5분 차이로 비행기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이미 수속을 마감했기 때문에 5시 비행기를 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음속에 갑자기 의심과 혼돈이 생겼다. 과연 내가 브라질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란 말인가? 한 시간 안에 비자를 받은 것은 하나님의 기적과 섭리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애틀랜타로 가는 비행기를 놓쳤으니 어떻게 오늘 밤에 브라질로 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말인가? 참으로 난감했다! 그러면 브라질로 보내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는 어떻게 된 것인가? 비자를 한 시간 만에 받게 해 주신 하나님께서 내가 고속도로에서 나가는 길을 놓치지 않도록 역사 해 주실 수는 없으셨단 말인가? 내가 그만 감정적으로 그렇게 느낀 것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아니면 정말 하나님께서 내가 브라질에 가도록 섭리하시는 것일까?

 나는 잠시 기도하고 나서 항공사 다른 직원에게 다가갔다. 그 직원에게 비행기를 놓쳤다는 설명을 하자, 그는 마침 웬일인지 6시에 떠나는 비행기 한 편이 더 추가되었네요. 짐을 가지고 뛰어가면 아마 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리가 없지만 한 좌석을 만들어 볼 테니 일단 뛰어가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해 준 것입니다.라고 외치며 무조건 뛰었다.

 겨우 비행기 좌석에 몸을 던진 나는 땀을 닦으며 감사를 드렸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비행기가 애틀랜타에 8시에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브라질로 가는 비행기는 8시 40분에 떠나게 되어 있는데, 과연 그 연결편을 탈 수 있을까가 문제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문이 열렸으니 또다시 하나님께서 섭리해 주시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 위로하였다. 그런데 비행기가 10분이나 연착하는 것이 아닌가! 비행기 승무원에게 말했으나 연결 편 비행기표를 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서로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리자마자 나는 뛰었다.

 그런데 예약된 비행기 데스크에 도착하니 약 7분밖에 남지 않아서 문은 이미 닫혀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직원은 내가 안 오는 줄 알고 내 좌석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에게 워싱턴에서부터 여기까지 오게 된 하나님의 섭리를 말해 주면서, 저 비행기도 타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전했다. 이 말을 들은 직원은 정말 비자를 한 시간 만에 받았단 말이에요? 매우 신기해하며 어디엔가 연락을 하고 나서는 더 좋은 자리에 좌석을 마련하여 주면서 Have a good trip! 잘 다녀오세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감사하면서 좌석에 앉아서 생각해 보았다. 그날 온종일 마음속에서 믿음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았다.

섭리를 믿는 믿음
 
우리는 실상 하나님의 섭리를 미리 볼 수가 없다. 더 이상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을지라도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것을 알아볼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섭리의 역사는 나중에 가서야 깨닫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다. 믿음은 섭리나 기적을 알아볼 수 있는 특별한 안목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되든지, 어떠한 일이 일어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이라는 사실을 신뢰하는 믿음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최선을 아시며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불안과 초조함 가운데 살아간다. 그것은 우리의 원대로 이루고 싶은 소원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브라질에 도착해 보니, 하나님께서 그곳에 나를 정말 필요로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 선교원의 지도자들이,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이, 또한 전도인들이 나의 부족한 가르침과 조언들과 하나님의 복음을 너무나 절실히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집회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큰 감화 속에서 성공리에 마쳐졌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은 결국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섭리를 통하여 역사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느끼거나 눈으로 볼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의심으로 흔들리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 문이 열리며 잘 나가다가도 갑자기 문이 닫혀 버리면서 하나님의 역사가 보이지 않는다거나, 주님의 섭리와 뜻을 의심하여 낙심하게 되는 경우들이 종종 생긴다.

 우선 나의 문제는 내 실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비자 문제를 알아보지 않고서 소홀히 한 나의 잘못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주시면서 역사 해 주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적과 섭리의 역사에도 우리의 협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역사를 기다리는 인내와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역사는 시원하게 일률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마귀의 터전이며 또한 완악해진 사람들의 마음이 다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강요하는 분이 아니시다. 그래서 계시록 14장 12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는 것이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는 예수의 믿음이 필요하다. 예수를 믿는 믿음뿐만이 아니라, 예수께서 가르치신 믿음, 예수께서 이 세상에 사실 때에 가지고 계셨던 그 믿음, 그래서 죄와 사단을 이기고 승리하셨던 그 믿음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만 사셨던 믿음이다. 그분의 모든 계획과 소원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며 이루는 것이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고, 예수님은 그 목적을 위하여 사셨다.

우리에게 필요한 예수의 믿음
 
예수 믿음의 진수는 십자가에서 나타났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예수님은 인류가 지은 죄 짐의 무게를 느끼심으로 비틀거리기 시작하셨다.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는 아버지의 임재를 더 이상 느끼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외침이 예수님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던 것이다.  그러한 캄캄한 상황 가운데서 예수께서는 아무런 기적이나 아버지의 섭리를 볼 수가 없으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신뢰하신 것은 눈에 보이는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는 그 상황에서 예수께서 신뢰하시고 붙들었던 것은 과거에 아버지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잘 알고 계셨고, 그분이 하신 약속의 말씀은 영원히 불변한다는 사실을 믿으셨다. 그리하여 어두운 영혼의 밤중에도 주님께서는 그것을 믿으시고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신 것이었다. 주님은 믿음으로 승리자가 되셨다.

 이제 머지않은 장래에 개국 이래로 없던 환난을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예언해 주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의 믿음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의해 마음과 신뢰가 흔들리는 믿음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섭리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뜻과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핍박당할 때나 시련을 당할 때에, 특히 장래에 큰 환난의 풀무 불에 빠질 때에 하늘 천사들의 합창 소리나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임재의 광채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시간들은 시험을 받아 고뇌하는 시간이지 영광을 누리는 시간이 아니다. 하나님의 광채나 천사들의 도움이나 응원이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을 때에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끝까지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인내이다. 그것이 예수의 믿음이다. 우리는 그 믿음을 지금부터 실천하면서 배워야 한다. 환난 때에 불러야 할 우리의 노래는 예수 믿음의 노래이다.

 그 위대한 엘리야도, 침례 요한도 인간적으로 잠시 흔들렸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지고 있던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그들은 결국에 가서 예수의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였다.  요셉은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의 기적을 볼 수가 없었다. 노예로 팔려가는 길에도, 선한 일을 하다가 모함으로 감옥에 가는 와중에도 하나님의 섭리와 기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참 믿음을 가지고 믿고 기다렸다. 죽음에 처한다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면 결국 하나님의 섭리가 그분의 뜻을 이루실 것이라는 것을 그는 신뢰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 모진 세월과 고난을 이기고 승리자가 된 것이다.

 빌립보 감옥 속에 갇혔던 바울과 실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였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방향을 바꾸어 빌립보로 전도하러 갔던 그들은 오히려 자기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발이 족쇄에 묶여 꼼짝 못하는 처절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찬송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찬송은 감옥을 뒤흔들어 문들이 열리게 하는 지진을 일으킬 정도로 하늘을 움직이는 강력한 믿음의 찬송이었다.

 현시대는 눈에 보이는 증거를 찾는 시대이다. 기적과 눈에 보이는 축복을 갈구하는 시대이다. 복과 번영이 오지 않으면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을 듣는 시대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오는 핍박과 고난을 당연하게 여기는 믿음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예수의 믿음을 배워야 한다. 무엇을 믿는 믿음이란 말인가?  우리의 감정이나 자신의 논리를 믿는 것이 아니고, 또 눈에 보이는 기적을 믿는 것도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믿는 것, 그 말씀의 약속을 믿고 따라나가는 것, 곧 하나님의 명령을 신뢰하고 믿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믿음으로 따라가는 법을 지금 배워야 한다. 초자연적인 기적이 생기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을. 전혀 하나님의 기적이나 주님의 섭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결국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고야 마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며,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사는 사람이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고후 5:7).  

 

신앙: 2부 - 섭리의 길을 확인하는 법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잘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찾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바치는 당신의 애정과 충성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영적인 일에 온 마음과 관심을 쏟는 당신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기로 결심한 당신의 마음을 주님께서는 크게 생각하십니다. 그래도 어떤 땐 모르시겠다고요? 정말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인지, 왜 주님을 따라가는 길에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인지, 왜 원하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게 되는지, 그리고 왜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모든 것이 귀결지어지는지 이해할 수 없으시다고요? 또한, 당신이 가고 있는 길이 정말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길인지 혼란스러우시다고요?
 때때로 우리는 삶을 살아가다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아니, 전혀 계획하지 않은 길로 가게 되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일이 풀려 가는 것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길을 따라 좁은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더 빈번하게 생길는지도 모릅니다. 인생의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과 일들을 만나면서, 어떤 때는 참아내기 힘든 경험들을 통과하면서, 아니, 때로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시련들을 겪으면서 그리스도인들은 부르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길은 무엇일까? 나는 과연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섭리의 길에 서 있는 것인가라고&. 하나님 섭리의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조언들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영적인 식별력을 기르십시오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명확한 영적 식별력이 요구됩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만 분변할 수 있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4,3).
 어떤 일이 생길 때, 우리는 즉시 육적인 시각을 떠나 영적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영적 안목을 길러야 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이 일이 영적으로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지 볼 줄 아는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의 그 너머를 꿰뚫어 보며 그 일에서 빨리 영적인 교훈과 배움을 얻어야 합니다. 육적인 눈으로만 바라보면, 그리고 현재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가지고 판단해 보면 낙심할 수밖에 없고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어나는 그 일 너머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혹시 그 일어나는 일들이 사단이 다스리는 죄악 세상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불행한 일일지라도, 그것을 결국 축복으로 바꿔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며, 그 일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섭리는 인간의 눈으로는 잘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섭리의 길은 어떤 때 매우 어둡고 절망적이고 지혜롭지 않은 것 같아 보입니다. 때로 인간의 안목으로 그 일은 옳지 않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십자가의 도는 인간의 육적인 안목으로 보면 미련하게 보이지만, 그 섭리에는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답니다. 

 영적인 안목과 식별력을 가지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안약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적 식별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그 일이 나에게 어떤 영적인 유익을 얻게 하려고 일어나는지 보고자 성령의 안약을 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식별력은 성령의 역사 하심이 아니면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우리는 무슨 일을 당할 때마다 그 일을 영적으로 분별하고 영적으로 그 의미를 터득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영적인 식별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리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가십시오
 어떤 것이 하나님의 섭리인지 알기 어려울 때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느 때 아무리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이 뭐라고 하시는지 알아보고 그 말씀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과 섭리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려주시지 않는 이유는, 그 모든 것이 말씀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말씀 속에서 우리가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헤아리고자 성령의 지혜와 지도하심을 간구하면서 말씀을 연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속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님의 지도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사 30:21).
 
 말씀을 연구하면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게 됩니다. 말씀 속에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심지어 어디서 살아야 하는지까지 다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기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모든 뜻이 말씀에 나타나 있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연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즉 구원의 도리를 깨닫게 되는데, 말씀은 우리 속에 진리 되시는 그리스도를 탄생하게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면 하나님의 섭리를 더 잘 파악하게 되므로,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여 모시고자 말씀을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벧후 1: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말씀을 연구하고 따라갈 때, 하나님의 섭리를 확실히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섭리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바른 진리를 깨달은 사람과 함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알기 원할 때 종종 도움이 되는 것은, 진리를 깨달은 지혜로운 사람의 조언을 듣고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진리를 알고 거듭난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앞길이 어둡고 어떤 결정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영적이고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함께 하늘의 도우심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입니다. 함께 기도하는 일에는 역사 하는 힘이 크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사람들이 모이면 쓸데없는 대화들을 주고받을 때가 많습니다. 유용한 이야기와 영적인 주제에 대한 대화들은 영혼을 살찌게 하고 서로에게 생명을 주지만, 무익하고 세속적인 대화나 험담들은 영혼을 윤택하게 할 수 없으며 그런 분위기 속에서는 성령의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때때로 영적인 대화를 나누는 중에 갑자기 하나님의 영께서 역사 하셔서 깨닫게 하고 답을 얻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그 영적인 교제에 축복하신 결과인 것입니다.
 
 영적인 좋은 친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인생에 풍성한 축복을 얻은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 13:20). 또한, 때때로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금식하면 우리 몸의 모든 장기가 쉬게 되며 소화와 대사를 위하여 소모되는 에너지를 줄이게 되므로, 정신이 더욱 명료해지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일어나는 일에 감사하며 순응하십시오
 
환경이나 상황을 변하게 할 수는 없어도 우리의 마음은 변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어나는 모든 일에 순응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만 변하면 못 견딜 고통이 없고, 지내지 못할 어려움이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은 고난 속에서도 하늘의 평안을 맛보는 꽃이 핀 길입니다. 어려운 시련과 고난들을 만날 때, 그리고 알 수 없는 시험과 걱정으로 마음이 흔들릴 때, 슬픈 일을 당하여 낙담 될 때, 섭리의 길이 투명하게 보이지 않아 혼란스럽고 두려울 때, 우리는 우리의 짐을 주님께 내려놓고 편히 쉬어야 합니다.
 
 감당하기 심히 어렵고 가혹하게 보이는 시련이라도 일단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축복임이 판명될 것입니다. 세상의 쾌락을 앗아가는 혹독한 재난이 오히려 우리의 눈을 하늘로 향하게 하는 수단이 됩니다. 슬픔을 당하여 예수님 안에서 위로를 구하는 일이 없었더라면 결코 그분을 알지 못했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순응한다는 것은 주님께 굴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나의 유익을 위하여 주님께서 마련하신 것이라는 것을 믿고 주님의 사랑 속에서 쉬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것은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며 주님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경험 속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찾아내고 그분의 지도하시는 길을 따라 감사하며 걸어가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참된 성도이며, 마지막 하나님의 참 백성이며, 구원 얻을 자, 곧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계 14:4)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진정으로 희생하도록 요구받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많은 것을 당신께 바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같지만, 그것은 우리가 하늘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버리는 데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생애에 매우 소중하고 좋아 보이는 것들을 버리라는 요구를 받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더 좋은 일을 이루어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믿고 조용히 순응하고 주님께모든 것을 굴복하여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장차 하늘 본향에 가면 이 땅에서 우리를 괴롭게 하고 실망하게 했던 신비들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응답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였던 우리의 기도와 좌절당했던 희망이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최선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항상 최선의 길로 그분의 자녀들을 인도하십니다. 만일 휘장이 걷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다면, 우리가 인도함 받기를 원하는 바로 그 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안목이나 계획이나 생각보다 월등히 나은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곧, 우리 각자를 위한 최선의 길과 축복의 지도를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앞길이 잘 보이지 않더라도 최선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십시오. 항상 우리에게 최선의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며, 최선의 축복으로 갚아 주시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계신 것을 감사하십시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그런 믿음으로 살았던 믿음의 조상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 믿음으로 &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히 11:24~27).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개인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성경은 자비로운 하늘 아버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9~31).
 
 광대한 우주를 변함없는 법칙에 따라 운행하시고, 나라들의 흥망성쇠와 정세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주에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티끌보다 적은 지구에 사는 당신을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을 생각하십시오. 당신은 참새 한 마리도 그냥 떨어짐이 없이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가장 최선의 길, 곧 하나님 아버지를 더 잘 알 수 있는 최선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계획이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의도를 버리는 것이 최선의 길임을 보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허락하는 것이 최선의 일이 아니라고 보시면, 그분께서는 당신의 사랑의 증거를 보여 주시고 우리에게 다른 것을 주심으로 거절하신 일에 균형을 이루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고 관심을 두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것보다 우리 자신을 더욱 잘 이해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야망을 채우려고 이기적으로 구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시고 거절하십니다. 때때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우리의 계획은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최선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신앙: 3부 - 시련을 통해 배우는 노래

 때때로 우리의 생애에 알 수 없는 시련과 재난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어려운 고난과 시련이 닥칠 때면 믿음이 흔들리면서 과연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인도하고 계신가 하는 시험과 의심에 빠지기 쉽습니다.

 종종 시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섭리의 과정에 포함되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혹시 시련을 당하고 계십니까? 모든 소유를 잃고 어려움에 처하게 되셨습니까? 믿었던 친구가 떠나가 외로움에 떨고 계십니까? 질병으로 마음과 몸이 괴로워 신음하고 계십니까? 재난으로 한숨을 쉬고 계십니까? 시련 속에 있는 당신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말씀을 보내 드립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으면 하나님의 조용히 속삭이며 위로하시는 음성을 들으실 것입니다.

시련은 근거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시련이 닥쳐 비록 괴로움 속에 떨고 있을 때에라도 우리는 잠깐 시간을 내어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시련과 슬픔은 아무 근거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시련은 자신의 잘못으로 초래되기도 하고, 혹은 아무 잘못이나 실수 없이 우연히 닥칠 수도 있습니다.
 시련이 왜, 어떻게 해서 오는지 정확한 원인을 규명해낼 수 없을지라도,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시련을 통해 우리를 연단시키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신다는 것이며, 우리는 시련들을 통해 귀중한 교훈들과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난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단을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우리는 시련을 당할 때에 불평하지 말고 조용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주님 앞에 겸손히 낮추고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시련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강한 것인지 아니면 곧 흔들려 없어질 약한 믿음인지를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애 3:33)십니다. 그분께서 시련과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히 12:10)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는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이 유익이 됨을 배우며, 주님의 징계를 경시하지 말고, 하나님께 책망받을 때 낙심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시련의 단련은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주님과 같은 성품을 닮고 그분의 생애와 같이 살아가려고 애쓰는 그리스도인 생애의 매 발걸음마다 노력과 자아희생과 수양이 요구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너무 쉽게 낙심해 버립니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많은 사람들이, 전에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장애물을 만나고 시련과 난관에 둘러싸이게 되면 놀라고 실망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같은 품성을 소유하기 위하여, 또한 주님의 사업에 적합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치고 헌신하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기도하기 전보다 본성에 있는 모든 악을 자극하는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자기 속에 그런 것이 들어 있었는지 전혀 의심해 보지도 않았던 결점들이 나타나고, 매사가 꼬인 실타래처럼 얽혀 힘들고 난처한 상황에 빠지면 그리스도인들은 옛날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부르짖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면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닥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련과 장애는 주님께서 택하신 훈련의 방법이며, 또한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정하신 성공의 조건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성품을 우리들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잘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은 잘 지도하기만 하면 그분을 위하여 사용될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이 있는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각기 다른 위치와 여러 가지 환경에 처하게 하시는 섭리로써, 지금까지 알지 못한 채 감추어져 있던 결함들을 그들의 성품에서 발견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그런 결함들을 교정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사업에 적합해지도록 훈련받을 기회를 주십니다.
 
 때때로 그분께서는 고난의 불이 그들을 엄습하도록 허락하심으로써 정결해지게 하십니다. 우리가 시련에 당면해 있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계발시키기를 바라시는 귀중한 무엇이 우리 속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그분께서 우리 속에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우리를 연단하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가치없는 돌을 용광로 속에 던져 넣지 않으십니다. 대장장이가 쇠와 강철을 불 속에 던져 넣는 것은 그것들이 어떤 종류의 금속인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사람들이 어떤 기질의 사람들이며 그들이 당신의 사업을 위하여 적합한 자들이 될 수 있을 것인지의 여부를 시험해 보고자 그들이 고난의 풀무 속으로 들어가도록 허락하십니다.
 
 장인은 그릇이나 도자기를 만들려고 먼저 진흙을 가지고 형체를 구상합니다. 그는 흙을 이기고 빚다가 그것을 떼어서 찧고 또 눌러서 뭉칩니다. 그러다가 물로 축이고 다시 말립니다. 그는 얼마 동안 손을 대지 않고 그것을 놓아두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장인은 그릇을 만드는 일을 계속합니다. 진흙으로 모양을 만든 다음, 깎고 다듬어서 햇빛에 말리고 솥에서 굽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용하기에 알맞은 그릇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빚어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마치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분의 손에 놓여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바침으로 예수님에 의하여 꼴 지어지는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 배우는 노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만일, 어떤 새에게 노래를 가르치려는 주인이 있다면, 다른 음성의 노래들이 들려 오는 밝은 대낮 동안에는 새장 안에 있는 그 새에게 노래를 가르치기가 힘들 것입니다.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여러 소리와 환경은 그 새가 주인이 가르치려고 애쓰는 그 노래를 배우는 데 방해가 됩니다. 그런 경우에 새는 노래의 한 절 한 절씩을 여기저기에서 떼어내어 짤막짤막하게 부르는 흉내만을 낼지언정 결코 단독으로 완전한 곡조를 다 부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새장을 덮고 그 새가 하나의 노래만을 들을 수 있는 어두운 곳에 두면 그 새는 주인의 노래를 잘 배우게 됩니다.
 어두움 속에서 그 새는 되풀이해서 그 노래를 부르려고 노력하게 되고, 그리하여 마침내 그 노래를 배워 완전한 곡으로 부르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 그 새를 밝은 곳으로 내어 놓으면, 그는 자기가 배운 노래를 거기에서 부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과 아픔과 외로움 속에서 배우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의 그늘 아래서 그것을 배우게 되면, 우리는 그 후에 언제나 그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마지막 남은 무리인 하나님의 참 성도, 곧 십사만 사천이 부르는 노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계 14:3).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계 15:3).
 
 마지막 환난을 통과하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 앞에서 찬양할 십사만 사천은 노래를 부를 것인데, 그 노래는 곧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입니다. 왜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일까요? 그것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홍해를 가르고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하는 노래이며,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믿음의 경험의 노래인 것입니다.
 마지막 백성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노래, 하나님이 구원하신 역사에 대한 자신만의 간증의 노래가 있어야 합니다. 십사만 사천이 부르는 경험의 노래는 모든 시련을 믿음으로 견디고 아픔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기이함과 감사함을 배운 후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련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보석을 만들고 계십니다
 
때로 시련을 겪지 않았더라면 인생의 의미를 결코 배우지 못했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변하지 않았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생의 고난은 우리의 성품에서 불순물과 거친 것들을 제거해 내는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돌 같은 우리들이 채석되어 깎이고, 끌로 새기어지고, 갈리고 다듬어지는 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그리고 모난 돌을 가는 회전 연마기 속에 들어가 갈고 닦여지는 경험도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간 돌은 하늘 성전의 제자리를 채우는 데 부족함이 없게 준비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쓸모없는 물건을 위해서는 주께서 그처럼 신중하고 철저한 작업을 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그분의 보석만이 궁전의 식양대로 다듬어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보석입니다. 그들은 그분을 위하여 밝게 빛나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흘러나가게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광택은 그들이 어떤 연마의 과정을 거쳤느냐에 좌우됩니다. 그들은 깎이고 닦이기로 작정하든지, 혹은 깎이지 않은 채 남아 있기를 선택하든지 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전에 한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는 판단을 받으려면 갈고 닦는 모든 과정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갈고 닦으시지 않으시면 보통 자갈 이상의 빛을 반사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는 내 것이다. 내가 너를 샀다. 너는 지금 한 덩어리의 거친 돌에 불과하지만 너 자신을 내 손에다 두면, 내가 너를 갈고 닦아 빛나게 할 것이며 너의 광택은 내 이름에 영광을 돌릴 것이다. 어떤 사람도 내 손에서 너를 빼앗지 못하게 할 것이다. 내가 너를 나의 귀중한 보화로 삼을 것이며, 너는 나의 대관식 날에 내 면류관에 기쁨의 보석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치없는 재료에는 시간을 별로 들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귀한 보석만을 모든 거친 곳을 잘라 내시고 궁정의 식양을 따라 연마하십니다. 이 과정은 참으로 혹독한 시련이기 때문에 인간의 교만을 꺾어 놓습니다.

 주님께서는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깊숙한 곳을 잘라서 품성의 교만을 제거하십니다. 거친 표면을 잘라 내시고 모든 거친 면을 다 갈려 나가게 하신 후 그 돌을 빛 가운에 들고 비추어 보실 때, 주님께서는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이 반사되어 나오는 것을 보십니다. 그리고는 이것은 나의 보석 상자에 넣을 가치가 있다!라고 선포하십니다.
 그 경험이 아무리 혹독할지라도 그것은 매우 축복된 경험인데, 그것은 그 돌에다 새로운 가치를 주고 생명의 빛을 비추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보석으로 다듬어지는 과정을 감사히 여기며 시련과 고난을 잘 통과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 4부 - 하나님의 섭리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곤란한 경우들을 당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보기가 어렵다. 어두운 구름이 앞을 가려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고 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보지 못한 채 낙심 가운데 지나쳐 버리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서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무신론자처럼 살게 된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기는 하지만 나와는 개인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무신론자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섭리는 오랜 세월을 두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생에서 한꺼번에, 한순간에 그것을 다 볼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성경에도 얼마나 많은 믿음의 노독들이 앞이 보이지 않을 때에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나아갔던가! 야곱을 인도하시어 라반과 에서의 손에서 살리시고, 결국은 장자의 축복인 메시아의 조상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 요셉을 노예로 팔리게 하시고 감옥에서 구출해 내시어 국무총리 되게 하셔서 기근에서 이스라엘을 보존하신 하나님의 섭리, 애굽의 산파의 마음에 역사 하셔서 아기 모세를 살리게 하시고, 또한 바로의 공주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보라!
 
 사도행전 28장에는 바울이 로마로 가던 배가 파선되어 갖가지 고생을 겪고 멜리데 섬에 표류하다가, 거기서 뱀에 물렸으나 죽지 않고 보불리오라는 사람의 집으로 가게 되어 병자를 고침으로 온 섬이 구원 얻게 된 하나님의 섭리가 기록되어 있고, 또한 빌레몬서에는 도망간 노예 오네시모가 하루는 죄수들을 구경하다가 전도하는 바울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게 되는 하나님의 섭리가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어떤 일이나 사건이 그 당시와 순간에는 왜 일어나는지 알 수 없지만, 지나고 보면 그 속에는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가장 위대한 증언이 되는 사람의 생애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생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자.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섭리의 부르심
 
인류가 바벨탑의 사건에서 흩어진 후 이 세상에 또다시 우상 숭배가 보편화 되자, 하나님께서 완고한 자들은 한길을 따르도록 그냥 내버려 두시고, 셈 계통의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후대를 위한 그분의 율법과 진리의 보존자로 삼으셨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남은 무리를 보존하셨다. 아담, 셋, 에녹, 므두셀라, 노아, 셈은 계통을 이어가며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보존하였다.
 
 아브라함은 미신과 이교 신앙 가까이에서 자랐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보존해 왔던 그의 아버지의 가족들까지도 주위의 유혹에 굴복하여 여호와보다도 다른 신들을 섬겼다. 그러나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은 우상 숭배가 사방에서 유혹하였지만, 경건하고 신실하며 만연한 우상 숭배와 배교에 부패되지 않은 채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끝까지 고수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그 당시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자손의 번영과 국가적 위대함에 대한 약속이 주어졌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3). 그리고 이에 더하여 다른 모든 것보다 귀중한 보증, 곧 그의 혈통에서 세상의 구세주가 나시리라는 보증이 주어졌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그러나 먼저 성취의 조건으로서 믿음의 시험이 있어야 했으며 그것에는 희생이 요구되었다. 첫 번째 시험은 하나님의 섭리의 부르심에 응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속해 있던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이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그 당시 사람들은 부족을 이루고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친족을 떠나 새로운 민족을 이루어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과 진리의 보존자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 사업의 위대한 사명을 성취하는 믿음의 조상이 되도록, 아브라함은 그의 생애에 교제하던 것들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했다.
 우상을 섬기는 친족과 친구들의 감화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려고 하는 훈련에 방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외부적 증거를 볼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안일하고 윤택했던 생활과 집과 친척과 고향을 버리고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떠났다.
 
 그는 약속의 땅에 관하여 묻지 않았다.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가 건강에 적합한지, 그리고 그가 갈 땅이 유쾌한 환경을 제공하며 재물을 쌓을 기회를 줄 것인지 묻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은 하나님께서 그로 있기를 원하시는 곳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시험을 당하였던 것처럼 시험을 받는다.
 하늘로부터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는 않았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교훈과 섭리의 사건들을 통해 그분의 자녀들을 부르신다. 그들은 극기와 고난과 희생의 길처럼 보이는 길로 가도록, 부귀와 명예와 안일을 보장하는 직업을 버리며, 마음에 맞는 유리한 공동생활을 떠나고 친족과 작별하라는 요구를 받을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들을 각각 다른 섭리로 인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감화와 도움에서 벗어나 그분의 도움만이 필요하고 그분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인도하신다.

섭리의 길에 주어진 시험들
1. 기근의 시험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과 권속들이 처음으로 머무른 곳은 가나안 사람들의 땅 세겜이었다. 그가 들어간 가나안 지역은 아름답고 비옥한 지역이었지만 숲이 우거진 산과 풍요로운 평원은 음울한 그림자로 덮여 있었다. 그가 다다른 희망의 목적지는 이방 족속에게 점령당하여 우상 숭배가 널리 퍼진 지역이었던 것이다. 숲 속에는 거짓 신들의 제단이 세워져 있었고 부근의 언덕들에서는 인간이 제물로 바쳐진 흔적들이 보였다.
 
 하나님의 약속에 매달리기는 하였으나 그가 장막을 친 곳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곳이었다. 새로 나타난 아브라함의 권속들에게 어떤 해가 미칠지 모르는 낯선 환경이었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그와 함께 하며 그가 악인의 손에 내맡겨지지 않았다는 약속의 보증을 믿으며 그의 믿음은 더욱 굳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았다. 
 하나님의 벗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훌륭한 모본을 보여 주었는데, 그의 생애는 기도와 예배를 드리는 생애였다. 장막을 치는 곳마다 그는 제단을 세우고 권속들을 불러 조석으로 희생 제물을 드리며 예배를 드렸고, 그의 장막이 옮겨갔을 때에도 제단은 남아 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점점 남쪽으로 여행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심한 기근이 닥쳐와 가족과 가축 떼들이 기갈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인도를 의심하지 않았을까? 분명히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대로 가는 섭리의 길인데 고난이 닥칠 때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고, 약속해 주신 가나안 땅을 버리거나 궁지에 몰린 나머지 그가 떠나온 갈대아 땅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환경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에 그의 믿음이 흔들리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기근을 피하여 잠깐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애굽에 체류하는 동안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약점과 불완전함을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드러냈다. 사라가 그의 아내라는 사실을 숨김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고, 그의 생애 속에 나타났던 고상한 신앙과 용기의 결핍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하여 그는 더 단련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2. 약속 지연의 시험과 실패
 
그 당시 가문에 후계자가 될 아들이 없다는 사실은 그 사람이 축복을 받지 못한 증거로 여겨지고 있었다. 아들이 없이 점점 늙어가는 아브라함에게 네가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 약속의 성취는 점점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자손도 주시지 않으면서 어떻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인가? 때때로 그의 마음은 섭리의 길을 가면서도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시간이 갈수록 열국의 아비라는 의미를 가진 아브라함의 이름은 무색해 가고 있었다. 아들을 주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으나, 아브라함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과 방법대로 당신의 말씀을 성취하시도록 기다릴 수 없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약속이 지체되는 일을 허락하셨으나 그는 그 시험을 견디는 데 실패하였다.
 
 사라는 자신이 나이 많아 자녀를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될지도 모를 인간적인 방법을 제안하게 되었고, 자신의 여종들 가운데 한 사람인 하갈을 아브라함이 취하게 하였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부족으로 행해진 하갈과의 결혼은 그의 가정뿐 아니라 후대에까지 나쁜 결과를 빚어 내었다.
 
 아직 그는 하나님의 섭리에 온전하게 순종하는 법을 더 배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후에 하나님의 능력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늙은 사라의 태에 생명을 탄생시키셨고 마침내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손 이삭이 태어나게 되었다. 

3. 마지막 시험
A. 아브라함의 갈등
 믿음으로 순종하여, 아브라함은 그의 고국을 버렸으며 친족이 사는 고향을 떠나왔다. 그는 오랜 세월을 유업의 땅에서 나그네처럼 방황하였다. 그런데 이제 그처럼 오랫동안 소망하다가 태어난 아들이 성년이 되어가고 있었을 때, 그리하여 소망의 결실이 그의 눈앞에 다가온 것같이 보였을 때, 그의 앞에 다른 모든 시험보다도 훨씬 더 큰 시험이 이르러 왔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고통으로 찢어지게 하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 번제로 드리라(창 22:2)는 혹독한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이삭은 그의 가정의 빛이요, 그의 노령의 위로요, 다른 모든 것보다도 약속된 축복의 후사였다. 그런 아들을 사고나 질병으로 잃는다는 생각만 해도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을 것이며, 백발이 된 그를 슬픔에 잠기게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친히 자신의 손으로 그 아들의 피를 흘리라는,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도저히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아브라함은 장막 밖으로 나가 맑은 밤하늘을 보며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셀 수 없이 많으리라던 50여 년 전의 하나님의 약속을 회상하였다. 만일 이 약속이 이삭을 통하여 성취되어야 한다면 어떻게 그가 죽임을 당할 수 있을까? 자신이 기만을 당했을 것이라는 유혹이 그에게 밀려왔다. 의심과 고민 중에 그는 땅에 엎드려 이 무서운 의무를 정말 수행해야 할 것인지, 주어진 명령의 확실성을 알고자 이전에 결코 해 본 적이 없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 데리고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그의 귀에 쟁쟁히 울리고 있었다.
 
 장막으로 돌아온 그는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아들의 사랑스런 얼굴을 바라보면서 떨었다. 아브라함은 자고 있는 사라를 깨워서 한 번 더 그의 아들을 안아 보도록 하고 싶은, 그리고 하나님의 요구를 말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으나, 그는 사라가 자신의 일을 방해할까 봐 두려워서 자제하였다. 이삭은 그녀의 기쁨과 자랑이었고 그녀의 생명은 그와 결탁되어 있었으므로 모성애가 그 희생을 거절할지도 몰랐다.
 
 마침내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을 불러 먼 산에서 희생을 드리라는 명령에 대하여 그에게 말하고 함께 떠났다. 가는 길에 그는 그의 아들과 하인들이 자는 동안에 기도로 밤을 지새우며, 혹시 하늘의 천사가 찾아와 시험은 이것으로 넉넉하며 이삭이 아무런 해를 받지 않고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의 고통당하는 영혼에게 구원은 이르러 오지 않았다.
 그들이 셋째 날의 여행을 시작하려고 하였을 때 북쪽을 바라보던 아브라함은 약속의 표인 영광의 구름이 모리아 산 위에 배회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에게 말한 음성이 하늘에서 온 것임을 알았다.  지금까지도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고 주의 선하시고 진실하신 증거를 생각함으로 그의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 아들은 예기치 않게 주어졌으니 귀중한 선물을 주신 분께서 다시 취하실 권리가 없으시겠는가? 이삭은 기적의 아들이었으니 그에게 생명을 준 하나님의 능력이 그것을 다시 회복할 수 없겠는가?  믿음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저편을 바라보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히 11:19) 하였다.

B. 승리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는 아버지의 마음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독생자 아들을 이 땅에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브라함밖에 없었다. 지정된 장소에 이르러 그들은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올려놓았다. 그 후에 아브라함은 떨리는 음성으로 하나님의 기별을 아들에게 알렸다.
 
 이삭은 그의 운명을 알고 두려워하고 놀랐으나, 아무 저항을 하지 않았다. 만일 이삭이 불순종하고 반항하였더라면 비탄에 빠진 노인 아버지의 뜻을 꺾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년 시절부터 즉시 신뢰하고 순종하도록 훈련받은 이삭은 하나님의 명령을 알게 되었을 때 자원해서 순종하였다.
 
 그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나누어 가진 사람이었으므로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와 아들은 마지막 사랑의 인사를 나누며 눈물을 흘리고 마지막 포옹을 한다.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칼을 든다. 이때 갑자기 그의 팔이 정지된다. 하나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그를 부른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1~18). 그는 마지막 시험에서 승리하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동시에 복음의 실재를 그의 마음에 새겨 주기 위함이었다. 그 무서운 시련의 어두운 날 동안 그가 겪었던 고통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속하기 위하여 치르신 희생의 위대함을 깨닫게 하려고 허락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인간을 위해 독생자 예수를 고통과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도록 내주셨던 것이다. 어떤 다른 시험도 아들을 제물로 드리는 것과 같은 고통을 아브라함에게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드디어 아브라함은 온 하늘 앞에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심을 증명하게 되었고, 완전한 순종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을 입증하게 되었던 것이다. 
 
섭리를 믿는 자들
 
하나님께서 섭리로 아브라함에게 시련을 주신 것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후세대에 고난을 참도록 부르심을 받을 모든 사람들에게 순종과 인내와 믿음의 교훈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인도하시지만,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을 잊어버리거나 내버리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욥에게 고통이 이르는 것을 허락하셨으나 그를 버리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사랑하는 요한이 외로운 밧모 섬으로 귀양 가도록 허락하셨으나,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그곳에서 그를 만나셨다. 그리하여 그의 계시는 불멸의 영광된 장면들로 가득 찼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이 시련을 당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은, 시련을 통하여 그들이 영적으로 부요하게 되며 그들의 모본이 다른 사람들에게 힘의 근원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의 믿음을 격렬하게 시험하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바로 그 시련들은, 우리가 모든 짐을 그분의 발아래 놓고, 그 대신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실 평안을 경험하도록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더욱 가까이 인도하기 위함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고난의 풀무를 통해 그분의 백성을 시험하셨다. 그리스도인 품성의 순금에서 찌꺼기가 제거되는 것은 풀무의 열을 통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세밀하고 엄격한 시험으로써 그분의 종들을 훈련하신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사업을 발전시키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어떤 사람들을 보시고 이들을 시련에 처하게 하신다. 그리하여 그분의 섭리 가운데서 그들의 품성을 시험하며, 그들 자신이 알지 못했던 결점과 약점들이 드러나도록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결점들을 바로잡고 하나님의 나라와 봉사에 적합한 자가 되게 기회를 주신다. 그런 기회들을 통해 그들은 교육과 연단과 훈련을 받으며 준비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시련의 과정들을 지날 때 감사하며 연단을 받아야 한다. 훗날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그 시련을 인해 감사하고 찬양할 때가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시련의 과정들을 믿음으로 견디는 독자들이 되기를 바라면서&.

질문과 답변 : 진짜와 가짜의 차이를 아시나요?

 요즘처럼 기독교가 인기 있는 시대는 또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마치 명함 한 장 지니듯이, 사람들은 자신의 사업을 위하여, 사교를 위하여, 명예를 위하여, 교회에 나가고 쉽게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리고 교인이 된 후의 편리함을 즐깁니다.
 곤란한 경우들을 당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보기가 어렵다. 어두운 구름이 앞을 가려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고 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보지 못한 채 낙심 가운데 지나쳐 버리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서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무신론자처럼 살게 된다.그러나 많은 교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 곧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적당히 세상과 어울려 세상과 같이 사는 사람이 아니고,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가를 치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입니다.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아니면 어느 인간의 학설을 따르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좋은 대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모본을 따라 살기로 작정한 자들입니다. 세상을 살기에 편리한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또한 제시하여 주신 길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의 길과 세상의 길 사이에는 항상 투쟁이 있기 마련입니다.
 
 믿는 자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일 때에는 동시에 예수를 자기의 주인이요,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 안에는 예수를 자기 편리한 대로,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믿고 사는 가짜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차 있는 이상한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기업이 되어 가는가 하면 어떤 교회들은 사회 친목 단체나 클럽처럼 변신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좌표를 다시 살펴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과연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어떠한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일까요?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은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일이란 참으로 많은 희생이 필요한 생애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기쁨과 즐거움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이 거듭나서 취미와 좋아하는 것들이 바뀌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생애를 살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쉽게, 그리고 편하게 사는 길은 멸망의 길이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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