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편지: 빛을 향한 염원

 많은 사람이 어두움 가운데서 무디어진 삶의 바늘이 가리키는 대로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허둥대는 삶을 살다 수없이 넘어지면서도 빛의 부재를 감지하지 못한 채 흑암 속에서 살아갑니다. 어느때 간혹 섬광처럼 번뜩이며, 신의 손길로 빚어진 섭리가 혼수상태에 빠진 것 같은 마음을 잠깐 깨울 때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다시 똑같은 잠 속에 빠지고, 세월은 뿌연 먼지 낀 창문처럼 혼탁한 세상의 잔영을 남겨 놓은 채 빨리 지나쳐 가 버립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도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도 깨어난다는 것은 매우 신비하고 축복스러운 경험입니다. 기나긴 어둠의 동굴을 지나 갑자기 나타나는 눈부신 빛을 만나듯이, 깊은 잠을 자다 문득 환한 새벽을 맞아 그 아름다운 빛 속에서 눈을 뜨듯이, 그리고 그때에야 귓가를 울리는 새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듯,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영적으로 깨어나 빛 속에서 나를 보게 되는, 알게 되는 경험은 새롭고도 신비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결코 다시 어두움 속에서 잠들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눈이 먼 물고기
 미국 테네시 주에는 로스트 씨(Lost sea)라는 유명한 관광 명소가 있습니다. 로스트 씨는 미국 최대의 지하 호수인데, 300피트 정도 지하로 내려가야 볼 수 있습니다. 좁은 동굴의 입구를 따라 한참을 내려가면 깊은 굴 안에 숨겨져 있는 큰 호수가 나타납니다. 깊은 땅속 지하에 어떻게 그렇게 큰 호수가 있는지 신기해하며 사람들은 그 이름을 잃어버린 바다(lost sea)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신기한 것은 그 호수 속에 살고 있는 물고기들은 모두 눈이 멀었다는 것입니다. 빛이 전혀 없는 캄캄한 지하 동굴의 호수에서 너무 오래 살았기 때문에 그 물고기들의 눈은 점점 퇴화되어 눈이 멀게 된 것이지요.

 로스트 씨의 눈이 먼 물고기들처럼, 영적인 눈이 점점 퇴화되어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4~5).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사람들을 깨우십니다. 그러나 눈이 먼 사람들은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눈을 감아 그 빛을 거부합니다. 마치 빛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날 자신의 모습이 견디기 어려운 듯 빛을 피하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을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마 13:13)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자신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그리고 진정으로 찾아 소유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인지 알지 못한채, 이 세상을 그냥 그렇게 바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지하 동굴 속 캄캄한 호수에서 헤엄치며 살고 있는 눈먼 물고기와 같습니다.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녔다고 해도, 아무리 오랫동안 믿었다고 해도, 만일 빛이신 예수님이 마음속에 함께 사는 경험이 없다면, 예수님의 그 환한 빛에 한 번도 자신을 비추어보지 못했다면, 그리고 그 빛을 투명하게 통과시킬 만큼 자신이 없어지는 경험을 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오로지 그 빛 속에서 즐거워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리고 빛이 일으키는 변화를 체험하지 못한 채 타성에 젖은 종교 생활에만 안주해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빛을 가지지 못한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입니다.    

은안(隱眼)
 중국에서 눈이 없이 태어난 한 아기 때문에 중국 국민들이 안타까워 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중국 푸젠성 퉁안에 사는 갓 돌이 지난 샤오쉬라는 사내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얼굴에 코와 입만 있을 뿐 눈이 없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현재 샤오쉬를 치료 중인 안과 전문의는, 이 아이의 병은 일명 은안(隱眼)병으로 전 세계에서도 100여 건 정도의 사례밖에 없는 희귀병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의료팀은 5월 29일 아이의 안구를 찾는 첫 번째 수술을 진행했으며, 다행히 피부 안에서 안구 하나를 찾아내어 6월 말경이면 수술 성공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은안(隱眼), 숨겨진 눈이 있습니다. 가슴 속 깊이 숨어 있는 영적 눈이 있습니다. 그 눈은 아주 멀어 버리기 전에 찾아내어져야 합니다. 다시 크게 뜨여진 눈으로 진정한 빛이신 예수님을 보게 되어야 합니다. 누구나 원하면 자신의 숨겨진 눈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눈을 열어 빛을 볼 수 있습니다. 고개를 돌려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빛 같지만 진정한 빛이 아닌, 세상의 현란한 색채들이 가슴속의 눈을 교란시키게 허용하지만 않는다면&. 예수님께서는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요 9:39)시려고 오셨습니다. 숨겨진 눈을 찾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눈을 떴지만 소경인 사람들, 눈으로 보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눈으로 진정한 것을 찾을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진정한 눈을 뜨게 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빛을 찾는 염원
 "주광성" 이란, 빛에 반응해 행동하는 성질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식물과 나방류는 주광성을 가지고 있는데, 빛을 향한 그들의 성향은 놀랍습니다. 주광성을 가진 식물들은 햇볕을 향해 해 있는 방향으로 이파리를 향하고 가지를 굽힙니다. 아무리 큰 바위 밑이나 돌밭에 깔려 있어도 햇빛을 받으려고 빛을 향해 뻗어 나오는 가느다란 들풀들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나방류는 어두운 밤에 불을 켜 두면 아무리 멀리서도 불빛으로 몰려듭니다. 나방이를 비롯한 야행성 주광성 벌레들은 4Km나 되는 먼 거리에서도 불빛을 감지하고 그 불빛을 향해 달려온다고 합니다. 

 주광성을 가진 듯, 사람들에게도 빛을 찾는 염원이 있습니다. 빛을 찾으려는, 빛을 향하려는 마음속 깊은 곳의 염원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하늘로부터 선물로 주어진 이 아름다운 염원은 세속의 먼지가 너무 두껍게 쌓여 무디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세상의 재물들로, 혹은 명예와 부귀로, 쾌락으로 이 염원을 덮어 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의 섭리(?)로 인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빈손이 되는 상황을 만나게 될 때, 문득 사람들은 가슴속에 하나님을 간절하게 열망하고 찾는 염원이 자신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전율하게 됩니다.

빛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의 빛이 되십니다. 너무 큰 해를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듯이, 예수님의 빛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햇살로 다가오는 예수님의 빛은 우리의 가슴을 치료하고도 남을 만큼 따뜻하게 흘러 넘칩니다. 진리의 빛으로 다가오는 예수님의 빛은 과거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을 만큼 힘이 있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다가오는 예수님의 빛은 속사람을 완전하게 하여 빛 속에서 계속 자라나도록 합니다. 끊이지 않는 생명의 연속이 되도록&.  가슴속에 들어온 예수님의 빛은 우리를 치유하여 빛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입을 열어도 빛의 소리, 손을 벌려도 빛의 행동이 나와 영혼들을 살리게 됩니다.  눈을 뜨고 빛을 보십시오! 빛을 깨달으십시오! 빛 속에서 자신을 보십시오! 빛을 찾고, 빛으로 온통 자신의 삶의 이유를 삼은 사람들의 입에서는 언제나 이렇게 아름다운 찬송이 흘러나옵니다. 눈을 예수께 돌려 그 얼굴을 주목하라. 그의 영광스러운 광채에 세상 영화는 사라지네.

 빛을 향한 염원을 꺼 버리지 마십시오. 항상 당신의 마음속에서 타오르던 그 염원은 당신의 가슴속이 온통 그 빛으로 가득 찰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생애의 빛에서

고등학교 시절에 하나님을 원망하며 뇌까리던 한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아담 할아버지가 죄를 지었는데 왜 내가 그 대가를 다 받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부탁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저 태어남을 당한 것뿐인데&. 그렇다면 내 잘못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잘못이 아닌가?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해야 옳은 것이 아닌가? 간단한 질문 같지만 깊은 고뇌가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모름지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질문을 품고 해결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해결하고 지나가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어떠한 해답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하나님께 대한 이해와 개념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는 신앙의 태도도 이 질문에 대한 이해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옛날 어거스틴은 이 곤혹스러운 질문에 간단한 한 가지 답변을 던져두고 갔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원죄설'이라고 부르지요. 우리 모두는 아담으로부터 모든 조상들의 죄의 책임을 함께 공유하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여 한 번도 죄를 지어 본 적이 없을지라도 무조건 정죄 받은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이며, 남의 죄들 때문에 함께 어우러져서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고나는 그 죄의 성질을 이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 억울한 이야기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운명을 어떻게 취급하시고 계시는 것입니까?
이 문제에 대한 확실한 답변을 성경에서 찾을 수가 있을까요?

이번 호는 이 흥미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으시고 해답을 찾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가정과 영성: 어린아이의 믿음과 어른의 믿음

성경은 두 종류의 신앙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한 쪽에는 하늘을 향한 신앙이 있고 그 반대편에는 멸망을 향한 신앙이 있다. 믿음에도 두 종류의 믿음이 있는데 한 믿음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믿음이고 그 반대편에 있는 믿음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믿음이다.

 예수께서도 믿음을 두 종류로 나누시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눅 18:16,17).
 
 예수께서는 여기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갖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 있다면 그 반대편에 무슨 믿음이 있다는 말인가? 어린아이와 같지 않은 믿음, 즉 어른의 믿음이다. 어른의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결단코 하늘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실제로 믿음에는 두 종류밖에 없는데 그것은 어린아이의 믿음과 어른의 믿음이다. 그 중간에 속한 믿음은 없다.

어른의 믿음을 갖게 되는 이유

 먼저 어른의 믿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자. 어른의 믿음이란 어떤 종류의 믿음을 말하는가? 어린아이처럼 단순하지 않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고 복잡한 마음으로 믿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다 보면서 성장한 어른이 된 우리가 어떻게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 왜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갖기가 그토록 어려운가?
 
 우리가 사는 시대는 불신의 시대이다.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다고 미화하며 추한 것을 멋있게 포장하고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만드는 언어의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시대이다. 95%의 진실과 5%의 거짓이 섞여 있는 말이 난무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광고를 볼 때나 집을 살 때도 항상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살펴야,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우리의 삶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마음속에 불신과 의심의 습관을 심어 놓는다.  의심하는 방법과 불신하는 습관을 쌓다 보면 어느덧 어른이 되어 있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이렇게 어른이 된 우리가 어떻게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을 적당하게 불신하는 것이 삶의 지혜라고 배워 온 우리가 어떻게 성경에 기록된 정말 믿기 어려운 말씀들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그것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이 받아들일 만한 수준으로 낮추거나 그 의미를 왜곡시키게 되는 것이다.

어른의 믿음이 나타내는 특징
 어른의 믿음을 갖게 되면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예수께서 간음한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어도 가끔 죄를 범하면서 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어른의 믿음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는 말씀을 읽으면서도, 이기지 않는 자도 하늘에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의 여지가 남도록 해석하는 것이 어른의 믿음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조차도, 육신대로 살아도 구원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어른의 믿음이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라는 요한계시록의 말씀도, 속되고 가증하며 거짓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하늘 진주문을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른의 믿음이다.

 어른의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의심하고 불신하며 살아온 수십 년의 인생 경험이 하나님의 말씀마저  텔레비전 광고나 중고차 세일즈맨의 상술 정도로 취급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그 말씀의 의미를 낮추거나 왜곡시켜서 해석하는 것이 어른의 믿음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믿음을 가진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셨다(눅 18:16).
 
 그런데 왜 사람들은 어른의 믿음을 갖게 될까? 왜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할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대신에 자신의 능력을 바라보며 살기 때문에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 속에서 항상 불가능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내려서 생각하는 것이다.
 
 이기는 것도, 승리하는 것도, 죄를 버리는 것도, 세상을 버리는 것도, 인내하는 것도, 절제하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을 제쳐 놓은 채 자신의 능력과 경험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지게 되는데 이런 믿음이 어른의 믿음이다. 어른의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에 기초한 신앙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졌던사람들
 부모의 품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왜냐하면, 부모의 힘과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란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믿기 때문에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믿음을 뜻한다. 어린아이는 집에 불이 나도 도망쳐 나가기보다는 울면서 엄마 아빠를 찾는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으면서 그분의 말씀에 의지하는 믿음이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다. 이제 성경 속에 나오는 인물들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과연 그들이 어떤 믿음을 가졌는지 판단해 보도록 하자.

노아
노아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홍수를 보내 온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노아는 그 말씀을 믿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때에 비가 쏟아져서 지구 전체가 물로 채워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믿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산 중턱에 방주를 지었던 것이다. 이것이 어린아이의 믿음이다.

아브라함
 히브리서 11:8에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갈 바를 알지 못했음에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고향 땅을 떠난 아브라함의 믿음, 이것이 어린아이의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내 앞을 인도하시고 보장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 즉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다. 자신의 앞날과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믿음은 어른의 믿음이다. 많은 사람의 믿음이 이 점에서 큰 시험을 받는다. 아브라함 역시 자신의 힘과 능력을 바라보면서 두려워했다면 결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께서 모리아 산에 가서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을 때에 순종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물론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다.
어떻게 자식을 번제로 드리기로 결심할 수 있었을까? 저(아브라함)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히 11:19).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도 부활시킬 수 있다는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애 속에서 단 한 번도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자신의 경험 속에서 보고 들었기 때문에 생긴 믿음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생긴 믿음이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가?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해서 순종하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면 불순종에 대한 셀 수 없이 많은 이유와 변명거리가 생긴다.

사라

 창세기 18장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라가 어떻게 했는가? 장막문 뒤에서 그 말씀을 들은 사라가 웃었다. 이때 사라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어른의 믿음이다. 왜 어른의 믿음인가? 다음 성경 절을 읽어 보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창 18:13-14). 여기 어른의 믿음에 대한 정의가 나온다. 여호와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믿음이 어른의 믿음이다. 여호와의 능력을 믿지 못하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실 때에 말도 안 된다고 웃게 된다.

아브라함의 거짓말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이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애굽의 왕에게 소개했던 것은 어른의 믿음이다. 왜 어른의 믿음인가? 어떤 상황도 역전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으면 이 세상을 살면서 인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거짓을 말하게 되고 의를 행하지 못하게 된다. 사람의 눈치를 보면 어른의 믿음을 갖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면 어린아이의 믿음을 갖게 된다.

엘리야의 믿음

 길르앗에서 우거하던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나아가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비)가 있지 아니하리라 (왕상 17:1)고 말한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물론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다. 그 믿음의 근거는 무엇인가?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어린아이의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엘리야의 믿음이 얼마나 어린아이 같았었는지 살펴보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왕상 17:2-4). 
 
 아합 왕의 궁에서 빠져나온 엘리야는 까마귀가 먹여 살릴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을 그대로 믿고  그릿 시냇가로 갔다. 이것이야말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다. 어른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이런 만화 같은 말씀을 읽을 때에 정말 웃을 수밖에 없다. 이성과 합리성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를 통해서도 나를 먹여 살리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것이다. 이것이 구원하는 믿음이다. 
 
믿음을 잃어버린 엘리야

 놀라운 믿음을 가졌던 엘리야도 이세벨이라는 여인이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한마디에 겁이 나서 어떻게 했는가?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왕상 19:3-4).  바로 이것이 믿음을 잃어버린 인간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잊어버리는 순간 즉시로 깊은 두려움의 계곡에 빠져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된다. 어린아이의 믿음을 잃어버리는 순간 연약한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된다.

맺는 말

 오래전에 한 책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책의 제목은, 그분의 능력에 대해서 말하라(Tell his power)였다. 나는 그 책의 제목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 책의 제목처럼 우리가 날마다 그분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우리의 생애가 어떻게 변할까? 그분의 능력에 대해서 말하면서 우리가 걱정하고 불안해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앞에 두고서 순종할까, 하지 말까를 고민할 수 있을까?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란?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믿음이다. 말씀에 기록되어 있다는 이유 하나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될 때마다 손익을 따지면서 안절부절못하는 믿음, 그것이 어른의 믿음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마치 불난 집 속에서도 부모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가 곤히 잠자는 것처럼,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말씀 안에서 편히 쉬는 믿음이다. 우주의 왕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이 복음이다. 또한, 그분의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것이 복음이다.
 그것은 너무나 좋은 복음이어서 우리는 그것을 기쁜 소식이라고 부른다. 그런 복음을 가진 사람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채 살아간다면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너희는 가만히 있어(be still)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건강: 소금와 위암

육체의 체액이 0.9%의 소금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소금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성분이다. 그럼에도, 소금은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소리 없는 살인자로 불릴 정도로까지 치명적인 존재가 되고 있다.

 알래스카의 에스키모인들은 오래전부터 순록이나 생선을 조리하지 않은 채 날로 먹기 때문에 소금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이 섭취하는 염분은 대부분 재료 자체에 포함된 소금뿐으로서 일일 섭취량이 4g에 불과하였다. 한국인의 평균 소금 섭취량인 15~20g과 비교하면 매우 적은 양이다. 이러한 차이는 곧바로 에스키모인들의 동맥 경화와 같은 성인병의 발병률이 한국인들보다 현저하게 낮은 결과를 가져왔다.  의학자들은 에스키모인들의 특별한 저염식 식사와 건강과의 관계를 주목하고 있다.

 프랑스의 식약청에서는 프랑스인의 최대 사망 원인은 심장병과 고혈압 등 심혈관 질환인데 이를 극복하려면 소금의 섭취량을 적극적으로 줄여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2년 내에 프랑스인의 하루 소금섭취량을 현재 10g에서 8g으로 낮출 계획이라고 소개했다. 미국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하루 평균 소금 섭취 권장량을 하루 6g에서 3.8g으로 대폭 하향 조정해서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티스푼의 2/3에 해당하는 정도의 적은 양으로서 한국인이 하루 평균 섭취하는 소금량의 1/4에 해당하는 양이다.

 일본의 국립암센터는 소금 섭취량과 위암 발병률의 관계를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젓갈류가 위암에 가장 좋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된장국은 염분 농도가 1~2%이지만 염장 어류나 젓갈은 10%나 된다.  이 조사 결과에서 밝혀진 사실은 고혈압은 섭취한 소금의 총량이 중요하지만, 위암은 농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국물처럼 묽은 농도라도 많이 마셔 섭취 총량이 증가하면 혈압은 올라간다. 그러나 위암은 총량보다 농도에 좌우되기 때문에 소량이라도 젓갈이 위장에 해로운 것이다.

 소금은 왜 위암을 일으키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실험을 하였다. 쥐들에게 각각 일반식과 10% 농도의 고염식을 하게 한 후 발암 물질을 주입해서 발암 물질의 활성도를 비교했다. 그 결과 고염식을 한 쥐들에게서 발암 물질의 활성도가 훨씬 높게 나왔다. 같은 물질의 발암 물질이 체내에 들어와도 소금을 많이 섭취했을 때 더 해로워진다는 뜻이다.
  
 헬리코박터 세균은 위장에 사는 세균으로서 위 점액을 뚫고 위에 상처를 내어 궤양이나 위암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헬리코박터 세균에 감염된 위장에 소금이 추가될 때 위암의 발병률이 급격하게 증가한다. 대부분 현대인은 짠맛이 강하게 느껴져야 만족한다. 그러나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소금의 섭취량을 낮추어야 한다.

창조 교실: 사람의 목소리는 왜 서로 다를까요?

사람은 모두 같은 신체 구조로 되어 있는데, 어떻게 목소리가 서로 다를까요? 그 답은 소용돌이(vortex)에 있답니다.

 신시내티 대학(University of Cincinnati)의 연구자들은 소용돌이가 소리의 신비를 푸는 데 도움을 줄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해 제트 엔진(jet engines)에 대한 지식을 사용했습니다. 소용돌이란, 후두(larynx)를 통과하는 공기 흐름에 대한 공기역학적 효과(aerodynamic effects)라고 할 수 있는데, 만일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마치 회전하며 도는 연기 고리들(rotating smoke rings)처럼 보일 것입니다.

 많은 연구학자가 후두의 구조를 연구해 오던 중, 시드 코슬라(Sid Khosla)와 그 연구팀은 후두를 통과하는 공기 흐름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제트엔진 주변의 소용돌이가 소리를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현상이 후두의 기계적 진동을 조절하여 소리의 톤(tone)과 음색을 만들어 내고 있을 것으로 추정했던 것입니다.
 
 코슬라는 소용돌이들은 각 개인의 목소리들이 서로 다르며, 그들 목소리의 다양한 음색을 제공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라고 말했습니다. 는 덧붙여 말하기를, 소용돌이들은 여러 가지 다른 메커니즘들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 있다고 하면서, 이 복잡성이 한 목소리와 또 다른 하나의 목소리를 만든다.라고 했습니다. 만일 진화론자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공기 흐름에 소용돌이를 일으켜 후두의 기계적 진동을 조절하는 신체의 구조가 우연한 돌연변이로 생겨났다는 말이 되는데, 그것은 전혀 가능성이 없는 추론이라고 연구자들은 말했습니다.

 다양한 소용돌이를 일으키게 하시고 그래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저마다 각각 다르게 고안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솜씨가 정말 놀랍지요? 사람의 후두를 통과하는 공기의 흐름을 각각 다르게 하셔서, 높은 목소리, 낮은 목소리가 서로 어울려 재미있는 음감을 내도록 하신 하나님은 정말 놀라운 분이시죠? 사람마다 각각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도록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오늘도 목청 높여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으시렵니까?

신앙: 1부 - 첫째 아담

 주위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한 일들과 불공평함, 혹은 세상에 편만 해 있는 고통과 부조화들을 보면서, 또는 자녀나 자신에게 나타나는 유전 법칙의 영향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자주 조상 탓을 한다.

 이 지구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지금과는 얼마나 다른 세상이 되었을 것인가! 만일 우리의 시조가 죄를 짓지 않고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사는 이 지구는 하나님께서 창조한 우주 세계에서 아주 행복하고 평화롭고 조화로운 어떤 행성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죄의 음영이 없는, 죄와 타락의 비참한 결과로 야기되는 고통과 슬픔과 재난, 그리고 사망과 부조화가 없는 아름다운 세계였을 것이다. 그래서 가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인류의 시조, 최초의 조상인 아담의 범죄를 원망하는 말을 하곤 한다.

1) 첫째 아담의 출현

 창조주의 손으로 창조되었을 당시에 지구는 완전하고 아주 아름다웠다.푸른 수풀과 꽃들은 창조주의 솜씨를 찬양하듯이 미풍에 흔들리고, 각종 아름다운 과실들과 씨 맺는 채소와 나무들은 땅을 풍요롭게 하였다. 각종 생물과 많은 동식물로 가득 찬 지구가 창조되고, 창조주의 걸작품이며, 세상이 그렇게 아름답게 지음을 받고 단장한 이유로서의 사람이 세상의 활동 무대에 등장하였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 온 땅을 &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 1:26,27).

 첫째 아담이 이 땅에 생겨났다. 성군(星群)의 세계들을 하늘 높이 두시고, 들의 꽃들을 정교한 솜씨로 물들이시고, 땅과 하늘을 창조 능력의 경이들로 채우신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스러운 창조 사업의 마지막을 장식하시려고 하실 때, 창조 사업의 절정이며 걸작품으로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만드셨던 것이다. 우리의 최초 조상인 첫째 아담은 그렇게 창조주의 손에서 탄생했다.
 
 아담이 창조주의 손으로 지음을 받았을 때 그의 육체와 지능과 영성은 하나님을 매우 닮아 있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외모나 마음이나 정신과 성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하게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본성은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었고,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애정은 순결하였고, 그의 식욕과 감정은 이성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고, 그분의 에 완전히 순종하는 가운데 거룩하고 행복하였다.

2) 아담의 통치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에, 아담을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릴 수 있는 통치자로 창조하셨고, 그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릴 통치권을 주셨다. 그는 더 낮은 차원의 존재들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대표자로 세움을 받았던 것이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 &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시 8:6~8).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지구의 통치권을 이임 받았으며, 이 지구의 주인이 되어 생물들을 다스리게 되어 있었다.

 인간의 모든 재능은 발달 가능성이 있었으며, 그 능력과 활력은 끊임없이 증진하게 되어 있었다. 아담이 창조되고 나서 모든 동물은 각각 그들의 이름을 받으려고 그의 앞으로 인도되었다는 성경의 기록(창 2:19,20)은 아담의 지력을 증명해 주는 좋은 예이다. 창조 당시 인간 재능의 활용 범위는 광대하였고, 연구를 위해 펼쳐진 분야는 놀라웠다. 눈에 보이는 우주의 신비, 곧 지혜가 온전하신 자의 기묘한 일(욥 37:16)들은 그의 연구 대상이었으며, 특별히 창조주와 대면하여 마음을 열어 놓고 교제하는 것은 그에게 큰 특권이 되었다.
 
 조화로운 창조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법칙과 자연의 법칙대로 세상을 다스리며, 무궁한 시대를 통하여 계속해서 새로운 지식의 보화를 얻고,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힘에 대하여 더욱더 밝은 개념을 가지게 되며, 지속하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로 지적, 영적으로 더욱 발전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었다.

3) 범죄와 통치권의 손실

 그러나 우리의 첫 시조 아담은 범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지구의 통치권을 잃어버렸다. 그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는 대신 사단의 말을 더 신뢰하고 사단이 주는 유혹에 넘어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사단의 뜻에 순종하였다. 선악과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을 시험하는 시금석이었으며, 눈에 보이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명이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여 자발적으로 그분의 뜻과 법을 따르도록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보다 마귀의 말을 더 신뢰하여 금단의 나무 실과를 먹었으며, 금지되었던 악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 2:17)는 경고는 그들이 금단의 실과를 먹은 바로 그날에 죽으리라는 것을 암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에 취소할 수 없는 선고가 내려졌는데, 그것은 순종을 조건으로 그들에게 약속된 불사불멸이 취소된 것이었으며, 범죄함으로 인해 영생을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부터 인간은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의지를 사단에게 바침으로써 인간이 가지고 있던 지구의 통치권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사단은 사람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한 후에 이 지구를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자칭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그들의 군주로 선택하였다고 선언했다. 그는 사람을 지배함으로 세상의 통치권을 쥐었다. 이제 사단의 통치 아래 들어간 이 세상은 죄의 저주 아래 있게 되었고, 자연의 모든 만물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특성과 결과들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는 슬픔과 고통이 들어왔고,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죽음과 사망이 찾아왔다. 인류의 시조가 범죄하므로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으며, 죄의 종이 되고 사단의 노예가 되어 살게 되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그때로부터 땅과 인류는 찾아온 죄의 저주로 말미암아 영원한 쇠퇴와 죽음에 처하게 되었고, 빼앗긴 지구를 찾는 일은 요원해 보였다.

신앙: 2부 - 첫째 아담의 죄 때문에 내가 죽어야 하는가?

 많은 그리스도인과 신학자들이,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죄가 후손에게도 전가되었으므로 아담의 자손들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 죄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인간이 태어난 존재 자체가 죄이며, 조상으로부터 타고난 원죄가 항상 인간에게 있고, 또 누구든지 태어날 때 그 원죄를 타고난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그 원죄 때문에 인간이면 누구나 다 죽는다고 말한다. 물론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그것은 첫째 사망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상을 보면, 진짜 사망은 영원한 형벌의 사망인 둘째 사망인 것을 알 수 있으며, 예수께서도 첫째 사망은 자는 것이라고 하신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것은, 둘째 사망인 형벌의 사망으로서, 조상의 죄의 책임을 나누어지기 때문에 태어난 인간은 누구나 정죄 받은, 지옥불에 들어갈 죄인이라고 믿는 것이다.  정말 우리는 우리의 조상인 아담의 죄 때문에 정죄 받은 죄인이 되고 죽는가? 갓 태어난 아기, 세상의 죄악을 전혀 접해 보지도 않고 죄를 모르는 아기도 조상 아담의 죄 때문에 원죄를 타고난 큰 죄인이 되는가?
 
 그리스도인들이 원죄를 믿고, 존재 자체를 죄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지은 죄뿐이 아니고 아담의 죄 때문에 죽는 것이라고 믿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작용했는데, 신학자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하므로 인해 생긴 오류, 신학적인 잘못된 가르침 그리고 인간의 유전을 받아들인 것들이 원인이다. 그중 한 가지 주지하여야 할 사실은, 이러한 사상을 기독교 안에 들여와 큰 영향을 끼치게 하고, 기독교의 교리 중 원죄설을 큰 기둥으로 우뚝 서게 한 장본인이 있다는 사실인데, 그 장본인은 다름 아닌 중세기의 성자라고 불리던  어거스틴이다.
 
 어거스틴은 죄의 기원에 관한 개념을 일반화했는데, 그것은 인간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죄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아담의 죄 때문에 죄인이 되었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죄라는 것은 십계명을 범하는데 달린 것이 아니고, 존재 상태, 바로 그것이 죄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은 생애 가운데서 죄의 형태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 우리는 아담의 죄 때문에 죽는가? 자, 그렇다면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함께 연구해 보기로 하자. 먼저 이 사상의 근간이 되는 성경 절을 보자.

 로마서 5장 12~18절,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장 12~18절의 주지
이 성경 절을 연구할 때에 제일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기록한 이 성경 절의 주제는 무엇이며, 어떤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 기술해 놓았는가 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라든가,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이라는 구절들이 등장하지만, 이 성경 절이 시사하는 바는,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다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나, 또 그 사실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죄 때문에 야기된 사망의 힘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의 선물의 능력과 힘이 더 크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기술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로마서 5장 17,18절을 주시해 보자.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이 성경 절을 잘 분석해 보면, 비록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 노릇 하게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의 선물이 더욱 넘치므로, 즉 주님의 은혜의 능력이 더 크시므로 우리가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을 바르게 연구하는 방법은, 강조되어 쓰인 한 성경 절만 보고 그 구절에서 어떤 신학적인 사상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사상과 흐름과 성경 전체가 말하는 총체적인 진리를 보며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연구하는 것이다.

에스겔과 사도 바울은 서로 상반된 의견으로 싸우고(?) 있는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어떤 성경 절에서 신학적인 사조와 교리를 추려 내려면, 그 사상이 성경 전체가 말하는 진리와 들어맞는가 하는 것을 추리해 내야 한다. 만일, 신학자들이 바울이 말한 로마서 5장 12~18절에 의해 아담의 원죄가 우리에게 전가되었으므로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한다면, 성경 에스겔 18장 20~24절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똑같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성경의 저자인 에스겔 선지자와 사도 바울이 서로 교리를 놓고 싸우는 것인가? 에스겔 18장 20~24절에는 분명히 이렇게 언급되어 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에스겔 18:20).

 성경은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로 멸망을 하는 것이지, 조상의 죄로, 아버지의 죄가 전가되어 죽는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또 다른 구절을 보자.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21,22절).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23,24절).
 
 만일, 신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오래전부터 가르쳐져 온 교회의 교리대로, 아담의 죄가 전가되어서 우리가 죽는다면, 범죄한 그 영혼은 그 사람만 죽으리라.아들이 아비의 죄를 담당하지 않으리라.는 에스겔 선지자의 말은 하나님의 영감이 아닌 거짓말이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성경이 모순투성이란 말인가? 에스겔 18장 2절에는 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이 구절은 조상 탓을 하며 죄를 짓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버지의 죄가 아들에게 전가되지 않는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하여 에스겔 선지자가 시사한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그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렘 31:29)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할 때에는 전체적인 사상과 진리를 포괄적으로 다루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적절한 연구법이 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요점은 무엇인가?

바울은 로마서 5장 12~18절에서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가 시사하는 이 성경 구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  어떤 신학자들은 한 사람의 죄로 모든 인간이 죄인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첫째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왔다는 뜻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후손들이 죄의 결과와 영향과 죄의 속성을 유전적으로 물려받게 되어 죄를 짓기가 쉽게 되고 연약해졌다는 뜻이다. 즉, 악으로 기울어지기 쉬운 경향인 죄의 성향을 타고났다는 말이다. 비록 아담이 범죄함으로 그 영향력으로 인간은 썩을 몸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우리가 죽는 것은 아담의 죄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죄로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지은 죄 때문에 우리가 정죄 받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이다. 우리는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며, 자기 죄 때문에 사망과 멸망에 이르는 것이다. 첫째 아담이 범죄하므로 자동으로 죄의 책임과 정죄를 받고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그 죄의 속성과 연약성이, 죄의 결과와 그 영향이 우리에게 들어온 것이다.


2. 존재 자체가 죄가 아니다 - 만일 인간이 태어난 자체가 죄라면(원죄 때문에), 죄의 영향, 즉 죄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당연한 결과인 사망을 맛보지 않고 승천한 믿음의 조상들의 경우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에녹을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에녹은 살아서 하늘로 승천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하늘로 데리고 가셨다. 에녹은 죄를 짓고 실수하는 생활을 살았겠지만, 어쨌든 성경에 나타나 있는 마지막 300년간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므로 사망에 이르지 않고 하늘로 승천했다.아마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늘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죄를 승리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망을 이기고, 사망을 맛보지 않고 승천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태어난 자체가 죄라고 한다면 그는 구원받아 하늘로 승천해 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  죄인은 소멸하시는 불이신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엘리야도 사망을 맛보지 않고 승천했다. 물론 에녹과 엘리야는 구세주가 필요했다. 구세주 때문에 사망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것이다. 마지막 십사만 사천도 홀연히 변화되어 승천할 때, 자기의 의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세주 때문에 사망을 맛보지 않고 승천하게 되는 것이다.그러나 에녹과 엘리야가 의인이 들어가는 하늘에 들어간 것을 보아도 태어난 자체가 원죄이기 때문에 멸망 받을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님이 확실하다.

3.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
이 성경 절을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살펴보자.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7,18). 여기서 바울은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고 말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아니고많은 사람이정죄에 이르렀다고 하고 있다.  그 다음 계속되는 성경 절에서도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모두다 의롭게 된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아담의 죄로 모든 사람이 다 정죄를 받았다거나, 아담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다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신 구속 사업도 모든 사람을 다 의롭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구속 사업을 믿음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만 의롭게 되는 것이다.

4.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 5:14) -
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말했는가? 먼저,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에 관한 표현을 살펴보자.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 첫째 아담의 범죄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다.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의가 무엇인가가 세상에 소개되었다. 첫째 아담을 통해서 죄와 사망이 들어왔는데,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을 통해 의와 승리와 복음과 능력이 들어왔다.  첫째 아담 때문에 죄의 영향력이 모든 인류에게 다 미쳤고, 둘째 아담 예수를 통해서 의와 의의 영향력이 모든 사람에게 미쳤다. 아담의 범죄한 결과와 영향력이 모든 인류에게 다 미친 것처럼, 예수님의 의도 모든 사람에게 다 영향을 미친다. 아담의 죄 때문에 그 영향이 모든 인류에게 이르렀고,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의로운 희생과 생애의 영향도 모든 인류에게 이르게 된 것이다.

결론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논리 - 첫째 아담 때문에 인간이 무조건 죄인이 되었다 만일, 신학자들의 말처럼 첫째 아담 때문에 태어난 인간이 다 죄인이 되었다면, 둘째 아담인 예수님 때문에 태어난 인간은 무조건 의인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서게 된다. 즉, 첫째 아담 때문에 인간들이 다 죄인이 되었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둘째 아담인 예수님을 믿든지 안 믿든지, 받아들이든지 안 받아들이든지를 막론하고 인간들이 다 의인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생기는 것이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이 그 결과 자동으로 죄인이 된 것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는 자동으로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해석하고 적용시키면 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문제가 생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45절과 로마서 5장 20~24절에서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이 우리에게 끼친 영향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인지 확실히 아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요, 책임이다.

성경이 주장하는 논리 - 인간은 자신이 범죄하므로죄인이 된다
성경 에스겔서는 아버지는 아버지의 죄로 멸망하고, 아들은 아들 자신의 죄로 멸망하는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첫째 아담을 통하여서는 죄가 들어 왔으나,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는 의가 들어왔고, 그러므로 죄의 힘보다 더 강한 은혜가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려고 쓴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죄의 결과와 연약성을 타고났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통해 새 마음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 모든 죄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다.

 구원이란 죄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다.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다시는 똑같은 죄를 짓지 않게 하는 은혜의 힘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 구원이지, 죄를 그대로 지으며 똑같이 산다면 그것이 어떻게 구원이 될 수 있겠는가? 죄를 회개하고 승리하고 이겨야 하며, 다시 그 죄를 반복적으로 짓고 또 짓는 일이 그쳐져야 한다. 우리는 아담의 죄 때문에 유전적으로 좋지 않은 죄의 결과와 영향을 받고 태어났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성령의 힘으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  아담의 죄 때문에 우리가 죽는 것인가? 우리의 아버지와 조상이 죄를 지어서 내가 멸망하게 되는가?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죽는 것이다.

신앙: 3부 - 둘째 아담, 기업 무르는 자

고전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아담은 창조 받을 때 성령이 충만하고 죄가 없는 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범죄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그는 산 영이었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산 영일 뿐더러 죄를 지은 인간들을 살려주는 영이시다. 우리의 시조인 첫째 아담 때문에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 아름답던 지구에 죄로 말미암아 죽음과 사망이 생겼으며, 산 영이었던 인간이 죄인의 속성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이 계명을 어기므로 죄를 범하여 이 지구 땅을 잃어버리게 되고, 지구의 찬탈자인 마귀에게 땅뿐만 아니라 지구의 지배권과 통치권을 빼앗기게 되자, 이 땅은 온통 사단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죄 때문에 지구의 인간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고 지구가 파멸을 향하여 달려가게 되자, 우리 인간들을 파멸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지구의 땅을 인류에게 도로 돌려주시기 위하여, 살려주는 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으로 이 땅에 오셨다.

1) 예수 그리스도 - 기업 무르는 자

 유대인의 풍습 중에 영적으로 아주 깊은 의미를 주는 풍습이 있다. 그 풍습의 이야기는 룻기서에 나오는데, 룻기서에는 예수님의 구속에 대한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 이스라엘의 풍습 중에 땅 무르는 풍습이 있었다. 그것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기업인 땅을 잃어버린 사람을 위해, 가난해서 땅을 판 사람을 위해, 그 사람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대신 땅을 찾아서 돌려주는 기업을 무르는 풍습이었는데, 땅을 도로 찾아 기업을 물러 주는 친족을 기업 무르는 자라고 부른다. 그런 의미가 있는 단어가 곧, Redeemer(구속주, 구세주)이다. 

 이방 여인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하여 이스라엘로 따라왔다. 가난한 룻은 다른 사람의 밭에서 이삭을 주워 먹고 살게 되었다. 가난과 기근으로 기업이었던 땅을 다 팔았던 나오미와 룻은 기업을 물러 줄 누군가가 필요하였다. 그 당시 기업은 가장 가까운 친척이 대신 물러 주어야 했는데, 선한 보아스가 그들의 기업을 물러 주는 자가 되었던 것이다(더 가까운 친족이 권리를 양보했음).
 보아스의 기업 무르는 일로 그들은 다시 땅을 얻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방인 룻이 하나님의 자손이 되었고, 룻과 보아스 사이에서 이새가 태어나고, 다윗이 태어나고, 다윗의 혈통에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므로 룻이 예수님의 조상이 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속주, 기업을 무르는 자이시다. 예수께서는 우리 인류가 죄 때문에 잃어버린 이 땅을 도로 찾아 주시기 위해 오셨다. 첫째 아담이 범죄하므로 빼앗기게 된 이 땅의 통치권을 사단으로부터 찾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땅을 물러 주는 자, 기업을 무르는 자 둘째 아담이 되신 것이다.

2) 기업 무르는 자가 되려고

1. 가장 가까운 친족이 되심
 룻기서에서 살펴보았듯이 기업을 무르는 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은 그 사람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어야 하였다.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주로서 우리의 빼앗긴 땅을 찾아 주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려고 오셨는데, 예수께서 구속주, 기업 무르는 자가 되시려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친족이 되셔야 했다. 친족 중에 가장 가까운 관계는 형제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은 혈육을 가지신 인성을 쓰시고 성육신 하신 것이며, 우리와 같은 한혈육을 가지신 형제가 되신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다음의 성경 절은 그 사실을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다.

 히브리서 2장 11절,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히브리서 2장 14~18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인성을 쓰시는 것도 그리스도 예수께는 무한한 치욕이 되었을 것이지만, 예수께서는 인간이 타락한 지 4,000여 년 후,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쓰시고 성육신 해서 오심으로 우리와 한형제가 되셨다. 곧, 인간의 타락한 영향과 인간의 유전 법칙의 영향과 인간의 연약성을 그대로 다 받으신 채 인간이 되어 오신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의 형제가 되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창조주이신 능력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어 인간을 어떻게 도와주실 줄 아시기 위하여 우리와 한형제가 되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와 같은 시험을 받으셨지만, 한 번도 범죄하지 않으신 성령이 충만한 생애를 사심으로 우리의 모본이 되신 것이다.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히 5:2).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이렇게 예수께서 우리의 피와 살을 나누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기업을 물러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둘째 아담이 되신 것이며, 바울은 히브리 1장에 예수께서 다윗 자손의 혈통에서 나시고 우리와 한 혈통이 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2. 한혈육에 속하심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은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신비이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전 3:16). 인성을 쓰시고 우리와 하나가 되신 그리스도 성육신의 사랑을 명상할 때에 우리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신비 앞에서 당황하게 된다.그래서 바울은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추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6,27)고 말했던 것이다.

 로마서 1장 3절은 그의 조상들을 통하여 예수의 본성에 관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한혈통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히브리서 2장 16절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킹 제임스 한글 성경에는 이 구절이 더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다. 이는 주께서 진실로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음이라.(For verily he took not on him the nature of angels; but he took on him the seed of Abraham).

 혹자는 예수님의 인성에 대하여 말하기를,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탈만 살짝 쓰신 것이고 그 속은 하나님이셨다고 말한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완전히 인간이 되시기 위해서 인성을 쓰시고 오신 것도 사실이다. 한모양과 혈육을 말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을 언급하는 것이지 신성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지만, 인성의 면에서 100% 인간이셨다.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당할 수 있는 육신을 가지신, 그런 정서를 가지신 분이셨다.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또 어떤 사람은 예수께서 인간의 모양만 가지셨다고 말한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모양만 돌아가신 것인가? 고통의 모양만 있었고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으셨는가? 그런 사상은 도세티즘(Docetism)의 사상인데, 이것은 초대 기독교 당시의 한 사상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통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형상적이었고, 부활하신 후에는 영적인 몸, 즉 실제적인 몸이 아니라 인간적인 모습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그때 당시 이설로서 취급되었던 교리이며 사상이다.

 성경에는 죄 자체가 되신 예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겪으신 겟세마네와 갈바리의 십자가에서 겪으신 고통과 고난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분께서는 속속들이 인간이 당해야 하는 죽음과 죄를 대신 지시는 고통을 당하셨고, 몸에 죄를 지셨다. 죄를 대신 진다는 뜻은 죄 자체가 되셨다는 뜻이다. 그 의미는 죄를 지었을 때 당하고 느끼는 죄책감, 그리고 죄를 지었을 때 느끼는 불행한 마음, 죄를 지었을 때 갖는 소망이 없어지는 마음, 죄지었을 때 은혜가 없이 완전히 정죄 당하는 느낌이 드는 것을 말한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정말 죄 자체가 되신 것이며, 정말 인간이 되셨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3. 한모양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가 숙고하고 연구하며 명상해야 할 신비한 주제이다. 우리가 성육신의 놀라운 신비와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신앙생활이 열렬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귀한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입으셨던 인성이 우리와 똑같은 인성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얼마나 많은 점에서 같았는가? 범사에서이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히 2:17).
 
 범사라는 말은 영어로 in every way인데, 이것은 모든 면에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신성을 거론하는 것 말고 인성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으셨다. 신이셨지만, 우리와 똑같은 감정 - 슬픔, 기쁨, 고뇌, 행복 - 을 느끼시고, 또 우리와 똑같이 육체적인 상황 - 배고프고 피곤하신 - 을 겪으셨던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데에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범사에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느낌과 경험을 체험하셔서 우리를 어떻게 도우실 줄을 아시기 위함이고, 둘째로는 우리도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살 수 있다는 모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이다.

한모양으로

 히브리서 2장 14절의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이라는 구절에서    한모양이라는 단어에 관해 생각해 보자. 한모양이라는 단어를 연구하기 위해 신약에 언급된 다른 성경 구절을 찾아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해 쓰인 성경 구절 중, 가장 명백하며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이 로마서 8장 3절이다. 성육신 하신 이유와 어떠한 육신을 취하셨는지를 이 성경 절보다 더 잘 설명하는 말씀은 없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초기의 신학자들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라고 표현된 킹 제임스 성경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실 때 예수의 육신에 대한 바울의 정의라고 자연스럽게 해석하였다. 저명한 신학자인 카알 바드(Karl Barth) 그리고 에밀 부르너(Emil Brunner),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J.A.T. 로빈슨(J.A.T. Robinson)과 같은 20세기 후반의 유명한 신학자들은, 예수님은 인간이 타락한 후의 인성을 가지셨으며, 타락에 의해 영향을 받은, 우리와 같은 유전 법칙의 영향을 받은 분으로서의 예수님의 인성을 공공연하게 지지했는데, 특히 쿨만과 볼트만은 빌립보서 2장 5~8절 말씀에 대하여 똑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양이라는 말을 빌립보서 2장 7절에 나타난 것과 정확하게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성경 절은 예수께서 신의 형상과 하나님과의 동등성을 버리고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은 곧, 예수께서 단순히 인간의 겉모습만 가지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실적으로 바울이 로마서 8장 3절(KJV)에 말한 대로 죄된 육체(sarkos hamartias)와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죄인이 되셨다는 의미도 아니며,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어떠한 인간의 죄에 참여하셨다는 의미도 아니다. 

종의 형체를 가져
 쿨만은 종의 형체를 가져라는 뜻에 대하여 그의 주석에서, 종의 형체를 취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의 형체, 곧 인간의 타락으로 영향을 받은 한 사람의 형체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라고 기록하였다. 빌립보 2장 7절의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에서 사용된 likeness는 원어 Homoiomati라는 뜻으로서, 겉모양만 똑같은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같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인성을 쓰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되,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입으시고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던 것이다.
 
 갈라디아서 4장 4, 5절에 기록된 성경 구절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실제적이고 완전하게 타락한 후의 인성에 참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하여 많이 인용됐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 아래 나셨다는 말은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으신 것을 가리킨다. 또, 고린도후서 5장 21절도 그렇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히브리서를 비롯한 다른 바울의 편지서들을 이용하여 결론을 내리고 나서, 카알 바드(Barth)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내신 본성은, 타락에 관한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본성과 동등한 것이었다는 구원의 진리를 연약하게 만들거나 불분명하게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우리처럼 되실 수 있었겠으며, 우리와 그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타락된 특징을 가지고 서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의 본성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잃어버리신 바 되었고 저주받은 상태 아래 있는 우리의 본성의 구체적인 형상 속으로 임하셨다. 그는 이 형상을 우리의 것과 다르게 만들거나 세우지 않았으며, 결백한 자로서 죄지은 것으로 되셨고, 죄 없으셨으나 죄가 되셨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우리를 그가 우리와 연합한 상태에서 떨어지게 해서는 안 되며, 이러한 이유로 그를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해서도 안 된다. 

 에밀 부루너(Emil Brunner)는 그의 Dogmatic에서 이와 똑같은 결론에 이른다. 그는 그가 여자로부터 태어나셨다는 사실은 그가 진실로 인간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말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성공회 감독 J.A.T. Robinson은 이에 대해 말하기를 이러한 말씀들을 강조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학이, 바울이 이 문제에 관한 복음의 위력을 소개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대담한 문구들을 이상하게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동방정교회,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는 그리스도께서 타락하지 않은 인성으로 성육신 하셨다고 믿고 있다.라고 했다.

그러나 성경은 또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이 말의 뜻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으셨지만, 예수님 속에는 신성의 충만하심이 함께 거하시므로 어떤 악한 감정이나 일과도 관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죄를 이기신 순결한 생애를 사셨다는 뜻이다.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기업 무르는 자로 이 땅에 오셨다.
 인류의 조상 첫째 아담이 범죄함으로 잃어버린 이 지구의 기업을 도로 찾으시기 위해, 주님께서 구속주(redeemer)로서, 가장 가까운 친척이 아니라 우리 중 하나인 형제가 되어 오신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신성을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신 예수님의 겸손과 사랑은 우리를 놀라고 감격하게 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신앙: 4부 - 둘째 아담이 오신 이유

빼앗긴 이 지구를 찾을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 지구는 돈으로 주고 살 수가 없었다. 사랑이 많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빼앗긴 지구의 기업을 도로 물러 주기 위해서 가장 가까운 친척인 형제가 되셨는데, 그렇다면 예수께서 무엇을 우리에게 해 주셔야 했는가?

  이 지구가 마귀의 편에 들어간 이유는 인류가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여 파괴하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마귀의 말을 더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지구의 지배권을 다시 얻으려면 마귀를 이기고, 마귀의 유혹과 함정과 그의 능력을 이기고, 또 그의 속임수를 이겨야 한다. 곧, 죄를 승리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지구를 도로 사는 방법은,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사단의 시험에 승리하며,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첫째 아담이 실패한 그 장소에서 둘째 아담이 승리해야 했다. 첫째 아담은 완전한 상태에서 아름다운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었으나, 둘째 아담인 예수께서는 인간이 타락한 지 4,000년이 지나고 퇴폐되고 타락한 곳에서 죄를 승리하고 이겨야 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인성을 쓰시고 첫째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속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러나 구주의 속죄 사업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분이 인간이 되셔서 죄를 승리하는 생애를 사심으로 우리에게 모본을 보여 주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아버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사심으로 모든 죄를 이기시고, 내가 승리했으니 너희도 할 수 있다.는 용기와 확신을 주시려고 오셨다. 인간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를 승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고 오신 것이다.

1) 선과 악의 대쟁투의 관건

 선과 악 사이에 대쟁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하나님의 품성을 잘못 나타내고, 그분의 법인 계명에 대하여 반역을 일으키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었다. 사단은 하나님의 계명은 순종할 수 없으며, 공의가 자비와 조화되지 않으므로 계명을 파기하지 않고는 죄인이 용서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모든 죄는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만일 하나님이 죄의 형벌을 면제해 준다면 그분은 진리와 공의의 하나님이 될 수 없으며, 사람은 계명을 순종할 수 없으므로 용서받을 수 없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사단은 자기가 반역하고 나서 하늘에서 추방당했기 때문에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총에서 영원히 제거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직도 죄인들에게 은혜를 나타내고 계심으로 그분은 공의로우실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인류가 비록 죄인일지라도 사단과는 다른 입장에 놓여 있었다. 루스벨은 하늘에서 하나님 영광의 빛 가운데서 범죄했다.지음을 받은 어떤 다른 존재들에게도 나타낸 일이 없는 하나님 사랑의 계시가 그에게 주어졌다.
 
 사단은 하나님의 품성을 이해하고 그분의 선하심을 알면서도 자기 자신의 이기적이고 독자적인 생각을 따르기로 선택했던 것이다. 이 선택은 그에게 결정적이었다.더는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실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인류는 속임을 당했으며 사단의 궤변에 의하여 마음이 어두워졌다.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를 알지 못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는 희망이 있었다. 하나님의 품성을 바라봄으로 인간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었다.

 사단의 유혹으로 인류가 하나님의 계명의 범법자들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아버지의 계명을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 인성을 쓰신 예수님을 통하여 사랑이라는 하나님 성품의 계시인 계명을 지킬 수 있음이 입증되어야 했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기꺼이 놀라운 희생을 치르려고 오셨던 것이다.
 
 계명은 하나님 성품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타락한 인류에게 알맞게 일점일획이라도 변경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법을 변경하지 않으셨고,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 자신을 희생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고후 5:19)신 것이다.

2) 죄가 없으셨던 예수 그리스도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계명은 의, 즉 의로운 생애, 완전한 품성을 요구하지만, 인간은 그 요구에 미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서 지상에 오셔서 거룩한 생애를 사시고 완전한 품성을 계발시키시고 보여 주셨다.  그리고 그분의 의를 받기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비와 관용을 통하여 과거의 죄를 용서받으며,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속성을 사람들에게 불어넣으시며, 은혜와 능력을 주셔서 죄를 미워하게 하시며, 죄를 이기게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품성을, 거룩하신 하나님의 품성을 따라 형성하여 영적인 힘과 아름다움을 지닌 훌륭한 건물이 되게 하신다. 그리하여 바로 이 율법의 의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서 성취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롬 3:26)실 수 있으신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계명은 불공평하고 순종할 수 없다는 증거로써 아담의 범죄를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성으로 오셔서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실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첫째 아담이 사단에게 굴복해서 넘어진 점에서 사단을 쳐서 복종시키시고 승리하시기 위해 오셨다. 두려움 가운데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사단에게 종노릇 하는, 마귀의 속임수에 노예가 되어 질질 끌려 다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마귀를 없애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사단은 예수님을 유혹하고 시험해서 이길 만한 발판이 없었다. 주님은 항상 아버지께 굴복되어 있었고 하나님의 영의 역사 하심에 충만해 있었기 때문에 마귀에게 내어 줄 발판이 없었다. 곧, 이 세상의 임금과는 관계가 없는 삶을 사신 것이다.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요 14:30,31).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대로 행하려고 내가 이 땅에 왔다! 첫째 아담과 세상을 넘어뜨린 마귀와 아무 상관이 없이 아버지의 뜻대로만 사는 것을 보여 주려고 왔다. 이것이 지구의 기업을 무르는 것이다.  

신앙: 5부 - 둘째 아담의 승리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그분은 먼저 사단의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는 시험을 받으러 광야에 가실 때 자원해서 간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순종하여 가셨다. 성경은 성령에 이끌리시어 광야로 가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이다. 그분은 시험을 자취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홀로 있으면서 자신의 사명과 사업을 숙고하고자 광야로 가셨다. 그분은 금식과 기도로 앞으로 걸어가야 할 피 묻은 길을 위하여 자신을 준비하려고 하셨다. 사단은 예수께서 광야로 가신 것을 알았으며 이때가 예수에게 접근할 가장 적당한 때라고 생각했다.
 
사단은 사람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한 후에 이 지구를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자칭하였다. 그는 우리 인류의 시조에게 자신의 성질을 본받게 한 후에 이곳에 그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그들의 군주로 선택하였다고 선언했다. 사단은 사람을 지배함으로 세상의 통치권을 쥐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주장을 반증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인자(人子)로서 하나님께 끝까지 충성할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 사단이 인류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였다는 것과, 세상이 자기 것이라는 사단의 주장이 허위였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둘째 아담으로서 이 지구를 구속하시는 역사를 시작하실 때, 메시아로서 침례를 받으시고 사명을 시작하실 때,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이 제일 처음 하신 일이었다. 왜인가? 예수께서는 기업 무르는 자로서의 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시작부터 그분이 왜 왔는가 보여 주시고, 인간이 실패한 그 점을 승리하시고 회복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마귀와 싸워 승리하셔서 범죄치 않음을 보여 주심으로 둘째 아담으로서의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1) 첫 번째 시험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 - 육신의 정욕에 대한 시험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유혹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 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2~4). 에덴에 살던 아담과 하와와 같이 그리스도에게도 식욕은 첫째가는 큰 시험의 무대였다. 멸망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곳에서 구속 사업이 시작되어야 했다.
 
 아담은 식욕의 방종에 의해 타락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식욕을 극기하심으로 승리하셔야 했다. 아담의 시대부터 그리스도의 시대까지 자아 방종은 식욕과 정욕의 세력을 점점 증가시켜, 마침내 그것들이 거의 무제한으로 사람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사람은 타락되고 병들어서, 자신의 힘으로는 그것들을 극복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대신하여 가장 혹독한 시험을 견디므로 이기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굶주림이나 죽음보다 더 강한 자제를 행사하셨다.

 예수께서 광야로 가셨을 때 그분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에 열중하여 인간의 연약함을 초월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떠나고 그분은 시험과 싸우도록 남으셨다. 40 일간 그분은 금식하셨으므로 굶주림으로 쇠약해지고 정신적 고민으로 피로해지셨다. 마치 그분 기도의 응답인 양, 하늘로부터 온 천사로 위장한 사단이 구주께 다가왔다. 그는 그리스도의 금식이 끝났다는 것을 알리도록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을 받은 듯, 아버지께서는 피 묻은 길로 들어가시려는 그리스도의 자원하는 마음을 만족히 여기신다는 보증을 주려는 듯, 사단이 갑자기 그분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구주께서는 그때 굶주림으로 기진맥진한 중에 음식을 갈망하고 계셨다. 광야에 널려 있는 떡 덩이 모양의 돌들을 가리키면서 유혹자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 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하였다.  그는 광명한 천사처럼 보였지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첫 말이 그의 성격을 폭로해 주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말에는 불신의 표현이 담겨 있었다.
 
 만일 예수께서 사단이 제의하는 대로 행한다면 그것은 이 의심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과연 그분의 아들을 야수들이 있는 광야에 음식도, 친구도, 위로도 없이 버려두실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격심한 배고픔에서 그대 자신을 건짐으로 그대의 능력을 나타내라! 이것이 사단의 암시였다.

 사단은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들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마 3:17)이라는 하나님의 증언을 불신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낙담과 극도의 배고픔 속에서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위하여 이적을 행하시기를 바랐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구원의 계획은 깨어졌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경 말씀으로 사단을 대항하셨다.
 
 그분은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셨다. 시험당할 때마다 그분의 싸움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사단은 그리스도에게 신성의 표적으로 이적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모든 이적보다도 더 큰 표적, 곧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라는 말씀에 대한 확고한 신뢰는 사단이 논박할 수 없는 표적이었다.

 인간 육체의 욕구가 지나치면 하나님의 명령과 그분의 뜻이 보이지 않는다. 육체의 욕구가 하나님의 명령이나 요구보다 더 큰 것이 죄인의 속성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인간의 욕구를 지니셨지만, 아버지의 명령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고, 아버지께서 먹으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먹지 않으셨고,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의 욕구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더 강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보이신 모본을 따라 우리도 그렇게 할 수가 있다.

2) 두 번째 시험
성전에서 뛰어내리라 - 이생의 자랑에 대한 시험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 4:5~6).
 
 이제 시험하는 자는 그리스도가 참람되게 행동하도록 충동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단은 유혹은 할 수 있으나 죄를 짓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시험에 동의하시지 않는 한 그는 그분을 정복할 수 없었다. 사단은 그분을 강제로 밀쳐 떨어뜨릴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께서 개입하여 당신을 구원하실 것이니 뛰어내리라고 말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라는 약속을 인용하면서, 사단은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는 말씀, 곧 하나님께서 택하시는 모든 길에서라는 말씀을 생략했다.
 
 그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는 미래에 올 메시아는 높은 성전에서 뛰어내릴 것이라는 전설이 굳게 믿어지고 있었으므로, 사단의 말에 동의하고 뛰어내리면 예수님은 쉽게 메시아로서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질 것이었으며, 하나님께서 그의 목숨을 보호하실 것이었지만, 예수께서는 순종의 길에서 벗어나기를 거절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드러내는 한편 당신을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아버지의 간섭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그런 처지에 자신을 두지 않으실 것이었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이 당신을 구출하게 하심으로 사람에게 신뢰와 복종의 모본을 보여 주는 데 실패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예수께서 사단에게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라고 선언하셨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목이 말라서 모세에게 물을 달라고 요구하면서,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출 17:7) 하고 부르짖었을 때에 모세가 한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기적적으로 역사 하셨지만, 난관을 만나면 그들은 그분을 의심하고 그분께서 함께 계시는 증거를 요구하였다. 그들은 불신 가운데서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사단은 그리스도께 같은 일을 하도록 재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께서 그분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셨다. 지금에 와서 또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시험하는 것, 곧 그분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지 않으신 것을 요구하는 것도 역시 같은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불신을 나타내고 그분을 진실로 시험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성취하실 것인지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그것을 성취할 것이기 때문에 간구해야 하며,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믿고 간구해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3) 세 번째 시험
내게 경배하면 모든 것을 주리라 - 안목의 정욕에 대한 시험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8~9).
 
 사단은 예수님을 높은 산 위에 세워 놓고 이 세상 왕국들의 화려한 영광의 전경(全景)을 그분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다. 햇빛이 전각들이 있는 성들과 대리석 궁전들과 비옥한 전답과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포도원들을 비추었다. 악의 흔적들은 숨겨졌다. 조금 전까지도 음침하고 황폐한 것밖에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의 눈은 지금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과 번영의 장면들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때에 유혹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가 넘겨받은 것이므로 내가 주고자 하는 자에게 주노라.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이 다 네 것이 되리라.

 그리스도의 사명은 오직 고난을 통하여서만 성취될 수 있었다. 그분 앞에는 슬픔, 고난, 투쟁의 생애와 수치스러운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분은 온 세상의 죄를 지셔야 한다. 그분은 하늘 아버지의 사랑에서 끊기는 일을 견디셔야 한다. 이제 유혹자는 그가 찬탈했던 권세를 포기하겠다고 제의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최상권을 인정함으로써 두려운 미래를 피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대쟁투에서 승리를 포기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단이 하늘에서 범죄하게 된 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보다 높이려고 한 데 있었다. 만일 그가 지금 이긴다면 반역의 승리를 의미할 것이다.

 사단이 그리스도에게, 이 세상 나라와 영광은 내가 넘겨받은 것이므로 자신이 주고자 하는 자에게 줄 것이라고 한 그의 말은 부분적으로만 사실이었다. 사단의 통치권은 아담에게서 빼앗은 것이었으나 아담은 창조주의 대리인이었다. 사단의 통치권은 독립적인 통치가 아니었다. 이 땅은 하나님의 소유요, 그분은 만물을 당신의 아들에게 맡기셨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서 통치해야 할 것이었다. 아담이 속아서 자기의 통치권을 사단의 손에 넘겨주었을 때에도 그리스도는 여전히 합법적인 왕이셨다.

 사단이 그리스도께 이 세상 나라와 영광을 제공하겠다고 한 것은 그리스도께 이 세상의 진정한 왕권을 포기하고 사단의 지배하에서 통치권을 쥐라고 제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통치권은 유대인들이 소망하던 것과 같은 통치권이었다. 그들은 이 세상 나라를 원하였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그러한 나라를 주시겠다고 승낙하셨다면 그들은 그분을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하늘에서 반역을 일으킨 사단은 세상 나라를 예수에게 제공하여 악의 원칙을 따르도록 매수하려고 하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매수되지 않으셨다. 그분은 의의 나라를 세우려고 오신 그분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사단은 이와 같은 시험으로써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권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이 세상 나라를 주겠다고 제의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고 분부하신다. 그러나 사단은 그들 곁에 따라다니면서 이렇게 말한다. 영생에 관한 것이 사실이라 해도 이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나를 섬겨야 한다. 너희의 행복은 나의 수중에 있다. 나는 너희에게 재물과 쾌락과 명예와 행복을 줄 수 있다. 나의 권고를 들으라. 정직이나 자아 희생 등과 같은 별난 사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 길을 예비하여 주리라. 이런 유혹에 많은 무리가 속임을 당한다. 그들은 자신을 섬기기로 승낙하고 사단은 만족해한다. 사단은 세상 지배권에 대한 희망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면서 한편으로 영혼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다.

 사단은 즉시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예수의 명령을 거역할 능력이 없었다. 사단은 수치와 분노로 몸부림치면서 세상의 구주 앞에서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아담의 실패가 완전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승리도 완전하였다. 예수님은 인간의 기본적인 세 가지 욕구를 다 물리쳐 이기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 기업을 무르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모본은 우리를 위한 것이며, 주의 능력 안에서 우리도 승리할 수 있다!

신앙: 6부 - 둘째 아담을 따르는 자들

1) 은혜의 힘을 체험하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19~21).

  그리스도인들은 위의 성경 절을 읽으며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는 사실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것 같다. 그리고 흔히들 주장하기를, 한 사람의 범죄로 우리가 모두 죄인이 되었고, 죄인으로 태어났으니 그냥 죄를 짓고 살다가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성경 절을 기록한 바울의 저의를 자세히 숙고해 보라. 이 성경 구절은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하는 힘보다 은혜가 의로 왕 노릇 하는 힘과 능력이 더 크다는 것을 알려 주고, 죄의 힘을 이기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힘을 믿으라는 힘찬 복음의 기별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죄의 영향력 파워와 은혜의 영향력 파워, 이 둘 중 어떤 것이 더 클까?  물론 우리가 첫째 아담에게서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죄의 파워와 영향력은 크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은혜의 파워는 더 크고 세다! 복음은 능력이며,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오는 창조의 역사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분께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 하여 죄의 힘과 유혹과 습관들을 넉넉히 이기고도 남게 될 것이다. 어떻게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용서받은 사람이,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경험하고 체험한 사람이 과거와 똑같은 죄의 파워 아래서 종노릇 하는 것이 가능할까? 만일, 타고난 죄의 영향과 유전적인 기질이 너무 커서 죄를 이길 수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다. 없는 것에서 유를 창조하시며, 온전히 새로운 것으로 변하게 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불신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또한, 그런 사람은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이며, 그 능력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진정한 구원이란 용서만으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 구원은 새롭게 되는 것을 말하며, 온전한 회복을 가리킨다. 만일, 알콜 중독자나 담배를 계속 피워대는 골초가 있는데, 그 사람이 온전하고 행복하고 건강한 사람이 되려면, 온전한 회복과 구원이 이루어지려면, 과거를 용서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건강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려면, 알콜과 담배를 끊고 그 중독에서 해방되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용서해 주어도 그대로 욕구가 있다면, 그래서 계속 똑같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신다면, 그것이 어떻게 그 사람에게 새로운 삶이 되고 구원이 될 수 있겠는가? 과거의 모든 것을 끊고 그 병이 치료되어서 그렇게 하지 않고 살 수가 있게 되어야 새 삶이고 구원이다. 골초에게는 담배 중독을 끊게 되는 것, 그것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다. 음욕을 품는 일을 이길 수 없는 자에게는 악한 생각을 이기고 다시는 그런 일을 도모하지 않게 되는 것이 구원이다.

 죄에서 구원을 받는 것은, 죄 가운데 그대로 있으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다. 죄의 욕구와 과거의 죄에 매여 종노릇 하던 모든 습관과 생각과 욕망과 생활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 죄의 왕 노릇 하는 파워에서 벗어나야, 구원을 받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생애에는 사망의 죄가 왕 노릇 하는 일이 끊어지고, 그 대신 흑암의 나라에서 은혜와 빛의 나라로 옮겨와 은혜가 마음속에서 왕 노릇 하는 기적이 생긴다. 그리고 한번 그리스도의 은혜로 시작된 그 기적은 우리가 거절하지만 않는다면, 우리 속에서 지속적으로 계속되어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우리를 자라게 한다.

 은혜가 왕 노릇 한다는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애를 주장하심으로 우리가 반역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님을 믿고 자신의 생애를 완전히 굴복할 때, 즉 거듭나는 경험을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걷기를 시작하게 되며, 이때로부터 우리의 마음속에는 주님의 은혜의 능력이 우리를 점령하고 이끌게 된다. 주님의 은혜는 우리의 의지에 역사 하여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매 순간 주님께 굴복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되므로 은혜의 파워 속에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힘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은혜의 파워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에 비례하여 받고 경험하고 가지게 될 것이다.

2) 은혜의 힘을 경험하는 자들의 출현 
 
예수님의 승리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증거이다.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온전히 경험하는 사람들,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승리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여자의 남은 자손이며, 십사만 사천이다. 그들은 은혜의 힘으로 온전히 변화되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며, 온전한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닷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계신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범죄하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도 승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매일 새 마음을 창조해 주시므로 그 일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시면 죄가 나가고, 죄가 들어오면 그리스도께서 나가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죄를 동시에 우리의 마음 보좌에 모실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누인 마음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완전한 승리의 경험을 하는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이 머지않아 세상에 출현하게 될 것인데, 그 마지막 하나님의 남은 자손들이 바로 하나님의 인을 받는 사람들이며, 늦은 비를 받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짐승의 표 환난과 핍박하에서도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파하게 된다. 이 사람들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죄를 승리하고 은혜의 힘을 받아 매일의 생활에서 사단과 싸워 이긴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삶에서 나타났던 경험이 재현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목숨이나 생명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매일 매일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 4:4). 

3)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만남
 
머지않아 예수께서 재강림하시고, 예수께서 기업 무르는 자인 둘째 아담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 사업을 믿음으로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을 하늘 본향으로 데려가실 것이다. 구속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으로 영접 될 때, 환희와 기쁨의 외치는 소리가 공중에 충만해질 때, 구원받은 성도들의 눈앞에 감격스러운 장면이 펼쳐질 것이다. 그것은 바로 두 아담이 만나는 장면이다. 이제 두 아담은 회복된 본향에서 바야흐로 서로 만나려 한다.

 하나님의 아들,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서는 팔을 벌리고 인류의 시조인 첫째 아담, 곧 주님께서 창조하신 자이며 창조주께 범죄하고, 그의 죄 때문에 주님의 몸에 십자가의 못 자국을 남기게 한 그 아담을 안으실 것이다. 그때, 아담은 영원한 사랑의 기념으로 남아 있는 잔인한 못 자국을 식별하고 주님의 품에 안기려 하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의 발아래 그 자신을 던지고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고 부르짖을 것이다. 구주께서는 친절하게 그를 안아 일으키시고, 그의 범죄 때문에 빼앗겼었지만 둘째 아담의 기업 무르는 구원의 사업으로 말미암아 다시 찾은 아름다운 에덴의 본향을 다시 한 번 보라고 하실 것이다.

 둘째 아담이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인류의 실패와 타락을 구속하셨다. 그러므로 그 속죄의 사업을 통하여 아담은 최초의 통치권을 회복할 것이다. 아담은 자기가 쫓겨날 때보다 더욱 아름다워진 회복된 에덴을 보게 될 것이다. 구주께서 그를 생명나무로 인도하여 빛나는 열매를 따서 아담에게 먹으라고 하실 때, 그는 감격하며 주위를 둘러보고 하나님의 낙원에 서 있는 구속 받은 그의 가족의 큰 무리를 볼 것이다.
 
 그때 그는 그 찬란한 면류관을 벗어 예수님의 발 앞에 던지고, 그분의 가슴에 몸을 던져 구주를 포옹하며 황금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러면 구속 받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리의 승리의 노래가 하늘 공간에 울려 퍼질 것이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아담의 가족들은 주님께 경배할 때 찬양의 노래를 부르며 구주의 발 앞에 그들의 면류관을 벗어 던질 것이다.

 둘째 아담 때문에 다시 찾게 된 이 땅,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회복된 이 땅은 눈부시게 아름다울 것이다. 거기서 기업 무르는 자의 은혜 덕분에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이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긴 자들의 무리가 보좌 앞에 있는 수정같이 맑은 바다, 불이 섞인 유리 바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바닷가에 모일 때, 땅에서 구속 받은 십사만 사천 명은 하나님의 거문고를 손에 들고 어린양과 함께 시온산에 서서 새 노래를 부를 것이다.

 기업 무르는 자의 구속의 날이 가까워 오고 있다. 마지막 환난과 짐승의 표 환난도 가까워 오고, 우리를 유혹하여 멸망시키려는 사단의 노력도 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과 파워는 더 크고 더 세어 이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고도 남게 하신다. 아름다운 하늘 본향,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 날이 가까워 온다. 죄를 이기게 하는 은혜의 힘을 체험한 자들,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죄를 승리한 자들만이 그때, 그 구속의 날에 새 노래를 함께 부를 수 있게 될 것이다. 은혜로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자!

질문과 답변: 알곡을 만드는 복음과 가라지를 만드는 복음의 차이

 교회 안에 두 가지 복음이 존재한다. 하나는 참 복음이요, 다른 하나는 가짜 복음이다.  참 복음은 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복음이요,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계획하신 참된 구속의 방법이다. 그러나 가짜 복음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그 내용을 살짝 바꾸어 놓은 위조된 복음을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두 복음이 다 한가지로 성경의 단어들과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는 데 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두 가지 사이에서 혼돈을 겪는다. 그러나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자기의 마음에 맞는 복음을 자기의 진정한 동기와 소원을 따라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복음은 알곡을 만들어 내고 가짜 복음은 가라지를 생산해 낸다. 모든 사람은 이 두 가지 복음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 믿는다. 

 초대 기독교회의 신앙이란, 자신의 씻을 수 없는 죄를 용서받은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서 산 값비싼 향유를 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은 신앙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감사와 사랑 때문에 자신의 생애 전체를 그분의 진리에 바치게 만든 신앙이 초대 기독교회의 신앙이다. 사랑은 그 여인을 진리에 완전히 붙잡힌 바 된 의의 종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막 14:9).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대한 참된 가르침의 한 실례인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과 사도들이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교회는 형식과 의무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서서히 율법주의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단은 중세기의 종교 암흑시대에 천주교회를 통하여 각종 예식과 순례, 즉 행함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율법주의를 퍼뜨리는데 성공하였다. 이로 인하여 온 세상은 깊은 영적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것은 오늘날까지 전수되어 기독교회 안에 깊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