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편지: 사랑으로 굳혀진 습관

 사랑도 습관이고 행복도 습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습관은 매우 중요합니다. 습관은 품성을 만들고 품성은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속죄는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티켓이지만, 성화를 통해 형성된 품성은 하늘에서 살 수 있게 하는 적합성입니다.

 사랑의 품성과 사상으로 변화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좋은 천국에 데려다 놓아도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 좋은 면을 바라볼 줄 모르는 사람, 늘 남의 일에 참견하고 성가시게 구는 사람, 선하지 않은 의도와 계획을 마음에 가진 사람, 질투와 증오가 있는 사람, 자기 뜻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사람들과 조화와 하모니를 이루며 살 줄 모르는 사람, 칭찬과 격려의 말 대신 비판과 불만의 말만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 하나님과 나누는 영적인 교제와 동행의 행복함을 모르는 사람, 하나님과 융화되지 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늘에 간다고 해서 갑자기 그 품성이 변할까요?

 하늘에서 살 만한 적합성이 없는 사람을 하늘에 데려다 놓는다고 해서 그 하늘이 행복한 장소가 될까요? 이기심 없는 사랑이 지배하는 하늘에서, 각자의 마음이 무한한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의 마음과 서로 통하는 그 하늘에서, 아무도 서로 해하지 않고 서로의 자유와 개성을 존중하는 하늘에서, 온유한 사람들이 서로 위하고 사는 하늘에서, 순결한 사람들을 고무시키는 사랑과 취미와 동기가 충만한 하늘에서, 그런 사람은 하늘의 음악과 멜로디에 화합되지 못하는 거친 음조가 될 것입니다. 

뇌에 길을 내는 습관
 치매에 걸린 한 할머니가 휠체어에 앉아 양로원 병원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참 좋은 날이지요? 그렇지요? 감사합니다!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오고 가는 사람들과 간호사들에게 손을 흔드는 할머니는 병원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을 띄게 합니다. 옛날의 기억들은 거의 잊어버리셨다는 할머니에게 남은 것은 웃으며 인사하고 감사하는 습관이 전부였습니다. 매일 몇 시간이고 인사를 하는 할머니를 보고 간호사들은 귀여운 인사 할머니 라고 부른답니다. 이렇게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몸에 베인 습관&. 우리에게는 후일에 어떤 습관이 마지막으로 남을까요?

 어떤 일을 21번 반복하면 습관이 된다는 말이 있지요? 학자들이 그것을 과학적으로 연구해 본 결과, 사람이 똑같은 일을 21번 반복했을 때 뇌 속에 길이 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말은, 뇌에서 자극을 전달하는 신경 전달 물질이 그 회로 쪽으로만 전달하여 그쪽으로 뿌리가 내린다는 말이지요.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부정적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낙심하고 불평하는 일을 21번 한 사람의 뇌는, 그런 부정적인 쪽으로 회로가 생기고 길이 나게 되고 뇌에 입력이 되어,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자기도 모르게 벌써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남의 말을 하고 비판과 험담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뇌는 벌써 그런 쪽으로 뿌리가 내려져 있고, 그것이 습관으로 형성되어 있어, 어떤 일을 보거나 들을 때 즉각 험담하거나 비판하는 반응을 보이게 되는데, 그것은 그런 습관이 반복되다가 그 습관이 그 사람의 품성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매사에 좋은 생각을 하고 긍적적인 사고를 가지며, 이해하는 마음과 칭찬하고 덮어 주는 너그러움을 가진다면, 그리고 남을 탓하는 대신 모든 것을 자신의 부족으로 돌리는 겸손함을 매 순간 가진다면, 또 친절하고 따뜻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그리고 그 좋은 일을 21번 이상 한다면, 우리의 뇌 속에는 얼마나 좋은 길이 생길 것이며,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좋은 습관을 만들까요? 그리고 그 좋은 습관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성품, 하늘에서 살 수 있는 적합한 성품으로 굳을까요! 

행복 선택
 선택 이라는 제목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새 차를 산 밥과 테레는 차를 길들일 겸 온갖 짐을 다 싣고 아내 테레의 할머니 집으로 장거리 여행을 갔습니다. 할머니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밀린 일을 하러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밤도 늦고 피곤해서 다음날 아침에 짐을 내리기로 하고 잠을 잤습니다.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집 앞에 세워 놓은 새 차가 온 데 간 데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경찰에 도난 신고를 한 후, 차 속에 들어 있던 귀중한 물건들이 하나 둘 떠오르자 테레는 당황하며 속상해 하기 시작했습니다. 화가 치밀어 오른 테레가 편안하게 앉아 있는 밥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의 소중한 물건들과 새 차가 없어졌는데,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있어요?  그러자 밥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우리는 차를 잃어버리고 화가 날 수도 있고, 아니면 차를 잃어버리고 행복할 수도 있소. 어떻든 우리가 차를 잃어버린 건 분명하오.  우리가 이럴 때, 어떤 기분과 마음을 갖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난 믿어요. 그리고 난 차를 잃어버리고 행복한 쪽을 선택하고 싶소.

 닷새 뒤에 그들의 새 차는 안에 있던 소지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찌그러진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3천 불이나 되는 거금을 들여 고친 차를 일주일 만에 다시 운전하게  된 기쁨도 잠시, 밥은 고친 차를 몰고 오다가 다른 차를 들이받고 맙니다. 상대 차는 괜찮았지만 밥의 차는 많이 찌그러져 또다시 차를 고치려면 몇천 불이 들 것을 생각하고 너무 속상한 나머지, 집 앞에 차를 주차하며 차를 발로 뻥 차는 밥의 모습을 지켜본 아내 테레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보, 우리는 차를 부서뜨리고 화를 낼 수도 있고, 차를 부서뜨리고 행복할 수도 있어요. 어느 쪽을 선택하든 차가 부서진 건 기정사실이에요. 그러니 우리, 차가 부서지고 행복한 쪽을 선택합시다. 갑자기 웃음보를 터뜨린 밥은 아내 테레를 안고 즐거운 마음으로 저녁 식사를 하러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휴 다운즈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어떤 특정한 환경 속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특정한 마음 자세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사랑 연습, 행복 연습
 사랑이 습관이 되고 행복이 습관이 되게 하십시오! 습관은 우리의 품성이 될 것입니다. 매 순간 사랑으로 생각하고, 매 순간 행복을 선택하세요. 올라오는 육신의 감정 - 부정적이고, 우울하고, 슬프고, 비관적이고 비판적인 생각은 버리고, 매 순간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롬 5:5) 되도록 하십시오!  육체의 일은 다음과 같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19)

 이런 것들이 마음속에 깃들지 않도록, 이런 일들을 자꾸 행함으로 이것이 당신의 습관이 되지 않도록 하세요! 그것은 곧 당신의 품성을 형성할테고, 그것은 하늘에서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품성이 될테니까요.진정한 사랑을 연습하는 것이란, 나의 눈으로 볼 때 정말 사랑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 때에도, 밉고 화가 나는 생각이 쑤욱 올라올 때에도, 그것을 떨쳐 버리고 하나님의 눈으로 초연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 연습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있는 그대로를 이해하는 것, 내가 당신이 될 수 없고 당신이 내가 될 수 없듯이, 상대방을 나처럼 만들려고 애쓰지 않는 것, 나를 상대방처럼 만들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주님과 같이 되기를 심히 원하며&. 사랑을 연습하는 사람은 행복을 연습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연습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며, 그렇게 행복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오늘도 하늘에 적합한 품성을 지어내는 아름다운 습관을 연습하기를&. 그리고 그 습관이 사랑으로 굳혀진 습관이 되기를&.

생애의 빛에서

 참으로 신기합니다!  어떻게 음식을 먹으면 우리 몸에서 그것을 분해하여 에너지와 양분으로 바꾸어 주고 있는 것입니까?

 곡식과 과일과  채소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비타민들과 단백질과 효소들을 담고 있는데, 그것들을 땅에서 끌어올려 우리를 위하여 품고 있지요. 심지어는 우리가 그것들을 씹을 때 입속의 침이 섞이어 잘 소화되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신기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음식은 우리가 살아서 활동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먹어야 삽니다!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먹지 않아도 죽지만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지 않으신 잘못된 것들을 먹어도 죽습니다. 또한 먹는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하여 대신 먹어 줄 수가 없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고도 잘 살아간다는 것은 죽은 송장이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로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고서도 잘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죽은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셈이지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양식을 섭취하지 않고, 또 배고픈 느낌도 없이 그냥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을 이해하기가 힘들다든지, 시간이 없다든지, 먹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말씀을 먹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말씀이 실제로 우리 생활의 양분이 되게 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말씀으로 산다는 의미일까요?

 이번 호는 이 중요한 이슈를 다루고 있습니다.

가정과 영성: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기독교회 안에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는데 한 무리는 예수님의 능력을 추구하고, 다른 한 무리는 예수님의 품성을 추구한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나는 예수처럼 되고 싶다.라고 말한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 누가 마귀가 되기 원하겠는가? 그러나 슬프게도 어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 안에서 마귀로 변해 가고 있다. 입으로는 나도 예수처럼 되고 싶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마귀가 걸었던 길을 걷고 있다.예수처럼 되고 싶어서 교회에 나왔지만, 실제는 마귀처럼 되어 가는 상황, 바로 이것이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의 모습이다.
왜 이런 일이 교회 안에 생기게 되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먼저, 마귀는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요한계시록 12장 7-9절에는 마귀가 하늘에서 쫓겨나는 장면이 나온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예수 그리스도)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악한 천사)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계 12:7-9)
 마귀와 악한 천사들이 하늘에서 쫓겨났다고 했다. 그런데 왜 마귀와 악한 천사들은 하늘에서 쫓겨났을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사야 14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마귀)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사 14:12-14)
 이 말씀의 앞부분에는 어떻게 하늘에서 쫓겨났으며 어떻게 해서 땅에 떨어졌는가?라는 질문이 나오고 이어서 그  답이 나온다. 마귀는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하나님)와 비기려고 하다가 쫓겨나게 되었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나님의 능력과 보좌를 탐하다가 하늘에서 쫓겨난 것이다.

 한 가지 매우 흥미 있는 사실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다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처럼 되기 원하다가 하늘에서 쫓겨났던 마귀는 인간을 유혹할 때에도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유혹하였다. 하나님처럼 되는 것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굉장한 유혹거리임이 틀림없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하와는 하나님처럼 선악을 아는 능력을 얻으려고 선악과를 따먹었고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속한 능력과 힘을 구하는 자들은 쫓겨나게 된다. 왜 그럴까? 하나님께서 이기적이기 때문에 능력을 독점하기 원하기 때문일까?

 도대체 하나님이 어떤 분이기에 마귀와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했을까?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의 제자 빌립은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하였다.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하나님)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8-9)

 예수님은 내가 행동하는 것, 내가 사람들을 대하는 것, 내가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는 것, 내가 고통당하는 병자를 도와주는 것, 내가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바로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오해받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 주려고 이 땅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예수께서 이 땅에서 보여 주신 것과 같은 분이시다. 그분은 사랑과 봉사와 자기희생의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마귀와 하와가 하나님처럼 사랑하고 하나님처럼 봉사하기를 원하다가 쫓겨났다는 말인가?  물론, 아니다. 그렇다면 마귀가 정말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하와가 원했던 것은 정말 무엇일까? 우리는 마태복음 20장 17-28절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엿볼 수 있다.

17-20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심각하게 말씀하시는 그때, 세베대의 아들인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께 뭔가 청탁을 넣으려고 하는데 차마 자신의 입으로 그 말을 하기에는 창피하니까 어머니를 앞장세우고 와서 청탁하는 것이다.

2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정말 너무하지 않는가? 예수께서는 이제 곧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라는 비장한 말씀을 하시는데, 장차 자기 아들들에게 가장 높은 자리를 내어 달라는 청탁을 하고 있다니&. 장차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면 우의정과 좌의정 자리를 달라고 미리 손쓰려고 찾아온 것이다. 예수님을 찾아와서 권좌와 권력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2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마시려는 잔은 무엇인가? 십자가 피의 잔이다. 고난의 잔이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따라다니면 고생과 피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두 제자는 권력과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지난 6천 년 동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존재해 온 엇갈린 기대이다.하나님은 항상 인간에게 구원을 위하여 고난의 잔을 마시라고 요구하시는데, 인간은 항상 하나님께 권세와 권능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정치인만 권세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종교인들도 권세를 얻고자 정신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까지 말이다.

23절: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예수께서는 분명히 밝히셨다. 예수님의 목적은 인간에게 권세와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피의 잔을 마시도록 안내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마신 것처럼 말이다.

24절: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나머지 10명의 제자들이 화가 났다. 왜 화가 났는가? 왜냐하면, 그들도 높은 권좌와 권력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자리에 있던 12제자 모두 권세와 능력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25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모은 다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의 특징을 두 가지로 요약했는데 첫 번째는 다른 사람을 임의로 주관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권세를 부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주장하고 움직이기 원하며, 또한 그런 권세를 얻고 싶어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도 깊이 들어와 있다. 아무리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교회에 다니더라도 다른 사람을 제 뜻대로 주관하려고 하며, 그러한 권세를 얻으려고 은근히, 교묘하게 애쓰는 자들은 이방인이다.

 이러한 원칙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서로를 자기 뜻대로 주관하려고 권위를 부리는 자들은 이방인의 정신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의 정신은 무엇인가?

26-28절: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의 성품과 생애를 설명하시면서 두 단어, 즉 종, 섬김을 사용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마셔야 할 피의 잔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섬김을 받기 위해서 섬기러 온 것이다. 그냥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섬기려고 오셨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성품이다. 예수께서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씀하셨으므로 하나님 또한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죽기까지 내어주며 섬기시는 분이다.그러므로 우리가 나는 예수처럼 되고 싶다.라고 말할 때는 나는 예수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종이 되고 싶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마귀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종이 가져야 하는 성품을 원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힘을 원했던 것이다. 자기희생, 사랑, 봉사, 정직, 순결과 같은 하나님의 성품에는 관심이 없었고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원했던 것이다.

 하와도 마찬가지이다.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아는 능력을 받게 되기를 원했다. 마귀가 하늘에서 반역했을 때에 걸었던 그 길을 하와도 따라 걸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품을 구하는 대신에 하늘의 능력만을 탐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나게 된다. 성품이 아니라 능력을 구하는 것, 바로 이것이 현대 기독교회의 문제이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나는 예수처럼 되고 싶다!라고 외친다. 왜 그들은 예수처럼 되고 싶어하는가?예수처럼 능력을 행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갖고 계셨던 병 고치는 능력을 자신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들은 방언의 능력을 자신도 갖게 해 달라고 금식하며 기도한다. 그들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자신도 갖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이것이 그들이 예수처럼 되고 싶다고 말하는 진짜 속내이다. 능력과 힘을 탐하는 정신이 그들 속 깊은 곳에 있는 것이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인간을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누고 있는데, 하나는 기적과 이적을 구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계명과 진리를 추구하고 따르는 사람들이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에 내려지는 짐승의 표 환난 때에 사단을 따르는 무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고.(계 13:13,14) 마지막 시대에 사단은 기적과 이적을 내세워 사람들을 미혹하고, 하나님께서는 진리와 계명을 통하여 사람들을 모으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현대 기독교회가 가진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의 능력은 탐하면서 그분의 성품은 구하지 않는 것이다. 하늘은 그러한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교회에 다니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늘에 가길 원한다.
 불멸의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  성령의 은사를 원한다. 그러나 하늘에 가기 전에 하늘에서 영원토록 하나님 곁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 하늘에서 영원히 살지라도 하나님의 권능과 그분의 진리에 도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하늘의 천사들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 성령의 엄청난 능력이 임해도 저 사람은 절대 오만방자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어야 한다.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교회에서 봉사할 때는 놀라운 하늘의 능력이 함께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설교가 끝나고 가르치는 일이 끝나고 교회 봉사가 끝나면 마치 전기 스위치를 내리면 전깃불이 나가는 것처럼 그 능력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왜 그럴까? 그들 속에 종의 성품, 섬기는 자의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능력과 힘을 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끝까지 따라갈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며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결국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은 우리의 품성과 생애가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는 쪽으로 이루어지는데, 대부분 그것은 자극적이거나 감정적이지 않으며 눈에 보이지 않게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서 길을 열어 놓으셨지만, 우리 눈에는 닫혀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실 때에는 미래의 모든 것을 보여 주신 다음에 선택하도록 하지 않으신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시 119:105)라는 말씀처럼 주의 말씀은 내 발 앞을 비춰 주어서 넘어지지 않고 걸어갈 수 있을 만큼만 보여 주신다. 주의 말씀이 내 머리의 등이 된다면 멀리까지 비춰 주겠지만,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기 때문에 한 걸음 한 걸음씩만 비춰 준다. 멀리 있는 것에 대해서는 방향만 제시할 뿐 그곳에서 실제로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가리시고 보여 주지 않으신다.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 길을 걸어야만 볼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성장하고 강해진다.
 일상적인 환경 속에서 모든 것이 잘되어 갈 때는 하나님을 만나기 어렵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잘되어 갈 때에는 내가 이루어 놓은 것들을 보면서 자고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붙잡을 것이 없고 기댈 곳이 없는 환경에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 깊이 만나 주시려고 아무것도 붙잡고 의지할 것이 없는 광야로 이끄신다. 편안한 삶 속에서는 전혀 볼 수 없던 것들이 인생의 힘든 광야를 통과하면서 보게 되는데 그때에 내 안에 숨어 있는 야욕과 세상을 향한 야심을 보게 된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나의 영광이 뒤섞여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인생의 광야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고난을 통해 정제되어 간다.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이 엉켜져 있는 삶이 광야 속에서 정결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내 능력의 한계에 부딪혀 절망할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열망이 자라나게 된다.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사용하고자 하는 인물들을 인생의 광야로 몰아가셨다. 그곳에서 그들을 만나 주셨고 그곳에서 그들을 훈련하셨다. 왜냐하면, 편안한 안락의자와 따뜻한 아랫목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외면하며 건방진 태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생의 광야로 내몰아 가는데 광야의 주변에는 재물과 풍요의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부와 명예를 누리면서 살고 있다. 그들을 보면서 광야를 통과하는 것이 나그네들이 경험하게 되는 시험이다.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라고 불렸지만 정작 그가 살았던 곳은 복이 없는 광야 땅이었다. 아름답고 복이 있는 땅은 조카 롯에게 주었다. 복을 구하고 그것을 찾아간 롯의 가족은 처참한 운명을 맞이하였지만, 복을 이기심 없이 나누어 주었던 아브라함의 가족은 복을 누리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눈에 보이는 능력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품성을 구하는 자들의 삶이다. 그리스도인은 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어 주변 사람들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복의 근원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복을 찾으려고만 한다. 사람들은 돈이 있고 복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려고 한다. 그래서 서울의 강남에 사람들이 모이고 뉴욕의 맨해튼에 사람들이 미어터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장소가 어디인가에는 관심이 없고, 보기 좋고 살기 좋은 곳을 찾으려고 인생 대부분을 보내는 사람들은 결국 행복을 잃어버리고 인생의 광야 속에서 길을 잃게 된다.
 우리가 하늘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얻게 되고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을 소유하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다.중요한 것은 내가 어느 곳에 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가?이다.

건강: 아직도 담배를 피우시나요?

alt
alt
alt

창조 교실: 매미를 통해 가르쳐 주시는 교훈

 무더운 여름 날, 한가로운 매미 소리를 들으면 시원한 느낌이 들지요? 푸른 나무에 붙어 맴맴 소리 내며 노래하는 매미는 무척 평화로워 보이는데, 사실 매미의 일생을 연구해 보면 슬프기도 하고 진한 감동이 전해 옵니다.
 매미의 알은 길이가 2밀리미터쯤 되며, 주로 나뭇가지에 산란되었다가 부화를 합니다. 처음에 알을 깨면 얇은 껍질을 뒤집어 쓴 애벌레 전 단계의 벌레가 되었다가, 그 다음 껍질을 벗고 애벌레가 됩니다.

 애벌레는 조금 쉬고 난 뒤에 땅 위로 떨어집니다. 그리고 더듬이를 흔들면서 걸어다니다가 흙이 부드러운 곳에서 흙을 파고 땅속으로 들어갑니다. 드디어 애벌레의 긴 땅속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땅속으로 들어간 애벌레는 침처럼 생긴 뾰족한 주둥이로 나무뿌리를 찔러 그 속의 수액을 빨아먹으면서 몇 해를 자랍니다. 애벌레가 땅속에서 보내는 기간은 흔히 6년에서 7년이라고들 말하나, 그 기간은 종류별로 달라서 1<2년을 땅속에서 보내는 것부터 3<4년, 5<6년 등 다양하답니다.


 다 자란 애벌레는 땅 위로 기어 나와 나무줄기나 가지 등에 몸을 고정시킨 후 탈피를 합니다. 5년이나 6~7년 전에  땅속에 들어갔던 매미 애벌레들 가운데에서 여러 적들을 피하여 살아남아 밖으로 나오는 것은 얼마되지 않습니다.

 잠시 돌아다니고 난 애벌레는 나무줄기나 잎 뒷면 같은 곳에 앞발의 발톱으로 단단하게 매달립니다.
그렇게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애벌레가 힘을 주기 시작하면 곧 등의 허물이 갈라진 틈에서 매미의 몸이 나옵니다. 그리고 조금 후에 머리가 완전히 나오고 날개도 나옵니다. 곧 이어서 다리까지 나옵니다. 이렇게 허물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성충이 된 매미는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그리고 맴맴 예쁜 소리를 내어 짝을 부릅니다.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기 위함이지요.

 그런데 평화로워 보이는 매미의 울음소리는 7년이라는 긴 어둠의 세월을 땅속에서 보낸 후에 세상에 나와 비로소 내는 소리라서, 무척 감동적인 소리라고 할 수 있네요.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매미가 세상 밖에 나와서 지내는 시간은 불과 1주일에서 10일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긴 시간을 땅속에서 지내다가 큰 소리로 맴맴 울 수 있는 기간이 고작 1주일이라니!
그래도 매미는 자연의 법칙을 따라 본분을 다하며 자신의 일생에 충실하게 살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매미를 통해 우리에게 겸손의 공과를 가르쳐 주시네요. 그리고 매미처럼 고통과 어둠의 시간들을 잘 견디고, 고난의 과정에서 배운 노래를 부르라고 하시네요. 고통의 시간을 잘 견뎌 낸 믿음과 인내의 노래를&.   

신앙: 1부 -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환난과 예수 재림을 앞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확고한 믿음이 요구되고 있다. 그 확고한 믿음은 그냥 믿음이 아닌, 말씀만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산 믿음이다. 자신의 뜻과 감정에 의한 믿음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란 무엇일까? 어떤 환경이나 상황이 닥쳐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그러하니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행하는 믿음, 이런 산 믿음을 이번 호 신앙 기사를 통하여 함께 연구하여 보자.    - 편집실 -

 한 원주민이 선교사를 찾아왔다. 선교사가 준 성경책을 자신이 기르는 사냥개가 먹어 버렸다는 소식을 전하며 난처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선교사는 걱정하지 말라고 원주민을 위로하며 성경 한 권을 더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원주민은 고개를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성경을 먹기 전에 우리 집 개는 사냥을 잘하는 뛰어난 맹견이었는데, 이제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었으니 사냥을 하지 않으려 할 것이 아닙니까?

 무척 우스운 예화이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이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만을 의지하여 살므로 말씀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경험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적은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 똑같은 능력의 말씀이 우리를 매일 새로운 생명으로 재창조하실 수 있다. 말씀으로 산다는 것, 능력의 말씀을 의지하여 산다는 것의 의미를 함께 연구해 보자.

1) 말씀으로 사신 예수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신 생애는 우리에게 모본이 된다. 그분이 처하셨던 상황과 그 상황에 대처하시던 태도와 방법들 그리고 일어난 사건들을 처리하시던 태도와 마음가짐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좋은 실례가 된다. 예수님의 생애를 특징 지웠던 한 가지 확고한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셨고, 말씀으로만 사셨다는 것이다. 그 예는 특히 광야에서 사단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실 때 가장 현저하게 나타났다.

 예수님은 모든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대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주님께서는 어떻게 사는 것이 말씀으로 사는 것인가 하는 실례와 방법을 친히 우리에게 보여 주셨던 것이다. 그분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시험을 대항할 수 있었다. 그분이 행하셨던 모든 일의 동기와 배후에 있는 원칙은 기록되었으되였다.
 예수님은 말씀 자체이셨지만, 지상에 사실 때 매일 새벽 미명이면 한적한 곳에 가셔서 하나님 아버지와 교통하고 기도하며,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명상하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과 말씀대로 순종하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일과 자신의 뜻과 계획을 따름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그르치지 않으려고 매일 그분의 헌신을 새롭게 하셨다. 곧,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충성심과 결심을 매일 새롭게 하셨던 것이다. 그분은 말씀으로만 사셨다. 그분 생애의 신조는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7)였다.

 지상에서 모든 시험당할 때마다 예수님의 싸움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실천하러 오신 것이 그분 생애의 목적이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사단이 거는 시험의 맹공격을 받을 때, 상황이나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 말하는 대로 행하고 순종하여야 한다. 우리가 말씀으로만 살 때, 그 말씀의 모든 능력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며, 예수님과 같은 생애를 살기에 부족함이 없게 될 것이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

2)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3,14)
 그리스도는 거룩한 말씀이시다. 온 세상 만물은 그분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창조되었으며 유지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는 무엇이라도 성취시키는 힘이 있다. 말씀 속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바로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히 4:12)으로서, 말씀 되신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인간들의 마음속에 거하시며,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생애에서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말씀 안에는 그리스도가 계시는데, 이것은 말씀이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 가운데로 모시기 때문이다.창조의 능력을 가진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우리의 생애에는 변화가 생긴다.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모든 것을 정결하게 하는 변화가 생기는데, 곧 말씀이 버려야 할 것들을 잘라 쪼개 버리게 하고, 자아의 욕망과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는 것들은 쳐서 복종시키며, 마음의 동기와 원칙과 생활이 바뀌게 하는 변화가 생기게 한다.

 미워하고 원망하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사랑과 감사로 충만한 사람이 되고, 매사에 부정적이고 불평하던 사람이 긍정적이고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격려하는 사람으로 변하며, 게으르고 나태하던 사람이 정직하고 성실하며 매사에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생애와 마음의 동기와 마음의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여 바뀌고, 또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져서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행하지 않으면 못 견디게 되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이고, 말씀으로 변화되었다는 의미이며, 이것이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다.

3) 감정과 느낌을 부인하고 말씀을 따르는 것
 말씀으로만 산다는 것에는 매우 중요한 원칙이 있는데,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그 중요한 원칙을 알 뿐만 아니라 마땅히 그것을 체험하고 살아야 한다. 대부분 사람은, 믿는 것이란 그저 머리로 아는 것, 혹은 동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것은 그 이상을 뜻한다.

 진정한 믿음이란, 주님의 말씀이야말로 온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이라는 것을 믿으며, 모든 것들이 그것에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일지라도 그 말씀을 의지하는 가운데 주님의 뜻 안에서 영혼이 편안히 쉼을 얻는 것을 말한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말씀만으로 사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말씀으로 산다는 의미는, 매일의 삶을 영위해 나가면서 처하게 되는 상황과 일과 사건과 경우에서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이나 욕망을 따르지 않고, 그 감정들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즉,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에 느껴지는 대로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고, 그 감정이나 느낌이 밀려올 때, 그것들을 붙잡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며 그분의 뜻과 섭리 안에서 편히 쉬는 것을 가리킨다.

 조상의 죄 결과로 우리는 죄로 치우치는 경향들을 타고났다. 즉, 유전자를 통해 조상의 성정과 성격과 기질들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죄를 짓기로 선택하는 우리의 고의적인 선택 없이 우리의 존재 자체, 즉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가진 그 부족한 자체를 죄인이라고 정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죄에 대해 성경에서 말하는 정확한 개념이다. 우리 속에는 육신의 소욕을 따르려는 죄의 본성들이 자리 잡고 있으므로 매 순간 여러 가지 감정과 욕망이 마음속에서 올라온다. 그러나 말씀만으로 산다는 것은 그것들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라고 말하며,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말고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권면하였다. 그러므로 죄를 승리한다는 것은, 자신의 육신에서 올라오는 감정과 소욕을 좇지 않고, 그 느낌을 부인하고 말씀을 붙잡고 사는 것, 곧 말씀만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약 1:17)다. 그분의 말씀과 원칙은 일정하시며, 또 사랑과 자비는 변함없으시며 그분은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과 느낌은 시시때때로 변하기 쉽고 안정적이지 못하다. 또한, 육체에 속한 감정들은 시간이나 상황, 또는 육체의 건강 상태나 환경과 분위기에 따라 변하기 쉬운 것이므로 그것은 신뢰할 수가 없다.
 육체의 소욕들 대부분 부정적이고 악한 감정이나 느낌을 통해 형성되고 일어난다. 그러나 사실 그런 것들은 실체가 아니고 허상이다. 그러므로 좋지 않은 감정이나 부정적인 생각이나 느낌들이 엄습할 때, 또한 죄의 유혹이 감정을 자극하며 올라올 때, 우리는 그것들에 굴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지, 그 말씀의 명령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육체에서 일어나는 허상들이 우리를 자극하고, 긍정적인 영적인 경험 속에서 우리를 끌어내리고 쓰러지게 할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나의 감정과 뜻을 부인하고 그분의 임재 속에서 그분의 뜻과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이 실체를 붙잡는 것이며, 그것이 죄를 승리하는 비결이다.

신앙: 2부 - 감정을 따를까, 아니면 말씀을 따를까?

 우리가 사는 시대는 감정과 느낌에 호소하는 매개체들에 심하게 노출되어 있어서 감정적으로 살고 생각하고 표현하도록 자극받기가 쉽다.

 심지어 기독교인들까지 느낌이나 감정에 바탕을 둔 신앙을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신앙생활을 할 때 성경 말씀에 의존하기보다 자신의 감정과 느낌에 기초하여 신앙하는 태도는 올바르지 않으며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말씀 위에 서서 믿음을 활용하는 대신에 자신에게 어떤 특별한 느낌이 오기를 기다리고 바라며, 자신의 느낌을 말씀의 원칙이나 명령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 둔다. 곧, 말씀 위에 바탕을 둔 신앙보다는 감정 위에 기초를 둔 신앙을 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감정과 믿음이 혼합된 신앙 형태가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감정의 흥분 상태를 조장하는 예배 형식과 분위기와 노래들이 난무하고 있다. 감정이 고조되어야만 믿음이 향상되고 있다고 느끼며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헛된 허상의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사단의 전략에 기만당하기 매우 쉬운 형편에 놓여 있다.
 사단은 진리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말씀이 시사하는 바를 따르지 않고 감정을 따라 신앙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성품과 생애에서 아직 충분하게 열매 맺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각종 기적과 거짓 은사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줌으로써, 그들의 고조된 감정을 통하여 접근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고조된 감정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신과 특별하게 함께 하신다는 거짓 확신을 하게 한다.

 그런 잘못된 경험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말씀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거짓 기적과 초자연적인 현상들에만 치우치게 되어 진리로 온전히 구원함을 받는 경험에서 멀어지게 된다. 감정적인 경험은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변화가 아니다. 물론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바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참된 하늘의 평안과 사랑이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고 따르는 자아 포기와 함께 참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이 따르게 된다.
 
 감정적인 신앙을 하는 사람들은 매번 자신이 경험했던 감정적 환희와 만족을 억지로 이끌어 내려고 애쓰지만, 그들의 생애를 이끌어 가는 진리와 신앙의 원칙이 교정되지 않는 한 진정한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말씀이 명령하시는 대로 자신을 바치고 굴복하는 경험이 없이는 새롭게 거듭난 생애도 시작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스스로 확증하고 확인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자신의 기호나 욕망이나 감정을 따르는 결정이나 주장이 아니고, 진리의 말씀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감정적 신앙을 하고 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매우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분명하게 그분의 뜻을 밝혀 주셨음에도 자기가 원하는 그와 반대되는 길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억지 기도를 드리는 것이야말로 감정적인 신앙의 대표적 증거이다.
대개 감정을 중요시하는 신앙인은 하나님의 진리와 계명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음에도, 성령께서 주시는 개인적인 특별한 감정적인 느낌만을 기다리며 자신의 길을 고집한다.

 특별히 오랫동안 자신이 믿어 왔고 고집해 왔던 어떤 가르침이나 교리들이 말씀을 정확히 연구한 결과 오류임이 드러날 때, 많은 기독교인은 자신의 아집을 꺾고, 선뜻 하나님의 참 복음이 가리키는 가르침을 따르기를 거절하는 경우들이 있다.

 말씀대로만 산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이나 교만이나 고집을 버리고 말씀이 가리키는 대로 따라가는 것을 뜻한다.
옛날의 유대인들도 그러했다. 그들은 편견과 자존심 때문에 성경의 참된 증거를 거절하고 자기들이 믿고 있던 신조를 고집함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이다.

 사단은 말씀의 원칙보다 감정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이 원하는 감정과 느낌을 줌으로써,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가 요구하는 바를 저버리고, 자신의 감정과 느낌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생애 함으로써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항상 기록되었으되라는 원칙 아래에서 사신 것처럼, 말씀 위에 기초를 두고 말씀으로만 사는 경험을 해야 한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만이 마지막 때에 흔들림 없이 진리 위에 설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끝까지 충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앙: 3부 - 감정 대신 말씀을 따라 사는 실제적인 경험

1) 감각을 통해 받게 되는 유혹
 사단이 지배하는 죄된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길에는 유혹이 산재해 있다. 사단은 매일 홍수와 같은 유혹들을 가지고 와서 우리의 감정에 호소한다.
 육신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통해 인간이 범죄하고 실패하기 쉽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늘 감정과 감각들을 통해 유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의 삶 속에서 직면하게 되는 유혹들을 어떻게 다루며 감정이 올라올 때 그것을 이기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므로 매우 중요하다.
 사단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쟁탈하기 위해 교묘하게 유혹을 통해 역사하고 있다. 유혹을 받을 때, 모든 감각 기관이 받지만, 유혹에 가장 민감한 부분은 시각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눈은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 6:22)라고 하셨다. 시각을 통하여 유혹을 받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는 일은, 유혹을 대항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죄에 대해서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악한 생각들의 많은 것들이 우리가 보지 않았어야 할 것을 보았기 때문에 생성되며, 이렇게 생성된 악한 생각들로부터 공공연한 죄의 행위가 발전한다. 그러므로 무엇을 보느냐, 또는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는 실제적인 면에서 죄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라고 하셨다. 사단은 인간의 마음과 의지를 지배하려고 고도의 감정적이고 육체적인 감각을 이용하고 있는데, 창세기에는 이것에 관한 뚜렷한 증거가 나와 있다.
 인간을 범죄하도록 만든 첫 번째 시도에서 사단은 이 방법을 전적으로 사용하였다. 하와가 선악과 나무 아래에서 뱀에게 유혹받았을 때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사단이 얼마나 강력한 감각적 매력을 가지고 하와를 유혹하였는지를 알게 된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여기에서 우리는 시각, 청각 그리고 미각을 통한 유혹의 조화를 보게 된다. 사단은 항상 감각을 통해 우리의 감정에 호소하며 유혹한다. 또한, 죄악의 행로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죄된 길을 항상 타당하며 많은 사람에게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들로 꾸며 놓는다. 그러나 옳고 그름은 외관이나 감정이나 느낌에 의해서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감정은 우리가 보고, 듣도록 자신을 허용함으로써 생성되고 발전한다. 사단은 하와로부터 자만과 헛된 생각을 이끌어 내기 위해 과장된 말을 하였다. 그녀가 보고 들은 것은 그녀가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에 영향을 미쳤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면서 하와의 자제력은 무너졌고, 재빠른 불순종이 뒤따르게 되었다. 그 열매의 맛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에 하와는 자신이 그것을 먹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믿을 수 없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유혹은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유혹을 받았을 때, 그 유혹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 유혹을 받아들여 마음에 품고 그 유혹이 죄로 잉태되도록 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 죄를 짓느냐 짓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된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2) 감정이 일어나 유혹을 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의 마음속에는 쉴 새 없이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들이 일어난다.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 것은 곧 죄를 짓게 되는 지름길이 되고 있다. 죄를 짓는 일은 감정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 죄들은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감정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것들인 경우가 많다.  우리가 범하는 죄들은 우리의 정욕과 뒤엉켜 우리를 너무 꼭 붙잡고 있기 때문에 마치 쇠사슬로 붙들어 매인 양 그것을 끊고 나오는 것이 불가능하게 생각된다.
 또, 우리는 너무나 자주 쓰러지고 패배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깊은 실망감으로 그리스도인 생활을 포기하고 싶은 지경에 이르게 될 때도 있다. 그러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주신 복음은 모든 죄를 넉넉히 이길 수 있게 하는 능력의 복음이므로 복음을 이해하고 말씀대로 살아갈 때 그 모든 것들을 이길 수 있다. 유혹이 오고 감정이 일어날 때, 그것을 이기고 그 대신 말씀을 따라가는 실제적인 경험에 대하여 단계적으로 한번 생각하여 보자.

감정 대신 말씀을 붙잡는 길
   
  
1. 첫째 계단: 영적인 눈을 떠서 인식하라
 먼저, 좋지 않은 감정이 일어나고 그에 대하여 반응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을 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유혹을 받는 자체, 감정이 일어나는 자체는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 유명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새가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것은 막을 수 없어도, 머리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라고 했다.
 유혹을 받는 상태는 마치 새가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새가 둥지를 틀지 못하게 해야 한다. 곧, 그 유혹이 죄로 발전하도록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 유혹을 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여러 가지 유혹들을 받는다. 타락하여 연약해진 육체를 가졌으므로 바람직하지 못한 감정에 빠지려는 유혹에 당면할 때가 수도 없이 많다. 고난이 올 때, 시련과 시험이 올 때, 핍박을 받을 때, 모든 것을 잃는 경험을 할 때, 우리는 낙심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리고 그로 인해 환경이나 남을 탓하고 싶은 욕망에 빠진다.
 또한, 애매하게 모함을 받거나 업신여김을 당할 때,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들을 때나 욕설과 비방을 받을 때, 똑같이 보복해 주고 싶은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일어나는 감정으로 인해, 부정적이고 분노하고 어둡고 낙담하는 감정에 빠져서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신뢰하지도 않게 되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자, 우리가 어떤 것에 자극되어 유혹을 느꼈다고 하자. 예를 들어 나쁜 비방의 말이나 이유없이 던지는 거친 말을 듣고 화를 내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던지, 혹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게 되어 탐욕이 올라오게 되었다든지, 그 유혹을 받는 단계가 공식적인 단계의 절차를 거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유혹을 받았다고 하자. 이때는 매우 중요한 시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눈을 뜨고 늘 깨어 있어서, 유혹이 올 때, 감정이 일어날 때 그리고 사단의 공격이 올 때, 이것을 알아차리고 인식할 수 있는 영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두 번째 계단으로 갈 수 있다.
 영적인 혼수상태에서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은 유혹이 와도 그것이 유혹인지 아닌지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런 사람은 감정이 이끄는 대로 마구 행동하게 된다. 그러므로 유혹이 올 때, 그 유혹을 인식하는 문제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우리에게 깨우쳐 준다.

2
. 둘째 계단: 유혹과의 싸움을 시작하고 말씀을 붙잡으라

 많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은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진리의 말씀은 이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 2:26)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만, 머리로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참된 믿음을 가지고 말씀대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유혹을 물리치고 죄를 승리하기 위하여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며 밖에서 오는 유혹과 육체에서 올라오는 감정의 유혹과 대항하여 전쟁을 벌이면서 날마다 구세주의 발자취를 뒤따라야 한다. 구원을 얻는 일에 있어서 인간이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유혹을 받을 때, 우리는 유혹과의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의 느낌과 감정을 따라 행해서는 안 된다. 유혹과 싸우라는 말은, 자신의 욕구를 부인하라는 말이다. 자신의 뜻을 부인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대신 하나님 말씀의 약속을 붙들라는 말이다.
 유혹과 싸우라는 말은 유혹을 붙잡지 말고 말씀을 붙들라는 말이다. 나의 감정, 나의 좋아하는 느낌을 부인하고 말씀을 붙잡는 것이 말씀으로 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시험과 고난이 올 때, 불평하는 정신에 빠지는 대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하나님 말씀의 약속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을 믿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최선의 길을 따라 그 일을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낙망과 낙심의 감정이 올 때 자신의 사사로운 느낌과 감정과 욕망을 제쳐 놓고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어려울 때, 핍박을 받을 때, 슬프고 의기소침하려는 감정과 싸우고, 어둡고 부정적인 느낌을 부인하고 말씀을 붙잡고 소망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말씀만으로 산다는 의미이다. 멸시를 받아 분노가 올라올 때, 자신의 상한 자존심을 내세우며 똑같이 보복하고 싶은 감정을 붙잡는 대신, 원수를 사랑하라는, 유순한 대답으로 노를 식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이 명령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말씀으로 산다는 의미이다.

3
. 셋째 계단: 선택이 중요하다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을 따라가는 대신 말씀을 붙잡고 말씀이 명령하는 대로 나아가는 길에서 필수적인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그리고 선택을 하는 일에는 반드시 우리 의지의 작용이 따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다. 우리의 매일 신앙생활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혹을 이기고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어떤 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의 생활에서 우리의 의지로 감정과 자신의 느낌을 따라가는 편을 택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편을 택하는 것, 즉 사단이 주는 충동에 따라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말씀이 시사하는 대로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것이다.

 이 일은 우리 의지의 작용과 선택에 의하여 매일 매 순간 이루어지는 일들이다. 우리는 자아와의 싸움에서 우리의 의지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또 우리의 의지를 사용하여 매일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의지는 사람의 본성 가운데서 지배하는 힘이다. 만일 의지가 확고하게 성립이 되면 나머지 모든 것들은 그 지배하에 들어오게 된다.
 의지란 자신의 좋아하는 기호나 경향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이며, 결정하는 능력이고, 사람 속에 작용하여 말씀에 순종하게도 하고 불순종하게도 만드는 능력이다. 이 의지는 아무도 강제할 수 없다. 우리가 감정의 편이나 하나님 말씀의 편이나 둘 중 하나를 따라가기로 선택하여 결정하면, 그때 그리스도든 사단이든 그 사람을 지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말씀으로만 살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의지를 그리스도 편에 고정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 말씀의 편을 따라가기로 우리의 의지로 선택하는 일이다. 연약성을 가진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여러 가지 휘몰아쳐 오는 감정에 휩싸이기 쉽고,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욕망과 느낌과 충동으로 휩쓸려 가기가 매우 쉽다.

 우리는 스스로 마음을 고칠 수 없고, 또 옳은 일을 행할 능력도 없다. 그러나 말씀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떠한 감정과 느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의 약속을 상기하고 믿고 주장하며 그편을 선택하는 것, 곧 우리의 의지로 하나님의 편을 선택하고 그 말씀을 따라가는 것을 가리킨다.
 감정은 하루에도 수십 번 변할 수 있고, 올라왔다가는 사라져 버리는 허상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면서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택력을 주셨으므로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다. 우리가 비록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고, 우리의 감정과 생각과 욕망과 애정을 지배할 수 없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할 수는 있고, 우리의 의지를 그분께 드릴 수는 있다. 여기에 유혹을 이기고 말씀으로만 사는 비결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으로만 사는 비결은 감정적으로 그렇게 느껴지지 않고, 또 그렇게 하고 싶지 않더라도 자신의 뜻보다는 하나님 말씀의 편을 택하는 것이다.

4. 넷째 계단: 도움을 구하라
 
런데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비록 그 단계와 법칙들을 잘 안다 해도, 우리는 연약한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스스로 우리의 생각과 동기와 애정을 통제하거나 억제하기가 어렵고, 그렇게 할 힘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낙심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의지의 힘과 또한 우리의 의지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그럴 때, 우리의 의지를 그리스도께 굴복시켜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연합하게 된다.

 유혹이 밀려오고 감정이 일어날 때 우리는 즉시 말씀의 편을 택하고 예수님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여! 지금 감정이 밀려오고 저의 마음속에 풍파가 일어납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주님! 나의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망과 내 뜻대로 하고 싶은 고집을 주님께 지금 바칩니다. 주님의 뜻대로만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내게 주십시오!
 이렇게 우리가 말씀만으로 살고자 하늘의 도우심을 구할 때, 도움을 요청하는 응급 기도를 드릴 때, 하늘에서 초자연적인 능력이 임하여 우리로 시험과 유혹과 감정을 이기게 한다. 즉, 우리의 의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에 복종시킬 때, 그분은 즉시 우리의 의지를 취하여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뜻으로 대치시키시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도록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고 힘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본성은 성령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감정과 느낌과 생각조차도 그분께 복종하게 되어 유혹과 죄를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감정대로 살지 않고 말씀대로만 산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다.

 죄를 승리하는 생애, 감정과 느낌과 정욕에 승리하는 생애는 연약하고 요동하는 인간의 의지를 전능하고 확고한 하나님의 의지에 결합시키는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것이다. 덧붙여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편을 택하는 우리의 선택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하며, 도움을 구하는 기도는 한 번뿐만 아니라 일어난 감정이 사라질 때까지, 유혹을 이길 수 있을 때까지 쉬지 않고 여러 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일이 매일 매 순간 유지될 때, 우리의 생애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대로 모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신앙: 4부 - 말씀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약속

1) 말씀을 붙잡는 것이란?
 죄의 유혹과 감정들을 이기고 대신 말씀을 붙잡고 승리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펴야 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말씀 속에 승리를 위한 모든 능력을 약속해 놓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성경을 상고하고 말씀을 암송하여 유혹이 오고 감정이 올라올 때에 그 말씀을 기억하고 그대로 따르므로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바로 그분의 말씀 가운데 있다. 예수께서 질병을 고치시고 마귀를 내어쫓으신 것은 말씀으로 하신 것이었으며, 또 말씀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셨다. 온 성경은 그리스도를 나타낸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들의 믿음을 말씀 위에 고정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처럼 그들도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기를 원하신다(마 4:4).

 우리 육체의 생명이 음식에 의하여 유지되는 것처럼 영적 생명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지된다. 사람마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생명을 얻어야 한다. 영양분을 위하여 스스로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도 그 말씀을 우리 각자를 위하여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단지 다른 사람의 지식을 중개로 하여 말씀을 얻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깊은 주의를 가지고 성경을 연구해야 하고, 한 구절씩을 취할 뿐 아니라 문맥 속에 포함되어 있는 사상을 확인하는 일에 정신을 집중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그 사상이 우리의 것이 되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알게 될 때까지 그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진리의 원칙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소화시킬 때에 그 원칙은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되고 생명의 원동력이 된다.

 심령에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은 사상을 형성하고 품성을 발달시킨다. 이 말씀은 우리의 본성적이며 땅에 속한 성정을 멸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말씀을 붙들고 말씀으로만 살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심령에 임하신다.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말씀을 붙드는 사람 안에서 재창조되고 그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을 먹는다는 것이다.

2) 말씀에 나타난 약속들

 여러 가지 다른 환경이나 난처한 상황을 만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약속을 마음에 새기며 주님의 뜻대로 전진해야 한다. 여러 가지 감정에 휩싸이게 될 때, 또 유혹과 부정적인 감정으로 마음이 흔들릴 때, 육신의 감정이 자신의 원하는 바를 관철하기 위해 치밀어 올라올 때, 분노와 격정이 마음을 휘몰아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들어 있는 약속들을 헤아리며, 또 그 말씀들을 암송하며 이겨내야 할 것이다.다음의 성경 절들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은혜로운 성경 구절들이다. 기억해 놓도록 하자.

시련과 고난을 당할 때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2~3)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히 12:5~10)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

낙심이 들어올 때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 27:14)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렘 29:11)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시 12:2~3)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 3:21~23).

슬픔과 외로움이 밀려올 때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4~15)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눌릴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시 68:19)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 5:7)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 6:25~27)

신앙: 5부 - 유혹과 싸웠던 사람 요셉과의 가상 인터뷰

 생애의 빛 편집인 : 먼저 요셉님의 경험을 독자들과 이렇게 나누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성경 역사에서 당신은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께 충성한 믿음의 조상으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데요. 당신이 이루신 승리의 경험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먼저, 형제들에 의해 팔려 갈 때에 일어났던 감정의 변화와 승리의 경험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요셉  : 네, 마치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이 나의 일생은 누구보다도 격렬한 시련과 고난 그리고 영욕으로 점철된 삶이었습니다. 형제들로부터 그렇게 철저하게 미움을 받은 사람이 나 말고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형제들의 증오와 배반으로 그렇게 처참하게 노예로 타국에 팔려 간 사람이 나 말고 또 있겠습니까?
 이집트로 팔려 가던 그날의 비극적인 경험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약대에 실려 상인들을 따라 점점 남쪽으로 갈 때, 멀리 아버지의 장막 주위에 있는 산들이 보였습니다. 멀어져 가는 고향의 산들을 바라보며 나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싸여 울었습니다.나에게 사나운 눈초리를 던지며 나의 애원을 무시하던 성난 형제들의 모습, 나를 상인에게 팔아넘기던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몸부림치며 애걸할 때 나를 향해 쏘는 듯이 뱉어 놓던 모욕적인 말들이 귀에 쟁쟁하게 울리는 듯 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나에게 일어났고, 그것이 나의 형제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일들이기 때문에 더 기가 막히고 슬펐습니다.

원망과 분노의 감정, 기막힌 운명을 한탄하고 싶은 감정들이 몰려왔고, 자포자기하는 부정적인 마음과 하나님께 불평하고 싶은 감정이 마음속에서 막 치밀어 오르던 그때, 흔들리는 낙타 등 위에서 나는 나의 아버지 야곱의 하나님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아버지 야곱이 방황하던 때의 이야기, 곧 집으로부터 도망해 나와서 쓸쓸한 들판에서 잠자던 밤에 꿈속에서 계시해 주셨던 여호와의 사다리와 아버지 야곱을 버리지 않고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해 내었습니다. 위급하고 필요할 때 항상 아버지 야곱을 도우셨던 하나님을 생각하자 갑자기 마음에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한테서 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자 마음에 용기가 솟아오르게 되었습니다.

아!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 야곱과 함께하셨던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약한 마음으로 자꾸 슬퍼하며 울지 말고 아버지에게서 배운 대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굳센 믿음으로 살아가자! 외롭고 어두운 감정을 날려 보내고,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배웠던 모든 귀한 교훈들을 생각하고 붙잡으며, 나의 조상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이 이제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낯선 상인을 따라 흔들거리며 가는 그 머나먼 여행길 동안 나는 내내 마음속으로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을 믿음으로 붙잡았습니다. 그러자, 외로운 몸으로 가는 낯선 땅에서 펼쳐질 앞으로의 운명에 대해서 슬퍼하고 두려워하던 마음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 그렇게 가혹하게 보이던 하나님의 섭리는, 다른 방법으로는 여러 해를 걸쳐서도 배울 수 없었을 교훈을 나로 하여금 몇 시간 안에 배우게 했습니다. 낙타를 타고 가면서 나는 난생 처음 여호와 하나님께 나 자신을 완전히 헌신했고, 이스라엘의 수호자 되신 하나님께서 내가 가는 땅에서도 나와 함께 계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또한,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하늘 왕의 백성답게 행동하여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리라는 굳센 결심을 하였습니다. 더 이상 무섭거나 슬프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내 일생에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그 일은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생긴 일이니,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내 운명의 시련을 인내로 감당하며 매일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자 결심하였습니다.
 그 하루의 경험은 내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 무서운 사건이 그날 나를 응석 부리는 아이에서 용감한 어른으로 변화시켰고, 육신에서 올라오던 낙망과 낙심과 슬픔과 원망의 감정을 넘어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했던 것입니다.

생애의 빛 편집인  :
네, 감사합니다. 애굽에서의 경험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애굽 생활도 쉽지 않았겠고, 그곳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시험과 유혹에 당면하셨을 텐데, 그 시험에 승리한 경험에 대해 좀 나누어 주시겠습니까?

요셉  : 네, 내가 도착하여 팔려간 곳은 애굽 왕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이었습니다. 그 집에서 1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온갖 일을 다하며 주인을 섬겼습니다. 그곳의 환경은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 성행하고 이방의 음란한 풍습들이 자리 잡은 환경이었습니다.처음 보는 것들과 접하는 일들은 낯설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는데, 매일의 생활은 주위에 널려 있는 죄악적인 일들과 유혹과 싸우는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당시 우상 숭배와 거짓 신의 숭배는 애굽 국가에서 최고의 예배 행위로 간주되고 있었으며, 왕족들로부터 궁정의 모든 사치와 함께 최고의 문명국이었던 애굽 나라의 부와 문화의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화려하고 휘황찬란한 주위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숱한 죄악들로 둘러싸였지만, 나는 마치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생애 하였습니다. 내 생각은 금지된 문제들의 주변에서 머뭇거리지 않았고, 애굽인들의 환심을 사려는 욕망으로 나의 원칙을 감추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늘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말씀과 명령대로 살기로 매일 결심하였으며, 나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단 한 순간이라도 감정에 쏠렸더라면 나는 여러 가지 유혹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조상들의 종교를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고 내가 여호와를 경배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애쓰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나의 결심과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지켜나갔습니다.

그런 나에 대한 주인 보디발의 신임은 날이 갈수록 두터워져 마침내 그는 나를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주관하는 가정 총무로 삼았습니다. 나의 노력과 보살핌과 정력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셔서 그 주인집의 모든 일이 점점 잘 되고 집안이 번영하게 되자, 우상을 숭배하는 주인까지도 하나님의 축복이 자기 집 번영의 비결이라고 인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성실함을 높이 산 시위대장은 나를 노예보다는 오히려 아들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회에서 왕족들과 지위가 높은 사람들, 또 박식한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어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도 가졌습니다.그곳에서의 생활이 점점 자리가 잡혀갈 즈음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충성을 다시 한 번 검증받는 시험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어떤 시험보다 어려웠던 시험이 어느 날 이르러왔는데, 그 유혹은 나에게 참으로 많은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사심을 가지고 나에게 친절과 관심으로 대해 주던 주인 아내의 유혹과 요구는 거절하기가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이교도의 나라인 애굽에 범람하는 부패한 문화와 습관들에 오염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아왔지만, 혈기가 왕성한 젊은이로서 매우 돌발적이고 강하게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그 시험은 대항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는 모든 분위기와 음악과 환경을 유혹적인 것으로 준비해 놓아 저돌적으로 뻗쳐 오는 그 유혹을 견디기 어렵게 부추겨 놓았으며, 더구나 그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하는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라는 것을 아는 나였기 때문에 그 시험은 더 치열하게 느껴졌습니다.
 한편에는 은폐와 총애와 보상이 있고, 다른 편에는 수치와 투옥과 죽음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내 장래의 전 생애가 일순간의 결정에 달렸었습니다. 감정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과 원칙을 어길 것인가, 아니면 육신의 끓어오르는 감정과 유혹을 부인하고 여전히 하나님께 충실할 것인가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 나의 마음은 마치 저울에 달린 추가 떨리듯이 떨렸습니다.

그러나 나는 늘 해 오던 삶의 원칙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기로 결정했습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였습니다. 나는 지상에 있는 주인에 대한 신의를 배반하고 싶지 않았고,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하늘에 계신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도 참되게 행하기를 원하였습니다. 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천사들을 보는 듯이 행하고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보시고, 우리가 하는 말을 들으시며, 우리의 언행에 대한 세세한 기록을 보존하고 계시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 모든 기록을 장래에 다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산다면, 우리는 유혹에 굴복하여 범죄하기를 두려워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동 중 어느 하나도 보지 못하시는 것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모든 동기가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펼쳐져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성실함 때문에 고생을 당했고, 유혹하던 그 여자가 더러운 죄목을 씌워 고소함으로 인해 감옥에 갇히게 되는 일을 당하였지만, 오히려 유혹에 저항함으로 하나님께 충성하였다는 기쁨으로 마음이 편했습니다. 만일 주인 보디발이 나에 대해 그의 아내가 한 고소를 그대로 믿었다면, 아마 나는 벌써 생명을 잃었을 것이지만 감옥으로 보냈다는 것은 내가 무죄하다는 하나의 증거였습니다.
 또 감옥에서 지냈던 적지 않은 세월 동안 하나님을 원망하고 내 생을 한탄하고 싶은 감정과 유혹에 직면할 때가 많았고 비탄과 불만에 빠져 나의 삶을 어두운 비관과 한숨 섞인 불평의 말과 시간으로 채우고 싶은 유혹들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말씀을 붙잡았으며,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그 모든 것들을 참고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매우 영화로운 직책과 결과들을 보상으로 주셨습니다.

 기적처럼 꿈을 통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일, 하나님의 은혜로 형제들을 용서하고 가족들을 기근에서 살리게 된 일, 그립던 아버지를 만난 일, 모두 나에게는 기쁨과 감격의 순간들이었고, 유혹과 고난과 시련을 견딘 후에 받은 하나님의 선물과 보상이었습니다. 내 인생의 모든 경험을 되돌아보면, 그 당시는 매우 힘들게 보였던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들이라는 것이 너무 확실하고, 나를 인도하시고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충만합니다.

생애의 빛 편집인  : 당신이 이루신 승리의 경험이 독자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나누신 경험들이 우리에게 좋은 모본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그분 말씀의 원칙을 붙잡고 유혹과 감정과 죄를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열심히 기도하며 노력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신앙: 6부 - 한때 낙심에 빠졌던 개혁자 엘리야와의 대담

 생애의 빛 편집인: 엘리야 선지자님! 당신은 성경에서 위대한 개혁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명령을 확실한 믿음으로 행동했던 개혁의 이야기를 좀 들려 주십시오!

 엘리야:
갈멜 산에서 이방 선지자들과 이세벨과의 대전을 익히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이 참 신이시라는 혁혁한 증거가 갈멜 산을 가득 메운 백성에게 증거된 후, 바알을 섬기던 선지자들을 모두 죽임으로 이스라엘 나라에 힘찬 영적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그날, 백성은 죄를 자복하고 그들 조상의 하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아합 왕과 백성은 이제 기근이 물러가고 비가 올 것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확연했습니다.

사실, 내가 확신 있게 아합 왕에게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라고 말했지만, 소나기가 내리려는 어떤 외적인 증거가 있거나 보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우렛소리도 들리지 않았지요. 그러나 그것은 나의 육신적인 감정을 넘어, 하나님의 성령께서 나를 감동시켜서 말하게 하신 것을 말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그날 온종일 하나님의 뜻을 확고하게 수행하였고,이제 나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행하였으므로, 하나님의 비를 풍족히 내려 주시겠다는 약속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종을 보내어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였습니다.

 종이 돌아와서  아무것도 없나이다. 라고 말할 때마다 초조해지려는 유혹을 받았으나,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었고 오히려 더 열렬히 탄원하기를 계속하였습니다. 일곱 번째 드디어 나의 종은 돌아와서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 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것으로 넉넉하였습니다. 나는 급히 종을 아합에게 보내어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라는 기별을 전하였습니다.
 인간의 감정대로 하자면, 두려움과 의심과 걱정에 둘러싸이게 되는 일들이었지만, 나는 감정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약속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믿음은 하나님께 응답을 받았던 것입니다. 눈을 뜰 수 없이 세차게 내리는 빗속을 뚫고 왕의 마차 앞을 달려서 왕을 성문으로 인도하던 그날의 기쁨은 결코 잊을 수 없이 감격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생애의 빛 편집인:
좋은 경험의 말씀 감사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 말씀의 약속을 굳게 붙잡고 승리할 때까지 그 약속을 놓지 않는 신앙이 정말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 보면 그 위대하던 개혁 뒤에 잠깐 인간의 연약한 감정에 빠졌던 때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때의 경험을 좀 나누어 주시겠습니까?

 엘리야: 아, 그때의 경험 말입니까? 아마 그 경험은 독자들에게 많은 용기를 주는 이야기가 될 것 같군요.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연약한 인간들이므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붙들어 주지 않으면 금방 실족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되는 이야기니까요.
 갈멜 산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들과 여호와께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밝혀진 사실, 그리고 아합이 바알의 선지자들을 모두 죽인 일에 대하여 들은, 회개할 줄 모르는 이세벨은 격분하였지요. 그 밤에 한 사자가 종일 여러 가지 사건을 겪고 피곤함에 지쳐 잠든 나를 깨우면서 기별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 기별은 다름이 아니고 이세벨이 이렇게 말하며 나의 생명을 찾고 있다는 기별이었습니다. 선잠에서 깨어 그 기별을 듣는 순간, 혼자 일을 수행하느라고 정신적으로 지치고 외롭고 피곤했던 나는 감정을 가다듬을 시간이 없이 급격한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날 갈멜 산에서 그처럼 대담한 용기로 혼자서 왕과 사제들과 백성 앞에서 완전하게 승리를 거둔 나였지만, 그리고 그처럼 현저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스러운 돌보심의 증거로 축복을 받았던 나였지만, 역시 나는 연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놀라 당황한 나머지 선잠에서 깨어 서둘러 도망을 갔습니다.

하늘에서는 비가 쏟아지고 사방은 어두웠습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줄행랑을 치는 나는, 삼 년 전에 하나님께서 이세벨의 증오와 아합 왕의 수색에서 피할 장소를 친히 지시하여 주시고 보호하여 주셨던 사실도 잊은 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목숨을 부지하려고 황급히 도망을 쳤습니다.사실, 나는 내가 맡은 의무의 자리에서 도망하지 말아야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옹호하도록 사명을 맡겨 주신 하나님께 나를 보호해 주시기를 호소하면서 이세벨의 위협을 직면하여야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다음에 어떻게 역사하셔서 그 일을 마치실지 기다리지 않고 성급한 마음이 앞섰던 것입니다. 사실 갈멜 산 꼭대기에서 온종일 음식도 먹지 못하고 신경을 많이 쓰고 마지막 신체적인 힘을 다하여 아합 왕의 마차를 인도한 후, 나는 육체적으로 많이 지쳐 있고 과로했었습니다. 그래서 사사로운 감정에 빠져서 나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항상 높은 신앙과 영광스러운 성공에 흔히 뒤따라오는 그런 반작용이 나에게도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나는 갈멜 산 위에서 시작된 개혁이 중단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로 의기소침하여졌고, 이세벨이 아직도 혈기가 왕성하여 회개하지 않고 권세를 휘두르는 것을 보고 실망하였던 것입니다.그것은 정말 인간적인 감정이었지요.
  마음이 조용하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감을 받고 있을 때에는 혹독한 신앙의 시련을 견딜 수 있었지만, 피곤에 지치고 지나친 염려로 소진하고 번거로워진 마음으로 있을 때, 귀에 들리는 이세벨의 위협과 이 악한 여인의 음모를 통해 나타나는 사단의 계속적인 영향력으로 인해 실망한 나머지 나는그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데 실패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계속 도망하여 마침내 아무도 없는 쓸쓸한 광야에 오게 되었고, 녹초가 되어서 로뎀나무 아래 쉬려고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늘을 향하여 죽기를 간구하였습니다.나는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쓸쓸한 도망자가 되어 무서운 절망으로 말미암아 정신이 꺾인 채, 나는 완전히 기진맥진하여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생애의 빛 편집인: 낙심의 감정이 몰려오고 인간적인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에 실패하기 쉬운 때에, 어떻게 하면 그것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지, 그리고 절망 가운데 느낀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엘리야 선지자님의 경험을 통하여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엘리야: 네. 모든 사람의 경험 가운데는 통렬한 실망과 철저한 낙담의 때와 슬픈 운명에 처하여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를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운 날들, 고통이 마음을 눌러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은 것처럼 느껴지는 날들이 이르러 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잃어버리고, 의심의 노예가 되고, 불신의 속박에 얽매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때에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럴 때 느껴지는 감정을 뛰어넘어 우리를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그리고 말씀에 나타난 약속들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이런 감정과 환경과 분위기를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처럼 불안한 예감이나 심한 절망적인 감정에 빠지고 싶은 시험을 당해 본 일이 있으십니까? 가장 암담한 날, 형세가 가장 험악한 것처럼 보일 때에도 무서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내가 경험해 보고 겪어 본 하나님은 정말 좋으시고 신뢰할 만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시련의 때에 버리셨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나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느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불을 보내어 갈멜 산 꼭대기를 비추던 때와 똑같이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잠자고 있던 나에게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고 나를 깨우는 상냥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순간 나는 원수가 나를 발견하지나 않았나 하는 두려움으로 깜짝 놀라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자, 나를 굽어보는 동정 어린 얼굴은 원수의 얼굴이 아니라 천사의 얼굴이었습니다.하나님께서는 나를 잊지 않으시고 음식을 가진 천사를 하늘로부터 보내셨던 것입니다.
 천사는  일어나서 먹으라. 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준비된 음식을 먹은 후 다시 잠에 빠졌습니다. 두 번째 천사가 와서 피로에 지친 나를 깨워 친절한 말로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였습니다.그 식물의 힘으로 나는 사십 주 사십 야 를 여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  에 이르러 그곳 한 굴속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피로에 지치고 실망한 나를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굴 입구에서 만나시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물으셨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나는 너를 그릿 시내로 보냈고 그 후에는 사렙다 과부에게 보냈다. 나는 네가 이스라엘로 돌아가 갈멜 산에서 우상 숭배자의 사제들 앞에 서도록 명하였다. 나는 너를 능력으로 띠 띄워 왕의 마차를 이스라엘 성문으로 인도하게 하였다. 그런데 누가 너를 이처럼 급히 광야로 도망하게 하였느냐?너는 무슨 사명을 띠고 여기에 와 있느냐?  비탄에 빠져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나는 입에서 불평 아닌 불평을 발했습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 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왕상 19:10)  그러자 천사는 나를 굴 밖으로 불러내어 산 위에 올라가 여호와 앞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명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 19:11~12).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조용한 가운데  세미한 소리 가운데 계셨습니다. 여호와의 계시를 기다리는 동안 폭풍이 휘몰아치고 번갯불이 번쩍이고 삼키는 불이 휩쓸고 지나갔으나 그 모든 것 가운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침착한 가운데, 인간의 소란스럽고 고조된 감정이 가라앉은 후에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리는 법입니다. 이제 나의 급한 성미는 가라앉고, 정신은 부드러워졌습니다.
 나는 비로소 하나님을 조용히 신뢰하고 굳게 의지하면 이 어려운 때에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침착하게 그리고 더 자세하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또한, 나는 이스라엘 땅에서 나 혼자만이 참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고 생각하였지요. 그러나 모든 사람의 마음을 환히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오랜 배도의 세월을 통하여 하나님께 충성스럽게 남아 있는 7천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낙담과 표면상으로 패배한 것처럼 보이는 날 동안에 겪은 나의 경험으로부터 독자 여러분이 배울 귀중한 교훈이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환경 아래서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압박을 받아 실망하고 낙담하게 되거나, 또 아무런 삶의 보람이 없는 것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는 나를 기억하십시오! 성경에 위대한 개혁자와 선지자로 기록된 나였지만, 격노한 여인의 분노 앞에서 두려워하여 잠깐 하나님의 능력을 잊어버리고 도망했던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피로하고 지치고 쓰라린 실망으로 죽기를 구하였던 나는, 바로 희망이 사라지고 사업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던 그때에 가장 귀중한 교훈을 배웠다는 것을.
 나는 가장 쇠약한 때에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와 가능성을 배웠고, 인간적인 감정 대신 하나님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철저하게 배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가장 어려울 때, 나의 곁에 가장 가까이 계셔 주셨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경험을 지나 다시 믿음과 영적인 힘을 회복하게 하시고, 마침내 더 영광스러운 보상으로 나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이신지요! 늘 그 하나님을 기억하고 승리하십시오! 감사합니다.

마치면서
 하나님의 남은 무리인 마지막 성도로서 우리는 승리하는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곧, 육신에서 올라오는 감정과 느낌들을 배제하며,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고, 그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주님의 뜻대로 나아가는 연습을 철저하게 하여 죄를 승리하는 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사단이 맹렬한 시험을 가지고 영혼을 공격할 때는 그 영혼이 가장 약할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의지력이 약해지고 믿음이 결핍될 때에 오랫동안 의를 위하여 담대히 섰던 사람들이 유혹에 굴복했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합 앞에 담대히 섰으며, 갈멜 산에서 대결이 있던 날 종일 온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참 하나님의 유일한 증인으로 섰던 엘리야도 한순간의 피로로 인한 죽음의 공포가 하나님께 대한 그의 신앙을 정복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오늘날에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의심에 싸이고 고통스러운 환경에 처하거나 인간적인 감정으로 가장 약해 있을 때에 사단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심을 흔들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우리들의 과오를 들추어 내고 나열하여 하나님을 불신하고 그분의 사랑을 의심하도록 유혹하고, 우리의 영혼을 낙심하게 하여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럴 때에 영적인 식별력을 활용하며, 감정이나 느낌에 휩쓸리지 않고 굳센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붙들고 전진해야 합니다.

 독자들이시여! 유혹이 올 때에 하나님께 매달리십시오! 그리고 계속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감정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그분께서 설계하신 섭리의 길을 믿음으로 가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죄와 싸우는 그분의 모든 자녀를 붙드실 만큼 강하십니다. 인간 자신의 힘은 무력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음으로 모든 감정과 죄는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께서 위하여 죽으신 자들을 절대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선악 간에 진행되는 영적인 전투의 결과는 우리가 감정의 편을 따라가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느냐 하는 것에 따라 좌우되며, 그 전투의 결과에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에 승리하는 독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질문과 답변: 구원의 위조지폐를 아시나요?

 많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전진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데, 그 이유는 구원에 관한 두 가지 중요한 면들이 올바르고 균형 있게 활용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과 행함은 서로가 부딪치거나 투쟁하는 것이 아니며, 서로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협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항상 순종이라는 선한 행위를 생산해 낸다. 성경은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 2:26)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성경에서, 우리는 세 가지 믿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사단이 가지고 있는 믿음인데, 사도 야고보는 그러한 믿음은 행함이 전혀 없는 믿음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약 2:19~20)야고보가 지적인 동의나 정신적인 동의에 불과한 믿음을 귀신의 믿음으로 묘사하였던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두 번째 종류의 믿음은 행함이 있지만, 잘못된 동기와 목적을 근거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신호등이 있는 네거리에서 정지 신호를 보고 있는 운전사의 예를 통하여 두 번째 부류의 믿음을 설명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자동차를 정지시켰다. 그가 왜 자동차를 정지시켰는가? 다른 편에서 달려오고 있는 자동차와 충돌하여 죽는 것이 무서워서 정지하였는가? 아니면, 교통 경찰관이 자신에게 법규 위반 티켓을 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정지하였는가?이러한 종류의 믿음은 하나님께 가납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들은 두려움에 근거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움에 근거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들의 신앙은 마치 불을 피해 도망가는 것과 같다. 그들은 자신들이 걷고 있는 길의 끝에 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그 불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선한 사람들이 하는 선한 행위를 하기 위해서 애를 쓴다.그러나 이러한 부류의 믿음은 율법주의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세 번째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자. 세 번째 믿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일한 믿음인데, 그 믿음은 갈라디아서 5장 6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하는 모든 순종의 행위가 사랑에 그 근거와 동기를 두고 이루어질 때에 그것은 참된 믿음이 되는 것이다.

보다 상세한 설명을 원하시는 분들은 생애의 빛으로 연락해 주십시오.
성경으로 돌아가는 길잡이 제15호를 무료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미국 1-320-500-1004 한국 070-7569-2300 캐나다 416-431-37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