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편지: 영혼의 밤을 지나면서 깨닫는 비밀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전 4:13)
 
영혼의 밤을 지나는 당신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어느 날 마음속에 갑자기 태양이 져 버리고 낯선 손님처럼 찾아온 캄캄한 영혼의 밤을 맞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해가 져 버린 하늘에는 노을이 있습니다. 조금 더 어두워지면 하늘에 별도 뜨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내일이면 다시 태양이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만물의 찌끼가 되어

 붉은 저녁 해가 호수 속으로 풍덩 뛰어들듯이 사라져 버리면 남은 잔영으로 눈이 부셔 한참 아무것도 보이지 않듯이, 무너진 그 꿈의 환영이 지금도 당신의 마음에 고스란히 남아 몇 날을 드러누워 있어도 잊히지 않는 고통스러운 것이 되고 있음을 잘 압니다. 어쩌면 그 일은 당신에게 달콤한 잠을 깨우는 자명종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장밋빛 환상으로 지어진 당신의 유리성은 벌써 깨어졌어야 했습니다. 진실을 보지 못하게 만든 고운 색채가 입혀진 색 유리창도&.  감사한 것은, 지금 있는 그대로를 보아도 감당할 수 있으리만큼 당신이 성숙해졌다는 것과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자신을 수용할 만큼 당신이 겸손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당신의 영혼이 깨어나도록 섭리할 만큼 하늘은 당신에게 깊은 관심과 사랑이 있으며, 그리고 그 꿈이 깨어지는 경험이 없이는 당신이 만물의 찌끼가 되는 일이 도저히 불가능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인 만물의 찌끼가 되는 일이&.

 당신은 항상 너무 바빠 당신의 영혼을 깨우는 그 목소리를 등 뒤로 하였지요! 아마도 당신은 너무 두려워 영혼의 깨어남을 자꾸 뒤로 미루었는지 모릅니다. 깨어나고 나서 치러야 할 대가들과 버린 다음에 찾아올 결과들을 아주 잘 아는 당신이었기에&.  아니, 어쩌면 진실을 들여다보기에 당신은 너무나 교만하고 안일했는지 모릅니다. 영혼의 깜깜한 절망의 밤을 지나면서야, 당신의 영혼을 싸매어 치료해 줄 수 있는 약은 세상 어디서도 구할 수 없다는 아픔을 겪으면서야, 비로소 당신은 깨어진 유리 틈으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내어다 봅니다. 찌끼보다 더 형편없이 낮게 내려앉아&.  이제서야 조용해진 당신의 마음에 하나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여 주십니다. 얘야! 이젠 내 음성을 들을 만큼 여유로워 보이는구나. 나의 이런 마음을 좀 알아주길 바란다."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는"(사 42:3) & 그리고 "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며"(렘 29:11),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는 것이 나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애 3:33)&.

비밀 하나
 마음에 태양이 지고, 모든 꿈이 무너져 사라진 캄캄한 어둠의 밤을 맞이해 본 사람들은 압니다.  새가 둥지에 깃들듯 절망이 찾아와 생애를 온통 점령해 버리고, 약초처럼 씁쓸한 삶의 맛이 입안을 맴도는 그 시련의 밤이 얼마나 깊고 긴지를&. 그리고 인생을 사노라면 누구에게나 그런 밤이 몇 번이고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편안하게 만물의 찌끼가 되는 법을 터득하게 되기까지는 몇 번이고&.  영혼의 밤을 지내는 당신에게 비밀을 하나 말해 주고 싶습니다. 해가 져 버렸어도 마음을 진짜 밝혀 줄 또 하나의 태양을 가질 수 있는 비밀을.  일찍이 마음속에 이것을 깨달은 바울은 그의 글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엡 3:4) 그리고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라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비밀의 경륜을 터득한 그는,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엡 3:9)나게 하려고 우리 생애에 일어나는 모든 일, 여러 가지 환난과 시험과 시련과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쁘게 당하라고 권면하면서,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담대하게 견디며 지날 수 있는 비결은 마음속에 비밀 되시며 영광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왜 여러 가지 힘들고 절망스러운 일들이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지를 구차하게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왜 온 열정을 다해 쫓던 우리의 꿈이 산산조각이 나야 했는지를 변명해 주지도 않습니다. 다만,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간직하라고만 말합니다. 그러면 아무리 캄캄한 밤을 맞아도 마음속에 또 다른 빛나는 태양이 떠오를 것이라고&.  그리고 다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 마음을 충만하게 채우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비밀 둘
 그는 비밀을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비밀이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생애를 살았습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비결을 말해 주셨습니다.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요 15:5)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것이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영혼의 밤은 어둡습니다. 그 깜깜한 영혼의 밤을 함께 맞아 줄 사람은 세상에 어느 누구도 없습니다. 그것은 혼자 겪어야 하고, 혼자 치러야 하는 인생의 시험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절망의 순간을 지내 본 사람만이 가장 겸허하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만물의 찌끼같이 형편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영혼의 밤을 지내 본 사람만이 절망의 어둠을 밝혀 주는 또 하나의 태양이 마음에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 캄캄함의 깊이를 넘나든 사람만이 고통 중에서도 어떻게 즐거워할 수 있는지를 배우며, 그 시리고 외로운 고독의 절정을 겪어 본 사람만이 그 속에서 터득한 비밀의 위대함으로 삶의 모든 역경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입에서 푸념을 거두십시오!  그리고 모든 꿈이 허물어진 영혼의 밤으로 말미암아 그 비밀을 터득할 수 있었음을 감사하십시오!  세상의 밤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절망의 밤을 수없이 지내고, 마음속의 비밀, 영혼의 태양이 다시 떠오르는 경험을 한 당신에게 그 밤은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잠깐, 그리고 한 번 더 기억하십시오. 만물의 찌끼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맡기셔도 안전할 만큼 당신이 겸손한 일꾼이 되었다는 증거인 것을&.

생애의 빛에서

세상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정말 예수님을 아는 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께서 정말로 자기의 생활 속에 들어오셔서 실제적인 하나님이 되시게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자기 생애의 주인, 자기 삶을 주관하시는 왕으로 섬기고 순종하며 따르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여 유익을 얻고 하늘 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바치고 헌신해야 할 분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께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성경 말씀은 예수님을 여러모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반석으로, 생명수로, 만나로, 목자로, 심지어는 힘센 천사로 표현된 적도 있습니다.앙겔로스(기별자 - 천사), 즉 하나님 아버지의 기별을 전해 주시는 분으로서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을 여러 가지 모습으로 소개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며 각 사람이 처한 형편들과 입장들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실제적인 하나님으로 소개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이 처한 형편이 어떠한 형편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떠한 필요를 느끼십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시고 거기에 알맞은 분으로 다가오십니다.  예수님은 만주의 주이시고 만왕의 왕이시며 각 개인을 아시고 찾아오시는 지극히 개인적인 구세주이십니다.  다윗은 예수님을 목자라고 불렀습니다. 왕도 아니고 장군도 아닌 목자라고&.  그는 자기의 하나님이, 양의 필요를 알고 양을 위하여 자기 모든 것을 바쳐 일하는 목자가 되어 주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여러분 개인에게 어떠한 하나님으로 다가오시기를 원하십니까?  이번 호에서는 예수님을 상징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표현들을 통하여 개인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설명하려고 애썼습니다.  이 은혜로운 말씀들을 읽으실 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가정과 영성: 유대교회는 왜 메시아를 거절하였는가?

첫 번째 질문 : 왜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거절하였을까?
 이 질문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자주 던져지는 질문이다.  그럼에도, 4천 년 동안 성경을 전수해 온 유대교회가 구세주이신 메시아를 왜 거절하였는지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또한, 유대인 석학들의 집합체인 산헤드린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던 이유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극히 드물다. 

구약 성경 속에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가득 차 있고, 세상에 오실 메시아를 상징하는 각종 표상이 너무도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지만, 유대교회는 메시아를 영접하는 일에 실패했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만일 유대교회가 예수를 올바로 이해했더라면, 그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메시아의 고귀한 생명은 유대교회 지도자들의 진리에 대한 무지와 편견 때문에 희생되었던 것이다.  아브라함과 모세를 조상으로 가진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예수를 거절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은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해결할 수 없는 난제로 남아 있다.

두 번째 질문: 구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와 신약 성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 사이에는 왜 400년이라는 긴 시간적 공백이 있는가?

 이 질문도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위에서 언급한 첫 번째 질문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4백 년 동안 유대교회가 깊은 어둠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구약의 각 시대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유대교회를 깨우시고 성경을 기록하게 섭리하셨는데,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는 4백 년의 기간 동안 유대교회는 깊은 암흑 속에 빠지게 되었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그들이 4천 년 동안 기다려 왔던 메시아를 거절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말라기 이후에 더 이상의 성경도 나올 수 없게 되었다. 
  
 유대교회를 깊은 암흑에 빠뜨린 결정적인 이유는, 헬라 문화의 교육과 사상을 유대교회의 지도자들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는 로마가 제국을 이루고 있었지만, 로마의 바탕을 이루고 있던 사상, 철학, 교육 체제는 헬라에서 그대로 넘어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럼 이제부터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는 기간인 4백 년 동안 성경이 기록될 수 없었던 배경과 유대교회가 메시아를 거절하게 된 배경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님의 뜻을 좇기를 소원하였던 유대인들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 생활 중에서 겪었던 쓰라린 경험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은 다시는 하나님의 권면하시는 말씀을 거절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스라엘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은, 그들이 참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갈 때, 그들에게 이르러 올 심각한 결과들을 두려워하였다. 에스라서에 기록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말씀은,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일을 행하는 족속들과 연혼하오리까? 그리하오면 주께서 어찌 진노하사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스 9:14)

그리스도의 초림 2세기 전에 기록된 부조들의 윤리라는 유대인들의 책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하게 된다.  "심판에 대해서 생각하라. 많은 수련생을 훈련해라. 그리고 율법을 지키라."
이스라엘 가운데서 지혜가 있던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를 좀 더 잘 이해하게 하려고, 각종 주석과 설명과 규칙을 만들었으며, 여러 가지 종교적인 도움들을 백성에게 제공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성경에 나타나 있는 요구 조건들을 백성에게 교육하는 일에서, 그들은 커다란 돌에 걸려 넘어지게 되었다.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얏두아의 영접을 받아서 이스라엘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린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리스와 이스라엘 사이에는 우호 관계가 발전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의 휘하에 있던 장군들은, 스코퍼스 산에서 그들의 대왕이 대제사장인 얏두아를 죽이는 대신에 우호적으로 대하는 것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이 마케도니아에 있을 때 보았던 계시에 대해서 그의 지휘관들에게 말해 주었다.  계시 가운데서 알렉산더 대왕은 얏두아를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성전에 들어가서 얏두아의 하나님을 경배하기를 원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스는 자신들이 유대 국가와 참된 우호 관계를 가짐으로써, 유대 나라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고자 하였다. 그들은 히브리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게 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숫자의 유대 랍비들이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갔고, 거기서 유대인의 성경을 그리스 언어로 번역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스의 학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세련된 문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모든 정보와 지식을 얻고자 하였다. 또한, 그리스는 이스라엘의 똑똑한 청년들을 알렉산드리아로 초청하여 그리스의 발전한 철학과 과학과 지식을 그들에게 교육했다.

 이스라엘의 많은 지도자는 이러한 상황이 가져오게 될 결과에 대해서 두려워하였다.  지혜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이 이방인들의 관습과 문물을 받아들인 결과로서 받았던 고통과 슬픔을 기억했다.  그들은 젊은 사람들이 그리스의 교육과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경고하였다. 그러나 적극적이면서도 총명하고 활력있는 젊은이들이 그리스의 학교에 들어가서 유대 종교의 위대한 진리를 그리스의 철학자들과 학자들에게 전파하여,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유대교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굉장히 바람직한 것이 아니냐는 논쟁이 발생하였다.  이스라엘의 나이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생각에 반대하였다. 젊은이들을 그리스로 보내어 이방의 문물을 배우도록 허용한다면, 유대 국가의 장래는 파멸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스라엘 청년들이 유대교의 표준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유대 지도자들을 설득하였다.  이스라엘의 교육과 어긋나지 않는 교육을 그리스에서 받을 수 있으며, 그리스의 교육을 받은 이스라엘의 청년들은 단지 그리스 학자들의 지혜와 지식만 받아들이면 된다고 설명하였다.  만일 이스라엘 청년들이 당대에서 가장 위대한 그리스 국가의 교육을 받게 된다면, 유대 청년들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교육적 유익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스라엘의 영향력 있는 대다수 사람들은 그리스의 설득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이 진실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호하실 것이며, 유대 학교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더 높은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제 유대 학자들은 자신들이 도달해야 할 또 하나의 목표와 동기를 갖게 되었다. 젊은이들은 지식과 영향력과 명성을 얻을 수 있게 되었으며, 더 다양한 지식을 얻을수록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점차 이스라엘 학교들은 졸업생들에게 학위를 수여하기 시작하였다.  Rav, 랍비, Tana, Gayon, Sadi, Rabbon과 같은 등급들이 생겼다. 랍비 학교의 졸업생들은 다른 의복을 입음으로써, 자신들의 등급을 표시하게 되었다.  학위를 가진 사람은 독특한 옷과 모자를 써야만 하였다. 조금씩 조금씩, 귀족적인 교육이 생성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을 산헤드린이라고 불렀다. 산헤드린이라는 말은 그리스 어이며, 히브리 이름은 Beth Din Hagodol로서 위대한 법정이라는 뜻이다.  지식과 학위가 강조되면서 영성은 쇠퇴하였다.  이스라엘의 종교 학교들이 계속해서 운영되었지만, 영성과 능력이 눈에 뜨이게 쇠퇴하였다. 해마다 철학과 문화에 대한 교육 과정이 증가함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는 줄어들었다.

 랍비 학교의 교육 과정이 지성주의에 의해서 영향을 받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사람이 높여지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낮아지게 되었다. 학식 있는 랍비들이 칭송받게 되었으며,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무시당하게 되었다.  깊은 신앙은 사라져 갔으며 형식과 예식이 증가하였다. 랍비 중심의 교육에 관한 수많은 법이 통과되었지만, 여전히 학생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라는 권면이 장려되고 있었다. 부조들의 윤리라는 책에서, 랍비들이 다음과 같이 가르쳤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5살에는 성경을 연구해야 하며, 10살에는 미스나(Mishna), 15살에는 저머라(Germara)를 공부해야 한다. 미스나는 매우 두꺼운 성경 주석 책이었으며, 저머라는 미스나를 주석하는 책이었다. 그리하여 학생들의 학년이 올라감에 따라서 지성적인 면만이 개발되었다. 학생들은 위로 올라갈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점점 덜 연구하게 되었으며, 인간의 글에 대해서 점점 더 많이 연구하게 되었다.

지성주의에 의해서 가려진 영감

 어떤 사람이 유대 회중들을 가르치는 자로 인정을 받으려면 반드시 랍비 학교의 교육 과정을 마쳐야 했다. 그러한 과정을 마치지 못한 자들은 산헤드린에 의해서 밀려나게 되었으며 대중들에게 아무런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랍비 학교를 졸업한 자들은 그들의 복장에 의해서 인지되었다. 랍비의 자격을 얻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녀로 인정받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침례 요한과 예수께서 유대 땅에 태어났을 때, 이러한 분위기가 유대 나라를 뒤덮고 있었다.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어떤 종교 저술가는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바벨론에 사로잡혀 갔던 경험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을 숭배하는 일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수백 년간 저들은 이방 대적들의 압제로 곤란을 받았는데, 그 결과로서 그들의 번영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데에 달렸다는 신념이 그들의 마음에 깊이 박히게 되었다. &  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후에는 종교적인 교훈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두게 되었다. 국내 각처에 회당을 세우고 거기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율법을 해석하였다. 그리고 학교들도 세워졌으며 예술과 과학과 아울러 의의 원칙들이 가르쳐졌다.  그러나 이런 기관들이 부패하게 되었다. & 그들은 여러 면에서 우상 숭배자들의 풍습을 다시 따르기 시작하였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에게서 떠나자, 성소 제도에 대한 교훈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성소의 제사 제도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것이었다. & 유대인들의 의식 가운데 있던 영적인 생명이 상실되었고 죽은 형식만을 좇았다. & 제사장과 랍비들은 저희의 잃어버린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저들 자신들이 만든 여러 요구 조건들을 늘렸다. 규칙들이 더욱 엄격해질수록,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더욱 적게 나타났다.  그들의 성결함을 의식의 다과로 측정하였으며, 마음은 자만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떠나가자, 신앙은 희미해졌으며 미래에 대한 희망은 사라져 갔다. 선지자들의 말씀은 그들에게 이해되지 않게 되었다.(DA, 영문, 28-29)

 침례 요한과 예수께서는 랍비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유대교회에서 인정하는 랍비 학교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은 침례 요한과 예수님에게 그들 선생으로서의 권위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침례 요한과 예수님께 기별을 주셨으며 성령의 거룩한 능력으로 채우셨다. 구약 성경이 침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음에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침례 요한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기별을 받아들이는 일에 철저하게 실패하였으며, 구세주의 기별을 받아들일 만큼 준비되어 있지 못했다.  랍비들은 이 사람이 배우지 않았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라고 빈정거렸다(요 7:15).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들은 예수에 대한 믿음보다는 유대교회에 대한 믿음이 훨씬 강했다(요 7:4,5). 왜냐하면, 성경 교리에 대한 정통성 판정이 산헤드린에 의해서 결정되었으므로 랍비 신학교에서 세운 교리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결코 인정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구세주께서 하나님 계시의 보관자인 유대교회 가운데 나타났음에도, 그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던 메시아에 대한 표상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이유는 매우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철학과 뒤섞음으로써 성경 교사들과 백성이 영성을 잃게 되었으며, 그들의 생애 속에서 살아 있는 능력을 찾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렸다. 그리스의 철학과 알렉산드리아와 아테네의 문화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힘을 빼앗아가 버렸다. 이방에서 들여온 교육의 영향력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로 하여금 구세주를 알아볼 수 없게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것들을 취하려고 오셨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거룩한 것을 이야기하셨지만, 백성은 땅에 있는 세속적인 것들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늘과 땅은 전혀 조화될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공중 봉사를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그분의 예언대로 바리새인들은 그분을 귀신들린 사마리아인이라고 고소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살해 음모는 시작되었다. 
죄 때문에 눈이 멀어졌고, 인간의 지식과 랍비들이 가르친 잘못된 교리와 전통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백성의 영적인 통찰력은 마비되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유일한 희망을 거절하였으며, 구원을 위한 유일한 통로를 스스로 막아 버렸다.  그들이 아무리 열심을 내고 정직하며 진지하다고 할지라도 자신들을 죄로부터 구원할 수는 없었다. 세상의 빛이고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그리스의 문화와 지식에 의해서 압도되어 명예와 영향력을 얻기에 급급하였다. 그들은 경건한 조상들이 물려준 옛 신앙을 고수하기를 포기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 세상에서 인정받는 교육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임무를 더욱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대교회는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진리는 오류와 뒤섞이게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메시아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절하게 되었던 것이다.  높은 지식과 학위와 명예를 사랑하는 마음 탓에 그들은 영성을 잃어버리게 되었으며,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되어서, 구세주를 직접 보았고 만졌으며 그 말씀을 들었을지라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결국, 유대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방어하기 위해서 구세주를 못 박아 죽여야만 했다. 메시아를 거절하였던 유대인들의 역사는 반복될 것인가?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과 신약 사이에 4백 년 동안 성경이 없었던 이유와 유대교회가 메시아를 거절하게 되었던 배경을 살펴보았다.  예수께서 유대교회가 가장 어두웠을 때 초림하셨던 것처럼, 이 세상 종말에도 기독교회가 가장 깊은 어둠 속에 있을 때 재림하실 것이다. 유대교회가 초림을 준비하는 일에 철저하게 실패했던 이유가 지금 이 시대에 다시 반복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소수의 사람만 메시아를 영접하고 신약 시대를 여는 주인공이 되었던 것처럼, 말세에도 기독교회는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일에 철저하게 실패함으로써 적은 숫자의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재림을 위하여 준비하게 될 것이다.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말세의 기독교회 속에 존재하는 배도와 악함을 보고 있다.

건강: 활성 산소가 생기는 두 가지 요인

1. 외부적 요인
 현재 암을 유발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활성 산소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대 과학의 많은 부분이 활성 산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동맥 경화증은 동맥의 벽에 콜레스테롤이 쌓이는 병인데 특히 콜레스테롤이 쌓이는 장소가 어디인가를 살펴보면 거기에서도 활성 산소의 문제가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동맥벽에 콜레스테롤이 쌓이려면 먼저 세포가 활성 산소에 의해 상해서 상처가 생겨야 하기 때문이다. 콜레스테롤은 바로 그 상처를 거점으로 쌓이기 시작하여 동맥 속을 흐르는 혈액의 흐름을 막게 된다.

 과거에는 계란의 노른자에 콜레스테롤이 많아서 동맥 경화 환자들에게 노른자를 먹지 말라고 말했지만, 과학이 발전하면서 노른자를 많이 먹는다고 해서 모두 동맥 경화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동맥 경화를 일으키는 음식은 콜레스테롤과 활성 산소가 함께 들어 있는 식품들이다 피자나 삼겹살처럼 먹을 때 콜레스테롤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동물성 지방을 불에 태워 섭취하는 경우, 산화된 기름이 활성 산소와 함께 체내로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체내에 들어간 활성 산소는 동맥벽을 구성하는 세포에 상처를 내고 그 상처 난 부분에 콜레스테롤이 쌓이기 시작한다.

2. 내부적 요인

 스트레스를 받으면 인체는 다양한 반응을 나타낸다.  혈압이 올라가고 혈당 수치가 높아져 인체의 기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현대 의학이 발전하면서 스트레스가 세포에 매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화가 나고 걱정이 생겨서 잠을 이루지 못할 때 인체의 세포에서는 활성 산소를 만들어 내는데 이것의 산화력은 보통 강한 것이 아니다.  이 활성 산소는 무엇에든지 달라붙어서 무차별적으로 산화시켜 버린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아서 세포에서 활성 산소가 발생하면 이것은 세포핵 속으로 가서 유전자를 구성하는 핵산을 무차별하게 산화시켜 버리는데 이로써 유전자가 변질하게 된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사람은 늙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세포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건강하게 세포 분열을 하기 때문이다.

 아직 세포는 죽을 때가 되지 않아서 계속해서 세포를 증식시키고 있는데, 사람이 건강에 나쁜 것을 먹으면서 화를 내고 신경질을 내면 활성 산소가 마구 발생하고 그 때문에 세포가 견디다 못해서 변질하게 되며 이것이 암이 되기도 하고 노화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몸에 이상을 느낀 사람이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먹는 것을 신선하고 건강에 유익을 주는 것으로 바꾸고, 부드러운 마음을 갖고 참된 행복을 찾기 위한 태도로 살아가기 시작하면 활성 산소의 발생이 줄어들면서 변질된 세포가 서서히 다시 정상을 찾아가게 된다.  이것이 참된 치료의 과정이다. 이러한 자연의 현상을 무시하고 아무것이나 먹고 아무렇게 살면서 몸에 좋다는 약을 함부로 먹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체의 생리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3. 쥐를 통한 실험

 스트레스는 곧바로 활성 산소를 발생시키고 발생한 활성 산소는 곧바로 세포를 망가뜨리기 시작한다.  스트레스는 뇌신경 세포에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다음과 같은 실험에서도 분명히 밝혀졌다.  쥐를 두 그룹으로 나누어서 한 그룹의 쥐에게는 조용하고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다른 그룹의 쥐에게는 같은 환경을 만들어 주면서 매일 녹음된 고양이 소리를 들려 주었다. 일정 시간이 흐른 후에 양쪽 그룹 쥐들의 간을 떼 내어 살펴보니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조용한 곳에서 마음 편하게 지낸 쥐는 건강하였는데, 온종일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은 쥐의 간에는 암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고양이 소리가 쥐에게 엄청난 스트레스가 되었기 때문이다.

 인생은 고양이 소리 같은 스트레스를 받는 투쟁의 연속이다.  이 투쟁 속에서 영혼의 평안을 누리는 사람만이 건강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풍요롭게 살 수 있다.  소중한 유전자를 사망의 손길로부터 구원하기 원하는가?  예수께 나아가 마음의 멍에를 벗고 쉼을 얻어야 한다. 고양이 소리는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끝까지 우리의 인생을 따라다닐 것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들려오는 고양이 소리에 반응하여 잠 못 이루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를 바라보면서 영혼의 평안을 간직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건강 유지법이며 노화 방지법이다.

Engish Section: Morning Mana


There's a story of a young lady who enrolled in a poetry class. She was not necessarily inclined to read poetry, but she bought the necessary text book, because it was a required class for her curriculum. Before the semester started and before she met the professor she decided to get a head start and look into the book. As much as she tried to get into the poems in the book it wasn't very meaningful to her. She gave up the idea of getting a head start and decided to go along with the flow. When the first day of class came she didn't realize that her professor was a young, handsome bachelor who happened to be every woman's dream. The greater shock was that he was the author of the assigned textbook. Her heart melted as she got to know this young teacher. All of the sudden all the love poems in the book seemed as if they were directed to her and with a renewed interest she couldn't get enough of those poems that seemed so dry and dull before.

There's a love letter addressed to us from God called the Holy Bible. Often times it can seem dry and dull, but as we begin to see a little bit of how much God loves us we are drawn to know more about this love. All that is necessary is a little spark of an interest to get to know God more. The Holy Spirit will then blow upon that spark and fan that flame and as long as we have the desire to know Him more God will kindle a flame in you that cannot be quenched.

Look with me at this simple line of logic: you cannot do the works of God unless you love Him; you cannot love Him unless you know Him; you cannot know Him unless you spend time getting to know who He is. The glue that bonds all relationships is communication. That means that you must talk to Him through prayer and listen to Him through His word. It is a two-way communication.

When the children of Israel walked through the wilderness Manna came down from heaven in the morning. They were to gather enough just for the day. If they gathered any more than what was necessary for that day, it rotted. They could not store it for the next day; it was only good for that day alone. Additionally, when they were too lazy to gather the manna in the morning and tried to go look for it in the day time it would melt and there would be nothing left to gather.

I believe this was a lesson that God was trying to teach. When Jesus was tempted in the wilderness He said, “It is written, ‘Man shall not live by bread alone, but by every word of God.’” The Bible is likened to bread because we understand that physical food is essential for our physical growth. It is just the same in the spiritual dimension as well. We must get up early in the morning to gather the spiritual Manna before it melts. Jesus, the eternal God of the universe, felt that He had to practice this. Mark 1:35 says, “And in the morning, rising up a great while before day, He went out, an departed into a solitary place, and there prayed.”

Why is morning the best time? You don't know what is ahead of you for that day. Jesus said, “Sufficient unto the day is the evil day of” (Matthew 6:34). It is as if God has measured how much you have grown and allowed a certain amount of temptation that you can bear to come to you for that day. 1 Corinthians 10:13 confirms this. You can choose to face this temptation without strengthening your spiritual body by digesting God's word, but that is about as foolish as going to battle without an armor. God's word is like a shield against sin. God's word will keep us from sinning, but we have to take the time to gather it and to bake it ourselves.

We often don't think of the importance of spending that morning time with God because we can't see the spiritual world. But we all know that to die spiritually is much worse than dying physically. If that is the case, then doesn't it stand to reason that spiritual bread is more important than physical bread? Job says it very nicely. “I have esteemed the words of His mouth more than my necessary food” (Job 23:12).

I know that as students we can be quite busy. I've been there. But as important fiber is for the body your interview with God is of greater importance. Sometimes we can get so caught up in the things that we have to do that we lose sight of what is really important in the end.

Let us not lose sight of what is really important in life. Let us form the habit of rising up a great while before day to seek God's will day by day.

바이블 맨: 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인간적인 표현을 썼나요?

질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요. 이것이 사람이 생각하는 개념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지 궁금합니다. 삼위일체이시며 동등하신 분이라고 한다면 왜 아들이라는 표현을 하게 되는 건지 모호합니다.

답변: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태 속에 잉태케 하셨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시편 2장 7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낳았다." 라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설명하였다.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히 1: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히 5:5)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육신을 취하고 이 땅에 오기 위한 방법으로 성령을 통하여 인간의 태 속에 잉태되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창조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부자지간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다.  삼위일체는 인간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관계이다. 그것은 세 분 하나님 사이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관계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한 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세 분의 다른 인격과 서로 다른 개체를 가지신 하나님이시지만, 목적과 사명과 뜻과 마음이 한 분처럼 완전한 일체를 이루시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삼위 중의 한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셔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한 모본을 보이기 위해서 오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분을 아버지로 부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우리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처럼, 성육신하신 예수께서도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곧 신약 시대부터 삼위일체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돕는 보혜사로서의 관계로 표현되었다.  이 관계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관계로 표현한 것이다. 세 분의 하나님은 한마음과 한뜻으로 서로 사랑하고 돕는 관계로 표현되었는데, 이 관계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시는 사역에 있어서 상호 협조하는 관계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구속의 역사를 서로 사랑하며 돕는 관계 속에서 하신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을지라도 그분은 크신 하나님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다.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은 그 사실을 잘 보여 준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예수)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3)

창조 교실: 사람의 뇌가 생각을 말로 바꾸는 데 걸리는 시간은?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유일한 생물체이지요. 그렇다면 사람의 뇌에서 생각한 것을 말로 바꾸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 대학의 네드 새힌 박사와 하버드대 연구진은 인간의 두뇌가 문제를 인지하고 어휘를 떠올린 뒤, 이를 문법에 맞게 말하는 데 0.6초가 걸린다는 사실을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에 소개했습니다(2009년 10월 15일 자).  뇌에서 말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영역은 알려졌지만, 구체적으로 생각이 말로 바뀌는 과정을 밝힌 것은 처음입니다.

 1865년, 프랑스 의사 피에르 폴 브로카는 언어 생성을 관장하는 대뇌피질의 특정 영역을 발견했습니다.  훗날 과학자들이 그것을 브로카 영역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다른 뇌 연구와는 달리 언어 영역은 동물 실험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이유로, 언어가 생성되는 과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미국 연구팀은 발작을 제어하기 위해 뇌에 전극을 꽂은 간질 환자에게서 실마리를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환자에게 단어를 떠올리게 하고, 시제나 단, 복수를 바꿔서 생각하게 한 뒤, 수 밀리 초(ms) 간격으로 뇌파를 측정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사람이 적절한 단어를 고르고 문법에 맞춰 말을 하는 데 최소 0.6초가 걸린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 연구에서 연구진은 인간 머릿속의 생각이 말이 되기까지 최소 3가지가 넘는 복잡한 계산이 이뤄진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뇌가 외부 자극에 반응해 적절한 단어를 고르는 데는 0.2초, 문법에 맞춰 적절한 시제나 단, 복수를 결정하는 데까지 0.12초 그리고 여기에 발음을 결정하는 데 0.13초, 입에서 소리를 내는 데 0.15초가 걸리는 것을 알아내었지요.  그래서 생각이 말로 바뀌는 데는 합계 0.6초가 걸린다는 것을 계산해 내었답니다.

 물론 사람마다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다 다르겠지만, 대략 0.6초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밝혀낸 과학자들은 이번 연구로 언어 표현 과정에서의 복잡한 뇌의 작용을 더 자세하게 알아낼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놀라운 뇌의 능력! 이렇게 정교한 뇌의 작용을 보면서 인간의 뇌가 한갓 원숭이의 뇌로부터 진화된 것이라는 주장에 신뢰가 갈까요? 우리 함께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신앙: 1부 - 예수님은 당신에게 반석이 되십니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항상 인간의 곁에 가까이 다가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언어로, 혹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상징과 표상을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과 모습과 인격과 성품을 알리셨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가장 하나님의 모습과 성품을 우리에게 고스란히 드러내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상징과 표상과 비유들 가운데는 그런 예수님의 모습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찾아내기만 하면, 발견하기만 하면, 그리고 깨닫기만 하면, 우리에게 구원의 이치와 진리의 빛과 행복의 비결이 될, 표상 속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 만나 보시기를 바랍니다.    - 편집실 -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합소서.  은혜로운 이 찬송은 오랜 세월 동안 그리스도인들의 입에 애창되어 내려오며 사랑을 받는 가사의 찬송입니다.  그러나 자칫 별 뜻 없이 불러 버리기 쉬운 이 찬송의 가사 속에는 세기를 가로질러 놓여 있는 구속의 의미가 들어 있는데, 그것은 반석 속에서 깨달아야 할 놀라운 진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1) 갈라진 반석
 만세 반석 열리니라는 찬송의 가사를 작사한 톱 레이디(Agustus Montague Toplady 1740~1778)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경건한 그리스도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나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1762년 영국 국교회에서 안수를 받은 그는 1763년 부로드 햄 버리(Broad Ham Bury)라는 교구를 맡아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은 토질과 기후가 좋지 못했고, 병자들이 산재해 있는 열악한 곳이었습니다. 

 
여느 날처럼 병든 사람들과 가난한 교인들을 방문하여 열심히 위로하고 돌아오던 그는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무 한 그루조차 없는 광야 같은 곳을 지나가다 갑작스러운 광풍과 번개와 소나기를 만난 그는 황급히 피할 곳을 찾다가 한 바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위에는 큰 틈이 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폭풍우가 지날 때까지 그 바위틈에 안전하게 숨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섬광처럼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영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죄인을 위해 열리신 만세 반석 되신 주님에 대한 것이었고 그 감동을 시로 쓴 것이 이 찬송의 가사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보기 원했습니다. 패역하고 반역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탄원하던 모세는, 앞으로도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더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어서 감히 여호와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그를 꾸짖지 않으시고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라고 하시며,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19~23)라고 하셨습니다. 

  연약하고 허물이 있던 모세가 하나님을 뵙고도 살 수 있었던 것은 반석 틈에 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바위틈에 넣으시고 손으로 덮으셔서 하나님을 뵈어도 죽지 않게 하셨던 것입니다. 반석과 반석 틈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모세를 숨겨 준 반석은 그냥 반석이 아닌 갈라진 반석이었습니다. 틈이 있는, 곧 벌어진 상처를 가진 반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라진 반석이십니다.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옆구리를 깊이 찔리신 예수님의 상처 때문에 우리는 살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갈라진 반석을 알고 계십니까? 
당신의 생애에 폭풍우가 닥쳐올 때, 또 마귀의 공격으로 무섭고 두려울 때, 시험과 고난으로 낙심될 때, 유혹에 쓰러져 연약하여 흔들릴 때, 예수님 사랑의 상처, 갈라진 반석의 틈 속에 피하여 숨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을 숨겨 주는 피난처 반석이 되고 있습니까?

2) 침을 당한 반석

 우리에게 물을 주시오!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우리와 우리 자녀와 가축들을 죽게 하는 거요? 신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장막을 친 이스라엘 백성은 물이 없자 또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의 섭리를 또다시 불신하고 화가 나서 모세를 돌로 치려고 하며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라고 소리쳤습니다.  먹을 것을 공급받았을 때 그들은 그들의 불신과 불평을 부끄럽게 여기고 앞으로 여호와를 신뢰할 것을 약속하였지만, 믿음이 시련을 당하자마자 그 약속을 잊어버리고 실패했습니다.

 모세는 침착하고 인내하는 태도로,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라고 백성을 진정시키며, 하나님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로부터 모세는 애굽에서 이적을 행한 지팡이를 가지고 백성 앞에 서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모세가 친 반석은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반석에는 여호와께서 서 계셨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칠 때 주님께서는 침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벌써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맞으시고 침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물이다, 물! 모세가 친 반석에서 물이 나온다! 모세가 반석을 쳤을 때 바위에서 물이 쏟아져 나와 생수의 시내를 이루었고, 그것으로 온 이스라엘 진영의 기갈이 흡족하게 해소되었습니다.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깊은 수원에서 나는 것같이 저희에게 물을 흡족히 마시우셨으며 또 반석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같이 흐르게 하셨(시 78:15,16)다고 성경은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오래전에 벌써 성경은 그분을 가리켜 이스라엘의 구원의 반석(신 32:15)이라고 하였습니다.  시편의 시인은 나의 구속자요, 내 힘의 반석이요, 나보다 높은 바위요, 거할 바위요, 내 마음의 반석이요, 나의 피할 반석(시 19:14, 62:7, 61:2, 71:3, 94:22)이라고 노래하였으며, 또 이사야는 예수님을 영원한 반석이요,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사 26:4, 32:2)로 묘사했습니다.  참된 반석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 동안에 그들과 늘 함께 계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통과하게 하시던 때에 그들로 목마르지 않게 하시되 그들을 위하여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게 하시며 바위를 쪼개사 물로 솟아나게 하셨느니라.(사 48:21) 물이 없을 때,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모세가 친 반석은 그리스도의 표상이었습니다.  이 상징을 통하여 소중한 진리가 우리에게 가르쳐졌습니다. 생명을 주는 물이 모세가 친 반석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하나님에게 맞으며 우리의 허물을 인하여 찔리시고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사 53:4,5) 상하신 그리스도께로부터 잃어버린 인류를 위한 구원의 시냇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반석을 치자 생수가 나와 백성을 살린 것처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흘리신 물과 피가 우리를 살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매 맞고 침을 당하신 반석, 우리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3) 한 번만 침을 당해야 했던 반석

 성경에는 두 번째 반석을 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반석을 말하여 명하는 대신, 인내심의 한계에 이르러 반석을 치고 말았습니다.  말로 명해야 했던 반석을 친, 단순해(?) 보이는 죄로 말미암아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장면을 읽으면서, 그 속에 숨겨진 깊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은 마음에 의문을 가집니다. 그러나 연구해 보면 그 속에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거의 가까운 지역 에돔에 도달하기 전에 물이 그쳤습니다. 이때야말로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 대신에 믿음으로 행해야 하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련이 오자 조상들처럼 반역의 정신을 나타냈고, 진영에서 물을 갈망하는 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반석에서 물을 나게 하시던 하나님,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필요를 공급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잊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대신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 마실 물도 없도다. 모세와 아론이 성막 문으로 가서 땅에 부복하자, 여호와로부터 모세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가 주어졌습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민 20:8) 

 
이제 노인이 된 모세는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반역과 고집을 참았으나 마침내 자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는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라고 부르짖으며,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반석에게 명하는 대신에,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물은 군중이 넉넉히 마실 만큼 많이 흘러나왔지만, 모세는 큰 과오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반석은 한 번만 침을 당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한 번만으로 넉넉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한 번 침을 당한 반석은 또다시 침을 당할 필요가 없었고, 이제는 명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모세가 반석을 명하는 대신 반석을 두 번째 또 침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표상의 의미가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반석이 한 번 침을 당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히 9:28)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믿음 속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하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두 번째는 반석에게 명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두 번 희생당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용서를 간구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한 번의 죽음을 통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고 회개하는 기도로써 마음의 소원을 토로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예수님의 상처를 가져갈 것이며, 죄인들에게 생수의 흐름으로 상징된 생명을 주는 피가 다시 흘러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우리를 위해 침을 당한 그 반석은 오늘도 우리를 구원하는 바위, 피할 바위 그늘이 되십니다. 당신은 반석을 두 번 또 치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죄를 회개하지 않고 반복하여 짓는 것은,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치는 실수를 한 것같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또 한 번 못 박는 일이 됩니다. 우리의 죄로 침을 당한 반석 예수님은 오늘 당신에게 어떤 분이 되십니까? 당신은 반석에서 흐르는 보혈로 깨끗함을 받고 있습니까?

 


 

신앙: 2부 - 예수님은 당신에게 어떤 돌이 되십니까?

성경에 예수님은 여러 가지 다른 돌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살리는 돌, 가루를 만드는 돌, 깨뜨리는 돌, 거치는 돌, 넘어지게 하는 돌&.

 많은 그리스도인이 마치 장식품처럼 이 돌을 진열장 안에 진열만 해 놓습니다. 그리고 이 돌을 가끔씩 신기하게 들여다보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리고 마치 신앙이 책의 표지인 양, 그 안의 알맹이인 책의 내용보다는 책의 겉표지와 장식에만 관심을 두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성경에 돌로 표상된 예수님, 그분은 당신에게 어떤 돌이 되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되고 있습니까? 성경에 나타난 돌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 의미를 짚어 보기로 합니다.
 
1) 모퉁이 돌
 유대인들의 성전이 지어질 때의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은 그 당시 세기에 화제가 될 만큼 화려하고 장엄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이 솔로몬의 성전을 건축할 때의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성전을 건축할 때 전혀 망치 소리나 자재 다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은 두로 왕에게 부탁한 레바논의 훌륭한 백향목들과 금과 은들로 성전 건축 재료를 삼았는데,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식양과 규격대로 미리 나무와 돌들을 다 잘라 다듬어서 가지고 왔기 때문에, 그 자재들을 맞추기만 하면 되어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전의 벽과 기초를 위하여 사용될 거대한 석재들은 이미 채석장에서 완전히 연마되었고, 단단한 목재들은 이미 규격대로 각각 다 잘라지고 다듬어져 있어서, 그것들이 건축 장소에 옮겨지면서 아무런 연장도 필요 없고 제 위치에 갖다 맞추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지요. 
지금도 영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에 쓰일 돌들과 재목들이 연마되고 있습니다. 연마되고 갈고 닦여져 준비된 재료들은 하나님의 성전의 한 자리를 채울 것입니다.

 성전을 짓던 중, 무엇에 사용하려는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유별나게 크고 특별한 모양을 한 돌 하나가 옮겨져 왔습니다.  성전을 건축하던 일꾼들은 이 돌을 갖다 맞출 곳을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 큰 돌이 건축 현장에 쓸데없이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 돌은 곧 사람들에게 귀찮은 물건이 되었습니다.
 
 
성전의 재료들을 맞추고 재어 보며 건물을 짓는 동안 이 돌은 버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건축자들이 성전의 기초 석인  모퉁잇돌 을 놓으려고 특별한 돌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 위에 어떤 큰 무게를 올려놓아도 견딜 수 있는 충분한 크기와 강도와 적당한 모양을 갖춘 돌을 말이지요. 
 
 
만일 성전의 모든 무게를 버티는 기초가 될 이 중요한 돌을 잘 선택하지 못한다면 온 건물의 안전이 위태롭게 될 참이었습니다. 그들은 햇빛과 서리와 큰 폭풍에 견딜 수 있는 매우 특별한 돌을 찾아야만 하였습니다. 여러 돌들이 선택되었지만 거대한 무게의 압력에 다 쪼개졌습니다.
 
 
어느 돌도 갑작스러운 대기의 변화에 따른 시험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꽤 오랫동안 버려두어졌던 이상한 큰 돌이 시선을 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공기와 햇빛과 폭풍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어떤 작은 금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건축자들은 이 돌을 검사하기로 하고 만일 이 돌이 엄청난 압력의 시험을 견딜 수 있다면 이것을 모퉁잇돌로 택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돌을 시험해 보았습니다. 과연 이 이상한 돌이 모퉁잇돌로 쓰일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모든 시험을 한 후에 이 돌을 배정한 장소에 가져가니 꼭 들어맞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지어지고 &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도다.(벧전 2:4<8)

 예수님은 모퉁잇돌이십니다.
사람에게 버림받아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모든 사람의 눈에 이상하고 쓸데없는 돌로 보이지만, 성전을 건축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기초 석인 모퉁잇돌이시며 우리의 생애에 든든한 기초가 되시는 귀한 돌, 변치않는 반석이십니다.
 
 
산 돌이신 그리스도와 합하여 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모든 사람은 다 산 돌이 됩니다.많은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자르고 닦고 아름답게 하여도 산 돌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연결 없이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산 돌이신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 가야 합니다.

2) 시험한 돌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 28:16)  모퉁잇돌이 되도록 모든 시험을 거쳐야 했듯이, 예수님은 시험한 돌이 되셨습니다.
 
 이런 시험 저런 시험을 다 해 보고, 기초 석이 되기에 충분히 튼튼하고 견고하다는 것이 밝혀져야 모퉁잇돌로 채택될 수 있었듯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시험을 견디셨습니다.  인성을 쓰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시험과 유혹과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모든 시험을 당하신 이유는 우리를 어떻게 도우실 줄을 아시기 위해서이며,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않으시는 분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맏형님이 되시고, 또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히 2:11)는 주님은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고 오셔서 아담과 그 후손들의 모든 죄의 무게를 견디시고 죄를 승리하시고 죄의 정복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심하고 그분께 죄의 짐을 맡길 수 있습니다.

 온 세계가 이 시험한 돌, 견고한 기초 돌이 되신 예수님 위에 그 짐을 올려놓을 수 있습니다. 어떤 무거운 근심과 걱정의 짐을 놓을지라도 이 돌은 견딜 수 있습니다. 어떤 폭풍우가 와도 흔들리지 않는 이 견고한 주춧돌 위에 누구든지 안전하게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안전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할 만큼 넓고, 온 세상 사람의 무게와 짐을 다 질 만큼 강한 시험한 돌, 이 견고한 기초 석 위에 집을 짓는 데 달렸습니다.  

 머지않아 우리의 공력이 드러날 것인데,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그 안에서 집을 지은 사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진리의 토대 위에 건물을 세운 사람은 안전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시험해 보지 않은 기초 위에 집을 짓고 있습니다. 비가 내리고 폭풍이 휘몰아치고 홍수가 올 때에 그런 사람들의 집은 무너질 것인데, 그 까닭은 그것이 영원한 반석, 시험한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거치는 돌
 

 예수님은 또 성경에 거치는 돌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견고한 기초 돌이 되시지만,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치는 반석이 되십니다.  이사야는 이 사실에 대하여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사 8:13<15)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반석으로 구약에 표상되었던 예수님께서 신약 시대에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자신에 대하여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마 21:44)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돌 위에, 반석 위에 떨어져 깨어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과 합하여 침례를 받을 때 자아가 살아 있는 채로 물에 장사 됩니다.  자아의 그루터기가 그대로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자아가 살아 있어 자신이 원하는 뜻대로 살며, 하나님의 성령에 복종하는 생애를 살지 않는 삶은 진정으로 거듭난 생애가 아닌 것입니다.

 반석 위에 깨어진다는 의미는, 저 유명한 사도 바울의 말처럼 자신이 날마다 죽는 경험을 하는 것이며, 자신이 온전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옛 자아가 철저하게 죽고, 회개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반석에 떨어져 깨어진다는 것은 우리의 독선을 버리고, 어린아이같이 겸손하게 주님께 나아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그분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만하고 죄된 자아는 반석에 떨어져 죽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은 채 진리의 이론만을 받아들입니다. 마음과 생애가 변화되지 않은 말뿐만의 기독교인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누가 반석 되신 그리스도 위에 떨어져 산산이 깨어질까요? 우리는 속절없는 상태 그대로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떨어져야 합니다. 진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깊이 들어와 녹아들지 않는 한, 우리의 생애가 변화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나 지식적으로 잘 알 수 있지만, 성령께서 진리를 깊이 감명시키지 않으면 반석 위에 떨어져 깨어질 영혼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이 거룩한 성령의 지도와 제재를 받도록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복종하는 것이 반석에 깨어지는 것이며,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녀들의 마음속에 성령을 통하여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빌 2:13)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어떤 돌이 되고 있습니까?  당신은 이 돌 위에 떨어져 깨어지는 경험을 하십니까, 아니면 돌이 당신을 가루로 만들어 흩는 경험을 하십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영원히 의지할 모퉁잇돌이 되십니까? 당신은 매일 시험과 걱정의 모든 짐을 가지고 나아가 그분께 드리고 있습니까?  당신은 예수님과 어떤 연결을 하고 있습니까? 산 돌이신 예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성전으로 매일 지어져 가고 있습니까?당신은 매일 이 반석 위에 떨어져 산산이 깨어지는 경험을 하고 있나요?

신앙: 3부 - 예수님은 당신에게 생명수가 되십니까?

초막절 축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초막절은 매우 큰 절기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지루한 축제에 지쳐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성대한 의식과 축제는 눈을 현혹할 만큼 아름다운 빛과 색채로 뒤덮여 있었고, 그들의 귀에는 연주되는 훌륭한 음악이 가득 흘러 넘쳤지만, 이 모든 의식 가운데 심령의 결핍을 채워 주거나 영혼의 갈증을 만족시켜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형식적인 절차들로 마음이 피곤해진 사람들은 성전 여기저기에 허전한 마음으로 모여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성전 마당을 다 울릴 만큼의 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그것은 참 생명을 주는 생명수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었습니다.

 지금도 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삶은 요란하고 현란스러우며, 인간의 사교 생활과 교제를 충족시키기에 넉넉하리만큼 수많은 교회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설교가 교회 단상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영혼의 굶주림을 채워 줄, 또 영혼의 외로움과 갈증을 채워 줄 생수를 찾지 못해 많은 사람이 서성이며 방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수이십니다. 당신은 생명수를 발견했습니까?  성경 구약과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는 영혼을 소생시키고 치료하는 생명수 샘물로 상징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셨을 때, 직접 자신을 생수를 주시는 분으로 묘사하시며,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7~38)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명의 샘에 나와서 마시라고 목마르고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을 초청하셨습니다. 당신도 그 초청에 응할 수 있습니다.

1) 야곱의 우물가에서

 정오의 태양은 뜨거웠습니다. 갈급함을 가지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한 영혼에게 생수를 주시려고 예수께서는 일부러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 가시는 중이었습니다.  위대한 창조주이셨지만,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인성을 입으신 예수께서는 오랜 도보 여행으로 지치시고 목이 마르셨습니다.  하지만 우물에는 물을 떠 마실 수 있는 그릇이 없었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우물가에 나타났습니다.
 
 아무도 물을 길으러 오지 않는 뜨거운 한낮, 한적한 우물가에 사람들을 피하여 물을 길으러 나타난 이 사마리아 여인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허전함과 갈증이 있었고, 이 영혼이 얼마나 생수를 갈급하고 있는가를 예수께서는 아셨습니다.  물을 달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요청에 그 여자는 육신적인 물에만 정신을 쏟고 있었으므로, 생수를 주실 수 있는 분이 곁에 계신 것을 영적 안목으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 여인은 눈앞에 단지 목이 마르고 여행에 피곤하며 먼지가 묻은 한 나그네만을 보았을 뿐이었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목마른 영혼들이 이 사마리아 여인처럼 생명수 곁에 있으면서도 그 생명의 우물을 찾고자 헤매고 있는지요!  예수께서는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영혼의 생수의 필요성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2) 구약에 나타난 생수

 그리스도께서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실 때에 구약에 묘사된 동일한 표상을 사용하셨습니다.  생명수에 대한 아름답고 뜻깊은 표상들이 성경의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반석이시기도 하고, 또 생수가 되시는 두 가지 상징을 겸하여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이 생수에 대한 묘사를 여인에게 상기시키셨습니다. 

 마시는 생수 - 시냇물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흘렀던 산 시냇물을 생생하게 회상시키는 표현으로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가련하고 빈핍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사 41:17, 44:3, 35:6, 55:1)
 
 다윗의 노래 가운데, 그리스도는 하늘의 목자가 인도하는 양떼가 마시는 푸른 목장의 시원하고 잔잔한 물(시 23:2)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또 그는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시 36:8,9)다고 말했습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주님의 지혜의 샘은 솟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잠 18:4)라고 표현하였고, 예레미야에 예수님은 생수의 근원(렘 2:13)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씻는 물 - 정결하게 하는 샘

 예수 그리스도는 스가랴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슥 13:1)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또 에스겔에는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겔 36:25)라고 기록되어 있고, 다윗은 그의 시에  "나를 씻기소서."(시 51:7)라고 하여 정결함을 원하였습니다. 이런 표현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렘 4:14) 이렇듯이 생수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현은 성경 각 곳에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으며, 영혼을 소성케 하는 것으로도 나옵니다.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11)

 반석을 쳐서 나온 생수

 초막절의 절기에는 광야에서 반석을 친 일을 기념하는 예식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은 기드론 시내의 흐르는 물에서 항아리에 물을 담아 높이 들고 나팔이 울리는 가운데 음악에 발맞추어 천천히 조심스럽게 넓은 성전 계단을 올라가면서 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시 122:2)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항아리의 물과 포도즙을 두 개의 은 대야에 부어 이 물과 포도즙이 기드론 시내로 연결된 관을 통하여 사해로 흘러들어가게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반석에서 솟아나온 샘물을 상징하였습니다. 
  
 친 반석에서 흘러나온 물은, 자신의 죽으심으로 구원의 산 시내를 열어서 목마른 자에게 흘러가게 할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지요.  생명수가 온 세계에 흘러갈 수 있도록 예수님은 침을 당하셨고, 매 맞은 반석에서 생수가 흘러나왔습니다. 예식을 행하면서 그들은 환호하는 노래를 다음과 같이 불렀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2,3)  영적으로 정신을 상쾌하게 하는 물, 바싹 마른 불모의 땅에서 솟아나 사막이 꽃이 피는 곳이 되게 하는 샘물, 멸망할 자들에게 생명을 주는 샘물은 그리스도께서만이 주실 수 있는 생수로서, 영혼을 정결하게 하고 새롭게 하고 활력을 주는 하나님 은혜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내재하시는 사람은 그 속에 결코 다함이 없는 은혜와 능력의 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받아들여진 예수님의 사랑은 샘처럼 솟아나 영생에 이르게 할 것이며, 예수의 사랑이 마음속에 샘솟는 영혼은 자신이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그의 삶 속에서, 의로운 말과 행실 가운데서, 생수가 흘러나와 주위에 있는 갈급한 자들에게 활력을 주게 될 것입니다.

3) 생수를 마시는 경험

 생수로 표상된 그리스도를 우물가에서 만난 그 여자는 그분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였지만, 그 생수를 가리키는 말에 엄숙한 뜻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 세상의 우물에서 그 갈증을 풀려고 하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게 만들 물을 마실 뿐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은 만족을 얻지 못하고 영혼의 필요를 공급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갈망합니다. 그  갈망은 오직 한 분만이 채우실 수 있습니다. 세상의 생명수 되신 예수님만이 나누어 주실 수 있는 하늘의 은혜는 생수와 같아서 영혼을 순결하게 하며, 소생시키며 활력을 줍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실 때, 다만 한 모금의 생수가 충족시킬 것이라는 의미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생수를 맛본 사람은 그 물을 계속하여 더욱 갈망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거하시는 사람은 그 속에 축복의 샘, 곧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신 사람은 세상의 다른 것을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부귀영화도 그 사람을 매혹시키지 못할 것이며, 그 마음속에 늘 외치는 소리는 주여, 당신을 나에게 더 주시옵소서.라는 말일 것입니다.  마음속에 그런 갈망과 간구를 가진 사람들에게 영혼의 필요를 아시는 주님께서는 주림과 갈증을 채워 주려고 오십니다. 그리하여 그에게 다함이 없는 샘물이 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마시고 또 마셔도 생수는 늘 새롭게 공급됩니다. 그리고 이 생수를 마시는 경험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이 근원에서 자신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과 은혜를 길어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생수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우물가의 여인은 기쁨으로 충만하여 물동이를 버려두고 다른 사람에게 기별을 전하고자 동네로 돌아갔으며, 예수께서는 그 여인이 왜 떠나갔는지를 아셨습니다.  그 영혼의 간절한 소망인 생수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기쁨에 넘쳐서 그 여인은 자기가 받은 귀한 빛을 전하려고 길을 재촉하였습니다. 생수를 마시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생명의 샘물이 됩니다.

 받는 자는 또 주는 자가 되지요. 영혼 안에 그리스도의 샘물을 가진 사람은 다른 영혼들을 소생시키고, 멸망하여 가는 사람들에게 생명수를 열망하도록 인도합니다.  당신은 생수이신 그리스도를 발견하였습니까?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그 샘에서 끊이지 않고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 생명수 샘물을 마시는 것입니까? 이 땅에서 생수를 마시는 경험을 매일 하는 사람만이 훗날 하늘에서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를 마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앙: 4부 - 예수님은 당신에게 빛이 되십니까?

빛은 신비한 것입니다.
 빛은 보이지만 손에 잡을 수 없습니다.  과학자들이 오래 연구한 끝에, 빛은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파장이 비교적 짧아 직진하는 성질이 있고, 또 다른 물체의 경계면을 만나면 반사되거나 굴절이 되는 빛의 성질은 아직도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빛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또, 빛이 없으면 이 세상에는 색깔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창조 시에 가장 먼저 창조된 것이 빛이며,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것도 빛입니다. 빛이 없으면 이 세상에는 캄캄한 어둠만이 존재할 것입니다.
 
 미국의 정치가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기가 사는 필라델피아 시민에게 무언가 좋고 선한 일을 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름답고 좋은 등을 하나 준비해서 집 앞에 선반을 만들고 그 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등불은 집 안에 두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집 밖에 두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 주가 가고 한 달이 지나자, 사람들은 뭔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집 밖에 등불을 두니까 밤에 지나가는 사람이 넘어지거나 다치지 않고 멀리서도 방향을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좋게 생각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집 밖에 등불을 두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길거리가 환해졌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가로등의 시작이었답니다. 만약 길거리에 가로등이 없다면 빛이 없이 얼마나 캄캄하고 어두웠겠습니까? 세계적으로 가로등이 생긴 것은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한 사람이 주변 사람들을 위하여 집 밖에 빛을 비추게 함으로써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빛은 비추어 줍니다. 빛은 보게 하고 깨닫게 합니다. 빛이 오면 변화가 옵니다. 성경에 묘사된 빛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빛에 숨겨져 있는 비밀을 함께 연구해 봅시다.
 
 1) 비추는 빛
 1.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예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들으러 모인 사람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아침이었습니다.  창공으로 점점 높이 떠오르는 광명한 태양은 산골짝과 산의 협곡들 사이에 숨어 있는 어두운 그림자들을 몰아내며 그 빛의 찬란한 광채를 대지 위에 쏟아 놓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앞에 있는 무리와 떠오르는 태양을 차례로 바라보신 다음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태양이 밤의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에 생명을 일깨워 줌으로 사랑의 사명을 다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도 나아가 오류와 죄의 암흑 속에 있는 자들에게 하늘의 빛을 널리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태양 광선이 지구의 가장 먼 구석까지 비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빛이 지구 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미치도록 계획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빛으로서의 우리의 사명과 목적을 성취할 것 같으면, 흑암과 죽음의 음침한 그늘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빛이 비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에 단순한 빛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우주에 하나님을 증명하는 빛의 증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나타내는 빛의 통로이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빛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온 세상에 빛을 비추며,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일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이 복음의 빛으로 온 세상을 비추는 일이 성취될 것입니다. 
 
2. 우리에게 없는 빛 
 예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들으러 모인 사람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아침이었습니다.  창공으로 점점 높이 떠오르는 광명한 태양은 산골짝과 산의 협곡들 사이에 숨어 있는 어두운 그림자들을 몰아내며 그 빛의 찬란한 광채를 대지 위에 쏟아 놓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앞에 있는 무리와 떠오르는 태양을 차례로 바라보신 다음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태양이 밤의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에 생명을 일깨워 줌으로 사랑의 사명을 다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도 나아가 오류와 죄의 암흑 속에 있는 자들에게 하늘의 빛을 널리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나타내는 빛의 통로이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빛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온 세상에 빛을 비추며,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일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이 복음의 빛으로 온 세상을 비추는 일이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자체에는 비출 아무 빛도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죄로 죽어 가는 세상의 암흑을 비춰 줄 수 있는 유일한 빛이십니다.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그리스도를 떠나면 우리는 불붙지 않은 심지와 같고 태양을 등진 달과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의 흑암을 비출 수 있는 빛이 한줄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의 태양을 향하고 그리스도와 접촉하게 될 때, 우리의 온 심령과 마음은 하나님 임재의 빛으로 작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빛을 전하는 자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생명을 받음으로써였습니다. 바로 영혼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품성에 나타난 그분의 사랑이 그들을 세상의 빛이 되게 하였던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비록 대광명의 근원이시지만 인간을 통해 나타나신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세상에 주어집니다. 신성과 연합한 인간이 인간과 접촉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 각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하늘이 택한 통로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 빛을 비추기 위하여 분투하라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빛이 비취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거하시면 그분의 임재의 빛을 감출 수 없고, 자연스럽게 빛이 비쳐나올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따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또 그들에게 비출 빛이 없는 이유는, 그들이 빛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지 않고 분리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님의 영광이 우리의 심령에 비치고, 우리의 마음이 그분의 영광의 임재 안에서 빛나기만 하면, 우리에게는 일어나 발할 빛으로 넘칠 것입니다. 
 
2) 보게 하는 빛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되신 주님은 사람들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시는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태초에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고후 4:6)게 하신 주님은 상징과 예표와 예언으로 세상을 비춘 영적인 빛이셨습니다. 그러나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요 1:5)고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고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요일 2:11)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1. 보게 된 사람들
 예수님께서 지나시던 길에 앉아있다가 고침을 받은 소경 두 사람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그들은 자신이 눈이 먼 것을 알았습니다. 어둠 속에 살면서 그들은 빛을 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눈이 떠지기를, 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열망하던 그들에게 희망이 생겼습니다. 빛이 되신 예수께서 그 눈먼 사람들 가까이 오시게 된 것입니다. 눈을 뜨게 하실 수 있는 예수께서 가까이 계신 것을 알고 그들은 간절하게 간청합니다.
 
 영적으로 눈이 먼 우리는 영안이 떠지도록, 그리하여 진리를 발견하고 알아볼 수 있도록 주님께 간구하며 성령의 안약으로 우리 눈을 뜨게 해달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빛을 보기 위해, 그리고 눈을 뜨기 위해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 간절한 열망입니다. 소경 바디매오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는 부끄러움과 사람들의 꾸짖음과 반대를 무릅쓰고 예수님께 고침을 받으려고 소리질렀습니다. 진리의 빛을 찾으려면 우리도 소리쳐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잠잠하라고 그를 꾸짖었지만, 그 제지가 그의 열망을 잠재울 수는 없었습니다. 진리의 빛을 찾으려는 우리의 소원도 그와 같아야 합니다. 비록 제지와 핍박이 올지라도 빛을 찾기까지 우리는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 예수님이 부르실 때 그는 치료받으려고 겉옷을 벗어 버렸습니다. 겉옷을 벗는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다 버리고 주님을 찾는 것을 의미하고, 또한 치료하시는 주님의 빛을 받고자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 보게 된 그는 예수님을 좇습니다. 즉, 주님의 증인이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눈먼 사람의 이야기도 같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른 다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그를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놀랍게도 그 사람의 시력은 회복되었습니다.  그가 난생처음으로 눈을 뜨고 본 사람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다음 그는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되었고, 주위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빛 되신 예수님을 발견하는 과정도 이와 같습니다. 빛으로 깨어난 사람이 제일 먼저 보는 것은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다음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며, 그리고 주위의 영혼들을 보게 됩니다.  그 소경의 이웃들과 친구들은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라고 놀라며, 눈이 떠지고 용모가 변화되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한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영적으로 눈을 뜬 사람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또 그분과 같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 다음, 빛으로 치료를 받고 변화하여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으로 주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자신을 치료한 그 빛으로 다른 영혼들을 인도하고, 아직도 어둠 속에서 눈이 먼 채 살아가는 다른 영혼들을 살리려고 그의 삶과 생애는 바치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 가운데 행하리라.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거룩한 빛의 접촉에 반응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증가하고 품성이 아름답게 변화될 것입니다.  마치 빛나는 햇빛이 꽃송이에 아름다운 색채를 줄 수 있도록 꽃이 태양을 향하듯이, 하늘의 빛이 사람의 품성을 우아한 그리스도의 품성으로 아름답게 만들도록 영혼은 의의 태양으로 향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참모습이 오해된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러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셔서 그들을 고쳐 주시고 눈을 뜨게 하셔서 하나님과 진정한 복음에 대하여 곡해된 흑암의 그늘을 거두어 내셨습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고후 4:6)라고 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의 마음속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기를 기뻐하십니다. 당신은 빛을 발견하셨습니까? 빛 되신 예수님께서 마음속에 비추고 계십니까?
 
2. 눈이 멀어 있는 사람들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하겠느뇨?(마 6:22,23)  바리새인들은 눈이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눈에 있는 대들보보다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더 잘 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소경이 눈을 뜨게 된 기적을 보고 예수님의 빛을 받아들였어야 했지만, 그들은 더 증오심으로 가득 차게 되었는데, 이유는 그 이적이 안식일에 행해졌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눈을 뜨는, 빛을 보게 되는 기적에 대하여는 눈이 먼 채, 한낱 외형적인 신앙, 율법의 한 조항을 지켰느냐 범했느냐 하는 것에만 온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소경 되었던 사람은 기쁨과 감사로 충만하여 자연의 경이로운 사물과 하늘과 땅의 아름다움을 보며 예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는 시력을 회복하였다고 주장했지만, 바리새인들은 그들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눈으로 본 증거를 부정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선입견은 너무 강하고 바리새인들의 의는 너무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거리낌 없이 자기의 경험을 말하자, 바리새인들은 그를 침묵시키려고 했습니다.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이 사람이 너의 눈을 뜨게 하였다고 다시 말하지 말라. 이 일을 행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요 9:24). 소경 되었던 사람은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성경의 해설자요, 종교적 지도자로 자처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이었지만, 그들은 예수께서 빛의 근원이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요 9:39)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눈먼 자를 보게 하고, 흑암 가운데 앉은 자들에게 광명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셨으며, 그분이 막 행하신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기적은 바로 그분의 사명에 대한 증거였습니다. 
 
 소경에게 육체적, 영적 시력을 모두 주신 하나님 능력의 빛을 거절함으로 바리새인들은 더욱 깊은 흑암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바리새인 청중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우리도 소경인가?라고 묻자,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자신이 눈이 멀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심각한 질병에 걸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눈먼 상태를 모르고, 고집스럽게 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고치실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을 완고한 불신에 싸이게 하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사명을 분별할 수 없게 한 것은 무서운 흑암이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성령을 거절하는 것은, 빛이 더 큰 능력으로 비칠 다음번에도 그 빛을 거절할 길을 준비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그 거절의 단계를 하나씩 지나게 되면, 마침내 빛이 그 사람에게 아무 감동을 주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 하나님의 성령에 조금도 반응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하여 조금 남아 있던 빛까지 어두워져 버리고, 아는 진리도 완전히 왜곡되어 영혼의 흑암이 더 심해져 영적 소경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을 밝혀 줄 빛을 가지고 있습니까?  혹시 어둠이 마음을 가리고 영적으로 눈멀어 있지는 않습니까?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에 들어오시기를 바랍니까? 빛을 초청하십시오!  예수님은 진리의 빛이 되셔서 당신의 마음속에 환한 불을 켜실 것입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막 10:46~52)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요 9:1~3,7) 

신앙: 5부 - 예수님은 당신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분입니까?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 13:33)

 미국 보스턴의 지하 병동에 한 소녀가 격리 수용돼 있었습니다. 소녀는 마음의 고통 때문에 심한 정신병을 앓아서, 사람들이 다가오면 괴성을 지르고 사납게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의사들은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회복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부모도 아이를 포기해 버려 면회조차 오지 않고, 그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소녀에게 은퇴한 늙은 간호사가 다가가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6개월 동안 끊임없이 주님의 사랑을 전해 받은 소녀의 마음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소녀의 삶을 통째로 뒤바꿔 놓았던 것입니다. 마침내  회복 불가능 이던 정신 질환도 완전히 치료되고 변화된 소녀는 자신과 같은 정신 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소녀가 바로 헬렌 켈러를 위대한 사람으로 키운 앤 설리번 메이시(Anne Sullivan Macy)입니다.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사람의 마음속에 생기는 변화는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1) 은혜의 누룩

 예수님이 마음에 들어오시면, 누룩이 가루를 부풀게 하듯 사람의 삶에 변화가 찾아옵니다. 유대인들은 누룩을 죄의 상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유월절 절기가 되면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죄를 없이 하듯이 집에서 모든 누룩을 없애 버리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눅 12:1)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누룩은 천국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영혼을 살리고 변화하게 하는 예수님의 은혜, 곧 성령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가루 속에 누룩이 들어가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 모든 가루를 부풀게 하는 작용을 하듯이, 우리의 생애를 변화시키는 하나님 은혜의 역사도 먼저 마음속이 새로워짐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성령의 역사에 굴복하는 사람 속에는 새로운 생명소가 심어져, 생활에 변화가 생기고 그 사람의 삶 속에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이런 변화를 일으킬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밖에 있는 누룩이 가루에 섞여야 기대하는 변화가 생길 수 있듯이, 죄인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변화할 수 없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이룰 수도 없습니다.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차원 높은 모든 교육을 가지고도 죄인을 하늘의 자녀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새롭게 갱생시키는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변화는 오직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거듭남의 진리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나타나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3~8)

2) 누룩의 역사
 부풀게 하는 누룩처럼, 예수님이라는 진리의 누룩도 사람이 모르게 조용히, 끈기 있게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진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께서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 선천적이고 후천적으로 배양된 모든 악한 성정을 부드럽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속에 새로운 사상과 감정과 동기를 심어 주십니다.  새로운 품성의 표준이 세워지고 양심이 각성됩니다. 마음이 변하고 가지고 있던 재능들이 새로운 면으로 활성화되는데, 그것은 사람이 새로운 기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던 것들이 성화되고 변화하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는 특성이 삶 속에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악습, 저런 악습을 교정함으로 품성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출발부터 잘못한 것입니다.  변화는 먼저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말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과 마음속에 진리를 간직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지요.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는 넉넉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생각의 방향을 바꾸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먼저 변화되고 성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변화된 사람의 생애에서는 마음속에 간직한 원칙을 따라 행하게 되는 참된 순종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를 믿노라고 주장하면서도 말과 정신과 품행에 전혀 변화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이 무엇일까요?  교인이라고 하면서도 누가 자기의 목적과 계획에 반대하면 참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한 품성을 나타내며, 말이 거칠고 거만하고, 쉽게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믿는다는 사람의 생애 속에서 세상 사람들에게서 똑같이 볼 수 있는,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 이기심, 급한 성미, 성급한 말을 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치 진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처럼 교만하고, 선천적인 못된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괴벽한 품성을 자주 나타내는 것은 왜일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진리의 누룩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지 않아서이며, 또 그 누룩이 작용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선천적, 후천적인 나쁜 성벽이 누룩의 변화시키는 능력에 굴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며, 그리스도 은혜의 결핍, 곧 품성을 변화시키는 그분의 능력을 불신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진리이신 예수께서 마음속에 들어오시면, 그리고 진리를 통하여 성령께서 마음에 역사하시면, 그 진리가 작용하여 모든 거룩하지 못한 성벽을 복종시킵니다.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마음속에 생긴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게 되어, 우리의 몸과 영과 혼이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하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진리의 누룩을 마음속에 받아들이면, 그것은 우리의 욕망을 통제하고, 우리의 사상을 순결하게 하며, 성미를 부드럽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의 원칙에 젖어 사는 사람들 - 이기적이지 않고, 돈을 사랑하지 않고, 재물과 명예와 세속적 쾌락을 추구하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위해 극기하고 일하며, 영원한 것을 염두에 두고 세상의 부패한 감화를 초월해서 사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누룩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진리의 누룩은 경쟁심이나 야심이나 으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변화된 사람은 인간의 칭찬이나 인정에 연연해 하지 않으며, 오직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그분께서 위하여 죽으신 영혼들에 대한 사랑이 마음속에 충만하므로, 자기 자신을 내세우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진리의 누룩은 사람 전체를 변화시켜서 거친 행동은 세련되게 하고, 난폭한 기질은 온순해지게 하며, 관대하게 만듭니다. 진리의 누룩, 생명을 주는 능력은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을 주님의 거룩한 생애와 일치되도록 해 줄 것이며, 그리하여 인성을 가진 사람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이러한 성품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애를 누룩처럼 부풀게 하고 계십니까? 온전한 변화가 당신의 삶 속에 일어났나요? 예수님을 받아들이므로 당신의 삶이 온전히 바뀌는 경험을 하고 계십니까?   반석이신 예수님, 생명수이신 예수님, 빛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음속에 누룩처럼 역사하셔서, 당신의 생애가, 당신이 삶의 목적이, 그리고 삶의 방향이 송두리째 바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질문과 답변: 우주 전쟁, 그것은 어떻게 끝나는지 아시나요?

 먼저,이 세상에 왜 죄가 들어왔는가? 라는 문제에 대하여 간단하게 생각해 보도록 하자.

 죄의 문제는 이 온 우주를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천사들도 루스벨의 반역 운동을 지켜보았고 그의 간계와 기만을 보고 들었으며 그의 세력에 합류한 악한 천사들과 큰 전쟁을 치른 후에 타락한 자들을 하늘에서 쫓아내었던 것이다. 
 
물론 할리우드의 영화 Star Wars(스타 워스)처럼 실제적인 무기들로 싸운 전쟁은 아니었으나 누구의 말을 믿고 누구를 경배할 것인가? 하는 심각한 마음속의 결정들이 이루어졌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신뢰하는 의로운 천사들이 기만하고 속이는 악한 자들을 하늘에서 내어쫓았던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한 것이지, 천사들이 무기를 들고 싸워서 이긴 것은 아니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루스벨(사단)의 사악한 반역과 또한 그 죄의 결과가 어떠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이러한 죄와 반역은 없어져야 하며 그러한 반역에 가담하여 돌이키지 않는 자들도 없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에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사단과 그 추종자들을 내어쫓으셨던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반역 운동이 은근하게 시작되자마자 그 즉시로 단숨에 악한 자들을 없애 버리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그 문제점을 올바로 직시하고 충분히 이해해야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과 그 심판이 공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인정할 수 있으므로 그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셔야만 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하늘의 천사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공의로움에 대해서 이해하는 대신에 오히려 무서워하게 되었을 것이요, 하나님을 섬기되 두려움으로 섬기게 되었을 것이고, 나아가서는  죽임을 당한 루스벨이 혹시 옳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마저 품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이 진정한 감사와 사랑을 가지고 자원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만 진정한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의 최종적인 구원을 위해 필요한 상황을 기다리셔야만 한다.  위에서 설명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즉시로 제거해 버리지 않고 살게 놓아 두셨다. 물론, 그 세력을 이 지구에만 한정시켜 놓았지만 말이다. 
 
마귀의 말을 듣고 인류의 조상이 범죄한 순간, 인류는 사단에게 이 지구에 대한 권한을 주어 버렸던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사단을 아직까지 살게 해 두시는 것일까?  왜 그 마지막 심판을 이렇게 오랫동안 지체하고 계시는 것일까? 무슨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이해해야만 우주 전쟁의 실체와 그 끝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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