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질문과 답변: 아마겟돈 전쟁을 아십니까?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세상 종말에 대해 많은 관심을 나타내 왔는데, 그럴 때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표와 아마겟돈 전쟁은 종말론의 중심 주제가 되어 왔다. 
 
 짐승의 표로부터 시작해서 7재앙과 아마겟돈 전쟁, 그리고 예수 재강림으로 연결되는 일련의 마지막 사건들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끝마쳐 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시대를 초월하여 기독교회 안에 항상 존재해왔다.

 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그들 나름대로 조금씩 다른 견해를 가지고 최후 종말에 관한 아마겟돈 전쟁 시나리오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미국의 할리우드에서 조차 혜성 침입으로 인한 지구의 종말 사건을 아마겟돈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하여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기도 하였다.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심각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를 얻는 유일한 사람들은 구약시대 때로부터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었던 유대 민족이라고 믿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믿는 것처럼, 유대 민족이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유일한 선택된 민족이라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면인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이스라엘 역시 유대 민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놀랍게도 유대 민족은 선택된 민족으로서의 특권을 약 2000년 전에 이미 잃어버렸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면 누가 진짜 이스라엘인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이 중동 지역에만 모여 있는가? 아니다. 온 세상 도처에 흩어져 있다. 머지않아 아마겟돈 전쟁이 이르러 올 것이다여러분은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날에는 진짜 이스라엘만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하는 흰 옷을 입은 자들,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들, 그리고 품성과 생애에 성령의 열매를 맺은 자들만이 아마겟돈 전쟁의 주역으로서 승리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중동 지방을 쳐다볼 때가 아니라,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회개하여 진짜 이스라엘이 되어야 할 때이다.

 아마겟돈 전쟁은 어디서 일어날까? 이 전쟁은 중동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참 백성에 대한 핍박의 불길인 동시에, 선과 악 사이에 존재하는 마지막 영적 대쟁투이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마지막 사건들에 대한 갖가지 오해와 추측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아마겟돈 전쟁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이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지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신앙: 6부 - 인간이 죄의 결과를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죄 자체와 죄의 책임을 유전적으로 물려받는다는 오해

 응애, 응애! 새로 태어나는 아기의 우렁찬 울음 소리는 생명의 태동을 알린다. 죄라는 것 자체를 모르는 순진무구한 아기!  그런데 만일 이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죽었다고 가정해 보자.

 조상의 원죄를 타고났기 때문에, 아무리 죄도 모른 채 잠깐 숨쉬다가 죽었다 할지라도, 이 아기는 영원히 타는 지옥 불 속에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아기에게는 아담의 죄가 전가되었기 때문이다. 이 논리가 도대체 이치에 맞는 것인가?  많은 그리스도인과 신학자가,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죄가 후손에게도 전가되었으므로, 아담의 자손들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 정죄 받은 죄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하여 결국 그 원죄 때문에, 태어나 한 번도 죄를 지어본 적이 없는 아기든, 죄를 많이 지은 어른이든, 다 지옥에 떨어질 죄인이라고 주장한다. 정말 그런 것일까?

원죄설의 유래
 원죄설은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여 주창되었다.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어거스틴(354년)은 마니교도인 아버지와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났다.  마니교는 3세기경 바빌론에서 태어난 마니에 의해 창설된 종교로써, 우주에는 빛과 어둠, 선과 악처럼 대립된 두 원리가 공존한다는 철저한 이원론의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교의 하나이다. 
 그는 교육열 높은 아버지 덕택으로 이태리, 로마와 카르타고 등지에서 교육을 받았고, 젊은 시절 동안 방탕한 생활을 살며 혼란을 겪던 차에, 암부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 사상에 눈을 뜨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철학과 신플라톤주의 서적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니교의 사상에 오랫동안 젖어 있었다가 교부가 되어서 그는 저서를 통해 많은 이교의 오류들을 기독교에 들여오는 장본인이 되었다. 그는, 사람은 자신의 죄로 인해 죄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아담의 죄 때문에 죄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는데, 죄는 십계명을 범하는데 달린 것이 아니고, 존재 상태, 바로 그것이 죄라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갓 태어난 유아도...물로써 구원하시는 주님의 은총에 의해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원죄의 죄책으로 인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갓 태어난 유아들은 구원을 위해서 성별 되게 특별히 제정한 성례전을 통해 신자가 되지 않는다면 어둠(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어거스틴의 원죄설은 당시의 많은 사람을 설득해 모든 인간에게 외적 통제, 즉 제국의 지지를 받는 교회가 필요하다는 관념을 심어주어, 로마제국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정치적인 효과를 가져왔으며, 원죄설은 기독교 안에서  아담의 타락 은 곧  사람의 타락 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고, 기독교는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고 사회 현실에 항거하기보다 원죄와 복종을 강조하는 종교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억울하심 풀어 드리기
  원죄설을 믿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모순투성이가 되고 만다. 그리고 원죄설 속에서 하나님은 매우 불공평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분으로 나타난다.  조상 한 사람의 불순종과 잘못된 선택의 죄로 인해 태어나는 후손들이 선택의 여지 없이 모두 다 죄인이 된다는 사상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의 편에 있어서도 매우 억울한 것이다. 
 또한 매우 중요한 사실은, 원죄설은 우리의 마음 속에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고 죄를 이기게 하는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능력을 평가절하하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 곧 만물을 창조하신 말씀의 능력,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보혈의 능력, 우리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는 죄의 유혹에 쓰러지지 않도록 우리를 붙드시고 힘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과소평가하게 한다.

1.원죄설에 사용되는 로마서 5장 12~18절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 5:12~18절)
 이 성경 절이 시사하는 바는,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람이 다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나, 또 그 사실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죄 때문에 야기된 사망의 힘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의 선물의 능력과 힘이 더 크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기술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성경절을 잘 분석해 보면, 비록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의 선물이 더욱 넘치므로, 즉 주님의 은혜의 능력이 더 크시므로 우리가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2. 에스겔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포
 어떤 성경절에서 신학적인 사조와 교리를 추려 내려면, 그 사상이 성경 전체가 말하는 진리와 들어맞는가 하는 것을 추리해 내야 한다. 만일, 신학자들이 바울이 말한 로마서 5장 12~18절에 의해 아담의 원죄가 우리에게 전가되었으므로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한다면, 에스겔 18장 20~24절에 언급되어 있는 것은 무엇을 시사하는 것인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20)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로 멸망을 하는 것이지, 조상의 죄로, 아버지의 죄가 전가되어 죽는 것이 아니라고 선포하셨다. 또 다른 구절을 보자.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겔 18:21~22)
 만일, 신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오래 전부터 가르쳐져 온 교회의 교리대로, 아담의 죄가 전가되어서 우리가 죽는다면, 범죄한 그 영혼은 그 사람만 죽으리라.,아들이 아비의 죄를 담당하지 않으리라.는 에스겔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에스겔 18장 2절에는 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너희가...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이 구절은 죄를 조상 탓으로 돌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버지의 죄가 아들에게 전가되지 않는다는 것을 교훈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다. (렘 31:29도 참조할 것)

3. 바울이 말하는 요점
È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 여기서 첫째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왔다는 뜻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후손들이 죄의 결과와 영향과 속성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음으로 연약해져서 죄를 쉽게 짓게 되었다는 뜻이다.  즉, 악으로 기울어지기 쉬운 경향인 죄의 성향을 타고났다는 말이다.
 비록 아담이 범죄한 영향력으로 사람은 썩을 몸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우리가 죽는 것은 아담의 죄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죄로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지은 죄 때문에 우리가 정죄 받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이다.  우리는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며, 자기 죄 때문에 사망과 멸망에 이르는 것이다. 첫째 아담이 범죄하므로 자동으로 죄의 책임과 정죄를 받고 죄인 된 것이 아니라, 그 죄의 속성과 연약성이, 죄의 결과와 그 영향이 우리에게 들어온 것이다.

È
존재 자체는 죄가 아니다 - 만일 사람이 태어난 자체가 죄라면(원죄 때문에), 죄의 영향, 즉 죄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당연한 결과인 사망을 맛보지 않고 승천한 믿음의 조상들의 경우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에녹과 엘리야는 살아서 하늘로 승천한 사람이다. 그들은 사망을 이기고, 사망을 맛보지 않고 승천했다.
 
 만일 태어난 자체가 죄라고 한다면, 그들은 원죄 때문에 사망을 맛보지 않고 살아서 승천해 갈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에녹과 엘리야는 구세주가 필요한 사람이었고 구세주의 속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기정된 사실이다. 그러나 에녹과 엘리야가 죄 없는 하늘에 들어간 것만 보아도 태어난 자체가 원죄이기 때문에 멸망 받을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È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 이 성경 절에서 바울은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고 말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아니고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고 하고 있다. 그 다음 계속되는 성경절에서도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모두 다의롭게 된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아담의 죄로 모든 사람이 다 정죄를 받았다거나, 아담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다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신 구속 사업도 모든 사람을 다 의롭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구속 사업을 믿음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만 의롭게 되는 것이다.

È 원죄설의 개념을 가지고 이 성경절을 읽으면 - 첫째 아담 때문에 사람이 무조건 죄인이 되었다면, 둘째 아담인 예수님 때문에 태어난 사람은 무조건 의인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서게 된다.  즉, 첫째 아담 때문에 사람들이 다 죄인이 되었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둘째 아담인 예수님을 믿든지 안 믿든지,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 지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다 의인이 되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첫째 아담을 통하여서는 죄가 들어 왔으나,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는 의가 들어왔고, 그러므로 죄의 힘보다 더 강한 은혜가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쓴 것이다.

È 원죄설을 믿을 때 야기되는 죄의 정의와 예수님의 본성 문제 - 죄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는 것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그 자체가 죄라는 개념을 가지게 될 때, 죄는 결코 이길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것이 되며,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죄에 대한 정의와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잘못된 개념도 따라오게 된다.  죄를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본성 그 자체라고 가정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인성을 취하셔야만 한다. 죄인은 구세주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원죄설은 또 하나의 오류를 들여왔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우리와는 전혀 다른 것(천주교의 무염시태설을 통하여)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와 똑같은 본성을 입으시고 우리의 모본이 되신 예수님을 말하고 있다. 만일, 죄를 선택으로 믿지 않고 조상의 죄가 전가된 존재 자체라고 믿는다면, 어떻게 죄를 승리하고 이기는 마지막 백성, 곧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성경에 묘사된 하나님의 참 백성이 나올 수 있겠는가?

ÈÈ 지금은 하나님의 복음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하나님을 변호해 드릴 마지막 참 백성이 필요 되고 있는 시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진리와 복음을 알고, 이해하고, 진리로 성화된 한 백성을 모으고 계신다. 마지막 오순절의 놀라운 성령을 받고 나아가 큰 소리로 바벨론의 오류와 죄악을 폭로할 사람, 흑암과 오류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를 불러낼 증인을 부르고 계신다. 오해 받고 계시는 하나님의 억울함을 풀어 드릴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마지막 증인이 되기 위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변화되는 독자들이 되기를 기도 드린다!

신앙: 5부 - 악인을 죽지도 못하게 하며 영원히 고문하신다는 오해

지옥설의 주장만큼 하나님을 억울하시게 만드는 것도 없을 것이다.  지구에 범죄한 영혼이 한 사람만 있었다 할지라도 그 영혼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을 사랑의 하나님과,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꺼지지 않는 불에 영원히 지글지글 태우는 하나님이 과연 조화되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무섭고 두렵고 잔인한 분인가?


옥설의 유래 
  
지옥설은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기초를 놓은 2세기 말의 라틴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으로부터 유래하게 되었다.  그는 서방교회에 영원한 형벌, 곧 영원지옥설을 소개한 장본인으로, 그의 저서에서 자신의 가르침이 헬라의 철학자 플라톤의 영혼불멸 사상에 근거했음을 천명했다. (Tertullian, On the Resurrection, chap. 3, Quoted in ANF, Vol. 3, 437) 

 이 터툴리안의 가르침은 어거스틴에 의하여 신학적 체계를 갖추었는데, 이 두 사람은 북아프리카 출신의 교부들로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이집트와 헬라의 영혼불멸 사상에 깊이 젖어 있었던 사람이었다.  후에 이러한 터툴리안과 어거스틴의 사상이 칼빈의 영혼불멸설과 영원지옥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연옥 신앙의 문을 연 어거스틴
 
어거스틴(Aulelius Augustinus; 354-430)은, 플라톤의 영혼불멸설과 터툴리안의 영원지옥설을 확증하는 한편, 개개인의 영혼의 운명은 죽는 즉시 결정됨과 내세에는 정결케 하는 고통이 있음이 절대로 확실하다는 연옥의 개념을 가르쳤다.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중간 지점의 어떤 곳(Purgatory)으로 표현된 연옥은, 비록 천국과 영생을 위해 지금 잘 준비되지 못했다 해도 내세를 위해 준비할 수 있는 또 다른 생(生)이 존재한다는 안도감을 주고, 인간의 노력(기도나 중보나 헌금) 에 의해 갈 수 있는 곳으로 설명하여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조건을 제시하는 신자들을 위로 또는 기만하는 이설이 되고 있다. 

 영혼불멸에 관한 플라톤의 사상은 어거스틴에게 전수되고, 그것은 또 다시 중세 가톨릭교회와 칼빈에게 그대로 전수되어, 결국 영혼문제와 지옥에 관한 값비싼 종교개혁은 무효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억울하심 풀어 드리기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무한하신 능력으로 끝없는 우주의 세계를 운행하시지만, 한 마리 작은 참새도 떨어지지 않게 붙드시며, 우리 각 개인의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다정하시고, 자상하시고, 사랑과 자비가 한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어거스틴(Aulelius Augustinus; 354-430)은, 플라톤의 영혼불멸설과 터툴리안의 영원지옥설을 확증하는 한편, 개개인의 영혼의 운명은 죽는 즉시 결정됨과 내세에는 정결케 하는 고통이 있음이 절대로 확실하다는 연옥의 개념을 가르쳤다.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중간 지점의 어떤 곳(Purgatory)으로 표현된 연옥은, 비록 천국과 영생을 위해 지금 잘 준비되지 못했다 해도 내세를 위해 준비할 수 있는 또 다른 생(生)이 존재한다는 안도감을 주고, 인간의 노력(기도나 중보나 헌금) 에 의해 갈 수 있는 곳으로 설명하여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조건을 제시하는 신자들을 위로 또는 기만하는 이설이 되고 있다. 
 영혼불멸에 관한 플라톤의 사상은 어거스틴에게 전수되고, 그것은 또 다시 중세 가톨릭교회와 칼빈에게 그대로 전수되어, 결국 영혼문제와 지옥에 관한 값비싼 종교개혁은 무효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무한하신 능력으로 끝없는 우주의 세계를 운행하시지만, 한 마리 작은 참새도 떨어지지 않게 붙드시며, 우리 각 개인의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다정하시고, 자상하시고, 사랑과 자비가 한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참혹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게 하시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 흑암의 구름으로 자신을 감추시고 십자가 곁에서 아들 하나님과 함께 고통을 당하신 하나님,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듯 오랜 세월 동안 죄인을 참으시고 무한히 기다리시는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가!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모습은 지옥설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지옥에 대한 잘못된 오해는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훼손시킬 뿐 아니라, 그분의 공의를 왜곡하게 만들며, 하나님을 무섭고 잔인한 분으로 나타나게 만든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아무리 오래 살아도 70, 80년 밖에 살지 못하는 사람이 살면서 죄를 지었다고 해서, 영원한 지옥 불에 몇 천 년을, 아니 영원토록 지글지글 태우신다니!  지옥설은 하나님을 얼마나 두려운 형벌의 하나님으로 나타내는가!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정직한 영혼이 지옥에 관한 올바른 성경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품성에 대해서 그릇된 오해를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며, 결국에는 하나님께 대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충성과 사랑과 희생의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그들은 타당한 이유 없이, 끝없는 고통 중에서 영원히 타고 있어야 하는 악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 대하여 의심과 회의를 가질 수 밖에 없으며, 악인들이 받는 형벌은 하나님의 잔인한 복수심에서 나온 것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지옥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품성에 대한 엄청난 오해를 받고 계신다. 지옥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을 믿으면,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결코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지옥에 관한 질문과 답
1. 지옥은 있는가, 없는가?  
답:
있다.
미래에 있을 것이지만, 영원히 불타는 지옥은 없다.
 예수님께서 재림 하실 때에 지구는 참혹한 폐허가 되는데, 이 때 모든 의인은 공중으로 이끌려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승천하지만, 무덤 속에 있던 죽은 악인들은 의인들의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대로 무덤 속에 있을 것이며, 재림의 광경을 살아서 지켜볼 살아있던 악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광채에 의해서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황폐된 이 땅 위에는 악인들의 시체들만 뒹굴게 될 것이다. 그 때에 사람을 미혹하던 사단은 폐허가 된 이 지구에 갇혀서 천 년을 지내게 될 것이다. (계 20:1~3참조)

2. 그렇다면 지옥은 언제, 어떻게 생기는가?  
답: 성경은 이 지구에 결박되어 있던 사단이, 천 년이 끝나면...그의 감옥에서 풀려나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려고 나가서 그들을 함께 모아 전쟁을 일으키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그들이 땅의 넓은 데로 올라가서 성도들의 진영과 사랑하시는 도성을 포위하니,
하늘에서
불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와 그들을 삼켜 버리더라.
(계 20:7~9절)고 말하는데, 그 때에 이 땅이 불타는 지옥이 되는 것이다. 천년기가 끝나면서 마귀가 천사의 결박으로부터 다시 풀려나는 때에, 모든 악인이 무덤 속에서 부활하여 나온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5절)

 이 때, 사단은 부활한 악인들을 한 곳으로 끌어 모은 다음, 하늘로부터 내려온 새 예루살렘 도성을 포위하여 최후의 반격을 가한다.
사단을 선두로 해서 모든 악인이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려고 할 때, 하늘에서 불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와 그들을 삼켜 버리게 되는데(9절), 

바로 이것이 부활한 악인들에게 죄의 대가로서 주어지는 최후의 유황불 형벌이며 이것이 지옥인 것이다. 그 때 모든 죄의 원흉인 사단 역시 유황불의 형벌 속에서 불타게 된다.

영원히 불타는 지옥에 대한 오해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경에 나오는 꺼지지 않는 불에 대하여 질문한다. 성경 말씀 중에서 영원한 지옥 불의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구절들을 찾아 연구해 보자.

1. 영원한 멸망의 형벌의 의미 -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살후 1:8~9) 여기에 쓰인 표현은 영원토록 중단되지 않는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형벌의 결과가 영원토록 유지되는 것, 악인의 생명이 영원토록 없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즉, 형벌의 결과로서 영원한 멸망, 즉 영원히 멸망되어 완전하게 없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2. 세세토록, 영원토록의 의미 -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계 20:10) 아마 가장 쉽게 오해 할 수 있는 지옥에 관한 표현은, 세세토록(Forever and ever)이란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러한 표현들이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보면, 그 진정한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성경 전체를 조사해보면, 영원, 또는 세세토록이란 말이 57번 나오는데, 이 말이 언제나 영원토록 계속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사야는 세세토록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것이 완전한 멸망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불과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는 곳에서 짐승과 새는 살고 있다고 기록하지 않았는가? 
 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 그 티끌은 유황이 되고 그 땅은 불 붙는 역청이 되며 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않고 그 연기가 끊임없이 떠오를 것이며 세세에 황무하여 그리로 지날 자가 영영히 없겠고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 거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에돔에 베푸실 것인즉. (사 34:9~1) 몇 가지 예를 살펴보도록 하자.

A. 영영히 섬기는 노예 - 출애굽기 21장에 나오는 노예 법에는, 노예가 죽기까지 평생토록 주인을 섬기도록 규정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그것은 송곳으로 귀를 뚫고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는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출 5:6)  노예가 영원토록 주인을 섬길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여기서 영영히 (Forever)란 말은 끝이 없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의 생명이 마쳐질 때까지 주인을 섬기라는 뜻이다.

B. 사무엘은 영원히 살았는가? - 구약성경에 나오는 한나는 그녀의 아들인 사무엘을 하나님의 전에 데리고 가서 거기서 영영히 있게하였다. (삼상 1:22) 그러나 이어지는 28절에서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린다.고 단순하게 설명하고 있다.  영원이란 용어의 일반적인 의미는 무한정한 시간을 뜻하지만, 성경에서는, 어떤 사건이 완전히 마쳐질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할 수 있다.

C. 예루살렘 성은 현재 불타고 있는가? -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렘 17:27)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순종치 아니함으로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 예루살렘 성이 꺼지지 않을 불로 삼킴을 당할 것을 예언하였으며, 그 성이 타서 재가 될 것을 예언하였다. (대하 36:19~21) 
 지금 이 순간에도 예루살렘 궁전이 불에 타고 있는가? 그러므로 성경에서 꺼지지 않는다라는 표현은, 결코 꺼지지 않고 영원토록 탄다는 뜻이 아니고, 그 불은 아무도 끌 수 없으며, 그 불이 태우는 대상들이 완전히 재가 되어 없어질 때까지 탄다는 뜻이다.  지옥 불은 아무도 끌 수 없는 불이며, 한 번 불 붙으면 마귀와 악인들을 완전히 불태워 재로 만들어 버릴 때까지 타게 될 것이다.

D. 소돔과 고모라는 아직도 영원한 불로 타고 있는가? -
유다서 7절에는 영원한 불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만일 소돔 성이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고 있다면, 지금도 소돔성은 불타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영원한 불의 의미는 영원토록 타고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불로 인한 결과가 영원할 것이라는 뜻이다. 
 소돔 성을 재가 되게 했던 그 영원한 불은 악인들에게 마지막으로 가해질 하나의 표본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영원히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서 없어졌기 때문에 영원히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킨 것과 똑같은 종류의 불이 악인들을 화염으로 태우게 될 것인데, 바로 그것이 영원한 불이 될 것이다.사도 베드로는 소돔과 고모라의 영원한 멸망을 재가 되었다는 말씀으로 표현하여 주셨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벧후 2:6)

지옥이라고 잘못 번역된 원어 4가지
1. 구약성경에서 음부로 번역된 스올
 
구약성경에 65번 나오는 Sheol(스올)이라는 히브리어는 보이지 않는 세계(The unseen world)를 뜻하는 말인데, 한글 성경에는 주로 음부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어서, 저승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마치 죽은 사람의 영혼이 가는 곳처럼 느껴진다.  17세기에 번역된 흠정역 영어성경을 보면, 번역하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서 31번은 무덤으로, 31번은 지옥으로, 3번은 구덩이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읽는 사람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새로운 연구를 거치는 동안, 지옥으로 번역된 스올이 문맥과 전체적인 의미에 맞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져 새국제역(NIV)은 지옥 대신 무덤으로 번역함으로써 잘못된 번역을 수정하였다.

2. 신약성경에서 지옥이라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 3가지 신약성경에는 지옥(Hell)으로 번역된 말이 23번 나오는데, 그 가운데 10번은 하데스(Hades), 12번은 게헨나(Gehenna), 그리고 나머지 1번은 타르타루스(Tartarus)라는 헬라어가 지옥으로 번역되었다.

A. 신약성경에서의 음부인 하데스 - 하데스는 구약성경의 스올에 해당하는 말이다. 소아시아의 무덤에 있는 묘비를 보면, 지금도 묘비 위에 기록된 ooo의 무덤이라는 글로 하데스라는 단어가 무덤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B. 어두운 구덩이 타르타루스- 지옥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는 타르타루스의 원래의 의미는, 어두운 구덩이이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타르타루스)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매. (벧후 2:4) 이와 같은 단어가 유다서에서는 흑암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타르타루스, A dark abyss, 어두운 구덩이)에 가두셨으며. (유다서 6절) 참고로, 범죄한 악한 천사들을 심판의 날까지 가두어 놓은 이 흑암의 구덩이는 바로 지구를 의미한다. (계 12:7~9, 20:1~3)

C. 신약성경의 지옥 게헨나 - 신약성경에서 게헨나(Gehenna)는 12번 지옥이란 말로 번역되었는데, 이 단어는 예수께서 친히 사용하셨던 특이한 표현이다.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게헨나)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막 9:48) 그런데 여기 나오는 게헨나는 지옥이 아니라 지명이다.  

È 게헨나는 히브리어로 골짜기를 뜻하는 게(Ge)와 인명인 힌놈(Hinnom)이 합성되어 생긴 힌놈의 골짜기란 뜻의 지명인데, 예루살렘 남쪽 비탈 아래의 계곡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그곳은 쓰레기 처리장으로 사용되는 곳이었는데, 그 골짜기에는 항상 처형당한 죄인의 시체와 죽은 동물의 시체와 쓰레기가 타고 있었기 때문에, 뿌연 연기가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타기 위해 쌓인 쓰레기 속에는 구더기들이 들끓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쓰레기와 죽은 시체를 태우는 불길이 밤낮 타오르던 게헨나(힌놈의 골짜기)를 가리키시면서, 마지막 심판 날에 악인들을 태울 불길을 영영한 불로 표현하셨던 것이다. (마 25:41)  영영히 불타는 지옥을 만들지 않으신 사랑의 하나님은 얼마나 공의로운 분이신가!  (지옥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월간지 62호를 참조 하세요.)

신앙: 4부 - 영혼을 영원히 죽지 않도록 만드셨다는 오해

영혼불멸설은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직접적으로 도전하고 반역하는 오류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께 반역하고 범죄하도록 하와를 유혹한 사단의 최초의 거짓말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에 앞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는 말씀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경고하셨다.  또한 죄의 값은 사망(롬 6:23)임을 선언하시고,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4)고 천명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살고, 불순종할 때는 반드시 그 죄의 결과로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사단의 거짓말 중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영혼불멸설의 유래
 
영혼불멸설이란 육체가 죽은 후에도 영혼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이론이다. 이 뿌리깊은 영혼불멸설의 근본은 어디인가?

1. 영혼불멸 사상의 기초를 놓은 헬라 문화;
사단으로부터 시작된 영혼불멸 사상은 고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고대 신비 종교가 헬라 문화와 접목되면서부터 새로운 체계를 확립하였다. 
 기원전 5세기에 이르러서 이 영혼불멸설을 받아들인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통하여 영혼이 해방되어 감옥과 같은 육신에서 벗어나서 불멸의 존재가 되어 영원한 이데아(Idea)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가르쳤으며, 그의 수제자 플라톤은 영혼불멸 사상의 열렬한 주창자가 되어 파에돈(Paedon)이란 저서를 통해 영혼불멸 사상이 서방 정신문화의 기초를 이루도록 만들었다.  

 영혼불멸 사상은 고대 헬라의 신비주의에 기초를 둔 이교 사상이라는 사실을 유대 대 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영혼불멸의 신앙은 헬라 사상, 특별히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사상을 이상하게 혼합한 신비종교를 통하여 그것을 받아들인 주창자인 플라톤의 철학과의 접촉에 의하여 유대인에게 도입되었다.

2. 영혼불멸 사상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 3세기, 로마제국의 헬라 문화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에는 당대 최대 규모의 신학교가 있었는데, 3세기 초에 그 신학교에서 교장을 지낸 오리겐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영혼불멸 사상을 그리스도 교회로 끌어들였다.

3. 어거스틴과 칼빈을 통해서 들어온 영혼불멸 신앙; 5세기, 중세 가톨릭 교회의 신학적 기초를 세운 신학 교부인 어거스틴도 이 영혼불멸설을 받아들였다.  그는 33세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기까지, 9년간 페르시아의 이원론(二元論)과 영지주의를 혼합한 마니교(Manichaeism) 신자였고, 그 후 신플라톤주의를 열렬히 신봉했기 때문에 평생 그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플라톤의 영혼불멸 사상을 철저하게 신봉하면서, 플라톤의 영혼불멸 사상을 성경의 가르침으로 만들기 위해서 무리하게 성경을 해석하고 성경과 일치시키려는 잘못을 범하였다.  종교개혁 이후, 프랑스의 젊은 가톨릭 신자였던 칼빈은 개신교회로 개종한지 2년째가 되던 해인 1534년(25세)에, 영혼불멸을 반대하고 죽음을 잠과 같은 무의식으로 가르친 그리스도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최초의 신학논문 혼수론을 씀으로써, 오늘날 개신교회들이 영혼불멸 신앙을 따르도록 만드는 확고한 계기를 만들고 말았다. 
 그는 저서에서 자신의 사상이 플라톤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칼빈에 앞서 종교개혁운동을 주도하였던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교수인 위 클립과 틴데일, 그리고 독일의 마틴 루터 등이 중세 가톨릭 교회의 영혼불멸설 교리가 이교적인 사상임을 공공연하게 지적하였다.  

하나님의 억울하심 풀어 드리기
 
사단에게서 기원되고 바벨론과 이집트의 이방종교에서 기인된 영혼불멸설은, 성경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과, 정확한 진리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하는 영적인 경험과, 다가올 재림과 심판을 위해 준비하는 일을 정면으로 방해하고 오해하게 만드는 가르침이다. 
 인간이 죽어도 영혼은 영원히 살아있다면, 그리고 그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에 벌써 가있다면, 심판이 왜 필요하며, 주님의 재림이 왜 필요한가?  요한 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생명의 부활인 첫째 부활과 형벌의 부활인 둘째 부활은 무엇이며, 천년기 이후에 있을 악인들의 심판이 왜 필요한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명확한 진리가 사단으로부터 조장된 인간의 헛된 철학에 의해 완전히 왜곡된 것을 답답해하고 계시며, 많은 영혼들이 이 거짓된 가르침을 믿음으로 인해 올바른 진리에 안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신다.

 영혼불멸설은 죄를 지어도 죽지 않는다는 사단의 기만과 결코 죽고 싶지 않은 인간의 이기심과 본능에서 합작되어 나온 오류의 가르침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짓고 죄의 값인 사망을 선고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힘입어 죄를 용서받고 다시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영혼불멸설을 믿는 사람들은 죄를 지어도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고집을 부리며, 하나님께 반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거짓말은 거짓의 아비 사단에게서부터 유래한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범죄하도록 유혹할 때 그는 놀랍게도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대한 거짓말로 시작했다.

 영혼불멸설을 믿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사단이 강신술을 통하여 사람들을 미혹할 때, 죽은 사람의 영으로 가장하고 나타나 오류를 진리라고 선포하며 자신을 따르라고 할 때, 그 기만적인 속임수에 다 넘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불멸설을 믿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1. 사후에 대한 성경의 정확한 가르침
1) 죽음 이후의 상태
È 시편 146:4 -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È 전도서 9:5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È 시편 115:17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신약성경에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의 이름은 나사로이다. 예수님과 절친했던 친구인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나사로의 죽음을 설명하셨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요 11:11) 후에 예수께서 나사로의 돌무덤 앞에 서서 다음과 같이 크게 외치셨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분께서는 나사로야 내려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왜냐하면 나사로는 하늘이나 다른 어떤 곳에 가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덤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사로는 죽음의 잠에서 깨어 걸어 나왔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셨다.

2. 오해 받고 있는 성경절
 영혼불멸설을 믿는 많은 사람이 의문을 제기하는 중요한 성경절이 있다.  

È 전도서 12:7 (킹제임스 영어성경) -
흙은 예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고, 영(Spirit)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 여기서 도대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영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를 알기 위해 먼저 사람이 태초에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주 여호와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Breath of life)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Living soul)이 되었더라. (창 2:7 킹제임스 영어성경)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몸을 흙으로 빚어 만드셨다. 그러므로 사람의 몸의 화학적 구성 성분은 흙과 동일하다. 그러나 인간의 몸이 흙으로 만들어졌지만, 그것이 생명을 갖고 활동하기 위해서는 생명력이 주입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세포에 생명력을 제공하시고, 심장을 박동케 하시고, 호흡을 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생명력인 생명의 호흡(생기)을 코에 불어 넣으셨던 것이다. 
 생명의 호흡은 히브리 원어로 Neshamah인데, 그것은 호흡과 살아 있음(Living)의 복합어이므로, 원어적 의미 역시 생명의 호흡(Breath of life) 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사용하셨던 두 가지 재료는 흙과 생명의 호흡 임을 알 수 있다.

흙 + 생명의 호흡(생기) = 살아있는 혼 (생령: Living soul) = 인간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코에 불어 넣으신 생명의 호흡은 어떤 귀신 같은 영혼이라고 볼 수 없다. 영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구절에서의 영은, 창세기 2장 7절에 사용된 생명의 호흡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단어이다. 그러므로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 사람의 두 가지 구성 요소 중에서 육체는 부패돼서 흙이 되어 땅으로 돌아가고, 또 다른 구성요소인 생명의 호흡역시 그것의 공급처인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생명의 호흡(Breath of life) 과 영(Spirit)은 성경에서 종종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인데, 그렇다면 그 단어의 히브리어(구약성경)의 의미와 헬라어(신약성경)의 의미가 동일한가를 확인해 보자.

3. 구약 성경에서의 영과 호흡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는데, 구약성경에서 호흡, 바람, 기운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히브리 원어는 루아흐(Ruach)로서, 구약성경에 총 389회나 등장한다.  구약성경에서, 루아흐는 성령이라는 의미로 94회 사용되었으며, 그 외에는 번역하는 사람이 영혼에 대해서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호흡, 생기, 기운, 정신, 마음, 신, 영혼, 영등으로 서로 다르게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의 경우, 자칫 잘못하면 엉뚱한 오해를 하게 된다.

È 시편 146:4 - 그 호흡(루아흐)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라.이 성경절에서는 루아흐가 호흡이라는 의미로 올바르게 번역됨으로써, 창세기 2장 7절과도 일관성 있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È 에스겔 37:5 -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루아흐)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영적인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키는 모습을 상징하는 이 성경절에서 루아흐가 생기라고 번역되었는데, 킹제임스 영어성경에는 Breath(호흡)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È 욥기 27:3 -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루아흐)이 내 코에 있느니라.여기서 루아흐는 기운으로 번역되었는데,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기운(루아흐)이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에 사용하였던 그 생명의 호흡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È 시편 104:29~30 -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루아흐)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창세기 2:7에서는 하나님께서 생명의 호흡으로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주의 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의 영으로 창조하였다는 말씀의 의미는 주의 호흡으로 창조하셨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제 전도서 12:7로 돌아가서, 사람이 죽으면 몸을 떠나서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루아흐를 어떤 의식을 가진 영이나 귀신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히브리 원어에 대한 지식의 부족과 영에 대한 잘못된 편견에서 나온 오해이다.  이것은 생명의 호흡이 그것을 주신 분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4. 신약 성경에서의 영과 호흡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서 호흡, 바람, 생기, 성령을 뜻하는 히브리어 루아흐가, 신약 성경에서는 헬라어 프뉴마(Pneuma)로 385회에 걸쳐서 사용되었다.  신약 성경에서 프뉴마는 성령이나 악한 영으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번역하는 사람의 사상과 주관에 따라서 영, 마음, 심령, 정신, 바람등으로 표현되었으며, 심지어는 영혼이라고까지 번역되어 있어서, 읽는 사람들에게 큰 혼란을 주고 있는데, 그 몇 가지 실례를 살펴 보도록 하자.

È 마태복음 27:50 -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프뉴마)이 떠나시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생명의 호흡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갔다는 사실, 즉 그분의 죽음을 뜻하는 말씀 임에도 불구하고, 프뉴마가 영혼으로 잘못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예수님이 죽는 순간에 그분의 혼백이 몸을 떠났던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È 사도행전 7:59 -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프뉴마)을 받으시옵소서.여기서도, 생명이 끊어질 때에 호흡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표현이, 마치 영혼이 스데반의 몸에서 빠져나가 하늘로 올라간 것처럼 잘못 번역되어 있다.
 이렇듯, 구약에서 389회 쓰인 루아흐나 신약에서 385회 쓰인 프뉴마가 비록 신, 영, 또는 영혼이라고 번역되어 있을지라도,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원어적 의미로 볼 때, 그것이 성령을 가리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간과 연관되어 사용되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단 한 번도 불멸하거나 죽은 시체에서 보이지 않는 연기가 되어 몸을 빠져나가는 어떤 존재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성경의 원어와,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는가를 올바로 살펴본 사람이라면, 죽는 순간에 사람의 영이 소리 없이 빠져나가 허공을 떠돌아 다니게 된다는 미신에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신앙: 3부 -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오해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Once saved, Always saved)는 가르침은, 역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강요하지 않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매우 억울하게 만드는 가르침 중 하나이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과신한 나머지 영원한 구원이라는 개념에서 주장하고 있는 이 가르침은 많은 사람을 잘못 인도하고 있다.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가르침
 기독교회에 자리잡고 있는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보통 영원 구원이라고 불린다.  이 가르침은 사람이 한번 진실한 신자가 되면 그가 믿음을 잃는다는 것(영원히, 적어도)은 불가능하며, 그러므로 그가 구원을 잃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칼빈이 주장하는 5대 진리의 하나로서, 하나님께서 창조 이전에 완전히 타락한 사람 중 누구를 구원하실 것인지를 무조건 결정하시고, 정한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저항할 수 없도록 부르시고, 그들에게 믿음의 선물을 주신다고 하는 교리이다.

하나님의 억울하심 풀어 드리기
1. 자유의지를 주신 사랑의 하나님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처럼 공의로우시고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잘못 나타내는 것은 없다. 기독교에 확실한 교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이 가르침은 예정설이 낳은 또 하나의 오류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너무 보잘것없고 유한한 존재지만,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을 입은 사랑의 창조물인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또 이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섬기는 분은 사랑의 신이다.  하나님께서는 독재자가 아니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과 자유의지로 스스로 모든 것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우리를 창조하셨다. 그것은 사랑의 의지에서 나온 하나님의 결정이었다.

 강요나 강압이나 강제를 통해서는 올바른 교제가 성립될 수 없다. 사랑과 무한한 자유 안에서만이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사랑의 교제와 관계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그 사랑 안에서 자원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사랑의 교제와 섬김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셨던 것이다.
 사람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와 선택의 결정권이 사람의 범죄와 타락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음을 아시고도, 강요하시지 않는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만일의 비상사태를 위해 사람을 구원하실 계획까지 세워놓으시고 우리에게 귀중한 선택권을 주셨다.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오류의 가르침은 이런 사랑의 하나님을 얼마나 왜곡되게 나타내고 있는가! 생각하고 판단하여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이다. 그러나 이 선택력은 동시에 자유와 막중한 책임을 사람들에게 주고 있다. 
 인류의 시조의 범죄와 타락으로 인해 죄로 기울어지는 성향과 유전적인 연약성을 타고나는 점에 있어서는 사람에게 선택권이 없지만, 그래서 비록 우리가 영생을 얻기 어려운 타락한 본성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나긴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새로운 마음을 받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선택권을 주셨다.  이 선택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결정인 것이다. 이 선택은, 죄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영원히 죽을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새로운 마음을 받아서 영원히 살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2.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1)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 15:5~6) 
 성경 어디에도, 과거에 가졌던 한 순간의 믿음의 경험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이 된다는 말씀을 찾아볼 수 없다.  구원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 의한 영적 성장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구원을 받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접촉과 관계가 지속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은 사람이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연합을 떠나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지 않으면, 그는 시들어 죽고 결국에는 지옥 불에 살라지게 된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와의 구원의 관계가 결코 과거에 이루어진 단 한 번의 결정에 기초된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영생에 대한 보장은, 오직 그의 믿음이 그리스도께 고정되고, 그의 마음이 생명이신분과 연결된 사람에게만 영원한 것이 된다.

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예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는 상황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가시덤불과 돌짝 밭에 떨어진 씨앗에 대해서 설명하신 것을 보면, 오직 한 부류의 사람들, 곧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사람들만이 최종적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길가와 바위에 떨어진 씨로 비유된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얼마 동안만 신실하였던 사람들은 얼마 동안만 구원받은 상태로 있다가 유혹의 때에 떨어져 나갔다.  이 비유의 말씀은, 사람이 얼마 동안 구원하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가 후에 믿음을 잃으면, 멸망 받게 된다는 주님의 분명한 가르침이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나오는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처럼, 진실한 자라 할지라도 뒷걸음질 하여 진리의 길에서 돌아서면 멸망 당할 수 있다.  믿음이 그리스도께 계속해서 고정되어 있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될 것이다.

3) 용서에도 조건이 있다
 
예수님의 예화 마태복음 18장 21~35절에 나오는 왕과 빚진 종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용서에도 조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에게 엄청난 빚을 진 종을 그의 간청에 응하여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탕감 받은 종이 자기에게 약간의 빚을 진 동료 종을 만나자, 그 빚을 갚지 않는다고 무자비하게 그를 감옥에 집어 넣었다.  이 사실을 안 왕이 분노하여 전에 그 종에게 탕감해 주었던 많은 빚을 취소하고, 그 종이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어 놓았다.

 이 예화의 끝에는 하나님의 용서에도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무자비하게 대함으로써, 이미 받은 용서를 잃어버릴 수 있다.  이것은 에스겔 33장 13절의 말씀과 일치하는 것이다.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 그러므로 영원한 구원의 비결은 구원의 근원되시는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데 있다.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구원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히 10:38)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히 10:26)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롬 8:13)

4) 부모가 어떻게 자녀를 버릴 수 있는가?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을 주장하는 사람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비유로 들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려고 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자녀가 순종하든지 불순종하든지를 불문하고, 자식은 항상 부모의 자식인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한 가지 중대한 문제를 간과하고 있는데, 그 문제는 부모의 말에 불순종하여 부모의 돌봄을 떠난 자녀는 병들어서 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셨던 것이다. (요 6:53)  만일 그리스도인이 한 번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지 않으면 그분께로 나오는 영적 생명을 계속해서 받을 수 없으며, 그 결과 그는 스스로 영적 죽음을 당하게 된다.

신앙: 2부 - 하나님께서 우리의 운명을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오해

하나님을 억울하시게 하는 가르침 중에 가장 주된 것은 예정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성품을 완전히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종교 암흑 시대에 성행했던, 교회와 교황이 구원을 준다는 가르침과 사상에 반대하고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역설로 예정설을 주장하게 된 칼빈의 의도를 참작해준다고 하더라도, 이 교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성경에 나타난 구원론에 전면적으로 배치되는지, 그리고 얼마나 신앙에 큰 해를 끼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모든 편견을 내려놓고 진실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이 주제에 대하여 함께 연구해 보기로 하자. 

요한 칼빈의 예정설   
구체적으로 기독교에 예정설을 주장해서 체계화시킨 대표적인 인물은 요한 칼빈이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 받을 사람을 미리 예정해 놓으셨다는 것, 즉, 하나님께서 천국에 갈 사람과 지옥에 갈 사람을 미리 예정해 놓으셨다는 것이 예정설이다.  요한 칼빈은 "모든 것이 동일한 상태에서 창조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분의 영원하고 바뀔 수 없는 계획에 따라 어떤 자들은 영생으로 예정되고, 어떤 자들은 저주로 예정되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예정설의 원조 어거스틴
 
 
사실, 예정설의 원조는 어거스틴(Aulelius Augustinus; 354-430)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다는 중요한 진리를 간과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멸망 가운데 있도록 정해 놓으셨다는 예정설을 세우게 되었다. 
 이교도인 아버지를 가졌던 어거스틴은 이교의 사상에 물들어 있다가 중간에 기독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난 중요한 사상, 즉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의지를 자유롭게 사용해서 선과 악 중의 어떤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사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가졌던 이교의 영향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절대적이고 독재적인 신으로만 이해했던 어거스틴은,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어려운 사상이었던 것이다.  그는 성경에서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장면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학적 개념에 끼워 맞추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예정설의 시작이 되었다. 
 예정설은 후에 종교 개혁자이며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가 그 모순을 밝히 드러내면서 주춤하였었지만, 칼빈이 정립시키고 주창한 이 예정설을 믿는 어거스틴의 후예들은 아직도 교회 안에 남아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하나님의 억울하심 풀어 드리기
1. 모두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예정설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과 뜻에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사상이다. 예정설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억울하게 만든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의 보화를 모두 쏟아 부으신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을 왜곡시키는 논리인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불순종하고 타락하자마자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구속의 방안을 마련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게 하시는 것이었다. 이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 신이신 아들 하나님이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시는 것도 힘든 결정이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분신과 똑같은 아들 하나님을 죽게 내어주시는 것도 매우 고통스럽고 어려운 결정이었다. 

 누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아들을 흉악한 범죄자의 죄를 속해주기 위하여 대신하여 죽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죄지은 사람, 보잘것없고 무가치한 사람들을 위해 귀하신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죽게 내어주셨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실 때, 검은 구름과 흑암으로 자신을 감싸시고 십자가 주위에서 예수님과 함께 고통을 당하셨다. 타락한 인류를 위한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예정설은 죽음을 불사하고 죄지은 사람들 모두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의도를 완전히 오도하고 있다.

2. 예정하심의 정확한 의미
 
예정설의 기초가 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예정하사라는 구절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선택권을 무시한 채, 누구는 구원받을 것이고, 누구는 아무리 잘 믿으려고 해도 멸망 당하게 될 것이라는 식의 예정설을 믿거나 가르친 적이 없다. 
 바울이 말한 미리 예정하셨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5)
 사도행전 2장 23절도 하나님의 미리 아신 대로 예정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할 것을 미리 알고 계시다는 뜻이다.

 베드로 전서 1장 2절에서도 같은 의미의 말씀을 발견하게 된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 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이와 같은 말씀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말씀한 것이지, 우리의 선택이나 자유 의지를 무시하고 강제로 구원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미리부터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시기 때문에 그러한 표현을 쓴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의 올바른 의미는 예지 예정이다.
 예정설을 믿게 될 때, 그리스도인은 여러 가지 모순에 부딪히게 된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구원이 이미 확정되었다는 예정설을 받아들일 경우, 그는 유혹과 죄를 극복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며, 다른 영혼을 위하여 전도해야 할 이유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죄와 세속의 종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두려운 착각을 갖게 된다. 
 성경의 정확한 가르침은, 각자의 자유 선택에 따라서 진리에 순종하는 자들은 영생에 이르고, 불순종하며 죄 된 삶을 고집하는 자들은 결국 멸망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계속적으로 죄에 머물러 있기로 고집하는 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린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히 10:26~27)  다음의 성경 절을 보아서라도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도록 예정해 놓으셨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멸망을 선택하고 성령의 음성을 거절하는 것이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4)
  •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겔 33:11)
  • 신앙: 1부 - 어두워져 가는 현대 기독교

    현대 기독교 교회들의 실상을 보면서 영적으로 깨어있고 진실한 많은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다.

     교인을 내적으로 변화시키고, 임박한 주님의 재림을 위해 준비하게 만드는 대신, 눈에 보이는 외적인 교회 성장과 현세의 축복과 기복신앙만을 강조하고, 세속적인 것에만 치우치고 있는 현대 교회의 허상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굶주리고 공허한 사람을 먹이고 변화시킬 참된 진리와 복음의 능력이 결여된 현대 기독교는, 이제 영성이 결여된 공허한 예배, 형식과 사교적인 활동에만 치우치는 신앙, 감정에 치우치도록 선동하는 집회, 교회 안으로 속속히 도입되는 여러 가지 형태의 세속적인 방법을 통하여 온전한 그리스도인을 배출하는 대신 하나님의 모습을 닮지 않은 기형아를 출산하고 있는 가짜 복음의 산실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진리와 복음을 주신 데에는 한 가지 목적 밖에 없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이 죄로부터 구원을 받고, 처음 창조 받았던 때,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던 창조 당시의 온전한 인간으로 회복되어, 잃어버린 본향을 되찾고 그   회복된 본향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귀중한 진리와 복음을 그분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하셨고, 그 말씀을 통하여 구원의 길과 방법을 찾도록 계획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 참된 복음과 귀중한 진리들은, 소위 신학자와 지도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유전과 가르침에 의해 왜곡되고 변질되어, 이 변질된 반쪽 복음만으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인간으로 변화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매우 답답하고 억울한 상황에 처해 계신다.
    인간에 의해 변질된 복음은 사랑의 하나님의 속성을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뒤틀어 놓았으며, 그분의 공의와 자비와 지혜를, 더 나아가 그분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과 구속의 역사를 완전히 왜곡시켜 놓았다. 그렇게 잘못 전해지고 표현된 진리와 복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답답하고 억울하신 것이다. 
     지금 현재 기독교 교회들에서 전해지고 있는 가짜 복음인 반쪽 복음의 가르침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구속의 계획과 그분의 사랑의 성품에 대해 눈을 멀게 하여,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게 만든다.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면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없고, 올바른 복음을 알지 못하면 올바른 영적 경험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잘못된 가르침을 받은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진정한 영적인 상태와 구원의 계획을 깨닫지 못하게 되고, 또 올바른 영적인 경험을 하지 못해서 다가오는 심판과 재림을 위해 준비되기 어렵게 한다.
     
     하나님의 억울하심을 풀어 드려야 한다.
    왜곡되고 변질된 복음은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온전한 복음이 제시되어야 한다.  올바른 복음을 알지 못하고 오류의 어두움 가운데 신음하고 있는 영혼들을 구해야 한다.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  올바른 복음을 알고, 그 진리와 참된 복음에 의해 온전히 변화된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 
     종교 개혁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류를 밝히고 진리의 영원한 복음이 높이 들려져야 한다.  하나님의 복음을 회복시키고, 하나님의 억울하심을 풀어드릴 사람이 필요하다.  복음으로 온전히 변화함을 입은 산 증인이 나타나야 한다. 마지막 하나님의 증인들이 준비되어야 바벨론을 향한 큰 소리 외침을 할 수 있고, 그래서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이 세상의 끝이 올 수 있는 것이다.

    창조교실: 꽃과 식물에 들어 있는 비밀색소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색깔로 피어나 자태를 뽐내고 있는 예쁜 꽃들, 그리고 푸른 식물들! 어떻게 꽃들과 식물들은 이렇게 저마다 서로 다른 색을 지니고 있을까요? 그 비밀을 실험을 통해 한번 알아볼까요?
     
     
    빨간 장미꽃 잎이나 붉은 양배추 잎을 한 움큼 따서 콩콩 찧어 액즙을 쥐어 짜낸 다음, 그 즙을(물로 희석하여) 시험관에 따르고 식초 한 방울 떨어뜨려 보세요. 금방 붉게 변합니다.  다음은 거기에다 양잿물(수산화나트륨, NaOH) 한 두 방울을 넣어보세요. 그러면 또 금방 푸른색으로 바뀐답니다. 정말 요술 같지요? 
     이 실험을 통해 꽃물이 산성에서는 붉은색으로, 알칼리성에서는 푸른색으로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재료 말고도 포도껍질, 검은콩, 홍차, 버찌, 제비꽃, 철쭉, 나팔꽃, 당근도 실험을 하면 똑같은 결과가 나온답니다.  꽃잎과 식물 속에 과연 어떤 물질이 들어 있기에 이런 변화무쌍한 요술을 부리는 것일까요?

    그것은 안토시아닌 때문이랍니다.
     
    안토시아닌(Anthocyanin)은 고등식물의 잎, 줄기, 뿌리, 꽃, 과일 등 어느 조직에서나 생성되는 수용성물질이지만, 주로 과일과 꽃에 많으며, 세포의 액포(Cell vacuole)속에 들어있습니다. 이 물질은 화청소(花靑素)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플라보노이드(Flavonoids)계 물질로 냄새와 맛이 거의 없습니다. 
     안토시아닌이 많이 든 과일의 예쁜 색은 동물을 유인하여 과실을 먹게 하므로 씨앗을 퍼뜨리게 하고, 꽃의 고운 색은 곤충을 끌어들여 수분(受粉, 꽃 가루받이) 하게 하며, 알록달록한 여린 이파리에서는 이것이 강한 자외선을 막는 햇빛 가리개(Sunscreen)역할을 한답니다. 
     그 뿐 아니라 식물세포 속에 생기는 활성산소(Reactive oxygen species)를 없애는 항산화제(抗酸化劑, Antioxidants)로 작용하지요.  그래서 안토시아닌이 듬뿍 든 블루베리, 체리, 흑미(黑米), 포도, 붉은 양배추와 같이 진한 색을 띤 것들이 사람 몸에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화청소가 가장 많이 든 것은 검정콩이라네요. 그리고 가을 단풍이 붉은 것도 바로 안토시아닌 때문이라고 합니다. 
     붉은 꽃을 피우는 산성식물은 그 꽃잎을 구성하는 세포가 산성이며, 푸른색 계통의 꽃은 알칼리성이라는 것을 실험을 통해 다 아셨지요?  그렇다면 빨간 꽃과 푸른 계통의 꽃이 아닌 노란색 꽃은 어떨까요?  노란 색은 안토시아닌(화청소)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카로티노이드(Carotenoid)라는 색소 때문이랍니다.  이것은 당근이나 귤 등의 색깔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꽃이나 식물에는 신기한 색소들이 들어있을까요? 이렇게 예쁜 색깔을 이들에게 넣어주신 분은 누구일까요? 

    바이블맨: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출애굽기 10장 1-2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케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너로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 가운데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게 하려 함이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표징을 나타내기 위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나요?  바로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인데, 또 다른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파멸시키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답변: 성경에는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 종종 나옵니다. 출애굽기 9장에 나오는 말씀과 디모데전서 2장에 나오는 말씀 역시 서로 반대가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출 9:12)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4) 
     출애굽기 9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고 하였는데, 디모데전서 2장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말씀 중에서 어떤 것이 진리일까요?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말씀을 취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취하는 방법으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 있을 때, 우리는 그 두 말씀의 의미를 연결시켜 주는 성경절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성경절의 의미를 연결시켜 주는 말씀을 사무엘상 6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팍케 한 것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기이하게 행한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삼상 6:6) 
     출애굽기 9장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셨다는 말씀의 참된 의미는 사무엘상 6장의 말씀에 나오는 대로 애굽인과 바로 스스로 그 마음을 강퍅하게 하였다는 것이며, 이것이 성경 전체에 나타난 진리와 하나님의 성품과도 조화를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어서 그 사람이 구원받을 수 없도록 하신다는 가르침은 예정론의 오류와도 연결될 수 있는 잘못된 해석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도 조화를 이룰 수 없으며, 전혀 논리적이지도 않은 해석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씨 뿌리는 자와 씨앗의 비유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어느 땅(토양)으로 비유된 각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복음(씨앗)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구원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아니라, 바로 스스로가 선택하고 결정한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모세를 통해서 여러 번 반복하여 진리를 보여주셨고, 부인할 수 없는 기적을 통하여 그 마음에 호소하셨습니다. 바로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굴복시켜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협력하도록 계속해서 빛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거룩한 능력이 반복하여 나타날수록 그는 더욱 더 단호하게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함에 따라 그 양심이 무감각해질 때까지 바로는 빛을 무시하고 거부하였으며, 그 결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빛은 거두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한 것은 그 스스로의 저항이었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겔 33:11) 태양빛은 그것을 받는 물질의 본성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각기 다른 반응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태양빛은 밀랍은 녹이지만 진흙은 오히려 굳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시는 영향도 그것을 대하는 각 사람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각기 다른 결과를 나타냅니다.  가난하고 애통해 하는 심령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이 그의 마음을 회심과 구원으로 인도하실 때 그것을 감사와 겸비로 받아들이지만, 완고한 고집과 이기심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은 그것에 저항하여 싸움으로써 그의 마음을 점점 더 강퍅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각 사람에게 똑같이 나타나도,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구원과 생명으로, 다른 사람은 심판과 사망으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건강: 천식에 대처하는 방법

     천식이 어떤 것과 관련이 있는 질병인지를 알아보고 그 원인들이 무엇이며 그 해결 방법은 어떤 것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구약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해 내신 후에 그들에게 건강 지침과 청결한 환경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시는 장면이 나온다.  죽은 시체를 접촉한 후 지켜야 할 청결과 세정에 관한 상세한 규칙들이 있다. 또한 배설물 처리에 대한 특별한 지침도 있다.  급속한 전염성이 있는 문둥병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들도 있다. 건강과 위생에 대한 하나님의 이러한 말씀들은 당시의 백성들이 그분의 권고를 기꺼이 따르고 신뢰할 때에만 유익을 얻을 수 있었다.

     천식 역시 위생이나 청결과 깊은 관련이 있다. 국립 도심지 천식 연구회(NCICS)에서 시행한 연구는 아마도 현재까지 시행된 가장 큰 규모의 천식 연구일 것이다.  1천 7백만 달러가 소요된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위대한 연구 업적은 천식과 바퀴벌레 단백질 사이의 강한 연관성을 발견해 냈다는 것이다. 천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바퀴벌레와 그 배설물(Dropping)에 비정상적인 면역 반응을 나타내는 경향이 많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천식 알레르기를 일으킬 수 있는 항원들 중에서 바퀴벌레 단백질이 가장 강력한 것으로 나타났다. 천식에 시달리는 청소년의 38%가 바퀴벌레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연구 결과들은 도시에 거주하는 현대인들이 왜 천식에 더 잘 걸리는지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천식의 주요 원인인 도시 대기 속의 오존이나 황산화물, 이산화질소와 다른 대기 오염 물질들 외에도, 도시 지역 거주자들은 바퀴벌레 단백질에 노출될 위험성이 한층 더 크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천식은 아동기부터 가장 흔한 만성질병이며, 그 발병률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대부분의 천식 환자는 지난 10년간 45%나 증가했다.  선진국의 천식 환자들 중에서 3분의 1은 18세 미만이다. 1980년 이래로 24세 이하 젊은이들 중에서 천식으로 인한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하여 그 기간 동안 118%의 증가율을 보였다. 어떤 특정 인종 집단은 다른 인종보다 훨씬 더 타격을 입었다. 흑인 아동과 청년들은 그 나이 또래의 백인보다 천식으로 사망할 확률이 4배에서 6배 가량이나 높았다.

    바퀴벌레 죽이기
     
    밀집한 도시 아파트 같은 주거 시설에 거주하면, 우리 자신뿐 아니라 이웃의 불량한 청결 상태의 영향을 받게 된다.  연구 보고서는 청결한 환경에 대한 강력한 필요성을 제시하였다.  연구에 참가했던 전문가들은 가정을 바퀴벌레 단백질로부터 깨끗하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 네 가지를 제안하였다. 

     첫째, 연막 또는 스프레이를 사용하여 집이나 아파트에 있는 바퀴벌레를 제거한다.   둘째, 전체의 바닥과 카펫을 모두 세척하여 바퀴 벌레의 단백질을 제거한다.  바퀴벌레가 생기는 것을 예방하는 방법은 바퀴벌레를 모여들게 하는 음식물을 남겨 두지 않는 것이다. 식탁 위의 음식물뿐 아니라 마루 위의 부스러기, 쓰레기통의 음식물 찌꺼기까지 잘 처리되어야 한다. 
     셋째, 식사한 후 즉시 모든 접근 가능한 음식물을 치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남겨두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냉장고에 보관하는 것이 좋다. 버려야 할 음식물은 분쇄기로 처리하거나 거주지 바깥에 버림으로 빨리 제거하는 것이 좋다.
    마지막으로, 바퀴벌레 잡는 덫을 설치한다.

    천식과 식생활
     천식은 식이요법과 특별한 연관이 있는 질환이다. 천식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식생활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물성 식품이 전혀 섞이지 않은 완전한 채식은 천식환자들의 약물투여 필요성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 12년 정도 기관지 천식을 앓았던 35명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연구가 실시되었는데 모든 참가자들은 장기간 천식에 대한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그 중에 20명은 프레드니솔론과 같은 가장 강력한 코티존 유형의 약을 쓰고 있었다. 이런 복합 조제약은 천식을 잘 다스리기도 하지만 장기간 투약할 경우 상당한 부작용을 초래한다.

     연구팀은 35명의 만성 천식 환자들 중 3분의 2 이상에게 1년 동안 동물성 식품이 완전하게 배제된 채식 식사를 하도록 했다. 영양 프로그램을 따른 거의 모든 환자가 다음과 같이 상당한 회복을 보였다.

    - 4개월 동안 환자들 가운데 71%의 상태가 호전됨
    - 1년 후 환자들 중 92%의 상태가 호전됨

     일반적으로 신체 기능이 향상되면 천식 증상은 감소하는데, 환자들은 다음과 같은 테스트에서 상당한 회복과 향상이 나타났다.  스트레스 검사, 폐 기능 검사, 신체적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혈액 검사에서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  IgE 수치를 포함하여 혈액 검사 결과 역시 향상되었는데 이는 알레르기가 호전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더욱이 거의 대부분의 환자가 천식 약물의 투약 양을 상당히 감소시킬 수 있었다. 연구원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대체 치료 요법에 관심이 있고 약물 투약의 부작용을 우려하던 환자들은 증상이 호전됐으며, 이러한 식이요법으로 전통적인 약물 투약 방법을 대체할 수 있다.  이러한 결론은 천식 환자들이 자신의 건강 상태를 식이요법으로 호전시키고, 약물 투약을 중단하거나 감소시킬 수 있음을 시사해준다.
     천식에 채식 요법이 유효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음식물 알레르기가 감소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존스 홉킨스 대학 연구원들은 최근 음식물 알레르기가 아동기의 천식을 악화시키는 데 주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폐 기능 측정 결과, 천식 발병 가능성이 있는 아동들은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식품에 대한 호흡기의 과민반응이 더 민감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과민 반응은 호흡기의 경련으로 천식 발작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천식 발병 가능성이 있는 아동들은 식단에서 질환을 악화시키는 음식물을 제외시키지 않는 한 천식이 호전되지 않는다.
     콩이나 밀은 알레르기 위험율이 높은 식품이다. 이런 식품은 그 자체로는 유익하나 이것을 매일 먹는 것은 알레르기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알레르기 전문의들은 알레르기성 식품에 계속해서 반복 노출되는 것은 알레르기의 유발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동기 알레르기를 유발시키는 식품으로 지목되는 것은 계란과 우유와 생선이다. 이런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음식들은 식단에서 제외시켜야 한다.
     
     환자들을 치료해온 경험에 비춰보면, 유제품은 알레르기를 가장 많이 악화시키는 식품이다. 
    이러한 경험은 의학 보고서들과도 거의 일치한다. 유제품은 피부 알레르기에서 급성 알레르기 반응에 이르기까지 모든 알레르기 문제와 연관성이 있다.  알레르기와 천식이 관련이 있기 때문에 기관지 천식 환자들은 채식으로의 전환을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한다. 또한 흔히 사용하는 특정 식품(우유, 계란, 콩, 밀)에 거듭 노출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좋다.  

     채식을 하면 염증성인 류코트리엔과 프로스타글란딘이 적게 생성된다. 또한 현미와 같이 정제되지 않은 식품을 섭취하는 사람들은 염분을 덜 섭취하는 경향이 있다. 소금이 많이 함유된 식단도 천식을 악화시키기 때문에 균형진 채식을 하는 것이 좋다.

    가정과 영성: 그리스도인이 진리와 원칙에 불평하는 이유

    사람들이 종교에 관하여 가장 자주 하는 불평 가운데 하나는 종교가 너무 제한하는 것이 많고 까다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한이 없고 엄격한 원칙이 없는 교회일수록 많은 사람이 몰리게 된다.

     술을 먹어도, 담배를 피워도 아무런 제재가 없는 종교일수록 인기가 많다. 구원은 받되, 신앙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다는 태도가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는 그리스도인들 마저도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방해 받기 싫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한다. 그래서 어떤 것을  포기하라 는 성경의 요구를 강조하는 목회자나 교회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다. 
     현대 그리스도인은 너무 "유별난 사람이라는 사회적 낙인이 찍히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어떤 원칙과 진리들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 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교회가 너무 율법주의적이고 옹졸하게 되면, 많은 훌륭한 사람이 실망하여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는 이론을 종종 전개한다.

     어떤 원칙과 표준의 옳고 그름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원칙과 표준을 사람이 만들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만드셨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인간에 의해서 독단적으로 만들어진 금기 사항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 세우신 사랑의 규제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은 부드럽고 안이한 장미꽃 길이 아니다. 너무나 많은 성경 말씀이 좁은 길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고 말씀하셨다. (마 7:14)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 번째 원칙 중 하나는 자아부정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눅 9:23)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완전한 굴복을 의미한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값진 진주의 비유는 영생이라고 불리는 어마어마한 상급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라도 남김없이 모두 투자할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 13:45~46)

     많은 사람의 입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이 너무나 좁고 협착 하다는 불평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눅 14:33) 
     또한 예수께서 부자 청년 법관에게 하늘나라를 얻기에는 한 가지가 부족하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부자 청년 법관은 그 한 가지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주님보다 다른 어떤 것을 더욱 사랑했고 순종하기를 거절함으로써 구원을 잃어 버리게 되었다.  이러한 면에 있어서 예수님의 입장은 언제나 분명했다. 심지어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까지 하셨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7)  어떤 물건이나 사람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결국에는 사단의 미혹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등지고 떠남으로써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거듭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 언제나 변명하고 핑계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늘의 진리와 원칙을 제시할 때에는 사랑스럽고 지혜롭게 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스럽고 지혜롭게 말씀을 전할지라도 듣는 사람의 마음 속에 진리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진리는 자아부정을 요구하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반역적인 생각과 무관심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의 입에서는 불평하는 말과 태도가 나오게 된다.

    사랑하면 불평이 없어진다
     
    결혼은 엄격한 원칙이 가장 많이 포함된 관계이다. 결혼하는 사람은 자신이 전에 좋아하던 많은 것을 포기하기로 약속해야 한다.  남편이 될 사람은 이제는 더 이상 다른 여자들과 데이트할 자유를 포기해야 하며, 자신의 남은 생애를 오직 한 여성을 위해 묶어 놓는 결정을 하게 된다.
     신부도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남편에게 바치고 이전에 사귀어 온 다른 남성들은 버리기로 동의하는 서약을 해야 한다. 결혼 서약이야말로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좁고도 협착한 길을 걷기로 맹세하는 서약이다.  제한이나 규칙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삶이 불행해지는 것이 사실이라면, 결혼이야말로 가장 비참하고 불행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결혼은 가장 행복한 사건이다. 왜 그럴까? 왜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자신의 생애를 신랑에게 바치기로 서약할 때 그토록 빛나고 행복해 보일까? 왜 신랑은 자신의 남은 생애 동안에 자신의 행위가 매우 까다롭게 제약 받을 것이라는 서약을 하면서 그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결혼에 따르는 제약들이 그들에게 기쁨이 되는 이유는 배우자를 향한 마음과 감정 때문이다.

     결혼식이 끝난 후에 불평하는 신부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아, 이젠 내가 더 이상 다른 남자와 데이트를 못하게 됐어. 이건 너무 불공평해. 결혼에 관한 법과 원칙은 나에게 남편에게만 충실 하라고 강요하고 있어. 결혼하는 것은 너무 제약이 많아라고 불평하는 신부를 본 적이 있는가?  또한 새 신랑이 이제부터는 봉급을 아내와 나눠 써야 한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결혼에 관한 법칙과 규칙이 너무나 까다롭고 엄격해서 그것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감옥을 갈 수도 있지만, 신랑 신부는 그런 것에 대해서 전혀 불평하지 않는다.

     신부가 간음을 하면 법에 의해서 신부는 체포되어 감옥에 가지만, 신부는 그러한 법에 대해서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있다. 사랑은 두 사람을 붙잡아 매고 있는 모든 원칙과 규칙들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게 하며,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자신들의 결혼 생활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이 잘못하면 처벌 당할까 봐 두렵기 때문에 서로에게 충실한 것이 아니다. 깊이 사랑하는 상대방을 기쁘게 하기 원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충실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남녀는 결혼은 하였지만 더 이상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것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이 땅의 지옥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가해진 제약과 부담들에 대해서 신경질을 내며 불평을 한다.

    진리에 대해서 불평하는 진짜 이유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교인은 침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결혼하였지만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교인이다.  그는 종종 자신에게 좁고 제약이 많은 종교의 짐을 얹혀 주려고 하는 교회와 설교자를 심하게 비난한다. 그러나 문제가 교회나 설교자에게  있는 것일까? 
     문제의 진짜 원인은 불평을 하는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사랑의 관계를 가져보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을 잘 알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만나는 경험을 하고 있지 못하면 진리와 성경이 말하는 원칙에 대해서 불평하게 된다. 
     거듭나지 않은 교인의 마음 속에는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한 교리들이 이곳 저곳에 쌓여 있다. 받아들이지 않아서 먼지가 쌓인 교리 뭉치나 규칙과 신조의 목록이 마음 속에 쌓이게 될 때, 영혼은 힘을 잃고 죽어가게 된다.

    참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되 성경이 말하는 진리와 원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점까지 깊은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인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신앙 생활을 하는 그들의 동기가 단순히 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에 있다. 그들은 천둥과 벼락을 피하기 위해서 종교를 가진다. 지옥 불을 피하기 위해서 주님을 섬긴다. 그래서 그들이 늘 못마땅한 듯한 찌푸린 표정을 짓고 다니게 되는 것이다. 
     아!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이 얼마나 왜곡되었는가!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을 믿기로 결정한 사람은 결혼식을 방금 끝내고 나오는 새 신랑과 신부보다도 훨씬 더 행복한 사람이어야 한다.

     어떤 부인이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하지 않으면 이혼당할까 봐 매일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면 그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을까? 그와 같은 긴장 상태에서 결혼 관계는 순식간에 붕괴되고 말 것이다.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고 그를 진심으로 기쁘게 하기 원하기 때문에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든다. 또한 남편은 아내의 생일이 가까워 오면 아내가 무엇을 갖기 원하는지 주의 깊이 살펴보고 귀를 기울인다.  아내는 남편에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아침마다 출근하는 남편을 붙잡아 놓고 반복해서 알려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정확한 날짜를 기억했다가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산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날마다 성경을 탐구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최고로 사랑하는 분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끊임없이 예언과 교훈들을 탐구할 것이다. 
     20세기역 성경에는 이와 같은 표현이 있다. 무엇이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인지를 발견하기 위해 언제든지 애를 쓰십시오. (엡 5:10)  그리스도인을 위한 얼마나 멋진 표어인가! 이 표어야말로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최상의 소원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십계명 중에서 처음 네 계명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요약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 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7~38)

     성경이 말하는 규칙과 엄격함에 대해서 불평하는 진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고, 자신의 구원만을 위해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종류의 신앙으로는 구원도 받을 수 없고 행복한 삶을 살 수도 없다. 그러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지킬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규칙들을 지키려고 애쓰는 노력 자체가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사랑이 빠진 노력과 투쟁을 신앙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무언가 심각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모든 원동력은 사랑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겼던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3)

    하라와 하지 말라의 신앙
     사내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는 강해진다. 세 명의 아들을 키우는 한 어머니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는 아들들이 항상 말끔하고 청결한 용모를 갖추어야 한다는 원칙을 매우 엄격하게 요구하였다. 대부분의 다른 소년들처럼 그 세 아들도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구두를 깨끗이 손질하는 따위의 규칙들을 매우 귀찮아 했다. 학교에 가는 아침마다 어머니는 자신이 세운 법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 아들들에게 어머니의 권위로 법을 강요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사춘기에 들어선 맏아들이 흠잡을 데 없는 깔끔한 모습으로 등교 길에 나서는 것이었다. 머리카락은 잘 빗질되어 있었으며 구두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어머니는 너무나 놀랐다. 놀라움과 기쁨을 억누르며 그녀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났는지를 알기 위해서 관찰해보기로 했다. 수수께끼는 금새 풀렸다. 학교에 새로 전학 온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여학생으로 인하여 맏아들의 태도가 완전하게 변화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 생애가 단지 "하라"와 "하지 말라" 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결혼에 있어서도 실제적인 육신적 결혼에서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규칙과 제약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것들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일하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깊은 행복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야 할 그리스도인 생애가 고역스러운 것을 억지로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보고 싶은 것을 보지 못하며,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한다고 울상을 지으며 불평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자신들이 너무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도록 강요 당한다고 불평한다. 진리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없는 그들의 삶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온갖 금지 조항들을 모아서 강요하는 종교로 보이게 된다. 
     서로 사랑하면 그들은 상대방을 위협하거나 최후 통첩을 보낼 필요가 없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고 서로를 기쁘게 해 줄 방법들을 찾는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순종을 짐으로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끝까지 따를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은 그리스도인을 원하지 않으신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32:8~9)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 받는 신앙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 감사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내가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을까? 라는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성경을 탐구하는 자들은 빛이 밝아질 때마다 더 밝은 곳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감사의 정신이 온 영혼을 뒤덮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드러내 주신 진리와 원칙들이 굴레가 될 수 없다. 이것이 좁은 길을 걷는 성도들의 참된 경험이다.

    생애의 빛에서

    여러분은 몹시 억울하여 밤잠을 설치면서 괴로워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잊으려 해도 자꾸 생각이 나서 살 의욕조차 없어지게 하는, 자신을 계속 괴롭히는 그러한 억울함 때문에 말입니다.  나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에게 심각한 지장을 주게 되는 그러한 억울함 말입니다.  
     아십니까?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너무나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이 억울함은 그저 좀 속상하다가 잊고 지나가면 되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약이라는 식으로 참아버리면 사라지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이 억울함은 하나님께 대한 오해들인데, 문제는 이 오해들 때문에 무수한 믿는 자들이 영생을 잃어버리게 되는 참으로 심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또 어떤 성품을 가지고 계신 분이신지에 대한 것을 포함해서 이 세상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의 어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건지? 어떻게 심판하시는 것인지? 어떠한 방법으로 구원하시는 것인지?  사단과 죄인들과 악을 어떻게 없애버리시려고 하시는지 등등에 대한 것들에 엄청난 오해와 어둠들이 이 세상을 덮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정확한 성경적인 이해를 해야 합니다. 빛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진리는 우리 영혼의 등불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믿느냐가 우리의 영생을 좌우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빛이 우리 위에 임할 때에 이사야는 일어나 빛을 발하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으로 이 세상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이것이 믿는 자들의 임무입니다. 이번 호는 여러분에게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편지: 우주와 함께 하는 회전

    우주와 함께 하는 회전
     
    당신의 몸은 돌고 있습니다. 어지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흔들리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당신은 지금 엄청난 속도로 돌고 있습니다. 우주는 돌고 있습니다.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거대한 은하들은 마치 한 축을 끼고 도는 듯, 어떤 중심을 가운데 두고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손바닥을 한번 들여다 보십시오. 그리고 생각해보십시오! 거기에는 놀라운 우주의 리듬이 들어 있어, 그 리듬에 맞추어 손바닥 세포들의 핵이 매우 빠른 속도로 돌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당신의 손바닥은 서로 무한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그리고 매우 빠르게 회전하고 있는 아주 작은 세포들의 집합이 모여서 이루어진 물체라는 것을...

    우주의 기본입자 쿼크
     
    우리는 물질계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 몸 자체도 물질입니다. 물질을 이루고 있는 가장 작은 단위는 무엇일까요?  물질을 자르고, 자르고, 또 자르면 더 이상 자를 수 없는 작은 입자가 되는데, 그것이 분자입니다. 그런데 분자는 더 작은 단위의 입자, 물질의 가장 최소 단위이며, 현미경으로도 보기 어려워 미시적인(보이지 않는) 세계의 물질이라고 불리는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원자는 또 원자핵과 그 주위를 둘러싼 전자로 나뉘어져 있고, 그 작은 원자핵은 또 중성자와 양성자(핵자)의 입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이 핵자가 제일 작은 입자인줄 알았는데, 1964년도에 원자핵의 양성자와 중성자를 이루고 있는 더 작은 초소립자, 우주의 가장 기본이 되며,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궁극의 입자인 쿼크(Quark)를 발견했습니다.

    쿼크는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너무나 작은 입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쿼크에 질량(무게)을 주고 힘을 주는 또 다른 더 미세한 소립자가 있다는 것이며, 지금 과학자들이 이 입자를 축출해내려고 실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인데, 이 입자는 힉스(Higgs)라는 초미세소립자로, 신(神)의 입자(God Particle)라고 불리며, 신의 에너지와 같은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우주가 시작되는 가장 기본입자인 것입니다.
     쿼크와 우리 몸의 세포와의 연관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의 머리카락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현미경으로 보면, 긴 까만 줄로 보이는 한 올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은 사실 20~30개의 가닥이 모여서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 가닥은 수 십만 개의 까만 점 같은 세포가 모여서 줄처럼 이루어진 것이고, 또 각각의 한 점은 수많은 세포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 인체는 60조~100조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는데, 세포 하나마다 세포막과 세포질과 세포핵이 있고, 그 세포핵 속에는 우리가 잘 아는 유전인자 DNA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쿼크와 연관하여 생각해 볼 때, 보이지 않는 그 미세한 DNA 염색체는 거대한 분자입니다. 그 DNA라는 분자를 이루는 수많은 원자와 원자핵을 생각해야 쿼크에 대한 개념이 겨우 들어올 뿐입니다.  쿼크나 힉스의 개념은 정말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런데 현미경으로 볼 때, 세포와 세포와의 거리는 마치 별과 별 사이의 거리처럼 무한하다고 하니, 몸 속의 세포 체계를 또 다른 미시적 세계의 우주라고 하는 것이 당연한 것 같습니다.

    회전하는 쿼크와 은하
     
    그런데 매우 신기한 사실은, 원자핵을 이루고 있는 6개의 쿼크는 점이 아닌 작고 가는 끈이며, 이 끈 같은 것들이 텅 빈 공간에서 지속적으로 진동을 하며 지구처럼 일정하게 축을 따라 회전운동(Spin)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자핵은 쿼크의 진동으로 인한 전자적인 진동으로 가득 차 있고, 또 핵 주위를 감싸고 있는 전자(렙톤이라고 불리는)의 운동에 의해서 빠르게 회전을 하고 있는데, 핵 주위의 전자는 항상 쉬지 않고, 핵 크기의 10만 배쯤 되는 바깥 공간을 초속 2,000 km 의 맹렬한 속도로 돌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고 또 우리가 느낄 수는 없지만, 지금 현재도 우리 몸의 세포를 비롯한 모든 물질에 존재하는 원자핵은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고 있으며, 진동의 소용돌이 속에 있습니다.  정말 그 사실을 생각해 보면 현기증이 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전자로 원자핵 둘레를 그처럼 맹렬하게 돌게 하는 힘은 무엇이며, 그리고 핵 속의 쿼크를 쉬지 않고 진동하게 하며 회전하게 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들은 무엇을 중심으로, 어디를 향해 그렇게 돌고 있는 것일까요?

     작은 원자핵에 존재하는 회전과 진동은 거대한 은하계에도 똑같이 존재합니다. 거대한 별들과 은하들도 어떤 중심을 향해 회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태양계가 속해 있는 우리은하는 가운데가 볼록한 원반 모양으로, 원반의 지름은 약 10만 광년이며 은하중심으로부터 동쪽으로 회전하고 있는데, 중심부로 갈수록 회전속도가 빠르다고 합니다.

     미국의 스미스소니언 천문학센터 연구진은 우리은하의 중심부 회전 속도를 측정한 결과, 은하가 시속 90만 8천 800 km나 되는 놀라운 속도로 회전하고 있다는 엄청난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우주는 회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은하도 돌고, 은하 속의 별도 스스로 자전을 하고, 이런 별을 행성이 돌고, 행성도 자전을 합니다. 또한 보이지 않는 미시적 세계에서의 모든 물질의 원자핵들도 돌고 있습니다. 수 없는 진동을 거듭하면서...

    우주의 리듬과 함께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돌며 움직이고 진동하며 회전합니다. 물질이든, 별이든... 그리고 그들이 엄청난 속도로 돌고 있는 중심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에너지, 하나님의 고유한 리듬과 법칙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입니다. 우주와 보이지 않는 세계들과 삼라만상에는 만물을 붙드시고, 유지하시고, 조절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롬 1:20)

     우주의 리듬, 하나님의 리듬에 맞추어 모든 것은 돌고 있습니다. 돌지 않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진동하지 않는 것은 도태하게 됩니다. 우리의 몸의 세포 핵 안의 원자핵과 전자의 회전이 우리의 몸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과 생각도 진동하지 않으면, 회오리바람 같은 회전으로 팽창하고 자라나지 않으면, 영적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진동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생명의 법칙과 우주를 회전시키는 능력과 함께 돌지 않을 때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주와 함께 하는 회전
     과학이 놀라울 정도로 발달한 요즘에, 사람의 생각, 즉 뇌파만으로도 컴퓨터나 휠체어를 작동하고, 장난감이나 로봇을 조종하는 것이 너무나 쉬운 일이 되었습니다.  뇌파를 이용해 장난감을 원격 조종하는 기술뿐 아니라, 심지어 인간의 뇌파와 생각과 감정의 주파수를 읽어내고 조정할 수 있는 시스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 사람의 생각은 어떤 것을 움직일 수 있는 전기를 띠고 있는 에너지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입자를 다루고 있는 물리학인 양자역학도 미시적 세계에서 물질은 입자가 되기도 하고 파동이 되기도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그렇습니다.
  • 우주는 하나님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파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진동과 회전과 파동과 파장... 얼마나 생동하는 우주와 만물들입니까?
  • 당신은 우주와 함께 회전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과 파장이 맞는, 주파수가 맞는 생각과 마음과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까?
  • 머지않아 세상이 끝나고 파괴될 때, 하나님과 같은 진동으로 진동하고, 하나님과 같은 생각과 파동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것입니다.
  • 우주와 함께 회전하는 사람, 그리고 그 우주의 리듬을 이해하고 체험하고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세계에서 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