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질문과 답변 - 지옥을 보셨나요?

성경에서 가장 신학적으로 혼돈되어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지옥에 관한 주제입니다.
그것은 목사들이나 신부들에 의해서 잘못 해석되어 왔으며, 평신도들은 토속 신앙이나 불교 등에서 말하는 지옥과 혼돈함으로써, 지옥(Hell)이라는 단어의 참된 성경적 정의가 파괴당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합니다. 지옥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악한 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사랑의 하나님께서 과연 영원토록 사람들을 고문하시겠는가? 모든 죄인은 지옥에서 동일한 형벌을 받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반드시 성경적으로 해답을 얻어야 하며, 그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우리가 기대하거나 믿던 것과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거절해서는 안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이 있으며, 또한 피할 수 있는 지옥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영혼은 구원을 얻거나 혹은 잃어버린 바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중립 지대란 있을 수 없으며, 천국을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어떠한 위로나 보상도 없습니다.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태복음 13:41~43).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두 가지의 궁극적인 목적지가 있다고 볼 때, 우리는 얼마나 열심히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옥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 중에서 모든 사람이 신뢰할 수 있는 절대적인 안전책은, 예수님께서 지옥에 관해서 가르치신 것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사실은, 지옥에 관한 그리스도의 진리가 많은 종교 지도자에 의해서 도전을 받아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 순간에 불멸의 혼이 육체에서 빠져 나와서 하늘이나 지옥으로 날아간다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셨다는 주장이 온 세상에 범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예수께서 가르치신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에 그 사람의 영이 육체로부터 빠져 나와서 분리된다고 말씀하셨던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악한 자가 죽는 순간에 즉시 영원한 지옥불의 고통 가운데 처하게 된다고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현대의 성직자들은 죽을 때에 혼이 육체를 연기처럼 빠져나간다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혼은 형상도 모양도 없다고 말합니다. 비록 그러한 견해가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위대한 선생이시고,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고 계신 예수께서 어떻게 설명하셨는지 공부해 보시길 바랍니다.

 

신앙 6부 - 두 번째 오순절이 다가오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성령의 역사가 정말로 필요 되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며, 그때는 언제인가?

두 번째 오순절이 다가오고 있다. 예수께서 맡기신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첫 번째 오순절의 크신 성령의 역사가 필요했던 것처럼, 마지막 때에 이 세상에 복음 사업을 마쳐야 하는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참 백성에게 더 큰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 첫 번째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가 컸다면, 두 번째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더 엄청나고 크고 놀라운 역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 시대에 남은 무리가 이루어야 할 사명과 사업은 훨씬 더 크고 엄청난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두 번째 오순절 성령을 받을 사람인가?

성경은 마지막 선과 악의 대 쟁투에서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 사단과 싸워 마침내 승리할 남은 무리, 즉 하나님의 증인들이 등장하리라고 예언하고 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14:12). 그 사람들은 이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있으며 (계7:2~3), 또 이마에 어린 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으며 (계14:1),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며,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사람 가운데 구속을 받아 시온산에서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사람들 (계14:1~5)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참 백성, 남은 무리이다. 이들은 참된 복음을 경험하고 진리로 성화된 사람들로서, 세상에 참된 복음을 증거하고, 바벨론의 죄악과 비밀을 폭로하며, 바벨론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러낼 큰 사명을 띠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우주에 하나님을 변호하는 증인이 되어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마지막 시대에 나타날 백성으로서, 이들은 인간의 역사 중 가장 극심한 환란인 개국 이래로 없던 환란, 가장 어렵고 견디기 어려운 시련과 고통, 그리고 짐승의 표 핍박과 고난을 통과하는 사람들이다. 과거 역사상 인간이 결코 겪어 본 적이 없는 시험과 고난을 통과하면서도 그들은 죄와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며 하나님께 끝까지 충성하는 사람들이다.

왜 성령이 필요한가?

이 마지막 남은 무리가 끝마쳐야 하는 사역은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가 없다. 환란을 견디고 통과하는 일, 핍박 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는 일, 적 그리스도의 비밀과 바벨론의 죄악을 폭로하는 일, 짐승의 표를 거절하므로 인해 당할 시련과 고통을 이기는 일, 또한 마지막에 사단이 직접 나타나 싸울 아마겟돈 전쟁(계 16:13~21)에서 사단을 대적하여 싸우는 일,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의 표인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께 끝까지 충성하는 일 등은 보통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마지막 칠 재앙 속에서 안전하게 보호하심을 받고, 짧은 시간에 알곡들을 추수해야 하는 어려운 사명을 띤 하나님의 남은 무리, 소수의 정예군에게 성령의 몇 배의 은사와 능력이 필요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머지않아 두 번째 오순절 성령의 큰 역사가 다가올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마쳐져야 하는 마지막 복음 사업은 인간의 수완과 재력, 재능과 힘으로 할 수 없는 사업이다. 이 일에는 크고 엄청난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다. 지금은 마지막 시대에 세상과 우주에 증인의 사명을 띠고 하나님을 증거할 남은 백성이 준비되어 가고 있는 시기이다. 당신도 그중에 한 사람인가?

두 번째 오순절 큰 성령을 받고 나가 외칠 사람은, 매일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고 살아가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다. 매일의 생활에서 성령을 받은 증거(죄를 승리하고 주님의 형상과 성품으로 거룩하게 변화해 가는)가 충만하게 나타나는 사람들이다. 당신은 성령을 받았는가? 매일 역사 하시는 이른 비의 촉촉한 역사를 매 순간 경험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곧 다가올 두 번째 오순절에 놀라운 성령을 받고 나아가 외칠 하나님의 증인이 될 것임이 틀림이 없다!

그 행복하고 놀라운 무리에 속하는 독자가 되기를 기도드린다.

신앙 5부 - 나는성령을 받았을까요?

성령을 받은 사람은...

첫째, 죄를 버리기를 원한다

만일, 당신의 몸속에 암 덩어리가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 암 덩어리를 제거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는 증상은 죄가 악하게 보이고, 그 죄가 너무 싫고, 죄를 버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려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자신의 몸속에 암 덩이처럼, 마음속에 자리 잡은 죄를 없이 하려는 것이 성령을 받은 사람의 최고 관심사이다. 성령은 죄를 태우시는 불로 임하신다.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예전의 죄의 습관과 성격과 기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참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죄를 견딜 수 없게 된다. 죄악적인 생각이나 동기가 생애에서 끊어지게 되고, 성령의 순결하신 동기와 생각이 마음을 채우게 된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죄를 버리기 원하여 회개하고 참회하며, 눈물로 통회하면서 하나님 앞에 겸손히 마음을 낮춘다. 그리하여 성령의 성결하게 하시는 아름다운 회개의 열매가 맺힌다.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며 버리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성령의 역사 속에 있는 사람이다.

둘째, 새로운 사람으로 매일 거듭난다

죄를 버리고 회개하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경험을 한다. 성령에 의해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은 예전의 생애를 버리고 환희와 기쁨에 찬 삶을 살아가게 된다. 거듭남의 경험은 얼마나 달콤하며, 얼마나 온몸과 마음이 새털같이 가볍고 상쾌해지는 기쁜 경험인가! 이제 죄의 짐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자신의 온 생애와 마음과 몸을 바친 사람은 새로운 각오와 결심 속에서 거룩한 기쁨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이런 거듭남은 한 번만 존재하고 사라지는 경험이 아니다. 물론 처음 거듭나는 경험을 할 때에는 그 거듭남의 기쁨과 감격과 환희와 열정이 뜨겁지만, 그러나 그 후로 매일 지속하는 거듭남의 경험은 격렬한 감정이라기보다는, 성령께서 마음 가운데 조용히 역사 하시는 잔잔하고 평온한 영적인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고 헌신하며 살아가기로 했는가? 하나님과 진리를 따라가는 길이 아무리 험하고 어려워도, 사랑하는 주님을 위한 열정과 사랑이 그 모든 것을 잊게 하는가? 사랑하는 님을 그리듯이, 주님과 일편단심 사랑의 관계 속에 들어가 사는 것이 행복한가? 그렇다면 당신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다.

셋째,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한다

죄를 버리고 새 마음을 받은 사람은, 그 깨끗하고 정결하게 청소된 빈 마음을 하나님의 임재로 채우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이제 어디든지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며,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거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증거는 우리 속에 예수께서 임재해 계시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제 매일 매 순간 예수님과 동행하는 일을 시작한다. 곧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분의 선하심을 맛보며, 천국을 마음속에 이루며 살아가는 행복이야말로 성령을 받은 가장 큰 증거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뜻보다 예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더 우선으로 하고,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더 즐거운 일이 되는데, 그 이유는 이제 마음과 생각 속에 새로운 계명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주의 뜻을 행하는 것이 생애 최대의 기쁨이 된다. 예수님과 끊임없이 동행하고 있는가? 그분의 임재로 당신의 마음을 매 순간 가득 채우고 있는가?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넘치는가? 주님의 면전에 머무는 순간이 어떤 다른 존재에게 머무는 것보다 월등히 기쁜가?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세상의 그 어떤 이야기보다 즐거운가? 그렇다면 당신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다.

넷째,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자는 참 양이다. 성령이 역사 하는 큰 증거는 진리의 말씀과 주님의 음성을 식별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8). 성령께서는 새롭게 거듭난 사람을 진리로 양육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오류인지, 무엇이 바뀐 가짜 복음인지, 무엇이 변질한 반쪽 복음인지 식별하고 알 수 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성령의 음성을 듣고 진리 안에서 자라나는 성화의 경험을 한다. 회개할 때 "칭의"("의롭다고 칭해 주시는 의", "입혀주시는 의"라고도 함)의 경험을 한 사람은 이제 성령의 인도 하심을 따라 "나누어 주시는 의"인 성화의 경험을 하며 살아가게 된다. 즉 거듭나고 새로운 생애를 살게 된 사람은 예수님과 동행을 시작하고, 성령의 은혜를 받으며 주님의 인도를 따라 영적으로 자라나는 성숙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화"이다. 그러나 회개도 거듭남도 우리의 힘으로 될 수 없듯이, 성화, 영적인 자라남도 우리 스스로 힘으로 자랄 수 없다. 성령께서 역사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진리를 깨달을 수도 없고, 진리대로 성숙해 갈 힘과 능력도 없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분의 음성을 들려주신다.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곧 진리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는 것을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진리대로 굴복하고 순종하며 사는 생애를 통하여, 간구하여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받으므로 일어난다. 매 순간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한 역사 속에 사는 사람은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자신의 뜻과 의지를 주님께 바치고 굴복하며, 자신의 마음대로 살지 않고 주님의 음성을 순종한다. 즉, 주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생애를 살게 되는 것이다. 마음속에 뚜렷한 주님의 음성을 듣는가?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마음속에 확실하게 깨달아지는가? 무엇이 오류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을 어떻게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매일 그분의 인도 하심을 따라 사는 경험을 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다.

다섯째, 죄를 승리하는 생애를 산다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는 당일부터 다시 옛날의 습관과 욕망과 성격과 기질 그대로 돌아가서 예전과 똑같이 사는 사람을 보았는가?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죄의 파워에 아직도 묶인 채 과거처럼 변함없이 죄의 노예처럼 끌려다니는 사람들을 보는가? 진정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죄를 승리하며 산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데, 그리고 흑암의 왕국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의 나라로 옮겨졌는데, 어떻게 똑같이 사단과 죄의 노예가 되어 살 수 있겠는가? 어떻게 마음속에 고의적으로나 계획적으로 죄를 짓고 싶은 의도와 마음이 살아 있을 수 있겠는가? 거듭나도 육신에 배양된 습관이 남아 있어 혹시 연약하여 쓰러지는 경험이 있다 할지라도, 어떻게 성령의 지배 아래서 사는 사람이 죄의 소욕을 따라 마구 죄를 지며 죄의 노예로 살겠는가?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분께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 하여 죄의 힘과 예전에 가지고 있던 죄의 습관들과 유혹을 넉넉히 이기고도 남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회개하여 용서받은 사람은,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경험하고 체험한 사람은, 과거와 똑같은 죄의 파워 아래서 종노릇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만일, 타고난 죄의 영향과 유전적인 기질이 너무 커서 죄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다. 없는 것에서 유를 창조하시며, 온전히 새로운 것으로 변하게 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불신하는 것이며,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성경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죄에서 구원을 받아 새사람이 되는 것은, 죄 가운데 그대로 있으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죄의 욕구와 과거의 죄에 매여 종노릇하던 모든 습관과 생각과 욕망과 생활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 죄의 왕 노릇 하는 파워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한 번 성령의 역사와 은혜로 시작된 이 놀라운 기적은, 우리가 거절하지만 않는다면 우리 속에서 지속적으로 계속되어 세상과 자신과 마귀를 이기고 승리하며 살게 한다.
죄가 싫어지고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는가?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승리하는 생활을 살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기는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다.

❖ 믿음으로 선물로 받는 성령

성령을 받기 위해 대가 아닌 대가를 치르려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지도자들이나 목회자들로부터 성령을 받으려면, "백일기도를 해라", "헌금을 많이 바쳐라", "40일 금식을 해라", "선교 봉사를 해라" 등등의 요구를 듣기 때문이다. 정말 성령을 받으려면 그에 상당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 성령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성령은 우리의 어떤 행위로도 받을 수 없다. 우리의 선한 행위들, 봉사와 예물들이 성령의 부어주심을 재촉할 수가 없다. 성령은 믿음으로 간구할 때에 선물로 주어진다. 베드로는 성령이 선물로 받는 것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8).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선물로 받는 것같이, 믿음으로 성령의 역사 하심을 믿고 간구할 때에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 성령의 역사 하심이 없으면 우리에게 구원의 경험이 있을 수가 없다. 죄를 깨닫는 일, 구세주의 필요를 느끼는 일, 회개하고 고백하는 일, 헌신하는 경험, 말씀과 진리를 깨닫는 일, 예수님의 품성을 닮아가는 경험,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는 과정,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역사이며 성령께서 역사 하신 결과이다. 성령께서 역사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놀라운 성령은 우리에게 하늘의 사랑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가!

신앙 4부 - 성령이란 무엇이며 누구인가?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성령에 대한 관심이 점점 고조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성령의 충만함과 성령의 은사를 갈구한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를 바라며 구하기 전에 필요한 것은 성령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는 일이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 안에서 흔히 성령의 역사라고 불리는 거짓 성령의 부흥과 역사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함을 받을 길은, 또한 성령을 빙자한 광신과 초자연적인 현시와 기만에 빠지지 않는 길은, 바로 성령에 대하여 기록된 성경의 올바른 지식을 갖는 것뿐이다. 성경에 기초한 바른 복음과 지식만이 우리를 건전하고 올바른 성령의 역사 속으로 인도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이란 무엇인가? 성령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령을 찾아 이곳저곳으로 헤매기 전에,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 이 교회 저 교회를 두드리기 전에, 성령이 무엇이며 누구인가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알아야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인간의 가르침이 아닌 오직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성령에 대한 가르침을 연구해 보도록 하자. 성령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을 알고 성령을 올바로 구할 때 우리의 신앙에 성령의 큰 역사와 부흥이 생길 것이다.

1) 성령이 무엇인가?

성령이 무엇인가, 또는 성령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사람들의 궁금증은 날로 깊어 가고 있다. 성령은 어떤 개체를 가지고 있는 분일까, 아니면, 성령은 다만 어떤 기운이나 힘(force)에 불과한 것일까? 성경은 성령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성경은 말하기를,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서 나오는 하나의 "능력"이나 "감화력", 또는 추상적인 "힘"이나 "기운"이 아니고, 인격적인 존재요, 능력을 소유하고 개성을 가지신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개성"이란 용어의 개념은 지력, 감정, 의지의 세 요소를 소유한 인격적인 속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이 개성을 가진 인격적인 존재자라는 성경적인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1. 성령은 인격적인 속성을 소유하고 있다

 지력을 소유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 -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이사야 11장 2절 -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감정을 소유하고 있다
로마서 8장 26절 -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15장 30절 -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의지를 소유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2장 11절 -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사도행전 16장 6~7절 -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2. 인격적인 활동을 하신다

 가르치신다
요한복음 14장 26절 -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증거하신다
요한복음 15장 26절 -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중보하신다
로마서 8장 26절 -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말씀하신다
디모데전서 4장 1절 -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명령하신다
사도행전 13장 2절 -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인격적인 취급을 받으신다

 모욕을 당하신다
히브리서 10장 29절 -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속임을 당하신다
사도행전 5장 3절 -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훼방을 당하신다
마태복음 12장 31~32절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근심 하신다
에베소서 4장 30절 -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4. 인격적인 신분으로 소개되었다

 증인(Witness)이 되신다
히브리서 10장 15절 -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영문성경(KJV)에는 "성령은 또한 우리에게 한 증인이 되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인칭대명사로 지칭되어 있다
신약성경 가운데서 성령을 묘사하는 여러 경우에 남성 대명사가 사용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요한복음 15장 26절 -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장 7, 8절 -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요한복음 16장 13, 14절 -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이상의 모든 증거를 살펴볼 때 성령은 단순한 능력이나 감화력이나 기운이 아니라, 무엇을 알고, 느끼고, 행하는 인격적인 존재자요, 개성을 가지신 제3위의 하나님이심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2) 성령은 누구인가? - 약속하신 보혜사

요한복음 14장 16절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한복음 14장 18절 -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성령님은 예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이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육체로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과 동등이셨던 예수께서 우리 죄인들과 함께 살면서 가르치시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보여 주시며, 또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제물이 되시기 위해 사람의 육신을 취하시고 이 땅에 임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예수께서 모든 사업을 다 이루신 후 다시 하늘로 승천하시게 되었다. 이러한 시점에, 예수께서는 그분 없이 홀로 남겨지는 제자들을 위하여 놀랍고도 위대한 한가지 선물을 약속해 주셨다. 그것은 예수님 대신 그들을 가르치고, 인도하고, 함께 계실 보혜사 성령이었던 것이다.

"보혜사"란 말은 영어로 "Comforter"(위로자)이다. 헬라어로는 "파라클레토스", 즉 "곁에 있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육신을 쓰시고 임하신 예수께서는 그들과 항상 어느 곳에서나 동시에 같이 계실 수가 없으셨고, 또한 이제는 하늘로 다시 돌아가시기 때문에 그들을 직접적으로 돌보거나 가르치실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을 그들에게 보내 주심으로써, 그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들 각자 한 사람 한 사람과 언제나 함께 계시겠다는 놀라운 약속을 주신 것이었다.

예수께서 하늘로 다시 돌아가셨지만, 주님의 약속대로 그들은 홀로 버려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욱더 놀라운 영적 체험과 주의 영의 인도를 받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요 16:7). 이 약속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약속이다. 성령에 대한 약속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선물 가운데서 가장 크고 좋은 선물이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보혜사 성령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세상에 계시지 않아도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 14:19,20).

신앙 3부 - 성령의 역사와 성령을 받는다는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았다거나 성령에 사로잡혔다는 표현을 잘 사용한다. 또 성령이 임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표현도 쓴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는다는 말이 과연 무슨 말이며, 성령의 역사란 무엇인가? 만일 당신이 성령을 받았다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령에 대한 문제는 기독교회 역사에 있어서 항상 토론과 이견의 주제가 되어 왔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성령의 역사를 마치 능력을 주고 기적을 베풀며 환희의 경험을 가져다주는 매개체로서만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므로 진정한 성령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성령을 받는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 성령을 받는다는 진정한 의미와 성령의 참된 역사는 무엇인가?

1)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17절 -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한복음 14장 26절 -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6장 13절 -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성령을 받았다는 진정한 의미와 성령의 역사의 첫 단계는 진리를 깨닫는 일이다. 성령은 진리를 찾게 하시고, 알아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다. 진리가 올 때 진리를 알아보고,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크게 역사 하신 증거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받는 것을 마치 황홀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으로만 착각하고 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진리를 알지 못하고, 정확한 진리와 말씀의 기초 위에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짓 영의 역사에 빠지고 기만당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진리에 관심이 없고, 진리가 올 때 알아보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지도 못하며, 진리에 굴복하고 순종하기를 거절하는가! 그것은 성령의 역사를 거절하는 것과 같다.

성령은 예수께서 가르치고 말씀하신 모든 진리를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는 일을 하신다고 성경은 말한다.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를 갈급하면서도 성령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알지 못해서이다. 성령이 역사 하는 사람은 온전히 진리를 찾을 때까지 마음에 만족이 없고, 진리를 갈급한 심령이 계속 지속한다. 그러다가 진리를 만나게 되면 기쁨으로 진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성령께서는 사람이 진리를 찾기 위하여 성경을 읽을 때나 말씀을 연구할 때 마음속에 역사 하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시며, 우연한 책자나 어떤 계기를 통해 진리를 발견하게 하신다. 그리고 무엇이 진리인지 마음속에 감동하셔서 알려주신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진리를 분별하고 식별할 수 있다.

진리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진리는 사람의 생각을 쪼개어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는 것을 잘라낸다. 진리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오랫동안 믿어온 전통을 지적한다. 그리고 오직 성경만이 그 진리를 변호하게 한다. 진리는 영적인 경험이 성경 위에 기초한 올바른 것이 되도록 인도한다. 진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생각을 교정한다. 진리를 알 때에, 진리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렇게 될 때에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위대한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이며, 진리를 깨닫고 진리대로 사는 것이 성령을 받은 증거가 된다.

2) 거듭나는 역사를 체험한다

1. 거듭남을 이루시는 성령의 역사

많은 사람이 어떤 뜨거운 감정이나 느낌이 들게 되거나, 이적을 행하고 눈에 보이는 기적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눈에 보이는 어떤 뚜렷한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성령의 역사는 언제 활동을 해서 언제 변화를 수반했는지 가늠할 수 없는, 잔잔한 바람처럼 조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을 받은 증거는 거듭남이다. 사람이 거듭나서 새사람이 되는 것은 성령의 큰 역사이며, 성령을 받은 진정한 증거이다. 예수께서는 성령의 역사를 거듭나는 것이라고 직접적으로 설명하셨다.

 요한복음 3장 5~8절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성령의 역사는 병을 고치는 치유의 은사라기보다, 뜻 모를 방언이 터져 나오고 어떤 흥분된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라기보다, 진리를 알고 진리에 의해 거듭나는 것이다. 사람이 죄를 깨닫고 옛 생애를 버리며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은 성령이 역사 하신 결과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변화, 이 일은 아마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일일 것이다. 이 세상에 사람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사람의 마음과 동기를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돈도 권력도 아니요, 명예나 인정도 아니다. 어떤 외부의 강압적인 힘이나 물리적인 힘도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다. 좋아하던 것이 싫어지고, 즐기던 것이 흥미가 없어지게 되고, 흥미 없던 것이 재미있게 되는 변화, 미워하던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증오하던 사람을 용서하게 되며, 마음에 품었던 죄악적인 생각이 끊어지고, 세상의 욕심과 세속적인 욕망이 없어지는 변화, 이런 변화는 오직 성령께서만이 가져오실 수 있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큰 증거 중의 하나는 거듭나는 것이다.

2. 살아있는 말씀으로 거듭남

 베드로후서 1장 23절 -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요한복음 6장 63절 -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런데 성경은 사람이 거듭날 때 무엇으로 거듭난다고 말하고 있는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다고 기록하고 있다. 곧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과 말씀으로 거듭난다는 말은 같은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가진 씨이다.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난다. 이 거듭남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받아들인 결과이다.

예수님이 들려주셨던 열 처녀의 비유에 보면,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에 기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등잔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기름은 성령을 상징한다. 기름이 없으면 등잔이 빛을 낼 수 없듯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매일 읽는다 해도,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그 진리의 말씀이 뜻하는 바를 깨달을 수 없고, 진리로 변화될 수 없고, 진리의 능력을 받을 수도 없다. 즉, 성령이 역사 하지 않으면 말씀이 마음속에 들어와 그 사람을 온전히 거듭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매일 성경을 옆에 끼고 다니며 읽어도 그 속에 있는 참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진리로 완전히 변화되고 거듭나는 경험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말씀이 인간 속에서 역사 하여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일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3) 지속적인 변화가 계속된다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이 예전과 똑같은 생활을 살며, 다시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이전의 취미와 성향과 삶의 방향이 그대로 남아 있고, 똑같은 삶의 패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목격하는가? 왜 성령을 받았다면 그 능력과 파워가 지속하지 못하는가? 왜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반대하고, 하나님의 계명과 뜻대로 살지 않고 자신의 혈기와 욕심 그대로 사는가? 여기에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딜레마가 있다.

성령을 받는다는 의미는 매일 매 순간 성령의 역사 속에서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엄청난 사건이나 전격적인 변화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언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모를 정도로 잔잔하게 경험하는 조용한 역사인 경우가 더 많다. 매일의 생활 속에서 죄를 깨닫고, 죄를 회개하고, 또다시 그 죄를 지을 마음이 없게 만들어 주시는 것, 그리하여 주님과의 긴밀한 동행 속에서 승리하는 거룩한 생활을 살게 하는 것, 이런 경험이 더 확실한 성령의 역사이며 성령을 받은 증거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받는 뜨거운 경험을 했다고 하지만, 방언의 은사가 터지고, 치유의 은사를 받고, 구원을 받는 경험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생애에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잠깐 회개한 듯하지만, 다시 과거의 똑같은 생활로 돌아가며, 생애에는 열매가 맺히지 않고, 성품이 전혀 예수님을 닮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만일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진리대로 살지 않고, 변화되지 않은 과거의 똑같은 습관과 생활을 산다면 그것이 무슨 성령을 받은 것이겠는가?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깨닫고, 매일 점점 더 깊어지는 회개를 하는 것이 진정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가 된다. 성령께서는 매일 우리의 죄를 보여 주시며, 죄의 악함과 결과를 체험하게 하셔서 죄를 미워하게 하시고, 그 죄들을 버리게 하신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죄를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회개할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보혈이 효력이 있도록 개개인에게 역사 하시며, 우리를 십자가 밑으로 데려가 우리의 죄 때문에 귀한 생명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게 하며, 자신의 지은 죄 때문에 애통하며 울게 하신다. 죄에 대하여 슬퍼하는 마음, 죄를 미워하며, 죄의 악함과 죄의 결과를 보고 다시는 죄를 짓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갖게 하시는 것, 그리하여 찾아온 변화가 지속적이 되게 하는 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며, 이런 경험을 갖는 것이 진정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다시는 과거의 경험으로,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능력을 주며, 죄의 세력으로부터 막아주는 것이 진정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이다.

신앙 2부 - 이런 사람이 성령을 받은 사람일까요?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받기를 원하고 있지만, 사실 성령의 진정한 역사와 그에 따르는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성령을 받고 체험하면, 거기에는 엄청난 변화와 개혁과 뒤바뀜과 흔들림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버릴 것이 생기고, 고칠 것이 생기며, 바꿀 것이 생기기 때문이다. 표면상으로 성령을 받기 원하거나,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성령을 받지 않기를 원하거나,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일 수 있다. 다음의 사람들은 성령을 받았다고 아무리 주장을 해도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의 특징을 보이는 유형의 사람들이다. 혹시 내가 이런 사람은 아닌지 진단해 보자.

이런 사람을 보셨습니까?

첫째,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신자

교회를 열심히 다닙니다. 그리고 종교를 매우 즐깁니다. 교회를 다니는 목적은 신앙생활을 하기보다는 종교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교회는 문화적 가치가 있기 때문에 선호합니다. 교회의 봉사 활동이나 지역을 위한 특별 활동을 좋아하며 적극적으로 지원합니다. 사교 생활을 하기에는 교회가 안성맞춤이고, 종교는 여러 가지 필요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또한,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교회만큼 적당한 곳이 없으므로 좋아합니다.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고 적당히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 교회의 전통을 따르며 사는 것보다 편안한 것이 없기 때문에 교회를 좋아합니다. 대내외적으로 교회를 다니면 훌륭한 크리스천, 도덕적인 사람, 평판이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종교나 신앙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종교와 삶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주말이면 말쑥한 차림으로 종교를 걸치고 교회에 가지만, 주중이나 집에서는 불편하기 때문에, 평일에는 종교를 선반 위에 올려놓습니다. 종교는 자신의 비즈니스를 위해, 사업을 위해, 자녀 교육을 위한 정보 교환을 위해, 세속적인 축복을 받기 위해 매우 중요한 것이 됩니다. 자신의 자녀가 교회의 문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교회에서의 취미 활동과 자녀 교육 강좌는 매우 흥미로운 것이 됩니다. 그러나 영적 성장에 관심이 있는 하나님의 거듭난 성도들 속에 있으면 불편을 느낍니다. 성령의 체험을 갈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회중과 함께 성령 부흥회에 참석하고 또 자신도 성령을 받았다고 말은 합니다.

❖ 그러나 종교가 진정한 신앙이 되어 삶에 파고들지 않는 한,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진정한 변화가 삶에서 일어나지 않는 한, 이런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적인 일들에 무관심한 채, 자신의 권력을 교회에서 장악하고 소수의 뜨거운 신자들을 몰아내는 일들을 벌이기 쉽습니다.

둘째, 안일한 신자

예수를 믿고, 구원에 대하여 알고, 주님을 섬긴다고 말합니다. 천국을 향해 가고 있다고 말을 하며, 구원받았다고, 또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교회에서 요구하는 사항들을 잘 지키며, 교회의 전통을 잘 따르고, 목사님이나 지도자의 말은 성경의 기준에 비추어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순종합니다. 교회 활동에도 잘 참여하고, 교회의 행사에도 자원하여 일합니다. 그러나 신앙 때문에 불편해지거나 전격적인 변화가 오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자신의 계획이나 자신이 추구하는 멋진 일들을 방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주님 뜻대로 살겠다고 말은 하지만, 자신의 욕심으로 세운 계획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절대로 바꾸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한 큰 희생이나 혁명적인 변화보다는, 자신의 뜻과 의지를 주님의 뜻에 굴복하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보다는, 적당히 믿고, 적당히 사는 안일한 뜨뜻미지근한 상태의 신자입니다. 새로운 변화 적극적인 개혁은 불필요하거나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며, 진정한 변화와 거듭남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냥 그대로 편안하게 교회의 일원이 되어 다니는 그 상태로 만족합니다. 교회가 주는 축복이나 복을 원하지만, 자신의 뜻과 욕심을 버리는 극기와 인내와 헌신에서는 멀리 있습니다.

❖ 아무리 교회를 잘 다니고, 교회를 받들고 있다 해도, 교회에 내리는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다 해도, 이런 안일한 신자는 성령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차든지 덥든지 하라고 충고하십니다. 뜨거운 신자, 전격적인 변화와 거듭남을 소유한 신자가 되지 않으면 성령의 역사에서 멀리 있는 것입니다.

셋째, 재미를 추구하는 신자

기독교는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재미가 교회 안에 다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연예오락, 세상에서 듣는 음악의 장르, 춤, 심지어 연극이나 드라마도 교회에 다 실재하기 때문에 집에 따분하게 있는 것보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사람들에게 곧잘, "당신이 예수님을 섬기면서도 원하는 모든 재미는 다 누릴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기쁘게 하자는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라고 반문합니다. 축제예배 형식에 신이 납니다. 교회 안에서 연주되는 빠른 템포의 음악과 감정을 자극하는 낭만적인 분위기의 노래들은 늘 감각을 만족하게 해주고 감정을 고조시켜, 교회에 가면 세상의 근심을 다 잊고 한바탕 취한 듯 신 나게 예배를 보고 돌아옵니다. 그러나 간절한 기도 생활이나 성경 말씀을 읽거나 연구하는 일은 너무 심각해서 별로 관심이 없고, 재미있는 코미디가 섞인, 길지 않은 목사님의 설교면 충분합니다. 양심을 일깨우거나, 죄를 깨우쳐주거나, 회개하도록 촉구하는 설교는 흥미가 없을 뿐 더러 교회를 다니는 재미를 앗아가기 때문에 선호하지 않습니다.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교회에 가서 스트레스를 깨끗하게 날려 버리고 교인들과 친교를 즐기는 일이 좋을 뿐입니다. 손을 흔들거나 울리는 드럼과 악기에 맞추어 손뼉 치며 노래를 부르면 마치 성령이 하늘에서 임한 듯 취하게 됩니다. 정말 교회는 신이 나는 곳이 됩니다.

❖ 기독교적 연예오락이 하나님의 경건한 예배와 일들을 몰아내고 대신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여러 교회에서 급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진정한 성령의 역사를 대신하기 위해 투입된 축제 예배 형식과 감정적인 음악과 오락적인 교회의 프로그램을, 죄의 깨달음과 회개와 경건한 예배보다 더 즐기는 유형의 사람은 성령을 받음과는 거리가 먼 곳에 있는 사람입니다.

넷째, 감정과 거짓 흥분에 치우치는 신자

기도회란 기도회는 다 쫓아다닙니다. 금식 기도도 잘합니다. 수련회나 대 부흥회는 빠지지 않고 다닙니다. 치유 은사와 안수 기도와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현상들을 선망합니다. 진리 안에 존재하는 참된 행복과 만족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헛된 감정적 환희를 추구하며, 기적을 통하여 생긴 뜨겁고 황홀한 감정 상태가 조금만 식었다고 느껴지면 불안해서 인위적으로 뜨거운 감정을 자아내려고 애씁니다. 신앙은 매우 감정적입니다. 진리나 올바른 복음에는 관심이 전혀 없고, 그 대신 초자연적인 현상과 기적을 통해 성령을 받고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했다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에 맹목적인 거짓 구원의 기만에 빠져 있습니다.
감정이 고조되어야 믿음이 향상되었다고 생각하므로 매우 격정적인 신앙생활이나 예배 형태를 좋아합니다. 옆의 성도들이나 지도자들이 죄 되고 이기적인 생애를 살면서도 각종 기적과 거짓 은사를 행사하는 것을 보고, 회개나 고백이나 새롭게 변화되는 일들에는 관심을 쏟기보다는 자신도 영적인 능력과 파워를 갖게 되기를 갈망합니다. 초자연적인 어떤 현상을 경험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정하신다는 거짓 확신 속에서 기뻐합니다. 항상 자신이 경험했던 감정적 느낌과 황홀함을 얻으려고 크게 소리 내 기도하거나 기적을 간구하지만, 그들의 생애를 이끌어 가는 원칙은 변화되지 않으며, 새롭게 거듭난 생애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감정이 잘 살아나지 않아 냉랭한 상태에서 절망과 깊은 낙담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럴수록 점점 더 큰 기적과 더 강한 감정을 추구해보지만, 생애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잔잔한 평화와 화평이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 아무리 강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고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해도, 초자연적인 현상에만 집중하고 진리에 굳게 서지 못한 채 감정적인 신앙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능력과 파워에만 관심이 있지, 진정으로 역사 하시는 성령의 일 - 죄를 깨닫고 자복하는 일, 회개하고 심령이 새로워지는 일, 거듭나는 일, 진리를 깨닫고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성화 되어 가는 일 등 - 에는 관심이 없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성령과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다섯째, 영적이지만 교만과 아집을 버리지 않는 사람

매우 영적입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영성이 있다는 집회들에 참석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영적 자만심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자신이 최고의 신자이며 자신이 최고의 영적인 수준에 올라 있다고 믿습니다. 성경 지식도 있고, 교회 내에서 존경도 많이 받고 있지만, 성품이나 생활 면에서 예수님의 온유하신 성품이 나타나지 않거나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매우 이상한 사실은, 자신이 알고 있던 기존의 사고방식이나 어떤 지식이나 고정 관념을 버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인 꼭 닫힌 마음의 상태를 가지고 있어서, 참된 진리가 올 때에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진리를 반박합니다. 자신이 믿고 신봉하던 교리나 신조가 성경의 올바른 진리와 맞지 않음을 분명히 알게 되어도 가지고 있던 아집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통해 성령께서 마음속에 뚜렷한 음성을 들려주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집이나 편견을 버리지 않고 참된 복음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또한, 때로 가지고 있는 영적 교만이 옆의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교회 내의 평판과 존경이 삶의 최대의 추구하는 목표이자 기쁨이며, 자신의 자리를 박탈하거나 흔드는 사람이 있으면 용납하지 못하며, 타 종교나 교리에 대해 지나친 과민 반응을 보이거나, 자신이 알고 있는 짧은 지식과 맞지 않는 모든 것은 다 이단으로 정죄합니다. 누구보다 성령의 은사를 많이 받았다고 자부하며 성령 충만한 생애를 산다고 주장하지만, 진리의 성령께서는 그 교만과 아집을 뚫고 일하시기 매우 어렵습니다.

❖ 진리가 올 때 마음을 열어 환영하지 않는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를 환영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을 받고 마음이 부드럽게 열린 사람들의 생애에는 예수님과 같은 성품의 열매가 맺히고, 쓸데없는 아집이나 고집으로 진리를 배척하거나 성령의 역사를 거절하지 않습니다.

신앙 1부 - 정말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등이 뜨끈뜨끈 했습니다!

눈앞에서 파란 불이 번쩍번쩍했어요!

가슴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나와서
    나의 온몸을 사로잡는 듯했습니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나도 모르게 방언이 터져 나왔습니다!

병이 나은 것 같고 기분이 좋아져서
    나도 모르게 바닥에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위의 말들은 심령 대 부흥집회, 또는 기도회나 수련원에서 금식 기도를 하는 중에 성령체험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흔히 나오는 말이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찾아 헤맨다. 빠짐없이 참석하는 예배로도, 매 주일 듣는 목사님의 설교로도, 금식 기도와 선교 활동과 헌신적인 교회 활동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영적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또는 자신의 신앙 척도를 가늠해 보기 위해, 또는 병 낫는 기적과 이적을 경험하기 위해, 혹은 더 열렬한 믿음이 생길까 하여 성령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서 곧잘 다음과 같은 갈등의 말들이 튀어나온다.
대 부흥회에 참석하여 뜨겁게 성령을 체험하고 돌아온 날이었어요. 가슴에서 뜨거운 불도 나오고, 이 세상을 잊은 듯한 황홀한 느낌도 느꼈고, 목이 쉬도록 찬송도 불렀지요. 얼마나 신이 나던지...근데 문제는 집에 돌아와서였어요. 똑같았어요! 변한 것이 없이 똑같은 감정, 똑같은 생각, 똑같은 마음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었어요. 예전의 미워하던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전 기억이 되살아나며 분노와 증오심이 다시 끓어 오르는 것이었어요. 분명히 조금 전에 성령을 체험했는데, 성령을 받았는데, 왜 나는 변하지 않았을까요? 왜 똑같은 것일까요?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거죠? 다시 허전함이 몰려옵니다.
계속 떠오르는 질문
많은 교인이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성령으로 구원함을 받았으므로 한 번 얻은 이 구원은 영원하며, 한 번 성령의 부으심을 받았으니 이제 축복받으며 잘살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교회에 가서 손뼉 치며 찬송을 부르고 요란한 통성 기도와 쿵작거리는 성가 연주 속에서 뜨거운 성령을 받는 예배를 드렸으니 신앙생활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며 만족해한다.
그러나 때때로 문득 마음에 떠오르는 정직한 질문에는 대답할 말을 잃는다. 내가 정말 성령을 받은 것일까? 정말 구원을 받은 것일까? 왜 교회에 가면 되는 것 같은데, 집에만 오면 옛날과 똑같은 생활이 반복되는 것일까? 왜 아직도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그대로 존재하고, 왜 아직도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할 수 없으며, 왜 아직도 세상의 자랑과 과시하고 싶은 욕망과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가득한 것일까? 왜 아직도 세속적인 일들이 그렇게 재미있는 것일까? 왜 그렇게 황홀하게 느껴지던 감정이 지속하지 않는 것일까? 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이렇게 쉽게 사라지는 것일까? 왜 양심의 소리가 아직도 나를 자꾸 나무라고 있는가? 정말 나는 성령을 받은 것인가?
많은 사람이 성령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다. 성령을 받는다는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은 매우 적다. 많은 기독교인이 일반적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것과 성령의 역사를 어떤 기적이나 이적의 현시, 또는 병을 고치는 치유의 은사, 그리고 격정적인 감정의 변화와 흥분, 황홀한 느낌이나 분위기 등을 체험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비단 성령의 뜨거운 느낌과 격렬한 감정을 체험했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도, 일상의 삶으로 돌아왔을 때 또다시 느끼는 신앙적인 갈등과 풀리지 않는 의문과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교인들간의 불화나 교회 분쟁의 문제들을 당면하게 될 때, 다시 갈등에 싸이게 되며 마음속에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정말 성령을 받은 것일까?

창조교실 - 젓 먹이는 물고기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물고기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최근에 포유동물이 아닌 물고기가 새끼에게 젖을 먹인다는 사실이 과학 잡지에 실려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 물고기는 다름이 아닌 "디스커스"라고 불리는 열대어랍니다.

아마존 강이 원산지인 열대어 "디스커스"는 "수족관의 왕"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애호가에게 인기가 높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에야 인공번식에 성공했을 만큼 기르기가 매우 까다로운 물고기이지요. 그런데 이 디스커스라는 열대어는 알에서 깬 새끼에게 자신의 피부 점액을 먹인다고 하는데, 그런데 마치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행동이 실제로 포유동물이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과정에 못지않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국제학술지 "실험생물학 저널" 최신호에 실린 논문에서, 영국 플리머스 대학의 조너던 버클리 박사는 30마리의 디스커스에게 산란을 유도해 부화하는 과정을 단계별로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디스커스 치어(알에서 깬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물고기)는 알에서 깬 첫 사흘 동안은 꼼짝하지 않고 알의 노른자위를 섭취했습니다. 헤엄칠 준비를 마치자 치어들은 떼 지어 어미의 옆구리로 몰려들었습니다. 어미는 암수 모두 피부에서 점액을 배출하는데, 새끼들은 최고 10분 동안 점액을 떼어먹었습니다. 흥미롭게도 가끔 어미는 몸을 뒤채 새끼를 배에서 떼어내고 배우자에게 보내 교대로 점액을 먹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버클리 박사는 "열대어 디스커스 어미가 새끼를 돌보는 행동은 포유류 또는 조류의 행동에 견줄 만한 것들이 많다."라고 말했습니다.

디스커스 열대어 부부는 2주일 동안 열심히 '젖'을 먹인 뒤, 3주일째부터 특이한 행동변화를 보였는데, 그것은 잠깐씩 새끼에게서 벗어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4주가 되면 엄마가 도망 다니고 새끼는 뒤쫓는 현상이 일어난답니다. 그 과정은 포유류와 조류가 젖을 떼는 과정과 아주 흡사하지요. 그렇게 되면 할 수 없이 새끼들은 스스로 먹이를 찾게 됩니다.

연구팀이 분석해 본 결과, 디스커스의 점액에는 다량의 단백질과 항생물질이 들어 있었습니다. 특히 단백질 함량은 3주까지는 짙은 농도를 유지하다가 산란 전 수준으로 떨어졌는데, 이런 변화는 포유류의 젖 성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랍니다. 버클리 박사는 "산란 때 점액의 단백질 함량이 급증하는 것이 포유류처럼 호르몬 조절에 의한 것인지, 또 점액의 분비량도 호르몬의 조절에 의한 것인지 앞으로의 연구과제"라고 밝혔습니다.

물고기도 새끼를 위해 젖을 먹이는데, 여인이 젖 먹는 자식을 잊지 않는 것처럼 나도 너희를 잊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설마 잊으시겠습니까? 젖 먹이는 물고기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사랑을 얼마나 잘 드러내주시는지요!

 

 

건강과 행복 - 화를 다스리는 방법

불황으로 직장을 나와야 하고, 명예 퇴직자들의 숫자가 급증하며, 신용불량자들이 늘어나고, 집값이 급락하며, 사채가 늘어나고 .... 경기 불황으로 인하여 복잡한 한국 사회에 화병 증세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대학생들로부터 장년 및 노인층까지 사회 전체가 화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다. 정신적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상태가 장기간 동안 방치될 때, 호흡이 어려워지고, 식욕감퇴, 불면증, 미열, 계속되는 억울한 감정, 이유 없는 분노, 삶의 허무함, 두통, 어지럼증 등이 화병의 증세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현상들의 복합 증세가 6개월 이상 지속할 때, 화병이 생겼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살아 있는 생물은 물리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에 더욱 큰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과학자들이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에 대한 스트레스 실험을 했다. 서로 마주 보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두 개의 방에 두 그룹의 쥐를 풀어놓은 다음, 2분에 한 번씩 10초 동안 방바닥에 전기가 흐르도록 했다. 한 방은 바닥이 전기가 잘 흐를 수 있도록 했고, 다른 방은 바닥에 고무 절연판을 깔아 놓음으로써 전기가 쥐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고무 절연판을 깔아 놓은 방에 있는 쥐들은 옆 방에 있는 쥐들이 2분에 한 번씩 전기가 흐를 때마다 고통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실험이 진행될수록 고무 절연판이 깔린 방에 있는 쥐들의 움직임이 점점 저하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지치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전기가 흐르는 방에 있는 쥐들이 아니라 고무절연판 위에서 전기 충격을 받지 않는 쥐들이었다.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고통은 없지만 고통당하는 쥐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더 심한 스트레스를 주었기 때문이다.

실험 중간에 정기적으로 각 방에 있는 쥐들의 스트레스 호르몬의 혈중 농도를 검사해 본 결과, 직접적으로 전기충격을 받았던 쥐들의 스트레스 호르몬은 초기 단계에서는 7배까지 치솟았다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반면에 다른 쥐들이 전기 충격을 받는 모습을 지켜본 쥐들은 스트레스 호르몬의 양이 계속해서 상승하여 몇 시간 후에는 전기충격을 받는 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스트레스 호르몬이 생성되었다.

이러한 실험 결과는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우리 몸에서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스트레스로 가장 먼저 손상되는 것은 혈관이다. 특히, 화는 스트레스 중에서도 가장 격렬한 것이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혈관 손상이 관상 동맥에서 일어난다면 심장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어서 심근경색으로 인한 갑작스러운 죽음을 가져올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화병이라고 불리는 분노 증후군은 여러 가지 증세를 동반한다. 주로 머리와 목과 가슴에 나타나는데, 두통, 입 마름, 두근거림, 치밀어오르는 느낌 등을 느끼게 된다. 여성의 나이 4, 50대가 되면, 갱년기에 접어들면서 호르몬의 밸런스가 깨어지는 현상이 생긴다. 이때가 되면 자녀는 청소년기의 반항을 하거나 서서히 부모의 품을 떠나게 된다. 또한, 남편은 사회적으로 가장 바쁘거나 명예퇴직을 하여 경제적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중년의 여성들이 이토록 극심한 스트레스를 잘 처치하지 못할 경우,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가슴이 뛰고, 목이나 가슴에 덩어리 같은 것이 느껴질 만큼 강렬하게 치미는 증세가 나타나게 된다.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오랫동안 억제하면서 효과적으로 처리하지 못할 때 몸과 마음의 질병이 되어 화병이 생기게 된다.

영으로 정신을 치료한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마 11:28). 과거의 경험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리고 현재의 환경이 아무리 절망적이라고 할지라도 자비하신 구주께서는 우리를 감싸주신다. 우리의 슬픔과 근심은 이유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으로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다(애 3:33). 하나님께서 시련과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기 위함이라(히 12:10). 감당하기 심히 어렵고 가혹하게 보이는 시련일지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축복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혹독한 고통이 오히려 우리의 눈을 하늘로 향하게 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인생의 고난은 우리의 성품에서 불순물과 거친 것을 제거해 내는 하나님의 일꾼이다. 이들에 의해서 채석되어 깎이고 끌로 새겨지고 갈리고 다듬어지는 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쓸모없는 물건을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그처럼 신중하고 철저한 작업을 하지 않으신다. 오직 그분의 보석만이 하늘 궁전에서 살 수 있도록 다듬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 못할 슬픔과 아프고 상한 마음으로 짓눌려 있도록 버려두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눈을 들어 당신의 자애로운 모습을 바라보게 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눈물로 앞이 가려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많은 사람 곁에 서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손을 꽉 붙잡길 원하신다.

그분의 마음은 우리의 슬픔과 비애와 시련을 향하여 항상 열려 있다. 어려운 때일수록 우리는 마음을 그분께 바치고 온종일 그분의 자애를 명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할 때, 그분께서는 우리의 영혼이 매일 당하는 슬픔과 어려움에서 벗어나 평화 가운데서 살게 해주실 것이다. 날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팔복을 읽고 명상하라. 그대는 이 세상에서 참된 평화와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2).

시골생활 - 다섯번째 이야기

(이 글은 지난 호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시골에 살면서 시골이 주는 풍요와 평화와 유익을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전에 부모님과 함께 일을 끝내고 호미를 들고 오솔길을 따라 점심을 먹기 위해 집으로 올 때면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신선한 바람과 풀 향기를 느끼며, 또 밭둑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을 만져보고 맑은 강물에 땀을 씻고 집에 와서 밥을 먹으면 정말 꿀맛이었습니다. 때로는 형과 함께 밭둑에 누워서 푸른 하늘에서 움직이는 구름을 쳐다보며 찬송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저희 밭둑에는 오디나무(뽕나무)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오디가 나올 때는 밥을 먹기 전에 오디나무 아래 보자기 같은 것을 깔아 놓고 나무를 흔들어서 떨어지는 오디를 받아서 입술에 물이 들 때까지 실컷 먹곤 했습니다. 추운 지방에서는 고구마와 밀 같은 것을 심을 수 없지요. 그 지방에서 제일 잘되는 것이 있었는데 소(牛) 사료용으로 쓰이는 황옥수수였습니다. 그래서 겨울이 되면 저희는 황옥수수와 밀가루를 주식으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가장 저렴한 가격에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밀가루였습니다. 밀가루로는 주로 수제비나 국수를 했었고, 옥수수는 형과 제가 맷돌에 갈면 체로 쳐서 팥이나 콩을 넣고 반죽하여 떡을 해 먹었습니다. 특히 어머니께서 감자를 썰어 넣고 만들어 주신 국수에 들깨 소금을 섞어 먹으면 정말 맛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저희의 마음을 얼마나 잘 아시는지 한번은 쌀밥을 먹은 지가 오래되어 밥이 먹고 싶었는데, 강 건너편에서 어떤 분이 저를 부르시는 것이었습니다. 강을 건너갔더니 쌀이 담긴 작은 봉지를 제게 건네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쌀 봉지를 집에 가지고 와서 보니, 거기엔 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액의 돈도 들어 있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요!

이런 가운데서도 저희보다 더 힘들게 사시는 분들을 도와주고, 비록 저희도 얻어 온 옷이지만 나눠 입고, 일주일에 하루씩 날을 정하여 집집을 방문하며 기도해 주고, 외로운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말벗이 되어 주고, 어려운 가정을 손을 모아 도와주는 것은 저희에게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둑새골에서 일어난 기적

저희는 그 강가 집에서 "둑새골"이라는 (특별히) 강이 없고 산 중턱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곳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곳은 아주 양지바르며 과일나무들도 골고루 있는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평평한 골짜기가 아니고 산언덕이기 때문에 논이 계단식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논은 너무 좁아서 사람이 삽으로 파서 일구어야 했습니다(너무 작아서 소가 들어갈 수 없으니까). 무엇보다 그 많은 다랑이마다 논둑을 만들려면 참 힘들었습니다. 작은 다랑이까지 다 합치면 모두 41다랑이나 되었으니까요.

이제 소로 논과 밭을 갈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소는 전혀 논과 밭을 갈아 본 일이 없었고 저희 아버지도 쟁기질에 익숙하지 못하셨습니다. 본래 소로 쟁기질을 하려면 잘 길들인 소로만이 할 수 있습니다. 소를 길들이기 위해서는 소의 멍에 뒤에다가 무거운 짐을 달고 며칠씩 연습을 시킨답니다. 며칠씩이나. 그런데 저희는 소를 어떻게 길들여야 되는지도 모르고, 그냥 소에다 멍에를 씌우고 논을 갈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한 번도 멍에를 매보지 못한 소에게 멍에를 씌운 다음, 아버지께서 (소로 논가는 것은 많이 구경해 보신 터이라) 쟁기를 잡고 소모는 흉내를 내셨습니다. "이랴" 하면서&. 그랬더니 그 힘이 넘치는 소가 논둑을 펄쩍펄쩍 내리뛰면서 줄행랑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쟁기를 잡고 소하고 같이 뛰시다가 쟁기는 놓치고 소의 고삐만 잡고서 간신히 소를 정지시켰습니다. 몇 번을 그렇게 소와 씨름하고 나니 얼마나 힘이 빠지고 지쳤겠습니까? (형과 저는 소가 꼬리를 치켜들고 뛰면 멋도 모르고 신이 났었지만). 그래서 아버지는 소를 논 한쪽에 세워 놓고 가족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저희 네 식구는 둘러서서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이고 소를 만드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천사를 보내주셔서 소가 말을 잘 듣고 일을 잘하게 해주시고, 아버지께도 힘과 지혜를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어주실 거야"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시 쟁기를 잡았습니다. 아,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조금 전까지도 아무 곳으로 막 뛰어가던 소가 길을 잘 들인 소처럼 잘 가는 것이었습니다. 오, 과연 누가 그 소를 잘 가게 붙잡아 주었을까요? 전혀 길들이지 않은 소가 논을 잘 갈 수가 있다니! 동네 사람들이 와서 보고는 길 안들인 소가 저 정도로 일을 잘하는 것은 정말 기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진실로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신 표였습니다.

기적!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우리에게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나타내시길 원하시는 주님! 이런 일들은 형과 제게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지울 수 없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이런 것이 실제적인 참 교육이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나타내시며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알려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축복을 얼마나 구하고 있는지요. 우리는 우리의 생애에서 믿음을 행사하고, 성령의 음성에 굴복하므로 우리의 품성이 변화되는 기적을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가정과 영성 - 천사들의 보고서

우리 천사들은 지구에 있는 사람들을 항상 지켜봅니다. 우리가 비상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천사라고 할지라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까이 가서 그들을 보호하고 지켜줄 수 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말 모든 인간에게 접근해서 선한 분위기와 감화를 주고 싶지만, 어떤 사람들은 악한 천사들에 의해서 둘러싸여 완전한 흑암 속에 빠져 있기 때문에 참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한 천사들이 방문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진리를 사랑하고 참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하늘에서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재물과 금과 은을 얻기 위해서 인생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영광과 명성을 소유할지는 모르지만 결국 하늘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수많은 군중이 이 세상에서 주는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몰려다니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크게 소리 지르며 서로 떠밀면서 자신보다 약한 자들을 뒤로 제쳐 놓고 있으며, 급히 달려가다가 넘어진 자들을 짓밟았습니다. 많은 사람은 재물의 면류관을 쓰기 위해서 열렬하게 애쓰고 있으며 일단 그것을 잡으면 결코 놓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머리가 하얗게 되는 나이가 되어서도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들의 얼굴은 근심과 염려로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친척들도 돌보지 않았습니다. 도움을 호소하는 눈길이 그들을 향할 때마다 그들은 더욱더 단단하게 그들의 재물을 붙들었는데, 그것은 마치 잠시 방심하는 순간 그들이 조금이라도 재물을 잃어버리거나 친척들과 그것을 나누도록 권유받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의 열망 어린 눈은 지상의 면류관을 자랑스럽게 보면서 돈과 재산을 세고 또 세곤 하였습니다. 재물에 한이 맺힌 가난한 사람들이 부러운 눈으로 부자를 바라보았는데, 강한 자들이 그들보다 약한 자들을 억압하자 그들은 속절없이 뒤로 물러갔습니다.

그러나 장애인, 병든 자, 그리고 나이 든 자들까지도 세상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애를 쓰다가 죽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면류관을 잡자마자 병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세상의 면류관을 붙잡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힘과 정력을 낭비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붙잡음과 동시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면류관을 받기 위해서 애쓰다가 죽은 사람들이 땅을 덮었으나, 많은 사람이 죽어 넘어진 동료의 시체를 짓밟고 앞으로 달려나갔습니다. 지상의 면류관을 쓸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한 자들은 모두 자랑스럽게 서 있었는데, 그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큰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오래오래 전에 하늘에서 매우 많은 숫자의 악한 천사들이 지구로 쫓겨 왔습니다. 그들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 매우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사단이 그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사단과 악한 천사들은 너무나 즐거운 모습으로 이 세상의 면류관을 얻고자 투쟁하고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지상의 면류관을 열렬하게 찾는 자들에게 사단은 특별한 마력의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지상의 면류관을 찾는 사람 중 많은 사람이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며 예배를 드리면서 하늘 면류관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 그 아름다움에 매력을 느낀 것처럼 보였지만, 그 가치와 영광에 대한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늘 면류관을 잡기 위하여 허공을 향하여 한쪽 손을 힘없이 뻗었으나 다른 손으로는 지상의 면류관을 잡기 위하여 힘있게 뻗었습니다. 세상의 면류관을 열렬하게 추구하다가 하늘의 면류관을 시야에서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어둠 가운데 버려졌다는 사실을 모른 채 세상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더듬어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너무도 열렬하게 세상의 면류관을 찾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혐오감을 나타냈습니다. 세상의 면류관을 향하여 나아가다가 위험을 느끼고 돌아서서 하늘 면류관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이 생길 때마다 하늘의 천사들은 급히 날아가서 그들의 길을 인도하였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얼굴은 어둠에서 빛으로, 침울함에서 거룩한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하나님과 진리에 생애를 바친 사람들은 눈을 하늘의 면류관에 굳게 고정시킨 채 곧바른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들이 혼잡한 세상을 물리치고 전진할 때, 하늘의 천사들이 그들에게 다가와 전진할 기회와 틈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늘의 면류관을 향하여 접근해 가는 사람이 나타낼 때마다 하늘의 빛이 어둠을 뚫고서 날아와 그들과 그들 주위를 비추어 주변의 흑암을 몰아냈습니다. 사단과 악한 천사들이 물러나고 선한 천사들이 그들을 에워쌌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면류관에 미련의 눈길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이 그들 생애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19-24).

우리가 알게 된 사실은, 세상의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그처럼 열렬하게 투쟁하고 있던 사람 중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재물의 매력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는 것은 너무나 큰 고통이었습니다.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명예와 돈을 갈망하다가 하늘을 사모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마치 세상 사람처럼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세상에 속한 자들로 간주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받게 될 불멸의 면류관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모든 관심과 열심은 세상에서 면류관을 얻는 일에 쏟아졌습니다. 우리 천사들은 그들을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그들이 너무나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고 수전노와 같이 그들의 소유를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사업이나 하늘의 보화보다 돈을 더 사랑한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일 수도 느끼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머리는 나이 때문에 희어지고 얼굴은 근심으로 주름이 굵게 그어진 노인들까지도 자존심과 재물을 지키기 위해서 처절하게 애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고통이었습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이 무덤을 향하여 가까이 가면서도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주변에 있는 가난한 친척들도 그들로부터 경제적인 혜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재물을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도 사용하지 않았고, 그들 자신을 위해서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위해서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해결해주고 하나님의 사업을 유지해야 할 의무가 그들에게 제시되면, 그들은 근심하였습니다. 그들은 구원과 영생의 선물은 원하지만, 그것 때문에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는 것은 절대 원치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외아들 이삭까지도 아끼지 않았는데....

하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고 날마다 하늘에서 살 수 있는 성품을 이루어가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지상의 재물과 보화를 얻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들에게 하늘에서 얻게 될 보상과 영원한 생명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었지만, 그들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욕심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은 자신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감추인 보화처럼 찾지 않습니다. 진리를 찾기 위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최고로 발휘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빛으로 환하게 빛나야 할 그들의 마음은 복잡하고 어두운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막 4:19). 우리 천사들은 "그러한 자들은 핑계치 못할 것이다."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시대를 위한 엄숙하고 중요한 진리를 이해하고자 열망하지 않으며, 그 진리를 깨닫지 않아도 괜찮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빛은 사라져 버렸고 흑암 속에서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봉사와 수고가 허지로 돌아갈 때마다, 우리의 노력이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이기심과 욕심 때문에 그 결실을 거두지 못할 때마다 천사들의 눈에서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권두언

신비한 존재들 가운데, 성령 하나님의 존재는 참 신비합니다. 어떠한 분이신가도 그러하지만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하는 문제도 참 신비한 부분입니다. 이 문제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가 많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무슨 경험이 성령을 받은 경험입니까?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것을 의미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회개와 거듭남에서부터 인침을 받는 경험까지 모든 면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는 경험은 진리를 이해하고 알게 되는 경험과 항상 함께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로 거룩하게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지요.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감정적인 뜨거움이나, 환상적인 경험, 또는 초자연적인 경험으로 이해해 버리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함정을 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 성령을 소개해주셨을 때에, 그분은 우리에게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해 주시는 분으로 보내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이해를 빼고서는 성령에 대하여 말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 크기에, 여기에서 많은 오해들과 광신들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특히 이 말세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의미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리고 그러한 이해에서 오는 올바른 경험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번 호가 이 이슈에 대하여 여러분들께 큰 도움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편지 - 함께 가시겠습니까?

발걸음을 뗍니다.
아무도 걷지 않은 첫눈 위에 발자국을 내듯
조심스럽게 첫발을 디뎌 봅니다.
어떤 기쁨 어떤 슬픔이, 어떤 희망 어떤 절망이
길목 어귀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주저함 없이 발걸음을 뗍니다.
이해에 남기는 발자국은 올곧고 아름다운 것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함께 가시겠습니까? 
새벽 흰 눈 위에 첫발을 내딛는 행인의 설렘으로 
새 화판 위에 첫 그림을 시작하는 화가의 두근거림으로
펜을 들고 하얀 종이를 펼치는 시인의 떨림으로
생(生)의 첫 장을 여는 이 비장한 시간,
함께 가시겠습니까?

어쩌면 지난해보다 더 힘든 발걸음의 연속이 될지 모르지만, 
발바닥을 찌르는 날카로운 돌멩이 깔끄러운 모래알 발걸음을 더 고되게 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지난해보다 더 거센 바람 맞을지 모르지만,
휘몰아치는 회오리 한가운데서 모진 바람에 떨어야 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지난해보다 더 많은 눈물 흘릴지 모르지만,
눈물샘이 터지는 슬픔의 골짜기 몇 번이나 지나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길에 준비된 시련들은 우리를 보석처럼 빛나게 하여
하늘 궁전을 장식할 잘 연마된 돌이 되게 하고 
시작하는 여정 길 비록 험해도
결국 하늘까지 연결된 길이니까 말입니다.

이 땅의 괴로움 수시로 우리 마음 건드리며 지나가고
이 땅의 외로움 자주 우리 마음 흔들며 지나가며
이 땅의 얽힌 일 때로 우리 마음 번거롭게 훑을 것이지만,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계 3:8) 하시며
열린 문으로 틈틈이 빛나는 얼굴 보여주시는 주님  
하늘의 용기, 하늘의 용서, 하늘의 응답, 하늘의 축복 넉넉히
내려 주실 것이기에.          

땅에 살아도 하늘 삶을 살아 이 땅이 하늘이 되고, 
땅엣 것을 보아도 하늘 풍경만 눈에 닿아 이 땅이 하늘이 되고,
땅의 소리 들어도 하늘 음악만 들려 이 땅이 하늘이 되는 신비한
비밀
가는 길에 촘촘히 열린 열매처럼 가지에 널려 있기에.
그 비밀 우리 발길 향기롭게 하고, 그 열매 우리 입에 달콤하게
녹을 것이기에. 

그래서 감히 물을 수 있습니다.
험한 길 첫 발자국을 떼며
함께 가시겠습니까?라고...

함께 가시겠습니까?
버리고 또 버려야 하는 험한 길이지만, 
비우고 또 비워야 하는 혹독한 길이지만,
죽고 또 죽어야 하는 힘든 길이지만,
피묻은 길
흰 옷자락 날리며 힘차게 걸어가신 주님의 뒤를 따라...

모퉁이를 돌 때마다 보이는 피묻은 손자국
오르는 험한 바위 새겨진 발자국마다 돋아난 핏방울.
그러나 미소 지으며 가신 길이기에
성큼 큰 발자국 떼며 주님 따라나섭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새해, 이렇게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길을...
지고 가야 할 십자가 크고
들고 가야 할 짐 무거워도
주어진 길 잘 가도록
성령의 흰 날개 달아 주실 테니까요.

가다 보면 때로 두 갈래 길을 만날 것입니다.
그리고 선택한 그 길 때문에 더 멀리 돌아가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저리로 가면 만나지 않을 것을 이리로 가서 만나거나,
이 길로 가면 생기지 않을 일이 저 길로 가서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걷다 보면 우리는 알게 됩니다. 
꼭 그 길에서만 얻을 수 있는 축복과
꼭 그 길에서만 배울 수 있는 지혜가
크신 자비의 섭리 아래 어우러져 있는 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길을 우리가 가고 있다는 것을...

쉬지 않고 가다 보면
머지않아 환한 빛이 맞아줄 것입니다. 
고개 너머 멀지 않은 곳에서
벌써 하늘빛이 흘러나오는 듯합니다.

거기
시들지 않는 생명나무 일 년 내내 과일 맺고
그치지 않는 생명수 끝없이 흐르는 곳에서

피곤에 지친 발 담그고
달콤한 열매 입에 넣으며
두고두고 맺힌 한 풀며
천 년이 넘도록 주님과 나눌 이야기들.

지금은 가슴에 조용히 간직하고서 
묵묵히 가야 하는 길

함께 가시겠습니까?
새해 아침
엄숙한 마음으로 생의 첫 페이지를 넘기며
감히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먼 길이라도
아무리 끝없어 보이는 길이라도
타는 듯 그리운 주님 사랑 우리 발걸음 재촉하여
찬란한 시온 성 문에
넉넉히 다다르게 할 것이기에

주저함 없이 첫 발걸음 떼며 묻습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