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시골 이야기 - 일곱번째 이야기

농부의 마음

(이 글은 지난 호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봄은 농촌에서는 가장 바쁜 때이다. 나와 형은 주로 오전에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공부를 했다. 하지만 모심는 철은 예외였다. 아침을 일찍 먹고 못자리에서 모춤을 만들어 논에 던져 놓고 형은 아버지와 한 팀을 이루고 나는 어머니와 한 팀을 이루어 이 쪽 저 쪽을 맡아서 심었다. 때로는 형과 시합이 붙어서 허리 아픈 것도 참고 열심히 했었다. 밀가루반죽 같은 말랑말랑한 진흙을 맨발로 밟고 모를 심다 보면 올챙이도 튀어나오고 거머리에 물리기도 했지만 한 뙤기를 끝내고 모가 일정한 간격으로 심겨진 논을 보면 기분이 참 좋았다. 모를 반듯하게 줄을 맞추어 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줄이 삐뚤어졌을 경우에는 다시 고쳐야 했다. 모를 심어 놓은 것을 보면 각 사람의 성격이 나타나 있다. 모 한 포기를 심어도 바르게 심도록 하는 것도 교육이었다. 모를 다 심고 나면 어머니는 나물콩을 논둑에 심으셨는데 이상하게 밭에 심은 것보다 논둑에 심은 것이 훨씬 잘 되었다. 모를 다 심고 집에 들어갈 때는 논둑에서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머위(잎)를 뜯어다가 쌈을 싸먹었는데 시장기에 쌉쌀한 머위 맛이 더해져 밥을 꿀맛 같게 해주었다. 손님들이 오시면 어린 내가 밥을 어른용으로 한 공기씩 먹어 치우는 것을 보고 놀래곤 하셨다.
모를 심고 나면 백로 같은 큰 새들이 와서 개구리 같은 것을 잡아먹느라고 모를 짓밟기 때문에 모가 뿌리를 잡고 어느 정도 자라기까지는 쉬는 시간에도 여기 저기 둘러보면서 새를 쫓아내야 했다. 그리고 예외 없이 모씨의 사촌인 피씨가 등장한다. 피는 겉모양은 벼와 비슷하지만 열매는 완전히 다르다. 아버지가 여러 번 알려주셔도 처음에는 피와 모를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피는 모와 함께 심어진 것이 많아서 피만 따로 뽑아내려면 허리를 굽혀야 했고 벼 잎사귀에 얼굴과 눈을 찔리기가 쉬웠다. 그리고 가끔 개구리가 발등 위로 올라와 깜짝 놀래어주곤 했다. 여름에 미지근하게 데워진 논에 들어가 땀을 흘리며 잡초를 뽑다 보면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논을 빠져나와 옆의 산속에 들어가 기도하고 마음을 추스르고 쉬었다 나오기도 했다. 피를 뽑아낼 때면 아버지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죄를 뽑아내야 된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다랑이 논을 가지고 있으면 비가 올 때마다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 비가 올 때에 땅이 물렁해지고 두더지나 땅강아지들이 파 놓은 작은 구멍으로 물이 들어가면 논둑이 무너진다. 한번 내려앉은 논둑을 다시 복구하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비가 많이 올 때면 삽을 들고서 논둑을 하나씩 걸어 다니면서 점검을 하고 물고를 터놓았다.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예배 보러 가는 날에 비가 오면 논둑이 터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곤 했는데 예배일에 논둑이 터진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우리 일상생활의 작은 것들에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의논 드리고 부탁하면 우리는 그분의 응답을 보게 될 것이다.
벼에 이삭이 패고 꽃이 필 때에 논둑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농부만이 느낄 수 있는 벼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논둑의 풀을 깎아 주면 마치 이발을 잘한 머리처럼 보기가 좋고 시원하게 느껴진다. 이삭이 여물기 시작할 때면 태풍이 한 두 차례씩 지나가 잘된 벼를 논바닥에 눕혀놓곤 한다. 그러면 농부는 벼 한 포기 한 포기를 일으켜 세워주고 포기끼리 묶어준다. 꺾인 벼를 보는 농부의 마음은 얼마나 아픈지&&.
이삭이 여물어 가면서 논에는 황금물결이 일기 시작한다. 연둣빛 노란색에서 점차 황금색깔로 익어가는 겸손히 고개 숙인 벼 이삭들을 보는 농부의 마음은 흐뭇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찬물이 나는 논 어느 한쪽 구석에 꼿꼿이 서 있는 쭉정이 벼들이 있다. 알맹이가 없이 겉모양만 있기에 쭉정이들은 꼿꼿이 서 있다. 곧 서리가 올 텐데 아직도 여물지 않은 벼들을 보는 농부의 마음은 슬프기까지 하다. 
나는 땀을 흘리면서 일할 수 있음을 인해 감사한다. 또한 농사를 지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게 하심이 감사하다. 우리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을 닮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창조교실 - 수면 중에도 일하는 뇌

우리의 뇌는 정말 바쁘답니다. 우리가 잠자는 동안에도 뇌는 쉬지 못하니 말입니다. 최근 영국 더 타임스지에는 수면 중 뇌가 활동한다는 과학적 연구 기사가 실렸습니다.  
깨어 있는 동안 당신의 뇌는 깊은 생각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업무와 자잘한 문제, 또는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순간뿐 아니라, TV를 보거나 컴퓨터를 하는 동안에도 손가락을 움직여서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리게 하는 명령들을 뇌가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뇌가 쉬면서 하루 동안의 생각들에 숙고하는 유일한 때는 수면 시간뿐입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뇌에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새로운 사고방식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뇌가 또 다른 일을 시작하기 때문이지요. 수면을 취하는 동안 뇌는 특별히 관련이 없어 보이는 정보들을 연결합니다. 그리고 정보의 위치를 바꾸고 새로운 연관을 만들어내지요. 
잠자는 사이 인생과 역사를 바꿀만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버클리 수면 연구원 매튜 워커는 그런 뇌의 활동이 창의성을 낳는다고 강조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서로 들어맞지 않는 아이디어와 사건과 기억들을 연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창의성의 기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입니다.
이런 사실은 연구로 확인되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잠이 든 사람의 뇌(특히 꿈을 꾸는 동안)를 스캔해 본 결과, 뇌의 감정 영역은 과도하게 활성화되고 논리 영역의 스위치는 꺼지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이것은 왜 꿈에 논리에 맞지 않는 이야기들이 등장하는지 해명해 줄 뿐 아니라, 뇌가 이질적 정보를 하나로 묶어내는 방식도 보여줍니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러셀 포스터 교수(신경과학)는 수면 부족은 창의성을 죽이며, 숙면은 문제의 새로운 해결책을 낳을 가능성을 크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도저히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에 대해 생각한 후 잠을 청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얻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합니다.  
잠을 자는 동안 뇌는 그날의 경험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기억들을 통합하고,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전환합니다. 그래서 뇌의 한 부분에 잘 저장합니다. 그러므로 수면이 부족하면 기억력도 약해지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뇌는 작업 기억에도 영향을 미치므로, 전화번호나 위치나 방향을 기억하기 어렵다면 7시간 정도 숙면을 취해야 합니다. 수면 부족은 정서적 불안정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수면을 통해 정서 또는 감정의 회로가 새롭게 활성화됩니다. 잠을 자고 나면 정서적 도전에 맞설 힘이 생겨나지요. y

바이블맨에게 묻는다 - 성령 받은 증거는 무엇인가요?

    내가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하여 분명한 답변을 줍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행 5:32)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21)라고 말씀하셨고, 같은 장 23절에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순종하는 자들에게 임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계명들을 순종하고 그분의 뜻에 순복하는 것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령과 감정의 문제

성령을 받는 사람들의 느낌과 감정이 모두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 받은 증거로써 감정의 극치를 기대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다음과 같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 3:8) 우리는 바람을 보지 못하지만 바람이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이 마음에 역사할 때에 그것을 볼 수 없지만, 그분의 능력은 조용한 가운데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 줍니다. 비록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보거나 만지지는 못할지라도, 그분께서 해놓으신 결과를 볼 수는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변화된다면, 우리의 생애가 성령의 임재하심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에 의존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임재하심은 오직 변화된 생애를 통해서만 분명하게 확증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온전히 자신을 비우고 마음 속의 우상과 죄를 버린다면,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충만하게 채우실 것입니다. 오직 이러한 사람들만이 성령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데,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에 대해서 자랑치 아니할 것이며, 오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심이라.(고린도전서 2:10, 12)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받았을 때에, 우리는 어떤 황홀하고 자극적인 느낌을 얻기 보다는, 오히려 침착함과 예리한 판단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생애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서와 생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처럼 성령이 충만하였던 사람이 있습니까? 그분의 생애는 감정적 환희와 흥분으로 차있는 생애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고뇌와 희생으로 점철된 생애였습니다. 그리스도께 있어서 성령 충만함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조용하면서도 진지하게 행하는 순종의 삶으로 표시되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이성적인 분별력과 하나님의 진리가 감정과 느낌을 지배해야 합니다. 진리는 건전한 상식 위에 세워지며, 질서 있는 가정생활을 통하여 다른 영혼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어두운 감정과 느낌을 극복하는 방법 

마음의 거룩함과 생애의 순결을 위하여 애쓰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괴로움과 낙담 중에 방황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살펴 보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우울한 신앙 생활을 하게 됩니다. 참된 믿음이 가지고 있는 단순함 이상을 추구하기 때문에 마음 가운데 커다란 흑암을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로부터 돌려서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단순한 마음으로 믿어야만 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을 신뢰하여야 합니다. 
때때로 흑암과 낙담이 영혼을 엄습하여 우리 자신을 압도하려고 할 것이지만,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마음 속의 감정이 어떻게 변화되든지 간에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면서 하나님 안에서의 쉼을 얻어야 합니다.

신앙 5부 - 남은 무리, 홀로 서는 사람들의 사명

왜하나님께서는 남은 자손을 가지고 계시며, 왜 마지막 시대에 남은 자손들이 필요한 것일까? 그들의 사명은 무엇인가? 지금 하늘의 우주 법정에는 우주 역사상 가장 중요한 소송 사건이 진행되고 있다. 그것은 사단이 하나님의 법과 성품에 대하여 고소를 한 사건이다. 그는 고소하기를, 하나님의 법은 불공평하고 결함이 있기 때문에 우주의 행복을 위해서 그 법을 변경해야 한다. 하나님은 지킬 수 없는 법을 피조물에게 강요하므로 인간은 그 법을 지킬 수 없다라고 한다. 
이러한 사단의 고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늘 거민들과 온 세계 앞에 하나님의 계명은 우주의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공평한 법이며, 또한 그 법은 피조물이 지킬 수 있는 법이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일은 하나님 혼자서는 해결하실 수 없는 일이며 반드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일단의 무리가 생기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서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이 되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악한 환경 가운데서, 또한 그렇게 연약해진 죄의 육신을 쓰시고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심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때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사단의 고소를 침묵시키기 위해서는 예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법은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증인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그 사명은 마지막 남은 무리가 이루어야 할 사명이다.    

마지막 남은 무리의 등장

그렇다면 과연 온 우주에 하나님의 입장을 변호하며 하나님의 법은 인간이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증인들이 나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성경에는 마지막 선과 악의 대 쟁투에서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 사단과 싸워 마침내 승리할 마지막 무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14:12). 그들은 이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있으며(계7:2~3), 또 이마에 어린 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으며(계14:1),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으며, 사람 가운데 구속을 받아 시온 산에서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사람들(계14:1~5)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람들의 이마에는 하나님의 인, 즉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의미는 이 남은 무리는 마음속에 하나님의 성품이 새겨져 있는 사람들이며,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어 있는 거듭난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남은 자손인 하나님의 참 자녀들은,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또 그들의 죄가 사랑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죄가 얼마나 악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싶지 않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고 회개한 사람들이다. 또한, 하나님의 성령이 마음속에 계속 내재하시므로 그 생애에서 죄를 그치는 사람들이다. 아니 적어도 마음속에 알고 있는 죄를 버리지 않고 고집하거나 고의로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고 주님의 피로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실 뿐만 아니라, 능력을 주셔서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을 믿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욥과 같이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입을 열어 범죄하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환란, 즉 개국 이래로 없던 마지막 큰 환란을 지날 때에도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굴복하고 성령의 충만하심과 능력을 받아 그분의 인도 하심 대로 하나님의 계명을 마음으로부터 온전히 사랑하고 지키는 사람들!...그리하여 선과 악의 대 쟁투에서 하나님께 승리를 가져오며 우주의 법정에서 하나님을 변호할 증인이 될 사람들!...지금 세상의 이곳저곳에서 이런 사람들이 준비되어 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역사의 끝에, 예수님께서 보이신 온전한 성품을 이룬 사람들, 예수의 보혈의 능력으로 죄에서부터 구원받고 회복되어 죄를 승리하는 사람들을 가지실 것이다. 그런 무리를 통하여 드디어 온 우주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자들, 죄인이었다가 회복된 그 인간들을 다시 죄 없는 하늘로 맞아들이기에 안전하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 사명은 아무나 성취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히 반사하는 사람들만이 성취할 수 있다.

남은 무리의 승리

환란이 오고 짐승의 표가 강요될 때, 목숨을 내놓고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는 하나님의 참 백성을 우주는 곧 보게 될 것이다. 그때 드디어 온 우주는, 하나님의 계명을 목숨을 내걸고 순종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을 반사하고, 하나님의 품성과 그분의 율법을 옹호하며, 사단이 틀렸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살아 있는 마지막 세대, 한 충성스러운 성도의 무리를 보게 될 것이다. 마귀가 아무리 유혹하고 위협해도 그들은 그것에 굴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원동력은 자신들의 구원에 대한 집념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좋으신 하나님의 누명을 벗겨 드려서 영원토록 아무런 의심이나 불평 없이, 온 우주가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드리게 하겠다는 거룩한 동기가 그들의 헌신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요한은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서 있고 그와 함께 14만 4천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이마에 받고 같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하늘의 인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반사하는 남은 무리였고 거룩한 자의 빛과 영광으로 충만하였다. 그들은 짐승의 표와 환란을 이기고, 사단의 시험을 이기고 벗어나 하늘 유리 바닷가에 서서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 부르고 있었다. 

홀로 설 사람을 찾습니다!

홀로 설 사람을 찾습니다.  기독교를 휩쓸고 있는 오류와 거짓 반쪽 복음을 과감히 벗어날 용기를 가진 사람을 찾습니다. 한 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거짓 기만의 복음과 거짓 구원의 평안 속에 잠들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더 이상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왜곡된 가르침을 담대하게 떨쳐버릴 사람을 찾습니다. 
새롭게 변화되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타성에 젖어 신앙생활을 하며, 거듭나기를 갈망하지 않는 영적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기 원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홀로 설 사람을 찾습니다.
친구나 교회로부터 고립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영적인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진리의 말씀을 연구하며, 영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무익한 교제를 과감히 끊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을 찾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가 하는 말이나 설교일지라도, 그 말하는 바가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가 베뢰아 사람처럼 신중하게 연구하는 지혜로운 사람을 찾습니다. 
홀로 설 사람을 찾습니다.
교회나 단체를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산 연결을 맺고, 말씀과 진리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소속되는 것이 참 교회이며 하나님의 참 자녀라는 것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홀로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을 찾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아무도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아무도 붙들어 줄 수 없습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로 성화 되는 경험을 한 사람들, 하나님을 아는 경험을 충만하게 하고, 하나님과 긴밀하고 깊은 개인적인 관계를 맺은 사람들만이 두려움 없이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온갖 종류의 거짓 가르침들이 난무하는 가운데서, 똑바른 진리를 알고, 그 진리의 말씀이 지적하는 모든 것을 순종하는 사람, 버릴 것은 버리고, 자를 것은 과감하게 자르는 사람, 이 세상의 어떤 세력도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빼앗아 갈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마지막 하나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홀로 설 사람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권위 밖에는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인간의 권위나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위해 굳게 설 사람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생명까지 바치며 충성할 사람을 찾습니다. 
어떤 환란이나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께 욕 돌리기보다는 차라리 죽기를 선택하는 백절불굴의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습니다.

신앙 4부 - 마지막에 등장하는 참 교회, 남은 무리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소수의 무리를 가지고 계셨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예배하고 경배하는 하나님의 참 자녀들은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복음을 전하는 매개체로 쓰임을 받았는데, 하나님께 진정으로 소속된 이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참 교회였다. 가인과 아벨의 시대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참 교회는 셋과 에녹, 노아, 아브라함, 야곱, 모세 순으로 맥이 이어져 왔다. 
앞에서도 강조하였지만, 교회란 무엇인가? 건물인가? 조직인가? 교단인가? 아니다. 교회란, 어떤 조직이나 교단이나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태초에 아담과 하와에게 가르쳐 주셨던 진리, 곧 변하지 않는 영원한 복음을 이해하고 믿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하나님의 참 자녀들이다. 교회는 노아가 전파하였던 진리, 아브라함이 믿었던 진리, 엘리야가 경고하였던 진리, 다니엘과 사도 요한에게 계시되었던 예언,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이 가르쳤던 가르침을 정확하게 보존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 즉 남은 무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참 교회란 참 진리를 보존하고, 그 진리대로 살기 위해서 자신의 생애를 바치는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 

1) 마지막에 나타날 참 교회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등장할 한 무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참 교회로서, 마지막 시대에 벌어질 선과 악의 대 쟁투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를 위해 싸울 용사들이다. 이 사람들은 교회 안에 스며든 바벨론의 거짓된 가르침과 비밀을 폭로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높이고, 하나님의 계명을 변호하며, 바벨론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러내어 하늘에서 내리는 마지막 재앙과 진노를 피하게 할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먼저 바벨론의 습관과 죄악에서 나오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며, 죄를 회개하고 정결하게 함을 받은 사람들이며, 거듭남을 체험하고 그들 생애의 목표와 동기가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갚기 위해 사는 것으로 변해버린 사람들이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성품을 그대로 반영하는 사람들이다.  
성경은 마지막에 사단의 공격 목표가 될 하나님의 참 교회, 즉 참 백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성경은 마지막에 사단이 교회와 싸우려고 한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사단은 바로 하나님의 남은 자손과 최후의 전쟁을 벌이려 한다고 말한다. 성경에 나타난 역사와 초기 그리스도 교회사와 중세기의 역사를 살펴볼 때, 우리는 항상 성경의 진리를 그대로 전수하며 생애 하였던 하나님의 교회, 즉 남은 무리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각 가정에 족보가 있듯이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엄연히 족보가 존재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남은 자손들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진짜 자손들이 있다는 말이다. 그 사람들을 성경은 남은 자손이라고 부르는데, 사단은 그 남은 자손과 최후의 전쟁을 벌이려고 벼르고 있다.

2) 남은 자손의 특징 

1. 계명을 지킨다

성경은 마지막에 사단이 싸우려고 하는 남은 자손의 특징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이 바로 여자의 남은 무리, 하나님의 참된 남은 자손들이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머리로만 믿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을 그들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하게 삼는 사람들이며, 또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만 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따라 사는 자들이다. 참된 믿음은 머리와 입으로만 동의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를 예수님께 복종하고,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 요구하는 바를 순종하는 것이다. 자기의 목숨을 잃어버리게 되는 상황에 부닥치게 될지라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더 높이는 자들, 하나님의 명령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자들, 먹고 사는 일보다 주님의 명령이 더 중요한 자들, 그러한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하나님의 남은 자손들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남은 무리는 구원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또 마음이 새롭게 거듭나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순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며 지키는 변화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똑같은 믿음으로 죄를 승리하는 경험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에 나타나는 참 교회, 남은 무리를 설명하면서 3번이나 반복하여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명령,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라는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2. 예수의 증거를 가졌다

계시록 12장 17절에 보면, 남은 무리는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의 증거란 무엇인가? 우리는 그 대답을 성경 절에서 찾을 수 있다. 요한계시록 1장 1~3절을 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2절과 3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이라는 구절과 이 예언의 말씀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러므로 예수의 증거란 요한이 본 계시, 곧 계시로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또 다른 성경 절을 보자. 요한계시록 19장 10절에는,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위의 성경 구절도 예수의 증거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말해 주고 있는데,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며, 영어로는 spirit of prophecy, 예언의 신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남은 교회의 특징은 예수의 증거인 예언의 말씀, 곧 예언해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들은 예언을 아는 사람들이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예언들을 알고 해석하므로, 마지막에 닥칠 환란과 재앙과 심판을 위해 준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참 교회인 마지막 남은 무리는 사도 요한이 계시록에 기록해 준,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의 교회의 위험과 오류들의 함정에 대하여 잘 알고 있으며, 선지자의 증거들을 잘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예언의 증거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고 보호해 오셨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참 교회는 진리의 배도에서 순결하게 보호함을 받는 교회이며 사람들이다.

3.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다 

남은 무리의 또 다른 특징은 예수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예수 믿음을 지킨다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믿음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으시고 이 땅에 사셨지만,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믿고 의지하시므로 온전히 죄를 승리하는 생애를 사셨다.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셨다. 우리도 우리를 재창조하시고 온전히 변화시키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 믿음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온전한 의를 얻게 된다. 그것을 믿음으로 얻는 의라고 부른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실 때에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으시고도 죄짓지 않는 생애를 사셨다. 그분께서는 생각까지라도 시험에 굴복하시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과 연합되었다. 그분은 늘 성령의 내재 하심으로 사단과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러므로 죄를 승리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또 우리에게 품성의 모본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곧, 인간이 위로부터 능력을 받음으로써 완전한 생애를 살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타락한 인간이 신성과 연합하고 교제할 때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여 준다. 그리고 그분의 완전한 성품은 그분을 따르는 모든 자도 마음과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할 때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과 더불어 연합하고 있는 동안에는 죄는 우리를 주관하지 못할 것이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유혹은 아무런 힘도 갖고 있지 못하다. 사단은 모든 면에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가 없으신 주님의 고결하신 성품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할 수 없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일 때에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 수 있는 능력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진정한 믿음은 우리를 구원해줄 뿐 아니라 실제로 생애에 역사 하는 산 능력이 되어 죄를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본이시다. 또한,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입으시고 경험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어떻게 도와주실지를 잘 알고 계신다. 예수님은 능력이 무한하신 분이시다. 그분이 죄짓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참믿음을 가진 사람이며, 그런 예수 믿음을 가지는 것이 마지막 남은 무리의 특징인 것이다. y

신앙 2부 - 홀로 섰던 사람들

1) 노아

하나님께서 다가오는 홍수에 대해 경고를 주셨던 노아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온 세계는 하나님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분이 주시는 권 면에 개의하지 않았다. 그 당시 모든 교회와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고와 권면들로부터 독립된 채로 남아 있었다. 오직 노아만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여 주님과 협력하여 겸손히 일했다. 노아, 그는 얼마나 고독하고 고립된 듯이 보였는가! 그는 얼마나 독립적이고 독보적인 존재로 보였는가! 그러나 표면적으로 독자적으로 행하는 듯이 보였던 그 한 사람만이, 사실은 하나님께로부터 독립 자행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사단은 노아의 때에, 온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께 반역하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독자적으로 행하는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던 때에 크게 기뻐하였다. 사단은 온 교회와 세상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하나님께 반역하게 하였을 때에 큰 승리를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를 보라!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만 섬기고, 모든 사람이 비웃어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한 노아야말로 세상으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하고 하나님께만 진정으로 소속된 의의 사람이 아니었는가? 그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선 사람이었다.

2) 모세와 이스라엘 총회 

지나간 성경 역사의 기록을 보면 모든 것이 명백하게 보이지만, 우리가 실제로 그런 상황을 당할 때엔 늘 그런 것은 아니다. 항상 대다수가 옳아 보이고, 대다수를 거스르는 것이 틀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눈에 이 일이 어떻게 보이는가 만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충성스러운 사람의 표이다. 마지막 심판의 표상처럼, 하나님께서 불의를 행한 자들에게 심판을 내리셨지만, 그들의 마음에 독립 자행과 불순종의 정신이 너무도 깊게 잠식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즉각적인 처벌도 그들의 반역적인 정신을 뿌리 뽑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잦았다. 이스라엘 총회가 모세를 거스른 사건을 보아서도 그렇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오십 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민 16:2). 오늘날의 총회나 재직 회의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그들의 회를 대표하는 기구가 있었다. 이들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들은 유명한 자들이었으며,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택함을 입은 지도자로 있었다. 이들 백성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민 16:3)라고 항의하였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자신들의 길로 자행하지 않는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었다. 노아처럼 그들이야말로 교회 안에서 홀로 서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하나님 앞에 신실했던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만 충성하고 순종했던 까닭에, 그들의 총회와 교회에서 비난을 받았다. 그 당시 상황에 의하면, 고라와 그의 동역자들이 교회의 대표자였으며, 스스로 다 각각 거룩하다라고 부른 그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 당시 대다수였던 회중 교회는 하나님을 떠나 독자적으로 행한 반면, 독립 자행한다는 비난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하늘 정부에 충성 되고 진실하게 남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대다수에 굴복하지 않는 신실한 소수의 무리, 홀로 서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3) 이스라엘 회중 교회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살펴보자. 모세가 가나안 땅에 열두 명의 정탐꾼들을 보냈을 때, 열 명의 정탐꾼들이 낙담시키는 보고를 가지고 돌아왔다. 백성은 아우성쳤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우리가)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민 14:3, 4).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지도 하심에서 독립하여 스스로 자기들의 좋은 뜻대로 자신들의 지도자를 택하고 자신들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그때 갈렙이 그들에게 권고하였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하나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였(민 14:9, 10)다. 
구약에서 회중이란 말은 신약에서 교회와 같은 말이다. 스데반은 사도행전 7장 38절에서 광야교회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므로 오늘날로 말하자면, 회중 전체란 교회 전체를 가리키는 의미였으며, 이스라엘 회중 교회 전체가 갈렙과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 때문에 그들을 제적시키고 돌로 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런 결정을 한 것은, 다른 이방인의 교회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결정이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이스라엘 회중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떠났다. 그러면 누가 옳았는가? 교회 지도자들로 대표된 열 명의 불충실한 정탐꾼들과 대다수의 청중이 옳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따르고 바른 증언을 한 것 때문에 죽임을 당할 처지에 몰렸던 외로운 두 명이 옳았는가? 갈렙과 여호수아와 소수의 무리는 홀로 서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었다. 

4) 침례 요한 

침례 요한이야말로 홀로 서기를 한 사람의 대표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 앞서 보내심을 받은 자신의 사명을 성취하였는데, 그는 자기의 사업을 시작할 때에 산헤드린의 인가나 교회 지도자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침례 요한의 부르심은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그는 하늘의 권위를 따랐다. 산헤드린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특권과 권위가 자신들의 것인 양 주장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자행자지했으나, 침례 요한은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음으로 그들의 독립 자행에 참여하지 않았다. 요한은 백성에게 어떤 조직이나 혹은 기관에 믿음을 두지 말라. 이는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어 던지울 것이기 때문이라고 가르쳤다. 아무리 그 기관과 단체가 크다 할지라도, 또 아무리 훌륭한 집단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아무리 유능한 개인이나 회중이라 할지라도, 그 기관이나 개인이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로부터 떠날 때에는 찍혀 멸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그 계통이 아브라함에 속하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한은 믿는다고 공언하는 바에 따른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경고하였다. 나무의 가치는 그 나무의 이름보다도 그 나무의 열매로 결정된다. 믿노라고 자칭하는 것만으로는 무가치하다. 만일 생애와 품성이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부합되지 않고, 주님과 산 연결을 맺지 않고 있다면, 그리고 진리를 거절하고 부인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이며,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침례 요한의 두려워할 줄 모르던 용기와 홀로 서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 그 백절불굴의 정신은 마지막 시대에 홀로 서야 할 사람들에게 좋은 모본이 되고 있다.  

5) 예수님

예수님은 홀로 서신 분이시다. 그리고 매우 독자적인 분이셨다. 그러나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산 사람 중에 가장 의존적인 성격의 분이셨다. 그분은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 5:30)라고 말씀하셨으며, 또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하노라)(요 5:30)라고 말씀하시며, 매사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늘 아버지께만 의존하고 사셨다. 그분께서는 그 당시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고 교회의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조화 있게 일하려고 애쓰셨다. 그러나 그는 유년 시대부터 랍비의 규칙에 구애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셨다. 유대의 서기관과 장로들은 예수님이 너무 온순하고 겸손한 까닭에, 그가 자신들의 뜻을 따르고 그들의 교훈의 감화를 쉽게 받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고대의 랍비로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가르침들과 전통, 유전을 받아들이도록 권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가르침의 성경적인 근거를 요구하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업과 뜻에 상치되는 사람이 만든 규칙과 제지들에 굴복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매우 독자적이고 파격적인 사람으로 간주 받으셨다. 
유대 나라의 행정기구였던 산헤드린회는 모든 할 방법을 다하여 그들의 권위로부터의 독립적으로 행하시는 예수님의 행보를 제한시키려고 애썼다. 그분은 산헤드린 회의 앞에 불렸고, 그들은 그분을 설득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성경의 명백한 증언이 없이는 예수님을 설득시킬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과 진리 외에는 행하거나 따르는 분이 아니셨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들은 그분의 영향력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백성을 경고하고 예수님의 진리를 따르는 자들을 출교시켰다(요 9:22 참조). 그러나 비록 그들이 애썼고, 자신들이 성공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뜨리거나 교회로부터 제적시킬 수 없었다. 예수님이 바로 교회이셨고, 그분이 바로 진리이셨으며, 하나님과 하나가 되셔서 사시는 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을 참 교회와 참 진리 되신 분으로부터 제적시키고 말았다. 
예수님은 진정한 독립을 이해하는 분이셨다. 하나님을 떠나 독자적으로 죄악적인 일을 행하던 유대 나라의 지도자들이 사실은 잘못된 독립을 한 사람들이었고 하나님께 반역하는 사람들이었으나, 인간의 전통과 유전들을 따르지 않는다고 예수님을 독자적인 사람이라고 핍박하며, 그분의 진정한 독립을 허용하지 않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이다.

홀로 서기

우리는 홀로 서는 경험, 진정한 독립을 경험해야 한다. 마지막에 하나님을 위하여 증인이 될 사람들은 지금 복음과 진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홀로 서는 연습을 해야 한다.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지, 있는 곳에서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아야 하며, 받은바 진리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대다수와 오류를 대항할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을 가져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마지막 남은 무리인 참 백성은 기독교 안의 변질한 복음으로부터, 오류의 가르침으로부터, 교회의 왜곡된 권위로부터, 인간의 잘못된 제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시는 표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경험하고 사는 사람들만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혼자 꿋꿋하게 설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교회의 책임 있는 지위는, 다른 사람들의 믿는 것과 행하는 바를 명령할 권위를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뿐 아니라 교회가 구원을 주기 때문에 교회의 권위와 명령에 무조건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는 바벨론의 잘못된 사상에 젖어 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8). 그리스도께서 몸의 머리이시기 때문에 그분과 그분의 진리가 모든 것 위에 항상 으뜸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그리스도나 그분의 말씀 위에 군림할 때 그 교회는 우상이 될 수 있다. 홀로 서서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하고, 그 어떤 것도 하나님 말씀의 권위 위에 두지 않는 연습을 하는 사람만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위하여 굳게 서는 충성스러운 증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y

신앙 3부 - 누가 참 교회였을까?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인간이 변질시키지 않은 하나님의 영원한 복음을 전수한 참 교회들이 등장한다. 그 참 교회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통해 그분의 복음과 구원의 경륜을 이 세상에 펼치시고, 그분의 진리를 전수하게 하셨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보잘것없는 소수의 무리였고, 쫓기는 교회였고, 핍박받는 교회였으며, 대다수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교회였다. 인간의 눈으로는 판단할 수 없었던 그 참 교회는 누구였을까? 두 가지 예를 들어 생각해 보기로 한다.   

1) 제자들? 아니면 유대 교회?

1. 십자가 후에도 강행되었던 유대의 제사제도

성소 제도에서 희생제물의 원형이셨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마 27:50,51). 성소 휘장이 찢어졌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제 더는 성소 제도가 필요 없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어린 양으로 표상되던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실제로 오셔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어린 양을 제사하여 인간의 죄를 속죄하던 성소 제도가 필요 없게 되었다. 성소 휘장이 둘로 찢어졌다는 의미는,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던 휘장이 찢어져 지성소가 다 드러나 보인 것을 뜻한다. 이제 그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더는 함께 하실 수 없었으며, 성소 제도는 종말을 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대 나라 역사의 기록을 보면,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찢어진 휘장을 다시 꿰매고,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부인한 채, 계속 성소 제도를 고집하며 제사법을 강행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므로 도말하신 의문의 율법을 무의미하게 계속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 2:14). 여기서 잠깐 짚고 갈 것은, 사도 바울이 신약에 언급하고 있는 십자가에서 폐해진 의문의 율법은 십계명이 아니다. 그것은 의문의 율법, 즉 모세의 법과 제사법과 절기법들을 가리킨다. 
유대 나라 교회의 총회는 메시아를 거절하고 희생제물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계속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성소에서 무의미한 제사를 계속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2. 오순절 성령을 받았던 제자들이 참 교회였다 

십자가 이후, 하나님의 교회, 이 세상에 유일하게 존재하던 기독교는 유대 나라에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두 가지 교회가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른 예수님의 제자들이었고, 또 다른 교회는 아직도 하나님의 선택 받은 선민이라고 자부하며 성전에서 제사와 희생제물을 드리고 있던 유대 나라의 지도자들과 예루살렘 교회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참 교회는 메시아를 거절한 유대 교회, 예루살렘의 총회가 아니었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따른 소수의 초라한 무리, 곧 그분의 제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원의 복음을 제자들을 통해 이 세상에 전하시려고, 그들에게 오순절 성령의 큰 능력을 부어주셨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도구로 그들을 택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표면상으로 참 교회는 거짓 교회로 보였고, 핍박받는 교회였고, 이설을 전하는 무리로 간주를 받는 교회였다. 오순절 성령을 받고 나아가 하나님의 기별을 전한 소수의 무리 하나님의 참 교회는 대형 교회로부터 술에 취한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또...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행 2:13). 
오순절 당시 절기를 지키기 위해 많은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다는 성경의 언급을 보면(행 2장 5절 참조),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아직도 어린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제사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참 교회였는가? 예루살렘 교회였는가? 오순절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었는가? 대형 교회의 조직을 가지고 많은 교인을 가지고 있었지만, 참된 복음과 진리에서는 떠난 예루살렘 유대 교회가 참 교회였는가? 아니면, 비록 인간의 인정이나 인가는 받지 못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분부받은 오순절 성령을 체험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는가? 누가 참 교회였는가?

2) 핍박하던 대형 교회? 아니면 핍박 받던 광야교회?

1. 변질된 복음을 들여온 평화정책

오순절 성령을 받고 나가 외친 무리를 통해 예수님의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자,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하나님의 참 교회, 예수님을 닮고 그분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생겨났다. 그러나 그와 함께 진리와 복음에 대한 핍박이 시작되었다. 주 후 64년경 로마의 네로 황제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시작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는 많은 순교자의 피를 이 땅에 흘리게 하였다. 그러나 여러 세기 동안 수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했으나, 신앙과 기독교의 힘은 사라지지 않았다. 순교자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면 흘릴수록 더 많은 그리스도인이 생겨났던 것이다.
핍박과 고문과 죽음은 그리스도교를 없앨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이 그들의 신앙을 피로 인쳤고, 그것으로 인하여 복음은 더 널리 전파되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핍박의 시대가 지나가고, 겉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에게 평화스러운 듯이 보이는 시대가 도래되었다. 교회가 예수님께서 전해주셨던 구원의 순수한 복음과 가르침에서 떠나게 된 큰 이유는 핍박보다는 평화와 타협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주 후 312년경, 콘스탄틴이 로마의 황제로 등극하여 사용한 로마의 융화정책으로 온 변화 때문이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이교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수용하여 국가를 통합하려는 정책으로 그 자신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던 토요일 안식일을 이교도들이 태양신을 경배하던 일요일로 바꾸어 그날을 공식적인 국가의 예배일로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명인 넷째 계명이 사람의 권한으로 바뀌는 일이 생겼다. 이런 일들과 함께 기독교에는 많은 이교의 가르침과 예배 형식이 스며들었고, 핍박을 받을 때는 순결하던 하나님의 교회는 세속과 타협하게 되었다.
초기 시대의 기독교는 로마에 의하여 국교로 인정을 받고 교세를 확장해 가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잘 따르고 있었다. 예수님의 가르침 그대로, 변질하지 않은 참된 복음과 진리가 전해지고 있었고, 인간의 전통이나 유전이나 사사로운 신학적인 해설이 붙여지지 않은 순순한 가르침이 전수되어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교회는 순수한 그리스도인의 회가 되기보다는, 국가의 힘을 빌려 종교가 되었고, 하나님의 교회는 점차 순수성을 잃어가게 되었다. 복음과 진리에는 인간의 가르침과 이교의 교리가 섞이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 진리는 명확한 빛을 잃게 되어 거짓과 혼합된 가르침으로 변하고 말았다.

2. 광야교회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세우고, 국가 통일 정책에 의하여 이교의 가르침을 기독교의 가르침에 섞어 놓았으나, 성경을 신앙의 유일한 표준으로 생각하고 성경에 있는 진리를 그대로 순수하게 믿고 고수하는 사람들이 여러 세기를 통해 각 나라에 있었다. 로마의 압제에 대하여 무력한 저항을 해본 후에 마침내 여러 교회의 지도자들은 거의 온 세계가 존중하는 듯한 법왕의 최상권을 마지못해 인정하였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법왕과 주교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았다. 로마 교황권에 직접적으로 항거하고 진리를 전수하기 위해 최선봉에 선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왈덴스(Waldenses)인들이었다. 그들은 법왕의 지위가 확립된 바로 그 나라에 살면서도 그 허구의 가르침과 부패에 꿋꿋이 저항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성경이 말하는 진리대로만 믿으며, 그들의 믿음의 순결을 그대로 보존하고자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깊은 산골짜기나 험준한 산속으로 피해 가서 거기서 자유로이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왈덴스교도들이 몇 세기 동안 가르쳐 온 신앙은 로마에서 나온 허위의 교리와 현저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들의 종교적 신조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즉 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에 기초하였다. 세상과 차단된 궁벽한 곳에서, 양 떼를 치거나, 포도원을 가꾸며 고달픈 고역에 시달리며 살던 그 농부들은, 그들의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순수한 복음, 배교한 교회의 교리와 이설(異說)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진리를 전수하며 믿고 살았던 것이다. 세계의 대도시에 거만하게 자리 잡고 있는 교권 교회가 아닌, 변질하지 않은 복음의 진리를 간직한 이 광야 교회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나누어 주라고 그분의 백성에게 맡기신 진리의 보화(寶貨)를 잘 지키고 있던 하나님의 참 교회였다. 
왈덴스인들은 진리를 집이나 토지나 친구나 친척이나, 심지어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 그들은 자녀를 어릴 때부터 성경으로 가르쳤으며, 성경을 복사하여 기록하는 일도 하였다. 왈덴스인들은 유럽의 여러 백성 중에서 최초로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들은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수백 년 전에 벌써 자국어로 필사(筆寫)한 성경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더욱 증오와 박해의 표적이 되었다. 교황권이 다스리던 소위 종교 암흑시대(12세기)는 기독교가 성행하던 시대라고 하지만 영적인 한밤중이었다. 그러나 1170년경에 일어난 왈덴스인들에 의해 진리의 횃불은 빛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1) 로마 교회의 전통을 거부하고 순수한 성서 신앙을 제창했으며, (2) 연옥교리를 부정하고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를 반대했으며, (3) 성만찬의 빵과 포도즙이 사제의 기도로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형한다는 화체설을 부인했다. (4) 로마 천주 교회는 결코 잘못할 수가 없다는 무류설을 반대하고 평신도의 전도할 권리를 요청했다. (5) 이들 가운데 성서적 안식일인 제칠일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무리도 일어났음이 역사가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험준한 알프스 골짜기를 피난처로 삼고 행상을 하며 전도한 왈덴스인들은 로마 천주교회의 혹독한 핍박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유럽의 22개국으로 번져나갔다. 결국, 이 왈덴스인들의 전도로 말미암아 종교개혁의 샛별 마틴 루터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에는 두 가지 교회밖에 없었다. 표면적으로 성공한 큰 세력이며, 대다수에게 인정을 받고 지지를 받고 있던 대형 교회,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며, 인간의 가르침과 이교의 교리를 혼합하여 믿는 로마 천주교회가 있었고, 변질하지 않은 하나님의 순수한 복음과 진리를 고수하며 성경대로 믿기 위해 생명을 바치며 피를 흘리는 핍박받는 교회, 두 무리가 있었다. 누가 참 교회였는가? 핍박하는 대형교회였는가, 아니면 핍박받는 광야교회였는가? y

신앙 1부 - 진정한 독립과 진정한 소속

바다의 펭귄들의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펭귄 한 마리가 물속으로 뛰어들면 그 뒤를 이어 수백 마리의 펭귄이 모두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장관이 펼쳐진다. 그런 펭귄의 모습을 보면 집단사고(Groupthink)란 단어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펭귄이 자신의 생각이나 주관 없이 그냥 막연하게 앞의 펭귄을 따라 생각하고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현대인들도 집단사고에 의한 군중심리나 대중심리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며 살고 있다.  

1. 그리스도인들의 집단사고

집단사고(Groupthink)란 용어는 1972년 어빙 제니스(Irving Janis)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된 용어로서, 그는 이것을 어떤 집단이 응집력을 이루기 위해 의견의 일치를 유도하여 비판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며, 만장일치를 추진하기 위해 노력하며,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내놓은 사상들을 뒤엎으려고 노력하는 일종의 상태로 규정하고 있다. 인간은 어떤 단체나 그룹에 속해 있어야 안정감을 느낀다. 현대 사회와 현대의 교육은 사람이 집단사고에 참여하지 않으면 정서적인 불안감을 느끼도록 유도하여 옴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어떤 그룹이나 사회의 집단과 사상을 달리하거나 그 단체에 속하지 않았을 때, 또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이 대중적인 지지를 받지 못할 때, 홀로 서서 자기의 사상이나 주장을 펴나가기를 매우 두려워하게 되었다.   
기독교에도 예외가 없다. 그리스도인들도 교회라는 단체와 집단 속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집단사고에 익숙한 기독교인들은 항상 교인 대다수 의견과 결정을 따르도록 길들어 있으며, 교회의 권위나 지도자의 권위, 혹은 잘못된 복음이나 성경과는 대조되는 가르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교육됐다. 그리고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이나 기존의 교리에 의문을 가지거나 질문을 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어 있다. 기독교에 들어온 이 집단적인 사고방식은 양심적이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사실 가장 영적이고 신앙적인 태도는, 교회가 어떻게 가르치고, 대중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보다는,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리인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어떻게 비칠까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홀로 서는 경험을 배워야 한다. 신앙은 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다. 집단이나 교회가 구원을 줄 수 없고, 교회의 지도자나 목사에게 개인의 영생 문제를 맡길 수 없다. 진리는 혼자 탐구하고, 진리대로 혼자 서야 한다.
교회를 다니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표면적으로 교회가 구원을 준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실상 교회가 하는 명령을 반드시 지키며 교회에 교적을 두고 있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사상이 기독교인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 어떤 교회나 집단에 속해 있지 않을 때 느끼는 고립감과 두려움을 견디기 어려워하므로 인해, 많은 교인이 교회가 무엇을 말하고 가르치든지, 교회의 전통이 성경의 진리와 상충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교회의 권위와 가르침에 맹종하며 교회를 다니고 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더는 다닐 수 없을 만큼 교회의 영적 타락과 쇠퇴가 온 기독교회를 휩쓸고 있지만, 또한 교회의 지도자나 교인들 사이의 겪는 어려움과 많은 상처에도, 교회에 더 이상 들을 수 있는 말씀이나 영성이 없다고 판단됨에도, 교회의 조직을 떠나서는 살 수 없고 그럴 용기도 없으므로 마음속에 일어나는 갈등을 속으로 삭이며, 교회의 조직 속에 섞여 있다는 안도감과 안일함 속에 안주하고 있다.

1) 교회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고 그 속에서 가르쳐지는 진리의 말씀으로 인해 영생의 비결을 깨닫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맞는 논리이다. 교회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이다.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신 성품을 세상에 나타내고, 그분의 사랑과 은혜의 충만하심을 온 세상에 나타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오순절 성령을 충만히 받았던 제자들이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려고 했을 때, 그들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질서와 조직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의 회, 곧 교회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펴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참된 교회가 되려면, 교회는 구원의 참된 복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진리를 올바르게 전해야 하며, 사람들을 구원의 도를 깨닫도록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인간의 뜻이나 욕망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펼쳐지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건물도 아니고, 조직도 아니고, 그것은 국가적인 설립 기관도 아니며, 또한 그것은 여러 각종 교파도 아니다. 교회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그리스도께서는 초라한 몇 사람 중에라도 계시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이다. 왜냐하면, 영원토록 거하시는 높고 거룩하신 분의 임재만이 교회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란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이 모인 곳이며, 하나님의 임재를 마음의 성전에 모신 사람들이 교회이다.  

2) 진정한 소속

하나님의 뜻을 온 세상에 펼치고 그분의 명령을 받드는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조건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진정한 소속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소속되는 것이다. 어떤 집단에 속하여, 그 집단이 갖는 집단사고에 길들기 전에,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진리에만 소속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때때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홀로 서는 경험을 해야 한다. 집단의 신앙과 신조가 하나님의 참된 복음에 어긋날 때,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교회에는 소속되어 있지만, 하나님께는 진정으로 소속되어 있지는 않다.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진리를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며, 인간의 전통이나 인간의 신학이 변질시켜 놓은 반쪽 복음만을 배우며, 참된 복음을 알지 못하므로 그 진리에 의하여 성화 되는 경험을 하지 못하면, 결국 그 사람은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과 그분의 참된 진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교인 수가 많고, 프로그램이 좋고, 예배 형식이 훌륭한 대형 교회에 속해 있다 해도, 만일 그곳에 진리가 전해지지 않거나, 참된 복음이 가르쳐지지 않으며, 외형적인 신앙만 있을 뿐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산 연결이나 진정한 소속이 없다면, 그곳은 하나님의 참 교회가 될 수 없다. 또한,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큰 교회 단체에 속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개인의 구원이나 영생 문제를 해결하거나 결정해 주지 못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하나님과 산 연결, 산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 교인 명부 책에 이름이 올라 있고 교회 재직회에 이름이 올라 있으며, 직책을 맡고 교회 요직에 앉아 있다 해도, 예수님과의 산 연결이 없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님과 산 연결을 맺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그 뜻대로 산다. 곧, 그 생애에서 죄를 승리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며, 주님의 계명과 뜻대로 순종하는 생애를 산다.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말로 예수님을 믿고 섬긴다고 공언한다 할지라도 엄밀하게 따지자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며, 그리스도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비록 그 사람이 주여, 주여하며 주님의 일과 사업을 한다 해도, 그 사람이 예수님과 산 관계를 맺고 있지 않고 주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께서 선고하신 다음의 말씀에 해당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3) 진정한 독립

1. 하나님으로부터의 왜곡된 독립

하나님 나라의 원칙과 하나님의 정부를 보면, 하늘은 상호협력과 연합의 원칙 위에 건설된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과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과 사랑 안에서 서로 잘 연합되고 조화되어 있었다. 루시퍼가 일어나 하늘의 연합과 사랑의 정책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정부로부터 독립하여 자주적인 정신으로 반역할 때까지 그래 왔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진리와 계명에 대한 왜곡된 독립과 자주의 정신은 사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와가 타락하도록 사단이 유혹한 것도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과 자주정신에 대한 시험이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4,5). 사단은 하와 자신이 선과 악을 알아서 혼자 독립적으로 행동해도 충분할 만큼 지혜롭게 생각하도록 그녀를 유혹했다. 
인류가 사단의 이 기만에 속았을 때, 지구는 하나님 정부의 법칙과 뜻에서 벗어나 죄의 법을 따르는 혼돈된 암흑의 세계가 되었고, 사단이 뜻한 대로 하나님에게서 벗어난 왜곡된 독립에 함께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온 세계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와 분리되고 사단의 독립적인 사업과 정신에 연합하게 되므로, 이 세상에 죄로 말미암은 고통과 부조화와 무질서와 악이 성행하게 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의 진리로부터, 그분의 사랑의 뜻과 자비의 원칙에서부터 사람들이 떠난 결과는 6천여 년간의 죄악의 처참한 역사를 통해 확연하게 알 수 있지 않은가?     

2. 진정한 독립

성경의 역사를 보면, 사단의 통치와 지배로 말미암아 대다수 무리가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고, 그의 의도한 대로 죄를 지으며 하나님과 분리되어 독립하여 살고 있었지만, 그 성행하는 죄악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위해 하나님께 충성하는 소수의 충실한 무리가 있었다. 하나님과 협력하고 하나님과 합하여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따르는 이 소수의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의 대다수 조류와 신조와 의견을 따르지 않고 세태를 역류하여 살았으므로,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으로부터, 사단을 따르는 대다수 사람들로부터, 집단의 사고를 따르지 않는 독립적인 이상한 무리로 따돌림을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 이 사람들은 죄악과 사단의 일로부터 떠난, 진정한 독립을 이룬 충성스러운 자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그 당시 집단의 생각이나 신조를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올바른 믿음을 따라가는, 홀로 서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홀로 서야 한다. 진정한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 사단과 오류와 죄악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며, 대세를 이루는 기독교의 잘못된 신조와 믿음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기독교를 휩쓸고 있는 영적인 타락과 바벨론의 오류를 답습하고 있는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며, 잘못된 복음을 믿어 빠지게 된 거짓 구원의 기만으로부터 깨어나야 한다. 대다수가 믿고 신봉하고 있는 비진리와 변질한 복음과 죄악의 조류에 역류하여, 혼자 굳게 서서 진리대로 사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의로운 사람이며, 사단의 일에 참여하지 않는 진정한 독립을 이룬 사람이며, 하나님께만 속한 진정한 소속을 이룬 사람이다. y

채식 요리 코너 - 단호박 샐러드

alt

가정과 건강 그리고 행복 - 위장을 잘 보살피세요!

위암과 소금

위는 소금 때문에 괴롭힘 당한다. 짜고 맵게 먹는 한국인의 식생활은 위암이 생길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소금은 몸 안에서 아질산염으로 변하면서 위벽에 상처를 내는데, 이때 아질산염이 음식물의 단백질과 혼합되어 강력한 발암물질이 생성된다. 그러므로 저염식 식사는 위암 예방에 매우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위암 환자들을 조사해 보면,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짜게 먹는 식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구나 헬리코박터에 감염된 사람이 짜게 먹을 경우 위암이 발생할 확률이 더욱 높아진다. 술과 담배를 즐기는 사람이 헬리코박터에 감염되어 있을 경우, 위암 발병 확률은 한층 높아진다.  
위암과 불에 태운 음식
불에 태운 음식은 위암과 관련이 있다. 숯불에 직접 구운 고기를 즐기는 한국인의 식습관이 위암 발병을 자극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고기를 구울 경우, 145배가 더 많은 발암물질이 생성된다. 고기를 구우면서 숯불에 떨어지는 기름이 타면서 연기가 발생하는데, 이때 연기가 다시 고기에 흡착되면서 발암물질이 생성된다. 태운 음식물에서 생성되는 발암물질은 자동차 배기가스나 담배를 피울 때 발생되는 발암물질과 동일하다.

위장이 좋아하는 식사법

한번은 150세를 넘어선 할머니에게 장수의 비결을 물어보았다. 그 할머니는 대답하기를, 나는 배가 고프지 않을 때에는 어떤 것도 입에 넣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단 입에 들어간 것은 그것이 물죽이 될 때까지 씹고 또 씹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훌륭한 위장 관리법이 어디에 있겠는가! 만일 배고픈 경우에만 무엇을 먹으며, 배고픔을 면할 수 있을 정도의 음식물을 섭취한다면, 그리고 식사 후 5시간 이상이 지나야만 배고픔을 느끼도록 우리 몸을 훈련시킨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힘과 생명력을 얻게 될 것이다. 피로에 관한 90% 이상의 이유가 과식에 있다는 매우 놀라운 의학 보고가 있다.

위궤양을 잘 잡으세요

후추가루와 고추, 각종 화학 조미료와 자극성 양념들, 설탕, 그리고 커피, 콜라, 차와 같이 카페인이 들어가 있는 것들 역시 위를 자극한다. 과일과 채소를 함께 먹으면, 위의 산도가 증가되므로, 위궤양 환자들은 주의해야 한다. 식사 중에 물을 마시는 것은 위장에 부담을 준다. 식사 중에 물을 마시면, 위장 내의 산도가 떨어지는데, 이 경우 위장의 적정 산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더 많은 산이 위장에 분비되어야 한다. 이로 인해서 음식이 완전하게 소화되기까지 더 오랜 시간을 위장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결과가 초래되며, 결과적으로 위장은 더 많은 일을 해야만 하게 된다. 다음과 같은 한가지 원칙이 도움을 줄 수 있다. 식사 중에는 물을 먹지 말고, 식사와 식사 사이의 공복에 물을 마실 것.
위궤양 환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한가지 사실이 있는데, 그들은 하루에 조금씩 여러번 식사를 함으로써, 위산이 위벽을 갉아먹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위산은 위장 안에 음식이 존재할 때에만 분비되어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상식처럼 알려진 생각은 오히려 위장에 해를 가져오는 것이다. 일단 식사를 했으면, 다음 식사 시간까지 어떤 것도 위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때 식사와 식사의 간격은 적어도 5시간 이상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원칙은 위장으로 하여금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후에 휴식을 취하면서 다음 음식이 들어오기 전에 보급품을 받을 수 있는 여유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든다. 
간식으로 인해서 음식물이 위장 안에서 필요 이상으로 오래 동안 머물러 있게 되면, 여러가지 원치 않는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 첫째, 위장 안에서 완전하게 소화되지 못한 음식물의 중심부에서 박테리아들이 쉽게 생성될 수 있다. 만일 위장이 효과적으로 일하지 못하면, 소화에 필요한 펩신과 산의 양을 조절할 수 없게 되어서,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은 양의 펩신과 산이 위장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만일 너무 많은 펩신과 산이 위장 안으로 분비되면, 이것은 위벽을 상하게 한다. 또한 몸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소화를 위한 화학 성분들을 만들어 내는데에 지나치게 많이 소모됨으로써, 피곤과 무력감이 생긴다. 이런 경우, 많은 사람들은 배가 고파서 무력감을 느끼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어서, 또 다시 음식물을 먹게 된다. 이미 과로한 상태에 있는 위장은 계속해서 들어오는 음식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쉴사이 없이 일해야만 한다. 이런 식으로 혹사당한 위장은 결국에는 염증으로 인하여 붓게 되고 위궤양이 생기게 된다.
가벼운 운동은 내장의 소화를 증진시키고 움직임을 활발하게 만들지만, 격렬한 운동은 오히려 내장의 움직임을 감소시키며 소화액 분비를 감소시킨다. yalt

가정과 건강 그리고 행복 - 용서를 배운 우리 가족들

밖은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유난히 추운 밤이라 우리 여섯 식구는 한 이불을 함께 덮고 저녁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지난 밤에는 아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올리우신 이야기를 들려 주었었다. 
예수님, 안녕히 가세요. 예수님, 보고 싶을 거예요. 빨리 오세요!라는 제자들의 마지막 인사를 읽어 주었을 때 헤어지는 그들의 마음이 느껴져 눈물이 났다. 아이들은 그런 엄마의 모습을 신기 한 듯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삼 년 반 동안 모든 것을 함께 했던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제 다시는 서로를 보지 못하는 이별을 앞에 두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보다 더 좋은 어떤 것을 줄 것이 있으셨기에 기꺼이 하늘로 가셨다. 그 좋은 것이 무엇인지 그 날 아빠는 지난 밤에 들려 주었던 이야기에 이어서 성경 이야기를 읽어 주었다.
다락방에는 120명이 모여 있었어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며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들의 사이는 점점 가까워졌어요. 그들은 전에 저지른 잘못이나 거친 말과 행동에 대하여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습니다.  저의 잘못을 용서해 주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하고 말고요. 내가 오히려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내 잘못을 용서해 주시오라고 말하며 서로 손을 잡는 사람들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습니다. 이야기에 감동을 받을 법도 한데 갑자기 여덟 살 된 큰 아이가 화가 난 목소리고 아빠를 불렀다. 아빠, 별이가 자꾸 이불 밑에서 제 발을 밀어요. 
아니에요, 저 안 그랬어요. 별이도 억울한 듯 말을 했다. 
네가 그랬잖아. 
아니야, 안 그랬어. 누구의 말이 옳은지, 저마다 자기가 옳다고 하니 아빠가 중재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얘들아, 다락방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했니? 너 때문이야 아니야, 네가 그랬잖아. 너 때문이야.라고 했니? 그제서야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아빠는 성경 이야기를 계속 들려 주었다.
그들이 서로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약속인 성령이 마치 불같이 그들에게 내려 왔어요.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뜨거워져서 서로를 더 사랑했고 그 열심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 이야기가 끝난 후 나는 내 마음에서 솟아나는 소망을 내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그 다락방에 있었으면 좋겠다. 
저도 그 다락방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 말이 끝나자 마자 여섯 살인 별이가 조금 전의 일그러졌던 모습을 버리고 금새 고운 빛을 얼굴에 담고 부끄럽게 내 말을 따라 했다. 분명 그 아이의 얼굴 표정은 정말 그 방에 있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있는 이 방이 오순절의 다락방이 되기를 바랬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낮에 비아냥거리며 남편에게 농담을 했던 것과 어떤 일에 참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짐처럼 무겁게 남아 있었는데 이제는 내려 놓을 때가 된 것 같았다.
철이 아빠, 오늘 내가 잘못 한 것 용서해 주세요. 제가 잘못 했어요. 평소에는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나오지 않던 말이 너무도 쉽게 흘러 나왔다. 성경 말씀은 분명 힘이 있었다.
아니야, 자기는 잘못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자기가 잘못 했을 때 이미 용서가 나갔거든, 자기를 사랑하니까&. 남편의 따뜻한 말에 나는 미소로 고마움을 표현했다. 엄마 아빠를 지켜보던 아이들이 까르르 웃어댔다. 아이들이 우리를 보고 서로 용서를 구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길 바랬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에게 길을 열어 주고 싶었다. 잘못을 고백하는 길, 용서를 구하는 길, 그리고 용서하는 길들을&. 
밖의 하얀 눈이 우리의 맘에도 내려 앉고 있는 듯 했다. È
글|서정희

가정과 건강 그리고 행복 - 성령의 음성을 들으려면...

최근에 사람들의 시선을 주목시키는 뉴스가 발표되었다. 한반도 크기의 거대한 우주선이 2012년 12월에 지구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3대의 거대한 우주선이 지구를 향해 오고 있는데, 가장 큰 우주선은 지름이 240km로 한국보다 조금 작은 거대한 우주선이라고 한다. 현재 명왕성 궤도 너머에서 지구로 돌진하고 있으며, 화성을 지날 때쯤은 정확한 관측이 가능하다고 한다.
정말 2012년 12월에 거대한 우주선들이 지구에 도착할까? 어떤 기독교인들은 그것은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재림하기 위해서 지구로 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주인들이 지구를 공격하기 위해서 다가오고 있으니까 지구 방위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금년에도 수많은 사건과 가르침이 우리 주변을 배회하게 될 것이다. 수 많은 음성들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들 중에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어떤 것을 거절해야 할까? 참으로 혼돈스러운 시대이다. 
세상이 복잡하면 할수록 우리는 성령의 음성을 정확히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의 음성은 여러가지 모양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우리의 귀에 대고 한마디씩 또박또박 해주면 좋은데, 성령의 음성은 그렇게 들려오지 않을 때가 많다. 
노아 시대는 망치소리가 성령의 음성이었다. 자신의 생애를 바쳐서 방주를 짓는 노아의 망치소리는 그 시대 사람들의 이기심과 죄를 책망하는 성령의 음성이었다. 그 음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사람들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alt 
요셉이 들은 성령의 음성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역사와 성령의 음성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을까? 마리아와 요셉의 이야기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어느날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하늘의 기별을 전달했다. "이제 성령이 네게 임할텐데 네가 처녀의 몸으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 소식은 마리아에게는 너무나 영광스런 소식이었지만, 정혼자인 요셉에게 이 말을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셉에게는 이 말이 청천벽력과 같았을 것이다. 아마 그 당시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갔을지 모른다.
마리아 : 요셉씨, 제가 임신을 했습니다. 
요  셉 : 아니, 우리는 한번도 잠자리를 함께 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 아기는 누구의 아기입니까?
마리아 : 이 아기는 성령으로 인해 잉태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이 말에 요셉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이러한 상황에서 요셉이 성령의 음성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을까? 경건한 유대교인인 요셉은 마리아의 손목한번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는데, 어느날 정혼녀인 마리아가 와서 아기를 가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은 요셉이 어떻게 반응했다고 말하는가?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마 1:18~19). 
요셉은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고자 하였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역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가 일어났는데, 그것을 분별치 못하고 정혼녀와 헤어지자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요셉을 의인이라고 기록하였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마리아의 임신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마리아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를 분별치 못했지만, 그는 자신의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분명히 붙잡았다. 이것이 성령의 음성을 듣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어떤 면에서 요셉은 온 동네를 다니면서 파혼을 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해야 했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조용히 파혼했다가 나중에 마리아가 아기를 낳으면 동네 사람들 모두 누구를 비난할 것인가? 아기를 임신시켜 놓고 여자를 버린 요셉을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그 모든 부담을 자신이 짊어지기로 결정하였다.
그리스도인은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성령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들은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성령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고 그것을 붙잡는가? 요셉이 마리아에게 역사하는 성령의 역사를 분별치 못했던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임하는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만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만일 금년 한해 동안 우리가 요셉처럼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아무리 복잡하고 혼돈되는 상황 속에서도 의인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의인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성령의 음성을 붙잡는 사람들이다. y
강명수 편집인 

권두언

세상에 교회가 너무나 많습니다.  특히 한국에는 가는 곳마다 교회들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좀 이상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세상에 교회가 많이 세워져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이 보다 훨씬 더 많이 일어나야 하겠지요. 그러나 문제는 교회가 정말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일으키시는 교회인가 라는 것입니다.
누가 정말 하나님의 교회일까요? 교회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교회란 건축물인가요? 교파나 교단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떤 기독교적인 조직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이슈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오늘날 많은 교회들의 현실이 참으로 암담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교회를 이루는 것인가에 대한 신자들의 개념이 많이 혼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우선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교회란 진리를 떠 받들기 위한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만이 교회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 모여서 무엇을 하는가, 어떻게 믿으며 무엇을 수호하며 전하는가가 오히려 협회나 조직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모아오시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말세에는 더욱더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참 신자들을 모아오시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모든 교회들마다 그리고 신자들마다 성경적인 교회, 하나님께서 모아 오시는 참 교회에 속하여야 하겠습니다. 이번 호는 이 중요한 이슈에 있어서 여러분들께 큰 도움을 드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편지 - 바람의 길목에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창문 왼쪽으로 보이는 나무의 잎사귀가 몹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창문 오른쪽에 있는 나무의 나뭇잎은 하나도 흔들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전혀 불지 않는 것처럼...
왼쪽 나무의 잎은 마구 흔들리는데 왜 오른쪽 나무의 잎은 흔들리지 않는 것일까, 
고개를 빼어 밖을 내다보다가 이내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창 밖의 두 나무가 펼쳐준 그림이 하루 종일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그 두 나무는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바람이 늘 지나는 길이었습니다. 
나뭇잎과 나무를 통째로 흔드는 큰 바람, 잎을 잠깐 흔들고 가는 작은 바람, 
잎을 살짝 스치는 미세한 바람들이...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는 잎은 떡갈나무의 커다란 잎이었고, 
미동도 하지 않는 잎은 바늘처럼 가는 늙은 소나무의 잎이었습니다.

잎이 큰 나무

인생에는 언제나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지나는 길목에 사는 우리에게도 늘 바람이 지나갑니다.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쓰러지게 하는 거센 바람,
마음 흔들어 넘어지게 하는 작은 바람,
가슴 슬쩍 스치며 어지럽히는 미세한 바람이... 
바람과 부딪히는 면이 큰 커다란 잎이 바람에 더 많이 흔들리듯이
자아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작은 바람도 크게 지나갑니다. 
작은 바람만 불어도 심하게 흔들리는 큰 이파리처럼,
자아가 크게 살아 있는 사람은 인생의 작은 바람에도 크게 휘저어집니다.
스치듯 지나가며 들은 작은 말에도 마음의 평정이 깨질 만큼 예민하고,
자신이 부각되거나 조명을 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해 끓어오르고,
자신의 의견이 동조를 얻지 못하면 소외감과 울분으로 밤을 지새우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항상 밖으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다른 사람의 행운에 대해 기뻐하기 너무 어렵습니다.
큰 잎처럼 자아가 살아 주렁주렁 달린 사람에게 
인생은 너무 힘겹고 버겁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작은 바람도 큰 폭풍우처럼 지나가 
바람이 불 때마다 뒤집히고 쓰러집니다. 

잎이 가는 나무

 삶에는 회오리바람이 몰려올 때도 있습니다. 
때론 굵은 빗방울까지 동반한 바람도 불어 닥칩니다.   
생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짙은 절망의 회오리바람,
가슴 시린 눈물의 빗줄기와 함께 오는 시련의 바람, 
휩쓸어버릴 듯 세차게 부는 시험의 바람이...
늘 바람과 부딪히는 큰 잎사귀와는 달리,
성성하게 사이가 벌어진 소나무 잎 사이로는 바람이 쉽게 지나갑니다.  
자아가 바늘처럼 작아져 보이지도 않게 된 가는 잎 사이로 
바람은 늘 쉽게 비켜가 어떤 바람에도 크게 부딪히거나 흔들리는 일이 없습니다.  
던져지는 날카로운 말에도 가슴 후벼지지 않고,
자신이 조명을 받지 못해도 조용히 다른 사람을 비춰주고,
주위의 동조를 못 받아도 하늘의 위로로 마음이 평안하고,
사람들과 환경과 분위기에 늘 초연하고,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해 진정으로 기뻐합니다.  
자아가 죽어 어떤 것도 개의치 않게 된 마음에는
폭풍도 미풍처럼 부드럽게 스쳐 갑니다. 

흔드는 바람

자아의 잎이 크게 달려있어 바람에 몹시 흔들리는 사람은
자기만 흔들릴 뿐 아니라 곧잘 다른 사람을 흔드는 바람이 됩니다.
자아가 큰 사람이 일으키는 바람이 주위를 휘몰아치면,
큰 잎을 달고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사시나무처럼 떨며 흔들립니다.
분노의 바람, 원망의 바람, 질시의 바람, 수군거리는 바람, 
슬픔의 바람, 노여움의 바람, 원한의 바람, 온갖 바람이 떠돌고, 
또 저마다 바람을 주고받아 뿌리가 뽑힐 만큼 서로 심하게 흔들립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모두 진동을 가지고 있어
자신의 진동으로 다른 사람을 울립니다.   
좋은 진동을 가진 사람은 아름다운 진동으로 주위를 울리고
좋지 못한 진동을 가진 사람은 나쁜 진동으로 주위를 해칩니다.  
    
같은 진동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의 진동으로 화답하듯이, 
바람을 일으키는 사람과 같은 진동을 가진 사람은 
휘몰아치는 같은 바람으로 한바탕 소용돌이를 만든 후 
폭풍이 빚어놓은 잔해에 때늦은 후회와 슬픔에 잠깁니다.
우리를 흔드는 바람 중에 우리 마음에 불어야 할 바람이 있습니다. 
마음을 속부터 흔들어 새롭게 만드는 꼭 불어야 할 좋은 바람이 있습니다. 
언제 흔들렸는지는 모르지만, 
사랑하게 하고, 입가에 미소 띠게 하고, 세상의 빛깔이 달라져 보이게 하고, 
마음에 깃털 하나 단 듯 가볍고 행복하게 하는 성령의 미풍이 
보이지 않게 우리 마음에 불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진동으로 마음을 울리는 이 하늘의 바람을 타는 사람은
바람이 빚는 대로 자신을 맡겨 끝내 찬란한 하늘의 성품으로 빛납니다.

바람의 길목에서

바람은 늘 그렇게 불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바람의 길목에 사는 우리의 삶에 불어오는 바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아가 하늘의 은혜에 숨겨진 사람에게 
바람은 자취도 없이 가볍게 지나치는 것,
자아가 죽지 않고 단단하게 살아 있는 사람에게
바람은 항상 폭풍우와 같은 것.
창 밖으로 바람이 붑니다.
큰 나뭇잎은 몹시 흔들리고, 바늘 같이 가는 잎은 별 미동이 없습니다. 
창 밖으로 펼쳐지는 정경이 마음속에 지울 수 없는 그림으로 남습니다. 
강영은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