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Did you know? 알곡을 만드는 가르침과 가라지를 만드는 가르침

복음은 완전한 것이어야 한다. 믿음과 행함 그리고 복음과 율법이 완전하게 성서적 조화를 이루고 있는 복음만이 성도들을 죄로부터 구원할 수 있으며, 죄인의 성품과 생애를 변화시켜서 하늘 도성 안으로 인도할 수 있게 만든다. 교회 안에 존재하는 율법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에게 올바른 복음을 설교함으로써, 그들이 멸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가르쳐 주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율법주의와 자유주의로부터 넉넉히 구원해 내실 수 있는 구세주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소개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마음을 변화시켜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아름다운 생애로 이끌어 주시는 분임을 가르쳐 주도록 하자.

율법주의자들을 향한 우리의 호소는, 자포자기하여 영생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을 포기하고 인생을 방종과 자기만족으로 살아가는 자유주의자들의 진영으로 건너가고자 하는 유혹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그대들의 문제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한 최선의 처방은, 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생애를 명상함으로써 그대 자신의 무가치함을 깊이 인식하고, 모든 시험과 기만으로부터 완전한 승리를 주실 수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간구하라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을 향한 우리의 호소는, 율법과 원칙에 철저하지만,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생활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위선적인 율법주의자들을 보면서 율법을 경시하게 되는 유혹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혹시, 이 글을 읽은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 하셔서 자신의 생애가 나태하고 방종한 삶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경우, 그대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에 순종하는 순결한 생애를 살고자 결심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때에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단의 덫인 율법주의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자신도 모르게 십계명이 십자가에서 폐지되었다는 거짓 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유주의적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가? 그대들이 일단 율법을 경시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 그대들의 생애는 아무런 원칙과 표준이 없이 표류하게 될 것이다. 그대들의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 자신이 세워 놓은 인생관과 철학에 따라서 형성될 것이다.

이러한 그대들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교회 신앙을 모호하게 만들 것이다. 세상과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 사이에는 분명한 선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대가 자유주의를 고집하며 살아가는 한, 그대의 생활은 방종의 길을 걷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영원한 파멸이라는 쓰디쓴 후회의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형제자매들을 위한 최선의 처방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라는 것이다. 과연 그대들이 믿는 것처럼 하나님의 법은 폐지되었으며,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는 생애를 살아도 구원을 보장받을 수 있는지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물어보라. 또한, 날마다 십자가와 그분의 은혜에 대해서 깊이 명상하는 일을 잊지 마라. 만일 그대들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희생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다면, 율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을 결코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 안에 존재하는 가련한 율법주의자들과 깊은 기만 속에서 만족한 생활을 살아가는 자유주의자들이 십자가를 통하여 하늘 왕국에 이르는 길을 분명하게 발견하게 되기를 기원한다.

바이블 맨에게 물어보세요: 홍해를 건널때 애굽 군사들은 왜 심판도 없이 죽어야 했나요?

사랑의 하나님은 결코 재판이 없이는 심판하시지 않는다고 하시는데 그렇다면 왜 재판도 없이 애굽의 군사들은 홍해 가운데서 무참히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까요?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어밀매 새벽에 미쳐 바다의 그 세력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스려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쫓아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었더라. 그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하나님께서 역사 하고 계시므로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는 백성은 그분의 보호 하심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 하심 속에 있는 사람들을 대항하는 것은 실상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입니다. 이집트 파라오와 백성에게 모세를 통해 그의 완악함을 돌이키고 하나님을 인정할 기회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충분한 시간 동안 주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나오게 하실 때, 그 이전에 이미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10재앙이라는 모든 기적과 이적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셨고, 이집트 인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그분의 전지전능하심을 체험할 수 있는 시간과 환경을 줬습니다. 그러나 파라오는 더 완악하게 하나님을 거절하여 자신의 왕 됨과 신적인 존재임을 더욱 들어내고자 하나님께 대항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는 것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인도 하심과 하나님의 경영을 불합리한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께 대적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창조주이심을 대항하는 것이며, 법을 어기고 법을 파괴하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원리가 적용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특별히 미워하시거나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의 보호 아래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법이라는 보호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법도 그 법 가운데 사는 대부분 사람은 안전하고 평화 가운데 살 수 있으나 법을 어기고 범죄하며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사람들은 그에 응당한 법의 판결과 선고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의 원칙이고 하나님 사랑과 품성의 표현인 하나님의 법의 정당성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도 법을 어기고 그 법의 대가를 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법을 대항하여 창조주를 격멸하고 그 법 가운데 안전한 보호를 받아야 할 모든 사람을 해롭게 하는 모든 범죄는 법이 존재하는 한 그 법의 원칙 가운데 정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아무리 범죄한 영혼일지라도 지금 당장 그 법의 끔찍함을 알고 마음을 돌이켜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살기로 돌이킨 사람을 위해서는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그 죄의 값이 지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홍해 바다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여 이집트 땅을 탈출하면서 당하는 위험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연약하여 억압당하는 그분의 백성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방법이 틀리기라도 했다는 말일까요? 그 길은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바다를 갈라 만드신 특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그 길을 건넌다면 본래의 목적에 맞지 않아 그 길의 존재 이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열렸던 바닷길을 모세가 손을 내밀어 회복시킨 것이 하나님의 복수가 아닙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바다의 물은 본래 바다에 채워져 있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갈라놓았던 바닷물이 본래의 세력으로 회복되었다 해서 하나님을 불합리하다 할 수 있을까요? 그 길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병거들을 피해 벗어날 수 있도록 준비하신 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분의 백성을 끝까지 추격해서 죽이려는 이집트 군사들로부터 보호하시려는 그 바닷길에 분노하며 뒤따라가던 이집트 병거들과 병사들이 빠져 죽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길에 스스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 길은 분노로 가득 차서 가야 할 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신들의 피난처요 무능함을 도우시는 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의 길입니다. 죄 가운데 종노릇하던 사람들이 그 흑암 속에서 벗어나게 하신 진리의 길입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찬양받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믿는 자들의 길이며, 그날 열린 그 길은 창조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자들만을 위해 열린 축복의 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고 그분은 진리의 길입니다. 지금 그분의 공로를 의지하여 자신의 죄로부터 돌이켜 회개하여 그 사랑에 마음이 변화된 사람은 그분의 법을 절대적으로 순종할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그분의 법 가운데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길 소원하며 살아가는 참사랑의 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부디 마음 가운데 있는 모든 의혹과 혼란한 부분들이 성경 말씀으로 이해되어 주님의 신실하고 용감한 일꾼으로 살아가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사랑의 편지: 빈 무덤을 향하여

새로운 해를 맞으면서 사람들은 새 삶을 생각합니다. 새 마음으로 새해를 맞는 사람들은 새롭게 다가올 삶을 설렘으로 기다립니다.

새해, 새 삶은 새로 태어나는 영적 거듭남을 상기시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나오는 부활을 상기시킵니다.  

나비는 날아가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벗어버린 죽은 껍질을 보면서 연연해 하지 않습니다.

새롭게 태어난 사람도 육체의 일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새로 태어난 사람은 다시는 자신을 가두던 캄캄한 고치 속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새로 태어난 사람은 다시는 날지 못하는 채로 병 속에 갇혀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땅의 일일랑 잊고 팔랑팔랑 하늘로 날아오르는 나비처럼,  무한히 자유로운 날개로 더 높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처럼, 뒤의 일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만 갑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하늘을 나는 나비에게 땅 위의 나무토막이 넘어야 할 산이 아니듯이, 날개 가진 새에게 녹슨 철조망이 분단을 가져오는 장애물이 아니듯이, 새로 거듭난 사람에게 땅의 일은 하찮은 것이 됩니다. 날개를 받지 못한 애벌레와 날지 못하는 새에게만 철조망과 가시 울타리는 장애가 됩니다. 해가 바뀌었는데도 지난해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뀔 것을 바뀌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없어질 것을 없어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떠나게 될 것을 떠나지 않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사라질 것을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죽을 것을 죽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 그것이 옛 생애에 붙어 있는 사람의 상태입니다.

새로 태어난 사람은 과거의 모든 생각을 내려놓을뿐더러 자신마저도 내려놓는 사람입니다. 생각을 내려놓기는 쉬워도 나를 내려놓기는 쉽지 않습니다. 나를 내려놓기 어려운 까닭은, ‘내’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죽음의 두려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한 번도 진정으로 죽어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영적 죽음을 미루고, 늘 그 죽음을 회피합니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과거의 삶이 계속 이어집니다. 죽음을 통하여만 자유가 얻어지고 죽음을 통하여만 옛‘나’가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죽음을 통하여만 새로운 부활이 나옵니다.

빈 무덤을 들여다보지 마십시오. 주님은 이제 거기 계시지 않습니다. 

빈 무덤을 들여다보지 마십시오. 당신은 이제 거기 없습니다.   갈라진 빈 무덤을 향하여 주님은 오늘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강영은

신앙 제 5부: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 수 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며, 또 그렇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왜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본성을 입고 오셨을까?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본성을 입으시고도, 죄를 짓지 않고 계명을 지키시는 순결한 성품과 생애를 사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다. 특별히 마지막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주제는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마지막에 탄생할 하나님의 참 백성 여자의 남은 무리의 특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생애의 특성과 같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하나님께는 마지막 시대에 사단의 고소와 반격을 침묵시키시기 위해 한 무리를 필요로 하고 계신다. 그 백성은 바로, 하나님의 법은 불공평한 것이며 지킬 수 없다고 하나님의 정부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사단의 고소가 틀린다는 것을 우주에 증명할 무리이다. 한 백성, 곧 하나님의 계명은 지킬 수 있는 것이며,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성품을 가질 때에, 온 우주와 지구가 얼마나 아름답고 평화롭고 살만한 곳이 된다는 것을 증거할 증인들이 필요하신 것이다.

그것이 유혹이 아니었다면?

우리와 같은 타락한 본성을 입으셨지만, 예수께서는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으셨다고 성경은 말한다."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예수께서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인성과 본성을 입으셨지만, 예수님 속에는 신성의 충만하심이 함께 거하시므로, 어떤 악한 감정이나 일과도 관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죄를 이기신 순결한 생애를 사셨다(요 14:30 참조). 예수께서는 이 땅에 사실 때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과 유혹을 받으셨다. 항복할 가능성이 없다면 유혹은 유혹이 아니다. 만일 시험에 굴복할 가능성이 없다면, 시험은 시험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분이 실패할 가능성이 전혀 없으셨더라면, 그는 인간이 시험당하는 것같이 모든 일에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실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분도 아담처럼, 그리고 모든 사람처럼 시험대에 오른,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있는 자유 행위자였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유혹은 생생한 현실이었다. 그것이 유혹이 아니었다면, 육체에 계실 때에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처럼 시험을 이기기 위해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유혹이 예수님께 유혹이 되지 않았더라면, 주님은 승리를 위해 애쓰실 필요도 없었고, 그러면 그분은 우리의 모본이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인성을 쓰신 주님이 견뎌야 할 유혹과 시험이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모본이 되시기 위하여 이겨내야 할 시험들이었다. 만약 타락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었다면, 그분은 인간들이 시험을 당하는 것처럼 모든 일에 한결같이 시험을 받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성을 쓰시고 이 땅에 오셔서, 몸소 모든 것을 체험하시는 그 위험한 시간을 보내셨던 것은, 우리에 대한 놀라운 사랑 때문이었다.

우리 힘으로?

성경은 우리도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죄를 승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사람만이, 마지막 선과 악의 대전쟁에서 하나님의 증인이 될 수 있다. 마지막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는 사람들을 보라! 모든 죄를 이기고 승리하며,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 (곧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악한 술수를 쓰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입에 흠이 없으며, 교만하지 않고 이기심이 없고, 남을 미워하지 않고 원수도 사랑하고 용서하는 사랑의 성품)을 이룬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앞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는 것이다. 마지막 여자의 남은 무리는 예수님과 같은 성품을 가지고, 예수님과 같은 생애를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새 언약관계에 들어간 사람들인데, 곧 거듭나고 온전히 변화된 그들의 마음과 생각에는 하나님의 계명이 쓰여 있다.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사람으로 온 마음 바탕이 변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악이 너무 싫어지고, 죄와 악한 것이 너무 싫으므로 계명이 저절로 지켜지는 마음과 성품으로 변한 것이다.

죄를 승리하고 이기는 삶, 죄가 싫어지고 죄와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변화가 과연 인간에게 가능한 것일까?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고 오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삶과 변화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와는 다른 본성을 가진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와 달라서 우리의 모본이 되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본성을 입고 오셨다고 믿는 사람, 우리와 같은 인성을 쓰시고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를 한 번도 지으신 적이 없이 순결하고 흠 없는 생애를 사셨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에 매우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죄를 승리하는 일은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고 죄를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정결한 마음을 재창조해주셔야 하는 것이다. 이 일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힘(파워)과 능력이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또다시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지 않도록 힘을 주신다.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그렇다면 어떻게 승리하는 생활이 가능한가? 그것은 우리도 예수께서 사신 방법 그대로 살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신 방법은 의외로 매우 단순하다. 예수님의 생활을 한 번 반추해 보며, 그 방법을 배워보자.

» 예수께서 사신 방법

  1. 새벽 미명에, 모든 일을 하기 전에 제일 먼저 하나님과 함께 교통하며 오래 기도하셨다.
    그리하여 하늘의 은혜와 축복이 마음에 충만하게 차기 전까지는 어떤 일도 하시지 않았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가납하심과 인정을 받기 전에는 하루 일을 시작하지 않으셨다.
  2. 다른 어떤 것을 머릿속에 넣기 전에,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하게 읽으시고
    그 말씀을 머리와 마음속에 저장하셨다.
  3. 그날의 읽은 말씀을 온종일 명상하고, 그 말씀의 뜻과 의미가 체험과 마음속에
    녹아들 때까지 진리의 말씀을 음미하셨다.
  4. 매 순간 하나님을 모시고 그분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사셨다.
  5. 사단의 유혹이 올 때, 자신의 뜻과 마음대로 하고 싶은 의지를 포기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만 행하셨다."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노라"라고 하시며,
    자신을 비우시고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만 행하셨다.
  6. 철저하게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과 계획대로만 사셨다. 예수께서는 절대 마음대로
    행하지 않으셨는데, 비단 예수님 자신,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 성취되는 문제에 있어서까지도, 그 예언이 성취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기다리셨고,
    하나님의 섭리를 인내로서 기다리셨다.
  7.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으로 모든 영혼을 이해하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셨다.
    모든 사람을 구원해야 할 사람으로 대하시고 다루셨다.
  8. 하나님의 사업, 즉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는 사업이
    그분 생애의 가장 우선적인 것이 되었다.


이 외에 예수께서 사신 방법은 많이 있지만, 위의 방법들은 우리가 모방하고 따라 하기에 너무 쉽고 가능한 것들이다. 이 방법들은 우리가 넉넉히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정말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죄를 미워하고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면, 또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께만 영광 돌리는 삶을 살고 싶다면, 예수께서 보이신 모본을 따라가며, 이 방법들을 실천해 보면서, 죄를 이기는 것이 가능한지 아닌지 체험해 보면 되지 않겠는가?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은 거듭난 사람만의 모본?

많은 그리스도인이 의아해하며 묻는다."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나셨고, 또 하나님이셨으니까 그분 속에는 신성이 거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사실 수 있었지요.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맞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으로 날 수 없는가? 그럴 수 있다. 거듭나면 그것은 가능하다. 거듭나는 것은 곧, 성령으로 나는 것,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다. 예수님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모본이 아니시다. 예수님은 오직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난 사람의 모본이시다.

그런데 거듭난 사람이라고 유혹과 시험이 없는가? 아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고 거듭났어도, 육신의 습관과 유전자의 영향을 받은 연약성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매일 그 거듭남을 유지하고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죄를 이기기 위해, 매일 매 순간 마음을 주님께 바쳐야 하며, 매일 다시 거듭나야 한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다. 성령으로 나셨고 또 하나님이셨지만,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으셨던 예수께서는, 인간이 느끼는 것과 똑같이 느끼셨고,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번도 그 시험과 유혹에 굴복해 보신 일이 없으셨다. 만일, 예수께서 우리와 다른 본성을 입고 오셨더라면,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그리고 쓰러질 때, 얼마나 예수님과의 간격을 느꼈겠는가? 그러나 우리와 똑같은 입장에 처해 보시고 우리와 똑같이 느껴보신 주님이 계셔서, 우리를 너무 잘 이해하시고, 동정하시고, 어떻게 도울 줄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 안심되고 감사한 것이다. 거기에다가 주님은 우리의 변호사이시며 중보자가 아니신가!

마치면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 아니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 수 있다. 우리와 같은 본성을 입고 오신 예수께서 모든 시험과 죄를 승리하시고 사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다. 비록 타고난 우리의 연약성이 너무 많아 불가능하게 느껴질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죄를 승리하며 살 수 있다.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며, 그렇게 사는 것을"예수 믿음", 곧 예수께서 가지셨던 믿음이라고 부른다.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본성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만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죄짓지 않고 사신 믿음을 예수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지막에 등장할 여자의 남은 무리는 예수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계명을 지키는 삶, 곧 모든 죄를 승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고 오셔서,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시고, 우리의 경험을 몸소 겪으셔서 우리를 어떻게 도와주실지 아시는 주님, 그리고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 해 주시는 주님이 계신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우리와 같은 입장으로 내려오신 주님의 놀라운 희생과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힘차게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이기를 포기하시고,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신 놀라운 예수님의 사랑을 명상하면서,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워, 모든 죄를 승리하는 일이 가능해지기를 기도 드린다. 그리고 이 기사를 읽는 우리 모두가, 우리와 같은 본성을 입고 오셔서 흠 없는 생애를 사신 예수님처럼 그렇게 살 수 있기를 기도드린다.

마지막에 등장할 여자의 남은 무리는
예수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이며,
계명을 지키는 삶,
곧 모든 죄를 승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신앙 제 4부: 죄인은 구세주가 될 수 없다?

앞의 기사들을 읽으면서 아마 매우 당황스러워져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아니, 만일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본성을 입고 오셨다면 예수님이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고,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셨다면 예수님도 죄인인데, 어떻게 죄인이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자, 이제 이 문제에 대해 함께 공부해 보자. 특별히 이 문제를 공부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슈인, 죄란 무엇인가?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인간이 죄인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공부해 보기로 한다.

죄란 무엇인가?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 연구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왜 거룩한 예수님을 인간의 본성을 쓰신 죄인으로 만드는가 하고 반문한다. 이러한 논리라면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것 자체가 죄인이 되었다는 말이 된다. 한 번도 죄를 지으신 적이 없어도 죄인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성경에"죄는 없으시니라"(히 4:15)라는 말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한 정의를 바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죄의 정의 여하에 따라,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아담이 범죄하기 전의 본성인가, 아니면 범죄한 이후의 본성인가로 달라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본성 문제에 대한 이해가 구원에 대한 신앙여하를 결정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죄의 정의를 분명하게 제시한다."죄는 불법이라"(요일 3:4). 불법이란 법을 어겨 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 때문에 같은 성경 절의 전반부에는"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죄는 불법이라"라고 분명하게 일러준다. 사도 바울은"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롬 4:15)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주어진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죄란 율법을 범하는 것"이란 정의이다. 그럼에도 허다한 신학자들이, 5세기의 어거스틴을 선두로 해서 이렇게 단순한 죄의 정의를 불만족스럽게 생각해왔다. 그런 식의 단순한 정의는 신학적 깊이가 결여된 정의라 느낀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신학자가 성경과 맞지 않는 새로운 죄의 정의를 만들어내고, 또 그와 더불어 새로운 그리스도의 본성, 즉 거짓 그리스도의 본성을 창출해 내었다.
신학자들이 만들어낸, 성경과 맞지 않은 새로운 죄의 정의란 다음과 같다."죄란 사람이 무엇을 행함으로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적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죄는 인간 의지의 행사 여하에 따른 것이 아니고, 타고난 인간의 상태이다. 행위는 인간 속에 있는 죄의 결과에 불과하다."물론 이 말 속에는 어느 정도 진리가 포함된 것이 사실인데,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범죄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연약성과 유전적인 영향으로 말미암아 죄로 기울어지려는 성향, 그리고 그 속에 자리 잡게 된 이기적 성질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죄는 의지의 행사가 있을 때 성립되는 것이지, 연약한 인간의 본성 자체가 죄는 아니다.

지금 기독교 안에는 죄에 대한 두 가지 정의가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혼란과 오류와 거짓 복음이 기독교 안에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자, 기독교 안에 있는 죄에 대한 두 가지 정의에 대하여 정리해보자.

A 원죄설

"죄는 본성이다"라는 정의

첫 번째 죄에 대한 정의는 원죄설이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이 바로 죄라는 가르침이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잘못된 본성이 있는 그 자체가 죄라고 믿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정의는, 우리가 태어날 때에 이미 우리는 잃어버린 바 되고 정죄 받은 상태에서 태어난다고 믿는 것이다. 곧, 우리는 지옥으로 갈 본성으로 태어났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 원죄설이 거의 모든 개신교인이 믿고 있고 이해하고 있는 교리이다. 원죄설은 우리가 숨을 쉬는 것처럼 우리의 본성 자체가 죄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 우리의 본성과 늘 함께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은 할 수 없고 그냥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그런 정의를 가진 사람에게 복음은 항상 용서만 해야 한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항상 죄인이라 죄를 어떻게 할 수 없고, 다만 용서만 받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대부분 기독교인이 믿고 있는, 성경과 맞지 않는 교리이다.

B 죄는 선택

"죄는 우리의 선택이다"라는 정의

성경이 말하는 죄의 정의는 다르다. 성경은 죄는 우리의 선택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잘못된 본성을 유전적으로 받았다고 해서 자동으로 멸망 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다. 우리는 악한 죄의 편과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와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다. 그분은 강제적인 굴종을 기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모든 존재가 하나님을 선택하고 자원하여 봉사하도록 의지의 자유를 허락하셨던 것이다. 누구도 인간의 의지를 강제할 수 없다. 사람이 그리스도나 사단, 둘 중 하나를 선택하여 그에게 순종하기로 하면, 그때 그리스도든 사단이든 그 사람을 지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이 자유의지의 법칙에 대하여 잘 설명하고 있다.

●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벧후 2:19).
●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전 15:34).
●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6,7).

이 성경 절들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의 선택권을 사용하여 죄를 짓든지, 선을 행하든지 하는 것은 인간의 선택에 달렸다고 말하고 있다. 만일 원죄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본성의 연약함과 연약한 모든 것이 죄라고 규정한다면, 위의 성경 절들이 인간에게 하는 요구는 정당하지 못하며 불공평한 것이 된다. 죄는 우리가 동의하고 선택할 때 죄가 되는 것이다.

유혹과 죄의 차이

많은 그리스도인이 유혹을 느끼는 자체를 죄라고 생각하며, 어떤 것에 끌리는 자체가 죄라고 말한다. 물론 우리의 본성이 연약하다. 그러나 성경은 타락한 영향을 받은 연약한 본성 그 자체가 죄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끌리는 것은 죄가 아니라 유혹이다. 죄에 대해 엄밀하게 따져서 정리하자면, 죄가 성립되는 데에는 단계가 있다.
죄가 성립되려면, 먼저 유혹을 받는 단계가 있다. 유혹은 우리를 자극하는 요소, 즉 보는 것, 듣는 것 등으로부터 온다. 그래서 우리의 내적인 것이 유혹을 받아서 끌려야 하는 것이다. 그다음 죄는 유혹 뒤에 온다. 곧, 유혹을 계속 품어야 죄가 되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 단계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예를 들어, 불순한 생각이 죄가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일을 더 해야 하는데, 그것은 그 받은 유혹과 생각을 계속 품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4)라는 말씀처럼, 사람은 처음에 유혹을 받고, 그 욕심을 계속 품어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유혹을 죄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첫 번째 단계(끌리는 단계)가 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유혹과 나쁜 생각을 계속 품어 죄를 짓는 것을 죄라고 말한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머리를 길게 기르지 말라고 했는데 아들이 장발족이 되었다 하자. 이때"죄"는 아들의 몸에서 머리털이 자라는 자연적이고 생리적인 현상이나 힘이 아니고, 이발하지 않은"행위"그것이다. 인간은 범죄로 연약해진 인성을 타고났으므로, 누구나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자라게 되어 있듯이, 천성적으로 죄로 기우는 경향, 이기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경향이 죄는 아니다. 죄는 사람이 자기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와 연합시키지 않은 까닭에 그 경향에 굴할 때 오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무염시태설

어거스틴이 원죄설을 주창한 이후, 천주교는 물론, 개신교의 대부분이 이 원죄설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런데 원죄설을 믿는 사람들에게 큰 딜레마가 하나 생겼다. 그것은 예수께서 인간이 되어, 곧 성육신 하셔서 이 땅에 오셔서 구주가 되셨는데, 원죄설을 믿으면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 되게 되어 있으므로, 예수님이 자연히 죄인이 된 것이다. 또한, 죄인은 구세주가 될 수 없으므로 큰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해 낸 것이"무염시태설"이었다. 그 교리는 성모 마리아는 은총을 입어 하나님께서 죄를 없애주셨고, 그래서 죄가 없는 우리와는 다른 본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성모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 또한 죄가 없는, 우리와는 다른 본성을 가졌다는 교리였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는 될 수 있지만, 우리와는 다른 본성을 타고나셨으므로 한 혈육이 되실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그리하여 성경이 말하는 놀라운 진리, 곧 우리와 같은 본성을 타고나시고 한형제가 되시며, 우리 곁 가까이에서 모든 문제를 이해하고 도우시는, 한 혈육이 되어 우리를 동정하시는 예수님의 본성에 대한 놀라운 진리를 부인하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신앙 제 3부 정말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갖고 계신가?

예수께서 정말 우리와 같은 인성, 아담이 범죄 한 후의 인성을 입으셨는가? 예수께서 정말 우리가 당하는 것과 같은 시험을 당하셨으며, 죄의 유혹을 받으셨는가? 정말 예수께서 우리처럼 슬픔과 고통을 느끼셨는가? 예수님의 인성을 연구하다 보면,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질문들이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을 것인가? 성경에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이 나와 있는가? 그렇다. 자, 이제부터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함께 연구해 보기로 하자.

1.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의 인성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성경은 예수께서 입으셨던 인성이 우리와 같은 인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우리와 얼마나 많은 점에서 같았는가?
"범사에"이다."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히 2:17)."범사에"라는 말은 영어로"in every way"인데, 이것은"모든 면에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신성을 거론하는 것 말고 인성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같으셨다. 신이셨지만 우리와 같은 감정 - 슬픔, 기쁨, 고뇌, 행복 - 을 느끼시고, 또 우리와 똑같이 육체적인 상황 - 배고픔, 피곤함 - 을 가지셨다. 저명한 신학자 중, 특히 쿨만과 볼트만은"빌립보서 2장 5~8절"말씀에 대하여 동일한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쿨만"은 "종의 형체를 가져"라는 뜻에 대하여 그의 주석에 기록하기를,"종의 형체를 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의 형체, 곧 인간의 타락으로 영향을 받은 한 사람의 형체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라고 했다.

빌립보서 2장 7절의"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는 성경 구절의 영어 표현은"in the likeness of men"이다. 여기서 사용된"likeness"의 원어는"Homoiomati"라는 뜻으로서, 겉모양만 똑같은 것이 아니라,"모든 것이 완벽하게 같다."라는 뜻이다. 이 의미가 바로"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라는 말의 뜻이다. 더욱이 그다음 구절"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가 강조하는 것처럼, 예수께서는 성육신 하심으로 완전한 인간의 상태를 받으셨다. 그리하여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신 분께서, 속죄사업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의 부르심에 순종하심으로 인간의 육신이 되신 것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신의 형상과 하나님과의"동등성"을 버리고"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곧, 예수께서 단순히 인간의 겉모습만 가지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신 것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인성을 쓰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되,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으시고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던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겸손과 사랑인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성육신 하신 이유와 어떠한 육신을 취하셨는지를 이 성경 절보다 더 잘 설명하는 말씀은 없는 것 같다. 초기 신학자들은"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라고 표현된 킹 제임스 성경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실 때의 가지셨던 예수의 육신에 대한 바울의 정의라고 자연스럽게 해석하고 그대로 믿었다. 그들은"모양"이라는 말을 빌립보서 2장 7절에 나타난 것과 정확하게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성경 절 중"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라는 구절을 영어로 살펴보면,"God sending his own Son in the likeness of sinful flesh"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likeness"의 원어도"Homoiomati"로서 빌립보서 2장 7절의 뜻과 같다. 그리고"육신에 죄를 정하사"라는 성경 절은,"죄 된 육체 속에서"즉, 타락한 육체의 유전자의 영향을 받으셨지만 죄 없는 삶을 사신 예수께서, 실제로"죄를 육신에 정하"(로마서 8:3)셨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지해야 할 사실은, 이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죄인이 되셨다는 의미도 아니며,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어떠한 인간의 죄에 참여하셨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주께서 진실로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음이라."

성경의 히브리서만큼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는 책은 없다. 히브리서를 깊이 연구하면, 이 문제에 대한 모든 의문과 질문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위의 성경 절은 더 이상의 해석이나 주석이 필요 없는 성경 절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을 때에 입으셨던 본성에 대해 이것보다 더 명확한 표현을 어디서 찾아보겠는가? 예수께서는 천사들의 본성, 즉 인간 이상의 어떤 신적인 본성을 취하신 것이 아니요, 아브라함의 씨, 즉 아담이 타락한 이후의 죄와 유전법칙의 영향을 받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입고 나셨다고 히브리서 2장 7절은 정확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가지고 있었던 연약성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가?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연약성이 아닌가? 그러므로 다윗의 조상과 후손들을 살펴보면,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던 그 혈통은 모든 인간적 연약성을 그분 안에 쌓이게 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연약성이 역사 하는 인간의 성향 속에서도 죄를 짓지 않으시고, 우리와 같은 인성을 쓰시고도 우리의 모본이 되셔서 우리를 따라오라고 하시며 고난의 길을 앞서 걸어가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그 신비가 정말 놀랍고 눈물겹게 느껴지지 않는가?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롬 1:3).
"저를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히 2:7).

이 문제를 이야기할 때, 많이 인용되는 다른 성경 절 중에 또 하나는 로마서 1장 3절이다. 이 성경 절은 그의 조상을 통하여 예수의 본성에 관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정확하게"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라고 언급하고 있다. 다윗의 혈통이라면 어떤 혈통인가? 신의 혈통인가, 아니면 인간의 혈통인가? 히브리서 2장 7절과 9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저를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 구절 또한 예수님의 본성에 대해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여기 언급된, 천사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으로 관 쓰신 예수"의 본성은, 사망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우리 인간들과 같은 본성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예수께서는 인간으로서 사망이 들어 온 후의 인성을 쓰셨고, 사망의 지배를 받기 전의 인성을 쓰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망이 들어온 것은 오로지 죄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이 범죄한 후의 인성을 쓰셨다는 것이 증명된다.
또 히브리서 2장 10절에 보면"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이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범죄 하기 전에는 인간은 고난을 당하는 일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께서 범죄 하기 전의 인성을 쓰고 오셨다면, 그런 인성과 방법으로는 인간의 고난을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이며, 그러므로 인간을 돕고 이해하며 동정하는 능력이 그렇게 넓게 미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을 이끌고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인간이 되셨을 때에, 고난 곧 죄의 삯인 죽음의 고난을 받고 있는 인성에 참여하신 것이 확실하다.

히브리서의 몇 성경 구절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형제"들의 인성의 본질을 강조하기 위하여 쓰였다. 예를 들면,"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브리서 2:11)라는 구절과"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2:14)라는 말씀, 그리고"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2:17)는 말씀들이 그것이다.
또 다른 성경 절은"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브리서 4:15)라고 표현되어 있으며, 이 모든 성경 절들은 예수님과 인간이 한 혈통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갈라디아서 4장 4, 5절에 바울이 선언한"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과 고린도후서 5장 21절"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들은 우리와 한 혈통을 가지신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2. 예수님의 무한한 겸손과 치욕

아담이 범죄하기 전의 인성을 쓰시는 것도 그리스도 예수께는 무한한 치욕이 되었을 것이지만, 예수께서는 인간이 타락한 지 4,000여 년 후, 우리와 같은 인성을 쓰시고 성육신 해서 오심으로 우리와 한 형제가 되셨다. 곧, 인간의 타락한 영향과 인간의 유전 법칙의 영향과 인간의 연약성을 그대로 다 받으신 채 인간이 되어 오신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의 형제가 되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우리와 같은 시험을 받으셨지만, 한 번도 범죄하지 않으신 성령이 충만한 생애를 사심으로 우리의 모본이 되신 것이다. 혹자는 예수님의 인성에 대하여 말하기를, 예수께서 인간의 모양만 가지셨다고 말한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도 모양만 돌아가신 것인가? 고통의 모양만 있었고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으셨는가? 그런 사상은 도세티즘(Docetism)의 사상인데, 이것은 초대 기독교 당시의 한 사상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통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형상적이었고, 부활하신 후에는 영적인 몸, 즉 실제적인 몸이 아니라 인간적인 모습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그때 당시 이설로서 취급되었던 교리이며 사상이다.
성경에는 죄 자체가 되신 예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겪으신 겟세마네와 갈바리의 십자가에서 겪으신 고통과 고난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분께서는 속속들이 인간이 당해야 하는 죽음과 죄를 대신 지시는 고통을 당하셨고, 몸에 죄를 지셨다. 죄를 대신 진다는 뜻은 죄 자체가 되셨다는 뜻이다. 그 의미는 죄를 지었을 때 당하고 느끼는 죄책감, 그리고 죄를 지었을 때 느끼는 불행한 마음, 죄를 지었을 때 갖는 소망이 없어지는 마음, 죄지었을 때 은혜가 없이 완전히 정죄당하는 느낌이 드는 것을 말한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정말 죄 자체가 되신 것이며, 정말 인간이 되셨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신앙 제 2부 예수님의 본성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셨든, 아니든,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의아해할 독자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께서 어떤 본성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의 구원과 영생이 좌우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해 함께 연구해 보기로 하자.

1) 연구에 앞서

여기서 한 가지, 함께 공부하기 전에 먼저 밝혀두고자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인성을 쓰셨지만,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연구하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인성이지, 신성이 아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어떤 본성을 입고 오셨는가 하는 문제를 함께 연구하는 것이다. 또한, 특별히 주지해야 할 것은, 우리가 연구하고자 하는 문제는, 성육신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가 하는, 즉 그리스도의 신성이 어떻게 인성과 연합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100%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100% 인간이셨다.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은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신비이다. 사도 바울은 이 신비에 대하여,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

라고 말한다.
이 신비는 단순히 성육신뿐만 아니라 구속의 계획의 모든 면과 관계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분의 속죄와 중보사업에 관한 연구는, 진리를 찾고 연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놀라운 하늘의 보화를 가져다줄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명상할 때에, 우리는 인간의 마음이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신비 앞에서 당황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신비와 비밀에 대해 숙고하면 할수록, 이 속에서 진리는 더욱더 놀랍게 나타나, 우리는 주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진리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묶는 황금 사슬이 된다. 이 신비한 주제를 연구할 때에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연구해야 할 것인데, 이것은 우리의 이해가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있는 신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연구하여 풀어야 할 문제는, 왜 성육신이 이루어졌는가, 그리고 어떤 종류의 육체 속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는가 하는 것이다.

2) 두 그리스도?

기독교 안에는 두 그리스도(?)가 있다. 한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지고 오신 그리스도이고, 다른 그리스도는 우리와 다른 본성을 가지고 오셨다는 그리스도이다. 그런데 어떤 그리스도를 믿는가에 따라 우리의 믿음과 신앙의 견해가 현저하게 달라지고 만다. 예수님의 본성이 우리와 같은 것이었는가, 그렇지 않은 것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이슈이다.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본성을 입으셨다고 믿는 것과 예수께서 우리와 다른 본성을 입고 오셨다는 것을 믿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차이가 있는가?
만일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고 오셨다고 믿으면, 그것은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예수께서 사신 것과 같이 죄를 승리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히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되며, 예수님은 구세주일 뿐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고 오셨으므로, 예수께서 사신 생애와 성품이 우리의 모본이 되신다고 믿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만일 예수께서 우리와 다른 본성을 가지고 오셨다고 믿으면,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는 되시지만, 우리와는 다르므로 우리의 모본이 되실 수 없고,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성품을 가지거나 거룩하게 성화 되어야 할 필요성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어떤 인성을 가지셨는가를 믿는 견해는 우리의 신앙 생애와 구원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현대 기독교의 신학자들 가운데 대부분이 후자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대부분의 목사와 지도자들이 믿기를, 예수님의 본성은 우리와는 다르므로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나 죄를 지을 수밖에 없으며, 예수님처럼 죄를 승리하는 생애를 사는 일이 불가능하며, 그러므로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거의 모든 신학자는, 구원에 필요한 것은 죄를 용서받아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칭의"(Justification)가 전부라고 믿으며, 죄를 짓더라도 그 죄는 구원에는 지장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기 때문에, 흔히"한 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토록 구원을 상실하지 않는다"(once-saved-always-saved)는 이론이나 그와 유사한 주장을 믿는다.

그러나 전자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본성, 곧 아담이 타락한 이후의 본성을 쓰고 오셨다는 의견을 믿는 신학자들과 신자들의 신앙은 그와는 정반대이다. 전자의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예수께서 사신 것처럼 죄를 미워하고 죄를 승리하는 생애를 살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는 생애 동안 우리의 죄를 지적해서 알게 해주시며, 그때마다 그 죄를 이길 힘도 함께 주시는 것을 믿는다. 그들은 은혜로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칭의"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조건이라고 믿으며, 죄를 이기는 것 그 자체가 하늘에 들어가도록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거룩하게 변화되고 성화 된 사람만이 하늘에 가서 살 자격을 갖추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순결하고 완전한 성품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의 마지막 증인이 될 수 있으며, 여자의 남은 자손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매일 죄를 이기는 승리의 생활을 살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3) 신학자들의 견해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아담이 범죄한 이후의 인성을 취하셨다는 주장은 심각한 이설로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 초기 기독교의 순수한 가르침과 복음이 교황권의 지배와 교리의 변경으로 말미암아 변질하였으며, 그로 인해 기독교에 들어온 오류가 순수한 가르침과 복음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유명한 신학자로 알려진 가톨릭의 교부 어거스틴이 주창한 많은 교리가 성서와 맞지 않는 오류임에도 천주교뿐 아니라 기독교의 교리에도 깊숙이 자리 잡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 인간들과는 다른 먼 거리에 있는 다른 본성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식견 있고 신실한 많은 그리스도인은 이 문제에 대하여 아직도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20세기 후반의 신학자들, 칼 바르트(Karl Barth), 에밀 부르너(Emil Brunner),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J.A.T. 로빈슨(J.A.T. Robinson)과 같은 유명한 신학자들이, 공개적으로 타락으로 영향을 받은 예수님의 인성을 그들의 저서들에서 후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은 아담이 범죄한 이후의 인성을 가지셨으며, 우리와 같은 유전 법칙의 영향을 받은 분으로서의 예수님의 인성을 공공연하게 지지했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1934년 초에 출판된 기사를 통하여 이러한 본성을 지지하고 있다. 그의 가장 중요한 논점은"진정한 신 그리고 진정한 인간"이라는 제목 아래 실린 그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의 글에서 그는 그리스도께서"진정한 신"이었음을 확실히 밝힌 후, 그리스도의 타락한 인성에 대해 전혀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런데 현재 기독교 안에서, 예수님의 본성에 대한 가르침이나 그분의 인성에 대해 초점을 맞추거나 가르치는 일이 거의 없다.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가르치기만 할 뿐, 구세주뿐 아니라 모본도 함께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 잘 가르치지 않는다. 따라서 기독교에는 예수님이 모본이 되실 필요가 없는 신앙이 자리를 잡았고, 또한 예수님처럼 죄를 승리하며 온전한 성품을 이루어야 한다는 성화의 가르침을 거의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가르치고 있는 정확한 그리스도의 본성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를 구원받게 하고 마지막 하나님의 증인이 되게 하는 중요한 이슈이기 때문이다.

신앙 제 1부: 왜 하나님은 우리 같이 되셨는가?

우리와 하나 되시기 위해

밖에 눈이 많이 내리는 추운 밤이었다. 불을 따뜻하게 지핀 벽난로 옆에서 제임스 씨가 성경을 읽고 있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 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인간이 되어 오셔야만 했을까 하는 문제를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창문 쪽에서 무엇이 부딪히는 소리가 자꾸 퍽퍽 들리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가 창문에 가보니, 그 소리는 추운 바깥에서 참새들이 방안으로 들어오려고, 창문이 있는지도 모르고 돌진해오다가 창문에 부딪혀 떨어지는 소리였다. 너무나 세차게 돌진하기 때문에 새들은 창문에 부딪힌 후 떨어져서는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에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계속 성경을 읽었으나, 너무 많은 새가 자꾸 부딪히는 바람에 그만 안타까워져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추운 밖으로 나가서 새들을 쫓기 시작했다.
"훠이, 훠이! 새들아, 오지 마라! 저리로 날아가라! 그렇게 세게 날아오면 창문에 부딪혀 죽어. 저리 가!"
그러나 새들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자꾸만 날아들다가 창문에 부딪혀 죽는 것이었다. 그는 눈보라가 치는 밖에 한참을 서서 새들을 쫓았다. 눈 위에 서 있는 그의 발은 점점 얼기 시작했고, 코는 추위에 빨갛게 물들었다. 그러나 온 힘을 다해 오랫동안 손을 휘저어 새들을 쫓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는 생각했다. "아아, 내가 새라면, 내가 새들의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들을 구원할 수 있으련만!..." 그때, 한 생각이 그의 머리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비로소 확실하게 깨달았다. "아, 그랬구나!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이 되어 오셨구나!"

"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는가? 그리고 왜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되셨는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첫 번째 대답은, "우리와 하나가 되시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어 가까이 다가오셔서 우리와 같은 언어로 말해 주지 않으셨다면, 아마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와 하나가 되셔야 했는가?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히 5:2

이는 주께서 진실로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음이라 -히 2:16, 킹 제임스 역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를 놓아 주려 하심이니 -히 2:14, 15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 2:17, 18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히 2:11

위의 성경 절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모든 성경 절은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으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와 같이 되셔서, 우리와 하나가 되셔서, 인간들을 어떻게 도우실지를 아시기 위하여 성육신 하신 것이라고 피력하고 있다. 우리 인간들과 한 형제가 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한 혈육에 속하신, 성육신 하신 하나님! 시험을 당하여 어쩔 줄 모르는 연약한 인간들을 도우시기 위해, 그리고 죄의 강한 유혹과 사단과 악의 세력과 싸우며 투쟁한다는 것이 무엇임을 손수 겪으시고 이해하시기 위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성을 입으시다니,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1. 체휼하시는 분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히브리서 4장 15절에는 예수님은 우리를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체휼하다"라는 뜻은, "동정하고 불쌍하게 여긴다."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을 체휼하시는 분, 곧 우리를 동정하고 불쌍하게 여기시는 자비로우신 구세주이시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셔서 인간이 당하는 모든 시험을 당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사정을 아시며, 그 누구보다도 인간을 이해하시며 동정하신다. 그분은 손수 당하신 그 유혹의 힘을 아시며, 인간이 당하는 불행과 시련과 고통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동정하시며 돕기를 심히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사단이 이 세상에 뿌려 놓은 거짓 정보 - 곧 하나님은 가혹하시며, 죄를 용서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시기를 좋아하시는 인색하고 무서운 신이라는 - 거짓 정보 속에서,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참모습과 성품을 곡해하여 두려워 떠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나타나셔서는 인간들을 도우실 수 없으셨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겠지만, 연약에 싸여 죄의 세력 아래서 헤매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인간의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인간의 언어로, 인간의 삶을 이해하시는 입장에서 이 일을 하셔야 했다. 그것이 주님께서 성육신 하신 이유 중의 하나이다. 곧 우리와 하나가 되시기 위해서이다. 그분은 우리를 체휼 하시는 분이시다.

2. 어떻게 도울지를 아시는 분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히 5:2).
미국 속담에 "남의 신발을 신어봐야지 안다."라는 속담이 있다. 또한, 인디언 속담에도 "남의 신발을 신고 십 리를 가보지 않으면 그 사람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마라."라는 속담이 있다. 한 번도 범죄해 본 적이 없고, 이 세상에 살아 본 적이 없고, 죄의 세력의 무서움과 유혹을 체험하거나 견뎌보지 않은 천사들은 인간을 도울 수는 있지만, 인간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인성을 쓰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죄악의 땅에서 사셨던 예수께서는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실 수 있다. 친히 인간의 삶을 몸소 체험하신 예수께서는, 죄의 세력이 얼마나 무섭고 강한지를, 그리고 그 죄의 유혹을 견디기 위해 얼마나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고 강한 믿음으로 그것을 저지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기 위해 얼마나 자아를 철저하게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지를 잘 아신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도우실지를 아신다.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동정하시며 이해하실 수 있다.

3. 죄의 세력을 느끼신 예수님

예수께서 이 땅에 사실 때에 죄의 세력을 느끼셨는가?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으신 예수께서, 죄의 세력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아버지의 뜻대로만 살기 위해 투쟁하신 모습이 성경에 나와 있는가? 그렇다. 성경은 인성을 쓰신 예수께서 눈물로 사투하신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 5:7).
이 성경 절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왜 예수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하나님께 올려야만 했는가? 육체로 계신 예수님은 악의 세력을 느끼셨다. 사단은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아들을 괴롭히고 그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었다. 그 당시 그렇게 귀신 들린 사람과 사귀들린 사람이 많았던 것은, 사단이 메시아의 사업을 방해하고 그의 세력을 세상에 펼쳐, 인간들을 죄악과 그의 권세 아래 단단히 속박시켜 붙들어 매려고 사력을 다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단은 교회 안에 역사 하여,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사업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첩자를 보내어 흠을 잡아 교란시키며, 틈틈이 그분의 생명을 해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특히 백성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과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려고 예수님을 모함하고 괴롭혔다.

예수님의 생애는 계속적인 기도의 생애였다. 히브리서 5장 7절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예수께서는 심한 통곡과 눈물의 간구를 매일 아버지 하나님께 올리셨다. 왜 그래야 하셨는가? 주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행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그것이 설령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분께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대로만,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시간과 방법과 섭리대로만 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분은 그의 신성을 사용하여, 그분의 메시아 되심을 부인하고 그분을 조롱하며 괴롭히는 사람들을 제압하실 수도 있었고, 또한 그분의 놀랍고 두려운 능력으로 자신이 메시아임을 증거하고 과시하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시며, 자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시간을 능가하지 않도록 제어하셨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충동이나 감정을 넘어서,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기 위해 눈물로 간구하셨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경험이었다. 사단은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이 범죄하도록 그를 괴롭히고 유혹했다. 그래서 그분은 사단과 죄악의 세력을 대항하여 싸우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생애를 사시기 위하여, 그리고 죄악의 세력에 빠져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심한 통곡"으로 "새벽 미명에" 간절히 기도하시는 생애를 사셨던 것이다.

권두언

하늘과 묶어 주는 황금 고리

 우리와 하나님의 보좌를 굳게 붙들어 매어 주는 한 가지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저 먼 하늘에만 계셔서 우리에게 올라오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있는 곳까지 내려오셔서 죄인들과 같은 입장에 동참하셨으며, 우리와 함께 살면서 직접 경험적으로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야말로 진실로 우리를 하늘과 묶어 주는 고리입니다.   주님의 경험 중에서도 완전히 인간이 되어 주신 그분의 성육신 하심, 그분의 인성의 면이야말로 진실로 우리를 하나님의 보좌와 묶어주는 황금 고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지를 깊이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인간이 되시어 내려오신 성육신에 대하여 생각하고 깨달아 아는 일은 하나님의 구속 방법인 복음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취하신 인성은 어떠한 것이었을까요? 어떠한 형체의 육신을 취하신 것이었을까요? 속은 하나님이시면서 겉으로만 인간의 모양을 쓰셨을까요? 아니면 모든 면에서 한결같이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신 것이었을까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왜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으셨을까요? 이 주제에 대한 연구는 성경의 요구대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게 해 줄 것입니다.  

발행인  강 병 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