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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토크: 창조주께서 주신 최고의 천연 항암제

 

사람들에게 과일의 왕을 뽑으라면 어떤 사람은 두리안, 포도, 사과 또는 리츠를 뽑기도 한다. 그러나 과일 중 최고의 천연 항암제를 뽑으라면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단연 레몬이다. 겉보기에는 썩 먹음직하다고 볼 수 없는 레몬 그러나, 그 작은 것 속에 창조주께서 넣어주신 신비한 효능들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레몬은 최고의 천연 항암제일 뿐 아니라 면역력 증진과 우리 몸을 산성 체질에서 알칼리성 체질로 바꾸어 주는 창조주께서 주신 기적의 과일이다.

레몬의 효능 중 대표적인 것들만을 알아보자. 

           

              레몬의 효능

1. 항암 작용을 한다.

2. 항산화제 역할을 하여 우리 몸의 세포와 조직의 손상을 막고 해로운 것들을 중화시켜준다.

3. 소화액을 분비시켜 소화력을 증진한다.

4. 바이러스와 알레르기성 물질을 분해하고 막아준다.

5. 항독 작용을 한다. 몸속에 들어 오는 많은 독소를 중화시켜 없애주고 치료한다.

6. 면역력을 증진한다.

7. 세포의 활동력을 증가시킨다.

8. 항염 작용, 세포나 조직의 염증을 제거해준다.

9. 레몬 특유의 향과 맛이 정신을 살아나게 하고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레몬 속에 있는 대표적인 4가지 성분이 그런 역할을 해준다.

1. 비타민 C(항산화제, 항독 작용을 한다.)

2. 플라보노이드(신 과일 속에 많이 들어 있다.)

3. 레모노이드(특히 레몬의 껍질에 있다.)

4. 섬유질(펙틴-껍질 바로 아래에 있는 솜처럼 부드럽고 하얀 것에 있다.)

비타민 C부터 살펴보면, 대표적으로 위암 발암물질인 나이트로스아민 (불고기 한 근을 불에 구울 때 기름이 타면서 담배 200개비에 들어 있는 발암물질이 나온다.)을 중화시킨다. 그래서 레몬 속의 비타민 C는 항산화제로서 각종 발암 물질을 파괴하고 몸의 독소를 제거하는 일을 한다. 그리고 항암 및 면역 기능을 증진해준다.

플라보노이드는 영양제는 아니지만 놀라운 치료작용을 한다. 파이토케미컬인 플라보노이드는 항염 및 항암작용을 한다.

레모노이드 역시 우리 몸속에 들어오는 항암 물질을 중화시켜서 발암물질이 그 기능을 잃어버리게 한다. 특히 위암과 유방암을 예방해준다.

펙틴(레몬의 섬유질 속에 있음)은 용해성 물질이며 특히 전립선암을 예방하고 암이 전이되는 것을 막아준다.

이렇게 레몬은 최고의 항암제이다.

그러나 레몬은 항암제로서뿐 아니라 심장혈관 질환에도 매우 큰 유익을 준다. 첫째로 모세 혈관의 벽을 튼튼하게 만들어 주는 일을 한다. 둘째로 동맥 경화증을 일으키는 혈관 안의 콜레스테롤과 죽은 무기 칼슘 등 혈관 속의 떼(죽은 칼슘과 지방)를 제거하여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한다. 셋째로 피가 엉겨 붙어서 피안에 돌아다니다가 좁은 곳에 막히면 중풍이 되는데 레몬의 껍질 속에 있는 딜리모닌이라는 성분이 혈액이 응고되는 것을 방지해주고 피를 묽어지게 하여 혈액순환이 잘되도록 해준다. 고혈압에는 이뇨작용을 하여 염분을 제거해주고 요산을 녹이고 관절염을 예방해 준다. 그리고 류머티즘을 예방 및 치료해준다.

레몬의 활용 예

천식: 신선한 레몬을 짜면 즙이 약 두 숟가락 정도 나오는데 하루 세 번 밥 먹기 15분 전에 그냥 마시거나 물에 타서 마시고 자기 전에도 마시면 천식을 예방할 수 있다. 천식은 주로 소화기 계통이 안 좋을 때 많이 생기는데 레몬은 소화액 분비를 증진하고 레몬의 비타민 C가 알레르기 때문에 분비되는 히스타민 분비를 억제해 준다.

체 했을 때: 레몬 하나를 짜서 레몬 즙과 똑같은 양의 물을 따끈하게 끓여서 함께 섞어 마시면 금방 체한 것이 내려간다.

감기, 기침, 가래가 생길 때: 레몬주스와 파인애플 주스를 반씩 섞어서 마시면 목에 있는 가래가 다 녹고 레몬즙을 물에 타서 계속 마시면 감기 예방에 좋다.

오한이 있을 때: 레몬즙을 물에 타서 마시면 대부분 하루 만에 치료된다.

악취가 날 때: 레몬 즙을 물에 타서 칫솔에 묻혀 양치질하면 입뿐 아니라 위장에서 나오는 냄새까지도 제거해준다.

빈혈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레몬: 레몬은 채소에 있는 철분의 흡수를 도와주므로 채소를 먹을 때에 레몬을 함께 섭취하면 좋다. 채소로 반찬을 만들 때 레몬 즙을 조금 섞어서 만들어도 맛을 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레몬에는 폴렉 에시드라는 것이 있어서 붉은 피를 생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항균 작용: 레몬 즙을 탄 물에 채소나 과일 등을 담그든지 그 물로 씻어 사용하면 대장균은 물론이요 콜레라균까지 없어진다.

구충제: 레몬을 껍질까지 갈아서 마시면 우리 몸속의 회충들을 죽인다. 그리고 레몬유를 바르면 곰팡이를 없앨 수 있다.

금연: 신선한 레몬주스를 조금씩 입에 물었다가 넘기면 금연을 하는데도 큰 도움을 준다.

양념이 적고 자극성이 없는 순수한 음식을 먹을수록 금연을 하기가 좋다.

피부 미용: 레몬주스를 꾸준히 마시면 혈색이 좋아지고 레몬 껍질을 피부에 문지르면 피부가 부드러워지고 매끄러워져 미용에 좋다.

이 밖에 많은 적용을 할 수 있으나 지면 관계상 다 적을 수 없을 뿐이다.

위의 내용을 요약해 보자.

1. 레몬은 항암작용을 하여 위암과 유방암, 전립선암의 예방과 치료에 매우 좋다. 특히 암이 전이되는 것을막아준다.

2. 레몬은 천식과 기침, 감기 및 알레르기성 질병에 특효가 있다.

3. 철분을 잘 흡수하게 해주어 빈혈을 예방 및 치료해 준다.

4. 고혈압과 류머티스 관절염에 좋다.

5. 동맥 경화증과 중풍을 예방해준다.

6. 바이러스나 균에 의한 감염성 질병을 예방해 준다.

7. 악취 제거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

8. 피부 혈색을 좋게 하며 피부미용에 좋다.

9. 구충제와 곰팡이 방지 역할을 한다.

10. 피로회복에 매우 좋다.

11. 금식과 아울러 레몬 즙을 활용하면 각종 질병에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12. 레몬의 향과 맛이 정신을 소생시켜 우울증과 잡념에서 깨어나게 해주고 맑은 정신과 상쾌한 기분을 준다. 

레몬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천연 치료제이다. 레몬을 잘 활용하여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Tip 레몬 사용법:

먼저 레몬을 통밀가루를 탄 물에 씻어 껍질에 있는 농약들과 균들을 중화시킨다. 껍질째 적당히 썰어서 즙을 낸다. 즙을 만들었을 때 30분 안에 사용하는 것이 좋다. 사람이 마실 때 레몬 즙과 같은 비율로 물을 섞어서 마시는 것이 좋고 경우에 따라 꿀 등을 조금 섞어서 마셔도 된다. 증상에 따라 레몬의 순수한 즙을 눈이나 코에 한 방울 넣어도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으며 껍질째 간 것을 아픈 관절 등에 발라도 효과를 볼 수 있다. 레몬 껍질과 속을 분리해서 사용할 경우 껍질을 그늘에 잘 말려서 보관했다가 끓는 물에 넣어 차처럼 마셔도 좋다. 레몬 껍질과 알맹이 사이에 있는 솜 같은 흰 섬유질에도 중요한 성분이 있으므로 함께 섭취하는 것이 좋다.

 

사랑의 편지: 마음이 흐르는 물이라면

 

마음이 흐르는 물이라면

 

                                                                                                     강영은

 

냇물 가에 앉아 흐르는 시냇물에 글씨를 씁니다.

아무리 손가락을 물속에 깊숙이 넣고 써 보아도

흐르는 물에는 글자를 새길 수가 없습니다.

흔적까지 지우며 흘러가는 물을 보며

문득 우리 마음도 흐르는 물 같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던져지는 어떤 냉정한 눈빛에도,

멸시에 찬 어떤 비아냥거림에도,

힐끗거리는 어떤 험한 표정이나 어떤 모함 어린 비판에도,

아무런 자국이 남겨지지 않는 물 같은 당신의 마음처럼,

우리 마음도 흐르는 물 같다면 좋겠습니다.

 

냇물 가에 앉아 흐르는 시냇물을 바라봅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을 흘러도 변하지 않는 초연함으로,

아무리 돌멩이가 막아도 부딪히지 않는 부드러움으로,

아무리 틈이 많아도 그 빈자리를 채우는 풍요로움으로,

아무리 다른 틀에 담겨도 자신의 모양을 고집하지 않는 겸손으로,

그렇게 감싸며 흐르는 물을 보면서

우리 마음도 흐르는 물 같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저께나 오늘이나 한결같은 당신의 초연한 마음처럼,

덜 갈린 마음의 무거운 돌덩이 녹이시는 당신의 부드러운 마음처럼,

빈틈 빈자리마다 드러나는 허물 채우시는 당신의 풍요로운 마음처럼,

어떤 마음자리에도 아무 틀 없이 드시는 당신의 차별 없는 마음처럼,

그렇게 낮은 데로 임하시는 물 같은 당신의 마음을 보면서  

우리 마음도 겸손하게 흐르는 물 같다면 좋겠습니다.

 

생명이 있기 위해서는 흐름이 멈춘 채 괴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솟아나는 샘물이 시냇물을 끊임없이 흐르게 만들듯이,

영혼의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산 샘물이 늘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영생으로 인도하기 위해 우리 속에서 생수를 계속 쏟아내어

남을 시들게 하는 이기심,

남에게 생채기를 내는 질투심,

남을 가시처럼 찌르는 교만,

모두 쓸어버리고 흐르게 하는 생수의 샘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흐르는 물에는 자국을 남길 수 없습니다.

너무 금방 아물어 자국이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흐르는 물에는 아무 것도 새길 수 없습니다.

칼로 새겨도 아무렇지도 않게 합쳐져 흔적이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흐르는 물에는 그 무엇도 숨길 수 없습니다.

흐르는 물살은 떠내려 보내지 그 무엇도 가라앉게 하지 않을 것이기에

 

오늘도 물 같은 당신의 마음 닮고 싶어

시냇물 가에 조용히 앉아 있습니다.

 

신앙 제 5부: 완전을 가능하게 하는 말씀의 능력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으로 완전해질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를 깨닫게 해주고,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며, 말씀이 우리에게 능력을 준다. 완전을 가능하게 하는 말씀의 능력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1) 말씀은 창조의 능력을 가졌다

 

우리의 말은 아무 힘도 없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은 힘(Power)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말씀하시면 그것은 이루어진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 성경은,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은 바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6, 9)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 주님의 말씀은 능력이다. 주께서 “어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실 때에, 그 말씀 자체가 바로 “그것”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어떤 말씀이든지, 그것이 표현될 때에는 바로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존재하게 된다. 곧, 그분이 어떤 것을 지명하여 부르거나 이룰 것에 대해 말씀하시면, 그것은 말씀과 동시에 곧바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곧 능력이다. 그런데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는, 그래서 반드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매우 중요한 사실은, 창조하실 때에 사용하셨던 그 똑같은 능력의 말씀이 지금 우리를 매일매일 새로운 생명으로 재창조하신다는 사실이다. 말씀이 우리를 태초에 가졌던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과 성품으로 재창조하신다. 곧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한 성품을 이룰 수 있게 하시기에 능하시다.

 

2) 말씀 되신 그리스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1~3). 그리스도는 거룩한 말씀이시다. 그분께서는 그가 발하신 말씀 가운데 계시다. 만물이 그의 안에 거한다고 하는 것은 세상이 그분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바로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히 4:12)이다. 말씀 되신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인간들의 마음속에 거하시며,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마음 속에 거하시고 임재 하실 때, 우리는 죄의 세력에서부터 보호함을 받고 승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을 말씀을 통해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성품과 생애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와 아울러 죄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까지 받게 되는 것이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인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유혹은 아무런 힘도 갖고 있지 못하다.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으셨다. 주님의 고결하신 성품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사탄은 죄를 짓게 강요할 수 없다. 주님께서는, 그분을 받아들이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그분의 능력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의의 아름다움을 나누어주신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될 수 있는 능력(power)을 주신다. 그러므로 말씀을 받아들이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되고, 그러면 주님께서는 인간 속에 성품을 완전하게 하는 위대한 사업을 성취하시는 것이다.

 

3) 말씀이 포함하는 약속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어떤 명령을 순종하고 실천하라고 요구하시고 권면하실 때마다 거기에는 항상 약속과 보장이 따라왔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의 공식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순종에 대한 요구 이전에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보장의 말씀이 앞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성경의 원칙을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볼 수 있다.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power)를 내게 주셨으니,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또한, 로마서 1장 16절을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power)이 됨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요한복음 1장 12절에는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power)를 주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서도,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요구하시거나 하라고 명령하실 때, 그것을 순종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명령은 약속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온전하게 될 수 있는 능력과 힘을 주신다는 보장이 되며, 그 말씀에 따라 우리는 온전하게 될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과 그것이 보장하는 약속을 연구할 때, 우리는 그 약속에 매혹될 것이며 감동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드디어 우리 자신의 연약한 두려움과 의심을 버리고, 말씀이 주는 승리를 향하여 나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는 승리에 대한 보장과 약속 위에 우리의 시선과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순종에 대한 확신과 담대함을 갖게 하려고 말씀의 능력을 우리 앞에 제시하여 주신다. 그분의 말씀 능력과 약속에 우리의 눈을 고정하고, 그분의 능력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한 우리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전진하게 될 것이다.

4) 말씀의 능력을 믿자

 

창조와 홍수, 애굽에 내린 재앙, 그리고 홍해와 요단 강을 가르신 기적 등, 성경 전체의 역사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강력하게 소리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아픈 자가 나았고, 무덤이 열리며, 폭풍우가 잔잔해지는 이야기가 나온다. 방탕하던 사람이 순결해지고, 그리스도의 박해자였던 사울이 전도자 사도 바울이 되고, 항상 흔들리기만 하던 베드로가 확고부동한 순교자가 되었으며, 우레의 아들이었던 요한이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 측량할 수 없고, 강력하며,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능력에 대해 말하고 있다.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도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 후에 뒤이어서 나온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능력의 말씀이었다. 즉, 강한 제국의 세력을 약화시켰으며, 이방의 강력한 군대를 격파했고, 홍해를 가르고, 바위로부터 물을 내시며,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했던 것과 같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그들은 보고 경험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백성에게 있어서 큰 능력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세상 역사의 마지막에 사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위기 가운데 처해 있다. 사탄의 요구와 악의 세력에 자연적으로 굴복하는 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신앙이 되었고, 죄로부터 해방하는 구원이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는 아무 상관 없는 복음이 인기 있는 복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죄를 지으며 살다가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 참 복음처럼 가르쳐지고 있다. 죄를 승리한다는 가르침이나 완전의 경험을 한다는 복음은 이단시 되고 이상한 복음으로 터부시 되고 있다. 완전에 대한 가르침을 들을 때에, 많은 그리스도인은 거의 쇼크 상태에 들어간다. 도대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믿기는 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 능력의 현시들을 한갓 옛날 이야기쯤으로 흘려버리는 것일까? 아니면, 성경 자체를 부인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일까?

 

능력! 창조주 하나님 말씀의 능력, 인간을 재창조하시는 말씀의 능력을 믿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변화시키는 능력, 진리의 성화시키는 능력, 이러한 모든 능력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로 인간들을 변화시키고 사람들의 생애 가운데에 효과적으로 역사 하도록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 능력을 무제한으로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말씀의 능력으로 우리는 완전한 경험에 이를 수 있다.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그렇다. 하나님 말씀의 능력으로 완전하게 승리할 수 있다. 하나님의 명예, 그리스도의 명예는 그분 백성의 성품의 완전함에 달려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같이 되기를 갈망하는 바로 그 순간에, 주님께서는 그분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그 형상을 새기기 시작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완전케 하시는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그 일을 그분은 마치실 것이다. 말씀의 능력을 신뢰하고 완전의 경험을 향해 나아가자.

 

**마치면서

 

앞의 기사들에서 우리는 완전에 대해서 함께 공부해 보았습니다. 성경에는 완전할 수 있다는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유다서 24절은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에 대한 매우 중요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능히 너희를 거침이 없게 하시고(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keep you from falling)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게 하시리라." 주님은 우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하시기에 능하신 분이십니까? 유다는 그렇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하시기에 능하신 분이십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은 우리가 주의 깊이 살펴보아야 할 또 다른 성경 절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할까요? 죄를 이기는 승리가 정말로 가능할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3장 21절에서 또 놀라운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분명히 우리는 죄를 승리할 수 있으며, 완전한 성품을 이룰 수 있고, 완전의 경험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힘이 아닌, 주님의 능력으로, 말씀의 능력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호에서 함께 연구한 “완전”의 주제가 독자 여러분의 영적 경험을 풍부하게 하고, 여러분이 완전의 경험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신앙 제 4부: 완전의 경험은 가능한 것이다

 

완전”, 그것은 가능한 것인가?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는 가능한가?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명령하셨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왜 주님께서 그렇게 되라고 명령하셨겠는가?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는 가능하다.  

 

   1)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온전하게 된다는 의미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장 48절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명령하시기 전에, 어떻게 사는 것이 온전하게 사는 것이라는 것을 그 앞 절들에서 말씀해 놓으셨다. 예수께서는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게 된다는 의미에 대해서 실제로 풀어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곧, 착한 행실로 이웃에게 빛을 비추는 것이요,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며, 형제를 욕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으며, 또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기 전에 형제와 화해하고, 생각으로라도 범죄하지 말고, 손이나 눈이 범죄하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버리듯이 죄를 과감히 버리는 것이 온전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또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달라는 것보다 후히 주고 베풀며, 핍박하는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온전하게 사는 것이라고 하셨다. 생각으로라도 범죄하지 않는 것, 자신을 괴롭히고 망하게 하는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고 성가시게 구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며, 자기를 때리려고 하는 사람에게 다른 편 뺨까지 갖다 대어주는 일이 과연 인간에게 가능한 것일까?

그 일은 사람이 완전히 거듭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자신이 없어지고 그 속에 예수께서 임재해 계신 사람, 예수님 안에서 자아가 죽어 없어진 사람, 자신의 뜻이 아닌, 온전히 예수님의 뜻과 명령대로만 사는 사람 아니면 이 일은 불가능한 일인데, 왜냐하면 이 일은 인간의 힘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계명을 지키는 완전한 생애이며, 마음이 온전히 거듭난 사람에게 이것은 가능해진다. 예수님께서는 곧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곧 자신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품성을 재현하는 것임을 늘 가르치셨다. 인간이 계명을 지키는 완전한 생애를 살 수 있는가? 육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거듭난 사람, 자아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좌정해 계시는 사람에게는 이런 생애가 가능하다.

   2) 완전해지면 질수록 허물이 더 많아진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완전의 경험을 하고 온전하게 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완전의 경험이 깊어지면 질수록 자신에게 허물이 더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완전의 경지와 경험이 매일 더 깊어 가는데 허물과 부족이 더 많이 드러난다니 그것이 무슨 말인가? 그것은, 완전의 경험을 하면 할수록, 곧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굴복하고 주님께 사로잡힌 경험을 하면 할수록, 주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고 주님께 더 가까워지기 때문에, 자신의 부족함이 더 많이 보이고 자신의 허물을 더 많이 깨닫게 되며, 예수님의 아름다우신 성품에 비해 자신의 품성이 너무 형편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 가까이 나아가서 그분의 품성의 순결함을 더 똑똑히 보고 알게 되면 될수록, 우리의 죄가 심히 가증한 것을 깨닫게 되고, 주님의 아름다우신 품성을 보면 볼수록 우리 자신의 허물과 추함이 더 생생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과 가깝게 지내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더 알게 되어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완전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야말로 완전의 경험에서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아를 부인하고 버리는 일은, 주님을 받아들이고 주님과 함께 걷기를 시작할 때부터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과정에도 늘 계속되어야 하는 경험이다.

3) 완전한 승리는 가능하며 필수적인 것이다

아무리 부인을 하려고 해도, 성경을 연구해 보면, 특히 마지막 시대에 대한 성경의 예언을 연구해 보면, 완전한 성품을 가지는 것과 죄를 승리하는 경험은 반드시 해야 할 경험임을 부인할 길이 없다. 마지막 때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고, 환란을 통과하여 구원을 받을 십사만 사천의 성품에 대한 성경의 묘사를 보라. 어린 양 되신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이 그들 속에 이루어져 있으므로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이 쓰여 있지 않은가?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인 십사만 사천은, 승리의 표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흰옷을 입고 거문고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른다고 성경은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종려나무 가지는 고대에서 승리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으로서, 성경에 승리의 상징으로 나온다. 그들이 무엇을 승리했다는 말인가? 사단의 세력을 벗어나 죄를 승리했으며, 선악의 대 쟁투에서 승리했다는 말이다. 그들의 앞이마, 즉 선택과 이성의 판단과 결정을 하는 앞뇌의 전두엽은, 항상 하나님의 편을 선택하고, 언제나 성령의 음성에 굴복하여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일을 계속해 왔고, 성화된 의지의 굴복 경험이 습관적으로 자리 잡아 왔으므로 그들 속에서 연속적인 승리의 생애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살아서 구원을 얻을 십사만 사천의 경험은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이 되어야 한다. 특히 십사만 사천은 품성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완전히 반사하는 사람들로서, 극상품인 첫 열매가 되어 하나님을 온 우주와 세상에 증거하는 증인들이 될 것인데, 첫 열매의 성품은 바로 완전의 경험을 하는 것과 직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를 완전히 승리하는 장성한 성품의 상태가 과연 인간에게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애를 주장하신다면, 우리는 결코 반역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속에 살아계신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범죄하지 않으신 것처럼 죄짓기를 거절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죄를 동시에 우리 마음 보좌에 모실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누인 마음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십사만 사천은 늘 하나님께 굴복된 마음을 지속하는 경험을 해왔기 때문에, 늘 주님의 편을 택하고 사단을 섬기는 것을 거절하는 경험을 해왔기 때문에, 늘 죄를 승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경험을 습관적으로 해왔기 때문에, 그들에게 승리의 경험은 습관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이룬 그들의 앞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쓰여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사만 사천의 경험, 완전의 경험을 하기 위해 우리의 힘과 노력과 정성과 헌신을 다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다시 한번 오순절의 큰 성령 운동이 임하기 전에, 그리고 하나님의 천사가 인을 치기 전에, "완전"의 경험을 하는 것은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

 

신앙 제 3부: "완전"의 경험을 갖기 원하는 당신에게

 

온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싶다면, 그리고 온전한 삶의 경험을 가지고 싶다면, 어떻게, 어떤 믿음과 개념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 완전의 경험을 갖기 소원하는 당신에게 이 글은 완전의 경험을 지속할 방법을 가르쳐주고, 실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1) 거듭남과 굴복의 지속성이 필요하다

 

완전한 성품을 갖기 위해 가장 필요 되는 것은 거듭남이다. 거듭남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함을 가져오는데, 그것은 언제나 구원을 위하여 충분한 것이다. 거듭남이란 자신과 죄에 대하여는 죽고 전적으로 새로운 생명이 나오는 것이다. 거듭난 마음, 그리스도께 굴복된 마음을 가질 때에 새로운 능력이 인간의 마음을 점령한다. 죄를 미워하고 이전의 쾌락들을 버리게 되며, 새로운 애정, 새로운 관심, 새로운 뜻을 갖게 된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 지금까지 그리스도보다 더 좋아했던 것들은 이제 다 버려지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생애의 매력이 되며 그의 기쁨의 극치가 된다. 괴로운 듯 보이던 순종과 성화의 과정이 이제는 그의 기쁨이 된다. 한때 탐닉했던 죄악에 대하여 애통하며, 자기에 대한 사랑과 허영은 버려지고, 다시는 이전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되고, 그의 품성을 반사하며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 굴복하는 것과 굴복된 마음과 성품은 완전에서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굴복을 중단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우리 속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굴복이 일정하지 않다. 우리는 때때로, 아니 자주 주님께 굴복하는 일을 그만둔다. 영적인 소홀함이나 부주의로, 그리고 너무 바빠서 주님과의 교통과 주님께 굴복하는 일을 그치고 마음대로 자행자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 굴복하는 일을 절대로 중단하지 말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언제나 주장하시게 하여야만 죄를 승리하는 일과 완전한 삶과 경험을 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관건은 우리 굴복의 지속성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꾸준하지만, 굴복 여하에 따라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때때로 약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 매 순간 하나님께 바쳐진 마음으로, 굴복된 마음과 심령으로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며, 그 굴복된 성품과 마음 그 상태 그대로가 완전한 것이다.

 

2) 하나님의 관점과 평가로 완전을 생각하자

완전에 대해 잘못 이해하게 되면, 죄에 대한 충동조차 느끼지 않는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   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하여 실망하게 된다.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이나 평가대로 완전을 이해하면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잘했는지 내리는 평가로 우울증에 걸리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평가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온전하게 하시며, 내가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향하여 “순전한 의인”이라고 하셨고, 노아를 “당대의 의인”이라고 부르셨다. 그들이 완전히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부르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평가로 자신을 보자.

완전의 경험을 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계속 자라나야 할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3:17~19).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은 하늘에 가서도 계속 자라날 것이다. 거기에는 다 자랐다, 다 이루었다 할 지점이 없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성경은 완전한 마음의 상태를 경험하라고 말하는 것이지, 다 올라가고 이룬 지점을 말하는 완전주의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사도바울도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4)라고 하지 않았는가?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 18:27)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사 43:1)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온전하게 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며, 또 우리를 그렇게 되게 하신다. 그 사실에 감사하자! 때로 인격이나 지식이나 생각이 모자라 실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죄가 아니다. 마음속에 하나님께 반역하고 반항하는 동기나 마음이 없고, 죄를 지으려는 의도가 없지만 연약하여 실수할 수가 있다. 어린아이는 인격이 덜 되어 잘못하는 수가 많다. 그럴 때 그 실수하는 어린아이는 가르치면 된다. 하나님께서는 동기와 심중을 보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우리 속에 비록 죄의 본성이 남아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계명대로 살려고 하는 우리의 동기와 소원과 우리 삶의 방향을 보시는 것이다. 그리고 죄와 타협하지 않고 주님께 굴복한 성품으로 사는 우리에게 그분의 능력으로 온전한 성품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눈에 보기에 매우 훌륭하고 영적으로 보이고, 또 착한 선행과 친절로 보이는 일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실 때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러나 또 사람이 보기에 틀린 일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그 사람의 동기와 심중이 올바를 때가 있다.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시지 않는 분이심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품성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다. 그리고 우리의 품성, 곧 생각과 감정을 지배하는 것이 우리의 의지이다. 그리고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늘 바칠 때에, 우리의 감정과 생각이 하나님의 것이 될 것이고, 우리는 완전한 품성을 갖게 될 것이다.

3) 시작은 주님과 그다음부터는 나 혼자?

의로워지고 완전한 성품을 가지게 되기를 원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겪는 경험이 있다.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지만, 그다음은 혼자의 힘과 혼자의 의로 완전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생기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 충성하려는 진실한 그리스도인 중에 이런 경험이 생기기 쉬운데, 계명을 순종하는 일, 거룩하게 성화 되는 일, 생애를 개혁하는 일 등, 그리스도인 생애의 전반적인 일에 있어서 열심히 순종하는 생활을 사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시작은 그리스도의 의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혼자의 의와 행위로 서려고 애를 쓰다가 낙심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그런 사람들은, 시작할 때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힘을 의지하지만, 신앙생활 도중에는 자신의 힘으로 해야 한다는 열심으로 주님의 능력에 온전히 의지하는 일을 잊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의를 얻는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그리스도의 의와 공로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 외에는 아무것도 우리에게 은혜와 언약의 축복 중 하나도 얻을 자격을 줄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축복들을 받기 위하여 오랫동안 희망하고 노력해 왔지만, 그것들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 스스로 그것들을 받을 자격을 갖추기 위하여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사상을 품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는 마치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자아를 바라본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의 공로와 능력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일 대신, 무의식중에 내가 주님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해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할 가망이 없으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 그분 안에 우리의 소망이 있고, 우리의 의롭다 함이 있고, 우리의 의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축복을 구하기 전에 그들이 변화한 사실을 그분께 입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실은 전혀 맞지 않는 것인데,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야 하고,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야 하는 연약한 존재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품성을 형성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죄 많고 속절없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현실 그대로 그분께 나오기를 바라신다. 회개는 용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령의 감화를 통하여, 우리는 죄를 깨닫게 되고 용서의 필요를 느끼게 된다. 마음속에서 회개를 이루어 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 시작에 주님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처럼, 자라는 과정, 곧 성품에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에도, 생애를 개혁하는 일에도, 죄를 승리하는 일과 장성한 성품으로 자라나는 일에도, 주님의 도움이 항상 필요한 것이다.

비록 시작은 주님과 함께했으나, 도중에 그들의 심령을 지켜 주시도록 그분께 위탁하려고 하지 않고, 그들의 마음속에 시작된 은혜의 역사를 완성하기 위하여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가운데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위탁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아를 신뢰하는 일이 많다. 일부분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일부분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양심적인 영혼들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기 위하여 그분을 바라보지 않으면서, 시험을 대항하기 위한 경계와 그분의 가납하심을 받기 위한 어떤 특정한 의무 수행에 몰두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승리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헛되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을 생각하며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 중 어떤 사람들의 심령은 끊임없이 속박당하고 있다. 그들의 무거운 짐을 예수님의 발아래 내려놓기 전에는 안식을 얻지 못한다. 물론 언제나 깨어 있고, 죄를 승리하며, 거룩한 성화의 생애를 살며 성령의 열매를 삶 속에 맺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심령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을 때, 주님께 의탁 되고 그분의 임재 속에 지속적으로 살 때에 이런 일은 저절로 생기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선행을 전혀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실수하고 죄 많은 상태 그대로 그리스도께 나가면, 그분의 사랑 안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으며,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의 공로를 온전히 의지하고 그분께 나오는 모든 사람을 언제나 어김없이 받아 주신다. 주님과 함께 지속적으로 사는 완전의 경험은, 어쩌면 시작할 때와 같은 감정의 황홀경은 없을지라도, 영속적이며 평화로운 신뢰가 있고, 사랑이 조용하고 충만하게 마음을 채우는 일이 있다. 의무는 즐거움이 되고 희생은 기쁨이 된다. 그러므로 완전의 경험을 위해서, 우리는 시작도 나중도 늘 주님과 함께 가야 한다.

 

신앙 제 2부: "완전"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에서 “완전”이라는 단어는 금기시된 것 같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완전이라는 단어의 정의와 개념이 곡해 되었기 때문이다. 참된 회개와 거듭남을 경험하고 새로운 생애를 살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조차도, “완전”이란 단어나 “온전하라”라는 말은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대부분 그리스도인은 “완전”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그것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느끼게 되는 자신의 부족함이나 미비한 영적 상태 때문에 구원에 대한 불안감 내지는 압박을 느끼게 되며, 심지어 자신을 비하하고 낙심과 초조감에 빠지는 현상까지 초래하게 된다. 또한, “완전”을 하나님의 관점과 평가에서 생각해야 함에도, 인간의 눈으로 판단하거나 재고 분석하여, 나는 완전하다거나, 또는 완전하지 못하다거나, 혹은 저 사람은 완전하고, 이 사람은 완전하지 못하다고 인간의 생각과 평가대로 판단한다.

이렇게 완전에 대한 왜곡된 개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완전이라는 단어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게 하였으며, 심지어 완전이라는 말을 무서워하게끔 해 버렸다. “완전”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가지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작용하고 있다.  

* 완전에 대한 거부감이 생기게 된 이유

1. 완전에 대한 곡해된 개념 때문에

2. 율법주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3. 완전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으므로

4. 사단이 심어 놓은 완전에 대한 공격 때문에

완전의 개념이 거부감을 일으키고, 곡해된 데에는 자유주의 신학과 기독교에 들어온 거짓 복음이 기여한 바가 크다. 순종을 강조하지 않고 성화를 경시하도록 가르치는 현 기독교의 복음은, 하나님의 뜻과 계명대로 순종하고 살아야 하는 성도의 당연한 행실을 율법주의로 몰아가게 하여 버린다. 그래서 성경의 순수한 가르침과 진리대로 순종하며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율법주의자 또는 완전주의자라는 붉은색 도장이 자신들의 등 뒤에 찍힐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움츠리게 되었다. 또한, 변질한 복음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완전에 대한 가르침을 전혀 듣지 못했고, 죄를 승리하고 이기는 믿음에 대해 펼친 사단의 공격으로 완전이란 단어가 금기시 되어온 것이다. 사실 성경을 상고해 볼 때, 우리는 완전이라는 단어가 매우 자유로이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주저함 없이 이렇게 말씀하셨지 않는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perfect)과 같이 너희도 온전 (perfect) 하라”(마 5:48). 완전하라는 말은 두려운 말이 아니다. 완전이라는 말의 의미와 올바른 개념을 알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말이다.

완전은 그리스도인들의 구원과 떼놓으려야 떼놓을 수 없는 주제이며,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완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경험이 바르게 될 수 있다. 우리의 신앙에 큰 유익이 될 완전 문제에 대해 함께 공부해 보자.

1) 완전이란 무엇인가?

많은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완전에 대한 개념은 상당히 왜곡되어 있다. 대부분 그리스도인은 “완전”을, “모든 것을 다 성취하고 올라간, 모든 것을 다 이룬 지점”으로 생각한다. 즉, 죄를 지을 수 없는 경지나, 죄를 짓지 않는 지점에 이른 것을 완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은 이르러야 할 어떤 지점이나, 다다라야 할 어떤 꼭짓점이 아니다. 완전”이란, 마음의 상태나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즉, 쉽게 풀어서 설명하자면, 완전은 죄를 지을 마음이 전혀 없는,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된 마음의 상태와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있는 상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굴복되어 있는 마음의 상태를 “완전”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완전의 상태에 이를 것을, 이런 마음을 가질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2) 완전과 완전주의의 혼동

너무나 많은 사람이 완전함 (perfection)과 완전주의(perfectionism)를 혼동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완전의 개념과 완전주의의 개념은 서로 판이하다. 다 올라가서, 다 성취해서 무엇을 이룬 도착지의 개념은 완전주의에서 오는 것이다. 무엇을 행하고 이루어서 어떤 지점에 다다른다는 개념, 자신의 행위로 의를 쌓아 완전한 지점에 이른다는 것은 완전주의(perfectionism)로서,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이며, 옛날 유대인들이 지향하던 바리새파주의, 곧 완전주의와 율법주의이다. 완전주의는 구원을 위해 도달해야 할 경지가 있고, 그 지점에 이르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신앙 생애이다. 또 그런 경지에 도달하고 나면 더는 그 경지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서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완전(perfection)이란 완전주의와 다르다. 완전함이란 죄짓지 않는 지점에 이른 것이 아니다. 완전은 지점이 아니고, 경험과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자, 여기서 더 자세하게 완전이란 단어에 대해 분석해 보기로 하자.

1. 절대 완전

첫 번째는, 절대 완전이다. 절대적인 완전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사람들은 완전이라고 하면 절대 완전을 떠올리며 결론을 내리기를, 우리 인간들은 결코 절대 완전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한다. 그 말은 맞다. 왜냐하면, 절대 완전, 즉 한계도 없고 미래에 실패할 가능성도 없는 절대적인 완전은 하나님 자신을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절대 완전이란 피조물들에게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며, 인간이나 천사들을 위한 것도 아니다. 천사들의 완전은 하늘에서 실패하였고, 사람들의 완전함은 에덴에서 실패하였지 않는가? 그러므로 절대 완전이란 천사나 인간에게 사용할 수 없으므로, 이것은 하나님께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2. 본성적 완전

두 번째, 살펴볼 완전에 대한 정의는 본성적인 완전이다. 우리의 죄 된 본성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만 제거될 것이며, 그 후에야 속으로부터 나오는 죄 된 충동들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이 완전이라고 하면, 죄의 충동이나 유혹조차 느끼지 않는 본성의 완전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본성이, 속으로부터 죄에 대한 연약성이나 충동이나 유혹조차 느끼지 않게 다 제거되는, 본성이 전혀 다른 본성으로 변하는 본성적 완전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이전에 본성적 완전을 경험할 수 없다. 성경적 완전이란, 죄의 충동을 받거나 유혹을 받아도 마음이 하나님께 굴복되고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동하거나 죄를 선택하지 않는 것을 말하지, 죄의 충동이나 유혹까지 본성적으로 제거되는 “본성적인 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3) 완전의 올바른 관점

완전과 죄 없는 상태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그 정의를 성품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완전에 대한 정의를 논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완전의 개념이다. 성경은 우리의 성품을 말하면서 완전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완전, 혹은 완전함에 대한 단어를 묘사할 때에 적어도 두 가지 성품에 대한 견해가 있다.

1. 굴복된 성품

첫째는 굴복된 성품이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생애를 그리스도께 완전히 굴복할 때, 개심의 순간에 일어난다. 모든 죄를 회개하고 다 버리며, 하나님께 마음을 온전하게 바친 상태로서의 그 경험은 완전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경험에서 인간의 완전은 그 당시에 완성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저 그리스도와 함께 걷기를 시작한 것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빛이 주어진 만큼 알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전적으로 굴복하는 것을 받으실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굴복된 성품은 완전한 것인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완전하다고 간주하시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설명하면, 완전은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굴복된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의미한다. 완전은 본성의 완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의 성품이 완전하게 될 필요성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과 진리에 대해 완전하게 굴복된 성품을 의미한다. 성경이 말하는 그 성품은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성품과 그 의미에서 전혀 다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착하고 친절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그 사람 성품이 참 좋네!”라고 말하지만, 성서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성품을 계명에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진리와 계명에 순종하는 생애를 사는 사람이 완전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다.

2. 장성한 성품

그런데 거기에 우리가 꼭 살펴보아야 할 또 하나의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장성한 성품이다. 하나님께 굴복한 사람은 죄를 짓지 않기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그러므로 여기서 장성한 성품이란, 개인의 생애에서 추수할 만큼 무르익은 상태를 가리킨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항하여 더는 죄짓지 않기로 계속 선택할 때에 우리의 성품은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이 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가 반역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 사단의 편을 선택하지 않고 성령의 음성에 복종하는 선택은 어느 때에나 일어날 수 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안에 살아 계신다면 그분께서 우리의 생애를 주장하실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범죄치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도 죄짓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지 않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범죄할 때에는 사단의 지배를 선택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하지 않는가?

이 개념은 단순하면서도 명백한 방법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들어 오시면 죄가 나가고, 죄가 들어오면 그리스도께서 나가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죄가 동시에 우리 생애의 보좌에 같이 앉아 우리를 다스리도록 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누인 마음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장성한 완전의 상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주장하심으로 하나님께 대한 반역적인 선택들을 하지 않는 것이다. 곧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을 대항하여 반역하기로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하시기에 능하신 분이 아니신가! 우리는 항상 타락한 인간의 불가능들에 대해서는 말하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가능성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성경은, 죄의 정의를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유혹에 반응하여 죄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법도에 따라 순종하기로 선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또한 믿게 될 것이다. 우리는 굴복하기로 선택할 수 있고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승리를 위한 능력을 제공하시기 때문에 굴복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죄짓지 않는 성품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올바른 개념과 생각으로 볼 때, 완전함이란 실제적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3. 혹시 구원에서 떨어진다면?

혹자는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만일 사단의 유혹에 넘어져 실패하게 될 때에는 완전에서 떨어지고 구원을 잃게 되는가? 이 질문은 올바른 것이 아닌데, 구원을 주시고 안 주시는 것, 구원을 받고 못 받는 것은 하나님께 달린 것이지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을까 못 받을까 하는 염려보다는, 우리는 재빨리 우리의 연약함과 실수를 인정하고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대언자께 우리의 실수를 고백하며, 하나님과 다시 화평한 관계에 들어가도록 우리 마음의 경험과 상태를 올바르게 해야 한다.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일 인간의 연약함과 실수로, 또 바쁜 중에 부지불식간에 죄를 짓게 되었다면, 그것은 의도해서 짓는 고의적이고 반역적인 죄가 아니며, 또 그 마음이 하나님께 반역하고 반항하여 나가는 의도가 아니므로 자비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정을 살피셔서 우리를 은혜와 구원의 상태에 두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신앙 제 1부: 성경은 완전하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진실하게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성경 구절을 발견하고 멈칫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에 떠오르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니, 하나님께서 가능한 것을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인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처럼 완전해질 수 있단 말인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명령은 허락이며 약속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명령을 하실 때, 그것이 가능하도록 허락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약속하시며 보장해 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은 약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는 명령도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그렇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마음속에 떠오르는 의문이 해결되거나, 이 성경 절로 인해 생기는 고민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이 해결되려면, 우리는 “완전” 문제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가장 성서적인 개념의 “완전”, 그리고 “완전”이란 말의 진정한 의미를 함께 연구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마음에 의심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명령이 우리 마음속에서 허락과 약속으로 바뀌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완전에 대한 주제를 함께 연구해 보자.

 

1) 성경 절 속에 나타나 있는 “완전”          

성경 여러 곳에는 우리에게 완전하라는 명령과 당부의 말씀이 실려 있다. 먼저 성경 절을 읽어보면서 완전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 고린도후서 7장 1절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 디모데후서 4장 18절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 유다서 24절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 히브리서 7장 25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요한일서 1장 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 베드로후서 1장 4절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 요한계시록 14장 12절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 요한계시록 3장 5절

이기는 자에게는 ... 내가 그 이름을 생명 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 요한계시록 19장 8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 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 요한계시록 22장 14절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킹 제임스 역).

* 디도서 2장 14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디도서 2장 12절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 디모데전서 6장 1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 에베소서 4장 13, 14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위에 예로 든 몇 성경 절들처럼, 성경에는 모든 불의에서 떠나 거룩하고 온전하게 살라는 부탁과 명령의 말씀이 많이 있다. 우리가 영적 눈을 떠서 하나님의 뜻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새삼스럽게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서 품으신 높은 이상과 뜻과 소원을 깨닫게 된다.

 

2) 하나님의 소원과 예수님의 모본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에 대해서 가지시는 이상은 인간이 가진 가장 높은 이상과 생각이 도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높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이 명령은 일종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속의 계획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타락하고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세우신 구속의 계획은, 인간을 사단의 권세에서 완전히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구원의 계획을 세우셔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반면, 구속의 계획이 가능하도록 그분의 모든 능력을 쏟아 부으셔서 이 일이 가능하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항상 회개하는 영혼에게서 죄를 분리하신다. 그분께서는 마귀의 역사를 멸하기 위하여 오셨으며, 모든 회개하는 영혼에게 성령을 주셔서 그로 죄를 다시 범하지 않도록 보전할 만반의 대비책을 세우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과 성육신 하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본과 성령님의 역사와 능력으로, 우리는 죄의 세력을 이기고 온전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이 우리 인간들에게 실현되는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인 품성의 이상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분의 생애에서 완전하셨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들의 생애에서 완전하여야 한다.

 

예수께서는 범사에 우리 인간들의 형제가 되셨다. 그분께서는 우리와 같은 육신이 되셨다. 왜 그러셨는가? 그것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쓰시고도 죄 없고 흠 없는 삶을 사시므로,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도 인간처럼 시장하고 목마르고 피곤하셨다. 그분은 음식을 잡수심으로 생명을 유지하셨고, 수면을 취하심으로 원기를 회복하셨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인간의 운명에 동참하셨지만, 그럼에도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죄 없는 생애를 사셨다. 그분의 품성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온전하라고 하시며, 인간이시면서도 온전한 삶을 사신 예수님을 모본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 의미는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하며,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우리에게 오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우리에게 모본이 되고 용기를 주시기 위하여,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야곱이 보았던, 밑바닥은 지상에, 꼭대기는 하늘 영광의 문어귀에 닿은 그 사다리이시다. 만일 그 사다리가 단 한 발판 때문에 지상에 도달하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잃어버린 바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있는 곳에 찾아오셨다. 그분께서 우리의 본성을 취하고 승리하신 것은, 우리가 신성에 참여하여 승리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분께서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으나 죄 없는 생애를 사셨다(롬 8:3). 그러므로 이제 예수께서는 그분의 신성으로는 하늘의 보좌를 붙드는 한편, 그분의 인성으로는 우리를 붙드신다. 그렇게 하시면서 예수께서는 그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품성의 영광에 이르라고 우리에게 명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야 한다. 또한, 온전하게 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그렇다면 어떻게 어디까지 완전해야 한다는 말인가? 계속되는 기사에서 완전에 대하여 공부해 보자.

 

권두언

 

완전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시나요?

                                                                                                                              

성경은 완전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완전해야 하늘에 간다고 말합니다. 특별히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는 지상 명령도 하신 바 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말씀일까요? 정말 인간이 완전할 수 있는 것일까요?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완전의 가르침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값싼 은혜의 가르침이나 반쪽 복음은 순종이나 거룩하게 변화되는 성화의 과정을 불필요한 것으로 사장해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복음, 변질하지 않은 복음에는 성화와 완전에 대한 가르침이 빠질 수 없습니다.

현 기독교 안에는 “완전”에 대한 왜곡된 개념이 온통 퍼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구원 문제에서 중요한 관건이 되고 있는 “완전” 문제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현시점, 특히 마지막 때가 가까운 시점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시대에 나타날 여자의 남은 무리는 완전을 이룬 사람들이어야 하며, 완전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완전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완전의 경험을 할 수 있으므로, 완전에 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합니다.

 

완전이란, 다 이루고 성취하여 더는 다다를 것이 없는 지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이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반드시 경험해야 할 상태나 경지입니다. 더 나아가 완전은 품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성품을 이룬 사람들에게 인을 치실 것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완전에 대한 개념과 완전의 중요성에 대해 다룰 것입니다. 완전의 경험이 생애에 이루어짐으로, 하나님의 인을 받고 구원을 얻는 놀라운 역사가 독자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발행인  강병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