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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맘의 채식 요리: 두부 스테이크

 

오늘은 한국인 밥상의 단골 메뉴인 두부로 만든 요리를 소개할까요? 밭에서 나는 고기, 콩으로 만든 두부로 단백질이 풍부한 스테이크를 만들어 보겠어요. 고기만을 이용해서 스테이크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만들기도 간단하지만 한 끼 식사로도, 손님 접대용으로도 손색이 없어요.

재료:

두부 한 모, 채수100cc(ml), 표고 & 느타리 & 팽이버섯 각 70g , 가루간장 1큰술, 1큰술, 마늘 1큰술, 전분 3큰술, 참기름 1작은술, 소금, 전분물 (전분 1T : 1T))

만들기:

1. 두부를 1.5~2cm정도 크기로 도톰하게 썰어서 소금을 뿌려서 물기를 빼요. (소금을 뿌려 놓으면 두부가 더 단단해져요.)

2. 곱게 간 마늘을 두부의 윗면에 펴 발라요.

3. 전분 옷을 입혀 팬이나 오븐에 구워요.

4. 채수가 끓으면 표고버섯, 느타리버섯, 팽이버섯을 넣고 마늘, 가루간장, 꿀을 넣어 익힙니다.

5. 버섯이 익으면 불을 약하게 낮추고 전분과 물을 1:1 비율로 섞은 다음 4에 부어주세요.

6. 걸쭉한 상태가 되면 불을 끄고 참기름을 넣고 구워진 두부 위에 버섯 소스를 올려주면 맛있는 스테이크 완성입니다.

 

mom's note  채식으로도 단백질 섭취가 충분할까요?

채식으로는 우리 몸에 영양분이 부족할 것 같다고요? 채소, 통곡류, 견과류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질 좋은 단백질이 많아요. 고기처럼 소화 분해되면서 산성 찌꺼기들이 생기지 않는 깨끗한 단백질이죠. 고기는 우리 몸을 산성화시킬 뿐 아니라 각종 질병을 유발한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하루 단백질 섭취량이 많지 않아요. 우리 몸을 해롭게 하지 않는 채식에서 단백질을 얻느냐, 산성화시키는 육식에서 단백질을 얻느냐. 어떤 것이 현명하고 지혜로운 선택일까요?

Mom's tip!

가능하면 두부는 꼭 유기농, non GMO를 확인하고 구매하세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GMO 식품들이 우리 식탁에 너무 깊숙이 들어왔답니다. 버섯 대신 양파와 부추, 견과류를 볶아서 올려도 좋겠네요.

 

간증문: 울어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강성실 사모의 간증문

저는 38년 동안 강병국 목사와 함께 살아온 그의 아내입니다. 처음으로 이렇게 간증을 쓰려니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립니다. 그런데 저의 뺨을 흐르는 눈물은 슬픔과 원망의 눈물이 아니라, 감사와 감격의 눈물입니다. 참 파란만장하고 가파른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제게 넉넉하셨다는 생각이 가슴에 넘쳐나며 흐르는 눈물입니다.  

어떻게 그동안의 삶을 짧은 페이지에 다 적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뒤돌아보면 저희의 길은 오로지 하나님의 진리와 주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불철주야 애쓰며 달려온 길이었습니다. 좁은 길을 걸어오면서, 예수님께서 왜 좁은 길은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말씀하셨는지 그 이유와 의미를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남편 강병국 목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영혼들에게 참된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고자 하는 열성을 빼놓고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아내로서 감히 그렇다고 증언할 수 있습니다. 옆에서 오랜 세월을 지켜본 제 남편의 삶은, 이 세상에 대한 욕심이나, 자랑이나, 개인적인 명예에 대한 소원이 전혀 없는, 세상적인 것을 모두 버린, 하늘만 바라보는 삶이었습니다.

이번에 하나님의 사업에 대한 중압감에서 비롯된 스트레스와 사탄의 공격으로 인한 충격으로 갑자기 쓰러져 심장수술을 받게 되었을 때, 그동안 하나님의 사업에만 열중하여 전혀 쉼을 가지지 못했던 제 남편은 드디어 쉼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휴가를 얻은 것도 아니고, 안식년에 여행을 떠난 것도 아닌, 심장을 꺼내어 대수술을 하게 된 환자로 병원에 누워 쉬게 된 것이었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습니다. 쉼이 필요한, 얼마나 고달픈 생애를 이어왔던가를 아셨던 하나님께서 이런 경험을 통해서라도 남편을 쉬게 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사는 수술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심장 판막에 구멍이 생기는 이 케이스는 매우 위중하고 또 위험한 수술이라서, 앞으로 가족을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무서운 죽음의 선고를 받고 사망의 골짜기에서 헤매다 새 생명으로 옮겨가는 제 남편의 침대 곁을 지키면서 정말 많은 생각이 오갔습니다. 그동안 올바른 진리만을 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애쓰는 제 남편과 저희 가정을 향한, 안팎에서 일어나는 사탄의 공격은 정말 거세고 맹렬했습니다. 거짓 모함과 원망 섞인 말들을 난무하게 하며, 그렇지 않아도 힘든 하나님의 사업을 끌어가는 길에 또 다른 과중한 짐을 덮어씌우려는 사탄의 계략들이 무수히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업과 진리만을 위한 열심으로 전진하려는 남편의 모습은 제 눈시울을 뜨겁게 적셨습니다. 쓰러진 남편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혹시 이제는 정말 하나님의 사업이 끝나는가?” 하는 의심의 구름이 어둡게 마음속에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이 다 끝마쳐지지 않은 이상, 제 남편은 죽지 않을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인 수술이 성공리에 마친 후, 삼일 반 동안의 마취에서 깨어난 제 남편은 참 고통스러운 회복의 과정을 겪었지만, 이제 참 많이, 아니 거의 다 회복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인 것을 저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얼마나 많은 형제자매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기도와 염려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감사했습니다.

앞에서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우리의 지난 생애는 끊임없는 사탄의 공격을 받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이 발전하고, 많은 영혼에게 진리가 전파되는 크신 역사가 생길 때마다, 사탄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며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공격이 뒤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세상의 임금보다 능력이 많으시고 크신 분이십니다. 항상 위기를 축복으로 바꾸시는 역사가 끊임없이 그 뒤를 따랐던 것을 저는 제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저는 참으로 많이 보아왔습니다. 핍박과 고초가 감사의 찬송으로 바뀌는 경험들은 참으로 은혜로운 일입니다.

이번에도 사탄은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뜨리려고 많은 계략으로 공격을 감행해 왔습니다. 그러한 와중에 제 남편까지 쓰러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께서 승리하고 계시고 또 승리를 거두실 것이기에.... 그리고 주님의 사업은 더 높은 경지로 발전하고 있으며 또 발전할 것이기에...

저희 생애의 빛 모든 직원은 요동함 없이 충성스럽게 일하고 있습니다. 저희를 지원해온 많은 후원자도 여전히 이 하나님의 사업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비록 괴롭힘과 성가심을 받고 있으며, 여러 가지 마귀의 거짓 속임수의 불화살을 받고 있지만, 하나님의 사업에는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제 생애의 빛 사업은 더 높은 경지로 도약하고 있습니다.

수술 이후 휴양 중에 있는 제 남편의 얼굴에는 여전히 확신과 평안의 미소가 넘쳐 흐릅니다. 저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제 남편을 지켜보아 왔습니다. 오늘도 투병 중인 제 남편의 얼굴에서 저는 하나님께 대한 그의 확신과 헌신의 기운이 감도는 것을 느끼면서, 속으로 이렇게 크게 외쳐 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 세상의 고통은 결국 하나님 은혜의 선물로 바뀌게 됩니다. 당시에는 고통스러워 보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더 크신 은총과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라는 것을 너무나 많이 터득하고 느끼며 살아온 저이기에, 이제는 감사히 그 시련들을 견디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하겠습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하는 찬송 중에, 제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듯한 가사를 발견하게 됩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바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는 눈물 밖에는 이제 흘릴 것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의 편지: 날아가는 생각

 

날아가는 생각

                                                                                                      강영은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 8:3, 4).  

 

 

때로 상상을 해봅니다.

천사가 매일 우리의 생각을 주워담으려고

우리 곁으로 온다는 상상을 말입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사실 그 일은 매일 일어나고 있지요.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의 수호천사는 우리 곁을 서성거린답니다.

그리곤 재빨리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바구니에 담습니다.

 

천사가 들고 있는 금으로 된 바구니에는

방금 드린 우리 기도의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감사와 찬양 같은 밝은 생각도 있지만,

슬픔과 고뇌 같은 어두운 생각도 있습니다.

 

 

생각은 색깔을 지니고 있습니다.

생각은 에너지라서 늘 분위기와 감화와 파장을 일으킵니다.

 

아름답고 좋은 생각은 찬란한 무지갯빛을 띠고

감사하고 행복한 생각은 분위기를 환하게 밝혀주지만,

독기 품은 질투와 미움의 생각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주위를 두르지요.

 

 

간혹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느냐는 원망으로 얼룩진 생각이

천사의 바구니에 반쯤 걸쳐져 있는 때도 있습니다.

마치 담겨 주님 앞에 가기에 주저되는 듯

그 얼룩진 색깔의 기도는 천사의 바구니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때로 무르익은 생각은 천사의 바구니에서 꽃을 피웁니다.

좋은 생각은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 바구니를 향기롭게 장식하고

투정과 욕심의 기도는 바구니를 무겁게 합니다.

 

꽃으로 피어난 생각들은 하늘 정원에 심기 웁니다.

때로 손질이 필요 없는 아름다운 생각의 꽃들이 도착합니다.

그 꽃들은 다른 것보다 더 빛나 주님을 기쁘게 하지요.

 

꽃들은 주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깨끗이 씻음 받고 손질 받아

아롱다롱 더 예쁘게 빛이 납니다.

그렇게 잘 손질된 꽃에 주님 중보의 의로운 향이 섞이게 되고

그러면 거기서 아름다운 기도의 향연이 피어 나오는 것이지요.

 

 

 매일 하늘로 우리의 생각이 안개처럼 피어오릅니다.

매일 하늘로 우리의 기도가 향연처럼 퍼져 올라갑니다.

 

천사의 바구니를 예쁘게 장식할 아름다운 기도가 모이도록

하늘 정원을 빛나게 할 아름다운 생각이 하늘로 날아가도록

 

오늘도 좋은 마음, 고운 마음,

선한 생각, 사랑의 생각 품으렵니다.

 

신앙 4부: 부활, 그 영광스러운 소망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13, 20).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 17).

부활! 그 얼마나 감격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인가!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하고 있다. 죽음의 고통과 사망의 이별의 아픔을 겪은 사람들은 부활의 의미가 가슴 속 깊이 와 닿을 것이다.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이 사망했거나,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나 친지를 잃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부활처럼 복된 소망은 다시 없을 것이다. 다시 살아나는 부활, 죽었던 사람을 산 사람으로 다시 만나는 부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성경은 죽은 의인들이 부활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그 약속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첫 열매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으므로 그렇다. 부활이 문자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확실한 증거로써 실제로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처럼 다시 살아나고 부활할 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첫 열매 되신 주님께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다시 살아날 것이며, 주님을 믿고 주 안에서 잠든 의인들이 예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처럼 똑같이 부활할 것이다.

 

1) 부활의 첫 열매 예수님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잠자는 자들의 처음 익은 열매로서 죽음에서 일어나셨다. 그분은 요제의 원형으로서, 여호와 앞에 요제를 드리던 바로 그날에 부활하셨다. 이스라엘의 절기 중에 요제절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추수하는 밭에서 처음 익은 곡식의 이삭들을 모아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들이 가져간 처음 익은 곡식단을 여호와 앞에 감사의 예물로서 흔들었다. 추수 밭에서 모은 처음 익은 곡식의 이삭들, 곧 유월절에 백성이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에 바쳐진 처음 익은 곡식단은 여호와 앞에 감사의 예물로 바쳐졌다. 백성은 추수의 여호와로서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뜻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익은 열매를 흔들었다. 이 의식을 올린 후에야 낫으로 곡식을 베어 추수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 헌납한 이 곡식단은 추수를 예표하였다. 그와 같이 처음 익은 열매 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모아 들일 큰 영적 추수를 표상하였으며, 그분의 부활은 죽은 모든 의인의 부활 모형이요 보증이 되었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여기서 “데리고 오시리라”라는 단어는 영어로 “bring”이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으로, “데리고 가시리라”라는 뜻으로 번역해야 올바른 번역이 된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 안에서 잠자는 모든 사람의 마지막 부활에 대한 예표였다.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처럼, 예수님 안에서 자는 자들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잠자는 이들의 첫 열매이셨던 그리스도 생명의 왕께서 요제의 원형인 첫 열매가 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였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롬 8:29)었다. 죽음에서 일어나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요제절의 의식은 오랫동안 유대인들에 의해서 상징적으로 거행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로 그 상징적인 의식이 실제의 원형이 되었던 것이다.

첫 열매이신 예수님의 부활 외에 또 다른 부활의 예들이 성경에 나오는데, 그것은 모세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신 것과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 무덤에서 나온 자들의 부활의 예다. “무덤이 갈라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마 27:52,53). 예수님 외에 다시 부활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죽었다가 부활할 모든 영혼에 대한 부활의 약속의 표가 된다. 그들이 죽음에서 일어나 부활한 것처럼, 마지막 예수님의 재림 때에 주님을 신실하게 믿고 섬기다가 잠든 자들이 무덤을 깨고 부활할 것이다. 그날에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킨 그 같은 능력이 그분의 자녀들을 일으킬 것인데, 그 누구도 깰 수 없던 사망의 권세가 깨어지며 잠자던 성도들이 무덤에서 일어나는 그 부활의 승리는, 재림의 아침에 일어날 영광스럽고 엄청난 클라이맥스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재림하실 때에, 사단의 통치로 인해 신음하던 지구의 고통과 죄악의 역사가 마칠 때에 사단의 통치는 그 종막을 고하게 될 것이며, 생명의 시여자께서는 무덤에서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불멸의 생명으로 영화롭게 해 주실 것이다. 그렇다! 첫 열매이신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그날에 우리도 부활할 것이다!

 

2) 부활은 재 창조

현 기독교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비진리처럼 부활할 때 영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부활할 때는 영과 신체(몸)가 부활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영으로서가 아니라 신체를 갖고서 부활하셨다는 기록을 보아서도 그 사실은 알 수 있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 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 24:36~39). 예수께서는 살과 뼈가 있는 몸을 가지고 부활하신 것을 이 성경 절을 보아 알 수 있지 않은가? 부활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먼저 죽음의 본질에 대해 공부해 보자.

1. 죽음의 본질
죽음이 생명의 중단이라면, 성경은 죽은 사람의 상태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는가? 기독교에 들어온 비진리가 가르치듯이, 죽을 때 인간의 몸이 영과 혼이 분리되어 영혼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죽음은 완전한 멸절이 아니고 부활을 기다리는 동안의 일시적인 무의식 상태에 불과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성경은 이 상태를 거듭 잠이라고 부른다. 구약 성경은, 다윗과 솔로몬과 이스라엘과 유다의 다른 왕들의 죽음에 관하여 말하면서, 그들이 조상들과 함께 자는 것으로 묘사한다(왕상 2:10, 11:43, 14:20, 31, 15:8; 대하 21:1, 26:23). 욥은, 다윗(시 13:3)과 예레미야(렘 51:39, 57)와 다니엘(단 12:2)과 똑같이 죽음을 잠이라고 불렀다(욥 14:17-12). 신약 성경도 동일한 표현을 사용한다. 죽은 야이로의 딸의 상태를 묘사하면서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잔다고 말씀하셨고(마 9:24; 막 5:39), 죽은 나사로도 같은 표현으로 말씀하셨다(요 11:11~14). 마태는,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마 27:52)났다고 기록했고, 스데반의 순교를 기록하면서 누가는, 그가 "자니라"(행 7:60)라고 했다. 바울과 베드로 역시 죽음을 잠이라고 불렀다(고전 15:51, 52; 살전 4:13~17; 벧후 3:4).

죽을 때에 사람에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이해하려면 사람의 본질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아야 한다. 성경은 사람을 나타낼 때, 하나의 유기체로서 전인적인 사람을 나타내기 위하여 "영혼"(원어: 네페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과 생기와의 연합인 생령, 혹은 영혼(네페쉬)을 만들었다. 그런데 죽을 때에는 반대 현상이 생긴다. 곧 땅의 흙으로 이루어진 사람에게서 생기가 제거되면, 의식이 전혀 없는 죽은 사람 혹은 죽은 영혼(네페쉬)이 된다(시 146:4). 몸을 이루었던 요소는 본래 그대로 흙으로 돌아간다(창 3:19). 영혼(네페쉬)은 육체를 떠나서 의식적 존재로 남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죽을 때 영혼(네페쉬)이 하나의 의식적 존재로 생존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진실로 "범죄하는 그 영혼(네페쉬)은 죽"(겔 18:20)는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이 분리된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몸과 영혼(네페쉬)은 오직 함께 존재한다. 또한, 성경은 어느 곳에도 사람이- 혹은 그의 "영혼"(soul, 네페쉬)이나 "영"(spirit, 루아흐)이 -천성적으로 불멸의 특성이나 상태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영혼'(네페쉬)과 '영'(루아흐)이라는 말이 성경에 1,600회 이상 사용되고 있지만, "불사" 혹은 "불멸"이라는 낱말과는 결코 관련되어 있지 않다. 무덤은 의식이 있는 장소가 아니다. 죽음이 하나의 잠이기 때문에, 죽은 자는 무덤(하데스)이 그 죽은 자를 내어주는(계 20:13) 부활 때까지 무의식 상태로 무덤 속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2. 재창조
부활은 재창조이다. 부활은 썩은 인간의 몸이 새롭게 다시 재창조함을 받는 것이지 옛 몸을 다시 합성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때에 죽은 의인을 불러내시고 생명의 호흡을 다시 주실 것이며, 마른 뼈들에게 다시 살라고 명하실 것이다. 비록 부활한 몸이 무덤으로 들어갈 때와 똑같은 물질이나 원소로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개성과 동일성은 그대로 보존될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불가사의한 일들은 인간에게는 하나의 신비이다. 죽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나올 것이겠지만, 병에서는 자유로움을 얻고 아무 흠이 없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이 죽기 전에 그 몸을 이루고 있었던 것과 똑같은 물질의 원소들을 되돌려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법이 자연에는 없다. 씨앗이 심어져 싹이 새로운 식물과 모습으로 나오는 것처럼, 부활도 새로운 모습이 되어 나오는 것이다. 바울은 밭에 뿌려진 곡식 알갱이의 예를 들어서 부활의 문제를 설명하였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전 15:35~38).

씨앗을 심는 예를 생각해 보면, 밭에 파종 된 곡식의 알갱이는 썩었지만 거기서 새로운 곡식 낟알이 나온다. 썩은 낟알 속에 있는 자연의 원소가 결코 그전 것과 똑같이 재구성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것에 자기를 기쁘시게 할 만한 아름다운 형체를 주실 것이다.

바울은 또 이렇게 기록했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39~43).

이렇게 인간이 부활하는 것은 몸이 부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시사하고 있다. 인간은 몸을 가지고 부활할 것이지만 그것은 우리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새롭고 영화로운 몸이 될 것이다. 옛 신체의 조각들을 다시 주워 모아 합성된 몸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손을 통해 새롭게 재창조된 아름다운 몸일 것이다. 이는 그것이 새로운 피조물이요, 새로운 출생이기 때문이며, 육의 몸을 심고 신령한 몸으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의롭게 살다가 죽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몸을 주실 것이다.

 

3) 품성은 보존됨

인간이 죄를 간직하고 죽으면, 곧 죄를 회개하지 않고 거듭나지 않은 성품과 땅에 속한 육신의 성정을 가지고 그대로 죽으면, 그 사람은 이 땅이 불로 멸망할 때 땅과 함께 멸망하게 된다. 그러나 회개하여 거듭난 품성, 하늘에서 살기에 적합한 품성, 곧 하나님의 품성과 같은 성품을 가지고 죽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무덤에서 불러내실 것이다. 우리의 성품은 생각과 감정이 합해져서 이루어진 것인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꼴 지워진 품성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내세로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 사람이 사는 동안 간직하고 있던 품성의 특성은 죽음에 의해서나 부활에 의해서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가정과 사회에서 나타냈던 동일한 성향을 갖고 무덤에서 나올 것이다.

예수님은 그분의 재림 때에 우리의 품성을 변화시키지 않으신다. 변화의 사업은 지금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 매일의 생애는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에 적합한 자가 되려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품성의 결함들을 회개하고 극복해야 하며, 이 은혜의 시기 동안에 균형 잡힌 품성을 이루어야 한다. 죽을 때에 인간의 정신과 품성은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대로 보존된다. 부활할 때에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의 품성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에서 성도가 되고자 하면 먼저 지상에서 성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매일 죽을 때에 가지고 있어야 할 성품을 준비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4) 서로 알아봄

부활하는 의인들은 각자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살아날 것이며, 따라서 친구들이 서로 알아볼 것이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경우를 보아서도 그렇다. 부활하신 구주의 얼굴과 태도와 음성은 모두 다 그분의 제자들에게 익숙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다락방에서 처음으로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에 도마는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의 보고를 듣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데 대한 충분한 증거를 받았으나 그의 마음에는 어둠과 불신이 가득하였다. 그의 주께서 자기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제자에게만 나타나신 것을 생각할 때 그는 자존심이 상했다. 도마는 믿지 않기로 했다. 한 주일 내내 그의 형제들이 희망과 믿음을 가진 데 반해 그는 모든 것이 어둡게만 보이는 불행에 잠겨 있었다. 그동안 도마는 여러 번 반복해서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가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 형제들이 눈으로 본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그들의 증언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도마는 다른 제자들과 만나기로 하였다. 자기의 불신에도 그는 예수님 부활의 그 좋은 소식이 진짜였으면 하는 가냘픈 희망을 품고 있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주신 예언의 증거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셨다. 그리고 도마를 보시고 예수께서는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도마의 생각과 그가 한 말을 잘 알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의심하던 도마는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여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부르짖었다.

우리는 제자들이 못 자국을 그대로 지니신 예수님을 알아본 것처럼, 부활한 우리의 친구들을 알아볼 것이다. 그들이 혹시 이 인간 세상에서 모양이 일그러지고 병들고 볼품이 없었다 할지라도 완전한 건강과 균형을 갖고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영광스럽게 된 몸일지라도 그 속에 그들만의 동일성이 보존될 것이다. 그때에는 주께서 우리를 아신 것같이 우리가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고전 13:12).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자들의 얼굴 모습을 알아볼 것이다.

 

 

**마치면서
우리에게는 복된 부활의 소망이 있다. 많은 신실한 믿음의 선조들이 부활을 믿으면서 숨져갔다. 수많은 신실한 성도들이 성경이 말하는 부활신앙을 고백함으로 화형과 사형을 당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로마 가톨릭교회와 결별한 영국교회가 정치적인 이유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기록이 나온다. 영국 국교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따라 영혼불멸을 부인하고 조건적인 불멸을 고수하며 부활을 믿는 다수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투옥하거나 화형에 처했다. 대표적인 예로,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I) 때인 1575년 7월, 테르우르트(Hendrik Terwoort)와 피터스(Jan Pieters)가 화형에 처해졌고, 제임스 1세(James I) 때인 1611년 4월, 레가트(B. Legatt)와 위트만(Edward Wightman)이 역시 같은 이유로 화형을 당했다. 그들이 믿었던, 죽기 전에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재가해 주기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한 13개조의 신앙고백 가운데 하나인 제12조의 신앙고백은 아래와 같다.

“우리는 이사야 26장 19절, 요한복음 11장 25절, 다니엘 12장 2절, 요한복음 5장 25절, 고린도전서 15장 22절,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기록된 대로 죽은 자의 부활을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분의 천사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오실 때, 죽은 자로부터 자신의 몸으로 일어날 것이며(욥기 19장 25절, 이사야 26장 19절, 고린도전서 15장), 그 후에는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복음 25장 34절, 로마서 2장 6절).

그들이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고수했던 부활신앙! 그러나 죽어도 다시 살 것을 믿었기 때문에 큰 소망을 가지고 죽게 만든 그 복된 부활의 가르침이 현재에는 얼마나 희미하고 혼란스러운 것이 되었는가! 또한, 부활이 그렇게 복된 소식임에도, 그것을 믿고 부활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적은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가 살아서 주님을 맞이하게 될지, 아니면 죽었다가 무덤에서 부활하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주님의 오심을 위해 우리의 품성을 준비한다면, 그리고 죽을 때의 성품을 매일 준비하고 산다면, 우리는 살아서든, 죽어서 부활해서든 그리운 예수님의 얼굴을 반가이 뵙게 될 것이며, 그 영화로운 재림의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잃었던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소망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그리고 죽어도 다시 살아나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이 부활의 소망이 얼마나 큰 것인가!

 

 

신앙 3부: 부활에 혼란을 가져온 성경절의 잘못된 해석

영혼이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고 믿게 하는 성경 절이 있다. 아니, 원래 그 성경 절의 의미는 그렇지 않지만, 해석하는 과정에 그 의미가 곡해되어 마치 영혼불멸 사상을 옹호하는 것이라고 믿게 하는 성경 절이 있다. 그것은 원어의 의미와 깊은 뜻을 모르므로, 그리고 번역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사상이 들어가므로 그렇게 된 것들이다. 질문과 답하는 형식으로 이 성경 절들에 대하여 함께 공부해 보자.

Question1

누가복음 23장 43절에 예수께서 십자가의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것은 사람이
죽으면 즉시 낙원에 간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Answer

이 성경 절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죽어서 강도와 예수님이 함께 낙원에 갔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은 강도보다 먼저 돌아가셨기 때문에 함께 낙원에 갈 수가 없습니다(요 19:32~34).
또한,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신 그날 낙원에 가신 것이 아니라 일요일 부활한 후였습니다(요 20:17). 어떤 사람들은 낙원과 하나님이 계신 곳이 다르다고 주장하는데, 요한계시록 2장 7절에는 하나님의 낙원에 생명나무가 있다고 하였고, 요한계시록 22장 1, 2절에 보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 앞에 생명나무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낙원이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성경 절의 바른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오늘, 십자가에 너와 내가 못 박힌 오늘, 내가 너에게 말하는데, 후에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 말씀이 이렇게 곡해된 것일까요? 이 성경 절이 그렇게 인용되게 된 것은 구두점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경은 예수님과 강도가 당일에 낙원에 갈 것처럼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고대 헬라어가 띄어쓰기나 구두점들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온 혼란입니다. 원문을 단어 나열 순서 그대로 옮겨 놓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르시되 그에게 예수께서 진실로 내가 이르노니 네게 오늘 나와 함께 네가 있으리라 낙원에"

여기서"오늘"을, 예수께서 말씀하신 약속한 시간에 관련시키느냐, 혹은 낙원에 가는 시간에 관련시키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집니다. 앞에서 말한 내용에 기초하여 보면 이것은 약속한 시간과 관련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질문하신 성경 절은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영어 본문을 보면,"And Jesus said unto him, Verily I say unto thee, To day shalt thou be with me in paradise"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어로 번역할 때 찍었어야 할 올바른 구두점은,"And Jesus said unto him, Verily I say unto thee today, shalt thou be with me in paradise"라고 하여"today"다음에 구두점을 찍어야 정확한 번역입니다. 그러나 영혼불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던 그"오늘"이라고 하는 단어를, 낙원에 오늘 가겠다는 뜻으로 번역해 놓은 것입니다.

Question2

전도서 12장 7절에는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 돌아"간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Answer

여기 신(神)은 히브리어로"루아흐"인데 이것은 본래"바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호흡"이나"생명"입니다. 실제 이 말은 언제나 의사를 표현하고 활동하는 이성적인 존재에게만 사용되며,"루아흐"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는 전혀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어 성경(성서교재간행사, 1991년)에서는"그때가 되면 흙에서 온 네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네 생명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만일 루아흐를 영혼으로 번역한다면 욥기 27장 3절의"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루아흐)이 내 코에 있느니라"라는 말씀에서 영혼이 코에 있다는 우스운 말이 되고 맙니다.

Question3

누가복음 1장 19~31절에 나오는 예수님의"부자와 거지 나사로"이야기는
사람이 죽어 천당이나 지옥에 간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닙니까?

Answer

누가복음 16:19~31의 말씀은 결코 실제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비유입니다. 14절에는 이 비유의 목적이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부(富)는 하나님의 은총을 많이 받은 증거이므로, 부자는 당연히 천국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잘 알려진 이야기를 통하여 그러한 생각에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실제로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부자가 간 곳을 "음부"라고 하였는데, 원어로는 무덤을 가리키는 "하데스"입니다. 무덤 속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것입니다.
  2. 나사로가 간 곳이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 품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3. 24절에 보면 그가 불꽃 가운데서 고통 한다고 하는데, 과연 영혼이 뜨거움이나 목마름 등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육체가 느끼는 감각들입니다.
  4. 25절의 아브라함 말에 모순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천국과 지옥은 이 세상에서 고생했느냐 안 했느냐를 기준으로 해서 결정한다는 말이 됩니다.
  5. 과연 천국과 지옥이 서로 마주 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일까요? 그렇다면 그곳이 정말 천국이 될 수 있겠습니까? 지옥의 고통을 다 보고 있는 곳은 천국이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 당시에 잘 알려진 이집트의 설화입니다. 그것은 파피루스에 기록되어 있는데 시-오시리스(Si-Osiris)와 그의 아버지 세톤 카임붸제(Seton Chaemwese)가 죽음의 나라를 여행하는 내용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가난한 서기관과 부유한 세리 바르 마얀"의 이야기로 널리 알려졌습니다(Joachim Jeremias, 예수의 비유. 허혁 역, 왜관:분도출판사, 1974, p.177). 비유는 교훈을 얻는 데서 그쳐야지 비유 자체를 실제화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이솝의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이야기는 끈기와 노력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고자 만든 이야기이지 실제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신앙 2부: 죽어서 즉시 천국에 간다면 부활이 왜 필요한가?

한 연구 조사에 의하면 한국 국민 중에 사후세계가 있다고 믿는 비율이, 무교나 일반인보다 기독교인들이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개신교인의 75.6%가 사후세계를 인정한 데 반해, 일반인은 46.7%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100%가 아닌, 부활을 믿는 75%의 기독교인들에게도 부활에 관한 문제는 그렇게 명확하거나 명료하게 조명되고 있지 못하다. 그 이유는 부활에 대한 기독교의 순수한 진리에 섞이게 된 불분명하고 불투명한 교리 때문이다.

1 부활의 의미를 혼돈시키는 영혼 불멸 사상

많은 그리스도인이 부활을 믿으면서도, 기독교에 침투한 비진리의 가르침 때문에 부활에 대한 확실하고도 명확한 사진을 보지 못하고 있다. 구슬이 꿰어지지 않듯이 부활과 사후의 문제와 영생과 심판의 문제가 서로 정확하게 꿰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나 있는 부활의 개념과 의미가 그렇게 놀랍고 복된 소식임에도, 그것은 많은 그리스도인의 귀에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현실과는 거리가 먼 희미한 이야기처럼 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믿음의 동기부여가 되며, 우리의 신앙을 위한 필생의 준비와 소망의 활력과 목표를 줄 놀라운 부활의 개념을 불분명하게 흐리고 있는 비진리의 가르침을 우리는 절대적으로 경계해야 한다. 기독교 안에는 부활의 의미를 흐리는 대표적 두 가지 사상이 있다. 그 첫 번째는, 사람이 죽으면 즉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개념이며, 두 번째는 영혼은 소멸하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가르침이다.

이 대표적인 두 가지 비진리는 부활의 개념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있다. 아무리 성경이 올바른 부활의 개념을 말하고 있어도, 이런 사상을 믿고 있으면 부활의 중요성이나 필요성, 그리고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놀라운 의미를 깨달을 수 없다. 예수님의 생애에 몸소 나타났던 그렇게 놀라운 부활의 현시가,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대로 재현되어 나타나야 할 그 놀라운 부활의 현시가, 기독교에 침범한 비진리 때문에 퇴색되는 것은 대단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에서 현재 널리 가르쳐지고 있는 이 두 가지 비진리, 잘못된 교리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부활의 정확하고 확실한 개념을 흐리고 있는 주범이 되고 있는데, 만일 영혼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그리고 사람이 죽어서 즉시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면, 이미 천국에 가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왜 또다시 부활시키실 필요가 있는가? 사람이 죽자마자, 그것이 몸이든 혼이든 아무튼 다시 살아나서, 일종의 부활 같은 것을 거쳐 천국이나 지옥에 이미 가 있는데, 부활이 무엇이 그렇게 필요하며, 부활의 의미가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고 새롭겠는가 말이다. 또 영혼이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데 부활이 무엇이 그렇게 새삼스럽고 감격스럽겠는가? 그러므로 영혼 불멸 사상의 오류를 믿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의미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영혼불멸 사상의 침투

고대 이집트 사람들과 플라톤을 대표로 하여 생긴 헬라 사상, 어거스틴의 교리로 시작된 중세 교회의 신조, 그리고 칼빈에 의하여 정립된 신앙은, 모두 영혼은 몸을 떠나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불멸의 본질로 간주했다. 따라서 구원받은 의인이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것처럼, 또한 구원받지 못한 악인은 지옥 불 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당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러한 영혼 불멸이나 영원지옥 교리는 성경에 근거한 진리가 아니라,"거짓의 아비"(요 8:44)인 사탄의 최초 거짓말(창 3:4)에 기초한 것이다."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서기 150년부터 325년, 곧 역사적인"니케아"종교회의가 열리기까지의 시대를"니케아 전 시대"(Ante-Nicene Period)라고 하는데, 이 시대의 시작과 함께 로마 제국에 편만했던 헬라의 영혼불멸 사상이 본격적으로 그리스도교 안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 기간에 요한이나 사도 바울이 경계했던 거짓된 종교철학인"영지주의"가 들어오고(딤전 4:7; 6:20, 요일 4:1~3), 어거스틴이 깊이 빠져있던 신플라톤 사상도 넘쳐 들어 왔다. 모든 그리스도인 학교 안에 헬라의 영향이 점점 압도적으로 되었으며, 그리하여 교회 안에도 영혼불멸의 사상이 내세에 관한 성경의 정확한 가르침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내세와 사후에 대한 정확한 개념은 무엇인가?

구약 성경의 가르침: "정녕 죽으리라"

성경은 영혼이 영원히 산다는 것에 대해 부인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항상 조건적인 불멸과 영혼 멸절의 사상이다. 이 사상은"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 17)는 하나님의 말씀에 드러나 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범죄하지 않으면 불멸의 영생을 보장받게 된다는 조건적 불멸이다. 반대로 불순종하여 범죄하면, 죄의 값인 사망에 이른다는 악인 멸절의 선언인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구약의 모든 부조와 선지자들에 의해 확고하게 옹호되었으며, 구약 성경의 일관된 신앙이다. 이에 관하여 은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육신이 해체된 뒤에도 영혼은 계속 존재한다는 신념은 단순한 신앙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이거나 신학적인 사변에 불과한 것이며, 따라서 성경 어디에도 분명히 가르쳐진 데가 없다."
영혼 불멸 사상이 구약 성경에 결코 용납될 수 없었음이 같은 책에 다음과 같이 또 진술되어 있다."죽은 후에도 영혼이 계속적인 생명을 누린다는 신앙은, 원시적인 조상숭배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실패한 바 있는 강신술(삼상 28:13; 사 8:19)의 기초를 이루었던 것인데, 생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믿는 믿음에 적대되는 것으로, 선지자들과 치리자들에 의하여 좌절당하고 억압을 당했다."
다시 말하면 구약 성경은 영혼 불멸 신앙을 사탄의 역사로 간주하고 이단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장 혹독한 방법을 써서 근절시키도록 촉구했다는 것이다
(레 19:31; 20:6, 27; 삼상 28:9; 대상 10:13; 사 8:19 참조).

신양 성경의 가르침: 몸의 부활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도, 예수님은 물론 모든 사도와 신약 성경 전체는 당시에 편만했던 헬라의 영혼 불멸 사상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으며, 유대교 내부까지 깊이 침투해 있던 그릇된 내세관을 정면으로 배척했다(마 22:23~33; 행 4:2; 23:8)."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행 17:18)하여 변론이 일어났음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마지막 심판 후 재림 때에 있을 몸의 부활로 인한 불멸이었지, 영혼의 불멸이 아니었다(요 11:25, 26; 고전 15:52~54; 살전 4:16).

인간에게는 처음부터 불멸의 속성을 준 바가 없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조건으로 영생이 보장되었음을 성경은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불순종으로 인한 범죄는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여"죄의 삯은 사망(롬 6:23)임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재림 시에 썩지 아니할 생명을 부여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부여받았다. 반대로 끝까지 복음을 거절하고 불순종을 고집한 사람들은 마지막에 있을 심판을 거쳐, 재림 후 천 년 뒤에 있을 둘째 부활 때 육신의 몸으로, 영원한 심판의 불에 살라져 없어짐으로 영원히 소멸한다는 사실을 성경은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계 20:12~15; 말 4:1, 2; 시 37:9~11; 롬 6:23). 이러한 조건적 불멸과 악인 소멸의 신앙의 교리는 매우 성경적이며 예수님께서 몸소 가르치신 진리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초대 교부들이 믿었던 조건적 불멸 신앙

우리의 선조들은 인간의 사후상태와 영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믿었는가? 예수님과 사도들이 믿었던 정통적인 부활 신앙, 곧 조건적인 불멸 신앙은, 사도들의 뒤를 이은 사도 교부들에 의하여 거의 일관성 있게 유지되었다. 사도 바울과 직접 친교를 나눈 것으로 알려진 로마 교회의 감독"클레멘트"(Clement of Rome), 베드로의 후계로 알려진 안디옥의 감독"이그나티우스"(Ignatius), 요한의 제자로 알려진 서머나의 감독"폴리캅"(Polycarp)을 비롯하여 당시의 문서들인"디다케"(Didache) 교훈집,"바나바"(Barnabas)서신,"헤르마스"(Hermas)의 목양서 등에는, 영혼의 불멸이 아니라 육신의 부활을 강조하고 악인의 영원한 소멸이 진술되어 있어, 영혼 문제에 관한 한 사도들의 신앙이 그 후의 시대에도 잘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또한, 믿음을 위해 순교한"저스틴 마터"(Justin Martyr. 106~165)는 조건적 불멸과 악인의 소멸을 성경과 일치되게 논증했으며, 그의 제자인"타티안"(Tatian. 110~172), 폴리캅의 제자인 안디옥의"데오필러스"(Theophilus. 180 사망)도 같은 신앙을 고수했다. 특히 지금의 프랑스 남부 고을 지방의 감독이었던"이레니우스"(lrenaeus. 130~202)는, 탁월한 종말 신학을 가지고 영지주의와 플라톤의 영혼불멸 사상, 영원 형벌 신앙을 논박하여 조건적 불멸 신앙의 2세기 챔피언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변하기 시작하였고, 헬라 철학의 영향은 점점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섞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헬라 철학의 본거지가 된 북아프리카 출신의 교부들, 즉"터툴리안"과"오리겐"등의 영향과 그리스도교 신앙에 점점 깊은 뿌리를 내린 신플라톤 사상이 영혼불멸과 영원 지옥의 신앙을 공고히 하게 되었고, 그런 분위기에서 역사적인 니케아 종교회의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 회의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옹호하여 정통 신앙의 기수가 된"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7~373) 감독이, 이미 시대의 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듯 훨씬 약해진 논증으로 성경에 입각한 조건적인 불멸을 옹호한 것을 마지막으로 대세는 기울어졌다. 이러한 때에 나타난 유명한 교부"어거스틴"은 플라톤의 영혼불멸 사상과 터툴리안의 영원 지옥 신앙, 그리고 이교 적인 연옥 신앙을 정립시켜 중세기 교회에 전수함으로써, 그 이후 거의 천 년간 진리를 밝히는 소리는 거의 잠잠해졌다.

성경의 조건적 불멸 신상을 옹호한 중세기 기수들

그러나 12세기에 접어들면서 다시 성경적인 조건적 불멸을 옹호하는 음성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12세기 가장 탁월할 신학자로 알려진"메돈"(Methone)의 헬라 감독"니콜라스"(Nicholas)가 일어나 신플라톤 사상을 공박하기 시작했고, 중세기를 대표하는 몇 유대인 학자들, 곧 마이몬(Moses Ben Miemon. 1131~1204), 킴치(David kimchi. 1160~1232), 아브라바넬(Judah Abravanel. 1437~1508) 등이 영원 지옥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리고 특히 12세기 이후 성경의 진리를 고수하며 알프스 산중에 칩거하던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인 왈덴스인(the Waldenses)이, 연옥의 교리가 이교 사상임을 지적하고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들을 반대함으로써 혹독한 핍박을 받았다.

14세기가 밝아오자,"종교개혁의 새벽별"로 불리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4~38)가 과감히 일어나 연옥의 거짓됨과 죽음은 잠과 같은 무의식 상태임을 성경을 근거로 강력히 논증했다. 때를 같이 하여"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이 일어났다. 그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출신의 탁월한 언어학자요 영국을 대표하는 종교 개혁자였는데, 최초로 헬라어 신약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까닭에 화형을 당한 위대한 순교자이기도 하다. 신, 구약 성경을 해박한 원어에 대한 지식을 통하여 깊이 이해한 틴데일은,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근거로 중세 교황권을 적그리스도로 단정함과 동시에 중세교회가 가르쳐온 영혼불멸, 즉 죽은 뒤 영혼이 간다는 그런 천국, 지옥, 연옥을 모두 부인하고, 재림 시에 있을 부활을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소망으로 확인했다. 그는 반대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논리적으로 반문했다.

"그대들은 몸을 떠난 영혼들을 천국이나 지옥, 연옥에 둠으로써 그리스도와 바울이 입증한 부활의 논증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부활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것을 매시간 바라보도록 깨우치고 있다. 이교의 철학자들은 이것을 부인하고 영혼은 언제나 살아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교리와 철학자들의 인간적인 교리를 함께 결합해 놓았으나 이것들은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일치할 수가 없고, 그리스도인 한 사람 안에서 성령과 육신이 더 이상 역사 할 수가 없다... 내게 다시 말해주시오. 만약 영혼들이 하늘에 있다면 그들이 왜 천사들의 경우와 같지 못한가? 그런 뒤에 [새삼스럽게] 부활이 있어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 부활과 영혼불멸을 동시에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William Tyndale, An Answer to Sir Thomas More's Dialogue, Book 4, pp.180, 181)."

종교개혁과 함께 부활한 조건적 불멸 신앙의 가르침

16세기에 접어들면서, 1517년 독일을 시작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큰 별 루터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과 은혜로 받게 되는 구원을 선포했으며, 인간의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이 신앙의 기준이 됨을 선언했다. 이교적 가르침에 기초한 연옥의 교리로 사람을 위협하여 면죄부 판매로 수익을 올리던 중세 교회의 타락은, 사실 모두 영혼불멸과 영원형벌 신앙에 근거했던 것이었다. 루터는 1520년 11월 29일에 발표한 그의 41개조 신조에서,"영혼이 불멸이라는 신조는 터무니없는 다른 견해들과 함께 로마교회의 교령집 쓰레기 더미에서나 발견되는 것"이라고 논박하였다. 루터는 성경적인 근거로써 죽음은 영혼의 잠이라는 사상을 신조로 삼았으며, 연옥과 성자숭배를 반박하고 그 신조를 죽는 순간까지 유지했다. 그는,"영혼은 몸이 죽을 때 소멸하며, 하나님께서는 이후 몸과 함께 부활시킨다"(Luther, Defence Proposition No.27)고 주장했으며, 죽음을 잠으로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은 성도들의 죽음을, 마치 그들이 쓰러져 잠들었다가 아버지에게로 모여들듯이,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위로로 죽음을 정복하고, 죽음으로 그들보다 앞서 간 성도들과 함께 부활을 기다리는 것으로 말하고 있으며, 어디에서나 이러한 위로를 베풀고 있다."

대표적 현대 신학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오스카 쿨만은 1902년 스위스에서 출생한 신학자로서, 1949~72년까지 신약 학 교수로 활동하였고, 여러 권의 신학 저서를 저술한 훌륭한 신학자였다. 그는 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였다. 그는 자기의 논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초대 기독교적 부활 신앙은 영혼불멸에 대한 헬라적 관념과 조화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 신약에서는 언제나 죽음을 궁극적인 원수라고 생각함으로써, 죽음에서 친구를 찾았던 헬라 사상과는 극적인 대립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바울은'오 죽음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쓰지 않았는가?"(Oscar Cullmann, 영혼불멸인가 죽은 자의 부활인가, 전경연 편, p.12).

그의 논문에 의하면, 죽음을 친구처럼 다정하게 대했던 소크라테스나, 또한 죽음을 환희에 찬 영혼의 해방으로 받아들인 칼빈의 사상은 모두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위배된다. 쿨만은 자신의 깊은 연구를 통해 이렇게 단언하고 있다."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영혼은 본질적으로 불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서만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이, 불멸의 것이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기독교 신학 사전에는 다음과 같은 정의가 내려져 있다.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영혼이 원래부터 불멸이라는 사상을 찾아볼 수 없다. 사람이 사후에 다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부활이라고 하는 하나의 기적을 통해서 뿐이다"(기독교 신학사전 379).

영혼불멸 사상과 부활의 신앙은 논리적으로 공존할 수 없다. 어긋나는 교리를 동시에 유지하려는 무리한 시도 때문에 기독교에는 현재 엄청난 모순과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죽는 즉시 영혼이 천국이건 지옥이건, 게다가 연옥까지 모두 가버리고 나면,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때인 재림은 무슨 소용이 있고 부활은 무엇 때문에 있어야 하는가? 그러므로 놀라운 부활의 기적을 혼돈시키는 비진리를 경계, 또 경계해야 함이 마땅하다.

신앙 1부: 성경은 부활을 말한다.

1880년에 출판된“그리스도의 이야기”(A tale of the Christ)라는 부제가 달린 '벤허'라는 유명한 책이 있다. 이 책은“루 월레스”(Lew Wallace)가 쓴 책으로, 이 책을 저작하게 된 배경에 대한 일화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잘 알려졌다. 남북전쟁의 영웅이며 터키 대사를 지낸 바 있는 루 월레스는 유명한 장군이면서 동시에 문학의 천재였다. 어느 날 그는 친구인 무신론자“로버트 잉거 솔”(Robert Ingersoll)과 기독교의 신화를 영원히 없애버릴 책을 써서 인류를 그리스도에게 매여있는 굴레로부터 벗겨주자고 다짐했다. 원래 기독교에 대해서 회의론자였던 그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내용의 책을 쓰려고 계획적인 연구를 시작하였다.

월레스는 유럽과 미국의 유명한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깊이 연구하여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허위라는 것을 주장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저술을 위해 조사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많은 증거를 통하여 오히려 그는 부활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그는 이전에는 전혀 믿지 않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더 확실하게 변호하고 주장하는 내용의 '벤허'라는 책을 쓰게 되었고, 이 책은 1880년 출판과 동시에 200만 부나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여러 차례 연극, 영화화되어 인기를 끌었다. 또한,“벤허”는 지금까지 쓰인 예수의 생애와 부활을 다룬 저술 가운데 가장 위대한 소설로 남아 있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성경은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이 헛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활은 인류역사에 신기원을 이룬 큰 사건이다. 사망의 그늘에 앉은 인간에게 영생의 길이 열린 획기적인 사건인 것이다. 아주 이른 시기로부터 사람들은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져왔다. 욥은“후일에”그리스도가 재림할 때에 부활의 소망이 성취될 것을 깨달았다.“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욥 19:25~27)라고 그의 부활의 믿음을 표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신다. 주님께서는 사망 가운데 잠자고 있는 의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그리스도인들이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기를 원하시며, 부활에 초점을 맞추면서 서로 위로하며 살기를 원하신다(살전 4:13, 14). 부활, 썩지 않을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부활, 얼마나 놀라운 소망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가! 부패치 않음, 영화로워짐, 불멸성, 영원성, 이 모든 것은 부활 때에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부활

성경은 강력하게 부활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부활을 증거하는 증명 그 자체이다. 성경이 말하는 부활의 개념은, 죽음 다음에 있는 완전한 개체와 개성을 지닌 생령의 회복이다. 인간은 죽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이 무덤 저편에 있는 생명, 곧 내세의 생과 영생을 경험하려면 부활이 있어야 한다.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종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부활의 소망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 19:25,26).

다윗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 (시 49:15).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시 73:24).

이사야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사 26:19).

바울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12~20).

우리의 선조들이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믿었던 부활의 소망은, 죽음이 모든 사람의 운명으로 되어 있는 이 현실에서 더 좋은 미래를 누릴 수 있다는 용기와 소망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죽은 자들을 최종적으로 일으키실 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시기 때문에, 죽은 의인들이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영원히 사는 불멸성으로 부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또한, 예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과 인간 부활의 연관성과 중요성은 매우 크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관된 말씀들을 공부해 보면서 부활의 주제에 대해 숙고해 보자.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복음의 전파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고전 15:14).

죄의 용서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전 15:17).

예수님을 믿는 목적도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고전 15:17).

죽음에서 일어나는 일반적 부활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전 15:12).

죽음 저편에는 소망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고전 15:17, 18).

그리스도 부활의 영향

그리스도의 부활로 그분의 제자들은 자극을 받고 분기되고 불이 붙었다. 부활은 약하고 겁에 질린 이 사람들을 용감한 사도로 변화시켜 그들의 주님을 위하여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하였다.“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행 4:33). 그 결과 그들이 담당한 사명은 로마 제국을 진동시키고 온 세계를 뒤집어놓았다(행 17:6). 복음 전파에 핵심과 능력을 준 것은 그리스도 부활의 확실성이었다. 베드로는,“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산 소망이 있게 하”(벧전 1:3)심에 대하여 말했다. 사도들은 그들이“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행 1:22)의 사명을 다하였는데, 그들의 증거에 큰 권능을 준 것은“주 예수의 부활”(행 4:33)에 대한 개인적 지식과 체험이었다. 사도들이 나가서“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행 4:2)를 전할 때 그들은 유대 지도자들의 반대를 받았다.
산헤드린 앞에 소환되었을 때, 바울은 그가“심문을 받”은 것은“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행 23:6, 24:21).“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 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로마인들에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롬 1:4)다고 편지를 썼다. 또한, 그는 침례를 받을 때,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롬 6:4, 5). 이렇듯 예수님의 부활은 사도들의 복음 사업에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들에게 확신에 차고 불붙는 소망이 되어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권두언

예수 그리스도 - 부활의 소망

부활! 말만 들어도 우리의 가슴이 벅찹니다.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중점이 되고 그리스도인 소망의 최대 정점이 되고 있습니다. 부활 없이는 기독교의 종교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심오한 의미를 줍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생애에 나타났던 죽음과 부활은 그분의 삶의 매 단계마다 나타났습니다.
매 순간 예수님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한 죽음의 결과는 매 순간 예수님의 생애에 부활로 이어져 왔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경험이 계속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삶에서 진정한 죽음과 부활을 매번 경험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어도 영원히 사는 진정한 부활을 경험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맛보고 살아나신 것처럼, 죽은 의인들은 무덤에서 부활하여 일어나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번 호 신앙 기사에 실린 부활에 대한 연구는 독자 여러분의 신앙에 유익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안고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발행인 강 병 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