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시사와 성경: 위기를 바로 알아야 준비한다

 

매일 아침 짙은 어둠을 가르고 광명한 해가 떠오른다. 산과 들은 푸름이 더해가고 신선한 바람결에 꽃향기가 느껴진다. 맑고 푸른 하늘에는 흰 뭉게구름이 일어나 찬란한 빛을 반사하며 마치 이 세상이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답게 영원히 갈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그러나 과연 정말 그러할까? 조금만 눈길을 인간세상으로 돌려보면 그 기대는 금방 깨어지고 만다. 오히려 우리는 과거에 전혀 있어본 적이 없는 위기의 시대에 살면서도 그 위기를 못 느끼며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세계 인구 70억 돌파
2011년 10월 31일에 세계 인구 70억 명째 아기가 태어났다. 70억이라는 숫자는 실로 엄청나다. 사람이 70억 초를 산다면 220살까지 살 수 있으며, 70억 보를 걷는다면 지구 궤도를 106번 이상을 돌 수 있고, 70억 장의 종이를 쌓으면 국제 우주 정거장 왕복거리(540만 마일)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70억 인구를 거느린 지구의 당면한 문제는 한두 개가 아니다. 이 지구는 각종 환경 오염과 자연재해와 그에 따른 질병들과 부작용으로 가득 차 있다. 오존층이 파괴되면서 새로운 질병과 균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한 질병에 대한 백신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또 다른 새로운 전염병이 생겨난다. 2011년 통계에 의하면 세계적으로 비전염성 질병에 걸리는 사람은 일주일에 약 59만 1천여 명, 전염성 질병에 걸리는 사람은 일주일에 약 47만 3천여 명에 이른다. 또한, 오염된 식수로 말미암은 어린이 사망자 수가 연간 1백30만 명으로 하루에 약 3,700명이 사망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하루에 한 끼의 식사도 못 하고 있는 인구가 9억 6천만 명에 이르며, 영양실조로 말미암은 하루 아동 사망자 수는 13,000명으로 7초마다 한 아동이 숨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뿐 아니라 하루 AIDS 감염자 수가 약 7,400명, 하루 동안 AIDS 사망자 수는 5,400명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처처에 지진과 기근
지금도 지구의 저쪽 편에서는 약 1,130만 명의 사람들이 가뭄에 의한 기근으로 시달리고 있다. 또 한 편에서는 홍수 때문에 기근이 심각하다. 우리 동족 북한주민만 해도 홍수로 심각한 식량난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홍수와 기근은 이제 너무 자주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뉴스에서도 잘 보도되지 않을 정도이다. 미국 지질 조사국(USGS)에 따르면 2011년도에 역사상 가장 많은 지진이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2011년도에만 진도 6.0이 넘는 것은 229번, 진도 7.0이 넘는 것은 23번이나 발생하였고, 진도 5.0 이상 된 것까지 합하면 2,964번의 지진이 발생하였다. 2011년 지진으로 말미암은 사망자는 실종되어 보고되지 않은 이들을 포함하면 4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세계의 활화산은 약 850개인데 이 중에서 매년 약 40개의 화산 분화가 보고되고 있다. 2010년 4월 20일 아이슬란드의 화산 폭발로 시작된 잠잠하던 화산의 폭발은 인류에게 또 다른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 왜 갑자기 이러한 온역(Pandemic)과 지진, 기근의 현상들이 생기는 것인가? 이것은 처처에 지진과 기근이 있을 것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마 24:7)성취가 아니겠는가?

이상한 현상들
지난해 세계 각지에서 물고기와 새들이 적게는 수백 마리에서 많게는 수백만 마리까지 떼죽음을 당하는 현상들이 생겨서 눈길을 끌었다. 미국, 스웨덴, 이탈리아, 뉴질랜드, 아일랜드, 브라질, 베트남, 영국, 한국 등에서 일어난 이런 현상은 정확한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채 불안감을 더해주고 있다. 또한, 꿀벌이 사라지고 있는 요즘, 꿀벌이 사라지면 인류는 4년 안에 멸망한다던 아인슈타인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고 있다. 많은 사람을 공포에 떨게 한 싱크 홀(Sink Hole)은 이 세상에 안전지대가 없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현상들을 말하자면 지면이 부족할 것이다.

한편, 종교자유의 나라 미국이 변하고 있다. 2010년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한 목사가 정부의 허락 없이 자기 집에 구도자들을 모아 놓고 성경을 가르친 혐의로 경찰의 조사를 받았으며, 앞으로는 허가 없이 개인의 집에서 성경을 가르치거나 집회를 열면 수백 불의 벌금을 내야 한다. 교회에서 설교할 때에도 특정 집단이나 단체를 모독하는 말을 하면 감옥에 갈 수 있다. 예를 들어 동성애(同性愛)가 성경적이 아니라는 말을 해도 잡혀갈 수 있다. 이제 우리가 성경의 곧바른 진리를 자유롭게 전하고 가르칠 수 있는 때도 머지않았다. 또한, 인간 도덕성의 타락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실 수 있는 죄악의 잔이 가득 찬 것을 느끼게 해준다. 정치인들은 한결같이 새 세계 정부를 외치고 있고, 새 세계 정부의 영적 지도자로 교황을 내세우고 있다.

주께서 오신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주께서 곧 오신다는 것이다. 세상은 급변하고 있다. 위기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면 준비할 수 없다. 우리는 시대의 위기와 재림의 임박성을 깊이 깨달아야만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잠자고 있는 동안 원수 마귀는 마지막 때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다. 성경의 예언은 성취되고 있다. 이제는 정말 깨어야 할 때가 되었다. 다시금 우리 마음의 등불을 가다듬고 주께로 눈을 돌리자. 주님께서 곧 오신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날은 온 지구 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눅 21:34-36).

 

동행: 하나님의 말씀대로 발걸음을 움직일 때


김현범

어느 날 부모님과 함께 차를 타고 집을 구하기 위해 답사를 갔습니다. 누구의 안내나 소개도 없이 지도를 보고 마땅한 곳이다 싶으면 무조건 가는 답사였습니다.
이곳 저곳을 둘러보지만, 썩 맘에 드는 곳이 금방 눈에 띄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곳은 마을이 너무 가까워 찬송을 큰 소리로 부르면 이웃에게 방해될 것 같고, 어떤 곳은 지형이 음침하고 습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곳을 발견했습니다. 동네에서 1.7km 떨어졌고 사람이 살지 않는 아주 오래된 집이 세 채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작은 개울물도 흘렀습니다. 전기도 전화도 되지 않았지만 아무리 찬송을 크게 불러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고 가뭄에 물 걱정도 덜고, 바로 옆이 산이라 겨울 땔감문제도 맘이 놓였습니다. 게다가 둘러보니 봄나물도 많고 집 옆에는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감나무도 있었습니다.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침 근처 밭에서 일하는 분이 계셔서 함께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분이 자기가 이 땅의 주인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혹 이 땅을 파실 마음이 없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아직 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하시며 잠시 생각하시다가 저희가 원하면 오늘 팔겠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는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응답해주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저희는 이사했습니다. 그런데 집이 오래돼서 이삿짐만 간신이 들여놓고 아직 자거나 살 수 없었습니다. 수리하는 것보다 다시 짓는 것이 더 빠르다고 판단, 비닐하우스를 만들어서 약 6개월 정도를 지내면서 중고 조립식 집을 구하여 짓기로 했습니다. 집을 뜯어내고 굴착기를 하루 불러서 집터를 닦아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부터는 배워가면서 가족끼리 집을 지었습니다. 일단 줄을 띄워 위치를 정하고 기초를 쌓을 곳을 팠습니다.
겨울에 불을 땔 수 있는 아궁이와 구들을 만들어야 해서 땅을 파내는 일이 힘들었습니다. 기초를 다 만든 다음 구들을 놓기 위해 흙더미를 끌어내려 바닥을 다지는 일을 하는데, 며칠 같은 일을 하다 보니 팔과 다리에 통증이 왔습니다. 나중에는 손에 힘이 빠져서 흙을 끌어내리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흙에 돌들이 섞여 있어서 더 힘들었습니다.
서로 힘든 것을 간신히 참고 일하는데 어머니께서 문득 “야, 장난감 포크레인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라고 웃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하시더니 “허허 장난감 포크레인 가지고 될 것 같은 감? 장난감 포크레인 가지고는 돼지도 안유.”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그 유머 섞인 말이 얼마나 재미있던지 저와 어머니는 배가 아프도록 웃었답니다.

그렇게 조금씩 구들바닥을 만들고 이제 바닥 콘크리트를 할 때가 되어 모래를 퍼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동네에 있는 큰 냇가 여기저기로 다니면서 수십 경운기의 모래를 날랐습니다. 하루에 네 번을 왔다 갔다 하면 시간이 다 갔습니다. 그렇게 모래와 시멘트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반죽을 해서 그 큰 바닥을 다 콘크리트 칠 생각을 하니 벌써 허리가 아픈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의 그런 사정을 아셨나 봅니다. 어느 날 먼저 있던 곳의 교우님들이 각자 차를 타고 오셔서 22평 되는 면적을 콘크리트를 하루 만에 다 해주고 가셨답니다. 하나님께서는 꼭 필요한 때마다 사람을 보내주셔서 저희를 도와주게 하셨습니다. 또한, 집을 지으면서 하나님께서 모를 때에 지혜를 주시고 위험한 때마다 도와주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집이 다 완성되었을 때에 우리 가족은 마치 성전 헌당식을 하듯 다 함께 예배와 찬송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발걸음을 움직일 때에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며 인도하십니다. 물론 힘들고 어려운 일 없이 평탄한 길만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당하게 되는 고난과 어려움은 얼마나 보람 있고 가치 있는 것이었는지요. 매일의 삶이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느끼며 그분의 뜻을 이루는 삶이 되길 기도합니다.

 

신앙 5부: 산 성전 (Living Temple)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전 6: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나 “교회”에 익숙해 있을 뿐 아니라, 사회생활이 교회와 밀착되어 있어, 교회와 교회생활을 뺀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별 의미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에 담겨 있는 더 깊고 심오한 뜻을 이해해야 하는데 그것은 인간 각 개인이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 곧 성전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산 성전(Living Temple)입니다.

 

1) 성전 정결의 의미

예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신 사역은 메시아의 사명과 사업의 일환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부정한 것과 속된 것들을 성전에서 몰아내시고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일에는, 산 성전인 우리 인간의 마음 성전도 예수께서 그렇게 깨끗하고 정결하게 하셔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로 건축된 성전은 이스라엘과 세상을 위하여 실물 교훈이 되도록 계획되었습니다. 태초 전부터 광명하고 거룩한 스랍 천사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을 창조주께서 내재하시는 성전이 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셨습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인류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를 그쳤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죄악으로 어두워지고 더러워져서 신령하신 분의 영광을 더는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 하심으로써 하늘의 목적은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류 안에 거하시고 또한 구원하는 은혜를 통하여 사람의 마음은 다시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성전이 세상의 모든 영혼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 고안된 놀라운 구속의 경륜과 비밀에 대해 잘 증거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던 성전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성령이 임재하실 만한 성전으로 바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불경한 거래의 혼잡으로 채워진 예루살렘 성전 뜰은, 관능적인 정욕과 부정한 생각을 품으므로 더러워진 마음의 성전을 너무나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매매하는 자들로부터 성전을 정결하게 하시면서 예수께서는 인간의 마음에서 더러운 죄, 곧 영혼을 부패하게 하는 세속적인 욕망, 이기적인 욕정, 악한 습관을 제거하고 정결케 하는 그분의 사명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사명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말 3:1~3).

 

2) 산 성전이 되기 위하여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 17). 우리는 하나님의 산 성전입니다. 걸어 다니고 살아 있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하나님의 임재를 가지라
산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속에 하나님의 임재를 가져야 합니다. 곧 우리 속에 예수님께서 좌정해 계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도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악한 세력들을 혼자서 내쫓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만이 영혼의 성전을 정결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강제로 들어가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옛날 성전에 들어가셨던 것처럼 마음에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어야 들어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고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면, 우리가 주님을 나가시라고 강권하기 전에는 그분께서는 나가지 않으시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사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루 동안만 와 계시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6)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한다”는 말의 뜻을 원어로 보면, "I will live with them and walk among them"이라는 뜻으로서, 함께 살고 함께 걷고 동행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산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임재를 초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영접한다는 의미는,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경험, 곧 주님과 함께 먹고, 함께 마시고, 함께 걷는 경험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함께 먹는다,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의 의미는, 주님의 살과 피를 마시는 경험, 곧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그 말씀으로 사는 것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사상과 마음과 생각이 꼴 지어지며 그분의 거룩한 말씀으로 변화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과의 동행이 끊임없이 지속하여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임재만이 우리를 산 성전으로 만듭니다. 그분의 임재는 영혼을 정결하게 하고 성결하게 하여, 우리로 주 앞에 거룩한 성전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엡 2:21, 22) 되게 할 것입니다.

2.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되라
산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성전으로 지어지는 일과 성전이 되는 일을 지속적이 되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거룩한 성전에서 하나님께 신령한 제사를 드릴 제사장의 역할도 산 성전이 되는 일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기록한 성경 말씀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의 원어는 “are being built into spiritual house”로서, “세워지고”의 “are being built”는 현재 진행형으로 쓰여 있습니다. 현재 진행형으로 쓰인 의미는, 우리가 신령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계속, 그리고 지속적으로 지어져 가야 함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어져 간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성품이 점점 자라 장성한 분량에 이른 온전한 성품이 되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므로 우리의 생애에서 더욱더 큰 하나님의 영광이 재현되고 드러나는 것을 말하며, 바로 그것이 더욱 아름다운 성전으로 완성되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성전에는 사역을 하는 제사장이 있듯이, 우리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제사장 역할도 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우리의 제사장 직책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우리는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하는 엄숙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제사장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그분의 구속 사업에 대해, 그리고 백성이 나아가야 할 진리의 지표에 대해 밝히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백성에게 가르치는 거룩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를 중보할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곧 자신이 죄를 승리하는 정결한 삶을 살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제사장의 입에서는 진리의 도를 가르치는 말씀과 기도와 감사의 찬송만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 우리는 산 성전입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임재만이 성전에 환한 쉐키나 영광의 빛을 비추게 할 것이며, 그 환한 임재의 빛이 산 성전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산 성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 제4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는?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거하기를 기뻐하실, 그분의 마음에 흡족한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는 어떤 곳이어야 할까요?

 

1) 만민이 기도하는 집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의미를 성경 절을 찾아보며 한번 생각해 봅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기도하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막 11:17). 

만민”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다음의 성경 절을 보면 그 의미가 확실해집니다.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3,6,7).

우리는 주로 이 말씀이 유대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이사야 56장 3절부터 읽어보면, “만민의 기도하는 집”에 나타난 “만민”의 의미 속에는 이방인이 직접 거론되고 언급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만이 사용하던 성전을 정결케 하시며 예수께서 외치신 말씀에도 “만민”이라는 단어가 쓰인 것을 봅니다.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 속에서, 교회는 기도하는 집, 그것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염원을 우리는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넘어 세상 각처에 널려 있는 이방인들, 곧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집에서 기도하며 진리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교회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계급이나 인종이나 남녀노소의 차별 없이 모든 족속과 민족들이 모여서 진리의 복음을 듣고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은 전해진 진리의 복음이 너무 놀랍고 기뻐서, 그리고 진리가 말하는 대로 살기를 너무 원하게 되어,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기도를 드리게 되어야 합니다. 진리 앞에 겸손히 굴복하고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펼쳐 놓으며 기도할 수 있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편견이나 비판이나 손가락질이 없는, 자신의 과거가 어떠하든지, 자신의 배경이 어떠하든지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하며, 누구나 마음을 열고 편히 나올 수 있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말과 행동을 하나님 자신에게 한 일로 간주하십니다. 형제를 실망하게 하거나 쓸데없는 비판이나 험담은 제해져야 합니다. 교회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들어와서, 편안하게 마음을 하나님 앞에 펼쳐 놓을 수 있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능력, 치료를 경험하는 곳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과 치료를 경험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정결하게 하실 때에,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두려워서 도망갔습니다. 부정함을 씻기 원하지 않는 교만한 사람들, 자신의 죄 됨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사람들, 자신의 죄의 병 고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만이 예수님의 정결 사업을 무서워하여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병자들과 연약한 자들과 어린아이들은 오히려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임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고, 청각장애인의 귀가 열리고, 언어장애인이 말을 하게 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뛰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교회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성전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능력과 치료의 권능이 나타나는 곳이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죄의 병을 치료받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정결케 되는 일이 교회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모든 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영적 상태를 깨닫게 하고 자신의 영적 상태를 올바로 진단할 수 있게 하는 진리가 반드시 전해져야 합니다. 또한, 부패한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게 하는 말씀의 능력이 현존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교회에서는 섞임 없고 순수한 하나님의 진리가 그대로 전해져야 합니다. 교회에는 진리의 성령이 항상 거하셔야 하며, 예수께서 친히 임재하셔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정결케 하는 일은 예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들어 오시면 죄악들이 나가게 되어 있으며, 그때에 우리 영혼이 치료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복음과 함께 목사나 지도자는 물론, 교회에 참석하는 모든 신자는 영혼의 치료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영혼을 위한 어떤 부담도 느끼지 않거나 그들의 구원에 관하여 무관심한 태도는 하나님을 슬프게 합니다. 우리는 죄로 병든 영혼들을 도와주고 치유시키는 기술을 지녀야 하는데,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먼저 죄에서 회개하고 고침을 받은 경험이 있어야 하며, 주님께로부터 정결함을 받은 그 경험을 영혼들에게 간증하고 전하는 산 증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자신의 죄와 부족에 대해 슬퍼할 뿐만 아니라, 죄악을 경고하며 죄인들을 위해 울며 간구하는 일, 세상의 죄악을 제지하는 일에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영혼을 구할 수도 있었음에도 죄인들을 구하지 않고 게을렀던 사람들은 심판 때에 그 이유를 하나님 앞에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목사들과 지도자들, 그리고 먼저 진리의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은 매일 성령의 기름을 받고, 변화된 성품과 흠 없는 생애로 영혼들의 모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일꾼의 품행은 진지하고 단정하고 아름다워야 하며, 말과 행동에 참된 그리스도인의 공손함이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치료의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치료 능력과 치유의 산 체험이 존재해야 그것이 참된 교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

교회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들에서 많은 음악과 찬양이 울려 퍼지지만, 어떤 찬양들은 하나님께 상달 되지 못하는 음악이 되고 맙니다. 자신의 영혼에서 참된 간증으로 나오지 않는 찬양은, 그 찬양이 아무리 훌륭한 음악이라도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치료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에, 참된 복음을 경험했기 때문에 기쁨과 감사에 가득 차 마음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찬양이 진정한 찬양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후, 고침을 받은 병자들과 어린아이들의 찬송소리가 성전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것은 돈 바꾸는 소리, 흥정하며 싸우는 소리와 짐승들의 울음소리와 제사장들과 제사 드리러 온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사라지고, 원래 성전에서 있어야 할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치료의 능력을 찬송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동안 위선적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오랫동안 성전을 차지하고 앉아서 하나님의 성전을 메마른 형식주의로 가득 차게 하므로 성전은 하나님의 참 교회가 되는 일에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몰아내신 후, 진짜 성전을 채웠어야 할 찬송과 찬양이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에서 울려 퍼져야 할 소리가 무엇인지 보여주시기 위해 고침 받은 병자들과 어린아이들의 찬송소리가 성전을 가득 채우도록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과거에 이러한 놀라운 광경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편견과 자만심과 교회의 권위주의 때문에 그 아름다운 찬송소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장면을 보고 오히려 분하게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성전을 정결케 하신 것이 아니라 파괴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다음 그들은 급하게 산헤드린 회의를 소집하여 어떻게 예수를 죽일 수 있을까를 논의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한 찬양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진짜 성전에서 들였어야 하는 소리가 나지 못하도록 막는 장본인들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즈음도 이와 같은 현상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듯한 교만에 찬 찬양이나, 인간에게 보이려는 찬양, 또는 고침 받은 산 체험이 섞이지 않은 형식적인 찬양, 감정적인 흥분에만 싸여 부르는 찬양 등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죄를 자복하고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서 올리는 찬양은 하늘 보좌 높은 곳까지 상달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이 진정한 찬양의 소리를 막는 방해자가 되지 않도록 마음을 깊이 살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속에 진정한 찬양이 흘러넘치도록 합시다!

 

신앙 3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또 구약 당시와 예수님 당시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성전으로 몰려들던 유대인들처럼 수많은 교인이 교회에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시대의 교회들과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교회와 교인들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예배를 드리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두려운 경고의 말씀이, 바로 오늘날 현시대의 교회들과 교인들에게도 그대로 선포되어야 하는 심각한 현상에 기독교는 빠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경배하려 모여 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이렇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0~1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 1:10).

어떻게 된 일입니까? 왜 이렇게 충격적이고 심각한 경고의 말씀이 발해져야 했을까요? 어떻게 경배받으시기를 기뻐하시고 사람들의 예배를 흠향하기를 좋아하시는 자비의 하나님께서, “너희의 예배와 경배는 더 이상 받기가 괴로우니 차라리 예배를 드리러 오지 마라. 너희는 마당만 밟으러 오는 사람들이다. 차라리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구나! 번제와 제사도 드리지 마라. 너희가 드리는 예물은 받지 않겠다”는 선고를 하시게 되었는가 말입니다. 그리고 왜 오늘날의 교회들에게도 이 경고의 말씀이 적용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예배와 경배와 예물을 받지 않으시겠다고 선포하시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예배들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예배

1) 공경하는 마음이 없는 예배

하나님께서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즐겨 받으십니다. 성경 말라기 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 도다”(말 1:6).

여기에는 의사소통이 전혀 안 되는 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공경하는 마음이 없고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를 공경하는 마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제사장과 백성은 그 질문에 대하여 이상하게 여기며 “하나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멸시했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정말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이 절기나 성소 제사 때에 정말 번제와 예물도 드리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열심히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기를 즐겨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제물과 헌물을 열심히 가지고 성전에 나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일까요?
요즈음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있습니까? 그들이 정말 교회에 참석하지 않고 헌금도 드리지 않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이 빠지지 않고 열심히 교회에 나가고 헌금도 바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깁니다. 그렇다면 이 말이 무엇입니까?

예배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형식적으로 타성에 젖어 드리는 것이 진정한 예배가 아니라, 마음과 몸과 정성과 그리고 온 생애가 함께 어우러져서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입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히 회개하고, 그리고 회개에 따르는 순종과 변화의 열매가 반드시 맺히고, 마음과 더불어 온 생애도 함께 헌신하고 바치는 예배가 참 예배입니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예배가 곳곳에서 드려지고 있습니다. 형식과 외식만을 따르는 예배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격식을 잘 갖춘 예배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공경하는 마음이 없이 드리는 헛된 제사라고 단정하시며, 그런 사람들을 마당만 밟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볼 수 있는 성령의 안목도 없고 행위와 형식에만 치우치며, 완전한 회개나 굴복이 없이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마당만 밟는” 외식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만족하므로 이런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을 섬기지 않았으며, 우리가 언제 주님을 공경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한다는 의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곧 하나님을 순종하고, 그분의 뜻에 온전히 굴복하며, 성품과 생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없는 예배, 회개와 순종이 동반되지 않는 예배, 신령과 진리로 드리지 않는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예배라고 간주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나 엄숙한 사실입니까?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몇 번이나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드려진 바 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2) 악을 행하며 모이는 예배

성회와 집회로 모이는 사람들의 마음과 행위가 진정한 예배의 관건임을 시사한 성경 절이 우리의 시선을 끕니다.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사 58:3,4).

이사야 58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금식하고 성회에 모이면서도 서로 다투고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서로 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탄식하시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사야 1장에도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고 손에 피가 가득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실 수 없고 기도를 듣지 않으시겠다고 선언하신 기록이 나옵니다. 이 성경의 기록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의 면모와 생활상이었습니다. 그들은 명목상으로 훌륭한 교인들이었지만, 금식하고 십일조를 바치고, 성소 제도와 안식일과 절기를 통해 즐겨 성회에 모이고 각종 제사 제물과 헌물들을 바쳤지만, 그들의 생활에는 진정으로 거듭난 신앙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보다 더 악하게 행하고, 싸우고 질투하고 모함하고 비판하며, 미워하여 남을 해하는, 성경의 기록을 빌리면 손에 다른 사람을 해하려는 의도로 피가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들에게도 이 말씀이 적용될까요? 그렇습니다. 명목상으로는 교회에 적을 두고 잘 참석하지만, 아니 교회에서 훌륭한 직함을 가지고 존경을 받으며 생활하지만, 사실 실제 생활과 삶에 있어서 신앙과는 거리가 먼 교인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세상의 오락과 세속적인 일에 우선권을 두는 일, 성품이나 인격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좋지 않음을 드러내는 일들, 어떤 직책을 놓고 서로 권력 다툼을 하거나 명예를 얻기 위해 서로 싸우는 일, 분파를 만들거나 당을 짓고 서로 반목하거나 이권 다툼을 벌이는 일, 다른 사람을 질투하고 모함하며 치는 일 등, 그 당시의 현상들보다 더 악하고 치명적이고 충격적인 일들이 현대 교회들 안에서 더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회로 모이면서 악을 행하는 위선적이고 외식적인 신앙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싫어하시고 슬퍼하시기에, 그런 사람들의 기도는 들으실 수 없으며 그런 예배는 받으실 수 없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이런 것이 바로 헛된 제물을 바치는 껍질뿐인 예배입니다.

 

3) 더러운 떡과 더러운 상을 드리는 예배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말 1: 7). 

이 성경 절을 보면 이상한 표현이 나옵니다. 그들이 “더러운 떡”을 하나님의 단에 드리며, 주의 상을 경멸히 여긴다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 당시의 성소에서 하나님께 바쳐지던 떡은 진설병이라고 불렸는데, 그 진설병은 매일 아침 신선하게 갓 구운 새 떡이어야 했습니다. 이 떡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 매일 먹음으로 영적으로 살아갈 힘을 주는 귀한 하늘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태하고 뒤로 물러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그분 앞에 올바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모든 상징과 표상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사역을 나타내며 그들의 구원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던 성소의 기물과 예물들에 대해서도 소홀하게 행했습니다. 그들은 매일 만들어야 했던 신선한 떡 대신에 오래된 더러운 떡을 하나님의 단에 드렸습니다. 그리고 진리가 펼쳐져야 할 하나님의 상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더럽게 하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은 어떤가요? 현대 교회들의 설교 단에서 들려지는 말씀들은 올바른 진리들인가요? 오류가 섞이지 않은, 정말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복음들과 진리가 전파되고 있습니까? 교회들의 설교 단들에서 얼마나 사탄이 던진 오류가 섞인 가르침들이 난무하고 있습니까? 또 우리의 삶은 어떤가요? 우리는 매일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이신 그리스도를 먹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까? 하루를 살 수 있는 영적 힘을 받기 위해, 어제 먹은 것이 아니고 바로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먹고 있습니까? 

더러운 떡은 우리의 생애에서 치워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좀먹는, 영적 시야를 좁히고 하나님께 대한 원대한 사상을 편협하게 만드는 거짓된 가르침과 진리가 아닌 오류는 골라내 버려야 합니다. 또 우리 마음과 생각을 오염시키는 죄 된 생각과 사상들과 세속적인 계획들은 깨끗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떡 신선한 만나로 우리의 마음과 사상을 채워야 합니다. 더러운 상은 하나님께 드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제단 앞에 깨끗한 제물로서 우리 자신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산 제사를 드리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헛된 제물을 드리는 예배가 아닌, 진정한 예배와 경배가 되는 것입니다.

 

4) 헛된 제물을 바치는 예배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헛된 제물을 드려서입니다. 헛된 제물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성경 이사야 서와 말라기 서에 기록된 말씀들을 참고로 살펴보도록 합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 1:13~15).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말 1:8~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말 1:13).

성소에서 드리던 제물에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흠 없고 순결하고 좋은 최상품이어야 했습니다. 제물은 항상 흠 없는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예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최상품을 드리기를 아까워했습니다. 그들은 몰래 병든 제물과 저는 것들, 곧 잘못 태어난 기형 동물 양이나 송아지들, 또 눈멀고 형편없는 제물들을 예수님을 예표하는 제물로 가져왔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께 제사와 예물을 드리는 일을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이 훔치거나 사기 친 물품들을 헌물로 가져왔습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말씀처럼,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그들의 가장 귀한 보화를 드리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즐거워하고 있는지요? 우리는 우리의 시간, 우리의 돈, 우리의 힘, 우리의 애정과 정성 등, 우리의 모든 것과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아깝지 않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전체를 바치는 것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 하나님의 호소

하나님께서는 헛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호소하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6~18).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6~1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참된 회개와 변화된 성품과 생애, 그리고 진리로 드리는 진정한 헌신의 예배입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시고 가장 좋은 하늘의 선물을 주신 하나님과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헌신과 보답은 어떠해야 할까요? 어떤 예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할까요?

 

신앙 2부: 달라진 성전의 모습

 

폭풍우가 지나간 듯, 갑자기 성전에 고요가 깃들었습니다. 이제 전에는 결코 들어보지 못했던, 과거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광경이 성전 안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성전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습니다.
성전 뜰에는 소음과 고성과 부정한 거래가 없어지고 그 대신 조용한 침묵과 엄숙함이 혼란하던 광경과 소음 대신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옛날 거룩하게 성별된 산에 임하였던 여호와의 임재가 이제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세워진 성전을 신성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1) 제사장들은 왜 도망갔을까요?

예수께서 성전을 정결하게 하실 때에, 공포에 질린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그들의 마음을 통찰하시는 예수님의 예리한 눈초리를 피하여 성전 뜰에서 도망갔습니다. 무서워서 도망가는 무리, 참된 예배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을 예수께서는 측은하게 바라보며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왜 성전에서 도망갔을까요? 그들은 왜 그 자리에 서 있지 않았을까요? 그들에게 가라고 명령하신 분은 세상의 지위나 권세가 없는 초라한 목수의 아들이요, 가난한 갈릴리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예수에게 대항하지 못했을까요? 왜 그들은 그들이 그토록 귀중하게 여기던 부정하게 번 돈을 버리고, 비천한 외모를 한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 도망갔을까요?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실 때에 그분의 외모나 음성에는 그들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그 무엇, 왕의 위엄 같은 권위가 있었습니다. 신성이 인성을 통하여 번쩍일 때에 그들은 그분의 얼굴에 나타난 의분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 전에는 결코 인식하지 못했던 위선자와 사기꾼과 강도로서의 자신들의 진정한 입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영원하신 재판장의 보좌 앞에서 현세와 영원을 위하여 선고를 받고 있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메시아 되신 그리스도에 관한 선지자들의 예언이 번개처럼 떠올랐습니다. 그들이 과연 성령께서 주신 그 깨달음에 굴복하려고 했을까요? 그들은 회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이 권력과 권세를 가졌음에도, 백성 앞에서 한갓 목수일 뿐인 가난한 예수의 명령에 복종하여 자신들이 무서워하며 한걸음에 달아난 사실에 대해 자존심 상해 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부정 이득을 취한 죄를 저질렀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생각을 꿰뚫어 보셨으므로 그분을 증오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공공연한 책망이 그들의 자만심에 굴욕감을 주었으며, 그들은 백성에게 그리스도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것을 시기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속으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고 놀랐으며 메시아에 관한 예언의 말씀이 그분에게서 성취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감화와 깨달음을 무시하고 그분께서 저들을 내쫓으실 때 사용하신 능력과 또한 이 능력을 그분에게 주신 분에게 도전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은 천천히 생각에 잠겨 마음에 증오심을 품고 성전으로 돌아왔습니다. 제사장과 관원들은 정신이 들자, 그리스도의 사명을 일종의 혁신으로 간주하고, 성전의 주관자들이 허용한 것을 간섭할 권리가 그분에게 있는지 따지려고 작정하였습니다. 장사가 방해를 받았으므로 감정이 상했고, 백성 앞에서 체면이 깎이게 된 것에 화가 나서 그들은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라는 마음의 확신과 성령의 호소를 짓눌러 버렸던 것입니다. 제사장들을 비롯하여 뜰에서 도망갔던 무리는 잠시 후에 슬금슬금 되돌아왔습니다. 그들을 사로잡았던 공포에서 얼마간 회복되었지만, 아직 머뭇거리고 주저하며 돌아온 그들의 앞에 놀라운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습니다.

 

2) 성전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

그들이 그곳을 떠난 사이에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던지요! 그들이 도망갔을 때에 가난한 자들은 뒤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사랑과 긍휼을 띤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눈물 어린 눈으로 그분의 주위에서 떨고 있는 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를 도우리라”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선생님이여, 나를 축복하소서!”라는 간절하고도 가련한 호소를 하면서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분의 귀는 모든 외치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분은 온유한 어머니의 긍휼보다 더 큰 긍휼을 가지고 고통당하는 어린 자들을 굽어보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돌보심을 받았으며, 각가지 병을 가진 사람들이 치유를 받았습니다. 말 못하던 자가 입을 벌려 찬송하고, 눈먼 자들이 그들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신 분의 얼굴을 바라보고 기뻐서 찬양을 드렸습니다. 고통당하던 자들의 마음은 즐거워졌습니다. 찬양의 소리와 축복의 소리가 성전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과 성전 관리들이 이 위대한 사업을 목격하였을 때에, 그들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그리고 그들의 귀에 들려온 소리는 얼마나 놀라운 계시였는지! 사람들은 그들이 겪어온 고통, 곧 그들의 좌절된 희망, 고통스러운 날들, 잠 못 이룬 밤들에 관한 이야기를 예수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고통은 사라지고 마음은 하늘의 위로와 평안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질병으로 소망의 마지막 불꽃마저 꺼지려던 때에 그들의 병을 고쳐주신 그리스도께 찬양과 감사의 말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에게 “그리스도께서 너의 생명을 건지셨다. 네 목소리를 높여서 그분을 찬송하라!”고 말하고 있었으며, 유년들과 청소년들, 아버지 어머니들, 친구들과 목격자들이 목소리를 합하여 감사와 찬송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소망과 기쁨이 그들의 마음을 채웠고 평화가 그들의 마음에 깃들었습니다.

혼란과 소동으로 장터 같던 성전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고, 대신 성전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영광과 평화와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 찬 진정한 성전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신앙 1부: 예수님 당시의 교회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요 2:13).

예수께서는 아무도 무르게 조용히 사람들의 무리 속에 섞여 예루살렘성전으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큰 무리가 유월절을 맞아 당시 유대 나라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을 향하여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즙으로 만드시는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시면서 메시아의 사업을 시작하셨지만, 아직 메시아의 사명과 공생애의 시작이 대중들에게 크게 공표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분께서 군중 가운데 섞이셨어도 아직 크게 남의 시선을 끌지 않으셨습니다.

여행 도중에 사람들 사이에 오고 가는 화제는 단연 침례 요한의 전도설교 때 현저하게 시선을 끈 메시아의 강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잃어버린 국가적 위상과 권력을 되찾는 것이 소망이었으며, 그들의 이런 기대와 욕망을 채울 분으로서의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소망이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데서 기인한 것이어서 그들이 큰 실망을 겪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여행 중에 기회가 되는 대로 사람들에게 깊은 열의를 가지고 예언의 말씀을 설명해 주셔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정확하게 알고 연구하도록 깨우치려고 힘쓰셨습니다. 드디어 긴 여행이 끝나고 마침내 예루살렘의 탑들이 시야에 들어오자, 사람들은 모두 목소리를 합하여 노래를 불렀습니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네 성 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시 122:2~7).
그러나 그들이 부른 노래와는 달리 성 안에는 평강이 없었습니다.
성전 안에는 입이 딱 벌어질 만한 광경과 소리가 온통 가득 넘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그리고 예수님의 눈에 적나라하게 나타난 성전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1) 성전의 모습

예수님의 눈은 점점 크게 떠졌습니다.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놀라운 광경 때문이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성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소란스러운 가축 시장과 같았습니다. 쩔렁거리는 동전 소리, 흥정하다가 싸우는 날카롭고 노한 언쟁 소리, 가축들이 질러대는 소리, 양들과 비둘기의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낯선 곳에 익숙지 못한 동물들은 놀라서 이리저리 뛰고 그런 동물들을 단속하는 장사꾼들의 소리가 뒤섞여 성전은 한바탕 장터가 선 것 같았습니다. 혼란이 너무 심하고 소음이 너무 시끄러워 성전을 찾은 예배자들은 방해를 받고 있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말씀은 성전 속까지 침입하여 들어온 그 소동에 파묻히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성전 안에서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일까요?

유대의 절기인 유월절에는 수많은 제물이 바쳐졌으므로 그 당시 성전에서 매매하는 일이 대대적으로 행해졌습니다. 특히 유대의 지도자들은 백성에게 예루살렘에서만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유월절 동안 예루살렘은 팔레스틴 각처와 심지어 먼 외국에서 예배하러 온 수많은 사람으로 붐볐습니다. 이 많은 방문객은 크신 희생 제물을 예표하는 제물들을 가져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 성전 바깥 뜰에서 짐승들이 거래되었던 것입니다. 각 계층의 사람들이 헌물을 사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제사가 드려지는 경건하고 조용해야 할 성전 뜰은 장터가 되어 늘 혼잡한 군중으로 가득 찼고, 엄청난 소란과 혼란으로 그곳이 성전인지 시장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장터가 된 성전

상인들은 언제나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이 희생제물을 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미끼로 동물들을 팔 때에 엄청난 가격을 요구하였으며, 그 이익금이 나뉘어 제사장들과 관원들의 손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백성 사이에 공공연하게 알려진 비밀이었습니다. 경건과 신앙의 모본이 돼야 했을 지도자들과 제사장들은 백성의 희생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었으며, 제물을 바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의 자녀와 토지에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여 그렇게 비싼 가격에 동물들을 사도록 종용했던 것입니다. 특별히 먼 곳에서 성전까지 찾아온 사람들은 이왕 먼 길을 왔기 때문에, 희생제물을 바치는 헌신의 행위를 행하지 않고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에서는 그들만의 주화를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모든 외화는 성전주화로 교환되었습니다. 모든 유대인은 “그 생명의 속전”으로 해마다 반 세겔을 지급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며, 이렇게 모은 돈은 성전을 유지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출 30:12~16). 이외에도 많은 금액이 자원하는 헌물로 드려져 성전 금고에 비축되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외국 화폐는 성전 봉사에 사용되던 “성전 세겔”이라고 불리는 주화로 바꾸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돈을 바꾸는 일은 사기와 부정 이득을 취할 기회가 되어 수치스러운 거래로 발전하였으며, 이것 또한 제사장들의 소득원이 되었던 것은 두말할 것 없었습니다.

 

3) 장사꾼이 된 지도자들

유대인들은 그들의 경건을 크게 자랑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성전을 기뻐하고 자랑스러워 했으며, 성전을 헐뜯는 말은 아주 엄중하게 신성모독으로 간주되하였습니다. 특히 지도자들은 성전과 관계되는 의식을 이행하는 데 매우 엄격하고 성전에 관계된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지만, 사실 그렇게 하는 이면에는 돈을 사랑하는 이기심의 마음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그렇게 성전을 소중하게 여긴다고 말하면서, 성전 속에서 참되게 거행되었어야 하는,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의식의 본래 목적과 의미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멀리 벗어났는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셨을 때에 모세는 산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그곳을 거룩하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짐승이나 사람을 무론하고 살지 못하리라(출 19:12, 13)는 경고를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는 곳은 어느 곳이든지 거룩하다는 교훈이 주어져 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 경내는 신성하게 간주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장삿속과 이익 다툼으로 이 모든 것이 잊힌 지 오래였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의 대표자가 되도록 부름을 받은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성전 뜰에서 벌어지는 악폐를 시정해야 했으며, 그들은 성실과 동정의 모본을 백성에게 보여야 했습니다.

지도자들은 자신의 이익에 골몰하는 대신에 경배자들의 사정과 필요를 염려하고, 필요한 제물들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들의 마음은 탐욕으로 강퍅하여졌고, 그러는 와중에 돈이 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무시 당하기가 일쑤였습니다. 너무 가난하여 주께 드릴 하찮은 선물조차도 살 수 없고, 심지어 자신의 허기진 배를 채울 양식조차 사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많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이 절기에는 고통받는 사람들과 여러 가지 질병으로 몸이 불편한 사람이 왔고, 어떤 이들은 들것에 실려 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질병과 곤고한 사정은 하나님께 축복받지 못한 증거라고 냉정하게 선언하는 제사장들의 말을 듣고 괴로워하였습니다.

그 당시 백성은 의식의 의미에 대한 적절한 교훈 없이, 무조건 무수한 의식을 행하라는 명령만 받고 있었습니다. 경배자들은 그들이 바치는 희생 제물이, 완전한 희생 제물이 되시는 메시아를 상징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냥 무의미한 제물만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그들의 모든 제사가 상징하고 있는 바로 그 메시아가 인정과 존귀를 받지 못한 채 서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제물들의 상징적 의미와 제사들이 왜곡되고 오해되고 있음을 보셨습니다. 신령한 예배는 거의 다 사라져 가고 있었으며, 백성을 하나님과 연결해 주는 고리는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전혀 다른 예배를 확립하는 것이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의 사업이었습니다.

 

4) 예수님의 성전 정결 사업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이 모든 광경을 보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부정한 거래를 보셨습니다. 그분은 피 흘림이 없이는 그들의 죄를 용서받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는 가난한 자들의 슬픔을 보셨습니다. 그분은 성전의 바깥 뜰이 거룩하지 못한 장터로 변한 것을 보셨습니다. 거대한 환전소로 변해버린 성전을 그분께서는 슬픔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종의 조치가 취해져야만 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전 뜰의 계단에 서서 준엄한 눈초리로 당신 앞에 있는 장면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분은 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어떻게 궁핍한 자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막는지를 보셨습니다. 그분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들에게서 감추어지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상품화하는지를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장면을 보셨을 때, 그분의 얼굴에 의분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용모에 권위와 권세가 나타났습니다! 그분 속에 감추어진 신성이 빛을 발하는 듯했습니다! 갑자기 사람들의 관심이 예수님께로 이끌리게 되었고, 부정한 거래를 하고 있던 자들의 눈이 그분의 얼굴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눈길과 용모를 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는 듯했습니다. 부정한 자들과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속의 생각을 읽고 그들의 은밀한 동기를 알아내는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어떤 자들은 마치 그들의 악한 행위가 얼굴에 기록되어 있어서 그 준엄한 눈초리가 환히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얼굴을 숨기려고 애쓰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소란이 그치고 정적이 맴돌았습니다! 거래하고 흥정하던 소리가 멈추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침묵이 흐르고 경외감이 회중을 압도했습니다. 마치 그들이 행한 일에 답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송사를 당하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쳐다볼 때 그들은 인성의 두루마기를 통하여 신성이 번쩍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께서는 샅샅이 관찰하면서 무리를 훑어보십니다. 마치 당당한 위엄으로 솟아오르는 해처럼 하늘의 빛이 그분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곧 명확하고 근엄하게 울려 퍼지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마라!” 예수께서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시면서 구내 입구에 모아 둔 노끈으로 된 채찍을 들고 장사하는 무리에게 성전 구내에서 떠나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분은 전에 절대 나타내지 않았던 열정과 준엄함으로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셨습니다. 주화는 대리석으로 된 보도 위에 떨어져서 날카로운 소리를 냈습니다. 아무도 감히 그분의 권위에 의문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감히 부정으로 모은 돈을 주우려고 멈추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노끈으로 만든 채찍을 가지고 그들을 때리시지는 않으셨지만, 그분의 손에 들린 단순한 채찍은 마치 화염검과 같이 그들에게 무서워 보였습니다.

성전 관리들, 투기하는 제사장들, 중간상인들과 가축 매매자들은 양과 소를 몰고 오직 그리스도의 임재로부터 벗어나려는 일념으로 그 자리에서 허겁지겁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공포가 무리를 휩쓸고, 사람들은 그분의 신성의 표시를 느꼈습니다. 공포의 비명이 수백 명의 핏기 잃은 입술에서 새어 나왔고 제자들까지도 떨었습니다.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평상시의 태도와는 너무도 다른 언행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떠들썩하던 군중은 그들의 물건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멀리 떠나갔습니다.

 

권두언

예배에 대한 올바른 이해 

세상에 예배 드리는 사람들이 참 많아졌습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상 생활의 루틴이 되어버렸습니다. 심지어는 골프 치러 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른 아침 예배를 만들어 주든지 아니면 그 전날 밤에 드리고 가도록 배려해 주고 있는 형편이지요.
왜 그러할까요?
신자들이 배워서 가지고 있는 한 가지 신조가 바로 교회에서 예배의 중요성이기 때문입니다. 예배 자체가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받기 위하여 드려 주어야 할 조건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이슬람 교도들의 예배 드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고개가 수그러질 정도로 참으로 진지하고 엄숙하기만 합니다. 길 가다가도 시간만 되면 작은 양탄자 같은 것을 깔고 이마를 땅에 대고 절을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도 정성을 바치는 이유는 이 예배의 습관이 그들의 구원의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독교회의 예배에 대한 일상 관념들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배의 중요성은 그 예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의 표현을 상징하는 의식이나 형식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것을 행하고 있는 예배 드리는 자의 태도와 그가 왜 예배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자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와 헌물을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역겹게 하는 것들과 의식들을 다 가지고 나가라고 말씀하신 것도 있을 정도입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예배도 많고 예배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이제 곧 주님께서는 진리와 성령으로 예배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러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질 시간입니다. 그리고 참되게 예배하여야 할 시기입니다.

이번 호는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여러분께 귀한 빛을 드릴 것입니다.

 

발행인 강병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