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시사와 성경: 창조주의 영역을 침범하다

 

요즘 과학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이 창조주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종종 듣는다. 과학과 지식의 증가로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현실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슬픈 사실은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그것이 사람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사람이 문명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Ibrain: 뉴욕타임스는 NeuroVigil, Inc.가 개발한 ibrain 뇌파해독기계를 통해 파킨슨이나 루게인 등의 중추신경계통의 질병이 있는 사람들이 큰 도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2012년 4월에 임상실험에 들어간 생각을 읽는 기계인 ibrain은 뇌의 파장을 이용하여 사람이 어떤 종류의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판독해낼 수 있다. 이제 생각까지도 감시를 받을 수 있고 나도 모르는 사이 강제적으로 다른 사람에 의해 내 생각이 판독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아수라장으로 변할 것이다.

Nano robot: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나노(nano)라는 말은 이미 익숙한 말이 되어버렸다. 나노는 1억분의 1을 말하는 것으로서 1나노는 머리카락을 10만분의 1로 나눈 크기라고 한다. 나노의 기술을 통해 이제 사람의 세포 안까지 나노 로봇이 들어갈 수 있고 유전자 조작이 가능하다. 즉 나쁜 박테리아를 죽일 수도 있고 늙은 세포를 젊은 세포로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빌 게이츠가 극찬한 미국 과학발명가 레이 커즈웨일(Ray Kurzweil)씨의 책 [the coming singularity]에 의하면 나노 로봇의 개발로 인간은 2050년경이 되면 수명을 마음대로 연장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어쩌면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가장 잘 아시고 정해 놓으신 수명을 인간이 늘린다면 그것은 축복보다는 저주가 되지 않을까?

Bio Technology: 요즘 IT 기술뿐 아니라 생명 공학(Bio Technology)의 발달도 놀라울 만하다. 동물의 몸속에 인간의 장기를 이식하고, 동물을 복제하는 것 등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법으로 인간 복제를 불법으로 규정했기 때문이지 인간복제의 기술도 이미 완성단계에 있다고 하며 여러 번 실험을 한 사실들도 가끔 밝혀지곤 한다.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이 창조주의 영역을 침범하고 있는 것이다.

Human program: 요즘 사람이 잠잘 때의 눈 운동인 rem(Rapid eye movement)을 분석하고 그것을 프로그램화시켜 사람의 기억력을 되살리고 심지어 뇌의 기억장치 속에 프로그램을 만들어 넣을 수 있는 기술이 발전되었으며 암암리에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즉 기억력을 주관하여 그 사람의 과거를 지배하고 한 사람의 정체성이 완전히 없어지고 다른 사람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이다. 리모컨으로 로봇을 조종하는 것처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지배하여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노예로 삼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실 수 있는 마지막 선을 넘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가 완전히 침해당하고 있다.

Drug Music: 미국의 한 사이트에서는 신기한 약을 판매한다. 우울증 약, 기쁨과 희열을 느끼게 하는 약, 죽음과 지옥을 맛보게 하는 약 등 종류도 다양하다. 놀라운 것은 이 약은 입으로 먹는 약이 아니라 귀로 듣는 약이며 MP3 파일로 판매하고 자신의 컴퓨터에 다운받아서 사용한다. 사람들은 그 약을 들으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마약을 먹은 것처럼 희열과 몽상에 빠지기도 하고 때로는 죽음의 충동과 깊은 슬픔을 느끼기도 한다. 하늘의 음악가였던 사탄은 음악을 이용하여 많은 젊은이를 멸망으로 몰아가고 있으며 정신을 혼미케 하여 하나님을 발견치 못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Smart phone: 스마트 폰이 없으면 요즘 젊은이들은 무엇을 할지도, 무엇을 읽을지, 무엇을 보고 들을지도, 어떻게 연락을 할지도, 어떻게 여행을 갈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공부하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물건을 주문하고, 쇼핑하고, 채팅하고, 전화하고, 길을 찾고, 계산하고.… 길을 걸을 때도 차를 탈 때도 잠시 무엇을 기다릴 때도 언제나 스마트폰은 몸에 연결되어 있다. 부모 없이는 살아도 스마트폰 없으면 못사는 것이 요즘 아이들이다. 스마트 폰 안에 온 세상이 들어 있는 듯하다. 사람은 스마트폰의 노예가 된 듯하다. 스마트폰 덕분에 요즘 젊은이들의 두뇌는 쉴 틈이 없다. 조용히 속삭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말씀을 묵상할 여유가 없다.

주님께서 오셔야만 한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엄청난 일들이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다. 과연 세상은 이대로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이대로 하나님께서 본성에 넣어주신 인간성이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까? 창조주의 영역이 침범당하고 있다. 인간의 육욕적인 욕망과 이기적 야망은 그 도를 넘어서고 있다. 사탄은 각종 문명의 이기를 통하여 사람을 타락시키고,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바쁘게 만들어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이제는 정말 예수님께서 오셔야 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말씀 연구와 열렬한 기도와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영혼을 가장 안전하고 순결하고 거룩한 환경과 분위기 가운데 두고자 온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매 순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지키자!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 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약 4: 7,8).

 

동행: 상수도를 설치하다

 

가래골이라는 곳은 동네에서 좁은 골짜기를 따라 20여 분 걸어 들어가면 뻥 뚫린 듯 나오는 높은 산 아래 골짜기입니다. 집 옆에 작고 깨끗한 개울물이 흘러서 그 물을 직접 떠서 마시기도 하고 씻기도 하고 개울에 와서 빨래도 하고 했습니다. 개울 바로 옆에는 작은 둑이 있었고 개울을 건너가는 길도 작고 큰 돌들로 예쁘게 쌓아놓았습니다. 그런데 겨울이 되면 개울물이 얼기 때문에 얼음을 깨서 구멍을 뚫고 그 안에 있는 물을 길어다 사용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가을 큰 맘을 먹고 상수도를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전기가 없는 곳이라서 수압을 통해 물이 자동으로 나오게 하려면 큰 공사를 해야 했습니다. 집에서 개울을 따라서 위쪽으로 약 200 미터 부근에 작은 통을 묻어서 일단 깨끗한 물이 작은 통에 모이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통에서 파이프를 연결하여 집과의 중간 거리에 커다란 통을 놓고 물을 저장하고 거기서 또 파이프를 통해 물이 집 안으로 들어가도록 구상을 했습니다. 문제는 200 미터가 넘는 거리를 땅을 파고 파이프를 묻는 일이었습니다. 겨울에는 온도가 섭씨 영하 25도 이상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적어도 한 자() 반은 묻어야 하였습니다. 곡괭이와 삽으로 돌이 많이 섞인 땅을 파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돌 하나를 빼내기 위해 수 시간을 소비해야 했습니다. 아버지와 저 그리고 어머니까지 합세하여 돌을 빼내려 해도 안 될 때는 지렛대를 이용하고 지렛대로도 힘들 때는 해머로 돌을 깼습니다. 그렇게 밭둑과 산의 땅을 파헤치고, 돌을 캐내고 파이프를 묻기까지 2주 이상이 걸린 것 같습니다. 그 기간에 어머니는 고생한다고 다른 때보다 점심을 더 맛있게 해주셨습니다.

드디어 파이프를 다 묻고 연결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물을 들여보내 공기를 빼내었습니다. 공기가 빠지자 수압에 의해 맑은 물이 수도꼭지를 통해 쏴 하고 쏟아져 나왔습니다. 물이 잘 나오는 것을 보면서 우리 가족은 모두 기뻐했고 어떤 큰일을 이루어낸 듯 감사했습니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하루에도 여러 번씩 물을 가지러 개울까지 왔다 갔다 안 해도 되니 맘이 놓였습니다. 그 후 며칠 간은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는 것만 바라보아도 기분이 좋았고 감사했습니다. 가족이 함께 연합해서 어떤 힘든 일을 해내므로 서로 간에 더 도와주고 격려해주고 이해하는 마음이 생겼고, 고난을 통해 서로 더 긴밀히 연합하게 된다는 진리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가난과 고생은 큰 축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부유할 때보다 가난하고 어려울 때에 하나님을 더 바라보게 됩니다.

겨울이 되자 한 가지 염려되는 곳이 있었습니다. 파이프가 상수원에서 집까지 연결되는 중간에 개울을 건너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큰 나무를 개울에 걸쳐 놓고 파이프를 스타일로폼으로 많이 싼 다음 나무에 묶어 놓았었습니다. 만일 그 부분이 언다면 물을 겨우내 못 쓰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밤에 잘 때는 물을 젓가락 굵기 만큼 계속 틀어 놓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흘러내리는 물은 잘 얼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해에는 무심코 누군가가 밤에 수도꼭지의 물을 잠가서 몇 달간 물을 사용하지 못한 적도 있습니다.

한 번의 실수와 무심코 한 행동은 추운 겨울에 얼음을 깨고 개울에서 물을 길어와야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흘러가지 않는 물은 추위가 오면 언답니다. 그리고 한 곳이 얼면 그 한 부위가 언 것 때문에 전체 물이 흘러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파이프를 땅속에 깊이 묻듯이 우리 자아를 땅속에 깊이 묻어야 문제가 안 생깁니다. 그리고 생수를 계속 흘려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끊임없이 공급받지 않으면 흘려보낼 수 없습니다.

오늘 한 손으로 살짝 돌리기만 하면 뜨거운 물과 찬물이 나오는 수도 밸브를 보면서 감사한 마음을 가져봅니다. 그리고 살짝 틀기만 하면 생수가 나오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길 기도합니다.

 

사랑의 편지: 주님, 당신을 따라 걸어봅니다

 

주님, 당신을 따라 걸어봅니다

 
                                                                       강영은

주님, 때때로 상상 속에서 당신을 따라 걸어 봅니다.

당신의 임재로 축복받았던 산과 들, 촌락과 마을들을

 

초라하지만, 하늘빛이 머물던 나사렛의 작은 집,

당신의 손길을 감당치 못해 황송했을 손수 만드신 나무 벤치 놓인

당신의 집 앞길을...

 

나사렛 거친 사람들이 모여 주고받던 잡담들,

삶에 찌든 입에서 나오던 불평의 말,

가난과 속박이 싫다고 던지던 분노의 말,

세상과 닮지 않은 당신을 비아냥거리며 던지던 조롱의 말은

 

어느새 당신이 부르는 시편의 아름다운 찬송에 휘말려 사라지고

자기도 모르게 노래를 따라 부르는 그들의 얼굴에 옮아 번지던

당신의 평화로운 미소가 흐르는 나사렛의 일터는

작은 천국이었습니다.

 

 

주님, 때때로 마음으로 당신을 따라 걸어 봅니다.

당신의 발자국이 새겨진 들과 마을을

 

삼십 년의 기다림으로 채워졌던 비천한 목공소.

그러나 당신의 손길을 타던 행복한 목수 간은

신이시지만 미천한 일을 위해 허리를 굽히는,

존귀한 존재이지만 수고스럽게 짐을 지는 당신의 겸손 때문에

천사들이 감탄하는 멋진 곳이 되고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나르던 물동이와 등에 지던 나뭇짐,

그리고 손으로 깎으신 나무 기구에 깃든 당신의 조용한 자취는,

환호와 칭찬과 떠들썩한 인정을 갈구하는 사람들과 너무 달랐습니다.

 

 

주님, 때때로 생각 속에서 당신을 따라 걷습니다.

주님의 향기가 풍기던 촌락을

 

배고픈 사람이 지나가면 당신의 몫을 쥐여주시곤

조용히 금식 속에서 하늘 양식으로 채우시던 당신의 사랑.

그것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던 사랑과 똑같은 사랑이었습니다.

 

숲 속의 작은 곤충을 돌보던 자상한 손

한 마리 참새도 떨어지지 않게 지키던 사랑의 손은,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 문둥병자를 고치신 치료의 손

처음 눈을 뜨고 본 당신의 얼굴이 너무 자애로워 놀라던

소경을 고친 능력의 손과 똑같은 손이었습니다.

 

 

주님,

이 세상은 당신의 노래로 향기로워졌습니다.

이 세상은 당신의 음성으로 달콤해졌습니다.

이 세상은 당신의 사랑으로 따뜻해졌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당신의 임재와 용서로 행복한 곳이 되었습니다.

 

주님, 오늘도 마음에 난 길을 당신을 따라 걸어봅니다.

 

 

신앙 5부: 질문: 예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언제 나타날까요?

 

답: 성경 요한계시록은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 마지막 때에 예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출현할 것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성품을 가지고 나타날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성경 요한계시록에는 예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들은 십사만 사천입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또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계 14:1).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성품을 가졌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기 때문에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4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성품을 의미합니다 (출 33:18~23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이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안에 재현되는데, 그것이 우리의 앞이마(전두엽)에 형성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뇌는 특유의 기능을 가진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전두엽은 앞이마의 안쪽에 있는 뇌의 한 부분입니다. 이곳은 판단과 논리, 지성과 의지를 통제하는 곳이며, 특히 우리의 자아를 제어하는 기능이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전두엽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성품을 형성하는 데에 앞이마(전두엽)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이 죄를 짓도록 유혹할 때 사탄의 편을 택하여 죄를 짓든지, 아니면 성령의 음성을 듣고 굴복하든지 둘 중에 선택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어린 양의 이름이 이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성품이 이루어진 것으로, 의지가 성령께 지속적으로 굴복하므로 옳은 편을 선택하는 것이 습관이 된 것, 곧 거듭난 마음을 계속 유지하는 것, 사탄의 유혹이 올 때 매번 올바른 편(성령의 음성을 듣는 편)을 지속해서 선택하여, 영성과 도덕성과 의지력이 온전하게 꼴 지어지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예수님의 성품을 이룬 십사만 사천의 출현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언제 십사만 사천이 나타날까요?
십사만 사천은 마지막 때에 나타납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내가 인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계 7:1~4).

십사만 사천에 관한 앞의 성경 절을 읽어 보면, 십사만 사천은 마지막 때 사방의 바람이 놓이기 전, 즉 마지막 심판의 바람이 불려고 하는 시점에 등장하며,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치는 시점, 그리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이 오기 직전에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계시록 14장 1절을 보면, 구원을 받아 하늘로 승천하여 시온 산에 서서 구속의 노래를 부르는 십사만 사천은, 그전 장인 13장에 언급된 짐승의 표 환란을 이기고 승리하여 구원을 받는 마지막 세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판과 재림과 구속은 모두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십사만 사천은 마지막에 일어나는 마지막 세대(last generation)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세대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는 “남은 자손”이라는 말과 연관이 있습니다. 남은 무리는 영어로 “remnant”인데, 이 단어의 뜻은, “천의 남은 자투리”, 곧 “마지막 남은 천”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 마지막 시대에 생겨날 하나님의 남은 무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닷모래 위에 섰더라” (계 12:17). 십사만 사천은 마지막 시대에 일어날 하나님의 남은 무리인 참 백성입니다.

 

** 마치면서

예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준비되어 가고 있습니다. 성경의 참 진리를 깨닫고, 진리로 변화되고 성화되는 사람들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가 가까웠기 때문이며, 성경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한 마지막 세대 십사만 사천이 나타날 때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한 여자의 남은 무리 하나님의 참 백성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마지막까지 견디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4:12). 하늘은 예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우주에 죄의 역사가 다시는 시작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는 루시퍼의 반역과 같은 죄의 반역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죄를 온전히 승리하고,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여 다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거나 그분을 슬프시게 하지 않으려고 굳게 결심한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죄의 흉악성과 비참한 결과를 너무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다시는 그 죄를 반복하거나 다시는 짓지 않기로 한 사람들만이 하늘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죄는 이길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굴복입니다.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 너무 약하지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는 죄를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그 일은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막10: 27). 우리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이 구원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선택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의지를 바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신비한 능력으로 우리의 의지에 힘을 주셔서 죄를 승리할 수 있게 하시며 예수님의 성품을 온전히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성품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모든 힘과 정성을 쏟아야 할 때입니다. 어느 때에 우리의 이름이 불리고 우리가 하늘에 적합한 성품을 가졌는지 조사하는 심판이 하늘에서 지나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성품밖에 없습니다. 지금 하늘은 예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린 양의 성품과 이름이 이마에 기록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원하시는 예수님의 온전한 성품을 이룬 사람이 되기 위해 여러분의 모든 노력과 힘을 바치지 않으시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성품을 준비하시는 독자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신앙 4부: 질문: 우리도 예수님의 성품을 가질 수 있을까요?

 

답: 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예수님의 성품을 가지는 일은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성품의 모델이시고 모본 되시는 예수님의 성품을 우리도 가질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 우리는 그분의 생애의 한 면 한 면을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성품을 가지셨는지 연구해 봅니다.

 

1) 사랑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6,19). 예수님의 성품의 대표적인 속성은 사랑입니다.

하늘의 영광과 행복을 버리시고, 하늘 왕의 왕관과 왕복을 벗으시고, 이 타락한 세상에 죽어가는 인류들을 위해 오신 것도 사랑이고, 우리의 모본이 되시기 위해 비천한 이 땅에 살면서 무서운 사탄의 공격과 시험을 이기고 죄를 승리하신 것도 사랑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온 인류의 죄의 짐을 어깨에 지시며 죄 자체가 되셔서 당하신 그 고뇌와 십자가에서 자신이 영원히 죽어서 없어지더라도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과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결심하신 것도 예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상처를 입고 죽게 되었을 때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 우리를 속절없이 아무 소망도 없이 죽도록 버려두지 않으시고, 온 하늘 천군의 존경을 받으시던 거룩하고 행복한 하늘 집을 떠나 세상에 오신 예수님, 원수를 구원하시기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은 그분의 모본을 보여주시며,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사실 때의 예수님의 성품은 하나님을 잘 대표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태도 속에는 늘 동정과 사랑이 흘러넘쳤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도 그분께 나아오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셨던 예수님은 집집이 다니시면서 병자를 고치고, 굶주린 자를 먹이고, 애통한 자를 위로하고, 상심한 자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괴로워하는 자에게 평안을 끼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어린이들을 품에 안고 축복하셨으며, 지쳐 있는 어머니들에게 소망과 위로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그분의 모든 행위에 나타나 있었으며, 사람들에게 격려와 위로를 주고, 날마다 접촉하는 슬픔에 잠긴 사람들과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기쁨을 안겨 주는 일을 예수께서는 그분의 양식으로 삼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정확하게 말씀하실 때에도 남을 배려하는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사람들과 교제하실 때에는 크신 지혜를 가지고 주의 깊고 친절한 태도로 대하셨고, 무례하지 않으시고, 가혹한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감정이 예민한 사람들을 쓸데없이 상심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약점을 비난하지도 않으셨고, 진리를 말씀하시되 항상 사랑으로 하셨습니다. 심지어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불신과 불의를 견책하실 때에도 그의 말씀에는 눈물이 섞여 있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지 않은 사람은 사랑을 창작해 낼 수도 없고 만들어 낼 수도 없습니다. 사랑은 오직 예수께서 다스리시는 마음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워진 마음에서만 사랑은 모든 행동의 원칙이 됩니다. 사랑은 품성을 변화시키고, 감정을 지배하고, 정욕을 제어하고, 증오심을 사라지게 하며 성정을 고결케 합니다. 하늘로부터 온 참된 사랑은 이기적이거나 변하기 쉬운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랑을 마음속에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돌아가신 영혼들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내세우려고 애쓰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자기를 사랑해주고 기쁘게 해주며 자기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산 소유물이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참된 사랑은 자신의 동기와 말과 행동이 오해를 받거나 오전 될 지라도 화를 내지 않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따라가는 사랑입니다. 사람이 말로는 아무리 공언한다 할지라도, 자기의 형제들에 대해 이기심 없는 사랑을 갖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가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만으로는 결코 이러한 사랑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자아가 그리스도께 몰입될 때에 사랑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마음에는 사랑의 결핍이 결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생명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신 모든 사람을 사랑할 것입니다.

 

2) 온유와 겸손
온유와 겸손은 예수님의 가장 두드러진 성품의 특징 중 하나였습니다.
그분의 겸손은 성육신에 잘 나타났습니다. 하늘의 왕 영광의 왕께서 자기를 낮추고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는 겸손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영광의 광채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빌 2:6,7)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하시는 일에는 어디에도 자아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지극히 높으신 주님께서 우리 인간과 같이 되시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셨다는 이 사실은 주님께 얼마나 굴욕적이며 비천한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 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우리 인성을 취하셨으며, 잘 알려지지 않은 초라한 갈릴리의 한 마을에서 30여 년 동안을 사셨습니다. 그분의 지상에서의 환경은 거칠고 험악하였습니다. 그분은 영광스러운 가문에 화려하게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영광이 가려졌던 것은 외양의 위엄이 주목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외적 장식을 피하셨고, 재물, 세상의 명예, 인간적인 위대함에 따라 영혼의 가치가 평가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겸손하신 예수께서는 어떤 세속적인 성질의 매혹물로 사람들을 당신의 편으로 이끌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늘 진리의 아름다움만이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을 이끌어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무아의 봉사의 생애였습니다.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한”(마 20:28) 것이 그분의 모든 행동의 교훈이었습니다. 그분은 온유하고 겸손하셨으며, 사람들에게도 겸손하고 온유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참고 온유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 귀하게 여기는 특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온유를 천국에 들어가는 첫째 조건으로 삼으셨고, 그분의 생애와 품성 속에는 이 귀한 덕성 온유와 겸손의 거룩한 미()가 나타났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천군 천사들을 호령하실 수 있었지만, 당신 자신을 위대하거나 높은 인물로 주장하지 않고, 충만한 신성을 의식하셨지만, 왕관과 왕복을 벗으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지상 생애에서 그분이 마지막으로 행하신 일도 겸손을 나타내는 의식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종처럼 몸소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종의 일을 행하셨던 일입니다. 겸손하신 예수님을 볼 때에, 자기 과시를 위해 애쓰고, 이기심과 교만과 지배욕으로 다져진 인간의 본성과 자존심은 한없이 부끄러워질 것입니다.

 

3) 극기와 인내
이 지상에서 사신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극기와 오래 참음과 인내의 생애였습니다. 예수께서 대항하신 유혹과 시험들은 우리가 막아내기 어려운 것들이었습니다. 이 시험들은 그분의 품성이 우리의 성품보다 뛰어나신 것만큼 더 극심하게 임하였습니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을 하시고,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가장 혹심한 고통과 시험을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것은 식욕의 힘을 깨뜨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세상 인류들의 심히 무거운 죄 짐을 지고, 식욕과 세상에 대한 사랑과 참람으로 이끄는 과시를 사랑하는 시험에 대항하셨습니다. 이 시험들은 아담과 하와를 정복하였고 우리를 쉽게 정복하는 것들입니다. 에덴의 거룩한 부부 아담 하와 같이 그리스도에게도 식욕은 첫째가는 큰 시험이었습니다. 멸망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곳에서 우리의 구속 사업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아담이 식욕의 방종에 의해 타락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식욕을 극기하심으로 승리하셔야 했습니다. 아담의 시대부터 그리스도의 시대까지 자아 방종은 식욕과 정욕의 세력을 점점 증가시켜, 마침내 그것들이 거의 무제한으로 사람을 지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타락되고 병들어서, 스스로 힘으로는 그것들을 극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대신하여 가장 혹심한 시험을 견디므로 이기셨고, 우리를 위하여 굶주림이나 죽음보다 더 강한 자제와 극기를 행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본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과 영생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행하여야 할 것인지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높은 지위를 떠나셨을 때 당신이 원하시는 어떤 형태의 생명체라도 취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위대함이나 계급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가장 겸비한 생애를 선택하셨습니다. 주님의 생애와 경험 가운데는 사치, 편의, 자아 만족과 같은 것이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일에 절제하시고 인내를 보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참으로 슬픔에 처한 자이셨지만 그분의 생애는 극기와 인내로 특징지어져 있어서, 비록 고통과 근심으로 그늘졌을지라도 정신이 연약하게 꺾이지 않으셨고, 항상 안정하고 침착한 표정을 띠셨으며, 어디를 가시든지 안정과 화평과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 계획과 섭리의 시간에 순종하시기 위해 인내와 극기를 실천하셨습니다. 자기 뜻대로 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만 사셨던 것입니다. 극기와 인내는 마지막을 사는 우리에게도 매우 필요한 덕성입니다. 자아를 정복하고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일에도 인내와 극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극기를 몸소 실천하신 생애는 우리에게 좋은 모본이 되고 있습니다.

 

신앙 3부: 질문: 누가 성품의 모본인가요?

 

답: 우리가 따라가야 할 성품의 모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네, 우리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 이외에는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우리가 형성하고 준비해야 하는 성품의 모델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우리의 모본이 되시는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또한, 마지막에 나타날 여자의 남은 무리,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하나님의 남은 백성의 특징을 요한계시록 14장 12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이들이 가진 것은 “예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다른 누구의 믿음이 아니고, 예수께서 가지셨던 믿음, 곧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 하늘의 능력과 힘으로 죄를 승리하셨던 믿음, 사탄의 유혹에 생각으로라도 범죄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믿음을 가리키는데, 성경은 마지막 남은 무리가 예수께서 가지셨던 것과 똑같은 믿음을 가질 것을 시사하고 있으며, 이런 예수님의 믿음을 가진 사람만 환란을 통과하고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본 되시는 예수님의 생애의 특성을 연구해 봅니다.

 

1) 모본이신 예수님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1).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바라보는 것에 의해 변합니다. 예수님과 같은 성품을 준비하려면 우리는 매일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생애를 명상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영혼을 대하셨으며, 어떤 생각을 하시고 어떻게 사셨는지, 어떤 말과 대화를 하셨으며, 그분의 삶의 목적과 방향은 어떠했는지 연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볼수록, 그분의 생애, 그분의 가르침, 그분의 품성의 완전함을 연구하면 할수록, 인간은 그분의 성품에 찬탄할 수밖에 없게 되어, 그분께 더욱 끌리고 더욱 매료되며 또 그분의 형상에 동화되어 그리스도의 성품과 마음을 갖게 되기까지 그리스도와 같아지기를 매일 더욱 소망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훌륭한 인간도 우리의 모델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습관과 말과 예모와 품성에 흠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피차간에 평가하고, 종종 자신의 생애를 다른 사람들의 생애와 비교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우리에게 모본으로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인간 사이에 서로 비교하거나 모방하는 일을 그치고 참된 모본이신 예수님을 닮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권면하는 베드로의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벧전 1:14~16).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과 같이 거룩해야 한다고 피력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믿는 믿음만으로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계신 그대로 그분을 언젠가 보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그리스도의 성품은 신의 성품의 완전이십니다. 우리도 그런 성품을 가지게 되기 위하여 우리의 힘과 노력과 애정과 정성을 다 쏟아 부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그분을 말함으로, 그분의 품성의 사랑스러움을 바라봄으로 우리는 변화될 것입니다.

 

2) 죄를 승리하신 모본: 말씀으로 승리하심
예수님 성품의 특성 중에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죄를 승리하신 성품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요 14: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탄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분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사탄의 궤변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죄를 짓기로 동의하지 않으셨고, 생각으로라도 사탄의 시험에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을 죄에 굴복시키고 실패하여 쓰러지게 하려고 온갖 유혹과 시험을 가져왔지만, 그분은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과 연합되었습니다. 그분은 성령의 내재하심으로 죄와 투쟁할 태세가 되어 있었고 죄를 승리하실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충성과 타락한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이 그 모든 시험과 유혹과 괴로움을 이기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어떤 수단을 통하여 사탄과의 투쟁에서 승리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분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시험에 대항하셨습니다. 그분은 시험과 유혹에 항상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고 묵상하셨고,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진리의 원칙들을 행하는 일에 온 생애를 바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은 그분 생애의 표어였습니다. 그분의 모든 생애의 원칙과 좌표는,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성경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는가를 적용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이 광야에서 맹렬한 시험과 유혹으로 예수께 왔을 때에, 주님께서는 “기록되었으되”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같은 성품을 기르고 죄를 승리하기 위해서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육체의 생명이 음식으로 유지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적 생명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지됩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가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자양분을 위하여 스스로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도 그 말씀을 우리 자신을 위하여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지식을 중개로 하여 그것을 얻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주의 깊이 성경을 연구해야 하며, 한 구절을 취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 구절 가운데 넣어 주신 사상을 확인하는 일에 정신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것이 되어, 주님께서 우리 자신에게 말씀하신 바를 알 때까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심령에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은 사상을 형성하고 품성을 발달시킵니다. 말씀은 우리의 본성적이며 세속적인 성정을 멸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 생명을 나누어 줍니다. 말씀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보혜사로 심령에 임하시고, 변화시키는 그분의 은혜의 역사로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재창조됩니다. 그 사람은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 약속은 모두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탄의 시험의 맹공격을 받을 때, 상황이나 자신의 약점을 보지 말고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바라보십시오! 그 말씀의 모든 능력은 그대의 것입니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시 119:11).

 

3) 죄를 승리하신 모본: 기도로 승리하심
성경에는 예수님의 기도생활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막 1:35). 예수님께서 인간이셨을 때에, 그분은 아버지의 힘이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기도 장소를 찾으셨습니다. 그분은 산속에서 홀로 아버지와 교통하는 것을 사랑하셨습니다. 이런 기도와 영적 교통을 통해 예수께서는 그날의 의무와 시련을 위해 힘을 얻으셨습니다. 그분은 의무와 시련을 위해 무장된 모습으로 힘차고 신선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당신의 아버지께로부터 새 힘을 구하는 간구자가 되셨고, 밤에는 탄원자가 되셨습니다. 죄 없고 흠이 없는 분이셨지만 예수님은 인간이셨으므로, 죄악 세상에서 영혼의 투쟁과 고통을 견뎌 내기 위해 기도가 필요하였고, 그 기도는 그분의 특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아버지와 교통하는 가운데 위안과 기쁨을 발견하셨던 것입니다.

기도하므로 예수님은 그분의 마음을 찢는 슬픔을 덜어 놓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슬픔의 사람이셨고, 비애를 맛보셨습니다. 낮 동안에는 인간을 멸망에서 구원하시려고 선을 행하시고, 병자를 고치고, 애통한 자를 위로하고, 실망한 자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으나, 낮의 일이 끝나면 밤마다 도시의 소란을 피하여 한적한 숲 속으로 가 엎드려 아버지께 간구하셨습니다. 그분은 자주 밤이 새도록 간구하셨습니다. 만일 인간의 구주께서 신적 능력을 소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필요를 느꼈다면, 연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는 얼마나 더 열렬하고 끊임없는 기도의 필요를 절실히 느껴야 할까요! 그리스도께서 가장 심한 시험에 봉착하셨을 때에 그분은 금식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고 열렬한 기도와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굴복함으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막 14:38)고 명하시고 기도로 승리하신 모본을 보여주신 예수님, 우리도 예수님처럼 기도한다면, 어떤 사탄의 유혹과 시험이라도 이길 수 있을 것이며, 죄를 승리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신앙 2부: 질문: 예수 재림 때에 성품이 홀연히 변하지 않나요?

 

답: 재림 때에 홀연히 변화되는 것은 몸이지 성품이 아닙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우리는 죄인이라서 죄 가운데 그냥 이렇게 살다가, 재림 때에, 혹은 언젠가 홀연히 변화되어 천국에 갈 것이다.”라고 막연하게 믿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 때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고전 15:5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재림 때에 홀연히 변화되는 것은 성품이 아닙니다. 죽음이나 무덤이나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성품을 변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품을 준비해야 하는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 함께 공부해 봅니다.

* 재림 전에 심판이 있다
심판은 예수님의 재림 전에 있습니다. 누가 하늘에 적합한 성품을 가졌는지 조사하는 심판이 재림 전에 하늘에서 진행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품을 준비해야 하는 때는 지금입니다. 성경에는 이 사실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예복의 비유는 재림 전의 심판을 말해준다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마 22:1, 2).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예복의 비유 이야기는 재림 전에 심판이 있다는 중요한 사실에 대해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초청을 보내시고 그 초청에 임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참여하도록 하십니다. 여기서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으로 비유된 분은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구속의 계획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비밀이 담긴 복음을 가르치시고, 그 복음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셔서 하늘에 데리고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1. 보내진 세 번의 초청
하나님께서는 인간 구속의 계획의 일환으로 복음의 초청을 인간에게 보내시는데,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초림하셨던 시대부터 세상 끝에 있을 재림 때까지, 세 번에 걸쳐서 복음의 초청을 인류에게 보내십니다. 세 번째 초청은 이방인들을 향하여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때부터 세상을 위한 은혜의 시간이 마쳐지는 순간까지 보내어지는 초청을 말합니다. 두 번에 걸쳐서 보낸 초청이 선택된 민족 유대 백성으로부터 거절당하자, 임금은 마지막으로 이방인들을 향하여 세 번째 복음의 초청장을 보냅니다. 그런데 이 세 번째 초청을 받고 찾아온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 속에 "악한 자와 선한 자"가 함께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섞인 무리였습니다. 모두가 이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임금의 말을 순종하는 사람들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은 다만 이기적인 혜택을 얻기 위해서 왕이 초대하는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로서, 왕이 혼인 잔치를 위해서 어떠한 희생과 수고를 하였는지는 무관심하며,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주어질 보상에 관해서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2. 심판과 조사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 (마 22:11~14).

고대 시대의 풍습을 보면, 왕이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초청할 때 그 자리에 참석하는 사람이 반드시 입고 와야 하는 예복을 함께 보내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이 비유에서도, 임금은 손님들에게 예복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왜 그 예복을 입지 않고 왔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손님들은 왕이 보내어준 예복을 입고 옴으로써, 왕이 자신을 초청해 준 것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표시해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임금이 보내준 예복을 입는 대신에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고서 참석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잔치의 참석을 위해, 임금이 요구하는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엄청난 값을 치르고 준비한 예복을 입는 일을 소홀히 하였던 것입니다. 임금이 잔치에 참석한 손님을 심사하는 일은 심판을 표상합니다. 잔치에 모두 참여는 할 수 있지만, 잔치에 참석하여 그 향연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조사하고 심판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이 비유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고 하늘에서 열리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사람은 재림 때에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누가 하늘에 들어와서 살 수 있는 성품을 갖추었는지를 조사하는 일은 재림 전에 선재합니다. 영생이라는 최후의 보상을 나누어 주기 전에 먼저 누가 의인의 유업을 차지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3. 흰 예복으로 표상된 성품
그렇다면 예복과 성품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요한계시록 19장에는, 하늘 왕의 아들인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신부와 혼인 예식을 올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신부는 주님께서 입게 하신 빛나고 깨끗한 흰 예복, 즉 흰 세마포를 입고 있습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계 19:7,8). 또 다른 성경 번역을 참고해 보면, "이제 그에게 허락하사 정결하고 흰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이는 성도들의 의라" (계 19:8 ; 킹 제임스 영어성경 역).

성경은 흰 세마포를 “성도들의 의”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곧 세 번째 초청을 받고 하늘 왕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복"을 입고 참석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바로 "성도들의 의"의 옷을 입고 하늘 혼인 잔치에 참석해야 함을 뜻합니다. 그것은 곧 의롭고 선한 성품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동기와 생각과 의도와 방향이 의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복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소유해야 할 순결하고 흠 없는 품성을 표상합니다.

 

2) 재림 전에 있을 조사심판을 가리키는 성경 절
지금 예수께서는 하늘 지성소에서 우리의 기도와 죄의 고백과 회개를 받으시며 우리 죄를 중보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중보사업이 마치기 전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정결하게 하시는 동안, 하늘에서는 그 사람이 하늘에 들어와도 안전한 사람인지, 다시는 죄의 반역을 일으키지 않을 하늘에 적합한 성품을 가졌는지 조사하는 심판이 진행됩니다. 이 심판은 인을 치는 과정과 같은 것으로써 시간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기간에 우리의 죄와 허물들을 보여주시며, 우리가 그 죄를 회개하고 그것을 버리도록 하십니다. 그다음 단계로 또 다른 죄를 보여주시고 그 죄를 알게 하셔서 회개하게 하심으로 정결 사업의 과정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심판 동안, 주님과 하나가 되어 그분의 영혼 정결 사업과 중보사업에 동참하는 자들은 어린 양과 혼인하는 것으로 성경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 8장 14절의 예언에 나오는 “이천삼백 주야” 예언을 연구해 보면 이 사실에 대해 더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고 다니엘서의 예언을,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은 잘못 해석하여,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 땅이 정결하게 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천삼백 주야의 예언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라는 요한 계시록 14장 7절의 첫째 천사의 복음은, 모두 지성소 안에서의 예수님의 봉사, 곧 재림 전 심판을 가리키는 것이지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속하시고 악인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재림하시는 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다는 것은 예수께서 이 땅을 심판하시러 이 땅에 임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임하셨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이 지상에 임하신 것이 아니고,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를 심판하시는 일을 하시기 위하여 하늘에 있는 지성소에 임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선지자 다니엘은 그분께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 앞에 나아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단 7:13)라고 기록했는데, 그는 인자 같은 이(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으로 온 것으로 말하지 않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하나님 아버지)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단 7:13)라고 하였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역시 이때의 오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말 3:1),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은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말 3:2,3). 다니엘서 8장 14절의 기록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성소를 정결케 하려고 지성소에 들어가시는 것과 다니엘서 7장 13절의 “인자 같은 이가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 앞에 나아가시는” 것과 말라기가 예언한 “주님께서 홀연히 그 전에 임하시는 것” 등의 세 가지는 모두 같은 사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곧 재림 전에 하늘에서 진행되는 심판을 가리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열 처녀 비유 이야기와 혼인 잔치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심판에 대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신랑이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사건입니다. 여기에 보면 신랑이 오는 것은 잔치보다 먼저 있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혼인예식의 풍습을 보면, 신랑이 신랑 집에서 먼저 신부와 혼인을 하고 신부 집으로 혼인 잔치(피로연)를 하러 옵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혼인을 마친 신랑이 혼인 잔치를 하기 위해 돌아올 때의 모습을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혼인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나라를 받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손님들로 불리고 있습니다(계 19:9 참조). 손님이 된 사람이 동시에 신부로 대표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선지자 다니엘이 기록한 대로 하늘에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께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으실 것인데,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단 7:14; 계 21:2)은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을 받으실 것입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혼인으로 성경에 표상된 것입니다. 혼인이 끝나면, 곧 그 성안에 살 수 있는 적합한 성품을 가진 성도들이 결정이 되면, 예수께서는 그 예루살렘 성 안에 살 성도들을 데리러 오시는 것입니다.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사람들은 직접 그 혼인 예식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에 사는 반면에, 그 혼인은 하늘에서 행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눅 12:36)어야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실 때에,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이해하고, 믿음으로 그분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중보의 일을 끝내시고 그의 나라를 받으시기 위하여 하나님 앞으로 들어가실 때,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모든 사람은 다 그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자들로 표상되어 있습니다.

 

** 성품은 재림 때에 홀연히 변화되지 않습니다. 성품은 그 전에 준비되어야 합니다. 재림 때에 홀연히 변화되는 것은 육의 몸이 영광스러운 불멸의 몸으로 바뀌는 것이지 성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품은 지금 준비해야 합니다. 하늘에서 성도가 되고자 하면 우리는 먼저 지상에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사는 동안 간직하고 있던 품성의 특성은, 죽음에 의해서나 부활에 의해서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나타냈던 동일한 성향을 가지고 무덤에서 나올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재림 때에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의 품성을 변화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변화의 사업은 지금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매일의 생애는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고상하고 원만한 품성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연히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고상한 품성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를 통하여 개인이 노력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재능과 정신력을 주시지만, 품성 형성은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품성은 자아와 맹렬하게 싸움으로써 형성됩니다. 타고난 성벽을 끊어 버리기 위하여 거듭거듭 계속해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단 하나의 좋지 않은 성벽도 고쳐지지 않은 채 남아 있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나는 품성의 결점을 고칠 수 없다”는 말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할 수 있다 없다는 것은 의지에 달린 일이며,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예수님께 바칠 때 성품의 변화는 가능한 것입니다.

하늘에 적합한 사람이 되려면, 이 은혜의 시기 동안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품성의 결함들을 회개하고 극복하며, 균형 잡힌 품성을 이루기 위해 힘을 다해야 합니다. 귀한 유예의 시간, 곧 우리 품성의 옷을 어린양의 피로 씻어 희게 하도록 우리에게 은혜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품성의 흠을 제거하는 데는 필생의 노력이 요구됩니다. 매일 자아를 부인하며 죄를 승리하는 데는 중단 없는 굴복과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의 승리를 위해 하나님께 열렬히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 승리는 가능할 것입니다.

 

신앙 1부: 질문: 왜 성품이 하늘에 가져갈 유일한 것인가요?

 

대답: 성품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성품은 우리가 하늘까지 가져갈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성품은 구원과 멸망, 그리고 승리와 실패를 결정합니다. 성품에 의해서 세상과 인간의 운명이 바뀌었고, 또 바뀔 것입니다. 왜 성품이 그렇게 중요한지 그 이유에 대해서 연구해 보기로 합니다.

 

이유 1: 우주의 조화가 깨진 것은 성품 때문이었다

아름다웠던 하나님의 세계
태초에 하나님의 세계는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온 우주는 조화로웠고 평화로웠습니다.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세상은 흠이 없이 완전했고, 모든 창조물 하나하나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표현이 집약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 사업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하늘을 펴시고 땅의 기초를 세우시며, 모든 세계를 공간에 매다시고 들의 꽃들을 아름답게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손이었습니다. 땅을 아름다움으로 채우시고 공중을 노래로 채우신 하나님께서는, 땅과 공중과 하늘에 있는 모든 만물에 사랑의 기별을 기록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분의 탁월하신 솜씨와 영광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사랑의 법칙대로 서로를 위해 살았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나 땅 위에 기어 다니는 동물들이나 어떤 피조물도 다른 생물에게 봉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작은 나뭇잎이나 풀 잎사귀도 다 서로를 위해 봉사합니다. 수풀과 온갖 수목들은 사람이나 동물들에게 필요한 생명의 요소를 발산하며, 사람과 동물도 또한 수목들의 생명에 도움을 줍니다. 꽃들은 향기를 발산하고 그 아름다움을 펴서 세상에 복을 끼치며, 태양은 만물과 대지를 기쁘게 하려고 빛을 보냅니다. 모든 샘물의 근원이 되는 바다는 각처에서 흘러오는 물을 받지만, 그것은 주기 위하여 받는 것입니다. 또 바다의 표면에서 증발되어 올라가는 수증기와 비는 땅을 적시어 열매를 내고 싹을 틔웁니다.

모든 피조물이 사랑의 충성에 동의하고 하나님의 법을 인정하는 동안 하나님의 우주에는 완전한 조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창조주의 목적을 성취하며, 그들의 사랑과 봉사를 베푸는 일에서 기쁨을 찾았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고 그분을 찬미하는 것을 즐거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있는 동안에는 피조물 상호 간의 사랑도 믿을 만하였고 무아적이었습니다. 하늘의 조화를 파괴할 불협화음이 이 우주에는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망친 ‘죄’
그런데 이 행복한 상태에 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칙에 순응하던 이 우주에, 그분의 법칙에 반역하고 대항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 당신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로부터 사랑의 섬김과 교류를 원하셨는데, 그 섬김은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을 인식하므로 자원하여 생겨나는 사랑의 섬김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분은 강제적인 굴종을 기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모든 존재가 당신께 자원하여 섬기도록 그들에게 의지의 자유를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허락하셨던 자유의지를 악용한 자가 생겼습니다. 의지의 악용은 죄가 되었고, 죄는 하나님의 완전한 작품을 망쳐 놓았습니다. 죄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 다음가는 최고의 영광을 받았으며, 하늘 거민들 가운데 가장 높은 권세와 영광을 가졌던 자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아침의 아들” 루시퍼는 덮는 그룹들 가운데 으뜸이었으며 거룩하고 흠이 없는 천사였습니다. 그는 크신 창조주 가장 가까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둘러싼 영광의 끊임없는 빛 속에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사랑과 영예를 받던 루시퍼는 차츰차츰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욕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겔 28:17),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사 14:13, 14). 그의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에도, 이 힘센 천사는 그것을 자기 자신의 소유인 양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늘 무리 중에 최고의 영광을 누리면서도 그는 자기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감히 창조주만이 받으실 수 있는 존경을 탐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부여하신 영광을 탐내고 그리스도만이 가지신 대권을 갈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정부의 법이 부당하며 불공평한 것이라는 불평을 퍼뜨리며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완전하던 하늘의 조화는 파괴되었습니다. 하늘에 선과 악의 대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어쫓긴 루시퍼는 사탄이 되었고, 동조한 악한 천사들과 함께 이 땅 인간들의 마음에 죄악을 심어주고, 이 세상의 행복과 평화와 조화를 파괴하며, 하나님의 세계에 불행과 파멸을 가져오기 위해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과 악의 대쟁투는 지금 이 땅에서, 인간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 사랑의 호소에 회개하고 돌이키고 싶은 마음이 루시퍼에게 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만과 완고한 고집으로 그는 그 호소를 묵살해 버렸고, 하나님과 성령의 사랑의 호소에 마음 문을 닫은 그의 성품은 점점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적인 성품으로 굳어졌습니다. 온 우주와 이 세상에 파멸과 불행과 죄를 가져온 것은 루시퍼 성품의 타락 때문이었습니다.

 

이유 2. 다시는 죄의 반역을 일으키지 않을 성품을 가진 사람이 하늘에 가야 안전하다
하늘에는 더 이상 죄의 반역이 있으면 안 됩니다. 인류의 범죄와 타락으로 오랫동안 하나님께서는 고통과 슬픔을 당해 오셨습니다. 지구에 사는 인간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은 부조화와 불협화음으로 온 우주는 함께 신음해 왔습니다. 그동안 우주의 타락하지 않은 거민들과 천사들도 죄 때문에 빚어진 비참한 결과와 참상으로 고통을 당해 왔습니다. 죄의 무섭고 신비로운 힘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피조물, 만물의 영장인 사람을 어떻게 형편없이 망가뜨려 놓았는지, 그리고 또 그 타락하고 범죄한 인간들에 의해 세상이 얼마나 무섭게 파괴되고 파멸되었는지 그들은 생생하게 목격해 온 것입니다. 그래서 결코 범죄해 본 적이 없는 천사들과 우주의 거민들은 죄가 또다시 우주 세계에 들어오고, 또다시 죄악 고통의 역사가 시작될 까봐 두려워합니다.

성경의 예언서 요한계시록과 다니엘서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심판을 베풀 때에 그냥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책들을 펴고 심판을 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계 20:12, 단 7:10 참조). 심판 때에 펼쳐놓은 그 책이 무슨 책일까요? 그것은 성도들의 행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는 기록책입니다. 그 기록책을 열고 그 사람을 조사한 후에야 그 사람의 구원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곧,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아서 하늘에 가서 살아도 안전한 사람인지, 진정으로 회개하고 성품이 변한 사람인지,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므로 죄를 미워하고, 그리하여 그 악한 죄를 극복하고 승리하여 다시는 죄의 유혹에 쓰러지지 않을 성품을 가졌는지, 그래서 이 사람을 하늘에 데려와도 안전한지, 그 사람의 성품을 조사하는 심판을 거친 후에야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아 하늘에서 살 자들을 조사해서 가려내는 심판을 통과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루시퍼의 교만과 시기 질투 때문에 일어났던 죄의 반역이 우주에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다시는 죄를 일으키지 않을 안전한 성품을 가진 사람, 죄의 결과의 비참함과 고통을 잘 알기 때문에 죄를 너무 싫어하는 사람을 하늘은 기다립니다. 다시는 자유의지를 사용해 하나님을 반역하지 않을 사람, 그의 생애를 통해 그것이 증명된 사람만이 하늘에 가서 살기에 안전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을 또다시 위험하게 만들지 않을 온전히 변화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들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가기 위해서는 죄를 승리하고 변화된 성품이 필요하고, 그런 성품을 준비하는 일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유 3. 거룩한 하늘에 알맞은 적합성을 지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얻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온전한 품성을 준비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구속 받은 당신의 백성을 거룩한 사회에 소개하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거룩하고 순결한 사회에서 살기 위해서는, 천사들과 타락하지 않은 우주의 거민들과 함께 어울려 살기 위해서는 하늘에 알맞은 아름다운 성품이 필요합니다. 거룩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성품을 이룬 사람만이 하늘에서 살기에 적합한 사람입니다. 만일,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을 반역하는데 허비한, 구원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이 갑자기 하늘로 옮겨져, 그곳에 존재하는 고상하고 거룩하고 완전한 상태를 목격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하늘에 있는 모든 사람이 사랑으로 충만하고, 얼굴에서는 기쁜 빛이 흐르며, 서로 양보하고 봉사하고 섬기며, 모두 하나님과 어린양을 찬양하며 아름다운 곡조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본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리고 아무도 자기의 이기심을 발휘하거나 술수나 음모를 꾸미는 일을 하지 않고, 서로를 높여주고 존경하며, 보좌에 앉으신 분의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환한 빛 속에서 사는 광경을 목격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하나님과 진리와 성결에 대한 증오심으로 충만해 있는 자들이, 과연 하늘의 무리와 섞여 사는 것이 행복할까요? 그들이 아무 사심 없는 순결한 마음으로 찬양의 노래를 함께 부를 수 있을까요? 그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광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늘에 적합한 품성을 이룰 수 있는 은혜의 시기가 여러 해 동안 주어졌지만, 그러나 그들은 순결을 좋아하는 마음을 배양하지 않았고, 하늘에서 살 적합성을 배양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살아왔던 하나님을 반역해온 그들의 생애는 그들을 하늘에 적합하지 못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순결과 성결과 평화는 그들에게 괴로움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은 태우는 불이 될 것이며, 하늘은 불편한 곳이 되어, 그들은 그 거룩한 곳에서 피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을 구속하기 위하여 돌아가신 분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하여 차라리 멸망 받기를 원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아무나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 합하는 변화와 하늘에 맞는 적합성이 있어야 가는 것입니다.

죄인이 회개할 때에 그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의’를 “입혀주신 의(칭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회개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은혜를 통해서 의로운 생애를 살 수 있도록 거룩하게 만드는 ‘의’를 “나누어 주신 의(성화)”라고 합니다. 칭의는 우리가 하늘에 갈 수 있는 티켓, 곧 자격입니다. 그러나 성화는 우리가 하늘에서 생활할 수 있는 적합성입니다. 표를 가지고 하늘에는 들어갈 수는 있지만, 적합성이 없이는 하늘에서 적응해서 살기가 어렵습니다. 하늘에 적합한 품성이 준비되어야 하늘에서 어울려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은 괴로운 곳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권두언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늘에 적합한 성품을 구하자

현대 그리스도인은 흔히들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의지하면 되지 성품이 준비되어야 하늘에 가게 된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요. 하늘 갈 품성이 준비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실 몫이고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믿는 일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그러한 말이 굉장한  믿음의 이야기 같이 들리지만 그것은 가장 엉터리 믿음의 이야기라는 사실입니다. 이 모든 것이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부터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그저 지적인 동의가 아닙니다. 믿음은 살아있는 경험이요, 생활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놓고 굴복하는 나의 헌신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그대로 믿고 따르는 삶의 태도와 방향 그 자체이지요. 구원은 회복입니다. 죄의 기록만 지우는 일종의 거래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가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죄의 능력으로부터 해방되고 의의 종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원래 창조된 상태처럼 하나님의 영광에 다시 이르게 되기를 소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성품입니다. 그 일은 약속의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기만 하면 약속의 성령을 받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의 성품을 하늘에 적합한, 신뢰할만한 성품으로 변화시켜 주는 역할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지식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어렵다고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참 믿음을 가지고 하늘과 협력하기만 하면...

발행인 강병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