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독자편지: 하늘 친구에게

 

오랜만에 편지를 쓴다. 나에게 주시는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느끼는 대로 매일 이렇게 나누는 것도 좋을 텐데... 이렇게 가끔이라도 나누면 좋겠다. 너도 괜찮지? 어제는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서 바람이 정말 세차게 불었어. 그래서 마음대로 창문도 못 열고 지냈어.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 밖에 아무리 강하고 센 바람이 불어도 내가 창문을 열지 않으면 그 바람은 나에게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그러면서 내가 성령의 감동하심과 역사를 얼마나 열렬히 구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 생각났어. 내가 성령을 정말로 구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아직 그분께 열지 못한, 닫고 있는 마음은 무엇인가? 생각의 찌끼는 남아있는가? 하는 것 말이야. 나는 아직도 강한 바람을 맞기 위해서 창문을 여는 믿음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것을 원하긴 하지만 아직은 바람이 부는 것을 구경하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 말이지. 그래서 다시금 마음의 결심을 하게 되더라. 모든 시간 속에서 하늘을 향해 마음을 여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우리의 상태와 모습을 알려주시는 것 같아. 한동안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보느라 참 힘들었는데... 요즘에는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만 보고, 하늘만 보려고 노력하고 있어. 처음부터 나에게는 어떠한 희망도 사랑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거든... 이제는 그분께서 주시기 원하는 것을 받기 위해서 내게 주신 믿음을 활용할 거야. 내 속에서 그분의 일을 시작하셨음을 감사하고 그분의 역사가 정말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 나아가는 것이지.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어? 늘 바쁘고 피곤하지? ^^ 안 봐도 선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늘 그렇게 열심인 너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힘과 위로를 얻어~ 늘 주님 앞에 신실한 종으로 살아가는 네가 있어 지금의 내가 이곳에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었기에... 생각하면 기쁘고, 입가에 미소를 지을 수 있게 하는 네가 있어서 참 감사하고 행복하다. 요즘 나는 말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고 있어. 내가 부드럽지 못하고 좀 많이 무뚝뚝하잖니~ ㅎㅎ 그런데 말씀에서는 부드럽고 온유하라고 하고 예수님의 생애를 봤을 때도 부드럽고 온유한 음성으로 친절과 사랑을 나누셨더라고. 그래서 나의 언어가 나의 표현이 정말 부드럽고 온유했으면 좋겠어. 이것은 내가 종종 생각하는 글인데 “겸손은 우리의 언어를 그리스도와 같은 인자한 언어가 되도록 할 것이다.” 저번에 이 글을 읽고 좋아서 적어두고, 킹스메신저에 올린 적도 있는데... 내가 정말 그분 안에서 가장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더라. 그분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되면 좋겠다. 내가 원하고 또 구하니까 그렇게 나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겠지? 우리가 정말 그분의 언어로 살아간다면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이고 하늘의 위로와 평안을 전하는 기회와 특권을 우리가 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래서 감사하고... 하나님의 귀한 부르심에 함께 일하는 우리가 정말 완전한 순종과 굴복을 통해서 그분께서 쓰시기에 편한 그릇들이 되도록 하자. 주님께서 주시는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하도록 하자. 너는 지금처럼 하면 될 것이고~ 나는 더 분발하도록 하마! ^^

이제 날씨가 시원해져서 활동하기도 좋고, 주님과 동행하기에도 더 좋은 계절인 거 같아. 더 추워지기 전에 열심히 운동도 해야겠다. 너도 산책 열심히 잘 다니고~ 건강 잘 챙겨라~ 알겠지?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셔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게 하신 은혜에 감사드린다. 친구야~ 이제 곧 보겠네~ 잘 지내다가 만나자. 안녕! 사랑해~^^

구리에서 혜경이가.

라이프토크: 도파민과 우리의 성품

 

사람이 살면서 느끼게 되는 행복감과 슬픔, 즐거움과 우울함, 상쾌함, 피곤함, 만족감, 쾌감 등은 모두 우리 몸의 호르몬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들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의 감정과 기분을 조절하는 이러한 호르몬들은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반응하며, 우리의 생각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호흡하느냐에 좌우된다.
쉬운 예로 온종일 힘들게 일한 후 저녁이 되면 멜라토닌이 분비되어 피곤함을 느끼고 졸리게 해준다. 시원한 나무그늘에 앉아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멀리 펼쳐진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볼 때면 엔돌핀이란 호르몬이 나와 아픔과 걱정을 잊게 해주고 피로를 못 느끼게 해준다. 혹은 누군가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의분이 생기면서 아드레날린 호르몬이 나와 주먹을 불끈 쥐게 해주고 갑자기 달려가서 한 방 때려 주고 싶은 힘과 담력을 느낀다. 서로 마음이 통하고 이해하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손을 잡고 걸을 때면 도파민이 나와 즐거움과 행복감을 느끼게 해준다.

도파민이란?
도파민(Dopamine 신경호르몬)은 뇌에서 만들어지는 신경전달물질로 잘 알려졌으며 사람의 기분과 감정을 조절하는 대표적인 호르몬으로 불린다. 도파민은 인간의 욕망이나 정신적 이해력과 창의성 그리고 어떤 일을 할 때의 동기부여와 결단력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사람의 성품 형성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다. 도파민이 과다히 분비되면 정신 분열증이 생길 수 있으며, 도파민의 분비가 적어도 우울증과 수면 장애가 올 수 있고 운동장애를 가져올 수도 있다.

도파민의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한번 하고 되풀이된 일들을 다음에는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즉 마약처럼 어떤 쾌감을 주는 일을 계속 반복하면 도파민 호르몬에 의해 쾌감을 느끼게 해주는 신경조직들이 비대해져서 점점 더 많은 자극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도파민은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에 포만감과 만족감을 주며 맛을 통해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는데 음식을 오래 씹어 먹을수록 도파민 분비가 많이 되어 과식이나 폭식을 막아준다고 한다.

도파민이 미치는 영향
도파민은 두뇌의 여러 곳에 퍼져 있는 신경세포들에 정보들을 전달하여 사람의 기분과 감정과 정신에 영향을 준다. 그럼 도파민이 전달되어 영향을 주는 두뇌의 4가지 부위에 대해 알아보자.
첫째는 뇌의 시상하부로 전달된다. 시상하부는 콩 하나의 크기 정도로 작지만, 교감신경과 부교감 신경, 내분비 기능을 조절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도파민은 식욕과 수면, 정신을 깨어 있게 하고 몸의 체온과 평형을 조절하는 것 등에 영향을 준다.
둘째는 변연계로 전달된다. 본능의 자리라고도 불리는 대뇌 변연계는 동물적인 욕망과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도파민의 신경물질이 이곳에 전달되면 분노와 공포를 느끼게도 하며 기억력에도 영향을 준다.
셋째는 선조체(Striatum) 부위로 전달된다. 선조체는 몸의 운동을 조절하는 기능을 하는 곳으로서 도파민 수용기능이 파괴되면 제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말도 잘 못하게 되며 몸이 떨리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넷째는 대뇌피질로 전달되며 특별히 앞이마 부분인 전두엽 쪽에 전달된다. 도파민은 창의성과 지식, 분별력, 사고와 언행을 조절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도파민과 성품 형성
이처럼 도파민은 사람의 몸에는 물론 사람의 정신과 감정 그리고 판단력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매우 중요한 호르몬이다. 어느 심리학자는 도파민을 가리켜 “인간 자체”라고까지 부르기도 하였다.
그럼 이 중요한 도파민은 언제 가장 잘 분비될까?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있음을 느낄 때이다. 나를 이해해주고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고 있음을 느낄 때에 가장 큰 행복감이 다가온다. 또한, 새롭고 신기한 것들을 발견하거나 느낄 때에도 도파민의 수치가 올라간다고 한다. 힘들게 어렵고 복잡한 일을 이루어 냈을 때의 기쁨, 누군가에게 내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신뢰했을 때 오는 평안 등이 도파민 분비를 도와준다. 반면 인위적인 방법으로 행복과 즐거움을 찾거나 정욕적인 쾌락에 방종하면 도파민이 비정상적으로 분비될 수 있다. 도파민은 하나님께서 주신 천연의 활력제요 각성제이다. 적당한 도파민의 분비는 우리 삶을 즐겁고 활기차고 행복하며 매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게 되게 하고, 기쁨과 만족이 넘치는 삶으로 바꿔줄 것이다.
우리의 오감은 생각과 감정의 자료를 대주고, 생각과 감정은 말과 행동과 느낌을 만들고 그것이 반복되어 습관이 되고 우리의 성품이 된다. 그러므로 올바른 생각을 하고 올바른 감정을 갖는 것은 우리의 성품 형성에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올바른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은 도파민의 적절한 분비에 달려있다.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늘 하나님 안에 머물게 하자.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우울하고 피곤한 삶이 아니라 기쁨과 활력이 넘치는 즐거운 삶이 되게 하자.
그러므로 성경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고 권유하고 있다.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고후 13:11).

 

사랑의 편지: 안이 밖이듯, 밖이 안이듯

 

안이 밖이듯, 밖이 안이듯

 

                                                                     강영은 

그 성의 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 21:11).

 

하늘 예루살렘 성을 상상하다가 멈칫 놀란 적이 있습니다.

성의 아름다움에 반해서이기도 했지만,

성을 받치고 있는 열두 보석의 찬란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큰 진주 하나로 성문이 만들어졌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비늘 같이 마음을 찌른 생각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 성의 벽이 안이 다 들여다보이는 맑은 수정, 크리스털보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깊이 숨길 것도

애써 가릴 것도 없는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다 보여도 부끄럽지 않을 생각,

다 드러내어도 순수하기만 한 생각을 가진 사람만이

그렇게 다 들여다보이는 성에서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맑은 유리 같은 정금 길이 길게 뻗어있는 그 성

투명한 수정 벽으로 둘러싸인 그 성에서도 편히 지낼 수 있는,

숨긴 것, 숨길 것 없는 깨끗한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안이 밖이듯, 밖이 안이듯 살고 싶습니다.

헤집고 들여다보고 또 보아도

자만과 욕심과 허영의 그림자 하나조차 비쳐나지 않는

깊고 해맑은 호수 같은 마음으로...

비집고 헤쳐봐도

약삭빠른 잔 꾀 하나 남아 있지 않은

구름 개인 맑은 하늘 같은 생각으로...

 

 

안과 밖이 똑같이 맑고 깨끗한 사람은 주님의 성산에서 살 것입니다.

해함도 상함도 없는 주의 성에서...

남을 해하지도 않으면서, 나를 상하지도 않으면서...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 65:25).

 

해함이 없다는 것은

마음으로라도 남을 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을 원망하지도

남을 시샘하지도

남을 부러워하지도

남을 쓸데없이 부추기지도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보혈로 씻기어 지워지고 깨끗하게 비인,

감사와 사랑 밖에 남은 것이 없는 고요한 마음만이

남을 해하지 않습니다.

 

상함이 없다는 것은

생각으로라도 나를 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나친 억측으로 스스로를 벌하지도

지나친 예민함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도

지나친 자존심으로 스스로 상처받지도

나를 쓸데없이 작게 만들지도 또 크게 띄우지도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다만 시끄럽게 지나치는 소용돌이 물살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것 때문에 매끄럽게 깎인다는 것을 아는 조약돌처럼

초연한 지혜의 생각만이 나를 상하지 않습니다.

 

 

안이 밖이듯, 밖이 안이듯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모든 것은 내 마음 안에 있으므로, 그리고 내 생각 안에 있으므로,

모든 것에서 해방된 마음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진 생각으로 그렇게...

마음이 깨끗하고

생각이 깨끗하고

손이 깨끗한 사람만이 주의 거룩한 산에 오를 것이기에.

 

 

안이 밖이듯, 밖이 안이듯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다 들어내 보여도 그냥 그 마음이 그 마음인 순수함으로,

다 들추어 보여도 그냥 그 생각이 그 생각인 깨끗함으로

다 들여다 보이는 수정으로 된 예루살렘 성에 살아도

결코 부끄럽지 않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신앙 5부: 두 여자와 하늘 예루살렘

 

바울은 두 언약, 곧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설명하기 위해 두 여자를 비교하면서 특이한 설정을 하고 있습니다. 곧 두 여자와 더불어 시내 산의 예루살렘과 위에 있는 하늘 예루살렘을 비교하며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비유들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 의미를 연구해 보면 그 속에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인 “믿음의 의”와 복음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1) 여종 하갈 – 종을 낳은 자5: 두 여자와 하늘 예루살렘
갈라디아 4장에서 바울은 두 언약을 언급하면서 이것을 두 여자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24~26절: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여기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여종 하갈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갈에 대하여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더 나아가 이 하갈은 “시내 산에 있는” 이 땅의 예루살렘과 같으며,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하는 자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무슨 뜻이며 무슨 비유일까요?

종은 종을 낳을 뿐입니다. 종이 낳은 자녀는 종이 됩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행위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려고 하갈을 아내로 삼아 아들을 낳은 사실을, 인간이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하고, 자신의 의로 구원을 이루려는 것은 행위 위주의 율법주의이며, 그것이 곧 행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려는 율법주의적인 종교는, 그 속에 사랑도, 그리스도도 없으므로 사람을 결코 예수 그리스도와 영생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정신에 의해 행해지는 금식이나 기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입니다. 예배와 집회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신앙의 척도를 재고, 형식적인 종교의식을 반복하거나 외형적인 겸손만을 나타내며, 남의 이목을 의식하고 시선을 끌기 위한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하는 일들은 아무 가치가 없는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시도이며, 이런 일들을 행하므로 자신을 의롭고 신앙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교만한 마음은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힘씁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로는 결코 구원을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이 범한 거룩하고 공의로운 율법의 요구에 응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일지라도 그것은 전혀 무가치한 것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자기 자신의 행위로 천국에 이르려고 노력하는 자는 온전히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바로 율법 아래 있는 자, 죄의 종이 된 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육체를 따라 난 자와 같은 맥락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2) 땅에 있는 예루살렘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바울이 언급한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라는 표현 역시 인간의 힘으로 율법을 이루려는 시도를 가리킵니다. 옛날 시내 산이나 땅 위에 있던 예루살렘은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로 율법을 이루려는 옛 언약의 경험과 같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와 히브리서에서, 옛 언약은 행위에 근거가 되어 있지만 새 언약은 믿음 위에 근거 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이를 얻으려고 하갈을 잘못 사용한 것처럼, 이스라엘은 도덕적 지시들과 의식적 지시들을 왜곡시켰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과 그들의 죄를 구속하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위해 세워졌음에도, 그들은 이 의식들을 단순한 행함의 제도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그리하여 옛것을 옛 언약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그 언약을 행함의 제도로 왜곡시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행함의 옛 언약을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과 같은 근본적 언약을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행함의 제도가 된 것은, 이스라엘이 이것을 왜곡시킨 때문이었습니다.

시내에서의 과오는 백성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과 관계를 유지하는 일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다음에 언약은 성소 모형들로서 공식화되었는데, 그것은 때가 이르면(원형이신 예수께서 오시면) 끝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옛 언약의 정신과 경험에 머물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율법주의에 빠지지 말라고 경계하면서, 바울은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 4:30)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지은 땅 위의 예루살렘은 행함으로 말미암아 얻으려는 의와 구원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옛 언약의 경험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범했던 잘못에 빠지지 않기 위해, 즉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계명을 자연스럽게 지키게 되는 새 언약의 경험에 들어가기 위해 옛날의 잘못된 신앙 경험들을 버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에 의해서만 인간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위에 있는 예루살렘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왜 바울은 새 언약을 설명하면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과 자유자 어머니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
이유 1. 하늘 예루살렘 = 믿음으로 얻는 의 = 하나님의 의
바울은, 사람들이 곧 멸망할 인간의 손으로 지어진 이 땅의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하늘에 있는 더 좋은 예루살렘을 바라보게 하려고, 그리고 행위의 상징이 되어 오던 폐해진 의문의 율법과 의식들에서 시선을 돌려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어진 더 좋은 하늘 예루살렘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위에 있는 하늘 예루살렘은 인간의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하나님의 손으로 다 지어진 것입니다. 의를 이루는 일에 있어서나 구원을 이루는 일에서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인간의 힘과 노력을 다한다 해도 인간의 공로는 구원을 얻는 데에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능력을 받아야 구원은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의를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을 하늘 예루살렘에 비유한 것은, 인간의 힘으로 이루기에는 불가능한 것, 즉 없는 것을 창조하고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아니면 새 언약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이 사용한 것입니다.

이유 2. 생각과 마음에 계명이 쓰여지는 것은 하늘의 능력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 계명이 쓰이는 일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전혀 불가능한 것입니다. 거듭남이란 옛것을 변경하고 개량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자신과 죄에 대하여는 죽고 전적으로 새로운 생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성령의 효과적인 역사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으며,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전에 좋아하고 사랑하고 즐기던 것이 싫어지는 변화가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겠습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그분께서는 당신의 의와 아름다운 의의 성품을 나누어주십니다. 성품을 완전케 하는 위대한 사업은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결코 성취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성품을 향상하고 개발하는 일에 있어서 인간은 높은 곳으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을 계속 공급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에는 그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 수 있는 능력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성품을 변화시키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주님께 나아가 회개하고 간절히 원하기만 하면,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당신의 법을 기록해 주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일치하게 되기를 갈망하는 그 순간에 바로 주님께서는 그분의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그 형상을 새기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완전케 하시는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그 일을 그분은 마치실 것입니다.

이유 3.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것처럼
성도들이 구원을 얻었을 때에 하늘에서 예루살렘이 내려와 성도들이 그곳에서 사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구원을 이룬다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 바울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 또한 하늘에서 내려오는 역사가 없이는, 곧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결코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새 언약의 약속은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와 가능케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한 것입니다.

 

4) 자유자, 어머니
바울은 또 새 언약을 언급하면서 “자유자 어머니”라는 표현을 씁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낳고 양육하는 임무를 띠고 있습니다. 그것처럼 성령께서도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고 또 의로 양육시키십니다. 특별히 여기서 자유자란 표현을 한 이유는, 새 언약이 이루어진 사람은 율법에 매이지 않는 자유, 율법 아래 있는 속박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율법이 폐했다고 계명을 지키지 않고 마음대로 사는 방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지 않았을 때 늘 부담이 되고 무거운 의무로 느껴지던 계명을 지키는 일이, 자유 속에서 자연스럽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애 속에 체험하는 것을 말하며, 예수님의 사랑 속에서 죄의 무거운 짐이 벗겨지고 죄의 권세를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의 생애에는 하나님의 법인 십계명을 온전히 기쁨으로 지키는 역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마치면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주님과 새 언약을 맺을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마음과 생각 속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주고 기록해 주시기 위해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찾고 계십니다. 거듭난 사람의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새 언약의 경험, 당신은 이 새 언약의 경험을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계명이 폐했으므로 지킬 필요가 없다는 잘못된 가르침과 거짓 평안 속에서 방황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의 경험에 들어간 사람, 그래서 생각 속에 하나님의 법이 있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성품을 그대로 반영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 사람들이 준비되면 하나님을 닮은 그 사람들을 데리러 이 땅에 강림하실 것입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4:12).

하나님의 성품을 이루는 새 언약의 경험을 다 하시는 독자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신앙 4부: 두 가지 언약에 내포된 더 깊은 의미를 아십니까?

 

많은 그리스도인이 기독교에 들어온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두 언약에 대한 그릇된 사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속에 들어있는 심오한 영적 교훈과 반드시 배워야 할 공과를 놓치고 있습니다. 두 가지 언약에는 매우 깊은 뜻이 들어 있는데, 그것은 단지 계명과만 연관된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두 가지 언약에 내포된 깊은 의미를 함께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갈라디아 4장에 등장하는 두 언약
갈라디아서 4장에는 사도바울이 두 언약에 대해서 심도 있게 설명한 기록이 나옵니다. 먼저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두 언약에 대해 설명하게 된 배경을 연구해보면, 이 두 언약이 단지 계명이 폐했다거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피상적인 논란의 화두로 사용되기에는 너무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바울이 두 언약을 설명하게 된 배경은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유대인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바로잡기 위해서였습니다. 율법주의를 고수하고 있던 유대의 거짓 교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도 의문의 율법을 지켜야 하며 의식들과 또 할례를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잘못된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시켜서 갈라디아 교회에 혼란을 주고 있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반박하기 위하여 바울이 설명한 두 언약은, 믿음으로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 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믿음의 의”에 대하여, 그리고 그 속에 내포된 복음의 진수에 대하여 명확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사실은, 바울이 두 언약에 대하여 설명할 때에, 아브라함의 “두 아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그 아들의 탄생을 예를 들어 비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설명 속에는 “두 여자”와 “두 예루살렘”도 등장합니다. 이 의미들에 대해서 함께 공부해 보기로 합니다.

* 갈라디아 4장 22~26절
22~23절: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26절: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 두 언약에 나타난 “믿음의 의”
먼저, 바울은 왜 두 언약을 설명하는데 아브라함의 두 아들과 그 탄생 배경과 방법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만국의 아비”라는 그의 이름의 뜻이 무색하게도 100살이 넘도록 그에게는 자식이 생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아브라함은 늙었고, 사라도 생산할 능력이 없어진 늙은 여인으로 변했습니다. 그들의 몸은 생산과는 거리가 먼,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늙은 몸이 되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으나 세월이 점점 흐르고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이루어지자, 초조감과 믿음의 부족으로 그들은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로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사라의 종 하갈을 통해 아들 이스마엘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방법으로 얻은 아들 이스마엘이 아닌, 사라의 몸에서 친히 난 아들이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창 17:15,16).

성경을 보면, 처음에 아들을 낳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은 아브라함과 사라, 두 사람 모두 웃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불가능한 것에서 가능한 것을 행하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와 사자들이 떠난 다음에 그 말씀을 곰곰이 되새겨 보고는, 아브라함과 사라 두 사람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들의 불신을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굴복하고 그 약속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죽은 것 같은 태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이가 잉태되고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난 것입니다.

바울이 두 아들을 언급한 이유는, 이삭의 탄생을 통하여 “믿음의 의”에 관한 복음의 진수를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행위가 아닌 믿음을 통해서라는 복음을 가르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기독교 안에서 믿음의 올바른 정의가 많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머리로만 동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머리로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것을 이루어내는 기적이 생기게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불가능한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는 것, 곧 기적을 믿는 것입니다. 늙은 태에서 기적이 일어나 이삭이 태어난 것처럼, 우리 스스로는 어떤 선도 행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면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이 이루어집니다. 곧 의로운 마음과 동기를 가지게 되고, 의롭게 살 수 있게 되고, 의롭게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의로운 영적 생명을 낳는 일, 곧 우리가 의로운 행실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그 일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세상을 창조하셨던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며, 또한 거짓말하실 수 없고 미쁘사 약속하신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바울이 말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는 의미입니다.

 

3) 두 아들의 탄생에 나타난 차이점
22~23절: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구원의 역사를 아들이 나는 탄생의 차이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탄생의 차이는 아들의 신분과 격의 차이를 결정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는 자유 없이 매이고 속박된 상태의 노예인 계집종에게서 태어났고, 하나는 자유를 가진 주인 여자에게서 났는데, 어떻게 누구에게서 나왔는가 하는 것이 그들의 신분의 품격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종이 낳은 아들은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유한 여자에게서 태어난 아들은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 육체를 따라 난 자
여기서 육체를 따라 났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행위와 노력과 힘으로 의를 이루고 구원을 얻으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힘으로 노력으로는 절대 율법을 지킬 수가 없으며,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율법으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자는 죄의 종이 될 수밖에 없다고 언급된 로마서의 기록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롬 6: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또한, 그런 상태를 바울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롬 3:19 참조).

육체에 거하는 자, 곧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의 근본인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이룰 수가 없으며 하나님의 법의 정신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의로운 생애를 살기를 원하지 않으며 또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계명은 다만 무거운 짐이 될 뿐이며, 마음의 근본이 죄의 종이라서 죄의 세력 아래서 죄의 권세에 질질 끌려다닐 뿐입니다. 그것이 육체를 따라 난 것이고, 죄의 종이며, 또 율법 아래 있는 상태이며, 인간의 행위로 의를 이루고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2. 약속으로 말미암아 난 자
그렇다면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약속으로 말미암아 났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는 것과 그분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롬 4:18~22).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약속하시면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그것을 이루실 수 있는 능력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거듭난 사람 속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어떤 약속입니까?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 8:10).
이것이 무슨 약속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과 새 언약을 맺으십니다. 인간의 힘으로 율법을 지키려던, 인간의 힘으로 의를 이루려던 옛 언약의 정신을 물리치시고, 새 언약, 곧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약속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언약에 들어있는 약속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돌비가 아닌 사람의 생각과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시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함께 살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그분과 같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함이란 외양적인 경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과 마음과 애정과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새 언약에 들어 있는 약속에서, “생각 속에 하나님의 법을 두고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회개하고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과 그분의 법을 너무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너무 즐거워하게 되어, 머릿속에 온통 그분의 계명과 뜻이 가득 채워지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생각하고 살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마치 예수께서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7)라고 고백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기쁨이 됩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계명이 기록됩니다. 마음의 의도와 동기와 방향이 완전히 바뀌어, 이제는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고 살 수 있는 넉넉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나타난 그분의 사랑의 성품이 생애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과 구속이 너무 감사하며, 죄와 악이 너무 싫고 죄악의 참상과 결과가 너무 혐오스러우며, 또 자신 속에 들어 있는 악의 작은 모양이라도 견딜 수 없어서, 죄를 버리고 매일 깊은 회개의 경험을 하며,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버린 상태가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된다는 의미입니다.

 

신앙 3부: 새 언약이 더 좋은 언약입니까?

 

성경에는 새 언약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상한 표현을 쓰고 있는데, 그것은 새 언약을 “더 좋은 언약”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정말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더 좋은 언약일까요? 새 언약에 더 좋은 조건과 축복의 약속이 들어 있을까요?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찌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히 8:6~9).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정말 옛 언약은 흠이 있는 언약이었습니까? 그래서 폐해져야 하는 것이었을까요?

 

1) 새 언약이 더 좋은 이유
모세가 돌비에 새긴 십계명을 가지고 산에서 내려가기도 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약속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즉,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인간 쪽에서 깨뜨린 것입니다. 이것이 옛 언약의 결함이었습니다. 문제는 언약을 맹세한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에 있었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의 내용이나 지키라고 주신 십계명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저희를 허물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히 8:8). 또한, 9절에는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을 보면, 분명 상호 간의 언약을 깨뜨린 장본인은 이스라엘 백성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그 언약이 무흠하지 않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옛 언약은 백성에게 속박만을 가져왔다고 느끼게 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거듭나지 않았을뿐더러, 자신들의 죄 됨에 대해 전혀 깨닫지도 못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랬으며, 그러므로 그들은 그 언약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조건과 내용과 본질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서 볼 때, 우리는 두 번째 언약 즉, 새 언약을 다시 맺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새 언약을 더 좋은 약속이라고 표현했을까요? 그 이유는, 언약의 창안자이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언약을 맺는 상대방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 8:10). 하나님께서 인간이 하나님의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음을 잘 아시고, 성령을 통해 당신의 계명을 우리의 마음에 기록하셔서, 우리를 계명을 지킬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켜 주시겠다는 놀라운 약속이 새 언약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바울은 새 언약이 더 좋은 언약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2) 새 언약의 인준
이제, 새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인준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옛 언약과 똑같은 방법인 피를 흘림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수소가 피를 흘리는 대신에 하나님 아들의 피가 흘려졌습니다. “양의 큰 목자 되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히13:20). “우리가 준행하리다”라는 능력 없는 인간의 빈약한 약속 대신에, 이제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우리 속에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와 그분의 능력이 모든 그리스도인 앞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그분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이 새로운 언약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짐승의 피로 인준된 것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자신들의 힘으로 지키겠다고 공언한 이스라엘 백성의 의지에 근거하여 이루어졌습니다(출 24:5~8, 히 9:19~20). 그러나 새 언약은 우리의 마음에 당신의 계명을 기록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위에 기초해 있는데, “더 좋은 약속”, 즉 죄 용서의 약속과 마음을 새롭게 하여 마음을 하나님 계명의 원칙과 일치하게 하는 하나님 은혜의 약속 위에 세워졌습니다. 새 언약의 약속을 보면, 돌판에 새겨진 같은 율법이 성령에 의하여 마음 판에 기록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세우는 대신,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지나가야 할 것은, 언약의 본질과 내용은 같으므로, 새 언약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의 구속 역사를 믿는 믿음으로 희생제물을 드리던 아브라함의 시대에도 유효하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약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로 확증되었는데,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히 6:18) 때문입니다. 그러나 같은 언약이지만 그리스도께서 비준하신 때로부터 그것은 새 언약으로 불렸습니다. 새 언약 역시 하나님의 계명이 기초가 되고 있으며, 그것은 사람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수 있는 위치에 처하게 하는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3) 옛 언약과 계명이 함께 폐했는가?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므로 계명이 폐했기 때문에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곧 옛 언약인 계명이 폐했고 은혜의 시대인 새 언약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폐해진 것은 계명이 아니고 다른 것이었습니다.

1. 옛 언약은 계명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잘못 가지고 있는 생각이 있는데, 그것은 언약이 계명이라는 개념입니다. 언약은 십계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대하여 세워진 상호 간의 약속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계명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도덕률이지, 상호 간에 맺어진 약속이 아닙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이 언약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옛 언약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맹세한 약속을 말하는 것이지 십계명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법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약속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답례로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였던 것입니다.

2. 십자가에서 폐해진 것은 무엇?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5). 십자가에서 폐해진 것은 의문의 율법이지 십계명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로 폐해진 의문의 율법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하자 그들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구원의 계획을 발표하시고(창 3:15),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제사 제도를 주셔서 그것을 통하여 그들이 믿음을 표현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 때부터 시작된 동물의 희생제도는 그의 후손들에 의해서 크게 곡해되었는데, 주변의 이방인들로부터 받아들인 미신, 우상 숭배, 방탕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지시하셨던 단순하고도 의미심장한 희생제도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제사제도는 물론,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살아야 할 모든 생활방식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노예로만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계몽되고 교육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소 제도와 성소에서 유지되어야 할 예배 형식에 대한 완전한 지시를 다시 주시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식 율법을 책에 기록하였습니다. 이 희생제도에 관한 의식 율법을 신약 성경에서는 “의문의 율법”(ceremonial law)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십자가에서 폐지된 율법은 바로 이 의식 율법을 뜻합니다. 또한, 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생활 전반에 걸쳐서 지켜야 할 규례들을 모세로 지시하게 하셨는데, 이 규례들은 특별한 성일, 유월절 같은 종교적 절기들, 그리고 절기와 안식일이 겹쳐지는 연례적인 절기 안식일들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매년 절기들은 경배드리는 일에 사용되었으며, 또한 특정 일자에 개최되었기 때문에, 의식적인 안식일들은 현대의 크리스마스 날처럼 주일 중 아무 날에나 떨어졌습니다.

이런 의문의 율법들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가리키는 표상들이었으며, 다가오는 사건을 가리켜 주는 모형과 그림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의문의 율법들과 모형들은 표상의 원형이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자, 그분 안에서 다 성취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을 때 모형은 원형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의문의 규례들은 잠시 동안 주어졌다가 십자가에서 폐지된 것임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의문의 율법은 일시적이며, 십자가에서 모형들이 성취될 때까지만 역할을 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의문의 율법이 주어진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음의 진리들을 가르치고, 오시는 메시아를 가리키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실제로 오심으로써 표상적 의식들은 존재해야 할 목적을 상실하게 되었으므로 의문의 율법이 십자가와 함께 폐한 것입니다.

3. 십계명은 폐하지 않았다
앞에서 공부했듯이, 십자가에서 폐한 것은 십계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두 돌판에 친히 기록하신 십계명은 성소의 두 번째 칸인 지성소 안의 법궤 안에 거룩하게 보관되었습니다. 이 십계명은 하나님의 도덕적 품성과 그분의 뜻이 기록되어 있는 도덕률(moral law)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모든 의무가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법은 결코 폐하거나 변할 수 없습니다. 십계명의 율법에 대해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다고 기록하였고(시 119:89), 예수께서는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고 가능한 한 크게 강조하여 주장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천지가 존속하는 한 이 십계명은 보존되리라는 사실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그분의 보좌처럼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의문의 율법을 종식했지만, 도덕적 율법인 십계명에 대한 인간의 의무는 조금도 감소시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류에게 내려진 변할 수 없는 십계명의 의무와 율법의 정죄를 속하기 위해서, 하늘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셔야만 했다는 사실은 율법의 요구와 그 권위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새 언약 하에서 믿음과 율법 사이의 관계를 이렇게 분명히 나타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3:31).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연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으므로 율법이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4).

 

신앙 2부: 성경에 나오는 언약의 본질을 아십니까?

 

많은 그리스도인이 언약과 연관 지어 떠올리는 것은 계명입니다. 그리고 옛 언약과 새 언약 두 가지 언약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춘 채, 지금은 신약 시대이기 때문에 옛 언약은 폐하고 새 언약 시대 은혜의 시대가 되었고, 그러므로 계명이 폐했으므로 지금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시대라는 매우 피상적인 생각에만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언약의 본질을 알고 보면, 그보다 더 깊고 심오한 의미와 진리가 들어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제일 처음 맺어진 은혜의 언약
앞서 언급했듯이, 최초 은혜의 언약은 에덴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어졌습니다. 그 약속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 후에,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겠다는 구원의 계획을 발표하심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이 언약은 모든 사람에게 용서와 인간의 죄를 속하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약속은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대한 순종과 충성을 조건으로 그들에게 영생이 약속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곧 인간을 사탄과 죄에 대해서 적의를 갖는 관계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 죄를 미워할 뿐 아니라 죄를 이기도록 해 주시겠다는 약속도 포함된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이 약속을 믿을 때에, 이 약속에 포함된 옛 뱀 마귀와 원수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2)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분리?
최초로 발표된 은혜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모든 후손, 곧 모든 인간은 구원의 소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언약은 특별히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 (창 22:18)라는 약속 가운데 되풀이되었습니다. 그런데 곧 이 약속은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비록 이 언약이 아담과 맺어지고 아브라함에게 되풀이되었지만, 그 언약은 그리스도의 돌아가심까지는 비준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언약의 중심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속에 대한 첫 통고가 주어졌던 때로부터 그 언약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존재했고, 시대 시대마다 그 언약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 믿음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본질과 약속의 내용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폐할 수 없는 영원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현대 기독교인들이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그렇게 분리해 놓고, 정작 언약 속에서 발견하고 깨달아야 할 진리의 진수들을 간과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기독교 안에 들어온 오류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분리해서 두 가지 언약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내포된 매우 중요한 내용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3) 옛 언약, 그리고 옛 언약을 세우게 된 이유
성경에 “옛” 언약이라 불리는, 표면적으로 다른 약속처럼 보이는 언약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체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율법을 주시기 전에 먼저 모세를 산 위로 부르셔서 하나님 자신과 백성 사이에 맺을 언약을 제안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너희가 내 말을 받들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19:3~6).
이 말씀 가운데는 언약의 요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언약은 맺어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제안에 대해서 그들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 (출 19:7~8).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다 행하리이다”라는 대답이 하나님께 올려지는 순간, 옛 언약의 기초가 놓였습니다. 그러나 그 언약이 공식적인 시행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그 약속을 봉인하는 절차가 있어야 했습니다. 언약을 인준하는 의식은 백성 위에 수소의 피를 뿌림으로써 거행되었습니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출 24:8).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언약에 구원의 약속과 모든 것이 다 포함되었다면, 왜 시내에서 다른 언약을 세우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의 원칙을 대부분 다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때에,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도록 그분의 능력과 자비를 그들에게 나타내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무력함과 하나님의 도우심의 필요를 깨닫게 하려고 그들을 홍해, 곧 애굽의 추격을 받았을 때 도망할 길이 없어 보이는 홍해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위하여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 그리고 그분의 능력에 대한 신뢰로 채워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 새겨져야 할 더 큰 진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와 부패 가운데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나 그들의 마음과 생활에 가득 찬 죄악,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기에 전혀 불가능한 그들의 무능함, 구세주의 필요 등에 대하여 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이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시내 광야로 인도하셔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고, 그들에게 순종을 조건으로 큰 축복을 약속하시면서 당신의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과 규례에 대하여 새로 배우고, 그 법규들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선민이 되기 위한 교육을 다시 철저하게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마음의 죄악과 그리스도 없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선뜻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자신들의 의를 세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그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24:7)라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엄청난 위엄 중에 율법이 선포되는 것을 목격하고 산 앞에서 무서워 떨었습니다. 그러고도 불과 몇 주일이 지나지 않아서, 그들이 하나님과 세운 언약을 깨뜨리고 새긴 우상에게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약속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빠른 시기에 그들이 벌써 깨어버린 언약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바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제야 자신들의 죄악과 용서의 필요를 깨닫게 되었고, 그들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나타나 있고 희생 제물로 예표된 구주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과 사랑으로, 그들을 죄의 속박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매어 달리게 되었습니다. 옛 언약의 체결 과정에서 결정적인 잘못은, 약속하는 백성 편에서 보인 태도와 그들의 마음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구하는 대신에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에 포함된 약속이나 축복이나 조건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내용과 똑같은 것이었지만, 그 언약을 받는 인간의 편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 1부: 왜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셨을까요?

 

언약은 약속입니다. 그러나 언약과 약속의 의미는 서로 조금 다릅니다. 사전을 보면 언약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 언약: “말로 약속함. 또는 그런 약속”
백과사전에는 언약이란 말이 “계약”이라는 단어로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계약: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약속. 히브리어인 ‘베리스’에서 온 말로 “속박”이라는 뜻이다. 원래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 사이에 약속이 이루어지면, 짐승을 둘로 쪼개어 나누어 가지는 유대 민족의 풍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신 약속을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1)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언약
언약이란 말은 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언약이란 단어가 제일 처음 등장하는 장은 창세기 9장 11~15절입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이 최초로 등장하는 언약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멸하지 않고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마음과 신념이 약속으로 들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지어 타락한 인간을 사랑하셔서,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하시고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언약에 나타나 있다는 말입니다.

 

2)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는가?
하나님의 언약 속에 나타나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의지는, 저 유명한 약속의 원조가 되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 언약을 한번 살펴봅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8).
이 언약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와 네 후손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일방적으로 약속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언약을 맺으셨을까요?

1. 관계를 맺어 구원하시려고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관계가 깨어져 버렸습니다. 죄가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낸 것입니다(사 59:2). 하나님께서는 죄지은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다시 인간과 관계를 맺는 것이 필요하셨습니다. 즉 죄를 해결하시고, 인간을 회복시키셔서 다시 인간과 함께 거하시고 관계를 맺으며, 인간을 친히 지도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어떻게 해결하시고 회복시키셔서 인간을 다시 잃어버렸던 본향 에덴으로 데려가실 것에 대한 구속의 계획과 경륜은 일찍이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되었습니다. 그 구원의 계획 선포는 창세기 3장 1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와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한 장본인 옛 뱀 마귀에게 이렇게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속에는 놀라운 약속과 언약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죄를 지어 이제는 하나님을 순종하기보다 사탄을 순종하기 더 쉽게 되어버린 인간에게, 죄에 대한 적의를 갖게 하고 죄를 미워하게 하며,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게 만들어주시겠다는 놀라운 약속의 역사는,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발꿈치를 상하”는 일, 곧 십자가에 달려서 대속의 죽음을 죽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해 사탄은 머리를 상하게 되고, 결국 인간을 누르던 죄의 권세는 결국 꺾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은 그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일환으로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여자의 후손을 태어나게 하기 위한, 하나님 백성의 계보를 잇기 위한 준비로 하신 것입니다.

2. 책임지시겠다는 의지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리라”라는 하나님의 언약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가 만연하던 갈대아 우르에서 신실한 믿음으로 굳게 서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분 백성의 조상을 삼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가 탄생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영원한 기업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 속에는, 죄 많고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시키고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영원한 기업을 얻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들어 있으며, 그 일을 그분의 능력으로 책임지고 이루시겠다는 소망 또한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 속에는 우리가 믿음으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놀라운 진리의 능력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3) 언약의 세 가지 요점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바탕으로,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를 통하여 이러한 언약에 기초하여 그분의 백성을 인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때에는 개인과 언약을 맺으셨고, 어떤 경우에는 국가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시간과 장소와 환경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형태로 언약이 맺어졌지만,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는 조건은 항상 불변하였고 다른 것으로 대치되지도 않았습니다. 성경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구절들이 등장하지만, 일차적으로 이것은 죄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입니다. 이 언약은 중요한 세 가지 요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을 믿는 믿음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과 약속을 믿음으로 붙잡을 때 그 언약은 우리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과 언약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 약속은 믿음으로 그것을 붙잡은 사람들의 것이 됩니다.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레 26:4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출 17:7).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9).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2. 하나님의 조건들, 곧 그분의 뜻에 대한 순종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모든 약속을 다 해 놓으셨지만, 하나님의 그 언약과 약속을 받는 데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순종입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 19:5).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출 15:26).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신 7:12).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신 6:25).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3. 조건들을 충족시킬 방도들­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약속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켜 주시는데, 곧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통해서 가능해집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 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 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사 42:1,6).

 

권두언

새 언약의 경험에 들어가야 한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단 하나의 죄도 용서할 수가 없고 자신을 의롭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은 전적으로 하나님이십니다. 너무나 당연한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시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알고 지나가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저 높은 하늘 위에서 이 땅에 사는 인간들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시어 좋게 심판해 주시고 영생에 들어가도록 판결해 주시는 것 그 이상이라는 말입니다.

할 수 없는 인간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을 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성령의 능력과 복음의 역사로 변화시키시어 하나님의 법을 즐거이 지키며 영원히 거룩한 천사들과 살기에 안전한 자, 합당한 자로 회복시켜 주셔서 구원하여 주신다는 말입니다. 구원은 재창조입니다. 새롭게 만들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들, 특히 갈라디아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필요한 것이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살 수 있게 되는가 하는 그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새 언약의 경험에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생각 속에 당신의 법을 기록하여 주시고 변화시키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주님께 즐거이 순종하는 품성을 소유한 자들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에 살았던 자들이라고 무조건 옛 언약시대에 살았던 것이고 십자가 이후 신약시대에 사는 자들이라고 무조건 새언약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새 언약의 경험은 이미 구약 성경, 예레미야 31장과 에스겔 36장에서 소개되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언약 하에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은 그 마음의 경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중요한 이해입니다. 이번 호 월간지를 정성스럽게 읽으신다면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실 줄로 확신합니다.

발행인 강병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