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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기사: 잠 못 이루는 밤과 멜라토닌

자려고 누우면 생각이 점점 많아지고 또렷해져 자꾸 뒤척이는 밤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내일 할 일에 대한 압박감과 체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걱정이 들지만 잠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간다. 다른 이들은 곤히 잠들어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데, 얼마나 공평하지 못한 세상인가? 잠 못 드는 밤, 그 이유를 알아보자.

잠 못 이루는 밤이라는 뜻을 가진 사자성어가 있다.“輾轉反側”(전전반측); 곧“돌아누울 전”,“구를 전”,“돌이킬 반”,“곁 측”이라고 해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한다는 뜻인데, 잠 못 들어 뒤척이는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많은 모양이다.

 

청소년들이 어른보다 잠을 더 많이 잘 자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멜라토닌' 생성량이 많기 때문이다. 멜라토닌 생성량은 여름에 비해 방이 긴 겨울에 많은데, 이것은 동물들과 사람들에게 겨울에 더 많은 잠을 자도록 하신 창조주의 배려이시다. 이 멜라토닌은 호르몬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멜라토닌'이란 호르몬의 정체는 무엇일까?

먼저, 호르몬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기능, 즉 성장과 생식, 생체 내의 환경을 일정하게 유지시켜 주는 기능을 하는 등, 여러 생리적 활성을 조절하는 물질이다. 호르몬은 우리 몸 안에서 만들어지고 또 우리 몸을 기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 몸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의 종류는 대단히 많은데, 그만큼 호르몬이 우리 몸에서 하는 역할은 많고 중요한 것이다. 

 

멜라토닌은 뇌의 중앙에 있는 송과체*에서 분비되는 유일한 호르몬으로 잠과 관련된 호르몬이다. 이 호르몬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물질로서 신경계와 긴밀하게 작용하고 있다. 멜라토닌은 밤에 많이 생성되고 낮에는 적게 생성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그래서 멜라토닌이‘수면주기조절’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호르몬으로 알려져 있다. 그뿐 아니라 멜라토닌은 성적 성숙을 조절하기도 한다. 멜라토닌 생성이 지장을 받으면 아이가 비정상적인 성적 성숙을 겪게 된다.

*송과체(솔방울샘): 좌우 대뇌 반구 사이 셋째 뇌실의 뒷부분에 있는 솔방울 모양의 내분비 기관

또한 멜라토닌은 빛이 없는 시간대에 분비 된다. 멜라토닌은 잠을 취하는데 도움을 주는 호르몬이기 때문이다. 멜라토닌은 빛이 있으면 잘 분비되지 않는다. 우리가 시험공부를 하다가 불이 켜진 채로 잠들었을 때, 잠을 잔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드는 것은 멜라토닌이 불빛 때문에 제대로 분비되지 않아 얕은 잠을 잤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이 수업시간에 유난히 졸린 이유는 성호르몬 분비가 활발히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멜라토닌과 세로토닌 모두 성호르몬에 의해 자극되는 호르몬이다. 여성의 경우 갱년기에 성호르몬이 감소하기 때문에, 세로토닌과 멜라토닌이 부족한 현상이 나타나 불면증이 유발되는 것이다.

우리 몸은 매일 손상된 세포를 탈락시키고 새로운 세포를 생성시킨다. 이런 작업은 잠을 자는 동안 진행되는데, 밤 11시~2시 사이에 가장 활동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잠자는 시간을 잘 조절해야 한다. 멜라토닌은 해가 지면 분비돼 잠을 편하게 자도록 하는 수면호르몬이지만, 해가 뜨면 분비돼 낮에 활성화 되는 세로토닌 호르몬을 거쳐야 만들어지는 호르몬이다. 그러므로 적당히 햇빛을 받으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빠른 걸음의 산책은 누구에게나 행복과 기쁨을 가져다 주는 좋은 운동이 되고, 특히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훌륭한 치료법이 되는 것이다.

못 드는 밤이 늘어가고 있는가? 낮 동안 적당히 피부를 노출시키고 햇빛을 쏘여 보라! 또 따뜻한 햇살 아래서 걷거나 가벼운 운동이나 노동을 해보라! 뒤척이던 밤이 밤하늘의 별과 함께 쌔근쌔근 잠드는 포근한 밤으로 바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섬세하게 창조해주신 그 놀라우신 섭리를 이용하여 호르몬을 잘 생성시킨다면 불면증을 치료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창조주의 위대하고 세밀하심에 깊이 놀라게 될 것이다.

 

 

 

가정기사: 스마트폰과 우리의 혀

요즈음 어린아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손 안에 쏙 들어오는 앙증맞고 아주 재미있으면서도 중요한 물건이 하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기도 하고 소식통이기도 한 작은 그것! 그것이 무엇일까? 바로 스마트폰이다.

스마트폰은 어린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기도 하고, 부모와 자녀 간의 연락망이 되기도 하는 편리한 도구이다. 젊은이들은 스마트폰으로 책을 읽을 수도 있고, 모든 정보를 알아 낼 수 있으며, 모르는 길도 빨리 찾을 수 있는 유용한 물건이다.

그러나 이렇게 편리한 도구가 되는 스마트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주 좋지 않은 매개체가 된다. 쉽게 어린아이들이 게임에 빠지도록 만들며, 스마트폰 안에 있는 다양한 기능이 청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기도 한다. 스마트폰 안에는 텔레비전과 영화관이 있고, 또 그 안에는 불건전한 채팅 방이 있고, 온라인 게임방과 비디오방 등 없는 것이 없다. 언제 어느 곳에 있어도 혼자 있지 않게 만드는 스마트폰, 그리고 비록 세속을 떠나 살고 있어도 세상 한 가운데서 살아가게 만드는 스마트폰의 위력은 엄청난 것이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기능을 가지고 유혹을 주는 스마트폰! 현 시대의 스마트폰은 교묘한 상술로 무장된 채, 호기심이 넘치는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유혹하는 최고의 기호품이 되고 있다.

그런데 아이들 뿐 아니라 스마트폰이 어른들에게 끼치는 해가 있다. 그것은 스마트폰을 통해 놀리게 되는 혀에서 야기되는 문제들이다. 전화 한번 잡으면 세월 가는 줄 모르는 어른들이 많이 있다. 전화로 필요한 일들을 해결하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문제는, 전화만 붙잡으면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소연을 하게 되거나 여러 가지 불평을 늘어놓게 되고, 어떤 사람의 흉도 보게 되며 부정적인 말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즉, 스마트폰이 우리의 혀를 더 바빠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도 좋은 말을 하는 것으로 바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일을 하느라 바빠지게 만든다. 결국 스마트폰과 함께 분주하고 부주의하게 움직여진 혀 때문에 불신과 루머가 싹트게 되고 그로 인해 주위와 사회가 어두워지게 되는 것이다.

최근 미국에서‘Cellphone 안 쓰기 게임’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고 외신들이 소개했다. 이 게임은 여러 사람들이 식사를 할 때, 스마트폰을 식탁 중앙에 모아 놓는다. 문자나 전화가 왔을 때 손을 먼저 뻗어 스마트폰을 확인하는 사람이 지는 것으로 돼 있는데, 가장 먼저 스마트폰을 집어 든 사람은 참가자 모두에게 식사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규칙이 이 게임에 들어 있다. 짧은 식사시간 동안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것이 쉬워 보이지만 생각보다 의외로 어렵다고 참가자들은 말한다. 잠시라도 스마트폰 없이 못 사는 현대인의 중독증을 풍자하고 있는 셈이다. 스마트폰이 곁에 없으면 초조하고 불안하여 견디지 못하고, 가지고 있으면 하염없이 문자를 보내거나 게임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주인인지,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스마트폰이 주인인지 모를 정도로 현대 사회는 스마트폰에 푹 빠져있다. 그들은 이미 스마트폰의 노예가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은 사람에게서 시간과 마음을 훔치는 괴물로 변하고 있다.

고대 헬라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에 성행하던 경기 중에서 마라톤과 같은 경주가 있었다. 이 경기에 참가하는 사람은 엄격한 준비와 훈련을 받아야 했다. 해로운 식욕의 방종이나 지적 혹은 육체적 활력을 저하시킬 어떤 것이라도 엄격히 금지 되었다. 경주의 승리자는 월계관을 받고, 오른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려주며 최고의 영예를 받았다. 사도 바울은 이 경주를 그리스도인의 승리와 비교하고 있다.“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고전 9:24~25).

마지막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이 엄격한 절제를 잘 실천하고 있는지, 스마트폰의 중독자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귀중한 시간을 잘못된 혀의 놀림으로 낭비하고 있지나 않은지 스스로 검증해 보는 것은 어떨까?“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 3:2).

 

사랑의 편지: 마음속의 하늘나라

성경을 읽다가 깊은 생각에 잠기게 만든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렘 12:5).

대답 할 말을 찾다가 이내 부끄러워졌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잘 살고 있어야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를 그리며 천국의 소망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늘나라는 미래일 뿐입니다. 하늘나라에 간다고 준비하는 사람들은 '오늘', '지금', '이곳에서' 천국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이 땅의 순간이 어서 지나가라고 바랄 뿐...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하늘나라는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이미 하늘나라가 있는 사람이 가는 곳이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스스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평화와 하늘의 웃음과 하늘의 행복을 이미 마음에 가진 사람만천국의 평화와 천국의 웃음과 천국의 행복을 가질 것입니다.

마음에 천국이 없는 사람은 항상 주위에서 천국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천국을 보지 못했다고,그 이웃에게서 천국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그 사람 안에 천국이 없더라고 실망하며 웁니다. 마음에 천국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 마음의 천국을 볼 수 없기에...그런 사람의 마음은 항상 '오늘은 고통', '천국은 내일'입니다.

오늘 마음에 천국이 없는 사람은 내일 천국도 없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에서 하늘나라가 시작되지 않은 사람은 어디에서고 하늘나라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순간이 없다면 내일도 없듯이,오늘 이 순간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내일도 준비되지 않을 것입니다.

걸어가면서도 힘들다면 말과 어떻게 경주 하겠습니까?작은 시험에도 넘어지면 큰 시험에는 어떨까요?

우리는 자주 내일의 천국을 위해 오늘의 천국을 놓칩니다. 오늘 이 순간 하늘나라가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마음에 임한 하늘나라가 미래의 하늘나라가 될 것이기에... 오늘 이 순간 마음에 하늘이 없다면 내일 하늘도 없을 것이기에...

글/강영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연구: 갈라디아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라디아서 1:6~10).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에 일어난 문제의 위급함을 직감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은 멸망으로 치달아가는 그들을 구하고자 하는 책임감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그의 뜨거운 설교를 열린 마음으로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과 저를 부르신 이는 누구십니까?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벧전 5:10)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2:39)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리라”(살전 5:23,24) 인류를 부르시는 이, 그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형제들이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있는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왜, 무엇이 그들을 흔들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부르시기 위하여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사도바울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일에 부르심을 받은 많은 분들의 글들이 있습니다. 전하는 입은 많을지 모르지만 말씀하시는 음성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배도는 항상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하는 결과에서 올 것이라고 사도바울은 경고하였습니다. (행20:30참조) 많은 사람들은 일단 교인이 되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꼭 생각해야 할 한 가지는 “나는 주님과 연합하여 그의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는가?”하고 자신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모든 믿는 자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인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요 6:63 참조) 그러므로 생명 즉 구원을 주지 못하는 것은 복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어떤 그릇된 것이 복음으로 통용되려고 하면 반드시 생명의 길이라고 가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람들을 속일 수가 없습니다. 바로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런 거짓 이론에 꾀임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능력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그들 자신의 능력인 그들의 생각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상은 참 복음이 아니라고 분명히 알려 주고 있습니다. 바로 갈라디아의 문제는 어느 것이 참 복음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인지 또는 다른 사람들이 전한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갈라디아서는 참된 복음을 다른 거짓 복음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는 영감의 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하나님의 능력이며 천하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았으므로 오직 하나의 복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즉 복음은 에녹, 노아, 아브라함, 모세, 이사야가 전파하였던 같은 복음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다른 복음을 전파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강한 경고가 있습니다. 왜일까요?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시기에 그러합니다. 능력이 아닌 것을 신뢰하도록 하는 것은 사는 길이 아니라 멸망의 길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렘 17:5)입니다. 사람들을 이끌어 저주를 받게 하는 사람은 그 자신도 저주를 받습니다.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27:18). 만일 육체적으로 소경 된 자를 길을 잃게 하는 자가 이렇게 된다면 한 영혼이 길을 잃어 영원한 멸망을 당하도록 하는 자는 얼마나 더 큰 저주를 받아야 되겠습니까? 거짓된 구원의 소망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그들로 하여금 결코 구원할 수 없는 것을 신뢰하도록 하는 것보다 더 악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참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큰 임무인 것을 새삼 알게 됩니다.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이 성경에 제시하지 않은 다른 그 무엇을 전한다면 그도 또한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범죄한 천사들”(벧후2:4)과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유6)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사단도 자기를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고후 11:14,15). 그들은 죽은 자들의 영(사실은 죽은 자의 영이 아님)이라고 말하면서 영계로부터 새로운 기별을 가져 왔다고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 4:1)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사 8:20).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으면 속임을 받을 염려가 없습니다. 말씀은 길을 비추어 주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이후 교회의 지도자들은 복음의 몇몇 엄격한 원칙들을 완화시키면 이교 신자들이 교회에 정착하기가 쉬워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교회를 다스리게 될 정도로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상의 밑바탕에는 자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사기 위해 진리를 굽히고 양보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갈라디아 교회에도 행하여지고 있었으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종이었으며 하나님만이 그가 기쁘게 하려는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자는 사람의 종이요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이 원칙은 모든 종류의 봉사에 있어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섬기고 기쁘게 하는 것을 우선으로 두는 자는 사람들에게도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봉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3:22~24). 이 원칙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두려워하여 양심의 가책을 무시하여 왔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사도바울의 이 외침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성령에 대한 연구: 하늘에서 온 비둘기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요 1:32)

그리스도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의 모본이 되십니다. 아버지께 드린 그분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늘이 열렸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그분 위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사람과 교통하고, 순종하는 신실한 자들의 마음에 거하실 것입니다. 사단에 대항하고 시험 받을 때에 승리하기 위한 지혜를 얻기 위해 성령을 열심히 구하는 사람들에게 빛과 능력이 임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던 것처럼 승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공중 봉사를 열렬한 기도로 시작하셨으며, 그의 모본은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는 데 기도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나타내 줍니다. 그분은 아버지와 지속적으로 교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생애는 우리가 모방해야 할 완전한 모본을 우리에게 제시해 줍니다. 그의 생애의 기록을 살펴보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분은 작은 숲이나 산의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 하나님께 끈기 있고 열렬하게 기도하셨습니다. 몇 가지 능한 이적을 행하도록 요청 받으시기 직전 그분은 자주 온밤을 기도로 지새우셨습니다. 하루의 수고를 마감하고 그 밤 기도 시간 동안, 그분은 동정 어린 마음으로 제자들이 쉼과 수면을 취할 수 있도록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반면에 그분은 인류를 위해서 강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열렬한 탄원을 하나님께 쏟아 부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기도의 응답으로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의무를 감당할 능력을 얻으셨고 시련에 대처할 수 있는 굳건함을 얻으셨습니다. 우리는 성공적인 그리스도인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을 의존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본은, 우리가 대적을 저항하고 승리할 은혜와 능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결코 실패함이 없는 힘의 근원으로 나아갈 통로를 우리 앞에 열어 놓으셨습니다. 요단강 둑 위에서 그리스도는 인간의 대표자로 기도하셨고, 열린 하늘과 승인의 음성은 아들의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류를 가납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신시킵니다.

 

성령에 대한 연구: 그리스도의 대리자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7)

보혜사는“진리의 성령”으로 불리웁니다. 그분의 일은 진리를 정의하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는 처음에 진리의 성령으로 마음 가운데 거하시므로 보혜사가 되십니다. 진리 안에 위로와 평안이 있습니다. 진정한 평안과 위로는 거짓 가운데서 발견될 수 없습니다. 사단이 마음을 지배할 능력을 얻게 되는 것은 거짓 이론들과 전통들을 통해서입니다. 거짓 표준들에게로 사람들을 가게 함으로써 사단은 품성을 그릇되게 꼴 지웁니다. 성경을 통해 성령은 마음에 말씀하시고 마음에 진리를 새기십니다. 그와 같이 성령께서는 오류를 폭로시키시고 영혼에서 그것을 내어 쫓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택한 백성들을 자기 자신에게 복종케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는 진리의 성령에 의해서입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의 직무를 묘사하면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고취시켰던 기쁨과 소망으로 제자들을 고취시키려고 애쓰셨습니다. 그분은 교회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풍부한 도움을 인하여 기뻐하셨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그분의 백성을 높이시기 위해 아버지께 구할 수 있는 모든 선물들 중에서 최고의 것이었습니다. 성령은 개심시키는 대리자로서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희생은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수세기 동안 악의 세력은 강해져 왔고, 사단의 사로잡는 세력에 대한 인간의 복종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죄는 제한된 힘이 아닌 신령한 능력의 충만 가운데 오실 신성의 제3위 되신 강한 대리자를 통해서만 저항되고 극복될 수 있습니다. 구주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효력 있게 만드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마음이 정결케 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믿는 자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악으로 기우는 모든 유전적 및 배양된 경향들을 극복하고, 그의 교회에 자신의 성품을 각인하시기 위해 신령한 능력이신 성령을 주셨습니다.

 

신앙기사: 마치면서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거나 그분의 계명을 지킬 수가 없다. 우리는 죄로 기울어지는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 악하고 불순종하는 마음이 우리의 본 마음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듭나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마음, 곧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마음을 위로부터 받아야 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전 5:17).

매일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죽고 매일 그리스도의 성령의 지배를 받아서 사는 경험을 통해서 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순종하는 생애를 살 수가 있다. 우리의 힘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가능케 되는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이루어진다. 나를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주님을 사랑하게 될 때에, 그 사랑이 강권하는 힘이 되어서 주님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고, 그분의 계명을 다 지키고 싶은 열망이 생기는 것이다. 순종이나 행함은 결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공로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는 계명을 순종하는 믿음과 진리를 따라 깨끗하고 진실되게 사는 변화된 생활이 반드시 뒤따르게 되어 있다. 참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순종을 낳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이슈이다. 마지막 짐승의 표의 환난은 계명에 관한 시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계명을 지키며 죽기까지 충성할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자기의 목숨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참 믿음의 소유자, 남은 무리를 찾고 계신다. 당신도 하나님의 남은 자손이 되지 않으려는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15)

신앙4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어느 가난한 부부가 여섯 자녀를 어렵게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매우 절친한 부자 친구가 한 아이를 자기에게 양자로 주는 게 어떠냐고 제의했다. 그날 저녁 아이들이 모두 잠자리에 들어간 다음에 그 부부는 의논하였다. 어떤 아이를 양자로 보낼까? 첫째 아이인 아들을 생각하자, 맏아들을 남 주기에는 너무나 귀하고 아까웠다. 둘째 아이는 딸이었는데, 이번에 역시 첫 딸이라 보낼 수가 없었다. 셋째 아이도 딸인데 너무나 몸이 약해서 마음이 놓이지 않았고, 넷째 아이는 외할머니와 너무 닮아서 보낼 수 없다고 부인이 거절했다. 다섯째 아이는 친할아버지와 너무 닮아서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었고, 이제 남은 것은 애기 밖에 없었다. 그 순간 부인은 그만 울음을 터트리며 "우리 귀여운 애기 절대 남 줄 수 없어요"하며 통곡하고 말았다.

아무리 자녀가 많아도 부모에겐 하나하나가 다 귀중하다. 여섯 자녀가 있어도 그 하나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이다. 그런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을 능가한다. 하나님은 단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어떤 저울로도 측량할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분의 사랑은 아무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하늘의 가장 귀중한 선물을 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도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 편에서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신 후에, 이제 그분께서는 인간 편에서 꼭 지켜야 할 의무에 대해 이렇게 명확하게 명령하셨다.“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1)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순종한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공언하고 있다. 감미로운 곡조로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복음 성가들이 교회에 넘쳐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드리는 헌금으로 교회 지붕이 점점 더 높아져 가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거리에 나가 외치는 전도와 선교의 목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그렇게 간곡하게 부탁하신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계명을 지키라는 주님의 부탁과 명령을 어기고 있는가! 성경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3~5).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 자녀와 아버지의 관계를 가지고 계시며, 그분은 우리가 자녀로서 온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그 순종은 곧“내 계명을 지키”라는 것이며,“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순종을 원하시는가? 그것을 알려면 순종의 모본 되시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해 보면 된다. 인류의 선두에 앞장서서 아버지를 섬기신 예수님은 우리가 어떠한 자녀가 되어야 하는지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으로 섬겼으며, 하나님을 위해 즐거운 마음과 부담 없는 정신으로 봉사하셨다. 그분은“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라고 하셨는데, 지상 생애 동안 늘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계명과 법을 즐겁게 묵상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예수님께는 가장 큰 기쁨이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당신이 성취하시러 오신 사업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너무 크다고 생각지 않으셨으며, 어떠한 수고도 너무 괴롭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셨다. 그는“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고 말씀하셨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순종해야 한다.“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계명은 폐했고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잘못된 가르침 속에 마음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는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계명을 지킬 것이다. 또한 행함이 따르는 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순종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표준에 이르는 자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자이다. 행함과 선행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살 수는 없으나,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우리가 정말 그분을 사랑한다면 마음으로 기꺼이 그분의 명령을 순종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는 두 계급의 사람들만이 살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때에도 단지 두 계급의 사람으로 구별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사람들과 그 율법을 순종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충성과 불충성을 입증할 수 있는 시험을 주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 14:15~24).

 

 

2)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계명을 지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요일 5:3).

온 마음과 힘과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무엇인가? 그것은 곧 계명을 지키는 일이다.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온전히 굴복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만 행하는 것이며, 믿음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가 생애에 풍성하게 맺히는 것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계명을 지키는가? 아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결코 슬프시게 하고 싶지 않아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다. 율법주의가 되어 계명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거듭난 후, 마음이 다시는 예전처럼 죄를 짓고 싶지 않은 마음, 다시는 악한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마음, 곧 죄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변했기 때문에, 저절로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온 마음으로 계명을 지키는 삶이 살아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 주의 율법을 사랑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생애를 자연스럽게 살게 되는 것이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나타내 주는 사본이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분의 계명이 무거운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십계명은 첫째에서 넷째 계명까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랑과 의무를 말해주며, 다섯째에서 열째 계명까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과 의무를 말해주고 있다.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최고의 애정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며 그분 외에는 결코 다른 우상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거짓 서약과 거짓 맹세를 하지 않을 것이며, 경솔하고 부주의한 태도로 보통의 대화에서 부주의하게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것이며,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입 밖에 낼 때에는 존경하는 마음과 엄숙함으로 말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명령을 따라 안식일을 지킬 것이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하여 세속적 성격의 일들을 생각하는 것조차도 피할 것이며,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부모에게 효도할 것이며,“살인하지 말지니라”는 계명, 곧 생명을 단축시키는 모든 부정한 행위와 증오와 복수의 정신과 또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나 그런 감정을 품는 일을 하지 않으므로 여섯째 계명을 지킬 것이다. 또한 음란한 행위를 금할 뿐 아니라, 육욕적인 생각과 욕망은 물론 마음의 은밀한 의도와 감정에까지도 순결하기 위하여 온전한 순종으로 일곱째 계명을 지킬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도적질 하지 않으며 일상 업무의 가장 사소한 일에도 성실할 것이다. 또한 이웃을 속이려는 의도나 목적으로 거짓말하지 않을 것이며 남의 소유물에 대한 나쁜 욕심을 품는 것조차도 삼갈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뜻을 따라 행하며 그분의 법을 지키고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생애를 사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3) 계명을 지키는 자들의 출현

성경 요한 계시록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생명까지라도 불사하는 사람들이 등장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짐승의 표의 환난이 올 때에, 계명을 지키는 남은 자손들에게 핍박과 박해가 올 때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분의 성품으로 온전히 변화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지키고 충성하기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을 목숨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계명을 인간이 만든 계명보다 더 위에 두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그런 사람들,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현 기독교에서 믿고 가르치는 복음으로는 계명을 지키는 마지막 남은 무리를 양산해 낼 수가 없다. 입으로 시인하고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된다는 가르침, 또한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며 행함이나 거룩하게 성화되고 변화되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전혀 강조하지 않는 가르침이 난무하고 있으니,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겠으며, 어떻게 영적으로 깨어나 환난과 예수 재림을 위해 준비되겠는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거듭나 새 마음으로 살며,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죄를 이기는 경험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한 구원을 받는다는 거짓된 가르침과 예정설의 오류에 깊이 빠져서 그 귀중한 체험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오래 다녀도 세상 사람과 별 차이가 없고, 오히려 세상 사람보다 더 돈과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거짓된 삶을 계속 살면서도,‘나는 구원받았다’는 거짓 확신 속에서 살아가는 현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말은 그토록 낯설게 들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속에서 그리스도의 품성을 재현하는 것이다. 곧 계명을 지키는 품성을 가지는 것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했다(롬 13:10). 만일 우리가 온 마음과 힘과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계명을 지킬 것이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예수께서 강조하신 말씀이다.“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아무도 신앙의 고백만으로는 그들이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예수님과 구원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말만으로는 그 사실이 확인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 믿는 신앙이 삶 속에 형제를 사랑하는 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로, 악한 죄를 이기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며,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며 참 믿음인 것이다.

신앙3부: 믿음과 행함의 관계

오늘날 기독교의 가르침이 어떻든 간에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인 성경은 참된 믿음에 대한 명확한 지침을 알려주고 있는데, 그것은 믿음은 순종과 행함을 낳는다는 것이다. 믿음과 행함은 떼어 놓을래야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를 이루고 있다. 배를 저을 때에 한 쪽 노만 저으면 배가 제자리를 맴돌게 되는 것처럼, 믿음과 행함이 함께 병행하여야 구원의 배가 제 자리를 맴돌지 않고 하늘 포구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믿음과 행함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공부해 보자.

 

 

1) 성경이 말하는 믿음

히브리서 11장은 우리가 흔히 믿음의 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역대 믿음의 조상들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그들의 믿음과 함께 그들의 믿음을 증거하는 행함도 동시에 적고 있다. 곧 그들의 믿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함을 적어 놓았는데, 그 행함은 다“동사”로 쓰여 있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지었다고 하였다. 비를 본적이 없던 시대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홍수가 온다는 사실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예비하기 위하여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다. 행함이 따르는 믿음이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어디로 갈지를 몰랐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그 우상의 땅을 떠나 나갔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 이 또한 행함이 따르는 믿음이 아니었던가!“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히 11:31). 그러므로 히브리서에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였던 사람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가져오며, 그것은 선한 행실로 나타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이다. 참된 믿음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성경의 진리에 대한 동의 뿐만 아니라 순종과 행함을 동반한다. 행함을 통해서 영생을 얻을 수는 없지만, 참된 믿음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경건한 행실과 순종을 열매로 맺는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 행함의 관계인 것이다.

 

 

2) 믿음과 행함의 성경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6).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3:21,22).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3,4).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 KJV 번역).

 

 

3)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행함으로 심판받는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행함은 심판의 기준이 된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값아 주리라”(마 16:27).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 2:6).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계 2:23).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진정한 믿음을 가졌는지, 그 믿음이 올바른 행위를 동반하는 참 믿음이었는지, 그래서 그 사람의 생애가 믿음의 열매를 맺었는지의 여부로 심판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속에는 믿음과 행함이 반드시 균형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나타나는 완전한 순종과 그에 따른 선한 행위는 우리의 성품과 생애를 완전하게 변화시킬 것이다.“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그러므로 하늘 아버지의 뜻(성경 말씀)과 그것에 대한순종(행함)에 대한 설명 없이,“믿으라, 믿으라,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외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가르침이다.“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라는 가르침 속에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을 감추고 편히 안주하게 만드는 위험이 포함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동의하기만 하면 자신에게 믿음이 있고, 그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 기독교의 가르침의 큰 맹점인 것이다.

 

 

4) 귀신도 가진 믿음

행함을 무시하면서“믿음, 믿음, 오직 믿음만을 가져라”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네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 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약 2:19,20).

행함이 없이 머리로만 알고 인정하는 것은 사단이 가지고 있는 믿음과 다를 것이 없다. 마귀는 인간을 유혹하고 죄를 짓게 만들며 악한 일을 계속 도모하면서도 하나님이 창조주이신 것을 잘 알고 믿는다. 그러나 그분의 권위와 뜻에 복종하지 않고 자신의 성향대로 악한 길을 계속 고집한다. 만일 우리의 믿음이 행함을 낳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지 못한다면 마귀의 믿음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생명력을 잃어버린“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입술로만 진리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진리가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가 믿는다고 공언하는 진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진리를 믿는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생활과 삶의 목적과 방향을 완전히 새롭게 뒤바꿔 놓아야 진짜 믿음이며, 또한 그 믿음이 성품을 통해서 증거될 만큼 열매를 맺는 믿음이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예수께서 그대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라”라는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나 2000년 전에 예수께서 동일한 질문을 받으셨는데, 그분께서는“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되물으셨다. 그때 예수께 질문 했던 사람은,“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다(눅 10:25~28).

진정한 믿음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행함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마음과 정신의 법칙이다.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우리의 애정의 표현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그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진짜로 믿는 참 믿음을 가졌다면, 거기에는 당연히 의로운 행위가 따를 것이다. 믿음과 행함은 결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신앙2부: 관계에는 법칙이 존재한다

세상에서 첫 번째로 맺어진 관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관계이다. 곧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관계가 매우 좋고 아름다운 최선의 관계, 최고의 사랑의 관계가 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다음 인간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며 함께 관계를 맺어 그분의 사랑을 보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관계를 맺으시고 그것을 유지하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 그러나 먼저 관계를 깨뜨린 쪽은 인간이었다.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인간이 먼저 배반한 것이었다. 인간은 하나님보다 사단에게 더 신뢰를 보내고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관계를 깨고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시고, 그 깨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화목제물로 삼으심으로 그분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셨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행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인간의 편에서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한 가지를 이행하기를 요구하신다. 그 요구는 바로“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왜 우리가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 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이 먼저 그분의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 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관계에는 법칙이 존재한다. 즉 관계를 유지하려면 서로 지켜야 할 약속이 있는 것이다. 사랑의 관계에도 법칙이 있다. 그 법칙은 바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 할 약속과 법칙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법칙으로 온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하신 것이다.

 

 

1) 사랑의 법칙-사랑은 원칙이다

기독교에 심각한 오류가 들어왔다. 그것은 사랑의 법칙이 변질된 것이다. 마치 많은 현대 부부들의 결혼 서약이나 사랑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변질되었듯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사랑의 법칙과 약속도 변질되어 버렸다. 이 변질된 법칙은 기독교 신앙에 큰 오류를 들여오게 만들었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로 잘못된 신앙관을 갖게 만들어 영생을 잃어버리게 하는 위험을 초래하고 있다. 남녀 간의 사랑이나 결혼 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많은 경우에 사랑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어 있어서이다. 사랑을 감정이나 느낌으로만 여기는 데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뜨거운 감정이 안 느껴지면 쉽게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은 감정이나 느낌보다는 서로의 서약에 대한 신실한 행동, 서로 약속한 원칙에 대한 신실한 준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랑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 기독교에도 들어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것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개념을 감정적인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큰 오류이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사랑하는 것을 감정적인 면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느낌만이 아니다. 사랑을 가슴을 뜨겁게 하는 정서적인 것으로만 이해 할 때 신앙에 큰 문제가 생기게 된다. 사랑은 행동이며 사랑은 원칙이다. 사랑은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을 어떻게 보여주셨는가? 행동으로 보여주셨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주시는 행동으로 그분의 사랑을 표현하셨다. 그냥 하늘에서“그래,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만 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삼위 중의 하나이신 아들 하나님을 죽게 내어주심으로 그분의 사랑을 입증하신 것이다.

그렇다! 사랑은 행동이다. 사랑은 참된 믿음을 낳으며 믿음은 순종과 올바른 행동을 낳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에 따르는 행동이 나타나지 않는 신앙은 올바르지 않은 신앙이다. 변화가 따르지 않는 신앙, 순종하는 행위나 행동이 따르지 않는 신앙, 개혁과 개심이 따르지 않는 신앙과 사랑은 가짜인 것이다.

 

 

2) 믿음에 대한 정의

사랑의 법칙이 잘못 되었듯이, 현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믿음 또한 왜곡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믿음을 어떤 교리나 가르침에 대한 지성적인 동의라고 생각한다. 믿음을 성경의 어떤 신조를 받아들이거나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개념이나, 그것에 대한 자기의 신뢰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이러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기독교회의 복음에, 구원관에 큰 문제가 생겼다. 믿음은 사랑처럼 원칙이며 행동이다. 믿음이란 주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따르는 행동이다.

요즈음 기독교 안에서‘행함’을 강조하면 이단이라는 낙인이 찍히기 십상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다음과 같이 확신 있게 말한다.“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행함은 중요한 것이 아니죠. 믿음만이 구원을 위한 필수 요건입니다.”물론 예수를 믿으면 구원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믿음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말하는 대로 믿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현재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은혜와 믿음은 반쪽 이다. 온전한 복음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기만 하면 은혜로 다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 믿기만 하면 되고 행함이나 순종할 의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다고 하는 가르침,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너무 커서 인간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고 덮어주셔서 구원을 얻게 하신다는 가르침은 오류이다. 성경은 믿음에 대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에 대한 정의는 그와 전혀 다르다.

 

 

 

3) 참 믿음에 행함을 낳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성경에 나오는 믿음에 대한 말씀에 대하여 눈이 멀어 있는 듯하다. 성경은 전혀 오해할 만한 소지가 없이 너무나 명확하게 참된 믿음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믿음에 대한 왜곡된 정의를 가지게 되는 것일까? 그것이 지도자의 잘못인가? 확실한 성경 연구 없이 지도자와 대중을 따라가는 신자의 잘못인가?

성경에는 진정한 믿음에 대해 수없이 정의하고 있다. 많은 성경 절을 볼 필요도 없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만 읽어보아도 그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입으로만 믿고 그 믿음에 따르는 온전한 순종이나 행동을 나타내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런 심각한 선고를 내리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예수님께서는 입으로만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들, 곧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향하여“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선포하셨다. 어떻게 예수께서 이렇게 명확하게 설명하셨는데도, 믿음에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오해하게 되었을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에 들어 온 오류를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 오류는 또 다른 오류를 낳게 되어 혼란 속에서 영생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신앙생활을 살고 있다. 이렇게 믿음에 대한 가르침과 정의가 왜곡될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야고보를 통하여 야고보서를 기록하게 하셨다. 잘못된 믿음의 개념을 가진 신자들을 위하여 야고보는 진정한 믿음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균형있게 설명해 주고 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14, 17~22).

믿음에 대한 얼마나 명확한 정의인가! 야고보는 참된 믿음을 설명하면서 마귀도 하나님을 믿고 떨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진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마귀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정도의 믿음과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참된 믿음이란 머리로 지성적으로 하는 인정과 동의를 지나서, 우리의 마음과 사상과 생활을 바꾸어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순종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4)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떠하였는가?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과 구원의 삼각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를 들어서 말씀하고 있다. 곧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참된 믿음의 예로 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야고보가 추천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3,24).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낳기 이전에 이미 자신과 아내 사라가 너무 늙어서 아이를 전혀 가질 수 없는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약속의 아들을 주시고 그 약속의 아들을 통하여 택함 받은 한 나라를 이루시고 또 메시아를 이 땅에 탄생하게 하시겠다는 약속, 자기의 자손들이 큰 민족을 이루어 그 수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믿었다. 그것을 믿는 일은 엄청난 믿음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게 여겨 주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사실을 그저 머리로만 인정하고 동의한 것이 아니다. 믿음은 머리로 어떠한 사실이나 가르침을 인정하거나 동의하는 수준 이상을 의미한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후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그 말씀대로 따라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었을 때에 그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었다. 아브람이란 이름은“높아진 자”라는 뜻이었고 아브라함은“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었다. 자식이 하나도 없던 아브라함이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기의 이름을“열국의 아버지”라고 소개하고 다닌 사실은 굉장한 믿음을 나타내는 행동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삭이 태어나고 그가 20세가 되었을 때에 청천 벽력같은 명령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그것은 곧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이었다.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과연 그러한 명령을 하실 수가 있을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몹시 고민하며 떨었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이삭을 아침 일찍 깨워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간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말씀이 아무리 이치에 맞지 않는 것처럼 들릴 때에라도 믿고 순종하였다. 마침내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칼을 들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멈추도록 명하시고 그가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야 (사단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KJV 참조) 알았다고 말씀하여 주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시험하셨던 것이다. 그는 승리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이 경험을 실례로 들어서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머리로 믿기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신이 믿는 대로 행했던 믿음이었다. 곧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그대로 믿으며, 그분의 말씀과 뜻과 명령에 모든 것을 바쳐 순종하고 행하는 믿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음만 가지고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음에 수반되는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라고 야고보는 강조하고 있다.

요즈음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믿음은 이상한 의미로 퇴색해 버렸다. 사랑의 관계에 수반되는 법칙과 믿음에 수반되어야 하는 원칙은 더 이상 강조되거나 가르쳐지지 않고 있다. 사랑의 관계에는 법칙이 존재한다. 만일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만 하면서, 그 사람을 속상하게 하거나 싫어하는 행동을 계속 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일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올바른 행위가 따를 것이며, 그 사람의 생애에 하나님을 순종하는 표가 나타날 것이다.

 

신앙1부: 관계를 맺으시려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창조하셨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뚜렷한 이유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성경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과 그분께서 하신 업적과 사업을 숙고해 보면 그 이유가 명확히 보이게 된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1)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사랑'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을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사랑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사랑은 혼자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홀로 있을 때 사랑이 시작될 수 없다. 사랑을 하려면 반드시 대상이 필요하다. 곧 사랑은 상호 간의 관계가 있어야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함께 사랑을 나누고 함께 교류하며 서로 교통할 대상이 필요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성경 창세기에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기록이 나온다.“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 1:27). 그런데 이 말씀에서“형상”이란 단어가‘Image’라는 단어로 쓰여 있어, 인간이 하나님의 외양적인 모습만 같게 창조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거기에는 보다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형상”이라는 단어“character”는“카락테르”라는 헬라어 원어에서 파생된 단어인데,“Image”말에는 외양적인 면이 더 부각되지만,“Character”라는 말에는 특성이나 특질, 그리고 성격과 기질 같은 면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외모에서뿐만이 아니라 성격과 성품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닮게 창조되었다고 해야 정확한 의미와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성격을 보면, 사랑을 하고 관계를 맺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성격을 알 수 있게 된다. 저 유명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인간은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마음과 정신과 사상과 욕망의 소통을 통하여 만족을 얻으며, 상호 간에 맺어지는 관계 속에서 사회를 이루고 그 안에서 인정을 받고 자존감과 만족감을 얻는데, 그런 인간의 특성은 사랑의 관계를 맺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특성으로부터 파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나와 있다.“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인간이 왜 하나님을 찬송하는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가? 찬양이나 칭송이나 칭찬은 좋지 않으면 할 수 없다. 사랑하지 않으면 입에서 칭송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너무 좋으시기 때문에, 그분의 사랑이 너무 크고 놀랍기 때문에,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의 놀라우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그렇다. 좋아하지 않으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누구를 찬송하거나 찬양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며, 그 사랑은 상호 간의 관계 속에서 맺어지는 것이다.

 

 

2) 만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계이며, 또 하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는 성경과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친히 증명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1.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기이하고 놀라운 자연계는 창조주의 사랑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온 땅을 비추는 햇빛과 적시는 우로, 산과 바다와 들, 방긋이 피어오르는 꽃봉오리와 뾰족뾰족 돋아나는 새싹마다“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구절이 기록되어있다. 공중을 즐거운 노래로 충만하게 채우는 아름다운 새들, 향기를 풍기는 연연하고 고운 꽃들, 잎이 청청하게 무성한 수풀의 교목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롭고 돌보시는 사랑의 품성과 그분의 자녀들을 행복하게 하시려는 그분의 마음을 증거하는 것들이다. 작품이 작가의 정신세계를 반영하듯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세계는 하나님의 속성과 뜻을 반영한다.“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20).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창조된 것들을 유지시키신다. 하나님께서 생명 에너지를 통해 우주의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을 유지하시는 것은, 생명을 주기 원하시고 모든 만물을 살리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의 품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온 우주의 존재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들이어서 여호와 하나님과의 절대적 사랑의 관계 속에 연결되어 있다. 자연계를 예로 들어 보자. 옥수수 한 알을 땅에 심으면 그 한 알로 인해 열리는 옥수수는 두 개 정도가 열리는데 그 옥수수의 낱알의 개수는 몇 백배가 된다. 한 알이 몇 백배가 되는 자연 현상은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살게 하시기 위해 베푸시는 풍성한 사랑을 증명하고 있으며, 한 나무에서 수많은 열매들이 열리도록 되어 있는 자연의 법칙은 인간이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돌보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증거해주고 있다.

한 영국인 그리스도인이 요크셔 해안에 아름다운 별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해안 한쪽에는 커다란 바위가 바다를 향해 불쑥 나와 있었다. 어느 날 이 영국인은 딸을 데리고 바위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들이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는 딸에게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을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얘야, 위를 올려다보아라." 딸은 아버지의 말대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아래를 내려다보아라." 아버지의 말대로 딸은 하늘이 비춰지는 바다를 내려다보았다."이번엔 저 앞을 내다보아라." 딸은 아버지의 말대로 했다. "얘야, 이렇게 높고 한없이 깊고 끝없이 넓고 아름다운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란다!" 이 말을 들은 딸은 아버지를 향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이처럼 높고 깊고 끝없이 광활하다면, 우리는 그 한가운데서 살고 있네요." 라고 말했다. 우리는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이나 경외하지 않는 악인이나, 이웃과의 관계가 좋은 사람이거나 아니거나, 도덕적으로 깨끗하거나 아니거나, 종교적인 열심이 있거나 없거나를 막론하고, 모두를 돌보시고 모든 필요한 것을 차별 없이 공급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심이라”(마5:45). 하나님은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당신의 사랑으로 모두가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신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것을 공급하신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간의 광야 생활에서 양식을 하늘에서 비같이 내려 먹이셨다(출 16:4)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만나에 대한 기록을 읽으면서 신기해한다. 그러나 지금도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셔서 모든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지금도 가나의 혼인잔치의 포도즙의 기적이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광야 생활 40년 동안 내려주신 만나는 땅 위에 살고 있는 인류가 섭취하는 음식물의 한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오늘도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신 원소들을 섭취하므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한 예를 들어 보자. 사람은 누구나 질소를 먹으며 살고 있다. 물론 공기 중의 있는 질소를 직접 먹지는 못한다. 그러나 음식물에는 질소가 들어 있으며 모든 살아 있는 물질은 질소의 일부분이다. 만약 우리가 먹는 음식에 질소가 없다고 하면 어느 것이든 자라지도 못하고 부서져 상처가 난 세포를 대체할 수도 없게 된다. 모든 생물의 양식이 되는 이 질소는 공기 중의 5분의 4(78%)나 되는데, 이 질소가 없으면 식물이 자랄 수가 없다. 식물이 질소를 이용하여 단백질을 합성하는 과정을 '질소 동화'라고 하는데, 공기 중에 들어 있는 질소는 매우 풍부한 원소이지만 그 결합력이 너무 강해서 웬만해서는 분해하여 다른 화합물을 만들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질소분자 상태로는 식물이 질소를 이용할 수 없어서 이러한 질소를 식물이 이용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질소고정’이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박테리아나 어떤 종의 세균들과 남조류는 공기 중의 질소를 암모니아로 바꾸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미생물에 의해서 질소고정이 일어나 식물은 암모니아나 질산염의 형태로 변한 질소를 흡수하여 자라날 수 있게 된다. 질소는 단백질의 구성요소인 아미노산을 합성하는데 필수적인 원소로 우리 몸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원소이다. 그런데 질소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해주신 원소들이 없으면 오늘도 인간은 살아갈 수 없으며, 우주와 만물은 유지될 수 없다.

포도나무의 포도송이 생성 과정을 생각해 보자. 포도나무 이파리는 햇빛을 받아 광합성 작용을 하여 당분과 타닌을 포도송이로 연결시킨다. 7~8월이 되면 왕성했던 이파리와 줄기의 생육이 둔화되고, 그동안 잎에서 만들어진 광합성 산물이 열매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축적된 당이 달콤한 포도송이를 만드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던 포도나무에 땅의 양분과 비와 햇빛만을 통해 생겨난 달고 맛있는 포도송이가 열리다니, 이것이 가나의 혼인잔치의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모든 생물과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심으로써 그분의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보여주신다.

한번은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였던 찰스 스펄젼 목사님이 시골에 있는 어떤 농가를 방문했다. 농가의 마당 한쪽 편에는 큰 풍향계 하나가 서 있었는데, 풍향계 끝에는 바람의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촉이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화살촉 밑에 표가 하나 달려 있었고 그 표에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스펄젼 목사님은 궁금해서 풍향계 밑으로 가까이 다가가 보았더니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좀 의아스럽게 생각한 스펄젼 목사님은 주인인 농부에게 물었다.  "설마 하나님의 사랑이 바람 부는 대로 바뀐다는 뜻은 아니겠지요?"그러자 농부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정반대이지요. 바람이야 어떠한 방향으로 불던지 간에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뜻으로 거기에 그 말씀을 적어놓은 것입니다.”차별이 없고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2.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그분의 품성을 나타낸다. 하나님은“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시며,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시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출 34:6,7). 또한“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욘 4:2)고“인애를 기뻐”(미 7:18)하시는 분이시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명령을 보라.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이 잘 반영되어 있지 않은가!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19:9,10).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 할 지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9:14~18).

얼마나 자비로운 하나님의 성품인가!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 사단의 계략으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그분의 성품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천연계와 성경을 통한 모든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이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공포심으로 대하게 되고 또 하나님을 가혹하고 용서하지 않는 분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사단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은 냉혹하고 엄격하게 처단하시는 자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또한 사단은 조물주는 사람들의 허물과 잘못을 찾아내 저들에게 벌을 주려고 항상 주목하는 분인 것처럼 나타내었다. 이런 어두운 세상에 깔린 오해의 구름을 없애고 진정한 사랑의 하나님을 보여 주시려고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늘에서 강림하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는 생애였다. 그분의 희생과 헌신과 봉사의 생애는 자비로운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예수님의 사랑은 죄지은 인류를 살리시기 위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크나큰 사랑을 증명하기에 넉넉한 것이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 그분께서는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맺으시고 그 관계 속에서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