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칼럼 - WCC의 정체와 성경의 예언

 

1. WCC의 역사와 조직

WCC란 “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의 약자로써 세계 교회의 일치와 연합운동을 추진하는 초교파적 교회 협의체이다. 다른 말로는 에큐메니칼(Ecumenical) 운동이라고도 부르는데,“에큐메니칼”의 어원은 그리스어 “오이쿠메네”(Oikoumene)에서 온 말로 그 뜻은 “하나님의 집에 사는 모든 식구들”이란 뜻이다. 성경 에베소서 2장 19절에는 ‘하나님의 권속’이란 뜻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에큐메니칼 운동은 제1,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해서 일어나게 되었다. 기독교 선진 문명국들은 지난 몇 세기 동안 이룩해온 세계선교 활동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두 번씩이나 전쟁으로 폐허가 되자 깊은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세계 교회를 중심으로 국제연합기구를 만들어 다시는 전쟁하지 않고 인류평화와 정의를 이루자는 차원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1920년대 말까지 몇 차례 선구적 운동이 있었고, 1937년에 이르러서는 교회 지도자들이 WCC를 만들기로 합의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공식기구 발족이 지연되기도 했다. 하지만 1948년 이래 모든 대륙의 수많은 교회가 기독교 일치를 위한 조사에 참여했으며, 그 결과로 1948년 8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Amsterdam)에서 147개 교회 대표자들이 모여 제1회 세계 교회 협의회(이하 WCC)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1961년에는 WCC의 성격을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한 분 하나님의 영광으로서의 공통적 소명을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교회들의 단체”로 규정하였다.

2. 세상의 종교를 하나로 묶는 WCC의 논리 (강신술과 교회의 권위 강조)

WCC는 각 종교의 배후에 궁극적인 신적 실재가 존재한다는 종교 혼합주의적 개념을 표방한다. WCC의 신관은 한마디로 종교다원주의이다. WCC 제7차 총회(호주 캔버라, 1991)에서 한국 대표로 참석한 정현경 교수의 ‘초혼제’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은 사신의 강림을 성령 강림과 동일시하며, 하나님의 영과 악한 귀신의 영을 똑같은 신으로 보는 종교 혼합주의를 용인하고 있다. 제7차 캔버라에 대회에 인용된 초혼문을 잠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흑인 노예자여, 이집트 하갈의 영이여 오소서!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착취당하고 버림받은 하갈의 영이여 오소서! 우리아의 영, 그의 아내 밧세바에 대한 다윗 왕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전쟁터에 보내져서 죽임 당한 장군의 영이여 오소서!......십자군 때 죽은 사람들의 영이여 오소서! 토착민의 영이여, 식민지 시대와 위대한 기독교 선교 시대에 죽어간 영혼들이여 오소서!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당시 가스실에서 죽어간 영혼들이여 오소서!”

이와 같이 이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의 강림과 이 세상에서 살다가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의 강림(강신술)을 동일한 영의 강림으로 보고 있다. 성령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를 동일시하고 있는 종교 혼합주의의 대표적인 예이며 또한 성경이 금지하고 있는 강신술을 기독교계에 들여오고 있는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성경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주장하고 있는 로마카톨릭 교회의 권위에 동조하고 있다. “성경은 신앙과 생활의 최종적인 규범이나 표준이 아니다. 기독교의 여러 분파들이 자기의 성경관과 성경해석을 고집하면 다양한 형태로 역사하는 성령의 진리를 짐짓 상실할 수 있다. ‘오직 성경’의 원리에 연연하고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며 성경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은 세계 교회 일치를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기독교 신앙은 성경을 통해 전달되는 것만이 아니라 구전, 전승, 전통, 성전을 통해 전수되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로마카톨릭 교회와 그 전통론은 성경의 가르침과 모순되지 않는다.”

WCC의 중심적 위치에 서 있는 로마카톨릭에 의하면 그들은 성경의 권위나 교회(로마카톨릭 교회)의 전통은 동일하며 오히려 교회의 전통이 성경의 권위보다 위에 있다는 노골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오직 성경’을 외치며 자신의 해석을 고집하는 것은 교회의 일치를 방해하는 요인이며 모든 교회는 로마카톨릭의 권위 아래서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세상의 모든 종교가 로마카톨릭의 교회의 권위를 중심으로 하나로 묶여져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며 그것을 위해 그들은 강신술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WCC의 정체와 목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들이 미리 성경에 예언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3. WCC의 정체와 성경의 예언

요한계시록 16장에 보면 이 세상 마지막 때 펼쳐질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아마겟돈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요한계시록 16:13

이 아마겟돈 전쟁은 총과 칼로 무장된 나라들 간의 전쟁이 아니라 이 세상 역사 마지막 때에 펼쳐질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의 영적 대 전쟁을 묘사한 것이다.

이 아마겟돈 전쟁에서 그리스도의 반대 편에서 싸우게 될 사탄의 세력을 사도 요한은 각각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들은 바로 사탄(용)과 로마교황권(짐승)과 세계종교 지도자들(거짓 선지자)들을 상징하고 있다. 사도요한은 마지막 때 이들 사탄의 삼중 종교연합체가 사람들을 자신의 진영으로 모을 것이라고 이상 중에 예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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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들 사탄의 삼중연합체는 온 세상의 종교를 어떻게 하나로 묶게 될 것인가. 요한계시록 16장 13절을 다시 살펴보자.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그렇다. 그들은 이적을 행하여 세상의 모든 사람을 하나의 종교로 모을 것인데 그 이적은 바로 WCC가 허용하고 있는 강신술을 가리킨다. 그들은 강신술을 사용하여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로마카톨릭이 중심이 되는 하나의 종교를 세우게 될 것이다. 결국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불교나 그 어떤 종교든 다 하나의 신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로마교황이 중심이 되는 하나의 종교로 통일하자는 것이 그들의 논리가 되는 것이다.

지금 현재 펼쳐지고 있는 이 종교연합운동(에큐메니칼 운동)은 요한계시록 16장 13절의 표현에 얼마나 적합하게 들어맞고 있는가?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이들 WCC는 세상의 종교를 하나로 모은 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기 위하여 대 영적전쟁을 일으키려 할 것이다. 그 전쟁의 계쟁점은 바로 하나님의 율법이 될 것인데 WCC 종교연합체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고의로 하나님의 율법을 짓밟도록 유도하게 된다. 하나님의 계명이 아닌 자신들의 권위로 세운 계명을 높이 쳐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깃발아래 모이도록 선동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유린하는 강제법령을 세울 것이다.

4. 제10차 WCC 부산총회를 바라보면서

지난 10월 30일부터 11월 8일, 10일간 대한민국 부산에서 WCC 제10차 총회가 개최되었다. 부산총회가 개최되기까지 한국에서는 보수 진영과 WCC 개최 주도세력 사이에 팽팽한 긴장과 논쟁이 가열되기도 하였다. 일부 극보수 세력들은 WCC에 대한 반대 시위와 집회를 열면서 WCC에 대한 강한 반대의 입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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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진영 측에서 WCC를 반대하는 이유는 WCC가 종교다원주의, 동성애 찬성, 용공주의, 성경의 무오성 불인정 등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의 원칙에 입각하여 신앙을 고수하려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한국교회는 아직 희망이 남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여전히 성경의 예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예언의 시각에서 WCC 종교연합 운동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한국 교회는 이번 WCC 부산총회를 기점으로 종교연합 운동의 실체가 무엇이며 성경의 예언이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대해야 할 것이다.

1. WCC 제 10차 총회 2. WCC 총회 개최를 반대하며 시위하는 모습

3. WCC 부산총회가 세계인의 축제를 표방하며 지난 30일 막을 올렸으나, WCC 반대 목소리는 개막당일까지도 계속됐다.

WCC와 관련된 제 현상들이 단지 종교다원주의나 공산주의 혹은 동성애를 금지하는 차원의 기독교 수호 운동이 아니라 이 세상 마지막 때를 장식하는 성경 예언의 성취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한국 기독교회는 눈을 떠서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바이다.

 

사랑의 편지 - 낙엽 그 무덤을 넘어

                                                                                                             강영은

한 잎 한 잎 나뭇잎이 바람에 날리며 떨어집니다. 

빈 가지 스치는 바람 소리 찬 겨울 숲을 걷다가 떨어진 잎들로 수북하게 만들어진 낙엽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죽은 잎새 쌓인 낙엽 무덤은 그날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무덤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또 새로운 삶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무덤 넘어 저 편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무덤 넘어 저 편을 믿는 사람에게만… 

무덤으로 내려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죽기를 원했건만 우리의 자아는 너무 자주 죽기를 거부합니다. 주님과 함께 물 속 깊이 장사되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줄 알았던 우리들의 자아는 때때로 너무나 쉽게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곤 합니다. 그렇게 오래 지녀왔어도 쉽게 갈릴 줄을 모르는 “자아”라는 돌은,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모서리 날카로운 돌처럼 이리 삐죽 저리 삐죽 튀어 나와 다른 사람을 찌르든지 예민한 자존심을 건드렸다고 투정을 부립니다.

죽어야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새 별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다른 별의 죽음이 있어야 하고, 근육이 새롭게 나고 자라기 위해서는 예전에 있던 세포가 파괴되는 과정을 겪어야 하듯이, 죽음을 통해서만, 무덤을 통해서만 새 생명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우화인지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 것인지 모르지만, 항간에 회자되고 있는 솔개의 이야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생각 거리를 던져 줍니다.

솔개는 최고 70년의 수명을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장수하려면 약 40세가 되었을 때 매우 고통스럽고 중요한 결심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솔개가 태어난 지 40년이 되면 발톱이 노화하여 사냥감을 그다지 효과적으로 잡아챌 수 없게 되고, 부리도 길게 라고 구부러져 가슴에 닿을 정도가 될 뿐 아니라 깃털이 짙고 두껍게 자라 날개가 매우 무겁게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기가 힘들게 된답니다. 이 즈음이 되면 솔개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주어집니다. 그대로 죽을 날을 기다리든가, 아니면 약 반년에 걸친 매우 고통스런 자기와의 싸움, 갱생의 과정을 시작하든가 하는 것이지요.

갱생의 길을 선택한 솔개는 먼저 산 정상 부근으로 높이 날아올라 그 곳에 둥지를 틉니다. 그리고 먼저 자기 부리를 바위돌이나 나무에 부딪쳐 빠지게 하여 다시 새 부리가 돋아나게 합니다. 서서히 새 부리가 돋아나게 되면 솔개는 새로난 부리로 자기 발톱을 쪼아 발톱을 하나씩 뽑아낸다고 합니다. 새 발톱이 돋아나면, 이번에는 날개의 깃털을 하나 하나 뽑아 새 깃털로 바꿉니다. 이렇게 반년에 걸친 고통스러운 죽음의 과정을 거치면 그 때 솔개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게 되고, 이 과정을 통과한 솔개만이 힘차게 하늘로 상하며 다시 30년의 새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고통스러운 죽음의 과정을 통해야만 새 삶이 다시 주어지고 무덤을 통과해야만 새로운 생명이 다시 탄생할 수 있는…

겨울 숲을 걸으며 생각해보았습니다.

떨어지는 잎은 다시 새잎으로 태어날 것을 알고 있는 걸까, 수북한 낙엽 무덤을 만들며 떨어진 죽은 잎새들은 파란 잎으로 다시 탄생할 봄이 있다는 걸 알기나 하는 걸까 하고…

 

PART 4.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알고 행해야 하는 교훈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2)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0,21)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거룩한 인성을 지니시고 많은 고난을 겪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인 우리들에게 깊은 의미가 있는 중대한 진리들을 우리들은 너무나 소홀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들은 죄의 악한 특성을 깊이 깨닫고 죄를 가증한 것으로 증오하게 될 때까지 그리스도의 생애에 나타난 극기와 자아 희생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다짐하는 일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교훈 10.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구속의 오묘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2).

하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시는 미쁘심에 대하여 감사하도록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일깨워야 합니다. 우리가 갈바리의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될 때에 주님의 자비와 사랑은 우리의 구속을 위한 영원한 보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매일의 삶 가운데서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 각 사람들은 어떠한 감사의 답을 드려야 할까요!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진리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당신께 나오는 모든 자들을 용서하시기 위하여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예수님만을 높여야 합니다. 성소 제도를 통해 옛 유대인들은 희생 제물에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제물들은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주며 피흘림이 없는 곳에는 사함이 없다는 위대한 진리에 저들의 심령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왜 하나님께서 그처럼 많은 희생 제물을 원하셨으며 유대인의 제사 제도에서 그처럼 많은 피 흘리는 제물을 바치기를 원하셨는지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모든 죽어가는 희생제물은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었고 가장 엄숙하고 거룩한 의식으로서 정신과 마음에 감동을 주는 교훈이 되었으며 제사장들은 이런 의미들을 분명하게 설명해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소 제도의 희생 제물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만이 죄에 대한 용서가 있다는 이 위대하고 중대한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명백하게 계획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중대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를 사람들에게 그처럼 자주 반복해서 들려주시고 지금도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불순종하며 이 진리들을 향한 사람들의 무관심과 냉담함에 천사들이 얼마나 놀라고 있는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의 교회가 구속의 경륜에 대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써만 생생한 현실로 인간에게 붙어 다니는 죄, 고칠 수 없는 문둥병과 같은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이 진리를 믿는 자들이 얼마나 적은지 모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여야 참 믿음을 온 인류의 마음에 넣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한 대속 때문에 고통을 당하실 필요가 전혀 없으신무죄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고통은 주님의 고결한 인격과 당신의 무죄하고 고상한 성품이 하늘보다 높으신 것에 비례하는 심각하고 처절한 고통이었습니다.

 

교훈 11. 일시적이고 감정적인 회개의 위험성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0,21).

사람들은 왜 이 말씀이 아직도 우리들의 귀에 익숙지 않은가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 까닭은 그들이 철저히 회개하지 않은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거하시지 못하게 합니다. 한 가지 우상을 영혼에서 내쫓을 때에 사단은 그 자리를 대신할 또 다른 우상을 준비합니다(마 12:43~45참조). 우리들이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몸과 마음(전적인 헌신)을 바치고 주님과 더불어 매일의 삶을 살지 않는 한, 우리들이 주님을 “모사”로 삼지 않는 한 우리들의 마음은 악한 생각들을 맞아들일 것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생애에서 자신을 섬기는 생애로 쉽게 돌아서게 될 것입니다. 간혹 우리들은 회개하고 싶을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결정적으로 개혁하고 우리들이 배운 진리를 실천에 옮기지 않는 한, 우리들이 활동적이며 역사하는 믿음 곧 능력이 계속적으로 증가하는 그런 신앙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우리의 회개는 단지 아침 이슬과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회개는 영혼에게 하늘의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일시적인 감정의 작용에 의해서 생기는 회개의 심정은 망상적인 것으로서 또 한 번의 참회가 필요한 회개일 뿐입니다. 우리들에게 의의 평온한 열매를 맺게 하지 못하는 강렬한 감정의 작용은 우리들 자신을 이전보다 더욱 악화시킬 뿐입니다. 사단은 매일 우리들의 앞길에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쫓는 것을 정당화하는 속임수와 그럴 듯한 변명을 늘어놓고 우리들이 옛 습관으로 되돌아가게 함으로 우리들로, 영원한 소망과 안위와 보장을 얻게 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등한히 하게 만들려고 지금도 우리 주위를 맴돌며 쉬지 않고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원하는 봉사 곧 마음속에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감동을 받아 일어나는 봉사만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냉담하고 이기적인 봉사는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며 받으실 수도 없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온전한 믿음과 완전한 애정과 죄에서 구원하시는 당신의 능력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완성시키는 생애 가운데서 당신 앞에서 자신을 절제하며 노력하는 모든 참되고 열렬한 영혼을 영화롭게 하시며 받들어 주실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는 당신 앞에서 겸손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있는 영혼을 결코 혼자 버려두거나 배척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과 더불어 동역자가 되게 할 자격을 부여한 풍성한 은혜를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순결하고 거룩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리하고 성화된 식별력으로 하나님의 허락에 대한 보장을 인식하면 우리 각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그 허락들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훌륭해서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위대하시기 때문이며 우리들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산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의로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교훈 12. 성령을 받는 일의 중요성

그리스도께서는 한 때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의 제한된 이해력은 주님을 억제하게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공개하시기를 간절히 바라신 진리들을 저들에게 나타내 보일 수 없었던 것은 진리에 대하여 저들의 마음 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이었고, 이 상태에 있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진리를 가르쳐주는 것은 헛된 수고에 불과할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훈들을 밝히 깨달을 수 있기 이전에 저들은 성령을 받아야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우리가 아는 지식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된다면 우리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자리를 같이 하도록 선정될 것이며 우리는 영원한 시대를 통해서 우리를 위하여 베풀어진 잔치에서 주신 축복들에 대하여 끊임없이 배우게 될 것입니다. 미숙한 아이에게나 어울릴 기질, 습관 및 품성의 특징들을 그대로 가진 채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의혹, 비판, 급한 성미 및 자존심 등을 길러왔다면 그 잔치를 망칠 것이므로 그 자리에 들어갈 허락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을 과하여 들어갈 모든 자들은 하늘의 베틀로 짠혼인 예복을 입은 자들입니다. 다른 사람의 품성에서 결점을 끄집어내는 버릇을 스스로 키운 자들은 가족들을 불행하게 만들며 영혼들로 진리에서 떠나 어리석은 이야기를 택하도록 하는 추한 결함을 드러낼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불신의 누룩, 다른 사람의 신망을 얻고자 하는 욕구, 남을 비난하는 정신은 우리 자신을 그 문으로 못 들어가도록 막을 것입니다. 상호간에 완전한 신뢰로 결합하고 사는 이웃들의 행복에 흠을 낼 자는 단 한 사람도 이 문을 통과하여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 안에 사는 모든 자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겼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늘 임금의 품성을 나타내지 않는 한 아름다운 영광에 싸이신 하늘 임금을 결코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의지와 지혜를 버리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배울 때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허락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전적이며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하십니다. 생애의 질서, 인격의 도야, 품성의 형성을 위하여 우리의 생애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의 목에 주님의 멍에를 메어야 합니다. 주님의 인도를 받고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께 속한 성품을 선택하여 주님의 관심사들이 우리의 관심사들과 같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주님의 뜻을 닮고 그 뜻만을 이행하도록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제자가 되는 조건들이며 이 조건들에 따라 살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안식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주님을 떠나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멍에를 우리의 목에 메는 순간은 그 멍에가 가볍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며 그 때에 비로소 가장 힘든 영적 노력을 기울일 수 있고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질 수 있게 됩니다. 그까닭은 주님께서 힘과 권세를 주시기 때문이며 사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 즐거운 마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 이 말씀을 하신 분은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께서는 천국의 대주재이시며 영광의 왕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신령한 사물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순결하게 되어 이기심의 찌꺼기나 비뚤어지고 거칠며 매정한 우리의 성질들을 버리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내적이며 고상한 체험을 얻어야만 하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므로 은혜 가운데서 자라는 체험을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통회할 때 우리는 형제들에게 장애물이 되지 않고 오직 형제들을 든든하게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우리를 가르치시고 책망하심으로 시작되어 넉넉히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도록 키워주실 것입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PART 3.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구원해 가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호 13:14)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대상 21:1)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

 

D. 나의 몸값은 그리스도의 것임을 표현하는 속전의 의미

성소의 기구들에 대한 교훈가운데는 20세 이상 되는 모든 남자들에 대하여 반 세겔의 세금을 징수하라(출 30:11~16, 38:25~31)는 주님의 구체적인 명령이 있습니다. 20세는 청년이 성인이 되는 나이로, 제사장직과 레위의 봉사와 군 복무의 자격을 갖추게 되는 나이로 인정되는 것이 그 당시 이스라엘의 관례였습니다.(대상 23:24,27; 대하25:5,31; 스 3:8)

처음 태어난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이 같은 성직의무에서 벗어나는 대가로 값을 지불하였으며 만일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사회에 참여하고자 할 것 같으면 그도 역시 “자신의 영혼에 대한 속전”을 지불해야 하였습니다. 나이나 신분이나 부나 인종으로 인한 그 어떤 예외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 은 한 개는 단순히 “반”을 의미하는 베카(BEQ’A)로 불리워졌습니다. 이 명령은 세 번씩이나 “매 인”이 그 자신의 속전을 개인적으로 준비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당신의 백성들을 무리로 계산하지 아니 하시고 오직 개인 단위로 계산하고 계심을 알려 주는 중요한 교훈이라 하겠습니다. 또 한 예로 유월절 떡은 “각 사람의 식량을 따라”(출 12:4) 준비되었으며 주님께서도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으로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하는 필요성을 가르치셨습니다.(요 6:54 참조) 이 인두세의 또 다른 목적은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출 30:12)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과 악의 큰 전쟁의 결과로 이 지구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필연적으로 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각 사람의 개인적인 선택의 결과임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친히 회개한 자에게는 이 진노가 철회될 것임을 보장하는 “속전”을 우리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두셨습니다.

선물로 주어진 베카를 위한 은

이스라엘 백성은 그 은을 만들거나 벌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채굴하거나 주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구원함을 받았던 그 잊을 수 없는 밤에 선물로 그들의 것이되었던 것입니다. 당신의 가난한 자녀들을 위하여 준비하시는 자애로우신 하늘 아버지에 대한 비슷한 한 가지 예로 아기 예수님을 위하여 선물로 바친 동박박사들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바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요셉이 애굽에서 유랑하는동안 그의 가족들을 부양할 충분한 재물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각 이스라엘 백성의 영혼을 위한 보상은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 13:8)의 선물에서처럼 여호와의 계획 가운데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우리들은 그분의 은혜를 감사히 받고 그것을 성실하게 사용해야합니다.

이스라엘의 장자가 반 세겔의 속전을 지불하였을 때, 그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 가운데 계수되었습니다. 그의 자유에 대한 증거였던 이 은은 나중에 다른 반 세겔들과 함께 녹여져서 성막의 기초를 이루는 데에 사용됩니다. 속전을 낼 때마다 이스라엘백성은 자신이 한 때는 적국의 노예였으며 그의 구주께서 “애굽을 너의 속량물”(사 43:3)로 받아 주었음을 명심해야 하였습니다. 이 세상 끝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 대하여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호 13:14)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의 속전을 지불함이 없이는 불순종 하는 자들에게 임할 심판은 대할 길이 전혀 없습니다.

다윗이 백성을 계수한 사건과 베카

다윗이 백성을 계수한 사건의 치명적인 결과가 얼마나 두려운 일이었습니까! 성경은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대상 21:1)하였음을 알려 줍니다. 다윗이 이 사단의 주장에 굴복하였을 때, 그는 요압에게 명령하여 인구조사를 실시하게 하였습니다. 요압조차도 이 일이 하나님께 죄가 된다는 사실(대상 21:3)을 알고 있었는데 왜, 그 믿음의 사람 다윗은 이런 죄를 범하게 되었을까요.

다윗은 인근 민족들 중에 그의 정복사업을 확대할 목적으로 군대를 증강시키기를 원했고 이 일을 위해서는 인구조사가 필요하였습니다. 다윗의 치세 하에서 이스라엘이 번영한 것은 왕의 능력이나 군사력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에 기인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 마음에 일어나는 교만과 이기심에 인구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왕과 이스라엘백성이 신뢰하는 것은 여호와의 능력이 아니라 그들의 군대라는 인상을 인근 민족들에게 퍼지게 할 위험이 있는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다윗의 더 큰 죄는 각 사람에 대한 속전(출 30:14)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지 않았을까요!

모리아 산에서 준비된 속전(구속)

솔로몬의 성전 터가 되고, 다윗의 인구조사의 죄로 온역이 내렸을 때에 단을 쌓았던 오르난의 타작마당은 거의 800년 전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바로 그 장소였습니다. 모리아 산 그 장소에서 하나님께서는 죽을 운명의 이삭(장자)을 위하여 속전(구속)을 준비해 주신 사건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깨달은 사도 바울도 구속은 예배의 기초라는 원칙을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베카에 대한 규정

베카에 대한 고대의 규정은 부자라고 더 내거나 가난한 자라고 덜 내거나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의 구속에 대한 대가를 조작하는 인간의 노력은 결코 심판자에게 받아 들여질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은 조각은 “성소의 세겔”(출 38:25)에 따라 부과되었으며 각 베카는 이것과 비교되었으며 “성소의 저울”에 달려졌습니다. 너무 큰 것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반면에 부족한 것도 거부되었습니다. 어떤 대치물로도 타협할 수 없으며 기도나 눈물이나 행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표준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속에 대한 아주 중요하고 적절한 예증이라 하겠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이 원칙은 모든 세대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준비에 적용되었으며 구원을 위한 단 하나의 법이기도 합니다. 베카는 비교적 값어치가 없는, 작은 한 조각의 은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구원은값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벧전 1:18,19)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속전은 코페르라 불리워졌는데 이 코페르는 대 속죄일에 사용된 단어와 같은 어근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노아가 방주 덮는 덮개를 묘사할 때 쓰였던 “역청을 칠 하는 것”으로도 표현되었습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제하”거나 “속”하는 것으로도 번역되며, 하나님의 어린 양의 보혈로 말미암아 제공되는 덮개를 가리키는 단어로도 사용되었습니다(사 6:7,22:14,27:9). 그분의 죽으심은 회개한 죄의 기록을 말소하거나 제하거나 “가리”웠으며(출 30:15; 레 4:20,16:18,33; 요일 1:9) 인간의 빚을 갚아 줌으로 그의 “차용증서”나 “빚 문서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골 2:13,14) 이와 같이 베카는 우리에게 구속에 대한 이해를 더해 주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기념물로도 불리워졌던 베카

출애굽기 30장 16절에서 베카는 기념으로 불리워졌는데, 이 단어는 “기억하라”라는 단어의 어근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성경에서 “기억하다”라는 말은 항상 회상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상을 띠고 있습니다. 예로 십자가상에서의 강도는 구주께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였을 때에 그는 이 단어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요청을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카가 모여졌을 때 그 은은 녹여서 성막을 둘러싼 50개의 널판을 받치는 받침대 또는 기초를 형성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그 은은 뜰을 둘러싼 기둥들을 장식한 뚜껑이나 기둥머리 뿐 아니라 휘장을 거는 아홉 개의 기둥들의 받침대에도 사용되었습니다.(출 38:28)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이 빛나는 은으로 이루어진 이 구역들을 바라볼 때 그는 자신의 해방은 값으로 산 것이며 그의 헌신은 “영혼의 속죄”(출 30:12,15,16, 속전과 속죄는 동일한 히브리어의 번역)를 가져온 “속전”에 의해서 보증되었음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속전으로 만들어진 이 받침대들은 그 기둥들이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도록 받혀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통찰력이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속의 대가, 곧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의 생애가 온 성막과 그것을 위하여 세워진 모든 것의 기초가됨을 상기시켰습니다. 성소에 사용된 모든 은과 마찬가지로 베카의 은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이중 속전을 지불하신 예수님

그리스도는 성전에 온전한 세겔, 곧 두 베카를 바친 것으로 기록에 남은 유일한 분이십니다.(마 17:24~27) 사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의 속전을 매수하거나 바칠 수 없습니다.(시 49:7 참조) 그러나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 당신 자신을 인간과 동일시 하셔서 “장자”(히 12:23)가 되심으로 그리스도는 “두 몫”(신 21:15~17)을 받을 권리를 얻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속죄하며 그분의 순종은 우리를 위하여 받아들여진바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영원부터 사랑이신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속전으로 주셨으며 이 엄청난 사실들이 모든 성소 예배의 기초(은 받침)를 이루게 됩니다. 성소의 벽이 세워지고 영원한 예배가 시작될 수 있기 전에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의 은 받침대가 하나님의 계시된 목적을 유지하기 위하여 바로 이 땅의 흙먼지 위에 세워져야 하였습니다. 그분의 완전한 순종의 확실한 기초를 의미하는 이 베카들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고 경외하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귀중한 가르침을 알려 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들은 이 거룩한 성소를 살펴볼 때에 두렵고 떨리는 감격의 마음으로 임해야 할 것입니다.

 

PART 2.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연구

 

갈라디아서 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이 두 성경절을 통해 사망, 저주, 축복, 구원에 대해 자세히 살펴 볼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이 두 구절은 우리에게 확실한 십자가의 이해와 구원에 관한 깨달음을 갖게해 줄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과 자세로 함께 연구하기를 바랍니다.

 

사망의 쏘는 것이란?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이 말씀으로 미루어 사망은 저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나무에 달리시므로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를 위하여 저주로 삼으신바 되셨습니다. 저주와 사망은 죄로부터 이르게 됩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 율법에 불순종하는 것은 사망을 낳는다는 것을 갈라디아 3장 10절을 통해서 이미 배운 바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그저 살아있는 모습과는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말씀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요 6:53)다고 하시며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죽음 곧 사망의 몸인 것입니다(롬 7:24참조).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며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저주는 가장 매력적인 죄 속에 숨기어져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는 사망인 것입니다.

저주로부터의 구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읽고 생각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하셨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불순종의 저주에서 구속하신 것처럼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구속을 받았기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옳다라고도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지금까지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저주는 불순종입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아래 있는 자라”(갈 3:1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롬 8:4)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구속을 받을 수는 있으나 모든 사람이 다 구속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선택에 따라 하나님의 선물을 거절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귀하신 피 곧 참 생명으로 온 인류를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될 수가 있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율법의 모든 의로운 요구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지 않은데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의미이며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죄의 쇠사슬을 산산조각을 내셨기 때문에 모든 얽매이기 쉬운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분의 구원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더 이상 좋고 나은 미래를 위해 헛된 희망을 갖고 또 그것을 위해 애쓸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감옥 문을 활짝 여시고 죄의 포로들인 우리에게 “나오라”고만 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그의 승리는 곧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승리를 받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셨”다는 말씀은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고후 5:21)바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나무에까지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그의 몸으로” 짊어지셨다는 것은 그저 피상적인 일이거나 상징적인 일이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그 일로 인해 죄들이 그 안에 있게 되었고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바 되었으며 그 결과 우리를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몸으로 짊어지신 것은 그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들의 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벧전 2:22;고후 5:21 참조) 사망을 삼키는 무한한 생명의 능력으로 죄를 받으셔서 완전히 삼켜 버리셨습니다. 우리에게 그의 이 놀라운 생명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육신 속에 있는 온갖 죄로부터 해방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들은 이미 정복되었고 쓰러진바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패배당한 원수와 싸우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우리 자신을 그의 죽으심과 살으심에 바칠 때에 우리는 그의 이름을 헛되이 지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십자가의 도이며 하나님의 능력이시며 그의 위대한 사랑이며 온 인류에게 전하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인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밝히 보여주신 것

1. 죄와 사망으로 부터의 구속은 십자가를 통해서 완성되었습니다.

2. 복음은 모두 십자가에 들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이 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이기 때문입니다.

3. 그리스도는 죄에 빠진 인류에게 오직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분으로 드러나 계십니다.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전하신 모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바울이 알고자 했던 모든 것이며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입니다.

4. 그리스도는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속주로 사람들 앞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주에서 구원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담당하시는 것으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저주가 있는 곳에는 어디에서나 그 저주를 담당하신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셨고 지금도 여전히 담당하고 계십니다. 즉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땅에 선고된 저주(창 3:18)로 신음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속을 받았습니다.(롬 8:19~23 참조)

5.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담당하신 것은 오직 십자가 위에서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위해서 저주가 되신 것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나타났기에 그러합니다.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저주로 부터의 구원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정복자요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저주 그 자체는 십자가를 제시하며 우리의 구원을 선포합니다.

6. 저주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 지상에 관련되어 있는 모든 것 위에는 불완전함이 있습니다. 바로 이 불완전함이 저주입니다. 인간도 불완전하고 아름다운 초목도 그 옛날 하나님께서 좋으셨다고 하시던 그 아름다움으로 보면 불완전한 것입니다(사 26:4 참조).

7. 이 모든 일의 결론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살전 5:9). 저주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땅과 인간 안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디에나 있다는 놀라운 증거입니다. 모든 풀잎사귀와 모든 꽃과 과일 심지어 매일 우리 앞에 놓여진 음식물까지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인이 찍혀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도 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숨 쉬며 기동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복음이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이 그가 만드신 모든 만물 안에 나타나 있으며 그 능력이 곧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엡 3:20)인 것입니다.

저주에서 축복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자들

우리가 죄의 깊음 가운데 있으나 살아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자신께서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 심지어는 저주까지도 사실은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죄 됨은 만일 주님을 믿으면 절망의 원인이 되는 대신에 구속의 보증이 됩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또한 우리가 주 예수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진다면 예수의 생명도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날 것입니다.(고후 4:10,11 참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고후 5:21 참조) 그가 짊어지신 저주를 통하여 우리가 받는 축복은 바로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입니다. 저주는 범법이므로(갈 3:10 참조) 축복은 우리 각자가 우리의 죄와 허물에서 돌아서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저주와 사망의 고통을 받으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복은 무슨 복이었을까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8 참조). 이 축복은 이방인에게 뿐만 아니라 믿는 유대인에게도 임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무할례시에 이 축복을 받고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축복은 죄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이며 저주는 죄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주가 십자가를 드러낼 때에 바로 그 저주는 주님에 의하여 축복으로 선포되어 집니다. 비록 우리가 죄인이기는 하지만 살아 있다는 사실은 죄로부터의 구원이 우리의 것이라는 보증이 됩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엡 1:3)주셨습니다. 그것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축복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가 이 선물을 원치 않았거나 혹은 고의로 내던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이유 외에는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이 축복을 넘치게 받을 수 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받고 믿는다면 죄가 우리를 절대로 지배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인이 깨달아 알아야 하는 그 시대의 진리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약속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을 “성령의 선물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잘못 읽지 않도록 유의하여야 하겠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일은 우리에게 성령의 선물을 입증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인인 것과 구속받는 일은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는 일입니다. 성령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깨닫게 해 주시며(요 16:8참조) “증거 하는 이는 성령이시며 성령은 진리이시며(요일 5:7)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요일 5:10). 그리스도는 지상의 사람들 가운데 성령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십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이 증인의 증거를 받을 수 있고 성령의 소유자가 되는 것을 즐거워 할 수 있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이 우리 위에 임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약속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의 약속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면서 한 기업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기업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기업이며 우리가 믿음으로 그의 자녀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하신약속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시며 우리가 그의 자녀들로서 같이 참여하는 약속-한 유업의 약속-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의의 유업을 받도록하기 위하여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자기를 하나님께 흠없이 드리어 우리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히 9:14,15 참조)시기에 그러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14).

복음을 주신 하나님의 크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하나로 조화되게 하여 아름답게 하나님의 뜻 안에 통일되게 하고자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이 안에 우리들이 잘 조화 되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PART 1. 성령에 대한 연구

 

그 안에서 너희도…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요 12:35)

 

성령께서 우리를 방문하심

그 안에서 너희도…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하나님의 성령의 깊은 감동하심으로 성령께서 오시는 일의 특성이 성경에 공개되었습니다. 성경은 성령께서 임하신 영혼들 앞에 놓여진 위험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곧 대적의 격렬한 공격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 대적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허지로 돌아가게 만들 시험들을 가지고 그들을 압박할 것이며, 성령께서 나타내시고 증거하신 중대한 진리가 하늘의 빛을 받은 사람들을 정결하게도 거룩하게도 하지 못하게 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서 영화롭게 되지 못하도록 하려고 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 빛을 간직하지도 못하고 그 빛에 입각하여 활동하지 않는다면, 영적 광명의 시대는 그에 상응하는 영적 암흑의 시대로 변할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신령한 감동을 소중히 하지 않고 거룩한 곳에 거하지 않는다면, 성령의 감화는 마음에서 점점 사라질 것입니다.

영적인 지식 가운데 진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샘 옆에 서서, 은혜스럽게도 그들에게 열려진 구원의 우물물을 되풀이해서 마실 것입니다. 그들은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샘물을 떠나지 말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이 나타난 곳에서 감사와 사랑에 부푼 마음으로 그들은 계속 생수를 마셔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요 6:36). 이것은 많은 경우에 글자 그대로 성취되어 왔습니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진리에 대한 통찰과, 자비롭고 긍휼하시며 사랑이신 그의 품성에 대한 통찰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비추임을 받은 후에 그들은 그에게서 떠나 불신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빛을 다른 영혼들에게 반사하여야 하였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거룩한 계시에 조화되게 행해야만 하였습니다. 그렇게 행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잃어버린바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심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성령을 부어 주기 위해 내려 오셨습니다. 빛과 진리와 능력의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택한 백성을 자신에게 어떻게 복종시키십니까? 그의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입니다. 성령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마음에 말씀하시고 인간의 마음에 진리를 새기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보혜사를 그의 제자들에게 보내실 것이라고 확약하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8).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13,14절).

그리스도의 이 약속은 충분히 이용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결핍으로 인해 율법의 정신과 율법의 영원한 의무는 이해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관계는 여전히 존재하나 희미하게 이해될 뿐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 그분의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어렴풋이 이해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납하시는 헌신의 성격을 인간의 마음에 드러내시는 것이 성령의 직무입니다. 성령의 사역으로 영혼은 계몽되며, 품성은 새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고 고상하게 됩니다.

 

성령이 우리를 비추심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요 12:35)

“빛이 있을 동안에 다”니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단 하나의 빛 줄기도 놓치지 말고 모으십시오. 빛 가운데서 행하십시오. 우리에게 제시된 진리의 모든 가르침을 실행하십시오. 하나님의 입술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십시오. 그러면 그 때 우리는 예수께서 어디로 가든지 그분을 따를 것입니다. 주께서 증거에 증거를 더하시고, 빛에 빛을 더하시는데 영혼들은 왜 이 빛 가운데 걷기를 주저합니까? 왜 사람들은 빛에서 더 큰 빛으로 걷기에 왜, 그렇게 게으를까요?

주께서는 구하는 그들에게 그의 성령을 주시기를 거절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 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주의하지 않습니까? 모든 주저와 지체로 인해 우리는 하늘의 빛을 받아들이기가 더욱더 어려워지고 마침내 훈계와 경고에 감동되기가 불가능한 지경에 자신을 놓게 됩니다. 죄인들은 더욱더 쉽게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행 24:25)고 말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빛 안에서 행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방법을 따르고 자신의 판단을 따라 행하므로 심각한 위기를 자초하게 됩니다. 양심은 점점 무뎌집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더욱 더 멀어지고 범죄자는 자기 자신의 범죄에 열중케 됩니다. 고집으로 그는 모든 호소에 저항하고 모든 조언과 충고를 멸시합니다. 그의 구원을 위해 행해진 모든 준비에서 돌아섭니다. 하나님의 기별을 전하는 자의 목소리는 심령에 어떤 감흥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더 이상 그를 제어하는 권세를 발휘하지 못하며 “그는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호 4:17)는 선고가 내려집니다. 그의 홀로 서기는 얼마나 암울하고, 음침하며 완고합니까! 죽음의 무감각이 그의 마음에 있는 듯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는 영혼이 통과하는 과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