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Part 1. 성령에 대한 연구

 

성령을 의도적으로 거절함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12:32).

 

예수께서 사귀 들리고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고치시는 이적을 두 번째로 행하셨을 때에 바리새인들이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9:34)는 비난을 되풀이한 것은 이 일이 있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성령의 역사를 사단의 행위로 여김으로 축복의 근원에서 자신을 차단하고 있다고 명백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신적인 신분을 전혀 알지 못하고 예수를 반대하던 자들은 사유하심을 받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사람이 회개하고 믿는다면 죄가 어떠하든지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거절하고 이를 사단에게서 온 것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저들과 교통하실 수 있는 통로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성령을 끝까지 거절하면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위하여 더 이상 아무것도 하실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강퍅케 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잘못을 시정하고 안전한 길로 저들을 인도하시기 위하여 빛을 보내십니다. 눈이 멀고 마음이 강퍅케 되는 것은 이 빛을 거절함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흔히 이 과정은 점차적이요 거의 알아챌 수 없게 진행됩니다. 빛은 하나님의 말씀과 당신의 종을 통하여 혹은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를 통하여 사람에게 임합니다. 그러나 한줄기의 빛이라도 무시할 때에 영적 감각력이 부분적으로 마비되어서 두 번째에 나타나는 빛은 그만큼 분명하게 식별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하여 암흑은 증가되고 마침내 영혼이 밤과 같이 어두워집니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였으나 진리를 대적하기 위하여 성령의 역사를 사단에게 돌렸습니다. 이렇게 행함으로 그들은 고의로 기만을 선택하였습니다.

 

 

지금이 회개할 때임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무엇이 성령을 거역하는 죄가 됩니까? 그것은 고의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사단에게로 돌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의 특별한 역사를 목격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는 그 일이 성경과 일치된다는 것과, 성령께서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그의 마음에 증거해 주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는 유혹을 받아 타락합니다. 이제 그는 교만, 자부심, 그 밖의 다른 악한 특성이 그를 지배하도록 자신을 내어줍니다. 그리하여 그 역사의 거룩한 특성에 대한 모든 성령의 증거를 거절하고, 그가 이전에 성령의 능력으로 인정했던 것이 사단의 능력이었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의 매개를 통해서 인간의 마음에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성령을 거역하고 그것이 사단에게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의 통로를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즐겨 그들에게 주신 증거를 부인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비취고 있던 빛을 꺼버립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어둠에 묻히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말씀,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냐(6:23)라고 하신 말씀이 입증됩니다. 이 죄를 범해온 사람들이 한동안은 하나님의 자녀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품성을 나타낼 환경이 되어지면 그들은 스스로 그들이 어떤 형태의 정신에 속한 사람인지를 드러내 보일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들이 원수의 땅에 있다는 것, 즉 사단의 검은 깃발 아래 서 있다는 것이 발견될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께서는 오늘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예수께로 나아갑시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자복하고, 모든 죄악을 버립시다. 그리하면 우리는 그분의 모든 약속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45:22)는 은혜의 초청을 받아들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는 인내하며 기다리심

볼지어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3:20).

 

나이가 든 고명한 자이든 어리고 연약한 자이든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에게서 진리를 명백하게 배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만이 심령을 구원하시는 참 진리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생의 말씀을 정직한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께서는 배우고자 하는 모든 영혼들을 가르치기 위해 인내하며 기다리십니다. 잘못은 세상이 이제까지 알았던 교사 중 최고로 위대한 교사인 자원하신 그 교사에게 있지 않습니다. 잘못은 자신의 감정과 사상을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고 그의 인간적인 이론들을 포기하지 않으며 겸손하게 배우려 하지 않는 학생에게 있습니다. 농부가 땅을 갈 듯, 건축가가 건물을 세우듯 우리는 우리의 양심과 마음이 교육받고 훈련받도록 마음 밭을 잘게 갈아야 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3:9)고 알려주시는 말씀에 마음을 내어 놓으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은 신령한 형상에 따라 형성되고 꼴 지어져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우리의 사랑하는 친구들과 청년들과 노인들에게 영원한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만약 너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인생의 안내자로 삼지 않는다면, 너희는 그의 지혜와 그의 영적인 삶을 알지 못할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6:53~56).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63).

 

우리는 성경을 연구하며 그것을 가장 열심히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 열심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심장부에 진리를 취하며, 사랑으로 역사하고 영혼을 정결케 하는 믿음이 자라나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믿는 그 믿음을 통해 성령의 성화를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우리의 근육들은 우리가 먹는 생명의 양식에 의해 영양분을 공급받습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영적인 근육들도 우리가 매일 심령에 받아들이는 말씀들로 하늘의 영양분들을 공급받게 될 것입니다.

 

Part 2.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연구

 

갈라디아 3:19~2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기업은 완전히 약속에 의해서 주어지며 확정된 약속은 변경될 수 없고 조금이라도 가감할 수 없는데 왜 430년 후에 율법이 들어오게 되었습니까? 다시 말해서 왜 율법이 생겼습니까? 그러면 율법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율법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성경 안에서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5:20). 이 말씀을 다른 말로 하면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7:13)입니다. 율법은 가장 두렵고 엄숙한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그들의 불신으로 약속된 유업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경고로 주셨습니다(19장 참조). 그들은 아브라함처럼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14:23)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업은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므로(4:13) 믿음이 없는 유대인들은 그 유업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유업의 소유에 필요한 의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의가 율법에서 오지는 않지만 의는 율법의 증거를 받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3:21). 다시 설명하면 그들이 믿음을 가지지 않았으므로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며 그 이유로 유업을 상실하는 것이 지당한 일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일 그들이 믿었더라면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새기신 것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의 마음에도 하나님의 율법을 새겨 두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불순종하면서도 여전히 약속된 후사라고 주장했을 때에 그들의 불신은 죄라는 것을 그들에게 가장 눈에 띄는 방법으로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들의 범법함을 인하여 율법을 주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백성들의 불신 때문에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시내산에서 율법이 가입한 것(5:20)은 그 율법이 그때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아브라함의 시대에도 있었고 또 그가 그 율법을 지키었음을 창세기 26 5(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의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시내산 에서 율법을 선포하시기 한 달 여 전에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가 아니 지키는가를 시험하셨다고 출애굽기 16장을 통해 알려 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 19절의 더한 것이라고 번역한 말씀은 히브리서 12 9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에서 말씀하다로 번역된 단어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신명기 5 22절에 나오는 하나님이 큰 소리로 십계명을 말씀하시고 더 말씀하시지 아니 하셨다는 단어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범법함을 인하여 말씀하신 것이라입니다. 이것은 곧 죄를 책망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신뢰로 인해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불평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할 수 있고 그 분의 약속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6:28)라고 물은 그들의 자손들과 동일한 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자기 신뢰의 위험성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 하느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그들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알지 못했으므로 그들 자신의 의를 하나님의 의와 동일한 것으로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10:3 참조). 만일 그들이 그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다면 약속은 그들에게 아무 소용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에 율법을 주셔야 할 필요성이 있게 된 것입니다.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1:14). 시내산에 있었던 천천만만의 천사들(68:17 참조)이 어떤 일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들에게 복음의 전파가 맡겨진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인간에 관련된 모든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땅의 기초가 놓일 때에 그들은 노래하였으며(38:7 참조) 인류의 구세주가 탄생하셨을 때에도 그들은 기뻐 찬양을 드렸습니다. 스데반은 그의 증언에서 산헤드린 회원들을 향하여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 하였(7:51~53)다고 하였습니다. 천사들은 능력이 있(103:20)으며 그들이 율법을 선포하는 자리에 참석했다는 사실은 이 율법의 선포는 크고 중대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중보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딤전2:5) 바로 우리의 구세주 이십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4:12)

 

그리스도께서는 원수 됨을 없애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기 위하여 오셨습니다(8:7). 그는 우리의 화평이 되시기 때문입니다(2:14~16). 그분은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벧전3:18)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5:1,2; 2:18 참조). 중보로서의 그리스도의 일은 시간이나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그는 중보가 되셨으며 우주에 죄가 없고 속죄가 필요 없게 될 때에도 중보자가 되실 것입니다.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1:17). 그는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이며 생명이십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 안에서만이 하나님의 생명이 모든 피조물에게 흘러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생명의 빛이 온 우주에 충만하게 되는 중보이시며 길이십니다. 인간이 타락했을 때에 처음으로 중보자가 되신 것이 아니고 영원부터 그 분은 중보자이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창조되었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가 구속을 얻는 것입니다(1:14~17참조). 우주를 충만하게 하고 붙들고 있는 능력은 우리를 구원하는 그 능력인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 하기를 원하노라 아멘(3:20,21). 

 

율법은 약속을 거스리지 않음

모든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고후1:20 참조) 율법과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과 약속을 주셨다는 사실에서도 율법이 약속을 거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율법을 주신 것이 언약에 새로운 사항을 더 넣은 것이 아님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확증을 했으므로 더 넣거나 빼거나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소용없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지키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은 어느 때나 변함없이 약속을 거스리지 않으며 또 새로운 사항으로 율법을 부가하여 넣은 것도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율법이 언약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약속에 이 율법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8:10). 이것은 하나님께서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7:8)을 때에 그에게 행하여진 것을 가리키는 말씀(4:11; 2:25~29; 3:3 참조)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율법은 약속을 높임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세상을 유업으로 상속 받으리라는 약속은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4:13) 이루어진 약속입니다. 또한 율법은 하나님께서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51:7)에게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요구하는 의는 약속된 땅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의가 됩니다. 그러나 이 의는 율법의 행위로 얻지 못하고 믿음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의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약속도 더욱 크게 보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의를 주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시내산에서의 엄숙한 장면은 하나님의 율법의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함과 위엄을 나타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맹세를 기억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의 위대함을 계시한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의를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기로 맹세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선포하신 큰 음성은 산꼭대기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자비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큰 음성이었습니다(40:9 참조). 하나님의 계명은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계명은 반드시 이와 같은 약속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것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만 하면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죄로부터 지켜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보증인 것입니다.

 

생명과 의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21).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의는 생명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것은 단순히 형식이나 생명이 없는 이론이나 주의가 아니라 살아있는 행동입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의가 되십니다.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8:10). 두 돌비에 쓰여진 율법은 생명을 줄 수 없고 율법이 쓰여진 돌비도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모든 율법이 완전하나 생명이 없는 문자들이 변하여 살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율법의 문자만을 받는 사람은 정죄의 직분과 사망을 가질 뿐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셨고 산 돌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은 생명과 평안이 됩니다. 영의 직분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받을 때에 율법이 시인하는 의의 생명을 가지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갈라디아서 8절과 22절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복음이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 둔 같은 성경에 의해서 전파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두었다는 말은 23절에서와 같은 글자 그대로 매인다는 말입니다. 법에 의해서 가두어진 사람은 감옥에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나라에서도 범죄자는 법에 의하여 그를 붙잡아 가둡니다. 하나님의 법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항상 작용하고 있으므로 사람이 죄를 지을때에 즉시 그를 가둡니다. 이처럼 온 세상은 다 마찬가지로 매인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3:23,10)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높은 성소에서 하감하시며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신 이유와 목적은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102:19,20)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내어 주시고 그를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42:6,7). 얼마나 감사한 약속이신지요! 여기에, 개인의 경험에서 아직까지 주께서 주시는 기쁨과 자유를 알지 못하는 한 죄인이 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는 이런 기쁨과 자유를 체험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로 죄를 깊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지난 날에는 의심이 많았고 망설임이 있었으며 쉽사리 자기 변호를 늘어 놓았지만 죄를 깨달은 그 때에는 아무런 할 말이 없게 될것입니다. 하나님과 성령이 계시는 것에 대해 전혀 의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또한 옥에 갇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알게 될것입니다. 율법의 돌비가 그의 생명을 박살내는 것 같이 느끼게 되어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 까 하나이다(20:19)라고 느낄 것입니다. 그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그가 받도록 하기 위한 유일한 목적을 위하여 갇혀 있었다는 말씀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때 그에게는 생명을 얻은 큰 기쁨이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약속의 말씀을 붙잡을 때에 우리를 둘러싼 감옥 문은 즉시 활짝 열릴 것입니다. 우리는 큰 기쁨으로 우리 혼이 새가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남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 났도다(124:7)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율법아래 매인 바 되고

이제 우리는 성경이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기 위해서 임을 배웠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으며 후에 계시될 믿음이 계시되기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나 죄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14:23 참조). 그러므로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죄 아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가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로부터 구원을 가져다 주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에 죄로부터 해방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율법을 범하는 자들이며 의인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며 율법 안에서 행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몽학 선생이 되어

새 번역에서는 몽학 선생 대신에 가정교사로 번역되어 있으며 독일어, 스칸디나비아 성경 번역본에는 교도소의 감독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헬라어에서는 영어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정교사로 나와 있습니다. 예전에 가정교사들은 아이들을 잘 교육시키기 위하여 매를 때리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두가지의 의미를 잘 살펴서 보면 율법은 진정한 가정교사이며 죄 아래 있는 죄인들을 감독하는 몽학선생이자, 감독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죄인은 스스로 그들의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은혜스러우시지만 죄인을 죄 없다고 하시지 않으십니다(34:6,7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그들의 죄를 떠날 수 있는 길을 제공하십니다. 죄인이 이 구원의 길을 따라갈 때 율법은 더 이상 그들을 대적하지 않으며 더 이상 그들을 가두지도 않습니다. 사실적으로 율법은 죄인에게 감옥을 만들어 줍니다. 죄인을 가두고 불편을 느끼게 하고 생명을 짓누르는 죄책감으로 압제를 가합니다(5:22,고전15:56 참조). 아무리 벗어날려고 노력을 해도 헛된 일 뿐입니다. 아무리 율법과 친구가 되려 하고 율법을 지키겠다고 약속한다 하더라도 그의 죄가 여전히 있기 때문에 더 나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 율법은 몽학 선생이 되어 죄인을 도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로 몰고 갑니다. 죄인은 유일한 길인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자유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이 하나님의 의가 되기에 그러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1:25)이 있음을 알려 주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고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 하겠습니까!

 

믿음이 오기 전에

이 구절이 믿음이 올 어느 때가 있다는 그런 뜻일까요? 전혀 아닙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곧 우리 안에 율법을 이루므로 더 이상 율법을 대항하지 않고 율법에 복종하게 하는 약속의 말씀을 받을 때에 바로 그 때에 믿음이 그 사람에게 이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살펴 보면 아벨의 시대이래 사람들은 믿음을 통해 자유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유일하게 정해진 시간은 지금, 오늘날뿐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 이로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후6:2,3:7,8)는 사도 바울의 음성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를 옷 입었느니라.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6:3).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와 함께 죽지 않으면 안됩니다. 침례는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연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됩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2:20 참조)을 뜻합니다. 그리스도를 옷 입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며 우리는 완전히 그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모든 것에 권리를 가지며 그리스도가 앉아 계시는 하늘에 갈 권리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물론 침례가 하나의 실제이며 단순히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침례를 받는 것은 단순히 물 속에 잠기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인류는 어떠한 차별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이것이 복음의 기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같은 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모두 다 같은 방법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온 인류는 어떤 인종이나 어떤 상태 하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서 동등합니다. 너희는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리고 그리스도는 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여럿을 가리켜 네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오직 한 자손 밖에 없으며 그 자손은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자들을 포함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곧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도록 인도 할 수 있는 마지막 영혼이 그를 받기까지는 오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유업을 받는 자들이므로 그들이 유업을 받기 전에는 그리스도께서 유업을 받을 수가 없기에 그러합니다. 자손은 하나이고 둘로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기를 원하지 않노라고 말한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때에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14) 오실 것입니다. 그 때에 자손은 완성될 것이며 그 약속은 성취가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율법은 충실히 죄인들의 양심을 일깨우고 찌르는 일을 행할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거나 또는 완전히 거절하기까지 쉼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진정으로 율법에 대하여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하며 불평을 그치고 율법의 요구를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약속에 의한 유업을 받을 자로서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며 기쁨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Part 3.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표 성소에 대한 이해

 

B. 번제단

우리의 모든 고난조차도 주님의 것임을 뜻하는 의미로 지금도 우리의 마음 안에서 번제의 불이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이 놋제단은 성소 뜰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으며 예배하기 위해 들어 오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있었습니다. 이 제단의 실제 규모는 너비와 길이가 각각 5규빗, 높이가 3규빗이었습니다(27:1).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그것은 가로 세로 9피트, 높이가 5피트 6인치가 됩니다(성전 규빗의 길이는 1.8피트). 이 높이는 제사장들이 제물을 손질하기에는 어려운 높이이기에 제단 사방으로 다닐 수 있는 하나의 단을 만들었습니다(27:5,38:4). 이것을 제사장들이 밟고 제단 주위를 걸어 다녔기에 그 길을 둘레 길이라고 불렀다고 유대 역사에 나와 있습니다. 이 둘레길은 흙으로 만들었고 사람의 벌거숭이가 노출되지 않도록 금지되었으므로 계단이 아닌 경사로에 의해 오를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 단 네 귀퉁이에는 고리가 붙어 있어 고리에 놋을 입힌 막대기를 끼워 레위인들이 어깨에 메고 제단을 옮길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희생 제물에서 나온 피 때문에 미끄러울 때는 그 경사로에 소금을 뿌렸습니다. 이처럼 번제단은 광야 생활의 실제적인 한 부분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매일의 실제적인 삶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26:6에서 이런 의식들을 생각하며 노래하기를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번제단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나무와 놋

다윗은 의인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했고 침례 요한은 이스라엘을 나무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생명나무이십니다(2:7, 22:2). 나무는 썩기 쉬운 물질을 시사하며 상징적으로 시간의 황폐 행위에 상처를 입기 쉬운 인간의 연약성을 나타냅니다. 모세는 보잘것 없는 떨기나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나타냈으며(:2-4) 이 키 작은 아카시아 관목은 내주하는 쉐키나를 통하여 빛나게 되었고 불타는 신성의 임재를 견뎌냈습니다. 이와같이 성소에 있는 모든 나무는 타락한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표상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나무들은 불멸의 금속인 동, , 금을 입힘으로써 손상을 당하지 않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번제단은 브사렐이 성막과 그 기구들을 만들 때 구리로 쌌습니다. 그리고 약 20년 후에 고라의 반역에 가담했던 250명의 족장들이 사용했던 향로들로 덧 씌워졌습니다. 이 사실은 한때 반역의 상징이었던 놋 향료들을 통해 반역이 영원한 희생 제단의 봉사를 보강시켰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놋 혹 구리는 불패와 내구의 상징으로 성경 여러 곳에 상징되어져 있습니다(6:1,4:13,40:15-24). 특별히 놋 뱀은 악마적인 사단의 세력을 파멸시키기 위하여 장차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취하실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나와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구리에는 차츰 푸른색의 이끼가 끼이게 됩니다. 이것 또한 십자가에 바쳐진 희생제물로 인해, 절망적인 죄의 긴 겨울 다음에는 녹색이 상징하는 희망의 봄이 죄인의 마음에 솟아 날 것을 알려 주는 귀한 상징이 아닐까요! 이처럼 제단에서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영원한 속죄의 제단에서 나오는 불과 피의 준비가 없으면 성소의 모든 봉사는 우리를 구속하는 일에 아무런 효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단의 뿔

뿔은 성경에서 힘과 권세의 표로 사용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 중에 죽임을 당하고 살아 나신 일곱뿔을 가지신 어린양을 보았습니다. 이 일곱 뿔은 완전한 능력을 증거합니다. 뿔은 기름을 넣어 두는 그릇으로 사용되었으며(삼상16:1,13; 왕상1:39) 성령의 상징으로서 이 붓는 기름(관유)은 선지자, 제사장, 왕을 위임하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능력의 근원으로서 하늘을 그들에게 가리키는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리의 그리스도께서도 이 모든 세 직임에 대하여 기름 부음을 받았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뿔은 회중들을 소집하거나 알리는 일에 쓰이는 악기로도 만들어졌습니다(10:1-10; 4:5; 33:3-6; 2:1). 그것들은 여리고 전쟁에서, 또 기드온에 의해서 사용되어졌으며 월삭이나 희년에 백성들을 부르는 데에도 사용되었습니다. 특별한 기별을 전하기 위해서는 뿔로 만든 나팔이 분명한 소리를 내야 하였습니다(고전14:8). 또 뿔은 어떤 동물들에게 있어서는 공격과 방어의 무기입니다. 이와 같은 뿔에 대한 모든 사상은 제단 뿔의 의미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뿔은 그 힘을 나타냈고 기름과 아울러 피로써, 하나님의 어린양과 성령의 봉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옛날 제단의 뿔의 또 하나의 역할은 속절없는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로 사용된 것입니다. 복수를 피해 가는 도망자들은 뿔을 붙듬으로써 자기 자신을 여호와의 보호 아래 놓고자 노력했습니다(3:14; 17:1; 왕상1:50-55). 그러나 회개하지 않은 자와 범죄한 자에게는 이 피난처가 무효였음 또한 기억하여야 합니다(21:13,14). 제단에서 끌어내어 죽임을 당한 요압(왕상2:28-34)과 솔로몬을 반역한 아도니야(왕상1:50-53,2:23,24)의 무서운 일이 성경에 나와 있음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성소 뜰 의식들의 중심인 제단 봉사

성소 봉사는 제단, 특히 불과 피에 직접적으로 의존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늘의 불로 붙여진 제단의 불과의 접촉이 없이는 어떤 속죄의 제물이 바쳐지거나 감사 제물이 드려질 수 없었습니다. 또 어떤 진설병이 굽어지거나 등불이  켜지지도 않았고 향도 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연중 절기와 금식은 물론이며 전체적으로 행해진 매일의 의식들도 이 하늘의 불이 없이는 행해질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번제단은 성막 뜰 한 복판에 모든 예배의 기초로 서 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피와 가납해 주시는 하늘의 불이 없이는 우리의 구원은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과 영혼 사이에 지정된 만남의 장소인 자아 희생의 제단에서 우리의 마음을 밝히 살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필요를 드러내 주는 이 하늘의 불이 우리의 마음을 밝혀 주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 성경의 교훈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 하늘의 불은 열납하시고 정결케하는 하나님의 품성을 상징합니다(4:24,9:3; 12:29; 6:6,7). 풀무의 불은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그 불은 우리를 정결케 하며 거룩하게 해 줄 것입니다(3,벧전1:7).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칠 때에 그의 마음의 제단에서 하늘의 불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불이 타 오를것입니다. 이 불로 우리 마음에 쌓여 있는 더러운 이기심의 쓰레기들을 치우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의 불이 우리의 마음을 태우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그 분의 무아의 사랑은 거룩한 말과 사상과 행동이 되어 우리를 태우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불은 우리의 이웃과 세계로 흘러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하신 특권이 아닙니까! 이 특권은 우리에게 일상 생활에서의 완전한 헌신을 요구합니다. 그 옛날 번제단에서 제물이  완전히 태워져야했던 것처럼 거룩함이란 하나님께 우리의 전체를 바치는 것입니다.

 

제단에서 나온 재의 의미

이 잿 더미는 대리 희생 제물이 완전하게 태워졌다는 것을 경배자들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한동안 제단과, 뜰로 들어가는 입구 휘장 사이에 남겨 두었습니다. 이 재들을 서둘러 치워 버리지 않은 이유는 그 재들이 의미하는 경고와 격려가 그들의 사상에 깊이 새겨 지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재들은 또한 회개하지 않은 자들의 운명을 가리켰습니다. 시편73:17에서 아삽은 성소에서 이 잿더미를 보고 그것이 저희 결국에 대한 것임을 깨달았음을 알려줍니다. 제단에서 재를 옮기고 나면 제사장은 그의 특별한 옷을 벗고 그의 정규적인 옷을 입었습니다(6:10,11). 그리고 적당한 시간이 지나간 후에 그것을 그릇에 담아 개인의 속죄 제물을 태우는 영문 밖 정결한 장소로 가져 갔습니다. 이 장소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히브리 백성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것을 의미하여 줍니다(13:11,12). 사실 성벽 바깥의 이 장소는 사실상 제단의 연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위에서 특별한 속죄 제물의 시체들이 태워졌기 때문입니다(16:27,6:30). 이 재처럼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제단에서 끌어내어 지셨고 한동안 그 분의 죽임 당한 장소 가까이에 있는 굴 속에 눕혀져 있었습니다. 이 재의 의미를 이해한 모든 사람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희생의 의미를 더 깊이 마음에 새기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불 외에 다른 그 어떤 불도 사용되어서는 안 됨

여호와께서는 하늘의 불이 아닌 다른 불을 제단에 결코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30:9). 우리에게는 술에 취해 다른 불로 불을 붙인 향로를 들고 들어간 나답과 아비후의 슬픈 역사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늘의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아벨의 제물은 받아 주었고 가인의 피 없는 제물은 거절하였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거룩한 불이 아닌 세속적인 불, 즉 자신의 생각, 계획, 감정, 비뚤어진 품성에서 나오는 불로는 절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서 비취는 빛은 결코 그들 스스로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세상의 빛이시며 생명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이 거룩한 불 외에 다른 불을 사용하지 않도록 우리를 경고하십니다. 다른 그 어떤 불도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우리를 유혹하며 결국은 멸망으로 내몰것입니다.

 

갈보리 제단의 십자가의 의미

그 옛날 한 회개자가 그의 제물을 바치고 죄를 고백하고 그의 제물을 죽이는 제단에서의 봉사는 그 회개자에게서 그의 죄를 분리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불은 그를 하늘이 받아주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제단 위에 그를 대신하여 놓여 있는 제물을 사르었습니다. 그는 이제 무죄로 간주되었습니다. 이 의식들은 모두 장차 세상 죄를 위하여 갈보리에서 돌아가실 하나님의 어린 양을 가리키는 표상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희생의 갈보리 제단의 십자가가 그의 생애와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 곳에서 우리는 모든 죄에 대하여 용서를 받고 필요한 모든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이 희생을 기억하고 명상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대신한 그리스도의 죽음의 참 가치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십자가의 희생은 그분의 제사장 중보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더해 줄것입니다. 하늘 성소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현재의 우리의 위치에 대하여서도 깊은 깨달음을 더해 줄것입니다.

 

Part 4.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알고 행해야 하는 교훈

 

우리들은 시련을 겪는다는 것이 무엇임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의 모양이 아닌 능력으로 자라나기 위해서 우리들은 불어오는 시련들을 실제적으로 견디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시련들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열렬한 기도로 하나님을 찾게 하며 그분을 믿고 단순한 믿음으로 그분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덕성이 시험을 받게 되고 우리의 믿음이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야말로 예수님의 고귀하심을 절실히 느낄 때입니다. 우리들은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니(13:15,KJV)라는 욥의 경험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 경험은 우리가 위기에 직면하였을 때나 슬픔과 질병과 고통과 사망 가운데서라도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고백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꼴지어 줄 것입니다.

 

교훈 17. 참된 경건의 부흥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이 주님의 조건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과 마찬가지로 도덕 관념 역시 우리들의 생애와 성품에 영향을 미칩니다. 각자의 영혼에게는 싸워야 할 투쟁이 있고 쟁취하여야 할 승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그대로 일들이 성취될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애와 가르치심을 통해서 주신 모든 교훈을 정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이사야 42:3)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무엇을 만지시든지 그것을 온전하게 성장시켜 주십니다.

 

이처럼 이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사업에 있어서도 필요한 것은 돈이나 재능이나 학식이나 웅변이 아니라 겸손으로 훈련된 믿음입니다. 주님의 사업을 위하여 기꺼이 수고하며 희생과 비난을 참는 이들이 믿음과 겸손의 태도로 증거하는 진리는 그 어떤 반대도 이겨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모든 수고가 성공을 거두기 바란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동역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저들 자신을 위하여 울지 않을 자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우셨던 것처럼 울어야 하며 저들 자신을 위해서 탄원하지 않을 자들을 위하여 주님께서 탄원하시는 것처럼 탄원해야 합니다.

 

거룩한 능력이 인간의 노력과 연합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사업은 마치 바짝 마른 지푸라기에 불이 번지는 것처럼 확대될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있어야 할 참된 경건의 부흥은 우리의 모든 필요 중에서도 가장 심각하고 긴급한 일입니다. 이러한 신앙 부흥을 일으키는 것이 우리의 첫째 사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축복을 받기 위한 열렬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고 싶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축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세상의 부모들이 저희 자식들에게 좋은 선물을 주고 싶어하는 그 이상으로 당신께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축복을 허락하시는 약속에 대한 조건들을 성취시키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며 그 조건들이란 죄에 대한 자복, 겸비, 회개 및 열렬한 기도임을 알려주십니다.

 

신앙부흥은 오직 이러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기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성령을 받지 못하는 한 우리들은 주님의 말씀을 주님의 뜻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권능이 우리들의 심령을 감동시킬 때에만 우리가 들은 설교가 무익한 것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따를 때 우리는 귀중한 경험을 얻게 될 것이며 건전한 감화력을 발휘할 준비를 하게 될 것입니다. 옛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기도로서 하나님과 씨름한다는 것과 성령의 부어 주심을 받는다는 의미가 무엇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우리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진정으로 회개하였습니까? 우리는 하늘 성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업에 대하여 각성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자신이 일깨워지기 전에 어떤 강력한 능력이 임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들은 모든 기독교계 전체가 부흥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한 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교훈 18. 믿는 자들이 경계해야 하는 것들

우리 안에는 회개하지 않은 자들이 있으며 열렬하고 힘있는 기도에 연합하지 않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사업에 헌신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더욱 많이 기도하고 말은 더욱 적게 하여야 합니다. 죄악은 관영하며 그리스도인들은 참 뜻과 능력이 결여된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만족하는 일이 없도록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심중을 열심히 살피고 죄들을 버리며 악한 습성들을 고친다면 우리의 영혼은 헛된 일에 마음이 들뜨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불신하게 될 것이며 우리의 능력은 하나님께 있다는 영속적인 의식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저들의 모순이 없는 생애, 경건한 모본 및 활동적인 감화력으로서 저들이 대표하고 있는 사업을 증진시키고 영화롭게 하는 가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자주 진리를 옹호한다고 공언하는 자들이 진리의 발전에 대하여 가장 큰 장애물들임을 스스로 증거하고 있습니까! 불신하고 의혹을 나타내는 것은 악한 천사들이 나타나도록 장려하고 사단의 계획을 성취시킬 길을 여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악적인 사상과 감정을 억제하고 그것을 말과 행동으로 나타내지 않는다면 사단은 경우에 알맞은 그럴듯한 시험 거리들을 준비할 수 없으므로 패배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자제력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자주 영혼들의 원수에게 문을 열어주고 있습니까! 그릇된 감정을 지배하기 위한 노력이 거의 없고 사단에게 이용거리가 될 모든 말을 억제하는 노력이 없으므로 세상 사람들도 부끄럽게 여길 분열과 갈등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존재합니다. 비난과 그것에 대한 공박은 사태를 위태롭게 하며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듭니다. 사단과 그의 천사들은 그처럼 뿌린 씨의 수확을 거두기 위하여 맹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대 기만자 사단은 시련에 버틸 힘이 없고 끊임없는 기도와 산 믿음으로 경계하지 않은 모든 영혼들을 위한 간계를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자복하고 모든 죄를 버림으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여야 하며 주님께서 당신의 풍성하신 은혜를 나누어 주실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세상과 함께하는 것으로는 그 길을 예비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묶어 놓은 매혹적인 세상의 감화력을 끊어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에 있어서나 단체에 있어서 잔인하고 단호한 원수의 끊임없는 유혹에서 우리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음으로써만 시험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 앞에 끊임없는 빛을 비추게 하여 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점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을 본 받는 길에서 완전히 돌아서는 것과 모든 악의 모양까지도 버리는 일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그것을 실천에 옮김으로 반대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조롱할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비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난을 받게 될지라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비난이 되어야 하며 우리 자신의 죄나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비난이 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하여야 합니다.

 

교훈 19. 하나님의 임재를 예비하는 길

하나님의 백성들이 앞길의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 버림으로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실 수 있도록 하는 것만큼 사단이 두려워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단이 자기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세상 끝날까지 작거나 크거나 간에 또 한번의 큰 각성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단의 계책을 모르는 자들이 아닙니다. 사단의 세력을 물리치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위한 길이 예비될 때에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단이 하늘의 창문을 닫아 비가 땅에 내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그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내리는 축복의 소나기를 내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들이 겸손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으로 저희 죄를 자복하고 버리며 믿음으로 주님의 허락들을 주장한다면 악한 사람들과 사단은 하나님의 사업을 절대로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자리에 주님께서 임재하시는 것을 막을 수 없기에 그러합니다. 공개적으로나 은밀하게 영혼을 위협하는 모든 유혹과 모든 반대하는 세력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4:6)는 말씀에 의해 성공적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Amen.

 

Part 5.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나님의 남은 자손의 생활방식과 활동들

 

봉사와 자아 희생의 정신

참 교회가 예수님께서 모본을 보이셨던 봉사와 자아 희생정신을 가지고 각자의 능력에 따라 주님을 위하여 일하게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복음 사명을 성취하기 위하여 세계 곳곳의 모든 곳과 각 분야에서 열심을 다할 때 온 세계는 하나님의 경고의 기별을 받을 것입니다. 그때에 주 예수께서 능력과 큰 영광으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요즈음은 어디를 가나 단체의 사업이 개인의 노력을 대신하는 경향이 현저합니다. 인간의 지혜는 인터넷과 미디어 매개체를 통하여 한곳으로 집중하고 대형 교회들과 단체들을 세우는 것에 온 관심이 기울어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자선사업을 단체들과 큰 조직에 다 일임 시키고 있으며 분주한 삶으로 그들이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스스로를 합리화 시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점점 마음은 냉랭해가고 자기들 일에만 골몰한 나머지 심령은 이기심으로 무감각해지고 하나님과 인류에 대한 사랑은 심령속에서 점점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개인사업, 곧 어떤 사람이 대신하여 이룰수 없는 사업을 우리 각자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병자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봉사, 잃어버린 자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이 단체나 큰 조직에 의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영혼을 향한 개인적 책임과 노력, 직접적인 희생의 체험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지녀야 할 필수 요건들입니다.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19:13)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이 끝날 날이 몇년밖에 남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마지막까지 주님의 명령인 그 장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각 사람이 그분의 다시오심을 조용히 묵상하도록 자신을 훈련시키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야 할 것이지만 현재 주어진 의무 또한 등한히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이 오실때 당신을 기다리는 무리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사업 거래에 종사할 것이며 어떤 사람들은 들에서 씨를 뿌릴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추수장에서 수확할 것이며 또 다른 사람들은 맷돌을 갈고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생활의 의무와 책임을 버리고 한가하게 명상하며 종교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추진할 수 있는 모든 선한 일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힘있게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매일이 생애의 마지막 날인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이날이 우리에게 허용될 수 있는 마지막 날인 것처럼 경계하고 일하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과 사단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매일의 업무를 행함에 있어서 매순간, 죽었다가 다시 사시고 영원히 계신 그분의 힘에 의지하여 깨어 기다리며 일하는 것 뿐입니다. 매일 아침 그날을 위해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여러달 혹은 여러해를 기약하지 말것인데, 그 이유는 시간과 날은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단지 짧은 한날이 주어졌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한 날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인것처럼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계획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주님의 섭리가 지시하는대로 추진하든가 포기하든지 해야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 이루어지기를 힘쓰며 그분의 거룩한 뜻을 위해 사는 까닭입니다.

 

참된 하나님 날의 양심적인 준수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참 하나님의 날 준수를 통해 사람들 사이에서 창조주이신 그분을 아는 지식을 보존하기 원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주의 날을 통해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그분께로 우리의 마음을 향하게 하십니다. 그날을 통해 그분을 앎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고 평안을 누리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한주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날을 마음에 기억하고 그날을 계명에 따라 지키기 위해 준비하여야 합니다. 단지 율법적인 문제나 잘못된 동기로 그날을 지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날이 우리의 삶의 모든 국면에 미치는 영적인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억하고 그날을 엄숙히 준수할 때 세속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침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는 달리 엿새동안 열심히 일을 다할 것이나 제칠일인 하나님의 날을 범하는 어떤 의무도 그날에 남겨 두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생활에 꼭 필요한 일들은 이행해야 합니다. 즉 병자는 반드시 돌보아야 하며 궁핍한 자들의 필요도 반드시 채워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날에 고통당하는 자들을 도와주기를 게을리 하는자를 하나님은 죄없다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거룩한 날은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졌기에 그러합니다. 선하고 자비로운 행위는 하나님의 날의 의도와 완전히 일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날과 그 다른 날들일찌라도 구제받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우리의 부주의로 인해 단 한시간이라도 고통으로 인하여 괴로움 당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십일조와 각종 헌물에 관한 우리의 태도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떼어 놓으신 거룩한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 전도자들을 부양하는데 사용되도록 하나님 창고에 들어져야 합니다. 말라기 3장을 주의 깊이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십일조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헌신하고 그들의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여 그분의 사업에 협력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그들이 후한 마음으로 헌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그분의 자비하심에 대한 감사를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각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여정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기억은 우리의 마음을 찬양과 감사로 가득차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도자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확신으로 마음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오신 길과 우리의 과거 역사를 통해 주신 그분의 가르침을 잊어버리는 것 외에는 미래에 두려워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물이 주님께 너무나 지나친 희생이라는 생각 또한 감히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때로 가까이 갈수록 전도 사업의 필요는 계속해서 늘어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영생을 위한 우리의 적합성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시험 중에 처해 있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하여야 합니다. 품성에 이기심의 때가 묻어있는 자는 아무도 하늘에 들어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일시적인 소유를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청지기로서 재물들을 사용하는 것에 따라 영원한 부를 우리에게 맡길 수 있는지의 여부를 시험하십니다. 생애의 마지막에 겨우 남은 유산을 위탁하는 것보다는 살아있는 동안 청지기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그리스도인의 몸

성령의 열매의 하나인 절제는 우리의 몸에 해로운 모든 것을 버리고 건강에 유익한 것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것으로 시작 되어집니다. 요즈음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자극적인 음료들(카페인이 많이든 차, 커피, , 담배 등)은 중독성이 있으므로 우리의 정신과 판단력을 흐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속에 이러한 것들을 취하는 것은 우리를 죄된 방종으로 안내하는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런 것들을 삼가하고 완전히 끊어야 할 것입니다. 건강을 해치는 것은 무엇이나 육체적 힘을 감퇴시킬 뿐만 아니라 정신적·도덕적 힘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건강을 해치는 습관에 빠지게 되면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일이 더욱 어렵게 됩니다. 깨끗한 공기, 햇빛, 절제, 휴식, 운동, 적당한 식사, 깨끗한 물의 사용,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 하는것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참된 치료제들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한걸음 한걸음씩 그분의 본래 계획-사람은 땅에서 생산되는 자연 소산물을 먹는 것-으로 돌아가게 하시고자 애쓰십니다. 주의 다시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원래 에덴 동산에서 우리의 시조 아담과 하와에게 허락했던 식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이 목표를 항상 염두에 두고 그것을 향해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진실로 주님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큰개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특히 건강 개혁이 우리들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몸에 해로운 음식을 섭취하므로 생기는 신체적, 정신적, 영적인 손해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병든 짐승과 오염된 바다의 어류 등을 섭취한 결과들에 대한 위험성을 밝히 알아야 합니다. 이점에 있어서도 우리들은 자신들이나, 세상의 지혜를 의지하는 대신 우리의 지도자 되시는 주님의 지혜를 의지하여야 합니다. 좀 더 열성적으로 영적 잠에서 깨어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먹고 마시는 습관을 절제하는 훈련은 우리를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로 성장케 하는 일에 큰 유익을 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권장할 만한 참된 금식은 자극성 있는 모든 음식을 멀리하고 하나님이 풍성하게 마련해주신 건강하고 단순한 음식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땅의 음식을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해서는 더욱 적게 생각하고, 전체적인 신앙경험에 활력과 강건함을 가져다 주는 하늘 양식에 대해 더욱 많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여야 함

헌신하지 않은 주님의 일꾼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이 때때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인하여 슬퍼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업은 복된 주님의 감독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분께 나아가 전적으로 그분의 명령을 따르며 그분의 지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에 활력이 충만한 모습을 고대한다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면 됩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사업을 너무 급속하게 추진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혹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까닭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 사업을 촉진시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 사업은 하늘의 도움으로 연합되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날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전도자들이 지금 물러선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업은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에 따라 계속 전진할 것입니다.  

 

독자로부터 온 편지

 

나의 소개

저는 삼대째 내려오는 카톨릭 신자 집안에서 태어나서 자랐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작고하신 저의 할머니는 80이 넘은 고령에 카톨릭 신자가 되어 92세에 종부성사까지 보시고 영면하셨습니다. 생전에 할머니는 하루에 세번 삼종기도를 올리셨고 그시간을 정확하게 지키기 위해 식사시간도 걸르면서 매일 시계만 쳐다보시면서 사셨던 것이 기억에 납니다.

 

저의 부모님 역시 할머니 장례식을 카톨릭 의식으로 치루면서 자연스럽게 카톨릭 신자가 되었습니다. 아버님은 늘 조상님 제사때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회는 못써. 술도 못 먹게하고 담배도 못피게 하고 조상 제사도 못 지내게 하잖아 그런 말씀을 들으면서 자란 저 역시 자연스럽게 천주교가 최고의 교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가장 신자 수가 많은 큰 교단이었기에 믿을 수 있는 교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카톨릭에 입문하기 이전, 좀 더 젊은 시절에는 참 신앙 참 종교를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교회 저 교회 기웃거리며 방황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교회가 옳다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채 방황하다 결국은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카톨릭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아무런 생각없이 조상 대대로 믿어왔던 카톨릭에서 영세를 받게 되었고, 카톨릭 의식에 따라 혼배성사로 결혼식도 하였고, 태어난 아이들에게 유아세례까지 주면서 신앙생활을 하였지만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신앙을 갖고 거의 25년이 넘도록 성당 문턱을 넘나들게 되었습니다.

 

카톨릭 신앙 생활

종교의 자유가 없는 사우디 아라비아 현장 재직시에는 직원 Camp 한구석에서 비밀리에 행하는 공소(신부 없이 행하는 미사예절)에도 열심히 참석하였고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려고 노력했읍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영화를 몇 번씩 보면서 저는 감동 받았고 결혼도 하지 않고 묵묵히 성직자 생활을 해 나가는 신부님과 수녀님들을 진심으로 존경하였습니다. 로사리오(묵주) 기도를 드릴 때면 똑같은 기도문을 반복하는 것이 지루하기도 했지만 정성만은 주님께서 받아 주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분심없이 기도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저의 신앙은 자라지 못하고 매일 같은 생활의 반복이었습니다. 매주 마다 미사에 참석하고 매주 똑같은 의식으로 제탓이오 제탓이오 제탓입니다 가슴치며 회개하고, 주 기도문과 사도신경을 바치고, 찬송가 몇 곡 부르고, 마치 교양강좌같은 짧은 신부님 강론을 듣고 성체를 모시는 미사의식은 십년이 넘도록 거듭되었지만 크리스천으로 달라진 나 자신의 변화는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같은 교회내에서도 서로 경쟁하고 술 마시고 주정하며 서로 험담하며 가진 사람은 못가진 사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사치스러움을 자랑하는 그 모임은 교회라기 보다는 사회의 어느 친교단체 모임과 다름이 없어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저 일주일에 한번 나가서 미사 올리고 예수님의 몸과 피라고 칭하는 성체를 받아 먹으면 난 그리스도 교인이었고 구원도 받게 될 것으로 막연히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한때는 레지오(성모 마리아의 군대) 활동으로 나름대로 봉사도 했으니까 남보다 조금은 더 독실하다 자평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래 다녀도 나의 신앙은 더이상 자라지 못하고 체바퀴 도는 듯한 생활은 계속 되었습니다. 교회에선 선하고 거룩한척 미소 짓고 있었지만 속 마음은 깨끗하지 못했고 적당히 음행하고 법을 어기지  않을 정도의 죄는 항상 지으면서도 인간은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수 없다는 생각으로 변명하며 내가 나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었습니다. 물론 카톨릭 안에서도 독실한 신앙으로 절제하고 교양 있으신  많은 분들을 보았지만 정작 나에게는 아무런 변화없이 일반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어느덧 60 가까운 나이가 되었습니다.

 

캐나다 독자로부터

 

*다음 호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