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Part 1. 성령에 대한 연구

 

성령께서는 항상 기다리심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성령께서는 인간의 마음에 그분의 직임을 행하기 위해 항상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배우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에 자신을 놓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모든 것을 보혜사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칠 것이며, 기억나게 할 것이라는 약속은 성취되고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분리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도 학교의 학생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영혼에 대한 부담감도 전혀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영혼들(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을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인 랍비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전통과는 아주 상이한 그리스도의 교훈을 지킨다는 것은 사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존중하도록 배운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그들의 마음과 감정을 지배할 하늘의 권세를 갖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인간의 교훈과 계명들로부터 벗어나야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과 지성에 확실한 진리와 귀중한 보석처럼 인식되고, 사랑 받고, 행해진 후에야 그들은 살아 있는 빛나는 빛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거룩한 삶을 사신 다음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에게 위탁하신 가치 있는 보석들 안에 있는 유산을 교회에 남겨 두셨습니다. 그분은 사람의 오류와 유전이 섞이지 않은 귀중한 교리들을 교회의 수중에 두시기 위해 제자들을 보관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의의 태양이신 세상의 빛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아버지께서 그의 이름으로 보낼 보혜사 성령을 그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세상의 구속자가 보내기로 약속한 신령한 성령은 하나님의 임재이며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은혜가 결핍하여 하나님의 대적에 의해 고통 받고 세상의 압제에 의해 시달리도록 세상에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보혜사 성령을 통해 백성들을 도우시며 보호하시고 계십니다.

 

거듭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삶의 전체 목적은 하늘에서 처럼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3,5,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계급 제도, 피부색, 계층의 차이가 그의 왕국의 백성이 되기에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것은 부나 유전적 우월성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들만이 그의 왕국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늘의 왕국은 이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거듭나고, 변화된 영적인 성품만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의 백성은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무궁한 은혜의 힘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그분의 왕국에 적합함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의 신령한 능력으로 그들에게 합당한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은혜는 죄와 죄된 행실로 죽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삶이 되살아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목적을 위해 그들에게 주신 재능은 정화되고, 정결해지고, 고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령한 형상을 따라 품성을 형성하게 됩니다. 때때로 그들이 자신의 달란트를 잘못 사용하고 또 그것이 죄 되게 사용되었을지라도, 비록 그들이 불순종으로 말씀에 걸려 넘어져서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걸려 넘어지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을지라도, 그들은 마침내 그의 사랑에 이끌리어 본분의 길로 가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빛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능력으로 그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십니다.

 

 

구원받도록 선택됨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구원을 받도록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공로와 아무 상관없이 주시는 그분의 은총을 이같이 경이롭게 나타내심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은혜 가운데 받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바친 영혼을 그분께로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나는 그들에게 용서하는 사랑을 베풀 것이며 내 기쁨을 부여하리라. 그들은 내게 귀한 보석이 되리라. 나를 위해 내가 조성한 이 백성이 나를 칭송하리라(렘 30:22, 31:1,33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영혼들을 자신에게 나아오도록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을 듣고 응답하는 것은 우리의 현세와 내세 모두에 유익한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초청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빛이 우리에게 비추일 수 있는 곳, 즉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되며 세상의 빛 되신 분을 따라가서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곳에 우리 자신을 두도록 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셨습니다. 부요한 한 선물(그리스도) 안에 그분은 하늘의 보화를 부으셨습니다. 그분은 초청하시고, 간청하시고, 촉구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들을 자신에게 오도록 강요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협력을 기다리십니다. 그는 창세로부터 그를 위해 예비 된 그분의 은혜의 부요를 죄인에게 수여하기 위해 우리의 의지가 동의하기를 기다리십니다.

 

 

Part 2.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연구

 

갈라디아서 4:1~1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4장의 주

어린아이가 모든 것의 상속인이라 할지라도 나이가 찰 때까지는 종과 다름이 없습니다. 만일 나이가 차지 않는다면 사실상 유업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설령 유업의 몫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모든 생애는 종으로써 살아야 할 것입니다.

 

 1절의 어렸을 동안으로 알려진 상태는 5절의 아들의 명분을 받기 전의 상태인 것을 문맥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속을 받기 전, 곧 우리가 개심하기 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를 의미하지 않고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4장 14절에서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 자녀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개심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던 때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초등 학문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 2:8)고 말씀하신 경고에 귀를 여십시오. 세상의 초등 학문 아래에 있다는 것은 이 세상 풍속을 좇고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1~3)인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3장 22~24절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믿음이 오기 전 우리가 율법 아래 곧 죄 아래 있었던 때와 같은 매임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엡 2:12) 상태를 뜻합니다.

 

누구나 유업을 이을 자가 될 수 있음

만일 그렇다면 여기에서 자녀들로 언급한 자들의 상태가 이런 것이라면 어떻게 그들을 유업을 이을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으므로 모든 사람이 그의 후손이라는 의미에서 누구나 유업을 이을 자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원칙적으로도 추수 때까지는 누가 자손이 되는가 하는 것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믿음이 오기 전에 비록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율법 아래 있어 주인의 감시를 받으면서 갇힌 바 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약속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탕자들일지라도 여전히 그들을 자녀들로 여겨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아들이도록 하셨습니다. 이 집행유예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로 시인하여 그의 참 자녀가 될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죄의 종으로 죽어야 할 것입니다.

 

때가 차매

그리스도께서는 때가 찼을 때에 오셨습니다. 이때는 메시야의 초림이라고 성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구속은 각 시대의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메시야는 창세 전에 예정되어 있었지만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셨습니다. 만일 이 세대나 아니면 종말 전 마지막 때에 나타나시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을지라도 복음에는 전혀 차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항상 살아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히 9:25; 13:8; 9:14)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희생은 지금이나 모든 시대를 막론하여 동일한 능력과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으므로 그분께서는 틀림없이 인간이셨습니다. 이 땅에서 육신을 쓰시고 다른 사람과 같은 생애를 사셨고 여자에게서 난 사람의 운명인 질병과 고난을 모두 당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자신을 인자라고 칭하여 부르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자신을 온 인류와 영원히 동일시 하셨으며 이 연합의 띠는 결코 끊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자에게서 나셨으므로 율법 아래 나신 것이 당연합니다. 곧 이와 같은 상태가 온 인류의 상태이며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히 2:17)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율법과 그 정죄로부터 구속하시므로 우리를 구속하셔서 율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도록 하십니다.

 

성령의 증거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 5:7),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서까지라도 기뻐하며 실망이 없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롬 5:5)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롬 8:16)하시며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요일 5:10)가 있게 됩니다.

 

이후로는 종이 아니고 아들이니,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니 두 종류의 자녀들이 있는 것처럼 두 종류의 종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4장의 처음 부분에서의 자녀라는 말은 장성한 자(히 5:14)가 아니므로 지각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진노의 자녀로 있는 동안은 죄의 종이며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종이지만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종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종입니다. 종의 품성은 그 섬기는 주인을 따릅니다. 본 장에서의 이라는 말은 실제로 자녀들이 되는 하나님의 종들에 적용하여 쓰는 말이 결코 아니며 죄의 종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종과 아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종은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고 그 자신조차도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을 구별 짓는 특성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탕자가 그 아버지의 집을 떠나 허랑방탕하고 있을 때는 종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와 같은 처지로 그는 아버지의 집에 돌아오면서 종보다 나은 대우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직도 아들이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그를 알아보고 달려가 만났으며 그를 아들로 영접하였습니다. 그가 모든 상속권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상속자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자녀라 불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상실하였고 유업을 탕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녀로 영접하시며 그리스도가 가진 것과 똑같은 권리와 특권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지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권력자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가난한 농부만큼 많은 소유물이나 권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4~6).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현재의 고난에 우리와 하나가 되시는 것은 우리로 그의 현재의 영광에 주님과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교의 종노릇

사도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말하기를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고전 12:2)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인들도 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갈라디아인들은 원래 이방인이었고 우상을 숭배하였으며 타락한 미신의 종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종노릇은 앞장에서 말한 것과 같이 그들이 율법 아래 갇히어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모든 개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종노릇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로마서 2, 3장에서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주님을 체험적으로 알지 못한 유대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하나니(요일 3:8).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고전 10:20). 만일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이방인이 되며 중간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배교하면 즉시 이방인이 됩니다. 의의 태양의 빛을 보았고 자유의 기쁨을 누렸던 자들이 감옥으로 되돌아가 쇠고랑에 매이며 심지어는 그 쇠고랑을 좋아하기까지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실 이 경험을 얼마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고 슬픈 일은 사람들이 심지어 사망까지도 좋아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혜자의 경고를 꼭 기억하여야 하겠습니다.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잠 8:36).

 

이방의 풍습을 지킴

갈라디아서를 받아보는 그들은 유대인들이 아니고 갈라디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교에서 개종하였으며 개종하기 전에는 유대인들이 행한 종교 행사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에 유대인의 풍습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옛 이교 풍습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신 18:10, 11 참조). 그러나 그들을 다른 길로 이끈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아니었습니까? 이 거짓 형제들-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의 진리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갈라디아인들을 유혹하여 그리스도를 떠나게는 하였으나 그들을 유대인의 규례에도 머물도록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갈라디아인들은 이전의 이교 미신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만일 어떤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도록 어떤 다른 것으로 이끌 때 그가 어디로 돌아가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시대에 있어서도 자신을 신뢰하고 육신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은 우상을 만들어 절하는 이방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대신 자신의 행위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영리함과 스스로를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능력 외에는 다른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쉽다는 것을 명심하길 바랍니다.

 

 

Part 3.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표 성소에 대한 이해

 

C. 물두멍

물두멍은 성소 뜰, 곧 번제단과 성소로 가는 휘장 사이에 위치한 커다란 놋 대야를 말합니다. 이 물두멍은 우리의 모든 더러움은 그리스도의 것임을 상징하는 것으로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물두멍을 가리키는 이름의 근원은 파다, 구멍을 뚫다, 때리다 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이 의미는 시편 기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묘사하였던 시편 22:16절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이처럼 갈보리에서 들려진 망치와 못은 그리스도의 손과 발에 물두멍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곳에서 흘러나온 정결한 구원의 물은 지금도 온 세상을 흐르며 다 내게로 오라는 간절한 외침을 내어놓고 있지 않습니까!

 

제단이나 거룩한 장소에서 봉사하고자 하는 모든 제사장은 물두멍에서 물의식을 통하여 먼저 자신을 정결케 하도록 요구되었습니다(출 30:17~21). 주님께서도 이와 같이 제자들에게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고전 6:11)이 필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물로써 이루어지는 이 영적 정결 의식은 물두멍이 성막 뜰에서 표상적으로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물두멍은 이스라엘의 여자 예배자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바친 잘 닦여진 구리나 놋 거울로 만들어졌습니다. 성경에서 거울은 율법의 한 기능, 곧 죄를 드러내 주는 것을 예시합니다(약 1:23~25; 고후 3:17, 18). 나사렛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에게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과, 우리가 실제로 처해 있는 상태 두 가지를 다같이 비춰 볼 수 있는 하늘의 거울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의 이기심을 나타내던 거울은 이제 그들의 생활방식이 바뀌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으로 물두멍을 만드는 데에 바쳐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놋거울이 물두멍과 그 받침으로 만들어진 후 그 분께서는 그것들을 침을 당한 반석에서 나온 물로 채우도록 요구하셨습니다.

 

침을 당한 반석에서 나온 깨끗한 물

주님께서는 물두멍의 풍부한 역할을 위한 물을 깨어진 바위에서 마련하셨습니다(출 17:5, 6). 간음의 의심을 받는 여자와 관련된 의식에서는 물두멍에서 떠온 거룩한 물만이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물두멍에서 떠온 물이 의식적으로 정결하게 하며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구별된 것이라고 결론짓게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지는 의식을 위하여 물두멍의 물은 실로의 못에서 길어 왔습니다. 평화라는 이름으로 된 이 샘은 평화의 왕이신 임마누엘의 상징이었습니다(창 49:10). 실로암은 이 못에 해당되는 다른 이름이며 그 뜻은 하나님이 보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요 9:7). 물두멍에 잠기고 목욕하기를 택하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정결함을 주십니다. 이 의식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 장차 용서와 정결을 갈망하는 모든 자들에게 새 생기를 주는 평화의 못이 되실 그분을 가리키는 의식으로 행해졌습니다.

 

새 언약의 물두멍 봉사

바울은 구약의 물두멍의 의미에 대한 두 가지의 통찰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우리를 개인적으로 구원한 것은 주님의 은혜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이 구원의 봉사는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 3:3~5)으로 효력을 나타냈다고 상기시켰습니다. 바울이 쓴 씻음이라는 말은 물두멍의 샘과 철저하게 목욕하는 수단을 나타내기 위해 헬라어 구약에 사용된 말에서 온 어근에서 유래합니다. 사도에게 있어서 물두멍으로 대표된 사상은 씻음의 행동과 동시에 물을 포함합니다. 그는 디도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로 불리워진 죄인들의 중생은 매 경우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주어진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이 기능은 물두멍의 씻음을 통하여 성소에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도는 이 물두멍에 대한 다시 한번의 언급에서 예수께서 당신의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엡 5:26) 하신다고 에베소인들에게 설명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물두멍의 씻음이 영감의 성경을 순종함으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화를 예시했다고 하는 깊은 사상을 강조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성경을 읽는 독자가 영감에 의하여 성경에 제시된 사상을 그의 마음속에 언제나 머물도록 허용할 때 우리의 생각하는 사고의 과정은 깨끗하게 씻겨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두 가지 통찰을 조화시킴으로써 우리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는 능력은 물론이요, 그 분의 중생케 하고 의롭게 하는 봉사는 그리스도인이 계속적으로 영감의 성경 원칙들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개인적으로 적용할 때 그의 마음에서 제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봉사는 물두멍의 물을 통하여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시되어 있었습니다.

 

물두멍은 피와 물로써 성별되었음

성막이 처음 세워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물두멍과 그 받침이 사용되기 전에 봉헌의 의식을 먼저 명하셨습니다. 이 봉헌 의식에서 피와 기름이 잇따라서 물두멍과 그 받침위에 뿌려졌습니다(출 30:26~29; 40:11; 레 8:10,11). 이 두 가지는 그들에게 물두멍이 가리키는 봉사에 나타난 갈보리의 희생 제물의 피와 오순절의 성령의 기름이 담당한 역할을 바라보도록 표상적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이 이중의 수단은 이스라엘의 물두멍 씻음에 활력을 부여하고 정결케 하는 능력을 표상하였습니다. 이 의식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당신이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물두멍을 구별하고 계심을 강조하셨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것을 세속적 목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침례를 표상하는 물두멍

구약의 물두멍으로 표상된 봉사는 신약의 침례를 미리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인 예식을 받아들이기 전에 제자는 회개하고(행 2:38), 옛 사람이나 그의 이전 생활 습관을 버리기로 은혜에 의하여 결심해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또한 율법의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봄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하신 일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은 그의 마음에 깊은 감사를 일으킬 것이며 날마다 마음이 엄숙해짐으로 그는 예수님을 자기의 구주요, 주로 기꺼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정욕과 야망을 자원하여 묻어버리겠다는 표로써 침례의 물속으로 들어가도록 자기 자신을 허락합니다(롬 6:1~8 참조). 주님께서는 당신의 새로 태어난 자녀의 영적 부활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를 물두멍에서 일으키십니다. 일으킴을 받은 그는 여전히 육체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지라도 이 거듭난 제자는 이후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갈 2:20) 살기로 작정합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의 길을 날마다 걸어가는 동안 그는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고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만일 우리가 동의한다면 그분은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주님 당신의 것으로 간주하시고 우리의 사상과 목적을 당신의 뜻과 일치하도록 섞어 놓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 순종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실행에 옮기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시대를 통하여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그들의 시련에서 구원하신 여러 가지 방법들-그 중 많은 것들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한 것들과 유사-은 물 침례와 관련된 성경 말씀들로 예시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침례의 의미가 방주 안에 남은 믿는 자들이 안전하게 보호되었던 대홍수에 의하여 묘사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벧전 3:18~22). 바울은 홍해의 큰 물결이 침례 받은 이스라엘의 피난을 위한 보호벽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고전 10:1,2).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하나님의 구름 그늘이 당신께 굴복한 유순한 백성들을 뜨거운 광야를 편안하게 통과하도록 한 것 역시 그들의 침례에 해당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깊은 바다에 빠진 반항하는 요나를 지켜준 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완전히 자신을 맡겨 버린 것을 설명한 그 분의 피의 침례에 대한 예증이 되었습니다. 영감은 이 각각의 네 이야기들을 승리의 부활 전에 있는 침례의 매장과 관련시켜 주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 진리들을 성령의 역사로 중생케 하는 물에 비유함으로써 니고데모에게 공개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복음의 소식이 물두멍과 그 물로 이루어진 성소 봉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랫동안 시사되어 왔음은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물두멍의 정결 봉사는 계속적으로 반복되어야 함

율법은 모든 봉사자에게 성소에서 어떤 의무에 들어가기 전에 손발을 깨끗이 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성막에 들어가기 전에 손발을 씻어 모든 불결을 제거해야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이 주님께 봉사하고자 시도하기 전에 자신들의 생애를 정결케 해주는 은혜의 물줄기를 규칙적으로 적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의 물두멍에 대한 충성된 제사장인 그리스도인의 관계와 그 세밀한 요구들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은 그들의 이웃에게 감동을 주어 이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순종하게 하는 것에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 옛날 성막뜰에서 반복된 물두멍의 기별은 여전히 우리에게 끊임없는 정결을 유지하도록 요구합니다. 이 매일의 생애의 정결이 없으면 칭의가 그리스도인 발전의 다음 단계인 성화, 곧 성소 기구들의 상징과 그것들을 통하여 실천된 의식들에 의하여 가르친 성화로 나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이 정결을 찾고자 애쓰던 다윗의 결심이 이 시대의 우리의 결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시 26:6, 73:13). 예전의 물두멍의 봉사는 오직 아론 계통의 제사장 직분으로 태어난 자들에게만 적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왕 같은 제사장들의 일원으로서 새로운 출생을 통하여 그분의 봉사에 들어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매일 복음의 여러 분야를 대표하는 주님의 기구들을 메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 역시 중생의 물두멍으로 표상된 실체와 그것이 초래한 정결이 우리의 매일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계속적으로 확인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제사장의 성별과 물두멍의 물

물두멍의 물은 대제사장의 성별과 관련된 의식에도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대표자로서 모세는 아론의 완전한 정결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를 물두멍에서 길어온 물속에 잠기도록 하였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의 경험에 있는 이 단계에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내가 받는 침례를 너희도 받을 수 있느냐(마 20:22; 눅 12:50)라고 질문하셨음을 기억하십시요. 아론을 침례 주는 일에 나타난 모세의 이 행동은 그리스도의 지도 아래 있는 모든 목자들의 순례길에 하나의 이정표로 표상되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그들의 침례 매장이 완전한 위탁을 나타낸 것임을 명심하도록 당부하였습니다(롬 6:1~11). 이 처음의 씻음을 근거로 그 후에는 오직 손(매일의 활동)과 발(순례 여행의 발걸음)의 씻음이 필요할 것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세족 예식에서 상징되어 나타났습니다(요 13:10).

 

그 외의 이루어진 물두멍의 예식들

희생 제물의 부위들이 제사장에 의하여 제단에 놓여지기 전에 이 물로 씻겨짐을 입었습니다(레 1:9, 13). 랍비들은 간음을 의심받는 여자를 판정해 주고자 할 때 물두멍에서 떠온 물을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대속죄일에 행하여진 물 의식들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대제사장은 다섯 번 자기 자신을 물에 담갔습니다. 그리고 낮 동안에 행해진 의식 동안에는 물두멍에서 떠온 물로 자주 손발을 씻었습니다. 이 예증들은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이루는 모든 활동에 있어서 죄와 불결을 씻어주는 샘에 의하여 우리가 정결한 상태로 보존되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해 줍니다. 성막의 뜰에 분명하게 놓여진 물두멍의 끊임없는 존재는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우리의 눈을 돌리게 합니다. 이처럼 매일의 발걸음에서 더렵혀진 우리들에게도 끊임없는 정결이 필요합니다. 내가 너를 씻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 13:8)고 하신 주님의 경고는 우리를 특별한 힘으로 그분께 바쳐진 상태로 가까이 지내도록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생애의 순결을 얻도록 그분께서 마련해 놓으신 준비는 얼마나 완전하고 적절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이 이 유익을 얻을 수 있었던 유일의 장소가 물두멍이었던 것처럼 오늘날 죄와 부정을 씻기 위하여 다른 샘 근원을 찾는 자들은 더러워진 그대로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샘을 무시한다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영원한 손실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물두멍과 유리바다

성경에서 물두멍이 마지막으로 언급된 곳은 구속 받은 자들이 우주에 보여지는 장면에서 입니다. 계시자는 그것을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계 4:6)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계시록의 장면은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의 헌당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의식을 진행하는 동안 왕은 백성들에게 설교하고 또한 여호와께 기도하기 위하여 특별한 바다혹은 강단 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대하 6:13; 왕상 8:22). 이 히브리어 바다는 바로 이 물두멍에서 온 말이었습니다(대하 4:2). 이처럼 요한의 이상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마침내 모든 시대와 모든 곳에서 모여 바다가에 서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 침례 중생의 상징인 바다(물두멍)는 마침내 구속 받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는 일에 궁극적인 기초가 될 것입니다. 물두멍에 대한 이 마지막 이상은 그리스도의 변화된 제자들이 그 후로는 더 이상의 정결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증을 우리에게 남겨줍니다. 그들은 영원하신 심판자의 보좌 앞에 흠없이 서 있고(계 14:5) 그들의 품성의 옷은 갈보리의 두 줄기 흐름으로 씻기어 희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왕이요 제사장들로서 밤낮 그분의 성전에서 그 분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물두멍의 사명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의 마지막 칭의와 성화를 통하여 완성될 것입니다.

 

 

Part 4.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알고 행해야 하는 교훈

 

우리는 지금, 자복과 회개로서 우리의 죄들이 먼저 심판을 받아야 할 때인 대속죄 기간 중에 살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깨닫고 이해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시급하고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별이 당신의 종들로부터 무기력하고 열의가 없는 그런 증거로 드러난다면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힘이 없는 그런 증거는 현대 진리의 역할을 담당할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이 시대를 위한 기별은 마지막 남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기에 필요하고 알맞은 기별이어야 합니다. 사단은 점차적으로 이 기별의 능력을 빼앗기 위해 하늘의 능력을 모방한 큰 능력( 13:13 참조)으로 일하고 있다는 성경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영감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깨우고 힘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교훈 20. 우리는 대속죄 기간 중에 살고 있음

우리는 참으로 엄숙하고 중대한 순간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의 심판 문제는 하늘 법정에서 미결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육체 가운데 있을 때 행한 행위에 따라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상징적인 성소 봉사에 있어서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속죄하는 의식을 거행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저희 영혼을 스스로 괴롭혀야 했습니다. 저희 죄가 대속을 받고 저희 죄들을 도말 받기 위하여 자복하여야만 하였습니다. 하물며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서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탄원하고 계시는 이 때의 형편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최종적이고 되풀이할 수 없는 판결을 각자에게 언도하게 되는 이 대속죄 기간에 있는 우리에게 향한 요구가 그 옛날보다 가벼울 수 있을까요? 이 두렵고 엄숙한 때에 우리의 상태를 면밀히 살펴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교만, 위선, 속임수, 의복에 대한 애착, 천박한 정신, 오락 및 으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교회 안에서까지도 용납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모든 죄들은 우리의 생각과 정신을 흐리게 하여 영원한 사물들을 식별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인류 역사의 어느 단계에 놓여 있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일은 오직 성경을 열심히 탐구한 결과로만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특별히 이 시대에 우리들을 위하여 성취되고 있는 일에 관하여 그리고 이 속죄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우리가 죄인으로서 있어야 할 위치에 대해서 정확하고 분명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영혼의 구원에 관하여 진정한 관심이 있다면 우리는 결정적인 변화를 일으켜야만 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참회의 정신으로 주님을 찾아야 하며 깊은 회오의 마음과 태도로 죄들을 자복하고 죄 없이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유혹을 받는 입장에 머물러 있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우리는 은혜의 시기의 끝을 향해 신속히 다가서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영혼이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것인가?라는 물음을 늘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언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고 우리의 심판 문제가 최종적으로 결정될는지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심판의 날에 우리가 의인으로 간주될 것인지 아니면 악인의 수에 끼게 될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훈 21. 이 시대의 교회가 가져야 할 정신과 태도

교회는 분발하여 자신의 타락한 상태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여야 합니다. 파수꾼은 깨어 있어야 하며 분명한 나팔 소리를 내야 합니다. 우리는 정확한 경고를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에게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 58:1)고 명령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진정으로 회개하는 일에 백성들의 관심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모든 노력이 헛된 것이 될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비록 하늘의 천사가 내려와서 저들에게 말할지라도 그의 말들은 마치 죽은 사람의 귀에 대고 하는 말과 같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교회가 길을 예비하지 않는 한 결코 임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을 열심히 살피는 일이 먼저 앞서야 합니다. 연합하는 정신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허락들을 주장하여야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몸에 베옷만을 걸칠 것이 아니라 영혼의 깊은 겸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자축하고 자고해야 할 아무런 마땅한 근거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있으신 손 아래에 우리들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참된 탐구자들을 위로하시고 축복하시기 위하여 나타나실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해야 할 사업이 있습니다. 그 사업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신속히 일해야 하며 끈기 있게 전진해야 합니다우리는 여호와의 큰 날을 위해서 예비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는 낭비할 시간이 없으며 이기적인 목적에 종사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경고의 기별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전하기 위하여 개인적으로 어떤 일들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셨으며 모든 사람은 자신이 담당해야 할 분야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자신의 영혼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이 사업을 등한히 할 수 없습니다. ,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들이 성령을 슬프시게 하여 떠나게 해야 할까요? 우리들이 주님을 모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복되신 구세주를 문 밖에 세워 둬야 할까요? 우리들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멍에를 지기를 방해하는 너무도 지나친 안락을 추구함으로 다른 영혼들이 진리에 대한 지식이 없이 멸망하도록 버려 둘 것입니까?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는 성령의 경고에 귀를 세우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훈 22. 참 개혁은 경건의 능력이 증거되는 신앙부흥을 동반함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심령 가운데 신령한 생명의 호흡이 끊어진 듯이 보입니다. 이것은 매우 슬픈 사실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육체와 마귀에 대하여 공격적인 투쟁을 유지하여 오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빈사 상태의 그리스도인 정신, 곧 세상에 속한 이기적이며 탐욕적인 정신, 경건치 못한 일에 세상과 짝하고 거짓된 정신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어떻게 사단을 대적할 힘을 얻을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진리의 원칙에 확고부동 하여야 하며 처음에 품었던 우리의 신뢰심을 끝까지 붙잡고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 12:11)겨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오직 한 분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지혜를 받아야 하며 그 은혜를 힘입어 우리의 성실성을 보존해야 합니다. 온유한 마음과 참회하는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여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설교가 큰 비중을 차지하여 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대신에 단상의 열변을 의존하고 있습니다. 저들에게 부여된 신령한 은사들은 무용지물로 여겨졌으며 사용되지 않은 채 점점 그 기능을 미약한 상태로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능력은 실제적으로 삶에 활용함으로써만 증가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허약성에 대하여 우리들에게 무거운 책임을 추궁하시면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3:15-18)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고 정직한 신앙 부흥과 개혁 사업을 요구하십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미지근한 자들을 점점 더 주님께서 싫어하시게 될 것이며 마침내는 저들을 당신의 자녀로 인정하시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신앙 부흥과 개혁 사업은 성령의 조력을 힘입어 이루어져야 합니다. 신앙 부흥과 개혁 사업은 별개의 것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신앙 부흥이란 영적 생애를 소생 및 부흥시키는 것이며 정신력과 마음의 힘을 일깨워주고 영적 사망에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혁 사업은 재조직, 사상과 이론의 변화에 따르는 삶의 습관과 제도의 개선을 뜻하는 것입니다. 개혁 사업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신앙 부흥과 연결되어 있지 않는 한 의의 선한 열매를 결코 맺을 수 없습니다. 신앙 부흥과 개혁 사업은 각기 맡은 분야를 수행하여야 합니다. 매일의 삶 가운데 이 두 가지를 잘 혼합하여 나아간다면 분명히 우리들은 성령의 귀한 열매들을 맺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서게 될 것입니다.  

     

 

Part 5.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나님의 남은 백성들의 생활방식과 활동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조할 것이며(신 6:7)

 

가족 예배

아침 저녁으로 자녀들과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올바른 가족 예배는 가족 간의 연합을 이루어낼 것입니다. 자녀들이 성경말씀을 읽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법을 반복해서 읽도록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신 6:7). 가족 예배는 짧고 생기 있게 드려야 합니다. 자녀들이나 가족 중 어느 누구라도 그 예배가 지루하고 흥미가 없어져 싫어하도록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말씀을 길게 읽거나 기도를 길게 하면 이 귀한 예배가 지루하게 느껴지므로 그것이 끝날 때 가족들은 안도의 숨을 쉬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예배의 진정한 의미가 상실될 뿐 아니라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예배로 전락하기 쉬운 위험이 따르게 됩니다. 밝고 활기찬 찬송과 함께 간단 명료한 비유나 예화, 그리고 하루 동안 실천할 수 있는 교훈을 주는 성경 몇 구절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대표 기도하는 인도자는 모든 것을 기도할 것이 아니라 단순한 말로 필요를 아뢰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높이도록 할 것입니다.

 

경계해야 할 세속적인 정신

하나님의 참 진리의 선포로 말미암아 참과 거짓을 분리시키는 사업이 이루어질 때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충성된 파수꾼으로서의 우리의 참된 위치를 분별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 공언하는 자로서 세속적 정신의 영향을 받아 영적인 식별력이 흐려져서 주의 참된 일꾼들을 잘못된 교리나 오류로 물든 거짓 교회의 시각으로 판단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올바른 안목을 갖기 위해 우리는 세속적인 사상에 젖어있는 자들과의 어떠한 동맹도 맺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동시에 그들을 바리새인적인 정신으로 대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진정으로 사모하는 주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쾌락을 위하여 추구하는 오락이나 운동, 사교모임 등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과 어울려 잘못된 교제에 빠지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선택은 자신을 영적으로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할 것입니다. 오직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전도 목적으로 그들과의 관계를 유지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진리의 원칙을 희생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그들과의 교제를 유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하는 사업, 계약, 동맹 등은 하나님의 명령하신 것들이 아님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여가 활동과 휴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육체적, 정신적 힘을 사용하려는 목적으로 가지는 휴식은 정신을 새롭게 가다듬고 신체를 활발하게 하여 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며 동시에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건전한 정신과 올바른 판단으로 자신들의 마음을 방탕케 하거나 심령을 저열하게 하거나 실망, 혹은 자신을 파괴하는 슬픈 감화를 남기거나 유용한 자가 되는 길을 방해하는 그러한 휴식으로부터 자신을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들이 어디에 있든지 주님과 동행하며 또한 늘 기도하는 정신을 유지한다면 우리들은 늘 온전히 안전한 곳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건전하고 유익한 휴식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올 때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죄책이 없는 양심과 우리와 사귀는 자들에게도 어떤 모양으로든 상처를 주거나 해로운 감화를 끼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며 그렇게 행할 영적인 에너지도 생기게 될 것입니다. 어떠한 형태의 모임이나 오락이든지 우리 자신들을 하나님 앞에 부적합한 자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은 안전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우리를 타락시키는 위험한 것들이 될 것입니다. 오직 안전한 오락은 진지하고 신앙적인 생각을 저하시키지 않을 성질의 것이어야 합니다. 또한 안전한 휴양지는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가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평온하며 아름다운 곳이어야 합니다.

 

용기를 주는 거룩한 음악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하는 중에 거룩한 노래로 기운을 냈던 것(출 15:1-21)처럼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이 세상 순례자의 생활을 하는 동안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둔하여진 머리에 각인시키는 데에는 찬양의 노래로 반복하여 부르는 방법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찬송에는 우리에게 힘을 주는 기이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칠고 교양 없는 성질을 진정시키며 생각에 활기를 불어넣고 딱딱해진 마음에 동정심을 일깨워 줍니다. 찬양으로 부드러워진 마음은 행동의 조화를 촉진시키며 용기를 잃게 하거나 우리의 힘을 약하게 하는 어둡고 불길한 생각을 없애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한 음악은 하늘 궁정에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거룩한 예배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들의 찬양의 노래 또한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늘 찬양대와 함께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르는 찬양은 정결한 음률과 박자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어떠한 세속적인 성질의 것이라도 깃들어 있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이 될 수 없음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쾌락을 위한 시청물의 위험과 극장, 유흥장들

요즈음은 너무도 흔히 인터넷, TV, 전자게임들을 통해 폭력적이고 타락적인 것들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또한 도박, 술집, 나이트 클럽, 극장 등 음란한 장소들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휘몰아 가는 위험한 현실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들은 악한 습관과 범죄의 경향을 부추기고 조장시킬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더욱 더 타락과 악으로 치닫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러한 음란한 곳들과 악한 시청물에 길들여진 젊은 청년들이 하나님의 원칙에 따라 살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하고 힘든 환경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라 공언하는 사람들이라도 그러한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지켜 조심하지 않는다면 고상한 생각에 심각한 해독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세속적이고 저속한 생각은 신앙적인 감화를 파괴하며 평안한 참 즐거움과 건전한 삶의 원칙에 대한 분별을 흐리게 하는 치명적인 해를 입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스스로 무엇을 보고 듣는지 조심하여야 합니다. 자신을 그러한 잘못된 환경에 두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경계하며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두어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러한 타락하고 불결한 곳에서 어느 누구도 발견되지 않기를 주님께서는 오늘도 바라시고 계심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옷차림과 태도

우리는 매일 주님께서 베푸신 풍성한 은혜를 생각하고 대화하기를 즐겨 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복 문제가 일상생활의 관심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거듭난 참 그리스도인들이라면 하나님의 말씀과 조화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그들의 삶에서 치워버릴 것입니다. 마음의 거듭남이 없이 옷차림에 대해 이것 저것 염려하는 것은 신앙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잘못된 사치와 허영과 방종에 대한 사랑이 근본적으로 우리의 마음에서 치워져야 합니다. 만약 근본적인 개혁이 없이 외식적인 장식물들을 제거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큰 나무에서 단지 몇몇 나뭇잎을 떼어내는 것과 같은 일일 뿐 본성적인 충동은 곧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진실된 주님의 백성이라면 우리가 직면하고 걸어야 할 길은 우리 자신의 죄된 본성과 정면으로 충돌할 것입니다. 이 길에는 피할 수 없는 투쟁이 따를 것입니다. 비록 처절한 투쟁이 따를 지라도 우리는 오직 주님의 명령만을 자원하여 따를 것을 결심하여야 합니다. 이 결단은 육신의 정욕을 쳐서 주님의 말씀에 우리 스스로 복종시킬 힘을 줄 것입니다. 의복은 단순하고 아담하게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치와 허영적인 옷차림에 대하여 마음의 지배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옷차림을 보면 그 사람의 내면을 알 수 있습니다. 소박하며 정숙하고 단정함으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면을 단장하라는 믿음의 선배(벧전 3:3, 4)의 권면을 따라 산 모본으로 자신들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절실하게 요구되는 출판물의 배포

우리는 요즈음 시대처럼 고상하고 건전한 사고력을 가지기 힘든 적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TV나 인터넷 등의 매개체를 통해 그저 별 생각 없이 흥미와 쾌락을 위주로 영화, 연속극, 게임 등을 보며 사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 시대는 가장 쉽고도 단순한 언어로 쓰여진 하나님의 영감의 글을 통해 우둔하여지고 탁한 우리의 사고력과 지력을 고상하게 훈련시켜야 하는 일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입니다. 우리의 모본이신 주님께서는 어린 아이나 배움이 부족한 자들이라도 심령이 깨끗하다면 금방 이해할 수 있는 쉽고 단순한 방법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세상에서 소외 당한 자들에게도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현재 마지막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과 명령들을 쉽고 단순한 말씀으로 전해야 합니다. 이 단순한 나팔 소리는 잠자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깨우게 될 것입니다. 귀가 있어 들을 수 있는 모든 자들에게 앞으로 임할 큰 환란들에 대해 알려주어야 합니다. 전도지와 소책자와 그 외 출판물을 가을 낙엽처럼 널리 이 세상에 뿌려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향해 수행해야 할 아주 중요한 의무입니다. 진리를 알지 못해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이 더 멀리 세상 곳곳에 진리의 말씀을 뿌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진리를 알리되 거칠고 험한 언어 사용은 금해야 합니다. 또한 날카로운 비판이나 매정한 공격, 암시를 사용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성화되지 못한 요소와 일치하며 우리의 원수 사단과 똑같은 정신이므로 이 같은 정신으로 말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기독교 정신은 프로 권투처럼 비판이나 정죄를 통해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각 교파와 교단 안에는 하나님의 진실한 백성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이 세상 곳곳에는 아름다운 진리의 말씀을 듣고 읽어 예수님의 참 증인으로 설 많은 백성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그들을 구별하여 내실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의 연합의 중요성

진리를 믿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에게 형제와의 연합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상을 강요해서가 아니라 각자가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의 정신을 실천할 때 비로소 주위 사람들은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임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는 자들로서 각종 형태의 위장되고 변질된 오류에 대해 아무리 주의하여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높이는 자들에 대해 사단은 수많은 올무와 덫을 뿌려 놓았습니다. 늘 겸손하고 성실함으로 말씀을 대하며, 그 말씀으로 이러한 오류들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을 주님께서 공급해 주시기를 기도하여야 합니다. 어떤 새로운 빛이나 계시를 받았다고 공언하며 일어나는 자들 또한 경계해야 합니다. 말씀 연구에 대해 게을리하거나 부주의한 자들은 원수의 올무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사단은 항상 우리의 생각과 영적인 눈이 영생을 보장하는 진리에서 벗어나 영생에 필요치 않는 일에 우리들의 눈을 돌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일에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몰두하게 유혹하여 그것에만 집중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도록 우리를 속이는 큰 기만을 얼마나 자주 행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단은 진리를 우리 마음에서 뽑혀져 버리게 할 아주 매혹적이며 독창적인 일들을 우리 주위에 뿌려 놓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바로 우리들의 영생을 방해하는 사단의 계략들입니다. 아무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형제들보다 뛰어난 특별한 빛을 자신들에게 주신 것처럼 자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단은 이러한 사람들을 진리에서 꾀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안에서 연합하여 매일 주어진 자신의 일에 충실히 행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행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참 진리 안에서 진정한 연합을 이룰 때 이 연합은 믿음이 연약한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높여야 할 때임

그리스도인들은 조용하고 침착하게 그리고 뚜렷하게 말씀을 전파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감정의 흥분을 자아내는 일을 열성이라는 미명아래 우리의 의무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직 성령 하나님께서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건전한 열성을 불어 넣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일하실 수 있도록 겸손한 마음과 우리의 연약한 의지를 주님께 내어 드려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며 매 순간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빛과 생명이 되시는 고귀하신 주님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지도하심만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 의해서 말하고 노력하며 영적인 의무를 이행할 때, 우리의 모본은 침착성과 위엄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증거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전파하는 진리에 순응하도록 우리가 영향력을 끼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흥분과 감정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한 참된 진리를 전파하고자 함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진리를 방해하는 사람들이 허탄한 이야기로 사업에 치욕을 끼치려 할지라도 우리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 반대자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말을 우리의 입술을 통해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 진리의 말씀을 듣는 자들 중 지각이 있는 사람들은 진리의 우수성과 탁월함에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진리의 말씀의 고상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조차도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높이는 좋은 기회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독자로부터 온 편지

 

진리에 대한 갈급함

시간의 속도는 자기 나이 만큼 빠르다는 말처럼 세월의 속도는 나이가 들수록 더욱 더  빨리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몸과 영혼이 건강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초조함을 느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성실하게 살아왔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도 했지만 비교적 평탄하고 안락했던  삶은 내가 똑똑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고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마다 남은 인생은 주님의 충실한 종이 되어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도 같이 떠 올랐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의 충실한 종이 되고 싶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어 남은 인생은 당신의 종으로 헌신할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리고 또 드렸습니다. 앞으로 20년 정도의 삶이 더 허락된다 하더라도 그때가 그렇게 멀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겨우 몇 밤 더 자고 깨어나면 그때를 맞이할거라는 초조감과 허무함이 떠오를수록 더욱 더 열심히 기도 드렸습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왜 여기까지 와 있고 그리고 며칠 후 난 어디에 가 있을까?라는 대한 궁금증과 하나님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이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먼지만 뽀얗게 쌓여있던 성경책을 찾아서 읽기 시작했고 천주교 창세기반에 등록하여 처음으로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성경공부는 주어진 프로그램에 따라 진행되고 더디기만 할뿐 하나님의 역사와 가르침을 공부하고 그동안 쌓여왔던 궁금증을 해소하기엔 너무 느리고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개신교 목사님이 가르치는 성경공부도 신청하여 비슷한 시기에 같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개신 교회에서 다른 하루는 카톨릭에서 공부하였지만 그것으로도 성경에 대한 갈급함이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궁금증이 쉽게 풀리지 않았습니다. 집에 와서는 인터넷 유투브를 통해서 가리지 않고 많은 목사님들의 강의를  듣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 저것 듣다 보니 더 혼돈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 예수님을 찾는다고 다 같은 교회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에 사단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거짓말을 하며 하와를 유혹한 것처럼 사단의 장난에 놀아나는 교회도 분명히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후  이스라엘의 역사,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적 그리스도, 카톨릭의 실체, 알베르토 리베라 신부님 이야기, 기독교회사, 예수회의 탄생 배경, 종교탄압과 재판 등등 많은 주제를 성경의 역사와 함께 공부하면서 카톨릭은 순수한 그리스도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카톨릭에 대해 알게 된 이러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고나서 전 마치 나를 길러주신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아닌 계모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와 같은 그런 엄청난 혼돈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과 사탄의 영적인 전쟁의 역사라는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끊임없는 영적인 전쟁을 걸쳐 내려오면서 사탄은 인간이 알아채지 못하는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만든 법률보다 더욱 광범위하고 깊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 가르침의 바탕에는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경애하며 살아있는 생명 간에 서로 사랑하라는데 의미가 있음을 알았습니다불법을 행하는 죄, 하늘에 속하지 않고 땅에 속하여 육신의 종노릇 하는 것이 죄였고 그외 인간이 쉽게 간과해 넘기는 교만, 질투, 시기, 자랑 등도 하나님의 나라에선 다 죄란 것을 깨닫고 나서 그동안 나 자신이 얼마나 죄속에서 살아왔는가 깨닫게 되었고 회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캐나다 독자로부터

*다음 호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