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권두언

 

우리는 본향에 가까이 이르고 있습니다. 저 멀리 하늘 본향의 밝은 빛이 비쳐 나오고 우리를 환영하는 천사의 노래가 들리는 듯합니다. 영적으로 지금 우리가 지나는 이 세상은 사탄과 악의 세력이 역사하는 추운 겨울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겨울이 지나고 이렇게 따뜻하고 아름다운 봄이 온 것처럼, 머지않아 시련과 고통의 계절이 지나고 영적인 봄이 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지냈던 이 세상의 괴로움을 다 잊어버리고 기쁨과 환희 속에서 그리던 주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그때에는 아무리 과거의 고통을 생각해내려고 해도 전혀 기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본향에 이를 날을 사모하고 주님 만날 날을 기다리며 사는 이 세상의 삶 속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지치지 않는 믿음과 소망입니다. 시련과 고통을 견디게 해주는 소망의 믿음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이 저 먼 지평선을 뛰어넘어 영광의 본향을 꿰뚫어볼 수 있는 강한 믿음과 소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마지막 시대를 보내면서,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을 바라본 이사야와 에스겔과 같은 계시의 안목을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봄비 같은 사람

 

                                                                           강 영은

 

오월의 문턱

싱그러운 봄이 제자리를 잡느라 봄비를 뿌립니다.

초록 물을 세차게 뽑아 올리고 싶던 잎들이

고운 빛깔에 윤기를 더하고 싶던 꽃들이

목마른 듯 입을 벌리고 비를 마십니다.

 

재촉하지도, 급하지도 않게 촉촉이 적시는 봄비…

잎들을 씻어주며 조용히 속삭이는 봄비의 사랑 속에서

나뭇잎들은 한결 더 푸른 색을 띠어가고,

간지럽히듯 부드럽게 쓰다듬는 봄비의 손길 속에서

겨우내 땅 밑에서 움츠렸던 작은 생명이 쑥쑥 커갑니다.

 

 

풋풋한 봄

아직 미처 싹을 틔우지 못한 식물들과,

아직 소낙비를 맞을 만큼 단단하지 못한 나뭇잎과,

아직 물이 차 오르지 못한 연한 꽃들에는  

흙덩이를 헤집으며 세차게 쏟아지는 부담스런 여름비보다는

이슬처럼 촉촉이 적시며 잦아드는 봄비가 좋습니다.

봄비 속에서 비로소 한해살이 채비를 차리는 연한 생명은

아직 세찬 빗줄기를 견딜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름 소나기처럼 너무 강하게 밀어치지 않는

보슬보슬 내리는 비단실 같은 고운 봄비를 바라보다가

봄비처럼 부드러운 분을 마음에 떠올려봅니다.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시는 분…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비”같으신 분을…

 

눈이 부셔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정오의 햇살이 아닌

아침 빛 같이 서서히 밝아 그 빛에 천천히 길들게 하는

사려 깊은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항상 잔잔하게 마음을 토닥여주시는 주님…

함부로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내리는 봄비 같은 주님…

 

 

때로 진리를 가졌다고

때로 진리를 옹호한다고

때로 진리를 전한다고 높이는 시끄러운 우리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속삭이는 봄비 같은 주님의 소리와 얼마나 다른지…

 

생명의 물을 가졌다고

생명의 물을 나눠준다고

마구 가슴을 헤집는 세찬 여름비 같은 우리의 모습은

촉촉이 마음을 적시는 봄비 같은 주님과 얼마나 다른지… 

 

 

장마비처럼 다 휩쓸어 갈듯한 세찬 비가 아니라서 좋은,

피지 않은 꽃봉오리에 상하게 하는 강한 비가 아니라서 좋은,

창밖으로 조용히 뿌리는 봄비를 내다보다가

한숨처럼 중얼거려 봅니다.

나도 봄비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나도 우리 주님처럼 되었으면…”

 

 

제1부_ 계시를 보는 믿음

 

서론

 

마지막 시대의 여러 가지 사건과 징조들을 눈앞에 보며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고난이나 환난이 닥쳐도 낙담하지 않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살기 위해,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살는 데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음, 곧 보통 믿음이 아니고 매우 특별한 믿음인 계시를 보는 믿음입니다. 

계시가 무엇입니까? 계시는 보는 것입니다. 계시를 보는 믿음이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떤 것을 보는 믿음입니다. 곧, 암담하고 절망적인 상황과 환경에서 소망과 희망의 빛을 보는 믿음입니다. 실망스럽고, 의심스러운 인간관계에서 사랑과 신뢰로 회복된 아름다운 관계를 보는 믿음입니다. 고난과 고통과 시련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을 보는 믿음입니다. 오류와 복음의 능력을 잃어가는 세태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진리의 능력을 체험하는 믿음입니다. 결국, 계시를 보는 믿음이란, 현재는 없지만, 미래에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일들을 보고 소망 중에 기뻐하는 아주 특별한 믿음입니다.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에스겔의 계시를 조명해 보면서 우리 모두 계시를 보는 믿음을 키웠으면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굳센 믿음으로 살아가는 독자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편집실 -

  

제1부: 계시를 보는 믿음

 

성경 요한 계시록은 마지막 시대에 성도들이 가져야 할 이 특별한 믿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특별한 믿음은 바로 “예수 믿음” 이다. 예수 믿음이란 예수께서 가지셨던 믿음, 곧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믿음, 모든 죄를 이기고 극복하는 믿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믿음, 모든 것을 견디는 믿음, 인내하는 믿음이다. 앞으로 있을 고난과 고통의 시기는 우리에게 피로와 지연과 굶주림에 견딜 수 있는 믿음, 즉 아무리 격렬하게 시련을 받을지라도 쇠약해지지 않을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

예수 재림 바로 전 짐승의 표의 환난과 핍박을 앞둔 마지막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곧 어떤 경우나 상황에서든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성품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지고 있는 우리에게 이 특별한 믿음을 가지는 일은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 앞날에 대한 계시를 보는 특별한 믿음이 있어야 모든 시련을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계시가 주어진 이유

 

성경에 기록된 계시 중에 대부분은 역사에 있어서 가장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들이다. 계시는 왜 가장 암담하고 어두운 시대에 주어지는가? 그 이유는 가장 암담한 시기야말로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계시가 필요하고, 가장 절망적일 시기야말로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계시가 주어지는 이유는 미리 예언된 사건이나 일이 성취되는 것을 보면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와 믿음이 더 고취하게 하도록 주어졌다. 계시를 본 선지자나 사도 중에 가장 유명하고 알려진 사람은 아마 사도 요한일 것이다. 마지막 시대에 우리의 나아갈 길을 환히 밝혀주는 저 유명한 요한 계시록의 예언과 계시가 없었다면, 우리의 앞길은 얼마나 캄캄하고 암담했겠는가! 계시를 통해 보는 영광스러운 앞날의 소망 때문에 우리는 지금 소망 중에 기뻐하고 있지 않은가!

 

신약에서 요한이 보았던 마지막 날에 대한 계시가 중요하다면, 구약에서는 에스겔 선지자가 본 계시가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것은 마지막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에스겔이 보았던 계시를 통해 얻는 교훈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마지막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사도 요한의 예언과 계시를 통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소망을 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구약 시대에는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과 계시를 통해 소망을 얻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에스겔의 계시들이 구약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그 당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마지막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고무시키기 위해 미래를 꿰뚫어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로서, 그 계시의 빛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결국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구속하셔서 영광스럽게 회복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유다 나라의 멸망과 사로잡힘

 

사도 요한처럼 에스겔에게도 꽤 많은 계시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다. 에스겔이 살던 당시는 어떠했는가? 에스겔에게 계시가 주어졌을 그 당시도 암담하고 어두운 시기였을까? 그렇다. 에스겔이 살던 시대는 성경의 그 어떤 사람이 살던 시대보다도 어렵고 절망적인 시기였다. 사도 요한이 고령에 밧모섬에 포로로 잡혀가 고생하고 있을 때 계시가 주어졌던 것처럼, 에스겔에게 계시가 주어진 때도 그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고생하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는 이미 북방 이스라엘은 망해서 사라진 지 100여 년이 지난 때였고, 남방 유다는 바벨론의 침공으로 벌써 여호야김 왕 때에 바벨론 나라에 예속되어 있었을 때였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대 왕 여호야김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불명예스럽게 통치 11년 만에 아들 여호야긴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들 여호야긴이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행하였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나 그도 열조들을 따라 악을 행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여호야긴이 왕이 된 지 겨우 석 달 되었을 때에 다시 바벨론이 쳐들어와 예루살렘을 에워쌌고, 유다 왕과 모친과 부인들과 내시, 신복과 방백들이 다 바벨론으로 잡혀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포로 중에 에스겔도 들어 있었던 것이다(왕하 24:12-16 참조).

 

유다 백성들의 포로생활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을 살펴보면 매우 비참하고 암담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성경 시편에 나타나 있는 시들을 통해 그들의 생활과 슬픔을 엿볼 수 있는데(시 137편 참조), 그들은 바벨론 사람을 "우리를 사로잡은 자", 또는 "우리를 황폐케 한 자"라고 부르고 있다. 역사에 보면 유다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갈 때, 유다 왕의 두 눈을 뽑은 채로 사로잡아갔으며, 유대 백성들을 허리와 목에 줄을 묶어서 끌고 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바벨론 사람들은 그들의 부모들을 죽이고 아이들을 돌에 메어쳤다(시 137:8,9절 참조).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처하게 된 암담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에스겔은 계시를 보게 된다. 참고로 그 당시 세 명의 선지자가 있었는데, 예레미야는 유다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에게 보내진 선지자였고, 에스겔은 바벨론에 이미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위하여 보내진 선지자였고, 다니엘은 느브갓네살 왕과 바벨론의 궁정의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을 증거하고 알리기 위해 보내진 선지자였다.

이제부터 에스겔의 계시 몇 가지를 연구하며 교훈을 얻어보자. 에스겔의 계시를 통해 영광스럽게 회복될 미래의 소망을 가졌던 그 당시 소수의 신실한 백성들처럼, 마지막 시대의 예언과 계시를 아는 소수의 여자의 남은 무리는 굳센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제2부_ 에스겔의 계시 I - 바퀴 안의 바퀴

 

하나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택하신 선민인 우리나라가 다 망하고, 하나님의 성전조차 다 훼파되고, 왕과 왕족들과 귀족들도 다 포로가 되어 잡혀 이렇게 비참한 형편에 처하다니,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 것이 맞습니까?”

하루는 에스겔이 슬픔과 절망에 싸여 그발 강가에 나와 있었다. 그는 포로로 끌려와 비참하게 사는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께 절규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열리더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좌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보좌 위에 하나님께서 좌정해 계신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제 삼십 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겔 1:1-6).

그 바퀴의 형상과 그 구조는 넷이 한결 같은데 황옥 같고, 그 형상과 구조는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행할 때에는 사방으로 향한 대로 돌이키지 않고 행하며, 그 둘레는 높고 무서우며 그 네 둘레로 돌아가면서 눈이 가득하며, 생물이 행할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행하고 생물이 땅에서 들릴 때에 바퀴도 들려서, 어디든지 신이 가려 하면 생물도 신의 가려 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신이 그 바퀴 가운데 있음이라”(겔 1:16-20).

 

놀라운 일이었다! 절망에 싸여 있는 에스겔 앞에 지극히 거룩하고 휘황찬란한, 움직이는 하나님의 보좌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이상 중에 나타난 바퀴 가운데 있는 신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겔 1:26-28).

 

1) 네 생물과 바퀴

 

에스겔이 계시 가운데 보았던 하나님의 보좌 모습은 사도 요한의 계시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보좌 모습과 똑같다. 요한은 이상 중에 하늘의 열린 문을 보았고 그 안에 베풀어진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다. 에스겔이 보았던 하나님의 보좌 곁에 있는 네 생물의 모습과 그분의 보좌의 장엄한 광채와 영광스러운 모습은, 요한이 기록한 요한 계시록 4, 5장에 묘사된 것과 너무나 흡사하다.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 옆에서 영존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네 생물과 거룩한 천사들과 네 생물의 안팎으로 가득한 눈들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의 빛의 색깔과 휘황찬란한 아름다움에 대해 묘사하였는데, 그와 똑같은 묘사를 에스겔이 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면이 할애하는 대로 간단한 언급만 하고 지나가기로 한다.

 

1. 왜 하나님의 보좌가 바퀴 위에 있는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보좌에 대한 묘사는 유동성으로 표현되어 있다. 다시 말하자면, 물론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고정된 하나님께서 좌정하시는 곳이지만, 때때로 성경에 묘사된 하나님의 보좌는 한 곳에 고정되어 있기보다는 움직이는, 이동될 수 있는 곳으로 표현되었다. 성경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하나님의 보좌가 묘사될 때에는 “보좌가 있는데”라는 표현보다는 “보좌를 베풀었다.”는 표현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원어로는 “throne was set”으로, “보좌가 베풀어지거나” “보좌가 설치되는” 표현으로 기록된 것이다. 그러므로 에스겔의 계시에서 바퀴 위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어서 이리저리 운행하는 모습으로 표현된 것은, 하나님께서 필요하실 때마다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시기 위해서 그분의 보좌 가운데 좌정하신 모습으로 현시하시고 운행하신다는 것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표현으로서 기록해 놓은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는 항상 구속과 심판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성소 제도에 나타난 지성소 안의 시은좌는 인간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구원을 상징하고 있으며, 다니엘 7장 9, 10절과 13절에 나타난 것처럼 보좌가 베풀어지고 책들이 놓인 장면은 심판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보좌는 바퀴 위에 놓인 듯, 때와 기능에 따라 유동적으로 운행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다음의 성경절을 참고해 보라.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단 7:9,10).

 

2. 네 생물의 의미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계 4:6).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는 항상 네 생물이 있는데, 네 생물은 각각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다(겔 1:15 참조). 이들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하므로 그냥 “생물”이라고 묘사되어 있지만, 아마 네 생물은 매우 아름다운 존재일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네 생물의 얼굴은 각각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그 얼굴의 모양이 하나는 사람의 얼굴, 다른 하나는 사자의 얼굴, 그리고 소와 독수리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품과 사업의 특징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사람의 얼굴은,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상징하며, 사자는 그리스도의 왕권을 상징하고, 소는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봉사, 그리고 독수리는 예리한 눈, 통찰력을 지닌 심판자로서의 사역을 상징하는 것이다. 보좌 곁의 네 생물과 함께 빛나는 바퀴 위의 보좌 위에서 나타나신 찬란한 하나님의 위엄있으신 모습에 에스겔은 놀라 넋을 잃고 말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광경이었던가!

 

 

2) 바퀴 안의 바퀴

 

에스겔은 계시에서 바퀴 속에 바퀴, 바퀴 안에 바퀴가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바퀴 가운데는 생물의 신이 있었다. 그렇다면 바퀴 안의 바퀴가 있고 그 속에 신이 있다는 의미는 무엇이며 영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우리의 삶은 마치 바퀴 안에 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복잡하게 뒤엉킨 채 돌아간다. 우리에게는 일어날 것 같지 않던 절망적인 사건과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고, 또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비참한 포로생활 속에서 에스겔이 거의 낙심할 뻔했던 것같이, 또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광야를 걸어가며, “과연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가?” 하며 부르짖었던 것같이, 인생의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는 그 암담함 속에서 “정말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인도하고 주관하고 계시는 것일까?” 하는 의심에 빠진다.

 

에스겔의 계시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룹의 날개 밑에 당신의 손을 갖고 계셨다. 그것은, 유한한 인간의 마음에는 복잡하게 뒤엉켜있는 것같이 보이는 것을 주님의 손이 완전한 질서 속에 보존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또한 우리의 짐을 담당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졸지 않고 항상 깨어있는 하늘 천사들이 지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쏟는 쉼 없는 봉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손이 바퀴 안에 바퀴를 어떻게 운전하고 계신가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익히 아신다. 우리의 영적 눈이 열릴 수만 있다면 그분의 영원히 변치 않는 손이 세상 역사를 주관하고 계심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지배 아래에 있지 않은 강력한 힘이 작용하고 있다. 인간은 자기가 일을 주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의 영향력보다 더 높은 힘이 세상에 역사하고 있다. 바퀴 안에 바퀴가 일하고 있다. 그 기계는 겉보기에는 매우 복잡해서 우리는 완전히 엉켜있는 모습을 볼 뿐이지만, 에스겔이 본 바와 같이 거룩한 손이 바퀴들 위에 놓여 있고 각 부분은 완전한 조화 가운데서 작동하고 있다. 그것처럼 우리의 생애가 복잡해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슬기로우신 대장께 우리의 생애를 맡긴다면 모든 어려움이 물러가는 것을 볼 것이다.  

 

에스겔처럼 어려운 삶 때문에 절망과 낙담에 빠져 있는가? 우리는 계시를 보아야 한다. 현재 우리의 당한 처지가 아무리 절망적이고 고통스럽게 보이더라도, 또 우리의 삶이 아무리 복잡하게 뒤엉켜있는 듯이 느껴질지라도, 우리는 우리 삶의 바퀴를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손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최선의 길로 인도하시고 결국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며 우리를 하늘 백성으로 만드시리라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아무리 힘들고 복잡하게 엉켜있는 것같이 보이더라도, 결국은 능력 있는 하나님의 손이 우리의 인생을 항상 주관하며 인도하신다는 것을 계시로 보고 믿는 사람들이 되자!

 

제3부_ 에스겔의 계시 II - 마른 뼈

 

에스겔이 본 계시 중에 이 계시는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하는 계시 중 하나이다. 에스겔 37장에는 매우 이상한 장면이 등장한다. 함께 연구하면서 이 계시에 숨어있는 영적 의미를 찾아보자.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 37:1-3).

 

한번은 에스겔 선지자가 계시 가운데서 어떤 큰 계곡 속에 있게 되었는데, 그의 앞에는 음산한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골짜기가 온통 죽은 사람의 마른 뼈로 뒤덮여 있는 것이었다. 그때 그의 귓가에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는데, 그것은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는 여호와의 질문이었다. 그는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에스겔의 대답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것이 긍정적인 대답인가? 아니면 부정적인 대답인가? 사실 그의 대답은 하나님의 능력을 확실히 믿지 못하는듯한 머뭇거리는 부정적인 대답이었다. 선지자는 그 마른 뼈들에 생명이 들어가 살 가능성을 전혀 볼 수 없었다. 에스겔이 이 계시를 보았을 때는, 자신의 처지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 몹시 낙망하고 있을 때였다. 그들은 마른 뼈와 같이 도무지 희망이 없어 보였다. 하나님께서 훈련하는 도구로 사용하신 바벨론에 잡혀 와서도 계속 하나님께 반역하고 우상숭배와 악에 빠지는 형편없는 자기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또 자신의 조국의 현실을 보면서 에스겔은 깊은 낙담에 빠지려는 유혹을 받았다. 그런 암담한 현실 속에서 그는 계시를 본 것이다. 이상 중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신다. “에스겔아,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1) 마른 뼈는 누구인가?

 

먼저 마른 뼈는 우리가 구원하고 전도해야 할 영혼들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가 구원하려고 하는 세상의 영혼들은 에스겔이 계시 가운데서 본 골짜기의 마른 뼈들과 같다. 그들은 죄와 허물로 죽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들을 취급하라고 하신다. 겉으로 볼 때 그들이 살 것이라는 희망을 품을 만한 근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은 사람들, 마치 무덤 속에 있는 것같이 희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도 생명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인간이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실 것이며, 생명이 없는 영적인 본성을 소생시키실 것이다. 만군의 주 하나님의 숨결이 생명이 없는 몸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마른 뼈에 대한 이 비유는 세상에 적용될 뿐 아니라 먼저 큰 빛과 진리로 축복을 받고 있는 우리에게도 적용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도 골짜기의 해골과 같기 때문이다. 비록 사람의 형상과 신체구조를 갖기는 했지만, 영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머리로 알기는 알아도 영적으로 행할 힘과 능력이 없다면 그것은 영적 근육과 힘줄이 없는 마른 뼈와 같다. 그런데 그뿐이 아니고 우리가 서로 바라볼 때 어쩌면 우리는 골짜기의 마른 뼈처럼 형편없는 서로의 모습을 볼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실망하고 서로 상처를 받고 주는 그런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서로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래서 서로에게 실망하고 서로의 모습에 낙망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이 마른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마치 에스겔 선지자의 대답처럼 우리는 확신 없이 대답한다. “아니요, 하나님, 부족한 저를 보세요! 그리고 연약한 저 형제, 자꾸 쓰러지고 미끄러져서 헛소리하여 실망을 안겨주는 저 형제를 보세요!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11). 이것이 우리의 낙담한 형편이다. 믿음 없이 좌절과 실망에 빠져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정신이 번쩍 나도록 큰 소리로 선포하신다.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여호와가 이들을 살릴 것이다!”

 

2) 마른 뼈에 임한 하나님의 능력

 

이제 마른 뼈에 어떤 기적이 일어나는가?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4).

그렇다. 마른 뼈들이 살기 위해 제일 먼저 말씀이 들어가야 한다. 마른 뼈에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37:5-10).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을 쫓아 대언하니,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흩어진 뼈들이 움직였고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서로 연락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이렇게 해서 생긴 몸에 여호와께서 생기를 불어넣었을 때, 그들은 큰 군대가 되었다.

 

그런데 이 비유는 마른 뼈들을 단지 사람의 형상으로 짜 맞추어 놓고 그냥 버려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지와 얼굴의 균형이 잡힌 것으로는 넉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똑바로 일어서고 활동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호흡이 몸에 생기를 주어야 하는데, 그들이 살기 위해서는 주께서 마른 뼈들 위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야 한다. 그것처럼 하나님의 생기 성령께서 활력을 주시는 그 능력과 함께 모든 인간 속에 계셔야 하는데, 그것은 몸의 모든 영적 근육과 힘줄이 운동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성령이 없으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생기가 없으면 무딘 양심과 영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생기가 영적 생명을 회복시켜야 썩지 않을 영원한 씨로 태어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뼈를 회복시키되 완전한 모습으로 회복시키시는데, 거기에는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1. 힘줄이 생김 -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먼저 힘줄이 생기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힘줄만 있는 것으로 넉넉하지 않다. 아직 사람의 모습으로 다 회복되지 않았는데도, 열성만 뻗쳐서 힘줄로 막 움직이려다 자기도 다치고 남도 다치게 하기 쉬운 상태이다.  

2. 살과 가죽이 덮임 - 사람의 모양은 거의 되었는데 아직 겉모양만 그럴듯한 상태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생기가 솟아난 사람은 아직 아니다. 자신이 영성이 충만하여 깨어 있을 뿐 아니라 주위와 다른 영혼을 성령의 은혜로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아직은 없는 상태이다. 영적으로 다른 영혼을 소생시키고 살리는 놀라운 능력인 생기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겉으로 살과 가죽이 입혀진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3. 생기를 넣어주심 - 성령의 능력인 생기가 들어가 완전한 사람으로 회복된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먼저 일어서는 상태가 온다.

4. 일어선다 - 힘이 없으면 일어설 힘이 없듯이,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설 힘을 가져야 한다. 곧 영적으로 각자 서는 경험을 해야 한다. 서지 못하면 걸을 수 없다. 성화의 길, 거룩게 되는 길을 걷기 위한 첫 단계가 일어서는 것이다.  

5. 큰 군대가 된다 영적으로 스스로 설 수 있는 사람, 성령의 생기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모여서 군대를 이룬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야 한 그룹으로서 한 단체로서 하나님의 큰 군대가 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정예 부대가 되는 것이며, 그때에 주님을 위해 싸울 마지막 큰 군대가 준비되는 것이다.  

 

3) 마른 뼈에 임한 기적이 나에게도

 

마른 뼈에 일어난 기적이 나에게도 임할 수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그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가? 영적 죽음에서 일어나라! 영적인 죽음에서 부활하라! 하나님께서는 네가 죽었으니 그 무덤에서 일어나 나오라고 하신다. 마른 뼈가 생기있게 움직이는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기적이 생기기 위해서는 부활의 경험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37:11-13).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이 어디에 거하고 있다고 하셨는가? 그렇다. 그들은 영적 잠이 든 상태로 영적인 죽음 중에서 무덤 속에 누워있다. 이 모습은 거듭나지 못하고 죄된 옛 생활과 습관에 젖어 죽은 듯이 무덤에 누워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무덤을 열고 나오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성령으로 변화시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렇다!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와 성령의 역사에 굴복하기만 하면 그 일이 우리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에 들어가게 되며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함께 거하시게 되는 것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장막이 우리 가운데 거하게 되는 영광스러운 장래의 본향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37:14).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있으리니 열국이 나를 이스라엘을 거룩케 하는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37:26-28).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계시를 보기를 원하신다. 지금은 비록 보잘것없고 부족한 우리 자신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얼마나 영적인 생기가 넘치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현재는 문제를 일으키고 말과 행동으로 우리를 힘들게 하는 형제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생기로 역사하실 때 그 사람이 얼마나 변화되어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모두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가지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계시를 보아야 한다. 마른 뼈처럼만 보이는 내 모습에서, 형제들의 모습에서, 영적인 힘줄이 붙고 근육과 가죽이 붙은 모습, 그리고 생기가 철철 넘치는 변화된 미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계시의 믿음이 필요하다. 또 믿음의 눈으로 그렇게 변할 교회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우리 같이 부족한 사람들을 믿어주시고 신뢰하시는 예수님의 믿음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의 모습을 뛰어넘어 미래에 이루어질 기적들에 대한 계시를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시키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이 특별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다

 

제4부_ 에스겔의 계시 III – 성전의 물

 

에스겔은 마지막을 장식하는 영광스러운 계시를 본다. 바로 에스겔 47장에 기록된 성전에서 나오는 물에 대한 계시이다. 성경절을 한번 읽어보자.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겔 47:1-5).

 

이 계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것은 미래에 회복될 하나님의 교회의 모습이다. 참고로 성경에서 물은 성령을 상징한다. 이 계시는 성령을 상징하는 물이 강같이 되는, 성령이 차고 넘치는 회복된 하나님의 교회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산 성전인 성령이 충만한 하나님의 백성 각 개인을 가리키기도 한다. 교회란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해지게 하려고 조직된 단체나 무리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성경 속에서의 정확한 교회의 개념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참 백성 자녀들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산 연결이 없이는 우리 각 개인은 하나님의 산 성전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미래에 성령이 충만한 하나님의 교회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계시가 우리에게 어떻게 영적으로 적용되는 것일까?

 

1) 동으로 흐르는 물

 

에스겔이 계시에서 보니 성전에서 물이 스며 흘러나오는데, 나중에는 이 물이 사람이 헤엄쳐야 할만한 강같이 깊은 물이 된다. 그런데 이 물은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왜 동으로 흐르는가? 에스겔 47장 8, 9절을 보면 그 대답이 나오는데,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찌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물이 동으로, 즉 동방으로 흘러가서 아라바와 바다로 이른다고 했는데, 아라바 광야와 그 광야의 가장 낮은 지역에는 죽음의 바다, 사해가 있었다. 그러므로 물이 아라바로 내려가 바다에 이른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생명 강물이 죽음의 바다, 가장 낮고 낮은 땅인 이 세상을 향하여 흘러간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나님 성령의 은혜는 죄 많은 세상을 살리며, 또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세상을 살리는 것이다.

 

2)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

 

그런데, 이 계시를 보면 처음에는 물이 흘러 발목 높이만큼의 물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발목까지 차는 물에서는 헤엄을 칠 수 없다.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칠만한 물”이 되어야 가능하다. 회복된 교회는 성령의 인도함과 충만함에 잠겨 헤엄칠만한 정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물로 비유된 성령님의 인도와 역사와 능력과 힘은 어느 정도인가? 우리를 주관하시고 제어하는 성령님의 힘은 우리 안에 얼마만큼 작용하는가?

 

1. 발목 깊이의 물 - 이 상태는 최소한의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아직 물속에서 헤엄친다기보다는 마음대로 멋대로 뛰어다닐 수 있는 깊이의 물이다. 이 상태에서는 아직 자기 마음대로 산다. 성령님의 인도와 주관, 제어를 받기보다는 나의 계획대로 내 맘대로 사는 영적인 상태를 가리킨다. 아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령이 충만한 회복된 교회 상태가 아니다.  

 

2. 무릎 깊이의 물 - 여전히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사는 상태이다. 발목까지 차는 물에서는 마음대로 걷는 것이 수월하지만, 물이 무릎까지 오면 걷기도 무거워진다. 하나님의 진리를 알므로 세상적으로 마음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하나님 성령의 뜻대로 온전히 주관 받고 사는 상태도 아니다. 마음이 있지만, 육신이 약한 걱정만 가득한 상태이며, 인생이 힘겹고 어려운 상태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께 완전히 굴복되어 쓰임을 받는 상태가 되기를 원하신다.  

 

3. 허리 깊이의 물 – 허리 깊이의 물에서는 엎드리면 헤엄칠 수 있다. 자신이 엎드리고 굴복하면 성령에 따라 살 수 있는 영적인 상태이다. 그러나 물에 둥둥 떠서 마음대로 헤엄을 치는 상태는 아니다. 성령이 지배하기는 하는데, 전적으로 굴복하지 않아 때때로 자신이 튀어나온다.  

 

4. 물이 강이 됨 – 물이 강같이 되어야 헤엄칠만한 물이다. 이런 영적인 상태는 성령이 충만한 상태이고, 내 생각보다 성령의 생각과 인도하심에 온전히 이끌려 사는 상태이다. 성령의 주관 하심을 받고, 온전히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생각하고 숨 쉬고 말하며 사는 상태인데, 곧 하나님의 사랑에 푹 잠겨서 사는 참된 신앙의 삶이다. 헤엄칠 때 몸을 온전히 물에 던져야 뜨듯이, 물에 다 맡기고 편안히 있어야 뜨듯이, 인생의 모든 것을 다 성령의 지배에 맡겨야 하나님 은혜의 강에서 헤엄을 치며 편안히 살 수 있다. 성령에 잠겨야 죄를 승리하고 자아를 이기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떤 상태인가? 여러분의 삶에서 성령님께서 주도하시는 정도는 어느 정도인가?

  

에스겔은 계시를 보았다. 가물고 메말라 보이는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의 물로 가득 차는 영광스러운 계시를 보았다. 강에는 생물이 자라고 고기가 심히 많아지는 장면이 연출되는데(9,10절), 물고기가 많아진다는 의미는, 많은 영혼을 인도할만한 성령의 충만함과 역사가 회복된 교회에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 강가 좌우에는 실과나무가 자라고 열매가 많이 맺어지며 잎사귀는 사람을 살리는 약재료가 된다는 기록이 나온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12절). 이것은 마지막 늦은 비 성령을 받은 사람들로 가득 찬 마지막 교회의 모습을 나타낸다. 실과와 열매를 맺는 나무들은 성령의 열매가 가득한 변화되고 성화된 사람들을 상징하는데, 이것은 곧 요한 계시록 18장 1절에 나타난 넷째 천사가 나타나 하나님의 영광으로 땅을 환하게 하는 늦은 비 성령의 운동과 그것에 참여한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세상은 이런 사람들에 의해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제5부_ 에스겔의 계시 Ⅳ – 하나님의 도성 “여호와 삼마”

 

에스겔이 기록한 마지막 계시의 장은 48장이다. 이 계시의 장면은 47장 후반부부터 시작되는데, 연구해보면 큰 은혜가 되는 계시이다. 함께 공부해보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이 지계대로 이스라엘 십이 지파에게 이 땅을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되…”(겔 47:13).

 

회복된 교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땅과 기업을 나누어주는 장면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면서 에스겔의 계시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열두 지파에게 땅과 기업을 나누어주는 기록은 옛날 여호수아 때에 이스라엘 백성 열두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는 것과 같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회복된 하나님의 땅, 구역을 가리키는 것이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 땅과 구역을 분배 받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주목하여 볼 것은 48장에 보면, 열두 지파 이름이 나오고 땅을 분배하는데, 땅 중앙 가운데 거룩하게 구별된 땅을 예물로 드리는 것이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다.

유다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너희가 예물로 드릴 땅이라. 광이 이만 오천 척이요 장은 다른 분깃의 동편에서 서편까지와 같고, 성소는 그 중앙에 있을지니, 곧 너희가 여호와께 드려 예물로 삼을 땅의 장이 이만 오천 척이요 광이 일만 척이라”(겔 48:8,9).

 

이 온 땅 중에서 예물로 드리는 땅 곧 레위 지계와 연접한 땅을 그들이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여길지니라”(겔 48:12).

 

이 구별된 땅은 지극히 거룩한 땅으로서 특별히 성읍과 성의 크기가 묘사되어 있다. 그 땅의 모양은 네모 반듯한 땅으로서(20절), 일만 팔천 규빗의 크기로 나와 있는데, 이 성읍에 대한 묘사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을 따른 열두 대문이 등장한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 땅과 구역에 관한 묘사와 크기는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사도 요한이 보았던 계시에 등장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을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한 묘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에스겔이 마지막에 보았던 계시 속에 나타난 모습은 회복된 새 하늘과 새 땅에 위치할 하나님의 도성이었다! 에스겔이 본 것은 이 땅에 회복될 예루살렘 성이 아니었다. 즉 바벨론 멸망 후, 회복된 이스라엘 나라를 본 것이 아니라, 사도 요한이 계시에서 보고 기록한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여호와삼마”란 단어이다.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겔 48:35).

 

여호와 삼마” – 히브리어로 ‘삼마’는 “거하다”, “존재하다”라는 의미가 있는 단어인데,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도 불구하고 항상 함께 거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 그런데 그것도 보통 장소가 아닌 특별한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삼마란 여호와께서 항상 함께 거하시는 곳이라는 뜻인데, 그것은 곧 “여호와가 항상 거기에 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신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에스겔의 이 계시는, 요한 계시록 21장에 묘사된 새 하늘과 새 땅에 내려와 상재할 새 예루살렘 도성과 이제로부터 하나님께서 영원히 인간을 떠나지 않으시고 장막을 치실 것과 도성 중앙에 설치될 하나님의 보좌와 성소 되신 어린 양이 함께하실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1-4).

 

에스겔은 계시에서 회복된 교회를 보았고, 하나님의 참 교회이며 성소인 각 개인, 곧 회복된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았고, 새 예루살렘을 보았는데, 그곳에는 여호와삼마, 하나님의 보좌가 함께 장막을 치고 계시는 것을 보았다. 여호와의 장막이 항상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우리에게 감격스럽고 놀라운 일이 될 것인가! 우리는 얼마나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사모하고 소망하고 있는가!

그러나 그것은 먼 장래의 일만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참 백성들이 온전히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어 그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산 성소가 되면 성취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곧 각 개인이 하나님의 산 성소로 회복되면 가능한 것이다. 여호와삼마는 미래의 있을 것만이 아니다. 현재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임재를 가지고 주님과 항상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곧 여호와삼마가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가진 삶,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삶인가!

 

** 마치면서

 

마지막 시대를 사는 오늘날, 우리는 계시를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의 인생이 엉망으로 어렵게 엉켜있어 보여도, 결국 우리의 인생을 최선의 축복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그래서 우리를 결국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실 주님 섭리의 손을 보아야 합니다. 또한, 아무리 지금 나 자신이 마른 뼈만 남은 듯이 앙상해 보여도, 그리고 교회와 이웃의 형제들이 마른 뼈 같은 형편없는 모습으로 보여도, 우리 속에 역사하셔서 큰일을 이루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서로 사랑하고, 미래의 변화될 모습을 그리며 서로 격려하는 것이 계시를 보는 믿음입니다. 또한 우리가 거듭나고 변화되어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남은 무리와 백성들이 결국 성령의 충만하신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을 믿는 것이 계시를 보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에스겔처럼 계시를 보는 믿음 속에 살아야 합니다. 현재는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될 것을 믿는 믿음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그 계시 속의 영광스러운 모습, 회복된 모습이 우리 속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믿는 것이 마지막 시대에 필요한 특별한 믿음, 계시를 보는 믿음입니다. 이 특별한 믿음을 통해 그 계시 가운데 나타난 놀라운 일이 우리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그리고 그 회복된 새 예루살렘에 다 들어가게 되는 독자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세계 동향 Top News

 ■ 2014/04 월간 세계 동향 TOP NEWS

 

 (1) 비극적인 세월호 침몰 사고와 버큰헤이드호의 전통

2014년 4월 16일 오전 전남 진도군 병풍도 해상에서 믿을 수 없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수학여행 길에 오른 안산시 단원고 고등학교 학생 325명을 포함하여 475명을 태운 세월호가 침몰하여 4월 23일 현재 302명이 숨지거나 실종된 상황이다. 배가 해상에서 침몰하거나 항공기가 바다 등에 추락해 탈출할 때 “여자와 어린이 먼저 구조하며 선장과 승무원은 끝까지 남아 구조를 돕는다”라는 '버큰헤이드호의 전통'은 1852년 버큰헤이드호의 침몰 사건 이후로 전 세계적으로 불문율처럼 지켜지고 있다. 타이타닉호 침몰사고에서도 버큰헤이드호의 전통에 따라 여자와 어린이부터 구출됐다. 그러나 이번 사고에서는 지구촌 상식인 버큰헤이드호의 전통을 찾아볼 수 없어 더 비극적인 사고로 남게 되었다.

 

179-NEWS-1 

 

(2) 일본의 소비세율 인상과 국가 부채 디폴트 가능성

최근 일본에서 사재기 열풍이 벌어졌다. 가전제품, 식재료, 전철 정기권 등의 물품들을 일본인들이 마구 사들였는데 그 이유는 소비세(어떤 물품이나 서비스를 거래할 때 붙는 세금, 한국의 부가가치세) 인상 때문이다. 일본의 소비세율은 4월 1일부터 5%에서 8%로 인상됐다. 소비세 인상은 소비 위축을 부르게 되어 어려운 일본 경제에 더 큰 부담이 될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조세 저항을 무릅쓰고 세수를 올린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국가 부채 때문일 것이다. 일본 재무상은 최근 예상하기를 부채 이자 상환이 이번 회기에 2천 570억 달러(25.3조 엔)에 이를 것이라고 했다. 이는 2013년 회기에서 13.7% 늘어난 것이다. 일본의 올해 세수는 45.4조 엔으로 예상된다. 이는 이자 비용만 전체 정부 세수의 56%에 이른다는 것을 뜻한다. 역사에서 보면 오토만 정부는 이자 지불에 총 세수의 52%를 지불하던 1877년에 디폴트 했고, 프랑스 혁명 전 해인 1788년 프랑스 정부는 부채 이자 지불에 세수의 62%를 사용했다. 일본도 GDP의 242%에 이르는 10조 달러(1천조 엔)의 디폴트가 일어날 시기가 멀지 않은 것 같다.

179-NEWS-2

 

(3) 美, 양적완화 100억달러 추가 축소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지난 3월 19일 100억달러 규모의 추가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을 결정했다. 이로써 연준의 채권 매입 규모는 당초 850억달러에서 750억달러(지난해 12월)→650억달러(올해 1월)→550억달러(3월)로 줄어들었다. 미국 국채 최대 매수주체인 연준이 미 국채 매입량을 줄이고 있는 가운데 지난 1월 중국과 일본에 이어 새로운 세 번째 규모의 미 국채 보유국으로 유럽의 작은 나라인 벨기에가 등장했다. 벨기에는 2월 현재 3412억달러(약 354조원) 규모의 미 국채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지난해 벨기에 국내총생산(GDP) 4840억달러의 3분의 2에 해당된다. 특히 벨기에는 지난 2월에만 309억달러의 미 국채를 매입했고, 작년 12월과 지난 1월의 단 2개월간 약 1,000억달러의 미 국채를 매입하며 급속히 미 국채 보유량을 늘리고 있다. 몇몇 경제 전문가들은 이렇게 빠른 속도로 벨기에가 미 국채 보유량을 늘린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고, 이런 일들이 미국 국채 시장의 붕괴를 막기 위해 누군가가 벨기에를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79-NEWS-3

 

(4) 달러 안쓰는 러시아 기업들과 페트로달러의 미래

서구의 추가 경제 제재가 예고된 가운데 러시아 수출 기업들 사이에서 결제 대금으로 달러 대신 다른 통화를 선택하자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4월 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러시아 국영 석유회사 가즈프롬의 자회사 가즈프롬 네프트의 알렉산더 듀코프 최고경영자(CEO)는 "95%의 고객들이 달러 대신 유로로 결제하는 것에 찬성했다"면서 "아시아를 중심으로 수출선 역시 다변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금으로 뒷받침 되지 않는 달러가 지금까지 세계 기축통화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 무역에 달러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석유 결제에 달러가 사용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유로화로 석유를 팔려고 했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나 금으로 석유를 거래하려던 리비아의 가다피는 제거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러시아와 중국이 석유를 포함한 무역에서 달러 사용을 줄이고 있다. 무역에서 달러를 배제하는 움직임이 확산되면서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지위가 위협받고 있다.

 

179-NEWS-4-edit

 

(5) 핏빛 붉은 달 '블러드 문'현상과 성경 예언

4월 15일 달이 오렌지 빛에서 점점 붉게 물드는 이른바 블러드문 현상이 미 전역에서 목격됐다. 이 블러드문 현상은 보름달이 지구 그림자에 가릴 때 나타나는 '개기 월식' 현상인데, 햇빛이 지구 대기의 오염된 먼지에 의해 굴절될 때 가시광선 중 붉은 빛의 회절이 잘 일어나 달이 붉게 보이는 것이다. 개기월식은 평균적으로 3년에 2번 정도 일어난다. 그런데 이번 월식에 대해 미 항공우주국 나사(NASA) 측은 “15일 시작된 블러드 문 현상은 기이하게도 내년 9월 28일까지 4번이나 연속으로 일어난다” 고 밝혔다. 또한 이 네 번의 개기월식 중간에는 두 번의 일식 현상도 일어나는데, 2015년 3월 20일에는 태양 전체가 가려지는 개기일식이 발생하고, 2015년 9월 13일에는 태양의 일부가 가려지는 부분일식이 일어난다고 한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올해와 내년에 걸쳐 있을 블러드문 현상과 개기일식이 이스라엘의 절기에 맞춰 일어난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말세에 해와 달에 징조가 있을 것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행 2:20) 올해부터 내년까지 해와 달에 있는 이 특별한 현상이 성경예언의 성취라고 볼 수는 없지만, 말세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한번쯤은 관심을 가져볼 만한 주제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행 2:17, 18) 오늘날은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피가 되는 징조와 함께 하나님의 성령이 준비된 자들에게 임하는 시대이다.

179-NEWS-5

 

마지막 시대 이슈_ 월드컵 - 당신의 영혼이 위험하다

 

179-5179-6

 

진리 탐구_ 7년 환란 교리가 변경해 놓은 영생에 대한 달콤한 유혹

 

7년 환란 휴거와 함께 반드시 전파되는 교리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입니다.

그러한 교리를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은 7년 환란 전에 휴거가 되어 올라가지 않으면 그 사람은 “버리운 자”로 인(印) 쳐지기 때문에 휴거 이전에 이미 구원의 확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7년 환란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들의 구원의 날짜(죄 사함 받은 날, 은혜를 깨달은 날, 복음 말씀을 깨달은 날 등)를 자신의 육신의 생일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며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교리는 사람들에게 이미 구원에 대한 안식과 평안을 줌으로써 하나님의 법과 계명을 폐하게 되고 세상이 주는 거짓 평안에 자신들의 영혼이 죽어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예수님의 재림 징조가 예언의 말씀에 더한 것인지 제하여 버린 것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교리에 세뇌되고 중독되어 올무에 갇히게 됩니다.

성령의 은혜로 구원의 길로 들어섰다 하더라도 7년 환란의 교리가 전해주는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으로 인해 육체로서 그 길을 마감하게 될 운명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믿고 있는 7년 환란의 교리가 세상의 징조와 맞지 않음을 그것을 가르치는 교단이나 목회자들도 서서히 인정하고 시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세상 사람 누구나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시대의 징조를 보고 또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사람들은 7년 환란의 전 3년 반이 지난 후 3년 반의 재앙과 기근과 고통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므로 해서 그들 스스로 자신들이 “버리운 자”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기 때문에 심히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그들은 자신이 믿는 교리에서 돌이키거나 회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또 다른 추측과 추정으로 7년 환란 교리를 변호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고 있으며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은 교리가 만일 옳지 않더라도 우리가 믿고 전하는 구원의 복음은 확실하며 동시에 우리의 구원은 변함없이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엄연히 시대를 분별 할 수 있는 때에 살면서도 그들이 주장을 굽히지 않는 내면에는 그들의 명예와 위상과 누리는 풍요를 사람들의 영혼보다 더 사랑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거나 거짓을 말할 때는 심판과 형벌의 교훈을 우리에게 주시고 있습니까?

이사야 8장 20절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재림에 앞서 이미 구원받았고 구별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올바른 영생의 길에서 벗어나 알곡으로 추수되는 것이 아니라 “쭉정이”가 되어 환란에 다 날아가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 어떠한 진리의 말씀도 그들에게는 감동과 감화를 줄 수가 없으며 결국에는 죄에 대하여 영원한 사함이 없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날마다 지음으로써 그 일들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7년 환란 교리가 변경해 놓은 영생에 대한 사단의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선악과의 또 다른 불순종인 악(惡)의 모양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며 지금도 침노를 당하고 있습니다.

“침노(擄侵)” 한다는 말은 온 마음을 다한다는 가르침으로 하나님과 세상에 두 마음을 품으면 결코 빼앗을 수 없으며 환란을 통해 인내를, 인내를 통해 연단을, 연단을 통해 소망이 이루어지는데 이 모든 것이 없이는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번 뿌려진 말씀의 씨앗은 믿음의 순종이나 육신의 방종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무조건 알곡이 될 것이라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다음의 말씀은 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생명의 양식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마가복음 4장 28절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다음 호에는 7년 환란이 여러분들에게서 강탈해 버린 지위와 권리와 영광인 “잃어버린 이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회사 Episode_ 금욕주의 선동자와 그 히스테리의 영향

 

금욕주의적이고 엄격한 것으로 특징 지워진 4세기 교회 제도가 바로 제롬(A.D. 340~420)에게서 체험되었다. 그는 자신의 삶과 대화를 통해서 그 제도의 가장 나쁘고 불쾌한 특성들을 드러내 보여 주었다. 음침함, 신랄함, 질투, 불관용, 신성한 의무를 행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모든 것에 대한 불만 등, 이 모든 것이 그에게는 습관화되어 있었다. 이런 사실은 거의 모든 그의 글과 말과 행동에서 무심코 드러났다. 그의 가장 큰 결점 중에는 비판적이고 흠잡기 좋아하는 정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이 같은 정신 때문에 그 시대에 가장 훌륭한 사람들까지도 그의 책망을 피해가지 못했다. 라틴 벌게이트판 성경(5세기)을 편집한 이 사람의 까다로운 기질과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진 독설은 제롬이 4세기 모든 논객 중 가장 신랄하고 가혹한 인물로 알려지게 한 이유에 포함되었다.

제롬은 그의 친구 폴리누스가 금욕주의를 따르기 위해 견뎌낸 모든 굴종과 고난을 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즉시로 그의 재산을 모두 바치라는 힐책의 요구를 했다. 또한, 그 당시 국가와 연합하지 않은 교회들의 새 지도자요 자신의 인생을 올바른 초기 사본들을 수집하는 일과 성경을 배포하는 일, 복음 전단들과 책들을 쓰기 위해 필기자들을 고용하는 일에 혼신을 바친 왈덴스인 비질란티우스에 대하여 제롬은 국가의 손에 넘겨서 유배나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신실한 왈덴스인들의 지도자 비질란티우스에 대해 제롬은 “비열한 놈은 혀가 잘리든지, 아니면 미치광이처럼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기록하였다.

 

우리는 금욕주의 히스테리의 영향이 얼마나 비도덕적이었는지를 어거스틴(A.D. 354~430)에게서 일어난 변화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저명한 저술가(아마도 그는 카톨릭 교부들 중 교황권에 의해 가장 칭송받는 인물일 것이다)는 제롬의 견해들을 받아들이라는 대중의 압력을 받았으며, 그 또한 제롬과 서신을 왕래하는 중에 있었다. 박해 정책에 대한 그의 완벽한 공헌에 대해 림보르는 상당히 길게 설명하였다. 어거스틴은 북아프리카에서 주교의 자리에 있으면서 교황권에 치명적인 무기 하나를 선사하였다. 그것은 ‘강제 구금’이라는 괴물 같은 교리를 고안해 낸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종교재판소의 기초를 놓았다. 헬라 철학에 도취하여 있던 그는 그 철학의 정신이 자신의 영혼에 엄청난 불길을 지폈다고 외쳐댔다. 어거스틴은 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마니교에 빠져 있었다. 이 종교는 정교 연합을 가르치며, 주일 중 첫째 날 준수를 존귀하게 여기는 종교였다. 어거스틴은 왜 교회의 교리들과 관습들이 무력으로 강제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많은 이유를 발견하였다. ‘강제 구금’ 교리는 국가에 의해서 강요된 예배 형태를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수백만에 이르는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이 외에도 어거스틴은 당시 순수한 복음주의 브리튼(대영제국)의 섬들을 이교적인 교리로 전복시키고자 협박하고 세상 왕권을 이용해 무너뜨리고자 하였으며, 운명론 교리를 통해 오늘날 기독교에 엄청난 해를 입혔다. 어거스틴은 광야 교회의 으뜸가는 대적인데도 오늘날 그는 성자라 칭함을 받고 있을 만큼 기독교는 무지 속에 그의 이교적인 교리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 이교의 관습에 반대한 사람들을 독자들은 아는가? 그들의 투쟁을 다음 호에서 살펴보자.

 

Healing Story_ 미세먼지 대처법

 

179-7179-8

 

신앙 칼럼_ 선한 말, 은혜를 끼치는 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엡 4:29).

세상에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이 난무합니다. 잘난 체하는 말, 이웃을 비방하는 말, 폭력적인 말, 천박한 말, 남을 모함하고 해코지하는 말, 아부하는 말, 입에 발린 말, 불쾌한 말, 등 우리 주변에서 말도 안 되는 말만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 때문에 사회를 문제 삼고 남 탓할 것 하나 없습니다. 매일 내가 한 말이 자라서 우리가 한 말이 되고 세상의 말들을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허튼소리만 잘해도 사람들이 관심을 두고 댓글을 달고 그러면 사회적 쟁점이 돼서 유명세를 타는 희한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실제로 거짓말도 많이 떠돌면 하나의 통계가 돼서 사실처럼 굳어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회현상으로 자리 잡는 순간 거짓말도 진실이 되는 이상한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빛보다 빠른 속도로 세상의 말들을 전하는 최첨단 대중 매체 덕분에 이런 일들은 더욱 쉽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개인이 언론이 되는 세상’이 바로 지금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말을 하고 싶습니까? 아니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그 해답은 ‘덕을 세우는데 소용이 되는 선한 말, 타인에게 은혜가 되는 말’입니다. 이것은 시대를 초월한 불변의 진리입니다.

선한 말을 실천하려면 여러분 속에 있는 동기와 의도를 가장 먼저 살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9절은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동기가 선해야 선한 말, 선한 행동이 나올 수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양선의 미덕을 강조했습니다. 양선은 어질고 착하다는 뜻으로 그리스도의 가장 뚜렷한 성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의 동기와 의도가 선하면 우리는 매사에 설득력 있는 자세로 선한 말, 은혜로운 말을 가려서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하시던 모습이었습니다.

선한 말, 은혜를 끼치는 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에베소서 4:29).

 

 


      
세상에 생각없이 내 뱉는 말들이 난무합니다. 잘 난체 하는 말, 이웃을 비방하는 말, 폭력적인 말, 천박한 말, 남을 모함하고 해코지하는 말, 아부하는 말, 입에 발린 말, 불쾌한 말, 등 우리 주변에서 말도 안되는 말만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 때문에 사회를 문제삼고 남 탓할 것 하나 없습니다. 매일 내가 한 말들을 자라서 우리가 한 말이 되고 세상의 말들을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허튼 소리만 잘 해도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댓글을 달고 그러면 사회적 이슈가 돼서 유명세를 타는 희한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실제로 거짓말도 많이 떠돌면 하나의 통계가 되서 사실처럼 굳어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회현상으로 자리잡는 순간 거짓말도 진실이 되는 이상한 구조가 만들어 집니다. 빛보다 빠른 속도로 세상의 말들을 전하는 최첨단 매스 미디어 덕분에 이런 일들은 더욱 쉽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개인이 언론이 되는 세상’이 바로 지금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말을 하고 싶습니까? 아니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그 해답은 ‘덕을 세우는데 소용이 되는 선한 말, 타인에게 은혜가 되는 말’입니다. 이것은 시대를 초월한 불변의 진리입니다. 

 

선한 말을 실천하려면 여러분 속에 있는 동기와 의도를 가장 먼저 살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9절은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동기가 선해야 선한 말, 선한 행동이 나올 수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양선의 미덕을 강조했습니다. 양선은 어질고 착하다는 뜻으로 그리스도의 가장 뚜렷한 성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의 동기와 의도가 선하면 우리는 매사에 설득적인 자세로 선한 말, 은혜로운 말을 가려서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하시던 모습이었습니다.

[출처] 선한 , 은혜를 끼치는 (킹스 메신저) |작성자 유리동굴

 

이현맘의 채식 요리_ 밥 버거

 

17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