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권두언


마지막 때에 이 지상에는 오직 두 무리만이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 이렇게 두 부류의 사람들만이 있을 것입니다. 아무도 중간에 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는 교회라는 조직은 형식적으로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전체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로 채워질지 모르고, 어떤 교회는 하나님의 인을 받는 사람들이 간혹 있을지 모르며, 어떤 교회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인을 받을지 모릅니다.
중요한 사실은,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고, 구원을 위한 준비도 개인적인 것이며, 교회가 구원을 이루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 참석한다고 하여 구원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교회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해서 멸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성경의 진리대로 변화되어,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과 어린 양의 성품을 이루는 각 개인이 하나님의 인을 받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단이나 교파나 건물이나 조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참 백성들이 교회입니다.
머지않아 참 교회의 정체가 드러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참 교회인 백성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 교회에 모두 포함되시는 독자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강 병국 목사           

Love Letter_ 부드러운 흙의 가슴이 되어

                                                                                                       

                                                                                                        강 영은                                                                                                          

 

어느새 무거워진 벼 이삭이 고개를 수그렸습니다.
농익어가는 감이 파란 하늘을 더 높아 보이게 하고
머리를 툭 치고 배시시 웃으며 떨어지는 도토리 몇 알 발에 채더니
벌써 낙엽 흩날리는 초겨울 입새입니다.

하나, 둘, 푹신한 대지에 마음 놓고 몸을 던지는 잎은

떨어지는 잎들을 받아주는 흙의 가슴을 아나 봅니다.
벌레에 물린 잎, 물기 빠진 잎,
검게 썩어 얼룩진 잎, 구멍 숭숭 뚫어진 잎
가슴 열어 다 받아주는 부드러운 흙의 마음을…
허름한 사람, 지친 사람, 슬픈 사람
포근히 재우는 여인숙처럼…


계절이 가고 또 다른 계절을 맞는 길목에 서서
지나간 시간들이 남기고 간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아는 이들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기대하지 않은 일에서 당한 실망 때문에,
소망대로 되지 않은 데서 생긴 두려움 때문에,
가슴을 꽁꽁 싸맨 채 지내는 삶은 아닌지…


설그럭 설그럭 힘없이 떨어지는 낙엽을
말없이 포근하게 받아주는 대지를 보면서 생각을 해봅니다.
썩은 잎, 벌레집 붙은 잎, 시든 잎 우수수 쌓이면 싸일수록
기름진 양분으로 삭히는 성숙한 흙,
가슴을 열어 고통을 안고,
마음을 열어 아픔을 보듬고,
세상의 모든 슬픔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부드러운 흙의 가슴, 대지의 마음을 갖고 싶다는…


원망도, 저항도 없이 열어 둔 마음에
풀지 못한 매듭 없는 포근한 손길에
쉴 곳 없는 시든 잎들 마구 떨어져도
제 몸의 물기를 모두 짜서 먹이는 흙은
훗날 푸르름으로 뒤바뀔 순환의 기쁨을 조용히 혼자서 삭입니다.

자신을 썩혀 다른 것으로 다시 살리는 흙,
무엇을 받아도 다 삼키고 소화하는 흙,
무엇이 들어가도 좋은 양분으로 승화시키는 흙,
그리고 끝내 죽음에서 생명을 다시 피어올리는 흙…

문득, 비난과 고통과 죽음의 십자가에서
아름다운 생명의 꽃 피어올리신 한 분이 생각납니다.
모든 이의 죄를 대신 받고,
모든 이의 죄를 대신 묻고,
사망의 무덤을 넘어 생명의 부활로 일어나신 분…


떨어지는 낙엽을 가슴으로 받으며
수북한 낙엽 무덤을 개의치 않고 하늘 보고 편히 누운 흙…
이 계절엔
흙의 가슴, 흙의 마음, 흙냄새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집니다.

제1부_ 스데반이 역설한 “손으로 짓지 않은 성소”


교회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골목마다 십자가가 세워지고 작은 교회, 큰 교회, 몇 만 명이 운집하는 대형 교회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교회, 하나님의 진리가 가감 없이 전해지는 교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고 있는 교회는 좀처럼 찾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원래의 목적을 잃어버린 채, 교회는 인본주의와 교회 성장, 그리고 비즈니스 주의에 빠져 비대해진 몸으로 표류하며 오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신이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구원이 보장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붙어 있기만 하면 구원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 건물이 크고, 교인의 숫자가 많고, 선교를 열심히 하는 교회라 할지라도, 그 교회에서 진리가 바로 전해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진리와 계명에 대한 순종이 강조되지 않고 수반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를 당신의 참 교회로 간주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또한, 교회가 구원을 보장해 준다는 일념 아래 구원받기 위해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사람들을 당신의 참 백성으로 간주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참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 그 교회는 훌륭하게 건물이 갖추어진 유형의 교회라기보다는 무형의 교회입니다. 곧 마음의 보좌에 하나님께서 친히 좌정해 계시는 교회, 하나님과 산 연결을 한 살아있는 교회, 하나님의 계명과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 주님 안에 거하여 열매를 많이 맺는 각 개인이 하나님의 성소가 되는 무형의 교회를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번 신앙 기사에서 연구할 교회에 대한 올바른 개념은 이 마지막 시대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참 교회, 참 성소가 되도록 도와드릴 것입니다. – 편집실 -

 

제1부: 스데반이 역설한 “손으로 짓지 않은 성소”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행 7:48-50).

 

“참 교회”에 대해 가장 진보적이고 가장 성서적인 이해와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성경의 인물은 스데반이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했던 스데반이 순교할 때에 마지막으로 했던 설교와 증언에서 참 교회에 대한 개념을 유추해 낼 수 있다. 그의 설교의 핵심 주제로 그를 순교하는 지점까지 몰고 갔던 참 교회에 대한 개념은,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양심을 날카롭게 깨웠을 뿐 아니라 현주소를 잃고 표류하고 있는 마지막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도 큰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허를 찌르고 분노를 충천하게 하여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게 만든 참 교회에 대한 개념이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역설한 그 개념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

 

1) 거짓 고소를 받은 스데반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자 복음이 큰 능력으로 전파되었다. 복음 사업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되어 점점 더 넓은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오순절 성령을 부어 주실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 (행 2:5)고 있었는데, 놀라운 성령의 역사에 굴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받아들인 유대인 제자들이 수없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성령의 역사와 사도들과 제자들의 헌신적인 전도 활동으로 인해 초대 교회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인 여러 다른 민족과 이방인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점점 늘어가는 신자들의 수의 증가는 책임 맡은 사람들에게 무거운 부담이 되었다. 사도들은 집회를 소집하여 성령의 지도에 따라 일곱 집사를 선출하여 교회의 일을 분담하게 하였다.

 

초대 교회 당시 일곱 집사 가운데 하나로 뽑혔던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던,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일곱 집사 중에 으뜸 되는 스데반은 경건하고 깊은 신앙의 소유자로서, 유대 태생이었지만 헬라어를 구사할 줄 알고 헬라 사람의 관습과 예절에 익숙한 사람이었으므로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유식한 랍비들과 율법의 박사들은 자신들이 쉽게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스데반과 공개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그들은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능히 당치 못하”였다. 스데반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했을 뿐만 아니라, 예언을 연구한 사람으로 모든 성경의 예언을 꿰뚫고 있었고, 율법의 모든 내용과 이스라엘의 역사에 박식하였다. 그는 진리를 힘 있게 옹호하고 변호하므로 그에게 도전해 오는 모든 적수들을 완전히 패배시킬 수 있었다.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스데반의 명석하고 예리한 지혜의 말을 누구도 반박하고 이길 수 없음을 알고는 불타는 증오심을 가지고 그를 징계하려고 하였다. 그렇게 하여 백성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하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들은 스데반을 체포해서 산헤드린 앞으로 데려다가 심문을 시작했다. 스데반의 논증을 반박할 목적으로 학식 있는 유대인들이 소환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데반의 죄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거짓 증인들을 고용하여 스데반이 하나님의 성전과 율법에 대해 참람된 말을 한다는 거짓 증언을 하게 하였다. 그 증인들은 “그(스데반)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이 스데반을 거짓 고소한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교회에 관한 문제였다. 여기서 스데반의 교회에 대한 개념과 유대 지도자들의 교회관이 상충되었다.

 

2) 유효 기간이 끝난 성소와 두 가지 교회

유대 지도자들의 교회관은 무엇이었는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교회와 성전은 그들에게 거의 우상이었다. 그들에게 교회와 성전은 구원의 보장이요, 수단이자 그들의 존재 이유였으며 그들의 종교의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성소 제도는 종말을 고하고 성소의 유효기간은 끝났다. 오랜 세월 동안 성소 제도와 표상들을 통해 가리켜 오던 희생제물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자신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지상의 성소 제도는 끝이 났으므로, 이제 그들은 그들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새롭게 보여주시는 새 길, 새롭게 열린 구원의 도와 방식을 따라가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성소의 낡은 제도를 붙잡고 있었다.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았다는 자만 속에 율법주의와 위선에 빠져있던 유대 지도자들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왔을 때에 그를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성취가 그토록 뚜렷하게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영적 눈이 멀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성소 안의 희생제물은 필요 없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던 그때, 성전 안의 휘장이 하늘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한때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했던 곳이 군중의 눈으로 다 볼 수 있도록 열려졌다. 그곳은 하나님의 세키나 영광의 빛이 거했던 곳, 하나님께서 시은소 위에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던 지성소였다. 아무도 이 지성소와 성소를 갈라놓는 휘장을 쳐들 수 없었고, 다만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씩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 성전의 지성소는 더 이상 거룩한 곳이 아니었다. 모형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원형과 마주쳤고 큰 희생이 이루어져, 이제는 지상의 지성소가 아니라 하늘 지성소로 가는 새롭고 산 길이 만민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다. 모든 사람은 누구든지 단번에 드려지신 희생제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보이지 않는 하늘의 칼에 의해 휘장이 찢어져 지성소의 내부가 훤하게 드러나 쓸모없게 된 성소,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버린 성소에서 휘장을 꿰매어 칸을 다시 막은 채, 아직도 이전과 똑같은 제사 제도를 집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유효 기간이 끝난 낡은 성소 제도를 고집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참 교회, 진짜 교회라고 믿고 있었으며, 그들의 교회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구원이 이른다고 스스로 기만하고 있었다.

 

이제 이 지상에는 두 개의 교회가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는 크고 웅장한 성전 건물을 가지고 있고 거대한 조직을 가졌지만, 진리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더 이상 같이 하지 않는 눈에 보이는 유형의 교회, 또 다른 하나는 훌륭한 건물도 조직도 없지만, 진리가 그 속에서 가르쳐지고 전파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역사가 현저하게 함께 하는 하나님의 참 교회,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교회였다. 한 교회는 정치적으로도 막강한 세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세와 또 산헤드린이라는 위대한 조직과 정권을 배후로 하며 훌륭한 성전과 의례와 의식들을 가지고 있는 교회였고, 다른 한 교회는 교회의 총회도, 총 지도자도, 그렇다 할 조직과 배후도 없는, 다만 성령의 능력과 역사하심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보잘것없는 교회였다. 그렇다면 이 두 교회 중에 어떤 것이 참 교회였는가? 하나님께서 어떤 교회를 사용하셔서 그분의 뜻을 펴시고 진리를 전파하셨는가?

 

3) 스데반의 참 교회의 개념 – “손으로 짓지 않은 성소”

산헤드린 앞에 끌려간 스데반은 영적으로 눈이 먼 유대 제사장들과 관원들을 깨우치고 싶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스데반이 참람 되다는 비난에 답하려고 재판관들과 마주 섰을 때, 그의 얼굴에는 거룩한 빛이 비치었고,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 스데반의 얼굴의 빛을 바라본 많은 사람들은 떨면서 얼굴을 가렸지만, 지도자들과 관원들의 완고한 불신과 편견은 흔들리지 않았다. 스데반은 그가 믿는 진리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에 맑고 감격에 떨리는 음성으로 자신의 변호를 시작하였고 그 음성은 온 공회당에 울려 퍼졌다. 사도행전 7장 2절에서 53절까지는 스데반이 순교하기 바로 전에 그가 믿고 주장했던 진리에 대한 마지막 증언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것이 무슨 내용이었는가?

 

스데반은 먼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유대 민족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으로 그의 증언을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불러내어 그와 언약을 맺으시고 그의 후손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셔서 인도하신 역사, 그리고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신 놀라운 역사를 열거하였다. 그다음 그들이 그렇게 위대하게 추앙하며 믿고 있는 모세가 했던 예언,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우리라”던 예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사실을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또 그들이 이 땅에 강림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예언된 메시아를 거절하고 못 박아 죽인 큰 죄를 지적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증언에서 가장 핵심 되는 주제, 참 교회에 대한 개념을 예리하게 피력하였는데, 결국 그 증언과 지적은 그들을 분노하게 하여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게 하였다. 그 마지막 핵심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그렇게 굳게 믿고 의지하고 주장하던 그들의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성전과 교회와 조직은 더 이상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참 교회가 아니며,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아와 그분이 전하는 진리를 유대인들이 거절했으므로, 이제 하나님께서는 “손으로 지은 성소”에 더 이상 함께 계시지 않는다는 요지였다. 즉, 스데반은 유대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신뢰하던 그들의 율법과 규례와 의식과 성전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하나님께서 더 이상 유대 백성과 함께하실 수 없는 이유를 제시하며, 그들이 유대 나라의 마지막 은혜의 시간이 지나가기 전에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촉구하였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구원의 복음을 인간의 유전으로 뒤틀고 왜곡시켜,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받는 백성들과 함께 헛된 형식주의에 빠져 멸망의 길로 가고 있었다. 그들의 영적 어두움은 너무 심해서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오랜 세월을 통해 예언되고 표상되어 온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를 못 박아 죽일 정도까지 되었다. 그들이 헛된 구원의 망상 속에 빠져 자랑하고 의지하던 성전은 그들의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었으며, 머지않아 그들의 눈앞에서 그것이 초토화되고 파괴될 것이었다. 그들은 눈앞에서 파괴되어 없어져 버릴 교회를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에게서 구원을 바라며,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임재를 지닌 산 성소가 되어야 했다. 이제 스데반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지막 자비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스데반이 죽으면서까지 역설한 참 교회의 개념은 오늘날 맹목적으로 교회의 권위와 가르침에 맹종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커다란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의 말씀에 순종함과 하나님과 산 관계를 맺고 있음에 관계없이,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고, 교회의 녹명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교회와 연관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구원이 보장된다고 생각하는 현 기독교인들의 교회관은 매우 위험한 사상이다. 성경이 가리키는 참 교회에 대한 개념은 보편적인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교회관과 사뭇 다르다. 성경이 참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은 단체나 조직이나 건물이 아니다. 참 교회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여자의 남은 무리로서, 영혼의 성전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모시고 있는 각 개인이 참 성소이다. 스데반은 성령의 역사로 그 위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 당시에 인간의 안목으로는 전혀 받아들여지기 불가능한 진리를 역설했던 스데반은, 교회나 성전이나 조직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 교회의 조건이 아니고, 그 가운데 있는 진리와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만이 참 교회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증언하다가 위대하게 생을 마감하는 순교자가 되었다.

제2부_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는 거짓말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렘 7:2-4).

 

스데반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가졌던 교회에 대한 그릇된 개념은 구약 당시에도 편만 하게 나타나 있다. 이 문제는 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자주 경고를 하시던 사안이었다. 그런 경고의 메시지가 극명하게 나타났던 시대 중 하나는 선지자 예레미야 시대였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고 진리에서 떠나 곁길로 가면서도 유대 백성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전을 의지하고 있었다.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께 반역하고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유다 백성들을 경고하는 중, 예레미야는 심지어 성전 문 앞에 서서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까지 말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상상해 보라! 교회 앞에 서서 교회에 출입하는 신자들을 막으며 그렇게 말하는 예레미야의 모습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가를...!

 

그들은 무조건 성전을 믿고 있었다. 그들은 이방 나라를 본받아 우상숭배와 온갖 가증한 죄악을 행하면서도, 그들이 구원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있는 성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멸망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마치 엘리 제사장 당시에 이스라엘이 그들의 악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법궤가 있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에 대한 승리가 보증될 것이라는 헛된 생각을 가졌던 것과 똑같은 예였다. 그러나 법궤는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구해줄 수 없었다. 남방 유다도 마찬가지였다. 예레미야 시대의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성소 봉사를 엄격히 준수하고 성전을 믿을 때에, 그들의 악한 행실로 인해 마땅히 받게 될 공정한 형벌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유대 백성들의 죄악과 잘못된 사상을 바로잡고 곧 이르러 올 멸망을 피하게 하려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눈물로 그들을 경고하였다.

 

1) 예레미야는 정말 매국노였는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것은 요시야 왕의 재위 13년이 되던 때였다. 그 때는 이미 북방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멸망 당한 때였고, 이제 남방 유다도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하려고 하던 시기였다. 그는 요시아 왕 때 여호와 하나님의 소명을 받기 시작해서, 요시아의 아들 여호야김이 왕위를 물려받은 시기와 또 다른 아들 시드기야가 다시 왕위를 물려받은 후, 결국 유대 민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던 기원전 587년 전후까지 오랫동안 선지자와 예언자로 활동했다. 요시야가 통치자로 있을 동안은 유다 백성들에게 다소나마 희망의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이 전쟁에서 죽은 후에는 그들을 올바로 인도하거나 중재할 지도자가 없어졌다. 이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운 초청을 너무 오래 거절하기 때문에 유다에도 북방 이스라엘 나라에 내렸던 형벌이 곧 내릴 것이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께로부터 백성들에게 전하기 위해 받은 메시지는, 유다가 흥왕하리라는 축복의 메시지도 아니었고, 너희가 잘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리라는 소망의 메시지도 아니었다. 그는 곧 유다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루살렘 성전이 초토화되리라고 경고해야 했다. 다른 예언자들처럼 백성들을 적당하게 위로해 주고 “다 잘 될 것이다” 라고 하거나 민중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했으면 환영을 받았을 것이지만, 그의 메시지는 멸시와 조롱과 핍박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메시지였다. 예레미야 시대의 대다수 다른 예언자들은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방식으로 예언하며 백성들과 왕에게 아부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호와가 바벨론을 물리쳐주실 것이며 유다가 평안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정반대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그대로, 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했다. 그는 더 이상 인간을 의지하지 말 것과 인간적인 안목에 지혜롭게 보이더라도 애굽을 의지하는 일을 멈추라고 경고했다. 그들은 애굽을 향하여 도움을 구하거나 동맹을 맺거나 애굽으로 도망해서는 안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의 계획에 겸손하게 순종하여 바벨론에게 순복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형벌과 징계의 막대기가 경해질 것이며, 그들의 순종과 회개로 하나님의 구원이 그들에게 회복될 것이었다. 그러나 유다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회개하기보다는 인간의 생각과 지혜대로 행하였고, 그런 메시지를 전하는 예레미야를 애국자가 아닌 매국노로 치부하였다. 아무리 그가 경고의 메시지를 선포하여도 그들이 하나님께 택함 받은 선민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던 훌륭한 성전을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시므로 절대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예레미야는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하나님을 반역하고 여호와를 슬프시게 하는 죄악을 계속 범하고 있으면서도, 성전이 우리에게 있으니 안전하다는 망상 속에 빠진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 성전 문 앞에 서서, 이 성전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과 그들 사이를 낸 죄악을 회개하고 자복하는 일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외쳤다.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2)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고 외치는 현대 교회들

앞서 살펴본 유다의 역사는 비단 예레미야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현시대의 대부분의 교회들에서는 이와 똑같은 상황들이 재현되고 있다. 그들은 진정한 구원이 보장되는 진짜 성전, 하나님의 참 교회가 될 수 있는 조건은 부인 하면서도, 참 교회에서만 기대할 수 있는 구원의 역사를 바라고 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고 구원의 효력이 없는 빈 껍질만의 외형의 성전이 아닌, 구원의 효력과 보장이 되는 진짜 성전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는 조건과 방법은 실로 단순한 것이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 순종하는 것이었다. 죄를 회개하고 마음이 새롭게 거듭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죄를 이기는 거룩한 생애를 살며 하나님의 임재를 가지는 것이었다.
오늘날 진짜 성전이 아닌, 가짜 성전을 의지하며 교회에 붙어 있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 어리석은 신자들이 많다. 그들은 교회를 붙들고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고 외치고 있다. 교회의 권위가 성경의 진리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목사의 판단이 구원의 기준이 되며, 신자의 숫자가 구원의 효력을 더 한다는 헛된 망상 속에 빠진 것이다. 진리 대신 오류가 설파되고, 순종을 강조하는 대신 값싼 은혜로 구원이 주어진다고 가르쳐지며, 십자가가 시작이 아니라 구원의 끝이라는 초보의 가르침이 주류를 이루는 현시대의 교회들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을 위한 교회의 목적이 이루어질 수 없다. 완전한 복음을 통해서만이 구원의 완성이 가능한데, 그 이유는 완전히 회복된 복음을 깨닫고, 그 복음대로 변화되고 성화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가진 산 성소가 되기 때문이며, 또 그런 참 교회들이 준비되어야 마지막 여자의 남은 무리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 믿음을 가진” 남은 무리가 형성되어야 하나님께서 마지막 선과 악의 대 쟁투를 승리로 이끄실 수 있으며, 그때에야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교회를 세우신 진정한 목적이 성취되는 것이다.

 

3) 진짜 성소가 되기 위한 우리의 회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백성들의 죄악을 고발하셨다. 즉, 그들이 하나님의 참 성소가 될 수 없었던 죄악과 이유를 열거하셨다. 그들이 지적 받은 그 시대의 죄악은 현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되는데, 이런 죄악을 회개해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참 교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교회로 만든, 예레미야 2장에 열거된 유다의 죄악 기록을 비추어 현시대의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적용해 보자.



1. 하나님의 땅을 더럽힌 죄 – 교회 내의 오류의 범람

* 예레미야 2:7 -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

원래 하나님의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이것을 영적인 의미로 보면, 처음에 하나님께서 주신 본래의 토양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영적으로 성장시키기에 충분한 영양이 있는 기름진 토양이었다. 진리가 충만하고 아름다운 구속의 복음이 충분히 깃들어 있고, 섭취하기만 하면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해주고 구원을 주기에 충분한 양분을 가진 토양이었다. 그러나 그 땅은 더럽혀졌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시며, “내 땅을 더럽히고”라고 하셨다.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다”는 말은 토해내고 싶을 정도로 아주 혐오스럽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지금 현재 교회들의 토양은 어떤가? 설교단에서 전파되고 있는 가르침들은 바벨론의 오류의 포도주로 더럽혀진 것들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순수한 복음과 진리에서 떠나, 인간의 학설과 유전이 마구 섞여 변질된 복음과 가르침이 현시대 교회에 난무하고 있지 않은가?


유다가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의 땅을 더럽혔듯이, 하나님보다 인간을 더 숭상하고, 인간의 목소리 듣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보다 더하며,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과 세속을 더 사랑하여 교회인지 세상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이 현대의 교회들의 형편이다. 현대 교회는, 아니 우리들은 이 죄악을 회개해야 한다. 진리에 순종하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이 있으면 버려야 할 것이다. 우리 각자가 진리로 온전히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의 임재를 가진 산 성소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다.

 

2. 지도자들의 죄악 – 신자들을 잘못 인도함

* 예레미야 2:28 –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

당시의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올바른 제사를 드리고 또한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책임을 진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영적으로 눈이 멀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깊은 의미와 거기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맛보아 알므로, 자신이 먼저 깨달은 의미를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에 더하여 선지자들은 거짓 선지자가 되어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면서 우상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현대 기독교의 영적 지도자들은 어떠한가? 성경의 진리에서 완전히 떠난 변질된 복음을 잘못 가르칠 뿐만 아니라, 영적 소경이 되어 신자들을 오히려 더 흑암으로 인도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대부분의 목사들이 성경의 진리에서 설교 강목을 연구하기보다는, 현대 철학자나 명상가들이나 심리학자들이 쓴 서적들을 참고로 하여 이방의 정신적인 가르침과 철학들을 그들의 설교 내용에 담아내며, 신자들의 질적 영적인 향상보다는 교회 성장과 경쟁에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가? 바알의 무익한 가르침들이 가르쳐지는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들의 영적 부흥이나 개혁은 거의 바랄 수 없다. 성경의 순수한 진리에서 떠나지 않은 말씀과 자신의 생애 속에서 먼저 역사한 진리의 능력을 전파할 때만 그 복음은 강력한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3. 생수의 근원을 버린 죄 – 거짓 성령 운동

* 예레미야 2:13 -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에 그 속에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우리는 정결함을 얻게 된다. 생명수는 예수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으로, 성경에서 물은 종종 씻으시는 성령의 역사를 나타내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스가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정결 사업을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슥 13:1)으로 표상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배에서 흘러나오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도 성령을 표상한다. 유다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샘물을 맛본 적이 없었다. 생수를 주시는 여호와께서 친히 그들을 인도하시기를 원하셨건만 그들은 영혼을 정결케 하고 새롭게 하고 활력을 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고, 그들의 갈증을 결코 채워줄 수 없는 세상의 터진 웅덩이에서 물을 찾았다.

 

현대도 마찬가지이다. 진리가 선포되지 않고 거짓 오류의 복음이 전해지는 교회에서 영혼들은 영적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세상 사물에 몰두하는 대다수의 신자들로 가득 찬 교회, 성령의 부흥하게 하시는 능력이 떠난 교회들에서는, 거룩한 진리가 줄 수 있는 축복을 받지 못해 갈증을 느낀 사람들이 영혼의 갈증을 거짓 성령의 흥분적이고 광신적인 운동으로 풀어 보려고 노력한다. 하나님의 성령의 심오한 감화와 역사를 통해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며,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살게 되는 변화가 부재하게 되면, 자연히 영혼의 굶주림을 채우고 대신 만족시켜 줄 거짓 성령 운동에 끌리게 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거짓 기적과 감정적인 흥분과 열광은 있지만, 성령으로 인해 일어나는 생애의 진정한 변화나 거듭남, 또한 거룩한 생활에서 나타나는 지속적인 죄에 대한 승리는 찾아볼 수 없다. 한번 거짓 성령 운동에서 정서적인 흥분과 거짓 평안의 기만 속에 빠지게 되면, 중독 현상이 일어나, 어떤 흥분이나 감정의 고조감이 느껴지지 않으면 성령이 떠났다고 믿게 되므로, 조용하고 차분한 심령 속에 역사하시는 진짜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되고, 진리에서 떠나 점점 더 광신적인 거짓 성령의 역사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매일 정결하게 하시는 성령의 샘물,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수를 마시는 경험을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내재하시는 사람은 그 속에 절대 마르지 않는 성령의 은혜와 능력의 샘을 가지고 있다. 성령의 임재와 진정한 역사야말로 참 교회를 시험하는 시금석이 되고 있다.

제3부_ 교회의 포퓰리즘과 홀로 서기


마지막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교회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바른 교회관을 가진 사람만이 온 세상에 내릴 마지막 짐승의 표의 환난의 때에 홀로 설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주지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 앞에 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포퓰리즘, 대중주의와 대립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시대에 진리를 믿고 진리를 위해 선다는 의미는, 다수나 대중이 믿는 바를 역류하여 가는 것이며,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외로운 길을 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진리 위에 홀로 서는 경험을 하는 사람만이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참 교회로 설 수 있게 될 것이다.

 

1) 누가 참 교회인가?

교회는 세상에 진리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품성과 충만하심을 알리기 위해 세우신 것이 교회이다. 교회의 존재 이유가 가장 정확하게 나타나 있는 성경절은 베드로전서 2장 9절이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 하나님의 품성의 아름다우심과 그분의 충만하심을 세상에 나타내는가? 진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품성으로 변화된 사람들이다.

교회는 건물도 조직도 아니다. 진리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 하나님과 산 관계를 이루고 하나님의 임재를 가진 사람들이 교회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모여 단체와 그룹을 이루고 조직을 세우지만, 교회의 목적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일과 봉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지하도록 하자. 교회를 세우신 이유 가운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진리와 빛의 전수이다. 순결한 하늘의 가르침과 순수한 성경의 진리의 빛은 시대에 시대를 이어 사람들을 통해 계속해서 보존되어 왔다. 태초부터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지상에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그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살던 시대에 진리의 복음을 전했다. 박해와 투쟁과 흑암의 세기를 통과하면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곧 교회를 보존하셨는데, 아무리 오류의 물결이 거세고 진리를 말살시키려는 사단의 공격이 있었을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심 덕분에 진리의 빛은 꺼지지 않고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수되었다. 때때로 진리를 보존하기 위한 대가로 여러 사람들의 생명이 요구되었고,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흘려졌다. 특히 중세기 종교 암흑기에 하나님의 교회는 산 위에 세운 도성이며, 요새와 도피성이었다. 지상에는 거대한 조직을 가지고 왕권과 정치권의 세력을 힘입어 세계를 제패하는 눈에 보이는 큰 교회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를 당신의 참 교회로 간주하지 않으셨다. 교회 건물은 훌륭하였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전해지지 않고, 백성으로 진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을 알도록 인도하지 않으며, 오히려 진리를 고수하는 참 교회를 핍박하는 세력으로 둔갑한 사탄의 대리 세력을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교회라고 부르신 적이 없다. 오히려 진리 때문에 핍박과 죽음을 당하며 알프스 산으로 이리저리 쫓기던 왈덴스인들과 같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참 교회, 광야 교회라고 부르셨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를 보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대표자로서의 그들의 거룩한 사명을 완수하는 데 실패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렇게 선언하셨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렘 2:21). 그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했다. 거룩한 생애와 순결한 품성, 곧 자비롭고, 사랑이 풍성하고, 친절하고 온유한 성품으로써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시 19:7) 한다는 사실을 나타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수받은 진리의 빛과 영적인 축복을 세상에 나누어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설사 온 민족이 하나님의 선민으로 택하심을 받았을지라도,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교회였을지라도, 그들이 불순종하고 진리에서 떠났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었다. 그 속에 있는 하나님께 충성하는 소수의 무리,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교회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진짜 교회라고 자신을 스스로 기만하고 있었다. 그들의 훌륭한 건물과 성전이 구원을 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키셔서 하나님의 교회로 세우신 데에는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번영하는 강국이 되도록 하시거나, 숫자가 가장 많은 큰 민족을 이루는 축복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진리를 보관하여 전수하고, 그들의 씨를 통해 메시아를 탄생하게 하여 이 세상에 구원을 주시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그분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의 품성과 진리를 드러내어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대표자로서의 그들의 특권을 분별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잊어버렸으며 그들의 거룩한 사명을 완수하는 데 실패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유전과 인간이 만든 학설을 진리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장엄하고 웅장한 성전, 곧 그들의 전부인 교회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대신할 만큼, 교회를 믿고 교회를 의지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붙잡고 있는 성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와 진리가 함께 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껍데기만의 종교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현시대도 이와 같지 않은가?

 

우리는 참 교회가 되기 위하여,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그 영광과 탁월함을 드러내도록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참 교회가 되는 길이다. 아무리 어떤 교회가 화려한 건물과 장엄한 예배 의식을 자랑할지라도, 그 교회에 진리가 없고, 공의와 자비와 하나님의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의 받으시는 교회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진리의 중요한 원칙들이 잊혀질 때 의식은 많아지고 사치스럽게 된다. 품성 변화가 등한시되고 심령의 단장이 결핍되며 신앙의 단순성을 잊어버리게 될 때에, 교회는 굉장한 건물과 화려한 장식과 장엄한 의식으로 그 공허함을 메꾸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의식과 허식과 과시로 이루어진 유행적 종교를 받지 않으신다. 그런 예배는 하늘의 응답을 받지 못할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훌륭함을 가지고 교회를 높이 평가하지 않으시고, 세상과 구별되는 참된 경건성과 진리로 교회를 평가하시기 때문이다. 온갖 예술이 만들어 내는 어떠한 아름다움도 그리스도의 대표자들이 나타내는 품성의 아름다움과 전혀 비교할 수 없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작고 초라한 모임이라도 거기 모인 사람들이 진리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품성의 원칙을 소유하고 있을 것 같으면, 그곳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참 교회가 되며, 하늘의 만만 천사들이 그들의 예배에 연합하게 될 것이다.

 


2) 남은 자와 홀로 서는 자

성경에는 “남은 자”라는 구절이 여러 곳에 등장한다.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사 4:3).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사 10:22).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왕하 19:31).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2).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하나님의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남은 자와 홀로 서는 자가 되어야 한다. 남은 자와 홀로 서는 자 사이에는 매우 유사한 공통점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남은 자를 가지고 계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배역하였을 때, 아합 왕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 거의 대다수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유다 나라 민족들이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바벨론에 잡혀갔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의의 편에 서서 충성하는 남은 자들을 가지고 계셨다. 그들은 그들의 시대에 온 교회와 대중이 타락하고 배도했지만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참 교회가 되어 홀로 서 있었다. 시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경배할 때에 우상 숭배에 참여하지 않은 레위지파 사람들이 있었고, 아합 왕 때에 엘리야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의 사람들이 있었으며, 바벨론에서 하나님께 충성한 다니엘과 두라 평지에서 금신상에게 절하기를 거절하여 풀무불에 들어갔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은 남은 자였으며 홀로 서는 자들이었다. 그 시대의 편만 하던 악의 조류를 거슬러 하나님의 의의 편에 남아 홀로 선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보존하며 하나님의 성품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참 교회였다.

 

이 시대에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 하나님의 참 교회가 된다는 의미는,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의 주류에게서 이해받지 못하는 독특한(peculiar)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세상을 거슬러 결코 세상과 동화될 수 없는 특별한 삶을 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아름답고 조화로운 성품을 세상에 나타내며 거룩한 성화의 길을 가는 하나님의 남은 자들, 홀로 서서 진리를 고수하며 진리를 위해 충성하며 좁은 길을 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참 교회이다. 현시대에 성경의 진리 그대로 순종하고 살려면 우리는 교회의 포퓰리즘과 대치해야 한다. 대중이 원하는 종교, 대중이 지지하는 진리, 대중에게 인기 있는 복음은 하나님의 참된 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고, 사람의 말을 듣기보다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교회나 인간의 권위에 충성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찾으시는 참 교회이다. 진리를 고수하며 가는 길은 좁은 길이며 대중을 거슬려 홀로 서서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세상과 쉽게 동화되고 대중에 쉽게 동요되는 사람들은, 마지막 짐승의 표의 환난의 때에 진리를 위해서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세상의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짐승을 경배하고 따를 것이기 때문이며, 사탄의 세력과 합쳐진 엄청난 국가와 대중의 압력과 핍박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진리를 위해서는 사람에게 몰려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평안한 때에 벌써 인간의 권위와 압력에 쉽게 굴복하고 쉽게 진리를 포기하는 사람은 마지막 때에 결코 홀로 서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우리 자신들이 깨닫고 확신을 얻은 진리 위에 굳게 서는 경험을 해야 한다. 마지막 때가 오면 아무도 우리를 진리의 길에 서도록 도와주거나 이끌어주지 못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 성령의 역사 하심과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인도만 따라 사는 경험을 매일 하는 사람만이 마지막 때에 홀로 설 수 있을 것이다.

 


** 마치면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 짓밟힌 하나님의 계명을 높이고, 무너진 데를 수보하며, 황폐한 곳들을 다시 세우는 참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 그것은 건물도 아니고, 장소도 아니고, 조직도 아니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마음속에 기록된 사람, 예수 믿음으로 죄를 승리하고 이기어 아름다운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과 의를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홀로 서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 교회가 되는 연습, 어떤 핍박과 어려움이 와도,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대적해도, 진리 위에 굳게 서서 대중을 거슬러 홀로 서는 연습을 해야합니다. 종교 암흑의 시대에 하나님의 참 교회는 이단자라는 누명을 쓰고 단두대와 화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당시 하나님이라고 여기고 섬기던 신부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너는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라는 저주를 받으며, 이단자라는 글씨가 쓰인 옷을 입은 채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이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납하신다는 믿음의 증거를 의지한 채, 마치 신부가 신랑을 맞으러 나가듯이 기쁨으로 순교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인간이 보기에 이단자로 낙인이 찍혀 생명을 잃지만, 진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그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소중한 보물인 참 교회였습니다.

이 시대에 진리를 지키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조소와 멸시를 당하고, 믿는 바와 말이 오해를 받을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어쩌면 냉담과 경멸이 순교보다 더 견디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이유 없이 미움을 받으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분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기 때문에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순결하고 깨끗하고 선한 일만을 행하셨던 예수님께서 비천한 범죄자와 같이 취급되어 사형선고를 받으셨다면, 그분의 제자들도 아무리 생애에 흠이 없고 품성에 비난할 여지가 없더라도 그와 비슷한 취급을 받지 않겠습니까? 마지막 때에 대중을 따라 인간적인 법령에 복종하는 자들은 호의를 받을 것이지만, 우상의 안식일에 굴복하지 않을 사람들은 호의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여름에는 상록수와 다른 나무를 분간할 수 없지만, 겨울바람이 불어오면 상록수는 변함없음이 드러나고 다른 나무들은 시들어 그 가지가 벌거숭이가 되는 것처럼, 지금은 모르지만, 곧 누가 하나님의 참 교회이고 누가 거짓 교회인지 분명히 드러날 때가 올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반석과 같이 견고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설 것이며,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대중을 두려워하지 않고 홀로 서서 믿음을 지킬 것입니다. 각 나라에 흩어져 있는 세상의 거민들 중에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충성스런 사람들, 하나님의 참 교회는 밤에만 나타나는 하늘의 별들처럼 어두움이 온 세상을 덮고 깊은 어두움이 대중을 덮을 때에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다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이름이 교회의 교적부에 올라 있고 녹명 책에 적혀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이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산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성경의 순수한 진리를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 그리고 그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변화되는 경험을 하는 사람, 죄를 승리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사는 사람,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임재를 마음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참 교인, 참 교회입니다.
머지않아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당신의 충성스러운 교회에게 생명의 불멸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로 잡습니다!


SOSTV MAGAZINE 183호의 20쪽에 게재된 “사탄의 두 번째 공격 아리안 주의” 첫 번째 문단 내용 중 ‘아리안주의의 아버지로 일컬어진 루키안(Lucian)’과 ‘동일 본질’에 관한 오해의 여지가 있는 부분을 바로잡습니다.

 

“안디옥의 루키안은 후에 자신의 주장을 뒤집었다”고 하는 것은 문맥상 루키안이 아리안주의자였다는 오해를 할 수 있으나, 루키안은 그리스도의 신성 논쟁에 참여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다. 또한 동방에 있는 교회의 모든 아리안주의자가 “성자의 신성을 부인하고 인성만을 말한 유사본질을 주장했다거나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는 비난은 반대파의 주장이기에 사실성이 희박하다.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지면상 간략히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루키안은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표준원문 성경을 편집하고 히브리어 성경을 보존하여 널리 유포하는 일을 하였으며 하나님의 법을 높이고 영지주의를 대항하여 진리를 고수한 신앙심 깊은 학자였다. 그의 제자로 알려진 아리우스가 실제로 유사본질을 믿었다고 하는 소문은 그가 주장했다는 근거가 없는 비난이다. 반대로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가 신플라톤주의자이며 “동일본질”설을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같은 본질을 가졌으며 성부와 성자는 동일본체를 지녔다”고 주장하였다. 즉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연약한 몸을 입으셔서 우리의 본이 되신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는 이론을 펼쳤으며, 이런 까닭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외면당했다. 동일본질인지 유사본질인지에 대한 논쟁은 교황들끼리도 서로 헛갈리는 주장을 했었으며, 반면에 하나님의 계명을 높이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논쟁에 가담하지 않았다. 물론 동방의 몇몇 교부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한 나머지 신성을 부정하는 유사본질을 주장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소문이 사실인지는 알 길이 없으며, 콘스탄틴과 제국종교는 자신들에 반대하는 이들 모두를 아리우스주의자로 몰아 그들의 모든 저서를 불태우도록 명령했기 때문에 ‘동일본질’을 시인하지 않은 모든 사람에 대하여 아리안주의라고 낸 소문은 허위일 가능성이 크다. 이와 같은 논쟁이 한창이던 동 시대에 안디옥의 루키안이나 아일랜드의 패트릭, 고트족의 아버지 울필라스 같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논쟁에 자신들의 인생을 허비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법을 높이는 일에 모든 일생을 바쳤다.-이것이 기독교회사입니다 참조 그러므로 교황권 황제종교는 자신들의 삼신론 교리를 위한 ‘동일본질’에 대한 강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대자들을 미워하였으며 즉시로 아리안주의자로 낙인찍었다. 로마 교회의 성직자들은 기독교가 이 관계를 가장 적절히 표현하는 용어로 헬라어 단어인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동본질성”, 사람과 동일한 몸으로 오실 수 없음을 의미함)를 찾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후에 교황권은 자기 자신들에게는 삼위일체 교리를 믿는 사람들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한편, 이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아리안주의자라는 호칭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아리안주의자라 불리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믿는 사람들이라는 잘못된 비난의 말이 여기저기로 펴져나갔다. 이 같은 소문은 그 같은 비난을 받을 이유가 없는 사람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필요한 논쟁에 극단적인 두 그룹 중 그 어느 쪽에도 그들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마지막 시대 이슈_ 종교개혁을 일으켜야 한다


오늘날 많은 개신교인은 ‘개신교도’ 즉 ‘프로테스탄트’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디서 시작하였는지 자신들의 과거를 잘 알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과거 개신교주의를 일으킨 종교개혁가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적그리스도로 지목한 교황이 대한민국을 방문하였지만, 오히려 반기는 개신교인들도 있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맞이하고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엄청난 환영을 받은 교황 프란치스코가 12개 종교 단체 지도자들과 만났습니다. 많은 사람은 개신교 즉 프로테스탄트주의가 종교개혁과 함께 교황권의 오류를 오류로서 지적하며 출발하였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있기 전에도 사도들로부터 전수받은 순수한 복음을 유지하며 교황권의 오류를 지적하고 교황권을 적그리스도로서 지목한 초대 교회의 후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대중이 “개독교”라고 욕하는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현대 기독교회는 타락하였습니다. 현대 기독교회는 바벨론의 음행의 포도주에 완전히 만취하여 비틀거리며 더는 그리스도교라 부를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제 그만해라! 예수 이야기 이제 지겹다. 예수 믿으라 하고서 사기 치고 간음하고 도적질하고 거짓말하고 지겹다.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지목하는 너희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라고 맹비난합니다. 네. 맞습니다. 대부분의 현대 기독교 조직들은 비난받아야 마땅합니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 현존하는 수많은 대형 교회, 교단, 교파에서 예전 초대 교회의 경건함과 순수한 복음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이것은 정말 비통한 일이며 이 세상에 임한 가장 큰 재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사실을 직시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충성하며 복음의 참 능력을 체험하고 모든 죄악을 버리고, 순종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를 전하는 참된 복음의 능력의 빛을 세상에 발하며 마음속에 종교개혁의 불을 다시 지펴야 할 것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늘 두 부류의 경배자들이 존재해왔습니다.

한 부류는 “주여! 주여!!” 크게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나가서 전도 활동도 열심히 하고 헌금도 열심히 하고 교회에서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고 교회에서 시키는 일에 복종합니다. 또한, 성령을 받았다며 각종 기적과 능력을 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에는 순종치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사실은 믿고 떨지만, 그들이 너무나 사랑하는 죄악과 그들의 죄악을 변호하는 오류는 버릴 생각이 없습니다. 그들은 죄를 버리지 않아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가짜 복음을 믿고 교회가 구원을 준다고 믿으며 자신의 전도 활동의 공로를 믿고 선행의 공로를 신뢰합니다. 또한, 교회와 신학자들을 성경 말씀보다 신뢰하며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침묵시키고 속히 주님께 나아와 굴복하고 모든 죄를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성경의 참 진리를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몰고 핍박합니다. 이 부류는 과거에 수많은 성도를 죽였고 앞으로 또다시 사탄의 앞잡이로서 일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교회의 양적 성장과 이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사는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다른 부류는 매우 소수지만 이 세상에서 완전히 망할지언정 주님께서 명하신 모든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돈 잘 버는 세상 직장도 포기하고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가족에게 버림받고 극단 광신자 이단 취급을 받으며 완전히 사회에서 사장되어 외롭게 죽게 될지언정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탄이 미워하여 고통과 고난과 질병을 주고 그의 대리자들을 통해 핍박할지라도 인내하고 주님을 신뢰하며 주님을 원망치 않고 오히려 주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며 거룩한 삶을 사는 이 세상을 초월한 하늘 시민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며 세우신 초대 교회는 두 번째 부류 즉 매우 소수의 참된 그리스도인들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순수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였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가짜 교회인 유대교의 핍박에 굴복하지 않았고 이교 로마의 핍박에도 하나님께 충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이미 그 당시에 자신 있게 골로새서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골 1:23 “…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수많은 열정적인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으로 이미 사도 시대에 복음은 온 천하 만민에게 전파되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온 천하가 복음을 듣고 회개하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도 시대에 이미 온 천하 사람들이 간절히 진리를 찾고자 원하기만 하면 진리를 접할 기회가 있었듯이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진리를 발견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아무도 양심적으로 “나는 몰랐습니다. 나는 알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라고 핑계할 수 없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손가락을 못자국에 그리고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던 의심 많던 도마는 거듭난 뒤에 인도에까지 가서 열심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미 초대 교회 시대에 사도 도마는 인도까지 가서 전도하였고 어떤 저자들은 그가 멀리 중국에까지 가서 사도로서의 직무를 수행하고 인도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M. L’Abbe Huc). 복음은 삶 전체를 복음에 헌신한 수많은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 덕분에 아시아까지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처음으로 인도의 항로를 열었을 때 성 도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말라바르 해안에 여러 세기 동안 자리잡고 있었다 … 그들의 귀에 하나님의 어머니(성모)라는 칭호는 거슬렸으며, 라틴 사람들의 미신적인 행위로 거의 여신의 지위에까지 올려놓은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존경심을 양심적인 탐욕이라고 평가했다. 처음으로 그녀의 조각상을 성 도마의 제자들에게 선물했을 때 그들은 분개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지 우상 숭배자들이 아니다!”라고 외쳤다.” –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ch. 47, par. 31.

인용문에서 읽다시피 사도 도마에게 복음을 전수받은 성 도마 그리스도인들은 마리아 숭배를 우상 숭배라고 너무나 분명하게 지적하였습니다. 사도 시대로부터 1600년 동안 순수한 복음을 유지해온 성 도마 그리스도인들은 천주교회가 인도에 왔을 때 성경보다 교회를 더 높이는 행위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평신도는 안 되고 오직 성직자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성사(聖事) 즉 천주교회에서 신자들에게 신의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주는 종교의식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주장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사도 교회의 직계 후손으로서 진정한 프로테스탄트 즉 “교황권의 권위와 오류에 항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천주교회의 오류들을 거절하고 그들의 의로운 생애로 비성경적인 천주교의 교리들을 정죄하였습니다. 인도에 잔혹한 종교재판을 세운 사람은 다름 아닌 예수회 공동 창시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습니다. 그런데 천주교회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성인으로 칭송합니다.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우리는 역사 속에서 가짜 기독교가 진짜 기독교를 늘 잡아 죽이고 핍박해왔음을 계속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가인이 아벨을 살인한 사건을 시작으로 하나님께 순종치 않는 가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계속해서 잡아 죽여왔음을 우리는 성경 기록과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발견합니다.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진리를 옹호하고 오류를 거부하기 때문에 핍박을 받든지 아니면 진리를 옹호하는 자들을 핍박하는지로 우리는 역사 속에서 진짜 기독교와 가짜 기독교를 분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진리를 듣고 배운 사람들로서 영혼을 구원하고 믿어 순종케 하는 진리를 전하기 때문에 이교 로마와 유대인들로부터 심각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초대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핍박당하는 교회였고 가난한 교회였으며 순교하는 교회였지 성도들을 핍박하는 부를 가진 대형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참 교회는 늘 대중에게 큰 인기가 없었으며 다수를 조종하는 마귀에게 핍박당하는 교회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고대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죽었습니다. 지하 무덤 카타콤은 고대 로마 그리스도인들의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 이후 2세기 로마 그리스도인들은 땅굴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교 로마는 그리스도교를 박멸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끊임없이 수색하였고 수많은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위한 증인으로서 그들의 생명의 피를 뿌렸습니다. 그들은 핍박을 피해 로마 도시 외곽에 있는 카타콤의 지하동굴 안에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비록 그들은 이 세상의 명예와 재물과 자유를… 그리고 생명을 잃었지만,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사랑하는 그들의 신앙을 포기하고 단념케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믿고 진리에 순종하며 믿어 순종케 하는 참 복음을 전하여 영혼들을 죄에서 구하는 것을 그들의 삶의 목적이자 최대 소망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계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예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믿음과 인내와 희망이 가득한 말로 서로 격려하며 궁핍과 괴로움을 견뎠습니다.

결국, 복음은 이교 로마에 승리하였습니다. 핍박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말살하려던 마귀는 그의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습니다. 폭력으로 그리스도교를 말살하려던 사탄의 노력은 계속해서 실패하였고 오히려 찬송하며 죽어간 순교자들의 피는 복음을 급속도로 전파하는 복음의 씨앗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죽음으로 그리스도교는 이교의 핍박을 계속해서 승리하였고 하나님의 일꾼들이 계속해서 죽임을 당했지만, 믿는 자의 수효는 더욱더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4세기에 들어 사탄은 그의 계략을 바꿔야만 했습니다. 투옥, 불, 칼 등은 이것과 비교할 때 큰 축복이었습니다. 사탄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탈을 쓰고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이름뿐인 개종을 통해 사탄은 박해를 잠시 멈추고 그 대신에 세속적 번영과 명예라는 위험한 미끼를 그리스도교에 제공하였습니다. 겉으로 개종한 척한 우상 숭배자들이 그리스도교 안으로 수없이 밀려 들어오며 그리스도교 신앙의 일부는 받아들이되 다른 중요한 진리들은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일치하기 위하여 먼저 양보하였으니 그리스도교 측에서도 그만큼 양보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타협을 요구하였습니다. 핍박 덕분에 과거에 순결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그리스도교는 이제 타협한 가짜 기독교와 전면전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4세기에 오직 성경만을 그의 신앙과 가르침의 권위로 삼았던 아일랜드 켈트 교회의 지도자 패트릭. 그는 본래 로마의 시민으로 태어났으나 아일랜드에 포로로 잡혀가 7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그곳에 켈트 교회를 세웠고 선교 훈련학교를 세워 수많은 신실하고 열심 있는 선교사들을 배출하였습니다. 이교가 교회에 깊숙이 들어온 4세기에 이교와 타협하지 않은 진짜 기독교는 이교와 짬뽕이 된 가짜 기독교와 분리합니다. 역사 속에는 수백 년간 가짜 기독교인 천주교회와 혈투를 벌인 수많은 적은 무리가 있었지만, 오늘은 그 중에서 사탄의 영토 한가운데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혈투를 벌여 종교 개혁의 불씨를 지핀 왈덴시스에 대해서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알프스 산맥과 피레네 산맥 속에 살던 왈덴스인들은 이탈리아어로 “골짜기들”이란 뜻을 가진 “왈덴스인”들 혹은 프랑스어로 “골짜기 거주민들”이라는 “보(Vaud)인”들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그들의 신앙의 순결을 보존하기 위해 배도한 교회와 분리한 하나님의 참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교황과 주교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로마교회를 요한계시록에 있는 타락한 바벨론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교황권에 처음으로 항거한 초대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자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프로테스탄트의 뿌리는 천주교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황권의 오류와 죄악에 항거하는 진짜 개신교 즉 프로테스탄트의 뿌리는 사도 교회를 계승한 과거에 핍박받으며 이리저리 산속을 유리하며 복음을 전한 진짜 그리스도인들에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천주교회가 사도 교회의 계승자가 아닙니까?”라고 묻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닙니다.” 가짜 기독교는 핍박을 가했고 진짜 기독교는 핍박을 당했습니다. 사도 교회의 계승자가 오직 성경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핍박을 한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즉 1천 년 이상 중세 암흑시대에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인 로마 천주교회는 하나님께 속한 집단이 아니란 뜻입니다.

 

역사 속에서 왈덴스인들은 그들의 초기 지도자 비질란티우스 레오 (A.D. 364~408)의 이름 덕분에 “레오니스트” 즉 “레오파”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왈덴스인 초기 지도자 비질란티우스는 이교와의 연합을 반대하고 항거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즉 그는 로마 천주교회에 항거하는 프로테스탄트였습니다. 성경 외의 인류 역사는 늘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되고 승자는 패자의 기록들을 모조리 소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우리가 정직한 역사를 현대 역사서들에서 배우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기독교 = 천주교. 개신교는 천주교에서 나왔다.”라고 배웠고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역사 기록들은 대부분 과거 1천 년 이상 중세 암흑시대를 왕으로 군림하며 진짜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고 그들의 기록을 모조리 파괴하기 위해 애를 쓴 로마 천주교회와 교황권의 관점에서 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진짜 기독교이며 누가 가짜 기독교인지 역사 속에서 깨닫기 위해 깊이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위에서 이미 다루었듯이 가짜 기독교는 늘 핍박자이며 진짜 기독교는 늘 핍박을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왈덴스인들을 학살하는 교황권의 십자군.

교황권은 십자군에 참가한 자들에게 온갖 종교적 형벌에서 면죄해주었고, 마땅히 행하기로 선서한 것들도 면제해주고, 불법적으로 얻은 재산도 합법으로 인정해주었으며, 이단자들을 죽이는 그 일에 가담함으로 모든 죄에서 사유함을 받게 된다고 보증해주었습니다. (Wylie, The History of Protestantism, b. 16, ch. 1.) 왈덴스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도 교회로부터 받은 복음과 진리를 유지하며 끊임없이 참 복음을 전하고 로마교회의 오류와 죄악에 대하여 아무 거리낌 없이 통렬한 비판을 하였습니다(Mosheim, Institutes of Ecclesiastical History, b. 2, cent. 7, pt. 2, ch. 2, par. 2.). 그들은 교황권에 항거하는 프로테스탄트였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읽고 계신 내용은 음모론이 아닙니다. 오늘 읽고 계신 내용은 사실이며 역사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는 늘 가짜 기독교와 진짜 기독교가 존재해왔습니다. 핍박받으며 그들의 순교의 피로 진리를 전하고 보존하여 후세대에 전해준 수많은 이름없는 그리스도인들 덕분에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교황권의 오류와 죄악을 폭로하며 교황권을 적그리스도로서 지목하였습니다. 그들의 영향력은 위클리프 시대에 시작된 종교개혁 운동의 씨를 뿌렸습니다. 화목 난로의 꺼져가는 불을 다시 지필 방법은 아직 붉게 열기가 남아있는 숱을 한곳에 모으고 입으로 바람을 불어 불을 살리고 그 위에 새로운 장작을 올려놓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종교개혁 운동의 불은 다시 지펴져야 합니다. 종교 개혁 운동이 다시 일어나려면 먼저 각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오류와 죄악들을 버리고 주님께 온전히 굴복하는 일이 먼저 선제해야 합니다. 먼저 주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되는 참된 거듭남의 경험이 우리들의 삶 속에 있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깊이 연구하며 성령 하나님의 지도 아래 가장 성경적인 진리를 받아들이고 오류와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개인의 감정과 체험과 경험에 기초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우리 주님의 살아있는 성경 말씀 아래 굴복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진리를 마음속에 모으고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바람처럼 진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새로운 빛에 순종하여 종교개혁의 불길은 먼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활활 불타올라야 합니다.

네. 저도 압니다. 우리는 죄 됩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너무나 연약하고 우리의 의지는 그저 모래로 만든 밧줄과 같이 힘이 없습니다. 너무나 나약하고 너무나 쉽게 쓰러집니다. 네.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나약하고 가장 죄 된 우리를 택하사 복음의 능력으로 새롭게 하시고 능력 있는 타락한 천사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온 우주에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와 은혜와 그리고 무엇보다 넘치는 사랑을 입증하시고자 예정하셨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에 온전히 우리 자신을 굴복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점도 없고 흠도 없고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성도들로서 하나님의 마지막 증인으로서 준비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엄청나게 복되고 영광스러운 특권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부디 깨닫게 되시길 바랍니다.

 

존 위클리프는 교황권을 대적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 성경을 최초로 영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원수들의 공격에 기력이 다하여 병상에서 죽어가던 위클리프는 그의 신앙을 취소하도록 권유하기 위해 주위에 모여든 적들에게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날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너희 주교들의 악행을 공개할 것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회복하여 바벨론의 어미 로마 천주교회를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 진리의 성경 말씀을 최초로 영어로 번역하였습니다. 또한, 위클리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순교자의 면류관을 멀리서 찾고 있노라고 말하느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저 교만한 주교들에게 전하라. 그리하면 순교는 틀림없이 오고 말 것이다. 살아서 침묵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고? 결단코 안 될 말이다. 탄압하려거든 해보라. 나는 그 일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다.”

– D’Aubigne, History of the Reformation, b. 17, ch. 8.

 

위클리프의 외침과 같이 종교개혁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마지막 증인들이 준비될 때에 핍박은 어김없이 부활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의 마음을 깊이 살피고 모든 죄악과 분리하고 주님의 은혜로 거룩한 순교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영광을 허락하실 날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 60:1-3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오류의 흑암 속에서 진리의 빛을 더욱 밝게 비추는 현대판 왈덴스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진리 탐구_ “영적 이스라엘” 그 믿음의 시작


지난 글들을 통해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만 출애굽했다는 생각을 가졌던 분들에게는 좀 더 넓은 시각으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살펴보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더 넓은 시각을 가지고 좀 더 앞으로 성경의 진리에 대해 발걸음을 내디뎌 볼까 합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을 단편적으로 나타내는 아름다운 말씀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호와의 증인”, 새 하늘과 새 땅의 상징인 “신천지”, “요한계시록” “십사만 사천”, “하나님의 교회” 등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단어들을 접하는 순간 불행히도 마음에 왠지 모르는 불편함이 들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여러분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 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말씀들이 적대적이며 이단시되는 말씀으로 각인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탄이 오랫동안 애쓰고 공들여서 이루어 놓은 오류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고 변경하고 미혹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해 놓았기 때문인데 믿는다는 사람들조차도 이러한 말씀을 듣게 될 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사탄의 작품 중 가장 훌륭한 마지막 걸작품이 바로 “7년 환란”의 교리인데 이 교리로 인해 사탄은 하나님의 참 진리를 그리스도인들의 눈과 귀와 양심을 가리는데 최대의 성과를 얻고 있습니다. 사탄은 이 교리를 통해 “하나님의 때와 법”을 변경하고, 적그리스도를 감추어 버리고, “바벨론”을 숨기고, “부활”을 오해하게 하고 “추수와 혼인 잔치와 재림”의 시기를 혼돈케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성경의 기록된 마지막 예언의 말씀에 제하거나 더함으로 생각 없이 믿고 따르는 영혼들은 결국 기록된 재앙들을 더 받게 될 것이며 영혼은 멸망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통탄스럽고 가슴 아픈 현실입니까?

“7년 환란”에서 여러분의 귀와 눈과 양심을 막아버린 교리 중의 하나가 바로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믿음의 경험입니다. 이 말 또한 이단적인 말로 들리신다면 이번 호부터 진행되는 성경의 증거로 그 편견과 선입관을 버리는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7년 환란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말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 중동의 이스라엘이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만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우리가 전하는 ‘7년 환란’은 거짓 중의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말 속에서 그들이 진리에 입각한 믿음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전하는 사람들의 계명과 교리의 유전을 지키기 위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께서는 그 당시 육적으로 태어난 이스라엘 백성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 (고전 10:18)” 그러므로 이 말씀을 다른 편에서 본다면 영적으로 따라 난 이스라엘 백성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롬 9:6)” 여러분께서는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이 여러분 마음속에 진심으로 아멘과 평강이 되십니까?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찌어다 (갈 6:16)”

 

또한 사도 야고보의 인사는 어떠하십니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약 1:1)” 오늘날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께 묻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경험 가운데 여러분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변경하여 주신 영적 경험의 믿음이 있으십니까?

세계 동향 Top News


1. 미국으로 확산된 에볼라 바이러스
에볼라 바이러스가 2달여 만에 감염자와 사망자가 3배 이상 증가하며 미국까지 확산됐다. WHO는 10월 27일 “에볼라 로드맵을 통해 기니,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말리, 스페인, 미국 등 6개 국가의 에볼라 감염자는 1만 141명, 사망자는 4922명”이라고 밝혔다. 미국 내 첫 번째 에볼라 감염자인 에릭 던컨은 지난 10월 8일 사망했고, 그와 접촉했던 수십 명이 격리 조치되었다. 에릭 던컨을 돌보다가 에볼라에 감염된 간호사 2명은 혈청 치료 등으로 다행히 완치됐지만, 뉴욕에서 첫 에볼라 감염 판정을 받은 의사 크레이그 스펜서(33)는 여전히 치료 중이다. 특히 스펜서는 서아프리카 기니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10월 17일 미국으로 입국한 후, 1주일 동안 아무런 제약 없이 뉴욕 시내를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접촉한 것으로 밝혀져 미국 국민이 충격에 빠졌다.

 

2. 이슬람 국가(IS)의 시리아 ‘코바니’ 공방과 테러 위협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 IS(이슬람 국가)는 지난 9월부터 쿠르드족 요충지인 시리아 북부 도시 코바니를 공격하고 있다. 시리아 인권관측소는 이 전쟁으로 약 40일간 IS 대원 481명과 쿠르드족 민병대 302명이 숨지는 등 양측 사망자가 최소 800명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은 코바니 지역의 IS를 겨냥해 135차례의 공습을 단행하여 수백 명의 IS 대원들을 살해했으며, IS의 공격을 저지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IS는 여전히 공격을 계속하고 있으며 그들의 세력을 세계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미 상원 정보위원장인 다이앤 파인스타인 의원은 10월 26일 CNN 방송에 출연해 IS 대원 규모를 3만~5만 명으로 추정하면서 “IS는 계속 진군하고 있으며, 자기네 방식으로 모든 것을 죽이고 파괴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캐나다와 미국에서 최근 군인과 경찰을 겨냥한 테러 공격이 잇따르고 있다며 IS의 테러 위협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3. 미 연준 양적완화 종료 임박과 디플레이션의 공포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가 10월 28일부터 이틀간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양적완화 종료를 선언할 것이 전망된다. 그러나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양적완화 종료를 늦춰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현재 세계 경제는 디플레이션 공포에 직면해 있다. IMF(국제통화기금)는 올해와 내년 세계 경제 성장 전망을 하향하였고, 특히 유로권의 약화되는 수요와 디플레이션 추락을 강조했다. IMF는 미국이 양적완화 종료 후 금리 인상을 시작하면 한국이 아시아 국가 중 가장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지난 10월 21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과의 공동 컨퍼런스에서 발표했다. 한국은 현재 가계, 기업, 공공 부채가 대략 3300조 원으로 한계상황에 이르렀고 금리가 2%만 올라도 경제에 큰 충격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4. 미국에서 확대되는 동성 결혼 합법화

미국 연방 대법원이 지난 10월 6일 국토 절반 이상에서 동성 결혼을 사실상 합법화했다. 5개 주(인디애나, 오클라호마, 유타, 버지니아, 위스콘신) 항소법원은 동성 결혼 금지는 위헌이므로 이를 허용하라는 판결을 내렸었다. 상기 5개 주 항소법원 판결에 불복해 낸 상고에 대해 미국 연방 대법원은 심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연방 대법원은 동성 결혼을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이 되었고 상기 5개 주는 동성 결혼 허가서를 발급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미국 정부는 지난 10월 26일, 6개 주(알래스카, 애리조나, 아이다호, 노스캐롤라이나, 웨스트버지니아, 와이오밍)의 동성 결혼 합법화를 추가로 인정했다. 이로써 미 전역에서 동성 결혼이 인정된 곳은 32개 주 및 워싱턴 DC로 늘었다. 이번 연방 대법원의 결정으로 동성 결혼 합법화가 미국에서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5. 일본 온타케 산 화산 폭발 – 55명 사망

일본 화산 중 두 번째로 높은 온타케 산이 지난 9월 27일 갑자기 분화했다. 갑작스러운 화산 분화로 숨진 사람들만 55명에 9명이 행방불명 된 것으로 집계됐다. 희생자의 90%는 ‘즉사’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중 50% 이상이 머리 부분에 분석(화산 분화와 함께 분출되는 돌)을 맞은 것으로 조사됐다. 일본에는 110개의 활화산이 있으며 그 중 47개는 언제든지 분화 가능한 화산으로 분류되어 있다. 온타케 산도 언제든지 분화 가능한 화산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화산 감시 시스템이 작동하는 곳 중 하나다. 그러나 이번 폭발은 현재 과학으로는 예측이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전문가들이 평가했다. 이번 화산 폭발과 함께 수도권 인근에 위치한 후지산 폭발 가능성과 시나리오가 소개되어 일본인들의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다.

Healing Story_ 늙은 호박과 성인병


초가지붕 위에 놓인 노란 늙은 호박을 보면,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납니다. "에구, 내 강아지! 빨리 와서 따뜻할 때 이것 좀 먹거라." 하시며 달달하고 뜨끈뜨끈한 호박죽을 차려주셨습니다. 순식간에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는 저를 보며 흐뭇하게 웃으시던 주름진 얼굴이 몹시도 그립습니다. 오늘은 소박하고 든든한 늙은 호박에 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예로부터 한국에서는 산모의 붓기가 심하면 늙은 호박을 고아서 먹게 했습니다. 그만큼 늙은 호박은 이뇨 작용, 신장과 부종에 좋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늙은 호박과 호박씨는 고혈압, 동맥경화증, 전립선 비대증 등등 여러 가지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효능이 있다고 합니다. 한 가지 한 가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고혈압

늙은 호박에는 나트륨: 칼륨의 비율이 1:340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떤 과실이나 야채이든지 간에 칼륨이 많고 나트륨 적으면 고혈압에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늙은 호박은 모든 음식 중에서 칼륨이 많고 나트륨이 적은 대표적인 음식입니다.

 

2. 동맥경화증

협심증과 심장마비를 불러오는 심근경색증 등 심장혈관 질환에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동맥경화증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위치가 뇌로 가면 뇌졸중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무서운 동맥경화증을 노랗고 둥근 늙은 호박이 어떻게 치료하는 것일까요? 우리 몸에 죽은 칼슘이 침착이 되는데, 특히 동맥 안의 벽 쪽에 축적이 되면서 콜레스테롤과 같이 반죽이 되어서 동맥경화증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늙은 호박은 그렇게 뭉쳐 있는 칼슘을 풀어줌으로써 동맥경화증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또한 항산화제로써 베타카로틴, 용해성 섬유질, 비타민C가 함께 들어있는 음식은 건강에 큰 유익을 갖다 줍니다. 그런데 바로 이 늙은 호박이 그런 경우가 되겠습니다.

 

3. 전립선 비대증

닥터 클라이라는 분이 연구한 바로는, 유럽의 어떤 부족은 늙은 호박씨를 습관적으로 자주 먹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전립선 비대증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사해 본 결과, 호박씨가 그 원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호박씨에 있는 쿠쿨비타신(cucurbitacins)이라는 물질은 전립선 세포가 빨리 번식하며 자라지 못하도록 세포분열을 막아줍니다. 그리고 소변을 내보내는 통로에 염증이나 긴장감이 있어서 소변보는 것이 어려운 경우에도 긴장을 완화해 주며 소염작용을 하기 때문에 소변을 부드럽게 보도록 도와줍니다. 또한 호박씨에 있는 필수 지방산인 리놀레산은 세포막을 아주 튼튼하게 만들어 줍니다. 세포막이 튼튼하면 질병의 침투를 막아 줍니다. 따라서 전립선 비대증이 있는 분들은 호박씨를 매일 드시는 것이 도움됩니다. 늙은 호박 자체도 방광과 요로에 염증이 자주 있는 분들에게는 좋습니다. 왜냐하면, 가벼운 이뇨작용과 함께 비뇨기 계통을 청소해 주기 때문입니다.

 

4. 부종

저는 피곤하거나 짠 음식을 먹으면 잘 붓는 편입니다. 그래서 늙은 호박을 아주 즐겨 먹습니다. 늙은 호박은 신장을 청소해 주고 재생해 주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호박을 고아서 그 즙을 마시거나 퓌레, 스튜로 먹으면 그 효능이 매우 좋습니다. 늙은 호박에는 전분 6%. 단백질 1%, 지방은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영양가도 별로 없고 값도 싸기에 하찮은 음식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깨끗이 청소하고 재생하기를 원하신다면 늙은 호박 요리를 자주 드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5. 소화기

소화기가 아주 예민하여 소화 흡수가 잘 안 되는 분들에게도 늙은 호박은 좋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금식한 이후, 처음 먹는 음식으로 늙은 호박을 요리해 먹습니다. 특히 늙은 호박은 위산 과다를 중화시키는 위산 제재를 합니다. 용해성 섬유질이 많기 때문에 변비에도 도움이 됩니다. 전분 음식은 소화가 안 되면 발효가 되고, 단백질 음식은 소화가 안 되고 내려가면 부패가 됩니다. 그러면 장의 건강에도 좋지 않지만 연이어 간이 피곤해지고 머리도 맑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다 청소해 주는 것이 늙은 호박입니다.

 

6. 눈의 질병

미국에는 퇴행성 망막질환으로 인하여 실명을 하는 노인 환자가 많이 있습니다. 늙은 호박에는 비타민 E와 항산화제가 있어서 망막을 건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또한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연구 발표를 했는데, 늙은 호박, 시금치, 고구마 이 세 가지를 습관적으로 자주 먹는 사람들에게는 백내장이 생기는 비율이 아주 적다고 합니다.

 

7. 암

늙은 호박은 항산화제로써 베타카로틴, 비타민C, 용해성 섬유질이 많기 때문에 유익할 뿐 아니라 항암제 효능이 있다고 합니다. 일본에 한 대학에서 쥐에게 실험해 보았습니다. 목이 길고 구부러져 있는 노란 서양 호박을 한 그룹의 쥐들에게만 먹이고, 다른 그룹의 쥐들은 그냥 채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쪽 모두를 발암물질에 노출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호박을 먹인 그룹에게는 암이 생기지 않았고, 다른 그룹에게는 암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로써 호박에 발암물질을 중화시키는 항암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호박꽃, 특히 멕시코산 늙은 호박꽃 역시 동맥 경화증과 암을 예방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8. 기타

호박씨에는 아연이 대단히 많습니다. 아연이 세포 안에서 부족증을 보이면 몸에서 만들어 내는 항산화제를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또한 늙은 호박은 섬유질이 많기 때문에 조금 먹어도 포만감을 주므로 비만증이 있는 분들의 식사에도 좋습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두 번이라도 늙은 호박을 단순히 요리해서 먹는 것은 젊은 사람들뿐 아니라 노년의 건강에도 아주 유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