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권두언

하나님께서는 죄지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놀라운 구속의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계획을 통해 타락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독생자 아들을 선물로 주심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온 우주와 거룩한 천사들도 놀라게 한 사랑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마음의 고민으로 커다란 핏방울 같은 땀이 떨어졌습니다. 세상의 모든 죄가 그분 위에 놓이고, 사람을 대신해 율법을 범한 자로서 고난을 당하시는 그 번민의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죄인의 입술에서 고난의 잔을 취하시고 그것을 대신 마시셨습니다.  사람 위에 내렸어야 할 죄의 값과 진노를 대신 받으시면서도 주님께서는 죄지은 인간을 위해서 당신이 해주실 수 있는 일에 대해 기뻐하셨습니다. 성경은 여러 장 여러 곳에서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하여 하지 못할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 신앙의 원동력, 곧 죄를 승리하게 하는 원동력, 유혹을 이기게 하는 원동력, 형제를 사랑하고 용서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도 우리를 강권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기고, 모든 것을 이루시는 독자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강 병국 목사    

Love Letter_ 겨울이 지나지 않고는 봄이 올 수 없듯이

                                                                                                                강 영은

찬 바람 한 자락 끝에 살짝 묻어나는 미풍이
긴 겨울 끝이 보인다고 말을 해줍니다.
봄이 오는 소리 행여 들릴까 담벼락을 기웃거리던 햇살이
길게 누워 기지개를 켭니다.

겨울을 지나지 않고서는 봄이 올 수 없듯이
인생의 겨울을 지낸 사람에게만 봄이 옵니다.
매운바람 견딘 가지에 봄꽃이 더 찬란하게 피듯
고통의 무게를 견딘 사람에게 삶은 더 빛납니다.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사 30:20)을 맛본 사람만,
“밭가는 자가 등을 갈아” 그 등 위 고랑이 길게 진(시 129:3) 사람만
서릿발처럼 매서운 인생의 겨울의 아픔을 압니다.

광야의 당아새같이, 지붕 위에 참새같이 외론 밤 지새고(시 102:7)
연기같이 소멸하는, 냉과리같이 뼈가 타는 낮을 지내야(시 102:3)
눈발처럼 차가운 인생의 겨울의 고독을 압니다.

고통의 얼음꽃 고드름처럼 응얼져 달리고
온몸 떨리는 추위 속에 손발 시린 다음에야
새뽀얀 소망의 입김 뿜어져 나오고,
고난의 시린 얼음길 걷고
시험의 눈보라 고개 넘어야
따뜻한 봄에 다다르기에,
지금 지나고 있는 겨울 한올 한올은 선물입니다.

겨울 속에 숨어있는 봄을 찾아내려면,
아직 더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겨울 속에 잠든 봄을 끄집어내려면
아직 더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봄의 주파수에 귀를 맞추고, 봄이 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하나의 미동에도 가슴을 열고, 하나의 움직임에도 촉각을 세우고…
그래야 얼른 마음 밭에 꿈틀거리는 씨앗들 끄집어내고
그래야 얼른 봉긋이 솟아나는 꽃망울들을 피워낼 수 있습니다.

겨울을 지나지 않고는 봄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겨울의 벌거벗음을 겪지 않고서는 봄의 풍요를 덧입을 수 없습니다.
긴 겨울을 견디며 깊어진 충만으로,
긴 겨울을 지내며 쌓은 인내로 봄의 문은 열립니다.

오늘
지나가는 겨울의 길목에서 한 분을 떠올려 봅니다.
인생의 겨울 속에서도 봄으로 사신 분,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 십자가를 참으신 분…
주님,
이렇게 봄을 기다리며 당신을 생각해 봅니다.

제1부_ 신부와 남편, 연인 관계 속에 그려진 하나님의 사랑

성경에 나타난 구속의 역사와 구원의 놀라운 경륜의 근간에는 매우 중요한 사상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실천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여러 다른 모습으로 다른 관계 속에서 계시하십니다. 그러나 모습과 관계는 다를지라도 그 속에 나타난 사랑은 같은 사랑, 하나의 사랑입니다. 

성경의 정확한 진리를 알고, 예언 해석을 하고, 성경에 능통한 모든 지식과 지혜를 가졌다 해도, 각 개인이 성경에 근원적으로 흐르고 있는 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거나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그 신비한 구속의 경륜과 비밀은 인간의 마음에 마땅히 불러일으켜야 할 만큼의 숭경과 감탄을 자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피상적인 문자로만 맴돌다 끝나서 우리의 신앙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호 신앙 기사에서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여러 다른 관계로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조명해 보았습니다. 다른 관계, 다른 모습이지만, 그 속에 나타난 같은 사랑, 하나의 사랑인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의 신앙이 더 뜨겁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 편집실 –


제1부: 신부와 남편, 연인 관계 속에 그려진 하나님의 사랑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렘 3:14).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신부이다. 성경의 여러 곳에 하나님은 우리의 남편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남편도 그냥 남편이 아닌, 아내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든, 어떤 처지에 있는 사람이든지를 막론하고 조건 없이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으로서 등장한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에게, 다른 정부를 찾아 자주 집을 나가는 음란한 여인 고멜과 혼인하여 살게 하시므로, 남편인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하는 아내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심정을 예증하고 체험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 신부인 우리를 보며 매우 기뻐하고 행복해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호 11:4).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

1) 아가서 - Song of songs

성경의 책 중에, 신부와 남편,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의 관계로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를 표현한 대표적인 책이 아가서이다. 솔로몬이 저자로 알려진 아가서는 “노래들 중의 노래”(song of songs)라는 뜻이 있는데, 솔로몬으로 상징된 하나님과 술람미 여자로 상징된 그분의 백성 사이의 사랑의 관계가 묘사된 노래로서, 유대인의 가장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에 낭독되는 두루마리서였다.
아가서는 솔로몬, 술람미 여인, 그리고 예루살렘 딸들 사이에 대화 형식으로 불린 사랑의 노래이다. 아가서를 통해 흐르고 있는 사랑은 그냥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사라지기 쉬운 사랑이 아니라, 많은 시련을 극복하며 이루어가는 온전하고 아름다운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상징하는 이 온전한 사랑이야말로 세상의 어떤 시련도 이길 수 있게 해주고, 어떤 죄악도 승리하게 하는 놀라운 힘을 가진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부인 우리를 향해 가지신 사랑은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는, 죽음보다 더한 사랑이 아닌가! 또한 아가서는 교회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초대교회에서도 아가서에서 나타난 연인과 남편과 신부의 사랑의 관계를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상징하여 가르쳤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불렀던 침례 요한의 기록과(요 3:29) 그리스도 자신이 신랑임을 친히 밝히신 말씀(마 9:15)을 바탕으로 한 해석이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5장 22-32절에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으며, 사도 요한도 어린 양의 아내, 신부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계 18:23; 21:2,9; 22:17).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2) 아가서에 나타난 사랑의 서막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를 한 쌍의 연인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사랑은 눈을 멀게 한다. 솔로몬 왕의 눈에는 피부가 검은 보잘것없는 여인이 엄청나게 아름답게 비친다. 마치 죄로 물든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의 눈처럼 말이다. 그 여인의 외모나 배경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에게 빠지게 된 솔로몬의 사랑은,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에 진정으로 적합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아가서 1장의 기록을 보면(6,7절) 술람미 여인의 정체와 그들이 만나게 된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술람미 여인은 왕의 포도원지기였고, 왕은 양을 돌보는 목자가 되어 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이복 오빠들이 포도원지기로 삼았기 때문에 일광 속에서 일해서 햇볕에 그을린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일한 여인이었다. 솔로몬 왕의 사랑을 받은 그녀는 이렇게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표현은 언뜻 비치는 섬광처럼 우리에게 뜻깊은 의미를 던져준다.

* “게달의 장막”과 “솔로몬의 휘장”

아가서 1:5 -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술람미 여인은 예루살렘 여인들과 비교하며 비록 자신이 그들보다 검을지라도 그들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다. 예루살렘의 딸들은 왕궁에서 왕의 시중을 드는 시녀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거친 들에서 양 떼를 돌보는 그녀보다 살결이 더 희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술람미가 자신을 그들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한 것은 그녀가 솔로몬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 사랑을 독차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게달의 장막” 같이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솔로몬의 휘장”과 같다고 말한다. 게달의 장막이란 유목민들의 거처하던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천막을 말한다.

여기서 “게달의 장막”이란 단어는 우리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세운 성소를 상기시켜 준다. 성소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상징했다. 성소는 네 개의 덮개로 지붕처럼 덮여 있었는데, 그중 제일 겉에 있는 덮개가 게달의 장막처럼 해달의 가죽으로 만든 검은 가죽 덮개였다. 해달은 물개와 같은 해양 동물로서, 그 말린 가죽은 색깔이 검었다. 성소의 가죽 덮개는 예수님께서 취하신 보잘것없는 인성을 상징한다. 이 바깥 가죽 덮개가 외적인 아름다움을 지니지 않은 것같이, 그리스도도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사 53:2)는 분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초라한 외형 속에 숨어있는 신성의 임재의 영광은 참된 아름다움이었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성소 지붕의 네 개의 덮개 중, 검은 가죽 덮개 속에는 붉은색으로 물들인 수양의 가죽 덮개가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과 희생을 상징하는 붉은색으로 물들여져 있었다. 그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을 상징하는 순백의 염소 털 덮개가 있었고, 그 맨 안쪽의 덮개는 왕의 덮개라고도 불리는 아름다운 덮개가 있었다. 그것은 휘장 같은 큰 천으로, 예수님의 순종을 상징하는 청색과 왕권을 상징하는 자색, 그리고 희생을 상징하는 홍색 실로 꼬아 만든 아름다운 휘장 위에 금실로 천사들의 형체가 수놓아 있는 것이었다. 왕실 색깔의 실로 짜인 이 덮개는 빛에 따라 여러 색깔로 빛나는 화려 찬란하고 아름다운 휘장이었다. 마치 솔로몬의 휘장처럼 말이다.

게달의 장막 같은 검은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의 휘장 같다는 말은, 죄가 많고 검은 마음의 소유자들인 우리를 솔로몬의 휘장처럼 찬란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의로 덮어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치있게 만들어주시는 것을 상징할 수 있다. 우리는 게달의 장막처럼 초라하고 볼품없지만, 주님은 우리를 자신의 신부로 택하여 주시고 마치 솔로몬의 휘장처럼 우리를 덮으시고 존귀하게 해 주셨다.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이다. 술람미 여인은 그 사랑을 믿고 당당하게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랑할 수 있었다.

제2부_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솔로몬 왕에게 사랑을 받은 술람미는 많은 험한 시련을 승리하는 힘을 갖게 된다. 그 힘은 오직 왕으로부터 받은 사랑에서 나오는 힘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올바로 깨닫고 인식할 때에 바른 가치관 안에서 바른 신앙을 할 수가 있고, 우리에게 닥치는 시련을 넉넉히 이길 수 있으며, 그 사랑의 힘으로 죄를 승리할 수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해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얻게 해주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요일 4:10).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 할 합당한 행동들을 하게 될 것이며, 점점 더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정도에 비례하여 우리의 신앙이 자라고 성품이 변화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사랑의 고백과 노래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서로 만나 사랑을 싹 틔운 뒤, 이들은 서로를 극진히 사랑했기 때문에 언제나 함께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들의 꿈은 술람미의 형제들로 인하여 이룰 수 없었다(1:6).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그들의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갔다.

1. 사랑하는 이를 찾아서

아가서 1:7,8 -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야, 네가 양 치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말하라. 내가 네 친구의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술람미 여인은 계속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기를 열망하고 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 솔로몬을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 양 떼를 먹이는 “목자”로 불렀다. 솔로몬을 목자로 부른 것은 그가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에서 왕은 백성의 목자로 불렸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게 양 떼 먹이는 곳과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자신에게 고하라고 말한다. 화답하는 사람들의 말대로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간 그녀는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2. 사랑의 고백

1:13,14 –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1:15 -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2:10 –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그들은 서로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아름다운 언어들을 서로 사용하며 묘사했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 대해 말할 때, 그의 사랑을 자신을 치료하는 몰약이라 부르고, 자신이 피하고 거할 피난처인 엔게디의 포도원이라고 불렀다. 엔게디는 다윗이 시련과 핍박을 피해 숨어 지내던 요새였다. 이것은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예수님을 표현하기에 얼마나 안성맞춤의 표현인가! 시험과 시련의 폭풍우가 몰려올 때 주님은 우리의 거할 안전한 피난처가 되신다. 이에 솔로몬은 어여쁜 그녀의 눈을 비둘기 같다고 사랑에 화답한다. 술람미와 솔로몬은 계속 사랑을 노래하며, 서로에 대해 “바로의 준마” “비둘기”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 등에 비유한다. 그들의 사랑 속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샤론의 수선화와 가시나무 중 백합화가 되고, 수풀 중에 사과나무로 피어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서로의 존재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사람이 되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에 가장 소중하고 존귀한 자가 된다. 그분께는 “우리의 머리카락도 세신 바 되며(마 10:30), 어떤 곤란한 사정이라도 숨기어지지 않는다”(사 40:27).

만일 우리가 술람미 여인처럼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우리는 매일 주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며 우리의 충성을 맹세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어떤 일이라도 마다치 않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길은 그분을 보다 더 깊이 아는 것인데, 우리의 영적 삶은 주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를 아는 정도에 따라 깊어질 것이다. 아가서 2장에 보면 솔로몬은 술람미에게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거듭 초청하고 있다. 이 초청은 특별한 장소로의 초청이라기보다 온전한 사랑을 이루기 위하여 함께 하자는 초청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원하신다. 우리는 함께 가자고 하시는 주님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지금”은 항상 주님과 교통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시간이다. 혹시 주님과 만나는 시간을 계속 다음으로 미루고 있지는 않는가? 주님께서는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지속하시기 원하셔서 매일 우리를 초청하신다.

3. 바위 틈 은밀한 곳에

2:14 –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솔로몬은 자신의 연인을 은밀한 곳에 숨어있는 비둘기로 비유했다. 우리도 바위 틈에 숨는 비둘기가 되어야 한다. 바위의 갈라진 틈은 만세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 안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쉼을 주시기 위해 상처를 받으셨다. 우리는 그 반석의 틈 안에서 쉼터를 발견한다. 그곳은 은밀한 곳, 사적인 경험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을 받고, 그 보혈로 치료를 받는 곳 그리고 그 피의 공로와 힘으로 세상과 죄를 이기게 되는 곳이다. 은밀한 곳의 경험은 주님의 밀실에 함께 들어가는 경험으로, 주님과 함께 비밀의 장소(Secret chamber)인 지성소로 들어가는 경험이다. 그곳에서 영혼의 정결을 받은 사람만이 사탄의 공격과 시험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시험의 때에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 그 품에 거할 때 그분은 우리의 이름을 그의 입술에 담으시고 아버지께 나아가 말씀하신다. “나는 내 손바닥에 그들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압니다”고 하신다. 그 때에 곧 그들을 보호하라는 명령이 천사들에게 내려진다. 주님께서는 두려운 시련의 날에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간 숨을지어다”(사 26:20)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환난의 때에 밀실의 경험을 한 사람들을 보호하실 것이다. 주님과 사랑의 관계에 들어간 사람은 매일 밀실에서 주님과 교제를 나누는 경험을 지속할 것이다.


2) 사랑의 두드림

아가서 3장 6절은 재회의 기쁨을 말해 주고 있다. 솔로몬은 용사들의 옹위를 받으며 술람미를 찾아갔다. 여기 묘사된 솔로몬의 위엄은 보는 사람들에게 그의 모습에 압도당하게 하여 아무도 이들의 재회를 막을 수 없게 하였다. 그들은 기쁨으로 다시 서로 사랑을 고백하며 기쁨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이들의 재회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술람미의 무관심으로 인해 이들의 기쁨이 깨어졌기 때문이다(3:6-5:6). 술람미는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는 이유로 밤에 찾아온 사랑하는 사람을 문밖에 세워 놓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솔로몬은 밤이 늦도록 문을 두드리며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을 맞아주기를 기다렸지만 결국 그녀의 무관심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여인이 일어나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문을 열었을 때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였다.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을 번거롭게 생각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문 두드리는 소리를 무시했던 것이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은 지쳐서 돌아갔다. 여기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라는 표현은 솔로몬이 술람미가 문을 열어주기를 바라며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찾아가 문 열어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시는 모습을 비춰본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주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시기를 간절히 바라시면서 마음 문을 두드리신다. 음식을 함께 먹는 것보다 우정과 친교를 더 잘 나타내는 행동은 없다. 이 경험이야말로 산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경험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많은 사람이 그들의 마음 문에 너무 많은 쓰레기를 쌓아둠으로 문을 열 수 없다. 형제들 사이에 있는 어려움과 문을 열기 전에 제거해 버려야 할 악한 기질과 이기적 탐심이 있다. 또 세상에 대한 애정과 욕심들이 문을 가로막고 있다. 이 모든 쓰레기는 제거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그들은 문을 열고 구주를 영접해 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께서는 호소하시기를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신다. 그분이 주시는 금은 믿음과 사랑이며, 흰 옷은 그리스도 자신의 의의 두루마기이다. 누구든지 문을 열고 주님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영적인 보화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제는 반대로 술람미 여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한밤의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를 헤맸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기까지 긴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는 밤중에 사랑하는 자를 찾아 거리를 다녔기 때문에 성 중에서 행순하는 자들과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에게 매를 맞아 상하기도 하였지만 그런데도 사랑하는 자를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하는 자를 찾았는지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부탁한 말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너희가 내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는 일에 소홀히 했을 때, 우리가 주님을 다시 찾고 우리의 영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몇 배의 많은 노력과 고통의 시간이 필요하다.

제3부_ 아가서가 말해주는 사랑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사랑하는 자가 어디 있는지” 묻고 다니던 술람미는 결국 다시 사랑하는 이를 만난다. 솔로몬은 자신에 대하여 무관심했던 여인을 다시 만났지만, 그녀의 어떤 허물도 책망하지 않았고 오직 다시 만난 것만을 기뻐했다. 이들의 재회는 잃어버렸던 사랑의 노래를 다시 찾게 해 주었다. 아가서의 마지막 장인 8장 5절에 나오는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라는 말은 예루살렘 여자들이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이 함께 오는 것을 보고 하는 말이다. 여기 “의지하고”라는 말은 다른 번역에서 “팔을 끼고(arm in arm. GNB)”라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과 결혼하기 위하여 그녀의 집이 있는 거친 들로 가서 그녀와 팔을 끼고 다정하게 예루살렘으로 오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드디어 그들의 사랑이 결실을 보아 아름답고 신성한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얼굴이 검고 보잘것없는 평범한 한 시골 여자인 술람미 여인이 왕의 사랑과 은총을 받아 왕비가 되고, 높은 신분의 왕족이 되어 왕궁으로 가게 된 이 이야기는 얼마나 놀라운 러브 스토리인가! 이 스토리는 바로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주님을 영접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후사가 되어 놀라운 하늘의 상급을 받고, 하늘의 왕족이 되는 우리의 이야기인 것이다.

1) 인 같이 품고 도장 같이 새기는 사랑

아가서 8:6 –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가서는 그들의 사랑을 “인”과 “도장”으로 비유했다. 인(seal)이란, 고대 시대에 사용되던 것으로, 여러 가지 중요한 문서들이나 자신의 소유에 봉인하는 일에 쓰이는 것이었다. 고대 사람들은 “인”을 도장 처럼 사용했는데 도장에는 주인의 이름이 새기어져 있었다. 인이 쳐지면 그것은 그 인을 친 사람의 소유라는 것이 인정되었고, 또 인을 친 사람의 권위가 인정되었다. 그들의 사랑은 “인 같이 마음에 품”어져야 하는 극진하고 간절한 것이었다. 인 같이 마음에 품으라는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과 정신에 새겨져서 우리의 성품과 생각이 예수님처럼 되는 것을 뜻한다. 마음은 머리와 정신에 있으므로, 마음에 품는다는 것은 우리 마음과 정신에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과 계명이 기록되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 계시록 7장과 14장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데, 요한은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4,000인이 섰는데 그 이마에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을 보았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반사하고 있었고, 이마에 하늘의 인을 가지고 있었으며, 거룩하신 분의 빛과 영광이 충만하였다. 이마에 인을 받기 위해서는, 이마에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기 위해서는 모든 죄악을 벗어 버리고 승리하며 모든 죄로부터 정결해지고 어린 양과 같은 성품을 가져야 한다.

도장은 새기는 것이다. 도장을 팔에 둔다는 의미는, 도장을 새기듯, 도장을 찍듯 마음과 팔에 나를 잊어버리지 말고 새기라는 뜻이다. 도장을 새기는 일에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처럼 인을 받는 일에도 과정이 필요하다. 고대에 양초에 도장을 찍어 형상이나 문자를 새겨내려면 그 도장을 양초에 한동안 단단히 눌러 놓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에게 형성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는 것에는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며 그분의 형상이 드러날 때까지 우리를 누르시는 경험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을 도장같이 사랑으로 인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순복하고, 주님께서 꼴 지워 주시는 대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어떤 중국 선교사의 시에 “저를 도장처럼 영원히 당신의 마음에 품어주시고, 도장처럼 지울 수 없게 당신의 팔에 두소서. 제사장들이 그들의 가슴과 어깨에 이스라엘 백성을 품고 짊어졌듯이, 당신의 마음속에서 저를 항상 기억하시고 당신의 팔로 저를 부축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오늘 이후로 모든 것은 당신의 능력과 당신의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라는 기도가 나온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인같이 도장 같이 품고 새기는 그분의 신부가 되어야 하리라.

2) 영원한 사랑

8:7 -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하나님은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사랑한 것보다 더 뜨겁고 조건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노라(렘 31:3)” 참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기 때문에 온 재산을 주고도 그 사랑을 살 수 없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귀한 생명을 주셨다. 그래서 바울은 이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롬 8:32)”고 반문하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 생명까지도 주는 사랑인데,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이와 같은 사랑이다. 우리는 당신의 아들로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구속의 비밀과 우리 구주의 사랑은 현세와 내세에 있어서 우리의 최고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생각해야 할 주제가 될 것이다. 우리의 상상력을 다 동원할지라도 우주의 왕이셨던 분께서 이 땅에 오시기까지 몸을 낮추신 그 사랑을 전혀 설명할 수 없고 다만 그 윤곽만을 희미하게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저 그 사랑의 높이와 넓이와 깊이를 다 알 수 없어서 십자가 앞에서 눈물만을 흘릴 뿐이다. 이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파괴하거나 빼앗아 갈 수 없는 사랑이다. 죽음보다 강하고, 불같이 일어나고, 많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많은 물이라도 엄몰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3) 아가서의 해피엔딩

아가서는 해피엔딩(happy ending)으로 마친다. 아가서는 서로 사랑하게 되고, 서로 함께하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은 결혼을 위하여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마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이 땅에서도 그 사랑의 교제를 통하여 행복하게 살 수 있지만, 이 땅의 모든 수고를 마치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본향에 가서 주님과 함께 살게 될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가 정말 우리의 해피엔딩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집에 우리가 거할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셨다. 성경에는 구원받은 자들의 유업을 하늘 본향이라고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구원받은 그분의 백성을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생명나무는 달마다 과실을 맺고 나뭇잎은 만국을 섬기기 위하여 있다. 거기에는 수정같이 맑고 끊임없이 흐르는 시내가 있으며 시냇물 옆에는 흔들리는 나무들이 주님의 속량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길들 위에 그 그림자를 던질 것이다. 이 생명강 옆에 있는 평화로운 평지 위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나그네요 유리자였던 하나님의 백성은 영원한 쉼을 발견할 것이다. 그곳은 지상의 나그네들이 거할 본향이다. 우리를 괴롭히고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던 모든 것들의 신비가 그곳에서는 명백히 드러날 것이다. 은혜의 오묘한 섭리가 우리 앞에 공개될 때에, 우리의 유한한 지력으로 혼란과 깨어진 약속밖에 보지 못하였던 것에서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운 조화를 보게 될 것이다. 아가서에서 사랑하는 연인이 마침내 팔짱을 끼고 왕궁으로 가듯이, 우리는 머지않아 주님과 함께 하늘 도성으로 갈 것이다. 우리는 귀향 중에 있다. 하나님의 도성에는 슬픔의 통곡도, 깨어진 희망과 사라진 소망에 의한 비탄과 한숨의 소리도 다시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찬송과 감사의 찬양은 우주에 영원히 메아리칠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제4부_ 부모와 자녀 관계 속에 그려진 하나님의 사랑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3).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을 자비롭고 인자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로 소개하시기를 좋아하셨다.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인간에 대해 가지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에 가장 적합한 관계이다. 부모가 자녀에 대해 가지는 사랑, 끊임없이 주어도 또 주고 싶고, 아무리 잘못해도 저절로 용서되고, 미운 짓을 해도 이쁘기만한 부모의 사랑은 아마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고 돌봐주시는 무조건적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잘 대표할 만한 것이 될 수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첫마디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아버지를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도록 가르치신다. 그분은 우리를 형제라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영접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하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사용해야 하는 첫 번째 말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신다는 용기와 위로로 가득 찬 놀라운 진리의 선언인 것이다.

1) 어떤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눅 15:11-13).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확실하게 예증하시고 하늘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강조하시기 위해, 인간이 최대한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한 비유를 예화로 들어 말씀하시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셨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이다.
비유 속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제재에 몹시 싫증이 났다. 그는 아버지가 자기의 자유를 구속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애로운 아버지의 사랑과 돌보심을 오해하고 집을 나가 마음대로 살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자기 몫으로 받게 될 유산을 지금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는 아버지를 돌아가신 분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마음대로,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고 싶어 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슬퍼서 처음에는 아들을 만류했지만,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그에게 유산을 내주었다. 넉넉한 유산을 손에 걸머쥔 아들은 기쁨에 들떠 “먼 나라”로 갔다. 많은 돈과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된 아들은 드디어 자기의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고 몹시 기뻐하였다. 이제 아무도 그에게 주의나 조언을 주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그는 세상에 나가 그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마음껏 쾌락과 방탕에 몸을 맡겼다. 악한 친구들을 사귀고 그들이 부추기는 대로 죄와 쾌락에 빠져 “허랑방탕하여 그 재물을 허비”하였다. 그의 귀중한 청춘은 정욕의 불꽃에서 소멸되고 젊음의 소중한 시간과 지력과 포부는 방종과 쾌락 속에서 쓰러져가고 있었다.

2) 회한과 절망 속에서

해가 석양에 뉘엿뉘엿 질 때, 정신없이 놀던 아이들은 문득 자신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을 느낀다. 정신없이 방탕하던 젊은이에게 갑자기 인생의 석양이 밀려왔다. 영원히 갈 것만 같던 쾌락과 방탕의 시간은 갑작스레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그의 수중에 있던 돈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이제 장래를 설계할 줄 모르고 흥청거리던 그에게 남은 것은 빈곤과 가난과 궁핍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자 그는 끼니를 잇는 일에도 어려움을 겪게 되어 결국 돼지를 치는 일까지 하게 되었다. 유대인에게는 그 일이 몹시 천한 직업이었다. 돼지 외에는 다른 아무 친구도 없는 쓸쓸하고 흉년이 든 그 지방에서 그는 땅 위에 홀로 앉아 짐승이 먹는 팥 껍질로 배를 채우고 있었다. 그가 잘살 때 그의 곁에 몰려와서 그의 돈으로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던 친구들 중에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그가 허랑방탕하며 즐기던 오락과 세상의 기쁨은 어디로 가 버렸는가? 그는 전에 자기의 양심을 달래고 감각을 마비시키면서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돈도 다 떨어지고, 배도 고프고 자만심은 땅에 떨어져, 한때 자신의 자유를 뽐내던 그는 이제 자신이 처참한 노예가 된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를 매혹하던 찬란하고 번쩍거리던 세상의 영화는 다 사라져 버리고 이제 그는 속박의 쇠사슬의 무게에 눌리게 되었다.

여기에 묘사된 탕자의 형편은 죄인의 상태를 가리킨다. 얼마나 비참한 형편인가! 가인이 자기의 살 곳을 찾기 위하여 여호와 앞을 떠나간 것처럼, 탕자가 “먼 나라”로 떠나간 것처럼, 죄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행복을 찾으려고 집을 떠난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사람들은 귀한 세월과 정신과 마음의 능력을 낭비하고 영원한 삶을 얻는 일에 낙오자가 된다.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돈을 허비하며 배부르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고 있다. 그런데 머지않아 자신을 깊이 자각할 때가 올 것이다. 먼 나라의 외로운 처지에서 자신의 가련함을 느끼고 절망 가운데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고 부르짖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3) 귀향

돼지를 치고 있던 탕자는 문득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떠올렸다. 가련한 형편에 빠진 그는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마음속에는 수많은 갈등이 일어났다. 차마 지금 같은 처참한 꼴로는 집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더구나 쓸데없이 낭비해버린 유산을 생각하면 고개를 들 수가 없었고, 그의 집의 종들과 주위의 이목을 어떻게 견뎌낼까 고민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아버지의 인자한 사랑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내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고 소망을 갖게 되었다. 그를 집으로 이끌리게 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이와 같이 죄인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강권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렘 31:3)고 말씀하신다.

탕자는 돼지 떼와 팥 껍질을 버리고 분연히 일어섰다. 그리고 자기의 집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허약해서 비틀거리며 먹지 못해 기진맥진한 몸으로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집을 향하여 걸었다. 더러운 누더기로 겨우 몸을 가린 채 맨발로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고 있는 탕자를 상상해 보라! 놀기만 좋아하고 생각이 모자랐던 그 젊은이는 집을 떠날 때 아버지의 마음속에 남겨 놓은 고통과 외로움과 애절한 사랑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그의 방탕한 동무들과 춤추고 먹고 마시고 있을 때 그의 고향 집에 드리운 우울함에 대하여 거의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피곤하고 무거운 발을 끌면서 고향으로 뻗어 있는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도 한 분이 자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아들이 집을 떠난 이후로 아버지는 한 시도 아들을 잊은 적이 없었다. 매일 문을 열어 놓고 매일 밤 등불을 밝혀 놓았다. 혹시 밤에라도 왔다가 들어오지 못하고 돌아설까 봐 아버지는 밤에도 불을 켜고 아들을 기다렸던 것이다.

어느 날, 멀리서 낯익은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아직 “상거가 먼데”도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을 분간했다. 사랑은 눈을 밝게 한다. 여러 해 동안의 죄된 생애로 초췌해졌을지라도 아버지의 눈이 그 아들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그는 “측은히 여겨 달려가” 사랑의 팔로 그의 “목을” 오랫동안 꼭 안았다. 아버지는 사람들이 자기 아들의 비참한 모습과 누더기를 경멸의 눈초리로 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 어깨에 걸쳤던 넓고 좋은 외투로 아들의 남루한 꼴을 덮어 주자 그 아들은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덧붙이는 그의 말은, 그가 얼마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무지했는가를 나타내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고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종들에게 명하였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4) 하늘 아버지의 사랑

성경은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라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비유에는 탕자의 잘못을 견책하거나 꾸중하는 장면이 전혀 없다. 돌아온 탕자는 자기의 과거가 용서함 받고 그의 죄가 영원히 잊어버린 바 되고 도말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죄인에게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사 44:22),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회개하는 죄인을 기꺼이 받아주신다. 만일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멀리 떠나있다면 일어나서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멀리까지 나와서 우리를 영접하실 것이다. 우리가 회개하고 그분을 향해 한 걸음만 내딛어도 그분은 재빨리 무한하신 사랑의 팔로 우리를 안아 영접하실 것이다. 그분의 귀는 통회하는 자의 부르짖음을 듣기 위해 열려 있고,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사모하는 생각이 싹트는 순간에 그것을 아신다. 기도가 아무리 더듬거리고, 눈물을 아무리 은밀하게 흘릴지라도 그분은 아시며,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아무리 미약할지라도 하나님의 성령이 알아차리지 못하시는 때가 없다. 기도가 입술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마음의 소원이 알려지기도 전에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마음에 역사하신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 깊고 크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부모의 사랑도, 그 어떤 아버지나 어머니의 사랑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죄인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바치신,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은 이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제5부_ 목자와 양의 관계 속에 그려진 하나님의 사랑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헌신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표현된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목자와 양 사이의 관계로 표현된 이야기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품과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속의 역사에 나타나는 그분의 헌신적인 사랑의 특성을 설명하시기 위해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한 한 서민적인 이야기를 선택하셨다.

1) 길 잃은 한 마리 양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요단 동편의 넓은 고원지대에는 풍부한 목초지가 있었다. 목자들은 양을 먹이기 위해 그곳을 자주 찾았다. 그러는 중에 산골짜기와 나무가 무성한 숲에서 길을 잃게 된 양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고 그래서 어느 곳에는 길 잃은 양들이 목자들의 손을 기다리며 방황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한 목자가 그의 양 가운데 한 마리가 행방불명이 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매일 밤 목장으로 돌아오면 우리 안으로 양들을 들여보내기 전에 혹시 다친 양은 없는지, 상처 난 양은 없는지 그들을 일일이 검사하였었다. 기름을 발라주고 털을 쓰다듬으면서 양들을 돌보는 이 목자에게 양들은 마치 자식같이 소중했다. 목자는 그 날밤 양들을 세어보고 또 세어 보았지만 한 마리가 부족한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마리의 양이 길을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되자마자 목자의 마음은 슬픔과 근심으로 가득 찼다. 그는 양을 세어보고 또 세어 본 다음, 그의 양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우리 안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를 버려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러 나간다. 목자는 평안히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양들을 바라보며 “아흔아홉 마리가 남아 있는데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가는 것은 너무나 많은 고생이 될 거야. 저 혼자 돌아오겠지, 돌아오면 내가 우리의 문을 열어 안으로 들여보내지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밤이 어두워질수록 비바람이 심해질수록 목자의 염려는 더욱 커져 그는 양을 더 열심히 찾는다. 그는 잃어버린 그 양의 이름을 부르며 숲과 골짜기를 헤매어 다녔다. 때로 넘어지기도 하고 가시에 찔리기도 하였지만 그 잃어버린 자기의 양을 찾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하였다.

2) 양을 발견하다

캄캄한 밤에 숲을 헤매며 양을 부르는 목자의 귀에 멀리서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양의 울음소리였다! 그는 그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뛰기 시작하였다. 그는 생명을 걸고 가파른 고개를 기어오르기도 하고 아슬아슬한 낭떠러지의 가장자리를 지나기도 하면서 소리 나는 곳으로 점점 다가간다. 그렇게 양을 찾아가는 동안 양의 울음소리가 점점 희미해가는 것을 듣고 그 양이 거의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근심하던 목자는 마침내 그 잃었던 양을 발견한다. 목자는 너무 기뻐서 양을 덥석 품에 안았다. 목자는 양이 자기에게 그처럼 많은 괴로움을 끼쳤다고 해서 그 양을 꾸짖지 않는다. 그는 양을 채찍으로 몰지도 않으며 양을 걷게 해서 집으로 끌고 오지도 않는다. 그냥 크게 기뻐하며 떨고 있는 양을 가슴에 안고 우리로 향한다. 양은 목자의 가슴에서 두려움과 시름을 잊고 잠이 든다. 양은 안전하게 우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모든 동물 중에서 양은 가장 겁이 많고 무력한 동물이다. 그 당시 성벽 밖의 목초지는 안전하지 않았다. 배회하는 약탈자들과 맹수들은 바위틈에 숨어서 양무리를 약탈하려고 기다렸다. 목자는 자신의 생명이 위험함을 알면서도 그가 돌보는 양무리를 보호한다. 목자가 그의 양 떼를 인도하며 언덕과 숲에서 고독한 밤을 지새울 때, 산에서 강도를 막고 병들고 연약한 양들을 친절하게 돌볼 때 그의 생명은 양들의 생명과 하나가 된다. 양 떼가 아무리 많아도 목자는 모든 양을 다 안다. 양마다 이름이 있으며 목자가 이름을 부를 때 그들은 대답한다.

3) 가슴에 안는 사랑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은 선한 목자 되신다. 이 세상 목자들이 자기 양을 아는 것처럼 거룩한 목자도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당신의 양무리를 아신다.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겔 34:31).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개인적으로 아시며 우리가 사는 집과 우리 모두의 이름을 아신다. 각 영혼은 마치 그가 구주께서 위하여 죽으신 유일한 사람인 것처럼 예수님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분은 마치 이 지구 표면에 그 사람 외에는 다른 사람이 없는 것처럼 각 사람을 돌보신다. 각 사람의 고민은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도움을 구하는 모든 부르짖음은 예수님의 귀에 들어간다. 목자가 자기 양을 사랑하고 한 마리라도 잃어버리게 되면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더한 무한히 큰 사랑으로써 우리를 사랑하시고 가슴에 안아주신다.

곁길로 나갔던 양을 집으로 데리고 왔을 때 목자의 감사함은 기쁨에 넘친 아름다운 노래로 표현된다. 그는 자기의 친구와 이웃들을 불러 놓고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고 말한다. 그것처럼 크신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 곁길로 나가 방황하는 자들을 찾았을 때 하늘과 땅은 함께 기뻐한다. 잃은 양은 한 사람의 죄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배도하여 죄로 멸망하게 된 이 지구를 대표한다. 이 지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광대한 우주에 비해 지극히 작은 한 개의 점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타락한 작은 세계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으로서 다른 아흔아홉보다 더욱 귀중하다. 하늘에서 사랑받는 통치자이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이 잃어버린 지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가 아버지와 함께 가지고 계시던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그 높은 자리에서 이 세상으로 내려오셨다. 이 지구를 위하여 하늘에 있는 죄 없는 세계들, 잃어버림을 받지 않은 아흔아홉을 뒤에 두시고 한 마리 잃은 양 같은 이 지구의 우리를 위하여 오신 것이다. 얼마나 큰 사랑인가! 얼마나 자비로운 목자이신가! “그는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여러 가지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실례를 본다. 그러나 이런 모든 관계를 예로 들더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 표현할 수 없다. 하늘의 모든 보화를 다 바치시고, 생명을 다 바치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무엇으로 비유한단 말인가! 그 사랑을 어떻게 다 표현한단 말인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다만 광대하고 망망한 하나님의 사랑의 바닷가에 서서 그 사랑의 물 한 방울을 손가락에 찍어 맛볼 수 있을 뿐이다.

마지막 시대 이슈_ 세상의 종말을 위해 한 축을 담당하는 영지주의 영화들

지난해(2014년) 영화 매출이 사상 처음으로 2조 원을 넘기고, 관객 2억 명을 돌파했다. 1인당 평균 영화 관람 횟수는 4.19회였다. 이 수치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람한 사람들의 통계이며 집이나 다른 장소에서 영화를 관람한 횟수는 더 많을 것이다. 이미 영화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누리는 문화생활로 자리를 잡았고, 사람들의 사상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문제는 오늘날 인기 있는 대부분 영화들이 영지주의 사상으로 제작된다는 것이다.

영지주의란 무엇인가?
영지주의(Gnosticism)는 헬레니즘 시대에 유행했던 종파의 하나로 2세기에 유행했으며 헬라 철학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여 성경 말씀을 왜곡했다. 그들은 성경의 말씀들을 뒤집어서 해석하기 시작했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악한 신으로 사탄을 선한 신으로 설명했다. 그들은 우리를 두르고 있는 창조물들이 실제로는 우리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이 특별한 지식(뱀이 말한 대로 선악과를 따먹으므로 얻는 지식)을 소유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자유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할 것이며 결국 충분히 자유로운 사람이 되면 모두 신과 같이 될 것이라 믿었다.

영지주의는 3세기경 쇠퇴했으나 그 후에도 다양한 종파의 교리와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문제는 이 영지주의가 오늘날 뉴에이지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강력하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영화가 제작되는 사상에 깊이 영향을 주고 있다.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영화들은 물론 성경 이야기를 주제로 만들어진 영화도 영지주의 사상으로 제작되고 있다.

영화 “노아”
2014년 3월에 성경의 위대한 의인 노아에 대한 영화가 개봉했다. 성경 이야기를 주제로 한 영화라 많은 사람에게 이슈가 되었고, 수많은 기독교인이 개인적으로 또는 단체로 영화를 관람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아 영화는 성경 말씀을 왜곡하여 제작되었다.

노아 영화 속에 포함된 영지주의 요소들(성경 말씀과 다르게 표현한 점들)
- 하늘에서 떨어진 ‘타락한 천사들’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들에게 ‘문명’을 건설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마지막 순간엔 노아가 방주를 지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것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쫓겨난 타락한 천사들을 마치 인간들을 돕고 이롭게 하려다가 잔인한 신(하나님)에게 저주를 받은 존재인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 노아와 타락 천사들은 살기 위해 방주에 타려고 하는 인간들을 무차별로 학살하고 이 사명을 완수한 타락 천사는 빛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 노아는 인간의 완전한 심판과 멸종을 위해 방주 안에서 태어난 자신의 손녀딸들을 죽이려 하고 노아의 아들 셈과 함은 이에 대항해 아버지와 싸운다. 결국 노아는 실패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죄송합니다. 나는 못합니다.” 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이 영화에서 표현된 노아보다 더 잔인하고 악하게 표현된다.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

아로노프스키 "나는 노아가 신앙적이 아니라 그저 다른 많은 종교와 영적 생활들에 포함된 위대한 우화라고 생각한다." "노아는 역사상 가장 비성경적인 영화다."

또한, 주연배우 러셀 크로는 다음과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다.

러셀 크로 :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이 노아를 자애로운 자로 여긴다는 것이죠."
"동물들을 보살폈기 때문에 '아 ~ 노아 할아버지. 노아와 동물들" 좋게 여기죠? 농담하는 거죠? 이 남자는 지구 인구 전체가 멸망하는 것을 방관한 자입니다. 그는 자애롭지 않죠.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니죠."

위와 같이 노아 영화는 성경에 기록된 의인 노아를 도끼를 들고 사람들을 학살하는 미치광이로 만들고 하나님을 악한 신으로 만들었다. 또한, 타락한 천사들은 인간들을 돕는 선한 신으로 표현했다.

영화 제작진들은 성경의 기록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비롭게 인류의 죄악을 참으셨고 올바로 의를 행할 수 있도록 도우시려 얼마나 크게 역사하셨으며 얼마나 분명한 증거들을 계속해서 인류에게 허락하셨는가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증거가 있었음에도 그들은 죄악의 길을 택한 사람들이다. 당시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창 6:5,11,12)

그 당시는 정말로 극도로 악한 세상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늘 생각하던 생각이 "강간, 절도, 강도, 살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행하며 살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이 사실을 간과하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의인 노아의 가족만 제외하고 전부 멸하셨는가? 너무 잔인하시다."라고 생각을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만약 그런 악인들이 넘치는 도시나 국가가 있다면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외칠 것이면서도, 많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간보다 자비롭지 못하고 판단력이 없으시고 공의롭지 못하신 존재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깊이 이 점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너무나 악해진 사람들을 오래 참으셨다.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악을 막아오셨고 이미 성령을 거역하여 악해진 사람들을 120년이나 더 기다리셨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 영이 항상 사람과 다투지는 아니하리니 이는 그도 육체이기 때문이라. 그럼에도 그의 날들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 6:3)

120년간 의인 노아를 통해 의를 전파하게 하셨고 다가오는 심판을 경고하게 하셨다.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벧후 2:5)
그러나 노아와 노아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끝까지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신들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악을 행하며 살았다. 생각하는 모든 것이 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결국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경 말씀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영화들을 보며 하나님과 성경 말씀을 오해하게 된다. 또한 성경 말씀을 어느 정도 아는 기독교인이라 해도 이 영화들에서 나오는 내용은 잠재의식에 영향을 미치고 하나님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영화 “엑소더스”
2014년 12월에는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이 영화도 영지주의 사상으로 성경을 해석하여 하나님과 성경에 나온 의인들을 왜곡하여 표현하고 있다.

엑소더스 영화에 있는 영지주의 요소들 – 성경 말씀을 왜곡하고 있는 장면들
- 영화 ‘엑소더스’에서는 모세가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서 만난 여호와 하나님을 ‘고집 센 어린아이(동자승?)’로 묘사하고 있다.
- 미리암이 람세스의 질문에 답변하는 장면에서 미리암은 모세가 자신의 동생이 아니라고 거짓말한다.
- 모세도 거짓말쟁이, 믿지 않는 자로 표현된다.
-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친히 돌판에 기록해주셨지만 영화에서는 모세가 십계명을 직접 돌판에 새긴다.
- 영화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잘 죽이는 지도자가 필요하셨다.”라고 표현하며 영화 속 모세는 지팡이 대신 칼을 사용하는 혁명 지도자이다.

영화는 모든 재앙을 하나님의 기적이라기보다는 자연재해가 우연히 연결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악어들이 난동을 부려 물고기를 다 잡아서 나일강을 피로 가득하게 하고, 그 일로 개구리가 강에서 뛰쳐나오고, 개구리가 죽자 파리가 들끓고, 파리 때문에 사람들 피부에서 종기가 생기는 식으로 연결한다. 이런 재앙들을 신의 변덕으로 묘사한다. 마지막 재앙에서 바로의 아들이 죽게 된 상황에서는 모세가 와서 미안하다고 할 정도였고 이때 바로는 “어린아이를 죽이는 그런 신을 왜 믿느냐고 질문한다. 어린아이까지 죽이는 악하고 변덕스러운 신으로 하나님을 표현한 것이다.

영화를 제작한 감독과 배우들은 어떤 사상을 가졌기에 이런 성경을 왜곡하는 창작물이 나오게 된 것일까?
감독 : "이것은 마법과 공상과학인데 근본적으로 늘 실제 사실로서 믿어온 것이다."
“악의 가장 큰 근원은 물론 종교이다. 좋은 종교를 아십니까? 공정하며 친절하며 관대한 종교가 있는가?”
- 감독 리들리 스콧은 인터뷰에서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십계를 시청할 때) 셋째 줄에 앉았던 어릴 적에도 믿지 않았다. 나는 더 과학적이거나 자연적인 설명을 생각해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한다."
월스트리트 저널에 의하면 "그(리들리 스콧)는 홍해가 갈라짐을 지진 때문에 생긴 해일의 결과로 묘사하기로 했다."
필자의 생각엔 그의 주장이 성경의 기록보다 훨씬 더 큰 기적이다.

할리우드 리포터와의 인터뷰에서 배우 크리스찬 베일은 그가 연기한 '모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크리스찬 베일 : "내 생각엔 그는 아마도 정신 분열증을 가졌고 또한, 내 일생 읽어본 인물 중 가장 야만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더 놀라운 점은 하나님의 품성이다. 그 또한 매우 변덕스러웠다."

변덕스럽다 : 갑작스럽거나 예측할 수 없는 감정이나 마음의 변화

엑소더스 영화는 전혀 성경적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해 변함이 없으시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나는 주라 변치 아니하나니...”(흠정역 말 3: 6)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흠정역 히 13: 8)

진짜 성경의 출애굽 이야기는 본래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위대한 손길에 대한 것이다. 그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죄에서 구속하시는지에 대한 영적인 교훈을 주고 있다.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은 출애굽 사건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위대한 손길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경을 왜곡하는 영화들을 만들면서 하나님을 비웃고 대중에게 사탄의 영지주의로 사상교육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믿든지, 어떤 짓을 하든지 진실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는 절대로 그들이 지울 수 없다.

영지주의 영화의 문제점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싫어한다. 영지주의 영화들의 영향력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재미로 보는 수많은 영화에 하나님을 왜곡하여 보여주는 사상이 들어가 있고 그것들을 보는 사람들은 잠재의식에 영향을 받아 결국 하나님을 싫어하게 된다.

닥터 모로의 D.N.A. 라는 영화의 각본을 맡은 리차드 스탠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리차드 스텐리 :
"오늘날 대중매체는 영지주의 신앙의 확대판이라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영화 자체는 세상의 종말을 위해 한 축을 감당하는 것 같다."
리차드 스텐리는 영지주의가 영화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다.
영지주의 사상은 인기 있는 영화들은 물론 성경을 주제로 한 영화들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노아 당시의 사람들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예수님의 재림 전 마지막 때에는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을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예언하셨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7)

하나님께서는 노아 당시 사람들 속에서 그들이 구원받을 모든 가능성이 120년 후에 끝날 것을 아시고 의인 노아에게 방주를 짓고 다가오는 심판에 대해 모두에게 전하며 사람들에게 회개하도록 촉구할 것을 명하셨다. 모든 사람에게는 전지전능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며 곧 심판이 올 것이라는 사실이 전달되었다. 그런데도 홍수 전 세상의 사람들은 그들의 악행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악해져 갔다.

오늘날 우리도 불의한 일을 계속 참고 있을 수 없지 않은가? 하나님께서도 죄악을 참으시는 데 한계가 있으시다. 더 이상 회개할 수 없는 상태로 인간의 마음이 굳어지면 그때는 심판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사는 말세가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벧후 3:3~10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영지주의 영화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성경 진리를 거부하여 죄의 노예로 살아가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감당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때에 우리는 우리의 눈과 귀를 지켜 사탄의 기만에 속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진리로 준비되지 않은 모든 사람은 사탄이 준비하는 마지막 기만에 다 속게 될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진리의 말씀으로 준비해야 할 때이다.

기독교회사_ 브리튼 섬 켄트 왕국에서의 교황 그레고리와 어거스틴의 로마교회식 선교

노텀브리아(Northumbria)는 로마 카톨릭을 믿다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 후에 다시 켈트교회에 의해 그리스도께 드려진 나라였다. 그러나 그 나라가 켈트교회에 의해 기독교화된 유일한 앵글로색슨 왕국은 아니었다. 사실 광야교회 1260년 기간의 전체 역사를 살펴볼 때, 우리는 로마 카톨릭을 계속 생존하도록 도운 것은 바로 교황권의 영토 안에 존재해 있던 광야교회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광야교회가 항상 로마교회의 라이벌로 존재하였다. 광야교회가 어떤 지역들에서 제거되거나 파괴될 때에는 신속히 기독교의 표준들이 저속하게 떨어져 내리는 일들이 발생했다. 에섹스와 메르시아와 동 앙글리아와 켄트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 이 일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또한 잉글랜드를 복음화한 아이단과 그의 후계자들의 사역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카톨릭의 어거스틴과 그와 함께한 40명의 수도사가 행한 일들에 대해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 그들이 로마에서 켄터베리로 온 것은 597년이었다. 교황 그레고리가 어거스틴에게 내린 명령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명령은 어거스틴이 카톨릭교도로서 이교도인 에텔베르트 왕의 아내가 된 베르타의 도움을 받아 켄트에 교황과 그의 수도사들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 후에 그레고리가 어거스틴에게 내린 것이다.

“그레고리의 처음 의도는 에텔베르트 왕으로 하여금 우상 숭배를 위해 지어진 신전들을 모두 다 파괴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실제로 그 왕에게 그런 자신의 생각을 암시해 주었다. 하지만 그 일에 관해 심사숙고한 끝에 그레고리는 마음을 바꾸어 대수도원장 멜리투스 편에 한 서신을 급송했다. 이 서신에서 그는 만일 우상의 신전들이 잘 지어진 것들이면 그것을 파괴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으로 전환해야만 한다고 선언하였다. 이 일은 사람들이 익숙해져 있는 장소들로 그들을 모으는 일을 훨씬 더 쉽게 만들었다. 더 나아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혜택도 돌아가지 않는 우상들을 위한 축제들은 다른 것들인 교회를 봉헌한 기념일들이나 그 지역에 그들의 유물들이 보관된 성인들을 기념하기 위해 구별된 날로 대체되어야만 했다. 이런 날들에는 사람들이 교회의 주변에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축제 음식을 먹도록 가르침을 받아야만 했는데, 그렇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현세의 삶을 위해 주신 선물들에 관하여 모든 행복의 시여자께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관능적 즐거움을 허락함으로 그들을 더 쉽게 내적이고 영적인 면으로 이끌어 갈 수 있게 될 것이었다.”

다음은 카톨릭 추기경 역사학자 앨버트 헨리 뉴먼이 어거스틴이 사용한 방법에 관해 쓴 글이다.
“고행의 삶에 대한 과시, 가장된 기적들, 이 땅에서 얻을 유익들에 관한 약속들, 이런 것들을 통해 그들은 색슨족의 왕인 에텔베르트를 개종시키는 일에 성공하였다. 이 왕은 그를 추종하는 약 10,000명의 사람들과 함께 어떤 강에서 그 선교사들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 왕과 교황 사이에 확고한 동맹을 맺은 후 이 선교사들은 그보다 훨씬 더 힘든 임무인 브리튼의 그리스도인들을 로마 카톨릭에 복종시키는 일을 위해 사역을 시작했다. 다른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음을 알게 된 그들은 색슨 왕을 설득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원정 전쟁을 벌이게 했다. 3,000명의 브리튼 그리스도인들이 동시에 살육당했다. 옛 브리튼의 신앙 방식을 고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수 세기에 걸쳐서 독일 각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도 모든 힘을 다하여 로마 카톨릭의 침입에 저항하였다. 이 같은 방식의 신앙을 하는 기독교가 이 땅에서 완전히 멸절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미 복음이 전해진 지 오랜 브리튼의 모든 섬을 카톨릭으로 점령하기 위해 그곳 그리스도인들을 강제 개종하려고 권력들을 이용하였다. 그가 창안한 강제구금 교리를 통해 카톨릭은 강압적 종교 강요를 계속해 왔다. 그의 운명론과 강제구금 교리는 많은 프로테스탄트에 들어와 현존하고 있다.

진리 탐구_ "새 언약"을 받으셨습니까?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 8:10)

옛 언약은 말씀 그대로 구약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과 약속임을 우리는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새 언약”은 또 다시 이스라엘과 유대 집만의 언약일까요? 새 언약이 육신의 히브리인들만을 위한 언약이라면 우리는 히브리서를 볼 이유도 없고 성경 66권에 포함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언약의 대상을 모든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으나 히브리서 저자는 히 8장 8절에 이스라엘 집과 유대 집으로 한정되게 말씀하고 그나마 10절에서는 유대 집은 언급되지도 않았는데 이스라엘 집이란 의미에는 그 모든 백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 집의 가족 구성원들은 개개인으로서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 즉 세상 열국의 백성이라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새 언약의 대상은 이스라엘 집이며 하나님의 집이며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며 결론적으로 주님이 몸 되신 “교회”입니다. 또한, 그 새 언약의 대상은 구속의 은혜를 믿으며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자들이라고 증거합니다. 만약 히브리서 8장에서 10장까지 기록된 새 언약의 대상이 히브리서 8장 8절에 기록된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만 한정되는 것이 당연하다면 영적 이스라엘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히브리서를 인용하여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입니다. 결과적으로 “영적 이스라엘은 없다”라는 주장과 “교회가 영적 이스라엘이 될 수 없다”라는 사람들은 오늘날 히브리서 말씀을 교회에서 전함으로 인해 그 주장은 또 다시 모순(矛盾)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로마서 2장의 “이면적 유대인과” 갈라디아서 2장의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오직 육적․혈통의 유대인이라는 견해처럼 히브리서에 나오는 새 언약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주장하여야 합니다.

히브리서 복음의 말씀이 이방 민족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씀이다. 그 이유는 첫 번째,제사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 민족들은 그 규례를 알지 못하므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두 번째, 그 제사법의 규례인 옛 언약은 오직 육신과 혈통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준 것이었기 때문에 새 언약의 대상도 육신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되며, 세 번째, 히브리서 8장 8절에 기록된 대로 이 새 언약은 이스라엘 집과 유대 집에만 맺는 새 언약이다. 위 세 가지 이유를 종합해 보면 히브리서 복음은 육신과 혈통적 참 유대인 중 거듭난 유대인만 받을 수 있는 말씀이다. 히브리서 자체가 타민족에게는 구원의 믿음을 줄 수 없는 히브리인을 위한 히브리인만의 복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히브리서로 복음을 전할 때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이 없다가 세상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한다는 것은 말씀을 오해하고 진리를 왜곡하게 됩니다. 히브리서의 “새 언약”은 하나님의 참 백성으로서 새 언약을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집, 영적인 이스라엘의 집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7,28)

새 언약은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흘려주실 주님의 보혈로서 그 약속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며, 이삭의 씨의 자녀이며, 예루살렘이 어머니며, 한 성전으로 지어지고, 주님께서 머리 되시고, 하나님도 같은 하나님 한분이시며, 형제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며,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그들 각자의 이름을 세상을 이기는 자들의 영적 이름인 “이스라엘”로 바꿀 수 있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새 언약이며 그 언약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인 새로운 선민 “영적 이스라엘” 탄생입니다.

이런 믿음이 아직도 억지스럽고 이해가 안되는 말씀입니까? 오늘날 교회가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이스라엘 집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여러분의 신앙에 큰 문제가 생기며 미혹시키는 믿음입니까?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유대인과 이방인은 주님께서 피를 흘리시고 값으로 사신 귀한 성도들이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 된 몸으로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모두 하나님 앞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예수님의 보혈로 한 몸으로 만드신 교회를 사람들의 유전과 계명으로 나누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다음 호에는 육신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목적과 그들이 선민 자격을 잃어버리고 그들의 특권이 영적 이스라엘 백성에게 넘어오게 된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영적 이스라엘”에 대한 이러한 긴 설명과 배경이 필요한 이유는 오늘 유독 말도 많고 탈도 많으며 여러분께서 많이 궁금해하시는 요한계시록의 “이스라엘 144000”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호에 뵙겠습니다.

Healing Story_일해백리 마늘

일해백리! 특유의 고약한 냄새를 제외하면 어떤 나쁜 점도 찾아볼 수 없다는 마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좋은 것인지 마늘의 효능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마늘(garlic) 백합과 중 가장 매운 식물이며, 주성분은 탄수화물 20%, 단백질 3.3%, 지방 0.4%, 섬유질 0.92%, 회분 13.4%을 비롯하여 비타민 B1, 비타민 B2, 비타민 C, 글루탐산(glutamic acid), 칼슘, 철, 인, 아연, 셀레늄, 알리신 등 다양한 영양소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2002년 미국 타임지는 마늘을 세계 10대 건강식품으로 선정하였으며, 1992년 미국암연구소가 발표한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좋은 음식 피라미드의 최상위에 마늘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마늘의 알리신과 셀레늄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알리신
마늘의 독특한 냄새를 내는 물질로, 마늘이 가지고 있는 약효의 주된 성분입니다.
마늘을 자르거나 빻을 때 세포가 파괴되면서 마늘 속의 알린(Allin)-> 알리나아제라는 효소의 작용-> 알리신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알리신은 강한 살균•항균 작용이 특징이며, 탄수화물, 단백질 등과 결합하여 그 약효가 상승됩니다. 또한 혈관을 확장시켜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고, 소화를 촉진하며, 인슐린의 분비를 도와줌으로 당뇨병에도 좋습니다. 알리신이 비타민 B1(티아민)과 결합하면 알리티아민이 되는데, 이는 장내의 어떤 세균에도 파괴되지 않고 흡수되어 탄수화물을 분해하여 에너지를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셀레늄
셀레늄은 강력한 항산화력이 특징입니다. 세포막 손상을 일으키는 과산화수소와 같은 활성산소를 제거하여 신체 조직의 노화와 변성을 막아 주거나 그 속도를 지연시킵니다. 셀레늄의 항산화 작용은 해독 작용과 면역 기능을 증진시키고 암, 간 질환, 신장병, 관절염 등을 예방하고 치료합니다. 체내에 공급되는 셀레늄의 많은 양이 고환과 전립선에 집중되어 남성의 건강한 생식 기능을 유지하게 하며 수정 확률을 높여줍니다.
그러나 마늘을 익히면, 알리신이 파괴되어 위와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없으며, 마늘을 빻은 지 1시간이 지나면 그 활성도도 떨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마늘의 유효성분을 잘 보존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그 대답으로 여러분께 흑마늘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2.흑마늘 이제까지는 마늘의 유효성분 중에서 알리신이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해 왔으나, 그에 관한 연구가 계속되면서 마늘을 숙성시키면 원래 존재하지 않던 S-아릴시스테인 이라는 새로운 성분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늘 고유의 유효 성분과 흡수율은 높이면서도 매운맛이 적고 단맛이 있어서 어린아이도 먹기가 좋습니다. 항산화력 또한 생마늘보다 거의 10배 이상이나 높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효능
(1) 고혈압 예방 : 혈내 콜레스테롤을 줄여 혈액순환을 좋게 합니다. 또한 마늘 속의 칼륨이 혈내 나트륨을 없애서 혈압을 정상화 시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2) 당뇨병 치료 : 마늘의 알리신은 췌장 세포를 자극하여 인슐린의 분비를 촉진하기 때문에 비타민C와 함께 피 속의 포도당이 세포로 스며들게 도와줍니다.
(3) 노화 예방 : 마늘에 들어있는 알리신은 체내에 흡수된 뒤 혈중 적혈구의 작용을 도와 혈구 자체의 수명을 연장 시킵니다. 대표적인 항산화제인 비타민E보다 무려 2,000배나 강한 항산화력을 가지고 있어서 혈액과 세포를 건강하게 하며, 말초 혈관의 확장 시 구석구석의 세포에 혈액과 산소를 공급하며 노화를 억제시켜 줍니다.
(4) 정력 강화 : 마늘의 알리신은 비타민B1과 결합하여 알리디아민이라는 성분으로 바뀌는데, 이것은 호르몬 활동을 조절하고 난소나 정소의 기능을 좋게 해줍니다.
(5) 피로 회복 : 마늘의 풍부한 게르마늄이 비타민B1의 흡수를 도우며 비타민B1은 체내에 저장되어 몸이 지치거나 피로할 때 정상으로 회복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6) 신경 안정, 진정 효과 : 알리신은 불안하고 흥분된 신경을 안정시켜 줌으로 스트레스 해소와 불면증 치료에 좋습니다.
(7) 소화 촉진, 위장기능 강화 : 알리신은 위액 분비를 촉진해 소화를 돕고 위장을 튼튼하고 건강하게 만듭니다. 보통성인은 2~3쪽의 마늘이 적당하고 위가 약한 사람은 하루에 1쪽 정도씩 꾸준히 복용하면 위가 튼튼해집니다.
(8) 장운동 활성화 : 소장과 대장의 운동을 촉진하여 영양분과 수분의 흡수를 도와줍니다. 또한 신장에도 영향을 미쳐 소변의 배설을 원활하게 해줍니다.
(9) 간 기능 회복 : 신체 장기 중 간은 피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간은 우리 몸에 필요한 단백질을 합성하여 영양소로 저장하고, 해로운 물질은 걸러내어 배출하는 일을 합니다. 이러한 기능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몸에 독소가 쌓이고 면역력이 떨어지면서 지속적인 피로감을 느끼게 되며 질병에 걸리기도 쉬워지는 것입니다. 마늘은 적은 양으로도 간세포를 활성화하여 간 기능을 회복시켜 줍니다.
(10) 해독작용 : 알리인, 알리신, 치오에텔, 멜가프탄, 유화수소성분 및 그 유도체는 수은 등의 중금속을 배출하고 세균을 없애줍니다.
(11) 알레르기 완화 : 알레르기 반응 시에 신체에 유해한 효소들이 만들어지는데, 마늘은 이 효소들의 생성을 억제시켜 줌으로 아토피성피부염과 알레르기 증상을 완화시켜 줍니다.
(12) 살균, 항균작용 : 알리신의 강력한 살균작용은 각종 식중독균, 이질균, 티프스균 등 각종 세균을 살균하고 소독합니다. 또한 페니실린이나 테라마이신보다 살균력이 강해 2차 세계대전 때에는 살균제 대신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13) 면역력 강화 : 세포나 임파구 등의 백혈구 기능을 촉진하여 면역성을 높여줍니다.
(14) 암 예방 : 암이 발생되는 것을 억제시키고 예방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전에는 냄새가 없는 마늘에는 암 예방 효과가 없다고 여겨져 왔으나 냄새가 없는 수용성 아미노산인 S-아릴시스테인 등에도 강한 암 예방 활성이 발견되었기에 효과가 없다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만드는 법
흑마늘을 만들 때, 가급적 봄, 여름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봄은 마늘에 수분이 많이 들어있고, 여름은 흑마늘을 건조할 때 어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음식이나 그렇지만, 흑마늘 역시 여러 번 만들어 보면서 자신만의 노하우를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흑마늘을 만드는 과정에서 마늘 특유의 냄새가 나므로 베란다를 이용하시고, 가능하다면 안 쓰는 밥솥을 사용하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1) 먼저 마늘은 잘 건조된 것으로 준비합니다. 지저분한 마늘 뿌리는 잘라내고 흙이 묻은 껍질은 벗겨 냅니다.
(2) 정리한 통마늘은 전기밥솥에 넣어 뚜껑을 닫고 보온상태로 둡니다. 마늘이 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밥솥 안에 찜기를 넣기도 합니다.
(3) 보온 시간은 마늘의 양이나 밥솥 온도에 따라 조금씩 다르며 약10~14일 동안 보온을 합니다. .
(4) 10~14일 후, 밥솥 뚜껑을 열고 솥이 식을 때까지 그대로 두었다가 식으면 마늘을 꺼내어 채반에 건조시킵니다.
(5) 젤리처럼 말랑해질 때까지 1~2주 동안 건조시킵니다.
(6) 건조된 흑마늘은 그늘에 두고 먹어도 되고, 양이 많으면 냉동실에 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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